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메리카 공화국.
애틀랜타에 위치한 제약 업체 화이백.
CEO 프레드 밀러는 비서실을 통해 올라온 월매출 보고서를 읽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숫자와 그래프가 매우 인상적이야."
"앞으로 더 늘어날 겁니다. 드링크제 판매 호조로 다른 약들의 판매 역시 덩달아 상승하고 있습니다."
"좋아! 이 기회에 공장 증축해서 매출 더 올려보자고."
"네!"
드링크제, 바이탈 주스(vital juice)의 누적 매출액이 무려 2억 달러가 넘었다.
시판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저 먼바다 건너 삼한 제국이란 나라에서 인기리에 팔리는 생기불끈, 그걸 그대로 카피한 피로회복 드링크제였다.
태홍 바이오 제약회사.
프레드 밀러는 예전부터 이 회사를 주목하고 있었다.
변종 3줄 무늬 모기독 해독제, 포자 독 낙타 고라니 해독제, 그리고 마나와 내상을 치유해 주는 태홍 회복제.
구례에서만 판매되는 약을 입수해서 분석에 들어갔다.
하지만 될 리가 있나?
줄줄이 실패.
김태주가 개발한 약들은 도저히 복제할 수 없는 약이었다.
태홍 바이오가 약의 특허 신청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프레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호시탐탐 약의 비밀을 캐기 위해 산업 스파이들을 대거 삼한 제국으로 보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태홍 바이오의 뉴서울 진출, 신약을 출시하려고 특허청과 식약청에 심사 신청을 한 것.
신약이라.
과연 어떤 효능의 약일까?
공장에서 약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신약의 정체는 피로 회복제와 외상 치료제.
입수해서 먹어봤다.
당연히 신약들의 엄청난 효과를 몸으로 체험했고.
프레드는 미칠 것 같았다.
적합자든, 각성자든, 일반인이든, 그 누구에게도 적용되는 피로회복, 또한 외상과 흉터마저도 감쪽같이 복원해주는 외상 치료제.
이게 만약 카피가 된다면?
끝내주는 거지.
다른 약 다 제쳐두고 이것들만 팔아도 된다.
성분 분석에 들어갔다.
그리고 카피에 성공했다.
완전히 성공한 건 아니다.
원래 약효의 80% 정도?
삼한 제국에서 자생하는 토종 약초들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대체재를 찾아내긴 했지만.
계속 연구하면 90% 이상까지 끌어올릴 수 있겠지.
필요한 재료를 확보하고 대량 생산 준비에 들어갔다.
그 기간동안 태홍 바이오는 특허와 식약청 심사를 통과해서 판매를 시작했고.
화이백에서도 바이탈 주스라는 이름으로 피로회복 드링크제를 출시했다.
외상 연고도 마찬가지.
이것도 일반인을 비롯해 각성자와 적합자들에 두루두루 적용되는 신약.
출시하자마자 히트쳤다.
대성공이었다.
아메리카 공화국의 건강음료 시장과 외상 치료제 시장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그리고 유럽 제국으로 진출.
바다를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해 비행기로 수출했다.
가격이 비싸지긴 했지만 불티나게 팔렸다.
물론 허락받지 않은 약품의 무단 카피는 불법.
어쩌라고?
여긴 아메리카 공화국인데.
이미 특허와 FDA 승인까지 마쳤다.
"태홍 바이오 쪽에선 아직 움직임이 없지?"
"아마도 인지하지 못한 듯합니다. 내수 판매만 해도 힘에 부쳐서 해외수출은 생각도 못 하는 상황이고요."
"설령 안다고 해도 상관없어. 끝난 사항이니까."
항의가 들어오던, 국가적 외교 문제로 비화 되든, 전혀 무섭지 않다.
달마다 정치권에 들어가는 로비 자금이 얼만데?
여긴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다.
프레드는 힘도 있고 돈도 있었다.
※ ※ ※
태주는 천경호를 처리하고 바로 구례로 돌아왔다.
천마를 잡으러 간 프리 바르셀에서 뜬금없이 생기불끈의 카피약이 발견됐다.
그것도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만든 드링크제.
즉시 회사 본사로 들어가서.
"어머? 회장님!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일이 생각보다 잘 끝나서···, 이것 좀 보세요."
"응? 무슨?"
태주는 백서연에게 가지고 온 드링크를 꺼내 보여줬다.
"응? 드링크제, 우리 회사 제품은 아닌데."
"마셔보세요."
꿀꺽.
백서연은 드링크제를 마셨다.
잠시 후 몸에서 일어난 변화.
"아! ···이거 설마?"
"그래요. 생기불끈."
"카, 카피 약인가요? 아니면 우연? 이걸 대체 어디서?"
원산지를 확인해보니.
"아메리카 공화국 화이백 제약회사네요."
"성분 분석이 필요합니다. 생기불끈과 동일한 성분이 맞는지."
"미친!"
병을 들고 벌떡 일어나는 백서연.
"당장 조사해보겠습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조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결과가 금방 나왔다.
"결론적으로 카피약이 맞아요. 몇몇은 약효가 떨어지는 재료가 있지만 주성분은 정확하게 일치해요."
"하···,"
화이백이라는 제약회사에서 만든 바이탈 주스.
나중에 알아보니 생기불끈뿐만 아니라 새살쑥쑥과 효능이 비슷한 외상 치료제도 판매되고 있단다.
뻔뻔하게 아메리카 공화국 특허까지 받은 채로.
구례에서 파는 약과는 다르게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은 뉴서울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혼원무상독령공, 혹은 오행신공의 기운이 들어가 있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카피가 가능하고.
그래서 특허청과 식약청에 심사를 받았다.
그런데 아메리카 공화국이라니.
"어떡하죠?"
작정하고 카피했음이 분명하다.
그로써 발생할 문제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먼저 공식적으로 항의를 해보고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지금 시점에서 세계 각국 간의 무역은 활발한 편이 아니다.
해양 마수들로 인해 바닷길이 끊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품의 수출과 수입은 비교적 안전한 육로와 항공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삼한 제국과 유럽 제국이 양방향에서 시베리아를 개척하고 있는 이유도 이것과 맞닿아있다.
시베리아 지역은 마수들로 넘쳐난다.
곳곳이 마수 밀집지대이다.
그곳을 토벌하면 끊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복원할 수 있다.
거의 90%의 진행 속도를 보여주고 있다.
몇 군데 구간만 토벌하면 유럽과 삼한 제국 사이의 기찻길이 열린다.
1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그런데 뜬금없이 카피약이 먼저 유럽으로 진출하다니.
'절대 그냥 못 넘어가지.'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
그냥 내버려 두면 선례를 남길 수도 있다.
베끼니까 되네? 나도 해야지.
"먼저 합법적으로 해결해봅시다."
"어떻게?"
"국제법이라는 게 있잖아요."
"···될까요? 300년 전에 있었다던 WTO 같은 국제기구도 존재하지 않는 판에."
태주의 생각도 그렇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건 일종의 명분 쌓기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따라서 물리적인 방법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사실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는 하다.
"회장님, 합법적인 방법은 제가 맡아서 해볼게요. 백두 그룹과 함께."
"네, 하지만 정부 쪽 도움도 필요할 겁니다."
"외교부와 접촉해볼까요?"
"아뇨, 보다 빠른 길이 있어요."
태주는 백서연에게 금수호 비서관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아! 금비서관님."
"잘 도와줄 겁니다."
황제에게 직통으로 보고가 올라갈 터.
"당분간 저 실험실에 있을 테니까, 알고 계시고요."
"넵!"
일단은 백홍표와의 약속이 먼저다.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만들어야 할 때.
이번 일로 얻은 교훈이 있다.
해독제나 회복제처럼 복제 불가능한 약을 만들어야 한다.
카피는 엄두도 못 내게 말이다.
※ ※ ※
천계(天界).
다른 말로 대라천이라 부른다.
상제가 기거하는 처소는 자미궁.
오늘은 각각의 계를 대표하는 존재들이 모여 대회합을 여시는 날, 그래서 신장(神將)과 천인, 천녀, 선녀들은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었다.
"다 오셨나?"
"아닙니다. 두 분께서 아직···,"
"누구시냐?"
"도화궁의 서왕모와 선계의 태상노군이십니다."
"흐음, 이상하구나. 제일 일찍 오시는 분들이었는데."
그때였다.
자미궁으로 화려한 꽃가마가 들어오고 있었다.
4명의 여우 요괴들이 인간으로 변신해 짊어지고 오는 꽃가마.
"서왕모께서 행차하신다. 모두 예를 갖춰라."
꽃가마가 자미궁 앞에서 멈췄다.
예의를 갖추는 신장들과 선녀들.
두 명이 여인이 먼저 내렸다.
월궁 선자와 미호 선자였다.
'응?'
'무슨?'
'···어.'
그녀들의 옷차림이 특이했다.
몸에 달라붙어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상의에, 무릎 위를 살짝 가린 짧은 치마, 다리 맨살엔 검정색 모시처럼 생긴 반투명한 옷감을 입고서.
'마, 망측해라.'
'눈을 둘 데가 없군.'
'허허, 미호 선자야 여우니까 그렇다 쳐도, 그 조신한 월궁 선자마저.'
신발은 또 어떻고?
뾰족한 앞굽에 작대기를 끼웠는지 높게 올린 뒷굽까지.
저러면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까?
그리고 서왕모가 가마에서 내렸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왕모도?'
대체 선자와 서왕모가 입은 옷은 어디서 난거지?
선계, 천계, 황천계를 통틀어 여성들은 죄다 하늘하늘한 선녀복을 입고 다니는데.
서왕모의 옷도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옷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품이 있었다.
어떻게 저리 잘 어울리지?
"들어가자꾸나."
"네!"
"보필하겠나이다."
서왕모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한껏 즐겼다.
'촌것들.'
인간의 시간으로 가늠해볼 때, 최소 천년에서, 많게는 수천 년을 살아온 천계의 주민들이다.
그들도 이런 옷을 구경이나 해봤을까?
하늘색 엘메스 원피스에, 팔에는 엘메스 가방, 티파니 목걸이와 귀걸이, 신발은 지미츄우 구두, 스타킹도···.
서왕모 일행이 자미궁 옥석길을 걸어간다.
또각! 또각! 또각!
뒤태가 늘씬하다.
'서왕모가 저렇게 키가 컸나?'
'종아리도 얇아 보여.'
'으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천계의 천인, 신장, 선녀들도
용왕을 따라온 용궁의 신하들도.
염라와 함께 온 황천계의 차사와 사자들도.
그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여자들은 더 했다.
바로 그때!
"까악! 까아악!"
때마침 선학이 저 하늘에서 날아왔다.
"···태상노군도 오시는군."
선학이 착륙했다.
태상노군이 내렸다.
"모두 예를 갖춰···, 헉!"
그들이 알고 있던 태상노군의 모습이 아니다.
뚜벅뚜벅.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태상노군,
명품 수트에 구두, 머리는 짧게 잘라 왁스로 깔끔하게 정돈하고, 얼굴엔 선글라스, 손엔 맨스 클러치백을 들고서 말이다.
'···.'
'허어.'
'세, 세상에!'
대체 선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 결국 베꼈네.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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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나 거부증 치료제(1) >
천계(天界) 자미궁의 대전.
둥글게 원을 그리며 넓게 띄워진 의자마다 앉아있는 사람들.
상제와 여래, 염라와 용왕, 서왕모와 태상노군이었다.
각자의 표정들이 오묘하다.
눈을 반쯤 뜨며 명상하는 여래.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만 쉬어대는 상제.
긴 곰방대로 뻐끔뻐끔 연초를 피워대는 염라.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서왕모와 태상노군을 노려보는 용왕.
이미 긴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하지만 전혀 진전이 없는 토론.
사실 토론이라기보다는 선계의 잘못을 지적하는 성토장이나 다름없었다.
지친 표정의 태상노군이 말했다.
"이거 원, 옷 한번 다르게 입었다고 죄인 신세가 됐군."
푸념 섞인 노군의 말에 터져 나오는 불평과 불만들.
"우리가 옷 하나 가지고 그러는 건가? 지금 상위 계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네."
"언제부터 신선들이 세속적 물욕에 그리 집착했나?"
"쯧쯧, 청담의 도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야. 선계의 혼란을 마냥 좌시할 수 없는 노릇···,"
다리를 꼰 채, 손을 들어 올리는 태상노군,
"아아! 이제 그만 합시다."
그러고는 클러치 백에서 빨간색 종이 곽을 꺼냈다.
"···그건 또 뭐요?"
"연초, 말도 안 통하고 답답해서 한 대 피워야겠소."
연초라는 말에 호기심을 보이는 염라.
"무슨 연초가 저렇게 생겼나? 그리고 그 종이 곽 위에 시커먼 그림은? 인간의 폐 아닌가?"
"계속 피우면 폐가 이렇게 된다는 뜻이지. 뭐, 필터도 없는 곰방대보다는 낫소."
태상노군은 담뱃갑의 비닐을 벗기고는 한 개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어느새 꺼낸 반짝반짝 빛나는 금속 물체.
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고.
칙!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 그것도 다른 세상에서 온 물건인가?"
"듀퐁 라이터···, 쯧, 자꾸 물어보지 마시오. 대답하기도 짜증 나오. 물욕이니 뭐니 하면서 실컷 욕이나 해대 놓고서는."
"···."
듀퐁 라이터로 불을 붙이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자, 소매에서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는 손목시계.
다리를 꼬며,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고.
이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독선과의 특훈을 통해 익힌 동작이었다.
한입 깊숙이 빨아대니,
파스스스스,
새빨간 담뱃불이 자미궁 대전 안에서 빛났다.
"후우!"
입에서 뿜어지는 하얀색 연기.
태상노군은 불붙은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모두가 말이 없었다.
다들 멍한 표정으로 태상노군이 펼치는 퍼포먼스를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을 뿐.
수컷들의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유는 모르지만 다들 그랬다.
반면 서왕모는 같잖다는 듯 조소를 머금으며.
"나도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겠네요. 당신들이 우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았으니까."
용왕이 서왕모를 보면서 아니꼽다는 어투로 쏘아붙였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러오? 대체 언제까지 신선들과 놀아나면서 상위 계의 질서를 망가뜨릴 작정이오?"
"말은 바로 하세요. 혼돈이 아닌 조화라고 이미 판정이 났잖아요."
"하! 염라가 만든 저울추? 그깟 기물 하나로 그렇게 쉽게?"
발끈하는 염라.
"용왕, 말조심하시오. 그깟 기물이라니, 천지의 이치에 따라 제작한 보패를!"
"바로 그게 문제지. 당신의 저울추 때문에 선계가 저 모양 저 꼴로···,"
"그건 용왕의 말이 맞소. 그 보패가 얼마나 오래됐나? 탈이 났는지, 멀쩡한지 검증을 해 볼 필요가 있소이다."
"이, 이런! 어디서 감히 그런 망발을!"
순간!
"닥치세요들!"
서왕모는 분노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그대들이 우릴 어떻게 보는지 상관없어요. 내가 여기 온 것은 통보를 하기 위함이에요."
상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통보라니?"
"앞으로 천계, 여래계, 황천계, 용궁으로 들어가는 선도(仙桃)는 더 이상 없을 거예요."
"···뭐?"
"귀가 먹었나요? 선도를 공급하지 않겠다는 말이죠. 천도 또한 꿈도 꾸지 말아요."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선도와 천도에 대한 모든 권한은 오롯이 서왕모가 가지고 있다.
또 도원은 선계에 있다.
그곳이 복숭아가 가장 잘 자라는 곳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맥과 선맥의 기운을 받고 자라는 상위 계의 보물 천도도.
"여분의 선도는 신선들에게 돌아갈 예정이에요. 하루 하나씩."
"허어, 어처구니가 없군."
태상노군도 거들었다.
"대체 뭐가 불만이신가? 우리 신선들을 하루에 하나씩 선도를 받으면 안 된다?"
"허허, 정녕 제정신이요? 신선들에게 무턱대고 선기를 퍼 먹여주면 천지의 질서가···,"
"그놈의 질서, 질서! 입 밖에도 내지 말라! 우리 선인들이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더냐?"
"···."
모두가 묵묵부답이었다.
태상노군이 변했다.
그도 한 달에 한 번 선도 지급에 동의했는데 인제 와서 딴소리라니.
게다가 서왕모도 한통속이 되었다.
상위 계의 협정이 깨어지는 순간.
서왕모는 벌떡 일어났다.
태상노군도 꼰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갑시다."
"노군,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요?"
"지금 나가면 될 거요. 독선이 감사하게도 세일 시간을 조금 늦춰줘서, 하지만 빠듯하오. 서두릅시다."
그러자,
"자, 잠깐!"
제지하는 상제.
"그렇다면 천계도 인간계로 통하는 문을 닫겠네. 앞으로 신선들이 인간계로 강림하지 못할 거야. 서왕모 그대도."
"그러시던지."
"···진심인가? 진짜 인간계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선계가 더 재밌거든. 강호의 인간계보다 훨씬! 궁금하면 놀러 와도 막지는 않겠소."
휘적휘적,
뒤로 돌아보지 않고, 태상노군과 서왕모는 함께 자미궁을 나섰다.
※ ※ ※
백서연은 바로 금수호 비서관에게 생기불끈 카피약 사태에 대해 알렸다.
그리고 금수호는 황제에게 즉각 보고했고.
"이런 망할 새끼들이!"
듣자마자 분노하는 황제.
감히 삼한 제국의 특허 약물을 마음대로 베껴?
"어떻게 할까요?"
"아메리카 공화국 대사관에 연락을 넣어. 백악관으로 들어가 항의하라고 해!"
"수위는요?"
"강하게! 카피한 제약 회사에게 생산 중지 명령부터 시행하라고."
"손해 배상 요구는?"
"당연하지. 그냥 넘어가면 우리도 보복하겠다 통보해."
300년 전과는 달리 아메리카의 영광은 사라졌다.
과거 미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태평양은 해양 마수의 소굴이 됐다.
미국이 자랑했던 항모 전대와 전투기는 운용이 불가능해졌다.
핵무기?
있으면 뭘 하나?
핵은 상호 확증 파괴의 전략 무기다.
삼한 제국도 미국 본토까지 핵을 실어나를 초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아메리카 공화국은 여전히 강국.
멕시코와 캐나다 영토까지 집어삼킨 광대한 공화국.
인구도 많다.
사실 국가의 힘은 바로 인구에서 나온다.
그래서 내수 경제도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하지만 여전히 국가 간 무역 거래는 이루어지고 있다.
항공과 육로를 통해서 말이다.
또한 마수 밀집지대가 토벌됨에 따라 점점 무역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
그런 이유로 저작권과 특허권을 무시하고 타국의 상품을 무단으로 도용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지됐다.
