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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란테의 기사들은 발이 빨랐고, 덕분에 며칠 만에 기사들은 아카데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자는 넉넉했기에 거의 대부분은 야영으로 해결했다.

선두에 있던 빈센트가 가늘게 뜬 눈으로 아카데미의 외벽과 고메드를 바라봤다.

"한 덩치 하는 친구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건장하군요."

빈센트와 첸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그냥 건장한 정도야?'

'괴물들의 기준이란....'

그때, 혀를 날름거린 렉사르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치울까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렉사르 특유의 쇳소리 같은 소리가 묻어 나와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빈센트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옆으로 다가온 렉사르를 바라봤다.

"최근 들어 몸이 근질거리나 보군."

"...그래 보입니까."

"그렇게 몸이 근질거린다면 나나 첸 경이 상대해 줄 수도 있는데."

얼음장처럼 싸늘한 첸의 시선이 꽂히자, 렉사르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사양하도록 하죠."

렉사르는 과거 첸과 친선 대결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요구한 대결이었기에 승부의 결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생긴 얼굴의 자상이 욱신거렸다. 렉사르는 인상을 찌푸린 채 빈센트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빈센트와 기사들이 문 앞에 도착했다. 압도적인 위세에 여학생이 고메드 뒤에 숨어들었다.

고메드는 긴장을 삼켰다. 당장에라도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었다.

'나, 지킨다, 학생.'

고메드의 시선이 자신의 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학생에게로 향했다. 이 학생을 보면 여기서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누구냐, 당신들. 정체를 밝혀라."

고메드의 물음에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감히 자신의 주군에게 무례를 끼쳤기 때문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함에 기사들의 기세가 칼날이 되어 고메드의 목을 조였다.

고메드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첸이 빈센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가서 대화를 나눠 보겠습니다."

"됐네. 내가 가지."

빈센트의 대답이 조금 예상 밖이기는 했지만, 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도약해 말 위에서 내려온 빈센트가 말없이 걸어 나갔다. 그저 걷기만 하는데도 공기가 냉각되는 것 같았다.

고메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아카데미 내부의 사정을 알 리 없는 고메드는 열심히 지원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원. 언제 오나.'

다가선 빈센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고메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학생 학부모인데 잠깐 들어가도 되나?"

"...흐어."

고메드가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하, 학부모인가?"

"맞네. 내 딸이 이 아카데미의 학생이지."

"그, 그렇다면. 바로 하지 그랬나. 말."

"음...? 바로 말한 것 아닌가?"

빈센트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고메드가 손을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말았다.

그때 고메드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여학생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혹시 학생 이름이 뭔가요...?"

학생의 질문에 빈센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리사라고 하는데 알려나 모르겠군. 혹시 알고 있느냐?"

"아, 리사면 저희 클래스인데? 와, 리사 아버님이세요? 대박!"

여학생이 폴짝거리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고메드가 눈을 끔뻑이며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나, 죽지 않는 건가?"

고메드의 말에 빈센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자네가 왜 죽나? 이상한 친구군."

"하, 하하. 맞다. 그렇다면, 문 열어 주겠다. 조금만, 기다려라."

고메드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려고 했다. 에단의 폭력을 겪은 이후 고메드의 성향은 많이 유해졌다.

고메드가 성문에 손을 가져다 댄 그 순간.

꿈틀.

가슴께에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에 고메드의 몸이 멈칫했다.

"...자네."

빈센트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께름칙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자네, 지금...."

빈센트가 고메드에게 말을 건네려던 그 순간, 고메드의 눈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끄어어어어!"

괴성을 내지른 고메드의 주위로 흉험한 마나가 넘실거렸다.

빈센트가 인상을 찌푸렸고, 여학생은 당황한 얼굴로 갑작스럽게 달라진 고메드를 올려다봤다.

"고, 고메드?"

하지만 이미 고메드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후웅!

고메드의 거대한 주먹이 여학생에게로 향했다.

"꺄아아악!"

여학생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숙였다. 가만히 그 상황을 바라보던 빈센트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터벅.

한 걸음을 내딛자 빈센트의 신형이 사라졌다.

여학생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주먹이 당장에라도 머리 위를 덮칠 것 같았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는 빈센트가 손을 들어 고메드의 팔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네 꽤나 힘이 세구먼."

그렇다기에는 여유가 흘러넘치는 목소리였다. 고메드의 검게 물든 안광이 빈센트를 노려봤다.

"가주님!"

기사들이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들고 뛰쳐나오려 했지만, 빈센트는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했다.

"가만히 있도록."

빈센트는 남은 한 손으로 여학생을 감싸 안았다.

"조금 놀랄 텐데 괜찮겠느냐?"

끄덕끄덕.

여학생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빈센트는 작게 미소 지었다.

후웅!

그 순간 여학생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여학생은 다시금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날아오는 여학생을 첸이 가볍게 받아 들었다.

"괜찮습니까?"

"...아, 안 괜찮아요."

여학생의 목소리에서 서러움이 절절히 묻어나왔다.

"저보다 저분이...!"

여학생이 시선을 돌렸다. 빈센트와 고메드는 여전히 대치 중이었다. 첸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빈센트를 바라봤다.

세상에서 가장 걱정이 필요치 않은 인물이 빈센트였다. 빈센트의 안위는 아무 걱정이 없다. 다만, 거슬리는 구석이 있다면.

'이 기운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개개인이 가진 포악한 기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첸과 같은 걸 느낀 렉사르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일이 재밌어지는군."

렉사르는 재밌는 사건을 경험한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빈센트는 말없이 고메드를 지켜보았다.

'아직도 상태가 바뀌고 있군.'

고메드의 육체가 뒤틀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거대하던 육체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외력으로 인한 신체의 변화에는 엄청난 부작용이 뒤따른다.

빈센트가 고민하듯 미간을 좁혔다.

"우어어!"

그때 고메드의 반대편 손이 빈센트에게로 향했다. 빈센트는 붙잡아 두고 있던 팔을 가볍게 밀어냈다.

코끼리와 인간 사이 만큼의 체급 차이가 났다. 힘 싸움이 성립될 것 같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밀려난 것은 고메드였다.

밀려난 고메드가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보며 빈센트는 턱을 쓰다듬었다.

"검을 뽑기도 그렇고. 조금 난감하군."

그래도 딸이 다니는 아카데미이기에 쓸데없는 유혈 사태는 벌이고 싶지 않았다. 빈센트가 고민하던 사이, 고메드의 골격이 다시 한번 뒤틀렸다.

"끄어어어어어!"

고메드가 또다시 괴성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괴성이라기보다는 고통에 찬 절규에 가까웠다.

빈센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 좀 자고 있게나."

고메드를 향해 도약하던 그때, 빈센트가 갑작스레 겁을 뽑더니 곧장 마나를 방출시켰다.

고메드의 몸이 꿈틀거렸다. 빈센트가 고개를 돌려 첸을 바라봤다.

"첸!"

첸 또한 이변을 눈치챘는지 검을 뽑아 들고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푸른빛의 마나가 거침없이 타올랐다. 첸이 검을 휘두르자 푸른 마나의 장벽이 펼쳐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카론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마나 컨트롤이 무슨...!'

방대한 마나 양보다 이 정도 규모의 방벽을 펼쳤다는 사실이 더 믿기지가 않았다. 빈센트도 마나를 일으켜 보호막을 형성했다.

꿈틀거리던 고메드의 몸이 순식간에 터져 나갔다.

콰아아앙!

무시무시한 충격을 동반한 대폭발이 발생했다. 귀를 멀게 할 정도로 아찔한 굉음과 태풍 같은 기세의 돌풍이 휘몰아쳤다.

거대한 문이 순식간에 조각날 정도로 압도적인 파괴력이었다. 그런 강력한 위력 속에서도 빈센트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불쾌하군.'

빈센트가 인상을 구겼다. 폭발의 여파가 걷히자 붉은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빈센트는 최후의 순간 고메드가 내뱉은 말을 들었다.

'살려 줘....'

하지만 고메드의 애원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이 빈센트는 더없이 불쾌했다.

◈ [138화] 리사의 부탁

에단은 마차 밖으로 펼쳐져 있는 맑은 하늘이 보며 하품을 했다.

'슬슬 도착했겠군.'

블란테의 이동속도는 다른 기사들과는 궤를 달리했기에 슬슬 아카데미에 도착했을 시간이다.

'간만의 부녀 상봉인데 천천히 가도 되겠지.'

너무 지체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조급해할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이건 시작에 불과하니까.'

블란테는 대륙의 끝자락에 있다. 몬스터들의 범람을 막아서는 살아 있는 요새가 바로 블란테였다.

'위명은 있지만 그것뿐이라는 거지.'

블란테가 이동하면 주위 모든 세력들이 블란테를 견제한다. 블란테가 그만큼 껄끄럽고 위협적인 존재라는 소리다.

'그걸로는 안 돼.'

그것만으로는 후일을 대비할 수 없다. 정계에 알을 박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에단은 중앙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줄 위인이 아니었다.

'명분과 실리.'

득이 되는 것들만 취하면 된다.

위기 시에 블란테만 희생하는 것이 아닌, 타국까지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남한테 미루면 다 뒈지니까.'

급한 불은 껐지만 어디까지나 급한 불이다.

'지하'에서 놈들이 범람하기 시작하면 모든 상황이 뒤바뀔 터.

'가지고 있는 패는.'

에단은 객관적으로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떠올렸다. 먼저 명분이 있었지만, 그를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증인들이 도주했다.

'크게 상관은 없어. 도망쳤다는 것 자체가 혐의를 입증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엘프들의 지지는 상황을 반전시킬 때 써먹으면 되겠고.'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성검을 바라봤다. 무언가가 떠오를 것 같았다.

'성검... 성자....'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좋아, 대충 그림은 그려지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블란테의 입지를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이보다 확실한 명분과 세력은 없다.

'이거면 녀석들과 치고받고 싸워도 눈치를 안 봐도 되겠는데?'

사건이 터지기 전 부패한 개자식들의 뿌리를 뽑을 생각이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건데....'

에단이 골똘히 고민했지만 딱히 생각나는 방법은 없었다.

'그건 뭐 리사가 알아서 하겠지.'

답이 안 나오는 고민은 하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았다.

다만, 대략적인 윤곽이 잡혔음에도 에단의 가슴에는 찝찝함이 남아 있는 것이 걸렸다.

'...정말 이게 끝인가?'

무언가 거슬렸다. 정말 레벨린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친 게 끝이란 말인가?

툭툭.

에단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네이드와 헨리가 그런 에단을 힐끔 바라봤다.

'찝찝한데.'

에단의 이마에 주름이 그어졌다.

* * *

비산한 파편들, 그리고 피어오르는 거대한 먼지구름이 폭발의 파장을 단편적으로 드러냈다.

투두둑.

돌가루와 쇳가루들이 하늘에서 떨어졌고, 주위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반면 빈센트의 몸에는 작은 핏자국도 묻어 있지 않았지만,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고메드...!"

첸이 보호하고 있던 여학생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고메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채 갈가리 찢겨 죽었다.

여학생이 허망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빈센트는 아무 말 없이 여학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소란을 파악하고 멀리서 학생들과 에밀라가 다가왔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에밀라는 갑작스러운 소란과 참상에 인상을 찌푸렸다.

고메드는 시체조차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자리에 있던 여학생의 상태는 패닉에 가까웠다.

에밀라는 교수로서 빠르게 사태를 파악하고 정리해야 했다. 학생을 보호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다. 에밀라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쿵!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무미건조한 빈센트의 시선이 에밀라에게 향했다.

전신을 난도질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에밀라는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는 실력자였다. 하여 웬만한 마스터를 마주해도 기에 눌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턱이 떨린다. 하지만 학생들 앞에서 겁을 집어먹은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당신들은 누구죠?"

에밀라의 물음에도 빈센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빈센트가 말없이 에밀라를 응시하고 있자, 기약이 없는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리사는 잘 있나?"

"리사? 설마 당신이...."

에밀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강한 위압감에 짓눌려 가려져 있던 시야가 넓어지며 기사들의 행렬이 보였다.

'블란테.'

헛숨을 삼킨 에밀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낭자한 혈흔, 산산이 조각난 문.

"...당신께서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에밀라의 물음에 빈센트가 이맛살을 구겼다.

"내가 그렇게나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이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진상을 파악해야 해서...."

에밀라가 서럽게 울고 있는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두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익숙한 감각이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뭐지?'

꺼림직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다. 안개처럼 흐릿한 기억 속에서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따뜻하고 포근하게만 느껴졌던 얼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

'...레벨린.'

레벨린의 기운이었다. 그녀를 떠올리자 에밀라의 몸이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은 에밀라가 이를 악물었다.

'정말... 모든 게 거짓이었군요.'

에밀라는 고메드를 알고 있다. 조금 바보 같고 단순했지만, 순진한 녀석이었다.

이렇게 잔혹하게 죽을 만한 녀석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학생만 봐도 그랬다. 고메드는 학생을 좋아했고, 학생들도 곧잘 고메드를 따랐다.

이가 갈렸다. 레벨린의 잔혹한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했어야만 하는 겁니까?'

분노에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에밀라가 빈센트를 바라봤다. 빈센트는 말없이 에밀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좋지 못한 꼴을 보여 줬군요."

"괜찮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하니까."

에밀라가 학생을 부축했다. 어느새 첸이 다가와 빈센트 곁에 섰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에밀라가 고개를 숙였다. 그때 당시에는 별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 줬다.

"...면목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온 거니까요."

첸의 대답에 에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여학생을 안아 들고 지나가자, 학생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학생들의 얼굴은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메드의 죽음.

그것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죽음이었다.

장성한 성인이 봐도 충격적인 광경을, 아직 자아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학생들이 봤으니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분들은 누구지?"

한 학생이 의구심을 표했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기사들이었다.

검게 빛나는 갑주, 그리고 강렬한 카리스마.

아카데미에 재학하면서 다양한 기사들을 만났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자들은 없었다.

"저 문양은... 설마...?"

그제야 학생들의 시선이 갑옷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검은 갑주.

거기에 새겨진 사자 문양.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브, 블란테...!"

"블란테라고?!"

학생들이 일제히 뒷걸음질 쳤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블란테의 명성과 악명은 자자했다.

고위 귀족의 자제가 대부분인 아카데미의 특성상 블란테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블란테는 어려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검사 중의 검사, 기사 중의 기사. 그게 바로 현시점 블란테의 위치였다. 블란테와 대등하다고 알려진 가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법 명가 아큐르와 또 다른 검술 명가로 알려진 카이제르가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은 블란테와 다르게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고 있었다.

블란테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크게 놀랐다.

'...블란테가 도대체 여기를 왜 찾아온 거지?'

갑작스러운 출현.

심지어 등장한 장소가 아카데미였다. 블란테가 아카데미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수차례의 초청에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블란테가 도대체 왜?

하지만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밝혀졌다.

"아빠―!"

멀리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학생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한 여학생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학생들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등장한 이가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쟤 리사 아니야?"

"아빠라고?"

"농담하지 마...."

학생들이 눈을 비볐다. 쉽사리 믿기지가 않았다. 황당해도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싸늘하다고까지 느껴지던 빈센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는 점이었다.

위엄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인자하고 따뜻한 아버지의 얼굴로 바뀌었다.

빈센트가 팔을 벌리며 리사를 반겼다.

"리사, 오랜...."

쐐애액!

그 순간 리사가 발을 휘둘렀다. 깔끔한 일격이었지만, 빈센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리사의 발을 붙잡았다.

"너무 천박한 행동은 좋지 않단다."

"아빠야말로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진짜 제가 하고 싶던 말이 얼마나...!"

리사는 쌓인 감정이 많았다. 대뜸 등장한 오빠부터 시작해, 방금 전 소란, 그리고 전쟁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대동한 수많은 기사들까지.

황당하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당장에라도 전후 사실을 파악하고 추궁하고 싶었지만,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크흠."

리사가 발을 내리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치맛자락을 다듬으며 다시금 빈센트를 바라봤다.

"아빠."

"그래, 우리 딸."

"...일단 할 말이 있어요."

리사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 싫었지만 자존심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때였다.

"말해 보거라."

빈센트가 따뜻한 시선으로 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리사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해요."

* * *

아카데미가 또다시 한바탕 뒤집어졌다.

평민으로 알려진 리사가 블란테의 일원이었다니.

그것도 단순히 블란테 소속이 아닌, 직계 혈통이었다. 그 사실에 학생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간 평민으로 여기고 리사를 깔보고 비아냥거리던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초조해졌다. 웬만한 귀족 가문들은 블란테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블란테가 입김 한 번 불면 가문이 위태로웠다.

"어, 어쩌지?"

"나 리사한테 말실수한 것 같아."

"나, 나도.... 아니, 그러게 왜 가문을 숨겨서...."

"...사실 저것도 다 쇼 아닐까?"

"그 사람들이 모두 가짜라고?"

학생들이 시선을 돌리자, 우직하게 서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오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 그렇지? ...나는 죽었다."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되지 않을까?"

평소 거만함으로 똘똘 뭉쳐 있던 몇몇 학생들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들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필 걸려도 블란테에게 걸리다니.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 [139화] 또 다른 앙숙 (1)

"그런데 애당초 블란테인 걸 숨긴 게 잘못한 거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 같은데?"

"하, 진짜 어이가 없네...."

학생들의 반응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잘못을 뉘우치고 인정하기보다는 회피하기 급급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레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정말로 블란테의 자제였을 줄이야.'

혹시나 했던 가정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리사의 검술 실력은 동급생의 수준을 아득히 상회한다.

뛰어난 재능만으로는 이룩하기 어려운 성취였다.

아카데미를 몇 년 다니는 것만으로 그 정도 성취를 보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라프가 진짜 망한 거 아니야?"

"...그렇네? 라프 너 괜찮아?"

학생들의 시선이 라프에게로 돌아갔다. 최근 리사와 가장 큰 다툼이 있었던 것은 라프였다.

라프가 큰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리사가 아무 배경 없는 평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블란테라고?'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리사에게 얻어맞은 얼굴이 욱신거렸다. 그 통증보다도 동급생들의 표정이 더 신경 쓰였다.

겉으로는 걱정하는 듯 보였지만, 그 가면 속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위세 떨 때부터 알아봤다.'

'제대로 걸렸네. 쯧쯧.'

라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라프가 살벌한 눈초리로 동급생들을 노려봤다.

"블란테인데 뭐 어쩌라고?"

대놓고 하는 도발에 학생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직 블란테의 기사들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너, 너 미쳤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프의 눈에 핏발이 섰다. 라프는 이미 분노에 잠식되어 있었다.

블란테 기사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매서운 시선에 학생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저, 저희가 한 말 아니에요...!"

라프가 학생들의 어깨를 밀쳐 냈다.

"나도 꿀릴 거 없어. 우리 가문도 카이제르 소속이라고."

라프의 아버지는 카이제르에 소속된 기사였다. 비록 직계는 아니었지만, 라프의 말대로 카이제르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나는...."

라프가 더 입을 열려고 하자, 학생들이 라프의 입을 틀어막았다. 더 이상 입을 열게 놔두면 참사가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블란테 기사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학생들이 침을 꼴딱 삼켰다.

"하, 하하.... 이 녀석이 원래 입이 조금...."

학생 한 명이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그때 절그럭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산한 정적이 감돌았다.

질척이는 불쾌함이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짙은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학생들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카이제르...?"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거친 목소리였다. 학생들은 분위기에 압도당해 침을 삼켰다.

몸이 굳은 것은 라프도 매한가지였다. 분노에 이성을 잃어 내지른 말이었다. 지금이라도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큭큭.... 머저리 같은 카이제르 놈이 여기에도 있었나...?"

렉사르가 손을 뻗었다. 라프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학생들은 말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 하실 수 없으십니까?"

드레이가 렉사르의 앞을 막아섰다. 렉사의 표정이 굳었다.

"...너는 뭐지?"

"학생입니다."

스스스.

드레이가 침을 삼켰다. 그 또한 긴장감에 몸이 떨려 왔다. 저 소름 끼치는 존재 앞에 서는 데에도 적지 않은 각오가 필요했다.

하지만 자기가 보는 앞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것만큼은 좌시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라프가 죽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큰 파장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드레이는 공포라는 감정을 억눌렀다.

