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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화] 세계수 (4)

죽은 마나에 잠식당한 인간.

불길함이 형상화되어 넘실거린다. 꺼림직하고 섬뜩한 기운이 숲을 메웠다.

에단이 발을 내딛자, 네이드가 에단을 불렀다.

"도련님."

"어, 괜찮아."

에단이 가볍게 손을 들며 네이드의 걱정을 일축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뿌려 둔 씨앗을 흡수한 녀석은 강했다.

'하지만.'

에단은 이미 저따위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녀석을 상대로 승리했다. 고작 저런 조잡한 급조물 따위에 겁을 집어먹을 이유가 없었다.

"쓰읍."

오히려 입맛이 돋았다.

이미 에단이 흡수한 죽은 마나는 과분할 정도로 넘쳐흘렀지만, 에단의 욕망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멀었어.'

고작 이 정도 수준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온갖 특전을 독식한 주인공도 헤쳐 나가지 못한 길이었기에 현실에 안주해 있을 수는 없었다.

파이론이 힘을 갈망했던 것처럼, 에단도 똑같은 갈증을 느꼈다.

검은 안광에서 흘러나온 맹렬한 적의가 에단에게로 향하자, 피부가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 저릿한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던 에단은 씨익 웃었다.

"뭘 꼬나봐?"

콰득!

에단이 발을 내딛자 지면이 움푹 파였고, 순식간에 검은 형체 앞에 도달했다. 에단의 팔에는 죽은 마나가 넘실거렸다.

콰앙!

에단의 주먹이 키얀을 향해 휘둘러졌다. 빠르게 팔을 든 키얀이 주먹을 막아 냈다.

에단의 입가가 비틀렸다.

내지르던 손을 펼쳐 역으로 키얀의 손목을 붙잡았다.

꽈아악!

에단이 힘을 주어 키얀의 손목을 움켜쥐자, 순식간에 죽은 마나가 에단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

키얀이 괴성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발광했다. 힘을 갈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저항하는 듯싶었다.

"시끄러워."

에단이 붙잡은 손을 당기며 그대로 키얀의 다리를 걸었다.

후웅―!

키얀의 몸체가 흔들렸다. 지면을 짚기 위해 팔을 내디뎠지만, 키얀을 마중 나온 것은 에단의 주먹이었다.

콰직!

검은 얼굴이 뒤로 꺾였다. 에단이 키얀을 붙잡고 있는 손을 놓는 동시에 주먹을 내질렀다.

빠악!

에단의 주먹이 키얀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키얀의 몸이 넘어가려 하자, 에단이 그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붙잡은 팔을 휘감으며 에단이 몸을 돌렸다. 키얀의 골반이 에단의 허리에 밀착됐다.

퉁―

키얀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가 그대로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콰앙!

큰 충격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에단이 무심한 눈으로 키얀의 얼굴을 짓밟았다.

콰직! 콰직! 콰직!

수차례 짓밟던 에단이 키얀의 몸 위에 올라탔다. 에단의 허벅지가 키얀의 갈비뼈를 짓눌렀다.

고통에 찬 신음 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키얀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상처가 빠르게 아문 키얀은 검게 물든 안광으로 에단을 주시했다. 눈이 마주친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뭘 봐?"

에단이 팔을 들었다. 이윽고 에단의 팔꿈치가 키얀의 얼굴을 으깨기 시작했다.

콰직! 콰직! 콰직!

에단이 무심한 듯 서늘한 표정을 지은 채 쉬지 않고 파운딩을 날렸다. 에단의 소매가 찢어질 정도로 무참한 파운딩이었다.

팔꿈치가 꽂힐 때마다 키얀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면서도 에단은 죽은 마나의 흡수를 멈추지 않았다.

그걸 지켜보던 키아나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 저런 미친....

― ...이놈이 원래 손속이 좀 과해.

― 네 눈은 썩은 오크 눈이냐? 저게 손속이 조금 과한 정도라고?

카이나가 어이없어하며 페온의 말에 답했다. 이건 손속이 과한 정도가 아니었다.

에단은 카이나의 예상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승부는 생각보다 쉽게 결판날 수 있었다.

성검의 힘을 적극 활용한다면 보다 수월하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 그런데 이 녀석은....

성검의 힘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성검을 버리거나 등한시한 것은 또 아니었다.

보험을 위해 에단은 검을 쥐고 있었다. 에단은 한 손만으로 적을 제압한 채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서.

카이나는 그런 에단의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 너보다 더한 새끼가 있을 줄이야....

― ....

페온은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에단은 둘의 대화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죽은 마나의 추출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이제 이 정도로는 큰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군.'

거북함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기껏 최후의 방법을 시전한 녀석이었지만,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모든 힘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물을 것도 없으니.'

어차피 이 녀석도 끄나풀에 불과했다. 에단이 찾는 것은 그보다 뒤에 있었다.

콰직!

에단이 마지막 엘보우를 무심하게 가격하자, 키얀이 파이론과 마찬가지로 검은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에단이 콧방귀를 끼며 몸을 일으켰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미간을 좁혔다.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지만.'

균형이 뒤틀리고 있다는 점이 느껴졌다. 죽은 나무의 힘으로 제약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죽은 마나는 본래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페온의 도움으로 부정적인 부분들을 최대한 덜어 내고 있음에도 한계가 있었다.

'서둘러 진행해야겠어.'

대부분의 문제들은 끝났다. 이제 세계수의 복원만이 남았다.

에단은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네이드와 가토, 르니엘과 툰나가 말없이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르니엘의 얼굴은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말 용사님이 맞나요?"

울먹이기까지 하는 말투였다.

에단의 잔혹한 손속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툰나의 얼굴에도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 있었다.

"아닌데?"

용사 아니라고 말했잖아.

* * *

― ...언니.

― ...누나.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의 목소리였다. 동생은 그녀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동생을 떠올리며 버텼다. 동생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었다.

'그런데... 동생이 왜 언니라고 불렀다가 누나라고 부르지... 남자였나?'

자신의 전부이자 원동력이었던 동생. 가냘프고 병약해 자신이 돌봐 줘야만 했던 동생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나 어깨를 짓누르는 의무감과 중압감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얼굴과 목소리 등 모든 것이 희미했다.

흐릿한 잔상만이 헨리의 손을 붙잡았다.

― ...언니.

― ...누나.

― ...왜 나를 버렸어?

'아니야.'

나는 버리지 않았어.

바빠서 그랬을 뿐이야.

언제나 너만 생각하고 걱정해 왔어.

헨리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헨리의 외침은 어느 곳에도 닿지 않았다.

― ...이미 늦었어.

늦었다니?

대체 뭐가 늦었다는 거야?

그리 묻고 싶었다. 헨리는 답답함을 느꼈다. 이 몽롱함 속에서 어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다.

'에단 씨....'

그때 헨리의 머릿속에서 에단이 떠올랐다.

그가 있으면 복잡한 감정이 진정되고는 했다. 답이 없다고 생각되는 난제도 에단이 나서면 해결되었다.

'에단 씨가 오시면.'

이 악몽 속에서도 깨어날 수 있지 않을까?

동생의 원망 소리가 쉬지 않고 메아리쳤다.

― 왜 나를 안 구하러 왔어?

― 왜 나를 버린 거야?

― 언니.

― 누나.

헨리는 귀를 막고 싶었다. 지금 이 상황을 견디기가 버거웠다.

"적당히 징징거리지?"

그리고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이 어려 있는 익숙한 목소리. 날카로운 목소리였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음성이었다.

"...에단 씨?"

"어."

뒷말은 듣기 싫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에단이었다.

"늦었다고 했지? 미안한데 아직 안 늦었거든?"

"그게 무슨...."

"일단 불 좀 켜자."

이어지는 에단의 뒷말과 함께 그녀의 악몽이 끝났다.

화악!

헨리의 눈이 떠졌다.

"허억!"

헨리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귀찮게 할래?"

"에, 에단 씨?"

헨리는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그녀에게 천천히 상황을 설명해 주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일단 일부터 하자."

급한 불은 꺼야 할 거 아니야.

* * *

르니엘은 눈을 끔뻑이며 에단을 따라다녔다. 에단이 하는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곱씹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에단이 용사라고 확신했다. 에단이 보여 준 모습이 용사임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과연 용사가 맞을까?'

에단의 무력은 르니엘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강한 힘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를 지킬 수 있는 힘은 용사의 소양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

르니엘은 일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건 상대를 제압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보고 있는 사람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잔혹한 손속과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 확인 사살.

신성함과는 거리가 먼 소름 끼치는 검은 기운.

그리고....

르니엘은 똑똑히 보았다.

에단의 뒤에 떠올랐던 나무 한 그루의 형상을.

곧 죽을 것처럼 보이던 앙상한 나무는 풍요로운 생명력을 뿜어내던 생명의 나무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느낌을 보여 줬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느껴졌다. 귀곡성을 터트리며 생명을 갈구하는 목소리가.

르니엘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아니,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힘을 다루는 자가 과연 용사가 맞을까? 르니엘의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

확신할 수 없었다. 르니엘이 믿고 따르는 툰나는 아직 아무런 말이 없었다.

르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엘프가 누워 있었다.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누워 있는 엘프는 그녀가 가장 껄끄러워하는 자 중 하나였다.

'리트마....'

리트마는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고, 르니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리트마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리트마의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의 적의에 따져 묻지 않았다.

자신의 안일함이 마을과 숲을 위기에 빠트린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그럴 줄이야....'

헛웃음이 나왔다. 그 누구보다 르니엘을 힐난했던 리트마는 외부의 세력과 내통하고 있었다.

리트마는 상황이 안 좋아지자 망설이지 않고 적의를 내비쳤다.

수백 년을 함께해 온 자신과 일평생을 마을에 헌신했던 툰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바로 옆에 있던 툰나는 복잡한 얼굴의 르니엘을 빤히 바라봤다. 리트마는 르니엘이 데려온 외지인에 의해 저지당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에단은 망설이지 않고 행동했다. 주저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들을 찍어 누른 에단은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지금....

목걸이를 쥐고 있는 에단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에단이 쥐고 있는 목걸이.

그가 목걸이를 처음 꺼내 들 때 툰나는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툰나는 묻지 않았다.

그저 에단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봤다.

◈ [125화] 헨리 (1)

에단이 차가운 눈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는 잠에 빠져 있었다.

아주 깊은 잠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지금 무언가에 의해 붙잡혀 있었으니까.

에단이 목걸이를 들었다.

이건 촉매였다.

헨리의 의식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제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지.'

에단이 목걸이를 헨리의 몸 위에 올렸다.

지이이잉―

목걸이가 빛을 발했다. 따스한 온기와도 같은 빛이었다. 드레이가 뿜어낸 찬란한 광채와는 결이 다른 신성함이었다.

후웅!

보호막이 펼쳐지며 에단과 헨리를 둘러쌌다.

에단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무의식에 늪으로 빠져들었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무집이었다. 아니, 나무집이라고 부르는 것도 민망할 수준의 오두막이었다.

집 안에서는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상 물정 모르는군.'

겉으로 보기에는 자연 친화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숲속의 오두막.

에단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됐다.

'단열은 안 될 테고, 벌레는 들끓겠지. 기본적인 생활도 뭐....'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다. 비단 식재 조달만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이 고려할 문제는 아니었기에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걸었다.

에단이 한 걸음씩 다가가자 웃음소리가 점점 옅어졌다. 날이 어두워지고, 땅거미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숲의 어둠은 사나웠다. 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하지만 에단의 시야는 뚜렷했다. 이제 에단에게 어둠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흑흑흑."

헨리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은 에단이 문을 열었다.

쾅!

후웅!

바람이 휘몰아쳤다. 또다시 시야가 반전되는 상황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귀찮게 하는군."

에단이 앞을 바라봤다. 정체 모를 괴물이 에단의 앞에 서 있었다.

한참 위에서 에단을 내려 볼 정도로 거대한 괴물이었다. 이 정도 사이즈는 블랙 오우거 외에는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에단이 목을 비틀며 몸을 풀었다.

"그래, 뭐.... 이 정도 이벤트도 없으면 안 되겠지."

안 그러면 실망이지.

터벅터벅.

에단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괴물을 향해 걸어 나섰다. 괴물이 에단을 향해 포효했다.

"시끄러워, 이 새끼야."

에단이 웃었다.

* * *

쿠웅!

거인이 바닥에 쓰러진 걸 확인한 에단이 가볍게 손을 털어 내자, 그와 동시에 어둠이 걷히고 배경이 달라졌다.

에단의 얼굴에는 짜증이 맴돌았다.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하라는 거야?"

하지만 앞을 보아하니, 이번이 마지막인 것 같았다.

헨리가 보였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에단은 다른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에단은 죽은 나무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죽은 나무는 세계수와 상극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무엇보다 가까웠다.

에단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그의 앞에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지금 헨리를 비난하고 있었다.

에단이 발을 내디뎠다.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적당히 징징거리지?"

에단이 다가서자 어린아이들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에단은 동요하지 않았다.

"미안한데 아직 안 늦었거든?"

누구 마음대로 늦었단 말인가. 정말 늦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아이들의 표정은 표독스러웠다. 절망과 원망이 가득한 눈이었다. 에단이 콧방귀를 뀌었다.

헨리가 멍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일단 불 좀 켜자."

쾅!

에단이 땅을 구르자 응집된 죽은 마나가 폭발하듯이 전개되었다.

에단이 지닌 죽은 마나는 최근 포식을 한 터라 충만한 상태였고, 반대로 세계수는 지금 빈사 상태나 다름없었다.

'헨리한테 이럴 정도면 말 다 했지.'

그렇다고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다. 에단은 세계수를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니까.

죽은 마나가 퍼지며 순간 어둠이 짙어진 듯 보였지만, 순식간에 하얀 배경으로 바뀌었다.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눈이 팅팅 부은 헨리가 멀뚱멀뚱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왜 질질 짜고 있어?"

"...네?"

헨리가 황급히 눈물을 닦아 냈다. 이런 상황에서 구박을 받으니 서러움이 북받쳤다.

"하, 하지만...."

헨리가 다시 눈물을 터트리려 하자, 에단이 얼굴을 구겼다.

"울면 맞는다."

"...아, 알겠어요."

헨리가 울음을 삼켰다. 다른 건 몰라도 에단에게 얻어맞는 건 사양이었다.

에단이 사람을 패는 걸 수도 없이 봐 왔기에 알 수 있었다.

'죽을 거야....'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에단에게 맞아 죽을 생각을 하니 소름이 쫙 끼쳤다.

에단은 울음을 꾹 참고 있는 헨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에단이 씨익 웃었다.

"이제 좀 낫네."

"...너무해."

헨리가 작은 투정을 부렸다. 에단은 헨리의 말을 무시한 채 허공을 바라봤다.

"보고 있는 거 알거든?"

에단이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

"지금 안 내보내면 다 깨부순다?"

살벌한 경고였다. 하지만 허언은 아니었다. 에단은 지금껏 내뱉은 말을 모두 지켜 왔다.

― ...이유가 뭐지?

"이유?"

에단이 헨리의 목덜미를 붙잡아 쑤욱 끌어 올리자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딸려 왔다.

"네가 내 직원 울렸잖아."

에단이 씨익 웃었다. 헨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 그 녀석은....

"거기까지. 그 이상은 별로 필요 없거든."

녀석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든 에단에게는 하등의 상관도 없었다.

에단이 헨리를 씨익 바라봤다.

"이미 상처받은 거 조금 더 받아도 되지?"

"네?"

헨리가 대답도 하기 전에 에단이 말했다.

"얘가 네 꼭두각시인 거? 그래서 어쩌라고?"

"꼬, 꼭두각시요...?"

헨리가 말을 되물었다. 하지만 에단은 헨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 줄, 내가 오늘 끊어 버릴 거거든."

― 네가 무슨 권한으로...!

녀석은 마치 화를 내는 듯했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녀석이 소유욕을 가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소유욕은 에단도 뒤지지 않는다. 이미 계약서를 작성했으니 헨리는 에단의 소유였다.

에단은 자신의 것을 빼앗길 생각이 없었다.

"권한이 왜 없어?"

에단이 고개를 돌려 헨리를 바라봤다.

"너 여기서 이대로 죽을래?"

에단의 질문에 헨리가 입을 다물었다.

분명 방금까지 그녀는 죽고 싶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에단이 나타나자 절망과 두려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오늘도 자신을 어둠 속에서 건져 냈다. 거기까지 떠올린 헨리의 동공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하는 거죠?"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정말 에단에 손에 의해 맞아 죽을 것 같았다.

