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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디즈의 의심을 사지 않게 오전에는 그의 업무를 도와준 후에 아무리 봐도 곧 쓰러질 것 같은 ABT 연구소로 돌아왔다.

"볼드가 왜 저러지?"

디즈의 말에 파키케팔로사우루스를 보니 어제 고릴라와 오크를 던져둔 건초 더미 위에 머리를 박아대고 있었다.

볼드가 박치기를 할 때마다 건초 안에서 뭔가가 움찔거렸으나 디즈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디즈의 뒤를 따라 연구소로 들어가면서 볼드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올려세워 주었다.

꾸워어어어

더 열심히 박치기를 하는 볼드.

볼수록 하나 데리고 있으면 괜찮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볼드의 배설물을 치우기 위해 디즈가 방독면을 쓰고 작업복을 입은 채로 나오는 걸 보고서 마음을 돌렸다.

그걸 구경하고 있는 사이, 라이시가 찾아왔다.

"오늘도 뵙네요, 알파 씨."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라이시는 지금 내게 매우 중요한 정보원이다.

밝게 맞았다.

"오늘도 식물들 돌보다 오셨나 봐요?"

"네. 제가 하는 일이 늘 같죠."

"위쪽 분위기는 어떤가요?"

라이시가 한숨을 길게 뿜었다.

"후우······. 말도 못 하죠. 프로이데와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건지 원······. 그렇게 되면 다른 도시 권역이 계룡 권역을 넘볼 텐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저런······. 그런데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얻어갈 게 있나요?"

"프로이데에서 보관하거나 팔고 있는 영원빙정이 탐나는 거겠죠. 빙결계 마법사들에게 효과가 가장 좋다고는 하지만, 그 자체로도 좋은 영약인 건 분명하니까요. 프로이데에서는 영원빙정의 판매금액 일부를 분명히 계룡 권역에 재투자하고 있어요. 동식물 보호기금을 조성한다거나, 토템 제작 재료를 지원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그걸로는 성에 안 찬다는 거겠죠."

그리고 민감한 문제를 하나 꺼냈다.

"대우 문제도 없지는 않겠죠?"

계룡 권역은 자연주의 권역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많은 주술사, 샤먼, 심령주의자, 드루이드 같은 이들이 모여 산다.

다른 도시에 이들과 같은 능력을 가진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발전된 권역으로 가면 좋은 일자리와 대우를 보장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계룡 권역에 모인 이들 중에는 그런 타 권역의 복잡함에 질리거나 적응하지 못해 이곳에 정착한 이들도 많았다.

기업이나 대학교의 연구원, 혹은 소규모 공방 같은 것을 꾸려 삶을 영위해나가기는 하지만 이들이 창출해내는 경제적 가치는 그리 크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다른 도시에 있었다면 적당한 규모를 가진 많고 많은 기업체 중 하나 정도의 크기인 프로이데 마탑이 계룡 권역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상당한 지경.

계룡 권역이 차지하는 의미는 '다른 도시 권역 간의 완충지대', '기계 문화가 주류인 다른 권역에 비해 생명 중심적인 면이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프로이데 마탑이 그곳에 존재해서'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자연스레 프로이데 마법사들은 스스로를 1등 시민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엄연히 말해 계룡 권역의 시장 격인 대군장부터가 자연주의자들에게 반신으로 모셔짐에도 불구하고.

'마탑주가 말했지. 프로이데 마탑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게 언제부터인지 모른다고.'

다르게 말하면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길게 이어진 차별의식이 이 문제에 내재 되어 있는 것이다.

가면을 쓰고 대군장에게 접근한 남자는 그런 미묘한 열등감과 부당함을 건드린 것이 아닐까?

예언은 아주 조그만 기폭제일지도 모른다.

그 아래 가득 쌓여있는 갈등이라는 폭탄을 터트릴 기폭제.

조심스레 어려운 부탁을 꺼냈다.

"위에 올릴 보고서에 조금 더 상세한 상황과 정보를 담았으면 하는데, 혹시 라이시 씨와 디즈 씨께 동행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어렴풋하게나마 파악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제법 고민하던 둘이 내게 말했다.

"좋아요. 데려가 드릴게요. 하지만 절대로 소 주위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허리에 차고 있는 그 칼자루도 어떻게 하고요."

바로 칼자루를 풀어 바지 뒤쪽에 쑤셔 박았다.

움직일 때 거치적거리긴 해도, 이걸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디즈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자기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근래에 광포화된 동물 몇을 죽였는데, 그 중 틀림없이 위쪽에서 탈출한 녀석이 있을 거라면서, 시비가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라이시와 함께 대군장과 강경파들이 머문다는 달이 머무는 계곡의 소로 향했다.

올라가면서 차츰 분위기가 변했다.

아래쪽은 정말 캠핑을 즐기러 온 느슨한 분위기였다면, 소에 다가갈수록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다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약이나 환각제를 했는지 표정과 눈이 풀린 이들도 종종 보였다.

그중 압권은 등딱지를 다 열고 다니는 거북이 수인이었는데, 양손에 물병을 들고 쉬지 않고 물을 퍼먹으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 것이, 진짜 광기를 느끼게 했다.

'엮이면 진짜 X된다' 하는 경각심이 절로 들었다.

마침내 소에 이르렀다.

거신족의 발자국에 물이 담겨 만들어졌다 설화가 있을 만큼 커다란 소였다.

계곡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소를 이루기 시작하는 지점, 줄기에 케이블과 회로가 잔뜩 솟아 나온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저게 계룡 권역의 대군장······.'

아마 케이블이 묻힌 줄기 안에는 예의 그 수액에 절여진 슈퍼컴퓨터가 있을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몇 명인가 우리를 제지하기는 했지만 라이시 덕에 큰 문제 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렇게 뒤쪽에서 잘 보이지 않는, 대군장 뒤쪽에서 조금 떨어진 공간으로 이동한 뒤, 라이시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대군장이 펼쳐놓은 장막이 시작돼요."

"네? 보기엔 아무것도 없어 보여요."

"대군장이 허락한 사람만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어요. 보세요."

그리고 라이시가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아까 봤던 눈빛이 맛이 간 거북이가 소리를 지르며 대군장에게로 뛰어들었다.

"으헤헤헤! 에헤헿!"

라이시가 알려준 곳에서 대군장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 닿을 경계에 들어서자마자, 거북이 수인은 제자리에서 넘어지고, 구르고, 공중제비를 돌고, 헤엄을 쳐댔다.

그리고는 몸을 반대로 돌려 튕기듯 대군장에게서 멀어졌다.

"흐허허헣!"

정말 마음으로만 생각하려 했는데, 거북이 수인의 웃음을 듣고서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안타깝다, 안타까워. 한창으로 보이는 친구가······."

푸훅하고 웃음을 터트린 라이시가 설명했다.

"대군장의 구형 슈퍼컴퓨터에서 발생하는 독특한 전자파와 대군장이 그동안 말 나눴던 정령들의 파장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라고 해요. 설명이 길었지만, 쉽게 말해 대군장이 자기 모습을 감추고 허가받은 사람만 들여보내게 하는 일종의 결계예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대군장의 모습은 보이잖아요."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이죠. 일단 전 안에 들어 갔다 올게요. 말씀드렸지만 절대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지 마세요. 아시겠죠? 안쪽으로 들어오지도 마시고요."

라이시가 대군장을 향해 걸음을 내딛자, 아까 봤던 거북이 수인과는 다르게 몸이 아예 사라졌다.

"오······."

신기해하며 약 30분 정도 멀리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을 무렵, 뒤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객이 계셨군. 오늘 올 사람은 의사가 전부라고 들었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가면을 쓴 남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이상하게 낯이 익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 구면인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뭘 물어야 하지?

거신족과의 관계?

대군장을 조종하는 이유?

프로이데 마탑과의 충돌로 인해 그쪽이 얻어갈 이득?

남자가 내게 다시 물었다.

"왜 대답이 없지?"

질문을 결정했다.

"당신은 어째서 대군장에게······."

그때, 사라졌던 그대로 라이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시 역시 가면 쓴 남자를 보고 흠칫 놀란 뒤, 내게 말했다.

"대군장이 알파 씨를 만나고 싶대요."

"이 사람을?"

예상치도 못한 말에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가리키는 동안, 가면 쓴 남자의 목소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마구 흔들렸다.

039.

039.

위타천에게 선물 받아 차고 다니는 귀걸이, 정식 명칭은 개인용 스마트 통신 디바이스지만 안에는 온갖 기능이 내재되어 있다.

사진 촬영, 개인 인증 기능, 차량과 링크 시 네비게이션 기능, 팔찌나 시계와 같은 별도의 디바이스에 연결해서 원하는 이미지를 화상으로 띄워주는 기능 등등.

설명서를 대충 읽고 던져본지라 정확히 어떤 기능들이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제법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기능은 통역 기능이다.

세상이 이 지경까지 발전했는데도 언어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대한 패권국 없이 도시 권역 단위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디바이스 덕에 큰 불편함은 없다.

욕설, 사투리 등등의 미묘한 뉘앙스까지도 거의 완벽에 가깝게 표준화된 말로 바꿔 들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디바이스의 단점 아닌 단점이 하나 있으니, 발성기관을 거쳐 나온 음파의 진동만을 언어 발화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나뭇가지의 떨림이나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조절해 의사를 표현하는 목인의 언어는 이 귀걸이로도 전혀 통역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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솨아아아-

산뜻한 바람이 대군장의 잎새를 두드리며 지나가는 소리였다.

나는 지금 라이시의 뒤를 따라 대군장이 펼쳐놓은 장막의 안에서 대군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장막 밖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밖에서 보는 대군장의 모습은 오랜 기간 마을의 초입에 뿌리 박고 서서 사람들에게 큰 그늘을 제공해주는 거대한 느티나무 같았다.

그 줄기에서 뻗어 나와 위와 아래로 향하는 케이블과 전선은 마치 나무에서 원래 솟아나온 것마냥 위화감 없이 섞여들었고. 신비로움과 영험함마저 다가오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나뭇잎 사이로 얼핏 비치는 햇살 한줌을 마주하며 그 영험함에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떠오를 정도.

하지만 그것은 대군장이 보여주고 싶은 자기 모습이라 했던가.

가까이서 본 대군장은 줄기가 우람하지도, 가지가 성기지도, 나뭇잎이 빽빽하지도 않았다.

크기는 분명 컸지만, 응달에서 쓸쓸히 말라가는 나무의 모습이 저럴까.

빽빽한 케이블과 전선은 군데군데 피복이 벗겨져 안쪽의 금속 선들이 번쩍이고 있었으며, 노후된 슈퍼컴퓨터가 돌아가는 굉음이 간헐적으로 소리를 키웠다가 이내 잠잠해지곤 했다.

그것은 슈퍼컴퓨터를 안에 품은 예언자 목인이 아니라, 생명 유지 장치를 끌어안은 채 간신히 호흡하는 노인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이미 다음 대가 진즉 탄생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이상하리만치 오래 버텨 오신 거죠."

손이 닿기만 해도 떨어지는 대군장의 푸석한 껍질 한 겹을 벗기며 라이시가 말했다.

대군장은 아직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듯, 다시 한번 가지를 떨었다.

라이시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나뭇잎도 몇 개 떨어질 정도였다.

라이시가 그런 대군장과 대화를 나눴다.

보기에는 라이시가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대화 내용은 분명히 상대가 있었다.

"또 그 소리세요? 대체 그 옛 주인이 누군데 그렇게 찾으시는 거예요. 그런 말씀은 저 가면 나중에 들어오실 분이랑 하시고, 앞에 계신 분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 땅에 발붙인 사람 중에 당신께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지만 콕 찝어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고 하신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대군장의 껍질을 쓰다듬은 라이시가 나를 한 번 보고 대군장에게 말했다.

"알파 씨에요. 하실 말씀 있으면 천천히 하셔도 돼요. 알파 씨에게는 제가 전해드릴게요."

나뭇가지가 사르르 떨었다.

그 사이 사이로 통과하던 햇빛의 길이 뒤바뀌며 아래의 그림자를 이지러트렸다.

그것은 내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 라이시에게 하는 말이었다.

"평소에는 예언의 앞부분만 힘주어 말하시더니, 오늘은 뒷부분도 말씀하시려나 보네요. 잠시만요. 제가 듣고 알려드릴게요."

라이시가 손에서 몽글몽글한 기운을 만들어내서 대군장에게 가져다 댔다.

대군장의 말을 라이시가 전해주기 전, 내가 먼저 말했다.

"가장 순수한 자는 땅의 옛 주인을 지워내리니 그를 주의하라."

바람이 멎었다.

살포시 귓가를 간질이던 나뭇잎 소리도, 고막을 긁는듯한 슈퍼컴퓨터의 굉음도 사그라들었다.

정적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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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장은 자신의 이름을 잊었다.

일부러 잊으려 노력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주위에 머물렀다 사라져간 사람과 이름들을 하나씩 잊어가다보니 자신의 이름 또한 잊어버렸을 뿐이었다.

그렇게 긴 세월 살아온 목인 주위에 사람들이 모였고, 목인은 어느새 계룡 권역을 통솔하는 대군장이 되어 있었다.

책임감 때문에 슈퍼컴퓨터를 끌어안고 예언자의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 언제인지도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을 추앙하는 이들이 다른 권역의 복잡함과 난해함에 대해 토로할 때, 대군장은 그저 나뭇가지를 한 번 흔들어주고 말았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는 않았으니까.

어느 날 자신에게 찾아와 이 권역에 자리를 잡아도 되겠냐고 묻는 마법사 한 무리에게 대군장은 그러라고 했다.

땅의 옛 주인들이 떠난 뒤로 남은 곳은 많았으니까.

자신의 주위에 모인 사람이 대를 이어가며 마법사들과의 갈등을 마음속에 새길 때, 대군장은 미움을 품어 좋을 것은 없다 조언했다.

그가 오랜 시간 지켜온 바로는 그랬으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군장은 조금씩 지쳐갔다.

그럴 때마다 어릴 적 보았던 이 땅의 옛 주인들, 거신족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거대하고 자애로웠다.

늘 다른 이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던 대군장에게 처음으로 그늘을 씌워준 것도 거신족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지쳐 대군장이 가지를 축 내리고 있으면, 거신족 중 자애로운 자들이 기운 내라며 일부러 스스로의 손가락에 상처를 내어 대군장에게 피를 한 모금 먹여주기도 했었다.

긴 생애 동안 다른 이들을 보호해온 대군장이 보호받는다고 느낀 때는 그때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강대한 종족조차 차츰 모습을 감추었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들의 강대함은 다른 종족들이 보기에 큰 위협이라 모두가 단합해 거신족을 없앴다고 했다.

살아남은 거신족들은 몸집이 작은 거신족들 뿐, 그나마도 다른 종족들과 섞이며 그들은 계속 작아지고 있다고 했다.

대군장은 거신족은 그런 이들이 아니라는 걸 말하기 위해 온 몸을 애달프게 떨었지만, 그의 말을 이해하고 전해줄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거신족이 사라진 이후 남은 이들 간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권역에 터를 잡은 마법사들은 여전히 때가 되면 자신에게 인사를 오긴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찾아볼 수 있던 겸양과 존중은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대군장인 자신에게도 그럴진대, 자신을 보고 모여든 다른 이들에게는 오죽했으랴.

그렇게 고된 나날이 이어질 때 쯤, 대군장의 몸속에서 간신히 기능을 이어가던 슈퍼컴퓨터가 예언을 하나 했다.

대군장은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예언일수도 있겠다고 직감했다.

-땅의 옛 주인이 돌아올 것이나 그는 흐려진 채일 것이라. 하지만 그와 함께 일어서면 되찾을 영광은 무궁하리라. 가장 순수한 자는 땅의 옛 주인을 지워내리니 그를 주의하라.-

뒤의 문장을 일부러 말해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제 세상에 순수한 자가 남아 있지 않음을 대군장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들리지 않게 읊조렸을 뿐이다.

예언의 내용을 훼손할 수는 없기에.

그 무렵이었다.

자신이 어쩌면 거신족의 마지막 핏줄일수도 있다는 남자가 대군장을 찾아온 것은.

"나는 거신족의 마지막 후손이고, 이 땅에 뿌리내린 억압을 거두어 낼 것입니다."

대군장이 만들어 낸 장막 앞에서 울려 퍼지는 가면 쓴 남자의 목소리.

믿지 않았다.

남자의 몸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거신족은 대군장을 덮을 수 있을만큼 거대했었다.

하지만 흔들렸다.

모두 장난처럼 거신족의 이름을 입에 담는 시대에, 남자는 진실로 거신족을 입에 올렸다.

장막이 열리고, 남자가 대군장에게로 다가섰다.

가면을 벗어놓은 남자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보호하던 자들을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이 무시 받지 않을 세상을 만들 겁니다. 멀고 험한 길이고, 많은 피와 희생이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이 내 뜻을 따라줬으면 합니다."

가면을 내려놓아 원래의 모습을 찾은 남자가 손에 상처를 내자 붉은 피가 후두둑하고 대군장의 뿌리께에 떨어졌다.

그 피에서, 대군장은 옛 주인의 재림을 실감했다.

주인께서 돌아오니 모든 것은 그의 뜻대로 행해졌다.

대군장은 프로이데 마탑에 대항하는 것이 위험한 일인줄 알면서도 사람들을 불러 모아 계곡을 점거했다.

어느새 이 일은 마법사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계룡 권역을 원주민들에게 돌려주자는 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원주민이 자신과 대군장인줄 알았지만, 대군장은 그것이 뜻할 수 있는 존재는 거신족뿐이라 확신했다.

거신족이 활보하며 자신을 지켜주는 세상.

늙고 지친 목인의 노곤함은 계속해서 과거의 기억을 향했다.

그러던 중, 넓게 펼쳐진 대군장의 기감에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모두가 더럽혀지고 섞여가는 세상에서 홀로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거신족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것 못지않게 거대하고 장엄했다.

예언은 옛 주인의 재림 뿐만 아니라 그의 대적자對敵者에 대해서도 경고했었다.

대군장은 대적자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그는 마치 몸속에서 별빛이 흘러넘치는 것 같아 대군장은 쉬이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예언의 순수한 자가 이 자다. 옛 주인의 재림은 이 자에 의해 뒤틀리리라. 그러니······.-

마음을 다잡기 위해 대군장이 다시 한번 예언을 읊조렸다.

그러자 대적자의 입이 열렸다.

"가장 순수한 자는 땅의 옛 주인을 지워내리니 그를 주의하라."

아무런 능력도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읽어내는 이가 있을 줄이야!

대군장은 마음을 먹었다.

-이 자를 여기서 죽여야 대업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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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인 언어 최상급]

서리얼에서 거신족은 선택이 불가능한 종족이었지만 목인은 플레이어블 종족이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도 느리고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는 지역도 평원이나 숲으로 제한받는 종족을 골라서 플레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 목인 중에서도 유저를 제외한 NPC만이 사용하던 목인 언어를 배운 사람이 나다.

왜?

이유 따윈 없다.

그 스킬이 거기 있었으니까.

그게 내가 게임을 하는 방식이었으니까.

내려앉은 침묵을 갈라낸 것은 라이시의 말.

"목인의 언어를 알고 계신 건가요? 저도 의미만 통할 뿐, 적확한 단어와 말로 번역한다고는 하기 어려운데······."

"제가 하는 말은 대군장이 알아 듣는 거죠?"

"네. 일단은요."

다시 말했다.

"가장 순수한 자는 땅의 옛 주인을 지워내리니 그를 주의하라. 이렇게 말한 거 아닙니까? 왜 뒷 내용은 숨겼으며, 순수한 자는 뭡니까?"

"알파 씨!"

라이시가 말렸으나 대군장 앞에까지 온 이상 나는 멈출 마음이 없었다.

"대체 나를 이곳에 들인 이유는 무엇이며, 흡혈귀들이 소에 오면 오염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여길 점거해서 당신들이 얻는 이득은 뭡니까.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옛 주인이라는 존재. 그건 거신······."

쿠르르르-

작은 진동이 발끝에서 느껴졌다.

땅 위로 솟아오른 대군장의 뿌리 끝이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040.

040.

"왜 이러세요! 멈추세요!"

라이시의 애타는 외침이 대군장에게 닿았지만, 나를 향해 날아오는 뿌리의 속도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검을 꺼낼까?'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플람 수플레]

뿜어진 숨이 불의 벽이 되어 닿는 뿌리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러나 [플람 수플레]는 전방에 불의 벽을 세우는 스킬,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옆과 심지어 뒤에서도 땅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선빵을 아주 호되게 먹여주시네."

손가락을 튕겼다.

[밀푀유Millefeuille]

종잇장 형태로 변한 불들이 내 주위를 맴돌면서 계속해서 땅에서 솟는 뿌리들을 태워 없앴다.

내 주위로 타버린 뿌리에서 만들어진 재가 겹겹이 쌓였다.

뿌리의 습격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발바닥에서 온몸으로 느껴지는 진동은 점점 심해졌다.

마침내.

쿠드드드-

대군장이 깊게 박혀있던 뿌리를 들고 일어섰다.

비록 점차 말라 가는 게 보일 정도로 우람하지는 않은 나무였지만, 뿌리를 뽑아 들고 땅 위에 서니 일반적인 사람에 비해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목인木人의 전신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왜 이러는지 알려주고 지랄하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질문 좀 했다고 사람을 이 꼴로 만드나?"

대군장의 몸이 가늘게 흔들렸다.

-너는 옛 주인의 도래를 방해할 존재. 네가 내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죽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

슈퍼 컴퓨터에서 굉음이 뿜어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대군장의 줄기 곳곳에 삐죽삐죽 솟아나 있던 케이블에 불이 들어왔다.

대군장의 거대한 발이 내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속 이동]······?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엄청난 이명이 귀를 메웠다.

슈퍼컴퓨터의 잉잉대는 소음과 더불어 귀곡성이 섞인 끔찍한 소리가 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어 균형감각이 엉망이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세운 뒤-

[청각 차단]

즉시 소리가 멈췄다.

주머니에서 씨앗을 하나 집어 던졌다.

[과잉 생장]

자라난 넝쿨의 끝이 땅에 박히는 것을 확인한 뒤

[경량화]

[챔질]

낚시줄에 딸려가는 물고기마냥, 나는 넝쿨에 매달려 딸려갔고, 그 덕에 대군장의 발에 밟혀 압사하는 꼴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대군장의 껍질이 바스락거렸다.

