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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성인식 (2)

성인식은 세계수 앞에서 치르는 의식이라고 한다.

따라서 세계수가 있는 곳까지 가야겠지.

문제는 어떻게 가냐는 것.

이 의문은 금방 풀렸다.

오후가 되자 형이 나타나서 나를 데리고 순간 이동했으니까.

코앞까지 이동한 것은 아니고 2~300m 정도 떨어진 지점이었다.

"저기 보이는 게 세계수야."

"와! 엄청 큰데?"

살짝 거리가 있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성인식이라... 수능 볼 때가 떠오르네."

당시엔 다른 수험생들이 부모님이나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수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나는 실패할 수 없다는 독기를 품으며 홀로 들어갔었지.

"뜬금없는 질문인데 네 꿈은 뭐냐? 장래 희망 같은 거"

"꿈이라...."

사고 이후로 '뭘 하고 싶은지'보다 '뭘 해야 하는지'를 우선에 두고 선택했다.

그렇기에 꿈은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였다.

"생각해본 적 없어."

"한 번도?"

"예전에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

10년 전 사고에서 깨어난 직후의 꿈이었다.

식물인간이었던 형을 깨우고 싶었다고 할까.

"너 공부 잘했잖아."

"의대 갈 성적은 안 됐어."

"내가 기억하기론 충분하고도 남았던 것 같은데... 재수라도 하지 그랬냐?"

"재수는 끌리지 않더라. 군대 문제도 있고."

"군대? 면제 아니냐?"

"아니야. 만 13세 이전에 부모가 사망하고, 부양해줄 가족이 없을 때만 면제라고 하더라."

또는 18세 미만의 아동이 아동 양육시설에서 5년 이상 보호되었을 경우도 면제다.

"버티다 보면 재산이나 부양가족 문제로 면제되지 않았을까?"

"한국에서 미필은 입사가 거의 불가능해. 그거 버티느니 차라리 빨리 갔다 오는 게 낫지."

"결론은 꿈이 없다고?"

"꿈이라면 형이 깨어날 때까지 버티는 거였는데...."

눈앞의 목표가 너무 커서, 그 뒤의 미래까지 바라볼 엄두도 못 냈었다.

지금도 그렇다.

현재의 목표는 설정하기 쉽지만, 꿈이란 인생을 걸고 도전해야 할 목표가 아닌가.

찾기부터 쉽지 않았다.

"민석아."

"왜?"

"난 네 형이다."

"알아."

"네가 수없이 실패하더라도 내가 지탱해줄 거고, 넘어졌다면 일으켜 세워 줄 거다."

순간.

그 한마디가 내 가슴 속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렸다.

"그러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

"내가 생각해도 좀 멋있는 말 같았는데 왜 말이 없냐?"

"...듣고 싶었어."

"응?"

"지난 10년 동안 한 번이라도 듣고 싶은 말이었어."

나는 실패할 수 없었다.

실패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실패하면 내 목숨뿐만 아니라 하나 남은 가족마저 무방비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실패 대신 패배를 선택했다.

"아직도 진심으로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어. 확실한 건...."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실패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면....

"더는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아."

수없이 실패하더라도, 한 번의 성공을 위해 나아가고 싶었다.

***

"많네."

멀리서 보는데도 세계수에는 수천 명의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오니까. 심지어 인재 체크나 스카우트를 위해 오는 사람도 있거든."

"수능 같은 개념인가?"

"수능에 고시나 대기업 공채가 한꺼번에 섞여 있는 느낌이지."

"얼마나 마음 졸이고 있을까. 혹시 재수는 없지?"

"없어. 성인식은 단 한 번뿐이야."

"지금 받은 작위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그건 아니고. 나중에 노력에 따라 작위가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해. 성인식 때 받은 문장으로 실시간 측정되거든."

형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랭크 게임과 비슷했다.

작위는 랭크,

성인식은 배치고사 같은 느낌.

"후궁 시녀 중에는 문장이 있던 사람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 힐드는 있었구나."

왼쪽 손등에 있었다.

문신인 줄 알았는데....

"대부분 스무 살이 밑이니 성인식도 안 치렀지."

"미성년자에게 일을 시켰어?"

"여기에 노동법 같은 건 없어. 대여섯 살짜리 애들도 자기 부모를 도와서 농사짓고 그래."

"그래도 노동법은 있어야지."

산업혁명 때 어린 애들이 착취당했던 걸 생각하면 어휴....

"'해줘.'라고만 하지 말고, 필요하면 네가 직접 만들어."

"나는 입법 권한이 없잖아."

"있어."

"응?"

"황족은 뭘 해도 돼. 그게 이 세상의 법이다."

"그러다 황족이 많아지면?"

"그때의 황제가 알아서 권한을 제한하겠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되었다.

법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닌 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겠지만.

차분히 알아보고, 천천히 나아가자.

"절실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네."

"처음에 높은 작위를 받으면 그만큼 재능이 높다고 여겨지거든. 기회도 많아지고, 인맥도 넓어져. 윗사람 눈에 들기도 쉽지."

"학연 같은 거구나."

"좀 더 복잡해. 대부분은 처음 받는 작위에서 크게 변동이 없으니까. 남작 받아서 백작 되면 개천에서 용 난 수준이지."

"다들 쟁쟁해 보이네. 나는 남작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

"그딴 걸 왜 신경 쓰냐. 뭘 받든 내가 최소 공작급까지는 만들어 줄 텐데."

카카오가 듬뿍 들어간 초콜릿을 먹은 듯한 느낌이었다.

달콤하지만 마지막에는 꽤나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

인생 쉽게 살고 싶다는 욕망.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두 가치관이 충돌한다고나 할까.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세계수 인근에 도착했다.

멀리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가까이서 보니 어마어마하게 거대했다. 눈앞의 시야 전체가 나무껍질로 된 벽으로 보일 정도.

형과 내가 인파의 끝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경악하며 마치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듯이 갈라졌다.

그들은 모두 무릎 꿇고 엎드렸으며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뭐하냐? 가자."

"으, 응."

세계수에 도착하자 나무 바닥을 기어가듯, 뿔 달린 청설모 한 마리가 빠르게 내려왔다.

"여어. 라타토스크. 안 뒤지고 잘 살아있네?"

"뭐냐. 황제냐. 또 브륀에게 소박맞고 쫓겨났냐."

"가오 떨어지게 소박이 뭐냐."

"떨어질 가오는 있냐?"

"너 진짜 날 잡아서 구워 먹는다."

"네가 싸지른 똥을 누가 치워주고 있다고 생각하냐. 은혜도 모르냐."

그렇게 형을 놀려대던 청설모, 라타토스크는 이내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이건 뭐냐."

"안녕하세요. 동생인 김민석이라고 합니다."

"황제의 동생인데 왜 존댓말을 쓰고 그러냐."

"초면에 실례니까요."

"당당하게 했다가 뒤에서 욕먹기 싫으니까, 착한 척해서 살아남겠다는 전략 아니냐."

"...그런 면도 있는 것 같네요."

"그런 건 자존감 없는 패배자들이나 할 법한 생각 아니냐."

묘하게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다.

마치 내면의 악마를 불러일으키는 마법의 주문 같은 느낌.

"본인 입으로 말씀하셨듯 생존 전략이라고 봐주세요."

"왜 그리 멍청하냐. 본좌는 인간이 아냐."

속은 부글부글 끓는데, 묘하게 랩 배틀을 듣는 것 같다.

"그래서 왜 왔냐."

"왜 왔겠냐. 작위 측정하러 왔지."

"너냐. 아니면 쟤냐."

"멍청아. 내가 받으러 오겠냐."

그는 주둥이를 다물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곧 씨익 웃었다.

"너 왜 이렇게 약하냐."

"그런 세상에서 왔으니까요."

"네 형은 같은 세상에서 왔는데 겁나 세지 않냐."

"단련한 적도 없고요."

형도 처음 왔을 때는 약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따져서 말싸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 똑똑하지도 않지 않냐."

"네. 뭐...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네요."

"그러냐."

"잡담은 그만하고. 민석아. 가서 세계수에 손을 대라."

몇 걸음 더 걸어가 세계수 앞에 섰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함께 세계수에 손을 대자, 라타토스크의 푸른 눈이 붉게 빛났다.

동시에 세계수는 강렬하게 황금빛을 내뿜었다.

"화, 황금?"

"말도 안 돼. 분명 폐하의 동생분은 무공도 마법도 익히지 않았다고 했는데...."

"에이트리 형제나 이발디의 아들 같은 장인인가?"

"장인이라고 하기엔 근육이 발달하지 않았어."

"크바시르 같은 현자라는 뜻?"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왼쪽 손등에 쥐가 물어뜯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측정은 완료되었다. 김민석에게 대공 9급을 부여한다.]

라타토스크의 말이 끝나자 손등에는 룬 문자로 <대공 9급>을 의미하는 문양이 나타났다.

세계수의 빛은 잦아들었으며, 라타토스크의 눈도 이전의 푸른빛으로 돌아갔다.

"대낮부터 술 처먹었냐?"

측정이 끝나자, 형은 격분했다.

"뭐냐. 세계수와 내 눈은 정확하다는 걸 누구 보다 알지 않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쟤가 왜 대공 9급이야?"

"넌 지식의 가치를 모르냐."

"뭐?"

"저 녀석 머리에는 어떤 보물보다 귀한 지식이 잠들어 있지 않냐."

그는 형을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최고의 천재들이 수없이 많은 실패를 반복하며 수백, 수천 년을 노력해도 얻을까 말까 한 수준 아니냐. 그 지식을 어떻게 얻었든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너 이 새끼!"

분명 좋은 말임에도 형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형이 주먹을 꽉 쥔 모습을 보며 나서야 할 때임을 느꼈다.

이대로 두었다간 분명 성인식은 피의 축제가 될 것 같았으니까.

"아... 그... 고생하셨습니다."

"냐."

"네?"

"네가 가진 지식은 이로울 수도, 극히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냐."

"조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힘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주변에 큰 영향을 준다. 한 번 잘못된 길을 걸으면 나중에는 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방향으로 폭주하게 되고."

그간 계속 '~냐.' 소리를 하며 장난스럽게 말했었는데, 이번만큼은 대단히 진지했다.

"나는 균형을 유지하는 자. 네가 길을 벗어날 경우, 그에 맞는 시련을 내릴 것이다."

형이 또 발끈했으나, 손으로 제지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니까요."

"그 정도면 훌륭하지 않냐."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라타토스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전의 말투로 돌아왔다.

"그리고 황제 너. 30년간 황제 자리에 앉아있었으면 좀 발전해야 하지 않겠냐. 어떻게 형제가 나란히 멍청하냐?"

"저도요?"

"제 위치를 모르고 다른 이에게 맞춰주고 있으니 멍청하지 않냐."

그렇게 말은 했지만, 어쩐지 기뻐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의심의 눈초리는 지우지 않았지만.

"이제 가는 거냐."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온 김에 보다 가려고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 결과를 받는지 궁금했다.

형을 슬쩍 보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별문제 없을 듯했다.

"쯧. 스스로 고생문을 여네."

"무슨 뜻이야?"

"그런 게 있어. 간 빼 먹힐 수도 있으니 정신 바짝 차려라."

"음?"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위험한 일은 아니겠지만,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모습에 막연한 두려움이 생겨났다.

그리고 잠시 뒤.

형이 했던 말의 의미를 뼈저리게 알게 된다.

#008. 성인식 (3)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민석 전하. 저는 크누트 카알손이라고 합니다. 보셨다시피 방금 준남작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반갑습니다. 김민석입니다."

"지금은 준남작에 불과하지만, 금세 올라갈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의 큰 골격과 아름다운 근육을!"

크누트는 보디빌더처럼 멋진(숨 막힐 정도로 답답한) 육체미를 보여주었다.

만약 이 사람이 한국에 있었다면 이종격투기 선수로 이름을 떨쳤을지도 모르겠다.

"어떻습니까. 저라면 전하의 힘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내가 누구를 부하로 삼을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은데.

"가라."

옆에서 형이 지루하다는 말투로 한마디 하자,

"넵."

크누트는 곧 순한 양이 되어 돌아갔다.

이런 패턴이 벌써 서른네 번째 반복되고 있다.

성인식에 참가한 모든 이들이 나에게 왔다 가는 걸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런 건 별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전하를 성인식에서 우.연.히 뵙게 되다니. 평생의 운을 다 써버린 것만 같습니다."

"아하하...."

"세리스 엠블라라고 합니다. 영원의 시대 때부터 귀족이었던 유서 깊은 가문, 엠블라 가의 차녀입니다."

"반갑습니다. 김민석입니다."

그녀는 윤기가 흐르는 붉은 단발의 소유자로 사나워 보이는 눈매를 가졌지만, 미녀임은 분명했다.

오피스 룩을 입었다면 유능한 커리어우먼처럼 보였을 것 같다.

"전하를 보는 순간 운명임을 느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게 전하를 섬길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문제는 바로 이거다.

형은 남자가 다가오면 가차 없이 쳐낸다.

하지만 여자, 그것도 미녀가 온다면 수수방관했다.

오히려 내게 음흉한 미소를 보이며 잘해보라는 듯 엄지를 치켜세웠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누구를 거둘 여유는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 한 몸 바쳐 전하의 앞길을 닦아놓겠습니다."

그녀가 받은 작위는 남작.

전투 능력은 무려 1만 2천으로, 나보다 120배는 강하고 아까 근육 마초보다 두 배 정도 강했다.

이렇게 선이 가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걸까.

"지금으로서는 답변드리기가 무척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기사나 호위가 부담스러우시다면 전속 시녀도 좋습니다. 엠블라 가문의 차녀답게 신부수업도 확실히 받고 있으니까요."

더 부담스럽다.

"제 대답은 같습니다. 세리스 양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이곳에 적응할 때입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괜히 코 꿰이기 싫었다.

기사로 거두든, 시녀로 거두든 이쪽 세계에 대해 충분히 파악한 후에 그러고 싶었다.

"전하의 고귀한 뜻은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신다면 저, 세리스 엠블라를 떠올려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녀는 뒷걸음으로 몇 발자국 뒤로 가더니 세련된 동작으로 몸을 돌려 떠났다.

무척이나 도도한 모습이었다.

"아깝네."

"엠블라 가문이 그렇게 대단한 가문이야?"

"옛날에는 유명한 공작가였는데 지금은 아니지. 내가 신분제를 폐지해버렸으니까."

"그거에 대해서 좀 자세히 듣고 싶...."

생각 없이 말을 꺼냈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췄다.

아까의 세리스 엠블라처럼 강제로 강등된 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괜히 이 자리에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 그러면 뭐가 아까운 건데?"

"예쁘잖냐."

"...."

"후궁의 시녀들하고 다른 타입의 미녀라 혹시 네가 관심 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그러고는 어깨동무를 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혹시 고자는 아니지?"

"아니야."

"전에는 내가 소개해주면 다 받겠다고 하더니, 막상 관심받으니까 왜 그렇게 숙맥이냐?"

"관심은 좋지만, 숨 고를 틈도 없이 관심 보이니까 부담스러워."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사람마다 성격은 다르지."

한가롭게 이야기하는데 드디어 마지막 순번이 세계수로 향했다.

그 남자는 세계수에 손을 댔지만, 결국 어떤 작위도 받지 못했다.

"응?"

"왜?"

"좀 이상해서."

작위를 못 받는 거야 몇 번을 봤기에 특별히 이상하진 않았다.

문제는 그 남자의 전투력.

무려 27만.

오늘 본 청년 중 전투 능력이 2만을 넘긴 이가 없다는 걸 생각하면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저 남자 진짜 강해. 근데 왜 작위를 받지 못했지?"

"호오. 혜안으로 본 건가. 상당히 쓸만한 능력이네. 맞아. 원래의 저 녀석이라면 최소 백작은 받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결격사유가 있거든."

꽤 유명한 청년이었는지, 주변은 무관심으로 반응했다.

"누군데?"

"한때는 인간족의 미래라고 불렸던 유망주, 지크프리트 메로빙거다."

"...."

할 말을 잊었다.

지크프리트.

