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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50화

17장 임계 돌파

"이런 곳에 계셨군요."

온몸을 붕대로 감은 남자가 어둠 너머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구석에 박혀 있던 파이렌은 퀭한 눈을 치켜뜨며 겨우 대답했다.

"후원자님.... 드디어 오셨군요. 목소리를 낮춰 주십시오."

"네! 제가 왔습니다."

"쉬.... 조용히.... 위쪽에 아직 사람들이 있습니다. 들키면 큰일 납니다."

"이곳은 당신의 저택이 아닙니까? 왜 자신의 저택에서 다른 사람을 걱정하십니까?"

"모르셨습니까? 섭정 전하께서는 돌아가셨고.... 저는 제국의 역적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역적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 병사들이 제 저택을 뒤지고 있습니다."

"아하, 그래서 이런 골방에 숨어 계셨군요."

후원자는 구석에 놓인 파이렌의 머리를 양 손으로 집어 들었다. 머리만 남은 파이렌은 천식 환자처럼 색색대며 말했다.

"이곳은.... 저택의 비밀공간입니다. 가까스로 도망쳐서 이곳에 숨었지만.... 언제 발각되어 들킬지 모릅니다."

"저런, 그 듬직하던 몸은 어디가고, 이런 애처로운 모습이 되셨습니까?"

"적에게 당했습니다."

"적이라면?"

"다비...."

"다비? 당신과 같은 나이트 마스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황자.... 클로드가 섭정 전하를 죽였습니다."

"클로드라."

후원자는 턱을 가볍게 저으며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스 황자님이 마지막 소원을 빌게 만들었던 바로 그 자군요. 하지만 광전사가 한낱 인간에게 패배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클로드는 이미 아크 위저드 이상의 마법을.... 그런데 광전사가 무엇입니까?"

"파이렌님도 직접 눈으로 보셨을 텐데요?"

"제가 어찌.... 아, 섭정 전하께서 변하신 모습을 광전사라 부르나보군요. 과연...."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남은 게 머리뿐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후원자는 파이렌의 목덜미에 남은 절단면을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주 깨끗하게 잘렸군요. 이래서는 새로운 촉수를 만들기도 어려웠을 텐데, 용케 여기까지 도망쳐 오셨습니다."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겨우 만들어낸 촉수도 저택까지 오는 동안 다 말라 비틀어져서...."

"그래도 목숨은 건져 다행입니다. 덕분에 생명 신호가 너무 약해서 찾아내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제가 목숨을 건진 건.... 후원자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소원이었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설사 목이 잘리더라도 살아남는 육체를 가지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목이 잘릴 줄은 몰랐습니다만."

"복수를....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부디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을...."

파이렌은 슬슬 목숨이 다해가는 듯 했다. 후원자는 한동안 손바닥 위의 머리통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 번째 소원은 쉽게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에 걸맞은 감정의 왜곡이 필요합니다."

"가.... 감정...."

"감정의 뒤틀림이 심하면 심할수록 후원의 품질이 좋아지거든요. 그러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후원자는 붕대 사이로 혀를 쑥 내밀었다. 그리고는 파이렌의 얼굴 곳곳을 세밀하게 핥아대기 시작했다.

"음.... 좋아. 아주 좋군요. 아주 훌륭한 맛입니다."

"맛...."

"분노, 후회, 그리고 열등감이 절묘하게 어우러졌습니다. 특히 이토록 뒤틀린 열등감이라니. 그 다비라는 분에게 정말 쌓인 게 많은 모양이군요."

"다비...."

"예전의 파이렌님은 자신감이 높아 이런 복합적인 감정을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패배가 약이 된 모양이군요. 음, 여기에 공포까지? 이런 어두운 골방에서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두려움에 떨고 계셨던 겁니까?"

"...."

"이런, 힘이 다 해가는 모양이군요. 아무튼 이 정도로 뒤틀린 맛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맛보았던 섭정 전하와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후원자는 입맛을 다시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어둠속으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남은 신체가 워낙 적어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우선은 돌아가야겠군요. 돌아가서 모자란 부분을 복구하도록 하지요."

"돌아가다니.... 어디로?"

파이렌이 마지막 힘을 다해 가까스로 질문했다. 후원자는 그런 파이렌을 가슴에 꼭 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물론 제 고향입니다."

"고향...."

"축하드립니다 파이렌님. 당신은 이쪽 세계 출신 중, 차원을 넘은 최초의 이방인으로 기록에 남으실 겁니다."

동시에 골방 구석에 공간이 열리며 어둠 너머의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파이렌은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후원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경계를 뛰어 넘으며 파이렌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다음에 눈을 뜨셨을 때는 분명 모두가 두려워할만한 그런 존재가 되어 있을 겁니다. 제가 약속드리죠. 세 번째 소원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 * *

"쿠웩! 컥! 퉤악!"

기계실로 돌아온 르갈은 다짜고짜 세 개의 코어를 토해냈다.

"자, 약속대로 여기 코어다."

"두 개만 있어도 되는데. 아무튼 고마워."

이것으로 황제는 물론이고 황태자인 아드릭스까지 치료할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둘을 동시에 살린 적은 없었는데, 그렇다고 특별히 문제가 생기거나 하진 않겠지?

"난 올해로 351살이다. 300살을 넘긴 에이션트 울프는 10년마다 하나씩 몸속에 코어가 만들어지지. 그러니 코어가 더 필요하게 되면 9년 뒤에 다시 찾아와라."

"기억해둘게. 그런데 그보다도...."

나는 기계실로 돌아오는 도중 고민했던 제안을 던졌다.

"너 말이야, 이제 그만 밖으로 나오는 게 어때?"

"밖? 하수도 밖을 말하는 건가?"

"듣자하니 여기서 벌써 50년을 산거 같은데, 슬슬 밖으로 나올 때도 되지 않았어? 언제까지 하수도에 틀어박혀 살 거야?"

"평생이다."

르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디디가 설명해주지 않았나? 내가 여기 왜 들어왔는지?"

"쌍둥이와 족장 자리 놓고 싸우기 싫어서 도망친 거라며?"

"난 부족의 규칙을 어겼다. 돌이킬 수 없는 중죄지. 그러니 나의 체취가 다시 세상에 나오면 안 된다. 다시금 동료들의 추적이 시작 될 거다."

"사정은 알겠어. 그러니 탈취의 영약을 줄게."

"뭐?"

르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는 예전 회귀 때 마스터한 영약의 지식을 떠올리며 말했다.

"탈취의 영약. 마시면 체취를 제거하는 효과를 가진 영약이야."

"그런 영약이 존재한다고?"

"몸에서 냄새가 아무리 심하게 나는 사람도 그거 한방에 정상으로 돌아와. 재료가 워낙 희귀해서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영약이야."

"대단하군. 하지만 그게 나한테 통한다는 보장이 있나?"

"일단 먹어보면 되지 않을까?"

"지금 나한테 도박을 하란 소린가?"

"한번 해볼 만한 도박 아냐? 그리고 솔직히 너도 지겹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르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양 팔을 쭉 펼쳤다.