"분명 방금까지는 죽고 싶었는데...."

헨리가 맑은 웃음을 머금었다.

"살고 싶어졌어요."

"좋아."

에단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단이 들고 있던 헨리를 지면에 내려놨다.

뚜둑. 뚜두둑.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아?"

―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주도권은 에단이 쥐고 있었다.

"왜, 죽을까 봐 겁나?"

― ...내가 죽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대충은."

생명의 나무.

세계수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마나를 순환시킨다.

마나는 정체되지 않고 순환한다. 그게 이 세계의 규율이다. 자세한 건 알지 못한다.

작가의 설정까지 깊게 파고드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문제는.'

이 나무가 완전히 오염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반대되는 성향의 녀석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단 점이다.

망령과 언데드들이 들끓으며 '지하'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대기 중의 마나는 흐려지고, 정령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한마디로 일이 더럽게 귀찮아진다는 거지.'

에단에게는 적들이 활개 칠 발판을 마련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태도가 더럽게 아니꼽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황상 도와주는 것은 불가피했지만, 저따위 태도를 계속해서 고집한다면 생각을 달리할 생각이었다.

에단이 죽은 마나를 끌어 올렸다. 동시에 죽은 나무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에단은 지금 진심이었다.

― ...진심인가?

"그럼 거짓말 같아? 지금 선택해. 여기서 뒈질지. 아니면 내보낼지."

― 어차피 상황은 끝났어.

"누구 마음대로 끝났어? 어차피 너도 '진짜'는 아니잖아."

―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왜, 궁금해?"

― ....

히죽 웃는 에단의 모습에 세계수가 침묵했다. 결국 세계수가 입을 열었다.

― 그 증표가 어째서 네놈 따위에게 갔는지 모르겠군.

"왜 혀가 길어지실까."

― 좋아. 내보내 주지, 하지만 후회하게 될 거다.

"글쎄? 살면서 후회를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너무 식상한 경고 아닌가?"

― 내가 없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놈이 그렇게 말하는 건가?

"아무 일 없게끔 내가 만들 거거든."

― 허! 좋다. 어디 한번 해 보거라.

시야가 다시 한번 반전된다.

번쩍 눈을 뜬 에단이 주위를 둘러봤다. 툰나의 거처였다. 에단이 눈을 뜨자, 툰나가 에단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뭐, 잘 해결됐어."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에단 님."

"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죠?"

많은 일을 겪어 놓고도 헨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 탓에 그녀는 지금 혼란스러웠다.

"귀찮아. 나중에 말해 줄게."

에단이 몸을 돌렸다. 뒤에는 가토와 네이드가 서 있었다.

휴고는 지금 다른 거처에서 자고 있었다. 심신에 적지 않은 피로가 쌓인 탓에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인원이 많이 필요하진 않았다.

'원래라면 정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에단이 성검을 바라봤다. 성검의 힘은 무한하지 않다. 이미 침식이 진행되고 있는 세계수를 완전히 정화하기는 어려웠다.

'만일 가능하다고 해도.'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에게는 설명하지 못했다.

세계수가 피해를 감수하고 정화를 택한다면, 아마 헨리는 소멸하게 된다.

생각만 해도 불쾌함이 들었다. 그따위의 결과는 사양이었다.

'빼앗기는 건 질색이야.'

원작과는 상황이 달라진 탓에 이제부터는 에단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개척해 나가야 알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두려움이나 걱정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무턱대고 희망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이 어그러질 확률이 더 높았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에단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어떻게든 되기 마련일 테니까.

에단이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많이 쉬었지?"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전부터 느꼈지만... 노인을 너무 고생시키시는군요."

"아직 정정하면서 엄살은, 가토 너는 아직 젊으니까 괜찮지?"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벌써 약아졌네. 뭐, 그럼 움직이자."

이제는 진짜 끝을 볼 시간이다.

◈ [126화] 헨리 (2)

일행에게 말을 한 에단이 세계수의 목걸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목걸이에서는 더 이상의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흥미를 잃은 에단의 시선이 르니엘과 툰나에게로 향했다.

"이제 세계수로 가 마무리 지어야지."

"...장로님."

르니엘이 툰나를 바라봤다. 르니엘의 표정에는 그녀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번 일은 숲의 명운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다시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건 아닐까?'

르니엘는 확신을 하는 게 두려웠다. 그때 르니엘의 어깨에 툰나의 손이 올라갔다.

그의 손은 따듯했다.

"르니엘."

"...."

"괜찮다."

툰나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르니엘은 결심했다.

"...감사합니다."

르니엘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르니엘의 말에 에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지."

찾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세계수를 찾아갈 방법은 많았다.

에단의 몸에 뿌리내리고 있는 죽은 나무.

그리고 유일한 증표인 세계수의 목걸이와 헨리.

'하지만 작정하고 숨어들면 의미가 없지.'

세계수의 또 다른 자아는 이미 에단을 적대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었다.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끝낼 생각이었다.

* * *

타다닷!

르니엘을 선두로 에단과 일행이 뒤따랐다. 헨리는 에단이 짐짝처럼 짊어진 채 달렸다.

헨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지만 거부할 수도 없었다.

헨리의 신체 능력으로는 이 속도를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르니엘의 뒤를 따라가는 에단은 내심 감탄했다.

'대단하군.'

르니엘은 시시각각 뒤바뀌는 길을 막힘없이 개척해 나갔다.

세계수의 방해였다. 하지만 르니엘은 마치 익숙하다는 듯 새로울 길을 찾아냈다.

마치 위에서 관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즉에 막든가.'

오염되기 전부터 채비를 제대로 했으면 이 귀찮은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혀를 찬 에단이 르니엘의 뒤를 바지런히 따랐다.

바로 그때, 몬스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에단은 무심하게 시선을 던지다가 발로 몬스터를 걷어찼다.

쾅!

몬스터가 사정없이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하지만 몬스터의 숫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많은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네이드! 가토!"

"알겠습니다!"

가토가 선두로 튀어나왔다. 가토의 검광이 번뜩였다.

네이드도 따라붙어 단검을 휘두르자 피가 솟구쳤고, 사방에 몬스터들의 괴성이 메아리쳤다.

르니엘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평정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다.

이내 숲의 심층부 입구에서 멈춘 르니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길이 막혀 있어."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세계수는 언제나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길을 막아 버리다니....

"비켜 봐."

에단이 헨리를 내려놓고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와 넝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검으로는 의미가 없겠군.'

성검의 힘은 정화에서만 극강의 효과를 자랑했다. 이럴 땐 오히려 다른 것이 더 효과적일 터.

에단이 죽은 마나의 힘을 끌어 올리자 검은 기운이 주위에 넘실거렸다.

음험하고 소름 끼치는 기운이었다. 마치 귀화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에단이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른발을 축으로 몸이 회전했다. 에단이 왼손을 내밀었다.

꽈광―!

귀가 멀 것 같은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 길이 뻥 하고 뚫렸지만, 그 또한 일시적이었다.

넝쿨이 다시 길을 막으려고 들자 에단이 죽은 나무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지금이 적기지.'

키에에엑!

죽은 나무의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주위에 있는 울창한 나무들이 떨리기 시작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네이드와 가토가 열심히 몬스터를 막고 있었다.

'둘이 알아서 하겠지.'

에단이 헨리의 목덜미를 붙잡아 번쩍 들어 올린 채 터진 길을 따라 질주했다.

달려 나가면서 에단이 고개를 돌려 르니엘을 바라봤다.

"고맙다!"

르니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숲의 심층부에 들어왔다. 그리고 또다시 세계수를 마주하게 됐다.

생명과 풍요와는 거리가 먼 앙상하게 마른 거목이었다.

제정신인 상태로 세계수를 마주하자 헨리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헨리."

에단이 헨리를 불렀다. 헨리의 표정은 한마디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에단 님.... 저는 대체 무엇이죠?"

에단은 헨리를 바라보며 와락 인상을 구겼다.

"기억 안 나?"

에단이 성검을 꺼내 들자 카이나의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대체 어떻게 할 셈이냐?

'지켜보고 계세요.'

에단은 모두가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헨리는 세계수가 만들어 낸 인격이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방어 기제가 헨리였다.

'원래라면 더 복잡해졌겠지만.'

세계수의 보험이 바로 헨리이기에 평범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계수의 상태는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덩달아 헨리도 가진 힘을 끌어내지 못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오히려 다행이야.'

만일 헨리를 향한 세계수의 통제가 그대로 작용했다면, 에단의 의도대로 일을 진행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넌 내 직원이라고. 어딜 도망가려고 하는 거야?"

그렇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에단이 성검을 쥔 채 세계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속이 들끓는다. 죽은 나무가 아우성을 치고 있다.

에단의 내부는 한쪽으로 치우쳐져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산 자보다는 죽은 자에 더욱 가까웠다.

에단이 세계수에게 점점 가까워지자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대체 뭐를 할 생각이지?

"왜? 이제야 좀 쫄리냐?"

― 왜 저딴 녀석에게 집착을 하는 거야?

"말했잖아. 내 직원이라고. 어딜 마음대로 직원을 빼 가려고 하고 있어."

에단이 히죽 웃었다. 앙상한 세계수가 몸을 떠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그만, 멈춰!

"싫어."

세계수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 녀석과의 대화라.'

아마 에단이 지니고 있는 죽은 나무의 힘 때문이겠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건 아직 풀리지 않은 떡밥이었고, 몇 차례 언급된 것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이 앞으로는 개척을 해야 했다.

"헨리."

"...네."

"죽고 싶은 건 아니지?"

순간 에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헨리가 죽고 싶다고 대답하면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헨리는 한 차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답했다.

"네, 살고 싶어요."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에단이 씨익 웃었다.

"좋아, 그거면 됐어. 들었지? 얘가 살고 싶다잖아. 그리고 따지고 보면 너도 진짜는 아니지 않나?"

― 그걸 어떻게...!

"알면 다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검을 세계수를 향해 찔러 넣자 강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에단은 밀려나지 않았다.

에단의 다리는 지면에 뿌리를 박은 것처럼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후읍―

에단이 숨을 들이 삼켰다. 복압이 단단하게 유지되며 몸 안에서 요동치고 있는 죽은 마나를 몸 전체에 골고루 퍼트렸다.

카이나가 역정을 냈다.

― 야! 나는 이 기운 존나 싫어!

그러나 에단은 카이나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에단의 몸에서 날뛰던 죽은 마나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푸욱!

성검이 세계수에 깊이 박혔다. 그와 함께 성검에서 찬란한 빛이 발산되었고, 에단은 검 손잡이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좀 낫는 것 같지 않아?"

원래라면 이 방법으로 오염된 세계수를 정화하려 했지만, 이것만으로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다.

세계수는 너무 약화되었다. 만일 회복된다고 해도 그 힘과 크기는 예전에 비해 상당히 축소될 것이다.

'그렇다면.'

살을 붙여 주면 된다.

검을 찔러 넣은 뒤 에단이 손을 뗐다. 그러고는 곧장 땅바닥에 팔을 박아 넣었다.

"후읍!"

에단이 다시 한번 의식을 집중했다. 그제야 페온은 에단이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하는지 깨닫고 소리쳤다.

―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가만히 지켜보고 계세요.'

어차피 마지막에 웃는 것은 자신이다. 이건 확신이다. 이 행동은 확신 없이 던지는 만용 따위가 아니었다.

"후읍!"

에단이 숨을 들이켰다. 복압을 단단하게 유지했다. 지금부터는 반동을 견뎌야 하기에 충격에 유의해야 했다.

쿠구구구구구―

에단은 죽은 마나를 모조리 이끌어 냈다. 그와 동시에 죽은 나무조차 끄집어냈다.

키에에에에―!

죽은 나무의 귀곡성이 숲에 울려 퍼졌고, 그 압도적인 위용에 르니엘은 기가 죽었다.

이윽고 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마나 폭풍이 휘몰아쳤다.

마나와 죽은 마나, 그리고 성검의 정화 능력까지.

모든 기운이 상충되고 있었다. 세계수에 박혀 있는 카이나가 악을 질렀다.

― 이 미친 새끼야!

"뒈지기 싫으면, 알아서 조율하십시오!"

에단이 막무가내로 소리쳤다. 이제 자신도 한계였다.

나름의 한 수를 던지긴 했지만,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한마디로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뜻이다.

'상충하는 두 거목.'

별생각 없이 넘기기에는 걸리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에단에게는 한계가 명확했다. 대부분은 편법으로 손에 넣은 힘이었다. 마스터의 벽은 넘었지만, 아슬아슬한 줄타기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조금 더 한쪽으로 치우치는 순간이 바로 파멸의 순간이었다.

'그 모든 걸 해결할 방법이.'

지금 던진 이 도박 수였다.

죽은 나무가 에단의 손을 벗어났다. 죽은 나무는 이미 많은 양분을 섭취한 상태였다.

원래라면 묘목도 안 되는 일개 나뭇가지였던 죽은 나무는, 차근차근 힘을 모아 어느새 약화된 세계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에단은 거기에 양분을 더했다. 에단이 손에 넣은 죽은 마나를 모조리 죽은 나무에게 집어넣고 있었다.

― 이런 미친놈이 지금 무슨 짓을...!

페온이 경악을 삼켰다. 저놈이 지금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긴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에단이 벌이는 일은 세계수인 '생명의 나무'와 '죽은 나무'의 융합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합일.

당연히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과를 보지 않았지만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뿌리가 어떻게 함께한단 말인가.

하지만 에단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은 언젠가 뒈져.'

저승이나 윤회 따위는 모른다.

두 거목은 가장 멀어 보였지만, 에단이 보기에는 가장 가까워 보였다.

그렇기에 에단은 확신했다. 위태로운 자신의 상태를 해결하고, 저 재수 없는 세계수의 자아에게 엿을 먹일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걸.

그 여파?

'그게 내 알 바냐?'

그딴 건 모른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금 자신이 열이 받는다는 거다.

에단은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그렇기에 곧 죽어도 굽히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여기서 뒈지더라도.'

사건 한번 일으키고 간다.

에단의 얼굴에 핏대가 돋아났다. 눈가에선 실핏줄이 터지고, 죽은 마나의 과용으로 인해 검은 피가 눈코입에서 줄줄 흘렀다.

에단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에단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다시 한번 지껄여 보시지?"

에단의 비아냥에 세계수가 기겁하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 이, 이 정신 나간 새끼가!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느냐! 고대로부터 내려온 법칙을 깨부술 생각이냔 말이다!

"그러게 누가 좆 같은 협박을 하래?"

그것도 나한테?

넌 사람 잘못 봤어.

◈ [127화] 나를 협박해? (1)

르니엘은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나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단순한 마나의 폭풍이 아니었다. 죽음의 마나와 세계수의 마나가 맞부딪쳤다.

더불어 꽂혀 있는 검에서도 찬란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세 가지의 힘이 서로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우위를 점한 것은 에단이 뿜어내는 어둡고 사나운 기운이었다.

에단이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르니엘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겁에 질렸다.

'내, 내가 또 실수한 걸까?'

에단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르니엘의 시선이 이번에는 헨리에게로 향했다.

르니엘의 눈이 점차 커졌다. 헨리는 생각보다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마주했던 것 같은 몽롱한 눈이 아닌, 또렷한 눈동자였다.

'대체 어떻게....'

헨리에게서는 특별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보다 우직하게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생명의 나무 옆에 거대한 나무가 생겨나는 모습에 르니엘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소름 끼치는 모습의 나무였다. 그 나무는 세계수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쾅!

그때 거대한 폭발음이 터졌다. 휘몰아치던 마나가 결국 폭발을 일으킨 것이었다.

에단이 그 순간 헨리를 끌어당겼다. 에단이 왼손을 들었다. 마나를 통해 신체를 보호할 수 없다.

이미 모든 마나를 소진한 상태.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체의 내구력뿐이었다.

옷이 찢어발겨지며 살가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단은 이 순간을 놓칠 생각이 없었기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에단의 눈은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뿌리내린 죽은 나무와 세계수의 자리싸움이 시작됐다.

죽은 나무는 세계수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세계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전력으로 방어했다.

"카이나!"

에단이 소리치자 카이나에게서 짜증 가득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 어따 대고 반말이야! 어린놈의 새끼가!

카이나가 빽 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에단의 의도는 확실하게 읽었다.

