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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마지막검사

게임과 현실이 하나가 되어가는 세상.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판타지 #현대판타지 #게임시스템 #귀환 #사이다 #착각 #헌터 #고인물 #먼치킨

히든피스

"아놔, 뭐 이딴 쓰레기 같은 게임이 다 있냐."

모니터에 떠오른 'Game over'라는 글자를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심혈을 다해 키운 캐릭터가 공중분해 되는 순간.

마우스를 집어던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격한 빡침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익숙한 듯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며 담배를 물었다.

"······ 벌써 5년 넘게 이 게임 하나만 붙잡고 있는 내 인생도 레전드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창밖을 바라본다.

하기야, 내가 무언가를 쓰레기라고 욕할 처지는 되던가.

현명하게 살라며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 박현명. 하지만 나는 전혀 현명하지 못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창밖에는 어느덧 해가 중천이다.

주말도 아닌 평일.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있을 시간.

개백수인 나는 폐인마냥 씻지도 않고 게임에 몰두 중이었다.

"접을 때가 됐지."

5년 전에 반짝 인기를 끌었던 게임, 판게니아.

출시 당시 미친 게임이라고 욕도 많이 먹었다.

캐릭터가 죽으면 모든 게 증발해버리며, 플레이어는 다시 처음부터 게임을 플레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례 없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해 클리어한 사람이 전무하다고.

그래서일까.

잠깐 반짝한 인기는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현재에 이르러선 솔직히 게임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 더 있을지도 의문이다.

홈페이지 서버에 기록되는 동시접속자 수는 항상 0 아니면 1을 기록하고 있었으니.

참고로 0은 내가 플레이하지 않을 때, 1은 내가 플레이하고 있을 때다.

······ 동접자 1인 좆망겜인데 아직도 서버를 안 닫은 게 용하긴 하지만, 뭐.

때마침 시간도 많았다.

직장도 퇴사했고, 매일 잔소리하던 여자친구도 없으니까.

"하, 젠장."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눈을 꾹 감았다.

-오빤 좋은 사람이지만······ 미안해. 비전 없는 사람이랑 언제까지 만날 순 없어. 이제 결혼도 생각할 나이니까.

5년 만난 여자친구에게 대차게 차였다.

나만 같이 사는 미래를 그렸나 보다.

-내 친구들은 다 사짜나 이름난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이랑 만나고 결혼하는데 오빠는······ 하아. 됐어. 그만하자.

그렇게 혼자 정리하고 가버렸다. 나쁜년.

덕분에 비전 없는 회사도 때려치웠다. 앞으로 뭐 하고 살아야 하나. 이참에 기술이나 배울까.

딸칵. 마우스를 집었다.

곧 화면 위로 '캐릭터를 생성하시겠습니까?'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원래 인생은 찐찐막이지.'

이전 캐릭터를 만들 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원래 마지막의 마지막이 진짜 마지막인 법이었다.

물론 방금 전 삭제 된 캐릭터 말고도 창에는 수많은 캐릭터가 이미 존재했다.

맥스 레벨에 도달한 캐릭터도 있고, 온갖 보물로 치장한 캐릭터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클리어할 스펙은 되지 않는다고 확신한 녀석들.

이 미친 게임은 특정 구간에서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높다.

이걸 깨라고 만들어놓은 건지 의문인 보스들, 동료인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뒤통수치는 악역들, 현상수배가 걸리면 찾아와서 죽이는 네임드 NPC들 등등······.

예컨대 게임사가 관리를 하는지 테스트하고자 만든 캐릭터 '뇌절사기꾼'은 맥스 레벨에 보물급 아이템도 꽤 갖췄지만, 워낙 해괴한 짓을 많이 해놓은 터라 네임드 NPC에게 특급 현상수배가 걸려서 로그인하면 바로 척살 당한다.

세계관 최강급의 몇몇 네임드 NPC는 플레이어의 맥스 레벨을 넘어서기 때문에 이런 녀석들한테 찍히면 캐릭터 삭제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접속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여튼 간에.

"즐겜하자, 즐겜."

클리어를 위해 목숨 걸고 만든 캐릭터도 결국 삭제됐다.

착용한 아이템을 떠올리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다른 캐릭터에서 유일급 아이템을 전부 쓸어 와서 키운 건데······.

판게니아에서 여태껏 밝혀진 유일급 아이템은 총 15개가 있다. 그중 모아둔 여덟 개를 한 캐릭터에 몰빵 한 것이다.

역대급 도박이다. 죽으면 5년이 날아가는.

그런데 죽었다. 캐릭터가 삭제되며 아이템도 전부 날아갔다. 염병······.

'소울 포인트 160만? 확실히 유일템이 포인트를 엄청 주긴 하는구나.'

하지만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판게니아에는 소울포인트(SP) 시스템이 존재한다.

캐릭터가 죽을 때 갖고 있던 가치를 포인트로 환산해서 주는 거다.

플레이어는 그 소울포인트로 새로운 캐릭터를 키울 때 이점을 주는 게 가능해진다.

5년 동안 수백 개의 캐릭터가 삭제되며 모은 SP는 8만 정도였다. 그런데 유일템 8개를 가진 캐릭터가 삭제되자 160만 소울포인트가 생긴 것이다.

유일템 뿐만이 아니라 챕터 진행도도 가장 높았다. 클리어에 가까운 스펙이었던 것은 확실했으므로.

'재능 한 가지에 1만 소울포인트면 떡을 치는데.'

소울 포인트의 대표적인 사용처는 바로 '재능' 부분이다.

캐릭터 생성시 내가 원하는 재능에 포인트를 투자할 수 있고 투자한 포인트 수치에 따라 가파른 성장이 가능한 것이다.

상한선도 마찬가지로 1만 소울포인트였다.

참고로 과거 검술에 1만 소울포인트를 투자했던 '명란젓코난'은 검술의 대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사망했다.

'평소라면 가장 무난한 번개류 마법 재능에 투자하겠지만······.'

정해진 루트가 몇 개 있다. 가장 무난한 건 역시나 번개류 속성의 마법 재능이다.

그러나 이 게임은 투자할 수 있는 재능의 종류가 수백 가지였다. 160만 포인트면 전부는 아니어도 상당부분의 재능을 맥스치로 찍을 수 있을 터.

'오대원소 재능에 각각 3천 포인트 이상 투자하면 허(虛)속성이 열리지. 허 속성에 다시 오천 포인트를 투자하면 허무(虛無) 특성을 얻을 수 있고.'

재능이 또 다른 재능을 낳는다. 일종의 히든피스였다. 이런 식의 '설계'가 판게니아에는 무진장 많았다. 고인물 중의 고인물인 나도 모두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이니 말은 다했다.

'허무 특성을 가지면 상반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돼. 빛과 어둠 친화력도 같이 찍을 수 있으니 꼭 챙겨가야지.'

이 게임은 서로 충돌하는 속성을 한 캐릭터가 동시에 사용할 수 없다. 도구를 쓰거나, 다른 매개체를 이용하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다.

하지만 '허무 특성'을 갖고 있으면 이런 상반되는 마법이나 속성 등을 함께 쓸 수 있게 된다.

다만, 허무 특성을 얻는 것 자체에만 이만 포인트를 써야하는지라 다른 재능에 투자할 포인트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어려운 게임. 캐릭터가 죽으면 투자한 SP도 날아간다. 그만큼 뚜렷한 재능을 갖고 시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진정한 즐겜은 랜덤이지. 가자, 올랜덤!'

이것저것 따지면서 루트를 짜봤자 골머리만 아프다. 진정으로 게임을 즐기고 접으려면 올랜덤만큼이나 확실한 게 없다.

특성을 비롯한 모든 것을 무작위로!

파멸적인 선택이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클리어가 아닌 즐겜의 목적.

160만 포인트를 전부 무작위로 건다.

'어차피 못 깨.'

깨려고 온갖 발버둥이란 발버둥은 다 쳐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게임은 깨라고 출시한 게 아니다.

판게니아 출시 당시, 개발자는 유저들에게 이런 선전포고를 한 적이 있었다.

―게임을 클리어한 사람에게 한 가지 꿈을 이뤄주겠다.

꿈을 이뤄준다. 그게 무엇이든 이뤄주겠다는 그 개발자의 한 마디에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하고 좌절했다.

이후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게임은 클리어되지 않았다.

한 1년 전까진 그래도 사람이 몇 있었는데, 이제는 나 혼자 도전하는 게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대로 게임을 즐겨볼 생각이다.

'누른다?'

외형을 무작위로 해본 적은 있지만 '전부 무작위'로 선택하는 건 나도 처음이다. 그만큼 비효율적이고 쓸데없는 짓으로 악명높은 게 바로 저 '올랜덤' 버튼이었다.

지난 시간의 정수. 모든 것을 담은 선택이 마음먹었다고 쉽지는 않았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딸칵!

눌렀다.

확실하게. 동시에 주사위가 돌아가며 모든 것들이 무작위로 결정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히든피스가 발동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특이점을 만족하여 판게니아에 초대되셨습니다!>

처음 보는 문구가 모니터 위에 떠 올랐다.

"히든피스?"

[빛보다 더 밝고, 어둠보다 더 어두운, 창조와 파멸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자여. 판게니아에서 행복하시기를.]

게임 인트로도 떠오른다.

평소와 같이 스킵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어어······?"

그 글자들이 모니터 바깥으로 튀어나와 흐믈거린다.

그 순간이었다.

―개 같은 신이여! 네가 만든 모든 세계를 불살라주마!

쇠 긁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서 펼쳐지는 지옥도.

지구 위로 판게니아 대륙이 떨어지며 함께 붕괴하고 있었다.

조악한 그래픽이 아니라 실제 상황처럼 보일만큼 퀄리티가 장난이 아니었다.

인트로에 이런 동영상이 있었던가?

그런 의문을 느끼기도 잠시.

내 의식은 저 멀리 사라졌다.

히든 특성 13개!

"쓸모없는 노예 새끼들! 빨리빨리 걷지 못해?"

촤악!

알싸한 고통과 함께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모래사장에 머리를 처박은 뒤에야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게임 인트로를 보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자 지금 상황이다.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지만 생각보다 머리가 차갑게 돌았다.

'내 몸이 아니야.'

두꺼운 손. 헬스트레이너도 울고 갈 울긋불긋한 한 근육.

내 몸이 아니다. 하지만 내 몸인 것처럼 생생하다.

또한, 단단하게 묶여있는 손과 현재 상황으로 판단하건대 나는 끌려가는 중이다.

고개를 들자 수백의 남자들 역시 일렬로 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었다.

나를 채찍질한 놈과 현재 상황을 종합해보니 답이 나왔다.

'전쟁 노예.'

패잔병들이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노예로 잡혀 온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선두를 걷는 대형괴수였다.

'히드라곤!'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와 드래곤의 하체를 합쳐놓은 저 괴수가 무척이나 낯이 익다.

분명히 처음 보는 괴물인데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겠다.

히드라곤.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든 플레이어가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첫 번째 역경과도 같은 존재!

그래픽 덩어리가 현실화하여 눈앞에 나타났다.

거의 천에 달하는 캐릭터를 키우며 그 숫자만큼 잡아봤으니 익숙할 수밖에 없다지만, 게임 속 괴물을 단번에 확신하는 것도 정상은 아니었다.

'일어나야 한다.'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대로 계속 주저앉아있으면 죽는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즉시 채찍이 날아들었다.

격한 고통에 털이 쭈뼛 섰지만 억지로 신음을 참았다.

"또 한 번 쓰러지면 그때엔 히드라곤의 먹이로 던져주마."

··· 히드라곤이 맞나보다.

이제는 모든 게 확실해졌다.

'판게니아다. 내가 게임 속으로 들어온 건가?'

이해할 수 없는 일.

혼란스러워야 정상이지만 놀랍게도 침착하다.

도리어 순식간에 파악하고 적응해버렸다.

'촉감을 비롯한 모든 감각이 전부 현실이랑 다를 게 없다. ······그렇다면.'

게임인데 게임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과 같지만 나는 마지막에 주사위를 돌린 걸 기억해냈다.

올 랜덤.

모든 것을 무작위로 돌리지 않았나.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라면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상태창."

그 순간이었다.

촤르륵. 눈앞으로 돌돌 말린 양피지가 나타나며 천천히 펼쳐졌다.

<능력치>

레벨 : 1

힘 : 12 체력 : 12 민첩 : 12

지능 : 12 마력 : 12

<재능>

[건강][체질][지능][감각]

[검술][방패술][창술][도끼술][단검술][궁술]

[빛][어둠][불][물][땅][바람][공기]

[허]

[예술][학문][지도력][관찰력]

······.

<활성화된 히든 특성>

[허무]

[손재주]

[올 마스터]

[웨폰 마스터]

[거인의 항마력]

[드루이드의 자연친화력]

[철혈군주의 심장]

[비스트 로드]

[황금의 은총]

[천상(天上)]

[돌연변이]

[대식가]

[대현자]

······.

<판게니아 붕괴까지 : 6.12%>

<<붕괴가 진행될수록 현실과 판게니아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붕괴의 정도가 10%를 넘기면 최초의 균열이 진행됩니다.>>

'미친.'

보자마자 욕지기가 튀어나오려는 걸 애써 억눌렀다.

정말 상태창이 나오긴 했는데 나타난 것들이 말이 안 됐다.

우선 능력치.

본래 능력치는 재능에 따라 1에서 10의 범위 내로 정해진다. 그런데 그걸 넘어 12다. 그것도 전부 균일하게 12로 시작하고 있다.

5년 동안 판게니아를 하면서 처음 보는 황금빛 스타트였다.

뿐만인가.

'재능이 몇 개가 찍힌 거야 대체?'

양피지가 끝도 없이 내려간다. 200가지가 넘는 재능이 찍힌 것으로도 모자라 10개가 넘는 히든 특성이 활성화됐다.

하나만 가져도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의 최강자가 될 수 있는 게 바로 히든 특성이었다. 그걸 정확히 13개 갖고 있다.

'히든 특성 13개라니.'

별을 먹고 초월을 이룬 네임드 NPC나 심연속 세계관 최강자 급의 괴물들도 히든 특성 13개를 갖고 있진 않다. 많아야 다섯 개 정도지.

전무후무.

그중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철혈군주의 심장!'

모든 육체적 재능을 전부 찍으면 나타나는 연동특성이자 히든 특성, 철혈군주의 심장.

대충 '쉽게 지치지 않고, 웬만한 일에 놀라지 않으며,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이도록'하는 기능이 있다.

또한, 능력치 창에 보이지 않는 '스테미너'와 '명예'를 높여주고, 더 질 좋은 퀘스트를 받게 해주며 '군주의 자격'을 부여하는 특성이다.

그런 것들이 무려 13개.

히든 특성을 전부 눈에 담고 다음 내용을 살펴보았다.

'판게니아 붕괴. 현실과의 경계? 저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정상적인 범주의 이해를 아득히 뛰어넘는 일들이 내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허나 언제까지고 사색에 잠겨있을 순 없는 노릇.

"이봐."

나는 앞서가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오른쪽 중지와 검지가 잘린 남자가 힘없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왜?"

"여기가 어디지?"

"······ ? 칼츠만 사막이잖아."

더위 먹고 쓰러지더니 정신도 같이 놔버렸냐는 듯한 눈빛을 외면하며 재차 물었다.

"칼츠만 사막? 설마 파이살메르로 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대륙 동남부에 위치한 칼츠만 사막은 크게 세 부족이 자리잡은 악명높은 땅이다.

세 부족 모두 노예사냥을 업으로 삼으며 전쟁을 일삼는 미치광이들인 탓이다.

그리고 파이살메르는 잡아들인 노예를 파는 중간도시 같은 곳이었다.

"맞아. 그러니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리라고."

노예들의 눈에 빛이 없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파이살메르에 잡혀들어간 노예는 절대로 살아나가지 못한다.

'스타팅포인트로 절대로 지정하면 안 되는 곳. 칼츠만 사막에 떨궈지면 그냥 캐릭터 삭제하고 다시 키우는 게 낫다.'

원래부터 악명높은 사막이다.

딱 한 번 호기심에 이곳에서 시작해봤다가 포기한 기억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단연코 나는 칼츠만 사막을 시작장소로 선택한 적이 없다.

'망할.'

스타팅 포인트까지 무작위로 정해버린 내 실책이다. 누굴 탓하겠나.

나는 마지막 의문 보따리를 풀어놨다.

"그런데 칼츠만의 부족들이 원래 이렇게 대량으로 노예를 취급했나?"

아무리 큰 노예상인이라도 많아야 수십의 노예를 취급하기 마련인데 지금 이 행렬은 족히 300은 넘어 보였다.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우리가 왜 끌려가고 있는 거지?"

"우리가 잡혀가는 이유? 글쎄, 원정대 낙오자들이라?"

"원정대? 무슨 원정대?"

"하아··· 8용사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마계 원정대. 패배하고 너나 나나 도망치다가 잡힌 거잖아. 더위라도 먹은 거냐?"

8용사? 마계 원정대?

'아!'

······ 내 얘기였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이 캐릭터를 만들기 직전에 플레이했던 캐릭터의 이야기다.

가장 강한 여덟 개의 캐릭터에서 여덟 개의 유일급 아이템을 모아 원정대를 꾸렸다.

그리고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마계에 들어가 마신전 근처까지는 갔지만 결국 마지막 문을 열지 못한 채 게임오버 당한 것이다.

그게 8용사와 원정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모양.

"씨발. 내분만 아니었어도 원정은 성공했을 텐데······!"

내분?

무슨 내분?

물어보려 했으나 그 순간 땅이 흔들렸다.

동시에.

"메인 퀘스트 1 : 생존하십시오!"

"보상 : 내용에 따라 차등 지급"

"실패시 : 사망 - 게임과 현실 양쪽의 육체가 모두 사망합니다."

눈앞에 퀘스트가 나타났다.

생존하라니. 이 상황에서?

더욱 기겁할 건 실패할 때의 페널티였다. 설마 현실의 육체라는 게 진짜 내 몸을 말하는 건가?

문득 인트로가 떠올랐다. 판게니아와 지구가 충돌하는 모습이.

쿠르릉! 쿠르릉!

허나 더 길게 고민할 틈은 없었다.

거친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거대한 동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히드라곤 세 마리!"

"전열을 다듬어라! 습격에 대비해!"

노예상인이자 숙련된 병사인 그들은 품에서 무기를 꺼내며 숨죽였다.

히드라곤을 무려 세 마리나 이끌고 쳐들어온 적들이 문답무용으로 그런 노예상인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뱀공주! 뱀공주다!"

"뱀공주! 불가침 협약을 잊은 건가!"

"아악!"

비명이 난무한다.

협약이나 규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살육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저들은 노예를 죽이는 데에도 거침이 없었다.

이 자리를 전부 쓸어버리는 게 목적인 듯 보였다.

나는 바로 앞에 죽어있는, 내게 채찍질을 했던 노예상인의 품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이후 수갑을 풀자마자 시미터를 들고 습격에 대비했다.

"나, 나도!"

"나도 풀어줘!"

전 원정대의 병사들이 열쇠꾸러미를 보곤 소리쳤다.

그래도 명색이 마계원정에 나선 병사들이다.

함께 맞서 싸워줄 거란 기대를 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 어디 한구석이 고장 난 불구였다.

[Lv. 1]

[Lv. 2]

그 증거로 모든 병사의 레벨도 1에서 2 사이다.

