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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시스템

37화

제9장 자본주의(1)

방어벽이 사라진 것 외에도, 3레벨 미션은 여러모로 이전 미션과 달랐다.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차이점은 진입 인원에 제한이 없다는 것.

거기에 더해 미션의 내용도 변했다.

MISSION

[03-143]

홀과 연결된 매개체를 모두 파괴하십시오.

• 매개체(0/1)

[보상]

아래의 보상 중 선택하십시오.

• 마력 60, 명성 3

• 속성 마력 30, 명성 6

(※ 명성 순위 1위 특전, 미션 성공 시 보상이 2배로 지급됩니다.)

보상에 명성이 추가되는 건 예상했던 바다.

공적 목록에 '홀 폐쇄에 직접적으로 공헌하는 모든 행위'라는 문장이 있으니까.

실제로 명성과 관련된 업데이트 당시 내가 클리어했던 미션 개수만큼 명성이 늘었다.

업데이트가 끝난 지금 당연히 보상 목록에 있어야지.

그렇기에 이 부분은 눈여겨 볼 필요가 없었다.

난 예상했던 내용을 건너 뛰고,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을 살펴보았다.

'매개체.'

이게 뭐지? 난 정찰을 위해 마력 탐지를 사용하며 미션의 내용을 거듭 확인했다.

'적을 제거하라는 카운트도 없....'

하지만 변한 부분을 자세히 곱씹기도 전에 주변에 있는 마력이 느껴졌다.

2레벨에서 보던 괴물의 마력보다는 크기가 작은 대신 머릿수가 많다.

'시작부터 여섯.'

정확한 위치는 나보다 아래.

처음에는 땅속에 괴물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괴물이 있는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을 때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연못....'

아니, 늪지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곳은 나무가 가득했던 이전 미션지보다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내 키만큼이나 큰 풀이 물 밖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으니까.

잎이 동그란 부채처럼 생긴 식물이었다.

'연잎 같이 생겼는데.'

난 무엇인지 모를 식물의 뿌리가 잠긴 물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확하게는 어둠을 머금은 채 검게 물든 수면 위.

마력 탐지에 걸린 괴물이 있는 방향에 역삼각형 형태의 무언가가 둥둥 떠 있었다.

흰자와 동공이 구분되지 않은 붉은색 눈.

파충류처럼 반질반질한 가죽.

물 안에서 가끔씩 튀어나오는 길쭉한 혀.

'뱀인가?'

난 창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수면 위로 머리만 살짝 내민 놈과 대치했다.

그러는 사이 마력 탐지에 걸린 다른 놈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주변이 고요한 탓에 괴물들이 움직일 때마다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괴물들의 위치는 물 밖으로 드러난 진흙길의 좌측에 있는 늪지 안쪽.

그렇게 하나, 둘, 셋, 마지막 여섯까지.

내 반경 300m 내에 있는 괴물들이 모두 물 밖으로 머릴 내밀었다.

놈들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높게 자란 풀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은 붉은 안광 여섯 쌍이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저 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이상 움직임이 제약되는 물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악수다.

만약 뱀과 비슷한 형태라면 몸이 칭칭 감겨버릴지도 모르는 일.

투창도 그리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무기를 잃을 위험이 크다.

'내가 들어갈 수 없다면 놈들이 오게 만들어야지.'

언제든 찔러 넣을 수 있게 움켜쥐고 있던 창대를 내리자 수면이 조금 더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괴물들이 나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는 것처럼 물 안에서 이리저리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빼곡한 식물의 줄기와 수면의 흔들림 때문에 육안으로 놈들의 위치를 쫓는 게 쉽지 않았다.

'마력 탐지가 없었다면 고생 좀 했겠는데.'

지형과 주변 환경이 나에게 유리한 곳은 아니었다.

난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십자날 형태의 창날을 물속에 살짝 담갔다.

'누전 사고가 왜 위험한지 몸소 배워라, 이 새끼들아.'

손끝에서 일어난 스파크가 순식간에 창을 휘감았다.

"샤아악!"

그 결과 물속에 숨어 있던 괴물들이 물에서 건져낸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 * *

삼각형의 머리, 끝이 살짝 갈라진 혀와 180도까지 벌어지는 아가리.

4개의 다리와 물갈퀴, 날카로운 발톱에 내 허벅지만큼이나 두꺼운 꼬리까지.

새로운 괴물의 외형은 악어와 비슷했다.

하지만 완전히 악어라고 하기엔 힘들었다.

이놈들은 두 다리로 직립보행이 가능했으니까.

일어설 경우 내 가슴께까지 오는 크기였다.

'물속에서 튀어 오르는 게 성가시네.'

난 혀를 차면서도 방금 물속에서 무서운 속도로 튀어 올라온 괴물의 입속에 단검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내 손을 물고자 측면에서 달려드는 놈을 걷어 찼다.

괴물이 죽어나갈 때면 어김없이 오염된 마력이 흡수되었다.

「적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염된 마력 27이 흡수됩니다.」

「적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염된 마력 29가 흡수됩니다.」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마력을 징수한다는 메시지가 뜨질 않는다.

난 복잡한 심정으로 메시지 창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보고 있는다고 해서 이유를 알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지금은 털어내는 수밖에.

놈들의 보유 마력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북극곰보다 마력이 많아.'

마력의 보유량만 보면 이놈들이 북극곰보다 강한 생명체라는 의미다.

평범한 인간은 드잡이를 하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난 긴장을 풀지 않고 물속에서 화살처럼 튀어나오는 놈들을 착실히 정리했다.

마침 땅으로 기어 올라온 놈이 종아리를 물려 하기에 발을 들어 콱, 밟아버렸다.

뻑.

단조로운 소리가 나며 나에게 머리가 밟힌 놈의 두개골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후우."

전투가 시작되고 고작 몇 분, 나를 노리던 여섯 마리의 괴물은 모두 죽었다.

'카오스 수치는 0.4% 정도.'

보유 마력이 늘어난 덕분에 카오스 수치의 상승 폭이 많이 떨어졌다.

승급 시험에서 겪었던 것처럼 급격한 감정 변화가 일지도 않았다.

그간의 경험상 내가 정신 오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한계점은 약 30% 초반부터다.

그때부터 환청과 폭력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50%까지 올라가면 내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발길질을 하는 등, 폭력을 사용한다.

'아직 여유는 있지만 오염된 마력을 굳이 내버려 둘 필요는 없지.'

난 정화를 돌리며 장검과 단검에 묻은 검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곧장 자리를 뜨는 대신 괴물의 사체를 살펴보았다.

목에 단검이 꽂혀 절명한 놈의 사체가 그나마 가장 멀쩡했다.

승급시험과 2레벨에서 본 괴물은 입천장에 가시 같은 이빨이 가득했는데.

이놈들은 악어처럼 입 가장자리에만 이빨이 나 있었다.

전체적인 외형을 확인한 후에는 약점을 찾을 차례였다.

'가이드북을 계속 써야 하니까.'

내가 3레벨을 준비하는 사이 에단과 릴리는 이미 2레벨 미션을 한 번 진행했다.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선두권이 1레벨을 졸업할 시점이 된 것이다.

슬슬 상위 레벨 미션을 두고 가이드북 후속편을 쓸 때가 되었다.

꾸준히 명성을 모으려면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해선 안된다.

'일단 찔러보자.'

난 단검으로 괴물의 사체를 여기저기 찌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특별히 가죽이 약한 부분은 찾지 못했다.

등가죽이나 뱃가죽이나, 단검이 박힐 때 들어가는 힘은 비슷했다.

꼬리를 들어보니 묵직한 게, 머리에 제대로 맞으면 뇌진탕은 예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분명 이놈들은 평범한 인간보다 강하다.

'하지만 2레벨에서 본 괴물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야.'

이놈들은 실체화를 사용하지 않고도 칼질 한 번에 양단 낼 수 있다.

그래서인지 2레벨에서 겪은 전투보다 수월했다.

'반응 속도도 느리고, 힘도 약해.'

난 괴물의 사체를 살핀 후 직전의 전투를 곱씹었다.

'여섯 마리나 모였는데도 선제 공격을 안 했어.'

내가 먼저 자극한 후에야 달려들었지.

물론, 달려들 때도 무작위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리 사냥에 익숙한 놈들인가.'

이 부분은 다음 전투에서 조금 더 눈여겨봐야겠다.

난 간단하게나마 정보를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손에 죽은 괴물의 사체를 쭉 훑어보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숫자가 더 늘어나면 정신없겠는데.'

분명 약한 놈들이지만 수십 마리가 한 번에 달려드는 상황이 오면 버거울 것 같았다.

손이 부족한 이상 몇 번 물리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 할지도.

난 다음 전투에 대비해 주의 사항까지 확인한 후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괴물을 살펴보며 느낀 위화감에 대해 곱씹었다.

'이상해....'

보통 게임은 레벨이 오를수록 주사냥터가 구분된다.

그리고 그 사냥터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수준도 올라가고.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단계적으로 난이도가 어려워져야 정상이다.

'그런데 3레벨에서 나오는 괴물이 2레벨보다 약하다고?'

단순히 머릿수 때문이라고 하기엔 수준 차이가 너무 심했다.

당장 여우 괴물에 비해서 마력이 50 가까이 차이가 나지 않나.

더군다나 솔로 플레이를 하고 있는 나와 달리, 다른 이들은 파티 플레이가 기본이다.

15명을 꽉 채워 들어오면 절대 어려운 수준이라고 할 수 없다.

'차라리 여우 새끼가 더 까다롭지.'

실체화를 못 하면 죽이기 어려우니까.

객관적으로, 일반적인 플레이어 입장에선 3레벨이 더 쉽다.

'대체 뭐지? 구조가 이상하잖아.'

그간 내가 느낀 바에 따르면 1레벨은 기본 피지컬을 끌어 올리는 구간.

2레벨은 본격적으로 캐릭터 빌딩을 시작하는 구간이다.

상점에 있는 저가 보조 기술은 정말 다양하고,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아마 2레벨에서 딜러나 탱커 등의 포지션이 구분될 것이다.

이 부분만 보면 게임의 체계는 분명히 잡혀 있다.

그런데 난이도 구성이 이상하다. 이유가 뭘까, 고민하다 보니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매개체...."

앞선 1, 2레벨에선 찾아볼 수 없던 요소다.

이 이상한 구조가 매개체와 관련되어 있는 걸까?

'어쩌면 괴물 수준에 따라서 레벨이 나뉘는 게 아닐지도.'

시스템 메시지에서 1, 2레벨을 초보자 구간이라고 표시한 것과 관련이 있으려나?

오늘도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 마음 한구석에 쌓였다.

'답답하네.'

난 습관적으로 흘러나올 뻔한 한숨을 삼키며 이동을 시작했다.

물에 잠기지 않은 땅은 한 사람이 간신히 걸을 정도로 좁았다.

그 탓에 때때로 발이 미끄러져서 물에 빠지면 첨벙, 하고 큰 소리가 났다.

좁은 길을 따라 이동하는 건 생각보다 성가시고 느렸다.

설상가상으로 제멋대로 자란 식물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내 발밑도 겨우 확인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꼭 갈대밭을 헤치며 걷는 기분이다.

거기서 그쳤다면 욕지거리는 나오지 않았을 텐데.

내 앞을 막고 있는 건 일반적인 식물이 아니었다.

줄기 부분에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해서 옷이 자꾸 걸렸다.

'상처가 날 정도는 아니지만.'

찔리면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결국 난 그 식물을 검으로 잘라가며 길을 확보했다.

그러는 사이 다시 하나둘, 괴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육안으론 괴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근거리까지 접근한 후에나 눈으로 볼 수 있겠지.

'계속 같은 필드가 나온다면 마력 탐지는 필수야.'

이번 필드는 이전의 미션보다 괴물들이 숨을 곳이 너무 많다.

난 내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한 마력들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괴물이 열 마리쯤 모였을 때, 놈들의 선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놈들, 집단 사냥만 한다.'

놈들이 혼자서는 절대 달려들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는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시스템

38화

제9장 자본주의(2)

손이 바빠지고 정신이 없었으나, 다행히도 두 번째 전투도 큰 부상 없이 끝났다.

어쩌다 허벅지를 물린 게 전부였다.

전투에, 정화에, 정신이 없었지만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었다.

난 부상과 속성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 포션을 비운 후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덧 미션을 시작한 지 30분.

식물의 키가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 지점부터는 물 위로 겨우 고개를 내민 정도가 되었다.

가시 달린 연잎 군락지를 벗어난 것이다.

지금까지와 달리 시야가 확 트였다.

듬성듬성 자라난 이름 모를 풀과 질척거리는 땅,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이 쭉 펼쳐져 있었다.

물안개가 자욱해서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야가 트이니 속이 다 시원했다.

'풀떼기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원.'

마력 탐지가 없었다면 정신적 압박이 심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달갑지 않은 필드다.

물비린내도 거슬리고, 딛고 설 지반도 부실하다.

'다른 놈들이 오면 고전 좀 하겠는데.'

이곳은 여럿이 모여서 전투를 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파티로 들어오니까 나보다 손이 많은 건 장점이겠다만.'

난 가이드북에 적을 정보를 정리하며 혀를 찼다.

탐지 범위 내에 있던 마력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는 괴물들의 움직임에 따라 수면이 갈라지는 광경이 확실하게 보였다.

"쯧."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열일곱, 열여덟.'

괴물의 숫자가 계속 늘어난다.

이번엔 꽤나 큰 출혈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속성 마력은 반 정도.'

배분만 잘 한다면 이번 전투까지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머릿수를 믿는 건지, 놈들은 시간을 오래 끌지 않았다.

난 장검을 휘둘러 물에서 튀어 오른 놈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그리고 연이어 달려드는 녀석들을 피해 옆으로 물러났다.

"흡!"

순간 뭔가 물컹한 걸 밟으며 발이 미끄러졌다.

첨벙, 소리가 나며 발이 물에 빠졌다.

그 과정에서 내가 밟은 흙이 무너저 내렸고, 그 아래 파묻혀 있던 물체가 모습을 드러났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지만 자세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동시에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오는 놈이 네 마리나 됐으니까.

난 튜토리얼 당시 받은 창으로 가장 먼저 도착한 놈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발을 물가에서 빼냄과 동시에 우측에 있는 늪에서 세 마리가 튀어나왔다.

놈들은 순식간에 내 어깨 높이까지 치솟았다.

난 자세를 낮추고 오른손에 든 장검에 마력을 둘렀다.

그걸 머리 위로 휘두르며 왼쪽 다리에 마력을 밀어 넣었다.

간발의 차로 왼쪽에서 튀어나온 놈들에게 허벅지와 종아리를 물렸다.

"큭."

허공에서 두 동강 난 세 마리의 괴물이 검은 피를 쏟아냈을 때.

난 왼손에 쥔 단검으로 허벅지에 달라붙은 괴물의 멱을 따고 있었다.

다음은 왼쪽 종아리에 매달린 놈.

단검을 역으로 쥐고 괴물의 두개골이 단번에 꿰뚫어버렸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력 탐지에 걸린 괴물의 숫자가 늘어나는 중이니까.

내가 죽인 놈들의 사체보다 달려드는 놈들의 수가 더 많다.

"이 귀찮은 새끼들이!"

한 놈, 한 놈, 따로 두고 보면 위력이 대단치 않다.

맨손으로도 으깨버릴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그 하찮은 놈들이 서른을 훌쩍 넘자 버거웠다.

내 빈틈을 노리고 달려드는 놈들을 정리하기 위해선 속성 마력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단번에 태울 정도는 아니지만, 경직시키기엔 충분했다.

덕분에 잠깐의 여유를 벌고 악어 괴물을 정리할 수 있었다.

