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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퀸은 뻗었다.

인우에 대한 걱정의 긴장이 풀리고, 배가 부르고, 이곳이 안전하다 여겼는지 잠이 몰려왔던 것이다.

그녀는 게이트 구석탱이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인우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자고 일어나면 소화되어 있을 테니까 그때 또 먹이는 거다."

그런 결심을 한 뒤 분신들을 불러 모았다.

유니크 스킬 볼 10개.

이것들을 모두 분신들에게 줄 작정이었다.

현재 분신들의 숫자는 도합 여덟.

때문에 한 개씩 나눠 주더라도 두 개가 남는다.

인우는 우선 분신들에게 스킬 볼을 하나씩 지급했다.

만일 꽝이 나오는 녀석들이 존재한다면, 그때에 나머지 2개를 추가 지급할 참이었다.

"오오. 근데 내 껀. 둘이 것보다 작아 보이는데?"

팔이가 제 손에 들린 유니크 스킬 볼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은 녀석들에게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잔말 말고 한 명씩 먹어 봐."

인우가 말했다.

그러자 일이가 먼저 유니크 스킬 볼을 입속에 넣었다.

"삼킨다?"

녀석은 제법 긴장했는지 붕뜬 어조였다.

인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이내 스킬 볼이 꿀꺽 삼켜졌다.

['분신1'이(가) '아공간'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일이가 습득한 스킬은 인우의 시스템 메시지에도 떴다.

그리고 둘의 표정이 교차한다.

인우는 짐칸이 더 생겼다며 미소를 지었고, 일이는 공격 스킬이 아니라며 울상을 지었다.

이윽고 일이가 아공간을 습득했다 말하자 나머지 분신들은 부러움도 안타까움도 아닌 비웃음을 날렸다.

"하하. 일이는 짐꾼. 짐꾼이다."

팔이가 또 촐랑댄다.

그러자 일이가 팔이를 검지로 가리키며 으르렁댔다.

"다음으론 니가 먹어라. 팔이."

"나? 좋아. 대장. 내가 두 번째로. 먹어도 되겠지?"

"물론."

아무렴 어떨까.

인우는 긍정했다.

그러자 팔이는 히죽 웃으며 유니크 스킬 볼을 입속에 우겨넣었다.

그리고 거친 얼굴을 한 채 삼켰다.

CF가 들어오는 것도 아닐 텐데 뭔 똥폼을 저리…

['분신8'이(가) 스킬 습득에 실패하였습니다.]

와.

재수도 없지.

인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조차도 유니크 스킬 볼을 한창 먹을 초창기 때는 꽝이 떠 본 적이 없다시피 했다.

그때는 스킬의 개수도 굉장히 적었고, 이에 따른 꽝이 뜰 확률은 현저히 낮았다.

그런데 팔이는 꽝이 떠 버렸다.

도대체 얼마나 재수가 없어야 저게 가능할까?

팔이는 단숨에 주저앉았고, 그런 팔이를 향해 일이가 말했다.

"쌤통이다."

"으아."

곧이어 팔이는 제 머리칼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일단 팔이는 대기. 그리고 다음으론 누가 먹어 볼래?"

인우가 묻자 이번엔 둘이가 유니크 스킬 볼을 삼켰다.

['분신2'이(가) '아이스 볼'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아이스 볼이라.

무난했다.

어찌 되었건 허세킹 둘이는 체면을 구기지 않아도 되었다.

녀석은 시크한 표정으로 팔짱을 낄 뿐이었다.

다음으로 삼이가 유니크 스킬 볼을 삼켰다.

['분신3'이(가) '점프 찍기'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말이 거의 없고, 흘러가는 대로 분위기를 타고 휩쓸려가는 삼이는 그야말로 무난한 스킬을 습득했다.

저건 그냥 전사 스킬이었다.

다시 말해 굳이 유니크 스킬 볼이 아니더라도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뭐 습득은 했으니 그걸로 된 것일까?

삼이의 태도는 여전히 얌전했다.

이어 사이.

['분신4'이(가) '힐'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오!"

"우하하하하하!"

처음 외침은 인우였고, 두 번째 웃음은 사이였다.

덜떨어진 사이는 힐 스킬을 습득했다.

녀석은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형제 분신들을 향해 힐을 시전하며 말했다.

"앞으로. 다친 녀석들은. 백 원에. 힐 한 방. 하하."

힐 스킬.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인우로서는 사이를 피 채워 주는 용도로 사용해도 좋을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유니크 스킬 볼을 지속적으로 확보하여 8명 모두 힐을 배울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대박이다.

8명의 힐이 인우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진다면 엄청난 양이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체력을 단번에 채워 주는 또 다른 힘의 정수가 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체력의 확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광폭 무형검같은 스킬을 사용하기 수월해진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체력의 절반을 소모하는 기술이기에 두 번을 꼽으면 한계치였다.

하지만 힐만 잘 사용한다면 그것을 3번, 아니 어쩌면 4번까지도 끌어올릴지 모른다.

인우와 사이. 둘 모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사이의 미소는 형제 분신들에게 힐을 판매할 상상에서 기인한 것이었지만.

이어 오이가 스킬 볼을 삼켰다.

['분신5'이(가) '헤이스트'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오이는 스킬을 습득하자마자 별 말 없이 인우에게 헤이스트를 시전해 주었다.

['헤이스트'에 의해 민첩이 5 증가합니다.]

"오호. 오이 너는 앞으로 내 버프 담당이다."

아직은 1레벨의 헤이스트이기 때문에 올라가는 능력치는 낮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금세 올라갈 것이다.

녀석들도 스킬의 만렙 달성을 금세 할 테니 말이다.

여기에다가 인우가 지닌 스트렝스까지 시전하면 버프는 더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게다가 자신에게만 걸어 주는 것이 아니다. 지들끼리도 알아서 버프를 나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마력 스텟을 찍어야겠다는 둥, 마나 드레인 스킬이 필요하다는 둥, 설계까지 하고 있었다.

녀석들이 그럴수록 인우는 만족스러웠다.

역시나 저 혼자서 유니크 스킬 볼 10개를 몽땅 먹어서 꽝이 뜰 바에야, 이렇게 분신들을 이용해 여러 종류의 스킬들을 습득하는 것이 훨씬 더 좋았다.

그야말로 극강의 효율인 것이다.

인우야, 앞으로는 레전드 스킬 볼만 먹으면 될 일이었다.

이윽고 육이가 스킬 볼을 삼켰다.

['분신6'이(가) '힘의 축복'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이 녀석도 버프인가?

나쁘지 않다.

이내 육이는 감사함을 담아 인우에게 힘의 축복을 시전했다.

['힘의 축복'에 의해 근력이 5 증가합니다.]

이로서 오이의 헤이스트와 육이의 힘의 축복까지.

버프 스킬만 두 개씩이나 받고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힘의 축복이 무서운 점은, 바로 인우가 지닌 스트렝스와 중복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이로써 인우는 버프만 3개를 달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덧 칠이도 스킬 볼을 삼켰다.

['분신7'이(가) '생명의 샘'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버프!

버프가 너무 많다.

그렇다고 싫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좋을 수밖에 없다.

버프는 많을수록 좋았다.

온갖 버프로 전신을 도배하면 능력치가 뻥튀기 될 테니 말이다.

게다가 모조리 마스터 레벨을 찍을 테니까.

생명의 샘은 체력 회복력을 올려 주는 버프였고, 힐 보다는 효율이 나쁠지 몰라도 지속성이 있기에 좋은 버프였다.

이로써 모든 분신들이 유니크 스킬 볼을 먹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이가 중얼거렸다.

"나만 못 얻었다...."

녀석이 울먹거렸다.

그러자 인우가 말했다.

"아직 유니크 스킬 볼은 두 개가 남았어. 팔이만 스킬을 얻지 못했으니, 하나 더 줄 생각인데. 모두 이의 없지?"

의사를 묻긴 했으나 녀석들은 인우의 명령에 거절을 표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인우의 분신이었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인우는 팔이에게 유니크 스킬 볼을 하나 더 지급해 주었다.

이에 팔이는 울먹이다가 금세 표정을 풀고 스킬 볼을 삼켰다.

['분신8'이(가) 스킬 습득에 실패하였습니다.]

"안 돼! 왜. 왜! 왜 나만!"

또 꽝이라고?

도대체 팔이 녀석은 얼마나 재수가 옴 붙은 거야?

사실 이제 하나 남은 스킬 볼은 가위바위보라도 할 참이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된 거 인우는 어쩔 수 없이 남은 스킬 볼 하나를 팔이에게 마저 지급해 주었다.

또 다시 팔이의 목으로 유니크 스킬 볼이 넘어간다.

녀석은 이제 거의 뭐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이것은 마지막 유니크 스킬 볼이었으니까.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팔이가 이내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우하하하하하하하!"

그러자 모든 분신들이 동시에 외쳤다.

"도대체 무슨 스킬이 뜬 건데!!"

"우하하하하하!!"

팔이는 대답 대신 미친 듯이 웃을 뿐이었고, 인우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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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다른 세상 (1)

팔이가 웃는다. 형제 분신들은 궁금해 죽겠다는 투로 팔이를 보채고 있었다.

지금 팔이가 습득한 스킬은 꽤나 높은 등급의 네크로맨서 스킬이었다.

그나저나 인우조차도 네크로맨서의 스킬은 습득해 보지 못했는데 팔이가 먼저 배워 버렸다.

꽝이 2번씩이나 뜨기에 재수가 옴 붙은 줄 알았건만 좋은 스킬을 습득하기 위한 발판이었나 보다.

팔이는 잔뜩 우쭐대며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더니 온갖 폼이란 똥폼은 다 잡아 가며 마력을 응축시켰다. 사실, 굳이 저러지 않아도 소환술은 발동된다.

후우우우웅-!

어느덧 팔이의 양 손바닥에서 검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츠으으으으으······.

3미터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크기의 언데드가 소환되었다. 그것은 바로 용작두 광전사였다.

데스나이트들의 왕.

그 녀석이 팔이에 의해 소환된 것이다. 용작두를 쥐고 있는 대형 데스나이트.

저것은 해골병사 소환 같은 하급 소환술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고로, 팔이는 지금 꽤나 좋은 스킬이 뜬 것이었다. 히든 스킬을 습득할 수 없는 분신에게는 최대치에 가까운 스킬이라 할 수 있었다.

용작두 소환의 급수는 마법으로 치자면 블리자드 급이었으니까.

정보를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덧 인우는 팔이가 습득한 스킬의 정보를 불러 보았다.

1. [용작두 광전사 소환술 Lv.1 (84%)] ? 레벨이 높아질수록 용작두 광전사가 강해집니다. (재소환 대기 시간 10분.)

이것은 액티브 스킬. 이에 따라 마스터 레벨이 되면 꽤나 강해질 테다. 인우는 여전히 묘한 미소를 지으며 팔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팔이는 팔짱을 낀 채 용작두 광전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내뱉는다.

"하하. 너는. 이제부터. 막내다."

그간 제 놈이 막내라는 사실이 꽤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팔이는 흐뭇하게 웃었다.

녀석은 오늘 꽤나 득템했다. 아티펙트인 코카트리스의 부리까지 받았고, 이 소환술까지 습득하지 않았나.

다른 분신들 또한 팔이가 부러운지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그러다 똘똘한 일이가 인우를 향해 궁금증을 표했다.

"저거. 잡으면. 용작두랑 각성 정수랑 유니크 스킬 볼. 주지 않겠어?"

"그럴 리가.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네크로맨서들은 다 부자게?"

인우는 피식 웃으며 답하고 있었다. 스킬을 이용해 소환된 괴수는 전리품을 내뱉지 않는다. 오리지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죽으면 연기처럼 스르르 사라질 뿐이다. 인우는 그러한 사실을 분신들에게 알려 주었다. 대부분의 분신들이 납득했다. 하지만 멍청한 분신 사이는 납득이 안 되는지 이마를 좁히고 있었다.

"똑같이. 생겼는데. 어째서 그런 거지?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

바로 그때.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허세킹 둘이가 말했다.

"똑같이 생겼다고 모두가 같은 건 아니지. 바로 우리들처럼 말이야."

녀석은 청산유수처럼 끊김 없이 말하고 있었다. 저리 말하니 무언가 좀 달라 보인다. 심지어 납득까지 될 정도다.

멍청한 사이가 단박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까.

그 모습에 말을 내뱉었던 둘이는 흥 하고 콧방귀를 끼더니 팔짱을 끼고 또 다시 똥폼을 잡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 팔이가 한 마디 내뱉었다.

"둘이는. 다 좋은데. 뭔가 재수 없어."

팔이의 말에 형제 분신들은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로부터 5일이 지났다.

['광폭 절대검'의 레벨이 'Master'에 도달하였습니다.]

인우의 절대검은 99레벨이 되었다.

이로써 마스터.

하지만 이제는 마스터에 이른다고 끝이 아니다. 새로운 전능자 패시브로 인해 스킬의 한계가 돌파된 상황.

현재 광폭 절대검은 Master Lv.1 이었다.

그리고 절대검이 마스터 레벨에 도달하는 동안 다른 스킬들은 Master Lv.26에 도달해 있었다.

1. [내려찍기 Master Lv.26 (2%)] - 양손 무기 장착 시 사용 가능. 거대한 검이나 도끼를 양손으로 틀어쥐고, 장작을 패듯 미친 듯이 내려찍습니다.

.

.

내려찍기를 포함한 모든 돌파 스킬들이 26까지 올라간 것이다.

이를 통해 드러났겠지만, 한계 돌파 이후 스킬 경험치의 총량은 비약적으로 상승된다. 절대검이 99에 닿는 동안, 한계 돌파 스킬은 고작 26레벨이 올랐을 뿐이니까.

이곳이 게이트 내부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것은 엄청난 수치일 것이다.

만약 지구에서 한계 돌파 스킬의 레벨을 올리려면 엄청난 고생이 뒤따를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인우가 이처럼 성장하는 동안, 분신들 또한 크게 성장한 상태였다.

우선 절대자의 걸음, 호흡, 성장. 3가지의 패시브를 모두 지니고 있는 분신 1, 2, 3, 4의 경우.

본인들이 습득한 스킬을 마스터했다.

일이의 경우 아공간 마스터.

둘이는 아이스 볼 마스터.

삼이는 점프 찍기 마스터.

사이는 힐 마스터.

그리고 절대자의 걸음 한 가지만을 가지고 있는 분신 5, 6, 7, 8의 경우.

오이는 헤이스트 77레벨.

육이는 힘의 축복 79레벨.

칠이는 생명의 샘 75 레벨.

팔이는 용작두 광전사 소환술 73레벨.

이렇듯 절대자 패시브의 개수에 따라 성장 속도가 극명히 갈린 분신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팔이의 소환수였다.

현재 팔이의 소환수인 용작두는, 팔이 본인보다 강할 정도였다.

무려 73레벨의 용작두 광전사이니 말이다.

일반 필드의 용작두를 Lv.1로 가정한다면, 이는 엄청난 수치임이 분명했다.

하긴. 네크로맨서들도 먹고 살기 위해선, 이 정도 위력을 지닌 소환수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일반 초인은 이러한 소환술을 마스터하려면 10년이 넘게 걸리겠지만, 팔이는 이제 곧이다.

어찌 되었건 지난 5일간 이처럼 모두가 큰 성장을 했다.

그리고 드래곤의 사체는 정리가 끝난 시점이었고, 뼈와 살덩이들은 모조리 일이의 아공간으로 옮겼다.

사실 인우의 아공간에 넣어도 되겠지만, 안 그래도 난잡한 내부인지라 일이의 아공간이 제격이었다.

나아가, 드래곤의 혈액도 모조리 채취된 상황.

이 혈액은 인우의 아공간에 들어갔다.

인우는 지속적으로 퀸에게 드래곤 혈액을 공급해 주기 위해 본인의 아공간에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현재 채취된 혈액은 대략 3320리터 가량.

지난 5일간 퀸이 꾸준하게 마셨음에도 이 정도였다.

아니, 사실 그녀가 5일간 줄기차게 마셔 봐야 30리터도 채 마시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30리터로 인해 퀸은 얼추 400만이 넘어가는 경험치를 획득했으며, 비약적인 성장을 한 뒤였다.

현재 그녀의 레벨은 115.

그녀는 인간들처럼 각성정수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단숨에 100레벨을 넘어 버렸던 것이다.

확실히 인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레벨 구간이었기에 400만의 경험치 만으로도 엄청난 성장을 했다.

물론 그녀 또한 고레벨이 되어 가며 점차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경험치 총량에 적응해야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인우가 주는 것을 마시기만 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자, 이제 나가자."

어느덧 인우는 분신들과 퀸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마쳤다.

통로의 끝과 끝.

오른쪽으로 향하면 프로킨이고, 왼쪽으로 향하면 지구다.

인우는 왼쪽의 입구로 향했다.

* * *

민철이와 지은이는 지난 5일간 저택에 머물며 인우를 기다렸다.

이 인간이 이번에는 울트라 게이트로 들어섰단다.

언론은 당연히 난리였고, 각국의 초일류 랭커들은 한국의 울트라 게이트를 구경하기 위해 꽤나 많이도 입국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철과 지은은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정인우를 뒤쫓아서 울트라 게이트에 들어설까 말까 하는 고민이 벌써 5일째인 것이다.

제 놈 혼자서 꿀이란 꿀은 다 빨고 있겠지. 라는 생각과, 혹시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닐까? 라는 걱정이 공존했다.

그리고 이들의 고민은 오늘로서 막을 내렸다.

"가자. 아무래도 걱정돼서 안 되겠어."

"혹시 누님과 제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상황이 펼쳐져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더더욱 가야지 멍청한 놈아! 오빠가 그만큼 위험하다는 거 아니야!"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민철은 얼버무렸다.

지은은 지금 굉장히 감정적이었고, 민철은 꽤나 이성적이랄까?

둘의 의견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갑시다. 누님."

"진즉 그래야지."

둘은 단숨에 저택을 나섰다.

그리하여 강원도 울트라 게이트 앞에 도착한 두 남녀.

이곳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개중에는 지은을 알아본 세계각지의 랭커들도 꽤나 많았다.

"요. 가브리엘 정이잖아? 텍사스에서 악녀 짓을 관뒀다더니. 여기 있었··· 응?"

지은은 아는 체를 해 오는 랭커를 가볍게 무시하며 울트라 게이트로 향했다.

그 뒤를 민철이 졸졸 뒤쫓았고, 이윽고 두 남녀는 울트라 게이트에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이곳에 모인 랭커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헛숨을 들이키고 있었다.

"저 여자가··· 미쳤나······."

헬게이트 보다 수십 배는 큰 울트라 게이트에 겁도 없이 진입하다니.

삽시간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움은 곧이어 놀라움으로 번져 가기 시작했다.

"어, 어!! 게이트가 또 떨린다!"

누군가가 외쳤고, 그 외침과 동시에 게이트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정인우였다.

인우는 울트라 게이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뚱한 얼굴로 장내를 바라보았다.

뭔 인간이 이렇게 많이 모였어?

그러한 생각도 잠시.

랭커들이 저마다 떠들기 시작했다.

