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9

* * *

"아, 요즘 사람 많이 죽이네."

진현우는 목을 꺾으며 혀를 찼다.

하지만 임천우는 어쩔 수 없다. 전생의 일을 생각한다면 미리 죽여 둬야 할 놈이니까.

'악명이 자자한 놈이었지.'

임천우가 특히 그랬다.

지금은 하위 랭커지만 나중에는 중상위 랭커에까지 자력으로 오르는 놈이다.

문제는 성미가 굉장히 잔인해서, 조금만 신경에 거슬려도 다 죽이고 다녔다는 것.

'자기한테 방해가 될 놈들도 죽였었고.'

그렇게 죽어 나간 사람들 중에는 탑 공략에 큰 도움이 될 만한 사람도 많았다.

미래의 인재들을 뿌리 뽑았다는 뜻이다.

진현우에게 길드 가입을 강요하고, 가입을 거절하면 바로 죽이려고 했었던 것처럼.

"잘 죽었다, 인마."

- 크릉?

옆에 있던 늑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현우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에서 아이템들을 챙겼다.

임천우가 쓰던 할버드는 완전히 파괴돼서 팔 수가 없다. 대신 쓸 만한 게 있었다.

[돌격대장의 반지 (영웅)]

· 설명: 항상 용맹하게 선두에서 적에게 돌진하던 남자가 쓰던 반지다.

· 착용 제한: Lv.50.

· 옵션: 돌격대장, 질주.

* 돌격대장: 다수의 적과 싸울 때 능력치가 향상하며, 자신과 인근 아군이 부정적인 효과를 지닌 정신 계열 공격에 저항력을 가진다.

* 질주: 달리는 속도가 빨라지며, 이동 계열 스킬의 마력 소모가 감소한다.

임천우와 그 일행이 어떻게 환각에 버틸 수 있나 했더니 이 아이템 덕분이었다.

진현우는 곧바로 반지를 착용했다.

요호를 상대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시체들은 대강 묻어 둬야겠군."

게이트에서는 살인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사유로든 게이트가 닫히면 안에 있던 시체들도 사라지기 때문.

살인멸구가 굉장히 쉬운 곳이어서였다.

임천우가 괜히 온 게 아니다.

"자기가 죽을 줄 알았겠냐."

진현우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이 근방에 사일런스 마법을 걸어 뒀으니 싸우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리진 않았을 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거의 와해되다시피 한 공략대가 숲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 보였다.

'저 공략대가 시간을 끌어 주겠지.'

정석만을 비롯한 몇몇 플레이어는 아직 홀리지 않았다.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고, 더 강력한 정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정기를 원하는 요호는 한동안 공략대를 홀리기 위해서 시간을 들일 것이다.

"그동안 움직여야겠어."

놈의 신경이 공략대에게 쏠려 있으면 혼자 움직이는 진현우는 신경 쓰지 못할 터.

저 너머에 어딘가로 홀린 듯이 걸어가는 이들이 보였다. 저들이 길을 안내해 줄 것이다.

요호가 만든 결계의 중추가 있는 곳으로.

"좋아."

진현우는 걸음을 옮겼다.

87화

선물 상자

숲에 홀린 이들은 하염없이 걸었다.

초점 없이,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하지만 어딘가로 가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채.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달한 곳은 숲의 중심.

"아아, 아아아아...."

"우, 우우우... 아무나, 살려 줘...."

보이는 것은 거대한 나무.

그리고 그 나무에서 뻗어 나온 줄기에 묶인 수많은 사람이 신음하는 모습이었다.

줄기는 살아 있는 것처럼 맥동했고, 그럴 때마다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빨아냈다.

- 쿠후, 쿠후후.

정기였다.

그렇게 빨린 정기는 거대한 나무로 흐르고, 그 안에 있던 결정체로 흡수되었다.

결정체의 크기가 그럴 때마다 커졌다.

- 이제 새로운 먹이를 삼키렴.

거대한 나무는 지금 막 도착한 플레이어들을 줄기로 휘감고, 똑같이 정기를 흡수했다.

결정체가, 점점 더 커져 가고 있다.

- 아아, 느껴져. 강인한 자들의 정기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힘의 원천이....

그 과정을 지켜보던 요호가 몸을 떨었다.

플레이어들은 평범한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정기를 가졌다. 이들의 정기를 모두 흡수한다면 자신은 더욱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꼬리의 숫자도 늘릴 수 있을 터.

- 아아, 나도 구미를 가질 수 있느니라.

아홉 개의 꼬리.

요호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 그곳에 도달하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그게 요호의 꿈이었다.

- 아직 더 강한 먹이가 남아 있지 않느냐.

요호는 공략대를 떠올렸다.

자신의 매혹에 저항했던 정석만. 그 남자의 정기는 얼마나 맛있을까. 그걸 떠올리면서.

- 쿠후후. 참을 수 없어. 으응, 참을 수 없지. 아이들아, 너희는 이곳을 지키렴.

요호는 먹이 사냥에 나섰다.

그녀의 분신들과 홀린 플레이어들이 거대한 나무를 지키면서 주변을 배회했다.

그리고 그걸 기다리던 이가 있었다.

"찾았다."

진현우.

목표를 찾은 그의 두 눈이 번뜩였다.

* * *

끔찍한 광경이 보였다.

숲 중추에 서 있는 거대한 나무와 줄기에 묶인 채 축 늘어져 있는 수많은 사람.

줄기는 사람들에게서 정기를 흡수했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몸이 말라 가고 있었다.

'그래도 죽은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요호는 사람을 잘 죽이지 않는다.

그게 오히려 손해다. 사람을 오래 살려 두면서 지속적으로 정기를 흡수하는 게 낫다.

쥐어짜 낸 끝에 더는 쓸모가 없어졌을 때 죽여서 영혼에 남은 정기까지 흡수하지만.

아직은 괜찮을 것이다.

"슬슬 움직여 볼까."

요호는 정석만을 비롯한 공략대를 홀리기 위해서 떠났다. 이 숲을 변화시킨 결계의 핵을 지키는 것은 홀린 플레이어들뿐.

저놈들을 돌파하는 건 쉬운 일이다.

문제는 핵을 어떻게 파괴하느냐.

'결계의 핵은 저 나무다.'

거대한 나무 자체가 결계의 핵이다.

결계를 파괴하려면 저 나무를 제거해야 한다는 건데, 큰 것도 큰 거지만 나무 자체의 방어력이 엄청나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파괴하던 도중에 요호가 돌아오겠지.

그럼 나무를 파괴하다가 멈춰야만 한다.

'해일을 쓰면 바로 부술 수 있긴 한데.'

그러면 마력 소모가 너무 크다.

후에 찾아올 요호를 상대하기가 힘들다.

'저 나무가 알아서 파괴되게끔 할 수단.'

있었다.

진현우는 주머니에서 씨앗을 꺼냈다. 이전에 그가 복용했던 불꽃의 씨앗이었다.

이 씨앗은 강렬한 불길을 일으킬 수 있다. 전설급 아이템인 얼어붙은 심장의 냉기를 이겨 낼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불길을.

"오랜만에 불장난이나 해 볼까."

불꽃의 씨앗 두 개로 나무를 불태우고, 그걸 막으러 온 요호를 진현우 자신이 상대한다.

간단한 계획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아아아아...."

"으우, 우우우우...."

홀린 플레이어들은 마치 좀비처럼 나무 주변을 배회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스락, 진현우가 소리를 내며 걸었다.

그러자 그들이 모두 진현우를 응시했다.

"크... 으아아아아!"

"아아아아아!"

- 가르르르...!

플레이어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요호의 분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진현우는 늑대들을 소환하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 파앗!

섬광이 번뜩였다.

순식간에 돌진한 진현우는 가장 선두에서 뛰어오는 플레이어의 안면을 타격했다.

콰앙! 쓰러지는 플레이어. 진현우는 곧바로 주먹에 마력을 실으며 허공을 강타했다.

"크하아악!"

충격파가 다른 플레이어들을 휩쓸었다.

진현우는 바로 몸을 틀면서, 자신의 등을 노리던 플레이어의 칼날을 건틀릿으로 쳐 냈다.

그리고 적의 턱을 후려쳤다.

'죽이기에는 좀 그렇지.'

사람을 죽이는 것에 거리낌은 없지만, 무작정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다.

노리는 것은 정석만뿐.

다른 플레이어들은 기절시키기로 했다.

"키하아아아!"

"우우우...!"

플레이어들이 진현우를 포위했다.

그는 도끼를 높이 들어 올린 후, 있는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 거대한 폭음이 터지더니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뒤흔들렸다.

플레이어들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흐읍!"

그 사이를 섬광이 노닐었다.

진현우는 휘청거리는 플레이어들을 놀라운 속도로, 급소를 타격하여 빠르게 제압했다.

그리고 땅의 흔들림이 그쳤을 때.

"크하아...."

"아...."

서 있는 플레이어들은 없었다.

나름 조절을 해서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절시켰으니 한동안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 캬아아앙!

- 크르르!

영혼 늑대들은 여우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여우, 요호의 분신들은 환각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강해진다. 다르게 말하자면, 환각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쉬운 상대라는 뜻이다.

무언가에 홀릴 가능성이 아예 없는 영혼 늑대들은 놈들의 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자, 그럼."

진현우는 도끼를 빼 들었다.

- 서걱!

진현우는 돌진하면서 줄기들을 베어 냈다.

플레이어들과 일반인들의 정기를 흡수하는 용도의 줄기들이다. 그냥 놔둘 이유가 없다.

도끼를 투척해 가면서 줄기들을 모조리 처리한 진현우는 마침내 나무 앞에 도달했다.

"방어막인가."

나무의 근처에는 방어막이 펼쳐져 있었다.

이 나무 자체가 결계의 핵이니,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방어막을 만들어 둔 것이었다.

꽤 단단한 방어막이다.

- 카아앙!

하지만 진현우에게는 무의미했다.

부서진 검의 옵션, 흡마검. 검기를 일으킨 그는 방어막을 베어 냈다. 엄청난 방어력을 가지고 있던 방어막의 마력이 검에 흡수되었다.

스르르, 방어막이 사라졌다.

"나무 한번 더럽게 크네."

거대한 나무가 눈앞에 보였다.

진현우는 불꽃의 씨앗 두 개를 나무 앞에 던졌다. 그리고 일정 거리를 벌린 후.

- 콰직!

화살로 씨앗들을 타격했다.

강철도 꿰뚫는 화살인데 씨앗은 꿰뚫지 못했다. 그만큼 씨앗이 튼튼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균열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 스으으으!

균열에서부터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불꽃의 씨앗 내부에 담겨 있던 압축된 열기가 해방되었고, 그 열기는 곧 불길로 화했다.

화르르륵! 거센 불길이 땅을 뒤덮었다.

- 키아아아아아...!

기분 탓일까, 나무에서 비명이 들렸다.

땅을 뒤덮은 불길은 금방 거대한 나무로 옮겨붙었다. 불길이 순식간에 나무를 뒤덮었다.

하지만 나무가 타들어 가는 속도는 느렸다.

"네가 버텨 봤자 얼마나 버티겠냐?"

흡수한 정기를 이용해서 버티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한계가 찾아올 터.

'요호가 오는 것만 기다리면 되겠군.'

진현우는 쓰러진 플레이어들을 다른 곳으로 옮긴 후, 요호를 기다리기로 했다.

* * *

요호가 이상함을 느낀 것도 그때였다.

어떻게든 안전지대로 달아나려고 하던 정석만과 남은 공략대를 홀리는 것에 성공했다.

성과에 만족하면서 돌아가려는 찰나.

- 으읏, 이 느낌은...!

참을 수 없는 불길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분신들이 사라지는 감각과 요호가 만들어 둔 방어막이 깨지는 감각도 느껴졌다.

요호가 두 눈을 부릅떴다.

- 방어막이 깨졌다니, 대체 누가!

누군가 건드리면 바로 알 수 있게끔 요호가 특별히 공을 들여서 만든 방어막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건드렸다는 걸 알기도 전에, 방어막이 파괴됐다는 것부터 알게 됐다.

그게 뜻하는 것은 간단했다.

- 일격에 파괴했단 말인가?

방어막을 한 번에 파괴했다는 뜻.

그 정도의 강자가 있었나? 남은 공략대는 지금 막 자신이 현혹하지 않았던가.

대체 어디에 있었길래.

- 크윽! 빨리 돌아가야만 하느니라!

요호는 황급히 거대한 나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 뒤를 홀린 공략대가 따랐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달한 요호는 봤다.

- 아, 아아....

나무를 지키라고 둔 이들이 사라지고 없음을. 정기를 흡수하던 먹이들이 풀린 것을.

그리고 거대한 나무가 불타고 있는 것을.

- 끼아아아악! 나무가, 내 정기가!

요호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빨리 저 불을 꺼야 한다. 강력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가 아직은 불길에 저항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터.

- 빨리, 빨리 꺼야 돼! 너희는 날...!

홀린 공략대에게 불을 끄는 걸 도우라고 하려는 찰나, 요호가 뒤늦게 눈치챘다.

거대한 나무 앞에 진현우가 서 있는 것을.

요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생각보다 늦었네. 안 급한가?"

- 네놈, 누구냐?

진현우는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서 있었다.

보이는 것은 거대한 혼령 불. 놈은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 다시 묻겠느니라. 네놈은 누구냐?

혼령 불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건, 거대한 여우였다. 집채만 한 덩치에 흉악한 얼굴, 새빨갛게 물든 두 눈까지.

괴물의 꼬리는 여섯 개였다.

"널 잡으러 온 사람."

- 날? 잡는다고? 쿠후후, 인간 따위가?

요호의 입가가 비뚜름해졌다.

-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실력은 제법인 모양이구나. 하나 그래 봤자지.

결국은 인간.

요호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의 등 뒤에서 여태껏 따라온 플레이어들이 나타났다.

정석만과 남은 공략대였다.

- 후후, 어떻느냐? 네 동료들이다. 인간이란 참 쉬운 동물이지. 자기 동료에게는 약하거든.

몇 번이고 봐 온 풍경이다.

홀린 동료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머뭇거리고, 정신을 차리라면서 울부짖는 모습.

그리고 끝내 동료의 손에 죽는 모습을.

저 남자라고 해 봤자 다를 건 없다.

- 네 동료들을 살리고 싶지 않느냐?

정석만과 공략대가 진현우를 포위했다.

요호는 여유롭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 그럼....

정석만이 진현우를 향해 걸어갔다. 진현우가 땅을 박찬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콰득!

- 얌전히 항복....

"끄르륵!"

살을 으깨는 소리.

그리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요호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 ...어?

요호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진현우의 도끼가 정석만의 목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우는 어울리지 않게 아연실색했다.

"뭐야, 날 위한 선물 상자냐?"

- 뭐, 뭐라고? 네놈, 동료를....