저작권과 특허권은 국가의 고유 재산이다.
그것을 무시하면 무조건 갈등이 생긴다.
또한 갈등이 심화되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마나의 침범과 마수 때문에 지구가 거의 망할 뻔했는데, 다시 인간들끼리 전쟁을 벌이자고?
비록 UN이나 WTO 같은 국제기구는 없지만, 국가끼리 수교를 맺었다.
아메리카 공화국엔 삼한 제국의 대사관이 있었고, 삼한 제국에도 아메리카 공화국의 대사관이 있다.
삼한과 아메리카는 우방국.
요구가 받아들여질 줄 알았다.
아메리카 공화국 대통령 빌리 피트먼은 삼한 제국 황제의 요구를 절대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대사 말로는 빌리, 그 새끼 반응이 뜨뜻미지근 하다고 합니다."
"뭐?"
"확답도 없고, 어영부영 넘어가려는 눈치라던데요.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의도 같습니다."
이 새끼들 봐라?
지금 막 나가자는 거 맞지?
황제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직접 통화해야겠군. 핫라인 연결해."
※ ※ ※
아메리카 공화국 대통령 빌리 피트먼은 삼한 제국 황제에게 걸려온 전화를 끝내고 피곤한 기색으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욕을 한 바가지 들었으니 오래는 살겠다.
백악관 비서에게 질문하는 빌리 피트먼.
"조사 결과가 나왔나?"
"네, 태홍 바이오 제품과 화이백 제품의 성분이 완전히 일치합니다. 다만 배합 문제인지, 재료 문제인지, 약효는 그보다 떨어지고요."
"제기랄! 어쩐지 세게 나오더라니."
상당히 곤란하게 됐다.
삼한 제국과는 우방국.
탁월한 마수 사냥 기술로 지금도 영토를 쭉쭉 넓히는 아시아 초강대국이다.
엘리트 마수 사냥에 대한 노하우도 교환하고, 항공기를 통해 생산품을 수출하고 수입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카피약 사태가 터져버렸다.
다시 자세한 상황을 물어보는 빌리 피트먼 대통령.
"화이백 프레드 밀러 입장은 어떤가?"
"자신들은 무고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자체적으로 개발한 신약이라고."
"자네 생각은?"
"말도 안 되죠. 연구 자료도 내놓지 않는 판에."
"이 뻔뻔한 새끼가!"
"지금 결정해야 합니다. 삼한 제국의 요구를 받아들일지, 화이백의 손을 들어줄지."
빌리 피트먼 대통령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프레드, 그놈이 뿌리는 정치자금이 얼마지?"
"공식적으로요, 비공식적으로요?"
"합쳐서."
"올해만 3천만 달러입니다."
상당히 큰 액수다.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바이탈 주스에 대한 경제적 가치는 어떤가?"
"수익과 일자리 창출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일단 약으로 인해 국민들의 삶의 질이 달라졌습니다. 저도 하루에 2병씩 꼭 챙겨 먹고 있을 정도니까요."
카피약이 그 정도라면 진짜는 대체?
빌리 피트먼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계속 시간을 끌어. 당장 판매 중지를 내리면 난리가 날 테니까."
국민들이 반발할 것이다.
이미 약의 효과에 길들어졌을 테니까.
지지율 폭락이 눈에 선하다.
과거 미국이 그랬든, 아메리카 공화국의 국가 정책 기조 또한 철저한 국익 우선,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자잘한 불법 따윈 눈감아 줄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빌리 피트먼의 가장 큰 고민은 따로 있었다.
국가적 차원이 아닌 오로지 개인적 차원.
회의를 끝내자마자 빌리 피트먼은 자신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지금 병원이요?"
- 그래요. 레이첼과 같이 있어요.
"의사는 만나봤소?"
- ···방금 이야기 나누고 병실로 왔어요.
아내의 목소리가 침울했다.
"어, 얼마나 남았다는데?"
- 길어야 3개월이라고···.
"후우, 알았소. 이따 나도 시간 내어 들러보지."
레이첼 피트먼.
빌리 피트먼 대통령의 사랑스러운 딸이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보물.
하지만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겨우 3개월이란다.
마나 거부증이라는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다.
병이라면 고쳐보겠지만 이건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는 천형이고 운명이다.
딸이 멀쩡해질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 수 있으련만.
어쩔 수 없다.
3개월 동안은 대통령이란 역할보다 아버지라는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 ※ ※
태주는 실험실로 들어가기 전 백화점부터 들렀다.
이번에도 백화점을 통째로 쇼핑.
백화점 측도 물건을 가득 채워놓았다.
"전처럼 창고로 배달요."
"매번 감사합니다!!!"
실험 도중에 신호가 오면 바로바로 보내야지.
공유 창고도 넓어졌으니.
태주는 개인 실험실 안으로 들어왔다.
혼자만 사용하는 장소지만 엄청나게 큰 공간.
중앙엔 정제수가 꽉 들어찬 대형 수조가 놓여있었다.
전체 인구의 5% 내외로 추산되는 마나 거부자.
40억 인구 중 2억에 가까운 숫자.
전 세계 곳곳에 있었다.
그중엔 이미 20대를 넘겨 증상이 심각해 침대에서만 생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0대를 넘지 않아 일상적인 활동 정도는 가능한 이들도 있다.
물론 현재 죽어가는 사람도 있겠지.
자신도 마나 거부자여서 안다.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지.
최대한 빨리 서둘러야 한다.
첫 번째 단계.
태주는 자신이 마나 거부자였을 때를 상상했다.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 기억해두고는.
'독정에서 변종 3줄 무늬 모기 독을 뽑아서,'
그러나 모기독 만으로는 부족하다.
혈관으로 흐르는 마나를 없애줄 수는 있지만 이미 세포에 스며든 마나는 없애주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의 세포까지 침투해서 중독시키는···,
'만년오공의 분해 독도 섞고.'
모기독과 만년오공의 독이 기본 베이스가 될 것이다.
거기에 지금까지 먹어왔던 수많은 독의 정수도.
혼원무상독령공 대성에 이르러 독에 대한 이해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하나 더 있다.
바로 선기(仙氣).
만물이 상생할 수 있게 하는 조화의 기운.
그리하여 더더욱 끈끈해진 독과 독의 융합.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이 결합하니 전혀 새로운 성질의 무언가로 탄생한다.
독이 가진 두 얼굴.
독(毒)의 다른 얼굴은 약(藥)이다.
남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태주의 독정도 양면의 성질을 가졌다.
독정(毒精)은 약정(藥精)이라 불리어도 무방하다.
'일단 한 방울.'
태주의 손가락 끝에서 새파란 독기의 정수 한 방울이 이슬처럼 응결하고 있었다.
똑!
정제수 수조에 떨어지는 독의 정수.
수조에 손을 대어,
우우우웅!
진동시켜 골고루 섞은 후.
스푼으로 떠서 맛을 봤다.
'···너무 강해.'
독의 배합도 어정쩡하다.
생각했던 결과물이 아니다.
다시 수조에 손을 대, 독기를 회수하고.
독성을 줄여보자.
인체 실험이 가능할 정도로만.
그리고 배합도 새롭게 해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반드시 만들어낸다.
마나 거부증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해주고 말 것이다.
< 마나 거부증 치료제(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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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나 거부증 치료제(2) >
백홍표는 태홍 고아원 양호실에서 침대에 누운 남자아이의 땀을 수건으로 닦았다.
아이의 나이는 15세.
그러나 외견상 10살도 채 되어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이름은 우명진.
원래 태홍 고아원에 있던 아이는 아니다.
저 멀리 안동까지 가서 직접 데리고 온 아이.
그곳 보육원이 재정 문제로 문을 닫았다.
다른 고아원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할 운명에 놓인 원생 30여 명.
그들을 한꺼번에 구례로 데리고 온 것.
각각의 사연에 의해 이미 부모들과 한번 이별을 경험한 아이들이다.
그런데 또 서로 헤어져야 한다고?
백홍표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모두 거뒀다.
태홍 고아원 재정이야 튼튼하다 못해 흘러넘치니까.
공간이 좁으면 건물을 더 지으면 되고.
그런데 그중 한 명인 명진이가 마나 거부증이었다.
처음 볼 때부터 심하다 싶을 정도로 약한, 중학생인데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보다 더 못한 겉모습, 이 아이가 버려진 이유였다.
보약도 구해 먹이고, 고라니 사골곰탕도 푹 끓여서 입에다 떠먹여 줬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오래 버티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이젠 하루에 깨어있는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다.
'태주의 치료제 연구가 성공했으면 좋으련만.'
똑똑,
벌컥,
양호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태주.
"어떻게 왔나? 연구 중이라더니,"
"잠깐 시간을 냈어요. ···이 아이인가요?"
"맞아. 마나 거부증, 불치의 천형을 가지고 태어났어. 이름은 우명진이고, 나이는 15세."
"증세가 너무 많이 진행됐네요."
"하아, 최소한 스물은 넘길 줄 알았는데."
자신은 남들보다 오래 버텨 20대 후반까지 살아남았지만, 이 아이는 15살을 넘기지 못할 지경에 처해있었다.
태주는 우명진의 맥문을 손으로 짚었다.
맥이 약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위급한 상황.
'으음···,'
우명진이 신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눈이 부시는지 실눈을 뜨면서.
"며, 명진아!"
"···원장님."
"그래, 나다. 어서 정신 차리고 벌떡 일어나야지."
"···저 알아요. 아마 오늘을 모, 못 넘길걸요?"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그, 그냥··· 옆에서 소, 손이나 잡아주세요. 외롭지 않게."
"이놈아!!!"
"무서워요. 무서워서···,"
백홍표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우명진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태주는 아이 곁으로 다가갔다.
"네가 명진이니?"
"누, 누구세요?"
"김태주. 내 이름이야."
우명진이 힘없이 고개를 돌려 태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이제야 뵙네요."
"날 알아?"
"그, 그럼요. 마, 마나 거부자라면 모를 리가 없죠."
"그래?"
"제 롤모델이 회장님인데."
태주가 마나 거부자였다는 건 매우 잘 알려진 사실.
사실 마나 거부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간혹, 매우 희박한 확률로 천형을 극복하는 케이스도 있다.
심지어 각성까지도 가능하다.
그래서 마나 거부자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한다.
하지만 명진은 이미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
더는 버틸 여력이 없었다.
"흐흐흐, 주, 죽기 전에 회장님 얼굴 보고 가서 좋아요."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고쳐 줄 거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봐. 포기하지 말고."
"···제 마음 편하게 해주시려고 무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전 준비됐어요."
"진짠데?"
태주는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우명진의 눈앞에 흔들었다.
"이거, 뭔질 알아?"
"네?"
"마나 거부증을 억제하기 위해 내가 시험 중인 약."
"···어."
"먹어볼래? 하지만 각오는 해야 할 거야. 미완성이라 잘못될 수 있어."
우명진은 멍하니 있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태주는 그의 입으로 방금 만들어온 따끈따끈한 치료제를 흘려 넣었다.
잘못될지도 모른다고 겁을 줬지만 그렇게 되진 않을 것이다.
"기분이 어때?"
"아직 잘···, 윽!"
태주는 명진이의 맥문을 잡았다.
"어디가 아파?"
"시, 심장이, 심장이 찢어질 듯···,"
심장이라면 맹독 고로쇠나무 수액인가?
고로쇠 수액 독은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해 약효를 온몸으로 돌게끔 촉진한다.
'조금만 줄이자.'
혼원무상독령공으로 고로쇠 수액의 독기를 반쯤 흡수하고.
"괜찮니?"
"네, 조, 조금."
"다른 데는?"
"피부가 많이 근질거려요."
피부에 스며든 마나를 중화시키는 독이···,
'붉은 날개 땅벌 독.'
상피 세포를 파괴해 흐물흐물하게 만든다.
이것도 양을 줄이고.
"오줌은 마렵지 않아?"
"글쎄요. 그다지."
마려워야 정상이다.
신장과 방광에 고여 있는 마나를 오줌으로 배출시키는 역할을 하는 독 질경이.
'조금 더 집어넣자.'
그러자.
"어억! 오, 오줌이 너무 마려워요."
"싸."
"네?"
"기저귀 차고 있잖아. 원장님이 갈아주실 거야."
"···어음."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하고.
그러자.
"어때?"
"잘 모르겠지만···, 괜찮아진 느낌이 들어요."
"일어날 수 있겠어?"
"흐음, 그, 그건 아직."
나아지긴 했지만 많이 부족하다.
마나 침범 이후, 지구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약재에 일정 성분의 마나가 포함되어 있다.
당연히 태주가 만든 약에도.
"저 나은 건가요?"
"천만에! 이거 하나 먹었다고 완치될 리가."
"···아!"
"하지만 실망하지 마. 내가 있으니 최소한 죽진 않을 거야."
"그러면 정말 감사하죠. ···회장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아직 아니야."
태주는 백홍표에게 말했다.
"형님,"
"으응?"
"내일부터 다른 마나 거부증 환자들도 모두 한곳에 모아주세요."
"본격적으로 임상 들어갈 건가?"
"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아무튼 가능성은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다음날.
"명진이 상태가 어떻습니까."
"좋지 않네. 어제 하루는 괜찮아 보이더니, 오늘 다시···."
약 기운이 사라지니 예전 그대로 되돌아갔다.
일시적인 효과만 보였을 뿐.
"후우, 일단 어제보다 발전된 치료제 가지고 왔으니 먹여보죠."
증세가 영구적으로 나아져야 하는데.
약이 지속되는 시간만 괜찮아질 뿐.
그렇다고 평생을 먹일 수도 없는 노릇.
약이라고는 하나 본질은 독.
계속 장복하게 되면 다른 부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선기로도 안 되는 거였나?'
사실 선기는 충분히 제 역할을 했다.
그 수많은 독을 포용해서 조화를 이루게 만들어줬으니.
'뭔가 새로운 것이 있어야 해.'
그걸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태주는 절대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믿고 있는 환자들이 몇 명인데.
고아원에 중증 이상의 마나 거부자들이 모였다.
태주의 치료제 연구는 계속됐다.
거의 일주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말이다.
그사이에 한 번씩의 지구, 선계 간의 배송 신호가 떴다.
물론 커진 공유창고만큼 많은 양이 물건이 오고 갔고.
그러던 중 천천히 퍼져나가는 소문.
내용은 바로, '태홍 바이오 제약 김태주 회장이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연구하려고 한다.'
입에서 입으로,
혹은 인터넷과 SNS로,
그리고 제국의 영역을 넘어 해외까지.
전 세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 ※ ※
상위 계 중에서 가장 넓은 곳이 바로 천계.
따라서 천계에 사는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그들을 통틀어 '천인'이라고 부른다.
악한 자들이 가는 지옥이 있으면 당연히 선한 자들을 위한 천당도 있어야지.
천계가 바로 천당의 역할을 하는 곳.
인간이었을 때, 남을 위해 희생하고, 도와주고, 배려하고, 아무튼 착한 일을 많이한 사람들은 죽어서 천계, 즉 천당으로 간다.
이곳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사후 세계를 영위한다.
개중엔 천계에 집을 지어 평범하게 사는 천인이 있는가 하면, 상제의 자미궁에서 일을 하는 천인도 있다.
해맑 선녀는 자미궁에서 일한다.
이름처럼 해맑고 천진난만한 선녀.
오늘은 쉬는 날, 어젠 손님맞이를 하느라 열심히 뛰어다녔으니까.
"으흥, 흥흥흥, 랄라라라라···."
해맑 선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천계 꽃밭에서 꽃송이들을 하나하나 따서 줄에 엮었다.
머리에도 커다란 거 한 송이 꽂고.
이렇게 꽃을 꺾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천계에 피는 꽃과 꽃나무다.
꺾인 꽃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다시 꽃송이가 맺히고 금세 아름답게 피어난다.
만들어진 꽃목걸이를 목에 걸어보는 해맑.
"헤헤, 예쁘다."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어제 자미궁에 행차했던 서왕모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왕모님은 너무 아름다우셨어.'
천인이라고 해서 욕망이 왜 없겠나?
다른 세상에서 온 물건들로 치장한 태상노군과 서왕모, 그리고 선자들.
해맑도 가지고 싶다.
최소한 어떤 물건이 있는지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다.
'선계에서 팔고 있다고 했지? ···가볼까?'
가는 거야 어렵지 않다.
그녀는 자미궁 선녀.
이동에 불편함이 없도록 지급받은 선녀복과 축지 술법 신발이 있다.
'···보고만 오면 되는 거야. 누가 알아?'
그래서 해맑은 선계로 뛰어갔다.
축지법으로 쭉쭉.
마침내 도착한 선계.
'그 물건들은 어디 있는 거야?'
한참을 헤매다 보니, 돌판으로 평평하게 만들어진 길이 보인다.
'누가 만들었지? 와! 잘 만들었다. 혹시 이 길을 따라가면···,'
그때였다.
푸다다다닥! 푸다다닥!
뒤쪽에서 들리는 굉음.
"에구머니나!"
해맑 선녀는 깜짝 놀랐다.
뭔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철로 만든 말?'
타고 다니는 사람의 복색도 이상하다.
까만색 가죽옷에, 길다란 가죽 신발에, 등에는 검을 매고.
끼익!
철마가 멈춰 섰다.
해맑을 처음 본 검선의 소감은 이랬다.
'···미친 년인가?'
딱 보면 각이 나온다.
머리에 큼직한 꽃을 꽂고, 꽃목걸이도 하고.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누구시오?"
"처, 천계에 사는 해맑이라고 합니다."
"오! 천인이시군. 난 검선이라고 하오. 그런데 선계엔 무슨 일로."
"으음, 전 그저 구경만 하려고."
검선은 빙그레 웃었다.
해맑이라는 천인이 왜 여기 왔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타시오."
"네?"
"구경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소? 안내해드리리다."
"근데 어딜 타요?"
"내 등 뒤에."
꿀꺽.
아무리 신선이라고 하지만 외간 남자인데.
하지만 이 희한한 철마를 타고 싶은 욕심도 생기고 해서.
"여기 타요?"
"꽉 잡으시오."
푸다다다다다닥!
"꺄악!!!"
빠르게 달려 나가는 할리 바이크.
든든한 남자의 등.
해맑은 저도 모르게 검선의 허리를 꼭 잡았다.
그렇게 달려오니.
"아!"
그녀의 눈앞에 거대한 7층 누각이 보인다.
"다 왔소. 나를 따라오시오."
검선이 앞장섰다.
순진무구한 해맑이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멀티플렉스 안으로 들어갔는데.
"어머?"
그녀는 처음 보는 모던한 인테리어에 깜짝 놀랐다.
1층 휴게실에서 담소를 나누던 선인들도 그녀를 발견했다.
'미쳤나?'
'미쳤군.'