"여긴 할 게 아무 것도 없잖아? 너도 심심해 죽겠으니 위쪽에 인간들이 무슨 이야기 하는지 엿 들었겠지."

"엿듣지 않았다. 그냥 들려서 들은 거다."

르갈은 고개를 휙 돌리며 부정했다.

하지만 딱 봐도 마음이 이미 넘어왔는데? 심심해 죽겠다는 사실 까지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살 거야? 이만하면 됐으니 그만 밖으로 나와. 내가 사는 저택 주변에 숲이 엄청 넓으니 거기서 사는 게 어때?"

"숲?"

"물론 영원의 숲처럼 넓은 숲은 아니야. 그래도 너 하나 살기엔 넘치고도 남을 걸? 먹을 것도 충분히 제공해 줄게. 가끔 별식으로 사슴 고기도 구해오고."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르갈은 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고했다.

"하지만 내 부족이 너의 숲으로 암살자를 보낼 수도 있다."

"뭔 상관이야? 너 암살자에게 죽을 정도로 약해?"

"그럴 리가. 내 형제가 아닌 이상 나보다 강한 에이션트 울프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럼 됐지 뭐. 혹시 나한테 폐 끼칠 거 걱정해? 신경 꺼. 내가 얼마나 강한지 봤잖아? 마음만 먹으면 암살자가 아니라 에이션트 울프 부족 전체를 몰살시킬 수도 있어. 물론 그렇게 하겠다는 소린 아니고."

"흠...."

르갈은 바닥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좋아. 고민하는 거 보니 이제 거의 다 넘어온 것 같네.

물론 나라고 순수하게 인도적인 마음에서 녀석을 설득하는 건 아니다.

내가 르갈을 하수도 밖으로 끌어내려는 이유는 단 하나.

속도.

비행마법으로 하늘을 나는 것 보다 이 녀석이 작정하고 달리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르다!

물론 바람 마법을 활용해 가속도를 내면 순간적인 속도는 내가 더 빠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르갈은 마력의 소모 없이 장거리를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니 집 근처에 풀어 놓고 키우다 급할 때 어디 좀 태워 달라고 부탁하면 훌륭한 이동 수단이 되어 주지 않을까?

"...좋다."

늑대는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디디가 펄쩍 뛰며 늑대의 목을 껴안았다.

"르갈!"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디디가 밖에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새롭게 하고 싶은 일도 생겼다."

"오, 하고 싶은 일이 뭔데?"

"그건 나중에 알려주도록 하지."

르갈은 조용한 눈으로 내 몸을 살폈다.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데.... 일단 마음 바뀌기 전에 밖으로 나가는 게 먼저겠지?

"맘대로 해. 그럼 당장 나가자. 디디야?"

"네. 황자님."

"앞장서서 안내 해. 들어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자."

"아니, 거긴 안 된다."

순간 르갈이 끼어들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인간들이 출입하는 통로를 사용 할 수 없다. 출입구 주변을 박살내지 않는 한."

아, 그런가?

확실히 처음 들어왔던 통로로는 르갈의 덩치가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사람 한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사이즈였으니까.

"그럼 어떻게 해? 애당초 넌 하수도에 어떻게 들어왔고?"

"하수가 마지막으로 하수도를 빠져나가는 넓은 수로가 있다. 강과 연결되어 있지."

"강이라면 리젤 강? 그럼 아예 엠퍼로드 밖으로 나가야 하네?"

리젤은 엠퍼로드의 남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르갈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계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50년 전에 그곳으로 하수도에 들어왔다. 다시는 바깥으로 나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세상일이란 역시 모르는 거군."

* * *

하수도를 빠져나온 늑대는,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몸을 날리며 강 한복판으로 도약했다.

풍덩!

"윽!"

덕분에 등에 올라타 있던 디디와 내가 옆으로 튕기며 강물에 빠져버렸다. 뭔데 이거! 왜 갑자기 전력질주로 점프하고 지랄이야!

"야! 르갈! 갑자기 뭔 짓이야!"

"미안하다! 먼저 뭍에 올라가 있어라!"

강 한복판까지 날아가 빠진 르갈이 물 밖으로 고개만 내민 채 대꾸했다. 나는 일단 비행마법으로 강물 위로 빠져나오며 디디를 찾았다.

"디디야!"

"여깁니다 황자님!"

디디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강변을 향해 헤엄을 치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날아가 겨드랑이 사이에 양 팔을 집어넣으며 물 밖으로 뽑아냈다.

"흡!"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하수도에서도 비슷한 행동을 했었지?

그때는 양 어깨에 뿌직 소리가 나며 디디를 다시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버틸만했다. 좋았어. 이거 관절은 물론이고 전체적으로 몸이 튼튼해졌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근력 자체가 획기적으로 좋아진 건 아닌 것 같고....

으, 신나서 오래 들고 있더니 어깨가 아니라 팔 전체가 끊어 질 것 같구만.

덕분에 강변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디디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디디는 착지와 동시에 강 쪽으로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황자님! 르갈이 아직 강에 있습니다!"

"나도 알아! 그 녀석 혹시 수영 못해?"

"그동안 수영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습니다!"

"설마 물에 빠진 건 아니겠지?"

수영도 못하는 주제에 하수도 출구에서 강 한복판까지 점프를 뛴 거야?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녀석이 있는 곳 까지 날아갔다.

"르갈! 뭐해! 빨리 올라와!"

녀석은 강 한가운데서 수면위로 오르락내리락 하며 여유 있게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물에 빠진 건 아니다. 근데 왜 저러는 거지? 설마 이 와중에 강물에서 물고기라도 잡고 있나?

"푸확! 푸헙! 조금만 기다려라!"

르갈은 마침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그런데 수면에서 파닥거리는 거구의 늑대 주위로, 정체불명의 시커먼 무언가가 먹구름처럼 주변으로 퍼지는 게 보인다.

혹시 독?

내가 모르는 사이에 르갈이 뭔가에 중독되었고, 그걸 지금 강물에 배출하는 중인가?

아니지. 생각해보니 에이션트 울프는 모든 독에 면역이다.

그러니 저 시커먼 기운의 정체는 바로....

"으악!"

깨달은 순간 자동으로 비명이 나왔다. 나는 또다시 물속에서 자맥질을 하다 다시 수면으로 올라온 녀석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르갈! 너 검은 늑대 아니었어?"

"...."

"근데 왜 지금은 털이 하얀색인데! 응? 뭐라고 말 좀 해봐! 으, 드러! 세상에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아니 늑대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51화

17장 임계 돌파

검은 늑대.

아니 이젠 하얀 늑대.

생각해보니 과거에 사냥한 에이션트 울프는 모두 털이 하얀 색이었다.

물론 르갈은 하수도에서 50년을 살았으니 정상을 참작해줘야 겠지마....

...휴.

아직도 눈을 감으면 강물이 까맣게 변하던 그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으, 이거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아.