육체적 손실과 정신적 결함으로 인해 레벨다운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레벨이 너무 낮다. 원정대가 민병대보다도 못한 수준이라니?

툭!

"나, 나부터야!"

"악! 비켜!"

열쇠꾸러미를 던져주자 몸싸움이 일어났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한 명, 한 명 풀어줄 여유 따윈 없었다.

그 사이에도 살육은 진행 중이었다.

아비규환. 지옥이 있다면 이럴까.

'살아남아야한다.'

경이로운 결과

냉정하게.

냉철하게 주변을 살피고 상황을 정리한다.

먼저 공격해온 노예 상인들의 레벨을 바라봤다.

[Lv3.]

대부분이 3에 수렴했다. 일반병사 수준. 사막의 대전사들이 아니라면 살아날 구멍은 있다.

"컥!"

"히, 히드라곤이 너무 많아!"

문제는 저놈들. 레이드 보스 몬스터 판정을 받는 레벨 5의 괴물이 무려 셋이다.

'내 레벨은 1이다.'

반면에 나는 1이다. 전부 나보다 높다.

아무리 생각해도 양심이 없는 퀘스트였다. 이런 전장의 한복판에서 레벨 1로 생존하라니?

게다가 보스몬스터는 레벨 외에 추가효과 판정이 붙는다.

'히드라곤은 시력이 나쁘다. 몸과 머리를 동시에 움직이지도 못해.'

하지만 이 세계는 공략법만 숙지하면 1레벨도 5레벨 보스몬스터를 죽일 수 있다.

애당초 1레벨 12명이 모여 잡도록 설계된 게 히드라곤이었다.

진짜 레벨의 차이, 격의 차이를 느끼는 건 7레벨부터다.

그러니까 그 전의 레벨은 어떻게든 극복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할 수 있다.'

1레벨이라도 좌절하긴 이르다.

가장 중요한 건 나는 이 게임의 고인물 Of 고인물이라는 것이었다.

혼자서 12인분, 까짓거 해내면 그만.

까앙!

검과 시미터가 부딪혔다.

어느덧 다가와 눈앞에서 살기를 뿌리는 병사 한 놈.

'실제상황이다.'

게임이 아니다.

검을 휘두르고 몸을 쓰는 모든 게 클릭 한 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곳은 살과 살이 부딪히고 베이며 찢기는 전장이다. 직접 몸을 움직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도저히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희망은 있었다.

'검로가 보인다.'

[웨폰 마스터]의 영향일까?

검로가 보인다. 내가 휘둘러야 할 장소가 정확하게 읽힌다.

또한 무기를 쥐자 절로 숙지 되었다. 수만, 수십만 번 휘둘러본 것처럼 손에 익었다.

내가 해야 할 행동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지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콰직!

비스듬히 검을 쳐내고, 주먹을 뻗어 병사의 턱을 박살 냈다.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병사의 목을 베어냈다.

망설임은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검로, 그리고 모든 투로(鬪路)가 이미 내 눈에 투영되고 있었으니!

*

뱀공주는 전장의 중심지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곳을 지우는 게 그녀의 사명. 사막여왕의 절대적인 명령이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왕 다음가는 강자. 하물며 숫자도 이쪽이 훨씬 많았으니.

그런데 노예 중 한 명이 갑자기 나대더니 자신의 병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건 히드라곤 한 마리도 저놈이 죽였다는 것이다.

혼자서 전장을 휘젓고 있다.

"······ 저놈은 뭐지?"

*

"헉! 헉! 하아악!"

심장이 파열될 것만 같다.

뜨거운 숨결을 내뱉을 때마다 목 천장을 칼로 긁어내는 느낌이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게 핏방울인지 땀방울인지 이젠 구별조차 되지 않을 지경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채엥!

수백 번을 부딪친 검날이 부러졌다.

그러자 나를 감싸오던 망이 더욱 촘촘하게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창을 든 창병들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검이 부러졌다! 죽여!"

"지금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들은 정규군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대의 방식대로 틀을 짜고 하나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때마침 승리욕에 취해 대열을 흩트리고 다가오는 창병 하나.

"어억!"

나는 그 창병의 근처까지 몸을 굴려 다가가 바닥을 쓸었다. 발이 걸린 창병이 그대로 쓰러지며 창을 떨어트렸다.

바닥에 창이 닿기 전에 잡아들자 그 순간의 빈틈을 노리고 병사들이 검을 휘둘렀다.

창날을 돌려 날아드는 검의 끝에 걸고 반동력을 이용해 쳐냈다. 그러자 병사의 상체가 균형을 잃었다.

"꺽!"

창날로 병사의 목에 구멍을 뚫었다. 즉사. 쫘악, 소리와 함께 창살을 빼내고 창을 돌려 다가오는 움직임들을 저지했다. 평생을 창만 단련해온 창술의 달인 같은 곡예에 주변 병사들의 혼이 빠졌다.

[철혈군주의 심장]으로 인해 냉철하게 주변을 살피고, 쉽게 지치지 않을 수 있다면 또 다른 히든 특성 중 하나인 [웨폰 마스터]는 모든 무기를 숙련도 없이 숙련자처럼 다룰 수 있게 해준다.

심지어 [손재주]와 함께 시너지 효과를 냈다.

<검의 숙련도가 6Lv로 격상했습니다!>

<창의 숙련도가 6Lv로 격상했습니다!>

히든 특성 [손재주]는 스킬의 숙련도와 관계가 있다. 웨폰 마스터가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게 해주고, 숙련도를 5Lv로 시작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면 손재주는 더 높은 숙련도로 '쉽게' 나아갈 수 있게끔 도와준다.

스킬의 숙련도 역시 10레벨이 끝이다. 숙련도 6레벨은 이름있는 기사가 평생을 갈고닦은 수준의 능숙함을 뜻했다.

그것을, 무기를 쥐자마자 이루어냈다.

히든 특성 간에도 이처럼 연동되고 시너지를 내는 것들이 있다. 물론 이건 극소수만 알고 있는 내용이다. 히든 특성은 플레이어들 사이에도 그다지 알려진 게 없었으니까.

검을, 창을, 도를, 활을, 시미터를, 철퇴를. 무기라면 가리지 않고 사용했다.

"괴물 같은 새끼!"

"저 괴물 같은 놈도 지쳤다!"

"죽여라!"

온갖 극찬과 함께 망은 더욱 좁혀들고 있었다.

습격자는 500명. 히드라곤도 하나 죽였다지만 혼자서는 벅차다.

이제 고작 레벨 1인 내가 병사 서른에 히드라곤까지 죽였으면 할 건 다 했다. 최대한 움직임을 적게 해 체력을 분배하고 모든 무기를 활용한 덕이었다.

다른 플레이어가 봤다면 기겁했으리라. 고인물들도 저게 가능하냐며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그래도 슬슬 한계였다.

한계지만.

<레벨이 올랐습니다!>

<체력과 마력이 회복됩니다.>

<피로도가 회복됩니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걸 기다리고 있었다.

'2라운드 시작이다.'

어깨를 풀었다. 가파르던 숨이 안정감을 되찾아간다. 다가오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느껴진다. 각성을 한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멈춰라."

우우웅-

그때였다.

전장을 타고 고막을 강타한 여인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병사들이 바짝 굳은 채 멈춰버렸다.

'드디어 왔군.'

병사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렸다.

히드라곤의 위에 올라 느긋하게 전방을 주시하던 여자.

이곳 사막의 전사들과 달리 타긴 했지만 유난히 흰 피부. 고양이 같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그녀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그녀의 출현을 예상하곤 있었다.

"고, 공주님께서 나서실 것까진······."

뱀공주. 그녀를 향해 백인장이 용기를 내어 말하자, 뱀공주가 비웃었다.

"저자는 지치지 않았다. 지친 척을 하고 있었을 뿐이지."

"······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숨과 땀이······."

"잘 보아라. 저자의 숨이 차 보이는가?"

"······."

순간 백인장의 눈이 내게 향했다.

어느새 숨을 가다듬은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 저런 괴물 새끼가 다 있냐'하는 표정과 눈빛.

"지친 척하고······ 방심을 유도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본의는 아니지만 레벨업으로 체력을 회복한 게 뱀공주에겐 그렇게 읽힌 모양이다.

나는 변화 없는 표정으로 뱀공주를 맞이했다.

"역시나. 날 마주하고도 변함없는 이는 흔치 않지."

순간적인 살기가 읽혔으나 '철혈군주의 심장'에 의해 나는 놀라지도 수축 되지도 않았다.

기운만으로도 상대를 재단할 수 있는 존재. 나는 그녀의 머리 위를 바라봤다.

[Lv 8]

레벨 8. 어디에 내놔도 '최강자'소리 들을 법한 레벨의 소유자!

판게니아의 강자를 가르는 기준은 7레벨이다. 7레벨부터 본격적인 차이가 나타나며 레벨의 격차를 어지간해선 뒤집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8레벨은 어느 유명한 단체의 수장들이나 가능한 레벨이었다. 인구 백만의 대도시에 한, 두 명이 있을 법한 수준이었다.

'파이살메르에 이만한 강자가 있던가?'

있기는 있다. 파이살메르의 여왕. 하지만 그녀 외에 NPC로서 8레벨에 도달한 네임드는 내가 알기로는 없었다.

이곳은 시작의 도시. 스타팅 포인트에 불과했으니.

헌데, 왠지 모르겠지만 눈앞의 여인이 묘하게 눈에 익다.

눈에 익다고 해야 할지 익숙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과거에 꽤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윽고 그녀가 지근거리로 다가와 말했다.

"이름이 뭐냐?"

이름이 뭐냐고?

'닉네임도 안 짓고 떨어졌지.'

생각해보니 닉네임도 짓기 전이였다. 설마 여기가 닉네임을 짓는 분기점인가?

'게다가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다.'

메인 퀘스트가 종료되었다는 표시도 없다. 생존. 생존을 위한 과제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뱀공주 때문이리라. 지금 여기에 모인 전부를 합쳐도 뱀공주 하나만 못하다. 나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위협이 내 눈앞에 있으니 생존 퀘스트가 종료될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이 '이름' 역시 중요하다.

"란돌프."

"··· 위대한 늑대? 사막 출신인가?"

란돌프는 '위대한 늑대'의 이름이다. 사막지대 출신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단어를 내가 입에 담자 뱀공주가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뿐이다.

"사막 출신이 왜 중앙대륙의 원정대 떨거지들과 함께 있는 거지?"

노골적인 혐오.

사막의 사람들은 중앙대륙의 인간들을 악마로 묘사한다.

잡혀들어온다면 모조리 노예로 쓰다가 죽일 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흥미가 다하면 죽일 터.

하지만 의문이었다.

'원정대인 걸 안다. 알면서도 전멸시켰다.'

노예로 쓰기도 전에 이처럼 전멸시키는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 잡아 온 같은 사막 부족 출신도 모조리 죽였다.

'증거인멸. 원정대가 사막에 도달한 걸 감추려고 하는 거다.'

8용사와 원정대······ 아마도 내가 '유일급의 장비' 여덟 개를 착용하고 일으킨 마계로의 대원정을 뜻하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나는 원정에 실패했다. 모든 준비를 끝냈음에도 마왕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유는 마왕이 너무 강했다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중앙대륙이 두려워서다.'

결론을 냈다.

사막의 여왕은 원정대와 사막이 결부되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

원정의 실패를 논할 때 엮이면 피바람이 불 걸 알고 있어서다. 대륙의 거의 모든 대도시에서 병사를 차출했지만 사막도시 파이살메르는 논외였으니까.

마녀사냥 당하기 제일 좋은 게 바로 이곳이었다.

그러니 아예 0.1g이라도 결부될 수 있는 모든 걸 제거하고 있다.

얼추 상황을 읽은 뒤 입을 열었다.

"중앙대륙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 중앙대륙의 첩자라고? 누가 보낸 거지?"

"나 스스로 갔다."

"스스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무엇보다 이곳 사막에서 너와 같은 전사를 나는 처음 본다. 피부색도 다르고, 어느 부족의 표식조차 없지 않느냐. 어디서 주워들은 거로 사기를 칠 생각이라면······."

"별이 내게 말했다."

뚝!

뱀공주의 전신이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그리곤 기이한 눈망울로 내게 물었다.

"······ 별?"

당황. 놀람. 그리고 간절함.

'아무래도 맞나보군.'

그녀의 반응으로 말미암아 뱀공주가 왜 익숙한지 확신했다.

뱀공주는 내가 알고 있는 존재가 맞다.

그리고 그녀가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별이 바로 그녀의 '빈틈'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확신한 채 나는 '연기'를 시작했다.

"성각자(星覺者). 나는 어느 부족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애초에 내 입으로 사막 출신이라 말한 적도 없다만, 왜 착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

성각자. 별을 읽고 별에게 인도하는 자.

그들은 선각자이며 세상에 몇 없는 진정한 떠돌이였다. 별을 따라, 별을 좇아, 별을 위해 움직이고 기도하는 자들.

그리고 뱀공주에게 반드시 필요한 이름이었다.

"뱀공주 이자벨라.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내······ 내 풀 네임을 어떻게?"

"성각자는 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별이 말해줬다는 거다.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성각자는 플레이어가 얻을 수 없는 클래스. 오직 선택받은 NPC만 가질 수 있고, 플레이어는 10레벨을 넘어 별을 얻어야 할 때 그들을 필수적으로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도 비슷한 경우였다.

그녀는 이곳 사막을 누구보다도 벗어나고 싶어 했으니까.

여왕의 저주로 묶여있는 건 그녀였다. 사막부족 출신이 아닌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벗어나려면 별이, 별의 축복이 필요했다.

이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느냐고?

'대체 내가 만든 캐릭터가 왜 뱀공주가 되어있는 거야?'

설마 싶었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최악의 스타팅 포인트.

경험 삼아 해보자며 적당히 만든 캐릭터가 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한계가 명확한 데다 이 사막에선 도저히 더 성장할 길이 없어서 포기했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왕의 저주로 인해 '별의 축복' 없이는 도저히 나아갈 길이 없었다. 하지만 사막에서 성각자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포기한 것이다.

그 포기한 캐릭터가 지금 뱀공주가 되어 눈앞에 있으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그 순간이었다.

<'메인퀘스트 1 : 생존'이 완료되었습니다.>

······ 생존했다는 알림.

수십의 병사를 죽이고 히드라곤의 멱도 땄지만 완료되지 않았던 퀘스트가, 마침내 종료를 알려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용을 정산합니다.>

<역대급! 완벽함을 넘어 경이로운 결과입니다.>

<총점 220점. 메인 퀘스트 - '명예의 전당'에 업데이트됩니다.>

<초보자의 행운! '행운의 성좌'가 미소를 짓습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됩니다.>

<'전투의 성좌'가 제법이라며 콧잔등을 긁습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됩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획득했습니다.>

<'히드라곤의 혼'을 획득했습니다.>

<'미켈라의 칼'을 획득했습니다.>

······.

내용을 확인한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미친."

그야말로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보상이었으므로.

로그아웃

'히드라곤의 혼이라니!'

두 눈에 선명하게 박힌 이름들.

공중에 떠 있는 보상들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히드라곤의 혼(Raid)

히드라곤(Lv5)을 소환하여 부릴 수 있다.

히든 특성 – '비스트 로드' 의해 강화 가능』

우선 레이드 보스 몬스터의 혼.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천 번을 넘게 사냥했음에도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기물.

혼이 담긴 돌로 히드라곤을 소환할 수 있게 해주는 최고등급 아티팩트!

레이드 보스 몬스터의 '혼'은 가장 극악한 확률로 나오는 보물이다. 탈 수도 있고 소환해서 전투를 돕게 할 수도 있는데 그 희소성 탓에 매물조차 없었다.

'출시하고 5년 동안 나온 게 고작 하나.'

그중 히드라곤의 혼은 다른 레이드 보스 몬스터의 혼보다도 적었다. 3년 전에 딱 하나 나온 게 전부.

그마저도 사진이 찍혀 커뮤니티에 간접적으로 언급된 게 다다. 아무도 모르는 플레이어였고, 나 역시도 처음 보는 캐릭터였다.

'운영자 아니냐는 소문만 무성했지.'

어떤 의미에선 유일급 아이템보다 갖기 힘든 게 바로 이 혼이었다.

감개무량. 평소라면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서 박제부터 했을 터.

히든 특성에 의해 강화까지 할 수 있다니 금상첨화다. 전신에 짜릿하고 전기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미켈라의 칼까지.'

뿐만인가.

거대한 양손검. 무게만 10kg을 훌쩍 넘길 것만 같은 칼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미켈라의 칼(Raid)(Set)

최초의 히드라곤을 죽인 거인 기사 미켈라의 칼. 히드라곤의 저주와 미켈라의 혼이 깃들어 있다.

사용 가능한 적정 능력치 - 힘 20 이상

명예를 아는 자가 사용 시 '미켈라의 힘(힘+3)'이 발동된다.

미켈라의 장비 세 개를 모으면 '천룡인(天龍人)'을 사용할 수 있다.』

초반을 헤쳐나가는데 이보다 좋은 칼은 없다.

특히 검을 사용하는 부류라면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검이었다. 능력치를 올려주는 무구는 보통 중반부 이후에 몰려있는 탓이다.

세트 옵션도 달려있다.

칼과 갑옷, 투구를 모으면 사용할 수 있는 '천룡인'은 변신기술이다. 용의 날개가 등에서 돋아나 장시간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게 해준다.

'거지 같은 특정 구간을 뛰어넘으려면 미켈라 세트는 필수다. 초반에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 그렇지······.'

미친 노가다를 요구하는 특정 퀘스트 구간, 숨겨진 던전, 숨겨진 퀘스트 등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바로 저 천룡인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다. 칼과 갑옷, 투구를 모두 모으지 않으면 발동되지 않는데 나올 확률도 더럽게 낮았다.

특히 미켈라의 칼은 그중에서도 가장 구하기 어려운 파츠. 운이 좋았다.

'그런데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은 뭐지?'

위의 두 가지는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저것. 저 황금색 동전은 처음 본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현실과 판게니아의 '동기화'를 가능토록 해준다. On/Off 가능(잔여 시간 24시간).

'황금률 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다.』

죄다 처음 보는 설명이다. 황금률이라는 것도, 이걸 이용할 수 있는 황금률의 상점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말이다.

무엇보다 현실과의 동기화라니.

"미친······?"

뱀공주가 내 단말마를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 미친 게 아니라는 말이다. 뱀공주 이자벨라여."

급히 주워 담아 본다.

뱀공주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그녀가 잠깐 이상하단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곤 백인장에게 말했다.

"모시거라."

"예? 여, 여왕께선 다 죽이라고······."

"귀인(歸人)이시다. 극진히 모셔야 할 것이다."

*

사막의 대도시 파이살메르.

여왕이 통치하는 절대왕정의 세계!

그곳에서 졸지에 귀인이 된 나는 호화로운 궁전 하나를 통째로 전세 냈다.

'내가 키운 캐릭터가 파이살메르의 2인자가 되어있을 줄이야.'

궁 안에서 바깥을 보며 사색에 잠겼다.

이곳에 오며 알게 된 건 이자벨라 역시 파이살메르의 실세 중 실세라는 것이었다. 대전사들마저 깍듯하게 이자벨라를 대하는 걸 보고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사막의 대전사는 여왕과 여왕이 인정하는 자가 아니면 따르지 않으므로.