세계수에 박혀 있던 성검이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저 빛은 세계수를 치료하기 위한 힘이 아니었다.

― 나도 이제 몰라! 제기라아알!

키에에에에에엑―!

죽은 나무의 뿌리가 세계수를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세계수는 죽은 나무로부터 몸을 지킬 수 없었다.

―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는...!

꽈드드드득!

세계수를 꽁꽁 싸맨 죽은 나무가 세계수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 끄아아아아아악!

세계수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폭발의 여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단은 아직도 헨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에단이 힐긋 눈을 돌려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의 몸은 가늘게 떨리는 중이었다.

"버텨."

이것까지는 에단이 도와줄 수가 없었다.

헨리의 인격에 세계수가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헨리의 심경이 흔들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그것은 헨리가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에단은 이제 헨리를 완전히 세계수에서 분리할 생각이었다.

콰지직!

세계수를 압박하던 죽은 나무가 결국 세계수의 몸을 완전히 부러트렸다.

더 이상 세계수의 비명이 들려오지 않았다. 마나의 여파가 가세되었다. 하지만 이번 여파는 얼마 가지 않았다.

죽은 나무가 세계수의 잔재를 게걸스럽게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죽은 자의 몸에서만 마나를 추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세계수에게서 흘러나오는 모든 마나를 삼키기 시작했다.

폭풍의 여파가 걷혔다.

에단의 몸은 그야말로 걸레짝이 되었다.

고된 채찍질을 당한 죄수의 몸처럼 몸 곳곳에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에단은 아랑곳 않고 달렸다.

에단이 노리는 것은 바닥에 구르고 있는 성검이었다. 에단이 왼손을 뻗어 성검을 쥐었다.

순간 빛이 발산되며 에단의 상처가 순식간에 치유됐다. 그와 동시에 에단이 죽은 나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성검이 흩뿌리는 섬광이 죽은 나무를 덮쳤다. 그와 동시에 에단이 상체를 숙였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순간적으로 수축했다.

에단이 질주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두 차례의 도움닫기를 통해 죽은 나무를 향해 뛰어들었다.

푸욱!

에단의 손에 들린 성검이 죽은 나무의 몸에 꽂혔다.

'카이나 씨?'

― 이런 개....

카이나가 입에 담기도 어려운 욕설을 거칠게 내뱉었다. 하지만 그녀의 욕설은 에단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 썅! 하면 되잖아!

카이나는 결국 입을 다물고 다시 한번 힘을 발산했고, 그와 함께 죽은 나무가 거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산책 끝냈으면 이제 돌아와야지?"

에단이 죽은 나무의 겉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직!

죽은 나무의 표면이 갈라지며 에단의 손이 푹 박혔다.

이미 한 번 흡수한 힘이었다.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다.

"빨리 안 와?"

에단이 사나운 목소리로 으르렁거리자, 죽은 나무의 몸이 비틀렸다.

죽은 나무에게도 자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죽은 나무는 지금 겁을 먹고 있었다. 세계수를 삼킬 때처럼 포악하고 광포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겁을 집어먹은 상대를 요리하는 건 에단의 주특기였다.

콰직! 콰직!

저항의 의지를 부숴 버리기 위한 에단의 주먹질이 시작됐다.

에단의 왼손은 타이탄의 장갑이 보호하고 있었다.

죽은 나무가 어떤 대응을 하든,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려 하든 의미가 없었다.

타이탄의 장갑은 죽은 나무의 껍질을 계속해서 벗겨 냈다.

콰지직!

주먹질이 이어지자 에단의 팔이 결국 죽은 나무 사이에 깊게 박혔다. 에단이 씨익 웃었다.

― 거기서 오른쪽!

카이나의 외침에 에단의 눈이 번뜩였다. 에단이 팔을 뽑고 다시 한번 주먹을 내질렀다. 죽은 나무의 속살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콰지직!

에단의 손이 다시 한번 깊게 박혔다. 손에 감각이 느껴졌다.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찾았다.'

손에 집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에단의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물체는 바로 죽은 나무의 핵이었다.

키에에엑!

죽은 나무가 저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성검의 힘이 죽은 나무를 방해했고, 내부에서는 에단이 거칠게 핵을 움켜쥐고 있었다.

죽은 나무의 핵이 귀여운 반항을 시작하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상큼한 새끼.'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 타이탄의 장갑을 꿰뚫을 수는 없었다.

에단이 왼손에 힘을 줬다. 전완근에 핏줄이 돋아나자 죽은 나무의 핵이 바르르 떨렸다.

"터져 볼래?"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말하자, 죽은 나무의 저항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마지막 경고야. 뒈지기 싫으면 다시 들어와. 우리 지금까지 좋았잖아?"

키에엑....

그 단말마를 끝으로 죽은 나무의 크기가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결국 에단이 쥐고 있는 핵만 남게 되었다.

에단이 말없이 죽은 나무의 핵을 바라봤다.

에단이 처음 죽은 나무의 힘을 흡수할 때 봤던 볼품없는 나뭇가지와 놀랍도록 흡사했다.

에단이 움켜쥔 나뭇가지에 힘을 주자, 나뭇가지가 떨리더니 이전처럼 에단의 몸에 흡수되었다.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흡수되는 모습에 에단은 가만히 죽은 나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쿠웅―!

엄청난 충격이 갑자기 에단의 몸을 덮쳤다. 실제로 몸이 들썩일 정도의 충격이었다.

해일 같은 힘의 파도가 에단의 신체에 휘몰아쳤다.

이전의 힘과는 궤가 달랐다.

―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페온이 침음을 집어삼켰다. 이런 종류의 힘은 페온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때 카이나의 목소리가 에단의 귀에 파고들었다.

― 뭐 해, 머저리 새끼야! 빨리 검을 쥐어!

쿵.

한 차례의 충격과 함께 몸 전체의 혈관이 돋아났다. 흉측한 모습이었다.

에단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검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야속하게도 거리가 멀었다. 에단이 이를 악물었다.

정신력이나 인내력으로는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앞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헨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내, 내가 뭐라도 해야 해.'

너무나도 엄청난 일들이 연속으로 벌어졌다. 헨리는 아직도 이성을 되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에단이 자신을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고, 끝까지 자신을 믿었다는 것을.

헨리는 그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헨리가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헨리가 달리기 시작했다. 헨리의 손이 성검으로 향했다.

― 너...!

카이나가 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그녀의 음성은 헨리에게 닿지 않았다. 헨리가 성검을 움켜쥐었다.

에단이 헨리를 향해 소리치려 했지만, 에단은 지금 목소리 한 점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헨리가 결국 성검을 움켜쥐었다.

에단이 눈을 부릅떴다. 원래라면 엄청난 반발력이 헨리를 덮쳐야 정상이었지만, 성검의 반발력은 헨리를 덮치지 않았다.

헨리가 검을 쥔 채 에단에게 뛰어갔다.

"에, 에단 님! 제가 지금 뭘 하면 되죠?!"

헨리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하지만 성검을 꼬옥 붙잡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고 확고했다.

에단이 손을 뻗었다. 헨리가 황급하게 에단에게 성검을 건넸다.

'제기랄, 정말로 뒈지겠군.'

농담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때마다 지옥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에단의 육체는 이미 한 번 각성을 경험했다. 그로 인해 수용 가능한 마나의 총량이 늘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기운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페온이 섣부른 조언을 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는 이미 넘어섰다. 아무리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자그마치 세계수의 힘이었다.

마나의 흐름을 관조하는 세계수의 힘을 일개 인간이 모두 흡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죽은 나무의 막대한 기운조차 받아들였다.

한 가지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판국에 거대한 두 힘을 모두 삼키려 들었다.

페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너무 무모한 짓을 저질렀어.'

페온과 카이나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버렸다. 에단의 몸은 지금 폭탄과 다름없었다.

총량을 아무리 늘린다고 한들 저 둘의 힘은 흡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헨리가 에단에게 성검을 건네주는 그때, 페온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 에단! 쟤를 빨리 붙잡아!

에단은 페온의 외침 한마디로 그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에단은 성검을 건네받으며 얻은 잠깐의 자유로 헨리의 팔을 잡아당겼다.

헨리가 당황하며 에단에게 끌려왔고, 에단은 성검을 바닥에 꽂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헨리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에단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너, 견딜, 수, 있겠, 냐...?"

진지한 에단의 물음에, 당황에 물들었던 헨리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에단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은 상관없었다.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확신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견딜 수 있습니다."

◈ [128화] 나를 협박해? (2)

에단은 페온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성검을 매개체로.'

터질 것 같은 힘을 헨리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에단의 몸속에 잠재되어 있는 기운은 지금 대해와도 같았다.

더군다나 이질적인 기운이다. 일반적인 마나도 아니고, 죽은 마나도 아닌, 그 사이의 무언가였다.

이 기운을 헨리가 과연 수용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른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이 일에서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헨리가 적임자였다.

그녀는 세계수가 만들어 낸 또 다른 자아 중 하나였기에 이 방대한 기운을 받아들이기에는 최적이었다.

헨리의 확고한 눈을 바라본 에단은 이내 마음을 굳혔다. 더는 방법이 없었다.

에단의 몸속에 있는 기운은 이전처럼 폭력적인 성향을 띠지 않았다.

잠잠하고 고요했다. 하지만 그 힘 자체가 에단의 수용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었기에 가만히 있어도 에단의 몸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에단의 왼손이 성검의 날을 붙잡고 손잡이를 건넸다. 헨리는 망설이지 않고 에단이 건넨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 시작한다.

카이나 또한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규격 외의 힘을 전달하는 매개체의 역할은 결코 단순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스스―

거대한 바다에 미약한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에단의 몸속에 있던 바다가 천천히 흐른다. 성검이라는 통로는 넓지 않았지만 견고했다.

좁은 장소에 불만을 가진 해일 같은 마나는 순식간에 성검의 통로를 통해서 헨리를 향해 넘어가기 시작했다.

쿵―!

갑작스러운 충격에 헨리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주, 죽을 거 같아.'

아직 일부분만 넘어왔음에도 엄청난 힘과 여파가 느껴졌다. 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헨리는 이를 악물며 견뎌 냈다.

'이 정도도 못 참아?'

헨리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실망하고는 했다. 그게 자신의 천성이라고 생각했다. 주제넘게 나서는 것은 과용과 만용이라 여겼다.

하지만 헨리는 에단을 봐 왔다. 에단은 언제나 무모했다. 블란테라는 배경을 감안하고 바라봐도 에단에 행동은 미친 짓 같았다.

하지만 에단은 언제나 증명해 왔다. 헨리는 그런 에단의 당당함을 동경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도움을 받았다. 헨리는 소심했지만 바보가 아니었다.

에단이 이런 고통을 짊어지게 된 원인이 본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일로 빚을 청산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의 빚을 덜어 낼 수 있다면....

'여기서 죽어도 돼.'

그게 헨리의 각오이자, 다짐이었다. 헨리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파도가 거칠어지며 헨리를 향해 마나의 이동이 가속화됐다.

촤악!

파도가 한 번 칠 때마다 헨리의 몸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하지만 헨리는 결코 고통스러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에단의 호흡이 점점 평안해졌으니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페온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정말 이 막대한 기운을 수용하고 있다니.

외관상 보이는 어리숙함에 헨리를 낮게 평가했었다. 하지만 헨리의 역량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대마법사나 마스터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이 마나의 대해를 헨리는 담담히 흡수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세계수의 유지를 이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헨리가 과소평가될 이유는 아니었다.

아무리 조건이 좋다고 한들, 이 대해 같은 마나를 수용하려면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면 통로의 역할을 담당 중인 카이나는 연신 고통에 찬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 이런 제기랄! 어쩌다 이딴 녀석을 만나서는!

카이나가 한탄이 섞인 괴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방대한 마나가 길을 건너는 통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 중이었다.

후우, 후우.

에단의 호흡이 이전보다 훨씬 평온해졌고, 일정해졌다. 에단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아직 얼굴에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지만, 조금 전과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정된 상태였다.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이를 부서져라 악물고 있는 헨리가 보였다.

한 발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르니엘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마을을 수호하는 수호 엘프임에도 그녀는 우왕좌왕하기만 할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외지인들에게만 의존하는 자신의 모습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괴감이 느껴졌다.

가녀린 헨리의 모습을 한 차례 지켜본 르니엘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저, 저도 도움을 주겠습니다!"

르니엘이 무턱대고 성검에 손을 뻗었다.

'저런 미친!'

에단이 소리치려 했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 상태가 완화된 것은 아니었다.

덥썩.

르니엘이 헨리의 손등 위로 손을 얹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에도 반발력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에단이 한숨을 돌렸다.

'이 기운을 수용하고 있어서인가?'

대해와도 같은 마나의 통로를 자청하고 있는 지금, 섣부르게 반발력을 일으켰다간 성검조차 무사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저런 줏대 없는....'

하지만 도리어 상황은 나아졌다.

비록 헨리에 비해서는 뒤질 수 있어도, 엘프 중 누구보다 세계수와 친화력이 높은 이가 바로 하이엘프인 르니엘이었다.

르니엘 또한 에단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수용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헨리의 낯빛이 한결 나아졌다.

스스스스―

파도가 치며 마나가 넘어간다. 바닥을 드러내지 않을 것 같던 마나도 어느새 눈에 띄게 크기가 줄어들었다.

에단은 지금 가늠하고 있었다. 자신이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본인의 몸을 관조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순간이 느껴졌다.

'지금이다.'

에단이 통로를 막으며 성검을 붙잡고 있던 왼손을 당겼다.

툭―

에단이 성검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하아."

에단이 엎드린 채 호흡을 골랐다. 통로를 막자, 나가떨어지기는 헨리와 르니엘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갑자기 얻은 방대한 마나를 제어하기 위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눈을 감은 헨리는 자신의 내면이 보였다. 그제야 헨리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나는 인간이 아니었구나.'

그제야 의문이 해소되었다. 숲에 들어서고 나서 느낀 이질감과 세계수라고 불리는 거대한 나무를 봤을 때 느껴지던 묘한 동질감.

잊었던 본분이 보였다. 몸을 가득 채운 마나는 헨리가 모두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헨리가 눈을 떴다. 마나의 컨트롤은 숨을 쉬는 것처럼 할 수 있었다. 마나의 형질은 달라졌지만 결국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같았다.

손을 뻗자 그녀의 손에서 작은 묘목이 생겨났다.

새싹과 비교해도 될 정도로 작은 나무 한 그루였다. 천천히 땅을 파기 시작한 헨리는 그곳에 나무를 심었다.

'이건 세계수일까?'

헨리가 본인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졌다. 정답을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제대로 자라게 된다면 분명 숲과 대륙에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걸.

'당장은 문제가 없겠네.'

헨리의 갈색 눈에 푸른빛이 감돌았다. 맑은 눈이었다. 그녀의 맑은 눈이 르니엘과 에단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포함한 이 셋이 지금 마나의 순환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육체 자체가 세계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될 줄은 몰랐네.'

인간은 유한한 삶을 가졌다.

인간에 비해서는 오랜 기간을 살아가는 엘프도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세상을 관조하는 세계수와는 비교할 바가 되지 않았다.

헨리는 쓸쓸한 표정으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바라봤다.

'너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을 텐데.'

세계수는 원래 인격을 지니지 않는다. 헨리를 만들어 낸 인격조차 결국에는 어떠한 계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수의 인격이라고 할 수 있던 그것은 그녀의 여동생이자, 남동생이었으며, 그녀의 부모였다.

'아는 게 많지가 않네.'

헨리가 에단을 바라봤다.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바뀌는 것은 크게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헨리였다.

에단이 말해 준 사실이다. 원래라면 자신은 세계수가 회복되며 자연히 소멸할 존재였다. 하지만 에단은 헨리를 그런 존재로 놔두지 않았다.

에단의 말이 아직도 귓전에 맴돌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자를 만나는 기분은 특별했다.

'정말 괴물이었네.'

헨리는 이제 에단이 얼마나 괴물인지를 알게 되었다.

넘쳐 나는 마나를 자신과 르니엘에게 나눠 줬지만, 이 둘의 마나를 합친 것보다 에단이 지닌 마나의 양이 더욱 컸다.

헨리는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알고 있었다. 정말 인간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정도였으니까.

헨리가 에단을 바라봤다. 바닥을 짚고 있던 에단이 숨을 한 번 내쉬더니 몸을 일으켰다.

"후,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에단이 혀를 내두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이내 특유의 웃음을 머금은 채 헨리를 바라봤다.

