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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에밀라는 쉬지 않고 내달렸다.

말의 체력이 다하면 말을 바꿔 탔다.

블란테의 입김이 닿아 있는 지역에는 게이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꽤나 먼 거리를 쉬지도 자지도 않고 주파했고, 블란테의 영향이 닿지 않는 도시까지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도시에 도착한 에밀라는 곧바로 게이트를 이용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왜 이렇게 초조한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쓸데없는 말에 휘둘리는 건가?'

기억을 지우려고 해도 에단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머릿속에서 의심이 점차 싹텄다.

레벨린에 대한 에밀라의 믿음은 신앙에 가까웠다.

그녀를 의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죄책감이 느껴졌다.

레벨린은 에밀라의 인생을 구원해 준 구세주였다.

'생각하지 말자.'

고개를 젓고 걸음을 옮기자 에단에게 맞은 곳이 욱신거렸다.

에밀라는 눈을 감았다.

고통을 참는 것에는 익숙했다. 배고픔을 참는 것에도 익숙했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어쌔신의 소양이었다.

에밀라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학생들이 선망하던 설화(雪花)의 모습이었다.

이윽고 게이트를 넘어 아카데미에 도착하자, 구역질이 치밀었다.

평소라면 가볍게 넘길 메스꺼움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에밀라로서는 레벨린이 걸어 둔 암시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에밀라가 비틀거리며 걸었다. 시선들이 에밀라에게 향했다.

"어? 에밀라 쌤이다!"

"에밀라 교수님,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

"어디 가셨다가...."

에밀라는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에밀라의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옷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다가오던 학생들도 멈칫했다.

에밀라가 계단을 올라, 레벨린의 집무실로 향했다.

'불안해하지 마.'

모든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그따위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었다.

에밀라가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평소와 같은 미성이 들려왔다. 언제나 에밀라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목소리.

'그래, 달라진 건 없어.'

아카데미는, 아니, 레벨린은 에밀라의 보금자리였다.

에밀라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레벨린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칭할 수려한 외모, 그리고 그녀를 상징하는 붉고 긴 머리칼.

그런데 그런 레벨린의 모습을 보자 역겨움이 치밀었다.

"에밀라 씨, 일찍 오셨네요? 안색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으셨나요?"

레벨린의 목소리를 듣자 에밀라의 머리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아닙니다. 급히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에밀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걱정은 되지만, 그만큼 급한 사항이니 그렇겠죠.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레벨린이 싱긋 웃으며 에밀라를 바라봤다. 그녀다운 자애로운 태도였다.

'대체 왜 이러지?'

소름이 끼쳤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에밀라가 침을 꿀꺽 삼키며 불손한 의심을 외면했다.

"...임무는 실패했습니다."

"실패했다고요?"

레벨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제가 알고 있는 그분은 에밀라 씨를 상대로 일 합을 견뎌 낼 실력도 없을 텐데요."

"...에단 씨를 알고 계십니까?"

"네, 뭐... 알고 있다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이전에 아카데미에 시험을 치르러 왔을 때 한 번 뵌 적은 있었죠. 마무리가 좋지는 못했지만... 그걸 떠나서도 워낙 유명 인사잖아요? 블란테의 망나니로."

"...소문대로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가요? 그거 신기하네요. 제가 봤을 때의 모습은 소문과 정말 판박이였는데 말이죠. 다른 문제나 착오가 있던 것은 아니었나요? 가령 블란테에서 술수를 부렸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죠."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그 속내에는 에밀라를 향한 추궁이 포함돼 있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시험에 임했고, 패배했습니다."

에밀라의 대답에, 레벨린이 에밀라를 말없이 바라봤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레벨린이 평소 같은 미소를 지었다.

"에밀라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들어가서 쉬시죠."

"...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오히려 제가 사과드려야죠."

에밀라가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 밖으로 나서려고 하자, 레벨린의 음성이 에밀라의 발목을 붙잡았다.

"에밀라 씨, 말씀하신 것 외에 다른 일은 없으셨죠?"

"네, 없었습니다."

에밀라의 짧은 대답과 함께 문이 닫혔다.

◈ [48화] 여행 시작 (1)

마차 안은 조용했다. 말없이 책을 읽는 네이드와 한적하게 창가를 바라보는 에단.

그리고 힐긋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헨리.

"왜 그렇게 눈치를 보는 거죠?"

"부,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직 쉽게 믿기지가 않아서...."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계시죠. 어차피 곧 한배를 타게 될 사이 아닌가요? 아, 이미 타긴 했군요."

에단의 농담조에 헨리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에단의 제안은 헨리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대체 나의 뭘 보고 제안하는 거야?'

운 좋게도 아카데미에 입사할 수 있었지만, 헨리의 실적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에단의 의중이 이해되지 않았다.

헨리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헨리의 가방에서 진동이 새어 나왔다.

"앗!"

헨리가 화들짝 놀라며 가방을 뒤지자 통신 수정구가 울리는 것이 보였다.

"자, 잠시만 조용히 해 주세요."

아카데미와 직통으로 연결된 통신 수정구였다.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보고조차 건너뛰고 독단적인 결정을 감행했다. 감히 어떻게 변명을 늘어놓아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헨리가 침을 삼키며 수정구의 암호를 풀자 수정구가 빛을 발했다.

에단과 네이드는 흥미로운 눈으로 헨리와 수정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 헨리 씨? 보고는 들었습니다.

"네, 넵...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 하아... 난감한 일이긴 하지만 헨리 씨를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믿기 힘들기는 해도 에밀라 씨를 이겼다면 자격은 충분한 거겠죠. 이미 명분을 잃었습니다.

헨리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레벨린이 말을 이었다.

― 하지만 헨리 씨에게 잘못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애초에 헨리 씨가 여지를 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죠? 그러니까 일정을 최대한 늦추세요. 저희 측에서도 조치를 취해야 하... 헨리 씨?

헨리가 고개를 숙인 채 끅끅거리고 있었다. 마치 웃음을 참는 모양새였다.

"크큭... 크하하하핫!"

헨리가 폭소를 터트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단이 헨리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던 발가락을 회수했다.

그와 동시에 에단이 통신 수정구를 빼앗아 왔다. 헨리가 당황하며 에단에게 손을 뻗었지만 닿을 리가 없었다.

에단이 입 모양으로 헨리에게 말을 전달했다.

'가만히 있어요.'

이미 수정구를 빼앗긴 헨리에게는 선택 사항이 없었다. 에단이 수정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반갑습니다, 레벨린 씨.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 ...누구시죠? 상당히 당황스러운데요.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에단입니다. 아끼던 수하의 얼굴을 아주 박살을 내 버리고 말아서, 사죄의 의미로 이렇게 수정구를 넘겨받았습니다."

― ...확실히 이전과는 많이 달라지셨군요.

'뭐야, 서로 일면식이 있었어?'

모르던 사실이다. 에단과 레벨린과의 접점은 원작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으니.

하지만 그 사실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에단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답했다.

"사람은 바뀌기 마련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 글쎄요. 저는 반대의 의견입니다만... 에단 씨를 보아하니 생각을 달리해야 할 것 같군요. 그런데 헨리 씨는 어디 계시죠? 지금 상당히 불쾌합니다.

"하하, 불쾌하실 것 없습니다. 헨리 씨는 이제 당신 같은 사람 밑에서 일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으니까요."

그 순간 헨리의 턱이 빠질 것처럼 벌어졌다. 헨리가 경악하며 다가왔지만, 네이드가 저지해서 차마 에단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 ...무슨 소리시죠?

"혹시 귀가 잘 안 들리시나요? 헨리 씨는 이제 당신들 직원이 아니라고요. 제가 스카웃했습니다. 가진 능력에 비해 너무 저평가를 받고 있는 인재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어서 말이죠."

― 당신이 감히 뭔데... 아니, 에단 씨에게 무슨 권한이 있어서 그렇게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거죠? 헨리 씨의 정식 고용주는 아카데미입니다. 아무 절차 없이 막무가내로 처리한다고....

레벨린의 말이 길어지자 에단이 말을 도중에 끊었다.

"절차야 이제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허, 저희가 대체 왜 그래야만 하죠? 정중한 부탁도 아니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당신을 위해서?

레벨린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에단은 오히려 한술 더 떴다. 에단이 거만하게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왜? 그러면 한번 진짜 무례하게 가 줄까?"

― ...뭐라고요?

"아카데미에서 내가 뭔 짓을 해도 괜찮아? 당신들이 쌓아 올린 좋은 평판, 내가 다 시궁창으로 처박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 당신 지금....

"나는 블란테야. 아카데미의 협박 따위는 좆도 신경 안 쓴다고. 아까도 말했지. 명분은 우리한테 있다고. 그런데 어쩌려고? 이제 와서 정식 계약을 파기라도 하게?"

―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어. 협박하는 거야."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신이 하는 짓은 협박이 맞았으니까.

* * *

헨리는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당장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물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단에게는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 바뀌었다고 들었지만, 여전하시군요.

"상당히 돌려서 말하네? 솔직하게 말해도 돼. 망나니 새끼 버릇 어디 안 간다고."

에단의 계속되는 도발에 레벨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이러시는 이유가 뭐죠? 정말 헨리 씨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응.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헨리의 가치는 에단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벨린 또한 헨리의 가치를 모르지 않았다.

단지 확신이 없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천천히 여유를 두면서 큰 계획을 진행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내가 왜 가만히 놔둬야 하지? 그것도 나를 방해할 게 빤한 녀석을.'

에단을 향한 경계?

그딴 게 무서웠으면 애초에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애초에 레벨린은 에단의 앞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몸을 사리는 건 적성에 안 맞아.'

어차피 나중에 가면 블란테의 존속 자체가 확실하지 않다. 물론 최대한 블란테 가문이 무너지지 않게끔 할 생각이었다.

애초 그렇게 하려는 이유가 지금과 같이 가문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함이었으니까.

"왜, 싫어?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내가 이미 그러기로 마음먹었거든."

― ...감당하실 자신이 있으신가요?

레벨린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이건 그녀의 경고였다.

하지만 에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에단이 조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는 너는 감당할 자신 있고? 조만간 보자고, 레벨린 팀장."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에단이 네이드를 향해 수정구를 던졌다. 수정구를 받아 든 네이드가 한숨을 내쉬며 통신을 끊었다.

"지, 지금 무슨 짓을...!"

헨리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수정구를 붙잡았다. 하지만 강제로 통신이 종료된 수정구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헨리가 원망 어린 눈초리로 에단을 쏘아봤다.

"...어떻게 책임지실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책임질 거라고 했지 않았나요?"

"아... 현기증이...."

에단의 태연한 대답에 헨리가 비틀거렸다. 그 모습에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속은 시원하지 않았습니까?"

에단의 속없는 물음에 헨리가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솔직히 속은 뻥 뚫렸네요."

헨리의 표정을 본 에단이 웃었다.

* * *

빠드득.

레벨린이 이를 갈았다. 언제나 가면 같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녀의 얼굴에 금이 갔다.

"...꽤나 거슬리게 해 주는군요."

블란테는 큰 덩치의 사자였다. 함부로 삼키려 들면 안 됐다.

"언제까지... 그렇게 으스댈지 지켜보겠습니다."

하지만 남은 시간도 얼마 없었다. 블란테가 먹기 좋은 크기가 됐을 때, 한 번에 집어삼킬 생각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놀랍군."

레벨린이 에단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문의 힘을 믿고 생각 없이 내뱉는 말버릇은 과거와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였지만, 그때처럼 마구잡이로 내뱉는 게 아니라 말 속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주의해야겠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에밀라는 레벨린의 중요한 패 중 하나였다.

그런 에밀라가 패했다는 것은 상당히 뼈아팠다.

'괜찮아. 에밀라의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그녀가 패했다는 것은 학생들은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밝혀지지만 않으면 에밀라의 가치는 퇴색되지 않을 터.

'아직 우위는 우리가 가지고 있어.'

상대는 고작 블란테의 망나니였다. 협상 테이블 위에서 객기를 부려 봤자, 레벨린은 제 마음대로 주무를 자신이 있었다.

'모든 것은 계획을 위해서.'

원대한 계획에 차질 따위는 없어야 했다.

그것도 날아드는 부나방 때문이라면 더더욱.

* * *

"...그러면 저는 이제 어찌하면 되는 거죠?"

헨리가 울상을 지으며 묻자, 에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요?"

"책임져 준다고 하셨잖아요!"

"말이 이상하시네."

에단이 피식 웃으며 대답하자 헨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우물쭈물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결국 헨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사정이 있어서 일을 그만둘 수 없어요...."

헨리가 음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라고 왜 모르겠는가.

아카데미의 처사가 가혹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렇다 할 스펙과 경력이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그녀에게는 아카데미가 최선이었다.

"걱정 마시죠. 저는 거짓말은 안 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지금 급여의 두 배. 그리고 다른 문제도 있죠?"

에단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헨리가 고개를 숙였다.

"네... 빚이 있습니다."

적은 빚이 아니었다. 채무의 압박이 그녀를 그간 몰아세우고 있었다.

채무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기에 달아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지켜야만 하는 가족이 있었다.

"여동생도 있고."

"네...."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뭐라고요?"

헨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못 들으셨나요? 채무도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채무자들? 그 녀석들이 블란테보다 두렵습니까?"

"그건... 아니죠."

아무리 채무자가 두려운 존재라고 해도 감히 블란테와 비교할까.

블란테는 대륙에서도 위명 높은 무력 집단이었다.

"그러니까 순순히 고용되시죠. 어차피 이제 선택지는 없습니다."

에단이 미소 지었다. 정말로 이제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 [49화] 여행 시작 (2)

헨리는 에단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거절하기에는 이미 레벨린에게 저지른 일을 수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단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을 원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정말로 헨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럼 이제 말은 편하게 하도록 하지. 자, 이건 선불."

에단이 헨리를 향해 주머니를 던졌다.

헨리가 화들짝 놀라며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이건 대체...?"

헨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받아 든 주머니를 열어 봤다. 주머니 안에는 환하게 빛나는 금화가 가득 차 있었다.

"허익...!"

헨리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다가 턱 빠지겠다."

"이, 이런 큰돈을...."

"돈이 필요하던 거 아니었나?"

"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거금은 못 받습니다!"

"선금이니까 받아 둬. 위약금이라고 생각해. 정 부담을 느낀다면... 그만큼 굴릴 거니까 기대해도 좋아."

"아...."

그래도 주머니를 되돌려 주려 하던 헨리는 에단의 표정을 보았다.

악마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에단을 보자 오금이 저렸다.

'저, 정말로 이 금화만큼 나를 굴릴 생각이야.'

벌써부터 머리가 어지러웠다.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금화의 값어치만큼 에단에게 이용당할 생각을 하니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반면 에단은 용무가 끝나자 마차 밖을 바라보며 헨리에 대한 신경을 접었다.

'첫 단추는 끼웠군.'

헨리가 지금 당장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만간 요긴하게 쓰일 예정이었다.

'그렇다고 그동안 가만히 놔둘 생각인 건 아니지만.'

지금 당장 큰 쓰임새가 없다뿐이지, 사람 하나로서의 구실은 충분히 했다.

'아카데미에서 구른 짬도 있고, 굴리면 충분히 쓸데가 있겠지.'

에단은 준 만큼 반드시 회수할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음흉한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 ...무서운 놈.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에단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밖에서는 휴고가 들뜬 표정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너는 뭐가 그렇게 신났어?"

"아, 죄송합니다.... 그냥 이렇게 나와 본 게 처음이라서... 헤헤."

'...그럴 나이인가.'

휴고의 나이는 아직 10대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가문 내에서 허드렛일만 하면서 천대받고 지냈으니, 단순히 거리를 거니는 행위 자체만으로 만족감이 높아 보였다.

"여행 가는 거 아니니까 집중해. 우린 블란테의 기사니까."

마차를 몰던 가토가 휴고에게 말했다. 가토는 블란테의 기사라는 자부심이 강한 것 같았다.

"으, 응, 조심할게...."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에단이 피식 웃었다.

'지도 신났으면서.'

가토의 표정도 휴고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붉게 상기되어 있는 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꿈에 그리던 기사라는 목표를 이룬 뒤에 첫 출전.

비록 정식 임무는 아니었지만, 에단이라는 주군을 따라나서는 행위 자체가 큰 동기 부여가 되는 것 같았다.

'좋을 때다.'

둘의 모습이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을 즐기게 놔두고 싶었다.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니까 말이야.'

에단이 저 둘을 데리고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블란테인 걸 안 드러낸다고 했지, 얘네까지 숨긴다고는 안 했잖아?'

휴고와 가토는 블란테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전투 시에 입는 갑주는 아니었지만, 블란테임을 증명하는 수단임은 분명했다.

둘은 명실상부한 블란테의 기사였다.

둘이 블란테임을 드러내는 것은 에단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한마디로 에단의 권한 밖이었다.

'평상시에는 떠벌릴 생각은 없지만.'

그것 때문에 로브를 입혔다. 대놓고 드러내서는 안 되겠지만, 필요시에 이용하기에는 충분했다.

"헨리."

"네, 넵?"

"여기서 아카데미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했지?"

"이 속도로 게이트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하면 2주 정도 소요될 것 같아요."

"2주라."

뭐 나쁘진 않네.

여유를 부려서는 안 되지만, 조급할 것까지는 없었다.

'그 녀석도 아카데미에 있을 테고.'

원작의 주인공.

뛰어난 재능과 온갖 기연으로 순식간에 아카데미의 주목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초조할 것까지는 없다.

구태여 원작 주인공을 짓밟을 필요도 없었다.

주인공의 목표는 흐릿했지만, 결국 자신의 행복과 주변 인물들의 행복 중심이었다.

'알아서 커서 이런저런 상황을 잘 막아 주면 오히려 다행이지.'

원작 내용과는 다르게, 에단은 주인공과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을 예정이니 과도한 경계는 불필요했다.

'그렇다고 죄다 독식하게 둘 수는 없지.'

벌써 주인공이 얻을 것들을 몇 가지 가져왔다.

죽은 나무와 세계수의 목걸이.

'그리고 예상 밖에 소득도 있지.'

타이탄의 장갑과 페온.

'이 두 가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아.'

아무리 원작이 불친절한 소설이라고 해도, 나름대로 중요한 설정인 타이탄과 그를 알고 있는 페온의 스토리에 대해 아무런 언급조차 없었다.

에단에게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지만, 무언가 찝찝했다.

'특히 페온의 존재가 마음에 걸려.'

검을 등한시하던 선대 블란테.

페온의 존재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페온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이유로 영체로 그곳에 머물러 있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언젠가는 밝혀지겠지.'

페온은 당장 쓸모가 있었다. 에단이 아직 개척하지 못한 분야인 마나를 다루는 것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나에 관해서 에단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아직 갈 길이 멀어.'

편법으로 얻는 마나. 그것만으로 마스터의 경지를 뚫는 것은 무리였다.

그간은 순간적인 상황 판단과 변칙적인 공격들로 우위를 점했지만.

'한계는 명확해.'

결국에는 스스로의 역량을 키워야 했다. 페온은 그 점에서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었다.

'어디 한번 보자고.'

멍청하게 뒤통수를 맞을 생각은 없었다. 숙이고 들어가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 * *

까드득!

레벨린이 이를 갈았다.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뭣도 아닌 망나니 새끼 하나 때문에.

늘 평정을 유지하던 그녀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괜찮아. 그딴 녀석 하나쯤."

에단이 교수로 임관된다고 한들 초임 교수의 권한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결국 아카데미를 주무를 수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아카데미의 중축도 결국에는 그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에단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떠올리자 절로 치가 떨렸다.

'계획을 바꿔야겠어.'

원래라면 충분히 블란테를 이용하다 집어삼킬 계획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계획보다 조금 빨리 블란테를 흡수할 생각이다.

'조금 탈이 나더라도.'

뒤따르는 부작용 따위는 감수할 수 있었다.

레벨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 * *

에단 일행의 여정은 여유로웠다. 하인 생활을 오래 해 온 휴고는 순식간에 야영지를 만들었고, 네이드는 간단한 재료로 먹음직한 요리를 금세 만들었다.

소박해 보이는 고기 수프를 입에 넣은 에단이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보기보다 훌륭하네."

"칭찬 감사합니다."

작게 미소를 지은 네이드가 음식을 배분하기 시작했다. 식량이 여유로운 편이 아닌지라 평소처럼 풍족한 식사는 할 수 없었지만, 맛 하나만큼은 소박하지 않았다.

― 에잉, 몸이 없는 게 한이군.

에단이 페온의 투덜거림을 무시했다.

휴고가 스프를 뜬 수저를 입에 넣었다.

"와∼ 네이드 님, 정말 대단합니다! 그 재료로 어떻게 이런 맛을...."