아무튼 하얀 늑대가 된 르갈의 코어를 황제와 황태자의 입속에 살포시 넣어준 다음(정신이 황폐해진 황태자와는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지만), 저택에 돌아와 지금의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하수구를 가득 메웠던 이계의 괴물.

비록 원인이 제스의 독이란 게 밝혀졌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많은 것이 과거의 내 경험과 달라진 건 사실이다.

회귀한지 고작 1년차인데.

이미 어떤 임계점을 넘어 버린 느낌이라고 할까?

확실한 건 내가 속도를 높일수록 적들도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는 사실. 여기서 적이란 물론 이계의 스파이를 말한다.

"스파이가 발 빠르게 움직이면 이쪽도 대응을 해야 하는데...."

"무슨 소리지?"

옆에서 고기를 뜯던 르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택 정원이 꽤 넓은 편인데, 이 녀석이 엎드려 있으니 어디 조그만 뒷마당처럼 보이는구만.

"별거 아냐. 그냥 더 빨리 강해져야 될 거 같아서."

이러다가 감당하기 힘든 적이 갑자기 쏟아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그러니 다른 쪽에서 더 빠르게 테크트리를 올릴 필요가 있다. 스파이와 관련된 인물이나 사건은 가급적 제외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정령마법.

본래 계획은 아직 한참 멀었다. 바위의 정령 룩카르를 얻은 뒤, 다음 목표인 나무의 정령을 얻기 까지는 2년 정도의 텀이 있다.

문제는 이것이 무작정 당긴다고 당겨지는 일정이 아니라는 것.

나무의 정령을 얻으려면 제국과 대립중인 엘프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엘프는 파고 들 틈이 없다.

그래서 엘프와 동맹인 드워프를 먼저 공략해야 하고, 드워프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보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대량의 보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동쪽에 있는 라그란 대륙과의 교역이 재개되어야 한다. 이쪽 대륙에는 보리가 제대로 생산이 안 되거든.

물론 첫 관문은 넘겼다. 요튼만을 봉쇄한 시 서펜트를 몰아냈으니, 곧 라그란 대륙과의 교역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급하다고 이 모든 과정을 억지로 당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결국 정령 마법이 아닌 다른 테크트리를 땡겨야 한다는 소린데....

"강해지기 위한 계획이 있나?"

르갈이 입안의 고기를 으적거리며 물었다. 녀석 맛있게도 먹는구만. 오늘만 해도 양고기를 벌써 200kg쯤 해치운 것 같은데.

"응. 이것저것."

"훈련을 말하는 건가? 저쪽에 있는 녀석들처럼?"

르갈이 턱으로 저택 옆의 공터를 가리켰다. 나는 단원들을 능숙하게 조련하는 다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기사는 내 전문 분야가 아냐. 건강을 위해 마지못해 하는 거지."

"하지만 넌 육체를 단련할 필요가 있다. 물론 내가 상관할 건 아니지만."

르갈은 다시 큼지막한 새 고깃덩이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나는 신선한 피 냄새가 훅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들고 있던 영약 통을 내밀었다.

"자, 이거 마시고 계속 먹어."

"탈취의 영약인가? 이제 더 마실 필요는 없을 것 같다만."

고작 하루 분량을 복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르갈의 몸에서 풍기던 야생동물의 체취는 놀랄 만큼 옅어져 있었다.

"라니아가 그랬어. 효과 좀 생겼다고 영약을 끊으면 도로 예전으로 돌아간대."

"흠. 그런가?"

늑대는 마지못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나는 2리터도 넘는 영약을 통째로 아가리에 부어 넣으며 웃었다.

"돈 먹는 하마 같으니라고. 이거 사람으로 치면 한번에 30인 분량이야. 가뜩이나 재료가 귀해서 비싼 영약인데."

"어쩔 수 없지. 나도 이거 믿고 하수구 밖으로 나온 거니까."

영약을 다 마신 늑대가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나는 빈 통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멀리서 훈련하고 있는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육체 단련이라.

예전 같으면 코웃음으로 넘겨버렸을 테지만, 지금은 경우가 좀 달라졌다.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

이거 덕분에 몸 상태가 놀랍도록 좋아졌거든.

지금부터 남은 시간을 훈련에 매진한다면, 분명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중급 마갑'의 착용도 가능해지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이제 와서 적당히 강한 기사 한명을 추가해 봤자, 훗날 이계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차라리 쓸 만한 기사 지망생을 대량으로 선발해서 왕창 키워내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그 이상을 노려볼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가 나이트 익스퍼트가 되는 건 큰 의미가 없지만, 만약 나이트 커맨드나 나이트 마스터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입 주위가 빨갛게 물든 늑대를 보며 물었다.

"혹시 다른 마수들도 코어가 있을까?"

"있다."

이 녀석, 무슨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대답하네?

"이름에 에이션트가 붙는 녀석들은 전부 코어를 만들 수 있다. 마수라고 불리기도 하고 고대종이라 불리기도 하지. 물론 나처럼 족장 급은 되어야겠지만."

"혹시 아는 종족 있어? 내가 아는 마수는 에이션트 울프뿐이라서."

"내가 아는 녀석들만 세 종족이 더 있다."

"뭔데?"

"우선은 에이션트 베어가 있다. 영원의 숲에서 북동쪽 멀리 있는 어둠 산이란 곳에 살고 있다."

"어둠 산이라."

이름 정도는 들어 봤다. 제국은 물론이고 인간들의 영향력 자체가 미치지 않는 지역.

덕분에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 나도 굳이 그쪽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고.

"에이션트 울프와 약간의 교류가 있는 종족이다. 하지만 간단하진 않을 거야."

"간단하지 않다니, 뭐가?"

"육체를 추가로 강화하려는 생각 아닌가? 또 다른 마수의 코어를 확보해서?"

이 녀석, 눈치가 100단 이구만.

"뻔한 이야기다. 어지간한 훈련으로는 턱도 없겠지. 네 녀석의 그 허약한 육체를 그나마 정상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당장 내 코어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동감이야. 확실히 좋아지긴 했는데 그렇다고 아예 기사 테크트리를 진행할 정도는 아니거든."

"테크트리?"

"굳이 기사 쪽으로 능력을 발전시킬 정도는 아니라고."

"흠."

"하지만 코어를 추가로 먹으면 새로운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잖아? 코어마다 뭔가 강화시키는 능력이 다르다던가? 어때?"

"흠...."

르갈은 혀를 날름거리며 입 주위를 핥았다. 그러고는 무심한 얼굴로 설명했다.

"너는 이미 나의 코어를 흡수했다. 그것으로 총 세 가지의 영구적인 효과를 얻었고."

"세 가지?"

"그것은 에이션트 울프의 특징이기도 하다. 우선 체력이 늘어난다. 우리는 아무리 먼 거리도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으니까."

"확실히 체력이 좋아진 게 느껴져. 워낙 저질이었던 게 정상 수준으로 돌아온 것도 있겠지만."