"이제 좀 정신 좀 차렸냐?"

에단의 가벼운 언행에 헨리도 작게 미소 지었다.

"네. 어떻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네요."

에단의 시선이 이번에는 헨리의 옆에 있는 르니엘에게 돌아갔다. 르니엘은 아직도 낑낑거리고 있었다.

"...쟤는 언제 괜찮아지냐?"

"잠시만요."

헨리가 르니엘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이 르니엘의 손을 붙잡았다. 헨리의 손에서 따뜻한 빛이 흘러나왔다.

"호오."

에단이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헨리는 어떻게 보면 르니엘과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인도에 르니엘의 가파른 호흡이 일정해지고 얼굴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르니엘이 눈을 떴다.

"...용사님?"

"아직도 그 소리냐?"

에단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성검을 들었다.

― ...이런 빌어먹을 새끼.

성검을 쥐자마자 카이나의 신랄한 욕설이 에단을 반겼다. 에단은 킥킥 웃으며 답했다.

'결국 잘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 내가 뒈지는 줄 알았거든? 야, 페온. 이 새끼 원래 제정신이 아닌 거야, 아니면 최근 들어 미친 거야?

― 원래 제정신이 아닌 쪽에 가깝지. 그걸 지금 느끼다니. 카이나, 너는 생각보다 눈치가 없는 건가?

― 이런 ㅆ....

카이나가 다시 욕지거리를 내뱉으려 하자, 에단은 귀를 닫았다.

'어떻게 일을 해결하긴 했군.'

시간을 지체한 탓에 생각보다 일이 어려웠다.

'그래도 남은 일이 많아.'

안심하기는 일렀다. 가장 먼저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는 데 걸릴 시간을 생각한다면 벌써 늦었다.

레벨린과 교장이 도주하며 생긴 공백은 에밀라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것은.

'오랜만에 아버지 얼굴을 뵙겠군.'

블란테가 아카데미를 방문한다.

◈ [129화] 복귀 (1)

르니엘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킨 르니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생소한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이건."

처음 겪은 막강한 기운이었다. 생명의 나무가 멀쩡했을 때도, 이런 충만하다 못해 넘치는 기운은 겪어 본 적 없었다.

그녀가 멀뚱멀뚱 앞을 바라봤다. 에단과 그 옆에 서 있는 헨리가 보였다.

"...용사 님?"

르니엘이 존경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에단의 뺨이 움찔거렸다. 에단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대응했다.

"내가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말랬지?"

에단이 생각하기에 용사라는 단어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단어였다. 에단이 살벌하게 눈을 부릅뜨자, 찔끔한 르니엘이 고개를 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헨리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음... 아직 통성명을 하지 못했네요.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헨리가 르니엘에게 천천히 다가와 물었다. 르니엘이 시선을 돌려 헨리를 바라봤다. 르니엘의 몸이 움찔 떨렸다.

헨리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친숙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르니엘이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의도한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다.

헨리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르니엘의 손을 붙잡았다. 고개를 들며 천천히 일어서는 르니엘의 눈꺼풀이 떨렸다. 투명한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제가 무슨...."

"저걸 봐 주시겠어요?"

헨리가 고개를 돌려 나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어린나무를 바라봤다. 르니엘의 시선이 그 나무를 향했다.

"...저건."

르니엘의 눈이 한 번 더 거칠게 떨렸다. 저 가녀린 나무가 어떤 존재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와 한평생 같이 살아왔던 존재였으니까.

헨리가 르니엘의 손을 놓았다. 르니엘이 천천히 다가가 어린 나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와아...."

르니엘은 어린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뭐 하냐?"

에단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둘을 바라보자, 헨리가 민망한 듯 웃었다.

"너무 분위기를 깨시는 거 아닌가요?"

"뭐, 나도 사람인지라 협조를 해 주고 싶기는 한데."

에단이 손목을 두드렸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 * *

가토와 네이드가 거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일전에 조우했던 마수에 비하면 이번에 등장한 몬스터는 상대하기 어렵지 않았다.

머릿수만 많을 뿐 단순한 몬스터에 불과했다. 가토의 시선을 따라 다리가 움직였고, 검이 그에 맞춰 춤을 췄다. 무수한 실선이 그어지며 선혈이 솟구쳤다.

네이드는 힐긋 가토를 바라봤다.

'엄청난 성장이군.'

이 정도까지 가파른 성장을 할 줄은 몰랐다. 가토의 재능과 노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언정 이 정도 속도의 성장은 이해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열 번의 훈련보다 한 번의 실전이라, 그건가.'

네이드가 상체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네이드의 발이 몬스터의 발을 걸었다. 몬스터의 상체가 붕 뜨자, 네이드가 단검을 내리그었다.

푸슛―!

순식간에 급소를 가격당한 몬스터가 목을 틀어막았지만, 성큼 다가온 죽음을 막아설 수 없었다. 피거품을 무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동공이 생기를 잃었다.

네이드가 다시 가토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네이드는 가토를 주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토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파밧!

가토가 몬스터의 하단을 걷어찼다. 공중에 뜬 몬스터의 목을 단칼에 베어 냈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동작이었다.

'큭큭.'

네이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이가 들었는지 이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에단과 휴고, 그리고 가토까지.

범상치 않은 인물들밖에 없었다.

'늙은 나이에 설렘을 느끼게 해 주는군.'

그때부터 둘은 지칠 줄을 모르고 싸워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털썩.

몬스터들이 자리에 쓰러지고 있었다. 쓰러진 몬스터들은 바닥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끝난 건가?"

네이드가 중얼거리자 가토가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가토의 숨은 아직 거칠었다. 그들이 시간을 끄는 사이 에단은 일을 이미 끝냈을 것 같았다.

가토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미 땀과 피가 범벅이 되어 가토의 옷은 엉망인 상태였다.

가토가 네이드를 바라봤다. 네이드는 여전히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옷도 더러워지지 않았다. 뽀송뽀송한 네이드의 의복에는 피 한 점 묻지 않았다.

"...."

가토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직 멀었네요."

"욕심이 과하십니다."

"그런가요?"

네이드가 빙그레 웃었다. 가토도 따라서 웃음을 터트렸다.

"돌아가면 휴고 녀석 혼 좀 내야겠어요. 저희만 이렇게 고생하는 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가토가 볼멘소리를 내자, 네이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소리인 것 같군요."

그 순간, 기척을 느낀 네이드와 가토가 고개를 들었다. 몬스터 같지는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풀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도련님."

"어, 고생했어."

에단이 덤덤하게 손을 들어 네이드를 향해 말했다. 순간 에단의 시선이 가토를 향했다. 에단이 미간을 좁힐 정도로 가토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얘는 상태가 왜 이렇게 거지꼴이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아, 그러셔."

에단이 손을 건네 가토를 일으키려 하다가 손을 뺐다. 에단의 행동에 가토가 눈을 끔뻑였다.

"네 손이 조금 더러운 것 같아서. 찝찝하잖아."

"...."

가토가 서운함과 서러움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피식 웃더니 재차 왼손을 뻗었다.

"농담이야, 인마. 표정 한번 가관이네."

"...저 울 뻔했습니다."

"명색이 내 기사라는 놈이 아무 데서나 눈물을 흘려서야 쓰나."

에단이 가토의 손을 붙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가토가 엉덩이를 털어 냈다.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뭐 얼추 해결됐다고 봐야지."

가토가 고개를 돌려 헨리와 르니엘을 바라봤다. 가토는 단번에 헨리가 무언가 달라졌다는 점을 눈치챘다.

이전까지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지금은 무언가 벽이 쳐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벽에서 느껴지는 것은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은은한 위압감에 가까웠다.

네이드가 헨리와 에단, 르니엘을 번갈아 바라봤다.

'모두 달라졌군.'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올린 네이드는 알 수 있었다. 저 셋은 같은 기운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중 에단은... 독보적이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이야.'

방금까지 가토의 성장세도 엄청나다고 여겼지만, 등장만으로도 가토의 존재감이 옅어질 정도로 에단은 또다시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나타났다.

'부작용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성장 방식으로 힘을 얻은 게 아닌 탓에 완벽하진 않았다. 마스터로서 갖춰야 하는 것은 마나가 전부가 아니니까.

'차차 나아질 문제지.'

에단은 분명 머지않아 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드는 그렇게 확신했다.

네이드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에단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허리춤을 바라봤다. 벨트라인에 어정쩡하게 걸쳐진 성검이 꽤나 불편했다.

'아버지를 뵈는 김에 검집 하나 준비해 달라고 해야겠는데.'

에단이 네이드와 가토를 향해 말했다.

"돌아가자."

* * *

휴고는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조금의 안정만 취하면 머지않아 눈을 뜰 터였다.

툰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숲의 풍경이 보였다.

"르니엘."

툰나가 르니엘의 이름을 되뇌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툰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툰나의 시선이 다시금 휴고에게로 돌아갔다. 툰나는 휴고의 외향이 뒤바뀌는 과정을 직접 봤었다. 오랜만이기는 했으나, 낯설지는 않았다.

'수인족.'

과거 엄청난 위세를 떨쳤던 종족이었다. 대부분의 수인족은 엘프처럼 숲이나 산에 터를 잡고 있었지만, 그들은 엘프와 달리 호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우월한 신체 능력과 타고난 전투 본능은 수인족을 뛰어난 전사로 만들어 줬다. 숫자로는 인간에게 밀렸지만, 압도적인 전투 능력으로 인간의 군대를 수세로 몰아넣었다.

'결국 패한 것은 수인족이지만.'

어떠한 일을 계기로 수인족은 패배하고 말았고, 다시 뿔뿔이 흩어진 수인족들은 자취를 감췄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휴고가 평범한 늑대족이 아니라는 것은 털의 색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은빛 털은 선택받은 늑대족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툰나가 생각에 잠긴 채 휴고를 바라보고 있을 때, 숲 너머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긴 시간을 숲과 마을에서 살아온 툰나는 비록 나이를 먹었지만, 다가오는 자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툰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기운을 느꼈다. 포근함과 충만한 기운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툰나의 얼굴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성공했군요."

* * *

툭툭.

가토가 휴고의 턱을 건드렸다. 자기들은 이렇게 개처럼 구르고 있는데, 편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묘하게 눈꼴시었다.

에단은 그런 가토에게 잠깐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툰나를 바라봤다.

"일은 대충 해결된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툰나는 떨리는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는 이 마을의 장로였다. 그 말인즉 가장 오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었고, 에단의 존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느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에단의 주위에 마나가 순환되고 있었다. 에단의 몸속은 혼란스러우면서도 안정되어 있었다.

르니엘과 헨리도 마찬가지였다. 툰나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르니엘을 바라봤다.

"기연을 얻었구나."

르니엘이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툰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다시금 에단을 바라봤다.

"저희 마을은 당신을 영원한 은인으로 여기겠습니다."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뭐, 여기서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에단이 헨리를 향해 힐긋 시선을 던졌다. 에단의 의중을 눈치챈 헨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생명의 나무가 있던 자리에 작은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그녀가 툰나와 르니엘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고는 아주 따스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헨리의 말에 툰나와 르니엘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결단코 지켜 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에단이 둘의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돌려 휴고에게로 다가갔다. 가토가 다가오는 에단을 보며 자리를 피했다. 에단이 휴고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간질간질.

에단이 휴고의 턱을 간질였다. 마치 강아지를 대하는 손짓이었다.

부르르.

휴고가 미세하게 몸을 떨더니 이내 몸을 비틀었다. 가토는 눈을 끔뻑이며 멍한 표정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개야?'

◈ [130화] 복귀 (2)

모든 일이 정리되자, 엘프의 숲에서 에단의 평판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오염된 숲을 정화하고, 비록 아직 어린나무이기는 하나 세계수를 완전히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거대한 거목이자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었던 세계수가 없어진 상태다 보니 완전한 대체가 가능할지 걱정하는 엘프들도 있었지만, 르니엘과 툰나의 보증으로 논란을 잠재웠다.

당장은 에단과 헨리, 르니엘의 힘이 세계수를 대체하고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결국에는 세계수가 필요했다.

'애초에 세계수 자체도 의심스러운 존재였군.'

고작해야 일개 나무 하나가 마나를 순환시킨다.

마나라는 것은 무엇이고, 순환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하'와 '사자(死者)'에게서 나오는 죽은 마나는 무엇이 다른가.

어쨌든 에단은 결국 두 힘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도박 수였으며, 원작에서 언급되지 않은 설정이었다. 본인의 감을 믿은 것이다.

'뭐, 같은 나무니까.'

덕분에 에단의 내면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게 안정된 상태였다. 불안정하게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던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

페온과 카이나.

그 둘도 아직 모든 걸 말해 주지는 않았다. 둘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지금 추궁하지 않을 뿐, 언젠가는 밝혀내야 할 사실이다.

'짜증이 나는군.'

이런 복잡한 일은 본래 자신이 담당했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주인공이 해결할 일을 덤터기 쓰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에단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가토를 바라봤다.

"휴고 깨워."

"넵, 알겠습니다."

가토가 휴고를 향해 다가갔다. 휴고는 아직 잠에 빠져 있었다. 들숨과 날숨에 맞춰 콧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가토의 얼굴에 장난기가 맴돌았다. 가토가 휴고의 턱을 긁었다. 휴고가 몸을 배배 꼬았다.

"...너 뭐 하냐?"

"...죄송합니다."

에단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토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깨워야지. 휴고야, 밥 먹자."

번뜩.

휴고의 눈이 번뜩였다. 휴고가 잽싸게 몸을 일으킨 다음에 주변을 둘러봤다.

"바, 밥...? 어, 여긴...?"

휴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낯선 풍경이었고, 익숙한 것이라고는 앞에 있는 에단과 가토뿐이었다.

웃음을 참는 가토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반면 에단은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큭큭큭, 많이 배고팠냐?"

"...."

휴고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 같아서야 여기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싶다만 시간이 없어. 움직이면서 보존식을 먹어야 할 것 같다."

"아, 그런가요? 그런데 그 일은 어떻게 된 건지...."

가토가 눈을 끔뻑이며 휴고를 바라봤다.

"너 아무것도 기억 못 해?"

"...그러게? 나 대체 뭐 하고 있었지?"

휴고도 스스로에게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억이 통으로 사라진 상황이니 이런 감상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휴고의 반응을 보던 가토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야."

"어?"

"멍, 해 봐."

"...뭐라고?"

휴고는 가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대뜸 짖어 보라고 하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까. '멍' 한번 해 보라고."

"...너 뭐 잘못 먹었어?"

"윽, 이상한 거 주워 먹은 건 넌데."

"...?"

휴고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가토를 바라보자, 가토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애들 아니랄까 봐."

그때 에단에게 툰나가 다가왔다.

"너무 그러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분은...."

"네. 뭐 그래도 제 동료니까요."

에단의 반응에 툰나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에단의 대답이 예상외였던 것이다.

"부디 행운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제가 도움드릴 수 있는 것은 크게 없지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에단은 툰나의 말을 소홀하게 듣지 않았다. 툰나는 긴 시간을 살아온 엘프였다. 그의 연륜과 지식은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는 에단이라도 가볍게 여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부터는 더욱 북쪽으로 넘어가세요."

"여기서 북쪽이라면."

"그렇습니다. 좀 거북한 존재들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죠."

툰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거북하다고 말하는 대상은 신성 왕국임이 분명했다.

'아직은 좀 귀찮은 녀석들인데.'

신성 왕국은 일개 국가나 무력 집단이 아니었다. 대륙의 유일신이라는 어마어마한 명분을 등에 업은 폭군이었다.

적어도 에단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무력만 따진다면 밀리지 않겠지만.'

블란테의 무력은 신성 왕국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무서워할 대상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에는 놈들도 처리해야 할 대상이니까.'

에단은 드레이를 책임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에단은 지금껏 뱉은 말을 허투루 넘긴 적이 없었다.

"갑자기 신성 왕국을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까?"

"왕국을 넘어, 설산을 향하게 되면 정답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툰나가 에단에게 작은 팔찌를 건넸다. 은색에 특별한 문양도 없어 보이는 팔찌였다. 에단은 거부하지 않고 팔찌를 받아 들었다.

"이것도 '증표'인가요?"

에단의 물음에 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맞습니다. 용사님에게는 모르겠지만, 저 동료분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죠."

툰나가 휴고를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좋은 기회군.'

수인족에 대한 정보.

후일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정보였다. 원작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정보는 에단도 알 도리가 없는 탓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꼼꼼히 읽어 보는 건데 말이야.'

