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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안은 대답도 듣지 않고, 지 할 말만 주절거렸다. 정식 수련생이 된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겁을 내다니 이 녀석도 참 별종이었다.

"그래도 라온 도련님이 수석이라 다행입니다. 만약 버렌 도련님이 수석이셨다면 저, 정말 숨도 못 쉬었을 겁니다. 차라리 시험에 떨어지는 게 나을…"

도리안이 그 말을 할 때 버렌과 방계들이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히익!"

버렌의 서늘한 눈빛에 도리안이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딸꾹! 딸꾹!"

도리안은 손발을 바들바들 떨며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버렌은 겁에 질린 도리안을 신경도 쓰지 않고 라온의 앞으로 걸어왔다.

"일주일 전 네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패했음을 인정한다. 미안하다."

버렌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

"헉!"

"버, 버렌 님!"

그 옆에 있던 수련생들이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올리는 버렌의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포기한 건 아니다. 그 어떤 노력을 해서라도 다시 네 앞에 서겠다. 난 물러서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물론 네게도 질 생각 없다."

버렌은 라온만이 아니라, 루난에게도 손가락을 겨눈 뒤 좌측으로 걸어갔다.

"주, 죽는 줄 알았네."

도리안은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을 덜덜 떨며 일어섰다.

"저, 저는 어떻게 하죠? 찾아가서 빌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의 눈동자가 처음보다 2배는 빨리 흔들렸다. 저 상태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버렌의 시선에 박힌 건 자신과 루난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을 거다.

-얻어터지고도 주제를 모르는 놈이로다. 당장 쫓아가서 눈깔을 뽑아버려라.

'저 정도면 대단한 거야.'

이제 13살이 되는 아이가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재도전을 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명가 지그하르트의 직계다운 모습이었다.

-대단하고 말고는 상관없다. 본왕의 마음에 들지 않으니, 죽여라.

'하!'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나가 입을 다무니, 다른 놈이 떠든다. 조용할 틈이 없었다.

후우웅!

라스를 분노를 한 귀로 흘리면서 발목을 돌리고 있자, 담장 위로 녹색 바람이 치솟았다.

"살짝 늦었지? 어제 술을 좀 마셔서 늦잠을 좀 잤다. 미안."

상쾌한 녹풍과 함께 리메르가 나타났다. 새가 집을 지은 듯한 뒷머리를 긁적이며 허허 웃었다.

뿌득!

뒤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버렌이었다.

-감히 본왕을 기다리게 하다니, 저 건방진 뾰족귀가 아예 정신이 나갔다! 당장 귀를 찢어버려라!

라스는 참지 못하고 분노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니 버렌과 라스는 죽이 잘 맞을 것 같았다.

리메르는 콧노래를 부르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잘 쉬었지?"

그가 손을 흔들었다. 아직 잠이 깨지 않았는지 비실비실한 모양새였다.

"예!"

아이들은 그와 반대로 연무장이 떠나가도록 우렁찬 소리를 질렀다.

"먼저 정식 수련생이 된 걸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뭐, 다 알고 있겠지만 떨어진 녀석들은 본인 의사에 따라 6연무장의 수련에 참여하기로 했다. 친구가 떨어졌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리메르는 나중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웃었다.

"오늘부터 정식 훈련을 시작한다. 큰 틀은 변하지 않아. 너희는 정신이든, 체력이든, 무학이든 매번 한계를 넘어서는 훈련을 하게 될 거다. 그게 가장 빨리 그리고 높게 갈 수 있는 길이니까."

그는 기본 단련엔 끝이 없다고 말을 이었다.

다만 하품을 쩍쩍하는 게으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 몇 가지 수련이 추가된다. 첫 번째는 오러 연공법. 내일부터 새벽과 저녁 시간에 오러 연공을 하게 될 거다."

오러 연공을 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 새벽과 일몰 시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그렇게 바라던 검술과 권법 수련도 시작한다."

"오오!"

"드디어!"

검술과 권법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들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리메르가 다음 말을 하려고 할 때 연무장의 문이 쾅 열렸다.

후우욱!

모래 먼지가 피어나는 문 앞엔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흑단 같은 머리칼을 왼쪽 어깨로 내렸고, 흑백이 뚜렷한 동공은 진주처럼 반짝였다. 피부는 그와 반대로 눈송이처럼 새하얬다.

"오?"

"어…."

루난과는 색이 다른 단아한 미모에 연무장의 소년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아, 씨벌. 문이 왜 이렇게 안 열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욕에 소년들의 입이 다른 의미로 또 벌어졌다.

"마침 왔네."

리메르는 피식 웃으며 다가오는 소녀를 가리켰다.

"내 담당은 아니었지만, 전 기수에서 떨어진 낙제생이다. 앞으로 함께 수련해야 하니까. 인사는 해둬."

"마르타다."

마르타라는 이름을 밝힌 소녀는 턱을 치켜들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외모는 단아했지만, 말과 행동은 뒷골목 양아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저래 보여도 착한 아이라니까. 잘 지내주면…."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뭐, 그렇대."

리메르는 히히 웃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반면 수련생들의 입은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

"오늘은 간단하게 몸을 풀고, 정규 수련은 내일부터 진행한다. 그럼."

그는 아이들을 한 번씩 훑어보고서 씩 웃었다.

"달려라. 전력으로."

"역시나."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땅을 박차려고 할 때 앞으로 그림자 세 개가 튀어 나갔다.

루난과 버렌 그리고 낙제했다는 마르타였다.

"도, 도련님."

그들의 뒤를 쫓아서 달리려고 할 때 도리안이 다가왔다.

"저 사람이 여기에 오다니, 어, 어떻게 하죠?"

"저 여자를 알아?"

"모, 모르십니까? 저분도 직계잖아요."

"직계라고? 판별식에서 본 적이 없는데."

"아, 일반적인 직계는 아니죠. 입양되셨으니까요. 오직 재능만 보고."

도리안은 마르타가 글렌의 셋째 아들 데니어 지그하르트의 딸로 입양되었다고 말했다. 그것도 오직 재능 때문에.

"재능이라."

라온은 버렌이나, 루난보다도 앞서나가는 마르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1살이 더 많긴 하지만, 대충 보아도 그녀의 재능은 보통이 아니었다.

"제가 알기론 마르타님도 라온 도련님처럼 전 기수에서 수석 수련생이었어요."

"그런데 왜 낙제한 거지?"

"패, 팼대요."

"응?"

도리안이 모은 양팔을 덜덜 떨며 말을 이었다.

"수련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수, 수련생 다섯을 반 죽여놨다고 해요. 그중에 직계도 2명이 껴 있었죠."

"직계 둘이라…."

"성격이 더럽다고 하니, 조, 조심하세요."

라온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땅을 박찼다.

'조심해야지.'

그녀가 나를.

힘을 숨길 생각 따윈 없었다. 덤빈다면 그 누구라도 밟아버릴 것이다.

* * *

"후욱…."

라온은 저녁까지 진행된 체력 단련을 마치고 거친 숨을 뱉어냈다.

"으억…."

"주, 죽겠다."

"일주일 쉬었다고 이런…."

대부분의 수련생들은 연무장 바닥에 주저앉아 가는 신음을 흘렸다.

"너무 무리하면 내일 훈련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은 리메르와 교관들에게 고개를 꾸벅이고서 다시 쓰러졌다.

"말했듯이 내일부터는 오러 연공도 함께 실시한다. 지금부터 연공서를 나누어 줄 테니, 오러를 익히지 않은 수련생은 앞으로 나오도록."

리메르의 손짓에 단상 위로 새끼손톱 두께의 책이 올라왔다.

"기본으로 내어주는 연공서라고 실망할 필요 없다. 린덴 오러 연공법은 대륙 어디에서도 통하는 연공법이니까."

대부분은 가만히 있었고, 소수의 평민 출신 수련생들이 앞으로 나가서 연공서를 받았다.

"음?"

리메르의 시선이 라온에게 향했다. 그는 아직 오러가 없었으면서도, 앞으로 나오질 않고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너도 오러가 없는 걸로 아는데?"

"이번에 얻은 오러 연공법을 익히려고 합니다."

"흐음!"

동급의 패를 이용해서 가주님에게 연공서를 받은 것 같았다.

'은패 이상의 연공법을 주셨겠지?'

글렌은 겉과 달리 라온을 아낀다. 분명 린덴 이상의 연공법을 주었을 것이다.

"오러 연공법을 이미 익히고 있는 수련생은 각자의 방에서 새벽 연공을 하고, 오늘 연공서를 받은 수련생과 라온 지그하르트는 내일 새벽 이곳으로 나오도록."

"저도입니까?"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오러를 익힌 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

"잠깐. 할 말 있어요."

체력 단련을 끝내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마르타가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 수석이 누구지?"

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모두를 훑어보았다.

"나다."

라온은 마르타의 새까만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뗐다.

"오러도 없는 녀석한테 밀리다니, 직계도, 봉신 가문도 다 죽었나 보네."

그녀는 버렌과 루난을 비웃으며 라온의 앞에 섰다.

"난 나보다 약한 놈이 위에 있는 걸 못 봐."

마르타의 서늘한 기세가 전신을 휘감았다.

"한판 뜨자."

제25화

마르타 지그하르트가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서 턱을 들었다. 거만한 눈빛. 단아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여기 터가 안 좋은 건가?'

라온이 연무장 바닥을 툭툭 찼다. 도리안이 경고를 해줬지만, 바로 시비를 걸어 올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정말이지 주변에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

-뾰족귀보다, 파란 눈깔보다 건방진 놈이 나올 줄은 몰랐도다. 네 몸을 내놓아라. 본왕이 저 계집을 통째로 얼려버리겠다!

'이럴 줄 알았어.'

마르타의 도발에 라스의 발작도 시작됐다. 느껴지는 분노의 폭을 보니, 평소보다 훨씬 격했다.

"흠."

"마르타 지그하르트."

어떻게 할까 생각할 때 옆에서 아이답지 않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품위 없게 지금 무얼 하는 거냐."

버렌 지그하르트였다. 서늘한 눈빛으로 마르타를 노려보았다.

"앙?"

마르타가 입매를 구겼다. 명문가의 아이가 보여줄 만한 얼굴이 아니라, 어두운 세계에 발을 담근 인간들이 할 법한 표정이었다.

"지금 이 누님에게 한 말이야?"

그녀가 웃으며 버렌의 옆으로 다가갔다.

"주둥이 함부로 놀렸다간 그대로 뒈지는 수가 있어. 다음 말을 잘 고르는 게 좋을 거야."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교관님과 가주님 앞에서 수석의 자리를 인정받았다. 넌 그걸 부정하겠다는 건가?"

버렌은 본인의 일처럼 나서서 마르타를 막아주었다.

"내가 알기론 너도 시험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난리를 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르타의 입꼬리가 빙글 올라갔다. 선이 굵은 비웃음. 수석을 모른다고 한 것과 달리 시험 과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다."

버렌의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에 내가 보였던 추함을 또 보고 싶지 않아서 지금 네 앞을 막고 있는 거다."

"어엉?"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먹칠하지 마라. 마르타 지그하르트."

라온이 버렌의 등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 녀석….'

버렌의 눈빛은 맑았다. 기 싸움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상황이 어지러지지 않게 막기만 하려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던 게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척!

마르타를 막으려는 사람은 버렌만이 아니었다. 루난이 라온을 지키려는 것처럼 앞으로 나왔다.

"너도 같은 생각이야?"

마르타가 루난과 버렌을 훑어보며 히죽 웃었다.

"가."

루난은 뚱한 눈빛으로 짧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물러나라. 마르타."

"내가 말했잖아."

마르타의 눈이 번득였다.

"난 나보다 약한 놈의 말은 안 듣는다고!"

그녀의 주먹이 대기를 뚫어버리며 버렌에게 쏘아졌다.

후우웅!

오러까지 담긴 주먹이 버렌의 얼굴에 닿기 직전 녹색 바람이 치솟았다.

퍼엉!

단상 위에 있던 리메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 마르타의 주먹을 막아냈다.

"너희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내가 아무리 만만해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면 섭섭해."

그는 빙긋 웃으며 마르타의 주먹을 밀어냈다.

"마르타. 넌 그 성질머리 때문에 낙제했다면서 아직도 그대로구나."

"그건…."

"버렌이나, 루난은 몰라도 라온은 네 말대로 오러조차 익히지 않았어. 그래도 싸우고 싶어?"

"저도 오러를 쓸 생각 없어요."

"그래도 같은 조건이 아니라는 건 잘 알잖아. 나중에 기회가 있을 테니까 오늘은 참아."

"칫…."

마르타는 입을 삐죽이면서 한발 물러섰다. 다만 떠나지 않고 버렌을 노려보았다.

"버렌 지그하르트."

"뭐지?"

"너희 형 나한테 얻어터져서 한 달 동안 누워만 있던 거 알고 있지? 건방을 떨려면 실력부터 키워."

"난 형과 다르다."

"그야 보면 알겠지."

마르타는 가늘게 웃고서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루난과 버렌도 긴장을 풀고 옆으로 물러섰다.

그때.

마르타가 뒤를 도는 동시에 땅을 박찼다.

"난 건방진 놈들보다 남들 뒤에 숨는 겁쟁이가 더 싫어!"

순식간에 뛰어들어 라온에게 주먹을 내질러왔다.

"헉!"

"아!"

버렌과 루난은 반응하지 못했고, 리메르는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

'역시.'

라온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등을 돌리면서 무게중심을 뒤쪽으로 놓았을 때 달려들 거라 예상했다.

타악!

가슴을 노리고 내달려온 마르타의 주먹을 손등으로 쳐냈다.

"어?"

"맞을 각오는 됐지?"

꽉 쥔 주먹을 내질렀다. 공호권의 회전이 담긴 주먹이 텅 빈 마르타의 복부를 향해 질주했다.

"헉!"

마르타의 눈동자에 당황이 어렸다. 이를 악문 그녀의 왼손에 갈색 기운이 어렸다.

터엉!

맨주먹과 오러가 담긴 팔뚝이 맞부딪치며 라온과 마르타가 동시에 밀려났다.

"오러는 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라온은 빨갛게 달아오른 주먹을 툭툭 털어냈다.

"너, 너 뭐야!"

흑백이 뚜렷한 마르타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당당함만을 드러내던 그녀가 말까지 더듬었다.

"이야!"

"그, 그걸 막았다고?"

리메르가 낄낄 웃었고, 버렌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익!"

마르타가 갈색 오러를 전신으로 끌어 올렸다.

"거기까지."

그대로 돌진하려고 할 때 리메르가 자세를 바로 하고 그 앞을 막아섰다.

"이 이상은 허가할 수 없어."

웃고 있지만, 뿜어지는 기세가 날카롭다. 조금 전 장난을 칠 때와는 또 달랐다.

"하지만 전!"

"지금 오러 없이 싸워봐야 불완전 연소일 뿐이잖아. 나중에 라온이 오러를 익혔을 때 제대로 붙어봐. 그땐 허락해 줄 테니까."

"후…."

마르타는 이를 갈며 라온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번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나갔다.

"라온."

리메르가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마르타의 공격을 어떻게 막았지. 꼭 미리 알고 있는 것 같던데."

"무게중심입니다."

라온은 별일 아니라는 듯 정답을 툭 던졌다.

"무게중심?"

반문은 버렌이었다. 루난 역시 궁금한 듯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여자 등을 돌려놓고서 무게중심은 앞이 아니라, 뒤에 맞췄습니다. 그 방향은 버렌도, 루난도 아니라 중앙인 저였죠. 무조건 달려들 거라 생각했습니다."

"고작 그걸로…."

버렌은 답을 듣고 나서 오히려 인상을 찌푸렸고, 루난은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가 탁 풀렸다.

"흐음!"

리메르가 가벼운 탄성을 흘렸다.

'역시 관찰력과 육체 능력은 대단하네.'

무게중심으로 상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즉시 반격하다니, 역시 보통 재능이 아니었다.

"...."

버렌은 라온과 마르타가 맞부딪친 바닥을 쭉 살펴본 뒤 입술을 깨물고, 연무장을 떠났다.

"단단히 말해뒀으니, 한동안 귀찮게 하진 않을 거다. 대신 나중에 오러를 익히게 되면 마르타와의 싸움을 피할 수는 없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공호권의 회전은 아예 네 걸로 만들었네."

라온이 마르타에게 날린 주먹엔 회전이 담겨 있었다. 반격 이상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뒤를 돌았다.

-지금 무엇을 한 것이냐. 본왕에게 주먹을 날린 계집을 그냥 보내다니! 사지를 찢고 만년빙하에 가두어야….

'한 방 날렸잖아.'

-모자르다. 아예 머리통을 부숴놔야지!

'이득이 없어.'

지금 이곳에서 주먹다짐을 해봐야 얻을 게 없다.

나중에 그녀에게서 얻을 게 있을 때 수석 자리를 걸고 내기를 하는 게 훨씬 도움 된다.

-크으으, 통째로 얼린 뒤 부숴버려야 하건만….

'기다려. 더 시원한 모습을 보게 해줄 테니까.'

라온은 웃으며 연무장을 떠났다.

* * *

라온은 해가 뜨기 전에 연무장으로 나왔다. 혼자서 연공을 하고 싶었지만, 지시가 내려와서 어쩔 수 없었다.

수련생 대부분이 오러를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연무장에 나온 사람은 8명이었고, 전부 평민 출신 수련생이었다.

"도, 도련님."

도리안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다가왔다.

"오, 오러를 익히다가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정말일까요? 거기다 단전이 터질 것처럼 아프다는 말도 있고…."

그 말이 아예 잘못된 건 아니다. 실제로 좋지 않은 연공법을 익히다가 죽거나, 심하게 다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물론 지그하르트에서 제공하는 연공법은 안정적이고, 주변에 뛰어난 교관도 있으니,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괜찮을 거다."

도리안을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을 읊어주었다.

"그, 그렇겠죠? 도련님이 말씀하시니까 좀 안정이 되네요."

도리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호흡을 조절했다. 그리고 잠시 뒤.

"저, 정말 괜찮겠죠? 아무리 안정적이라고 해도 위험한 사람이 나올 수 있는데, 그게 저라면 다 끝장나잖아요! 어, 어떻게 하지? 죽으면…."

"...."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이 이상 말해도 도리안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딱히 녀석을 신경 쓸 이유도 없었고.

"오늘은 안 늦었지? 딱 좋은 시간이네."

리메르가 평소처럼 담을 넘어 들어왔다. 해가 뜨지 않은 어둑한 하늘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곧 해가 뜰 테니, 바로 시작하자."

"예!"

오러를 익힌다는 기대감에 아이들이 평소보다 훨씬 우렁찬 기합을 내질렀다.

"다른 아이들이 먼저 오러를 익히고 있다고, 뒤처졌다 생각할 필요는 없어. 오러는 평생을 익혀야 하는 무학. 다른 아이들이 딱 한발 먼저 갔다고 생각해라."

"예!"

"그럼 옆에 있는 교관과 함께 개인 연공실에 들어가라. 너희가 안정적인 연공에 들어갈 때까진 교관들이 도와줄 테니, 궁금한 거 힘든 거 다 말해."

리메르가 손뼉을 치자, 뒤에 물러서 있던 교관들이 아이들을 개인 연공실로 데리고 갔다.

"음."

라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자신의 옆에 아무도 없었다.

"넌 혼자 개인 연공실로 들어가라."

"그럼 절 왜 부르신 겁니까?"

"연공서로 연공법을 익히다 보면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거든. 내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마음 놓고 연공해."

"...."

못 믿겠는데.

지금까지 봐온 리메르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연공실에서 죽어가도 낮잠을 자고 있을 것 같다.

"그 눈은 뭐냐? 나 못 믿어?"

"아닙니다."

고개를 젓고서 연공실로 들어갔다. 도움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적당히 호법 정도만 서주면 충분하다.

"후욱."

라온이 눈을 감고, 만화공의 운용을 시작하자, 그의 어깨 위로 새빨간 불꽃이 날름거리며 타올랐다.

'시작해볼까.'

* * *

리메르는 라온이 연공실에 들어가자마자, 자세를 바로 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하게 기감을 풀었다.

'뭘 얻었나 볼까.'

펼쳐낸 기감으로 라온의 연공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마나의 파동을 읽어보았다.

'화속성이군.'

뜨겁고 역동적인 마나가 라온의 주변에서 휘몰아쳤다.

'보통 연공법이 아닌데?'

라온의 마나 회로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정상 수준을 한참 벗어났다. 막 터진 용암처럼 폭발적인 기운. 오러 연공법을 습득 중인 상태에서 저 정도 마나가 움직이다니, 평범한 연공법이 아니었다.

'저건 동색의 패가 아니라, 금패를 줘도 얻지 못할 수준인데?'

린덴 연공법을 익히는 아이들에게 상위 연공법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라온의 것은 달랐다.

직계들이 배우는 연공법 그 이상.

저 연공법을 제대로 습득하게 된다면 라온의 단전에서 대체 어떤 오러가 생겨날지 기대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만 오러의 흐름이 굉장히 난해하다. 습득할 때까지 시간과 노력이 굉장히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음?'

리메르가 가는 눈썹을 내렸다. 뜨거운 기운이 내달리는 라온의 마나 회로. 그 안에서 서늘한 한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설마 저 녀석!'

라온이 움직이는 기운을 느끼고 나자, 자연스레 입이 떡 벌어졌다.

'마나 회로의 냉기를 지우는 게 아니라, 그 기운을 함께 이끌어가고 있어!'

라온은 열기로 지워지는 냉기를 그냥 버리는 게 아니라, 단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게 마나를 처음 다루는 놈이라고?'

연공법을 배운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녀석이 마나를 자유자재로 운용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오러 연공법이 특징이 아니라, 저 녀석의 재능이야.'