"저도 이 녀석이랑 같은 생각입니다."

"얼굴에 금칠 그만하시죠. 부담스럽습니다."

헨리가 분위기를 살피다 수프를 한술 떠먹더니 눈이 커졌다.

'저, 정말 맛있네?'

과장이 섞인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들어간 재료 중에 정말 특별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맛은 평범하지 않았다.

헨리가 허겁지겁 수프를 뜨기 시작하자 네이드가 작게 웃었다.

식사를 이어 나가던 도중 휴고의 숟가락질이 멈췄다.

곧이어 네이드가 움직임을 멈췄고, 에단도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도련님."

네이드가 에단을 바라보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르지도 않은 불청객이 찾아왔네."

휴고와 가토가 몸을 일으켰다. 가토가 검을 뽑았다.

스르릉―

따뜻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었다.

에단이 주변에 흐르는 기척을 느꼈다. 기운이 매섭지는 않은 걸 보니 짐승의 느낌은 아니었다.

'긴장할 상대는 아닌 것 같고.'

상대방은 아직 다가오고 있었다. 기감이 예민한 휴고와 네이드가 먼저 눈치챈 것이다.

― 걱정은 않아도 괜찮겠군. 하룻강아지 새끼들이 범 무서운 줄을 모르고 몰려오는구나.

스스슥.

수풀을 헤치는 소리, 그리고 그를 뒤따르는 발걸음 소리.

"사람이군."

어이가 없었다. 블란테의 영지를 떠난 지 아직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 한데 블란테의 인근에서 나타나는 도적이라니.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때마침 놈들이 나타났다.

화르륵!

횃불이 켜졌다. 수풀을 거둬 내며 수염이 가득한 거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수풀을 짓밟으며 나타나자 그 뒤에 수많은 도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악한 활과 무기들이었지만, 풍기는 기세는 제법 사나웠다.

"사, 산적!"

겁에 질린 헨리가 에단의 뒤에 몸을 숨겼다.

"하하, 반갑다. 이 앙증맞은 녀석들아."

"...산적인가?"

에단이 눈살을 좁히며 묻자, 거구의 사내가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 앙큼한 놈들, 상당히 말이 짧구나. 이번만 봐주도록 하지. 크하하!"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하네. 산적이냐고 묻잖아."

"하하, 그게 그리도 궁금한가? 어려운 것도 아니니 알려 주마. 네 말이 맞다. 우리는 산적이지. 포상으로 그 혀를 잘라 주마."

거한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거렸다.

"감히...."

가토가 검을 들어 올리려 하자 에단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가토의 시선이 향하자, 에단이 작은 입 모양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기다려.'

궁금했다. 상대를 제압하는 건 나중에도 충분했다.

"그래. 산적이라는 건 무식하게 생긴 외모만 봐도 알겠고. 그래서 무슨 용무지?"

달라지지 않는 에단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거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래. 객기는 인정해 주마. 이 일대는 우리의 땅이다. 남의 땅에 발을 들였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흠, 여기가 너희들 땅이라고? 그거 이상한걸."

에단의 말에 남자가 가슴을 두드렸다.

"이상할 것이 뭐가 있지? 여기가 바로 우리 '곰 발' 산적단의 영역인데 말이야."

거한이 다시금 누린내가 진동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거한의 호탕하고 패기 있는 목소리에, 주변을 에워싼 산적들이 크게 소리치며 호응했다.

"그것참 신기한 일이군. 이 일대는 블란테의 영역이 아니던가?"

"블란테? 흐흐흐... 그 고고한 척하는 기사 새끼들이 너희 같은 벌레 새끼들의 목숨 따위 신경 쓸 거 같아? 그리고 우리는 블란테 따위 무서워하지 않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곱게 혀나...."

"이거 참 실수했군.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그래, 말해 봐라. 질문 하나 정도는 받아 주지."

― 허허, 도적놈들이 말도 많고, 자비심도 넘치는구나.

에단은 페온의 말에 공감하며 놈들에게 물었다.

"왜 우리를 노린 거지?"

"그걸 몰라서 묻나? 딱 봐도 허접해 보이는 놈들이니까. 이 일대를 돌아다니는 애들은 두 부류밖에 없어. 블란테거나 블란테와 거래를 할 정도의 거물이거나. 우리는 뭐 블란테도 딱히 무서워하지 않지만... 괜히 블란테를 건드려서 귀찮은 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어쨌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쭉정이가 겁대가리 없이 이 일대를 지나다니는데 우리가 그냥 넘어갈 이유가 있나. 어때, 대답으로 충분한 거 같은데?"

거한의 대답에 에단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이야, 블란테도 무섭지 않아? 그거참 대단하네. 그런데 너희들 어차피 우리 죽일 생각 아니야? 아까 말한 대로 괜히 후환을 남겨 두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야."

"흐흐,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녀석이 눈치는 빠르구나."

"그럼 이 짓거리는 그냥 우리가 겁에 질린 모습을 보고 싶어서 하는 거겠네?"

"이번에도 정답이다. 애들아, 다 죽여라!"

산적이 웃으면서 에단에게 뛰어들었다. 산적의 손에는 녹이 가득한 도끼가 들려 있었다.

에단이 한숨을 내쉬며 산적의 앞에 한 걸음 다가섰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지랄."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 [50화] 무서운 산적 (1)

에단을 습격한 산적은 나름대로 영리한 축에 속했다.

요즘같이 치안이 발달한 시기에는 노략질을 하기가 어렵다.

병력이 많은 만큼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도적들도 서로가 경쟁하는 시대였다. 규모가 커지면 분쟁이 벌어진다.

이권 다툼은 그들에게도 숙명이었고, 분쟁을 벌일 정도로 규모가 커진 도적들은 소탕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소규모로는 아무것도 안 돼.'

굶어 죽으려고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될 만한 수확을 얻으려면 그럴 만한 대상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생각이 있는 상인이라면 돈 몇 푼에 상행의 명운을 걸지 않는다. 목숨과 상품을 지키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당연히 그를 경호하는 경호 인력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 녀석들을 노려봤자 피만 볼 뿐이지.'

노련한 용병들이 얼마나 무서운 족속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잔혹한 손속은 도적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용병들은 전투 경험으로는 월등히 앞서니 괜히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산적 두목은 고민했다. 그러다가 기회가 생겼다. 생각지도 못한, 뒷배가 좋은 조건으로 끌릴 만한 제안을 받은 것이었다.

― 도적들이 기피하는 곳이 있다네. 그게 어딘지 아는가? 바로 블란테가 있는 곳이지.

약탈이나 하는 도적들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도적질로 부를 불린다고 한들, 도적은 결국 수배당하는 운명에 처해진다.

그렇기에 평생을 불안감에 떨며 살아야 한다.

그런 자신들에게 부와 신분, 그리고 직위를 내건 제안이 왔다. 너무 큰 대가인지라 쉽게 믿을 수 없었지만, 그만큼 달콤해 보이는 과실이었다.

하지만 과실을 따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

그 어떤 도적들도 자리 잡지 않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장소인 블란테의 인근.

블란테는 모르는 이가 없는, 대륙을 주름잡는 무력 집단이었다.

그런 괴물 같은 놈들이 도사리는 곳에서 감히 노략질을 하다니.

아무리 도적들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들이긴 해도, 그런 간 큰 놈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한에게는 뒷배와 함께 자신감이 있었다.

'걸리지만 않으면 되잖아?'

고정 관념을 이용했다.

블란테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블란테가 행차할 때는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호화스러운 행보를 보여 줬다.

블란테와 거래하는 상인과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상응하는 경호 인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녀석들만 피하면 돼.'

모두가 기피하고, 또 두려워하는 장소에 뿌리를 심은 것이다.

먹어도 탈이 나지 않을 만한 놈들을 삼킨다.

그것이 그들의 신조였다.

'그래도 결국에는 꼬리를 잡히겠어. 그 녀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여기서 마무리다.'

슬슬 자리를 뜰 때가 되었다. 안심하고 안주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눈앞의 이 허름한 마차를 마지막으로 털어 버리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산적 두목이 달려들었다.

그래도 한 무리의 우두머리라서인지 기세가 상당히 매서웠다.

험상궂은 외모와 그를 뒷받침하는 덩치.

산적 두목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 나갔다. 흥분한 산적들도 동시다발적으로 뛰어들었다.

전의는 오를 만큼 올라 있어서인지, 패배를 의심하지 않는 승자의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산적들이 헨리를 보는 눈에는 음욕이 가득했다.

마지막에 좋은 물고기가 걸렸다는 듯 음탕한 웃음이 만연했다.

빠악!

이내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하하! 재미없으니까 단번에 죽이지는 마라!"

산적 두목이 호방하게 웃었다.

"너같이 건방진 새끼에겐 쓴맛을 좀 보여 줘야지!"

산적 두목은 도끼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쇳덩이를 휘둘렀다.

에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날아오는 도끼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젖혀 공격을 피했다. 도끼는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피해?"

네가 감히? 라는 표정이다. 에단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 그딴 걸 맞아 주리?"

"이익!"

얼굴이 달아오른 산적 두목이 거칠게 도끼를 휘둘렀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에단의 태도도 바뀌지 않았다.

팔짱을 낀 에단이 여유롭게 공격을 하나하나 피해 냈다.

쉭― 쉬익―

도끼는 여전히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상황이 바뀌지 않자 산적 두목은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뭔가 이상해.'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며 속이 울렁거렸다. 불길함이 치밀었다.

산적 두목은 눈치가 빨랐다. 그게 그동안 노략질을 하면서도 살아남은 이유였다.

'주위가 조용해.'

에단의 여유는 바뀌지 않았다. 뭔가가 이상했다. 시끄럽던 산적들의 웃음소리가 끊겼다.

정적이 찾아왔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소름이 끼쳤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하릴없이 휘두르는 자신의 도끼질 소리뿐이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산적 두목이 아니었다.

"이제야 끝났냐? 대체 얼마나 기다리게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밥 먹던 도중이라 아직 소화가 안 돼서 그만...."

에단이 타박했다. 이미 산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에도 산적은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피가 끓기는커녕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도끼질이 뚝 하고 멈췄다. 호흡이 가쁘고 심장도 거칠게 뛰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땀은 흐르지 않았다.

산적이 고개를 서서히 돌렸다.

"히, 히익!"

수십이 넘던 산적들이 모두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개중에는 피를 철철 흘리는 자들도 있었고, 몸이 기괴하게 꺾여 있는 놈도 있었다.

그 많은 인원이 순식간에 괴멸한 것이다.

가토와 휴고는 가볍게 목과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고 있었고, 네이드는 여전히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자, 잘못 건드렸어.'

벌집을 건드려 버렸다.

습격에도 여유를 부리는 모습을 보고 빠르게 판단했어야 했는데....

자신이 저지른 오판으로 인한 참상을 보며 산적 두목은 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렸다.

"야."

에단이 산적 두목을 불렀다. 산적 두목이 화들짝 놀라며 에단을 바라봤다.

"네, 넵?"

"넵? 방금 '넵'이라고 했냐? 방금은 곱게 죽일 생각이 없다느니 뭐라느니 하지 않았나?"

"그, 뭔가 서로 간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

에단이 산적 두목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너, 이름이 뭐야?"

"주, 줄리엔입니다."

산적 두목의 대답에 에단이 얼굴을 구겼다.

"줄리엔? 이름하고 얼굴이 매치가 안 되는데?"

"죄, 죄송합니다...."

"아니, 뭐 죄송할 건 없고... 이름이 안 어울리는 게 죄는 아니니까. 죄송할 일은 따로 있잖아."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악마의 웃음이었다.

콰직!

"커헉!"

에단이 발끝으로 줄리엔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줄리엔이 신음을 터트리며 몸을 숙였다.

"어쭈, 몸을 숙여?"

에단의 목소리가 살벌하게 줄리엔의 귀에 꽂혔다. 줄리엔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끄으윽!"

콰직!

다시금 이어지는 발길질.

줄리엔은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쓰러지지 않았다.

"야."

"네, 넵!"

"아까 하던 거, 마저 해 봐."

"...."

"곱게 죽이지 않겠다. 뭐 그런 거 했잖아. 이야... 정말 오금이 저리더라. 오줌 지리겠어."

"...죄송합니다."

콰직!

"끄으윽."

다시금 이어지는 에단의 조인트에 옆에서 지켜보던 휴고와 가토가 소름이 끼치는지 팔을 매만졌다.

"...그, 에단 님?"

헨리가 에단을 부르자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에단의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아, 아닙니다."

해맑은 에단의 표정을 보자 헨리가 곧바로 찌그러졌다.

"야."

"네, 넵!"

"너희들 간도 크다? 여기서 몇 탕이나 해 먹은 거야?"

"그...."

줄리엔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에단이 팔을 들었다. 찔끔 놀란 줄리엔이 손을 들었다.

"다섯 번 정도...."

"뒈질래?"

"죄송합니다. 열 번은 되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흐음... 열 번이나 약탈을 했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에단이 네이드를 바라보며 묻자, 그가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죄질이 매우 나쁘군요. 감히 블란테의 입김이 닿는 곳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이야."

"블란테...? 혹시...."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줄리엔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럴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예감이 적중한다면.

줄리엔의 표정이 불안감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어, 맞아. 우리 블란테야."

에단이 휴고와 가토를 향해 손짓했다.

"로브 좀 벗어봐."

에단의 말에 휴고와 가토가 로브를 벗었다. 로브를 벗자, 블란테를 상징하는 검은 사자의 휘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히, 히이익!"

줄리엔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뭐야? 아까는 블란테도 안 무섭다고 하지 않았어?"

"저, 정말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쇼!"

줄리엔이 곧장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연신 찧었다.

머리에 피가 흐를 기세를 본 에단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내가 왜?"

에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악어의 입에 머리를 집어넣었구나!'

후회가 막심하게 들었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한들 늦어도 한참 늦었다.

지금은 구차하게라도 목숨을 구걸할 때였다.

"다, 다시는 이런 짓 벌이지 않겠습니다!"

"야."

에단이 부르자 줄리엔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진심이 조금도 안 느껴지잖아."

에단이 줄리엔의 덥수룩한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지면에 내다 꽂았다.

콰직.

"끄으윽!"

줄리엔이 신음을 흘렸다.

흙바닥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지만, 에단은 머리채를 놓지 않고 다시금 들어 올렸다.

"줄리엔."

"네, 넵!"

"대답은 한 번만 해."

"네!"

"이 정도 규모면 너희 아지트도 있겠네?"

"...."

"하하, 대답을 안 하네. 괜찮아."

쾅!

줄리엔의 얼굴이 다시 바닥과 인사했다. 그러자 줄리엔의 얼굴은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었다.

얼굴에서 피와 먼지가 같이 흘러내렸다.

"줄리엔."

"네! 아지트 있습니다! 저희가 손수 안내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이제야 말이 통하는구나."

에단이 몸을 일으키자 줄리엔도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얘네 다 묶어 두고 가자."

"이놈들을 전부 말씀입니까?"

"어. 죽이진 않았지?"

가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몰라서 치명상은 피하고 모두 기절시켰습니다."

"그럼 다 깨워."

"알겠습니다."

휴고와 가토가 기절해 있던 산적을 모두 깨웠다.

깨어난 산적들 중에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반항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몇 대 쥐어 터지자 다시 얌전하게 바뀌었다.

"뒈질래?"

휴고가 손을 흔들면서 경고하자 악을 쓰던 산적이 얌전해졌다.

― ...저거,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말이다. 안 그러냐?

페온의 물음에 에단은 대답을 회피했다.

"야, 산적 두목."

"네, 부르셨습니까."

"이제 안내해."

자원을 보충할 시간이었다.

◈ [51화] 무서운 산적 (2)

산적들의 아지트는 야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숫자에 비해서 아지트의 규모가 큰 편이었다.

돈은 물론이고 가치가 있어 보이는 물건들도 상당히 쟁여 두었고, 심지어는 가축도 기르고 있었다.

"보존식도 꽤 있고 좋네."

조만간 이곳을 정리할 생각이었는지, 떠날 채비까지 되어 있었다.

"내가 잘 쓸게."

"헤헤, 제가 오히려 영광입니다. 전부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에단이 줄리엔의 뒤통수를 두드리며 말하자, 그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속이 쓰리다 못해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차마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산적답지 않게 검소한 삶을 지양하면서 아등바등 모아 온 재산이었다.

그러한 재산을 한순간에 모조리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항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에단이 너무 무서웠다.

"오늘은 여기서 지내면 되겠네. 얘들 다 묶어 놔."

그 말에 가토가 에단에게 다가왔다.

"...이놈들을 살려 두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놈들도 쓸데가 있거든."

개똥도 약에 쓴다는데, 그냥 버리기는 아깝잖아.

* * *

훌쩍훌쩍.

산적들의 흐느낌 소리가 이어졌다.

그간 힘겹게 쌓아 올린 탑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직 덜 맞았지?"

커져 가는 흐느낌 소리에 짜증이 치민 휴고와 가토가 몸을 일으켰다.

서슬 퍼런 안광이 줄줄 흐르자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산적들은 알고 있었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저들의 외모는 눈속임이라는 걸.

웃으면서 상대를 곤죽으로 만드는 모습.

그 상황을 직접 겪은 산적들은 둘을 보자마자 오줌을 지릴 뻔했다.

"다시 밥부터 먹을까."

에단이 네이드를 바라봤다. 네이드가 한숨을 내쉬며 소매를 걷었다.

"할 일이 늘어 버렸군요."

대부분이 육포 따위의 보존식이었지만, 산적들의 본거지인 만큼 음식과 식자재는 풍족했다.

네이드가 소매를 걷자, 페온와 가토도 일손을 도왔다.

꽤나 그럴듯한 음식들이 순식간에 준비되었고, 묶여 있는 산적들을 방치해 둔 채 에단 일행은 식사를 시작했다.

오물오물.

헨리는 말없이 음식을 씹으면서 에단을 바라봤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그 포악한 돼지가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니.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있는 날카로운 인상이 있긴 하지만, 에단은 누가 봐도 잘생긴 편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눈빛.

살에 파묻혀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정말로 파묻혀 있던 보석이 세공된 것 같았다.

'성격은... 바뀐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전처럼 패악질을 일삼지는 않았지만, 들이박고 보는 성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레벨린과의 통신에서도, 방금 전 산적과의 조우에서도 에단은 조금도 기가 죽어 보이지 않았다.

에단의 태도는 늘 거만했고, 거침없었다.

과거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없던 실력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가문만 믿던 망나니에서 힘과 뒷배를 모두 갖춘 오만한 사자가 되었다.

'...아카데미에서는 괜찮을는지 모르겠네.'

본의 아니게 퇴사를 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헨리는 아카데미에 대한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에단이 스스로 블란테임을 드러내지 않겠다고는 말했지만, 과연 그렇다고 한들 그의 태도가 평소와 다를까 생각해 보면....

역시 회의적이었다.

'아, 음식.'

잠시 상념에 빠져 있었더니 음식이 빠른 속도로 줄기 시작했다.

헨리가 상념을 지우고 꾸역꾸역 음식을 입에 넣었다.

"쩝쩝, 헨리 씨 배가 많이 고프셨나 봐요?"

햄스터처럼 음식을 볼에 가득 채운 휴고가 그리 묻자, 헨리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쿨럭, 네.... 조금...."

하지만 지금은 사사로운 대화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 * *

'...이러면 지원을 덜 받은 게 의미가 있나?'

헨리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정작 에단이 매우 흡족해 보였기 때문에 따로 말은 하지 않았다.

식재료가 보충되었고, 마차의 크기는 그대로였지만 말이 한 필 늘어 쌍두마차가 되었다.

쌍두마차는 큰 도시의 내부가 아니라면 보기 힘들었다.

말 자체가 워낙 비싸고 말을 관리하기도 쉽지 않다 보니, 말을 가지고 있는 상인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쌍두마차인 것치고는 마차의 외관이 매우 부실하긴 했지만, 어쨌든 말이 하나 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상당히 높아졌다.

에단이 떠날 채비를 갖추자, 산적들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서글픔에 눈이 촉촉해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에단을 노려보는 자들도 있었다.

"표정이 참 보기 좋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물론 그러한 태도를 에단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에단을 노려보던 산적 하나가 급하게 눈을 깔았지만, 에단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빠각!

"꺼헉!"

에단의 발이 산적의 정강이를 거칠게 찍자, 산적의 몸이 굽어졌다.

"왜 몸을 숙이지?"

에단의 서늘한 목소리에 산적이 재빠르게 몸을 세웠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발길질이었다.

빠악!

"야, 너도 이리 와."

"저, 저 말씀입니까?"