누가 킬링 타임용 웹소설을 탐독하듯 철저히 분석한단 말인가.

'다시 돌아가도 못 할 짓이지.'

에단이 팔찌를 품에 넣었다.

"좋은 선물 감사드립니다."

"감사라니요. 감사 인사는 오히려 저희가 드려야 하는 거죠. 덕분에 숲이 다시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툰나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덩달아 르니엘도 툰나와 같이 고개를 숙였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에단으로서는 정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거기다 세계수가 완전히 오염되어 제 기능을 못 하게 되면 오히려 죽을 쑤게 되는 쪽은 에단 일행이었다.

적들에게 엄청난 기회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꼴은 못 보지.'

다른 걸 떠나서 눈꼴시어 볼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잘 해결됐지만, 엿을 먹이고 도망간 레벨린과 마크를 떠올리면 아직도 짜증이 치밀었다.

에단은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당장 급한 일부터 해결하면.'

수인족에 대해서도 조사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럼 슬슬 이동해 보겠습니다."

"제가 너무 오래 잡아 뒀군요."

"괜찮습니다. 덕분에 좋은 것도 얻게 되었고. 다만 부탁드릴 게 있다면...."

"네. 이번에는 목숨을 걸고 지켜 내겠습니다."

아직 세계수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어린나무는 주변의 비호가 필요했다. 하지만 툰나와 르니엘의 결의 가득한 눈빛을 보아하니 더 이상의 말은 불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배신자는 잘 처리했습니까?"

에단이 지나가듯이 말하자, 툰나와 르니엘의 표정이 굳었다. 배신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는 하나밖에 없었다.

'직접 나서는 건 좋지 않겠지.'

이 무리의 수장이자 실권자는 툰나였다. 여기서 툰나에게 과도한 간섭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았다.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르니엘을 바라봤다. 르니엘이 몸을 작게 떨었다.

"알아서 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한 번 배신한 녀석인 데다가 입지도 잃어버렸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에단은 후환을 남겨 두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이곳에서 직접 처리하기엔 걸리는 게 많아 주의로 끝냈다.

"명심하겠습니다."

르니엘의 대답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할 말은 남지 않았다.

"일어나자."

움직일 시간이었다.

* * *

말은 되찾았지만, 마차가 망가져 당장 운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냥 달리는 게 나으려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에단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때 헨리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헨리가 마차에 손을 뻗자,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지면에서부터 나무뿌리가 올라와 마차를 감싸자, 실선이 그어지거나 파손된 부위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가토와 휴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에단도 감탄 어린 휘파람을 불었다.

"이제 좀 쓸모가 생겼나요?"

헨리가 뿌듯한 얼굴로 대답하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밥값을 좀 하는군."

에단의 대답에 헨리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저야 고맙군요."

네이드가 허리를 두드렸다. 제아무리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서며 범인의 경지를 뛰어넘었다고 해도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마차 위에 올라탄 네이드를 본 헨리도 눈치를 힐끔 보더니 헤헤거리며 마차 위로 올라갔다.

"음, 그럼 나도 타야겠네. 불만 없지?"

에단까지 마차 위에 탑승하자, 휴고의 표정이 굳었다. 가토가 휴고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알지?"

"...잠깐만."

휴고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당연히 말들은 기겁을 하며 휴고의 손길을 피했다. 휴고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물들었다.

"왜 나만...."

"그 이유를 아직도 몰라?"

"...뭔데?"

"멍, 해 보면 알려 줄게."

"아까부터 그게 무슨 소리야...."

휴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차의 옆에서 떨어졌다. 마부석은 오늘도 가토의 차지가 되었다.

'...나 이걸로 기뻐해도 되는 걸까?'

가토는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지만, 금방 떨쳐 냈다. 가토 외에는 고삐를 들 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쟤보다는 낫지.'

오늘도 두 발로 여행길을 걷게 된 휴고보다는 입장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에단은 말없이 가토와 휴고를 바라봤다.

'바뀐 게 없군.'

휴고의 정체는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다.

단지 묻지 않을 뿐이었다. 그들은 휴고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에 거북함을 느끼지 않았다. 휴고는 휴고였고, 이전과 같은 동료일 뿐이었다.

네이드가 에단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도련님께서는 안목이 좋으시군요."

"갑자기 사탕발림이야?"

"그냥 그런 것 같아서 말해 봤습니다. 그나저나 오래간만에 사탕 좀 드릴까요?"

네이드가 품속에서 작은 알사탕을 꺼냈다. 에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네이드를 바라봤다.

"이런 건 도대체 왜 들고 다니는 거야?"

"도련님이 좋아하셨으니까요."

"아, 그래."

할 말이 없어지자 에단이 알사탕을 받아 들었다. 얇은 껍질을 까고 입에 넣으니 달달한 맛이 혀를 자극했다.

"달긴 하네."

"입맛에 맞으십니까?"

"근데, 나는 홍삼 맛을 더 좋아해."

"...홍삼이요?"

"어."

"그게 뭔지 모르겠군요."

"그런 게 있어. 씁쓸하면서 맛있는 거."

와그작.

에단이 입에 넣은 사탕을 깨부수며 말했다.

◈ [131화] 격동 (1)

기상 직후의 훈련 때문에 블란테의 아침은 분주했다. 후끈한 열기와 기합 소리는 블란테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이유로 바쁜 하루를 맞이했다.

"모두 빠르게 준비를 갖추도록!"

"충!"

기사들이 분주하게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블란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묵빛 갑주.

빈센트와 첸도 검은 정복을 입으며 준비했다. 첸은 미묘한 표정으로 빈센트를 바라봤다.

내색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오랜 기간 빈센트의 곁을 보좌해 온 첸은 빈센트가 지금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런 모습의 가주님은 오랜만이군.'

빈센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표현이 미숙했다. 검술 가문의 수장이라는 권위는 빈센트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첸이 빈센트 옆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첸의 시선을 느낀 빈센트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웃고 있나?"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기분 나쁘니 그만 웃지."

"상처 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시는군요."

"뭐라도 잘못 주워 먹었나?"

"글쎄요."

첸이 빙그레 미소 짓자, 얼굴을 찌푸린 빈센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은 채비를 갖추고 묵묵히 빈센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불만을 가진 기사들도 있었다.

'전쟁이나 토벌을 준비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 해?'

주군의 명령에 의심을 품는 것은 명예에 어긋난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블란테는 아카데미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리의 수장인 빈센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수하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 아카데미 따위에 가는데 이런 준비를 해야 하지?'

이러한 불만은 있었지만 가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대열의 사이에는 카론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론은 다른 기사들보다도 더욱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맞나?'

가장 먼저, 에단을 만나는 게 껄끄러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더 이상 자신이 에단을 넘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줄을 잘못 탔다는 게 문제지!'

이미 미운털이 박혀 버렸다. 개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하지만 카론에게도 나름대로의 억울함이 있었다. 가문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약육강식을 가훈으로 두는 가문의 특성상 약하면 잡아먹히기 마련이다. 막내로 태어난 카론은 불리함을 짊어진 채 후계자 싸움을 시작했다.

어릴 때의 나이 차는 의미하는 바가 컸고, 당연히 마스터를 목전에 둔 모룬은 넘볼 수가 없는 상대였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블란테의 피를 이었으면서 욕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경멸 어린 시선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카론은 어쩔 수 없이 먹잇감을 찾아야 했고, 때마침 좋은 먹잇감이 바로 에단이었다.

검술 가문 직계이면서 검을 두려워하며, 지식도 교양도,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짐승 같은 형.

카론은 에단을 경멸하고 혐오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하게 여겼다. 에단 덕에 자신이 입지를 키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에단은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과거의 나태한 돼지가 아니었다.

변한 에단과 부딪히며 카론은 현실을 인정하게 됐다.

카론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할 줄 알았고, 그 말인즉 더 이상 에단을 넘볼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아카데미까지 찾아가는 꼴이라니.'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블란테에서 가주의 명은 곧 법이나 진배없으니,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은 셈이었다.

기사들도 감히 볼멘소리를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카론은 기사들이 이번 일을 썩 내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사들만 이렇게 모을 줄이야.'

누가 보면 무력행사를 나간다고 생각할 정도의 숫자였다. 카론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찾아가는 이유가 뭐야?'

아들인 자신조차 묻지 못한 이유였다. 빈센트가 아카데미를 대하는 태도는 블란테의 구성원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방문이라니.

'에휴.'

카론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카론의 입지는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검술 스승도 이제 자신을 외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검술 스승인 아드먼이 떠오르자 입안이 썼다. 한 차례 고개를 흔든 카론이 정면을 바라보자, 기사들을 훑는 빈센트가 보였다.

후웅―

빈센트는 그저 시선만 던졌을 뿐이었지만, 그 여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심장을 옥죄는 압박감에 기사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블란테의 기사는 모두가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었고, 그만큼 자존심도 강했다. 하지만 빈센트는 시선만으로 그런 블란테의 기사들을 제압했다.

'...정말 괴물이군.'

자신의 아버지가 괴물이라는 사실은 과거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늘 다시금 느꼈다.

빈센트가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들인 지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빈센트는 늘 성장했다. 그의 성장은 더뎌지지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 강해지는 거지?'

카론은 두려웠다. 형제끼리 해 왔던 이권 다툼이 우습게 여겨졌다.

기사들은 여전히 긴장한 채 서 있었고, 빈센트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마음에 안 드는군."

"...!"

툭 던지듯 내뱉은 빈센트의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말이 우스운 건가?"

"아닙니다!"

기사들이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빈센트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탐탁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말하도록. 증명할 기회는 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빈센트는 몸을 돌렸다.

철그렁.

그때 쇠사슬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멈춘 빈센트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저건 누구지?'

처음 보는 인상에 카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큰 로브. 그리고 그 사이에서 덜그럭거리는 쇠사슬과 여러 무기들.

블란테는 고명한 검술 가문이다. 모든 기사들이 자신만의 검을 들고 있다.

하지만 그 검은 한 자루뿐이었다. 저자처럼 수많은 무기들을 달고 다니지 않았다.

그만큼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빈센트가 미간을 좁힌 채 후드를 눌러쓴 사람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별건 아닙니다. 기회를 준다고 하여 찾아왔을 뿐이지요."

큭큭.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음침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지만, 빈센트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호오, 지금 내 말을 거역하고 싶다. 그건가?"

"그럴 리가요. 단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죠. 우리가 아카데미를 가는 이유가 무엇이죠? 설마 그 망나니 때문입니까?"

미소를 머금고 있던 빈센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망나니?"

그 순간,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그 압력이 향하는 대상은 후드를 눌러쓴 정체 모를 남성이었다.

잘그락. 잘그락.

무형의 기세에 사슬과 무기들이 떨리고 있었다. 남자의 턱도 덜덜거리며 떨렸다. 몸이 떨리는 와중이었지만 남자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크크... 망나니가, 아닌가요?"

후웅.

기운을 거둔 빈센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그놈이 망나니인 건 사실이지."

"...하."

"하지만 아들놈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렉사르."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추적하는 사자' 렉사르의 질문에 빈센트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에단한테 얻어터지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닌가?"

* * *

에단 일행은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바뀐 것은 크게 없었다. 휴고와 가토는 여전히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아, 좀 떨어지라고. 말 몰기가 힘들잖아."

"...아니, 이 정도도 안 되는 거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말이 안 무서워하고 배겨?"

휴고의 표정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말들의 기피가 더욱 심해졌다.

말이 안정을 취하려면 상당히 멀리 떨어져야 했다. 남들이 보면 일행으로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휴고는 서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귀여운 새끼들.'

가토와 휴고를 한 차례 바라본 에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부터는 새로운 미래였다. 자신의 행동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후회 따위는 들지 않았다.

에단은 헨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헨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휴고와 가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네?"

"너 기억은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게... 잘 모르겠어요."

"뭐?"

헨리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분명 모르던 것을 알게 되기는 했다.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세계수가 조형한 존재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러면 채권자는 어떻게 된 건데?"

"아... 채권자요?"

헨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듯이 손뼉을 부딪쳤다.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헨리가 멋쩍게 웃었다.

"최근 너무 다사다난한 일이 많아서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그러고 보니 빚은 왜 졌지?"

"너 혹시 미쳤냐?"

"아니 그게...."

헨리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계수는 헨리에게 거짓 기억을 심어 놨다. 어떻게든 움직이도록 동기를 만들어 준 셈이었다.

"기억이 조금 뒤죽박죽이라서요."

"일단 기억나는 거라도 말해 봐."

"그... 아마 빌리게 된 게... 돈이 필요해서."

"그야 돈이 필요하니까 빌렸겠지. 왜 필요했는데?"

"그게... 동생한테 보내 줘야 하니까?"

"...맞을래?"

"죄송합니다."

헨리가 빠르게 사과했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헨리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아!"

"그래, 이제야 생각이 나?"

"그런데 그게...."

"뭔데?"

헨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에단에게 말했다.

"돈이 필요해서...."

"나랑 장난해?"

에단의 얼굴이 사나워지자, 헨리가 쭈물거리며 대답했다.

"그... 기억상으로는... 그 돈을 불리려고 했던 것 같아요...."

"돈을 불려? 네가? 뭐 어떻게?"

"아마... 도박이겠죠?"

그 순간 에단의 손이 올라갔다. 헨리가 얼굴을 가리며 싹싹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어휴."

에단이 손을 내리고 한심한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도박으로 빚을 져 놓고는 뭐? 동생?"

"...하하."

그녀도 머쓱했는지 웃음만 흘렸다.

"그래서 빚은 누구한테 졌는데."

"아 그게... 그 한니발이라고...."

헨리의 대답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은데?'

이런 이름을 들어 봤다면 아마 원작에서 언급된 내용일 터. 그때 얘기를 듣고 있던 네이드가 입을 열었다.

"한니발이라고 하면 혹시, 거상 한니발을 얘기하는 겁니까?"

네이드의 말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을 거예요...."

에단은 한니발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려고 기억을 헤집고 있었다.

'뭐, 생각이 나질 않는 거 보면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고....'

지금 중요한 건 헨리가 지고 있는 채무였다.

"그래서 빚이 얼만데?"

"그... 한 1,000골드 정도...? 헤헤."

"...야."

"네?"

"내려."

"살려 주세요!"

헨리가 울먹이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 [132화] 격동 (2)

헨리가 에단에게 말한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동생에게 보낼 돈이랑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아카데미의 급여가 너무 적었기에 어두운 곳까지 가서 돈을 빌렸다.

돈을 빌린 걸로도 모자라 그 돈을 불리기 위해 도박에까지 손을 댔다.

한마디로 크게 한탕 하려다가 개같이 말아먹었다는 소리였다.

'뭐 이런.'

분명 헨리는 세계수의 보험 같은 존재였는데, 그런 이가 알코올중독에 도박 빚을 진단 말인가. 에단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때 돈을 빌리기 위해 알게 된 사람이 한니발이라는 유명한 상인이다.

"왜 그러고 살았냐?"

에단은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봤고, 헨리는 할 말이 없었는지 마차의 구석에 쭈그리고 있었다.

'거상 한니발이라.'

대충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원작에서 등장하는 돈 귀신 캐릭터. 욕심 많고, 야망이 넘치던 캐릭터로 기억한다.

'결국 주인공한테 걸리긴 했지만.'

원작에서는 주인공한테 제대로 교육을 당한 이후로 그의 조력자로 활동했다.

상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많은 인맥을 구축하고 있으니 주인공의 조력자로는 제격이었다.

'나한테는 크게 메리트는 없지만, 상대하기는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네.'

헨리를 통해 한니발과 접촉할 명분이 생겼고, 에단은 그를 압박할 충분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블란테라는 세력.

블란테는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무력 집단이다. 상인에게든, 귀족에게든, 왕족에게든 블란테라는 가문이 가지는 위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뭐.'

블란테의 망나니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조만간 바뀌게 될 이미지였다.

아카데미의 교사직은 명패가 될 것이고, 따라오는 의심은 실력으로 짓누르면 그만이다.

'충분히 이용해 먹을 수 있겠어.'

닥친 일들 때문에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일들을 이번 기회에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붉은 곰 녀석들도 해결해야지.'

녀석들은 지금 낙동강 오리 알 신세다. 아카데미를 포기하고 자취를 감춘 레벨린이 일개 용병단까지 챙겼을 리 만무했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군.'

에단이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정보 길드와 연결하기 전 네이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그 상인이랑 일면식이 있나?"