악룡 파프닐을 참살한 용사.

북유럽 신화에 관해 기초적인 지식밖에 가지지 않은 나도 들어본 적 있는 대영웅.

"결격사유가 뭔데?"

"몸은 멀쩡하지만, 정신이 박살 났어. 사실상 폐인이야."

"저런... 어쩌다가?"

"결혼 잘못했다가 인생 작살난 거지. 부인은 괜찮았는데 장모와 처남이 개쓰레기였거든."

안타깝다고 생각할 무렵, 저 멀리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텅 빈 눈.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다른 청년들과는 달리 이쪽으로 오기는커녕 도망치듯 천천히 달아나버렸다.

"아...."

"왜?"

"아니야. 아무것도."

그의 눈은 전에 거울을 봤을 때의 내 눈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요 며칠 사이 점차 생기를 찾아가긴 했지만, 그는 아마도 더 깊은 수렁에 빠질 테지.

지크프리트를 마지막으로 성인식은 끝났다.

그와 동시에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천천히 세계수 앞으로 나아갔다.

"청년 여러분. 성인식을 치르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와아아아아!"

마치 수능을 끝낸 고등학생 같은 모습이었다.

청년들은 모두 손을 뻗어 올리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성인식은 끝이 아닌 시작이며...."

이 이야기를 이세계에 와서 들을 줄이야.

일단 고생했으니 좀 쉬거나 놀라고 말해주면 안 되냐.

한국이나 여기나 왜 끊임없이 채찍질만 하려고 하는 거지?

"잊지 마십시오. 황제 폐하께서 등극하시기 전엔 인간은 최약의 종족이며 노예의 종족이었다는 사실을. 지금이야말로 인간이 최고이자 최강의 종족으로 발돋움할 때입니다!"

"와아아아아!"

고개를 돌려 형을 보았다.

"그랬어?"

"옛날엔 그랬지. 인간은 다른 종족에 비해 별 장점이 없거든. 굳이 찾자면 체력이 좋다는 정도? 아. 농사는 제일 잘 짓는다."

"전에 각 종족이라고 했었잖아. 얼마나 있는 거야?"

"아홉 세계니까 아홉 종족."

인간, 드라켄(용인족), 드워프, 노움, 수인족, 엘프, 다크 엘프, 오크, 언데드.

이렇게 아홉 종족이라고 한다.

시녀 중에는 언데드가 없었구나.

딴생각을 하는 사이 노인의 연설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인간은 최후의 전쟁에서 유일하게 거인들을 이겨낸 일등 신민입니다!"

"와아아아아!"

"그 자부심을 잊지 말고 끊임없이 단련하여 황제 폐하께 충성하고 아홉 세계에 우뚝 서십시오!"

"예!"

최약의 종족, 노예의 종족이라는 이름에서 그동안 얼마나 멸시받았고 힘든 생활을 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래도 저런 선민사상은 좀 위험한데....

"잠깐 나갔다 온다."

"어디 가게."

"성인식에 황제가 참가했잖냐. 자라나는 새싹들을 밟아... 아니, 한 마디 해줘야지."

불안한 느낌이 엄습한다.

대체 뭔 소리를 하려고.

형은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연설을 하던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살짝 물러났다.

"황제다."

"...."

이전의 환호성과는 달리 모두 정자세로 숨죽이며 형에게 집중했다.

"우선 하나 정정해주지. 인간족이 거인을 이긴 게 아니라, 내가 거인을 이긴 것이다."

"...."

"뭘 꼬라보냐."

그렇게 말하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한 자세로 건들거렸다.

동네 양아치 같은 모습이었다.

"하여간 이 새끼들은 조금만 신경 안 쓰면 누가 잘 났니, 못 났니 하며 도토리 키 재기 하고 있어. 그렇게 할 일이 없냐?"

"...."

"내 밑으로 다 평등하다고 했냐, 안 했냐."

"하셨습니다!"

"내가 또 칼춤 춰주리?"

"아닙니다!"

"처신 잘하라고."

"예!"

그 말을 끝으로 돌아오려고 하던 형은 다시 몸을 돌렸다.

"아. 맞다. 내 동생 알지?"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부담스럽다.

"물론 쟤는 예외다. 뒤지기 싫으면 알아서 꿇어라."

"예!"

이제야 실감이 났다.

황족의 의미에 대해.

이래서 후궁의 시녀들이나 이곳의 청년들이 자꾸 들이대었던 거구나.

"민석아. 이리 와봐."

또다시 불안한 예감이 들었지만, 일단은 형이 손짓하는 곳으로 갔다.

"앞으로 너의 시다바리가 될 애들이니까 한 마디 해줘라."

"시다바리가 뭐야. 그래도 황제인데 바른말 써야지."

"됐다. 이렇게 살다 가련다."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보았다.

아까의 엄숙한 모습 대신 나를 향해서는 기대의 눈빛을 가득 보내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후우...."

무척 긴장이 되고 떨렸지만, 심호흡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들과 비슷한 처지였다.

그러니 그때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떠올려 보자.

가르치려 들지 않고.

듣고 싶은 말만 해주지 않고.

솔직담백하게 있는 그대로의 말을.

"우선 고생 많으셨습니다. 성인식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대략 듣는 것만으로도 여러분께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것 같습니다."

"...."

뭐라도 좋으니 반응해 줬으면 좋겠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간 고생하신 만큼 잠시만이라도 쉬거나 마음껏 노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건 중요하지만, 휴식도 매우 중요하거든요."

"...."

"여러분들이 사회로 나가게 되면, 노력한 만큼 보상이 따라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대로 노력을 안 했거나 제 노력을 과대평가한 거겠지."

내가 인상을 쓰며 째려보자 형은 휘파람을 불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군중들 사이에서 웅성웅성하는 소요가 일어났지만, 이내 잦아들었다.

"때로는 인생이 꼬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느낀 바로는 대부분 살짝 방황하고 헤매는 사이 서서히, 그리고 잔잔하게 꼬이기 시작하더군요."

"그게 꼬인 거냐. 제 인생 지가 말아먹은 거지."

"좀 조용히 해!"

"미안."

다시금 소요가 일어났다.

대충 들어보니,

'폐하께서 눈치를 보셨어!'

'황제 폐하께 이렇게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폐하께서 미안하다는 말씀도 하실 수 있었구나!'

와 같은 반응이었다.

대체 형은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저는 여러분께 쉬면서 진지하게 인생의 목표를 찾아보길 권합니다. 이건 저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목표가...."

형을 슬쩍 보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달성되는 바람에 지금 좀 헤매고 있어서요."

"...."

나름 유머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은 없었다.

다들 대단한 명언을 들은 것처럼 곱씹고 있었다.

"저도, 여러분도 방황하지 않기를. 설령 방황하더라도 길은 잃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와아아아아!"

함성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살면서 이렇게 주목받은 적이 없었는데 간질간질했다.

동시에 미래를 향해 패기 넘치게 전진하려는 청년들을 보며, 하고 싶은 일을,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았다.

이 세상은 세계수와 라타토스크라는 신비로운 존재로 인해 외압이 없는 평가제도가 도입된 세계다.

나는 그러한 인재들을 거둘 수 있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

기득권에 타협하지 않고.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공정과 정의가 살아있는 세상.

그러한 세계의 기초를 다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길이 얼마나 가시밭길인지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수없이 실패하더라도.

단 한 번의 성공을 위해.

끝없이 도전하고자 마음먹었다.

#009. 환영 파티 (1)

성인식이 끝나자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다들 걸어가네."

"세계수 근처에서는 말을 타면 안 된다는 법이 있거든"

"저 정도로 멀리 떨어졌으면 순간이동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순간이동은 아무나 쓰냐?"

"뭐가 평범한 거고, 뭐가 특별한 건지 구분이 잘 안 돼."

"살다 보면 알게 되겠지."

첫날부터 조급해지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이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늘 초조했다.

평생을 뒤처지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살았기 때문일까.

"수련은 언제부터 할 거야?"

"네 안에 있는 영약들이 안정되고, 내 몸도 융화가 안정되면."

형은 내 등을 손바닥으로 짝! 하고 쳤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넌 5년 안에 나에 버금가는 최강이 될 거다."

"형은 계획이 다 있구나?"

"나만 믿어라."

든든했다.

가족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심적으로 안정된다니.

지난 10년 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응?"

"왜?"

"지크프리트...."

그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걷다가 넘어지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또 몇 걸음 걷지 않아 다시 고꾸라졌다.

다른 사람들은 익숙한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지나쳐갔다.

결국,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가?"

"내가 그였다면 누군가 도와주길 간절히 바랐겠지."

"쟨 폐인이라니까. 마음이 망가졌다고. 고통을 못 느껴."

"더 아프지. 망가졌으니까."

굳이 형하고 말씨름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자기만족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내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에게 다가갔다.

그사이 또 넘어졌다.

조용히 기다렸다.

다시 일어나기를.

바닥에 손을 짚고.

부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기를 썼다.

완전히 서기 직전.

중심을 잃은 그는 다시 쓰러졌다.

아니, 쓰러질 뻔했다.

"괜찮아요?"

그를 부축하며 말을 걸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공허한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스무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삭았지만, 눈은 의외로 맑았다.

덥수룩한 검은 머리.

거칠게 자란 수염.

쉰내에 가까운 악취.

대체 어떤 충격을 받으면 사람이 이토록 망가지는 걸까.

"고생했어요."

"...."

"쉬세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 으... 으아...."

"네?"

"으아아아악!"

갑자기 괴성을 지른다.

괴물 같은 악력으로 나를 꽉 쥔다.

그리고는 내 목을 물어뜯을 듯이 입을 벌렸다.

"숙여!"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오는 것을 느꼈으나, 나는 지크프리트를 꽉 껴안았다.

훅!

뒤를 돌아보니 코끝에 형의 발이 멈춰있었다.

"민석아. 검은 머리 짐승은 함부로 거두는 게 아니다."

형의 전신에서는 강렬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내가 하룻강아지라서 그런 걸까.

형에게 믿음이 있어서 그런 걸까.

조금도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형은 나에게서, 내가 안고 있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 괴롭더냐."

손에는 세계조차도 파괴할 것만 같은 강렬한 기운이 모여든다.

"안심해라. 나스트론드도 널 괴롭힐 수 없을 만큼 편하게 해줄 테니. 민석아. 비켜라."

"잠깐!"

"네가 말해도 이건 들어줄 수 없는 일이다. 더는! 누구도! 절대! 잃지 않을 테니까!"

언제나 패기만만했던 형에게서 깊은 슬픔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런 형을.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이제야 알 것 같아."

순간 형이 멈췄다.

"뭘?"

"미미르가 혜안을 주면서 했던 말의 뜻을."

"뭐라고 했는데?"

"'미래를 통찰하는 지혜는 현재를 정확히 앎으로써 시작되는 법.'이라고 했어."

무슨 뜻인지 몰라 처음엔 단순히 상태창 같은 걸 보고 사람을 파악하라는 건 줄 착각했다.

"방금 '살려줘'라고 한 거죠?"

그는 나를 해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말하는 방법마저 잊어서 발버둥 치며 울부짖은 것뿐이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구하러 온 사람에게 위험할 정도로 엉겨 붙는 것처럼.

"전 확실히 들었습니다."

손을 내밀었다.

형의 살기로 인한 충격 때문일까.

그는 아까보다 몇 배는 힘겹게 팔을 들어 올렸다.

"좀 아프네요."

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인지, 아까보다 더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굳은살이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투박한 손이었다.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일부러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그는 손에 힘을 풀었다.

"모든 것을 잃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어요. 지금은 그저... 성장통 같은 겁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인재를 보는 눈이 탁월하다고 한다.

나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었기에, 작은 가능성이라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지크프리트.

치열한 사투 끝에 사악한 마룡, 파프니르를 참살한 대영웅의 이름.

어쩌면 동일인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굳은살과 흉터에 새겨진 아픔과 노력을 믿었다.

"다시 일어날 수 있어요. 이전보다 더 높게 뛸 수 있어요."

"...."

"제 말을 믿나요?"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당신을 믿어요."

내 몸 안에서 따뜻하면서도 강대한 무언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작위를 받기 위해 세계수에 손댔을 때처럼 나와 그의 몸이 황금빛으로 뒤덮였다.

곧,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그의 얼굴이 깊게 잠든 아이처럼 변한다.

심신 곳곳에 가득했던 상처는 흘러나간 고뇌처럼 깨끗하게 씻겨진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잘은 모르겠어."

내가 그를 믿고.

그가 나를 믿었을 때.

현실이 바뀌었다.

마치 기적처럼.

"신이라도 된 기분이네."

무척 추상적인 힘이다 보니 정확한 발동 조건은 잘 모르겠다.

다만 감각으로는 그런 느낌이었다.

사제에게 계시를.

예술가에게 영감을.

학자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듯.

비전을 현실로 불러왔다고 할까.

이 힘을 잘 사용하면 수많은 인재를 빠르게 '잘' 육성할 수 있을지도.

"민석아."

"응."

"너는 어렸을 때부터 나보다 똑똑했어. 지혜롭기도 했지. 하지만 아직은 넌 모르는 게 많다."

"알아. 그러니 더 노력해야겠지."

"그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마음가짐의 문제지."

"응?"

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만으로는 전해지지 않나...."

"정확히 무슨 뜻인데?"

"언젠가 알게 될 거다."

옆에는 지크프리트가 기절한 채 누워있었다.

이대로 사람을 내버려 둔 채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좀 그랬다.

"됐다. 지금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푹 쉬어라."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형은 나를 후궁으로 순간 이동시켰다.

***

민석에 대한 소문은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성인식에서 대공 9급을 받았다는 소식부터, 인간족 유망주인 지크프리트를 갱생했다는 소식까지.

게다가 망나니인 황제와는 달리 인격도 훌륭하다고 한다.

다소 소심해 보이는 면이 있지만, 망나니보다는 훨씬 나았다.

"놀랍습니다. 전하께서 이토록 유능하실 줄이야.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오산이로군요."

브륀은 여러 보고서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능력은 크게 기대하지 않고, 오직 인품만을 기대했는데 이렇게 대박일 줄이야.

"말했잖아. 상당히 똑똑하다고. 무려 '증기기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니까?"

"폐하께서 5년간 장인들을 닦달했지만, 결국 예산만 엄청나게 쓰고 폐기된 그 쓸모없는 장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야야. 살살 때려. 뼈 나가겠다."

"이쯤 되면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뭐를?"

"그 증기기관이라는 것도 사실은 쓸모있는 장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거라니까? 그 썩을 장인들이 제대로 구현을 못 해서 그렇지."

설계도도 안 주고 무작정 만들어내라는 사람이 문제다.

브륀은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무척 기분이 좋은 상태였으니까.

"아직 제대로 보급되지도 않았는데 편자에 호평이 자자합니다. 이 정도면 좋은 '증명'이 될 것 같군요."

민석은 세상에 둘 뿐인 황족이기에 증명 같은 절차가 필요 없다.

하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다.

"게다가 힐드에게 알려주신 다른 지식도 대단합니다. 제국 유수의 학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고 하더군요."

미터 측정법이라든지.

삼각측량이라든지.

금본위제도라든지.

이 지식이라면 종족 간의 분열을 상당히 봉합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문제라면 철벽이라는 점이군요. 툭 치면 넘어올 거라던 폐하의 말씀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걔가 모쏠이라 연애 세포가 멸종했을 수 있어."

"그런 느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꼴리질 않았다는 뜻이겠지. 좀 더 수위를 높여서...."

제석은 '걔가 본 야동이 수천 편일 텐데 어지간한 수준으로 꼴리겠냐?'라고 생각했다.

민석의 체면을 위해 차마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구로 넘어가면 그 녀석 컴퓨터를 뒤져서 야구 동영상의 패턴을 분석해봐야...."

"네?"

"아무것도 아니야. 설마 민석이 취향이 파이어볼러는 아니겠지?"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게 있어. 그보다 시녀들이 의욕이 없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폐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자원해서 수만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시녀가 되었으니까요."

모든 종족과 생명은 평등하다.