"이, 이번에도 살아 돌아왔어! 진정 괴물인건가!"

"난 저번에도 정인우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보다 풍기는 분위기가 훨씬 더 강력해졌어. 미친. 말이 돼···?"

"그나저나··· 랭커를 한 손으로 죽였던 녹색 머리칼의 남자는 보이지 않는데··· 역시나 정인우가 해치운 건가?"

"모르겠어. 그것보다 저걸 보라고. 이번엔 저번 헬게이트 때처럼 게이트가 소멸되지 않았잖아. 저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들이야 알 도리가 없다.

저것은 그냥 프로킨과 통하는 차원의 문일 뿐이다.

헬게이트처럼 파괴할 수 있는 성질의 게이트가 아닌 것이다. 헬게이트는 한번 진입하면 파괴하기 전까진 빠져나올 수 없지만, 이 울트라 게이트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어느덧 인우는 수많은 랭커 인파로 인해 꽉 막힌 길을 향해 조용히, 그러나 힘 있는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내가 직접 길을 뚫어야 나올래?"

그 말과 동시에 잔뜩 몰려 있던 세계 랭커들이 홍해가 갈리듯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인우는 퀸을 데리고 그 길을 걸어 나갔다.

인우가 풍기는 엄청난 기운에, 이곳에 모인 랭커들은 침만 꼴깍 꼴깍 삼킬 뿐이었다.

성격이 참 지랄 같다고 소문이 자자한 인우였다.

이 때문에 괜히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뒈질지도 모르지 않은가.

정인우가 날뛰면 세계가 나서야 진압이 될 정도일 테다.

그가 누군가를 죽인다면 그 누군가는 그냥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감히 인우를 붙잡고 물어볼 수 있겠는가.

울트라 게이트는 왜 닫히지 않았으며, 저 내부에는 무엇이 존재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방금 두 남녀가 울트라 게이트로 진입했는데, 그들은 어떻게 되는지도 말이다.

그 무엇도 물을 수 없었다.

* * *

민철과 지은은 울트라 게이트에 진입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 헬게이트랑은 많이 다른데요?"

민철이 볼을 긁적이며 말하고 있었다.

그 말대로였다. 괴수도 없고, 헬탑도 없다. 그저 흰색의 통로가 쭉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곳엔 인우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파리 새끼 한 마리도 없다.

"형님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아무래도 이 통로 끝자락까지 가 봐야 알 것 같은데?"

지은은 그렇게 답하며 끝까지 걸어 나갔다. 통로는 제법 길었고, 이내 그들은 새하얀 빛무리가 뿜어져 나오는 하나의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 어디에도 오빠가 보이지 않아. 아마 이 안쪽으로 들어간 게 분명해."

"제 생각도 같습니다, 누님. 그, 그런데. 괜찮을까요?"

민철은 두려움을 숨기지 못한 채 말하고 있었다.

지은은 그런 민철의 손을 꽉 움켜쥐며 입구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둘이 들어선 입구는 통로의 오른쪽 끝.

바로 프로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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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다른 세상 (2)

강원도에 생성된 울트라 게이트.

이곳을 통과하여 반대편 프로킨으로 나온다면 하늘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면, 프로킨에 생성된 울트라 게이트는 공중에 설치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엄청난 고도의 높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드래곤들이 설치한 것이고, 그들은 인간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울트라 게이트를 설치해 둔 것이다.

이 높이는 심지어 와이번조차도 날아올 수 없는 고도였다.

그리고 그러한 울트라 게이트를 넘어간 지은과 민철.

이들이 도착한 곳은 프로킨이었고, 당연하게도 그들의 시야에는 새파란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그 즉시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끝도 없이 추락한다.

"어, 어, 으어어어어억! 누니이이임!"

"으아악!!"

민철과 지은은 곧장 비명을 내질렀다.

이들로서는 영문조차 알 수 없었다. 울트라 게이트를 넘어섰을 뿐인데 그곳이 공중이었을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강렬한 바람에 의해 얼굴 살이 밀리고 몸을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다.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였다.

지상의 풍경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그럴수록 정신은 까마득히 막연해진다.

그러한 순간에 지은은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아래를 향해 마법을 뿌려 댔다.

"으아아아아아!"

강력한 에어 마법들을 꽂아 버리며 그 반발력을 이용해 마치 낙하산처럼 추락을 늦추고 있었다.

그러나 민철은 그 어떠한 대책도 없었다.

"살려!!!"

민철은 점차 빠르게 추락하고, 지은은 점차 느리게 추락한다.

이 상태라면 민철은 땅에 추락하자마자 온몸이 터져 죽을 것이다.

하지만 지은은 민철에게 그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었다. 당장 저 살기도 바빴으니 말이다.

"민철아!!"

그녀는 이내 한참이나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민철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민철의 비명이 들려온다.

"누니이이이임!"

어느덧 민철의 모습은 구름에 가려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에어 마법을 이용해 뒤늦게 지상에 착지한 지은. 그녀는 땅을 밟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민철을 찾았다. 떨어져 죽었다면 다 터져 나간 살덩이라도 보일 것이다. 하지만 한참을 찾아도 민철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리고 지은은 뒤늦게 이곳의 풍경이 무언가 낯설다는 것을 느꼈다.

"여긴 도대체······."

일단은 숲이었다.

그런데 나무의 크기가 빌딩만 하고, 꽃들의 색깔이 형광색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지구에 이러한 풍경의 숲이 존재하나?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곳은 도대체 어딘데?

지은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려봐야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젠장!"

이 순간 지은은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들고 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걸려고 했다.

하지만 핸드폰은 먹통이 되어 있었다.

멀쩡한 핸드폰이 먹통이 되다니? 여기가 뭐 지구와는 다른 차원이기라도 한 건가?

"어······."

그 순간 지은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

다른 차원.

언젠가 인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별안간 떠올랐다.

-지난 30년간. 나는 프로킨이라는 곳에서 개처럼 굴렀다.

-그곳은 약육강식의 세계. 나는 모든 강자들을 꺾고 그곳의 황제가 되었다.

-드래곤들이 나의 황궁에 침공해 왔고, 나는 다시금 지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

인우는 30년 만에 재회한 자신에게 그리 말했었다. 개소리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생동감 있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은은 그 말을 믿었었다.

심지어 지은은 인우의 모든 것을 앗아간 드래곤들에게 한 방 먹이자며 프로킨으로 넘어가자 제안까지 했었다.

"이곳이 그럼···?"

그래 이곳은······.

정인우가 말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아마 다시금 지구로 넘어가기 위해선 공중의 지점을 찾아서 그곳의 울트라 게이트로 진입해야 할 테다.

하지만 하늘 위로 고개를 치켜들어 봐도 너무나 까마득하여 보이지도 않는다.

이윽고 지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런···기분이었냐. 정인우?"

* * *

추락의 공포는 인간의 정신이 끊길 만큼 아찔하다.

물론 민철은 일반적인 인간은 아니다. 어엿한 초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민철은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기 전, '크워어어어'거리는 팜이가 내는 피어와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 * *

와이번 용병단 소속의 용병 이브.

그녀는 와이번을 타고 악몽의 숲을 가로지르는 도중 하늘에서 떨어지는 뚱뚱한 인간을 발견했다.

"오잉?"

그 인간은 기절을 한 건지 인형처럼 추락하고 있었다.

이브는 볼 것도 없이 와이번을 타고 인간을 받아냈다.

-꽤애애애액!

그러자 와이번이 남자 인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덜컥 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브는 헛숨을 들이키며 크게 놀랐다.

"와. 내 와이번은 성체인데. 이 남자, 보통 뚱뚱한 게 아니네."

그렇게 중얼거린 이브는 와이번을 끌고 바닥에 착지했다.

착지와 동시에 와이번이 꽥꽥거리며 등을 움직여 남자를 떨어트려 버린다.

그 모습에 이브는 피식 웃으며 내려섰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남자의 생김새를 살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람이라···"

남자는 검정색 머리에 특이한 옷을 입고 있었다. 등에는 거대한 대검을 메고 있었는데, 아마 이 남자도 헌터인 듯싶었다.

그런데 왜 공중에서 추락했던 걸까?

이내 이브는 남자의 뺨따귀를 때리며 외쳤다.

"이봐요! 이봐요! 정신 차려요!"

"끄으으."

그러자 남자가 정신을 드는지 앓는 소리를 냈다. 이브는 더욱 강하게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인정사정없는 그녀의 손바닥에 남자의 감긴 눈이 스르르 뜨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여긴?"

그러나 이브는 남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언어다.

그 순간 이브는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프로킨 대륙에는 전설이 존재한다.

그 전설의 주인공은 바로 정인우라는 인간이다.

그 인간이 등장한 것은 30년 전이었다.

아직 20살 밖에 되지 않은 이브도 어머니를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이야기다.

30년 전 홀연히 나타난 검은 머리의 인간 정인우.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내뱉으며 프로킨 대륙을 뒤집고 다녔다.

후에 그도 프로킨 어(語)를 구사하긴 했지만, 그 이전까진 언어도 통하지 않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그 인간은 '하늘 사람'이라 일컬어지며 시간이 지날수록 유명세를 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프로킨의 모든 강자를 꺾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던 대륙의 최강자였으니까.

그것도 고작 30년 만에 말이다.

프로킨의 사람들은 정인우를 기억한다.

그래. 기억한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정인우를 말이다.

정인우는 1년 전 드래곤들의 침공을 받고 사망했다.

전설이라 일컬어지는 그조차도 수백 마리의 드래곤들에게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또 다시 하늘 사람이 나타났다.

어느덧 이브는 조심스럽게 남자를 안아들었다. 그런 뒤 마을로 향했다. 즉시 촌장님께 알려야 한다.

'금남(禁男)의 구역이긴 하지만··· 하늘 사람이라면 촌장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 * *

민철은 3시간쯤 전에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민철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지은은 보이지 않았고, 웬 이상한 여자와 할머니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자신은 분명 지은과 함께 공중에서 추락하는 중이었다.

그 기억이 맞다면, 자신은 분명 사망했을 터다.

아니 그럼 여긴 사후세계인가!?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난 민철이었다.

그리고 민철은 오래지않아 깨달았다.

이곳은 사후세계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숨 쉬고 사는 작은 산골마을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이 지구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입고 있는 옷이나, 집의 구조나, 내뱉는 말이나.

모든 온갖 것들이 지구에서 본 적도 없는 것들뿐이었다. 민철은 막연해졌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겠다.

우선 이 마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나오고 있었기에, 당분간 이곳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또한, 희한하게도 마을 사람들은 전부 다 여자였다.

그것도 하나같이 절세미인들.

그랬기에 민철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민철은 지금 이곳 마을을 걸어 다니며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민철은 마을 꼬맹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아이들이다."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아이들.

민철은 가슴이 따뜻해짐과 동시에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 무리의 여자 아이들은 무척이나 예쁘고 귀여웠다.

어째서 여자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을에 아이들이 있나? 라는 의문 따윈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야야야! 오늘은 내가 다 딸 거다!"

"헛소리! 내가 딸 거다!"

아이들은 승부욕이 동했는지 저마다 크게 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귀엽다.

물론 민철은 아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행동이나 몸짓, 그리고 말투로 인해 대략적인 상황이 파악되었다.

이윽고 아이들은 땅바닥에 둘러앉더니 품안에서 저마다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가죽주머니가 열리자 그 안에서는 빨강색 파랑색 구슬이 넘치도록 쏟아져 나왔다.

"어. 어···?"

그 모습에 민철은 멍청한 얼굴을 한 채 손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 봐야 구슬의 모습이 선명히 각인될 뿐이었다.

"딱 대라! 내 구슬 날아간다!"

"으으! 안 돼!"

민철의 판단이 맞다면, 지금 아이들은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세상의 아이들도 구슬치기를 하는구나? 라는 의문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민철이 놀란 이유는 저 구슬들 때문이었다.

"미, 미친. 저건 스킬 볼이잖아!?"

그랬다.

이 작은 산골 마을의 아이들은 지금 스킬 볼로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콧물과 때 구정물로 범벅이 된 가난해 보이는 산골 아이들이 말이다······.

지구에 가면 못해도 하나에 3~4천만 원씩은 할 만한 스킬 볼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

"여, 여기는 도대체 어디야!!!"

민철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꽥 내지르기 시작했다.

* * *

울트라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인우는 저택으로 향하는 대신 서울에 갔다.

서울에 들른 이유는 간단했다.

초인 상점에 들려 스킬을 습득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나에게 유니크 스킬 볼은 크게 의미가 없어.'

레전드 스킬 볼이 등장한 시점이다.

그렇기에 더 이상 유니크 스킬 볼에 목을 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전에야 유니크 스킬 볼의 확률을 위해 스킬 습득을 꺼려하던 인우였다.

스킬의 개수가 많아질수록 랜덤 스킬을 습득하기 불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100% 확률의 레전드 스킬 볼을 얻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의 특성에 맞는 전사 계열의 스킬은 모조리 다 먹어 버리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엄청난 스킬들이 생길 테다.

앞으로 유니크 스킬 볼은 모조리 분신들에게 넘길 것이니, 스킬이 많아져도 상관없는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이득이었다.

스킬의 개수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100% 확률의 레전드 스킬 볼로 랜덤 스킬까지 습득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인우는 볼 것도 없이 서울에서 가장 큰 초인 상점에 들렀다.

인우의 등장에 상점에 머물고 있던 모든 이들이 크게 놀랐다.

이윽고 상점의 사장이 헐레벌떡 튀어나와 인우를 맞이했다.

"어, 어이쿠! 정인우 씨 맞지요!? 와우! 실제로 뵙게 되다니! 굉장한 영광입니다! 아이템을 구입하기 위해 오신 것이겠지요? 찾으시는 물품은 무엇인지요?"

인우는 사장의 태도가 싫지만은 않은지 웃음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전사 계통의 스킬 볼. 다 꺼내다 주시죠."

"···예?"

사장은 멍청한 반문을 하다가 뒤늦게 인우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내 직원들을 향해 황급히 명령했다.

"스, 스킬 볼! 전사 계통! 다 내어 와!"

그러자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장사, 다 했다.

============================ 작품 후기 ============================

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0147 / 0208 ----------------------------------------------

147화 스킬이 너무 많아

상점의 사장이 내온 스킬 볼은 도합 25개였다. 하지만 이중 인우가 이미 배운 스킬이 9개나 존재했다.

해서 인우는 나머지 16개를 구매했다.

액티브 9개. 패시브 7개.

이 스킬 볼들은 전사 계열의 초인이 배울 수 있는 스킬들이었다.

물론, 전사 계열의 스킬은 이보다 더 많다.

하지만 지금 이 상점에 존재하는 스킬 볼들은 이것이 전부였다.

이곳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초인 상점이니, 아마도 이보다 더 종류가 많은 곳은 드물 것이다.

"다 합해서 28억 8400만 원입니다만, 세계 랭킹 1위인 정인우 님이니 깔끔하게 28억에 드리겠습니다요!"

장사꾼들은 꼭 뒷말을 부치곤 한다.

사실 지금 인우에게는 28억이건 300억이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까나?

인우는 단숨에 결제를 한 뒤 스킬 볼들을 받았다.

"그런데, 누구에게 선물을 해 주시려나 봅니다?"

사장이 묻는다.

하지만 인우는 답 대신 바로 그 자리에서 스킬 볼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러한 행동에 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하니 정인우 본인이 사용하기 위해 구입한 것이었나?

"아니, 여태 이런 기본적인 패시브도 배우지 않았던 겁니까?"

자그마치 세계 랭킹 1위 초인이다. 사장이 판단하기엔 당연히 이미 배운 스킬일 줄 알았다.

본인이 직접 습득하기 위해 구매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현재 인우가 삼킨 패시브들은 전사 계열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정도로 필수인 스킬들이었다.

"이런 스킬들도 없이 세계랭킹 1위를..."

도대체가 말도 안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우는 가볍게 무시했다.

이내 인우의 입속으로 패시브 스킬 볼들이 차례로 넘어가고 있었다.

['광기'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대검강화'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전사의 심장'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전사의 끈기'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태풍의 검'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무기의 달인'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방어의 달인'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도합 7개의 패시브.

인우는 새로 생성된 패시브들의 정보를 불러보았다.

.

.

15. [광기 ? 생명력이 닳아갈수록 공격력이 증가합니다.]

16. [대검강화 ? 양손 검 데미지 +10%]

17. [전사의 심장 ? 생명력 자연 회복률이 5% 증가합니다.]

18. [전사의 끈기 ? 육체 저항력이 10% 증가합니다.]

19. [태풍의 검 ? 검의 공격속도가 15% 증가합니다.]

20. [무기의 달인 ? 물리 공격력이 10% 증가합니다.]

21. [방어의 달인 ? 물리 방어력이 10% 증가합니다.]

하나같이 도움 되는 패시브들뿐이었다.

앞으로도 습득할 수 있는 전사 계열의 패시브들이 드랍된다면, 망설임 없이 배울 생각이었다.

이어 인우는 액티브 스킬 볼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염화대검'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점프 찍기'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횡 베기'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박치기'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토네이도 킥'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토네이도 펀치'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연속 베기'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대검 올려치기'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무기 돌리기'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도합 9개의 액티브 스킬.

이 모두가 레벨 업이 가능하다.

인우는 새로이 생성된 액티브들의 정보를 불렀다.

[염화대검 Lv.1 (2%)] ? 순간적으로 엄청난 근력을 폭발시켜 대검을 휘두릅니다. 이에 따라 대검에 염화가 맺힙니다.

[점프 찍기 Lv.1 (2%)] ? 무기를 역수로 쥔 채, 적을 향해 한순간 점프하여 찍습니다.

[횡 베기 Lv.1 (2%)] ? 횡으로 크게 베어 버립니다.

[박치기 Lv.1 (2%)] - 머리를 이용해 적을 타격합니다.

[토네이도 킥 Lv.1 (2%)] ? 강력한 바람을 머금은 발차기를 날립니다.

[토네이도 펀치 Lv.1 (2%)] ? 강력한 바람을 머금은 펀치를 날립니다.

[연속 베기 Lv.1 (2%)] ? 연속으로 적을 베어 버립니다.

[대검 올려치기 Lv.1 (2%)] ? 아래에서 위로 적을 타격합니다.

[무기 돌리기 Lv.1 (2%)] ? 무기를 머리 위로 치켜 들고 빙글빙글 돌립니다.

기존의 스킬까지 합하여 도합 37개. 엄청난 스킬 개수다.

하지만 횡 베기나 박치기는 참 볼품없어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스킬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박치기의 경우 스킬을 배우지 않고도 적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어 박치기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의문이 뒤따를 것이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스킬은 배우지 않고도 모방할 수 있다.

횡 베기를 보자면, 스킬이 없어도 대검으로 적을 횡으로 벨 수 있다. 이것은 그저 하나의 공격 수단일 뿐이니까.

다만 스킬은 의미가 다르다.

박치기나 횡 베기를 배운 뒤, 적을 공격할 경우 자동으로 스킬이 발동된다.

그리하여 행위에 대한 공격력과 스킬에 대한 공격력이 합쳐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스킬을 배우는 것과 배우지 않는 것의 차이다.