"후욱, 훅."

상처는 제법 많이 생겼지만 위험한 순간은 없었다.

하지만 체력 소모는 2레벨 미션보다 더 심했다. 정말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으니까.

난 몸을 곧게 세우며 거칠어진 숨을 몰아 쉬었다.

검은 피 특유의 퀘퀘한 냄새가 물비린내에 섞여서 구역질이 일 정도로 역겨운 냄새가 났다.

내가 서 있던 곳 주변에 둥둥 떠 있는 괴물의 사체는 언뜻 봐도 30구가 훌쩍 넘었다.

이미 마력 탐지로 대략적인 숫자를 알고 있었는데.

죽어 있는 놈들의 숫자를 직접 눈으로 보자 기가 질렸다.

'다구리엔 장사 없다더니.'

혼자 서른이 넘는 수를 상대했더니 속성 마력이 또 바닥났다.

난 전투가 끝나자마자 포션을 들이켰다.

괴물에게 물린 상처 부위에도 포션을 아낌없이 부었다.

상처가 낫기 시작했지만 내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제대로 공격기나 광역기가 필요해.'

아니면 파티를 꾸리던가.

'피지컬이 계속 정체된다면 혼자서 4레벨로 넘어가는 건 무리야.'

혀를 차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난 괴물의 사체가 별로 없는 방향으로 자리를 옮겨 대충 얼굴과 머리를 씻었다.

이윽고 내가 향한 곳은 연잎 군락지를 벗어났던 그 장소였다.

자세를 낮추고 주변을 더듬더듬 확인하자 곧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세 번째 전투가 시작되었을 무렵 밟았던 것.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난 이를 악물며 진흙에 반쯤 파묻힌 그것을 단검으로 뒤집어보았다.

썩은 살의 안쪽에 보이는 하얀 뼈, 그리고 끝에 달린 깨진 손톱.

물에 퉁퉁 불어버린 살점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이건 분명 사람의 손이었다.

"하아...."

썩어가고 있는 손을 빤히 응시하던 난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여전히 시퍼런 달 두 개가 떡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방어벽이 없는 미션지에 온 플레이어는 내가 최초다.'

그러니 이 손의 주인은 플레이어가 아니다.

아마도, 지구가 아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겠지.

2레벨 미션 당시 발견했던 금화를 떠올리자 머릿속에서 떠돌던 가정이 명확해졌다.

'이 세상엔 문명과 사람이 존재해.'

의심도, 이견도 남지 않은 완벽한 확신이었다.

깊게 숨을 고른 난 가시에 긁혀 여기저기 찢어진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 그걸 반으로 찢어 썩어가는 손을 감쌌다.

"으...."

물컹물컹하고 흐물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사후경직이 풀릴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는 소리다.

죽은 사람의 손을 만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거북한데.

그 감촉이 정육점에서 사던 국거리용 고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더 소름끼쳤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손을 포장한 이후 보관함에서 가방을 꺼냈다.

미션이 끝났을 때를 대비해 옷가지와 신발 같은 용품을 넣어둔 가방이었다.

거기에 손을 넣은 난 가방 째로 보관함에 쑤셔 넣었다.

이 징그러운 걸 굳이 챙기는 이유는 간단했다.

'제대로 확인하자.'

이 손이 정말 '인간'의 손인지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혼자서 파헤치기엔 너무 전문적인 분야다.

'우선은 종훈 아저씨한테 말해보고.'

그 선에서 불가능하다면 국정원 쪽에 감식을 부탁하자.

난 손을 챙긴 후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대신 튜토리얼 때 받은 창을 꺼내 남은 옷을 둘둘 감았다.

보관함에 넣어 온 기름을 적셔서 불을 붙이자 횃불이 만들어졌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수색이 시작되었다.

난 아예 바닥을 기어 다니며 흙이 짓눌린 흔적을 하나하나 다 확인했다.

덕분에 특정 지점에 우르르 몰려 있는 괴물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자국을 따라가자 이질적인 흔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발...."

물갈퀴와 발톱에 짓눌린 자국과 달랐다.

정면이 돌출된 타원 형태, 꼭 신발의 앞코처럼 생겼다.

괴물의 발자국이 너무 많아서 듬성듬성 남은 정도지만, 분명히 사람의 발차국처럼 보인다.

발자국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고민하기도 잠시.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창에 달린 불길을 털어냈다.

뒤에서 괴물들의 마력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미션부터 정리하고, 다시 확인한다.'

장검과 단검을 꺼내 들자 제법 멀어진 늪지의 수면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남은 건 90마리 정도.'

근처에 모여든 놈들은 일곱.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 *

내가 매개체의 흔적을 발견한 건 미션지에 진입한 지 세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지금까지 난 80마리가 넘는 괴물을 죽이고 2천이 넘는 마력을 추가로 확보했다.

전투를 끝내고 움직이면 나를 발견한 괴물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그럼 난 녀석들을 사냥하고 다시 자리를 옮긴다.

몇 시간 동안 굳어진 사냥 패턴이었다.

그런데 다섯 번째 전투가 끝난 후부터 괴물들이 모여들질 않는다.

'...왜 안 와?'

혹시 인근의 괴물이 모두 죽은 걸까?

난 잠시 더 기다려보다가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이동을 시작하고 30분쯤.

멀리서 괴물의 마력이 하나둘, 느껴지기 시작했다.

난 또 한 번의 몰이 사냥을 준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탐지 범위의 안쪽에서 갑자기 커다란 마력이 느껴졌다.

"뭐...."

갑작스러운 상황에 흠칫, 몸을 떤 내가 자리에 멈춰 섰다.

이 마력은 감지 범위 밖에서 나타난 게 아니었다.

안쪽에서 정말 뜬금없이 튀어나왔다.

마력의 위치에 집중하자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물 밑에 있는 것 같은데.'

악어 괴물들이 숨어 있는 늪은 그리 깊지 않았다.

'끽 해봐야 5, 60cm.'

깊어도 1~2m정도다.

그런데 저 놈은 더 아래, 수십 미터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력 탐지는 나를 중심으로 둥근 구 형태를 이루는 인지 범위를 가지고 있다.

전방과 후방, 상하좌우의 반지름이 300m인 구 안에 있는 마력만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끝으로 갈수록 상하의 범위가 좁아진다.

이 놈이 탐지 범위 안쪽에서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다.

난 지금까지 사냥한 괴물들의 마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마력을 유심히 살폈다.

대략적으로나마 크기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비교 대상은 활활 타오르던 한창식의 마력.

'반 정도 되나?'

수치로 따지면 4, 5백 마력이다.

'일종의 보스몹인 모양인데.'

아무래도 3레벨부터는 보스 레이드가 추가되는 모양이다.

'이제까지 괴물의 마력이 백을 넘은 적은 없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난 보스몹 옆에 있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저게 뭐지?'

일반적으로 탐지 기술에 걸리는 마력은 타오르는 형태였다.

평범한 사람이나 플레이어, 괴물과 식물까지 모두.

생명체라면 일단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형태의 마력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 보스몹 옆에 있는 저 마력은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소용돌이...?'

정신을 집중하자 마력의 움직임이 조금 더 자세하게 느껴졌다.

소용돌이 형태의 마력, 그 옆에 괴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마력.

두 개가 연결되어 있었다.

'아니야.'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소용돌이 쪽에서 괴물의 쪽으로 마력이 흐르고 있다.

그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흡수?'

괴물이 플레이어처럼 마력을 흡수한다고?

머릿속에서 나에게만 들릴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저 새끼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어느새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난 서둘러 두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내 주변에 있던 괴물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동을 보였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나를 노리고 다가와야 하는데.

놈들은 제자리를 지킨 채 미동도 없었다.

'왜?'

이 상황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위화감, 경각심, 그리고 초조함.

분명 난 이 미션지에 발을 들인 이래 최고로 긴장 중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형태의 마력이 느껴지는 곳과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느려졌다.

꼭, 들키지 않게 숨을 죽이는 것처럼.

그러다 갑자기 커다란 마력이 움직인 탓에 몸이 떨렸다.

빌어먹을 시스템

39화

제9장 자본주의(3)

놈은 정확히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난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자 내가 있는 쪽으로 오던 마력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난 더 물러나는 대신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그러자 보스몹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같은 행동을 두어 번 반복하자 확신할 수 있었다.

저놈은 내가 일정 거리 내로 접근하면 반응하지만, 그 밖으로 물러나면 쫓아오지 않고 돌아간다.

'대략 50미터인가....'

그리고 작은 괴물들은 보스몹의 근처에 접근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안전지대라는 의미였다.

여기서 재정비를 할 것인가, 마력을 흡수하고 있는 저놈을 당장 죽이러 갈 것인가.

난 연결된 두 개의 마력을 주시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마력이 눈에 띄게 늘고 있지는 않아.'

그렇기에 선택이 쉬웠다.

'속성 마력을 전부 회복하고 들어간다.'

보스몹으로 추정되는 놈의 마력은 백 단위다.

괴물이 얼마나 강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상대해도 승기를 점칠 수가 없었다.

결정을 내린 후 난 땅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미션지에 진입한 지 벌써 반나절.

난 챙겨온 식량으로 공복을 채우며 마력을 회복되길 기다렸다.

"쯧."

오늘만 해도 속성 마력이 네 번이나 고갈되었다.

중간에 이런 식으로 회복할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전투가 더 버거웠을 것이다.

'속성 마력이 너무 적어.'

위력은 뛰어난데 사냥을 끝냈다 하면 다 써버리니 답답할 노릇이다.

언젠가부터 일반 마력보다 속성 마력이 더 간절해졌다.

일반 마력은 이제 화폐처럼 느껴질 뿐이다.

'더는 마력으로 몸이 변하지 않는데다, 실체화를 펑펑 써도 남아돌 정도로 많으니까.'

3레벨까지 올라오면 일반 마력은 전투력 증가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다.

'기술이나 장비를 구매하는 식으로.'

반면 속성 마력은 전투의 위력과 지속 시간을 늘리는 등, 직접적인 전투력 증가로 이어진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그리고 많이 모을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기억을 뒤져본들, 속성 마력을 얻은 건 미션을 성공했을 때뿐이었으니까.

또 하나의 숙제를 품은 난 보스몹이 있는 방향을 주시하며 숨을 골랐다.

* * *

나는 속성 마력을 채운 후 지체 없이 보스몹이 있는 장소로 내달렸다.

혹시 몰라 투명화를 하고서 접근해봤지만, 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했다.

'올라온다.'

별 소용도 없는 투명화를 푼 후 뜀박질이 한층 빨라졌다.

놈보다 먼저 자리를 잡아야 했으니까.

다행히도 저 반응 자체가 견제를 위한 건지, 보스몹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덕분에 난 놈이 물속에서 나오기 전에 거대한 늪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넓이가 거의 학교 운동장 정도는 되어 보였다.

'뭐 이리 넓어?'

난 주변 환경을 빠르게 확인한 후 괴물의 기척에 집중했다.

손에 든 무기는 튜토리얼에서 받은 창.

십자날 창을 얻은 후 거의 쓰지 않았지만, 오늘은 필요했다.

이건 십자날 창보다 투창에 유리했으니까.

'나오면 일단 한 방 꽂아 넣고 시작한다.'

난 흙탕물 속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검은 그림자를 보며 투창 자세를 취했다.

보스몹이 움직일 때마다 흙탕물이 꽤나 크게 흔들리며 철퍽, 철퍽, 땅을 적셨다.

하지만 놈이 수면 위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난 인내심을 가지고서 괴물이 물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저 녀석의 인내심도 만만치 않았다.

놈은 내가 발견한 이래 줄곧 물 속에 있을 뿐이다.

'물 밖에서 호흡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인가....'

정말 그렇다면 끌려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위험해지겠지.

난 놈과 달리 익사의 가능성이 있으니까.

작은 놈들을 상대했던 장소는 고작 내 무릎이나 허벅지까지 오는 수심이었지만, 여긴 몇 십 미터는 될 정도로 깊다.

내가 물 안으로 들어가선 안될 이유가 분명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이런 대치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는 일.

놈을 자극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고 보니, 저 소용돌이 마력 옆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보스몹의 행동 패턴을 곱씹던 난 슬쩍 창대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처음 이 미션지에 들어왔을 때처럼 창촉을 물에 담가보았다.

물론 그때처럼 속성 마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마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

저놈에게 감전이 별 효과가 없다면 마력만 날리는 꼴이니까.

다행히도, 고작 창촉을 담근 것만으로도 반응이 왔다.

물 속에 있는 놈의 움직임이 한층 거칠어진 것이다.

그에 따라 물이 출렁거리는 정도가 심해졌다.

마치 화가 나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

'나오는 건 물론이고, 누군가 이 장소를 침범하는 것도 싫은 거야.'

그 사실을 깨달은 난 곧장 첨벙첨벙, 물에 발을 담갔다.

촤아악!

동시에 괴물이 있는 방향에서 물이 치솟더니 내 팔뚝 만한 두께의 뭔가가 튀어나왔다.

'온다!'

난 마치 채찍처럼 움직이는 혓바닥을 붙잡았다.

"흡!"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하지만 나에게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다.

난 붙잡은 혀를 왼팔에 감고 힘껏 잡아당겼다.

상당한 저항감이 느껴지며 발이 무른 지반을 파고들었다.

그 상태에서 이를 악물고 힘을 주자 물속에 숨어 있던 놈이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물 밖으로 드러난 괴물의 외관은 작은 괴물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머리가 거의 내 몸통 만했다.

'전신은 2, 3m 정도 되겠는데.'

작은 놈들의 몇 배에 달하는 크기에 인상을 찡그리기 무섭게 내가 던진 창이 놈의 왼쪽 앞발 근처에 박혔다.

"샤아아악!"

머리를 노린 건데, 놈이 몸을 비트는 바람에 빗나갔다.

더군다나 내가 바랐던 것보다 얕게 박혔다.

작은 괴물의 가죽과 비슷했다면 아예 관통됐을 만한 위력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놈이 버둥거리자 몸에 박힌 창이 뽑혀 나왔다.

"쯧."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쓸데없이 질겨가지고는.

'그렇다면 가까이 당기는 수밖에.'

그때부터 보스몹과 나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버티는 힘이 상당해서 쉽지는 않았다.

"쯧."

그에 난 속성 마력을 써서 놈을 경직시켰다.

"흐읍!"

잠깐이나마 굳어버린 놈을 힘껏 잡아당기자 3m 정도 될 법한 괴물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렸다.

잠시 후 움찔움찔, 경직이 풀린 놈이 제 이빨로 혀를 끊어버렸다.

"이 새끼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제 몸을 잘라내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니.

기가 막혔지만 놈은 이미 물가를 벗어난 후였다.

지 몸을 지가 자르겠다는데, 내가 말려줄 필요는 없지.

난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는 놈에게 달려갔다.

오른손에 장검, 왼손에 단검을 쥐었다.

내가 거리를 거의 다 좁혔을 때쯤 쿵, 소리가 울리며 육중한 몸체가 땅에 떨어졌다.

주변에 듬성듬성 고여 있던 흙탕물이 사방으로 비상했다.

그 때문에 시야가 가려진 방향에서 내 허리와 비슷한 두께의 꼬리가 날아들었다.

'오른쪽!'

붉은 안개에 뒤덮인 장검은 그대로 괴물의 꼬리를 꿰뚫어 버렸다.

'이대로 발을 묶는다!'

직후 압정으로 종이를 고정시키는 것처럼 장검을 땅에 박아 넣었다.

놈의 꼬리는 기이한 점액질로 뒤덮여 미끌거렸다.

