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아직은 닫을 수 없다. (1)
쿠르르릉!
건물의 주변까지 모두 흔들릴 정도로 강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기사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마력의 힘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불길함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이, 이게 뭐야."
"무슨 마력이 이렇게...."
"일단 물러나자."
기사들은 거리를 벌리며 건물을 포위하듯이 섰다. 그러면서도 주변을 힐끗힐끗 둘러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너희들... 왜 도망을 안 가는 거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가 이상했다. 루카스가 지셀에게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뭔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런 이상 현상이 일어나면 기겁을 하고 도망가야 정상이다. 하지만 다들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무너지고 있는 건물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셀이 힐끗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미 먹힌 자들이다. 곧 변이할 테니 모두 죽여라."
뚜둑! 뚝! 뚝!
찌지직!
지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변이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기사들에게 덤벼들었다.
츠츠츠츳!
"에라이! 이럴 줄 알았다!"
퍼억!
루카스가 크게 외치며 창을 휘둘러 변이자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다른 기사들도 비슷하게 대처했다. 피에서 뿜어지는 산성 독만 조심한다면 변이자들을 상대하기는 어려울 게 없었다.
퍼억! 퍼억! 퍼억!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변이자가 죽었다. 그리고 그쯤에서 드디어 균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쿠르르릉!
건물은 지하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을 이기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졌다. '세라'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징그러운 변이자는 건물의 잔해에 깔려 터져 버렸다.
쩌저저적!
무너진 잔해 위에서, 갑자기 허공에 금이 가며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공간이 찢어지는 듯했다.
"우, 우와... 저거 뭐야...."
기사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금이 가며 찢어지다니. 이런 현상은 다들 난생처음 봤다.
쩌적! 쩌저적!
'균열'은 그 이름답게 실금이 주변으로 퍼지며 마치 유리가 깨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 틈으로 나오는 빛에서는 신성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처음에 느꼈던 불길함과는 상반된 느낌에 다들 당황했다.
허공에 난 금이 점점 벌어지며 유리 조각이 깨져 떨어지는 듯한 틈이 생겨났다.
틈 안은 어두운 보랏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만히 그걸 지켜보던 기사들은 곧 숨을 들이켰다.
"저, 저거 뭐야...."
"안에 뭐가 있어."
"괴물인가?"
어느 순간 생겨난 악마의 눈 같은 것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르르르....
눈의 뒤에서 맹수의 울부짖음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빨리 공간이 열리기를 바라는, 이곳을 나가고 싶어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벌어진 틈 사이로 아주 작은 빛의 입자들이 점점이 빠져나와 퍼지기 시작했다.
"모두 저것을 잡아 없애라!"
지셀이 크게 외쳤다. 입자들은 마나를 다루는 자가 아니면 없앨 수가 없었다.
기사들은 넋이 나가 있는 와중에도 지셀의 명령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퍼억! 퍼억! 퍼억!
입자들은 쉽게 터져 나갔다. 너무 많아서 문제였지, 없애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기사들은 입자들을 없애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변이자들."
"네?"
"저게 사람들 몸에 들어가면 변이자가 된다. 그러니 놓치지 말고 모두 없애라."
"으에에엑! 역겨워!"
기사들은 하나라도 빠져나갈까 봐 마나를 힘껏 끌어올리며 입자들을 없앴다.
마나를 다루는 자는 쉽게 변이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쨌든 찝찝했기 때문이다.
지셀의 실력이라면 아예 공간을 점유해 입자들을 한꺼번에 터뜨릴 수 있지만, 그는 오러 블레이드만 내뿜으며 가만히 힘을 모았다.
그동안 점점 넓어진 균열 너머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언뜻 보였다.
타다다다다닥!
뒤쪽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의 시장이 병사들을 이끌고 오는 소리였다.
"펜리스 백작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왜 남의 영지에까지 와서 이러시는 겁니까!"
시장은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잘 나가는 고위 귀족이라도 그렇지, 남의 영지에서 이러는 건 선을 크게 넘은 것이다.
지셀은 힐끗 시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대피시켰나?"
"그전에 무슨 일인지 말씀을 해 주십시오!"
"대피시켰냐고 물었다."
"이, 이익...."
시장은 이를 악물며 지셀을 노려보다가 외쳤다.
"백작님에게 그럴 권한은 없습니다! 이 도시의 시장은 저란 말입니다!"
"균열에 관한 일에는 무조건 협조하라고 브랜포드 후작께서 공문을 보내셨을 텐데?"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내 영주님께 아뢰어 정식으로 친왕파에 이번 일을...."
"멍청한 놈."
"뭐라고요?"
지셀이 시장의 뒤를 따라온 고든에게 말했다.
"고든."
"네!"
"당장 시장을 제압한 뒤 병사들을 이끌고 주변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알겠습니다!"
퍼억!
"케엑!"
고든이 시장의 정강이를 걷어차 바로 무릎을 꿇렸다.
그러고는 검을 시장의 목에 들이댄 고든이 으르렁거렸다.
"당장 병사들을 이끌고 이 주변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어서!"
시장의 호위 기사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고든의 검이 시장의 목을 조금 더 파고들어 피가 나자 곧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어서 주변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병사들이 움직여 멀리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이제 균열의 주변에는 지셀과 펜리스의 기사들, 그리고 시장과 이 도시의 병력 일부만이 남았다.
시장은 여전히 지셀을 노려보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문단속."
"네?"
"다들 거리를 더 벌려라!"
갑작스러운 지셀의 외침에 기사들이 물러났다. 시장과 그의 병력도 얼떨결에 끌려갔다.
균열의 틈은 이제 거대한 몬스터도 튀어나올 만큼 넓어졌다. 하지만 처음에 보였던 눈은 사라지고 오직 보랏빛 어둠만이 가득 차 있었다.
다들 무슨 상황인지 모른 채 지셀과 균열만을 바라보았다.
지셀이 검을 양손으로 잡고 무언가를 벨 것처럼 천천히 들었다.
여전히 그의 검은 밝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유도 알지 못하면서 그 분위기에 눌려 숨을 죽였다.
바로 그때, 균열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파아악!
지셀이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순간적으로 밝은 빛이 주변으로 퍼졌다.
빛이 사그라든 뒤, 지셀의 앞에 있는 것을 보고 기사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무기를 꽉 쥐었다.
"저, 저게 뭐야...."
게이트에서 뛰쳐나온 건 거대한 몸집의 괴수였다.
네 다리로 힘차게 땅을 딛은 그것은 회색빛의 몸에 금빛으로 빛나는 갑주를 차고 있었다.
머리에는 푸른 뿔이 여러 개 달렸고, 굵은 꼬리는 길게 늘어져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졌다.
꼬리 곳곳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솟아 있었다. 발톱도, 이빨도 날카로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벌어진 입에서는 푸른 연기가 끝도 없이 흘러나와 주변으로 퍼지고 있었다.
장대한 크기에서 오는 위엄과 기세는 마치 신화 속의 짐승 같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셀이 괴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에퀴데마."
전생의 학자들은 저것을 '종말의 첨병'이라 칭하며, '역병의 괴수'라는 고대어 이름을 붙였다.
저것은 균열이 열리면 가장 먼저 튀어나와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곤 했다.
콰아아아아아!
에퀴데마는 나오자마자 자신을 공격한 지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크게 포효했다. 몸에 길게 상처가 나 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분노한 듯했다.
그 울음소리에 기사들이 모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포효 한 번에 다들 몸이 저릿해지며 영혼마저 얼어붙는 근원적인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미, 미친... 무슨 울음소리가...."
"저거 뭐야? 뭔데 영주의 공격을 맞고도 아직 살아 있어?"
"드, 드래곤 같은 건가?"
그나마 펜리스 기사들은 겁을 먹었어도 말할 기운은 있었다. 워낙 꼴통들이라 겁을 먹어도 허세는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을 따라왔던 병사들은 그냥 무기를 놓고 주저앉아 버렸다. 오줌을 지려 버린 병사도 있었다.
당황하는 사람들을 보고 지셀이 혀를 차며 발을 굴렸다.
콰아앙!
"정신 차려라!"
에퀴데마의 포효는 드래곤 피어와 비슷한 효과가 있다. 그렇기에 다들 몸이 공포로 굳어 버린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무기를 강하게 움켜잡았을 때, 균열에서 다시 무언가가 마구 튀어나왔다.
카아아아아!
"이, 이번엔 뭐야!"
엄살 끝판왕 루카스가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이상한 괴물들이 수십 마리나 튀어나오고 있었다.
사람과 비슷한 형체이지만 몸은 회색이고, 팔이 길고 눈이 붉었다. 털은 하나도 없었고 날카롭고 긴 이빨과 손톱, 발톱을 가지고 있었다. 앙상하게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배가 쏙 들어가 있었다.
한마디로 인간이 징그럽게 변한 것 같았다. 그래서 지셀의 전생에는 저 괴물들을 '균열인'이라고 불렀다.
지셀이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균열인'들이다! 저놈들이 퍼지지 않게 막아라! 괴수는 내가 막겠다!"
카아아아악!
체구가 비교적 작은 균열인들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당연히 주위에 둘러서고 있던 기사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에이, 시발! 모르겠다!"
"이 징그러운 새끼들!"
"다 죽여!"
기사들이 모두 마나를 폭발시켰다. 마음속 깊이 올라오는 근본적인 거부감이 처음부터 강한 힘을 쓰게 한 것이다.
콰아아앙! 콰앙!
카아아아악!
균열인들은 무척이나 민첩하고 공격 또한 날카로웠다. 마나를 쓰는 건 아니었지만 신체 능력이 초급 기사와 맞먹을 정도였다.
그것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눈에 보이는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지셀의 경고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이 도시의 병사들은 제대로 맞서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몸이 찢겨 나갔다.
"으아아악!"
사방에서 병사들의 비명이 울렸다. 균열인들은 병사들의 살점을 찢어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시장은 덜덜 떨면서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도, 도와라. 펜리스 백작을 도와라!"
시장의 외침에 도시의 기사들과 병사들도 전투에 합류했다. 처음에는 수십 마리였던 균열인들은 계속 튀어나와 벌써 수백 마리로 늘어났다.
여기서 못 막으면 자신들도 죽는다는 공포에, 도시의 기사도 병사도 정신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콰아앙! 콰앙! 콰앙!
카아아아아!
"으아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울렸다. 그나마 펜리스의 기사들이 모든 힘을 폭발시켜서 균열인들이 이 자리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지셀과 에퀴데마는 서로를 노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크르르르....
에퀴데마는 천천히 걸음을 옆으로 옮기며 지셀을 살펴보았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지셀 또한 에퀴데마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랜만이다."
물론 상대가 자신의 말뜻을 알아들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전생에 죽였던 괴수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균열이 열릴 때마다 이 괴수가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존재를 다시 보게 될 것은 오래전부터 예상했다.
그것은 필연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전생과 좀 다를 거다."
지셀이 처음 이 괴수를 맞닥뜨렸을 때, 세상은 이미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균열에 대해 대비하기는커녕 예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신은 환란의 시기에 대비해 많은 것을 준비했다. 거기에 라비에르 덕분에 전생에 비해 훨씬 많은 균열을 미리 없앨 수 있었다.
다른 이들 또한 구원교의 음모에 대비하기 시작했고,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영주들이 경계심을 품고 군대를 모았다.
그러니 달라질 것이다. 달라져야 한다.
"이번에는 반드시 네놈들을 세상에서 모두 지워 주겠다."
파아아아악!
지셀의 눈이 붉게 빛났다. 동시에 검붉은 기운들이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검에서도 검붉은 오러 블레이드가 길게 솟아올랐다.
크르르르....
지셀을 노려보던 에퀴데마가 몸을 낮추었다. 짐승의 근육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지셀과 에퀴데마는 천천히 서로를 노려보며 움직였다.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언제든 공격할 수 있게 집중했다.
그리고 에퀴데마의 입에서 나오던 푸른 연기가 서로의 시야를 잠깐 가린 순간.
파앗!
지셀과 에퀴데마가 서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앙!
416화 아직은 닫을 수 없다. (2)
단 한 번의 격돌로 지셀과 에퀴데마의 몸이 서로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균열인들과 싸우면서 그 모습을 힐끗 본 기사들이 놀랐다.
'영주님이 뒤로 밀렸다고?'
'뭐야! 저 괴물은!'
'미친.... 이러다가 다 죽는 거 아냐?'
지셀은 왕국에서 이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였다. 그런 그가 밀리다니, 저 괴수는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물론 괴수도 지셀의 힘에 밀려 나긴 했다. 지셀보다 압도적으로 강하진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저런 괴수가 곧 대륙 곳곳에서 튀어나온다는 것이 문제였다.
초인급 괴수들이 수백, 수천 마리나 나와서 대륙을 유린할 예정이라니.
'진짜 종말이다.'
종말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카아아아악!
에퀴데마가 푸른 연기를 입에서 뿜어내며 다시 포효를 내질렀다.
쿠웅!
괴수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울렸다. 주변에서 싸우던 이들이 모두 몸을 휘청일 정도였다.
에퀴데마가 발을 내디딘 곳에서부터 땅이 점점 회색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지셀은 괴수를 노려보며 다시 마나를 끌어 올렸다.
'침식....'
에퀴데마는 군대로 치면 선봉 장수였다. 저 괴수가 가장 먼저 나와 숨을 내쉬고 땅을 밟을 때마다 환경이 변해 갔다.
