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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2 핏빛 이빨 토끼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토끼가 죽자 세 마리의 개미들은 곧바로 다음 공격 목표를 찾아 나섰다.

더듬이를 흔들어 감사 표시를 하기는커녕, 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뭔가 기대한 내가 잘못이겠지···

몬스터 개미들과 흡혈 토끼들이 격전을 벌이는 초현실적인 광경의 한복판에서, 나는 새삼스럽게 이 세계가 정말 기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주위의 숲 속에서 엄청난 수의 지네들이 쏟아져 나와 전장에 뛰어들었다.

난전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이 망할 지네들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벌써 한참 동안 이 근방이 전투로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선한 시체들이 전장에 가득하니···

진하고 달콤한 바이오매스의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을 터였다.

던전의 몬스터들에게 이 전장은 마치 농장에서 직배송한 유기농 제품들이 매대에 가득 쌓여 있는 마트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숲이 여느 때와 달리 몬스터들로 포화 상태인 만큼, 경험치와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들도 득실거릴 게 분명했다.

이 근처 어딘가에 내가 지난 번 털었던 것과 비슷한 지네 소굴이 있는 모양이었다.

때아닌 축제를 즐기기 위해 기어온 징그러운 벌레들이 서른 마리는 넘어 보였다.

제기랄, 단단히 꼬였군.

내가 늑대 드래곤에 욕심을 내는 바람에 말도 안 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가장 걱정되는 건 싸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소리를 듣고 더 많은 몬스터들이 몰려들 거라는 점이었다.

모든 경쟁자들가 겁을 먹고 도망칠 만큼 압도적으로 강력한 몬스터가 나타나서 전장을 휘어잡지 않는 이상, 이런 진수성찬을 보고 그냥 지나갈 몬스터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우리 둥지가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싸움의 전리품은 원숭이 나무를 쓰러뜨렸을 때보다 더 풍성할 터였다.

이만한 바이오매스와 경험치라면···

수백 마리의 일개미들이 변이, 심지어 진화까지 가능한 양이었다!

둥지의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뿐만 아니라 먹이가 이만큼 있으면 새로운 개미를 수백 마리는 늘릴 수 있었다.

몬스터들의 치열한 전투를 보는 내 가슴 속에 탐욕이 가득 차올랐다.

눈 앞의 몬스터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경험치와 바이오매스 덩어리로 보였다.

한 조각도 양보할 수는 없었다.

개미 둥지는 그야말로 식탐의 대명사였다.

내가 살던 세계의 작고 평범한 개미들은 지구 전체 동물의 중량 중 20%를 차지했다.

곤충이나 벌레 같은 작은 생물들을 개미만큼 많이 잡아먹는 종은 없었다.

미시 세계에서 개미들은 공포의 대상이자 모든 것을 먹이로 삼는 궁극의 포식자였다.

그런데 이 세계의 몬스터 개미들은 크기마저 컸다.

그러니 단지 작은 벌레나 곤충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생물이 우리의 먹이였다.

그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떠올리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과연 이 세계에 우리 개미와 견줄 만한 종이 존재할까?

만약 우리 둥지가 꾸준히 성장해서 잠재력을 최대로 발휘하면, 과연 당해낼 적이 있을까?

지금 둥지에는 여왕 하나와 일개미 수백 마리가 전부였다.

하지만 여왕 개미가 다섯, 여섯으로 늘어나면?

일개미들이 수천, 수만, 십만, 백만 마리 단위로 불어나면?

우리가 이 던전을 휩쓸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몬스터 군단이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 살던 전생에, 나는 그렇게 폭력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개미가 된 이상...

내 고향은 우리 둥지였다.

그리고 나는 둥지의 형제들이 생존하기를 원했다.

아니···

그저 생존을 넘어 번성하기를 바랐다.

어쩌면 이 전투가 그 시작이 될 수도 있었다.

지네들이 싸움에 참전하자 불쌍한 토끼들은 놈들과 우리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비상 사태를 의미하는 페로몬을 분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근처의 일개미들이 즉시 그 신호를 감지하고 나를 따라 비상 페로몬을 분비했다.

곧 전장이 우리가 발산하는 페로몬 냄새로 가득 찼다.

같은 신호를 거듭해서 감지한 내 더듬이가 폭발할 것처럼 흔들렸다.

비상 사태!

전투다!

둥지를 방어하라!

병력을 소환하라!

비상 사태!

주위가 온통 긴급 신호로 포화 상태가 되었다.

몇몇 일개미들이 전장을 벗어나 개미 언덕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저 친구들이 개미 언덕과 둥지 안까지 페로몬의 자취를 만들어 놓을 터였다.

그러면 모든 개미들이, 심지어 육아실에 있는 일꾼들과 여왕까지 소식을 접하겠지.

어쩌면 지난 번처럼 여왕이 등장할지도 몰랐다.

여왕 개미가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는 건 확실히 위험한 일이었다.

가고일이 공중에서 공격을 퍼붓거나, 예전의 타이니나 거대 악어처럼 커다란 녀석들이 갑자기 나타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어쨌든 여왕이 전투에 얼마나 능한지 난 아직 모르니까.

하지만 그건 감수할 만한 위험이었다!

만약 이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다음 모든 보상을 챙긴다면···

둥지의 힘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의 성장이 가능했다.

지금은 주사위를 던질 때였다!

엄청난 기회 앞에 스스로 동기 부여를 한 나는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전투에 복귀했다.

전장의 외곽에 포진해 있던 개미들이 새로 등장한 지네 무리를 향해 일제히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지글거리는 산성 용액이 공중을 가르고 지네들의 머리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두 무리 사이에 끼어 버린 신세가 된 토끼들은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이제 놈들은 사냥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처지였다.

토끼들은 한층 더 흉포하게 날뛰며, 개미와 지네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물었다.

한편 전장 한복판에 홀로 고립된 늑대 드래곤은 자신을 물어뜯고 잡아당기며 바닥에 쓰러뜨리려고 드는 조그만 몬스터들에게 포위당한 채, 미친듯이 날뛰는 중이었다.

늑대 드래곤이 무시무시한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약한 몬스터들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나는 아비규환으로 변한 전장의 한복판으로 돌아갔다.

전선의 개미들은 나를 포함한 서로의 등을 밟고 올라가 토끼들을 턱으로 물어 쓰러뜨리고 있었다.

나 역시 좌우로 턱을 마구 휘두르며, 적이 보일 때 마다 깨물기 스킬을 사용했다.

토끼 몬스터는 단단한 외골격과 같은 방어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히려면 깨물기 스킬이 가장 유용했다.

내 턱이 토끼들의 부드러운 살에 깊숙이 박힐 때마다, 놈들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끝없이 몰려드는 개미 무리 속에 파묻혔다.

내가 토끼들의 숨통을 끊을 때마다, 경험치 획득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는 앞으로 전진하며 깨물기 스킬을 사용할수록, 체력이 바닥나며 점점 빠르게 지쳐가는 기분을 느꼈다.

스킬을 쓸 때 턱이 힘으로 빛나는 것을 봤을 때부터, 그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 건지 항상 궁금했다.

그리고 액티브 스킬이 소모하는 에너지가 분명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아무래도 그 짐작이 맞는 모양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스킬을 수십 번이나 썼더니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체력을 소모하는 거였군!

이제 한번 턱을 다물 때마다 몸이 점점 지쳐갔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이 바이오매스들이 모두 우리 개미들의 것이 될 때까지는 멈출 수 없다!

[깨물기 스킬이 레벨 6이 되었습니다]

[깨물기 스킬이 레벨 7이 되었습니다]

젠장!

적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토끼들은 패배했다.

모두 생기를 잃어버린 빨간 눈을 부릅뜬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 시체 위에서 지네들을 상대로 한 싸움이 이어졌다.

전장 한쪽에서는 개미들이 다친 동족을 끌어내, 언덕 아래쪽에 마련된 임시 집합 장소로 데려갔다.

치료를 위해 둥지 안의 여왕 개미에게 보낼 무리였다.

부상자들 중 몇몇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도, 남아 있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여 싸움에 복귀하려 했다.

주위를 살피는 내 눈에 다리를 거의 다 잃어버린 어린 개미 하나가 턱으로 땅을 짚으며 전장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긴급 사태를 의미하는 페로몬은 대부분의 일개미를 전장으로 불러들였다.

백 마리도 넘는 몬스터 개미들이 그 부름에 응답했고, 이제 둥지의 이름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개미들의 지원 병력은 새로 도착할 때마다, 적들을 향해 몸 속의 산성 용액을 모두 발사한 뒤 그대로 진격했다.

충원된 병력 덕분에 이제 우리가 지네들보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다.

개미들의 수가 지네들에 비해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치열한 난전을 벌이다 보니 지네들은 가장 치명적인 무기인 꼬리의 독침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독침을 찌르려면 꼬리를 높이 들어야 하는데, 양측이 서로의 몸 위로 기어오르며 싸우는 도중에 그러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개미들로서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길 수 있다!

점점 더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우리 둥지의 미래를 위해 있는 힘껏 싸웠다.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이었고, 턱을 너무 많이 쓰는 바람에 얼굴 근육이 얼얼했다.

게다가 최대한 많은 동료를 돕기 위해 적들에게 치명상을 입힌 뒤에도 시간을 들여 숨통을 끊지 못하고, 다 죽어가는 상대의 마무리를 다른 개미들에게 맡긴 뒤 또다른 지네를 찾아 나서야 했다.

막타를 때리지 못하니 경험치를 하나도 벌지 못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미 측의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나처럼 업그레이드를 거치지 못한 개미들의 갑각은 토끼들의 송곳니에 종잇장처럼 뚫렸다.

몇 마리는 머리를 물려서 즉사하기도 했다.

지금도 내 시야가 미처 닿지 못하는 곳에서 싸우거나, 너무 멀어서 제때 돕지 못한 개미들이 지네들의 발톱에 당해서 쓰러지고 있었다.

내 행동의 결과로 형제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이 승리가 둥지에 커다란 이득을 안겨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게 모든 일개미가 목숨을 걸고 추구하는 목표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내 각오를 비웃기라도 하듯, 갑자기 발 밑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엄청난 크기의 거인이 다가오는 것처럼 강력한 진동이 반복적으로 느껴졌다.

제발, 아니겠지···

다음 순간 내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났다.

숲의 나무 사이로 거대 악어가 최종 보스와도 같은 위용을 자랑하며 등장한 것이다.

그 양 옆에는 두 마리의 악어 괴물이 졸개처럼 따르고 있었다.

···갑자기 왜 조직력을 발휘하고 난리인 건데?

새로 도착한 악어 괴물들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자, 강력한 진동이 공기를 타고 내 더듬이에 전해졌다.

거대 악어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작은 몬스터들이 가득한 전장을 둘러봤다.

이 정도 양의 먹이라면 거대 악어처럼 진화한 몬스터도 변이를 할 만큼 충분한 바이오매스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놈이 거느린 두 마리의 부하 악어와 나누고도 남았다.

전장의 소란과 바이오매스의 냄새를 맡고 나타난 악어 괴물들은 이제 전투를 마무리 짓고 널려 있는 먹이를 모두 차지할 생각으로 보였다.

거대 악어와 같은 엄청난 괴물을 상대로 감히 맞설 자가 없으니까 말이다.

어떤 몬스터가 그렇게 무모한 자살 행위를 할까?

그야 바로 여기 이 개미 몬스터지!

결코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둥지는 이 전투에서 이미 소중한 일개미들을 잃었다.

뚱뚱한 악어 몇 마리가 나타났다고 해서 그 희생을 수포로 만들고 도망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냥 메뉴가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스태미나가 바닥나고 온몸에 자잘한 상처가 가득한 지금, 저렇게 강력한 몬스터를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거대 악어 혼자서도 파이어볼을 날려 우리를 불태워 버릴 수 있었다.

게다가 부하까지 둘이나 거느리고 왔으니···

반면 내 몸 속에는 한 차례 발사할 만큼의 산성 용액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때 내 눈에 뭔가가 보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구원이 도착한 것이다.

마치 어둠 속에 비추는 한 줄기 빛처럼.

처음에는 개미 언덕의 꼭대기 부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진동이 점점 더 커지면서, 언덕 위의 흙이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언덕 꼭대기에 거대한 개미 한 마리가 나타났다.

분노에 차서 더듬이를 흔들며, 어마어마한 턱을 위협적으로 벌린 모습이었다.

거대한 개미는 몸을 들썩이며 좁은 입구를 완전히 빠져나왔다.

자식들이 위험에 처한 걸 알게 된 여왕이 경호 개미들을 뿌리치고 몸소 행차한 것이다!

크기가 내 다섯 배에 달하는 여왕 개미가 언덕 꼭대기에서 위압적인 태도로 전장을 내려다봤다.

길다란 더듬이에 이미 치유의 기운이 빛나고 있었다.

됐어!

우리 엄마 왔다 이 자식들아!

승자독식

언덕 아래에 모여 있는 부상당한 개미들, 그리고 숲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를 내려다보는 여왕의 눈빛에 분노가 번득였다.

여왕은 전장에 침입한 악어들에게 눈을 돌렸다.

놈들은 아직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기회를 노리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여왕이 죽기라도 하면 둥지는 끝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토끼들과 지네들만 있을 때에는 여왕이 나타나도 다칠 가능성이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다른 악어 괴물들은 몰라도, 거대 악어는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여왕의 전투 능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여왕 개미의 주된 역할은 둥지를 성장시키기 위해 알을 낳는 거였다.

아무래도 전투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치유 마법에 특화된 걸 봐도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니 진짜 걱정되는데?!

하지만 여왕은 조금도 두렵거나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분노에 차서 전장을 살피던 여왕 개미는 잠시 기운을 모은 뒤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여왕의 더듬이에서 나온 치유의 빛이 언덕 아래의 부상당한 개미들을 감싸더니, 바닥을 타고 흐르며 전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나는 강물처럼 흘러오는 치유의 빛을 게걸스럽게 흡수했다.

체력이 회복되고 작은 상처들이 치료되면서 HP가 채워졌다.

치유를 주문 덕분에 활기를 되찾은 일개미들이 다시 전투에 뛰어들었다.

부상으로 이탈했던 개미들이 전투에 복귀하자, 이미 열세였던 지네들의 승산은 완전히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공격적이고 탐욕스럽게만 들리던 놈들의 발톱 소리가 이제 애처롭게 느껴졌다.

싸움이 막바지에 가까워지자, 한참 동안 전투를 지켜보던 거대 악어와 그 부하인 두 마리 악어 괴물이 슬슬 끼어들 태세를 취했다.

남아 있는 몬스터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바이오매스를 독차지하려는 속셈 같았다.

한편 전장 뒤쪽에서는 벌써 개미들이 죽은 토끼 시체를 둥지로 운반하는 중이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악어들의 눈에 분노한 기색이 어렸다.

마치 "저 하찮은 놈들이 감히 우리가 차지할 바이오매스를 훔치다니! 네 주제를 알아라, 벌레들아!"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오늘 네놈들에게 개미의 무서움을 가르쳐 주마!

육중한 거대 악어가 가장 앞쪽 다리로 나무들을 헤치며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양 옆의 악어괴물도 바닥에 엎드린 채 그 뒤를 따랐다.

마치 깡패 두목을 따르는 졸개들 같았다.

저 빌어먹을 악어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다니···

처음 보는 광경인데, 대체 언제부터 그런 거야?

너희들 모두 고독한 사냥꾼 뭐 그런 컨셉 아니었어?