하지만 검으로 꿰뚫은 이상 놓칠 염려는 없다.

꼬리가 발악을 하듯이 꿈틀거렸지만 난 힘으로 괴물의 반항을 억누르며 장검에 속성 마력을 불어 넣었다.

발을 묶은 김에 경직되게 만들고, 그 사이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푸른 스파크가 일어남과 동시에 또 헛웃음이 나왔다.

괴물이 제 꼬리를 뚝 떼 버리고는 도망가버렸으니까.

덩그러니 남겨진 꼬리가 바짝 익어서 모락모락 연기를 뱉어 냈다.

'이번엔 꼬리냐?'

이제 보니 악어가 아니라 도마뱀이었나보다.

난 혀를 차면서도 곧장 도망가는 괴물의 뒤로 따라 붙었다.

혀와 꼬리를 다 포기했으니 이제 저놈도 근접전 밖에 길이 없다.

내가 몸을 바짝 붙이자 괴물이 고개를 틀었다.

이대로 놈에게 물리기라도 했다간 몸이 두 동강 나겠지.

난 괴물의 주둥이를 걷어 차며 왼손에 쥔 단검을 수평으로 그었다.

괴물의 옆구리가 길게 찢어지며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대로 장검의 사거리에 들어온 목을 잘라내기만 하면 끝낼 수 있다!

"샤아아아아!"

그대 놈이 갑자기 몸을 뒤집더니 머리를 사방팔방으로 흔들며 아가리를 쩍 벌렸다.

나와 놈의 주둥이 사이에 남은 거리는 멀지 않았다.

이대로 내려 긋기만 해도 장검으로 놈의 주둥이를 잘라낼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하지만 내가 검을 써보기도 전에 괴물의 아가리 속에서 걸쭉한 초록색의 액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뭣...!"

난 몸을 뒤로 빼면서도 서둘러 방어막을 만들었다.

괴물이 뱉어낸 체액이 순식간에 방어막을 뒤덮었다.

"하!"

직후 방어막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녹기 시작했다.

치이익.

꼭 불판 위에 고기를 올릴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산이네.'

염산인지, 황산인지, 정확한 성분은 모르겠지만 닿으면 위험하다.

다행히도 난 방어막이 녹는 사이 안전하게 몸을 뺐다.

놈은 저가 뱉어낸 체액를 밟고 섰는데도 멀쩡해 보였다.

'어째 너무 미끄럽더라니.'

아무래도 표피에 묻어 있는 점액질이 산 성분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모양이다.

내가 인상을 구기자 괴물이 체액를 사방으로 뿌려대기 시작했다.

아예 내가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고 싶다는 듯이.

난 그 액체를 피해 몇 걸음 더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괴물이 슬금슬금 이동을 시작했다.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괴물이 가려는 방향에 있는 게 물이었으니까.

'튀려는 거야.'

저놈은 지금 물속으로 숨으려는 것이다.

'절대 안 돼.'

물에 들어가면 다시 제 발로 나오지는 않을 터.

내가 물에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너무 불리해진다.

난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창을 꺼내들고 발끝에 속성 마력을 모았다.

허공을 박참과 동시에 투명화를 사용했다.

펑, 펑.

주변에 가득 깔린 산성을 피해 허공을 뛰어넘자 괴물도 후다닥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견제하는 것처럼 사방에 체액을 뿜어냈다.

내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지 못한 탓에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게 더 많았지만.

운 좋게 근처로 날아오는 체액은 허공에서 몸을 틀어 피했다.

그러는 사이 난 괴물에게 창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후였다.

'부상은 피할 수 없어.'

방어막을 사용한 상태에서는 나도 공격이 불가능해진다.

그렇기에 놈을 찌르는 순간만큼은 방어막을 없애야 한다.

난 부상을 감수하고 놈의 목 위로 떨어져 내렸다.

기척을 느낀 괴물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창날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남과 동시에 괴물이 체액을 쏘아냈다.

이후 내가 왼발로 허공을 박차며 몸을 틀고.

괴물의 측면에 착지해서 방어막을 만들고.

고개를 돌린 괴물의 입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온 체액이 방어막에 닿고.

녹아버린 방어막 너머로 내지른 창이 괴물의 목덜미를 찌르고.

내가 초록색 체액을 뒤집어 쓰는 것까지.

순차적으로 이어졌다.

"흐악!"

"캬악!"

왼쪽 어깨와 등, 옆구리, 그리고 팔과 손에 이어 허벅지까지 불이 붙기라도 한 것처럼 뜨거웠다.

피부가 녹기 시작하며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

난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창을 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창대를 더 꽉 쥐며 남은 속성 마력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대략 100에 달하는 번개 속성의 마력이 한 번에 실체화되자 푸른 빛이 사방으로 번쩍거렸다.

목덜미에 창을 꽂고 있던 괴물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괴물의 거대한 몸체가 들썩거릴 때마다 나도 놈에게 매달린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푸른 스파크가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시스템 메시지가 뜨지 않았다.

그래서 장검을 꺼내 들고서 실체화를 사용했다.

붉은 안개를 휘감은 장검은 1/3 쯤 갈라져 있던 괴물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빌어먹을 시스템

40화

제9장 자본주의(4)

사악-!

「적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오염된 마력 459가 흡수됩니다.」

괴물의 머리가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간 후에야 시스템 알림이 떴다.

마력이 흡수되는 걸 느낄 여유는 없었다.

난 창과 검을 거의 버리다시피 하며 뒤로 물러났다.

신발 밑창이 녹으며 하얀 연기가 나기 시작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괴물의 체액이 닿은 부분의 살이 거의 다 녹다시피 해서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으학...."

살이 녹아버린 왼쪽 팔과 손은 뼈가 보일 정도였다.

난 벌벌 떨리는 손으로 서둘러 환부에 포션을 들이 부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회복 속도가 늦었다.

이를 악물고 포션을 세 병이나 쏟아낸 후에야 새살이 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녹색 액체에 뒤덮인 장소를 벗어났을 무렵엔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간지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언젠가 간지러움도 심할 경우 고문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진짜였다.

당장이라도 머릿속에 손을 집어 넣어 뇌를 긁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상처가 생긴 손을 꽉 움켜쥐어 보지만 끔찍한 감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난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머리를 박고 그저 버티기만 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난 걸까?

"흐아, 흐...."

통증과 간지러움이 점차 가라앉았다.

고개를 들어 환부를 살피자 제법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한동안 녹초가 되어 축 늘어져 있던 난 심하지 않은 상처를 확인했다.

뺨이나 귀에도 체액이 튀어서 살이 녹아 있었다.

작은 상처까지 일일이 다 치료하자 포션 4병이 증발했다.

"하하...."

이렇게 심하게 다친 건 두 번째 듀토리얼 이후 처음이다.

몇 분 전까지 나를 지배했던 고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후유증으로 손이 덜덜 떨렸지만 계속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슬금슬금.

탐지 범위 안으로 조금씩 기어들어 오기 시작한 마력들 때문이다.

보스몹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쉴 틈도 주지 않고 모여든다.

난 대량으로 흡수한 오염된 마력을 정화하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보스몹의 사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단검으로 흙을 뒤집어가며 길을 만들자 더는 신발을 희생하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이젠 장비값도 들겠네."

괴물의 사체 옆에 떨어진 장검은 반쯤 녹아 있었다.

손잡이 부분이 부글부글 끓으며 사라지고 있으니 더는 쓸 수가 없다.

깔끔하게 검의 회수를 포기한 내가 시선을 옮겼다.

거기엔 괴물의 체액을 뒤집어쓴 채로도 녹지 않은 창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장검이랑 뭐가 다르기에 멀쩡한 거지?'

또 늘어난 의문을 옆으로 치운 난 너덜너덜해진 보관함에서 옷을 꺼내 창대를 쥐었다.

본래 미션이 끝난 후 갈아입기 위해 챙겨온 옷이었다.

하지만 저걸 맨손으로 만지느니 옷을 희생하는 게 나았다.

치이익.

창대에 닿은 옷은 녹기 시작했다.

가까운 웅덩이로 가서 체액을 씻어낸 후에야 맨손으로 창을 잡을 수 있었다.

내가 재정비를 하는 사이 작은 괴물들은 부쩍 가까워졌다.

다시 시작된 전투는 길지 않았다.

난 놈들을 모두 정리하고 난 후에야 물가로 다시 다가갔다.

물속에서 느껴지는 건 소용돌이 마력, 그리고 아주 작은 마력 몇 개가 전부였다.

'이 정도 크기면 식물이다.'

제법 깊은 물 안에 위험한 생명체는 없는 것이다.

난 성큼성큼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몸이 변했다지만,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까지 뛰어넘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흙탕물 속에서 시야를 확보하는 건 불가능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무런 장비도 없이 저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 건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첨단 장비를 대신해 줄 기술이 있었다.

난 눈을 감은 채 마력 탐지에 의지했다.

바닥을 향해 잠수를 하자 새삼 이 늪이 깊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적어도 20m는 되는 것 같은데.'

예전의 나라면 잠수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수심이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물이 더 차가웠지만 지금의 난 큰 어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자꾸만 몸이 뜨는 것을 다시 끌어내리며 기어이 바닥에 닿았을 때.

난 소용돌이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끌거리고 딱딱한 물건이 잡혔다.

그것을 낚아챈 내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푸하!"

수면 밖으로 나와 눈을 뜨자 내가 가져온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매개체]

03-143 홀과 연결된 매개체.

파괴할 경우 홀이 폐쇄된다.

시스템 창 너머로 보이는 건 여기저기 녹이 슨 철제 방패였다.

물 속에서 방치된 탓인지 수초에 뒤덮여 있었는데, 그 수초 끝에 하얀 덩어리가 하나 엉켜 있었다.

"참, 놀랍다...."

일단 보기엔 사람의 두개골처럼 생겼다.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그걸 보던 난 거친 손길로 두개골을 떼어냈다.

"무슨 증정품도 아니고."

왜 하필 이렇게 꺼림직한 게 딸려오나.

난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두개골을 보관함에 쑤셔 넣었다.

몇 시간 전에 챙긴 썩은 손과 함께 감식을 진행해볼 생각이었다.

챙길 것을 다 챙긴 후에는 방패를 뒤덮은 수초를 뜯어냈다.

바깥쪽에 새겨진 양각 문양은 새처럼 생겼다.

'맹금류인가?'

금화에 새겨진 건 포유류였는데, 이건 조류다.

안쪽에 달린 장식도 새였다.

손톱 만한 크기의 작은 장식이었지만 재질은 아마도 금.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난 일단 방패를 들고서 땅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물에 빠진 창도 찾아오고 싶었지만, 괜히 시간만 낭비할 가능성이 높았다.

'수경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저 깊은 곳에 가라앉은 창을 촉감만으로 찾는 건 힘들 것이다.

물에서 빠져나오자 몸에서 떨어진 물이 촤아악, 하고 주변을 적셨다.

"후우."

땅 위로 올라온 난 무릎을 굽히고 앉은 채 생각을 곱씹었다.

시스템과 업데이트, 그리고 물음표 특성.

거기에 더해 아이템 설명창, 코드명 도입, 현상금 미션, 마지막으로 강제 미션 진행.

거기에 방금 내가 했던 개고생까지.

"지긋지긋하다, 정말...."

대체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 채 희생을 강요받는 꼴이지 않나.

이리저리 끌려다닐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진절머리가 난다.

계속 의문을 쌓아두기만 하는 건 이제 못 해 먹겠다.

이 게임을 시작한 후로 명확한 게 대체 몇 가지나 되었나.

적어도 내 생각엔, 내가 왜 이 개고생을 해야 하는지 알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나를 사지로 밀어 넣고만 있다.

그 이기적인 행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나를 이용하는 주제에.'

지금까지의 상황을 되돌아볼 때, 시스템은 플레이어를 이용하고 있다.

'홀을 폐쇄하는 게 시스템의 목적 중 하나인 건 분명해.'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오늘에 이르러 차갑게 식은 눈으로 허공을 노려볼 수 있었다.

"하아."

내 인생에 막무가내로 끼어든 시스템을 생각할 때면 항상 화가 치밀곤 했다.

아무것도 없는 저 허공 너머에 있을 시스템을 향한 적의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그리고 오늘은 분노 옆에 경멸도 함께였다.

제멋대로 내 인생에 끼어들어선 날 이용하는 개자식.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이 게임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른다.

미션을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아무리 거부해도 열흘에 한 번은 무조건 이 낯선 땅으로 돌아와야 하는 처지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이렇게 당해야만 하나?

제멋대로 나를 이용해 먹는 이 시스템의 의도대로 휘둘리라고?

'웃기지 마.'

잇새에서 까득, 하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빌어먹을 시스템이 나를 이용한다면, 나 역시도 그러면 될 일이다.

이 빌어먹을 시스템을 어떻게 이용해 먹어야 할까?

차근차근 따져보자 좋은 생각이 떠올렸다.

'아흐레 동안 일을 못 나갔어.'

당장은 전리품을 팔고 챙긴 1억 6천만 원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리 큰돈은 아니다.

우리 세 가족이 쓰면 1, 2년 안에 동날 것이다.

'재테크를 시작해도 추가 수입원은 있어야 해.'

난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계속 게임의 레벨이 높아지면 일을 병행하는 건 힘들다.

매일 24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서 훈련을 해도 이렇게 다치는데.

일까지 한다는 건 내 목숨을 위협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이 게임에 쏟은 시간.

앞으로 빼앗겨야 할 시간.

그리고 그로 인해 놓쳐야 했으며, 놓치게 될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하자 머리가 맑아졌다.

'3년 금방이야.'

이대로 계속 게임에 시간을 빼앗기면 애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는 건 꿈도 못 꾼다.

자칫 내가 비명횡사했을 때를 대비해 동생들이 살길도 마련해 놔야 한다.

'죽지 않기 위해 노력은 하겠지만, 최악의 경우도 가정해 놔야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시스템에게 뭘 받아내야 할지 명확해졌다.

난 방패 안쪽에 달린 금장식을 뜯어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 시스템이 나를 보고 있다면.'

그간 내가 해왔던 가정이 정말 맞다면 내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

이건 시스템이 정말 나를 보고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야."

난 손에 든 새 모양의 반쪽짜리 금장식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런 거 더 없냐?"

내 물음에 돌아온 답은 없었다. 그렇다고 물러날 내가 아니다.

"이 새끼가, 대답 안 하지?"

시스템은 어리석게도 나에게 약점을 드러냈다.

난 그것을 곱고 아름다운 마음씨로 눈감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죽거리는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내가 열흘에 한 번만 미션 도는 꼴을 보고 싶냐?"

시스템은 이미 자신이 미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게임의 규칙을 이용해 제대로 협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시스템이 미션에 집착하는 게 정말이라면 반응이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할 거냐.'

여기서 시스템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따라 적어도 하나는 알 수 있다.

만약 내 협박에 굴하지 않고 무작정 미션을 강제하려면, 다시 업데이트를 하면 된다.

유예 기간을 줄이는 식으로.

하지만 업데이트를 하지 않는다면?

'제약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네 번째 업데이트 이후 품었던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는 셈이다.

난 시스템의 반응에 따라 몇 가지 시나리오를 짰다.

그러는 사이 제법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시스템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 침묵에 경멸과 분노, 울화가 차곡차곡 쌓였다.

난 손에 쥔 작은 금장식을 꾹 움켜쥐며 읊조렸다.

"대답해."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받는 동안 쌓인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네 놈이 뭔데 나를 멋대로 이용해."

낮게 잠긴 목소리에서 차마 숨기지 못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점점 격양되기까지 했다.

"날 이용하고 싶으면, 내 노력과 시간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라고!"