"씻겨드릴까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아름다운 여인들 다섯이 일렬로 줄을 서 있었다.

모든 걸 마음대로 하라며 내준 궁. 전세는 전세인데 여자가 많았다. 그것도 아름다운 묘령의 여인들이 즐비했다.

······ 여긴 하렘이었다.

도저히 게임의 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현실감. 핏줄 하나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작은 숨결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여인들은 얇은 실크 하나만 걸친 채 육감적인 몸매들을 여실 없이 드러내고 있다.

철혈군주의 심장을 지녔다고 한들 아찔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컷의 본능.

"발만 씻겨다오."

"예."

최대한 감정 없이 말했다.

그러자 진흙으로 만든 대야에 물을 받아온 여인들이 내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발을 씻겨주는 것.

파이살메르에서 외부인을 받아주는 의식이다.

들어온 외부인의 발을 씻겨주지 않는다? 그 사람은 노예라는 의미다. 씻겨주는 이는 손님이라는 뜻이고.

나는 손님이었다. 그것도 뱀공주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파이살메르의 시험이다.'

말 그대로 이 모든 일련의 상황은 이자벨라가 낸 시험이었다.

성각자가 성욕에 눈이 멀 리는 없으니까. 내 반응을 보고 그대로 전달하겠지. 그렇다고 발을 씻겨주는 것조차 마다한다면 사막의 예의를 모르는 자가 된다.

고로, 이 시험의 정답은 발은 씻되 평정심을 갖는 것이다.

촤르륵.

잔잔한 물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살결이 발에 닿는다.

군살 한 점 없는 손. 살결이 그대로 피부에 닿는다.

그렇게 열 개의 손이 내 발을 살살 녹이고 있다.

마치 얇은 솜털로 간질이는 느낌이었다.

나는 애써 생각을 돌렸다.

'현실로 돌아가는 방법은 없나?'

캐릭터를 만들다가 빨려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이 세계에서도 현실에 대한 언급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로그아웃 기능은 안 보인다. 강제로 종료할 수도 없으니······ 잠깐.'

불현듯 든 생각에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능력치>

레벨 : 2

힘 : 24 체력 : 24 민첩 : 24

지능 : 24 마력 : 24

······

<판게니아 붕괴까지 : 7.66%>

<<붕괴가 진행될수록 현실과 판게니아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붕괴의 정도가 10%를 넘기면 최초의 균열이 진행됩니다.>>

이맛살을 구겼다.

능력치의 성장세도 예사롭지 않지만, 그보다 주시할 점은 그 아랫부분이었다.

처음 봤을 때 붕괴의 정도는 6.12%였다.

그런데 메인퀘스트를 끝내자 1.5%가량이 증가했다.

정말로 100%가 되면 지구와 판게니아가 충돌하는 걸까?

'명예의 전당에 대한 언급도 있었지. 그건 뭐였을까?'

궁금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의외로 명예의 전당에 관련한 수수께끼는 금세 풀렸다.

관련된 내용을 생각하자마자 눈앞에 창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명예의 전당이 오픈되었습니다.>>

<<메인퀘스트 별 점수에 따라 전당에 이름을 남길 수 있습니다.>>

<<'메인퀘스트 1 - 생존'의 순위가 업데이트됩니다.>>

<1위, 220점. 란돌프>

<2위, 195점. 그라시아>

<3위, 187점. 민트초코맛있어요>

<4위, 170점. 흑요>

<5위, 163점. 학살>

······.

<<'생존'의 순위권 내에 들어 '로그아웃'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로그아웃할 경우 캐릭터가 무방비하게 노출되니 주의하십시오.>>

'······ 뭐?'

어딘가 익숙한 이름들.

특히 2위 '그라시아'와 3위 '민트초코맛있어요'는 가장 오랫동안 같이 판게니아를 플레이하던 동료들이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없어져서 접었나 싶었건만.

'접은 게 아니라 설마 나처럼 판게니아에 소환된 거였다고?'

둔기로 한 대 맞은 듯 머리가 띵해진다.

내가 만든 캐릭터만 이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같이 플레이하던 사람들도 이곳에 있다.

게다가.

'로그아웃······.'

로그아웃.

즉, 나갈 수 있다. 이 거지 같은 게임 속에서!

"그만."

내 묵직한 발성에 발을 씻기던 여인들이 멈칫했다.

"예······?"

"다 나가라. 별과 소통할 시간이니."

"하지만······."

여인들의 표정에 당황함이 서렸다. 발을 씻기는 건 파이살메르의 예의다. 그것을 거절하는 건 결코 좋은 징후는 아니었다.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제시간에 별과 소통하지 않으면 성각자는 힘을 잃는다. 뱀공주가 진정으로 그것을 바라는지 가서 물어보거라."

"아······."

여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그녀들은 모두 뱀공주가 보낸 스파이였다.

뱀공주가 왜 나를 이곳에 들였는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편한 소통시간 되시길."

진중한 표정으로 여인들이 고개를 숙이곤 나갔다.

······ 후. 다행이다. 이런 허접한 변명이 먹혀서.

방에 홀로 남은 나는 자세를 잡고 앉았다. 직후 시야의 1시 방향 끝에 떠오른 붉은색 버튼을 눌렀다.

<<로그아웃 중입니다.>>

<<캐릭터를 안전한 곳에 대기시키십시오.>>

<<Tip : 캐릭터가 죽으면 현실에서도 사망합니다.>>

시야가 점멸한다.

그리고.

<<로그아웃이 완료되었습니다.>>

세상이 변했다.

*

"······."

멍하니 시선을 내린다.

컴퓨터 앞 의자 위. 낡은 흰색의 무지반팔 티, 시장에서 대충 산 검은 트레이닝 바지.

패트병에 담긴 담배의 산.

게임을 플레이 하기 전과 같은 복장, 같은 자세, 같은 환경이었다.

'꿈인가?'

혹시 그간 너무 폐인처럼 살아서 꿈이라도 꾼 걸까?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게다가.

"이런 황금 동전을 내가 갖고 있을 리가 없지······."

책상 위에 다른 게 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그 찬란한 황금빛 동전이 내 앞에 있다.

옆엔 작은 가죽 주머니도 놓여있었다.

또한 시야 바깥에 있었던 로그아웃 버튼 자리엔 '로그인'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붉은색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천천히 가죽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자 물건 두 개가 딸려나왔다.

"끄으응!"

쿵!

거대한 검 한 자루. 주머니의 입구가 늘어나더니 검을 내뱉었다.

바닥에 놓자 쿵 소리와 함께 집이 들썩였다.

······ 아무리 봐도 미켈라의 칼이다.

거기다 작은 돌 위에 룬이 그려진 아티팩트, 히드라곤의 혼까지 있었다.

"게임은?"

게임창은 닫혀있는 상태였다. 아니, 아예 게임이 지워져 있었다.

마우스를 집고 인터넷을 켰다.

이어 판게니아를 검색하고 사이트에 접속하자.

[존재하지 않는 홈페이지입니다.]

······ 홈페이지가 날아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홈페이지가 말이다.

혹시 몰라 관련된 기사를 찾아봤다.

그런데 서비스가 종료되었다는 그 흔한 뉴스 기사 한줄 없다. 유튜브에 검색해봐도 최소 2년 전의 영상들만 올라가 있었다.

'대체 언제 서비스가 종료된 거지?'

유튜브 영상이 남아있는 걸 보면 서비스는 되고 있었다는 증거다. 게임 자체가 없던 게 아니라.

사람들이 접속하고 게임을 했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올라오는 영상도,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도 사라졌다.

좋다. 다 좋다 이거다.

의문점은 판게니아에 소환됐다면 나처럼 로그아웃한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로그아웃한 사람이 있다면 분명히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순위권 내에 든 사람만 로그아웃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제한적이라면?

극소수라면?

아직 많은 사람이 게임 속에 갇혀있다면?

남아있는 정보는 적거나, 아예 없을 가능성이 컸다.

'이럴 줄 알았으면 sns 교환이라도 해둘걸.'

나는 철저히 솔로 플레이어였다. 레이드를 할 때도 혼자서 해결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인사 정도는 주고받을지언정 같이 제대로 플레이한 적이 없다.

당연히 이메일이나 메신저 교환도 일절 없었다.

망할 신비주의. 그게 멋있는 줄 알던 과거의 나를 욕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식물인간, 실종자 명단······.'

손가락이 빨라진다.

식물인간과 실종자가 근 몇 년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현상에 대해 왈가왈부가 많았다. 어쩌면 판게니아와 관련된 현상일지도 모른다.

쿠릉!

그때였다.

몸이 살짝 떠오를 수준의 진동과 함께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괴, 괴물이다!"

"살려줘!"

동시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괴물? 갑자기 무슨 괴물?

커튼을 올리고 창문을 열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빠져나가며 바라본 바깥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4m는 되어 보일법한 거대하기 짝이 없는 사마귀가 도심에 나타나 학살을 저지르고 있었다.

촉수처럼 기다란 더듬이로 사람들을 낚아채고, 칼날 같은 앞다리로 막는 모든 것을 베어낸다.

묘하게 익숙한 생김새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자이언트 맨티스······?'

학살

착각할 리 없다. 꿈과 현실을 혼동할 만큼 맛이 간 것도 아니다.

진짜다. 진짜로 판게니아의 괴물이 현실에 나타났다.

탕! 타앙!

바로 앞 경찰서의 경찰들이 튀어나와 권총 사격으로 대응했지만, 씨알도 먹히질 않았다. 단단한 피부표면에 흠조차 내지 못한 채 자이언트 맨티스의 먹잇감이 되었다.

"살려······ 악!"

"긴급상황! 긴급상황!"

무전을 치며 대치 중인 경찰들. 일반 시민들 대부분은 도망치고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건물 안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상황만 주시하는 중이다. 몇몇은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비이이이이이이잉-!

공습경보가 데시벨을 올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난 상황과 마찬가지로 큰 소리를 냄과 동시에 액정 위로 떠 오른 내용들.

〔14:32분 미상의 공격 발생. 서울특별시, 부산, 대구, 경기 전역.

*가까운 지하대피시설로 대피하고, 방송 청취〕

······ 여기서만 발생한 게 아니라는 소리다. 한국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이 시작됐다. 정체 미상의 생명체로부터.

하지만 나는 저게 뭔지 안다.

판게니아를 플레이하게 되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필드 보스 몬스터.

4Lv의 자이언트 맨티스!

저 특유의 더듬이를 활용한 공격과 등 쪽에 나 있는 선명한 붉은색의 꽃을 보면 모를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게임 속의 나는 유연하며 유능한 만능의 플레이어지만 현실에서의 나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다.

머리가 아프다. 심장박동은 끝도 없이 빨라져만 갔다.

"아아아앙! 엄마! 엄마아아!"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시 고개를 돌렸다.

판게니아에서 얻은 보상들 전부를 현실로 가져왔다.

게임 속의 괴물들이 버젓이 현실을 돌아다닌다면, 게임에서 얻은 저것들도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히드라곤의 혼!'

룬이 새겨진 돌을 쥐었다.

히드라곤. 필드 보스인 자이언트 맨티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괴물이다.

공략법을 알아서 쉽게 잡았을 뿐이지 본래라면 12명이 공략해야 하는 시련이었으므로.

슥슥슥!

"이거 왜 안돼?"

인상을 찌푸렸다.

게임상에선 더블클릭만 하면 된다. 그럼 캐릭터가 돌을 꺼내 손으로 닦는 시늉을 하며 소환이 완료된다.

열심히 닦아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현실과 게임을 동기화해준다고 했다.

황금률의 동전을 가로채듯 쥔 채.

"온."

순간 눈앞에 여신이 나타났다.

판게니아의 쌍둥이 여신. 로그인할 때 항상 보아왔던 여신이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란돌프'와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완료되었습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잔여 시간은 24시간입니다.>>>>

······ 터질 것 같은 심장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몸의 떨림도, 복잡하던 머릿속도 깔끔하게 정리됐다.

손을 펼쳤다. 두꺼운 손. 나는 란돌프가 되어있었다.

미켈라의 칼을 들었다. 두꺼운 양손 대검이 착 감겨왔다.

히드라곤의 혼을 쥐었다. 그대로 창가로 다가가.

턱!

창틀을 밟고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구식의 5층 빌라. 평범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즉사할 높이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중에 떠오른 채 공기의 저항감을 느끼며 히드라곤의 혼을 문질렀다.

구오오오!

대로에 히드라곤의 성체가 소환됐다.

나는 히드라곤의 등을 타고 맨티스에게 진격했다.

*

'특종!'

인턴 기자 김하나는 괴물의 습격 순간 특종을 떠올렸다.

거대한 사마귀가 도심을 습격해왔다.

이 순간만 제대로 포착해내면 올해의 퓰리처는 따놓은 당상이다.

찰칵! 찰칵!

최대한 근접한 뒤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대박."

영화 소품이나 CG 따위가 아니라 현실감 넘치는 진짜 괴물이었다.

특종. 지긋지긋한 인턴 생활도 이제 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아아아앙! 엄마! 엄마아아!"

멀지 않은 곳에서 이제 5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장바구니. 건물 잔해에 깔린 여자.

거대 사마귀가 눈을 돌렸다.

오만 감정이 다 들었다.

저 잔인무도한 괴물이 한 가정을 박살 내는 모습까지 찍어야 하나? 그게 선배들이 말하는 진짜 기자정신인가?

망할. 김하나는 구두를 내던지곤 이를 악물고 달렸다.

친구 부탁으로 소개팅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지만 일일이 그런 걸 따질 시간이 없었다.

김하나는 거의 번지 하듯 뛰어들어 아이의 몸을 감쌌다.

"괜찮아? 괜찮니?"

"엄마가······."

"아, 아가씨. 우리 아이 좀······."

잔해에 깔린 여인이 정신을 되찾곤 겨우 입을 열었다.

아이를 구해달라는 엄마의 말.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하지만 김하나도 간과한 게 있었다.

그건 괴물의 더듬이가 생각 이상으로 빠르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촉수를 확인한 김하나가, 아이를 옆으로 밀었다.

'아.'

순간 몸이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곧이어 그녀의 눈앞에 거대한 사마귀의 얼굴이 놓였다.

머릿속으로 주마등이 지나갔다.

이렇게 죽는구나.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연애 한 번 못해보고 가는구나.

―우리 병원 젊은 원장님. 너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어찌나 조르던지. 제발 한 번만 만나주면 안 되겠니, 하나야?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대학생 때 학교 대표 킹카였다는데 엄청 잘생겼거든? 키도 크고 얼굴도 대박. 너 이 기회 놓치면 후회한다?

소개팅을 나가면 안 됐던 걸까.

친구 말마따나 괜찮은 사람이긴 했지만, 애당초 연애 생각이 별로 없어서 시간만 보내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그게 왜 이렇게 된 거지?'

김하나는 눈을 꾹 감았다. 거대 사마귀의 입과 돌기처럼 돋아있는 수많은 이빨들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촤악!

그 찰나였다.

몸이 다시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누군가의 체온이 느껴졌다.

살짝 눈을 뜨자.

"누구―"

"······."

야생미가 느껴지는 남자.

그가 내던지듯 김하나를 떨어트렸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김하나는 웬 정체 모를 괴물의 등에 올라타게 되었다.

'뭐, 뭐야?'

괴물이 하나가 아니었어?

이건 용인가? 그런데 용치곤 머리가 많다. 아홉 개의 머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마귀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괴물 중의 괴물.

"딸꾹!"

"꽉 잡고 있어라."

한국말이다. 김하나가 괴물의 등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거대한 대검을 든 남자가 뛰어올랐다.

카아아악!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용이 사마귀를 미친 듯이 물어뜯기 시작했다.

거대한 사마귀가 비명을 내지르며 울부짖는다.

그 광경은 마치 전설이나 신화 속의 장면 같았다.

김하나는 넋을 잃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남자가 대검을 장난감처럼 휘두를 때마다 초록색의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홉 개의 머리에 물린 사마귀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폭력. 이토록 잔인하고 처절한 폭력의 현장을 김하나는 생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영화나 드라마로 느껴지는 수위는 애들 장난과도 같았다.

신화 속의 영웅이 이런 모습일까.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날것 그대로의 야성미였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김하나는.

"아······."

전율했다. 몸이 떨렸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형용할 수 없는 존재와의 만남에.

쿵!

결국, 거대 사마귀는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쓰러졌다. 갈퀴와 목을 잘린 채 두 눈에 초점을 잃었다.

그러자 사마귀의 사체가 먼지처럼 사라져간다. 회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모습을 감췄다.

머리 아홉 개 달린 용도 마찬가지였다.

김하나는 부웅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 살려······!"

손과 발을 좌우로 흔들다가 어느새 다시 누군가에 안겼다.

괴물을 죽인 남자.

그가 지상에 떨어지는 김하나를 안아 들곤 안전하게 착지시켰다.

"가, 감사합니다."

"······."

두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등을 돌렸다.

멀어져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김하나가 핸드폰을 들었다.

찰칵.

"아."

직후 무언가를 깨달은 듯 김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사람들이 힘을 합쳐 건물 잔해에 깔린 아이의 엄마를 꺼내고 있었다.

김하나도 달려나가 잔해를 드는 일에 힘을 합쳤다.

*

세상은 난리가 났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온 괴물들.

괴물들은 등장 즉시 사람들을 죽이고 인류문명을 파괴했다.

하지만 나타난 건 괴물뿐만이 아니었다.

총도 통하지 않는 괴물을 무 썰 듯 베어버리는 전사들. 중세시대와 같은 갑옷이나 검, 창, 활 따위를 두르고서 괴물을 무참하게 살육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안전을 제가 지키겠습니다!"

"괴물들의 세상이 도래할 겁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중 몇몇은 자국어를 내뱉으며 사람들의 안전을 얘기했다.

더욱 놀라운 건 그들이 한 '변신'이었다.

전사의 모습으로 존재하던 그들이,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아와 이와 같은 말을 쏟아낸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유지시간 한 시간 남짓. 다들 시간은 아끼고 싶은 거겠지."

한 남자가 쏟아지는 기사와 영상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나타난 전사들은 모두 '로그아웃'이 가능한 랭커들이다.

메인 퀘스트 별로 순위권에 오르면 로그아웃 할 수 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의 잔여 시간은 최대한 아껴야 하니까.'

하지만 현실과 캐릭터를 동기화시켜주는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은 소모품이다. 짧으면 1분, 길면 한 시간 정도나 겨우 유지해준다.

하여 현실에서 동기화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현재 로그아웃이 가능한 알려진 인물은 총 여덟.

그중 남자는 '학살'이라는 랭커 캐릭터를 보유한 강자였다.

상황을 살피고자 학살은 이번 사태에서 한 발 빠졌다.

괜히 나섰다가 판게니아의 캐릭터 외형이 알려지면 게임과 현실 양쪽 모두가 위협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도 그럴 게 학살은 모두가 인정하는 비매너 플레이어였으니.

'그나저나.'

학살은 턱을 쓸었다.

'팬텀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팬텀처럼 보이는 놈은 없군.'

팬텀. 혹은 고스트.

판게니아의 명실상부 1위 플레이어.

아무도 이름을 몰라서 모두 그렇게 부른다.

예측으론 수백 개의 캐릭터를 보유했으며 최근 '마계 대원정'을 실행한 녀석이 팬텀이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온갖 방해 공작으로 대원정은 실패했고, 팬텀 역시 죽어서 캐릭터를 삭제당했다.