에단이 대뜸 줄리엔을 향해 손짓했다. 안쓰러운 시선으로 부하를 지켜보던 줄리엔이 당황하며 스스로를 가리켰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줄리엔의 근처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그러면 거기에 너 말고 다른 놈도 있어?"

에단의 눈빛에 줄리엔이 기가 잔뜩 죽은 표정으로 에단 앞으로 다가섰다.

"너, 애새끼 교육 제대로 안 해?"

빠악!

에단의 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줄리엔의 정강이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끄흑!"

"너도 정신을 못 차렸네?"

남들보다 가혹한 처사에 줄리엔은 서러움이 복받쳤지만, 에단은 투정을 받아 줄 사람이 아니었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애들 교육을 똑바로 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아, 그래? 알기는 아네?"

빠각!

줄리엔의 몸이 다시 숙어졌다.

하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에단의 눈총에 줄리엔은 빛의 속도로 몸을 일으켰다.

에단의 갈굼을 말없이 바라보던 일행은 하나같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휴고가 가토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우, 우리한테는 친절하게 대해 주신 거였구나...."

"...앞으로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하자."

그간 해 온 지옥 같은 트레이닝과 에단이 보여 준 악마 같은 모습이 약과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갈굼의 늪은, 공포 그 자체였다.

'여, 역시 무서운 사람이야.'

헨리는 겁을 집어먹다 못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에단에 대한 공포심이 더더욱 뇌리에 각인되었다.

한편 줄리엔은 이를 악물고 옆에 있는 산적을 노려봤다.

괜히 빌미를 줘서 자기까지 이런 꼴에 처하게 만들다니.

에단을 향한 분노보다 옆에 있는 수하들에 대한 원망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너는 안 되겠다. 그냥 보내 주려고 했는데."

"네? 그게 대체...."

줄리엔이 애처로운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블란테 직할령에 있는 산 알지?"

"네.... 알긴 하죠.... 그, 몬스터들이 바글바글하기로 악명 높은 곳 아닌가요...?"

"잘 아네."

에단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줄리엔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내가 약도를 하나 줄게. 적혀 있는 대로 따라가면 동굴이 하나 나오거든?"

"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거기에 들어가면 너를 손꼽아 기다리는 애가 하나 있을 거야."

"설마...."

"너희들 다 거기로 가라."

줄리엔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그럼 우리는 갈 테니까 너희도 잘 찾아가. 아, 도망갈 녀석은 중간에 도망가도 돼."

에단의 말에 산적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대신 그때는 '차라리 죽는 게 행복하다'는 말이 뭔 뜻인지 알게 될 거야. 그럴 각오가 있으면 도망가도 돼."

산적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검게 죽었다.

에단이 떠나기 전에 줄리엔을 응시했다.

줄리엔은 지옥 같았던 일들을 떠올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너는 수염이랑 머리 싹 자르고."

"...알겠습니다."

그간 자신의 강한 이미지를 공고히 만들고자 유지해 온 긴 머리와 수염이었지만, 에단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거스를 수가 없었다.

괜히 에단의 말을 거역했다가 무슨 후폭풍을 맞게 될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산적들보다 더한 놈.'

정말로 치가 떨렸다.

그때 에단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아, 너희들 이름이 뭐 곰 발바닥 어쩌구라고 하지 않았나?"

"...곰 발 산적단입니다."

"아, 그래. 너희 혹시 '붉은 곰' 용병단 알아?"

에단의 물음에 줄리엔의 눈이 커졌다.

뒤늦게나마 표정을 관리했지만 에단의 눈초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뭐야, 아는구나."

에단이 히죽 웃자, 줄리엔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분들은 어떻게?"

"그건 알 필요 없고. 뭐, 걔네 따까리였냐?"

줄리엔은 순간 고민했다. 신의를 지키느냐, 아니면 당장 자신의 정강이를 지키느냐.

결정은 빨랐다.

"...네. 인연이 있기는 합니다."

"보나 마나 빤하네. 뭐, 여기 알선받고, 정보 주고 그런 거겠지."

줄리엔의 눈이 다시금 커졌다. 에단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에단이 웃으며 다가왔다.

"그 새끼들, 지금 어디서 뭐 해?"

* * *

에단 일행은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마차는 여전히 허름하고 불편했다.

― 용병단 따위를 찾는 이유가 있느냐?

'별건 아닙니다. 일대에서 꽤나 이름값을 날리는 녀석들이라고 들어서요.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

― 흐음... 알겠다.

페온이 의구심을 떨쳐 내지는 못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에단이 가진 정보는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붉은 곰이라....'

꽤나 이른 시기에 그들과 접촉할 기회가 생겼다.

산적들 따위가 블란테 근처에 자리를 잡을 생각을 하기는 어려울 테니, 뭔가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그게 붉은 곰이라니. 이름이 비슷해서 물어봤는데 우연찮게 얻어걸렸다.

'위치도 괜찮군.'

마침 그들은 아카데미로 가는 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찌할까.'

아카데미에 빠르게 도착하는 게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붉은 곰도 후순위에 불과했다.

선택은 에단의 몫. 에단은 턱을 괸 채 휴고와 가토를 바라봤다.

'쟤네를 쓸까?'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굳이 비효율적으로 뭉쳐 다닐 필요는 없으니까.

자신이 가진 정보는 제한적이다. 붉은 곰과 관련된 사건은 아직 진행되기 전이고, 알고 있는 지식들은 모두 미래의 사건들을 기반으로 한다.

그것도 대부분이 주인공 위주의 서술들.

'그래도 키워드만 있으면.'

그렇다고 한들 에단이 가진 정보가 쓸모없는 건 아니었다.

정보는 큰 이점이다. 더군다나 온갖 기연이 난무하는 이 세계관에서라면 더더욱.

산적, 그리고 용병.

시기가 적절하다. 그래서 오히려 거슬렸다.

'앙큼한 짓을 하는군.'

때마침 블란테 영지에 자리를 잡고 있던 산적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붉은 곰 용병단.

이 모든 것들이, 레벨린이 깔아 둔 초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레벨린은 결국 블란테를 집어삼키는 게 목적일 테니까.

'이런 꼴로 움직인 덕에 뜻밖의 수확을 얻었군.'

만일 블란테임을 숨기지 않고 여정을 떠났다면, 산적단은 결코 에단 일행을 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붉은 곰 용병단의 정보를 얻지도 못했을 테고.

'소상인들은 계속해서 피해를 입었겠지.'

조금씩 블란테에 관한 괴담들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을 테지만, 원래 소문이라는 것에는 점차 살이 붙기 마련이다.

에단은 앞을 바라봤다. 잠이 덜 깬 휴고가 입을 벌려 하품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가토가 못마땅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야, 너 때문에 마차 속도 느려진 거 안 보여? 몰기 힘드니까 좀 떨어져."

"...아까는 호위니까 좀 붙어야 한다며."

가토에게 지적당한 휴고가 작게 투덜거렸다.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란 말이야. 훈련 때 안 배웠어?"

둘의 대화를 듣던 에단이 피식 웃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군.'

읽던 소설 속에 들어오다니. 유행이 지나도 너무 지난 설정이 아니던가.

게다가 편치 않은 앞날이 예상되었다. 원작은 총 20권이 완결이었고, 류태신은 15권을 보던 중 소설 속으로 끌려 왔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봐도 원작의 결말이 빤히 보였다. 이미 주변 인물이 다 죽어 가는 와중인데 좋게 끝나 봤자 결말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즐거웠다.

의욕과 의지를 잃고 점점 시들어 가던 감정이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류태신은 챔피언이었지만,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그에 반해 이곳은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이었고, 에단은 시험하고 싶었다.

자신의 능력과 한계.

성장하고 쟁취하는 것.

투쟁을 통한 승리.

그것이 에단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였다.

설렜다. 류태신이었을 때는 진절머리 나기만 했던 인간관계도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휴고, 가토, 네이드, 페온, 빈센트.

동료라는 단어는 믿지 않았다. 세상은 혼자 사는 거라 생각했고, 그렇게 믿어 왔으니까.

'하지만 이 녀석들이라면....'

조금은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씨익,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용히 가자."

"넵!"

"네!"

티격태격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끊겼다.

정적이 찾아왔고, 말발굽 소리만이 여정에 함께했다.

맑은 하늘을 보며 에단이 피식 웃었다.

◈ [52화] 아카데미의 문지기 (1)

일행은 여정에 속도를 올렸다. 곰 발 산적단 덕에 꽤나 이른 시점에 물자를 충당했다.

원래라면 적당한 마을이나 도시를 경유할 예정이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움직이는 걸 알았으니.'

산적, 붉은 곰, 아카데미.

연관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알게 된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게이트가 있는 도시까지 쉬지 않고 간다는 에단의 말에 휴고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지만, 그런 사사로운 감정까지 배려할 수는 없었다.

일행의 체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마차를 모는 말의 체력만 적절히 안배했고, 이내 게이트가 존재하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은 문제가 생겨났다.

"그렇게 비싸다고요?"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던 휴고가 게이트 이용료를 듣고는 입을 떡 벌렸다.

아무래도 마차까지 함께 이동하는 터라 많은 비용이 요구되었다.

아카데미의 초청장이 있다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겠지만, 에단은 아카데미에서 초청장이 오기 전에 출발했기 때문에 그런 편의를 바랄 수 없었다.

'나중에 청구하면 되겠지.'

에단은 일단 이용료를 납부하고는 게이트를 통해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이건...?"

휴고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게이트를 넘자마자 보인 것은 거대한 벽이었다.

외지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거대한 방벽.

'돈을 처발랐군.'

블란테 가문의 방벽도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지만, 아카데미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에단이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장소에 거대한 문이 보였다.

"입구는 저쪽인가?"

에단의 말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나저나 아카데미에 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헨리가 착잡한 얼굴로 문을 바라봤다.

더 이상 헨리는 아카데미의 소속원이 아니었다. 외지인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아카데미는 새로웠다.

"이렇게 엄격히 통제하면 제대로 된 생활이 가능한가요?"

"정기적인 물자가 들어옵니다. 아무래도 다양한 신분의 사람이 아카데미에 있다 보니, 아카데미와 구성원들은 늘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죠."

"아, 그렇군요...."

블란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깊은 산맥 중턱에 위치한 블란테도 정기적인 보급을 받고 있었으니.

물론 블란테는 반강제적인 경우였지만....

에단이 거대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비상식적으로 커다란 문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덩치의 거구가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역시나 있네.'

에단이 한숨을 내쉬고 그 앞에 섰다.

거한은 문에 기댄 채로 잠에 취해 있었는데, 에단이 한 걸음 더 다가서자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출입 예정. 오늘 없다. 외부인."

에단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활자로 보던 녀석을 마주하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에단이 한숨을 내쉬고 거한을 노려봤다.

"나 여기 교수니까 시험이니 뭐니 하지 말고 조용히 들여보내 주면 안 되냐?"

"...."

말없이 에단을 바라보던 문지기가 마치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 너는 교수가 아니다."

문지기의 말에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에단의 표정이 차가워진 것을 본 휴고와 가토는 등이 축축해졌다.

"야, 저거 어떡해...?"

"몰라. 입 다물고 있어. 괜히 불똥 튈 수도 있으니까."

휴고와 가토는 이미 마음을 놓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에단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게 신상에 이로울 터.

"저, 저는 들어갈 수 있나요? 저는 직원인데...."

지금은 아니지만....

끝말을 흐린 헨리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문지기가 가늘게 뜬 눈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안 된다. 넌 이제 여기 소속이 아니다."

문지기의 대답에 헨리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벌써 아카데미에서 제명당한 것이다.

헨리의 얼굴이 음울해지자, 에단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지랄 말고, 나 교수 맞으니까 비켜."

"안 된다. 너, 교수 아니다. 나는 여기 지킨다."

"염병, 진짜."

에단이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때, 때마침 사람이 나타났다.

"고생하십니다."

"지나가라."

문지기가 문을 열었다. 웅장한 크기의 문이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열렸다.

"쟤네는 뭐야?"

"몰라,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어서 떼쓰나 보지."

"큭큭, 한심한 놈들이네."

"그러게 말이야. 제대로 시험이나 치르고 들어올 생각을 해야지. 하핫."

앳된 얼굴의 학생들이 에단을 흘겨보며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 ...치, 침착하거라.

에단의 감정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이는 페온이었다. 페온은 지금 에단이 어떤 감정에 휩싸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화는 별로 안 나요.'

― ...정말이냐?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에단이 미소를 머금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물러서라. 너, 약하다. 다친다."

문지기 앞에 선 에단이 재차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단순한 두통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거슬렸다.

이윽고 기억의 편린이 깨어났다. 류태신의 기억이 아닌 에단의 기억이.

'허, 어이가 없군.'

기억의 내용은 단순했다. 문지기의 임무는 아카데미의 문을 지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 그것은 문지기의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안하무인이던 망나니 에단은 정해진 규율을 지킬 리 없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 억지를 부렸고, 문지기에게 처참히 얻어터졌다.

머저리 같이 얻어맞고 바닥을 기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가슴이 들끓었다. 기억 속의 한심한 자는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기억의 잔상은 계속해서 머리를 찔렀다.

그 당시 얻어터지고 나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가문 내에서 외면받는 에단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문지기 따위에게 패배한 에단을 한심하게 여기며 그 사실을 쉬쉬하기 바빴다.

류태신이 아닌, 과거 돼지 같은 에단의 기억을 상기했다.

* * *

짜악!

고메드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에단의 뺨을 무참히 가격하자, 에단은 속절없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너, 멍청하다."

고메드가 비릿하게 웃으며 에단을 조롱했다. 주변에 인파가 몰려들었고,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가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에단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물들었다.

가문에서 천대받고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영지와 밖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에단은 블란테 가문의 적자였고, 블란테라는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 권력이 아카데미에서도 통하는 줄 알았다.

가문에서 무시받지 않기 위해 아카데미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하지만 시험에서는 낙방하고, 귀족도 아닌 문지기 따위가 에단을 향해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너, 내가 누구인 줄 알면서 그러는 것이냐?!"

에단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문지기를 노려봤다.

그러자 거대한 덩치에 문지기는 눈을 끔뻑거리며 에단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너? 돼지 아닌가?"

푸하하하!

지켜보던 이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벌게진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네가 감히...!"

"너, 못생겼고, 시끄럽고, 돼지 같다."

문지기가 걸어 나왔다. 그가 발걸음을 내딛자 대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퍼억!

문지기의 다리가 공성추처럼 휘둘러졌고, 에단은 단 한 번의 발길질에 공중으로 붕 떴다.

"너, 동글동글, 공놀이하기 좋다."

문지기가 비릿하게 웃었다.

* * *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얻어터지는 기억은 에단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류태신이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의 기억이 가져다주는 감정은 명확했다.

분노.

화가 치밀었다. 아카데미 입성의 첫 단추인 만큼 원만하게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에단의 입가가 휘었다.

"야, 나 기억하냐?"

에단의 물음에 문지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너 같은 녀석 모른다. 물러서라. 다가오면 다친다."

"그래. 원래 이긴 새끼에겐 기억이 없어. 나도 그랬거든, 진 새끼들 따위 기억에 안 남아."

에단이 앞으로 다가서며 웃었다. 여태껏 보인 적 없던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에단을 바라보던 일행은 너 나 할 것 없이 몸을 떨었다.

에단의 몸에서는 지금 무형의 마나가 줄기차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저 녀석은... 눈치가 없는 건가?'

이 거리에서도 피부가 따가울 정도였다. 하지만 문지기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너, 겁이 없나?"

"어, 나 겁 없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휴고와 가토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제발 겁 좀 가져!'

하지만 마음의 소리가 문지기에게 닿을 리 만무했고, 문지기는 오히려 쿡쿡 웃었다.

"너, 귀엽다. 하지만 오면 혼난다."

"내가 너를 이기면 들어갈 수 있는 건가?"

"멍청한 소리다. 넌 날 못 이긴다. 그럴 일은 없지만, 나를 이겨도 들어가진 못한다.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선택받은 자들이다. 너같이 멍청한 녀석이 아니라. 하하."

문지기는 갑자기 유창해진 말로 에단을 도발했다.

"...헨리 씨."

"네?"

가토의 부름에 침울한 표정의 헨리가 고개를 들었다.

"저 문지기 강한가요?"

"아... 네, 뭐... 강하죠."

"얼마나 강한 거죠?"

헨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마나 유저 중에서는 적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교수급은 되지 못하죠. 그것도 교수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에밀라 씨를 이긴 에단 씨에게는...."

그제야 헨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걸 말릴 수 있을 거 같나요?"

"아...."

그제야 두 사람 사이의 기류를 눈치챈 헨리의 말끝이 늘어졌다.

그녀도 느낀 것이다.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 것을.

헨리가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일이 커지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에단이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문지기의 두꺼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너, 다친다."

마지막 경고였다. 그러나 에단은 보란 듯이 발을 내디뎠다.

"다치게 해 봐."

"늦었다! 후회해도!"

문지기가 에단에게 다가섰다. 엄청난 거구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았지만, 에단의 앞에 나란히 서자 몸집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자그마치 두 배가 넘는 신장 차이. 키만 컸다면 그렇게 거대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몸을 가득 메운 압도적인 근육.

화가 잔뜩 난 근육이 꿈틀거렸다.

문지기가 팔을 젖혔고, 무엇을 할지는 벌써부터 예상이 되었다.

에단은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너, 죽는다!"

문지기가 젖힌 팔을 뻗었다.

후웅!

강한 풍압이 일었다. 단순히 주먹을 내지르는 행위였지만, 거기에 뒤따르는 파급력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위력에 에단의 검은 머리가 휘날렸다.

'큰일이다!'

문지기는 후회가 막급했다. 눈앞의 치기 어린 애송이의 태도가 건방졌다고 한들, 대응의 정도가 너무 심했다.

손속을 두고 상대해야 했지만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내지른 힘을 제어하기는 불가능했다.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처벌을 피하기가 어려울 터.

"피해라!"

문지기가 간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에단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에단이 한 걸음 더 내딛자, 바위 같은 주먹이 그의 코앞에 다가왔다. 하지만 에단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에단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아주 가볍게 문지기의 팔을 쳐 냈다.

패링(Parrying).

상대의 공격을 흘려 내는 방어 기술.

잽과 같은 견제기가 아닌, 제대로 힘이 실린 공격을 패링해 내기는 쉽지 않았지만, 타이밍과 기술의 완성도가 그걸 가능케 만들었다.

탁!

후웅!

문지기가 자신의 힘에 못 이겨 몸을 휘청거렸다. 에단이 무너지는 문지기의 몸을 가뿐하게 피했다. 문지기는 지면에 팔을 뻗어 고꾸라지는 것을 겨우 면했다.

넘어지는 것은 면했지만, 문지기는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안도감보다는 의아함이 앞섰다.

분명 눈앞의 남자는 곤죽이 되어야 정상이었다.

'내가 졌다? 힘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힘은 문지기의 자부심이었다. 힘에 있어서는 그 누구에게도 밀린 적이 없었다.

"너, 속임수 썼다. 나쁜 놈이다."

문지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문지기의 얼굴이 흉신 악살처럼 일그러졌다. 흉흉한 살기가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지랄, 아, 맞다. 선빵은 네가 친 거다? 이제 난 죄가 없어."

에단의 도발이 이번에는 제대로 먹혔다.

문지기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머릿속이 분노로 하얘졌다.

"우어어어!"

문지기가 다시금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죽이기로 작정하고 휘두른 주먹이었다.

에단이 앞서 했던 동작을 반복했다. 문지기의 손을 쳐 낸 뒤,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주먹은 이렇게 휘두르는 거야."

앞발을 축으로 에단의 몸이 회전했다. 에단의 왼 주먹이 문지기의 옆구리에 꽂혔다.

퍼억!

"흐억!"

문지기는 헛숨을 들이켰다. 살면서 느껴 본 적 없는 끔찍한 고통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 [53화] 아카데미의 문지기 (2)

문지기의 몸이 크게 꺾였다. 그는 배를 부여잡으며 몸을 숙였다.

고통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엄살이야?"

신장 차이가 크게 났다. 원래라면 간을 두드리는 리버 샷이 적중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크게 차이 나는 신장 탓에 간이 있는 위치까지는 주먹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좋군.'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문지기가 몸을 수그리자 눈높이가 맞았다.

"엄살 피우지 말랬지."

에단의 발이 몸을 숙인 문지기의 턱에 꽂혔다.

퍼억!

문지기의 턱이 크게 들렸다. 굽었던 문지기의 몸이 펴지자, 에단이 뛰어들었다.

빠악!

에단의 발이 문지기의 가슴팍에 적중했다.

"꺼헉!"

문지기가 숨이 멎는 소리를 내었다. 거체가 바닥에 고꾸라지자, 먼지와 바람이 일었다.

