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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조슈아가 채비를 마치고는 일 층으로 내려왔다.

생존자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아침은 바깥을 탐색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었다.

"네 녀석은 밖으로 나가면 그날로 제삿날이야."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어제 자신에게 당했던 로덴이란 이름의 학생이었다.

"연구소로 갈 생각이지? 눈독 들이지 마."

"어째서?"

"넌 보이는 순간 내가 바로 없애 버릴 테니까."

그가 흥분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봤다.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협박이라고 하는 걸까?

다리를 들어 올려서는 그의 종아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로덴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크아악! 내 다리! 이 새끼가."

로덴이 품속에 든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휘두르려고 자세를 잡았을 때.

"이봐."

어김없이 기사가 막아섰다.

아무리 한가로운 시간이라도 최소 두 명의 기사는 홀을 지켰다.

그들은 타워 안에서 소동이 일어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보호받던 이들에게서 신뢰를 잃기 때문이다.

"너 어젯밤에도 난리 친 녀석 아니냐? 이름이 로덴이었던가. 아주 상습범이구만."

"아, 잠시만요! 저 새끼가 먼저 때렸다고요."

"그럼 서로 주먹으로 해결할 것이지, 치사하게 무기를 꺼내?"

기사가 눈짓으로 그가 들고 있던 단검을 가리켰다.

로덴은 재빨리 그것을 뒤로 감추었다.

"네가 누굴 찌르든, 죽이든 관심 없어. 단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라는 말이다. 우린 사람들을 지켜 주는 대가로 상납을 받고 있다. 그런데 타워 안에서 살인이 일어난다? 치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죄다 떠나겠지? 그러면 상납도 사라질 테고."

"...예."

"만약 우리가 하는 일에 고춧가루를 뿌린다면 널 죽일 거다. 아주 고통스럽게 죽일 거야. 그러니까 신중하게 행동해라. 이건 너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기사가 얘기를 하던 중에 자신도 한번 바라봤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으면 가라."

로덴은 다리를 얻어맞고도 또다시 저항 한번 못 하고 사라졌다.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기사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경고하듯이 자신에게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볼일 보거라."

기사들의 경계심이 높아졌다.

다른 누군가가 또다시 시비를 걸어온다면 그때는 무시하는 게 좋겠지.

정문으로 향했다.

그곳을 지키던 경비병과 가볍게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타니아가 먼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일찍 나왔구나."

그녀가 기숙사에서 구해 주었던 지팡이를 꾹 움켜쥐어 보였다.

"연습했어요. 조금 더 큰 불을 조금 더 정확하게 쏠 수 있도록."

그녀가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과가 있었음을 자랑하는 듯한 태도였다.

더하여 자신에게 칭찬을 바라는 모습처럼 다가왔다.

"연습한 결과가 실전에도 나타날 수 있길 기대하마."

"노력할게요!"

"루실 경에게 허락은 받은 거냐?"

"언니는 처음엔 반대했어요. 그런데 선배도 같이 간다고 말했더니 고민 끝에 허락해 줬어요. 그 녀석이라면 승산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을 거라고 덧붙이면서 말이죠."

루실의 성격은 제 가족을 떨어뜨리려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집을 꺾고 보내 주었다는 의미는 간단했다.

그녀에게 인정받았다.

조금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가진 기대감이 자신의 실력 이상일 수도 있었으니까.

"날 너무 믿지 마라. 내가 언제나 정답은 아니니까."

"저도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의미이죠?"

"그래."

뒤이어 탈레온과 가비누가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연구소로 향하는 것을 제안하자 냉큼 수락했다.

그럼에도 위험성을 한 번 더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빨리 온 것뿐이다. 그럼 떠나기 전에 한 번만 더 확인하마. 지금 떠나는 여정은 기숙사를 지키던 것보다 몇 배는 위험하다. 탈레온은 잘 알 거다. 황무지를 떠돌아다니는 것이 생존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탈레온은 마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땅굴 속에 즐비했던 사람들의 시체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아침에 먹었던 햄 한 조각이 목구멍을 타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괴물은 어디에든 있다. 그리고 그놈들만큼이나 위험한 생존자도 어디에든 있다. 바깥은 지옥이다. 그럼에도 나가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어이없는 세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지옥을 피해 왔지만, 역설적으로 살기 위해선 지옥과 마주해야만 했다.

모순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 사람은 침묵했다.

희미하게 숨을 삼키는 소리만 잇달아 들려왔다.

"뭐야, 너한테도 그룹이란 게 있었냐?"

자신들의 뒤를 이어 나오는 그룹이 있었다.

로덴의 그룹이었다.

그는 창피를 당하고도 조슈아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잠깐만, 저 빨간색 머리카락 아이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설마, 타니아 레인우드?"

로덴이 소녀를 알아보고는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명망 높은 가문이면서, 아카데미 최고 유망주인 그녀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의 그룹에 속한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조슈아와 타니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절 아시나요?"

타니아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널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어? 그런데 네가 왜 저 녀석이랑 함께 다니는 거지? 너도 잘 알겠지만 조슈아 팔라리온은 교내 최고의 문제아라고."

"그런데요?"

"이렇게 말해 줘도 모르겠어? 저놈이랑 엮이면 살아남을 상황도 못 살아남아. 이쪽으로 와. 우리가 널 도와줄 수 있어."

조슈아는 가만히 있었다.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타니아가 들려줄 대답은 상상이 갔다.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는 제가 평가해요."

타니아가 차갑게 말했다.

"...선배? 하하, 네가 그렇게 격식을 차릴 놈이 아닌데."

"하, 더는 못 들어 주겠네요."

타니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더는 상대해 줄 마음이 없다는 듯이 몸을 틀었다.

"가요. 할 말 끝났으니까."

그녀가 조슈아의 소매를 붙잡고는 강하게 잡아끌었다.

조슈아가 당황하며 질질 끌려갔다.

"타니아, 넌 속고 있는 거라고! 제기랄!"

로덴이 마력을 모아서는 전격을 쏘았다.

뻗어 나간 전격은 조슈아의 바로 앞에 떨어져 그을음을 남겼다.

"마법!"

탈레온과 가비누가 반사적으로 무기를 뽑았다.

타니아도 분노했다.

지팡이를 움켜잡고는 머리 위로 불덩이를 소환해 낸다.

"로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건 계획에 없었던 일이라고!"

"닥쳐 봐!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조슈아는 몸을 돌렸다.

그는 마치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되도록이면 어제 싸움으로 끝냈으면 했다.

이 이상을 넘어간다면 결말은 하나뿐이다.

"내기를 하자. 너도 연구소로 갈 생각이지? 먼저 도착한 사람은 서로의 그룹에서 원하는 것 하나를 가져오는 거야."

자리에 멈춰서는 그가 건넨 제안에 대해 고민했다.

적을 늘리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기는 적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냉정함]은 받아들이라고 추천했다.

[영리함]은 도리어 보상을 높이라고 조언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돌이킬 수 없다면 자신에게 가장 득이 될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상대를 없앤다는 걸 포함해서.

"정말로 할 거냐?"

"그럼 내가 장난으로 보이냐?"

"나 역시 장난으로 묻는 게 아니야. 두번째는 없어. 그러니까 신중히 대답해."

로덴은 겁을 집어먹은 듯 뒷걸음질 쳤다.

그것이 도화선 심지에 불을 붙인 듯 소년이 격앙했다.

"나도 두 번 말하지 않아."

"하나만 바꾸면 받아들이지."

"뭔데?"

"보상으로 받아 갈 것은 하나가 아니라 전부로 하자."

로덴은 침을 꼴깍 삼켰다.

순간적으로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당한 코와 종아리가 얼얼했다.

"진심이냐?"

"진심이지. 설마, 네가 먼저 제안하고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

로덴은 머리를 쥐어짜냈다.

상대는 고작 4명.

반면에 이쪽은 9명이었다.

게다가 전부 4학년 이상의 고학년 위주였다.

상대 그룹은 조슈아를 제외하면 모두 저학년이었다.

"재 미친 거 아니야? 이건 누가 봐도 우리가 유리한데."

"야, 문제아 무슨 자신감으로 까부는 거냐?"

"아, 알겠다. 타니아한테 잘 보여서 환심을 살 생각인 거지? 속 보이는 놈."

"얼른 한다고 해."

불안해하던 동료들이 애기를 듣고는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한명은 앞으로 다가오더니 구리로 만든 동전을 집어 던졌다.

"저 새끼가!"

잠자코 지켜보던 탈레온이 분노했다.

다른 두 동료들도 표정이 일그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신 그 행동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한 거야?"

"물론이지. 설마, 그것도 모르고 했을까 봐."

기사는 상대방에게 도전할 때 장갑을 던진다.

그것처럼 이 세계에선 무엇을 던지느냐에 따라 의미가 제각각이었다.

구리 동전은 몰락을 뜻하였다.

조슈아의 신분이 평민으로 전락한 것에 대한 조롱.

신분이 가진 의미가 큰 세계에서 이만큼 모욕적인 행동도 없었다.

"이 정도는 해 줘야 너희 리더가 발을 못 뺄 것 아니야."

탈레온은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로 무기를 쥐었다.

"집어넣어라, 탈레온."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조슈아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냉정함]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현대의 문화에 익숙한 자신에게 이 시대의 문화는 낯설기만 할 뿐이었다.

다만 저 행동이 뜻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조슈아의 가문을 욕보였다.

가문은 곧 가족이었고 이를 욕한다는 것은 패드립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는 기억해 두마."

"하하,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러섰다.

뒤편에 있던 소년의 동료들이 낄낄거리며 그의 행동을 칭찬하였다.

로덴도 그러한 분위기에 몸을 맡겼다.

"그래서 대답은?"

"좋아, 받아들이지."

"그걸로 됐어."

조슈아가 웃었다.

로덴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 대결이 성립됨으로써 기쁜 것은 자신들이었다.

한데 그가 다른 누구보다 좋아했다.

"뛰지 않고 뭐 하냐?"

"뭐?"

"먼저 연구소에 도착하는 사람이 이기는 승부였잖아. 한가하게 머뭇거릴 시간이 있냐고."

뻔한 도발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볼품없다면서 그를 비난했다.

로덴은 함께 떠들지 못했다.

그를 조롱할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달아나야 할 것만 같았다.

* * *

"느긋하게 가도 괜찮겠어요?"

타니아가 초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시에 출발하였으나 상대 그룹은 이제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앞섰을까?

그녀는 불안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기본은 대열이다."

"그건 저도 아는데...."

"어차피 다시 만날 거다."

"예?"

"연구소가 있다는 북서쪽 방향으로 향하는 길목은 세 가지가 있어. 녀석들은 그 길목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거야."

"설마요, 고민하는 시간이 길다 하더라도 5분은 안 걸릴 거에요."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면 알겠지."

타니아는 곧 말문을 삼켰다.

아주 멀어졌다고 생각한 상대편 일행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슈아의 짐작대로 갈림길 앞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시발, 재들이 쫓아왔다고."

"여기서만 20분이나 날려 먹었어!"

우리를 바라본 이들이 길길이 날뛰었다.

조슈아는 그들과 멀지 않은 장소에 앉아서는 빵 하나를 꺼냈다.

곰팡이가 피었던 물건이었으나, 정화를 통해 먹을 수 있게 해 놓았다.

"잠시 쉬자."

"...그래도 돼요?"

탈레온이 상대 그룹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곁에 앉았다.

다른 두 사람도 덩달아 움직였다.

"저 새끼, 우리가 길을 열어 두면 그곳으로 뒤따라와서 득을 볼 심산이야."

"야비한 놈."

조슈아는 빵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너희들이 나아간 방향으론 가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라."

저 길목 중에는 연구소까지 빠르고 그나마 안전한 길목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을 고르지 못할 것이다.

정보가 부족한 사람은 눈앞의 상황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다.

"오른쪽이다! 오른쪽으로 가야 해."

로덴이 말했다.

동료들은 그의 판단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른쪽 길목에는 좀비가 보이지 않았다.

좀비가 있다고 의심되는 정황조차 없었다.

그가 오른쪽을 고른 것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우린 오른쪽으로 갈 거다."

로덴은 조슈아에게 확인하려는 듯 말했다.

"뱉은 말에 책임질 테니까 어서 가 봐. 우린 먹던 것 좀 마저 먹고 갈 테니까."

"그 여유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보자."

로덴 일행이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몇 분 후에는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또 놓쳤네요."

타니아가 아쉬운 듯이 중얼거렸다.

"오른쪽으로 가야 했던 것 아닐까요? 저긴 괴물들이 없는 것 같은데."

그리 대답하고는 다른 두 방향의 길목을 바라봤다.

미약하지만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괴물 특유의 악취 같은 게 느껴졌다.

"오른쪽은 아니야. 우린 정면으로 갈 거다."

"정면이요?"

타니아가 놀라며 반문했다.

중앙은 3개의 선택지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었다.

정황조차 없는 오른쪽.

정황은 넘치는 왼쪽.

그리고 괴물들이 대놓고 어슬렁거리는 중앙.

타니아는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렸다.

소규모의 괴물 무리가 사냥감을 찾기 위하여 배회했다.

"재들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데요."

"죽이면 돼. 운이 좋으면 그냥 지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저로서는 잘 이해가 안 돼요."

"그렇겠지."

조슈아는 긍정했다.

그녀의 시선에선 좀비가 넘치는 길목을 고집한 자신이 미치광이로 보이겠지.

"저긴 처음만 넘기면 의외로 수월해. 그리고 중앙에 쉴 곳도 있고, 놈들을 유인할 수 있는 장소도 있거든."

타니아와 가비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눈에 힘을 주며 중앙을 바라봤다.

아침이라 눈앞이 밝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한 장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의문은 있겠지만, 그냥 한번 믿어 봐."

탈레온이 끼어들었다.

소년은 트라이덴 마을에서 그의 비범함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아닌 이상에야 모를 땅굴.

더군다나 그 안쪽의 구조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제 곧 메시아를 보게 될 테니까."

걱정하던 두 사람과 달리 탈레온은 조슈아가 건넨 빵을 맛있게 음미했다.

29화

조슈아는 몽둥이를 꺼냈다.

눈앞의 좀비는 다섯.

좀비를 상대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떨지 않는 것이었다.

[냉정함]이 코웃음을 쳤다.

고작 다섯으론 지금의 몸뚱이엔 기별조차 오지 않는다.

"헉헉."

다른 학생들을 살폈다.

탈레온은 괜찮았다.

트라이덴에 데려갔던 경험이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반면 다른 두 사람은 떨고 있었다.

[가비누 모이란]

상태 이상 – 공포 2단계에 빠졌습니다.

모든 능력이 40% 떨어집니다.

[타니아 레인우드]

상태 이상 – 공포 1단계에 빠졌습니다.

모든 능력이 20% 떨어집니다.

[분석]을 사용했다.

두 사람은 두려움을 느꼈기에 상태 이상에 빠졌다.

기숙사에서의 경험만으론 아직 부족하였다.

"각자 하나씩 맡아라. 둘은 내가 잡을 테니까."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따스한 노란빛이 손끝에 일렁이며 두 사람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평정]. 마음을 안심시키는 주문이었다.

"...뭔가 기분이."

"숨쉬기가 편해졌어!"

눈에 띄게 안색이 밝아졌다.

마력을 느낀 타니아가 자신에게 눈짓한다.

시선을 외면했다.

둘에게는 스스로가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인식을 심어 주고 싶었다.

"고마워요."

아쉽게도 마법사인 그녀는 속여 넘기지 못했다.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다음으로 시험해 볼 것은 또 다른 주문이었다.

트라이덴에서 얻은 경전으로 배운 주문은 총 3가지.

첫 번째는 분석이고.

두 번째는 치료.

세 번째가 축복(근력 강화)였다.

술식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견습 기사인 두 소년에게 주문을 걸었다.

붉은빛이 번뜩였다.

"어라?"

"갑자기 몸에 힘이."

두 소년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은 많지 않았다.

능력을 시험해 볼 거라면 지금이 기회였다.

"움직이자."

조슈아는 누구보다 먼저 앞으로 나섰다.

좀비의 뒤로 접근하여 머리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놈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자세를 바로잡기 전에 한 번 더 공격.

휘두른 몽둥이에 놈의 살점과 뇌수가 묻어났다.

[냉정함]이 마무리되었다는 신호와 함께 다른 한 마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쪽으로 달려왔다.

눈이 뒤집히고, 입에서는 침을 흘리며, 목으로는 비명을 내질렀다.

침착하게 몽둥이로 무릎을 공격했다.

좀비가 바닥으로 쓰러진다.

재차 일어서기 전에 뒤통수를 노렸다.

몽둥이를 내려찍을 때마다 살덩어리가 곳곳으로 튀어 나갔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됐지?'

맡기로 했던 좀비들을 끝내고 주변을 살폈다.

탈레온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들고 있던 도끼로 좀비의 팔과 다리를 베었다.

쏴악!

좀비는 바닥에 쓰러져서는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바둥거렸다

"어떤가요?"

탈레온이 흥분한 표정으로 몸을 틀었다.

"불합격."

조슈아는 미간을 찡그리며 재빨리 등 뒤에서 배트를 꺼냈다.

그러고는 아직 살아 있는 좀비의 머리를 내려쳤다.

발악하던 손길이 멈춘다.

"팔이 잘린 정도로 놈들은 죽지 않아."

"...죄송합니다."

"

시선을 돌려서 가비누를 살펴봤다.

소년이 좀비 하나를 쓰러뜨리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검이 마치 새것처럼 잘 들어가요."

"그러냐."

마법의 효과는 만족스러웠다.

두 소년의 공격력은 눈에 띄게 강해졌다.

'신성 마법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조슈아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감이 잡히네.'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캐릭터.

한 번도 사용해 보지 못한 마법.

그렇기에 조슈아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다.

독창성 2레벨을 달성하였고 이 녀석의 구조는 대강 파악이 끝났다.

모아 둔 코인의 사용 방법도 정해졌다.

"언니의 순풍과 비슷한 건가요?"

"그래."

마법사인 타니아가 눈빛을 빛내며 질문했다.

그녀의 뒤편에는 불에 탄 좀비가 보였다.

"다른 사람에게 술식을 부여하는 건 대단히 어렵다고 들었어요. 언니도 몇 달간 피나는 노력을 한 다음에야 겨우 성공했다고 들었는데."

술식 부여가 어렵기는 하지.

밑바닥에서 시작한다면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그마저도 실패하여 포기하는 이들도 많다.

"선배는 얼마나 연습하셨어요?"

"하려고 하니까 됐어."

"예?"

그녀는 모른다.

자신이 현대에서 어떤 수업을 받아 왔는지.

그녀가 배운 수학과 자신이 배운 수학은 역사가 달랐다.

"방정식을 독학하셨다는 말씀이세요!"

"그런 셈이지."

타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정식도 여러 가지가 존재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건 중학교 수준의 레벨이다.

'중학교 수학이 이 세계에서는 고등 수학으로 분류되다니.'

이럴 줄 알았다면 수학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질 걸 그랬다.

"빛 속성에는 상처를 치료하는 마법도 있다고 들었어요. 혹시 선배도 가능하세요?"

그녀는 계속해서 질문했다.

자신은 대답을 아꼈다.

분명 신성 마법에는 치료가 있으며, 자신은 그것을 배운 상태였다.

하지만 그걸 함부로 사용할 수도, 사용할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아직은 힘들다. 언젠가 할 수 있으면 좋겠네."

도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상처를 치료하는 능력.

그것이 지닌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녀는 모른다.

'게임을 하던 중에 그런 동료를 만났다면 무조건 모셔 왔을 거야. 경우에 따라서는 두들겨 패서라도."

자신에게 이득이 있을 때 밝힐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는 침묵할 것이다.

타니아가 흥미가 식었다는 듯이 뒤로 물러섰다.

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가비누였다.

"혹시 제보자들이 착각했을 가능성은 없나요? 그들이 없는 소리를 지어낸 걸 수도 있잖아요."

의심이 많은 가비누는 이번에도 정보에 의문을 품었다.

"걱정하지 마라. 나도 아는 장소이니까."

"방향은 확실한가요? 북서쪽이란 애매한 말만 가지고는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

"날 따라와 보면 알겠지."

아카데미의 교수들에게는 저마다 훈련이나, 연구를 목적으로 한 개인 시설이 존재했다.

검술 교관의 경우에는 훈련장.

마법 교수의 경우에는 연구소였다.

지금 향하는 곳은 고든이라 불리는 교수의 연구소였다.