목인의 언어는 소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그가 의미하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너는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나는 그럴 마음이 없는데."

손에서 불덩이를 몇 개 만들어 대군장을 향해 던졌다.

하지만 대군장은 가지 몇 개를 움직이는 것으로 간단히 불덩이를 쳐내버렸다.

그런 시도는 몇 번이나 계속되었지만 번번히 막혀버렸다.

대군장은 나를 차근차근 몰아넣었다.

왼쪽으로 피하면 뿌리로 만들어낸 벽이 있었고, 그걸 태우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거대한 주먹이 날아오는 식이었다.

심지어 잠시 틈을 만들기 위해 [은신]을 사용했음에도 정확히 내가 있는 위치로 정령을 날려 보내기까지 했다.

예언자이기 이전에 샤먼이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는지, 대군장의 주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정령이 차츰 많아지고 있었다.

'뭐지? 마치 내 움직임을 예측하는 듯한······!'

대군장의 몸에서는 여전히 슈퍼컴퓨터의 굉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니, 굉음은 처음보다 더 커지고 있었다.

"저건가."

내 행동을 예언, 혹은 예측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씨팔."

숨을 골랐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거대한 목인을 올려다보았다.

대군장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의 발치에 있는 라이시에게 경고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대군장은 저를 죽이고 싶다고 그러네요. 근데 저는 쉽게 죽어줄 마음이 없어요. 그러니 피해 계세요."

라이시는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허겁지겁 나와 대군장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이제 대군장에게 말했다.

"이것도 예측했냐?"

오른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박동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고, 안쪽의 근육과 신경을 타고 다시 심장으로 내달렸다.

[앙플라메enflammer]

나는 이제 스스로 불이 된다.

대군장이 양손을 치켜들고 나를 찍어 내렸다.

그의 주위를 맴돌던 정령들이 나를 향해 해일처럼 쏟아져 내렸다.

발치에서는 대군장의 몸에서 뻗어 나온 뿌리가 당장이라도 나를 꿰어 버릴 것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앙플라메]

심장 박동이 거세지며 온몸이 뜨거워진다.

한 번 더!

[앙플라메]

심장의 열기는 끝내 작은 불꽃을 피워낸다.

불꽃은 내 몸을 타고 흘러 마침내 나는 불 그 자체의 형상을 이룬다.

손이 움직이는 대로 불꽃이 일렁이며 따르니, 의지는 불꽃으로 피어나 향하는 것을 사윈다.

3중첩 [앙플라메]가 지속되는 1분 남짓, 나는 화염계 마법의 정수이자 위계를 초월한 화신의 영역에 이른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대군장의 손이 깍지를 낀 형태로 내 머리 위까지 다가와 있었다.

오른손을 들어 머리 위에 호를 그렸다.

[벌목]

화염의 도끼날이 아래에서 위로 치솟아 그대로 대군장의 팔목을 잘라냈다.

잘린 단면에서 불이 번져 오른다.

"보아하니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이유를 모르겠거든? 그럼 내가 보기엔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거겠지?"

대군장은 팔이 잘린다는 것쯤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개의치 않고 정령들을 내게 밀어 보냈다.

정령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밀푀유]

아까보다 훨씬 많은 불의 종이가 내 주위를 가득 메웠다.

충돌한 정령들은 한 줌 비명을 남기지 못하고 불과 함께 너울거리다 부스러져 흩어진다.

"이유 없는 미움은 좀 그러니까. 나를 좆같이 싫어하도록 만들어줄게."

대군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벌목]

[가지치기]

[뒤섞기]

불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장비들이 내게로 향하는 대군장의 일부를 잘라내고 베어냈으며, 순식간에 탄화된 그의 일부를 끼얹었다.

그는 나의 접근을 막으려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내 손짓과 눈짓으로 인해 주위에 쌓이는 재만 많아질 뿐이었다.

마침내 대군장 앞에 도달했을 때, 불타지 않고 대군장의 나뭇가지에 멀쩡하게 매달려 있는 나뭇잎은 이제 셀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끝났군.'

이 난리와 3중첩 [앙플라메]가 거의 동시에 끝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일렁이듯 넘실대듯 불꽃이 모습을 감췄다.

[앙플라메] 사용의 대가는 화염계 마법의 일주일 봉인.

3번이나 연달아 사용했으니 앞으로 3주 간은 추워 죽을 것 같아도 손끝에 불 하나 피워올리지 못한다.

몸 곳곳이 타들어 간 대군장에게 라이시가 달려와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눈물겨운 모습에 공감할 수 없었다.

짜증이라는 짜증이 다 솟아오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청각 차단]을 해제하고 대군장에게 날 선 말을 내뱉었다.

"말해. 옛 주인이 거신족인지, 순수한 자는 뭔지, 왜 나를 공격한 건지, 이런 짓을 해서 당신들이 얻어 갈 건 뭔지."

케이블이 가장 많이 뭉쳐 있는 곳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제는 크기가 많이 줄어든 소음의 근원지.

아마 이곳에 슈퍼컴퓨터가 있을 것이다.

화염계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은 지금 나밖에 모른다.

협박으로는 부족함이 없겠지.

-결국 이렇게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대군장이 알 수 없는 말을 흘리는 동안,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멈춰."

돌아보니 가면을 쓴 남자였다.

가면 아래 그의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마침 잘 왔다. 너한테도 궁금한 게 산더미거든."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와의 대화를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뒤춤으로 손을 가져가자 라이시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알파 씨! 그거······!"

라이시에게는 신경 쓰지 않은 채로 가면 쓴 남자에게 말했다.

"너, 거신족과는 무슨 관계냐. 그리고 여기 자빠진 장작이랑은 또 무슨 관계인지 다 말해. 이 질문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는데, 한 번만 더 물어보게 하면 너도 여기 눕고 싶다는 걸로 알아듣는다."

"대군장이 없으면······!"

남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가면을 젖히며 말했다.

"예언은 완벽할 수 없다고 하더니, 대군장은 이런 일도 예견했던 건가. 네가 그 순수한 자인가 보군."

"대체 그 순수한 자는 뭐냐고. 설마 퓨어냐?"

가면 아래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절반 이상이 울긋불긋하게 변해 있었다.

화상의 흔적 같았다.

"그럴지도, 그렇지 않을 수도. 확실한 건 그쪽과 나 사이의 타협은 힘들 거라는 거 아니겠나?"

가면을 벗어던진 남자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대강 봐도 남자의 몸이 4m 가량을 넘어서자 라이시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거신족······. 옛 주인의 재림이······."

그걸 보고 있던 내가 말했다.

"리벨리온을 이끄는 자의 얼굴에 화상자국이 있다고 하더군. 거신족 혼혈로 의심될 정도의 덩치와 힘을 가지고 있다고도 하고."

"곧 죽을 놈에게 신상 정보를 듣게 되니 영광이군."

"역시 그랬나. 진오."

"대군장의 몸에서 내려와라. 너를 죽이려다가 대군장을 더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다."

"리벨리온에 사람이 필요한가 보지? 대군장은 그 사람들을 네게 이끌 인물이고?"

리벨리온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인천 권역의 암흑가를 평정한 엘프의 몸에 문신이 가득하다거나, 서해 권역의 인공 섬 몇 개가 무장단체의 손에 넘어갔는데 그들이 쓰는 무기가 예공방의 무기로 보인다는 그런 종류의 소문이었다.

페룬 마탑이 대림 에어리어 26구역의 폐교를 중심으로 사회사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들은 다른 영역으로 옮겨 간 것 같았다.

언젠가는 대림 에어리어에 돌아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다.

그런데 이렇게 계룡 권역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프로이데의 영원빙정을 노린 건가? 예공방 생산기지의 테러를 자행할 정도의 조직치고는 너무 소박한 것 같은데."

진오가 이를 갈았다.

나는 계속해서 혼잣말에 가까운 도발을 자행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프로이데 마탑에 품고 있는 열등감과 부당함을 자극한 뒤에 자연스레 리벨리온으로 끌어들이려는 방법도 있겠군. 자신이 속한 사회에 불만이 있는 자들이라면 충동질하기 쉬울 테니까. 리벨리온이 엮여 있다고 생각하니 하나씩 풀려가네."

"너, 뭐 하는 놈이냐."

"부정하지는 않네?"

진오의 입이 열렸다.

"틀리지 않다. 열패감을 품고 있는 자들은 우리의 소중한 자원이지. 흡혈귀에 대한 반감 따위는 내가 알 바 아니다. 계룡 권역에서 프로이데의 영향력을 약화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다시 네오-서울로······."

그때, 정신 나간 거북이 수인이 다시 등장했다.

"흐흐헤헤. 물 너무 조앙. 헤헤헿."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의 예상치 못한 등장이기에 나, 진오, 대군장, 라이시 모두 얼어붙었다.

그렇게 우리 사이로 뛰어 들어온 거북이 수인은 진오를 보고 말했다.

"우와아아아. 엄청 크다아."

그리고는 다시 칠렐레팔렐레 다른 곳으로 달려 나갔다.

거북이 수인이 달려간 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곳을 보고 있었다.

"여긴······대군장의 장막 안이라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은 들어오지······!"

진오의 말이 이어질 때 쯤, 나는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섰다.

뒤 춤에서 떨어트린 검이 대군장의 몸, 정확히 말하면 슈퍼컴퓨터가 있을 만한 곳에 깊이 꽂혀있었다.

너무 깊이 꽂혀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대군장의 몸에 칼자루가 하나 솟아있는 걸로만 보일지도 모르겠다.

멍청한 표정의 진오에게 간단히 알려주었다.

"장막은 슈퍼컴퓨터랑 정령들이 만들어내는 거라며? 그럼 이걸 멈추면 장막도 없어지겠다 싶더라고. 여기 모인 다른 사람들은 네 생각에 동의하나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모인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대군장님은 왜 저렇게 되신 거지?"

"위에 올라타 있는 저거, 라이시랑 또 누구야?"

"앞에 저거, 설마 거신족인가?"

"지금 그게 중요해? 리벨리온이래! 우리를 자기네 아래로 끌어들이려는 술수였다고!"

"대군장도 한 패였다는 거야?"

얼굴을 잔뜩 구긴 진오가 중얼거렸다.

"다시 묻는다. 누구냐."

"PMC 소속 알파인데."

"알파라. 편하게 죽게 두지는 않겠다."

그가 도약하자 땅이 울렸다.

오른 어깨를 한 번 돌린 뒤, 뒤로 당겼다.

그리고 고개를 올려 들고, 떨어지는 진오를 향해 물었다.

"순수한 거신족을 본 적 있나?"

"······!"

"너는 거신족치고 너무 작아. 진짜 거신족은 주먹만 떼와도 너보다는 크다."

어퍼컷을 날리듯 주먹을 뻗었다.

"보여주지."

내 주먹이 대군장의 몸보다, 진오의 신체보다도 커다랗게 변해 진오를 향했다.

041.

041.

[풍선 주먹]

스킬 이름 그대로다.

그저 주먹의 크기만을 부풀리는 스킬이다.

강한 타격이나 물리력 등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말.

하지만 이 스킬을 사용한 건 이유가 있었다.

진오가 몸을 부풀리는 것을 보고 라이시가 대번에 거신족이라는 말을 흘렸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생각해서 몸을 크게 만드는 방법은 아주 많다.

약물을 섭취하거나 투여하는 방법, 마법으로 몸을 크게 하는 방법, 혹은 신체 내부에 특수한 수술을 해서 뼈와 근육을 가능한 크고 길게 늘이는 방법, 강신등을 통해 일시적으로 몸을 크게 하는 방법 등등.

이 세계관에서는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적당히 말이 된다.

하지만 라이시와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가능성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그래야 했던 것처럼 다같이 거신족을 입에 올렸다.

실제로 거신족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없음에도.

옛 주인의 재림이라는 대군장의 예언과, 근방에 있는 거대한 소가 거신족의 발자국이라는 설화가 만들어낸 일종의 집단 암시다.

이미 약에 취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런 '겹치는 우연'은 마치 운명이나 필연처럼 받아들여져 마음속에서 의심을 제거하게 된다.

'대군장과 진오가 노린 것도 이런 효과였겠지.'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거신족의 이미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거대함'이다.

나는 그런 거대함에 더 거대한 강함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암시를 거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실제로 진오를 때리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게 무슨······!"

자신을 향해 올려 치는 거대한 주먹에 진오가 나를 내리치려던 것을 그만두고 바닥에 몸을 굴렀다.

'먹혔다!'

손 크기를 원래대로 돌린 후에, 진오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게 거신족의 주먹이지."

"같잖은 술수를 쓰는구나."

"네 덩치를 숨겨주는 그 가면이 진짜 술수지."

근처의 누군가가 외쳤다.

"마, 맞아! 거신족은 너무 거대해서 신체의 일부만 보인다고 했어!"

"저건 거신족이 아니야! 외골격을 입거나 거대화 주술을 사용하면 저 정도 크기가 될 수 있어!"

"하지만 저 주먹은······."

시선이 내게 모였다.

거북이 수인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먹 크으다. 주먹 밖에 안 보여어어."

내 뒤편에 있던 라이시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진······짜 거신족의 주먹."

대군장의 이파리가 떨렸다.

무언가 말하려고 했으나 아직 박혀있는 검을 한 번 더 쑤시며 엄포를 놓았다.

"가만있어. 긴 삶을 숯으로 마감하고 싶지 않으면."

지금 화염계 마법을 쓸 수는 없지만, 뭐 어때.

나만 아는데.

협박이 먹힌 것인지 대군장의 흔들림이 멈췄다.

주위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들으셨겠지만, 저놈은 리벨리온의 진오입니다! 예공방 대림 생산기지의 테러를 자행한 놈이고, 서해 권역의 인공 섬을 점령한 테러리스트이기도 합니다! 흡혈귀 회합의 방해는 핑계일 뿐이고, 사실은 프로이데 마탑의 영향력을 줄인 뒤 계룡 권역을 리벨리온의 영역으로 만들 생각이었을 겁니다! 여러분의 의사 따위는 관계 없이요!"

웅성임이 커졌다.

이를 부드득하고 갈아낸 진오가 내게 말했다.

"그게 어때서. 힘없는 자들이 뭉쳐서 목소리를 내는 것뿐이다."

나는 그런 진오를 향해 일말의 동정 없는 싸늘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수백 정도는 우습게 죽을 수도 있는 이런 방식이? 말은 똑바로 해. 네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가는 거야."

"닥쳐라."

"하나 더 알려줄까? 너는 네가 엄청난 일을 하는 줄 알겠지만, 장기 말도 못 되는 것 같더라. 나이누안과 셀티스가 왜 죽었는지 알아?"

"감히 그 이름을!"

진오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이 건틀렛으로 변형됐다.

예공방 도난 물품 리스트에서 봤던 물건, 부스트 건틀렛.

충격파를 날려 보내거나, 직격한 물체를 내부에서부터 폭발시켜 피떡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위험 무기였다.

얼굴에 핏대가 잔뜩 선 진오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내가 서 있는 대군장의 몸 위를 강타했다.

뿌드드득-

박혀있던 검을 역전개하며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미끄러지기]를 통해 몸을 뒤로 피했고, 진오의 손에 둘러진 부스트 건틀렛에서 충격파가 발생하더니 대군장의 몸통 일부를 박살 냈다.

튀어오르는 파편 중에는 슈퍼컴퓨터의 것으로 보이는 부품들도 여럿이었다.

"대군장님!"

라이시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경악했지만 지금 그들에게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충격파를 날려 보내는 진오에게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널 죽여서 좀비로 만들고 싶어하는 놈들이 학교를 습격한 거다! 너는 살았지만 나이누안과 셀티스, 그리고 아이들은 죽었지!"

"거짓말!"

"믿는 건 네 자유다. 하지만 말하는 것도 내 자유지."

[회피의 춤]

날아오는 충격파 하나를 우아한 스텝으로 빗겨냈다.

[축지]

진오에게 불쑥 다가섰다.

부스트 건틀릿이 철커덕거리며 새하얀 김을 내뿜는 것이 생생하게 보였다.

칼자루를 빠르게 두 번 비틀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내가 전개형 기계식 검을 쓴다는 것을 확실하게 눈에 담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사재시 매사필종]

서걱-

빛의 칼날이 커튼처럼 내려지고, 내 상체 정도는 될 크기의 진오의 손목이 그대로 절단되어 바닥을 구른다.

놀랄 법도 하건만, 진오는 아직 멀쩡한 손을 들어 나를 뭉개려 했다.

[연하일휘]

몸을 급격히 틀어야 했기에 진오의 반대편 손을 완벽히 베어내지는 못했다.

긁어내듯 부스트 건틀릿 위를 지나친 검 뒤로 부품과 파편이 마구 튀었다.

"그 검······! 샴록에게 들었다. 오메가인가."

분노에 가득 찬 진오의 음성.

재빨리 물러나 검을 역전개하며 대꾸했다.

"지금은 알파라니까."

대군장은 몸통이 반파되었고, 진오는 손목 하나를 잃었다.

진오 스스로 자신이 리벨리온인 것과 사람들을 모은 이유도 말했으니 이제 이 자리를 정리만 하면 된다.

그때,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시부엉- 시부엉-

고개를 들자 거대한 새가 머리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구스타보 영감의 유전자 변형 생물 중 하나인 시부엉새가 분명했다.

시력 좋고, 움직임 조용하고 해서 정찰용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묘하게 기분 나쁜 저 울음소리가 단점이다.

시부엉- 시부엉-

분위기 상 프로이데 마탑에서 이곳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얼추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구스타보 할아범이 새를 보낼 정도라면······!'

갑자기 등골이 서늘했다.

시부엉새가 선회하고 있는 곳에서 조금 더 먼 곳, 프로이데 마탑이 있는 방향에서 거대하고 흰 무언가가 고고하게 공중을 유영해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페테르였다.

"좆됐다. 진짜로."

백린연막탄을 쏟아붓지 않더라도, 페테르가 여기 내려앉아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한 바퀴만 해도 초토화가 될 상황.

사람들도 페테르를 보고 정신이 나가기 시작했다.

"백린이다! 백린이 날아온다!"

"도망쳐! 프로이데에서 우리를 다 죽일 셈이야!"

고개를 내려보니, 진오는 잘린 손목과 함께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옛 주인 어쩌고 하더니 도망가는 건 뒤지게 빠르네."

라이시가 내게 달려와 외쳤다.

"이거 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우린 이제 다 죽는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지금 할 말이에요? 알파 씨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요!"

"대군장이 절 먼저 공격했어요. 보셨잖아요."

"······."

"가서 페테르한테 사정을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너무 높단 말이지······."

패닉에 빠져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켜! 비키라고!"

볼드가 디즈를 태우고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내 옆에 멈춰선 디즈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게 무슨 난장판이죠? 대군장은 왜 저꼴이 된 거고······. 아니, 이게 아니라. 백린이 날아오는 걸 보고 바로 알파 씨를 찾아왔어요."

"저를요?"

"네. 알파 씨는 짐을 프로이데 마탑에 풀었으니까 알파 씨 말이라면 백린도 들어주지 않을까 해서요."

과정은 좀 다르지만, 결과는 내가 생각한 것과 동일했다.

"그런데 어떻게요? 백린은 너무 높이 있어요."

볼드 위에서 내린 디즈가 나를 밀어 올렸다.

"볼드 위에 타세요. 얼른."

"네?"

내가 엉거주춤 올라가는 사이, 라이시가 디즈에게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디즈, 설마 볼드를 그 형태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잖아. 난리가 날 거야."

"어쩔 수 없어, 라이시. 욕은 내가 먹으면 돼."

그리고 나를 향해 단단히 당부하는 디즈.

"꽉 잡으세요."

"뭘요?"

디즈가 온 힘을 다해 볼드의 꼬리를 걷어찼다.

"볼드! 진화다!"

꾸워어어어어-

울음소리를 크게 한번 내지르더니, 볼드의 등과 옆구리가 갈라지며 안쪽에서 뼈와 얇은 피막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익룡과도 같은 날개 4개가 솟아난 볼드.

켄타우루스인 라이시의 등에 올라탄 디즈가 나를 향해 말했다.

"백린을 말려주세요! 부탁해요!"

디즈를 태운 라이시가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볼드의 날갯짓이 시작됐다.

후욱- 후욱-

거대한 날개가 몇 번 퍼덕거리더니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아래 모인 사람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 머리 위를 천천히 선회하는 볼드는······푸드득거리며 똥을 뿌렸다.

아비규환이 된 아래쪽의 절규가 내게 들렸다.

"으아, 시발! 똥 폭탄이야!"

"생화학 공격이다! MOPP 4단계! MOPP 4단계!"

"디즈 미친놈아! 뭘 만들어 타고 다니는 거야!"

"피부가 벗겨진다! 뭘 처먹고 뭘 처 싸길래 이 정도 독성이! 또라이 리자드맨 새끼! 죽인다!"

라이시와 디즈가 재빨리 멀어진 이유가 이거였나······.

한편, 안에 있던 것을 배출해서 몸이 가벼워진 것인지 볼드의 움직임에 속도가 붙었다.

빠르게 상승한 덕에 외골격을 전개한 페테르의 곁에 붙을 수 있었다.

"페테르!"

움푹 패인 거대 용의 안와에 푸른 빛이 들어오더니 나를 스캔했다.

기계음 섞인 페테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메가. 안 보이더니 이런 곳에 있었나."

"계곡으로 가시는 거죠?"

"그렇네. 대군장이 본신本身을 드러내고 리벨리온의 인물로 추정되는 놈이 하나 나왔다고 해서. 회합에 방해가 될 수도 있지 않나."

"아래쪽은 거의 패닉이에요! 제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개입을 조금 늦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면 이 형태만이라도 원래대로 돌아와 주세요!"

"흠······. 아래쪽의 긴장 상태가 보통이 아닌 것 같던데, 괜찮겠나?"

당신 때문에 그 긴장 상태가 폭주하고 있다고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하지."

"감사합니다."

"자네는 믿을만한 친구라고 헤지르가 그랬거든. 나는 헤지르를 믿으니 자네 역시 믿어보겠네."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 정말 다행이다.

한 가지 부탁을 덧붙였다.

"저랑은 잘 모르는 척해주세요. 특히 제 이름은 말씀하시지 말고요."

볼드와 함께 계곡의 소로 내려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용인으로 변한 페테르의 신형이 내 옆에 내려섰다.