악어들이 전장을 향해 다가오는 동안, 나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다른 개미들 틈에 섞여서 천천히 놈들 쪽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의식을 내 코어에 집중했다.

그리고 코어에서 끌어낸 마나를 목 쪽에 단단한 구체로 뭉치게 만들었다.

악어 괴물들이 점점 가까워지자, 놈들의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숲이 발산하는 푸른 빛을 반사하며 번쩍였다.

나는 계속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코어로부터 끌어내 목구멍에 위치한 마나 구체의 크기를 키웠다.

문득 이러다 통제력을 잃기라도 하면 내 머리통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

굳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겠군.

[마나 조작 스킬이 레벨 2가 되었습니다]

[강력한 마나 스킬이 레벨 2가 되었습니다]

오호라!

이런 상황에서도 마나 스킬이 성장했다는 사실에 살짝 신이 났다.

마나를 움직이고 응축하는 과정이 조금 더 편해진 게 곧바로 느껴졌다.

비록 큰 변화는 아니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니까.

시야 가장자리에서, 치유 마법으로 만족하지 못한 여왕 개미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언덕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순식간에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나 구체가 목을 누르는 압력이 점점 강해졌다.

구체 안에 응축된 에너지가 세차게 소용돌이쳤다.

아무래도 이제 곧 한계였다.

빠르게 행동해야 한다!

여왕은 경호 개미들을 이끌고 숲을 향해 전진했다.

직접 전투에 참여해 저 거대한 몬스터들로부터 둥지의 개미들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빌어먹을 악어들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치유 마법 한 번으로 충분했을 텐데···

지금은 너무 많은 일개미들이 위험해 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직접 나서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우리를 보호하려고 위험을 감수하다니···

아니, 우는 게 아니다!

어차피 개미라 못 울어!

하지만 어쨌든 난 여왕의 모성애에 감동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상황이 이렇게 된 게 모두 내 잘못이란 사실은 잠깐 잊기로 하자···

타이니는 내 등에 앉아 전장을 살피며, 적들을 향해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적이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하면 종종 작은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난 이 작은 친구가 나가 떨어지지 않고 내 등에 잘 앉아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 도중에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나는 거대 악어와의 거리를 점점 좁혀갔다.

악어 일당은 이제 개미들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이제 곧 무시무시한 발톱으로 개미들의 목숨을 빼앗으려 들 터였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나는 갑자기 속도를 높여서 동료 개미들을 제치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악어들이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최대한 내 쪽으로 주의를 돌릴 작정이었다.

그러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가자!

내 몸 속의 마나 구체는 이제 한껏 단단해진 상태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이상 마나를 주입할 수는 없었다.

작은 구체의 형태로 뭉쳐진 뜨거운 열기가 세차게 소용돌이치며,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했다.

전장의 가장자리에 도착한 나는 옆에 있던 일개미의 등을 밟고 공중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거대 악어를 향해 몸을 날렸다.

거대 악어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놈의 거대한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며, 수많은 이빨들이 나를 위협했다.

더러운 파충류 놈, 위대한 개미들의 포효를 들어라!

나는 입을 벌리고 내내 응축해 놓고 있던 에너지를 마침내 토해냈다.

마치 화약이 총알을 밀어내는 것처럼, 억누를 수 없는 강한 힘이 마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꼭 입으로 대포를 발사하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주위 시간이 느려졌다.

아니면 내 인지 능력이 빨라졌거나.

주변의 혼란스러운 움직임들이 한 순간 모두 멈췄고, 세세한 장면들이 정지 상태로 눈에 들어왔다.

제 발로 날아드는 개미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거대 악어···

그 입 속의 이빨에 매달려 있는 침방울···

양 옆의 졸개 악어들은 나를 무시한 채 발톱을 드러내고 개미들을 향해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팔을 휘두르기 위해 앞발을 들어올린 악어들의 비늘 아래에서 두꺼운 근육이 실룩거렸다.

내 뒤에서는 일개미들과 지네들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무리의 명운을 걸고 벌어지는 처절한 벌레 대 벌레의 전투였다.

그 와중에도 악어들의 위협을 느낀 일개미 몇 마리가 더듬이를 흔들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런 개미들의 표정에도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직 무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할 각오만 드러날 뿐이었다.

그리고 마법이 발사됐다.

격렬한 폭발과 함께 터져 나온 마나가 마치 공성 무기와 같은 위력으로 바람을 갈랐다.

날카로워진 감각 덕분에 주위 공기가 휘어지고 비틀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중에 뛰어오른 상태로는 아무래도 정확한 조준이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발사한 마나 대포는 애초 노렸던 거대 악어의 입 속이 아니라 가슴에 명중했다.

대포가 명중하는 순간, 나는 거대 악어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그 눈빛에 경악하는 빛이 스쳐가는 걸 포착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주위를 슬로우 모션처럼 만들었던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거대 악어는 미사일처럼 날아가 뒤쪽의 나무에 부딪혔다.

거대한 몬스터와 충돌한 나무는 그대로 부러졌다.

요란한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이어서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12 레벨 크레센트 굴라 가라로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 8이 되었습니다]

···

한 방이라고?

장난 아닌데?!

거대 악어는 부러진 나무의 파편에 깔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놈의 가슴 부위에는 마치 거인의 망치에 두드려 맞은 듯 움푹 파인 자국이 생겼다.

두 마리의 악어 괴물들이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여섯 다리로 바닥에 착지하고 나서 악어 괴물들을 올려다봤다.

나를 내려다보는 악어 괴물들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때 엄마가 도착했다.

여왕 개미는 마치 폭주하는 화물 열차를 떠올리게 만드는 엄청난 기세로 왼쪽에 있던 악어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여왕이 놈의 허리 부분을 턱으로 물었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근육질의 몬스터가 그대로 두 동강이 났다.

아니 어머니?!

턱을 변이하는 데 대체 바이오매스를 얼마나 투자하신 거예요?

제 턱보다 훨씬 날카로워 보이는데요!

첫번째 악어 괴물을 순식간에 끝장낸 여왕은 악어의 진액으로 뒤덮인 턱을 무섭게 딱딱거리며 두 번째 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 동네 몬스터들은 후퇴라는 개념을 모르는 듯했다.

악어는 전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여왕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남아 있는 악어 괴물에게 덤벼들었다.

악어 괴물은 사납게 포효하며 자신보다 커다란 여왕 개미를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여왕은 발톱이 자신의 갑각을 할퀴고 지나가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가 당했다면 그대로 날아갔을 법한 위력적인 공격이지만, 여왕은 끄덕도 하지 않고 경멸 어린 차가운 눈빛으로 악어 괴물을 내려다봤다.

악어 괴물이 발톱을 다시 거둬들였다.

놀랍게도 어머니의 빛나는 갑각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다.

대체 얼마나 업그레이드를 해야 저렇게 되는 걸까?!

문득 일개미들이 매번 사냥을 할 때마다 여왕에게 바치기 위해 최대한 많은 먹이를 둥지로 가지고 온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여왕은 그 먹이로부터 알을 낳기 위한 에너지를 얻을 뿐 아니라, 엄청난 양의 바이오매스를 확보했을 터였다.

여왕이 둥지에서 가장 많은 변이를 거친 개미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눈에 크게 띄지 않는 종류의 변이들만 거친 것 같았다.

저렇게 강하면서, 갑각이나 턱이나 겉으로 봤을 때 두드러지는 특징은 없었기 때문이다.

여왕은 악어가 실패한 공격을 거둬들이는 틈을 놓치지 않고, 온몸의 하중을 실어 턱을 아래로 내리쳤다.

제 아무리 악어 괴물이라도 힘으로 여왕을 당할 수 없었다.

놈은 여왕의 강력한 턱에 눌린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턱의 위치를 살짝 조정한 여왕은 그대로 악어를 물어서 끝장냈다.

···

너무 세잖아!

방금 뭐였지?

저 정도면 거대 악어도 어렵지 않게 처리했겠는데···!

우리 엄마가 이렇게 강할 줄이야!

여왕 개미는 전혀 흥분한 기색 없이, 앞다리를 들고 몸을 일으켜 위압적인 눈빛으로 전장을 둘러봤다.

여왕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자 사기가 충천한 개미들은 지네들을 완전히 몰아붙이고 있었다.

전투는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갔다.

벌써 부상자들을 옮기거나 적의 시체를 분해해서 둥지로 운반하는 일개미들이 꽤나 많았다.

이겼다!

전리품은 모두 우리 차지다!

승리의 춤을 추고 있는 내 위에 여왕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어머니···?

여왕이 강력한 앞다리를 들어 내 머리를 때렸다.

부상을 당할 정도로 강한 위력은 아니지만,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내가 미처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서기도 전에, 여왕은 등을 돌려 둥지로 걸음을 옮겼다.

호위 개미들이 그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지금···

지금 나 엄마한테 혼난 거야?

물론 그 이유가 뭔지는 알 것 같았다.

오늘 획득한 전리품들은 둥지에 어마어마한 성장 동력을 제공할 테지만···

이 전투로 적어도 서른 마리의 일개미들이 목숨을 잃었다.

내가 둥지 근처에서 싸움을 시작하지만 않았어도···

일개미들을 전투에 끌어들였다가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지지만 않았어도···

죽지 않았을 개미들이었다.

게다가 내가 간과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설사 이 먹이들로 여왕 개미가 더 많은 알을 낳는다고 해도, 유충을 돌보고 먹이를 제공할 일개미들의 수가 크게 줄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남아 있는 개미들의 노동량이 한계까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여왕이 너무 많이 화난 게 아니라면 좋겠는데.

저도 반성하고 있다고요···

코어 강화

몬스터들의 전투가 끝난 현장은 실로 처참했다.

개미들이 열심히 시체를 분해하고 있는 탓에 그런 느낌이 한층 더했다.

전투가 벌어졌던 공터는 수많은 몬스터의 시체들로 뒤덮여 있었다.

검은 털 토끼, 지네, 늑대 드래곤 두 마리가 모두 뒤엉켜 바닥에 널려 있었고, 그 위를 개미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도축 작업을 벌였다.

나 같은 성체 개미는 몇 마리 되지 않았고, 대부분이 갓 부화한 개미들이었다.

녀석들은 너무 작아서 몬스터를 통째로 둥지에 가져갈 수 없다 보니, 조각조각 분해해서 운반해야 했다.

내 주위에서 온통 그런··· 다소 끔찍한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개미들은 그렇게 조각조각 자른 시체를 턱으로 집어 들고 즐겁게 둥지로 달렸다.

최대한 빨리 다녀와서 더 많은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60마리가 넘는 일개미가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시체를 전부 옮기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여왕이 다시 둥지로 돌아갔기 때문에, 나는 운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일개미들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또다시 우리의 전리품을 강탈하려는 몬스터들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내가 방어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엄마한테 혼까지 나면서 얻어낸 전리품을 다른 놈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지!

어쨌든 시체들이 널려 있는 전장을 보기만 해도 벌써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시체들의 경험치는 벌써 일개미들이 모두 흡수한 거니까.

각각의 개미들이 진화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겠지!

이제 다음 세대가 태어날 때까지 둥지가 버틸 수만 있다면, 우리는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전해질 터였다.

타이니는 벌써 내 등에서 내려와 전리품 틈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녀석은 작은 손으로 부지런히 바이오매스를 퍼서 입으로 가져갔다.

천천히 먹어라, 임마.

그러다 체하겠다.

타이니의 식욕이 왕성한 걸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녀석이 빠르게 자라서 내가 봤던 그 박쥐 고릴라만큼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내게 큰 전력이 될 터였다.

나는 타이니의 코어가 거대 악어에 견줄 만큼 강한 생물한테서 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아마 녀석도 나중에는 그만큼 강해지겠지.

다른 모든 개미들이 바이오매스에 정신이 팔린 동안, 나는 내 몫의 전리품을 찾아 움직였다.

전장에는 덩치 큰 진화형 몬스터들의 시체도 여러 구 있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건 바로 몬스터 코어였다.

진화 전에 내 코어를 한계까지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우선 바이오매스도 얻을 겸, 코어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늑대 드래곤 두 마리의 시체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내 코어는 몸 속 깊숙이 존재했다.

여태까지 만났던 다른 몬스터들도 대략 비슷한 위치에 코어를 지니고 있었다.

즉 늑대 드래곤도 그만큼 깊숙이 파먹어야 코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첫 번째 늑대에게서는 바이오매스 두 개가 나올 동안 코어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빠르게 식사를 중단하고, 코어 발굴에 방해가 되는 개미 몇 마리를 밀어낸 뒤 두 번째 늑대 드래곤을 먹기 시작했다.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호환되는 몬스터 코어를 발견했습니다. 코어를 강화하거나 몬스터를 재구성하겠습니까?]

음하하하!

찾았다!

코어 공학 스킬을 얻기는 했지만, 일단 내 코어를 한계까지 강화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는 함부로 스킬 연습에 몬스터 코어를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코어 강화!

늑대 드래곤의 코어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에너지가 내 코어에 흡수되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내 코어가 더 커지고 강해져서, 저장할 수 있는 마나의 용량이 늘어났다.

좋았어!

서두르자!

아직 코어가 더 있을 거야!

늑대 드래곤 두 마리를 모두 확인한 나는 전장 한복판을 떠나, 개미들이 악어 괴물을 분해하려 하는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라고!

나는 일개미 몇 마리를 밀치며 여왕이 처음에 반토막을 냈던 악어 괴물의 시체에 탐욕스럽게 뛰어들었다.

시체가 두 동강이 나 있는 덕분에 코어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서둘러 다음 악어 괴물을 찾아 움직였다.

날 너무 욕심쟁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줘, 형제들···

코어를 최대로 강화한 상태로 진화만 하고 나면, 둥지에 몇 배로 갚아줄 테니까!

좀 봐 달라고.

[바이오매스를 흡수했습니다]

[호환되는 몬스터 코어를 발견했습니다. 코어를 강화하거나 몬스터를 재구성하겠습니까?]

좋아!!!

코어 강! 화!

다시 한 번 기분 좋은 감각이 온몸을 휩쓸었다.

에너지를 흡수한 코어의 크기와 밀도가 더욱 높아졌다.

늘 새로워, 늘 짜릿해!

코어가 최고야!

최대 MP는 이제 무려 40으로, 진화 이전보다 두 배에 달했다.

아무래도 이 정도면 지금 단계의 최대치가 아닐까 싶었다.

정말 그런지 여부는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나는 행운을 빌며 거대 악어의 시체에 다가갔다.

거대 악어는 부서진 나무 둥치에 기댄 채 쓰러져 있었고, 가슴 부분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내가 이렇게 거대한 생물을 한 방에 쓰러트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용언(아니지만)의 힘은 엄청나구나!

당장은 충전 시간 때문에 전투에서 사용하기 좀 어려웠지만, 앞으로 레벨이 높아지고 코어가 더 강해지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상상이 갔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내가···

아냐, 현재에 집중하자.

공상에 잠길 때가 아니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거대 악어에게 접근했다.

놈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이 거대한 악어가 눈을 뜨고 나를 향해 달려들 것 같았다.

물론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지하신 시스템께서 놈이 죽었다고 선언했으니까.

그저 이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일 뿐이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나는 거대 악어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뒤에 숨어 놈이 남긴 찌꺼기를 주워 먹는 신세였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거대 악어를 처치했다.

그리고 놈의 바이오매스는 내 것이다!

뭘 망설여, 어서 먹자고!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크레센트 굴라 가라로쉬.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크레센트 굴라 가라로쉬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됩니다.]

