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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42화

13장 예상 못 한 루트

모두의 예상대로, 내 저질체력으론 다비의 가벼운 러닝 트레이닝조차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어허!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엉덩이가 뒤로 빠졌습니다! 달릴 땐 항상 가슴을 펴고! 허리를 세우고!"

"자, 잠깐. 그게 지금 배가 땡겨서...."

"사흘 굶은 거북이도 이거보단 빠르겠습니다! 그날 전투할 때는 그렇게 쌩쌩 날아다녔으면서 지금은 이게 뭡니까! 속도를 더 내십시오!"

"아니, 그때는 비행마법으로 날아다녔던 거고... 허, 허억! 쿨럭!"

"언제까지 날아다니기만 할 겁니까! 인간은 자고로 두 발로 달리는 짐승입니다! 어허! 달릴 때 무릎 내려가면 안 됩니다! 탄력 있게 지면을 박차듯이! 하나! 둘! 하나! 둘!"

"헉, 허억, 허걱...."

아 제발.

지금 날 죽일 셈이냐?

다비는 마치 개인 트레이너처럼 옆에 붙어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나는, 그저 가볍게 달리기만 하는데도 제정신을 유지 할 수 없었다.

가슴은 터질 것 같고, 무릎은 욱신거리고, 발바닥은 아마도 찢어졌거나 물집이 잡혔겠지.

특히 허리는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쪼개질 것처럼 아프다. 내가 버티다 못해 앞으로 고꾸라진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메르데스가 달려와 각종 영약 병을 꺼내기 시작했다.

"황자님, 우선 체력의 영약입니다. 이번에도 무릎이 다치신 것 같습니까?"

"으, 으응...."

"그렇다면 한 번 더 회복의 영약을 마시고.... 발바닥은 어떻습니까? 앗, 이쪽 발은 찢어졌는데 이쪽 발은 물집이 잡혔군요. 발목도 덜컹거리고, 이러면 회복의 영약을 추가로 한 병 더 마셔야 합니다. 여기에 추가로 연한 설탕물을...."

"자, 잠깐! 그만! 물배 터지겠어! 좀 전에도 그만큼 마셨잖아!"

불과 15분 전에 쓰러졌을 때도, 그에 앞서 20분 전에 쓰러졌을 때도 계속해서 각종 영약과 설탕물을 마셨다고!

아무리 영약이 좋아도 이렇게 계속 마시면서 달리자니 배가 터질 것 같다. 나는 영약 대신 다친 곳에 직접 회복 마법을 사용하며 툴툴댔다.

"이건 무슨 자가발전, 아니 자급자족하는 것도 아니고...."

"신성마법! 역시 황자님은 최고의 기사가 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걸로 얼마든지 부상을 입어도 바로 훈련을 재개할 수 있겠군요!"

다비가 신이 나서는 소리쳤다. 아니, 그걸 거기다 가져다 붙이면 안 되지!

휴, 고갈된 체력을 '블레스'로 회복시키고, 온몸의 통증을 '페인 킬러'로 차단하자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역시 회복 쪽은 영약보다 신성마법이 직빵이라 좋긴 좋다.

여하튼, 불과 한 시간의 러닝으로 내 몸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라는 걸 깨달았다.

뭔가 대단한 걸 한 게 아니다. 그저 단순히 공터를 빙빙 돌면서 달린 것뿐.

그런데 발목과 무릎이 뒤틀리고, 고관절이 삐걱대고, 심지어 팔을 크게 휘두르며 달리다 어깨뼈가 빠지기까지 했다!

이번 회귀에는 예상 못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데, 어쩌면 이것도 예상 못한 변수가 아닐까?

시작부터 비행마법으로 날아다니거나, 장거리 이동에는 마차를 타고 앉아 있기만 했잖아?

그래서 몸 상태가 예전보다 더 퇴화해 버렸나보다. 한 마디로 운동부족이란 소린데....

"자, 정비가 끝났으면 바로 훈련을 재개합니다! 약속한 두 시간 중 아직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트레이너 모드가 된 다비가 우렁찬 목소리로 재촉했다. 아놔. 얘도 평소엔 차분한 녀석인데, 누구 가르칠 때만 이렇게 성격이 스파르타로 변신한단 말이지?

"아, 알았어. 뛸게. 뛸 테니까 일단 5분만 쉬자."

"여기서 더 쉴 필요가 있습니까? 방금 체력을 회복시키는 신성마법을 쓰시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만?"

"야, 신성마법이라고 만능이 아니야. 나중에 5분 더 뛸 테니... 지금은 잠시만 쉴게."

육체가 아니라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다고, 이 짐승 같은 놈아!

다비는 그제야 내 뜻을 이해한 듯, 흥분된 표정을 가라앉히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럼 잠시 숨을 돌리도록 하지요."

"후아...."

"앞으로 한동안은 이런 식의 기본적인 체력 훈련만 하겠습니다. 마갑이나 검술 같은 건 당분간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해 뭐해. 이딴 몸으로 마갑 입었다간 즉사할지도 몰라. 온몸의 뼈가 남아나겠어?"

나는 가느다란 팔을 들어 언데드 해골처럼 흔들어 보였다. 다비는 쓴웃음과 함께 주변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기사단 본부를 지을 계획이라 하셨습니까?"

"내일부터 공터를 더 넓힐 거야. 훈련은 거기서 하면 돼."

"기사단 정원은 몇 명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생각이고 자시고... 이미 서른 명으로 정해졌어. 아, 제스 형이 정해준 거라 이제 와선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죠. 혹시 기사 단원을 추가로 더 모집하실 계획이 있으십니까?"

"있지. 제국 사관학교 다시 가서 몇 명 더 뽑아 와야 하는데...."

그동안 여러 루트를 동시에 진행하느라 사관학교에 추가로 들릴 짬이 나질 않았다. 다비는 내 답변을 예상한 듯, 곧바로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카일처럼 졸업반에서 차출할 생각이시라면, 그냥 사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넉 달도 안 남았으니까요."

"그동안 다른 기사단에서 침 발라 놓고 빼 가면 어떻게 해?"

"그만큼 뛰어난 생도라면 이미 기사단의 접촉이 끝났을 겁니다."

"아."

"무엇보다 기사단의 선택 기준은 당장의 실력입니다. 하지만 황자님의 기준은 다르지 않습니까? 카일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그렇긴 한데.... 그래도 빨리 빼오면 빼올수록 좋지 않을까? 그만큼 네가 빨리 가르칠 수 있을 텐데?"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당분간은 지금의 단원들을 가르치는 데 충실하고 싶습니다."

다비는 라니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 메르데스를 바라보았다.

"본인이 없는 자리라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메르데스는 저보다도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보다?"

"네."

"넌 이미 나이트 마스턴데? 근데 그보다 위야?"