계룡 권역의 공공 집행자로 보이는 몇몇이 페테르와 눈인사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쓰러진 대군장을 뒤에 둔 채, 나는 모두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급작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께서 목격한 것은 일체의 진실입니다. 정체를 숨기고 옛 주인을 자처하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예언도 좋지만, 저는 여러분들 한명 한명 스스로가 계룡 권역의 주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손을 등 뒤로 돌려 검이 잘 숨겨져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 말했다.

똥범벅이 된 사람들에게 진지한 얘기를 하려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알파라고 합니다. 디즈 씨를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입니다."

웅성거림이 있었으나 곧 잦아들었다.

"저는 여러분의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프로이데 마탑의 편에 서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제 3자의 입장에서 여러분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042

042.

닷새 뒤.

벌컥-

라벤느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사람은 당연히 라벤느.

성큼성큼 걸어서 자신의 책상에 앉은 라벤느가 책상 앞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판을 잘 짰더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새 게임은 새 판에서 시작해야죠."

"그 둘, 켄타우루스와 리자드맨. 라이시와 디즈라고 했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자연주의 연합의 임시 대표들입니다. 그렇게 막 부르면 마탑주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어요."

#

대군장 휘하의 인원들과 프로이데 마탑.

계룡 권역의 큰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집단이다.

대군장이 거신족의 재림이라는 명목하에 리벨리온으로의 합류를 도모했다는 것이 알려지고, 이러저러한 일의 결과로 몸통 대부분이 박살 난 채로 골골대고 있으니 계곡에 모인 사람들은 당황했다.

계곡 근처의 소뿐만 아니라 계곡, 나아가 계룡 권역 전체에서 대군장의 뜻에 조금이라도 동조했던 사람을 따지면 기실 수십만은 넘어갈 거다.

어쩌면 백만 단위가 될 수도 있겠지.

그중 절반 정도는 제대로 된 직업 없이 계룡 권역에서 수행이나 수련하는 사람들일 것이며, 그 중 또 일부는 허구한 날 축제와 약에 취해 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런 거대한 집단의 구심점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도 권역을 통째로 반사회적 집단에 넘기려 했다는 의혹을 가진 채로.

이대로면 내부적으로는 무정부상태나 분열 상태가 될 위험이 있었고, 만일 소식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타 도시 권역에서 계룡 권역을 넘볼 위험이 있었다.

흡혈귀 회합이 진행되는 중이라 외부 인원, 특히 방송사의 유입을 막은 라벤느의 판단 덕에 정보 전파를 늦출 수 있었다.

선견지명은 아니고 얻어 걸린 거다.

소셜 미디어로 소식이 알음알음 퍼져나갔지만 워낙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고 공신력 있는 보도가 나오지 않아 가짜뉴스 취급 받기도 했다.

내가 이런 일련의 결과를 의도하고 행동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해관계가 깊게 얽혀 있고 무엇보다 진오와 대판 싸웠기 때문에 몸을 감출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페테르를 비롯한 호위들의 도움을 받아 일단 계룡 권역에 있는 대군장 영향권의 붕괴를 막았다.

페테르는 계룡 권역의 공공 집행자들을 통솔해 치안과 사회시스템의 혼란을 막았으며, 구스타보 할아범과 로렌 아줌마는 각각 데리고 다니는 생물과 인형들을 계룡 권역 곳곳으로 보내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정보 공유를 도왔다.

여다함은······.

새로운 무기와 마법 개발에 쓸 수 있을 거라면서 '거신의 주먹'을 다시 보여달라고 내게 졸라대고 있었다.

그런 여다함을 떼어놓고, 나는 대군장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집단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정당도 이익단체도 아닌, 그저 자신이 딛고 살아가는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느슨한 연결고리이자, 예언이나 옛 주인에게 의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연합체.

대군장이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이 계곡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며칠을 밤새워 토론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반목하고 이해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결성된 단체가 자연주의 연합이었다.

그리고 임시 대표로 라이시와 디즈가 뽑혔다.

라이시는 대군장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대군장의 말에 넘어가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이들에게 위험성을 알려줬다는 이유로, 디즈는······나와 가장 관계가 깊은 인물이어서였다.

디즈의 선출에 반대가 없던 것은 아니다.

특히 볼드가 날아가면서 그 아래 있다가 똥을 뒤집어쓴 사람들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볼드를 살처분해야 한다는 소리도 왕왕 나왔을 정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여기에 페테르의 백린연막탄이 쏟아졌을 거라고 내가 지적하자 더 이상 큰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라이시와 디즈가 라벤느를 만나기 위해 프로이데 마탑을 찾아왔고, 마탑은 흡혈귀 회합이 진행되는 동안 또 다른 협상의 장이 마련되어 바쁜 분위기였다.

그리고 라벤느의 얼굴을 보니 협상이 끝난 모양이었다.

#

"달이 머무는 계곡에 모인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을 걸세."

"그럼요?"

"흡혈귀 회합의 종료를 함께 바라볼 증인이 되겠지. 물론 그전에 계곡 전체에 대대적인 청소와 정화를 해야겠지만. 그건 오늘 내일이면 될 일이야."

흡혈귀들의 진입을 허용한다는 소리였다.

라벤느의 얼굴에 기분 좋은 피곤함이 묻어났다.

"훌륭한 결과야. 아마 앞으로도 이 정도로 성대하게 끝을 맺는 흡혈귀 회합은 다시 없겠지."

"제 덕분이죠."

나를 흘겨보던 라벤느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긴 하지. 게다가 대군장이 뒷전으로 밀린 것도 우리에겐 나쁘지 않을 일이고."

"이득만 생각하시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프로이데 마탑은 계룡 권역의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약물 중독자들의 재활에 더 많은 투자와 관심을 약속했다.

자연주의 연합의 인원들과 더 많은 교류와 협력을 약속하기도 했는데, 그 첫 번째 방안이 영원빙정에서 약초와 주술의 비율을 높인 신상품 개발이라고.

프로이데 마탑의 영향력이 더 늘어나긴 하겠지만, 협력하는 이들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가져갈 수 있을 테니 서로에게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한동안은 쉽지 않을 것 같군요."

내 말에 라벤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새로운 집단이 탄생했지만, 대군장의 빈자리에서 오는 공백이 있을 테니까."

새로운 체제는 필연적으로 크고 작은 소음을 동반한다.

그 틈을 노려 타 권역의 세력이 침투하거나, 내부에서 예상치 못한 갈등이 생겨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이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일 처리 방식도 좋았네. 정말로 대군장이 리벨리온의 지원을 받아 우리를 짓누르려 했으면······."

"프로이데 마탑의 위신이 크게 깎였겠죠. 계룡 권역의 맹주를 자처하더니 숨어들어온 반사회적 세력도 알아채지 못했다느니 하면서요."

"저번의 동화나 연극 얘기도 그렇고, 자네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걸 굳이 입 밖으로 내서 듣는 사람 불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

피식 웃어주었다.

"듣는 사람이 불편하지, 말하는 사람이 불편한 건 아니잖아요?"

"뻔뻔스럽고로······."

꼬았던 다리를 풀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 의뢰는 완료한 것 같으니 약속한 걸 좀 받아볼까요?"

"미리 준비해놓긴 했네만······."

혀를 쯧쯧하고 찬 라벤느가 일어나 뒤에 있던 금고의 문을 열고 옹골찬 나무로 짜여진 작은 상자를 꺼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영원빙정 30년. 보증서도 있고, 들어오기 전 신시아에게 확인을 마쳤네. 신시아의 오라비인 레비가 폐관 수련에 들기 전에 몇 개나 먹는 걸 직접 봤을 테니 확실한 물건이지."

솔직히 이상한 걸 주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을 안 한 건 아닌데, 설마 흡혈귀도 속이고 가짜를 줄까 싶어서 믿어주기로 했다.

상자에 손을 뻗는데 라벤느가 뭔가 생각난 것처럼 내게 물었다.

"맞아! 그런데 알파는 누군가? 자연주의 연합의 임시 대표들이 계속 알파라는 사람 얘기를 하던데. 말만 들어서는 아주 엄청난 화염계 마법사 같더구만······."

"글쎄요. 그 사람들이 그때 약이라도 거하게 하고 환각을 본 건 아닐까요. 아니면 리벨리온을 견제하기 위한 비밀 결사의 인물이라던가요."

"그런가······."

상자의 윗부분을 열자 약효를 흡수당해 하얗게 변해버린 약초 더미가 두텁게 쌓여있었다.

라벤느가 얼른 덧붙였다.

"만약 다른 곳에 판매할 생각이라면 우리가 재매입할 의사도 있네."

그럴 거면 돈으로 달라고 했겠죠.

조심스레 약초를 걷어내니 어딘가 정돈되지 않은 것 같이 생긴 눈의 결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중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물건이지만 가장 최근 거래가의 1.3배 이상 더 쳐줄 생각이······."

라벤느의 애타는 말을 무시하고 조심히 상자째로 들어 고개를 숙여 약초 더미 가운데의 영원빙정을 코에 닿을 듯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켰다.

후우우-

차갑다 못해 에일듯한 영원빙정이 녹으며 내게 빨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코끝에서 머물던 한기는 비강을 거쳐 이내 목으로 내려섰고 점점 속도를 붙이더니 순식간에 폐를 가득 채웠다.

청량감이라는 간단한 단어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호흡기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 줌도 놓치기 싫어 숨을 내쉬기가 싫을 정도였다.

그렇게 폐를 몇 바퀴나 감싸 안던 한기가 차츰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아-."

마침내 참고 참았던 숨을 터트렸을 때,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빙결계 마법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칠 정도로 온몸에 힘이 가득했다.

"어땠나?"

라벤느가 내 곁에 와서 물었지만 나는 빙긋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답을 해주지 않았다.

"자네가 먹은 영원빙정은 나도 한 번 먹으려면 제자들과 원로들의 눈치를 봐가면서 먹어야 할 정도로 귀한 거란 말일세. 감상! 감상만이라도!"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나는 라벤느의 집무실을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틈에 손가락을 대고 아래로 내렸다.

순식간에 얼음이 만들어지며 문틈을 메웠다.

안에서 라벤느가 문을 붙잡고 용쓰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왜! 안 열려! 어이! 오메가! 감상이라도 말해주게!"

#

-계곡의 물맛 참 좋더라고요.

네오-서울로 돌아가는 바이크 위, 귀걸이를 통해 신시아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다른 분들도 굉장히 만족하셨어요. 농담조긴 했지만 프로이데 마탑이 있는 계룡 권역으로 회합 장소를 고정하자는 말도 나오더라니까요.

그렇게 되면 프로이데 마탑과 라벤느가 얻어갈 이득은 환산할 수 없이 거대할 것이다.

젠장.

40년이나 50년짜리로 받을걸.

-그런데 돌아가는 길은 별로 재미없네요.

여다함의 말로는 돌아가는 길이 더 험난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와 앨리스는 정말 드라이브를 하는 것처럼 여유롭게 바이크를 타고 있었다.

여다함과 일리아나가 각각 테오릭 경과 야스민 공을 만나기 위해 네오-서울행을 택했고, 페테르 역시 헤지르 대주교를 직접 한 번 만나야겠다면서 방향을 우리와 같은 쪽으로 잡은 덕이었다.

물론 이 결정은 급작스럽게 내려진 것이라 아펠블뤼텐 가와 히라솔 가의 대표인 레온과 마테우스가 극렬히 반대했다.

올 때도 늦게 와서 집중포화를 뚫고 도착했는데, 갈 때도 같은 꼴을 당하기는 싫다는 이유였다.

페테르의 네오-서울 행도 독단적인 결정이었기에 닐 아이리스가 당황했으나 '그럼 혼자 돌아가시던지.' 하는 페테르의 발언에 닐은 네오-서울까지 동행한 뒤 디트로이트 권역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로 얘기가 마무리됐다.

여튼, 레온과 마테우스의 반 애원 덕에 일단 각자의 길로 가는 척하다 네오-서울로 가는 사람들끼리 나중에 합류하는 것으로 얘기가 됐다.

최소한 얼마만이라도 적들의 화력 분산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지금.

왼쪽 멀리에서 구름 사이사이로 페테르의 외골격 흰 몸체가 비쳐 보였다.

아래로는 백린연막탄이 마치 폭설처럼 쏟아지고 있었고, 가히 생지옥이라 할만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은.

-와하하하하. 만천화우! 만천화우! 만천화우다!

통신채널을 연결해놓은 덕에 여다함의 광기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원격통제가 되는 장갑차 두 대를 몰래 공수해놓은 여다함은 신나게 포격을 쏟아붓고 있었다.

한 대 포격, 두 대 이동의 반복.

그러다 세 대가 동시에 변형을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미사일이 하늘에 뿌려지며 촘촘한 그물 모양을 만들어냈다.

-천라지망이다아아아아!

심지어 미사일 몇 개는 직접 마법을 통해 조종하는지 괴상한 움직임과 궤도를 보여주기까지.

자는 데 방해되니 조용히 좀 하라는 일리아나의 타박을 마지막으로 여다함 측의 통신이 끊겼다.

이렇게 미친 사람들이 앞장서서 주변 정리를 해주니 나와 신시아는 잔해들을 피해 운전만 하면 됐다.

신시아가 키득거렸다.

-재밌는 사람들 많이 알아가서 좋네요. 다음 회합에도 제가 참가하겠다고 해야겠어요.

"네······."

건성으로 대답한 나는 계속해서 귀걸이를 이리저리 만지기에 바빴다.

"이상하네······. 왜 말이 없지?"

#

정현은 모두가 외근 나간 사무실에서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참을 데리고 티비 채널을 돌리기에 바빴다.

"아오! 중계되는 곳이 하나도 없냐. 백린이랑 여다함이 난리 친다는데. 그런 걸 중계 해야지! 오메가 형님도 오고 계실 텐데! 중계 헬기랑 드론이 다 터져나갔다는 게 말이야 방구야!"

한쪽 구석에서 얌전히 티비를 보고 있던 신참, 자코가 정현에게 물었다.

"오메가라는 해결사. 그렇게 대단한가요? 백린이랑 여다함 사이에서 언급될 정도로요?"

"냉정히 말해서 네임 밸류는 아직 좀 부족할지도 몰라. 근데 능력은 진짜야."

"그래요?"

"우리 사장님이 자기가 사무실 차리고 만난 최고의 인맥이라고 그러잖아. 우리 사무실이 예공방 테러 때 들러리라도 서고, 내가 거기 지하에 내려갔다 온 게 전부 오메가 형님 덕이야."

"우와······. 몰랐어요."

"밖에다가는 말 잘 안 해. 너도 이제 우리 식구니까 알려주는 거야. 하여튼 그 이후로 사무실 형편이 좀 펴서 너도 새로 들이고 한 거 아니냐."

"그분이 요 앞에 RW200 주인이시죠? 완전 멋있던데."

"야. 형님은 그 오토바이보다 더 멋있어."

"진짜요?"

"······."

왠지 살짝 민망해진 정현은 괜시리 채널을 뒤적였다.

"죄다 몇 시간 전 영상이네. 이미 다들 도착했겠다!"

쾅-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정현이 벌떡 일어서서 문쪽을 향해 인상을 구겼다.

"어떤 놈이······형님! 잘 다녀오셨어요!"

들어오는 사람은 얼굴이 잔뜩 굳은 오메가였다.

급하게 들어왔는지 오메가의 얼굴에는 바이크 용 고글이 올라가 있었다.

정현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자코의 허리를 세워주며 말했다.

"자코, 인사해라. 해결사인 오메가 형님. 요새 유명하니까 이름이랑 얼굴은 알지? 형님 이쪽은 자코라고."

"나중에. 나중에."

오메가가 정현에게 급하게 물었다.

"앨리스 여기 왔었어?"

"네. 형님 계룡 권역 가신 동안 매일 왔죠. 어제도 한참 놀다가 갔는데. 그지? 자코 너랑도 인사했잖아."

"네. 그런데 오늘은 안 오지 않았나요?"

다급한 오메가의 목소리가 적막한 사무실을 흔들었다.

"앨리스가 없어졌어."

043. (유료 연재 시작입니다)

043.

"이게 뭔 개소리야! 어제까지 잘 놀던 애가 왜 갑자기 없어져!"

키클롭스 아재가 자기네 사무실 문을 벌컥 열며 들어섰다.

나는 그때까지도 의자에 파묻히듯 앉아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납치인가? 어떤 새끼지? 아니, 새끼들인가? 안드로이드 납치는 거의 없어졌다고 그랬는데?"

내게 다가오던 키클롭스 아재가 주춤하더니 고개를 돌려 정현과 자코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얘는 좀 맛이 간 것 같은데."

"오메가 형님네 사무실은 앨리스가 본체잖아요."

"그건 그렇지."

짧게 고개를 끄덕인 키클롭스 아재.

다 봤다.

키클롭스 아재가 나와 정현, 자코에게 대략적인 사정 청취를 마친 후에 정리했다.

"오메가가 계룡 권역에 들어간 이후로는 연락이 안 됐다라······. 그건 권역 별 통신 프로토콜 때문에 그런 거니까 당연한 거고. 앨리스 어제까지도 여기서 놀았잖아."

"그렇죠."

정현이 갈색 털이 덮인 귀가 펄럭일 정도로 귀를 크게 끄덕였다.

도마뱀붙이 수인인 자코가 얼른 정현의 말 뒤에 덧붙였다.

"그런데 오늘은 놀러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이건 납치야! 분명해!"

키클롭스 아재가 다가와 내 어깨를 눌러 앉혔다.

"아니야. 기다려."

"왜 아닌데요! 누가 봐도 납치인데!"

"납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 특히 집행자인 내가 보기에는 더더욱."

키클롭스 아재는 우리 모두를 사무실 한쪽의 회의실로 데려갔다.

사무실 중간에 놓인 긴 탁자에 키클롭스 아재가 손을 올려놓자, 탁자 자체적으로 키클롭스 아재의 손을 스캔했다.

탁자 중앙이 스크린으로 변하며 부팅이 시작됐다.

부팅이 진행되는 짧은 시간 동안 키클롭스 아재는 왜 앨리스가 납치된 것이 아닌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왜 도시 권역 간 안드로이드 통신 프로토콜이 다른 줄 알아? 다 통일 시켜 놓으면 범죄 조직들이 값싼 안드로이드를 구매해서 권역 간 인적 연락망이나 운반책으로 써먹고 버리는 일이 많아서야. 대포 통신 디바이스를 구하느니 구형 중고 안드로이드가 안전하고 싸게 먹힐 때가 있었거든."

"그게 앨리스가 없어진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과거에는 그런 일이 빈번했었어. 그래서 각 도시 권역에서 안드로이드 관리가 철저해졌지. 권역에서 권장하는 통신 프로토콜 모듈 내에 긴급 보호 요청 시스템이 들어가 있게 법 개정을 했다고. 공장에서 모듈이 장착되기 전의 안드로이드를 빼 오지 않는 이상 안드로이드를 범죄에 끌어들이는 건 불가능하다고까지 할 정도야."

"아······. 그래서 예전에 비해 안드로이드가 관련된 범죄가 엄청 줄었구나."

탁자 위에 손을 올려 이리저리 화면을 분할하는 키클롭스 아재가 정현의 혼잣말에 답해주었다.

"지금도 안드로이드들이 100% 범죄에 엮이지 않는다고는 못해. 권역 간 통신 프로토콜도 외부 모듈 달아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납치를 당할 것 같은 상황에서 긴급 보호 요청도 못 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또, 혹시 몰라서 앨리스한테 나랑 직통으로 이어진 위험 신호 발신기도 쥐여 줬단 말이야."

정현이 놀랐다는 얼굴을 했다.

"언제 그런걸······."

"이 주위 사람들은 앨리스가 오메가 사무실에 있는 애라는 걸 다 알지만, 혹시 모르잖냐. 다른 구역 놈들한테 퍽치기라도 당할지도. 오메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들고 다니라고 했지."

키클롭스 아재의 설명을 듣다 보니 정신이 조금 갈피를 찾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긴급 보호 요청이랑 위험 신호 발신기 둘 다 작동하지 않았으니까 납치일 확률은······."

"매우 적다는 거지. 나도 아니라고 단정 짓지는 못해. 알잖아? 네오-서울. 순식간에 안드로이드에게 적용된 안전장치를 해제하는 놈이 있을 수도 있어."

그 사이, 탁자 위는 키클롭스 아재의 손짓에 따라 수십 개의 화면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자코가 입을 떡 벌렸다.

"해결사 사무실에서 저희 사무실까지 설치된 CCTV를 모조리······."

정현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저희 지난달에도 CCTV 무단으로 해킹해서 시청 정보과에서 경고 통지 왔잖아요!"

"뭐라고 하면 안드로이드가 범죄에 엮여 있다고 하자고. 시청에서도 적당히 넘어갈 거야."

내가 한 마디를 더했다.

"이유는 나중에 붙이기 마련이야."

"역시 오 사장이야. 나랑 말이 통해. 그리고 오 사장한테 신세 진 게 있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자, 시작하자고."

테이블에 가득한 화면들의 시간대가 어제저녁 앨리스가 집행자 사무실을 나가던 시간대로 조정됐다.

화면이 재생되고, CCTV에 찍힌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클롭스 아재의 인공 안구에서 계속 작은 작동음이 나면서 화면을 훑었다.

그걸 보고 있던 자코가 옆에 있던 정현에게 속삭였다.

"사장님 저런 모습 처음 봐요. 솔직히 처음 여기 왔을 때 그냥 대머리 사이보그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술 먹으면 목구멍 안쪽의 팬 돌리면서 술 냄새 빼는 거라고 하고, '이번 네오-서울 시장은 허수아비야! 허수아비!' 이러면서 주정이나 부리는 줄 알았는데 자기 분야에서는 제대로 전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찾았다."

1분도 되지 않아 키클롭스 아재의 말과 함께 화면이 멈췄다.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화면이 확대되었다.

"이거, 앨리스 맞지?"

허리가 굽은 노년의 여성이 앨리스를 끌어안고 있었다.

앨리스는 굉장히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었고.

"면식범일까요?"

"그건 몰라.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안아서 나온 표정일 수도 있고, 아는 사람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서 나온 표정일 수도 있으니까."

정현의 추측을 반박한 키클롭스 아재가 다시 화면을 재생시켰고, CCTV 화면에는 여성과 손을 잡은 채 걸어가는 앨리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둘은 해결사 사무실로 오는 길에서 벗어났다.