그 기운 덕분에 균열인들이 이곳으로 나와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진다.'
그러니 빨리 없애야 한다. 시간을 끌수록 점점 튀어나오는 균열인이 많아질 것이다. 지금도 균열인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카앙! 카앙! 콰아앙!
"젠장! 끝도 없이 몰려오잖아!"
"이 새끼들 그렉스야, 뭐야?"
"또 뚫렸다! 빨리 잡아!"
기사들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지치기 시작했다. 균열인 하나하나의 신체 능력도 만만치가 않은데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사람들을 피신시킨 기사들과 병사들이 이곳으로 다시 달려왔다. 그리고 혼란을 감지한 도시 수비군도 몰려오고 있었다.
그래도 돈 많은 공작파에 속해 있던 영지다. 작은 도시임에도 무려 500에 가까운 수비군이 달려왔다.
시장은 그 모습을 보고 다급하게 외쳤다.
"막아! 괴물들을 막아! 펜리스 기사들을 도와라!"
처음에 반대했던 것 치고는 제법 눈치 있는 결정이었다. 시장은 어떻게든 균열인들이 퍼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막아라!"
수비군 지휘관이 외치자 기사들과 병사들이 균열인들에게 달려들었다.
뒤늦게 온 자들도 사실 지금 어안이 벙벙하고 상황이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균열에 대한 공문은 받았기에 그나마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펜리스 기사들이 가장 앞장서서 분전하고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카아아아아!"
"죽어! 이 징그러운 새끼들아!"
병사들은 균열인을 맞상대하기엔 약했지만, 그래도 그들이 주변을 막자 펜리스 기사들이 싸우기가 조금 더 수월해졌다.
지셀은 힐끗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이 균열인들을 막고 있는 동안, 아직 에퀴데마가 제힘을 전부 발휘할 수 없는 동안 에퀴데마를 처치해야 했다.
지셀이 마나를 더 끌어올렸다. 시간을 줄이려면 자신도 최대의 힘을 내야 했다.
"다크, 시작하자."
― 으으, 죽지 말라고.
다크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지셀의 감정을 증폭시켰다.
콰아아아아아!
지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검붉은 기운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광폭하게 사방으로 뻗쳐 나가 에퀴데마를 압박했다.
크르르르....
에퀴데마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짐승의 눈은 이전보다 더 붉게 변해 살의와 분노를 아낌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가자."
지셀이 낮게 읊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콰아앙!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땅이 갈라졌다. 3단계 코어를 활성화하고 다크에 의해 다시 증폭된 감정은 끝도 모를 힘을 가져다주었다.
그간 살아오면서 지셀이 느낀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하나로 뭉쳐 타오르고 있었다.
'죽인다.'
지셀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목표 하나만이 남았다. 그가 품은 모든 분노는 눈앞의 적을 없애 버리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종말의 첨병, 에퀴데마.
전생에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절망에 빠뜨렸던 괴수.
용병단의 많은 수하와 동료들도 이 괴수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때마다 자신이 더 강하지 않음을 얼마나 한탄하였는가.
그때마다 다른 이들을 더 지켜 주지 못하여 얼마나 안타까워하였는가.
균열을 막는 것은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서다. 사람들을 지키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다.
그걸 위해 계획을 짜고 물밑에서 대비하며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대의 따위는 잊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짐승이 마음에 안 들 뿐이었다. 죽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죽어라."
순식간에 뻗어 나간 지셀의 오러 블레이드가 에퀴데마의 몸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앙!
에퀴데마는 피하려 했지만 너무나도 빠른 속도에 옆구리를 베이고 말았다.
깊게 베인 옆구리에서는 입에서와 마찬가지로 푸른 연기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부우우우!
다시 지셀의 오러 블레이드가 내리꽂혔다. 에퀴데마는 피할 수 없음을 느꼈는지 그대로 그것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콰아아아앙!
다시 폭발음이 울려 퍼지고 주변으로 충격파가 터져 나갔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물론이고 날뛰고 있던 균열인들마저 모두 자세를 잃고 쓰러져 굴렀다.
끊임없이 튀어나와 지셀의 주변을 메우고 있던 균열인들은 아예 몸이 터져 버렸다.
하지만 에퀴데마는 그 힘을 버티고는 강인한 앞발로 지셀의 몸을 할퀴었다.
푸아아아악!
지셀을 감싸고 있던 검붉은 기운들이 몇 갈래로 찢어지며 순간 그의 몸이 드러났다.
그간 지셀이 두른 장막을 제대로 없앤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한낱 괴수인 에퀴데마가 그것을 뚫은 것이다.
검붉은 기운은 금세 지셀을 다시 감쌌지만 그 색은 조금 더 붉어져 있었다. 지셀의 몸에서 터져 나온 피가 섞였기 때문이다.
지셀은 자신의 재생력을 믿고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에퀴데마의 몸이 들썩였다. 지셀의 검은 너무도 빠르고 강력해서 제대로 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지셀도 마찬가지였다. 에퀴데마의 거대한 덩치에서 비롯된 공간 장악력과 강력한 힘에 의한 빠른 공격은 피하기가 힘들었다.
짐승으로서 타고난 힘과 본능이 극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균열의 괴수였다.
지셀이 이를 악물며 검을 다시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피하면서 싸운다면 에퀴데마에게 큰 타격을 주기 힘들어진다. 애초에 오랫동안 이 힘을 쓸 수도 없고 시간을 끌어서도 안 된다.
에퀴데마도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지셀의 공격을 몸으로 받으면서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오직 상대에 대한 살의만이 남아 있는 맹수들의 싸움과도 같았다. 지셀과 에퀴데마는 서로 상처를 입으면서 상대를 물고 뜯기를 멈추지 않았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지셀의 검붉은 장막은 수도 없이 찢겨 나가며 검붉은 연기를 주변에 흩뿌렸다. 에퀴데마의 몸에도 수많은 상처가 생기며 푸른 연기가 퍼져 나갔다.
그 연기들은 서로 섞이며 공간을 가득 채워 갔다.
크어어어어엉!
에퀴데마가 크게 포효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인간이 죽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쿠웅!
에퀴데마는 언제부터인지 지셀에게 공격을 당할 때마다 한 걸음씩 물러나고 있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런 작은 생명체에게 밀리고 있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지셀은 그런 에퀴데마를 보며 다시 한 걸음 나아갔다.
'와라.'
전생에서 수도 없이 싸워 본 놈이다. 그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짐승에 불과한 놈.
물러나면 안 된다. 기세에 잡아 먹혀서도 안 된다.
더 강하게 나가고 더 상대를 압박해야 한다.
콰아아앙!
지셀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며 검을 휘둘렀다. 에퀴데마는 조금 더 뒤로 밀렸다.
자신의 발톱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된 짐승은 결국 더 강한 무기를 쓰게 되는 법이다. 에퀴데마는 더 이상 발톱을 휘두르지 않았다.
카아아아아아!
괴수의 거대한 체구가 단숨에 지셀에게 접근했다. 큰 입을 벌려 상대를 씹어 삼키려는 목적이었다.
다가오는 에퀴데마의 머리를 향해 지셀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에퀴데마의 한쪽 눈이 터지며 얼굴의 반이 갈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을 참으며 그대로 쇄도했다.
터업!
엄청난 속도에 지셀의 몸이 에퀴데마의 입에 잡혔다.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다.
드드드득!
에퀴데마는 그냥 삼키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턱에 힘을 주고 어떻게든 지셀의 몸을 으깨려고 했다.
"크읏!"
지셀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에퀴데마의 거대하고 날카로운 이빨이 장막을 뚫고 몸을 조금씩 파고들고 있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끊임없이 에퀴데마의 입에서 뿜어 나오는 푸른 연기였다.
그 연기는 지셀의 장막이 뚫린 사이 그의 몸으로 깊숙하게 침투했다. 곧 지셀의 몸에서 붉은 반점이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푸른 연기는 단순한 독이 아니었다. 오히려 질병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금 지셀의 몸은 그 질병을 몰아내고 다시 걸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끄으으으으...."
지셀이 이를 악물며 오러 블레이드를 더 키웠다. 몸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마나만 남기고 모든 힘을 검에 쏟아부었다.
검을 역수로 쥔 지셀은 이미 터져 버린 에퀴데마의 눈을 다시 찔렀다. 길어진 오러 블레이드는 충분히 그 거리에 닿았다.
그그그그극!
불꽃이 튀며 철판이 뚫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조금만 더 집어넣으면 아예 머리를 뚫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단번에 지셀을 죽이는 데 실패한 에퀴데마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지금!'
에퀴데마가 방향을 바꾸어 지셀을 다시 물려고 했지만 그보다 지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타앗!
지셀은 에퀴데마의 머리 위로 잽싸게 올라갔다. 그리고 에퀴데마의 눈을 향해 쇄도했다.
"이제 좀 죽어라."
지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붉은 장막이 사라졌다. 몸을 보호하는 모든 마나마저 검에 밀어 넣은 것이다.
콰가가가가각!
지셀의 오러 블레이드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에퀴데마의 눈을 통해 들어가 괴수의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크어어어엉!
에퀴데마가 몸을 크게 들어 올리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하지만 그것의 눈빛은 이미 생기를 잃고 있었다.
강력한 외피로 보호되지 않은 장기는 오러 블레이드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르르륵....
에퀴데마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 연기가 점점 줄어들어 갔다.
뇌가 파괴된 이상 아무리 에퀴데마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단지 너무나도 강력한 신체가 목숨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죽지 않았을 뿐, 살아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저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쿠웅!
비틀거리던 에퀴데마가 그 거대한 몸체를 땅에 누였다. 푸른 연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도 한동안 숨을 들썩이던 짐승이 드디어 눈을 감았다.
"후...."
지셀은 에퀴데마의 시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마나를 끌어낸 탓에 이제는 싸울 힘도 없었다. 뼈는 모두 뒤틀렸고 근육이 터져 나갔다.
아주 미약하게 남은 마나가 온몸을 돌며 회복을 시도하고 있지만 상처가 너무 커서 쉽게 낫지 않았다.
"드디어 죽였군."
평범한 상황이라면 감히 에퀴데마의 머리에 올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물러나지 않고 계속 압박하여 에퀴데마가 결국 이를 드러내게 했다.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뇌를 파괴해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에퀴데마가 죽자 균열인들은 더 이상 나오지 못했다. 이미 나와 있던 균열인들도 갑자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카아아악!"
균열인들은 자신의 몸을 마구 할퀴고 머리를 붙잡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것들과 싸우던 자들도 놀라서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미, 미쳤나?"
이미 나와 있는 균열인은 천 마리에 가까워져 있었다. 언제 죽이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공격도 멈추고 발작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야! 일단 죽이자고!"
루카스가 크게 외치며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가려다가 멈췄다.
스스스스슥....
균열인들의 몸이 갈라지며 점점 먼지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될 존재인 것처럼.
"뭐, 뭐야?"
사람들은 넋을 잃고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균열인들을 바라보았다.
지셀은 주저앉아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사라지는군."
전생에 성녀가 말했다. 균열 너머의 존재들은 이 세상에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라고.
지셀이 고개를 돌려 에퀴데마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 큰 시체도 점점 갈라지며 먼지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로 끝나면 좋았을 텐데."
모든 것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음에도, 균열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417화 아직은 닫을 수 없다. (3)
"영주님!"
펜리스의 기사들이 허겁지겁 지셀에게 달려갔다. 그들도 많이 지쳐 있긴 했지만, 지셀만큼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는 없었다.
지셀이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수고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조금 치료를 해야겠지만."
지셀이 포션 한 병을 꺼내 마셨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은 각자의 포션을 꺼내 지셀에게 마구 들이부었다.
지셀은 옷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가 되자 손을 휘저었다.
"그만 뿌려도 돼. 외상은 이제 괜찮다. 내상이 문제인 거라 휴식을 먼저 취해야 한다."
"아니, 그래도 안전하게 해야죠!"
"그럼요! 귀하신 몸인데!"
몇 명은 그냥 막 포션 뚜껑을 열고 집어던지듯이 얼굴에 찹찹 뿌려 댔다. 아무리 봐도 뭔가 감정이 상당히 섞여 있는 거 같았다.
애초에 지셀은 얼굴에 그다지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만하라고."
"...넵."
어쨌든 지셀이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셀의 숨이 조금 안정되자 고든이 물었다.
"이것들 뭡니까? 왜 갑자기 다 먼지가 되어 버린 겁니까?"
"저 괴수가 죽어서 그래. 아직 이곳이 침식되지는 않았거든."
"침식이요?"
"저 균열에서 나오는 놈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는 거다. 저 괴수는 그 일을 하려고 나온 거고. 저놈들은 이 세상에 허락받지 않은 놈들이거든."
"...."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지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지셀은 기사들의 멍한 눈빛을 보고는 고개를 몇 번 저은 뒤 말을 이었다.
"그렇게만 알고 있어도 된다. 차차 익숙해질 거야."
"그러면... 저 균열은 이제 어떻게 합니까? 왜 안 닫히는 거죠?"
균열은 여전히 구멍이 뚫린 채 존재하고 있었다. 거대한 괴수도 없애고 나머지도 다 없어졌는데 왜 저건 그대로 있을까?
사람들은 조금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균열을 바라보았다.
"당분간은 내버려둬라. 어차피 아직은 닫을 수 없다. 주변만 포위하고 감시하는 수밖에."