"재능만 보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실은 저도 반쪽짜리 나이트 마스터거든요."

엥?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네가 왜 반쪽짜리 나이트 마스터인데?

하지만 그 질문을 하기 앞서, 나는 여태껏 한 번도 다비에게 분석안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물론 안 봐도 최고등급이 나올게 뻔해서 굳이 시도하지 않았던 것뿐인데....

종족 : 인간

현재 힘 : A

A?

다비의 힘도 그냥 A등급이었어? 리넨의 잠재 힘과 똑같네?

그런데도 나이트 마스터?

여기에 잠재능력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결국 현재 능력이 이미 한계치에 닿았다는 뜻인데....

이건 뭔가 분석안이 잘못된 건가?

"제가 마스터 칭호를 받은 것은 오직 나이트 스킬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스터 스킬인 '분열검'을 구사할 수 있으면 일단 기사 협회에서 칭호를 내려줍니다."

우웅!

그리고는 검을 뽑아 분열검을 구사했다. 전에 저걸로 파이렌을 잡은 건데.... 가까이서 보니 칼이 둘로 나눠지는 게 멋지긴 멋지구만.

"하지만 제 역량으론 또 다른 마스터의 징표인 '최상급 마갑'을 오래 착용할 수 없습니다. 30분만 입어도 온몸에 진이 빠집니다. 그래서 실전에는 되도록 중급이나 상급 마갑을 사용하죠."

"어... 그래도 최상급 마갑을 아예 못 입는 건 아니잖아?"

"입어봤자 의미가 없으니 안 입느니만 못합니다. 여기에 체력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최상급 마갑을 통해 강해지는 힘 보다 오히려 늘어나는 마갑의 중량 때문에 제한되는 움직임이 더 손해입니다."

정말? 바로 직전의 회귀 때 최상급 마갑을 입고 이계의 군대를 휘젓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러니까... 예를 들면 특별한 움직임이 필요한 상황에서만 손해라는 거지? 저번 파이렌처럼 강력한 녀석과 1 대 1로 붙는다던가?"

"그렇습니다. 이름은 최상급이지만 제가 추구하는 최상의 움직임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최상급 마갑도 제대로 다룰 수 있고, 마스터 스킬인 '중량검'도 정확히 구사하던 파이렌이 저보다 훨씬 제대로 된 나이트 마스터인 셈입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표정엔 아쉬움이 느껴졌다. 나 참, 미친 황자 루트를 빨리 진행했더니 이런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는구나.

지금까지는 그냥 기사 중에서 가장 잘 싸우기에 다비가 최고인줄 알았다. 알고 보니 내가 모르던 이런 속사정이 있을 줄이야.

결국 최고가 되기엔 살짝 역량이 부족했던 다비는, 그 부족함을 기술에 몰빵함으로써 극복한 것이다.

하긴. 예전부터 얘가 항상 주장하던 게 '모자란 힘은 기술로 대처할 수 있다'였지.

결국 나이트 마스터라고 다 같은 나이트 마스터가 아니란 소리. 다비는 얼굴에서 아쉬운 표정을 지우며 가만히 웃었다.

"그래서 이번에 가르칠 단원들에게 기대가 무척 큽니다. 간만에 '진짜'나이트 마스터가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메르데스 말이지?"

"다른 단원들도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니 가르치는 보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6개월 정도는 추가 인원을 받지 않고 이들 네 명에게 집중하고 싶습니다. 아, 물론 황자님까지 합쳐서 다섯 명이 되겠군요."

"나야 뭐. 앞으로 달리기만 실컷 할 것 같으니 신경 꺼도 돼."

과거에 기사 테크트리를 밟았을 당시, 최하급 마갑을 입기 위해 기초체력만 단련한 시간이 무려 2년이었다.

물론 지금은 환경이 개선됐으니 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새 뭔가를 생각하던 다비가 갑자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황자님은 이 기사단으로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응? 그야...."

그야 9년 후에 이 세상을 뒤집어 놓으러 올 이계의 공격을 막을 생각이지.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전 그날 밤 생각나? 청사자궁?"

"물론입니다. 분명 평생 동안 잊을 수 없겠죠."

"만약에 말이야. 그런 괴물 녀석들이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쏟아진다면 너는 어떻게 할래?"

"저라면...."

예상 못한 질문에 다비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그 누구도 그런 식의 미래를 상상하진 못했을 테니까.

덕분에 나는 예정대로라면 3년쯤 후에 꺼냈을 이야기를 지금 상황에 맞게 재구성했다.

"제국은 사방이 적이야. 지리적으로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어."

"네. 그건 확실히 그렇습니다."

"심지어 포위망 너머에 또 어떤 위험이 있는지도 몰라. 지금에 안주해서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날 밤의 괴물들도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시작됐을 거야."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존재들이었으니까요. 섭정 전하께서 남몰래 외부와 접촉하셨던 걸까요? 호위 기사였던 파이렌과 함께?"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암튼 그런 놈들에게 대항하려면 힘이 필요해. 난 최악의 상황에서도 제국을 지킬 수 있는 구심점을 만들고 싶어."

이 정도면 당장은 대답이 됐겠지?

"그것은...."

다비는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곧바로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저 역시, 미력하게나마 황자님의 힘이 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너야 이렇게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지. 설마 나이트 마스터를 받아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난 웃으며 다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비는 황송하다는 표정과 함께 양손으로 악수를 받고는, 갑자기 그대로 내 몸을 쑥 일으켜 세워버렸다.

"윽?"

"저야말로 부족한 몸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자님."

"근데 왜 갑자기...."

"5분이 지났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다시 체력 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뭐 하고 계십니까! 어서 달리지 않고! 아직 훈련 시간은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부터 퍼져가지고 늘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달려! 달리십시오! 어서!"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43화

14장 부활엔 늑대가 필요하다

에구 삭신이야.

어제 훈련의 후유증으로 밤새 끙끙대며 잠을 설쳤다. 어휴. 각종 영약을 대접으로 퍼마시고 오만 신성마법을 퍼부었는데도 이놈의 허접한 몸뚱이는 도무지 깔끔하게 회복이 안 되는구만.

아무튼 아침부터 황궁에서 연락이 와 마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제스가 실종된 뒤로 제국 정부는 긴급사태를 선포했는데, 당장은 서열이 가장 높은 내무대신이 정무를 주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중요한 업무의 최종 승인이 가능한 건 오직 황제뿐.

만약 황제가 자리를 비울 시에는 황태자가 대리를 맡으며, 그 황태자까지 문제가 생긴다면 대신들의 동의를 얻어 유력한 황족이 섭정 직을 맡게 된다.

하지만 지금의 제국은 황제도 없고 황태자도 없으며 섭정도 없다.

대신들도 이런 답 없는 상황을 언제까지 내버려 둘 수는 없겠지? 그러니 대충 왜 불렀는지 답이 나온다.