키클롭스 아재가 황급히 다른 CCTV 화면을 띄워 둘의 모습을 다시 잡았다.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실루엣은 아니었다.

"뭐지? 제가 아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오 사장이 모르는 안드로이드 아니야? 안드로이드끼리는 커뮤니티가 잘 되어 있다더라. 권역, 에어리어, 구역별로 돌아간다던데? 앨리스가 그런데 나가고 한 적 있었어?"

"딱 한 번요. 그런데 갔다 오더니 거기 있는 남성형 안드로이드는 다 여성형 안드로이드랑 한 번 엮여보려는 버팔로 병신이고, 오는 여성형 안드로이드들은 일벌 한번 꼬셔보려는 여왕벌 년들이래요. 그리고는 안 나가더라고요."

"앨리스 사리 분별은 참······언제 들어도 칼 같네."

그렇게 CCTV 화면은 여러 각도로 노인과 앨리스가 걸어가는 모습을 비추었다.

노인은 스카프를 둘러쓰고 있어 정확한 얼굴 생김새를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그때, 화면이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이크."

키클롭스 아재가 계속해서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던 손을 떼자, 화면이 한 번에 사라졌다.

"왜요! 더 따라가 봐요!"

키클롭스 아재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그거, CCTV 네트워크에 침투한 걸 잡아내는 프로그램이야. 다행히 걸리지는 않은 것 같네."

정현이 탁자 위의 버튼을 몇 개 누르자 이번에는 화면에 대림 에어리어, 그중에서도 우리 사무실과 이곳 사설 집행자 사무실이 있는 23구역의 지도가 떠올랐다.

"아까 CCTV 화면상으로 보면······."

정현이 한 손을 들고 지도 앞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동안, 내가 손가락으로 CCTV로 봤던 거리를 툭툭 찍었다.

"22구역 방향으로 향했네."

"CCTV만 보고 목적지를 그렇게 빨리 찾는다고요? 이 복잡한 동네에서?"

"나도 이제 여기가 익숙해졌나 보지."

정현이 자코에게 '봤지? 저런 형님이라니까'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지도 분석] 덕인데.

밖으로 나서자 키클롭스 아재와 정현, 자코가 내 뒤를 따라왔다.

"다른 애들은 일이 있어서 다 부르지는 못하지만, 우리만이라도 도와줄게, 오사장."

"그러면 저야 감사하죠."

#

1시간 뒤.

한참이나 여기저기를 뒤진 끝에 정현이 서성이고 있는 곳으로 다가가 물었다.

"여기야?"

"네. 어제 앨리스와 같은 인상착의를 한 여자아이랑 노파가 들어가는 걸 봤대요. 꼭대기층에 산다는 것 같아요. 여기저기 묻고 다니느라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 다녔슴다."

내 눈에 보이는 건물은 연식을 가늠할 수도 없이 오래되어 보이는 대림 에어리어 22구역의 낡은 빌라였다.

빌라의 유리창은 깨진 것보다 멀쩡한 걸 세는 편이 빠를 것 같았으며, 제멋대로 그려진 그래피티와 일부가 부서진 건물 외벽, 엿가락처럼 늘어져 아래로 향하는 발코니 난간이 환장의 콜라보를 형성하고 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키클롭스 아재와 자코도 건물 앞에 도착했다.

자코가 모두에게 말했다.

"안쪽 대부분을 이쪽에 자리 잡은 갱단이 쓰고 있대요. 괜한 충돌은 피하는 편이 좋지······않을까요?"

키클롭스 아재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 직원한테 무슨 일 생겼으면 다 죽인다."

그리고 키클롭스 아재에게 말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감사했으니까 부담되면 안 따라오셔도 됩니다."

"서운하게 그게 무슨 소리야. 가자고."

자코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일단 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안은 오랜 세월 관리되지 않아 도배가 벗겨진 벽과 반쯤 부서진 문짝이 가득한 곳이었다.

갱단이 아지트로 삼을 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층에서 2층으로 연결되는 계단, 껄렁해 보이는 양아치 셋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무슨 볼일 이슈?"

"위에 노파가 하나 산다고 들었다. 그쪽에 찾아가는 길이니 비켜."

"위에 누가 사는지는 모르겠고, 여긴 우리가 쓰는 건물인데 그냥 비켜드릴 수는 없지."

삐딱하게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틱 내미는 양아치 놈이었다.

"통행료. 꼭 돈 아니어도 돼. 약이나 몽환껌이면 더 좋고."

손을 내민 놈 뒤에 있던 뚱뚱한 녀석이 소곤거렸다.

"야! 이 사람들 꼭대기 층 할멈 얘기하는 거 아니야? 대장이 그 할멈이랑 관련되어 보이는 사람 건들지 말랬잖아!"

"아 몰라! 그리고 그동안 그 할멈 찾아온 사람 없었잖아. 대장은 다 늙은 할망구한테 왜 그리 빌빌대는지-."

뻐억-

내 주먹에 맞은 양아치가 얇은 벽을 부수면서 날아갔다.

키클롭스 아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오 사장. 좀만 참지 그랬어."

"바빠 죽겠는데 통행료 같은 개소리 하잖아요."

한편, 벽이 무너지면서 발생한 소음 때문이었는지 2층과 3층이 시끌시끌해졌다.

"뭔 일이야!"

"어떤 새끼가 우리 아지트에서 행패야? 블랙 스콜피온 구역인거 몰라?"

스스로를 블랙 스콜피온이라고 지칭하는 이들은 종족 관계없이 대부분 비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블랙 스콜피온보다는 팻 피그가 어울릴 것 같은데.

그래도 선빵은 내가 쳤으니 죽이지는 말아야지 하는 자비로운 생각을 하며 앞으로 나설 때, 키클롭스 아재가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오 사장, 잠깐만. 막내야."

"네, 넵!"

"실력 좀 보자."

긴장된 얼굴의 자코가 중얼거리며 내 옆을 지나 앞으로 스쳐 갔다.

"이건 기회야. 형님들한테 깊은 인상을 안겨 주는 거야. 난 할 수 있어."

대부분 그런 말은 마음속으로 하지 않나?

몰려드는 비대한 덩치들 앞에선 자코.

재빠르게 신발을 벗고 벽을 타더니 곧 천장에 붙어 등을 아래로 한 자세가 되었다.

그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의 등허리에 스파크 하나가 튀었다.

"전격계 마법사?"

브지지지직

덩치들을 향해 퍼져나가는 전기.

얼마 지나지 않아 갱단 놈들은 대부분 감전되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바닥을 기는 상태가 되었다.

문제라면 자코도 천장에서 떨어져 똑같이 몸을 떨며 침을 흘리고 있다는 것.

키클롭스 아재가 감전된 갱단 놈들에게 닿지 않게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며 설명했다.

"마법사인 줄 알았지? 자코 이 녀석은 전기뱀장어 수인의 발전기관을 이식한 도마뱀붙이 수인이야. 그래서 전기는 만들어낼 줄 아는데, 조절을 조금만 잘못하면 이 꼴이 난대. 연습 많이 해야겠다. 정현아, 얘 좀 챙겨라. 신발도 들어주고."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 익숙하게 고무 재질의 장갑을 꺼내 끼고 자코를 질질 끌어당기는 정현이었다.

그렇게 자코의 연습 겸 희생 덕에 우리는 별다른 방해 없이 꼭대기층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층에 단 하나 있는 문이 보였다.

어깨에서 솟아난 안테나로 안에 음파를 흘려 대략적인 내부 구조를 알아낸 키클롭스 아재가 내게 말했다.

"내부에 있는 인원은 셋으로 추정. 한 명은 노파인 것 같고, 두 명은 몸집이 작아. 아마 둘 중 하나가 앨리스겠지. 내가 문을 열어 줄 테니까 오 사장 자네가 먼저, 정현이 네가 뒤따라 진입해. 알겠어?"

정현이 끌고 올라온 자코는 아직 정신을 찾지 못했기에 일단 여기서는 보류였다.

문고리를 잡은 키클롭스 아재의 손이 변형되더니 작은 도구 같은 것들이 솟아나 촤르륵거리며 문고리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5초가량.

"됐다!"

문이 벌컥 열리고 내가 뛰어들었다.

"우리 애 여기로 데려간······놈이······누······구?"

노파 하나가 집 내부의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놓인 흔들의자 위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집을 정리하고 있던 듯한 두 명의 소녀가 그 자리에 발이라도 묶인 듯 딱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소녀의 얼굴은 놀랍도록 흡사했다.

그중 왼쪽에 있던, 앨리스가 분명한 소녀가 나를 향해 말했다.

"사장님!"

"앨리스!"

"나가세요! 당장! 위험해요!"

앨리스의 얼굴은 다급해 보였다.

"응? 너 구하러 여기까지······으악!"

뒤에서 들이닥치는 정현과 키클롭스 아재 덕에 우리는 현관에서 큰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이 눈을 떴다.

그리고 엉망이 된 현관과 뒤엉킨 우리들을 보더니 고함을 질렀다.

"내 집에서 나가! 도둑놈들아!"

그 한마디에 집안의 모든 물건이 붕 떠올랐다가 엉망으로 여기저기 처박혔다.

'이게 무슨······! 물질계 마법인가? 아니면 중력을 조절하는 장치?'

노파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 주위에 흩어져 있던 물건들이 떠올랐다.

그때, 노파의 오른쪽, 즉 앨리스의 반대편에 있던 소녀가 노파에게 달려가서 다급히 말했다.

"주인님. 손주분들이 왔어요. 요리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러자 물건들이 떠오르던 것이 멈추고 아래로 떨어졌다.

상상치도 못한 상황에 모두가 간신히 숨만 고르고 있을 때, 노파가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으이구, 이런 똥강아지들. 할미 집을 또 이렇게 엉망을 만들어놨어. 할미는 밥하러 갈 테니 다 정리해놔라. 안 그러면 밥 없다. 그리 비쩍 말랐는데 밥까지 안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친구들한테 멸치라고 놀림 받는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사라지는 노파.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자 노파를 달랬던 소녀가 우리 앞으로 와서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죄송합니다. 큰 실례를 했습니다. 앨리스도 얼른 보내야 했는데, 저희 주인님께서 놓아주질 않으셔서······. 정말로 바로 보내려고 했습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만 가중되는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인원은 여기서 단 한 명뿐인 것이 분명했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앨리스에게 말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개판인지 모르겠으니까, 설명 좀 해봐라."

044.

044.

"저 할머니가 왕년에 이름 좀 날렸던 안드로이드 공학자인데······."

꼭대기 층의 주방에 있는 커다란 식탁, 옆에 앉은 앨리스에게 들었던 얘기를 되짚고 있었다.

다만 특이사항이 있다면 노파가 계속해서 음식을 내오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정현과 자코가 시끄럽게 떠들면서 그걸 먹어대고 있다는 정도?

"우와아! 엄청 맛있어요!"

소매를 걷어붙인 채 들통에서 커다란 갈비짝을 퍼올려서 식탁으로 가지고 오던 노파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냐? 많이들 먹어라."

그리고는 깨작거리는 키클롭스 아재보고 한마디 했다.

"너는 왜 안 먹어. 할미 음식이 맛이 없냐?"

"아닙니다. 너무 맛있는데요."

"그래. 잘 먹어야 빠진 머리도 새로 난다. 어여 먹어라."

기묘한 표정이 되어 민머리를 쓰다듬는 키클롭스 아재였다.

노파의 시선이 내 앞에 놓인 접시에도 닿았기에 잘 익은 만두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자 그제야 노파는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만두를 꿀꺽 넘기고 앨리스에게 물었다.

"공학자였는데, 사업 차리려다가 이래저래 사기 맞고, 사고당해서 남은 건 이 건물 하나라고? 자식도 없고?"

"네."

"길거리에서 너보고 손녀라고 끌어안았다고?"

"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불편하신 분인가 싶어서 조금 맞춰드리려고 따라갔더니 이렇게 됐네요."

"그런데 연락은 왜 안 했어."

앨리스가 주머니에서 작은 버튼을 꺼냈다.

그리고 누르려 하자, 키클롭스 아재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위험 신호 발신기를 여기서 누르면 나한테 신호가 올 건데?"

딸깍-

앨리스의 손가락이 버튼을 몇 번이나 더 눌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키클롭스 아재가 머쓱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고장 난 걸 줬나?"

"아뇨. 이거 작동 제대로 잘 돼요."

생각보다 덤덤해 보이는 앨리스에게 재차 물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너 긴급 보호 요청도 할 수 있다며. 그건 왜 안 했어."

"할머니 옆에서는 아무것도 안 돼요. 저도 지금 최소한의 유지장치만 가동되는 중이에요. 키클롭스 사장님도 그렇지 않나요?"

"나?"

몸 여기저기를 훑던 키클롭스 아재가 벌떡 일어났다.

"진짜네? 이럴 수가 있나? 뭐지?"

그걸 본 노파가 주방에서 버럭 소리쳤다.

"어떤 못 배운 녀석이 밥 먹는데 벌떡 일어서서 주머니 뒤지냐! 똑바로 앉아서 흘리지 말고 먹어!"

키클롭스 아재가 깨갱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때까지 노파를 도와 식탁으로 열심히 음식 접시를 나르던 다른 소녀가 내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그 부분은 제가 말씀드려도 될까요."

얘도 안드로이드다.

이름은 샬롯이랬던가.

#

샬롯은 안드로이드다.

한때 안드로이드계를 선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공학자, 올가 볼코프가 손녀의 모습을 본따 만들어낸 안드로이드이자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진 마지막 안드로이드.

손녀가 있는데 왜 손녀의 모습을 닮은 안드로이드를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사연이 있다.

올가의 특허와 지적 재산권을 노린 기업들 간의 경쟁이 심해졌고, 그중 한곳이 올가의 아들 부부와 손녀를 납치했다.

공공집행자까지 투입되는 큰 작전이었고, 납치를 사주받은 마피아를 소탕했지만, 아들 부부와 손녀는 참혹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몸담고 있던 기업에서 나와서 막 공방을 꾸려나가던 올가는 큰 충격을 받았고, 몇 년간이나 칩거에 들어갔다.

그녀의 주위에 가득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다.

심지어 친척들마저도.

그리고 올가는 마침내 손녀의 이름과 모습을 붙인 안드로이드, 샬롯을 만들어냈으나 너무 큰 충격으로 그녀의 몸과 정신은 온전하지 못한 채였다.

그나마 있던 재산도 대림 에어리어의 빌라 하나를 제외하면 대부분 사라진 상황.

샬롯은 주인님과 함께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들어 가슴의 중앙에서 약간 왼쪽 부분, 인공심장이 있는 곳에 손을 대어보았다.

콩닥 콩닥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손목의 작은 액정을 통해 올가의 신체를 체크 했다.

올가의 심박수와 샬롯의 심장 박동은 일치하고 있었다.

#

"주인님이 근래 들어 몸이 급격하게 약해지시면서 알츠하이머 증세가 심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밖에서 앨리스를 보고 저나 샬롯 아가씨인 걸로 착각하고 데리고 온 게 아닐까 해요. 제가 대신해서 사과드립니다."

"그거 치매······."

정현의 말에 나와 키를롭스 아재가 동시에 혀를 찼다.

"어허. 들릴라."

죄송하다는 정현의 말에 샬롯이 쓰게 웃었다.

"저를 만드셨을 때도 정신이 온전하시진 않았어요. 그래도 전자기장 발생장치는 확실하게 조절하셨는데, 요즘은 그것마저도 분간을 어려워하시는 것 같으니······."

"그거, 전자기장 어쩌고 때문에 앨리스가 아무것도 못 하고 끌려 온 거지?"

내 물음에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주인님이 아드님 부부랑 손녀분 사고 이후에 자기 방어용으로 만들어서 몸에 이식한 장치예요. 일종의 장기 하나가 더 있는 거라고 보시면 되는데, 아까 보셨다시피 출력이 강해지면 아마 웬만한 치안 유지 드론 정도는 우스울 거예요."

그 말을 들은 키클롭스 아재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주위의 전자 회로들을 쇼트 내지 않으면서 특정 대역만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건데, 그게 되나? 네오-서울에서 허가도 안 날 것 같은데."

"네. 허가도 안 나고, 연구도 불법인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아마 주인님 몸에 있는 장치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느새 내 앞에 놓인 세숫대야만 한 그릇에서 국수 면발을 건져 올려 목 뒤로 넘긴 뒤에 샬롯에게 말했다.

"할머니가 조금 편찮으셔서 그 장치 조절에 애를 먹고 있고, 그것 때문에 곁에 다가온 앨리스가 아무 행동도 못 하고 여기까지 엉겁결에 끌려 온 거네?"

"네. 저도 앨리스를 보내려고 했는데, 문 쪽으로만 다가가면 주인님이 출력을 올리시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손녀가 또 떠난다고 인식하셨나 봐요. 죄송합니다."

"안 다치고 다 무사하니까 뭐라고 하지는 않을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할머니 몸에 있다는 장치 말이야."

"네. 전자기장 발생장치요."

"듣기에는 엄청 위험하면서도 가치가 높은 물건인데, 그걸 이렇게 처음 본 사람들 앞에서 막 얘기해도 되는 건가?"

꿀꺽-

자코가 입안 가득 우물거리던 고기를 넘기는 소리와 할머니가 주방에서 달그락대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내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쩌려고. 나는 몸에 기계 장치가 아무것도 없어서 할머니 제압하는 건 순식간이야."

어떻게 나오려나 보려고 던진 질문에 샬롯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답했다.

"상관없어요. 저 장치는 주인님의 생명 징후에 이상이 생기면 그 즉시 작동을 멈추고 자체 분해 절차를 거치게 설정되어 있어요."

"내가 시간을 들여서 방법을 찾아내면?"

"방법이 있다고 해도 일주일 안에 찾아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일주일?"

"네. 주인님께 남은 날은 일주일 안쪽이에요."

푸헉

정현과 자코가 놀라서 거의 동시에 씹어대던 음식물을 앞접시에 쏟아놓았다.

올가 할머니가 산처럼 쌓인 잡채를 가져오다 둘의 그 꼴을 보고 성을 냈다.

"이놈 자식들! 천천히 좀 먹지! 못 산다. 못 살아! 흘린 거 닦아!"

그리고 올가 할머니는 정현과 자코를 향해 각각 키친타월과 행주를 던지고는 다시 요리를 하러 주방으로 가셨다.

입가에 묻은 음식물을 정리한 정현이 목소리를 낮춰 샬롯에게 물었다.

"저렇게 정정하신데? 일주일?"

"네. 거의 확실해요. 저는 요양 및 간병 기능도 있거든요. 그래도 앨리스랑 여러분을 손주로 착각하고 계신 덕에 많이 밝아 보이셔서 좋네요. 요 며칠간은 정말 힘들었거든요."

식탁에 숙연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샬롯이 나를 향해 말했다.

"앨리스한테 들었는데, 해결사시라면서요? 의뢰를 하나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내가 뭐라고 하기 전, 정현이 끼어들었다.

"저기,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여기 형님이 오메가라고 요새 대림 에어리어, 아니 네오-서울에서 유명해. 몸값이······."

그런 정현을 제지했다.

"들어는 보자고."

샬롯을 제외하고 식탁에 둘러앉은 모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특히 앨리스가.

그렇게 의외였나.

샬롯이 의뢰를 말했다.

"집이 이렇게 밝아진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저는 주인님의 마지막 일주일이 어둡고 침침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일주일간만 주인님이 앨리스를 손녀로 착각하게 놔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동안 손주들인 척 여러분이 찾아 와 주시면 좋겠고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일주일만 남은 게 확실한 건가? 내 말은, 뇌의 이상은 고치기 힘들지 몰라도 다른 장기는 이식이나 교체할 수 있잖아. 뇌만 남겨서 감각 장치를 애드온하는 방법도 있고."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모든 형태의 연명치료를 거부하셨어요. 앨리스를 만나기 전에는 이제 떠나서 아드님 부부와 샬롯 아가씨를 볼 수 있다고 기뻐하시는 게 일과였어요."

앨리스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네 의사가 중요할 것 같은데."

"제가 있어서 할머니가 웃으며 떠나실 수 있다면······. 도와드리고 싶어요."

모두의 시선이 내 입에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일주일. 그동안 여기서 외근해. 너는 못 나가는 거 같으니 필요한 거 있으면 정현이한테 부탁해서 사오라고 하고."

정현이 멍청한 표정으로 '저요?'라고 했지만, 키클롭스 아재가 수고 좀 하라고 하자 녀석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코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한테도 시킬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도울게요."

그걸 보고 앨리스에게 말했다.

"사실상 네가 하는 의뢰나 마찬가지니까 대충 하지 마. 네가 못하면 내 평판이 떨어진다. 그리고 이번 의뢰 끝나면 엄청 굴릴 거니까 각오하고."

"사장님이 절 굴려봤자죠."

그렇게 말하는 앨리스는 웃고 있었다.

샬롯이 일어서서 모두를 향해 머리 숙였다.

"감사합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내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염치없이 그냥 부탁드리려는 건 아니고요. 보상은······."

샬롯의 말을 잘랐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지.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일단 이걸 다 먹어 치우는 일인 것 같거든."

불기 시작한 국수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멸치육수의 깔끔한 맛과 빨려 들어오는 소면의 감촉이 참 좋았다.

의자를 뒤로 기울여 주방을 향해 크게 외쳤다.

"할머니! 국수 진짜 맛있어요!"

올가 할머니의 힘찬 외침이 들렸다.

"그럼! 우리 손주들 주려고 할미가 한 건데! 부족하면 말하거라!"

모두들 맛있다는 말을 하며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젓가락과 그릇이 부딪치며 달그락 소리가 요란했지만, 음식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정현과 자코는 고개를 내리고서 코를 훌쩍이며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기 바빴다.

그리 크지도 않은 전을 한참이나 씹다가 넘긴 키클롭스 아재가 한마디를 했다.

"음식 솜씨가 참 좋으시네. 늦게 알게 돼서 아쉬워."

동감이었다.

#

다음 날, 계룡 권역에 내려가 있는 동안 앨리스가 분류해 준 의뢰들을 대강 읽고 나니 어느새 오전이 다 지나가 있었다.

흡혈귀 회합의 호위라는 것이 대단하긴 대단한 스펙이었는지, 이전과는 또 다른 의뢰들이 여럿 와 있었다.