"두 번째는 관절의 유연성과 탄력이다. 우리는 아무리 전력으로 뛰어 올라도, 혹은 어지간한 높은 곳에서 떨어져 착지해도 쉽사리 다치지 않는다."

"그것도 이미 확인했어. 디디 들어 올릴 때 어깨가 찢어지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더라."

"그게 무슨 소리지?"

"자세히 말하면 괴로우니 대충 넘어가. 그럼 마지막은?"

"마지막은 대부분의 독에 면역이 되었다는 거다. 추가로 타액에 해독과 치유의 효과가 생기고."

"타액? 침? 그건 됐어. 내가 누굴 핥아서 치료할 것도 아니고. 신성마법도 쓸 수 있는데."

"그런가? 아무튼 이 정도다. 그리고 완벽한 건 아니지만, 에이션트 베어의 코어가 주는 효과 역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오, 그쪽은 어떤 효과가 있는데?"

"우선은 근력이다."

쿵!

르갈은 앞발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치며 말했다.

"힘이 대폭 증가하지. 아주 강력하게."

"곰 같은 힘이 솟는 거야?"

"힘은 에이션트 베어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리고 내구력이 증가한다. 어지간한 충격에도 뼈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찢어지지 않아."

"그것도 좋네. 곰이란 게 워낙 튼튼한 짐승이니까."

"너처럼 허약한 인간에게 딱 필요한 능력이다. 여기에 다른 효과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모른다. 족장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족장?"

"내 쌍둥이."

르갈은 그리워 보이는 얼굴로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에이션트 울프와 에이션트 베어는 족장 간에 서로 코어를 교환하는 풍습이 있다."

"아하, 그래서 그렇게...."

에이션트 울프 족장 사냥이 힘들었구만!

녀석은 바위 정령인 룩카르가 내지른 펀치를 수차례나 얻어맞고도 끄떡 않는 맷집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마법을 퍼붓기도 곤란해서 더 까다로웠다. 시체가 훼손되면 황제의 독을 치료 할 수 없으니까.

물론 지금은 그 녀석을 잡을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에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래서 그렇게? 무슨 소릴 하려는 거지?"

"아니, 아무것도. 근데 코어는 억지로 빼앗는 게 가능해? 사냥해서 해부한 다음 몸속에서 추출한다던가?"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는군. 당연히 안 된다."

르갈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렇게 얻을 수 있었다면 과거에 해체 과정에서 뭔가가 발견됐겠지?

"몸속의 코어는 실체가 없다. 주인이 그것을 의식하고 외부로 토해낼 때 비로소 형체를 가지게 된다."

"물론 그냥은 절대 안 줄 테고. 그럼 어떻게 해? 너처럼 특이한 경우를 또 기대할 수는 없잖아? 어디 다른 하수도에 곰 한마리가 산다던가?"

"어둠 산을 찾아가 직접 부탁해야한다. 물론 우리만큼이나 인간을 싫어하는 놈들이니 그냥 가면 싸움이 벌어질게 뻔하다."

"그래?"

"그래."

그렇다 이거지? 하지만 마수 친화력 A+인 디디가 출동하면 어떨까?

정확히는 잠재적인 능력이 그 정도라는 말이지만. 아무튼 당장도 B+등급이니 어지간한 마수와는 폭력 없는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디디를 앞세우면 괜찮지 않을까?"

"디디를? 왜?"

"너도 디디 처음 봤을 때 뭔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며?"

"내가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다른 녀석들도 같은 느낌일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르갈은 멀리서 훈련에 매진중인 디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말이 통하면 그 다음은 의외로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녀석들은 욕심이 강하거든."

"욕심? 무슨 욕심?"

"음식에 대한 욕심이 엄청나다. 내가 그 놈들의 입맛을 전부 꿰뚫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 꿀을 좋아하는 건 확실하다."

"그럼 나중에 꿀을 왕창 싸들고 가서 부탁 좀 해볼까?"

"어지간한 양으로는 턱도 없을 거다. 적어도 집채만 한 크기의 통이 필요하겠지."

그리고는 턱을 까딱이며 뒤에 있는 루넨브레스 저택을 가리켰다. 나는 저택을 돌아보며 코웃음을 쳤다.

"설마 진짜 우리 집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아무튼 그만큼 많이 필요하다는 비유지?"

"비유가 아니다."

"비유가 아니야?"

르갈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진짜 저 만큼이 필요하다고?

"에이션트 베어를 네가 알고 있는 평범한 곰과 비교하면 안 된다. 나 역시 다른 늑대와는 덩치가 다르지 않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만큼의 꿀을 어디서 구해?"

저택 하나를 꽉 채울 만큼의 꿀?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하긴 하나?

"나는 그저 방법을 알려 줬을 뿐이다. 불가능하다면 할 수 없지."

르갈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리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이거 뭔가 열받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못 할 줄 알고?

"...."

아니, 못할 것 같기도 하다.

애당초 그런 대량의 꿀을 어디서 구할 것이며, 만약 구한다 해도 그 멀고 먼 어둠 산 까지 어떤 방법으로 운송할 것인가?

"결국 돈...."

"흠? 뭐라고?"

르갈이 귀를 바짝 세우며 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둥글게 말았다.

"돈이 많아야 할 것 같다고. 그것도 진짜 엄청나게 많은 돈이."

* * *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를 먹인 지 나흘 뒤.

지난 수년간의 의식불명에서 깨어난 황제는 곧장 대신들에게 소집명령을 내리고 대전으로 입궁했다.

"먼저 짐이 쓰러진 사이, 제국을 지탱하고 이끌어준 대소신료들의 막대한 공을 치하한다."

옥좌에 앉은 황제가 대신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신들을 하나같이 몸 둘 바를 모르며 허리를 90도로 기울였다.

"망극하옵니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궁인들에게 설명을 들었다. 다들 잘 해 주었지만 그중에도 발베니, 내무대신인 그대의 고생이 심했더군. 정말이지 큰 공을 세웠다."

"아닙니다 폐하. 저는 정말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사옵니다."

내무대신인 발베니 백작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모든 공은 오롯이 클로드 전하의 몫입니다.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제국의 국난을 해결하신 것도 클로드 전하시며, 이렇듯 폐하께서 다시 떨치고 일어나신 것도 모두 클로드 전하의 공적이옵니다."

"그래. 우리 클로드가 말이지. 일어나라 클로드."

"네. 폐하."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휴, 황제가 입궁하기 전 부터 무릎을 꿇고 대기하고 있었더니 다리가 저리는구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황제의 부름을 받은 황족은 옥좌 앞에서 이 자세로 기다리는 게 예법이니까. 황제가 이름을 불러 줄 때까지.

"내가 괜히 미리 부른 덕분에 오래 기다리고 있었겠구나. 미안하다 클로드."

"망극한 말씀이십니다. 이렇게 폐하께서 다시 옥좌에 앉으신 모습을 보니 그저 마음이 뿌듯할 따름입니다."

"클로드.... 그새 정말 의젓해졌구나."