"네? 내버려둬야 한다고요? 그러면 이곳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겁니까?"
"그래. 아직 나올 놈이 남았거든. 그놈을 없애야 균열이 닫힌다. 저거 지금 작아서 못 나오는 거야."
그 말에 사람들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나온 것들도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들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뭔가가 남아 있다니.
그것도 구멍이 작아서 못 나오고 있단다. 구멍은 이미 커질 대로 커졌는데도.
'도대체 얼마나 큰 괴물이 나오길래....'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놈이 나온다는 게 아닌가.
균열에서 나온 괴물들을 지셀이 다쳐 가면서까지 처치했는데도 결국은 도시 하나를 그냥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기사들이 지셀을 부축했다. 일단은 안전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지셀은 고개를 들어 균열을 다시 바라보았다.
스윽.
어느새 균열의 틈으로 다시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눈은 붉게 충혈된 채 지셀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셀이 그 눈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조만간 다시 보자고."
지셀의 말이 통한 걸까? 그 눈은 다시 보랏빛 어둠 속에 섞여 들어가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에 가려진 눈은 마치 웃음을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서부의 새로운 관리자(?)가 된 셀버크 백작은 엉망진창이 되어 찾아온 지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셀은 셀버크 백작을 데리고 린더스타인의 집무실로 향했다.
평소에는 셀버크 백작이 앉아서 기분을 내던 자리지만 주인이 왔으니 비켜 줘야 했다.
지셀은 대략 상황을 설명한 뒤 물었다.
"서부에 있던 균열 후보지는 전부 처리했습니까?"
"네, 브랜포드 후작께서 보내 주신 군대로 겨우 토벌할 수 있었습니다."
균열의 위치가 발각된 구원교도 나름 발악을 해서 갈수록 처치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남부가 아닌 지역은 군대가 밀어붙이니 결국 토벌될 수밖에 없었다.
"없는 곳도 있었지만, 알려 주신 위치 대부분에 그 '제단'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지만 이제는 다들 구원교의 제단이라고 명칭을 통일한 상태였다.
지셀이 알려 준 곳에 제단이 없을 때도 간혹 있었다. 용병왕이 되기 전에 전해 들은 정보는 아무래도 정확도가 떨어지긴 했다.
하지만 그런 곳은 정말 드물었기에 지셀이 알려 준 정보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편은 아니었다.
'아직 남아 있는 곳이 있을 거다.'
하지만 지셀이 모르는 곳에도 분명 균열이 존재할 터였다. 이번에도 핀로스 영지에서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 균열들도 조만간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어서 진술서를 작성해라."
지셀의 말에 핀로스 영지에서 강제로 끌려온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균열을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을 확보하기 위해 지셀이 일부러 데려온 자들이었다.
잠시 후, 핀로스 기사들이 쓴 진술서를 본 셀버크 백작도 깜짝 놀랐다.
"괴, 괴수의 힘이 초인급이라고요? 그리고 병사보다 강한 괴물들이 계속 튀어나온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구원교 놈들이 이유 없이 제물을 바치진 않았을 테니 뭔가가 튀어나올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초인급 이상의 힘을 가진 괴수라니.
하나만 튀어나와도 영지 몇 개는 순식간에 멸망할 터였다.
지셀이 셀버크 백작에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이 서신을 모든 영주들에게 전하십시오. 브랜포드 후작님에게는 제가 직접 전달하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셀버크 백작이 기사를 불러 명령을 전달하는 동안 지셀은 집무실에 놓여 있던 서류를 대충 훑어보았다.
균열의 자세한 소식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서부를 빨리 안정화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곧 셀버크 백작이 돌아와 그간의 일을 보고했다.
"패잔병들은 거의 다 수습을 했군요."
"네, 식량을 나눠 주겠다고 하니 다들 금방 투항했습니다. 백작님의 소문이 널리 퍼진 덕분이지요."
지셀은 항복하는 자들은 잘 받아 주고 식량도 넘치게 주는 걸로 소문이 나 있다.
그 소문 덕분에, 도적 떼가 되었던 패잔병들은 지셀이 서부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속속들이 항복했고 현재 린더스타인의 군대는 무려 3만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도적 떼가 대부분 사라졌다 해도 서부가 안정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전쟁 물자 때문에 백성들이 수탈당했던 것도 문제였지만, 몇몇 영주들이 여전히 악행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밥 먹듯이 죽이며 강제로 수탈하는 놈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식량을 푼다고 사정이 나아질 리가 없었다.
"어느 정도 혼란은 수습이 됐으니 이제 확실히 정리를 좀 해야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안정화에 방해가 되는 영주들 몇을 본보기로 쳐 내고 직할령으로 만들어야죠."
"...그, 그게."
셀버크 백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로드리크 후작령은 펜리스의 직할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 주변에 있던 봉신들은 지셀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항복을 한 상태였다.
만약 그들을 쳐 내면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차후 백작님의 명성에 큰 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영주들도 백작님에게 항복을 하지 않게 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전부 쳐 내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본보기로 아주 악독한 몇 놈만 처리할 생각입니다."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이미 펜리스가 서부의 노른자 땅을 다 차지한 상태였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안정시키면 큰 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로드리크 후작가를 따르지 않았던 변방 영주들은 다 고만고만한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나 지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도 천천히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몇몇 이들의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일을 망칠 수는 없습니다."
그 말도 맞다. 균열의 존재가 밝혀지고 사교가 판을 치고 있었다. 공작가와의 내전도 필연적으로 벌어질 것이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여도 모자랄 판에 그런 놈들이 있으면 다들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지셀이 심유한 눈빛으로 셀버크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균열은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상대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긴장해서 한마음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건 개인의 싸움이 아닙니다."
셀버크 백작은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영주들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지키고 있다가는 그 권리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모두 다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악독한 놈들의 사정까지 봐주느라 저와 제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쳐 낼 이유가 충분한 놈들만 쳐 내겠다는 말입니다."
지셀답지 않게 충분히 많은 설명을 해 준 셈이었다. 서부의 대리인이자 고위 귀족인 셀버크 백작에게 지셀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대우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지셀의 입에서 온갖 정책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쪽 관리들이 본보기로 삼을 놈들을 선정할 겁니다. 군대를 보내 바로 치워 버리세요."
"그리고 균열의 괴물들에 대비해 작은 마을은 최대한 없애고 도시와 요새로 사람들을 이주시키세요."
"모든 자원은 식량과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쪽으로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자리가 많이 생길 겁니다. 영지민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보상으로 주세요."
"군대를 더 늘립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원을 아끼지 말고 군대에 쓰도록 하세요."
펜리스에서 펼쳤던 정책들이 지셀의 입에서 줄줄이 나왔다. 가만히 듣고 있던 셀버크 백작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 그걸 어떻게 동시에 다 진행한다는 말입니까? 지금 행정력이 엉망이라 치안 유지도 겨우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괜찮습니다. 우리 쪽 애들이 그런 일에는 전문입니다. 현재 펜리스의 관리들이 와 있지 않습니까?"
"그, 그건 그런데... 그들은 지금 서부의 현황을 파악하고 급한 문제를 처리하느라...."
"지금쯤 다 끝났을 겁니다. 어이, 책임자 불러와라."
지셀의 명령에 기사들이 움직였고 곧 한 남자가 웃음을 지으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영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씨익 웃고 있는 자는 클로드의 친구인 행정관 빌리였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클로드에게 사기를 당해 끌려온 뒤로 오랫동안 펜리스의 행정 업무를 맡아 왔다.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영지 몇 개 정도는 갈아엎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오랜만이야. 정리는 다 끝이 났나?"
"네, 본보기로 쳐 낼 영주들 몇을 추렸습니다. 밥 먹듯이 영지민들을 죽이고 저희의 지원품을 횡령하던 놈들로만 추렸으니 반발이 적을 겁니다. 명분도 충분합니다."
"그래, 적당히 쳐 내고 관리들을 보내도록. 병력은 셀버크 백작이 준비해 줄 것이다. 나머지는?"
"사람들을 이주시킬 도시와 성도 선정했습니다. 개간할 땅과 인구는 충분하니 적당한 보수를 걸고 인부들을 투입하면 금방 정리될 거 같습니다. 기존 시설들을 보수하고 새로운 시설을 집중적으로 건설할 계획도...."
빌리의 입에서 영지를 어떻게 갈아엎을지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셀버크 백작이 입을 쩍 하니 벌렸다.
"대, 대단합니다. 벌써 저렇게 다 준비했다니... 펜리스 관리들은 잠을 안 자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밤에도 항상 불이 켜져 있는 거 같던데."
"...."
"우리 행정관들도 펜리스의 관리들만큼 했으면 좋으련만."
'그러다가 다 죽어....'
빌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린더스타인에는 관리들뿐만 아니라 피오테를 따라 파견됐던 사제들도 같이 와 있었다.
관리들이 과로로 쓰러지면 깨우기 위해서 말이다.
어쨌든 계획은 다 세워졌다. 아무것도 없었던 펜리스에서도 성공했던 정책이니, 자원과 인부가 더 풍부한 서부에서 실패할 리가 없었다.
지셀은 흡족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한 건 전부 펜리스에 요청하도록. 특히 서부에는 아직 전쟁 여파가 남아서 식량이 충분하지 않으니 아끼지 말고 마구 풀도록 해."
"알겠습니다."
식량 생산에 관해서는 펜리스가 이제 왕국을 넘어 대륙 최고의 수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들을 마구 뿌리면 금방 민심도 가라앉고, 많은 이들을 공사에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지셀은 셀버크 백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백작님은 군대를 이용해 치안에 특히 힘을 써 주십시오. 최근 서부 인근에 새로운 도적들이 나타났다는 말은 들으셨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놈들은 굳이 토벌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제가 군대를 끌고 와서 다 쓸어버릴 테니 치안과 방어에만 집중하세요."
"알겠습니다."
지셀은 셀버크 백작과 빌리와 상의하며 그 외에 자잘한 일도 방향을 잡아 주었다.
펜리스에서 경험을 많이 쌓은 빌리가 있으니 서부를 안정시키는 데는 별 어려울 게 없었다.
이제 더 중요한 걸 대비해야 한다.
"약은 챙겨 왔나?"
지셀의 물음에 빌리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서부의 모든 이들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펜리스에서 미친 듯이 약을 생산하고는 있지만, 수많은 영지민들에게 다 나눠 줄 수량은 되지 않았다.
지셀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전투에 참여하는 병사들 위주로 복용해야지. 수량 부족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셀버크 백작도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단 이쪽에서도 보내 주신 제조법대로 재료를 최대한 긁어모아 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실입니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말입니까?"
셀버크 백작에게도 얼마 전에 지셀의 뜻이 전달되었다. 시키는 대로 하고는 있지만 백작은 도무지 지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작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기에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 곧 다가올 전염병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환란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418화 대화, 공감, 설득. (1)
"벨레브에 균열이 나타났습니다!"
"시아호에도 균열이 나타났습니다!"
"현재 도시 수비군은 저지에 실패하고 후퇴하는 중입니다!"
"버번트 남작령 인근이 초토화...."
수도에 각지의 전령들이 바쁘게 도착했다. 드디어 균열이 이곳저곳에서 열린 것이다.
지금 열린 것들이 전부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어디 한 곳에 터져 대응하려고 하면 시간을 두고 또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왕실과 친왕파의 고위 귀족들은 골머리를 썩였다.
"당장 왕국군과 모아 둔 영지군을 보내야 합니다!"
"일단은 공작가를 막고 있는 남부 전선에서도 병력을 물려야 합니다."
"그 안에서 나온 괴수의 힘이 초인급이라지 않습니까? 균열인이란 괴물들도 무수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방법을 찾기 위해 연일 회의가 이어졌다. 그나마 왕국군과 영지군이 미리 전쟁 준비를 끝내 놓은 덕분에 몇몇 영지에서는 균열인들의 공격을 저지하며 막고 있었다.
왕국의 재상, 스티어 노튼 후작은 허연 수염을 부들거리며 물었다.
"에퀴데마라는 괴수를 없애야 균열인들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의 사위, 브랜포드 후작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펜리스 백작이 이미 하나를 처치했다고 합니다."
"그, 그러면 그곳의 균열은 닫힌 건가?"
브랜포드 후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균열인들이 더 나오지 못하게만 막았을 뿐. 균열은 그대로 있습니다. 현재 핀로스 남작이 모든 군대를 이끌고 그 일대를 포위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균열을 닫는단 말인가?"
"펜리스 백작의 말로는... 그 안에 아직 무언가가 더 있는 거 같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그것까지 처리해야 닫히는 거 같다고 합니다."
"허어!"
재상은 머리를 짚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이름만 재상일 뿐, 모든 국정은 브랜포드 후작이 맡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그저 브랜포드 후작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재상의 권한으로 처리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이제 어찌하면 좋다는 말이오?"
이미 어느 정도 생각해 둔 바가 있던 브랜포드 후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균열을 닫는 게 우선입니다. 남부와 동부 전선에는 최소한의 방어 병력만 배치하고 균열을 없애는 쪽에 힘을 써야 합니다."
"공작가도 정신이 없지 않겠는가? 남부에도 균열이 열렸을 거 아닌가?"
"그쪽도 균열이 열리긴 했지만... 애초에 그들이 연 거니 신경도 쓰지 않을 겁니다."