"동료는 뭔 동료야? 몇 번 만난 적도 없는 놈들인데. 게다가 날 죽이려고 한 놈이지."

진현우가 도끼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그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안 그래도 죽이고 싶었거든. 잘됐네."

- 미친, 놈.

그건 요호의 진심이었다.

미친놈이다. 이런 미친놈을 보게 될 줄이야.

같은 인간을, 조금 전까지 함께 숲을 공략하려고 했던 동료를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나?

- 네놈은 쓰레기 같은 놈이로구나.

"갑자기 인신공격이나 하기는."

- 쯧, 여기까지 온 것은 가상하다만.

요호는 힘을 집중했다.

어떻게 환각을 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직접 대면했으니 더는 피할 수 없다.

놈의 두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 네놈도 내 노예가 될 것이다!

요호에게서 사이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상대방을 환각에 빠지게끔 만드는 마안. 일개 인간이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그 기운이 진현우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

- ....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사이한 기운은 진현우의 전신을 휘감았지만, 그게 다였다.

정작 진현우에게 침투하지는 못하고 허망하게 사라졌다. 요호가 두 눈을 껌뻑였다.

- 어?

저도 모르게 요호가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88화

제안

요호는 당황한 눈으로 진현우를 봤다.

꼬리가 여섯 개로 늘어나면서 가진 힘이 더욱 강력해졌다. 지금 요호의 환각은 일개 인간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상태였다.

그런데.

- 이, 인간, 내 명령에 따르거라. 지금 당장 무기를 버리고 내 앞으로 와서....

"내가 미쳤냐?"

- 어, 어?

안 통했다.

요호가 자랑하는, 숲에 찾아온 공략대를 홀렸던 환각 능력이 아예 먹히지 않았다.

진현우가 요호를 한심하다는 듯 봤다.

그 눈빛이 몹시도 열받았다.

- 이, 이익! 네놈도 내 노예가!

요호는 다시금 환각을 사용했지만, 진현우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놈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 왜냐? 왜 네놈에게는 환각이....

"내가 가진 아이템이 좀 좋아서."

- 뭣이라?

요호가 인상을 구겼다.

환각에 저항하는 물건을 가진 것인가? 하지만 이 숲은 그런 물건의 효과를 감소시킨다.

그럼에도 저 정도의 저항력을 가졌다는 것은, 강력한 물건을 여럿 가지고 있다는 뜻.

- 아쉽구나. 쉽게 해결하려고 했거늘, 기어코 어려운 길을 자처해서 가려고 하다니.

"뭔 개소리야?"

- 닥쳐라!

요호가 노성을 터트리자 주변의 플레이어들이 움직이더니 진현우를 포위했다.

그 숫자가 대강 20명 가까이 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흥! 생각보다 실력은 있군. 그래도 이 숫자를 혼자 상대할 수는 없겠지.

요호는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분신을 만들어 냈다. 그러자 진현우 주변을 플레이어들과 여우들이 빼곡하게 메웠다.

그 숫자가 100은 넘을 것 같았다.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숫자였다.

- 이 정도의 힘을 지닌 인간이면 강한 정기를 가졌겠지. 쿠후후, 그 정기가 탐나는구나.

요호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놈은 자신의 유리함을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놈이 유리했다. 진현우가 이번에 새로이 익힌 스킬을 쓰기 전까지는.

- 스으으....

- 뭘 하려는 것이냐? 저놈을 쳐라!

진현우가 손을 뻗었다. 그 손아귀에 사이한 기운이 응집하더니 거대한 깃발로 화했다.

새까맣고, 피로 칠갑한 깃발이었다. 그는 거대한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린 후 땅에 꽂았다.

그러자.

- 화아아악!

- 큭, 으으윽?!

땅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검보랏빛의 마법진. 그걸 본 순간, 요호는 참을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 불길함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 구우우우....

- 크아아아악!

용서받지 못할 괴물들이 지하에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썩은 살점을 가진 괴물, 살점은 하나도 없이 뼈만이 남은 괴물까지.

언데드들이었다.

- 영역 선포.

폭군이 수도 아빌론에서 선보였던 그 광대한 마법진을, 지금 진현우가 사용했다.

당연하지만 폭군이 사용하던 것에 비하면 열화판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성능이었다.

하나.

- 네놈, 사령을 다루는 놈이었나! 큭!

열화판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스킬이었다.

한때 폭군을 섬겼던 언데드 부대가 진현우의 앞에 도열했다. 그 종류도 다양했다.

구울, 스켈레톤과 메이지, 듀라한.

그리고 거대한 누더기 골렘까지.

- 구오오오오오!

- 키아아아악!

진현우가 착용한 폭군의 진노가, 전쟁 영웅의 부츠가 언데드들을 강화했다.

언데드들의 몸집이 한층 거대해졌고, 생기를 잃은 눈동자에 광기 가득한 빛이 어렸다.

그걸 본 요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어떻게... 믿을 수가 없군. 신성한 힘을 다루던 놈이 이런 불길한 힘을 다룬다고?

상극의 힘을 다룰 수 있다니.

요호로서는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놀랄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스르륵!

"...!"

돌진하던 플레이어들의 발아래에서 나무뿌리와 줄기가 나타나더니 그들을 묶었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 언데드가 움직였다.

"여우들은 죽여라. 사람들은 상처는 입혀도 되지만 죽이지는 마라. 움직여!"

- 주인님을, 위해서....

진현우의 명령을 받은 언데드들이 자연의 속박에 당한 플레이어들을 덮쳤다.

가장 선두에 선 누더기 골렘이 공격을 받아 내면서 적들을 무자비하게 쓰러트렸다.

구울들이 쓰러진 적들의 위에 올라탔고, 듀라한과 스켈레톤들은 여우들을 공격했다.

- 캬아아아앙!

- 윽,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리고 진현우가 움직였다.

섬광이 번뜩였다. 순식간에 요호의 앞까지 도달한 진현우는 곧바로 도끼를 투척했다.

네 자루의 도끼가 얼음 결정을 동반한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요호를 덮쳤다.

- 크으으으! 감히, 감히!

요호는 날아드는 도끼를 앞발로 쳐 냈지만, 모든 도끼를 쳐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두 자루의 도끼가 놈의 몸을 꿰뚫었다. 그리고 동시에 진현우가 앞으로 돌진했다.

- 이노오오옴!

진현우는 되돌아오는 도끼를 받으면서 크게 도약했다. 그리고 붉게 물든 도끼로 요호의 등을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 크하아악! 감히, 인간 따위가!

"이런 놈들은 왜 말하는 게 똑같지?"

- 뭣이라?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요호가 분노하며 꼬리를 휘둘렀다.

여섯 개의 꼬리 끝에 거대한 혼령 불이 맺히더니 동시에 진현우를 향해서 쏘아졌다.

그는 피하지 않고 방패를 앞세웠다.

- 화르르륵!

빛의 수호가 쏟아지던 불꽃들을 막아 냈다. 흑마법이었다면 반사할 수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혼령 불은 흑마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막아 내기에는 충분했다.

- 막아 낸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으냐!

"그럼 도망치면 되나?"

요호가 노성을 내지르며 앞발을 휘둘렀다.

놈이 가진 발톱은 칼날같이 길었으며, 하나같이 치명적인 예기를 지니고 있었다.

진현우는 땅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다.

- 콰아앙!

-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인간!

발톱이 허공을 스쳤다.

하지만 요호는 멈추지 않고, 두 발에 힘을 실으면서 강하게 땅바닥을 내리쳤다.

땅 아래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렀다.

- 화아아악!

진현우의 발아래 땅이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검보랏빛의 불길이 기둥처럼 치솟았다.

그는 방패를 아래로 내리면서 신성한 방패를 전개했다. 거대한 방패가 펼쳐졌다.

- 콰드드드득!

검보랏빛의 불길이 방패를 덮쳤다.

어지간한 강철은 단번에 녹여 버릴 정도의 화력이었지만, 신성한 방패는 막아 냈다.

진현우는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불길을 막아 낸 반동을 역으로 이용하여 요호에게로 포탄처럼 쏘아졌다.

- 이놈! 큭, 크으으윽!

요호의 등에 올라탄 진현우가 무자비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살점이 베이는 고통에 비명을 내지른 요호가 이를 악물었다.

놈의 몸이 흐릿해졌다.

"어딜!"

- 크아아아악!

영체로 변해서 도망치려는 것이다.

진현우는 마르실의 성검을 빼 들더니 요호의 가슴께를 향해 있는 힘껏 투척했다.

수직으로 쏘아진 검이 요호를 꿰뚫었다.

- 하악, 흑, 으아아아!

요호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진현우는 파쇄권으로 허공을 후려쳤다. 충격파가 마르실의 성검 자루를 타격했고, 칼날이 더욱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게끔 했다.

놈의 흐릿해졌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슬슬 때가 됐나.'

진현우는 부서진 검을 빼 들었다.

이번 전투에서 이걸 쓰지 않은 이유는 요호가 영체로 변해서 도망치는 걸 우려해서였다.

부서진 검의 검기는, 그리고 웨펀 마스터의 스킬은 말도 안 되는 마력을 소모한다.

'확실한 기회를 노려서 단번에 끝낸다.'

요호가 한번 영체로 변했다가 풀렸으니 한동안은 영체로 변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 마무리를 지을 기회였다.

진현우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오지 마라, 내게, 오지 말란 말이다!

요호는 큰 위협을 느꼈다.

죽는다. 이대로는 죽을지도 모른다. 여태껏 느껴 본 적 없는 강렬한 공포심이 느껴졌다.

그 감정이 요호를 움직이게끔 했다.

'지금은 정기를 아낄 때가 아니다.'

요호는 가진 정기를 모조리 사용했다.

정기는 곧 마력으로 바뀌었고 요호에게 강력한 힘을 선사했다. 놈은 체내를 흐르는 엄청난 양의 마력을 느꼈고, 곧 그걸 소모했다.

- 죽여 주마. 네놈을 반드시!

요호가 흐릿해진 꼬리들을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 혼령 불이 나타났다. 하나가 둘로, 둘이 넷으로, 넷이 열여섯으로.

순식간에 증식해 나가는 혼령 불이, 이제는 셀 수 없는 숫자가 되어 하늘을 뒤덮었다.

- 화르르륵!

- 크아아아아아!

하늘을 뒤덮은 혼령 불이 일제히 낙하했다.

그건 유성우를 보는 것만 같았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혼령 불이 같은 지점으로 향했다.

바로 진현우가 있는 곳을 향해서.

- 죽어라!

진현우는 천천히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의 검이 빛을 발했다. 탐욕스럽게 마력을 흡수한 부서진 검이 시퍼런 검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검을 치켜세웠다.

'멍청한 놈, 검 한 자루로 뭘 하겠다고!'

하늘을 뒤덮은 혼령 불은 고작 검 한 자루로 막거나 튕겨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미 늦었다. 저놈은 죽었다.

요호는 그렇게 확신했다.

- 뭐, 무슨...!

하나 그 확신은 깨졌다.

진현우의 팔이 움직였다. 그 손에 쥔 검이 흐르는 강물처럼 너무도 평온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요호는 인지할 수 없는 신묘한 움직임으로, 쏟아지는 혼령 불을 모조리 쳐 냈다.

- 이놈, 무슨 짓을, 대체...!

보이지 않는다. 인지할 수 없다.

진현우는 혼령 불 각각의 궤적을 정확하게 읽어서 검기로 쳐 내고, 흘려 내고 있었다.

그렇게 쳐 낸 혼령 불들이 방향을 틀었다.

- 크아아아아악!

바로 요호를 향해서.

요호는 진현우가 쳐 낸 혼령 불이 자신을 덮치는 것을 보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놈은 이를 악물었다.

'검으로 쳐 낸다고? 그렇다면!'

쳐 낼 수 없게끔 만들면 된다.

요호는 자신을 덮치는 혼령 불들을 무시하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진현우에게 쏟아지던 하늘의 혼령 불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자석에 끌리듯 뭉치기 시작했다.

- 쿠르르... 화르르륵!

뭉치고 또 뭉치고, 그렇게 뭉치기를 반복한 혼령 불의 모습이 점점 거대해졌다.

이윽고 혼령 불들이 모두 뭉쳤을 때, 하늘에는 검보랏빛의 거대한 태양이 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마력을 담았다.

요호는 이를 악물며 한데 뭉친 혼령 불을 쏘아 냈다. 거대한 태양이 진현우에게 엄습했다.

맹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가까워질수록 타들어 갈 것 같은 뜨거움이 피부를 덮쳤다.

"후우."

진현우는 크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다가오는 태양을 향해서 역으로 섬광을 써서 거리를 바짝 좁혔다.

그 기행에 요호가 경악했다.

'거리를 좁혔다고? 어째서?'

그 대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부서진 검이 진현우의 몸에 남은 마력이라는 마력은 모조리 흡수했다. 그 마력이 검에 모조리 모였고, 한계치까지 응축했다.

진현우는 상반신을 크게 젖혔다.

- 서걱!

그는 태양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일거에 갈라진다. 그 사이로 수많은 검기가, 말 그대로 쏟아졌다.

검에 한계치까지 응축된 검기가 해방됐다.

- 콰르르르르!

- 무, 무슨!

그리고 검기가, 태양을 갈랐다.

쏘아지는 수많은 검기가 거대한 혼령 불과 충돌했다. 검기는 혼령 불을 베어 내고, 그 안에 담긴 마력들을 탐욕스럽게 흡수했다.

- 마, 말도 안 되느니라. 이건....

태양처럼 거대하던 혼령 불의 기세가 점점 잦아들었다. 검기에 베일 때마다 그 크기가 줄었고, 내뿜던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검기가 혼령 불을 베어 냈을 때, 더 이상 남은 혼령 불은 없었다.

- ....

하늘을 뒤덮던, 요호가 여기서 모은 정기를 모조리 써서 만들었던 혼령 불이 사라졌다.

모두 다, 하나도 남김없이.

그 사실을 깨달은 요호가 넋을 잃었다.

"그리즐리 베어!"

- 쿠어어어엉!

바로 그때였다.

진현우는 거대한 곰을 소환하면서 돌진했다. 곰은 당황한 요호를 힘껏 들이박았다.

요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지금.'

남은 마력은 거의 없었다.

그런 진현우와 달리, 혼령 불을 흡수한 부서진 검이 찬란한 검기를 내뿜었다.

그는 땅을 박차며 검을 휘둘렀다.

- 촤아악!

- 크....

일섬.

허공을 가르는 검기가 요호의 오른발을 베어 냈다. 균형을 잃은 요호를 곰이 짓눌렀다.

요호가 남은 왼발을 허우적거렸다.

진현우는 몸을 크게 회전하면서, 번개처럼 검을 내질러 요호의 왼발마저 베어 냈다.

- 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두 발을 잃은 요호가 땅에 상반신을 처박았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진현우는 놈의 코앞에 검을 내리꽂았다.