또한 인우의 경우 전능자의 한계돌파로 인해 스킬 레벨을 2배 더 키울 수 있다.

99+99인 것이다.

언뜻 우스워 보이는 박치기라도, 99+99레벨이 된다면 파괴력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다시 말해 인우가 내뿜는 행위 하나하나는 모두 다 압도적인 데미지를 뽑아 낼 테다.

그야말로 괴물이 되는 것이다.

진즉에 이렇게 되는 것이 맞았음에도 그리할 수 없었다. 유니크 습득 확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유니크 스킬 볼을 통해 뽕을 뽑을 대로 뽑았다.

타 클래스의 스킬까지 겸비하면서 전사 계열의 스킬 또한 꽤나 많이 보유하게 된 것이다.

특히나 지금 배운 스킬 중에 토네이도 펀치의 효율은 극강일 것이다.

바투에게서 얻어낸 아티펙트를 착용중이지 않나.

맨손의 위력이 유난히 강했던 바투.

녀석이 착용했던 초월의 팔찌는 인우의 손목에 걸려 있다.

때문에, 맨손 전투력 5배를 머금은 이 펀치는 그야말로 핵펀치가 될 것이다.

이 와중에도 사장은 여전히 인우를 바라보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액티브도 드신 겁니까? 패시브야 기본적인 것이니 습득하는 것이 맞지만, 액티브를 그렇게 많이 배워 봐야 마스터 레벨까지 올릴 수 없을 텐데······."

이번에도 인우는 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인우는 함께 온 퀸을 데리고 상점에서 나가 버렸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인우가 나가자 초인 상점을 둘러보던 고레벨 초인이 사장을 향해 넌지시 알려 주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이다.

"사장님. 이런 데서 장사하면서 정보가 참 부족하시네. 정인우. 저 사람 말이죠. 언론에 공개된 것만 해도 22스킬 마스터라고요."

"에, 에에에엑!?"

사장이 눈을 부릅뜬다.

세계 랭커들의 최대 마스터 수치가 5스킬 마스터다.

그런데 22스킬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너무 놀라 턱살이 바들바들 떨려온다.

그러자 설명을 해 주던 고레벨 초인은 흥이 동했는지 몇 마디 더 덧붙였다.

"더 놀라운 건, 그건 그저 공개된 수치일 뿐이라는 거죠. 마스터 스킬이 얼마나 더 있을지는 정인우 본인 밖에 모르겠죠. 오늘도 여기서 스킬을 꽤나 배워 간 거 같은데, 얼마 안 있으면 또 마스터 해 버릴걸요?"

"마, 말도 안 됩니다!"

"이미 중국 전쟁에서 밝혀진 사실이라고요. 중국 전쟁 초기 때는 5스킬 마스터라 밝혀졌는데, 전쟁이 끝날 때 즈음엔 마스터 스킬이 20개가 넘어갔다고 하더라고요."

"미, 미쳤군요······."

언론에서 세계랭킹 1위라고 그리도 떠들어대더니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으이그. 우리 사장님. 장사를 하시려면 정보는 필수입니다! 필수! 쯔쯧."

끝내 초인은 한심하다는 투로 말을 끝마쳤다.

허나, 사장으로선 정말로 처음 듣는 소리였다.

인우의 마스터 스킬에 대한 정보는 초인들, 그것도 랭커급의 초인들만 알고 있는 정보였으니 말이다.

나아가, 각국의 정부와 초인관리국들도 포함된다.

22스킬 마스터.

실상은 28스킬 마스터에 한계 돌파까지 했다.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공개된다면 세상이 뒤집힐 수도 있을 거다.

그야말로 미친 소리였으니까.

지금 사장의 반응만 보아도 명확했다.

* * *

프라시아 마을.

프로킨 남부 끝자락에 위치한 이곳은 금남의 구역으로도 유명하다.

금남. 즉, 남자는 출입을 허용치 않는 지역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이곳은 어린아이까지 모두 여아뿐이었다.

프라시아의 여자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다만 출산을 위한 남자와의 성교는 한다.

하지만 쾌락을 위한 성교는 하지 않는다.

또한, 출산 이후 아이가 남자라면 키우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든 주민이 아이부터 노인까지 여자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들 모두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사실 프라시아 마을은 미의 여신 프라시아를 섬기는 추종자들의 마을이었다.

이들은 프라시아의 뜻에 따라 이곳에 모여 사는 것이다.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 이곳에 남자가 들어섰다.

무척이나 뚱뚱한 남자는, 프라시아 촌장의 손주인 이브가 데리고 왔다.

"할머니. 아니, 촌장님. 저 남자는 하늘 사람이 분명하다고요."

프로킨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검은 머리.

갈색 눈동자.

황토빛 피부.

나아가, 정인우가 사용했다던 언어를 구사하며 정체불명의 옷을 입고 있다.

필시 프로킨 대륙의 전설인 정인우와 같은 인종이었다.

"으음···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지긴 한단다. 그런데 저런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촌장과 이브는 지금, 마을 아이들과 구슬치기를 하고 있는 민철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철이는 이를 악물고 아이들의 구슬을 따먹고 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주제에 손짓 발짓을 해 가며 구슬치기를 했다.

그러나 민철은 오래지 않아 모든 스킬 볼을 잃었다.

가방에 넣고 다니던 전리품 중 스킬 볼이 몇 개 있었는데, 그것을 모조리 먹힌 것이다.

민철은 땅을 쳐 대며 후회했다.

그러다 민철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아··· 인우 형님 보고 싶다."

그러한 중얼거림에 이브와 촌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민철이 내뱉은 한국어를 알아들어서가 아니다.

민철이 언급한 하나의 단어 때문이었다.

"할머니. 저 사람 분명 지금 '인우'라고 하지 않았어요? 잠깐 있어 봐요."

그리 말한 이브가 단숨에 민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물었다.

"정인우?"

이브가 정인우를 언급하자, 이번엔 민철이 크게 놀라 눈을 부릅뜨고 받아쳤다.

"인우 형님을 알아!?"

"정인우?"

"그래! 정인우 형님 말이다! 정인우 형님을 아냐고!"

"정인우···?"

이윽고 이브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둘의 대화는 오로지 '정인우'라는 키워드 하나로 통하고 있었다.

어느덧 이브가 촌장을 향해 말했다.

"이 사람··· 자기가 정인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이상해요. 공중에서 추락하고 있던 것도 그렇고··· 그리고 정인우는 대검을 쓴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 남자도 대검을 차고 있어요. 할머니. 황제 정인우 폐하는 죽었던 것이 아니었나요?"

"나도 모르겠구나. 나 또한 황제 폐하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단다. 다만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이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만약 저분이 정말로 황제 폐하라면······."

거기까지 말한 촌장의 눈빛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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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프라시아의 정인우 (1)

아이들과 수준이 딱 맞아, 덜떨어진 모습을 보이며 구슬치기를 한다. 구슬을 따먹기 위한 승부욕이 대단하다. 대검을 차고 있다. 프로킨 어를 구사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

"흐음······."

하나의 가정이 촌장의 머리를 때렸다.

혹시 황제 폐하는 1년 전 드래곤 침공 때 사망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드래곤들에게 잡혀 그들의 레어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대개 드래곤의 레어는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서 드래곤들에게 갖은 고문을 당하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기억을 잃고, 생존을 위해 간신히 탈출을 한 것이다.

그로인해 공중에서 추락하던 것을 이브가 발견했다면?

그렇다면 저분이 정말로 황제 폐하일까?

기억을 모두 잃은 황제 폐하인 것일까?

이윽고 촌장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저분이 진정 황제 폐하라면, 필시 엄청난 무력을 지니고 있을 게야. 기억은 잃었어도, 무력을 잃진 않았을 테니. 그러고 보니 신체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하다. 우리보다 높은 레벨임은 분명해······."

그 말에 이브도 동조했다.

"황제 폐하는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유흥과 향락에 빠져 버렸다고 했잖아요. 제 상상 속 황제 폐하는 엄청 뚱뚱했다고요. 그렇다면, 저분이 진정··· 아악!"

이브는 답하다 말고 자신의 머리를 짓누르는 손길에 고개를 푹 떨궜다.

촌장이 그녀의 머리를 누르며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흙바닥에 머리를 숙였다.

촌장이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프로킨의 태양!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난데없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두 여자.

그 모습에 잔뜩 당황한 민철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안절부절이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할머니! 아가씨!"

현재 프로킨은 정인우 사망 이후 1년간 황제가 없었던 시점이었다.

그로인해 대륙의 10왕국 국왕들이 황제가 되기 위해 이를 갈고 있는 중이었으며, 대륙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과 같았다.

그런데, 1년 만에 전설이 돌아왔다.

기억을 잃고 언어까지 잃었지만, 그는 살아 있었다.

* * *

프라시아는 엘리 왕국에 귀속되어 있다.

엘리 왕국은 대륙의 10왕국 중, 유일하게 여왕이 통치권을 잡고 있기도 했다.

이곳의 여왕인 엘리는, 프라시아에 정인우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접했다.

그녀가 다스리는 땅에 전설이 나타났다고?

말도 안 된다.

필시 정인우를 사칭하는 사기꾼이 분명했다.

하지만, 소문의 진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정인우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는 그냥 지나칠 정도로 가볍지 않았기에.

엘리는 그 즉시 프라시아에 근접해 있는 레옹 남작에게 명령을 내렸다.

프라시아로 내려가 정말로 정인우가 나타났는지 확인해 보라는 명령이었다.

이에 레옹 남작은 단숨에 사병들을 이끌고 프라시아로 향했다.

"프라시아에 가기 위해선 반드시 악몽의 숲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악몽의 숲을 단박에 돌파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레인저와 함께 간다."

레옹 남작은 병력을 이끌고 악몽의 숲을 돌파하고 있었다.

이제 곧 프라시아에 도착해 소문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 *

"아오 빌어먹을! 여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는 거야?"

지은은 숲속을 헤매며 욕지기를 내뱉고 있었다.

프로킨이고 뭐고 다 좋다.

우선 여기를 나가야 뭐라도 해볼 거 아닌가?

벌써 이틀째 숲속을 헤매는 지은이었다.

샤워를 하지 못해 온몸이 끈적하고, 숲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짜증이 솟구쳤다.

사실 이 숲은 악몽의 숲이라 불리는 악명 높은 곳이었다.

그러나 지은이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악몽의 숲.

이곳은 악명이 자자한 숲이다.

초심자들이 이곳에 진입하면 반드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굶어 죽곤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악몽'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고 말이다.

"으아!! 답답하다 답답해!"

그녀는 참다 참다 못 참겠는지 꽥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데 그때였다.

-카아아아아악!

괴수의 교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난 이틀간 괴수라고는 고블린 한 마리조차 보지 못했는데, 난데없이 웬 교성?

"이건··· 말리오의 교성인가?"

지구의 기준으로 말리오는 10존의 괴수다.

엄청난 맹독을 지닌 뱀 형태의 괴수이나, 지은에게는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지은은 곧바로 그레이트 쉴드를 발동시켰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카아아아악!

팔뚝만 한 뱀이 지은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어 녀석은 비늘을 잔뜩 부풀리더니, 마치 수류탄 파편처럼 비늘을 날려 버렸다.

파바바바밧!

저 비늘은 닿기만 해도 치명적이다.

하지만 비늘은 지은의 쉴드 앞에 무력하게 녹아 없어졌다.

지은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말리오의 머리통을 잡아 채 뜯어 버렸다.

뿌득!

살과 비늘이 찢기는 끔찍한 소음과 함께 말리오의 숨통이 끊겼다.

[경험치를 5,000 획득하였습니다.]

곧바로 들어온 경험치.

그리고 지은은 놀랐다.

"헉! 역시 여기도 헬게이트처럼 10배인 건가?"

본래 말리오 경험치는 500이니, 5천이라면 정확히 10배다.

프로킨의 경험치는 원래 이랬다.

지구가 프로킨보다 10배 더 작았던 것일 뿐.

다만 프로킨의 경우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사냥터가 없었기에, 몬스터의 개체 자체가 현저히 적었다.

어찌 보면 도긴개긴이다.

다만, 지구나 이곳이나 하기 나름이었다.

"음······."

어느덧 지은은 말리오의 전리품은 내팽개치고 사체의 비늘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빨간 고기 덩어리가 드러났다. 이 또한 고기니 먹을 수 있을까?

꼬르륵-

"굶어 죽는 것보다는······."

그리 중얼거린 지은은 화염구를 생성하여 고기 덩어리를 익히기 시작했다.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어 가며 맛있는 냄새가 난다.

그럴수록 지은의 푹 꺼진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다 익은 고기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고기를 입속에 가져가려는 순간.

쐐애애애액-!

어디선가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파밧!

지은은 화살을 피하기 위해 말리오 고기를 놓친 채로 땅을 굴렀다.

그런 뒤 쉴드를 생성했다.

"어떤 개자식이야!! 내 고기! 으악!!"

이틀 만에 접한 괴수 고기다. 또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엄청난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그때.

터벅- 터벅-

숲 저편에서 갑옷과 로브를 걸친 사람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지은은 그들을 노려보았다.

"니들이냐? 내 고기를 잘도···!"

지은의 분노에 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레옹 남작님. 저 여자는?"

"실로 보기 드문 미인이다. 저년은 잡아가는 것이 좋겠군."

그리 말한 레옹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응큼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후우우우우웅-!

언제부터였는진 모르겠으나, 하늘에서 새빨간 운석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니까.

"메, 메테오 스트라이크!?"

"남작님!"

잔뜩 당황한 놈들의 외침에 지은은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너넨 다 뒤졌어."

이내 그녀는 메테오와 함께 양손에 또 다른 마법을 응축시키며 놈들을 후드려 패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무력에 남작과 사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레옹은 남작이라는 직위에 걸맞게 상당한 레벨을 갖추고 있는 초인이었다.

애초에 프로킨은 가진 무력이 곧 권력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약육강식의 세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남작이 별다른 손조차 쓰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하긴.

지은은 지구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랭커이다.

게다가 그녀는, 텍사스의 악녀라 불리지 않나.

지은은 눈이 돌아간 채로 지랄 같은 성격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 * *

여왕 엘리는 믿을 수 없는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뭐라? 프라시아로 향했던 레옹 남작이 사망했다고?"

레옹이 누구인가.

그는 이제 곧 백작이 될지도 모르는 강력한 초인이다.

그 레벨은 200이 넘어섰고, 가진 무력은 엄청나다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사망했다니.

"예. 분명하옵니다. 레옹 남작님은 사망했습니다."

다시금 신하의 말이 들려왔다.

레옹에게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라 일러 프라시아로 향하게 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

이로써 믿을 수 없는 소문의 진위가 진실로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프, 프라시아에 그가 나타났다는 것이 진실이란 말인가?"

그래야만 말이 된다.

레옹은 프라시아에 도착했고, 아마 그곳에서 정인우를 보았겠지.

"본래 폐하께서는 자비가 없는 분. 자신을 확인하러 온 레옹을 살려 둘 리 없지. 그래. 폐하라면 괘씸한 녀석이라며 레옹을 죽였을 것이다. 하아···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정인우 폐하가 정말로 살아계셨던 것인가?"

엘리는 두통이 이는지 관자놀이를 눌러 가며 힘겨워했다.

그러길 한참.

엘리는 뒤늦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허나, 정말로 폐하가 살아계셨던 것이라면··· 그렇다면······. 정인우 폐하는 곧 움직일 것이다. 대륙에 다시금 피바람이 불겠지."

"······."

그녀의 혼잣말에 신하는 침묵했다.

정황상 확실했다.

레옹 남작이 악몽의 숲의 괴수들에게 당했을 리 만무하다.

그러한 강자가 한낱 괴수에게 당할 리가 있겠는가.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프라시아에 엄청난 강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강자는, 정인우일 확률이 농후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전설이 돌아온 것일까?

* * *

"퀸. 더 마셔. 양을 늘려야 한다고."

"그렇지만 배가 너무 부르단 말이에요."

"그래도 마셔."

인우는 지금 퀸과 함께 택시 뒷자석에 앉아 있었다.

스킬 볼 쇼핑을 마치고 강원도 거주지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인우는 이러한 짜투리 시간에도 퀸에게 드래곤 혈액을 먹이기 바빴다.

퀸은 이 택시 안에서만 2리터의 혈액을 마셨다.

그 광경에 택시 기사는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기도 했으나, 저것이 피라고는 상상조차도 못하고 있었다.

끈적한 것이, 아마 토마토 주스이겠거니, 싶었다.

택시 기사가 어떻게 여기건 말건 인우는 여전히 불만스러운지 퀸의 입술을 부여잡았다.

그 손길이 싫지만은 않은지 퀸은 또 배시시 웃는다.

"뭐가 좋다고 그리 웃냐?"

인우의 물음에 퀸은 급히 표정을 고치고 정색했다.

그리고 퉁명스레 말했다.

"웃긴 생각이 났었어요."

본인이 생각해도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다.

하지만 바른 대로 고할 만큼 당찬 여자가 아니었기에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에효. 아무튼. 이따 또 배 꺼지면 말해."

"알겠어요."

답을 마친 퀸은 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웃음이 그칠 날 없다.

인우는 많이도 변해 있었다.

처음 만났던 날.

그날에 인우는 퀸을 굴복시키기 위해 상식 밖의 폭력을 휘둘렀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의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우 또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퀸은 그러한 생각을 하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공간.

택시를 타고 편안히 집으로 향하는 길.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 이게 사랑이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택시는 한참을 달렸고, 그러는 와중에도 퀸은 힐끔힐끔 인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택시는 강원도에 도착했다.

택시 값을 지불한 인우는 퀸을 데리고 내려섰다.

"아, 어제와 오늘은 참 길었다. 얼른 집에 가자고."

인우는 앞장서 걸었다.

그 넓은 보폭의 걸음을, 퀸은 쫄래쫄래 뒤쫓았다.

어느덧 저택에 들어섰고, 인우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삐쭉 내밀고 있는 제라를 발견했다.

제라가 말했다.

"흥. 이 인간들. 항상 나만 빼고 잘도 놀러 다니는구나."

"뭐라는 거야. 근데, 지은이랑 민철이는 어디 갔냐?"

"쳇. 정인우. 널 찾는다고 나갔다."

"날 찾는다고 나갔다고?"

"그래!"

가만, 인우는 분명 울트라 게이트에 갔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분명히 또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겠지.

그렇다면 민철과 지은은 자신을 찾기 위해 울트라 게이트에 진입했다는 말이 되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인우는 곧바로 핸드폰을 들고 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걸리지 않았다.

이번엔 민철에게 걸었다.

민철 또한 마찬가지.

"허, 이 녀석들 설마?"

울트라 게이트에 들어섰다가 프로킨으로 넘어간 것일까?

아직 확신할 순 없었으나, 정황상 모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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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프라시아의 정인우 (2)

정인우를 잡기 위해 벨자므를 보냈지만, 벨자므는 소식이 끊겼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되었다.

분명 얼마 되지 않아 정인우가 벨자므에게 잡혀 와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될 줄 알았다.