'쯧쯧, 겉은 멀쩡한 여인이.'
'저렇게 큰 꽃을 머리에.'
'많이 아픈 모양이군.'
'비가 안 내리길 다행이야. 아니면 머리에 꽃 꽂은 채로 비 맞으러 뛰어다닐 텐데.'
검선은 해맑을 2층 쇼핑몰로 데리고 갔다.
"마음껏 구경하시오."
"아아아아···,"
탄성을 지르는 해맑 선녀.
죄다 다른 세상의 물건들.
'이렇게나 많아?'
서왕모, 그리고 선자들이 입었던 옷, 구두, 모자, 가방···,
한마디로 별천지였다.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이리 가서 구경하고, 저리 가서 구경하고,
차마 만지지는 못했다.
귀한 물건에 때가 탈까 봐.
순간!
스윽!
그녀의 뒤로 접근하는 한 사람.
"어떻소? 마음에 드시는지?"
"까, 깜짝이야! ···누구?"
"여기 주인, 독선이라 부르면 되오."
"아···, 전 해맑이라고 하옵니다."
"검선에게 이미 들었소. 천계에서 오셨다고?"
"네."
"처음 오셨으니 하나 골라보시오."
"···제가 가진 게 없어서."
당군악은 빙그레 웃었다.
"돈이 없어도 되오. 공짜로 드리지."
"···괜찮아요, 구경만으로 만족한답니다."
역시 천계 주민이다.
심성이야 말할 것도 없다.
머리에 커다란 꽃을 달고 온 것이 웃기긴 하지만···, 가만!
'꽃?'
그것에서 상서로운 진한 향기가 느껴진다.
킁킁, 킁킁킁킁.
당군악은 해맑의 머리에 가까이 가서 연신 냄새를 맡았다.
움찔,
뜬금없는 독선의 행동에 당황한 듯, 뒤로 한걸음 물러나는 해맑 선녀.
"가, 갑자기 왜? 설마···,"
"큼큼, 오, 오해 마시고."
당군악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는 꽃송이를 가리켰다.
"이건 무슨 꽃이요?"
"네? 천계에 피는 흔한 꽃인데, 우린 금정화(錦淨花)라고 불러요."
"금정화?"
"먹을 수도 있어요. 피를 맑게 해주거든요."
"천계에 많이 피어있소?"
"당연하죠. 천계 전체가 꽃밭인데, 헤헤."
"허어."
보통 꽃이 아니다.
무려 천계에서 피어나는 꽃.
"먹어봐도 되겠소?"
"꼭꼭 씹어 드세요."
당군악은 해맑이 건네준 금정화 꽃잎을 따서 입에 넣었다.
질근질근 씹으니 몸속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기운.
'역시.'
태주와 영혼이 연결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
'마나 거부증 치료제라고 했지.'
그가 어떤 방법으로 치료제를 만들려고 하는지도 알았다.
'이 꽃이 피를 맑게 해준다고 했으니, 큰 도움이 될 거야.'
당군악은 다시 해맑을 보며 말했다.
"목에 걸고 있는 꽃목걸이도 먹어봐도 될는지."
"그, 그럼요. 여기."
당군악은 형형색색의 꽃잎을 하나씩 따서 맛보았다.
그럴 때마다 꽃의 효능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주는 해맑.
"그 꽃은 반월화(半月花)라고 해요. 소화능력을 북돋아 줘요. 그리고 이 꽃은 천상화(天上花), 피부를 깨끗하게 해주고, 음양화(陰陽花)는 몸의 균형을 바로 잡아···,"
대박이다.
이건 꽃이 아니라 약.
당군악은 해맑에게 넌지시 말했다.
"혹시 돈이 필요하시오? 이 물건들을 살 수 있는 화폐 말이오."
"필요하긴 하지만."
"내가 이 꽃들을 코인으로 바꿔주겠소. 한 송이당 1코인, 열 송이면 10코인."
"무, 무슨 말씀이신지?"
"그게 뭔가 하면···,"
그리하여 시작된 선계 화폐에 관한 설명.
해맑 선녀의 표정이 점점 해맑아졌다.
< 마나 거부증 치료제(2)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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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나 거부증 치료제(3) >
삽시간에 퍼진 소문.
김태주 회장이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발명하려 한다고?
삼한 제국 전체가 들썩였다.
만나면 그 얘기,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믿음.
김태주 회장이 이번에도 해낼 것이다.
실제로 증명해오지 않았나?
그가 만들어온 신약들, 어느 하나 평범한 것이 없었다.
다른 하나는 불신.
아무리 김태주 회장이라도 마나 거부증 치료제는 어려울 거다.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
마나 거부증은 질병이나 후천적 질환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게 되는 체질적인 문제.
인위적인 처치로는 극복이 힘들다.
기적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상반된 두 개의 태도.
믿음과 불신.
삼한 제국의 황제 류태현은 전자였다.
굳게 믿었다.
자신도 기적을 경험했으니까.
"설마 수호, 자넨 불신하는 건 아니겠지?"
금수호가 발끈했다.
"참나! 사람을 뭐로 보시고, 불신 지옥 모르십니까? 복숭아에, 신비한 술에, 몇 가지만 떠올려도 충분히 믿고 남지."
"하긴, 자네도 복숭아는 못 먹었지만 술은 마셔봤을 테니까."
"···쳇!"
만약 김태주 회장이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만들어낸다면?
혁명이고, 기적이며, 천지개벽이다.
삼한 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거부증 환자들, 우리 제국민만 해도 약 2천만 명입니다."
"그들이 모두 치유된다고 가정하면···, 후우, 어마어마해. 우리가 도울 일은 없을까?"
"특허와 식약청 심사를 간소화해서 빠르게 출시되도록 도와야죠."
"그건 당연한 거고. 설사 부작용이 좀 있다고 해도 어때? 무조건 통과시켜."
부작용?
죽지만 않으면 된다.
"그건 그렇고,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지?"
"무슨 기회요?"
"아메리카 공화국 말이야. 여론전 시작해보자고,"
"네?"
황제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을 이었다.
"자! 김회장이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고. 그럼 아메리카 공화국에 팔 것 같나? 안 팔 것 같나?"
"흠, 당연히 팔겠지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려있는 문젠데,"
"맞아. 김회장 성정으로 보아 절대 외면하지 않을 거야. 카피 약으로 인한 갈등이 생겼어도 팔거야. 하지만 놈들 버릇은 고쳐줘야지?"
"그야 저도 동의합니다만, 어떻게요?"
"악역은 우리가 맡아보자고, 먼저 아메리카 언론사들 몇 개 선정해서···,"
금수호가 즉시 작업에 들어갔다.
아메리카 공화국의 주요 언론사와 방송사를 섭외해서 동시에 터뜨려버렸다.
<마나 거부증 치료 시대가 열리나?>
<삼한 제국의 T 바이오 제약사에서 마나 거부증 임상 시험 돌입.>
<익명의 관계자에 따르면 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아메리카 약 4천만 명의 마나 거부자 및 가족들, 기대감에 부풀어.>
카피약 분쟁도 그 위에 살포시 끼얹었다.
<화이백에서 생산 중인 바이탈 주스와 외상 치료제, 알고 보니 T 바이오의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을 무단 카피한 불법 의약품.>
<우방국의 신뢰가 무너질 상황, 이대로 두면 안 된다.>
<카피약 문제가 터진 나라에 누가 신약을 수출하겠나?>
<하루빨리 갈등을 풀어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
당연히 아메리카 공화국 시민들이 당혹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먹은 피로회복 드링크가 불법 카피약이라고?
└ 퍼킹! 그럼 지금까지 내가 가짜 드링크제를 먹고 있었단 말이네.
└ 몰랐어? 난 진짜를 마셔봤거든. 바이탈 주스와는 차원이 달랐어.
└ 제기랄! 쪽팔리게 뭐 하자는 짓이야? 처음부터 로열티 계약 체결했어야지.
└ 맞아. 그랬으면 좀 더 질 좋고 싼 피로회복 드링크를 살 수 있었을 거야.
즉각 반박 기사가 터져 나왔다.
<마나 거부증 치료제, 아직 확인되지 않는 뜬소문이다.>
<바이오 전문가들 하나 같이 부정적, 그전에도 이와 같은 사례들이 많이 있었다. 벌써 몇 번을 속았는지 기억해야 한다.>
<화이백 CEO 프레드 밀러, 마나 거부증 치료제는 허상, 사기일 가능성 농후.>
<거짓말이 분명하다. 마나 거부증 환자와 가족들을 우롱하는 2차 가해 행위.>
<불법 카피도 근거 없는 뜬소문, 우리 아메리카 공화국의 바이오 제약 기술은 만만하지 않다.>
└ 그래, 너무 성급해. 아직 약은 발명되지 않았다고. 임상 시험 중이라잖아.
└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임상 시험하다가 엎어진 약이 얼마나 많았어?
└ 그리고 바이탈 주스도 그래, 진짜 카피했는지 확실하지도 않고.
└ 동의, 정부에서도 아무런 제재가 없어. 카피가 맞았다면 생산을 중단시켰겠지.
└ 난 바이탈 주스 포기 못 해! 중단하기만 해봐! 당장 백악관으로 달려간다.
여론전은 금방 끝났다.
삼한 제국이 아닌 아메리카 공화국이었으니까.
하지만 황제와 금수호는 만족했다.
그래도 불씨는 피워놨기 때문이다.
※ ※ ※
화이백 제약 CEO 프레드 밀러는 마나 거부증 치료제 임상 시험 소식을 듣자마자 같잖다는 표정으로 조소했다.
'웃기는군.'
마나 거부증?
그게 질병이나 독에 의한 것이라면 이해나 한다.
프레드가 보기엔 김태주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었다.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지.'
차라리 새로운 몸을 만드는 게 더 빠를 것이다.
0.000001%의 기적을 바라거나.
사실 프레드는 마나 거부자가 기적적으로 완치됐다는 여러 사례들도 의심하고 있었다.
애초에 마나 거부증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질환과 착각했을 수도.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았다.
마나 거부증으로 알고 쭉 살아왔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질병이었다든가.
'치료는 절대 불가능해.'
삼한 제국, 혹은 태홍 바이오의 치졸한 언론 플레이가 확실하다.
마나 거부증 치료제 기사가 나오고, 거의 동시에 불법 카피 문제가 터졌다.
'이딴 걸로 날 어떻게 해보려고?'
너무 하찮아서 가소로울 지경.
가만히 있긴 뭐하고 해서 즉시 반박 기사를 냈다.
아메리카 공화국은 자신의 영역이다.
여론전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아마 빌리 피트먼 대통령 딸이 마나 거부증이라는 걸 알고 이런 식으로 나오나 본데.
'오히려 역효과야.'
절대 실현되지 않을 희망을 안겨주는 것보다 더 잔인한 것은 없다.
빌리 피트먼 대통령은 딸의 병실에서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자신의 약점을 담보로 삼아 카피약 분쟁을 해결하려는 것이 틀림없다.
'망할 것들이, 그러면 내가 머리 굽히고 사과할 줄 알았나?'
두 번 다시 속지 않는다.
지금까지 딸을 치료해주겠다며 자신에게 접근한 사람만 몇 명이었는데.
그러나 죄다 사기꾼들이었다.
옛 아메리카 원주민 후손이라는 주술사, 치유 마법 스킬을 익히고 있다는 각성자, 오랜 연구 끝에 치료제를 개발했다는 사이비 과학자.
다 돈만 받아 처먹고 달아났다.
이번 언론 보도도 사기가 분명하다.
그것도 다분히 의도적인.
그래서 매우 괘씸했다.
"류태현, 이 개자식!"
아무리 불법 카피가 사실이라고 해도 딸 레이첼의 마나 거부증을 이용해 여론을 움직이려고 들어?
빌리 피트먼의 반감만 커졌다.
※ ※ ※
태주는 계속 연구에만 몰두했다.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일이삼백이도 연구에 방해될까 제자들에게 맡겼다.
심지어 카피약 분쟁마저도.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한가.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목숨이 몇 명인데.
하지만 도통 나아가지 않는다.
약효가 지속되는 순간에는 증세가 좋아졌지만, 하루가 지나면 말짱 도루묵.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선도도 갈아 넣어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마찬가지.
할 수 있는 건 연명치료밖에 없었다.
'결국 체질이 문제야.'
물론 이걸 고칠 방법은 있다.
환골탈태를 시키면 된다.
그럼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
하지만 환골탈태를 유도하기 위해 영약을 먹이면 어떻게 될까?
일반인, 적합자, 각성자들하고는 다르다.
마나 거부자들에게 마나는 독이다.
영약을 먹는 순간 몸이 뻥! 터져 죽을 것이다.
'하나가 더 있긴 한데···,'
바로 혼원무상독령공.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독정을 만들어내어 마나 거부증을 극복해내는 것.
이것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
자신이야 당군악과 같은 영혼이라 쉽게 배웠다지만 혼원무상독령공은 결코 만만한 무공이 아니다.
가르친다 한들 몇 명이나 배울까?
그리고 이건 당군악의 무공이다.
아무리 같은 영혼이라도 마나 거부증 치료를 위해 세상에 퍼뜨릴 수는 없는 노릇.
'방법이 있을 거야.'
무조건 만들어야 한다.
독공의 성취가 부족하면 독령의 경지에 올라가서 만든다.
그래서 태주는 지금도 독정에 각인된 독물을 조합해 치료제를 만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찌르르르르!
머릿속에서 울리는 배송 신호.
'왔구나.'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당군악에게 보내는 물건은 꽉꽉 채워야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공유창고를 확인했는데.
"···응?"
뭐지?
공유창고 안에서 보이는 형형색색의 식물들.
'꽃이잖아.'
꽃 말고는 없었다.
몇 송이 되지도 않았다.
어림잡아 20~30송이?
다른 물건은 오직 공기계 스마트폰 하나.
심지어 아공간 아이템도 없다.
'흐흐, 무슨 기념일도 아니고,'
남자와 남자 사이에.
혼원무상독령공 대성했다고 보내주는 건가?
그거야 예전의 일이다.
아무튼 물건을 옮기고, 백화점에서 산 물건들을 집어넣고.
'스마트폰이나 확인해 보자.'
꽃을 보낸 이유가 있을 테니.
태주는 최근에 찍은 동영상을 실행했다.
당군악의 모습이 보인다.
맨날 봐도 반갑다.
이어지는 영상.
들려오는 말소리.
그리고.
"···어? 꽃?"
천계 꽃밭이라니.
그럼 이 꽃들이 모두···.
"마, 맙소사!"
바보같이.
단번에 알았어야 했다.
그냥 꽃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당군악이 보낸 물건 중에 어디 평범한 것이 있긴 했나?
선도도, 신선주도, 하늘을 나는 검에, 부적, 그리고 혼원무상독령공 대성을 이루게 해준 독물.
그리고 이 천계 꽃.
당군악이 꽃의 효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태주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되겠는데?'
마나라는 잡스러운 기운은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천계의 영험한 꽃.
'금정화(錦淨花)와 음양화(陰陽花)라면···,'
무조건 된다.
태주는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군악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를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금정화, 깨끗해진 피는 정맥, 동맥, 모세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흘러 장기와 세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몸의 균형을 조절해주는 음양화, 마나의 침범으로 무너진 몸의 균형을 바로 잡아 달라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그리고 거기에 마나를 삭제시키는 독물들을 섞어 넣으면?
태주의 머릿속에서 실험대가 차려졌다.
어떤 독을 천계 꽃들과 결합해야 할지, 어느 걸 빼야 할지.
하지만.
'천계 꽃은 약점이 있어.'
꽃 자체로서가 아닌 얼마만큼의 재료가 수급되느냐가 관건.
아무리 좋아도 물량이 충분치 못하면 치료제를 만들었다고 해도 꽝이다.
당군악도 영상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 지금 보낸 건 샘플이네. 일단 연구나 해보라는 거야.
- 대량 생산은 기다리게.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서면 그때부터 생산에 들어가지.
태주도 동의했다.
일단은 연구부터 해보자.
※ ※ ※
선계 멀티플렉스.
오늘도 여지없이 머리에 커다란 꽃을 꽂은 해맑 선녀가 발랄하게 뛰어 들어왔다.
청바지에 티셔츠, 등에는 커다란 자루를 메고 문을 박차고 들어와.
"안녕하세요오오! 신선님들! 헉헉!"
신선들이 깜짝 놀라며 해맑의 손에서 자루를 넘겨받았다.
"어이쿠! 너, 넘어질라."
"천천히, 천천히 와."
"쯧쯧, 이마에 땀 봐라, 어쩌자고 그렇게 힘들게 뛰어왔어?"
"에잉! 검선 뭐 하는 거요? 할리 바이크로 마중 나갔어야지!"
검선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다들 해맑이가 얼마나 빠른지 모르는···,"
"아니! 이 연약한 애가 빠르면 얼마나 빠르다고."
"당신은 손자 손녀도 없나?"
"애초에 결혼도 안 한 검선 아니요."
"어쩐지, 감수성이 없더라니."
"···."
사실 검선만 결혼을 안했나?
여기 있는 신선들 태반이 거의 꼬질꼬질한 홀아비.
그래서 해맑은 해맑 선녀는 금세 신선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녀는 선하고 착했다.
예의 바르며 남을 배려하고, 귀여운 외모에,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를 항상 달고 다닌다.
한마디로 긍정의 에너지 그 자체.
선계에도 여자는 있다.
눈만 마주쳐도 무서운 서왕모, 요망한 미호 선자, 얼음장 같은 월궁 선자,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 하선고.
어찌 이들과 해맑을 비교할까?
그래서 요즘 하루라도 해맑이 안 보이면 신선들의 걱정이 태산.
"독선님은요?"
"위에 있다. 올라가 보려고?"
"네!"
"여기서 쉬고 있어라. 내가 불러오지."
잠시 후.
계단에서 내려오는 당군악.
"해맑 선녀 오셨소?"
"넵! 제가 자루 한가득 꽃을 따 왔어요."
"하하, 수고 많으셨소. 오! 꽃이 큼지막하군."
"자미궁 근처에서 딴 거라 그래요."
흠칫, 놀라는 당군악.
자미궁 근처라면···?
"혹시 상제가 꽃을 따가는 모습을 봤소?"
"당연히 보셨죠. 왜 따가는지도 제게 물어보셨어요."
"···대, 대답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솔직하게 말했어요. 앞으로도 마구마구 따갈 거라고."
"아!"
처음 만났을 때 당군악은 해맑에게 왜 꽃이 필요한지도 간략하게 설명해줬다.
"그래서 상제가 뭐라고···?"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그리고 천계 전체가 꽃밭인데 아무리 따도 티도 안 나는걸요? 헤헤."
천계에서 천인과 상제의 관계는, 왕과 백성의 관계가 아니다.