"델파인 공작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그런 사교와 손을 잡고!"
재상의 노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재상은 나이가 워낙 많기에 회의에 오래 참석하기도 힘들었다. 진작에 은퇴하려고 했지만 델파인 공작가의 위협 때문에 은퇴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거절했기에 그를 도와주느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재상이 다시 브랜포드 후작에게 물었다.
"균열을 상당히 없앴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이렇게 일이 터질 수가 있는가?"
"...미리 없애지 않았다면 적어도 지금보다 3배는 더 나타났을 겁니다."
"허어...."
지금 왕국 내에 나타난 균열만 해도 수십 개가 넘어갔다. 그마저도 지셀 덕분에 절반 이상을 없앤 것과 마찬가지였다.
타국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균열을 닫지 않고 연구해 보겠다고 까불던 곳은 아예 주변이 다 쓸려 나갔다.
재상은 여전히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괴물들이 더 퍼지지는 않았는가?"
"네, 듣기로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거 같습니다."
균열인들은 에퀴데마의 힘 덕분에 이 세계에서도 활동할 수 있지만, 아직은 그 범위가 그리 넓지 않았다.
주변이 침식될수록 활동 반경도 넓어지겠지만 아직까지는 균열 주변에서 더 뻗어 나오지 못하는 상태였다.
"공작가가 움직이면 어찌하려고?"
"...어쩔 수 없습니다. 내부의 균열을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요."
공작가가 움직인다면 당연히 모두가 막으러 가야 한다. 하지만 균열을 내버려두면 내부를 갉아먹으며 전쟁 지속력을 떨어뜨릴 것이다.
균열이 영역을 확장하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막아야 한다.
재상은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미쳤구나, 공작이 미쳤어. 젊은 시절에는 그렇게 총명하던 자가 어찌 이리 변했단 말인가. 이런 상태로 왕국을 차지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괴물들이 판치는 왕국 따위는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친왕파로서는 델파인 공작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북부의 군대가 도움을 줄 겁니다."
"북부? 펜리스 백작 말인가?"
"그렇습니다."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펜리스는 왕국의 희망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부 최강의 로드리크 후작을 깨부수고 왕국 최강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그들의 전쟁 수행력이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거기에 북부는 균열이 발생하지 않았다. 조금 수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전력을 집중하고 보존할 수 있었다.
"서부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쪽에도 균열이 몇몇 발생했습니다. 안정화도 해야 하니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지 않습니다."
펜리스 백작이 차지한 서부는 어디를 도와주고 할 형편이 아니었다.
펜리스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상황을 수습하고는 있었지만, 주변에 생긴 균열들이 또 문제였다.
결국 온전하게 전력을 유지한 곳은 펜리스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한 군데가 더 있기는 했다.
브랜포드 후작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레이폴드 백작이... 저희 쪽에 참전하겠다고 알렸습니다."
"레이폴드? 아멜리아 레이폴드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전에 죽은 데스몬드 백작과 긴밀한 관계가 의심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어차피 공작파 귀족들은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4대 교단을 적으로 두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으음...."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폴드가 도와준다는 건 조금 다른 의미가 있기도 했다.
"그래, 조건이 무엇인가?"
아멜리아는 수많은 귀족에게 지탄받고 있었다. 정당한 명분 없이 아버지의 자리를 찬탈했다는 이유였다.
수많은 항의와 협박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도 않고 콧방귀만 뀌어 댔었다. 그런 그녀가 자진해서 나선다는 것은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왕실의 인정, 그리고 동부의 영지를 달라고 합니다."
"무어라?"
재상이 허연 눈썹을 꿈틀거렸다.
왕실의 인정을 요구하는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더 이상 후계 문제로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영지를 달라는 건 조금 다른 얘기였다.
"이미 북부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왜 거리가 떨어진 동부의 영지를 달라고 하는 건가?"
"의도는 모르겠습니다. 다른 영주들의 것을 뺏어서 주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균열이 열렸거나 공작가가 차지한 영지가 있다면 알아서 그곳을 치고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끄응.... 그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럴 능력이나 되는가?"
그녀에 대해 험담하고 무시하는 자들은 시간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높이 평가하는 자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중 하나가 브랜포드 후작이었다.
"평범한 자였으면 레이폴드를 차지하진 못했을 겁니다."
"후우....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자네 뜻대로 하게나."
"알겠습니다."
말이 회의지, 브랜포드 후작이 재상에게 말했다는 건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다.
거절할 생각이었다면 아예 재상에게는 말도 꺼내지 않고 후작 선에서 처리했을 테니까.
동부에도 만만치 않은 병력이 있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뭘 주지 않고도 조력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친왕파에 큰 이득이었다.
공작파에 뺏기거나 균열로 잃지 않으면, 또는 그렇게 되더라도 친왕파만의 힘으로 되찾는다면 아멜리아는 가져갈 게 없을 테니까.
재상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대충 상황은 알았으니 빨리 균열을 없애는 데 집중하게나. 긴급 상황이니 왕실의 재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네가 나를 대리해서 모든 것을 총괄하게."
"알겠습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 왔다. 단지 절차가 하나 더 줄어들었을 뿐이다.
늙은 재상은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부부가 오래 떨어져 있어서 좋을 거 없네. 자네도 나이가 들었으니 조금 유하게 사는 건 어떻겠나."
"...유념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귀족들이 웃음을 참았다.
브랜포드 후작의 부인은 후작의 성격을 견디지 못하고 친정으로 가 있었다. 재상은 지금 사위에게 타박을 한 것이다.
저 철혈의 후작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재상밖에 없으리라.
탕!
재상이 나가자 브랜포드 후작이 책상을 쳤다. 집중하라는 뜻이다.
"이제부터 균열을 없애는 것부터 우선할 것이오. 뒤에 적을 두고 싸울 수는 없으니까."
모리스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공작가는 정말 최소한의 병력으로만 막을 것인가?"
"일단은 그래야겠지. 언제 움직일지도 모르지 않나."
곧 움직일 거 같기는 하다. 하지만 저들이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군대가 전선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안 균열의 범위가 확장되고 영지들은 난리가 날 것이다.
친왕파는 진퇴양난의 길에 빠지게 되었다. 균열을 이용해 압박을 피하고 시간을 벌겠다는 구원교의 의도가 그대로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친왕파로서는 일단 내부를 정리하고 공작가가 움직이면 그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균열에 당한 군대를 최대한 빨리 수습하고 다른 영지군도 전부 균열 인근으로 이동시켜 균열을 포위하시오. 누구도 빠져서는 안 될 것이오."
"그런데 그 괴수가 초인급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데? 영지군 수준으로는 피해가 엄청날 거야. 그렇다고 수도를 비워 둘 수도 없고."
최고의 전력들은 수도를 지켜야 한다. 공작가에서 언제 암살을 시도해 올지 모를뿐더러, 이곳은 친왕파의 심장이자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펜리스 백작에게 맡겨야지."
"역시 그 수밖에 없지?"
"균열 주변을 포위하고 균열인들을 막는 역할은 우리가 맡겠지만, 괴수는 펜리스 백작과 그의 기사들에게 맡기는 게 가장 효율적이야."
"그런데 공짜로 할 놈은 아니잖아?"
"별수 있나. 원하는 건 다 주는 수밖에."
브랜포드 후작이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니 펜리스 백작에게 이제 북부군 사령관의 권한을 발동할 수 있게 할 것이오. 또한 균열 처리에 관한 권한도 모두 그에게 줄 것이오. 그러니 그가 필요하다는 건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고 대가로 요구하는 것들도 웬만하면 모두 주도록 하시오. 알겠소?"
친왕파의 귀족들은 만장일치로 후작의 말에 따랐다.
가장 피해를 적게 보고 균열의 확장을 멈추는 방법은 마스터인 펜리스 백작이 움직이는 것뿐이었으니까.
* * *
서부의 상황을 점검한 지셀은 영지로 돌아왔다. 그사이 펜리스에서는 모든 인원이 전쟁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전쟁을 밥 먹듯이 해 온 이들이다. 전쟁 대비는 이제 그들에게는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철컹, 철컹.
영지로 돌아오자마자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지셀의 뒤로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고든이 지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그자를 쓰실 생각입니까?"
"그래, 그러려고 일부러 고생해서 살려 둔 거잖아. 내가 그렇게 베는 거 봤어?"
"하긴, 영주님이 박살 내지 않고 그렇게 얌전히 벤 건 처음이었죠. 난 왜 그랬나 싶었다니까."
고든과 기사들이 지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영주가 상대를 죽일 때는 단 한 번도 그냥 죽인 적이 없었다.
머리를 박살 내거나 모가지를 떨궈 버리거나 심장을 파괴하거나. 아무튼 네크로맨서가 와도 못 살릴 정도로 확실하게 파괴했다.
그 정도로 전투에서 영주의 검은 잔혹할 정도로 자비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상대만은 예외였다. 무척 곱게(?) 베며 살아날 가능성을 주었다.
고든은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 다시 물었다.
"하, 그래도 좀 찝찝하지 않습니까? 적이었던 자인데. 그 실력에 괜히 뒤에서 칼부림하면 피곤해지잖아요. 어찌 보면 우리가 원수인데."
그 말에 지셀이 피식 웃었다.
"그럴 놈은 아닌 거 같던데. 너 그렇게 명예랑 체면 따지면서 살 수 있어?"
"아니요."
고든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거 하나하나 따지다간 피곤해서 못 살 것이다.
굳이 챙기자면 의리 정도나 챙기려나.
지셀의 고든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그런 재능을 가지고도 세상에 죄를 많이 지었으니 속죄는 하고 가야지."
"영주님 말을 따를까요? 죽겠다고 또 난리 치는 거 아닌가 몰라."
고든이 묻자 지셀이 서늘한 눈빛으로 답했다.
"죽는 것도 내 허락 없이는 못 죽어."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영지 한쪽 구석에 있는 지하 감옥이었다.
노동 돌격대에도 들어가지 못할 인간쓰레기, 죽여도 되는 인간들만 잡아넣는 곳이었다. 지셀은 그런 자들도 죽이지 않고 가둬 두었다가 위험한 일에 투입했다.
그리고 그 지하 감옥의 가장 깊은 곳에 한 사람이 갇혀 있었다.
끼이이이익.
두꺼운 감옥의 문을 열자 안에 있던 죄수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지셀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이, 몸은 좀 어때? 이제 회복은 다 됐나?"
어두운 감옥 안에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외팔이 남자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419화 대화, 공감, 설득. (2)
외팔이 남자, 테넌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날 살린 거요. 아니, 그전에 도대체 어떻게 살린 거요. 난 분명 죽었을 텐데...."
"다 방법이 있지."
지셀이 웃었다. 솔직히 반쯤은 운이었다.
지셀은 테넌트의 목을 가르며 다크의 기운을 집어넣었다.
당시 테넌트는 이미 모든 마나를 완전하게 소모하여 오러 블레이드도 사라진 상태였다. 가만히 내버려뒀어도 어차피 탈진해서 쓰러졌을 것이다.
그 와중에 그의 몸에 들어온 다크의 기운은 상처를 지혈함과 동시에 기도를 막아 테넌트를 기절시켰다.
모든 힘이 빠진 테넌트는 일말의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고 그걸 죽음의 과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에 지셀은 그냥 편하게 생각했다.
'죽으면 어쩔 수 없고.'
테넌트는 완고할 정도로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당시에는 설득이 불가능했기에 지셀로서도 그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테넌트는 실낱같이 숨이 붙은 채 살아남았다. 지셀은 바로 포션을 이용해 응급 처치를 하고, 그를 영지로 옮겨와 피오테에게 맡겼다.
지셀이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물었다.
"감옥 생활은 어때? 할 만한가?"
"...나 같은 놈에게는 이조차도 과분하오."
"사람이 많이 변했네."
서부 최강자라는 오만한 자신감을 드러내던 그는 이제 끝없이 자신을 탓하는 자격지심덩어리가 되었다.
전쟁에서 패하고 주군까지 죽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오만한 만큼 명예를 아는 자였으니까.
그래서 테넌트는 감옥에 갇힌 뒤에도 딱히 난리를 피우지 않았다. 도망치려는 시도도, 자결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회한에 잠긴 눈빛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을 뿐이었다.
지셀이 웃음을 거두고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테넌트,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비록 초입이지만 너는 이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 네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날 살린 것이오?"
"그래, 균열이 열리고 괴수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한 사람의 힘이라도 더 필요해."
테넌트가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난 그럴 자격이 없소. 날 죽여 주시오."
"결투를 신청한 건 너야. 그리고 패자의 처우는 승자에게 달린 것이지. 안 그래? 넌 내 허락 없이는 못 죽는다."
"...."
테넌트는 할 말이 없었다. 결투의 패자는 승자의 말에 따라야 한다. 그렇기에 결투가 용인되는 것이며, 때로는 영지전도 결투만으로 승부가 날 때가 있는 것이다.
이미 모든 오욕을 뒤집어쓴 그로서는 차마 결투의 결과까지 번복할 수는 없었다.
로드리크 후작이 펜리스군의 손에 죽었다면 그걸 명분으로 끝까지 덤벼 보기라도 할 텐데, 그런 핑계도 댈 수가 없었다.
"내가... 함께하면 많은 이들이 불편해할 것이오."
"우리는 항상 불편하게 살아.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돼."
"...."
지셀의 말에 기사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에 제정신인 놈이 별로 없으니 그냥 다 불편했다.