그랬기에 에일린은 정인우를 100년 동안 고문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차다.

그런데 벨자므가 실종되다니?

힘이 빠진다.

설마하니 정인우가 지구에서도 힘을 키웠던 것인가?

벨자므와 대적할 정도의 힘을?

아니, 그건 말이 안 된다.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인우가 지구라는 차원으로 도주한 것은 고작 1년이다.

필시 육체가 초기화 되었을 텐데, 힘을 키워 봐야 얼마나 키웠겠는가.

"무언가 잘못되었어. 이번엔 확실하게 끝낸다. 블랙 드래곤 아리다를 보내는 거야. 만일 이번에도 일이 잘못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정인우가 강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모든 드래곤 일족을 이끌고 지구로 간다."

에일린은 그러한 계획을 세웠다. 무슨 수를 써서든, 놈을 잡을 것이다.

* * *

아직 프로킨으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지구에서 힘을 더 키울 예정이었으니까.

그런데 상황이 꼬였다. 민철과 지은이 프로킨으로 넘어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흐음."

방치할 순 없었다.

물론 가만히 놔둬도 둘은 죽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민철과 지은은 서로 의지하며 프로킨에서 잘 적응하지 않을까?

인우 본인조차도 홀로 30년간 살아남으며 최강자가 되었질 않나.

인우는 1레벨부터 시작했지만, 둘은 이미 엄청난 고레벨이다.

필시 잘 적응할 테다.

그런데 왜 이리 걱정이 될까?

"후우······."

아무래도 가족이기 때문일 테다.

지은. 그리고 민철까지도. 모두 인우가 아끼는 이들이었다.

'그래, 가자.'

오래지않아 인우는 결정을 내렸다.

게다가 영영 가는 것도 아니다.

울트라 게이트라는 차원문까지 존재하는 상황이다.

아무런 패널티 없이 갔다가 다시 넘어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담이 될 리 없다.

'가 보자고. 그래.'

과거의 인우는 본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도망쳐 왔다.

그러나 지금의 인우는 가족의 안위를 위해 불구덩이로 뛰어들려 하고 있었다.

물론 멍청하게 불구덩이에서 잿더미가 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 불구덩이를 삼킬 생각이었다.

다시금 프로킨으로 간다면, 최대한 빠르게 황제의 직위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비밀스럽게 움직이며, 모든 무력을 되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드래곤들과의 2차전의 시작이다.

어느덧 인우는 퀸과 제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 저택에 존재하는 모든 짐들. 하나도 빠짐없이 아공간에 쑤셔 넣어."

"응? 어디 가냐 인간?"

"좀 멀리 가게 될 것 같다. 따라오지 않아도 좋아. 물론 따라온대도 말리진 않을 거고."

"흥. 이번에도 나만 쏙 빼놓고 놀려고? 어딘진 몰라도 나도 갈 거다."

"준비할게요."

퀸 또한 별다른 의문 없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저택에 존재하는 모든 물품들이 인우의 아공간에 쌓이기 시작했다.

'프로킨이라······.'

긴 여행이 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 * *

민철은 오래지않아 깨달았다.

절세미녀만 가득한 이곳 마을 사람들은 정인우를 알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태도를 보건대 정인우는 필시 이곳에서 굉장히 유명한 인간이었던 것 같다.

민철은 인우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무척이나 신기하고 색달랐다.

물론 이곳 마을 사람들이 내뱉는 언어를 알아듣진 못한다.

다만 정인우는 이곳에서, 아니 이 대륙에서 대통령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여태까지 느껴왔던 것을 보자면 확실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어쩌다가 나를 인우 형님으로 착각한 건진 모르겠지만······.'

이 사람들은 민철을 정인우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고개를 숙였으며, 엄청난 미녀들이 엉겨 붙었다.

"흐흐."

싫을 리가 있나?

이곳은 파라다이스가 분명하다.

민철은 심지어 이곳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한 심리가 작용한 건진 몰라도, 근래에 들어 민철은 이곳의 언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일단은 말이 통해야 더 재밌게 놀 것 아닌가?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마을의 촌장인 할머니였다.

오늘도 촌장은 민철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민철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폐하. 언제쯤 대륙으로 진출하시는지요?"

황제가 무서워 바른대로 말하진 못했지만, 이를 직역해 보자면 빨리 꺼지라는 의미였다.

촌장으로선 당연한 태도였다.

드래곤의 레어에서 탈출한 채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질 않나?

이 때문에 황제가 도주한 것을 안 드래곤들이 프라시아로 침공이라도 해 온다면?

그때는 제아무리 황제가 이곳에 존재한대도 드래곤들을 막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냥 모조리 다 개죽음이라는 말이다.

이 때문에 촌장은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른 채, 늘 안절부절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빨리 이 빌어먹을 황제 녀석이 대륙으로 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폐하. 이곳은 금남의 구역. 프라시아님의 진노가 오기 전에 빨리 대피하셔야만 합니다."

"아이고. 할머니. 그렇게 말해 봐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해요. 그나저나, 이거 돼지고기인가? 맛있네요."

"폐하. 제발···"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뭔가 찝찝했지만, 그녀 입장에선 드래곤들에게 당한 충격으로 인해 언어까지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즈음 촌장은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밖으로 나온 촌장은 즉시 프라시아를 모시는 신전으로 향했다.

그런 뒤 프라시아의 석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도와주소서. 제발, 제발··· 저 눈치 없는 황제를, 죽이던 내쫓던, 저희에게 다시금 평화를 내려주소서······.'

기도를 마친 촌장은 눈물을 훔치며 석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프라시아의 석상에서 미세한 빛이 세어 나왔다.

기도가 응답한 것일까?

촌장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렸다.

* * *

에일린의 명령을 받은 블랙 드래곤 아리다.

아리다는 그 즉시 울트라 게이트를 타고 지구라는 차원으로 넘어갔다.

아리다 또한 정인우를 무시하고 있었기에 인간의 모습을 한 채였다.

실종된 벨자므. 그리고 도주한 정인우를 찾아야 한다.

아리다는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프로킨과는 많이 다르네."

그리 말한 아리다는 즉시 피의 용언을 시전했다.

이것은 동족의 피를 추적하는 고위급 마법.

"오?"

어느덧 그녀는 동족인 벨자므의 피를 발견했다.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엄청 가깝다.

어?

아니다. 더 가깝다.

아니, 더 가까워진다.

피 냄새는 점차 짙어지며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피 냄새는 정확히 아리다가 서 있는 이곳 울트라 게이트 앞을 향해 오고 있었다.

"벨자므가 오는 건가?"

그러나 예상은 깨끗하게 빗나갔다.

터벅- 터벅-

지금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존재는, 바로 정인우였던 것이다.

"정인우!?"

녀석의 옆에는 뱀파이어 퀸으로 추정되는 괴수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새카만 인간(?)이 보였다.

인우 또한 아리다를 확인했는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에일린이 보냈냐? 또 한 마리만 달랑 보냈네."

모든 짐을 꾸린 채 프로킨으로 향하던 정인우.

그는 뜻밖에도, 가는 길에 블랙 드래곤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인우가 말했다.

"벨자므는 내가 죽였어."

"뭐!?"

아리다는 어찌나 놀랐는지 눈을 부릅떴다.

그렇다면 지금 풍기는 벨자므의 피 냄새는 정인우에게서 났던 것인가?

아니다.

정확히 보자면 정인우의 옆에 있는 뱀파이어 퀸에게 풍기고 있었다.

맙소사.

드래곤의 피를 마신 뱀파이어 퀸이라니.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경우를 보았나?

"정인우. 벨자므는 어떻게 죽인 거지? 너에게 그런 무력이 있을 리 없다. 옆에 있는 퀸과 검은색 인간의 힘인가?"

"······."

인우는 답하지 않았다.

그래, 놈들로서는 여전히 상상조차 불가할 것이다.

1년 만에 급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이윽고 인우는 모든 분신들을 소환했다.

그런 뒤 조용히 읊조렸다.

"넘어가기 전에 파티나 벌이자. 모든 버프 걸어."

그 말에 버프를 지닌 분신들이 마법을 시전했다.

곧이어 인우의 육체에 빛이 맴돌며 버프로 인해 능력치가 상승되었다.

이어서 인우는 본인이 지닌 버프 마법까지 모조리 시전했다.

그런 뒤 물리 공격력을 2배나 올려주는 광폭화까지 시전했다.

이로써 모든 도핑을 끝마쳤다.

인우의 능력치는 놀라울 정도로 껑충 뛴 상태였다.

"이름이 뭐냐. 드래곤."

"뭐? 갑자기 무슨?"

아리다는 여전히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우선 첫째로, 정인우가 부리는 분신의 숫자에 놀랐고,

둘째로는 정인우와 그 분신들이 뿜어내는 막강한 버프에 놀랐다.

고작 1년이다.

이러한 변화는 말이 되지 않는다.

어느덧 인우는 파뇌를 뽑아들었다.

"후우우우우······."

그런 뒤 긴 숨을 토해 내며 광폭 절대검을 시전했다.

이와 동시에 인우의 마나가 절반이나 떨어져 나갔다.

과거 황제 시절에나 사용해봤던 스킬이다.

광전사의 4차 각성 스킬 광폭 절대검.

이 스킬은, 시전자의 대검에 강력한 검강을 덧씌운다.

본래 1 레벨의 절대검은 5초의 지속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지금 인우의 절대검은 마스터였고, 무려 50초의 지속시간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검의 진정한 무서움은 역시나 중첩.

이내 인우는 새파란 검강으로 뒤덮인 파뇌를 치켜들며 아리다를 겨눴다.

"내가 왜 너희 드래곤 녀석들을 싫어하는지 아냐?"

"어쩌자는 거지? 정인우?"

"심심하다고 마을 하나를 통째로 불태워버리고, 인간들을 벌레 취급하고, 그것도 모자라······."

거기까지 말한 인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

과거 에일린의 행태가 떠올라 또 다시 분노가 들끓었다.

어찌하여 지들이 자초해 놓고 지들이 더 성질일까?

놈들이 먼저 인우의 역린을 건들지만 않았다면, 인우 또한 로드의 알을 훔치는 미친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다.

"후우··· 일단, 좀 맞자."

말을 마친 인우는 그대로 광폭 무형검을 시전했다.

후우우우우웅!

순간 대기가 진동하며 보이지 않는 검이 아리다를 찔렀다.

푹! 푹! 푹! 푹!

"크허어어어어억!!"

존재하는 모든 버프.

거기에 공격력 2배의 광폭화.

나아가 마스터 레벨의 광폭 절대검까지 덧입혔다.

이에 따라 현재 인우가 시전하는 광폭 무형검의 위력은 실로 어마무시했다.

아리다는 이 한 방에 단숨에 피를 토해내며 쓰러졌다.

"쿠훕! 저, 정인우! 다시 무력을 되찾은 거였나?"

"됐고, 한 대 더 맞아라."

인우는 또 다시 광폭 무형검을 준비했다.

그러자 아리다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제, 젠장!"

이내 아리다는 볼 것도 없이 울트라 게이트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습에 인우는 여전히 파뇌를 치켜든 채 퀸과 제라를 향해 말했다.

"가자."

인우 또한 울트라 게이트로 들어섰다.

황제 정인우.

그가 1년 만에 다시금 프로킨에 입성하고 있었다.

0150 / 0208 ----------------------------------------------

150화 전설이 돌아왔다 (1)

울트라 게이트에 들어선 인우.

블랙 드래곤 녀석은 이미 꽁지가 빠지게 도주한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목숨에 위협을 받았으니 잽싸게 프로킨까지 도망쳐 버린 것이겠지.

뭐, 상관없었다. 이제 인우 또한 프로킨으로 들어설 것이니 말이다.

인우는 퀸과 제라와 함께, 길게 늘어진 내부를 걸어갔다.

저 앞에 보이는 출구로 나가면 프로킨이다.

감회가 새롭다. 이번엔 강제로 소환된 것도 아니었다.

제 발로 걸어간다. 자신의 의지로 다시금 그곳을 향하는 것이다.

터벅 터벅-

어느덧 인우 일행은 게이트 끝자락에 도달했다.

그러자 제라가 물었다.

"흠. 인간. 들어가기 전에 하나만 묻자. 여기로 나가면 뭐가 나오냐?"

"다른 세상."

"다른 세상이라고?"

"그래. 나한텐 제 2의 고향 같은 곳이야."

그 말에 제라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15년 인생동안 다른 세상이 있다는 얘긴 처음이다."

"······."

제라의 중얼거림에 인우는 침묵했다.

15년 인생이라.

그렇다면 제라의 나이는 15살이라는 이야기.

어느덧 인우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제라를 올려다보았다. 저 거대한 덩치에, 삭을 대로 삭은 녀석이 15살이었다고?

물론, 전신이 새카만 블랙오크이기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워 보이는 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감안한다고 해도 15살이라고 하기엔······.

'하긴······.'

그러다 인우는 저도 모르게 납득하고야 말았다.

블랙오크가 등장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생각을 마친 인우는 자신의 옷깃을 붙잡고 있는 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도 그렇다.

나이조차도 모르고 있었질 않나.

나아가, 이름까지도.

어느덧 인우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퀸, 넌 몇 년이나 살았냐?"

"저요? 잠깐만요······."

말을 마친 퀸은 하얀 손가락을 하나씩 굽히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이기에 저러는 거야?

혹시 할머니인건가? 라는 의문도 잠시.

금세 퀸의 입술이 열렸다.

"18년이요. 18년 살았어요."

어리구나.

지금 인우의 나이가 만으로 50살이었으니, 꽤나 큰 나이 차이다.

"이름은?"

어째 취조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도 퀸은 기쁜 기색으로 답하기 시작했다.

"루시. 루시 퀸이에요."

"루시 퀸······."

인우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읊고 있었다.

그러자 루시 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이름 한번 읊어 주는 것뿐인데도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으니까.

루시는 인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인우는 멋쩍은 웃음을 한번 짓고 입을 열었다.

"들어가자."

그 한마디에 마침내 인우 일행이 프로킨으로 들어섰다.

물컹거리는 게이트 특유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어 곧바로 일행을 맞이한 것은 허공이었다.

먼저 한 발을 뗐던 제라는 난데없이 푹 꺼지는 발걸음에 헛숨을 들이켰다.

"헉!"

보이는 건 온통 새파란 하늘이었고, 발을 디딜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서 루시 퀸 또한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꺄아악!"

반면 인우는 당황은커녕 그 즉시 파뇌를 뽑아들었다.

"뭐야 이거. 공중에다 설치한 거야?"

말까지 내뱉는다.

하긴. 인우는 이보다 더 극심한 상황에도 직면해 보았다. 그러한 인간이 이 정도 상황에 당황하며 허우적거릴 리 없었다.

일전, 이곳을 넘어 추락하던 민철, 지은과 비교해 보아도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쐐애애애애액-!

인우는 빠르게 추락하며 주변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왼쪽에 루시 퀸. 그리고 오른쪽에 제라.

두 녀석은 흡사 거품이라도 물 기세로 겁을 집어 먹고 있었다.

저것이 당연한 태도다.

그들은 날개가 없었고, 그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구름을 뚫고 추락하고 있질 않나.

인우는 즉시 제라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물론 공중이었기에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 없었다.

인우는 2m에 가까운 파뇌를 쭉 내밀며 제라에게 외쳤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무기 잡아!"

"취-------익!"

제라는 간신히 인우의 외침을 듣고 이를 악물었다.

잇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제라는 커다란 손을 뻗어 인우의 파뇌를 붙잡았다.

그 순간 인우는 아공간을 소환했다.

그런 뒤 파뇌를 휘둘러 제라를 아공간에 내던져 버렸다.

"들어가 있어!"

외침과 동시에 아공간을 닫았다.

그리고 이번엔 왼편의 루시 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추락의 공포로 인해 이성이 날아간 듯 보였다.

그나저나, 그녀와의 거리가 제법 멀다.

"후우!"

인우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그런 뒤 오른편 허공을 향해 스윙을 날렸다.

후웅!

그 강력한 풍압으로 인해 인우의 육체가 왼편으로 단번에 이동됐다.

그제야 인우는 루시 퀸과의 위치를 맞출 수 있었다.

인우는 볼 것도 없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인우의 손길을 느낀 퀸은 그제야 겁먹은 표정이 풀렸다. 인우는 왼손으로 그녀를 안고, 나머지 오른손으로 파뇌를 휘둘렀다.

방향은 아래.

그리고 스윙을 날렸다.

후웅!

강력한 풍압과 함께 육체가 서서히 추락했다.

그렇게 얼마쯤 스윙을 날렸을까.

척.

마침내 인우는 지상을 밟을 수 있었다.

* * *

블랙드래곤 아리다.

그녀는 지구로 들어섰다가 골로 갈 뻔했다.

정인우의 무형검에 몇 번 더 타격을 입었다면 정말로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것은 보통의 무형검이 아니었다. 마스터 레벨, 그 이상이 분명했다.

하지만 무형검 마스터라니?

아리다가 알기로 무형검은 3차 각성 스킬이다. 즉, 300레벨 스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300레벨의 스킬을 마스터했다고?

그렇다면 지금 정인우의 레벨은 몇이란 말인가?

나아가 300레벨 때의 스킬도 마스터했다면, 그 이전 구간의 스킬들 또한 마스터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랬기에 아리다는 도주를 택했다.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울트라 게이트를 타고 단숨에 프로킨을 향했던 것이다.

아마 정인우가 프로킨까지 쫓아오진 못할 것이다.

"빌어먹을 황제 놈! 설마하니 힘을 키웠을 줄이야! 어서 빨리 로드에게 알려야 해!"

그렇다.

알려야만 했다.

현재 로드를 포함한 모든 드래곤 일족은 정인우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아리다는 로드의 레어를 향해 단숨에 비행했다.

이윽고 도착한 레어.

에일린은 얼이 빠진 아리다를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기 시작했다.

"정인우는?"

"로드. 큰일이야!"

아리다는 지구에서 정인우를 마주했던 일부터 벨자므의 사망까지.

그리고 현재 정인우가 지닌 무력까지 낱낱이 보고했다.

아리다의 보고를 모두 들은 에일린의 얼굴이 굳었다.

에일린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아리다는 벨자므보다 고룡이다.

그러한 드래곤이 착각했을 리 없다.

정인우가 힘을 되찾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아니, 어쩌면 과거보다 더 강한 힘을 얻게 된 것 같다.

"벌레 같은 인간주제에······."

그렇게 중얼거린 에일린은 뒤늦게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나 로드 에일린. 로드의 권한으로, 현시간부로 모든 드래곤 일족을 소환한다. 목표는 지구. 그 안에 숨어 있는 정인우다."

수백 마리의 드래곤들.

그들은 로드의 명을 받들어 지구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빌딩만한 나무들이 즐비한 곳. 그로인해 숲은 빛 한 점 없이 캄캄해야 하건만, 형광의 빛으로 가득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 숲에 피어난 꽃들은 스스로 빛을 발한다.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숲이었다.

하지만 겉모양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이곳은 매우 악명이 높은 숲.

'추락하자마자 악몽의 숲이라니. 나 원 참.'