나 보고 섭정 좀 맡아 달라 이거지.

물론 시켜준다고 넙죽 받을 생각도 없다. 앞으로도 진행할 루트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섭정 일까지 함께할 여유가 없거든.

"클로드 황자 전하! 현재 페이우드 제국은 미증유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제국에는 항상 모든 일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주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황제폐하께서는 병상에 누워계시고, 황태자께서는 한사코 외부인을 거부한 채 별궁에 칩거 중이십니다."

아직 황궁에 입궁하지도 않았는데, 내무대신인 발베니와 군사대신인 홉스가 버선발로 달려 나와서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섭정 전하께서 사망, 아니 실종되신 후에 다른 황자님들께 섭정 직에 대한 의사를 물었지만 모두가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득의하게 클로드 전하를 이곳에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나 보고 섭정을 맡으라고?"

어차피 거절할 거라 대놓고 건방진 말투로 물었다. 두 대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부디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안 돼."

"아, 안 되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의 거절은.... 저희가 무슨 떼쓰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너무 하십니다."

"아무튼 안 되는 건 안 돼. 다들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잊었어? 란트 후작이 잘도 그걸 허락하겠네?"

여기서 란트 후작이란, 작년에 내가 독주를 마시고 발작을 일으켜서 중상을 입혔던 재무대신 란트를 말한다.

"물론 란트 공은 전하께 매우 적대적인 입장이십니다만... 그래도 지금은 이미 은퇴하신 분입니다. 크게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영향력은 여전히 대단하잖아? 은퇴한 뒤로도 날 엄청 씹어대는 거 같던데?"

"그렇긴 합니다만. 여하튼 전하께서는 근래 들어 완전히 새 사람이 되시지 않았습니까? 최근 들어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공도 많이 세우셨고. 그러니 섭정 직을 맡아도 훌륭히 잘 해내실 거라 사료됩니다만...."

발베니는 심드렁한 내 얼굴을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 없으니까 빨리 포기하는 게 좋아. 내가 다음 루트를 완료할 때까지는 너희들끼리 고생 좀 하라고.

그런데 준비한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홉스가 고개를 들며 매우 진중한 표정으로 발언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전하께서 분명 섭정 직을 거절하리라 예상했습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물론 제국의 이익을 위해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큰 역할을 수행해 주시고 계시지만, 전하의 본질은 결국 자유로운 영혼이시니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제멋대로 싸돌아다니는 망나니라는 뜻이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데 왜 그랬어?"

"그래도 일단 의사를 확인했어야 했으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제국의 신하 된 몸으로서, 전하께 제국의 존망을 둔 진짜 의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의뢰?"

"클로드 황자 전하. 부디 전하께서 나서서 황제폐하의 중병을 치료해 주십시오!"

엥?

방금 뭐라고?

"물론 폐하의 병은 영약은 물론이고 모든 신관들이 손을 놓은 정체불명의 독종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다섯 신의 기적을 받은 성자가 아니십니까? 분명 전하께서 나서주시면 어떻게든 폐하의 몸에 차도가 생길 거라 생각합니다."

아하, 그렇구나.

이 녀석들이 날 여기까지 불러온 진짜 목적은 바로 황제의 회복이었다!

타이밍 한번 끝내주는구만. 바로 다음에 내가 진행하려던 루트가 바로 그거였는데.

"또한 외람된 말씀이오나, 정녕 전하의 힘으로도 폐하의 악질을 고칠 수 없다면, 차선책으로 지금 요양 중인 황태자님의 병환이라도 치료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내무대신도 타이밍을 맞춰 함께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믿을 분은 정말 전하뿐입니다. 부디 제국의 안위를 위해 떨치고 일어서 주십시오!"

"떨치고 일어서라니, 무슨 전쟁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두 대신의 뒤통수를 한참동안 노려보았다.

하지만 내심으론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다음에 진행하려던 루트가 바로 황제나 황태자 중 한 명을 살려내는 '부활의 루트'.

덕분에 대신들에게 생색을 내면서 큰 빚을 지게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최대한 귀찮고 괴로운 표정으로 끙끙거리다가, 이내 몸을 쭈그려 대신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에휴, 암튼 주변 눈도 있는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어들 나지?"

"전하. 부디 제국을 어여삐 여기셔서..."

"그래그래. 알았다고.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물론 절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정말입니까! 전하! 전하의 이 조그만 몸에 제국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제국의 안위가 전하의 이 작은 두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순간 두 대신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갑자기 욱신거리는 '작은' 어깨를 손으로 주물렀다.

이 망할 놈들. 흥분하니 입에서 막 본심들이 튀어나오는구만.

그래도 작은 건 사실이니 뭐라 반박할 수도 없다는 게 더 안타깝다. 나는 한숨과 함께 의뢰의 대가로 선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그 대신 이쪽도 좀 부탁할게 있는데 말이지...."

* * *

부활의 루트.

목표는 제스의 독으로 인간 구실을 못하게 된 황제와 황태자를 부활시키는 것으로, 원래대로라면 제스를 자연스럽게 몰아냈을 2,3년쯤 후에 시작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게 최우선으로 진행할 루트가 되어 버렸다. 나는 의뢰를 맡긴 대신들에게 생색을 내며 미리 선금을 받아 챙겼다.

"우선 두 사람이 머리 좀 굴려서 베리트를 제대로 돌아가게 해줘."

"베리트... 말씀입니까?"

"언제까지 거길 그 모양으로 내버려둘 거야? 그렇다고 집으로 돌려보낸 탈리스만을 다시 끌고 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탈리스만 백작은 정신착란 증상을 보인 덕분에 지하 감옥에서 9일 만에 해방시켜 본가로 돌려보냈다. 내무대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지금도 제국 정부에 탈리스만 백작가의 항의가 쏟아지고 있긴 합니다만... 일단 전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쪽은 신경 끄고 베리트에 집중해."

"으음...."

"그렇다고 베리트에 무슨 특혜를 주라는 건 아니야. 그냥 평범하게 농사짓고 먹고 살 수 있게만 해줘. 당장 사람들 안 굶어 죽게. 그 정도 예산은 낼 수 있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알겠습니다. 비록 제가 재무대신은 아니지만, 책임지고 베리트의 상황을 개선하겠습니다. 특히 공정하고 엄선된 관리를 파견하도록 하지요. 적어도 황제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는 잘 해낼 인물로 말입니다."

굳이 '황제가 돌아올 때까지'라는 조항을 붙인 이유는, 아마도 탈리스만 백작을 베리트의 영주로 임명한 게 바로 황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상관없다. 그거야 그때 가서 다시 해결하면 되는 문제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하나의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새로 만든 기사단의 예산도 바로 집행해주면 좋겠어. 어떻게 빨리 안 될까?"