"너한테 제안을 하나 할 거다."

그리고 정말 갑작스러운 말을 꺼냈다.

요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진현우는 놈의 코앞까지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살고 싶으면 지금부터 내 얘기를 잘 들어."

진현우의 얼굴에 떠오른 불길한 미소.

요호의 두 눈이 떨렸다.

89화

구미, 이미

- 끅, 으으윽, 흐윽....

요호가 땅을 기었다.

앞발을 모두 잃고 몸에는 검이 꽂힌 상태. 가슴께에서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잘린 앞발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내가 이런 굴욕을 겪는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요호의 주된 공격 수단은 환각이다.

그 환각이 통하지 않는 시점에서 요호가 가진 전투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진 셈이었다.

- 안 돼. 이대로, 이대로 죽을 수는....

꼬리를 여섯 개까지 늘렸다. 요호가 오랫동안 가졌던 꿈을 이룰 때가 머지않았다.

구미가 될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하지만 이대로는 죽는다.

"살고 싶냐?"

- 윽, 당연한 말을...!

"그 상태로는 얼마 못 가서 죽어. 치명상이거든. 사람들 정기를 흡수한다면 모를까."

- 지금 날, 조롱하는 것이냐!

"아니, 선물을 하나 주고 싶어서."

진현우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영혼석이었다. 강대한 영혼을 깃들게 하며, 신비로운 효과를 다수 지닌 전설급 아이템.

- 선물, 아니 그 불길한 물건은!

그걸 본 요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저게 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하지만 저 돌을 본 순간,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 아, 안 돼! 내 혼이! 어째서?!

영혼석이 영롱한 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요호의 몸이 반투명해지더니 꼬리부터 조금씩 영혼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요호가 당황해서 허둥댔다.

- 너, 너! 날 봉인하려는 것이냐!

"아니, 뭐, 봉인할 생각은 아닌데. 일단은 영혼석 안에 가둬야지 일이 좀 진행이 되거든."

- 뭐라고? 그게 무슨... 아아아악!

만약 요호가 정상적인 상태였더라면 영혼석의 끌림에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놈은 큰 부상을 입은 상태.

저항할 수 있는 여력도 없다.

- 슈우우우욱....

- 안 돼, 안 돼! 이럴 수는, 내가, 이 요호가!

"흠, 정말 전형적인 멘트군."

거대한 요호의 몸뚱어리가 연기처럼 변하더니 영혼석 안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아름다운 수정처럼 생긴 영혼석 안에 검보랏빛의 기운이 가득 채워졌다.

요호의 영혼이었다.

- 아아아아아... 흑, 흐으윽... 안 돼애!

"야, 조용히 하고 내 말을...."

- 으아아앙! 내가 이런 곳에 갇히다니! 이럴 수는 없어, 구미가 멀지 않았었는데!

"...."

요호가 영혼석 안에서 울부짖었다.

진현우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영혼석을 움켜쥐고 마구잡이로 흔들어 버렸다.

- 끼아아아아악! 그, 그만해!

"내 말을 들을 정신이 좀 드나?"

- 날 얼마나 괴롭히려는 것이냐! 이런 곳에 가두고도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냐...!

"그러니까, 제안할 게 있다고."

- 무슨 제안 말이냐!

날이 선 반응.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를 길들이고 싶다."

- ....

순간 정적이 흘렀다.

영혼석 안의 요호가 어떤 모습인지는 모르지만, 미친 놈 보듯이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건 알 수 있었다.

- 네놈, 미친 것이냐?

"기분 탓이 아니었군. 뭐, 정상인은 아니기는 한데. 들어 봐. 너한테도 좋은 제안이야."

- 그러니까, 나더러 네놈의 애완동물이라도 되라는 것이냐? 꼬리를 흔들면서?

"다르게 말하자면 펫이지. 정확하네."

- 미친 것이냐!

요호가 고함을 내질렀다.

- 네놈이 정녕 미친 것이냐! 이런 모욕을!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요호에게 진현우의 제안은 더없이 모욕적이었다.

여태껏 하찮게 여겨 왔던 인간에게 길들여지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진현우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대신에 넌 구미가 될 수 있겠지."

- 뭣이라?

그 말에 요호가 할 말을 잃었다.

구미가 될 수 있다고? 어떻게?

"내 애완동물이 되면 널 성장시킬 수 있다. 그럴 방법이 있어. 대충 그렇게만 알아 둬."

- 설명이 너무 불친절한 것 아닌가?

"그렇지. 근데 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진현우가 영혼석을 꽉 움켜쥐었다.

"너한테 선택지는 둘이야. 내 제안을 받는다, 거절하고 영혼석 안에 평생 갇힌다."

- 흐윽...!

영혼석 안의 요호가 벌벌 떨었다.

이 좁은 공간 안에 평생 갇혀 있어야 한다니,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다.

"잘 생각해라, 요호야. 네 목적이 뭐냐? 구미가 되어서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것 아니었냐? 내가 그걸 도와주겠다는 거야. 응?"

- 그걸 인간, 네가 어떻게 아는....

"이대로 뻗대면 넌 내 손에 죽어. 죽는 것보다는 살아서 구미호가 될 기회를 노려 보는 게 낫지 않겠냐? 물론 좀 구질구질하긴 하다만."

- 구질구질하다고, 제 입으로....

영혼석에 서늘한 도끼날이 드리웠다.

진현우의 눈빛은 살인마처럼 차가웠다.

"참고로 네가 갇힌 영혼석을 파괴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해? 영혼석을 부숴서 영혼까지 같이 없애 주마."

- 히이익!

오들오들.

영혼석 안의 요호가 벌벌 떨었다.

조금 전의 저 인간이 보였던 위용이 떠올라서였다. 저 인간이라면 저러고도 남는다.

'죽는다,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말은 진심일 것이다.

거절하면 죽는다. 기분 나쁜 빛을 내뿜는 검으로 한 번에 베일 것이다. 그럼 죽겠지.

그건 싫다.

'승천, 나는 승천하고 싶어.'

꼬리가 아홉 달린 요호는 천상에 오를 수 있다. 승천하여 지금까지의 육신을 벗어 던지고 보다 고차원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노리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구미가 되고 나면 이 영혼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

물론 요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진현우는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영혼석을 도끼로 긁었다.

"시간 없다. 빨리 선택해라."

- 끼아아악! 알겠느니라! 네 제안에 응하겠다! 날 길들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란 말이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진현우가 씨익 웃었다.

요호가 그리 말하자, 놈이 갇혀 있는 영혼석이 영롱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 무, 무엇이냐? 왜 이러는 것이냐?

진현우가 요호를 영혼석 안에 가두고 설득하는 귀찮은 과정을 왜 거쳤겠는가.

다 이유가 있었다.

- 영혼 중재에 성공했습니다. 영혼석에 깃든 영혼이 당신의 설득에 응했습니다.

영혼 중재 특성을 발동하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정수에 담긴 영혼을 중재해서 소환 가능한 영혼 동물 목록에 추가하는 특성.

영혼석을 정수라고 치고, 요호를 직접 설득하는 방식으로 특성을 발동한 것이었다.

- 영혼석에 깃든 신비로운 힘이 영혼 중재에 반응하여 기적을 일으킵니다. 영혼석이 당신의 내면에 깃들고 있습니다....

찬란한 빛을 내뿜던 영혼석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진현우에게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 빰빠밤!

- 요호가 펫으로 등록되었습니다!

- 스킬: 펫 소환 (S)이 새로이 생겼습니다.

맥 빠지는 팡파르 소리를 내면서 그런 메시지가 나타났다. 진현우는 심드렁한 얼굴로 메시지를 끄면서 스킬을 사용했다.

스으으, 검보랏빛 기운이 흘러나왔다.

"캬오오오오!"

"...."

그 검보랏빛 기운이 뭉치더니, 자그마한 여우가 진현우의 눈앞에 나타났다.

조금 전의 요호가 새끼였을 때 이렇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자그마한 모습.

요란스레 울부짖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쿠후후, 나왔느니라! 그 갑갑한 영혼석에서 나왔느니라! 이렇게 기쁠 수가...!"

요호가 허공에서 방방 뛰고 있다.

한참 동안 해방의 즐거움을 느끼던 요호가 진현우를 보더니 묘한 눈빛을 보냈다.

파앙, 갑작스러운 연기가 요호를 가렸다.

"후후, 인간. 날 길들여서 뭘...."

"꼬맹이가 건방지게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아악!"

요호의 모습이 변했다. 검보랏빛의 장발이 눈에 띄는, 귀여운 인상의 꼬마 여자애로.

진현우는 그 머리에 딱밤을 놨다.

"때, 때렸어! 날! 나, 나를?! 인간, 넌 눈도 없느냐? 인간 눈에도 아름다울 날 보고도!"

"거울이나 봐라, 인마. 네 모습이 몇 시간 전의 네 모습하고 똑같은지, 아니면 다른지."

"어? 그게 무슨 소리...."

진현우가 방패를 꺼냈다.

빛의 수호는 반짝거려서 거울 용도로도 쓸 수 있다. 그걸로 요호의 얼굴을 비췄다.

"아."

요호는 봤다.

방패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그녀가 기억하는 아름다운 미인의 모습이 아니라.

"아아."

10살 남짓한 꼬마가 된 모습을.

당황한 요호는 황급히 둔갑을 풀었다. 자신의 자랑스러운 요호의 모습을 기대하고서.

하지만 이번에도 틀렸다.

"아아아아...."

거대한 괴물 여우가 아닌 너무도 자그마한 새끼 여우가 방패에 비치고 있었다.

그녀가 자랑하던 여섯 개의 꼬리는 모두 사라지고 겨우 두 개의 꼬리만 보였다.

"꺄아아아아악!"

요호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내 모습이 왜 이런 것이냐?! 내 자랑이었던 여섯 개의 꼬리는 어디로 간 것이냐!"

"내가 어떻게 아냐? 사라졌겠지."

"그게 왜 사라진 것이냔 말이다!"

"왜긴 왜야. 마지막에 이기겠다고 온갖 발악을 다 하더니 그때 다 썼겠지."

"아!"

요호는 마지막에 가진 정기를 다 써서 진현우를 공격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이, 이럴, 이럴 수는 없느니라. 내 꼬리. 내가 오랜 세월을 들여서 늘린 꼬리가!"

"거, 더럽게 말 많네. 없어진 걸 어떡해?"

"이, 이이익! 네가 뭘 알아!"

"죽을래?"

"쿠우웅...."

작은 여우가 몸을 움츠렸다.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요호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요호]

· 레벨: 10

· 종족: 요호

-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요괴다. 가진 잠재력이 어마어마하며 한때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크게 약화된 상태다. 하지만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서 원래 힘을 되찾고, 더 높은 등급에 이를 수도 있다.

· 등급: 전설

[특성]

· 요호 (S), 정기 흡수 (S)

· 이미 (C), 요호의 인정 (C)

[스킬]

· 마안 (B), 매혹 (B)

· 둔갑 (C), 혼령 불 (C)

진현우는 혀를 찼다.

마지막에 발악할 때부터 짐작하긴 했는데, 요호가 생각 이상으로 약해졌다.

아무래도 꽤 키워야 할 것 같다.

[설명]

· 요호 (S):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요괴 여우. 신비로운 힘으로 몸을 영체로 바꿀 수 있다. 일반적인 펫보다 월등히 강하게 성장한다.

· 정기 흡수 (S): 생명체의 정기를 흡수할 수 있다. 적이 죽었을 경우 자동으로 정기를 흡수하며, 이를 통해 요호는 성장한다.

· 이미 (C): 두 개의 꼬리를 가졌다. 꼬리가 늘어날수록 강해지며 매혹의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또한 특성과 스킬에 변화가 생긴다.

· 요호의 인정 (C): 요호가 마지못해 당신을 인정했다. 주인의 대미지가 5% 상승하며, 정신 계열 공격에 대한 저항력을 소폭 강화한다.

· 마안 (B): 눈을 마주친 자의 정신을 뒤흔들어 각종 환각을 보게끔 하는 마안이다. 원래는 굉장히 강했으나 지금은 약해졌다.

· 매혹 (B): 상대를 매혹해 지시에 따르게끔 한다. 요호가 약화된 탓에 성공 확률이 낮다. 상대가 취약할 때 성공 확률이 올라간다.

· 둔갑 (C):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한다.

· 혼령 불 (C): 혼령 불로 적을 공격한다.

등급이 높은 펫은 그 존재만으로 주인에게 강력한 버프를 주고는 한다.

요호의 인정이라는 특성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은 등급이 낮아서 저 모양이지만, 등급이 높아지면 성능이 꽤 좋아질 것이다.

"내 꼬리, 내 꼬리가아...."

"이놈을 언제 키우느냐가 문제겠군."

진현우는 이마를 짚었다.

90화

99%

나무가 불타고 있다.

요호가 공을 들였던, 강한 정기를 품었던,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정기를 품을 계획이었던 거대한 나무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쿠후, 쿠후후... 보거라, 인간. 내 세월이 쓰레기처럼 불타고 있구나. 재밌지 않느냐?"

"너 괜찮냐? 내가 머리를 세게 때렸나?"

"쿠후후, 쿠훗... 크흐으응...."

요호가 구슬프게 울었다.

진현우는 녀석을 무시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거면 게이트 목표도 달성한 거 아닌가?'

게이트의 목표는 신비로운 숲을 파훼하는 것이었다. 요호가 사실상 죽은 셈이 됐고, 숲의 결계 핵심이었던 나무도 파괴되었다.

게이트를 클리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니나 다를까.

- 신비로운 숲을 완전히 파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게이트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 이계의 문이 닫힙니다. 잠시 후, 게이트 내부의 플레이어들을 바깥으로 전송합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했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진현우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환각의 효과가 끝난 플레이어는 모두 기절한 상태였다.

- 플레이어들의 '기여도'를 측정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기절했지만 기여도 측정은 이어졌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 축하드립니다. 플레이어 '진현우'. 99%로 최고 기여도를 달성했습니다.

- 99%의 기여도를 다시 달성한 보상으로 칭호, 나 혼자서 한다 (영웅)가 강화됩니다.

[나 혼자서 한다 (영웅)]

- 효과: 게이트 내부에 있을 때 능력치와 대미지 +15%가 증가함.

저번 게이트에서 그랬듯이, 이번 게이트 역시 진현우 혼자서 깬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일까, 이전에 얻었던 '나 혼자서 한다' 칭호의 효과가 5%씩 강화되었다.

'좋네. 워낙 좋은 칭호니까.'

게이트 안에서 저만큼 능력치와 대미지를 올려 주는 칭호를 또 어디서 구하겠는가.

그리고 보상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진현우는 거대한 나무를 바라봤다. 불타고 재만 남은 나무의 중심부에서 갑자기 빛이 나더니, 거기서 자그마한 결정체가 나타났다.