그에 더는 억누르지 못하고 내 안에 쌓인 것을 쏟아냈을 때.

「특성 ?????의 명칭이 자본주의로 변경됩니다.」

「특성 자본주의가 활성화됩니다.」

「시스템이 지원 유형으로 전환됩니다. 지원 대상 플레이어 강현우.」

「탐색을 시작합니다.」

「진행률 1%」

....

「진행률 100%」

「지원 대상에게 적합한 추천 미션 목록이 제공됩니다.」

비로소 답이 돌아왔다.

빌어먹을 시스템

41화

제10장 흔적(1)

게임이 시작된 이래로 내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던 건 두 번 뿐이다.

'처음은 천만 원, 다음은 1억짜리 전리품을 얻었을 때.'

그리고 지금의 난 앞선 두 번의 경험보다 더 나은 상황을 맞닥뜨렸다.

03-159[원화 2억 만원 상당의 전리품]

03-188[원화 5백 만원 상당의 전리품]

03-293[원화 1천 8백만원 상당의 전리품]

03-255[원화 7천 만원 상당의 전리품]

04-1965[원화 3억 1천 만원 상당의 전리품]

04-2487[원화 8억 6천 4백 만원 상당의 전리품]

....

추천 미션 목록에 적힌 건 노골적인 문장이었다.

저건 앞으로 내가 이 게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이득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미소가 나오지는 않았다.

방금 시스템은 대놓고 나를 이용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니까.

'원하는 걸 내어줄 테니 딴 생각 말고 미션이나 열심히 하라는 거겠지.'

전리품을 얻으려면 난 저 미션을 클리어 해야 한다.

그리고 그건 시스템의 이득으로 직결될 터.

'기분 더럽네.'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았다.

'나도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게 된 셈이니까.'

적어도 내가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받는 게 아니다.

'돈을 벌 방법도 생겼고, 업데이트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도 확인했어.'

이제까지 빈손으로 휘둘리기만 했는데, 그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지.

역시 참지 않고 지르기를 잘했다.

난 숨을 깊게 고르며 추천 미션 목록을 훑었다.

추천 미션의 숫자를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빌어먹을 시스템이 언제 목록을 없애 버릴 지 모르니까.

원하는 걸 얻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시스템을 믿는 건 아니었다.

내 밥그릇은 내 손을 지켜야지.

'일단 급한 대로 4레벨까지는 외운다.'

눈에 보이는 숫자를 머릿속에 욱여넣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스템 창이 사라졌다.

미션 창을 열어 봤지만 추천 목록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이놈을 믿고 가만히 있었다면 다시 빈손으로 돌아갈 뻔했다.

'하여간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난 혀를 차며 바닥에 있는 방패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매개체.'

조금 전에 죽인 보스몹은 분명 작은 괴물과 같은 개체 같았다.

그런데 작은 괴물보다 훨씬 강하고 컸다.

이 매개체에 고인 마력을 흡수해서 그렇게 변한 걸까?

'내가 관찰하는 동안엔 마력의 변화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난 탐지를 통해 느껴지는 소용돌이 마력을 자세히 관찰했다.

마력을 빨아 먹던 괴물이 없어진 덕분인지, 흐름을 보는 게 더 수월했다.

가장자리에서부터 중심부 쪽으로 이동한 마력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어디로 사라지는 거지?'

의문을 곱씹자 이 매개체를 설명하고 있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홀.'

직역에 환장하는 시스템이 번역을 하지 않고 표기하는 것 중 하나.

'...구멍이라는 건 본래 단절되어 있던 공간이나 면적 사이에 나는 거 아닌가?'

그럼 이 홀이라는 건 대체 어디에 난 구멍을 의미하는 거지?

난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푸르스름하게 밝아온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저 하늘에 떠 있던 달은 분명 두 개였다.

문제의 구멍이라는 게 이 세상에 뚫린 건 아닐까?

'그래서 그 구멍 사이로 마력이 빠져나가고 있는 거라면?'

얼핏 그럴 듯한 추측이었다.

정말 그렇다면 이 구멍 너머에 있는 건 뭐지?

'설마... 지구?'

짧은 단어 떠올리자 입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이 홀이라는 게 정말 지구랑 연결되어 있다면, 마력만 빠져나갈 수 있는 건가?

'난 이미 지구에서 여기로 넘어왔잖아.'

내가 여기 올 수 있었던 게 저 '홀'이라는 것 때문이면?

반대로 이곳에 있는 게 지구로 넘어올 수도 있다는 의미이지 않나?

'아니, 시스템이 무슨 조치를 취한 걸지도 모르잖아.'

애써 부정해 보지만 머리를 가득 채운 상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야, 이 홀이라는 건 뭔데? 내가 여기 있는 이유랑 관련 있냐?"

초조한 마음에 시스템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협박거리가 없기 때문일까? 시스템은 답을 주지 않았다.

몇 번이고 재촉해 봤지만 알림음도, 메시지도 없었다.

'그래, 넌 이런 새끼였지.'

난 허탈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시스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저놈은 그 어떤 설명도, 해명도 없이 그저 날 이용할 뿐이다.

추천 목록을 띄운 것도 결국은 나에게 미션을 시키기 위함이다.

그 점을 잊어버려선 안 된다.

'내가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털어내듯 고개를 탈탈, 흔들었다.

'당장은 생각의 범위를 제한하지 말자.'

홀에 관한 건 내가 가진 정보로 확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보스몹이 평범한 개체보다 강해진 게 이 매개체 주변에 모여든 마력 때문이라는 것도 내 추측일 뿐이다.

확실한 건 없다.

이번에 얻게 된 정보와 의문을 차곡차곡 정리한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밑창이 녹아 너덜너덜한 군화를 벗어 던지고 보관함에 있는 운동화로 갈아신었다.

아까 창을 회수하면서 구멍이 난 상의도 걸쳐 입었다.

출발에 앞서 방패를 보관함에 집어넣으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안 들어가네.'

난 군화에 있는 끈을 챙겨 방패 손잡이에 묶고 허리에 둘렀다.

그런 후에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목적지는 가시 달린 연잎 군락지 주변, 내가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했던 장소다.

'이번 미션은 매개체를 파괴해야 끝나.'

그 말은 괴물을 모두 정리한 후 안전해진 장소를 둘러볼 시간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더군다나 미션지를 제한하던 방어벽도 없다.

'발자국을 쫓아 간다.'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물은 4리터, 식량은 하루치.'

아껴 먹으면 내일 오후까지는 버틸 수 있다. 그걸 다 쓴다 해도 상점에서 구매하면 된다.

'빵이랑 물 정도는 파니까.'

장기전이 되어도 버틸 기반은 있다.

하지만 막상 발자국을 발견한 곳으로 돌아온 난 쉽사리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이 흔적을 따라가려는 내 발목을 붙잡는 문제가 있었으니까.

'아저씨가 걱정하실 텐데.'

복귀가 늦어질 경우 종훈이 무슨 생각을 할지 눈에 훤히 보였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계셔.'

그런데 몇 시간, 어쩌면 며칠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마냥 기다리게 만들어도 되는 걸까?

동생들에게 내 부재를 이해시키는 것도 힘들 텐데.

'이미 대여섯 시간은 훌쩍 지났고.'

난 발자국 앞에 선 채로 고민에 잠겼다.

종훈에게 연락을 할 방법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종훈의 개인 정보를 노출해야 하는데다, 그 과정에서 나의 신원이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

우두커니 서서 자리를 지키기던 내가 채팅창을 열었다.

- K : 뭐하냐

답은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 Kj : 특전사 실전 무술 훈련중. 나 완전 날아다님! 형 3렙 시작하지 않았어? 아직 안 끝났넹?

- K : 좀 걸릴 듯.

- Kj : 허얼... 많이 어렵?

- K : 그건 아니고, 확인할 게 있어서. 그것 때문에 부탁이 좀 있는데.

- Kj : ㅇㅇ 몬데?

- K : 네 폰 감시 받냐?

- Kj : 가져가서 확인하는 건 아닌데 통신 기록은 보고 있음. 친해진 요원 누나가 슬쩍 찔러줘찌!

- K : 그럼 밖에 있는 파티원 중이 입 무겁거나 믿을 만한 사람 있을까?

- Kj : 국정원 밖에? 바니 눈나랑 남규 빼고?

- K : ㅇㅇ

- Kj : 그럼 요괴 형! 입이 무겁다기 보단 간이 작음. 아싸 형이랑 파티 짰을 때부터 같이 했는데 뒤통수 칠 깜냥은 안댐.

종훈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준 사람이었다.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게 둘 수는 없다.

'어떻게든 소식을 전해야 동생들에게도 변명을 해주실 테지.'

더군다나 김율은 이미 만나보기도 했고, 앞으로 계속 엮여야 할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계속 그보다 앞서가며 이득을 준다면 쉽게 뒤통수를 치지는 않을 것이다.

- K : 국정원에 안 걸리게, 요괴라는 플레이어 통해서 나 살아 있다는 연락 좀 해줬으면 하는데.

이번에는 한 박자 늦게 답이 도착했다.

- Kj : 솔삐 쫌 놀람. 신상 정보는 절대 안 깔줄 알았는데.

- K : 가능한 알리고 싶지는 않지. 입막음 비용으로 포션 10개 콜?

- Kj : 입단속 단단히 시키겠사옵니다, 행님. 누구한테 해주면 됨?

- K : 010-6695-XXXX. 그냥 전화해서, 게임 들어간 사람이 살아 있다는 말만 전해줘.

- Kj : 이 세상에서 저 번호를 아는 건 저와 요괴형 뿐입니다. 그리고 요괴 형한테는 형 얘기 입에 담지도 않을게! 맹세! 충성!

- K : 고맙다.

- Kj : ㅇㅇ 도움 필요하면 또 말하규!

굳이 미룰 필요는 없는 일이었기에 김율에게 바로 포션을 보냈다.

그렇게 종훈에게 소식을 전해줄 사람을 구하고 나자 무겁던 발이 움직였다.

이 걸음이 어디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왔을 때 할 수 있을 만큼은 해봐야지.

'다음 미션지에서 또 이런 흔적이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실제로 대부분의 2레벨 미션지에서 사람이나 문명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종훈에게 걱정을 끼치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만 했다.

'딱 1주일.'

그 안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미션을 클리어 한다.

나를 다독이며 시작한 추적은 쉽지 않았다.

전문적으로 추적 기술 같은 걸 배운 것도 아닌지라 주먹구구식이었다.

발자국이 물가로 이어질 땐 그 일대를 전부 뒤져야 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의 발자국을 다시 찾는 건 운이 좋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 괴물의 발자국에 뒤덮인 탓에 그걸 쫓아 한참을 갔다가 다시 원지점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난 이 흔적을 남긴 이들의 인원을 추측할 수 있었다.

'최소 네 명.'

몇 번이고 헤매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땅을 살폈다.

덕분에 태양이 하늘 높게 떠올랐을 무렵엔 늪지 외곽까지 나올 수 있었다.

'그래도 해는 하나네.'

달이 두 개이기에 혹시 태양도 둘인가 했더니.

'기후는 봄이나 가을 날씨.'

해가 뜨지 않았을 땐 바람이 선선했는데, 이젠 조금 더워졌다.

'여기도 사계절이 있는 세상이라면.'

딱히 마른 풀이나 낙엽이 보이지 않는 걸 봐선 봄일 가능성이 높다.

난 주변 환경을 살피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덕분에 변화를 빨리 눈치챌 수 있었다.

'지형이 바뀌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물웅덩이가 없어지나 싶더니, 흙이 마르기 시작했다.

물론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다른 의미로 추적이 힘들어졌으니까.

땅이 단단해진 탓에 발자국이 잘 보이지 않았다.

'끊겼네.'

그러다 점점 잡초가 많아지며 더는 발자국을 찾아볼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방에 보이는 거라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 전부였다.

흔적을 놓친 난 자리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때려칠까...?"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렇게 쫓아가는 게 맞는 건지.

의심과 불신이 계속 내 신경을 긁었다.

그럼에도 매개체를 파괴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후우."

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쫓아갈 수 있지?'

톡톡톡.

검지로 이마를 두드리며 방법을 고심하자 곧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늪지 외곽으로 나왔을 무렵, 수풀에 갈색 흔적이 묻어 있는 걸 봤다.

언뜻 눈길을 준 정도에 불과하고, 당시엔 발자국이라는 확실한 단서가 있어서 크게 관심을 갖진 않았지만.

'갈색에 가까웠어.'

만약 그게 붉은색의 피가 변질된 것이었다면.

"다쳤다."

내가 쫓아가야 할 존재가 다쳤을지도 모른다.

그럼 핏자국이 더 남아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난 마지막 발자국이 남은 곳에 창을 꽂아 넣은 후 땅을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뜬 채 집요할 정도로 인근의 풀을 헤집으며 살폈다.

그리하여 기어이 세 시간 만에.

'찾았다.'

풀에 말라붙은 갈색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창이 꽂힌 곳과 핏자국이 남은 곳.

두 장소를 직선 상에 놓고 보자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시스템

42화

제10장 흔적(2)

뭐든 하다 보면 실력이 늘기 마련이다. 추적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속 땅을 기어다니며 핏자국을 찾다 보니, 이틀 째에는 풀이 눌린 자국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턴 추적에 속도가 붙었다.

'넷이 아니라 여섯이야.'

모닥불을 피운 흔적과 사람이 누운 것처럼 잡초가 움푹 눌린 흔적, 그리고 배설물을 치우기 위해 땅을 뒤집은 흔적까지.

앞서간 이들의 발자취를 발견할 때마다 내가 바르게 가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가끔 그들의 흔적이 괴물이 잔뜩 모여 있는 지역을 가로지를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투명화를 뒤집어쓴 채 미친 듯이 뛰었다.

추적에 초점을 둔 탓에 충돌을 최대한 피한 것이다.

그마저도 쫓아오는 놈들이 있어서 드잡이를 좀 했지만.

크게 위험한 순간은 없었다.

그렇게 닷새, 난 초원을 벗어나 산악 지대에 발을 들였다.

비탈길에선 비교적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린 덕분에 발자국이 많이 남아 있었다.

덕분에 더 수월하게 추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깊은 숲속에 도달했을 무렵 덜컥, 걸음을 멈추었다.

수풀 옆에 사람의 다리로 보이는 게 삐져나와 있었으니까.

꿀꺽.

침을 삼킨 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추적을 이어오며 많은 상황을 가정했다.

더럽게 운이 좋아서 이 흔적을 남긴 이들을 만난다면 어떻게 할까, 하고.

상대방 쪽이 나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경우.

반대로 호의를 보일 경우.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을 경우.

그들이 인간이 아닐 경우.

혹시나 그들을 만나지 못해도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 도착할 경우.

정말 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생각을 곱씹었다.

대화를 나눌 사람조차 없는 곳에서 가끔 에단과 김율의 메시지만 받았으니, 생각할 시간은 차고 넘쳤다.

그런데도 막상 그 많은 가정이 눈앞에 닥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긴장된다.

하지만 그 긴장감은 오래지 않아 파스스, 흩어져버렸다.

내가 거리를 좁히는 동안 수풀 너머로 보이는 다리가 단 한 번도 움직이질 않았으니까.

그 사실을 깨달은 직후 내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아."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에서 바짝 말라 비틀어진 시체를 보자 한숨이 터져 나왔다.

격렬한 몸부림의 흔적이 남은 장소에 남은 시체를 세어보자 총 여섯.

내가 따라온 일행의 숫자와 일치했다.

조금 더 살펴보자 모포와 배낭이 구겨지거나 찢어진 채로 흩어져 있었다.

이들의 흔적은 여기서 끝나버린 것이다.