[크레센트 굴라 가라로쉬: 준성체 구멍 가라로쉬. 가라로쉬의 새끼이자 유체 가라로쉬의 진화형으로, 성장기에 있습니다. 마나를 불로 치환할 수 있으며, 입에서 파이어볼을 토할 수 있습니다.]

뭐라고?

내가 멋대로 '거대 악어'라고 이름 붙인 이 지옥의 괴물이 아직 준성체라고?

성체가 되면 대체 얼마나 커지는 건데?

그리고 가라로쉬라는 이름도 또 나왔다.

이 빌어먹을 악어들이 모두 몬스터 한 마리의 새끼라는 거지?

고질라의 악어 버전이라도 되는 건가?!

그렇게 커다란 놈이 지하에 있을 수 있는 건가?

···됐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난 아직 이 던전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

아마 더 깊이 내려가면 이 숲보다 더 큰 동공이 나오겠지.

어쩌면 나라··· 아니, 대륙 만한 크기의 공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숲만큼 광활한 공간이 지하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 숲 안에 있었다.

보라색 이파리가 달린 빛을 뿜는 나무 아래에, 악어의 시체를 뜯어먹으면서!

그러니 앞으로 뭐가 더 나올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섣부른 추측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여러 차례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바이오매스를 흡수했습니다]

[호환되는 특수 몬스터 코어를 발견했습니다. 코어를 강화하거나 몬스터를 재구성하겠습니까?]

응··· 뭐라고?

특수 몬스터 코어?

그건 또 뭔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우선 코어를 꺼내 눈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살점을 좀 더 뜯어먹자 턱으로 코어를 꺼낼 수 있었다.

···

엄청 크잖아.

이 코어 안에 대체 뭐가 든 거지?

뭐가 이렇게 거대해!

타이니가 태어난 코어보다 훨씬 더 컸다.

이 정도 크기라면···

그 거대 악어는 코어를 엄청나게 강화한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졌다.

내 코어는··· 이거에 비하면 반도 안 될 것 같은데?

한 5분의 1 정도는 되려나?

방금 분명 메시지가 코어를 강화하겠냐고 물어봤지.

이렇게 커다란 물건이 내 코어와 호환되는 것도 신기했다.

이 거대 악어도 한 번 진화한 형태인 걸까?

결정을 하려니 약간 떨렸다.

괜찮겠지···?

음···

코어 강화···?

[이미 현재 진화 단계의 최대 용량을 달성했습니다. 특수 코어를 흡수할 시 최대 용량을 초과하게 됩니다. 진행하겠습니까?]

갑자기?

물어보지만 말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면 안 될까?!

그러니까 내가 예상했던 대로 지금 내 코어의 최대 용량은 40MP였다.

이 코어는 '특수' 코어라 최대 용량 이상으로 흡수가 가능하다는 걸까?

그럼 이 다음 번 진화로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건가?

어쩌면 당장 코어를 흡수하는 쪽이 손해일 수도 있었다.

가령 진화를 하고 나서 이 코어를 흡수하면 용량이 8MP 증가할 텐데, 지금 굳이 흡수해서 4MP 밖에 늘리지 못하거나···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당장 코어를 흡수하는 선택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몬스터 코어가 강력할수록 진화에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도 커질 테니까.

이런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지.

코어를 강화해줘, 시스템!

거대한 흑진주처럼 생긴 코어가 공기 중에 서서히 흩어졌다.

코어를 이루는 단단한 물질이 조그만 입자들로 분해된 뒤, 소용돌이 치는 에너지와 함께 공중에서 춤을 췄다.

입자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눈에 보이는 에너지의 흐름을 형성했다.

이윽고 내 쪽으로 흘러온 에너지 줄기들이 가슴을 뚫고 들어와 코어를 향해 직진했다.

마치 하수구에 물이 빠질 때처럼, 에너지는 넓은 원을 그리며 코어 주위를 돌다가 점점 지름을 좁히며 빠르게 소용돌이쳤다.

마침내 에너지가 내 안의 코어에 닿았다.

코어가 표면에 닿는 모든 입자들을 게걸스럽게 흡수하며 크기를 불리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해서 흘러 들어오는 에너지를 흡수하며, 코어는 빠른 속도로 커졌다.

반면 악어가 남긴 거대한 특별 코어는 점차 분해되며 작아졌다.

힘이 폭포처럼 내 코어의 깊은 곳으로 흘러 들어왔다.

···

아프잖아!

코어가 커질수록 복부를 찌르는 둔통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견딜 만했지만, 통증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나는 턱을 꽉 깨물고 고통을 버텼다.

할 수 있어!

참을 수 있어!

조금만, 조금만 더.

끝나지 않는 고통은 마치 지옥 같았다.

아마 내 코어가 이제 나 정도 힘을 가진 몬스터가 가지기에는 너무 무겁고 거대하게 변했기 때문인 듯했다.

코어가 불안정하다는 점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너무 빨리 성장했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담고 있었다.

뭐가 어쨌든···

젠장, 아프다고!

시간이 지나자 악어의 거대한 코어를 마침내 모두 흡수했다.

하지만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몇 초마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반복적으로 찾아왔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타이니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다가와서 한 손을 내 등에 부드럽게 얹었다.

기특한 녀석···

아야야야야.

이 빌어먹을 시스템!

진화 수준을 초과해서 코어를 늘린다고만 했지, 이렇게 아플 거라고는 말 안 했잖아!

정신력으로 고통을 겨우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는 별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심코 상태창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MP 11/50!

50이라고..?

그렇다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도 납득이 갔다.

내 수준의 진화한 몬스터가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최대 MP에서 25%나 늘어난 셈이니까!

비록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는 강화였지만, 다음 번 진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하니 신이 났다.

새로운 희귀 선택지가 생길까?

아니면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진화 에너지를 추가로 잔뜩 받게 될까?

어쩌면 마법 사용에 필요한 보조 뇌를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태까지 내가 이 전장에서 얻은 바이오매스는 아직 일곱 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거대 악어의 시체를 앞에 둔 지금은 건드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너무 아파서 식욕이 모두 달아났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쓰러져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풍부한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 뭐···

나머지 놈들은 다 둥지로 가져가도 된다.

하지만 이 거대 악어는 내 몫이다.

내가 쓰러뜨린 놈이니 그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지 않을까?

물론 이미 이 놈은 물론...

다른 몬스터들의 코어도 내가 전부 골라 먹었다는 건 일단 덮어두기로 하자.

개미의 야망

나는 타이니의 도움을 받아 거대 악어 근처의 나무를 향해 절뚝거리며 나아갔다.

그리고 그 옆에 임시로 은신처를 파기 시작했다.

원래 같으면 둥지 안에 있는 방으로 시체를 끌고 가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힘이 없었다.

땅파기 스킬을 업그레이드시켜 놓은 선택이 여기서 빛을 발했다.

나는 꽤 빠른 속도로 나무 아래에 공간이 넉넉한 은신처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거대 악어에게 돌아가 시체를 조각조각 자른 다음 은신처로 옮기는 불쾌한 작업을 시작했다.

시체가 얼마나 큰지 분해해서 옮기는 데에만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다른 일개미들이 조각을 가져가려는 걸 몇 번이나 쫓아내야 했다.

모든 작업을 마쳤을 때에는 아까의 불타는 듯한 고통이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도 지속적인 통증이 가슴을 찔러댔다.

아··· 진짜 싫다.

일개미들도 슬슬 전리품 정리를 마쳐가고 있었다.

둥지로 운반된 바이오매스는 일개미들이 섭취하거나, 유충들에게 먹이로 제공될 터였다.

이제는 텅 빈 전장을 마지막으로 둘러본 후, 나는 지친 몸을 끌고 임시 은신처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타이니까지 들어온 걸 확인한 뒤 입구를 막았다.

기나긴 전투가 마침내 끝이 났고, 우리 둥지는 승리를 거뒀다.

그러니 좀 쉬어야겠어.

쿨쿨쿨···.

···

일어났다!

몇 시간 동안 무의식 상태로 휴식을 취한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휴!

잘 잤네!

코어의 통증은 자는 동안 점차 가라앉더니, 이제는 은은하게 느껴지는 정도였다.

아무래도 거대해진 코어가 예전보다 훨씬 큰 공간을 차지하면서 가슴 속을 헤집어 놓은 게 통증의 원인 같았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한 번 더 진화하면 몸 속의 공간이 다시 충분해질 테니까.

서서히 잠에서 깨는 타이니를 보니, 어제 신나게 바이오매스를 먹어서 그런지 제법 커져 있었다.

솔직히 이제 내 등에 태우기에는 너무 커 보였다.

조금 슬프기도 했지만, 녀석이 잘 자라는 모습을 보니 왠지 뿌듯했다.

곧 강하고 멋진 원숭이가 될 수 있을 거야, 타이니!

코어가 최대 용량 이상으로 커지고 나니, 타이니를 재구성한 코어가 더 이상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에는 손해도 보지 않았고...

귀여운 원숭이 친구도 하나 생겼으니까 말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이 바이오매스를 모두 먹어 치우는 거다!

나는 거대 악어의 바이오매스를 모두 섭취하기 전까지 이 은신처를 벗어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 먹기 전에는 못 나가는 거야!

거대 악어의 크기를 고려할 때 최소한 두세 번은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자, 타이니!

밥 먹을 시간이다!

···

우걱우걱···

···

으아!

더 이상은 못 먹겠다!

타이니를 돌아보니 마치 원숭이 모양 농구공처럼 빵빵해진 상태였다.

그렇게 나는 바이오매스를 일곱 개 더 얻었다.

든든하군!

배가 너무 불렀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더 자기로 했다.

고생을 했으니 좀 쉬어야지.

이윽고 잠에서 깬 후 우리는 다시 거대 악어를 먹기 시작했다.

마침내 식사를 마치자, 바이오매스가 네 개 더 생겼다.

R.I.P, 거대 악어.

네가 내게 선물한 변이는 평생 잊지 않을게.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바이오매스가 무려 열 여덟 개나 쌓여 있었다.

오우야...

너무 많아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진정하고, 차분히 계산을 시작해 보자.

더듬이를 최대로 성장시키려면 바이오매스 아홉 개가 필요했다.

그럼 이미 반이 줄어들고.

아홉 개가 남는다.

그리고 재생 분비선을 4단계까지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재생 분비선의 업그레이드는 우선 순위로 놓겠다고 예전에 이미 마음 먹었다.

그럼 남은 바이오매스는 두 개로군.

페로몬 분비선이 아니면 다리 업그레이드인데···

다리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쓸모가 있었다.

뛰고, 기어오르고···

내가 항상 사용하는 신체 부위였다.

그리고 페로몬은 둥지의 일개미들을 동원하기 위해 필요했다.

뭐, 어느 쪽이든 한 단계를 올린다고 큰 차이는 없을 테니 그리 고민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페로몬 분비선을 성장시키기로 했다.

일개미들을 1초라도 더 빠르게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건 상황에 따라 아주 중요한 능력이었다.

앞으로 둥지를 키우려면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효율적인 무리 사냥이 가능하다면 모든 일이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

[더듬이를 +5, 재생 분비선을 +4, 페로몬 분비선을 +2로 업그레이드 하시겠습니까? 총 18 바이오매스가 소모됩니다]

가즈아!

[현 레벨에서는 고급 변이 선택이 가능합니다. 메뉴에서 선택하십시오]

좋았어!

골라볼까?

엄청난 수의 선택지가 내 머릿속에서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역시나 너무 많았다!

대체 뭘 골라야 할까...

냄새를 더 잘 맡을 수 있는 감각 향상 더듬이?

편리할 것 같네.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는 칼날 형태의 더듬이?

오···

가까운 미래의 진동을 감지할 수 있는 예지의 더듬이···

농담이겠지?!

그 밖에도 마음에 드는 선택지가 많았다.

가령 마나 감지 더듬이라던지.

하지만 이미 비슷한 용도의 마나 감지 스킬이 있으니 패스.

더듬이를 거친 모든 마법 에너지를 증폭시켜주는 선택지도 있었다.

여왕 개미가 이걸 선택했을까···?

으으!

이 선택지 때문에 항상 머리가 아프다니까.

나는 평소와 같이, 우선 더듬이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먼저 결정한 다음 거기 가장 부합하는 선택지를 고르기로 했다.

완전히 마법에 특화된 몬스터가 될 거라면, 마법 에너지를 증폭시켜 주는 더듬이가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만 잘하는 전문가 타입은 별로였다.

강점으로 약점을 보완하기 보다는 모든 방면에 두루두루 능력을 갖추는 편이 좋았다.

가장 영리한 선택은 아닐 수도 있지만···

증폭 더듬이가 있으면 마법 능력은 훨씬 개선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감각 기능이 너무 떨어지지 않을까?

더듬이는 원래 냄새나 진동을 감지하는 용도인데 말이지.

원래의 용도에서 너무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탐색 능력을 향상시키는 쪽으로 선택지를 좁혀 보자.

그런 기준으로 탐나는 선택지 몇 개를 제외하고 나니 그제서야 고를 만한 상황이 되었다.

그 중 가장 시시한 선택지는 감각 증폭 더듬이었다.

이건 솔직히 너무 별 게 없었다.

더듬이 바깥쪽에 예민한 털이 돋아서···

운동 감지 센서처럼 작용하는 선택지도 있었다.

괜찮은 것 같으면서도 별로였다.

보지 않고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는 건 좋지만, 나는 이미 넓은 시야각을 보유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움직임은 더듬이가 감지하기 전에 이미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열을 감지하는 더듬이였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 더듬이는 마치 열화상 카메라와 같은 기능을 제공할 것이다.

대신 시각이 아닌 후각으로 열을 감지할 수 있는 거지.

기존에 없던 기능이 새롭게 추가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이걸 택하면 지하나 둥지 안에 숨어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몬스터도 체온으로 감지할 수 있을 터였다.

지네 굴 안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몇 마리가 숨어 있는지 셀 수 있다거나.

그래, 적외선 더듬이.

이걸로 하겠어!

이걸로···

으아아아아앜···

더듬이가 불타오른다!

왜 항상 이걸 까먹고 방심하는 거지!

더듬이는 그야말로 최악의 부위였다.

타오르는 것처럼 간지러운 감각이 머리 속까지 타고 내려갔다.

몸 속의 재생 분비선과 페로몬 분비선도 미칠 듯이 가려웠다.

빌어먹을!

마침내 간지러움이 잦아들고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이상하게도 변이가 끝나면 이 끔찍했던 감각은 곧바로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안 좋은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잊고 싶은 걸까?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바이오매스를 모두 사용하고 나니···

이제 스킬 포인트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걸로는 뭘 해야 할지 마음이 확실히 서지 않았다.

나중에 가지고 있는 스킬들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번에 마법에 관련된 스킬만 너무 많이 구입을 하느라 다른 좋은 스킬들을 지나쳤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 그냥 당장 써 버리자.

갖고 싶은 스킬들이 있었거든.

더 이상 참지 않겠어!

[외골격 숙련, 외골격으로 공격을 튕겨내거나 피해에 저항하는 능력을 향상시킵니다]

지난 번에는 마법 스킬에 모든 포인트를 쓰느라 못 샀지만···

이걸 사겠어!