해맑이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천계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 그녀의 행동을 제지할 권한이 상제에게 없다.
사실 천계의 주인은 바로 천인들.
상제는 그저 천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천계를 관리하는 역할이다.
"저 열심히 꽃을 따서 사람을 많이많이 살릴래요."
"···."
"내일부터 아는 동생들도 불러서 함께 자루마다 가득 채워서 올게요."
"···."
당군악은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해맑 선녀는 천상 천인이었다.
미친 신선들과는 차원이 다른, 보기만 해도 마음이 행복해지는 그녀.
이러니 신선들이 환장을 하지.
그래서 부끄러웠다.
고작 물건 몇 개로 그녀를 꼬드겼던 자신이.
"당 떨어질라, 초콜릿 하나 드시려오?"
"넵!"
해맑 선녀는 목소리도 해맑았다.
아무튼 물량은 충분할 것 같다.
< 마나 거부증 치료제(3)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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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상 시험(1) >
당군악이 보내준 천계 꽃의 양은 많지 않았지만 임상을 시도할 만큼의 치료제는 만들 수 있었다.
태주는 금정화와 음양화로 치료제 연구를 시작했다.
이 두 개의 꽃이 마나 거부증 치료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꽃에서 필요한 성분을 추출하고, 독정에서 뽑아낸 독물과 결합했다.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중요한 건 역시 배합.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비율을 찾는 것이 우선.
'흠,'
많이 섞으니까 문제가 생겼다.
천계 꽃 추출물이 마나를 없애줘야 할 독기마저 변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차츰 줄여나가자.'
수십번에 시도 끝에 마침내 찾아낸 황금비율.
독과 천계 꽃의 성분이 이질감 없이 완전하게 섞였다.
그리하여 만든 치료제 샘플의 개수는 약 100병.
그래도 천계 꽃이 절반이나 남아있다.
나머지 꽃으론?
'독정에서 뽑은 독 말고 일반적인 재료를 배합해서 만든 독물로도 가능한지 알아봐야 해.'
지금까지 태주는 기본 베이스가 되는 독물을 독정에서 직접 뽑아냈다.
즉, 태주 말고는 아무도 치료제를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매번 이런 식이면 양산이 힘들다.
매일매일 독정에서 독만 뽑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실물 재료를 이용해 치료제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렇게 만든 치료제도 같은 효능을 보여야 한다.
독물을 가지고 제조에 들어갔다.
만년오공 분해 독은 비슷한 효과를 내는 대체재를 찾았고, 모기 독은 지리산 늪지에서 직접 모기를 잡아 배양 작업을 통해 확보했다.
가공해서 정제수와 함께 천계 꽃 추출물을 황금비율로 섞고.
그리하여 만든 양산용 치료제 샘플도 100병.
이제 임상에 들어갈 차례.
하지만 지금 당장 실행하는 건 안 되고.
'기다려 봐야지.'
당군악의 다음 배송.
충분한 물량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기다리는 동안은···,
'좀 쉬어야겠네.'
과연 천계 꽃의 물량은 얼마나 될까?
당군악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태주는 실험실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었다.
바로 그때.
"어?"
"···."
저쪽으로 걸어가던 누군가와 그만 눈이 마주쳐버렸다.
고양이였다.
놀란 표정의 태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백이.
"···일백아?"
한참을 둘이 서로 바라보다가.
획! 일백이는 태주를 외면해버리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갔다.
'삐쳤구나.'
그런 것 같다.
이유도 알겠다.
연구에 몰두하느라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새끼,
눈치가 빨라 주인이 뭐 하고 다니는지 충분히 알면서도.
"주인도 몰라보는구나. 강아지나 한 마리 키워볼까? 요즘 댕댕이에게 자꾸 마음이 가던데"
멈칫!
일백이가 한발을 든 채 움직임을 멈췄다.
"이참에 유기견 보호소라도 가야겠다."
순간!
도도도도도도도도!
태주에게 돌진하더니.
"냥!"
폴짝, 뛰어와 안기는 일백이.
"요놈아! 니가 삐져봤자지."
"냐앙?"
"그래, 오랜만에 선도 하나씩 먹자."
"냐아아아아!"
태주는 한동안 일이삼백이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구례 시청에 들렀다.
명색이 구례 종신 시장.
하지만 시청에 거의 가보지 못했으니.
"시, 시장님!"
"···전화라도 주시지, 시청 앞에서부터 모실 텐데."
"자주자주 들러주십시오."
시청 공무원들이 모두 나와 태주에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종신 시장이기 전에 구례 최고의 인기인인데.
다들 표정이 밝았다.
월급 인상의 효과인가?
"어려운 일은 없죠?"
"네, 없습니다."
"있으면 꼭 이야기해주세요. 바로 처리해드릴게요."
여긴 파주와 다르다.
구례의 행정 체계는 전과 다를 바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커다란 프로젝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시장으로서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부시장님은?"
"업무실에 계십니다."
현재 태주 대신 시청의 행정을 통솔하는 이정학 길드장.
원래는 구례 경찰청장이었는데, 노고단 길드 부길드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부시장 자리에 올랐다.
"시장님, 어서 오십시오."
"잘 계셨어요?"
"마침 잘 오셨습니다. 보고드릴 일도 많고."
"···어, 지금요?"
"네."
오지 말 걸 그랬나?
뭐, 시장의 의무는 수행해야지.
이어지는 이정학의 보고.
딱히 큰일을 없었지만···,
"지리산에 마수가 많이 늘었네요?"
"맞습니다. 주로 일반 마수들이지만 그렇다 해도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마수들의 번식력은 꽤나 뛰어나다.
조금만 사냥이 뜸해져도 금세 불어난다.
그리하여 마수 밀도가 높아지면 엘리트 마수들도 탄생하게 되는 것이고.
보고서를 읽어보는 태주.
"흠, 레이드팀 숫자가 많이 줄어서 그런 것 같은데."
"아무래도 세금 문제 때문이죠."
태주가 시장이 됨으로써 구례의 자유 도시 지위도 상실됐다.
그로 인해 마수 부산물 판매에 대한 세금 면제 혜택도 사라진 것.
"그럼 다시 원래대로 부활시킵시다. 부산물 세금 면제로."
"잘 생각하셨습니다. 시청 예산이야 충분하니까요."
시청도 다녀왔겠다,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초조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었던 순간!
찌르르르르르!
드디어 배송 신호가 떴다.
'···과연?'
태주는 물건을 확인했다.
"흐흐흐."
공유 창고 안은 온통 꽃밭이었다.
큼지막한 금정화와 음양화 꽃송이가 가득가득 들어있었다.
아공간 가방 안에도.
창고를 비우고 지구 물건들로 가득 채운 태주는 스마프폰을 확인했다.
- 대량 생산 들어가도 되겠네. 사람들을 살려보세.
신호가 떨어졌다.
그전에 임상 시험부터.
※ ※ ※
태홍 고아원에 마련된 임시 병동.
명진이까지 포함해서 10명의 환자를 모아놓았다.
모두 초중증의 마나 거부자들.
"하아···,"
백홍표는 답답한 마음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증상이 나아지는 모습에 기대를 품었지만 그 이후론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그 대단한 태주도 쉽지 않다는 눈치.
천형을 극복하는 건 불가항력일까?
지금 당장으로선 하루하루 연명치료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태주가 만든 임시 치료제가 없었다면 이들 중 최소 절반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상 시험을 지원하기 위해 병원에서 파견 나온 의사는 다소 부정적인 태도.
"원장님, 이제 그만 포기합시다. 헛된 희망이에요. 차라리 이분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이 현명한 판단입니다."
이 새끼가, 어디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는 주제에.
"그래서 한 명이라도 죽었소?"
"네?"
"당장 오늘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환자들인데, 죽은 사람이 있냐는 말이오?"
"아, 아니 제 말은."
"포기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그러고도 당신이 의사야?"
"···."
"우리 김회장은 지금도 연구에 여념이 없는데, 고작 모니터 보면서 수치 체크나 하고 있으면서."
의사도 참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가 나왔습니까?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헛된 희망만 심어주고서는···,"
그때였다.
벌컥 열리는 문.
"형님!"
"···어, 태, 태주야."
"명진이, 어디 있죠?"
"저어기, 지금 자고 있어서."
태주는 파견 의사에게 만들어 놓은 주사제를 넘겨주며 말했다.
"이거 수액과 같이 주사해 주세요."
"···하아, 알겠습니다."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사의 표정,
하지만 구례 종신 시장이기도 한 태주의 말을 거역할 수 있나?
마나 거부증 치료제가 수액과 함께 명진이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약효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태주는 다른 환자들에게도 약물을 투여했다.
그리고 잠시 후.
꿈틀, 꿈틀, 잠에서 깨어나는 우명진.
눈을 번쩍 뜨더니,
"으아!"
산소 호흡기를 제 손으로 떼고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며, 명진아! 왜 그래? 어디 아파?"
"저어···,"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갑자기 편안해졌어요. 아프지도 않고, 숨도 너무 잘 쉬어져요."
그게 시작이었다.
여기저기서 몸을 일으키는 초증증의 환자들.
하나같이 입에 씌워진 산소 호흡기를 벗으며 말했다.
"저도 괜찮습니다."
"머리가 맑아졌어요."
"가뿐합니다. 호흡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저도···."
.
.
.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병원에서 파견 나온 의사는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조금 전까지 자가 호흡도 못 했던 사람들이···,'
진짜?
혹시 마약 같은 건가?
아니, 주사제 한 방 맞았다고···,
서둘러 활력징후 모니터를 체크해봤다.
희한하게도 모든 수치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
'이럴 수가···,'
사실 처음엔 코웃음 쳤다.
김태주 회장이 대단한 사람이란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만든 신약으로 인해 사람들의 삶의 질이 달라졌고, 마수 사냥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도.
하지만 마나 거부증 치료제는 전혀 다른 문제.
'연구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걸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 의료계는 거의 100년 이상 치료 연구에 매달렸다.
당연히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마치 거짓말처럼 기적이 일어났다.
태주는 이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약효가 얼마나 지속되는지 알아봐야지.
다음 날 2일 차.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다.
효과를 본 그 상태.
그래서 한 번 더 약물 투여했다.
더 좋아졌다.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3일 차.
여전히 유지되는 효과.
걸어 다니는 사람도 나왔다.
계속 약물 투여.
4일 차.
사람들의 식욕이 증가했다.
비쩍 마른 몸에 살이 차올랐다.
뛰어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일상생활을 시작하는 중증 마나 거부자들.
고아원 운동장을 산책하며, 가끔은 운동도 하고, 밥도 잘 먹고, 한마디로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1차 임상 대성공.
비교적 괜찮은 증상자는 3번으로 끝냈지만 증세가 심각한 환자들은 4번을 투약해야 했다.
향후 병이 재발할지 계속 지켜봐야 할 테지만 현재까진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 어떤 부작용도 없었다.
백홍표는 눈물을 글썽이며 태주의 손을 잡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태주야! 정말 고생했다."
"뭘요. 아직 2차 임상이 남았는데."
"2차?"
"네, 비슷한 증상자들 10명만 더 수소문해서 데리고 와 주세요."
1차 임상 성공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아직 호들갑 떨 때가 아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실험이 남았다.
그리하여 시작한 2차 임상 시험.
이번에 쓰일 치료제는 독정에서 뽑아낸 독이 아닌 실물 재료를 가지고 제조한 주사제.
일주일 동안의 투약을 마치고,
결과는···.
"됐어!"
2차도 대성공.
태주와 당군악이 함께 이룬 기적이었다.
1차와 다른 점도 있었다.
독정의 독이 아니기에 약효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투약 횟수가 평균 7회, 최소 6번 이상은 맞아야 했고, 유의미한 효과를 보려면 7번, 심하면 8번까지도 맞아야 했다.
하지만 이걸로 인해 태주가 독정에서 독을 뽑아야 하는 수고를 덜었다.
복제도 안 될 것이다.
자신 말고 천계 꽃을 어디서 구하나?
'하지만 보완해야 할 점이 많아.'
투약 횟수를 줄이는 것.
그리하여 3차 임상도 준비해야 한다.
시험을 통해 치료제의 효능을 끌어올린다.
치료제 양산 체제도 갖추고.
그런데 치료제를 생산할 공장이 없다.
뉴서울 공장, 구례 공장, 현재 제조라인이 꽉 찼다.
'일단 기존 생산하던 약품 생산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태주는 백서연을 찾아갔다.
"서연씨."
"회장님! 저도 이야기 들었어요. 지, 진짜 치료제를···?"
"네. 이제 양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제약회사 인수 작업 착수해야겠어요. 대량 생산 들어가야 하니까."
"아, 알아보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제약 설비가 제대로 갖춰진 공장으로."
"음···,"
잠시 고민하던 백서연, 그러더니.
"회장님, 미리내 제약은 어떻습니까?"
"···미리내?"
"네, 그쪽 회사 사정이 매우 안 좋거든요. 아시다시피 감사원과 식약청에 미운털 단단히 박혀있어서 망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으로 뉴서울에 진출하려고 했을 때, 미리내 제약의 방해로 특허 심사에 차질을 빚었던 적이 있었다.
감사원에 적발되고 완전히 개박살 났다.
이기언 회장도 그때 쓰러져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괜찮네요.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인수하세요."
"작업 들어가겠습니다."
백서연은 제값을 치르고 살 생각이 절대 없다.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미리내 그룹.
그래서 미리내 제약이 어떻게 커왔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했던 경영진들, 싹 다 쫓아내고 최대한 싸게 사버려야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제가 황궁에 도움 요청해볼게요. 괜찮죠? 제가 서연씨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려고 했어요. 지금 이것저것 가릴 땐가요?"
그리고 황궁이 개입해준다면 더 싸게 살 수 있겠지.
"참! 그리고,"
태주는 그녀에게 치료제 생산에 필요한 독물 리스트를 건넸다.
"여기 나온 재료들, 최대한 많이 확보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세요."
"무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다른 곳에도 부탁할 예정이니까."
제국군의 힘을 빌릴 생각.
독물들은 보통 마수 밀집지대에 많이 분포한다.
현재 마수들을 토벌하면서 영토를 넓히는 개척부대, 방어부대, 전초부대 등에 도움을 요청하면 더 많은 재료를 더 빨리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황제에게 직통으로 전화를 걸었다.
"폐하, 접니다. 김태주."
- 어이, 김회장, 요즘 바쁘지? 뭐 도와줄 건 없나?
"다른 게 아니라···,"
태주는 미리내 제약 공장 인수 계획과 약재 수급을 위해 제국군의 힘을 빌려 달라고 이야기했다.
- 대량 생산을 하겠다는 거군. 그야 어렵지 않지. 수호가 처리하면 되는 거니까.
옆에서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 추가 대량 생산이라면 아무래도 생기불끈이겠지? 카피 약과 승부를 보려고 하는 건가?
"네?"
- 드디어 해외 진출을 결정했군. 잘 생각했어. 그깟 효과 떨어지는 카피약, 진짜가 들어가면 쪽도 못 쓰고 무너질 게 뻔해!
황제는 착각하고 있다.
생기불끈 이야기가 아닌데.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했다.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만들었다는 걸.
- 나도 도와주겠네. 카피약 문제가 해결되어야, 마나 거부증 치료제 연구도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을···,
"생기불끈 대량 생산이 아닌데요?"
- 응? 무슨 말인가?
"마나 거부증 치료제 만들었거든요. 그걸 대량 생산하려는 겁니다."
- 아하, 그렇군. 마나 거부증 치료···, 헉! 뭐, 뭐라고?
황제의 떨리는 목소리.
- 다, 다시 마, 말해주게. 네, 내가 지금 들은 게 마, 맞는지···,
"성공했습니다. 제가 부탁드린 건 생기불끈이 아니라 마나 거부증 치료제 대량 생산과 재료 확보를 위한 겁니다."
- 으아아아아! 마, 맙소사! 아, 아니, 말도 안 되는, 오늘 만우절인가? 아니잖아! 지, 진짜 농담 아니지? 으어? 미, 미친!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괴성.
황제란 사람이 왜 저래 호들갑을 떨어?
뭐, 이해는 한다.
이게 어디 보통 사건인가?
< 임상 시험(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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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상 시험(2) >
마나의 침범으로 인한 인구 대절벽.
그걸 극복하기 위해 인류가 선택한 첫 번째 방법은 통합이었다.
사회 공동체를 유지하고 번영하려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인구, 사람이 있어야 뭐라도 해보지.
그래서 무력을 동원해 전쟁하든, 아니면 평화적인 방법으로 협상하든, 국가 간 통합으로 최소한의 인구를 확보했다.
남은 과제.
인구 성장으로 국력을 키워야 한다.
초기 통합 국가의 주요 정책은 출산율 증가에 초점을 맞췄다.
온갖 출산 장려 정책이 시행됐다.
아이를 낳으면 취업, 승진, 연봉 인상에 혜택을 주고, 집도 공짜로 주고, 학비도 지원하고···,
그 결과 과거 30대 중반까지 치솟았던 평균 결혼 연령대가 20대 초중반으로 확 낮춰졌고, 기본 한 가구당 최소 3명 이상의 아이들이 길러졌다.
하지만 200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
그것은 바로 마나 거부자들.
그들은 잉여 인간이었다.
범죄자보다 더 낮은 대우, 버려지거나 아예 없는 존재로 취급받았다.
유전적인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
결혼하려는 생각도 없었고,
수많은 인재가 마나 거부자란 이유로 외면당했다.
그나마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20대 인생이라도 편하게 살다가 갔다.
그러나 형편이 좋지 못한 집안의 마나 거부증 아이들은?
당연히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세계 각국은 대책을 찾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물론 성과는 없었다.
200년 동안 의료계와 과학계가 전력을 다해 몰두한 과제가 마나 거부증 치료였는데, 이걸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고?
"1차, 2차 임상 시험 끝냈습니다. 20명의 중증 환자들에게 치료제 투여했고, 그 결과 모두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성공이지 않나요?"
- 어어어···,
전화기 너머의 황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넘어갈 듯했다.
"3차 임상에 들어가려고요. 아직 치료제가 완전치 않아서, 남녀 반반, 유아에서 청소년, 다양한 인종 등 광범위한 표본으로, 최소 500명 이상···,"
- 자, 잠깐 기다려 보게.
수군수군, 전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는 금수호 비서관과 황제의 대화, 억! 하는 비명도 들렸다.
이윽고.
- 험험, 그, 제, 제국의 번영을 위해 엄청난 일을 해주었네. 아니, 지구 전체에 길이 남을 업적이야. 정말 감사한 일이지. 세상이 그대에게 고마워할걸세.
잔뜩 흥분한 듯 더듬거리며 말하는 황제.
"그렇긴 하죠?"