'헛걸음이었나.'

안도감과 허탈함 외에도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얼굴을 쓸어내린 난 시체 옆에 자세를 낮추고 앉았다.

손 하나밖에 남지 않았던 늪지와 비교하면 살펴볼 게 많았다.

눈코입, 손발, 귀, 머리카락까지 전부 나와 비슷했다.

'외형은 인간과 유사해.'

난 시체에서 손을 떼고 한숨을 삼켰다.

'이 미라 같은 꼴은 또 뭐냐.'

대체 무슨 읽을 겪었기에 이런 꼴이 될 수 있는 거지?

'단순히 시간이 지나서 마른 게 아니야.'

특별한 과정 없으면 시체는 부패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썩는 대신 말라 비틀어졌고, 피부에 작은 구멍이 빼곡하게 뚫려 있었다.

이쑤시개나 바늘처럼 얇은 것으로 온몸을 찔러 놓은 것 같다.

시체의 외관을 꼼꼼하게 살핀 난 손을 놀렸다.

이들의 소지품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퀘퀘한 냄새가 나는 수통 네 개.

듬성듬성 이가 나간 장검 세 개와 단검 다섯 자루.

그 중 내가 가진 것보다 조금 더 길고, 곡선 형태의 날을 가진 단검이 두 자루였다.

'이거 괜찮은데?'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단검 두 자루는 똑같은 모양이었다.

무기를 한자리에 모은 난 마력을 불어 넣었다.

'된다.'

도합 여덟 개의 무기 모두 마력을 실체화할 수 있었다.

지구에서 구한 무기는 마력이 고이지 않고 흩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 때문에 튜토리얼에서 받은 무기를 계속 사용해왔다.

다행히도 미션지에서 얻은 무기는 마력을 불어 넣어도 실체화가 가능했다.

난 곡선 형태의 단검 두 자루를 허리에 찼다.

'가죽 벨트도 있고, 좋네.'

나머지는 경매창이 올리던가 해야겠다.

남은 전리품은 보관함에 모조리 쑤셔 넣었다.

무기를 챙긴 후에도 계속 시체의 소지품을 확인했다.

'종이....'

상의를 들추자 안쪽에 A4 용지보다 두껍고 거친 재질의 종이가 몇 장 꽂혀 있었다.

'...무슨 글씨인지 모르겠네.'

뭐라고 적혀 있기는 한데 읽을 수는 없었다.

'일단 챙기자.'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털어서 정보가 될 만한 건 싹 쓸어 담았다.

시체들이 매고 있던 가죽 주머니도 내 손길을 피해갈 순 없었다.

주머니 입구를 열자 잡다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딱딱한 밀가루 반죽과 육포 여러 개.

그리고 알록달록한 무지개색의 돌이 두 개.

난 이게 뭔지 알고 있었다.

[속성석(최하급)]

소량의 속성 마력이 담긴 돌.

속성을 부여하기엔 마력의 양이 너무 미미하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크기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작았다.

상급 속성석은 내 주먹 만했는데, 이건 손가락 한두 마디쯤 되는 조약돌 크기였다.

하지만 승급 시험의 보상으로 받았던 속성석이 맞다.

'최하급....'

속성석을 손에 쥐고 있자니 번뜩거리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난 이미 속성이 있잖아.'

그런 상황에서 속성석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짧은 망설임 끝에 속성 마력을 속성석에 주입했다.

「속성석(최하급)을 사용합니다.」

「사용자에게 적합한 속성을 판별합니다.」

「사용자가 이미 적합한 속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속성 마력 34.8이 흡수됩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메시지가 떴다.

'이미 속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속성석을 사용하면 마력으로 치환된다.'

난 남은 속성석도 사용했다.

「속성석(최하급)을 사용합니다.」

「사용자에게 적합한 속성을 판별합니다.」

「사용자가 이미 적합한 속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속성 마력 37.2이 흡수됩니다.」

이로써 미션 보상 외에도 속성 마력을 확보할 방법이 생겼다.

하지만 상점에서 판매하는 속성석은 하급이 무려 3만 마력.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속성 마력 적다면 손해야.'

3만 마력을 들여서 속성 마력 100을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게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정도 금액이면 차라리 기술이나 장비를 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속성 마력이 전투력에 큰 기여를 하는 건 맞지만, 다른 것도 괄시하긴 힘들다.

'마력을 허투루 쓸 순 없잖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소비해야 한다.

물론, 이건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내가 가진 마력으로 속성석은 살 수 없으니까.

속성 마력을 확보하는 문제는 여전히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어디 조언을 구할 곳도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후우."

무거운 마음에 한숨을 내쉰 것과 거의 동시에 하늘이 번쩍거렸다.

뭐였지?

난 서둘러 가까운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하늘을 쭉 훑어보자 저 멀리,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점이 보였다.

'새는 아니야.'

새라면 허공을 가로질러 움직일 법도 한데, 저건 그저 아래로 떨어지기만 한다.

'하나, 둘, 셋....'

다섯까지 숫자를 샜을 때 한 번 더 번쩍, 하고 하늘이 빛났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크기가 각기 다른 점이 나타났다.

"허?"

분명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뭐야, 순간 이동이라도 돼?'

의문을 느끼기 무섭게 난 눈을 부릅떴다.

방금 나타난 점이 있는 쪽에서 화염이 덩어리가 생겨나더니, 아래로 떨어졌다.

"저런 미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 시뻘건 불꽃이 일렁거리며 날아가는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넋을 놓고서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을 텐데.

화염 덩어리가 아래쪽에 있는 점들과 충돌하더니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뜨거운 바람까지 몰아치자 난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큽!"

폭발의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나뭇가지를 딛고 서 있던 난 종잇장처럼 쉽게 튕겨 나갔다.

다급하게 마력을 끌어올리자 아무것도 없어야 할 허공에 붉은색의 판이 주르륵, 생겨났다.

난 그것들을 밟고 붙잡으며 가공할만한 속도로 날아가던 몸을 가누었다.

지난 닷새간 방어막의 마력구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결과물이었다.

방어막을 사용하면 나 역시도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

딱 필요한 곳에 필요한 크기 만큼의 방어막을 생성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조각난 방어막은 경도가 약해진다.

하지만 내 몸이 날아가지 않게 버텨줄 정도는 되었다.

잠시 후 폭발의 여파가 가라앉았다.

"워후."

숨을 몰아쉬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사이 폭발이 일어났던 방향에서 쾅, 콰광, 큰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아니,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 탐지 범위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정체 모를 존재감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방금 하늘에서 나타난 점이 살아 있는 지성체라는 것.

그리고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으로 치고받는 중이라는 것.

자세를 낮추고 앉아 있던 난 투명화를 뒤집어쓴 채 나뭇가지와 수풀 사이로 숨어들었다.

그 사이 또 폭음이 들렸고, 이번에는 지축이 흔들리며 시야가 뒤집어졌다.

"콜록, 콜록!"

이미 주변에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저 굉음과 화염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지척에서 끊임없이 충돌하는 중이었다.

일산화탄소를 마시지 않기 위해 옷으로 입을 틀어막았을 때였다.

몸이 뻣뻣한 나뭇가지처럼 굳었다.

마력 덩어리들이 우르르, 탐지 범위 안으로 들어온 탓이다.

그중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두 개.

단순히 크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제껏 내가 본 것과 비교도 할 수도 없는 거대한 마력이었다.

만약 직접 보았다면 눈이 다 타버렸을 만큼 화려하고, 뜨겁게 일렁이는 마력이 뒤엉켜 있었다.

저절로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저 거대한 마력 앞에서 난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

바람 앞의 등불도 저것들의 앞에 선 나보다 위태롭지 않으리라.

'저 판에 끼어들면 죽는다.'

내가 어떻게 비벼볼 수 있는 급이 아니었다.

공포에 완전히 잡아먹혀 있던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콰자작, 우지끈, 하고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온 후였다.

쿵, 하고 땅이 살짝 진동했다. 난 몸을 떨며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폭발로 인한 충격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진 것만 같은 느낌.

멀지 않은 곳에서 뭉게뭉게 흙먼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곳엔 위태롭게 흔들리는 마력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한 굉음, 가까운 곳에서 피어난 흙먼지, 점점 작아지는 마력.

난 조심스럽게, 하지만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도착한 곳에서 잠시간 말문이 막혔다.

날카로운 것에 잘린 듯 단면이 매끄러운 나무, 거대한 바위를 끌고 지나간 것처럼 움푹 패인 자국, 곳곳에 남은 작은 불씨까지.

한 발자국을 더 떼기 직전에 망설이게 된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 남긴 흔적 같지 않았으니까.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지.'

적어도 나에게는 이 광경을 만들어낼 힘이 없다. 그것 하나만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내 한계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상황을 마주하자 줄곧 앞으로 나아가던 다리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난 게임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앞이 아니라 뒤로 물러나려 했다.

"컥...."

하지만 발을 떼기도 전에 희미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낯선 광경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몸과 의식이 익숙한 소리에 반응했다.

부러진 나무를 지나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쿨럭, 쿡...."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래, 사람이었다.

주황색 머리에 검은색 천자락을 뒤집어쓴 채, 1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기다란 막대기 3개를 등허리와 어깨, 허벅지에 각각 꽂고서 축 늘어져 있는 저건 분명 사람이었다.

내가 그 사람을 발견하고서 멈춰서자 며칠간 조용하던 시스템이 움직였다.

「특성 자본주의가 활성화됩니다.」

「시스템이 지원 유형으로 전환됩니다. 지원 대상 플레이어 강현우.」

지긋지긋한 알림음과 함께 미션창이 내 시야를 가로막았다.

빌어먹을 시스템

43화

제10장 흔적(3)

HIDDEN MISSION

[신세계]

아군을 구조하십시오.(0/?)

[보상]

구조한 인원수에 따라 보상이 증가합니다.

• 속성 마력 50(+?)

• 랜덤 상자(×1)(+?)

지지직, 지직.

방해전파 같은 거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그래픽 카드에 문제라도 생긴 건지.

미션창은 이리저리 깨지며 흔들리는 중이었다.

난 그곳에 적힌 단어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구조.'

시스템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기정 사실화된 지금, 내 주변에 구조를 필요로하는 건 딱 한 명뿐이다.

'아군이라고?'

일방적인 통보와 다를 바 없는 이 결정과 메시지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

고민에 앞서 나는 감정을 배제했다.

이건 오로지 이해득실을 따져 결정할 일이고, 그렇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본주의 특성은 시스템이 나를 특별 대우하고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다.

'지원이라는 단어만 봐도 분명해.'

적어도 '나'라는 플레이어에 한해 시스템이 방관자, 관찰자, 중립의 입장을 버린다는 의미다.

내가 가진 반감을 배제하면 시스템의 의도에 따르는 게 더 이득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히든 미션이 뜰 때마다 난 평범한 플레이어들과 다른 혜택을 얻었다.

새끼 괴물들은 1레벨 미션을 스킵할 정도의 마력을 줬고, 랜덤 상자로 현재 구간에서 얻기 힘든 기술까지 손에 넣었다.

현상금 미션도 스트레스가 심하긴 했으나 얻은 게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나에게 말하는 바는 노골적이었다.

'히든 미션으로 손해 본 적은 없어.'

물론 고생은 좀 하겠지만.

그 때문에 지금까지 내가 누려온 이득을 포기해선 안 된다.

'내가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다른 플레이어에게 들러붙을지도 몰라.'

물음표 특성은 나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다.

시스템의 지원을 계속 받으려면 내가 다른 플레이어보다 낫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아직은 내 요구를 들어주면서까지 응해주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다른 플레이어보다 많은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일 터.

나를 대체할 놈이 나타난 후에도 시스템이 나에게 특별 혜택을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숲을 이렇게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놈들에게 달려들 생각은 없지만.'

저것들끼리 치고 박는 사이에 부상자를 챙기는 것 정도는.

'한다.'

이것저것, 내가 가진 패를 따져보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난 서둘러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구조해야 하는 사람의 숫자는 물음표.'

구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나에게 돌아오는 이득도 늘어난다.

다행히도 주변으로 접근하는 마력은 없었다.

덕분에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를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의식을 잃은 건지 내가 옆에 몸을 낮추고 앉았음에도 반응이 없었다.

난 우선 그의 몸에 꽂힌 것들을 확인하려고 했다.

남자의 손목과 목에 채워진 것을 발견하는 바람에 머뭇거렸지만.

'족쇄...?'

착각이 아니었다. 남자가 목 손목, 그리고 발목에 차고 있는 건 분명 족쇄였다.

그 광경을 보니 본능적으로 남자를 향한 경계심이 차올랐다.

동시에 의문도 느꼈다.

사슬이 달린 건 아니었지만, 저 쇳덩이를 장식용으로 달고 다닐 리는 없을 터.

이런 건 보통 죄인에게나 사용하는 물건이지 않나.

'아군....'

묘한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기도 잠시.

'급한 상처부터.'

난 남자의 등허리에 꽂혀 있는 검은 막대기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창은 아닌데....'

쇠파이프 같기도 하고, 가시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걸 뽑아야 치료를 할 수 있을 터.

상점에서 포션을 추가로 구매한 후 정체 모를 막대를 움켜쥐었다.

'최대한 빠르게.'

막대를 뽑자 남자의 몸이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들썩거렸다.

난 체중을 실어 무릎으로 그를 눌렀다.

그리고 환부에 지체 없이 포션을 들이부었다.

"망할...."

하지만 어째서인지 피가 쉽사리 멈추질 않았다.

'관통상이라서 그런가? 상처가 너무 커서?'

아니, 아니다. 상처의 크기나 출혈의 심각성을 따지면 내가 악어에게 당했을 때가 더 심했다.

피부의 1/4이 녹아내렸을 때도 이 포션으로 치료했다.

관통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럴 리는 없다.

난 흙바닥에 떨어진 검은 막대기를 힐끔거리며 계속 포션을 들이부었다.

출혈을 잡기 위해 무려 2병을 썼다.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피를 멈추게 하는데 2병.

남자의 몸에 박힌 막대기는 두 개나 더 있었다.

결과적으로 상처부위의 출혈을 잡는데만 6병의 포션을 사용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기분이었다.

'돌겠네.'

앞으로 몇 명을 구해야 할지 모른다.

명성으로 인한 할인율은 이제 고작 2%.

계속 이 페이스로 포션을 사야 한다면 10명만 구해도 1000마력이 넘게 들 것이다.

난 포션을 계속 쓰는 대신 종훈이 준 응급 구조 키트를 꺼냈다.

찌익, 찍.

그리고 남자의 옷을 벗겨 현대 약품으로 응급조치를 했다.

이걸로 나름 급한 불은 끈 셈이다.

"후우."

산이 쑥대밭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저 하늘은 고요했다.

하지만 난 이것이 평화가 아님을 안다. 아직도 쾅쾅거리는 소리가 계속되고 있다.

'대체 언제까지 치고받는 거야?'

마력 탐지의 범위를 벗어날 만큼 멀어졌을 뿐, 끝난 게 아니었다.

'자리부터 옮기자.'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남자를 두고 갈 수도 없으니, 안전한 장소부터 찾아야겠다.

난 남자를 들쳐 메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 * *

동료들과 흩어진 직후 라울에게 따라붙은 놈은 하나.

평소라면 쉽게 당해주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공격을 막아내는 것조차 버거웠다.

기습을 당했을 때 입은 부상이 너무 심각했다.

울컥울컥, 새어 나온 피가 다리를 타고 흘러내려 땅을 적실 정도였다.

"으아아!"

그럼에도 라울은 기어이 팔을 들어올렸다.