스킬을 구입 후 나의 상태창은 다음과 같았다:

=====

레벨: 8 (코어)

힘: 31

강인함: 22

영리함: 25

의지: 18

HP: 50/50

MP: 50/50

스킬: 땅 파기 레벨 4; 향상된 산성 용액 발사 1; 잡기 레벨 4; 단단히 물기 레벨 1; 고급 은신 레벨 2; 깨물기 레벨 1; 마나 조작 레벨 1; 강력한 마나 레벨 2; 외부 마나 조작 레벨 1; 마나 감지 레벨 1; 코어 공학 레벨 1; 외골격 숙련 레벨 1

변이: 초점 겹눈 +5, 적외선 더듬이 +5, 구속 산성 용액 +5, 다리 +1, 주입 턱 +5, 다이아몬드 갑각 +5, 재생 분비선 +4, 페로몬 +2

종족: 성체 일개미 (포르미카)

스킬 포인트: 0

바이오매스: 0

=====

몸이 점점 강력해지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 모든 부위를 +5로 변이한다는 목표의 끝이 서서히 보이고 있었다.

재생 분비선만 +5까지 올리고 나면, 남은 부위는 두 군데 뿐이었다!

2레벨만 더 올려서 레벨 10이 되면 아마 한 번 더 진화를 할 수 있을 터였다.

이미 한계를 초과한 코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라도 진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머지 않았다!

나는 은신처의 입구를 열고 타이니와 함께 밝은 빛 속으로 나왔다.

최고의 휴식이었어!

기운도 찾았고 힘도 세졌군!

활기와 의지가 넘치는 게 느껴졌다.

타이니도 휴식을 충분히 즐긴 듯했다.

녀석은 어느새 처음 태어났을 때의 거의 두 배 크기로 성장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내 등에 탈 수 없으니, 걷거나 기어서 따라다녀야 했다.

어서 가자, 타이니!

빈둥댈 시간이 없다고!

타이니는 양 주먹으로 바닥을 짚으며 마치 고릴라처럼 달렸다.

이제는 내 등에 탈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 심술이 난 것 같기도 했다.

개미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니 보초들이 숲을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몇몇 일개미들은 둥지를 드나들며 페로몬 흔적을 좇거나, 식량 수색에 나섰다.

저 친구들한테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지금 숲 속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니까 말이다.

나는 타이니와 함께 어둡고 시원한 둥지 안으로 들어갔다.

푸른 빛이 흐르는 혈관은 이제 더 안쪽까지 퍼져 있었다.

가장 끄트머리의 줄기들이 퍼져 나가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둥지 안은 아주 분주했는데, 이유는 뻔했다.

내가 늘어지게 먹고 자는 동안 여왕과 다른 일개미들은 둥지의 미래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육실을 확인해보니 광전사 침입 이후 태어났던 수많은 알들이 벌써 부화해서 작은 유충이 되어 있었다.

새로 부화한 유충들은 양육실을 가득 채울 만큼 많았다.

일개미들은 전투에서 얻은 식량을 총동원해 어린 애벌레들을 배불리 먹이는 중이었다.

이 녀석들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굴러다니겠군!

이게 애벌레야, 볼링공이야?

한번 굴려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자칫 너무 많이 굴러가면 아래쪽 통로로 떨어질 지도 몰랐기 때문에···

이봐, 일개미 친구들.

유충들이 많이 먹고 빨리 크기를 바라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배가 빵빵한 애벌레들은 움직이기도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유모 일개미들이 한 마리 한 마리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있었다.

유모 일개미의 배를 보니, 사교 위가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애벌레들이 먹은 걸 소화하자 마자 곧바로 다시 음식을 먹이려는 듯했다.

···

행운을 빈다, 애벌레들아!

빨리 자라서 튼튼한 개미가 되렴!

지난 번에 여기 있던 애벌레들은 이제 대부분 번데기가 됐거나, 변태를 마치고 개미로 부화했을 터였다.

새로운 동료는 언제나 환영이지!

나는 바글바글한 양육실을 빠져나와 둥지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갔다.

그러자 왼쪽에 생긴 새로운 통로가 눈에 띄었다.

나와 타이니는 호기심을 안고 새로운 통로를 따라갔다.

원래 있던 육아실이 가득 차서 하나를 더 만들기로 한 모양이었다.

지난 전투로 획득한 먹이를 섭취한 여왕이 또 알을 엄청 낳았구나···

새롭게 만들어진 어두운 방 안에서는 일개미 열 마리가 거대한 알 무더기를 보살피고 있었다.

알의 숫자는 2백, 아니 3백 개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그래, 내가 둥지를 전투에 끌어들인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아까 본 유충들 그리고 저 알들은 둥지에 엄청난 기회를 가져올 터였다.

전부 무사히 부화하면···

지금은 2백 마리 정도인 일개미의 수가 8백 마리까지 늘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노동력이 늘면 다음 세대, 또 그 다음 세대의 성장도 빠르게 도모할 수 있을 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개미 수 천마리를 거느린 거대한 둥지가 되겠지.

그때는 누가 감히 우리를 막을 수 있을까?

인간의 위협

대격변의 시대에 남겨진 기록물은 모두 허무맹랑하거나 신빙성이 아주 낮다. 라나레스 탑의 학자들은 수 십년 간 오래된 기록물을 해석하며, 당시의 세상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연구했다.

그 연구 결과는 종종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학자들이 여러 증거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주장은 판게라의 환경 마나 레벨이 크게 올라, 대격변 직전에는 평소의 거의 두 배가 되었다는 가설이다.

대격변 직전에는 마법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했고, 그에 따라 의존도도 높아졌다. 그래서 학자들이 '황금기'라고 부르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라나레스 탑의 학자들은 이 시기에 이미 지하의 던전들이 대부분 완성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다른 학파에서 매우 반대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거가 되는 논리를 들어보면 설득력이 있다.

대격변이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청난 힘을 가진 강력한 몬스터들이 지상에 나타났다. 던전에서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서로 싸우며 진화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몬스터들이 출현할 수 있었을까?

올리앤더의 역사학 논문, "위대한 야수들의 기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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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한 세계 정복의 꿈은 잠시 미뤄 놓고···

그 전에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나는 타이니 옆에 서서 잠시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을 고민했다.

선택지가 몇 가지 있었기 때문에 신중히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벌인 전투는 결과적으로 둥지에 이득이었다.

하지만 일개미가 서른 마리나 희생되었고, 하마터면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만약 내 마나 구체가 거대 악어를 한 번에 날려버리지 못했다면···

전장은 놈이 토해내는 파이어볼로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열 마리 정도는 개미 통구이가 되었겠지.

이번에는 좀 더 조심해서 그런 실수를 피해야 했다.

엄마한테 또 맞기는 싫었으니까!

첫 번째로 신경이 쓰이는 문제는 여왕 개미의 방에서 더 아래 쪽으로 이어진 통로였다.

광전사들이 거기로 침입해 왔으니까 말이다.

내가 제때 끼어들지 않았다면 훨씬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직접 그 내려가 보기는 좀 무서웠다.

광전사 같은 강한 몬스터들이 도망칠 정도라면, 내가 직접 정찰을 나서기는 무리였다.

혹시 한 번 더 진화를 하고 나면 그 아래까지 탐험할 용기가 생길지도···

지금 상태라면 일반적인 진화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 저 아래에 무엇이 있든, 내가 생존할 가능성도 높아질 터였다.

내가 그만큼 성장하기 전까지는 여왕개미와 호위 병사들이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위협들을 잘 막아 내기를 바랄 수 밖에···

다음 선택지는 둥지를 계속해서 성장시키는 방안이었다.

페로몬을 사용해서 일개미들을 전투에 끌어들이는 계획이다.

일개미들이 경험치를 쌓을수록, 둥지의 전체적인 힘도 강해질 테니까.

하지만 이쪽도 우려되는 점이 있었다.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는, 모든 변수를 계산할 수 있는 독립적인 전투 상황을 만드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얼마 전에 벌어진 전투가 그 예였다.

개미들이 섣불리 싸움을 벌이면, 그 소란과 바이오매스 냄새에 이끌린 다른 몬스터들이 하나 둘 몰려들 게 분명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너무 위험했다.

그러니 이 선택지도 패스.

그럼 뭘 해야 하지?

혹시 좋은 아이디어 있니, 타이니?

작은 유인원 친구는 멍한 표정으로 다리를 긁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 커다란 눈이 텅 비어 보였다.

내가 자기를 먹이로 인도해줄 거라는 믿음과 자신감은 느껴졌지만···

딱히 독창적인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래,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일개미들이 보통 둥지를 위해서 하는 일들이 뭐가 있지?

새끼들을 돌보는 일?

딱히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유모 개미들이 많다고···

둥지 방어?

내가 둥지에서 제일가는 전사인 건 확실하지만, 멍하니 서서 누군가 공격해 오기만 기다리기는 싫었다.

정찰?

정찰이라면 멀리까지 나가서 먹이를 찾고, 위험 요소가 있는지 확인한 뒤 둥지로 돌아와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나처럼 멋지고 강력하고 훌륭하게 성장한 개미에게 썩 어울리는 일 아닌가?

적극적으로 둥지를 방어하면서, 위험에 빠진 일개미와 마주치면 도와줄 수도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 개인적으로 사냥을 하면서 재미도 볼 수 있고 말이다.

거대한 전투를 벌이는 대신 내가 목표한 적들만 사냥하면서.

솔직히, 가능하면 빨리 진화부터 하고 싶었다.

전보다는 덜했지만 여전히 비대한 코어 때문에 가슴 부위가 아팠다.

마치 지속적인 치통이 정신을 갉아먹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만 아프면 좋겠다고!

그래, 결정했다!

타이니와 함께 수색 부대를 꾸려서, 넓은 세상으로 용감한 모험을 떠날 테다.

미지의 영역을 탐사하고 적들을 쓰러뜨리는 거다.

오직 둥지를 위하여!

나는 둥지를 나서기 전에 우선 여왕 개미의 방을 찾았다.

예상대로 여왕은 수면 중이었다.

전투에서 활약하고 돌아와 곧바로 알까지 낳았다 보니 피곤한 듯했다.

별 일 없네.

가자, 타이니!

나는 타이니를 데리고 언덕 밖으로 이어지는 터널을 기어올랐다.

더 이상 타이니를 내 등에 태우고 갈 수 없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여태까지 무임승차를 하던 녀석이 직접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둥지 안을 지나는 동안, 새로 얻은 적외선 더듬이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더듬이가 내게 전하는 정보를 이해하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인간의 몸이 열을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피부였다.

그런데 개미가 된 나는 피부 대신 갑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열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하지만 이제 내 더듬이가 열 감지 센서처럼 작동했다.

눈으로도 볼 수 없는 열의 원천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근처에 있는 일개미가 발산하는 열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모퉁이 뒤나 다른 방에 있는 개미의 열이 감지될 때면 아주 혼란스러웠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되겠지.

조금만 경험이 쌓이면 이 새로운 감각이 전해주는 정보에 빠르게 반응할 수 있을 터였다.

마침내 타이니가 매우 지친 모양새로 개미 언덕 꼭대기에 도착했다.

하핫!

앞으로 무임승차는 없어, 꼬마 친구!

체력을 단련할 필요가 있겠는걸!

평소대로 한 무리의 일개미들이 언덕 주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보초 개미들은 이리 저리 움직이며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숲으로 향한 일개미들의 자취가 몇 군데 남아 있었지만, 나는 그 중 어느 길에도 합류하지 않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난 번 전투에 난입한 지네들이 나타난 방향이었다.

그 많은 지네들이 그렇게 빨리 몰려든 걸 보면, 이 근처에 꽤 큰 지네 소굴이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나 혼자서 지네 소굴을 공격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둥지 가까이에 얼마나 많은 몬스터 무리가 서식하는지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숲은 여전히 몬스터로 들끓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도 서로 싸우고 사냥하는 소리가 가득했다.

새로운 감각이 전해주는 수많은 정보가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빠르게 해석하기에는···

열의 원천이 너무 많은 장소였다!

심지어 나무 위에서는 작은 몬스터들이 사냥을 위해 떼로 몰려다니며 내 감각을 어지럽혔다.

나는 원하지 않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다.

대부분의 몬스터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기는 했지만···

싸움을 벌이고 있으면 갑자기 어떤 몬스터가 나타나 뒤통수를 칠지 몰랐기 때문이다.

잠깐만···

이게 뭐지?

더듬이를 통해 조금 이상한 형태의 열이 느껴졌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땅에 가까이 붙어서 최대한 집중했다.

여태까지 감지했던 몬스터의 열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저기 저 나무 뒤에서 느껴지는 것 같은데.

아직 열기라는 감각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중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한 발 한 발 기어갔다.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고 본능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타이니를 보고 조용히 하라는 의미의 손짓, 아니 발짓을 했다.

하지만 타이니는 커다란 눈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빠르게 의사 소통을 포기했다.

그냥···

제발 조용히 있어다오!

나는 문제의 나무와 적당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뒤쪽에 뭐가 있는지 살짝 볼 수 있을 정도로 우회했다.

그러자 문제의 대상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왔다.

저건...

손?

인간이라고?!

나무 뒤에 있는 건 분명 인간이었다!

인간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인간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심장에 소름이 돋았다.

물론··· 불과 얼마 전까지는 나도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온 뒤로, 인간은 골칫덩어리일 뿐이었다!

옆으로 살짝 움직이자, 인간의 모습이 좀 더 제대로 보였다.

이전에 본 적 있는 검은 옷을 입은 병사들 중 하나 같았다.

지난 번에는 위쪽 동굴에서 여기로 나를 쫓아내더니···

기어코 숲까지 따라왔다!

니들 대체 뭐가 문제야?!

솔직히 내가 성격이 좋아서 망정이지, 아니면 좀 상처받을 뻔했다.

그저 몬스터라는 이유로 날 이토록 미워하는 거야?

이 깊은 곳까지 쫓아오다니!

문득 여기가 개미 언덕과 얼마나 가까운지 떠올리자, 심장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설마 벌써 우리를 발견한 걸까?

여왕 개미든 일개미든, 인간을 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한 때 인간이었던 나는 문명화된 인간 사회가 이런 세계에서 얼마나 강한 힘을 모을 수 있을지 짐작이 갔다.

이미 오랜 기간에 걸친 연구를 통해 온갖 종류의 스킬 조합, 마법 체계, 상호 작용 따위를 파악했겠지.

반면 우리 둥지는 너무 어렸다.

갓 부화한 상태를 벗어난 일개미도 얼마 없었고···

개체 수를 모두 합쳐도 천 마리가 안 되는 규모였다.

우리는 아직 약했고, 특히 훈련된 인간 병사들과 맞선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부족했다.

한 때 나와 동족이었던 인간에 맞서 싸우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병사가 둥지의 위치를 확인하고 돌아가서 다른 인간들에게 알리면 어쩌지?

그러도록 내버려둬도 괜찮은 걸까?

아니면···

내가 정말 인간을 죽일 수 있을까?

아무리 둥지를 위해서라도?

으아!

생각하기 싫은 질문이었다.

갑자기 이런 존재론적인 딜레마라니, 너무하잖아 시스템!

인간으로 살아온 17년을 아무렇지 않게 잊어버릴 수는 없다고!

비록 지금 나는 자랑스러운 개미지만···

이 모습으로 산 지는 아직 한 달 밖에 안 됐어!

물론 내 앞의 인간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둥지가 어디 있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침착하자.

우리는 무사할 수 있어!

나는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살짝 후퇴했다.

지금은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리 하나로 뻗어 타이니가 움직이지 못하게 꽉 붙들었다.

다행히 시끄럽게 반항하지는 않았지만, 녀석은 내게 짜증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어쩌라고, 임마!