황제의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감격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오랜 의식불명의 후유증?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52화

17장 임계 돌파

"크흠, 황제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서 공표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제국의 다섯 번째 황자인 클로드는 황제의 부름에 미리 무릎을 꿇고 대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모든 황족 중에 오직 황태자만이 누릴 수 있는 파격적인 대우.

물론 내 입장에선 이전 회귀 때 여러 번 경험해 봤으니 새로울 건 없다. 다만 뒤에 있는 대신들은 놀란 목소리로 웅성거릴 수밖에 없겠지만.

"오오...! 그 무슨 크나큰 영광을...."

"폐하, 설마 그것은?"

"설마 황태자를...."

"그렇다고 클로드를 황태자로 세우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이 아이가 제국에 세운 공적에는 마땅한 대우를 부여할 뿐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과연. 그렇습니다. 폐하."

"물론입니다. 폐하. 폐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놀라긴 했지만 반대하는 대신은 한명도 없었다. 황제는 아직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는 듯, 힘겨운 동작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땅히 그래야지. 클로드, 이리 좀 더 가까이 오너라."

"네. 폐하."

나는 황제의 바로 앞에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황제가 손을 뻗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무릎 꿇지 말래도? 자, 일어나라 클로드."

"폐하께서 옥좌에 앉아계신데 제가 어찌...."

"어허, 내 말 안 들을게냐?"

"알겠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물론 일어나 봤자 옥좌에 앉은 황제와 크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 같아선 나도 일어나서 널 맞아 주고 싶다만, 아직 다리가 말을 안 들어 그러니 네가 이해해라."

"망극합니다. 폐하."

"정말이지 말하는 게 의젓해졌구나. 그 몇 년 사이에 핏덩이 같던 조그만 아이가...."

황제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원래도 나를, 그러니까 내가 되기 전의 클로드를 끔찍이 아끼던 황제다.

하물며 의식불명으로 죽어가던 자신을 살려냈으니 얼마나 애틋하고 자랑스러울까?

"입궁하기 전 내무대신에게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네가 활약한 이야기를 말이다."

"폐하. 저는 그저...."

"처음에는 몹시 방황하며 망나니처럼 굴었다지? 허허. 그래 이해한다. 갑자기 이 아비가 사라졌으니 빈자리를 견디기 어려웠겠지."

아니, 그건 아닌데요?

클로드가 망가진 건 그저 제스가 먹인 이계의 독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가 저렇게 받아들이는 게 내 입장에선 오히려 더 잘된 셈이다. 그만큼 자신을 끔찍이 여기는 효자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 뒤로 스스로 떨치고 일어났더구나. 정말 대견하다. 특히 엘스톤에서 사령군을 홀로 막아낸 건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구나. 신관도 아닌 네가 신성마법이라니, 괜찮으면 보여주지 않겠느냐?"

"네. 폐하."

나는 황제의 손등에 손을 얹고 가볍게 신성마법을 사용했다.

"오오...."

"방금 이건 신성마법인 블레스입니다. 일시적으로 체력을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 나도 알지. 정말 기운이 나는 것 같구나. 오...."

황제는 순간 양손으로 내 손을 움켜쥐며 눈물을 흘렸다.

"처음에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섯 신께서 정녕 이 제국을 위해 널 축복하신 모양이더구나."

"이 모두가 폐하의 은덕이십니다."

"내가 뭘 했다고 은덕이 있겠느냐? 세상에 맙소사. 그 뒤로도 요튼만의 시 서펜트를 물리쳤다지? 그쪽은 내가 쓰러지기 전부터 해결 못 한 문제였는데."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신전의 도움으로 겨우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겸손하기는. 실제로 대부분의 시 서펜트는 네가 처리한 게 아니더냐? 설마 내무대신이 허위 보고를 한건 아닐 테지?"

"그것이... 아닙니다. 폐하."

발베니가 내 칭찬을 무지하게 늘어 놓은 모양이구만. 예전에 황제를 구했을 때는 이 정도 반응은 아니었는데.

"허허. 여기에 자이루트 산맥의 오우거에게 충성서약까지 받아 내다니, 내가 쓰러진 동안 제국의 근심이란 근심은 모조리 해결하고 돌아다닌 모양이야."

"폐하."

"정말 장하다. 클로드. 그리고 베리트의 문제는.... 그 일은 내 잘못이 크다."

황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선대로 부터 내려오는 관행을 함부로 바꿀 용기를 내지 못했다."

"...."

"사정이 어떻게 된 지는 들었다. 기근을 참다못해 베리트를 탈출한 난민이 네 집까지 도망쳐 왔다지?"

"그렇습니다. 폐하."

"그래서 영주인 탈리스만에게 달려가.... 덕분에 마음고생을 시켰구나. 앞으로는 베리트에 대한 모든 차별적인 정책을 하나씩 폐지하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어허, 내 앞에서 무릎 꿇지 말래도?"

황제는 팔을 뻗어 주저앉으려던 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양반, 몇 년 만에 깨어난 주제에 생각보다 힘이 좋은데? 역시 해독시킨 타이밍이 역대 회귀 중 가장 빨라서 그런가?

"탈리스만에게 내린 직위는 거두겠다. 불만이 있겠지만 따로 불러 잘 타이를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지금까지 세운 공을 감안하여, 네게 베리트의 영지를 하사하겠다."

음?

베리트의 영지를 지금 시점에서 나한테 준다고? 예전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여기에 폐허가 된 영지를 재건하기 위한 재건 비용으로 금화 2만개를 즉시 지급할 것이며, 향후 10년간의 세금도 면제하겠다."

"성은이.... 성은이 망극합니다. 폐하."

"물론 혼자서는 힘들겠지. 충분한 숫자의 관리도 추가로 파견하겠다. 솜씨 좋은 자들을 보낼 테니 네게 부담이 가는 일은 없을 게다."

결국 일은 관리들에게 시킬 테니 너는 편하게 영주 자리만 받고 꿀만 빨라는 뜻. 하지만 기왕 받은 영지를 나몰라 내버려둘 생각은 없다.

나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황제의 호의에 화답했다.

"소자, 전력을 다해 영지를 부흥시켜 보이겠습니다."

"무리하진 않아도 된다. 허허, 이런 든든한 모습이라니.... 레일린이 이런 널 봤으면 얼마나 대견해 했을꼬."

황제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죽은 전 황비에 대한 황제의 사랑이 유명했지.

"아무튼 영지의 일로 부담 가지지 말거라. 그 밖에도 너는 다른 할 일이 많지 않느냐?"

"다른 일이라 하심은 무엇입니까?"

"네게 감찰사의 직위를 내리겠다. 제국 전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문제를 발견하면 즉결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내려주마."

이쪽은 예정된 일이다. 지금까지 황제를 살려낼 때마다 같은 포상을 줬으니까.

그리고 이쯤에서 대신 한명이 앞으로 나서 반발을 하겠지?

"폐하. 그것은 너무 과한 일이 아닌가 싶사옵니다."

예상대로 군사대신인 홉스가 나서 무릎을 꿇으며 탄원했다.