"얼마나 가야 하나요?"

탈레온이 흘러내린 땀을 닦아 내며 말했다.

"별일 없다면 3시간쯤 걸리겠지만, 그보다 더 걸릴 각오도 해라."

한 시간 후.

이쪽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이 등장했다.

좀비의 끈적한 울음소리가 주변 곳곳에서 들려왔다.

긴장감이 맴돌았다.

공기가 팽팽해진다.

[강심장]이 몸이 경직되지 않도록 도왔다.

"오른쪽에 일곱 마리."

"왼쪽에 열 마리가 있습니다."

"뒤쪽에도 많아요."

대열을 유지하던 동료들이 적의 숫자를 보고했다.

정면에 있던 좀비까지 더한다면 30마리가 넘는 숫자가 자신을 포위했다.

"어떻게 하죠?"

"힘을 모아서 한쪽으로 탈출하는 편이...."

그들이 불안에 떨며 자신의 지시를 기다렸다.

"이대로라면 모두 죽고 말겠지."

"예?"

성당에서도 30마리가 넘는 규모와 맞붙은 적이 있었다.

하나 그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여긴 실내가 아니라 실외이며, 루실처럼 든든한 기사도 없었다.

"그럼 우린 이대로 모두 죽는 건가요?"

타니아가 울먹거리듯이 물었다.

가비누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싸우면 죽는다고 했을 뿐이야."

"그럼?"

"안 싸우면 해결될 일이지."

이쪽으로 관심을 보이기 전에 다른 곳으로 유인해야 한다.

이 근처에는 쓸 만한 미끼가 있었다.

옆에 있던 커다란 고목나무.

그리고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무언가.

"불을 피워서 다른 곳으로 쫓아낼 거다."

배낭에 있던 기름을 꺼낸 뒤, 바닥에 있던 나무토막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타니아에게 내밀었다.

별다른 지시가 없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알아챘다.

재빨리 손을 펼치며 불을 붙였다.

확!

불이 붙은 나무토막을 탈레온에게 건네며 말했다.

"저길 향해 힘껏 던져라."

소년은 명령대로 움직였다.

그는 던진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조차 안 하고 팔을 휘둘렀다.

나무토막은 포물선을 그리며 고목나무에 매달린 무언가와 부딪쳤다.

불이 붙었다.

"...맙소사, 너무 잘 타는 것 아니에요?"

탈레온이 불에 타는 나무를 보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필요 이상으로 불길이 강했다.

주변에 있던 좀비들이 죄다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사람."

"예?"

"자루를 뒤집어쓰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의 정체 말이다."

세 사람이 기겁하며 바라봤다.

전혀 몰랐다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을 경계하는 데 집중하였기에 나무를 살필 겨를 따윈 없었다.

"이 앞에 사방이 바위로 막힌 장소가 있다. 거기까지만 참아라."

타니아는 경악했다.

정신이 아찔한 상황 속에서 그의 지시는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괴물들을 유도한 것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눈에 보이지도 않던 쉼터까지 이끌어 주었다.

"헉헉!"

그가 말했던 바위틈에 도착했다.

안은 제법 넓었다.

네 사람이 다 같이 들어오고도 발을 뻗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예견하지 못한 게 있었다.

"...읍읍!!!"

누군가의 시체였다.

가장 먼저 목격한 타니아가 신음을 삼켰다.

조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체를 살폈다.

머리 한쪽이 완전히 찌그러졌다.

저런 꼴이라면 좀비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입고 있던 옷을 뒤적거렸다.

쓸 만한 물건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초콜릿 하나에 겉옷이 제법 두껍네."

시체를 뒤지는 그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이거 입을 사람?"

조슈아의 손에는 시체에게 벗겨 낸 옷가지가 들려 있었다.

탈레온과 가비누는 말을 삼켰다.

"이 남자는 성인이지만 몸집이 그렇게 큰 편이 아니다. 너희에게도 크기가 맞을 거야."

탈레온이 불쾌함을 뒤로하고 입을 열었다.

"꼭 입어야 하나요?"

"곰 털이다. 이거 귀한 거야. 원래라면 공짜로 안 줘."

"제, 제가 입겠습니다."

가비누가 앞으로 나서서 코트를 가져갔다.

입고 있던 아카데미의 정복 위로 옷을 걸쳤다.

놀랍도록 따뜻했다.

"어때?"

"아주 좋아."

"그 정도냐?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받아 둘걸."

탈레온이 뒤늦게 아쉽다며 후회했다.

조슈아는 볼일이 사라진 시체를 들어왔던 입구 쪽으로 던져 버렸다.

"어떻게 하면 능숙하게 만질 수 있나요?"

"뭐가 말이냐?"

"그, 그러니까 시체 말이에요."

"익숙해졌을 뿐이다. 마치 습관이나 버릇처럼 말이야."

탈레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시체를 만지는 게 익숙해질 수 있는 건가요?"

"그래, 지금껏 내 손을 거쳐 간 시체를 세어 본다면 만 구는 거뜬히 넘을 거다."

조슈아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게임을 하며 확인했던 시체의 숫자는 만이란 말로도 부족했다.

"노, 농담이시죠?"

"듣고 싶은 대로 들어라."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이 진심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연구소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다."

"그럼 거의 도착한 거네요!"

"그래."

조슈아는 조금 전 시체에서 얻어 낸 초콜릿을 네 조각으로 나눴다.

각각 학생들에게 나눠 주곤 자기 것을 깨물었다.

"선배, 그게 사람인지는 어떻게 아셨어요?"

타니아가 초콜릿을 바라만 보면서 물었다.

"나무 열매치고는 너무 컸으니까. 사람이 죽은 걸 처음 보는 거냐?"

"아뇨, 그건 아니에요."

이 시대의 사람이라면 누군가의 죽음은 쉽게 볼 수 있었다.

마음에 안 들면 법보다도 주먹이 가까운 세상.

여차하면 죽이면 된다.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선 살인을 억제할 장치는 모두 먹통이었다.

"그들은 왜 교수형을 당했을까요?"

"글쎄다, 필요 없어졌거나, 방해가 되었거나, 그냥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지. 이유야 갖다 붙이기만 하면 돼."

"살벌한 세상이네요."

"이 꼴이 되기 이전에도 여기는 미쳐 있었어."

조슈아는 소녀의 질문에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목나무에 일으켰던 불길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움직일 시간이다."

탈레온이 아쉬운 듯이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 10분밖에 쉬지 못했는데."

"너희들 생각해서 원래 5분 쉬려던 것을 배로 늘려 준 거다."

"정말이요?"

탈레온이 감격한 듯이 바라봤다.

"그래, 그리고 연구소에 도착하면 휴식 시간 정도야 충분히 있을 거야."

조슈아는 바깥을 살피고는 수풀을 걸쳐서 도로로 들어왔다.

거기서부터 연구소까지는 눈 깜짝할 사이였다.

자신이 중앙 길을 고른 이유였다.

위험 구간만 넘길 수 있다면, 좀비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저기 보여요!"

연구소가 보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로덴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이겼어요!"

"진짜로 이길 줄 몰랐어."

탈레온은 펄쩍 뛰어올랐고, 타니아는 입을 벌린 채로 굳었다.

조슈아는 승리에 취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딱 하나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과연, 몇 명이나 살아서 올 수 있을까.'

30화

조슈아는 연구소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저기 누군가 오는 것 같아요."

망을 보던 탈레온이 말했다.

소년이 손짓하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세 명의 실루엣이 보였다.

로덴 일행이었다.

길목 앞에서 헤어졌을 때와 달리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살아 있는 송장.

그들이 연구소 근처에서 쓰러졌다.

"도착했어! 도착했다고."

로덴의 목소리에는 울분이 섞였다.

대결의 결과 따윈 잊어버렸다.

그에게는 이 순간 살아남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봐."

조슈아가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잊고 있었던 대결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그는 절규했다.

"으아아악!"

로덴이 뒤로 기어가듯이 걸어갔다.

"귀, 귀신이야!"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귀신 취급하지 마라. 그것보다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게 전부인 거냐?"

조슈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홉 명이었던 그룹의 인원이 셋으로 줄어 버렸다.

이곳까지 오는 과정 중에서 죽은 것이다.

"악몽이야. 신이시여, 제발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로덴은 미쳐 가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그는 콧물과 눈물을 질질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약속은 약속이다."

조슈아는 뒤에 있던 로덴의 동료에게 다가갔다.

그룹이 관리하던 대부분의 짐이 그에게 맡겨졌다.

동료는 잃었지만, 그들이 남긴 물건은 빼먹지 않고 챙겨 온 것이다.

"이쪽으로 오지 마! 이건 절대로 못 줘."

"너희도 동의한 일이었잖아. 이긴 사람이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전부 가져온다."

"그, 그건 로덴이 멋대로 시작한 일이야! 우리는 관계없어."

조슈아는 그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타워에서 출발하기 전에 구리 동전을 던졌던 소년이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더라도 이 녀석에게만은 정을 베풀 생각이 없었다.

패드립을 박은 놈이다.

조슈아의 가족이 자신의 진짜 가족이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는 본인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했다.

"잡담은 집어치우고."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꺼내었다.

"셋 셀 동안 넘겨."

"뭐?"

"하나."

"잠깐만!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는 절대로 양보 못 해."

"둘."

"그래, 거래를 하자! 이 배낭을 넘겨줄 테니까 나도 너희 그룹에 끼워 줘."

"셋."

조슈아는 단검으로 그의 목을 베었다.

그가 흘러나오는 피를 틀어막으려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를 지나며 떨어지는 핏방울.

땅바닥에는 붉은 웅덩이가 생겼다.

"이게 무슨."

"셋이라고 말했잖아."

핏발 선 눈동자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벨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너는 거래를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나는 너에게서 원하는 게 없어."

"...이 배낭이 있잖아."

"그건 이미 내 거니까, 논외로 쳐야지."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목을 감싸던 손이 아래로 떨어지고, 힘차게 쏟아지던 피도 잠잠해졌다.

조슈아는 식어 가는 시체에서 배낭을 가져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연구소에 도착한 세 명 중 한 명은 도망쳤다.

자신이 단검으로 그의 목을 벤 순간이었다.

그리고 리더였던 로덴은 여전히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고생하셨어요."

그룹으로 돌아오자 탈레온이 반겼다.

반면 다른 두 사람은 당황한 눈치였다.

"왜, 죽였을 것 같아?"

가져온 배낭을 살피며 침묵하던 두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먼저 가비누가 말했다.

"그들에게 배낭은 생명줄하고도 같으니 쉽게 내주지 않았을 거예요. 계속해서 말씨름을 하는 것보다는 신속하게 죽이는 편이... 좋았겠죠."

"타니아는?"

"보복할 가능성이 있었어요. 살려 둔다면 우릴 잊지 않고 복수할 기회를 노렸을 거예요."

"둘 다 정답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너희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조슈아가 두 사람에게 조언하던 중에 뒤를 돌아보았다.

로덴이 지팡이를 들고서 이쪽을 겨누었다.

"말도 안 돼. 이제는 돌아갈 장소조차 잃어버린 몰락한 귀족 따위가, 진짜 귀족을 이기려고 해?"

로덴이 강렬한 살기를 뿜어냈다.

그가 지팡이 끝에 모아 둔 마력은 타워에서 보였던 것과는 규모가 달랐다.

술식을 엮은 이중술식.

죽음의 문턱에서 새롭게 고안한 마법이었다.

"여긴 타워가 아니야. 널 지켜 줄 기사는 없어."

"하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그는 착각하고 있었다.

"기사가 지켜 준 건 내가 아니라 너다."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빛 속성에는 공격 마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쓰기 나름이다.

방어의 목적으로 설계된 [방패] 주문.

빛의 원소가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방패를 머리 위로 만들어 냈다.

"...무슨."

로덴은 시선을 위로 돌렸다.

공중에 거대한 방패가 붕 떠 있었다.

전신을 두려움이 짓눌렀다.

저만한 물건이 아래로 곤두박질친다면 자신의 힘으론 막을 방법이 없었다.

"너 정체가 뭐야! 3년 전에 만났던 넌 기본기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얼간이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저런 마법을 쓸 수 있는 거냐고!"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더라."

조슈아는 위로 치켜든 손을 아래로 휘둘렀다.

방패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깐만! 날 살려 주면 아버지가 어마어마한 몸값을 지불하실 거야! 그러니까 일단 저것 좀 치워 봐."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로덴이 전격으로 맞받아쳤다.

콰직!

그가 쥐어짜 낸 마력은 방패에 실금을 내는 게 고작이었다.

방패는 그대로 떨어져 지면에 깊숙이 박혔다.

방패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가 온몸이 뒤틀린 채로 고통에 몸부림쳤다.

[자신을 업신여기던 상대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외톨이 신의 교리를 이행했습니다.]

[코인 2개를 획득합니다.]

[보유 코인: 54]

외톨이 신으로부터 보상이 내려왔다.

그것을 확인하던 중에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와. 학생, 솜씨가 야무지네."

조슈아가 고개를 돌렸다.

행색이 지저분한 사내가 꺼벙한 자세로 걸어왔다.

'제길, 운도 지지리 없지.'

연구소에서 조우하는 적은 크게 3가지다.

첫 번째는 좀비.

두 번째는 연구소로 오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경쟁자.

세 번째가 연구소 근방을 어슬렁거리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사냥하는 무리였다.

'전부 만날 줄이야.'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이 게임은 역시 불친절하다.

[냉정함]이 상념을 떨쳐 내고 눈앞에 집중하라고 채찍질한다.

조슈아는 사내와 시선을 마주했다.

짐승의 털가죽을 바늘로 적당히 꿰어 입었고, 등에는 활과 화살통을 지녔다.

산적이었다.

좀비 사태로 인하여 아카데미 외곽에 틈이 생겼고 그걸 이용해 침입한 작자들이다.

야만인들에게 아카데미는 눈독을 들일 만한 장소였다.

소규모의 마을들이 군데군데 흩어졌고 도시도 존재했다.

운 좋게 신분 있는 학생들을 잡으면 몸값이나 물자와 맞바꿀 수도 있었다.

"카악, 퉤!"

산적이 죽어 가던 로덴에게 가래를 뱉어 냈다.

"크크, 꼴좋다. 듣자 하니까 저 새끼가 널 얕잡아 보는 것 같던데. 잘했어. 지 잘난 맛에 사는 오만한 새끼들은 본인이 당하기 직전까지는 정신을 못 차리는 법이거든."

산적이 무릎을 굽히고는 로덴을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마법으로 죽이는 건 어떤 느낌이야? 손맛은 없을 것 같은데."

"아무 느낌도 없습니다."

"정말? 시시하네."

산적은 실망한 눈치였다.

그는 자리에 일어나서는 방패가 깔리며 생겨난 경사 밑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아직 죽지 않은 로덴의 몸을 뒤적거렸다.

"크으윽!"

산적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상의를 벗기고, 하의를 벗기고 심지어는 속옷까지 확인했다.

이렇다 할 물건을 발견하지 못한 그가 찢어진 옷들을 몸에 걸쳐 보았다.

"쳇, 나한테 안 맞네."

모욕을 견디다 못한 로덴이 눈물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조슈아 경."

탈레온이 가지고 있던 단검을 로덴에게 집어던졌다.

단검은 공중에서 몇 바퀴 돌더니 죽어 가던 그의 가슴에 정확히 박혔다.

최후를 알리는 작은 단말마.

그의 몸에서 작은 움직임조차 사라졌다.

"어이구, 깜짝이야! 꼬마야, 이런 걸 던질 때는 말이다, 말을 하고 던져야 한다."

산적이 기쁜 얼굴로 탈레온이 던진 단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에 묻은 피를 혀로 날름거렸다.

"이 단검은 내가 가져도 되겠지? 네가 실수했다면 내가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탈레온은 인상을 찡그렸다.

소년이 움켜쥐고 있던 도끼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저 능글맞은 사내를 베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저 인간이 이곳까지 혼자서 왔을 리는 없어요."

탈레온은 자신이 생각해 낸 정황을 얘기하였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답이란 의미였다.

"아아, 혹시 말이다. 너희들, 저 뒤쪽에 있는 하얀 건물에 볼일이 있니?"

조슈아를 제외한 세 명의 학생들이 동요했다.

그는 그저 우연히 지나가던 산적이 아니었다.

연구소 근처를 거점으로 삼아서 찾아오는 이들을 사냥하는 무리였다.

"예."

조슈아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산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괜찮다면 내 친구들이 있는 장소로 같이 가지 않을래? 우리도 그 건물에 관심이 아주 많거든."

조슈아는 턱을 쓰다듬었다.

야만인의 수준은 정해진 바가 없었다.

약골인 경우가 허다하지만 반대도 제법 많았다.

노략질에 숙달된 프로라면 함부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독을 쓸 줄 알고, 협공에도 능숙했다.

"건물에 들어가고 싶은데, 못 들어가고 계시죠?"

산적은 웃음을 감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네."

"저 건물의 이름은 연구소이고, 마법사를 교육하던 교수들의 시설이죠. 들어가려면 아는 사람들끼리만 공유하는 암호를 알고 있거나, 그걸 처음부터 해석할 수 있는 마법사가 필요해요."

"지루한 설명은 때려치우고, 열 수 있어? 못 열어?"

"열 수 있습니다."

연구소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술식의 강도는 삼중이었다.

재학 중인 학생들의 레벨론 어렵다.

괜히 잘못 건드리면 마법을 건드린 반동으로 도리어 불구가 되기 십상이다.

"자신만만하네. 네가 오기 전에 몇 명의 마법사가 그 문을 건드려서 뒤진 줄 아냐? 자그마치 일곱이다."

"생각보다도 적네요."

"뭐라고?"

산적이 당황했다.

죽은 사람의 숫자를 듣고도 소년은 덤덤할 뿐이었다.

"하하하, 좋아.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믿고 맡길 수 있지. 따라와라."

"잠시만요."

조슈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착각하고 있었다.

"저는 아직 그쪽의 제안에 동의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응? 자연스레 떠들길래 이미 한편인 줄 알았는데, 아니냐?"

산적이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언제든 화살을 꺼내어 상대에게 조준할 수 있도록.

"몇 명이나 있습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묻는데."

"당신들의 수준을 알아야 손을 잡을 것 아니에요."

"우릴 못 믿겠다는 거냐?"

"오늘 처음 본 사이에 뭘 가지고 믿습니까? 어린 학생이라고 너무 등쳐 먹으려고 하면 곤란해요."

산적은 생각에 잠겼다.

소년은 여느 순진한 학생들과는 무언가 달랐다.

사탕발림으로 넘어올 정도로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었다.

"나를 제외하고 여섯 명이다."

"당신만 따로 행동하는 이유는?"

"정찰병이지. 건물 주변을 돌아다니며 너희 같은 그룹과 접선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다른 동료들은 당신처럼 무장이 된 건가요?"

"모두 스스로를 지킬 검 한 자루는 지니고 있지."

산적은 슬슬 신경질이 치솟았다.

소년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 주는 처지가 불만이었다.

"이봐! 적당히 하고 대답해. 갈 거야, 말 거야!"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신들의 경력이 궁금합니다. 산적으로서 얼마나 해 먹으셨습니까?"

"크크, 일 년 좀 넘었지. 이 바닥에 문외한인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 기록은 대단한 거라고. 이제 내 차례다! 말해."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야만인으로서 1년이나 살아남은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범죄자로 수배당하고도 용병이나, 기사들을 피하며 계속해서 약탈해 온 것이다.

하지만.

"저흰 가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대단하다는 의미는 어디까지나 야만인들 사이에서의 기준이다.

플레이어인 자신의 기준은 달랐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야만인 생활 1년 짬밥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시발! 누굴 똥개 훈련 시키고 있어."

산적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충혈된 눈동자가 소년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잠잠하게 바라보던 소년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왔다.

공기가 떨렸다.

근처에 있던 동료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서 숨을 죽였다.

산적은 망설이고 있던 행동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고는 활시위에 걸어 소년에게 겨누었다.

"너, 제정신이냐?"

"어디까지나 제정신이지."

조슈아는 더 이상 그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처음부터 함께할 생각은 없었다.

야만인과 거래는 위험하다.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이들이기에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배신을 밥 먹듯이 하며, 공정과 신뢰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집단

'저 인간은 산적으로서 일 년 동안 살아남은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떠들어 댔지만.'

달리 말하면 그 일 년은 온갖 더러운 짓거리에 가담했다는 뜻이었다.