혹시나 해서 던진 질문이었는데 네이드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얼굴은 알고 있습니다."

"오, 그래? 그것도 뭐 과거의 인연?"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군요."

네이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에단이 헛웃음을 흘렸다.

'음흉하기는.'

하지만 에단에게는 오히려 잘됐다.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았다.

"너 급여가 얼마였지?"

"아, 아카데미에서의 급여 말씀인가요?"

"그럼 내가 뭘 물어보겠냐?"

에단이 한심해하며 바라보자, 헨리가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20골드쯤...."

헨리의 대답에 에단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진짜 뒈질래?"

"10골드입니다...."

"그래, 두 배 주기로 했으니까. 네 월급은 앞으로 20골드야."

"와, 정말인가요?"

헨리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궁핍하게 살아온 탓에 20골드가 얼마나 큰 거금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그런데 당분간 안 줘."

"네?! 왜요?!"

"빚 갚아야지."

"히익."

헨리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에단이 눈살을 좁힌 채 바라봤다.

"네 급여로 빚을 다 까면 그때부터 줄 거야. 왜, 불만 있어?"

"...아닙니다."

헨리의 표정이 암울해졌다.

20골드라는 돈이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1,000골드라는 거금을 전부 변제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하고, 얼마나 개처럼 굴러야 한단 말인가.

'자, 그러면 얘는 해결이 되었고.'

에단이 수정구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수정구에 마나가 깃들기 시작하며 형상이 떠올랐다.

―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그 컨셉 언제까지 할래?"

에단이 짜증이 묻어난 표정으로 말했지만, 메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대체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래, 편할 대로 해라."

에단도 체념했는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메이는 그런 에단을 말없이 응시했는데,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었다.

에단이 씨익 웃었다.

"궁금해?"

― ...짓궂으시군요.

"어, 그래. 끊는다."

― 궁금합니다.

"얼마만큼?"

― 이익...!

"그래, 잘 가."

― 궁금해서 미쳐 버리겠어요! 이제 됐습니까?!

"어, 괜찮네."

에단이 킬킬거리며 웃다가 이어서 말했다.

"세계수 문제는 해결했어."

에단의 대답에 메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 정말 놀랍군요....

"왜? 내가 못 해낼 줄 알았어?"

―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저희 정보원들은 접촉조차 못 했기에....

"실력 부족이겠지."

― ....

에단의 신랄한 힐난에 메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반응이 어떻든 신경 쓸 바는 아니었기에 에단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일은 잘 진행하고 있나?"

― 사미라 씨에 관한 일 말인가요?

"어. 붉은 곰은 어떻게 됐지?"

― 접촉은 성공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붉은 곰의 행보가 조금 이상하더군요.

"이상하다고?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 붉은 곰은 원래 굉장히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득이 될 의뢰만 수행하고 다녔죠. 저는 단장이 영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군."

에단이 피식 웃자,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붉은 곰은 지금 정체되어 있습니다. 최근 의뢰를 받은 것 같기는 한데 별로 좋은 의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의뢰인데?"

― 영지전입니다.

메이의 대답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영지전?"

아니, 그걸 왜 해?

에단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의뢰였다.

영지전은 집단끼리의 전투였기에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일개 용병단이 활약하기에는 쉽지 않은 임무였다.

붉은 곰 용병단은 엄청난 주가를 달리고 있었다. 실력은 입증되었다고 봐도 좋았고, 당연히 모아 둔 돈도 적지 않을 테다.

'하지만 전쟁은 다른 얘긴데.'

소규모 무리가 뛰어나다고 한들, 영지전 같은 대규모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어려웠다.

전투의 지휘권자가 귀족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들은 용병을 쓰다 버릴 소모품으로 여겼으니까.

'레벨린이 없어진 게 크군.'

확실히 지시를 내리던 존재의 부재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뭐가 이상하지?"

― 영지전에 참가한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말은 그 어떤 명마보다 빠르니까요. 영지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다면 몸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겠죠.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 그런데 이상한 게... 붉은 곰을 고용한 게 영지전에 참가하는 영주가 아닙니다.

"뭐?"

― 그 사이에 한니발이라는 상인이 끼어 있어요.

"한니발?"

― 들어 보셨나요?

에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자, 눈을 마주친 네이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단의 시선이 다시 수정구 너머의 메이에게로 향했다.

"어, 좀 알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것 같거든."

― ...쉬워진다고요?

"그래. 앞으로 이제 벌어질 상황을 간략하게 알려 줄게. 네가 잘 써먹어 보라고."

이미 벌어진 상황과 벌어질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해 설명했다.

아카데미 주축들의 도주, 블란테의 아카데미 흡수 계획, 세계수를 오염시킨 놈들의 정보, 이어지는 마수, 그리고 붉은 곰에 관한 계획까지.

드레이에 관한 얘기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귀에 들어갈 확률이 높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메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정구에 비친 메이의 입이 떡하고 벌어져 있었다.

― ...대체 당신은 무슨 일을 벌이시려는 겁니까?

"글쎄? 나도 몰라."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 * *

아카데미는 소란스러웠다.

관리원 대부분이 빠져나갔고, 때문에 당연히 정상적인 수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에밀라는 아직 낫지 않은 몸을 이끌고 학생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가뜩이나 부족했던 교수들의 이탈로 남은 교사는 둘 뿐이었다.

에밀라와 크러쉬.

크러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카데미를 빠져나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쯤에서 발을 빼야 하나?'

에단의 경고야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애당초 에단의 말은 믿기 힘든 것투성인 데다가,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 아니었다.

크러쉬는 당장에라도 떠나고 싶었지만, 에밀라는 아카데미를 떠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크러쉬는 그런 에밀라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고고한 귀족인 내가 평민보다 먼저 자리를 뜰 수는 없지.'

에단이 한 말 때문에 이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귀족의 권위는 책임으로 만들어진다. 그걸 떠올린 크러쉬는 다시 발 빠르게 움직였다.

* * *

에밀라의 얼굴은 복잡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홀연히 사라진 에단에 대한 원망도 들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에밀라와 크러쉬만으로는 학생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역부족이었다.

당장 아카데미의 기능 자체가 멈췄는데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에밀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에단이 오면 일이 어떻게든 해결될 것 같았다.

"에밀라 교수님."

에밀라가 고개를 들었다. 리사가 에밀라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리사 학생, 무슨 일입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리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진지한 태도에 에밀라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먼저 들려오는 불미스러운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죠?"

"그거야 뭐...."

에밀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만큼 자연스럽게 소문이 들려오기 마련. 그녀가 최근 들은 소문 중 하나는 리사와 에단이 교제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에밀라가 리사와 에단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겠으나, 에밀라는 리사와 에단이 남매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도 적지 않게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평민 출신 기재라고 알려진 리사의 가문이 블란테라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드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고...."

리사가 무거운 표정으로 에밀라를 응시하자, 에밀라의 얼굴도 사뭇 진지해졌다.

◈ [133화] 격동 (3)

'예쁘게 생기긴 했네.'

리사가 눈을 끔뻑이며 굳은 표정의 에밀라를 바라봤다. 에밀라는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얼굴선, 뚜렷한 이목구비, 윤기가 흐르는 은빛 머리칼, 짙은 속눈썹과 차가운 듯하면서도 고혹적인 눈매.

'...이런 사람이 오빠를 왜 좋아하는 거지?'

심지어 에단은 에밀라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얼굴을 굳히고 있는 에밀라가 귀엽게 느껴졌다.

상황은 급박했지만, 리사는 왠지 그녀를 골려 주고 싶었다.

"교수님, 제가 왜 평민인 척 아카데미에 입학했는지 아시나요?"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죠?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는다면 훨씬 편한 생활이...."

"그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구요. 고작 가문의 위신이 높다고 나한테 빌빌거리는 모습이."

"...."

"교수님도 그러신가요?"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요?"

눈살을 좁히면서 말하는 에밀라의 모습에 리사가 작게 미소지었다.

"그럴 리가요. 교수님은 블란테에 뒤지지 않은 아카데미의 꽃 아닌가요?"

"...리사 학생."

상기된 얼굴로 다그치는 에밀라를 웃으며 바라보던 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먼저... 지금 상황에 대해서는 저보다 교수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죠?"

에밀라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리사가 에밀라의 팔을 붙잡았다.

"그건 오빠가 나서면 해결될 거예요. 근데 아직 저는 이게 맞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교수님께서 도와주셔야 해요."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리사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말했다.

"지금 저희 아버지가 오고 있어요."

"아버지라고 하면... 블란테의 가주가 온다고요?!"

에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빈센트는 세간에 얼굴을 비추지 않기로 유명했다.

블란테가 고유의 자치령으로 인정받게 된 이후 빈센트는 그 어떤 대외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베일에 쌓여 있고, 신비한 인물이 빈센트였다. 그런 그가 아카데미에 직접 행차한다니.

"이유가 무엇이죠?"

"저도 구체적인 건 듣지 못했지만... 아마 저희 가문이 아카데미를 맡을 것 같아요."

"...블란테 가문이 아카데미를요?"

그게 가능한 얘기인가?

아카데미는 평등을 표방하는 대륙의 협력 단체였다. 각국 고위 인사들과 귀족들의 자제도 몰려들고 있는 곳이 바로 아카데미였다.

그런 아카데미의 통제권과 운용권은 민감한 문제였다.

귀족이 아카데미의 운용을 맡게 되면 자신의 세를 키우는 데 이용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최근 대륙 내에서 아카데미가 가지는 권위는 결단코 낮지 않았다.

그런 아카데미에서 연달아 사건이 터져 나왔다. 학생들이 대거 목숨을 잃을 뻔했고, 교직원들의 대처는 미흡했다.

아카데미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앞으로가 더 문제인 상황이라는 점이다.

교직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렇다는 것은 아카데미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에밀라가 유능하고 다재다능하다고 해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혼자서 수많은 학생들을 모두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블란테가 온다고 하면.'

블란테는 검술 가문이었다. 블란테가 아카데미를 운용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오히려 많은 주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기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반발이 엄청날 거야.'

블란테는 웅크리고 있는 사자였다. 지금은 구석에서 몸집을 불리고 있지만, 언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가 바로 블란테다.

한 가문이 국가에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눈엣가시인데 대륙의 중심으로 진출할 빌미를 준다? 왕족과 고위 귀족들이 허락할 리가 만무했다.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아카데미가 이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은 그들도 원하지 않는다.

'지금 아카데미는 좋은 먹잇감이니까.'

그동안은 레벨린의 수완으로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탈하자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에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든 해결할 것만 같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

어째서인지 에단의 얼굴을 떠올리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리사 학생?"

"음, 일단...."

리사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들을 좀 모으죠."

일단은 어떻게든 해야 했다.

* * *

"하암."

에단이 기지개를 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더럽게 귀찮네.'

이제 초반에 얻을 수 있는 대다수의 기연은 얻어 냈다.

그 외에도 부수적인 무언가가 있었지만, 지금의 에단에게는 딱히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오히려 과한 편이지.'

에단의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의도치 않게 얻은 힘. 에단은 욕심이 많았지만, 소화하지 못할 것까지 탐하지는 않았다.

정말 의도치 않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불안 요소는 지워 냈지만.'

에단이 눈을 감고 체내에 잠재되어 있는 기운을 느꼈다.

몸속에 있는 기운은 더 이상 죽은 마나가 아니었다. 흉포하고 사납던 죽은 마나 대신 호수같이 고요한 마나가 자리해 있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여기서 페온과 카이나를 추궁해 봤자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에단이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그냥 운동하고 퍼질러 자고 싶군.'

본래라면 주인공이 나서서 해결해 나가야 할 일이었다. 그 모든 일들을 자신이 도맡게 되다니. 형용할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

'코쟁이 놈들은 당연히 반발하겠지?'

작은 중소 가문이 아카데미를 운용한다고 해도 난리를 칠 판에 블란테라니. 입에 거품을 물게 될 게 빤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막상 닥쳐 보면 어떻게든 되기 마련이다.

'명분은 마련해 놨으니까.'

원래라면 천천히 절차를 밟아 흡수할 생각이었지만, 레벨린이 도주해 버리는 탓에 절차는 건너뛰게 되었다.

'슬슬 그놈들 얼굴도 한번 봐야 되고.'

영지의 산속에 짱 박아 둔 녀석들이 떠올랐다. 대략적인 기본 운동만 알려 주고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으라 명령해 뒀던 놈들.

바로 벨몬트와 줄리엔 패거리.

'요긴하게 써먹어야지.'

에단이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집단 중 하나였다.

필요에 의해서 놔둔 것이기도 했지만, 제대로 써먹으려면 아무래도 직접 손을 대야 했다.

'제대로 운동은 하고 있으려나 모르겠군.'

동굴 속에서 낑낑거리고 있을 녀석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 * *

후욱, 후욱.

블란테 가문의 산속 동굴 안에는 오늘도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뚝뚝.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턱을 따라 흘러 바닥에 떨어지는 땀방울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신음 소리.

"하나만 더!"

"고작 그 정도로 포기하려고? 그것밖에 안 돼?!"

줄리엔과 벨몬트의 응원에 잭슨이 이를 악물고 마지막 팔굽혀펴기를 성공했다.

파르르.

한계에 다다른 팔이 파르르 떨렸다. 잭슨이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허억, 허억.

잭슨이 바닥에 엎어진 채로 숨을 헐떡였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동굴에서 운동을 시작한 지 벌써 며칠이 흘렀다. 동굴 안은 정보 요원인 잭슨도 처음 겪어 보는 구성으로 채워져 있었다.

뱀파이어, 고블린, 인간의 조합이라니.

직접 본 게 아니면 믿을 수가 없는 조합이다. 심지어 이들은 무언가를 꾸미는 게 아니라 묵묵하게 운동을 하고 있었다.

'운동 방식은 또 왜 체계적인 건데?'

모든 운동은 기본적인 맨몸 운동이었다. 그러나 자세와 휴식 시간, 그리고 가동 범위까지, 모든 체계가 갖춰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걸 알려 준 이도 에단이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아니면 이게 블란테의 수련법인 것일까?

잭슨은 정보 요원이었지만, 전투 요원이기도 했다. 정보를 캐다 보면 어떤 위기 상황에 처해질지 알 수 없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에단이 알려 준 운동법에 호기심을 느꼈다. 기사가 된 이라면 모두가 선망하는 블란테의 수련법이었다.

그런 수렵법을 경험할 기회가 왔음에도 포기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한 번만 해 보자!'

그렇게 시작된 근력 트레이닝.

푸시업, 풀업, 스쾃, 크런치까지. 모두 생소한 용어였다. 하지만 숙달된 조교들의 시범으로 잭슨은 어렵지 않게 따라 했다.

단순한 동작에 처음에는 실망했다. 하지만 속도를 제한하고, 횟수를 늘리고, 쉬는 시간을 줄이니 운동의 강도는 차원이 달라졌다.

'저래서 몸들이....'

어둠 사이로도 보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근육들이.

잭슨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충분히 탄탄한 몸이었지만, 줄리엔의 우람한 가슴근육을 보자 자신의 몸이 더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잭슨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줄리엔은 그런 잭슨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첫날부터 정말 대단하십니다. 첫 등장 때부터 범상치 않았음은 느꼈지만...."

"...과찬입니다. 고작 이 정도밖에 못 하다니 한심하기 그지없군요."

"그런 소리 마시죠!"

잭슨을 바라보는 줄리엔의 눈에는 뜨거운 열의로 가득했다.

"그래, 처음 온 녀석치고는 꽤나 봐줄 만하더군."

꽤나 균형 잡힌 몸을 가지게 된 벨몬트가 잭슨에게 다가왔다. 벨몬트의 팔은 더 이상 앙상하지 않았다.

상의를 탈의한 벨몬트의 피부는 창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하얬다. 하지만 그 하얀 피부에는 오밀조밀한 근육이 자리해 있었다.

"마셔라."

벨몬트가 무심하게 잔 하나를 잭슨에게 건넸다. 그걸 본 줄리엔의 눈이 흔들렸다.

뒤에 자리해 있던 험상궂은 인간들도 아쉬움 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벨몬트 님, 정말 괜찮습니까?"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본 적 있느냐? 걱정 말거라. 최근 몬스터를 포획하는 속도가 늘어 충분한 양을 만들어 줄 수 있으니."

"오오...."

줄리엔을 포함한 인간들과 고블린이 감탄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잭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잔을 받아 들었다.

"...이게 무엇이죠?"