'팬텀은 진짜 운영자인가? 아직도 게임으로 플레이하고 있었다는 거잖아.'

학살 역시 순수한 게임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2년 전에 학살 캐릭터가 죽으며 판게니아로 소환됐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팬텀만, 팬텀으로 추측되는 자만 계속해서 게임을 영유했다.

그 원인을 알아내고자 온갖 사람들이 팬텀을 찾아 나섰다.

팬텀으로 보이면 일단 방해를 하거나 배신을 해서 죽인 뒤 캐릭터를 삭제시켰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캐릭터가 삭제되면 판게이나로 소환됐기 때문이다.

'아니야. 분명 그 캐릭터로 소환됐을 거다. 보유하고 있던 가장 강한 캐릭터가 죽으면 소환되니.'

유일급 장비를 여덟 개나 갖추고, 온갖 보물과 재능으로 무장한 5성급 캐릭터.

10레벨을 넘어 별을 다섯 개나 먹였으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분명히 팬텀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캐릭터였을 것이다.

운영자가 아니라면 필시 소환되었을 거다.

그리고 판게니아로 소환되면 초기화가 되긴 하지만, 가장 강했던 캐릭터의 재능만은 고스란히 이어받을 수 있다.

외형도 달라지고 NPC처럼 변해 다른 사람과의 접점도 모두 사라지지만 메인퀘스트를 진행하며 더 강해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 란돌프. 이놈이 팬텀인가?'

2년 전 소환된 이후 학살은 수많은 메인 퀘스트들의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학살은 레벨 10. 다른 랭커들이 그러하듯 히든 특성마저 지닌 랭커다.

그런데 거의 변화가 없는 순위에 최근 변화가 생겼다.

그것도 최초의 메인 퀘스트, '생존' 부분에서.

'220점이라니.'

그게 가능한 수치인가?

2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다고 해도 220점을 획득할 자신이 없었다.

이런 게 가능하다면 그건 분명 팬텀이다.

자신처럼 랭커들 모두가 확인했을 터이니, 표적이 되는 건 시간문제.

경쟁자는 제거한다. 또한 팬텀이라면 죽이는 순간 엄청난 양의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현실과 판게니아가 본격적으로 '침투'되고 있다는 게 확인됐다. 황금률의 조각을 얻으려는 경쟁 역시 본격화 되리라.

나중에는 판게니아와 현실이 아예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판게니아의 NPC가 현실로 나타나거나······ 정말 마왕이 강림하거나.

그 전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앞으로는 더 강한 자가, 더 많은 황금률의 조각을 지닌 자가 이 시대의 주역이 될 건 자명했으니.

"······ 히드라곤? 누구야, 이건."

그러던 와중 한 영상을 보고 학살이 인상을 찌푸렸다.

히드라곤.

공식적으로 풀린 적 없는, 아니 딱 하나 풀린 그 괴물과 함께 나타난 전사.

분명히 처음 보는 외형이다.

학살은 전사의 외형을 눈에 담았다.

그 외에도 한국에 나타난 다른 전사 캐릭터들 역시 눈에 담았다.

모두가 경쟁자다.

앞으로 펼쳐질 혼돈의 시대에 주역은, 자신이어야만 했으므로.

*

"성역으로 들여보내 달라? 미친 건가?"

······ 뱀 공주 이자벨라가 경악했다.

다름 아닌 나의 요청 탓이다.

사막의 성역. 그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는.

'메인 퀘스트 첫 번째가 생존이라면.'

그러나 나는 반드시 성역으로 가야만 했다.

'메인 퀘스트 두 번째는 클래스를 얻는 것이다.'

클래스. 메인 퀘스트를 진행함과 동시에 더 강해질 방법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곳에 별이 있다."

"뭐······?"

이자벨라의 눈가가 떨렸다.

별. 별의 축복을 받을 방법이 그곳에 있다니 놀란 것이겠지.

예전에 포기했지만 최근 플레이하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사막의 성역에 별이 있다. 여왕의 저주를 풀 방법이.

다만, 숨겨져 있었다.

'가장 낮은 곳에 있지만 어떠한 별보다도 빛날 수 있는 별.'

그리고 내가 바라는 클래스 역시도 그 별에게서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메인 퀘스트 2

"······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예."

여인들의 보고를 받은 이자벨라가 사자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의자 위에 앉아 턱을 쓸었다.

남자라면 반응할 수밖에 없는 미모의 여인들에게 세족을 시켰다. 사막 도시 파이살메르 최고의 대우이며 동시에 성각자를 살피기 위한 덫이었다.

그리고 이 덫은 설혹 남자가 아니더라도 빠져나갈 수 없다.

이들은 심장박동수의 변화와 피부의 미세한 떨림도 감지할 만큼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녀들의 손길에 닿으면 진실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게끔 말이다.

그런데 일체의 미동이 없었단다.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이자벨라의 입가엔 미소가 피어났다.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라. 듣던 대로군.'

성각자에 대한 소문과 이야기는 이자벨라도 숱하게 접하고 찾아보았다.

그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게 부동심이다. 오직 별에게 모든 걸 바친 성각자는 현세의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더 보고할 사항은?"

다섯 여인이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세족을 시켜달라고 말했습니다. 파이살메르의 예의를 알고 있는 자입니다."

"궁에 입성하여 오르는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벽에 걸린 괴물의 뼈들을 보고도 침착했습니다. 놀라긴커녕 감상하며 발본과 박제실력에 감탄했습니다."

"피부는 비단처럼 부드러웠습니다. 하지만 근육은 야생마의 그것과 같이 탄력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별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듯했습니다."

솔직한 여인들의 감상과 보고에 이자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나 예사롭지 않은 게 없었다.

우선, 파이살메르의 예의를 알고 있는 자다. 자처하여 세족을 말할 만큼의 지식이라면 필시 과거에도 파이살메르를 방문해봤던 자라는 뜻이다.

또한 노예나 평민은 궁의 모습에 압도되기 마련이다. 내부에 들어가서도 거침없이 움직였다면 그 신분이 예사롭지 않은 자라는 것이었다.

'귀족, 혹은 왕족인가?'

당당한 태도와 말투. 자신을 보고서도 흔들리지 않고 반박하는 모습은 확실히 귀족이나 왕족을 떠올릴 법하다.

성각자가 별에게서 태어났다고는 말하지만 그들도 결국 사람의 자식이다. 사람의 자식인 이상 귀천은 있기 마련.

발본과 박제실력을 알아볼 정도라면 전문적인 지식 역시 해박하다. 그만한 지식을 접할 수 있으려면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신분이 필요할 터.

'피부가 비단처럼 곱고, 근육은 야생마의 그것과도 같다······ 모순적이나, 성각자이기에 모든 게 설명이 되는군.'

성각자. 정말 마법 같은 단어다.

사막에는 성각자가 없으니까. 아무도 제대로 실체를 모르는 자가 이곳에 나타났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들은 믿을 수밖에 없다.

생각을 정리한 이자벨라가 말했다.

"별과 소통하는 중이라고 했나?"

"예."

"직접 봐야겠다."

"하, 하지만··· 소통을 하지 않으면 성각자의 자격을 잃는다고······."

이자벨라가 피식 웃었다.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다고 너희들은 대화를 못 하던가?"

여인들이 입을 꾹 닫았다.

옆에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나는 정도로 대화가 불가능해지진 않는다.

조용한 대화를 원한다면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으면 그만이니까.

단둘만의 대화?

어차피 이자벨라는 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미 둘만 소통하고 있는데 이자벨라가 옆에 있은들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이자벨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성각자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

······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뻔했다.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눈을 뜨자 그녀가 뻔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최대한 빨리 접속해서 다행이었다.

현실에서의 일을 대충 수습하고 나는 다시 판게니아에 로그인했다. 차분해진 이성과 냉철해진 판단력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다.

'현실에 괴물이, 소환된 플레이어들이 나타났다. 그것도 판게니아의 캐릭터로. 이번 대원정이 실패한 원인도 그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 판게니아란 게임은 어느 순간부터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잘 지내던 NPC가 갑자기 배신을 때리고, 동료가 돌연 날강도로 변하기 때문이다.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도 그 이상의 방식으로 방해를 해왔다.

이번 대원정 역시 마찬가지.

······ 그런데 그 '방해의 요소'가 전부 플레이어였다면?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상당히 많은 숫자의 '트롤러'가 존재한다면?

엔딩을 바라지 않는, 혹은 나를 경쟁자라고 생각하는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방해를 해온 것이라면······.

'다 썰어버려야 한다.'

화합? 친목?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런 방해로 삭제된 캐릭터가 수백이다. 심지어 내 모든 정수가 담긴 최강의 캐릭터도 죽고 삭제당했다.

문득 처음 이곳에 소환되었을 때 병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씨발. 내분만 아니었어도 원정은 성공했을 텐데······!

내가 모르는 내막이 있다.

심지어 마왕은 나 혼자 상대했는데, 어느 순간 '8용사'가 되어있었다.

이만한 업적을 조작할 정도의 '스피커'가 있다는 의미다. 그 스피커는 개인일 수도 있고, 단체일 수도 있다.

아니, 단체일 것이다.

나로 의심되는 캐릭터를 고의로 방해하고 죽이는 플레이어 단체가 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소문마저 날조해 판게니아에 정착시켰다.

8용사라니.

죽은 내 마지막 캐릭터의 우월함을, 유일성을 의도적으로 훼손시킨 게 분명하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일은 우선 빠르게 강해지는 것.

게임과 현실, 양쪽 모두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 성지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너는 들어갈 수 있겠지."

그녀가 필요했다.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내가 만든, 하지만 포기하고 버려뒀던 비운의 캐릭터.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 어느새 뱀공주라 불리며 파이살메르의 2인자가 되어있었다.

직접 지은 닉네임도 저게 아니다.

'아스카 키라라······.'

··· 왠지 미안해졌다. 하지만 판게니아에선 '가명' 취급되는 게 닉네임이었다. 본명과 실체는 이미 존재하고 플레이어가 그 몸에 빙의한다는 설정이니.

어쨌거나.

"누군가를 몰래 데려간 게 들키면······."

"사막을 떠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잘 생각하고 대답해라."

이자벨라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사막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별이 말해주었다."

"······."

할 말이 없겠지.

물론 이자벨라가 사막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설정은 없다.

그런 설정이 존재할 리도 없고.

하지만 이자벨라는 플레이어의 캐릭터였다. 세상 곳곳을 누비며 엔딩을 봐야 하는 존재 말이다.

그럴진대 저주로 인해 사막에 묶여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실제로 내가 그랬다. 그래서 포기했다.

'네 번째로 얻은 별이었지.'

그리고 이전 캐릭터를 키울 때 발견했다. 사막의 성지에 숨겨진 지고의 별을. 그 위치는 모든 플레이어 중에서도 나만 알고 있으리라.

단연코 그 별은 특별하다. 얻을 수만 있다면 최대한 빠르게 얻는 게 좋다.

"··· 성지는 허락받지 않은 자를 죽인다."

"그 부분은 전혀 걱정할 것 없다."

이미 한 번 끝을 본 곳이다.

그곳에 존재하는 함정 따위는 진즉에 파악을 끝낸 상태.

내 히든 특성 중에는 성역에서 작동하는 것들이 꽤 있었다.

대답을 듣고 이자벨라가 눈을 흘겼다.

"오늘 새벽. 달이 기울기 시작할 때, 깨어 있어라."

이윽고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휙! 몸을 돌려 떠났다.

*

새벽녘.

"컥!"

왕궁의 지하. 이자벨라를 따라 숨겨진 길을 신속하게 달렸다. 중간중간 보이는 병사들은 이자벨라가 알아서 처리했다.

내가 보고도 시원시원한 손속이었다. 거침없이 병사들을 덮치고 죽였으니.

이자벨라는 암살에 특화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어찌나 민첩한지 대부분의 병사가 자신이 죽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눈을 감을 지경이었다.

'귀신이 따로없군.'

목이 서늘해졌다.

처음부터 이자벨라가 나를 죽이려 했다면 지금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강자라 불리는 대부분의 존재가 같은 결말을 맞이하리라.

아군인 게 이보다 든든할 수가 없다.

그렇게 거침없이 달리자 거대한 제단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중심에 둔 채 모아이 석상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이곳이 성지다."

어쩔 테냐, 그리 묻는 눈빛이다.

정작 본인도 내키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이다. 사막의 성지는 그 정도로 복잡하고 어지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갈 순 없다. 그러기엔 너무 먼 강을 건넜다.

이자벨라가 병사들을 모조리 죽인 이유가 무엇이겠나.

'증거인멸.'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성역에 무단 침입한 걸 알리지 않겠다는 의지다.

돌아간다고 하는 순간 지체없이 내 목을 베겠지.

"내가 먼저 들어가마."

어깨를 으쓱하며 제단의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 들어섰다.

그러자 수많은 글귀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숨겨진 사막의 성역에 입장했습니다."

"서브 퀘스트 : 성역을 탐사하십시오."

"탐사율에 따라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주의. 성역 탐색의 권장 레벨(8)에 미치지 못합니다."

"주의. 독기와 마기가 넘칩니다. 항마력이 낮다면 진입하지 않을 것을 권합니다."

"히든 특성 '거인의 항마력'에 의해 보호됩니다."

"히든 특성 '돌연변이'가 적용됩니다."

숨겨진 성역. 본래라면 레벨 2의 초보자는 들어올 수 없는 곳.

여왕에게 허락을 받거나 강력한 전사들을 물리쳐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런 곳을 꼼수를 통해, 이자벨라를 앞세워서 입장했다.

성역 탐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보상은 쏠쏠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처음부터 내가 노린 건 서브 퀘스트 따위가 아니었다.

"메인 퀘스트 2 : '클래스 얻기'가 시작됐습니다."

"성역에서 클래스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 퀘스트는 클래스를 얻은 순간 종료됩니다."

"보상 : 얻은 클래스의 급에 따라 차등 지급."

바로 두 번째 메인 퀘스트.

'급에 따라 차등 지급이라.'

조건을 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강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건 세상의 이치다. 판게니아만큼 그 조건이 확실한 곳도 없다.

하지만 첫 번째 메인 퀘스트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좋은 클래스를 얻으려면 그만한 행운도 있어야 하는 법.

실력이 좋다고 모두가 우수한 클래스를 가질 순 없으므로.

그러나 걱정은 없었다.

'이번에도 1등이겠군.'

나는 실력과 행운, 그리고 그 둘을 아우르는 히든 특성까지 갖췄으니까.

13가지의 히든 특성 중 하나, 돌연변이.

'숨겨진 길이 보인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특성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옛 왕의 터

재능, 후천적으로 얻은 스킬, 능력치와 각종 장비, 장비에 특수한 옵션을 새길 수 있는 탈리스만 등등.

판게니아의 '숨겨진 것들'을 찾게 해주는 능력의 종류는 많다.

말 그대로 숨겨진 길을 찾거나, 아이템의 숨겨진 옵션을 찾거나, 봉인의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거나······.

하지만 그러한 도움을 주는 종류의 능력은 감히 말하건대 이 히든 특성 하나에 비견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돌연변이.

내가 가진 13가지 히든 특성 중 하나이자, 숨겨져 있는 모든 '비밀'을 파헤치는 권능과도 같은 능력!

'보인다.'

숨겨진 길.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설계한 외통수.

후아아아아아!

절벽 위 성역을 잇는 긴 다리가 있었다.

절벽 아래로 빨아들이는 강력한 바람도 함께 부는 중이다.

정신을 집중해 좁은 다리 위를 걸어가지 않으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있는 구조였으나.

"지, 지금 뭐하는······?!"

내가 다리 옆의 특정 지대에서 높이 뛰자 이자벨라가 기함을 터트렸다. 아마도 자살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보인 것이겠지.

하지만 기함은 순식간은 잦아들었다.

"잘 따라와라."

"······ 그런 길이 있다는 것도 별이 말해주던가?"

"당연한 소리를 묻는군."

이자벨라가 기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성역엔 곳곳에 보이지 않는 작은 땅의 블록이 허공에 떠 있었다.

기껏해야 성인 한 명이 겨우 올라갈 만큼 비좁다. 제대로 밟지 않으면 그대로 추락해 죽겠지만 내 눈엔 너무나도 또렷하게 보였다.

'탐색 스킬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군.'

이전 캐릭터로 이곳에 들어왔을 땐 온갖 도구와 스킬을 갖춘 채였다.

예컨대 스킬 레벨이 10에 이르러 초월한 '탐색' 스킬 '혜안'조차도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처럼 또렷하게 숨겨진 길을 알려주진 못했다.

얼추 그곳에 땅이 있다는 설명 정도이지, 글로 읽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차이의 간극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강기류가 워낙 강해 날개로 날아가는 것도 소용없다.

저 바닥에는 '심해어'가 있으므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레벨이 몇이든 죽는다고 보면 된다.

오직 땅. 땅을 밟고 지나가야 살 수 있다.

'탐색율 100%, 가능한가?'

서브 퀘스트라도 무려 성역 탐색이다.

이전에 들어왔을 땐 끝을 보긴 했지만 탐색율은 97%대에서 멈췄다.

97%에서 받은 게 특수 아이템 '호른의 영광'이었으니까······ 100%를 채우면 서사급의 보물을 줄지도 모른다.

나는 한 칸 더 뛰어오른 뒤 고개를 돌렸다.

"······? 뭐 하는 거냐?"

이자벨라가 뛰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다리에······ 쥐가 났다."

··· 잠깐 어이가 없었다.

병사들을 습격하면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아다닐 땐 언제고.

개 풀 뜯어 먹는 소리가 따로 없었다.

"뛸 때 힘 조절은 필수다. 잘못하면 하강기류로 쓸려갈 테니 조심하도록."

넓은 간격은 아니지만 문제는 하강기류다.

바람이 너무 강해서 자칫 잘못했다간 그대로 쓸려갈 수 있었다

아무리 이자벨라가 레벨이 높고 날렵해도 그 순간 죽음은 확정인 셈.

"성역에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니······."

"빨리 뛰어라. 시간 없다."

"정말 여기로 가면 '별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건가?"

이 녀석 봐라.

"무섭나?"

"하, 그럴 리가."

애써 코웃음을 치고 있지만 내게는 보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자벨라의 촉촉한 두 눈이 힘차게 떨리고 있는 것이 말이다.

저런 캐릭터였나?

파이살메르의 2인자까지 올라갔으면 두려움과는 담을 쌓아야만 한다. 여왕의 눈에 들고, 장로들에게 인정받아야만 공주라 불릴 자격이 생긴다.

그야말로 철혈의 여인. 뱀공주 이자벨라는 그런 인상이었다.

피식 웃으며 놀렸다.

"생각보다 겁이 많군."

"··· 나는 겁이란 단어를 모르니라. 정말 다리에 쥐가 났을 뿐이다."

다리를 푸는 시늉을 하곤 이자벨라가 뛰었다.

첫 번째 블록에 착지한 이자벨라가 보란 듯이 나를 치켜봤다.

보아라, 겁은 무슨. 그렇게 말을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래를 절대 쳐다보지 않는다.

설마 고소공포증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잘했다."

"몇 개나 남았지?"

"흠."

얼추 보이는 블록을 계산 후 말해주었다.

"70블록 정도만 가면 도착한다."

"70······."

"아니, 80인가?"

"······."