결정체는 진현우의 손아귀로 들어왔다.

[불타고 남은 정기의 결정체 (영웅)]

· 설명: 거대한 나무에 남아 있던 결정체가 불타고 남은 것이다. 숲의 생명들과 여러 인간의 정기가 결정체 안에 남아 있다.

· 옵션: 다수의 경험, 귀속.

* 다수의 경험: 복용할 경우 모든 능력치를 +5 상승시킨다. 또한 A 등급 이하의 스킬 하나의 숙련도를 3단계 상승시킨다.

* 귀속: 획득자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능력치와 숙련도를 올려 주는 아이템이었다.

진현우가 결정체를 쥔 채 생각에 잠겨 있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요호가 말을 걸어왔다.

"나무에 남은 정기로구나. 맞느냐?"

"어. 왜, 너한테 줄까?"

"그 오랜 세월의 흔적이 이것밖에... 크흥! 가능하다면 내가 먹고 싶다만, 나한테는 별 효과가 없을 것 같느니라. 네가 먹거라."

사실 딱히 줄 생각도 없었다.

진현우는 입가를 매만졌다.

'숙련도를 올려 준다.... 흠, 뭐에 쓰지?'

5단계를 올려 주는 거였으면 유수에 썼을 건데, 3단계라서 살짝 고민이 됐다.

어쨌든 그건 나중에 고민할 일.

"야, 너 일단 들어가 있어라."

"들어가라고? 그래, 안 그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느니라...."

어지간히도 충격을 받았는지, 요호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영혼석 안으로 돌아갔다.

숲 저 너머에서 거대한 빛이 보였다.

게이트가 빛나고 있는 것이다.

- 플레이어들을 바깥으로 전송합니다.

진현우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몸이 흐릿해졌다. 이미 죽은 정석만은 예외였다.

게이트 안에서 죽은 플레이어는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고 게이트와 함께 사라진다.

'증거 인멸하기에 제격이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

진현우는 눈을 감았다.

* * *

'신비로운 숲' 게이트의 입구에는 협회의 직원들과 여러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숫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기자들이 뭐 저리 많댑니까?"

"이번 게이트에 유명한 사람이 참가했다더만. 그, 이름이 뭐더라. 기억이 안 나네."

"진현우요?"

"어어, 그 사람."

비욘드라는 길드도 나름 인지도가 있지만, 저 정도의 기자들을 모으기에는 부족하다.

진현우가 A 등급 게이트를 공략한다는 소식에 많은 기자가 뉴스를 노리고 온 것이었다.

"이야, 유명하긴 엄청 유명한가 보네."

"원래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이번에 에픽 퀘스트 깨면서 확 유명해졌다더라고요."

"아, 2층 에픽 퀘스트? 그럴 만도 하지."

지금까지 몇 개 나오지도 않은 에픽 퀘스트를 플레이어 개인이 주도해서 성공했다.

이런 상황이니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프레아 왕국은 상황이 나아지거든 진현우와 성녀의 동상을 만들겠다고 선포할 정도였다.

"소문으로는 여러 길드도...."

"저기... 안녕하세요?"

"예?"

직원들끼리 얘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기자 하나가 다가와서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헌팅 일보 주은영 기자인데요. 혹시 이번 게이트 공략 예상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공략 예상 시간이요. 글쎄요, 이 레벨대의 A 등급 침식형 게이트면... 정말 잘 풀려야 3일? 안 풀리면 1주일 넘게 걸리죠."

"그렇군요! 많이 위험한가요?"

"예, 말할 것도 없죠. A 등급인데요."

스마트폰으로 뭘 열심히 입력하던 기자의 두 눈이 갑자기 반짝거렸다.

"그럼 만약에 말인데요, 그걸 3일보다 더 빠르게 공략하는 경우가 생기면...."

"엄청 화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뭐, 그럴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 싶긴 한데요."

"침식형 게이트니까 좀 힘들겠죠?"

"예,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기자가 해맑게 웃으며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기자는 한숨을 토했다.

"저 기자 말이야. 이번 게이트가 빨리 끝날 거라고 믿는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인가?"

"진현우가 있어서 그러는 거겠죠."

"나 참, A 등급 게이트를 뭘로 보고."

침식형 게이트는 워낙 위험하다 보니 유명 길드들도 신중하게 공략하는 곳이다.

진현우라는 플레이어가 최근 유명해져서 그런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직원은 그리 생각했고.

"어, 어어! 게이트가 열립니다!"

"뭐라고?!"

바로 그때, 닫혔던 게이트가 열렸다.

대화를 나누던 직원들이 경악했다. 아직 하루도 채 안 됐는데 게이트가 열렸다고?

이건 좋은 소식이 아니다.

"시발, 공략 실패한 거 아냐?!"

"아직 탈출도 불가능한 시간 아닙니까?"

"하루 만에 공략에 실패한 거면...!"

난이도 측정이 잘못됐다는 뜻.

드물지만 없는 케이스는 아니다. 협회 직원들이 허둥거리면서 바삐 움직였다.

기자들의 카메라도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게이트가 열렸다.

- 화아아악!

사방을 뒤덮는 빛.

게이트 너머에서 한 무리의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본 직원들은 일단 안도했다. 일단 공략에 실패한 건 아닌 모양이다.

'어?'

맞다.

공략에 실패한 건 아니다.

그리고 지금은 게이트를 탈출할 수 있는 시간도 아니다. 이게 뜻하는 것은....

'게이트 공략에 성공했다고?'

게이트 공략 성공.

이번 공략대가 A 등급의 침식형 게이트를 하루 만에 공략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직원은 조금 전의 기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그것 보라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더니 막 열린 게이트를 향해 뛰어갔다.

"미친."

사라져 가는 게이트.

그 앞에 기절한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홀로 서 있는 진현우의 모습도.

그걸 본 직원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혼자서 공략했다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직원은 달려 나갔다.

무엇보다 우선 기자들을 막아야 한다.

"진현우 씨! 헌팅 일보의 주은영 기자입니다!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오신 건가요?!"

"다른 분들은 왜 기절하신 겁니까!"

"아, 아! 모두 나오세요! 비키세요! 기자회견 할 시간은 따로 드리는 거 알잖습니까!"

"구급대! 기절한 플레이어들부터! 아니, 잠깐만. 여기 일반인들도 있다! 이 사람들부터!"

몰려드는 기자들과 그들을 막는 직원들로 현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 광경을 본 진현우가 속으로 혀를 찼다.

'개판이구만, 개판이야.'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 * *

게이트 공략이 끝났다.

진현우는 현장 근처에 마련된 텐트 안에서 협회의 직원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김이 올라오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플레이어 협회 소속의 이택권 부장입니다. 게이트를 공략하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바로 쉬고 싶으시겠지만, 이게 참...."

"저희도 사정 청취를 해야 해서...."

"예, 괜찮습니다. 뭐든 물어보시죠."

직원들이 면목 없다는 듯 말했다.

A 등급 침식형 게이트 공략이 하루 만에 끝난 데다가 플레이어들은 죄다 기절한 상태.

급하게 사정 청취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 게이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플레이어들이 다 기절했던데요."

"환각에 당했습니다."

"환각, 말입니까?"

"예. 신비로운 숲의 기믹입니다. 플레이어들을 환각에 시달리게 해서 분열을 일으켰죠."

환각이라니.

보급품에는 환각에 대비할 수 있는 아이템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게 통하지 않았다는 건데, 그 정도면 A 등급 게이트 수준이 아니다.

직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정말 죄송하지만... 플레이어분들 중에서 몇몇 분이 안 계시던데요. 설마."

"...예.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진현우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더없이 서글픈 목소리를 자아냈다.

"안에 요호라는 강력한 보스 몬스터가 있었습니다. 사람을 잡아서 생명력을 흡수하는 괴물이었죠. 제가 정석만 길드장님과 다른 플레이어들을 찾았을 때는 이미...."

"...생명력을 다 흡수당한 상태였군요."

협회 직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비욘드의 길드장이 그렇게 허망하게 당할 줄이야. 그 정도의 게이트였단 말인가.

"A 등급의 게이트가 아니었습니다. 저도 한 번 홀렸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습니다."

"어떻게 정신을 차리신 겁니까?"

"아이템 덕분입니다. 에픽 퀘스트를 깨면서 얻었던 보상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죠."

"그 보상은...."

"그건 말씀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택권은 침음성을 흘렸다.

더 묻고 싶었지만, 말하는 걸 꺼리는 것을 보니 몹시 귀한 아이템인 게 분명했다.

괜히 알려졌다가 아이템을 탐낸 이들 때문에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협회로서는 프라이버시를 존중할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택권은 진현우에게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들을 물어본 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기여도를 여쭤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기여도 말입니까?"

"예. 협회 보상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현우는 잠깐 생각하더니 메시지창을 띄웠다. 일부 메시지의 경우에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끔 띄우는 것이 가능했다.

바로 기여도처럼.

- 축하드립니다. 플레이어 '진현우'. 99%로 최고 기여도를 달성했습니다.

"...."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본 이택권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여도 99%. 혼자서 깼다는 뜻이다.

A 등급의 침식형 게이트를, 비욘드 길드와 함께 들어간 게이트를 개인 플레이어 혼자서.

'기자들이 난리가 나겠군.'

특종이라고 얼마나 난리를 부릴지.

이택권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91화

지금부터 네 이름은

'기자들이 난리가 나겠군.'

이택권의 그 생각은 적중했다.

바로 다음 날, 각종 언론과 플레이어 커뮤니티에 진현우에 대한 기사가 쏟아졌다.

- A 등급 게이트 [신비로운 숲] 공략 완료.

- 이번에도 99%의 기여도를 달성한 플레이어, 진현우는 단독으로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고 갇힌 일반인들을 구출했다고 합니다.

- 비욘드의 길드장 '정석만' 사망.

- [칼럼] 얼마 전부터 꾸준히 화제가 되고 있는 진현우, 그의 클래스는 대체 무엇인가?

정석만이 죽었다.

그 소식은 사람들에게 꽤 충격을 줬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는 없었다.

- 정석만이 죽었네. 실력은 있지 않았나?

- 죽든 말든. 저 새끼 뒷소문 구리잖아. 길드 키우겠다고 별짓을 다 하고 다닌다던데.

- ㅇㅇ; 그 칼리 길드하고 친하다고 함.

- 잘 죽었네 ㅋ 근데 요즘 임천우는 뭐 함?

- 몰라? 요즘 딱히 하는 게 없나, 안 보임.

임천우는 게이트 안에서 죽었지만 아직까지 그 사실이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협회는 게이트에서 사망한 플레이어들의 신변을 조사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이번 공략대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게 될 것이다.

임천우의 죽음은 알려질 수밖에 없다.

'뭐, 내가 죽였다는 건 모르겠지.'

의심하는 사람은 생길 수도 있겠지만,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게이트를 공략하고 며칠이 지났다. 진현우는 집에서 기지개를 켰다.

"인간, 저것 봐라. 네 얼굴이 나오고 있다. 저 상자는 꽤 신기하구나. 요술인가?"

그의 앞에는 자그마한 여우 형태를 취한 요호가 두둥실, 여유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놈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기자회견을 보는 중이었다. 진현우의 기자회견이었다.

"오호, 이제 보니 그때 그 자리구나. 인간들이 굉장히 많았었지. 스읍, 정기가...."

"멋대로 정기 빨고 그러면 죽는다."

"머, 머, 먹고 싶지는 않구나!"

요호는 귀를 바짝 눕히더니 덜덜 떨었다.

마안도, 매혹도 통하지 않는 괴물이다. 진현우한테 얻어터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게다가 지금은 저 남자한테 종속된 상태 아니었던가.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근데 인간, 뭘 그리 열심히 쓰는 것이냐?"

"너 어떻게 죽였나 쓰고 있지."

"그런 불길한 걸 도대체 왜...."

진현우는 이번 게이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협회에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기믹을 가진 게이트였는가,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리고 진현우가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 요호를 어떻게 공략했는가.

"젠장, 더럽게 귀찮네."

"날 어떻게 잡았는지 적는 걸 보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느니라...."

요호가 심란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진현우를 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살짝 의아했다.

"하루 만에 너무 온순해지지 않았냐?"

"쿠후, 내가 격하게 저항하기를 바랐느냐? 네 애완동물이 되기는 싫느니라! 하면서."

"그랬으면 영혼석을 칼로 긁었을 거다."

"너, 넌 발상 하나하나가 끔찍하구나!"

요호는 꼬리를 껴안으며 부르르 떨었다.

영혼석이 깨지면 요호는 영혼째로 사라진다. 그런 영혼석을 무식하게 칼로 긁겠다니!

극악하고도 무도한 발상이었다.

"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느냐. 날 구미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말에 기댈 뿐이다. 그래서 그냥 따르기로 한 것이다."

"오, 상황 파악이 빠른데? 마음에 들어."

"흐, 흐흥. 정기를 흡수할 기회는 따로 주지 않아도 괜찮느니라. 네가 생명체를 죽이면 거기서 나오는 정기를 흡수하면 되니까."

플레이어가 얻는 경험치와 비슷한 셈이다.

진현우가 몬스터를 죽이면 경험치를 얻는 것처럼 요호도 알아서 정기를 흡수할 것이다.

딱히 신경 써 줄 필요가 없다는 뜻.

"가능하면 강한 생명체를 죽여 줬으면 한다. 그러면 더 많은 정기를 얻을 수 있을 테니."

"그건 어렵지 않지. 내 옆에 있으면 정기는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을 거다."

"쿠후후, 마음에 드는 소리구나."

요호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그걸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맞다. 이름을 지어 줘야 하나?"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느니라. 요호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내 처지에 무슨...."

"그래? 그럼 바둑이라고 불러 줄까?"

"이유는 모르겠다만 그 이름은 싫다. 네 표정을 보니 날 놀리는 것 같아서 더더욱!"

"소리를 질러?"

요호의 꼬리가 크게 부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현우가 도낏자루를 만지작거리자 꼬리를 껴안으며 벌벌 떨었다.

"그, 그만. 그만하거라.... 너는 너무 폭력적이니라.... 뭐만 하면 무기를 만지잖느냐...."

"수백 년 동안 사람들 정기를 흡수하던 놈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냐? 나 참."

까다롭기는.

진현우는 요호의 이름을 생각하는 데 그리 긴 시간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빠르게 이름을 떠올렸다.

"그러면 미호라고 하자."

"미호? 설마 구미호의 구를 빼서 미호?"

"잘 아네. 간단하고 좋잖아."

"정말로 성의가 없는 이름이구나...."

"널 꼭 구미호로 만들겠다는 내 의지를 담은 이름이야. 설명을 들으니 마음에 들지?"

요호, 아니 미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거절하지는 않았다. 바둑이 같은 듣기만 해도 이상한 이름은 아니었으니까.

미호 정도면 나쁘지 않다. 그리 생각했다.