찰랑거리는 액체를 보아하니 마시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러기에는 색과 향이 좀 이상했다.

'내용물도 좀 걸쭉한 것 같고....'

보기만 해도 거부감이 느껴지는 비주얼이었다. 잭슨이 꺼림칙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줄리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얘들아, 불 좀 켜라."

"네! 형님!"

산적들이 불을 몇 개 더 밝히자 동굴이 환해졌다. 시야가 트이자 그제야 잔 안에 든 내용물이 보였다.

'...피?'

잔에 넘실거리는 것은 마치 피처럼 보였다. 잭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이거 설마...."

잭슨이 말끝을 흐리자, 벨몬트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나의 특제 비전 드링크다."

"그렇다면 여기 담겨 있는 게... 피라는 소리입니까?"

"피는 피지만 단순한 피가 아니지."

대답하는 벨몬트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벨몬트를 바라보던 잭슨의 정신이 순간 아득해졌다.

◈ [134화] 격동 (4)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엘프의 숲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툰나는 에단 일행이 마을을 떠난 뒤 곧장 르니엘을 불렀다.

"르니엘."

평소처럼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가 날이 서 있는 모습에 르니엘이 굳은 얼굴로 툰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도 바보가 아니었다. 툰나가 어떠한 의도로 자신을 불렀는지 예상이 갔다.

"리트마의 상태는 어떻지?"

"당분간 눈을 뜨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툰나는 고민했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 또한 한 무리의 수장이었다. 지금은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었다.

다만, 고민하는 지점은 '방식'에 관한 문제였다.

리트마가 외부인과 어떻게 내통하였는지, 또 내통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이후 똑같은 불상사를 방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또다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에단은 엘프들의 규율을 존중하며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실망시켜 드릴 수는 없겠군.'

잠시 에단을 떠올린 툰나가 르니엘을 바라봤다.

"르니엘."

"네, 툰나님."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저는...."

르니엘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툰나와 눈을 마주쳤다. 르니엘의 눈에는 결의가 차올라 있었다.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습니다."

르니엘의 확고한 대답에 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을 소집해 주게."

"알겠습니다."

르니엘의 신형이 홀연히 사라졌다. 이번 일로 인해 힘을 얻게 된 르니엘은, 명실공히 마을 내에서 수위를 다투는 실력자였다.

르니엘이 마을에 있는 모든 엘프를 소집했다.

"리트마의 처분에 대해 말을 하려고 합니다."

르니엘이 차게 식은 눈으로 엘프를 바라봤다.

"이것은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화를 해치려고 한 자를 용서한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르니엘이 가볍게 손짓했다.

휘잉∼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일었다. 붕대에 쌓인 리트마의 몸이 모두의 앞에 떠올랐다.

리트마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에단에 의해 철저하게 박살 난 탓에 리트마를 알아보는 자들도 많지 않았다.

"뭐야?"

"...저게 누구지?"

엘프들이 웅성거렸다. 외모 탓에 알아보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리트마는 여느 엘프와는 다른 이질적인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저희 마을과 숲, 그리고 생명의 나무를 위기에 빠트린 범인이 바로 리트마입니다."

"...리트마라고?"

엘프들이 혼란에 빠졌다. 리트마는 원래 누구보다 엘프들의 안위와 숲의 보호에 적극적인 의사를 피력했다.

그런 그가 배신자라니.

엘프들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방금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배신자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습니다."

툰나는 말없이 르니엘의 뒤편에 서 있었다. 르니엘은 어느새 엘프들을 이끄는 중심점이 되어 있었다.

원래 이 역할은 툰나의 몫이었지만, 이번 일은 르니엘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 이제 그녀가 엘프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르니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매서운 안광이 리트마에게로 향했다.

"이게 배신자의 말로입니다."

르니엘의 말투는 굳어 있었다.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하게 말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후우웅―

바람이 일며 무형의 활과 화살이 그녀의 손에 걸렸다.

르니엘이 활시위를 당기자 손가락에 걸리는 감각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표적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했다.

퉁!

르니엘의 손끝이 활시위를 놓자, 바람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리트마를 관통했다.

푸슉!

선혈이 솟구쳤다.

충격적인 광경에 엘프들은 입을 떡 벌렸다.

가족과도 같은 마을 구성원의 죽음만으로도 충격적일진대, 다른 누구도 아닌 르니엘의 손길로 인해 리트마가 목숨을 잃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르니엘은 더 이상 방심하지 않겠다는 듯 재차 손을 들었다.

후웅!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다. 몰아치던 바람은 르니엘의 손짓으로 인해 회오리가 되었다.

단순한 회오리바람이 아니었다. 폭풍 속에는 마나의 칼날이 가득했다.

콰가가가가가―!

회오리바람이 리트마의 선혈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 리트마는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잘게 찢겨 나갔다.

"...."

잔혹한 광경에 엘프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개중에는 구역질을 하는 엘프들도 있었다.

하지만 르니엘의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차게 식은 눈으로 붉은 회오리바람을 응시했다.

"이게 바로 숲과 마을을 위험에 빠트린 자의 말로입니다."

무심한 듯 보이는 르니엘의 연설에 엘프들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마을의 중심에는 이제 르니엘이 있다는 사실을.

* * *

블란테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단은 적당한 인원만 차출해서 오라고 했지만, 에단과 빈센트가 생각하는 적당히의 기준이 달랐다.

정예 기사 100명.

병사들의 숫자가 아닌, 오롯이 기사들로만 이루어진 구성이다. 심지어 개중에는 중급 마나 유저 이하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두 상급이거나 최상급의 경지에 이른 기사들.

개개인이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었는데, 그들이 갑주를 입은 채 대대적인 이동을 하고 있으니 적잖은 파장이 일었다.

"뭐, 뭐야?! 전쟁 준비인가?"

"블란테가 움직인다고?"

"빠, 빨리 알려야 해!"

영지민부터 지나가는 행인과 상인까지. 블란테의 이동은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최정예로만 구성된 블란테 기사들의 이동. 이건 아무리 봐도 무력시위에 가까웠다.

이와 같은 상황에 여유를 가지고 있는 자는 빈센트와 첸 이외에는 없었다. 빈센트는 간만에 나온 외출을 만끽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숨소리조차 함부로 내지 않았다. 그저 대열을 갖춘 채 발맞춰 걷고 있었다.

엄숙하고 절도 있는 움직임이었다. 위압 있는 풍경에 겁에 질린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금 본 것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기사들은 쉬지 않고 행군했다. 모두 상급 마나 유저 이상의 기사들이었다.

혹독한 훈련을 견딘 기사들에게 행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야영지도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카론은 천막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카론 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신가요?"

개인 시종의 질문에 카론이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에단을 볼 생각을 하니 심란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또 지랄하겠지.'

벌써부터 어지러웠다. 비수와도 같은 에단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푹푹 찌르는 기분이었다.

'대체 아카데미에는 왜 가는 거야?'

정말로 이유를 모르겠다.

블란테는 이미 안정된 집단이다. 괜스레 파란을 일으킬 행동을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카론이 나서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후우∼"

카론이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 천막 안으로 누군가가 대뜸 들어왔다. 카론이 인상을 찌푸렸다.

블란테의 혈족 중 카론의 입지가 제일 좁다고는 하나, 예고도 없이 무단으로 들어서다니.

카론은 불쾌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지만, 의외의 인물에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영지에서 출전 전 소란의 주범이었던, 렉사르라는 남자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카론의 시종이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대체...."

"그만."

팔을 들어 시종을 제지한 카론이 몸을 일으켰다.

'...강해.'

후드 너머로 수많은 흉터가 보였다. 저 흉터들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사선을 넘나든 것인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렉사르 자체에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기운이 느껴졌다. 끈적하고, 소름 끼치며, 포악한 살기였다.

하지만 카론 또한 블란테의 일원이었다. 여기서 겁을 집어먹은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성함이 렉사르라고 하셨나요?"

"맞습니다."

쇠가 갈리는 것 같은 거친 목소리가 렉사르의 입에 흘러나왔다. 듣기 힘든 목소리에 카론이 멈칫했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채 다시 질문했다.

"저를 찾아온 이유가 있습니까?"

카론의 물음에 렉사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의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카론이 미간을 좁혔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렉사르의 시선이 카론을 향했다. 보기만 해도 비릿함과 끈적한 살기가 느껴지는 누런 동공이었다.

"에단 님에 대해서 질문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형에 대해서요?"

예상 못 한 질문에 카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렉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 모를 거북함에 카론이 자기도 모르게 조금 물러섰다.

"뭐가 궁금하시죠?"

"어떻게 싸우는지."

'뭐야, 왜 또 말이 짧아? 그리고 그게 왜 궁금하지?'

일전에 있었던 아버지와 렉사르의 대화를 떠올렸다.

'...설마 그걸 담아 두고 있었나?'

카론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렉사르를 바라봤다. 장구류며 옷차림이며,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자가 있다는 걸 왜 몰랐지?'

그리고 왜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어려운 건 아니니 설명은 드릴 수 있습니다. 한데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끔직한 목소리군.'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정말로 듣기 힘든 목소리였다. 카론이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신가요?"

"...."

원론적인 카론의 물음에 렉사르가 한참 동안 침묵했다.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이던 렉사르의 시선이 카론에게로 향했다.

렉사르의 짐승 같은 눈을 마주한 카론이 침을 꿀꺽 삼켰다.

"블란테의 사냥개."

그 말을 끝으로 렉사르는 입을 다물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카론이 눈을 끔뻑였다.

'사냥개? 무슨 소리를.... 설마?'

마침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간 소문만 무성하고 베일에 싸여 있던 인물.

'이자가 추적하는 사자라고?'

빈센트를 제외한 개인의 무력이라면 흑사자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첸이 가장 강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지만, 그와 함께 종종 언급되는 이름이 있었다.

'추적하는 사자.'

한데 렉사르라는 자는 딱히 숨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카론도 몇 차례 들은 적 있었다.

'추적하는 사자'에게 쫓기게 된다면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낫다고.

괴담처럼 도는 말이었기에 카론은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다. 괴담은 괴담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실존하는 인물이었다니.'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나 첸과는 전혀 다른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음성에 카론이 화들짝 놀랐다.

'뭐, 별일은 없겠지.'

카론은 과거의 망나니 때의 에단부터, 바뀐 이후의 에단의 싸움 방식까지 렉사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게 당했는지에 대한 표출이었지만, 그럼에도 충실히 에단의 전투 방식을 설명했다.

렉사르는 천천히 카론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고작 이런 놈한테 내가 당할 거라고?'

기가 찼다.

카론의 말을 듣고 있던 렉사르의 안광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 [135화] 격동 (5)

"...블란테가 온단 말입니까?"

순간적으로 크러쉬의 몸이 비틀거렸다. 크러쉬는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 벽을 짚었다.

비록 넘어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었어?'

에단이 블란테라는 말.

반신반의했다. 블란테가 누구인가. 불세출의 검술 명가 아닌가. 대륙에 떨치는 위상만 놓고 보면 그 어떤 가문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귀족 중에서도 귀족이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정말 블란테라고?'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이 가빠졌다.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고,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떠올려 보니 소름이 끼쳤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크러쉬가 비틀거리기 시작하자, 에밀라가 크러쉬의 팔을 붙잡았다.

"정신 차리세요."

"...네, 그래야죠."

에밀라는 침착하게 이후 일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게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사에게 전달받은 말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게 현실적으로 실현이 가능한 일인지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도해야 했다.

학생들의 불안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고, 이대로 가다가는 아카데미는 붕괴하고 말 게 빤했다.

"...먼저 학생들을 모아 보시죠."

에밀라의 말에 크러쉬가 결의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확히 무슨 계획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크러쉬는 에밀라를 신뢰했다.

크러쉬가 다급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밀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녀도 정작 이게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 *

학생들 사이에 속해 있는 리사는, 학생들의 상황을 직접 겪고 있었다.

"리사,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율리가 리사의 곁으로 다가왔다. 리사에게는 많은 추문이 따랐다. 교수와의 스캔들, 로만과의 사건, 그리고 드레이까지.

그녀가 주의를 주며 입단속을 시켰지만, 떠도는 소문을 모두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율리가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자, 리사는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미안해.'

리사는 율리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지만, 어찌 됐건 리사는 율리를 속였다.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나면 율리가 느낄 배신감은 적지 않을 것이다.

리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 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이 상황에 꼴에 귀족이라는 것들은 권위를 세우고 있고.'

권력을 지녔다면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리사가 알고 있는 귀족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 주고 있지 않았다.

실력과 평등을 추구하던 아카데미의 본질이 옅어지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리사가 나서서 한마디를 하려고 할 때,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

소란스럽던 학생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말을 내뱉은 당사자는 드레이였다. 드레이의 윤기 나는 금발은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의 이미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존재감이 없는 학생이 아니었다.

"정녕 아카데미의 학생이 맞습니까? 정말 어이가 없을 지경이군요."

드레이의 지적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한 학생이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던 리사가 눈살을 좁혔다.

'저 녀석은....'

라프.

꽤나 저명한 기사 가문의 아들로 알고 있었다. 기사 가문의 자제인 만큼 학생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너는 뭐 하는 새끼야?"

라프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라프가 아무 이유 없이 저런 말을 내뱉은 건 아니었다.

라프는 자존심이 강했다. 강한 자존심만큼 자신의 실력과 가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했다.

아카데미의 반 배정은 실력순이었다. 하지만 그 기준은 교수진들이 결정했고, 라프는 최근 B반으로 강등당했다.

라프 본인을 제외한다면 모든 학생들은 라프가 강등당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특유의 오만함.

그것이 바로 라프가 강등당한 이유였다. 라프의 자부심은 정도를 넘어섰다.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영 못 믿겠단 말이야. 머리 색은 특이한 것 같은데. 너, 어디 가문이냐?"

유치한 비아냥이었다. 라프가 미소를 머금은 채 건들거리면서 드레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정작 드레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라프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드레이의 반응이 탐탁지 않았는지 라프의 표정이 굳었다.

라프는 건방지게 앞으로 나선 드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레이에 대한 소문이 떠돌아다녔다.

하나 같이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었다. 라프는 그 소문을 듣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카데미에는 머저리들이 가득했으며, 실력만 놓고 본다면 언제나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예외는 있었다. 높은 집안의 자제라면 라프도 어느 정도의 대우를 해 줬다.

'버러지 같은 평민 주제에.'

하지만 드레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라프가 손을 들었다. 피하든, 피하지 않든 그것을 덜미 잡아 교육을 시킬 생각이었다.

드레이는 여전히 라프를 빤히 바라봤다. 경멸이 담긴 시선에 라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 안 깔아?!"

라프가 손찌검을 하려 하자, 드레이는 가볍게 공격을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견인력에 드레이가 끌려 나갔다.

쿵!

드레이가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와 함께 타격음이 터졌다.

빠악―!

리사가 라프의 얼굴에 주먹을 꽂은 것이다. 정통으로 정권을 맞은 라프가 그대로 뒤로 쓰려졌다.

"끄아아악!"

라프는 얼굴을 감싸 안으며 비명을 터트렸다. 코뼈가 부러진 것인지 라프의 얼굴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카앗! 퉷!"

리사가 바닥에 침을 내뱉었다.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사의 입가가 비틀렸다. 통쾌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더 지껄여 보시지? 아주 엿 같아서 들어줄 수가 없던데."

리사의 신랄한 욕설에 코를 틀어막은 라프가 리사를 노려봤다.

"느...! 으 개즈식이...!"

"얼씨구, 이제 말도 똑바로 못 하냐? 너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부모님한테 말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거 아니야? 아, 그것도 이른가?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리프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욕설에 주변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율리는 발을 동동 굴렀다.

"리사... 어,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상대방은 귀족이었다. 그것도 변두리 약소 귀족이 아닌, 중앙 정계에 발을 들인 진짜배기 귀족이다.

이건 실수라는 말로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런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가기에는 사건이 커졌다.

재판이나 처벌을 기다릴 것도 없었다. 뭐가 됐든 권력이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테니까.

하지만 리사에게서는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들먹거리듯 짝다리를 짚은 채 팔짱을 끼며 라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꽈드득!

라프가 이를 악물었다. 과거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민 주제에 알량한 검술 실력을 믿고 설치는 게 눈에 거슬렸다.

라프가 몸을 일으켰다. 욱신거리는 코가 그의 분노를 가중시켰다.

눈앞에서 거들먹거리는 리사를 찢어 죽이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라프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키이잉.