십수 년간 휘둘러 온 도끼가 오늘따라 유독 무거웠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죽음에 순응하는 대신 끈질기게 발버둥 친 덕분에 라울의 도끼는 괴물의 목에 박혀 들었다.

그게 전부였다. 목을 반 이상 잘랐음에도 놈은 죽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고작 이 정도로 죽일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라울은 그것을 알고 있기에 황급히 허리를 젖혔다.

10cm는 될법한 손톱이 아슬아슬하게 라울의 흉부를 스쳐 지나갔다.

기우뚱, 한쪽으로 쏠리는 중심을 잡기 위해 다급히 발을 옮겼다.

그를 뒤따라온 괴물의 손톱이 왼쪽 어깨를 파고들며 피가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주 잠깐이지만 시야가 점멸하며 이명이 들렸다.

억지로 버텨 왔지만 의식이 깜빡깜빡,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출혈이 심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안돼...!'

하지만 당연하다 하여 원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주 작은 방심에도 목이 날아가고, 심장이 꿰뚫릴 상황에 하필.

라울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서 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의 몸은 원과 한을 내뱉기엔 너무 쇠약해져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았음에도 그에게 남은 건 비참한 죽음 뿐이었다.

"끼아아악!"

분명 그러했건만 왜 심장을 꿰뚫는 고통도, 목덜미의 살이 갈라지는 섬뜩함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어째서 귓가에 닿는 게 자신이 아닌 괴물의 비명소리인가.

생각을 하고서 움직일 여유는 없었다.

라울은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쥐어짜 도끼에 밀어 넣었다.

푸른 마력이 도끼날을 휘감았을 때, 라울은 이미 허리를 비틀며 도끼를 올려치는 중이었다.

"흐아아아!"

전율이 일었다. 분명 목을 잘랐다. 괴물의 가죽을 가르는 느낌이 왔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빠져나왔다!

라울은 전율한 순간에도 방심하지 않았다.

'머리까지 쪼개야 해!'

그렇지 않으면 마력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놈들이다.

라울은 무거운 눈에 힘을 주었다.

집요한 갈망 덕분이었을까, 간절한 기원 덕분이었을까.

아주 잠깐 시야가 돌아왔다. 허공을 배회 중인 괴물의 머리를 찾을 수 있었다.

"어...?"

하지만 원하던 것을 찾았음에도 라울의 입에서 나온 건 얼빠진 소리였다.

본래라면 데룩데룩, 굴러가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야 할 괴물의 눈 이상했으니까.

총 네 개여야 할 괴물의 눈 중에 멀쩡한 건 두 개 뿐이었다.

다른 두 개는 단검이 박혀 있었다. 도대체 누가?

'지원이 왔...?'

라울은 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도끼를 투척했다.

그의 도끼는 목표물을 금세 따라잡았다.

'끝났다.'

안도감이 밀려오자 다리가 꺾였다.

이젠 억지로 힘을 줘봐도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되찾은 시야가 다시 흐려지고,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Sug yeo!"

그때 라울의 머리 위에 붉은 마력이 고였다.

하지만 쿵, 하고 묵직한 소리가 울리자마자 산산조각나며 흩어졌다.

"커헉!"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오고, 도끼가 괴물의 머리를 쪼개며 나무에 박혀 들었다.

그게 정신을 잃기 전 라울이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의식이 가라앉기 시작하며 평생을 누려온 감각이 점점 멀어졌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웅웅, 모든 소리가 울렸다. 몸은 얼음속에 갇힌 것처럼 차갑기만 했다.

더 이상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계속 떨어지기만 한다.

그 아득한 추락감에 허우적거려보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차갑고 깊은 곳을 빠져나올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과 똑같았다.

맥없이 무너지던 성벽.

그 너머에서 몰려오던 괴물.

산채로 씹어 먹히던 가족과 이웃.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마법.

배가 갈라져 죽은 괴물.

그 속으로 기어 들어가 살아남은 어린아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날을 되새기게 만드는 감각이었다.

'죽는구나.'

기사가 된 후 위험했던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확실하게 죽음을 실감한 경우는 없었다.

라울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를 존재를 증명해주던 모든 것이 불필요해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바스라지고 존재감이 흐려졌다.

하지만 라울이 죽음에 닿기 직전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차갑고 깊은 곳에서 그를 무작정 끌어 올렸다.

"커헉!"

뜨거운 토혈과 함께 계속 단절되어 있던 감각이 밀려들었다.

복부가 타들어가고, 어깨가 찢겨 나가는 고통이었다.

"허억, 허억!"

마른 숨을 갈급하게 삼키기 무섭게 복부와 어깨의 열기가 아주 살짝, 옅어졌다.

"A-o, i sae kki do po syeon chyeo bal la ya gess ne."

또 한 번, 또 다시 한 번.

열기와 통증이 계속 옅어지고 있었다.

라울이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주변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뿌옇게 가려진 공간에서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Jeong sin i deub ni kka? Na bo i nya go yo."

라울의 보라색 눈동자가 바스락거리는 기척을 따라 움직였다.

"...Han byeong de kka?"

녹아내릴 것처럼 뜨겁던 고통은 어디로 가고, 어느덧 욱신거리는 통증만 남았다.

"Hm...."

곧 누군가가 그의 목을 받쳐 들었다.

바짝 메마른 입을 통해 차가운 액체가 흘러들어왔다.

라울은 갓난아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꿀꺽꿀꺽, 그것을 받아 마셨다.

의식이 한층 더 또렷해지고 시야도 조금 더 선명해졌다.

라울의 숨결이 한결 차분해지며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라울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낯선 고동색 눈동자 속에서 파란 안광이 피어났다가 사라진 것 같았다.

"O, jin jja il eo nass ne."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직 먹먹한 정신으로 주변을 돌아본 라울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폭발과 함께 뿔뿔이 흩어졌던 동료들이 그의 옆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툭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자 붉은 석양을 등진 채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아...."

눈이 부셨다. 손을 들어 가려보아도 소용없을 만큼.

빌어먹을 시스템

44화

제11장 접촉(1)

주황 머리를 구하고 2시간 정도 흘렀을까?

미션창에 뜬 숫자는 '5/?'가 되었다.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랑 비슷하게 생긴 쪽이 아군.

고양잇과 맹수와 비슷한 두상에 카멜레온처럼 돌출된 4개의 눈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데룩데룩, 굴려대는 쪽은 적군.

그들 대부분은 충돌 중이거나 충돌한 후였다.

여긴 내가 와선 안 될 고레벨 사냥터나 마찬가지.

저들의 싸움에 함부로 끼어들었다간 죽는다.

그래서 제 능력으로 전투를 끝내고 살아남은 놈들만 건져왔다.

'이놈은 운이 좋았지.'

난 이제 막 깨어난 남자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보았다.

"이봐요, 괜찮습니까?"

"아...."

포션을 무려 8병이나 잡수시고 정신을 차린 남자는 제 옆에 누운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이네.'

난 그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죽다 살아났으니 혼란스럽겠지.'

원래라면 이 남색 머리도 죽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발견했을 때 배가 뚫린 채로 괴물이랑 싸우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괴물의 목이 반쯤 잘려 있었던 탓인지, 아주 잠깐 내가 끼어들 수 있는 틈이 생겼다.

난 망설이기도 전에 단검을 던져서 괴물의 좌측 시야를 빼앗았다.

남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괴물을 죽였다.

덕분에 살릴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발견한 모두가 살아난 건 아니었다.

'괴물이 고렙이라 그런가? 부상에 포션이 잘 안들어.'

포션 6병을 들이부었는데도 죽은 사람이 있었다.

부상의 회복을 방해하는 특수 효과라도 있는 모양이다.

그동안 내가 봐온 괴물과 수준이 달랐다.

괴물의 주먹질 한 번에 방어막이 깨졌을 정도니 어련할까.

'아직도 욱신거리네.'

남색 머리가 위험해질 뻔해서 그의 머리 위에 방어막을 만든 적이 있다.

온전한 형태도 아니고 조각난 퍼즐처럼 작은 크기였지만.

덕분에 목이 잘리고도 움직이는 괴물의 주먹을 막을 수 있었다.

그 한 방에 방어막이 산산조각 나고 충격으로 피를 몇 번이고 토했지만.

일단 살렸으니 됐지.

'내가 살다살다, 목이 잘린 사체가 움직이는 꼴을 볼 줄이야.'

검은 피를 분수처럼 내뿜으면서도 남색 머리를 죽이기 위해 손을 치켜들던 괴물의 사체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난 머리를 탈탈 흔들며 중얼거렸다.

"상식은 버려."

여긴 머리가 잘린 시체도 움직일 수 있는 세상이다.

정신을 다잡은 내가 바닥을 쭉 훑었다.

내가 구해온 사람은 다섯 명, 정신을 차린 건 고작 한 명.

여기까지 오는데 사용한 포션이 무려 57병이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번 미션을 하느라 쓴 마력이 3천이 넘는다.

3레벨 미션으로 모아둔 마력이 고작 몇 시간 만에 사라진 것이다.

상당히 허탈했다.

'무슨 게임을 이따위로 만들어서.'

마력을 대가로 성장을 요구하는 이 룰은 사람의 의욕을 갉아 먹는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투명화는 괴물들의 감각을 피할 수 없었으니까.

'한 번 걸려서 진짜 뒤지는 줄 알았지.'

그때 도망치다가 허리에 매고 다니던 방패에 구멍이 났다. 괴물의 손톱에 뚫린 것이다.

내 능력으로는 도망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마침 부상을 입고 이동 중이던 '아군'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죽었겠지.

한 번 호되게 당하고 나니 투명화보다 나은 기술이 필요했다.

시스템의 작명에 따르면 은신, 투명화보다 여덟 배나 비싼 기술이었다.

8천짜리 기술을 1회용으로 쓰는데 필요한 가격이 7백.

유지 시간이 1시간 밖에 되지 않아서 무려 4번이나 샀다.

거기에 더해 안전지대를 만들기 위해 산 결계 기술석까지.

'그나마 기술석 교환석이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1회용에 2천 2백이나 하는 기술석을 산다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5명의 아군을 구하는 대신 내 주머니는 홀쭉해졌다.

'그래도 3천 밑으로 떨어진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입장 제한 기준 아래로 떨어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더는 쓰면 안 되겠다.'

정말 아슬아슬하다. 더는 마력 소모가 없도록 신경써야 할 타이밍이다.

이젠 거의 습관과도 같은 한숨을 내쉰 내가 결계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어쩌면 저 밖에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미션을 생각하면 다시 나가는 게 맞다.

내가 구하는 사람의 수만큼 추가 보상이 나올 테니까.

하지만 난 더 이상 이 결계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처지였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벅벅 긁고 있던 중에 괴물이 가까이 다가왔다.

난 그걸 지긋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괴물의 몸이 나를 슥, 통과해서 지나쳤다.

'이젠 웬만한 걸로는 놀랍지도 않다.'

결계의 효과였다.

[기술석(결계 - 상급)]

• 분류 : 소모성 기술

• 설명 : 내장된 마력을 이용해 결계를 형성합니다. 결계의 내부는 해당 차원으로부터 배제되어 실존하지 않는 안전지대가 됩니다. 외부인이 결계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시전자와의 신체 접촉이 필요합니다.

(유지 시간 : 2시간)

무려 2천 2백 마력짜리 1회용 결계는 실존하지 않는 안전지대를 만들어 주었다.

결계 내부에 있는 동안에는 이 세상에 도려내진 상태라고 할까?

이 장소, 이 공간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괴물이 나를 향해 걸어와도 부딪히지 않는다.

그저 유령처럼 스윽, 통과해서 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결계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나는 다시 '실존'하는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남색 머리를 구해서 돌아오는 길에 꼬리가 붙었던 건지.

아니면 주변에 남은 흔적을 보고 온 건지.

결계 근처에 모인 괴물이 벌써 세 마리다.

난 어슬렁거리는 괴물들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시야의 좌측 상단에 생겨난 타이머를 확인한 탓이다.

'이제 30분 정도.'

저 타이머가 다 되면 결계는 사라진다.

그럼 결계 밖에서 버티기 시작한 저놈들에게 죽겠지.

'방법을 찾긴 해야 돼.'

가만히 앉아 있다가 도륙 당할 수는 없다.

다행히도 마지막으로 구해온 놈이 빨리 정신을 차린 상황.

발을 까딱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난 다시 뒤를 돌아보며 남자를 호출했다.

"이봐요."

주섬주섬, 손으로 배를 움켜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던 남자가 어정쩡한 자세로 멈췄다.

난 비현실적인 보라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지금 상태로 저거 죽일 수 있습니까?"

남자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역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대충 예상은 했다. 나도 저 사람들이 기절하기 전에 웅얼거린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언어나 문화가 달라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똑같은 법이다.

난 괴물을 가리키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아."

짧은 탄성을 터트린 남자가 허공을 쭉 훑어보았다.

직후 제 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살짝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부상자들 옆에 차곡차곡 쌓아둔 무기 더미 쪽으로 향했다.

버리고 오기엔 아까워서 눈에 보이는 무기는 전부 챙겨왔다.

'흉갑 같은 건 다 깨져서 응급조치하는 동안 다 버렸지만.'

남자가 괴물과 싸울 때 쓰던 도끼도 저기 어딘가에 있다.

거의 내 몸통 만한 양날 도끼 하나, 그리고 평범한 크기의 손도끼 둘.

자신의 무기를 챙긴 남자가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이렇게 일어선 모습을 보자 나와 그의 체격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덩치가 거의 두 배 정도는 큰 것 같은데.'

키도 머리 하나가 더 있을 만큼 크고.

마력은 뭐, 차이를 비교한다는 게 가소로울 정도였다.

저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보다 강했다.

그런 사람이 시퍼런 도끼를 들어올리니 제법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부상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라 움직일 때마다 묘하게 둔해 보였다.

결국 난 그를 결계 밖으로 내보내기 전에 포션을 꺼내 흔들었다.

필요하냐고 물어본 것이다.

'소지품 중에 포션처럼 보이는 건 없었어.'

게임의 배경이 되는 세상인데 게임에서 사용하는 아이템이 없다는 건 이상하다.

더군다나 깨어난 남자는 주변에 널린 병을 보고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아마도 포션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그저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지.

저들도 보관함이 있나, 싶었지만 금방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남색 머리가 포션을 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난 별다른 말 없이 포션을 던져주었다.

결계의 지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상 저쪽이 괴물을 처리해야 나도 안전해진다.

가뿐하게 병을 받아든 남자가 뚜껑을 열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혼자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뭐야? 전투 준비를 하다 말고 왜 저....'

생각을 끝맺기도 전에 뒤에서 샤악, 하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후에야 탐지 범위 안에 거대한 마력 덩어리가 들어왔다는 걸 인지했다.

가장자리에서 나타난 게 아니라 내 코앞으로 뚝 떨어진 것이다.

삐걱거리는 몸을 돌리자 반으로 쪼개진 괴물의 사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건 붉은 피와 검은 피를 온 몸에 덕지덕지 바른 여자였다.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한 머리카락은 파란색.

결계 주변의 발자국과 괴물을 빠르게 훑고 있는 눈동자는 노란색.

'아니, 좀 더 진한... 금색.'

내가 그녀를 눈에 담기 무섭게 시스템이 선언했다.

「구조한 아군의 수를 집계합니다.」

「성공 보상으로 속성 마력 50이 제공됩니다.」

「성공 보상으로 랜덤 상자(×1)가 제공됩니다.」

「추가 보상으로 속성 마력 40이 제공됩니다.」

「추가 보상으로 랜덤 상자(×2)가 제공됩니다.」

미션 클리어 메시지가 다 뜨기도 전에 결계 밖에 있던 괴물들이 전부 토막났다.