"끄윽, 끄윽."

연이어진 공격 탓에 호흡이 곤란해졌는지 문지기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에단은 문지기의 상태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에단은 문지기의 가슴 위에 올라섰다.

차갑게 식은 눈과 마주치자 문지기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야, 한 번 더 지껄여 봐."

"끄어어어...."

"대답을 안 하네?"

퍽!

에단이 발을 굴렀다. 문지기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끄어억!"

문지기가 비명을 질렀다.

"더 말해 보라니까?"

"끄어어어억!"

문지기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가슴과 명치를 연달아 얻어맞은 터라, 적잖은 충격이 가해진 상태였다. 뼈 하나하나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동반했다.

당연히 원활한 호흡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문지기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상황이라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우스워?"

"으어어어!"

문지기가 격렬하게 고개를 휘저었다.

"무시하고 있는 거 맞네."

에단이 웃었다. 마치 악마의 미소 같았다.

충혈된 문지기의 눈이 촉촉해졌다.

"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휴고가 고개를 돌렸다. 예상하던 상황인 데다 에단이 저런 표정을 지은 순간, 이미 말리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멍하니 바라보던 헨리가 정신을 차렸는지 화들짝 놀랐다.

"저거 어쩌죠? 말려야...."

안절부절못하는 헨리를 보며 가토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말리면 저희도 죽습니다...."

저 상태에 접어든 에단은 가토도 두려웠다.

'그래도 이 정도면 손속에 사정을 둔 거 아닐까...?"

가토는 에단이 블랙 오우거를 상대할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 무자비한 손속에 비하면 지금은 양호한 것 같았다.

적어도 남자로서 지켜야 할 만한 부분은 무사했고, 표정을 보아하니 문지기를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 이 정도면 다행이지.'

혼자 납득한 가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더 이상 지켜보는 것은 고역이었는지 고개를 돌려 문지기를 외면했다.

"사람을 그렇게 개무시해도 되는 거야?"

에단은 이제 시작이었다. 문지기는 에단의 모습에 공포를 느꼈다.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신력을 타고난 문지기는 모두의 두려움을 받았다.

하지만 낮은 지능과 둔한 몸 탓에 한계가 명확했다.

문지기보다 강한 자도 많았지만 그들 모두 그를 존중했다. 문지기가 강자들에게 느끼는 감정 역시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와 존경이었다.

하지만 에단에게서는 끝을 알 수 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소름이 돋고 땀이 흘렀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문지기의 큰 눈에 물기가 맺혔다.

겨우 호흡이 회복되어 입을 열려고 하자, 에단의 발이 자비 없이 가슴에 꽂혔다.

"끄어어어어!"

문지기가 괴성을 내질렀다.

"난 말이야, 누가 나를 내려다보는 게 싫어."

에단이 한 걸음 더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그런데 널 이대로 보내면, 넌 다시 날 내려다보겠지?"

에단이 히죽 웃었다. 문지기가 턱을 딱딱거리며 몸을 떨었다. 공포심이 가득 차 있는 얼굴이었다.

"죽여도 되지 않을까? 이 정도면 정당방위잖아. 나도 죽을 뻔했고...."

문지기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 싫어? 그러면 눈이라도 뽑아 갈까. 그 건방진 눈깔이 없으면 사람을 깔보지 않을 거 같은데...."

"우어어어어어!"

물론 에단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애초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단지 몸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름대로 살살 때리는 중이었고.

어쨌든 문지기가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 주면 자신이야 좋았다.

"아, 그것도 싫어? 참 따지는 게 많네.... 그러면 다리는 어때? 그 다리를 죄다 분질러 버리면 눈높이가 비슷하지 않을...."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문이 열리면서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는 여자가 걸어 나왔다.

부드러운 몸선과 이목구비를 지닌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오랜만이네."

에단이 팔을 들어 반갑게 인사하자, 에밀라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일인지 설명하세요."

에밀라의 타박에 에단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음...."

"일단 내려오세요!"

"그래, 뭐... 부탁이라면."

에단이 문지기의 가슴 위에서 내려왔다.

에단이 내려서자, 문지기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으어어어!"

문지기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벽까지 기어갔다.

에단이 눈을 끔뻑이며 문지기를 바라봤다.

"쟤는 왜 저래?"

에단의 물음에 에밀라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하아.... 됐습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설명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에밀라가 멀뚱멀뚱 서 있는 일행을 바라봤다.

"다들 들어오시죠. 헨리 씨는... 소식 들었습니다."

헨리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에밀라가 가늘게 뜬 눈으로 헨리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는 뭐라고 할 권리도 없을뿐더러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부디 옳은 선택을 하셨기를 바랍니다."

에밀라의 말에 가식은 없었다. 지금 혼란스러운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고메드 씨... 괜찮으신가요?"

'아, 쟤 이름이 고메드였나?'

워낙 비중이 없는 문지기 캐릭터인지라 이름까지는 기억에 없었다.

'애초에 원작에서도 문지기라고만 묘사되었으니.'

"으어어어어...."

고메드가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살면서 처음 겪는 극한의 공포였다. 에단과 눈을 마주친 그가 어린아이처럼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덜덜덜.

바들바들 떠는 고메드를 안쓰럽게 바라본 에밀라가 에단을 노려봤다.

"불가항력이었다고."

에단의 변명 아닌 변명에 에밀라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변명은 들어가서 마저 듣겠습니다. 그보다... 굉장히 빨리 오셨군요."

"칭찬 고마워."

"칭찬 아닙니다. 적어도 준비할 시간이.... 하, 당신이란 사람은...."

"그거 이상한데. 난 분명 가는 중이라고 전달을 했는데."

"누구에게 말이죠?"

"네 상사."

"레벨린 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 반응이 아주 앙큼하더라고."

익살맞게 웃는 에단을 보며 에밀라는 인상을 찌푸림과 동시에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레벨린이라....

그녀를 떠올리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일단 들어가시죠. 고메드 씨는... 잠시 여기 계시겠습니까?"

끄덕끄덕.

바들바들 떨던 고메드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문안으로 들어섰다.

안에 들어서자 나무와 꽃들이 수놓아져 있는 도로가 보였다.

"와...."

휴고가 탄성을 터트렸다.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반면 에단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에단의 감성은 메말라 있었다.

'머리가 꽃밭인 놈들이 만들었으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감상에 젖을 법도 했지만, 에단은 말없이 에밀라의 뒤를 따랐다.

"어떻게, 잘 지냈고?"

"...잘 지냈을 거 같습니까?"

에밀라는 뾰족한 시선으로 에단을 응시하고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바지런히 걸었지만, 목적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아카데미의 부지는 넓었고, 수용 인원도 많았다.

수많은 학생과 그 학생들을 케어하는 다양한 직원들의 시선이 에단 일행에게로 향했다.

'노골적이네.'

하지만 대부분의 시선은 에단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에밀라를 향한 뜨거운 시선.

그들에게 에단은 갑자기 굴러온 눈엣가시에 불과했다.

여학생들은 선망의 눈으로, 남학생들은 흠모하는 눈으로 에밀라를 보고 있었다.

"휘유∼"

에단이 휘파람을 불었다. 에밀라는 생각보다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잘 따르나 봐?"

"...이제 당신이 가르쳐야 할 학생들입니다. 언행에 늘 주의하세요."

"난 늘 주의하고 있어. 이래 봬도 명문가 자제거든. 배울 건 배웠지. 안 그래, 네이드?"

에단이 바라보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도련님은 단 한 번도 정상적인 교양 수업을 듣지 않았습니다."

"...."

웃으면서 핵심을 짚는 네이드의 말에 에단이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대화를 듣던 휴고와 가토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웃음을 터트렸다가는 후환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하아.... 됐습니다."

에밀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단이 말없이 에밀라를 뒤따르다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원래라면 교무실에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사수를 통해서 업무를 익히는 게 우선이겠지만...."

에밀라가 말없이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의 얼굴에는 귀찮다는 감정이 빤히 드러나 있었다.

에밀라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어쩌다가 이런 인간에게....'

지난번 결투에서 완패한 이후, 완벽하게 휘둘리고 있었다. 그녀는 평생을 싸워 오고 수련해 왔다.

전투 실력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대련과 실전 모두 에단에게 패배했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질투? 분노?

그런 감정과는 결이 달랐다.

말로 형용키 힘든 복잡한 감정이었고, 에단이 레벨린에 대해 했던 말은 비수처럼 에밀라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레벨린 님.'

아직도 레벨린을 떠올리면 심경이 복잡했다. 이성과 감정 모두가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자신에게 이런 의심의 씨앗을 심은 에단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왜 말을 하다 말지?"

에단이 이마를 구기며 말하자, 사색에서 깨어난 에밀라가 답했다.

"학장님께서 대면을 원하십니다."

"학장?"

에단은 그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명목상으론 아카데미의 대표.

하지만 원작에서의 비중은 희미하다. 끽해 봐야 단발성 캐릭터.

이유는 단순했다.

레벨린의 존재 때문이었다. 학장은 레벨린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학장이 뿌린 떡밥들은 모두 레벨린의 의도대로 행해진 결과물이었다.

당연히 주인공은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아챘고 말이다.

'학장이라....'

형식상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이 대면이 성사된 이유가 학장의 순수한 의도인지, 아니면 레벨린의 속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엇이든 간에 에단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협상의 우위는 자신이 들고 있었으니까.

학장과의 대면을 위해 이동 중이던 에밀라의 표정은 복잡했다.

'...모르겠어.'

정상적인 보고 절차도 건너뛴 독자적인 행동이었다. 평소에 그녀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일이었다.

'반항심?'

그녀도 본인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던 레벨린에 대한 불신이 서서히 싹트고 있었다.

◈ [54화] 또다시 협상 (1)

"보람찬 하루였군."

아카데미의 학장실.

본관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위치였지만, 마크는 현재의 생활에 큰 만족을 하고 있었다.

대륙의 중심과는 거리가 먼 변두리 지방의 영세한 귀족이던 마크. 그는 언제나 자신의 위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출세에 대한 열망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뤄 내기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변두리 영지에서 나는 특산품이라고 해 봤자 흔해 빠진 농산물에 불과했고, 광산 같은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마크의 가문은 도태되었다. 가문을 물려받았지만, 마크가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이렇게 역사에 아무런 족적도 남기지 못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할 생각을 하니, 그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얼마 안 되는 재산으로 도박 수를 던지기에는 담이 너무 작았다.

재산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노후까지 버틸 수 있는 정도는 됐다.

노후 자금을 잃을까 두려워 사업을 벌일 자신도 없었다.

하여 그렇게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보내던 마크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레벨린.

갑자기 나타난 그녀는 마크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넸다.

지금 마크의 가문은 영세했지만, 과거에도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귀족 가문들이 과거에는 찬란한 과거를 간직하고 있었다.

과거를 잊지 못하면 도태되고, 변화를 선도해 기회를 잡으면 성장하는 것이다.

마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것이 바로 기회라는 사실을.

물론 그녀가 요구한 것은 굴욕적이긴 했다.

꼭두각시의 행세.

마크는 무능했지만 우둔하지는 않았기에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크는 망설이지 않고 레벨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계획은 먹힌다!'

마크의 생각은 정확히 적중했다. 레벨린의 계획은 순탄했고, 아카데미는 순식간에 세력을 확장했다.

그 와중에 의구심도 들었지만, 마크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인 법도 있는 거지.'

마크의 사회적 지위는 크게 높아졌다.

허울뿐인 직위이고, 그 뒤에 레벨린이 있다고 한들 변두리 귀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레벨린 님....'

레벨린을 향한 충성심은 점차 커져 갔다. 레벨린은 변두리에서 자신을 구해 준 구원자이자, 변화를 선도하는 선지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최근 눈엣가시가 생겼다.

블란테의 망나니가 아카데미의 물을 흐리고 있다고 했다.

아카데미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단체였기에 뿌리가 얕았다. 그리고 그만큼 흔들릴 여지가 많았다.

'기강을 잡아야겠어.'

상대는 그 유명한 블란테.

대륙에서 손꼽히는 무력 집단이자 검술 명가.

검 하나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집단.

과거의 마크였다면 감히 넘볼 수도, 대면할 수도 없는 거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크의 위치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마크의 현 지위는 아카데미의 수장이었고, 블란테의 망나니는 교수였다.

'애초에 에밀라 교수가 잘 처리했으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 않았을 텐데.'

쯧쯧.

마크가 혀를 찼다.

에밀라 선에서 끝내지 못한 게 아쉬운 탓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와 다를 것이다.

상대가 제아무리 블란테의 자제라고 한들 맡은 위치가 다르니까.

마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블란테의 콧대를 짓누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짜릿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겠지.'

그 블란테의 행차였다. 꽤나 성대한 준비가 치러질 것이 분명했다.

마크는 천천히 준비를 해 나갈 생각이었다.

"후후."

마크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학장실의 문이 열리며 비서가 들어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마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일정에 방문 예정인 손님은 없었다.

마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따로 일정을 잡고 찾아오라고 하세요."

"그, 그게... 새로 오신 교수님이라고...."

"뭐라고요? 설마...."

마크의 물음에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블란테에서 찾아오셨습니다."

* * *

"흠흠."

마크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것도 학장의 업무 중 하나였다.

'건방진 콧대를 눌러 주겠어.'

마크는 그렇게 다짐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문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학장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에단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사납게 웃었다.

"반가워, 학장."

마크의 얼굴이 당혹감에 젖었다.

* * *

에단은 학장실에 향하기 전 생각에 잠겼다.

아카데미의 학장.

원작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도 알았다.

'어떻게 할까.'

어떤 행동을 취해야 자신에게 유리할까 고민했다.

이건 협상 테이블이다. 저자세로 나가서 좋을 게 없다.

겸손?

개나 줘 버리라고 해라.

에단은 저자세로 나갈 때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상대는 호의를 호의로 여기지 않는다.

약하게 나가면 오히려 이용하려고 들었다.

이것은 불문율이다. 에단은 자신의 몸값을 키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미 몸값이 높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신은 이미 시작부터 갑의 위치에 있었다.

블란테라는 뒷배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행동을 주의해 주세요."

"걱정 마."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에밀라의 말을 에단이 한마디로 끊어 버렸다.

"...."

에밀라는 에단의 말에 쉽사리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더 이상 말을 덧붙이기도 힘들었다.

에단은 아직 아무 짓도 벌이지 않았고, 과하게 주의를 주면 오히려 반발심만 생길 것이 빤했기 때문이다.

'설마 여기서도 일을 벌이겠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 *

학장실에 당도한 에단이 거칠게 문을 걷어차는 모습을 보며, 에밀라는 조금 전에 한 생각을 후회했다.

에단은 상식이 통용되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반가워, 학장."

에단이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손님용 의자에 털썩 앉아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그럼 대화를 시작해 볼까?

'휘, 휘둘리면 안 돼.'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숱한 시뮬레이션과 가정을 해 보았지만, 이런 일까지는 예견치 못했다.

마크는 최선을 다해 평정을 유지했다. 최대한 위압감이 드러나는 표정을 지으며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게 지금 무슨 행패죠?"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겠지.'

자신은 학장이고, 상대의 직위는 교수. 직급의 차이는 분명했다.

마크는 에단에게서 사과를 이끌어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단이 귀를 후비는 걸 보아하니 조금도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행패? 조금 섭섭해지려고 하네."

에단이 깍지를 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나는 기회를 주려고 하는 건데."

"그게 무슨...."

에단이 뒤를 흘겨봤다. 그곳에는 에밀라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얘, 나한테 깨졌잖아."

"...."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블란테의 개망나니. 그게 세간에 퍼진 내 평판 아닌가?"

에단이 씨익 웃었다.

"근데 그런 내가, 아카데미의 교수로 온 걸로도 모자라 실력 좋기로 유명한 교수를 아주 묵사발을 내버린 사실이 소문나면 아카데미의 위상이 어떻게 되겠어?"

그 말에 에밀라는 수치심이 차올랐는지, 이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크도 이번에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에단의 말대로였다. 에밀라가 대련 중에 패배했다는 결과는 전달을 받았지만, 그 정도의 완패였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명확한 증거가 있지 않다면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겁니다.... 에단 님께서 에밀라 교수를 쓰러트렸다는 사실을요."

"하, 하는 말이 고작 증거 타령이야? 뭐, 증인이야 많지. 블란테의 눈이 곧 증거니까. 설마 우리 가문을 못 믿는 건 아니지? 그건 좀 기분이 나쁠 것 같은데."

"그, 그런 의도는...."

"그렇지? 방금 상당히 기분이 나쁠 뻔했어. 뭐, 다른 증거도 있어. 나는 지금 다시 겨뤄도 이 녀석을 이길 자신이 있거든. 왜, 학생들이 다 보는 앞에서 다시 보여 줄까?"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크가 에밀라를 향해 시선을 던졌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제안이라는 것이 뭐죠?"

"내 제안은 별거 없어."

정말 별거 없었다. 어차피 아카데미에 오래 있을 생각도 없었거든.

* * *

협상을 끝낸 에단이 학장실을 나왔다. 에밀라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왜 그래? 할 말이 있으면 말을 하든가."

"당신에게는 격식과 예의라는 것이 없는 겁니까?"

에밀라의 물음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어, 없어. 나 몰라? 블란테의 개망나니, 그게 내 별칭이잖아."

"하... 그걸 자랑이라고...."

"개망나니한테 진 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않나?"

"...."

에밀라가 입을 다물었다.

이내 건물에서 나오자, 휴고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가토도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신기하기는 매한가지인 듯 힐끔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고, 그런 둘의 모습을 네이드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녀왔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어, 별일이라고 할 만한 게 있나?"

에단의 태연한 대답에 에밀라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럼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아, 너희는 내 수행원으로는 못 있어."

"그, 그게 무슨...."

"내 신분은 대외적으로 평민이거든."

에단의 말에 가토와 휴고가 눈을 끔뻑였다.

"너희는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 걱정 마."

에단이 씨익 웃었고, 가토와 휴고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저, 저도 그 할 일에 포함돼 있나요?"

헨리가 소심하게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에단은 그게 말이냐는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당연한 걸 왜 물어?"

"...."

가차 없는 에단의 말에 헨리의 표정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할 일이라는 게 어떤...."

"아, 특별한 건 아니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이름 좀 떨쳐 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일행이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에단이 미소를 지었다.

"용병 노릇 좀 하고 있으라는 말이야."

너희가 고생해야 내가 조금 편해지니까.

일행들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 [55화] 또다시 협상 (2)

"...뭐라고요?"

에단이 찾아왔다는 직원의 보고에 레벨린의 볼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방문이었기에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에밀라가 나섰다는 사실이 더 이해 가지 않았다.

'어째서 보고를 하지 않았지?'

돌발 상황에 에밀라가 나설 수는 있다. 하지만 평소의 에밀라라면 자신에게 보고를 먼저 했을 것이다.

에밀라는 지금 독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에단은 현재 학장을 만나러 갔고,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계획이 계속 틀어지고 있다는 것에 두통이 느껴졌다.

"에단 씨는 지금 어디 계시죠?"

레벨린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 * *

"도련님, 저는...."

네이드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말을 흐렸다. 네이드는 에단의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었다.

"쟤네 셋만 보내? 그래도 되겠어?"

네이드가 가토와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고, 가토도 멋쩍게 웃었으며, 헨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만히 셋을 바라보던 네이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네이드의 말에 에단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뭐 해? 안 가고?"

"...지금 바로 가야 하나요?"

휴고가 불쌍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에단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당연한 거 아니야?"

"...."

헨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고, 다른 일행들도 축 처진 발걸음으로 떠나갔다.

남은 이는 에단과 에밀라, 둘뿐이었다.

"...당신은 원래 그런 성격입니까?"

여러 의도가 담긴 가시 돋친 말에 에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직장 동료인데 '당신'은 너무 딱딱하지 않나?"

"하아...."

에밀라는 에단과 말싸움을 해 봤자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한숨만 쉬어 댔다.

"아, 이제 나는 어디서 지내야 하지?"

"교직원들이 쓰는 숙소가 있습니다. 일단 그쪽으로 안내를...."

에밀라가 설명을 하려던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아름다운 여성, 레벨린이었다.

그녀의 입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에단을 바라보는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레벨린을 마주하자 에밀라의 얼굴이 굳었다.

에단이 에밀라를 흘겨봤다.

'잘 먹힌 모양이군.'

에단이 심은 의심의 씨앗은 성공적으로 발아한 것 같았다.

"실물로 뵈는 것은 처음이군요, 에단 씨."

"그러게 말이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반말에 레벨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레벨린이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밀라 씨도 여기 계셨군요."

"...네."

레벨린의 눈이 에밀라를 훑었다. 에밀라의 몸이 흠칫 떨렸다. 에단이 한 걸음 다가갔다.