하지만 황족은 더욱 평등하며, 황족의 배우자는 황족 대우를 받는다.

즉, 민석과의 결혼은 극적인 신분 상승의 기회였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문, 나아가 자신의 종족에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 기회.

"가문을 넘어 각 종족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받는 그녀들이 의욕 없을 리가 없지요."

황족을 제외하고서, 민석 그 자체로도 나쁘지 않았다.

대공 급 능력에, 천상계의 지식을 '전문적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황손은 '선의 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자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전하는 최고의 신랑감이지요."

'선의 법칙'을 언급하며 브륀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제석은 태평하게 넘겼다.

말 그대로 남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시녀들의 역량 부족이라는 뜻이네. 좋다. 새로 뽑자. 어차피 지원자는 넘치잖아."

"시녀들이 자주 바뀌면 전하께 안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이대로 기다리다가 지구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어쩌게?"

50년간 살다 보니 이곳은 제석의 고향 같은 느낌이었다.

이왕이면 여기서 동생과 함께 살고 싶었다.

조카도 보고 싶고.

"파티를 열죠. 전하의 환영회를."

"그거 여자만 부르는 거 아니지?"

"전하의 인맥을 위해서라도 다양한 부류를 불러야겠지요."

"아서라. 걔 같은 순딩이는 영혼까지 빨아 먹힌다."

"늑대 무리 한가운데에 던진다는 느낌은 있습니다. 야심가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인 만큼 그야말로 시험에 들게 하는 꼴이겠죠."

잘못 건드리면 황제한테 죽겠지만, 내버려 두기엔 너무 탐나는 먹잇감이니까.

"목적이 뭐냐."

"전하께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만남의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미리 걸러내려고 합니다."

"뭘?"

"향후 전하의 외부활동이 편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전하를 곤란하게 한 자들을 죄다 나스트론드로 처박아버리려고 합니다."

나스트론드.

죄인이 죽었을 때 떨어진다는 무간지옥.

영원히 사악한 용에게 살점을 뜯어먹히는 형벌을 당한다든가.

"그동안 잡초를 너무 방치한 것 같으니까요."

선례를 보이면 아무리 몸이 달아올라도 당분간은 알아서 자제하겠지.

"마음대로 해라. 민석이도 왕관의 무게를 느껴야 할 필요가 있으니."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을 처분하는 건 무겁다. 하지만 감싸 안는 건 훨씬 더 무겁지."

제석은 가볍게 웃어넘겼지만, 브륀은 몸을 살짝 떨었다.

황제의 표정이 과거 신분제를 폐지할 때 숙청의 칼날을 휘둘렀던 때를 떠올리게 했기에.

***

성인식이 끝난 지 4주가 흘렀다.

그동안 낮에는 형에게 기초 체력훈련을 받고, 밤에는 힐드에게 이곳의 상식과 역사를 배웠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로 아침 식사를 한 후에 체력 단련을 시작했다.

"헉. 헉. 헉."

"호흡이 얕다! 가늘고 깊게 쉬라고 했잖아!"

"스으읍. 후우. 스으읍. 후우."

"속도가 느려지잖아! 제대로 안 할래? 겨우 이게 힘들어?"

안 힘들 수가 없다.

잠실 운동장보다 큰 후궁 정원을 벌써 몇십 바퀴째 돌고 있으니까.

그냥 도는 것도 아니었다.

수십kg의 쇠붙이들을 몸 곳곳에 착용한 상태로 달렸다.

전에 먹었던 영약이 아니었다면 걷는 것도 힘들었겠지.

"오케이. 거기까지. 잠시 휴식."

"하악. 하악."

"쉴 때도 호흡은 유지해라. 내공심법이야말로 먼치킨이 되는 지름길이니라."

"미친...."

무협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형은 대종사급 천재다.

무협지에서 봤던 무공을 이곳에서 직접 만들어냈으니까.

형이 미미르의 샘물을 통해 얻은 지혜가 바로 이것.

정확히 무엇을 원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결과 '무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혜'를 얻었다고 한다.

"민석아."

"힘들어. 말 시키지 마."

"네가 여태까지 한 건 준비운동에 불과해."

"...."

"하여간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다니까. 나 때는 말이야 영약 같은 거 안 먹어도 이거에 열 배는 했는데."

"...."

"에휴. 됐다."

대꾸할 기운도 없어서 멍하니 있으니 잔소리를 멈췄다.

표정을 보니 본인이 심했다는 자각이... 없구나.

오히려 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수련만 하느라 힘들지?"

"수련만 하느라 힘든 게 아니라, 수련이 힘들어."

"그럼 분위기 전환이나 해볼까? 네가 성인식 때 그랬잖아.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휴식도 중요하다고."

수상하다.

저 근성론 신봉자가 이렇게 말할 리가 없는데.

"혓바닥이 길어지는 걸 보니 후달리는 게 있나 보네. 뭔데? 말해봐."

"오늘 저녁에 네 환영 파티를 열기로 했어."

"내 환영 파티인데, 난 왜 지금 듣고 있는 거지?"

"그건 음... 서프라이즈~!"

표정에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말해주는 걸 깜빡했다고.

"아무튼, 이번 기회에 사교계에 데뷔하자."

본인이 잘못했음에도 당당한 모습.

형을 진심으로 한 대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저렇게 사람이 뻔뻔할 수 있을까.

절대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환하게 웃었다.

"싫어."

#010. 환영 파티 (2)

"싫다고? 왜?"

"파티를 별로 안 좋아해."

"어쩌다가 방구석 폐인이 됐냐?"

"시끄럽고 북적북적한 곳을 싫어해. 부서 회식 정도는 괜찮아. 하지만 형이 말하는 파티는 그런 규모가 아니지?"

황제의 동생을 환영하는 파티.

그 황제의 동생은 황제를 제외한 유일한 황족.

작은 규모의 파티일 리 없다.

처음 보는 사람들을 무수히 상대해야 할 텐데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할 것 같았다.

"정 나를 알리고 싶으면 형이 판단해서 괜찮은 사람을 데려와 줘. 그런 건 나도 싫어하지 않으니까."

"어... 그렇게 하면 5년으로도 부족한데...."

5년 x 365일 = 1,825일.

다르게 말하자면 나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이 최소 2천 명은 된다는 뜻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적응할 수 있도록 소소하게 열었어."

"몇 명?"

"구백...."

"구백 명이나?"

"그럼 구십으로...."

"많아."

"그래도 명색이 황제가 주최하는 파티인데 규모가 너무 작으면 가오 빠지는데...."

형이 기가 죽은 모습을 보이자 나도 마음이 불편해졌다.

억지로 납치되어 오긴 했지만, 그만큼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한 번쯤은 형의 기를 세워줄 필요도 있겠지.

"알았다. 이번에는 형이 원하는 대로 할게."

"오! 역시 내 동생."

"단, 이번뿐이야. 다음에도 멋대로 하면 나도 안 참아."

"알았다. 알았어."

혹시라도 가볍게 받아들일까 봐 일부러 정색한 채 말했는데,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

그리하여 저녁이 다가왔다.

시녀들이 분주히 움직여 내 의상과 머리를 다듬었다.

이렇게 힘을 꽉 준 의상을 입게 되니 절로 긴장되었다.

"전하께서 걱정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힐드가 정장을 입혀주며 단언했지만, 그래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근데 여기는 원래 이러나요?"

"제가 무지하여 전하께서 하신 질문의 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명색이 황실에서 주최하는 파티인데 너무 날치기로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가족끼리나 친구끼리 하는 파티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조직의 규모가 커질수록 공지 기간이나 준비 기간 역시도 길어진다.

국가 레벨이 되면 최소 몇 달은 준비하고, 길게는 몇 년을 준비하는 예도 있다.

"이곳이 원래 그런 게 아니라 폐하께서 원래 그러십니다."

"...그렇군요."

"준비가 부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브륀은 우수하니까요."

"능력 있어 보이기는 했어요."

자매가 나란히 뛰어나네.

우리 형제는 라타토스크로부터 나란히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까의 질문에 추가로 답변해드리자면, 보통 사교계에 데뷔할 때는 최소 1년 전에 본인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역시 형이 좀 이상한 거였네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왜죠?"

"황족은 준비할 시간이 필요 없으니까요."

"...네?"

"황족은 무엇이든 마음 가는 대로 하며, 다른 이들이 알아서 '잘' 맞춰줘야 한다. 이것이 법입니다."

어쩌다가 이런 막장 규칙이 만들어진 것일까.

"전하께서는 인품이 훌륭하시니 평소처럼 하셔도 호평이 자자할 것입니다. 그러니 심려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자, 다 되었습니다."

"힐드는 안 가나요?"

내 비서라고 했으면서 여전히 시녀복 차림이었다.

"오늘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 동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후궁 앞에서 기다린다고 하셨으니 입구까지 모시겠습니다."

"아쉽네요. 다음에는 꼭 함께하죠."

"예. 그때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힐드와 함께 후궁 밖으로 나가자, 형과 어떤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브륀이었다.

"이야. 이렇게 꾸미고 나니 '옷이 날개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네."

"그 말은 못생겼다고 돌려 까는 말이야."

"알아."

"에휴. 됐다."

브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정장 차림인 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도 파티에 참석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명하시면 무엇이든 이루어드릴 테니까요."

"야. 민석이랑 내 취급이 너무 다르잖아. 설마 반했냐? 이 얼음땡이에게도 봄바람은 부는구나!"

내가 브륀이었다면 '좀 닥쳐줄래?'라고 했겠지만, 직위가 깡패라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 하는 것 같았다.

대신 냉기를 담은 경멸의 눈빛으로 형을 쳐다보았다.

물론 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때는 얘도 순수하고 착한 애였어. 날 만나고 어느 순간부터 변하더라. 무엇이 쟤를 바꾼 걸까."

"형을 만나기 전까지 착했으면 원인은 형이겠네."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어쩔 수 없어. 다들 패기가 없어서 얘만큼 받아주는 애가 없거든."

"고생이 많으십니다. 브륀. 형을 대신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브륀은 오른손을 왼쪽 가슴 위로 올리며 예를 취했다.

힐드의 행동거지가 우아하다면, 브륀은 세련되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전하께서 알아주시니 그간의 피로가 날아가는 기분입니다."

형과 브륀, 그리고 후궁 밖에 대기하고 있던 황궁의 시녀들과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안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네요. 오늘 파티에 참여한 사람은 몇이죠?"

"399명입니다."

이쪽 세계는 9라는 숫자를 신성시하므로 무엇이든 최대한 9로 맞춘다고 덧붙였다.

"원래 참가인원은 999명이었는데, 네가 질색할까 봐 최대한 줄이고 줄였어."

"감사합니다."

"줄인 건 난데, 왜 브륀한테 감사해하냐?"

"고생은 브륀이 했을 테니까."

파티 준비는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나도 부서 회식을 준비할 때 상당히 고생했던 기억이 있었다.

특히 장소 다 예약해뒀는데, 부장의 '그냥 삼겹살이나 먹지?'라는 말 한마디에 예약 취소하고 동선 다시 짜느라 엄청나게 고생했었지.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의 보좌에 비하면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에 대한 호감이 팍팍 올라가는 것이 혜안으로 보였다.

"혹시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브륀은 여기서 강한 편입니까?"

영약을 잔뜩 먹고 2주 동안 수련한 내 전투 능력이 약 3,000.

브륀과 힐드의 전투력은 53만.

단순 비교해도 177배는 강하다는 뜻이었다.

"아스가르드의 드높은 신들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만, 발할라의 전사들보다는 확실히 강합니다."

상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비교가 어렵다.

내가 알쏭달쏭하다는 제스처를 보이자, 형이 대신 설명했다.

"팔왕과 비슷한 수준이야. 팔왕은 각 종족의 최강이고."

"와... 대단한 분이네."

"내가 더 쎄."

"응. 알아."

형이 이 세계 최강이라는 사실은 귀가 닳도록 들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얘나 팔왕이나 더는 강해질 수 없어."

"나는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넌 한계가 없고."

"왜?"

"오딘이 만든 '선의 법칙' 때문인데... 이거 설명하면 말 길어진다. 다음에 알려줄게."

잡담하는 사이 연회장 문 앞에 도착했다.

"그럼 편히 즐기시기를."

"브륀은 안 들어오나요?"

"저는 파티의 총 책임자입니다.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빠르게 보고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고생 많으시네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시선을 형에게로 돌렸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우리를 부를 때까지 기다리면 되나?"

"야. 너는 왜 자꾸 맞춰줄 생각만 하냐. 쟤네들이 우리에게 맞춰야지."

그렇게 말하며 당당하게 연회장 문을 열어젖혔다.

"아홉 세계의~ 절대적인~ 지배자~ 황제 폐하~ 납시오~!"

형이 한 걸음 내딛는 동시에 시종장으로 추측되는 인물이 우렁차게 호명하기 시작했다.

"뭐하냐. 가자."

형은 걸음을 멈추고 멀뚱멀뚱 서 있는 내 어깨를 잡고 나아갔다.

"또한, 영광스럽게도 황제 폐하의 동생이신 김민석 전하께서 행차하셨습니다!"

예정에 없던 형의 돌발행동에 시종장은 속사포 랩을 하듯이 대사를 읊어 나갔다.

익숙한 듯, 당황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긴장한 탓이었을까.

연회장 끝에 준비된 단상 위로 올라가는 동안, 주변에서 여러 작은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저분이 폐하의 동생분이신가."

"소문대로 인품이 훌륭하신 것 같습니다."

"내 딸을 잘 봐주셨으면 좋겠는데...."

"성인식 때는 대공의 작위를 받으셨다고...."

"무공까지 배우신다면 어디까지 올라갈지 짐작이 되지 않는군요. 참으로 제국의 홍복입니다."

인간들에게는 호평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이곳에는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쯧. 최약의 종족인 인간만 노났군. 어째서 천상계에는 인간밖에 살지 않는가."

"어떤 종족이든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폐하와는 달리 전사의 패기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소외될 수도 있겠군."

"총기가 가득해 보이니 자네들 같은 전사들을 홀대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만."

"형제는 닮는다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군. 기질이 너무 달라."

인간 외의 종족들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불안 반, 기대 반인 듯했다.

단상에 도착하자 화려하게 치장된 두 개의 의자가 보였다.

"앉아."

"응."

어째서 의자의 형태가 똑같지?

형은 황제고, 나는 일개 황족이니까 격의 차이를 두어야 하지 않나?

이런 의문을 갖는 사이, 형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일부러 삐딱하게 앉은 채로 당당하게 선포했다.

"내 동생의 환영 파티에 참석해줘서 고맙다. 선물은 알아서 비싸고 좋은 거로 준비했을 거라 믿는다."

"...."

"편하게 잘 놀다 가고. 단, 한 가지 주의할 게 있다."

성인식 때 봤던 모습이 오버랩되는 듯했다.

설마 그 말을 또 하려는 건 아니겠지....

"민석이 건드리면 진짜 뒤진다. 인생 조지기 싫으면 알아서 기어라."

하네.

내가 경악하는 것에 반해 다른 사람들은 평온했다.

황제가 황제 했을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듯했다.

"민석아. 잘 놀다 와라. 아. 사정이 생기면 외박해도 돼. 다 이해한다."

"뭐?"

형은 내 대답은 듣지 않고 휙 하고 사라졌다.

399명의 시선이 나에게만 집중되자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후우...."

일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 봐야 소심한 바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성인식 때처럼 또 교장 선생님 모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성인식 때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많았고, 이곳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으니까.

"반갑습니다. 김민석이라고 합니다. 지금 무척 당황스러운데, 흔들림 없는 여러분들을 보아하니 익숙한가 봅니다."

내 말에 상당히 많은 인원들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하루 이틀 일이 아닌가 보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파티는 파티입니다. 특히나 절 환영해주기 위한 파티인 만큼,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이 즐겁게 머물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싶었으나, 너무 저자세로 나가는 것은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적당한 선에서 인사를 마무리했다.

다행히 전사의 패기를 중시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무난히 받아들인 것 같다.

"전하."

"브륀? 여기는 어쩐 일로...."