뛰어난 연공법 이상으로 라온의 마나 제어 능력이 놀라웠다. 뱃속부터 마나를 통제해 왔어도 저 정도는 아닐 거다.

'육체와 무학의 흐름만이 아니라, 마나에도 재능이 있었다니….'

라온은 판별식에서 마나에 최하위 재능을 가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버렌이나, 루난보다도 뛰어난 마나 운용 능력을 보여주었다.

'저 녀석이 저 연공법을 제대로 익힌다면….'

리메르는 기대감이 어린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새로운 괴물이 탄생할지도 모르겠군.'

* * *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라온 지그하르트가 뜨거운 숨을 내쉬며 연공실 밖으로 나왔다.

"라온."

리메르는 단상에서 내려와 라온의 옆으로 다가갔다.

"너 내일부터는 숙소에서 수련해라."

"예? 어제는 앞으로 매일 나오라고…."

"됐으니까. 숙소에서 수련해."

숙소의 벽은 마법 처리가 되어서 오러 연공을 해도 외부에서 느낄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라온의 오러 연공법을 느꼈다간 심한 견제가 들어 올 가능성도 있다. 마법 처리가 된 숙소에서 연공하는 게 나았다.

"내가 한 번씩 가서 봐줄 테니까."

"교관님이요? 음…."

"나라고 항상 게으르진 않거든?"

"알겠습니다."

라온은 평소처럼 별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바로 알려드려야겠지.'

리메르는 라온의 몸에서 퍼지는 뜨거운 마나의 잔향을 느끼며 히죽 웃었다.

* * *

리메르는 모든 훈련이 끝난 뒤 알현실을 찾아갔다.

"요즘 자주 찾아오는군."

석상이라도 된 듯 옥좌에서 움직이지 않던 글렌 지그하르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리메르가 씩 웃으며 중앙의 붉은 카펫을 걸어왔다.

"마르타가 수련에 참여했습니다. 듣던 것보다 성격이 더 뜨겁더군요."

"그 아이는 또래의 누군가에게 패하기 전까지 변하지 않을 거다."

글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만간 그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뭐?"

"라온과 살짝 부딪침이 있었습니다."

리메르는 어제 일어났던 라온과 마르타 그리고 버렌과 루난의 대립을 말해주었다.

"그런가? 그 아이들이 벌써…."

글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 속에 자그마한 기쁨이 떠도는 것 같았다.

"아, 그런데 찾아온 이유는 그게 아닙니다. 라온에게 대체 무얼 주신 겁니까?"

리메르는 라온에게 보여준 모습과 달리 놀란 티를 내며 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복잡하면서도, 정돈된 흐름을 가진 연공법은 처음입니다. 거기다 그게 화속성이라니…."

"만화공이라는 연공법이다."

글렌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만화공?"

"초대 가주님의 연공법이지."

"아, 초대 가주님의 연공법이구나. 그러니 그런 수준의… 어? 어어?"

리메르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초, 초대 가주요?"

"그래."

"허, 금패나 은패급의 연공법을 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초대의 연공법을 넘겨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주님이 라온을 아끼긴 아끼시는군요."

"만화공이 라온을 선택했을 뿐이다. 난 그 아이에게 그걸 넘겨줄 생각이 없었어."

"음…."

글렌은 자세하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아마도 그 안에 이런저런 사정이 있던 모양이다.

"그걸 물어보러 온 거냐."

"그게 아니라, 라온에 대한 이야깁니다. 그 녀석의 재능은 역시 정상이 아니에요. 무학만이 아니라, 마나에 대한 재능도 무시무시합니다!"

리메르는 오늘 본 라온의 마나 흐름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판별의 검은 평범 이하로 나왔다면서요. 그거 어디 망가진 거 아닙니까?"

"...."

글렌 지그하르트는 팔걸이를 쥐던 손을 떼서 턱을 쓸었다.

'마나에 대한 재능도 있다라….'

모두가 나간 후 판별의 검에 금색 불길이 빛났던 건 역시 라온의 능력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 아이의 몸 상태는 괜찮나?"

"여전히 땀이 차갑고, 입에서는 냉기를 뱉어냅니다. 몸에 문제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훈련 후에는 오히려 더 편안해 보입니다."

"음…."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드릭이 말해준 대로 활발하게 몸을 움직이는 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라온은 육체와 마나 모두 특별한 재능을 가졌습니다. 관찰력과 통찰력에 침착함까지 있죠. 또 하나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재능은 중요하지 않다. 만약 라온에게 그런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녀석은 너무 어려."

"그렇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죠. 사실 전 예전부터 아드님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리메르는 가늘게 좁힌 눈으로 글렌을 올려 보았다.

"전 당신이라는 불꽃을 보고 지그하르트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계자 중엔 제가 따르고 싶은 왕이 없습니다."

"너 설마 그래서 교관으로…."

글렌이 눈매를 좁혔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던 리메르다.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교관이 된 이유가 스스로 왕을 찾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라온도 자격이 주어진다면 후계자에 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

"잘되었군요."

리메르가 진녹색 안광을 발하며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물러섰다.

"하나만 더. 라온에겐 재능만 있는 게 아닙니다. 뭐, 그건 저보다 가주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는 알현실을 나가기 전 마지막 말을 흘리고 문을 닫았다.

"그래. 잘 알고 있다."

글렌은 텅 빈 알현실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도."

제26화

라온이 만화공을 익히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새벽과 저녁에 이어 밤에도 연공을 지속했지만, 오러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특별한 연공법은 무엇보다 강한 위력을 지닌 만큼 습득 난이도도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를 함께 운용하기에 성취가 더딘 것도 있었지만.

'천천히 하자.'

연무장 중앙에 선 라온이 덤덤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불의 고리가 있으니까.'

불의 고리가 있는 이상 육체와 마나적인 재능은 언젠가 끝까지 차오른다. 지금은 조급하게 발을 내디딜 때가 아니라 더 단단하게 토대를 다질 때다.

터엉!

정규 훈련 시간이 되자마자, 연무장 문이 시원하게 열리고 리메르가 들어왔다. 웬일로 지각이 아니었다.

"오늘부터 오전 시간에는 무학을 배운다."

"오오!"

"우와아아아!"

"드디어!"

"검술이다! 검술!"

아이들은 손을 들어 올리며 왁왁 소리를 질렀다.

수련생들은 시험에 합격한 이후에도 한 달 동안 체력 단련만 해왔다. 저런 환호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대륙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떨친 건 검술이지만, 권법도 그에 못지 않다. 지금부터 기본 권법의 형태를 보여주겠다."

리메르는 보여주겠다고 말해놓고 단상에 드러누웠다.

"숙련된 조교 앞으로."

그가 하품하며 손짓을 하자, 뒤에 있던 교관이 앞으로 나와 권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칠형권이군.'

일곱 가지 형태를 갖춘 권법이자, 모든 권법의 기본이 되는 주먹질이었다.

형을 알고는 있지만, 익힌 적은 없었다. 전생에서 내뻗은 손은 항상 적을 단숨에 죽이기 위한 칼날이었으니까.

"아, 칠형권…."

"저건 이미 아는데."

"에휴, 지겹겠네."

칠형권을 본 아이들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익혔던 권법이라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루한 표정들이네."

리메르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너희 중에 칠형권을 미리 배워온 녀석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니 제대로 익혔다는 걸 확인하면 바로 다음 진도로 나갈 수 있게 해주마."

"다음 진도? 그게 무슨 말이에요?"

겁은 많은 주제에 궁금한 게 많은 도리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너희는 같은 수련생 신분이지만, 같은 수준은 아니다. 즉, 똑같은 교육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내가 정한 선을 넘기만 한다면 바로 다음 단계로 보내주마."

리메르는 지난 수련 방식은 너무 고루한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좋네. 마음에 들어."

마르타 지그하르트가 방긋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또 지루한 칠형을 배울 줄 알았는데, 이게 맞지. 뛰어난 인간이 뒤떨어지는 인간에게 맞춰 줄 필요는 없잖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만. 어쨌든 지금부터 각자의 자리에서 방금 보았던 칠형권을 재현해라. 말했듯이 내 마음에 들면 바로 다음 수련을 시작하게 해주마."

리메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이 칠형권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기초가 잘 잡혀있군.'

라온은 주변에서 칠형권을 펼치는 아이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괜히 명가가 아니야.'

기본이라 어설프게 배우고 넘어갔을 줄 알았지만, 아이들은 정확한 방향과 힘을 가지고 주먹을 뻗어내고 있었다.

"흠, 역시."

리메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버렌 지그하르트, 루난 슬리온,…."

그가 제대로 된 칠형권을 선보인 수련생의 이름을 부르자, 중앙에 남은 인원은 20명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라온 지그하르트도 있었다.

* * *

"흠."

리메르는 라온 지그하르트가 펼치는 칠형권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모르고 있었군.'

그의 주먹질은 제대로 된 형이 잡혀있진 않은 날것이었다. 실비아에게 들었던 대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모양이다.

다만 라온은 버렌이 사용한 공호권의 흐름을 따라 한 적이 있으니, 며칠 안에 완벽하게 숙달할 수 있을 거다.

'다른 아이들도 좀 볼까….'

라온에게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글렌에게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도 제대로 살폈다.

'나쁘지 않군.'

추천을 받아서 들어온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눈과 육체가 뛰어났다. 저 아이들도 금세 칠형권을 익혀서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역시 경쟁이 좋다니까.'

이건 오래달리기나 마찬가지다.

앞서 나아가는 아이들은 후위 아이들에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뒤의 아이들은 선두를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훈련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리메르는 칠형권을 통과한 마르타와 버렌, 루난을 비롯한 수련생들을 살폈다.

마르타는 2단계에서 배워야 할 권법까지 완벽하게 익혔기에 3단계 벽력권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

마르타가 중간에 낙제하긴 했지만, 그건 실력이 아니라 성격 때문이다. 저 아이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다른 수련을 준비해 주어야 할 것 같다.

물론 거친 성격을 조금 유하게 만들 방법도 같이 생각해 보고.

'저쪽도 잘하고 있네.'

버렌과 루난도 2단계에서 배우는 진승권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저 둘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3단계 벽력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다.

리메르는 드러누운 채로 노트에 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적었다.

'자, 그럼 다시…어?'

연무장의 아이들을 모두 훑어본 뒤 다시 라온에게 향한 리메르의 동공이 출렁였다.

'뭐야….'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한 이 짧은 순간에 라온 지그하르트의 권로에 칠형권의 형태가 새겨지고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리메르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라온은 마르타, 루난, 버렌과 다르다. 분명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건만 지금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칠형권이 아무리 기본 권법이고, 따라 하기 쉽다고 해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에 띄게 성장을 하는 건 말이 되질 않는다.

'뭐 이런 괴물이….'

마나 운용 능력에 놀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무학 습득 능력에 경악하게 되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후."

라온이라고 특별취급을 할 생각은 없었다.

권법의 기본을 확실하게 다진 뒤 다음 단계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 순간이 굉장히 빠르게 다가올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니. 오늘 저녁일지도….'

* * *

마르타 지그하르트는 경쾌하게 주먹을 내지르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 교관들은 마음에 드네.'

지금까지 뒤떨어지는 놈들을 기다려왔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다.

재능 있는 사람은 위로 올라가고, 재능 없는 사람은 그 발판이 되는 게 옳은 방식이었다.

좌측으로 시선을 돌리자, 칠형권을 배우는 아이들이 보인다.

자신이 저걸 익힌 건 2년 전. 이제야 저 권법을 배우는 아이들이 자신을 따라오는 건 평생이 걸려도 불가능하다.

저들이 칠형권을 익힌 뒤 2단계에 도착했을 때 자신은 벽력권을 끝내버리고 검술을 시작하고 있을 테니까.

'저 녀석도 있군.'

마르타는 중앙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라온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지독한 냉기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스스로 훈련에 참여한 후 결국 수석을 따낸 별종.

한 달 전 자신의 기습을 막았을 때를 생각해 보면 감각도 움직임도 뛰어났었다. 재능있는 녀석이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13살이 되어서야 오러를 익히고, 권법을 시작한다는 건 출발 신호가 울리고 한참 뒤에 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녀석이 날 따라잡을 일은 없겠군.'

자신의 오러는 이미 3성의 경지에 올랐고, 권법만이 아니라 검술들도 섭렵한 상태다.

어렸을 때부터 수련을 시작한 버렌이나, 루난이면 모를까. 라온은 경쟁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발판이지.'

라온 지그하르트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낮은 발판에 불과했다.

"흥."

마르타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라온에게 관심을 끄고, 벽력권의 수련에 정신을 집중했다.

해가 질 때까지 벽력권의 성취를 올리고 있던 마르타의 옆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아가씨. 직계 수련을 할 시간입니다."

그녀의 집사인 카멜이었다.

"알겠어."

마르타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뒤를 돌았다. 다른 아이들은 아직도 수준 낮은 권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한심해."

"라온 지그하르트."

그들을 비웃으면서 돌아가려고 할 때 리메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합격이다. 다음으로 가도록."

바람을 탄 듯한 가벼운 음성에 뒤를 돌았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마르타가 눈을 부릅떴다. 하루. 아니, 고작 반나절 만에 칠형권을 완성 시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도 4일이 걸렸는데.'

천재적인 재능 덕분에 지그하르트에 입양된 자신조차 4일이 걸려서야 칠형권을 익혔다.

저 발판 놈이 고작 반나절 만에 그 경지에 올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 다음 권법을 알려주시죠."

"이미 해가 졌잖냐. 귀찮으니까. 내일 하자."

"귀찮다니 교관이 할 말이 아니…."

"잠깐."

마르타가 대화 중인 라온과 리메르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교관님. 지금 저 녀석이 합격했다는 건가요? 오늘 배운 칠형권을?"

"그래."

리메르가 녹색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다고 너무 대충 통과시키는 거 아닌가요?"

"대충?"

"칠형이 아무리 기본 권형을 담고 있다고 해도 각을 잡으려면 꽤 시간이 걸려요. 저 녀석이 그 각을 반나절 만에 완성했을 리 없을 텐데요."

"당연히 완성은 아니지. 다만 진승권으로 넘어갈 수준은 돼."

"하, 그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겁니다."

"흐음…."

리메르는 턱을 긁적이다가 라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는데? 라온. 한 번 보여줘."

"싫습니다."

라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 이미 교관님의 통과 선언을 들었는데, 뭐하러 다시 해야 하죠?"

"너…."

"그럼 내일 알려주려고 한 진승권을 지금 알려주지."

마르타가 나서기 전에 리메르가 먼저 입을 뗐다.

"후, 알겠습니다."

라온이 작게 한숨을 쉬며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렸다. 호흡을 멈추고 주먹을 뻗어낸다. 묵직한 정권이 저녁 공기를 뚫었다.

발을 앞으로 내밀며 좌측 주먹을 내지른다. 꺾여 오는 방향이 흡사 부메랑과 같았다.

우측으로 회전하며 허리춤에 놓았던 오른 주먹을 후려친다. 경쾌한 바람에 마르타의 앞머리가 나풀거렸다.

그 뒤로 이어진 라온의 자세는 표홀하면서도 박력 넘쳤다. 그는 칠형권의 일곱 가지 형태와 기세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꿀꺽.

마르타가 마른침을 삼켰다.

리메르가 대충 넘긴 게 아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정말 반나절 만에 칠형권의 형과 의를 익혀냈다.

"너 미리 알고 있었지!"

"아니."

라온은 뭔 헛소리냐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끄…."

할 말이 없었다. 아까 보았을 때 라온의 주먹질은 분명 초보자 수준이었으니까.

"어때 마르타. 이 정도면 인정할만하지?"

리메르가 자신을 놀리듯이 끌끌 웃었다.

"저걸 반나절 만에?"

"내가 뭘 본 거지?"

"와…."

"진짜 미쳤네."

교관들과 아이들도 놀라웠는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 정도는 나도 했어."

마르타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서 등을 돌렸다. 입술을 깨물고 그대로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괜찮아.'

고작 칠형권이다. 검술도 아닌, 권법의 기초 중 기초. 저걸 조금 빨리 익혔다고 해도 자신을 따라잡는 건 무리다.

그래.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지.

마르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직계 훈련장으로 향했지만, 머릿속엔 라온이 휘두른 주먹의 궤적이 깊게 남았다.

* * *

"어쩌라는 건지."

라온은 손을 털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놀라서 그러는 거다."

리메르는 연무장을 떠나는 마르타를 보며 픽 웃었다.

"사실 나도 놀랐어. 너 정도로 빠르게 습득하는 녀석은 처음 봤거든."

"칭찬은 감사하지만, 다음 권법부터 알려주세요."

"하, 그래야지."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허리와 손목을 풀고서 하늘을 보았다.

"근데 라온."

"네?"

리메르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불안감이 들었다.

"오늘은 너무 늦었다. 내일 보자!"

그는 바람을 불러일으켜 시야를 가린 뒤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재빠르고 단호한 움직임에 막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

-본왕이 전에 말했잖느냐. 저 뾰족귀는 뒤통수칠 관상이라고. 전장에서 네놈을 버리고, 홀로 도망칠 놈이니라.

언제부터 점쟁이가 되었는지, 라스는 리메르의 미래에 대해서도 늘어놓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어.'

라온은 입맛을 쩝 다셨다. 리메르의 반응을 보았을 때부터 저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버렌이 묵직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난 지금부터 직계만 받을 수 있는 훈련을 받으러 간다."

알고 있었다. 저녁 이후 수련생들이 개인 단련을 하는 동안 직계들은 추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불합리하다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꺾을 거다."

그는 잠시 라온을 노려보다가 연무장을 떠났다.

-저 건방진 눈깔은 여전하군. 언젠가 꼭….

'아니, 달라졌어.'

라온이 버렌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한 달 전부터 버렌의 눈빛이 맑아졌다.

경쟁심은 여전했지만, 이전처럼 추한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자박.

뒤에서 들린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난이 맹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넌 안 가?"

"안 가."

"가는 게 좋지 않나?"

"안 가."

"강한 검술도 배우고…."

"안 가."

루난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쯥."

라온이 입맛을 다시고서 단련실로 향했다. 뒤에서 루난이 따라오는 걸음 소리가 사박사박하게 들려왔다.

제27화

"후욱!"

버렌 지그하르트는 벽력권의 형을 차례로 펼쳐낸 뒤 거친 숨을 뱉어냈다.

'쉽지 않네.'

2단계인 진승권은 본관에 있을 때 배워놓아서 어렵지 않게 통과했지만, 3단계 벽력권의 습득은 쉽지 않았다.

기본 권법안에 고급 묘리가 어우러져 있어서 익히기 난해한 권법이었다.

'그래도 다음 주 정도면 끝낼 수 있겠어.'

본관에 있을 때 권법 기초를 확실히 익혀둔 덕분에 점점 자세가 잡혀갔다. 벽력권을 익힌 지도 2주가 넘었기 때문에 다음 주 안에 통과할 수 있을 거다.

'그럼 다시.'

버렌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다시 벽력권의 수련을 시작했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수련복이 젖어서 몸에 달라붙을 때까지 권법을 반복하던 그가 자세를 바로 했다.

후웅!

천천히 숨을 돌리고 있을 때 우측에서 거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긴 흑발의 미소녀가 세차게 수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마르타는 한참 전에 권법을 끝내고 가장 먼저 검술에 진입했다.

완벽한 자세와 정립된 형태.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수준의 검술이다. 성격은 지랄맞지만,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마르타의 진도는 수련장 누구보다 빠르고, 실력 역시 가장 뛰어나다. 교관 모두가 깜짝 놀랐을 정도.

하지만 그런 그녀의 표정에는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뒤에서 굶주린 맹수가 쫓아오는 것처럼 짜증과 긴장이 가득 찬 표정으로 검술을 펼쳐냈다.

'하긴 저럴 수밖에 없지.'

버렌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하루 만에 칠형권의 형태를 잡고, 진승권의 습득을 10일 만에 끝낸 괴물이 뒤에 있으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을 거다.

어이가 없지만, 지금 라온은 자신과 똑같이 벽력권을 수련하고 있었다.

후웅!

라온이 내지르는 주먹에 공기가 휘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리고, 땅을 구르는 발에 연무장의 바닥이 들썩인다.

그의 손짓과 발짓엔 벽력권의 묘리가 확실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괴물 같은 놈.'

주변에서 천재이니, 괴물이니 소리를 듣고 자라왔지만, 그걸 남에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어.'

수련생이 되기 전 진승권을 한 달 동안 익혔는데도, 3일의 추가 수련을 끝내고 나서야 벽력권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도 빠르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 달 동안 익혀도 대단하다는 말이 나왔는데, 라온은 고작 10일 만에 그 경지를 따라 잡아버렸다. 그것도 단순히 형만 익힌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묘리까지 권법에 담아냈다.

'저대로라면.'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검술로 넘어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

버렌이 가는 한숨을 뱉었다. 사실 라온을 살피며 놀란 건 그의 재능만이 아니다.

'노력과 정신력.'

라온은 훈련 시간에 단 한 번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입에선 차디찬 냉기가 흘러나오면서 전신은 땀에 젖는다.

제삼자가 보아도 정상을 벗어난 몸 상태건만 녀석은 그 어떤 훈련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나, 끝까지 하겠다는 말을 쉽게 하지만 그걸 실제로 이루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놈은 하지.'

라온은 매번 가진 모든 걸 소모해가며 훈련에 최선을 다한다.

리메르가 말했던 자신의 한계를 넘어 실력이 가장 빨리 느는 방법을 그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볼 때마다 놀라게 만들어.'

라온을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감탄이 나온다. 녀석은 이 수련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버렌. 손이 멈췄다. 쉬려면 휴식장에 가라!"