"나이 많은 할머니한테 붙이기에는 좀 귀여운 이름이다 싶긴 한데, 이 정도면 괜찮지."

"하, 할머... 정녕 미친 것이냐?!"

"몇백 년은 살았을 거 아냐. 할머니지."

"그 정도로 오래 살지는 않았느니라! 백 년, 내가 요호가 된 것은 백 년 정도 전이었다!"

"그래도 할머니군."

"...."

미호가 시무룩해졌다.

기껏해야 100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확실히 할머니라고 할 수 있었다.

부정할 수가 없는 게 슬펐다.

'생각보다 다루기는 편하겠는데? 요호라서 반항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녀석의 태도 변화는 만족스러웠다.

어쨌든 미호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둘 필요가 있다. 저놈이 엄청 유용하기 때문이다.

'마안에 매혹. 이 스킬들은 나도 얻기가 힘들고, 얻어도 계륵에 가까운 스킬들이다.'

진현우가 요호를 펫으로 만든 이유였다.

플레이어가 얻기 힘든 스킬들이고, 설령 얻는다고 하더라도 성공 확률이 몹시 낮기 때문에 계륵에 가까운 스킬이었다.

마인이 쓰는 마안이라면 모를까.

'특성이 있는 요호는 다르지.'

요호는 특성이 있어서 매혹의 성공 확률이 꽤 높다. 약화된 지금도 이런데, 성장한다면 매혹의 성공 확률이 더더욱 높아질 터.

마안도 마찬가지다.

'필요한 정보를 캐낼 때 굉장히 유용하다.'

탑에서 활동하다 보면 좋든 싫든 간에 사람을 심문해서 정보를 캐낼 때가 있다.

그 정보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것도 골치 아픈데, 매혹이 있으면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

'쓸모가 많은 놈이야."

진현우는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무룩해하던 미호는 갑작스러운 손길에 긴장하면서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미친 인간이다. 이러다가 갑자기 내 머리채를 잡아끌 수도 있느니라. 크흥, 무서워....'

진현우와의 전투는 미호에게 큰 트라우마를 선물했다. 미호가 그를 군말 없이 따르기로 한 것도 그 트라우마 때문이 컸다.

"좋아, 이 정도면 다 됐겠지."

진현우는 완성된 보고서를 한 번 훑어본 후 플레이어 협회의 메일로 전송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정기의 결정체. 이것도 써야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기여도 99%의 보상으로 얻은 불타고 남은 정기의 결정체였다.

무슨 스킬의 숙련도를 올릴까 잠깐 고민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결정할 수 있었다.

- 불타고 남은 정기의 결정체 (영웅)를 복용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했습니다.

- '섬광' 스킬의 숙련도가 3 상승했습니다.

진현우는 섬광을 선택했다.

지금 가진 스킬 중에서 가장 애용하는 스킬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숙련도가 오르는 속도가 느려서 까다롭기도 했고.

· 섬광 (A, Lv.7): 섬광과 같은 속도로 돌진한다. 이 스킬이 발동한 다음에 쓰는 스킬의 시전 속도가 굉장히 빨라진다.

* Lv.5: 2.5배의 마력을 소모하여 섬광을 두 번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다.

숙련도 5레벨 효과를 띄울 수 있는 레벨이라서 섬광을 선택하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두 번 연속? 괜찮네.'

두 번 연속으로 쓰면 전투에서 상대를 현혹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력 소모가 2.5배로 늘어나는 단점이 있으니 적재적소에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집에서 할 일은 다 했고."

"인간, 이제 밖으로 나가는 것이냐?"

"어. 갑옷 맡겨 둔 게 있어서. 확인할 게 있다며 오라고 해서 잠깐 가야 할 거 같은데."

"그렇구나. 그럼 나도 같이 가고 싶다."

진현우가 하는 걸 멍하니 지켜보던 미호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왔다.

미호는 인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탑 내부와 지구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으니 미호가 호기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아, 안 되느냐? 얌전히 있을 거다...."

"영체 상태로 따라와. 여우 모습이면 사람들 눈에 띌 거다. 여긴 여우가 드물거든."

"쿠후후, 걱정 말거라."

진현우는 영체 상태로 변한 미호를 데리고 네메시스 길드로 향했다.

* * *

진현우는 네메시스 길드를 들렀다.

이전에 만났던 꼬장꼬장한 노인, 강대훈이 갑옷 때문에 볼일이 있다고 해서였다.

"인간, 너희들의 세상은... 정말 크구나."

"저 건물이 좀 크긴 하지."

미호는 건물을 보며 입을 헤 벌렸다.

지상 25층 규모의 네메시스 빌딩은 녀석의 말대로 크고 세련됐다. 정문에 새겨진 검을 쥔 여성을 형상화한 문양도 예술적이었고.

"사람들도 정말 많구나! 스릅...."

"네 먹이 아니니까 침 흘리지 마라."

"아, 알고 있느니라. 이건, 크흥, 어쩔 수 없느니라. 맛있어 보이는 정기가 많잖느냐!"

"소리를 질러?"

"끼이잉...."

진현우는 기가 죽은 미호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향했다. 저번에도 그랬듯이 건물 1층에서 강대훈과 제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나. 조금 늦었군."

"약속 시간보다 빨리 온 겁니다."

"내가 말했잖나. 어르신하고 약속을 했으면 1시간은 일찍 와야 한다고. 벌써 잊었나?"

"제가 요즘 좀 바쁩니다."

강대훈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진현우를 데리고 1층의 어느 방으로 향했다. 사람이 없어 조용한 방이었다.

"그래, 유명하긴 하더군. A 등급 게이트를 사실상 혼자 공략했다던데, 사실인가?"

"거짓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사실이죠."

"흐흐, 겸손을 모르는 놈이군."

말하는 것과는 달리 강대훈은 진현우의 말투가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애초에 겸손을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갑옷은 완성됐습니까?"

"거의. 그 전에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다. 너, 폭군한테서 얻은 아이템은 없나?"

"장비 아이템 말입니까?"

"그래. 가능하면 방어구 계통으로."

있다.

진현우는 폭군의 진노를 꺼냈다. 그 아이템을 본 강대훈의 눈빛에 호기심이 어렸다.

"전설 등급 아이템이군. 허어, 근데 이건... 단순한 드롭 아이템이 아닌 것 같은데."

강대훈은 폭군의 진노를 이리저리 살폈다.

사념을 감정해서 만들어진 아이템이었으니 단순한 드롭 아이템과는 궤가 다르긴 했다.

"어떻게 이걸 얻은 건지 궁금하기는 하다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이 투구, 네가 평소에 착용하고 다니는 아이템이 맞나?"

"예. 좋은 아이템이니까요."

"잘됐군. 그럼 이 투구와 이어질 수 있게끔 갑옷을 만들도록 하지. 도움이 될 거다."

진현우가 1층에서 군단 여왕 세트를 얻었던 것처럼 세트 아이템으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잠깐 나가서 시간이나 때우고 와라. 아마 다섯 시간 정도면 갑옷이 완성될 거다."

강대훈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다섯 시간을 어떻게 때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미호가 영체 상태로 말을 걸어왔다.

미호는 영체 상태일 때는 직접 말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목소리를 전달하는 게 가능했다.

- 이, 인간. 이제부터 한가한 것이냐?

"어. 왜? 하고 싶은 거라도 있냐?"

- 으, 으음. 바깥을 돌아다니고 싶다. 자동차, 라고 했던가? 그것 말고 걸어서 말이다.

미호는 차를 타고서가 아니라 직접 걸어서 인간들의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은 눈치였다.

할 것도 없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좋아, 서울 관광이나 시켜 주지. 가자."

- 쿠후후, 재밌겠구나.

진현우는 미호와 함께 건물을 나섰다.

92화

3층, 하이아칸

갑옷은 불길한 외형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홀릴 것만 같은 묵빛. 금속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갑옷에 검은 뼈가 곳곳에 장식처럼 박혀 있는 형태의 갑옷이었다.

진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요란한데요?"

"갑옷을 보자마자 하는 말이 그건가?"

"아뇨, 음. 갑옷 자체는 괜찮습니다. 근데 외형이 눈에 띄어도 너무 눈에 띄지 않나...."

아니, 외형까지는 괜찮다.

근데 갑옷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뭐라 하기 힘들 정도로, 꺼려졌다.

'이걸 입고 다니라고?'

이런 갑옷을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것이다. 진현우라도 그럴 것이다.

그만큼 눈에 띄는 갑옷이었으니까.

"허, 나 참! 이 멋을 모른단 말인가? 이래서 어린 것들이란. 이 중후하고 멋진 외형을 모르다니! 검은 기운이 흐르는 것도 멋지잖나!"

"예, 예. 멋지네요...."

- 인간, 저 노인 정상은 아닌 것 같구나.

깜빡하고 있었다.

강대훈, 뛰어난 실력을 가진 대장장이.

다만 그가 가진 미적 센스는, 그 뛰어난 실력만큼 일반인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다.

- 쿠후후. 인간, 정말로 저걸 입고 다닐 생각인 것이냐? 수치스럽기 그지없구나!

'넌 돌아가면 영혼석부터 긁어 주마.'

- 히, 히이이익....

강대훈은 자신의 갑옷이 얼마나 멋진지 숨도 쉬지 않고 자랑하는 중이었다.

진현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좋습니다, 강대훈 어르신. 근데 제가 은밀하게 움직일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소독차처럼 저 기운을 뿌리고 다니기는...."

"흥! 하여튼 어린 것들은. 그럴 줄 알고 저 검은 기운은 원할 때 끌 수 있게끔 해 뒀네!"

"역시 대단하십니다."

소독차처럼 검은 기운을 뿌리고 다닐 뻔했는데 끌 수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진현우는 갑옷을 받았다.

[폭정의 상징 (전설)]

· 설명: 폭군의 신체 부위와 그가 쓰던 검을 이용하여 만든 갑옷이다. 그가 생전에 잔혹하게 펼쳤던 폭정을 상징하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폭군의 악기에 삼켜질 수도 있다....

· 착용 제한: 근력 160, 체력 150.

· 옵션: 검은 기운, 불허, 경량화, 약탈.

* 검은 기운: 갑옷 주변을 맴도는 검은 기운이 갑옷을 더욱 튼튼하게 만든다. 또한 갑옷이 파괴되었을 때 자동으로 수복한다.

* 불허: 마법 저항력이 30% 증가한다.

* 경량화: 착용했을 때 갑옷이 가벼워진다.

* 약탈: 죽은 적에게서 남은 생명력과 마력을 흡수할 수 있다. 적의 강함에 따라 흡수하는 양과 재사용 대기 시간이 달라진다.

진현우는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영웅 등급의 재료들만 가져온 걸로 기억하는데, 전설 등급 아이템이 만들어질 줄이야.

'아니,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건가.'

명장 강대훈.

대장장이 계통의 히든 클래스를 가진 노인. 그라면 이런 아이템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강대훈은 진현우의 표정을 보더니 웃었다.

"흥, 내가 원한 건 아니었다만 폭정이라는 옵션이 생겼더군. 쓸 때는 조심해서 쓰게. 착용자의 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

"너무 쓰면 미친다거나 그런 겁니까?"

"그럴 확률이 높다."

강대훈은 재료에 담긴 부정한 기운을 최대한 누르려고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왔던 폭군을 재료로 쓰는 것이었으니까.

전부 억누를 수는 없었다.

"뭐, 그래도 네놈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만... 조심하는 게 좋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어서 입어 봐라."

강대훈이 눈짓을 보냈다.

그는 갑옷을 세트 아이템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착용하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있을 터.

진현우는 갑옷을 착용했다.

- 폭군의 진노와 폭정의 상징이 서로 공명합니다. 세트 옵션이 활성화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리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 [폭군] 세트 옵션이 적용됩니다.

- 모든 능력치 +15.

- 보스 몬스터에게 주는 대미지 +30%.

- 공포에 빠진 적에게 주는 대미지 +30%.

- 자신보다 약한 적들을 공포에 빠지게끔 만드는 [불길한 안개] 옵션을 쓸 수 있다.

- 단 한 번, 죽음에 달하는 부상을 입었을 때 상처를 회복하고 능력치를 크게 강화한다.

"허, 이건...."

세트 효과를 본 진현우는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타 옵션은 그렇다 치고, 마지막 옵션이 말도 안 되게 좋았으니까.

'목숨이 두 개라는 거 아냐.'

가끔 이런 옵션을 가진 아이템이 있다.

정말 극히 드물고 대부분 귀속 아이템이라 구할 방법도 없어서 쓸 방법이 없지만.

그런 옵션이 지금 손에 들어왔다.

"왜, 어떤 옵션이냐? 나한테 보여 다오."

"어떤 옵션이냐면...."

"허어, 이런 옵션이 만들어졌나?"

진현우가 말해 준 세트 옵션을 들은 강대훈 역시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예상한 옵션이 아니었다.

"같은 몬스터에게서 나온 재료 아이템을 사용해서 아이템을 만들면 세트 아이템이 될 확률이 있지. 폭군 정도 되는 괴물이니까 세트 옵션이 꽤 좋을 거라 생각은 했다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강대훈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동안 밤을 새운 보람이 있구만."

"저도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감사합니다, 강대훈 어르신. 오랫동안 잘 쓰겠습니다."

"뭐, 그건 당연한 거고."

강대훈은 진현우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품속에서 지갑을 빼냈다.

그리고 거기서 명함을 한 장 꺼냈다.

"가져가라. 내 명함이다. 다음에 날 볼 일이 있거든 그 연락처로 연락하면 될 거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늙으면 딱히 새로울 일이 없지. 네놈이면 꽤 재밌는 것들을 가져올 것 같거든."

강대훈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명장이라 불리는 그는 일을 선택해서 받는다. 단순히 돈을 준다고 받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명함을 줬다는 것은, 자신에게 일을 맡겨도 되는 플레이어라 인정했다는 뜻이다.

"강대훈 님이...."

"이럴 것 같기는 했는데...."

강대훈 뒤에 있던 제자들이 소근거리는 게 들렸다. 그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스승이 인정한 플레이어는 랭커들, 그중에서도 상위권의 랭커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잘 쓰게. 다음에 또 이런 재료가 생기거든 가져와라. 나름대로 기대하고 있을 테니."

"예."

강대훈은 등을 홱 돌리고 떠났다.

제작 대금은 안 받는 건가? 명장 강대훈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남은 제자들이 진현우에게 다가왔다.

"대금 결제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그럼 그렇지. 얼맙니까?"

"음, 주신 재료 말고도 몇 개 들어간 것이 있습니다. 일단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제자가 건넨 재료 목록을 본 진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나같이 귀한 재료들에 더럽게 값이 많이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저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할부 됩니까?"

"예?"

* * *

할부가 될 리가 없다.

진현우는 네메시스 측에게 제작 대금을 지급한 후, 곧바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갑옷이 비싸기는 하지만 만족스럽다.