솔직히 길리언과 카오르도 같이 지내고는 있지만 대하기 불편했다. 클로드와 알포이도 그렇고, 엘프와 드워프들은 말할 것도 없다.
다들 서로가 불편한데 지셀이 강력한 힘과 권위로 찍어 누른 덕분에 다들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게 바로 펜리스였다.
예전에 적이었던 놈 하나 정도 추가되어도 별 차이 없다는 말이다.
"드레이크 용병단도 로드리크 후작이 죽었으니 더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그놈 후계자들도 전쟁에 참여하는 바람에 다 죽었으니까. 너한테 원한이 있었던 게 아니니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지셀의 말에 테넌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주군을 직접 죽이고 명예를 잃은 나를 쓰겠다는 거요."
"테넌트, 죗값을 치러라."
"죗값.... 말이오?"
"네 충성심은 누구든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네 삶이 정말 명예롭다고 할 수 있었나?"
"...."
"로드리크 후작은 너에게 주군이자 은인이었을지는 모르나 영지민들에게는 최악의 폭군이었다. 가신으로서 그걸 모르는 척한 너에게 정말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나?"
"그건...."
"그래, 영지민들은 영주의 재산이지. 하지만 정말 그게 옳다고 생각하나? 네가 진정 명예를 아는 기사라면 스스로의 양심에 물어봐라."
테넌트는 말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약자를 보호하지 않고 충언을 올리지 않은 것 또한 기사로서 잘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넌트는 다른 기사들처럼 그것을 모르는 척했다. 영주에 대한 충성이라는 조잡한 방패를 앞세워서 말이다.
고개를 숙인 테넌트에게 지셀이 말했다.
"그간 로드리크 후작가의 수탈에 고통받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균열의 괴수들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네가 정말 명예를 아는 자라면...."
푸욱!
지셀이 테넌트의 앞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는 사람들을 위해 검을 들어라."
테넌트는 한참 동안 바닥에 꽂힌 검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래도... 내가 거절하면 어쩔 것이오."
"널 묶어서 괴수들 앞에 던져 버리겠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거기서 그냥 비참하게 죽든가."
그 말에 테넌트가 피식 웃었다. 몇 번 어깨를 들썩인 그가 검을 잡았다.
동시에 지셀의 뒤에 있던 기사들도 긴장하며 검에 손을 올렸다.
천천히 검을 뽑으며 일어선 테넌트가 말했다.
"난 당신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을 것이오."
"상관없다. 내가 싸우라는 곳에서 싸우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을 구하고 전란이 끝나면 은거하겠소."
"평화로운 시기에 싸움만 할 줄 아는 놈은 전혀 쓸 데가 없지. 알아서 밥값을 줄여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테넌트가 웃으며 농을 건넸다.
"이왕 쓸 생각이었으면 팔은 멀쩡하게 내버려두지 그랬소."
"겸손함을 배운 대가라고 생각해."
다시 웃은 테넌트가 마지막 부탁을 건넸다.
"가면을 하나 가져다주시오. 맨얼굴로는 부끄러워서 다니기 힘들 거 같소이다."
"그렇게 하지. 가려도 다 알아보겠지만."
테넌트가 지셀에게 팔이 잘리고 결투에서 패배하는 것을 수많은 병사가 보았다. 얼굴을 가려 봤자 다들 누군지 알 것이다.
테넌트도 그를 알았지만 요청을 거두지는 않았다. 적어도 부끄러운 얼굴은 감출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펜리스 영지에 새로운 초인이 합류하게 되었다.
* * *
"허어, 요새 왕국의 정세가 말이 아니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쩌다 사교가 판을 치며 그런 것들을 만들어 냈는지...."
"그래도 북부에는 안 나타나서 다행 아닙니까?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일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다른 이들이 껄껄 웃었다.
야외에 있는 거대한 단상에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자들은 북부의 영주들이었다.
지셀은 북부군 사령관의 권한을 내세워 북부 영주들을 소집했다. 영주들은 차마 거절할 명분이 없어 일단 영지군을 이끌고 모인 상태였다.
펜리스가 왜 소집을 했는지는 다들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놈이 아무래도 군대를 모아 균열이란 걸 치러 갈 거 같은데...."
"그뿐이겠습니까? 공작가와의 싸움에도 우리 군대를 이용할 게 뻔합니다."
"순순히 내어줄 순 없지요. 다들 같은 생각이지 않습니까?"
"그럼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힘을 아끼고 있어야 합니다. 최대한 핑계를 대고 조금만 지원해 줍시다."
지금 왕국의 다른 영주들은 다 난리가 났다. 균열을 처리해야 하고 공작가와도 싸워야 하니 엄청난 손실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한 북부의 영주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 기회를 이용해 큰돈을 벌 수도 있었다.
당연히 자신들의 전력은 최대한 숨기고 아낄 생각이었다.
한 영주가 조금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런데 펜리스 백작이 적당한 선에서 넘어갈까요? 그놈 꼴통인 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아마 왕국법이 정한 최대치인 절반을 요구할 것입니다."
"저번 식량 구매 때도 병력을 상당히 끌어갔지요. 그거 다시 복구하는데 엄청 힘들었습니다."
"이번에도 그걸로 협박할 게 뻔하지 않겠습니까?"
영주들이 투덜거렸다. 펜리스에 식량과 철광석이라는 목줄이 매였으니 당시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대영주가 된 펜리스 백작에게 밉보이면 식량 구매가 제한될 위험은 여전히 컸다.
페르디움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짐바르의 영주, 짐바르 백작이 말했다.
"그놈이 어렸을 때는 망나니로 불렸지 이 정도로 유망한 놈은 아니었는데... 쯧쯧. 그래도 이번에는 조금 다를 겁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지금 그 애송이는 공작가와의 싸움도 앞두고 있고 균열이란 것과도 싸워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전부와 싸워서 좋을 게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끌고 온 병사들만 모아도 수천에 이릅니다. 그놈이 아무리 꼴통이라도 여기서 바로 싸울 생각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힘을 합해서 강하게 나간다면 그놈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기야 하겠지요. 하지만 나중에 식량 구매 같은 쪽으로 보복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그때 가서 해결해야지요. 그게 무서워서 군대를 절반이나 바치자는 겁니까? 그럴 수 있어요? 그놈은 최대치까지 요구할 게 뻔합니다."
"으음...."
영주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역 사령관은 전시에 모든 영주들에게 최대 절반의 병력을 강제로 징집할 수 있다. 남은 절반만으로 영지를 지키라는 뜻이다.
하지만 군대를 절반이나 가져다 바치면 영주들은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 그 군대의 운영 비용과 보급도 같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미래고 뭐고, 당장 영지가 휘청거릴 텐데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짐바르 백작이 은근하게 말했다.
"이 기회에 우리끼리 공고하게 동맹을 맺는 건 어떻겠습니까?"
"동맹이요?"
"그렇습니다. 안 그러면 펜리스 백작에게 휘둘릴 겁니다."
"좋습니다. 우리의 권리는 우리가 지켜야지요!"
영주들이 모두 찬성했다. 가난한 북부의 고만고만한 영지들이지만 이들이 모두 모이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된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북부 연맹'이 탄생했다.
초대 연맹주는 가장 먼저 간덩이가 부어서 의견을 낸 짐바르 백작이 맡게 되었다.
"그놈 아비인 페르디움 후작과도 오래 알고 지냈으니 저한테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겁니다. 우리 영지가 페르디움을 오랫동안 지원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럼요, 그럼요. 이제 그 애송이한테 우리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 주자고요."
북부를 제외한 다른 영지가 모두 전란에 빠졌다. 북부의 영주들은 위협에서 조금 떨어진 덕분에 이런 짓을 꾸밀 여유도 있었다.
"그런데 이 어린놈의 새끼는 어른들을 불러놓고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한 영주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저 멀리서 펜리스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주들의 호위를 맡은 기사들이 이곳저곳에서 외쳤다.
"펜리스 백작이 도착했습니다!"
둥! 둥! 둥!
흑왕에 올라탄 지셀을 필두로, 그의 측근들과 약 2천의 기마병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다가오는 펜리스군을 보며 다른 영지군의 병사들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보기만 해도 압도적인 기세도 기세였지만, 북부 최강이라는 명성은 다른 군대들을 절로 주눅 들게 했기 때문이다.
단상 위에 모여 있던 영주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애송이가 저랬었나?'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다....'
'왜 저렇게 세 보이지?'
지셀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영주들의 긴장감도 높아졌다. 다른 영주들과 연맹을 맺기는 했지만, 지셀이 워낙 꼴통이라 상대하려니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지셀은 말 위에 올라탄 채로 영주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오랜만입니다."
얼굴을 아는 영주들도 있었고 공작파에 끼었다가 빠진 영주도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가신들이 공작파에 넘어간 영주들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다. 누구든 공작가와 다시 연결되면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을 테니까.
'아멜리아는 안 왔군.'
하긴, 그 여자가 자신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 영악한 여자는 지셀이 북부군 사령관의 권한을 발동하기도 전에 독자적으로 움직이겠다고 친왕파와 협상을 끝내 버렸다.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아멜리아도 지금 상당히 골치가 아플 것이다. 구원교 때문에 계획을 전부 수정해야 할 테니까.
즉, 지금은 서로 싸울 일이 없다는 뜻이다.
말에서 내린 지셀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자마자 모두에게 말했다.
"북부군 사령관인 제가 왜 여러분들을 이곳에 불렀는지 아실 겁니다."
대답은 북부 연맹주인 짐바르 백작에게서 나왔다.
"크흠, 흠. 사령관의 권한으로 우리에게 전쟁에 참여하라고 종용하려는 것 아니오."
"맞습니다. 내전도 내전이지만 균열이 확장되는 것도 막아야 하니까요. 북부에는 균열의 피해가 없으니 여러분도 부담 없이 군대를 일으킬 수 있으실 겁니다."
"커허험, 왕국이 위기에 빠졌다는데 우리도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사령관께서 오시기 전에 우리끼리 지원에 대해 이미 얘기를 끝냈습니다."
"지원이요? 이건 지원이 아니라 왕국법에 의거한 차출입니다."
"크흠흠, 뭐,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저희들도 참여하니까 말입니다."
지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습니까? 얘기가 빨라서 좋겠군요. 그럼 결정은 다 하셨다는 말이지요?"
"네, 저희들은 각 영지에서 삼분지 일에 달하는 병력과 비용을 대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 정도만 해도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만들어지고 그에 못지않은 비용이 들 것이다. 영주들은 그 정도면 정말 많이 양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셀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난하십니까? 지금 왕국이 위기에 빠졌는데 '고작' 그 정도만 내어주고 안전을 꾀하겠다는 겁니까?"
"어허! 그게 고작이라니요! 우리도 그 정도면 정말 최선을 다한 것이요! 사령관께서는 정말 다 받아 가실 생각이었습니까!"
"예, 전 다 받아 가야겠습니다."
"그건 정말 왕국이 타국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나 가능한 일이 아니오!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절반이나 차출해 가는 건 그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순간 지셀이 짐바르 백작의 말을 끊었다.
"절반이요? 누가 절반이라는 겁니까?"
"법이 정한 최대치는 영지군의 절반이지 않소이까?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었소?"
지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군요."
"무슨 오해...."
"전부 다 데리고 오세요."
"뭐, 뭐요?"
지셀이 서늘한 눈빛으로 영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최소한의 치안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병력을 제하고는 전부 끌고 오라는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영주들은 순간 머리가 띵해져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420화 대화, 공감, 설득. (3)
짐바르 백작이 겨우 정신을 찾고 다시 물었다.
"저, 전부 말입니까?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겠지요?"
"정확히 들으셨습니다. 이제부터 북부의 모든 군대는 제 휘하에 들어올 겁니다."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었다. 영주가 무엇인가? 왕실에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자치권을 가진 자다.
자신의 영지에서는 왕과 같은 권력을 누린다는 뜻이다.
그런 영주의 사유 재산이자 자신을 지키는 힘인 군대를 모두 내놓으라니.
타앙!
짐바르 백작이 테이블을 손으로 강하게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 아무리 그대가 북부군 사령관이라 해도 이건 너무한 요구올시다! 어찌 영주들의 사유 재산을 그리 내놓으라 할 수 있단 말이오!"
"공작가와 균열을 막지 않으면 어차피 다 죽을 테니까."
"이, 이익!"
지셀의 서늘한 대답에 짐바르 백작은 이를 갈았다. 자신이 젊었을 때는 핏덩이였던 놈이 이제는 자신을 협박하는 자리까지 오른 게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들었다.
분위기가 사나워지자 옆에 있던 다른 영주들이 일단 말렸다.
"자자, 지금 이러자고 모인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앉으시지요, 백작님."
"펜리스 백작께서도 너무 농이 과하셨습니다. 왕국법으로도 최대치는 절반이지 않습니까?"
"그럼요, 영주의 권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그 누가 왕실에 충성을 바친단 말입니까?"
"사실 절반도 과한 처사입니다. 왕국의 위기를 상정했다지만, 지금껏 그런 경우가 없었어요."
영주들의 만류에 짐바르 백작이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지셀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 표정과 태도로 말했다.
"지금이 바로 그 왕국의 위기입니다. 균열에서 나오는 괴물들의 수는 갈수록 많아질 겁니다."