"아닙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교관의 외침에 버렌이 고개를 숙였다. 한숨을 뱉으며 머리에 가득 찬 상념을 흘려보냈다.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라온에게는 절대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녀석의 정신력을 본받아서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파앙!

버렌은 정신을 집중하며 꽉 말아쥔 주먹을 내뻗었다.

* * *

후웅!

눈앞에 적이 있는 것처럼 광기를 담아 검을 내리치던 마르타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검을 꾹 말아 쥐었다.

'짜증 나.'

이 연무장에서 유일하게 검을 잡고 있음에도 참기 힘든 짜증이 밀려왔다.

'이건 모두….'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며 눈길을 돌렸다. 허연 입김을 뱉으며 주먹을 날리는 놈이 보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놈을 보자,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벌써 벽력권에 들어갔다니.'

자신이 검에 진입하는 동안 라온은 두 가지의 권법을 모두 습득하고, 벽력권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버렌이나, 루난처럼 권법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모를까. 처음 익혀서 저런 발전 속도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망할….'

뒤에서 쫓아오는 전율적인 재능. 언제 선두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에 숨이 막혔다.

'저 자리는 내 거였는데.'

지그하르트에 입양된 이후 추격자는 항상 자신이었다.

천재라고 우쭐대고 잘난 척하는 직계와 방계들을 추월하여 놈들이 절망하는 모습을 비웃어왔다.

'하지만….'

이번에 그 역할이 반대가 되자, 쫓긴다는 두려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달았다.

후웅!

마르타는 점점 더 거대해지는 라온의 존재감을 지우기 위해서 검을 내리쳤다.

짜증이 가득 담긴 수련검의 칼날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그녀는 중천에 뜬 태양이 서산에 걸릴 때까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후욱…."

마르타가 긴 숨을 뱉으며 검을 내렸다. 종일 검을 휘두르고 나니, 답답했던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우측을 보자마자 다시 인상을 쓰게 된다. 라온의 권법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발전하고 있었으니까.

'저 망할 놈은 지치지도 않나?'

극한의 집중력을 유지한 채로 하루종일 수련하다니, 악바리도 저런 악바리가 없었다. 뒷골목에서 살 때 본 적 없는 종류의 인간이다.

"쯧."

마르타는 해가 떨어진 걸 확인한 후 몸을 돌려 연무장을 나섰다.

"수고하셨습니다."

"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 카멜이 고개를 숙여왔다. 대답할 힘이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아가씨."

카밀이 걸음을 빠르게 맞추며 마르타를 불렀다.

"그리 조급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최근 놀라운 모습들을 보여주어서 모두 잊고 있지만, 라온 도련님은 큰 약점을 가지고 계십니다."

카멜은 기합 소리가 들려오는 연무장을 힐끔 보고서 빙긋 웃었다.

"병 말하는 거야? 그놈은 독종이라 통증 따윈 신경 쓰지 않아."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뭔데"

"라온 도련님은 오러에 대한 재능이 최하 수준입니다."

"뭐?"

"아가씨께서 입양되기 전이니 모르시겠지만, 판별식에서 라온 도련님의 마나 감응력은 최저 수준으로 나왔습니다."

카멜은 단전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현재 5 연무장에서 오러를 익히지 못하신 분은 라온 도련님 한 명 아닙니까?"

"맞아."

마르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 전에 리덴 연공법을 배운 수련생들은 모두 단전에 오러를 안착시켰다.

카멜의 말대로 수련생 중에서 오러를 익히지 못한 사람은 라온뿐이다.

"동패로 얻을 수 있는 연공법이라고 해봐야 중급에서 중상급. 린덴보다 조금 뛰어난 연공법이죠. 그런데도 아직 연공법을 습득하지 못한 걸 보면 그분의 마나 재능은 판별식에서 나온 대로 최저 수준일 겁니다."

"아!"

"아무리 검술과 권법에 재능이 있어도 오러에 대한 재능이 미약하다면 제대로 된 무인이 될 수 없습니다."

카멜은 인자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랬군."

마르타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턱을 끄덕였다.

'오러에 대한 재능이 없는 거였어.'

라온이 가진 무학적 재능이 너무도 뛰어나서 잊고 있었지만, 놈은 지금까지도 오러를 익히지 못하고 있었다.

오러 재능이 약한 무인은 반쪽짜리라는 말이 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무학에만 재능을 몰아받은 반쪽짜리 무인이었다.

"후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난 시간 동안 잠까지 설쳤던 불안감이 단숨에 사라졌다.

"괜한 걱정이었네. 신경 쓸 필요 없는 놈에게 관심을 줬어."

마르타는 쇳덩이를 뺀 것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직계 수련장으로 향했고, 카멜은 그 뒤를 따르며 의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 * *

라온은 잠시도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벽력권의 묘리와 흐름을 몸과 정신에 때려 박았다.

등 뒤에서 식은땀을 흘러내리고, 입에선 눈처럼 하얀 김을 뿜어졌다. 누가 봐도 지친 기색. 하지만 그의 얼굴은 태양을 마주한 듯 밝았다.

"후."

라온이 마른 입술을 축이며 옅게 웃었다.

'점점 즐거워지는군.'

교관이 보여준 움직임은 1mm의 오차도 없이 머리에 새겨지고, 그 흐름과 형태가 육체를 통해 재현된다.

무학을 익히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전혀 몰랐다.

'당연한 건가.'

전생에선 무학이 아니라, 생존법과 살인법만을 배웠다. 성장하는 건 오직 사람을 죽이는 방법뿐이었다.

오러를 늘리고, 살인검을 수련하는 건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의 숨통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

내 한 몸이 으스러지고, 찌그러져도 적을 죽일 방법만을 몸과 정신에 새겼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칠형권도, 진승권도, 벽력권도 기초적인 권법이지만, 그걸 배우고 익히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를 위한 발전이니까.'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누군가의 명령을 들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수련을 하게 되니, 힘들어도 웃음만 나왔다.

'고통도 견딜 만해.'

통증만 따지자면 마나 회로의 냉기 때문에 지금이 전생보다 더 고통스럽다. 하지만 성장한다는 고양감에 몸을 멈출 수 없었다.

불의 고리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무학의 흐름을 파악하고, 육체를 강화한다.

권법만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까지 성장하는 게 느껴지니, 훈련이 즐겁기만 했다.

-그런 기초적인 몸부림을 익혀서 어디다 쓰려는 것이냐. 본왕에게 몸만 넘긴다면 당장 대륙의 정점에 서게 해주마.

'거기에 내 의지가 없다면 아무 소용도 없어.'

아무 의미도 없이 남의 명령을 따르는 건 전생의 삶으로 충분하다. 몸을 넘겨서 얻게 된 최강 따위는 필요 없다.

-멍청하군. 너처럼 허약한 놈은 평생을 노력해도 그 위치에….

'흐흠.'

기분이 상쾌하니, 라스의 개소리에도 웃음이 나왔다.

파앙!

라온은 라스의 말을 리듬 삼아 벽력권의 자세를 순서대로 펼쳤다. 수련을 통해서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조금이나마 배워나가는 것 같았다.

후우웅! 후웅!

전력을 다해 주먹을 내지르고, 잠시 호흡을 조절할 때 수련생 중 하나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저, 저기 수석님. 하나만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뭐지?"

"그 진승권의 마지막 자세가 잘 안 되는데…."

"우측 발을 조금 더 벌려. 다리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라온은 수련생의 자세를 보자마자, 문제를 파악했다.

"아! 감사합니다!"

수련생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단번에 이해했는지 지적한 부분을 고쳐 제대로 된 자세를 잡았다.

"와, 한 번에 고쳐졌어!"

"권법의 천재라니까!"

"교관보다 더 잘 보는 거 같아."

수련생들은 서로의 자세를 확인한 뒤 라온에게 감탄의 시선을 보냈다.

라온은 수련생들이 놀라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권법 수련을 한 뒤 숙소로 돌아갔다.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끝내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 오러 연공을 준비했다.

날이 갈수록 성취가 폭발하는 권법과 달리 만화공의 습득은 지지부진했지만, 라온의 표정은 덤덤했다.

'처음부터 오래 걸릴 줄 알았으니까.'

머릿속에 든 만화공의 내용을 모두 훑어보고 깨달았다.

만화공은 불의 고리처럼 전설급의 연공법이다.

제대로 익힌다면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오러를 사용할 수 있으니, 습득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했다.

'거기다 냉기도 함께 흡수하고 있으니까.'

라온은 만화공의 열기만이 아니라,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도 함께 운용하고 있다.

상반되는 두 기운을 동시에 순환시키는데, 그 기운이 쉽게 단전에 안착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걱정할 필요 없어.'

당장의 성취가 느린 건 맞다.

하지만 만화공을 습득하고, 냉기를 모두 흡수했을 때의 보상이 어마어마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불안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첫 번째 꽃을 피워낼 때가 기대되네.'

라온은 만화공의 화염에서 피어날 꽃 한 송이를 그리며 눈을 감고, 연공에 빠져들었다.

제28화

마르타의 수련검이 초여름의 선선한 공기를 가른다.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운 연계. 지그하르트의 기본 검술 중 하나인 연성검이었다.

후우웅!

그녀는 전장의 한복판에 선 것처럼 살벌한 눈빛으로 검을 내리쳤다. 그 강렬한 기세에 연무장에서 피어오른 모래조차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후우웅!

그런 마르타의 우측에서 비슷한 검풍 소리가 들려왔다. 금발적안의 소년. 라온 지그하르트였다.

그의 뭉툭한 수련검은 마르타와 똑같이 연성검의 초식을 펼쳐내고 있었다.

한참 뒤떨어졌던 라온이 결국 마르타를 따라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걸 지켜본 마르타의 얼굴엔 예전 같은 초조함과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라온에게 박수를 보냈다.

"잘하네."

마르타가 수련검을 내려놓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무학을 배우는 속도는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야. 그런데…."

그녀는 말을 살짝 끌며 손가락을 돌렸다.

"마나 감응력이 그따위라면 돼지 목에 진주나 다를 바가 없지. 그런 반쪽짜리 재능은 별로 부럽지가 않네."

마르타의 목소리는 컸다. 수련생 모두가 그 말을 들었지만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라리 오러와 무학에 대한 재능이 반씩 있는 게 낫지. 네 재능으로 할 수 있는 건 검술 교관 정도일까?"

라온에게 도움을 받은 수련생도, 버렌도, 옆에 서 지켜보던 리메르와 교관들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마르타가 더욱더 진한 비웃음을 흘렸다.

'저 멍청이가 4달 동안 오러를 익히지 못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테니까.'

오러 수련이 정규 훈련에 들어간 지 4달이 넘었지만, 라온은 오러를 익히지 못했고, 그의 단전은 빈털터리였다.

'처음엔 식겁했지.'

어마어마한 속도로 발전해 나가는 라온을 보며 진심으로 경악했다.

어마어마한 재능이 쫓아오는 공포에 잠조차 설칠 정도.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수련해도 그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카멜의 말을 듣고 난 이후로 모든 게 바뀌었다.

'정말 반쪽짜리였어.'

라온이 판별식에서 최악의 마나 감응력을 보여주었다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연공을 시작하고 4달이 지난 오늘까지도 단전에 오러를 만들지 못했다.

검술이나 권법을 아무리 잘 배우고, 익히면 무엇을 하겠는가. 그 주먹과 검에 담겨야 할 힘이 없는데.

"후후."

마르타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검을 휘두르는 라온을 비웃으며 턱을 틀었다.

'신경 쓸 가치도 없었어.'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아니다. 라온은 버렌이나, 루난은커녕 겁쟁이 도리안 수준도 되지 않았다.

다만 라온에게 반격을 당했던 건 아직 머릿속에 꽉 박혀 있었다.

'이제 잊어도 되겠네. 오러를 쓰는 대결에선 상대조차 안 될 테니까.'

마르타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응?"

루난 슬리온이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가."

"할 말은 그것뿐?"

"가."

"재촉하지 않아도 갈 거야. 수준 높은 수련을 할 시간이거든."

부드럽게 손을 흔들어주고, 연무장을 떠났다.

후웅!

마르타가 한껏 조롱하고 떠났지만, 라온은 반응하지 않았다. 입에서 하얀 김을 뿜어내며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빨간 눈동자에 비치는 건 오직 검뿐이었다.

* * *

라온은 야간 수련까지 끝낸 뒤 실내 단련장을 쭉 둘러보았다.

'다 돌아갔나.'

내일부터 이틀간 휴일이라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훈련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후…."

라온은 들뜬 숨을 내쉬며 검을 내려놓았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검술에만 집중했더니, 밤이 된 줄도 몰랐다.

암살하기 직전의 집중력과 같은 수준. 수련할 때 발휘하기 어려운 극한의 집중력이었다.

'검술이 꽤 늘었는데.'

검에만 집중한 덕분에 연성검의 성취가 꽤 올라갔다. 조금만 더 익히면 실전에서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거냐!

오늘 수련에 만족하고 있을 때 분노로 가득 찬 라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도발 당하고도 가만히 있다니. 한심한 놈!

'도발?'

-그 검은 머리 계집이 계속 주절거렸지 않느냐!

'아, 그랬어?'

라온이 픽 웃었다. 수련에 집중하느라, 마르타가 떠드는 것도 몰랐다.

-본왕에게 그따위 말을 주절거렸다면 전신을 얼린 뒤 갈기갈기 깨부숴버렸을 거다!

'전에도 말했잖아. 지금은 싸워봐야 이득이 없다고.'

지금 도발에 넘어가서 싸워봐야 마르타에게 뽑아 먹을 게 없다.

수석 자리를 걸고, 그녀에게 내기를 걸어 영약이나, 무학서 하나라도 챙기는 게 훨씬 낫다.

'어차피 뭘 해도 이길 수 있으니까.'

만화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르타 같은 애송이를 이기는 건 간단하다. 그녀에게 괜찮은 보물이 들어왔을 때가 싸움을 걸 때다.

'일단 돌아갈까.'

라온이 정리를 끝내고 단련장의 마법 등을 끄려고 할 때 문에서 작은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탁.

작고 가벼운 발소리. 매일 들어서 알 수밖에 없는 루난의 걸음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루난이 서 있었다. 평소처럼 맹한 눈이 아니었다.

"자."

그녀가 뒤로 숨기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벽돌보다 조금 작은 상자였다.

"이게 뭔데?"

루난은 대답하지 않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뚜껑과 함께 솟구친 새하얀 냉기 아래 엄지손가락만 한 구슬이 하나 있었다.

"어…."

라온은 상자에 든 구슬과 루난의 보랏빛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거 가져가라고?"

"응."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상자에 담긴 구슬을 손에 올려주었다. 손바닥 위로 기분 좋은 시원함이 올라왔다.

"먹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뭐지?'

이게 뭔지 모르겠다. 다만 저렇게 냉기가 모여 있는 상자에 보관하고 있는 걸 보면 귀한 게 분명했다.

"음…."

암살자의 삶에서 배운 대로라면 먹지 않아야 하지만, 루난의 눈동자에 담긴 기대감에 손이 움직였다.

"후…."

이 녀석이 이상한 걸 주진 않겠지.

눈 딱 감고 구슬을 입에 넣자, 혀끝에서 바로 녹아내렸다. 초콜릿을 얼린 듯한 시원한 단맛이 입안 전체를 휘감았다.

"허…."

헛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시원하고 달콤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이런 맛이 있다니!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도 느껴본 적 없는 단맛이다! 아니, 시원함 때문에 단맛이 올라간 건가? 더, 더 가져와라! 더 먹어보고 싶다!

감각을 연결했었는지 라스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펄쩍펄쩍 뛰었다.

'좀 가만히 있어.'

라온은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라스를 팔꿈치로 밀어냈다.

"어때?"

"마, 맛있네."

"구슬 아이스크림이야."

루난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선 그대로 단련장을 나갔다.

"어? 야!"

손짓하며 불렀지만, 루난은 돌아보지 않았다.

-…별종이로다. 근데 하나만 더 줬으면 좋았을 것을.

'걱정해준 건가.'

루난은 오늘 마르타가 대놓고 조롱한 것을 걱정해서 구슬 아이스크림을 준 것 같았다.

별관에서 가끔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긴 했지만, 이런 형태와 맛은 처음이었다.

상자의 크기를 보았을 때 끽해야 아이스크림 4개가 들어가 있었을 텐데, 그중 마지막 하나를 건네준 모양이다.

'마지막 남은 걸 주다니.'

루난은 아이답게 단 음식을 굉장히 좋아한다.

마지막 남은 아이스크림에 집착을 가질 만도 한데, 망설임 없이 건네다니 보통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아껴둔 간식을 들고, 우물쭈물하는 루난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 참."

라온이 픽 웃었다. 저런 아이까지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졌다.

'근데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말이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은 누구보다도 높고, 험난한 길. 그리고 만화공은 그 길을 더 쉽게 걸어가게 해줄 길잡이다.

그런 뛰어난 길잡이가 쉽게 힘을 빌려줄 리가 있겠는가.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나중에 보답 좀 해야겠네.'

라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훈련장을 나왔다. 지쳐있던 발걸음이 풀잎처럼 가벼워졌다.

* * *

"세상에! 라온 도련님!"

라온이 별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입구에 서 있던 헬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왔다.

"웬일이세요?"

"라온이 왔다고?"

헬렌의 목소리를 들은 실비아가 방문을 걷어차고 달려와 라온을 부둥켜안았다.

"이게 얼마 만이야! 몇 달째 찾아오지도 않고!"

"지난주에 봤잖아."

라온이 볼을 비비는 실비아를 밀어냈다. 수련생이 된 이후엔 주말 면회가 가능했기 때문에 실비아는 일주일마다 숙소로 찾아왔었다.

"그거랑 이건 다르지!"

실비아는 허공을 내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밥 안 먹었지? 금방 준비할게. 헬렌!"

"도련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실비아는 시녀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울리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비프스튜를 해주려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할까.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별관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전생에 없던 진짜 집이 이러할까.

"빨리 만들어! 라온이 배고플 거라고!"

"알겠어요! 근데 재료가…."

"일단 있는 거 다 때려 부어!"

라온은 주방에서 들려오는 정겨운 소리를 들으며 욕실로 향했다.

* * *

다음날 새벽.

주디엘은 라온의 방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라온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손에 쥔 종이를 툭툭 쳤다. 이전에 호수에서 찾아냈던 달빛 종이와 같은 물건이다.

"고개를 들어라."

엄숙한 목소리에 주디엘이 몸을 떨며 머리를 들어 올렸다.

"중무전에서 내려온 이야기는?"

"따, 딱히 없습니다. 이전에 도련님이 권법과 검술을 익히는 속도가 빨라서 더 자세히 조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오러를 익히지 못한 지금은 관심이 멀어진 것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

라온이 빙긋 웃었다. 오러는 모든 무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 그 재능이 뒤떨어지는 자신에게 관심이 떨어진 것 같았다.

"어머니에 대한 건?"

"실비아 님에 대한 관심도 줄어든 것 같습니다. 이대로라면 제가 철수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철수하면 좋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아니다.

'이용할 구석이 사라지지.'

주디엘을 이중 첩자로 만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건 좋은 흐름이 아니었다.

"저, 저기 혹시 지금까지 일부러 오러를 익히지 않으신 건지…."

주디엘이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뗐다.

"글쎄."

라온은 답을 해주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그것만으로 주디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도 그날의 공포가 그녀를 지배하는 것이다.

"수고했다. 나가보도록."

"예, 예!"

주디엘은 눈동자를 떨며 일어섰다. 공포와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뻐하며 빠르게 문을 열고 나갔다.

-누가 들으면 일부러 익히지 않은 줄 알겠군.

'분위기와 상황을 잘 이용하는 것도 능력이지.'

라온이 손목에 매달린 라스를 툭 쳤다. 주디엘은 알아서 착각하고 자신의 존재감과 공포를 더욱 키울 거다.

-오러를 익히는데 그렇게 힘들어하다니 한심하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는 한 번 배운 마법과 무학은 눈을 감고도 행할 수 있었지.

'그러게 참 한심하네.'

라온은 여유롭게 대답하며 방을 나갔다. 마음이 여유롭기에 라스의 놀림도 웃어넘길 수 있었다.

"음?"

새벽 단련을 위해서 정원으로 가려 할 때 멀리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붉은색 머리칼에 기분 좋은 바람을 몰고 다니는 엘프. 리메르였다.

"교관님?"

"잘 잤어?"

리메르는 새집이 지어진 머리를 한 채로 손을 흔들었다.

"새벽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예전에 약속한 거 못 지켰잖아. 그게 미안해서 조금 도움을 주려고."

"약속이요?"

"권법 수련 첫날 진승권을 알려준다고 하고 도망갔잖아."

"아!"

"그건 이미 늦었으니, 다른 교육을 해줄게."

그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진녹색 바람이 치솟았다.

"네게 속성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마."

제29화

"지금 속성을 알려준다고 하신 겁니까?"

라온이 흐트러진 리메르의 머리와 옷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도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사기꾼을 보는 눈빛이네."

리메르는 허리를 살짝 굽히며 낄낄 웃었다.

"내가 좀 게으르긴 해도 교육은 확실하잖아."

"...."

그건 맞다. 그의 방식은 많은 아이를 데려가진 못해도, 소수의 성장은 확실하게 책임졌으니까.

"의심 그만하고 나와."

"여기서 하는 게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 대충 준비해서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라온은 방에 들어가서 겉옷을 꺼냈다.

-새벽부터 뾰족귀와 마주치다니, 오늘 재수가 없겠군.

'매번 만났는데 뭘.'

겉옷을 걸친 뒤 별관을 나갔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북망산."

리메르가 별관 뒤편에 솟구친 산을 가리켰다. 지그하르트 전체를 둘러싼 거대한 산으로 별관만이 아니라, 본관과도 닿아 있었다.