게다가 어제 네오-서울로 향할 때 페테르, 여다함과 같이 움직인 덕인지 어제 하루 동안 쏟아졌던 의뢰는 다 읽어보지도 못할 정도로 양이 많았다.

결국 대충 눌러보다가 소파에 길게 늘어졌다.

"앨리스 없으니까 이런 거 하나도 불편해 죽겠네."

사무실 앞의 알림판을 close로 돌리고 모자를 대충 눌러 쓴 뒤 밖으로 나섰다.

의뢰를 수락하지 않자 막무가내로 사무실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고 어제 돌아다녀 보니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들어오는 길에 산 모자였다.

[변검술]이나 [임시 탈] 같은 스킬로 얼굴 형태를 변형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건물 밖으로 나가니 그사이 대림 에어리어 23구역의 명소라도 된 건지, 내 바이크 옆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보호막 안에 있어서 바이크가 잘 보이지도 않는구만······."

내가 걸어서 향한 곳은 올가 할머니의 빌라가 있는 22구역.

가까이 다가가니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자코였다.

"오메가 형님!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은 하다만. 오늘 너 비번이라고 안 그랬냐?"

"네. 그런데 할머니가 식사할 때 와도 좋다고 하셔서요.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자코는 양손에 식료품을 가득 들고 있었다.

"올라가자."

우리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누군가 해서 부서진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던 갱단 놈들이 허겁지겁 고개를 집어넣었다.

"저 사람이 오메가라며?"

"흡혈귀 회합에 호위로 갈 정도의 인간이 왜 여기에서······."

자코에게 말했다.

"너 먼저 올라가라. 나 생각난 게 있어."

그리고 갱단 놈들이 숙덕거리던 문 하나를 열어젖혔다.

쾅-

역시나 덩치가 투실투실한 놈들 몇이 모여있었다.

나를 보는 놈들의 눈이 떨렸다.

"야."

"예!"

"너네 대장이 누구냐? 얼굴 좀 봤으면 해서."

그들은 나를 복도 가장 안쪽 방으로 데려갔다.

머리를 레게 스타일로 길게 땋은, 정말로 살이 엄청 찐 돼지 수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의자가 부러지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

"나를 보자고 하셨다고? 해결사 오메가 씨? 나는 블랙 스콜피온의······."

"네 이름은 됐고."

돼지가 인상을 구겼다가 얼른 웃는 낯을 했다.

그래.

돼지는 웃어야 이뻐.

지폐라도 꽂아주고 싶네.

"들어보니까. 이 건물, 꼭대기 층 할머니 거라며. 근데 할머니가 별말 안 하니까 너네가 무단 점거한 거라더라?"

"그게······."

손을 귀 언저리로 들어 올려 때릴 자세를 취했다.

"말대꾸하지 마. 귀싸대기 맞기 싫으면. 이 양아치만도 못한 새끼들아."

"······."

"말대꾸하지 말랬지, 대답하지 말랬어?"

"예, 예."

"선택지를 줄게. 하나. 나한테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고 불법점거로 신고당해서 벌금 가득 처먹기. 덤으로 갱단이랍시고 모여서 소꿉놀이하는 것도 끝나겠지. 참고로 나는 어중이떠중이 사설 집행자 사무실 이런데 신고 안 한다. 위타천한테 바로 찌를 거야."

이런 일에 위타천이 움직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크게 불렀다.

역시 돼지 놈의 낯빛이 허옇게 변했다.

"둘. 나랑 일주일간 건물 청소 및 할머니 기쁘게 해드리기. 사실상 너희가 어질러놓은 거 너희가 치우는 거라고 봐야지."

"······두 번째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그럼 여기서 죽치고 있는 애들 다 불러와. 도망가는 새끼는 내 눈에 띄면 진짜 뒤질 각오하고 도망가라고 전해주고."

나가려던 돼지가 잠깐 멈칫하더니 내게 물었다.

"꼭대기 층의 할멈과는 무슨 관계이신지······."

"임시 손자라고 생각해."

"임시라면······."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말대꾸하지 말라니까?"

045.

045.

"아이고야."

의자에 앉아 있던 올가 할머니가 앓는 소리를 냈다.

블랙 스콜피온의 대장인 돼지 수인, 후앙이 할머니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차였다.

할머니의 어깨에 올라 있던 놈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후앙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내 눈치를 봤다.

대번에 녀석을 걷어찼다.

"꺼져. 돼지 자식아. 쓰레기 버리다가 손가락 찔려서 못하겠다고 해서 데려왔더니만 할머니 안마도 제대로 못 해?"

"그게 아니라······."

"말대꾸하지 말랬지. 나와, 무쓸모 집합체야."

후앙이 과장된 액션을 하며 물러나자 할머니가 후앙을 두둔했다.

"너무 그러지 마라. 이 할미 몸이 너무 약한 게지."

후앙이 때를 놓치지 않고 할머니 옆에 달라붙었다.

"저는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오메가 형님은 저만 못살게 군다니까요."

"누가 네 형님이야. 그리고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하라고."

내가 다가가자 후앙이 몸을 움츠렸고, 그 바람에 놈의 길게 땋은 레게 머리가 할머니의 손등에 스쳤다.

"남자가 머리가 그렇게 길어서 쓰겠냐. 단정해야지."

"할머니 말씀 들었지?"

후앙이 나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차 없이 말했다.

"잘라."

"지금요? 당장?"

아래로 내려가서 갱단들의 빌라 청소를 감독하고 있던 정현을 데려왔다.

"정현이 너, 집에서 자가 미용한다고 했지."

"네. 저는 털이 길고 많아서 이거 돈 주고 맡기려면 엄청 깨져요. 그런데 그건 왜요?"

"됐네. 네가 저 돼지 이발 좀 해라."

그 말에 올가 할머니가 기뻐했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미용도 할 줄 알아? 그래. 잘했다. 사람은 기술을 익혀야 한다. 기술이 있으면 굶어 죽지 않아."

"할머니 말씀은 틀린 게 없어. 시작해."

"옆은 하얗게 쳐서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깔끔해 보여."

정현은 자기네 사무실에서 가위와 바리깡을 가져왔고, 후앙을 끌고 화장실로 갔다.

약 30분 뒤, 후앙은 옆머리와 뒷머리가 하얗게 밀린 채로 울상을 지으며 걸어 나왔다.

화장실에서 정현이 소리쳤다.

"야! 이거 정리하고 가! 네 머리인데 내가 정리하냐?"

다시 들어가 정리를 마치고 돌아온 후앙을 본 할머니는 기뻐하셨다.

"봐라! 인물이 사네. 나가서 30분만 걸어봐라. 길 가던 아가씨가 결혼하자고 붙잡겠다."

"할머니가 칭찬하시네. 어떻게 해야겠니?"

내 말에 후앙이 입꼬리 끝을 바르르 떨며 어렵게 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내려가서 너희 애들 청소 똑바로 하나 관리 감독해. 내가 갔을 때 농땡이 피고 있거나 청소 대충 한 부분 보이면 너부터 편육으로 만든다."

후앙이 뒤뚱대며 허겁지겁 내려갔다.

그 사이, 앨리스가 와서 할머니를 거실 근처 볕 잘 드는 곳으로 모시고 갔다.

샬롯이 내 곁에 다가와서 감사를 표했다.

"건물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사람들이 주인님한테 해를 끼치는 건 아니었는데 좀 껄끄러웠던 건 사실이거든요."

"됐어. 곧 떠나실 분 주변 정리 좀 도와드린 것뿐이니까. 할머니 돌아가시고 관리할 사람 없어지면 또 엉망 될 거야."

앨리스와 할머니가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샬롯에게 말했다.

"앨리스 말로는 네 인공심장이랑 할머니 심장 박동이랑 거의 일치하는 것 같다던데 어떻게 된 거야."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주인님이 돌아가시면 저도 작동을 멈추겠죠."

"사고방식이 너무 구식인데."

"애초에 손녀분의 대용품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게 저니까요."

"너는 그런 끝에 만족하고?"

샬롯은 대답이 없었다.

대답하지 않는 것인지 대답하지 못하는 것인지는 내가 알 수 없었다.

"도와줄 일 있으면, 얘기해. 시간 얼마 안 남았다며."

#

모두가 돌아간 저녁, 앨리스와 샬롯은 잠이 든 올가 할머니의 침실에서 빠져나와 거실에 나란히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샬롯이었다.

"처음에 주인님이 샬롯 아가씨라며 널 데리고 왔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됐네. 고마워."

"제가 감사할 일이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건데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다행이네."

잠시 흐르는 어려운 침묵 후, 앨리스가 넌지시 말했다.

"저희 사장님한테 얘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오늘 낮에 말씀하시더라."

앨리스가 샬롯과 눈을 맞췄다.

"비록 생산 단계에서는 할머니가 자신이 죽으면 샬롯도 동작이 정지하도록 만들어놨을지 모르지만, 그때 할머니는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였다면서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말씀드려보세요."

"······."

"이대로 정지할 건가요? 서로 간의 링크만 해제하면 되는 거니까 어려워 보이지도 않아요."

"내가 알아서 할게."

"샬롯!"

"나도 알아. 주인님이 죽는다고 나도 따라 작동정지를 하는 게 이상해 보이는 거. 아마 주인님께 말씀드리면 흔쾌히 링크를 끊어주시겠지. 하지만 나는 앨리스 너와 달라. 애초에 샬롯 아가씨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주인님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어."

샬롯의 가슴이 들썩이고 입가가 떨렸다.

"어려워.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만 너나, 다른 도와주신 분들에게 폐가 되지는 않도록 할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이나 고르고 고르다 그녀가 한 말에 앨리스도 더 이상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일어서서 거실 한편의 충전대에 앉는 샬롯을 보는 앨리스의 눈에 애틋함과 가여움이 담겼다.

#

올가 할머니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정신만 조금 흐렸을 뿐, 정정하게 걸어 다니며 식사 시간 때마다 엄청난 음식을 해주시던 것도 며칠 가지 못했다.

찾아가면 밥은 먹었냐, 날 추운데 옷은 따뜻하게 입었냐, 바쁜데 뭐하러 오냐 등등 정말 손주에게나 할 법한 잔소리를 하긴 했지만 목소리에 담긴 기력과 총기는 차츰 흐려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할머니와 오랜 시간을 보낸 샬롯이 할머니의 레시피를 완벽히 복사해서 앨리스와 함께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려냈지만, 왠지 할머니가 직접 해주는 맛이 나지 않았다.

"왜들 그렇게 깨작들 거리냐. 있던 복도 다 떨어지게."

가장 상석에 앉은 올가 할머니가 우리들의 밥 먹는 모습을 보고 한 말이었다.

이제 할머니는 숨을 쉴 때마다 쌕쌕 소리가 함께 들렸으며,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것조차 힘겨워하셨다.

어쩌면 우리들이 모여 밥 먹는 모습을 보겠다고 저렇게 앉아 계시는 것 자체가 대단한 정신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할머니의 가느다란 야단에 음식을 우물거리고 있지만 넘기지는 못하고 있던 자코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사내자식이 왜 울어? 이 할미가 차린 밥이 맛이 없냐?"

자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럼 어여 먹어. 이제 할미가 차려주는 밥은 이게 마지막일 것 같으니."

다들 열심히 젓가락질을 했지만, 음식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법 오랫동안이나.

어렵게 식사를 마치고, 할머니는 자신의 침실로 우리를 불렀다.

회광반조回光返照, 터미널 루시디티terminal lucidity.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잠시 원기를 되찾아 명정한 상태로 돌아오는 것을 이르는 표현들이다.

올가 할머니는 허리와 등에 베개를 받쳐두고 비스듬하게 누워있었지만, 눈빛만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형형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

한 분야를 선도해가던, 꿈 넘치던 할머니의 젊은 시절에는 늘 저런 눈빛을 하고 계셨겠지.

다르게 말하면 이 시기를 넘기면 정말로 죽음에 이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자코, 정현, 키클롭스 아재 순으로 손을 꼭 붙잡고 덕담을 해주었다.

그렇게 내 차례가 되었다.

내 손을 꼭 잡은 할머니의 앙상한 손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고맙네. 늙은이의 흐리멍텅한 정신머리 때문에 자네가 고생했어."

"아닙니다."

"정말 고마워. 기억 아주 저편에 있던 행복했던 시절을 자네 덕에 다시 떠올릴 수 있었어."

"의뢰를 받았을 뿐입니다."

할머니가 가늘게 웃었다.

"요 녀석, 할미가 칭찬하면 그냥 고맙습니다라고 하면 된다."

푸근한 할머니의 미소를 보자 나도 비슷한 미소를 지은 것 같다.

"고맙습니다."

"그래, 그래. 이제야 좀 귀여운 맛이 있구나."

내 손을 놓은 할머니가 말했다.

"앨리스와 샬롯, 둘만 남고 나가도 좋다."

#

다른 사람들이 나간 침실, 올가는 앨리스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너를 곤란한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늙으면 분별이 없어져."

앨리스는 아무 말 없이 올가의 손을 조물조물하고만 있었다.

"네 덕에 정말 즐거웠다. 고맙구나, 앨리스."

올가는 처음으로 앨리스에게 샬롯이 아니라 원래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것은 올가가 마지막으로 불러주는 이름일 터, 앨리스는 다가가서 올가를 꼭 안았다.

"아이구, 힘도 좋구나."

격정적으로 앨리스의 어깨가 흔들렸지만, 그녀에게는 눈물샘이 없어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앨리스는 그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올가는 그런 마음을 안다는 듯 앨리스를 안고 토닥여주었다.

"떠나는 길에 울어주는 안드로이드가 있으니 나는 성공한 안드로이드 공학자 같구나."

올가의 농담에 샬롯과 앨리스 모두 은근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앨리스의 들썩임이 멈추자 올가가 말했다.

"샬롯과 둘만 나누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자리를 좀 비켜주겠니?"

고개를 끄덕인 앨리스가 나가고, 샬롯이 올가의 곁에 앉았다.

"주인님······."

"네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너를 존중해줬어야 했는데, 손녀의 대용품으로만 생각했어.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미안하다."

올가와 눈을 맞춘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주인님을 모실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넌 내가 만든 최고의 걸작이다, 샬롯."

올가의 숨이 가빠졌다.

이제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샬롯, 네 손목의 패널을 열고 아래 있는 버튼 중······."

"알아요. 왼쪽에서 두 번째 버튼을 오른쪽으로 세 번 밀면 주인님과의 링크가 끊긴다고 말씀하시려는 거죠?"

올가의 눈이 커졌다.

"그걸······어떻게 네가······."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정신이 정말 흐려지실 때면 저를 불러서 말씀하셨거든요. 미안하다고, 이 기능을 넣을 때는 주인님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요."

"그럼······얼른······."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 않으려고요."

"샬롯!"

"제가 안 따라가면, 주인님은 누가 보살펴요. 옆에서 책은 누가 읽어드리고, 장 본 짐은 누가 들어드리며, 손님 오면 차는 누가 내와요."

"샬롯! 어서!"

"주인님이 깜빡한 불은 누가 끄고, 옷의 주름은 누가 펴며, 말동무는 누가 해드려요."

"······."

"저는요. 주인님 곁이 제일 행복했고요. 제일 행복하고요. 제일 행복할 것 같아요. 이건 온전히 제 선택이에요. 마지막도, 그리고 앞으로도 주인님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올가는 샬롯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았다.

미소를 지으며 살롯이 농담을 했다.

"주인님 닮아서 고집도 세죠?"

"주인이 아니지······."

"네?"

"진작에 할머니라고 부르라고 해야 했는데, 이 말을 이제야 하는구나. 내 두 번째 손녀, 샬롯. 예쁘기도 하지. 먼저 하늘나라로 간 샬롯도 분명히 너를 반겨 줄 게다. 넌 그 애보다 나중에 태어났지만, 더 많은 경험을 했으니 너를 언니라고 부르라고 해야겠구나. 너는 좋은 언니가 될 게야."

샬롯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올가의 눈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할미가······손녀 얼굴 한 번······만져보자꾸나······."

샬롯은 그 앙상한 손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올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콩닥거리던 그녀의 심장 박동이 차츰 느려지다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문을 열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 눈에 주인과 안드로이드는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와 손녀가 서로 손을 잡은 채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깨지 않을 긴 잠을 자고 있었다.

#

"뭐하러 여기까지 따라와."

할머니와 샬롯을 화장하고 납골당에 안치한 직후, 후앙을 비롯한 블랙 스콜피온 애들이 할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을 봐야겠다고 우르르 몰려든 것을 보고 한 말이었다.

죄다 후앙처럼 옆 뒷머리를 허옇게 깎아놓은 덩치들 수십이 우르르 몰려드는 모습이 참으로 괴상했다.

"그래도 사람 된 도리는 해야죠. 저희 같은 놈들한테도 잘 대해주셨는데요."

빌라 청소를 마친 뒤, 할머니는 이들도 모두 불러 모아 거하게 음식을 해주셨다.

한 놈, 한 놈 이름을 물어가면서, 음식은 많으니 천천히 꼭꼭 씹어먹으라고 등을 두들겨 가면서.

추모를 마치고 나가는 녀석들에게 물었다.

"너희 이제 어디에서 뭐하고 소꿉놀이할래? 건물은 멀끔하게 고쳐놔서 아지트로 쓰기에는 분위기가 안 살잖아."

"그러게요. 형님이 나타난 덕에 저희가 나가게 생겼네요."

"네 형님 아니라고 임마."

형님이라는 말이 나랑 잘 어울린다면서 머쓱하게 웃고 지나가는 후앙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내가 며칠 봤는데, 너네 청소를 좀 잘하더라. 갱 소꿉놀이는 그만두고 청소업체나 하나 차려라."

후앙이 돌아봤다.

"네?"

"할머니가 그 빌라를 내 이름으로 달아두셨더라고. 근데 나는 할렘가에 있는 건물 관리를 맡을 생각은 없어. 다른 일도 바쁘다고. 거기다 세입자 관리가 좀 힘드냐. 너네 같이 무단 점거하는 놈들도 있을 것이고, 월세 안 내고 튀는 놈들도 바글바글하겠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말대꾸하지 말랬지. 여튼, 소꿉놀이 청산하고 청소업체 차린다고 하면 싸게 장기로 빌려줄게. 개조해서 사무실로 쓰고 애들 방도 하나씩 들어가. 어때. 내가 봤을 때, 너희 재능이 있더라니까."

"진심이세요?"

"내가 너랑 농담 따먹기 할 것 같냐? 그리고 내가 보기엔 근본부터 썩은 놈들인데, 할머니가 그러시더라. 너네도 처음부터 나쁜 애들은 아닌데 환경이 안 좋아서 어쩔 수 없이 나쁜 길로 빠진 거라고. 할머니 말씀이 맞나 한번 보여줘."

"너무 급작스러워서······."

"빨리 결정해서 알려줘. 눈치챘으려나 모르겠는데 내가 인내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라서."

"애들이랑 얘기해보고 사무실로 찾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블랙 스콜피온 덩치들이 떠나고, 앨리스가 옆에 다가왔다.

"죄송해요."

"뭐가."

"일주일이나 시간 들어간 것치고 보상이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아서요."

"보상? 나는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네? 따로 뭐 받았어요?"

"아니."

"그럼요?"

"직원 복지."

"무슨 말씀이세요. 알아듣게 좀 얘기를 해주세요."

"샬롯이 의뢰 얘기를 꺼냈을 때, 네가 어떤 표정 짓고 있었는지 알아?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나 완전히 초조한 표정이더라. 샬롯 의뢰 거절하고 다른 의뢰 하면, 네 마음이 불편할 거고, 그럼 그런 결정을 한 나도 불편했겠지?"

"사장님······."

"엄청난 건 못 해줘도, 직원 마음 편하게는 해 줘야지. 그래서 맡은 거야. 네 마음 편하라고."

선은 확실히 그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그런 거 없어. 칼같이 일할 거야. 감정, NO!"

"넵!"

"그리고 내가 얘기했지, 굴릴 거라고. 일하러 가자."

"안 그래도 야스민 가에서 언제쯤 방문할 거냐고 연락 왔어요."

"그렇다고 바로 일 얘기야?"

"일하자면서요."

"비즈니스 관계 아니랄까 봐 정이 없어도 너무 없어."

그 말에 앨리스가 발끈했다.

"비즈니스 관계는 좀 너무하네요."

"그럼 뭔데."

"음······그래도 저희 정도면 소울 메이트?"

안드로이드가 무슨 소울이냐고 하려다가 말았다.

그렇게 말하면 할머니와 샬롯에게 큰 실례를 하는 것 같았다.

앞에서 기대감에 눈을 빛내는 앨리스에게도.

"그래, 네오-서울에서 같은 사무실 쓰니까. 서울 메이트."

"으웩 아재 개그. 여튼 소울 메이트 부정은 안 하시네."

그렇게 말하는 앨리스의 표정은 조금 기뻐보였다.

소울이든 서울이든 뭐가 중요하겠나.

좋은 파트너와 쿵짝이 잘 맞으면 되는 거지.

"다른 의뢰들은 다 보류해두고, 야스민 가에 되도록 빨리 가겠다고 전해줘."

046.

046.

"경실련이랑 전경련이 왜 그렇게 흡혈귀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알 것도 같네."

바이크 속력을 줄이며 과장 조금 보태 성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 거대한 담벼락을 본 내 첫마디였다.

이곳은 성북 에어리어.

용산 에어리어, 강남 에어리어와 함께 네오-서울의 3대 부촌이자 그 부촌 중에서도 신흥 부자들이 아닌, 이른바 대대로 부자였던 가문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다.

대림 에어리어와 비교하면 여기가 같은 네오-서울, 아니 같은 행성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갈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곳곳에 흘렀다.

잘 가꾸어진 나무 사이사이에 숨겨진 폐쇄회로 텔레비전이나, 소음 하나 없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일정한 구역을 순회하는 무장 드론들이 감상에 조금 방해가 되긴 했지만.

"죽창이 필요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시는 건가요?"

신시아가 같이 와도 좋다고 해서 뒤에 앉혀 데려온 앨리스는 무서운 소리를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구호를 외치는 앨리스.

"죽창······죽창이 필요하다······레볼루숑······인민은 집결하라······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를 죽여라······."

주위에도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기에 드론 몇 대의 방향이 이쪽으로 향했다.

황급히 속도를 높이자 드론 하나가 날아와 안전 주행 속도를 넘어섰다고 떠들어댔다.