"즉결 처분이라 하심은 처형에 대한 권한을 내리신다는 말씀이십니다. 감히 목숨을 걸고 말씀드리건대, 이는 만에 하나 클로드 황자께서 다른 마음을 품으신다면 제국에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옵니다."

발언의 수위가 엄청 강하다. 내가 반역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둔 이야기니까.

하지만 이것은 황제와 미리 말을 맞추고 형식적으로 거는 태클.

"쓸데없는 걱정이다. 클로드에게 다른 뜻이 있다면 그토록 고생해서 날 이렇게 다시 살려 놓았겠느냐? 심지어 날 살리기 위해 직접 엠퍼로드의 하수도에 들어가 몇날 며칠을 고생했다던데?"

황제는 어림없다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홉스는 즉시 머리를 조아리며 반대의 뜻을 거두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폐하. 부디 폐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군사대신이 이렇게 선빵을 쳐 놓으니 다른 대신들이 뒤늦게 나서 이견을 제시하기 힘든 분위기가 되었다. 이런걸 보면 황제도 참 교활하단 말이지?

황제는 만족한 얼굴로 내 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널 믿는다. 클로드. 너라면 제국의 안위를 위해 필요한 일을 해주겠지."

"폐하의 믿음에 보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사단도 하나 만들었다지? 그쪽에 대한 지원은 내 따로 사람을 보내 알릴 테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감사합니다 폐하."

"나중에 백룡궁에 한번 찾아와라. 내 아들. 대신들이 없는 곳에서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마지막 이야기는 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속삭임이었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천진한 미소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나는 완만하게 처리했으니, 나머지 하나도 바로 처리하러 가봐야겠지?

* * *

은목궁.

황궁주변에 흩어져 있는 아홉 개의 별궁중 하나로, 차기 황제인 황태자가 거처로 사용하는 궁전이다.

그런데 은목궁도 아니고 은목궁으로 이어지는 정원에 들어선 순간.

"클로드!"

훤칠한 키의 남자가 번개처럼 달려와서는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니 잠깐, 이건 무슨 비비원숭이가 새끼사자를 들어 올리는 포즈도 아니고....

"황태자 전하. 그만 내려주십시오."

"황태자는 뭔 놈의 황태자!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그러지 마! 그냥 형이라고 불러! 오랜만에 봤는데 역시 엄청 작구나! 밥 좀 잘 먹고 다니지 그랬냐!"

황태자인 아드릭스가 치켜든 나를 와락 껴안으며 마구 얼굴을 비벼댔다. 으악, 이거 애정 표현이 너무 과격한 거 아냐?

"네 덕에 내가 그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났다! 이런 세상에! 그 더러운 악질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무사히 회복하셔서 다행입니다. 형님."

"다행이고말고! 으허어어어엉!"

아드릭스는 눈물까지 펑펑 쏟으며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컥,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냐?

"형님.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습니다. 그만 놔주세요."

"으흐르으으윽.... 응? 엇, 미안하다 클로드."

아드릭스는 얼른 놓아주며 눈물을 닦았다.

"내가 흥분해서 그만.... 아무튼 잘 왔다. 맞아. 이거 보이니? 살이 썩어서 뼈가 보였었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감쪽같이 원래대로 돌아왔어!"

아드릭스는 새살이 돋은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온몸의 살이 썩어가고 있던 나흘 전과 비교하면, 지금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골탈태를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치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고맙다 아우야! 이게 다 네가 가져온 그 코어인가 하는 영약의 효과야!"

"코어는 영약이 아니라 에이션트 울프의 몸속에 만들어지는...."

"아무렴 어때. 아무튼 정말 고맙다. 정말 고마워! 진짜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 아니 생명을 넘어 인생의 은인이라고 할까? 자! 이런데 있지 말고 정원으로 들어가자!"

아드릭스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등을 두드렸다.

"정원에 만찬을 준비했다. 별궁은 아직 냄새가 안 빠져서 들어오면 안 돼. 전에 왔을 때 맡아 봤지? 그때 막 욕해서 미안하다. 내가 워낙 끔찍해서, 아무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거든."

사흘 전 억지로 은목궁에 들어갔을 때 발작하듯 욕설을 내뱉던 모습이 떠올랐다. 하긴 그 썩는 냄새가 빠지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그때는 급한 마음에, 갑자기 들이닥쳐 실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런 일이라면 날 때려 눕혀서라도 제압해야지. 근데 아직 점심 안 먹었지?"

"네 형님. 방금 황궁에서 나왔습니다."

"좋아. 밥 좀 먹으면서 쌓인 이야기 좀 털어놓자. 우리 막냇동생이 어쩌다 이렇게 훌륭해진 거냐? 응? 그동안 내가 엉망이라 다른데 관심을 쓸 겨를이 없어서. 네 소식을 간간히 듣긴 했는데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원래 그렇게 마법에 재능이 있었어?"

아드릭스의 이런 격식 없는 태도는 꾸밈없는 본능이다.

덕분에 배다른 형제들 중, 오직 아드릭스만이 클로드를 진심으로 대하며 아껴 줬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그 끔찍한 병이 나으니 정말 살 것 같지 뭐냐? 아, 햇빛 정말 좋다. 다시는 바깥세상에 나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게 다 네 덕분이다. 맞아, 뭐 가지고 싶은 거 없니? 내가 줄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주마!"

"돈.... 아니, 실은 받고 싶은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휴, 나도 모르게 '돈을 주세요!'라고 말할 뻔했네.

나중에 어둠 산에 가져갈 꿀의 구입비와 운송비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꺼낼 때가 아니지.

"선물?"

아드릭스는 순간 내 앞에 쭈그려 앉으며 눈높이를 맞췄다.

"뭔데? 뭐든 말해! 내가 영혼을 팔아먹는 한이 있더라도 꼭 마련해 주마! 최고급 마차를 한대 뽑아 줄까? 아니면 새 저택이 필요하니? 엠퍼로드 중부지구에 괜찮은 저택을 몇 개 가지고 있는데...."

"제가 받고 싶은 것은 나이트 마스터입니다."

"응?"

아드릭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과거에 벌어졌으며 훗날에도 벌어질, 쏟아지는 이계의 군대를 선두에서 막아내는 황태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형님은 제가 기억하는 가장 멋진 기사였습니다. 모두들 형님이 언젠가 나이트 마스터가 될 거라 확신했죠."

"갑자기 그건 왜... 뭐 한때는 그랬긴 했지."

아드릭스는 갑자기 숙연해진 얼굴로 오른팔을 내밀었다.

"근데 너도 알잖아. 내가 몇 년 동안 자리보전한 거. 이렇게 얇아진 팔로 예전처럼 싸우는 건 힘들어."

얇은 팔 좋아하시네. 지금 당장도 내 팔뚝보다 세 배는 굵어 보이는 주제에.

물론 중독되기 전과 비교하면 살과 근육이 쭉 빠진 상태인 건 맞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드릭스에게 감정안을 사용했다.

종족 : 인간

현재 힘 : D+

잠재 힘 : A+

그럼 그렇지.