'3층에서 상대할 놈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 갑옷은 필요하다.

물론 아쉬운 게 없는 것은 아니다. 군단 여왕 세트가 가진 은신 효과를 잃게 됐으니까.

보호색은 굉장히 유용한 옵션이었다.

'은신하고 관련된 사념을 얻을 수밖에.'

다행히도 3층에 그런 사념이 있다. 그거면 보호색 옵션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을 터.

진현우는 짐을 챙겼다.

- 이, 인간. 영혼석은 긁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니라. 영혼석을 아껴 줬으면 하느니라.... 긁을 때마다 세상이 흔들려....

"안 부순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이제 정말 탑 3층으로 갈 때가 됐다.

며칠 후, 필요한 짐을 챙긴 진현우는 전이문을 통해서 세계의 탑이 있는 섬으로 향했다.

섬은 언제나 그렇듯 플레이어로 가득했다.

다만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야, 저기 저 사람...."

"2층에서 에픽 퀘스트 깬 사람 맞지?"

"어. 분명히 진현우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 성녀하고 같이 에픽 퀘스트 깼던 사람."

진현우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

어쩔 수 없었다. 여태껏 이것저것 저지른 일이 많기는 한데, 에픽 퀘스트를 깬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그는 탑의 정문으로 향했다.

- 세계의 탑에 방문한 것을 환영합니다.

- 현재 탑은 7층까지 개방되었습니다. 당신이 입장할 수 있는 층은 3층까지입니다.

- 3층으로 입장하시겠습니까?

탑은 여전히 7층까지 개방되었다.

진현우는 정문 근처의 표지판을 흘깃 봤다.

- 침식률: 44%.

침식률이 꽤 올라갔다. 처음 탑에 왔을 때는 35%였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60%쯤 됐을 때부터 급하게 움직였던 걸로 아는데.'

당장 탑 공략에 적극적인 것은 네메시스가 고작이다. 다른 5대 길드는 탑 공략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것에 전념하는 중이었다.

44%면 아직까지는 안전하다.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틀린 판단도 아니긴 했다.

'그래, 44%면 아직은 괜찮아.'

50%가 넘어가면 그때부터 온갖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지만, 아직은 버틸 수 있다.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7층까지 올라가야겠어."

진현우는 정문을 나아갔다.

- 3층: 하이아칸 대륙으로 향합니다.

- 입장 가능 레벨: Lv.50~Lv.80.

거대한 문이 열린다.

찬란한 빛으로 발을 내딛고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자, 새로운 세계가 보였다.

- 피난처 '베카샤'로 진입합니다.

보이는 것은 드넓은 숲이었다.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숲속에 마을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일반적인 마을이라면 숲을 밀어 버리고 그 위에 도시를 세웠겠지만, 이 마을은 숲을 건드리지 않고 함께하는 형태로 마을을 세웠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와, 씨... 저게 진짜 엘프구나."

"말이 안 나오네. 미의 종족이라더니 남자든 여자든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데...."

"말 걸면... 안 되겠지?"

이곳이 엘프들의 마을이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여러 엘프가 걸어다니는 게 보였다. 귀는 뾰족하고, 찬란한 금발에, 말 그대로 눈부시다고 할 만한 외모를 가진 엘프들이.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럴 수밖에 없지.'

이곳의 이름은 '피난처 베카샤'.

피난처라는 이름이 붙었듯이, 엘프들이 이 마을에 사는 것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었다.

쫓겨났고, 이곳으로 피난 온 결과였다.

[피난처 베카샤.]

- 권장 레벨: Lv.50~Lv.80.

- 설명: 마족들에게 수도를 빼앗긴 엘프들이 도망친 끝에 도달한 마을이다. 엘프들의 새로운 거주지로, 그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고 마족들에게 빼앗긴 수도를 되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몹시 험난하다.

- 점령 길드: 없음.

* 일정 주기로 전쟁터가 열리며, 그곳에서 카오틱을 비롯한 마족들과 전쟁을 벌임.

마족.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나타난 마족들에 의해 엘프는 수도를 빼앗겼다.

마족들의 욕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수도를 빼앗은 마족들은 더 나아가서 하이아칸 대륙 자체를 장악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걸 막으려는 엘프는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마족들과 전쟁 중이고....'

3층에 도달한 플레이어들은 그런 엘프의 편에 서서 마족과의 전쟁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면서 자동으로 쌓이는 '공헌도'를 모아, 4층으로 올라갈 자격을 얻기 위해서.

"또 전쟁이라니, 망할."

- 정기를 많이 먹을 기회로구나!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93화

루윈 대륙의 영웅

하이아칸 대륙.

브로큰 월드에 있던, MMORPG에서 소위 말하는 '필드 전쟁'이 일어나던 대륙이다.

뭐, 일단 그런 기믹이 있기는 했다.

의미는 없었지만.

'유저 수가 좀 적었어야지.'

필드 전쟁이 일어날 정도의 유저가 없었다.

그래서 매번 NPC들끼리 서로 치열하게 싸우던 대륙이었다. 가끔씩 나타나는 유저가 마음에 드는 세력에 합류해서 돕는, 그런 대륙.

"흐윽, 아아아악!"

"일리아네! 정신 차려라, 일리아네!"

"마족들에게 당했다! 마기를 없애야 돼!"

"여기 다친 여행자들도 있다! 제길, 워든 길드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다 죽었을 거야!"

게임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기믹이 세계의 탑에 와서야 비로소 활성화됐다.

플레이어와 엘프 그리고 마족과 카오틱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살벌하다, 살벌해."

"왜 저렇게 됐대? 또 장막 밖으로 나갔나?"

"그렇겠지. 엘프들은 어떻게든 장막 영역을 넓히고 싶어 하잖아. 뭐, 이해는 간다만...."

호송되어 오는 엘프와 플레이어들.

그들을 보던 이들이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얼마 전에 드라이어드의 숲도 뺏겼잖아. 거기 탈환하겠다고 인력들도 갈아 넣었었고."

"흐, 그게 승산이 있나?"

"없지. 어후, 난 장막 밖으로는 안 나가련다. 여기 있으면 세계수가 지켜 주는데 왜 나가?"

"아니면 나무 정령의 샘이나 갈까? 거기는 워든 길드가 맡는 곳이라서 안전하다던데."

플레이어들이 그런 얘기를 하며 떠났다.

세계수 그리고 장막. 진현우는 마을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나무를 올려다봤다.

'저게 엘프들을 수호하는 세계수....'

어지간한 고층 빌딩만큼의 크기를 가진 세계수가 연푸른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 기운은 저 너머, 베카샤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뻗어져 장막을 형성하고 있다.

'마족들의 접근을 막는 장막.'

이 마을이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

세계수, 저 거대한 나무가 마족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장막을 펼치고 있는 덕분이었다.

저게 없었다면 엘프는 멸망했을 것이다.

'장막 내부로 들어오는 방법이 없진 않지.'

카오틱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장막은 어디까지 마족들만 막을 뿐, 카오틱들은 막지 못한다. 그렇기에 카오틱들은 장막 안으로 들어와 영역을 '오염'시키고 있다.

그렇게 오염된 영역은 장막을 거부한다.

"드라이어드 샘을 빼앗겼나."

조금 전에 플레이어들이 말했던 드라이어드 샘이라는 곳을 빼앗긴 것처럼 말이다.

진현우는 목덜미를 매만졌다.

- 인간, 저 나무를 가까이서 보고 싶느니라.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 느껴지는구나.

"뭐? 보고 싶어도 못 봐."

- 왜냐? 아니, 으으음... 이유를 알겠군. 저 귀쟁이들이 열심히 나무를 지키고 있구나.

영체 상태의 요호가 혀를 찼다.

세계수 근처를 여러 엘프 부대가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세계수에 문제가 생기면 장막이 사라지니 당연한 일이다.

'그것 말고 세계수가 하는 게 또 있지.'

하이아칸 대륙에만 있는 아주 특수한, 전쟁에 큰 도움을 주는 기믹이 있다.

저렇게 지킬 수밖에 없다.

'흠, 일단 레벨부터 올려야겠는데.'

직업 퀘스트를 받아야 한다.

다음 직업 퀘스트는 아마 60레벨에 주어질 것이다. 그 레벨까지 올릴 필요가 있다.

진현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 엘프 수색대 본부로 향하여 '공헌도'를 기록할 수 있는 휘장을 먼저 얻으십시오.

- 수색대 본부는 서쪽에 있습니다.

때마침 친절하게도 메시지가 나타났다.

도시 서쪽으로 향하라는 메시지. 진현우는 베카샤의 풍경을 살피면서 걸음을 옮겼다.

엘프들의 표정이 좀 굳어 있기는 하지만, 마을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는 않다.

-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치고는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지 않느냐?

"그렇겠지. 나름대로 안전하잖아."

- 그 장막이라는 것 덕분인 것이냐?

"어. 장막이 파괴되지 않으면 안전하니까."

그렇다. 파괴되지만 않는다면.

진현우는 저 너머에 펼쳐진 장막을 봤다.

지금으로부터 머지않은 미래에 저 장막은 파괴되고, 이 대륙은 마족들에게 지배당한다.

'왜 멀쩡하게 굴러가는 대륙이 없지?'

2층도 그러더니 3층도 비슷하다.

당장은 어찌저찌 굴러가지만, 놔두면 멸망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둘 다 똑같았다.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 * *

베카샤에는 2층의 협회 지부처럼 플레이어에게 다양한 퀘스트를 주는 '수색대'가 있다.

베카샤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병사들이 머물 만한 병영이 바로 그것이었다.

- 엘프 수색대 본부.

- 일을 받고 싶은 여행자 환영.

입구에 그런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그 문구대로 일을 받고 싶은 플레이어들은 모두 수색대 건물로 발을 옮기는 중이었다.

진현우도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이거 말고 좀 더 좋은 퀘스트 없어요? 아, 뭔 배달을 언제까지 해! 내가 배달부야?"

"공헌도를 더 쌓으셔야 합니다."

"배달로 공헌도를 얼마나 쌓는다고! 무슨 경력 있는 신입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뭐야?"

"마족이나 카오틱들을 사냥해도 공헌도가 쌓입니다. 그걸 노려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 그건 존나 위험하잖아!"

들어가자마자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플레이어와 그를 상대하는 접수원 엘프가 다투는 소리였다.

다른 이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제발 몬스터 사냥이나 던전 탐험하는 퀘스트 좀 주시면 안 됩니까? 부탁 좀 드릴게요."

"지금 공헌도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진짜 미치겠다.... 제가 뭐 골드라도 좀 드릴까요? 예? 그러면 퀘스트 주실 겁니까?"

"저희는 골드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시겠지! 시발, 차라리 뇌물이라도 좀 받았으면 좋겠다! 이 융통성 없는 놈들아!"

다른 플레이어들, 3층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은 다 상황이 비슷했다.

상대하는 접수원 엘프들은 무표정하게, 기계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상대했다.

- 쿠후후, 인간들은 참 화가 많구나.

요호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저들이 저러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색대에서 주는 퀘스트는 공헌도에 따라서 퀘스트 수준이나 보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막 3층에 진입한 플레이어는 공헌도가 낮으니 좋은 퀘스트를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배달이나 채집, 사냥 같은 단순한 퀘스트만 주는데, 이건 공헌도 보상이 적다.

공헌도를 올려야지 좋은 퀘스트를 받을 수 있는데 공헌도를 올릴 방법이 제한된 상황.

속이 터질 수밖에 없다.

- 인간, 그러면 네놈도 힘든 것 아니냐?

"다 나름대로 방법이 있어."

- 방법? 따로 방법이 있는 것이냐?

요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3층의 신입 플레이어들은 자잘한 퀘스트를 하면서 천천히 공헌도를 쌓는 게 일반적.

하지만 진현우는 그럴 필요가 없다.

'2층에서 얻은 칭호를 잘 이용해야지.'

진현우가 얻은 칭호를 활용한다면 공헌도가 낮아도 좋은 퀘스트를 받을 방법이 있다.

그는 접수원 엘프에게 다가갔다.

"반갑습니다, 여행자. 처음 뵙는 얼굴이군요. 베카샤에는 처음 오신 건가요?"

"예. 휘장을 발급받고 싶은데요."

"그럼 자격증을 보여 주십시오."

진현우가 플레이어 자격증을 건넸다.

자격증에는 특수한 마법이 부여되어서 탑 내부의 사람들도 읽을 수 있게끔 되어 있다.

그걸 확인하던 엘프의 눈동자가 등급에서 멈췄다. A 등급. 그 눈빛에 놀라움이 어렸다.

3층에서는 보기 힘든 등급이다.

'등급... 가산점을 줘도 되겠군요.'

엘프가 융통성이 없기는 하지만, 융통성이 아예 틀어막힌 수준은 아니었다.

플레이어 등급이 높은 사람이라면 그걸 감안해서 휘장에 혜택을 주고는 했다.

"소속 길드는 없으신가요?"

"예. 길드에 가입했으면 가산점이 있나요?"

"아무래도 그렇죠. 예를 들자면 워든 길드처럼 큰 활약을 보인 길드 소속이라면, 그 부분을 조금 더 감안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워든 길드.

지금 3층에서 유명한 길드 중 하나일 것이다. 큰 활약을 해서 신뢰를 얻은 길드일 테고.

'워든 길드는 믿을 수 있다는 건가.'

진현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계속해서 자격증을 확인하던 엘프는 이름에 적힌 글자를 보고는 고민에 빠졌다.

'진현우.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계속 고민하던 엘프의 눈이 커졌다.

"루윈 대륙의 영웅."

세계의 탑이 가진 특징 중 하나.

다른 층에서 뚜렷한 업적이나 위업을 달성했을 경우, 그게 다른 층에서도 영향을 준다.

루윈 대륙의 영웅이 바로 그것이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엘프는 황급히 일어나더니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그걸 본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렸다.

"왜 저래? 신입 플레이어 아냐?"

"그러니까. 새로 온 플레이어면 그냥 신원 확인하고 휘장 던져 주는 게 끝 아니었나?"

"아니,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진현우는 망토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고, 시끄러워서 엘프의 말을 들은 이도 없었다.

덕분에 어떤 사정인지 파악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이 당황한 채 진현우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엘프 접수원이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가시겠어요? 저희 수색대장님이 여행자님을 직접 보고 싶으시다는군요."

"예."

엘프 접수원이 정중한 태도로 안내했다.

그녀를 뒤따르는 진현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뭔데?"

"수색대장이 플레이어 만나 주고 그러냐?"

"공헌도 높은 플레이어 아니면 안 만나 준다던데? 그 남자 엄청 깐깐하잖아."

"어이가 없네, 진짜."

플레이어들은 건물 안쪽으로 향하는 진현우를 시샘이 잔뜩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 * *

"반갑다, 여행자."

수색대 본부에 있는 수색대장의 방.