이대로 죽고 싶어?

곧 나는 숨어 있는 인간이 이 지역을 탐색 중인 여자 병사라는 사실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어깨와 옆구리에 금속판을 덧댄 검은색 가죽 갑옷을 입고, 긴 금발 머리는 시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뒤로 단단히 묶고 있었다.

귀도 보였는데···

적어도 엘프가 아닌 건 분명했다.

쳇···

···

이 멍청아!

집중해!

병사는 당연하지만 무장한 상태였다.

등에는 장궁을 매고, 허리에는 단검을 차고 있었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인간을 이렇게 자세히 관찰한 건 처음이었다.

그저 옷과 장비만으로도 알 수 있는 정보들이 꽤 많았다.

타이니와 나는 인간의 오른쪽에 있는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가만히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우리는 인간과 겨우 5,6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10분 정도 지나자, 병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과감하게 숲 속으로 향했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타이니를 이끌고 멀리 떨어져서 인간을 따라갔다.

다행히 요즘 워낙 숲속에서 싸움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보니, 들키지 않고 움직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향상된 은신 스킬이 레벨 4가 되었습니다]

오!

은신 스킬!

내 처음 구매한 스킬이자 가장 신실한 동반자...

역시 너 밖에 없다!

그렇게 많은 스킬을 구입한 후에도, 가장 소중한 기술은 여전히 은신이었다.

은신 스킬이 없었다면, 나약한 개미로 태어난 내가 이렇게 두려움 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수준까지 진화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둥지가 내 안위를 보장할 만큼 크고 강력해지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행복한 개미로 이 세상에서 최대한 오래 살다 갈 생각이었다.

지나치게 큰 소망은 아니잖아?

인간이었을 때에도 나는 그렇게 거창한 꿈은 없었다.

그런 성격은 몬스터가 되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병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모양의 갑옷을 입은 다른 인간 하나를 만났다.

다른 점은 장비 뿐이었다.

새로 나타난 병사는 활과 단검 대신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녀석들이던가?

희미한 기시감이 들었다.

물론 시각을 향상시키기 전까지는 지금만큼 세세한 부분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을 제대로 구별하지도 못했다.

위쪽 통로에서 나를 쫓아낸 사람들 중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숲 속에서 합류한 두 인간은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주위를 경계하면서 말이다.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정도는 잘 아는 것 같았다.

지금은 말그대로 사방이 몬스터들이니까···

사실, 이미 더듬이에 열 신호가 느껴졌다.

오른쪽에서 몬스터가 접근하고 있었다.

나는 열 감지 더듬이 덕분에 미리 알고 몸을 숨길 수 있지만, 인간들은 아니었다.

···재미있어지겠는데.

후퇴

잠시 후 숲 속에서 처음 보는 괴상한 모습의 몬스터가 나타났다.

짧고 뻣뻣한 털로 뒤덮인 거대한 근육질의 팔이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왔다.

그 팔 끝에는 거의 내 머리통 만한 크기의 손이 달려 있었다.

손가락마다 튀어나온 검은색의 날카로운 손톱은 들쭉날쭉한 톱니 모양이었다.

시선을 위로 올리자, 넓은 어깨 위의 커다란 사자 머리가 보였다.

사자가 으르렁거리자 입 안에 숨겨져 있던 길고 구부러진 송곳니가 드러났다.

밀림의 왕자 레오?

아니···

사실 밀림에는 사자가 살지 않는다고 하던데.

어쨌든 사자 머리에 근육질 팔이 달린 거인이라고?

이건 대체 무슨 몬스터지?

사자 거인은 노란색 눈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인간들 쪽을 탐욕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음···

사자 거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이런 숲 속에서 저렇게 작고 연약해 보이는 인간들과 마주치면, 어떤 몬스터라도 손쉬운 사냥감으로 생각하고 달려들 터였다.

만약 한 번도 인간을 본 적이 없는 멍청한 몬스터라면 말이다.

인간의 지성이 가진 무서운 힘을 알 리가 없으니...

던전 안에만 살던 몬스터들은 인간이 얼마나 독창적이면서도 무궁무진한 방법으로 살생을 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겉으로 볼 때에는 몬스터들보다 훨씬 약해 보이는 생물에 불과하니까.

그저 공짜 바이오매스를 발견했다는 생각에 어서 잡아먹고 싶겠지.

과연 내 생각이 맞았다.

사자 거인은 우렁차게 포효하며 인간들을 향해 곧장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본 여자 병사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번개처럼 앞을 향해 찔렀다.

그 동작이 얼마나 빠른지, 내가 눈을 깜빡일 수 있었다면 놓쳤을 정도였다!

여자 병사의 검은 그대로 사자의 어깨를 찌르고 들어갔다.

으르렁거리는 몬스터의 팔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첫 번째 공격에 실패한 사자 괴물은 뒤로 물러나더니, 두 번째 시도를 위해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한 손을 마치 공성 망치 같은 육중한 기세로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이 여자 병사에게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남자 병사가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지팡이 끝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창이 나타났다.

불꽃의 창은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 사자 괴물의 미간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사자 괴물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

그래, 저럴 줄 알았어.

두 인간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한 태도로 사자 시체에 접근했다.

여자 병사가 한 발로 시체를 딛고 서더니, 몬스터의 가슴 부위를 칼로 파 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남자 병사는 지팡이를 들고 주위를 경계했다.

곧 여자 병사가 몬스터의 피투성이 가슴에서 코어를 찾아냈다.

그리고 시체 냄새가 다른 몬스터들을 유인하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몬스터들을 말이지!

타이니는 벌써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인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마자, 우리는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레오 오그리.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레오 오그리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됩니다.]

[레오 오그리: 사자 오우거, 엄청난 힘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사자 오우거는 과도하게 발달된 팔을 휘둘러, 맨주먹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몇몇 사자 오우거는 바위나 나무 몽둥이 같은 원시적인 무기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리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사자 오우거라고?

그래··· 뭐.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5분 정도 식사를 즐긴 나와 타이니는 바이오매스 두 개를 얻은 뒤, 잽싸게 인간들이 떠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 인간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두 인간 병사가 몬스터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한 명은 연신 위쪽을 올려다봤는데, 아마 천장에 둥지를 트는 가고일 몬스터를 경계하는 듯했다.

한동안 보지 못한 놈들이지만···

여전히 저 위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만약 놈들이 나타나면 나 말고 다른 녀석을 덮치기만 바랄 수밖에.

병사들은 발 밑의 지형을 파악하고 가까운 몬스터의 흔적을 피하며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 과정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마치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도 근처에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 같았다.

나는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그리고 타이니도···

인간들이 거침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본인들이 숲 속의 어떤 위치에 있고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정확히 아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했다.

···

혹시 천장의 특징을 기억해서 그걸 기준으로 움직이는 건가?

마치 별자리처럼, 머리 위의 종유석이나 균열 따위를 기준으로 위치를 알 수 있기라도 한 건가?

아주 그럴싸한 방법이었다.

여태까지 내가 그 생각을 못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천장을 간간히 올려다보며 기억해둘 만한 특징을 골라냈다.

초점 시야로 업그레이드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시간 정도 이동하자, 병사들이 마침내 목적지로 보이는 장소에 도착했다.

숲 속의 커다란 언덕 안쪽으로 굴을 파 놓은 일종의 초소였다.

굴 입구에는 또다른 병사 두 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몬스터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서 위장을 한 상태였다.

내가 따라온 두 인간 병사는 가슴에 손을 올리는 경례를 한 뒤 굴 속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색의 갑옷이 그림자에 자연스럽게 섞이며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젠장!

뭔가 독심술이나 텔레파시 같은 스킬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수를 써야 저 인간들에게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까?

저 인간들은 내가 혼자 알아낼 수 있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눈 앞에 엄청난 지식의 금광이 놓여 있는데, 들어갈 수가 없다니!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나는 잠시 여기 머물면서 인간들의 초소로 보이는 언덕을 관찰하기로 했다.

인간 병사들의 공격만큼 둥지의 안위에 위협이 되는 요소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찰대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저들이 둥지를 노리고 있지 않다는 점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

하지만 두 시간이 지나자···

처음의 결의가 슬슬 약해졌다.

그 사이 굴 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들은 똑 같은 복장의 다른 병사들과 교대했다.

처음에 내가 쫓아왔던 그 병사들이 아닌 걸 볼 때, 적어도 굴 안에 여섯 명은 넘는 인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정도가 유일한 수확이었다.

타이니는 지겨움을 못 이기고 내 뒤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다행히 녀석이 코 고는 소리는 주위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인간들을 자세히 관찰하며 뭐 하나라도 더 알아내려고 애썼다.

발꿈치부터 무릎까지 끈으로 묶여 있는 부츠는 두꺼운 가죽을 검게 염색해서 만든 것 같았다.

흉갑도 마찬가지로 검게 염색된 가죽 재질에 금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양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는 없었다.

무기는 병사들마다 각각 달랐다.

내가 처음 도착했을 때 서 있던 보초 둘은 허리춤에 장검을 차고, 등에는 커다란 방패를 매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교대한 두 명은 달랐다.

하나는 좀 짧은 칼 두 자루를 X자로 교차해서 찼고, 다른 하나는 굴에서 나오며 석궁을 꺼내 짧은 화살을 장전했다.

내 눈에는 좀 특이한 부대처럼 보였다.

병사들마다 무기가 판이하게 다르다니···

생각해 보니 병사들이 왜 가벼운 갑옷을 입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처음에는 왜 중세 기사처럼 두꺼운 판금 갑옷을 입지 않을까 궁금했는데···

이 지하의 몬스터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생각해 보면, 금속으로 만든 갑옷을 입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내 날카로운 깨물기 스킬만 해도 철판을 종잇장처럼 뚫을 수 있을 터였다.

판금 갑옷은 무겁고 불편하기만 했지, 별 장점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자, 숲 속에서 병사 두 명이 더 나타나 언덕의 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갑옷을 입은 병사 열 명이 언덕 안에서 나왔다.

병사들은 서로 조용히 대화를 나눴는데, 나는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리는 잘 들렸지만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젠장.

의사 소통의 꿈은 물 건너 간 건가.

개미라서 목소리를 내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의 언어를 듣고도 이해할 수 없다니···

병사들 중 몇몇은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매고 있었다.

이 언덕을 떠나 다른 위치로 옮기려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병사들은 무리를 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주저했다.

인간들은 둥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벌써 둥지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인데···

이것보다 더 멀리 가도 괜찮을까?

인간들을 미행하는 건 몹시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그 수가 열 명으로 늘었다.

혹시 놈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타이니와 나는 그대로 끝장이었다.

···

그래, 안전이 최고지.

벌써 꽤 많은 정보를 얻었다.

인간들의 초소 위치도 알아냈고, 어떤 스킬을 사용하는지도 목격했다.

그 정도로 만족하자.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는 건 너무 위험했다.

이 병사들은 내가 지난 번에 야영지를 털어먹었던 어중이떠중이 용병과는 전혀 달랐다.

척 봐도 제대로 훈련을 받은 군인이라는 느낌이 왔다.

굴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논외였다.

이번에는 어떤 함정이 있는지 운 좋게 보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언덕 안에 뭐가 있을지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물러나자.

인간들이 떠난 뒤 나는 타이니와 함께 둥지 쪽을 향했다.

동굴의 천장을 예의 주시하며, 여기까지 오는 길에 기억해 놓았던 눈에 띄는 특징들을 찾아 움직였다.

몇 번 헷갈리기는 했지만, 무사히 출발 지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간 병사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걸 안 이상···

앞으로 더욱 조심스럽게 정찰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인간들이 위쪽 층을 샅샅이 뒤지며 눈에 보이는 몬스터들을 가차없이 죽여버리던 모습을 떠올리니 아직도 등골이 오싹했다.

내가 안전해지는 길은 하나 뿐이었다.

더 강해지고, 더 진화하는 것!

진화를 통해 둥지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면, 우리 개미들이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장은 사냥을 해서 레벨을 올리는 게 우선이다!

2레벨만 더 오르면 진화라고!

둥지 근처로 돌아온 나는 타이니와 함께 나무 위로 올라가 눈에 띄는 적이 없는지 살폈다.

숲은 몬스터로 가득했지만, 사냥감을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경험치를 효율적으로 얻으려면 진화한 몬스터를 노려야 하지만, 어떤 놈들은 다른 놈들보다 훨씬 더 강했다.

예를 들어 거대 악어 한 마리보다 진화한 지네 세 마리를 상대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니 현명한 사냥을 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도 커다란 코어 때문에 가슴이 은은하게 아팠다.

어서 이 코어 안의 잠재력을 활용해야 할 텐데.

이번 진화를 통해 나는 과연 무엇이 될까?

머리를 쓰자

레기온의 야영지는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장교들이 주의 깊게 지켜보는 가운데 순찰대가 꾸준히 드나들었다.

이번 원정에서는 몬스터 소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무래도 웨이브 대비가 예정만큼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지 않았다.

아우릴리아 호민관은 걱정스러웠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예상이 자꾸만 빗나갔기 때문이다.

당면한 상황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특이했다.

매일 여러 분대가 전초 기지를 나서서 몬스터를 사냥하고 스폰 지점을 수색했다.

스폰 지점을 발견하면 군단병들이 즉시 포위한 뒤, 던전이 몬스터들을 만들어 내는 족족 처치했다.

이는 레기온이 웨이브를 대비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목표는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몬스터의 수를 최대한 줄이는 데 있었다.

평소에 레기온이 스폰 지점을 포위하면, 사냥할 몬스터가 줄어든다며 용병들과 던전 모험가들이 극심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웨이브가 가까워지는 시기에는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많은 몬스터들을 미리 소탕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스폰 지점 하나를 찾아서 봉인하면, 다음날 네 군데가 더 생겨났다.

아무리 많은 자원과 병력을 동원해도 유의미하게 몬스터의 수를 줄이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티투스 사령관이 직접 숲에 들어가서, 몇 시간 만에 코어로 가득 찬 가방을 들고 몬스터의 체액을 전신에 뒤집어쓴 채 돌아오기도 했다.

아우릴리아는 그때를 기억하며 웃었다.

사령관이 숲으로 들어간다고 했을 때, 훈련병 몇 명이 동행하겠다고 자원했다.

그러자 고참 병사들은 훈련병들을 미친 사람 보듯 쳐다봤다.

티투스 사령관과 보조를 맞출 수 있는 병사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훈련병 열 명이 숲 속에서 수색을 마치고 돌아왔다.

공동의 안쪽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했던 수색 부대였다.

매일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 원정의 최우선 과제는 개미 둥지의 발견이었다.

지친 병사들이 한 줄로 나란히 서서 관문을 통과했다.

어깨는 무거운 배낭 때문에 축 늘어졌고, 눈은 수면 부족으로 충혈된 모습이었다.

가죽 갑옷은 몇 차례의 전투 끝에 군데군데 찢어지고 얼룩져 있었다.

호민관은 수색 부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민관을 본 훈련병들이 걸음을 멈추고 경례를 올렸다.

군기가 바짝 든 훈련병들을 보자, 노련한 호민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보고할 사항이 있나?"

아우릴리아가 훈련병들에게 물었다.

이번 수색의 지휘는 미린이 맡았다.

미린은 보고를 위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훈련병들은 이번 원정에 함께 하는 상관들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백인대장, 호민관···

심지어 사령관인 티투스마저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것 같았다.

갑옷이 더럽다?

연병장 뛰기 실시.