당장의 힘은 많이 떨어져 있지만, 역시 잠재적인 능력은 엄청난 수준이다. A+면 당장 나이트 마스터인 다비보다도 높구만.

비록 올해로 나이가 스물일곱이고, 최근 몇 년간은 허송세월을 보냈다 해도.

과거 모든 면에 있어 천재라 불린 타고난 재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나이트 마스터는 제국이 가진 힘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필 그 상징 중 하나가 최근에 반역을 저질렀죠."

"파이렌 말이지. 나도 이야긴 들었다."

"땅에 떨어진 명예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건 형님뿐입니다. 저는 형님이 언젠가 나이트 마스터가 되어 제국에서 누구보다 강력한 기사가 되실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엠퍼로드의 하수도까지 들어가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를 구해 온 겁니다."

"클로드...."

아드릭스는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진지한 표정도 잠시.

"...이 귀여운 것!"

녀석은 더는 못 참겠다는 얼굴로 또다시 날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어쩜 이렇게 말을 해도 예쁘게 하냐? 알았다! 오늘부터 바로 운동을, 아니 특훈을 시작하마! 목숨을 구해준 동생이 나이트 마스터가 되길 바라는데 반드시 돼야지! 암 되고말고!"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53화

18장 부흥의 루트

"황태자님이 가진 기사의 재능에 대해선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다비는 기초가 올라가는 기사단 본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으로 칭호를 받진 않았지만 이미 나이트 커맨더 수준이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건강 문제로 칩거에 들어가시기 전의 이야기입니다만."

"이젠 완치됐으니 다시 달려야지. 미리 말해 놨으니 가끔 은목궁에 들려줘."

"제가 말입니까?"

"그래. 제국 최강의 기사가 훈련도 도와주고 조언도 해주면 형님도 금방 예전 실력을 찾을 거야."

"황태자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큰 영광입니다. 하지만 당장은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다비는 내 쪽을 돌아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대체 그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갑자기 바뀔 수 있습니까?"

"나? 확실히 몸이 좋아졌지?"

방금 한 시간이나 공터를 달렸는데도 체력에 여유가 남을 정도다. 전에는 거의 5분 간격으로 달리다 쓰러지다를 반복했는데.

"좀 좋아진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몸이 되셨습니다."

다비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관절의 안정성이 놀라운 수준으로 올라왔습니다. 저번에 마지막으로 달리셨을 때 몇 번이나 다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대충 서너 번?"

"아홉 번입니다. 무릎과 발목은 물론이고 고관절까지 터지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고작 한 시간을 달리는 동안 말입니다. 회복마법이나 영약이 없었으면 불구가 되었을 정도의 부상을 아홉 번이나 입으셨다는 소립니다."

"에이, 설마 그 정도였어?"

"설마 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번도 쉬지 않고 한 시간 내내 달렸는데도 멀쩡하시군요. 물론 발바닥은 엉망입니다만."

마침 신발을 벗고 발바닥의 터진 물집을 치료하는 중이었다. 다비는 주저앉은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다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체 안정성이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이 정도면 디디와 비교해도 크게 부족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게 다 코어를 먹어서 그래. 디디가 그런 것도 코어 때문이고."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 말씀이군요. 하지만 그건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 진상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르갈이 나 먹으라고 하나 더 줬어. 덕분에 몸이 좋아지고 키도 컸고."

"키?"

"그래. 키."

"키가 크셨습니까?"

뿌득.

순간 이가 갈렸다. 설마 눈치 못 챈 거야? 그 며칠 사이에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생겼는데도?

"이래서 키 큰 놈들은.... 흥, 그래 봤자 어차피 자기랑 비교하면 별거 아니라 이거지?"

"아니, 죄송합니다. 다른 쪽의 변화에 집중하느라 이쪽은 캐치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황자님."

다비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틈을 노려 녀석이 허리에 찬 검을 쑥 뽑으며 몸을 일으켰다.

"용서 못 해."

차릉!

"황자님!"

"칼 좋네. 죄를 지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

당황한 다비의 목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야, 코어 먹고 정상으로 돌아오니 전보다 청각도 훨씬 예민해진 거 같네?

"농담이야. 어차피 훈련하기로 한 거, 슬슬 검도 쥐어보고 그래야지?"

"아직은 위험합니다. 처음에는 목검이나 가검을 다루면서 무기에 익숙해지는 게 좋습니다."

"그래? 생각보다 다룰 만한 것 같은데?"

우선은 몇 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검을 쥐고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검을 휘둘렀다.

붕.

부웅.

내가 다루기엔 버거울 정도로 길고 무거운 칼. 하지만 그렇다고 못 휘두를 정도는 아니지.

핵심은 검의 무게에 몸이 딸려가지 않도록 중심점을 잡는 것.

이 정도는 기초 중에 기초라 할 수 있다. 이래 봬도 5회차 때 아슬아슬하게 나이트 익스퍼트 근처는 찍어 봤단 말씀.

"아니...."

지켜보는 다비의 눈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크크. 고작 이 정도로 뭘 그렇게 당황하고 그러시나? 어디 한번 진짜 간 떨어지게 해 봐?

좋아. 재밌겠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모든 기사가 최초로 습득하게 되는 나이트 스킬.

바로 풍압검.

물론 기본적으로는 마갑을 착용해야 쓸 수 있는 기술이다.

마갑이 주는 추가적인 힘과 속도, 그리고 중량을 활용해 휘두르는 칼날에 단계적인 가속을 줘야 한다.

그러면 칼날에 풍압이 맺히고, 맺힌 풍압을 원하는 장소에 쏘아 일종의 충격파를 먹일 수 있다.

핵심은 검을 휘두르는 그 짧은 시간에 느린 가속과 빠른 가속을 얼마나 다단계로 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물론 마갑도 안 입은 지금 상태로는 최소 조건인 2단계가 한계겠지만.

부웅!

중량이 부족한 관계로 몸을 크게 회전해 원심력을 더한 다음, 마지막 순간 검을 크게 휘두르며 두 번의 가속을 추가한다.

처음은 느리게.

다음은 빠르게.

촥!

순간적으로 칼날에 풍압이 일어나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느낌은 느낌뿐이었다.

"으?"

빠른 가속과 동시에 몸이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맨땅에 검을 찍으며 바닥을 뒹군 순간, 지켜보던 다비가 번개같이 달려와 붙잡아 주었다.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아."

"위험하셨습니다! 자칫 땅에 찍은 칼 쪽으로 엎어지셨으면 큰일 났습니다!"

"그럴 것 같아 마지막에 몸을 틀었어. 쳇, 이거 그냥은 안 되는구나. 팔에 쥐났네."

"안되는 게 당연한 겁니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다비는 눈을 질끈 감고는 5초쯤 고민했다.

"방금 그거, 설마 풍압검을 쓰려고 하신 겁니까?"

"맞아. 풍압검."

"이런 세상에."

다비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 이건.... 역시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뭐가?"

"통찰력 말입니다."

통찰력? 갑자기 그건 왜?