"상황은 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정장을 입은 미녀가 허리를 숙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든든했지만, 너무 든든한 나머지 내가 레이디가 된 기분이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호의와 배려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녀의 바쁨을 생각하면 거절하는 게 옳았지만, 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지는 않았다.

솔직하게 받기로 했다.

모두가 기대의 눈빛으로 나를 보는 가운데, 천천히 사람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011. 환영 파티 (3)

대충 보기에도 고가의 장식으로 가득한 연회장.

나를 포함해 400명이나 참석했음에도 연회장의 반의반도 못 채울 만큼 넓었다.

"뷔페 형식이군요. 신기하네요."

"알아보십니까?"

"이것도 형이 주장한 건가요?"

"영원의 시대 때부터 내려온 아홉 세계의 전통 방식입니다. 그보다 가볍게 식사하시는 건 어떨까요?"

황가 주최 연회인 만큼 산해진미가 널려 있다.

하지만 음료에 손대는 이는 많아도 음식에 손을 대는 이는 없었다.

원래 이곳의 파티는 이런 걸까.

"아니요. 지금 상태에서는 뭘 먹어도 체할 것 같네요. 간단한 음료만으로 충분해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시겠습니까?"

"흐음...."

연회장은 할로윈 파티처럼 여러 종족이 가득했다.

종족을 상징하는 색이 있는지, 종족마다 특정한 색을 기조로 한 옷을 입었다.

예를 들면 엘프는 빨강색, 다크 엘프는 노란색이 중심이었다.

"마치 너와 나는 다르다고 선을 긋는 것 같은 느낌...."

"대부분 자신의 종족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니까요."

참가자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으며 대부분이 젊고 아름다웠다.

이런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말을 걸었다가는....

아무 의도가 없더라도 오해와 곡해로 점철되겠지.

"인선은 맡기겠습니다."

벌집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신경 쓰기 싫어도 쓰입니다."

특히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는 저 눈빛들을 보면.

"전하의 뜻은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초반에는' 능력 있는 '중년 남성' 위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게 괜찮겠군요."

대리·과장급은 수없이 상대해본 만큼, 그 연령대가 좀 더 편하니까.

***

결과적으로 중년 남성을 선택한 것도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 아들을 내 직속 수하로 넣기 위해, 혹은 딸을 결혼 상대로 추천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달려들었으니까.

"제 딸이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에디나는 정말 훌륭한 인재이자 미녀입니다. 전하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일생의 영광일 것입니다."

"아쉽지만 제가 누굴 곁에 둘 여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형... 폐하의 수련만으로도 하루가 다 가버리니까요."

"폐하께서 직접 가르치신단 말씀입니까?"

"예. 이상합니까?"

"폐하께서 누구를 가르치신 건 30년 넘게 없던 일이라 놀랐을 뿐입니다. 전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신 만큼 이상할 일은 아닙니다."

애정이 각별하다.

아까 형이 한 막말로 인해 다들 그렇게 각인된 듯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모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주셨는데 골고루 인사드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요."

"물론입니다. 전하께서 이리도 공정하고 자비로우시니 제국의 큰 복입니다."

혹시나 끈덕지게 달라붙으면 어떻게 할까 걱정했지만, 중년 남성은 깔끔하게 물러섰다.

명장이라고 불린다더니, 다가갈 때와 물러설 때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전하."

"네?"

"혹시 여성은 불편하십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여기는 연애하면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나요?"

"종족마다 다릅니다. 드라켄이나 드워프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엘프나 노움은 개방적입니다. 다크 엘프의 경우 문란한 수준이죠."

"인간은요?"

"드라켄이나 드워프만큼은 아니어도 보수적인 편입니다. 오크나 수인족들은 개방적인 편이고요."

도표로 만들어서 건네주면 모를까.

말만 들어서는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다크 엘프는 문란하다... 만 기억났다.

"언급하지 않은 종족이 있나요?"

"언데드가 있습니다."

"언데드는... 아, 연애를 하지 않겠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답니다. 차갑게 식었더라도 감정은 있으니까요."

스스로 납득했는데 누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루크레치아! 존귀한 분의 대화에 끼어들다니 이 무슨 무례인가!"

루크레치아라고 불린 여성은 호통치는 브륀을 무시하고 내게로 다가왔다.

이 여자... 강하다.

전투력이 무려 51만.

종족 최강급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라고 합니다. 현재 헬하임의 2번 기함, 프라우 훌레의 제독을 맡고 있습니다."

힐드에게 배운 적이 있다.

헬하임은 언데드로 구성되었다는 특징으로 인해 사실상 자치권이 인정되는 지역.

귀족격인 뱀파이어는 남녀 할 것 없이 아름답고, 거의 모든 이들이 두려워할 만큼 강력하다고 한다.

"반갑습니다. 김민석입니다."

"먼저 무례에 대해 사죄드리겠습니다. 전하를 보는 순간 죽은 심장이 다시 뛰는 것 같은 열기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피부와 '뱀파이어'답게 매력적인 용모를 지녔다.

하지만 온기 대신 냉기가 흘러서 '움직이는 마네킹' 같다.

"브륀. 존귀한 분을 모시면서 큰 소리를 내다니. 그대도 꽤나 오만해졌군요."

"...죄송합니다. 전하."

"괜찮습니다. 술이 들어간 자리에서는 다소 무례가 허용될 수 있지요. 서로가 기분 좋게 끝낼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는 기분 나쁘지 않으니, 괜히 기싸움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행히 둘은 내 뜻을 이해했는지 살짝 허리를 숙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보다 듣고 싶군요. 언데드도 연애를 하나요?"

"물론입니다. 그 수가 적고, 정신적인 교감이 주를 이룹니다만, 고위로 갈수록 상당히 뜨거워진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아, 비하의 의미는 없습니다."

"전하께 그런 뜻이 없음은 제 부족한 식견으로도 헤아리고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혹여 다른 용건이 있습니까?"

"전하께서 꼭 받아주셨으면 하는 '물건'이 있는데 받아주시겠습니까?"

"너무 값진 것은 부담스러우니 그 점을 양해해주신다면 받겠습니다."

이 사람들도 힘들겠다.

황제인 형은 알아서 비싸고 좋은 거로 준비하라고 하고, 나는 그런 값진 건 받을 수 없다고 하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기 드문 '것'이기는 하지만, 값진 '것'은 아니니까요."

"무엇인지 알려주시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혹여 불쾌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제가 왜 불쾌해야 하죠?"

"생명체들은 죽은 자가 주는 물건을 불길하다고 여기니까요."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언데드라고는 하나, 생각할 수 있고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인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언데드 NPC가 퀘스트 보상을 주는 느낌이었다.

"저주받은 물건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물건이라면 상관없습니다."

"전하께 그런 물건을 드린다면 헬하임은 한순간에 멸망하겠지요."

"그래서 무엇을 주려고 하십니까?"

루크레치아는 색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으로 치마 끝을 잡아 살짝 들어 올렸다.

"전하께 드리는 선물은 바로 저,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입니다."

"루크레치아 씨를요?"

"네. 이것이 그 증표입니다."

그녀는 내게 붉은 기운이 감도는 흑요석 반지를 내밀었다.

"종속의 반지입니다. 이것을 끼고 계시는 한, 저는 전하의 어떤 명령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분명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으니 물건이라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지요."

"저는 이성과 의지가 있는 존재를 함부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하의 고결한 마음은 제 가슴속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이런 말로 물러서 주니 고맙네.

"그럼 소중히 여겨주십시오."

가 아니네.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만...."

"편하게 AI 로봇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더운 여름날에는 죽부인 대신 사용하셔도 좋고요. 시원할 뿐만 아니라 감촉도 좋답니다."

"푸훗."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나와 사레가 들렸다.

"여기에도 그런 게 있나요?"

"없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한때 만들어내라고 황명을 내리신 적이 있기에 개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판타지 세계에서 AI 로봇이라니.

이거 완전....

"아무튼, 좀 꺼림칙하네요. 기분 나쁘다는 게 아니라 윤리관에 어긋난다고 할까요."

"전하."

"말씀하세요. 브륀."

"저는 전하께서 꼭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받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만면에 가학적인 미소를 띠었다.

힐드와 똑같은 얼굴로 이런 표정을 지으니 느낌이 좀 이상했다.

"그대에게 종속되느니 차라리 전장의 안개가 되는 것이 낫겠습니다."

"저도 충분히 소중히 여겨드릴 자신이 있습니다만."

"수없이 많은 전사의 뒤통수를 쳐서 숨통을 끊은 그대에게 소중히 여겨져 봤자, 빛나는 사슬을 단 노예일 뿐이겠죠."

"발할라는 꽤 좋은 곳이랍니다. 같은 죽은 자들의 세계인 헬하임이나 나스트론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말입니다."

그녀들의 대화에서 한 가지 전승이 떠올랐다.

"혹시 브륀은 발키리인가요?"

"발키리인 적은 있었으나, 지금은 분명 인간입니다."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정말 엄청난 분이셨네요."

내가 감탄을 담아 브륀을 쳐다보자, 루크레치아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가깝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 느껴지지는 않네.

언데드라 그런가.

"저도 그에 지지 않는답니다."

"루크레치아가 유능하다는 것은 한눈에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선물을 받는 것은 별개입니다."

"아쉽군요. 좋은 주인님을 모실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만."

"좋은 이가 아니라서 유감이군요."

"모실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루크레치아는 인사를 하고는 한쪽으로 사라졌다.

"아깝습니다."

루크레치아가 사라지자, 브륀이 살짝 입맛을 다셨다.

"저 반지를 받으셨다면, 전략 병기이자 만능의 하인을 무료로 부릴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내가 거절한 것이 어지간히 아까운 모양이었다.

"브륀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대단한 능력자 같네요."

"순수한 전투 능력만으로도 제국에서 20위 안에 들며, 뱀파이어라는 특성상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니까요."

"그렇게 어렵나요?"

"아홉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표현할 때 '뱀파이어를 죽이는 것보다 힘들다.'라고 할 정도지요."

"오...."

"게다가 늙지도 않고, 피로를 느끼지도 않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부하입니다."

"그런 능력자가 왜 하인을 자처하는 것이죠?"

말이 하인이지 거의 노예를 자청하는 수준이었다.

"절실하니까요."

"절실?"

"그녀가 속한 세계, 헬하임은 최후의 전쟁 당시 거인의 편을 들어 신들의 세계인 아스가르드를 침공한 전력이 있습니다."

"왜 그런 짓을...."

"과거 헬하임을 지배했던 여왕, 헬은 신왕인 오딘에게 강렬한 증오를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 세계 대부분은 아스가르드의 신을 숭배하는 애시르 교단이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아스가르드를 침공했다는 건 심각한 신성모독이리라.

현재는 신보다 위에 있다는 황제의 존재로 인해 종교가 많이 퇴색되었다고 들었다.

"폐하께서는 지금의 헬하임은 다르다며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받아주셨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문제입니다."

"그러니 다른 황족인 저에게도 눈에 들 필요가 있었다?"

"예. 만약 전하께서 헬하임을 혐오하게 된다면 존망의 기로에 선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저에게 그런 힘은 없습니다."

"하지만 폐하를 움직이실 수 있으십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지요."

아까 루크레치아의 대화에서,

++

"혹여 불쾌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제가 왜 불쾌해야 하죠?"

"생명체들은 죽은 자가 주는 물건을 불길하다고 여기니까요."

++

이 말이 어떤 심정과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인지 이해되었다.

나였다면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불안을 잔뜩 담은 상태로 물어봤을 것 같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파티는... 편한 마음으로 즐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말 한마디로 종족 단위로 희비가 갈린다.

그리고 이곳에는 아홉 종족이 모두 있었다.

"전하. 이번만큼은 정말 배려가 필요 없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가지시고, 바라시는 대로 취하십시오."

예의나 배려는 개나 앓는 질병이라고 말하는 듯.

"그것이 전하께서 누릴 복이며, 저들도 바라마지 않는 것입니다."

브륀은 가볍게.

하지만 확고하게 단언했다.

#012. 환영 파티 (4)

루크레치아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였을까.

연달아 다른 사람을 만났지만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 깊었던 상대는 없었다.

"생각보다 많이 지치는군요."

"그렇게 일일이 받아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한 인사조차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루크레치아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았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바뀌었으니까.

성인식 때의 청년들과는 달리, 부모들은 자녀의 미래를 위해 안면에 철판을 깔고 들이댔다.

특히 딸 가진 부모들은 '저돌적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떤 이는 자신의 세 딸을 늘어놓고 원하는 만큼 골라가라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저에게 이렇게 여자가 많이 꼬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여성에 익숙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들과 대화하실 때 무척 능숙하신 것 같았습니다. "

"서툴지는 않지만, 이렇게 편하게 대화한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어떤 면이 편하셨습니까?"

"상대가 먼저 흥미로운 화제를 꺼내오니까요. 그에 맞춰주기만 하면 되니 한결 편하다는 느낌입니다."

반면 한국에서 이성을 만날 때는 보통 내가 화제를 생각해야 했다.

침묵이 흐르면 재미없는 남자라는 인식을 받게 되니까.

그로 인해 나와의 만남 자체가 기피될 수 있으니 꽤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화젯거리를 생각했었다.

억울해할 건 아니다.

언젠가 여사친 한 명이 자기 카톡을 슬쩍 보여준 적 있었다.

무려 900개가 넘는 메시지가 쌓여있었지.

내가 아니라도 수없이 많은 관심을 받는데, 굳이 재미없는 나에게 관심을 줄 이유는 없다.

"전하께서 그만큼 매력적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매력적이었다면 저쪽에서도 그랬겠죠."

"천상계에서는 아니라도, 이곳에서는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좋은 말은 아니군요."

결국, 황족이라는 타이틀 때문이라는 뜻이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한국에 있을 때는 내가 이성들에게 철벽을 당했다는 뜻도 되고.

"전하께서 노력하여 얻으신 것인데 왜 좋은 말이 아닌 거죠?"

"네?"

"전하께서 대공을 받은 이유는 천상계의 지식을 깊이 탐구하셨기에 얻은 것입니다. 자랑스러워하셔도 되지요."

"황족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요?"

"대공은 팔왕 다음 가는 능력자라는 뜻입니다. 전하께서 황족이 아니셨다고 해도 충분히 매력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황제인 형.

다음이 팔왕.

그다음이 나라고?

제국 전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뜻?

"저조차도 공작에 불과하며, 아까의 루크레치아는 백작에 불과합니다. 전하께서는 충분히 자신감을 가지셔도 됩니다."

'물론 황족이라는 요소는 더욱 군침을 삼키게 할 만한 요소이긴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고마워요. 덕분에 힘이 나는 것 같네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보다 꽤 괜찮은 여성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마음에 드시는 분은 없습니까?"

"없지는 않았지만, 한두 번 보고는 그 사람의 인성을 파악할 자신이 없어요. 더 겪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결정하지는 않겠지만, 다음 만남은 굳이 피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마음 가는 대로, 몇 명이든 고르셔도 문제없습니다만."

"예의가 아닙니다."

"이곳의 예의엔 어긋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택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그쪽을 바랄 겁니다. 황족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아내는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그런 부분은 폐하와 참 많이 닮으셨군요. 상대를 고르는 방식은 매우 다르시지만요."

"어떻게요?"

형의 연애담이라니 꽤 궁금했다.

전에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으나, 형은 그에 대한 대화를 피했다.

"폐하께서는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평생에 걸쳐 증명한다.'라고 하셨었지요."

"평생에 걸쳐 증명한다...."

"나중에 말씀하시기를 어떤 책의 문구라고 하셨습니다."

분명 만화책이나 무협지에 나온 문구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좋으니 그만 증명해주셨으면 합니다."

브륀의 눈빛은 '너는 그러지 마라.'라는 것 같았지만, 굳이 그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

파티를 시작한 지 약 세 시간.

밀려 들어오는 인사를 받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오늘은 이만할까요?"

브륀이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음... 아니요. 한 명 더 만나고 싶습니다."

연회장 한쪽 구석.

망부석처럼 흔들림 없는 자세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말끔한 모습이었으나 그를 못 알아볼 일은 없었다.