믿을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그가 이곳의 상황을 다른 그룹원에게 알리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

"당신이 똥인지, 된장인지는 찍어 먹어 볼 필요도 없어."

31화

산적은 몸이 떨렸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들뜬 가슴을 진정시키며 옆에 있던 구덩이로 눈길을 돌렸다.

구덩이는 조금 전 소년이 보여 준 마법의 의해 생긴 것이다.

중심에는 이제는 반응 없는 학생의 시체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잘 생각해라.'

눈앞의 소년은 무언가가 달랐다.

저 나이대의 학생들은 살인에 대한 저항감이 상당했다.

귀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평민들을 깔보며, 노예들을 하찮게 여기는 귀족이라도 본인 손을 더럽히는 것은 끔찍이 싫어 했다.

한데 저 소년은 아니다.

스스로가 필요하다고 받아들인 순간.

무섭도록 냉철하게 그것을 실행했다.

마치 감정이 제각각 따로 놀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단 참아야 한다.'

산적은 시위에 메긴 화살을 등에 있던 통에 도로 집어넣었다.

상대는 넷이다.

만약 다른 세 명의 실력도 비슷하다면 승산이 없었다.

"이봐, 아우님. 일단 진정하고 얘기 좀 해 보는 게 어때?"

산적은 웃었다.

살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도 웃을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끝내주는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소년은 침묵했다.

산적은 분위기를 살펴 가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존재가 건물을 탐색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거잖아. 내가 다른 녀석들을 몰살시킬 방법이 있어. 아지트로 돌아가 먹을 음식에 독을 푸는 거야. 나는 그들과 안면이 있으니까 할 수 있어!"

조슈아의 곁을 지키던 세 학생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산적은 말했다.

1년을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동료들을 제 스스로 모두 죽여 보이겠다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산적의 흥분한 표정을 보건대 정말로 저질러 버릴 것 같다는 느낌도 강했다.

"독은 있나?"

"어?"

"독살하려면 독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동요하던 산적이 재빨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식물의 잎사귀처럼 보였다.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안 보이는데 이리 좀 가까이 와서 보여 줘."

"학생인 네가 야생에서 자라는 식물을 본다고 알아?"

"우물쭈물 거리는 게 수상하네."

"망할, 알았어! 그쪽으로 가겠다."

산적은 천천히 조슈아에게 다가갔다.

둘의 거리가 주먹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봐라!"

산적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움켜쥔 잎사귀를 내밀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붉은색 노란색을 오고 가는 신비한 잎사귀였다.

"사전에서 보았는데 색이 화려하거나, 무늬가 특이한 식물은 피하라고 들었어요."

옆에 있던 타니아가 중얼거렸다.

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저 사람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이건 독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위험하게 생겼네."

"정말로 독이 든 건가?"

학생들이 속삭이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조슈아는 혼자만의 상념에 빠졌다.

생존 게임을 잘하려면 그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물건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약초도 예외는 아니다.

연금술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재료 중 하나였다.

[영리함]이 잠들어 있던 기억을 깨웠다.

자신은 이 약초의 효능에 대해 알고 있다.

"화염초군. 체온을 높이는 데 쓰인다, 맞지?"

산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양 좀 길렀다는 귀족들도 화염초를 단번에 맞추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야생화이기에 아는 사람들만 아는 약초였다.

그것을 사냥꾼도 아닌 학생이 맞춰 냈다.

"오늘은 재수가 더럽게 없네. 너같이 똑똑한 범생이한테 걸려서는."

산적이 단검을 앞으로 뻗었다.

조금 전 탈레온에게서 빼앗은 물건이었다.

서슬 푸른 칼날이 조슈아의 목젖을 향했다.

쾅!

칼날은 조슈아가 만들어 낸 빛의 벽에 가로막혀서 튕겨 나갔다.

그가 충격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바로 옆에 있던 탈레온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들고 있던 도끼를 위로 치켜들고서는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

"크아아악!"

산적의 손목이 잘려 나갔다.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소년은 그의 목소리가 멀리 퍼지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았다.

"으으으음!"

"헉헉."

탈레온도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했다.

상대에게서 살기가 느껴졌고,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잘한 것일까?

스스로가 한 행동을 되짚어 보고 있을 때.

"잘했다."

조슈아의 칭찬에 크나큰 안도감을 느꼈다.

"아예 머리를 날려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살릴 가치가 있을 줄 알았어요."

"정보 수집은 이만하면 됐어."

조슈아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잘린 팔에는 여전히 단검이 들려 있었다.

손을 뻗어 자신이 집고는 산적의 가슴팍에 깊이 꽂아 넣었다.

피가 흘러나오며 그가 몸부림친다.

붙잡고 있던 탈레온이 단말마조차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보다 강하게 압박했다.

이윽고 산적이 죽었다.

"연구소 근처를 지키며 사람을 사냥하는 무리가 있다. 수는 여섯이고, 무기를 갖췄다. 그럭저럭 싸울 줄 아는 놈들이야."

조슈아는 산적으로부터 들은 정보를 다시금 말했다.

"정찰병이 돌아오지 않으니 분명 움직일 거예요."

"그래."

탈레온이 죽은 산적을 놔두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바닥에 피가 묻었다.

사람을 죽인 감촉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불쾌감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적고, 흐릿하여 움직이는 데 거부감은 없었다.

"저기."

탈레온이 말했다.

"이 녀석, 반은 제가 죽였으니까 제가 먼저 탐색해 봐도 될까요?"

조슈아는 눈을 끔뻑거렸다.

이처럼 당돌한 모습은 탈레온에게서 보기 드물었다.

어쩔까?

[냉정함]은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활은 주지 말라며 조언했다.

활은 활용도가 높았다.

원거리에서 은밀하게 적을 노리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조슈아에게는 활과 관련된 특성이 없다.

'여기서는 탈레온의 성장을 축하해 주는 게 옳겠지.'

조슈아는 등을 돌렸다.

탈레온이 성장하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마음대로 해라."

"...감사합니다."

소년은 산적이 입고 있던 무두질된 가죽 옷들을 벗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에 맞게 끝부분을 단검으로 잘라 냈다.

활과 화살도 잊지 않았다.

"너희들도 불합격은 아니다만."

조슈아의 시선은 이제 멀찍이 떨어진 두 사람에게 향했다.

"사람을 해치는 게 겁이 났는지, 아니면 그저 상대가 무서웠던 건지. 확실히 해라."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이어지면 사람은 동요한다.

동요하는 건 상관없다.

[냉정함]과 [강심장]을 가진 자신조차도 눈썹이 꿈틀거리는 정도의 반응은 한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에 얼마나 빨리 해방되고.

다음을 생각할 수 있느냐다.

"나나, 탈레온이 아니었다면 너흰 죽었다. 그리고 우린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다. 혼자 있을 시간도 많아. 다음에도 이렇게 끝나리라고 착각하지 마라."

"...야만인을 곧장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럼?"

가비누가 고개를 치켜들면서 물었다.

"겸사겸사 시험해 본 것뿐이다. 결과적으로 수확은 있었다."

조슈아는 뒤편에 있던 탈레온에게 눈길을 주었다.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단지 생존자에게는 그걸 이겨 낼 기회가 많지 않다. 극복하지 못하면 죽으니까."

* * *

산적과 로덴을 쓰러뜨린 장소에서 조금 더 나아가자 연구소에 도착했다.

조슈아는 근처에 있던 언덕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장소였다.

예상대로 산적의 그룹은 그곳에 캠프를 세웠다.

"괴물들이 근처에 오는지 집중해라."

바위 모퉁이에 딱 달라붙어서는 학생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산적 무리는 연구소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예정보다 늦어지는 동료를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 두 명 이상을 정찰조로 편성하여 보내야 한다.

"그때까지는 휴식이군."

로덴 그룹의 배낭을 확인할 차례였다.

그룹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무언가를 챙긴다.

챙긴 물건은 값어치가 높을 확률이 컸다.

사람 한 명이 짊어질 수 있는 무게에는 한계가 있고, 자연스레 우선도가 떨어지는 것은 버려진다.

즉, 배낭 안에 든 것은 로덴 일행의 알짜배기였다.

"먹어라."

식량은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 줬다.

타워로 챙겨 돌아가기보다는 먹어서 무게를 줄일 생각이었다.

배낭 위를 차지하던 식량이 사라지자 밑에 깔린 물건이 드러났다.

사파이어가 달린 반지.

귀부인의 장신구로 오해하기 쉽지만 이것 또한 마법 아이템이다.

"이런 물건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상황이 생겼을 때.

그것에 대처할 수단이 하나 더 늘어났다.

반지에 각인된 마법은 [분석]을 통하여 무엇인지 확인했다.

[우레의 반지]

-강렬한 전격을 전방으로 쏘아 낸다. 술식이 해방되면 보석은 파괴된다.

일회성이라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아이템이 그렇듯.

해방되는 순간의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다.

"으악!"

타니아가 목을 내밀며 연구소를 바라봤다.

"산적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들어갈 생각이시죠?"

"그래."

"상황이 생기기 전에 들어가야 하는데 삼중 술식이면 시간이 걸릴 거예요. 아무리 선배라도 7분은 걸릴 텐데."

타니아는 기숙사에서 교수의 방에 걸린 술식을 풀었을 때를 떠올렸다.

똑같은 삼중 술식이었다.

그가 술식을 해제하기까지 5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그때는 공격받을 위험이 없었지만, 이곳에선 산적이 등 뒤를 노렸다.

사람은 여유가 사라지면 평소와 같은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진다.

"어떤 걱정을 하는지는 알겠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넌 착각을 하고 있어."

"착각이요?"

"그래, 기숙사에서 보여 준 실력이 왜 내 전력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네? 그야 아카데미 재학생이라면 삼중 술식을 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실력이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슈아는 설명하는 것보다도 보여 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시.

위쪽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분위기가 술렁였다.

산적 중 두 명이 횃불을 들고서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불빛을 점점 멀어지며 조금 전 싸움이 있었던 방향으로 나아갔다.

'곧 들키겠군.'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빠져나간 두 사람이 돌아오기 전에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

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술식을 푸는 동안 산적에게 들킨다면 너희가 대치해라. 먼저 공격해서 자극하지는 마라."

"상대가 먼저 공격한다면요?"

가비누가 만약의 경우도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은 낮을 거다. 아까 죽은 산적이 그랬지? 연구소로 들어가려다가 죽은 사람이 일곱이라고. 산적들 입장에선 우리가 불길 속에 뛰어드는 나방 정도로 보일 거다."

"우리가 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겠군요."

"그래, 그러니 서로 대치만 하고 있으면 될 거다."

"문을 여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30초면 충분하다."

"...네?"

함께 듣고 있던 타니아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슈아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뒤이어 다른 아이들이 쫓아왔다.

위에서 망을 보던 산적이 신호를 보내며 동료들을 끌어모은다.

"이봐, 저 녀석들은 어디서 나타난 거야?"

산적 하나가 갑작스레 나타난 조슈아 일행을 발견했다.

그가 손짓으로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저쪽 방향에서 왔다면 정찰하러 나갔던 로나텔을 만나지 못했을 리가 없어."

"로나텔이 당한 건가?"

"아마도."

"등신 같은 놈, 입을 놀리다가 당한 거겠지."

산적들이 고개를 내밀고는 목청을 높였다.

"이봐, 꼬맹이들아! 누구 마음대로 그 문 앞에 선 거냐."

"이곳은 우리가 관리하는 지역이다. 건물에 다가가려면 우리 허락부터 받으라고."

산적들이 노발대발 신경질을 냈다.

활을 이쪽으로 겨누지만 쏠 생각은 없는지 시위를 놓지 않았다.

"왕립 아카데미의 주인은 왕가의 것이에요. 이곳에 허가 없이 발을 들여 놓고 주인 행세를 하다니! 목이 달아나고 싶으신 모양이죠."

타니아가 질세라 맞불을 놓았다.

산적들은 비웃듯이 낄낄거렸다.

"크크, 아가씨가 아직 바깥 소문을 못 들은 모양이네. 이름난 귀족들의 영지는 물론 왕도인 파르도는 아주 개판이 따로 없다고."

"...그게 무슨. 그, 그럼 레인우드령은 어떻게 됐나요?"

"레인우드? 아아,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네. 왕도 옆을 관리하던 귀족의 영지였던가. 그쪽 소문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지만, 뻔한 거 아니겠어?"

타니아는 바닥에 쓰러질 뻔한 것을 겨우 참아 냈다.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릴 것 같았다.

"야만인의 우스갯소리일 뿐이야. 정신 차려."

가비누가 떨고 있던 그녀를 위로하려 말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흔들리지 말자.

가비누의 말마따나 신뢰할 가치도 없는 인간의 헛소리였다.

언니인 루실도 가문의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는 상대하던 산적에게서 관심을 끊어 냈다.

충분히 30초가 흘렀을 시간이다.

얼떨결에 고개를 돌렸을 때.

무려 일곱이나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연구소의 삼중 술식은 한 남자에 의해 완벽하게 해제됐다.

"말도 안 돼. 정말로 끝났어."

기적이었다.

학생이 해낼 만한 경지가 아니었다.

탈레온의 말을 빌리자면, 그가 정말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해내고도 조슈아의 대답은 단순했다.

"들어가자."

32화

산적들이 경악했다.

저 문이 앗아 간 생명을 몇 번이나 지켜보았다.

개중에는 아카데미를 졸업한 마법사도 포함되었다.

그런 이들조차 열지 못한 문을 고작해야 학생 한 명이 풀어 버렸다.

30초도 안 되는 시간에!

"저 녀석들 정말로 열었는데."

"말도 안 돼. 성인 마법사도 열지 못했던 문을 저런 풋내기가."

"지금 감탄할 때냐! 일단 못 들어가게 막아야 할 것 아니야!"

산적은 활을 쏘았다.

수 개의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리꽂혔다.

표적이었던 학생들은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시발!"

산적이 욕지거리를 토해 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야외에 천막을 친 이유.

연구소에 잠든 물자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야, 뒤쪽에."

산적은 뒤쪽을 가리키며 인상을 구겼다.

불청객은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수십 마리의 괴물들.

조금 전 대화를 나누며 언성을 높였던 것이 실수였다.

벌 떼처럼 이곳을 향해 속속들이 모여든다.

"쫓아서 연구소로 들어간다. 이제 그 방법밖에는 없어."

지시를 받은 산적들이 가파른 언덕길 밑으로 뛰어내렸다.

* * *

연구소로 들어선 학생들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넓었다.

기다란 복도의 끝이 어딘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지시할 때까지 불은 켜지 마라."

타니아는 불꽃을 일으키려다가 참았다.

그리고 그의 지시에 숨겨진 뜻도 곱씹었다.

괴물이 있다.

그녀는 괴물의 시력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고목나무에서 일어난 불길에 수십 마리의 괴물들이 홀린 듯이 다가갔다.

작은 불꽃이라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조슈아 경, 피 냄새가 나요."

탈레온이 몇 번이나 코를 킁킁거렸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한 비린내.

기숙사에서 질릴 정도로 맛보았던 그 냄새였다.

"괴물이 있다. 그리고 다른 생존자도 있을지 모른다.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고요?"

"만약의 얘기다."

조슈아는 곧장 나아가지 않고 모퉁이를 돌아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손가락을 입술에 붙였다.

조용히 대기하라는 뜻에 따라서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

몇 분이 흘렀을까?

쿵쿵거리는 지면의 진동과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연구소의 입구 쪽이었다.

"다른 두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니야?"

"입구를 지키면 되잖아. 어차피 이쪽으로 도로 나올 텐데."

"등신아! 이런 나무 벽 따위는 부숴 버리면 그만이라고. 그 녀석들 무기를 갖고 있었어. 게다가 적어도 한 명은 마법을 쓸 수 있다.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

네 명의 산적이 모여서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상대의 전력과 건물 안쪽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정보가 부족하면 발이 묶인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촉박하다는 사실이 사람을 초조하게 만든다.

"들어간다. 밖으로 나간 두 사람에게는 우리가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도록 표시를 남기자."

조슈아는 기다렸다.

대화가 들린 후에 다시 한번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점점 가까워졌다가 뒤이어서는 작아졌다.

"지나간 모양이에요."

가비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들이 먼저 안쪽으로 들어가게 하자."

"그러다가 저들이 먼저 연구소의 물건들을 독차지할지도 몰라요."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가비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떠한 가능성을 제시하면 그는 매번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자신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다.

기묘하게도 그의 예상은 한 번도 빗겨 가지 않았다.

그가 아니라면 아니고, 맞다고 하면 맞았다.

흡사 예지력이었다.

"마법에는 미래를 내다보는 주문도 있나요?"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야."

같은 마법사인 타니아가 빈정거리듯이 대답했다.

"그냥 물어본 거야."

"안타깝지만 그런 주문은 없다. 내가 너의 말을 부정한 것은 정보가 있기 때문이다."

가비누가 몸을 들썩거렸다.

무심코 내뱉은 말 몇 마디만으로 이쪽의 의중을 꿰뚫었다.

하하, 멋쩍은 웃음을 내면서 뺨을 긁적였다.

"이 연구소에 와 본 적이 있으신가요?"

"여섯 번 정도 와 봤다."

조슈아의 대답에 타니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연구소는 교수의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드나들 수 있잖아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과거의 선배는..."

"형편없는 쓰레기였지."

"그, 그렇게까지 말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알아, 하지만 내가 여섯 번이나 와 봤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조슈아가 아닌 다른 캐릭터들로 방문했을 뿐이다.

그때의 기억은 어렴풋하다.

하나 [영리함]이 있다면 흐릿한 기억은 선명하게 탈바꿈된다.

[영리함]이 칭찬하라며 졸라 댄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는 생각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영리함]은 화가 난 것 같았다.

녀석의 칭얼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서 현재에 집중한다.

"...선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다른 곳은 어떤 상황인지 아시나요?"

타니아는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의문으로 속앓이를 하는 중이었다.

아카데미 바깥의 상황.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될 때.

언니인 루실과 재회하여 그녀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그녀는 영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렇게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모른다."

"혹시 아시는데 절 생각해서 숨기시는 거라면 전 괜찮으니까."

"아니, 정말로 모른다."

조슈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THE Survival은 아카데미에서의 생존을 전제로 만들어진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카데미 외부를 탐험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바깥에 갈 수 있다.

아카데미에서 레인우드령은 상당히 멀었으나 두 번은 가 봤다.

그리고 그곳에 대한 소문은 훨씬 더 많이 접하였다.

결론적으로 레인우드령은 회차마다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네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희망을 버리지 마라."

최선의 대답.

이걸로 그녀가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더 해 줄 말은 없었다.

타니아는 여전히 불안한 낯빛을 띠었다.

달콤한 말을 지어내 속삭인다면 그녀의 불안감도 잠잠해질 테지만.

훗날 진실을 알게 되면 더 큰 절망으로 되돌아온다.

약간의 신뢰를 얻고자 폭탄이나 다름없는 위험을 떠안고 싶지는 않다.

"크아아악!"

비명이 들렸다.

세 사람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조슈아는 손짓으로 긴장한 세 사람을 안심시켰다.

"거칠고 갈라진 듯한 목소리. 중년 남성의 것이에요."

가비누가 조금 전 들린 비명에 대해 분석하고서는 말했다.

"산적이겠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괴물을 만났을 거다."

"역시 안쪽에 괴물이 있는 거군요."

"산 사람보다는 죽이기 편할 거다."

"조금 전의 실수를 꼬집으실 생각이라면 그만두세요. 전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고요."

"반성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짚어 준 거다."

가비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다르지 않았던 타니아도 가슴이 답답했다.

둘은 각자의 무기를 꽉 움켜쥐고서 결단을 내렸다.

"근데 조금 덥지 않아요?"

아무도 얘기하지 않던 이변을 탈레온이 짚어 냈다.

방 안이 후끈거렸다.

그건 좁은 방 안에 네 사람이나 함께한 것도 이유이겠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이유로 후덥지근했다.

온몸으로 땀으로 범벅이 되어서는 끈적끈적하게 몸을 늘어뜨린다.

"네 생각이 맞다, 탈레온."

"그렇죠?"

"대열을 바꾼다. 탈레온과 가비누가 중앙으로 가고, 타니아가 후방을 맡아라."

조슈아는 등에 멘 방패를 앞쪽으로 옮겨서 왼손에 고정했다.

경비병에게 술과 담배로 교환한 물건들을 사용할 차례였다.