"새로 만든 기사단이라면, 황자님께서 섭정 전하께 은상으로 받으신 그 기사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슬슬 단원이 모이고 있는데 적어도 급료는 줘야 할 거 같아서."

"그것은...."

내무대신은 말을 멈추고 군사대신과 잠시 시선을 교환한 다음 되물었다.

"전에 들은 바로는 30명 정도 되는 소규모의 기사단이라 들은 것 같은데, 맞습니까?"

"맞아. 나중엔 어떻게 늘어날지 모르지만. 아무튼 열 명은 채웠어."

실제로 채운 건 다섯 명 뿐이지만, 일단 예산을 더 타려면 여기서 허풍을 떨어 놓는 게 좋겠지?

하지만 내무대신은 내가 기대한 것보다 더 큰 선물을 안겨 주었다.

"알겠습니다. 우선 30명분의 급료 예산을 통과시켜 놓겠습니다."

"30명? 정말?"

"당장 남는 건 황자님이 적절히 관리해주시면 됩니다. 단원이야 어차피 금방 찰 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고말고. 나 적절히 관리하는 거 아주 잘해."

"믿고 맡기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사단이라면 아무리 소규모라도 본부로 사용할 건물 정도는 있어야 하겠군요. 표준 건축비용과 건물 유지비용도 함께 집행해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주면 나야 고맙지."

내무대신 발베니가 이렇게까지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나?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번엔 평판 관리를 정말 탁월하게 잘한 모양이네.

추가로 기사단장이 바로 그 '다비'니까, 그에 걸맞은 나이트 마스터 급 급료를 추가로 배정해 줘~ 라고 말하려다 그냥 참았다.

다비가 내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건 가능한 나중에 밝히는 게 좋다.

필연적으로 그 전에 몸담았던 백기사단과의 분쟁이 벌어지거든. 당장은 그거 따로 해결할 시간도 없고.

"그런데 기사단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아직 정하지 않았어. 정하면 바로 공문을 작성해서 올릴게."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재무대신과 함께 회의를 열어서...."

"아,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발베니의 말을 끊었다.

"당장은 아버님의 용태부터 살펴야겠어. 직접 보고 상황을 파악해야 고치든 말든 하지."

"아...."

"과연.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두 대신이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뒤에 있는 황궁이 아닌, 황제가 잠들어 있는 별궁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 * *

백룡궁.

제국에서 오직 황후만이 거처할 수 있는 별궁이지만, 어머니인 레일린 황비가 사망한 이후 황제가 억지로 자신의 거처로 삼아 버린 곳.

그만큼 황제가 어머니를 아꼈다는 증거일까? 나는 백룡궁의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몸에 남아 있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예전에 여기서 막 뛰어 놀고 그랬는데...."

"기억하시는군요 전하. 전하께서도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셨다 들었습니다."

군사대신 홉스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그 이전 클로드의 기억이지만.

그렇게 황제의 침소에 다다르자, 문을 지키는 황금갑옷의 기사 둘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검을 치켜들었다.

철컹!

"수고가 많네. 황자께서 폐하의 용태를 확인하려 오셨으니 문을 비켜주게."

"...."

기사들은 사전에 보고를 받은 듯 오래 끌지 않고 양 옆으로 몸을 비꼈다. 나는 천천히 열리는 문을 보며 대신들에게 말했다.

"혼자 들어갔다 나올게. 두 사람은 여기서 기다려 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열린 문으로 진한 사향 냄새가 풍겼다.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참으며 황제의 침소로 걸음을 옮겼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공합니다만 손을 씻어 주시기 바랍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24시간을 교대로 근무하는 시녀가 조용히 물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반대편에 있는 거대한 침대로 향했다.

쿵....

뒤쪽으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어둑했던 침실의 조명이 한층 더 어두워졌고, 나는 쫓아오는 시녀를 향해 지나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창문 안 여나?"

"보안상의 문제로 모든 창을 봉인했습니다."

"환기가 안 되면 건강에 더 나쁠 텐데...."

실제로 아무 조치 없이 이대로 내버려 두면, 황제는 대략 3년 후에 숨을 거두게 된다.

물론 여러 가지 변수가 있긴 하다. 나는 머릿속에 몇 가지 타임 라인을 그리며 시녀에게 물수건을 돌려주었다.

"요즘 폐하의 몸에 변화가 있었어?"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식사는?"

"하루에 두 번, 입에 꽂은 관을 통해 죽과 영약을 넣어 드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치료를 받으신 게 언제야?"

"이틀 전에 신관님이 오셔서 용태를 살피고 돌아가셨습니다. 병에 차도는 없고, 등에 생기려 하는 욕창만 치료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신관은 사흘에 한 번씩 오지?"

시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침대에 드리운 두꺼운 베일을 손으로 걷었다.

윽, 냄새.

죽어가는 사람 냄새가 코를 찌른다.

하지만 낯선 냄새가 아니라 견딜 만하다. 나는 황제의 주름진 손을 가만히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16살임에도 여전히 조막만한 내 손에 비해, 젊은 시절 강한 기사로 이름 날린 황제의 손은 놀랄 만큼 크고 단단했다.

하지만 푹 꺼진 눈 주변과 칙칙한 피부색은 마치 데스마스크를 연상시켰다. 나는 황제의 얼굴을 보며 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 와서 황제의 용태를 확인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미 전부 알고 있으니까, 이건 일종의 대신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인 셈.

다만 '부활의 루트'엔 아직까지도 변수가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살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 그래서 선택의 기준이 필요하다.

황제냐.

아니면 황태자냐.

아직까지 확정된 건 없다. 둘 중 누구를 살리느냐에 따라 각기 장단점이 있으니까.

아무튼 황제의 모습은 예전 회귀 때의 기억에 비해 그리 달라 보이진 않았다. 그렇게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쓸 수 있는 신성마법의 정수를 몽땅 퍼부었다.

"안티 포이즌! 힐링! 멘탈 리커버리! 안티 이블! 턴 언데드!"

순간 황제의 몸에 눈부신 광채가 빛나며 어둑하던 방 전체를 환하게 비춰주었다.

"꺄악!"

뒤에 있던 시녀가 비명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미동도 없는 황제를 향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신성마법은 안 통하네."

"화, 황공합니다. 전하. 전하의 힘으로도 역시...."

"그래도 방법을 찾아야지."

나는 쓰러진 시녀를 돌아보며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시간이 좀 걸리겠네. 그 전에 일단 자료수집 좀 해야겠어."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44화

14장 부활엔 늑대가 필요하다

별궁을 나온 내가 다음으로 찾은 곳은, 다름 아닌 대신전의 지하 도서관이었다.

물론 진짜로 자료수집을 위해 찾은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제스가 사용한 이계의 독을 제거하는 과정이 워낙 그로테스크하기 때문에, 사전에 밑밥을 깔아 놓는 과정이 필요할 뿐이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좀 급한 일이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 들어오시지요. 황자님. 저희 비밀 도서관은 황자님을 위해 언제든지 열려 있습니다."