"방금 학장이랑 얘기는 끝냈는데."

"그 이야기, 저와도 하시죠."

에밀라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네가 학장보다 높은 위치인가?"

날카로운 에단의 물음에 레벨린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그녀는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그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업무는 제가 처리해서 말이죠. 저랑 대화하기가 싫으신가요?"

"어, 싫어."

레벨린의 표정이 다시 한번 딱딱하게 굳었다. 그 모습을 본 에단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그래, 대화 좋지."

"...농담이 짓궂으시군요. 그럼 이쪽으로 가시죠."

레벨린이 앞장서면서 에밀라를 흘겨봤다.

"에밀라 씨는... 나중에 따로 뵙도록 하죠."

레벨린의 말에 에밀라가 고개를 숙였다.

* * *

에단이 에밀라를 따라 응접실에 들어섰다.

'어찌 된 게 학장실보다 화려하군.'

과장이 아니었다. 레벨린의 응접실은 정말로 학장실보다 넓고 화려했다.

"제 개인 장소는 아닙니다."

"누가 뭐래?"

제 발 저렸는지 먼저 말을 꺼낸 레벨린에게 에단이 대꾸했다. 하지만 레벨린은 따로 답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생각보다 급하게 오셨군요."

"미뤄서 뭐 하려고."

지금과 같이 레벨린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만약 그녀가 대비를 한다고 해도 뚫고 나갈 자신은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계획 자체를 어그러뜨리는 게 편하고 쉬운 길이었다.

"...학장실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신 거죠?"

"뭐, 그냥 서로 도움이 되는 얘기를 나눴지."

"솔직하게 말해 주시죠."

에단이 다리를 꼬았다.

"궁금해?"

무례하기 그지없는 에단의 태도에 레벨린이 인상을 썼다.

"...제가 에단 씨에게 뭐 실수한 거라도 있었나요? 에단 씨는 전부터 저를 싫어하시는 것 같군요."

"어, 싫어해. 나는 속이 검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거든."

솔직한 에단의 대답에, 에밀라의 미간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에단의 이런 행동은 다분히 고의적이었다.

그녀에게 제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듯, 에단에게도 이곳에서 이득을 극대화할 계획이 있었다.

'경계를 받는 건 나쁘지 않아.'

어차피 레벨린은 블란테를 눈엣가시로 여겼으니, 부딪치는 건 예견된 상황이었다.

에단은 그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주인공을 향한 경계를 흩트릴 생각이었다.

'녀석이 성장해야 나도 사니까.'

주인공의 모든 것을 강탈할 생각은 아니었다. 에단에게 세상을 구한다는 사명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건 다른 애한테 맡기고.'

에단은 그저 자신의 것들을 지키고 싶었다.

'애초에 아카데미에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니까.'

필요한 것을 얻고, 주인공과의 접점만 만들면 에단은 이곳을 떠날 생각이다. 떠난 이후로는 레벨린도 자신에 대한 경계를 누그러뜨릴 게 빤했다. 처음부터 에단이 원하는 바는 그것이었다.

"대화 내용은 별거 없었어. 대화라기보다는 협상이었지."

"무슨 말이시죠?"

"내가 블란테라는 것을 감추기 위한 협상을 했다고."

"이유가 뭐죠? 서로 득이 되는 게 없을 텐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가 평범한 블란테의 구성원이라면 그 말이 맞겠네."

"...."

에단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에밀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에단이 말을 이었다.

"모든 사실을 늘어놓으면 아카데미의 평판도 떨어질 텐데."

에밀라의 상징성.

레벨린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상징성을 만들어 냈으니까.

에밀라는 아카데미의 꽃이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고고한 교수.

에단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에단은 대륙 내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망나니였다.

에단이 벌인 패악질과 사건들은 유명했고,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처참하게 탈락했다는 사실도 세간에 유명한 일이었다.

완전히 상반되는 둘의 평판.

그런 에단이 에밀라를 박살 내고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잘못하면 아카데미의 근간이 흔들릴 문제다.

레벨린의 표정이 굳었다.

"구태여 그런 협상을 왜 하신 거죠?"

"내가 이유 없는 호의를 보인 것 같아?"

"...무엇을 원하죠?"

"운신과 교육의 자유. 나는 지금부터 평민 에단이야. 이름을 바꿀 생각은 없어. 어차피 지금 내 모습에서 블란테의 에단을 유추하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교육의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나는 맡은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니까."

자유.

굉장히 두루뭉술한 말이었다. 특히나 레벨린에게는 상당히 껄끄러운 조항이었다.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애매했다.

'명분이 없어. 거기에 패는 상대가 쥐고 있고.'

에단의 말은 사실이다.

에단의 교수 임용에 얽힌 모든 전말이 밝혀지면 아카데미의 평판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힘겹게 쌓아 올린 탑이 무너질 만한 위험을 그저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계약에 충실히 한다는 말은 사실이겠죠?"

"나는 한 말은 지켜."

에단이 씨익 웃으며 말하자, 레벨린이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해만 보게 되었어.'

협상 테이블에서 손해를 본 게 얼마 만이던가. 탁상 위에서 행하는 협상은, 그녀에게 가장 자신 있는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에단의 막무가내식 행보는 그녀의 평정을 무너뜨리기 일쑤였다.

블란테를 삼키기 위해, 그리고 블란테의 위상을 이용하기 위해서 블란테를 아카데미로 초청하려고 했지만, 눈앞의 에단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블란테가 왔음에도 블란테인 것을 밝힐 수 없는 상황.

레벨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좋군.'

반면 에단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계획이 순조로웠다.

에단이 블란테인 것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주의 통보, 에단이 운신할 때의 제약.

블란테는 아카데미를 향해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단은 아카데미에 올 때부터 블란테인 것을 밝히지 않기로, 또 가문의 권위를 이용하지 않기로 가주와 약속했다.

가주는 그런 에단의 모습을 대견스러워했지만, 에단의 생각은 반대였다.

'이용할 건 이용해야지.'

이미 은연중에 블란테를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해 먹었다.

그리고 아직 뽑아 먹을 단물은 차고 넘쳤다.

오늘의 협상 테이블도 에단에게 블란테라는 뒷배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유리하게 진행이 된 것이다.

아무리 에단이 거칠 게 없는 성격이라고 한들, 가문이란 뒷배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강수를 둘 수는 없었을 터.

"따로 교수 임용식은 없나?"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됐어. 귀찮아."

"...."

레벨린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에단은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수업은 내일부터 진행해도 되나? 수업 하나 빼 주지?"

"상당히 조급하시군요."

"이왕 일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아, 반은 내가 정했으면 하는데."

"따로 이유가 있으신가요?"

"어, 여동생이 있어서."

"여동생 말씀인가요?"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 재주인가?"

"...."

레벨린이 입을 다물자,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리사 말이야."

"그녀는 자신의 가문을 숨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 알아. 가문을 숨기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잖아. 그냥 얼굴 한번 보려고."

"...알겠습니다."

에단이 리사를 떠올렸다. 에단의 기억을 뒤져 보면 둘의 관계는 결코 좋지 못했다.

에단은 리사의 재능을 질투했고, 리사는 에단의 성정을 혐오했다.

둘의 관계는 거리를 좁히려야 좁힐 수가 없는 관계였다.

'그래도 건방진 동생은 한번 만나 봐야지.'

때마침 리사와 주인공은 같은 반이었다.

'당연한 일이지.'

원작에서 리사는 어엿한 주연이었으니까.

'어디 한번 매제의 자격이 있는 놈인지 확인이나 해 볼까?'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할 얘기는 끝났겠지?"

에단이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가기 직전에 레벨린을 흘겨봤다.

"아, 그리고 꽤나 재밌는 짓들을 하던데."

"그게 무슨...?"

"조금 진부하고 재미없더라고. 산적들을 풀어 놓는 짓 말이야."

"...!"

"뭐, 물증이 없어서 따질 생각은 없지만... 조심하는 게 좋아. 또 걸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 블란테랑 전면전을 할 생각은 없겠지?"

블란테는 무력 집단이기에, 명분이라는 칼을 쥐면 전면전을 불사할 자신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모르면 됐어."

에단이 그대로 응접실을 나섰고, 홀로 남겨진 레벨린이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 [56화] 이해 못 할 행보

응접실을 나온 에단은, 가만히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에밀라를 볼 수 있었다.

에밀라는 다소 복잡한 얼굴로 말없이 에단을 바라봤다.

"왜 거기서 멀뚱멀뚱 서 있어?"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에밀라의 물음에 에단이 눈을 끔뻑거렸다.

"왜, 궁금해?"

웃음기 있는 에단의 목소리에 에밀라가 인상을 팍 구겼다.

"물어본 제가 바보군요."

"별말 없었어. 근데 아마 너는 많이 혼날걸?"

"진짜입니까?"

"아니, 농담이야. 빨리 방이나 안내해 주지?"

"...."

에밀라가 한 차례 에단을 노려보고 앞장섰다.

바깥에선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날이 저물었음에도 밖을 거닐고 있는 학생들이 적지 않게 보였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통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헤헤, 알겠습니다. 그 혹시 옆에 계신 분은...?"

여학생이 에단을 바라보며 묻자, 에밀라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새로 오신 교수님입니다."

"아, 진짜요? 반갑습니다!"

해맑게 인사하는 학생을 바라보며 에단이 대답했다.

"그래, 반갑다. 앞으로 잘 부탁하마."

"헤헤, 이 시간에 같이 다니시길래 전 또 에밀라 교수님 애인인 줄 알았네요."

여학생의 말에 에밀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기숙사로 돌아가세요."

"네∼ 죄송합니다."

에밀라의 타박에 머리를 긁적인 학생이 몸을 돌려 기숙사 쪽으로 총총 뛰어갔다.

"정말 학생한테 꽤나 인기 있나 보네?"

"그 말은 무슨 의미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의미인데?"

"...교직원들 숙소는 이쪽입니다."

교직원들의 숙소는 여학생이 뛰어간 기숙사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기숙사랑 가깝네?"

"위급 상황 시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입니다."

"직업의식이 꽤나 훌륭한걸."

"교육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도 저희의 의무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규칙과 규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에밀라는, 교수보다는 기사에 더 어울리는 성향이었다.

"그러는 애가 밤에 암살을 하러 잠입해?"

"...."

에밀라가 할 말을 잃었는지, 시선을 회피했다.

숙소로 들어가자 상당히 고급스러운 내부가 보였다.

"남자 숙소는 2층입니다. 저희는 3층을 이용하고 있고요."

"1층은?"

"식당 겸 휴게실입니다. 보통은 학생들과 같이 식사를 하지만, 같이 드시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교수분들도 있습니다."

에단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2층 계단에서 남자 하나가 내려왔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와 느끼한 눈썹을 가진 남자였다.

그 남자를 보자마자 에밀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대부분의 설명은 끝났으니, 다른 용무는 내일...."

"하하, 에밀라 씨?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요."

귓가를 타고 흐르는 버터 같은 목소리.

에단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이 구겨진 것은 비단 에단뿐만이 아니었다.

한차례 몸서리를 친 에밀라가 재빠르게 반대편으로 발을 옮겼지만, 남자의 걸음이 더욱 빨랐다.

마치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것 같은 매끄러운 발걸음.

"하하, 제 목소리를 못 들으셨나 보군요?"

에단이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를 눈짓으로 가리키자, 에밀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데미의 마법 교수이십니다."

남자는 그제야 다른 사람도 있다는 걸 인지했는지 찰랑이는 머리를 넘기며 에단을 응시했다.

하지만 에단이 반응이 없자, 남자는 에밀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분은...?"

"오늘 새로 부임한 교수입니다. 과목은...."

"체육."

에단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체육이라고요? 저희 아카데미에 체육이라는 과목이 존재했습니까?"

"몸 쓰는 건 다 맡기로 해서 말이죠."

에단의 태연한 대답에 남자가 에단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코웃음 쳤다.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행동이었지만, 에단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거 제 소개가 늦었군요. 마법을 담당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크러쉬라고 합니다. 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계시죠? 블라디미르 가문은 유서 깊은 마법 가문으로...."

크러쉬가 입을 열기 시작했고, 에단은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보았다. 어디까지 하나 한번 지켜볼 생각이었다.

한참 동안 자기 가문에 대하여 열띤 소개를 하던 크러쉬가 손을 뻗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제 소개는 이쯤 해야 할 것 같군요. 에단 씨는 혹시 가문이...?"

에단은 말없이 크러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평민입니다."

에단의 말에 크러쉬는 잠시 동안 에단을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대놓고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뻗은 손을 회수했다. 마치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불쾌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크러쉬가 품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냈다. 그는 자수가 화려한 손수건으로 악수하지도 않은 손을 닦았다.

'별 미친 새끼가 다 있군.'

에단은 화가 나기보다 재미가 있었다. 이런 녀석을 실제로 마주하다니.

모룬과 카론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이가 없는 것은 에단뿐만이 아닌 듯했다. 페온이 기가 차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 저 미친 새끼는 뭐라고 하는 게냐? 블라디미르? 그 머저리 새끼들이 유서 깊은 가문이라고?

'저야 모르죠.'

블란테는 검술 명가였고, 마법을 배척하는 가문이었다. 비록 무투라는 외도의 길을 택한 페온이었지만, 마법에 대한 반감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안 좋은 시선을 가진 걸 떠나서, 블라디미르라는 가문 자체의 위상이 크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애초에 비중이 있었으면 원작에서도 언급이 많이 됐겠지.'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마법 가문이라고 해도, 블란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블란테가 가진 무력은 한 국가의 무력과 비견해도 밀리지 않는다.

그러니 블라디미르는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어쨌든 가문과 별개로 에단은, 원작에서 언급되었던 그에 관한 정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 크러쉬.

에밀라를 흠모하는 캐릭터.

권위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지만, 천재의 반열에 들지 못하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 자격지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보니까 재밌네.'

느끼한 캐릭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권위 의식? 거만한 성격?

그것도 다 알고 있었다. 크러쉬의 포지션은 빌런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귀를 파고드는 기름진 목소리를 듣고, 저 표정을 보니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인간이 아닌 새로운 종족을 보는 것 같았다.

"전 또 같은 귀족인 줄 알았네요. 하긴... 처음 봤을 때부터 느껴지긴 했습니다. 귀족으로서 가져야 할 기품이 보이지 않더군요."

에단이 말없이 크러쉬를 바라보고 있자, 오히려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에밀라였다.

어째서 그가 자신의 가문을 밝히지 않는지, 어째서 이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지켜보는 모습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불안함이 무색하게 에단은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이러다가 수틀리면 언제든 무력시위를 해 기를 죽여 놓을 수도 있었다.

'일단 가문을 밝히지는 않기로 했으니까.'

괜히 가문을 밝혀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거 미천한 신분이 실례했군요."

에단이 저자세로 나가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에밀라였다. 에밀라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 것은 아닙니다. 저의 신분에 비해서 미천한 것은 사실이나, 자신의 주제를 알고 있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죠."

크러쉬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렸다. 에단은 흡족한 얼굴의 그를 보며 잠시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그런데 평민 신분인 건 에밀라 교수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 말에 에밀라가 에단을 바라봤다.

에밀라가 에단의 곁에 한 걸음 다가갔다. 에밀라가 이를 꽉 문 채, 씹어뱉듯 속삭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에단은 따로 대답하지 않은 채 크러쉬를 바라봤다. 크러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지금 당신과 에밀라 씨를 동일 선상에 올려 두시는 겁니까?"

"아니, 뭐 신분이 똑같은 것은 사실 아닙니까? 크러쉬 님 같은 고고한 신분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라는 소리죠."

에단의 태연한 대꾸에 크러쉬가 이를 빠득 갈았다.

"에밀라 씨는 이미 실력이 증명된 사람입니다. 당신 따위의 천한 사람과 비교할...."

"여기까지 하시죠."

참다못한 에밀라가 중재를 하기 시작했다. 에단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이 상황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날이 늦었습니다. 크러쉬 교수님도 내일 수업을 준비하셔야죠? 에단 교수님도 내일 첫 수업을 준비하시려면 이렇게 여유를 부리실 때가 아닐 텐데요."

싸늘한 에밀라의 시선에 먼저 물러선 것은 크러쉬였다.

"...그 말도 사실이군요.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크러쉬가 기품 가득한 자세로 인사를 건넨 뒤 휘릭 몸을 돌렸다.

몸을 돌려 올라가는 크러쉬가 순간 고개를 돌려 에단을 흘겨봤다.

에단을 향한 시선은 역시나 곱지 않았다. 에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크러쉬가 사라지자 에밀라가 에단을 노려봤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뭐가?"

"가문을 숨긴 것 말입니다. 이유가 뭐죠?"

에밀라의 물음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기로 했으니까."

"...그러기로 했다고요? 누구랑 말씀이죠?"

"네 상사."

순간 에밀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레벨린 님 말씀인가요?"

"어. 아무래도 시험에 낙방한 망나니가 교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나 봐."

"...."

에단의 말에 에밀라가 입을 다물었다.

"...정말 그것뿐입니까?"

"뭐, 다른 이유도 있나?"

"됐습니다.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에밀라가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에밀라를 에단이 불러 세웠다.

"잠깐."

에밀라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뭐죠?"

"식당 이용법을 알려 줘야지. 밥은 먹고 자야 할 거 아니야."

"...."

에밀라가 멍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에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에단의 요구는 지극히 합당했으니까.

'근 손실은 참을 수 없지.'

식사는 중요했다. 공복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

* * *

다행히 아직 식사 시간이 마감되지 않아 음식을 배급받을 수 있었다.

"식단이 조금 부실하네."

다른 것들은 얼추 나쁘지 않았지만, 단백질 함량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라는 게 많으시군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깐깐한 게 당연하지. 네가 먹는 데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렇게 약한 거야."

"...."

식단이 동반되지 않는 운동은 단순한 노동에 불과하다.

그것이 에단의 지론이었다. 비록 운동량은 못 채웠어도 충분한 영양 섭취는 동반되어야 했다.

'하루 굶는다고 이상이 생길 몸은 아니지만.'

굳이 식사를 거를 필요는 없었다. 에단이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라기보다는 음식을 몸 안으로 밀어 넣는 행위에 가까웠다.

"뭐야, 밥 먹는 거 처음 봐?"

볼을 한껏 부풀린 에단의 물음에 에밀라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저도 당신 때문에 저녁을 먹지 못했습니다."

에밀라도 음식을 받아 왔다.

◈ [57화] 평민 교수 (1)

음식을 받아 온 에밀라가 에단의 앞에 앉았다.

에단은 말없이 에밀라를 바라보다가 다시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고, 에밀라도 수저를 들었다.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음식을 밀어 넣는 에단에게서는 기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접시 위에 가득 쌓여 있던 음식이 비워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에단이 자리를 일어났지만, 에밀라의 식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밀라의 눈이 에단을 따라가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왜? 너 밥 먹는 것도 기다려 줄까?"

"...히허어스니다."

음식을 머금고 있는 에밀라의 발음이 뭉개졌다. 순간 에밀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에단은 말없이 에밀라를 바라보다가 씨익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아, 내 방은 몇 번이지?"

계단을 오르던 에단이 물었다. 입에 머금은 음식을 삼킨 에밀라가 말했다.

"...4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알겠어. 그리고 다음부터는 다 삼키고 말해."

"당신...!"

에밀라가 발끈하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에단은 무시하고 방으로 향했다.

숙소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호화스럽다고 보기에는 어려웠지만, 웬만한 여관보다는 나았다.

에단이 짐을 풀었다. 사실 짐이랄 것도 없었다.

옷가지 몇 벌이 전부였으니까.

대강 짐을 정리한 에단이 침대에 누웠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군.'

아카데미에 들어왔고, 주인공도 슬슬 활동할 시기였다.

지금껏 머릿속으로 세운 계획을 정리할 때였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원작 주인공과의 접점을 만들고, 사건 속에서 에단이 필요한 것을 취할 수 있었다.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안일하게 있을 수는 없지.'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에단이 경각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에단도 자신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문제는 주인공이 가져가는 기연들이 줄어든다는 건데....'

원작 스토리는 주인공의 원맨쇼나 다름없었다.

전형적인 이세계물의 스토리.

주인공은 세계를 구원할 구원자이자, 용사였다.

하지만 에단이 개입한 이상, 주인공의 성장세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내가 뒈질 수는 없으니까.'

양보나 희생 따위는 가정해 두지도 않았다. 설사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에단은 자신의 사람들을 챙겨 끝까지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주인공에게 협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주인공이 가져갈 힘이 줄어든 만큼, 에단이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어디 한번 보자고.'

답답하게 굴면 가만 있지 않을 생각이다.

에단이 눈을 감았다. 밤이 깊어졌다.