"90일 수도 있겠군."

이자벨라의 두 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성각자 란돌프. 그는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이었다.

성역의 독기와 마기는 생명을 좀먹는다. 하여 선택되어 축복을 받거나 그를 이겨낼 만큼의 신체 능력을 지녀야만 겨우 입장하는 게 가능하다.

그런데 란돌프는 별다른 장비나 축복 없이도 성역을 자유로이 활보하고 있었다. 이자벨라조차도 숨을 쉬는 게 버거운 이 장소에서 말이다.

심지어 수천 년간 밝혀지지 않은 숨겨진 길을 보거나 사방에서 날아오는 함정을 꿰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피해 다녔다.

'어떻게 나도 몰랐던 길을······.'

파이살메르의 2인자인 자신도 모르는 길을, 어쩌면 성역의 제사장도 모르고 있을 길들을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모두 한 발자국만 잘못 디뎌도 죽는 외길이었다.

란돌프가 디딘 길을 기억과 감각에만 의존해서 가야 했기에 극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

헌데, 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누군가의 뒤를 쫓아가는 이 형세가.

이토록 필사적으로 다른 이의 뒤를 쫓아본 적이 있었나?

'없었어.'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앞장서는 존재였다. 앞만 보고 달려나가는, 앞에 누군가가 있어서도 안 되는 그런 자리에 위치한 절대강자.

모두 저주를 풀기 위해서다.

공주의 자리를 꿰차면 저주를 풀어주겠다는 여왕의 말만 믿고 미친 듯이 달려왔다.

하지만 여왕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긴장 풀어라. 셋 세면 뛰는 거다. 내가 받아주마."

보이지 않는 길을 통해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면 이번에는 올라가는 길이었다.

마찬가지로 투명한 계단을 따라 천장에 닿아야만 했다.

이에 속도가 늦춰지자 란돌프가 말한 것이다.

이자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 가거라. 천천히 따라가겠으니."

"그럴 순 없다."

"······."

이자벨라는 입을 꾹 닫았다.

저 태도, 저 눈빛.

익숙하지가 않았다.

마치 자신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애정이 어린 몸짓이.

"왜······."

왜 나를 그런 식으로 쳐다보느냐 물으려다가 다시 입을 꾹 닫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예전에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

"같은 공간에서 만난 적은 없다."

"······ 그게 무슨 뜻이지?"

"나는 너를 보았지만, 너는 나를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해서 머리를 쪼개봤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성각자였다.

"그럼 별이 보여주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비슷하다고 해두지. 자, 가자. 동이 트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동이 트면 전사들의 죽음도 알려질 것이다. 자리에 없는 이자벨라는 의심을 받을 것이고, 머지않아 여왕의 추적대가 꾸려지리라.

성역이 봉쇄라도 된다면 빠져나갈 길은 더더욱 없어진다.

"하나, 둘······."

란돌프가 셋을 외치는 순간 이자벨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비좁은 타일에 겨우 오르자 숨소리가 지척까지 느껴졌다.

"그냥 업혀라. 그게 더 빠르겠군."

그 또한 맞는 말이다. 진즉에 업혔으면 이미 천장에 닿았을 터. 이 상황에 이르러서 더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다.

문제는 살아생전 이자벨라가 단 한 번도 남자의 등에 올라 타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막에서 여자가 남자의 등에 오르는 건 각별한 사이를 뜻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외간남자의 등에 업히는 일은 아예 없었건만.

"······."

입술을 깨문 이자벨라가 란돌프의 등에 업혔다.

그리곤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윽고 천장에 닿자 세상이 반전됐다.

'영역 결계!'

영역 전체에 결계를 쳐두고, 정해진 길을 따라온 자에게만 나타나는 또 다른 지역.

그런 게 성역 안에 있었을 줄이야.

꽃밭. 그리고 언덕이 있었다.

쿠릉! 쿠르르릉!

순간, 언덕인 줄 알았던 것들이 들썩이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골렘.'

골렘 세 기. 가슴에 새겨진 룬의 크기로 보아 최소 상급이다.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스릉.

등에서 내려온 이자벨라가 양손에 단검을 꺼내 들었다.

*

골렘이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동사냥하는 기분이 이런 건가.'

적이 나타나면 이자벨라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처리했다. 당장 내 레벨에선 적대하기 힘든 수준의 골렘들조차도 이자벨라 앞에선 순두부나 다름이 없었다.

순식간에 핵을 파괴한 이자벨라가 단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 찰나였다.

"'골렘 제작자' 클래스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역시나.

성역의 숨겨진 던전. 본래 이곳은 스킬을 획득할 수 있는 장소였다.

클래스가 있었다면 아마도 '골렘 파괴술'같은 스킬을 획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클래스가 없기에 스킬 대신 '골렘 제작자'의 클래스를 획득하게 해주었다.

이게 제작자가 의도한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애당초 성역의 독성을 이겨내려면 레벨이 최소 7은 넘어야 했다.

레벨 7에 클래스가 없는 경우는 없고, 만에 하나 나처럼 히든 특성으로 해결한다고 해도 숨겨진 길을 찾아내 골렘을 사냥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거부한다.'

"'골렘 제작자' 클래스의 획득을 거부했습니다."

골렘 제작자. 급으로 치자면 상급의 클래스다. 판게니아는 무언가를 소환하거나 같이 싸우는 형식의 클래스가 희귀했으므로.

하지만 내가 바라는 클래스는 아니다.

이 정도의 급으로 전당의 1순위를 기록할 순 없다.

'이자벨라가 사냥한 걸 내가 사냥했다고 취급은 해주는군.'

다만, 의아한 점은 있었다.

판게니아는 파티 시스템이 존재하긴 하지만 '기여도'에 따라 모든 걸 나눈다.

스킬, 혹은 클래스라면 높은 기여도로 사냥해야만 얻을 수 있다.

하여 마지막 공격을 가하는 식으로 약간이라도 기여를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백 번쯤 반복하면 한 번은 얻을 테니까.

그런데 한 번에 성공했다. 기여를 아예 안 했는데도.

'갑자기 파티 상태에 들어서기라도 한 건가?'

바깥의 전사들을 죽일 때나, 성역 안에서 자잘한 괴물들을 이자벨라가 처리할 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랬다.

"'악마 사냥꾼' 클래스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룬 워리어' 클래스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기아의 창술사' 클래스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

사냥을 이어갈 때마다 들려오는 시스템의 음성과 글귀들.

'모조리 거부한다.'

충분히 뛰어나지만 이 역시 내가 바라는 클래스는 아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마침내 도착한 거대한 산.

"'이름 없는 별이 묻힌 산'에 도착했습니다."

"주의. 권장레벨(10)에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산의 주인, '옛 왕'이 침입자들에게 노합니다."

*

거대한 산의 주인. 저 거신을 죽이려면 최소 10레벨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옛 왕을 죽이지 않았다.

죽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옛 왕이 격의 차이를 알아보곤 공격해오지 않은 탓이다. 당시 나는 별 세 개를 먹어 초월해 옛 왕 따위는 아득하게 뛰어넘는 초월자였다.

'지금은 약해져서 만만하다 이거지.'

······ 도우미 NPC가 아니었던 건가.

솔직히 당시엔 별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는 친절한 도우미 NPC라고 생각했다.

그냥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것뿐이었다.

「감히 옛 왕의 터에 들어오고서도 살아나갈 수 있다고 여겼느냐?」

산 전체에 울리는 목소리.

보석과 같이 반짝이는 몸.

거대하기 짝이 없는 흑요석의 뱀!

"아."

거신을 앞에 두고 이자벨라의 몸이 바짝 굳어버렸다.

레벨 10은 초월자의 바로 전 레벨. 이자벨라의 레벨이 8이라지만 10이라는 숫자는 넘을 수 없는 벽이요 격이다.

게다가 뱀에게서 흘러나오는 하울링은 마치 놈을 용처럼 보이게끔 했다.

부들부들!

이자벨라가 몸을 떨었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는 걸 알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피라미드 최상위 포식자를 마주한 먹이가 으레 그렇듯이.

쯧.

혀를 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이자벨라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인간이라면 절대로 옛 왕의 절대영역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비켜라. 너는 그곳을 지키고 있을 자격이 없다."

「인간이 헛소리를 하는구나. 내가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에게 자격이 있다는 것이냐?」

옛 왕이 혀를 내밀었다.

한입에 삼켜버리겠다는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빌헬름."

하지만 채 다가오기도 전에 옛 왕은 경직했다.

「······ 그 이름을 어떻게?」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고?

"진정한 산의 주인은 네가 아니라 빌헬름이지 않느냐?"

그야 내가 빌헬름이니까.

죽고 삭제당했지만, 이 산의 주인은 옛 왕이 아니라 나였다.

옛 왕이 내게 양도했고 그리하여 별의 주인이 됐다.

고로, 불법 침입자는 내가 아니라 저놈이었다.

「네놈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다만, 놈은 죽고 별은 떨어졌다. 이 산 역시 마찬가지!」

자유의 몸이 된 옛 왕이 입을 크게 벌렸다.

이어 나를 덮칠 찰나.

"너의 주인이 돌아왔다, 옛 왕― 드라무트여."

콰르르릉!

순간 급하게 방향을 전환한 놈의 머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별을 얻다

옛 왕, 드라무트.

별을 지키는 산지기이며 거구의 몸체를 지닌 거신(巨神)이다. 별의 영기로 인해 몸이 커지고 지혜가 생긴 영물이라는 게 드라무트의 유래였다.

이름. 진명(眞名) 역시 별에게서 계승한 것.

당연히 별을 제외한 그 누구도 몰라야만 정상이다.

오직 별을 소유하고 별의 주인이 된 자만이 놈의 진명을 알 수 있었다.

빌헬름. 최강의 캐릭터였던 바로 나만이.

「내, 내 진명을 어디서 들은 거냐? 빌헬름이 말해준 거냐?」

머리를 한 차례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드라무트가 당황하며 물었다.

"멍청한 놈. 계약 내용조차 잊었나?"

하지만 진명의 언급은 계약으로 묶여있다.

타인에게 발설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 계약으로 묶여있지 않으니 마음껏 발산한 것이다.

'참. 진짜다.'

드라무트의 비늘이 짜르르 울렸다.

산지기는 진실과 거짓 역시 구분할 줄 알았다.

만약 거짓이라면 마음껏 계약을 파기하고 활보하며 저 인간을 잡아먹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진실이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심지어 주인이 돌아왔다는 말조차도.

'처음 보는 인간이 내 진명에 계약 내용까지 알고 있다. 빌헬름의 이름을 언급까지 했다.'

계약의 불문율. 타인에게 관련된 내용을 조금이라도 언급하는 순간 대상자는 죽고 계약은 파기된다.

하물며 빌헬름은 5성의 초월자다. 말 한마디, 몸짓 하나하나에 격이 서린 주역의 존재가 계약을 파기해가며 누군가에게 비밀을 언급할 이유가 없다.

그런 식으로 파기됐다면, 드라무트가 모를 리도 없고.

'하지만 빌헬름은 죽었다. 별이 떨어졌으니.'

허나 계약의 대상자가 죽어도 계약은 파기되기 마련이었다.

빌헬름은 죽었다. 다섯 개의 모든 별이 떨어졌다. 완전무결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뜻이고 그에게 얽혀있던 모든 주박 역시 해제되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지금 드라무트와 저 인간 사이의 계약은 성립되지 않았다. 진명을 안다고 한들 조금 놀란 것뿐.

"길을 안내해라. 별이 나를 증명할 거다."

한입에 꿀꺽 삼켜버려도 티도 나지 않을 만큼 연약한 인간 주제에 뭐 저리 당당하단 말인가.

그리고 뭐? 별이 증명을 해?

「네깟 놈이 별을? 별 근처에만 가도 타버릴 것이다.」

드라무트가 비웃었다.

부족하다. 저 인간은 별을 먹을 기준에 한참 미달했다.

드라무트는 별을 지키는 존재. 본능적으로 별에 적합한 레벨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저 인간은 기준에 부합하긴커녕 기초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어찌하여 자신의 신역(神域)에 영향을 안 받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특수한 장비나 도구 따위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 아니겠나.

「혹시 옆에 있는 암컷인간이 도전한다는 걸 착각한 것 아니냐?」

차라리 저 옆의 암컷인간이 그나마 낫다. 물론 그래도 부족하다. 별을 먹을 자는 자신과 대등하거나 자신을 넘어서는 강자여야만 했으므로.

별의 근처에 다가가기도 전에 타버릴 것이다.

별은 기준에 부합하는 자에겐 한없이 너그러우나, 부합하지 않는 자에겐 한 치의 자비조차 없었다.

"내가 도전한다."

도전? 도저어어언?

「크하하하!」

드라무트가 몸을 베베 꼬면서 웃어댔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뒹굴거리며 웃은 드라무트가 겨우 정신을 찾았다.

이렇게 웃은 게 몇백년 만인지.

'내가 처리하는 것보단 별에 타버리는 게 훨씬 낫겠지.'

차라리 잘됐다. 자신의 진명과 빌헬름마저 알고 있는 요상한 놈. 찝찝하기 그지 없는데 별이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다.

아무리 특별하고 특수한 장비나 도구의 도움을 받고 있다한들 별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별은 오직 대상자가 지닌 능력만을 보니까.

「좋다. 따라와라, 애송이.」

스으윽.

드라무트가 흔쾌히 별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

별.

종의 규격을 넘어서며 인지의 초월을 이룰 때 필요한 '경계의 초석'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체였다.

죽은 쌍둥이 여신 레아의 조각난 몸을 우리는 '별'이라고 불렀다.

판게니아 대륙에는 총 32개의 별이 있었다.

그 부위를 보면 이와 같다.

손가락 열 개, 손등부터 어깨 부위 총 두 개, 몸통 한 개, 머리 한 개, 눈알 두 개, 코 한 개, 입을 포함한 하관 한 개, 귀 두 개, 목 한 개, 하반신 한 개, 발가락 열 개.

여신 레아의 신체부위 서른 두 종.

그 별을 갖고, 시험에 통과하면 비로소 초월할 수 있다.

당연히 부위마다 미묘하게 주어지는 초월성이 다르다.

그리고 이곳, '이름 없는 별이 묻힌 산'에 있는 여신 레아의 신체부위는······.

"저, 저게······ 별이라고?"

이자벨라가 기겁했다.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제단 위에 놓인 '별'을 보며 경악하는 중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별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으나 실물을 보는 건 그녀 역시 처음이었다.

아니, 성각자니 별이니 하는 이야기를 할 때 그게 시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 해골이······?"

하관이 잘려있는 해골.

"인사해라. 여신 레아의 얼굴이다."

"아."

휘청.

이자벨라의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너무 놀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별 앞에선 원래 별별 괴현상이 일어나는 법이었다.

"이 이상은 다가오지 마라. 위험하니."

드라무트도 저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죽을지 기대라도 하는 모양이다.

이자벨라를 만류한 채 나는 걸어나갔다.

여기서부턴 반반이었다.

성역의 숨겨진 이 천공섬은 모든 영역에서 스킬과 클래스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산과 별조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에는 이미 클래스를 갖고 있어서 그저 별을 얻고 초월하는 정도로 끝냈으나.

"······."

글자가 떠오른다.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하지만 노이즈가 많았다. 제대로 된 의사소통의 과정은 아니다.

그러나 내게 이런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게 누군지는 알 것 같았다.

죽은 쌍둥이 여신 레아다. 별이 되어 대륙에 흩뿌려진 그녀 말이다.

"허무."

한 발자국을 더 디디자 더욱 뚜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옮길 때마다, 말소리는 계속해서 추가됐다.

"손재주, 올 마스터, 웨폰 마스터, 거인의 항마력, 드루이드의 자연친화력, 철혈군주의 심장, 비스트 로드, 천상, 황금의 은총, 돌연변이, 대식가, 대현자."

내가 지닌 열 세 개의 히든 특성들.

그것들을 여신이 읽었다.

그리고.

"'멸망'과 맞선 자여."

나는 천천히 여신의 해골을, 별을 양손으로 들어올렸다.

화아아악!

순간 별에게서 찬란한 빛의 무리가 내 몸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별의 계승자' 클래스를 획득했습니다.>

<'마력'이 '성력(星力)'으로 전환됩니다.>

<주스킬 '별 할퀴기(1Lv)'와 보조스킬 '별의 축복(1Lv)'이 추가됩니다.>

<별 보유 효과(모든 능력치+5)가 추가됩니다.>

<계승자는 보유한 별의 종류와 숫자에 따라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초월시에도 별의 보유효과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

끊임없이 떠오르는 글귀들.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만큼 그 양이 방대했다.

<'메인 퀘스트 2 : 클래스 얻기'가 완료되었습니다.>

<내용을 정산합니다.>

<유일무이! 모두가 전율할만한 결과입니다.>

<총점 230점. 메인 퀘스트 - '명예의 전당'에 업데이트 됐습니다.>

<초보자의 행운! '행운의 성좌'가 더 환하게 미소를 짓습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 됩니다.>

<'모험의 성좌'가 당신의 무모함에 박수를 칩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 됩니다.>

<백성전의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발걸음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전의 성좌들?

벌써부터 그들이 나를 주목한다는 말에 기가찼다.

콧대 높은 양반들이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초보자를 주목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빌헬름으로 플레이 할 때조차도 별을 세 개 먹은 시점에서 관심이나 겨우 주기 시작했건만.

'별의 계승자 덕분인가?'

저건 나도 처음 보는 클래스다.

물론 백성전의 성좌들이 많이 주목해서 나쁠 건 없다.

그들이 보상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주기 때문이다.

나는 뒤에 올, 보상의 내역에 더욱 주목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획득했습니다.>

<두 단계 위의 주사위를 굴려 나온 결과입니다. 아래 열개의 보상 중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미켈라의 갑옷'>, <'미켈라의 투구'>, <'수호의 부적'>, <'대적자의 모루'>, <'해수의 아가미'>, <'붉은기사의 깃발'>, <'적토마'>, <'팔람의 갑옷'>, <'요정여왕의 눈물'>, <'그림자 망토'>

그리고 보상과 관련된 글귀 전부를 읽은 나는 절로 한 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 개쩌는군."

명예의 전당

두 성좌에 의해 두단계 위의 주사위를 굴려 나온 결과.

열 개의 목록중 무엇 하나 버릴 게 없었다.

'레이드 세트 무장을 그냥 던져줬다. 미켈라 세트를 지금 여기서 맞춰야하나?'

미켈라 세트는 초반에 맞추면 가장 좋은 무장 중 하나지만 그만큼 맞추기가 어렵다.

세 개의 무구를 전부 들고 있는 사람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걸 메인 퀘스트 보상이랍시고 던져줬다. 피, 땀, 눈물나는 노가다로 맞춰야하는 보물을 말이다.

'··· 열 개 전부 특정 레이드 몬스터 사냥시에만 드랍되는 보물이다.'

하지만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초보자가 아닌 판게니아의 슈퍼 고인물 유저다. 나머지 여덟 개가 미켈라 세트 못지 않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주춤하는 것이다.

판게니아 1년차 정도까진 당연히 미켈라 세트부터 맞추겠지만.

'수호의 부적. 필드에서 몬스터한테 공격당하지 않게끔 휴식처를 발동시킬 수 있지.'

이 게임은 정해진 장소에서 로그아웃하지 않으면 끔찍하게 살해당한다.