"괴물은 물어서 공격한다. 물리면 상처를 통해 감염되어 그들과 같은 괴물로 전락하지. 여기까지가 기본적인 패턴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몇몇 개체들은 살아 있을 적 다루었던 힘에 영향을 받아 변종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부터 상대할 놈은 변종이다. 다른 공격도 조심해라."

조슈아는 덤덤하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산적들은 망설이지 말고 죽여라."

들어왔던 문을 나와서는 다시금 복도로 걸어 나왔다.

마치 화재라도 일어난 것처럼 강렬한 열기가 몸을 휩쓸었다.

입고 있던 방화의 망토로 막아 냈다.

"설마, 마법?"

타니아가 몸을 떨었다.

들이닥친 열풍이 낯설지가 않았다.

바람 속에 스며든 기운의 정체.

어릴 적부터 배워 온 것이기에 결코 헷갈릴 리가 없었다.

마력.

그렇기에 열풍의 근원은 마법사라고 확신했다.

"크어어어!"

괴물이 앞에서 달려왔다.

여태껏 본 것과는 다른 흉물스러운 모습이었다.

썩은 피부 위로 불꽃이 타올랐다.

조슈아는 달려오는 괴물이 토해 낸 불꽃을 망토로 막아 냈다.

망토에 붙은 불씨는 마치 빗물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고는 잠잠해졌다.

"망토가 불타지 않았어."

"...타니아, 저것도 마법인 거야?"

두 소년은 눈을 비비적거렸다.

망토의 재질은 천이며, 천은 불에 타기 쉬운 성질을 지녔다.

그러나 조슈아가 몸에 두른 망토는 달랐다.

"설마, 인챈트된 물건?"

타니아의 뇌리가 번뜩였다.

눈앞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

물건에 술식을 담아 두는 인챈트.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그녀에게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인챈트는 고난도의 작업이라 아주 작은 물건이라도 엄청 비쌀 텐데."

"술과 담배로 거래했다."

"말도 안 돼!"

"사실이다. 그것보다도 적에게 집중해라. 놈은 아직 죽지 않았어."

조슈아가 근처까지 다가온 좀비의 머리를 방망이로 후려쳤다.

좀비가 나가떨어지더니 다시금 일어서서 달려들었다.

탈레온이 옆으로 튀어나와서는 팔을 베었다.

"야, 누가 더 그룹에 도움이 되는지 내기할까?"

탈레온이 가비누를 눈짓하며 말했다.

"자신 있냐?"

"난 벌써 조슈아 경에게 칭찬 한 번 적립 받은 것 모르냐? 넌 나보다 뒤로 밀렸어."

"장난하지 마. 고작 한 번 정도로."

"그럼 제대로 해라."

타니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이런 상황에 할 소리니? 정말이지."

조슈아는 소년들이 떠드는 와중에도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좀비를 방패로 밀어냈다.

방망이로 다리를 짓눌렀다.

완전히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서 입을 열었다.

"내가 채점자냐?"

조슈아가 두 소년을 향해 물었다.

"부탁드립니다."

"조슈아 경의 평가라면 믿을 수 있죠."

"좋다. 우선 너흰 100점 감점이다."

두 사람이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째서요?"

"전투 중에 누가 잡담을 늘어놓아도 된다고 했지?"

"기, 긴장도 풀고 좋잖아요."

"너흰 좀 긴장해라."

탈레온이 가비누에게 경쟁 의식을 부추긴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친구의 성장을 바라기 때문이다.

정체된 인간은 살아남지 못한다.

매번 고민하고, 행동하여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 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애써 데리고 다닐 가치가 없다.

"그런데 목재로 된 건물에 불이 붙은 괴물이 있는데, 용케도 멀쩡하네요."

"건물에 마력을 두른 거다."

"...설마."

이상한 점을 알아차린 타니아가 눈을 번뜩였다.

"무슨 일인데?"

"물건에 마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건, 아직 관리가 되고 있다는 뜻이거든. 관리가 되고 있다면 당연히 그걸 해 주어야 할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즉, 마법사인 생존자가 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타니아의 말이 맞나요?"

소년 소녀들의 문답에 끝은 언제나 조슈아였다.

조슈아는 탈레온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이 있다.

좀비도 아니고, 산적도 아닌 제3의 생존자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이 갔다.

그리고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도 말이다.

"길을 따라와라."

좀비 한 마리를 해치우자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

침묵은 사람을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이 안에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무리가 둘은 있었다.

그들이 언제 갑작스레 나타날지 모르기에 신경이 늘 곤두섰다.

[냉정함]과 [인내심]이 고생했다.

두 특성이 아니라면 현기증에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큰 것 같은데, 제가 이상한 건가요?"

"아니야, 실제로도 넓어. 연구소는 마력 도구를 이용하여 공간을 넓힌 시설이거든."

탈레온과 타니아가 얘기를 주고받았다.

가비누가 신경질적인 시선을 보내며 둘에게 경고했다.

어둠 속에서는 작은 신호 하나도 위험하다.

"신중한 건 좋지만, 그래 봐야 발소리는 못 숨긴다.

조슈아가 참견하며 핀잔을 주었다.

가비누는 그 부분은 고려하지 못했는지 얼굴이 상기되었다.

"잠깐 멈춰라."

벽면에 기대서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내가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턱수염.

무두질이 된 가죽옷.

산적 일행 중 한 사람이었다.

좀비에게 목덜미가 물렸는지 그 부분의 살점이 뜯겨 나갔다.

흘린 피의 양이 많았다.

과다 출혈로 생명을 잃어 가고 있었고, 길어 봐야 몇 분이었다.

"씨발. 어째서, 이런 꼴이."

신세를 한탄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살려 두면 좀비로 부활하여 골칫거리가 될 게 분명하다.

그전에 죽여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는 단검을 꺼내어 그와 시선을 마주쳤을 때.

산적의 눈동자는 억울한 기색이 강했다.

"도망쳐라! 나는 미끼다. 너희들이 멈칫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거야!"

버려진 산적이 분을 참지 못하고 다른 동료들의 계획을 실토했다.

그의 절규는 숨어 있던 산적들에게는 신호였다.

어둠 속에서 바람을 가르며 화살이 날아온다.

처음에 3개.

다시 이어서 3개.

총 6개의 화살이 쏟아지며 자신들을 위협했다.

신속하게 퍼부어진 공격에 조슈아는 [방패]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에 미리 왼쪽에 착용한 방패로 화살 2개를 빗겨 나가게 만들었다.

조슈아는 나머지 화살의 행방을 찾고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헉헉."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학생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비누의 곁을 에워쌌다.

그의 어깨에 박힌 화살 하나.

입고 있던 코트 위로 피가 번지며 붉게 적셨다.

소년이 다친 상처 부위를 꾹 눌렀지만, 피는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조슈아 경."

가비누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사과했다.

셋 중에서는 가장 냉정했던 소년이 눈물 섞인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본다.

이제 겨우 3학년.

열여섯의 나이가 감당하기에는 두려운 상황이었다.

"이봐."

통로 안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살을 쏜 남아 있던 산적 무리였다.

"지금 쏜 화살에는 야생에 자라는 독초를 짓이겨 만든 독을 발라 두었다. 이대로 둔다면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몸속에 침투한 독으로 그 녀석은 죽을 거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해독제가 있다. 거래를 하고 싶다.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면 신호를 보내라."

독이라는 단어에 학생들의 불안은 커져 갔다.

해독제가 없으면 죽는다.

그런 생각이 한 번이라도 머리에 자리 잡으면 헤어 나오는 것은 쉽지 않다.

세 사람은 모두 말을 아꼈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조슈아는 가비누의 곁에 다가가 무릎을 숙였다.

"거래를 원한다는 것은 즉사하는 맹독은 아니다. 머리가 어지럽거나, 신경이 조금씩 마비되는 그런 종류일 거다."

"...살 수 있는 겁니까?"

"아직은 모른다. 그렇지만 널 죽게 두지는 않을 거다."

가비누가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눕지 마라. 정신을 잃지 마라. 움직이는 건 최대한 자중해라. 탈레온, 가비누를 지켜라. 여긴 위험하다. 괴물이 올 수 있으니까 방으로 숨어라. 내가 너희들을 찾겠다."

"저는 어떻게 하죠?"

타니아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나와 함께 놈들을 사냥한다."

33화

조슈아는 탈레온과 가비누가 방에 숨는 것을 확인하고서 움직였다.

이제 산적을 상대할 차례였다.

모퉁이에 몸을 기대고는 그들이 서 있던 방향으로 입을 열었다.

"딱 한 번만 제안한다. 무기를 버리고 얌전히 이쪽으로 온다면 출구까지 안내해 주겠다."

"크크크."

통로 안쪽에서 비아냥거리는 웃음이 들려왔다.

쏴악!

화살 하나가 나무로 된 바닥에 내리꽂혔다.

"지랄하지 말고, 친구를 살리고 싶으면 너희들이 와서 머리를 숙여! 독이 너무 많이 퍼지면 해독제를 먹여도 소용없을지 모른다고."

"그게 당신들의 대답인가?"

"그렇다면 어쩔 건데?"

"알았다."

손을 내미는 것은 단 한 번이다.

그들이 입장을 바꾸더라도 용서는 없다.

"이길 수 있을까요?"

타니아는 숨을 삼켰다.

상대는 산적 넷.

사람을 죽이는 것에 거부감이 없고 익숙한 인간들이다.

더군다나 경계심도 충만하다.

바깥에 쓰러뜨렸던 산적처럼 방심하는 일은 없다.

"네가 도와준다면 가능하다."

조슈아는 느닷없이 배낭에서 펜과 종이를 꺼냈다.

곧이어 종이 위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다.

[영리함]의 힘을 빌려 완성한 것은 술식이었다.

"...불 속성."

타니아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마법사는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속성만을 공부하는 게 원칙이었다.

한 가지를 익히는 데도 피나는 노력을 요구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한 가지조차 익히지 못하고 정체됐다.

"왜, 선배가 불 속성의 공식을!"

"익혔다."

"쓰지도 못하시잖아요."

"그래."

"그런데 왜 저보다도 진도를 더 많이 빼신 거예요!"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타니아는 경악했다.

그는 불 속성을 익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 수준이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했다.

등급으로 따지자면 7등급의 미티오스.

'단순한 미티오스 레벨이 아니야.'

복잡한 절차를 간략히 줄이고 알기 쉽게 풀이했다.

어떤 교수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할 솜씨.

타니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따라 해라."

"저 7등급의 마법은 써 본 적이 없는데요."

"너라면 할 수 있어."

"선배는 꼭 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 같네요."

조슈아는 웃었다.

그녀는 모른다.

자신이 타니아로 플레이해 본 적이 있다는 걸.

그녀의 잠재 능력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날 믿어."

"어떤 주문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사정거리를 늘리고 불꽃의 강도를 높였다. 뭐, 써 보면 알 거다."

"어디를 향해 쏘는데요?"

"통로 끝에 있는 문이다."

타니아가 모퉁이에 서서 얼굴만 내밀고는 통로를 바라봤다.

희미한 불빛 아래로 문이 보였다.

"보여요. 그런데 저길 공격해 봐야 산적들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없을 거예요."

"맞아, 네가 소환한 불꽃은 애초에 산적들을 위협하려는 게 아니야."

"그러면?"

"괴물들을 불러낼 거다."

고든 교수의 연구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불 속성 마법사만을 제자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연구소의 시스템을 활성화하는 데 사용되는 것 또한 불 속성.

문을 여는데도 불길이 필요하다.

"저 안에 괴물들이... 탐지 마법 같은 건가요?"

"대충 비슷한 거다."

조슈아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탐지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니다.

연구소에 왔었던 경험과 기억을 [영리함]을 통하여 이끌어 내는 중이었다.

[영리함]이 우쭐거리고 있었다.

"...해 볼게요."

"그래."

그녀가 보여 준 공식을 머릿속에 담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술식이 간단해도 한 시간은 걸린다.

하지만 타니아 레인우드에게는 몇 분이면 충분하다.

"이봐, 서두르지 않으면 독이 온몸에 퍼져서 해독제를 써도 소용없게 된다고."

산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화살을 쏜 자리에서 여전히 상황을 관망했다.

"아까 문을 열었던 학생 거기 있는 거지? 동료를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슬슬 입을 여는 게 어때?"

자신을 찾고 있었다.

연구소는 문을 여는 게 끝이 아니다.

그 안을 탐험하기 위해서는 마법과 관련된 지식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산적들에게는 결여된 정보였다.

"자꾸 이러면 재미없어. 아저씨들 화나기 전에 얼른 나와."

산적들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진다.

마법사의 도움 없이는 출구를 찾을 수도, 보물을 찾을 수도 없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준비됐어요."

"쏴."

타니아의 손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은 어두워진 복도를 환하게 비추며 목표하였던 문과 부딪친다.

뜨거운 열기가 반사된다.

그녀는 스스로 발사해 낸 불꽃에 놀라워했다.

"이게 내가 쏜 마법?"

"집중해라.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어."

문이 불꽃에 반응하며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사이로 탁류처럼 좀비들이 쏟아졌다.

"으아아악!"

산적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짐작대로 좀비들이 그들을 덮쳤다.

쿵쿵!

멀지 않은 자리에서 진동이 일어났다.

곧이어 그 진동은 방향을 틀어서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마력을 모아서는 [방패]로 길목을 틀어막았다.

"크악!"

뛰어오던 산적은 그대로 벽에 코를 부딪치며 나가떨어졌다.

"뭐야, 뭔가가 막고 있어."

산적이 손을 뻗으며 방패를 더듬거렸다.

그리고는 시선을 옮기며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네 녀석 짓이구나! 빨리 풀어."

산적이 으르렁거리며 자신이 들고 있던 철퇴를 크게 휘둘렀다.

상당한 충격이 손끝에 전해졌다.

[인내심]이 실력을 발휘하며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게 도왔다.

"풀어! 풀어! 풀라고!"

쿵쿵쿵!!! 세 번의 공격이 연속되었다.

산적의 기세가 주춤거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앞에서 괴물들이 온다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른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좀비 세 마리가 달려왔다.

"씨발, 여기서 뭐 하고 있는데."

"이 새끼가 길을 안 열잖아."

또 다른 산적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본다.

쾅! 다리를 들어 올리고는 강하게 걷어찼다.

"뭔 놈의 벽이 이렇게 단단해!"

"날 상대할 시간에 저쪽에서 오는 괴물들 먼저 쓰러뜨리는 게 좋을걸."

조슈아는 그들이 닥친 상황을 깨닫게 해 주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좀비의 무리.

산적은 포기하고는 몸을 돌렸다.

"거기서 그만 지랄들 하고, 와서 이것부터 좀 잡아!"

사내는 갈고리가 달린 자루로 좀비를 열심히 밀어냈다.

좀비는 물러서지 않았다.

갈고리의 날 끝이 가슴팍을 꿰뚫고도 점점 다가온다.

탁탁!

놈들은 고통스러운 기색 없이 이빨을 부딪친다.

산적들은 숨을 삼켰다.

두려움에 몸을 떠는 것도 잠시.

저마다 무기를 꺼내어 좀비의 팔을 잘라 내고, 어깨를 베어 낸다.

"적당히 죽으라고 좀!"

좀비는 바닥에 쓰러지면 다시 일어났고, 다리가 없다면 기어서라도 움직였다.

산적이 기어 오던 좀비를 세차게 밟았다.

끈적한 살점과 진득한 녹색 피가 신발에 묻어 나온다.

앞으로 세 마리.

변종이 없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조슈아는 주문을 걸었다.

[근력 강화] 주문을 받은 이의 힘이 강해지는 주문이다.

산적이 도끼를 휘두른다.

휘두른 도끼는 전에 없던 위력으로 좀비의 머리를 동강 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도움을 좀 줬어. 전보다도 힘이 강해졌을 거다

산적은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본다.

입이 근질거리지만 수다를 떨 여유는 없었다.

다시 좀비가 온다.

그가 자신이 건 마법의 힘을 빌려 좀비를 상대한다.

"거머리처럼 질긴 놈들."

산적이 거칠게 숨을 내쉰다.

그들의 발밑으로 쓰러진 좀비들이 가득하다.

"그건 그렇고, 거기 너."

산적이 초록색 물약이 든 약병을 흔들어 보였다.

"이게 필요하다면 우리랑 거래를 하자."

조슈아가 해독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건 거래할 가치가 없어."

"뭐라고?"

"빼앗으면 되는데 뭐 하러 거래를 하지?"

조슈아가 손을 뻗었다.

손에서 뻗어 나간 마력이 방패를 통과하며 반대편으로 모여든다.

어느샌가 새로운 방패가 만들어졌다.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방패가 자신에게 다가온다.

"가진 걸 전부 내놔."

"자, 잠깐만 들어 봐! 우리가 가진 걸 몽땅 놓고 가면 괴물을 만났을 때는 어쩌라고!"

"방을 수색해. 뭔가 쓸 만한 물건 하나쯤은 나오겠지."

"그마저도 실패하면!"

"거기서부터는 생각 좀 해라. 어디까지 가르쳐 줘야 만족할 거냐?"

조슈아는 방패를 코앞까지 당겨 왔다.

산적들은 이제 팔을 펼칠 공간조차 없었다.

"제발, 살려 줘."

"물건은?"

"씨발, 이것 없으면 우린 죽어!"

"결정됐네."

산적이 머리를 숙였다.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냉정함]은 인정을 베풀지 말라고 조언한다.

[영리함]은 그들의 행동에 큰 경멸감을 느꼈다.

"너희가 죽인 사람들이 부탁했을 때는 어떻게 했었지?"

조슈아가 죽은 산적의 시체를 곁눈질했다.

그리고는 방패를 자신에게로 당겼다.

쾅!

두 방패가 맞닿으면 투명한 벽 위로 피가 번졌다.

[야만인 무리를 전멸시켰습니다.]

[코인 3개를 획득합니다.]

[외톨이 신의 교리를 수행하였습니다.]

[코인 3개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보유 코인: 60]

조슈아는 방패를 해제하고서는 바닥에 떨어진 해독제를 주웠다.

다음으로 그들의 시체를 뒤적일 차례였다.

"선배!"

타니아가 목소리를 높이며 경고한다.

동시에 [냉정함]이 번뜩인다.

통로 쪽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좀비.

하얀 턱수염과 반쯤 타다 남은 코트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다.

그리고 코트 위로 교수임을 상징하는 독수리 모양의 징표.

좀비가 된 고든 교수였다.

"일단 탈레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산적의 시체는 포기했다.

아직은 이곳의 보스를 상대할 때가 아니다.

* * *

"죽었냐?"

가비누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친구인 탈레온이 문 앞을 지키며 말을 걸어왔다.

상처의 출혈은 잠잠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했다.

화살촉에 묻은 독이 가비누의 몸을 마비시켰다.

"...아직 살아있으니까, 죽은 사람 취급하지 마라."

가비누의 목소리는 그의 창백해진 얼굴만큼이나 약해졌다.

"화살에 맞은 소감은?"

"죽을 만큼 아프다."

"독에 당한 기분은?"

"머리가 어지러워. 열도 오르는 것 같고. 하, 숨 쉬는 것도 힘들어."

"나였다면 간발의 차이로 피했을 거야."

"하하, 웃기고 있네. 그냥 운이 좋았으면서."

"크크, 맞아. 운이 좋았지."

두 사람은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여기에 계속 숨어 있어도 괜찮은 걸까?"

가비누가 불안한 듯이 몸을 떨었다.

"조슈아 경이 숨어 있으면 찾아온다고 했고, 우린 명령을 지켜야 해."

"그렇겠지."

실전에서는 명령이 최우선이다.

두 사람은 교관으로부터 그리 배웠다.

가비누는 한숨을 내쉬고는 시선을 돌렸다.

'버텨라, 가비누.'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정신을 잃지 마라.

조슈아가 남기고 간 말을 지키기 위하여 몸부림쳤다.

만약 의식을 잃는다면 돌아온 그가 실망할 것이다.

그를 두 번이나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친구에 대한 승부욕과 리더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의식을 붙든다.

"누군가 오고 있어."

탈레온이 입을 열었다.

톡톡!

소년은 놀란 토끼처럼 눈동자를 키웠다.

상대가 문을 두드리는 대범함을 선보였다.

소년은 도끼를 꺼내 들고서는 문이 열렸을 때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린다.

먼저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다."

탈레온은 곧장 문을 열지 않았다.

목소리는 똑같으나 다른 인물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연구소에 오기 전에 우리가 출발했던 장소를 말해 봐요."

"라인 타워."