렉사르는 말없이 드레이를 응시했다. 누런 동공이 드레이를 훑었다. 맹수 앞에 발가벗겨진 채로 서 있는 감각에 드레이가 침을 삼켰다.

'제기랄....'

이렇게까지 나선다면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랐다.

렉사르의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끈적이는 살기를 풍기고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드레이의 시선이 다른 기사들에게로 옮겨 갔다. 하지만 블란테의 기사들은 렉사르를 말리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둘의 대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드레이는 재차 각오를 다졌다.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게끔.

하지만 자신은 없었다.

겨뤄 보지 않아도 기량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고양이가 날고 기어 봤자, 호랑이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거기서 뭐 하고 있냐?"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저편에서 에단과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산한 미소를 걸친 채 다가오는 에단의 모습에 드레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아카데미에 돌아온 에단은 박살 난 문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뿐이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익숙한 기운이 발목을 잡았다.

죽은 마나.

이건 죽은 마나의 잔재였다. 낭자한 선혈, 반파된 문, 그리고 죽은 마나.

'씨앗을 심어 뒀나.'

예상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레벨린은 에단의 예상보다 더욱더 잔혹해졌다.

'오판했군.'

조금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면 고메드의 몸에 심어진 씨앗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고메드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잔혹한 죽음을 맞이할 녀석은 아니었다.

"쯧."

에단이 혀를 찼다. 흩뿌려진 피와 산산조각 난 문을 보니 입맛이 썼다.

'아버지께서 도착하셨나 보군.'

일행은 눈앞의 광경에 꽤나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그렇다고 배려를 해 줄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단이 말없이 박살 난 문안으로 들어서자, 일행들도 따라가기 시작했다.

부지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학생과 블란테의 기사들.

"...정말 오셨군요."

이동하면서 블란테가 찾아온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블란테의 정규 기사들을 보자 가토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휴고는 긴장했는지 침을 삼켰다.

"...쟤는 뭐지?"

에단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대치 상황이 보였기 때문이다.

척 봐도 심상치 않은 인물, 그리고 그 앞을 막아선 드레이.

"거기서 뭐 하고 있냐?"

에단의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에단은 거침없이 발을 옮겨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지금 내 학생에게 뭐 하는 거지?"

"...학생?"

렉사르의 목소리를 들은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왜 그따구야? 뭐 잘못 처먹었냐?"

대놓고 시비조인 에단의 어조에, 드레이와 기사들이 헛숨을 삼켰다.

"...네가 에단인가?"

렉사르의 목소리에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새끼 뭐지?'

저 질문은 자신이 블란테의 직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저런 방자한 태도라니....

또한 말투와 생김새부터 개성적인 녀석이다. 이 정도로 뚜렷한 개성이면 원작에 묘사가 되었을 테니 에단이 모르는 게 이상했다.

'블란테의 일원이면서 특이한 차림새라... 아, 그 녀석인가?'

딱 짚이는 곳이 있었다. 에단이 히죽 웃으며 렉사르를 바라봤다.

"그런데 너 말이 짧다?"

"...정말 많이 바뀌긴 했군."

"몸이 무거워서 살 좀 뺐지. 왜 놀라워?"

호의라고는 찾기 힘든 날 선 대화가 오갔다.

에단은 렉사르 앞에서도 전혀 기가 눌리지 않았는지, 쌍심지를 치켜세우며 렉사르를 바라봤다.

"너 우리 반장한테 뭐 하려고 했냐?"

"저놈한테는 별로 관심 없어. 저 뒤에 있는 녀석의 입을 조금 찢어 줄 생각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듣기 불쾌한 목소리.

에단이 고개를 돌려 드레이 뒤에 움츠리고 있는 라프를 바라봤다.

"쟤는 누구냐?"

에단이 눈을 끔뻑이며 바라보자, 드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B반의 라프라고 합니다."

"그게 누군데?"

"...."

드레이는 할 말을 잃었고, 에단은 다시금 눈살을 좁히며 기억을 되짚었다.

'대충 떠오를 것 같은데.'

익숙한 이름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려 보니, 주인공한테 깨지는 녀석인 게 기억났다.

"아, 네가 그 좆도 아닌 가문 믿고 나대는 그 새끼구나?"

에단의 신랄한 욕설에 라프의 눈이 부릅떠졌다. 학생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토가 이마를 쳤다.

"도련님은 여기서도 마찬가지구나...."

"그러게...."

둘이 고개를 저었다. 에단의 천성과 언행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쉽게 바뀔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 둘은 알고 있었다. 에단이 결코 입으로만 나불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침없는 에단의 언행은 자신의 실력을 확신하기에 내뱉을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가, 같잖은 가문?"

라프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살면서 이런 처우를 받은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라프가 알기로 에단은 평민이라고 했다. 그런 자가 자신의 가문을 모욕하다니. 라프가 치욕감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살벌했다.

"대충 상황은 예상이 가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흘러가는 상황은 알 것 같았다. 에단이 렉사르를 바라봤다.

"네가 뭘 하고 싶은지도 알 거 같고."

에단의 말에 렉사르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깊게 눌러쓴 후드 사이로 보이는 입꼬리가 비틀렸다.

"왜? 몸이 근질거려?"

에단은 렉사르 같은 녀석을 많이 봐 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책에서의 묘사와 지금 보이는 모습을 통해 어떠한 성격인지 알 수 있었다.

"큭큭.... 확실히 많이 달라지긴 했군. 과거에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너도 혀가 기네. 닥치고 본론만 말해."

에단이 비릿하게 웃으며 렉사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결국 한바탕 붙고 싶다는 거 아니야?"

에단의 검은 동공이 렉사르의 눈과 마주쳤다. 누린내가 넘실거리는 렉사르의 눈앞에서도 에단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큭큭, 잘 알고 있군. 그렇다면 지금 당장...."

"마음 같아서는 어울려 주고 싶긴 한데 지금 조금 바빠서 말이야."

에단이 휴고를 향해 손짓했다. 휴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스스로를 가리켰다.

"저, 저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럼 내가 누굴 부르겠냐?"

"옆에 가토도...."

"뒈질래?"

에단의 겁박에 화들짝 놀란 휴고가 후다닥 뛰어갔다.

'쌤통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토는 고소함을 느끼며 웃었다. 가토는 작은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이 세계수 때문에 개고생할 때 휴고는 숙면을 취했기 때문이다.

에단의 곁에 다가온 휴고가 멀뚱멀뚱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휴고의 머리칼을 휘저었다.

"야."

"네, 도련님."

"쟤 눈 한번 봐봐."

휴고가 렉사르의 눈을 바라봤다. 렉사르의 눈빛은 지금 더욱더 사나워졌다. 불쾌한 심기가 반영된 탓이다.

"어때, 무섭냐?"

"아니요...?"

빠드득.

휴고의 말에 렉사르가 이를 갈았다. 에단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얘가 너 따위는 발라 버릴 수 있다는데?"

에단이 장난기 있는 미소를 머금었다.

◈ [140화] 또 다른 앙숙 (2)

휴고의 얼굴이 패닉으로 물들었다.

에단이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들을 벌이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럴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도, 도련님...!"

휴고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뱉은 말이기에, 그가 나서서 해명해 주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야."

하지만 에단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휴고는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알았다.

'아.... 물 건너갔구나.'

에단의 짓궂은 눈만 봐도 알 수 있었기에 휴고는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히 말해 봐. 쟤가 무서워?"

에단이 휴고의 어깨를 치면서 속삭였다. 휴고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렉사르를 바라봤다.

렉사르의 표정은 살벌했다. 당장에라도 눈앞에 있는 놈들을 찢어 죽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휴고가 멀뚱멀뚱 렉사르를 지켜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휴고의 대답에 에단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자, 들었지?"

에단이 씨익 웃으며 렉사르를 바라봤다. 에단은 렉사르의 귀가 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가뜩이나 흘러넘치는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에단이 렉사르를 바라보며 코웃음 쳤다.

"기분 나빠?"

에단이 등을 치자, 휴고가 몇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밀린다 싶으면 이걸...."

에단이 끝말을 흐리며 휴고에게 당부했다. 휴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진짜로요?'

휴고가 입 모양으로 그렇게 묻자, 에단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이 자신감을 북돋아 주듯 휴고의 둥을 두드린 뒤 건물로 향했다. 휴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주려나?'

휴고가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일행을 바라봤다.

가토는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휴고를 보고 있었고, 네이드와 헨리도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듯 웃음을 머금었다.

'어휴, 내 팔자야.'

휴고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렉사르는 당장이라도 휴고를 찢어 죽이려는 기세를 표출하고 있었다.

"음.... 혹시 대화로는 안 될까요?"

"대화? 무슨 대화를 말하는 거지?"

듣기 거북한 목소리와 함께 절그럭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휴고의 동공이 렉사르의 팔 쪽으로 옮겨졌다.

휴고의 눈에 순간 노란빛이 맴돌았다.

꽈드득.

주먹을 움켜쥔 휴고는 자연스럽게 전투를 대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레이가 한 발짝 물러섰다.

'...이 사람은 누구지?'

얼굴에 큰 자상이 있기는 하나, 아직 앳된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다. 잘 쳐 봐야 자신의 또래로 보인다.

하지만 전혀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 아니었다. 겁을 먹었다기보단 오히려 당황해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렉사르는 자신이 앞에 서도 오금이 저리는 상대였다. 그런데 또래로 보이는 녀석이 조금도 기죽지 않아 하는 모습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에단 교수님과 관계된 사람 같은데.... 누구지?'

휴고가 드레이를 힐끔 보더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음.... 조금 피해 계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휴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드레이가 라프를 들쳐 메고 자리를 옮겼다.

라프가 뾰족한 시선으로 드레이를 노려봤지만, 드레이는 아무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라프를 옮겼다.

"너...."

"닥치고 있어."

드레이의 서늘한 목소리에 라프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언성을 높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에단은 건물로 들어서면서 휴고와 렉사르를 힐긋 바라봤다.

'생각보다 일찍 모습을 드러냈네.'

에단은 렉사르가 꽤나 오랜 시간 음지에 숨어 있던 것으로 기억했다. 무슨 변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렉사르는 양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꽤 쉽게 해결할 수도 있겠군.'

결국 이 또한 처리해야만 하는 문제였다. 그래야만 '지하' 놈들과 대적이 가능했다.

문득, 에단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자는 카론이었다.

'쟤도 왔네?'

설마 아카데미에 카론까지 찾아왔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완전히 밀려났나 보군.'

가뜩이나 입지가 좁았던 카론이었다. 에단이라는 방패막이 없었다면 애당초 승계 구도에 발을 담글 수도 없는 위치였다.

에단이 피식 조소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에 카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재수 없는 새끼.'

카론이 속으로 에단을 씹으며 눈앞의 렉사르와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었다.

에단이 가장 먼저 거둔 수하이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평민 출신 기사.

아직 에단은 정식으로 작위를 계승받지 못했다. 당연히 기사 임명 같은 높은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빈센트와의 모종의 협의를 통해 기사 임명권을 얻게 되었고, 에단은 약조대로 휴고와 가토를 정식 기사로 임명했다.

예외적인 일이었다. 가주가 아닌 자가 기사 임명을 하다니.

기사들 사이에서도 많은 말이 오갔다.

하지만 빈센트에게는 그 어떤 반론이나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블란테에서는 빈센트가 곧 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사들은 휴고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는 했다.

하인 출신 새내기가 과연 어떠한 실력을 지니고 있을지. 단순히 에단의 변덕에 혜택을 얻은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그에 걸맞은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학생들과 기사들 모두 흥미로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에단은 건물 내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에밀라가 있을 장소는 예상이 갔다.

아카데미의 접견실은 하나이니까 빤하지.

에단이 계단을 오르고 있자, 페온이 말을 걸었다.

― ...그 녀석은 위험한 놈이다.

'알고 있습니다.'

― ...알면서도 그 아이를 그렇게 두고 왔단 말이냐?

'제가 보기엔 휴고도 위험한 놈입니다.'

당연히 지금의 휴고라면 렉사르를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렉사르는 휴고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에단은 휴고와 렉사르를 붙여 둔 것이었다.

'애당초 그렇게 만들어진 녀석이니까.'

렉사르라는 존재 자체가 순리에서 벗어난 존재다. 그리고 그렇기에 휴고에게 가장 적합한 상대이기도 했다.

휴고에게는 스승이 없다. 구태여 말하자면 스승이 필요가 없는 존재다. 휴고의 가장 큰 장점은 야성에서 비롯된 본능이니까.

'지금이라면 야수화를 해도 상대하기 힘들겠지만.'

운이 좋다면 보다 일찍 야수화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본래라면 에단이 직접 도와주는 게 맞겠지만....

'귀찮아.'

일일이 수준을 맞춰 주면서 상대하는 일은 에단과 맞지 않았다.

'여차하면 네이드도 있고.'

아무리 렉사르가 요주의 인물이라고는 하나, 네이드와 견줄 정도는 아니었다. 에단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크흠, 크흠."

에단이 목을 가다듬으며 문을 벌컥 열었다.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들이 다수 보였다.

에밀라, 리사, 빈센트, 첸까지.

모두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늦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에단의 능글맞은 목소리에 빈센트가 미간을 좁혔다.

"건방지구나."

"죄송하게 됐습니다. 급한 일을 처리하고 오느라."

에단은 빈센트 앞에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산을 보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빈센트의 경지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괴물이군.'

에단이 내심 혀를 내둘렀다. 내적으로 에단은 이미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섰다.

아직 부족한 게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에단에게는 마스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에단의 경지가 빛바랜 것은 아니었다. 세계수와 죽은 나무의 기운을 흡수한 에단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고, 안정된 상태였다.

말없이 에단을 지켜보고 있던 빈센트가 눈살을 좁혔다. 얼굴이 굳은 것은 첸도 매한가지였다.

빈센트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에단에게 물었다.

"...그동안 어디서 뭘 하다 온 거냐?"

"어디서 잠깐 수련 좀 하고 왔습니다."

에단이 히죽 웃으며 대꾸하자, 빈센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빈센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늘 무표정을 고수하던 첸의 얼굴에도 동요가 생겨났다. 에단이 가문을 떠난 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에단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지금 에단이 이룩한 경지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해명을 요구하는 빈센트와 첸의 시선을 느낀 에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명할 수도 없고.'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아버지와 첸이 자신의 말을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능청스럽게 자리에 앉은 에단이 다리를 꼰 채 주변을 둘러봤다. 리사와 에밀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에밀라는 안도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리사는 짜증을 억누르고 있는 얼굴이었다.

"오빠 보니까 좋냐?"

"...뒈질래?"

"어허, 아버지 앞에서 그런 말 쓸래?"

까득―

리사가 낮게 이를 갈았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에밀라가 눈을 끔뻑였다.

'...정말 남매지간이긴 하구나.'

그것도 모르고 예전에 오해했던 일을 떠올리니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얘기는 어디까지 했습니까?"

에단이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담화를 나누는 것도 좋았지만,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빈센트의 눈이 가라앉았다.

"대강의 이야기는 들었다. 한마디 물으마."

"편하게 말씀하시죠."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지?"

"별로 꾸미는 건 없습니다. 감히 저에게 엿을 먹이는 놈들의 골통을 부숴 버렸을 뿐이죠. 그게 블란테의 방식 아닙니까?"

"...."

말을 듣던 빈센트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태연했다.

"아버지께도 좋은 기회 아닙니까?"

에단의 말에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회? 어디 한번 지껄여 보거라."

에단의 말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빈센트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언제까지 변방에서 방벽 노릇만 할 겁니까. 그렇게까지 맹약에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겁니까?"

에단의 말에 빈센트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표정이 굳은 것은 첸도 매한가지였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빈센트의 물음에 에단이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이제는 설득과 협상의 영역이다.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이미 저희는 너무 많은 견제를 당하고 있습니다. 저도 알고,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모두를 적으로 돌려서는 가망이 없습니다. 지금 이건 기회입니다. 명분은 저희에게 있죠."

"...전쟁이라도 벌일 셈이냐?"

빈센트의 말에 리사와 에밀라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스케일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에단이 미소를 지우며 표정을 굳혔다.

"두려우신 겁니까?"

"두려워? 블란테가 전쟁을 두려워할 것 같으냐?"

빈센트의 음성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 대답은 에단이 기다리고 있던 답변이었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아무리 맹약에 묶여 있다고는 하나, 뒤통수를 얻어맞고 넘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 말해 보거라."

"간판만 좀 빌려주시죠."

에단이 벌이려는 일은, 블란테라는 간판만 있으면 충분히 할 만했다.

◈ [141화] 야수의 눈 (1)

블란테의 맹약.

철혈의 사자에게 채워진 목줄.

'나도 잘 몰라.'

그 맹약에 관해서는 에단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맹약에 대한 떡밥은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는 알고 있지.'

블란테의 맹약은 가주에게 국한되어 있었고, 굉장히 편의주의적인 약조였다.

강제성이 존재하지 않는, 그저 말뿐인 약조.

하니 에단이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다. 에단이 해야 할 일은 블란테라는 이름을 십분 활용하는 것.

'신의 따위는 필요 없지.'

에단은 페온의 반응을 신경 쓰고 있었다.

블란테의 맹약이라는 민감한 단어를 언급하면 무언가 반응할 줄 알았지만, 페온은 침묵을 유지했다.

'흐음.'

페온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추측이 아닌 확신에 가까웠다. 그간 페온이 내뱉었던 말들은 의심스러운 것투성이였으니까.

그런 페온을 낚아 내기 위해 여러 미끼를 뿌렸지만, 페온은 반응하지 않았다.

'뭐, 시간은 많아.'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 페온은 에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고, 해를 끼칠 만한 이유도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에단은 말없이 고민에 잠겨 있는 빈센트를 바라봤다.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에밀라와 리사는 그 고요한 침묵 속에서 답답함을 느꼈다.

빈센트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뭐지?"

"계획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에단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의뭉스러운 에단의 말에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끝까지 본색을 밝히지 않을 생각이더냐?"

"본색이라뇨. 누가 보면 제가 아버지에게 해를 끼치는 줄 알겠습니다. 정말로 별거 없습니다. 이게 다 가문의 위상 때문에 할 수 있는 거라서요."

에단이 말을 내뱉은 그때, 큰 굉음이 터져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굉음이 터져 나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빈센트는 대번에 이 굉음의 주범이 누군지 알아챘다.

'렉사르.'

빈센트의 표정이 굳었다. 당장에라도 몸을 일으킬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에단이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다는 말이냐. 지금 더 늦으면...."

"휴고는 그런 막돼먹은 망아지한테 죽을 정도로 형편없는 놈이 아닙니다."

빈센트는 에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하에 대한 애정은 인정한다. 그것이 바로 무리를 이끄는 수장의 덕목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만함은 다른 문제였다.

렉사르는 위험했다. 무력이 아닌 위험도로만 따지면 블란테에서 가장 위험한 녀석이 렉사르였다.

빈센트가 지그시 자신을 노려보자, 에단이 피식 웃었다.

"혹시 의심되시면 내기 한번 하시겠습니까?"

"...내기?"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검을 들었다. 검집 없이 덩그러니 있는 검이었다.

빈센트와 첸의 시선이 돌아갔다. 처음 에단이 들어왔을 때부터 눈에 밟히던 물건이다.

예사롭지 않다.

딱 그 표현이 옳았다.

"검 한 자루만 주시죠."

에단이 내뱉은 말은 전혀 예상외의 것이었다. 빈센트가 황당하다는 듯 에단에게 물었다.

"검? 네 손에 들린 것도 검이 아니더냐?"

"검이기는 하죠."

조금 시끄러운.

에단은 말을 삼켰다. 지금도 카이나는 에단에게 역정을 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면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제 성검의 쓸모는 다했고.'

물론 추후에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으나, 성검의 용도는 다른 데에 있었다.

에단이 빈센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기는 안 하시는 겁니까?"

"...."

* * *

절그럭.

쇠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거친 목소리. 렉사르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가토는 자연스럽게 학생들을 통제했다.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아, 교전이 벌어지는 것은 확실했다.

기사들도 말릴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직계 혈족 간 싸움도 말리지 않는 것이 블란테다.