대신관 에식스는 봉인된 도서관 입구를 손수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숨과 함께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저 역시 올해 초까지는 백룡궁에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역량으론 폐하의 병을 도저히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내 신성마법으로도 안 되더라. 뭔가에 중독되신 건 확실한데, 기존의 방법으론 어림도 없을 것 같아."

"저 역시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다만, 마땅한 방법이 없어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황자님께서는 뭔가 다른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요?"

"있어. 혹시 여기 '해독의 마수'에 관한 기록이 있어?"

"해독의 마수라.... 일단 마수에 대한 책이라면 몇 권 있는 걸로 압니다. 하지만 그런 책이라면 제국의 도서관에도 있지 않겠습니까?"

"있었어. 청사자궁에. 근데 지금 거기가 사라져서."

"그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에식스는 근처의 책장 사이에 몸을 넣으며 책등을 살피기 시작했다.

"암살자가 이번엔 유폐된 황자님을 노리다니, 그것도 나이트 마스터인 파이렌이 관여되었다는 게 충격이었습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그래도 리버스 그래비티가 기사들을 상대로 사기적이라 다행이야."

정작 몸이 촉수가 된 파이렌에겐 리버스 그래비티가 통하지 않았지만 말이지. 에식스는 납득이 간다는 듯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기사를 상대로 효과적인 마법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황자님의 마법 센스가 독보적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편지를 받았는데 황자님의 마법에 대한 감탄이 자자하더군요."

"편지? 누구한테?"

"트리멈에게서 왔습니다."

트리멈? 아, 호위신관 리더?

"지금도 요튼 만에 남아서 황자님이 알려주신 방법으로 시 서펜트를 꾸준히 사냥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맞아. 거기 일도 꽤 중요해서."

"덕분에 경제가 멈춰버렸던 요튼 지역이 다시 회복되고 있다 들었습니다. 훌륭한 일이지요. 다만 그들이 황자님과 떨어진 덕분에 호위신관의 본분을 다할 수 없었다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한때는 리치를 봉인하던 봉인신관이었던 그들은, 지금 자신의 원래 목적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투입되어 있었다. 나는 쓴웃음과 함께 양손에 손가락을 두 개씩 세워 들었다.

"당장 일들이 워낙 급해서. 두 명은 요튼 만에 있고, 나머지 두 명은 베리트로 보냈어."

"베리트라.... 저도 그곳의 일은 최근에 들었습니다."

에식스는 한숨을 내쉬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사실 그런 일은 신전이 나서서 해결했어야 하는데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저희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워낙 외부와 격리된 지역에 신관의 출입을 차단하고 있어 함부로 나서기 힘들었습니다. 덕분에 황자님께 폐를 끼친 것 같아 이제와선 후회만 드는군요."

"자책할 거 없어. 나도 그날 직전까지는 거기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꿈에도 몰랐는 걸? 대신 앞으로는 좀 신경 써줘. 베리트도 다 사람 사는 곳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미 베리트에 새로운 신전을 세울 수 있도록 제국 정부에 허가 요청을 넣었습니다."

"분명 금방 통과될 거야. 그건 그렇고 책은?"

"책은.... 어디보자, 오, 여기 있군요."

에식스는 먼지가 앉은 가느다란 책 한 권을 꺼내며 콜록거렸다.

"크흠. 실례. 제목부터가 '해독의 마수'입니다. 정말 있었군요."

그야 당연히 있겠지? 내가 그 책에서 정보를 얻어 '부활의 루트'를 만든 거니까.

"책의 장정을 보니... 적어도 만들어진 지 200년은 넘었겠군요. 비록 신전이 정한 금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평범한 도서관에서는 찾기가 어려울 겁니다."

"청사자궁에 있던 거랑 비슷하네. 그때도 표지만 보고 내용은 안 봤는데.... 한번 봐도 될까?"

"물론입니다."

에식스는 웃으며 책을 건네주었다. 잠시 책을 읽던 나는, 미리 계획한 대로 놀라는 연기를 시작했다.

"오, 이거라면 가능할지도?"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직접 봐봐. 여기 이 대목."

"알겠습니다. 어디보자.... 독을 먹는 마수란 다름 아닌 '에이션트 울프'를 말하는 것으로, 아, 에이션트 울프 말이군요. 흠. 그중에도 300년 이상 생존한 '족장 급' 마수의 신선한 내장은 모든 독을 빨아들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오, 이거라면 혹시 황제 폐하의 병환을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근데 독을 빨아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지? 영약처럼 만들어서 복용하면 안 되나?"

"표현 그대로라면... 아마도 고약처럼 피부에 붙여서 독을 빨아들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에이션트 울프의 내장을?"

"그렇죠."

"짐승의 내장을 황제 폐하의 피부에 붙인다니, 대신들의 눈이 뒤집히겠네. 근데 어디다 붙여야 하는데?"

"그야 물론 환부에...."

"폐하의 환부가 어딘데?"

"몸 전체가 아닐까요? 정말 중독되신 거라면 특정 부위에 독이 고여 있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건...."

에식스는 헉 소리를 내며 아연실색했다. 나는 징그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덩치가 엄청 크길 바라야겠네. 그 족장 급 에이션트 울프라는 마수가.... 그래야 내장도 엄청나게 많이 나오겠지?"

* * *

물론 나는 에이션트 울프의 덩치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다.

일반적인 성체의 크기는 몸길이가 2미터에, 어깨 높이는 1미터가 약간 안 되는 정도?

하지만 나이가 300살 이상 먹은 족장 급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기억대로라면 길이는 5미터에, 어깨 높이는 2미터를 훌쩍 넘긴다!

덕분에 배를 가르면 내장 속에 사람 하나를 통째로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다.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부활의 루트를 진행했고.

"그러니까, 지금 바로 영원의 숲을 향해 떠나신다는 말씀입니까?"

공터에서 단원들을 훈련시키다 돌아온 다비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나는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록을 보니 에이션트 울프라는 녀석들이 거기 살고 있는 거 같더라."

"영원의 숲은 엘프의 영토입니다. 제국이 몇 년째 준전시 상황으로 대치중인 바로 그 엘프 말입니다. 제가 불과 몇 주 전까지 그 근방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난들 어쩌겠어? 대신들한테 의뢰도 받았고, 일단 VIP를 살리려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아직까진 그 VIP가 누가 될지 정하지 않았지만, 일단 부활의 루트의 과정 자체는 전혀 복잡하지 않다.

영원의 숲에 들어가 족장 늑대를 사냥한 다음 시체를 가지고 돌아오면 끝.