* * *

크러쉬는 자신의 방에 누워,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한결같이 아름다운 에밀라.

그리고 그의 옆에 있던 평민 남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그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을 하고 나서야 겨우겨우 에단이라는 이름을 떠올려 냈다.

'불결해, 천박하고, 상스러워.'

에밀라 옆에 서 있었던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솟구쳤다.

'감히 평민 따위가 에밀라 씨 옆에 서? 그녀의 옆에 서려면 블라디미르 가문 정도는 돼야지. 나 정도는 되어야....'

블라디미르 가문의 삼남인 크러쉬.

그의 가문은 마법 가문이었다. 하지만 크러쉬의 말과는 다르게 블라디미르 가문 자체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가문의 역사는 깊었지만, 대마법사를 배출하지 못한 그저 그런 가문이었다.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

마탑은 우후죽순 생겨났고, 대륙에서 이름을 날리는 마법사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뛰어난 마법사는 어딜 가서든지 대접을 받았지만, 크러쉬는 그 정도로 재능을 뽐낼 수 있는 마법사가 못 되었다.

그런 크러쉬에게 뜻밖의 제안이 왔다.

― 아카데미에서 학생을 지도할 생각은 없습니까?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

저명한 마법사로서 이름을 떨치기도 바쁜데 교수 노릇이라니!

'그때 수락하길 잘했지. 안 그랬으면 이 훌륭한 재능을 썩힐 뻔했잖아. 게다가 에밀라 씨도 못 봤을 테고.'

형제들과 비교해도 그저 그런 재능을 가진 크러쉬는 그렇게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마법사로서의 역량과 교육자로서의 역량은 같지 않았다. 비록 마법 재능은 출중하지 않더라도, 크러쉬는 교육자로서 그리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본인의 삶에 회의적이던 크러쉬의 생각도 바뀌었다.

아카데미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크러쉬의 자신감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자연스레 거만한 성격이 되었다.

크러쉬는 평민을 혐오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성향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평민을 혐오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그 빌어먹을 평민 놈...!'

유례없는 재능으로 대륙에 지대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평민 마법사. 수많은 마탑과 국가에서도 그를 영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크러쉬는 그를 실제로 마주한 경험이 있었다.

'당신이 소문의 그 마법사입니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귀족인 자신이 먼저 손을 뻗어 인사를 청했지만, 그 평민 마법사는 말없이 크러쉬의 얼굴을 응시하다 자리를 떠났다.

명백히 자신을 무시한 행위였지만, 크러쉬는 그 자리에서 분노를 표출할 수 없었다.

그날 당한 모욕을 크러쉬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났다.

감히 평민 따위가. 평민은 예의 없고 더러운 종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러던 차에 아카데미에 오게 되었다.

아카데미의 특성상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졌지만, 크러쉬는 그 사실에 불만을 품었다.

물론 그 불만을 대놓고 토로할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에는 귀족가의 자제도 있었으니까.

아카데미의 교칙상 학생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수 없었다. 신분의 차이로 발생하는 차별과 억압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하나 규정이 모든 변수를 방지할 수는 없었다.

귀족가의 자제들이 형성한 카르텔은 아카데미 내에 엄연히 존재했다.

어릴 때부터 다져 온 사교 활동과 부모님들의 교류가 자녀들에게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크러쉬는 평민을 혐오했고, 당연하게도 신분에 따라 학생을 차별하는 교수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도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다.

'에밀라....'

에밀라의 신분은 비록 평민이었지만, 모든 학생이 에밀라를 존경했고 그만큼 잘 따랐다.

아름답고 고고한 외모와 출중한 실력.

아카데미의 꽃이라는 별칭이 무색하지 않았다. 늘 고고하게 행동하는 에밀라의 모습에 크러쉬의 마음도 흔들렸다.

평민은 미천하다는 신조가 흔들릴 뻔했지만, 그는 자신을 합리화해 문제를 해결했다.

'에밀라 정도의 실력와 인성이라면 어딜 가도 작위를 수여받을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그 예로 대륙을 주름잡는 고위 귀족들도 앞다퉈 에밀라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에밀라는 어디서 어떤 제안이 오더라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모습에 크러쉬는 더욱더 그녀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녀야말로 내게 어울리는 여자야.'

비록 평민이라는 점이 흠이기는 했지만, 에밀라는 언제든지 귀족의 반열에 들 수 있는 특별한 평민이었다.

그 사실이면 충분했다.

에밀라를 향한 감정이 생긴 후로, 크러쉬는 에밀라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러쉬의 구애에도 에밀라는 언제나 공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물론 크러쉬는 그걸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후후, 부끄러움만 없었으면 벌써 내 여자가 됐을 텐데. 그러면 조금 전 그 평민 놈 옆에 있지도 않았을 테고.'

일이 끝난 후, 방에서 그녀를 떠올리는 건 그의 행복이었다. 한데 오늘은 에단이라는 평민이 신경을 거슬렀다.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가 들어와 버렸군.'

크러쉬의 머릿속에 각인된 에단은, 얼굴과 복장까지 모두 천했다.

혹시나 몰라 예를 갖추고 손을 뻗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하찮은 평민이었다.

'제기랄, 더러운 기억이 떠오르는군.'

평민 마법사에게 악수를 청한 순간이 생각났다.

크러쉬는 냉수를 단번에 들이켜며 분을 삭였다.

'그런 버러지를 배려하는 마음이라니. 에밀라 씨가 불쌍하군.'

에밀라를 향한 동정심까지 들었다.

'초반부터 기를 잡아 둬야겠군. 직위는 같을지 몰라도 신분의 차이는 확실하니까 말이야.'

귀족임을 밝혔음에도 건방을 떨던 에단의 모습을 상기하자 절로 짜증이 났다.

'내일 제대로 주제 파악을 시켜 줘야겠어.'

크러쉬는 그렇게 다짐했다.

* * *

아침 해가 뜨자마자 에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 층으로 향했다.

일 층으로 향한 에단은 곧장 음식을 배식받았다.

아침은 걸러서는 안 되는 끼니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굉장히 부지런하시네요."

배식원의 말에 에단이 주변을 둘러보니, 일 층에는 자신 혼자만 있었다.

에단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세 끼를 챙겨 먹는 것은 근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런가요?"

"네. 보통 아침은 거르시는 분이 많으니까요. 아, 한 분 꼬박꼬박 챙겨 드시는 분이 계시긴 한데...."

"그게 누구죠?"

"마침 내려오시네요."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아침임에도 완벽하게 준비된 에밀라가 계단을 내려왔다.

"...."

에밀라가 말없이 에단을 바라보자, 에단이 손을 들었다.

"좋은 아침."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는 않군요."

에밀라가 에단의 곁에 다가와 음식을 받았다.

아침은 소박했다. 따뜻한 빵과 고기가 들어간 수프였다.

이번에도 역시 단백질이 부족한 식단이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먹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수프의 풍미는 그윽했고, 빵은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의외로 끼니는 잘 챙겨 먹네?"

"...불만입니까?"

어제 일을 의식해서인지 에밀라가 입 안에 든 음식을 모두 삼킨 뒤 대답했다.

"그럴 리가. 끼니를 챙기는 건 중요하지. 잘하고 있어."

"당신에게 칭찬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칭찬은 아닌데? 그래도 넌 나한테 졌잖아."

"...."

에밀라가 뾰족한 시선으로 노려봤으나, 에단은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덕분에 빠르게 식사를 끝낸 에단이 에밀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뭘 하면 되지?"

"처음인 만큼 사수 곁에서 어떻게 수업을 하는지 배울 겁니다. 말로 설명한다고 한들 실제로 보는 것에는 못 미칠 테니까요."

"뭐, 좋아. 그래서 내 사수가 누구지?"

"아직 정해지진 않았습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제가 맡을 확률이...."

"제가 맡도록 하죠."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밀라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기름을 바른 것만 같은 특유의 목소리.

크러쉬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기품 있는 발걸음으로 에밀라의 앞까지 온 크러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때론 여인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아는 것도 귀족의 덕목 아니겠습니까?"

크러쉬의 그윽한 시선이 에밀라를 향했다. 에밀라는 크러쉬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구태여 안 그러셔도 됩니다. 제가 해도 상관은...."

"아니요. 그럴 수는 없죠. 평민 교수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고고한 신분을 가진 저, 블라디미르 크러쉬가 아니겠습니까?"

― 저 새끼, 그냥 죽이면 안 되겠느냐?

'저도 고민 중입니다.'

처음에는 신선한 느낌을 받았지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지속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북함이 느껴졌다.

"설마 에단 씨가 제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겠죠?"

"뭐, 그러도록 하죠."

어디까지 하는지 볼 생각으로 크러쉬의 말에 답했다.

이윽고 에밀라는 먼저 따로 이동했고, 크러쉬와 에단은 같이 움직였다.

"제 수업에 참관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왜죠?"

에단의 발언에 크러쉬가 뾰족한 시선을 던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한 겁니까? 하, 우둔한 평민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도 귀족의 의무 중 하나겠죠."

크러쉬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자기 자랑이었다. 당연히 에단은 크러쉬의 말을 조금도 듣지 않았다.

'오늘 중에 만나 보겠군.'

에단이 요청한 사항 중 하나가 바로 여동생이 있는 학급에 배정받는 것이었다.

지금은 크러쉬의 수업을 따라다니고 있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오늘 내에 주인공과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만나 보면 알겠지.'

대략적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생각해 뒀다.

크러쉬가 한참 동안 떠드는 걸 흘려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강의실이 있는 본관 앞에 도착했다.

"이해하셨습니까?"

"네, 뭐."

"우둔한 평민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우셨을 겁니다. 앞으로 잘 보고 배우면 되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제 수업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느끼는 것은 있을 테니까요."

"네, 노력은 하죠."

에단이 웃음을 삼키며 크러쉬를 뒤따랐다.

◈ [58화] 평민 교수 (2)

크러쉬는 기품 있는 발걸음으로 복도를 거닐었다. 에단은 감탄 섞인 휘파람을 불며 주위를 둘러봤다.

학교의 내부는 정갈하고 고급스러웠다. 확실히 돈을 바른 태가 났다.

에단의 휘파람 소리가 거슬렸는지 크러쉬가 헛기침 소리를 냈다.

"크흠, 적당히 하시죠. 봐드리는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아, 예."

― ...저 건방진 놈을 가만히 둘 생각이더냐?

오히려 페온이 분이 치미는지 에단을 닦달했다. 에단은 별다른 반응 없이 크러쉬의 뒤를 따라 강의실 문 앞에 섰다.

'반이 많군.'

에단이 느낀 감상이었다.

'성적별로 나눠 둔 걸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아카데미에도 비리가 존재했다.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평민들은 본인의 실력보다 낮은 반에 배정받았다.

반대로 본인의 실력보다 과분한 대우를 받는 고위 자제도 존재했다.

'난 신경 안 써도 되겠지.'

주인공이 해결할 문제였다.

정의감 넘치는 평등주의자 주인공은 그런 차별을 묵과하지 않았고, 반대로 에단은 귀찮은 일에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강의실 앞에 서자 학생들이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러쉬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제 수업을 기다리는 학생들의 태도가 아니군요."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크러쉬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와 함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사라지며 침묵이 강의실에 내려앉았다. 정적이 깔린 강의실 내부를 주시하던 크러쉬가 입을 열었다.

"수업 전에 떠들고 있더군요. 마음 같아서는 벌을 주고 싶지만...."

크러쉬가 힐긋 에단을 바라봤으나 에단은 웃음기를 머금고 앞만 보고 있었다.

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개중에는 에밀라와 함께 걷던 모습을 떠올렸는지 소곤거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조용."

그런 모습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크러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은 새로 온 교수입니다. 비록 귀족이 아닌 천한 신분이라 수업을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이 알아서 잘 배우도록."

크러쉬는 별다른 말도 없이 에단을 평민이라고 소개했고, 학생들의 얼굴에는 작은 조소가 떠올랐다.

"뭐야, 평민이야?"

"수준 떨어지네. 평민이 뭘 알려 준다고."

"그러게 말이야. 큭큭."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에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시선이 바뀌는 데에는 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터.

'언제나 그랬으니까.'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격투기 선수로 활동할 때도.

망나니라며 가문에서 천대받을 때도.

실력으로 뒤집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기분 나빠 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후의 일을 떠올리자 기대감이 들었다.

에단이 씨익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반갑다."

태연자약한 행동에 크러쉬가 다시 미간을 좁혔다. 기가 죽기는커녕 돌발 행동을 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수업을 보면 어차피 좌절할 게 빤하지.'

크러쉬는 자신 있었다.

자신은 유서 깊은 마법 가문의 자제였으며, 마법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 또한 마탑의 마법사에게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그럼 수업을 시작하마."

크러쉬가 부양 마법으로 두꺼운 책을 꺼내 펼치며 수업을 시작했다.

'지루하군.'

수업을 시작한 직후부터 에단은 연신 눈을 끔뻑였다.

크러쉬의 수업은 지루했다. 교육이 아닌 자기 피력에 가까웠다.

어려운 단어를 복잡하게 늘어놓다가 결국은 자신의 자랑으로 귀결된다.

심기가 불편하기는 페온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페온이 계속해서 투덜거렸지만, 에단은 별다른 반응 없이 수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루함은 그대로였는지라, 에단의 자세가 점점 삐딱해지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런고로 마법은 고귀한 혈통의 전유물...."

크러쉬가 흘깃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팔장을 낀 채 짝다리를 짚고 있었다. 심지어 몸을 벽에 슬며시 기대고 있었다.

"...뭐 하는 거죠?"

"보면 몰라요? 수업 참관 중이죠."

"지금 그게 수업을 듣는 태도입니까?"

크러쉬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하지만 에단은 콧방귀를 뀌었다.

"수업이 너무 지루해서 말이죠."

"지루...하다고?"

크러쉬의 말이 평대로 바뀌었다.

"감히... 하찮은 평민 따위가 내 수업을 모욕해?"

크러쉬는 살벌한 눈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분노한 그의 주위로 마나가 넘실거렸다. 에단이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야."

"...뭐라고?"

"말은 자기가 먼저 놨으면서 왜 과민 반응이야? 내가 학생이냐? 같은 교수인데 누구 앞에서 권위를 세우고 있어?"

"...하."

학생들이 숨을 들이마셨다.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적응을 못 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다들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평민인 교수가 귀족의 신분을 가진 교수에게 저런 태도를 취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학생들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에단은 크러쉬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심기가 불편한 이는 비단 크러쉬뿐만이 아니었다.

에단 역시 여기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레벨린에게도 무데뽀로 들이박았던 자신이었다.

에단이 눈을 부라리며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압도감이 흘러내렸다.

블랙 오우거의 피어였다.

크러쉬는 에단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위축되었지만 그 감정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일개 평민에 불과한 에단에게서 위압감을 느낀다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후환이 두렵지도 않나?"

"꼭 뭣도 없는 놈들이 후환 타령을 하더라."

에단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 학생들을 둘러봤다. 이 반이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주인공 얼굴도 모르고.'

뭐, 설마 여기에 원작 주인공이 있지는 않겠지.

원작 주인공은 에단과 같은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여기에 흑발을 지닌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여기서 질러 버려도 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야, 마법이 그렇게 잘났어?"

"허, 미천한 신분이라 그런지 하찮은 질문을 하는군. 당연한 것 아닌가? 무식한 검술에 비해 마법은 고고한...."

"아, 그래? 근데 에밀라는 검술 교수가 아니었나? 에밀라가 그렇게 무식하고 미천해?"

그 순간, 크러쉬의 눈빛이 바뀌었다.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에단을 노려보던 크러쉬가 입을 열었다.

"...감히 에밀라 씨와 너 따위를 비교하는 건가?"

"왜? 걔도 평민인 건 매한가지잖아."

"에밀라 씨는 너 따위와 비교될 수 없는...."

"너 앵무새냐? 같은 말만 반복하게."

학생들은 바짝 얼어 있는 채로 에단과 크러쉬의 말다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학생들을 향해 에단이 시선을 돌렸다.

"오늘 부임하게 된 교수다. 다시 내 소개를 하지."

크러쉬의 반응을 무시한 채, 에단이 한 걸음 나아갔다.

"검술과 체술이 내 담당 과목이다. 이 머저리가 방금 말했지? 마법이 월등하고 검술 따위는 열등하다고."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보여 줄게. 검술이 과연 열등한지 말이야. 수업을 듣는 너희들에게도 객관적인 결과가 필요할 거 아니야."

"지금 멋대로 무슨 짓을...."

에단이 몸을 돌려 크러쉬를 바라봤다. 크러쉬는 분노와 당혹감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때? 너도 자존심이 있으면 증명하고 싶을 거 아니야. 이번 기회에 네 말을 증명해 봐."

"...."

"미천한 평민 따위는 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어떻게 말이지?"

"방법이 뭐가 있겠어. 당연히 결과를 보여 줘야지. 왜, 쫄려?"

에단이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말했다. 에단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쫄리면 뒈지시든가."

* * *

크러쉬는 에단의 횡포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오늘 주제 파악을 시켜 줘야겠어. 아니, 이대로 죽여도 괜찮겠지.'

감히 갓 부임한 평민 교수 주제에 에밀라와 스스로를 비견한 것부터 중죄였다.

'거기다가 내 수업도 망쳐 놨지.'

수업은 평소처럼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귀족 자제들은 알아서 잘 따라왔을 테지만, 저열한 학생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 평민 따위가 지고한 마법을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에단은 크러쉬의 수업 방침을 면전에서 조롱했다. 크러쉬에게는 견딜 수가 없는 모욕이었다.

'교수라고는 하지만 평민 하나 죽는 일이니 아무 문제 없겠지.'

역량의 차이를 실감시킨 뒤, 가지고 놀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아주 비참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물론 대놓고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실수를 가장할 생각이었다.

크러쉬와 에단은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둘만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에단은 학생들도 이끌고 갔다. 크러쉬도 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학생들 앞에서 입은 자존심의 상처를 회복할 생각이었다.

에단과 크러쉬는 연무장 앞에 마주 섰다.

"흥, 이제 와서 울며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

"혀가 더럽게 길구나?"

"...죽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지랄."

에단이 뒤를 돌아봤다.

학생들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당황스러운 모양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움 구경만큼 재밌는 건 없지.'

그렇기에 격투기 챔피언이었던 류태신 시절, 그만한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에단이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판단은 너희들이 해라. 과연 이 새끼가 말한 것처럼 귀족 마법사가 월등한지."

"흥, 너 따위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보여 줄 생각이다. 검을 들어라. 수준 차이를 실감시켜 주지."

"검? 그건 너한테는 사치지."

"뭐라고?"

"내가 말했잖아. 나는 '검술'과 '체술'을 담당한다고."

에단이 검지를 까딱거렸다.

"너는 맨손으로도 충분해."

"좋다. 후회하게 해 주마!"

크러쉬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하자 결국 폭발했다.

'어떻게 아카데미에 발을 들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선택을 후회하게 해 주마!'

"매직 미사일!"

크러쉬의 머리 위에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마나가 모여 형성된 마법의 화살.

그 숫자는 적지 않았다. 열은 족히 넘어 보이는 매직 미사일.

"이제야 겁을 집어먹었나?"

벌써부터 승리라는 감정에 도취했는지 크러쉬는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섰다.

"그 대사 안 질리냐?"

에단의 말에 크러쉬가 이를 갈았다.

"죽어라!"

공중에 떠 있던 마법의 화살이 일제히 쏘아졌다.

맹렬한 기세로 쇄도하는 화살 세례에 에단이 슬며시 몸을 웅크렸다.

마치 단거리 육상 선수가 준비 자세를 취하는 것 같았다.

에단의 허벅지에 마나가 깃들더니, 에단의 몸이 마치 쏘아지듯 뛰쳐나갔다.

◈ [59화] 평민 교수 (3)

에단은 단 한 번도 수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여행 도중에도 지속적인 마나 컨트롤을 숙달하려 노력했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소홀하게 한 적이 없었다.

에단의 움직임은 쏘아진 화살과도 같았다. 크러쉬는 에단을 너무 얕잡아 봤다.

하여 방심이라는 독약을 삼키고 말았다.

에단이 크러쉬의 눈앞에 이동하고 나서야 크러쉬의 동공이 서서히 커졌다.

"이, 이게 무슨...!"

크러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에단의 몸놀림을 감히 쫓을 수도 없었다.

크러쉬가 몸을 돌린 건 나름의 최선이었다. 하지만 에단이 보기에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다.

그의 다급한 행동은 에단에게 딱히 의미가 없었다. 에단의 손에 푸른 마나가 깃들었다.

쾅!

이윽고 귀가 멀 것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에단의 주먹이 크러쉬의 실드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에단의 주먹이 일으킨 충격에 지면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크러쉬가 볼품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에게선 더 이상 권위와 품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히, 히익...!"