불만이 있으면 힘으로 푸는 것이 바로 블란테의 방식이었고, 오랜 시간 수습 기사 생활을 해 온 가토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학생들을 현장에서 떨어트린 가토가 주변을 둘러봤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학생들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가토의 얼굴은 학생들보다도 어려 보였고, 그런 녀석이 자신들을 통제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가토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을 수행했기에, 학생들은 반항하지 못한 채 가토의 통제를 따랐다.

가토가 학생들의 정리를 끝낸 뒤,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이번엔 블란테 진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토, 조금 살 만한가 보지?"

"도련님 뒤에 붙어 다니면서 안색이 조금 좋아졌다?"

"하긴 어떻게 얻은 기사직인데 말이야. 큭큭큭."

대놓고 들리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들. 하지만 가토의 안색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눈 하나 까딱이지 않는 가토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기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토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편한 삶은 아니었다.

에단과 함께하면서 보낸 시간은 고됐고, 그 고된 삶은 가토의 양분이 되었다. 가토가 싸늘한 눈초리로 기사를 바라봤다.

기사들의 실력은 훌륭했다. 블란테의 기사답게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무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같잖네.'

가토가 느끼기에는 같잖게 느껴졌다. 가토가 고개를 다시 돌렸다. 저따위 말을 듣는 것보단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후드를 눌러쓴 남자.

저자가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가토는 휴고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난입할 생각이었다.

'잘해라.'

도련님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가토가 말을 삼켰다.

렉사르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눈앞의 하룻강아지가 지금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송곳니였다. 그래서인지 황당하기까지 했다.

'저런 녀석을 교육시키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실소가 흘러나왔다. 렉사르가 휴고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과하면 봐주도록 하지."

"음.... 죄송합니다. 별로 내키지가 않네요."

렉사르는 한 차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휴고의 시선이 렉사르의 손을 따라갔다.

"도련님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아서."

"...명을 재촉하는군."

렉사르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그것이 전투 개시의 신호탄이었다.

후웅!

렉사르의 품에서 톱날 검이 빠져나와 휘둘러졌다. 마나는 서려 있지 않았다. 렉사르 나름의 관용이었다.

휴고가 가볍게 상체를 젖혀 공격을 피하자, 검의 궤도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그렇다고 물 흐르듯 부드러운 연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투박하고 거칠었다.

렉사르의 야성이 느껴지는 공격.

휴고가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걸 본 블란테 진영 측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상대가 안 되잖아?"

"훈련은 안 하고 도련님 뒤만 쫄래쫄래 따라다녔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 비웃음도 있었지만, 몇몇 이들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저 녀석은 뭐지? 실력은 괜찮은데?"

"마구간 지기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휴고는 가라앉은 눈으로 칼날의 궤도를 그리고 있었다.

'이쯤이면 되려나?'

뻑!

휴고의 발끝이 렉사르의 복부를 가격했다. 타이밍을 재다가 던진 발차기다 보니 큰 대미지를 기대하진 않았다.

렉사르의 움직임이 순간 멈추는 걸 본 휴고가 상체를 숙여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타닷!

짐승처럼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순식간에 렉사르의 품에 들어간 휴고가 팔을 가격했다.

렉사르도 저항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휴고가 다가오는 순간에 맞춰 칼을 휘둘렀지만, 휴고는 물 흐르듯 공격을 피해 내며 팔을 쳐 냈다.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유연성과 반사 신경이었다.

검을 놓친 렉사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사이 휴고는 무기가 꺼내지기 전에 달려들어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근본 없는 것처럼 보이는 주먹질이었지만, 하나하나가 날카롭고 흉악했다.

렉사르의 누런 동공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휴고의 주먹을 좇았고, 그러는 한편 반격을 준비했다.

차르르륵.

소름 돋는 쇳소리에 휴고가 순간 거리를 벌렸다. 어느새 사슬낫을 꺼내 든 렉사르가 거리를 벌린 휴고를 바라보며 웃었다.

"감이 좋구나, 꼬마야."

"...음, 그런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휴고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낫 부분이 아닌, 뒤쪽의 사슬만 던졌을 뿐인데도 강력함이 느껴졌다.

휴고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거친 심장 박동에 몸속의 피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감각이다. 휴고가 낮게 심호흡을 하면서 머리를 식혔다.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돼.'

렉사르는 강했다. 잡생각을 한다면 순식간에 수세에 몰릴 게 분명했다.

다시 상체를 숙인 휴고는 순간적으로 질주했다. 휴고가 달려 나가자, 사슬이 휴고의 앞을 가로막았다.

휴고가 기민한 몸놀림으로 사슬을 모두 피해 냈다.

"잡았다."

렉사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슬의 끝자락이 휴고의 발을 붙잡은 것이다.

"후읍!"

하지만 휴고는 멈추지 않았다. 숨을 들이켰다. 복압을 단단하게 잠그고 그 힘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켰다.

차르르!

쇠사슬이 딸려 왔다. 사슬의 무게가 더해진 휴고의 발이 렉사르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렉사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피했다.

쾅!

괴성과 함께 지면이 움푹 파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뭐야?"

"분명 하인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어?"

기사들은 휴고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하인 출신, 그것도 마구간 지기였다는 것 정도.

같이 수련했던 수습 기사들의 말로는 체력 하나는 뛰어나다고 했다. 체력은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지만, 체력만 뛰어나서는 쓸모가 없었다.

한데 정작 눈앞의 휴고는 검 하나 쥐지 않은 채 렉사르와 대등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

입을 꾹 다문 채 휴고를 노려보는 렉사르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스스스.

휴고는 렉사르의 주위에서 마나가 흘러나오는 걸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위험한데.'

휴고의 예민한 본능이 경고했다. 이런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지금껏 교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도 운에 가까웠다.

렉사르는 휴고의 신체 능력을 예상하지 못했고, 휴고는 그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제 렉사르는 더욱 신중하게 움직일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풍겨 오는 살벌한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이유가 뭐지?'

딱히 긴장되거나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뛰며 분노가 치밀었다.

휴고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에단이 건네주고 간 작은 보석 파편이었다.

'밀린다 싶으면 이걸 부숴.'

에단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써야겠지.'

지금이 아니면 사용할 기회를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휴고가 한숨을 내쉬며 검은 보석 파편을 움켜쥐었다.

악력이 가해지자 검은 파편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휴고에게 녹아들었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순간 휴고의 눈이 누렇게 물들었다. 렉사르의 눈과 매우 흡사한, 짐승의 눈이었다.

"저 녀석 설마...!"

지켜보고 있던 가토가 당황해하며 네이드를 바라봤다. 저 모습은 가토가 야수화할 때의 모습이었다.

"잠시 지켜보도록 하죠."

네이드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휴고가 야수화를 사용한 것에는 에단의 지시가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우선 지켜보는 게 옳았다.

'도련님,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 [142화] 야수의 눈 (2)

휴고는 렉사르에게 패한다.

정해진 사실이었다. 에단이 준 것은 작은 마석 파편. 흡수의 의미도 없는 미세한 파편이다.

'죽은 마나에 반응하니.'

휴고의 야성이 드러날 것이다.

'완벽한 야수화가 될지 반쪽짜리일지는 모르지만.'

에단에게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다.

'어떻게 되든.'

렉사르는 폭발한다. 에단이 한 내기는 승리를 점치는 게 아니었다.

'렉사르에게서 살아남는 것.'

그 정도면 충분히 휴고의 가치를 증명해 낼 수 있다.

쾅! 콰광!

굉음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에단이 바지를 털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보실까요?"

싸움 구경은 해야지.

* * *

휴고는 완전히 야수화가 되지는 않았다. 외적인 변화는 누렇게 물든 동공, 그리고 돋아난 어금니가 전부였다.

이전처럼 울부짖거나 야성을 터트리지도 않았다. 그저 호흡이 조금 거칠어지고 짜증이 치밀 뿐이었다.

'...뭐지 이건?'

이전의 야수화와 달라진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휴고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이전처럼 본능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닌, 생각하고 판단을 했다.

휴고가 가늘게 뜬 눈으로 렉사르를 응시했다.

움직임이 멎은 렉사르에게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스산한 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휴고는 두렵지 않았다.

두근두근.

오히려 호승심이 생겼다. 속이 들끓는다. 휴고는 지금 느껴지는 이 기운이 바로 '마나'라는 것을 인지했다.

'이렇게 쓰는 건가?'

탓!

한 번의 도움닫기로 휴고는 렉사르의 앞으로 이동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말도 안 되는 움직임 때문이었다. 휴고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전 같았으면 강철 같은 손톱과 이빨로 적을 물어뜯으려 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휴고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슉, 슈슈슉!

휴고가 주먹을 뻗었다. 군더더기가 없는 날카로운 주먹질이었다. 마치 에단이 펼치던 펀치 콤비네이션과 흡사했다.

경로를 예측하는 공격, 피해 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렉사르는 다시 한번 사슬을 휘둘렀다. 휴고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콰직!

휴고가 사슬을 지르밟았다.

"다 보고 있습니다."

"...건방지구나."

스스스.

렉사르가 마나를 끌어 올렸다. 사슬이 마치 춤을 추듯 움직였다. 휴고는 그 모습을 두고 보지 않았다.

휘릭.

휴고의 몸이 회전하며 렉사르의 복부에 뒤차기를 꽂았다.

뻐억!

렉사르가 몇 차례 뒷걸음질 쳤다.

방금 전 기술은 에단이 애용하는 일격이었다. 휴고는 지금 에단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휴고의 동체 시력과 신체 능력은 범인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그렇기에 에단은 휴고에게 따로 격투술을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휴고는 배우지 않고도 구사할 수 있었다.

'도련님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에단이었으면 방금의 일격으로 렉사르를 제압했을 것이다.

렉사르가 후드를 벗었다. 그의 얼굴에는 빼곡한 상처가 가득했다. 사람들이 침음을 흘렸다.

누런 동공,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덥수룩한 검은 머리.

휴고보다도 더 짐승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너는 뭐냐."

"음.... 휴고입니다. 에단 도련님의 기사죠."

휴고는 스스로를 블란테의 기사가 아닌, 에단의 기사라고 생각했다.

그 점이 부끄럽거나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휴고가 에단의 전투 자세와 유사한 자세를 취했다.

"...그래, 대답이야 천천히 들으면 되겠지...."

비릿한 미소를 지은 렉사르가 품에서 또 다른 무기를 꺼냈다. 흉측한 외향의 사슬낫이었다.

"...후우."

휴고가 한 차례 한숨을 내쉬더니 표정을 굳혔다.

파밧!

그러고는 곧장 질주를 시작했다. 사슬낫이 휴고의 경로를 따라 날아갔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머리가 낫이라는 것이다. 공격로를 예측하기 힘들고 한 번의 실수가 치명상으로 이어진다.

렉사르의 공격은 사냥꾼의 것과 매우 흡사했다. 사슬낫의 추격을 피해 휴고가 공중으로 도약했다.

"멍청하기는!"

마나가 어린 사슬낫이 휴고를 쫓았다. 경이적인 마나 컨트롤이었다. 휴고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했다.

홱!

그러면서 낫의 손잡이 부분을 낚아챘다. 렉사르의 눈이 커졌다. 휴고의 움직임이 마치 기예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후읍!"

한 번 했던 행동이다. 휴고가 숨을 들이마시며 힘을 주자, 얼굴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렉사르도 이번에는 사슬을 놓치지 않았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휴고는 공중에 떠 있다는 점.

쑤욱!

애초에 휴고가 노린 점이 그것이었다. 공중에 떠 있던 휴고가 사슬을 잡아당겨 순식간에 접근했다.

휴고는 오른쪽 무릎을 들어 올렸고, 그걸 본 렉사르는 사슬을 놓으며 팔을 들었다.

콰직!

팔로 휴고의 공격을 막아 냈지만 충격까지 모두 막아 낼 수는 없었다.

렉사르가 뒤로 밀려났다. 휴고는 사뿐하게 지면에 착지하며 손을 털었다.

"...후우, 힘드네."

휴고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물러난 렉사르를 추격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정말 감이 좋군. 마치 짐승 같아...."

렉사르의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르르륵.

렉사르가 다시 사슬을 끌어당겼다. 전투가 재개될 것 같은 조짐이 보이자, 휴고가 자세를 갖췄다.

"거기까지."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좌중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그곳에는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으며 휴고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련님."

휴고의 부름에 에단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휴고에게 다가갔다.

"고생했다."

에단이 휴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휴고가 눈을 끔뻑이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에단을 바라봤다.

"제가 무슨 개입니까?"

"아니었어?"

"...그게 무슨."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휴고를 뒤로한 채 에단이 몸을 돌렸다.

빈센트와 첸이 에단의 곁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도 적지 않게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휴고의 동공이 누런색에서 본래의 흑갈색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 빈센트는 눈썹을 미묘하게 꿈틀거렸지만, 감정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에단은 그 변화를 지켜봤다.

'아직은 지켜볼 생각인가.'

빈센트는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대단하군.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까지 성장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누가 키웠는데요."

"허, 그렇게 말하니 더 욕심이 나는구나. 어떠냐, 흑사자 기사단에 자리를 마련해 주지. 이런 놈팡이 녀석 밑에 있지 말고 올 생각이 있나?"

빈센트가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흑사자 기사단의 단원. 대륙 제일이라고 명성을 떨치는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토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방금 빈센트가 내뱉은 제의는 모든 기사들의 염원과도 같은 것 아니던가.

가토는 복잡한 마음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하지만 휴고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아니요. 저는 에단 님 밑에 있겠습니다."

"호오.... 따로 이유가 있더냐?"

빈센트의 물음에 휴고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에단 님 밑에 있는 게 더 좋아서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단이 씨익 웃었다. 그러면서 휴고의 어깨를 두드렸다.

"들으셨죠? 제의를 하려면 그런 것보다는 다른...."

에단과 빈센트, 그리고 첸의 시선이 돌아갔다.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선이 향한 장소에는, 렉사르가 이를 갈면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 멋대로 여기서 끝내려고 하십니까?"

렉사르가 거친 음성을 토해 냈다. 격렬한 분노가 그의 목소리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빈센트는 차게 식은 표정으로 첸을 호출했다.

"첸."

"네, 가주님."

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려 할 때, 에단이 팔을 들어 첸을 만류했다.

"잠시만요."

"지금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제가 하죠."

에단이 미소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가볍게 목을 풀며 렉사르에게로 나아갔다.

첸과 빈센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에단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저 나이에 저런 실력을 갖추게 된다면 힘에 취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잘못됐다. 지금의 렉사르는 위험했다.

"아빠. 저건...."

리사도 얼굴을 굳혔다. 어느 정도 실력이 있고, 상대를 가늠할 수 있다면 렉사르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느낄 수 있을 터.

하지만 반대로 휴고는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아들놈 밑에 있겠다더니 걱정은 안 되느냐?"

"...아, 도련님이요?"

빈센트의 물음에 휴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제가 보기에 제일 걱정이 필요 없는 사람이 도련님인 것 같습니다."

휴고의 눈에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다. 마치 에단이 위험해 처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같았다.

'처음 시험해 보는군.'

세계수의 힘까지 흡수한 뒤, 힘을 휘두르기는 지금이 처음이었다. 몸이 근질거렸는데 적당한 상대를 만났다.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렉사르를 바라봤다.

"왜, 이렇게 뿔이 잔뜩 났을까?"

비아냥거리는 에단의 어조에, 살벌한 눈빛이 그의 얼굴로 꽂혔다. 렉사르는 다시금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이구, 얼굴에 흉터도 많은데 구기니까 살벌하네."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다.

"크아아아아!"

렉사르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광폭한 마나가 터져 나왔다. 가만히 지켜보던 에단이 히죽 웃으며 검을 쥐었다.

'힘 좀 써 볼까?'

― ...엿 같은 새끼.

카이나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에단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앞발을 내디뎠다.

후웅!

허리가 비틀리며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함께했다. 에단이 마나의 편린을 끄집어냈다.

그가 느끼기에는 아주 작은 일부분이었지만,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후우웅!

이성을 잃은 것처럼 달려들던 렉사르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그의 본능이 경고했다. 당장 자리를 피해야 했다.

거대한 해일이 자신을 덮치고 있었다.

'...이걸 피할 수 있나?'

사람이 과연 자연재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렉사르의 발이 멎었다. 당황하기는 에단도 매한가지였다.

'...이런 옘병.'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일부분을 끄집어냈다고 생각했건만, 그 일부의 여파가 이 정도일 줄이야.

저 마나의 해일을 방치하면 아카데미의 상당수가 증발하고 말 터였다.

에단이 질주했다. 순식간에 반대편에 도달한 에단이 렉사르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너는 꺼져 있어."

마치 짐짝을 대하듯 무심하게 말한 에단이 그대로 렉사르를 멀리 던졌다.

훽!

렉사르가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에단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려 들었지만, 어느새 다가온 빈센트와 첸이 에단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버지?"

빈센트가 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 힘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이르구나."

첸이 나서려 하자, 빈센트가 팔을 뻗어 막고는 한 걸음 내디뎠다.

"됐네. 나도 가끔은 몸을 풀어야지."

키이잉.

빈센트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히기 시작했다.

◈ [143화] 피는 속이지 못한다 (1)

키이잉.

빈센트의 칼집에서 검이 뽑혔다.

해일 같은 마나가 덮쳐 오고 있음에도 빈센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정작 검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포악했다.

마나의 해일보다, 검 하나 들고 있는 빈센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주변에 있는 이들의 숨을 더 막히게 만들었다.

'...괴물이 따로 없군.'

이런 괴물이 원작에선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단 말인가?

문장의 나열로 보는 느낌과 실제로 마주했을 때의 감각은 천지 차이였다.

후웅.

빈센트가 검을 들어 올렸다. 기세 좋게 검을 휘두른 게 아니다. 그저 여유롭게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 여파는 결코 적지 않았다.

뚝.

하늘과 땅의 위치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구역감이 치밀었다.

후우웅!

마나의 해일이 허공으로 역류했다. 마치 역천(逆天)하는 폭포를 보는 것 같았다. 막대한 기운이 공중으로 치솟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각인되었다.

이게 바로 대륙 제일이라 불리는 빈센트의 진면모라고.

― ...이번 가주는 꽤나 쓸 만한 놈이구나.

페온의 퉁명스러운 말에 에단은 기가 찼다.

'이게 쓸 만한 수준이라고?'

마스터의 경지를 얕게 본 것은 아니었다. 편법을 이용했다고는 하나 에단도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디뎠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닌 결과였다. 증명은 결국 결과로 하는 것이고, 에단은 지금껏 결과를 창출해 내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 누가 와도 기가 눌린 적이 없던 에단은 지금 처음으로 압도되는 감각을 느꼈다. 피부가 저릿했다.

그 괴물 같은 '지하'의 리치를 만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 ...페온, 너보다 강하지 않냐?

― 닥쳐라.

카이나와 페온이 티격태격하며 나누는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신을 되찾은 에단이 빈센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만있으셨어도 제가 정리했을 텐데요."

"...고얀 놈."

빈센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허황된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검을 이용해 적절하게 마나를 방출하고, 세계수의 목걸이를 활용하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설령 된다고 해도 굉장히 많은 힘이 들었을 것이다. 빈센트처럼 가벼운 손짓으로 사태를 정리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터.

하지만 방금 느낀 압도감을 떨쳐 내려는 듯 에단이 툴툴거리면서 말하자, 빈센트가 피식 웃었다.

"대체 뭘 하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빈센트가 에단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한 경지. 그리고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마나의 총량.

모든 것이 놀라웠다.

'더군다나 저 검.'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에단이 어떤 경로로 저 검을 손에 넣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만한 물건을 들고 있으면서 왜 검이 필요하다는 거지?"

에단이 내기의 상품으로 원한 것은, 검 한 자루였다. 저런 검을 들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검이 필요하다니 의아함이 들었다.

"아, 이거요?"

에단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건 다른 애 줄 거예요."

"...뭐라고?"

빈센트가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 ...뭐라고 이 새끼야?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이나의 걸걸한 욕설이 에단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 * *

렉사르는 손쉽게 제압당했다. 첸이 무력을 행사할 것도 없었다.

순순히 제압당하면서 별다른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저 번들거리는 안광으로 에단과 휴고를 노려보며 사라졌다.

'뭘 꼴아 봐?'

당연히 에단은 콧방귀를 뀌며 넘어갔다. 상황이 얼추 정리되자, 에밀라와 크러쉬가 나서서 학생들의 인도를 시작했다.