"가자."

"알겠습니다."

라온은 리메르를 따라 산을 올랐다.

"이쯤이면 되겠네."

리메르는 20분 정도 산을 오른 뒤 멈춰 섰다. 평평하면서도 나무가 자라지 않아 공터 같은 공간이었다.

"여긴 왜 오신 겁니까?"

라온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속에선 리메르가 어떻게 움직여도 반응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 긴장할 필요 없어. 그저 느끼게 해주고 싶을 뿐이니까."

"느낀다?"

"그래."

리메르의 웃음과 함께 진녹색 바람이 불어왔다.

"날 믿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

"믿으라고 해도…음?"

겨울을 지우는 봄 내음처럼 살랑거리며 불어온 바람이 앞머리를 흔들었다.

그 뒤로 여름 숲에서나 느낄 법한 시원한 바람이 산을 오르며 달궈진 육체를 가라앉혔다.

세 번째는 겨울이다. 혹한의 폭풍처럼 뼈를 아리게 만드는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짓눌렀다.

바람은 또 한 번 변했다.

사계를 담아냈던 진녹색 바람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라온의 주변을 휘감았다.

"난 바람으로 내 주군을 지킬 칼날을 만들길 원했지."

녹색 바람의 해일 속에서 리메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아아!

주변의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칼날 폭풍이 몰아쳤지만, 라온은 물러나지도, 앞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이게 내가 선택한 바람이다."

라온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녹색의 폭풍을 느꼈다.

후우욱!

거친 바람의 기세가 꺼지고, 리메르의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가 피어났다.

"무섭지 않았어?"

"교관님이 공격할 의도가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움직이지 말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역시 넌 아무리 봐도 13살이 아니야."

리메르가 픽 웃고서 손가락을 튕겼다. 주변에 존재하던 바람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속성이 담긴 연공법은 다른 연공법에 비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익히기 쉽지 않아."

그의 잔잔한 목소리에 바람이 춤을 추듯 울렁였다.

"엘프인 나야 태어났을 때부터 바람을 느꼈지만, 인간인 넌 다르지. 마나 회로가 냉기로 가득 차 있으니, 더 힘들 테고."

"맞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화공이 난해한 것도 있지만, 태어나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냉기와 반대되는 기운을 운용해야 하니,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바람에도 종류가 있다. 따뜻하거나, 차갑거나, 날카롭거나. 난 모든 것을 뚫어낼 바람의 검을 바랐고, 그걸 이뤄냈었다."

이뤄냈었다라고 과거형을 말할 때 리메르의 표정은 서글프다기보다 당당했다.

"너도 그걸 찾아야 해. 네가 가질 불의 이미지를 잘 생각해봐라."

"이미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선 그 속성을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지."

"하지만 여긴 북방입니다. 산에 불이라도 지르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불꽃을 보기는 힘들어요."

"그랬다간 너랑 나랑 사이좋게 목이 잘릴걸."

리메르는 킥킥 웃고서 손을 저었다. 그의 발끝에 녹색 바람이 일어났다.

"따라와라."

"또 어딜 가는 겁니까?"

"바람은 느꼈으니, 불을 보러 가야지."

* * *

라온은 리메르를 뒤를 따라 산을 달렸다. 대략 20분쯤 뛰었을 때 리메르의 걸음이 느려졌다.

후욱!

열풍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차디찬 숲에서 두꺼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온에 피부가 간지러워졌다.

'저긴가.'

붉은 벽돌로 지은 집과 회색 가마가 붙어있었다. 열기는 가마 안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덥군.'

여긴 북방이다. 대륙에서 가장 추운 곳임에도 더울 정도이니, 저곳에서 피어나는 열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알 수 있었다.

"어이, 영감. 나 왔어!"

리메르는 자기 집이라도 되는 듯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뒤를 따라갔다.

가마에 다가갈수록 열기가 강해진다. 새어 나온 땀으로 옷이 젖을 정도.

"으음…."

익숙하지 않은 열기에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가 요동을 친다. 심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엔 딱 하나의 기구만 존재했다.

아궁이. 집 전체를 일그러져 보이게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열기를 뿜어내는 가마의 아궁이가 있었다.

아궁이 앞엔 머리를 허옇게 물들인 주름 가득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는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면서도 아궁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게 내가 알던 불꽃이 맞나?'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전생의 삶을 통해 많은 불길을 봐왔다. 직접 피운 모닥불부터 마법사의 손에서 뿜어지는 상위 화염 마법까지.

하지만 그 무엇도 아궁이에서 치솟은 불꽃의 열기를 따라잡지 못할 것 같았다.

고오오오!

마나 회로의 냉기가 비명을 지르고, 아직 습득하지도 않은 만화공의 흐름을 따라 주변의 마나가 움직였다.

불길이 일어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리고, 열기의 출렁임에 심장이 박동했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아궁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영감. 집중력은 여전하네."

리메르는 녹풍으로 열기를 가라앉히며 손을 털었다.

"네놈 때문에 열기가 죽지 않느냐."

"꼴을 보니, 어차피 오늘도 실패잖아."

"끄응…."

노인은 리메르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아궁이에 뭔지 모를 회색 덩어리를 집어넣었다.

후욱.

대지조차 녹여버릴 것 같았던 열기가 가라앉고, 불길은 따스할 정도로 낮아졌다.

"아…."

라온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불길이 꺼지자마자, 마나 회로를 질주하던 만화공의 흐름이 흩어졌다. 아쉬움에 손끝이 떨렸다.

"이번에는 또 뭘 데리고 온 거지? 저건 뭐야."

노인은 라온을 보고 눈매를 찡그렸다. 아래로 내려간 입매와 한껏 솟은 눈썹을 보니, 고집이 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허! 저거라니! 가주님의 손자께 무슨 막말이야!"

리메르는 본인도 반말하고 막대하면서 예의를 차리라 말하고 있었다.

"흥, 난 이미 은퇴한 노인네일 뿐이다. 가주께서 직접 오시지 않는 이상…음?"

그는 라온의 눈과 머리카락을 보고 일어서다가 멈춰 섰다.

"금발적안? 거기다 저 얼굴은…."

"가주님이랑 비슷하지? 라온이 훨씬 더 잘생기긴 했지만."

"음."

노인은 동의하는지 고개를 주억였다.

"발칸이다. 예의를 차리길 원한다면 다른 곳으로 가도록."

'발칸!'

라온은 다 타버린 숯을 보는 듯 흐릿한 노인의 눈을 보며 입매를 다잡았다.

'이 사람이 여기 있었다니.'

장인. 그것도 세계에 이름을 알린 대륙 장인의 칭호를 가진 남자로 글렌 지그하르트의 진천검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남자였다.

다만 그의 마지막 활동은 30년 전이었고, 진천검 이후에는 딱히 명검이라 불릴 만한 검을 만들지 못했다.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라온은 발칸의 반말에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한 길의 끝에 도달한 거인에게 보내는 예의였다.

"음…."

정중함을 차린 인사에 발칸의 구겨진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네가 나에 대해 알려준 건…."

"전혀."

리메르는 고개를 슥슥 젓고서 뒤를 돌았다.

"이 영감은 지그하르트의 장인이다."

"은퇴한."

"그래. 은퇴한 장인. 어쨌든 이 영감이 여기서 불씨를 태우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거든."

리메르가 꺼져버린 아궁이를 가리키며 몸을 돌렸다.

"여기가 북방에서 가장 뜨겁고, 열정적인 불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 * *

"화속성 연공법이라…."

발칸은 리메르의 설명을 듣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여기에 데리고 온 거냐?"

"영감은 1년 내내 여기서 불씨만 키우잖아. 여기 말고 제대로 된 불을 느끼게 할 곳이 어디에 있겠어."

"야장들의 공방이 있잖느냐."

"거긴 너무 눈에 띄어. 저 연공법을 습득할 때까진 보여선 좋지 않을 것 같거든."

"좋지 않다?"

"라온이 실비아의 아이라서."

실비아의 아이라는 말에 발칸의 시선이 다시 한번 라온을 훑어내렸다.

"후…."

그는 고민하는 건지 몸을 돌려 타오르는 주홍색 불씨를 보았다.

"방해는 하지 않겠습니다. 불을 느낄 수만 있게 해주십시오."

라온은 발칸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보고 싶어.'

발칸이 불씨를 태울 때 심장이 뛰고, 마나 회로가 크게 출렁였다. 그 불꽃의 호흡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난 숯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숯이라면?"

"백탄이나, 흑탄보다 훨씬 강력한 열기를 만들 수 있는 금탄. 금탄을 만드는 작업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무얼 하든 상관없다."

"감사합니다."

"흠…."

라온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전보다 더한 예의에 발칸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허락했으니까 됐네. 라온. 넌 새벽 연공 시간에 여기에 와서 만화공을 수련해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이 영감은 연공법 따윈 모르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의 말대로 발칸에게선 약간의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영감은 잠깐 나 좀 보지."

리메르는 잘 되었다고 손뼉을 치고서 발칸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영감은 여전히 착해빠졌네."

리메르가 발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씩 웃었다.

"라온을 잘 챙겨주면 나중에 좋은 술 가지고 찾아올게. 과일주 좋아하지?"

"너 때문이 아니다."

"응?"

"저 아이가 왔을 때 아궁이의 불씨가 더 크게 타올랐다. 갑작스러운 열기에 숯이 망가질 정도로."

발칸이 노랗게 타버린 숯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런 색이 나온 건 정말 오랜만이야."

"역시 영감도 느꼈군."

"난 장인이다. 평생을 보아온 불꽃이 출렁였는데 모를 수가 있나."

재가 되어버린 듯했던 발칸의 회색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저 아이의 호흡엔 불길을 움직이는 힘이 어려있다."

* * *

다음날 새벽.

라온은 해가 뜨기 전에 발칸의 숯가마로 달려갔다. 어둑한 산속에서 피어나는 붉은 열기에 숯가마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후우욱!

발칸은 발소리를 들었음에도 라온을 쳐다보지도 않고, 가마의 아궁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 아궁이에서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은 그가 괜히 대륙 장인이라는 칭호를 받은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이 열기….'

라온은 열기가 가장 진하게 타오르는 자리로 가서 섰다.

격한 열풍에 옷이 말려 올라가고, 피부가 따갑게 달아올랐다. 냉기가 발악하듯 마나 회로를 찔러댔다.

"흡…."

이가 악물리는 통증이 일어났다. 입에서 회색 입김이 흘러나온다.

당장에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심장은 불꽃을 느낀 흥분으로 두방망이질 쳤다.

마음에 희열이 깃든다. 고통 속에서 전해지는 불꽃의 호흡을 따라 만화공의 구결을 외웠다.

들이마시는 마나에 뜨거운 숨결이 담기고, 내쉬는 공기에 탁한 기운이 빠져나갔다.

라온이 눈을 감았다.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며 만화공을 운용했다.

고오오오.

집중력이 최고조에 오르자, 고통은 사라지고 열기에서 전해오는 희열만이 가슴을 채웠다.

"...."

발칸이 뒤를 돌았다. 눈을 감은 채로 호흡하는 라온의 모습을 보던 그의 손짓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타닥.

두 사람이 있는 아궁이 앞에선 장작이 타는 소리만 조용하게 울렸다.

* * *

라온이 발칸의 숯가마로 오러 연공을 다니기 시작한 지 세 달이 지났다.

이젠 산길이 익숙해져서 10분 만에 숯가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우욱!

숯가마는 처음에 본 것보다 더 강렬해진 화력을 뿜어내며 공간을 짓눌렀다. 가마 주변이 손가락만 한 아지랑이로 가득했다.

'여전하시군.'

발칸은 자신이 온 걸 알고 있으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도 열지 않았다. 집중해서 아궁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라온은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가마로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숨이 턱턱 막혀오고, 등 뒤가 땀으로 젖었다. 마나 회로의 냉기가 맹수의 아가리처럼 으르렁거렸다.

"후욱…."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었지만, 라온은 웃었다. 이제 불길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불이라….'

이제야 좀 알겠어.

리메르의 말대로 불과 함께 시간을 보내니, 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불을 가장 무섭고 강력한 속성이라 말하지만, 제대로 다룬다면 그 어떤 속성보다도 안정적이었다.

살갗을 태울 듯한 열기를 느끼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후우욱!

아직 습득하지 못한 만화공의 기운이 저절로 깨어나, 대지를 달구는 열기를 끌어당겼다.

그 마나에 반응하듯이 아궁이의 불씨가 악마의 혓바닥처럼 새빨갛게 치솟았다.

"후…."

라온은 폐에 남았던 숨을 내뱉고, 잔뜩 익은 마나를 받아들였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마나를 마나 회로로 이끌었다. 열기에 도망치던 냉기가 만화공의 흐름에 따라 단전으로 끌려갔다.

'이미지.'

연공이 궤도에 올랐을 때 라온은 리메르의 조언을 생각했다. 그는 원하는 이미지를 그려야 한다고 말했었다.

'내게 필요한 불은….'

목표를 생각했다.

실비아를 직계로 올리고, 데루스 로베르트의 목을 따겠다는 목표. 그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걷는 것처럼 힘들 거다.

때로는 길을 밝힐 횃불이 되어주고, 때로는 맹수를 무찌를 검이 되어줄 불이 필요했다.

눈이 와도, 비가 와도 불이 꺼져서는 안 된다. 절대 꺼지지 않는 불. 그게 내가 선택한 불꽃이었다.

화아아악!

명확한 불의 이미지가 잡히자, 뇌리에 벼락이 내리치고 심장이 약동했다.

마나 회로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얼어붙은 냉기를 자극한다.

빙하를 녹이는 용암처럼 뻗어나간 열기가 마나 회로를 관통하여 끝내 단전에 도달했다.

고오오오!

만화공의 기운이 응집되어 오러의 구슬을 만들려는 순간 섬뜩한 목소리가 뇌리를 울렸다.

-이제 본왕의 차례로군.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라온의 등 뒤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제30화

뿌득!

라온이 이를 악물었다.

'라스!'

무아지경에 도달하여 오러를 만들기 직전에 방해를 받자, 뭉치려던 오러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크읍!'

정신을 집중해서 사그라지려던 만화공의 오러를 응집시켰다. 억지로라도 오러를 안착시키려 할 때 서늘한 한기가 몰려들었다.

-말했잖느냐.

라스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어렸다.

-본왕은 네가 가장 약해진 순간을 노릴 거라고.

'크으….'

그 말이 맞았다.

라스는 가장 위험한 순간에 공격을 들어올 거라 경고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순간을 예측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무아지경에 빠지면서 놈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이제 시작이다!

라스가 막대한 냉기를 폭발시키며 달려들었다. 식은땀조차 얼려버릴 서늘함에 이빨이 덜덜 떨렸다.

뼈가 얼어붙는 듯한 고통에 당장 눈을 뜨고 싶었지만 지금 움직였다간 마나가 역류하여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이놈….'

한동안 조용해서 잊고 있었지만, 라스는 같은 편이 아니다. 악마. 그것도 마계의 왕이다. 육체를 망가뜨려서 영혼을 먹어 치우려는 것 같았다.

후우우욱!

라스의 냉기가 점점 더 독해지자, 숨죽인 듯 가라앉았던 마나 회로의 냉기까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으윽….'

비명이 입을 뚫고 흘러나왔다. 뼈와 피부가 쪼개지는 느낌이다. 차디찬 냉기와 분노의 감정이 정신까지 좀먹기 시작했다.

-끝났다.

라스의 서늘한 목소리에 분노가 아닌, 희열이 차올랐다.

-이제 네놈의 육체와 영혼은 본왕의 것이다.

놈의 말대로 전신에 시리고 시린 냉기가 차오른다. 통증을 넘어 감각이 사라져간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크으!'

라온이 혀를 깨물었다. 통증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잠시 정신이 들었다.

'생각해라. 생각!'

라스의 냉기가 이미 전신을 뒤덮었다. 이대로라면 놈에게 몸이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만화공을 멈출 수도 없어.'

지금 와서 불의 고리를 운용해도 늦었다. 고리가 회전하기 전에 라스의 냉기가 몸과 정신을 집어삼킬 테니까.

'살아날 구멍을 찾아야 해.'

끊임없이 만화공을 휘돌리며 버텼다. 그야말로 동아줄 하나로 절벽에 매달린 상황이었다.

-포기해라. 네놈의 육체는 이미 본왕에게 넘어갔으니까.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이지.'

-불필요한 노력이다. 매일 숯가마를 태우는 저 노인네처럼.

'숯가마…. 숯가마!'

있었다. 살아날 방법이.

꾸욱!

라온이 주먹을 바드득 말아쥐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마나를 끌어당겼다.

고오오오!

숯가마의 열기에 데워진 자연의 마나가 아니라, 숯가마 내부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네놈. 무엇을 하는 것이냐!

'발악!'

그래. 이건 발악이다. 아무것도 못 하고 죽는 건 전생으로 충분하다. 이번 생은 절대 허무하게 죽지 않는다.

쿠구구구!

단단한 진흙으로 굳힌 숯가마의 천장에서 낙엽이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멈춰라!

'끄윽!'

라스가 뿜어내는 냉기가 강해졌다. 피부를 넘어 뼛속까지 얼려버릴 위력. 이제 팔과 다리에선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악으로 버티며 마지막 숨을 들이마셨다.

퍼어억!

대지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열기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숯가마 내부에서 터져 나온 불꽃이었다.

후우욱!

라온은 단숨에 그 열기를 빨아들였다. 태어나서 처음 호흡했던 그때처럼.

코와 입만이 아니라, 전신의 모공으로 받아들인 열기가 몸 전체를 잠식한 냉기를 밀어낸다. 압도적인 화력. 용암이 혈관을 질주하는 듯했다.

화아아아!

노도와 같은 열기에 라스의 냉기들이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이, 이게 무슨!

'꺼져라. 라스!'

라온은 입술을 짓씹으며 만화공을 운용했다. 마나 회로에서 녹아내린 막대한 냉기까지 끌어당겨 단전으로 이끌었다.

고오오오!

꺼져 가는 아궁이의 불씨 같았던 만화공의 기운이 숯가마의 열기를 받아 뚜렷한 형상을 만들어 냈다.

우우웅!

그게 전부가 아니다.

완벽하게 형성된 만화공의 오러 바로 옆에 새하얀 기운이 유리구슬처럼 응집되었다. 마나 회로를 채웠던 혹한의 냉기였다.

-이, 이런 젠장!

'후욱….'

라온은 라스의 분통 어린 비명을 흘려들으며 대기에 퍼진 열기와 육체 내부의 냉기를 모조리 갈무리했다.

극한의 집중력. 그는 라스의 방해를 이겨내고 두 번째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 * *

"후!"

발칸이 아궁이에 장작을 집어넣으며 탁한 숨을 뱉어냈다.

치이이익!

순식간에 불이 붙어 진한 불길을 일으키는 아궁이를 보자, 옛 기억이 떠오른다.

'벌써 30년이 됐나.'

30년 전에 만든 마지막 걸작 진천검. 인생 최고의 명검인 진천검을 글렌 지그하르트에게 바치고서 자신의 삶은 막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바쳐도 다 쓰지 못할 재물도 있으니, 남은 삶을 즐기겠다고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불 앞에 앉아 있었다.

일찍 일어날 필요도, 용광로에 불을 지필 필요도 없지만,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공방으로 향했다.

멈췄지. 아주 단단히.

자신의 시간은 아직도 진천검을 만들었던 그 시절에 멈춰 있었다.

'끊어내질 못하겠군.'

많은 검을 만들었고, 지그하르트에 큰 공헌도 했으며, 가주이자, 대륙 최강자 중 한 명인 글렌은 자신의 검을 사용한다.

이대로 은퇴해도 역사에 이름이 남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망치를 놓지도, 불에서 멀어지지도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유는 하나.

계속 일을 하고 싶어도 글렌에게 바친 진천검을 넘어서는 작품을 만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어설프게 불을 지피고, 망치를 들었지만, 돌아오는 건 허무함 뿐이었다.

'그래서 이 가마를 만들었지.'

십여 년 전부터는 이 숯가마를 만들어서 숯을 생산했다. 흑탄과 백탄을 넘어서는 금탄을 만들기 위해서.

그 특별하다는 숯이 있으면 더 좋은 검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진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전설과 소문을 종합해서 수많은 방법을 사용했지만, 금탄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유일한 집착이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태우고 있을 때 그 아이가 찾아왔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 녀석은 처음 만난 그날부터 아궁이의 불씨와 호흡했다. 십수 년간 멈춰 있던 불꽃이 맹수처럼 이를 드러내고 타올랐다.

처음이었다.

화염이 반응한 것도, 화력이 올라간 것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무언가가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라온에게 곁을 허락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여긴 불지옥이니까.'

이 가마가 내뿜는 열기는 산전수전 다 겪은 장인들도 피할 만큼 지독했다. 처음에 돕겠다며 찾아온 장인들도 며칠 견디지 못하고 슬금슬금 사라졌다.

하지만 아이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입술을 깨물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매일매일 찾아와 가마 앞에 주저앉았다.

처음엔 바닥에서 피어나는 열기에 연공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보였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열기에 덜덜 떨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사흘, 나흘, 일주일, 한 달 그리고 세 달.

라온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숯가마에 찾아왔다.

그리고 오늘.

라온의 들숨과 날숨에 호응하듯 아궁이 속 불씨가 거세게 타오르고, 가마의 열기가 곱절 수준으로 강해졌다.

후우욱!

그는 불의 화신이 된 듯 이 공간의 불길을 지배했다.

'이건!'

발칸은 이 순간이 자신에게 찾아온 중요한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숯을 만들어 내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한번 장인으로서 살 기회.

"후우욱!"