"허어, 정말로 군대를 다 내놓으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대신 전쟁이 끝나면 식량을 비롯해 충분한 보상을 해 드리죠."
그 말에도 영주들은 고개를 저었다. 병력을 다 뺏기면 나중에 말을 바꿔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의 위기가 실감 나지도 않았다.
한 영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가 거부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러자 지셀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제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거 같습니까? 펜리스가 출정을 하고 만약에라도 패하면 여러분들이 우리 영지를 노릴 텐데요?"
그 말에 영주들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펜리스는 북부에서 풍요의 상징이 된 영지다. 지셀이 군대를 끌고 나가 균열이든 공작가든 어디엔가 패하면 펜리스 영지를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혹시나 올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병력을 아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짐바르 백작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백작! 아무리 북부 최강이라는 명성을 얻었다지만 너무 오만하외다. 지금 여기에 우리가 그냥 온 것으로 보이오? 백작도 피해를 아끼려 우리의 손을 빌리는 거 아니었소? 지금 여기서 싸워 보겠다는 거요?"
이런 회동에 영주들이 그냥 올 리가 없다. 인질로 잡힐 수도 있으니 다들 군대를 이끌고 왔다.
그렇기에 주변에는 각 영지의 군대가 삼엄한 기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영주들의 곁에는 호위 기사들이 가득했다.
지셀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영주들이 호위로 데리고 온 병력만 합해도 얼핏 5천이 넘어가 보였다.
지셀이 데려온 병력보다 월등히 많은 수지만 지셀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제가 못 할 거 같습니까?"
"정말 끝까지 가겠다는 거요?"
짐바르 백작의 협박에 지셀이 한쪽 손을 들었다.
"길리언."
"예, 영주님."
"이제부터 내 뜻에 따를 것을 거부하는 영주가 나온다면 바로 그가 끌고 온 군대를 공격하라."
"알겠습니다."
길리언이 말에 올라타며 크게 외쳤다.
"전원 전투 준비!"
철컹! 철컹! 철컹!
기사들이 말에 올라타고 뒤따라온 기마병들이 모두 창을 들어 올렸다. 어디든 목표만 결정되면 바로 쳐들어가겠다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차피 영주들이 끌고 온 군대는 모두 소속 영지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어서 목표를 잡기는 어렵지 않았다.
기사들까지 모두 말에 올라타자 지셀의 옆에는 가면을 쓴 테넌트만이 홀로 남았다.
펜리스군이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본 다른 영주들의 군대가 소란스러워졌다.
"뭐, 뭐야?"
"갑자기 싸우려는 건가?"
"모두 전투 준비! 전투를 준비해라!"
단순히 회담인 줄 알고 따라왔던 병사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영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셀이 이 정도로 막 나갈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 영주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백작님,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방법 말입니까?"
"그러니까 너무 이렇게 위압적으로 급하게 처리하지 마시고.... 일단 우리와 조금 더 '대화'를 한 뒤에, 우리가 또 다 백작님의 취지에 '공감'을 할 수 있게 '설득'도 좀 하시고...."
영주는 어떻게든 좋게 서로가 원하는 걸 취하기 위해 일단 지셀을 달랬다. 하지만 그는 상대가 어떤 인간인지 잘 몰랐다.
지셀이 검을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턱.
"이 검은 제가 아끼는 검이죠. 특히 상대방과 결투를 할 때 자주 씁니다. 그래서 이 검의 이름은 '대화'입니다."
"...?"
지셀은 다시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하나 꺼내 올렸다.
"이 도끼는 제가 다용도로 쓰는 것이지요. 자잘하고도 많은 일에 쓰이기에 이 도끼의 이름은 '공감'입니다."
"...."
지셀이 이번에는 옆으로 손짓하자 테넌트가 흑왕의 안장에서 창을 하나 꺼내 건넸다.
"이 창은 제가 전장에서 주로 쓰는 창이죠. 수많은 적에게 제 의지를 관철할 수 있기에 이 창의 이름은 '설득'으로 지었습니다."
"...."
지셀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영주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선택하십시오. 어떤 걸 원하십니까?"
영주들은 감히 대답도 못 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미친놈이다. 이놈은 직접 보니 소문보다 더 미친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화'와 '공감', '설득'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지셀은 자신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영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균열과 공작가를 막지 못하면 우리 다 죽습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힘을 합치시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서 죽겠습니까?"
"어, 으...."
살벌한 지셀의 기세에 영주는 땀만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도움을 요청하려고 옆의 영주들을 바라봤지만 다들 당황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함께 힘을 합쳐서 펜리스와 싸우자고 누구도 대놓고 나서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결국 지셀의 기세에 압도당한 영주는 찍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배, 백작의 뜻에 따르겠소이다."
"어? 어?"
"자, 잠깐...."
다른 영주들이 그제야 뭔가 말리려고 했지만 지셀이 노려보자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 사람이 굴복하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살벌한 지셀과 펜리스군의 기세에 눌려 누구 하나 나서서 덤빌 엄두를 못 낸 것이다.
결국 마지막 남은 '북부 연맹'의 초대 연맹주인 짐바르 백작도 항복을 하고 말았다.
"...따르겠소."
도무지 이겨 낼 수 없는 분위기에 모든 영주가 지셀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다 같이 힘을 합쳐 애송이에게 본때를 보여 주자고 말이야 쉽게 했지만, 북부 최강이라는 펜리스와 대놓고 싸울 용기는 없었다.
그제야 지셀은 기세를 풀고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들 본 사령관의 뜻에 동의해 주셔서 기쁩니다. 보급과 운영비도 늦지 않게 부탁드립니다. 균열을 모두 처치하고 왕국에 평화가 찾아오면 충분한 보상을 받으실 수 있을 테니 마음 편히 가지시지요."
'보상은 쥐뿔....'
'이제 진짜 개털이 되겠구나.'
'제 아비는 안 이러는데 어쩌다 이런 놈이 태어났을까.'
다들 입을 삐죽댔지만 대놓고 불만을 말하는 자는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지셀도 모르는 '북부 연맹'은 만들어지자마자 해체가 되고 말았다.
지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당부를 잊지 않았다.
"직접 보내실 필요 없습니다. 조만간 제가 관리들을 보내겠습니다. 따로 빼돌리는 것 없이 확실하게 준비 부탁드리겠습니다."
"...."
펜리스의 관리들이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는 소문이 요새 파다했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소문도 있으니 칼같이 다 걷어갈 게 분명했다.
영주들은 눈물을 머금고 돌아갔다. 돌아가서 영지의 재산을 싹싹 긁어모을 수밖에 없었다.
회담을 간단하게 끝낸 지셀에게 테넌트가 물었다.
"원래 일을 항상 이렇게 처리하십니까."
"뭐, 보통은 그렇지. 중요한 일을 질질 끄는 건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 말에 테넌트가 피식 웃었다.
지셀의 무지막지한 방식은 사실 로드리크 후작이 하던 짓과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로드리크 후작도 힘으로 억압하고 뺏는 걸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그 목적은 전혀 달랐다.
로드리크 후작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에만 바빴다. 하지만 지셀에게는 사리사욕이 보이지 않았다.
남들은 지셀에게 욕심이 많다고 손가락질하지만, 정말 탐욕스러운 자의 옆에 있었던 테넌트는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을 위해서인가.'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행보에서는 로드리크 후작과는 다른 무언가가 보였다.
조금 더 같이 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진짜 기사로서 죗값을 치를 수 있을지 말이다.
* * *
페르디움 후작은 북부군에 합류하지 않았다. 왕국이 혼란스러워지면 야만인들이 준동할 테니 그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멜리아도 북부군에 합류하지 않았다. 눈치 빠르게 미리 독립성을 보장받은 만큼 강제로 합류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강제하면 진짜로 뒤에서 들이받을 여자라는 걸 지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무척이나 피곤해진다.
그리고 동부의 영지를 요청한 걸로 보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대충 알 거 같았다.
'뭐, 알아서 하겠다니 당분간은 내버려둬야겠지. 당장은 도움이 될 테니까.'
아마 내전이 일어나면 공작가는 아멜리아 때문에 꽤 골치가 아파질 것이다.
지셀도, 아멜리아도 아직 원하는 바를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다 보니 지금까지 와 버렸다.
그렇게 페르디움과 레이폴드를 제외한 영주들의 군사들이 펜리스로 모이기 시작했다.
"짐바르 영지의 군사들이 도착했습니다!"
"브리반트 영지의 군사들이 도착했습니다!"
"프로멜 영지의 군사들이 도착했습니다!"
북부는 다른 지역보다 척박하기에 인구도 적고 군사 수도 그만큼 적었다.
하지만 북부의 모든 영지를 합치니 상당한 병력이 되었다.
지셀이 클로드에게 물었다.
"다 모인 건가?"
"예, 약 6만의 군대가 모였습니다."
"생각보다 많군."
"우리 관리들이 아주 빠짐없이 잘 긁어모아 왔으니까요."
"우리 군율에 맞춰야 하는데. 따로 손발을 맞출 시간이 없으니 훈련은 가면서 해야겠네."
"다들 행군하느라 죽겠군요."
씨익 웃는 클로드를 보며 지셀도 웃었다.
"마법사들은?"
"마법사들도 긁어 왔지만 수는 많지 않습니다. 애초에 북부는 마법사들이 별로 없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래도 우리 마법사들이 많잖아?"
"그럼요, 이제 200여 명에 육박합니다. 마법사 전력은 우리가 공작가와 최고를 다투고 있습니다."
로드리크 후작가의 마법사들을 죄다 붙잡아서 노예 계약을 해 버렸다. 도망가지 못하게 확실하게 왕실의 승인까지 받아 냈다.
이제 지셀은 관습과 법을 모조리 무시하고 상대를 강제할 만큼 힘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중간에 배신하거나 도망가거나 사고를 치는 놈이 있을 수도 있다. 그건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마법사들 관리를... 알포이가 맡는다고?"
"6서클 마법사 두 명과 5서클 마법사들은 바네사가 맡지만 나머지는 알포이와 친구들이 맡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그놈 성질이 더럽지 않습니까? 원래 초장에는 세게 잡아야 한다고요."
"그...래...."
뭔가 좀 찝찝하긴 했지만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알포이가 그간 마법사들 관리는 좀 하긴 했었다. 도망가는 놈들도 잘 잡아 오고.
갑자기 마법 병단의 수가 비대해져서 걱정이 조금 되지만 일단 믿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사제들은?"
"각 교단에서 추가로 사제들을 파견해 주었습니다. 모두 120명입니다."
"좋군."
사제 120명은 대단한 수다. 그 정도로 왕국에서 펜리스의 존재가 중요해진 것이다.
"대표는 피오테가 맡도록 해 놨지?"
"예, 반발이 조금 있었지만 영주님 명령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균열과의 싸움에서는 피오테가 중요한 역할을 할 테니까."
지셀이 씨익 웃었다. 영지전에는 참여하지 못하는 사제들이지만 균열과의 싸움은 다르다.
그간 편하게 지낸 다른 사제들을 열심히 굴려야 한다.
"용병들은?"
"조금이라도 더 용병들을 확보하기 위해 전역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현재 균열 때문에 각지에서 용병 고용도 활발해지고 있으니 접촉하기는 쉬울 겁니다."
"좋아, 그쪽도 중요하니 자원을 아끼지 말고 뿌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출정 준비에 관한 보고를 끝낸 클로드가 말했다.
"친왕파에서 연일 재촉하고 있습니다. 이미 몇 군데는 균열이 더 확장되어 군대가 버티지 못하고 물러난 거 같습니다."
"균열과 접촉한 군대는 최대한 격리하라고 전달은 했지?"
"예, 전부터 말해 놔서 몇몇 도시와 요새를 비운 뒤 그곳에서 상태를 보고 재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도 막기는 힘들겠지만 조금 줄일 수는 있겠지...."
지셀은 말끝을 흐리다 고개를 저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왕국 전역에서 사건이 터지고 있다. 자신이 신도 아닌 이상 모든 걸 하나하나 제어하고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이제 자잘한 건 그만 생각하고 크게 봐야 한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가자. 이제 우리가 움직여 줘야 한다."
펜리스의 총병력은 3만이다. 이 중 2만이 북부군에 편입되었고 1만은 북부 전체의 수비 및 보급을 맡기로 했다.
마침내 지셀이 이끄는 총 8만의 북부군이 가장 가까운 균열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421화 가장 강력한 전력을 사용하자. (1)
8만이나 되는 북부군의 위용은 대단했다.
펜리스의 명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수가 어지간한 대영주들도 압박을 느낄 정도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들을 통솔하는 사령관이 북부 최강이라는 펜리스 백작이다.
균열을 처치하러 가는 걸 알면서도, 북부군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영주들은 다들 그 칼이 자신을 향할까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북부군 병사들도 그 분위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영지에서 온 병사들마저 자부심에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야, 봐 봐. 배신하길 잘했지?"
한 중년인이 멋지게 기른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오래전 데스몬드에서 전향했던 첩자들의 조장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그간의 전공과 실력을 인정받아 지휘관으로서 펜리스의 기병 중대 중 하나를 맡게 되었다.
"그러니까요. 진짜 인생은 타이밍이라니까."
"그때 조장님 말씀 듣기를 잘했어요. 로드리크랑 붙을 때는 얼마나 쫄았는데요. 또 배신할 뻔했다니까."