인우는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프로킨에서는 제법 유명한 숲이다.

게다가 이곳에 출몰하는 괴수들은 죄다 강한 녀석들뿐이다.

지구와 비교하자면, 10존 이상의 괴수들이 출몰하니 말이다.

물론 인우에게 있어선 별다른 위협거리가 되지 못한다.

어느덧 인우는 퀸을 내려준 뒤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서 제라가 걸어 나왔다.

"하아! 땅인가!"

그 즉시 안도의 말을 내뱉는 제라였다.

-크아암.

아공간에서 나온 것은 제라뿐만이 아니었다.

인우의 애완용 팜이.

녀석 또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인우는 아공간에 물품을 챙기며 팜이 또한 데려왔던 것이다. 여행은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 분명했으니, 팜이를 두고 올 순 없었다.

그러길 잠시.

['염화대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점프 찍기'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

.

이번에 새로 배웠던 9개 스킬들의 레벨이 동시에 올라갔다.

역시나 경험치는 프로킨이다.

절대자의 경험치 마저도 10배가 되었으니, 이곳에서는 5일 가량이면 스킬을 마스터할 수 있을 거였다.

"인간. 이제 어디로 가냐?"

제라가 물었다.

이에 인우는 고민할 것도 없이 답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왕국으로 갈 참이다."

"왕국? 그곳에 가면 어떻게 되는 거냐?"

"가 보면 알아."

일축한 인우는 살벌한 기세를 뿜어냈다.

'엘리······.'

누군가를 떠올리는 인우였다.

악몽의 숲은 남쪽이었고, 이곳 영토의 주인은 엘리 여왕이었다.

인우는 엘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인우가 황제였을 당시, 대륙에 존재하는 10명의 왕들은 모두 다 인우의 통치권 아래에 놓인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인우가 명령하면 따라야 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드래곤 침공 당시, 그때에 왕들은 인우를 배반했다.

인우는 드래곤들의 침공을 막기 위해 왕들을 소환했으나, 왕들은 이를 거부하고 숨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인우는 황궁의 병력만으로 수백 마리의 드래곤들과 대적했었고, 결과는 알다시피 참패였으며 도주였다.

'모두가 너희 때문이었는데.'

인우가 드래곤과 대적한 이유는 왕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드래곤들은 틈만 나면 왕국을 약탈하며 인간들을 벌레취급 했었다.

인우는 이에 굽히지 않았고, 도리어 대적했던 것이다.

하지만 왕들은 인우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싸워 보지도 않고 포기한 채 숨어 버린 것이다.

이윽고 인우는 생각을 그치고 입을 열었다.

"엘리 왕국이라는 곳으로 갈 거다."

인우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 뒤 악몽의 숲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위저드 아이를 시전했다.

3초간 멀리 떨어진 지역을 살펴볼 수 있는 마나의 눈.

이를 통해 악몽의 숲을 돌파하는 인우였다.

* * *

엘리 왕도.

가지각색의 이종족들과 인간들이 존재하는 거대한 도시.

이곳에 창백한 여인과 새카만 오크, 그리고 흑발의 사내가 들어섰다.

흑발의 사내, 정인우는 왕도 중앙에 거대하게 솟아 있는 왕궁을 바라보았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빌딩들과는 비교조차 불가할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

그 무지막지한 위용에 제라와 루시 퀸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반면 인우는 마치 제 영역이라도 되는 마냥 거침없이 왕궁을 향했다.

"인간. 이곳에 있는 녀석들은 날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한다. 어떻게 된 거냐?"

제라로서는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연한 이야기였다.

도시에는 제라보다 더 특이한 종족들이 즐비했으니 말이다.

엘프에서 드워프까지 종족은 매우 다양했던 것이다.

"여기서는 숨어 지낼 필요 없어."

"정말이냐?"

"그래."

그렇게 대화를 나누기도 잠시.

어느덧 인우 일행은 도시 중앙 왕궁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인우는 궁의 출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들을 바라보며 프로킨 어로 말했다.

"여왕 엘리. 안에 있냐?"

그 거친 언사에 경비병들의 눈썹이 대번에 올라갔다가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눈앞의 사내는 여왕을 마치 친구라도 부르는 양 가볍게 내뱉고 있지 않은가?

뒤지고 싶지 않다면 저리 말할 수 없다.

권력자인가?

만일 그게 아니라면 정신병자 일 테다.

전자라면 기면 될 일이고, 후자라면 죽이면 될 일이다.

"아아. 신분패를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신분패가 있을 리 있나.

인우는 그저 다시금 제 할 말을 내뱉었다.

"엘리. 그년에게 당장 나를 맞이하라 일러라."

말을 내뱉는 인우의 몸에서, 순간 엄청난 위엄이 느껴졌다. 경비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재차 물었다.

"신분패를···"

"그런 건 다 잃었지.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황제라는 과거의 직위와, 손톱만큼의 인내심이다. 마지막으로 명한다. 엘리 년을 당장 불러와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 일러라. 이번에도 신분패 타령하며 헛소리를 내뱉는다면, 오늘부로 엘리 왕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거다."

"화, 황제···?"

경비병은 멍청한 얼굴을 했다.

눈앞의 사내는 분명 '황제라는 과거의 직위'라 언급했다.

그러고 보니 프라시아에 정인우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제야 인우의 인상착의를 다시 확인한 경비병.

분명 자신이 과거에 보았던 황제의 모습과 일치했다.

그렇다는 것은······?

"프, 프로킨의 태양,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느덧 경비병은 기절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며 부복했다.

0151 / 0208 ----------------------------------------------

151화 전설이 돌아왔다 (2)

맨땅에 부복한 채 부들부들 몸을 떨던 경비병.

주변은 매우 고요했고, 필시 찰나의 시간이건만 영겁처럼 느껴졌다.

'난 이제 죽은 목숨이다······.'

경비병의 머릿속에는 지난 날 선술집에서 흘려들었던 황제에 대한 소문으로 가득 찼다.

세인들이 황제에 대해 평하길···

폭력적이고, 자비가 없으며, 용서 또한 없다고들 했다.

맺고 끊음이 칼 같고, 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했다.

그러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가운데, 다시금 황제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너에게 뭐라고 명했지?"

그 짧은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귓속을 후벼 판다. 그제야 경비병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외쳤다.

"여, 여왕 폐하를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제, 제가 지금 당장 모셔오겠습니다!"

* * *

일전에 여왕 엘리는, 레옹 남작을 시켜 프라시아로 향하게 했다.

황제가 나타났다는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레옹은 사망했고, 소문은 진실일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엘리가 취한 행동은 침묵이었다.

프라시아에 또 다시 사람을 보내는 멍청한 짓 따윈 하지도 않았다.

그저, 궁에 처박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찔리는 게 있었으니까.

엘리는 1년 전 황제의 명을 떠올렸다.

-모든 왕들은 황궁으로 집결하라.

하지만 엘리를 포함한 10왕들은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드래곤들에게 승리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때문에 왕들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황제를 배반했다.

어차피 황제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뒷감당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황제는 죽었다.

수백 마리의 드래곤들에 의해.

그랬기에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 엘리였다.

"···폐하께서 궁 앞에 직접 행차하셨다 이거냐?"

"그, 그러하옵니다!"

"왜 안으로 모시지 않고 차디찬 밖에서 기다리게 만든 것이냐! 이 극악무도한 놈!"

엘리는 애꿎은 경비병에게 화를 토해 내며 분을 삭혔다.

그럼에도 분이 삭지 않자 엘리는 경비병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이 멍청한 새끼! 죽어 마땅한 놈!"

그렇게 한참이나 경비병을 때리던 엘리는 어느 순간 폭력을 멈췄다.

"하아. 하아. 하아."

사실, 경비병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순간의 울화를 참지 못해 애꿎은 경비병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한 왕국의 수장인 여왕이 말이다.

엘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신관들을 향해 명했다.

"경비병을 치료해 주어라."

이어 그녀는 신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폐하를 모시러 간다. 준비해라."

말을 마친 엘리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거의 뛰다시피 황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래지않아 도착한 궁의 입구.

그곳엔 정말로 황제가 서 있었다.

이윽고 둘의 시선이 닿았다.

그러자 인우는 엘리를 향해 살벌히 중얼거렸다.

"오랜만이다?"

그러면서 인우는 느린 걸음으로 그녀를 향해 나아갔다.

이에 엘리는 볼 것도 없이 황제를 향해 부복했다.

그런 뒤 그녀는 주변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궁이 떠나가라 외치고 있었다.

"프, 프로킨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인우는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선 네년 목을 당장에 쳐 버리고 싶은데······."

"폐, 폐하···!"

목을 친다는 살벌한 경고에 엘리의 신하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황제가 말을 하는데 왕을 지키겠다고 나설 수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황제가 자비를 내리길 바랄 뿐.

이내 인우는 오른발을 엘리의 턱에 갖다 댔다.

그런 뒤 그녀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시선을 마주한다.

이에 엘리는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기에 급급했다.

인우가 씹어 뱉듯 말했다.

"내 눈 똑바로 쳐다 봐."

"폐, 폐하. 제발······!"

"쳐다 봐.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그제야 엘리는 죽을상을 지어 가며 인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우는 그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그랬기에 그 속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왜 드래곤들과 대적한 줄 아냐?"

"······."

"대답해."

"···저희들이 핍박을 받아서입니다. 드래곤들은 인간을 벌레 취급했습니다. 하여, 폐하는 드래곤들에게 굴하지 않고 도리어 대적하셨습니다."

"그걸 아는 새끼들이 감히 날 배반해?"

"폐하······."

"긴말 안 한다. 너는 지금 당장, 나머지 왕 새끼들을 이리로 소집해라. 시간은 5시간 준다."

그리 말한 인우는 엘리의 턱에 댄 발을 뗐다. 그런 뒤 다시금 발을 높이 치켜 올렸다.

그런 뒤 그녀의 얼굴을 내리눌렀다.

그러자 엘리의 얼굴이 맨땅에 닿으며 짓눌렸다.

"후우······."

인우는 이대로 그녀의 머리통을 으깨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앞으로 있을 드래곤들과의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선, 모든 왕들의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왕들이 다시는 배반을 꿈꾸지 못하도록 철저히 말 잘 듣는 개로 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 * *

황제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식은, 민철이 머물고 있는 프라시아에도 닿았다.

이에 프라시아의 촌장은 벙찐 기색이 만연해 보였다.

이게 당최 어떻게 된 일일까?

소문에 의하면 황제는 엘리 여왕을 굴복시키고, 대륙의 모든 왕들을 소집하라 명했다고 한다.

그렇다는 건, 지금 황제가 엘리 왕국에 와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촌장이 알기로 지금 황제는 이곳 프라시아에 머물고 있었다.

기억까지 잃은 채로 말이다.

그리고 그제야 촌장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프라시아에 머물고 있는 저 뚱보는 애초에 가짜였던 것이다.

그래, 사칭이었다.

촌장은 볼 것도 없이 마을 사람들과 한데모여 가짜 황제에게 향했다.

"네 이놈!"

"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할머니!"

난데없는 촌장의 고함에 민철은 크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어가 달랐기에 대화도 통하지 않았고, 민철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뜬금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민철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지금 민철이 알기로 이 마을 사람들은 자신을 정인우라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러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볼 것도 없이 자신의 정체가 발각된 것일 테다.

"제, 제가 사실은··· 인우 형님이랑은 가족과도 같은 사이인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으··· 으으 아악! 아파요! 귀 좀 놔주세요!"

촌장과 마을 주민들은 민철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저 귀를 잡아 뜯을 기세로 민철을 질질 끌어냈다.

"꺼져라! 네 이놈!"

"이, 인우 형님하고 저는 엄청나게 각별하....아악! 쿠훕!"

민철은 변명을 하다 말고 난데없이 쏟아지는 오물에 의해 엉덩방아를 찧었다.

촌장과 마을 주민들은 불결하다며 가축의 똥오줌을 민철에게 내던져버린 것이었다.

그 지독한 냄새에 민철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땅을 기었다.

그렇게, 민철은 프라시아에서 쫓겨났다. 아름다운 여성만 존재하는 파라다이스에서의 삶이 끝나고, 지옥 같은 프로킨 적응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지은은 정체불명의 병사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들은 사실, 엘리의 명을 받든 남작과 사병들이었으나 지은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고기를 땅에 떨궈 버린 개자식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지은은 다시금 악몽의 숲에서 하루를 헤맸고, 그제야 마침내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즉시 뚫린 길을 마냥 걸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도착한 곳은 작은 소도시였다.

"후우. 일단은 이곳에 떨어진 이상 적응을 해야 돼. 정인우 새끼도 했는데, 나라고 못하겠어?"

그리 중얼거리던 지은은 도시의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막연함과 막막함을 느꼈다.

이건 마치 홀로 말조차 통하지 않는 해외로 여행을 온 느낌이랄까?

아니다. 애초 여행이란 다시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그랬기에 더더욱 막연했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지은.

그러다 지은은 도시 내에서 병장기를 두르고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발견했다.

척 보아도 초인이다.

즉, 괴수를 사냥하러 다니는 인간들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이곳은 지구에 비해 경험치가 10배나 높다.

일단 뭐가 됐건 저들을 통해 괴수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필요성이 있었다.

랭커인 그녀가 무슨 정보가 필요하냐 묻는다면, 괴수가 출몰하는 지역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녀는 이곳 도시까지 찾아오며 달랑 한 마리의 괴수를 마주했을 뿐이었다.

그 정도로 괴수의 리젠률이 극악인 곳이다.

지은이야 알지 못했지만, 이곳은 지구와 달리 헬게이트 사냥터 같은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헬게이트 사냥터는 인류가 강제로 철벽을 세워 고립해 둔 곳이질 않나?

그렇지만 프로킨은 그러한 사냥터가 없다.

때문에 괴수는 대륙 곳곳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괴수를 사냥하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했다.

이내 지은은 칼을 든 사내들을 불러 세웠다.

"어이. 잠깐."

그러자 사내들은 지은을 바라보며 주춤거렸다.

상당한 미인.

사창가의 여인인가?

그렇다기엔 너무 예쁘다.

하지만 정황상 사창가의 여인이 분명해 보였다.

사내들은 용병이었고, 도시에 들어설 때면 늘 사창가의 여인들이 들러붙곤 했다.

그러나 사내들은 금세 그 생각을 지웠다.

어느덧 지은이 양손에 마법을 응축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지은은 바디 랭귀지를 이용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난 괴수를 잡고 싶다!"

몸짓을 이용한 그 간절한 설명에 용병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자, 지금 우리 용병단에 끼워 달라는 것 같지?"

"흠. 그런 것 같은데?"

"그런데 어느 왕국 사람이지? 대륙 공용어를 사용하지도 않고."

"신대륙에서 온 건가?"

"일단 대장에게 데려가 보자. 안 그래도 요즘 용병단에 마법사를 구하려던 참이었잖아."

어느덧 사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은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용병단 가입 권유를 위해 말이다.

* * *

프로킨 또한 헬게이트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곳도 지구와 마찬가지로 헬게이트를 클리어 했던 인간은 정인우가 유일했다.

1년 전.

그 당시 10왕들은 헬게이트에 도전조차 하지 않았다. 왕들은 이미 권력의 정점에 섰고, 그 이상의 권력은 황제가 되는 것만이 유일했다.

하지만 황제라는 자리는 정인우가 너무나도 꽉 잡고 있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왕이라는 자리에 안주하는 그들이었다.

그런데 1년 전 정인우가 사라지고, 황제의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이에 왕들은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정인우가 없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중엔 당연하게도 헬게이트에 도전했던 왕들도 존재했다.

다른 왕들보다 강해지기 위해선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것은 목숨을 건 도박일지도 몰랐지만, 왕들은 그 정도로 황제의 자리를 갖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들은 헬게이트를 클리어했으며, 과거 정인우가 그러했듯 막강한 무력을 손에 쥐었다.

이러한 시점에 정인우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은 꽤나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정인우는 과거의 황제였을 뿐이다.

또한 과거에나 강력했을 뿐이었다.

현재는 다르다.

이미 막강한 힘을 얻은 왕들은, 정인우의 복귀를 내켜하지 않았다.

도리어 칼을 갈았다.

정인우를 굴복시키고, 본인들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엘리가 이미 굴복했다는 소식이 퍼진 가운데, 나머지 왕들은 과거의 황제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칼을 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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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십왕국 깽판기 (1)

엘리에게 다섯 시간을 주었다.

그 안에 그녀는 대륙의 모든 왕들을 소집하겠지.

그 다섯 시간동안 인우는 딱히 할 게 없었다.

그저 기다림의 연속이랄까?

그러다보니 인우에겐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제야 인우는 민철과 지은이 떠올랐다.

'이 자식들 분명 프로킨에 떨어졌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회랑을 걷고 있을 때였다.

저쪽 끝에서 엘리의 신하들이 숙덕대는 것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레옹 남작은 참 딱하게 되었군. 이제 곧 백작의 직위에 오를 예정이었는데 말이야."

"어쩔 수 없었던 게지. 프라시아에 계신다는 황제 폐하를 확인하려다가··· 쯔쯧."

저건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인우는 단숨에 회랑을 가로질러 녀석들 앞에 섰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인우.

이에 신하들은 헛숨을 들이키며 잽싸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너네 지금 뭐라 했냐?"

"아, 아··· 그것이······."

두 명의 신하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상황.

그러다 한 녀석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일전에 저희는 프라시아에 황제 폐하가 계시다기에, 확인을 하기 위해 레옹 남작이라는 자를 보낸 적이 있었···"

"뭐라고?"

뜬금없는 헛소리에 인우가 신하의 말을 자르며 묻고 있었다.

프라시아라니?

인우는 그곳에 들른 적이 없었다.

울트라 게이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악몽의 숲에 떨어졌으며, 그 직후 곧바로 엘리 왕국으로 오지 않았던가?

'아. 설마?'

그때 인우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칭한 것 같았다.

그리고 중요한 건, 자신을 사칭한 자의 정체였다.

'김민철 이 새끼. 프라시아로 떨어졌었나 보군.'

그것이 확실하다.

애초에 프로킨에는 인우나 민철이 같은 동양계의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초록색부터 분홍색 머리카락을 지닌 인종이 존재하는 마당에, 인우와 같은 토종 한국인은 그야말로 이종족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프라시아의 주민들은 민철의 생김새를 보고 황제라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프라시아같은 시골 변방의 주민들은 자신의 생김새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들리는 소문으로 프로킨에서 접할 수 없는 인종이라고나 알고 있지.

그러니 민철을 보고 충분히 착각할 수 있었다.

'왕 새끼들이 오기 전까지 프라시아에나 갔다 와야겠네.'

대륙은 넓다.

이는 즉, 시간이 흐를수록 녀석들을 찾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당장 찾을 수 있다면 움직이는 것이 좋을 테지.

엘리를 시켜 5시간 안에 왕들을 소집하라 일러두었으니, 프라시아에 다녀올 시간은 충분했다.

* * *

용병 일을 끝마치고 돌아온 이브.

그녀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가짜였다고요?"

"그래. 오늘, 그 미친 녀석을 당장에 내쫓았다."