"2주 만이네요. 그렇죠?"

다름 아닌 지크프리트였다.

"절... 기억하십니까."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기억 못 하면 바보겠죠."

"지난번엔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어떠한 벌이라도 받겠습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하오나...."

"저는 신경 쓰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그보다 몸은 좀 괜찮나요?"

"예! 전하의 은총 덕분에 날아갈 듯 가볍습니다. 예전의 감각을 찾으려면 좀 더 노력해야겠지만, 예전 수준은 금방 넘어 보이겠습니다."

아직 온전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음의 상처는 금방 회복되지 않는 만큼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겠지.

"각자의 자리에서 힘내봅시다. 저도 갈 길이 멀군요."

"전하...."

"말씀하세요."

"제가 만약...."

그는 말할까 말까 깊이 갈등하는 것처럼 보였다.

재촉하지 않고 마음의 결정을 내릴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제가 만약 전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네?"

"저를 전하의 종자로 삼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눈에는 여태까지 본 누구보다 절실함이 가득했다.

출세를 위함이 아니다.

어떻게든 다시 살아가고 싶어서.

누군가를 믿고 나아가고 싶어서.

날개를 다쳤던 새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절실함이었다.

나도 겪어보았기에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저는 부족할지라도 최대한 공정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확실히 약속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는 나를 탓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양손이 힘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당신이 했던 말을 행동으로 증명해낸다면...."

힘없이 흔들리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저는 더없이 기쁠 것이며, 그간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전하의 고귀한 말씀.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해봅시다."

"예! 전하."

지크프리트와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쭉 침묵을 지키고 있던 브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떤 것이요?"

"그가 무척 마음에 드신 것 같았습니다만... 앞으로 일을 생각하면 전하의 지지 세력이 있어도 나쁠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점점 넓혀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세계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것이 공정이고, 어떤 것이 정의입니까?"

"종족이나 파벌과 같은 진영 논리로 선악, 보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닌, 행동과 결과만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세계입니다."

"가시밭길이군요. 불가능... 아니, 무척 어려운 길이기도 하고요."

사실상 제국의 거의 모든 실권을 지닌 브륀조차도 불가능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실패하고, 또 실패하더라도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꿈이 아닙니까."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황족에게 머리를 숙이는 건 받아들여도, 다른 종족에게 뒤처지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해보죠.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걸었을 때, 제 눈앞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궁금하기도 하니까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지만.

머리와 어깨 위에 얹힌 책임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여느 때보다 가볍다고 생각했다.

***

파티가 끝난 다음 날에도 여전히 수련은 계속되었다.

"거기까지! 잠시 쉬자."

"푸하!"

"어제보다 열심이네. 파티에서 뭔 일 있었어?"

"누군가가 나를 사바나의 사자들 한가운데 던져버린 덕에 생존 의지가 늘어났지."

사자는 암컷이 사냥을 도맡는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있었어?"

"있었긴 한데, 면접관 증후군에 걸린 것 같아서 냉각기가 필요해."

"그게 뭔데."

"냉각기란 머리를 식히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는...."

"면접관 증후군이 뭐냐고."

"면접관은 수많은 인재 중에서 몇몇을 뽑는 일을 하잖아."

"어."

"그런 일을 하다 보니 지도 별거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우습게 보이는 증상을 말해."

파티에 참여한 사람들은 전부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빠지는 것 없는 우수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인재들을 흔한 엑스트라로 생각해버렸다.

루크레치아의 임팩트 덕에 다른 사람의 인상이 지워진 탓도 있었지만.

"우습게 봐도 되지 않나? 아쉬운 사람이 우물 파는 거지."

"인간관계가 또 안 그래."

"그런다니까? 내가 아무리 엿 같이 굴어도 쟤네들은 나한테 떨어질 수가 없어요."

엿 같이 군다는 자각이 있으면 좀 자제해줬으면 하는데.

"왜?"

"거인들이 돌아온다면 나 없인 못 막을 테니까."

"아직 남아있어?"

"있지. 대표적으로 수르트의 아내인 신모라. 어디에 숨었는지 계속 찾고 있기는 하지만 뭐...."

성과는 없다.

반대로 말하자면 언제 들이닥친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왜 이곳 사람들은 형만큼 강해질 수 없는 걸까?"

"선(線)의 법칙 때문에."

"전에 한 번 들어봤던 거네. 뭐야 그게?"

"오딘이 최후의 전쟁을 대비한답시고 이것저것 엄청나게 베풀었거든. 근데 다들 점점 강해지다 보니 지도 쫄렸던 거지."

"쫄려? 왜?"

"어쩌면 필멸자가 신들의 권위를 넘어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일정 이상 강해지지 못하게 세계의 법칙을 바꿔버렸지."

"선 넘지 말라는 거네."

브륀이나 힐드의 전투력은 53만.

각 종족 최강인 팔왕도 비슷하다고 했다.

즉, 그 수치가 이곳 사람들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라는 뜻이다.

물론 그 한계는 보통 사람이 보기에 아득히 높은 경지일 테지만.

"하지만 우리는 이세계인이라서 그 법칙에 영향을 안 받지."

"그 선의 법칙이라는 건 형도 어떻게 할 수 없어?"

"몰라. 시도해본 적도 없어."

"왜?"

"내가 뭐하러 고생해서 남 좋은 일을 시켜주냐. 밑에 놈들 대가리 커져 봐야 귀찮기만 하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형은 내 말을 자르듯이 선수를 쳤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 난 쟤네들이 우물 파는 거에 대해선 뭐라고 한 적이 없어. 내가 대신 파줄 생각이 없는 것뿐이다."

"그래... 근데 어쩌다가 화제가 여기까지 왔지?"

"네가 면접관 어쩌고 하다가. 아무튼, 그런 거니까 너도 네 마음대로 해도 돼."

"나랑 형이랑 같냐?"

"남편으로서의 가치는 비슷하지."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말했잖아. 너와 난 '선의 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네 자식도 똑같아. 게다가 황위 계승권까지 보너스로 생기겠지."

"자식도?"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확실해."

속뜻을 이해하는 순간 무서워졌다.

극단적으로 '결혼하지 않아도 아이만 갖게 해준다면 OK.'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또한....

'형도 자식이 있었다.'라는 뜻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형제라도 가볍게 물어볼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자.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받는 기대는 굳이 생각할 필요 없어. 네 마음대로 하면 된다."

"왜?"

"그들은 너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할 테니까."

"대접을 해주잖아."

"그건 내 업적에 대한 부가적인 대접이다. 내가 망하면 황제의 동생이라는 타이틀도 망가지듯, 그건 내가 신경 써야 할 문제지 네가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틀렸어. 가족이기 때문이 아니야. 네가 나를 살리려고 애쓴 세월에 대한 보답일 뿐이야."

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의 지원은 해주지 않았을까.

"정 기대가 부담스럽다면 그 기대를 무너뜨리도록 해. 나처럼 막 나가도 되고, 약점을 보여도 되고, 일부러 실패해도 되겠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걸 해?"

"기대에 못 이겨 네가 무너지는 것보단 훨씬 낫다."

어쩐지 그 말이 경험담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아 더욱 깊게 다가왔다.

명심해야지.

"자, 됐지? 수련을 계속하자."

"난 형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 같아. 오늘은 이만 쉴래."

바로 실천에 옮겼다.

"뒤진다?"

깜짝 놀랄 만큼 아무 소용 없었다.

역시 이론과 실전은 많이 다른 모양이다.

#013. 임페리얼 퀘스트 (1)

오후에도 수련은 계속되었다.

어제 심력을 소비한 탓일까.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게 유난히 힘들게 느껴졌다.

"피곤하네."

"운동하면 된다."

"...."

"무거운 걸 들어라. 지방, 특히 내장 지방을 태워. 그러면 피로가 싹 날아간다."

생각해보면 형은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하지만 운동 관련 지식만큼은 어지간한 전문가급.

전문 용어를 말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지.

형이 유식해 보여서.

그리고 마지막엔 실망을 안겨줘서.

"운동도 중요하지만, 식이요법이 더 중요하지 않아? 여기 음식은 좀 기름지던데."

"지방을 섭취하는 것도 건강에 도움 돼. 문제는 내장 지방이 쌓이면 남성 호르몬이 깎이지. 그러니까 태워라."

닥치고 수련이나 하라는 거구나.

군 제대 이후 이렇게 많이 운동하는 날이 올 줄이야.

"또, 수련이 끝나면 찬물로 샤워를 해라.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를 높여주고, 근육의 피로를 줄여준다."

"그거 검증된 이론 맞아?"

"형을 못 믿냐?"

"당연하지."

형의 인격에 대한 불신.

그리고 형의 지식이 10년 전 것이라는 데에 있다.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발전하는데.

아니라고 밝혀진 게 꽤 많을걸?

예를 들면 밤에 먹으면 살찐다는 이야기.

실은 아침에 먹든, 저녁에 먹든 별 상관없고 살찌는 건 그날 먹은 열량의 총합으로 결정된다는 게 지금의 중론이라고 한다.

대신 자기 전에 먹으면 역류성 식도염에 걸릴 위험이 있다고 하지.

"까라면 까 인마. 테스토스테론을 분비하라고. 공포를 줄여주고, 경쟁을 즐기게 해주는 테스토스테론은 만능의 호르몬이니까."

"경쟁을 즐기고 싶진 않은데...."

굳이 말하자면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보다 어제의 나와 경쟁하고 싶다.

"그뿐만 아니라 우울증이 없어지고 피곤함을 적게 느끼게 되지. 네가 피곤한 건 남성 호르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와도 나처럼 수련하면 힘들 거라 생각하는데.

"근데 테스토스테론이 많이 분비되면 공격성이 늘어나지 않아?"

"전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과다 분비되면 범죄로 이끌 수도 있겠지. 반면 코르티솔이 적어지면 여유가 생기고 이에 따라 관대해진다.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않게 된다는 뜻이지. 그것이 알파 메일, 우두머리 수컷이다."

"오호."

이제 알았다.

형이 인생을 대충 사는 이유를.

코르티솔이라는 게 적다 못해, 아예 없었나 보네.

"코르티솔이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보통 피부약인 스테로이드에 많이 쓰여."

"스테로이드? 그거 근육 만들 때 쓰는 도핑약 아닌가?"

"그건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같은 계열이긴 하지만 효과는 전혀 달라. 코르티솔은 당질 코르티코이드라고 해서 오히려 근육을 감퇴시키지."

이럴 때 참 당황스럽다.

형의 입에서 전문적인 이야기가 나오니 사람이 달라 보여서.

"그러니 내 말대로만 하면 넌 먼치킨이 될 수 있어. 또한, 성욕이 증가하지."

그리고 '그럼 그렇지.'라는 결론으로 끝나는 것까지 완벽하다.

대체 성욕을 증가시켜서 어디다 쓰라는 건지.

"고로 테스토스테론을 늘리고, 코르티솔을 줄여라."

"남성 호르몬은 운동하고 찬물로 샤워를 하면 잘 분비되는 거지?"

"그렇지."

"코르티솔은 어떻게 줄이는데?"

"스트레스를 안 받으면 된다."

"스트레스는 형이 주고 있는데?"

"성인식 때 네 입으로 말했잖아. 더는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그 말은 발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거 아니냐?"

"발전하고 싶다고 했지, 스트레스받고 싶다고는 안 했는데."

그래도 형이 무슨 말 하는 건지 알겠다.

"설령 실패했더라도 하지도 않은 사람보다는 성공한 거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도전해라."

참 많이 들어본 말이다.

다만 그때는 이 좋은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악감정이 생겼다.

책임지지 못 할 말을 쉽게 한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 실패를 감당해줄 가족이 생겼으니까.

이토록 든든할 수가 없네.

"수없이 실패하더라도 단 한 번 성공하면 인생이 달라질 거다. 그 꿀, 도파민 샤워를 맛보게 되면 예전의 너와 같지 않을 테니까."

"알았어. 더 열심히 해볼게."

굳은 결심을 하고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한 시간 뒤.

"헥. 헥. 헥."

"호흡."

"스으읍. 파... 스으읍. 파....."

"너 진짜 무공엔 재능이 없구나."

'혜안'을 통해 수련을 받을 때마다 점점 강해지는 것이 수치로 보였다.

그렇기에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하지만 형의 눈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브록바 정도는 아니어도, 도나르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모르는 사람이랑 비교하지 마. 어제의 나와 비교해!"

"세상의 근간은 경쟁인데 그런 식으로 해봐야 자기만족 외에 무슨 도움이 되냐?"

"지속해서 어제의 나보다 더 발전하다 보면 시작은 미미할지라도 끝은 창대해진다고 배웠어."

반대로 너무 잘난 사람들과 비교하다 보면 내 자신감과 자존감이 끝도 없이 추락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하찮게 여겨지기도 하고.

결국, 세상만 원망하다가 제자리걸음 끝에 깊은 수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지.

"그런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천마신공의 계승자가 될 수 있겠냐?"

"천마신공? 왜 천마야?"

"그냥 그게 제일 세 보이잖아."

중2병 같아서 좀 그런데.

"근데 나 그렇게 재능이 없어?"

"어."

"아스크르와 비교하면 어때?"

아스크르는 어제 파티 때 만난 인간족으로, 형의 1기 제자라고 했다.

평범한 옆집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라 인상이 옅었기는 하지만.

"네가 걔를 어떻게 알아? 파티 때 만났나?"

"응."

"야. 그래도 아스크르보다는 몇 배 낫지. 걘 진짜 재능이 없어. 내 제자 아니었으면 병사 A로 있다가 죽었을 거다."

"노력도 재능이지."

"헛소리하네. 천재는 노력 안 하는 줄 아냐."

"당연히 하겠지만...."

"경지가 올라갈수록 이전에 했던 모든 노력의 총합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이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네가 곧 겪게 되겠지."

곧이라....

지금은 멀게만 느껴졌다.

"아! 맞다. 생각해보니 내가 가르치는 것보다 그 녀석에게 맡기는 게 낫겠네."

"아스크르?"

"어. 걘 재능이 없어서 기초만 연마했어. 덕분에 기초만큼은 탁월하지. 그래서 2기, 3기 제자를 받을 땐 걔가 기초를 지도했어."

"좋은 사람 같던데."

"내 제자는 다 좋은 애들이야. 그러니 내 옆에서 지금까지 버텼지."

자학 수준의 셀프 디스다.

알면 고치면 될 텐데.

"대신 멍청해."

"멍청하다고?"

파티에서 이야기 나눴을 땐, 충분히 사려 깊고 현명해 보였는데.

"똑똑하면 나랑 얽히지를 않았을 테니까."

누워서 분수를 뿜는 것 같다.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스플래시 데미지를 먹여버리네.

"한 번 걔한테 배워 볼래? 어느 정도 강해지면 내가 힘을 숨기는 방법을 가르쳐줄게."

"힘을 왜 숨겨?"

"힘을 숨기면 멋진 일이 가능해지니까."

"예를 들면?"

"황제인 내가 정체를 숨기고 보통 사람으로 위장했다가 막 나가는 놈들을 역관광할 때의 쾌감! 진짜 장난 아니다."

"...."

"권력을 남용하는 자는 권력으로, 힘을 남용하는 자는 힘으로 압살한다. 정말 이만한 재미가 없지."

권력은 정작 본인이 남용하고 계신 뎁쇼.

"너 자신을 믿어라. 형인 내가 증명하듯 우리의 유전자는 우수하다. 내가 했으니 너도 할 수 있어."

"그럼 형도 기계공학 배워 볼래? 나도 했으니 형도 할 수 있어."

"말 돌리지 마! 핑계는 잠깐의 안도를 만들어줄 뿐이잖아!"

여느 때보다 발끈하는 걸 보면, 공부는 정말 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래도 찔리는 게 있었는지, 오후의 수련은 강도가 조금 낮아졌다.

***

"오늘 수련은 이만하자."

"푸하!"

오늘은 아직 해가 저물지도 않았는데 종료 선언했다.

머릿속엔 '살았다!'라는 생각이 가득 들었다.

"웬일이래?"

"확인할 게 있어서."