이건 황제에게 백번 그랜절 받아도 모자란다.
마나 거부증 치료제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일이다.
노벨상이 아직 존재했다면, 또한 중복 수상이 가능하다면, 혼자서 의학상, 화학상, 평화상을 휩쓸어 버릴 대업적이다.
- 다만 부탁이 있네만···,
"뭔데요?"
- 3차 임상 시험 대상자 모집과 절차는 제국 정부에게 맡겨 주게. 정성을 다해 준비하지.
정부가 주관한다라···, 안될 것도 없지.
"공평하게 선정해야 할 겁니다."
- 걱정하지 말게. 그 어떤 외부적 개입도 차단할 거야. 그리고 500명은 너무 적어. 숫자를 늘리면 안 되나? 1,000명 정도로.
"가능합니다."
재료야 충분하니까.
- 오! 고맙네, 고마워.
사실 태주도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민간보다는 국가가 대신 나서주면 훨씬 편하다.
- 그리고 황궁 비서실 홍보팀에서 구례로 내려가도 되겠는가? 인터뷰 좀 할까 하는데···.
"인터뷰라뇨?"
- 이미 자네가 치료제를 만든다고 소문이 났잖아.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야. 희망을 심어주세. 죽지 말고 기다리라고,
마나 거부자들에게 희망을.
괜찮은 생각이다.
"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태홍 고아원으로 오세요. 지금 완치된 환자들, 예후 관찰 중이니까요."
- 참! 아메리카 공화국에도 치료제 팔 거지?
"팔아야죠. 몇몇 사기꾼들 때문에 그 나라 국민들이 죽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그럴 줄 알았네. ···근데 살짝 겁만 줘볼까 하는데, 자네 생각은?
"···또 뭘 하시려고요?"
- 아니, 내가 조금 열받았거든, 빌리 피트먼, 그 새끼 때문에, 화이백도 그렇고.
"아···,"
대단한 황제다.
대판 싸운 모양.
나이가 몇 살인데,
아마도 카피약 분쟁 때문에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긴 듯했다.
"알아서 하시죠. 하지만 전 치료제 팔 겁니다."
- 흐흐, 알겠네. 자넨 아무 생각 말고 연구에만 전념하게.
이로써 3차 임상 준비는 정부에서 맡게 됐다.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치료제 연구나 계속하자.
다음 날,
황궁에서 홍보실 직원과 비서진들이 구례로 총출동했다.
무슨 영상을 찍는지 모르겠지만 촬영 장비를 잔뜩 동원해서 1차 2차 임상 대상자들과 한명 한명 빠짐없이 인터뷰하고 돌아갔다.
임상 시험 대성공에 대한 기사가 쏟아진 건 그다음 날이었다.
※ ※ ※
삼한 제국 뉴서울.
올해 20살인 조인철은 배낭 하나를 메고 몰래 빌딩 옥상으로 숨어들었다.
빌딩의 층수는 25층.
이 정도면 충분하다.
머리가 지면에 닿는 순간 으깨져서 고통도 느끼지 못하겠지.
조인철은 마나 거부자였다.
태어나자마자 알았다.
그래도 그의 부모는 그를 버리지 않았다.
남들은 학교도 안 보낸다는데, 초중고까지 자신을 뒷바라지해주며 키워주셨다.
조인철도 부모의 기대에 부응했다.
마나 거부자인 것도 잊은 채 열심히 공부해서, 마침내 뉴서울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대학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첫 발작이 찾아왔다.
심장이 터질듯한 고통.
그제야 조인철은 자신의 신세를 깨달았다.
마나 거부자.
어차피 시한부 인생.
대학에 합격하면 뭘 해?
어차피 죽을 텐데.
침대에 누워서 몸도 가누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폐나 끼치다가, 고통 속에서 절망하며 죽어가겠지.
조인철은 밤새 고민하다가 무작정 집을 나왔다.
그리하여 시작된 은둔생활.
사람들이 많이 없는 곳만 골라서 다녔다.
TV나 뉴스, 인터넷 같은 건 관심도 없었다.
스마트폰도 버렸고.
하지만 그의 부모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발견한 전단지.
거기엔 실종자 명단이라며 자신의 이름과 사진이 떡하니 나와 있었다.
'아! 아직 날 찾고 계셨구나.'
눈물이 났다.
너무나 고마웠다.
마나 거부자 잉여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니.
그래서 포기시켜 주기로 마음먹었다.
삶을 정리하자.
'나만 사라지면 돼.'
자식이 나 하나밖에 없나?
비록 슬퍼하시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자신이란 존재가 잊혀지고 나면 남은 가족들은 행복해질 것이다.
조인철은 25층 건물 옥상 난간으로 기어 올라갔다.
"후우,"
심호흡 한번 하고.
막상 삶을 끝내려고 하니 너무나 두렵다.
뛰어내리기 전에 조인철은 주위를 둘러봤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아왔던 세상을 기억하려고.
맞은편 건물에서 보이는 커다란 전광판, <속보>라면서 긴급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뉴스 안 본 지도 꽤 됐다.
뭐, TV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끊어버렸는데.
죽는 마당에 뉴스는 무슨.
'뛰자.'
조인철이 난간에서 한 발을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응?"
큼지막한 붉은 글씨로 요란하게 강조된 뉴스 자막.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쏙 들어왔다.
"이게 대체···,"
눈을 의심했다.
진짜 저 내용이 맞아?
두려움에 사로잡혀 환각이 보인 건 아닌지.
'죽을 때 죽더라도···,'
확인해보고 죽자.
조인철은 옥상에서 내려와 건물 바깥으로 나갔다.
곳곳에서 소식이 전해졌다.
TV에서, 속보로 뿌려지는 종이 신문, 그리고 사람들의 대화.
뉴스는 진짜였다.
조인철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 살 수 있는 거야?'
※ ※ ※
삼한 제국 모든 언론사와 방송사에서 일제히 터져 나온 속보.
<태홍 바이오 제약, 김태주 회장이 또 한 번 해냈다.>
<시한부 마나 거부 중증 환자 20명, 1차, 2차 임상 대성공,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일상으로 복귀.>
<마침내 일어난 기적, 우리는 인류의 위대한 업적을 동시에 목격하고 있다.>
<삼한 제국 황궁 홍보 대변인, 마나 거부증 치료제 양산 임박 예고.>
<3차 임상 시험을 위해 지원자 선정 작업 중, 모든 절차 및 집행은 제국 정부 보건복지부에서 담당하기로 결정.>
<3차 임상 대상에 포함되기 위해 제국 각지에서 문의 쇄도.>
<희망이 온다.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치료제가 출시되기까지 버티는 자가 승자다.>
└ 에이, 저거 쌩구라지. 그 병을 어떻게 고쳐?
└ 구라는 무슨! 황궁 홍보 대변인이 할 일이 없어서 기자회견 하고 앉았냐?
└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이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몰라.
└ 맞아. 지금까지 그가 만든 약을 봐. 모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거잖아.
└ 흐흐흐, 자랑스럽다. 국뽕 치사량이네.
└ 주모! 셔터 내려!
└ 이러다 탈모 치료제도 나오는 거 아냐?
그리고 뉴스와 너튜브에 동시에 나온 인터뷰.
- 처음엔 긴가민가했습니다. 효과는 있었지만 하루가 지나면 그냥 그랬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약효가 비약적으로···,
- 약효가 어땠냐고요? 저 1년을 꼬박 누워만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번 더 뛰어볼까요?
- 제 남은 인생은 그분을 위해 살 겁니다. 사랑합니다!
- 그분요? 그저 빛이죠. 제가 굳이 이름을 말 안 해도 아시죠?
- 전국 마나 거부자 환우님들! 끝까지 버티세요. 금방 좋은 세상이 옵니다.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아메리카 공화국에서도 소식이 알려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계속 TV만 바라보고 있는 빌리 피트먼 대통령과 참모들.
"저게 다 사실인가?"
"···이미 확인해봤습니다. 삼한 방송에 나온 시험 대상자들, 이전에 모두 초중증 환자들이었습니다."
"초중증?"
"네, 대부분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
빌리 피트먼도 잘 알고 있다.
자가 호흡도 못 할 정도였다면 초증증, 말기,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
그런데 저렇게 멀쩡하다고?
순간!
"대통령님!"
"응? 뭔가?"
"곧 삼한 제국 황궁 홍보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내용은?"
"3차 임상에 대한 이야기라고···."
어떤 내용일까?
빌리 피트먼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딸이 시한부 판정을 받아 투병 중이었으니까.
이윽고.
방송에 나온 황궁 홍보 대변인.
"3차 임상 대상 선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상인원은 총 1000명, 그중 600명은 삼한 제국민 중심이며, 나머지 400명은 세계 각국 마나 거부증 환자들을 인구수에 비례해 초청할 계획입니다."
빌리 피트먼과 백악관 관료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해외까지 기회를 준다고?
삼한 제국은 건국 초기부터 아메리카 공화국과 우방국.
임상 대상자를 몇 명이나 배당해줄까?
"이번 3차 임상 시험에 포함될 국가는 유럽제국, 모스크바 왕국, 사우디 연방, 위구르 티벳 연방, 인도 무굴 제국, 말레이 연방, 라틴 아메리카 연합국, 뉴이집트, 브리티쉬 입헌국, 오스트뉴질랜드···,"
황궁 대변인의 입에서 국가 이름이 쭉 나열되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국가명은 나오지 않았다.
기자회견이 끝나고도 말이다.
혹시 놓쳤을까 다시 들어봤지만.
'···아아아.'
아메리카 공화국의 이름은 없었다.
백악관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저 3차 임상에서만 제외된 것일 뿐이라 해도 빌리 피트먼에겐···,
'아메리카 공화국엔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공급하지 않겠다.'
이렇게 들렸다.
※ ※ ※
선계(仙界).
전에 없었던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늙다리 신선들이 가득 모인 곳에서 난데없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무 신기한 거투성이야."
"와! 높은 집이다."
"올라가도 돼요?"
"꺄르르륵!"
신선들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어허, 뛰지 마라, 넘어져."
"사탕 하나 주랴?"
"와! 사탕이다!"
"난 초콜릿이 제일 좋아."
"자자, 시원한 음료수도 한 잔씩 하거라."
다들 천인들이었다.
원래 천계엔 아이들 숫자가 제일 많다.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하지만 어려서 죽은 아이들.
천인들은 보통 죽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천계에 올라온다던데.
실제 살아온 세월은 수백 년일 테지만, 어린아이의 감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다들 해맑을 따라왔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왔다.
물론 천계 꽃송이가 가득 들어있는 자루 하나씩을 매고.
해맑에게는 아예 아공간 호리병박과 아공간 가방을 넘겨줬다.
혼자서 가득 채워왔다.
그럼 받아서 무한공간에 넣고 빈 호리병과 가방은 다시 주고.
"독선님! 가득 채워왔어요오오!!!"
"벌써?"
"빨리 비우고 주세요. 한 번 더 갔다 올게요."
"아, 아니, 괜찮소. 이 정도면 충분하오. 곧 배송 신호가 올 때가 됐소."
"헤헤, 그런가?"
"일하지 말고 푹 쉬시오. 영화나 보던가, 먹고 싶은 거 없소?"
"···저, 비, 비싼 거 먹어도 되나요?"
"얼마든지!"
"아, 아이스크림요, ···나뚜루뚜루라고 하던데."
그게 뭐가 비싸다고?
"하겐디아즈도 드리지."
"와!"
당군악은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한 아름 꺼내 해맑에게 안겨줬다.
"얘들아! 빨리 와, 맛있는 거야. 같이 먹자."
"야호! 아이스크림이다아아아!"
"나도 먹을래."
"빨리빨리, 녹을지도 몰라."
"어허, 뛰지 말라니까."
이미 금정화와 음양화를 한차례 대량으로 보냈다.
그러고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천계의 꽃송이들.
선계 분위기도 달라졌다.
신선들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만 봐도 즐거웠다.
그래서 독선에 대한 요구 사항도 달라졌다.
"독선, 아이들 보는 영화나 드라마 없소? 애니메이션이나 인형극 말이오."
"맨날 야한 장면이나 폭력 장면 나오는 거말고, 순수한 영화 좀 틉시다."
"갓 등선해서 그런가? 어찌 자극적인 것만 좋아해?"
"···."
당군악은 기가 막혔다.
염치도 없는 신선들.
자극적인 것들은 지들이 좋아하면서.
가끔 작품성 높은 예술 영화 틀어주면 지루하다고 난리를 치는 것들이, 막장 아니면 보지도 않고, 심지어 에로 영화 보다가 걸린 주제에.
할 말이 많지만 참기로 했다.
애들 보는 데서 소란을 피울 수도 없는 노릇.
그런데 정작 큰 소란은 3층 게임장에서 일어났다.
"진짜 게임 뭐 같이 하네!!! 어? 천인이면 다냐?"
검선이었다.
"검선님 화났다."
"너가 너무 잘해서 그런 거잖아."
"이번 판은 져드려."
"아니, 지려고 했는데···,"
멀티플렉스에서 아이들에게 제일 인기가 많은 컨텐츠는 바로 게임.
천계에서 꽃을 가지고 와서 게임방에서 한참을 놀다 가는 것이 천인 아이들의 하루 일과.
원래 검선은 게임방의 절대 강자였다.
하지만 어린 천인에게 무참하게 깨졌다.
특히 마지막 판은 퍼펙트로 지고 말았다.
수치심에 부들부들, 떠는 검선.
"소, 손이 미끄러워져서, 다, 다시 해!"
비겁한 변명이었다.
< 임상 시험(2)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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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료제 대량 생산을 위한 준비 >
아메리카 공화국과 삼한 제국은 오래된 우방국.
그래서 이번 마나 거부증 치료제 3차 임상 제외 소식은 공화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삼한주재 아메리카 대사가 황궁으로 들어가 외교부 장관과 면담을 요청했지만 만나보지도 못했다.
그전과 입장이 바뀌었다.
기자들의 후속 취재가 이어졌다.
황궁 홍보실로 쏟아지는 문의.
결국 또 한 번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황궁 홍보관에 가득 모인 외신 기자들.
먼저 치료제의 안전성부터 걸고 나왔다.
"치료제에 부작용은 없습니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자세히 설명해주시길 바랍니다."
"치료제엔 우리가 독으로 알고 있는 물질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어요."
"독이? 어떤 성분이길래?"
"주로 마나를 삭제하는 성분이 들어간 독이죠. 그래서 적합자들과 각성자들에겐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마나 거부자에겐 해가 없고요. 병원과 연계해 마나 거부자에게만 주사제로 투여될 겁니다."
간단한 말이다.
각성자와 적합자에겐 독, 그러나 마나 거부자에겐 약.
아메리카 공화국 출신의 한 기자가 손을 들고 말했다.
"아메리카 공화국이 3차 임상에서 제외된 이유가 뭡니까? 정확한 사유를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황궁 홍보실 대변인이 대답했다.
"아직 개발 완료가 끝나지 않은 치료제입니다. 완전성을 위해선 불법 카피는 무조건 막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기자가 날 선 어조로 쏘아붙였다.
"우리가 치료제를 불법 복제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이미 전적이 있잖아요. 3차 임상에 참여한다는 핑계로 치료제 몰래 빼돌려 카피를 시도할지도 모르고."
"무슨?"
"피로회복 드링크제만 해도 그렇죠. 원본보다 못한 카피약 주제에, 더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 그건."
"또한 좀 전에 말씀드렸듯이, 주성분이 독(毒)인 치료제입니다. 멋모르고 복제를 시도해서 엉터리 카피약이 출시되면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대변인의 단호한 말에 질문한 기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또 다른 기자가 손을 들면서,
"그렇다면 향후 완전한 치료제가 나오면 아메리카 공화국에도 정식으로 출시될 예정입니까?"
"글쎄요. 아직 개발이 완료된 상태가 아니라서."
"그러니까, 개발이 완료되었을 때 말입니다."
"수출국 선정은 제 권한이 아닙니다. 나중에 따로 발표가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기자회견 마칩니다."
"자, 잠시만요! 아메리카 공화국에도 수천만 명의 마나 거부자들이···,"
기자회견이 끝났다.
이제 기사가 터질 시간.
아메리카 공화국의 모든 신문과 언론에서 마나 거부증 치료제에 관한 내용이 쏟아졌다.
<마나 거부증 치료제 개발 성공! 인류의 위대한 발걸음, 하지만 아메리카 공화국은?>
<아메리카 공화국, 3차 임상 시험에서 제외 확실.>
<기어코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완전한 치료제도 아메리카로 공급될지 불분명,>
<삼한의 대변인 말은 변명이 아니었다. 실제 치료제에 독성분이 가득. 무단 복제 시 매우 위험할 수도.>
<치료제 개발이 불가능할 거라고 떠들던 앵무새들 다 어디로 갔나?>
아메리카 시민들의 반응은,
└ 진짜 만들었다고? 거짓말 아냐?
└ 거짓말은 아니야. 삼한 제국에 친구가 말해줬어. 인터뷰에 나오는 환자들, 실제 초중증의 마나 거부자들이었고, 가뿐하게 일상생활 하고 있데.
└ ···하아, 내 동생이 마나 거부증인데, 어떻게 3차 임상에 포함될 방법이 없나?
└ 우린 제외국이니까, 심지어 치료제가 영영 수출 안 될지도 모르잖아.
└ 방법은 있어.
└ 뭔데?
└ 귀화해야지. 다른 나라로.
동시에 터져 나온 성토.
<불법 카피가 문제였다. 화이백 제약에 대한 비난 여론 들끓어.>
<화이백 CEO, 프레드 밀러의 입장은? 현재 어떤 코멘트도 내놓지 않고 있어.>
<정부도 책임이 있다. 불법 카피가 확실한데도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것이 실수.>
<마나 거부자 및 가족들, 백악관으로 몰려가 시위에 나서.>
<경찰 추산 1만 명, 집회 측 추산 50만의 시위대, 카피 사건 가담자, 구속 수사 요구>
└ 이게 다 프레드 밀러, 그 새끼 때문이야.
└ 기술도 없는 새끼가 복제약이나 팔아먹고.
└ 내가 진짜를 먹어봤잖아? 상대도 안 되더라. 가격도 싸고.
└ 화이백은 망해야 해. 그래야 진짜 피로회복 드링크도 들어오고, 마나 거부증 치료제도 들어오고.
※ ※ ※
빌리 피트먼 대통령은 백악관 긴급 참모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정보요원들을 투입해서 미리 알아봤다.
치료제는 진짜였다.
거의 완성된 거나 마찬가지.
3차 임상은 약의 완전성을 높이고 투여 횟수를 줄이는 작업에 불과할 뿐.
순식간에 여론이 뒤바뀌었다.
언론도 등을 돌렸다.
폭락하고 있는 지지율은 덤.