아무래도 부상자와 쪼랩 밖에 없던 이곳에 든든한 지원군이 온 모양이다.

넋을 놓고서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남색 머리의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환하게 웃는 낯으로 여자가 있는 방향을 손가락질 했다.

'나가자는 건가?'

방금 저 여자의 손에 고레벨 괴물이 두부처럼 썰려 나가는 걸 본 참이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사람처럼 생겼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에겐 그녀가 가진 마력도 보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똑바로 응시하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강렬한 마력에 내가 짓눌릴 것 같았다.

더군다나 난 여러모로 수상한 상태다.

'숲에서 대뜸 튀어나와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흔하지는 않잖아?'

이상한 의심을 살까봐 조심스러워진다.

하지만 남색 머리의 재촉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저 사람을 내보내려면 같이 움직여야 하니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내가 이들의 목숨을 구한 것만은 사실이지 않나.

수상하다고 무작정 검을 빼드는 짓은 참아주길 바랄 수밖에.

난 남색 머리를 앞세워 결계를 빠져나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얼음장처럼 차갑던 여자의 표정이 살짝 녹아내렸다.

두 사람은 두 팔을 활짝 벌려 서로를 끌어 안았고, 난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여차하면 혼자서라도 결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여자쪽에서 날 공격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남자가 설명을 잘 한 건지, 대화가 끝났을 무렵엔 여자 쪽에서 먼저 악수를 청해왔을 정도였다.

난 그녀의 손을 마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두 사람을 결계 안으로 데려간 후에는 보상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다.

'랜덤 상자가 세 개.'

미션창에 적혀 있던 수치는 최소 1인을 구조했을 시에 주는 확정 보상이었으리라.

거기서 추가 인원에 따라 속성 마력은 10, 랜덤 박스는 0.5를 더 준 거고.

'쪼잔한 새끼. 쩜오가 뭐야, 쩜오가.'

기왕 주는 거 한 명 당 하나씩 더 준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닐 텐데.

"쯧."

난 시스템을 헐뜯으며 랜덤 박스를 꺼내 들었다.

박스를 열 때마다 번쩍거리는 빛이 났다.

그 때문에 의도치 않게 남색과 파란색 머리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했는데, 박스를 까고 나온 결과물이 어째....

[피넬페니아의 권능 1회 이용권]

[칼로스의 권능 1회 이용권]

[번역/통역 귀걸이]

"후우."

이놈의 시스템이 이용권에 꽂히기라도 했나?

왜 랜덤 박스를 깠다 하면 이런 아이템이 나오는 거지?

권능이라는 건 또 뭐고?

설명 탭에도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냥 권능을 1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라는 문장이 전부였다.

난 거의 해탈한 심정으로 이용권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남은 귀걸이를 살펴보았다.

내 손톱 만한 크기의 보라색 보석이 달린 귀걸이는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그마저도 양쪽 세트가 아니라 한 짝뿐이다.

[통역/번역 귀걸이]

인지 영역의 기술이 부여된 귀걸이.

착용할 경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과 의사 소통이 가능해진다.

이걸 낀다고 정말 통역이 될까?

의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귀걸이를 한다고 해서 크게 손해 볼 건 없다.

'두 번 뚫을 필요는 없겠네.'

생전 해본 적도 없는 물건을 착용하려던 찰나 왠지 집요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옆을 돌아보자 금색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동자에 빛무리가 서려 있는 것만 같았다.

나를 뚫어질 듯 강렬하게 바라보던 여자는 곧 눈을 돌렸다.

그제야 멈추고 있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여자의 시선에 위축돼서는, 나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숨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돌겠네.'

그냥 쳐다본 것만으로도 살 떨리게 만드는 사람과 같이 있어야 하다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난 원래 계획대로 귀걸이를 귓불에 찔러 넣었다.

빌어먹을 시스템

45화

제11장 접촉(2)

골이 띵, 하고 울렸다. 낯선 울림은 어지러움을 동반했지만 다행히도 오래지 않아 잦아들었다.

"아헬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결계도 있고...."

"저 남자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지나친 의존은 피해야 된다."

그때부터 저들의 대화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희를 구해준...."

"라울, 여긴 아인종이 홀로 돌아다닐 만한 곳이 아니다."

"...오염지에 생존자 마을이 없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타국에서 흘러들어온 생존자들이 근처에 터를 잡았을 수도 있죠."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지. 하지만 의심해서 나쁠 건 없다."

"저분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저희를 추적했다고 보십니까?"

"구명의 은혜는 잊지 않을 것이나, 방심해선 안 돼."

귀에 닿는 언어는 여전히 낯선데,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뜻이 해석되었다.

"...신기하네."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남자와 여자가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나를 돌아보았다.

"테니르어를 할 줄 아는... 아니, 마법인가?"

난 답을 하는 대신 귀에 꽂았던 귀걸이를 뽑아서 여자가 있는 방향으로 던졌다.

손톱 만한 크기의 귀걸이를 낚아챈 여자의 눈에 이체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것을 직접 제 귀에 차보기까지 했다.

"마도구로군. 왜 진작 사용하지 않았지?"

이번에도 머릿속에서 낯선 언어가 저절로 해석이 되었다.

'진짜 신기하네.'

이 세상에서만 쓸 수 있는 건가? 지구의 외국어도 통역해주나?

혼자 이것저것 생각하는 동안 여자가 귀걸이를 돌려주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물건을 낚아채는 건 쉬웠다.

난 귀걸이를 다시 착용한 후 여자가 한 질문에 답을 했다.

"방금 생긴 거라서."

"...방금?"

"내가 설명하면 그 말을 믿을 생각은 있고?"

여자는 명확하게 답을 하지 않았다. 모순적이게도 오히려 그게 답이 되었다.

속내를 숨길 생각이 없기에 일부러 보여준 건지.

속내를 숨길 줄 몰라서 얼결에 드러난 건지.

난 생살을 뚫은 터라 화끈거리는 귀를 만지작거리며 여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는 잠시간 내 시선을 똑바로 받아치더니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언행이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바로 사과가 나올 줄은 몰랐던지라 오히려 내 쪽에서 머쓱해졌다.

"딱히 불쾌했던 건 아니고."

"다행이군. 그럼 정식으로 소개부터 하지, 라샤르 베넷이다. 부하들을 구해준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

"라울 테헤르마라고 합니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부상자를 살피던 남색 머리도 짧게 자기소개를 끝냈다.

이후 두 사람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제 네 차례라고 말하는 것처럼.

순간 실명을 말할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케이."

"케이, 언어적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확실히 집고 넘어갔으면 하는데."

"뭘?"

"내 부하들을 구해 준 이유."

난 곧장 답하는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대체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되나 생각이 많아진 탓이다.

시스템이니, 다른 차원이니, 미션이니... 전부 초면에 하기엔 비현실적인 얘기다.

'말해봤자 미친놈 취급이나 받겠지.'

내가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지자 라샤르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실을 말하면 오해와 불화를 최소화할 수 있을 터. 그대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편견을 배제하겠다고 맹세하겠다."

저 말이 그럴듯한 빈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라샤르는 물론이고 나도 지금 상황에선 그 빈말이 최선이라는 걸 안다.

'시스템은 저들을 아군이라고 지정했어.'

괴물을 적이라고 공언한 것과 다른 행보다.

'물론 아군이라고 전부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보자마자 달려들던 괴물과 달리 이들과는 관계를 구축해볼 기회가 있다.

"구하라고 해서."

첫 단추를 잘 꿰기 위해서라도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누가?"

"날 여기로 데려온 놈."

"여기?"

"달이 두 개인 세상, 그놈의 표현에 따르면 신세계."

조금 전에 클리어한 미션의 타이틀을 읊자 라샤르와 라울이 동시에 움찔거렸다.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시선을 주고받더니 내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혹시... 이방인인가?"

내 눈썹이 크게 들썩거렸다.

이방인이라니, 내 처지를 저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나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봐?"

슬쩍 떠보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보다 먼저 이쪽 사람과 접촉한 플레이어가 있을 리 없다.

다들 아직 방어벽이 허물어지지 않는 1, 2레벨에 있으니까.

질문을 던지기 무섭게 라샤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그녀의 표정은 제법 복잡해 보였다. 내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직접 보는 게 처음이라면 간접적으로 듣기는 했다는 건가? 누구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

라샤르는 꽤나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정작 긴 침묵 끝에 내어 놓은 답은 생각보다 단호했다.

"불가."

"이유는?"

"그대가 이방인이라는 확신은 없으니까. 신뢰할 수 없는 이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게 좋은 선택 같지는 않군."

"...중요한 정보를 배제하고서 설명해주는 건?"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린 채 고민하던 라샤르가 한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는 건가?"

"뭘?"

"신탁이... 몇 해 전, 신탁이 내려왔다. 이방인이 올 거라고."

대화의 장르가 내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신탁?'

종교가 개입된 사건이라고?

지구에서도 종교 문제는 역사의 획을 그을 정도로 큰 불길이 되곤 했다.

이 세상에서 종교가 가진 가치나 무게를 모르는 이상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신탁을 당연하게 언급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면 위세가 대단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자의적인 판단으로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삐끗했다간 여러모로 곤란해질 수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단이나 이교도로 몰려서 화형당하는 끔살 엔딩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개죽음은 피하고 싶은데.'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정보가 필요했다.

"그 외에는?"

"그대를 신뢰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라샤르는 일말의 여지도 남지 않을 만큼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내저었다.

난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무리하게 캐물어서 반감을 사는 것보단 천천히 가는 게 나을지도.'

저렇게까지 딱 잘라서 말하는데 집요하게 굴어봤자 소용 없으리라.

"그럼 별 수 없지."

"그럼 내가 궁금한 부분을 마저 물어봐도 되겠나?"

"얼마든지."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하자 라샤르가 내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그 방패는 왜 들고 다니는 거지?"

어째서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진 것 같았다.

금색 눈동자도 조금 더 날카로워진 기분이고.

아무래도 이 방패가 환영 받을 수 있는 물건은 아닌 모양이다.

난 그녀를 따라 시선을 내리며 답했다.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편견 없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최종 목적은 파괴."

"왜 지금 하지 않고? 할 줄 모른다면 내가 해주겠다."

라샤르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고작 그게 전부였다. 검을 뽑아 든 것.

그런데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스르릉.

검날이 우는 소리가 왠지 모르게 스산할 정도였다.

'쫄지 말자.'

난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건 곤란해.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애매모호한 답이었다. 매개체의 파괴나 미션에 대해서 숨기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이걸 파괴할 경우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저들도 숨기는 게 있는데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나.

나도 저쪽을 무작정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니,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감추고 포장하는 건 필요하다.

하지만 방패를 응시하는 라샤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늦지 않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나쁜 의도는 없으니까."

"악의가 없다고 해서 악행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나를 의심하는 말이었지만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잠시 고민하던 난 방패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위험한 물건인가?"

무지와 순수가 악행으로 이어지는 걸 막으려면, 이게 뭔지 알아내면 될 일이다.

"...메세오에 대해 모르나?"

"내가 아는 이름은 매개체인데. 그 외에는 마력이 고여 있다는 것 정도."

힐끔, 다시 방패를 확인한 라샤르가 덤덤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메세오가 생긴 장소엔 괴물들이 모여 든다. 이후 살육 경쟁에서 살아남은 놈은 진화종이 되고. 충분한 설명이 됐을까?"

늪지대, 작은 악어, 큰 악어, 내가 보고 겪은 현상들이 일사불란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진화종.'

이 매개체가 그 커다란 악어를 만들어냈다는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여기에 고인 마력을 흡수했을 것이다. 플레이어들처럼.

"...보통 괴물이 몰려드는 데 얼마나 걸리지?"

목소리가 살짝 잠겨 나왔다. 큼, 하고 목을 풀자 라샤르의 답이 이어졌다.

"최단 반응은 14시간. 메세오가 생성되는 걸 확인한 후 14시간 만에 괴물들이 집결했다."

"들고 다니면...?"

"그런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 보통 메세오는 발견 즉시 파괴하니까."

내가 이 숲에 도착한 지 4, 5시간 정도 지났다.

'아직은 안정권인가?'

만약 계속 이곳에 머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늪지대처럼 괴물들의 소굴이 되는 건가?

난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물었다.

"난 이걸 5일 동안 계속 들고 다녔어. 하지만 괴물이 몰려든 적은 없는데."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대체 괴물이 얼마나 모이기에?"

"...정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기는 하군. 처음에는 열, 다음에는 백, 이후에는 천이 모일 테지."

라샤르의 말이 길어질수록 미션 목록을 채운 숫자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늘어나서, 아인종이 근처에 발을 들일 수조차 없는 수준이 될 거다."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내가 아는 3레벨 이상의 미션은 수천 개가 넘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많은 미션지에서 진화종이 마력을 흡수하며 강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더 궁금한 건 없나?"

"아? 어... 잠깐만."

후웁.

크게 숨을 고르자 굳었던 머리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홀이라고, 알고 있나?"

"모른다."

그쯤에서 난 매개체와 진화종, 두 단어를 옆으로 밀어냈다.

여기선 더 캐볼 게 없는 것 같으니 다른 것을 물어보는 수밖에.

주머니에 넣어둔 이용권을 꺼낸 난 시스템 설명창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그럼 피넬페니아의 권능이라는 게 뭔지 알고... 있나 보네."

눈을 큼지막하게 뜬 두 사람의 표정이 답을 대신해주었다.

"그게 뭐지?"

라샤르와 라울이 바쁘게 시선을 주고 받았다.

"권능을... 허락받은 건가?"

왜 저렇게 조심스럽지? 어째서인지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난 두 사람의 태도를 유심히 살피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회용이지만."

"일회용?"

"한 번만 쓸 수 있다고."

"아, 그럼 가호를 받은 것이군."

이건 또 뭔 말인가 싶어서 인상을 구기자마자 라샤르가 손을 내밀었다.

"그대가 정말 이방인이라면 말로 하는 설명보다 직접 보는 게 빠를 것이다."

난 잠시간 말없이 그녀가 내민 손을 응시했다.

라샤르는 재촉 한 번 없이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그 정적이 제법 편했기 때문일까?

난 내 의지로 라샤르의 손을 붙잡았다.

물론 그 행동에는 논리적인 판단이 깔려 있었다.

'시스템 보상으로 위험한 게 나왔을 리는 없지.'

미션이 힘들었던 적도 있고, 보상이 어이가 없었던 적도 있지만.

그게 나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는 건 분명했다.

난 라샤르의 손을 잡은 채 피넬페니아의 권능 이용권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거부감만 들었다.

본디 내가 알아선 안 될 것들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왔으니까.

문제는 그게 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머리가 깨질 것 같기도 하고, 전에 없이 개운한 것 같기도 하고.

그 감각이 반복되다 보니 구분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사진 같기도 하고, 영상 같기도 했다.

'기록...이구나.'

그래,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건 기록이었다.

정확하게는 라샤르 베넷이라는 사람의 시점에서 본 과거.

그 중 내가 볼 수 있는 건 단편적이었다.

글자가 빼곡하게 들어찬 종이와 지도를 보고, 검을 휘두르고 여러 사람이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기를 한참.

창문에 라샤르의 모습이 비칠 때마다 그 너머에 있는 나무가 변했다. 계절이 바뀐 것이다.

그때쯤 라샤르는 후드를 뒤집어쓴 이들과 푸르게 빛나는 그림 위로 올라섰다.

이윽고 여러 그림자가 어두운 동굴 같은 곳에서 바삐 움직인다.

벌거벗은 사람들, 족쇄를 차고 축 늘어진 사람들, 말간 얼굴로 쳐다보기만 하는 아이들까지.