온 정신을 집중하여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불길의 화력을 유지 시켰다. 불고, 부치고 불꽃을 키울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반복했다.

불씨가 살아 숨 쉰다.

중앙에 자리 잡은 투명한 불꽃이 탁하고 흐릿한 불길을 지워내며 더 짙은 화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숯가마에서 퍼지는 열기에 땀을 흘려야 할 라온의 전신 위로 서리가 내려선 것이다.

'뭐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냉기가 퍼진 곳은 오직 라온의 육체뿐이었다.

그 냉기는 점점 그의 전체에 퍼졌고, 결국에는 금빛 머리카락마저 얼어붙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라온의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좋지 않은 상태라는 건 알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때 건드려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저대로 놔두었다간 죽을 것 같았다.

"이, 이봐! 너…."

"안 돼."

발칸이 라온을 깨우기 위해서 손을 뻗으려고 할 때 리메르가 나타났다. 그야말로 바람 같은 움직임이었다.

"리메르! 뭐 하는 거냐! 저놈 저러다 죽겠어!"

"지금은 방법이 없어."

리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더욱 심하게 떠는 라온을 바라보았다.

"외부에서 조금만 충격을 줘도 피를 토하고 죽게 될 거야."

"저게 전에 말한 그 냉기인가?"

"그래. 저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저런 냉기를 몸에 가지고 있었어."

"그런…."

발칸이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저 어린놈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가 아궁이의 열기마저 지워버릴 정도로 지독한 냉기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 안쓰러웠고, 지금까지 버텨왔다는 것이 대견스러웠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나?"

"없어. 무엇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위험해."

리메르의 표정도 평소와 달리 심각했다. 주먹을 말아 쥔 채로 라온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점점 라온의 몸을 덮어가는 냉기를 지켜보았다.

"이, 이대론 정말 죽겠어! 뭐라도!"

"잠깐! 라온이 움직였다!"

리메르의 표정에 희망이 깃들었다.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라온을 바라보았다.

"뭐? 그게 무슨…어?"

발칸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숯가마를 태우는 아궁이의 불길이 갑자기 격해졌다.

쿠구구구!

불길은 아궁이 밖으로 뿜어져 나와 숯가마 전체를 휘감았다. 진흙으로 밀폐시켜놓은 숯가마가 터지며 무시무시할 정도의 열기가 허공을 뒤덮었다.

콰아아아아!

막대한 열기에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흐읍!"

대륙 장인으로서도 겪어 본 적 없는 열기에 몸을 숙였지만, 그 뜨거움은 순식간에 가셨다.

고오오오!

열기가 나선으로 회전하며 라온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열기가 응집되며 그의 전신을 덮은 냉기가 녹아내렸다.

화아아!

라온의 육체 위로 새빨간 불꽃이 타올랐다. 아니, 빨간색 불꽃이 아니다.

금빛.

동쪽의 산을 넘어 떠오른 금색 여명에 물든 황금색 불길이 피어났다.

라온은 금색 불꽃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연공을 멈추지 않았다. 이 주변만이 아니라, 북망산 전체의 열기를 모조리 받아들였다.

우우웅!

태양이 그 웅장한 서광을 완전히 드러내고, 쏟아지던 빛이 아스라이 옅어질 때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번쩍!

그 눈을 마주한 발칸이 마른침을 삼켰다. 발끝에서 시작된 전율이 뇌리를 꿰뚫었다.

진한 금광.

여명의 빛을 담아낸 황금의 불길이 그의 눈동자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제31화

라온이 천천히 눈을 떴다. 단전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린 뜨거운 기운에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드디어.'

라스의 거센 방해를 뚫고, 만화공의 오러를 만들었다.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크고, 정심한 오러의 덩어리를.

'만화공이 전부가 아니지.'

용암을 둥글게 뭉쳐놓은 듯한 만화공의 오러 옆에 북해의 빙하를 건져 올린 것 같은 냉기가 모여 있었다.

숯가마의 열기를 이용해서 라스의 냉기를 밀어냈을 때 만들어진 우연의 산물이었다.

'이게 이렇게 전화위복이 되나?'

만화공 오러의 크기는 예상보다 2배 이상 컸고, 그 옆에 냉기의 오러까지 생성되었다.

목숨을 걸고, 지독한 고통을 버틴 대가가 상상을 훌쩍 뛰어넘어 돌아왔다.

"후우우."

라온은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았다.

[<만화공>을 습득하셨습니다.]

[특성 <만화공(1성)>이 생성됩니다.]

[<만화공>이 강렬한 열기를 받아 2성에 도달했습니다.]

[<만화공(2성)>의 효과로 특성<화속성 저항력(2성)>이 생성됩니다.]

만화공이 만들어지자마자 2성에 올랐다는 메시지였다.

'이럴 줄 알았어.'

단전에 안착된 만화공의 기운이 예상보다 훨씬 커서 단번에 2성의 성취에 올랐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바로 꽃을 피워낼 수 있겠네.'

만화공이 2성에 올랐을 때부터 사용할 수 있는 일화(一花)이자 일화(一火). 그 능력을 바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대감에 미소를 지을 때 두 번째 메시지가 올라왔다.

[<혹한의 저주>의 냉기 두 가닥이 녹아내립니다.]

[체질 <저질 체력>이 사라집니다.]

[녹아내린 냉기가 응집되어 특성 <혹한의 냉기>가 생성되었습니다.]

[<분노>의 막강한 냉기를 받아 <혹안의 냉기가 2성에 도달했습니다.]

"오."

탄성이 절로 나왔다.

혹한의 저주 두 가닥이 녹아내리고, 저질 체력이 사라졌다는 메시지였다.

이것만으로 대단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 아래였다.

마나 회로의 냉기가 뭉쳐 혹한의 냉기라는 특성이 생겼다는 메시지. 만화공의 오러 옆에 있는 냉기의 오러가 바로 이 혹한의 냉기였다.

'냉기라….'

사실 마나 회로의 냉기를 배출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한 건 수속성 저항력을 높이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생각도 하지 않은 혹한의 냉기라는 보상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아직 내용을 다 파악하지도 않았는데, 세 번째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위기 상황에서 <분노>가 펼친 방해를 이겨내셨습니다.]

[극한의 정신력을 보여준 대가로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 상승합니다.]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능력치가 올라갔다. 팽창한 뒤 수축한 육체와 정신에 다시 한번 뜨거운 희열이 찾아왔다.

'꿈인가.'

그저 만화공을 익히려고 했을 뿐인데, 만화공 2성, 냉기 2성에 능력치까지 상승했다.

라스의 방해 덕분에 몇 년 동안 수련해야 할 경지를 단번에 이루었다.

-이런 빌어먹을!

메시지를 끄며 미소를 지을 때 라스에게서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놈은 무엇이냐! 어떻게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거냐고!

평소 근엄한 척하는 말투도 사라졌다. 라스는 말 그대로 분노가 폭발한 상태였다.

'나한텐 안 된다고 했잖아. 뭘 해도 소용없어.'

라온은 허세를 부리며 손을 저었다.

-말이 안 돼! 이건 말이 안 된다고!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도 이런 굴욕은 없었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이제 포기해라.'

여유로운 척하고 있지만, 아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3달 동안 숯가마를 돌아다니며 주변의 기운을 읽어 둔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심해야겠어.'

오늘로 확실해졌다. 조금 친해졌다고 해도 라스는 분명한 적이다. 놈에게는 절대 약점과 비밀을 들켜서는 안 된다.

"괘, 괜찮으냐?"

라스가 부르르 떨고 있을 때 발칸이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가 튀어 나갈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라온이 몸을 일으켰다. 능력치가 오르고, 두 종류의 오러가 생성되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럼 얻은 게냐?"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발칸의 입술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예. 덕분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전에 생성된 오러 덕분에 무얼 해도 힘이 넘쳤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가마가 무너졌네요."

라온이 무너진 숯가마를 가리켰다. 저 단단한 숯가마가 저리 붕괴된 건 자신의 탓이었다.

"괜찮다."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때 발칸이 어깨를 툭 치고서 가마로 다가갔다.

"문제가 없으면 그걸 되었다. 숯가마 따위야 다시 만들면 그만… 음?"

픽 웃으며 무너진 숯가마를 살피던 발칸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건…."

그가 무너진 숯가마를 뒤적이다가 아궁이 근처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숯 세 개를 집게로 들어 올렸다.

'뭐지?'

백탄, 흑탄은 봐왔지만, 저렇게 금색으로 빛나는 숯은 처음 보았다.

"아!"

생각났다. 처음 만났을 때 발칸은 백탄과 흑탄이 아닌 금탄을 만든다고 했었다. 저 황금빛을 보니, 저게 바로 금탄인 것 같다.

"기연은 네게만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것 같군."

"아."

"이게 금탄이다. 백탄보다 강한 열기를 가졌고, 흑탄보다 지속력이 좋은 장인의 숯."

발칸이 금색 열기를 뿜어내는 숯을 강철판 위에 내려놓았다.

"10년 넘게 이 숯을 만들고자 했는데, 이렇게 성공하다니. 인생이란 정말 모를 일이로군."

그는 황홀한 얼굴로 금탄을 바라보았다.

"네 덕분이다. 고맙구나."

"저는 딱히 한 일이 없습니다."

"네가 연공을 할 때마다 가마의 불꽃이 요동을 쳤고, 네 호흡에 불길에 생명이 돋아났다. 난 평생 망치만 들어 온 무지렁이지만 네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있어. 이건 네 덕분이다."

딱히 한 게 없다고 말을 하려 할 때 발칸의 말이 이어졌다.

"네 목표는 무엇이지?"

"목표?"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왜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진중한 눈빛을 보자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목표라….'

연공을 하며 다짐했듯이 길의 끝에 있는 건 당연히 데루스에 대한 복수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실비아다. 그녀가 행복하게 지내기를 원했다.

그걸 위해선….

흉악할 정도의 강함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절대 쓰러지지 않는 강함이 필요했다.

불의 이미지를 잡을 때처럼 꺼지지 않는 불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검사가 되고 싶습니다."

"꺾이지 않는다? 애송이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군."

발칸은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라기보다는 기꺼운 웃음 같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발칸 나름의 인정인 것 같았다.

"네가 개인 검을 가지려면 몇 년이 남았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3년에서 5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지그하르트 무인이 보급용 검이 아니라, 자신의 검을 가지기 위해선 기초 수련을 끝내고, 검사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대략 3년에서 5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군."

발칸은 그 정도라면 버틸만하겠어라고 중얼거렸다.

"꺾이지 않는 마음을 세웠을 때 날 찾아와라. 이 녀석들은 그날을 위해 아껴두고 있으마."

발칸은 강철판 위의 금탄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검을 만들어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은퇴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은퇴 번복은 꽤 흔한 일이지."

그가 빙긋 미소 지었다. 처음 보았을 때 피로와 허탈함으로 가득했던 주름살에 생기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죽지 마라."

발칸이 가볍게 손을 흔들고서 산을 내려갔다. 3개월간 얼굴을 마주한 것 치고는 너무 가벼운 인사였지만, 그답기도 했다.

"음."

햇발을 등지는 발칸의 등은 처음 본 것보다 30년은 젊어 보였다.

'어쨌든 잘 됐군.'

라온이 손을 펼치자, 뱀의 혓바닥처럼 새빨간 불꽃이 타올랐다. 만화공의 오러였다.

처음부터 2성에 오른 덕분에 제어할 필요도 없었다. 만화공의 불길은 완벽하게 자신의 의지를 따르고 있었다.

화아아.

주먹을 움켜쥐자 불길은 사라지고, 가는 열기만이 남았다.

'이번에는…음?'

혹한의 냉기를 끌어 올리려고 할 때 우측 나무 위에서 아주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산새나 작은 산 동물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작은 기척이지만, 라온은 그게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제 나오시죠."

라온이 나무 위롤 보며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 아무것도 없었던 나무 위에서 리메르가 원숭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에, 알고 있었어?"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에 알았습니다."

"쯧, 역시 그랬나? 불을 보고 깜짝 놀라서."

리메르가 짧게 혀를 찼다. 그의 녹색 눈동자엔 확연한 놀라움이 남아 있었다.

"계속 보고 계셨습니까?"

"아니, 오늘이 처음인데."

그는 웃고 있었지만, 평소 같은 여유로움은 없었다. 거짓말을 들킨 아이의 표정이다.

'하긴 당연한가.'

리메르는 수련생을 여기에 맡겨두고 내팽개칠 정도로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지난 3달간 꾸준히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라니까. 참."

리메르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눈을 돌렸다.

'특이해.'

감사하다니까 오히려 좋아하지 않고, 민망해한다. 이 엘프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좀 늦었지만, 오러가 생겼네.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딱히 늦었다고 생각은 안 하지만요."

라온이 손가락 위로 붉은 불길을 펼쳐냈다. 그 모습을 본 리메르가 얼굴을 찡그렸다.

"오러를 만들자마자 사용하다니."

그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거 아닙니까?"

"오러를 익히자마자 사용하는 놈은 처음 보는데?"

리메르는 보통 일주일에서 한 달은 지난 후에 오러를 능숙하게 사용한다고 중얼거렸다.

"이제 내려가라. 수련 시간에 늦기 전에 도착해야지."

리메르는 라온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서 미소 지었다.

"교관님은 안 가십니까?"

"난 저거 정리하고 가려고."

폭삭 내려앉은 숯가마를 가리켰다. 불길은 사라졌지만, 아직 열기는 남아 있었다.

"저도 돕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리메르는 고개를 젓고서 몸을 돌리려는 라온을 붙잡았다.

"난 교관이니까 지각해도 괜찮지만, 수련생이 지각하면 안 되지."

"...."

라온이 그게 뭔 개소립니까? 라는 표정이 되었지만, 리메르는 손부채질을 하며 무시했다.

"어쨌든 내가 다 처리하고 갈 테니까. 내려가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뒤 산을 내려갔다.

"후."

리메르는 라온이 내려간 걸 확인한 뒤 숯가마를 보았다. 발칸이 처음부터 불이 번지지 않게 만들어서 저걸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이곳에 남은 이유는 저 가마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 나오시죠."

라온이 자신을 부를 때처럼 위를 올려다보며 그 남자를 불렀다.

허공이 소리 없이 출렁이더니, 흑색 장포를 두른 금발의 노인이 내려왔다. 글렌 지그하르트였다.

"구경은 잘하셨는지요?"

"...."

글렌은 말없이 무너진 숯가마와 라온이 앉아 있던 자리를 살펴보았다.

"손주가 걱정되어서 매일매일 찾아오셨는데, 이제 마음이 좀 놓이시겠네요."

"그런 적 없다."

그는 고개를 젓고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글렌의 손짓에 따라 무너진 가마의 잔해가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쿠구구구!

잔해들이 장미 넝쿨처럼 동그랗게 꼬여 압축되더니, 그대로 지워져 버렸다.

바닥이 시꺼멓게 탄 자국만 아니라면 이곳에 가마가 있었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 어마어마한 오러 운용 능력이었다.

"숯가마 내부의 열기를 먹어 치운 덕분인지 오러의 양과 순도가 장난이 아닙니다. 거기다 안착시킨 오러를 바로 운용했죠. 역시 대단한 재능입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글렌은 라온이 내려간 산의 오솔길을 내려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녀석은 자신에게 주어진 굴레마저 제 것으로 만들었다."

* * *

지그하르트 남쪽엔 불빛이 꺼지지 않는 마을이 있다. 야장들의 도시. 대장장이들이 밤낮으로 망치를 두드리는 미르탄 마을이다.

마을의 가장 안쪽엔 공처럼 둥그런 형태의 공방이 있다. 10년 넘게 불이 들어오지 않았던 그 대장간에 불이 들어왔다.

"뭐야! 전 촌장의 공방에 불이 들어왔어!"

"촌장이. 아니 전 촌장이 돌아왔다!"

"돌아왔다니? 은퇴했잖아!"

"그 영감 고향으로 돌아간 거 아니었어?"

일하던 대장장이, 잠을 자던 대장장이, 출장을 가려던 대장장이까지. 모두가 전 촌장의 공방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물었다. 왜 돌아왔는지를.

"약속을 했다."

미르탄 마을의 전 촌장이자, 대장장이의 전설이 된 발칸이 대장간의 먼지를 털어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몸을 만들어 둬야 해."

그는 망치를 들고, 불을 지피며 시원하게 웃었다.

"진천검을 뛰어넘을 검을 만들어야 하니까."

제32화

연무장으로 향하는 라온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경쾌했다. 기분 탓이 아니다. 바람을 탄 것처럼 몸 자체가 가벼워졌다.

'오러 덕분이지.'

능력치가 오르고, 체질이 바뀐 것도 있겠지만 가장 큰 차이는 오러다.

오러는 마나의 응집체. 그 존재만으로 인간의 육체 능력을 상승시킨다.

지금 자신의 단전에는 그 오러 2개가 뭉쳐 있었으니, 평소보다 몸이 가볍고 활력 넘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야.'

더 감각이 더 세밀해졌다.

바람의 흐름, 풀잎을 뛰노는 산짐승의 발걸음 그리고 산 아래를 지키는 검사들의 기척까지. 주변의 모든 게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흐음."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시험해보고 싶은데.'

실전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지금의 내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오늘 수련이 끝나면 다시 산에 가봐야겠어.'

이전에 리메르가 바람을 알게 해준 북망산의 공터에서 시험을 해보면 될 것 같다.

-크아아!

기대감에 미소를 지으며 연무장으로 걸어갈 때 라스가 악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녀석은 지금까지도 흉폭한 냉기와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힘이 빠져서 조금도 위협적이진 않았다.

-어떻게 그 순간에 가마를 보았단 말이냐!

'그러게. 운이 좋았어.'

-웃기지 마라! 네놈이 끌어당긴 걸 모를 줄 알았던 거냐!

라스가 바드득 이를 갈았다.

'이 괴물 같은 놈!'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냉기와 정신공격을 막는 능력이 있다는 건 예상했다.

'뭐가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

금세 놈의 육체와 영혼을 먹어 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아니었어.'

놈은 달랐다.

처음부터 인간의 정신이 가장 약해지는 시기. 연공의 극에 이르러 정신의 방벽이 가장 낮아진 무아지경 상태를 노렸다.

그동안 모아놓은 분노의 감정과 냉기를 모조리 폭발시켰음에도 라온의 정신은 무너지지 않았다.

극한의 정신력으로 버티다가 가마의 열기를 이용해서 자신을 밀어내 버렸다.

그 완벽한 계획이 무너진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놈이….'

산전수전 다 겪은 마족들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저 어린놈이 아무렇지도 않게 참아냈다.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었다.

꿀꺽.

라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평생 저 꼬마의 팔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어.'

이를 악물었다. 이전에도, 오늘도 실패했지만 이렇게 계속 퍼줄 수는 없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좋아하지 마라. 본왕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그래. 열심히 해."

라온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연무장을 발걸음을 옮겼다. 저 무덤덤한 반응. 보면 볼수록 짜증이 나는 놈이다.

-귓구멍 씻고 들어라. 본왕은 포기라는 걸 모르는 마족이다. 네놈의 육체를 집어삼켜서 주변의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 버….

"힘내라."

-으아아악!

라온의 담백한 대답에 라스는 결국 두 번째로 폭발했다.

* * *

루난은 연무장 중앙에 서서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오지?'

최근 라온의 상태는 수련생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로 좋지 않았고,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오러.

라온보다 연공을 늦게 시작한 아이들도 모두 오러를 만들었지만, 그는 7개월이 지난 지금도 오러를 안착시키지 못했다.

5 연무장에서 오러를 습득하지 못한 건 라온뿐이었다.

버렌을 꺾은 뒤 그를 수석으로 인정하던 아이들도 생각을 달리했다. 마르타나 버렌 혹은 자신에게 수석의 자리가 가길 원했다.

'도와주고 싶어.'

라온에겐 큰 도움을 받았다. 옆에서 수련하면서 더 높은 성취를 이뤘고, 그에게서 풍기는 시원한 향기에 훈련할 때 항상 기분이 좋았다.

'엄마도 말했으니까.'

엄마는 고마운 사람에게 보답하라고 했었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구슬 아이스크림을 다시 가져왔다.

지난번에는 마지막 남은 하나를 줬지만, 이번에는 3개나 남아 있었다. 이걸 먹고 기운을 차려줬으면 좋겠다.

달칵.

루난이 구슬 아이스크림이 든 상자를 매만지고 있을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라온이 들어왔다.

탁탁.

쪼르르 달려가서 라온의 앞에 섰다. 이제 붙는 게 익숙해졌는지 라온은 별반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부스럭.

그런 그에게 가지고 있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힘내."

루난은 얼떨결에 상자를 받은 라온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음?'

평소처럼 다섯 걸음 거리로 떨어지려고 할 때 라온에게서 풍기던 시원한 향기가 더 진하게 느껴졌다.

킁킁.

잘못 느낀 게 아니다. 가슴이 떨릴 정도로 청량한 향기였다.

루난은 두 눈을 빛내며 평소보다 한 발자국 더 라온에게 다가갔다.

* * *

'또 왜 이래?'

라온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기분 좋게 하산해서 왔는데, 루난이 평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흥흥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루난에게 받은 상자를 보았다. 구슬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던 그 상자였다.

열어보니, 하얀 냉기가 피어나며 색이 다른 구슬 아이스크림 3개가 놓여 있었다.

-헉! 구슬 아이스크림이 아니더냐!

라스에게서 기대감이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먹으라고?"

"응."

흥흥거리던 루난이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저 아이를 본왕의 아이스크림 소녀로 인정한다. 라온. 다 먹어라! 본왕은 다른 맛도 느껴보고 싶도다. 일단 중앙에 있는 검은색부터….

'좀 가라.'