그곳에서 진현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남자 엘프였다. 탁해진 금발에, 근육질의 몸 그리고 전신에 가득한 상처가 인상적인 엘프.

"라시드다. 정확하게 말하면 긴 이름이다만, 줄여서 이렇게 부르지. 부족하지만 이 마을의 수색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너는...."

"진현우입니다. 이미 아시겠지만요."

"그렇지, 이미 알고 있다."

라시드가 씨익 웃었다.

"모를 수가 있나. 성녀와 함께 루윈 대륙의 위기를 구한 영웅인데. 하이아칸 대륙에도 네 이름이 전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좀 고생하긴 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여기로 부르신 이유는... 제 추측이 맞습니까?"

"무슨 추측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라시드는 책상 서랍에서 휘장을 꺼냈다.

나뭇잎 형태의 휘장이었다. 다만 조금 특이한 것이, 일반적인 휘장보다 반짝거리고 있다.

그리고 특수한 문양도 새겨져 있었다.

"내가 너에게 따로 휘장을 줄 거라고 추측한 거라면 맞는 추측이다. 가져가겠나?"

"거절할 이유가 없죠."

진현우는 휘장을 받았다.

그러자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 '엘프 휘장'을 받았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하이아칸 대륙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가 '공헌도'가 되어 휘장에 기록될 것입니다.

- 엘프가 관심을 가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수 휘장입니다. 공헌도를 넘어서는 퀘스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 현재 공헌도: 0.

공헌도는 다른 이와 똑같이 0이다.

하지만 공헌도를 넘어서는 퀘스트를 받을 수 있다는 혜택이 추가되어 있었다.

"큰 호의를 베푸시는군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상황이다. 실력이 있고, 그 실력을 이미 입증한 사람을 썩혀 둘 정도로 우리 엘프가 여유롭지는 않아."

"그게 이유의 전부입니까?"

"흠."

라시드가 쓰게 웃었다.

"그것 말고도 내 나름대로 네가 신뢰할 수 있는 여행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지만... 여행자들을 마냥 믿을 순 없거든."

플레이어들을 마냥 믿을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엘프를 배신하고 마족들에게 넘어가는 여행자가 적지 않다. '대적자'라는 존재가 마족들을 지원해 주고 있다더군."

"카오틱이 되려는 거겠죠."

"그렇다고 들었다. 마족에게 넘어가서, 대적자에게 힘을 받고 카오틱이 되는 것이지."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다.

라시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넘어가면 다행이다만, 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엘프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공헌도가 낮은 플레이어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는 이유도 이것이다."

안 그래도 엘프는 인력이 부족한 상황.

어떤 플레이어든 일을 맡기고 싶다. 문제는 검증되지 않은 플레이어에게 일을 맡겼다가 배신당하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

여태껏 전례가 몇 번 있었던 일이다.

"저는 믿을 수 있다?"

"정확하게는, 믿고 싶군. 아무 연관도 없는 루윈 대륙을 구원한 영웅 아닌가? 네가 우리 대륙에서도 그렇게 해 줬으면 한다."

라시드가 손을 뻗었다.

"우리를 도와주겠나?"

진현우는 그 손을 맞잡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94화

소환석

엘프들이 처한 상황이 꽤 복잡하긴 했다.

인원은 부족한 상황인데 할 일은 많고, 그런데 플레이어들을 마냥 믿을 수는 없는 상황.

믿을 수 있으면서 실력이 있는 플레이어가 필요한데, 거기에 진현우가 적합했다.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이렇게 따로 부른 걸 보니 맡길 일이 있는 거 같은데."

"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냥 배지 하나 주겠다고 진현우를 여기까지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시드는 헛기침을 터트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현재 엘프에겐 여유가 없다. 이전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 다음에 열릴 전쟁에서는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동맹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이아칸 대륙에 사는 종족이 엘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종족도 여럿 있었다.

엘프와 우호적인 관계였던 종족들.

"우리 엘프를 도와주던 동맹이 있다. 나무 정령이나 페어리, 아울족, 드라이어드 같은 종족들이지. 이들 중 일부가 우리를 배신했다.

"원해서 배신한 건 아닐 것 같군요."

"맞다. 강제로 배신하게 된 것이지. 마족들에게 오염되어서 이성을 잃게 된 탓이다."

라시드가 혀를 찼다.

그는 기록용 수정구를 꺼내더니 영상을 보여 줬다. 영상에서는 새까맣고 진흙처럼 질척거리는 결정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기의 근원'이라 불리는 것이다. 마족들은 하이아칸 대륙을 오염시키는 힘을 가졌는데, 이걸 이용해서 숲을 오염시키고 있다."

마기의 근원에서 시커먼 기운,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 마기는 주변에 스며들었고, 닿는 것들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척 봐도 불길해 보이는 물건이다.

"우리를 배신한 것은 드라이어드다. 나무에 깃든 요정인데, 마족들은 그들이 살던 숲을 오염시켰고 드라이어들을 타락시키고 말았지."

"그들을 구해 달라는 겁니까?"

"그렇다. 아직 모든 드라이어드가 타락한 것은 아니거든.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이어드의 숲에 마족이 있다. 놈을 죽이고 숲을 오염시킨 근원을 제거해 다오. 이 포션을 뿌리면 오염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오염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거든."

그 말이 끝난 순간 퀘스트가 나타났다.

[드라이어드 숲의 구원.]

· 난이도: A+.

· 설명: 드라이어드 숲이 마족들의 손에 오염되었다. 마기의 근원과 그걸 지키는 마족들을 처리해서 오염을 제거해야 한다.

· 보상: 경험치, 골드, 공헌도.

A+ 등급의 퀘스트.

쉽지 않은 퀘스트다. 혼자서 깰 수야 있겠지만, 꽤 고생하면서 깨야 할 것이다.

"다른 종족도 불안하긴 하다만, 가장 시급한 것은 드라이어드다. 쉽지 않은 임무일 테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동료를 구해서 같이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제가 친구가 많지 않아서요."

"음, 그건... 뭐라 할 말이 없군."

예상치 못한 말에 라시드가 볼을 긁적였다.

"필요하다면 정예 수색대를 보내겠다. 전투 경험이 많은 엘프들인데, 숲에서 특히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임무에 도움이 되겠지."

"거부할 이유가 없군요. 그렇게 하죠."

"고맙다. 그 휘장은 특수한 것이니 엘프들에게 보여 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진현우가 받은 휘장은 다른 플레이어의 것과는 다르게 특수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만."

"피할 수 없는 겁니까?"

"모르는가? 아, 신입이었지."

그럴 수가 없다.

라시드는 창문 너머의 세계수를 바라봤다.

"세계수의 힘은 무한하지 않다. 일정 주기로 소비한 힘을 충전해야 하지. 그 기간 동안은 우리를 지켜 주는 장막이 사라지게 된다."

너무도 광대한 범위에 장막을 펼치고 있으니 힘의 소비량이 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장막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 틈을 노리고 마족들이 대거 진군해 온다. 마족과 엘프 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지. 그게 여태껏... 몇 번이고 반복되어 왔다."

"피해가 계속 누적되겠군요."

"음. 다행히도 세계수가 그때를 대비해 도움을 준 게 있는데... 아니, 이건 됐다. 어차피 몬스터를 사냥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라시드가 뭐라 중얼거렸다.

몬스터를 사냥하다 보면 알게 될 것. 그게 무엇인지 진현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드라이어드 숲을 탈환하려는 것도 전쟁 때문이다. 그들이 동맹인 것도 있지만, 그런 지역은 아군에게 특수한 힘을 주거든."

하이아칸 대륙의 특징 중 하나다.

드라이어드 숲처럼 특수한 지역을 손에 넣을 경우, 모든 아군에게 버프가 주어진다.

공격력 같은 게 증가하는 버프를.

"어쨌든, 흠. 얘기가 너무 길었군. 나도 늙었나... 잘 부탁한다, 진현우. 루윈 대륙의 영웅이라고 불린 실력, 기대하고 있겠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현우는 방을 떠났다.

수색대장의 방에서 나온 그를 플레이어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우선 퀘스트부터 받기로 했다.

수색대 본부에는 거대한 게시판이 있었는데, 거기서 필요한 퀘스트를 받을 수 있다.

'어디, 퀘스트가 뭐가 있나.'

베카샤에는 다양한 퀘스트가 있었다.

사냥이나 채집, 물품 배달 같은 자잘한 퀘스트. 이게 3층의 신입들이 하는 퀘스트다.

원래라면 진현우도 이런 퀘스트를 해야 했겠지만, 다행히도 특수한 휘장이 있다.

'그래도 자잘한 퀘스트도 받아 둬야지.'

가는 길에 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받아서 나쁠 건 없다. 진현우는 여러 퀘스트를 받았다.

- 마기에 잠식된 몬스터 사냥, 장비 제작을 위한 가죽 수집, 붉은 허브 채집, 포션 배달, ... 퀘스트를 받았습니다.

진현우가 퀘스트 게시판에서 다양한 퀘스트를 받고 있자 미호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 인간, 바로 숲으로 갈 것이냐?

라시드가 부탁한 퀘스트.

오염된 드라이어드 숲으로 가서 그곳에 있을 마족들을 죽이고, 숲을 정화하는 것.

하지만 지금 당장 가기에는 이르다.

'아니, 다른 곳부터 먼저 들를 거야. 가기 전에 먼저 챙겨야 할 아이템이 하나 있거든.'

- 난 정기만 먹을 수 있으면 상관없느니라!

'그러시겠지.'

사념.

은신 스킬과 관련된 사념을 얻어야 한다.

한참 동안 게시판을 살피던 진현우는 마침내 바라던 퀘스트를 찾아냈다.

[공허한 언덕의 괴물.]

· 난이도: B+.

· 설명: 장막 접경 지역의 공허한 언덕에 괴물이 나타나 난동을 부리고 있다. 보스 몬스터로 추정, 나타난 이유는 여태껏 그랬듯 불문.

공허한 언덕에 나타난 보스 몬스터를 퇴치할 것. 공허한 언덕 인근을 지키는 엘프 수색대와 협력하여 처리해도 무방하다.

· 보상: 경험치, 골드, 공헌도.

공허한 언덕.

진현우가 원하는 사념이 있는 곳이다.

'사념도 얻고 퀘스트도 깨고.'

공헌도를 넘어서는 퀘스트를 받을 수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공헌도를 무시할 순 없다.

3층에서 공헌도는 신뢰도나 다름없다.

가능한 많이 쌓아서 엘프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끔.

그리고 무엇보다.

'3층에서는 보스 몬스터를 많이 잡아야 해.'

이유가 있다.

'전쟁'에서 써먹으려면 그래야만 한다.

이번 사념이 있는 곳에 가면 많은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다. 분명 큰 도움이 될 터.

"일단 필요한 아이템부터 사야겠군."

진현우는 골드 거래소를 이용해서 마법 아이템을 다수 구매한 후, 목적지로 향했다.

바로 공허한 언덕으로.

* * *

피난처 베카샤는 하이아칸 대륙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원래 수도로 쓰던 곳은 동쪽에 있지만, 그곳은 이미 마족에게 먹힌 상황.

'깔끔하게 동과 서로 나뉘어서 좋네.'

그리고 세계수의 장막이 닿는 곳을 기점으로 엘프와 마족의 영토가 나뉜다.

다만 영토의 크기는 똑같지 않다.

지금은 마족이 더 큰 영토를 가지고 있다.

- 아, 카오틱 이 개새끼들!

- 이번에 경비 초소 있는 지역 마족들한테 뺏겼다던데 사실인가요? ㅠㅠ;

- 네. 카오틱이 야밤에 기습해서 마기의 근원 심었어요. 다시 탈환할 거라고는 하던데.

- 진짜 미치겠네. 아니, 그 새끼들은 같은 사람이면서 왜 마족을 돕고 지랄이야?

카오틱의 활약 덕분이었다.

이렇게 카오틱이 많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2층, 루윈 대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플레이어가 활동하기 힘든 곳이었지.'

진현우가 폭군을 처리하기 전까지 2층은 카오틱들의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활동의 어려움을 겪은 플레이어 중 상당수가 카오틱으로 전향했다.

악순환의 굴레인 셈이었다.

"인간, 인간, 저기 봐라. 순록이다!"

생각에 잠긴 진현우를 미호가 깨웠다.

영체가 아닌 실체로 나타난 미호는 두 개의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저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에 있는 것은 순록들이었다.

숫자는 대강 10마리 남짓.

- 끼아아아아악!

"거 더럽게 시끄럽네."

순록이 괴성을 내질렀다.

일반적인 순록과는 그 생김새가 다르다. 뿔은 흉측하게 일그러졌고, 털은 새카맣게 변색됐다. 몸도 이상하게 변형되어 가고 있었다.

- 마기에 잠식된 순록.

저 동물, 아니 몬스터의 이름이다.

마기에 오랫동안 노출된 동물은 저런 식으로 변이하고, 저렇게 되면 돌아올 수 없다.

죽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 끼아아아아아!

"쿠후후, 인간! 순록이 달려오는구나!"

"넌 대체 뭐가 그리 신이 난 거냐?"

다수의 순록이 진현우를 향해 돌진했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뿔은 날카로운 칼날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검은 기운까지 흩뿌렸다.

스치면 좋은 꼴은 보지 못하리라.

'그럼 안 스치면 되지.'

진현우의 손에서 도끼가 투척됐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도끼가 돌풍을 일으켰고, 돌진해 오는 순록의 뿔을 강타했다.

콰직! 놈들의 뿔이 단번에 부러졌다.

- 키에에엑?!

- 커허엉!

살얼음이 순록들의 가죽을 찢었다.

놈들이 그 고통에 휘청거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타난 영혼 늑대들이 놈들을 덮쳤다.

진현우는 도끼를 돌려받으면서 땅을 힘껏 박찼다. 섬광이 번뜩이고, 이내 서걱!

- 쿠우웅!

순록들의 목이 베였다.

진현우는 달려드는 순록의 앞발을 붙잡은 채 몸을 회전하더니 그대로 땅에 메쳤다.

쓰러진 순록을 늑대들이 물어뜯었다.

- 케, 끄륵....

그게 마지막이었다.

10마리 남짓한 순록들을 금방 처리한 진현우는 놈들이 뱉은 전리품을 확인했다.

근데 그보다 먼저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쿠후, 쿠후후훗! 느껴지는구나, 느껴져! 이 순록들의 정기가 흡수되는 게 느껴진다!"

미호였다.

자그마한 여우는 죽은 순록들의 정기를 탐욕스레 흡수했다. 사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검보랏빛의 기운이 미호에게 스며들었다.

- 요호가 정기를 흡수했습니다. 미호의 레벨이 한 단계 상승했습니다!

"보거라, 인간! 난 보다 강해졌...!"

"좋냐?"

잘난 척하는 미호.

진현우는 그 머리를 쥐어박았다.