"할머니··· 아니, 촌장님. 그는 흑발에 대검을 쓰고 있었다고요. 모든 정황이 들어맞잖아요!"

"이브야. 용병단에는 아직 소식이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구나? 오늘 아침에 진짜 황제 폐하께서 엘리 왕도에 들어섰단다. 폐하께오선 엘리 여왕님을 굴복시키고, 곧바로 나머지 왕들의 소환을 명한 상태란다."

"아······."

"그 뚱보는 사기꾼이었어. 애초에 무언가 이상했질 않니?"

"하아··· 믿기지 않아요."

"이 할미도 오늘 왕도에서 들려온 소식에 확신할 수 있었단다. 진짜 황제 폐하께선, 큰 키와 탄탄한 근육질에 남자다운 강인함이 넘친다더구나. 왕도에 살고 있는 친우가 말해 준 것이니 확실하다."

"폐하가 정말 그런 생김새라면··· 우리 마을에 들어섰던 뚱뚱한 남자는 확실히 사기꾼이었군요."

"그렇지. 또한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몇 마디 말과 손짓 한 번으로 여왕님을 굴복시켰다고 하던데,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던 왕도의 사람들이 말하길··· 폐하가 뿜어내는 위엄과 강인함은, 몇 천 년을 살아온 드래곤과 버금 갈 정도였다고 하더구나,"

"에, 에이··· 아무리 그래도 드래곤과 비슷할까 봐요?"

"진실이란다. 폐하는 이미 1년 전에도 드래곤들과 대적하셨던 분. 또한 그 전쟁에서 살아서 돌아오신 분이다. 그렇게나 대단한 남자가, 그 뚱보였을 리 없지 않니?"

"하아··· 네. 그가 가짜였다는 걸 인정할게요. 하긴, 진짜 황제 폐하가 이런 변방의 시골 마을에 올 리가 없죠······."

이브는 풀이 죽었다.

촌장이라고 이브의 마음을 어찌 모를까?

이브는 어릴 적부터 강한 전사들을 동경해 왔다.

그러한 여파로 인해 와이번 용병단까지 가입한 그녀다.

이브의 우상은 당연하게도 황제였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인간만이 황제의 이름을 갖는다.

어느덧 촌장은 측은한 얼굴로 이브를 바라보았다.

'쯧······.'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난데없이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헉!

-화, 황제 폐하를! 아니, 프로킨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잔뜩 당황한 마을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런데 황제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어느덧 촌장은 이브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촌장과 이브는 보았다.

"저, 저것이 도대체?"

"마, 말도 안 돼!"

-크아아아아아아암!

8미터 가량의 드래곤 등 위에 걸터앉아 있는 늠름한 사내의 모습을.

그 모습이 어찌나 강인해 보이는지, 저절로 무릎이 꿇렸다.

어느덧 이브는 떨리는 음성으로 촌장을 향해 말했다.

"하, 할머니··· 저분이 바로······."

촌장은 대답 대신 잽싸게 땅바닥에 부복하며 황제에 대한 예를 표했다.

오직 이브만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멍청히 서 있었다.

"······."

드래곤과 버금갈 정도의 위엄을 갖추었다고?

그것은 웃기는 소리였다.

황제는, 도리어 드래곤을 길들인 채 그 위에 올라타고 있지 않은가?

드래곤을 강아지 다루듯 하고 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카리스마였다.

그래, 저 정도 카리스마를 뿜어내야 진짜지.

일전에 뚱보는 진정 가짜였던 거지.

동네 꼬맹이들과 구슬치기나 하고 앉아 있었질 않나?

'어쩜··· 저리도······.'

이브의 눈동자는 꿈꾸는 소녀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어느덧 팜이의 등에서 황제, 인우가 내려섰다.

인우는 부복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마을 주민들을 향해 말했다.

"고개 들어."

"······."

그 한 마디에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들렸다.

"하나만 묻자. 이곳에 나와 같은 흑발을 지닌 뚱보와 예쁘장한 여자가 오지 않았냐? 녀석들은 어딨지?"

고저 없는 그 음성은 분노인지 착잡함인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지금 황제는 저를 사칭한 괘씸한 놈을 찾고 있었다.

이에 촌장은 잽싸게 황제를 향해 외쳤다.

"여, 여자는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그 빌어먹을 가짜 화, 황제는 저희가 목숨을 걸고 내쫓았나이다! 똥물을 퍼붓고! 욕까지 해 주었나이다!"

칭찬을 바라는 어투였다.

그러나 인우는 이번에도 고저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디로 내쫓았냐?"

"그, 그저 마을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길을 가다 괴수의 먹이가 되라지요!"

"찾아라."

"에, 네?"

"찾으라고. 내 가족이니까."

가족.

그 한마디에 촌장은 다급히 제 입을 가로막았다.

지금 황제가 뭐라고 했는지 쉽사리 믿기지 않는다.

가족이라고?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황제의 가족을 향해 똥물을 퍼붓고, 괴수의 먹이가 되라며 저주를 퍼부은 것인가?

실언도 이런 실언이 없다.

어느덧 촌장은 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성대가 찢어져라 소리쳤다.

"주,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그건 내 가족을 찾지 못했을 때 얘기고. 책임지고 찾아내라. 다시 온다."

그리 말한 인우는 걸음을 옮겨 다시금 드래곤의 등 위에 올라탔다.

-크아아아아아암!

드래곤이 포효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이브는 저도 모르게 황제를 향해 뛰어나갔다.

그것은 순전히 본능이었다.

"화, 황제 폐하!"

그 외침에 인우의 시선이 이브에게로 향했다.

"뭐냐?"

"저, 저는 와이번 용병단 소속 이브입니다. 오랫동안 폐하를 존경해 왔어요!"

인우는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내 팜이를 타고 날아올랐다.

재수 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프로킨에서만큼은 저런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다.

감흥이 있을 리 없다.

인우는 그저 가벼운 무시와 함께 왕도를 향할 뿐이었다.

다시금 왕도로 가면, 엘리와 약속했던 5시간이 되어 있을 테다.

왕 새끼들을 보러 가야 한다.

* * *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엘리는 무릎을 꿇은 채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앞에는 왕좌에 앉아 있는 인우가 보였다.

이곳은 엘리의 왕국이고, 왕좌는 그녀의 자리이건만, 황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저곳에 앉아 있었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이런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아······.'

엘리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선뜻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를 향해 인우의 차가운 음성이 쏟아졌다.

"다섯 시간 지났다. 바른대로 고해라. 이 새끼들이 왜 안 오는지에 대해서."

"폐하··· 그것이······."

"말하라고. 질질 끌지 말고."

"그럼··· 소신, 있는 그대로 말하겠나이다. 저를 제외한 나머지 아홉 명의 왕들이 말하길. 루인 왕국의 루인 왕은 헬게이트 클리어 때문에 몹시 바쁘니, 볼일이 있다면 폐, 폐하께오서 직접··· 오라 말하였고, 루피안 왕국의 루피안은 폐하가 무너진 황궁을 재건하면 아주 조금은 생각해 보겠다 하였고, 이밖에도 빌퍼와 프로우스는, 걷기가 귀찮으니 마차를 보낸다면 생각해보······."

엘리는 왕들이 내뱉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인우는 끝까지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의 말이 끝난 순간······.

뿌득-

인우가 왕좌의 팔걸이를 움켜쥔 채 으깨버렸다.

그 광경에 엘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인우의 분노에 겁을 집어 먹어서라기보다는, 저 왕좌를 맨손으로 아작 낸 인우의 괴력 때문이었다.

'저, 저건 왕국에서 제일가는 드워프 장인이 만든, 결단코 부서지지 않는 왕좌이건만······.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무력을 지녔기에, 맨손으로 저것을 깨부순단 거야!?'

지금 그녀가 느끼는 놀라움은 두려움을 앗아갈 정도로 강렬했다.

그러길 잠시.

인우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한번 해보자 이거지?"

인우는 단숨에 왕좌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런 뒤 곧장 파뇌를 치켜들었다.

이에 엘리가 다급히 물었다.

"폐하! 왕들에게 직접 가실 참입니까? 마차를 대령하겠습니다!"

"됐다."

짧게 일축한 인우는 아공간을 열고 그 안에서 뛰어 놀고 있는 팜이를 불렀다.

-크아아아아아암!

인우의 부름에 아공간에서 튀어나온 팜이.

팜이는 이제 제법 드래곤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엘리는 인우가 불러낸 팜이를 바라보며 크게 놀랐다.

"드, 드래곤!?"

그녀가 놀라거나 말거나 인우가 물었다.

"아참, 방금 말했던 왕들 중에, 내가 황궁을 재건하면 생각해 보겠다는 왕 새끼가 누구였지?"

개인적으로, 걷기 귀찮으니 마차를 보내라던 새끼보다 더 기분이 나빴다.

황궁을 재건하면 생각해 본다고? 도대체가 미친 건가?

첫 번째 타자는 그 새끼다.

"그, 그리 말했던 왕은 루, 루피안 왕입니다. 어쩌실 참입니까?"

"당연한 걸 묻냐? 그 새끼 왕궁을 다 때려 부수고, 다시는 그 따위 헛소리를 내뱉지 못하게 이빨을 모조리 뽑아 버릴 생각이다."

저건 진심이다.

엘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 루피안을 애도(?)했다.

0153 / 0208 ----------------------------------------------

153화 십왕국 깽판기 (2)

남부 끝자락의 루피안 왕국.

루피안 왕은 침실에서 궁녀들을 끼고 놀고 있었다.

발가벗은 채로 해괴망측한 춤을 추며 술을 들이 붓는다.

인생 뭐 있나?

그냥 즐기는 거지.

"와, 와하하하하하!"

루피안은 호탕하게 웃으며 여전히 춤을 췄다. 그럴 때마다 그의 물건이 덜렁댔다.

그러길 잠시.

똑 똑-

-폐, 폐하. 다급히 전할 보고가 있나이다.

문 바깥에서 신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자 루피안은 소리를 꽥 내질렀다.

"뭐냐! 내가 궁녀들과 거사를 치를 때는 분명 근처에도 오지 말라 명했거늘?"

-하, 하오나!

"하······이놈이 정말로."

그리 중얼거린 루피안은 맨몸으로 문을 향했다.

신하의 멱살이라도 잡고 뺨따귀를 갈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다시금 문밖에서 신하의 외침이 쏟아졌다.

-지, 지금! 엘리 왕국에서, 화, 황제 폐하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합니다!

"뭐라고?"

-화, 황제 폐··· 하가!

"황제? 지금 이 대륙에 황제 따윈 없다! 똑바로 보고해라 네 이놈!"

이를 뿌득 갈며 외치는 루피안.

그 외침에 문 밖의 신하는 그의 의중을 눈치 채고 망설이는 티가 역력해 보였다.

그러자 루피안이 신하를 다그쳤다.

"똑바로 보고하라 일렀다!"

-···화, 아니··· 저, 정인우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옳지. 그래, 정인우 녀석이 이리로 오고 있다 이거지?"

-그, 그러하옵니다.

"하하하하하! 그 멍청한 자식이 명을 재촉하는구나!"

루피안은 배까지 부여잡은 채 낄낄거렸다.

그 웃음에 뒤편에 있던 궁녀들은 루피안을 따라서 똑같이 깔깔거렸다.

"아, 아하하학! 미치겠군. 그래, 어디 한번 개망신을 당해 보아라. 건방진 놈."

한참을 웃던 루피안은 이내 정색을 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런 뒤 궁녀들을 시켜 옷을 입었고, 갑옷과 무기를 무장했다.

모든 무장을 끝마친 루피안이 궁녀들을 향해 말했다.

"자, 이럴 게 아니라, 너희들도 오너라. 과거의 황제가,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질질 짜는 모습을 구경해야 할 것이 아니냐? 아니 그러냐?"

"맞습니다, 폐하. 폐하의 앞에서 정인우는 빌빌 기겠지요! 소녀들도 그 통쾌한 장면을 꼭 보겠나이다!"

"그래, 보아라! 하하!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왕도의 국민들을··· 여봐라!"

한참을 말하던 루피안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문밖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예의 신하가 다시금 답한다.

-예. 폐하.

"너는, 지금 당장 왕국의 국민들을 광장으로 모조리 모이게 만들어라. 나는 그곳에서, 국민들에게 나의 위대함을 보여 줄 것이니라."

-며, 명을 받들겠나이다.

"아직 안 끝났다. 또한, 왕국의 기사들과 병사들 또한 광장에 집합시키거라. 무를 추구하는 병졸들에게, 정인우와 나의 대결은 커다란 귀감이 될 터. 또한, 나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모조리, 아주 싸그리! 몽땅! 집합시켜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이윽고 루피안은 궁녀들을 양 옆구리에 한 명씩 낀 채로 광장을 향했다.

루피안의 입가에는 벌써부터 승리의 도취감이 가득해보였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루피안은 지난 1년간 많은 숫자의 헬게이트를 클리어하며 힘을 쌓았다. 이에 따라 엄청난 레벨 업을 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현재 루피안은 8스킬 마스터였다.

이는, 1년 전 정인우가 5스킬마스터였던 것보다 3개나 더 높았다.

물론 그럼에도 정인우는 약하진 않을 테다.

정인우가 무서운 점은 타고난 전투 센스. 나아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강철 같은 심장을 지녔다는 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상관없다.

'올 테면 와 보아라. 혼쭐을 내주고 모든 국민들 앞에서 개망신을 줄 테니.'

이미 판은 키울 대로 키웠다.

애초에 루피안은 상황이 이리될 줄 알고 있었다.

정인우의 명을 받들 생각이 없었기에, 황궁을 재건하면 생각해 보겠다며 말도 안 되는 주문을 내뱉었던 것이다.

그가 아는 황제라면 필시 화를 참지 못하고 달려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다른 왕들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이제 모든 왕들은 예전처럼 정인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덧 생각을 끝마칠 무렵. 루피안은 광장에 당도해 있었다.

그러자 벌써부터 소식을 듣고 온 국민들이 엄청나게 몰려 있었다.

루피안은 그 인파를 향해 손을 흔들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듣거라! 너희는, 오늘 과거의 황제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빨이 뭉텅이로 빠져나가고, 피떡이 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 외침에 국민들은 하나가 된 듯 크게 외쳤다.

"국왕 폐하 만세!!"

"하하하하하하하!"

이윽고 광장 중앙에 커다란 무대가 마련되었고, 인파는 시간이 갈수록 크게 불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즈음······.

-크아아아아아암!

커다란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광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모든 이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드, 드래곤이다!!"

"젠장! 드래곤이 침공해온다!"

"아니야! 다들 진정해! 이곳엔 왕국의 정예 기사단들과 국왕 폐하까지 계신다! 한 마리쯤은 어떻게든 괜찮을 거야! 폐하를 믿어!"

아니나 다를까, 루피안은 크게 동요한 기색이 없어보였다.

대략 8미터쯤 되어 보이는 드래곤이다. 저 정도 크기라면 막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고작 50년이나 살았을 헤츨링이려나?

혼자서도 충분할 지경이다.

그래서일까?

루피안은 도리어 잘됐다는 생각을 했다.

동요하는 국민들 앞에서, 단신으로 드래곤을 막아 내는 모습을 보이는 거다.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다.

헤츨링을 죽이게 된다면 드래곤 녀석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으니까.

겁만 주자.

딱 그 생각으로 임했다.

이내 루피안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런 뒤 공중에 있는 드래곤을 향해 날렸다.

쐐애애애애애애액!

이 정도라면 맞고서 지레 겁먹고 도주하겠지 싶었다.

그런데 웬걸?

쐐애애애애애애액!

드래곤의 등허리 위에서 난데없이 돌멩이 날아드는 것 아닌가?

이내 돌멩이는 루피안의 단검과 정확히 충돌했다.

카드드드득!

그런데 놀라운 건, 일개 돌멩이 따위가 루피안의 단검을 쪼갰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쪼갠 뒤에도 힘이 남은 돌멩이는 루피안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쏘아져오고 있었다.

"저, 저게 대체!"

저따위 돌멩이가 메테오라도 되는 건가?

루피안은 기겁을 하며 육체강화를 시전함과 동시에 돌멩이를 막아 냈다.

카아아아아앙!

"크읍!"

엄청난 위력. 절로 이가 갈릴 지경이다.

'이건 필시 암기투척이다. 이 정도라면 마스터. 아니, 그 이상이다. 그렇다면 히든 스킬인가? 도대체?'

쿠구구구구구궁-

어느덧 드래곤이 지상에 내려섰다.

그러자 그 등 위에 타고 있던 사내의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그는 바로 정인우였다.

"······."

내려선 인우는 그 즉시 눈을 굴리며 사방을 훑었다.

순간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이에 루피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기, 기세가 어찌 저리?'

"아, 아하하하! 왔구나. 정인우!"

그러나 내심과는 다르게 허세를 부리는 루피안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 판을 벌릴 대로 벌렸다. 왕도의 모든 국민들과, 왕국의 기사단. 그리고 병사들까지 싸그리 모아왔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건 그야말로 개망신이다.

또한, 기세가 강하다고 육체까지 강한 건 아니다.

정인우는 그저, 1년 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적어도 루피안이 보기엔 그랬다.

"정인우. 지금 당장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그 말에 인우는 루피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서 더 이상의 살기는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잠잠했다. 마치, 폭풍 직전의 고요함처럼.

터벅 터벅-

이윽고 인우가 루피안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 광경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모여 있는데, 바늘 하나 떨어진대도 그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꿀꺽-

루피안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어 루피안은 자신의 무기인 에페를 빼들었다.

그의 깡마른 육체와 제법 잘 어울리는 무기였다.

그리고 무기를 치켜든 채 정인우를 겨눴다.

"······."

문득, 에페를 쥔 손이 떨려온다.

왜 떨리는 것일까?

영문조차 알 수 없었다.

인우는 여전히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이윽고 둘의 거리가 에페의 길이만큼 가까워졌다.

그제야 인우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때서야 처음으로 인우의 입술이 열렸다.

"감히 나에게 칼을 겨눠?"

"입으로 싸울 참이더냐? 무기를 빼라. 정인우."

"정인우?"

인우는 녀석이 내뱉은 호칭을 곱씹으며 피식 웃었다.

이 새끼 정말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쐐액-!

루피안의 에페가 불식간에 찌르기를 해 왔다.

거리는 지척.

피할 도리가 없을 거다.

그런데······.

후웅-!

순간 인우의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에페의 측면을 후려쳤다.

테에에에에엥!

새로이 배운 토네이도 킥이었다. 이 발차기로 인해 에페의 칼날이 오징어처럼 볼품없이 꿈틀댔다.

에페를 쥔 손아귀가 아려올 지경이었다.

"이익!"

루피안은 크게 당황했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뱃가죽 힘 꽉 줘라. 내장 역류한다."

인우는, 루피안의 당황을 비집고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을 했다.

이번에는 주먹이었다.

무기조차도 뽑지 않은 맨주먹 말이다.

그런데 주먹에서 풍기는 기세가 드래곤 뺨따귀를 갈길 정도로 맹렬하다.

파바바바밧! 퍽!

"쿠헉!"