소년은 온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문에 달린 빗장을 풀고서 문을 열자 조슈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날 시험해 본 거냐?"

"죄, 죄송합니다."

"처음치고는 훌륭했다. 대뜸 열어 주었다면 죽도록 교육시킬 작정이었거든."

"...하하."

탈레온이 멋쩍게 웃었다.

농담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방금 그거 선배 흉내야?"

뒤이어 타니아가 들어오며 탈레온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탈레온은 뺨이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이상해?"

"응, 많이."

"이상해 보여도 참아. 조슈아 경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하며 최선을 다한 거니까."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그거 고맙네."

탈레온은 한차례 툴툴거리고는 빗장을 다시 걸어 잠갔다.

그러는 사이에 두 사람은 가비누의 근처로 다가갔다.

"잘 버텼다."

"정신을 잃지 말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가비누가 입꼬리를 올렸다.

"50점을 주마. 네가 아직까지 점수에 신경 쓸지는 모르겠지만."

"이걸로 제가 탈레온을 추월했네요."

가비누는 문 근처를 떠나지 않은 탈레온에게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

탈레온은 혀를 찼다.

다친 친구가 안쓰러우면서도 승부에서 진다면 분하다고 생각했다.

"점수를 두 배로 받는 방법을 하나 알려 줄까?"

"그런 게 있나요?"

조슈아가 산적으로부터 가로챈 해독제를 꺼내 보였다.

"해독제다."

"놈들을 쓰러뜨리신 거군요."

"그래."

"굉장해요. 산적들을 처리하는 데 성공했군요!."

"이걸 마시려면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아야 한다."

가비누는 갑작스레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가 말한 점수를 늘리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화살을 파낼 거다. 만약 네가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면 50점을 추가로 주마. 어떠냐?"

"...그건 좀 힘들 것 같네요."

34화

조슈아는 단검을 꺼내고는 타니아를 가까이 불렀다.

그녀에게 불꽃을 일으키도록 지시했다.

손바닥 위로 타오르는 불꽃에 칼날 부분을 그을리며 소독했다.

"단검으로 살갗을 찢어서 박힌 촉을 빼낼 거다. 그러지 않으면 상처가 썩는다."

"...아프겠죠?"

냉정하던 가비누도 이럴 때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기절할 정도로 아프다."

"...전에도 이런 일을 해 보셨나요?"

"수백 번은 해 봤지."

"그렇게나 많이요?"

"그래."

가비누가 의심스런 시선으로 바라본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화살 빼기는 게임을 하던 당시에 상호 작용으로 질리도록 해 봤다.

직접 경험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냉정함]과 [영리함]이 돕는다면 어떻게든 되리라.

"조슈아 경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건가요? 나이도 저희랑 비슷하잖아요."

"설명하면 길다. 다만 스릴 넘치는 삶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화살에 맞은 건 그렇게 위험한 상황도 아니었어."

"...그게 무슨."

"화살로는 잘 죽지 않아. 이런저런 디버프가 따라오긴 하지만, 도구만 충분하다면 살 수 있다."

가비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조슈아가 들려주는 이야기 어찌나 섬뜩했는지 화살의 통증도 잊을 정도였다.

"이걸 물어라."

조슈아는 재갈로 쓸 만한 손수건 하나를 가비누에게 건넸다.

"금방 끝날 거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상처에 칼날을 집어넣고는 화살이 빠져나오기 쉽도록 틈을 벌렸다.

피와 비명 소리가 흘러나온다.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무심하게 작업을 이어 나갔다.

"으으으윽!"

가비누가 고통에 몸부림치려던 것을 탈레온이 붙잡았다.

조슈아는 묵묵히 단검으로 살집을 헤집으며 화살을 뽑아냈다.

"고생했다. 해독제를 마셔라."

가비누에게 지옥 같던 몇 분이 끝났다.

소년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감사 인사도 내뱉지 못하고서 몸을 웅크리며 해독제를 들이켰다.

앞으로 며칠 동안은 고열과 오한에 시달릴 것이다.

"크으윽."

조슈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손을 뻗었다.

[치료] 트라이덴에서 얻은 새로운 주문.

[냉정함]은 그것을 아껴 두라고 조언했다.

조금 더 유용하게 쓰일 순간이 있을 거라고.

정보가 새어 나가면 자신이 위험에 노출될 것이라고.

"지금부터 내가 보여 준 능력은 다른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조슈아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가비누의 어깨 부근에 손을 올렸다.

마력을 끌어모으고 술식을 계산한다.

따스한 녹색 빛이 상처의 재생을 촉진시켰다.

"...설마, 치료 주문."

빛의 정체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타니아였다.

그녀는 책에서나 읽어 왔던 주문을 목도하고는 눈을 떼지 못했다.

"언제 익히신 거예요?"

"최근의 일이다."

"제가 물었을 때는 하실 줄 모른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랬었지."

조슈아는 손을 떼었다.

벌어진 틈새가 아물며 딱지가 자리 잡았다.

첫 시도로는 성공적이었다.

"나쁘지 않네."

"...감사합니다, 조슈아 경."

"그래, 내가 웬만해선 좋은 건 좋게 넘어가려고 하는 성격인데. 이번에는 정말 고마워해라."

"아, 정말 고맙습니다."

조슈아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머릿속에서 성격적 특성들이 길길이 날뛰었다.

특히나 [영리함]과 [냉정함]이 그랬다.

"혹시 말이다, 내가 치료 주문을 보여 준 대가로 받을 만한 것 뭐 없냐?"

가비누는 잠시 망설이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포장지로 감싼 초콜릿이었다.

"만약을 위해서 숨겨 둔 식량입니다만. 부족할까요?"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다, 그건 그냥 나중에 네가 먹어라. 내 머리는 내가 알아서 잘 정리할 테니까."

"치료 주문을 사용하는 데 부작용이 있는 건가요?"

"비슷한 거다. 내 머리에 망나니가 몇 마리 살고 있는데 말이야, 이놈들이 서열도 까먹고 기어오르는 중이거든."

성격적 특성에게 막말을 내뱉자 놈들이 점점 더 흥분한다.

이해는 한다.

[치료]를 활용할 순간은 많았다.

수많은 기회를 지나치고서 처음 사용한 것이 가비누였다.

돌아오는 보상은 없었고, 정보가 노출될 위험만이 생겨 버렸다.

이곳은 게임 속이다.

게임이라면 어디까지라도 비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니었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소년이 고통에 겨워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후회하게 만들지 마라."

"약속하겠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누구에게도,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대답은 가비누가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학생 전부였다.

머리가 차분해진다.

이제 연구소에 수색을 이어 갈 시간이었다.

"...저기."

타니아가 말했다.

"조금 전 그 괴물은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타니아는 걱정했다.

산적들을 쓰러뜨리고 뒤이어 나타난 괴물.

그것은 이 연구소의 주인인 고든 교수였다.

보통의 괴물보다 진화한 변종.

그 변종들 중에서도 눈에 띄게 강한 생물이었다.

"애써 사냥할 마음은 없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만약 피할 수 없다면 사냥해야겠지."

조슈아는 생각했다.

이곳에 떨어지며 무엇 하나 원하는 대로 흘러간 적은 없었다.

고난의 연속.

이 게임은 마치 살의를 지닌 것처럼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가시밭길을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가 없다.

그러니 고든하고도 만나겠지.

빌어먹을 세상.

당연하게도 그러한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다.

배낭 안에서 눈꽃 결정이 들어 있던 유리병을 꺼내 놓았다.

"걱정하지 마라. 우린 이번에도 살아남을 테니까."

이제 연구소의 생존자와 만날 시간이었다.

조금 전 타니아가 했던 의심.

연구소의 술식이 아직까지 유지되는 이유.

마력을 주입하는 인간을 찾아야 한다.

***

연구소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제어실.

연구소에 새겨진 술식은 모두 이곳을 통해 관리가 되었다.

한 여성이 그곳에서 손톱을 깨물었다.

초췌한 몰골에 푸석푸석해진 머릿결.

생기를 잃은 눈빛을 둘 곳을 잃고 방황하였다.

'누구지? 누가 온 거야?'

연구소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곳에 들어오려 많은 인간들이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누군가가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만에 술식을 해석했다.

소름이 돋는 솜씨였다.

마법사라면 학생은 아니리라 짐작했다.

교수이거나, 학회에 소속된 실력자.

그가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마력을 방출하면서 다가오고 있어.'

침입한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다.

함정일까?

아니라면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함인가?

'근처까지 왔어.'

이제는 마력을 읽어 낼 필요도 사라졌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명확하게 들린다.

한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세 명 이상.

제어실의 닫혀 있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불 속성의 마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다면 그건 저들에게 큰 걸림돌은 아니리라.

한차례 강한 마력이 피어오른다.

이윽고 잠겨있던 문이 열어젖혀진다.

"앗, 생존자가!"

들어서며 입을 연 것은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그녀는 아카데미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어려 보였다.

곁에 있던 다른 소년들도 비슷한 연배였다.

딱 한 명.

세 명보다도 어른스러워 보이는 소년 한 명이 있었다.

그는 마치 냉철함을 갑옷처럼 둘러 입었다.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주변을 훑어 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루이젤라."

"너, 어떻게?"

연구소에 갇힌 이후.

다시는 듣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자신의 이름이었다.

낯설면서도 반가운 기분이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우리에게 뭘 해 줄 수 있냐는 점이죠."

소년은 문을 닫고는 자신을 가로질러서 벽 끝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벽을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루이젤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너, 뭐 하는 거니?"

"분명 이쪽에 고든 교수의 금고가 있을 겁니다. 그걸 확인하는 중이에요."

"잠깐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녀는 경악했다.

연구소의 소속된 학생도 아닌 그가 교수의 금고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저희가 설명할게요."

빨간 머리카락의 소녀가 자신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모양인지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루이젤라는 수색하는 소년을 뒤로하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였다.

"그러니까 너희는 타워에서 이곳까지 왔다는 얘기니?"

"맞아요."

"다른 사람들은? 분명 너희와 함께 온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니야."

"저희 네 명이 전부예요."

루이젤라는 말문을 삼켰다.

그녀에게서 거짓말을 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고작 학생 4명으로 타워로부터 한참 떨어진 이곳까지 찾아왔고, 연구소로 들어왔다.

심지어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믿을 수 없었다.

바깥이 어떤 상황인지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열쇠가 없네요."

조슈아라는 이름의 학생이 방 안을 둘러보고는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누가 가지고 있죠?"

금고를 발견해 낸 그는 열쇠를 찾는 데 적극적이었다.

안타깝게도 열쇠는 이곳에 없었다.

"금고가 목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아. 저건 열 수 없어."

"...무슨 얘기인지 짐작이 가네요."

조슈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미 사정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그의 일그러진 눈빛이 들어왔던 문을 쏘아보았다.

"교수가 가지고 있는 모양이죠?"

그녀는 이제 소년이 모르는 게 무엇일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포기해.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랑 싸우면 너희 모두 죽어."

"하, 정말이지."

냉철한 그조차도 교수와 싸우는 것은 두려운 모양이었다.

땅바닥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쉰다.

"이번에도 가장 싫은 루트로 진행되다니."

그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시선을 허공에 향했다.

"일주일만 더 빨리 도착했더라면 다치지 않고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변종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되찾으니, 일찍 만났다면 약한 상태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루이젤라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년의 말대로라면 일주일 전이라면 교수를 죽일 수 있었다는 말처럼 들렸다.

어이가 없었다.

눈앞의 학생이 자질이 뛰어나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그래 봐야 학생이었다.

"조금 다칠지도 모르겠네."

조슈아는 결심이 선 눈빛이었다.

"너, 설마 싸울 생각이니?"

"그래야죠. 안 그러면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으니."

"죽기 싫으면 관둬!"

그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는 문 앞으로 걸어갔다.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우두머리를 잡는다."

"조금 전 산적과 싸울 때 불타고 있던 괴물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자연스럽게 전략을 짜기 시작한다.

세 학생들은 조슈아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내 근처로 다른 놈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라. 이게 이번에 너희의 역할이다."

학생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이어 자신들의 무기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거라도 드시겠습니까?"

조슈아가 다가와 가방에 들어 있던 비스킷을 건네주었다.

루이젤라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제어실에 남아 있던 식량은 며칠 전에 바닥을 드러냈다.

체면 따윈 잊고서 비스킷을 게걸스레 먹었다.

입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조차 아까울 지경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응?"

"교수를 쓰러뜨리고 금고를 열면 저흰 이곳에서 떠날 겁니다. 만약 저희와 함께 타워로 돌아가고 싶다면 밥값을 해 주세요."

"...그러다가 너희와 함께 개죽음을 당하면 어쩌라고."

"선택은 자유입니다만, 제안은 한 번만 하겠습니다."

루이젤라가 식은땀을 흘렸다.

단 한 번의 탈출의 기회.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하여야만 하는 걸까?

"뭘 하면 되는데?"

조슈아가 큼지막한 자루를 하나 떨어뜨렸다.

"부상자이시니 특별히 우대해 드리겠습니다. 그 가방 안에 쓸 만한 물건 좀 채워 넣어 주세요. 연구소 내부는 훤히 꿰뚫고 있으시잖아요."

"...그 정도라면."

"5분 정도 걸릴 겁니다. 만약 자루의 절반도 못 채운다면 실격입니다."

루이젤라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소년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교수를 혼자서 쓰러뜨리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시간 제한까지 걸었다.

그것도 5분이라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

"날 놀릴 생각이니?"

"저는 진지합니다."

"조금이라도 어른인 내가 충고 하나만 할게. 자만은 좋지 않아. 전략을 처음부터 손보는 게 어때?"

소년은 살며시 웃고는 문으로 향하였다.

조금 화가 치솟았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걱정되어 한 충고였다.

"저기... 루이젤라 씨."

타니아가 다가왔다.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도 돼."

"아, 그럼 언니라고 부를게요."

"그래, 무슨 일이니?"

"선배가 방금 5분이라고 말했잖아요. 그거 주의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루이젤라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소리야?"

"선배가 시간으로 단언하면 그 일은 무조건 그 시간 안에 끝나요."

"설마, 너도 저 5분이란 시간을 믿는 거니?"

"전 믿어요. 그러니까 언니도 믿으셨으면 좋겠어요. 안 그러면... 나중에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35화

조슈아는 학생들에게 저마다 맡을 구역을 정해 주었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모두가 사라진 다음에는 눈꽃 결정을 꺼내 들었다.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지만.'

보스 몬스터와의 전투.

실패하면 죽는다.

게임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스급과는 전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직은 적절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놈이 지니고 있었다.

'해보는 수밖에.'

조슈아는 고든 교수를 찾아 나섰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연구소 안에서 가장 강한 마력을 향해 나아가면 된다.

몇 개의 복도를 지나치고.

찾고자 했던 상대방과 맞닥뜨렸다.

"크르르."

좀비가 된 교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강심장]이 없었더라면 제자리에서 오줌을 지렸을 것이다.

그가 천천히 다가온다.

피해서는 안 된다.

지니고 있던 눈꽃 결정 6개를 모조리 맞춰야만 '빙결' 상태로 만들 수 있다.

하나만 빗나가더라도 다음이 없었다.

"으아아!"

고든 교수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마력이 목소리에 반응하며 여러 불덩어리를 허공에 만들었다.

7등급의 불구슬 마법.

이제부터 저것이 자신을 향해 퍼부어지리라.

손에 마력을 모아 [방패]를 펼쳤다.

콰아앙!

교수가 소환한 불구슬은 자신의 방패를 가볍게 부쉈다.

'지금 내 마력으론 막아 내기 힘들다.'

조슈아는 방패를 들이밀었다.

화염을 머금은 방패.

이번 연구소 공략을 위하여 자신이 준비한 수단 중 하나였다.

교수 레벨이라면 현재 내 마법으론 감당하기 어렵다.

"해 보시지."

고든 교수는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화염을 내던졌다.

방패가 불꽃을 막아 내고.

입고 있던 망토가 불씨를 흘려보낸다.

그럼에도 몸 어딘가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따끔거렸다.

아프다.

화상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이라 했던가?

[인내심]이 정신을 지탱한다.

이 싸움에서 그 어떤 성격적 특성보다 [인내심]의 역할이 중요했다.

'내가 쓰러질지 말지는 전적으로 너에게 달렸다.'

[인내심]이 흥분했다.

평소에는 [냉정함]과 [영리함]에 의지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내 생명줄은 [인내심]이 쥐고 있었다.

[체력이 상승합니다.]

[체력이 상승합니다.]

[후천적 특성 – 화염 저항(하)를 획득하셨습니다.]

불길은 견뎌 내는 동안.

내 몸은 거기에 맞춰 조금씩 성장해 간다.

기뻐해야 할 일일까?

이 고통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참아라.

참아야 한다.

아직 세상에 미련이 남아 있다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한 번도 클리어하지 못한 이 게임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크르르."

한바탕 불길이 치솟고 고든 교수의 움직임이 잠잠해졌다.

마력을 쓴 후유증이다.

지체 없이 들고 있던 눈꽃 결정 유리병 2개를 집어 던졌다.

유리병이 좀비와 부딪혀 폭발한다.

강렬한 냉기가 통로를 휘어 감쌌다.

좀비는 눈에 띄게 느려진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

고든 교수는 얼어붙은 부분을 깨부쉈다.

다른 평범한 좀비처럼 달려들거나 하지 않는다.

짐승의 본능.

사냥감을 마주하였을 때.

어떻게 싸우면 좋은지 본능적으로 판단한다.

그는 날 마법으로 태울 심상이다.

살아 있는 싱싱한 먹이보다 구운 먹이가 이 좀비의 입맛에 맞는 것일까?

아무튼 내게는 기회였다.

"인내심 싸움이군. 하지만 넌 잘못 걸렸어. 왜냐하면 지금 내 머릿속엔 근성 하나는 최고인 놈이 자리 잡고 있거든."

좀비는 상관하지 않았다.

나도 놈이 어떤 생각이든 상관없었다.

불길을 흡수하던 방패가 어느 순간 부서지고.

망토는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키아아악!"

고든 교수가 비명을 질렀다.

먹이가 반항한다.

포식자인 그에게는 어색하고 낯선 상황이었다.

그가 여느 좀비처럼 이성을 잃어 간다.

침을 흘리며 몸을 축 늘어뜨리고는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몇 번이고 봐 왔지만 적응되지 않는 공포 영화의 한 장면.

나는 [섬광]을 사용하여 좀비의 시야를 빼앗았다.

눈이 먼 좀비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뜨겁다.'

교수의 몸을 뒤덮고 있는 불길.

근처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땀샘이 폭발하는 느낌이다.

현기증을 이겨 내며 눈꽃 결정을 집어 던졌다.

"으아아악!"

좀비가 발버둥 쳤다.

놈이 땅바닥을 내려친다.

그러자 바닥에서 불길이 치솟더니 나에게 달라붙었다.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방패에 담긴 마력이었다.

방패가 불꽃을 빨아들인다.

그러나 인챈트된 아이템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희뿌연 금속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 가고.

왼손은 방패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녹아내릴 것처럼 고열에 시달렸다.

콰직!

방패에 금이 갔다.

몇 번의 화염을 흡수하며 방패에 필요 이상의 부담이 생겼다.

서둘러야 한다.

입고 있던 망토만으로는 고든 교수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다.

'앞으로 두 개.'

남아 있는 눈꽃 결정을 헤아렸다.

거리를 벌릴까?

아니, 고든 교수의 범위는 생각 이상으로 넓었다.

어디로 빠져나가든 불꽃은 추격해 온다.

남은 방법은 몇 개 없다.

그리고 [강심장]은 가장 위험한 방향으로 자신을 유혹한다.

정면.

꾸물거릴 시간은 없었다.

전략이란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은 반사적으로 떠올린 방향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나갔다.

이 세계에서 몇 번이나 실패해 온 나이기에 안다.

아무런 희생 없이 얻는 것은 없다.

승리도 마찬가지였다.

"크아악!"

좀비가 몸을 날렸다.

아주 잠깐.

내 몸은 생각했던 방향과는 반대로 움직였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사고를 뒤덮으며 잠식한다.

[냉정함]이 정신 차리라며 다독였다.

그 격려에 힘입으며 나는 흔들렸던 정신을 붙잡았다.

양손 위에는 눈꽃 결정이 들려 있었고, 그것들을 좀비의 머리와 몸에 각각 던졌다.

결정이 손끝을 떠났을 때는 시야가 흐릿해졌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공존하는 듯한 공기.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폐가 터질 듯처럼 괴로웠다.