물론 영원의 숲은 제국 영토의 최북단으로, 숲이 아니라 근처까지 가는 데만도 마차를 타고 열흘 쯤 걸린다.

여기에 족장 늑대가 엄청나게 강력하다는 것과, 추가로 족장을 지키려는 다른 수십 마리의 늑대를 사냥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고.

게다가 잡은 족장을 다시 엠퍼로드로 끌고 오는 동안 내장이 썩지 않도록 안티 커럽션으로 신선도까지 유지해야 하는 고생은 덤.

아무튼 그렇게 확보한 신선한 시체의 배를 가르고, 중독된 사람을 집어넣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녀석에겐 종류와 상관없이 인체를 잠식한 모든 종류의 이물질을 추출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독조차 순식간에 추출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다만 족장 늑대는 한 마리밖에 없다.

그러니 구할 수 있는 사람도 오직 한 명.

결국 선택을 해야 한다. 제스 대신 제국의 국정을 맡길 한 사람을.

황제?

황태자?

기존의 경험대로라면, 일단 황제를 살리는 쪽으로 무게가 기운다.

황제는 그 존재만으로도 제국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국정을 이끌어가는 능력도 탁월하고, 회복되는 즉시 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권한을 내려준다.

그러니 당장은 황제를 살려내는 게 정석이다. 이번엔 대신들이 직접 의뢰까지 해오기도 했고.

다만 황태자를 살리는 것도 나름의 메리트가 있단 말이지?

-클로드! 네 덕에 내가 그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났다! 세상에! 으허허허헝! 정말 고맙다! 정말 고마워! 무엇을 원하냐!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주마! 내 사랑하는 동생아!

만약 부활의 루트로 황태자를 살려 놓으면, 녀석은 감격해서 내게 간이고 쓸개고 전부 내어주는 상태가 된다.

여기에 황태자 아드릭스는 기사의 능력이 거의 만렙을 찍는 수준.

당연히 빨리 살려내면 살려낼수록 훗날 이계의 웨이브를 막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

반면 황제는 살려낸다 해도 전투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며, 심지어 그 상태로 3년쯤 지나면 기력이 떨어져 황제의 업무를 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 선택장애가 올 수밖에.

물론 대신들에게 미리 선금까지 받아 챙겼으니 당연히 황제를 살려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작정하고 '황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대신 황태자라면 살릴 수 있는데 어떻게 할래?' 라고 나서면 대신들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

"아무튼 다녀오는데 최소 한 달 쯤 걸릴 거야. 다비 너는 그동안 여기서 단원들을 잘 훈련시켜 줘."

"저야 여부가 있겠습니까만, 그동안 황자님의 체력단련은 어떻게 합니까?"

"별수 있어? 다녀오면 다시 열심히 할게. 그러니 한 달 휴가 준 셈 쳐."

"훈련 시작한 지 이제 하루 지났습니다. 그런데 한 달 휴가라니...."

다비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을 흐렸다. 그때 함께 데려온 디디가 어딘지 불안한 얼굴로 내게 질문했다.

"황자님? 그런데 저는 어째서 부르신 겁니까?"

"아, 별일 없으면 너도 같이 데려가려고."

"영원의 숲에 말씀입니까? 저는 그... 에이션트 울프의 사냥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족장 급은 물론이고, 에이션트 울프는 일반 구성원도 엄청 사납고 강하니까.

여기에 이놈들은 나와 같은 '은신'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

물론 나처럼 완벽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작정하고 숨으면 꽤 골치 아프단 말이지.

하지만 에이션트 울프는 내가 유일하게 존재를 파악하고 있는 '마수'다. 그러니 '마수 친화력'이라는 정체불명의 능력을 보유한 디디를 안 데려가고 배기겠어?

"음, 그럼 디디의 수련은 어떻게 합니까? 훈련 스케쥴은 물론이고 빠른 성장을 위한 식단까지 전부 만들어 놓았습니다만."

다비가 또다시 원망스런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미소와 함께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어쩌겠어. 수련은 한 달 후에 시작하자고."

"알겠습니다. 대신 돌아오시면 각오하셔야 합니다. 디디는 그렇다 치더라도, 황자님은 최소 한 달 동안은 훈련 시간을 두 배로 늘리겠습니다."

"두 배? 그럼 날 하루에 네 시간씩 굴리겠다고?"

다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표정만 봐도 타협이 불가능할거 같은데.... 과연 내 몸이 버텨주려나?

"저, 그, 아니, 그런데 황자님."

그런데 디디의 낌새가 아까부터 뭔가 수상한데? 나는 계속해서 움찔거리는 디디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왜? 뭐 궁금한 거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그 전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

"...."

디디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얜 또 갑자기 왜 이러나? 가뜩이나 말없이 무표정한 녀석이 이러니까 뭔가 불길하잖아?

"...저는 에이션트 울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 귀를 의심했다.

"뭐? 방금 뭐라고 했어?"

"황자님께서 사냥하러 간다 하신, 그 에이션트 울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

"너 혹시 영원의 숲 출신이야? 아니면 엘프랑 뭔가 관련 있어?"

"그건 아닙니다."

디디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한참동안 고민하다 말했다.

"에이션트 울프는 영원의 숲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여기도 있습니다."

"여기? 여기 어디? 설마 엠퍼로드를 말하는 거야?"

"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엠퍼로드에 에이션트 울프가 어디 있어!

아니, 에이션트 울프는 고사하고 제국 수도에 그냥 늑대라도 한 마리 있을 성 싶냐?

"디디야? 지금 뭔가 기억에 착오가 있는 거 같은데? 혹시 잠 자다 늑대가 나오는 꿈이라도 꿨니?"

"정확히는 엠퍼로드의 지하에 있는 하수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반 에이션트 울프가 아닌, 말씀하셨던 나이가 300살이 넘은 장로급 에이션트 울프입니다."

뭔가를 떨쳐낸 듯, 갑자기 차분해진 디디가 명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나는 놀란 눈을 껌뻑이며 그런 디디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표정을 보니 헛소리는 아닌 모양이다. 그럼 진짜 엠퍼로드의 하수도에 에이션트 울프가 살고 있는 거야? 그것도 장로급이?

"...디디야?"

"네. 황자님."

"자세히 좀 설명해 줄래?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고작 열두 살밖에 안 되는 너의 인생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다. 그러자 디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45화

15장 밑바닥에서

"저는 4년 전까지 가족이 있었습니다. 형제가 많았는데 먹을 것은 항상 부족했죠. 그래서 제대로 먹질 못했고, 결국 몸이 약해지다가 병에 걸렸습니다."

"4년 전? 그럼 여덟 살 때 이야기야?"

"확실하진 않습니다. 나이도 정확하지 않지만 밑바닥에서 지낸 시간도 정확하지 않아서요."

"밑바닥?"

"네. 밑바닥."

디디는 눈을 감으며 천천히 말했다.