크러쉬는 최선을 다해 에단의 눈을 피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애쓰는 모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마음 같아서야 조금 골려 주고 싶지만.'

시간을 할애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카론의 얼굴이 보였다.

"어이, 귀여운 동생."

에단이 히죽 웃으며 다가가자, 카론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최대한 에단을 무시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지만, 에단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으음, 형 말을 개무시하는 건가?"

서늘한 목소리가 귓전에 파고들자, 카론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내, 내가 언제 무시했다고...."

"그래. 잘 들리나 보네."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고, 그 모습을 본 카론은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아까는 바빠 인사도 못 해서 말이야. 어때, 요즘 살만은 해?"

히죽히죽 웃는 에단의 말이 거북하기 그지없었다. 카론은 렉사르에게 에단의 정보를 넘겼던 것이 내심 걸렸다.

"모, 못 지내지는...."

"너 그런데 말이 짧다?"

"...않았어요."

"그래, 보기 좋네. 오랜만에 리사 얼굴이라도 보러 온 거야?"

"그 싸가지 없...."

카론의 시선이 리사에게로 돌아갔다. 멀리서 리사가 사나운 눈초리로 카론을 노려봤다.

"...지 않은 누나가 생각나더라고요...."

카론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리사는 그에게도 버거운 존재였다. 리사의 실력은 가문에서도 유명했다.

리사의 검술 실력은 옛적에 카론을 넘어섰고, 실력주의가 만연한 블란테이기에 카론은 리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껄끄러운 인간이 둘이나....'

카론은 최대한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에단 오빠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오빠라고?'

리사의 입에서 나온 말에 카론은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리사는 모룬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오빠라는 호칭을 붙인 적이 없었다.

그련 리사의 입에서 오빠라는 말이 나오다니.

리사가 다가서며 카론을 지그시 바라봤다.

"카론도 있네?"

'...개 같은 년. 그래도 동생인데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화가 치밀었지만 차마 그 감정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리사는 어떤 면에 있어서는 에단보다 더 무서웠다.

"어, 어.... 리사 누나....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오랜만이네. 그런데 너 실력은 좀 늘었어?"

"시, 실력? 어떤 실력...?"

"내가 뭐를 물어보겠어? 당연히 검술 실력을 묻는 거지."

카론도 머저리가 아니었다. 지금 리사는 비아냥대고 있는 거다.

속에서 울분이 치솟았다. 당장에라도 건방진 누나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으, 응.... 조금 늘긴 했어."

"그래? 잘됐네. 재능이 없어도 노력하면 실력은 느는구나."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뭐야 얘네?'

대화가 아주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카론을 좀 골려 주려고 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남을 갈구는 실력은 에단보다도 리사가 뛰어났다.

― ...정말 네 핏줄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 잘못된 선입견이다. 카이나.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이제 가자."

"아, 그래. 또 보자, 카론."

리사가 획하고 몸을 돌렸다. 카론은 부들부들 떨면서 에단과 리사를 노려봤다.

'...개 같은 연놈들.'

하지만 그 생각을 밖으로 표출할 수는 없었다. 그때 멀어지던 리사가 고개를 돌렸다.

"카론, 방금 나 욕한 거 아니지?"

"...어?! 아니야! 내가 욕을 왜 해!"

카론이 화들짝 놀라며 말하자, 리사가 물끄러미 카론을 바라봤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과민 반응을 해? 갑자기 귀가 가려워서 물어본 건데."

"저, 정말 아니야. 내가 왜 네 욕을 하겠어."

"그렇지? 하나뿐인 귀엽고 멋진 누나인데 말이야. 그럼 갈게."

리사가 팔을 흔들며 멀어졌다. 카론은 안도감을 느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묘한 시선을 느낀 카론이 주위를 둘러봤다. 카론이 고개를 들자, 기사들이 고개를 피했다.

기사들의 시선 속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카론은 치욕감에 몸을 떨었다.

'제, 제기랄....'

에단과 리사의 대한 원망이 더욱 깊어졌다.

* * *

방금 보여 줬던 빈센트의 모습에 에밀라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검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권태로운 움직임. 아래에서 위로 검을 드는 그 행위만으로 막대한 마나를 모두 소멸시켰다.

압도적인 위세를 가진 마나였다. 자신이 전력을 다하고 죽음을 각오한다고 한들 그 마나의 해일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두려움이 느껴졌다. 실력을 과신한 적은 없었지만, 스스로를 비관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에밀라는 최근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꽃이니, 은발의 여검사니, 수많은 별호가 에밀라를 따라왔다. 많은 칭송과 스카우트 제의가 잇따랐다.

수련을 게을리 한 적은 없다. 학생들을 지도하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녀는 학생들을 가리키며 객관적인 시선을 키웠다.

학생들은 저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에밀라의 재능은 그 어떤 학생들보다 뛰어난 편에 속했다.

20대 나이에 이룩한 최상급이라는 경지.

교만에 빠진 적은 없었으나,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조급해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에밀라는 지금 조급함을 느꼈다. 에단은 그녀보다 어렸지만, 하루가 지날수록 멀어졌다.

마스터까지 한 발자국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게 과연 한 발자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빈센트를 떠올리자 오금이 저렸다. 떠올리기만 해도 압도적인 위압감에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빈센트의 일 합도 막아 낼 자신이 없었다.

그 사실에 허탈감이 들었다. 학생들을 인도하면서도 실소가 새어 나왔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한 학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밀라를 바라봤다. 에밀라가 순간 당황하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교수가 됐으면서 감정 하나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 에밀라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었다.

"일단 모두 기숙사로 돌아가 있겠습니까?"

안심시키려고 애쓰는 에밀라의 목소리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의 상황 정리가 끝나자, 에단 일행과 빈센트와 첸, 그리고 남은 교수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계획을 설명드리죠."

모두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쏠렸다. 따로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모두들 아카데미의 중축이 통째로 사라진 사실은 알고 있죠?"

에단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의 유지 인원도 없었다. 수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직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아 불만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뭐 어디 적당한 세력들이 사이좋게 나눠 먹겠죠."

직설적인 에단의 말에 에밀라와 리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카데미의 존속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권력 다툼이 시작된다면 아카데미는 본질을 잃게 된다.

균등한 기회는 사라지고, 차별은 더욱 강화될 게 분명했다. 에밀라는 부패한 곳에 교수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부른 거죠."

시선이 일제히 빈센트에게로 쏠렸다. 빈센트는 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내가 너를 도와야 할 이유는?"

빈센트가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블란테의 위상은 이미 드높았다. 구태여 아카데미에 발을 들여 모두의 견제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빈센트의 대답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리사가 죽을 뻔했다니까요?"

쨍그랑!

빈센트가 들고 있던 찻잔이 산산이 조각났다.

◈ [144화] 피는 속이지 못한다 (2)

모두의 이목이 빈센트의 찻잔에 쏠렸다. 찻물이 쏟아지고 파편이 비산했지만 옷이 더렵혀지지 는 않았다.

빈센트가 마력으로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태연하게 마력으로 물과 파편 조각을 태워 버리고 무심하게 물었다.

"...계획이 뭐지?"

― 저거 뭐냐?

― ...딸 사랑이 지극하군.

카이나가 황당해하며 말했고, 페온도 거기에 첨언했다.

'미치겠네.'

빈센트의 물음에 에단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그럼에도 씰룩거리는 입술이 티가 났는지 빈센트의 미간이 좁혀졌다.

에단이 멋쩍은 헛기침을 내뱉다가 빈센트를 바라봤다.

"하나부터 열까지 구구절절 설명드리는 것도 좋지만...."

자신은 그럴 성격이 되지 못했다.

"들어와."

에단의 말에 문이 열리며 드레이가 나타났다. 드레이의 굳은 얼굴에서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뭘 쫄고 있어?"

에단이 씨익 웃으며 손짓하자, 드레이가 어색한 발걸음으로 에단에게 다가왔다.

리사가 미묘한 표정으로 드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빈센트는 흥미가 있어 보였다.

"이 녀석은 누구지?"

"제가 가르치는 학생입니다. 그리고 저희의 조커 카드이기도 하죠."

"제대로 설명해 보거라."

에단은 말을 길게 하는 것보다 확실하게 한 번의 설명을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드레이."

"...네."

"보여 줘 봐."

에단의 말에 드레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는 드러내고 싶지 않던 힘이었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아, 잠깐."

막 성력을 방출하려는 순간 에단이 저지했다.

드레이가 눈을 끔뻑거리며 에단을 바라보자, 에단이 드레이에게 검 한 자루 건넸다.

"제가 이 검을 줄 사람이 있다고 했죠?"

좌중을 둘러본 에단이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이걸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자, 보여 줘."

진짜 성자의 힘을.

드레이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성력을 끌어올렸다.

시작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드레이는 반쪽짜리이지만 분명한 성자였다.

그가 뿜어내는 성력은 일반적인 성직자와는 궤를 달리한다.

성력이 꿈틀거리며 몸속을 질주하기 시작하자, 드레이의 머리칼이 광채에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성검의 힘이 더해졌다. 타오르는 빛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짙어졌다. 순간 눈이 멀 정도로 환한 빛이 발광했다.

리사와 에밀라가 눈을 가렸다. 하지만 빈센트와 첸, 에단은 확실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툴툴거려도 말은 잘 들어주신단 말이야.'

에단은 드레이에게 검을 건네기 전, 카이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좀 도와주시죠.'

물론 카이나는 걸걸한 욕설로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드레이의 모습을 보니, 말은 그렇게 해도 확실하게 도와주는 것 같았다.

'이거 기대 이상인데?'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성검의 위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엄청난 회복력, 그리고 마수나 사특한 존재를 상대할 때 얻는 막강한 위력.

'지금은 크게 끌리지 않는 점들이지.'

회복력.

에단은 자신의 몸을 알고 있었고, 얻은 힘을 알았다. 에단의 몸에는 대해 같은 마나가 잠재되어 있었다.

마나의 총량을 따진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인물의 마나를 더해도 에단과 비교되지 않을 것이다.

에단은 지금 숨 쉬고 있는 세계수나 매한가지였으니까.

'그게 꼭 무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빈센트를 보고 다시금 느꼈다. 가야 할 길은 멀었다. 그렇다고 그게 에단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이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더군다나 신체 능력, 내구력까지 크게 상승했다.

'성검'의 필요성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제일 큰 건 사실....

너무 시끄러웠다. 드레이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저 표정의 원인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증폭된 신성력 때문도 있겠지만.'

난처함과 당황함이 공존하는 얼굴이 된 데에는 카이나의 영향이 지대한 것 같았다.

에단은 고소를 머금은 채 시선을 돌렸다. 빈센트를 비롯한 모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에단이 믿고 있는 제일 큰 후원자가 이거였다.

"성자가 저희를 지지합니다."

"...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지?"

빈센트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짧은 시간이다.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간. 흐른 시간에 비해 에단이 몰고 온 폭풍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아카데미, 그리고 성자.

가벼운 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신성 왕국은 대륙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었다.

대륙의 국교는 유일신 하나였고, 그 유일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신성 왕국이었다.

일반 시민에게나 귀족에게나 할 것 없이 막대한 입김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무력 또한 지니고 있었다.

'피바람이 불겠군.'

빈센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에단이 가지고 있는 패가 너무 강한 탓에 대륙 전체가 흔들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빈센트가 가늘게 뜬 눈으로 에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에단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자, 이제 됐어."

에단이 드레이에게 손짓하자, 흘러넘치던 신성력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뭐, 이건 나중에 뒤통수칠 때 이용할 거고.... 그전에 초석이 더 필요하겠죠?"

"초석이라.... 한번 말해 봐라."

빈센트는 이제 어디까지 하나 지켜볼 생각이었다. 에단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전에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셔야 합니다."

"약속?"

"네. 아카데미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불만을 억누르는 게 한계에 다다랐을 거 같은데.... 아닌가요?"

에단이 에밀라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는 그림자 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제가 학생이라도 그래요. 개판 오 분 전인데 뭣 하러 다닌단 말입니까?"

에단이 주변을 훑어본 뒤 말을 이었다.

"학생들이 혹할 만한 보상을 줘야죠. 어수선한 분위기를 잠식시킬 만한 보상."

"...."

에단이 빈센트를 응시했다.

"애들 한번 가르쳐 보시죠."

"허, 블란테가 그래야 할 이유가...."

빈센트가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려 하자, 에단이 리사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리사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벌떡 일어나 빈센트의 곁에 다가갔다.

"아, 아빵...."

"...."

빈센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단이 음흉한 웃음을 머금었다.

* * *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블란테는 아카데미에 잔류해 있기로 했다.

많은 수의 기사들은 필요하지 않았기에 일부는 가문으로 복귀하기로 결정됐다.

그렇다고 당장 복귀하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지금 상황을 세간에 알리는 게 우선이었다.

'복잡한 일이 많겠군.'

이제부터는 진짜 귀찮고 피곤한 일들의 연속이다.

'로만의 관한 것을 언급할 수도 있지만.'

마크가 사라진 이상 로만의 가문에서 말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용해 먹으려는 새끼들은 있을 수 있지만.'

블란테를 아니꼽게 바라보던 세력들이 이번 기회에 승냥이처럼 달려들 수도 있었다.

정치권은 명분 싸움이다. 정치에 문외한인 에단도 그 정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 놈들은 처절하게 응징할 거고.'

에단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사정을 봐줄 생각은 없었다. 에단은 원작 주인공처럼 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상황을 뒤집어엎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공표해야 한다. 에밀라와 크러쉬, 그리고 에단이 학생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혼란스러운 것은 이해가 됐다. 하룻밤 사이에 아카데미의 기류가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쿵!

하지만 금세 적막에 휩싸였다. 기사들의 위압감에 기가 눌린 것이다.

단상 위에 먼저 에단이 올라섰다. 유려한 언변 따위는 구사하지 못한다. 에단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학생들을 둘러봤다.

에단의 시선이 지나가자,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학생들을 둘러보던 에단의 눈에 밟히는 학생이 있었다.

'잘 지내나 보네.'

다비였다. 다비는 여전히 천진한 미소를 지은 채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는 또래들도 보였는데, 모두 다비를 바라보며 쩔쩔매고 있었다.

'맹랑한 꼬맹이.'

에단이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다시 학생들을 바라봤다.

"나를 모르는 녀석들은 없겠지? 자, 다들 잘 지냈나?"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상황이었기에 에단은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왜? 아카데미 다니기 뭐 같아?"

에단의 말에 학생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에단의 언행이 너무 가볍고 거침없었기 때문이다.

"이해는 해. 갑자기 교수와 직원들이 잠적해 버렸으니까. 이게 뭔가 싶고, 당장 가문에 돌아가고 싶겠지. 굳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

"내가 그래도 명색이 너희들을 가르치는 교수인데 방치할 수는 없지. 너희들은 결국 여기에 배우러 온 거잖아."

에단의 말에 한 학생이 용기 내어 물었다.

"어,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죠?"

에단과 학생들의 시선이 그 학생에게로 향했다. 에단은 히죽 웃었다.

"좋은 질문이다. 뭘 어떻게 하겠냐고? 전과 다를 거 없어. 책임감 없는 쥐새끼보다 양질의 교육을 시켜 주마."

"쥐, 쥐새끼요?"

"그래 쥐새끼. 황당하지 않아? 아무런 대비 없이 사라진 학장과 직원들. 아, 걔네에게 희생당한 이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흑...."

에단의 말에 한 여학생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고메드의 곁에 있던 학생이었다.

고메드가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이미 모든 학생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멀쩡하던 녀석이 이유 없이 폭사당할 리가 없지."

에단의 말에 학생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근거를 댈 수는 없다. 하지만 의심의 씨앗을 뿌려 두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게 곧 명분이 되고 지지가 되니까.

'꿀릴 것도 없고.'

거짓을 말한 것도 아니다. 지지 세력도 충분하다.

에단이 뒤를 돌아봤다. 빈센트가 흥미로운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다시 학생들을 응시했다.

"걱정하지 마라. 책임은 교수들이 지니까. 우리가 양질의 교육을 시켜 주고, 보호해 주지."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걸 본 학생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에단이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남은 것은 빈센트뿐이었다.

빈센트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에단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빈센트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에단에게 말했다.

"...건방진 녀석."

"칭찬으로 알아듣죠."

빈센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상 위에 올라섰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정도로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빈센트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학생들을 훑어봤다. 어깨를 짓누르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학생들이 헛숨을 삼켰다.

"나쁘진 않군."

빈센트가 그렇게 칭하며 곧바로 말을 이었다.

"간략하게 소개하지. 블란테의 수장, 빈센트 블란테다."

빈센트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학생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 [145화] 묘한 기류 (1)

잔잔한 목소리였지만 빈센트의 목소리는 좌중을 압도했다.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사자의 등장이었다.

블란테의 이름을 모르는 자들은 없었지만, 빈센트의 얼굴을 아는 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빈센트라는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대륙을 호령하는 사자들의 우두머리.

그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

학생들 중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에단은 단상의 뒤편에서 휘파람을 불며 빈센트의 연설을 바라봤다.

'카리스마 지리네.'

확실히 가주라는 타이틀은 아무나 다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말 한마디로 모두를 휘어잡았다. 반론이나 의심의 목소리 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에단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빈센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침묵하던 빈센트가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이곳에 다니는 이유가 무엇이지?"

"...."

빈센트의 물음에 학생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함부로 입을 열만큼 담이 큰 자도 없었을뿐더러, 빈센트의 의중이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학생들을 주시하다 말을 이었다.

"이곳의 교육 방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훌륭한 수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기사는 검을 들어야 하고, 그 검은 피를 묻히며 날을 세우는 존재다."

블란테의 훈련 방식은 독특하다. 극히 실전과 가깝고, 그 방식을 지향한다.

마나 수련법도 그랬다. 블란테의 마나 수련은 전투 중 체득하는 것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다.

천혜의 수련 장소도 있었다. 해마다 몬스터가 범람하고, 기사들은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쓰며 실전을 경험한다.

그게 블란테가 철혈의 기사로 대륙에서 군림하는 이유였다.

학생들은 침묵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아카데미에 입학한 만큼 자존심이 강했다.

그런 자존심이 순식간에 뭉개진 것이다. 학생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학생들을 바라보던 빈센트의 시선이 순간 에단에게로 돌아갔다.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던 에단과 시선이 교차했다. 빈센트의 입꼬리가 조금 비틀렸다.

빈센트가 다시 학생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최근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블란테가 고수하는 방식만이 모두 정답인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

빈센트가 내뱉은 말에 기사들이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오히려 첸과 네이드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빈센트가 저 말을 내뱉은 이유가 바로 에단 때문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에단의 수련법은 기존의 수련 방식과 매우 달랐다. 독특하고 특이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블란테의 연무장에도 에단이 남기고 간 방식이 조금씩 차용되고 있었다.

당연히 뛰어난 효능을 보이고 있었고, 가주인 빈센트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바뀌지 않은 생각이 있다면."

스르릉.

맑고 청명한 금속음과 함께 빈센트의 검이 꺼내졌다.

검의 자태는 아름다웠다. 검에 대해 알지 못하는 자가 보아도 뛰어난 명검이라는 것을 알아챌 정도로 훌륭한 검이었다.

빈센트가 지면에 검을 밀어 넣었다.

"검에 있어서만큼은 블란테가 최고라는 것이다. 불만이나 의의가 있다고 한들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빈센트가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했다.

"우리가 너희들을 가르치기로 한 이상, 너희들은 모두 최고를 꿈꿔야 할 것이다."

빈센트의 말에 학생들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상황을 인지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학생들이 감격에 찬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빈센트가 지금 공표한 것이다. 블란테의 검을 알려 주겠다고.

모두가 숭상하는 검술 명가의 검을 배우게 된 것이다. 학생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에단이 휘파람을 불었다.

'아버지 말 한번 기똥차시네.'

예상보다 뛰어난 언변이었다. 빈센트 자체가 지닌 위압감으로 순식간에 학생들을 휘어잡았다.

조금 머리가 큰 애들이라면 이후의 파장을 걱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학생들은 어렸다.

'그건 내가 나서서 해결할 문제이고.'

이제부터는 어른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해야만 했다.

* * *

빈센트가 학장으로 취임했다.

물의를 일으킨 렉사르는 기사들과 함께 가문으로 복귀를 명받았는데, 예상외로 그는 고분고분하게 가문으로 복귀했다.