"왜, 왜애... 잘못한 게 없는데 때리는 것이냐! 난 그냥 정기를 흡수했을 뿐이니라!"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 아무것도 안 하고 정기를 흡수하는 건 못 봐 준다."

"크, 크으응...."

혼령 불에 매혹, 마안까지 있는 놈이 아무것도 안 하고 정기만 흡수하겠다니.

그건 두 눈 뜨고 봐 줄 수 없다.

"아, 알겠다... 다음에는 나도 돕겠느니라."

"그래, 좋은 태도야."

이럴 때 미리 기강을 잡아 둬야 한다.

진현우는 두 귀가 납작해진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순록들의 전리품을 확인했다.

가죽이나 부러진 뿔, 고기가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소환석.

"응? 인간, 이건 무엇이냐? 영적인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영혼석 같은 느낌이다."

자그마한 돌이 보였다.

이 돌의 이름은 소환석. 3층, 하이아칸 대륙에 적용되는 특수한 기믹 중 하나다.

[소환석: 순록 (일반)]

· 설명: 순록이 깃든 소환석이다. 하이아칸 대륙에서만 쓸 수 있으며, 세계수의 장막이 사라졌을 때에 한해 순록을 소환할 수 있다.

몬스터를 잡으면 해당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는 소환석을 얻을 수 있는 기믹.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세계수의 장막이 사라졌을 때.

- 음. 다행히도 세계수가 그때를 대비해 도움을 준 게 있는데... 아니, 이건 됐다. 어차피 몬스터를 사냥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라시드가 말했던 도움이 이것이다.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으나 세계수는 죽은 몬스터들을 소환석으로 만들고 있다.

장막이 사라졌을 때 전쟁을 돕기 위해서.

'이게 보스 몬스터를 잡아야 하는 이유고.'

마족과의 전쟁은 또 벌어질 것이다.

이건 피할 수 없다. 다만 지금 엘프의 전력으로는 어떻게 해도 마족을 이길 수 없다.

전쟁에 이기려면 강한 몬스터의 소환석을 얻어야 한다. 바로 보스 몬스터의 소환석을.

'보스 몬스터 그리고 숨겨진 보스 몬스터까지 다 처리한다면... 가능성은 있다.'

그게 진현우의 목적이었다.

쉽지 않겠지만 해야만 한다. 소환석들을 모두 챙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그때.

- 오지 마라! 이 빌어먹을 놈들!

멀지 않은 곳에서 노성이 들렸다.

진현우와 미호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동시에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95화

공허한 언덕 (1)

쫓기고 있다.

엘프, 이리샤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함께 도망치던 동료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흩어져서 도망치기로 했었는데.

'모두 잡힌 건... 아니겠지?'

이리샤는 입술을 깨물며 나뭇가지를 박찼다. 그녀의 몸이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어지간한 적은 쫓을 수도 없는 속도.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나 못지않게 빠른 적들이었어.'

깊은 밤, 카오틱으로 추정되는 적들이 공허한 언덕을 지키는 엘프 수색대를 덮쳤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마족 진영이 공허한 언덕을 노리는 것은 여럿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적들은, 좀 특이했다.

- 쉬익!

"으, 흐윽!"

나무 사이를 달리던 이리샤의 발목에서 피가 튀었다. 깊은 어둠 속에 불길한 빛을 내뿜는, 정말로 얇은 철선이 보였다.

균형을 잃은 이리샤의 몸이 기울어졌다.

"비겁한, 암살자 놈들...!"

"우리한테는 칭찬이나 다름없는 말이군."

추락한 이리샤가 땅을 굴렀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뛰쳐나오더니 그녀를 포위했다.

하나같이 어두운 옷을 입은 암살자들.

카오틱이었다.

"뭐야, 이년 하나밖에 없잖아?"

"흩어져서 도망치기로 했나 보군. 아직 발자국이 남아 있을 거다. 바로 추적하지."

"어. 여긴 나 혼자면 됐다."

다른 카오틱들이 모습을 감췄다.

남은 것은 암살자 하나. 이리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활을 잡고 적을 겨누었다.

"오, 오지 마라! 인간! 오면... 죽인다!"

"하하하! 그 떨리는 손으로 말이냐?"

"널 죽일 생각에 흥분해서 떨리는 거다!"

손가락이 시위를 튕겼다.

카오틱을 향해 쏘아지는 화살. 하지만 그 화살이 카오틱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철선이 화살을 튕겨 냈기 때문이었다.

"카학!"

카오틱이 땅을 박차더니 이리샤의 명치를 걷어차고, 철선으로 사지를 묶었다.

그녀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크흑, 주, 죽여...!"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지. 너희 엘프들 몸뚱어리는 이래저래 쓸 일이 많거든."

탐욕에 젖은 눈동자가 이리샤의 몸을 훑었다. 그 눈빛에 그녀는 이를 까드득 악물었다.

"이, 역겨운 놈...!"

"이리저리 최대한 굴릴 만큼 굴려야지. 그렇게 굴리고 난 다음에는 마기로 물들여서 다크 엘프로 만드는 거야. 이미 봤잖아?"

이리샤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다크 엘프. 마족들에게 마기를 강제로 주입당한 엘프들이다. 그들은 엘프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마족들을 주인 대하듯 모시고 있다.

'나를 그렇게 만들겠다고?'

이리샤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은 부상을 입었고 지쳤다. 저 남자를 이길 가능성은 낮다. 지원을 올 이도 없다.

이대로 끌려갈 확률이 높다. 그럴 바에는.

"흐읍!"

"어허, 어딜!"

이리샤는 자신의 심장을 단검으로 찌르려고 했지만, 카오틱의 움직임이 한발 빨랐다.

철선이 그녀의 단검을 쳐 냈다.

"놔, 놔라! 다크 엘프가 될 바엔 죽겠다!"

"하하하하! 반항이 거세군! 마음에 들어! 네가 다크 엘프가 되는 걸 보고 싶어졌어!"

"윽, 흐윽! 차라리 죽...!"

차라리 죽여라.

그렇게 외치려고 했던 이리샤는 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넋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본 카오틱이 비웃었다.

"어, 어어...."

"하!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군, 엘프. 걱정하지 마라. 팔다리는 남겨 둘 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엘프가 멍하니 카오틱을 응시했다.

아니, 자세히 보면 카오틱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뒤를 보고 있다.

뭔가, 믿을 수 없는 걸 본 것처럼.

"뭐야? 대체 어딜...."

카오틱은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 쿠어어어어!

"우, 우아아아악!"

거대한 곰이 그를 반겼다.

인지한 순간에는 이미 늦었다. 그리즐리 베어의 앞발이 카오틱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쿠웅! 카오틱이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커, 헉!"

- 크어어어! 우오오오오!

"억, 그, 그만, 크억, 으아악!"

곰의 발길질은 무자비했다.

거대한 발이 카오틱의 몸을 짓이겼다. 놈은 곰에게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 퍼억!

"크아아악!"

날아든 도끼가 놈의 발목을 베었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상처. 도끼를 휘감은 돌풍이 카오틱의 다리를 완전히 찢어발겼다.

일련의 과정을 말을 잃은 채 지켜보던 이리샤는 도끼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다, 당신, 대체 누구...."

안개 사이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진현우. 그는 이리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손짓하고는 근처의 나무에 모습을 감췄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뭐야?! 루이스, 무슨 일 있나?"

"조심해. 이 안개, 수상하다. 주변에...."

다른 카오틱들이 나타났다.

때마침 근처에 있다가 동료의 비명을 듣고 도우러 온 것이었다. 숫자는 셋. 그들은 주변을 경계하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 퍼억!

"끄어어어...!"

나무 뒤에서 진현우가 섬광처럼 쏘아졌다.

그는 가장 앞에 있던 카오틱의 오른팔을 도끼로 베어 내고, 파쇄권으로 얼굴을 강타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기절한 놈을 발로 찼다.

"크윽!"

그 몸뚱어리가 뒤에 있던 카오틱들과 충돌했다. 그리고 동시에, 몸뚱어리에 가려져 있던 검은 화살들이 두 카오틱을 관통했다.

'이 화살은...!'

'젠장, 디버프다!'

신체 능력이 감소하는 느낌.

그 사실을 채 인지하기도 전에 도끼들이 날아들었다. 그걸 쳐 내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카오틱들 사이로 진현우가 침투했다.

그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콰아앙!

"카, 학!"

그 손끝에서 강력한 충격파가 터졌다.

허공을 타격하면서 일어난 충격파에 왼쪽 어깨를 얻어맞은 카오틱이 휘청거렸다.

놈은 이를 악물며 검을 내질렀다.

- 카드드득!

"이, 미친...!"

검이 도끼와 충돌했다.

카오틱은 힘을 실어 도끼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검이, 끝자락부터 실금이 생기더니 부서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내 검이!"

부서진 검 조각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어안이 벙벙한 카오틱의 복부에 다시금 파쇄권이 엄습했다. 놈의 허리가 굽혀졌다.

- 우드득!

"...!"

진현우는 놈의 목을 붙잡고 안면을 무릎으로 강하게 올려 쳤다. 엄청난 충격에 얼굴이 짓뭉개진 카오틱이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남은 것은 카오틱 하나뿐.

"흐아! 흐으아아악!"

하지만 그도 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커다란 혼령 불이 놈의 얼굴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뭔가 끔찍한 환상이라도 보고 있는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쿠후훙, 어떠냐! 인간! 저놈이 도망치려고 하길래 마안으로 붙잡아 놨느니라!"

"오냐, 잘했다."

"알면 됐느니라!"

미호가 꼬리를 격하게 흔들며 뿌듯해했다.

어린애가 칭찬을 듣고 기뻐하는 것처럼.

'이 녀석, 점점 애처럼 바뀌고 있지 않나?'

정신은 육체를 따라간다고 했던가.

외형이 어려져서 그런지 하는 짓도 어려진 것 같다. 진현우는 그리 생각하면서 기절한 두 카오틱을 각각 어깨에 둘러멨다.

처음 제압한 카오틱은 이리샤가 지켰다.

"엘프, 어디 다친 데는 없냐?"

"이, 있긴 한데 괜찮아. 고마워, 여행자. 당신이 아니었으면 저놈한테 당했을 거야."

이리샤는 그렇게 말하면서 멍한 눈으로 진현우를 바라봤다. 조금 전의 전투가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이, 이런 여행자가 있었나...?'

일격에 검을 부수고, 카오틱 셋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것도 평범한 카오틱이 아니다.

기습이라고는 하나 공허한 언덕을 지키던 엘프 수색대를 처리할 정도의 실력자들이다.

그런 카오틱들을, 저렇게 쉽게.

'그리고 이 안개는, 대체 언제부터....'

사방에 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불길한 검은 안개가. 저 곰이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나타났나 했더니, 안개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서 그랬던 모양이다.

저 남자가 나타나고 함께 생긴 안개.

공교롭기 그지없다.

"핫! 여, 여행자! 부탁이 있어. 내 동료들, 저 짐승들이 내 동료들을 잡아갔어!"

"진정해."

이리샤는 다친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그때, 찬란한 빛이 터졌다.

광휘가 그녀의 몸을 치유했다.

"회, 회복 마법? 어떻게...."

전사가 아니었던가?

이리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급하게 움직이면 될 일도 안 돼.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설명해라."

"아, 응. 그, 그럴게."

이리샤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이아칸 대륙에 있는 공허한 언덕.

그 지역은 특별한 곳이다.

"몬스터가... 나타나, 강력한 몬스터가. 이유는 몰라. 어느 순간부터 계속 나타나고 있어."

그렇게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이들이 공허한 언덕을 지키는 엘프 수색대였다.

최근에는 플레이어들이 공헌도를 위해 도우러 왔기에 일하기가 한결 편해지기도 했었다.

문제는.

"공허한 언덕 근처에 있던 드라이어드의 숲이 마기에 오염됐어. 마족들 손에 들어간 거지. 그러면서 장막의 범위가 위축됐어...."

공허한 언덕은 원래 마족이나 카오틱이 섣불리 접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장막의 범위가 위축되면서 놈들이 접근하기 쉬운 접경 지역이 되어 버렸다.

"놈들이 이 지역도 점령하려고 기습한 거야. 원래라면 쉽게 당하진 않았을 거야. 문제는, 우리가 몬스터를 상대할 때 왔다는 거지."

"앞뒤로 공격당한 셈이군."

"맞아. 손을 쓸 방법이 없었어."

이리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족들은 다른 접경 지역을 공격해서 엘프들의 시선을 돌린 후, 정예 병력으로 공허한 언덕을 노렸다. 대처하기가 힘들 수밖에.

"놈들이 공허한 언덕을 노린 이유는...."

마족들은 왜 공허한 언덕을 노린 것인가?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여기로 오면서 마기에 잠식된 동물들을 봤지? 마족들은 몬스터들을 마기로 물들여서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 수 있어. 공허한 언덕을 갑자기 기습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거야."

공허한 언덕에 나타나는 보스 몬스터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동시에 엘프들이 놈들의 소환석을 얻는 걸 막기 위해서.

두 목적을 동시에 이루기 위함이었다.

"내, 내 동족들을 구해야 해. 아마 카오틱들은 공허한 언덕에 마기의 근원을 심으려고 할 거야. 그 근처에 내 동족들이 있을 거고."

이리샤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가만히 놔두면, 동족들이... 마기에 잠식돼서 다크 엘프가 될 거야.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만큼은 막고 싶어, 반드시."

이리샤는 간절한 눈으로 진현우를 보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절대 잊지 않을게. 어떻게든 은혜를 갚을 테니까, 제발."

- 쿠후, 꽤나 간절해 보이는구나.

어느새 영체로 돌아간 미호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일이 좀 귀찮아지기는 했다.

사념을 얻는 김에 퀘스트를 깰 생각이었는데, 거기에 엘프까지 구하게 생겼으니.

근데, 뭐.

'안 할 이유는 없지.'

- 오호, 저 귀쟁이를 도울 생각인가?

'어. 도우면 일이 편해질 것 같아서.'

공허한 언덕에 왜 몬스터가 나타나는가?

진현우는 그 이유를 안다. 그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념이 담긴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이리샤를 도와서 엘프들을 구하면 사념 아이템을 얻을 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

"좋아. 대신에 엘프들을 구하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되는데, 괜찮나?"

"아... 으, 응! 물론이지! 어떤 부탁이든 괜찮아. 우리 엘프는 은혜는 절대 잊지 않아."

"그래."

진현우는 이리샤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그 손을 잡았다.

"빨리 움직여야겠군. 일단 그 전에."

진현우는 쓰러진 카오틱들을 흘깃 봤다.

큰 부상을 입고 기절한 놈들. 쓸데가 있다.

"저놈들을 이용해 볼까."

- 쿠후후, 내가 나설 차례인가?

미호가 음흉하게 웃었다.

96화

공허한 언덕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