루피안은 인우의 토네이도 펀치 한 방에 게거품을 물며 배를 부여잡았다.

도대체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위력이란 말인가?

지금 인우는 무기조차도 빼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이런 위력을?

루피안으로서는 납득조차 불가능한 파괴력이었다.

'젠장!'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던 루피안.

그는 곧바로 전력을 다하기 위해 마스터 레벨의 스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현재 루피안이 지닌 스킬 중 가장 강력한 '절명검'이었다.

이 스킬은 그 이름답게 대상을 절명케 만들 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헬탑의 보스들 또한 이 스킬로 처리했다.

그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루피안이 확실히 믿고 있는 스킬이었다.

이내 루피안은 양손으로 에페의 손잡이를 쥔 채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한 루피안을 보고도 인우는 땅바닥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이노오옴! 날 무시하는 거냐!"

놈의 외침에도 인우는 귓구멍을 후비며 여전히 땅을 훑는다.

그러다가 인우의 눈동자가 단숨에 빛나기 시작했다.

그 시선 끝자락에는, 왕도의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할 때 썼을 것으로 유추되는 나무 막대기 하나가 보였다.

인우는 그 나무 막대기를 쥐어들었다.

"이 정도면 뭐, 죽지는 않겠지."

"뭐, 뭐라!?"

루피안은 전력을 다해 최강의 스킬을 준비하건만, 인우는 무기를 빼 들기는커녕 애들 장난감인 막대기를 들고 있다.

그 모습에 루피안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상황이 이 즈음 되자, 이곳에 모인 국민들은 저들끼리 숙덕대기에 바빴다. 안 된다. 이대론 웃음거리가 될 뿐!

루피안은 이를 악물고 에페를 치켜든 채 절명검을 날렸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인우는 광폭화와 동시에 광폭 절대검을 나무 막대기에 입혔다.

그러자 나무 막대기에는 새파란 불꽃처럼 보이는 거대한 검강이 일렁거렸다.

"아, 광폭화는 괜히 썼나. 죽으면 곤란한데."

그렇게 중얼거린 인우는 이쪽을 향해 공격해 오는 루피안을 향해 목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최대한의 가벼움을 담아 광폭 무형검을 날렸다.

"······!!"

그 어떠한 소리도 없었다.

그저, 어느 순간 루피안의 무릎이 꿇려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검에 당한 루피안은 넝마가 된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단 일격이다.

그 일격에 루피안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러한 광경에 국민들은 양손을 들어 입을 가린 채 크게 놀랐으며, 정예 기사단과 병사들은 말 같지도 않은 황제의 전투력에 허탈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나아가, 루피안의 궁녀들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황제라는 이름은 그저 과거의 명예였을 뿐이라 여겼던 그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터무니없는 강력함은 뭐란 말인가?

어느덧 황제는 나무 막대기를 어깨에 두른 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피안. 내가 황궁을 재건하면 소집에 응하겠다 말했지?"

"크, 쿠훕!"

"1년 전 배신으로도 모자라서, 감히 그 따위 헛소리를 지껄여? 아가리 벌려라. 다시는 그딴 소리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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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십왕국 깽판기 (3)

"그 이빨로 잘도 나를 농락했겠다."

말을 마친 인우가 대뜸 쪼그려 앉아 루피안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곤.

딱!

루피안의 입으로 손을 갖다 댐과 동시에 손가락을 튕겼다.

"끄아아아악!"

손가락을 튕기자 놀랍게도 루피안의 이가 부러졌다.

생니가 부러지는 고통은 엄청났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지."

또 다시 딱!

적당한 힘을 주자 치아가 뿌리째로 빠지기도 했다.

흔들리는 치아도 아니고, 잇몸에 단단히 뿌리 박혀 있는 건치다. 그러한 치아가 쌩으로 뽑히는 고통은 엄청났다.

특히나 어금니가 뽑힐 때는 세상이 두 쪽 나 버리는 것만 같았다.

"끄아악. 으어!"

"걷기가 귀찮으니 마차를 보낸다면 생각해 보겠다, 헬게이트 클리어 때문에 몹시 바쁘니 볼일이 있다면 직접 찾아와라, 무너진 황궁을 재건하면 아주 조금은 생각해 보겠다······."

딱!

"너희들이 이렇게 애타게 나를 부르는데, 오지 않을 수가 있겠냐? 오라 하니 왔다. 세상 천지에, 왕이 불러서 직접 행차하는 황제가 어디 있냐? 이게 말이나 되는 거냐?"

또 딱!

"우우우웁!!"

"내가 너무 물렀다. 너희는 사람 취급을 해 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커허억. 폐, 폐하···"

인우가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루피안의 이는 하나씩 부러지거나 뽑혀 나갔다.

이쯤 되니, 제법 곱상했던 루피안의 몰골은 말이 아닐 지경.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드러나는 이빨은 듬성듬성한 것이, 어딘가 모자란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루피안은 도저히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정말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

그는 정말 정인우를 이길 줄 알았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력은 1년 전 사라질 당시 정인우의 능력을 상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결과란 말인가.

1년 사이에 이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자신이 이렇듯 힘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한 채 지금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저 울고만 싶은 루피안이었다.

'하아······.'

찰나의 순간.

무언가 다짐을 한 듯 루피안은 눈을 들어 정인우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폐, 폐하··· 용서···해 주시옵소서······."

체통? 자존심? 남들의 시선?

그런 건 지금의 루피안에겐 전혀 상관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저 미친 황제가 자신을 죽일지도 몰랐다.

일단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모든 걸 내려놓고 인우에게 용서를 구하는 루피안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은 있는지, '살려 달라'가 아닌 '용서해 달라'고 하는 루피안.

그게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체면 세우기였다.

"음. 용서라······."

인우는 싸늘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정인우.

오래지 않아 인우의 입술이 열렸다.

"그래, 좋다."

······!

인우의 답에 동공이 떨리는 루피안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폐···"

"용서는 해 주겠다만, 그전에······."

루피안의 말을 끊으며, 씨익 웃는 정인우였다.

그 웃음에 루피안은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미소를 보인 인우는 가장 믿음직한 녀석들을 소환했다.

그리고 차례대로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이, 둘이, 삼이, 사이, 오이, 육이, 칠이 그리고 막내 팔이까지.

그들은 소환되자마자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역시나 가장 맏이인 일이가 인우에게 먼저 물었다.

"대장. 무슨. 일인가."

"이 새끼 땅바닥에 대짜로 눕혀서 고정시켜."

"알겠다. 대장."

이미 광폭 무형검에 의해 넝마가 된 루피안은 저항다운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이윽고.

"폐, 폐하··· 무, 무슨······."

"아, 움직이지 마라. 그러다 엄한 다리가 잘린다."

그리곤 인우는 시선을 내려 루피안의 사타구니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등허리에 매달려 있던 파뇌를 빼들었다.

대결을 펼칠 때에도 뽑지 않았던 무기이건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제야 무기를 뽑는단 말인가.

루피안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았다.

"폐, 폐하! 도대체 무슨!"

하지만 인우는 답조차 없었다. 그저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

이윽고.

파뇌를 양손으로 꽉 움켜쥔 채 하늘 높이 치켜든 인우.

인우는 루피안의 벌어진 가랑이 사이를 향해 내려찍기를 꼽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콰득!

"끄아아아아아아악!! 폐, 폐하!!! 끄어어어억"

녀석의 알 두 짝이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땅이 갈렸다.

마스터 레벨, 더하여 한계 돌파까지 해 버린 내려찍기는 루피안의 중요 부위를 흔적도 없이 짓이겨 놓았다.

루피안은 게거품을 물며 끅끅 거렸다.

그것은, 천지가 개벽하고 세상이 멸망하는 듯한 고통이었다.

사실, 무슨 고문을 한다고 해 봤자 지금 이 고통에 비하면 장난 수준일 뿐이었다.

그 광경을 본 루피안의 백성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린 채 '아이고.' 소리만 연신 내뱉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던 그 광경 이후로 대륙엔 이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황제를 잘못 건들면 두 짝이 날아간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루피안의 비명만이 넓은 광장을 가득 채우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 * *

엘리의 굴복 이후, 루피안까지 정인우에게 굴복했다.

자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정인우의 신발을 핥았다는데, 이 정도면 말 다했다.

그제야 남은 8명의 왕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루피안은 헬게이트까지 클리어한 강한 왕이었다.

그런데 정인우는 그런 루피안을 어린애 다루듯 팼다고 한다.

나아가, 용서를 비는 루피안의 생식기를 파괴했다는 대목에서는 절로 가랑이 사이에 힘이 들어가며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다.

그들이 강해졌던 만큼 정인우 또한 힘을 키웠던 것일까?

그렇다면 정인우는 그들이 결단코 넘을 수 없는 벽이란 말인가?

'그래, 넘을 수 없는 벽이라면 차라리······.'

이쯤 되자 나머지 8왕들은 의기투합하기에 이르렀다.

본래는 황제가 되기 위해 서로를 까 내리기 바빴고, 힘을 키우기 바빴던 이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정인우라는 괴물을 몰아내기 위해 뭉친 것이다.

우선 압도적으로 강한 정인우를 몰아내고 다시금 황제가 되기 위해 경쟁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장 큰 영역과 왕궁을 구축하고 있는 루인 왕국에 모였다.

루인, 빌퍼, 프로우스, 제프, 후안, 제스, 페릭스, 필립.

여덟 왕들의 이름이었다.

이들은 정말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각자의 정예 기사단까지 모았으며, 사설 용병단까지 매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목표는 오로지 하나.

<자신들이 배반했던 황제의 보복을 막아 내고, 그 황제를 제거한다.>

이것뿐이었다.

* * *

민철은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나마도 비가 한번 내려서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똥물이 씻겨 나가 다행이었다.

흡사 거지와 같은 몰골.

나아가 끔찍한 냄새.

꼴이 이게 뭐란 말인가.

민철은 눈물을 글썽이며 힘겨운 산행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깊은 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오두막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오두막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다만, 먼지가 얼마 없는 것을 보니 누군가가 살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긴 했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민철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철은 이곳에 마련된 육포와 포도주를 마시며 허기를 달랬으니까.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였다.

터벅- 터벅- 끼익-

오두막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민철은 단숨에 잠이 달아났는지 눈을 부릅뜨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두막 입구에는 얼굴 가득 화상자국이 가득한 사내가 서 있었다.

이 사내 또한 민철과 같은 거지 몰골이었다.

"나, 난 그저 길을 헤매다가 여기서 머문 겁니다!"

어느덧 민철은 사내의 싸늘한 시선에 저도 모르게 항변하고 있었다. 물론 말은 통하지 않았다.

사내 또한 프로킨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

사내는 대답대신 그저 오두막에 마련된 식탁에 앉았다. 민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태도였다.

이내 사내는 육포로 배를 채우고,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그러한 행위 하나하나에도 품위가 담겨 있었다.

도대체 뭐하는 인간일까?

행색은 분명 거지에다가 얼굴은 끔찍한 화상자국으로 가득한데 말이다.

이윽고 사내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화상 자국을 보았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챘겠지. 나는 알렉산더. 용건이 뭐냐, 이방인."

* * *

피닉스 용병단의 대장 피닉스는 심각한 얼굴로 의뢰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정말로 전례에 없던 대전쟁이다.

아니, 대전쟁이라고 부르기엔 조금의 무리가 있었다.

대상은 고작 한 명이었고, 이를 상대하는 병력은 8개 왕국의 규모였으니까.

그렇다.

지금 피닉스 용병단에 들어온 의뢰서는 8명의 왕들이 보내온 것이었다.

목표는 황제 제거.

이를 위한 전쟁 참여 의뢰서였다.

이 대전쟁을 위해 루인 왕국에 합류하는 것이다.

그 의뢰금만 해도 자그마치 10억 골드.

이 정도 금액이라면 위험한 괴수 사냥을 접고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고도 남을 돈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의뢰 내용은 터무니없을 정도의 위험을 동반했다.

자그마치 황제 정인우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이었으니까.

피닉스는 오래도록 고민했다.

그는 20년간 이 용병단을 이끌어왔고, 현재 피닉스 용병단의 명성은 꽤나 드높은 상황이었다.

그 증거로, 왕들조차도 이렇게 의뢰를 해 오지 않는가?

피닉스 용병단은 고작 5명의 전사로 시작했던 용병단이었다.

물론 지금도 5명의 전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불과 며칠 전에 굉장한 마법사 한 명을 가입시켰다.

그리하여 현재 피닉스 용병단의 숫자는 도합 여섯.

어찌되었건, 이 마법사는 어쩌면 대장인 피닉스보다 강력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으나, 그것을 제외한다면 이들과 너무나도 잘 맞았다.

우선은 아름다운 레이디라는 점에서 용병단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여성임에도 거친 용병들과 성정이 비슷할 정도였다.

보통 괴수를 보며 으레 여성들이 그렇듯 '꺅'하고 비명을 내지르는 대신, 이 여자는 괴수 아가리에 헬파이어를 꼽아 버리곤 했으니까.

간혹 개차반 같은 성격을 보이곤 했는데, 피닉스 용병단의 성격이 전체적으로 그러했기에 이곳에 잘 맞는 여자였다.

이름이 아마, 정지은이라했던가.

이윽고 피닉스는 자신을 제외한 다섯 명의 용병 식구들을 모두 소집했다.

피닉스는 텁텁한 목구멍에 맥주를 쑤셔 부으며 첫 마디를 뗐다.

"일생일대의 의뢰가 들어왔다. 의뢰금은 자그마치 10억 골드."

"뭔데?"

"일생일대라니?"

"도대체 뭔데?"

"뭔··· 데?"

마지막 물음은 지은이었다.

그녀 또한 분위기를 파악한 채 프로킨 어를 흉내 낸 것이었다.

그 모습에 피닉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명의 남자와의 전쟁이다. 결과가 어찌 될진 모르겠으나, 우리 쪽 병력은 수십만 대군일 거야."

"무슨 그따위 의뢰가 다 있어? 의뢰금이 10억 골드라 하지 않았나? 상대가 드래곤 로드라도 되나?"

그 물음에 피닉스는 침묵했다.

그리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상대는··· 프로킨의 황제 정인우다."

황제 정인우.

그 한마디에 모두의 얼굴엔 벙찐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지은만큼은 알아듣지 못한 채 여전히 얼굴 가득 의문이 가득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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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알렉산더 (1)

분명 용병대장 피닉스의 입에서 '정인우'라는 단어가 언급됐다.

지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난데없이 튀어나온 이름이었기에 의문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정인우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한 것 같긴 한데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피닉스는 잔뜩 무게를 잡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선택의 시간이야. 동지들. 이 제안, 승낙할 건가?"

피닉스는 자신의 용병단원들을 한 명씩 쳐다보았다.

"승낙하면 10억 골드.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잖아? 난 콜."

"상대는 고작 한 명. 제아무리 황제라 해도 대륙의 여덟 왕들이 그 한 명에게 칼을 겨눴어. 확률적으로 보자고! 황제가 괴물같이 강하다 해도 살아남기 힘들 거야. 나도 콜이다."

"이런 일생일대의 의뢰를 놓칠 순 없지. 나도 콜."

"음··· 그런데 너희들, 그 사실은 알고 있어? 황제에게 칼을 겨눴던 루피안 왕이 궁형(宮刑)에 처해졌다는 거. 어쩌면 우린, 목숨보다 귀중한 걸 잃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지. 그런데 뭐, 내 부랄 값이 10억 골드라면···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콜이다."

기존의 단원들은 모두 콜을 외쳤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단원은 정지은.

피닉스는 지은을 바라보며 바디 랭귀지로 부연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돈. 많~~이! 평생. 논다! 콜?"

뭐라 하건 말건, 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필시 정인우라는 이름이 튀어나왔었으니까.

* * *

인우에게는 늘 충직한 부하가 있었다.

지구에 민철이 있다면, 프로킨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

인우는 여전히 그날을 기억한다.

-폐,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황궁은 곧 함락됩니다! 수백 마리의 드래곤들이 지척까지 다가왔습니다!

인우에 대한 충심으로서, 인우를 대피시키고 홀로 황궁에 남았던 녀석.

아마 그날, 녀석은 죽었을 것이다.

살아남았다 해도,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진 않을 거다.

'프로킨에 오니, 확실히 네가 그리워지네.'

인우는 루피안을 괴롭히며 그런 생각을 했다.

루피안은 그저 자신의 무력에 굴복한 개일 뿐. 충신이라 볼 수 없었다.

현재 인우는 여덟 왕들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놈들은 정예 기사단을 모으고, 사설 용병단까지 매수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인우로서는 충신이 그리워질 수밖에.

"하아."

인우는 짙은 한숨과 함께 왕좌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그 앞에 부복하고 있던 루피안이 다리를 절으며 잽싸게 물어왔다.

"폐, 폐하. 제 왕국의 병력을 모으겠습니다. 나머지 여덟 왕들의 굴복을 돕겠나이다."

"필요 없어."

"폐하···"

하긴.

황제의 무력은 압도적이다.

그런데, 제아무리 그렇다 해도 여덟 왕 전부를 홀로 상대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느덧 인우가 루피안의 사타구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금방 올 테니, 상처나 잘 돌보고 있어."

"가, 감사합니다. 폐하······!"

어느덧 인우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가듯, 뒷짐을 지고 루인 왕국을 향했다.

* * *

민철은 여전히 이 오두막에서 지냈다.

이곳의 주인인 알렉산더라는 사내는 민철에게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여전히 투명인간 취급이다.

지금 민철은 오두막 식탁에 앉아 알렉산더와 마주보고 있었다.

"···음. 저기요?"

"······."

오늘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알렉산더는 육포를 씹으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매우 진중해 보이는 표정.

아니, 사실 끔찍한 화상 자국 때문에 표정을 구분하긴 힘들다.

다만, 그 태도가 진중해 보인다랄까?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어느덧 오두막의 문이 벌컥 열리며 큰 키의 여자가 들어섰다.

민철은 그간 이곳에서 지내며, 저 여자가 알렉산더의 부하임을 알고 있었다.

여자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렉산더 님. 놈들의 집결지는 루인 왕국입니다."

"여덟 놈들이 전부 집결했나? 역시나 겁쟁이들다워."

"네. 전부입니다. 나아가 놈들은 용병단까지 매수했습니다."

"돈에 눈이 먼 새끼들. 의뢰를 승낙한 용병단의 목록을 불러라."

"네. 피닉스 용병단, 황금 사자 용병단, 울프 용병단, 와이번······."

알렉산더는 여자의 보고를 끝까지 들었다. 현재 의뢰를 승낙한 용병단만 해도 20개가 훌쩍 넘어갈 정도.

"음. 우선은, 용병단 녀석들부터 차단한다. 너는 지금 당장 병력을 쪼개서 용병단이 루인 왕국에 닿지 못하도록 막아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님의 옆에 있는 뚱뚱한 남자는··· 아직도 계시는군요."

"아, 이놈? 상관하지 말아라. 나도 상관치 않고 있으니. 이놈은 그냥 바보다. 내가 나의 이름까지 언급했건만, 아무것도 알아먹지 못해. 덜떨어진 녀석이니, 신경 끄도록."