다른 두 사람도 첩자 조장의 부관이 되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조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씁, 말조심해야지. 자꾸 조장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의심한다고. 그리고 배신의 배 자도 꺼내지 마. 우리 지금 과거 세탁 잘했는데 걸리면 죽는다. 우리는 그냥 시대에 맞는 선택을 했을 뿐이야."
"앗차차, 그렇죠. 헤헤헤헤."
조원이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배신의 화신과도 같은 세 사람이지만 아무도 그걸 몰랐다.
세 사람은 은근히 능력이 있었다. 또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니 영지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었다.
다만 한 가지 찝찝한 건....
"야, 근데 첩보관은 왜 매일 우리 보면 비웃으면서 지나가냐. 뭐 아는 거 아니겠지?"
"에, 설마요.... 알면 우리 이미 다 잡혀 죽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그냥 기분 탓이겠지?"
아주 가끔 영주와 총관, 첩보관이 자신들을 발견하면 피식피식 웃으며 지나간다.
데스몬드를 점령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랬다.
'설마 알면서도 우리 내버려둔 건 아니겠지? 데스몬드 점령하자마자 첩보 양성관에 있던 서류도 다 태웠는데.... 그래, 그냥 기분 탓일 거야. 우리가 영지에 충성을 바치는 걸 얼마나 티 냈는데.'
자신들은 무척이나 열심히 일하는, 영지에 도움이 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노동돌격대에서 나와 승진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자기들 출신을 알면서도 쓸 만해서 어떻게든 부려 먹으려고 살려 두는 건 아닐 것....
조장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래야 한다.
불안해하는 그들을 제외하고는 북부군의 사기는 최고조였다.
수가 많은 것 자체도 기세를 높일뿐더러, 명성 높은 펜리스 백작과 그의 측근들도 모두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지셀은 지도를 보며 길리언에게 물었다.
"곧 도착하겠군. 하지만 균열은 꽤 확장이 된 상태겠어."
"행군 속도가 느리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주변 거주자들은 다 피신한 상태라고 합니다."
"쯧, 그렇게 재촉을 했는데도...."
북부군의 행군 속도는 지셀의 성에 차지 않았다. 수가 워낙 많고 대부분이 보병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식량 수레와 수많은 병기까지 싣고 가야 하니 느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실 규모에 비해서는 그렇게 느린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영주들이 본다면 놀랄 만한 속도였다.
하지만 기동력이 좋은 펜리스군만으로 움직였다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지셀을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더 속도를 내는 건 무리겠군."
지금도 후미의 병사들은 헐떡이면서 겨우 따라오고 있다. 사기와 상관없이, 병사들의 수준이 펜리스군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펜리스군만 먼저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얼마나 늘어났다고 했지?"
"마지막 소식에는 약 10만 정도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더 늘었을 겁니다."
아무리 펜리스군이 정예라 한들, 10만이 넘어가는 균열인들을 펜리스군으로만 막으려고 하면 피해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에퀴데마를 제때 막지 못하니 균열인들의 수가 미친 듯이 늘어나고 있었다.
각 균열이 있는 곳의 영주가 확장을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워낙 균열인이 많아 영지군만으로는 계속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침식에 시간이 걸려서 균열인들이 멀리 퍼지지 못하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해라. 얼마 남지 않았다."
지셀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억지로 이끌었다. 병사들도 상황의 심각함을 알기에 어떻게든 따라갔다.
그렇게 며칠에 걸쳐 강행군을 한 뒤에야 북부군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북부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였다.
목책을 잔뜩 세워 만든 저지선 근처에 천막 여러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군영 경계를 서고 있던 지저분한 병사들이 북부군을 발견하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북부군이다! 북부군이 왔어!"
"펜리스 백작님이 오셨다!"
"살았다, 살았어!"
균열인들과 싸우다 밀려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은 꼭 패잔병과 같은 꼴이었다. 북부군을 반가워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곧 꾀죄죄한 모습의 한 남자가 헐레벌떡 지셀에게 달려와 군례를 올렸다.
"부, 북부군 사령관 각하를 뵙습니다! 저는 이곳의 방어를 맡고 있는 스펜벨 남작입니다."
"음? 영주는 어디에 있지?"
"아,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상태입니다!"
"한심한 놈이군."
"...."
지셀의 말에 스펜벨 남작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영주는 영지민들을 지키기에 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주가 가장 먼저 도망을 가다니.
'역시 이 왕국의 귀족들은 대부분이 글러 먹었어.'
지셀은 혀를 몇 번 찬 뒤에 상황을 물었다.
"균열 영역은 얼마나 확장된 상태지?"
"혀, 현재 한 개의 성과 세 개의 도시가 전부 저놈들의 영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면 작은 남작령 정도의 규모였다. 영역 바깥에서 공격하기에는 늦었다.
지셀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퀴데마를 죽이려면 뚫고 들어가야겠군."
에퀴데마는 균열 근처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니 균열을 막을 때는 상대적으로 약한 균열인들과의 싸움이 주가 된다.
하지만 이번처럼 균열인들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밀려 나면, 수많은 균열인들을 뚫고 들어가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셀의 측근들도 스펜벨 남작의 말을 듣고 침음을 삼켰다.
"엄청난 속도군요."
"벌써 작은 영지 수준으로 확장하다니."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왕국이 전부 그놈들로 덮일 겁니다."
그들과 다르게 지셀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전생에 비하면 이건 그다지 빠른 편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침식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그래도 이 영지가 다른 영지보다 조금 더 침식이 빠르긴 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 시작됐다고 했지? 그 마을의 위치를 말하라."
"네, 넵!"
스펜벨 남작이 지도를 펴 한 곳을 짚었다. 균열이 열린 마을의 위치였다.
성이나 도시에서 생긴 균열보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마을에서 생긴 균열이 확장 속도가 빨랐다.
전생에는 자연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일수록 방해되는 것도 없고 마나가 풍부하기 때문에 침식 속도도 빠를 거라는 가설이 있었다.
지셀은 스펜벨 남작이 짚은 곳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는 파악했다. 이제 균열인들을 쓸어버리고 에퀴데마를 죽이러 들어가야 한다.
"병력을 이끌고 가장 가까운 피신처로 이동하라. 비워 둔 성이나 도시는 있겠지?"
"그, 그게 아직...."
그 말에 지셀이 눈을 부라리며 스펜벨 남작의 멱살을 잡았다.
"분명히 전염병에 대비해서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을 격리할 공간을 만들어 두라고 했을 텐데? 몇 번이나 말하고 몇 번이나 공문을 보냈다. 그런데도 공간을 만들지 않았다고?"
"여, 영주님이 거부를.... 일단 저지선만 만들고 막고 있으면 된다고...."
"멍청한 새끼."
이래서 문제다. 방법을 알려 줘도 욕심 때문에 제대로 따르지 않는 놈들이 수두룩했다.
도시와 성을 비우면 영지의 생산량과 경제력이 단숨에 떨어진다. 당연히 세금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게 된다.
그게 싫어서, 말을 듣지 않고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는 영주들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놈들 때문에 서부에서도 본보기로 몇 놈을 쳐 내지 않았는가. 그런데 펜리스의 영향력 밖에 있는 놈들은 지셀의 말을 우습게 들었다.
결국 지셀은 강제력을 행사하기로 했다.
"북부군 사령관의 권한으로 헤셀틴 백작의 모든 권리를 박탈한다. 죄목은 반역이다. 알았나?"
"가, 각하!"
스펜벨 남작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반역이라니! 그게 그냥 증거도 없이 말로만 들이밀면 되는 죄목인가?
말도 안 된다. 왕국 최고의 권력가인 브랜포드 후작도 그러지 못했다.
영주가 반역자가 되면 밑에 있는 가신들도 다 죽는다. 그러니 스펜벨 남작이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국을 위험에 몰아넣었으니 반역이나 마찬가지지. 걱정하지 마라. 죄는 헤셀틴 백작에게만 물을 테니까. 앞으로 네가 이곳의 영주다."
"네? 제가 말입니까?"
"그래. 당장 기사 몇 명을 선정해 가까운 도시 하나를 비우라고 전해라. 그곳의 주민들은 다른 도시로 가라고 하고. 보상은 펜리스에서 충분히 해 주겠다. 전령은 반드시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기사들로 써야 한다. 알았나?"
기사들은 전염병에서 비교적 안전하다. 마나가 병이 침투하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사들이 전령으로 움직여야 한다.
지셀의 박력에 밀려 스펜벨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이제 네가 이 영지의 영주다. 반대하는 자는 날 찾아오라고 해라. 병력을 수습하고 피신처에서 대기해라. 곧 브랜포드 후작이 그곳으로 약을 보낼 것이다."
"가, 각하.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당연하다. 백작의 가신들도 있고 혈연관계로 묶인 귀족들도 있다. 반역이라는 명분은 억지에 가깝다.
백작에게는 병력도 따로 남아 있었다. 스펜벨 남작이 영주를 자처했다가는 헤셀틴 백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그냥 말로만 그러는 사람이 아니다.
"제8기병 중대장을 불러와라."
지셀의 말에 데스몬드 출신의 첩자 조장, 해리슨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찾아왔다.
"추, 충성! 제8기병 중대장 해리슨입니다!"
"그래, 우리 얼굴 가끔 봤지?"
"넵!"
"너, 제법 쓸 만한 놈으로 알고 있는데."
"네, 네?"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볼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해리슨은 식은땀을 흘렸다.
'거, 걸렸나? 여기서 날 죽이려고 하나?'
해리슨을 따라온 부관 두 사람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지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형 선고가 아니었다.
"당장 군사를 이끌고 헤셀틴 백작을 잡아 와라. 내 명령이라고 전해. 브랜포드 후작의 이름을 팔아도 되고. 반항하면 다 죽여도 좋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정체가 발각되지 않았다고 안도한 해리슨이 기쁘고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펜벨 남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떠듬거렸다.
"가, 각하, 정,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곳은 북부가 아니다. 끄트머리라 해도 왕국의 중앙 지역에 속한다.
아무리 북부군 사령관이라 해도 이럴 수는 없다. 북부군 사령관이라고 해도 전시에 북부 영주들에게나 약간의 권한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군사적 권한이다. 영주 자격을 박탈하는 것은 오직 왕실만이 가능하다. 설령 반역에 준하는 죄를 지은 자라도 그렇다.
하지만 지셀은 이제 더 이상 좋게 좋게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균열에 관해서는 내가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니 내 말만 따르면 된다. 더 이상 멍청한 놈들 때문에 피해가 커지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 그대는 열심히 균열을 막으려고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그 보상으로 자리를 받았다고 생각해라."
무시무시한 지셀의 눈빛에 스펜벨 남작은 고개를 숙였다. 그냥 명령대로 열심히 싸웠을 뿐인데 영주 자리를 얻게 됐다.
'와, 이거 좋은데? 나 지금 영주 된 거야?'
펜리스 백작이 보상은 확실히, 후하게 준다더니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스펜벨 남작에게도 나쁜 일이 아니었다. 펜리스 백작이 준 거니 다른 이들도 감히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뒷배가 든든하니 절로 자신감이 차올랐다.
'말 잘 들어야겠다.'
말 잘 들으면 화끈한 보상을 받고 안 들으면 철퇴가 내려진다. 잠깐 사이 지셀의 성격을 파악한 스펜벨 남작은 힘차게 군례를 올렸다.
"그러면 바로 전령을 보내고 저희는 인근 도시로 철수하겠습니다!"
"그리하도록."
이제 참지 않기로 한 지셀의 결단에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됐다. 이제 스펜벨 남작군이 된 병력은 철수를 준비했다.
북부군이 에퀴데마를 없애러 갈 테니 이들이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후에 에퀴데마가 없어진 뒤 감시를 맡을 병력만 다시 오면 된다.
"가자."
지셀은 북부군을 이끌고 천천히 균열의 영역을 향해 나아갔다.
곧 그들은 푸른 안개가 가득 휩싸인 지역에 도착했다.
영역 안으로 들어간 이들의 귀에, 아주 희미하게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크르르릉....
422화 가장 강력한 전력을 사용하자. (2)
안개는 아주 옅게 깔려 있어 앞을 못 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푸른 안개는 무척이나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균열의 영역에 들어온 병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 이게 침식된 지역이라는 건가?"
"보기만 해도 끔찍하네."
"여기에 괴물들이 잔뜩 있다는 거 아냐?"
아무도 없는 대지는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변에 있는 나무와 풀들은 모두 말라비틀어져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푸른 안개와 회색의 대지, 괴물들을 제외한 모든 생명이 죽어 있는 곳.
이것이 바로 균열에 침식된 영역의 모습이었다.
균열은 이미 엄청난 영역을 차지한 상태였다. 이 영역 어딘가에 균열인도 있을 것이다.
다들 어떻게 나아가야 하나 궁금해할 때, 지셀이 손을 들고 말했다.
"투석기를 조립하고 열기구들을 준비해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공병들이 움직여 투석기를 조립했다.
가장 먼저 펜리스군의 갈바니움 중형 투석기 200대가 만들어졌다. 곧이어 각 영지와 펜리스에서 끌고 온 일반 투석기 100대도 완성되었다.
동시에 100대나 되는 열기구들이 마법사들을 태우고 하늘에 떠올랐다.
"전군, 진형을 갖춰라."
아직 적이 보이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갈바니움 갑옷과 방패를 착용한 펜리스의 중보병들이 일렬로 서서 앞을 막았다.