속도를 줄이고 드론이 돌아가자 앨리스에게 한마디를 했다.

"너 요새 커뮤니티 너무 많이 해. 그런데 글 남기고 자료 퍼 오는 애들은 가장 급진적인 애들이라니까."

"저도 알아요. 다 웃자고 하는 소리죠."

"그래, 그렇게 해서 즐겁다면 마음껏 웃어라. 뒤처리는 내가 하겠지."

내 말을 들은 앨리스는 올렸던 소매를 훌훌 내렸다.

어디서 낫이랑 망치를 구해 들고 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한편,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야스민 저택이 보이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곳의 정문으로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부촌의 외곽을 향해 가며 내가 중얼거렸다.

"이쯤 어디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저택이 새로 지어지는 듯, 높은 가설방음벽으로 둘러쳐진 공사 현장들이 여럿 보였다.

뒤에서 앨리스가 외쳤다.

"성북 에어리어 1-D! 저기인 것 같아요."

무장 드론이 아닌, 사설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는 공사 현장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이 먼저 험상궂은 얼굴로 다가왔다.

"공사 현장입니다. 위험하니 돌아가십쇼."

신시아가 알려줬던 방문 코드를 말하고 귀걸이를 통해 개인 인증을 했더니 경비원들이 길을 열어 주며 정중하게 말했다.

"들어가셔서 좌측 첫 번째 컨테이너입니다."

신시아가 알려준 것은 부정기적인 주기로 바뀌는 방문 코드와 진입 위치뿐이었기에 경비원들이 하는 말은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일단 아는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설방음벽 안쪽으로 들어서자, 공사 현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낯선 모습이 펼쳐졌다.

분리된 다섯 갈래의 짧은 길이 있고, 각각의 길 끝에는 커다란 컨테이너가 있었다.

알려준 대로 가장 좌측의 컨테이너로 향하는 길로 바이크를 움직이자 순식간에 길옆에 불투명한 막이 생겨나 앞쪽의 컨테이너 말고 다른 방향의 시야를 방해했다.

"프라이버시 보호용 통로인 것 같지?"

내가 말하자 탄성을 터트리며 신기해하던 앨리스가 맞장구쳤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야스민 저택은 드나드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게 하는 시스템이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이런 식으로 오가는 사람들끼리도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하는 가봐요."

"그래도 저택으로 향하는 통로, 아니 통로도 아니지. 출입구를 위해서 성북 에어리어에 이런 큰 부지를 통째로 쓴다는 게 참······."

그때, 우리가 향하던 컨테이너 바로 옆, 그러니까 좌측 2번째 컨테이너에서 뭔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불투명해서 형체를 알아보기가 매우 힘들었지만, 분명 자동차나 바이크는 아니었다.

움직임이 마치 거대한 네발짐승, 마치 고양이과 맹수 같았다.

"뭐지?"

내가 말 한마디를 하는 짧은 사이, 막이 촤륵 소리를 내며 아예 시야를 차단해버렸다.

궁금증은 궁금증으로 남겨둔 채, 컨테이너 앞으로 다가가자 자동으로 컨테이너의 문이 활짝 열렸다.

아래쪽으로 완만하게 뻗은 도로와 통로를 밝히는 불빛이 보였다.

딱딱한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제한 속도 20km/h 이내로 서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넓은 차고 같은 공간이 나왔고, 신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 가득 기뻐 죽겠다는 미소를 짓고 있는 신시아가 방정을 떨었다.

"오메가 님! 앨리스! 기다리다가 못 참고 내려와 버렸어요! 야스민 저택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와아아!"

바이크를 세워두자 아무 소리도 없이 벽과 바닥이 솟아올라 바이크를 가렸다.

'프라이버시 보호는 기가 막히게 하는구만.'

신시아와 앨리스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계룡 권역에는 잘 다녀오셨어요? 저희 사장님이 폐는 안 끼쳤으려나 모르겠어요."

"무슨 소리야. 덕분에 완전 즐겁고 편하게 다녀왔는데."

"다행이네요. 다른 호위 분들에 비하면 신시아 씨가 데려간 저희 사장님이 제일······."

앨리스의 말에 신시아가 인상을 썼다.

"타이린드한테 들었어. 앨리스 너, 타이린드한테는 언니라고 한다며? 근데 왜 나한테는 신시아 씨야. 나한테도 언니라고 했으면 좋겠어."

듣고 있던 내가 '그건 나이 때문 아니겠느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건 나이······.'까지 말했을 때 앨리스가 내 허벅지를 꼬집어서 멈춰야만 했다.

앨리스가 웃으며 말했다.

"네, 신시아 언니."

신시아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앨리스를 껴안았다.

"너무 귀여워! 동생이 얼마나 가지고 싶었다고! 시커먼 오빠만 둘이라니!"

그렇게 앨리스의 볼을 조물딱거리던 신시아가 나를 향해서도 말했다.

"타이린드한테도 씨 붙여요?"

생각해보니 그렇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타이린드가 워낙 친근감 있게 다가와서 그런가, 존댓말은 해도 이름은 그냥 툭툭 나왔다.

"아뇨."

"그럼 저한테도 신시아라고 해요."

"그래요. 신시아."

내 말에 신시아가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이제 신시아 씨는 죽고 신시아가 새로 태어났습니다."

피부 하얗고, 얼굴 예쁘고, 머리 회색 섞인 금발이라 신비한 분위기 풍기고.

신시아는 다 좋은데 저 방정과 주접만 좀 어떻게 하면 참 좋지 않을까?

성격 때문에 사령술사가 아니라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니까.

외관이 투명한 재질로 되어 있어 밖이 보이는 엘리베이터로 우리를 안내한 신시아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했다.

"원래는 바로 아버지와 독대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는데요. 예상치 못하게 아버지 손님이 한 분 오셨거든요. 지금은 가셨는데, 정리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요. 괜찮으실까요?"

"네.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오늘 다른 일정은 다 비웠거든요."

"다행이네요. 아버지도 따로 말씀하시겠지만, 이런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드문 일인데 하필이면 오메가 님이 오셨을 때 이렇게 돼서 속상하네요."

아마 아까 옆 컨테이너에서 불투명하게 보였던 '무언가'일 것이다.

그 거대한 네발짐승이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차라리 그걸 타고 다닌다고 하면 믿지.

그런데 내 바이크보다도 더 큰 네발짐승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면 나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데, 생각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사람의 프라이버시도 있을 것이고 해서 신시아에게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다.

"정리되면 알려드릴 테니까, 그때까지 정원이랑 저택을 좀 보여드려도 될까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신시아의 말에 앨리스가 반색했다.

"야스민 가의 저택! 웬만한 미술관보다 소장하고 있는 품목이 많다고 하던데!"

"그래?"

"네. 예술가들이나 미술사학자들이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엄청나게 요청한대요."

이어지는 신시아의 말이 더 아찔했다.

"미술품 수집이 아버지 취미셔서요. 일정 주기로 항목들 바꿔가면서 외부 전시 보내긴 하는데, 순번이 한참 남은 것들도 있거든요. 그리고 나가는 속도보다 들어오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기도 해요."

"그게······가능해요?"

"신진 작가들에 대한 아버지의 선구안이 굉장하거든요. 아버지가 눈독 들인 작가들은 대개 거장이 돼요. 그럼 작품들을 좀 보러 가실까요?"

일단 사서 쟁여놓으면 그중에 살아남은 몇이 거장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네. 부탁드릴게요."

그 말에 신시아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조작했고, 천천히 위로 이동하던 엘리베이터가 속도를 줄이더니 옆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이 좋으니 정원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들부터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잠시 후, 투명한 재질의 엘리베이터 벽 너머로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옷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저택 사용인들 수십 명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리를 맞았다.

"야스민 저택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디에서도 받아본 적 없는 환대.

하지만 신시아는 이런 대우가 너무도 당연한 것 같았다.

"바쁘실 텐데 다들 각자 볼일 보러 가셔도 좋아요. 그리고 오늘 도슨트(Docent: 전시물을 설명해주는 안내인)가 어떤 분이죠?"

집 안에 미술품이 얼마나 많으면 따로 도슨트를 두는 거지?

사용인들 가장 앞에서 황금빛 견장을 차고 있던 노인이 정중하고 품격있게 답했다.

"기스트 군입니다. 불러올까요?"

"네."

노인이 다른 사용인에게 도슨트를 불러오라고 시키는 사이, 신시아가 우리에게 노인을 소개해줬다.

"인사하세요. 이쪽은 저희 저택의 집사장, 레이먼드. 레이먼드, 이쪽은 오메가 님과 앨리스."

"처음 뵙겠습니다. 야스민 저택의 대소사를 맡아보는 레이먼드 홀스릭입니다."

"레이먼드도 흡혈귀랍니다. 홀스릭 가문은 아주 예전에 야스민가에서 분리된 가문인데 그 후로도 저희와 이렇게 함께하고 있어요."

"야스민 가의 번영이 저희 홀스릭의 기쁨 아니겠습니까."

그때, 사용인 하나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레이먼드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레이먼드는 잠시 이마에 주름을 만들어냈으나, 주름은 곧 원래대로 펴졌다.

그가 신시아에게 말했다.

"젠 도련님이 지금 기스트 군과 함께 새로 들어온 미술품 감상 중이라 기스트 군의 안내는 힘들 것 같다는군요."

"오빠가요? 말도 안 돼. 오빠는 언제든 미술품 볼 수 있지만, 오메가 님이 또 언제 우리 집에 오시겠냐고요. 도슨트 데려와야겠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리려는데, 레이먼드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제지했다.

"신시아 아가씨께서 오메가 님의 방문을 며칠 동안이나 고대하셨습니다. 아가씨 딴에는 아쉬워서 그런 것일 테니 잠시 아가씨께 맡겨보시죠."

정중한 권유에 나도 모르게 알겠다고 했다.

신시아가 레이먼드에게 물었다.

"젠 오빠, 지금 어디 있어요."

"후원에 계실 겁니다. 며칠 전에 설치품들을 싹 바꿨지 않습니까. 이렇게 된 김에 그쪽으로 합류하셔서 함께 설명을 들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젠 도련님도 오메가 님을 반길 것 같습니다."

레이먼드의 말에 신시아가 조금 누그러졌다.

후원이라길래 저택을 가로지르는 줄 알았는데 신시아는 우리를 다시 타고 올라온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그렇게 올라올 때보다 더 빠르고 오래 옆으로 이동한 뒤에 다시 햇빛을 볼 수 있었다.

저택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야스민 저택의 정원이 넓고 탁 트인 시야를 해치지 않게 예술품을 놓아 개방감을 추구했었다면, 후원은 정교하게 오밀조밀하게 모아 놓아서 정말 야외 전시장 같은 분위기가 났다.

끊임없이 감탄하며 좀 걸으니 저 멀리 남자 두 명이 있는 것이 보였다.

신시아와 같은 회색빛 금발에 도사들이 입는 도포를 걸친 사람이 아마 3남매의 첫째인 젠일 것이다.

"오빠!"

크게 자신을 부르는 신시아의 목소리에 젠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도슨트 분이 오빠한테 가 있다길래 왔어. 인사해. 이쪽은 오메가 님. 오메가 님, 저희 큰오빠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내 인사에 젠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말로만 듣던 오메가 씨군요. 신시아 입에 누구 이름이 이렇게 오랫동안 올라 있는 건 처음이라서 어떤 분일지 궁금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오빠."

그런데 영화배우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젠의 얼굴이 굳어졌다.

펄럭-

그의 도포의 소매가 부푸나 싶더니 젠이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허공을 걷는듯한 움직임 몇 번으로, 젠은 순식간에 우리에게서 수십 미터나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그렇게나 떨어져 있음에도 그가 눈을 감고 외는 도호道號가 생생하게 들렸다.

젠이 품고 있는 공력이 얼마나 정순하고 심후한지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원시안진元始安鎭 보고만령普告萬靈 악독진관岳瀆眞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신시아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오빠! 왜 저래, 진짜! 장난 그만 쳐! 손님 앞에 두고 뭐 하는 짓이야!"

"번뇌퇴산煩惱退散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번뇌퇴산 급급여율령!"

"오빠!"

젠이 눈을 떴다.

그에게서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신시아, 이런 장난은 그만두라고 몇 번이나 얘기 했을 텐데!"

"뭔 소리야, 진짜로!"

젠이 손을 들어 우리 쪽을 가리켰다.

"내가 동자공을 익히고 있는 것도 알고, 여인을 기피하는 것도 알면서!"

젠의 손가락이 뻗어있는 방향은 정확히 앨리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성형 안드로이드를 데려와?"

저렇게 근엄하고 장중하게 호통치는 이유가 앨리스 때문일 줄이야.

젠은 동자공을 익힌 도사 흡혈귀고, 여인을 극한으로 기피해서 신시아와 자신의 어머니를 제외하면 여성형 안드로이드도 꺼린다는 말을 들었었다.

저택의 규모와 크기에 감탄하느라 젠에 대해 들었던 내용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수 있겠다.

그걸 본 신시아가 새빨개진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진짜 제일 짜증나."

그렇게 남매는 서로 목에 핏대를 높여가며 악을 써댔다.

"앨리스가 얼마나 귀여운데! 오빠가 그렇게 대하면 상처받잖아!"

"그 아이에게만 박하게 대하면 상처겠지만 나는 모든 여자에게 똑같이 대하니 상처 받을 이유가 없지."

"평생 동정!"

"어허! 손님 앞에서 오빠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고자!"

"나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지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니 고자가 아니야."

"고자랑 뭐가 달라!"

"사령술사인 너를 보고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시체도착증)라고 하는 것만큼 다르지."

"네크로맨서랑 네크로필리아는 다르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

"네가 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내가 네 주장을 수용해야 할 이유가?"

도를 입으로 닦았는지 신시아를 자유자재로 농락하는 젠의 혀놀림은 이미 등선한 자의 그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황급히 레이먼드가 달려와 잔뜩 성이 난 신시아와 당황한 앨리스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 후에야 마무리가 되었다.

자리에 여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내게 다가온 젠.

동생과 말싸움을 하던 유치함은 어디 가고, 그는 다시 처음의 평안한 분위기로 돌아가 있었다.

그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입을 열었다.

"자세히 보니 신기하군요. 많은 걸 지니고, 그 많은 것에 능숙하다니."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몸이 뻣뻣해졌다.

047.

047.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최대한 침착하게, 젠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답했다.

그런 나를 향해 젠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도슨트에게 돌아가도 좋다고 말하고는 도슨트가 충분히 멀어지자 내게 차분히 말을 했다.

"오랜 기간 수행을 하다 보면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 있답니다. 세상을 흐르는 기氣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그 중 진기眞氣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기죠."

"그걸 보신다는 말씀입니까?"

젠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본다'라고 하면 너무 띄워주시는 겁니다. 몸 안으로 갈무리되지 못하고 조금씩 흘러나오는 조각들이 제 눈에 스쳐 간다고 하는 편이 맞겠군요. 아마 지금까지 수행한 날만큼 더 수행한다면 그때는 제대로 볼 수 있을지도요."

그러더니 젠은 내게 더욱 관심을 보였다.

한 발짝 다가와서 얼굴을 쑥 들이미는 젠.

"이런 형태의 진기는 누구에게도 본 적이 없어요. 사람이 성장하고 한 분야로 나아가면 진기도 그에 맞춰서 특정한 형질을 가지게 되는데 오메가 씨의 진기는······마치 정해지지 않겠다는 듯 뛰노는군요.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과하거나 모자란 부분이 없다니. 이건 저희 도가에서 말하는 태초의 혼원混元이 이런 느낌일까요."

어느새 말에 공력까지 실어 굉장한 호기심을 보이는 젠에게서 한발 물러섰다.

'여자 멀리한다더니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야?'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는지 내가 뒤로 물러서자 젠은 자신도 한 발짝 물러나며 사과했다.

"초면에 너무 가까이 갔나요? 죄송합니다. 너무도 신비로운 진기의 형상이라······. 저도 일단은 도사인지라 홀린 듯 다가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아!"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젠이 가부좌를 틀었다.

놀라운 것은 바닥에 앉아 가부좌를 트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자세, 그러니까 공중에 떠서 흔들림 없이 다리만 들어 가부좌를 틀었다는 것.

눈을 감고 손을 무릎 위로 늘어트린 젠의 입에서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혼원을 닮은 진기를 눈으로 마주하다니. 상단전의 영성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깊은숨을 들이쉬는 젠.

마치 주위 모든 만물이 젠에게 조금씩 기우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침내 젠이 모아두었던 숨을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그에게서 청량한 바람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분명 강한 바람이었으나 그것을 정면으로 맞이하는 후원의 식물들은 기쁨에 몸을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공중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젠이 눈을 떴다.

흡혈귀의 상징, 붉은 눈이 아까에 비해 더욱 진하고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행동 하나에도 원래 있던 기품을 넘어선 무언가가 그를 감싸는 느낌이었다.

가부좌를 풀고 다시 선 젠이 손을 뻗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습니다."

"예?"

"오메가 씨의 진기 일부를 본 덕에 벽을 하나 넘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요."

"그것이 무위無爲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는 무위와는 조금 다른 것 같긴 한데, 도사님이 하시는 말씀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인因과 연緣은 불가의 말이라고는 하지만 제가 도사라고 해서 인연을 귀하게 대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귀한 분에게는 더더욱요. 영약으로 쌓는 공력은 거의 한계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오메가 씨는 제게 새로운 길과 방법을 제시해주신 겁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이 감사함은 오메가 씨를 저와 만나게 안배하신 원시천존께 돌리겠습니다. 하지만 원시천존께 드리는 감사함과 오메가 씨에게 보답하고픈 제 마음은 별개입니다. 오늘 아버지를 만나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죠."

"아버지와의 만남이 끝나면 저와도 말씀을 좀 나누시죠.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알겠습니다."

승낙하는 내 말에 젠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리고는 나를 저택 안으로 데려가 직접 미술품 하나하나를 설명해주었다.

주기적으로 바뀌는 외부의 설치 미술과는 달리, 저택 안쪽에 놓인 미술품들은 야스민 공이 제일 아끼는 것들인 만큼, 바뀌는 일도 없고 가격대도 상상을 초월한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나는 예술에는 문외한이지만, 엄청 비싸다는 설명을 듣고 있으니 뭔가 어마어마한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본주의식 감상법······나 같은 인간에게는 꽤 괜찮은 감상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중, 작은 유리 쇼케이스를 하나 보게 되었다.

그 안에는 작은 풍뎅이 하나가 뽈뽈거리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희귀 곤충이라도 되나 싶어서 가까이 다가서니 풍뎅이긴 풍뎅이었지만 내 예상을 뛰어넘는 구조를 가진 풍뎅이였다.

놀란 나머지 멈춰 있는 사이, 젠이 옆으로 다가와 알려주었다.

"근래 들어 마법과 과학을 결합한 연구와 결과물이 쏟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건 그런 것들과는 궤를 달리하죠. 누군가는 고대 문명의 유물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사기꾼들의 쇼라고 합니다."

풍뎅이의 외관은 속이 비치는 얇은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그 덕에 생생하게 보이는 내부의 작은 기계 장치들이 정교하게 맞물리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젠의 설명이 이어졌다.

"효율을 극한으로 뽑아낼 수는 있을지언정 영구기관은 없다. 그것이 마법사들과 과학자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풍뎅이가 겉날개를 쫙 펴자 등 안쪽에 박혀있던 보랏빛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르르르-

날개를 편 풍뎅이가 쇼케이스 안을 우아하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저걸 구한 지 50년이 되어 갑니다. 그동안 풍뎅이가 움직임을 멈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비슷한 물건들이 아주 드물게나마 발견되고 있고, 발견지는 모두 고대 문명의 유적지입니다. 그리고 우린 저것들을 통틀어 마법과 과학 이전에 존재했던 무언가, 마도공학이라 부릅니다. 그 누구도 원리를 규명하지 못했죠. 내부의 핵을 건드리는 순간 바로 멈춰버려요."

"마도공학······."

그 사이 쇼케이스를 몇 바퀴나 선회한 풍뎅이는 다시 바닥에 내려앉아 뽈뽈뽈 기어 다녔다.

"발견이 정말 드물어서 그렇지, 하나 나왔다 하면 그해 경매 최고가를 갱신할 만큼 컬렉터들이 눈독 들이는 물건입니다. 저희 흡혈귀들도 기원을 알지 못 할 정도의 신비로움도 그 관심에 한 몫 하고 있죠."

젠이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마도공학 인기를 이끄는 컬렉터의 최선봉이 저희 아버지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내가 뭔가를 말하려는 사이, 어느새 레이먼드가 내게 와서 말했다.

"야스민 공께서 오메가 님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젠이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냥 가시면 안 됩니다?"

눈까지 찡긋하는 젠······저 새끼 진짜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겠지?

레이먼드와 함께 저택 내부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엘리베이터는 복잡하게 움직인 뒤, 멈추었다.

내려서자 눈에 보이는 것은 왕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고풍스럽고 우아한 양식의 복도, 그리고 그 복도 끝에 있는 황금색 문이었다.

문 앞으로 나를 이끈 레이먼드가 문고리를 잡고 톡톡 쳤다.

안에서 응답이 있었다.

"들어와."

여러 명의 목소리가 들린 건 착각인가?

절도 있고 우아한 동작으로 레이먼드가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선 나는 보이는 풍경에 입을 떡 벌렸다.

#

한편, 앨리스를 저택 한쪽의 자신이 쓰는 건물로 데려온 신시아는 연신 사과하기 바빴다.

"미안해, 내가 오메가 님이랑 앨리스 네가 와서 너무 들뜬 탓에 젠 오빠에 대해 깜빡했지 뭐야. 너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 괜찮아요."

"오빠는 동태 눈깔이야. 앨리스가 얼마나 귀여운데."

"하.하."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앨리스가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딸이신 신시아 씨가 보기에 아버지이신 야스민 공은 어떤 분이실지 여쭤봐도 될까요? 만남 전에 여러 경로로 알아보긴 했는데 워낙 구름 위의 구름에 사시는 것처럼 뜬소문만 많더라고요. 테오릭 경도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될 거라고 말씀을 안 해주시고······."

"우리 아버지?"

신시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좀 복잡하지. 굉장히 따뜻한 사람이시지만 동시에 차갑기도 하고, 가정적이면서 일 중독자이기도 하고."

"그 모든 걸 한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요? 다양한 면이 많은 분이시라는 건가요?"