크러쉬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대처하는 것도, 지금의 크러쉬에게는 무리였다.

"시, 실드!"

그는 남은 한 줌의 마나를 쥐어짜 실드를 만들어 냈지만, 그 행위가 과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꽤나 빠르게 드러났다.

"후우."

에단이 심호흡을 했다.

반투명한 마력의 보호막을 보며 간만에 호승심을 느꼈다.

에단이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들 아직 실드를 완전히 깨부수기는 쉽지 않았다.

역량의 차이가 심한 블랙 오우거를 사냥했을 때도 약점 부위를 집요하게 공략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승산이 희박했을 터였다.

'자신이 없지는 않은데.'

에단이 오른손을 힐긋 바라봤다.

충만한 기운 속에서 복합적인 힘들이 느껴졌다.

신체의 재능, 블랙 오우거의 힘, 그리고 흡수한 마나.

에단이 허리를 젖혔다.

누구도 당해 주지 않을 과장된 동작처럼 보였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건 상대를 노리는 비수가 아닌, 눈앞의 푸른 벽을 부숴 버릴 망치였으니까.

뒷발을 축으로 에단의 허리가 뒤틀렸다. 신체에 회전력이 실렸고, 오른손이 큰 포물선을 그렸다.

이윽고.

디딤 축으로 사용한 다리가 있는 자리가 움푹 파였다.

마나가 깃든 에단의 주먹이 휘둘러지며 바람이 뭉개지는 소리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후웅!

주먹을 뻗는 순간, 에단은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이건 부쉈다.'

콰앙!

에단의 오버 핸드가 거칠게 꽂혔고, 동시에 크러쉬의 실드가 허무하게 부서졌다.

"커헉!"

실드가 깨지며 그 반작용이 크러쉬를 직격했다.

"안녕?"

에단이 다가왔지만,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몸을 꿈틀거렸다.

"귀족답지 않게 왜 그래?"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러쉬의 코앞에 멈춰 선 에단이, 그의 뒷덜미를 붙잡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바들바들.

공포에 질린 크러쉬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었다.

"이, 이거 놔!"

크러쉬가 에단의 손을 떨쳐 내려는 듯 반항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에단이 반대 손을 들었다. 크러쉬의 눈이 흔들렸다.

"왜? 대충 감이 와?"

"무, 무슨...."

찰싹!

에단의 손이 크러쉬의 뺨을 거칠게 갈기자, 크러쉬의 고개가 홱 하고 넘어갔다.

학생들은 침묵했다.

승부의 결과가 예상을 벗어난 것도 있지만, 에단의 행동 자체가 경악스러웠기 때문이다.

동료 교수, 그것도 선배, 심지어 귀족의 뺨을 때리다니.

가볍게 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에단의 손이 크러쉬의 뽀얀 뺨에 부딪히는 순간, 크러쉬의 살이 터져 나갔다.

그의 볼이 거무튀튀하게 죽었다. 에단이 이를 보며 히죽 웃었다.

"야, 벌써부터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지. 넌 나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러면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지.

에단을 지켜보던 페온이 고개를 저었다.

건방을 떨던 크러쉬가 얄미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지워질 정도로 에단의 손속은 잔혹했다.

에단의 손은 그것 하나로 멈추지 않았다.

쫘악!

섬뜩한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학생들의 침음 소리가 뒤따랐다.

몇몇은 고개를 피했다.

그간 크러쉬의 차별 행위와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수업 방식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하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잔혹한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보기는 힘들었다.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에단이 풍기는 위압감에 다리가 벌벌 떨릴 지경이었으니.

크러쉬는 뛰어난 마법사는 아니었다. 전방위적인 지식과 교육에 관해서는 괜찮은 편이었으나, 일신의 무력은 결코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고위 마법사와 비교했을 때의 말이다. 크러쉬는 아카데미 교수였고, 5서클의 마법사였다.

웬만한 전투 마법사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경지에 들어선 마법사라는 소리다.

에단은 그런 크러쉬를 꺾었다.

그것도 힘겨운 혈투가 아닌, 어린아이의 손가락을 꺾듯이 아주 손쉽게.

하니 당연하게도 에단의 흉흉한 기세를 뚫고 결투를 만류할 사람은 없었다.

크러쉬의 몸이 축 늘어져, 실이 끊어진 인형 같은 꼴이 되었다.

에단이 크러쉬의 몸을 짤랑거리며 흔들었다.

'설마...?'

크러쉬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여기서 멈추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에단이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조금 과한가?'

하지만 괘씸함 때문에라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이 대결의 시발점은 에단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에단의 실력이 부족했다면, 크러쉬의 손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을 거다.

이런 잔챙이 따위에게....

에단은 기가 찼고, 화가 났다.

류태신은 원래도 이성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에단의 몸에 빙의한 이후로 감정적인 대응이 더욱 극심해졌다. 망나니의 본성이 어딜 가진 않은 것이다.

크러쉬의 입과 코에서 붉은 피와 침이 줄줄 떨어졌고, 동시에 아랫도리도 축축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만하세요!"

에단의 손이 휘둘러지기 직전, 순식간에 학생들을 뛰어넘어 등장한 에밀라가 에단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에단은 언성을 높이는 에밀라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교육. 아, 이건 좀 이상한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타인의 목숨을 앗아 갈 짓을 벌였다면 응당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게 에단의 가치관이었다.

하지만 에밀라가 보기에는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했다.

"당장 크러쉬 교수님을 내려놓으세요!"

에밀라의 고압적인 태도에 에단의 눈꼬리가 휘었다.

"그건 권유입니까? 협박입니까?"

"당신...!"

에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당장 검을 뽑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두려움.

두 번의 압도적인 패배로 인해, 에밀라에게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각인되었다.

한번 각인된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수많은 학생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가 무거웠다.

에밀라의 팔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자, 에단이 피식 웃으며 손에 힘을 풀었다.

그와 함께 크러쉬의 몸이 볼썽사납게 바닥에 떨어졌다.

"레벨린한테 혼 좀 났나 본데?"

에단이 씨익 웃더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마치 홍해가 갈라지는 것처럼 학생들이 길을 터 줬다.

"첫 수업에 못 볼 꼴 보여 줘서 미안."

에단은 학생들에게 손을 휘저어 보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에밀라는 복잡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 * *

― 그새를 못 참고 일을 벌였구나.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 ...때리는 것에도 정도를 두는 게 낫지 않겠느냐?

"글쎄요."

에단이 씨익 웃자, 페온이 포기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 이렇게나 막무가내로 일을 벌여도 괜찮은 게냐?

"어차피 아카데미에서의 목적은 크게 없습니다. 아무리 아카데미의 위상이 날이 갈수록 치솟는다고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블란테에 비할 바가 아니죠."

― 그걸 아는 놈이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사달을 벌여?

"재밌지 않습니까."

― ...미친놈.

사실 재미를 떠나서 주인공과의 끈을 잇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컸다.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 게 유리할까.'

에단의 지식은 제한적이었다. 원작을 모두 읽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은 곳까지만 봐도 대륙의 절대자가 된 주인공은 끝없는 혈투를 벌였고, 동료들은 모두 죽어 나갔다.

'녀석을 그 이상으로 성장시킬 수가 있나?'

불가능하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에단이 얻은 기연들도 모두 주인공이 가져가야만 했다.

이미 인과는 뒤틀렸다고 봐도 좋았다. 모든 기연과 성장을 주인공에게 몰아주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개죽음당해서는 소용없지.'

에단은 살기 위해서, 또 강해지기 위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주인공의 실수, 그리고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건들에 손을 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적당한 조력자의 위치에 서 있으면 되겠군.'

과한 신용은 불필요했다. 적당히 선을 지키며 조력자에 위치에 있으면 된다.

모든 것을 뺏어 갈 생각은 없다.

귀찮은 건 질색이니까.

'세계를 구원하는 데에는 크게 관심 없어.'

사명감 따위는 없었다. 자잘한 이벤트들은 어차피 주인공이 나서서 해결할 문제였다.

* * *

에단이 부임한 첫날부터 사건이 발생했다.

마음 한편에 불안감이 있었지만, 설마 첫날부터 일을 벌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크러쉬의 상태는 보기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에단의 손속 없는 손짓에 뺨이 터지긴 하였지만, 이 정도면 마법과 포션으로 금세 회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교수 사이에 폭행이 있었고, 명분 또한 에단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크러쉬는 대외적으로 귀족가의 자제였고, 소문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명마보다 빠른 것이 소문이다.

블라디미르 가문은 결코 이 사건을 묵시하지 않을 터. 게다가 크러쉬도 여기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에단에게 징계를 내릴 수도 없었다.

에단이 정말 평범한 평민에 불과했다면 교수직에서 제명하면 그만이겠지만, 에단의 가문은 블란테였다.

지금은 몸을 웅크리고 있으나, 에단이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는 게 알려지면 자고 있던 사자가 몸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

욱씬.

에밀라는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쩌다가.'

에밀라는 오전부터 레벨린에게 불려 갔다. 핀잔이나 타박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레벨린을 봐 온 에밀라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신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에밀라도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에 불신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레벨린과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크러쉬의 일은 또 어찌해야 할까.

눈을 질끈 감은 에밀라가 고개를 숙였다.

◈ [60화] 평민 교수 (4)

에단이 부임한 첫날부터 사건이 벌어진 탓에, 아카데미 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맴돌았다.

소문은 부풀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에단의 신분이었다.

대외적으로는 평민에 불과한 에단이 귀족의 피가 흐르는 크러쉬를 박살 냈다.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 구성원의 대다수는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평생을 귀족의 일원으로서 고고한 자존심을 키워 온 그들에게 이번 사건은 쉽게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소문에 점차 살이 붙기 시작했다. 결투가 벌어진 계기도 만들어졌다.

― 초임 교수가 크러쉬 교수님을 모함했다더라.

― 학생들 앞에서 대놓고 비아냥거렸다더라.

― 수차례 주의를 줬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웃으며 비꼬았다더라.

소문은 썩 그럴듯했지만, 자연히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악의적인 소문을 주도한 사람이 따로 있었다.

'감히 평민 주제에 귀족에게 대들어?'

로만은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다. 그러나 배움을 구하는 학생이기에 앞서, 권위 의식과 선민사상에 찌든 귀족이었다.

하지만 거만함과는 달리 로만 가문의 위신은 그리 높지 않았다.

평범한 귀족, 평범한 재산, 모든 것이 평범했지만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다.

'마크.'

아카데미의 학장인 마크는 로만의 아버지였다.

재능이 뛰어나지도 않았고, 가문이 엄청난 것도 아니었지만, 그 덕분에 로만은 떵떵거리며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었다.

로만도 바보는 아니었다. 대놓고 학장과 연관되어 있다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연중에 내색하기 마련이었고, 로만의 성격이 그랬다.

자연스레 로만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카르텔이 형성되었다. 평민을 차별하고 귀족의 위신을 드높이는 무리가 형성된 것이다.

그 카르텔에는 교수인 크러쉬도 포함되어 있었다.

'감히 평민 따위가...?'

그런데 최근 부임한 평민 교수인 에단이 반역이라 부를 만한 일을 일으켰다.

'그 평민에게 뭐가 있는 건 아니겠지?'

로만은 거만한 성격과는 별개로 겁이 많은 편이었기에, 자신에게 위험이 될 만한 행동은 자중했다.

'배경이라도 있으면 위험한데....'

그 예가 바로 에밀라였다.

마크는 로만에게 신신당부했다. 사소한 사건은 넘어가 줄 수 있지만, 에밀라한테만큼은 대들지 말라고.

로만은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약인 일도 있는 법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로만의 직감은 곧잘 적중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로만은 마크에게 찾아가 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아직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진정되지 않았던지, 마크는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넘어갔다.

― 그 녀석은 신경 쓰지 마.

― 왜요? 감히 귀족을, 그것도 선배 교수를 건드린 것 아닌가요? 혹시 녀석이 귀족이라도 되는 겁니까?

― ...그건 아니다. 내가 알아서 징계를 내리든 할 테니, 괜한 소란을 일으키지는 말도록.

하지만 이번만큼은 로만도 넘어갈 수 없었다. 귀족이 아니라는 확답은 들었으니 행동에 나서도 상관없다고 판단했다.

로만은 자신의 카르텔을 중심으로 소문을 퍼트렸다. 로만이 결투 장면을 직접 지켜본 것은 아니었지만 소문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그 내용을 바꿀 수 있었다.

크러쉬는 학생을 지키다가 비열한 수에 당한 선역으로.

에단은 갓 부임한 주제에 크러쉬를 속여 다치게 만든 인면수심의 교수로.

물론 결투 장면을 지켜본 학생들은 그 소문을 부정하곤 했지만, 이미 대다수의 학생은 로만이 퍼트린 소문을 사실로 믿고 있었다.

'이제, 자기 발로 이곳에서 나가게만 만들면 돼.'

애초에 아무런 근본도 없는 평민이 귀족들을 가르친다는 사실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크러쉬 교수님을 만나 봐야겠어.'

로만이 병실에 있는 크러쉬를 찾아갔다. 크러쉬는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얼굴에 상처를 입은 만큼 수치심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구지?"

"로만입니다, 교수님."

"여기까지 와 준 것은 고맙지만, 나가 줬으면 좋겠군."

음울한 크러쉬의 목소리에 로만이 고개를 저었다.

"크러쉬 교수님은 잘못이 없습니다. 모든 잘못은 건을 일으킨 평민 녀석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로만의 말에 크러쉬의 몸이 움찔했다. 그런 크러쉬의 반응을 보고 로만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교수라고는 하나, 그따위 행패를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소문은 들으셨습니까?"

"소문?"

로만이 간략하게 자기가 주도하고 퍼트린 소문을 설명했다. 가만히 로만의 말을 듣던 크러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역시 고귀한 핏줄은 뭔가가 다르군...."

크러쉬의 진심 어린 칭찬에 로만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로만은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자세히 설명해 보게."

"녀석을 아카데미에서 쫓아내 버리죠. 어차피 배경도 없는 평민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녀석에게 교수라는 자리는 과분한 직위입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만... 어떻게?"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로만이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임에도 에단은 태연했다.

'뒷배가 있다는 게 이렇게 편할 줄이야.'

징계나 퇴출을 걱정하지 않고, 이런저런 상황에 마구잡이로 들이대도 된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편할 줄은 몰랐다.

― 분명 블란테의 이름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이름은 안 쓰지 않았습니까.'

내가 과시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알아서 엎드리는 상황이었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오늘 하루는 이미 지났고, 내일부터 에단은 자신이 원하는 반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이제 주인공과 마주하게 되겠군.'

그리고 덩달아 건방진 여동생도.

과연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잘 가고 있는 건가?'

에단이 떠난 일행들을 떠올렸다. 휴고와 가토, 헨리는 상당히 불안했지만, 네이드가 함께한 만큼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일행을 그곳으로 보낸 이유는 달리 있지 않았다.

'정보 길드.'

정보 길드가 주로 활동하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붉은 곰도 덤으로 엮으면 좋고.'

붉은 곰은 언젠가 마주쳐야 하는 패거리 중 하나였다.

녀석들도 레벨린의 패 중 하나였으니까.

'급하게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지.'

여유를 가져도 좋았다. 어차피 귀찮은 일은 모두 원작 주인공이 해결할 테니까.

에단은 자신의 안위를 챙김과 동시에 본인의 성장만 추구하면 되었다.

'시간 아까운데 몸이라도 풀고 있을까.'

에단이 웃통을 벗었다. 그간 혹독한 단련을 견뎌 온 에단의 몸은 하나의 무기와도 같았다.

부피, 밀도, 그리고 데피니션까지.

완벽하게 자리 잡은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에단이 팔을 지면에 대더니 그대로 물구나무를 섰다.

"습."

에단이 호흡을 들이마셨다. 들이마신 호흡의 압력이 배를 단단하게 잠갔다.

이 정도 경지에 다다르면 복압과 호흡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습관에 가까웠다.

에단은 물구나무 푸시 업을 시작했다. 단순히 횟수를 채우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폭발력을 위해서라면 빠르게 움직이는 게 나을 수도 있지만.'

이미 폭발력은 충분했다. 그런 훈련은 가문에서 넘치도록 했다.

'이 정도 중량은 크게 부담도 없고.'

이미 에단의 신체 능력은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봐도 좋았다. 야수화한 휴고와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그 정도의 신체 능력을 지닌 에단에게, 자신의 몸을 컨트롤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게.'

수축과 이완, 1초면 끝날 동작을 1분에 가깝게 쪼갰다.

근육이 늘어나는 상황과 몸에 걸리는 부하를 즐겼다.

'적응했다고 자만하면 안 되지.'

평생 동안 사용하던 몸이 아닌,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던 몸에 들어왔다.

그런 몸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이렇게 시간이 남을 때 천천히 몸을 느끼는 시간이 필요했다.

에단이 우두커니 물구나무를 서서 푸시 업을 하던 도중, 벌컥 문이 열렸다.

"당신...!"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방의 문을 열어젖힌 사람은 에밀라였다. 에밀라의 얼굴에 담긴 표정이 분노에서 당혹으로 바뀌었다.

"뭐야?"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번쩍 일어났다. 에단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여기 남자 층 아니었나? 무슨 볼일이지?"

에단의 물음에 에밀라가 고개를 피하며 말했다.

"...왜 그런 꼴로 있는 거죠?"

"보면 몰라? 운동 중이었잖아."

에단이 수건을 하나 꺼내 들어 목에 걸쳤다.

"...원래 그렇게 아무 장소에서나 옷을 벗습니까?"

"여기가 아무 장소야? 내 방에서 웃통 까고 운동하겠다는데 뭔."

"하... 빨리 옷이나 입으시죠."

"싫어. 씻고 입을 거니까. 할 말이 있으면 지금 말해."

"당신.... 됐습니다. 당신은 뭘 믿고 그렇게 막무가내인 거죠?"

에밀라의 질문에 에단이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건 왜 물어?"

"어떻게 첫날부터 사고를 칠 수 있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러게 직원 교육을 잘 했어야지. 뭘 믿냐고? 난 언제나 자신이 없으면 행동을 안 해. 난 나를 믿고, 그리고 내 가문을 믿지."

에단이 입꼬리를 올리며 에밀라에게 다가갔다. 에밀라가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에단이 말을 이었다.

"너도 자신이 있어서 내 침소에 두 번이나 찾아온 것 아닌가?"

에단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에밀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소리를...!"

"농담이고, 혼자 있을 생각이니까 나가."

에단이 에밀라를 슬쩍 밀었다. 에밀라는 쉽사리 밀려났고, 문은 그대로 닫혔다.

"...."

에밀라가 멍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봤다.

* * *

다음 날, 에단은 업무실이나 교무실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강의실로 향했다.

오늘은 드디어 주인공과 만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에단이 발을 옮기자, 그에게 향하는 시선들도 함께 움직였다.

'저 사람이 소문의 그 사람이야?'

'잘생기긴 했는데 딱 봐도 인상이 사납네....'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짓을 벌인 거지?'

곱지 않은 시선과 목소리들.

'재밌네.'

하지만 에단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시선들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가문에서도 지금과 같은 멸시와 조롱의 시선을 한몸에 받지 않았던가.

'거기까지만 하면 봐줄게.'

하지만 소곤거리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건들기 시작한다면 말이 달라졌다.

'벌집을 건드렸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해 주지.'

그전까지는 지금처럼 관대하게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에단은 학생들의 말을 무시한 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 복도를 걷던 에단이 목적지를 확인하고 씨익 웃었다.

[A반]

문 앞까지 다가간 에단은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학생의 시선이 에단을 향해 쏘아졌다.

"반갑다, 친구들."

에단이 학생들을 둘러봤다.

미소를 머금고 말하는 에단의 모습에 학생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군.'

곱지 않은 시선들을 느끼며 에단은 생각했다.

'여기는 어떻게 휘어잡는 게 좋을까?'

◈ [61화] 주인공

"반갑다."

에단의 말이 나오는 순간, 모두들 수군거리면서 한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저 사람이 그 사람이야?"

"소문의 평민?"

얼추 봐도 비싼 장신구를 차고 있는 귀족 무리.

그리고 귀족들 사이에서 기가 죽어 있는 평민들.

반의 분위기를 대강 파악한 에단이 천천히 위에서부터 학생들을 훑어봤다.

'쟤가 내 여동생이군.'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에단의 기억이 흘러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요소들이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에단처럼 평민 행세를 하고 있지만 결코 감출 수 없는 귀족의 위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리사는 에단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뭐, 그럴 수 있지.'

지금의 에단은 외모와 분위기가 모두 달라졌으니까.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이름뿐이었다.