"언젠가 병에 걸려 열이 심하게 났을 때, 누군가 한밤중에 저를 안아 들고 어딘가로 몰래 데려가 버렸습니다."

"자그라 말이지? 제국 최대의 슬럼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너 자그라 출신이라며?"

"원래 살던 곳도 자그라입니다. 제가 버려진 곳은 하수도였습니다."

"쿨럭!"

순간 옆에 있던 다비가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시작했다. 이거 이야기가 엄청 무거워지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네 부모가 널 하수도에 버렸다고?"

"네. 빗물이 모여 하수도로 흘러가는 구멍에 집어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침묵이 이어졌다. 이건 대체 뭐라고 반응해야 하지? 어떻게든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 줘야 하나?

"그래도 어떻게든.... 죽진 않아서 다행이네."

"별일 없었으면 분명 죽었을 겁니다. 하수도로 굴러 떨어지는 와중에 뼈도 부러지고 상처도 심하게 났으니까요. 처음부터 병에 걸려 있기도 했고."

"...."

"하수도 밑바닥에 떨어진 뒤에 더러운 물에 휩쓸려 계속 어딘가로 떠내려갔습니다. 반쯤 기절한 상태였는데, 누군가 절 건져내는 것 까지만 기억하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하수도에서? 누가?"

"나중에 눈을 뜨니 커다란 늑대가 절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설마 아까 말한 에이션트 울프?"

디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겨우 감이 오는구만.

근데 그게 왜 하수도에 있는데? 에이션트 울프는 영원의 숲에 사는 마수 아니었나?

"분명 절 잡아먹으려 건져냈다고 생각 했습니다. 르갈도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르갈?"

"늑대의 이름이 르갈입니다."

"네가 지어 준거야?"

"자기가 직접 말했습니다. 처음엔 커다란 늑대라고 생각했는데, 르갈이 에이션트 울프라는 특수한 종족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습니다."

아니 잠깐, 그게 문제가 아니라.

에이션트 울프가 말도 할 줄 안다고?

예전에 내가 사냥할 때는 무슨 지옥의 악마처럼 울부짖기만 했는데?

"...그래서?"

"먹을 거라 생각해서 건져놓고 보니 살아 있는 인간이었고, 인간 치고는 느낌이 좋은 편이라 일단 살려 놨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계속 핥았다고 합니다. 에이션트 울프의 침과 혀에는 상처를 소독하고 회복시키는 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들.... 서로 죽어가는 동료를 열심히 핥아줬었지.

지금 생각하니 뭔가 몹쓸 짓을 한거 같구만. 실제로도 몹쓸 짓을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제 몸에 쌓인 독이 너무 많아 특별한 걸 먹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고 하더군요."

-사정이 있어 하수도에 자리를 잡았지만, 본래 에이션트 울프는 무리를 지어 사는 종족이다.

-무리에서 오래 떨어졌더니 아무와도 관계를 가질 수 없어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나와 대화를 해 주었으면 한다.

-아무 이야기라도 상관없다. 위쪽에 있는 인간들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너는 어쩌다 여기까지 떨어졌고? 네 이름은 뭐지?

"그래서 처음에는 제 이야기를 했고, 나중에는 르갈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습니다. 자신은 멀리 북쪽에 있는 영원의 숲에 살던 에이션트 울프였는데, 하필 쌍둥이로 태어난 바람에 결국 부족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쌍둥이? 그게 왜?"

"전대 족장의 자식이라, 다음 족장 자리를 놓고 형제와 싸우기 싫었다고 합니다."

"권력 다툼? 그렇다고 하필 왜 하수도인데? 전에 살던 숲이랑 환경이 너무 다르잖아?"

"저도 같은 질문을 했는데, 냄새를 감추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디디는 마치 늑대처럼 킁!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들이마셨다.

"에이션트 울프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서로의 냄새를 감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냄새를 감추려면 그 이상으로 지독한 냄새가 나는 곳에 몸을 숨겨야 한다 말했습니다."

"냄새...."

"대륙에서 가장 냄새가 심한 곳이 두 군데 있는데, 한쪽은 자신이 들어 갈 수 없는 곳이라 다른 쪽인 엠퍼로드의 하수도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것 참, 안타까운 이야기구만.

반면 이야기를 늘어놓는 디디의 얼굴은 생기가 가득했다. 아무래도 그 늑대와 사이가 매우 가까운 모양인데....

근데 이를 어쩌나?

다음 루트를 진행하려면 바로 그 에이션트 울프들을 대량으로 학살해야 하는데?

"그 뒤로 저는 하수도에 몇 년 동안 살며 르갈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동안 르갈이 저를 키워줬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까 4년 전이라 그랬지. 그럼 4년 동안 계속 하수도에만 있던 거야?"

"네."

"먹을 건 어떻게 하고?"

"엠퍼로드의 하수도는 규모가 방대합니다. 개중에는 고유의 생태계가 만들어진 곳도 있습니다."

"생태계?"

"이끼나 버섯도 자라고, 여러 동물도 서식합니다. 그중에 제가 먹을 수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봤자 하수돈데? 먹고 탈나는 거 아냐?"

"르갈은 제가 먹을 수 있는 건 모두 제게 주고, 먹을 수 없는 것만 자신이 먹었습니다. 주로 위에서 내려오는 썩은 음식들이었습니다만, 르갈은 독에 완전히 면역되어 있어 그런 것들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맞아. 그런 능력이 있으니 폐하의 독도 빨아들일 수 있을 텐데...."

"황자님, 말씀하신대로 꼭 사냥을 통해 에이션트 울프를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디디는 진지한 얼굴로 기사의 차렷 자세를 흉내냈다.

"제가 부탁 하면, 분명 르갈이 코어를 내줄 겁니다."

"코어?"

"르갈이 말했습니다. 자신처럼 오래 산 에이션트 울프는 몸속에 특별한 물질을 만들 수 있는데, 그것으로 모든 종류의 독을 제거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뭐?"

"그것이 바로 코어이며, 제가 처음 하수도에 빠졌을 때도 코어를 억지로 먹여 몸에 쌓인 독을 제거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의 독도 그걸로 치료할 수 있을 거다?"

"그렇습니다. 르갈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래서 황자님께서 르갈과 같은 종족인 에이션트 울프를 사냥하는 일은 부디 벌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감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는 털썩 주저앉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나는, 이 놀라운 이야기에 주먹을 살짝 감아쥐었다.

뭔데 이거!

사연이 있는 에이션트 울프 한마리가 엠퍼로드의 하수도에 숨어 살고 있다고?

심지어 죽이지 않고도 황제나 황태자의 독을 해독할 물질을 챙길 수 있었어?

이거 완전 새로운 루트잖아!

엠퍼로드 하수도 루트라니.