"뭘?"

"가보면 안다."

후궁 본채로 들어가니 시녀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을 분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기 물 좀 주세요."

"예!"

'물'이라는 단어가 들리자마자, 한 시녀가 빠른 걸음으로 작은 주전자와 컵을 들고 왔다.

어째 좀 불안 불안하다 싶었는데, 너무 긴장한 모양인지 제 발에 걸려 그대로 넘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시녀에게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평소에는 쾌활하고 일 잘하는 시녀인데, 형이 근처에 있으면 무척 소심해지는 시녀다.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울어."

형이 그녀를 보며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말을 왜 그렇게 해. 괜찮아요? 안 다쳤나요?"

"죄송합니다."

내가 차분히 달래어 돌려보내자 형이 툴툴댔다.

"애들을 새로 뽑았더니 영 시원치 않네. 패기가 없어. 패기가."

"시녀가 패기가 있으면 어쩌자고."

"황궁 시녀는 그래야 된다. 어설픈 놈들에게 무시 받으면 황실의 격이 떨어지니까."

"차차 익숙해지겠지."

나도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긴장을 너무해서 자주 실수하곤 했으니까.

"여기는 배우는 곳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이 일하는 곳이다."

"그건 알겠는데, 같은 말이라도 좋게 말할 수 있잖아."

"내용이 중요한 거다. '개새끼야. 심심해서 천만 원 입금했으니까 확인해라.'라는 말이 좋냐? 아니면 '사랑하는 민석아 빚보증 좀 서줄 수 있을까?'가 좋냐?"

"형은 내용도 안 좋잖아?"

"처벌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나가서 감정 추스르고 오라는 건데 그게 뭐가 안 좋아?"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울어.'라는 말에 그런 뜻이?

어떤 의미로 참 대단한 재주다.

같은 말도 개같이 하는 재주.

"근데 이 짐들은 다 뭐야?"

"너한테 온 선물."

"어...."

어제 환영 파티 때 참여자들은 모두 선물을 가지고 왔다.

다만 현물을 가져오지는 않고 서류로 목록만 보여주었으며, 현물은 따로 보낸다고 했다.

아마 그게 도착한 거겠지.

"근데 개수가 좀 많은데?"

파티 참여자 수는 399명.

하지만 선물 개수는 언뜻 봐도 1,000개는 가뿐히 넘어 보였다.

"한가락 한다는 애들은 다 보냈겠지. 잘 보여야 하지 않겠어?"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선물 받아봐야 별로 기쁘진 않은데....

이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돌고 돌아 이상하게 오해될 수도 있으니까.

예를 들어 '김민석 전하께서 ~~의 선물을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신다.'라는 소문 같은 거로.

"선물의 가치가 곧 정성이지. 보자. 어떤 새끼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대충 보냈을까?"

"상자부터 전부 고급스러운데?"

"그 상자 안에 돌멩이만 넣어뒀을 수도 있잖아."

"중고로운 평화나라도 아니고 누가 그런 짓을... 하네?"

수정같이 생긴 돌이.

무척 컸다.

"마정석이다."

"그게 뭔데?"

"마나를 담고 있고 수정. 보통 마도구를 만들 때 쓰이지."

마나는 마법과 초인적인 힘을 내게 해주는 신비한 에너지.

당연히 폭발도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걸로 엔진 같은 동력기관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게다가 마나를 자동으로 회복하는 만큼, 한번 마도구로 만들면 수십 년은 쭉 쓸 수 있다."

"자연 회복된다고?"

그거....

무한 동력이잖아?

#014. 임페리얼 퀘스트 (2)

"무한 동력...."

공학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영역.

그 가능성이 눈앞에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한 동력이 아닐지도 모른다.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처럼 재생 에너지로 분류되어야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조건 없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란 정말 말도 안 되는 물질이다.

"혹시 이거 흔해? 많이 구할 수 있어?"

"어? 어... 흔하지는 않지만 희소한 건 아니지. 이 정도 크기의 순도 높은 마정석이라면 귀하긴 하지만."

"다루려면 어떻게? 특별한 능력이나 기술이 필요해?"

"마법사 중에서 마도구 전문 제작자가 있어. 특히 엘프들이 잘 다뤄."

형은 흥분한 내 모습에 살짝 당황하면서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왜 그러는데?"

"확실하진 않지만, 이것만 있으면 동력기관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증기기관 말하는 거지?"

"이런 꿈의 물질이 있는데 뭔 증기기관? 내연기관... 아니, 마정석에 맞게 엔진을 새로 설계해야지."

"그게 된다고?"

엔진을 설계한다는 말에 형이 미친놈 바라보듯 쳐다봤다.

"해봐야지. 형이 말했던 그 장인들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좋네. 근데 엔진 만들어서 뭐 하게? 자동차?"

"당연히 철도가 우선이지."

물동량이 비교도 안 될 테니까.

"철도면 기차? 너 기차도 만들 줄 알아?"

"몰라. 하지만 기계는 기본적으로 거의 원리가 같아. 몇 번 시행착오 겪다 보면 될걸?"

전기·전자가 들어가면 난이도가 미친 듯이 올라가지만, 순수 기계식 구조는 생각보다 쉽다.

엔진과 변속기, 제어장치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테니.

"형이 한국에서 책 좀 가져다주면 더 쉽게 될 테고."

"네 전공도 아닌데 책 본다고 돼?"

"기계공학과를 나오면서 필요한 학문은 다 배웠어. 남은 건 실전뿐."

대학교수가 말한 적 있었다.

대학은 지식을 배우기보단, 학습 능력을 기르는 곳이라고.

전공을 완전히 벗어나는 영역도 아닌 만큼 충분히 가능하다고 봤다.

또한, 실전 경험도 있었다.

철도 관련은 아니지만, 일부러 차량 수리병으로 입대했고, 엔진이라면 수백 번 해체·조립해봤다.

변속기나 기계식 제어장치라면 어느 정도 알기도 하고.

"나야 고맙긴 한데...."

"문제 있어?"

"너무 깊게 발을 담그는 거 아니냐. 너 그러다 지구로 못 돌아간다. 애들이 발목 잡고 늘어질 테니까."

"그거라면 괜찮아."

이곳은 한국과 비교하자면 불편한 것투성이였다.

아무리 마법이 있다고 해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가 더 많으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꿈을 가질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한국보다 더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네 뜻이 그러하다면."

형이 웬일로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필요해? 다 말해봐."

"마정석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 철을 다루는 장인, 그리고... 돈?"

그러고 보니 여기 철 생산량은 어느 정도지?

강철을 하나하나 두들겨 만들어서야 답이 안 나올 텐데.

"힐드!"

"부르셨습니까. 폐하."

"민석이를 브륀에게 데려가라. 필요한 건 뭐든 지원하라고 해."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말하고서는 정작 형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형은 뭐하게?"

"책 필요하다며. 네 일도 처리해야 하니, 지구로 가보려고."

"지금?"

"준비 좀 하고."

부럽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제집 드나들 듯이 지구로 갈 수 있을까?

"언제 갈 건데?"

"금방. 오래 걸릴 건 없어 보이니."

"내 얼굴로 깽판 치지 말고."

"알았다. 이 자식아."

형이 내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어쩐지 나를 보는 눈빛이 동생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식을 바라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황궁 집무실로 가자, 브륀이 문밖에 나와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벌써 들었다고요?"

힐드는 나랑 같이 왔는데 어떻게?

"제가 마법으로 연락했습니다."

"마법...."

마법 덕분에 이 시대의 기술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해버린다.

마법에도 관심을 가져봐야겠다.

자리에 앉았다.

브륀이 차를 한 잔 타서 내게 가져다주었다.

"사람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추가로 마법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마법이라면 제가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단순 힘 싸움이라면 폐하께 밀리지만 섬세한 운용이나 다양성은 제가 더 위입니다."

"브륀은 바쁘니까요."

이 나라는 황제의 권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나라.

하지만 황제가 파업하고 있는 미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브륀은 이런 막장의 나라를 먹여 살리고 있는 총책임자.

한가할 리가 없다.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정 그러하시다면 힐드에게 배워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힐드요?"

"대부분 전투 마법을 익힌 저와는 다르게 실생활에 유용한 마법은 동생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새로운 걸 제대로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 말에 브륀이 따스하게 웃었다.

힐드가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분위기로 대한다면, 브륀은 엄격하지만 자상한 큰 누나를 보는 것 같았다.

"권력과 재력의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좋은 점이라면 수도 없이 많다.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만한 것도 없는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가장 좋은 점이라....

잘 모르겠다.

가져본 적 없어서.

"글쎄요?"

"실패하더라도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

검술을 배우다 실패하면 마법을 배우면 된다.

마법을 배우다 실패하면 다른 것을 공부하면 된다.

이런 걸 말하는 듯했다.

"설령 40, 50살에 이르는 동안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때 또 시작하면 됩니다. 권력과 재력은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게' 만들어줄 힘이 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거 아닐까요? 무슨 일이든 시기가 있는 법이니."

"권력과 재력이 있다면 그 시기가 얼마나 더 늦어지더라도 큰 상관이 없습니다. 조금 불편할 뿐이죠. 단적으로 전하께서 배우시는 무공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 늦었나요?"

"보통이라면 많이 늦었지요. 기사 지망생이라면 늦어도 열 살 이전엔 기초를 세워야 하니까요. 하지만 전하께선 많은 영약을 드셨습니다. 재능있는 아이가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것보다 효율적입니다."

'더욱이 폐하께서 직접 가르치니까요.'라고 덧붙였다.

브륀이 이렇게 말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반면 권력이나 재력이 없는 이들은 한번 실패하면 나락으로 가지요. 설령 나락으로 가지 않더라도 쏟았던 노력을 어떻게든 활용하기 위해 계속 매몰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다.

얼마 전까진 나도 저러했기에, 남 일 같지도 않고.

"그런데 만약 제가 정말 어떤 분야에도 재능이 없으면 어떻게 하죠?"

무공만 해도 그렇다.

힐드는 놀라운 성장 속도라고 감탄했지만, 형은 매번 구박한다.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정녕 그러하다면 재능 있는 이를 고용하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재능 있는 자가 평생을 노력해도 닿지 못할 성과를 이룰 수 있지요."

"그렇긴... 하죠."

인재를 알아볼 눈이 없다면,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인재를 구하면 된다.

말장난 같지만 의외로 현실에서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이것이 가장 큰 장점인데,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만 장점으로 압니다. 참으로 가엽습니다."

그러면서 브륀은 살짝 가학적인 미소를 지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힐드와 똑같은 얼굴로 저런 미소를 지으니 움찔움찔한다.

"왜 가엽죠?"

"권력과 재력을 맛보지 못했으니 그런 빈곤한 상상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신랄하다.

"잘 알겠습니다. 마법에 관한 건 힐드에게 배우도록 하죠."

"송구한 말씀이지만, 어제 환영 파티 이후로 눈빛이 크게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요?"

"결의에 찬 것 같습니다. 마치 황제 폐하께서 거인들을 쓰러뜨리겠다고 깃발을 들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결심한 것은 맞습니다만,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목숨을 걸 각오는 없으니까.

"아무튼, 잘 부탁합니다. 마도구 제작과 뛰어난 장인으로."

"명을 받듭니다."

브륀을 그리 오래 보진 않았지만 아마 잘 해주겠지.

형이 저지른 그 막장을 수습한 능력자니까.

***

다음 날.

후궁에서 열심히 수련하고 있던 내게 힐드가 다가왔다.

"김민석 전하. 브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필요한 인원이 모두 모였다고 합니다."

"스으읍. 후우. 그래요? 회의 시간은 언제라고 하던가요?"

"회의... 말씀입니까?"

"어? 회의가 아니었나요?"

"회의가 맞습니다."

"...."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원래는 뭐라고 생각한 거죠?"

진지하게 질문하니 힐드는 살짝 난처한 듯 시선을 피하더니 이내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 직접 명령하실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그렇군요."

다음부터는 뭘 할 건지 명확하게 말해줘야겠다.

솔직한 의견과 가능성을 듣고 싶은데, 이래서야 무대포 강행밖에 되지 않는다.

"회의 시간은 언제라고 하던가요?"

"전하께서 명하실 때입니다."

"그걸 제가 정합니까?"

"당연합니다."

별로 안 당연한 것 같은데.

슬슬 이런 방식에도 익숙해져야 하건만.

수십 년 동안 살아온 방식과 상식이 있어서 고치기가 참 어렵다.

"가능한 한 빨리하죠."

마냥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시간 낭비에 불과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준비를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늘 고마워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 근데 참여하는 분이 누구누구인가요?"

샤워하면서 대화할 내용을 상정해봐야겠다.

"군산복합기업 이발디의 CEO 안드바리 이발디, 하이우드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장 시뇨라 스탈린입니다."

내가 뭘 들은 거지?

군산복합기업?

CEO?

아니, 이건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서기장?

"스탈린이요?"

"유명한 성이지요. 무려 폐하께서 직접 지어주신 성이니까요."

"진짜요?"

뭔 생각으로?

"정식으로 성을 하사하신 건 아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냥 네가 스탈린 해라.'라고 가볍게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폐하의 말씀이면 아무리 가볍다 하더라도 쉽게 넘길 수 없습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거였구나.

"그런데요?"

"그 시간부로 성이 바뀌었습니다."

미친.

"혹시 그분이 팔왕인가 하시는 분인가요?"

"아니요. 현재 엘프 왕, 정확히는 주석은 그람 스탈린으로 시뇨라 스탈린의 아버지입니다. 다른 종족에게는 주석보다는 법왕, 혹은 마도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불길한 단어가 연달아 들린다.

생각해보니 어제 환영 파티에서도 엘프들은 대부분 붉은색을 기조로 한 옷을 입었지.

이 나라 정말 괜찮은 건가?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이번 국가사업은 김민석 전하께서 주도하신다는 소문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싶어 합니다."

"아직은 일을 크게 벌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일단 확실해진 후에 제대로 진행하고 싶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부탁해요. 그럼 전 씻고 올 테니 옷 좀 준비해주세요."

"예."

이번 일은 내 진짜 데뷔라고 할 수 있는 일.

철저하게 준비해서 잘해보자.

#015. 임페리얼 퀘스트 (3)

채비를 마치고 힐드의 안내에 따라 황궁의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여간 자본주의 돼지는 역시 상종 못 할 종자입니다!"

회의실로 쓰이는 어떤 방.

그 안에서 하이톤의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런 멍청하고 몰상식한 헛소리는 듣지 않는다!"

이에 지지 않겠다는 듯, 걸걸하고 거친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전하. 무척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예? 아, 네."

힐드는 꾸벅 인사하더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눈빛은 사자같은 살기를 품고 있었다.

힐드가 방 안으로 들어간 직후.

방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힐드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밖으로 나왔다.

"이제 되었습니다. 편하게 들어가시면 됩니다."

"뭘 한 거죠?"

"가볍게 주의 시켰을 뿐입니다."

일단 고개를 끄덕이곤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기죽어 있는 드워프 남성과 엘프 여성을 볼 수 있었다.

가볍게 주의시켜서 이 정도인데, 제대로 경고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만에 하나라도 힐드를 화나게 해선 절대 안 되겠다.

"반갑습니다. 김민석입니다."

무거운 분위기를 떨쳐내듯, 일부러 웃으면서 밝게 말했다.

"평화제철 이발디의 대표, 안드바리 이발디 입니다. 명성 높은 김민석 전하를 뵙게 되어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알프헤임 의회의 서기 시뇨라 스탈린입니다. 전하를 알현할 날이 오기를 간절히 고대했는데, 이렇게 빨리 뵙게 되어 평생의 운을 다 쓴 것만 같습니다."

"...예. 반갑습니다."

사전에 들었던 정보와 다르다.

분명 군산복합체의 CEO, 중앙위원회의 서기장이라고 들었는데.

슬쩍 힐드를 바라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는 의문을 담아서.

"군산복합체 하면 죽음의 상인이라는 안 좋은 이미지가 있고, 엘프의 중앙위원회라고 하면 위험한 사상을 가진 이로 인식되니까요. 필요에 따라 저렇게 소개하기도 합니다."