경례가 시원찮아?

두 시간 훈련장.

훈련 중에 실수를 했다?

기절할 때까지 훈련한다, 실시.

그래서 훈련병들은 잔뜩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멀리 공동의 안쪽을 수색하는 임무를 맡자 오히려 안심이 될 정도였다.

상관들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몬스터 무리와 싸우면서 며칠이고 쪽잠을 자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미린은 목을 가다듬고 보고를 시작했다.

"수색대는 약 30시간 전 지정된 좌표에 도달했습니다. 근방에서 네 군대의 스폰 지점을 찾았고 모두 성공적으로 봉인했습니다. 각 스폰 지점에서 식별 후 처치한 몬스터는 검토하실 수 있도록 정리해 두었습니다."

미린은 허리춤의 가방에서 스크롤 보관함을 꺼내 아우릴리아에게 전달한 뒤, 다시 한 번 경례했다.

호민관은 보관함을 받아 들며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무래도 훈련병들이 슬슬 이번 원정이 얼마나 어려운 임무인지 깨달아 가고 있는 듯했다.

아우릴리아는 보관함을 열고 안에 들어있던 스크롤을 펼쳐 목록과 숫자들을 눈으로 훑었다.

호민관은 순식간에 스크롤에 담겨있는 모든 정보를 파악했다.

"그리고 추적 대상은 어떻게 됐지? 개미들은 발견했나?"

아우릴리아가 스크롤을 다시 보관함 안에 넣으며 물었다.

이 스크롤은 이제 행정 담당관에게 넘어가, 레기온의 간부들과 리리안 왕실에 보고될 수 있도록 기록될 것이다.

호민관의 물음에 수색대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번 수색에서 개미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민관이 이걸 수색대의 임무 실패로 여긴다면, 그에 대한 징계가 따를 터였다.

미린은 다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개미의 흔적이나 둥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호민관님. 몬스터의 수가 늘어난 탓에 단독 수색이 매우 어려웠고, 그러다 보니 수색의 범위와 효율이 모두 크게 줄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계속했다.

"저희가 수색한 지역에서 개미가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발견은 하지 못했습니다. 해당 지역에 한번 더 병력을 파견해서 철저히 수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린이 대답을 이어 나갈수록 수색대에 속한 훈련병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수색이 자기들한테는 너무 어려운 임무였다고 인정할 뿐 아니라, 다른 대원들을 파견해서 이번 실패를 만회할 필요가 있다고 하다니!

다들 대체 어떤 징계를 받게 될지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물론 미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조금 더···

유연하게 보고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훈련병들의 우려와 달리, 호민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병 미린, 이만 수색대를 해산하도록.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미린이 뒤로 돌아 훈련병들을 해산시켰다.

훈련병들은 휴식용 천막으로 돌아가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던전 안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해 봤자 별 건 없었지만, 적어도 따뜻한 식사와 목욕 그리고 숙면은 보장되어 있었다.

나머지 대원들이 서로 등을 두드리며 천막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미린은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아우릴리아 호민관은 평소에도 엄격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리고 던전에 들어온 이후로 평소의 다섯 배는 더 심했기 때문이다.

나이 지긋한 호민관은 바로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어린 훈련병을 데리고 산책하듯 기지 안쪽으로 걸었다.

두 여자는 레기온의 부지런한 장인들이 몬스터들로부터 수확한 재료를 손질하고 있는 작업장을 지나쳤다.

자원 확보는 이번 원정에서 우선순위가 그리 높지 않았지만, 기지 가까이에서 몬스터를 잡았을 경우 그대로 던전에 양보하기는 아까웠다.

가죽은 푹 삶아서 무두질을 했고, 뼈는 목적에 따라 다듬거나 가루를 내거나 혹은 끓였다.

심연의 군단은 던전에서 수확한 재료를 외부에 판매하지 않고, 레기온의 장인들이 군단병을 위한 무기와 갑옷을 만드는데 사용하도록 했다.

혹시 남는 재료가 있다면 보관했다가 다른 도시, 다른 국가의 레기온으로 보냈다.

호민관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장인들과 인사를 나눴다.

군단병은 아니지만 레기온의 소중한 인재들이었다.

그리고 미린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 수색대는 내일 정찰에 나가지 않을 거다."

미린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호민관이 손을 들어 막았다.

"이번 실패 때문이 아니다. 사령관님과 내가 소규모 수색대를 공동 안쪽으로 보내기에는 너무 위험해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이제부터는 기지 근처의 몬스터를 처치하는 임무를 맡게 될 거다."

미린이 얼굴을 찡그렸다.

"외람되지만, 호민관님··· 저희를 너무 온실속의 화초처럼 여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우릴리아가 웃음을 터뜨리며 미린을 쳐다봤다.

"그럴 거라면 너희를 던전 안으로 데려왔을까?"

하기사 미린이 던전에 들어온 이후로 경험한 일들은 결코 온실 속의 화초에 어울리지 않았다.

"아닙니다."

호민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내부의 공기가 심상치가 않다. 본부에서 이미 더 깊은 층의 상황은 여기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전갈을 보내기도 했고. 우리는 웨이브를 대비하기 위해 리리안의 모든 군단병들이 여기로 보고하도록 명령했거든."

미린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호민관님, 지상에 있는 본부가 어떻게 우리보다 던전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까? 던전에 들어와 있는 건 우리인데요."

아우릴리아가 잠시 미린을 쳐다봤다.

경험, 고통, 상실과 승리로 점철된 세월이 호민관의 눈 안에 일렁였다.

"우리는 심연의 군단이야. 레기온의 본부가 정말 지상에 있다고 생각하나?"

미린은 잠시 아우릴리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리리아의 레기온 본부가 던전 안에 있다는 말인가?

"왜 제게 그런 사실을 알려주시는 겁니까?"

미린이 물었다.

"훈련병들도 좀 더 많은 걸 알아야 할 때가 되었으니까. 이 원정이 끝날 무렵이면 너희들은 레기온의 정식 군단병이 되어서 비밀의 일부가 되거나··· 아니면 목숨을 잃거나, 둘 중 하나겠지."

+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사냥을 하려면 머리를 써야 했다.

생각해 보라.

인간이 모든 경쟁자를 제치고 지구에서 가장 지배적인 종족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바로 머리였다.

독창성 말이다!

독창성과 어떤 행동의 결과를 미리 걱정하지 않는 성향이 결합해···

인류는 먹이 사슬의 정점에 올랐다.

그럼 지금 상황에서, 둥지의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한 식량을 마련해야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일반적인 사냥은 더 이상 어려웠다.

점점 몬스터의 수가 너무 늘었기 때문이다.

1대1로 사냥감과 싸움을 벌여서 처치한 뒤, 다른 놈들의 주목을 끌지 않고 바이오매스를 섭취하거나 운반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머리를 굴릴 시간이다.

전생이 선물해 준 지능이 빛을 발할 순간이었다.

그래서 결국 뭘 생각했냐고?

바로 함정이다!

인간의 지성과 땅굴을 파는 개미의 능력을 모두 활용해 바닥에 함정을 파는 것이다!

···

그래, 그래.

그렇게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둥지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다 커다란 함정을 파기 시작했다.

처음 예상했던 것 보다는 만드는 과정이 까다로웠다.

땅을 깊이 팔수록 흙이 아니라 돌이 나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턱에 마나를 주입할 수 있는 덕분에, 좀 더 힘을 들여서 돌을 쪼개면 되기는 했다.

채굴 스킬이 또 한번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함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레벨도 하나 올랐다.

채굴 스킬이 작동하는 방식은 아주 흥미로웠다.

나를 도와 굴을 파주는 마법의 삽이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러면 좋겠군···) 마치 달인이 내 본능을 인도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함정을 팔 장소를 찾을 때, 본능적으로 끌리는 위치가 있는 반면 여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위치가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턱을 삽처럼 사용해서 땅을 파다 보면, 내 본능이 '여기는 아직 파면 안된다', '흙이 부서질 것이다', '이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면 더 잘 파질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속삭였다.

덕분에 실수는 줄고 효율은 크게 늘면서, 짧은 시간 안에 더 큰 공간을 파내 수 있게 되었다.

채굴 스킬을 끝까지 성장시키면 아마 굴파기의 신이 될 것 같았다.

실수 없이 엄청난 속도로 작업해서, 하루 안에 거대한 둥지를 만들 수 있는 채굴의 신 말이다!

몇 시간에 걸친 노동 끝에, 나는 폭 2미터 깊이 5미터 정도 되는 함정을 완성했다.

이 정도면 대부분의 몬스터를 가둘만큼 크고 깊었다.

모처럼 개미답게 부지런히 일했더니 뿌듯하군!

함정 바닥에는 수평으로 몇 미터 정도 이어진 작은 통로도 만들었다.

먹이감을 보관하고 숨어서 섭취하기 위한 용도의 비밀 공간이었다.

작업 중에 몇 차례나 몬스터가 접근하는 걸 감지하고 숨어야 했다.

최근 들어 숲 속의 몬스터들이 매우 공격적으로 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놈들은 나를 발견하자 마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움을 벌이려고 들 게 분명했다.

그럼 그 소란을 듣고 더 많은 몬스터들이 몰려들 테고···

함정을 써먹으려는 내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겠지!

진정한 사냥꾼이라면 최고의 결과를 위해 인내심을 발휘할 줄 알아야 했다.

타이니는 내가 함정을 파는 내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잠을 자고 있었다.

어차피 땅을 파는 일에 별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근처에 뭐라도 나타나면 금방 덤벼들 터였다.

솔직히 저렇게 잠이나 자는 편이 나를 도와주는 거였다.

나는 함정 위에 나뭇가지와 풀을 얇게 덮어서 마무리를 한 뒤,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 제 발로 굴러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음하하하!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성과는 없었다.

오가는 몬스터들은 많았는데···

아무도 내 함정 위를 밟지 않았다.

빌어먹을 몬스터 놈들!

왜 저렇게 운이 좋은 거야?

나는 머리를 좀 더 굴렸다.

함정의 효율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끼!

몬스터를 함정으로 유인할 미끼를 설치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뭘 미끼로 사용해야 할까?

그때 나무 위에서 코를 골던 타이니가 잠결에 재채기를 했다.

나는 무심코 녀석을 올려다봤다.

···

아니, 그건 아니지.

타이니를 미끼로 사용했다가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큰일이었다.

코어 값을 다 하기도 전에 죽어버리면 곤란했다.

내가 열심히 일하는 동안 빈둥거리기만 했던 타이니 녀석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는 상상은 꽤 즐거웠지만···

그냥 몬스터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오기를 기다려 보자.

한 마리만 잡으면 거기서 나온 바이오매스를 미끼로 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면서 기다리기면 시간이 아까우니까···

일개미의 본능이 내 안에서 꿈틀대며,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채찍질했다.

나는 함정으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주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정에서 30미터 정도 거리에 괜찮은 자리를 발견했다.

함정 하나로 부족하다면, 더 만들면 그만이지!

땅파기에 대한 개미의 열정을 보여주마!

처음 함정을 팔 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땅에서 파낸 흙을 자연스럽게 주변에 흩어 놓는 일이었다.

함정 바로 옆에 흙으로 커다란 언덕을 만들어 놓는다면, 그건 제대로 된 함정이 아니니까.

여기 함정이 있다는 광고를 할 셈이 아니라면 말이다.

두 번째 함정을 파기 시작하고 30분쯤 되었을 때, 쿵 소리에 뒤이어 분개한 듯한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무아지경으로 땅을 파던 나는 깜짝 놀랐다.

뭐지!

너무 잘 먹히는데?

나는 너무 깜짝 놀란 나머지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땅을 파는 동안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 개미가 된 뒤로 땅을 파면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래, 사실 일개미의 존재 목적이나 마찬가지니까···

정신을 차린 나는 첫 번째 구덩이로 향했다.

그리고 어떤 운 나쁜 몬스터가 내 다소 조잡하고 투박한 함정에 빠져 있는 걸 발견했다.

구덕이 바닥에서 사납게 성질을 부리고 있는 몬스터는 커다란 쥐처럼 생긴 놈이었다.

꼬리에 달린 칼날이 위험해 보였다.

···이걸 맞으면 더 성질이 날 거다.

푸슝!

나는 산성 용액을 발사한 뒤 함정 안으로 뛰어내려 재빨리 놈을 처리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좋아.

마침내 내 함정이 결실을 맺었구나!

물론 그렇게 대단한 결실은 아니다.

포도 한 알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결실은 결실이지!

뭐든 시작이 중요한 법이니까 말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놈을 먹지 않기로 결정했다.

옆을 돌아보니 타이니가 식욕에 눈이 멀어 쥐 시체를 향해 달려들고 있길래 뒤통수를 때려서 멈추게 했다.

지금 이 작은 바이오매스 조각을 먹지 않고 참는다면, 나중에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시체를 구덩이 밖으로 꺼낸 다음, 함정 위를 다시 수풀로 가렸다.

그리고는 수풀 한가운데에 조심스럽게 시체를 배치했다.

내가 만든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바보짓을 하지 않으려면 주의해야 했다.

그래도 함정으로 뭐라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서 다행이었다.

기껏 열심히 작업했는데, 땅파기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는 용도 말고는 쓸모가 없었다면 억울할 뻔했다.

이제 적당한 미끼도 설치했으니···

타이니와 내가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녀석이 잡히기를 기다려야지!

첫 번째 함정을 손본 뒤, 타이니를 다시 나무 위에 올라가 있게 하고 나는 작업 중이던 두 번째 함정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러면서 혹시 접근하는 몬스터가 없는지 열 감지 더듬이와 넓은 시야각으로 경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다시 신나게 굴을 파볼까!

두 번째 함정이 반쯤 완성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쿵 소리와 함께 사나운 포효 소리가 들렸다.

이런, 이런.

내 누추한 함정에 또 손님이 찾아온 모양이로군!

그럼 반갑게 맞이할 수밖에!

크헤헤헤헤.

나는 속으로 신나게 웃으며 작업 중인 함정을 나와 첫 번째 구덩이로 달려갔다.

나무 위에서는 타이니가 함정에 빠진 불행한 몬스터를 내려다보며 신나서 날뛰고 있었다.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지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이었다.

음···

배가 고픈 건 알겠지만 그래도 예의는 좀 지켜줄래?

하지만 사실 내 배도 꼬르륵거리고 있었다.

커다란 구덩이를 두 개나 파는 노동을 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나는 함정 가장자리로 다가가서 과연 어떤 몬스터가 잡혔는지 살펴봤다.

구덩이 속에 사나워 보이는 거대 지네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함정을 가리고 있던 나뭇가지며 잎사귀 따위가 수많은 다리에 걸려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버둥거리는 중이었다.

···또 지네란 말이지.

이 숲에 처음 왔을 때에는 거대 지네를 보고 겁을 먹기도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놈들이 무섭지 않았다.

일반적인 발톱 지네보다 덩치만 클 뿐, 마찬가지로 멍청했고 공격 방식도 정해져 있었다.

게다가 덩치가 큰 만큼 민첩함이 떨어졌기 때문에, 지네 몬스터의 가장 위협적인 무기인 독침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기도 했다.

푸슝!

나는 이번에도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정의의 산성 용액을 미리 한 방 발사했다.

지금 이 숲에서 함정을 이용한 사냥 방식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한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구덩이 안에서 전투를 벌여도 소리가 밖으로 덜 새어 나가 다른 몬스터들을 끌어들일 확률이 적다는 게 하나고···

함정에 빠진 몬스터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공격하면 승률이 높을 거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그런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

나는 주위의 이목을 끌기 전에 이 거대 지네를 빨리 해치우기로 했다.