신시아가 애매하게 웃었다.

"다양한 면이라고 하면 좀 그렇고, 그 다양한 면 하나하나가 모두 아버지라고나······할까?"

"네?"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앨리스에게 신시아가 얼버무렸다.

"그런 게 있어. 나도 설명하려니 참 어렵네."

#

"이런 멍청한 녀석! 기계 교단의 헤지르 주교는 곧 자리를 내놓고 내려오지 않나! 그가 교단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을 생각해봤을 때, 이건 교단 내에 우리 입김이 닿는 인사를 확장할 좋은 기회야!"

"근시안적 시야를 가지고 있군. 헤지르 주교의 퇴위는 기계 교단 내에 큰 파란을 불러올 거다. 이럴 때 괜히 우리 측 인사들을 움직였다가는 꼬리를 밟힐 수 있어."

똑같이 생긴 두 명의 남자가 신나게 토론 중이었다.

한 명은 격렬하게, 다른 한 명은 차분하게.

그리고 다른 한쪽의 책장 옆에는 역시나 똑같이 생긴 남자가 앞서 말한 둘을 보며 혀를 차며 책을 넘기고 있었고.

모두 젠과 신시아를 닮아있고, 붉은 눈과 회색빛 금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야스민 공인 걸로 보였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내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는 동안, 또 다른 야스민 공이 내게 다가와 쾌활하게 물었다.

"대림 에어리어의 해결사 오메가! 감히 나, 커머라시 야스민과의 독대를 청하다니! 멍청한 건지, 강심장인지 모르겠군. 자네에 대해 알아보지는 않았네! 그저 운이 좋아 테오릭과 신시아의 호감을 산 녀석일 수도 있으니까! 두 사람 모두의 호감을 얻는 건 운 중에서도 강운 같긴 하지만!"

여전히 당황스러워 눈만 굴리고 있는 사이, 내 앞의 쾌활한 야스민 공이 말했다.

"어떤 타입, 어떤 감정이 자네와 잘 맞는 것 같지? 말만 해. 이성적? 감성적? 냉소적? 호의적? 원하는 타입의 나와 대화하게 해주지."

"음······저는 한 타입보다는 그 모든 걸 가지고 있는, 진짜 야스민 공 한 분과의 대화를 원합니다만."

그 말에 시끄럽던 방 안이 고요해졌다.

여러 명의 야스민 공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알아채지 못한, 내부 2층의 난간에 머리를 내민 몇 명의 야스민 공마저도.

"흠······. 그렇단 말이지."

수많은 야스민 공들이 하나둘 합쳐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 합쳐져서 몇 명 남지 않은 야스민 공들은 방의 한쪽에 있는 관 같은 침대로 향했고, 마침내 그들 모두가 관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리고 관 안에서 머리에 큰 모자 같은 것을 쓴 야스민 공이 일어섰다.

그는 천천히 모자를 벗어 내려놓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시간을 아끼고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껏 분리해 놓은 자아와 감정을 통합하게 만들었으니 자네와의 영.양.가. 많.은. 대.화.를 기대하겠어. 해결사 오메가."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한마디라도 했다간 당장이라도 목을 틀어쥐고 내 혈액을 모조리 빨아 마셔버릴 것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주눅 들지 않고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지만, 해결사 오메가입니다."

야스민 공이 차갑게 말했다.

"벌써 유통기한을 3년 8개월 정도 넘긴 인공 혈액을 마시는 기분이 드는데. 영양가가 느껴지지 않아."

그리고 야스민 공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의뢰의 내용과 그에 따른 보상을 살펴보지. '흡혈귀 회합의 호위로 참석해 신시아를 무사히 데리고 돌아올 것.'이게 의뢰 내용이었고. '혈계조검술 비급의 소유권 이전과 커머라시 야스민과의 독대.' 보상 내용은 이랬지. 틀린 부분 있나?"

"없습니다."

"좋아. 비급은 자네에게 넘겨주도록 하지. DRM이 걸려 있어 판매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 직접 익히는 방법을 추천하겠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문제가 되는 건 두 번째 보상조항인데. 독대만 원했을 뿐 추가적인 내용이 없단 말이지. 따라서 독대가 이루어진 현 시간부로 보상 지급이 완료되었다고 판단해도 되겠나?"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내가 요구한 것은 독대일 뿐, 그 이후 어떻게 하겠다고까지는 조건을 붙이지 않았었다.

독대 조건을 붙일 때만 해도 내가 요구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너무 까다로우면 이쪽에서 거절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야스민 공에게 묻고 싶은 것은 리벨리온을 장기 말처럼 사용하는 수연, 그리고 지금은 죽은 파라터스, 또 헤지르 대주교인 척 위장하고 있던 모래알 남자, 이들의 존재와 관계, 방향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걸 물어본다는 선택지는 보상안에 없었기 때문에 물어보게 된다면 야스민 공에게 내어줄 것이 필요했다.

영생의 종족인 흡혈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가문의 가주이며 투자의 귀재라고 불리는 야스민 공에게 줄 수 있는 것?

냉정히 얘기해서 없다.

앨리스도 내게 그냥 가서 바짓가랑이 붙잡고 환상의 똥꼬쇼라도 펼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뭐······.

그런데 젠이 미술품을 보여준 덕에 방법이 하나 생겼다.

이제 슬슬 지겹다는 눈빛을 하는 야스민 공을 향해 조심히 단어를 골라가며 입을 뗐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 요구에 응할 의무가 없네. 새로운······."

"새로운 조건을 걸겠습니다. 야스민 공께서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드리죠. 대신 제 물음에도 아시는 대로 답을 주셨으면 좋겠군요."

"기대는 되지 않지만 새로운 거래는 늘 들어볼 가치가 있지."

"마도공학······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것들에 관한 것입니다."

야스민 공이 코웃음을 쳤다.

"기껏 생각해낸 것이 그런 핑계라니. 마도공학 얘기를 꺼내면서 나와 만나려고 했던 놈들이 지금까지 몇 명일 것 같나? 한강을 가득 메울걸? 그중에 제대로 된 놈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말도 해두지."

그의 새빨간 눈이 빛났다.

"그중에서도 제법 재주를 가진 놈들은 나를 직접 보기도 했었어. 자네처럼 말이야. 그런데 하나 같이 사기꾼이더구만. 내가 그런 쓰레기 놈들을 어떻게 한 줄 아나?"

싸늘한 웃음이 야스민 공의 입가에 맺혔다.

"상상에 맡기지."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붉게 번들거리는 야스민 공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마도공학은 고대 문명의 잔재라고 들었습니다. 공께서 만나신 이들 중, 그 고대 문명을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마법과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기 이전의 고대 문명.

그거 아무리 봐도 내가 플레이하던 시절의 서리얼이잖아.

그때부터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물건이라면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당연히 한 명도 없지.

048.

048.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나를 향해 쏘아지는 야스민 공의 말이 매섭다.

"보석 박힌 풍뎅이를 봤습니다. 그 물건, 풍뎅이 말고 다른 모습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걸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의 말만 하는 게 좋다는 충고를 하고 싶은데."

야스민 공은 내게 지긋지긋한 소리를 또 듣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긴, 이런 비슷한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겠나.

네오-서울의 초 거물이 관심 가지는 예술품.

연원도, 작동원리도 규명되지 않았으며 유적지에서 아주 적은 수만 출토된다고 한다.

사기꾼들이 물기 딱 좋은 건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기꾼들과 다르다.

'진짜'니까.

"보여 드리죠. 보석 풍뎅이가 있는 곳으로 가서 보여 드리면 되겠습니까?"

야스민 공이 입술을 굳게 닫고 나를 응시했다.

그러기를 1분 정도 지났을까, 그가 고개를 떨구고 스스로에게 탄식했다.

"젠장. 마도공학만 걸려 있으면 감성이 이성을 앞서는군. 이래서 나눠놓은 자아를 합치면 안 됐는데."

아무래도 내가 야스민 공을 공략할 포인트를 제대로 잡은 것 같다.

야스민 공은 손에 낀 반지를 돌려 레이먼드를 호출했다.

"레이먼드, 자색 갑충을 들고 내 서재로 와 주게."

서재에서도 쓰리피스수트를 갖추어 입은 미중년의 남성이 반지에 대고 말하는 모습에서 굉장한 멋이 풍겨 나왔다.

'저런 형태의 통신 디바이스도 있구나.'

귀걸이 형태는 조작하고 바로 말하면 되지만 반지 형태는 입 가까이 가져다 대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 보이긴 했다.

하지만 또 불편함이 클래식이 된다면 그것 또한 느낌 있지 않나.

물론 모델이 야스민 공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내가 반지에 대고 중얼거리고 있으면 미친놈 소리를 듣거나 나이가 몇인데 보석 반지 빨아먹고 있냐는 앨리스의 잔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

호출을 마친 야스민 공에게 말했다.

"좀 다른 얘긴데······아까 저건 뭐고, 어떻게 하신 거고, 왜 하신 겁니까?"

내 눈이 향하는 곳은 조금 전, 많은 야스민 공들이 모여들어 하나로 합쳐졌던 관과 같은 모양의 침대였다.

"정식 명칭은 없고 내 개인적으로는 자아 형상화 장치라고 부르고 있네."

"자아 형상화 장치요?"

내가 그 물건에 관심 가지는 게 기쁜지 야스민 공은 날카롭게 나를 몰아붙이던 아까와는 정 다른 모습으로 침대 곁으로 가서 내게 가까이 와보라는 듯 손짓을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침대 옆에 놓여 있는 모자를 들어서 보여주었다.

검은색 비니처럼 생겼지만, 야스민 공이 뭔가를 조작하자 비니에서 수십 대의 초소형 드론이 부웅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하나하나가 홀로그램 재생기지. 아까 자네가 본 내 자아들은 모두 홀로그램이라네. 그동안 나는 여기 누워서 자아들의 컨트롤센터가 되는 거고."

"신기하네요. 그런데 왜 이런 걸 하고 계신 거죠?"

"자아라는 건 굉장히 두루뭉술한 집합체거든. 게다가 감정도 섞여 들어가면 매우 복잡해지지. 이런 복잡함 속에 섞여드는 불확실성은 중립을 해치고, 그 가운데 발생하는 확증편향 때문에 올바른 방향의 투자를 할 수 없게 되면. 그건 치욕적인 일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투자 얘기가 나오자 열변을 토하는 야스민 공이었다.

"그래서 아예 다양한 감정과 자아를 하나의 인격체로 형상화 시켜서 최적의 방향을 잡아내자는데 결론이 이른 것이지. 이 장치는 그 결론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고."

대충 이해하기로는, 투자하는데 다양한 감정들이 방해되니 그걸 극복해 낼 방법을 찾다가 아예 감정과 자아의 일부를 사람처럼 만들어서 토론 시켜 사안에 대한 다각도의 시야를 확보한다는 것 같다.

"오······. 하지만 그렇다면 투자를 알고리즘이나 머신에 맡기면 되는 것 아닌가요? 아예 감정 개입을 하지 않게요."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가 그 광기를 이해하지 못해 연산 회로가 다 타버린 안드로이드 얘기는 이제 기삿거리도 되지 못하네. 시스템 트레이딩은 손실을 최소화해주겠지만 다양한 현안에 대한 대응력은 부족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그리고 모자를 툭툭 두드리며 야스민 공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런 건 3가지만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만들 수 있네."

"그게 뭐죠?"

"돈, 수명, 도전정신."

보통 사람들은 셋 중에 하나만 많아도 썩 괜찮은 인생이라고들 하는데요.

혀끝을 넘어 입술 끝까지 맺힌 말이었지만 괜히 나서서 말꼬리를 잡지는 않았다.

그때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레이먼드가 들어와 들고 왔던 유리 쇼케이스를 야스민 공의 책상에 놓고 나갔다.

쇼케이스 안에는 여전히 풍뎅이가 발발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젠의 안내를 받을 때 내가 이 풍뎅이 앞에서 멈춰서서 말을 잃었던 이유.

이 풍뎅이가 서리얼에서 너무 흔해 빠진 '아이템'이었기 때문이었다.

집 꾸미기, 흔히들 하우징 시스템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분위기를 내기 위해 집 주변에 풀어놓는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형태만 보면 지루하다는 이유로 여러 형태로 바뀌게 만들어 놓았다.

"헛짓거리할 생각은 하지 않길 바라네."

그렇게 말한 야스민 공이 쇼케이스에 손을 대자, 다양한 색의 스파크와 일렁임이 일어나더니 곧 아무 일도 없이 잠잠해졌다.

"보안 장치들을 해제했으니 안에 손을 넣어서 스스로 했던 말을 증명하게."

야스민 공이 작게 열어둔 쇼케이스의 구멍 사이로 거침없이 손을 집어넣어 풍뎅이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이템'들 중 몇몇 개가 남아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건드리면 작동을 멈추는 모양.

그런데 그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연구랍시고 해체하려고 했을 텐데, 그건 아이템 분해와 같으니 당연히 멈추거나 사라지는 거지.

이제 내가 하려는 건 잡기술 측에도 못 낀다.

하우징 시스템을 이용했던 사람이라면 집을 예쁘게 꾸미기 위해 누구나 가졌던 스킬이다.

아마도 지금은 나밖에 못 쓰는 것 같지만.

[하우징 장식물 변형]

내 손등 위에 3이라는 숫자가 떴다.

쇼케이스에 들어갈 것처럼 머리를 붙이고 있던 야스민 공이 외쳤다.

"어, 어떻게 한 건가!"

그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말했다.

"횟수는 3번 남았습니다. 나비를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귀뚜라미를 좋아하십니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는지 야스민 공은 턱을 벌린 채 으어어하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귀뚜라미로 하죠. 좋은 소리가 날 겁니다."

손등 위의 숫자가 2로 변하고, 손등이 아래로 가게 주먹을 쥔 다음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얼굴이 자주색 보석으로 만들어진 귀뚜라미가 날개를 비빌 때마다 청명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세상에! 풍뎅이가 귀뚜라미가 됐어!"

야스민 공이 황급히 레이먼드를 호출했고, 나는 레이먼드에게 아주 정중한 태도로 몸수색을 당해야 했다.

풍뎅이를 숨기고 다른 걸 꺼내놨을 수도 있으니 정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절차라는 야스민 공의 말을 수 십 번이나 들으면서.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야스민 공의 눈은 계속해서 날개를 떨어대는 귀뚜라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풍뎅이의 형태를 바꿨음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야스민 공에게 전해지는 레이먼드의 말.

레이먼드가 나갈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야스민 공이 한마디를 했다.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인데······."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요."

"다른 마도공학품도 똑같이 할 수 있는 건가?"

관계는 역전되었다.

최대한 어리숙하면서도 능글맞은 티가 조금은 배어 나오도록 말끝을 늘였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날카로움 같기가 칼보다 더 예리한 야스민 공이다.

그는 바로 본론으로 향했다.

"내게 묻고 싶은 게 뭔가."

여기서 순순히 응하면 하수다.

조금 더 애타게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도 같습니다."

벌떡 일어선 야스민 공이 내게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이러긴가?"

그렇게 몇 번이나 딴청을 피우니 이제 야스민 공의 시선이 나와 귀뚜라미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갔다.

늘 부탁받는 위치에만 있어 본 사람이 부탁하는 입장이 되니 미치려는 것이다.

그런데 튕기는 사람이 자신이 제일 관심 있고, 아끼는 것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어떻게 할 수도 없어서 답답해서 가슴에 불이 날 지경일지도 모르겠다.

'이쯤 하면 건성으로 알려주지는 않겠어.'

크흠하고 목청을 가다듬은 뒤 드디어 야스민 공에게 본론을 말했다.

"예공방의 상무인 수연, 그리고 그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 남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네오-서울의 은밀한 곳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고, 그것에 대해 가장 잘 알만한 사람이 야스민 공이 아닐까 해서 찾아온 겁니다."

"들어보겠네."

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여전히 귀뚜라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야스민 공의 눈길이 점차 내게로 옮겨오고 있었다.

#

야스민 공이 지닌 정보의 범위와 양, 품질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헤지르 대주교가 야바니에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성당 지하에서 거대한 공장이 돌아가고 있는 것도 알았다.

그게 기계화 좀비라는 것은 조금 나중에 알았다고.

"그걸 어떻게 아신 거죠?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건데요."

"성당 지하에서 밖으로 향하는 걸로 추정되는 환풍구에서 배출되는 연기의 성분이 달랐으니까. 그리고 사령술협회가 신시아의 부탁을 그렇게 쉽게 들어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내가 고개 좀 까딱 한 거지."

내가 열심히 뛰어다닐 동안, 이 흡혈귀는 서재에 앉아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대림 에어리어 26구역의 폐교에 관련된 내막은 나도 처음 듣는군. 테오릭이 와서 제대로 정신 박힌 녀석 하나를 발견했다고 했을 때만 해도 호들갑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테오릭 경은 주변에 나를 그렇게 말하고 다니고 있었구나.

내가 지금까지 겪은 테오릭 경이나 그의 제자인 여다함을 봤을 때, 테오릭 경이 말하는 '제대로 정신 박힌 녀석'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마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그들과 비슷한 무언가로 생각하겠지?

잠시 우울해질 무렵, 야스민 공이 하는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수연. 나도 요새 주의 깊게 보고 있었지. 출신을 전혀 알 수 없는 데다가 예공방 내의 영향력은 사장을 능가하고 있어. 게다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제법 규모 있는 자금을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손을 들어 귀뚜라미가 든 유리 쇼케이스를 쓰다듬는 테오릭 경이었다.

"예공방의 이사 말고도 다른 일을 하는 걸로 보이는데, 주로 PMC나 용병 회사의 자문이나 사외이사를 맡고 있더군. 그리고 몸이 모래처럼 부서진다는 남자. 그런 특징을 가진 이들이 몇몇 있어서 쉽게 특정하기는 어렵군. 각자의 뒷조사를 해서 수연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쪽을 특정해 알려주지. 어때, 이 정도면 되겠나?"

깔끔하고 완벽한 일 처리.

찾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스민 공이 중얼거렸다.

"요새 방계의 사업장 몇이 망가졌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것도 그쪽 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일단은 저도 그쪽과는 감정이 좋지 못한지라, 혹여 트러블이 생기거든 먼저 찾아주시면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그렇게 부드럽게 영업 멘트를 쳤더니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정색한 야스민 공이 내게 말했다.

"무슨 소리, 자네 같이 귀하디귀한 고급 인력을 그런 데 쓸 수는 없지."

아까는 사기 치는 쓰레기면 어떻게 할지 각오하라고 으르렁거리더니 풍뎅이를 귀뚜라미로 바꿔줬다고 귀하디귀한 고급 인력이란다.

기분이 오묘하긴 했지만 어쨌든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은 건 분명했다.

"요새 이름값이 올라서 들어오는 의뢰가 많다지?"

"예. 회합 호위에 이름을 올린 덕이죠."

예의상 한 말인데 야스민 공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다.

나를 빤히 바라보고 하는 말도 혼잣말이라고 할 수 있나?

"맞아.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허락한 내 덕이지."

"틀린 말씀...은 아니죠."

"그러니 의뢰 하나 더 발주하겠네. 최우선으로 해야 할 걸세."

저기······우린 그걸 의뢰가 아니라 강압, 혹은 갑질이라고 부르기로 약속을 했어요.

일종의 사회적 합의랍니다.

그걸 그렇게 쉽게 의뢰라고 하면 안 돼요.

그러거나 말거나 야스민 공은 내게 의뢰를 발주, 아니 선언했다.

"3주 후, VVIP를 대상으로 하는 마도공학 경매가 있네. 내 대리인으로 참여해주게."

VVIP, 마도공학, 경매.

단어를 떼어놓고 봐도 아찔하게 황홀하고 조합하면 황홀하게 아찔하다.

이건 안 하는 게 멍청한 거다.

강압? 갑질?

명심해, 커머라시 야스민.

이런 강압과 갑질이라면 나는 언제든 환영이야.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한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의뢰의 보상으로는 어떤 것을 주실 수 있으실지요?"

이어지는 야스민 공의 말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신시아와의 결혼을 허락하겠네. 그리고 특별히 가문의 성을 내리지. 오메가 야스민이 되는 걸세. 또, 자네가 원한다면 흡혈귀가 되지 않아도 좋네. 참고로 야스민의 성을 사용하면서 흡혈귀가 아닌 자는 전 세계에 단 하나도 없네. 자네가 유일해지는 거야."

와······.

대체 어디부터 지적해야 하는 건지 감도 안 잡힌다.

049.

049.

"아버지 바보! 오빠는 똥멍청이! 둘 다 오늘 나 제대로 망신 주려고 작정했어! 아니면 이 상황이 말이 안 돼! 제가 언제 오메가 님이랑 결혼하고 싶댔냐고요!"

쾅-!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당장이라도 터질 것같이 시뻘겋게 변한 신시아가 야스민 공의 서재 문을 거세게 닫으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신시아! 왜 그러는 거냐! 신시아!"

야스민 공이 당황한 얼굴로 애타게 외쳤다.

새로운 의뢰만 마치면 나와의 결혼을 허락하기로 했다면서 야스민 공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하는 동안, 신시아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책상 위에 손을 올려놓았던 곳에서 시커먼 기운 하나가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늘 생글생글 잘 웃던 신시아인데 오늘 여러 가지 일로 멘탈이 박살 난 것 같아서 안타깝다.

여전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은 야스민 공을 향해 내가 말했다.

"제가 그랬죠? 당사자가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요."

"어째서?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었나?"

"네. 대체 어디서 오해하신 건지 모르겠는데 아닙니다."

"그럴리가? 신시아가 멋있다고 하는 남자는 오메가 자네가 처음인데!"

"말씀은 너무나 감사하지만 잘못 짚으신 것 같네요. 멋있는 남자와 결혼 상대는 좀 별개의 선택지가 아닐까요."

내가 생각했을 때, 신시아가 내게 느끼는 감정은 연모나 애정이 아니다.

신시아가 타이린드와 정민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느낀 거다.

서로 친구인 것을 참작해도 타이린드는 내게 훨씬 스스럼없이 대하지만 신시아는 호칭 정도만 신경을 쓸 뿐 으르렁대지 않는다.

타이린드는 내 몸에 손을 안 댔으니까.

정민은 내가 프로이데 마탑이 있는 내내 부담스러울 정도로 깍듯하게 대했지만, 밤에 내 손목을 잡고 있는 걸 들켜서 기간 내내 신시아의 살인적인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즉, 신시아는 나를 아이돌 보듯이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일종의 우상.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하지만 누군가가 독점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 소중히 여기자.' 정도의 느낌 아닐까.