하지만 게임을 진행할수록 '세이브 포인트'는 적어지기 마련. 이때 필요한 게 바로 '수호의 부적'과 같은 안전구역을 설정해주는 기물이었다.

굳이 로그아웃 할 때만 필요한 게 아니라 사냥 중 휴식에도 절실해지니 미켈라 세트 못지않은 효용을 지니고 있다.

아쉬운 점이라면 휘발성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사용회수에 제한이 있다.'

이런 안전구역을 강제로 설정해주는 기물은 죄다 몇 번 쓰면 날아간다. 그런데 구하기는 더럽게 어려워서 신중하게 사용해야하는 진짜 보물이었다.

'해수의 아가미는 바다나 강을 탐사할 때 필수고.'

이 역시 마찬가지.

바다나 강에도 숨겨진 던전이 많다. 대부분 7Lv 이후 탐사지역이지만 그때 가서 해수의 아가미를 찾다가 피를 토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미리 구해놓는 것도 현명한 판단일 터.

<'대적자의 모루'>는 냉정하게 필요는 없다. 히든 특성인 손재주가 있어서 모루로 생산스킬을 올리기는 빠르겠지만 나는 대장장이가 아니다.

<'붉은기사의 깃발'>, <'적토마> 역시 내게 중요하진 않았다. 저 깃발을 특정 왕국에 갖다주면 기사작위를 얻을 수 있지만 얽메이고, 적토마는 탈것인데 이미 히드라곤의 혼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팔람의 갑옷'>, <'요정여왕의 눈물'>, <'그림자 망토'>······ 이중 가장 끌리는 건 단연코.

'그림자 망토.'

착용자를 그림자에 숨겨주는 망토다.

은신 스킬을 공짜로 주는 셈.

망토가 망가지지 않는 한 영구적이니 혜자가 따로없다.

상위 티어의 탐색도구나 고레벨의 색적 스킬에는 걸리겠지만, 그것도 흔치 않았다.

무엇보다 이 망토는 현실에서도 엄청나게 유용할 것이다.

투명인간이라니. 모두가 어렸을 때 한번쯤은 꿈꿔봤던 로망 아닌가?

<'그림자 망토'를 선택했습니다.>

<한 개의 보상을 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망설임없이 그림자 망토를 택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나는 눈을 빛내며 턱을 쓸었다.

이중에서 뭘 골라야할까.

뭘 골라야 잘 골랐다고 소문이 날까?

*

「······.」

시공간이 무너지고 있다. 모든 게 박살나고 있었다. 이제는 이곳이 현실인지 꿈인지도 헷갈릴 지경이다.

물론, 이 모든 일련의 상황은 드라무트의 세계관에서만 일어난 일이었다.

드라무트는 할 말을 잃은 채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별]에 타죽을 줄 알았건만.

의연하게 걸어가서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다는양 당연하게 [별]을 들었다.

'꿈이다. 현실이 아니야.'

드라무트는 부정했다. 조작된 현실이다. 누군가가 보여주는 환상. 그래, 지금 자신은 환각상태에 빠진 게 분명하다.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나보다. 그것도 아니면 뭘 잘못 먹었던지. 주변에 환각버섯 같은 게 좀 많던가?

드라무트는 신진대사를 빠르게 돌렸다. 독성에 중독된 것이라면 해독하고 현실로 돌아오면 그만이니까.

이제 눈을 감고 뜨면 현실로 돌아올 것이다.

끔뻑!

강하게 눈을 감고, 빠르게 눈을 뜬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악!

별무리가 쏟아진다.

'······ 이런 미친.'

아무래도 아침에 먹은 버섯이 엄청나게 강력한 독버섯인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별]이 저 인간을 선택할 리 없잖은가?

[별]의 주인은 드라무트의 주인과도 같았다.

이전 주인인 '빌헬름'은 강력한 인간이었다. 드라무트가 주인으로 모시기에 부족함 없이 완벽한 초인 말이다.

마주한 순간 격의 차이를 깨달았다. 자신이 천, 만이 있어도 저 인간을 당해내진 못할 것이라고. 그래서 겸허히 인정한 채 빌헬름을 별로 이끌었다.

하지만 저 인간을 보라.

'빌헬름은커녕 바깥의 골렘보다 못한 인간을 내가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고?'

초월성은 눈꼽만큼도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고 자격이 주어졌나?

그것도 아니다.

별을 지닐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은 놈이었다.

그렇긴커녕 바깥의 골렘보다도, 산기슭의 토끼보다도 약한 존재였다.

자신과는 어마어마한 격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하늘과 땅? 아예 다른 차원과 차원 수준이다.

그래서 도전한다 했을 때 실컷 비웃었다. 별에 타버릴 것이라고 확신했으니까.

그런데.

"드라무트, 꿇어라."

「······.」

"아, 맞다. 뱀은 다리가 없었지."

이 빌어먹을 놈은 빌헬름이 주인이 된 직후 했던 요구를 똑같이 하고 있었다.

심지어 다리가 없다는 저 말조차도 똑같았다.

"새로운 주인을 마주하는데 눈이 너무 높은 것 아닌가?"

스으으으으.

젠장. 젠장. 젠장할!

아무리 저항해도 저항할 수가 없다. 드라무트그 지상에 얼굴을 바짝 갖다대었다. 남자의 눈높이에 맞추게끔 몸이 자동으로 반응한 것이다.

거부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족쇄.

저 인간이 오롯이 [별]의 주인이, 자신의 주인이 되었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잘했다."

툭. 툭.

드라무트의 콧잔등을 두드리며 인간이 웃었다.

감히.

감히 옛 왕이라 불리며 별의 수호자인 자신을 마치 애완동물 다루듯이!

"나는 란돌프다. 앞으로 잘 부탁하마, 옛 왕 드라무트여."

「······.」

"흠. 너무 감격스러워서 말도 안 나오나보군."

「······.」

"좋다. 그럼 충정의 의미로 성역탐색부터 시작해보자꾸나."

이건 꿈이다. 지독한 꿈!

드라무트는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드라무트의 악몽은 이제 시작이었다.

*

두근! 두근!

이자벨라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별을 보아서? 아니면 저 성각자가 갑자기 별을 가져서?

모르겠다. 확실한 건 지금 그녀는 초긴장 상태라는 것이었다.

"이자벨라."

"······ 예."

저도 모르게 말을 높였다.

별을 지닌 순간 성각자는 성각자가 아니었다.

별 그 자체였다. 여신말이다.

그녀는 지금 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사막의 대도시 파이살메르의 2인자라고 하더라도, 공주라 불리며 추앙받는다고 하더라도 감히 여신만 할까.

신의 앞에서 그녀는 한없이 작은 존재였다. 티끌 같은, 휘 불면 날아갈.

저 거신을 앞에두고 종처럼 부리며 모든 걸 관장하고 있다. 감히 그런 존재에게 이전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건 불신한 일이다.

"저주를 풀면 뭘 하고 싶지?"

"사막을 벗어나······."

"사막을 벗어난 다음엔?"

"······ 제··· 줄기를 찾고 싶습니다."

"데르시안 가문 말이냐?"

"······ 예."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다. 모든 비밀을 꿰뚫고 있었다.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그녀는 처음부터 사막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대륙 어딘가에 있는 데르시안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이다.

자신이 데르시안 출생이라는 걸 안 것은 여왕에 의해서였다. 여왕은 저주를 걸며 그녀의 비밀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 말도 함께했다.

저주를 풀고 싶다면, 복종해라.

공주의 자리까지 올라오면, 그때 저주를 풀어주겠다.

··· 여왕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비밀을 그는 알고 있다. 아무리 별이 말해준다고 해도 성각자 주제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별의 주인이라면, 별 그 자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축복을 걸어주마. 허나,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면······?"

"1년간 내게 봉사해라. 그 후 너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너의 줄기를 함께 찾아주마."

"아······."

"거짓이라 생각하는가?"

이자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별이 웃었다.

"나는 여왕이 아니다.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1년을 봉사하면 자유를 주겠다는 말.

사실 거짓이어도 좋았다.

저주만 풀 수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사막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 봉사하겠습니다."

이자벨라가 충성을 맹세했다.

*

<<명예의 전당이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메인퀘스트 2 – 클래스 얻기'의 순위가 변경됩니다.>>

<1위, 230점. 란돌프>

<2위, 198점. 그라시아>

<3위, 190점. 민트초코맛있어요>

<4위, 166점. 흑요>

<5위, 160점. 마스터>

······.

<<'클래스 얻기'의 순위권 바깥에 위치합니다.>>

<<'학살'에게 주어진 다음 '메인 퀘스트 2'의 이권을 박탈합니다.>>

<<'비밀 경매장'의 이권이 박탈되었습니다.>>

쿨럭!

불현 듯 떠오른 메시지에 '학살'이 인상을 찌푸렸다.

"씹, 갑자기 뭐야?"

이권 박탈?

메인 퀘스트 2의 순위권에 오른 이들에게만 공개되는 이권. 비밀 경매장에 대한 이권이 박탈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학살'은 랭커지만 유일하게 클래스는 평범했다. 겨우 메인 퀘스트 2의 순위권 끝자락에 매달려 있었는데 느닷없이 역전당했다.

하지만 짜증도 잠시.

"란돌프······ 230점?"

잘못 본 건줄 알고 눈을 비볐다.

메인 퀘스트 1을 220점으로 마무리하더니 이번엔 더 높다.

230점이라니. 대체 무슨 클래스를 얻으면 저런 점수가 가능한거지?

2위인 그라시아도 시크릿 클래스를 두 번이나 넘겨서 '검성'의 슈퍼 클래스를 얻고 198점을 얻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230점?

"이 새끼 진짜 팬텀이냐?"

란돌프. 이놈이 정말 팬텀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판게니아의 모든 걸 꿰뚫고 그라시아 이상의 클래스를 얻을 수 있는 비밀을 알고 있는 놈은 팬텀 뿐이니까.

대원정에서 캐릭터를 삭제당하고 정말 판게니아에 소환된 모양이다.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학살이 이를 갈았다. 아무리 좋은 클래스를 얻었다고 해도 지금 순간은 약할 것이다.

찾아내어, 반드시 죽이리라.

판게니아에서든, 현실에서든. 어디에 있던지 찾아만 내면 된다.

'그 전에 일단 순위부터 회복해야지.'

후흐흡! 겨우 심호흡한 '학살'이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우선 이권부터 회복하는 게 먼저다.

그다지 어려울 건 없었다.

자신의 위에 있는 순위권의 아무나 죽여도 순위는 회복되기 마련이었으므로.

잘 지내지?

"······ 란돌프가 정말 팬텀인가?"

세 명의 남녀가 강남역 카페에 모였다.

똑같이 생긴 우락부락한 남자 두 명과 미모의 여인.

그들은 구석 테이블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사방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대화를 이어나갔다.

"확실해. 메인 퀘스트 1은 몰라도 클래스 부분에서 그라시아보다 높은 점수를 받는 건 게임의 해박한 지식 없이는 불가능하니까."

여인이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최상위 등급의 클래스는 실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압도적인 행운과 그 행운마저 뛰어넘는 지식이 뒷받침해야하는 법.

팬텀이 아니면 저 점수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5년차 고스트 플레이어 팬텀이 드디어 등장했다. 난리가 나겠군."

"우리가 먼저 접선할 수 있을까?"

똑 닮은 두 남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에 여인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어떻게? 몇 년을 찾았는데 결국 못 찾았잖아?"

"그건 그간 팬텀이 진짜 플레이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진짜 플레이어가 됐으니 방법이 있겠지."

"그럼 '피싱'이라도 해볼까? 비밀경매장 열렸을 거 아냐?"

"피싱이라······."

"메인 3도 1등 먹으려면 아이템이 많이 빵빵해야할 텐데, 당연히 경매장을 이용하지 않겠어?"

피싱.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은어다.

비밀 경매장에 질 좋은 아이템을 싸게 올려놓고, 탈리스만의 '쌍둥이' 능력을 부착시켜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다.

'쌍둥이 탈리스만'은 서로가 떨어져있어도 위치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옵션.

이를 모르는 초보자들은 싸다는 이유만으로 덜컥 경매장에서 아이템을 구매한 뒤 추적당해 죽거나 강도를 당했다.

게임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하지만 그건 '학살' 같은 저열한 놈들이나 쓰는 수법 아닌가?"

"팬텀이라면 탈리스만의 옵션도 줄줄 꿰고 있을 거다. 눈치 못챌 리가 없어."

쌍둥이 남자 두 명이 모두 반대의사를 표했다.

피싱은 초보자 사냥을 하는 학살 같은 놈들이나 쓰는 저열한 수법이다.

설혹 쓴다고 해도, 그걸 팬텀이 모를 리 없다.

피싱에 당하는 건 탈리스만의 이름을 모르는 판게니아 1년차 이하 초보자들뿐이니까.

하지만 여인은 쯧쯧 혀를 찼다.

"아직도 팬텀을 몰라? 진짜로 마왕 목따러 간 사람이잖아. 실패하긴 했지만 대원정 일으킬 때 실행력 못 봤냐고?"

많은 이가 그 캐릭터, 빌헬름을 팬텀으로 확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빌헬름은 정말 미친놈이었다.

수많은 방해와 세력들의 와해에도 불구하고 대원정을 일으켰으니까.

유일템을 8개나 지니고도 실패하긴 했지만 빌헬름의 업적은 판게니아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신화 그 자체.

"비밀경매장에 피싱용 아이템이 있으면 좋다구나 하고 살걸? 덤빌테면 덤벼봐라, 들어오면 다 죽인다. 그게 내가 아는 팬텀이니까."

여인이 눈을 빛냈다.

'팬텀 빠순이.'

같은 생각을 하며 두 남자는 동시에 머리를 긁어댔다.

"접선한 뒤엔 어떡하지?"

"당연히 우리 길드로 초청해야지."

"뭣도 없는 우리 길드에 팬텀이 들어올까?"

"노력해야지. 물론 팬텀은 현실에서도 엄청난 사람이 분명하겠지만······ 다른 미친놈들보단 우리가 나아."

판게니아 플레이어 대부분은 미쳐있다.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밥먹듯이 살인을 저지르는 놈들 투성이다.

이전 '붕괴' 현상으로 괴물들이 나타나며 그들중 몇몇은 이미지 세탁에 성공했다. 허나 근본은 어디 가지 않기 마련.

"그나저나 어떤 사람일까? 대기업 C.E.O? 아, 역시 재벌가 아들이려나?"

여인이 눈을 빛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 모습을 보며 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

<<'서브 퀘스트 - 성역 탐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탐사율 100%!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수치입니다!>>

<<최초로 사막의 성역을 퍼펙트 클리어했습니다.>>

<<'텔레포트 북'을 획득했습니다.>>

<<업적 '성역 정복자(최초)'를 획득합니다.>>

<<경험이 축적되어 레벨업했습니다!>>

드라무트와 함께 성역을 돌며 탐사율 100%를 달성한 순간.

서브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보상이 나열됐다.

"허!"

보상을 보곤 감탄을 흘렸다.

텔레포트 북과 최초 달성 업적이라니.

파란색의 두꺼운 책을 들자, 관련된 설명이 떠올랐다.

『텔레포트 북(서사)

탐사를 끝마친 장소로 이동시켜주는 마법의 책.

시전시간 30초, 하루에 한 번 쓸 수 있다.

현재 등록된 웨이포인트 - 사막의 성역』

던전, 혹은 장소의 탐사율이 100%에 이르면 그곳으로 다시 이동할 수 있게끔 해주는 책이다.

지역을 이동할 때 순간이동 시켜주는 워프가 있기는 하지만 제한적이고, 원하는 장소로 정확히 이동할 수 없으며, 비싸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걸 말끔하게 해결해주는 서사급의 아이템이다.

'100만 골드는 받겠군.'

100만 골드. 판게니아에서 대저택을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다.

'비밀경매장에 올리면 수요가 제법 있을지도.'

메인 퀘스트 2의 순위권에 오르며 활성화 된 비밀경매장.

모든 플레이어가 익명으로 거래를 할 수 있는 곳이다.

팔 생각은 없지만 문득 이걸 올리면 얼마나 수요가 있을지 궁금해졌다.

텔레포트 북 역시 20개 이하로 풀린 '초희귀' 아이템이었으니.

'거기다가 업적이라······.'

'업적'을 얻는 건 온갖 시련과 역경을 건너야만 가능한 일이다. 판게니아에서 업적이라 칭송될 정도의 일을 해내야만 획득할 수 있었다.

업적으로 인정되면 명예가 엄청나게 오른다. 명예가 오르면 작위를 얻거나, 특정 명예를 지닌 이에게만 반응하는 네임드 NPC와 우호를 다질 수 있다.

무엇보다.

'레벨 3.'

드디어 레벨 3이다.

메인 퀘스트를 하나 해결할 때마다 레벨이 오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빠른 편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느려서 탈이었다.

'재능에 따라 필요경험치가 늘어나는 시스템이지. 아마 지금 내 필요경험치는 평균의 못해도 열 배는 될 거다.'

보통 메인 퀘스트 2를 해결하는 시점에서 최소 4, 높으면 5가 되어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이제 3이라는 건 필요경험치가 말도 안 되게 높다는 뜻.

너무 많은 재능을 지닌 탓이다.

'그 대신 맥스치가 뚫렸다. 레벨당 10의 수치가 12로 고정됐어. 히든 특성 덕분인 것 같은데······.'

물론, 장점도 있었다.

경험치가 늘어난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상상이상의 장점이.

'상태창.'

상태창을 되뇌자 눈앞에 양피지가 나타났다.

<상태창>

이름 : 란돌프

직업(Class) : 별의 계승자

<능력치>

레벨 : 3

힘 : 36(+5) 체력 : 36(+5) 민첩 : 36(+5)

지능 : 36(+5) 성력 : 36(+5)

······ 레벨업 할때마다 정확히 모든 능력치가 12씩 상승 중이다.

누군가가 봤다면 버그 쓰지 말라고 버럭 소리부터 내질렀을 광경.

평범한 플레이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수치였다.

'모든 재능이 찍혀서 레벨업할 때마다 능력치가 맥스치로 오르고 있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것도 10이 최대일 터.'

능력치는 지닌바 재능과 경험에 따라 레벨업 할 때마다 무작위로 오른다.

레벨업 할 때마다 개별 능력치가 오르는 건 10이 최대치이며, 극의를 봐야만 10의 레벨에서 100의 개별 능력치를 지닐 수 있었다.

그걸 넘으려면 초월해야 하는 거고.

그런데 나는 12씩 오른다. 그것도 모든 능력치가.

'레벨 10을 찍으면 2성급 능력치를 지니게 된다는 말이지.'

별을 두 번 먹어서 초월해야 얻을 수 있는 능력치를 레벨 10에 지닐 수 있다. 개사기도 이런 개사기가 없었다.

하물며 클래스 특성인 '별 보유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5나 올라갔다.

5년간 판게니아를 플레이하면서 이건 나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한 번이면 우연이지만 두 번이면 필연.

'처음보는 히든 특성 중에 이와 관련된 게 있다.'

곰곰이 턱을 쓸었다.

13개의 히든 특성. 이중 나도 처음 보는 건 세 개.

[대식가], [대현자] 그리고 [천상(天上)]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중 하나가 아마도 지금 이 현상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 특성들은 몸으로 부딪히며 차차 알아갈 수밖에.

어쨌든 이번 성역 탐사로 얻을 건 전부 얻었다.