겨우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떼어내고 몸을 추스리던 거대 지네는 내 구속 산성 용액을 뒤집어쓰고 다시 한 번 다리가 꼬였다.

고통과 불편함 때문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났는지, 놈은 사납게 쉭쉭거리며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나는 거대 지네의 몸통 위로 뛰어내려, 발톱에 최대한 힘을 주고 단단히 붙잡았다.

맛 좀 봐라, 이 벌레 녀석!

날카롭게 깨물기!

우직!

마치 차가운 버터를 뜨거운 나이프로 찌를 때처럼, 내 턱 끝이 지네의 외골격을 부드럽게 뚫고 들어가서 놈의 내장을 무참히 유린했다.

몬스터는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몸통을 흔들어 나를 구덩이의 벽 쪽으로 내던졌다.

쾅!

아야!

이 망할 지네 놈이!

용서하지 않겠다!

소리는 요란했지만, 다이아몬드 갑각 덕분에 지네의 절박한 공격에도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몬스터들이 이 소란을 듣고 몰려들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나는 재빨리 거대 지네를 한 번 더 물어서 앙갚음을 했다.

우직!

이미 날카로운 깨물기로 몸에 구멍을 내 놓은 상태라, 이번에는 놈의 피해를 극대화하기 위해 단단히 물기를 시전했다.

내 턱이 거대 지네의 근육과 장기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 공격으로 지네는 전의를 거의 상실했다.

몸의 뒤쪽 반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는 상태에서 놈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레벨 6 성체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좋았어!

나는 바이오매스 확보를 위해 번개처럼 달려들어, 녀석을 구덩이 아래에 미리 만들어 둔 수평 통로로 끌어다 놓았다.

그리고는 함정에서 나와 다시 나뭇가지와 이파리로 위쪽을 가렸다.

이번에는 구멍 한쪽을 완전히 가리지 않고 조금 공간을 남겨뒀다.

이러면 식사를 하는 동안 냄새가 너무 많이 퍼지지도 않을 테고, 다른 놈들이 내가 숨어 있는 장소를 찾기도 어려울 터였다.

모든 조치를 마친 나는 타이니와 함께 다시 함정 안으로 들어가서 굶주린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두운 비밀 통로 안에서 허겁지겁 지네의 시체를 먹어 치웠다.

꽤 오래 공복으로 있던 타이니의 식욕은 엄청났다.

그래, 많이 먹어라.

많이 먹고 빨리 커서 밥값을 해야지.

좀 더 크면 노예처럼 부려줄 테다!

이··· 귀여운 노예 원숭이 녀석!

이번 식사로는 바이오매스 두 개를 얻었다.

이로써 현재 내가 가진 바이오매스는 총 네 개였다.

하나만 더 있으면 신체 부위 중 하나를 +5까지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재생 분비선이 +5가 되면 어떤 고급 선택지가 나올지 기대되네!

이쯤 되자 슬슬 타이니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태어난 뒤로 여태까지 열 다섯 개··· 많으면 스무 개 정도 바이오매스를 섭취했을 텐데.

다 어디에 사용했을까?

손등으로 주둥이를 훔치던 타이니는 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채자,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 쳐다봤다.

녀석의 털이나 손에서는 별 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눈이나 팔,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바이오매스를 쓰기는 한 걸까?

혹시 계속 모으고만 있나?

어느 정도 자라기 전까지는 바이오매스를 쓰지 못하나?

아직 성체라고 부르기 어려운 단계이기는 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난 개미로 태어나자 마자 바이오매스를 쓸 수 있었는데···

뭐, 지금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일단 계속 바이오매스를 먹이면서 어떻게 되는지 볼 수밖에.

다행히 식사 중에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미끼로 썼던 쥐 시체를 재활용할 수는 없었다.

아마 구덩이에 떨어져 몸부림을 치면서 갈기갈기 찢어 놓은 탓이었다.

나는 타이니가 나무 위에 안전하게 자리잡은 걸 확인한 뒤, 첫 번째 함정을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두 번째 함정 제작을 마치러 돌아갔다.

미끼가 없기 때문에, 이번에는 사냥감이 잡힐 때까지 좀 더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지네 시체를 조금 남겨서 미끼로 쓰면 되지 않았냐고?

그래, 그럴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랬나?

아니.

우린···

배가 많이 고팠다고···

몇 시간이 지나서 나는 두 번째 함정을 완성했다.

그 사이 몇 차례 방해를 받기는 했다.

덜 진화한 지네 한 무리, 악어 괴물, 개의 머리가 달린 뱀이 근처를 지나갔다.

이 중에서 개 머리 뱀은 살아있는 모습을 본 게 처음이었다.

아쉽게도 놈들 중 한 마리도 내 함정에 발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전부 지나갈 때까지 잠시 몸을 숨겼다가 다시 작업을 재개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윽고 땅파기 레벨이 한 번 더 올랐다!

목숨을 걸지 않아도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있다는 게 기분이 좋았다.

나는 두 번째 구덩이를 완성하고 나서 위쪽을 덮기 전에, 처음과 마찬가지로 바닥 쪽에 작은 수평 통로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첫 번째 함정의 통로와 연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 아이디어 아닌가?

그냥 구덩이를 팔 때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특히 턱에 마나를 주입해서 중간을 막고 있는 딱딱한 바위를 깨뜨려야 할 때는 그냥 포기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두 함정의 바닥을 잇는 30미터 길이의 통로를 완성하고야 말았다.

와, 진짜 오래 걸렸네!

···엄청 배고프잖아!

쿵!

으르렁!

뭐지?

설마 타이밍 좋게 새로운 손님이 오셨나?

방금 완성한 좁은 통로를 따라 첫 번째 함정으로 돌아가자, 사나운 악어 괴물이 함정을 가리고 있던 덩굴과 나뭇가지에 뒤엉켜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걸렸구나!

개미 함정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나는 곧장 통로에서 뛰쳐나가 놈에게 돌진했다.

이 함정 사냥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은 모든 전투를 최대한 빠르게 끝내서 불필요한 소음을 줄이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몬스터는 함정에 빠진 뒤에도 바닥 부근에 작은 통로가 뚫려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일개미 한 마리가 튀어나와 마나로 빛나는 턱을 앞세워 자신에게 돌진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단단히 물기!

뚝!

나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턱을 휘둘러 악어 괴물의 다리 하나를 단번에 끊어냈다.

거대한 악어 괴물이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제아무리 단단한 비늘도 마나가 잔뜩 주입된 턱 앞에서는 종잇장에 불과했다.

다리 하나가 잘린 악어 괴물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구덩이의 공간이 워낙 좁아 놈처럼 커다란 몬스터가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하지만 내게는 완벽한 환경이었다.

첫 번째 공격을 성공시킨 뒤, 나는 악어 괴물을 지나쳐 구덩이의 벽을 기어서 올라갔다.

높은 위치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이제 끝내주마!

나는 지상으로 올라가서 악어 괴물을 향해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이쯤 되면 악어 괴물도 자신이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는지 진지하게 고민이 될 터였다.

별 생각 없이 숲 속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다리 하나를 잃고 구덩이 아래에서 산성 용액을 뒤집어쓰는 신세가 되다니.

걱정 마, 악어야.

금방 끝날 거야!

나는 구속 산성 용액을 한 차례 더 발사했다.

다시 일어서지도 못한 채 산성 용액으로 뒤덮인 악어 괴물은 내 마지막 공격에 그대로 쓰러졌다.

[레벨 3 유체 가라로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나는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 쓰러진 악어 괴물을 밟고 서서 생각했다.

···이거 너무 잘 먹히는데?

좀비 토끼

다행히 이번에는 인내력을 발휘해서 미끼로 쓸 고기를 조금 남길 수 있었다.

먹성 좋은 타이니 녀석의 밥을 먹이고 미끼까지 떼어놓자, 내 몫으로 남는 건 바이오매스 하나가 전부였다.

뭐, 일단은 그걸로 충분했다.

이제 바이오매스 다섯 개가 모였기 때문이다.

변이를 할 준비가 된 것이다!

어서 모든 신체 부위를 +5까지 업그레이드하고 싶었다.

그럼 난 얼마나 완벽한 몬스터가 될까!

아니 뭐 자아도취가 아니라···

첫 번째 함정을 다시 정리하고 두 번째 함정에 미끼까지 설치한 뒤, 나는 타이니와 함께 비밀 통로로 들어가서 변이를 준비했다.

[재생 분비선 +5를 구입하시겠습니까? 5 바이오매스를 소모합니다]

당장 구입!

[현 레벨에서는 고급 변이 선택이 가능합니다. 메뉴에서 선택하십시오]

또 다시 엄청난 목록이 현수막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매력적인 선택지들이 나의 정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중 하나밖에 고를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쉽군···

좋아.

일단 한 번 살펴보자.

우와···

재생되는 HP의 양도 늘릴 수 있고···

재생 속도도 높일 수 있고···

재사용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고···

심지어 체력을 모두 회복하고 남는 재생 용액을 MP로 바꿀 수도 있잖아!

느리게 작동하는 대신 오랜 시간에 걸쳐 더 많은 효과를 내는 재생 분비선.

몸 곳곳의 작은 주머니에 재생 용액을 저장해 놓았다가 상처가 나면 자동으로 치유하는 신속 대응 분비선까지.

뭘 골라도 좋겠는걸!

나는 다시 한 번 불꽃 같은 집중력을 발휘해서 재생 분비선으로 정확히 뭘 하고 싶은 건지 고민했다.

···사실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 신체 부위를 우선해서 업그레이드하기로 결심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니까.

재생 분비선은 마치 탈출 카드와도 같았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를 도와줄 비장의 무기였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때 전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탈출 카드!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더 많은 HP를 회복할 필요도, 작은 상처들을 즉시 회복할 필요도 없었다.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부상을 치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치명상을 극복하고 전투에 복귀하도록 해주는 게 내가 생각한 재생 분비선의 역할이니까.

광전사들이 둥지를 공격했을 때, 나는 다리가 없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에 빠졌다.

사지를 잃고 허우적대면서 턱으로 제대로 된 공격도 감행하지 못하는 상황은 정말 답답했다.

당시에 재생 분비선으로 HP를 조금 회복해 다리 재생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여왕 개미의 치유 마법이 없었다면 그렇게 금방 전투에 복귀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업그레이드는 바로···

신체 재생 샘이었다.

HP 회복량이 늘어나지 않는 대신, 잃어버리거나 부상을 입은 신체 부위를 빠르게 재생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는 분비선이었다.

이건 아주 유용할 것 같은데!

HP도 예전만큼 회복시켜 주면서, 없어진 신체 부위를 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재생시켜 주니까 말이다.

문득 생각해 보니, 그 동안 다리도 잘려 봤고 더듬이도 잘려 봤고···

대체 언제부터 신체 부위가 잘렸다가 다시 자라는 일에 이렇게 익숙해졌지?

개미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뭐, 굳이 인간의 사고 방식을 계속 유지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이제 인간도 아닌 걸.

내 사고 방식이 바뀌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살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지구에 있을 때에는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먹을 고기를 내 손으로 직접 도축해본 일이, 당연하지만 한 번도 없었다.

솔직히 둘 중 어느 쪽이 더 생명을 존중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 생존을 위해 많은 몬스터들을 죽이고는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전생에서는 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는 생명들을 외면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뭐, 그런 철학적인 생각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지금은 변이를 할 시간이다!

신체 재생 분비선으로 결정!

···

아 맞다 간지러운 것···

으아아아으아아으앍!

엄청난 간지러움은 한동안 계속되다 잦아들었다.

내가 바닥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동안, 타이니는 왠지 모르게 재미있어 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실컷 구경해라 이 원숭이 녀석.

나중에 네가 변이할 때가 되면,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동안 옆에서 깔깔거리고 웃어주마!

재생 분비선 변이를 마치자 내 상태창은 이렇게 되었다.

===

레벨: 8 (코어)

힘: 31

강인함: 22

영리함: 25

의지: 18

HP: 50/50

MP: 50/50

스킬: 채굴 레벨 3; 향상된 산성 용액 발사 5; 잡기 레벨 4; 단단히 물기 레벨 7; 고급 은신 레벨 4; 날카로운 깨물기 레벨 3; 터널 센스 레벨 4; 마나 조작 레벨 2; 강력한 마나 레벨 2; 외부 마나 조작 레벨 1; 마나 감지 레벨 1; 코어 공학 레벨 1; 외골격 숙련 레벨 1

변이: 초점 겹눈 +5, 적외선 더듬이 +5, 구속 산성 용액 +5, 다리 +1, 마나 주입 턱 +5, 다이아몬드 갑각 +5, 재생 분비선 +5, 페로몬 +2

종족: 성체 일개미 (포르미카)

스킬 포인트: 0

바이오매스: 0

=====

좋아!

이제 다리와 페로몬만 +5까지 올리면 완성이다.

바이오매스 26개만 더 있으면 되는군.

···

젠장, 26개라니!

너무 많잖아!

변이는 왜 이렇게 비싼 거야?

만약 다음 진화에서 변이를 +10까지 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한 신체 부위를 +5에서 +10까지 업그레이드하는 데에만 무려 46개의 바이오매스가 필요했다.

그리고 +15까지 올리려면···.

무려 105 바이오매스가 더 필요했다!

어우.

뭐, 강해지면 바이오매스를 더 많이 주는 놈들을 사냥할 수 있겠지.

진화가 덜 된 몬스터들로 그 많은 바이오매스를 모으려고 한다면 백 년은 족히 걸릴 터였다.

쿵!

그때 또 다른 손님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오십쇼!

환영합니다!

통로에서 고개를 내밀어 보니 미끼의 바이오매스 냄새를 맡고 접근한 사자 오우거가 두 번째 함정에 빠져 있었다.

미끼를 딱 적당한 양만 가져다 놓기 위해 고민을 좀 했었다.

너무 멀리 있는 몬스터까지 유인하면 곤란하지만, 근처의 몬스터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했다.

아무래도 양을 잘 맞춘 것 같았다.

나는 이번 손님에게 특히 신중을 가했다.

저 흉측하게 발달된 팔에 한 대라도 맞으면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먼저 산성 용액을 몇 발 쏜 뒤, 몬스터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틈에 돌진해서 깨물기를 시전했다.

사자 거인은 반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레벨 7 사자 식인 거인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 9가 되었습니다]

오호라!

이제 곧 레벨 10이 되면 진화를 할 수 있다!

너무 기대되는걸!

제자리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신이 났다.

···하지만 다른 몬스터가 꼬이기 전에 먼저 시체부터 치워야지.

나는 함정 위를 엄폐물로 가린 뒤 죽은 몬스터를 비밀 통로로 끌고 들어갔다.

사자 오우거의 어깨가 너무 넓어서 통로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시체를 조각내야 했다.

잠에서 깬 타이니는 벌써 먹을 준비가 된 모습이었다.

요 녀석···

내가 일하고 있을 때는 자다가, 뭘 먹을 때가 되면 귀신같이 알고 일어나는군.

그렇게 투덜거리기는 해도, 사실 타이니에게 주는 식량이 아깝지는 않았다.

많이 먹고 얼른 쑥쑥 커라, 타이니!

나는 바이오매스를 두 개 얻을 만큼만 식사를 했다.

그리고 미끼로 쓰기 위해 남겨 놓은 바이오매스 일부를 제외하고 전부 타이니에게, 그야말로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먹였다.