상자에서 검은색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서 입에 넣었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초콜릿이 입안에서 팔랑였다. 음식으로 행복을 느끼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달콤했다.

-미쳤도다! 시원함이 입안을 적시고, 그 위로 달콤한 초콜릿이 리본처럼 혀끝을 감싸는구나. 황홀한 맛이야!

라스는 평론가라도 된 거처럼 아이스크림의 맛을 세세하면서도 매끄럽게 설명했다.

-더, 더 먹어라! 이번엔 저 빨간색을….

"헤…."

루난은 먹고 싶었던지 살짝 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셨다.

"잘 먹었어."

라온은 아이스크림 2개가 남은 상자를 루난에게 돌려주었다.

"더 안 먹어?"

루난은 멍한 눈으로 되돌아온 상자를 바라보았다.

"충분해. 고마워."

-충분하긴 무슨! 본왕은 아직 배고프다! 다 먹어!

'얘 먹고 싶어 하는 거 안 보이냐? 나잇값 좀 해.'

라온은 난동을 부리는 라스를 손바닥으로 짓눌러버렸다.

"그럼 기운 났어?"

"응? 아…."

라온은 자신과 상자를 번갈아 쳐다보는 루난을 보며 픽 웃었다.

'역시.'

먹고 싶어 하는 표정을 보니 확실해졌다. 루난은 기운을 차리라고 이 아이스크림을 건네준 거다.

표정 변화가 적고, 말수도 적지만, 루난은 선하고 다정한 아이였다.

"기운 났어. 고마워."

"응!"

루난은 작게 웃으며 상자를 받았다. 보물을 찾은 탐험가처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근데."

"응?"

"아냐."

루난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점은 평소보다 거리가 가까웠고, 흥흥거리며 냄새 맡는 횟수가 좀 많이 늘어났다.

'정말 모르겠다니까.'

라온은 어깨를 으쓱이고서 뒤처리를 하고 올 리메르를 기다렸다.

* * *

"한 달 뒤에 좀 특별한 걸 해보려고 한다."

수련 시간에 10분이나 늦게 나타난 리메르가 히죽 웃었다.

"교관님 오늘도 지각하셨습니다. 10분이면 검을 100번 넘게 휘두를 수 있는 시간인데."

버렌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아, 미안. 준비가 좀 필요했거든."

리메르는 익숙한 손짓으로 사과를 한 뒤 말을 이었다. 말은 미안이라고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그저 웃는다.

"으음."

버렌은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이 역력했지만, 손은 내렸다.

"너희도 즐거울 거야. 오랜만에 훈련다운 게 왔으니까."

리메르는 입꼬리를 빙글 말아 올리며 뒤를 가리켰다. 뒤쪽 연무장에 원형으로 금이 그어져 있었다.

"7개월 동안 기초를 쌓고, 연공을 계속했으니 달궈볼 때가 되었지. 한 달 뒤에 대련을 실시한다."

"우오오!"

"드디어!"

"대련!"

아이들이 포효와 같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동안 반복해서 단련해온 오러와 검술을 시험해볼 기회가 왔으니, 기뻐하는 건 당연했다.

찌그러졌던 버렌의 인상도 펴졌고, 마르타는 서늘한 미소를 피워냈다. 루난의 맹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대련의 승패는 너희들의 졸업 점수에 들어가서 순위를 매기게 될 거다. 한 달간 열심히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잠시만요."

여유롭게 웃고 있던 마르타가 리메르를 불렀다.

"아직도 오러를 만들지 못한 뒤떨어지는 친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름을 칭하지 않았지만, 모두 라온을 바라보았다.

라온은 수련생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리메르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 친구도 오러를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네? 대체 언제…."

"어젠가? 오늘인가?"

"아, 그래요?"

마르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검은 눈동자가 진흙에 묻힌 흑진주처럼 번들거렸다.

"드디어 기회가 왔네. 너무 길어서 지루해 죽을 뻔했는데."

그녀가 다가오며 미소를 지었다. 비웃음과 거만함이 어우러진 웃음이었다.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지. 난 나보다 약한 놈의 지시는 듣지 않는다고.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아줬다고 생각해. 이번에 끝을 내자. 넌…."

"마르타 지그하르트. 물러나라."

라온이 나서기도 전에 버렌이 옆으로 끼어들었다.

"오러를 습득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녀석과 한 달 뒤에 대련하겠다니, 네겐 검사의 명예도 없는 건가."

"하! 명예?"

마르타가 입꼬리를 길게 꼬아 올렸다. 노골적인 비웃음을 그리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가문에서 귀하게 크신 분은 명예가 밥 먹여주는지 아시나 보네."

"마르타."

"명예라는 것도 그에 걸맞은 사람에게나 보여주는 거야. 저기 뒤떨어지는 녀석들도 한 달 만에 오러를 익혔지만, 우리 수석께선 반년이 넘게 걸렸어."

그녀는 린덴 오러 연공법을 익히고 있는 추천생들을 가리켰다.

"상급 이상의 연공법이라고 해도 7개월 만에 오러를 만들었다는 건 저놈에겐 재능이 없다는 뜻이야. 같이 판별식을 치렀으니, 네가 가장 잘 알지 않아?"

"으음…."

버렌이 인상을 찌푸리다가 입매를 내렸다.

'확실히….'

자신도 최상급의 오러 연공법을 2주일 만에 익혔었다. 아무리 대단한 연공법이라고 해도 1성을 습득하는데 반년 넘게 걸린 건 문제가 있었다.

"저 녀석에게 검술이나, 권법 재능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뿐이야. 오러에 재능이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어."

"으음."

"맞는 말이긴 하지"

"이름난 무인 중에 오러가 약한 사람은 없으니까."

마르타의 말에 동의하듯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관님이 갑자기 대련하겠다는 것도 수석을 바꾸고 싶어서 아닌가요?"

"글쎄?"

리메르는 눈썹과 어깨를 동시에 으쓱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네 능력치고는 수석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잖아. 널 따르는 아이도 없…. 아니. 몇 명뿐이니, 이제 그 자리를 내놓을 때가 된 것 같은데?"

마르타는 라온의 뒤에 있는 도리안과 몇몇 수련생들을 힐끔 보고서 픽 웃었다.

"전에 말이 나왔던 대로 대련에서 이긴 사람이 수석 수련생의 자리를 갖는 걸로…."

"싫다."

라온은 마르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을 고개를 저었다.

"뭐?"

"넌 돈도 없이 도박판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수석의 자리를 건다면 너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꺼내."

"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여기에 네 편은…."

"겁나?"

라온이 턱을 살짝 틀며 미소 지었다. 마르타가 보여준 것보다도 더 진한 비웃음이었다.

"겁?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하! 좋아. 네 마지막이 될 도발 정도는 받아주지."

마르타가 피식 웃었다. 검은 눈동자에 짜증을 휘감으며 품에 있던 작은 목갑을 꺼내 놓았다.

"아버지께서 내어주신 영약 구화단이야. 대련에서 네가 이긴다면 이걸 주지."

구화단은 아홉 가지 약초를 모아 만든 영약으로 육체와 오러를 강화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라스. 지금이 내가 예전에 말한 순간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마르타에게 뽑아먹을 게 생길 거라고 했지? 그게 지금이라고.'

마르타에게 저 영약이 있다는 건 수다쟁이 도리안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구화단이면 적당하지.'

라온이 구화단이 든 목갑과 도발에 넘어간 마르타를 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무조건 이기는 내기의 상품으로 말이야.

제33화

한 달 후 대련장을 시행하겠다는 리메르의 선언 이후 아이들은 미래의 상대를 상상하며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누구와 싸우더라도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서 검술을 다듬고, 오러를 연공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은 수련생도 있었다.

라온과 마르타. 이미 상대가 정해진 두 사람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라온은 평소처럼 새벽부터 밤까지 전력을 다해서 수련했고, 마르타는 수련생 중 최강자답게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각자가 전력을 다해 수련하는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대련 날 아침이 밝았다.

1년 가까이 단련해 온 무력을 증명하고, 교관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을 기회였기 때문에 수련생들의 얼굴에는 흥분과 긴장이 가득했다.

반면 마르타는 그런 것 따윈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한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야 갚아줄 수 있겠네.'

7개월 전 라온에게 반격을 당해서 얻어맞았던 팔뚝을 움켜쥐었다.

'처음이었지.'

이곳에 오기 전 뒷골목에서도 또래에게 맞은 적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당한 망신이라 지금도 잊히지 않았다.

그날의 굴욕을 갚아 줄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8개월 만에 드디어 그날이 찾아왔다.

'오늘로 끝이야.'

라온 지그하르트가 오러를 익힌 시간은 한 달밖에 되지 않았고, 자신은 3년이 넘었다. 사실상 의미 없는 대련이었다.

비겁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재능이 없는 놈을 언제까지고 기다려주는 것도 시간 낭비다.

'나는 할 일이 있어.'

라온 같은 얇은 벽에 막혀 있을 때가 아니다. 최대한 빨리 강해져서 구할 사람이 있다.

우우웅!

마르타는 손아귀에서 솟구치는 황색의 오러를 움켜쥐며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 * *

라온은 임시로 만든 대련장 우측에 앉아서 상태창을 확인했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최초의 승리.

상태 : 혹한의 저주(여섯 가닥), 운동능력 저하, 마나 감응력 저하.

특성 : 분노, 불의 고리(3성), 수속성 저항력(3성), 설화의 감각(1성), 만화공(2성), 혹한의 냉기(2성), 화속성 저항력(2성)

근력 : 35

민첩성 : 36

체력 : 35

기력 : 26

감각 : 50

특성의 개수도 많이 늘어났지만, 그동안 한계를 넘어서는 수련을 통해 능력치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괜찮네.'

라온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상태창의 수치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주목!"

상태창을 껐을 때 리메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대련장 바닥을 전부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의 전투를 보는 건 직접 대련하는 것만큼이나 도움이 된다. 다른 수련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대련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계획을 세우도록."

"예!"

"그럼 첫 번째 버렌 지그하르트. 도리안."

"네!"

"헉!"

버렌은 당당하게 일어서서 대련장으로 들어갔지만, 도리안은 게걸음을 걸으며 바들바들 떨었다.

"저, 저기 교관님?"

"뭐지?"

"기권합니다!"

도리안은 힘차게 손을 들어 올리며 기권을 외쳤다.

"...."

그 절박한 목소리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뭐 저런 놈이 다 있냐라는 눈빛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만?"

리메르가 당황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모,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어제부터 몸살과 오한이 와서. 콜록!"

도리안은 어색한 마른기침을 하며 입술을 떨었다.

"어우, 진짭니다."

배에 달린 주머니에서 얼음주머니를 꺼내 머리에 얹었다. 준비성 하나는 정말 철저한 놈이다.

-한심하도다. 본왕의 부하라면 당장에 목을 베었을 것이야!

'예상대로긴 한데.'

도리안이 저렇게 나올 건 알고 있었다. 평소 녀석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리안. 그래도 한 번은 싸워봐. 패하더라도 배우는 바가 있을 거다. 다치기 전에 말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 그럼 사람이라도 바꿔주시면… 흡!"

도리안은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버렌과 눈을 마주치고서 찔끔 몸을 떨었다.

"네가 밖에서 어떤 신분이었든. 지금은 지그하르트의 수련생이다. 지그하르트의 명예를 떨어뜨린다면 지금 이곳에서 목을 베어주마."

버렌의 목소리는 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살벌했다.

"허억!"

도리안이 입을 떡 벌리고서 리메르의 뒤로 몸을 숨겼다.

"도리안. 말 그대로 대련일 뿐이다. 무섭게 여기지 말고, 지금까지 네가 해온 걸 보여준다고 생각해."

"아, 알겠어요."

리메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도리안의 떨림이 살짝이나마 가셨다.

"버렌. 너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명예도 좋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들은 세상에 많으니까."

"...."

버렌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기세를 풀었다.

"음…."

라온은 버렌과 도리안 사이에서 웃고 있는 리메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잘 통하네.'

그의 조언은 양쪽 모두에게 적절하게 먹혀들었다. 매일 놀기만 하는 것 같아도 수련생들을 잘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저게 스승이라는 건가.'

전생에서 암살자로 사육될 때 저런 일이 있었다면 교관은 도리안과 버렌의 목을 둘 다 베어버렸을 거다.

저렇게 달래주고,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진짜 스승인 것 같다.

"그럼 준비."

리메르 덕분에 정리가 끝났고, 버렌과 도리안이 마주 섰다.

"시작!"

시작 소리와 동시에 버렌이 달려가 검을 내질렀다.

오러를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의 대결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히이익!"

도리안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틀었다. 덕분에 버렌의 검은 종이 한 장 차이로 허공을 찔렀다.

"도망치지 마라!"

버렌은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내리쳤고, 도리안은 수련검을 휘적거리며 발만 놀렸다.

"우아악!"

버렌이 휘두르는 검이 다섯 번이 넘어갔지만, 도리안은 끝까지 도망만 다녔다.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거냐."

버렌이 눈매를 좁히며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좁혀드는 거리. 숨겨둔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우허헉!"

도리안이 급하게 몸을 빼려 했지만, 늦었다. 버렌의 수련검은 이미 그의 허리에 닿아 있었다.

뻐어억!

강렬한 소리와 함께 도리안의 몸이 우측으로 튕겨 나갔다.

"어우욱, 하, 항복! 항복합니다!"

도리안은 허리를 부여잡고, 버둥거리며 항복이라 소리쳤다.

'역시 몸이 유연하군.'

라온은 바닥에 누운 도리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녀석의 재능은 나쁘지 않다. 특히 오러 운용 속도와 발 빠르기는 직계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버렌의 실력을 감당하기엔 한참 무리였지만.

"버렌. 넌 아직 감정을 조절 못 하고 있다. 제대로 상대했다면 다섯 합 안에 검이 닿았을 거다."

"…맞습니다."

버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물러났다.

"도리안. 넌 왜 자꾸 도망만 치는 거야. 할 수 있다니까. 도망치지 않고 맞서서 싸웠으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어."

"죄, 죄송합니다. 근데 무, 무서워서…."

"무서울 수는 있지만 여기서 극복하지 못하면 실전에선 서 있을 수도 없다. 검사가 되기 위해선 그 공포를 이겨내야 해."

도리안은 버렌과 달리 한참 동안 잔소리를 듣다가 돌아갔다.

"다음 루난이랑 크레인."

"네."

"예!"

루난과 방계 크레인이 대련장으로 걸어갔다.

크레인은 꽤 힘 있는 방계의 아이로 예전에 자신에게 덤볐던 버렌의 졸자 중 하나다. 실력은 괜찮지만, 루난의 상대는 되지 않는다.

"시작."

리메르가 손을 아래로 내리자마자, 루난과 크레인이 앞으로 뛰어들었다.

"흐압!"

선공은 크레인이다. 이를 악문 채 좌측으로 젖혀둔 수련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

루난은 평소의 표정을 유지하며 하얀 냉기가 뿜어지는 검을 올려 쳤다.

떠엉!

쇳덩이가 찌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크레인의 검이 떨어져나와 잘 다져진 대련장의 땅에 박혔다.

루난은 뒤늦게 검을 내지르고서도 크레인을 검을 쳐내버린 것이다.

"끄윽…."

크레인이 손을 바르르 떨며 뒷걸음질 쳤다.

"거기까지."

리메르는 턱을 긁적이며 대련장으로 나왔다.

"크레인. 긴장을 너무 많이 했다. 손목과 손아귀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 검을 잡을 땐 여유를 주어야 한다."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루난. 후발선공의 묘리는 좋았지만, 검 끝까지 오러가 담기지 못했다."

"네."

루난은 담백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였다.

"수고했어. 그럼 다음…."

* * *

대련 훈련은 해질녘까지 계속되었고, 남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마르타 지그하르트. 앞으로."

"기다리다 늙어 죽는지 알았네"

마르타의 검은 눈동자가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반면 라온은 덤덤한 눈으로 마르타와 마주 섰다.

"8개월이면 나치고는 많이 참았지. 이제 끝을 내자고."

"내기 하나만 더 걸까?"

라온은 이를 드러내는 마르타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뭐?"

"패한 사람이 승자. 즉, 수석의 말에 복종하는 게 어때?"

"복종이라. 너 같은 둔재의 복종 따윈 필요 없지만, 상관없겠지."

마르타는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진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의 마지막 대련이네. 모두 잘 봐두도록. 그럼…."

리메르가 알기 힘든 미소를 지으며 손을 올렸다.

"시작!"

리메르의 손이 내려가자마자 마르타가 땅을 박찼다. 터엉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후웅!

내려치는 마르타의 수련검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캬앙!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튀어나온 불똥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왜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나 궁금해?"

마르타는 검을 밀어붙이며 히죽 웃었다.

"먼저 검술로 붙어보자고, 그 뒤에 오러가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알게 해줄 테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순간 검술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속도와 힘만이 아니라, 궤도마저 현묘해졌다.

캬앙!

라온이 마르타의 수련검을 쳐내며 눈매를 좁혔다.

'모르는 검술이군.'

빠르고, 강하면서도 현묘하다. 직계 교육을 받을 때 배운 고급 검술인 것 같았다.

'강하긴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검술. 차라리 모두가 아는 연성검을 펼치는 게 더 나았을 거다.

컁! 캬아앙!

라온은 연성검의 다섯 초식을 연거푸 펼쳐 마르타의 검술을 막아냈다.

"전부 막아?"

새로운 검술을 수십 번 내치고도 자신의 방어를 뚫어내지 못하자 마르타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모든 검술은 다섯 가지 형태에서 시작한다. 그것만 알고 있다면 막아내는 건 어렵지 않아."

마르타가 내지른 검을 쳐내고 근접하여 주먹을 내질렀다.

후우웅!

그녀는 우측으로 보법을 밟아, 주먹을 피해냈다. 빈틈을 노리듯 허리를 향해 검을 후려쳤다.

캬아앙!

라온은 검을 사선으로 세워 공격을 흘려낸 뒤 마르타를 밀어붙였다.

"역시."

마르타가 검을 휘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인정하지. 넌 재능이 있어. 다만 그건 검술 하나일 뿐이야. 오러가 약한 반쪽짜리 무인이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어!"

그녀의 주변으로 황색 기류가 피어났다. 대지 속성 오러에 연무장이 잘게 흔들렸다.

쿠우웅!

마르타가 발을 굴렀다. 땅이 파여나가며 그녀의 수련검이 대기를 꿰뚫었다.

"흡!"

쏟아져 내리는 황색 기운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콰아앙!

검을 막아내는 것만으로 다리가 휘청였다. 아까와 같은 돌진이었지만, 그 속도도 위력도 차원이 달라졌다.

"오, 막았네?"

뭉툭한 칼날 사이로 보이는 마르타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이제 좀 알겠지? 제대로 된 오러가 담긴 검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그녀는 손목과 허벅지를 떨고 있는 라온을 보며 턱을 치켜올렸다.

"오러는 검술 이상으로 재능을 타지. 7개월 만에 콩알만 한 오러를 만든 네 재능으로 검사는 무리야."

마르타가 내려치는 검의 위력과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검격을 막아낼 때마다 몸 전체가 휘청였다.

"지금 이 오러도 내 전력이 아니야. 마지막 기회를 주지. 지금 항복해. 다음에는 뼈를 분질러 줄 테니까."

"말 참 많네."

라온이 우측으로 칼을 내리쳤다. 쾅 소리와 함께 마르타가 밀려 나갔다.

"마지막 배려를 걷어차다니, 진짜 멍청하네."

마르타가 음성이 북풍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말끝마다 재능. 재능. 이 집안의 인간들은 귀찮을 정도로 재능을 좋아한다니까."

라온이 코웃음을 쳤다.

'재능은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재능 이상으로 무인의 기질이 중요하다. 아무리 강한 무학을 익히고,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도 인간이 약하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

"재능이 없는 네겐 시끄럽게만 들리겠지만 난 재능 소리를 들을 때마다 즐거워."

마르타의 입꼬리가 풀잎처럼 올라갔다.

"그러니 확실하게 보여줄게. 진짜 재능이 무엇인지를!"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던 갈색 기운이 진해졌다. 날카롭게 갈린 바위 그 자체가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난 반대로 보여주지."

재능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라온의 눈에 황혼이 비치고, 시퍼런 검날에 새빨간 불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만화공 일화(萬火功 一火)

첫 번째이자, 하나의 불꽃.

지그하르트의 전설이 천년의 세월을 넘어 라온의 검 끝에서 타올랐다.

제34화

마르타 지그하르트는 자존심이 강하다.

전 기수에서 낙제한 이유도 실력 부족이 아니라, 자존심을 건드린 직계 두 놈을 반 죽여놓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여러 귀찮은 일들이 생겼기 때문에 5 연무장에선 적당히 넘기려고 했지만, 신경을 건드리는 놈이 하나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아이 같지 않은 그 꼬맹이가 계속 거슬렸다.

당장 싸우자고 하고 싶었지만, 리메르의 말대로 오러조차 익히지 않은 녀석을 때리는 건 추한 짓이라 참았다.

그래서 라온이 오러를 익혔다고 들었을 때 다른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이전의 굴욕을 갚아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대련이 시작되었고, 라온과 검을 맞댔다.

놈의 검술 재능은 실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처음 본 검술을 상대하면서도 거의 완벽한 방어를 선보였다.

하지만 타이탄의 오러를 운용한 순간부터 라온은 종이 인형처럼 가볍게 밀려났다.

예상대로였다.

오러의 크기와 정심함이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모든 상황은 마르타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라온의 뼈를 부술 수 있을 정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 라온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얼마든지 와라!

라고 도발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누구 손에 목덜미가 잡혀 있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토끼를 보는 듯했다.

한심한 놈.

마르타는 이죽거리며 검을 내리쳤다. 더 강한 오러와 힘을 담았다.