힐드는 전혀 거리끼지 않는다는 듯, 당당하게 치부를 까발렸다.

둘의 눈동자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렇군요. 선입견은 들어맞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괜히 긴장하지 말라는 뜻이다.

내 말에 두 사람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음...."

외견을 보자니, 시뇨라 스탈린은 상상과 거의 비슷했다.

플라티나 블론드의 머리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

그리고 창백한 눈동자.

다만 신비롭고 아름다운 엘프 공주의 이미지는 옅었다.

대신 스탈린의 성에 걸맞게 무척 매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안드바리 이발디도 상상했던 드워프의 모습과 달랐다.

판타지에 흔히 나오는 작은 키에 근육 돼지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했건만.

근육 돼지는커녕 무척 왜소했다.

잔근육이 다져지긴 했지만, 외견으로 판단하자면 고블린 같다고 생각될 정도로.

외모가 중요한 건 아니니, 궁금증은 나중에 풀기로 하자.

"우선 안드바리 이발디 씨에게 묻고 싶네요. 철 생산은 얼마나 되는지, 그 질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습니다."

"전하께서 필요하시다면 밤을 새우더라도 납기일을 맞추겠습니다. 물론, 황실에 납품되는 만큼 질은 최고의 수준으로 말입니다."

"상당히 많이 필요합니다만?"

"어떤 양이든 가능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를 느꼈다.

이래서야 회의가 되지 않으니까.

"창 자루 두께의 철봉으로 아홉 세계의 수도를 전부 이을 정도의 양이 필요합니다. 아, 한 줄이 아니라 네 줄입니다."

레일당 두 줄.

상행선, 하행선 하면 네 줄.

너무 자신만만하게 말하기에 살짝 기대했건만, 안드바리는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그, 그 정도의 양은...."

"네. 그래서 묻고 있습니다. 괜찮은 수준의 강철을 어느 정도 생산할 수 있는지."

"마, 맞추겠습니다. 장인들을 모두 끌어모아 독촉해서라도 반드시! 다만... 기한을 조금만 넉넉하게 잡아주시면...."

"훗."

안드바리의 약한 모습에 옆에서 시뇨라가 피식하고 웃었다.

안드바리는 살짝 발끈하는 듯했지만, 장소를 인식했는지 아까처럼 목소리를 높이진 않았다.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만, 강철은 단조로 만들죠?"

"예. 당연합니다. 폐하께서 철을 녹이는 주조 방식도 해보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지만, 질이 좋지 않아 널리 보급되지는 않습니다."

기술이 낮을 때는, 주조의 질은 단조의 질을 따라갈 수 없다.

철은 불순물투성이고, 탄소 함유량은 제멋대로니까.

하지만 단조는 생산량이 적다.

철도를 만들려면 주조 생산 방식이 꼭 필요했다.

"그렇다면 대량 생산 체제부터 새로 잡아야겠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이번엔 시뇨라를 보았다.

"새로운 마도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가장 핵심이 되는 작용은 폭발입니다."

전기자동차 같은 방식도 생각해 보았지만....

내 지식과 이곳의 인프라로는 제대로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무기를 만드실 생각입니까?"

"아니요. 큰 폭발이 아닌, 작은 폭발이 필요합니다. 이것 자체를 무기로 사용하기엔 적합하지 않아요."

엔진만 있으면 전차든, 비행기든 만들 수 있게 될 테지만.

"엘프의 마도구 제작 기술은 아홉 세계 제일. 전하께서 말씀하신 부분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행이군요. 핵심적인 부분이라 이 부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거든요."

"저희 엘프족이 전하의 고민을 덜어드릴 수 있게 되다니. 무척 영광입니다."

시뇨라는 우쭐한 표정으로 안드바리를 보았다.

안드바리의 미간이 꿈틀했지만, 역시나 목소리를 높이진 않았다.

"그럼 간단하게 구조를 설명하겠습니다."

양피지에 간단하게 실린더 구조를 그렸다.

마정석이 폭발을 일으키는 만큼 연료 분사는 필요 없다.

점화 장치도 필요 없으니 구조가 상당히 간단해지겠네.

"이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렇군요. 아, 참고로 초당 25회의 폭발이 필요합니다."

"...네?"

"초당 25회는 폭발해야 합니다. 일정 규모의 폭발을, 정해진 시간에, 오차 없이요."

"그...."

이 조건은 예상 못 했는지 시뇨라가 난색을 드러냈다.

"풋."

이번엔 안드바리가 실소를 흘렸다.

시뇨라는 얼굴을 붉히며 부들부들 떨었지만, 난동을 피우지는 않았다.

"가능하겠습니까?"

"그... 전하의 명령이시라면 목숨을 걸고 완수하겠습니다."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습니다만, 어렵다면 같이 연구하도록 하죠."

실망할 건 없다.

상정했던 수준이었으니까.

근데 절대 빗나가지 않는 투창은 어떻게 만든 걸까.

"그러시다면 전하를 알프헤임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알프헤임에는 마도구 전문가들이 많으니 연구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전하께도...."

"감히 전하께 오라 가라 한다는 겐가? 역시 귀쟁이답게 오만한 습성을 버리질 못했구먼."

"흥. 니다벨리르같은 시궁창에는 전하와 같은 존귀한 분을 초대 못 하니 심술을 부리는 건가요?"

기 싸움하던 둘은 내 뒤쪽을 흘끔 보더니 이내 쭈그러들었다.

아마도 내 뒤에 있는 힐드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겠지.

어떤 표정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참기로 했다.

세상에는 몰라도 좋은 게 많은 법이니까.

"저는 여러분이 어떤 종족인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이 일에 적합한지 아닌지만 고려할 뿐이죠."

오래 묵은 감정은 하루아침에 어떻게 할 수 없다.

지구에서 커피 클럽이 왜 존재하느냐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이대로 갈 수도 없었다.

이 작업에 강철과 마도구가 모두 필요하니까.

공동 작업이 필요할 때도 있을 터.

그때도 이렇게 불협화음이 생긴다면 작업에 큰 지장이 올 수도 있다.

"따라서 계속해서 불화가 눈에 보인다면, 다른 분을 섭외하여 진행할 것임을 분명히 밝혀두는 바입니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꾸벅 숙이는 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고 한 번으로 어떻게 되진 않겠지만, 손 놓고 있는 것보단 낫겠지.

"그럼 앞으로 잘해봅시다."

"예!"

이때부터 정말 회의 다운 회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

후궁에 돌아온 뒤에야, 겨우 가면을 벗고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힐드도 고생했어요. 어휴. 목이 다 뻐근해지는 것 같네요."

"주물러 드릴까요?"

"괜찮아요. 샤워하고 스트레칭 좀 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만 힐드도 쉬세요. 저도 곧 잘 생각이니까요."

"전하."

"뭔가 하실 말씀이 있나요?"

힐드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이렇게 무리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네?"

"저도, 브륀도 전하께서 이렇게 무리하시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저 아홉 세계를 편하게 즐기시기를 바랄 뿐이지요."

이게 무리라고 할 정도면, 얼마나 날 연약하게 보는 걸까.

아니면 형이 일을 전혀 안 하니, 이것만으로도 너무 부지런하다고 생각하나?

"아하하. 그렇게 무리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전하의 평온에 누가 될까 조금 우려스럽습니다."

진심 어린 걱정에 솔직하게 답할 필요를 느꼈다.

내가 조금이나마 서두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형은 왜 그렇게 숭배받는가.

영원불멸의 신들조차 무력하게 쓰러뜨린 최후의 전쟁을 혼자서 막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내 입지를 세우려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낼 필요가 있다.

크게 욕심내지는 않는다.

전문 분야가 다른 만큼, 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하면 되니까.

숨길 필요도 없고.

속일 이유도 없는 내용.

품속에 넣어두었던 내 개인 메모를 꺼냈다.

"이것은...."

"<황제 폐하의 업적>이라는 책을 보며 정리한 것입니다."

++

증기기관 개발.

- 실패. 막대한 예산만 소진.

도량형 통일.

- 실패. 도입에서 실패했고, 엘프와 드워프의 갈등 초래.

신분제 폐지.

- 성공. 대신 대규모 숙청 발생.

부정부패 척결.

- 성공. 지속적인 사형 발생.

지폐 도입.

- 실패. 시험 시행했던 도시에 극심한 인플레이션 발생.

고속도로건설.

- 약간의 성공. 일부 주요 도로에만 포장도로 설치.

자동차, 비행기, 철갑함 개발.

- 실패. 증기기관 개발 실패로 시도도 못 해봄.

인쇄술.

- 절반 성공. 금속활자 개발. 하지만 잉크 개발 기술과 종이가 없음. (양피지를 씀)

교육기관.

- 절반 성공. 교육 수준은 높아졌으나, 종족 간의 갈등이 더 심화함.

제철소(주조).

- 실패. 기술 부족으로 잡철(똥철)만 가득 만듦.

민주주의 도입.

- 실패. 제대로 된 선거가 이뤄지지 않음. 한 번 시행 후 폐지.

++

"책에서는 칭찬이 가득했지만, 제 평가는 이렇습니다."

"폐하께서 하신 일이니까요. 부정적으로 평가하긴 어렵지요."

"전에 브륀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형이 한 일을 동생인 제가 보완해 완성한다. 최고의 그림이라고 했죠."

형이 명했던 일은 근본적으로 보면 잘못되지 않았다.

하지만 도입 시기가 너무 빨랐고, 필요한 기술이나 경험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혼란만 가중되었으니 아마도 형이 국정에서 손을 뗀 이유도 그와 같을 것이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이 있지만, 그만큼 고통받는 이도 늘어날 테니까.

"형의 그늘에만 머물러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따라서 주도적으로 움직인다.

"황제의 동생이 아닌, 인간 김민석으로 인정받기 위해서요."

그걸 위한 내 미래 계획.

공정한 세상이라는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이정표.

"저는 이를 임페리얼 퀘스트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내 인생을 건 새로운 꿈이다.

#016. 아카데미 (1)

형과의 아침 식사.

며칠 시간이 지났더니, 형의 바뀐 외모에도 적응되었다.

"한국은 언제 갈 건데?"

"급한 일만 마무리하고."

"형은 일을 안 하잖아?"

직장인보다 백수가 더 바쁘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봐봐. 이젠 네 눈에도 보이지? 내 주위에 흐르는 불안정한 마나가."

"응."

내공심법을 익혔더니 나도 마나 식별이 가능해졌다.

근데 무공 이름을 꼭 천마신공이라고 지어야 했을까.

중2병 같아서 꺼려지는데.

"이게 안정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그게 내 일이야."

"형이 할 일은 그것뿐?"

"황제가 백성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게 뭐가 있냐? 내가 건강해야 거인족이 다시 쳐들어와도 막을 거 아니냐."

"그건... 인정."

살짝 놀랐다.

형도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는구나 하고.

"그리고 네가 일한다고 하니까 미리 신하들의 기강도 잡아놔야지."

"기강?"

"경고해줘야지. 처신 잘하라고."

형이 성인식과 환영파티 때 했던 발언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 동생 건드리면 뒤진다.'

이 이야기를 또 할 생각인 걸까.

"그동안 몇 번 말했으니까 이제 괜찮지 않을까?"

"그동안은 대충했는데, 이제는 최선을 다해서 갈궈놓으려고."

지금까지는 대충하는 망나니였는데, 이제는 최선을 다한 망나니가 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날 위한 거라면 더 좋은 방법이 있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거야."

"넌 모른다. 그 새끼들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오냐오냐했더니 호로새끼가 되더라. 아주 끝이 없어."

"고운 말 좀 써라."

그래도 황제인데, 말투가 너무 품격이 없는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걸 잘 조정하는 게 책임자의 역할이잖아."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니까. 겪어보기 전에는 몰라."

나도 안다.

알지만....

"자유로운 의견을 막으면 조직은 점점 퇴보해."

"네 생각이니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명심해라."

"뭘?"

"무식한 인간이 신념을 가지면 진짜 무섭다."

"형처럼?"

"이 새끼가.... 됐다. 네가 고생하지 내가 고생하냐?"

형은 피식 웃더니 포도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아. 네가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어."

"뭔데?"

"직접 하지는 마라."

"응?"

"뭘 하든 네가 직접 나서지 말라고. 시키는 거다. 명령만 내려. 넌 이제 실무자가 아니니까."

"...알아."

"보고 받으면 성과를 확인하고 방향만 짚어줘. 그게 네가 할 일이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나를 바꾸려면 도전해봐야겠지.

"제국 전체를 봐라. 하나만 신경 쓰지 말고. 책임자는 공평해야 해."

"아무것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

"아무것도 신경 안 쓰는 것보다 공평할 수가 있냐?"

어렸을 때도 느꼈지만 형은 참 당당하면서도 뻔뻔한 것 같다.

못 본 사이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이건 왜 안 먹냐? 먹어. 몸에 좋은 거야."

그러면서 버섯 요리를 건네주었다.

먹으면 키가 단번에 커질 것만 같이 생긴 붉은 버섯을.

대충 독버섯처럼 생겼다는 뜻.

내키지 않았다.

"생긴 게 좀.... 맛있어?"

"귀한 거다. 고급스러운 닭고기랑 비슷해."

"비슷하면 고급스러운 닭고기를 먹으면 되잖아"

"마. 함 무바라. 무바야 안다."

형이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추천하니 결국 먹기로 했다.

"음?"

"맛있지?"

"맛있지는 않아."

버섯 특유의 식감은 있는데, 맛은 닭고기와 비슷했다.

그 어색함 때문에 비호감으로 다가왔다.

"닭고기를 먹는 게 낫겠어."

"마. 남자에게 좋은 거다."

"남자에게?"

"응. 남자에게 아주 중요한 게 커지지."

"...."

순간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시녀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무슨 생각 하냐. 키가 커진다고."

"아.... 처음부터 정확히 말했으면 됐잖아."

"남자는 키 빨, 어깨 빨 이지. 네 어깨의 골격은 넓은 편이니 키 좀 더 크고, 운동 열심히 하면 외적으로도 멋진 수컷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면서 형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짜식. 여자 생각이 없는 건 아니구만. 그동안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었어?"

순간 시녀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됨을 느꼈다.

"아직은 내가 여자 보는 눈이 없어서. 천천히 보려고."

"너 연애 경험 없다고 했지? 진짜 나 때문에 연애를 회피했던 거냐?"

그렇긴 했다.

더 정확히는 돈 때문에 그랬다.

하지만 남 탓하고 싶지 않았다.

형에게 괜히 마음의 짐을 더 얹어주고 싶지도 않았고.

"아니. 그냥 이상한 여자들을 거르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

"어떤 여자를 걸렀는데?"

"나랑 사귀고 싶다는 여자는 걸렀지. 이상한 여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니까."

"미친...."

"농담이야."

애초에 나한테 고백했던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내가 보기엔 너 이대로 가다간 산채로 잡아먹힐 것 같다. 나 없을 때 장기 털리지 않게 조심해라. 여기 여자들이 얼마나 저돌적인데."

"그렇긴 하더라."

고대의 억압받는 여성의 삶?

여기에 그런 건 없었다.

현대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자유로운 연애 분위기로 보였다.

마나라는 신비한 현상 때문이지 않을까.

"네 이상형은 어때?"

"글쎄. 딱히 생각해본 적 없어. 순수한 사람이면 좋을 것 같긴 해."

"순수란 '엿 돼본 경험이 없는 무지'와 비슷한 뜻이지."

"그런 뜻이 아니라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까."

"성욕도 본질적이다. 음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면 순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나는 믿음, 소망, 사랑 같은 걸 말한 거였어. 형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어?"

"망사."

"응? 아...."

점점 더 깨닫게 된다.

브륀이 형을 대할 때, 왜 적당히 넘겨버리는지.

"말을 말자."

"너무 많은 요소를 고려하지 마."

"갑자기 뭔 소리야?"

"네 하는 꼴을 보니, 헛똑똑이들이 빠지는 함정에 빠질 것 같아서."

"...."

"커다란 과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는 한 가지로 조져버리는 방식이 필요해. 이것저것 신경 쓰다 보면 이도 저도 못 하니까."