라프의 분노를 대변하듯 불쾌한 쇳소리가 울렸다. 학생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검을 뽑은 이상 라프의 의도는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 정말 리사와 싸울 셈이야?'

이전까지였다면 리사의 안위를 걱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던전 탐사 이후로 리사의 진면목을 알게 된 자들이라면 리사가 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사의 무위는 동급생들 중에서 독보적이라는 걸 모두가 알아차렸으니까.

드레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리사를 만류했다.

"그만하시죠. 감정적으로 나서서 득이 될 게 없습니다."

이미 분노에 물든 라프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오히려 만류하는 드레이마저 죽일 듯이 노려봤다.

"네가 뭔데 멈추라 마라지? 선택권은 나한테 있어. 저년을 죽이고 너 또한...."

"너 혀 더럽게 긴 거 알아?"

리사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녀는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검이 부드럽게 뽑혀 나왔다. 리사의 검은 이미 한 차례 피를 머금었다. 목숨을 건 실전은 그 어떤 훈련보다도 그녀를 성장시켰다.

"너...."

순간 머뭇거린 라프가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떨림은 공포의 방증이다.

'내가 겁을 먹었다고?'

납득할 수 없었다. 고작 저따위 평민 계집에게 겁을 집어먹다니. 그게 말이 된단 말인가. 라프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부정했다.

이것은 전투 전의 고양감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뇄다. 어차피 승자는 자신이다. 라프가 쓰는 검술은 명가의 것이었다. 그러니 근본 없는 평민의 검과 비견될 게 아니었다.

뿌드득.

라프가 부서질 듯 검을 움켜줬다. 흥분이 공포를 집어삼켰다. 경험 없는 하룻강아지는 범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과거 리사도 마찬가지였다. 리사는 에단을 보며 '할 만하다'라고 여겼고, 아무것도 못 한 채 박살 났다.

'재수 없는 오빠의 마음이 이해가 되네.'

눈앞에 검을 들고, 공포를 외면하는 라프의 모습이 더없이 같잖게 느껴졌다.

리사는 우스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가 피식, 코웃음을 치자 그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죽어!"

라프가 검을 든 채 맹렬히 달려들었다. 위압적인 모습이지만, 그만큼 단순하고 무식했다.

저래서야 검을 든 의미가 없었다. 흥분한 멧돼지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방법이 너무 많아서 고민일 지경이야.'

반격할 방법이 너무 많이 떠올랐다. 무엇을 골라도 별 상관없었다.

돌진하는 라프를 향해 리사가 검을 밀어 넣었다. 신속한 공격은 아니었다. 그저 적절한 타이밍을 노린 공격.

"흥!"

라프가 리사의 일격을 피해 냈다. 그 또한 수위에 오른 검사였다. 이 정도 검을 피해 낼 실력은 지니고 있었다.

"뭘 쪼개?"

리사가 다시금 콧방귀를 뀌며 빙그르 회전했다. 라프가 당황하며 검을 들었다. 하지만 라프의 대응이 눈에 훤했다.

리사는 검무를 췄다. 그와 동시에 라프에게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 솟구쳤다.

라프의 손에 검흔이 새겨졌다. 그리고 전신에 가느다란 실선이 그어졌다.

촤아악!

"끄아아악!"

붉게 물든 채 바닥에 엎어진 라프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리사는 벌레를 바라보는 것 같은 싸늘한 눈초리로 라프를 바라봤다.

"이제야 주제 파악이 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학생들의 입이 벌어졌다.

◈ [136화] 불쾌한 도발 (1)

리사의 승리를 목격한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평민이라고 알려진 리사가 명문가의 적자인 라프를 압도적으로 이기다니.

귀족의 입장에선 평민이 주제 넘는 짓을 벌였다고 생각해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광경을 본 학생들은 리사가 로만을 죽였다는 소문을 다시금 떠올렸다.

"라프 경!"

같은 동급생이면서 '경'이라는 호칭을 부르며 달려 나가는 학생.

그 학생은 라프를 부축하며 리사를 노려봤다.

"알량한 실력을 믿고 까부는 거 같은데,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아? 보아하니 로만을 죽인 것도 사실 같은데."

리사가 로만의 목을 베는 모습은 같은 반 학생들이 목격했다. 에밀라가 주의를 줬다지만, 모든 학생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리사에게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비난하는 학생을 바라봤다.

"어쩌라고."

"뭐 저런 무뢰배 같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귀족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이래서 평민은 안 된다는 자도 있었고, 당장 부모님에게 연락을 취해야겠다고 협박조로 읊조리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리사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빠가 오면 다 입 다물 것들이.'

리사도 믿는 구석 없이 일을 벌인 게 아니다. 아버지가 아카데미에 도착해 이 꼴을 본다면 눈을 뒤집고 격분할 것이 분명했다.

빈센트는 명백한 딸바보였다. 리사는 빈센트의 과한 애정이 견디기 힘들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까지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에단이 떠나기 전 전달한 말도 있었다.

― 막무가내로 들이박아. 네가 잘하는 것 중 하나잖아.

― ...왜 갑자기 시비야?

― 사리지 말라고.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지금은 에단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귀족 출신 학생들이 신랄하게 리사를 씹어 대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그들의 업보로 돌아갈 것이다.

리사는 콧방귀를 뀌며 몸을 돌렸다. 라프가 저주 어린 욕설을 지껄였으나, 리사는 중지를 치켜들며 가볍게 응수했다.

"끄아아악! 반드시 죽여 버린다!"

라프가 광분하며 괴성을 질렀지만, 리사에게는 같잖을 따름이었다.

드레이의 눈에서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어쩔 생각입니까?"

"뭘 어째?"

리사의 태연한 반응에 드레이가 눈살을 좁혔다.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을 텐데. 설마 정말 에단 교수님의 동생인가...?'

드레이는 리치가 있던 동굴이 무너질 때 그녀가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 뭐? 갑자기? 아직 오빠랑 교수님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나온 해프닝 정도로 여겼다. 너무 허황된 얘기라고 생각했고, 리사의 입장에서는 블란테임을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블란테라고?'

그녀가 이미 저지른 일이 많았기에 그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드레이가 혼란스러워하는 그때, 율리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리사의 팔을 붙잡았다.

"리사아아...."

거의 울기 직전인 율리를 향해 리사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정말로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 * *

아카데미에는 다양한 클래스가 있었다. 다비는 아직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다.

본과에 들어갈 수는 없는 나이였기에 어린 학생들을 수용하는 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10대 초반 학생들이었다. 재능과 천재성을 인지하고 입증하기에도 부족한 나이다.

당연히 그 어린 학생들은 모두 하인이나 시종을 대동한 높으신 분들의 자제였다.

어리지만 알 건 아는 나이. 그들의 행동거지는 날 때부터 배워 온 예식이 몸에 밴 상태다.

반면 다비는 여관의 종업원 출신이다. 험한 용병들의 행동거지를 보고 자랐고, 사미라 또한 거칠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이미 권력의 맛을 깨우친 학생들은 대놓고 다비를 깔봤다.

다비는 눈치가 빨랐다. 동급생들이 높으신 분들의 자제라는 것도 알 수 있었고, 자신을 먹잇감처럼 본다는 것도 느껴졌다.

'귀엽네.'

하지만 아이들이 거칠게 살아왔다면 얼마나 거칠게 살아왔겠는가.

다비는 비록 어렸으나, 여관의 종업원 생활을 하면서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베테랑이었다.

눈치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고, 사람을 구슬리는 데에는 도가 텄다.

"너는 어디 가문 사람이야?"

시비를 걸려는 듯 다가오는 남학생이 보였다. 나이를 보면 다비의 또래로 보였다.

"앗, 저 말씀인가요?"

다비가 해맑게 웃자, 남학생이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 그래. 우리들은 서로의 가문을 다 알고 있어서 말이지. 참고로 우리 가문은 아델이야."

'그게 뭔데.'

듣도 보도 못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와! 정말 그 아델 가문이란 말씀인가요?"

다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기를 죽이려고 한 말이었지만, 다비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다가간 학생은 자아가 완성되지 않은 어린 나이었다. 다비의 반응을 의심할 만큼 성장한 수준은 아니란 소리였다.

남학생의 콧대가 높아졌다. 으스대는 표정으로 다비를 바라봤다.

"오! 너도 들어는 봤나 보지? 그 유명한 대마법사 아이작 아델이 바로 우리 아버지야."

"와! 정말 대단해요! 혹시 나중에 뵙게 되면 인사를 드려도 될까요? 정말 영광이에요!"

다비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예상한 상황과는 달라졌지만, 결과적으로 남학생은 기분이 좋아졌다.

"뭘 좀 아는 녀석이네. 너는 이름이 뭐야?"

"아, 저는 다비라고 합니다! 제가 여쭤봐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안 될 건 없지. 내 이름은 로이스 아델이야."

"미래의 대마법사를 이렇게 뵐 줄이야! 영광입니다. 혹시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다비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로이스를 바라봤다. 로이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 그래! 너는 착하니까 친하게 지낼 수도 있지.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구나. 나중에 아버님을 뵙게 되면 인사를 시켜 줄 수도 있어."

"와아!"

다비가 손뼉을 치며 폴짝폴짝 뛰었다. 그 반응에 로이스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귀, 귀여워.'

천한 평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로이스는 이미 다비에게 호감이 생겼다.

그가 보기에 다비는 다른 사람들처럼 전형적으로 입에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 순수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반응과 표정을 보여 주는 듯했다.

때문에 욕심이 깃들지 않은 그 순수한 표정과 행동에 로이스의 마음이 녹았다.

"로이스 님과 같은 수업을 들으려면 더 노력을 해야겠어요! 다음에 좀 알려 줄 수 있으신가요?"

"...못 해 줄 건 없지."

"우와! 로이스 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에요."

다비가 활짝 웃었다. 로이스는 그 해맑은 미소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가슴이 왜 이렇게 아프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다비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로이스 님한테 배우려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어요. 먼저 가 봐도 될까요?"

싹싹한 다비의 말의 로이스는 차마 거부를 할 수 없었다.

'...더 얘기하고 싶은데.'

공부를 하러 간다는데 어떻게 붙잡는단 말인가. 그러나 그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로이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해. 내가 알려 주려고 해도 너무 모르면 힘들지."

"네! 로이스 님한테 배울 수 있을 만큼 열심히 할게요!"

"그래...."

총총거리며 멀어지는 다비의 모습에 로이스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로이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몸을 돌렸다. 친하게 지내는 동급생이 눈을 끔뻑이며 로이스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너 아까 주제 파악을 시켜 준다고 하지 않았어?"

"울려 줄 거라고 하더니."

"그건 그렇고... 쟤 좀 귀여운 것 같은데?"

마지막 동급생의 말에 로이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야."

"어, 어...?"

"너, 쟤 건들지 마."

"...왜?"

"내가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았어?"

로이스의 사나운 눈초리에 기가 죽은 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로이스가 같이 있던 학생들도 노려봤다.

"너희들한테도 하는 소리야. 내 말을 무시했다가는... 알지?"

"으, 응...."

동급생들은 불만이 있었지만, 차마 로이스 앞에서 그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로이스는 무리 중에서 가장 힘도 세고, 가문의 위세도 드높았다.

* * *

다비는 멀어지면서 로이스를 슬쩍 흘겨봤다.

'병신.'

다비가 피식 조소 지었다.

'그나저나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얼마 전, 에밀라가 자신에게 찾아왔다. 다비는 에단이 데려온 학생이기에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 여기는 별문제가 없지만....'

본과 학생에 비해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고, 이곳의 교사들은 레벨린의 수하가 아니었는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아카데미가 무너지면 결국 이곳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싫은데.'

다비는 아카데미 생활을 더 즐기고 싶었다. 이제 갓 입학했는데 이렇게 끝나는 건 너무 아쉬웠다.

'에단 오빠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수많은 사람을 봤지만 에단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에단이 나선다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타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믿어요.'

다비는 에단을 믿었다.

* * *

"...나. 우울하다."

날씨는 좋았다. 아카데미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고메드와는 큰 연관이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구름들을 보며 시간을 보내던 고메드가 눈을 끔뻑였다.

고메드는 자신의 신력(信力)에 자부심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만 하던 자신이 쓸모가 있다는 사실에 더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렇기에 문을 지키는 것에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거대한 문은 자신만 열고 닫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의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에단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이후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 생겼다.

에단은 자신이 힘껏 열어 재끼던 거대한 철문도 가벼운 발길질로 열어 버렸다.

고메드는 침울한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봤다.

"고메드. 사는 이유. 궁금하다."

후우.

고메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메드의 눈이 우수에 젖어 있었다.

그때,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아 있던 여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고메드, 너무 상심하지 마."

"고맙다. 하지만 고메드, 쓸모가 없다."

"그러지 마! 그래도 나랑 친구들은 고메드가 있어서 늘 든든한걸?"

"...정말인가? 고메드, 든든한가?"

"그럼! 듬직하고 멋있어!"

"우어어! 고메드! 열심히 하겠다!"

고메드와 자주 대화 친구를 해 주는 학생이었다. 최근 이 학생은 풀이 죽은 고메드가 걱정됐는지 자주 나와서 고메드를 위로해 주고는 했다.

"헤헤, 다행이다. 어?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구지?"

여학생이 앞을 가리켰다. 먼 지평선에서부터 한 무리의 인파가 다가오고 있었다.

찌릿.

피부가 따끔거렸다. 형체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거리임에도 기세가 느껴졌다. 고메드가 일순 긴장감을 머금었다.

"...위험하다. 저놈들."

고메드가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거체가 문을 막아섰다.

"너, 빨리 들어가라. 여긴, 위험하다."

"하지만 고메드가 지켜 줄 거 아니야?"

"...일단, 지원을, 요청하겠다."

고메드가 거대한 종을 울렸다. 문지기 생활을 하며 처음 울리는 종이었다.

고메드가 긴장을 머금은 채 다가오는 무리를 바라봤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자들은 고메드보다 강했다. 에단을 만날 때처럼 두려움이 치솟았다.

그때 고메드의 새끼손가락을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메드가 시선을 돌리자 여학생의 가느다란 팔이 보였다.

고메드의 눈빛에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나. 지킨다.'

결의를 다진 표정의 고메드가 정면을 응시했다.

◈ [137화] 불쾌한 도발 (2)

정보 길드에 제보가 쏟아지고 있었다. 정보 길드의 수장인 메이는 보고서를 받아 들고 미간을 좁혔다.

'흐름이 달라지고 있어.'

사전에 확보해 뒀던 정보이기에 이번 일로 정보 길드는 꽤나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정보는 속도전이다.

10분의 차이로 모든 걸 뒤엎는 게 바로 선점의 효과였는데, 이번에 세계수와 블란테의 이동이라는 큰 정보를 에단에게 얻은 것은 적지 않은 수확이었다.

'그 흐름은 모두 그자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어.'

오랜 시간 정보원으로 활동했던 그녀였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처음 겪고 있었다.

흐르는 상황이 급박했다. 마치 전쟁같이 시민들과 상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리고 숨죽여 있던 블란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의 주축이 사라진 사실, 그리고 그 자리를 블란테가 꿰차려고 한다는 사실로 인해 대륙이 격동했다.

'전쟁을 준비하는 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블란테가 강대한 무력 집단이고, 전투를 기피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연합국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개인은 집단에게 패하기 마련이다.

'그는 도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거지?'

그때 위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정보 길드를 내걸었다.

어차피 실권은 그녀에게 있었기에 걸 수 있던 협상안이다. 하나 지금 보면 그때의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

아카데미, 세계수, 블란테.

망나니라고 평가받던 에단이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에단의 저의가 어떻고, 얼마만큼의 정보를 알고 있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 본명까지도.'

메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데릴라'라는 이름은 듣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건 이번 일로 정보 길드는 적지 않은 소득을 얻었다.

블란테의 움직임을 미리 알았던 것이 매우 컸다. 세상은 혼란에 빠졌지만 정보 길드는 평화로웠다.

'이후의 일은.'

에단이 언질을 줄 것이다. 이제 기다리면 된다.

'허,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순간 기가 찼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렇게 수동적으로 변하게 됐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그 녀석은 왜 안 와?'

잭슨을 보낸 지 꽤 시간이 흘렀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기에 여유롭게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늦어져도 너무 늦어지는 것 아닌가.

'또 어디 박혀서 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자신은 이렇게 심력을 소모하고 있는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꼴렸다.

'두고 봐.'

메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