쿵!

대련장에 작은 울림이 있었다.

하지만 놈은 버텼다.

연속으로 검을 내리쳐도 쓰러지지 않았다.

짜증이 났다.

재능이 바닥인 주제에 위를 향하려는 모습에 속이 끓어 올랐다.

'날 원망하지 마라.'

사지가 부러져도 어쩔 수 없다. 마르타는 더 강렬한 오러를 끌어 올린 뒤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강석의 자세.

날카로운 바위의 기세로 라온의 방어를 뚫어버릴 생각이었다.

땅을 박차려는 그때.

라온의 칼날의 끝에 붉은색 꽃이 타올랐다.

작디작은 불꽃.

하지만 무엇보다 새빨갛고 아름다운 불길을 본 순간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저게 뭐야.'

섬뜩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니야!'

마르타가 이를 악물었다. 잠깐이지만 라온 따위에게 겁을 먹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기 싫었다.

우우웅!

수련검의 뭉툭한 칼날에 모아둔 타이탄 오러를 그대로 내리쳤다.

화르륵!

그 순간 라온이 한 발을 걸었다. 그의 수련검에서 타오르던 작은 불꽃이 하나의 선을 창출했다.

좌에서 우로 그어지는 붉은빛의 선. 그 선에 닿은 타이탄의 오러가 녹아내렸다.

그리고.

뿌득!

단단하기 그지없는 수련검이 반으로 쪼개져 허공을 노닐었다.

터억!

부러진 칼날이 연무장에 박히는 소리가 마르타의 귓속을 후볐다.

"아…."

마르타는 넋이 나간 눈으로 반쪽 반 검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과 손을 동시에 떨었다.

"그게 네가 말한 재능인가?"

라온 지그하르트가 차가운 눈빛을 발한다. 검 끝에서 타오르던 불꽃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미숙한 칼질 한번 버텨내지 못하는 재능이라. 그 정도라면 의미 없다고 봐도 되겠어."

"너, 너…."

마르타 지그하르트는 평소와 달리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했다. 반으로 쪼개진 검처럼 고개를 숙였다.

* * *

"뭐, 뭐야! 방금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거야!"

"타, 타이탄 오러를 두른 수련검이 일검에 잘렸어."

"미, 미친…."

라온은 앞뒤로 쏘아지는 수련생들의 시선을 느꼈다. 당황, 불신, 경악. 숨 쉬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허…."

그건 앞에 있는 리메르도 마찬가지였다. 긴 귀를 더 뾰족하게 세운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일검에 마르타의 검을 베는 건 그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놀랐으니.'

만화공의 첫 번째 단계 일화의 위력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다면 마르타마저 베어버렸을 정도.

'2성이 이 정도라면….'

3성 이후의 위력이 어떨지 기대되어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으으…."

아래에서 들려온 신음에 시선을 내렸다. 마르타의 검은 눈동자가 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대로는 인정 안 하겠군.'

굴복한 표정이 아니다. 검이 잘리는 걸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인정 못 해."

마르타의 입에서 예상했던 그 단어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그녀는 갈라진 검을 내던지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고오오오!

타이탄 오러가 그녀의 육신을 감싸며 깨지지 않는 바위 같은 기세를 만들어 냈다.

"그럴 줄 알았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련검을 내려놓았다.

"네 입에서 졌다는 말이 나오도록 만들어주지."

"그런 일은 없어!"

마르타가 땅을 박찼다. 이번에는 정면이 아니라, 좌측으로 돌진해온다. 딱딱한 움직임이지만, 빠르면서 묵직했다.

"으하합!"

순식간에 접근해 기합과 함께 주먹을 찔러왔다.

터엉!

라온이 팔꿈치로 주먹을 내리찍었다. 무지막지한 충격에 마르타의 몸이 뒤틀렸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끝까지 주먹을 쏟아냈다.

뻐억!

손아귀로 원을 그렸다. 주먹을 부드럽게 막아낸 뒤 발로 마르타의 복부를 후려쳤다.

"끄흡!"

정타가 들어갔음에도 마르타는 약한 신음만 흘릴 뿐 물러서지 않았다. 단단한 오러에 어울리는 두터운 정신력이었다.

"아, 아직이야!"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뻗어냈다. 명가의 무학은 이 순간에도 빛을 발하는지 당황한 와중에도 제대로 된 투로를 그렸다.

'그래도 그 정도론 무리지.'

빠르고, 정확한 투로에 강력한 오러가 담겼지만, 그뿐. 단련은 한참 부족했다.

뻐억!

이마를 향해 쏘아져 온 주먹을 피하고, 손날을 세워 마르타의 허리를 후려쳤다.

"끄흡!"

타이탄의 오러를 뚫고 들어간 충격에 마르타의 입에서 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잠시 몸을 움찔거렸다가 더 빠르게 반격을 해왔다. 단아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흉폭함이다.

'맷집 하나는 좋군.'

성인 검사도 쓰러질 주먹을 연속으로 얻어맞고도 반격이라니, 정신력과 육체 내구성은 수련생의 수준이 아니다.

"흐아압!"

마르타가 발을 굴렀다. 대련장의 바닥에 깔린 모래들이 들썩 일어나 잠시 시야를 가렸다. 기척을 파악하기도 전에 우측에서 주먹을 쏟아졌다.

콰앙!

투석기의 바위 같은 주먹이다. 팔뚝으로 막을 때마다 전신이 흔들렸다.

"으아아!"

마르타는 간신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호흡을 멈추고 무수한 주먹을 뻗어냈다.

뻐억!

순식간에 스무 번의 주먹을 내지른 마르타가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멈췄을 때 라온의 주먹이 그녀의 복부를 강타했다.

"꺼헉!"

마르타가 배를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눈동자에 불신이 가득 깔려 있었다.

"선언한 말과 달리 주먹도 별론데."

라온은 마르타의 주먹을 막아낸 팔과 손목을 가볍게 털어냈다.

"어, 어떻게…."

"잘."

당황하는 마르타를 조롱하며 손목을 돌렸다.

'만화공은 방어도 뛰어나군.'

꺼지지 않는 불길을 이미지로 삼은 덕분인지 만화공의 오러는 공격만이 아니라 방어에도 효율적이었다.

"후우욱…."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말아 쥔 주먹으로 타이탄 오러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고오오!

오러를 한곳에 모으는 일점이라는 기예. 저 나이에 벌써 저걸 사용하다니, 역시 뛰어난 자질이다.

더 이상 얼굴에 흥분도 보이지 않았다. 분노 가득했던 눈빛에 정광이 돌아왔다.

"인정하마. 네놈은 강해."

마르타의 주먹에 모여든 기운이 제대로 된 형태를 갖췄다. 소드 유저 수준에 올라왔다는 뜻이다.

"이걸 넘어선다면 패배를 인정한다!"

마르타가 먹이를 본 곰처럼 내달렸다. 산 정상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듯한 묵직함.

"후우."

라온이 가는 한숨을 뱉어냈다. 진각을 밟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발목에서부터 시작된 회전이 대퇴근을 넘어 허리에 도달한 순간 내지르는 주먹에 폭발력이 담겼다.

콰아앙!

만화공의 불꽃이 깃든 주먹이 갈색 오러의 무더기를 깨뜨리고, 마르타의 팔을 뒤틀었다.

"아…."

타이탄 오러가 갈가리 쪼개지며 눈에 핏발이 선 마르타의 얼굴이 보였다.

화아아악!

권격의 후폭풍에 휩쓸린 그녀는 폭풍을 맞은 갈대처럼 휘청이며 튕겨 나갔다.

"으…."

마르타는 목을 바르르 떨다가 눈을 감고 뒤로 넘어갔다. 기절한 상태에서도 말아 쥔 주먹은 끝까지 풀지 않았다.

'정신력 하나는 대단하군.'

곧 15살이 되는 아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정신력이다. 실력과 재능 이상으로 놀라웠다.

"허억!"

"어…."

"아, 압도적이잖아."

"말이 안 돼. 어떻게 마르타 님을…."

마르타를 따르던 수련생도, 반대의 위치에 섰던 수련생들도 놀라 입을 다물질 못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버렌은 말아 쥔 주먹을 바르르 떨며 라온을 노려보았다.

"...."

루난은 평소처럼 뚱한 표정이었지만, 흥분했는지 뻐끔거리는 입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어이구…."

리메르는 잠시 멍하니 섰다가 바로 쓰러진 마르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갔다.

"쯧, 잔소리를 퍼부어야 하는데 기절이라니."

리메르는 마르타의 상태를 확인하고서 길게 혀를 찼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다. 모두 돌아가서 오늘 무엇이 더 모자랐는지 생각해보도록."

"아, 예."

"그럼 라온을 제외하고 모두 해산."

"전 왜…."

"줄 것도 있고, 하지 않은 잔소리가 남았으니까."

그는 씩 웃고서, 연무장의 벽을 넘어 의무실로 달려갔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이 리메르가 뛰어넘은 벽을 멍하게 보고 있을 때 버렌이 다가왔다.

"난 네 녀석이 따라올 거라 예상했다."

그는 감탄한 것 같기도,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난 마르타와 다르다. 네가 토끼처럼 앞서가도 포기하지 않고, 거북이처럼 느리게 가도 방심하지 않는다. 훗날 치러질 졸업시험에서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널 꺾겠다."

버렌은 그 말을 남기고, 연무장을 떠났다. 시원해 보이는 표정이다.

'확실히 변했군.'

이전처럼 아집과 질시로 가득한 버렌은 없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자만심을 버리고 자신감을 채웠다.

툭툭.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루난이 보라색 눈동자를 말똥거리고 있었다.

꾸벅.

그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잘했다는 것 같았다. 구슬 아이스크림이 든 상자를 꼭 껴안은 채 종종걸음으로 연무장을 떠났다.

"나 참."

라온이 어하고 입을 벌렸다. 저 녀석은 뭘 하고 싶은 건지 여전히 뭔지 모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자가 있는 단상 옆으로 걸어갔다.

의자에 걸터앉아 리메르를 기다리고 있을 때 단상 위에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리메르가 낮잠을 잘 때 베개 용도로 쓰던 책이다. 펼쳐보았다.

"어?"

내용을 살핀 라온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건….'

베게 용도로 가지고 다니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책 안에는 수련생들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개선할 방법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첫 페이지에 적힌 버렌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자만심이 과함. 수련생 신분이 된 이후 많은 변화를 이룸. 자신의 부족함이 정신적인 부분이라는 걸 깨닫고 명상에 시간을 쓰고 있음. 우아하면서도 체계적인 검술을 사용하고 본인도 이를 중요시….'

수련생을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적기 힘든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글이 하나가 아니라, 수련생의 숫자대로 있었다.

'나는….'

라온이 본인의 내용을 보았다.

'검술과 권법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고, 마나에도 뛰어난 감각이 있지만, 오러 연공법의 습득에 애를 먹고 있음. 속성에 관한 교육이 필요함. 불을 느끼게 할 방법을 찾는 게….'

자신에 관한 내용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리메르 교관….'

리메르가 항상 뺀질거리면서 노는 줄만 알았는데, 실제로는 모든 것을 세세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라온은 가슴을 따뜻하게 채우는 뭔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의외로군.

'그렇지?'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전히 건방지고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라스는 자신의 몸을 먹어 치우는 걸 실패한 이후 세상을 더 염세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지상에서 뾰족귀와 난쟁이가 건너온 적이 있었다. 까부는 놈들을 모조리 얼려서….

'말 진짜 많네.'

라온이 꽃팔찌를 툭 치자, 라스가 입을 다물었다. 점점 말이 많아져서 감당이 안 된다.

-끄윽, 본왕은 과묵의 대명사다. 마계의 군주 중에서도 말 없기로 제일이었는데, 말이 많다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말이 많다는 건….

'어우.'

다시 팔찌를 쳐서 입을 다물게 했을 때 리메르가 벽을 넘어 돌아왔다.

도둑도 아니고 왜 맨날 문 놔두고 저렇게 들어오는 건지 모르겠다.

"라온."

리메르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의 표정엔 여전히 놀람이 담겨 있었다.

"오러를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훌륭한 운용이었다. 다만 일부러 맞아주던가, 검을 버리는 건 할 필요 없는 행동이었어."

리메르가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다만 그건 교관으로서의 의견이고, 나라는 개인으로서는 만족스러운 한 판이었다. 진짜 수석이 된 걸 축하한다. 이제 이건 네 거다."

그는 품에 챙겨놓았던 목갑을 건네주었다. 마르타가 맡겨두었던 영약이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영약을 받으며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너희끼리 내기한 거니,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아뇨. 감사합니다."

이건 영약에 대한 감사가 아니다. 지금까지 수련을 지켜봐 주고, 여러 조언을 해준 것에 대한 감사다.

그는 지각하고, 농땡이를 부릴지언정, 필요할 땐 확신한 교육을 해주었다.

실제로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만화공을 익히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전생에선 스승이 아니라, 사육사만을 겪어 봤기에 리메르라는 사람은 감사를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하여튼."

리메르는 픽 웃었다. 그저 기껍다는 얼굴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

그는 검지와 중지를 모아서 손을 까딱였다.

"말했잖아 나와 갈 곳이 있다고."

"갈 곳이요?"

"가주전 알현실."

리메르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가주께서 널 호출하셨다."

제35화

"저를요?"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대련이 끝나자마자 호출이라니,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석 수련생을 데리고 오라 하셨지."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수석 수련생이라.'

그 뜻은 누구라도 수석이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글렌은 이번 대련에서 마르타가 이기리라 생각한 것 같다.

'웃기는 일이로군.'

버렌에 이어 마르타까지. 글렌이 기대했던 수석 후보를 차례로 깨부순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호출 이유는 뭐죠?"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

리메르가 입을 빼죽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저 표정을 보니, 이유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알려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언제 가야 합니까?"

라온은 주머니를 꽉 채운 목갑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러고 가려고? 옷도 안 갈아입어?"

"네."

"너 가주님 안 무섭냐?"

"잡아먹으려고 부르는 것도 아닐 텐데, 무서워할 필요는 없죠."

글렌의 그 차가운 눈빛이 거북한 건 사실이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역시 넌 재밌다니까."

리메르가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라온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가자."

"예."

라온은 리메르의 뒤를 따라서 가주전 알현실로 향했다.

"정말 마르타 님이 졌다고?"

"저렇게 작은 아이에게…."

"믿을 수가 없군."

"나이도, 나이지만 재능이 다를 텐데."

"운이다. 운일 수밖에 없어!"

지나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신기하거나, 놀란 눈빛으로 라온을 힐끔거렸다.

"네가 마르타를 꺾은 사실이 벌써 퍼진 모양인데."

리메르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게 벌써요?"

"지그하르트는 폐쇄적인 가문이니까."

그는 외부에 폐쇄적이니, 내부의 소문은 바람처럼 퍼질 수밖에 없다고 중얼거렸다.

"거기다 마르타는 같은 직계를 꺾을 정도로 뛰어나잖냐. 그런 아이를 정면에서 이겼으니 소문이 퍼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군요."

"그러니 주의해야 해. 올라가는 것만큼 아래로 추락하는 것도 빠르거든."

리메르는 그렇게 말하며 엄지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단전이 망가진 뒤 추락했던 본인의 모습을 말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축하한다. 이건 좋은 일이니까. 즐겨."

그는 휘파람을 불면서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무인들은 막지 않고 길을 비켜주었다.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1층의 대복도를 지나 알현실 앞에 서자, 글렌의 집사 로엔이 방긋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덜컹.

심장이 멎을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문이 갈라지고, 하늘을 뚫을 듯한 장대한 기운이 문밖으로 퍼져 나왔다.

라온이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 정도였던가….'

오러를 익히니 글렌의 기세가 더 거대하게 느껴진다. 끝을 알 수 없는 막강한 기파에 손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인간 따위가….

라스 역시 글렌의 기운에 짓눌린 것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오러가 있으니, 제대로 느껴지지?"

리메르는 이마 위로 땀 한 방울을 흘리며 웃었다.

"저게 우리들의 왕이다."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음…."

마른침을 삼키고, 그를 따라갔다. 걸어갈수록 글렌의 기세가 강해진다. 막대한 기파에 어깨가 짓눌리는 것 같았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은 리메르와 같은 선상에 서서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글렌의 기파가 줄어들었다.

찰나의 순간에 기세를 조절한다. 하늘에 닿은 무력. 데루스조차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았다.

"일어나라."

명령과도 같은 말에 라온의 목이 자동으로 올라갔다. 글렌의 붉은 눈을 마주하자, 주변의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정말이지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호출하신 수석 수련생을 데리고 왔습니다."

"...."

글렌은 리메르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기도 혹은 평온해 보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읽히지 않았다.

"만화공을 습득했나."

"예."

"얼마나 걸렸지?"

"7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느리군."

그는 턱을 살짝 틀었다. 한심해하는 것 같았다.

"오러를 일으켜보아라."

글렌의 지시에 라온을 리메르를 보았다. 가주 앞에서 오러를 꺼내도 되냐고 눈빛으로 물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안 되지만, 본인이 하라고 말씀하시잖냐."

"알겠습니다."

라온이 일어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화르륵!

죽어가던 잔불이 일어서는 듯한 소리와 함께 새빨간 불꽃이 피어났다. 만화공 일화. 하나이자, 첫 번째 불꽃이 타올랐다.

"그게 만화공의 첫 번째인가."

진흙 밑바닥에 가라앉은 듯한 글렌의 눈동자에 작은 흔들림이 있었다.

"넌 무엇을 추구하며 그 오러를 피워냈지?"

"꺼지지도 꺾이지도 않는 불입니다."

"꺼지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을 그렸습니다."

글렌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라온의 손아귀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조금 감격한 것처럼 보였다.

"괜찮구나."

"예?"

그에게서 생각지도 않았던 칭찬이 들려왔다.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귀를 만져보았다.

"화속성 검사나, 마법사는 최고의 화력을 자랑하지만, 그만큼 지속력과 방어력이 약하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면 너 하기에 따라 그 약점을 극복할 수도 있겠지. 어떻게 사용할지를 잘 궁리해보도록."

"…알겠습니다."

라온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이 갑자기 저런 조언을 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판별식에서 해주지 못했던 말을 지금 해줬을 뿐이니까."

"아…."

뭔지 알겠다. 글렌은 예전 판별식에서 자신에게만 조언을 해주지 않았었다. 그때의 말하지 못한 조언을 지금 해준다는 것 같았다.

'신기한 성격이네.'

글렌은 빙하를 깎아 인간으로 조각한 듯 차갑지만, 챙겨줄 건 챙겨준다.

겉으로는 챙겨주지만, 속으로는 인간을 물건처럼 사용하는 데루스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이제 널 부른 이유를 말하겠다."

글렌이 턱을 괴며 라온을 굽어보았다.

"내년쯤 너희들에게 임무를 내리겠다."

"임무라고 하셨습니까?"

"임시 수련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너희들이 수련을 시작한 지 1년이 한참 넘었다. 전부 오러를 습득해 소드 비기너가 되었으니, 밖으로 나가봐도 괜찮겠지."

"음…."

"너희가 어리다고 생각하나? 전투에 나이는 상관없다. 검사는 검을 들 수 있다면 언제, 어느 때라도 싸워야 한다."

'그게 아니라, 늦었다고 생각한 건데?'

전생에선 14살이 아니라, 8살에 암살 임무를 받았었다. 지금 나이라면 빠른 게 아니라, 느린 편이다.

"너만이 아니라, 수련생 모두 단단히 준비하라 일러두어라.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보도록."

글렌은 눈을 내리감고 손을 저었다. 라온은 다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뒤 알현실을 나갔다.

"임무를 할 때가 되긴 했지."

리메르가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잡으며 히죽 웃었다.

"저희가 수행할 임무는 뭡니까?"

"아직 정하지 않았어. 몬스터 토벌, 요인 호위, 던전 탐사, 산적 소탕. 무엇이 나올지 모르니, 가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할 거야."

"교관님도 같이 가시는 거 아닙니까?"

"가긴 가지만, 내 임무와 너희의 임무는 달라. 교관의 목적은 너희들의 보호니까.

"알겠습니다."

"엥?"

리메르는 자신이 당황할 줄 알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임무는 당연히 스스로 하는 거지.'

8살에 임무를 받았을 때도 지원 따위는 없었다. 유사시에 보호해 줄 교관이라니, 얼마나 사치인가.

'지그하르트는 내 생각보다 유순한 곳이네.'

라온은 역으로 당황한 리메르를 뒤로 하고 웃는 얼굴로 가주전을 나섰다.

* * *

라온이 별관으로 떠난 뒤 리메르는 다시 알현실로 들어갔다.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리메르는 단상 위에 선 글렌을 보며 빙긋 웃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다."

"에이, 그런 거치고는 입꼬리가 2mm 정도 올라가 있잖습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마르타의 상태나 말해라."

"타박상이 심하지만, 요양하면 나을 상처입니다. 문제는 정신적인 충격이죠."

"그 정도도 극복하지 못한다면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달 이유가 없지."

글렌은 8살에 입양된 마르타에게도 예외 없이 지그하르트의 정신을 말했다.

"라온이 불의 이미지를 그릴 때 네가 도움을 준 건가?"

"저도 나름 스승이니까요. 다만 선택한 건 라온입니다. 전 여러 개의 길이 있다는 것만 알려줬을 뿐입니다."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기대하던 초대 가주의 오러를 보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적혀 있던 그대로였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꽃을 보는 듯 아름답더군. 그 위력 역시 크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고."

"네. 4년 넘게 쌓은 마르타의 타이탄 오러를 아예 부숴버렸죠. 말이 되지 않는 위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색이 황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색은 불꽃의 위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거다. 그 아이가 앞으로도 제대로 된 길을 걸을 수 있게 지도해주어라."