"그렇긴 해."

"또, 복잡하고 정밀할수록 중요한 순간에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맞아. 그래서 정밀 기계는 자주 오작동을 일으키지."

"사람도, 조직도 마찬가지야. 따라서 너도 그런 방식이 필요하다."

너무 많은 요소를 고려하다가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현상.

이미 많이 겪어보았다.

신기하게도 핵심 문제를 해결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니 다행이다. 너라면 나보다 더 잘할 수도 있겠네."

차마 대답은 못 했지만....

형보다 못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이렇게 해도 제국이 굴러간다는 게 신기할 정도니까.

그래도 든든한 뒷배가 있다는 것이 심적으로 큰 안정을 가져왔다.

"넌 능히 할 수 있다."

***

"넌 능이버섯이냐?"

식사를 마치고 다시 후궁 정원에서 수련.

형은 결국 GG를 쳤다.

"아니, 이 쉬운 게 왜 안 되냐고!"

"뭔 개소리야! 검술 배운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에게 검기를 뽑아내라는 게 말이 돼?"

"나 때는 말이야! 가르쳐 주는 사람 없어도 금방 해냈어! 하여간 요즘 것들은 근성이 없어. 근성이!"

"...."

뭐라고 항변하고 싶은데, 기준을 몰라서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이놈의 검술.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아오. 속 터져서 안 되겠다. 예정을 앞당겨야겠다."

"무슨 예정?"

"기초는 아스크르에게 맡겨야겠어. 너 가르치다가 고혈압으로 사망할 판이다."

아스크르란 형의 제자 중 한 명.

형의 제자 중 가장 재능이 없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도 전(前) 근위기사단장에, 은퇴한 현재에도 후작 3급의 작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여기에 아스크르를 데려오게?"

"후궁에는 황제 외에 다른 남자를 데려올 수는 없다. 넌 황족이니까 예외고."

"내가 후궁 밖으로 나가야 하나?"

"후궁 밖이라고 해도 황궁 안이니 그리 멀지는 않을 거야."

"아스크르는 원래 어디에 있는데?"

"황립 아카데미에.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어."

"아카데미라...."

원래 이 세계에는 전문적인 교육 기관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형이 신분제를 폐지하면서, 직접 명령하여 설립했다고 한다.

++

교육기관.

- 절반 성공. 교육 수준은 높아졌으나, 종족 간의 갈등이 더 심화함.

++

내 목표인 '임페리얼 퀘스트'에 써 놓은 한 줄 평이 떠올랐다.

"나도 아카데미에 가볼 수 있어?"

"네가 갈 수 없는 곳은 없다."

"그럼 한국에 가고 싶어."

"아 그건 좀."

그냥 해본 말이었다.

"아카데미에 가보고 싶어."

"왜?"

"황립 아카데미라면 한국대 같은 곳이잖아."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라.

"제국의 미래를 보고 싶어."

"미래라...."

형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젊고 싱싱한 애들이 많지."

"다시 말하지만, 한국 가서 내 얼굴로 절대 그러지 마라."

"난 젊은 인재들이 많다는 뜻이었는데?"

"싱싱하다는 표현은 식자재에만 써야지. 사람에게 쓸 단어는 아니야."

"거참 말이 많네. 그렇게 따지고 살면 안 피곤하냐?"

"형이 없는 사이, 한국도 많은 게 변했어."

"표현의 자유는 어디 갔어? 나라가 거꾸로 가는 구만. 이래서 지도자가 중요한 거지."

"맞아."

한국이 막장이라도 형이 지배하는 제국의 미래보다는 밝아 보였다.

리더의 중요성을 다시금 실감한다.

"아무튼, 이왕 아스크르에게 배울 거라면 아카데미에 가보고 싶어."

"그러든가. 힐드."

"예. 폐하."

"브륀에게 말해서 민석이를 아카데미로 데려가라."

"...명을 받듭니다."

힐드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반론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나는 힐드의 표정에서 약간의 불안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성인식에 갈 때도, 환영 파티에 갈 때도 저런 표정을 지은 적 없었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브륀에게 연락하여 준비케 하겠습니다."

"그래라."

생각도 잠시.

나는 힐드의 안내에 따라 황궁으로 향했다.

***

황궁 본관으로 갔더니, 이미 마차부터 여러 기사가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기에도 5분 대기조 같은 게 있는 걸까.

정말 빠르다고 생각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그 선두에서 브륀이 세련되게 허리를 숙였다.

언제나 느끼지만 브륀은 유능한 커리어 우먼, 그 자체인 것 같다.

"오랜만이에요. 브륀. 오늘은 황립 아카데미에 가보려고 합니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아홉 세계 어디든 가실 수 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목적을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일단 아스크르를 만나기 위함입니다. 그가 제 검술 교관이 될 예정이거든요."

"아스크르 핀달 후작이라면 인재 양성의 귀재. 탁월한 판단입니다."

그렇게 말한 후, 브륀은 아주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힐드처럼 뭔가 꺼려지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나 힐드를 데리고 가셨으면 합니다."

"위험한 곳입니까?"

"전하께서 위험할 일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오해는 없는 편이 좋으니까요."

"네?"

"자세한 것은 마차 안에서 설명하겠습니다."

등 뒤에 있는 힐드를 슬쩍 보았다.

그녀도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힐드. 괜찮겠어요?"

"전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하겠습니다."

"그럼 힐드와 함께 하죠."

브륀은 무척 바쁠 것 같았으니까.

"알겠습니다. 힐드. 뒷일을 부탁합니다."

"전하를 성심껏 보필하겠습니다."

자매간임에도 공적인 대화.

하지만 둘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동생아. 알지?'

'어떻게든 해볼게요.'

대충 이런 뜻인 것 같았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힐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담담하게 나를 마차로 안내했다.

#017. 아카데미 (2)

제국의 수도, 이에렘.

이에렘은 제국을 건국했을 때 함께 짓기 시작한 완전 계획도시다.

지도를 보면 황궁은 황도 가운데에 있고, 그 주변으로 상류층의 저택이나 주요 관공서가 둘러싸고 있다.

이를 중심 지구, 혹은 도심이라고 부른다.

중심 지구를 벗어나면 동서남북 각각 4개의 지구가 있는데, 그중 남쪽 지구는 교육·연구를 담당한다.

아카데미는 중심 지구와 남쪽 지구의 경계면에 있다고 한다.

"설마 마차를 타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영화로 볼 때는 마차에 로망이 있었는데 막상 타보니 승차감이 영 불편했다.

황족이 사용하는 마차임에도 충격을 흡수해주는 현가장치가 없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는 '자동차'라는 걸 만들게 하셨지만, '증기기관'을 만들지 못해 무산되었습니다."

"증기기관으로 자동차라. 가능이야 하겠지만...."

"가능합니까?"

힐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에는 늘 평온을 유지하는데, 이상하게 과학 이야기만 나오면 적극적으로 변한다.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걸어가는 게 더 빠를 겁니다."

"물론 실용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선 가능하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기술이라는 게 보통 처음 개발하는 게 제일 어려우니까요."

쉽다는 건 아니지만, 개량은 의외로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편이다.

비행기나 스마트폰도 그런 과정을 거쳤으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연구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일단 철도부터 만들고 나서.

하지만 마정석 같은 꿈의 물질이 있는데, 증기기관을 만들 이유는 없는데....

"전하께서는 그 '자동차'라는 것에 대해 잘 아십니까?"

"그래도 웬만큼 아는 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걸 연구하는 곳에서 일했었거든요."

"정말 훌륭하십니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막상 진짜 만들어내라고 하면 어려울 것 같다.

마정석을 배터리처럼 가공해서 아예 전기차 같은 형태로 만들면 의외로 쉬울지도 모르겠는데....

문제는 내가 전자제어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안다고 해도 반도체 없이는 불가능할 테고.

"진심으로 대단합니다. 전하께서는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경향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내가 살짝 자신 없는 듯이 말하자, 힐드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한국에서 이렇게 인정받았다면, 내 인생도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제대로 인정받아본 경험이 없어서.

과연 나는 한국에 있을 때 과소평가를 받았던 걸까.

아니면 이곳의 과학 수준이 낮아서 상대적으로 과대평가 받는 것일까.

"전하."

"말씀하세요."

"돼지는 진주를 보고도 그 가치를 모릅니다. 전하께서 진주를 가지고 계신다는 점에서 이미 훌륭한 인재입니다."

그리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원해서 얻은 게 아니니까.

이 방법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한 것뿐이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힐드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전하.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아카데미에 가시려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깊은 뜻은 없습니다. 그저... 제국의 미래를 보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인재를 거두시려는 의도는 없으십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내 앞가림도 어려운 상태니까.

"왜 물으시죠?"

"30년 전, 아홉 세계에 끔찍한 재앙이 있었습니다."

"알고 있어요."

라그나로크가 일어났다고 했다.

오딘을 비롯한 아스가르드의 신마저 대부분이 전사한 최악의 전쟁.

"세계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제국인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옛말입니다."

"네?"

힐드는 마차의 커튼을 살짝 치우고 밖을 보여주었다.

"황제 폐하의 치세 아래 제국은 30년간의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질서 정연에게 늘어선 도심의 아름다운 건물들.

아무 생각 없이 봤다면 북유럽의 관광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제국 전체에서 가장 번영한 곳이라는 걸 감안해도 말이다.

3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만큼 이 세계는 상당히 회복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한 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지요."

"들었습니다. 최후의 전쟁 이전엔 다른 종족끼리 분쟁이 끊이질 알았다고 했었죠."

지구에서는 같은 인종끼리도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반면 이곳은 아예 다른 종족들이 사는 세계.

오죽할까 싶었다.

"아홉 세계의 주민들은 여러 이유로 분쟁을 벌였지만, 그 싸움은 온전히 그들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요?"

"신왕 오딘의 간섭이 있었습니다."

"예?"

"평화의 시대가 올 것 같으면 오딘이 직접 나서서 이간질하며 전쟁으로 이끌었습니다."

"왜죠?"

"발할라의 전사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수한 전사가 싸움터에서 죽어야만 발할라의 전사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브륀과 힐드는 쌍둥이 자매.

브륀이 과거 발키리였으니까, 힐드도 발키리였을 것이다.

오딘의 명령에 따라 죽은 전사들을 발할라로 이끄는 것이 임무였을 터.

얼마나 끔찍한 경험을 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동시에 오딘이라는 신이 참 사악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지금은 평화의 시대니 다행이네요."

"평화가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평화의 시대입니다.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도 많습니다."

"평화에 적응이 필요한가요?"

그냥 즐기면 되는 거 아닌가?

"평화는 사회의 고착을 가져옵니다. 전사나 용병의 필요성이 사라졌고, 예전과 같은 극적인 출세나 성공 가도도 사라졌지요."

시대가 시대다.

급격한 사회 변화나 기술의 발전도 없으니, 그야말로 고인물들의 리그가 되어버린 듯하다.

"하지만 무려 30년이 지났습니다.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습니까?"

"단 한 번. 제국에도 큰 혼란이 온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 아...."

살짝 굳은 힐드의 표정을 통해서 언제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대숙청.

형이 신분제를 없앨 때 일으켰던 피바람의 시대.

그때 죽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고, 쫓겨난 사람도 많았을 터.

젊은 인재, 특히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있던 이들에겐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제국에 새로운 바람이 찾아왔습니다."

"저 때문인가요?"

"예. 전하의 등장은 제국의 인재들에게 동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출세와 성공에 목마른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세계.

한국과는 상황이 달랐다.

이곳의 젊은이들은 아직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전하께서 일으키는 바람은 크나큰 변화를 가져오겠지요."

이제야 힐드가 말을 꺼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아카데미로 향한 것.

나로서는 가벼운 산책과도 같았지만, 아카데미 학생들에게는 구원의 동아줄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식시키고 싶었으리라.

"저에게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전하의 눈에 띄려고 한다는 점을 우려할 뿐입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설마....

"걱정하시는 거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럴 힘도, 배짱도 없습니다."

"그럼 무엇을 우려합니까?"

"무례한 말씀을 용서해주십시오."

"괜찮으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자상하십니다."

"소심한 겁니다."

스스로 바꾸려고 많이 노력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또한, 지나치게 인내심이 강하십니다. 지도자의 인내심은 때때로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인내심이 강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그게 어떤 문제가 됩니까?"

"주인을 떠보며 기어오르는 자들이 늘어나니까요. 따라서 되지도 않는 이들은 단호하게 쳐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괜히 찔러나 보는 이들이 없어집니다."

"이래 봬도 거절은 확실하게 잘하는 편입니다만."

"전하를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생각보다 주제를 모를 가능성이 큽니다. 아직 어리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힐드는 눈동자에 힘을 주었다.

여차하면 누구 하나 잡아서 담가버릴 것만 같은 기세다.

미성년자를 상대로 피를 보고 싶지는 않은데....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까?"

"바라는 대로 취하고, 원하는 대로 얻으셔야 합니다."

환영 파티 때 브륀이 했던 말과 비슷했다.

"내 세력을 만들라는 뜻인가요?"

"그들 사이에 어떤 알력이나 견제도, 전하 앞에서는 파도 앞의 모래성과 같다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자라나는 새싹들을 짓밟으라는 뜻인가?

아니면 아카데미 안에 정치질이 강하다는 뜻인가.

"흠... 알겠습니다. 고려하도록 하겠습니다."

힐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괜찮아 보이는 인재가 있으면 철도 연구에 스카우트하려고 했는데....

직접 보고 결정해야겠다.

힐드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순조롭게 황립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갔다.

아카데미의 외견을 봤을 때 느낀 점은 '대학교'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한국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대학교의 형태.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가자 교직원 일동과 몇몇 학생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중 제일 앞엔 자애로워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김민석 전하의 내방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아스크르 핀달 후작. 환영 파티 이후로는 처음 보지요?"

아스크르는 백발의 노인임에도 피부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처럼 탄력이 있었다.

또한, 품이 큰 옷을 입었음에도 잘 단련된 근육이 느껴졌다.

"예. 환영 파티 때는 경황이 없어 간단한 소개만 올렸습니다. 정중하게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후작의 배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경황이 없던 게 아니라, 내가 정신이 없었다.

내 상태를 파악한 아스크르가 일부러 인사만 하고 자리를 비켜준 것이었다.

"황립 아카데미의 학장을 맡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황송하게도 폐하의 첫 번째 제자라는 후광으로 그렇게 되었지요."

그는 전 근위기사단장이나 황립 아카데미의 학장보다는 형의 제자라는 타이틀에 더 자부심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으나, 전하의 사질(사문의 조카)이 되겠군요."

"이곳에서 제자는 '상속권이 없는 자녀.'로 취급된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스크르는 형의 양자.

따라서 나에게는 조카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칠순을 넘긴 사람을 조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편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관계와 상관없이 가족처럼 생각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황송하옵니다."

그의 전투력은 무려 34만.

과거 근위 기사단장이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혹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형이 핀달 후작에게 기초를 배우라고 하더군요."

"예. 이미 들었습니다. 제가 감히 전하를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

"존귀한 분을 정원에 세워둘 수는 없지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죠."

무척 긴장한 채 가만히 서 있는 교직원을 위해서라도 빨리 자리를 옮겨야겠다.

그런데....

어째 느낌이 싸하다.

교직원 사이사이에 있는 학생들.

그들은 모두 듬직한 자세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기시감도 느껴졌다.

"아...."

"예?"

"아닙니다. 아무것도."

기억났다.

예전에 회사 면접을 볼 때였다.

나를 포함해 5명이 동시에 면접을 보는 집단면접.

우리는 면접관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기 위해 모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지만, 속은 달랐다.

어떻게든 자신의 열정과 강점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다른 면접자들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고심했다.

동시에....

다른 면접자가 실수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야 내가 더 돋보일 테니까.

"들어가죠."

"모시겠습니다."

마음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만약 술수를 부려 공정한 경쟁을 방해한다면 참지 않겠다.

그런 다짐을 하며 아스크르의 안내를 받아 아카데미 학장실로 향했다.

#018. 아카데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