"너는 남아 있을래?"

에단이 카론을 향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카론은 거의 경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사양하겠습니다."

질색하는 표정을 바라보며 킥킥 웃음을 흘린 에단이 카론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그럼 조만간 또 보자."

"...."

카론은 말없이 대열에 합류했고, 절반가량의 기사들이 떠났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학생들이 가진 불만의 대부분이 사라졌다. 블란테에게서 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쉬이 찾아오지 않는다.

물론 검술을 주력으로 하지 않는 학생들은 불만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아카데미의 위상 자체가 상승하는 것이니 나쁠 것은 없었다.

'문지기의 존재는 크게 필요 없겠고.'

고메드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에단도 레벨린이 이 정도까지 잔혹한 일을 벌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고메드 같은 존재를 다시 뽑을 이유는 없지.'

고메드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작가의 편의주의적 전개를 위해 조형된 캐릭터였다.

별로 의미가 없는 캐릭터라는 소리였다. 소설적 과장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

'기왕 철문이 허물어진 김에 적당한 검문소로 바꾸면 될 노릇이고.'

당연히 그 역할은 당분간 블란테가 맡을 예정이다. 블란테의 상징인 검은 정복을 입은 채.

'도발과 홍보가 모두 필요하니까.'

방문하는 모두가 감히 아카데미를 가벼이 여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블란테를 도발하는 것일 테니.'

에밀라는 수업 스케줄 재구성을 담당했다. 학생들은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외의 일도 벌어졌는데, 생각보다 휴고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전 보여 준 전투.

얼굴에 큰 흉터가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앳된 얼굴이다. 나이도 학생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또래였다.

그런데도 그런 실력이라니. 학생들이 주목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휴고는 멋쩍어하면서도 학생들의 질문을 들어 주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예요?"

"제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라 전부 도련님 덕입니다...."

휴고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대부분이 휴고에 관한 질문이었지만, 때때로 에단과의 관계를 묻는 학생들도 있었다.

가토는 근처에서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뭔가 기분이 묘했다. 주목을 받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저런 모습을 보니 배알이 꼴렸다.

'...지금껏 고생은 내가 더 하지 않았나?'

가토가 피땀 흘리며 고생할 동안, 휴고는 침대에서 가만히 쉬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가토가 뾰로통한 얼굴을 한 채 휴고에게 다가섰다.

"야, 대련 한번 하자."

"대련?"

학생들의 시선이 가토에게로 쏠렸다. 둘의 대련은 늘상 있는 일이었기에 휴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럼 저는 이만...."

휴고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학생들의 표정에 아쉬움이 맴돌았다. 그때 한 학생이 입을 열었다.

"저도 지켜볼 수 있을까요?"

"...대련을요?"

휴고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물어본 학생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보고 싶어요!"

연쇄 작용으로 옆에 있던 학생들도 같이 대답했다. 휴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토를 바라봤다.

"마음대로 해."

가토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자, 학생들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쟤네 뭐 하고 있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단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 어린애들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하는 짓들이 귀여워 보였다.

에단과 같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리사가 물었다.

"...쟤네는 뭐야?"

리사의 물음에 에단이 잠깐 동안 말없이 둘을 바라봤다.

"동료."

"동료?"

리사가 눈을 깜빡이며 예상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에단이 이런 대답을 할 줄이야.

"왜, 이상하냐?"

"어. 엄청 이상해."

"그래도 내가 기른 녀석들이야. 너보다는 강할걸?"

"...장난해?"

리사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에단과의 실력 차이는 인정하는 바였지만, 리사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가토와 휴고는 또래로 보이는 나이대였다. 리사는 자기와 비슷한 나이대의 상대에게 질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우습게 보다가는 큰코다친다."

"오빠야말로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내기 한번 할까?"

에단이 휴고와 가토에게로 다가갔다. 시간이 부족하긴 했지만 이런 이벤트도 지켜보지 못할 정도로 촉박하지는 않았다.

에단이 다가가자, 가토와 휴고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둘의 시선이 리사에게도 향했다.

'...예쁘다.'

둘 모두가 같은 감상을 느꼈다. 리사의 외모는 객관적으로 봐도 출중했다.

찰랑이는 머릿결, 날카로운 듯 보이면서도 맑은 눈빛, 아름다운 얼굴선,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약간 표독스러운 인상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인상이 오히려 리사의 매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예전에 봤을 때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훨씬 예뻐지셨구나....'

한창 수습 기사로 훈련을 하던 도중 연무장을 지나가던 리사를 본 기억이 얼핏 남아 있었다. 그때도 순간 넋을 잃었었다.

두 사람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뭣들 하냐?"

"아, 아닙니다."

가토가 정신을 되찾고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흐음.... 누가 좋으려나.'

잠시 고민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가토야."

"네, 도련님."

"내 동생이랑 대련 한번 해봐."

"...네?"

에단의 말에 가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갑작스러워도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리사와의 대련이라니.

"왜, 무서워?"

에단이 입꼬리를 올리며 묻자, 가토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됐네."

그때 리사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리사가 가토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단련 상태는 나쁘지 않네.'

옷 너머로도 단련된 육체가 느껴졌다. 수련을 게을리한 몸이 아니었다.

"우리 혹시 본 적이 있었나?"

"예전에 연무장에서 봤던 적은 있습니다. 리사 아가씨께서는 저를 못 봤겠지만...."

"어, 난 못 봤어."

날카로운 대답에 가토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사가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알아보려고. 오빠가 그렇게나 자랑하던 실력을 한번 볼 수 있을까?"

"...저야 영광입니다."

"그럼 됐네. 연무장으로 옮기자."

리사가 가토의 팔을 붙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가토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동공이 떨린 것은 가토 혼자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휴고의 눈도 거칠게 떨렸다.

'...이 녀석들 봐라?'

에단이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 [146화] 묘한 기류 (2)

리사와 가토가 연무장에 마주 섰다. 어느새 관중들도 꽤나 많이 모여들었다. 학생은 물론이고, 리사와 블란테의 기사들도 찾아왔다.

에단 곁에 에밀라와 네이드가 다가왔다.

"...이런 데서 농땡이를 치고 계셨군요."

"아직 할 일이 산더미인데 잠깐 숨 좀 돌릴 수도 있잖아."

"하아."

천연덕스러운 에단의 대답에 에밀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단의 곁에 선 네이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리사와 휴고를 바라봤다.

"리사 아가씨는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아름답게 자라 주셔서 정말 기쁘군요."

"노인네처럼 말하기는."

"사실인 걸 어쩌겠습니다."

네이드가 작게 웃었다. 에단은 못마땅한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저 둘을 붙이시다니 의외로군요."

"동생 자극 좀 시켜 주려고."

"짓궂은 오빠군요. 아가씨 정도 실력이라면 조금 자만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나이는 가토랑 엇비슷하잖아."

"가토와 휴고는.... 또 자기 자랑이십니까?"

"눈치는 빠르네."

에단이 씨익 웃었다.

리사의 실력은 출중하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엘리트들만 모아 둔 아카데미의 학생들 중에서도 적수가 없을 정도이니 말이다.

'가진 재능만 놓고 본다면 가토보다 윗줄이지.'

리사 자체가 원작의 주연급이니 당연했다. 원래라면 가토는 리사의 상대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없었다면 말이지.'

리사는 아직도 가토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승부에 들어서기 전 오만이 얼마나 큰 독이 되는지 이번 기회에 느낄 것이다.

에단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가토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리사에게 말을 걸었다.

"...대련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리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한 걸 뭐 하러 물어? 허리춤에 검 있잖아."

"...진검으로 하시겠단 말씀이신가요? 위험하실 텐데요...."

걱정하며 내뱉는 가토의 말에 리사가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 적당히 손속을 두면서 상대해 줄 테니까."

"...."

리사의 태도에 가토는 더 이상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리사의 성격을 얼추 파악한 것이다.

'후우....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이런 점에서는 에단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스르릉.

리사가 검을 뽑자, 청명한 소리가 울려 펴졌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가토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마찬가지로 칼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리사에 비해 비교적 날이 죽어 있는 검이었다. 여행 중에 지속적인 관리를 했지만, 잦은 전투로 인한 대미지는 피할 수 없었다.

리사는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고, 가토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리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리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어쭈, 지금 여유를 부린다 그거지?'

리사가 에단을 흘겨봤다. 가토의 표정이 눈에 거슬렸다. 저 태연한 태도가 에단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금방 울상 짓게 해 주지.'

어디까지나 친선 대련인 탓에 따로 심판을 두지는 않았다.

"선공은 내가 해도 되겠지?"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타닷.

가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사가 달려들었다. 빠르고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이내 리사의 검이 화려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토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그녀의 검을 하나씩 받아 냈다.

챙! 채재재쟁!

기세를 탄 것은 리사였다. 거칠게 몰아붙이는 리사를 보며 지켜보던 학생이 탄성을 내뱉었다.

"역시 리사야...."

"그러게. 블란테의 기사를 상대로 저렇게 몰아붙이다니."

학생들의 대화를 듣던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었다. 에단이 양옆에 서 있는 네이드와 에밀라를 번갈아봤다.

네이드는 빙그레 웃으며 대련을 지켜보는 중이었고, 에밀라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자의 솜씨를 보니까 교수로서 어때?"

"나무랄 데가 없군요. 테크닉과 기교가 매우 뛰어납니다. 그렇다고 기본기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체력 또한...."

"그래서 리사가 이길 것 같아?"

"...."

에밀라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저런 괴물을 기른 거죠?"

에밀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검을 맞댈 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몇 차례 검을 섞는 모습을 보자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둘의 실력 차이는 확실했다. 얼핏 보면 리사가 우세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관상이었다.

리사의 검이 휘몰아쳤고,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다. 개중에는 가토를 끌어들이기 위한 허초도 존재했다.

가토는 그런 것에 유혹당하지 않았다.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오롯이 진짜만을 보며 쳐 냈다.

찰나의 순간 몰아치는 수많은 칼날의 폭풍 속에서도 가토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저런 평정심은 웬만한 기사들도 갖추기 어려웠다.

'누가 기른 녀석인데.'

에단이 뿌듯한 표정으로 가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가토는 고민하고 있었다. 매서운 폭풍 속에도 흐름은 보였다. 가토는 그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스읍!"

리사가 다시금 호흡을 삼켰다. 그녀의 체력은 무한하지 않았다.

쉬지 않고 커다란 공격을 퍼부었으니, 슬슬 체력이 바닥나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뭐지 이 녀석?'

뭔가 이상했다. 솔직히 얕잡아 봤다.

교만에 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고, 그렇기에 또래에서는 적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녀석을 압도적으로 이겨서 재수 없는 오빠의 코를 눌러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기세를 탄 것은 자신이었다. 전투에 있어 흐름과 기세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그 기세가 인위적이었다. 껄끄러움이 느껴졌고,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그것을 느낀 순간은 이미 너무 늦었다.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한 차례 멈칫하는 순간.

쾅!

가토의 눈빛이 돌변했다. 가토의 발이 지면을 내리찍었다. 순간 몸의 중심점이 단단해지며 지금껏 물러서던 가토가 자신의 영역을 갖췄다.

'제길, 여유를 줘 버렸어.'

빼앗긴 영역이야 되찾으면 그만이었다. 리사는 여성의 몸이었지만 힘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다.

리사의 검이 가토의 검과 부딪쳤다.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순간 폭발음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다.

쾅!

밀려난 것은 리사였다. 리사가 이를 악물었다. 손아귀가 찢겨 나간 것 같은 격통이 느껴졌다.

'뭐야 이건?'

힘 싸움에서 완패했다. 아무리 가토가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고 한들, 이 정도 격차는 예상치 못했다.

이를 악문 리사가 튕겨 나간 검을 붙잡았다. 여기서 패배를 인정하기에는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지 못한다.

리사가 검을 붙잡고 그대로 내려찍으려 했지만, 가토의 움직임이 더욱 빨랐다.

몸을 회전한 가토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리사의 목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리사는 오싹함을 느꼈다.

"오케이, 거기까지."

그 순간 에단이 연무장에 난입했다. 에단이 왼손으로 가토의 검을 붙잡고, 마나를 두른 오른손으로는 리사의 칼을 붙잡았다.

가토가 멀뚱거리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가토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적당히 하다가 져 주려고 했는데.'

몸을 비트는 순간 발이 꼬여 자빠지는 것까지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 순간 에단이 나타났으니 당황할 법도 했다.

"그럼 오늘은 무승부로 할까? 또래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에단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반달처럼 휜 에단의 눈이 리사에게로 향했다.

그 눈을 본 리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제기랄.'

마음 같아서는 왜 끼어들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리사는 그 순간 패배를 직감했다.

아니, 패배를 직감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공포를 느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또래에게 완패한 것으로 모자라, 그런 감정까지 느꼈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리사가 붉어진 얼굴로 가토를 노려봤다.

"너, 이름이 가토라고 했지?"

"...네."

"두고 봐."

리사가 몸을 휙 하고 돌리며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에단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하여간 성질하고는. 누구를 닮아서 저러는지 원...."

에단이 혀를 차며 말하자, 가토가 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성격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만....'

가토의 시선을 느낀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왜? 뭐 할 말 있어?"

씨익 웃는 에단의 모습에 오싹함을 느낀 가토가 빠르게 부정했다.

"아닙니다. 할 말 없습니다."

"그래서? 내 여동생이랑 대련해 본 감상은 어때?"

"아... 그게.... 상당하시던데요?"

"풉."

가토의 대답에 옆에 있던 네이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이런 식의 반응이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네이드는 애초부터 가토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가토는 그간 많은 실전을 겪었고, 매일같이 성장했으며, 네이드는 그것을 매일 지켜보고 있었다.

"네이드."

"네, 도련님."

"그 표정 좀 그만 지으면 안 될까? 뭔가 섬뜩해."

"...주의하겠습니다."

"어, 부탁 좀 하자. 그건 그렇고 헨리는 왜 얼굴을 안 비춰?"

"헨리 씨는 따로 할 게 있다고...."

"하여간 짱 박히는 솜씨하고는."

에단이 혀를 차며 에밀라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내가 이겼네?"

"...무엇이 말입니까?"

"어떻게 보면 각자 애제자끼리의 대결 아니었나?"

애제자라는 단어에 가토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막상 이런 말을 들으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에밀라의 시선이 가토를 훑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탐나는 인재이기는 합니다만...."

"욕심내지 마."

에단이 히죽 웃으며 가토의 어깨를 두드렸다.

"반응들 보여?"

에단이 학생들을 가리켰다. 리사를 상대로 우위를 점한 가토의 모습에 학생들이 감탄하고 있었다.

가토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고, 휴고는 묘하게 뾰로통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여간 애들하고는.'

실력과는 별개로 하는 짓들이 귀여웠다.

'이쯤 되면 학생들에게 각인은 시켜 뒀고.'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에단이 휴고를 향해 손짓했다.

휴고가 에단 앞에 서자, 에단이 말했다.

"휴고."

"네, 도련님."

"우리 어디 좀 같이 가자."

"...같이 말입니까?"

"어, 헨리도 데려갈 거야."

휴고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안감을 느꼈다.

"...가, 가토는 같이 안 가나요?"

휴고의 발언에 가토가 쌍심지를 켜며 휴고를 노려봤다. 하지만 휴고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누구 하나라도 더 끌고 가는 게 중요했다.

"어. 얘는 여기 두고 갈 거야."

"왜, 왜요? 왜 저만...."

"너는 가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머릿수가 많아 봤자 좋을 거 없는 일이야. 왜? 나랑 가기 싫어?"

에단이 눈살을 좁히자, 휴고가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좋아, 그럼 됐네. 그리고 휴고."

"...네?"

"헨리 좀 찾아와."

"제가요?"

"그럼 내가 찾으리?"

"...알겠습니다."

헨리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에단이 웃음을 삼키며 휴고의 어깨를 두드리자, 휴고는 축 처진 어깨로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네 코가 좋잖아.'

휴고는 후각이 뛰어났다.

◈ [147화] 뜻밖의 수확 (1)

휴고가 연무장 밖을 나섰다.

'하아.'

깊은 한숨이 나왔다. 아카데미는 넓었다. 광활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헨리 씨는 도대체 어딜 가 계신 거야.'

헨리를 향한 원망도 조금 들었다.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다니.

'대체 어떻게 찾....'

킁킁.

휴고의 코가 벌렁거렸다. 헨리를 찾으려고 마음먹으니 그녀의 채취가 조금 느껴지는 것 같았다.

풀 내음 같은 풋풋함과....

'...술 냄새?'

코를 자극하는 알코올 냄새가 느껴진다.

"설마...."

휴고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아닐 것이라 생각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큰일 났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 사실을 에단이 알게 되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불똥이 튈 거야.'

헨리가 혼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에단이 버릇처럼 말하는 '연대책임'이 문제였다.

휴고가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저기...!"

그때 한 여학생이 휴고의 곁으로 다가왔다. 휴고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힐긋 옮겨졌다.

평소의 휴고라면 다가온 학생의 말을 들어 봤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타닷!

휴고가 지면을 박차며 뛰어나갔다. 바람이 휘몰아치며 휴고의 신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학생은 눈을 끔뻑이며 사라진 휴고를 바라봤다.

* * *

'슬슬 그쪽 일들도 정리해야지.'

가시가 박힌 것처럼 찝찝했다. 진작에 뽑았어야 할 잔가시였지만, 다른 일들이 산재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대충 묶어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잘된 일이었다. 하나씩 따로 해결하려 들었으면 머리털이 빠졌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엿 같네.'

원래라면 자신이 아닌 주인공이 개처럼 굴러야 했다.

그런데 주인공이란 놈은 온데간데없고 자신만 지금 뭐 빠지게 일하고 있었다.

'대충 틀어막기는 했지만.'

지금 같은 요행이 언제까지 통할지는 알지 못했다.

'렉사르가 벌써 움직일 줄은 몰랐어.'

추적하는 사자.

렉사르는 주인공을 괴롭게 하던 악역 중 하나였다. 존재 자체가 떡밥이며 이질적인 캐릭터.

'생각 없는 작가 놈.'

어째 제대로 회수한 떡밥이 없었다. 던지는 건 작가 놈이고, 회수하는 건 주인공의 몫이었는데 그 사이에 낀 애먼 자신만 고생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가토에게 시선을 던졌다.

에단이 물끄러미 가토를 바라보자, 가토가 흠칫하며 에단의 눈치를 살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가토야."

"네."

"좋냐?"

에단이 피식 웃으며 가토를 바라봤다. 가토의 입꼬리가 씰룩이고 있었다. 리사를 이긴 게 꽤 흥분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실력 많이 늘었던데?"

"감사합니다."

"그래, 성장한 것은 축하해야 마땅한 일이지."

가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에단의 말을 듣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갑작스러운 금칠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기쁘기보다는 불안이 먼저 들었다.

"오랜만에 나랑도 몸 좀 풀어 볼까?"

"...네?"

"잘 안 들렸나? 간만에 몸 좀 풀자고."

가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토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습니다. 이미 몸은 충분히 풀린 것 같습니다. 구태여 더 신경 써 주시지 않으셔도...."

"가토야."

"네, 도련님."

"시끄럽고 그냥 검 들어."

"...."

가토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가토가 어두운 표정으로 검을 들었다.

우득, 우드득.

에단이 히죽 웃으며 손을 풀었다.

'...제기랄.'

가토는 휴고가 원망스러웠다.

* * *

"크으으.... 이거지!"

헨리가 입술을 닦아 내며 탄성을 내뱉었다. 비록 변두리로 좌천되었다고는 하나, 헨리도 아카데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때가 있었다.

과거에는 그 시간이 천년만년 이어질 것 같았다. 취업을 기념하며 큰맘 먹고 질렀던 고급술.

아카데미 안에 꽁꽁 숨겨 뒀던 녀석이다.

'보고 싶었다.'

그동안 이 녀석을 얼마나 되찾고 싶었단 말인가?

하지만 명분과 기회가 없었다. 아카데미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으니까. 실적도 없었기에 자포자기한 상태로 여관이나 주점을 전전했다.

'꼴좋다! 레벨린 그년 그럴 줄 알았어.'

이번 일에 대해 대략적인 경위를 들었다. 레벨린이 저지른 악행들과 수작질.