보병들이 창을 들고 중보병들 뒤에 대기했다. 그 뒤에는 궁병들이 활을 들고 섰다. 기병과 궁기병이 양옆에 대기했다.
그들은 그렇게 가만히 진형을 갖춘 채 기다렸다.
'어디를 치는 게 아닌가?'
'여기서 대기하면 되는 건가?'
'작은 영지 정도 크기라고 하지 않았어?'
병사들은 긴장한 만큼 궁금함도 많았다. 괴물들이 모여 있건 퍼져 있건 다 찾아서 죽여야 할 텐데 한 곳에서 기다리기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병사들의 귀에 희미한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카아아앙!
병사들은 이게 괴수의 울음소리인지 균열인들의 울음소리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에퀴데마의 울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리는 없다고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다시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무언가가 분주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다다!
'온다!'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이곳으로 수많은 균열인들이 달려오고 있는 것을.
드드드드드드!
그 수가 점점 많아지는지 땅울림도 점차 커져 갔다.
가장 앞에 있던 지셀이 말에서 내리며 대검을 들어 올렸다. 그 옆에 있던 측근들과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셀이 흑왕을 툭툭 치자 흑왕은 투레질을 몇 번 하더니 진형 뒤로 들어갔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기사들의 말도 모두 뒤로 이동했을 즈음에는 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려왔다.
드드드드드드!
카아아아아!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균열인들의 괴성만으로도 그 수가 많다는 것이 충분히 느껴졌다.
지셀이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쏴라."
"쏴라!"
병사들은 아직 균열인들이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지셀이 쏘라고 하면 쏘는 것이다.
콰앙! 콰앙! 콰아앙!
수백 대의 투석기에서 돌이 쏘아져 나갔다.
동시에 궁병과 궁기병들의 화살이 새까맣게 하늘을 가리며 날아갔다.
파아아앗!
"카아아아악!"
균열인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공격이 통한다는 뜻이다.
북부군은 쉴 틈도 없이 계속 공격을 가했다. 돌이 떨어지는 소리와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카아아아아!"
어마어마한 수의 균열인들이 푸른 안개를 헤치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쿠웅!
지셀이 대검으로 땅을 찍으며 외쳤다.
"쉬지 말고 후방을 공격해라! 이놈들의 수는 10만이 넘는다! 기사들은 나를 따라라!"
지셀은 중보병 뒤에서 지휘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중보병은 그저 다른 병사들을 지키기 위해 앞에 선 것일 뿐이다.
"준비해라!"
균열인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지셀이 대검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철컹! 철컹! 철컹!
기사들도 대검을 들어 올렸다. 길리언만 거대한 양손 도끼를 들었을 뿐이다.
균열인들이 마침내 몇 걸음 이내로 다가오자.
"가자!"
지셀이 크게 외치며 앞으로 나가 대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순식간에 수십의 균열인들이 터져 나갔다. 뒤를 따른 기사들의 공격이 이어지자 순식간에 수백의 균열인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달려드는 균열인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텅! 텅! 터엉!
중보병들의 방패에 단숨에 수백 마리의 균열인이 붙어 버렸다. 눈 몇 번 깜빡이자 그 수는 수천 마리로 불어났다.
"막아라!"
"버텨!"
"어서 공격해라!"
중보병들 사이로 창병들이 열심히 창을 찔러 넣었다.
힘과 속도는 강하지만 방어력은 일반인들과 다를 게 없는 균열인들이다. 한 번씩 공격을 주고받을 때마다 수백 마리씩 죽어 나갔다.
콰앙! 콰아앙! 콰앙!
지셀과 기사들이 앞을 막고 균열인들을 끊임없이 쓸어버렸지만 끝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몇몇 기사들은 해일같이 몰려오는 균열인에 밀려 넘어져서 깔릴 정도였다.
단번에 엄청난 수가 몰려오자 다들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렉스와 싸울 때처럼 요새를 준비하지도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생에 많은 영역을 뺏기고 사람들이 요새화된 도시에서만 살았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없애야 한다.'
지셀이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전생에 비하면 이 정도는 적은 거다. 50만, 100만 이상으로 불어나기 전에 에퀴데마들을 처치해야 했다.
콰앙! 콰아앙! 콰앙!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10만이 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 죽일 수야 있겠지만, 병사들의 피해가 크면 다른 균열과의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조금씩 진형이 밀리기 시작하던 그때, 진형의 뒤에서 성스러운 성가가 울려 퍼지며 사람들의 몸에 밝은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무려 120명의 사제들이 신성력으로 사람들을 보호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카아아아아악!"
전열 쪽에 신성력이 담긴 빛이 퍼지자 그것만으로도 균열인들은 괴로워했다. 신성력이야말로 이들에게는 상극의 기운이었던 것이다.
치이이익!
신성력에 직접 닿은 균열인들의 몸이 타들어 갔다.
쿠우우웅!
반면 신성력으로 힘을 회복한 전열의 병사들은 힘차게 방패를 앞으로 뻗었다. 기사들도 몸에 활력이 샘솟자 더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진열의 정면에 달려들었던 균열인들은 다시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양익을 보호하기 위해 마법사들이 나섰다.
"파이어 월."
열기구에 타고 있던 바네사가 진형의 양옆으로 거대한 불의 벽을 만들었다.
치이이이이익!
"카아아아악!"
진형의 양옆에서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달려들던 균열인들은, 7서클 마법사가 만든 거대한 불의 벽에 닿자마자 불에 타 뒹굴었다.
그래도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살아남아 뛰쳐나오는 놈들이 있었다.
"체인 라이트닝."
콰직!
그런 놈들은 전격 마법에 맞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재가 되었다. 그렉스들을 상대할 때 썼던 마법이었다.
콰콰카카카카칵!
룬스톤을 사용하지 않아도, 7서클에 이른 바네사는 수천의 균열인들을 단숨에 튀겨 버렸다.
그래도 여전히 진형의 양옆으로 수만 마리의 균열인이 몰려오고 있었다.
바네사는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여기서 모든 마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에퀴데마를 상대할 작전을 미리 세워 두긴 했지만 혹시나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마력을 아껴야 했다.
이제는 다른 마법사들이 나서야 할 때였다.
그녀가 다른 열기구를 돌아보며 크게 외쳤다.
"알포이 님!"
우기고 우겨서 결국 펜리스 마법 연구소의 부소장 자리에 앉은 알포이가 크게 외쳤다.
"모두 마력 아끼지 말고 쏟아부어! 어차피 괴수는 다른 사람들이 잡을 거야! 빨리빨리 해, 이 새끼들아! 전쟁이 장난이야? 대충 하면 영지 생활 끝날 거 같냐?"
바네사보다는 확실히 그가 사람들을 잘 갈구긴 했다.
이번에 노예가 된 6서클 마법사 두 명과 5서클 마법사 다섯 명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 저 싸가지 없는 새끼.'
'아주 지가 무슨 마법왕이야.'
'어쩌다 저런 놈 밑에....'
서클이 깡패라는 마법사들의 불문율은 이 영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펜리스 영지에서는 그냥 오래 묵은 사람이 윗사람이었다.
그것 자체는 영지의 문화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저놈이 높은 서클에 대해 눈곱만큼도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윗놈'에게 대들 수도 없으니, 마법사들은 울분을 삼키면서 알포이의 말을 따라야 했다.
알포이의 명령에 따라 열기구에서 수많은 마법이 쏟아져 나왔다.
"파이어 필라!"
"아쿠아 볼!"
"어스 퀘이크!"
파아아앙! 쿠르르릉!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마법들이 균열인들에게 쏟아져 나갔다.
바네사를 제외하고서라도 6서클 마법사 두 명에 5서클 마법사가 총 여섯 명이다. 그 아래 서클 마법사들도 200여 명이나 된다.
카아아아악!
거대한 마법들이 펼쳐질 때마다 균열인들은 대규모로 쓸려 나갔다.
수백 대의 투석기, 수만 발의 화살, 수백 개의 마법이 전장에 흩뿌려졌다.
압도적인 공격으로 10만이 넘어가던 균열인들은 순식간에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진형 앞까지 다가왔던 균열인들도 기사들에게 처맞고 다 죽었다.
"쉬지 말고 공격해라!"
지셀의 외침이 전장에 크게 울렸다.
아직은 할 만하다. 다른 괴수들, 특히 비행 괴수들까지 나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균열의 에퀴데마를 처치하고 확장을 막아야 했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크게 함성을 내질렀다.
힘이 들긴 하지만 피해는 거의 없었다. 저 많은 수의 균열인들을 오는 족족 때려잡고 있다.
싸우는 당사자들도 믿기 힘든 성과에 절로 사기가 크게 올라갔다.
콰아앙! 콰아아앙! 콰아앙!
균열인들은 북부군의 압도적인 힘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끝이 없이 몰려왔다.
병사들도 무아지경에 빠져 그저 시킨 대로 계속 움직였다.
한나절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다 보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전투도 점점 그 끝이 보였다.
8만 대군이 가져온 수천 개의 돌이 다 동났다. 수십만에 달하는 화살이 뿌려졌다. 200여 명의 마법사들은 마력이 다 떨어져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그쯤 되자 달려오는 균열인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카아아아....
기껏 와 봤자 뒤늦게 멀리서 합류한 수십 마리 정도였다.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이곳에 서식하고 있던 어마어마한 수의 균열인들을 전부 처리한 것이다.
하지만 전투가 끝이 난 건 아니었다. 지셀이 흑왕에 올라타며 외쳤다.
"바로 에퀴데마를 잡으러 간다!"
철컹! 철컹! 철컹!
지셀의 측근들과 기사들이 바로 말에 올라탔다. 상대적으로 힘을 아끼고 있던 1만의 기동군이 말고삐를 강하게 쥐어 잡았다.
피오테를 비롯한 몇 명의 사제와 마법사들도 말에 올라탔다.
히이이잉!
"나머지는 이곳에서 진형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해결사 맥스와 엘프 루미나 등 펜리스 지휘관들이 북부군을 통솔하고 있을 것이다.
"가자!"
지셀이 쏜살같이 푸른 안개를 헤치며 나아갔다. 측근들과 기동군도 바로 뒤를 따랐다.
두두두두두두!
중간에 다시 몰려드는 균열인들을 만났지만 그래 봤자 수십에서 백여 마리 정도였다.
콰지지직!
펜리스군은 달려드는 균열인들을 가볍게 짓밟아 버리며 에퀴데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참을 쉬지 않고 달리고서야 드디어 균열이 열린 위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크르르르르....
에퀴데마는 회색빛 대지에 누워 있었다. 그것은 불청객들을 보고 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카아아아!
균열에서는 계속 균열인들이 몇 마리씩 튀어나왔다. 하지만 처음처럼 수백 마리씩 나오지 못했다.
에퀴데마도 이 세계를 침식하려면 기운을 비축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쿠우웅!
괴수가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에퀴데마는 이미 자신의 영역 안에 침략자들이 들어온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균열인들을 보내 공격했지만 실패한 것도 알았다.
짐승은 어쩔 수 없이 비축하고 있던 힘을 개방했다.
카아아아앙!
히이이잉!
에퀴데마의 울음소리 한 번에 말들이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전장을 누비던 강인한 말들도 피어에 버티지 못한 것이다.
오직 흑왕만이 씩씩거리며 달려가려 했다. 확실히 흑왕만큼 미쳐야 겁이 없어지는 듯했다.
지셀과 측근들, 그리고 모든 병력이 말에서 내려 무기를 들었다.
"카아아악!"
얼마 되지 않는 균열인들이 달려들었다. 물론 튀어나오는 족족 앞을 막고 있는 기사들에게 죽어 나갔다.
이제 에퀴데마만 죽이면 당분간 이곳은 안전할 것이다.
"모두 준비됐지?"
지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인원이면 분명 에퀴데마를 죽일 수 있을 터였다.
지셀 혼자서도 에퀴데마를 죽였다. 비록 중상을 입고 겨우 죽였지만, 지금은 지셀도 혼자가 아니다.
길리언과 카오르, 테넌트, 바네사, 벨린다 등의 강자들이 함께하고 있고 1만이나 되는 펜리스 기동군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수많은 균열인들을 상대하느라 다들 꽤 지쳤다는 점이다. 힘을 아낀다고 아꼈지만 초인급 괴수를 상대하기에는 위험했다. 자칫 잘못하면 누구 하나는 죽을 수 있었다.
지셀이 씨익 웃었다.
"다들 지쳤는데 어렵게 갈 필요는 없지. 우리 영지의 가장 강력한 전력을 사용하자. 알포이, 준비됐지?"
알포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 병기 그놈을 쓸 시간이 왔군."
다들 지셀과 알포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뭔가 우리가 모르는 작전이 있는 거 같긴 한데....'
'가장 강한 전력? 최종 병기?'
그 말에 어울리는 사람은 누가 봐도 지셀이다. 그런데 마치 다른 사람을 두고 얘기하는 거 같았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던 벨린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리고 경탄성을 올렸다.
"아, 설마?"
있다. 힘을 쓸 수 있는 조건도 까다롭고 시간도 아주 짧지만, 신의 힘에 가까운 권능을 펼칠 수 있는 자가.
분명 그 잠깐만큼은 지셀보다 강하리라.
뒤를 돌아보는 그녀를 따라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알포이가 누군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향하는 방향에는....
순진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거리는 피오테가 서 있었다.
423화 가장 강력한 전력을 사용하자.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