오로지 내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기에 진짜 신시아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는 거다.

아이돌을 집에 초대했는데 오빠는 여성형 안드로이드를 자기 앞에 데려왔다면서 공력을 일으키고, 아버지는 껄껄 웃으면서 '아이돌을 너와 결혼시키기로 했단다. 잘했지?' 하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멘탈이 박살 나지 않는 게 기적일 지경.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느끼는 바로는 그렇다.

하지만 야스민 공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럼 이걸 계기로 서로 만나보는 건······?"

"더 이상 하셨다가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시게 될 것 같습니다."

진짜 모르겠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야스민 공을 보고 있자니 참 묘하다.

투자의 귀재이자 돈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흡혈귀도 딸 마음은 잘 모르는구나.

#

"아버지가 당황하는 모습이라니, 그런 모습을 본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요. 저도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야스민 공과 신시아 사이에 벌어진 일을 얘기해 주자 젠이 웃겨 죽으려고 했다.

지금 내가 젠과 함께 있는 곳은 저택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체육관······이라고 하기에는 거대하고 광활한 공간이었다.

축구장은 가볍게 들어갈 만한 공간에 이런저런 기구들이 가득 놓여 있는데, 그냥 체육관이라고 하기에는 그 단어가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슨 의뢰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상이 파격적이기는 하네요. 아버지가 신시아를 엄청 아껴서 중매를 모조리 쳐낸 지 오래됐거든요. 그런데 대번에 신시아와의 결혼을 약속하실 줄이야. 물론 아버지는 신시아의 의사를 중요시 생각하셔서 성립할 것 같지는 않은데 재밌네요."

"의뢰 내용은 야스민 공 개인이 하신 의뢰라 아드님이신 젠 님께도 말씀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전 신경 안 써요. 다만 보상은 좀 궁금하긴 하네요. 애지중지하던 신시아를 언급할 정도의 보상이었는데 다른 걸 준비하실 수 있으려나? 아버지도 간만에 골치 좀 아프시겠어요."

젠의 예상 그대로였다.

나와 신시아 사이의 결혼을 보상으로 내걸었다가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하면 다시는 아버지 안 볼 거라는 극렬한 신시아의 반대에 직면했고, 그런데도 야스민 공은 나를 마도공학 경매에 대리인으로 세우고 싶어 했다.

야스민 공은 우리 사이를 오해하긴 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를 허용한 것인데 그게 안 되니 어떤 걸 보상으로 줘야 할지 매우 당황했다.

"그 부분은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 말에 젠이 괜스레 바람을 넣었다.

"기대해도 좋을 것 같은데요? 아버지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팍팍 쓰시니까요."

기대가 안 된다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젠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서 보자고 하신 거죠?"

"아! 뭘 드려야 할지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젠이 도포 안에서 작은 리모컨을 꺼내 버튼을 누르자 장비들이 모두 벽과 바닥으로 사라지며 순식간에 광활한 공터 같이 변했다.

"새로운 경지를 엿보게 해주신 분에게 물질적인 건 의미가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그쪽은 아버지께서 알아서 잘 챙겨주실 것도 같고요."

늘어진 도포의 소매에서 폈다 접었다 하는 쥘부채 하나를 꺼내는 젠이었다.

"그래서 제가 대련을 좀 해드리면 어떨까 싶어요. 개선점을 찾아보죠. 진기가 다양한 방향으로 뻗고 싶어 하는데 그걸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이래 봬도 제게 지도 대련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꽤 됩니다."

용하다.

오랜 기간 수행한 도사라는 말이 맞긴 맞나 보다.

검술은 그나마 사용에 자유롭지만, 마법이나 기타 스킬들은 보는 눈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사용이 자유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사용이 자유롭지 않으니 자연스레 연계나 조합이 어설퍼지는 면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마구잡이로 보여줄 수도 없다.

"제가 비밀이 좀 많은 편이라서요."

"여기는 저와 오메가 씨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제 공력을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메가 씨께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제안한 것이지만 꺼려지신다면 다른 방안을 찾아보겠습니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믿어보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젠은 부채를 꺼내든 이후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후원에서 젠이 가부좌를 틀고 호흡할 때부터 느낀 건데, 이 흡혈귀, 엄청나게 강할 거다.

못해도 위타천, 혹은 그 이상.

비록 관계가 조금 요상해지긴 했지만, 나는 언젠가 위타천을 때려눕힐 꿈을 꾸고 있다.

그러니 위타천과 동급 이상으로 보이는 젠과 대련을 하는 것이 절대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째 호승심에 사고가 그쪽으로만 흐르는 것 같지만, 난 원래가 이런 놈이었다.

요새 바빠서 잠시 눌러둔 거지.

"그럼 사양 않고."

손에 칼자루를 쥐었다.

젠이 부채를 폈다가 접자 촤르르륵하는 소리가 넓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조절은 하겠지만, 어설프게 움직이다가는 다칠 수도 있습니다, 오메가 씨."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고속 이동]

쇄도하는 것과 동시에 비틀리는 칼자루.

시야에 젠이 웃는 모습이 담긴다.

[연하일휘]

나아가던 검이 중간에 우뚝 섰다.

부들거리는 검의 끝에, 젠의 쥘부채가 닿아있었다.

"움직임이 크고 낭비되는 힘이 많습니다. 더 정교해질 수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젠.

쥘부채에 빛으로 이루어진 검날이 닿았으나 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무형의 기운이 부채를 둘러치니 빛은 부채의 가장 끄트머리도 베어내지 못했다.

부채를 들지 않은 젠의 손이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너무나 느리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찰나 간에 이루어진 일이라 뇌가 느리게 인식하는 것뿐이다.

젠의 손바닥에서 공력이 뿜어져 나왔다.

"공격을 봤으니, 방어도 보겠습니다."

재빨리 검을 물리고 몸을 뒤로 뺐으나 산사태와 비견될 정도의 위력의 공력이 나를 덮쳤다.

[흐림수르사르]

삽시간에 형성되는 위압적인 얼음의 벽.

성당 지하에서와 비교하면 훨씬 두텁고 거대하다.

'영원빙정. 효과 좋네.'

하지만 젠의 공력은 그런 빙벽을 절반 이상 날려버렸다.

"현천칠성장玄天七星掌이라는 장법입니다. 빙벽이 이걸 버틸 줄은 몰랐습니다. 오메가 씨는 월하선 마탑의 숨겨둔 제자였던 겁니까?"

빙벽 너머로 들리는 젠의 목소리는 어쩐지 좀 즐거워 보였다.

"다시 오시죠."

빙벽 파편 위로 올라서서 젠을 향해 말했다.

"제대로 갑니다."

[표르긴]

얼음의 길을 만들어내는 스킬.

이전에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가늘었던 길이었지만, 이제는 내 바이크가 올라가도 끄떡없을 정도의 두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대로 시선을 쭉 돌리자 내 시선을 따라 얼음장이 만들어졌다.

마침내 나와 젠을 둘러싼 커다란 반구 형태의 얼음 돔을 완성했다.

그제야 젠이 조금 놀란 얼굴을 보였다.

"월하선 어쩌고는 농담처럼 한 말이었는데, 정말 마법이군요. 마나 하트도 안 보이는데······."

대답하지 않았다.

[탄성 증가]

제자리에서 뛰어보니 몸이 가볍게 통통 튀는 것이 느껴졌다.

위로 뛴 상태에서 다리를 뒤로 뻗자 얼음판의 감촉이 느껴졌다.

[여리박빙]

[추진]

발바닥에서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원래도 그렇게 멀지 않았던 젠의 모습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만사재시 매사필종]

한 줄기 빛이 젠을 스쳤다.

젠은 가볍게 부채를 휘둘러 내 움직임을 흘리는 데 성공했다.

뒤쪽의 얼음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급감속]

그리고 속도가 완전히 줄어들기 전, 공중에서 몸을 뒤틀어 다시 똑같은 스킬을 사용해 젠을 향했다.

내가 얼음을 밟는 소리, 검날과 젠의 공력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굉음이 단 한 순간의 간격도 두지 않고 울려 퍼졌다.

#

젠은 흡혈귀 가문인 야스민 가의 첫째이며, 도달한 경지를 따지자면 못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저명한 도사다.

이것은 그가 보고, 듣고, 마주한 경험의 수가 가히 엄청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게는 도관(道觀:도교 사원)에 새로 입문한 어린 도사들부터, 크게는 시대를 풍미한 무력을 지닌 이들까지.

그런데, 오메가의 공격을 받아 내는 이 순간 젠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하나 있었다.

자유자재.

오랜 시간 검을 수련한 검사처럼 검을 다루며, 가장 정교한 전투 마법사들 이상으로 다양한 마법을 구사했으며, 수행에 몰두한 기공 수련자들 이상으로 몸과 기를 잘 이용했다.

게다가 앞서 말한 것들 말고도 사이사이에 작게 스쳐 가는 다양한 기술들은 그 자체로 끊어지지 않고 굽이치는 강물의 자유로움을 연상케 했다.

'퓨어, 인간······!'

오메가를 직접 상대하고 있는 젠은 오메가가 퓨어라는 말을 전혀 믿을 수가 없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눈에 비치는 오메가의 신체는 분명 퓨어였다.

다만 몸 안의 진기가 조금씩 일렁일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기술들이 펼쳐지곤 했다.

만일 젠이 진기를 읽을 수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공격만 흘려보내는 수세守勢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젠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메가 씨와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이 정도의 움직임을 보일 수 없다.'

개선점을 찾아보자고 말했는데 감탄만 하고 끝낼 수는 없었다.

젠이 방어에 사용하는 공력을 최소화하고 남은 공력을 눈으로 올려보냈다.

안력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메가의 진기에 집중하는 젠은 그 유려함에 취해 자신을 잊는 경지, 몰아지경沒我之境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

도사란 무엇인가.

바람을 부르고 하늘에 번개와 우레를 내리는 이다.

도사란 어째서 바람을 부르고 뇌전을 내리는가.

땅에서 살아가는 순리를 거부하고 하늘로 오르려는 역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데 어찌 그런 힘을 지닐 수 있는가.

#

몰아의 경계에 있는 젠의 입이 열렸다.

붉디붉은 그의 눈에서 푸른 빛이 일렁인다.

"그것은 타고난 껍질을 깨고자 하는 열망의 발현일지니."

젠의 손에 들린 부채가 부드러이 움직이며 글자인 듯, 그림인 듯 기묘한 문자들을 그려냈다.

그의 눈을 벗어난 뇌전이 부채 끝에 뭉치고, 그걸 강하게 휘두르자 뇌전은 박쥐 떼를 빚어냈다.

[천정격뢰天頂擊雷]

[뇌신지편雷神之蝙]

뇌신雷神은 도가에서 우레를 다루는 신이며, 갈고리 발톱과 박쥐의 날개를 달고 있다.

또한 박쥐는 흡혈귀의 상징이기도 하니 젠에게 아주 어울리는 술법이었다.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푸른 박쥐 떼가 오메가를 향해 날아갈 때, 젠이 몰아에서 벗어났다.

"이런!"

그가 놀라 부채를 접어 들었으나 박쥐 떼는 파직거리는 전기불꽃을 거세게 일으키며 오메가를 향하고 있었다.

다급하게 다른 형태의 인을 맺은 젠이 오메가에게 외쳤다.

"피하세요! 술법약화, 급급여율령!"

하지만 오메가는 오히려 검을 어깨높이로 올려 든 뒤, 검날이 위로 가도록 돌려 잡았다.

[지락地落]

[술해術解]

전기를 흘려보낼 준비도, 술법에 대한 대비도 어느 정도 마친 오메가.

[빗방울 베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박쥐들을 빠른 속도로 베어내기 시작했다.

전기 박쥐와 광자 검날이 부딪힐 때마다 눈이 멀 것 같은 엄청난 빛이 쏟아졌고, 오메가의 뒤로 그림자를 길게 뽑아냈다.

빛과 그림자의 경계에서 움직이고 있어 움직임이 끊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오메가의 모습.

순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 그 어떤 도사도 저렇게 간절하고 필사적이지 않으리라.

툭-

젠의 손에 들려있던 부채가 바닥에 떨어진다.

한 인간이 몸소 보여주는 위대한 의지를 목격한 탓이다.

그의 입에서 도사의 본질에 대한 묘리가 흘러나왔다.

"안으로는 혼원을 담고, 밖으로는 역천을 행할지어다."

그렇게 수십 회의 명멸이 끝나고 박쥐 떼가 모두 사라진 자리에는 머리카락 끝이 조금 타버린 오메가가 있었다.

아래로 늘어트린 검이 역전개 되며 칼자루로 돌아갈 즈음, 정신을 차린 젠이 한 걸음 만에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괜찮나요?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로······!"

저릿저릿한 손과 다리의 느낌을 참은 채로, 오메가가 칼자루를 들고 있지 않은 손을 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쩌적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형성된 길고 날카로운 얼음 칼날이 젠의 어깨에 살짝 닿았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채로, 오메가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선언했다.

"1승 먼저 가져갑니다."

050. (2권 후기)

050.

"참나. 아버지도 정말. 어후, 결혼이라니. 그것도 오메가 님이랑.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니?"

앨리스는 자신을 위해 제공된 최고급 오일 샌드를 씹으며 붉어진 얼굴에 연신 손부채질하는 신시아를 바라봤다.

'맛있네.'

시추선에서 퍼 올린 원유에 심층 해양수를 배합해서 만들었다고 했던가.

농밀하고 진득한 기름 맛 사이사이 치고 올라오는 청량감이 아주 산뜻한 것이 진국이었다.

'아무리 사장님이 내 간식 비용에 유해졌다고는 하지만 이런 걸 매번 사 먹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눈앞에서 연신 손부채질을 하는 신시아는 다르다.

이런 오일 샌드 정도는 정원 바닥을 도배할 정도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앨리스의 연산 회로가 어느 때보다 빠르게 오일 샌드로부터 주어진 열량을 소모하며 가동을 시작했다.

'대체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위험한 곳을 찾아다니는 기질이 있으니 항상 불안하다. 하지만 야스민 가의 뒷배가 있다면? 적어도 네오-서울에서 위험할 일은 없다.'

게다가 터진 댐처럼 쏟아지는 신시아의 말을 정리해보면 무려 가문의 성을 주는데도 흡혈귀가 될 필요도 없다고 했단다.

'전경련이나 경실련에서 욕은 먹을지언정, 진짜 흡혈귀가 아니기에 식귀종 같이 흡혈귀를 직접 노리는 집단에서도 자유롭다. 설령 노려진다고 해도 사장님이 어디 가서 납치당하거나 얻어맞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고.'

가늘게 눈을 뜬 앨리스가 신시아를 빠르게 훑었다.

'인간형 종족의 미적 기준에 굉장히 높은 수준으로 부합해. 사장님이 그동안 특이한 취향을 드러낸 적은 없는 것 같고······.'

고급 한정판 오일 샌드를 계속해서 먹고 싶다는 욕망 98%, 오메가의 미래에 대한 걱정 2%의 비율로 연산을 마친 앨리스가 신시아를 향해 직구를 날렸다.

"언니."

"응."

"그래서, 우리 사장님 싫어요?"

간신히 좀 가라앉던 신시아의 붉은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달아올랐다.

"아, 아니 너까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싫냐고요. 싫으시면 사장님한테 가서 '신시아 언니는 사장님 별로래요.' 이렇게 전해드릴게요. 애매하면 서로 힘들잖아요."

"그, 그건 아니지만."

오일샌드 접시를 한쪽으로 밀어놓은 앨리스가 신시아 쪽으로 가까이 당겨 앉았다.

"언니, 저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긴 한데. 우리 사장님 여자가 잘 붙거든요? 타이린드 언니도 있었고,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프로이데 마탑의 정민이라는 마법사도 있었다면서요."

정민 얘기가 나오자 곧바로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신시아였다.

"반건조 오징어 같은 년."

신시아에게 다 말해줄 수는 없지만 리벨리온의 샴록도 악연이긴 하지만 오메가와 얽혀 있고, 수연은 대놓고 오메가를 유혹하려 했었다.

앨리스가 보기에 누구를 가져다 대도 내, 외부적인 스펙으로 신시아를 넘을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저도 들은 건데요. 남자가 가정을 이루면 진중해진대요. 진중한 사장님. 괜찮지 않아요? 지금처럼 대충 캐주얼하게 입고 외투만 걸치고 다니는 게 아니라, 젠 님처럼 분위기 있는 긴 도포를 두른다던가, 야스민 공께서는 항상 수트 차림이시라면서요. 그런 사장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쓰리피스수트에 야스민 가의 문장을 형상화한 넥타이핀이 꽂힌 넥타이를 맨 오메가를 상상한 신시아는 이제 얼굴에서 더 붉어질 곳도 없는 상태가 됐다.

"다른 여자가 채가면 그때 아쉬워할 거예요? 야스민 가의 영애인 언니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만 돌리는 신시아를 본 앨리스는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오겠구나 싶었다.

"동경, 좋죠. 그런데 우상에 대한 동경은 사춘기에서 끝나야죠. 우리 사장님은 움직이는 피규어가 아니에요. 만질 수 있고, 정서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지금 언니와 사장님의 관계는 건강하지 않아 보여요. 언니가 다가서면 사장님도 분명 반응이 있을 거예요. 제가 도울게요."

"돕는다고?"

신시아가 관심을 보이자 앨리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랑 사장님은 소울 메이트 하기로 했거든요? 언니랑 사장님은 와이프랑 허스밴드 해요. 저는 언니가 새언니가 되면 좋겠어요."

앨리스의 입은 막힘없이 말을 줄줄 쏟아냈다.

최고급 오일 샌드에 대한 욕망은 이토록 엄청났다.

눈치를 보며 손톱을 비비던 신시아가 중얼거렸다.

"와이프······허스밴드······. 새언니······."

솜사탕처럼 달콤한 미소가 신시아의 보조개에 맺히는 그 순간을 앨리스는 놓치지 않았다.

앨리스의 눈이 매처럼 변했다.

멀리 보이는 평원에서 풀을 뜯는 순진한 토끼를 노리는 날카로운 매의 시선.

"그런데 지금처럼 야스민 공이 주관해서 '해라, 해라'하는 결혼은 안 돼요. 우리 사장님 반골 기질 있어서 분명히 하라 그러면 안 할걸요."

오메가 얘기에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까이 붙어 앉았다.

"그러니까 야스민 공은 잠깐 빠져계시라고 하고, 일단 언니가 먼저 움직여요. 사장님은 딱 봐도 이런 쪽에는 눈치가 더럽게 없을 것 같거든요. 먼저 데이트 신청부터 합시다."

"데이트!"

#

바이크를 보관해놓았던 곳으로 안내를 받으며 젠과의 대련을 복기했다.

'처음의 그 한번 말고는 닿을 수 없었다.'

호기롭게 1승을 챙겼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그것도 젠이 방어적인 형세만 취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그래도 몇 번의 대련을 거쳐 가며 서로에게 익숙해지면서 젠은 술법 몇 가지를 보여줬는데, 언어 그대로 천지를 열어젖히는 수준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마른하늘에 수없이 많은 번개 줄기가 떨어지거나, 가벼운 손짓에 폭풍이 이는 것을 보고 있자면 절로 입이 벌어졌다.

지도 대련을 받기 위해 몇 년씩 대기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세계관 최강자가 동자공 익힌 흡혈귀 도사인 거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젠이 동자공으로 쌓아 올린 공력을 잃을까 여성을 극도로 꺼리는 것도 이해가 됐다.

공중에 글자 몇 개 그리는 걸로 비바람을 일으키는데 여자가 문제겠냐고.

그런 젠이 내 움직임을 하나하나 뜯어서 개선 방향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다.

천외천을 마주한 기분이랄까.

[앙플라메]의 후폭풍이 아직 잦아들지 않아서 화염계 마법을 하나도 사용하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런 얘기를 하자 젠은 눈이 휘둥그렇게 뜨며 자기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

.

.

"화염계 마법과 빙결계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면서, 그런 검술을 익히고 있다는 말입니까?"

"네."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할 말이 아닙니다. 마법은 속성별 특징이 뚜렷해서 한 번 마나 하트에 색이 배어들기 시작하면 다른 속성을 익히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염계와 빙결계 마탑이 나이누안을 그렇게 원했던 것이다.

심지어 남은 그의 마나 하트마저 탐낼 정도로.

"공력을 걸고 제 비밀을 지켜주신다고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허어······. 생각보다 너무 큰 비밀을 들어버린 것 같습니다."

.

.

.

나만 괜찮다면 다음에도 와서 대련을 해줄 수 있겠냐고 묻는 젠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가끔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닌지 의심 갈 때 빼고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실력자임이 분명하니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신시아와 앨리스가 먼저 와 있는 것이 보였다.

둘은 타버린 내 머리칼 일부와 너덜해진 옷을 보고 놀랐다.

특히 신시아는 당장이라도 젠을 찾아가서 따질 기세였지만 젠과의 대련이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고 하자 바로 누그러들었다.

바이크를 꺼내는데, 뒤에서 둘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지금요."

"지금?"

"네!"

뭔가 해서 돌아봤더니 신시아가 쭈뼛대며 다가왔다.

"저······아까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보상은요······."

"아, 역시 불편하셨죠? 야스민 공께서 신시아와 저 사이를 크게 오해하고 있으셨던 것 같아요. 없던 일로 하고 최대한 빠르게 다른 선택지를 제시하시겠다고 하셨어요."

"그, 그, 그래요? 잘됐네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표정이 상당히 기묘하다.

입가는 웃고 있는데 눈은 글썽거린다.

신시아가 후하 후하 하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내게 말했다.

"괜찮으시면, 저랑 한강 안 가실래요?"

"한강요? 그래요."

내 대답에 신시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뒤에서 공중에 어퍼컷을 날리는 앨리스의 모습도 보였다.

"새로운 의뢰 하시는 거죠?"

"어······그게······네! 새로운 의뢰요!"

그 말에 앨리스가 표정을 잔뜩 뭉개고는 양손으로 뻐큐를 날렸다.

하나는 신시아에게, 다른 하나는 내게 날리고 있는 건가?

저거 저거, 소울 메이트 어쩌고 해서 좋게 좋게 봐줬더니 사장한테 엿을 날리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