지금도 바깥에선 시위대의 함성이 들려왔다.
"주사제 방식으로 유통할 거라고?"
"네, 병원과 연계해서 엄격한 관리하에 치료제를 투여할 예정이랍니다."
"그렇다면 우회 수입은 힘들겠군."
"시도해 볼 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물량이 부족할 가능성이 커서···, 반드시 수출 대상국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후우."
빌리 피트먼은 깊은 후회의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카피약 사태를 무조건 빨리 해결했을 텐데.
현재 분위기가 심각하다.
같은 당 의원에게까지 공격받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 쪽은 차라리 애교 수준.
사람의 생명이 달려있다.
빌리 피트먼도 그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마나 거부증 치료제가 공급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딸 레이첼,
그 애를 살릴 자신은 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치료제를 구하면 된다.
하지만 다른 국민들은?
아메리카 대통령이란 자가 국민들은 나 몰라라 하고 자신의 딸만을 위해 치료제를 구해서 맞힌다?
재선은 물 건너간다.
정계 은퇴, 아니 사회적으로 사망,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다.
딸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아메리카 공화국 국민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태홍 바이오에도 직접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제국 정부에 문의하라는 답변만.
어쩔 수 없다.
빌리 피트먼은 마음을 다잡고 핫라인으로 삼한 제국의 황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전화가 안 되는 건 아닌지,
뚜우, 뚜우, 뚜우···,
그러나 다행히도,
딸깍,
전화를 받았다.
"접니다, 빌리 피트먼."
- 음? 왜 전화했소?
빌리 피트먼은 자세를 낮추기로 마음먹었다.
"다 내 잘못입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 뭘 말이오?
"불법 카피약 해결에 관한 정당한 요구를 묵살한 것 말입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사실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 허허, 거참! 왜 나한테 사과하는지, 난 당사자도 아니고 정작 사과받을 사람은 따로 있는데.
"대신 김태주 회장에게 전해주십시오. 어떤 요구든 받아들이겠다고, 제발 아메리카 공화국에 치료제를 공급해주시면 결코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 그야 어렵지 않소. 사람의 생명이 달린 일인데···, 하지만 그쪽에서도 성의는 보여주셔야지.
"성의라면?"
- 화이백, 프레드 밀러, 그냥 그대로 둘 거요?
"천만에요. 공화국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할 예정입니다."
- 그럼 해보시오. 지켜보고 있을 테니.
"네, 보여드리죠. 마음에 꼭 들 겁니다."
처벌 수위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삼한 황제의 말.
사실 그도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아메리카 공화국에도 수출이 되어야 하니까.
- 아! 그리고 아공간 아이템이 필요한데, 혹시 남는 거 있소? 값은 제대로 치러드리리다.
"바로 준비해서 보내드리죠."
이제 공은 빌리 피트먼 대통령에게 넘어왔다.
※ ※ ※
화이백 CEO, 프레드 밀러는 예상치도 못한 날벼락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마나 거부증 치료제가 진짜였다고?
거기에 아메리카 공화국 3차 임상 제외.
그 원인이 고스란히 화이백에게 씌워졌다.
여론이 완전하게 등을 돌렸다.
"제기랄!"
마나 거부증 치료제 성공이 알려지자마자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주주들이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라며 문제를 삼고 나섰다.
"망할 놈들이!"
피로회복 드링크제 출시 후,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을 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프레드 밀러는 몸을 사리기로 했다.
당분간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이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마나 거부증 치료제라고?
까짓거 복제하면 되지.
안되는 게 어딨어?
실제로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성공하면 아메리카 공화국의 영웅이 된다.
하지만 프레드 밀러의 생각은 망상에 불과했다.
<빌리 피트먼 대통령, 화이백에 대한 긴급 명령권 발동.>
<화이백 약품 제조 시설과 공장, 저장고 압류 지시.>
<불법 카피로 얻은 수익금 환수 조치, 추징금도 최고 한도로 부과.>
<미 공화국 수사국 RBI, 화이백 본사 압수수색 예정.>
"이런 퍼킹!!!"
일단 몸을 피하는 게 좋을 듯,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벌컥!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검은 양복의 사람들.
"프레드 밀러?"
"누, 누구?"
"RBI 수사팀, 당신을 불법 복제와 탈세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이미 늦었다.
"···변호사 불러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그거야 당신 권리니까. 그런데 변호사 부를 돈이나 있어?"
"무슨?"
"오늘부로 은행 계좌, 부동산, 모조리 압류된 거 모르시나?"
"왓더···,"
"당신 지금 끝장난 거야. 하지만 밥은 걱정하지 마. 교도소에서 평생 먹여줄 테니까."
"···."
절망 가득한 프레드의 눈동자.
재기의 기회가 있으려나?
아마 없을 것이다.
※ ※ ※
삼한 제국.
현재 모든 방송과 언론은 모두 마나 거부증 치료제 이야기뿐.
약이 출시되었을 때 일어날 경제적 효과, 혜택을 받게 될 환자들의 인터뷰, 어떻게 하면 3차 임상 대상자에 포함될 수 있을지.
제국 곳곳의 중증 마나 거부자 혹은 그 가족들이 구례로 몰려왔다.
제발 임상에 참여시켜 달라면서.
아예 태홍 바이오 본사 앞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안전을 위해 인근 지리산 방어부대가 출동해 태홍 바이오 직원들 경호에 나설 정도.
백서연이 직접 나서 진화에 나섰다.
"3차 임상에 대한 모든 절차와 권한은 제국 정부에게 위임했습니다. 공정한 방식을 통해 대상자를 선정하기로 약속했으니, 믿고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만, 제발 마음을 굳게 가지고 기다려주십시오. 이런 행동은 치료제 생산에 차질을 빚을 뿐입니다."
다행히 잘 해결되었다.
제국 정부도 화답했다.
진짜 심각한 증상의 환자들, 생명 유지 장치를 주렁주렁 달고도 당장 내일을 장담하지 못하는 환자들은 특별히 임상 시험 대상자에 포함시켰다.
해외에서도 중증의 마나 거부자들이 항공기를 통해 속속 입국하고 있었다.
태주도 뉴서울 공장 연구소에서 연구원들과 함께 임상 시험을 위한 치료제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대량생산이 시작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약재도 확보해야 하고, 설비도 갖춰져야 하고, 공장 직원들 교육도 시켜야 하고,
그 기간 안에 3차 임상 끝낸다.
3차 임상은 뉴서울의 대형 종합 병원에서 실시될 것이다.
주사제 투입 방식으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투여할 예정.
그래서 의사나 간호사 등, 의료인들도 참여할 계획이었다.
태주는 연구원들과 구례에서 파견된 베테랑 작업자들도 불렀다.
나중엔 이들이 생산을 담당할 주요 인력이 될 터.
"이, 이건 무슨 꽃입니까?"
"마나 거부증 치료제에 들어갈 핵심적인 재료요. 이게 없으면 못 만들어요."
"아아···, 꽃향기가 너무 좋습니다. 냄새만 맡아도 힘이 펄펄 나는 것 같습니다."
"소중하게 다뤄주세요. 꽃잎 하나라도 낭비하지 말고."
"당연하죠."
일단 천계 꽃이라는 재료를 낭비하지 않고 알뜰하게 추출하는 방법부터.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금정화와 음양화의 성분 추출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추출된 재료와 독물을 섞어 최적화된 조합식 레시피도 만들었다.
약효를 최대한 끌어올려 본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조합에 의해 만들어진 10가지의 샘플 치료제들.
재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찌르르르,
이렇게 3일, 혹은 4일에 한 번씩, 천계 꽃 배송이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태주는 공유창고를 열었다.
"하하하."
보기만 해도 좋다.
공유창고에 꽃송이가 한가득.
그리고 아공간 가방과 호리병박에도.
두 가지 아공간 아이템은 당군악에게 넘겼다.
저쪽에서 꽃들이 많이 넘어와야 하니까.
'아공간이 몇 개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황제에게 부탁했으니 조만간에 응답이 오겠지.
서둘러 물건을 옮기고, 호리병박과 아공간 가방에 든 것도 싹 비우고, 빠르게 물건 채워 보내고.
이제 스마트폰 확인.
태주는 당군악이 최근에 찍은 영상을 실행했다.
그러자,
- 태주 아저씨! 우리가 보낸 꽃으로 사람들 많이 많이 살려주세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선계에 웬 아이들?
- 아이스크림 너무 맛있어요. 맛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초콜릿도 말씀드려야지!
- 맞아! 젤리와 사탕도.
- 우리 무랍이가 검선님보다 게임 잘해요!
- 검선님, 무랍이에게 져서 울었데요.
- 이놈들아! 내가 언제!
- 게임 패드도 부쉈데요.
- 이 고자질쟁이들이!
- 와아! 도망가자!
검선도 특별 출연해줬고.
다음 영상에서 아이들이 나온 이유를 알았다.
당군악이 직접 나와서 설명해주었다.
"아!"
천인들이었구나.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천사들.
갑자기 눈이 시큰해졌다.
지구의 마나 거부자들을 위해 천사들까지 나서주고 있었다.
이어지는 당군악의 말.
- 혹시 아이들을 위한 영상 컨텐츠는 없을까? 게임도 좋고, 과자, 음료수 같은 간식거리에, 아동복이나 신발, 뭐, 그런 거 말이네.
당연히 있지.
없어도 만들어야지.
최고급품으로 잔뜩 준비해야지.
< 치료제 대량 생산을 위한 준비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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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산 개시 >
태주는 뉴서울 공장 연구실에 있었다.
3차 임상은 뉴서울에서 실시될 예정.
대상 인원수가 1,000명이다 보니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태홍 바이오 뉴서울 지점의 마석우 부장과 송수희 팀장도 지원을 나왔다.
"회장님!"
"아! 잘 오셨어요."
매우 반가워하는 기색의 태주.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 하고 왔습니다."
"할 일이야 아주 많죠."
"뭐든 시켜만 주세요."
마석우와 송수희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려 마나 거부증 치료제 개발에 합류하는 일이다.
선택받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임무.
나중에, 아주 먼 미래에 역사책에 실릴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김태주 회장과 함께 치료제 개발에 기여한 태홍 바이오 직원 마석우씨와 송수희씨.' 하면서.
태주는 10개의 스마트폰 공기계를 마석우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이건?"
"여기 화면에 OTT 플랫폼 어플 보이죠?"
"보, 보입니다."
"다 내 계정으로 가입해 둔 겁니다. 여기에 10살 이상의 아이들이 볼만한 애니메이션과 인형극 같은 거 다운받아 주세요. 펭귄과 상어 나오는 건 꼭."
"···네?"
"진짜 중요한 일입니다."
멍한 표정의 마석우.
그러나 중요한 일이라는데 어쩌겠나?
"어어, 아, 알겠습니다."
아직 하나 더 남았다.
"그리고 수희씨는 이 카드 들고 장난감 쇼핑몰 가셔서 거길 싹 털어오세요. 역시 10살 이상의 아이들이 가지고 놀만 한."
"···털어오라는 의미가?"
"말 그대로입니다. 쇼핑몰 전체를 사도 좋으니 장난감 종류별로 모조리 구매해서 적당한 창고에 넣어두세요. 카드 한도 없으니까 펑펑 써요."
"네, 네."
마석우와 송수희는 어리둥절했다.
마나 거부증 치료제 개발의 대업에 동참하려고 여기 왔다.
하지만 아이들 보는 영상과 장난감을 구해오라니?
"참! 아이들 옷과 신발도 사이즈 별로 구해다 주세요."
고아원에 보낼 건가?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회장님 지시다.
무조건 따라야지.
※ ※ ※
시베리아 개척 군단.
군단 직속 엘리트 마수 스페셜 레이드 팀을 이끄는 김웅방 준장은 부대 최고 사령관 양일국 군단장의 호출을 받았다.
"멸마! 준장 김웅방, 부르심 받고 왔습니다."
"오! 어서 오게. 불편한 데는 없지?"
"없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사근사근한 양일국 군단장.
"일단 앉아."
"괜찮습니다."
"어허, 내가 불편해서 그래."
김웅방은 부담스러웠다.
자신보다 두 계급이나 높은 사령관이 자신에게 이렇게 대하는 이유가 뭘까?
다 아들의 후광 덕분일 터.
"김준장, 오늘부터 사냥을 중단해야겠어."
"중단이라뇨."
"다른 임무가 주어질 거야."
"···."
사냥 중단이라고?
한창 레이드에 가속이 붙어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속속 복원되고 있는 판에.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나?
'설마 태주 때문에···?'
알아서 기는 것이다.
잘 보여서 점수를 따보려고.
얼마 전 고비 초원 개척 부대 서강진 중장에게도 연락이 왔다.
이리로 올 생각 없냐고, 만약 와준다면 지휘관 자리도 주고, 승진에도 힘써보겠다며.
그러나 김웅방은 거절했다.
안 그래도 미안한 마음뿐인데,
아들 덕을 보는 건 염치없는 짓이지.
"애초에 여길 온 이유가 최전방에서 마수와 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계속 싸우게 해주십시오."
"하하하, 나도 명령이라 어쩔 수 없어. 자네 아드님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그럴 줄 알았다.
태홍 바이오 김태주.
제국의 떠오르는 실세.
이것 때문에 상관들도 자신 앞에서 극히 저자세.
"죄송하지만 아들 덕을 볼 생각 없습니다. 그럴 처지도 아닙니다."
"응?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오해라니요?"
"이걸 보게. 오늘 하달된 명령서야."
김웅방은 양일국 중장이 건넨 명령서를 읽어보았다.
거기 적힌 내용들.
-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 마나 거부증 치료제 개발 성공.
- 대량 생산을 위한 재료 확보 시급, 제국군 전격 지원 결정.
- 모든 제국국 병력은 즉시 현 임무를 중단하고 재료 확보에 만전을 기하라.
- 개척 사단이든, 방어 사단이든, 예외 없이 적용한다.
'···아!'
아들 때문이 맞긴 하지만 자신이 생각한 그게 아니었다.
김웅방은 멍하니 명령서를 보고 또 봤다.
아들이 이룩한 위업.
'또 해냈구나.'
정말이지 너무 대견하다.
직접 마나 거부증을 극복한 것도 모자라 남을 위해 치료제도 만들어냈다.
저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어떤가? 할 거지? 마수 때려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임무야."
"지금 당장 병력을 이끌고 약재 채취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자네가 지휘를 맡아줘야겠어. 여기 재료 목록이 있으니 숙지하고."
"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멸마!"
시베리아 개척 사단뿐이 아니었다.
삼한 제국의 전 부대가 재료 채취에 나섰다.
그리하여 뉴서울, 구례 태홍 바이오 공장에 속속 재료가 공급되고 있었다.
※ ※ ※
백서연은 미리내 그룹 이병우 회장과 면담하고 있었다.
한때 미리내 그룹을 일선에서 지휘했던 이기언은 아직 병원에서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 맏아들인 이병우가 그룹을 이어받았다.
"미리내 제약 지분을 인수하시겠다고?"
"네, 제가 제안드리는 가격입니다. 본인 지분, 차명 지분, 움직일 수 있는 우호 지분까지 싹 다!"
이병우는 피식 웃었다.
3,000억?
지금 장난하나?
시건방지게.
"이봐, 백서연!"
"네?"
"지금 장난하는 거야? 지분들 다 합치면 55%가 넘어. 이 가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하! 전에 미리내 그룹 전략 기획실에 있었다고 했지? 어떻게 그 머리로 일했는지 모르겠군."
백서연의 안색이 굳어졌다.
다 쓰러져가는 회사를 인수해 주겠다는데.
"지금 마나 거부증 치료제 임상 성공으로 잔뜩 고무된 건 알겠어. 하지만 넌 선을 넘었어."
"제가요?"
"말도 안 되는 금액으로 내 지분을 가지고 가겠다고?"
"그럼 얼마를 원하시는데요?"
"동그라미 하나 더 붙이면 생각해보지."
"···."
현재 치료제 대량 생산이 시급한 상황, 충분한 생산 설비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 기존 제약회사를 인수하는 것, 그것도 대규모 시설을 완비한 공장을.
"회장님,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낄낄낄, 착각은 네년이 하는 거지. 미리내 제약? 상황이 안 좋은 건 맞아. 팔 수도 있어. 하지만 태홍 바이오에겐 절대 안 팔아!"
"하아, 끝내 이렇게 나오시겠다는 거군요."
"뭐? 어쩌라고? 김태주 회장에게 가서 일러바치게?"
"아뇨, 일러바칠 분은 따로 있어요."
"무슨···,"
그때였다.
벌컥!
미리내 그룹 회장실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한 남자.
"어이, 네가 이병우란 놈이구나."
"···."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지?"
백발 성성한, 그러나 다부진 근육질의 몸을 자랑하는 황궁 비서관 금수호였다.
이병우 회장은 깜짝 놀랐다.
왜 저 사람이 여기에?
"백사장, 아직 안 끝났나? 갈 길이 바쁜데, 어서어서 진행해야지."
저벅저벅 걸어와 책상 위에 놓인 지분 인수 제안서를 보더니.
"3,000억? 부실투성이 회사를 이 비싼 가격에 사려고?"
백서연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촉박해서요.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설비는 확보해야죠."
"쯧쯧, 너무 비싸, 동그라미 하나 빼. 아니, 기존 부채를 떠안겠다면 하나 더 빼야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의 이병우.
지금 사람을 앞에 두고 뭐 하자는 짓인지.
이런 식으로 자신의 회사를 빼앗아 가겠다고?
"아, 아무리 제국 정부라도 이건 월권입니다. 법이 있는데···,"
"법? 그거 좋지. 나도 법을 좋아해. 제국이 폐하의 입맛에 따라 운영되는 국가는 아니니까."
"그걸 아시는 분이 왜?"
"나도 법대로 하려고, 어디 보자, 미리내 그룹이 세무조사를 받은 지 얼마나 됐지?"
"네?"
"흐음, 아무리 생각해도 세무조사론 너무 약해. 이참에 검찰을 투입해 탈탈 털어볼까? 예를 들어 숨겨둔 비자금이라든지."
"···."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이병우.
심장이 두근거렸다.
협박성 수준의 말이지만 진짜 할 것 같았다.
미리내 그룹이 어디 법을 지켜가며 성장했나?
털면 우수수 나온다.
툭 건드려도 쏟아진다.
"우리가 몰라서 가만히 놔둔 줄 아나? 제정원에, 검찰에, 네놈들 비리가 서류 상자 수십 개씩 가득가득해. 네놈들 따윈 당장 집어처넣을 수 있었어. 미리내 직원들 밥줄 때문에 참고 있었던 거고."
금수호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네? 무려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만드는 일이야. 그 대업을 위해선 미리내 그룹 따윈 산산조각 내 공중분해 시킬 수 있어."