'...제기랄.'

통쾌하기보다는 입맛이 썼다. 헨리는 얼굴을 찌푸리며 입에 술병을 갖다 댔다.

술이 목울대를 넘어가려는 찰나, 덜컥 문이 열렸다. 헨리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문을 열고 등장한 자는 휴고였다.

"헨리 님! 여기서 대체 뭘 하고...!"

휴고가 큰소리를 내며 갑자기 들이닥치자, 헨리는 놀라 목을 부여잡았다.

"커, 커헉!"

사레가 크게 들린 것인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휴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헤, 헨리 씨! 괜찮으십니까?!"

휴고가 안절부절못하며 급히 다가가려 했지만, 헨리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무력한 그녀가 아니었다. 이까짓 상황쯤은 충분히 대처할 수가 있었다.

헨리가 마나를 끌어올렸고, 휴고는 코를 킁킁거렸다. 풀 내음 같은 풋풋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마나가 흘러나왔다. 헨리의 얼굴이 평온을 되찾았다.

그 모습을 보며 휴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깜짝 놀랐네요...."

"놀란 건 휴고 씨가 아니라 저 아닌가요? 그런데 대체 여기는 어떻게...."

"큼, 크흠. 에단 도련님께서 헨리 씨를 찾습니다."

"저를요? 대체 왜.... 어? 근데 저건 뭐죠?"

헨리가 벽 쪽을 가리켰다. 벽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휴고도 그제야 발산하는 빛을 눈치챘는지 눈을 끔벅였다.

"...저게 뭐죠?"

헨리가 술병을 놔두고 몸을 일으켰다. 올라오던 취기는 마나를 이용해 모두 날려 버렸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벽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뭐지?'

느껴지는 기운. 뭔가 이질적이면서도 친숙했다. 헨리가 가진 기운은 복합적이었고, 어느 한쪽에 치우쳐지지 않았다. 헨리가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마나를 주입했다.

덜컥.

벽이 쑥 하고 들어갔다. 옆에 다가온 휴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헨리가 침을 꿀꺽 삼키며 손을 떼자 공간이 생겼다.

헨리가 긴장과 흥분 가득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설마 숨겨진 금은보화가?'

당당해질 수 있는 기회.

더 이상 에단에게 책을 잡힐 이유가 없었다.

'혹시라도 빚을 갚고 남는다면....'

꿀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침이 고였다. 헨리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자세히 들여다보자 작은 공간이 보였다.

"아...."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본 헨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작은 공간에 있는 것은 책 몇 권이 전부였다.

"...그럼 그렇지. 뭐야 이게."

하아.

헨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일이 그렇게 술술 풀릴 리가 없었다.

그사이 휴고는 책을 꺼내 읽어 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내용이지?"

휴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서류들이었지만, 휴고가 이해하기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었다.

"뭔데 그래요? 그래 봤자 돈 안 되는...."

헨리가 책을 건네받아 눈으로 훑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본 책의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게 무슨...?"

헨리의 입이 천천히 벌려졌다.

* * *

가토가 바닥에 엎어진 채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부들부들.

가토의 몸이 가늘게 경련했다.

'괴, 괴물....'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어디 가서 무시당할 수준은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에단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극명한 실력 차이. 진검을 들고도 에단의 옷자락조차 건들지 못했다.

흠씬 두들겨 맞았다. 곡소리가 절로 나오게 얻어터졌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에단의 폭력은 예술에 가까웠다.

이렇게 죽을 것같이 아픈데 다친 곳은 없었으니까.

가토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그때 헨리가 호들갑을 떨며 달려왔다.

"에, 에단 님!"

달려오던 헨리와 휴고가 엎어져 있는 가토를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

헨리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한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는 거지?"

"그, 그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호오, 지금 말을 돌리는 거야? 아니면 내 말을 무시하는 거야?"

"죄, 죄송... 앗, 잠깐만 이것부터 봐 주세요!"

헨리가 몇 권의 책을 에단에게 건넸다. 에단은 헨리를 흘겨보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또 무슨 쓸데없는....'

종이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에단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에단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이거 어디서 찾았냐?"

"그게... 꿍쳐 뒀던 술을 마시다 보니 어쩌다.... 아, 그게 아니라...!"

"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잘했어."

에단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휘었다. 사소한 문제는 그냥 넘어가도 좋을 정도로 책에 적힌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뜻밖의 선물을 주고 가는군.'

레벨린이 급하게 떠나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더 쉽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 책은 장부였다.

그것도 뇌물과 비자금 등의 거래 내역이 빽빽하게 적혀 있는.

'더럽게 많이도 해 먹었네.'

받은 것도 있고, 매수한 것도 있었다. 장부에 적힌 이름들은 하나같이 거물들이었다.

'아주 태평하시구먼.'

중앙 정계 귀족을 시작으로, 왕족과 신성 왕국의 주교들.

'딱 이용해 먹기 좋은 놈도 하나 있네.'

한니발.

안 그래도 얼굴 한번 보려 했던 녀석의 이름까지도 적혀 있었다. 오고 간 금화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발 걸치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깊게 들어와 있었네.'

안전한 곳인 줄 알고 머리를 들이민 곳이 사자의 아가리 속이었다.

에단이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때, 휴고가 손가락으로 가토의 몸을 쿡쿡 찔러봤다.

'...살아 있나?'

조금 걱정스러웠다.

* * *

교직원들이 보충되었다. 그것도 블란테의 정예이다. 검증이 필요하지 않은 인원들이다.

학생들의 불만도 사그라들었다. 블란테의 기사들 앞에서 볼멘소리를 내뱉을 만큼 간 큰 학생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밀라의 부담이 크게 해소되었다.

'정말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어.'

아카데미는 빠르게 정상화가 되어 갔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에단이 등장하자 모든 것이 해결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혼자서 모든 것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여기 있었네?"

에단이 다가오고 있었다. 에밀라가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대뜸 전하는 감사 인사에 에단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내가 말했지? 걱정하지 말라고. 뭐, 아직 안심하기는 이른 상황이지. 이제 시작이니까."

"...네."

에단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지금 느끼는 평화는 일시적이었다. 블란테가 나섰기에 얻은 안정화.

'블란테이기에 얻을 수 있던 평화이지만....'

블란테이기에 많은 반발도 있을 것이다.

◈ [148화] 뜻밖의 수확 (2)

블란테가 아카데미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륙 전역에 퍼질 게 분명했다.

권력자들은 결코 블란테의 진출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위협이 될 만한 존재를 철저히 견제하고 배제하는 것.

그게 그녀가 알고 있는 귀족들이었다.

'...정말 가능할까?'

에단의 계획은 들었다.

대륙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위험천만하고 무모한 계획이다.

'...하지만.'

에단이라면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에단의 얼굴에는 한 치도 걱정이나 의심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을 보자, 그녀가 품고 있는 고민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거지?"

"...아닙니다."

"내가 또 할 일이 생겼거든? 대충은 알고 있지?"

"...바로 가시는 겁니까?"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떠난다는 말인가.

야속함이 들었다. 에단이 에밀라를 말없이 바라봤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놀러 가냐?"

황당하다는 듯 물어 오는 에단의 말에 에밀라가 미간을 좁혔다.

"제 표정이 뭐가 어때서 말입니까?"

"나도 귀찮음을 무릅쓰고 가는 거니까 시비 걸지 말고, 넌 따로 뭐 좀 하고 있어라."

"...뭘 말씀이시죠?"

에단이 서류 몇 장을 건네줬다. 헨리가 가져온 장부의 사본이었다.

서류를 받아 들어 훑어보던 에밀라의 눈이 점차 커졌다.

"이건...."

"익숙한 이름이 있나?"

"네. 레벨린 님이 저와 함께 이동할 때 만났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어. 조만간 네가 해야 할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수업에 대한 부담은 꽤나 줄었겠지? 아무렴 블란테가 검술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마다할 녀석이 누가 있겠어?"

"...."

배려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에단의 언행에 에밀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그렇게 얼굴 구기지 마. 여기 있는 동안 노인네 옆에서 기술이나 좀 익혀."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죠?"

"아, 너는 아직 모르겠구나?"

에단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아명의 모티브. 아무래도 원조한테 배우는 게 여러모로 낫지 않겠냐?"

"그게 대체 무슨...."

에단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밝은 달."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에단의 말에 에밀라의 몸이 흠칫했다.

"명색이 새벽의 달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제대로 배워 봐야 하지 않겠어?"

"설마...."

에밀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빨리 가 봐. 말은 해 뒀으니까."

배울 거면 제대로 배워야지.

* * *

떠날 채비는 빠르게 끝났다. 인원이 적은 만큼 마차는 필요하지 않았다.

'마부도 없고.'

가토가 따라나서지 않는 이상 말과 마차는 짐에 불과했다. 말들은 본능적으로 휴고를 두려워했으니까.

구태여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에단은 이미 빈센트와 다른 인원들에게 떠난다는 언질을 해 놨다.

"그럼 잘 좀 부탁드립니다."

"건방진 놈."

빈센트가 눈살을 좁히며 말했다. 에단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은 있느냐?"

"제가 누구 아들인데요."

"여전히 입은 살았구나."

"제가 언제 증명 못 할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래, 이번에도 어디 한번 지켜보도록 하지."

"그럼 고생 좀 해 주십쇼. 제가 큰 거 하나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그전까지는 자신 있으시죠?"

에단의 물음에 빈센트가 코웃음을 쳤다.

"너야 말로 나를 뭐로 보는 게냐?"

"노파심에 한번 해 본 소리였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씨익 웃은 에단이 몸을 돌렸다.

다음 에단이 향한 장소는 드레이가 있는 곳이었다. 드레이는 에단이 따로 마련해 둔 연무장에서 끙끙 앓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나?"

능글맞은 표정으로 등장한 에단을 향해 드레이가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냈다.

"왜 그렇게 죽상을 쓰고 있어?"

"...그걸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드레이가 성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체 저건 뭡니까?! 정말 성검이 맞습니까? 무슨 욕을 이렇게.... 저 이러다가는 정신병 걸릴 것 같습니다."

드레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퀭한 눈빛을 보니 허언이나 과장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불쌍한 새끼.'

에단은 드레이의 절절한 마음을 백분 이해했다. 에단이 몸소 겪던 일인데 어떻게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검은 더 이상 에단에게 크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다.

에단보다 드레이가 쥐는 것이 훨씬 효율이 높았다.

드레이의 한탄을 들어주던 에단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여동생 구하기 싫어?"

"...!"

드레이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걸 어떻게...."

"내가 그것도 모르고 너한테 저걸 쥐여 줬겠어?"

에단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드레이를 바라봤다. 서늘한 시선에 드레이의 얼굴이 굳었다.

"정 힘들겠으면 말해. 네가 거기까지인 거니까."

에단의 무덤덤한 말에 드레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방법이... 있는 겁니까?"

"내가 말했지, 쫄지 말라고. 신성 왕국? 뭐 어쩌라고?"

에단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우리는 블란테야. 정면으로 붙으면 우리가 밀릴 것 같아?"

오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에단의 말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자신감에는 분명한 힘이 있었다.

드레이가 입술을 깨물며 에단을 바라보았다. 분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에단이 핏발 선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부족한 건 명분뿐이야. 내가 말했잖아. 저걸 소화 못 하겠어? 그러면 포기해도 돼."

"...정말로 저 검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면 그 빌어먹을 새끼들 상대로 숨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그러면 여동생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드레이의 물음에 에단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안 믿겨?"

그 순간, 에단이 몸속에 잠재되어 있던 기운을 끌어올렸다.

에단의 몸속에는 바다 같은 마나가 잠들어 있었다. 조금만 깨워도 충분하다.

쿠우우우우―!

머리칼과 옷자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압도적인 위압감에 드레이의 눈이 부릅떠졌다.

드레이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몸을 짓누르는 마나에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끄으으...."

드레이의 입술 사이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에단이 가볍게 방출해 낸 기운에 드레이는 호흡조차 통제를 당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에단이 마나를 거뒀다.

압박하던 기운이 사라지자, 드레이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토해 내는 드레이는 그 잠깐 사이에 머리와 옷이 푹 젖을 정도로 많은 양의 땀을 흘렸다.

드레이가 공포에 젖은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이래도 못 믿겠어?"

"...당신은 대체 뭡니까?"

드레이의 물음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무슨 놈의 질문이 그딴 식이야? 반대로 네가 뭐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어?"

에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드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대충 납득했으면 어떻게든 성검의 인정을 받아. 다시 말하지만 너는 그 뭣 같은 신성 왕국에 엿을 먹일 수 있는 희대의 조커 카드니까."

"...."

까드득.

드레이가 이를 악물었다. 드레이의 얼굴이 결의로 가득 찼다.

이제 드레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에단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후우, 살았다.'

― ...정말 그게 전부냐?

에단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자, 페온이 묘한 어투로 물었다.

'그게 전부겠습니까? 카이나 님을 진즉에 떼버리고 싶었습니다. 속이 다 시원하네요.'

― 큭큭큭 그럴 줄 알았다. 카이나가 이 말을 들으면 아주 볼 만하겠군.

'허, 페온 님은 아니던 것처럼 말하시는군요.'

― 내가 언제 아니라고 했느냐? 죽을 맛이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다.

'역시 그렇죠?'

― ...다시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군.

큭큭큭.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 * *

"으으으."

헨리가 침울한 얼굴로 에단과 휴고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기억을 되찾고 힘을 얻으며 체력이 좋아지기는 했으나, 에단과 휴고와 비교할 수준은 되지 않았다.

안락한 마차 위에 있다가 직접 발을 놀리려고 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벌써부터 발에 물집이 잡힐 것 같았다.

'그러지는 않겠지만.'

헨리는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조금 걷는다고 물집이 잡힐 리가 없었다.

에단이 이동하는 도중 품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에단이 수정구에 마나를 주입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가면을 쓴 얼굴이 수정구에 비쳤다.

에단이 배시시 웃었다.

"잘 지냈냐?"

―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죠?

메이는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촌각을 다투는 정보 길드의 특성상 한시라도 빨리....

"내 말은 말 같지도 않다?"

―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에단 님께서는 건강하신가요?

"나야 뭐, 바빠서 힘들지."

에단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이유라는 걸 알아차린 메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지금 수많은 목격담과 증언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거기서 파생된 예측과 가설들이 우후죽순 퍼지고 있습니다.

"그럴 거 같았어."

에단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메이는 그런 에단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남 일이 아닌,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한데도 저런 여유로운 태도라니.

― ...뭔가 방책이 있는 겁니까?

무모하고 생각 없이 일을 벌이는 것 같지만, 언제나 에단은 계획하에 움직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라면 메이는 그 계획을 알고 싶었다.

에단이 수정구를 휴고에게 던졌다. 휴고가 헐레벌떡 수정구를 받아들었다.

"이쪽으로 돌려."

에단의 말에 휴고가 뾰로통한 얼굴로 수정구의 방향을 에단에게 조정했다.

에단이 메이 앞에서 서류 뭉치를 흔들었다. 그 모습의 메이의 눈살이 좁혀졌다.

― ...그건 뭐죠?

"실망인데? 명색이 정보 길드라는 녀석들이 눈치도 없어?"

― ....

"비밀 장부."

― 비밀 장부라고요?

"고리타분한 이름이지만 그만큼 확실한 게 없잖아?"

― 설마....

메이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에단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비밀 장부에 엮여 있는 사람이 예사롭지가 않다는 것이다.

"레벨린 본인의 관한 내용은 쏙 빠졌지만, 그년이랑 거래한 녀석들은 수두룩 빽빽하던데?"

― 이런 미친....

"내가 퍼트려도 상관없겠지만, 알다시피 블란테의 힘으로 소문을 내봤자 한계가 있으니까."

에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에단은 블란테 사람이다. 블란테는 이미 아카데미를 먹었고, 지금 상황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을 퍼트려 봤자 사람들의 반응은 미지근할 것이다.

― ...그래서 저희들을 이용하겠다는 건가요?

"이용이라는 말은 어감이 좀 그렇네. 어차피 너희들도 이거 퍼트리면서 필요한 이득은 죄다 취할 거잖아. 상부상조라고 하자고."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자, 메이의 볼이 파들거렸다.

― 좋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그건 그렇고 기분이 좀 상하네. 내가 너희들 좀 이용하면 안 되냐?"

― ....

정신 못 차리네.

어?

◈ [149화] 서열 정리 (1)

협상의 탈을 쓴 협박이 끝나자, 메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되는 게 없구나.'

에단과의 대화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쉽지 않았다. 에단이 언변이나 심계가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자신감, 그리고 그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

그 두 가지를 갖추고 있었기에 에단과의 협상은 이뤄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우리가 굽히기도 했고.'

정보 길드는 에단의 휘하에 있었다. 처음에는 절망했지만 돌이켜 보면 나쁜 선택지가 아니었다.

'세상은 격동하고 있어.'

그리고 그 격동에는 블란테가, 아니, 에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블란테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세간의 시선은 블란테에게 집중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다른 이들은 블란테가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저 장부.'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 분명했다.

'판도가 바뀌겠군.'

그 블란테가 명분이라는 검을 들고 휘두른다니. 상상만 해도 섬뜩함이 절로 들었다.

'...그건 그렇고.'

메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에단이 물었다.

"왜 갑자기 한숨이야?"

― ...잭슨을 기억하십니까?

"아, 그 녀석?"

기억하고 있었다. 꽤나 봐줄 만한 격투술을 구사하던 녀석이기도 하고, 에단이 정보 길드와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와준 녀석이었으니까.

"기억하고는 있는데 무슨 일이지?"

― 최근 블란테와 접촉을 시켰는데,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연락 두절?"

에단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어린애나 아녀자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실종을 당한단 말인가.

'아버지가 처리했을 리는 없고, 산맥을 오르다가 실종됐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확률은 희박했다. 만일 그랬다면 빈센트가 먼저 언급을 했을 터.

'뭐, 별다른 일은 없겠지.'

있어 봤자 동굴 안에서 시답잖은 짓거리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어차피 한번 들를 생각이었으니까.'

에단이 턱을 긁적이며 생각하다 물었다.

"근데 그걸 왜 지금 말하냐?"

― 네?

"아니, 이제 와서 말하면 어쩌라고?"

― 그게 무슨....

"쯧, 귀찮게 하네. 어차피 가문에 들를 생각이 있었으니까 가긴 하겠는데, 다음에는 미리미리 잘 좀 하자? 아, 이건 그 녀석 찾으면 건네주든가 할게."

에단이 그대로 통신을 끊었다.

뚝.

* * *

부들부들.

수정구는 더 이상 에단의 얼굴을 투영하지 않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부들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

"이... 개 같은 놈아!"

메이가 괴성을 내질렀다.

* * *

"흠...."

통신을 끊은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가려곤 했지만."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가문에 들를 생각이었다.

'녀석들도 한번 봐야 하고.'

시킨 건 잘하고 있으려나?

동굴 속에서 훈련하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 가 보면 알겠지.'

시킨 걸 잘하고 있으면 맞지 않을 테고, 탱자 탱자 놀고 있다면 뒈지게 맞을 테니까.

"그러려면 좀 빨리 움직여야겠는데?"

일행은 마차가 없다. 심지어 요리를 담당하던 네이드가 없고, 그를 보조하던 가토도 없었다.

블란테의 영지는 대륙의 끝 쪽 변두리에 위치해 있다. 중심에 가까운 아카데미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휴고와 헨리를 바라봤다. 멀뚱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에단이 이마를 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휴고야."

"네? 무슨 일이시죠?"

"헨리 업어."

"...네?"

이번에 대꾸한 것은 헨리였다. 헨리의 반응에 에단이 날 선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들 굶고 싶어?"

"...아니요."

그제야 상황을 인지한 헨리가 고개를 숙였다. 이 속도로 움직이다가는 답이 없었다.

"그럼 뛰자고."

헨리가 군말 없이 휴고의 등에 업혔다.

타닷!

에단이 지면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하자, 휴고가 그 뒤를 따랐다.

"꺄아아악!"

헨리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둘이 질주하는 속도는 어지간한 명마보다도 빨랐다.

'하아.'

결국 고생은 나만 하는구나.

휴고가 한숨을 내쉬며 에단의 뒤를 따랐다.

* * *

블란테의 기사들이 대열을 갖춘 채 움직이고 있었다. 가문으로 복귀하는 무리들이었다.