'그림자 망토, 요정여왕의 눈물, 텔레포트 북.'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셋중 하나도 버릴 게 없다.

모두 드랍율 극악을 자랑하는 레이드 보스 아이템.

특히 '요정여왕의 눈물'은 필수 탈리스만이다. 장비에 특수한 옵션을 부여해주는 극히 희귀한 아이템 말이다.

"괴물이다!"

"성역에 거대 해수가 나타났다!"

성역 탐사에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일까.

전사들이 하나, 둘 성역으로 들어와 드라무트를 발견했다.

"대전사와 여왕이 들이닥치기 전에 벗어나야합니다."

이자벨라가 표정을 굳혔다.

전사들의 숫자가 시시각각 늘어나는 중이다. 성역이 봉쇄되기 전에 벗어나야한다.

"드라무트, 날뛰어라."

스아아아아!

내 명령에 드라무트가 움직였다.

내키지 않아도 주인의 명령. 거부권은 없다.

드라무트가 날뛰기 시작하자 천천히 그림자 망토를 들었다.

"같이 쓰지."

"예?"

"추적대가 편성되기 전에 사막을 떠나야한다. 그러려면 들키지 않고 이곳을 빠져나가야해."

"아."

성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조용히 빠져나가려거든 이 수밖에 없다.

나나 이자벨라를 직접 병사들이 목격한다면 일이 더 커질 테니.

이자벨라가 망토 안으로 몸을 들였다.

"더 가까이 붙어라."

"······ 예."

이자벨라의 눈이 살짝 떨렸다.

이후 바짝 붙어 함께 망토를 쓴 채, 조용히 성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사막지대를 벗어나는 워프.

워프가 활성화 될 때까지 반나절가량이 걸린다.

"걱정마라. 저주는 풀렸으니."

저주로 인해 이자벨라는 워프를 이용할 수 없다.

사막지대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별의 축복을 받은 지금이라면, 워프를 이용할 수 있다.

"믿고··· 있습니다."

이자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의 끝, 반대편은 흑색의 낭떨어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너머를 바라보는 이자벨라의 두 눈엔 간절함과 절실함이 뒤섞여있었다.

오직 워프를 통해서만 다음 지역으로 향할 수 있었으므로.

이 부분은 게임과 똑같았다. 지역이 서로 연결되어있지 않은 점이.

어차피 이자벨라도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 지금쯤 여왕도 눈치채고 수색대와 추적대를 보냈을 것이므로.

"워프가 활성화 될 때까지 나는 별과 소통해야한다."

"지켜드리겠습니다."

내 말의 뜻을 알아들은 이자벨라가 경계의 기색을 보였다.

별과의 소통.

로그아웃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안전지대가 아니다. 로그아웃하면 온갖 짐승이나 괴물, 혹은 추적대가 따라붙을 수도 있었다.

내 안전을 오롯이 이자벨라에게 맡긴 셈이다.

요정여왕의 눈물 말고 수호의 부적을 골랐으면 안전지대를 설정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 이상으로 요정여왕의 눈물은 훌륭한 탈리스만이니까.

'일단 희망찬 시작이로군.'

내 앞엔 황금색 카페트를 넘어 로열 로드가 펼쳐져 있었다.

현실과의 연계를 생각해보면 판게니아에서의 성장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앞으로 미래에 더 많은 판게니아의 괴물들이 지구를 침공해온다면.

'······ 마왕. 놈이 강림할 수도 있다는 거다.'

빌헬름으로도 이기지 못한 괴물이 현실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 전율 어린 멸망이.

자리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쉬곤 눈을 감았다.

'로그아웃.'

<<로그아웃 중입니다.>>

<<캐릭터를 안전한 곳에 대기시키십시오.>>

<<Tip : 비밀경매장에서 아이템 구매는 신중히!>>

<<로그아웃이 완료되었습니다.>>

*

쏴아아아!

샤워기의 물을 맞으며 면도를 한다.

샤워를 끝낸 뒤 수건으로 몸을 닦곤 머리를 말렸다.

"후, 시원하다."

이게 얼마만의 샤워와 면도인지.

오랜만의 샤워가 상쾌하기 그지없다. 진즉에 좀 씻고 살걸 그랬다 싶을만큼.

'··· 진짜 폐인처럼 살았네.'

화장실을 나와 방의 꼴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한 달이 넘도록 외부와의 접촉없이 살았다. 제대로 청소도 안 하고 그냥 막 살아왔다.

자이언트 맨티스가 공격해왔을 때 변신해서 나간 걸 외출이라 부르긴 힘들 테니.

폐인. 하지만 언제까지 상심하며 집구석에 박혀있을 순 없는 노릇.

회사도 때려치웠다지만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치우자."

마음 먹고 방을 치우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띠리링~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음과 함께 핸드폰이 한차례 떨렸다.

책상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고 문자내용을 확인한 후,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오빠. 잘 지내지?

··· 내게 비전이 없다며 이별을 통보한, 전 여자친구로부터 온 문자였기 때문이다.

김하나

후룩!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반대편에 앉은 여인을 바라봤다.

김서연.

내 기억속의 긴 생머리는 어느새 단발이 되어있었다.

분홍색 오프숄더 원피스룩을 입고 한껏 치장하자 미모가 물이 올랐다.

남자라면 한 번쯤 돌아볼 만큼 아름다운 여인.

29살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동안이다.

남자친구라면 절로 어깨가 올라가고 자부심이 생기겠으나.

-오빤 좋은 사람이지만······ 미안해. 비전 없는 사람이랑 언제까지 만날 순 없어. 이제 결혼도 생각할 나이니까.

-내 친구들은 다 사짜나 이름난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이랑 만나고 결혼하는데 오빠는······ 하아. 됐어. 그만하자.

헤어질 당시 그녀가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5년의 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연애의 끝.

이별을 통보한 김서연은 그 즉시 내 번호까지 차단했다.

매몰차게 헤어지자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왜 보자고 한 거야?"

"그냥. 지나가는 길에 오빠 집이 보이길래. 잘 지냈어?"

잠실 사는 애가 은평구를 지나갈 일이 뭐가 있을까.

직장도 아무런 연도고 없을 텐데.

'잘 지냈냐고?'

그야 잘 못 지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다시 보면 미친 듯이 떨리고 그리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내 마음은 잔잔한 호숫가의 종이배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란돌프의 영향인가······.'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하지 않아도 란돌프가 되어 행했던 모든 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좀처럼 당황스럽지가 않다.

"그럭저럭. 그러는 넌?"

"나야 뭐, 항상 똑같지. 일, 집, 일, 집. 죽겠어."

다람쥐 쳇바퀴 굴리는 일상이 지겹다는 말.

하지만 일상이 지겨워서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얼추 이유도 짐작이 갔다.

그녀가 헤어진 직후 바꾼 프로필 사진. 웬 멋들어진 사업가와 함께 찍은 그 커플 사진이 지금은 내려가 있더라.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환승이별 해놓고선 문제가 생기니까 다시 나를 만나러 온 거다.

이걸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그 정도로 내가 호구처럼 보이는 건지.

'호구가 맞긴 했지.'

간이건 쓸개건 전부 떼어다 줄 것처럼 해온 연애였다.

그 정도로 좋았으니까 그렇게 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무 사이도 아닌 지금 같은 과거를 반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슨 말을 하나 보자는 심정으로 침묵하자 김서연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그 일 있고 난리가 났잖아. 가장 먼저 오빠가 걱정되던 거 있지?"

"그 일?"

"'디맨션 워' 말이야. 타차원의 괴물들이 지구를 습격한 날! 난 마블이라도 촬영하는 줄 알았다니깐?"

자이언트 맨티스가 나타난 날을 말하는 것이다.

판게니아의 괴물들이 현실에 나타나고, 판게니아에 소환된 사람들이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해 현실에서 괴물들을 퇴치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그들을 '디맨션 워리어'라고 부르며 칭송하기 시작했다.

타차원에서 온 전사들.

그들이 현인류에 빙의해 괴물을 퇴치하는 것이라나.

디맨션 워리어들은 앞으로 들이닥칠 위험을 미리 경고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라섰다.

의외로 판게니아를 직접 언급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하긴. 게임이 현실이 되는 것보단 다른 차원의 공격이 더 그럴싸하긴 해.'

이미 존재한 게임이 현실이 되는 것보단 미지로부터 흘러들어온 괴물이 더 두렵기 마련이었다.

"흥미가 없어 보이네?"

"이제 일어나도 되냐?"

"··· 어?"

여유롭던 김서연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린다.

"얼굴 봤으면 됐잖아. 우리가 가만히 잡담이나 나눌 사이도 아니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의 나였다면 다시 한번 붙잡으며 만나보자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5년도 갑과 을이 명확하게 갈리던 연애였으니까. 미련이 남은 채로 끝낼 수는 없다며 애걸복걸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해야 할 일이 구만리였다.

남에게 끌려다닐 시간 따윈 없었다.

"······ 내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래?"

"그런 건 아닌데. 지금 남자친구는 네가 나 만나고 있는 줄 아냐?"

프로필 사진만 내리면 내가 모를 줄 알았을까?

김서연 계정의 sns 사진은 아직 안 내려간 채였다.

즉, 어장이다.

나와 그 남자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다.

아니면 남자친구와 싸운 뒤 알량한 자존감의 회복을 위해 날 만나는 것이든지.

어느 경우든 최악이었다.

직설적인 화법에 김서연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내가 대놓고 말할지는 몰랐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아! 진짜! 그만 따라오라고요!"

"하나씨.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요?"

그 순간.

카페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소리를 내지르며 도망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중년의 남성이 바짝 뒤쫓고 있었다.

"이거 엄연한 스토킹이에요.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요."

"제발! 제발 나 한 번 만나봐요."

"진짜 싫거든요!"

카페의 모든 사람이 두 남녀에게 주목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남들과는 다른 원인에서였다.

어디서 한 번 본 것같이 익숙한 얼굴.

어디서 봤더라?

순간 남자의, 스토커의 표정이 백팔십도 달라졌다. 애처롭게 부탁하던 스토커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붉히기 시작한 것이다.

"씨발년아, 이게 오냐오냐하니까······!"

"아!"

스토커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여자가 비명을 내지르자 스토커가 이죽거렸다.

"그러게 적당히 받아주면 좋잖아?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분노로 이성을 상실한 모습.

스토커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를 내질렀다.

"뭘 봐, 이 새끼들아! 구경거리 났어?"

눈을 마주친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돌렸다.

"오빠. 괜히 나서지 마. 요즘 안 그래도 뒤숭숭한데······ 경찰 오겠지."

김서연의 말대로였다.

누군가는 신고했을 것이다. 몇 분만 지나면 경찰이 와서 저 스토커를 제압할 테니 괜히 나서서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순간 머리채가 잡힌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살려달라고 말하는 듯한 간절한 눈빛.

"오빠?"

······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여자가 누군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자이언트 맨티스가 출몰할 당시 아이를 구하던 여자.

"뭐야, 넌?"

"그만하지."

"새파랗게 어린놈이, 뭐? 그만하지? 이거 안 놔?"

어깨를 부여잡고 말하자 스토커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미친놈처럼 두 눈을 번뜩이며 살기를 흩뿌려댄다.

"웃어?"

하지만 그 살기조차도 지금의 내겐 귀여울 따름이었다.

최근 들어 몇 번이나 사선을 넘으며 전투를 벌였다.

검과 창이 난무하며 시체가 즐비하는 곳에서 한 치의 두려움 없이 임하던 게 나다.

불가해한 난이도에서 생존했고, 더 나아가 병사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다.

무기도 없이 눈빛만 번뜩이는 스토커를 상대로 무서울 리가 없지 않은가.

꽈아아악!

"아악!"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스토커가 비명을 내질렀다.

지금이라면 이 어깨를 박살 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조각난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만! 그만! 악!"

스토커가 온몸을 비틀었다.

'이 새끼 무슨 아구 힘이······!'

스토커 남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생긴 건 왜소하기 그지없는데 한 번 잡히자 꿈쩍을 할 수가 없었다.

근육이 파열되고 뼈가 가루가 날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이건 정말 인간의 힘이 아니다.

"그만한다고?"

"그, 그래! 그만!"

작게 혀를 찼다. 그러게 한 번 말할때 들으면 좀 좋아?

"커억!"

툭, 놓아주자 스토커가 중심을 잃고 볼품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스토커를 바라보던 여인이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괜찮으세요?"

"예······ 아! 뒤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맥가이버 칼을 펼친 남자가 날을 세워 달려들고 있었다.

"죽어!"

허나, 이미 알고 있었다.

살짝 몸을 틀어 달려오는 스토커의 발을 걸었다.

쿵!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찧은 스토커가 이내 미동도 없이 기절해버렸다.

*

상황이 종료되고 5분가량이 더 지나서야 경찰이 도착했다.

"서까지 같이 동행해주셔야겠습니다."

대강 상황을 살핀 경찰이 연행하려고 하자, 김하나가 나섰다.

"이분은 순수하게 도움만 주신 분이거든요. 저 남자가 스토킹한다고 신고한 사람이 저예요."

"그래도 폭행 사건이 벌어졌으니 일단 서까지 같이 가셔야 합니다."

"폭행 사건이라뇨? 상대는 칼까지 들었는데 그럼 구경만 했어야 된다는 소린가요?"

"원칙상 어쩔 수 없습니다."

"······ 저 CK방송국 기자 김하나입니다. 실례지만 관등성명이 어떻게 되시죠?"

명함을 건네자 그제야 경찰들의 눈빛이 귀찮아졌다는 듯이 변했다.

CK라면 나름 규모있는 메이저 방송국이다.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의 기자가 괜히 기사 한 줄 잘못 내면 밥그릇의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참고인 자격으로······."

"참고인 자격으로 갔다가 잘못 엮이면요? 됐어요, 당사자인 제가 직접 가서 해결할 테니 괜한 사람 붙들지 마시죠."

스토커는 이름있는 성형외과 원장이다.

비싼 변호사를 쓰면 별거 아닌 일도 별거로 만들 수 있는 세상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도움을 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

경찰들은 당찬 김하나의 행동에 눈을 깜빡거렸다.

'생긴 건 기자가 아니라 아나운서라고 해도 믿겠는데······.'

'성격이 대쪽이네.'

보통 이런 일을 당하면 두려워서 울거나 몸을 떨어야 정상인데 김하나는 도리어 처음보는 남자를 두둔해주고 있었다.

경찰들로서도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이윽고 김하나를 둘러싼 주변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 그 사람 아니야?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맞아. 괴물한테서 아이 구해준 사람? TV에도 나온 거 같은데."

"표창장도 받지 않았어?"

"김하나. 이름도 똑같잖아. 맞네!"

얼마 전 유튜브와 TV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디맨션 워.

타차원의 괴물들이 세계 곳곳을 공격해왔을 때 뜬 건 디맨션 워리어들만이 아니다.

전사가 아님에도 전사처럼 행동한 의인들.

김하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어린아이를 구하고자 대신 괴물에게 잡혀갔으며, 그 이후에도 아이와 아이의 엄마를 구하고자 현장에 달려간 인물.

그 영상은 순식간에 오백만뷰를 달성하며 김하나는 CK에 정식채용 됐고, 의로운 시민 표창장도 수여받았다.

"··· 알겠습니다. 신고자께서 직접 가시죠."

이런 인물을 상대로 문제가 생기면 더 크게 비약된다.

경찰들도 김하나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김하나는 서로 가기 전에 명함 한 장을 더 꺼냈다.

"오늘 정말로 감사드려요. 여기 제 명함이에요."

"괜찮습니다."

"······ 아, 혹시 같이 계신 분이 여자친구분?"

함께 있던 김서연이 여자친구냐는 말.

미소를 지으며 즉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제가 명함이 따로 없어서요."

"그럼 번호 적어주실래요?"

가방에서 팬과 종이 한 장을 꺼내든 김하나가 그걸 내게 넘겼다.

나는 거침없이 종이에 번호를 적어나갔다.

란돌프······ 가 아니라, 박현명이라는 이름도 함께.

"박현명? 이름 좋네요. 저는 김하나예요."

"예. 명함 봐서 압니다."

"연락드릴게요. 내일 시간 되면 커피 한잔해요. 물론, 식사도 괜찮고요. 제가 살게요."

"마다 안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꾸벅, 다시 인사한 김하나가 스토커를 연행하던 경찰들과 함께 카페를 나섰다.

······ 폭풍 같은 여자였다.

"와, 대박. 실물이 백 배는 낫다."

"기자 말고 연예인 해도 되겠는데?"

"설윤 느낌도 좀 나고. 스토커가 붙을 만하네."

사람들의 감탄 어린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

그러자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얼굴을 한 김서연이,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의 도시 아르카나

카페에 혼자 앉은 김서연의 얼굴이 짜증으로 붉게 물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처음부터 그랬다.

같이 마주하고 앉았지만 영혼이 다른데에 가 있는 느낌.

온전하게 자신에게만 집중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의 박현명은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느낌이었다.

'머리도 잘랐는데.'

머리도 장발에서 단발로 잘랐다. 어울리는 옷을 찾으려고 두 시간을 고민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언급도 전혀 하지 않았다.

파격적인 대변신. 못 알아봤을 리가 없었다.

-흥미가 없어보이네?

-이제 일어나도 되냐?

게다가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단순한 선언이 아니다. 일어나는 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나가고자 자리를 박찼다.

예전의 박현명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태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도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헤어진 적이 없던 것도 아니잖아?'

5년간 연애하며 헤어진 횟수가 다섯 번은 넘는다. 하지만 헤어지고 나서도 항상 자신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달랐다.

먼 거리를 달려 직접 보러 왔음에도 냉정하기 짝이 없는 태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나를 앞에 두고 그럴 수가 있지?'

그래. 앞에 것들은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헤어질 때 심한 말을 한 건 사실이니까.

가장 화가 나는 점은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렸다는 것이다.

-전혀,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자신을 앞에 둔 채 누구보다 강하게 부정했다.

전혀. 전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번호를 적어주고, 명함을 받아갔다. 데이트 약속마저 잡았다. 보란 듯이, 자신의 앞에서.

"박현명 주제에······."

차라리 김하나가 못생겼다면 전혀 신경도 안 썼을 것이다. 콧방구나 뀌며 둘이 잘해보라고 응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하나는 유튜브에서 '의신'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의신. 의로운 여신이란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만한 여자가 박현명을 뭐가 아쉬워서 만나겠는가. 커피 한 잔 하고 헤어질 사이가 확실했다.

무엇하나 잘난 게 없는 박현명.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생기거나 키가 큰 것도 아니다.

몸이 좋기를 하나, 유머가 넘쳐서 재밌기를 하나?

일 할 때와 데이트 할 때를 제외하면 항상 집에서 게임만 하는 히키코모리를 누가 좋다고 만나겠나. 자신이나 되니까 만나준 거지.

드르르르!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진우 오빠'라고 저장된 이름이 화면에 떠올랐다.

이름을 보며 김서연이 미소를 지었다.

박현명과는 180도 대비되는 남자. 그야말로 모든 게 정반대였다.

직장인은 아니지만 크게 사업을 하는 덕분에 돈도 많고, 잘생긴데다 키도 크다. 몸도 좋고 유머도 넘치고 활동적이라 뭐 하나 흠잡을 게 없었다.

단 한가지를 제외하면.