이병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황제 다음가는 권력의 금수호, 아니 이건 황제의 의중이었다.
"자, 여기 지분 인수 제안서가 있다. 네가 직접 적당한 가격으로 고쳐봐."
어쩔 수 없었다.
이병우는 떨리는 손으로 동그라미 하나를 지웠다.
"겨우?"
하나 더 지웠다.
3,000억이 30억으로 변했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의 금수호.
백서연이 나섰다.
"됐습니다. 이 금액으로 하죠. 저도 헐값에 후려치고 싶진 않으니까."
"역시 우리 백사장이야. 마음이 넓어."
이병우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마음이 넓다고?
저게?
"좋아! 빠른 시일 안에 모든 지분 정리해서 김회장에게 넘겨, 아! 차명 지분도 마찬가지야. 하나라도 숨겼다간···, 알지?"
이병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후회스럽다.
처음에 3,000억 제안이 들어왔을 때 사인을 해야 했었는데.
앞으로 몇 가지 절차만 끝내면 미리내 제약은 태홍 바이오의 소유, 이로써 대규모 생산 설비가 확보됐다.
※ ※ ※
사실 3차 임상은 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까지 나온 결과만으로도 약효가 입증되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대량 생산에 돌입하기엔 무리.
설비도 모자라고, 무엇보다 재료가 충분치 않았다.
선계 꽃은 물론, 다른 독물 재료들도,
공장 직원들 교육도 시켜야 하고.
각 공장에서 파견 나온 숙련된 제조 노동자들이 태주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도 치료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가족 중에도 마나 거부자가 있는 직원들도 많았다.
3차 임상이 진행됐다.
삼한 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마나 거부증 환자들.
각 100명씩, 10개 그룹으로 나누어 뉴서울 대형 병원에 분산 수용됐다.
1일 차.
첫 번째 투약이 시행됐다.
그리고 2일 차, 3일 차, 4일 차, 5일 차.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F그룹 환자군이 다른 그룹보다 효과가 월등합니다. 모두 완치 판정을 내려도 문제없겠는데요?"
"제일 효과가 떨어지는 그룹은 B그룹입니다. 아무래도 한두 차례 더 접종이 필요합니다."
"모든 그룹에서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때가 됐다.
태주와 백서연, 최동일 지점장이 모여 최종 단가를 논의했다.
"재료비, 인건비, 그리고 유통비까지 합하면 1회분 기준으로 50만 원 정도가 적당할 듯합니다."
5회분까지 맞는다고 봤을 때 드는 비용은 250만 원.
"의료보험 공단은요?"
"수가 적용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삼한 제국에선 가난 때문에 접종하지 못하는 환자는 없을 것이다.
"생산에 들어갈까요?"
아직은 확보한 재료가 충분치 않았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태주는 결정을 내렸다.
"네, 생산 시작합시다."
이름도 정했다.
해외 수출까지 감안해서.
마나 거부증 치료제(Mana Rebuff Cure).
줄여서 MRC.
제국 정부는 즉각 특허를 통과시키고 식약청 허가도 내줬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
아직 치료제를 받지도 않았는데 허가가 떨어졌다.
심지어 약이 생산되기도 전에 선금부터 들어왔다.
모두 안달이 나 있는 상태.
대체 언제 올까?
F그룹에 적용된 제조식을 기준으로, 구례 태홍 바이오 공장, 뉴서울 공장, 그리고 백두 바이오 사이언스에서 일제히 마나 거부증 치료제, MRC가 생산됐다.
파주는 공장이 완공되는 대로 합류할 것이고, 이젠 태홍 바이오의 소유가 된 미리내 제약도 일주일 안에 생산에 돌입할 예정.
목표는 삼한 제국을 비롯한 전 세계 각국의 초중증 환자들을 위한 1차 투여분 공급.
한 번만 맞아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진 못해도 산소호흡기를 떼고 자가호흡 단계에 이르는 데는 문제가 없다.
각국에서 군 수송기가 뉴서울 공항에 착륙했다.
거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MRC 이송 작전.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눈이 빠져라, 대기하고 있던 환자들에게 치료제가 투약됐다.
<드디어 마나 거부증 치료제 MRC 공급 개시.>
<각국 초중증 환자들부터 투약 시작.>
<효과는? 예상대로였다. 3차 임상의 기적이 그대로 재현돼.>
<단 한 번 맞았을 뿐인데 초중증 환자의 의식이 돌아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마나 거부자들.>
<제약의 신이 지구에 강림하셨다. 김태주를 찬양하라!>
└ 김태주!!!
└ 태주 킴!!!
└ 완전히 찢었다.
└ 진짜 너무너무 감사하다. 내 동생이 살아났어.
└ 축하해.
└ 고맙다.
└ 흐흐, 기다리다 보면 내 차례가 오겠지?
└ 그래, 끝까지 버티라고!
세상이 들썩이고 있었다.
모두가 마나 거부증 치료제 MRC 이야기뿐이었다.
당연히 개발자 김태주의 이름도.
└ 와! 정말 이 사람 신인가?
└ 최소한 천사는 맞다. 1회분 가격 봐. 겨우 400달러야.
└ 화이백 프레드 밀러 그 새끼였으면 아마 백만 달러는 받았을걸?
└ 이 사람 얼굴 사진 없어? 방에다 붙여놓고 매일 절하게.
└ 찾기 힘들어. 삼한 제국 정부에서 엄청나게 단속하더라고. 인터넷이고, SNS고 올라오는 즉시 지워버리던데.
└ 왜 그렇게까지?
└ 신이잖아! 신의 얼굴을 함부로 보면 안 되지.
김태주의 얼굴은 제국 정부의 통제로 인해 널리 퍼지진 않았지만 그 이름만은 세계인들에게 똑똑히 각인됐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마나 거부증 때문에 사망한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기적이었다.
< 생산 개시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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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계는 오늘도 즐겁다. >
MRC 1차분 출고를 마치자마자 태주는 미리내 제약 공장으로 갔다.
기다리고 있던 백서연이.
"회장님."
"인수는 끝났나요?"
"거의 끝나가는 중입니다. 곧 소유권이 넘어올 겁니다."
"흐음, 그런데 공장이 왜 이렇게 썰렁하죠?"
실제로 그랬다.
명색이 대기업 제약회사 공장인데, 마치 정전이라도 된 것처럼 설비들이 멈춰있었다.
직원들도 몇 명 보이지 않고.
"회사가 어려워서, 그동안 공장이 잘 돌아가지 않았어요. 정리해고 당한 직원들도 많고, 월급도 몇 개월씩 밀려있었고."
"쯧, 안타깝네요."
진작 인수했어야 했다.
피해를 본 직원 중에 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도 있었을 텐데.
'이병우, 그놈도 똑같은 놈이군.'
딱 기억해뒀다.
"해고된 직원들 전원 복직시키고 밀린 월급은 무조건 일괄 지급하세요. 연봉도 우리 직원들 기준으로 올려주시고."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파주 공장 진행 상황은요?"
"정연희 지점장이 직접 나서서 완공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거기도 곧 생산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파주도 방문해야겠다.
가서 격려라도 해줘야지.
재료는 충분하다.
이제 곧 치료제를 쏟아낼 수 있을 터.
지금까진 설비와 노동력이 부족했을 뿐.
전 세계 마나 거부자의 숫자는 약 2억 명, 그들이 모두 5회차까지 MRC를 투여받는다고 가정하면 당장 필요한 개수만 10억 개.
게다가 지금도 많은 아이가 마나 거부자로 태어나고 있다.
최종 목적은 마나 거부증을 감기보다 못한 평범한 질환으로 만드는 것.
'마나 거부자구나? 괜찮아. 주사 맞으면 나아.'
'마나 거부자라서 조퇴하고 싶다고? 고작 그 핑계로? 꾀병 부리지 마. 안 돼!'
'태어난 아이가 마나 거부자입니다. 네, 다른 질환은 없어요, 천만다행입니다.'
이럴 날이 머지않았다.
이제 개인적 일을 처리해볼까.
태주는 뉴서울 대형 완구 쇼핑몰로 갔다.
솔직히 송수희가 구매한 장난감들이 마음에 안 들었다.
우선 양이 턱없이 적다.
한도 없는 카드 주면서 다 긁어오라고 했는데.
무슨 죄다 블록쌓기 같은 교육용 아니면 불빛 번쩍번쩍하는 장난감 칼에다 총, 인형···, 차라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나 더 보내는 게 낫지.
분명 10살 이상이라고 말했는데.
아이를 낳아보지 않아서 그런가?
'이런 건 남들 시키면 안 되겠어.'
일단 배송은 보류했다.
직접 사서 보내야지.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게 딱 하나 있었다.
하지만 고작 하나.
지금 완구 쇼핑몰에 가는 이유가 그걸 대량 구매하려고.
"이 제품, 배터리는 얼마나 오래가나요?"
"마나 결정체 배터리를 적용해서 하루 10시간 작동한다고 가정하면 3개월 이상은 충분합니다."
마음에 든다.
이참에 발전기도 몇 개 더 보내고.
엘리트 결정체야 무한공간에 잔뜩 들어있으니까.
"이런 거 몇 개 있습니까? 전시된 게 전부인가요?"
"아뇨. 창고에 더 있습니다. 얼마나 더 필요하세요?"
"다!"
"···네?"
"다 주세요. 여기 물류창고로 배송해주시면 됩니다. 지금 당장."
"아, 알겠습니다."
부피가 생각보다 크다.
다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항상 선계로 물건을 보낼 때마다 드는 생각.
'아공간 가방이 몇 개 더 있으면 좋겠는데.'
아공간 아이템.
사실 생각해보면 매우 신기한 물건.
대체 어디서, 누가 만드는지 모르겠다.
무한공간이야 신선의 술법이니 그렇다 쳐도 아공간 아이템은 지구에서 만들어지는 거 아닌가?
'각성자 제작 스킬로 아공간 아이템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수상하다.
다른 마법 아이템도 의심스럽고.
시대를 벗어난 물건.
거의 오파츠나 다름없다.
'···영혼 연결자가 만든 물건일 수도 있어.'
아니, 거의 확실할 것이다.
'나도 그렇고, 천마도 그렇고···,'
영혼 연결자들은 확실히 더 있다.
숫자가 몇 명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중에 만나게 되겠지.'
천마 같은 놈만 아니면 된다.
잠시 후, 물류창고에 완구 쇼핑몰에서 보낸 물건들이 도착했다.
무한공간에다 집어넣으려고 하는 순간!
찌르르르.
마침 배송 신호가 떴다.
"오케이!"
기막힌 타이밍.
공유창고에 들어있는 천계 꽃들을 옮기고, 아공간 가방과 호리병박에 든 꽃도 비우고.
'시간은 충분해.'
과거 혼원무상독령공 대성으로 인한 영혼 연결 이벤트 이후, 공유창고도 커지고, 반짝임의 지속 시간도 늘어났다.
덕분에 물건 받고 보내기에도 여유가 생겼다.
먼저 공유창고부터 채우고, 그리고 두 개의 아공간 아이템에도 물건을 넣고.
그래도 아직 반짝이고 있었다.
시간이 넉넉해서 좋다.
그나저나 이 물건들, 천인들이 마음에 들어 할까?
※ ※ ※
삼한 제국과 전 세계로 공급되기 시작한 마나 거부증 치료제, MRC, 초중증 환자들을 위한 1차 긴급 투여분이었다.
비교적 증상이 가벼운 거부자들은 후순위로 밀렸다.
하지만 누구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메리카 공화국 빌리 피트먼 대통령의 딸, 레이첼 피트먼도 초중증으로 분류되어 다행히 치료제를 투여받을 수 있었다.
쌔액, 쌔액, 쌔액.
산소호흡기를 착용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레이첼.
"시작할까요?"
"어, 어서!"
백악관 주치의가 MRC 치료제가 든 주사기를 링거 줄에 달린 약물 투입구에 찔러넣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빌리 피트먼과 그의 아내.
과연 어떻게 될까?
치료제의 효과는 이미 검증되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시 후,
새근, 새근, 새근.
한결 숨소리가 편안해진 레이첼.
그러더니,
슬며시 눈을 떴다.
"오오오!"
"레, 레이첼!"
심지어 산소호흡기를 제 손으로 벗기고.
"아빠, 엄마···,"
대체 얼마 만인가?
딸의 목소리를 들어본 지가.
"레이첼, 괜찮니?"
"으음, 편안해. 숨도 잘 쉬어지고."
"하하하하! 그래, 이젠 더 좋아질 거다."
빌리 피트먼은 크게 웃었다.
이로써 그도 약효를 실감했다.
아무리 목숨이 경각에 달해도 MRC 주사 한 대만 맞으면 산다.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이게 다 누구 덕분인가?
태홍 바이오의 김태주.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 기적이었다.
'삼한의 류태현 황제가 부럽군.'
김태주 회장의 단점이라면 그가 아메리카 공화국 시민이 아니라는 것.
빌리 피트먼은 스마트폰을 들어 백악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날세."
- 대통령님, 레이첼 양은 어떻게 됐습니까?
"한결 나아졌어. 고비는 넘겼네."
- 아아!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그건 그렇고, 전에 내가 지시한 거 알아봤나? 아공간 아이템 말이야."
- 현재 소유자와 접촉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가격을 세게 불러서.
"될 수 있으면 꼭 구하게. 부탁하네."
- 노력해보겠습니다.
현재 국가 소유의 아공간 가방이 하나 있다.
마수 토벌 작전 때 군부대 지원용으로.
그걸 주면 되겠지만 하나로는 성이 찰까?
나름 강대국인데 최소 2개 이상은 준비해야지.
그리고 그걸 빌미로 김태주 회장을 아메리카로 초청할 생각.
한번 만나보고 싶다.
카피약에 대해 사과하고 감사를 표하고 싶다.
진심으로.
※ ※ ※
선계(仙界).
멀리서 선학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꺄악, 꺄악!"
곤륜 선인에게 당한 상처도 제법 회복되어 머리에 붉은 빛깔이 돌아온 선학.
태상노군이 학에서 내렸다.
이제 그의 상징이 된 옷차림, 검정색 수트에 구두, 그리고 선글라스.
한 손은 주머니에, 나머지 한 손은 클러치 백을 들고 당당한 걸음으로 선계 멀티 플렉스에 들어갔다.
그가 제일 처음 간 곳은 주선이 운영하는 칵테일 바.
"마티니 한 잔."
"···오랜만에 오셨소. 노군."
"뭐, 많이 바빴네. 놀고먹을 수 없는 처지라,"
꿈틀,
주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놀고먹는다니,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은데.
"선불이요."
그러자 태상노군이 무심코 바 스탠드에 던진 신용패가,
툭!
미끄러지듯 나아가 주선 앞에 놓였다.
스으윽!
"아예 석 잔 긁게. 안주도 하나 내어오고, 치즈나 햄 같은 거 말이야."
"···."
갈수록 기분 나쁘네.
신용패를 던져?
아무리 큰손이라도 그렇지.
'진상노군이군.'
그래도 손님인데 어쩔 수 있나.
"여기 있소. 그런데 엉덩이도 무거운 노군께서 어쩐 일로?"
"흐흐흐, 그야 좋은 소식 전하러 왔지."
"좋은 소식이라니?"
"다들 내게 감사해야 할 거야."
태상노군은 클러치백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기대감.
선도 인상에 관한 말을 하려고 직접 왔다.
그러면 신선들이 얼마나 자신을 추앙할까?
비록 독선만큼은 아니지만 선계 이인자의 지위는 확고하게 굳힐 수 있을 터.
"도화궁 서왕모와 합의를 봤네."
"무슨?"
퐁!
언제 들어도 경쾌한 듀퐁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휘유우우, 이제부터 우리 신선들에게 선도를 하루에 한 개씩 지급하기로 결정했어."
노군이 뿜은 희뿌연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이게 좋은 소식이야."
어때?
죽이지?
그런데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지는 주선.
"이 미친 영감탱이가! 여기가 어디라고 연초에 불을 붙여?"
뭐지?
태상노군은 어리둥절했다.
지금 나한테 소리친 건가?
그때였다.
서걱!
태상노군의 눈앞에서 번뜩이는 검광.
"히익?"
불을 붙인 담배 끝이 정확하게 잘려 나갔다.
검선이었다.
"무, 무슨 짓인가? 갑자기 검을 들이대?"
"애들 드나드는 장소에서 뭐 하는 짓이오? 노군!"
"···애, 애들이라니."
그러자 휴게실에서 쉬고 있던 신선들도 우르르 다가와 손가락질하며 욕했다.
"공기 청정기를 백 대 가동해도 모자랄 판에 담배를 피워?"
"아이들 폐암 걸리면 책임질 거요?"
"쯧쯧, 저 흉측한 담뱃갑 그림 보고도 피울 생각이 드나?"
"기고만장이 극에 달했어."
"입혀주고, 키워주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야."
"라이터 3일간 압수!"
"그걸로 되겠소? 아예 손모가지를 분질러야지."
태상노군은 당황했다.
하루에 선도 하나씩 주겠다고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왜 대접이 이렇지?
하루에 선도 하나.
백수 신선 놈들이 시위까지 하면서 주장했던 요구 사항 아닌가?
상위 계 대표자 모임에서 상제와 날을 세워가며 이뤄낸 성과였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애들 핑계 대면서 사람을 몰아세워?
여기 아이들이 어디 있다고?
마침 독선도 위층에서 내려왔다.
"태상노군 아니시오."
"오! 독선! 왔군. 글쎄 내 말 좀 들어보게. 대표자 회의에서 선도를 하루에 하나···,"
"잠깐!"
당군악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누가 여기서 담배 폈소?"
그러자 태상노군에게 집중되는 신선들의 손가락.
"노군이요."
"노군이 폈소."
"라이터 퐁퐁거리면서 뻔뻔하게 피더만."
'어우! 꼬라지 하고는···.'
"저게 신선이 할 짓이오?"
"매너가 신선을 만드는 법인데."
찌릿!
태상노군을 노려보는 당군악의 시선.
"아, 아니, 진짜 다들 왜 이래? 내가 무슨 잘못을···,"
순간!
우르르르르!
"밖으로 나가서 놀자."
"맞아! 계속 게임만 하면 폐인이 된대."
"근데 이게 무슨 냄새야?"
"으으으···,"
계단을 통해 아이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헉!"
태상노군은 깜짝 놀랐다.
'진짜 아이들? ···아! 천인들이로군.'
그제야 이해가 간다.
물론 좀 억울하긴 하지만.
'미리 이야기해주면 어디 덧나나?'
멀티플렉스에 놀러 온 모양.
모두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등 뒤엔 다른 세상에서 쓰이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고, 손에는 머리통만 한 공과 희한하게 생긴 신발도 신고.
"오늘은 내가 공격할 거야."