기사들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기사들 사이에 맴돌았다.

들려오는 것은 말발굽 소리와 절그럭거리는 쇳소리뿐이었다.

'...더럽게 거슬리네.'

기사들이 한 인물에게 눈총을 주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주범이자, 귀에 거슬리는 소음의 원인이었다.

렉사르.

렉사르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걷고 있었다.

'베일에 싸여 있던 녀석이라 궁금하긴 했는데, 막상 까고 나니까 별거 없잖아?'

렉사르는 전투 내내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다. 나중에는 심지어 에단에게 목덜미를 잡혀 바닥을 뒹굴었다.

'추적하는 사자.'

블란테 내에서도 명성을 떨치던 이름. 그 실체는 생각보다 허무했다. 기사들은 저마다 조소 섞인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렉사르는 아무 반응 없이 묵묵하게 움직였다.

'...제기랄 불안한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론은 초조함을 느꼈다. 뭔가가 불길했다. 이대로 놔두면 경을 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아무 사달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나설 수는 없었다. 카론은 불안감을 삼킨 채 걷고 있었다.

'제발 조용히 가자.'

카론이 보기에 렉사르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불쾌한 심기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카론은 최대한 렉사르와 거리를 벌린 채 걷고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접점이 없도록 만들고 있던 것이다.

'제발 무탈하게 복귀하게 해 주세요.'

저 눈치 없는 기사들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타다닷!

그때 지면을 박차는 소리에, 행군하던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렉사르였다. 렉사르가 흉흉한 얼굴로 뒤를 노려봤다.

"아직 이쪽에 있었네?"

다가서던 에단이 히죽 웃으며 카론을 바라봤다. 카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여기에 왜!'

"이 새끼가 여기에 왜 있냐는 표정인데?"

웃음기 어렸던 에단의 얼굴이 사납게 돌변하자, 카론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나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정말이야!"

"농담 한 번 한 거 가지고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이야."

"하, 하하...."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하자, 카론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죽이고 싶다.'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생각만 할 뿐이지, 그 생각을 에단 앞에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에단이 천연덕스럽게 기사들을 훑어봤다. 개중에는 렉사르의 얼굴도 보였다.

'숨길 생각도 없군.'

에단이 코웃음 쳤다. 렉사르의 표정은 이미 노골적이었다.

자신을 향한 적의.

그리고 뒤늦게 휴고가 다가오자, 휴고에게로 향한 누런 시선.

'마침 잘됐어.'

실타래를 풀기에는 지금이 적기였다.

'언젠가는 해소해야 할 테니.'

주인을 무는 개 따위는 기를 가치가 없었다. 렉사르는 주인을 물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렉사르의 주인이 에단이 아닌, 빈센트였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이 되면 언제든지 반항하겠네.'

그러기 전에 제대로 교육을 해 줄 필요성이 있을 것 같았다. 에단이 시선을 돌려 휴고를 바라봤다.

확실히 헨리를 업은 채 에단을 따라오기는 벅찼는지, 상기된 얼굴로 땀방울을 조금 흘리고 있었다. 휴고가 옷소매로 땀방울을 닦아 냈다.

'아직은 무리겠군.'

만용을 부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괜히 휴고가 상처 입는다면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뭐, 가끔은 명분을 생각해야겠지만.'

주인을 물려는 개한테까지 그 명분이 필요한가?

필요한 것은 몽둥이가 아니던가.

'응어리를 푸는 건 좋다 이거야.'

하지만 풀려면 응당한 힘이 필요하다.

에단이 팔장을 낀 채 조소를 지었다. 에단의 얼굴을 바라보던 렉사르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야, 렉사르."

에단의 비아냥 섞인 목소리에 카론이 화들짝 놀랐다.

'아, 제발....'

카론이 속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가.

카론의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에단의 눈이 휘었다.

"너, 인정 못 하고 있지?"

"무슨 말...."

렉사르 특유의 거북한 목소리가 들리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목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됐고. 어떻게 할래? 이대로 숙이고 들어갈래, 아니면 한 번 더 해볼래."

"...."

"이건 기회를 주는 거야. 오늘 여기서 처발리면 그냥 너는 끝인 거고."

"...어이가 없군."

"어이가 없는 건 나고. 너 설마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에단이 히죽 웃으며 손을 들었다. 기사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알아서들 피해."

에단의 말이 끝나자, 가장 먼저 카론이 부리나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기사들도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는지 몸을 피하며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아, 도련님.'

휴고도 한숨을 내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 이제 내려 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아, 네...."

헨리가 휴고의 등 위에서 내린 뒤 고개를 저었다.

"휴우, 진짜 십년감수한 기분이네요."

에단과 휴고가 질주하는 속도는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경주마보다도 빠른 속도를 겪다가 내려오니 머리가 핑 돌았다.

'그래도 이걸 놓칠 수는 없지.'

헨리가 눈을 빛냈다. 이런 흥미로운 상황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휴고가 묘한 시선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는 달라졌다. 과거처럼 겁에 질려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바뀌었네.'

달라진 것은 휴고도 매한가지였다. 헨리도, 휴고도, 에단을 만나면서 바뀌었다.

둘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일을 벌일지 궁금함이 들었다.

에단이 팔장을 풀며 손을 뻗었다. 에단이 검지를 까딱이며 말했다.

"뭐 해? 나 바쁘거든?"

"...언제까지 건방을 떨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그래, 기대할게."

차르르륵.

차가운 금속음이 울렸다. 렉사르의 품 안에서 수많은 칼날이 이를 갈았다.

개중 몇 개의 칼날이 에단을 향해 비산했다. 불시에 튀어나온 공격이다. 에단이 가볍게 고개를 젖혀 피해 냈다.

촤르르르륵!

렉사르가 사슬을 잡아당겼다. 에단을 향해 쏘아진 날붙이에는 모두 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금속으로 된 칼날이 마치 올가미처럼 에단을 휩쓸기 시작했다. 에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싸는 사슬과 칼날을 바라봤다.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거지?"

렉사르가 으르렁거리며 경고하자, 에단이 콧방귀를 뀌었다.

"긴장이 되게끔 만들어 줘야 내가 여유를 부리지 않겠어?"

콰직!

에단이 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렉사르의 입가가 비틀렸다. 거칠게 연마된 사슬이다.

이전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 마나까지 입혀 놨다. 그런 사슬에 손을 가져다 대다니.

하지만 렉사르의 조소는 금세 무색해졌다. 에단의 왼손이 사슬을 움켜쥐자, 섬뜩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콰드드드득!

불똥이 거칠게 비산했다. 에단이 악력을 가하자 춤추던 사슬이 멈췄다.

뚝.

렉사르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너는 학습 능력이 없냐?"

꽈악!

에단이 사슬을 움켜쥔 채 끌어당겼다. 렉사르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만, 에단 앞에서는 무의미할 뿐이었다.

쭈욱!

렉사르가 허무하게 끌려갔다. 에단과 렉사르의 거리가 한순간에 가까워졌다.

가까워진 렉사르를 향해 에단이 말했다.

"반갑다?"

에단이 사납게 미소 지었다.

◈ [150화] 서열 정리 (2)

렉사르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지금 네가 그런 말을 할 처지인가?"

에단이 렉사르를 비웃으며 사슬을 움켜쥐었다. 마치 짐승의 목줄을 움켜쥔 것 같았다.

'제기랄!'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았다. 에단의 힘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감안했다. 마나 또한 최대한으로 활용했건만 대처할 수가 없었다.

렉사르가 사슬을 놓았다. 품 안에서 섬뜩한 외향의 톱날 검을 끄집어냈다.

"하여간 겉멋하고는."

에단이 피식 웃으며 사슬을 놓았다. 렉사르의 검격이 벼락처럼 에단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마나가 넘실거리는 일격이다.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저것은 명확한 살초였다. 설마 가문의 적통인 에단을 향해 살초를 던지다니.

쾅!

하지만 그런 것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는 에단이 지면을 내려찍었다. 에단의 발에는 마나가 실려 있었다.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지진이 인 것처럼 지면이 흔들렸다. 에단이 왼쪽 손등으로 칼날 검을 후려쳤다.

쾅!

이번에도 강렬한 굉음과 함께 렉사르의 검이 허무하게 부러졌다. 렉사르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게 끝이야?"

그럼 이제 내가 보여 줄 차례인데.

에단이 살벌한 웃음과 함께 렉사르에게 접근했다. 렉사르의 동공이 흔들렸다. 에단이 어떤 공격을 해 올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짐승 같은 누런 동공이 에단의 몸을 주시했다.

"너무 티 내는 거 아니냐?"

에단이 손바닥을 펼쳐 렉사르의 시야를 가렸다. 렉사르가 이를 갈았다. 에단의 손을 피해 시야를 확보하려는 순간, 복부에 묵직한 통증이 일었다.

"커헉!"

렉사르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내장이 진탕되는 엄청난 고통이 동반되었다.

퍼엉!

렉사르의 신형이 거칠게 날기 시작했다. 렉사르가 날아가는 방향을 향해 에단이 질주했다.

타다다닷!

순식간에 렉사르에게 도달한 에단이, 렉사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고 있어?"

후웅!

에단이 멱살을 움켜쥐자, 렉사르의 세상이 반전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을 느끼며 렉사르는 암담함을 느꼈다.

쾅!

렉사르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대지가 다시금 요동쳤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휴고가 눈을 가리며 애도를 표했다.

'저런 미친 새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론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에단이 과거보다 성장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달라진 기세만 봐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설마 이 정도나 압도적일 줄이야.

전투의 양상은 에단이 압도적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렉사르의 가슴팍에 에단의 발이 올라갔다.

꾸욱.

에단이 발을 지그시 누르자, 렉사르가 입을 벌리며 신음성을 토해 냈다.

"뭐야, 너 이거밖에 안 돼?"

실망한 듯한 에단의 어조에 렉사르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봤다.

"노려보면 어쩌려고."

꼬우면 좀 세든가.

콰직!

에단이 발로 렉사르의 배를 밟았다.

"크억!"

렉사르의 입이 벌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에단이 쓰러져 있는 렉사르의 멱살을 움켜쥐어 들어 올렸다.

렉사르와 에단의 눈높이가 맞춰졌다. 렉사르의 눈은 죽지 않았다. 여전히 사납고 끈적이는 안광으로 에단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건 마음에 드네."

에단이 히죽 웃으며 렉사르를 노려봤다.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지?"

렉사르는 에단을 알고 있다.

한번 먹잇감은 영원한 먹잇감이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자신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에단은 자존심만 강한 피식자였다. 블란테와 어울리지 않는 약자, 그게 바로 에단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렉사르의 원초적인 질문에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난 원래 더럽게 셌어."

이 몸뚱어리의 주인이 약했을 뿐이지.

류태신은 단 한 번도 약자의 위치에 선 적이 없는 포식자였다. 그것은 지구에서도, 여기서도 매한가지였다.

감히 자신에게 어금니를 드러내는 상대는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에단이 움켜쥔 멱살을 놓자, 렉사르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섰다.

"자, 아직도 만족 못 했지?"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털며 말했다. 그 모습에 렉사르는 섬뜩함을 느꼈다.

'...내가 두려움을 느낀다고?'

믿을 수 없었다.

렉사르는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자신의 본능을 부정했다.

렉사르가 다시 한번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너 무슨 도라이몽이냐?"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무슨 놈의 무기가 끝도 없이 나온단 말인가.

"...."

렉사르는 대답 없이 날붙이를 꺼냈다. 이번에 꺼낸 건 이전과 비교해서 꽤나 단출한 무기였다.

짧은 톱날 단검.

'톱날 한번 더럽게 좋아하네.'

에단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뒤 자세를 갖췄다.

"어디 납득할 때까지 한번 해 보자고."

여기서 죽여 버리기는 아까운 녀석이다. 가주와 첸, 네이드를 제외한다면 가문 내에서 최상위 전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매가 약이지.'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에단이 원하는 것은 완벽한 서열 정리. 그러기 위해서는 렉사르가 먼저 나서서 굴종해야만 했다.

'그러면 어디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렉사르가 말없이 에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변에는 정적이 흘렀고, 두 사람 모두 선뜻 나서지 않았다.

지루한 대치 상황에 에단은 권태감을 느꼈다.

"에휴."

짧은 한숨과 동시에 에단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렉사르의 눈이 커지며 누런 동공이 에단을 좇았다. 에단의 이동 경로를 향해 렉사르가 단검을 휘둘렀다.

달려 나가던 에단이 순식간에 제동을 걸었다. 에단의 신형이 뚝 하고 멈췄다.

렉사르의 얼굴에 당황의 기색이 스쳐 갔고, 단검이 에단의 눈앞을 스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빠악!

에단의 다리가 렉사르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렉사르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아프냐?"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카프 킥.

상대가 먼저 자멸하고 포기하기를 원한다면 이 기술이 가장 베스트였다.

에단은 렉사르를 다리부터 천천히 좀먹을 생각이었다.

쐐액!

렉사르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에단이 렉사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제 좀 예상이 되나?"

렉사르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거리를 벌리려 들었다. 하지만 에단의 발이 더 빨랐다.

푸욱!

이번에 노린 곳은 정강이가 아니었다. 에단의 발끝이 렉사르의 명치를 꿰뚫어 버릴 것처럼 박혔다.

"커헉!"

렉사르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에단은 그 순간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빠악!

사정없이 휘두른 로우 킥, 강력한 타격음과 함께 렉사르가 다리를 절뚝이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안 움직여?"

에단이 악마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닦달했다.

― 어쩌다가 이런 놈이....

페온이 에단을 지켜보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에단의 본성에 감탄만이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이들의 감상도 다르지 않았다. 휴고는 아예 보기가 힘들었는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힘내시길.'

휴고가 렉사르의 명복을 빌었다. 에단이 저 표정을 짓게 되면 만류할 수가 없었다.

빠악!

"커헉!"

빠아악!

"크억!"

빠아아악―!

"어쭈? 발이 멈춘다?"

렉사르가 절뚝이면서 몸을 움직이지만 소용없었다. 최적의 컨디션일 때도 에단을 뿌리치지 못했는데, 지금처럼 만신창이가 된 하체로 에단을 쫓는 것은 불가능했다.

퍽!

다리를 방어하기 위해 의식을 집중하고 있을 때마다, 복부에 발이나 무릎이 꽂혔다.

"꺼, 꺼어억...."

렉사르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호흡에는 제약이 걸렸다.

렉사르의 눈에서 번들거리는 살기 대신 미약한 두려움이 감돌기 시작했다.

에단이 쪼그려 앉아서 렉사르를 내려 봤다.

"뭐 해? 일어서지 않고?"

렉사르가 고개를 들어 에단과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렉사르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만족할 때까지 해 주겠다고."

그 모습에 렉사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공포라는 것을.

* * *

렉사르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에단은 손바닥을 털어 내며 렉사르를 흘겨봤다.

'대충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이 정도면 반항심은 어느 정도 누그러진 것 같았다. 렉사르의 본성은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웠다. 블란테의 정체성과도 흡사한.

약육강식.

이번에 서열을 확실히 정리하고 입증했으니, 당분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걸리는 건 나중에 밝히면 그만이야.'

렉사르의 존재는 이질적이다. 원작에서 몇 차례 언급되던 떡밥이 있었으나, 회수되기 전에 류태신은 에단에게 빙의되었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으니.'

쯧.

에단이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에단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표정이 묘했다.

"야, 카론."

에단이 대뜸 이름을 부르자, 카론의 몸이 움찔했다.

"왜, 왜?"

카론이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너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이상해?"

"어, 존나."

'하다 하다 표정 가지고 난리냐!'

카론이 속으로 에단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에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만 후볐다.

"쟤 깨우면 알아서 잘 달래고. 나는 먼저 간다."

"...어디로 가는데?"

"영지로."

"영지에는 왜?"

카론의 물음에 에단이 살벌하게 웃었다.

"궁금해?"

"...아니, 몰라도 될 것 같아."

"잘 생각했어. 가끔 모르는 게 약인 경우도 있으니까."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기사들을 훑어봤다.

'마차를 타고 가면 느리겠지?'

아무리 에단의 체력과 신체 능력이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한들, 뛰어다니는 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적당한 놈 하나 마부로 부리면....'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에단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에단이 몸을 돌려 휴고를 향해 다가갔다.

"돌아가자."

"...넵."

휴고는 한 차례 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나 거침없이 구타를 퍼부었는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니....

경외심을 넘어서 공포까지 느껴졌다. 휴고가 고개를 피한 채 서 있자,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가자."

에단이 물끄러미 헨리를 바라보자, 헨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시선을 뜻을 알아차린 헨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또 업혀요?"

"나한테 업힐래?"

"...아, 아니요."

헨리는 휴고에게 다가가 등 위에 폴짝 올라탔다.

'...말이 된 기분이네.'

휴고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하지만 에단에게 토로할 수는 없었다. 괜히 꼬투리를 잡혀 렉사르처럼 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럼 가자."

에단이 지면을 박차자 순식간에 블란테의 기사들과 멀어졌다. 휴고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에단에게 따라붙었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론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입을 벌렸다.

"...쟤네 뭐야?"

...무슨 사람이 말보다 빨라?

셋의 모습이 벌써 점으로 보였다. 카론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다짐했다.

'진짜 상종도 하지 말아야지.'

에단과 엮이면 좋은 일이 없었다.

◈ [151화] 새로운 계획 (1)

일행은 게이트가 있는 도시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아무리 둘의 발이 빠르다 한들 그 먼 거리를 쉬지 않고 주파할 수는 없었다.

도시에 도착한 일행은 지체 없이 곧장 게이트를 이용해 영지 인근의 도시로 이동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요."

"그럴 수밖에."

헨리의 말에 에단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변방을 호령하던 블란테가 예고 없이 움직였으니 전운이 감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쟁이 될 수도 있고.'

상대가 굴복하지 않고 이빨을 들이민다면 어쩔 수 없었다.

'칼을 뽑아야지.'

대륙의 규합은 결국 에단의 과제였다. 분열된 상태로는 지하 놈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아무 데나 잡자고."

날이 저물고 있었다. 에단은 특출한 것 없는 무난한 여관 하나를 선정해 들어갔다.

허름하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은, 적당한 여관.

에단이 들어서자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세요. 방이 필요하신가요?"

"인원은 세 명. 방은...."

에단이 고개를 돌려 헨리와 휴고를 흘겨봤다.

휴고와 헨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은 기색을 풍겼다. 그 모습에 에단은 고개를 저으며 주인에게 물었다.

"방이 얼마나 있죠?"

"방은 많습니다. 각자 따로 드릴까요?"

"부탁드리죠."

"알겠습니다. 식사도 하시겠습니까?"

주인의 물음에 에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끼니를 거른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기회가 있을 때 적절한 열량을 섭취하는 게 좋았다.

"그것도 부탁드리죠."

"알겠습니다. 금방 준비해 드리죠. 방은 위쪽에 빈방이라고 쓰여 있는 곳 아무 데나 쓰시면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주인은 주방을 향해 사라졌다. 에단과 일행이 계단을 올랐다.

"방이 많군."

에단이 중얼거렸다. 주인이 따로 객실을 안내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의 대부분의 방에 빈방이라는 팻말이 적혀 있었다.

'이것도 블란테의 영향인가.'

엄밀히 말하면 이 지역은 블란테의 영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블란테라는 거물의 입김이 닿는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블란테의 최근 동향이 심상치 않은 만큼 뒤숭숭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각자 적당한 방으로 흩어져 짐을 풀었다. 사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대부분 빈손으로 온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대략 하루 정도인가."

에단과 휴고가 제대로 뛰기 시작하면 영지까지 하루면 충분하다.

'가문에 들를 필요는 없으니.'

곧장 산맥을 오를 생각이었다.

에단이 짐을 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는 몇몇의 테이블만 차 있었고 대부분 한산했다.

에단이 적당한 테이블에 앉아 있자, 주인이 먼저 맥주 한 잔을 가지고 왔다.

"잘 마시지."

에단이 피식 웃으며 은화 하나를 건네자, 여관 주인이 고개를 숙였다.

에단이 대충 맥주를 마시고 있자, 휴고와 헨리가 내려왔다. 헨리는 벌써부터 맥주가 그리운 듯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에단 옆에 앉은 휴고는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했다.

"도련님, 하나만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말해 봐."