"헉헉!"

거칠게 숨을 내쉰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꼴사납게 쓰러졌다.

나는 결과를 확인하기 위하여 서둘러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든 교수는...

[고든 연구소의 보스를 사냥하였습니다.]

[코인 15개를 획득합니다.]

[외톨이 신의 교리를 수행하였습니다.]

[코인 5개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보유 코인: 80]

죽었다.

상태창이 증거였다

온몸이 얼어붙은 채로 몸 곳곳이 산산조각 났다.

코인 20개.

지금껏 이 세계에서 해 왔던 어떤 일보다도 높은 보상이었다.

"기사들과 맞붙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쉬고 싶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다.

[냉정함]이 어디 엄살이냐며 머리에 자극을 준다.

제기랄.

이 성실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 네 말이 맞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의 몸이 무너져 내리며 그가 지니고 있던 소지품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안에는 금고를 여는 열쇠가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위에 기척을 읽어 내린다.

아이들은 잔당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같이 보지 못해서 아쉽네.

조슈아는 제어실로 돌아갔다.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적막한 공간에서 홀로 금고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

[고든 연구소의 금고를 여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코인 20개를 획득합니다.]

[보유 코인: 100]

코인 한번 짭짤하네.

100개쯤 되면 초반 시점에서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독창성의 강화는 물론.

아이템의 구매도 가능하다.

하나 이건 이번 연구소 수색에 얻는 보상에 덤일 뿐이었다.

내 진짜 목적이라 하면.

"이거지."

고든 연구소는 최근 어떤 야생화를 재배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마력초.

연금술사들 사이에서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희귀 약초였다.

이것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시약도 만들고, 포션도 만들 수 있었다.

나는 답지 않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마력초를 어떻게 다룰지는 생각해 놓았으니까.

* * *

루이젤라는 조슈아가 건넨 자루에 필요한 물자를 채워 넣었다.

물과 식량.

연구소의 구조에 익숙한 그녀에게 그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걸 들고서 혼자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

조슈아라는 이름의 소년.

그 소년을 향한 동료들의 신뢰는 대단했다.

루이젤라 본인이 보기에도 그의 리더십은 10대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교수를 이길 이유로는 부족하잖아?'

처음 만난 소년을 믿기보다는 현실을 선택하고 싶었다.

저건 평범한 괴물이 아니었다.

식욕이란 광기에 사로잡혀 두려움을 몰랐다.

그런 주제에 살아 있던 시절의 힘이 남아 있다.

학생의 레벨론 무리였다.

"...어쩔 수 없어. 나도 살고 봐야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 통로에 넌지시 사과의 말을 던지고는 입구로 뛰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으아아아악!"

루이젤라는 비명을 내질렀다.

입구 앞에는 괴물이 한가득이었다.

안쪽이 소란스러워지며 몰린 녀석들이었다.

부패된 메마른 손들이 코앞을 휘적거렸다.

그녀는 문을 도로 닫으려고 시도했다.

"제발, 닫혀라."

벌어진 틈새로 괴물들이 자신의 몸뚱이를 욱여넣었다.

힘으론 무리였다.

하여 머릿속으로 술식을 떠올렸다.

이곳 연구소의 직원은 모두 불 속성을 지닌 마법사였다.

'안 돼,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

계산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마법을 쓴다는 말인가?

괴물들의 갈라지고 끈적한 목소리.

문을 두드리는 완력.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먹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애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루이젤라가 혼자서 끙끙거리고 있을 때.

앞쪽에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탈레온이란 이름의 소년이었다.

그가 들고 있던 검으로 신속하게 괴물의 팔들을 잘라 냈다.

그리고는 문을 닫는 데 힘을 보탰다.

쾅!

"...고마워."

그녀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탈레온은 싸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도주하려고 했군요."

탈레온이 루이젤라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자, 잠깐만."

"어떤 무리에도 규칙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무리에서도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되는 행위가 있어요."

"미안, 생각이 짧았어."

"사과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좀비가 안으로 들이닥쳤을 테고, 예기치 못한 적을 만난 우리는 붕괴되었을 수도 있어요."

탈레온이 당장이라도 벨 것처럼 검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루이젤라가 몸을 떨었다.

소년의 살기는 진짜였다.

16살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단련되었다.

"정말로 벨 생각은 아니지?"

"제가 베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하고도 남을 거야. 하지만 잘 생각해 봐. 16살인 너에게 사람을 살해하는 경험은 너무 가혹하지 않니?"

"설득할 생각은 집어치우세요. 전 조슈아 경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어요."

"부디 용서해 줘. 저, 저걸 봐!"

루이젤라가 자루를 눈짓했다.

"그 아이가 시키던 대로 자루를 채워 넣었어."

탈레온이 검을 겨눈 상태로 자루를 곁눈질로 확인했다.

자루의 안이 제법 두둑하게 쌓였다.

"당신을 어떻게 할지는 조슈아 경이 결정할 거예요."

"아, 알았어. 근데 오지 않는다면?"

"오지 않는다?"

"네가 괴물로 변한 교수를 만나 보지 못해서 그래. 그 녀석은 학생이 어쩔 상대가 아니야!"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했던 일들 중에서 학생이 할 만한 일은 없었어요. 모두 말도 안 되는 일들이었지."

루이젤라는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이젠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희망을 걸어야만 한다.

멍청이, 얼간이, 고지식한 녀석!

현실적으로 생각하란 말이야!

속으로 탈레온을 힐난했다.

"너무 답답해하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30초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30초?"

"조슈아 경이 5분이면 끝난다고 했으니까요."

"하! 너, 그 말을 믿는 거니?"

"믿죠."

"그래, 어디 지켜보자. 이제 곧 누구의 말이 정답인지 알 수 있을..."

루이젤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30초는 흐르지 않았다.

대략 15초가 남았다.

약속했던 시간을 남겨 놓고서 조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두 학생들과 함께였다.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만."

조슈아가 루이젤라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서 고개만 숙였다.

"조슈아 경,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됐다. 네가 검을 뽑았고, 그녀의 목에 상처가 생긴 것만 봐도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되니까."

조슈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한다.

그녀가 도망치려 했다가 발각된 사실은 놀라운 축에도 끼지 못했다.

"너... 고든 교수는 어떻게 했어?"

조슈아는 네모난 키트를 내밀었다.

"그, 그건! 보존에 성공한 마력초 씨앗! 그걸 얻었다는 얘기는."

루이젤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이해에서 완전히 벗어난 일이었다.

괴물이 되었다고는 하더라도 상대는 교수였다.

"부탁드린 자루는 어찌 채운 모양이네요."

조슈아가 그녀 옆에 있던 자루를 들어 올렸다.

"아아, 맞아. 어때?"

"이걸 들고서 혼자 도망치려고 했고요."

"그, 그러니까 여기에는 나름의 사정이...."

"변명은 됐습니다."

"목, 목숨만은 살려 줘. 널 의심해서 미안해."

"그러죠. 대신에 당신에게 나눠 주려고 했던 몫은 제가 챙기겠습니다."

루이젤라가 울먹이며 그것을 허락했다.

"그런데 왜 실패한 겁니까?"

"응?"

"도망치려던 것 말입니다."

"입구에 괴물들이 깔려 있었어. 마법을 뚫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좀처럼 술식이 완성되지 않아서."

"그렇군요."

조슈아는 입구로 천천히 향했다.

온갖 디버프가 그녀의 능력을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자신은 달랐다.

문 너머에 좀비가 몇 마리나 있던 계산이 틀릴 일이 없었다.

우레의 반지를 꺼내 들고는 손가락에 끼었다.

"그, 그건 우레의 반지, 6등급의 벼락이 담겨 있는 반지잖아."

"잘 아시네요."

"너 뇌 속성이었어?"

"아뇨, 제 속성은 아닙니다만."

"바보야! 자기 속성도 아닌 아이템을 써서 어쩌려고 그래. 게다가 6등급이잖아. 네가 계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지.

본인 속성도 아닌데 6등급 아이템을 쓰려 하다니.

실패한다면 손을 잃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제 걱정은 마시고 뛸 준비나 하세요.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아이들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망설이던 루이젤라도 별수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이제 벼락을 소환할 차례였다.

[영리함]이 머리를 회전시켰다.

카드득!

뻗은 오른손에서 전류가 흘러나오며 그것은 뱀처럼 기다란 형상을 취하였다.

술식의 계산이 매끄럽게 진행된다.

마법사인 타니아와 루이젤라는 그 광경에 전율했다.

두 견습 기사들도 감탄했다.

마법에 문외한인 그들조차도 조슈아가 소환한 번개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자, 귀환할 시간입니다."

번개의 뱀이 입구를 집어삼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36화

라인 타워의 수장.

로드웰이 창문을 내려다봤다.

맑게 갠 하늘 아래로 부서진 폐허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살 것 같지 않은 장소 위로 시커먼 실루엣들이 움직인다.

타워에서 지내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상납금을 내기 위하여 위험을 각오하고 수색을 하던 중이다.

자신이 내쫓았다.

저들 중 누군가는 죽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 이라는 말로 포장하기에도 우습군. 나는 내가 살고 싶어서 저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는 것뿐이야.'

톡톡.

안으로 들어온 것은 다른 기사였다.

그의 손아귀에는 어떤 종이가 들려 있었다.

"보고하겠습니다."

로드웰이 창문으로부터 멀어졌다.

나무로 된 의자에 몸을 앉자 부하 기사가 말을 이었다.

"현재 타워 안의 총원은 167명입니다. 일주일 전과 비교하여 70명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렇군."

"행방불명이 된 사람들 중 40명은 타워 북쪽에 위치한 연구소로 향했던 모양입니다."

"지금껏 퍼뜨린 정보 중에는 가장 효과가 있었네."

부하 기사는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연구소에 대한 정보가 학생으로부터 흘러나왔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기사들은 학생들이 제보하기 이전부터 고든 연구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애당초 학생에게 정보를 흘린 것은 기사들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많은 이들이 그곳으로 향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당분간 식량 걱정은 없을 것 같습니다. 입이 줄어든 덕분입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지?"

"식량 담당인 토마스 얘기로는 한 달은 충분하다고 합니다. 먹는 양을 줄인다면 보름은 더 견딜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빵 하나로 세끼를 나눠 먹고 있는데, 여기서 더 줄인다는 것은 굶어 죽으라는 얘기처럼 들리네."

"어쩔 수 없죠. 저도 배부르게 먹어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기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았다. 나가 봐."

"수고하십시오."

기사가 경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로드웰은 상념에 빠졌다.

라인 타워는 식량난에 처해 있었다.

파견을 보낸 기사들이 임무에 실패한 게 원인이었다.

남은 것이라도 지켜야 한다.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은 단순하고도 무자비한 것이었다.

생존자를 줄였다.

직접 손을 쓸 필요는 없었다.

검을 쓰지 않더라도 그들을 없앨 방법은 가득했다.

"이 짓거리를 계속하다가는 잠자리가 어수선하겠군."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죄책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존 본능이 그 모든 것들을 짓눌렀다.

쾅!

누군가가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루실 레인우드였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들어와서는 여러 의자 중에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장갑을 책상 위로 집어 던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 좋은 일 있었어?"

로드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세 명을 때려눕히고 오는 길이야."

"무슨 일로?"

"난동을 부렸거든. 식량을 내놓으라면서."

"최근 자주 일어나네."

"날마다 사람들이 위태로워지고 있어. 이대로라면 폭동을 일으킬지도."

로드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속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그래 준다면 사람들을 내쫓는 명분으론 충분하다.

진압 과정에서 피를 흘리더라도 그들은 저항하지 못한다.

"단장!"

루실이 목청을 높였다.

그녀가 로드웰을 경칭으로 불렀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로드웰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상황을 이용할 생각이라면 관둬. 나한테 죽도록 맞기 싫으면."

생각을 읽혔다.

통찰 따위가 아니었다.

함께한 시간이 길었던 탓에 서로의 생각을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때가 있다.

로드웰은 침음을 삼켰다.

"네가 내 곁에서 사라진다면 몇 달은 더 오래 살아남을 텐데."

"내가 없다면 당신은 인간성을 완전히 잃겠지."

"정말이지, 지는 법을 모르네."

루실이 사납게 노려본다.

로드웰은 화제를 돌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조슈아."

"응?"

"네가 칭찬했던 소년 말이야.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그 아이라면 연구소로 향했을 텐데."

로드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타워 안에서 소재지가 밝혀진 연구소라면 한 곳뿐이었다.

북쪽에 있는 고든의 연구소.

"생각했던 것보다 좋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네."

"무슨 의미야?"

"아직 학생인 그에게는 맞지 않는 장소에 보냈다는 얘기다. 그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연구소로 향해서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없어."

"그건 모를 일이지."

루실이 팔짱을 끼며 아니란 듯이 부정했다.

"참고로 타니아도 그와 함께 보냈어."

"애지중지하며 찾아낸 동생을 사지로 내몰았다고?"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나는 조슈아 곁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해서 함께 보낸 거야."

로드웰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동생에게 쏟는 애정은 극진했다.

그리고 마법사로서 재능이 출중한 그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아카데미의 숱한 학생들 중에서도 루실에게 최고는 언제나 타니아 레인우드였다.

한데 반응이 달라졌다.

그녀와 기사단으로서 지낸 3년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태도였다.

"조슈아를 타니아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거냐?"

"그런 셈이네."

로드웰이 턱을 쓰다듬었다.

신뢰가 지나치면 파멸을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안목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래도 불안했다.

"연구소에는 진화체가 있어."

괴물에게도 종류가 있다.

그저 물어뜯는 게 전부인 놈들이 있는가 하면.

특이한 방식으로 사냥하는 개체들도 있었다.

로드웰은 그들을 가리켜 진화체라고 불렀다.

"아마도 교수겠지. 교수의 능력은 저마다 다르지만, 학생들보다 위라는 것만은 분명해. 조슈아는 실패할 가능성이 커."

"아쉽네."

"음?"

"제네럴(4등급)이나 되는 당신이 그 아이의 진면목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게."

"뭐,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로드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다시 창문으로 향했다.

바깥을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보다 조금 위쪽에서 작은 무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적인가? 아니면 다른 집단에서 찾아온 전령인가?'

무리는 외곽을 순찰하던 기사와 맞닥뜨렸다.

전투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몇 분간 대화를 나누던 것처럼 보였고, 기사가 길을 터 주었다.

'북쪽.'

방금 전 루실과 조슈아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기 때문일까?

그들이 내려오던 방향이 신경 쓰였다.

기사가 독수리를 날아 올렸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독수리는 훈련된 대로 타워 상층부의 창가에 앉았다.

콕콕!

독수리가 날카로운 금색 부리로 창문을 두드렸다.

로드웰은 창문을 열어 녀석을 맞이하였다.

발목에 묶인 쪽지를 풀어서는 기사가 적어 놓은 글귀를 확인했다.

"내려가자."

"나도?"

"그래, 너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거든."

* * *

로드웰이 일 층으로 내려갔을 때.

조슈아와 그의 일행들은 타워 안으로 들어온 다음이었다.

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귀환한 그들을 향해 시선을 곤두세웠다.

그들의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녹색의 피로 전신을 뒤덮었다.

괴물을 사냥했다.

눈썰미가 좋은 이들은 그들의 차림이 타워를 나섰을 때와 다르단 것도 알아차렸다.

어쩌면 사람도 죽였다.

그리고 빼앗은 것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못 이겨 하나둘 자리를 빠져나갔다.

타워에서 함께 지낸다는 공통점을 제외한다면 이들은 철저하게 타인이었다.

환영하기보다는 경계심을 높이는 쪽을 선택했다.

주변에 내려앉은 침묵은 로드웰이 입을 뗀 다음에야 사라졌다.

"꽤나 험하게 놀다 온 모양이야."

"그렇네요."

"어딜 들렀다 오는 길이지?"

"연구소입니다."

로드웰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올 뻔한 탄성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감탄이 나올 만한 일이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장소에서는 표정이 흔들리면 안 된다.

그건 수많은 생존자를 이끄는 리더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설령 기적에 가까운 공적이라도.

"저는 기사가 아니기에 로드웰 경에게 보고해야할 의무는 없지만, 그럼에도 들으시겠습니까?"

조슈아는 대화의 주도권을 거머쥔 것처럼 행동했다.

로드웰은 건방지다 생각하면서도 그의 의견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연구소로 향했던 생존자 태반이 죽었다.

보고에 의하면 무려 40명이다.

지옥으로 이끄는 수렁.

그런 표현이 아깝지 않은 장소를 공략해 낸 것이 학생 4명이었다.

"부디 듣고 싶군."

"우선 데리고 간 일행들을 쉬게 해 주고 싶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조슈아는 몸을 돌려서는 탈레온과 가비누를 불렀다.

"이제부터 너희 둘은 타워 안에서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한다. 밤낮을 따지지 말고, 항상 상황을 살펴라."

"다른 생존자들을 조심하라는 얘기이죠?"

눈치 빠른 가비누가 조슈아의 경고를 알아들었다.

"그래."

"알겠습니다."

"타니아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루실 경이 있는 한, 너를 표적으로 삼을 놈은 없다."

"알았어요."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곤 기지개를 피며 안으로 들어갔다.

타니아는 로드웰과 함께 내려온 루실에게 곧장 뛰어갔다.

세 사람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쪽은?"

로드웰은 아직까지 조슈아의 곁을 지키던 한 여성에게 눈길을 주었다.

노을을 빨아들인 듯한 주홍빛의 긴 코트.

코트의 색과 짝을 맞춘 듯한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로드웰은 그것이 불 속성 마법사의 특징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낯선 장소에 온 것에 불안해 보였다.

뻣뻣한 자세로 서서는 눈동자를 바삐 굴린다.

필사적으로 아는 사람을 찾는 눈치였다.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별빛 기사단 단장님이시죠? 저는 루이젤라라고 합니다. 고든 교수님 밑에서 일하던 사람입니다."

"...연구소 안의 생존자."

"제가 이곳에 머물면 안 될까요?"

로드웰은 다시 시선을 조슈아에게 향했다.

그녀를 머물게 하고 싶다면 그건 자신이 선택할 바가 아니었다.

타워의 규칙.

기사단에게 도움을 주거나, 물자를 상납해야만 이곳에서 머물 수 있었다.

"대화가 끝나면 그녀의 일주일 치에 해당하는 물자를 상납하겠습니다."

조슈아는 거부감 없이 대답했다.

이제 소년에게 일주일 치의 식량을 상납하는 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방금 들으신 대로입니다. 소년이 당신을 한 번 더 구해 주네요."

루이젤라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소년을 바라봤다.

감정이 폭발한 듯한 그녀는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허리만 여러 차례 숙였다.

"루이젤라, 당신을 당장이라도 쉬게 해 주고 싶지만, 지금은 당신이 필요합니다. 소년의 얘기에 증인이 필요하니까요."

"저, 저라도 괜찮다면 조슈아를 돕게 해 주세요."

루이젤라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간곡히 요청했다.

한 번은 연구소에서 그를 배신하려고 했다.

돌아오던 도중에 버려져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조슈아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은혜는 갚아야 한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럼 함께 위로 올라가시죠. 얘기는 거기서 듣겠습니다."

* * *

"...하."

로드웰은 혀를 찼다.

조슈아로부터 모든 얘기를 전해 듣고, 루이젤라가 증언해 줬다.

경악스럽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교수를 사냥했다고?'

로드웰은 대화를 듣기 전에 어떤 사실을 단정 지었다.

소년은 교수와 싸움은 피했다.

연구소 공략에 성공했다면 그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조슈아는 자신이 정한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했다.

눈앞의 아이가 진심으로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실력으론 비교가 될 수 없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수고 많았다."

로드웰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좋은 걸 얻었겠구나. 교수들은 저마다 소중한 것들을 꼭꼭 숨겨 놓으니까."

"그렇네요."

"아니라고는 대답 안 하네?"

"의문을 남기면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너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아?"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조슈아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널 해할 마음은 없다. 그런 영양가 없는 행동을 할까 보냐."

"그거 다행이네요."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도 있지. 기사가 되어 보는 건 어떠냐, 조슈아?"

조슈아의 눈길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기사.

탈레온과 가비누와 같은 견습 기사들의 목표이자, 또 다른 시작.

많은 견습생들이 그 문턱에 다다르지 못하고 좌절을 맛보며 꿈을 포기했다.

그 꿈같은 제안이 소년에게 날아들었다.