"황자님은 한순간에 상대의 능력을 꿰뚫어보십니다. 이번에는 기술이라고 해야겠군요. 전에 제가 풍압검을 시범으로 보여드렸을 때, 그 한순간에 이미 기술의 핵심을 전부 파악해 버리신 것 아닙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어떻게든 풍압검 한번 써 보겠다고, 5회 차 때 10년이라는 시간 대부분을 거기에 투자했거든.

덕분에 지금 그걸 비슷하게 흉내라도 냈던 거고.

물론 이런 사실을 모르는 다비는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몸을 돌렸다.

"그럼 뭐해. 어차피 실패했는데."

"실패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완벽하셨습니다."

"완벽했다고? 기술이 안 나갔는데?"

"기술이 발동하지 않은 것은 황자님이 마갑을 착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마갑의 중량이 더해졌다면 마지막 순간에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테고, 자연스럽게 목표 지점에 풍압을 방출할 수 있었을 겁니다."

"아, 그래?"

"그렇습니다. 아니, 오히려 마갑 없이 그 단계까지 기술을 완성한 게 더 놀랍습니다. 단계적인 가속은 아직 메르데스 양에게도 가르치지 않았는데 그걸 한번 보고 그대로 따라 하실 줄이야...."

다비의 표정이 빠른 속도로 심각해졌다. 녀석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진지한 얼굴로 선언했다.

"그럼 오늘부터 바로 마갑 적응 훈련에 들어가겠습니다."

"엥? 오늘?"

"원래 계획은 적어도 1년은 기본 체력만 단련하려 했습니다만.... 지금의 황자님께 그런 짓을 하는 건 범죄입니다. 지금부터는 우선 기존의 체력 훈련 두 시간을 한 시간으로 줄이겠습니다."

오, 정말?

"대신 마갑 적응 훈련 두 시간, 그리고 검술 훈련 한 시간을 추가하겠습니다."

아니 잠깐.

그럼 결국 훈련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난 거 아닌가? 두 시간에서 네 시간으로?

"잠깐, 지금 누구 맘대로 훈련 시간을...."

"피하시면 안 됩니다."

다비는 내 양 어깨를 움켜쥐며 눈과 눈을 마주쳤다.

"이건 황자님의 운명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당장 마갑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리고는 뭐라 말하기도 전에 쏜살같이 저택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 뭔데 이거.

마지막 순간 다비의 눈에 비친 광기는 등줄기가 오싹해질 지경이었다.

훗날 쏟아지는 이계의 군대를 앞에 두고도 저만큼 비장한 표정은 아니지 않았나?

이거 스위치가 잘못 들어간 거 같은데....

아니, 따지고 보면 결국 내가 다비의 스위치를 잘못 눌러 버린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풍압검 흉내를 안내는 건데!

* * *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멍하니 있자니 절로 옛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오후 내내 이어진 다비의 훈련은 영약이나 회복 마법으로도 커버 안 될 만큼 지독했다.

일단 하루 훈련하고 하루 쉬는 걸로 합의를 보긴 했는데, 그럼 이틀 뒤에 이 지옥 같은 훈련을 또 해야 하는 건가?

"후우...."

안 돼! 살려줘! 여기 저택 3층에 사람 있어요!

"괜찮으세요? 황자님?"

갈색 눈동자의 여자아이가 걱정스런 눈으로 물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물통에 손을 담근 소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루네.

악덕 영주의 횡포로 굶어 죽어가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베리트를 탈출해 자신의 힘으로 저택까지 도착한 갸륵한 소녀.

"괜찮아. 그냥 피곤해서."

"기사님이 너무 심하신 거 같아요. 황자님처럼 높으신 분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훈련하는 거 봤구나?"

"앗. 그게.... 죄송합니다."

당황한 루네가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일부러 훔쳐보려던 게 아니라 그냥 창밖으로 보다 보니 보여서...."

"후암...."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숨기고 훈련하는 것도 아닌데 뭘."

"하지만 저 같은 게 감히 무례하게...."

"괜찮으니까 신경 꺼. 그보다 루네야?"

"네. 황자님."

"손바닥의 감각에 집중해."

"네? 앗, 네."

의자에 앉은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물통에 담근 자신의 손을 노려보았다.

저택에 도착하고도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여전히 불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하긴 무려 황자가 자신의 저택에서 이런 융숭한 대접을 해주니 당황할 수밖에.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진 말고. 여기 적응은 좀 됐어?"

"네. 시녀 분들이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하지만 저 같은 게 이렇게 황자님의 저택에 오래 머물러도 되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만 집에 돌아가는 편이...."

"안 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 집 걱정은 하지 마. 베리트의 알룬이라고 했지?"

"네? 아, 네."

"그쪽 마을은 특히 더 신경 써서 지원했어. 가족들도 다 건강하게 잘 지내는 거 확인했으니 맘 놓아도 돼."

"감사합니다. 황자님. 이 은혜를 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지...."

"지금 하고 있는 게 바로 은혜 갚기야. 그러니 집중해."

'자신의 힘으로 저택에 도착한 루네'는, 훗날 아크 위저드까지 노려볼 수 있는 특급 잠재력의 소유자다.

그리고 강력한 마법사는 훗날 이계의 웨이브를 막는데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전력.

무엇보다 기사에 비해 마법사의 숫자가 턱 없이 모자라기 때문에, 루네 같은 인재는 반드시 제대로 육성해야 한다.

"제가 정말 마법사가 될 수 있을까요?"

루네가 물에 담긴 자신의 손을 보며 물었다. 나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돼. 마법사는 마법사를 알아볼 수 있어."

"하지만 저 따위가 감히...."

"넌 재능이 있어. 스스로를 못 믿겠으면 날 믿으면 되잖아? 너 나도 못 믿어?"

"그, 그럴 리가요. 저는 황자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좋아. 물론 그렇다고 처음부터 마법을 막 쓸 수는 없어. 그래서 이렇게 감각을 깨우는 수중식부터 차근차근하는 거고."

수중식.

이것은 매직 길드에서 만들어낸 기초적인 마법 훈련이다.

정확히는 재능은 있지만 아직 마법을 발현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훈련법이라고 할까?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물을 채운 통에 양손을 담그고 마법을 상상하면 끝.

"어때, 수온이 변하는 게 느껴져?"

"그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꼭 불의 이미지만 떠올릴 필요는 없어. 대신 얼음을 떠올리면서 물이 차가워지는지 확인해 봐. 밀어서 안 되면 당겨 보는 거지."

이제 막 입문한 마법사가 눈에 보일 만큼 또렷한 불꽃을 만들거나, 혹은 동상을 입을 만큼의 냉기를 발생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실제로는 미세한 마법이 발동하게 마련인데, 정작 자신이 마법을 발동한 줄 모르고 포기하고 좌절해 버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하지만 손을 물에 담그고 있으면 아주 조금이라도 수온의 변화가 생기게 마련.

그것을 느끼며 자신이 정말 마법을 쓰고 있다는 현실감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수중식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