라샤르는 그들을 재촉하거나 안은 채로 내달렸다.

이후 축 늘어진 사람들이 푸른 그림 위로 올라서더니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그림 위로 올라가서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저거....'

라샤르 일행이 하늘에서 번쩍거리며 나타났던 게 이해되는 순간이다.

이 게임의 바탕이 되는 세상에선 공간이동이라는 게 실제로 가능한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상점에 건너뛰기 같은 기술이 있는 거겠지.

'구조 작전 같은 건가?'

결과만 놓고 보면 작전은 성공에 가까웠다.

사람들에 이어 동굴에 잠입한 라샤르 일행까지 차례로 그림 위에 오르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완벽한 성공은 아니었다.

마지막 열 댓 명의 인원이 빠져나가기 전에 바닥에 있는 그림이 부서졌다.

'라울이랑 주황머리....'

내가 구한 사람들이 그 무리에 섞여 있었다.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기 무섭게 땅이 뒤집어졌고, 그 이후로는 기록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시스템

46화

제11장 접촉(3)

모든 장면이 지나치게 빠르고 순식간에 지나간 탓이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곤 피가 흩뿌려지는 것.

푸른 빛이 번쩍이는 것.

라샤르 일행이 갑자기 녹음 위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

그 정도가 한계였다.

곧 커다란 화염이 라샤르를 향해 쇄도했고, 난 그 광경을 내 눈으로도 보았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한계가 느껴졌다. 계속 들여다 보았다간 내가 터져버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난 본능이 울리는 경종을 무시하지 않았다.

거칠게 라샤르의 손을 뿌리치자마자 몸이 아래로 푹 꺼졌다.

옆에서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땅바닥에 나뒹굴었을 것이다.

나를 잡아 준 게 라울이라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두통이 일었다.

이제껏 미뤄두었던 것을 한 번에 떠안은 것만 같은 통증이었다.

"흐으...."

코피가 흐르며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였다.

얼마나 극심했으면, 검을 빼어 든 라샤르가 그것을 내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제법 시간이 지나고 두통이 잦아든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눈가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검신을 보았을 때, 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졌을 법한 고동색 눈동자가 변해 있었다.

'금색....'

라샤르와 비슷했다.

'눈동자 색이 변하다니.'

이 미친 게임을 하기 전의 나였다면 충격 때문에 넋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난 이 세상에서 상식을 기대해선 안 된다는 걸 몇 번이고 경험한 사람이었다.

"하."

그래서 헛웃음을 내쉬며 빠르게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내 눈이 왜 이렇지?"

"신성의 흔적이다. 신의 간택을 받아 권능을 공유하는 사도, 가호를 부여 받은 신관과 성기사, 그 외에 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지."

어째서인지 라샤르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

은연중에 느껴지던 경계심도 옅어진 기분이었고. 꽤나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뭐?"

내가 얼떨떨한 심정으로 반문하자 확실히, 예전보다 누그러진 라샤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가호로 인한 흔적은 일시적이니 몇 시간 내로 돌아올 것이다."

줄곧 검신에 비친 눈동자를 보고 있던 내가 라샤르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지금의 나보다 짙고 묵직한 금색이었다.

"그럼 그쪽은...."

"제대로 소개하지. 페렐 저항군 2사단 설화여단 소속 2중대를 책임지고 있는 지휘관이며 자선을 관장하는 팔라오의 다섯 사도 중 하나, 라샤르 베넷이다."

"사도...?"

정확한 설명이 없었음에도 감이 온다.

저 사도라는 게 이 세상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라고.

'이런 힘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흔하거나, 만만하지는 않을 거 아냐.'

처음 만난 지성체 무리가 대단하다는 것에 기뻐야 하는 건지, 부담스러워야 하는 건지.

"팔라오라는, 그러니까 그 팔라오라는 분이 신... 님 이신지?"

"그러했지."

그러했다는 과거형이 마음에 걸려서 살짝 눈썹이 구겨진 그때.

띠링.

시스템이 또 한 번 끼어들었다.

HIDDEN MISSION

[메인 시나리오]

신전에 방문하십시오.

[보상]

• 속성 마력 100

• 랜덤 상자(×3)

• 메인 시나리오 오픈

• 시스템과의 대화

여전히 그레픽이 깨져 있었지만 내용을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그 내용 중 내 시선을 빼앗은 건 평소보다 긴 보상 내역이 아니라, 굵은 글씨로 표시된 짧은 문장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시스템이 이런 식으로 특정 내용을 강조한 건 처음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쓰이는 내용이 있었으니.

"대화...?"

"음?"

라샤르와 라울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하고서 나를 보고 있었다.

반면 난 그들이 아니라 미션창을 노려보았다.

'대화라고.'

고작 그것만으로도 신전에 갈 의향이 있었다.

난 이를 악문 채 숨을 고르다 말고 라샤르와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몇 가지 더 물어봐도 되나?"

"내가 답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성실하게 답하겠네."

"피넬페니아라는 건...."

"7대 규율 중 근면을 관장하는 분이다."

"...신의 이름?"

근면의 신 피넬페니아, 방금 내가 겪은 게 바로 그 존재의 권능이란다.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7대 규율? 7대 죄악이랑 관련된 건가?'

깊이 아는 건 아니고, 상식 선에서 알고 있는 지식이었다.

교만, 탐욕, 시기, 분노, 음욕, 탐식, 나태.

7가지의 죄악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어보았다.

이게 종교의 교리와 관련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학문과 연관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악이 있으면 선도 있는 법.'

아무래도 이 세상은 그 7가지의 선이 중요시되는 곳 같았다.

그 종류에 따라 담당하는 신이 다른 거겠지.

'팔라오는 자선의 신이랬지?'

그리고 피넬페니아는 근면의 신.

다른 신 다섯이 더 있을 것이다.

난 티나지 않게 입안의 살을 씹었다.

'신의 이적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라니.'

이곳에선 신을 불신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종교가 가진 무게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런데 신전을 방문하라고.'

내가 그곳에 들어갈 수 있냐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

결국 지금 상황에서 내가 신전에 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나와 달리 신전이 어디에 있는지 알며,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사람을 이용하는 것.

우연인지, 운명인지, 마침 그런 사람이 눈앞에 있다.

"신이 있으면 신전도 있겠네?"

지나가듯이 툭 말하자 라샤르의 손이 꽉 말려들어갔다.

그에 내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시스템은 물론이고 저쪽도 신전이라는 말에 반응하고 있다. 대체 왜?

'신전에 뭐가 있기에?'

거기에 가면 이제껏 날 괴롭히던 의문을 풀 수 있을까?

'시스템이 미션을 띄운 이상 가볼 생각이긴 했다만.'

이제부턴 진짜 각잡고 제대로 해봐야겠다.

'당장은 여기에 붙는 것부터.'

라샤르가 신전에 동요를 내비치고 있으니 한 번 더 찔러보자.

"적어도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 같은데...."

"...."

"길 안내를 부탁할 수 있을까? 내가 여긴 초행이라."

포션을 꺼내 던지자 라샤르가 가뿐하게 받아들었다.

"물론 공짜로 하는 부탁은 아니고."

라샤르의 시선이 다시 내 허리춤에 달린 방패에 닿았다.

"보유한 포션이 얼마나 되지?"

이어진 질문에 난 픽, 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보험은 있어야지."

그걸 미쳤다고 가르쳐주겠나.

말한 수량이 다 떨어지면 나를 버릴지도 모르는데.

'실제로 얼마 없기도 하고.'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으나 라샤르는 충분히 알아들은 것 같다.

"일정이 급하나?"

히든 미션에 제한 시간은 없지만, 이미 미션지에 진입하고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편이야."

라샤르는 입을 닫은 채 시선을 내렸다.

툭툭툭, 그녀는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손가락이 점점 느려지더니 대신 노란색 눈동자 움직였다.

난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의 시선을 좇았다.

라샤르의 눈동자는 내 허리춤에 닿아 있었고, 그곳엔 구멍이 뻥 뚫린 방패가 덩그러니 매여 있었다.

"좋다, 신전까지 안내하지."

한동안 가만히 방패를 보기만 하던 라샤르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난 계속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분명 원하던 결말인데 기쁘기보단 당황스러웠다.

무작정 기뻐하기엔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내가 어디서 온 뭐 하는 놈인 줄 알고?'

아무리 내가 저들의 목숨을 구해줬다지만, 너무 쉬운 거 아닌가?

더군다나 라샤르는 내가 신전에 왜 가는 건지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권능이라는 걸 사용한 이후 태도가 너무 변했다.

'계속 이 방패를 힐끔거리는 것도 이상하고.'

단순히 위험한 물건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

라샤르에겐 내 의견을 무시하고 매개체를 파괴할 힘이 있다.

내가 팀원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한들, 이 방패가 계속 신경써야 할 만큼 위험한 물건이었다면 강제로 파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제 입으로 위험을 강조했으면서 파괴를 강요하지 않고 주시하는 선에서 그쳤다.

'다른 이유가 있다고 봐야겠지.'

난 방패를 만지작거리며 라샤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당장은 알 수 없는 문제이니 한동안 지켜보는 수밖에.

* * *

"누나, 좋은 아침이에요!"

훈련 시간에 맞춰 체력단련실에 도착한 김율이 화사하게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에 플레이어 감독관으로 자출된 요원이 마주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율아, 좋은 아침. 혜원씨도 좋은 아침이예요."

"네, 잘 주무셨어요?"

김율과 함께 도착한 양혜원 역시 웃으며 요원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교관이 오기를 기다리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팬서비스 열심히 한 보람은 있네.'

국정원의 보호감찰을 받기 시작한 이후로 몇 주.

김율은 연습생 시절의 경험을 십분 발휘해 요원들과 친분을 쌓았다.

평소에는 밝고 귀여운 이미지를 강조했지만, 미션을 끝내고 나올 때면 충혈된 눈으로 눈물 지었다.

한창식 사건으로 생긴 긴장감이나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동정와 연민을 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의 나이가 아직 어린 편이기에 더더욱.

덕분에 몇몇 요원들에게 제법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가볍게는 플레이어들의 계좌나 통화 기록이 감시 받고 있다는 언질을 받은 정도.

어제는 윗선에서 플레이어의 처분을 두고 어떤 말이 오갔는지도 들었다.

'며칠 전에 요원들 사이에서 케이 형이 언급된 이유는 못 들었지만.'

이들과의 사이가 나쁜 것보다는 친분을 다져두는 게 더 이득이었다.

그래야 야금야금 모은 소식을 추려 케이에게 전달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시점에서 나보다 형이랑 가까운 플레이어는 없겠지?'

케이의 신상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건 아마도 한 손에 꼽으리라.

그 중 한 명이 자신이라는 점이 꽤나 뿌듯했다.

물론 김율은 케이가 알려준 전화번호의 주인을 찾아보지 않았다.

'전번 알려준 것 때문에 날이 바짝 서 있을 텐데, 괜히 들쑤시지 말자.'

지금은 케이의 약점이나 뒤를 잡는 것보다 우호 관계를 유지해야 할 때다.

입막음 비용으로 포션 10개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어주는 사람이지 않나.

그런 사람에게 미움 받을 짓을 왜 한단 말인가.

김율이 한창 케이의 생각으로 바쁠 때 요원과 양혜원 사이에서 흥미로운 주제가 언급되었다.

튜토리얼에서 얻은 장비를 분석한 결과에 대한 이야기였다.

"벌써 결과가 나왔어요?"

이야기를 먼저 꺼낸 요원이 슬쩍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김율은 티나지 않게 눈을 빛냈다.

그녀는 국립과학연구소에 대학 동기가 있는 사람이다.

필시 그쪽을 통해 언질을 받은 것이리라.

"뭐래요? 아예 다른 금속인 거예요?"

케이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현실의 물건에 마력을 덧씌우는 건 불가능하다.

실제로 국정원 내에서 양혜원이 그것을 증명했다.

아무리 기를 써도 국정원에서 제공한 냉병기에는 마력이 고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플레이어가 튜토리얼에서 제공 받은 무기를 가지고 연구가 진행된 지 닷새쯤.

"아니, 성분은 동일하대."

왠지 모르게 찝찝한 결과가 나왔다.

"튜토리얼에서 제공한 무기도 일반 철이야."

"흠...."

"연구진들 사이에선 무기의 성분이 아니라 마력을 연구해 봐야 된다는 얘기가 나오는 모양이고."

마력과 무기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추측이 오고 가기도 잠시.

다른 플레이어들이 체력단련실에 도착하면서 어쩔 수 없이 대화를 정리해야 했다.

김율은 지난 며칠 사이에 제법 익숙해진 일과에 매진했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일과는 해가 저물었을 무렵 끝났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김율은 곡소리를 내며 미션창을 열었다.

'보자, 보자, 오늘도 하고 계신가.'

미션 목록을 훑자 그가 원하던 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굵은 글자로 변한 3레벨 미션.

케이가 아직도 그 미션을 진행 중이라는 의미였다.

그 숫자를 눈에 새길 듯이 뚫어져라 바라보던 김율이 채팅을 보냈다.

- Kj : 형, 오늘도 생존 신고 좀.

- 요괴 : ㅇㅇ 내일 하나 더 줘야 되는 거 알지?

- Kj : 당욘하짓!

코드명 요괴, 본명 안기준.

김율이 본 그는 타인의 뒤통수를 칠만큼 간이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도와줄 만큼 이타적인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포션이라는 사탕을 흔들었다.

케이가 알려준 전화번호로 '게임 중인 사람은 아직 살아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주면 이틀에 한 번 포션을 주기로 한 것이다.

양혜원조차 모르는 김율과 안기준 만의 거래였다.

'그 전화번호가 케이 형이랑 관련되어 있다는 얘기는 안 했지만.'

케이가 3레벨을 시작한 날부터 계속 부탁했으니 눈치를 챘을 수도 있다.

'나중에 케이 형한테 주의라도 줘야겠네.'

벌써 아흐레간 해온 일을 끝낸 후에는 미션 완료 목록을 훑어보았다.

미션창을 연 김에 다른 파티의 활동을 체크해 둘 생각이었다.

"어...?"

그런데 가장 최신 목록을 눈에 담는 순간 얼빠진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04-1848 - 폐쇄 공헌자 : K 외 6명(미등록 사용자)」

잘못 보았나? 김율은 굳이 눈을 문지르며 다시 목록을 확인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숫자가 변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다시 미션 진행 가능 목록을 확인했다.

하지만 3레벨 미션은 여전히 굵게 변한 상태.

"이게 무슨...."

얼떨떨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얼을 빼고 있기도 잠시, 김율은 서둘러 채팅창을 열었다.

* * *

「오염된 마력이 흡수됩니다. 직접적인 인과 과정의 부재로 인해 흡수율이 저하됩니다.」

「오염된 마력이 흡수됩니다. 직접적인 인과 과정의 부재로 인해 흡수율이 저하됩니다.」

「04-1848 매개체(3)가 파괴됩니다.」

「MISSION - 04-1848의 매개체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홀이 폐쇄됩니다.」

라샤르 일행과 만난 지 사흘 차.

삐죽삐죽.

난 자꾸만 위로 승천하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 Kj : 뭐야뭐야 어케 된 거야! 형 지금 4렙 완료 떴어!

그리고 거의 동시에 도착한 김율의 채팅을 훑으며 숨을 골랐다.

'무슨 일이냐고?'

버스탔다고 하면 알아들을까?

그것도 그냥 버스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는 초광속 버스를.

'개고생한 보람이 있다.'

난 전율을 느끼며 오늘을 위해 지나온 지난 며칠을 되새겨 보았다.

빌어먹을 시스템

47화

제12장 교류(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