무려 한 기사단을 책임지는 단장으로부터의 제안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서임의 과정은 생략된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내 영지 일부를 하사하고, 쓸 만한 가신 몇몇을 너에게 내주며 관계를 맺고 싶었을 거다."

"말씀하신 것들을 얻지 못한다면 제게 기사라는 호칭이 무슨 의미가 있죠?"

"몰락 귀족인 네 신분의 회복을 꾀할 수 있을 거다. 기사라는 이름값만으로 주변의 관계가 뒤바뀔 것이고, 기사단의 정보와 물자도 공유한다. 상납금에서도 자유로워지지. 이만하면 네가 얻는 이득으론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기사로서의 장점은 충분히 설명했다.

이제 대답을 기다릴 차례였다.

37화

조슈아는 생각했다.

로드웰의 제안에 따라 별빛 기사단 밑으로 들어간다면 당장은 안전했다.

그의 배경을 빌리자면 얼추 몇 달.

이 게임의 난이도를 떠올리면 무척이나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결국엔 죽는다. 그리고 좋은 것도 아니야.'

기사의 밑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은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인간이 된다.

어느 시대상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귀족이 되는 것에도 흥미가 없었다.

신분이 상승하면 도움은 된다.

하나 그것이 기사가 되었을 때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따라서 대답은 결정됐다.

"거절하겠습니다. 제 그릇에 맞지 않는 것 같거든요."

"그릇이 안 맞다.... 내 귀에는 기사단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로드웰은 짧게 신음했다.

"만약 첫날에 제안하지 않은 게 불만이라면 내가 사과하고 싶은데."

"그때도 대답은 같았을 겁니다."

"그러냐?"

"예."

"혹시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거냐? 조슈아 너, 상납을 갱신하지 않고 있던데, 앞으로 며칠 뒤면 이곳에 출입이 금지될 거다."

조슈아의 얼굴은 여전히 냉정했다.

이쯤 되면 그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미치도록 궁금할 지경이었다.

"근처에서 생활할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홀로 야외 생활을 하겠다고? 그것 참 걸작이네."

"의외로 잘 버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교류는 계속할 생각입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로드웰은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기사단장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 보려 한다.

거기까지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

저 나이 때 재능을 깨달은 소년들은 늘 혈기 왕성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이 소년은 한술 더 떠서 자신이 매달리도록 강요했다.

"한 대 때려 주고 싶네."

"로드웰 경이 진심으로 때리면 전 죽습니다."

"정말이지,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하는군!"

로드웰은 소년과의 대화가 지긋지긋해졌다.

손을 허공에 휘적거렸다.

"나가 봐라. 네가 가장 고생한 것 같으니까."

"감사합니다."

조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물쩍거리던 루이젤라도 덩달아 소년을 따라나섰다.

기사들의 방에서 충분히 멀어지자 덥석!

루이젤라가 소년의 팔목을 낚아챘다.

"조, 조슈아."

그녀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다.

조금 들뜬 것처럼도 보였다.

"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거야! 그건 엄청난 기회라고. 학생이 기사단장의 제안을 받아 기사가 되다니 들어 본 적도 없어. 이례적인 일이야."

"대단한 일인 것 같네요."

"남 얘기하듯이 말할 게 아니야."

"죄송하지만 최연소 기사가 되는 일 따위에는 관심 없어요."

"어째서?"

"명예가 목숨을 지켜 주지는 않으니까요."

* * *

루이젤라와 헤어지고는 홀 아래쪽에서 밤이 도래하기를 기다렸다.

타워를 비운 며칠.

방을 안내받지 못하여 홀에서 노숙하던 생존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더불어 부상자도 늘었다.

그들이 다친 상처를 부여잡고서 비명을 질러 댔다.

소름 끼치도록 처절한 목소리.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정만을 소비할 뿐이다.

[치료]를 사용하면 어떨까?

하다못해 [평정]이라도 사용한다면 조금 나아질까?

당연히 [냉정함]과 [영리함]은 반대했다.

가비누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막으려고 한다.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잠이 들고 싶었다.

이런저런 고민에서 달아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 * *

[냉정함]이 신호를 보낸다.

위험을 알리는 긴급한 신호는 아니었다.

농장으로 향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눈을 뜨자 전에 없던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담요가 덮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이 타워 안에 있는 숙소에서 쓰이던 것임을 알아차렸다.

자신을 따르던 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섬세함을 지닌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타니아 레인우드.

귀엽게도 쪽지까지 남겨 놓았다.

[밖에서 자면 감기 걸려요!]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요를 외투처럼 몸에 둘렀다.

연구소에서 향할 때 입었던 방화의 망토는 잿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새로운 장비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도 앞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창문 너머의 달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확인한다.

지금 그 일을 하기에 안성맞춤의 시간이란 뜻이다.

"뭐야, 너 또 나갈 생각인 거냐?"

밤의 보초를 서는 경비병과는 일면식이 생겼다.

그가 자기 키만큼이나 큰 창에 몸을 의지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예."

"밖에 숨겨 놓은 애인이라도 있는 거냐? 그게 아니라면 밤에 나가는 건 피해라. 괴물이 안 보인다. 사람도 안 보이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알았다. 매번 살아 돌아오니 이번에도 그렇게 되겠지."

경비병이 기지개를 한번 켜고는 문을 여는 장치를 눌렀다.

커다란 대문의 입구가 서서히 열린다.

나는 틈이 완전히 벌어지기 전에 타워를 빠져나왔다.

농장을 향해 걸었다.

마법을 사용하여 불을 켜지는 않는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적에게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대신에 [야행성]을 활용했다.

이 특성은 보통 사람보다 밤눈을 밝게 해 주는 힘이 있었다.

눈가에 힘을 주며 시야를 넓힌다.

농장까지는 제법 멀다.

쑥대밭이 된 마을 안에서도 가장 외각에 위치했다.

오늘처럼 피로가 심한 날에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조금 더 가까운 곳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나 그랬다면 기사에게 들킬 가능성은 더 컸으리라.

어느 쪽이든 장단점은 있다.

나는 달빛에 쫓기듯이 속도를 높였다.

농장 근처에 다다랐을 때는 주변에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없는지 조사했다.

이를테면 발자국이다.

[영리함]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놓치지 않았다.

녀석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농장 입구에 걸어 둔 술식을 해제하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꼬꼬댁!"

수탉이 반갑다는 듯이 울부짖었다.

내 발밑으로 재빨리 다가와서는 부리로 신발 위를 쪼아 댄다.

"결국 너도 밥이 목적인 거겠지."

이전에 뿌려 둔 모이가 보이지 않았다.

적지 않은 양을 뿌려 놓았을 텐데.

수탉과 암탉 모두 살이 오른 느낌이다.

"너희들이 일만 제대로 해 준다면 모이야 실컷 줘도 문제가 안 되겠지."

그들의 안식처인 볏짚 위를 뒤적거렸다.

달걀이 있었다.

위로 전부 들춰 내자 13개나 되었다.

"열심히 해 줬네."

나는 미소를 띄우고는 닭이 원하던 모이를 바닥에 듬뿍 뿌려 주었다.

놈들이 허겁지겁 달려온다.

한 달은 굶은 것처럼 쉴 틈 없이 부리를 내려찍는다.

뭔가 그들의 행동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이곳의 풍경이 낯설었다.

농부가 체질에 맞는 것일까?

아니라면 생각 없이 본능에 충실한 닭들이 부러웠던 것일까?

잠들기 전에 괴롭히던 비명 소리도 머릿속에서 차츰차츰 잊힌다.

"...아직 잠들면 안 되겠지."

밤은 짧았다.

생각한 것을 정리하려면 바삐 움직여야 한다.

인벤토리를 열었다.

현재 개방된 인벤토리는 두 칸.

다소 부족하지만 물건을 숨기기에 적합하며, 들 수 있다면 무게와 부피를 가리지 않았다.

안에 넣어 둔 것은 자신의 배낭과 마력초 키트였다.

당장 사용할 것은 키트였다.

조심스럽게 입구를 들추자 안에는 인공 씨앗이 들었다.

"이걸 팔기만 하더라도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섰겠지. 세상이 이 꼴이 났더라도 말이야."

참지 못한 웃음이 입가에 묻어났다.

마력초의 가치는 마법사를 환장하게 만들었다.

다 자란 마력초를 씹어 먹으면 마력이 상승한다.

재료가 받쳐 주고 연금술에 대한 지식에 해박하면 시약 제조도 가능했다.

부유한 귀족들에게 마력초는 늘 인기 상품이었고, 없어서 못 구할 물건이었다.

"일 좀 해 볼까?"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괭이를 집어 들었다.

헛간 앞의 땅을 고르게 해야 한다.

팍! 팍!

괭이질이 생각만큼 간단하지는 않았다.

요령이 없기에 필요 이상으로 힘을 썼다.

체력이 빠르게 줄어든다.

몇 번의 전투로 조금 좋아졌다 생각했지만.

이 지랄맞은 몸뚱이는 아직까지도 내 계획에서 발목을 잡았다.

"헉헉!"

사용한 괭이를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씨앗을 심을 수 있을 정도의 밭이 정돈되었다.

손가락으로 땅을 찌르며 하나씩 땅에 심어 넣는다.

그 위로 다시 흙을 덮고 물을 뿌렸다.

"보통 여기서부터는 기다리면 될 일이겠지만."

마력초를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과제가 더 남았다.

이 약초는 신기하게도 마법사의 마력을 양식으로 삼았다.

[이름 : 조슈아 팔라리온]

[5학년(18) – 노비스]

[잠재 능력 – 격세 유전(신성). 습득의 대가. 속독.]

[성격적 특성 – (강심장) (냉정함) (영리함) (인내심) (외톨이) (야행성)]

[후천적 특성 – 리더십(하) 언변술(중) 카리스마(하) 화염 저항(하)]

[보유 코인 – 100]

[인벤토리 – 2칸 개방]

[독창성 LV2 – 신성 마법]

[보유 마법 – 방패. 정화. 섬광. 평정.]

[체 력: 60]

[근 력: 40]

[민 첩: 30]

[마 력: 250]

[신성력: (2,000)]

연구소의 공략 성공으로 능력치가 고루 성장했다.

화염 저항도 얻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기쁜 것은 모은 코인의 개수였다.

100개.

이만한 양을 초반에 확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매번 벼랑 끝에서 줄다리기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양.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하다.

상점을 열었다.

트라이덴 마을에서 인벤토리를 산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때처럼 사야 할 것은 정해져 있다.

바로 [독창성 – 스킬 개방].

독창성과 관련된 마법을 골라 배울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값은 코인 100개.

어느 게임에나 있는 편법이란 것이다.

그래 봐야 최상급 마법을 고르지는 못한다.

이 아이템을 통해 익힐 수 있는 것은 중급 레벨이었다.

"다른 속성이라면 아까운 아이템이겠지만, 성 속성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신성 마법의 주문은 알고 있었다.

단지 경험이 없을 뿐이다.

나는 아이템을 사용하여 [성장]이란 주문을 배웠다.

[성장]은 동식물의 사용을 촉진하는 주문이었다.

게임을 하며 마력초를 키우던 당시에는 싹을 틔우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완전히 자라려면 한 달이 필요하다.

보통의 식물보다는 성장이 빠른 편이었다.

그럼에도 시간을 단축할 필요성을 느꼈기에 이것을 선택했다.

뿌린 자리 위로 손을 뻗는다.

머릿속으로 [성장]의 술식을 떠올렸다.

따스한 황금빛이 대지를 적셨다.

흙 위가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줄기가 자라나고 잎사귀가 피어올랐다.

"이건 좀 많이 빠른데?"

기억을 되새기며 마력초가 자란 정도를 파악했다.

대략 보름쯤 자란 것 같았다.

기쁨에 겨운 감탄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먹지 못하겠어."

[성장]에는 두 가지 제한이 있었다.

첫 번째는 동일한 대상에게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두 번이 최대이며.

하루에 연속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 그렇다.

마력초의 완성은 내일로 미루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조슈아는 헛간으로 되돌아왔다.

동식물에 적용된다면 여기에 사용할 재료가 더 있었다.

달걀.

무릎을 구부리고는 모아 둔 달걀 위로 빛을 쏘아 냈다.

껍질에 금이 갔다.

떨어진 조각 아래로 비에 젖은 듯한 노란색이 털이 보였다.

알을 천천히 벗겨 낸다.

모이를 먹던 암탉이 놀란 눈으로 이쪽으로 다가온다.

녀석으로선 당황스러울 것이다.

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알들이 예정보다 일찍 깨어났다.

"오늘은 여기서 먹고 자고 해야겠네."

병아리가 완전히 부화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 보였다.

헛간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병아리가 태어났을 때.

온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볏짚을 더 많이 깔아 두고 작은 틈을 보수했다.

이제 저 닭 부부에게 맡길 차례였다.

벽이 몸을 기대었다.

너무나도 만족스런 이 상황을 만끽하며 잠에 들고 싶지만.

아쉽게도 계획을 생각해야 한다.

타워에서 발생할 몇 가지 이벤트들.

개중에서 확정적으로 발생하며 중요한 것을 추려 냈다.

"아무래도 그것밖에 없어."

각 생존자 그룹의 수장들이 만나는 회담 이벤트.

수장은 호위로 두 사람을 정하여 함께 회담 장소에 방문한다.

참가해야 한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네임드들을 알아 두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관계를 쌓는다.

그들이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번에도 피곤해지겠어."

역시 이 세계는 나를 살려 둘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하다.

38화

조슈아는 폐허에서 처음으로 아침을 맞이하였다.

평소라면 볼일을 끝내고 타워로 돌아갔다.

딱딱한 매트라도 길바닥에서 노숙하는 것보다는 안락할 테니까.

하지만 어제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연구소에서의 쌓인 피로 탓에 온몸이 녹초였다.

"제기랄, 등이."

가을밤의 한기를 얕보았다.

담요 한 장으론 어림도 없었다.

등줄기가 시리고, 코맹맹이처럼 목이 답답하다.

모닥불이라도 피웠다면 좋았을 텐데.

속으로 뒤늦은 후회를 했다.

"삐악, 삐악."

나보다도 부지런히 일어난 생명이 있었다.

노란색 솜뭉치.

어젯밤 [성장]을 사용하여 부화시킨 병아리들이었다.

모두 13마리.

한 마리도 빠짐없이 껍질을 깨고 나와서는 시끄럽게 울어 댔다.

"진정해라, 진정해."

손으로 녀석들을 쓰다듬었다.

태어날 때 젖어 있던 털들은 어느 틈엔가 모두 마른 뒤였다.

푹신푹신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조금 떨어지지 않을래?"

헛간은 가축들의 규모에 비해 대단히 넓었다.

그런데도 이 작은 생명들은 내 곁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녀석들의 부모는 한쪽에서 곯아떨어졌다.

대리 양육이라도 맡길 셈인가?

[영리함]과 [냉정함]이 비웃기 시작한다.

"후, 정말이지."

손으로 한 마리씩 떨어뜨려 놓는다.

그러면 다시 기어오르려 한다.

애석하게도 나는 녀석들에게 애정을 베풀 수가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식량으로.

어떤 때는 거래의 재화로서 처리해야 한다.

[냉정함]을 지녔으니 괴롭지는 않을 테지만, 아무래도 가책을 느낀다.

"그러니까 나랑 너무 친해지려고 하지 마라."

나는 병아리들을 두고서 헛간을 나왔다.

재빨리 문을 잠근다.

안쪽에선 지저귀는 소리가 여전하다.

"이제 너희들 차례네."

심어 둔 마력초에 한 번 더 [성장]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성장]은 하루를 간격으로 리셋이며, 시간은 날짜가 바뀌는 12시가 기준이다.

일부러 타이밍을 맞췄다.

아침에 보양식을 먹는 느낌으로 하고 싶었으니까.

손을 뻗어서 빛을 뿜어낸다.

발목까지 자란 마력초가 단번에 무릎까지 올라온다.

"후... 다시 한번 네가 나설 차례다."

[인내심]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마력초를 먹는다.

본래라면 진액을 짜내 다른 재료와 혼합하여 즙으로 먹어야 한다.

그러는 편이 맛에서 월등하다.

[인내심]이 걱정 붙들어 매라며 위로한다.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고통을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울적해졌다.

"우선 하나."

마력초의 다 자란 머리를 손으로 뜯어냈다.

곧장 입 안에 털어 넣는다.

"우우욱!"

이 형편없는 맛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설사 맛인 카레.

토 맛의 토마토.

그런 표현이 떠오를 정도로 끔찍한 맛이었다.

[마력이 5 상승합니다.]

[현재 마력: 255]

간신히 목구멍에 넘기자 상태창에 변화가 생겼다.

순수한 마력초로 키울 수 있는 마력은 150이었다.

앞으로 30송이를 더 먹어야 한다.

오늘 먹어야 할 양은 4송이.

좀비를 만났을 때도 흘리지 않던 식은땀이 이마에 쏟아진다.

이건 위험하다.

"살아남기 위해서 먹어."

위기의 순간마다 되뇌던 각오.

무언가 먹는 자리에서 말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다시 뜯어 먹는다.

맛은 여전히 끔찍하다.

[인내심]은 어떻게든 전부 먹어 치우자고 독려한다.

"넌 그냥 네가 할 일이 늘어서 기쁜 것일 뿐이잖아."

나는 신경질적으로 [인내심]에게 투덜거렸다.

마력초를 한껏 입에 물고서는.

* * *

타니아는 아침부터 조슈아를 찾는 데 열심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홀에 잠들어 있었다.

깨우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방에 있던 담요 하나를 덮어 주었다.

감기 걸리지 않을까?

그런 걱정에 일어나자마자 달려 나갔다.

보이지 않았다.

타워 어디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탈레온과 가비누도 찾아갔다.

두 소년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조슈아 경이 보이지 않는다고?"

"응."

"그렇구나."

"너무 태평하게 대답하는 것 아니야?"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조슈아 경이 위험할 것 같다는 상상도 잘 안 되고, 만약 정말로 위험하다면 그 사람 수준에서 위험한 것일 텐데. 우리가 어쩔 수는 없지 않을까?"

타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아이들은 이토록 무심하다.

속으로 불평하며 그들에게서 떠났다.

"이제 확인해 보지 않은 층은."

기사단 간부들이 사용하는 10층 위.

언니인 루실을 만나야 한다.

공교롭게도 그녀와는 나선형 계단에서 마주쳤다.

"뭐야, 여기 있었어?"

"...응."

타니아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그녀도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잘됐다. 너 지금 시간 괜찮지?"

"...아."

"왜, 지금 바빠?"

"딱히 바쁜 건 아닌데."

"흠~"

루실이 층을 확인했다.

5층.

남자 학생들이 숙소로 머물던 곳이었다.

이 나이 때의 소녀라면 이성에 관심이 없진 않겠지.

그렇다면 더더욱 막아야 한다.

풋풋한 첫사랑일수록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게 그녀의 소신이었다.

"타니아 레인우드."

"네?"

"매번 말했지만 네 짝은 명망 있는 가문의 자제가 아니면 안 돼. 나중에 사태가 진정되면 언니가 직접 골라 줄 테니까. 그런 줄 알고 지금은 얌전히 있어."

타니아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 것 아니야!"

"아니야? 뭐, 좋아. 일단은 위로 올라가자."

"위로?"

"로드웰이 널 만나고 싶어 하거든."

타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드웰 단달리온.

언니의 상관이자 별빛 기사단의 단장.

그와는 과거에 언니의 소개로 몇 번 눈도장 찍은 게 전부였다.

"그 사람이 갑자기 날 왜 찾아?"

"너에게 제안할 것이 있다더라."

"기사도 아닌 나한테?"

"그래."

타니아는 루실을 따라 간부들이 지내는 10층 위로 올라갔다.

어쩌면 선배도 이곳에 있을까?

언니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묻지 못했다.

그녀가 조금 전에 놀리려고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나도 곁에 있을 테니까."

두 사람은 15층에 있는 회의실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곳엔 로드웰이 혼자 창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니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른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 올 것을 대비하여 상관없는 인물은 모두 물려 버린 모양이다.

"잘 왔어."

인기척을 느낀 로드웰이 몸을 돌리며 싱긋 웃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예뻐졌구나."

"감사합니다."

"...잠깐만."

두 사람의 대화에 루실이 참견했다.

그녀가 앞에 있던 책상에 손을 내려쳤다.

"설마, 내 동생에게 흑심을 품고서 데려오라고 한 건 아니지?"

동생과 관련된 일일 때면 루실은 정말로 무서웠다.