"여보세요? 진우오빠? 뭐? 용서해달라고? 또 나한테 숨기는 비밀 없어?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도 숨겼는데 내가 오빠를 어떻게 믿어? 완전 다른 사람 같아서 나 너무 무서웠단 말이야. 이제 안 그런다고? 흐음, 알겠어. 마지막이야. 한 번만 더 그러면 진짜 끝이야, 끝. 그러니까 나 데리러 와. 여기 주소가······."

*

"요, 우리 방송국 최고존엄 김원. 또 사고쳤다며?"

"··· 김하나입니다. 제발 김원이라 부르지 마세요."

한숨을 푹 쉰 김하나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느라 진이 다 빠져버렸다.

한 번 갔으면 됐지 추가로 물어볼 게 있다며 다음날 출근시간에 한 번 더 호출한 것이다.

김하나의 옆자리에 앉은 서정아가 의자를 옆으로 돌리며 물었다.

"이번에는 누군데?"

"성형외과 병원원장이요."

"미인들 많이 볼텐데 왜 그런 짓을 했대?"

"모르죠, 저는."

"하기야. 우리 의신 김원이 자연미인이기는 해."

"말 걸지 마요. 죽을 거 같으니까."

정말 죽을 맛이었다.

정규직으로 채용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냈던 것도 잠시.

'그 사건'이 있은 이후 방송국의 일은 열 배로 늘었다.

"부장이 출장가면서 너한테 이거 맡기던데?"

"뭐요? 아······."

파일첩을 받은 김하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라시아' 이사람 미국인 아니었어요? 이걸 왜 저한테?"

그라시아라 불리는 인물에 관한 정보가 담긴 파일첩이었다.

등장하자마자 산을 가르며 괴물 열 마리를 동시에 날려버린 슈퍼- 히어로라던가.

영상을 보면 가관이긴 하다. 진짜 영화가 아닌가 싶을만큼. 수천, 수만 개의 검의 형상을 한 섬광을 하나로 합쳐 쏘아내는 장면이 특히 압권이었다.

총과 폭탄으로도 잡지 못한 괴물을 일격에.

그런 사람이 갑자기 왜 한국에?

"그 사람이 널 만나보고싶다고 했대."

"절요? 왜요?"

"한눈에 반했나보지."

"장난치지 말고요."

"몰라. 하여간 그거 때문에 난리도 아니야. 미국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라, 웬만한 국빈급 의전 이상일 거 같다던데?"

"······ 별로 안 하고 싶은데요."

이런 거물의 인터뷰를 이제 막 정규채용된 자신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다른 디맨션 워리어들도 그라시아는 존중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끝판왕이 갑자기 방한을 해서 자신을 보겠다니.

"그럼 그 사람은 어때? 네 남자친구."

서정아가 턱을 끌어 김하나의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가리켰다.

사진 속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정확히는, 남자의 등이 있었다.

다부진 근육질의 몸매를 한 전사. 순식간에 괴물을 제압하고 사라진 남자의 뒷모습을 김하나가 직접 찍은 것이다.

김하나가 입을 쭉 내민 채 서정아에게 핀잔했다.

"남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부적 같은 거지."

그 일이 있은 이후 모든 일이 잘 풀렸다. 김하나에게 저 남자는 정말 행운의 부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름도, 사는 곳도, 아무 것도 모르고 남은 건 저 사진 한 장 뿐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런 것치곤 매일 물고 빨고 장난 아니던데?"

"아니, 먼지가 쌓여서 닦은 걸 그렇게 표현해요?"

서정아가 피식 웃었다.

김하나는 타격감이 있는 후배였다.

"저녁에 연예부 기자들이랑 술한잔 하기로 했는데, 콜?"

"약속있어요."

"남자?"

"예."

"아이고. 오늘 남기자들 술이 달겠네, 달겠어."

서정아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궁금하긴 했다. 그간 무수히 많은 러브콜을 받았음에도 단 한 번도 수락하지 않던 천하의 김하나가 갑자기 남자와 저녁약속을?

그러거나 말거나 김하나는 일에 집중했다.

일에 치여 죽기 싫으면, 정신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치워놔야만 했다.

*

"배신자를 죽여라!"

"간악한 뱀공주를 죽여!"

눈을 뜨자, 피칠갑을 한 이자벨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널린 시체들. 모두 파이살메르의 병사들이다.

전투는 아직 한창이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워프는 활성화 되어있었다.

넘어가려면 진즉에 넘어갈 수 있었음에도 이자벨라가 나와의 신뢰를 지킨 것이다.

'여왕의 친위대들.'

대전사들이 포함된 추적대다.

조금만 늦었으면 황천길로 갈뻔했다.

"'별과의 소통'은 끝나셨습니까?"

"그래."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여왕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기야 여왕이 직접 나섰다면 이자벨라도 길게 버티지는 못했을 테니.

천운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운에 의지할 순 없는 노릇.

"내가 길을 뚫겠다."

워프로 향하는 길목을 수십의 전사들이 막고 있었다.

이자벨라 역시 지칠대로 지친 상태.

[Lv.6]

대전사들의 레벨은 무려 6에 육박했다.

이자벨라가 정상적인 상태라면 그들을 죽이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녀는 이미 반나절가량을 이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누군가를 지키면서 기약없이 버텨내는 일을 그녀는 해낸 것이다.

길까지 뚫어달라고 하기엔 염치가 없으리라.

'별 할퀴기.'

별의 계승자가 되며 얻은 주력 스킬.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그 스킬이 마침내 발동했다.

<<모든 '성력'을 태웁니다.>>

<<지속시간 41초>>

무수히 많은 별빛이 내 주먹에 스며들었다. 이후 마치 별빛으로 만든 클로를 착용한 것처럼 뾰족한 칼의 날이 주먹 위에 돋아났다.

한순간 울버린이 된 기분이다.

별 할퀴기는 그 이름처럼 별조차도 할퀴어낼 수 있는 광역 스킬이었다. 물론 이대로 사용해도 되기는 하지만 그러기엔 지속시간이 너무 짧았다.

"간악한 배신자와 불신한 이단자를 죽여라!"

"위대하신 여왕폐하의 뜻이다!"

간악한 배신자는 이자벨라고, 불신한 이단자는 아무래도 나를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워프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있는 전사들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그 순간.

꽈아아아아아아앙!

후아아아아!

고막이 아플 정도의 폭발이 일더니, 불기둥이 세워졌다. 허나 그 불기둥은 진짜 불이 아니라 별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별빛 내의 대전사들은 모조리 증발한 상태.

"······."

"가지."

할 말을 잃고 별기둥을 바라보던 이자벨라에게 말했다.

바로 쏘아내면 41초간 지속되는 별의 기둥이다.

'별 할퀴기'는 모든 성력을 한꺼번에 태워 지속시간 동안 너른 영역에 침입을 막아내고 멸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절대영역이다.

'상상 이상이군.'

솔직히 놀랐다.

단발성이긴 하지만 이제 레벨 1인 스킬이 이만한 효과라.

10을 찍고 스킬이 진화를 이루면 얼마나 더 대단해질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따라와라. 축복을 받은 자는 이 '별의 기둥'을 넘을 수 있다."

내가 먼저 넘어가자, 이자벨라가 침을 꿀꺽 삼키며 별의 기둥을 넘었다.

하지만 다른 전사들은 별의 기둥을 넘지 못한채 뼈째로 증발해버렸다.

열이 넘는 전사들이 죽고서야 그들은 마침내 추격을 포기했다.

이제 남은 건 워프를 넘는 일뿐.

활성화 된 워프를 바라보는 이자벨라의 눈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자벨라. 지금이라도 돌아가겠다면 말리진 않으마."

오랫동안 꿈꿔온 자유.

워프를 넘어 다른 대륙으로 향하길 그녀는 항상 기도하고 기원했다.

허나 막상 평생을 지낸 사막을 벗어나려하자 오만 감정이 교차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 아닙니다."

"그렇다면, 해방의 순간이다. 기뻐하도록."

"예."

이자벨라는 자유를 택했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

"'워프'가 활성화됐습니다."

"'스타팅 포인트'의 워프는 무료입니다."

"'이자벨라'의 '한계저주'가 '별의 축복'으로 무효화된 상태입니다."

"'칼츠만 사막'에서 워프 가능한 연결도시는 12곳입니다."

"'아르카나'를 선택했습니다."

"워프를 시작합니다."

*

"'칼츠만 사막'을 벗어나 '중앙대륙'으로 워프되었습니다."

"황금의 도시 '아르카나'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Tip : '아르카나'는 극에 달한 물질만능주의의 도시입니다. 대부호 수준의 골드가 없다면 발도 들이지 않기를 권합니다."

워프를 넘어서자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황금빛 터번을 쓰고, 황금으로 이루어진 마차를 탄 채 이동중인 사람들이 보인다.

칼츠만 사막과 이어진 다음 워프장소는 대도시 아르카나였다.

'스타팅 포인트와 이어진 대도시 중 하나지.'

스타팅 포인트는 모두 여러 도시와 이어져있다.

이곳 아르카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여왕은 절대로 따라오지 못할 장소이기도 하고.'

여왕의 추적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여왕이 직접 이자벨라와 나를 죽이려고 쫓아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 아르카나는 사막도시 파이살메르와도 무척이나 사이가 나쁜 동네였다.

여왕과 친위대가 들어섰다간 그대로 전쟁이 발발할만큼.

그런데도 워프가 이어져있다는 게 아이러니할 따름이었다.

"도시가······ 굉장히 화려하군요."

이자벨라가 넋을 잃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게 솟은 건물과 주변 양식에 압도된 모습이다.

사막 외의 도시는 처음 가볼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르카나는 골드면 전부 되는 곳이다."

"골드라면 챙겨온 게 있습니다."

이자벨라가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얼추 무게로 보건대 300골드 정도.

중앙대륙으로 넘어갈 생각에 긁어모은 골드였다.

"300골드면 하룻밤 먹고 자면 끝나겠군."

물론 이것도 초보자에겐 상당한 돈이지만, 이곳 아르카나에선 입에 풀칠조차 못할 금액이었다.

이자벨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사막에서 300골드면 노예 열 명은 살 수 있습니다만······."

그거야 칼츠만 사막이 스타팅 포인트니까.

애당초 사막은 물물교환이 주를 이룬다. 골드로 살 수 있는 노예는 사냥용 노예밖에 없다.

"저길 봐라."

손을 뻗어 빵집 앞에 있는 간판을 가리켰다.

"빵······ 하나가 50골드?"

"왕에게 진상되는 최고급 밀로 만들기 때문이지. 그러니 50골드도 싼 거라고 저렇게 홍보하고 있는 게다."

"제 단검을 팔면 됩니다."

호박이 박힌 단검. 그야 팔면 수만 골드는 받을 것이다.

자신의 애검까지 팔겠다는 태도는 훌륭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없다. 300골드로 불리면 되니까."

"··· 불린다니요? 이 돈으로 장사라도 하겠다는 말입니까?"

"도박장."

"······ 예?"

꿈뻑꿈뻑. 이자벨라가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나는 재차 말했다.

"도박장으로 간다."

"그, 그게 무슨······?"

이자벨라가 경악하며 쳐다봤다.

돈을 불리는 방법이 도박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무엇보다 독실함의 대명사인 성각자가 도박을?

딱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황금의 은총].

히든 특성 13개 중 하나!

"나는 꽤 운이 좋은 편이니 걱정하지 말도록."

"······."

걱정돼 죽겠다는 눈빛으로 이자벨라가 내게 시선을 던졌다.

잭팟!

카지노 허드슨(casino Hudson).

황금도시 아르카나의 다른 이름은 환락의 도시다.

그리고 이곳은 아르카나의 지주인 허드슨이 운영하는 3대 카지노 중 하나.

그 웅장함과 화려함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으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카지노 허드슨의 장점은 '외부도시인'도 별다른 조치없이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원을 확인하지 않으며, 입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돈'이다.

또한 아르카나 유흥의 정점에 올라있는 곳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정체를 숨긴 채 허드슨을 방문하곤 한다.

"이 집문서가 8천 골드밖에 안 된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지금도 만 오천 골드에는 거래되고 있는데!"

입장객들을 분별하는 입구의 데스크.

한 남자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데스크 안의 작은 안경을 쓴 이가 고개를 저었다.

"5지구의 그 주변 실제 거래가가 7천 8백골드더군요. 8천 골드도 많이 쳐준 것 같습니다만, 2천 골드를 마저 채우지 않으면 입장이 어렵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경비."

순간 주변의 우락부락한 경비들이 순식간에 남자를 제압했다.

"뭐, 뭐야! 난 손님이라고!"

"입장 보증금 1만 골드가 없으면 손님이 아닙니다."

"커헉!"

경비가 남자를 들고, 그대로 하늘로 던져버리자 수미터를 날아간 남자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 고꾸라졌다.

그 모습을 보며 주변인들이 입을 가린채 비웃어보였다.

"쯧쯧, 거지 새끼가 어딜 넘으려고."

"아이, 꼴사나워라."

"5지구면 생쥐굴 아니야? 어디서 썩은내가 진동하는 거 같은데!"

아름다운 드레스를, 멋들어진 턱시도나 양복을, 혹은 대부호의 상징인 황금빛 터번을 쓴 도시의 부자들.

그들은 행색이 초라한 남자가 입장하려하자 눈살부터 찌푸렸다.

조롱하고 조소했다.

이곳은 아르카나. 오직 '돈'만이 최우선인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시선은 저들이 아닌 경비들에게 가 있었다.

경비는 평범한 경비가 아니다.

[Lv. 6]

대전사, 혹은 기사 급의 강자들.

설정상 실제로 모두 아르카나 시의 정규기사들이다.

명예로운 기사가 고작 카지노 경비나 서고 있다는 게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게임은 '대도시'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왕정이다.

그래서 도시마다 규율과 관습이 전부 달랐다.

아르카나에는 아르카나의 법도가 따로 있다는 뜻이다.

"환영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날아간 남자의 다음 순번이 나라는 것이었다.

나와 이자벨라 역시 저 남자처럼 경비들에 의해 날아갈 수도 있었다.

"카지노에 입장하려면 보증금 1만골드가 필요합니다. 당연히 담보도 받습니다."

유리벽 속 관리자가 사람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1만골드의 보증금. 하지만 갖고 있는 현금은 300골드가 채 되지 않았다.

'씻고, 옷도 사고 하는데 50골드 썼다.'

정확히 250골드 남았다.

피가 묻은 채로 카지노에 입장할 순 없기 때문이다.

현금은 턱없이 부족하고, 남은 건 담보다.

'입장할 때의 보증금으로도 레벨이 나뉘지.'

담보로 줄 건 많았다.

이자벨라의 말마따나 호박단검을 건네도 최소 3만 골드는 될 거다.

관리자는 기본적으로 모든 물건의 '가치'를 확인하는 고등급의 스킬을 지니고 있었다.

1만 골드, 혹은 그에 상응하는 담보가 있어야 겨우 입장이 가능하며, 담보금에 따라서도 레벨이 나뉘곤 한다.

자고로 담보는 게임머니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저 입장객의 '레벨'을 분별하는 척도에 지나지 않았다. 엄청난 금액의 현물을 거리낌없이 맡길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다.

"손님? 없으십니까?"

경비들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없으면 빨리 비켜!"

"줄 선 거 안보여? 좀 들어가자고!"

"아오, 거지새끼들. 시간만 엄청 끄네."

줄을 선 이들이 버럭 화를 냈다.

연속으로 두 명이 시간을 끌어대니 일초라도 빨리 입장해 슬롯을 돌리고픈 자들이 아우성을 지르는 것이다.

관리자의 눈이 위아래를 훑었다.

'시장에서 13골드에 산 하급 소재의 평상복. 그 외에 돈 될만한 건 보이지 않는군. 같이 온 여자도 제법 반반하긴 하지만, 별 게 없어.'

관리자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자격미달의 손님이 많은 것 같았다.

카지노가 아닌 시장에서 돗자리 펴고 게임을 해야할 것 같은 사람들 말이다.

자격미달의 손님이 많이 찾으면 카지노의 평판도 내려간다. 3대 카지노 중 허드슨이 그나마 자유로운 분위기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래서야.

'본떼를 보여야겠구나.'

앞사람이 날아가는 걸 봤으면서도 남은 건 악질이다.

더 크게 벌을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외진 곳에서 죽기 직전까지 맞으면 다시는 발들이지 않겠지.

"경비······."

"이걸로 하지."

경비들이 덥치려는 순간 툭, 남자가 품에서 물건 하나를 내밀었다.

물건을 확인한 관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뭔지 감이 안 잡힌다. 이에 '감정' 스킬을 발동시킨 순간.

관리자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 VIP실로 모시겠습니다. 카지노 허드슨에 오신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관리자도, 덥치려던 경비들도 공손하게 양손을 모았다.

"귀빈전용 입구로 안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비켜, 비켜!"

태도가 변한 경비들의 일사분란한 움직임.

길을 막는 사람들을 재치며 또 다른 길을 만들어낸다.

흡사 모세의 기적이 펼쳐진 것만 같은 광경.

"VIP?"

"뭐, 뭐야······?"

더불어 줄을 서던 사람들도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일반 입구가 아닌 귀빈전용 입구를 통해 우리가 올라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

카지노의 최상층.

귀빈들만 모아둔 장소에 올라서며 이자벨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 뭘 맡기신 겁니까?"

"요정여왕의 눈물. 탈리스만이다."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답해주었다.

그러자 이자벨라의 의문은 더 커졌다.

"탈리스만이라면 무기를 제련해주는 기물 아닙니까? 하지만 아무리 좋은 탈리스만이라도 하나로 이만한 대우를 받는 건······."

"불가능하지."

아무리 좋은 탈리스만이라도 100만 골드 이상의 값어치를 지니기는 어렵다.

단순히 '가치'만을 따져보면 '텔레포트 북'이 가격은 더 나갈 것이다. 수요가 많으니까.

그러나 이곳은 카지노 허드슨이었다.

'허드슨. 플레이어가 확실한 놈이지.'

게이머들이 게임 속으로 흘러들어가 NPC가 됐다. 설마 진짜 사람인 줄 몰랐던 나는 그들의 방해를 '게임의 자유도'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NPC가 아니었다면, 이곳의 주인인 허드슨은 99% 확률로 현실과 동기화된 사람이다.

'허드슨은 탈리스만을 모으고 있다. 당연히 희귀한 탈리스만이라면 눈독들이겠지.'

허드슨은 대상인이다.

지닌바 전투력도, 재능도 형편없는 그는 탈리스만으로 강해질 궁리를 하고 있었다.

탈리스만 중에는 무기의 착용제한을 없애주거나, 재능이 없어도 재능이 생기게끔 하는 기능이 담겨있는 탓이다.

당연히 '요정여왕의 눈물'은 그 조건에 부합한다.

본래라면 준레이드 보스몬스터인 '요정여왕의 기사'를 만 마리쯤 죽여야 하나 나올까 말까한 물건이니까.

더불어······ 허드슨이 가장 원하고 있는 탈리스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나마 만만한 놈. 변수 차단에 허드슨만한 놈은 없다.'

나는 궁금했다. NPC가 된 그들의 이야기가. 허드슨이 갖고 있는 정보가.

그리고 내가 확신하고 있는 자들 중 허드슨이 가장 접근하기 쉬웠다.

하지만, 놈과 접선하기 전에 우선.

"룰렛부터 돌려봐야겠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