"예. 그런데···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그동안 본격적인 움직임을 취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왜 이제야 움직이시는 겁니까?"

"알면서 묻나? 그분이 오셨잖느냐."

말을 마친 알렉산더의 눈동자가 지난날의 기억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간 그는 힘겹게도 살아왔다. 배반을 행한 10왕들을 홀로 대적하며, 그분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제는 때가 되었다.

"용병단을 막아라. 나는 곧바로 루인 왕국으로 가볼 참이니."

* * *

"젠장. 알렉산더 녀석."

피닉스는 짜증이 솟구치는지 해머에 묻은 핏물을 거칠게 털었다.

"알렉산더라면, 왕족 말살 집단의 수장이잖아?"

"그래. 왕족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그 미친놈 말이다. 지금 우리 앞을 가로막았던 놈들은, 알렉산더의 부하들이다."

"오호. 왕족의 의뢰를 받았으니, 우리도 죽이겠다는 건가."

"프로킨에서 제일 골치 아픈 꼴통 녀석이지. 드래곤 침공에서 살아남았다는 거 자체가 정상은 아니야."

"그것 때문에 전신에 화상자국이 가득하다던데."

"목숨이 끊기지 않았던 것이 용하지. 하. 그 꼴통 놈. 정말 이해가 안 된다니까. 내가 만약 알렉산더였다면, 잽싸게 왕국 하나를 먹었을 거다."

"하긴··· 알렉산더의 무력은 예전부터 유명했으니까. 그렇게나 강하면서, 왜 왕좌를 거절하고 황제의 개로 남았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

이들의 평가대로 알렉산더의 무력은 왕들과 대적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몇몇 왕들에 비하면 도리어 강할 정도.

돈을 따라 움직이는 용병단으로서는 알렉산더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지은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

어느덧 단원 한 명이 뒤편에 있는 지은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은의 마법이 아니었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무력으로 인해 알렉산더의 병력을 무난하게 막았다.

이윽고 피닉스 용병단은 루인 왕국으로 빠르게 발을 옮겼다.

* * *

루인 왕국의 왕도에는 무장 병력들이 까마득히 들어서 있었다.

왕도에 사는 시민들은 이미 대피한지 오래였고, 이곳에는 엄청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상대는 자그마치 황제.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은 여덟 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왕도에 병력들을 배치한 채 왕궁 꼭대기에 서 있었다.

"정인우가 혼자 올까?"

"재수 없는 소리 하지마라 혼자 온다면 그건 더 큰일이다."

"왜?"

"몰라서 묻냐? 혼자서 온다면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잖아. 정인우야 예전부터 잔머리 굴리는 건 알아줬고, 그런 녀석이 혼자 온다면 잔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다는 뜻 아니겠냐?"

"그럼··· 제발 엘리와 루피안의 병력들을 이끌고 오길 바라야 하는 거냐?"

"그것도 좀······."

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먼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즈음.

저 멀리 왕도의 입구에서 누군가가 홀로 걸어오고 있었다.

평범한 복장에 파뇌 하나 달랑 쥐고 오는 사내.

그는 바로 정인우였다.

그러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왕도의 기사들과 용병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놈이 온다! 준비하라!"

그 외침이 왕도를 가득 메운다.

이에 인우의 눈썹이 꿈틀댔다.

"놈?"

좋게 해선 안 되겠다.

물론 좋게 할 생각도 없었다.

인우는 곧바로 분신들을 소환했다.

여덟 분신들은 인우의 뒤에 시립했다.

척 보아도 전방에 적개심 넘치는 적들이 한 가득이다.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분신들은 별말 없이 각자 무기를 빼들었다.

현재 분신들 또한 일전에 유니크 스킬 볼로 인해 스킬이 하나씩 존재하는 상황.

특히나 팔이의 경우 용작두 광전사 소환술을 지녔다.

스킬의 레벨은 프로킨에서 성장한 것 답게 벌써 마스터 레벨.

어느덧 소환된 팔이가 용작두를 소환한다.

소환의 소환.

현재 이 용작두는 팔이 본인보다 더 강력할 정도였다.

급수가 높은 소환술이기에 굉장히 강력한 것이다.

다른 분신들도 서로 버프를 나눠가며 전투준비를 했다.

준비가 끝나자 인우는 여덟 분신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이 왕국,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다 때려 부숴라."

그 말에 분신들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왕도의 병사들을 향해 내달려나갔다.

곧바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왕도는 쑥대밭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크게 한 방 먹여 주마."

분신들을 앞세운 인우는 양손에 무언가를 응축시켰다.

새파랗게 떠오른 그것은 블리자드였다.

현재 블리자드의 레벨은 Master Lv.40.

수치상으로만 보자면 99+40이다.

이건 그냥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정도의 마법이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인우는 패시브 '용언'이 존재하는 상황이질 않나?

용언은 레전드 스킬 볼을 통해 배운 패시브답게 어처구니없는 성능을 지녔다.

모든 마법을 캐스팅 없이 즉시 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인우는 볼 것도 없이 저편에 있는 왕궁을 향해 블리자드를 쏘아버렸다.

후두두두두두두둑!!

맹렬히 회전하는 마나의 얼음덩어리들이 즉시 시전되어 왕궁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러한 광경에 왕궁 꼭대기에 서 있던 여덟 왕들은 헛숨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저, 저런 미친! 블리자드를 캐스팅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쏜다고!?"

"피해!"

"드, 드래곤이라도 되는 건가!!"

놀라기엔 일렀다.

인우의 블리자드는 연달아 2방이 더 쏟아져 왔으니까.

후두두두두두두둑!!

높다랗게 솟아오른 루인 왕궁이, 블리자드의 얼음으로 인해 단번에 파랗게 물들며 깨져 나갔다.

이건 분명 튼튼하게 지어진 성이건만, 인우의 블리자드 앞에선 유리의 성처럼 모조리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콰드르르르륵!

삽시간에 구름 같은 거대한 흙먼지와 함께 궁이 내려앉았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모두의 턱이 빠질 듯 크게 벌어졌다.

세상천지에 저런 얼토당토 않는 위력을 발휘하는 마법이 존재하다니?

왕궁은 보통의 건물과는 다르다.

저것은 프로킨의 마법사들과 드워프들이 만든 가공할 만한 강도를 지닌 궁이다.

웬만한 마법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라고 보면 된다.

대마법사들의 마법저항 마법진을 비롯한 수많은 종류의 진들.

그리고 드워프의 건축 기술이 만들어 낸 최고의 궁이니까.

그러한 궁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무너져 내린 잔해 속에서 여덟 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리자드와 잔해의 파편에 의해 상처 입은 왕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래, 아마도 그들은···

사람을 잘못 건드린 것 같았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이제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인 것이다.

왕들은 이를 악물고 정인우를 바라보았다.

인우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등허리에 매달렸던 파뇌를 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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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알렉산더 (2)

알렉산더는 20개가 넘어가는 용병단을 막기 위해 병력을 보냈다.

물론 모든 용병단을 막지는 못했다.

4개의 용병단은 애초에 진로가 엇갈려 버렸고, 특히나 피닉스 용병단은 알렉산더의 병력을 뚫고 루인 왕국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병력을 뚫다니?

알렉산더로서는 쉽사리 수긍되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이번 전쟁 의뢰를 받은 용병단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완벽히 막아 낼 수 있을 정도의 병력을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피닉스 용병단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변수가 도대체 무얼까?

피닉스 용병단은 고작 다섯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소수정예임을 안다.

또한 놈들은 개개인의 무력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변수는 없었다.

'피닉스 용병단에 무언가 엄청난 녀석이 있는 것인가.'

알렉산더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간 대장 피닉스가 힘을 숨겨 왔다는 가정도 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가정은 신빙성이 없었다.

애초에 용병은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러한 존재들에겐 가지고 있는 무력이 곧 돈이다.

본인들의 강함을 충분히 어필해야만 의뢰가 들어오고, 그래야만 돈을 번다.

그런데 힘을 숨긴다고?

그래, 그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새로운 인물이··· 존재하는 건가?'

지금으로선 이 가정이 가장 유력해 보였다.

예상치 못한 강자가 피닉스 용병단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후우.'

이내 알렉산더는 산을 넘어가고 있는 해를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이제 슬슬 폐하께서도 루인 왕국으로 향하고 있을 텐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알렉산더는 찝찝함을 거두지 못한 채 걸음을 멈췄다.

등골이 서늘한 것이, 확인을 해야만 풀릴 것 같았다.

그것은 오감을 넘어 육감을 통해 느껴졌다.

'변수라······.'

이윽고 알렉산더는 피닉스 용병단의 진격 루트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놈들을 기다렸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놈들은 직접 막아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의 무력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이들을 잽싸게 막고서 루인 왕국으로 향한다.

그렇게 얼마쯤 기다렸을까.

타다다다닥!

저 멀리에서 6명의 사람들이 다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피닉스 용병단.'

알렉산더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익히 아는 다섯 명의 남자들이 먼저 보였고, 처음 보는 여자도 보였다.

이윽고 알렉산더의 시선은 여자에게 정확히 꽂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알렉산더의 눈동자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저 여자가 변수로군.'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저 정도라면 자신이 보냈던 병력들이 맥없이 당했을 수밖에.

'역시. 내 감이 옳았다.'

알렉산더는 그런 생각을 하며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단검을 빼들었다.

그런 뒤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알렉산더의 얼굴을 확인한 피닉스가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허! 알렉산더? 니미랄! 오늘 일진 한번 사납네!"

피닉스의 두툼한 입술을 비집고 곧장 욕부터 튀어나왔다. 그 정도로 짜증이 솟구치는 피닉스였다.

이거 아무래도, 루인 왕국에 가는 게 늦어질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곳에서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피닉스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이윽고 화상자국으로 일그러진 알렉산더의 입술이 열렸다.

"여기까지다. 용병 놈들."

* * *

왕도 중앙에 위치해 있는 궁은 무너졌고, 그러한 궁 주변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력들이 있었다.

분신들은 저마다 무기를 치켜들고 그러한 병력들을 처치했다.

분신들의 손속에 자비란 없었다.

애당초 이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들라는 인우의 명령이 떨어진 상황이다.

평소에는 장난끼 가득한 팔이조차도, 지금은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본신인 정인우의 명령은 분신들에게 있어서 이만큼 절대적인 것이다.

현재 분신들에게 망설임이란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분신들부터 저지해라!"

"니가 뭔데 명령질이야!"

"분신이 말도 안 되게 강해! 미쳤다고!"

"크아아악!"

"어, 엄마!! 크흑!"

"마, 마법도 쓴다! 저 분신은 아이스 볼 마스터다!"

"저 분신 놈은 계속 힐만 쓴다! 저놈부터 죽여! 저놈이 체력을 계속 채워 주니 끝도 없는 거라고!"

"미, 미친! 저, 저 놈의 힐도 마스터야!"

"용작두 광전사를 조종하는 놈부터 죽여!"

반면, 왕도의 병력들은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여덟 왕 각자의 병사들과 용병단까지 합쳐져 있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극한의 상황에, 이들이 똘똘 뭉치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인우는 그러한 전장의 한복판을 걸었다.

무너진 중앙 궁에 멍청히 서 있는 왕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다시금 병사와 용병들의 악다구니가 들려온다.

"제기랄! 놈을 막아!"

왕들에 대한 충성심으로 움직이며, 돈에 매수되어 움직인다. 꽤나 용명한 녀석들도 드문 보였다.

인우의 무력을 직접 보았음에도 말이다.

"대장! 계속. 이동해. 후방은 우리가."

분신들이 인우의 앞길을 뚫어 주었다.

"이야아아아아아!"

"막아! 잡아!"

"움직이라고! 쫄지 마!"

그럼에도 숫자가 워낙에 많았기에 가로막는 녀석들이 끝도 없이 보였다.

인우는 그러한 병력의 바다 앞에 스윙을 날렸다.

후웅-!

파바바바밧!

그러자, 스윙에 의해 생성된 풍압이 수백 명의 병사들을 날려 버렸다.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열린다.

뿐만 아니었다. 현재 99+ 40 레벨의 스윙은, 풍압 이외에 데미지까지 지니고 있었다.

약한 병사들은 전신을 강타하는 풍압에 의해 숨통이 꽉 막히는 느낌과 함께 정신을 잃기도 했다.

"좀 나와라. 너희들의 그 잘난 왕들을 좀 뵈러 가야 하니까."

인우는 잔뜩 비꼬며 날선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저편에 무너진 궁의 잔해 위에서는 여전히 왕들이 서 있었다.

놈들은 돌격해 오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어찌할 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우는 잔해 위로 시선을 들어 그러한 놈들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멈춤 없이 길을 뚫었다.

터벅- 터벅-

그 모습에 이윽고 왕들은 병력들을 내려다보며 고래고래 악을 쓰기 시작했다.

"황제를 막아라!"

"진로를 완벽히 차단해! 뭐하는 거야 새끼들아!"

"황제의 목을 따면 1,000억 골드를 주겠다!"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인우의 힘을 빼놓아야만 한다.

그랬기에 왕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모조리 취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우는 여전히 잔해 위의 왕들을 노려보며 길을 뚫고 있었다.

사방팔방에서 병사들이 몰아닥쳤지만, 인우의 시선은 온전히 왕들만을 향해 있었다.

덤벼오는 병사들은 그저 파뇌만 움직여 도륙했다.

시선은 여전히 변함없다.

그 집요한 시선에 여덟 왕들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 어떠한 상황에도 인우의 고개는 돌아가지 않고 있었으니까.

"각오해라. 개자식들아."

인우는 거친 욕설과 함께 포효를 내질렀다.

복근에 강한 힘이 들어가며 뱃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기합성.

그 포효에 귓구멍을 강타 당한 병사들은 엄청난 두려움을 느낌과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인우는 그러한 놈들의 머리통을 향해 토네이도 킥을 날렸다.

퍼걱!

무언가가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병사의 육체가 썩은 나무처럼 무너졌다.

이어서 인우는 사방팔방을 향해 파이어 볼을 난사했다.

슈욱! 슈욱!

"으아아아아아악!"

이미 이 파이어 볼은 초급 마법이라 불릴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쉽사리 꺼지지 않는 투명한 마나의 불꽃에 몸통을 내어준 병사들은 산채로 타오르며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인우의 눈동자에서도 불꽃이 튄다.

"으라아아아압!"

인우는 전방을 향해 새로이 배운 염화대검을 꽂아 넣었다.

콰드드드드득!

벌겋게 달아오른 파뇌가 엄청난 화염을 머금고 적들을 태우며 양단했다.

적들은 비명을 내지를 성대조차도 두 쪽이 난 채 즉사했다.

"으아아아아! 황제!!"

이성을 잃은 한 병사가 인우를 향해 창을 쥐고 돌격해온다.

이에 인우는 육체 강화를 시전하며 가슴을 내밀어 창을 막았다.

카아아아아앙!

살과 쇠가 부딪혔다곤 믿기지 않을 타격음이 들려왔다.

병사는 당황했고, 인우는 그러한 병사의 당황을 비집고 왼손을 뻗었다.

그리곤 병사의 목을 움켜쥔 뒤 박치기를 날렸다.

퍼걱!

마스터 레벨의 박치기는 병사의 머리통을 흔적도 없이 터트렸다.

이에 인우의 얼굴에는 피와 살점이 들러붙었다.

인우는 아랑곳 않고 눈을 부릅떴다.

그리곤 파뇌를 머리위로 치켜 들고 무기 돌리기를 시전했다.

후웅! 후웅! 후웅!

인우의 파뇌가 풍차처럼 돌아갔다.

이에 따라, 인우가 앞으로 길을 뚫어 나갈 때마다 병사들의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합 37스킬 마스터.

그 위력은 실로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왕들은 그러한 인우의 무력을 눈을 부릅뜬 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잔해에 내려놓은 두 다리가 벌벌 떨려오며 눈동자에 힘이 턱 하고 풀렸다.

그즈음 왕들은 확실하고 또 확실하게 깨달았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병력과 왕들이 힘을 합친대도 막아내지 못할 미친놈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압!"

다시금 인우의 기합이 들려온다.

그러자 왕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 으아!"

"오, 온다!"

어느덧 인우와 왕들과의 거리는 꽤나 가까워진 상태.

이 거리라면 충분하다.

인우는 파뇌를 역수로 움켜쥐었다. 그런 뒤 두 다리를 구부렸다.

"각오해라!"

볼 것도 없이 왕들이 있는 곳을 향해 점프 찍기를 시전하는 인우였다.

파바바바밧!

인우가 땅을 박차자 흙이 튀며, 육체는 곧바로 허공을 껑충 뛰어 넘어 왕들을 향했다.

슈우우우욱!

거리는 단숨에 좁혀졌다.

인우는 역수로 움켜쥔 파뇌를 왕들을 향해 내리 꽂았다.

퍼어어어엉!

왕들은 곧바로 그 공격을 피했고, 파뇌가 꽂힌 자리의 돌파편이 수류탄처럼 사방을 향해 튀었다.

인우는 착지와 동시에 한 손으로 파뇌를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 잔해의 파편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런 뒤 왕들을 향해 날렸다.

"뭐, 뭣!?"

크게 당황한 왕들의 비명과 동시에 파편은 암기투척이 덧입혀진 채 맹렬한 기세로 쏘아졌다.

왕들은 볼 것도 없이 파편을 피했다.

저걸 직격으로 맞는다면 몸에 구멍이 송송 뚫릴 거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 사용하는 스킬마다 마스터, 아니, 그 이상이란 말인가!

그러나 놀라기엔 일렀다.

인우는 곧바로 광폭화와 함께 스트렝스를 사용했다.

[스킬 '스트렝스'로 인해 시전자의 근력이 140 증가합니다.]

이 버프 하나가 28개의 레벨 업 보너스 포인트의 효과를 지녔다.

하긴. 이 스트렝스는 마스터 레벨을 뛰어 넘은지 오래였으니 말 다 했다.

쩌어어어엉!

이와 동시에 인우는 파뇌에 광폭 절대검을 둘렀다.

[광폭 절대검이 발동됩니다. 지속 시간 76초.]

그러자 새파랗게 타오르는 살벌한 검강이 길쭉하게 파뇌를 감쌌다.

그제야 인우의 입이 열렸다.

"죽지는 마라. 너희들은 앞으로 나의 개로서 살아가야 하니까."

말을 마친 인우는 자신을 향해 둥글게 뭉쳐 있는 왕들을 향해 광폭난무를 사용했다.

파바바바바바밧!

인우의 신형이 믹서기의 칼날처럼 맹렬히 돌아가며 움켜쥔 파뇌가 사방팔방을 뒤집기 시작했다.

토네이도와 같은 폭풍이 몰아치고, 잔해의 파편들이 떠올라 으드득 갈린다.

그리고 그 폭풍의 칼날 앞에, 왕들은 속수무책이었다.

99+ 40레벨의 광폭난무는 미친 위력을 보이며 왕들을 사정없이 짓이겨놓았던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이윽고 광폭난무가 그칠 무렵, 전쟁의 끝을 알리는 왕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콰득!

몇 짝이나 되려나.

무언가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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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집 나간 애완 용(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