타이니는 한 번 식사를 하고 잘 때마다 눈에 띄게 커졌다.

이번에는 바이오매스가 턱 밑까지 차오르게 잔뜩 먹여서, 녀석을 더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지 볼 참이었다.

최대한 빨리 타이니가 전투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냥 빈둥대는 꼴을 보기 싫은 걸지도 모르겠군.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배를 채운 타이니는 통로 안의 편안한 자리로 굴러 들어가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사자 오우거의 시체를 혼자서 다 해치운 건 아니지만, 크기를 고려할 때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양을 먹기는 했다.

위를 확장시키는 변이라도 한 걸까

성공적인 레벨업과 변이에, 타이니까지 쑥쑥 자라나는 모습을 보니 미래가 기대됐다.

타이니를 재운 나는 시간을 내서 세 번째 함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세 개의 구덩이를 모두 비밀 통로로 연결했다.

덕분에 채굴 스킬의 레벨이 한 차례 더 올랐다.

어설프게 만든 함정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효과가 좋아서, 몬스터들을 꾸준히 잡을 수 있었다.

나는 몬스터가 함정에 빠질 때마다 빠르게 놈들을 처치한 후, 바이오매스 대부분을 타이니에게 먹이고 나는 나머지만 섭취했다.

하루가 끝날 때쯤 나는 바이오매스를 총 네 개 확보했다.

페로몬을 바로 3단계로 업그레이드할 수도 있었지만, 딱히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은 둥지의 개미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페로몬을 업그레이드해도 당장 도움될 일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문득 너무 오래 둥지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비밀 통로를 둥지까지 연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번 작업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특히 중간중간 돌아와서 함정에 걸린 몬스터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점과, 파낸 흙과 돌을 더 멀리까지 운반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어려운 점이었다.

땅에서 파낸 흙의 양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두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제 언덕을 만들지 않고 흙을 버리기 위해서는 구덩이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이동해야 했다.

벌써 함정 주변에 흙과 돌 무더기가 여기저기 쌓여서 지형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다행히 몬스터들이 오가며 바닥을 밟고 다져준 덕분에 조금 자연스러워졌지만···

오늘 하루 동안 가장 많이 변한 건 타이니였다.

녀석은 그야말로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반복하며 천국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잠에서 깰 때마다 이전보다 조금 더 커졌는데, 이걸 네 차례 반복하다 보니 거의 나와 비슷한 크기까지 자랐다.

이제야 성장기가 왔구나, 타이니!

아마 인간만큼 몬스터에게도 중요한 시기일 터였다.

인간으로 따지면 십대 소년일까?

하지만 여전히 먹고 자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곧 펑크 음악을 들으며 벽에 원시적인 그래피티 낙서를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타이니는 더 이상 꼬마가 아니었다.

이런 속도로 꾸준히 먹여서 키울 수 있다면 곧 전투에서 힘을 발휘할 듯했다.

벌써 녀석의 팔 근육이 두꺼워지는 게 눈에 보였다!

몬스터 몇 마리를 더 죽였지만, 레벨 10이 될 만큼 경험치를 모으지는 못했다.

나는 한 마리 한 마리 처리할 때마다 시스템이 '레벨 10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기를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한 마디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목표가 코 앞에 왔다는 걸 아니까 기다리기 더 힘들군!

···

땅굴이나 파면서 번뇌를 떨쳐야겠다···

나는 비밀 통로와 둥지를 연결하기 위한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자 곧 시간 감각도 잊고 땅파기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오직 턱에 집히는 흙과 돌 뿐···

어떤 욕구도, 욕망도 없었다.

쿵!

먹이다!

걸렸구나!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돌을 떨어뜨리고 서둘러 함정을 향해 달려갔다.

최대한 빨리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함정에 도착하니, 거대한 토끼 한 마리가 구덩이의 벽을 사납게 긁으며 근처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밟아서 부러뜨리고 있었다.

개미 언덕 근처의 전투에서 맞서 싸웠던 작은 토끼들과 달리 털이 가늘고 그나마 듬성듬성한 모습이 꼭 어디 아픈 녀석처럼 보였다.

무시무시한 힘이 느껴지는 두꺼운 근육질의 팔과 다리를 가진 주제에, 머리 위에는 작은 토끼 귀 한 쌍이 자랑스럽게 솟아 있었다.

나는 발버둥치는 토끼 몬스터를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

여태껏 본 몬스터들 중 가장 흉물스러운 생김새였다.

두 눈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이빨도 군데군데 빠진 데다 악취까지 풍겼다.

이 토끼는 그야말로 역겨웠다.

놈으로부터 흘러나온 죽음의 냄새가 구덩이는 물론 통로 안까지 가득 채웠다.

쳐다보기만 해도 온몸이 아픈 느낌이었다.

잠깐···

단지 느낌이 아니었다.

재빨리 HP를 확인하니 정말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냥 가까이만 있어도 HP가 줄어든다고?

이런 일이 가능한 거야, 시스템?

터널 지도

지상의 모든 문명 사회는 처음 던전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이래, 지하 세계에 대한 탐사를 종족의 명운을 건 과제로 삼아왔다.

그러나 던전에 대한 체계적인 탐사 방법의 확립이나 자유로운 정보 교류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막대한 자원을 투자해 던전의 비밀을 캐낸 모든 왕국, 교단, 조직, 사설 군대와 귀족 가문은 자신들이 알아낸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던전에 대해 많은 정보가 대중에게 알려졌고, 일반 시민들도 지하 세계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커다란 기회의 땅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정보들 중 하나는 지상으로부터의 깊이와 마나의 밀도에 따라 구분되는 던전의 각 층, 즉 '스트라타'에 관한 내용이다.

첫 번째 '스트라타'는 지상에서 5 킬로미터 안쪽의 깊이를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 발견되는 몬스터들 중 대부분은 지상에 존재하는 생물들의 끔찍한 변종이기 때문에, 따로 '짐승의 스트라타'라고 부르기도 한다.

더 깊은 층에 대한 정보는 입수하기 상당히 어려운데...

- 마기오 학자 타리우스의 수필집, '인류의 지식'에서 발췌

=====

지체할수록 HP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

서둘러 놈을 처치해야 했다!

푸슝!

푸슝!

나는 재빨리 함정 밖으로 나간 다음 뒤로 돌아서, 어깨 너머로 놈을 노려보며 산성 용액을 연달아 발사했다.

한 발은 토끼 몬스터의 가슴에, 다른 한 발은 앞발에 명중했다.

이 괴물과는 오래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놈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해 구속 산성 용액 두 발을 먼저 쐈다.

아무래도 놈에게 잘못 물리거나 발톱에 긁히기라도 하면 중독될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몸싸움을 하기 전에 우선 움직임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가능하면 산성 용액을 몇 발 더 쏘고 싶었지만, HP가 계속 떨어지고 있어서 시간을 오래 끌기는 어려웠다.

최대한 빨리 끝장을 내야 했다.

내 산성 용액은 토끼 몬스터의 듬성듬성 난 털을 지글거리며 태웠다.

괴물 토끼가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그때 뒤쪽에서 갑작스럽게 들리는 소리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턱을 앞세워 돌진하려는 순간, 내 뒤에서 타이니가 끽끽대며 달려나온 것이다.

녀석은 못생긴 박쥐 얼굴을 분노로 일그러뜨린 채 주먹으로 땅을 짚으며 앞으로 뛰었다.

그리고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자기보다 훨씬 더 큰 토끼 몬스터에게 달려들어, 마구 주먹질을 하며 물어뜯었다.

뭐지···

계속 빈둥대더니 갑자기 싸움이 하고 싶어진 거야?

그게 왜 하필 지금인데?!

나는 서둘러 싸움에 끼어들었다.

타이니는 내 친구이기도 했고, 여태까지 투자한 코어와 바이오매스가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토끼 몬스터는 타이니의 공격에 사납게 반응했다.

놈의 새된 비명이 고막을 찌르고 뇌를 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어림없지!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턱에 마나를 주입했다.

금방 저세상으로 보내주마, 이 빌어먹을 토끼 놈!

어디서 비겁하게 죽음의 오러 같은 걸로 내 HP를 깎아?

나는 턱에 마나를 주입하고. 단단히 물기까지 시전해서 공격력을 극대화했다.

그리고 토끼의 왼쪽 앞다리를 물었다.

턱을 다무는데··· 뭔가 기분이 더러웠다.

괴물 토끼의 살갗은 얇고 약했다.

그 피부가 찢어지자, 안쪽에서 피와 고름이 솟구쳐 내 얼굴을 뒤덮었다.

오···

맙소사.

이게 대체 뭐야?!

이런 개··· 빌어먹을!

눈에 들어갔잖아!

액체가 닿자 마자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산성인가?

이 괴물의 피가 산성인 거야?

HP가 더 빠르게 떨어지잖아!

산성이 갑각을 뚫고 머리 내부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난 끝장이었다.

재생 분비선 활성화!

당장!

이 빌어먹을 토끼는 그야말로 진상 손님이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HP가 떨어졌고, 공격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쩌라는 거지?!

하지만 어떻게든 놈을 처리하긴 해야 했다.

재생 용액이 몸 안을 흐르는 동안, 나는 코어 안의 마나를 다시 턱에 주입했다.

피해를 감수하고 공격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놀랍게도 이 시체 같은 몰골의 토끼는 내가 반쯤 끊어 놓은 다리를 여전히 움직일 수 있었다.

놈은 네 다리로 몸을 일으켜, 내 두 배는 족히 되는 커다란 몸집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타이니는 여전히 토끼의 등에 달라붙어 때리고 잡아뜯는 등 온갖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녀석에게서 처음 보는 낯선 모습이었다.

저 녀석은 평소답지 않게 왜 저렇게 광분하는 거지?

그때 토끼가 앞발을 들어 내 쪽으로 휘둘렀다.

척 봐도 유독성이 틀림없는 노란 진물이 발가락 사이에서 흘러나와 발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으···

아냐, 지지 않는다!

다이아몬드 갑각을 믿어보자!

나는 토끼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반격을 준비했다.

가까이만 있어도 들어오는 이 피해가 더 이상 누적되기 전에 빨리 놈을 끝장내려면, 결정타를 먹일 필요가 있었다.

쾅!

토끼의 앞발은 그대로 내 옆구리를 강타했다.

놈의 발톱이 내 갑각을 할퀴며 흠집을 냈다.

생각보다 날카롭잖아!

하지만 다행히 토끼의 발톱은 불꽃을 튀기면서도 갑각을 뚫지는 못했다.

휴!

이제 내 차례다!

코어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가득 주입된 턱은 이제 언제든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피해를 최대로 입힐 수 있는 방법만 찾으면 된다.

나는 토끼가 균형을 되찾기 전에 앞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목과 같은 급소를 노리는 대신, 놈의 몸통 부분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건 좀 아플 거다!

단단히 물기!

우직!

나는 잇는 힘을 다해 놈의 몸통을 물고 늘어졌다.

날카로운 턱이 토끼의 근육은 물론 뼈까지 파고들었다.

또 다시 역겨운 액체가 쏟아져 나와서 내 머리와 턱을 뒤덮었지만, 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물기!

우직!

마치 부패한 것처럼 흐물거리는 토끼의 살점은 너무나 쉽게 찢어졌다.

아예 마나를 주입할 필요도 없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공격을 계속했다.

최대한 빨리 죽여야 한다!

토끼 몬스터가 쏟아내는 산성 혈액, 그리고 놈의 거대한 몸집에 시야가 가려져 타이니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턱으로 공격할 때의 단점 중 하나는 상대방과 내 눈이 지근 거리에 놓인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지금 나는 토끼 몬스터의 화농성 피부와 듬성듬성한 털을 엄청 가까이서 보고 있었다.

겹눈이 넓은 시야각을 제공하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완전히 감을 잃을 뻔했다.

어쨌든 계속해서 물자!

죽어, 이 빌어먹을 토끼 놈아!

꽝!

토끼가 두 앞발을 동시에 휘둘러 내 등을 내리쳤다.

나는 위에서 가해진 엄청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무너졌다.

거대한 토끼의 체중이 실린 일격은 제법 위력적이었다.

윽!

이건 좀 아픈데!

서둘러 HP를 확인하니, 불과 30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토끼의 오러에 산성 용액까지 뒤집어쓰다 보니 HP가 엄청난 속도로 줄었다.

어서 싸움을 끝내야 했다.

나는 토끼가 다시 공격할 준비를 마치기 전에, 어지러움을 떨쳐내고 힘겹게 일어났다.

넌. 물린다. 새끼야!

우직!

나는 날카로운 깨물기 스킬을 사용해서 몬스터의 몸통에 난 상처를 한 번 더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턱의 날카로운 끝으로 내부를 완전히 헤집었다.

그러자 토끼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재빨리 토끼의 몸에서 얼굴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놈이 서서히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산성 혈액을 뒤집어쓴 얼굴이 아직도 화끈거렸다.

이렇게 역겨운 싸움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경험치는 얻겠지?

토끼 몬스터의 시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자 놈의 등 위에는 타이니가 양 발을 넓게 벌리고, 오른쪽 주먹을 토끼의 등에 깊숙이 박은 채 서 있었다.

푸른색의 전기 에너지가 타이니의 팔을 타고 번쩍였다.

타이니가 천천히 토끼의 등에서 주먹을 빼내자, 번쩍거리던 전기 에너지도 잦아들었다.

굉장히 힘든 운동을 마친 사람처럼 두 팔을 휘휘 돌리는 타이니의 못생긴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

나는 타이니를 보고, 몬스터를 보고, 다시 타이니를 봤다.

지금 몬스터가 죽었는데.

경험치를 얻었다는 메시지가 없네.

설마, 타이니···

지금 네가 내 막타를 가로챈 거야?

믿을 수가 없군!

몬스터가 죽었는데 메시지가 뜨지 않는다면 그 의미는 하나였다.

내가 막타를 치지 못했다는 것!

타이니가 상기된 얼굴로 몬스터의 등 위에서 뛰어내리더니, 신나서 내게 달려왔다.

마치 강아지 같았다.

박쥐 얼굴을 한 유인원 강아지지만···

귀여워서 봐준다, 이 원숭이 녀석!

차마 타이니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나는 다리 하나를 들어 타이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쨌든 잘했어, 꼬마야.

너 때문에 경험치도 얻지 못하고···

진화까지 더 오래 걸리게 됐지만···

화가 난 건 아니야.

어이쿠, 쓰다듬다가 실수로 머리채를 잡았네.

실수야, 실수.

자, 그럼···

이 토끼 시체를 어떻게 한다?

···

이거 먹을 수는 있는 거야?

산성 혈액 때문에 화끈거리던 얼굴이 좀 진정됐다.

나는 상태창을 열어서 HP가 아직도 내려가고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몬스터가 죽은 뒤로는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는 듯했다.

몬스터를 턱으로 물 때 느껴졌던 역겨운 기분을 떠올리며, 나는 조심조심 시체에 접근했다.

으···

냄새가 끔찍했다.

마치 죽은 쥐를 일주일 내내 덫에 걸린 채로 썩게 내버려뒀을 때에나 날 법한 냄새였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했다.

그렇다고 바이오매스를 그냥 포기해?

···적어도 한 입은 먹어 봐야지!

그래, 그래.

한 번 시도나 해보자.

냠.

···

와, 젠장.

젠장.

우웩.

꾸우웨에엑...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쿠안툼 모르스 라보르 타베스.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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