그동안 아홉 번이나 회귀를 반복했는데, 설마 엠퍼로드의 지하에 이런 비밀이 숨어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래도 너무 들뜬 것 처럼 보이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후우...."

나는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는 시늉을 했다.

어찌나 신선한 이야기인지, 당장이라도 하수도로 달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전에 대신전 지하에서 리치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감동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 듯 차분한 목소리로 디디에게 말했다.

"좋아. 영원의 숲에서 에이션트 울프를 사냥하는 건 나중으로 미룰게."

"감사합니다. 황자님. 그런데 나중으로 미룬다는 건...."

"하수도에서 일이 잘 안 풀릴 수도 있잖아? 그 코어란 걸로 황제 폐하를 고치면 그때 가서 계획을 완전히 취소할게."

"황제 폐하는 분명 회복하실 겁니다. 그럼 당장이라도 하수도에 다녀오겠습니다."

디디는 비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근데 나도 같이 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 혼자 내려가서 코어만 받아와도 충분합니다."

"내가 직접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 같이 가자."

이건 억지를 부려서라도 반드시 꼭 가야 한다. 디디는 난감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 * *

아 망할.

내가 왜 여길 들어오겠다고 했을까?

빈민가인 자그라에 도착했을 때 부터 냄새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다 어느 뒷골목에 있는 하수도 통로에 들어선 순간, 상식을 초월하는 악취가 눈과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나 이런 거 처음 알았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횃불을 들고 앞서 걷던 디디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은 채 웅얼거렸다.

"냄새가 끔찍하면 코 말고 눈도 썩는다는 거. 숨 쉬는 건 고사하고 앞이 제대로 안보일 정도야."

"여긴 황자님처럼 귀한 분이 오실만한 곳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게 어떻습니까? 저 혼자 다녀와도 충분합니다."

"그래. 지금이라도.... 아니, 괜찮아. 끝까지 가보자."

어우, 이젠 막 본능이 이성을 뚫고 제멋대로 반응하는구만. 그래도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지.

우리가 걷는 곳은 하수가 흐르는 물길 옆의 보도였다. 입구에서 사다리로 한참을 내려왔으니 꽤나 깊은 지하겠지.

엠퍼로드는 약 300년 전에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다. 그렇다고 이렇게 하수도까지 완벽하게 정비해 놨을 줄은 몰랐지만.

"냄새는 끔찍한데.... 수량을 보면 근처 강에서 지류를 뽑아 쓰는 건가?"

"지금은 수량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비가 오면 하수도 상류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내려옵니다. 지금 저희가 걷고 있는 여기까지 수위가 올라옵니다."

디디는 자신의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악취로 인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 일단 하수도 밖으로 도망치나?"

"하수도 안에 물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지금 저희가 가는 곳도 그런 곳 중 하나입니다."

"에이션트 울프가 거기 있어?"

"그곳에 자주 있습니다."

"만약 거기 없으면?"

"그럼 다음으로 자주 이용하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한 시간 정도 더 걸어야 합니다."

"제발 가까운데 있어라. 제발."

들숨이 깊어질까 봐 한숨조차 길게 내쉴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디디가 전에 냄새에 관해서 뭔가 이야기를 했던 거 같은데....

"맞아. 전에 오우거 마을 갔을 때 거기보다 냄새가 더 끔찍한 곳에 살았었다고 했었지?"

"네. 그게 바로 이곳입니다."

디디는 냄새에 익숙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쩌면 얘가 가진 최고의 재능은 다른 게 아니라 악취에 대한 내성이 아닐까?

그게 아니면 이미 후각이 마비되었다던가?

후....

아무튼 냄새도 그렇지만, 공간 자체가 지독하게 불쾌하다.

횃불에 비친 벽면은 정체불명의 점액이 잔뜩 끼어 있고, 수로에 흐르는 하수는 출렁일 때 마다 걸쭉한 점성이 느껴진다.

"뭔가 이상한데...."

"방금 무언가 말씀하셨습니까?"

"응? 아니. 이런 곳에서 잘도 4년을 버텼구나 해서."

이곳은 누가 뭐래도 인간이 오래 살 만한 곳이 못된다. 디디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여기서 보낸 시간만 따지면 3년 정도입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차츰 적응했습니다. 르갈과 대화를 하는 것도 즐거웠고요. 그렇게 3년쯤 지났을 때 르갈이 말했습니다. 그만 위로 올라가는 게 어떠냐고."

"그 녀석이 먼저 제안한 거야?"

"네. 제 덕분에 외로움은 가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들 사이에서 사는 게 좋다고 하며 올라가라 했습니다."

거 참, 늑대 주제에 마음 씀씀이가 깊기도 하구만.

"저는 여기 계속 있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이제 와서 위로 올라간다고 옛 가족에게 돌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달리 먹고 살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르갈은...."

디디가 말을 흐리며 걸음을 멈췄다. 나도 함께 따라 멈추며 되물었다.

"르갈이 뭐?"

"...동물을 기르거나 관리하는 일이라면 분명 잘할 거라 말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위로 올라갔을 때 마구간 청소 같은 일자리를 알아봤는데, 그러다 연이 닿아 제국 사관학교의 마구간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적성에 맞았나 봐?"

"말들이 저를 잘 따랐습니다. 목표도 있었고요. 어떻게든 돈을 모아 르갈에게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게 목표였어? 다시 여기 내려와서 늑대 먹이주기?"

"네. 처음 올라갔을 때도 가끔 얼굴 보러 내려올 거라 말했고, 실제로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왔구만.

디디는 작은 몸이 짓눌릴 만큼 커다란 등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안에는 막 시장에서 사온 신선한 고기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끄덕거리는 디디의 얼굴이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네?

"왜 그래? 뭐 문제 있어? 걸음도 멈추고."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갑자기 모르는 길이 나왔습니다. 이쪽에 이런 건 없었습니다."

디디는 멈춰선 곳의 왼편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여기 뭔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네?

"이게 뭔데?"

화륵!

구멍 속에 작은 불덩이를 집어 던지자, 지름이 5미터쯤 되는 원형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디디는 통로 안으로 고개를 넣으면 한참동안 좌우를 살폈다.

"석 달 전에 마지막으로 왔을 땐 이런 통로가 없었습니다. 제가 길을 잘못 든 게 아니라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드드드드....

통로 안쪽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디디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쪽은 방금 소리가 무엇인지 매우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 잊을 리가 없지.

설사 지옥에서도 잊을 수 없는 저 소리.

무수한 제국군을 털어버린 이계의 악몽 중 하나.

"디디야?"

"네. 황자님."

"당장 뒤로 물러서. 이 굴을 뚫은 녀석은 아마도...."

드드드드!

"괴물이야."

데스웜.

지금으로부터 9년 뒤, 이계의 침공이 시작되면 알게 될 이름을 차마 여기서 꺼낼 수는 없는 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