그 점을 알던 로드웰은 재빨리 정정했다.

"진정해, 이건 그냥 인사치레였다고."

루실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로드웰은 두 사람에게 일단 앉으라며 손짓했다.

"이걸 한번 봐 주지 않을래."

로드웰이 책상 중앙에 있던 양피지에 눈짓했다.

루실은 손을 뻗어서 그것을 집어 들고는 안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그럴수록 그녀의 표정에는 그늘이 드리웠다.

"...여기에 타니아와 함께 갈 생각이야?"

"그래, 그것 때문에 두 사람과 상의하고 싶었던 거야."

타니아는 굳은 자세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양피지를 읽지 않은 그녀로서는 대화의 흐름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저 아이에게도 보여 줘. 당사자도 어떤 상황인지는 알아야 하니까."

루실은 못마땅한 얼굴로 상관을 노려보고는 양피지를 동생에게 건넸다.

타니아는 건네받은 양피지를 살폈다.

만날 장소와 날짜.

참가할 집단의 이름과 그들 수장의 인장.

그리고 동행할 인원의 조건이 적혀 있었다.

내용을 모두 확인한 다음에는 시선을 로드웰에게 향했다.

"다른 생존자 그룹과 만나는 건가요?"

"그래."

"제가 읽은 게 맞다면 가야 할 사람은 그룹의 수장, 그리고 집단 내에서 재능이 넘치는 생존자 두 명이라고 봤는데 맞나요?"

"맞아, 그 문제로 널 찾은 거야."

타니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신은 기사단이 아니었다.

언니가 기사인 것을 제외한다면 연관성이 전혀 없었다.

"이 회담은 상황이 이리 되기 이전부터 이어져 오던 기사단들의 관습이다. 해마다 두 번씩 각 기사단이 모여서 화합을 도모하고, 자웅을 겨뤄 오던 전통이지."

"...전통."

"물론 지금은 전통을 지키기 위한 목적 따위로 만나는 게 아니다. 그걸 구실 삼아서 서로의 세력을 가늠하고,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이지."

"그런 자리라면 굳이 학생인 저희가 갈 이유는 없지 않나요?"

"이 전통에는 새로운 얼굴을 보여야 한다는 규칙이 있어서 말이다. 나는 반대했지만, 다른 두 기사단이 고집을 부렸거든."

타니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상황임에도 상대방이 규칙을 지키려는 이유.

"두 기사단에 유망한 학생들이 있고, 그걸 과시하기 위함인가요?"

"그래, 자신들의 세력이 탄탄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 거다. 밑에 있는 사람들이 기사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려는 거야. 사정이 이러니까 나도 발을 뺄 수는 없어서 말이다."

"참가하지 않는 건 어때?"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루실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동생을 먼 장소까지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건 미친 짓이야. 이런 상황에서 전통이 뭐가 중요해?"

"권위적인 네가 할 말은 아닌데? 너도 조슈아한테 영향을 받은 거냐?"

"아, 아니거든."

"안심해라. 네 여동생은 내가 목숨을 걸고서 지켜 줄 테니까."

"언니는 동행하지 않는 건가요?"

타니아의 물음에 로드웰이 시선을 돌렸다.

"회담의 진행장은 해마다 바뀌는데, 이번에는 달빛 기사단 차례다. 진행장이 아닌 기사단은 최소한의 인원만 대동하도록 되어 있어. 그래야만 충돌을 피할 수 있거든. 게다가 단장과 부단장이 둘 다 자리를 비운다면 타워의 질서가 흐트러지니까."

타니아는 생각에 잠겼다.

이 회담 뒤에 숨겨진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일까?

선배라면 분명 그걸 고민하고, 간파했겠지.

"...혹시 상대의 세력이 약하다고 판단되면 서로 공격하고 빼앗을 생각인가요?"

회의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두 기사는 소녀가 내뱉은 말에 의식하며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그러니까 선배라면 분명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고."

"선배?"

"조슈아 선배를 말하는 거예요."

"그렇군."

로드웰은 조금 언짢은 기색이었다.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이름이 자꾸 언급되는 것은 썩 유쾌하지는 않네."

"단장님은 선배를 싫어하나요?"

"싫어한다기보다는 거북한 거지. 그 녀석은 애늙은이야. 18살이 아니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지 로드웰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오면 타니아, 네 판단이 맞을 거다. 만약 데려온 사람들의 수준이 형편없다면 그걸 척도로 공격을 해 올 수도 있어. 그렇다고 참가하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얕보이고 말겠지."

집단이 또 다른 집단을 공격한다.

예전이라면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하나 이제는 안다.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피할 수 없다는 뜻이네요."

"그래, 그래서 널 데려가고 싶다. 물론 강제로 끌어들일 생각은 없어."

타니아는 루실의 표정을 살폈다.

반대하지 않았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즉, 그녀 입장에서도 자신이 동행하는 게 타당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망설이는 이유라면 동생을 보내고 싶지 않은 언니의 마음이겠지.

"저기 그러면 다른 한 사람은 누가 가나요?"

"...하."

로드웰이 입가를 뒤틀었다.

이쯤 되면 눈치 없는 사람도 알 수 있다.

그가 무엇에 곤혹스러워하고 있는지.

"조슈아를 데려가고 싶다.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거절당한 건가요?"

"아니, 아직 제안도 하기 전이다. 괜찮다면 네가 물어봐 줬으면 좋겠는데."

"음, 저보다는 단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건 곤란해."

로드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어제 낮에 조슈아에게 기사가 되어 달라 제안했고,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날짜가 하루 바뀌고.

이제는 부탁하는 입장이 되어 버린 자신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여 자신과 소년을 이어 줄 접선책을 원했다.

타니아가 적당하다.

함께 생존해 온 동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슈아를 만나기 싫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녀석은 분명 동행할 조건으로 내게서 무언가를 요구하겠지.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거다."

타니아는 저도 모르게 공감했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말은 해 볼게요. 저도 함께 갈 사람을 정할 수 있다면 선배가 가장 좋으니까."

루실이 눈을 흘겼다.

'좋아'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타니아 너도 가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까?"

"음... 언니?"

"가고 싶다면 말리지 않을게. 로드웰, 네가 책임지고 잘 챙겨 줘야 해. 알겠어?

목소리에 가시가 있음을 느낀 로드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언니의 허락이 떨어지자 타니아도 결심을 굳혔다.

이제 처음으로 되돌아와 아침부터 했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조슈아를 찾는 일이었다.

로드웰의 반응을 보면 그도 조슈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39화

조슈아는 그날 늦게 타워로 돌아왔다.

밤의 보초를 서던 기사가 당황한 눈초리를 보였다.

"설마, 이제 돌아오는 길이냐?"

"네."

"호오~"

기사는 소년이 보이지 않은 하루 동안 무엇을 했는지 궁금했다.

지루한 보초 시간에 즐거움이 되겠군.

속으로 되뇌며 입을 떼려던 순간.

어둠에 가려진 소년의 얼굴이 달빛을 머금으며 드러났다.

뺨이 눈에 띄게 핼쑥해졌다.

누군가에게 기력이라도 빼앗긴 사람처럼 말이다.

"힘드냐?"

"예, 조금."

"혼자서 뭘 하고 왔길래, 기진맥진이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기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소년을 붙잡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너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다."

"뭔가요?"

"어떤 아가씨가 너를 본다면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 달라고 하더라."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후 기사가 말했던 장소로 곧장 향하였다.

푸른색 카펫이 깔려 있던 계단 위로 상반되는 색깔이 눈에 띄었다.

붉은 머리카락.

아름다운 색이라고 생각했다.

"아!"

타니아 레인우드가 조슈아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자리에 일어나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소녀는 감정이 복받쳤다.

하루를 꼬박 쓰고도 눈앞의 사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만날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약속도 잡지 않고 무작정 찾기 시작한 자신이 이상했다.

그런 주제에 화가 났고.

지금은 만나서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아프신 거예요?"

타니아가 조슈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순간 머릿속에 미리 생각해 둔 불평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아프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몸이 안 좋은 건 확실하다."

조슈아는 대충 둘러댔다.

조리되지 않은 야생화를 먹다가 배탈 났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보내 드리고 싶지만 꼭 전해야 될 말이 있어요."

"뭐지?"

"곧 살아남은 집단들 간에 회담이 있는데, 단장님이 저랑 선배와 동행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저는 찬성했는데, 선배의 의견은 아직 듣지 못해서."

조슈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로드웰이 그녀를 보낸 의도가 다분했다.

이런다고 못 뜯어낼 자신이 아니건만.

"회담에 참석하겠다. 로드웰에게는 그리 전해 주면 돼."

"정말이요?"

"그래."

"너무 쉽게 허락해 주시는 것 아니에요?"

"가던 도중에 얘기할 시간이 있겠지. 로드웰은 날 피하고 싶겠지만 말이야."

볼일이 끝난 조슈아가 방으로 돌아가기 직전.

[영리함]이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켰다.

"담요 고마워."

"네?"

"어젯밤 홀에 있을 때 네가 덮어 주고 간 걸 알고 있어. 덕분에 편히 잘 수 있었다."

"그럼 선배 몸 상태는 감기에 걸린 게 아닌가요?"

"감기는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복통, 위경련. 이런 느낌이겠지."

"그랬구나."

타니아가 뒷짐을 지며 싱긋 웃었다.

그 나이 또래의 순수한 미소가 무척 귀엽다고 생각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조금 전에 생겼어요."

조슈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밤이 깊어진 계단 앞에는 그녀와 자신밖에 없었다.

"나 때문이야?"

"맞아요."

"그다지 웃긴 얘기는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후후,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칭찬을 받은 게 기뻤다.

꼭 탈레온이나 가비누처럼 말이다.

두 사람과 닮았다는 표현은 아무래도 참기 힘들어서.

타니아는 속마음을 최대한 억눌렀다.

"용무가 끝났다면 방으로 돌아가. 한밤중에 홀에 있는 건 위험하다."

"그럴게요."

조슈아가 그녀를 지나치며 먼저 계단 위로 몸을 실었다.

타니아는 그의 등 뒤를 바라봤다.

무언가 기묘했다.

병으로 쇠약해진 사내의 뒷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룻밤 사이.

그의 전신을 두른 마력의 질이 달라졌다.

* * *

다음 날.

조슈아는 로드웰을 찾았으나 문전 박대를 당했다.

회담장에 가기 이전까지는 자신을 만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대신에 타니아가 바빠졌다.

"회담은 3주 뒤에 시작이고, 도착까지는 3일이 걸린다고 들었어요. 그때까지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면 된다고...."

타니아가 노트에 필기한 내용을 읊조렸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영리함]이 있는 한 자신이 게임상의 흐름을 까먹을 일은 없었다.

로드웰을 찾으려 한 것은 다른 이유였다.

"제대로 들으셨죠?"

"그래."

"좋았어."

임무를 끝마친 타니아가 사명감을 만끽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늘은 예정이 어떻게 되세요?"

"탈레온과 가비누와 시간을 보낼 생각이야."

"...그렇구나."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타니아는 아쉬운 듯한 눈초리였다.

꼭 자신과도 놀기를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

"걱정하지 마라. 다음 주는 타니아 네 차례니까."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어 한번 쓰다듬고는 3층으로 내려왔다.

곧장 소년들의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방 안에서 햄과 치즈를 두고 무엇을 점심으로 먹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아, 조슈아 경! 어서 오세요."

탈레온이 밝은 목소리로 자신을 환영했다.

"마침 잘 오셨어요. 점심으로 뭘 먹을지 가비누와 생각 중이었어요. 조슈아 경은 어느 쪽을 추천하세요?"

조슈아는 그들의 근처까지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현대인이라면 때가 되면 무엇을 먹을지 고민한다.

그게 인생의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빨리 상하는 쪽으로, 관리가 어려운 쪽으로 선택해라."

햄과 치즈를 집어 들었다.

햄은 아직 괜찮았다.

반면 치즈 밑부분에는 푸른 곰팡이가 자라는 게 보였다.

"여기서는 치즈다."

탈레온과 가비누는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조슈아의 몇 마디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식사가 끝나더라도 햄을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과제다. 예를 들면 훈제나, 건조가 있다. 여기서 다시 고민이다. 현재 가진 재료로 어느 쪽이 가능하고, 편리한지."

조슈아는 두 사람에게 경고하듯이 얘기했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어둠 속에서 살았다.

제대로 된 식사 한번 못 하고.

인육을 즐기는 미치광이 괴물들과 함께.

그 상황에서 벗어났더라도 그때의 긴장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일 층에는 며칠째 굶고 있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너희들도 본 적 있을 거다. 그런 사람들이 함께 지내는 이곳에서 이런 행복한 고민은 하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해라."

"당신 같은 사람도 죽음이 두렵나요?"

"물론."

두 사람은 모른다.

자신이 이 세계에서 몇 번이나 실패했는지.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는지.

"미안하다. 훈계할 마음으로 찾아온 것은 아니었는데."

가비누가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아닙니다.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탈레온은 말없이 햄을 배낭에 집어넣고는 치즈를 씹어 댔다.

"얼마 뒤에 나와 타니아가 다른 곳으로 갈 것 같다."

"타니아에게 들었어요. 각 집단들이 모인 회의가 진행될 거라고."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분한 모양인지 가비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탈레온도 마찬가지였다.

데려갈 방법은 없었다.

이들은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한다.

하나 그때까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게 두지는 않을 거다.

"갈 곳이 있다. 따라와라."

두 사람을 데리고서 기사단이 거주하는 10층 위로 향하였다.

그곳을 지키던 기사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통로에서 비켜 주었다.

"...우와."

탈레온이 감탄을 내뱉었다.

라인 타워의 상층은 지도부만이 드나들 수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조슈아는 그런 장소를 자연스럽게 왕래했다.

이 타워 안에서 그의 신뢰가 두텁게 쌓였다는 의미였다.

소년은 계단 난간에 몸을 걸쳤다.

3층에서 보던 것과 높이가 달랐다.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놀고 있을 시간 없어."

앞으로 걸어 나가던 가비누가 보채듯이 말했다.

탈레온은 발을 멈춘 탓에 멀어진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13층의 어느 방이었다.

라인 타워는 도서관이다.

숙소로 쓰이는 방이 아니라면 어디서든 책장이 보이고, 종이 냄새가 진동했다.

이곳은 달랐다.

거추장스러운 부분을 전부 제거하고는 방으로서 온전한 모습만 남겨 놨다.

"안녕."

방 한가운데는 루실 레인우드가 서 있었다.

그때까지도 소년들은 자신들에게 곧 닥칠 미래를 알지 못했다.

조슈아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 설마 내가 재들을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루실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조슈아는 말을 아꼈다.

이 사람이라면 가르친다는 핑계로 스트레스를 풀 사람이었다.

반죽음을 만들어 놓겠지.

느슨해진 두 사람에게는 딱 적당할지도 몰랐다.

"수업료는?"

조슈아는 달걀 두 개를 그녀가 내민 손에 얹어 주었다.

오늘 아침 낳은 따끈따끈한 달걀이다.

"정말로 있었어?"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와 관계를 생각하면 공짜로도 해 주리라 생각하지만.

보상을 주는 편이 그녀도 진지하게 일해 주리라 판단했다.

"안 줘도 해 줄 생각이었는데."

"맨입으로 부탁드리기에는 죄송스러워서요."

"그럼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

조슈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냉정히 따지면 기사 수업료로 달걀 두 개면 싸게 먹혔다.

예전이라면 어림도 없는 금액이었다.

"너희들, 이쪽으로 와 봐라."

멀찍이 떨어졌던 소년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부터 한 달 동안 너희를 지도할 스승, 루실 레인우드다. 잘 부탁한다."

"루실 경이 저희를 봐주시겠다는 건가요?"

"그래."

소년들의 얼굴에 환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존경하던 기사로부터 가르침.

수업을 듣지 못해 따분하던 두 견습 기사에게는 행운이었다.

"죽도록 고생하게 될 거야. 차라리 괴물들과 싸우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후후, 기개가 마음에 드네. 그럼 우선은...."

루실이 한편에 있던 걸이대에서 연습용 목검 두 자루를 집어 들었다.

하나는 그 자리에서 공중으로 던졌다.

검을 건네받은 것은 조슈아였다.

"무슨 의미입니까?"

"어차피 회담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마법사에게 검으로 승부를 거는 건 너무 치사하지 않나요?"

"후후, 자신 없니?"

조슈아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 업적 중에는 마법사로 플레이할 시.

기사를 상대로 2분간 버티면 능력이 오르는 업적이 있었다.

루실이라면 조건은 성립된다.

[냉정함]은 부상을 걱정하면서 받아 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영리함]은 괜찮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리고... [인내심]은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시험 삼아서 2분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네요."

"그 정도면 나쁘지 않네."

무엇이 충분한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그녀는 자세를 잡았다.

루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그 자세 어디서 배웠어?"

"대충 따라 하는 겁니다."

"흉내를 내는 게 그 정도라고?"

루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였다.

흉내를 내는 정도라기에는 너무나 정교해서.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껄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꾸며 낸 연기다.

원체 속내를 잘 숨기는 녀석이니까.

가면을 벗겨 내기 위하여 발돋움하며 재빨리 나아갔다.

허벅지를 노리며 휘두른 첫 일격.

사선에서 내려친 목검이 상대방의 것과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흠."

조슈아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는 기사가 아니었다.

궤적을 읽더라도 받쳐 줄 근력이 약하면 간단히 무너진다.

하나 일격을 막아 냈다는 사실이.

이제부터 제자가 될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보였다는 생각이.

루실의 투쟁심에 불을 붙였다.

팍! 팍! 팍!

3연격.

놀랍게도 조슈아는 모두 막아 냈다.

하지만 충격의 여파는 몸에 남아서 점점 더 정확도가 떨어졌다.

4번째 올려치기에서는 옆구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루실은 인정사정없이 그곳을 후려쳤다.

나무 바닥 위로 소년의 몸뚱이가 한 바퀴 구르더니 다시 일어선다.

낙법이었다.

타이밍도 스텝도 완벽하다.

잘 받아 내긴 했지만 속으론 조금 걱정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힘이 너무 들어갔다.

일반인이라면 그 자리에서 몸을 데굴데굴 굴렀을 것이다.

한데 소년은 인상만 조금 구길 뿐이다.

'정말이지.'

적당히 봐 달라고 말했다면 그럴 생각이었다.

한데 소년은 그러지 않았다.

그 점이 너무나도 얄미워서, 타오른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팍! 팍!

찌르기 다음에 오른쪽 다리를 축으로 삼아 회전 베기.

조슈아는 허리를 뒤로 젖히는 것으로 피했다.

잘 피했다.

하지만 다음 동작이 굼떴다.

지구력이 약점이구나.

그리 생각하며 다리를 걷어찼다.

이번에야말로 바닥에 쓰러진 소년을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

"커헉!"

루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 싸움에서 자신이 당하는 그림을 상상하지 않았다.

방어에 소홀했다.

소년에게 억하심정을 품은 것도 원인이겠지.

하여 배를 걷어차였을 때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후."

조슈아가 다시 일어섰다.

위로 치켜들었던 목검의 머리가 아래쪽을 겨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루실은 침묵했다.

"끝났습니다."

[기사와 대련에서 살아남기]

[마력을 제외한 능력 모두가 5 상승합니다.]

[코인 5개를 획득합니다.]

[보유 코인: 5]

조슈아는 만족스런 웃음을 띠었다.

옆구리에 한 방 얻어맞긴 했지만.

업적으로 얻는 능력과 코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도 신경 쓰이는 건.

"너, 누구한테 검을 배웠어!"

루실이 화를 냈다.

그녀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쏘아보았다.

"독학입니다."

"말도 안 돼. 그건 분명히 훈련으로 이루어진 동작이었어."

"너무 묻지 마세요. 그리고 진검이었다면 옆구리를 맞았을 때 죽었을 겁니다."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시겠다?"

"루실 경이 뭐라 하던 이 이상은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조슈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에게 얻어맞은 옆구리 한 방.

[인내심]이 없었다면 기절할 정도로 아팠다.

이 이상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나가 보겠습니다."

"야!"

조슈아가 방을 나섰다.

그녀의 분노는 남아 있던 소년들에게로 옮겨 갔다.

"탈레온, 가비누! 검을 집어."

"예? 저흰 아직 몸도 안 풀었는데요."

"그리고 전 연구소에 다녀오면서 어깨 쪽에 부상이."

"알아서 조절해 줄 테니까, 일단 검부터 들라고!"

"히이이익."

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