"가문에 들르는 이유가 뭔가요?"

휴고의 질문에 헨리도 궁금하다는 기색을 띠었다.

에단은 말없이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글쎄, 뭘 것 같아?"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가문 내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나 보지 않았습니까? 구태여 지금 가문으로 복귀하는 이유가...."

'이 녀석은 모를 만하군.'

에단이 고소를 머금었다. 휴고는 그곳에 들렀지만 기억이 없었다.

"가 보면 알아."

에단의 의미심장한 대답에 휴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단은 그 이상 설명해 주지 않았다.

백 번의 대답보다 한 번의 설명이 중요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주인이 금세 음식과 맥주 두 잔을 추가로 내왔다. 꽤나 먹음직해 보이는 음식이었다.

'그래도 역시 현대와 비할 바는 아니지.'

음식 맛은 평이했으나, 현대의 자극적이고 깔끔한 맛과는 비할 바가 없었다.

"정말 전쟁을 준비한다고?!"

"...쉿! 이 사람이, 어디서 큰일 날 소리를...!"

그때 일행의 귀를 파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화를 경청했다.

"아니, 가만히 있던 블란테가 뭣 하러 전쟁을 준비한단 말이야?"

"정기 토벌 아니면 꼼짝도 않던 블란테가 움직이는 이유는 당연하지 않나? 지금 파다한 소문이 그것에 관한 얘긴데, 자네는 귀라도 먹은 건가?"

휴고와 헨리도 대화를 들은 건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달그락.

셋은 별다른 대화 없이 맥주 한 잔과 음식을 비웠다. 헨리는 맥주가 더 고픈 듯 보였지만, 어림도 없었다.

* * *

새벽이 되자 일행은 빠르게 움직였다. 구태여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낼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헨리가 눈을 비비며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가 미묘한 표정으로 헨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등을 내밀었다.

폴짝.

헨리가 휴고의 위에 올라탔다. 이제는 민망하지도 않은지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럼 가자."

"하암, 네에∼"

"...."

헨리가 하품을 내뱉으며 대답했고, 휴고는 고개를 저었다.

타닷.

에단이 지면을 박차며 달리기 시작하자, 휴고가 곧장 그 뒤를 따랐다. 풍경이 빠르게 변화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다.

'이제는 체력 훈련도 힘들겠네.'

에단의 육체는 이미 마스터의 반열에 오르며 벽을 부순 상태였다.

당연히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어지간해서는 지치지가 않는다.

자고로 신체는 한계까지 몰아붙여야 성장하는 법이었지만, 에단의 신체는 웬만해서는 지치지 않았다.

에단이 힐긋 뒤를 바라봤다. 휴고의 호흡이 조금은 거칠어졌다.

'이 녀석을 단련시키기는 아직 충분하겠어.'

에단이 속도를 올리자, 휴고가 이를 악무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에단이 웃음을 머금었다.

* * *

"하나!"

"흐읍! 후우!"

우렁찬 기합 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기괴한 조합이다. 웃통을 까고 있는 남정네들과 몬스터, 그리고 밤의 일족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대열을 갖춘 채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절도 있는 모습.

"둘!"

"흐읍! 후우!"

줄리엔의 구령에 맞춰 사람들(?)의 팔이 움직였다.

가슴에 자극을 유지하며 행하는 수축과 이완에 그들은 모두 열의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버겁습니까?!"

"그럴 리가!"

줄리엔의 물음에 가장 먼저 벨몬트가 대답했다. 벨몬트는 더 이상 앙상하고 가녀린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비록 우람한 몸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보기 좋은 몸이었다. 짧은 시간을 감안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벨몬트는 난생처음으로 열정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가 뜨거운 시선을 교환했다. 비좁은 동굴에는 진한 땀 냄새가 가득했지만, 불쾌해하는 기색을 띠는 자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셋!"

"흐읍! 후우!"

줄리엔의 구령이 이어지자, 다시금 몸이 움직였다. 모두 일제히 팔이 굽혀지고, 펴졌다.

자극을 온전히 느끼며 모든 신경을 집중하던 그 순간에.

터벅.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을 기울이지 않은 채 모두 근육의 자극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너희들 뭐 하냐?"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제야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허억."

헛숨을 마시는 소리와 함께 남성 하나가 바닥에 엎어졌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선량한 시민이었던 자신들을 악몽에 몰아넣었던 얼굴.

"뭐 하냐고."

재차의 질문에서 불쾌한 심기를 감지해 낸 줄리엔이 섬광처럼 달려와 에단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 말씀하신 대로 훈련 중이었습니다!"

"그래? 대답이 늦은 건 훈련 때문이지?"

"그렇습니다! 모두 근육 한 올 한 올 자극을 느끼며 최대한의 집중을 발휘...."

"사족은 집어치우고."

말을 끊은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선이 향한 줄리엔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등줄기에 소름이 타고 올랐다.

"너 누구냐?"

"...네?"

줄리엔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아니, 누구냐고."

"...줄리엔입니다."

"줄리엔?"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자,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아, 네가 그 추잡하게 생긴 산적이야?"

"...."

무례하기 그지없는 언행에 줄리엔이 입을 다물었다.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것 같았다.

쪼그려 앉은 에단이 줄리엔과 눈을 마주쳤다.

'...제기랄 다시 봐도 오금이 저리네.'

숱한 사람을 만나 온 줄리엔이었지만, 에단처럼 살벌하기 그지없는 눈빛은 처음 겪었다.

줄리엔이 마른침을 삼키며 에단의 대답을 기다리자, 에단이 감탄하는 얼굴로 줄리엔을 바라봤다.

"이야, 수염 좀 밀었다고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지? 어울리지 않게 이름이 곱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이랑 매치가 잘되네."

"...감사합니다."

여기서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숙였다.

에단이 몸을 일으켜 뒷짐을 쥐었다. 수컷의 진한 향취가 가득했다. 그 말인즉, 땀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다는 소리.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리니 휴고는 거의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이 안쓰럽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휴고의 후각은 인간보다 극도로 예민한 편이었으니 이런 반응을 보여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에단은 천천히 사람과 군데군데 속해 있는 몬스터들을 훑어봤다.

'이건 뭔 놈의 조합이야?'

낯섦을 넘어서 황당함이 느껴졌다. 에단이 기가 차다는 눈으로 저편을 바라보니 벨몬트의 얼굴이 보였다.

에단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다?"

"...."

벨몬트가 어두운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벨몬트의 몸을 바라본 에단이 작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과거 피죽도 못 먹은 몸을 하고 있던 벨몬트가 지금은 나름대로 보기 나쁘지 않은 몸이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군."

낮게 깔리는 벨몬트의 음성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군?"

"그대 덕분에 적지 않은 성취를 얻었다."

"다?"

"위대한 밤의...."

"야, 내 말 씹냐?"

에단의 눈초리가 사나워지자, 벨몬트가 순식간에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그래, 처음부터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뭐 나름 시킨 대로 잘한 것 같긴 한데.... 보고는 나중에 듣고."

에단이 휴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린 채 있는 헨리와 창백한 얼굴로 구역질을 하던 휴고가 고개를 들었다.

"우욱! 도련님, 이건 너무...."

휴고가 고개를 들어 에단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벨몬트를 향해 시선이 돌아갔다.

"...."

"...."

순간 주변에 정적이 맴돌았다.

"...설마 저 녀석은."

벨몬트가 설마 하는 그때, 휴고의 동공이 가늘어지고....

"지금은 안 돼."

빠악!

에단이 뒤통수를 후려치자, 휴고는 그대로 머리부터 바닥에 엎어졌다.

쿵!

지면에 쓰러진 휴고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152화] 새로운 계획 (2)

에단이 동굴 안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한 통보에 가까웠음에도 생각보다 훌륭했다.

시킨 운동도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운동들로만 구성했다.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맨몸 스쾃.

제대로 단련을 시키기 위해 했다기보다는, 가만히 놔두기는 뭐했기에 한 지시 사항이다.

그런데 꽤나 놀라운 성과를 보여 주고 있었다. 다들 근육이 붙고 있었으며, 근질도 나쁘지 않았다.

'잠재력이 뛰어나기 때문인가?'

그런 확률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정도 수준까지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짧은 시간 내에 몸 상태를 이 정도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던 데엔 다른 요인이 있을 터.

"...너 뭐 했냐?"

설마 약이라도 했나?

에단이 그런 의심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의심쩍어하는 에단의 눈초리에 벨몬트의 표정이 바뀌었다.

"흐흐."

음습한 웃음이 곧 광오한 얼굴로 바뀌었다. 에단이 미묘한 얼굴로 벨몬트를 바라봤다.

― ...쟤는 또 왜 저러더냐?

'제가 알겠습니까.'

페온의 물음에 에단이 고개를 저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녀석이었다.

"하하하하하하!"

벨몬트가 광소를 터트리며 에단을 바라봤다.

"궁금하더...."

"시끄러워."

"...."

순간 싸늘한 정적이 맴돌았다. 에단은 쓸데없는 소리에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뭘 한 거냐고."

"...남은 게 있나?"

벨몬트가 시무룩한 얼굴로 뒤를 바라보며 묻자, 줄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남은 게 몇 개 있습니다."

벨몬트의 손짓에 줄리엔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에단은 눈을 끔뻑거리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야?'

에단은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기로 했다. 에단이 기다리고 있는 사이 줄리엔이 컵 하나를 가지고 왔다.

에단이 눈살을 좁히며 컵을 받아 들었다. 컵의 외향은 펑범했지만, 내용물이 심상치 않았다.

"이게 뭔데?"

겉으로 보기에는 우유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우유라고 보기에는 진득하니 점성이 높았고, 냄새 또한 비릿했다.

그리고 가장 특이한 점은 묘하게 붉은빛이 감돌았다.

'딸기 우유야?'

에단이 많은 의미가 담긴 시선을 던지자, 줄리엔이 헛기침을 했다.

"큼큼! 이건 바로 벨몬트 님이 개발하신...."

"내가 말하지."

벨몬트가 뚜벅뚜벅 다가와 에단의 앞에 섰다. 흔들리는 동공이 긴장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벨몬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건...."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듣던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벨몬트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이게 몬스터의 젖이랑 피를 정제해 가지고 만든 거라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정말 그 과정을 말로 설명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이거 믿어도 돼?"

에단이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찰랑거리는 액체를 바라봤다.

전말을 듣고 보니 더 거북한 비주얼이다. 몬스터의 젖과 피라니. 얘기를 듣고 있던 헨리의 얼굴도 창백하게 질렸다.

― ...제정신이 아니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에단이 진중한 얼굴로 벨몬트와 줄리엔, 그 밖의 인물들을 바라봤다.

시킨 운동에 비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성과다.

'거의 약이나 다름없네.'

이해는 된다. 벨몬트가 아무리 반쪽짜리 뱀파이어라고 한들 밤의 귀족이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혈액에 관해서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위자나 진배없었다.

혈액을 이용해 타인을 세뇌하고 권속까지 만들 수 있는 판국에, 근 성장에 이로운 영향을 주는 성분만 추출하는 일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우유니까 단백질도 상당하겠고.'

그걸 감안하더라도 효능이 궁금했다. 역겨움이 치밀었지만 궁금증이 앞섰다.

에단이 눈을 질끈 감고 액체를 입에 가져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아...."

"저 아까운 걸...."

반대로 헨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저걸 먹는다고?"

벌컥벌컥.

에단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마침내 내용물을 모두 비우고 에단이 입을 닦아 냈다.

'생각보다 그렇게 역하진 않은데?'

냄새와 비주얼이 좋지 않아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각처럼 최악은 아니었다.

에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벨몬트가 씨익 웃었다.

"어떻습니까? 당장은 효과가 느껴지지 않아도 운동을 동반하면...."

"됐고, 이거 무슨 몬스터 젖으로 만든 거야?"

"좋은 질문입니다. 다양한 사전 샘플이 필요했던 만큼 다양한 몬스터들을 목록에 올려...."

"그래서 뭐로 만들었냐고."

에단의 눈빛에 짜증이 감돌았다.

"오크입니다."

"오크?"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정체를 들으니 생각보다 더 속이 안 좋았다.

'그래도 근 성장에 좋으니까.'

근육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데, 그 정도 거북함은 참을 수 있었다.

"최근 씨가 마르긴 했지만 다행히 이 근방에는 몬스터가 바글바글합니다. 그래서 꽤나 많은 시험품은 만들 수 있었지만...."

벨몬트가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금 말했다.

"일정 수준을 넘어가는 몬스터는 따로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우거나, 블랙 오우거 같은...."

벨몬트의 말을 들은 에단의 표정에 흥미가 맴돌았다.

"그 말인즉, 재료만 구해 오면 더 성능 좋은 보충제를 만들 수 있단 말이냐?"

보충제라는 말이 뭔가 걸렸지만, 대충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벨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더 강하고 질긴 근육을 가진 녀석의 피와 우유로 만든 보... 충제가 더 뛰어난 효능을 발휘했습니다."

"흠...."

에단이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서식지는 알고 있나?"

에단의 말뜻을 알아챈 벨몬트가 반색하며 답했다.

"알아 두고 있습니다. 꽤나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하지만요."

"좋아, 그건 뭐 나중에 같이 가면 되고."

"네...?"

같이? 그게 무슨 소리지?

벨몬트가 순간 귀를 의심하며 에단을 바라봤지만 에단은 제대로 된 해명을 해 주지 않았다.

"야, 거기."

에단이 삿대질을 하며 한쪽을 가리키자, 구석에서 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낯설지 않은 얼굴, 바로 잭슨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냐?"

에단이 씨익 웃으며 잭슨을 바라봤다. 혈색을 보아하니 대답을 듣지 않아도 잘 지낸 것 같았다.

'쓸데없이 오래 있기는.'

대충 근황만 확인하려고 시킨 일이었는데, 지낼 만했는지 죽을 치고 있었다.

에단이 묘한 눈초리로 잭슨을 훑어봤다.

'이것 봐라.'

잭슨의 몸 또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정말 이 보충제가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에단이 품에서 서류 더미를 꺼내 획, 하고 잭슨에게 던졌다.

"...이게 뭡니까?"

잭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뜸 서류 뭉치를 받아 들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읽어 봐."

에단의 말에 잭슨이 천천히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별생각 없어 보이던 잭슨의 눈이 서서히 커져 갔다.

"이, 이건...."

잭슨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손뿐이 아니었다. 거칠게 흔들리는 잭슨의 눈이 에단을 향했다.

"...이거 진짜입니까?"

"그럼 날조해서 줬겠냐?"

에단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잭슨을 바라봤다.

"그, 그럼 이게 정말...."

"그래. 뭐, 꽤나 성대하게 했더군. 이걸 왜 두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레벨린과 그녀의 측근들이 증발하듯 사라지며 대부분의 물건들은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급했다고 한들 이 정도 되는 장부를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두고 간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얘기를 들어 보니 죽은 마나에 반응한 것 같기는 한데....'

헨리가 사용하는 마나는 정확히 말하자면 죽은 마나가 아니었지만, 죽은 마나를 내포하고 있는 기운이었다.

만일 특수한 마나에만 반응하는 장치가 있었다면 헨리의 마나에 반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안일했거나.'

예기치 못했거나.

어찌됐건 에단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에단이 잭슨을 바라봤다.

"그거 들고 슬슬 이동해."

"...이동 말입니까?"

잭슨이 멀뚱멀뚱 에단을 바라보자, 에단이 얼굴을 구겼다.

"복귀 안 해?"

"아.... 해야죠...."

시원찮은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잭슨이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처음 보는 검 한 자루를 채웠다.

"처음 보는 거다?"

"받았습니다."

"받아? 누구한테?"

"...가주님에게요."

"아버지가?"

나한테는 안 주고?

잭슨이 경계하는 눈초리로 칼을 숨겼다. 에단이 그런 잭슨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안 훔쳐 가니까 걱정 마. 일 처리 뭐같이 하면 회수할 수도 있지만...."

"아니, 이걸 왜 에단 님이 회수합니까?"

"우리 아버지가 준 거라며?"

그럼 그게 내 것이기도 한 거지 뭐.

이어지는 에단의 말에 잭슨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뺏기기 싫으면 이제부터 열심히 해야겠지?"

"...."

잭슨이 똥 씹은 얼굴로 채비를 갖췄다. 슬슬 복귀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거 아직 터트리지는 말고, 천천히 정보나 모아 둬."

"정보를요?"

"어. 어차피 너희들 그런 거 수집하는 직업이잖아. 대충 불법 도박이니, 인신매매니, 약물이니 하는 것들. 강렬하고 자극적인 거 위주로 모아."

"...그것들이 왜 필요합니까?"

"궁금해?"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자, 오한이 든 잭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빨리 움직이기나 해."

"...넵."

잭슨이 그대로 동굴을 뛰쳐나갔다. 에단이 시선을 돌려 벨몬트를 바라봤다.

"자, 그럼 보충제를 찾으러 가 볼까?"

근 성장의 기회는 참을 수 없었다.

* * *

벨몬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에단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배신자들.'

벨몬트가 치를 떨었다. 동질감과 전우애를 공유하던 사이였지만, 막상 에단이 등장하자 모두가 벨몬트를 외면했다.

'힘들게 만든 걸작도 나눠 줬건만!'

수많은 시행착오와 배탈 끝에 근육 발달에 있어 최적의 음료를 만들어 냈다. 그런 귀하고 소중한 것을 베풀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외면뿐이었다.

벨몬트가 터덜터덜 숲을 거닐기 시작했다.

그때 에단의 옆에 서 있던 헨리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휴고 씨는 언제 일어날까요?"

"휴고? 대충 때 되면 깨우면 되지."

"아...."

헨리가 침음을 흘렸다. 휴고의 처우가 너무 처량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쓸데없는 말을 내뱉을 만큼 헨리는 담이 크지 않았다.

"이쪽 맞아?"

"확실합니다. 안 그래도 녀석의 영역을 피하고 적당한 녀석을 물색하기 위해 찾아다니던 터라.... 그, 음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시다시피...."

"그래, 알아. 암컷이어야 하고, 죽이지 말고 제압해야 한다고?"

에단의 말에 벨몬트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태연해?'

죽이지 않고 제압이라. 말은 쉬웠지만, 그 대상이 블랙 오우거다.

지금 찾는 블랙 오우거는 이전에 에단이 상대한 놈과는 다르게 완전한 성체였다.

'...믿어도 되는 걸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 [153화] 창단 준비 (1)

쿠어어어!

블랙 오우거가 포효하자, 보는 이들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만들고 심신을 얼어붙게 만드는 피어가 발산되었다.

하지만 에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를 후비고 있었다. 이미 두 차례나 상대한 녀석이다 보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벨몬트는 바들바들 떨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미, 미친! 이 녀석을 잡는다고?'

이미 에단이 한 차례 토벌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아성체와 완전한 성체와의 간극은 매우....

"시끄러워."

퍼억!

무지막지한 기세로 달려오던 오우거가 에단의 가벼운 발길질 한 방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믿기지 않은 모습의 벨몬트가 눈을 부릅떴다.

'이게 무슨....'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장성한 블랙 오우거를 무슨 동네 똥개 대하듯이 걷어찬단 말인가.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똥개와 다를 바 없이 블랙 오우거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는 것이었다.

우지직! 우지끈!

블랙 오우거가 굴러 가며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주위의 모든 것을 박살 내고 있었다.

벨몬트가 입을 벌리며 블랙 오우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걸 죽이지 않고 제압하면 된다는 거잖아."

끄덕끄덕.

더는 말도 나오지 않는 탓에 벨몬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이 씨익 웃으며 바닥을 뒹구는 블랙 오우거를 바라보다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휴고에게 시선을 옮겼다.

"언제까지 자고 있으려고?"

빠악!

"허억!"

에단이 휴고의 뒤통수를 재차 가격하자, 휴고가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 무슨 일 있으십니...."

"...."

휴고의 눈이 벨몬트와 마주쳤다. 휴고의 동공이 서서히 좁아졌다.

"자, 간만에 스트레스 좀 풀자."

크르르.

휴고의 야성이 눈을 뜨고 있었다. 벨몬트는 사색이 된 얼굴로 에단과 휴고를 번갈아 바라봤다.

"자, 네 상대는 저기 있네."

에단이 휴고를 내려놓고는 블랙 오우거를 향해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