'그나저나 주인공이 누군지를 모르겠군.'

이 반에 있는 것은 확실했는데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워낙 잘생겼다고 묘사하길래 알아보기 쉬울 줄 알았는데... 모르겠군.'

특출한 녀석이 있다면 페온이 먼저 입을 열었을 텐데,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러면... 어쩔 수 없지.'

원작 주인공 찾기를 포기한 에단은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자, 조용. 출석 부른다."

에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학생들은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추, 출석?"

"우리 출석 확인 같은 거 한 적 있었어?"

"없는 거 같은데...."

학생들의 반응이 호의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런 건 사소한 문제였다.

한마디로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소리다.

에단은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책을....

'아, 준비한 게 없었지.'

에단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에밀라에게 말이라도 해 둘 걸 그랬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

어차피 자신이 아는 몇 명의 이름만 부르고 말면 되는 일이었다.

에단이 대충 단상에 손을 얹어 삐뚜름하게 섰다.

"리사."

에단이 리사의 이름을 부르자, 예상한 인물이 반응을 보였다.

"대답 안 하나?"

"네."

리사의 대답에 에단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강혁."

두 단어. 이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한국식 이름이었다.

에단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위를 주시했다. 하지만....

'...뭐지?'

반응이 없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에단이 재차 입을 열었다.

"강혁?"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강혁이 누구야?"

"강혁이라고 알아?"

"아니, 처음 듣는데? 다른 반 애 말하는 거 아니야?"

"다른 반에도 없을걸? 애초에 이름도 특이하잖아."

"뭐야.... 저 교수 왜 저러는 거야?"

학생들의 반응에 에단은 큰 충격을 받았다.

무언가가 잘못됐다.

주인공이 없었다.

―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게냐?

페온의 물음에도 에단은 침묵했다. 에단이 리사를 바라봤다.

'그래, 리사 근처에 있어야 해.'

에단이 리사 곁에 다가갔다. 리사 곁에는 남자 학생이 앉아 있었다.

에단이 다가서자 학생의 표정에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히 떠올랐다.

"이름이 뭐지?"

"야, 얀입니다."

"너는?"

에단이 고개를 돌려 다른 근처 학생들에게도 물었다.

대답은 같았다. 강혁이라는 인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업은 잠시 보류다. 그동안 자율 학습이다."

에단이 몸을 돌렸다. 학생들이 웅성거렸지만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도서관.'

당연히 도서관의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에단은 밖에 돌아다니는 직원을 아무나 붙잡아 도서관의 위치를 물었다.

마침내 도서관을 찾아낸 에단이 안으로 들어섰다. 도서관의 규모는 거대했고, 웅장했다. 마탑의 서고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페온은 말없이 에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에단이 이렇게나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대륙의 역사. 마왕, 그리고 용사."

에단은 기억을 더듬어 주인공이 책을 찾던 순서를 그대로 따라갔다.

영웅담을 정리해 놓은 듯한 책의 순서.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무 글귀도 써져 있지 않은 낡아빠진 책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에단은 말없이 그 책을 빼 들었다.

'이 책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선택받은 용사만이 얻을 수 있는 힘과 조언.

아카데미에서 얻게 되는 첫 번째 히든 피스였다.

에단은 천천히 책을 펼쳤다.

[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남은 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룬어]

[절망]

책에서 음산한 검은 빛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빛은 에단의 팔을 타고 오르더니 이내 피부에 깃들기 시작했다.

― 무, 무슨 일이냐?

"...."

에단은 빛을 발하고 있는 문자들을 말없이 바라봤다. 글귀와 무늬는 희미해지며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룬어....'

용사이자 주인공만이 얻을 수 있는 힘이었다.

그리고 '절망'이라는 룬어.

주인공이 얻은 '희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서도 주인공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제기랄, 그 소리는.'

주인공이 진작 해결했어야 하는 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소리였다.

'먼저 세계수.'

분명 세계수의 오염을 막지 못했을 거다.

오염이 진행되고 있다면, 상황이 더욱 급박했다. 세계수가 완전히 오염되어 버리면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어쩔 수 없이 일을 해결해야 하는 자신은 엄청난 페널티를 안게 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적들은 막대한 이점을 얻는 것이고.'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몸을 돌린 에단이 곧장 교무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에단이 예고 없이 문을 덜컥 열자, 레벨린이 미간을 좁히며 에단을 바라봤다.

"무슨 볼일이죠? 지금 수업하셔야 할 시간 아닙니까?"

"그건 사과하지. 급하게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흐음, 말씀해 보시죠."

"강혁,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인가?"

에단이 레벨린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레벨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장 대답했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군요."

"...고맙군."

대답을 들은 에단이 곧장 몸을 돌리자, 레벨린이 그를 불러 세웠다.

"정확합니다. 학생들의 이름은 모두 외우고 있으니까요."

"암기력 하나는 대단하군. 그 정도면 천재 아닌가?"

"비꼬시는 거면 됐습니다. 혹시 알아봐 드릴까요?"

싱긋 입꼬리를 올리는 레벨린을 보며 에단이 피식 웃었다.

"내가 찾을 거니까 필요 없어."

"그거 유감이군요."

"아, 그 말을 빼먹었군."

"...뭐죠?"

"오늘 월차 낼게. 급한 일이 있어서."

"무슨 월차가 있다고... 저기요!"

에단이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은 뒤 달리기 시작했다.

계획이 바뀌었다.

'녀석들을 만나야겠어.'

상황이 달라졌다. 여유롭게 관조할 순 없었다.

'귀찮아졌군.'

시간이 촉박했다.

* * *

다그닥, 다그닥.

"이게 맞아?"

"몰라, 우리는 까라면 까야지."

"나도 아카데미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뭐야? 블란테의 기사라는 놈이 그따위 곳을 선망하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명심해. 너는 블란테의 가신이야. 마음가짐을 바로 하라고."

"너는 가 보고 싶지 않아?"

"...어."

"대답이 조금 늦었는데."

"아니라니까?!"

"아니면 아닌 거지, 왜 발끈해."

휴고와 가토의 대화를 바라보던 헨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하.... 말하는 것만 보면 영락없는 애네...."

그런 헨리를 보던 네이드도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보기에는 헨리 씨도 충분히 어린 축에 속합니다."

"아, 그런가요? 괜히 머쓱해지네요."

헨리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에단이 빠지고 예정되지 않은 일정이 생겼지만, 포기해서 그런지 꽤나 안정감을 찾게 되었다.

'동생이 보고 싶네.'

헨리가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어린 동생이 생각났다.

* * *

에단이 정문을 바라봤다.

'시간이 없어.'

에단에게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빨리 일행들과 만나야 했다.

에단은 철문에 손을 얹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근육이 부풀고 혈관이 돋아났다.

쿠구구궁.

철문이 굉음을 일으키며 밀려나고 있었다.

발밑이 움푹 파였다. 에단이 인상을 쓰며 힘을 주자 쿵! 소리와 함께 철문이 활짝 열렸다.

문밖에는 문지기가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에단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얼굴을 감싼 채 오들오들 떨었다.

"야, 그땐 조금 미안했다. 그러니까 다음엔 잘 좀 하자."

에단이 지면을 박찼다.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일행과 에단 간의 거리는 하루가 넘게 걸릴 만큼 벌어져 있었다.

'일단 최대한 뛰어 봐야지. 유산소 트레이닝은 오랜만인데.'

에단이 지면을 박차고 달렸다. 분주하게 발을 놀려야 따라붙을 수 있을 터였다.

* * *

일행은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야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꽤나 익숙해졌는지 능숙하고 빠르게 준비를 끝마쳤다.

"...평화롭네요. 안심도 되고."

모닥불 앞에 앉아 헨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평화와 그리 친숙하지 않았다.

늘 초조함과 촉박함에 쫓기는 기분로 살았다. 실적 부족과 불안정한 미래, 그리고 부양할 가족이 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되었다.

그런데 모든 걸 놓아두고 홀가분한 기분이 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헨리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었다.

"제 주제에 이런 곳에 끼어 있어도 될까요?"

"...."

휴고와 가토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입을 다물었다.

함부로 말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가만히 식사를 준비하던 네이드도 헨리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다가와 수프 한 접시를 건넸다.

"이거라도 드시죠."

"감사합니다."

헨리가 수프를 받아 들었다. 수프에서는 따뜻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잘 모르겠네요. 아직."

"모르시면 괜찮습니다. 저도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건 도련님도 다르지 않았죠."

"도련님이요?"

헨리가 되물었다. 덩달아 가토와 휴고도 귀를 쫑긋 기울였다.

셋의 반응이 재밌는지 네이드가 미소를 머금었다.

"궁금하신가요?"

"네."

"저도 궁금합니다."

"저도...."

모두 궁금해하자,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할아버지처럼 네이드가 입을 열려 했다.

그 순간.

"그 이야기, 나도 좀 들어 보자."

수풀을 헤치고 에단의 머리가 등장했다.

"꺄아아아아악!"

헨리가 비명을 질렀다. 네이드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고, 가토와 휴고도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도, 도련님?"

"도련님이라고?"

"아니.... 도련님이 여긴 왜."

"왜 이렇게 놀라?"

에단이 땀에 푹 절은 옷을 벗었다. 얼마나 땀과 열을 머금었는지 옷에서 김이 나오는 것 같았다.

에단이 옷을 쥐어서 물기를 짜내었다. 옷에서 물이 흥건하게 떨어졌다.

'내가 생각해도 무식하게 뛰어 댔군.'

조금만 찾아봤다면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간만에 땀도 빼고 좋지, 뭐.'

제대로 유산소 운동을 했으니, 이제 단백질과 수분을 보충할 차례였다.

"네이드, 내 것도 있나?"

"네. 여유롭게 했으니 드시죠."

"고맙군."

에단이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체취에 헨리가 볼을 붉혔다.

'모, 몸이....'

에단의 몸은 정말 잘 벼린 검 같았다. 갑옷같이 우락부락하지는 않았지만, 돋아난 혈관과 꿈틀거리는 근육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여기까지 대체 무슨 일로...."

"계획이 조금 틀어져서 말이야. 내가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해야 할 것 같아."

"일이라는 것은... 말씀하신 그것 말씀인가요?"

"어, 정보 길드. 녀석을 좀 찾아봐야겠어."

강혁에 대한 정보. 그게 필요했다.

◈ [62화] 합류 (1)

원래 하려던 야영은 갑자기 나타난 에단 때문에 접어야 했다.

"...평화가 끝났네."

휴고가 음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에단이 마차의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아쉬워?"

"아, 아닙니다."

"아쉬우면 말해. 다시 보내 줄 테니까."

"어디로요?"

"궁금해?"

에단의 섬뜩한 미소에 휴고는 샐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 안에 일을 다 끝내야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페르나니엄 자치령.

용병의 도시이자 무역의 도시.

자유를 표방하는 도시로 유명했다.

비록 공권력은 없다시피 한 무법 지대라고 볼 수 있었지만, 독자적인 규율이 질서를 만들었다.

누구보다 거칠게 사는 용병들이 세운 힘의 율법.

그 율법은 고압적이고 강압적이었다.

덕분에 확실한 강제력을 가졌다.

페르나니엄 자치령은 그 구조부터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상인들이 모이면서 많은 돈이 돌기 시작했고, 돈 냄새를 맡은 용병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상인들도 용병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상행의 안전을 위해서는 용병이 필요 불가결했기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도시는 발전했다.

빠른 성장 탓에 부작용도 따랐지만, 그를 뛰어넘는 장점 때문에 페르나니엄 자치령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확실히 활기가 넘치는 도시네."

"와, 해가 떨어졌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신기하네요."

휴고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상인들의 호객 행위와 길가에서 술을 마시고 연초를 태우는 용병들.

신선한 분위기였다. 무질서함 속에서도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상인들은 에단 일행을 힐긋거리며 주시하고 있었다.

'호구를 노리는군.'

에단 일행의 분위기가 딱 그랬다.

초짜 여행객.

유희를 즐기는 귀족이거나 갓 자립한 초보 행상인.

한마디로 빼먹기 좋아 보이는 먹잇감이었다.

에단이 봐도 그랬다.

앳돼 보이는 기사 둘에 어벙한 외모의 여자 하나, 그리고 나이 든 중년.

'좋은 먹잇감이 따로 없군.'

그렇다고 블란테임을 광고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경계심을 주는 편보다는 호구 잡히는 게 나았다.

에단이 마차에서 내렸다. 지금부터는 직접 훑어볼 생각이었다.

인파가 북적였다. 에단이 마차에서 내리자,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적어졌다.

"뭐지?"

"도련님 인상이 안 좋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해맑은 휴고의 대답에 에단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내가 인상이 더럽다고?"

"조금.... 정확히 말하면, 잘생겼는데 다가가기 힘든...."

― 딱 맞는 말이구나. 너는 거울도 안 보고 다니더냐.

휴고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에단이 얼굴을 찌푸렸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인상이 안 좋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인상이 거칠어도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용병을 상대로도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이 에단을 기피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짜증이 난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자, 그나마 접근하던 상인들도 몸을 돌렸다.

에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에단의 인상이 날카로운 편이기는 하였지만, 싸움터에서 구른 용병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들이 에단을 멀리하는 이유는, 에단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피어 때문이었다.

블랙 오우거는 몬스터 중에서도 마수에 가까운 존재였다.

영물이나 신수와는 질이 달랐다. 그것들보다 더 포악하고 사나운 기운이었다.

'뭐, 덕분에 편해지긴 했네.'

에단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때 에단을 향해 접근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앳된 외모의 소녀였다. 소녀는 당찬 발걸음으로 에단을 향해 다가왔다.

"여행객이신가요? 혹시 아직 쉴 장소를 찾지 못했으면 저희 여관으로 오세요!"

에단이 말없이 눈앞의 소녀를 바라봤다. 주근깨가 있는 얼굴과 갈색 머리를 한 소녀.

에단을 마주했음에도 소녀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음식은?"

소녀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끌리기는 했지만, 음식은 중대 사항이었다. 그들에겐 편한 잠자리보다 질 좋은 음식이 우선이었다.

"맛도 양도 최고입니다! 자신할 수 있어요!"

소녀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에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내해."

* * *

뜻밖의 인연으로 머물 장소가 정해졌다.

에단 일행은 소녀가 안내하는 장소로 향했다. 번화가에서 조금 동떨어진 장소에 있는 허름한 여관이었다.

긴 세월이 엿보이는 간판에는 '질긴 가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용병단 같은 이름이군."

"여관 주인분이 용병 출신이라 그래요! 겉은 투박할지 몰라도 내부는 나름대로 깔끔하답니다."

"그래, 기대하지."

"넵, 말과 마차는 제게 맡기세요."

소녀가 가슴을 두드리며 말하자,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서 내린 가토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고삐를 건넸다. 소녀가 작은 손으로 고삐를 쥐고는 능숙하게 말을 이끌었다.

그걸 본 가토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휴고를 슬쩍 바라봤다.

"누구보다 쟤가 더 나은 것 같은데?"

"...시끄러워."

휴고는 여전히 말과 친해지지 못했다.

일행은 여관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나무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은은하게 전해졌다.

문을 열 때 나는 투박한 소리에서조차 적지 않은 세월이 느껴졌다.

"어서 오세요."

상당한 풍채의 중년 여성이 일행을 맞이했다.

네이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곳 주인이십니까?"

네이드의 물음에 중년 여성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하, 허름하지만 제가 주인입니다. 방이 필요하신가요?"

여주인의 물음에 네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머무를 생각입니다. 객실을 좀 여유 있게 쓰고 싶습니다만...."

"운이 좋네요. 때마침 머무르던 용병들이 떠나서 방이 비던 참입니다."

"그럼 준비해 주시죠. 식사는 가능한가요?"

"그거야 당연하죠.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여주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네이드가 힐긋 뒤를 바라봤다.

"...종류는 상관없으니까 넉넉하게 준비해 주시죠."

"하하, 배가 터질 정도로 준비해 드리죠. 숙박비랑 식비까지 총 20실버입니다. 참고로 우리는 선불로만 받아요."

네이드가 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서 건넸다. 여주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금화는 오랜만이네요. 거스름돈은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괜찮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음식부터 준비해 주시죠."

"이해해 줘서 고맙네요.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여주인이 주방 안으로 들어가자, 일행은 적당한 테이블에 앉았다.

"주인이 용병 출신이라길래 남자일 줄 알았는데, 상당히 의외네요."

"그래도 상당히 실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쭤볼 게 있습니다."

"말해 봐."

"갑자기 급히 서두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애초에 정보라면 가문의 힘을 이용해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걸로는 부족해."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네이드가 입을 열었다.

"세력을 만드시려는 겁니까?"

네이드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원래라면 부정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에단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모르지."

"...."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가문과 상관없는 일이니까."

에단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입지를 다진 상태였다. 에단이 독자적인 세력을 꾸려 무언가를 모의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었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헨리가 입을 열었다.

"덩달아 용병들도 찾고 있는 것 아니었나요?"

"어, 붉은 곰."

"들어 본 적 있어요. 최근 들어 이름을 알리고 있는 신생 용병단으로 꽤나 실력이 있다고...."

"찾는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있으니까 찾지."

일행은 설명을 원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구체적인 대답을 하기가 애매했다.

'붉은 곰은 레벨린의 수하였고, 레벨린의 발을 자르기 위해서 붉은 곰에게 접근한다.'

정보의 출처부터, 설명하기 곤란한 것들이었다.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그때 말과 마차를 데려갔던 소녀 종업원이 들어왔다.

"헤헤, 금방 왔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음식은 금방 나와요!"

종업원이 후다닥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 안에서도 발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당히 활기찬 아이네요."

휴고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종업원 소녀는 작은 덩치로 큰 접시를 가뿐하게 옮겼다.

넓은 테이블이 순식간에 먹음직한 음식들로 가득 채워졌다.

일행이 식사를 시작했다. 아이가 자신만만해하던 것처럼 음식은 확실히 맛있었다.

밖에서 먹던 네이드의 요리도 분명 훌륭했지만, 노상에서 먹는 음식과 편안한 자리에서 먹는 음식에는 확실한 차이가 존재했다.

"헤헤, 제가 장담했죠?"

음식을 빠르게 먹어 치우는 일행을 바라본 아이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기대한 보람이 있네."

"제가 과장은 좀 해도,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아요. 페르나니엄은 처음인가요?"

"티가 많이 나나?"

"네, 완전요. 혹시 귀족이라거나 높은 분은 아니시죠?"

"왜 그것도 티가 나나?"

에단의 장난기 어린 대답에 소녀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귀족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딱히 걱정한 건 아니에요. 페르나니엄에서는 귀족이라도 똑같은 외지인이니까요. 귀족이 아니면 있는 집 자제인가요? 상인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궁금한 게 많나 보군."

"헤헤, 한창 그럴 나이라서요."

천연덕스러운 대답이었다. 에단이 고기를 한 점 입에 넣고 씹어 삼킨 뒤 대답했다.

"그냥 여행객이라고 생각해. 여기에는 찾는 사람이 있어서 온 거고."

"찾는 사람이요? 누구요? 상인? 용병?"

"용병. 혹시 들어 본 적 있나? '붉은 곰' 용병단이라고."

"붉은 곰이요? 의뢰 때문에 찾는 건가요?"

"어, 의뢰를 맡기려고."

"하지만 소문을 듣기로는 되게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불안한 듯 보이는 소녀의 말에 휴고와 가토가 눈을 끔뻑였다.

'제일 위험한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은 모든 일을 지켜봤다.

에단이 블랙 오우거를 어떻게 죽이는지.

모룬과의 결투에서 어떻게 모룬을 제압하는지.

에단이 아카데미에서 온 교수를 어떻게 박살 내는지.

그리고 아카데미를 지키던 문지기를 어떻게 손보는지.

그 장면들은 떠올리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붉은 곰 용병들이 얼마나 악명 높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감히 에단의 손속에는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조심해야겠네. 걱정해 줘서 고맙다."

에단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행이 먹던 손을 멈추고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의 태도가 상당히 어색했던 것이다.

'왜 자상해?'

'아니, 뭘 잘못 먹었나?'

소녀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헤헤, 아니에요. 손님인데 당연하죠."

"그래, 이름은?"

"다비입니다."

씩씩한 대답에 에단이 품에서 금화를 하나 꺼내 건넸다.

"이놈들 데리고 동네 구경이나 시켜 줘."

에단이 네이드를 포함한 일행들을 가리켰다.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기자 네 사람은 당혹스러워했다.

당황하기는 다비도 마찬가지였다. 예상 못 한 거금을 손에 쥔 다비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이렇게 큰돈은."

"무슨 소리야. 거스름돈은 들고 와야지."

에단의 대답은 단호했다.

◈ [63화] 합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