"역시 가주님은 그 아이를 특별하게 생각하시는군요."

"...."

글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손을 저었다. 귀찮으니,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럼 아이들의 임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내 소관이 아니라, 총관부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아이들이 어떠한 임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건하게 키우도록."

"옙! 아이들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확실하게 교육하겠습니다."

"너나 잘하라는 말밖에 나오질 않는군."

글렌이 리메르의 당당한 표정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게 반면교사라는 거죠."

리메르는 지지 않고 씩 웃었다.

* * *

"음?"

주디엘은 정원 앞을 손질하다가 뒤에서 들린 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헉, 라, 라온 도련님!"

라온이 자신을 지그시 내려보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일어서며 그의 모습을 살폈다. 옷에 먼지가 많이 묻었지만, 다친 곳은 전혀 없어 보였다.

'설마 이긴 거야? 그 마르타를?'

한 달 전부터 나온 이야기니, 오늘 라온이 마르타 지그하르트와 대련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길 줄은. 그것도 저렇게 멀쩡하게 이길 줄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대련에서 이기신 겁니까?"

"어떨 거 같아?"

라온이 빙긋 웃었다.

"아…."

승리를 말하는 웃음을 보자 그날 밤이 생각났다. 호수 위로 떠오른 붉은 눈. 그건 공포의 현신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이 괴물이 고작 천재에게 질 리 없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조만간 중무전에서 다시 연락이 올 거다. 나를 더 확실하게 조사하라고."

"그, 그렇겠죠."

"네가 알아서 적은 뒤 나한테 가져와라."

"알겠습니다."

그는 소름이 돋아오르는 미소를 지으며 별관으로 들어갔다. 주디엘은 식은땀이 등 뒤를 적시는 걸 느끼며 손에 쥔 잡초들을 떨어뜨렸다.

"천재를 꺾는 괴물…."

* * *

"라온!"

라온은 별관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걸치던 실비아와 마주쳤다.

"어디 가려고?"

"어딜 가긴! 집에 돌아온다고 한 날인데, 오질 않아서 찾으려고 한 거지!"

실비아가 땅을 박차고 달려왔다. 웬만한 검사들보다 빨라 보였다.

"괜찮아? 다친 곳은?"

그녀의 눈동자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좌우로 쉴새 없이 움직였다.

"안 다쳤어."

"어후…."

실비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만 라온의 몸을 살피는 눈동자는 멈추지 않았다.

"대련이 취소된 거야?"

"아니. 이겼어."

"그런데 다친 곳이 없다고?"

"안 맞았으니까."

"하, 한 대도 맞지 않고 이겼다고?"

"응."

"지, 진짜요?"

헬렌이 들고 있던 실비아의 겉옷을 떨어뜨렸다.

마르타의 재능이 직계와도 비슷하다는 건 모두 아는 정보였기 때문에 저들이 저렇게 당황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아, 안 다쳤으면 일단 밥부터 먹자! 헬렌. 바로 식사를 준비해줘!"

"괜찮아."

"응? 저녁 안 먹었잖아."

"오늘은 할 일이 있거든."

라온은 주머니에서 영약이 든 목갑을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또 한 번 강해질 시간이었다.

제36화

라온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커튼을 치고 방문을 잠갔다. 들어오지 말라고 말해놓았지만, 혹시나 하는 대비였다.

"라스."

그는 손목에 걸린 얼음꽃 팔찌를 툭툭 쳐서 라스를 불렀다.

-버러지 인간 주제에 본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그럴 거면 이름을 알려주지 말던가."

-네놈이 본왕의 빙의를 견뎌낼 줄은 몰랐으니까!

라스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먹어 치우기 전 마지막 배려로 본인의 위대한 이름을 알려준다고 중얼거렸다.

"위대한 이름은 모르겠고, 이번에도 방해할 생각이냐?"

-본왕은 마계의 군주로서 한 번 입에 담은 말은 지킨다. 앞으로 네놈이 연공을 하는 동안 건드리는 일은 없다.

"하긴 그동안 모아두었던 힘을 다 쏟아부었을 테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는 한 달 전 만화공을 익힐 때 전력을 다해 공격을 해왔었다. 그때 소모한 힘을 벌써 회복했을 리 없다.

-멍청한 놈! 분노의 기운은 언제라도 꺼낼 수 있다. 그저 군주로서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

"아, 됐어."

-이 콩알만 한 놈이 정말!

말을 끊자, 라스가 부들부들 떨며 냉기를 내뿜었다.

"아쉽네. 또 능력치를 올릴 기회였는데."

-크으으….

라스는 이를 바득 갈았다. 화가 폭발하기 직전인지 냉기의 불꽃 사이로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라온이 바르르 떠는 라스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놈 앞에서는 방심할 수가 없지.'

라스는 동료가 아니라 적이다. 놈의 앞에서는 연공 중이든, 수련 중이든 방심해선 안 된다.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자, 그럼."

주머니에서 구화단이 든 목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가을 산에서 맡을 법한 마른 수풀의 향이 진하게 풍겨 나왔다.

냄새 좋네.

약향이 방에 퍼지는 것만으로도 약효가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

라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고, 구화단을 입에 넣었다. 씁쓸하면서도 진한 약향이 입안 전체를 휘감았다.

'씹어서 먹으라고 했었지.'

리메르의 조언대로 구화단을 씹어서 삼키자, 목구멍에서 탁하고 풀어졌다.

후우우우.

구화단에 담겨 있던 진하디진한 기운이 굴뚝의 연기처럼 전신의 마나 회로로 퍼져나갔다.

눈을 감고 앉아서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고, 만화공을 운용했다.

구화단의 기운이 전신을 휘돌며 근육을 팽창시켰다. 단전이 찌릿거리며 확장되고, 마나에 대한 감각이 극한으로 치솟았다.

화아악!

숯가마에서 데운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기운이 마나 회로를 질주했다.

화아아!

마나 회로 내부에서 녹아내린 순수한 냉기는 만화공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전신을 휘돌았다.

'불의 고리를 먼저 운용하길 잘했군.'

불의 고리가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와 노폐물들을 깔끔하게 닦아내고, 만화공의 기운이 그 길을 빛살처럼 내달려 영약의 낭비를 줄였다.

두 연공법은 꼭 하나처럼 서로의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상쇄시켰다.

우우웅!

구화단의 마나가 모조리 녹아내리며 불의 고리와 육체 그리고 단전이 붉은 선으로 이어진다.

라온은 끝없이 이어지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며 점점 더 깊은 연공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 *

떠오른 해가 다시 서산 아래에 걸려 노을이 비칠 때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네 번째 <불의 고리>가 생성되었습니다.]

[<불의 고리>가 4성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불의 고리(4성)>가 육체와 영혼의 격을 상승시킵니다.]

[<불의 고리(4성)>의 효과로 근력, 민첩성, 체력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4성)>의 효과로 기력, 정신력, 감각이 상승합니다.]

라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메시지가 아니라도 심장을 세차게 휘도는 네 번째 고리를 느낄 수 있었다.

[체질<운동능력 저하>가 사라집니다.]

[체질<마나감응력 저하>가 사라집니다.]

[<수속성 저항력>이 4성에 올랐습니다.]

[<설화의 감각>이 2성에 올랐습니다.]

불의 고리가 4성에 오른 게 전부가 아니었다. <수속성 저항력>과 <설화의 감각>의 성취도 올라갔다.

'대단하네.'

중급 영약 하나를 먹은 것치고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영약 하나 때문은 아니다.

1년 가까이 전력을 다해서 수련해오며 쌓인 노력이 영약으로 인해 터졌을 뿐이다.

라온이 어깨를 돌리며 일어섰다. 단전은 뜨겁고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 찼고, 몸은 바람을 탄 풀잎처럼 가벼웠다.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 상태가 완벽했다. 지금이라면 육체 능력만으로 오러를 사용한 마르타를 가볍게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아악!

상태창을 불러오려 할 때 팔찌에 있던 라스가 푸른 불꽃과 함께 치솟았다.

-4성?

'음?'

-4성의 수속성 저항려어어역?

라스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려왔다. 녀석은 <불의 고리>의 내용은 보지 못하고, 마지막 떠오른 수속성 저항력만 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몰랐지.'

라스는 메시지는 볼 수 있지만, 상태창은 볼 수 없다. 수속성 저항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이 얍실한 놈! 4성의 수속성 저항력을 가지고 본왕을 속였던 거냐!

"물어본 적도 없잖아."

-으윽!

라스가 시퍼런 눈빛을 번쩍였다.

-저항력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4성. 그것도 성장형일 줄이야. 이 추잡한 놈!

"수속성 저항력이 있다고 추잡하다니…."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수속성 저항력으로 저 난리를 치는 걸 보니, <불의 고리>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발광을 하겠군.'

육체와 영혼의 격을 올려주는 <불의 고리>나 환생에 대해 알게 되면 라스가 기절하는 꼴을 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말했잖아. 넌 날 못 이긴다고.'

-닥쳐라. 본왕이 원래의 힘을 발휘한다면 네놈 따위는 가볍게 얼음덩이로 만들 수 있다.

'근데 못하잖아.'

-입을 열 때마다 화를 돋우는구나!

라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냉기의 불길을 터트리며 돌진해왔다.

화아아아!

찰나의 순간 입술을 시퍼렇게 만들 정도의 냉기가 전신에 회오리쳤다.

"음."

라스도 성장했는지 냉기와 감정의 자극이 이전보다 강해졌다.

'하지만.'

<불의 고리>와 수속성 저항력은 그 이상으로 성장했다. 자연스럽게 회전하는 네 개의 고리 앞에서 라스의 분노는 애교일 뿐이었다.

콰아아아아!

전신에 내리꽂히는 푸른 냉기를 꾹 참고 있으니,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의 공격을 버텨냈습니다.]

[<체력>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라스는 몬스터 같은 괴성을 지르고 나서 라온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팔다리가 다 잘린 것 같도다. 방법이 없어! 방법이!

놈은 이제 여유 있는 척을 그만두고 악을 내질렀다.

"그래서 말했잖아. 넌 안 된다고."

-본왕의 능력은 냉기만이 아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인 분노를 끌어 올리는 게 진정한 능력이지.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도 분노를 건드려 자폭시킨 마족이 수만 마리….

"근데 그것도 나한테 안 통하잖아."

-끄어어억!

라스의 푸른 불꽃이 뻘게지기 시작했다.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였지만 능력치를 주기는 싫은지 다시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제 좀 조용하네."

라온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상태창을 켰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최초의 승리

상태 : 혹한의 저주(여섯 가닥)

특성 : 분노, 불의 고리(4성), 수속성 저항력(4성), 설화의 감각(2성) 만화공(2성), 혹한의 냉기(2성), 화속성 저항력(2성).

근력 : 40

민첩성 : 41

체력 : 41

기력 : 29

감각 : 53

상태에 닻처럼 박혀있던 운동능력 저하와 마나 감응력 저하가 사라진 게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참을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고 마나가 모공으로 들어오는 듯한 감각이 괜히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능력치도 많이 올랐고.'

모든 능력치가 두 단계 이상 상승했다. 지금 육체 능력과 감각은 정규 검사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수속성 저항력도 큰 수확이고.'

수속성 저항력이 4성으로 올랐으니, 앞으로는 4서클 수준의 마법도 어렵지 않게 견딜 수 있다.

이 저항력은 검사를 상대할 때보다 마법사나, 주술사와 싸울 때 큰 도움이 될 거다.

'얻은 게 많네.'

구화단이 좋은 영약이라고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냉소적인 자신이 미소를 지우지 못할 정도로.

'몸만 좀 풀어볼까.'

변화한 몸과 오러를 확인해보고 싶어 방문을 열었다.

"헉!"

"어!"

문 앞에 서 있던 실비아와 헬렌이 깜짝 놀라서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뭐해?"

"아, 아니. 연공을 한다기에 호법을…."

"저도 마찬가집니다."

두 사람의 눈동자는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밤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여기서 자신을 지켜준 것 같았다.

기감을 뿌려보니, 창밖에 다른 시녀들도 있었다.

"음…."

라온이 눈을 내리감았다. 만화공을 운용했을 때보다 더한 따스함이 심장을 달궜다.

잠시나마 마나 회로의 냉기가 지워진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고마워."

두 사람과 밖에 있는 시녀들에게 고맙고도 미안하여 고개를 숙였다.

"흐윽!"

"마님!"

"헤, 헬렌. 어쩌지?"

실비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옆으로 픽 쓰러졌다.

"우리 아들 너무 잘 컸잖아!"

"그러게요!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마님!"

"헬렌!"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훌쩍였다.

'이게 제일 힘들어.'

라스의 정신 공격이나 마나 회로의 냉기, 글렌 지그하르트의 압박보다 실비아와 헬렌을 대하는 게 제일 버거웠다.

"후우…."

라온은 두 사람이 얼싸안을 때 빠른 걸음으로 별관을 나섰다.

* * *

라온은 이틀 동안 변화한 몸에 적응을 끝냈다.

육체와 감각은 상태창에서 본 것보다 많이 차이가 있었다.

처음 검술을 펼쳤을 땐 내 몸이 아닌 줄 알았다. 같은 검술을 펼쳐도 위력과 속도가 차원이 달라졌으니까.

그렇게 큰 차이가 난 이유는 간단하다.

체질의 변화.

체질에 적혀있던 운동능력 저하와 마나 감응력 저하가 사라지자 몸 상태가 최고조로 올라갔다.

생각을 한 그대로 몸이 움직이고, 모래같이 잘았던 마나가 구슬처럼 크게 느껴졌다.

'이것도 하나의 토대지.'

강해진 무력 이상으로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토대를 세운 것 같아 뿌듯했다.

그래서 휴일 마지막 날인 오늘은 휴식 삼아 정원의 화단에 나와 꽃을 손보고 있었다.

-멍청한 놈. 흙을 솎을 때는 먼저 아래에서 퍼야 한다. 영양이 있는 흙이 잘 섞이도록 모종삽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야 하느니라.

라스는 어울리지 않게도 꽃과 나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가져온 책을 펼쳐볼 필요도 없이 화단을 정리할 수 있었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얼음꽃으로 화단을 가득 메운 적이 있었다. 화단을 본 마족들은 경배하듯이 꽃에 고개를 숙였지. 그건 본왕에 대한 칭송이자, 경외….

"하아."

저 주절거림만 없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라스는 말이 정말 더럽게 많았다. 특히 '본왕이 마계에 있었을 때.'로 시작하면 최소 10분 동안은 말이 멈추질 않는다.

매일 마계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젠 가본 적도 없는 마계가 친숙해질 지경이다.

-그게 아니다! 꽃잎은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 못하겠으면 일단 얼려!

"알겠다고."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마나를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게 꽃을 심자, 라스의 잔소리가 그쳤다.

우측의 화단을 모두 정리하고, 좌측의 화단을 보려고 할 때였다.

"음?"

별관 입구에서 가느다란 인영이 걸어온다. 긴 머리카락이 단발로 변했지만,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이틀 전 패배했던 마르타가 인상을 잔뜩 쓴 채 다가왔다.

"시비라도 걸러 왔나?"

라온이 흙 묻은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섰다.

그럼 환영인데.

제37화

자주색 노을이 번져가는 저녁 하늘 아래. 마르타가 입을 꾹 다문 채 서 있었다.

시야가 깜깜한 어둠으로 물들 때까지 석상이 되어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져서는 안 됐는데."

마르타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핏줄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엄마를 찾을 때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져선 안 됐는데…."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절대 패배하지 않기로 다짐했건만, 져버렸다. 그것도 너무나 추하게.

억지로 마음을 비틀고, 욕을 달고 살고, 사람들과 거리를 둔 보람도 없이 그야말로 발려버렸다.

"빌어먹을!"

양아버지인 데니어 지그하르트는 자신의 재능을 보고, 지그하르트에 입양했다.

그런데 방계이자, 나이도 한 살 어린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져버렸으니, 아버지가 어떤 조치를 할지 예상되질 않았다.

데니어는 부드러운 사람이었지만, 그 모든 게 연기일 가능성도 있다. 최악의 경우 쫓겨날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그렇게 되면 엄마를 찾을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다. 바지를 붙잡아서라도 매달려야 했다.

"후우…."

"아가씨."

극도로 긴장한 마르타는 집사인 카멜의 부름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데니어 님의 편지입니다."

데니어 지그하르트가 편지를 보냈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마르타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여기 있습니다."

마르타는 마른침을 삼키고 편지를 펼쳤다.

[마르타. 첫 번째 패배를 축하한다. 한 번 졌다고 네 이름에 패배자 딱지가 붙는 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말 거라. 다만 왜 졌는지, 어떻게 졌는지를 수없이 생각해라. 그 반성이 훗날 네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줄 테니까. 직접 가서 위로해주고 싶지만, 임무가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구나. 가지 못해 미안하다.]

질책도, 조롱도 없었다. 진심으로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가 보낸 편지였다.

[네 친엄마의 흔적은 계속 수색 중이다. 내가 포기하지 않았으니, 너도 포기하지 말거라.]

마르타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지갑을 확인하듯 주머니를 꾹 눌렀다.

"하아…."

부서졌던 마음의 조각을 다시 모아주는 듯한 편지였다. 특히 마지막 글귀 때문에 어깨를 짓눌렀던 우울함과 불안함이 모두 가셨다.

"아버지께 명심하겠다고 전해드려. 정말. 정말로 감사하다고도."

"알겠습니다."

카멜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가씨."

"응?"

"라온 도련님과 내기에서 건 복종에 대한 게 신경 쓰이신다면 별관을 압박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직계의 힘을 이용한다면 조용히 처리할 수…."

"아니. 하지 마."

마르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흑진주 같은 눈동자는 이전과 달리 선명한 빛을 발했다.

"진 건 진 거야. 그것도 처참하게 졌지."

라온에게 패배한 이유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방심해서가 아니야. 그냥 졌어.'

라온은 그 뻘건 오러를 사용하여 자신의 검을 베어버렸다. 검사가 검을 잃었으니, 사실 승부는 거기서 끝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똑같이 검을 버리고 주먹으로 두 번째 승부를 내주었다.

그렇게 싸워준 사람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아버지가 더 실망하실 게 분명했다.

"멍청한 약속을 했더라도 일단은 지키는 게 지그하르트다운 모습이겠지.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실 거야."

"물론입니다. 데니어 님이라면 분명 그리 말씀하셨을 겁니다."

"딸인 내가 그분을 망신시킬 수 없어."

"그럼요."

카멜은 대견하다는 듯 입매를 크게 올리며 웃었다.

"카멜. 칼 있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줘봐."

"여기 있습니다."

마르타는 카멜이 준 얇은 단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검집에서 꺼냈다.

파악!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흑단 같은 머리카락의 중간을 단호하게 베어버렸다.

"아, 아가씨!"

"괜찮아. 멍청하고 추잡했던 과거를 떠나보내는 것뿐이니까."

마르타는 잘라낸 머리카락을 바람에 흘려보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웃음이 눈송이처럼 반짝거렸다.

"허…."

카멜은 이런 장면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헛바람을 흘렸다.

"내일 오전 직계 수련 취소해줘."

"예? 취소가 어려운 건 아니지만, 무엇을 하시려고…."

"갈 곳이 있어."

마르타는 그렇게 말하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카멜은 저택에 들어가는 마르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르타는 휴가 마지막 날 새벽 훈련만 마치고 바로 저택을 나왔다.

아침도 안 먹고 어딜 가냐는 카멜과 시녀들을 따돌리고 홀로 서쪽 별관으로 향했다.

상당히 멀었지만 길이 잘 닦여있어서 별관을 찾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서쪽으로 계속 걷고 있으니, 작은 정원에 둘러싸인 아담한 집이 보였다.

'저기 사는 건가.'

마르타가 눈매를 좁혔다. 본관의 건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초라했다.

다만 자신이 입양되기 전 집은 저 별관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에 별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정원으로 걸어갔다.

'누가 있네.'

금발 소년 하나가 화단에 쪼그려 앉아 흙을 파고 꽃을 심고 있었다.

'어?'

마르타가 눈을 부릅떴다.

'라온 지그하르트?'

시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꽃을 심고 있는 녀석은 자신에게 처음 패배를 안겨 준 라온 지그하르트였다.

라온도 자신을 발견했는지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섰다.

"무슨 일이지?"

"...."

마르타는 대답하지 않고, 라온이 가꾼 화단 앞에 섰다. 금방 물을 줘서 그런지 꽃들이 건강하고 생생해 보였다.

'이 녀석이 이런 취미가 있었나?'

아이답지 않은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또 아이다워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할까.'

오늘 마르타가 라온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하다.

재대결.

아버지의 말을 듣고 패배에 대해 생각해봤지만 어떻게 졌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걸 모르니, 실력 차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걸 메울 방법은 없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즉, 반성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대결이 필요했다.

머리에 열이 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라온과 싸워 실력 차이를 알고 싶었다.

"후우…."

마르타는 탁한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호수처럼 잔잔한 라온의 눈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너와 다시 붙어보고 싶다."

"아직도 패배를 인정 안 한 건 좀 추한데."

"아니. 내가 발린 걸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야. 다만 어떻게 당했는지를 몰라. 그걸 알고 싶어서 찾아왔어."

"...."

라온의 눈동자가 짧게 반짝였다.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럼 대가는?"

"뭐?"

"패자가 승자에게 도전을 하려면 뭐 하나는 들고 와야 하지 않나?"

"지랄! 싸우는데 꼭 대가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난 필요해."

"윽…."

마르타가 가는 신음을 흘렸다.

'이런 점이야.'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이런 점 때문에 라온이 아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없어? 없으면 곤란한데."

라온은 싸울 생각이 없어진 듯 팔짱을 꼈다.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