"아니야! 넌 골키퍼 해야지."
"왜 나만 키퍼야? "
"공을 잘 잡잖아."
"그래? 그럼 나 골키퍼 할게."
신선들도 그들을 보자 신이 났다.
"우리도 끼워줄 테냐?"
"네! 빨리 나가요."
"아이스크림 내기, 콜?"
"반칙 쓰면 안 돼요! 날아가도 안 되고."
"선기는 절대 쓰지 않겠다."
"그럼 딜!!!"
함께 나가서 편을 먹고 공놀이, 아니 축구를 하는 신선들과 천인들.
당군악은 흐뭇한 미소로 그들을 바라봤다.
바로 그때!
찌르르르,
지구로부터 온 배송 신호.
'왔구나.'
당군악은 공유창고를 열었다.
서둘러 물건을 빼내면서, 천계 꽃을 공유창고에 넣고,
태주가 보내온 물건들, 공기계 스마트폰과 아공간 아이템, 그리고 아이들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오! 이런걸?"
모두 비우고 다시 천계 꽃으로 채우고.
'더 보낼 건 없지?'
당분간 선도 대신 꽃만 보낸다.
치료제가 충분히 생산될 때까지는 말이다.
이제 확인해보자.
태주가 보낸 물건들.
평범한 장난감인 줄 알았는데···,
'천인들이 좋아하겠어.'
당군악은 밖으로 나갔다.
천인과 신선들이 멀티플렉스 앞마당에서 한창 공놀이 중이었다.
우선 한 대를 꺼냈다.
순간 당군악에게 집중되는 시선.
"응?"
"저건···,"
"자동차?"
"삼각뿔이면 벤츠 아니오?"
"그런데 왜 저리 작아?"
어린이용 전동카였다.
유아용보다 조금 더 큰.
몸집이 작은 어른도 탈 수 있을 정도.
속도도 상당히 빠르다.
당군악은 전동카 위에 올라탔다.
'좀 끼나?'
어쩔 수 없다,
몸을 줄이는 수밖에.
우드득, 우드드득, 우득!
축골공을 시전하자 작아지는 당군악의 몸.
그리고 악셀을 밟자,
위이이이잉!
검선이 만들어놓은 도로 위로 전동카가 질주했다.
"우와!"
"와아아아아!"
"독선님, 멋져요!"
"저도 타고 싶어요."
환호성을 지르며 당군악이 탄 전동차를 쫓아가는 천인들.
부끄럼도 모르는지 신선들도 따라서 쫓아왔다.
"허허허!"
"요지경이구나."
"도, 독선, 한 번만 타봅시다."
검선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직접 건설한 선계 도로, 만든 보람이 있었다.
그동안 혼자 사용하느라 외로웠는데,
이젠 함께 달릴 수 있겠다.
'도로를 더 넓힐까?'
길이 연장도 하고.
아예 천계까지 이어지도록 만들어야지.
< 선계는 오늘도 즐겁다.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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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마법사. >
마나 거부증 치료의 시대가 열렸다.
천형의 불치병이 주사 몇 대로 치유되고 있었다.
그전에도 기적이 있긴 했다.
매우 희박한 확률로 마나 거부증을 극복한 사례 말이다.
과연 어떻게 기적이 이루어졌을까?
과학자들이 자세히 조사해보려 했지만 표본도 극히 부족했고, 극복했던 사람들이 연구 대상이 되는 걸 거부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의 통계는 확보했다.
기적을 경험한 마나 거부자들의 공통점.
하나같이 권력자들, 혹은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마나 거부증 완치 기적 또한 가진 자들만의 전유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돈이 많고 집안도 좋아서 다른 마나 거부자들보다 더 섬세한 관리를 받았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여기엔 사람들이 잘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그들은 기적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유럽 제국의 네오 베를린의 한 고층 빌딩.
블랙 타워, 흑마탑이라 불리는 건물 최상층에 모인 5명의 사람들, 유럽의 밤을 지배하는 블랙 마피아의 장로들이었다.
"에드워드, 거부증 치료제는 분석해봤습니까?"
"어렵게 하나를 구해 들여다봤어요. 주로 마나를 삭제시켜주는 독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분석이 안 되는 물질도 섞여 있더군요."
"어떤?"
"글쎄, 아무튼 통째로 먹어봤는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건 분명했어요. 마치 신성력 같은···,"
"신성력? 지구에도 신이 존재했나?"
"그럴 리가요, 어쨌든 갑자기 그런 약이 튀어나오다니, 진짜 예상도 못 했어요."
"눈 뜨고 당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마나 거부증 치료.
사실 흑마탑, 블랙 마피아의 주요 비즈니스 중 하나였다.
흑마법을 이용해서 마나 거부증을 고쳐왔다.
저 먼 이계의 차원에서 최하급 마물을 소환해 마나 거부자들의 심장에 이식하는 방식.
이 최하급 마물은 크기가 매우 작지만 고유한 특성이 있었다.
숙주에 기생해 마나를 천천히, 오래오래 흡수한다.
비록 심장에 마물 하나를 키우면서 살아가야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효과는 이거 말고도 더 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마물을 이식한 대상자가 소환자의 노예가 된다.
자연스럽게 호감이 생겨나는 식으로.
또한 흑마법의 힘으로 시스템 각성까지 시킬 수 있고.
권력자와 부유한 자들의 마나 거부자 가족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걸로 돈도 벌고, 세력도 넓혀나갔다.
"아메리카 공화국 빌리 피트먼 대통령도 치료제를 받았겠죠?"
"너무 아쉬워요. 빨리 접근했어야 했는데 괜히 뜸 들이다가···,"
빌리 피트먼의 딸 레이첼 피트먼도 블랙 마피아가 노리던 목표.
증세가 악화하여 대통령이 절망에 빠지면 딸의 치유를 대가로 슬며시 접근해 백악관을 장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치료제라니!
그것도 삼한 제국에서.
이게 바로 블랙 마피아 최고 장로 회의가 열린 이유였다.
"김태주, 그놈, 혹시 영혼 연결자일까요? 아니면 제자거나."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만약 확실하다면 연금술 계열의 영혼일 듯합니다."
"훗! 연금술? 고작 그따위 걸로."
"무시하면 안 됩니다. 시스템 각성 마스터들도 그의 독엔 꼼짝 못 한다는 말이 들릴 정도니."
"그래봤자 연금술이죠."
가소로울 뿐이었다.
위대한 흑마법에 비교조차 안 되는 능력.
"그분께서 노여워하실까 두렵습니다. 카르멘, 어떠시던가요?"
"별말씀 안 하셨지만···, 알잖아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이란 걸."
"나도 압니다. 카르멘, 당신 생각을 묻는 거예요."
"하아! 당연히 기분이 안 좋으시겠죠. 아무리 그분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습니다."
"어떻게 하려고요?"
"최소한 우리 일을 방해한 것에 대해 응징 정도는 해야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놔두면 안 된다.
알고 했건 모르고 했건 그건 중요치 않다.
그놈 때문에 블랙 마피아의 주요 비즈니스가 중단됐고, 체면이 구겨졌으며, 그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모두 응징에 동의하십니까?"
"네."
"동의."
"죽입시다."
"서두르는 게 좋겠어요. 놈을 죽이면 치료제 생산이 중단될지도 모르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방식은?"
"하청을 씁시다. 암살 길드 놈들 말이에요."
"아! 그 쓰레기들? 뭐, 한번 쓰고 버리기엔 부족함이 없긴 합니다."
그러자 에드워드라고 불렸던 장로가 말했다.
"쓰레기들로는 부족할 수도 있어요."
"그럼?"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삼한 제국에 갈 일이 있어서."
"일이라니요?"
"전에 이야기했습니다만, 우리 조직원도 아닌 놈이 뱀파릭 터치를 사용한 정황이 있었다고,"
"아! 프리 바르셀에서 있었던 그 사건 말이군요."
보고가 들어왔었다.
뱀파릭 터치, 생기 흡수.
흑마법이 유출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도와줄 건 없을까요?"
"필요 없습니다. 저 혼자 충분합니다. 그깟 연금술 정도는."
그렇게 응징이 결정됐다.
장로들은 7클래스 경지의 흑마법사들.
따라서 삼한 제국의 김태주는 이미 죽어있는 거와 마찬가지다.
의심의 여지 없이,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 ※
선계(仙界).
당군악은 멀티플렉스 한 관을 천인들 전용관으로 만들었다.
역시 펭귄과 상어가 제일 인기.
천인들에겐 여기가 바로 천국이었다.
지루한 천계보다 훨씬 나았다.
아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넘어왔다.
천인들은 다 공짜.
신용패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천계 꽃을 가지고 오든, 안 가지고 오든.
영화를 보는 아이도 있고, 게임을 하는 아이도 있고, 또···
"모두 준비됐니?"
검선이 만든 도로 위에 길게 늘어선 전동카들.
선두엔 해맑은 해맑 선녀가 타고 있었다.
"네네, 선녀님!!!"
"그럼 가자!"
위잉! 위이이이잉! 윙윙윙윙!
빠르게 출발하는 전동카.
"달려!"
"와아아앙!"
"꺄아아악!"
"내가 간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귀곡 선인이 당군악에게 말했다.
"저거 오래가오?"
"3개월은 끄떡없다고 들었소."
"그래도 중간중간에 충전소를 만들어야지. 그러려면 발전기들이 더 필요할 텐데."
"태주가 보내주기로 했소, 아마 다음 배송 때 발전기가 더 올 거요."
윙윙윙윙!
전동카가 도로를 질주했다.
벌써 한 바퀴 돌았나?
"쯧쯧, 불안해. 아무리 천인이지만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아이들은 천인들이다.
사고가 나도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놀라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뿐.
"단주 선인이 만든 균형 부적이 있어서 전복되거나 쓰러지진 않을 거요. 안전벨트도 메고 있고."
"애 키우기 힘든 세상이군."
"우리가 더 노력해야지."
"그래서 말인데, 이건 어떻소?"
"뭘 말이오?"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만한 공간을 만들어봅시다. 여기 선계에."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라,
"음? 어떤···?"
"예를 들어 놀이공원 말이오. 이름 붙이자면 선계월드."
"허허!"
놀이공원.
괜찮은 생각이다.
땅도 남아도는데.
"놀이기구들은 나무로 만들어도 되고, 태주에게 놀이공원 설계도를 부탁해봐야겠군."
"허허, 회전목마, 관람차도 빼먹지 마시오. 그 뭐냐···, 물을 흘려보내 미끄러지는 것도 만들고, 아! 물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워터파크도 좋겠소."
"···근데 어째 주선이 더 기대하는 것 같소만?"
"험험, 기분 탓일 거요."
옆에 있던 주선 태백 선인도 호기심이 생기는 듯 물었다.
"선계월드? 그건 또 뭐요?"
"청룡 열차를 비롯한 온갖 놀이기구들이 있는 공원이지."
"청룡? 동해 용왕이 여기서 왜 나와?"
"그게 아니라···,"
당군악이 설명을 시작했다.
호기심이 생기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주선.
"어떠시오? 동참하시겠소?"
"못할 것 없지."
선계월드의 건설 계획.
솔직히 생각이나 했을까?
"태주 대협 덕분에 이런 것도 시도해보는군."
"참 고마운 사람이지."
"영원히 함께 했으면 좋겠소. ···아직 인간인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해도."
점차 표정이 어두워지는 당군악.
"하아, 그게 요즘 내가 하는 걱정이요."
주선이 물었다.
"인간이라는 것이 걱정이다?"
"비슷하지."
"정해진 수명 때문에? 등선하면 되지 않소? 이미 선기가 가득 차 있을 텐데."
"그의 세상에 선계가 있을 리가."
"···듣고 보니 그렇군."
태주의 세상은 이곳과 전혀 다르다.
선계도, 천계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
"사실 수명이 문제가 아니요. 태주는 오래오래 살 거요. 다만 지구에 천마 같은 놈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걱정되어서···,"
"영혼 연결 말이군. 흐음,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지. 천마보다 더 강한 놈이 나타날지도."
대화를 듣고 있던 갈홍 선인이 무심코 말했다.
"쯧, 선도가 아니라 천도를 보약 삼아 먹이면 이런 걱정 안 해도 될 텐데."
그때였다.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드는 당군악.
"···천도?"
"그렇소. 감질나게 선도 백 개씩 먹는 것보다···, 어?"
"아!"
"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탄성,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흐음, 천도라."
"맞아. 원숭이 새끼도 처먹는 천도를 태주 대협이 왜 못 먹나?"
"대책을 세워봅시다."
선계에서 지구로, 천도 배송 계획이 수립되는 순간이었다.
※ ※ ※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마나 치료제 MRC 생산은 순조로웠고, 2차 출고도 곧 이루어질 예정.
태주는 파주에 있었다.
드디어 태홍 바이오 파주 공장이 완공됐기 때문이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준공식은 약식으로.
소수의 회사 사람들끼리 모여 간단하게 하려고 했지만 의외로 많이 왔다.
정연희, 서필명, 류진철 등 기존 파주의 인원, 백서연을 비롯한 구례 본사 직원, 뉴서울 지점 직원, 그리고 백두 그룹 정욱철 회장까지.
행사는 금방 마쳤다.
바로 공장을 돌려야 하니까.
태주는 일백이를 품에 안고 정연희와 함께 공장을 둘러봤다.
"곧 있으면 설비가 가동될 거예요."
"수고 많으셨어요. 이것저것 하느라 정신이 없죠?"
"괜찮아요. 빠르게 MRC를 찍어내야죠. 그치?"
"냐앙!"
"호호, 너 진짜 귀엽다. 이리 올래?"
폴짝!
태주의 품에서 정연희에게로 넘어가는 일백이.
"복마검법 수련하기도 바쁘실 텐데."
"수련은 잠시 쉬는 중이에요. 가끔 아예 잊어버리는 것도 수련의 한 방식이라서."
수련 안 하기는 개뿔.
서 있는 자세, 가끔 손을 드는 행위, 걸음걸이, 다 예사롭지 않다.
'걸어 다니는 검이군.'
한창 날카로울 때다.
아직 기세를 숨기지 못해 그런 듯.
도가의 검이라는 게 그렇다.
대성하기 전엔 날카롭기 그지없다.
대성하고 나면 노화순청, 반박귀진으로 기세가 잔잔한 물결처럼 조용해지고.
"몇 성입니까?"
"90%까지 왔어요. 하지만 마지막이 어려워요. 대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빠르다, 빨라.
"파주 시내로 한번 나가볼까요?"
"사람들이 회장님, 알아볼 텐데···."
제국 정부의 통제로 사진이 퍼지진 않았지만, 여긴 파주 아닌가. 김태주 회장의 고향.
"괜찮습니다. 마스크에 모자, 선글라스 정도면···,"
"아! 그럼 되겠네요."
여우 가죽 코트도 입고 오지 않았으니.
태주는 정연희와 함께 공장 밖을 나섰다.
현재 삼한 제국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파주.
곳곳에서 건물이 건설되고 있었다.
아파트, 백화점, 호텔, 상가···, 그리고 쭉쭉 뻗은 도로.
태주는 번 돈의 전부를 파주에 투자하고 있었다.
그래도 마르지 않는 돈줄.
자금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든든한 캐시카우, 피로회복 드링크제가 있으니까.
공장이 늘어나 생산에도 문제가 없을 테고.
'피로회복제 같은 건강 보조 식품을 더 개발해야겠어.'
물론 마수 레이드와 관련한 약도 함께.
돈도 돈이지만 마수 때려잡는 것도 중요하다.
당장 시베리아 횡단 철도 복원도 그렇다.
마수 밀집지대 때문에 교통로가 막혀있으니 해외 수출에도 지장이 된다.
비행기로 운송하면 수송비가 너무 많이 들고.
'바닷길이 문제야.'
해양 마수들을 어떻게 처리할 방법이 없나?
바닷길이 막혔다는 건 지구가 동맥경화에 걸렸다는 것과 똑같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고 계세요?"
"냐앙?"
"···아!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무 몰두했나?
어느새 파주 시내에 들어섰다.
거리를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
다민족 국가인 삼한 제국이라 인종도 다양하다.
"사람들 숫자가 엄청나네요."
"맞아요. 유동 인구까지 합하면 파주 인구가 거의 4배 이상 늘었어요. 거의 외지인들이죠."
그만큼 파주가 살만해졌다는 의미.
"대부분 건설 노동자지만, 파주로 이사해오는 사람들도 많아요."
갑자기 뿌듯해지네.
기분이 좋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예전엔 보잘것없었던 촌 동네가 이렇게나 발전했다.
변화는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더더욱···,
'어?'
태주는 순간 발걸음을 멈칫했다.
"캬악!"
일백이도,
"음? 왜 그러세요? 일백이도···,"
"쉿!"
진득한 마기의 냄새.
여기도, 저기도,
숫자가 꽤 많다.
'뭐지? 그냥 섞여 들어온 놈들은 아닌데.'
그중 하나는 마기의 농도가 엄청나게 짙었다.
태주는 태연하게 정연희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깜짝 놀라는 정연희
"어머?"
그러나 태주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난 뒤,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함께 그냥 앞만 보고 걸었다.
'움직이는구나.'
마치 포위하듯, 사방에서 태주를 따라왔다.
확실하다.
목표는 자신이다.
'어떻게 알았지?'
마스크에 모자, 선글라스까지 착용했는데도 말이다.
'여기서 처리할까?'
아니다.
애먼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다.
'조용한 곳으로 유인하면 좋은데.'
태주는 긴장한 표정의 정연희를 힐끗 쳐다봤다.
이럴 땐···,
- 놀라지 말고 제 말 들어요.
전음(傳音)이 적절하다.
일종의 복화술, 그리고 기에 목소리를 압축해 가까운 사람에게 전달하는 음공의 일종.
- 저어기, 시내 너머 공사 현장 있죠? 백두 호텔 짓고 있는 곳, 들었으면 손을 잡아봐요.
손을 힘주어 꼭 잡아 오는 정연희.
- 일백이 데리고 먼저 가서 인부들 완전히 피신시켜요. 아무도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해했으면···,
또 한 번 손을 꼭.
- 좋아요, 지금 가요! 그리고 다 피신시켰으면 저한테 메시지 날려주시고.
정연희는 태주의 손을 놓았다.
"잠시만 화장실 다녀올게요."
"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
그제야 곁눈질로 자신에게 접근하는 마인들을 관찰했다.
'각성 문양이 없네? ···아! 가렸구나.'
자세히 보면 희미하게 보인다.
얼굴에 두꺼운 칠을 한 모양,
태주는 한동안 시내에 머물렀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그리고 잠시 후,
지잉!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꺼내서 확인해보니.
- 사람들 다 피신시켰어요.
그럼 시작하자.
< 흑마법사.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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