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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나는 삼류 소설 작가다.

듣고 나면 삼류라는 말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작품 활동 경력 10년.

완결작 10개.

대부분이 150화가 넘는 장편이었고,

집필과 퇴고를 반복하느라 밤을 지새운 적도 많았지만, 중요한 건 최신화 조회수가 한 자리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마이너한 소재의 문제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내가 먼저 쓴 소재를 이용해서 투베 1위를 먹는 작품도 있었으니까.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왁자지껄한 댓글창이 눈에 보이는데 정작 내 서재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것 같자,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뭐가 부족했던 걸까.'

노오오오력?

글을 쓰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뛰던 적도 있었고,

하루에 세 편씩 글을 생산해내던 소설 공장일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열정이라는 연료가 떨어지자 끝끝내 공장은 망하고 말았다.

시간이 없다, 돈을 벌어야 한다, 프로가 되어야 한다. 강박이 나를 몰아붙였다. 허황된 꿈과 현실의 벽이, 독자들의 무관심이 나를 몰락시켰다.

갈수록 커지는 부담과 걱정에 손은 덜덜 떨리고 머리는 굳고.

키보드 앞에서 글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끝내 백지 앞에서 노트북을 끄게 된다.

이불을 덮어쓰고 스스로의 한심함에 눈물짓는 일상이 이제는 익숙해진 것이다.

나는 삼류 소설 작가다…. 아니, 백수일 뿐이다.

당장 목을 매고 죽으면 사후에 주목받았던 여러 예술가처럼 나의 글 또한 재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 그럴 리가 없겠지. 그들 또한 광기라는 재능이 있었으니까.

지금의 나에겐 광기도, 객기도 아무것도 없었다.

신은 그토록 갈망하던 재능을, 내게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내 무기력한 인생에도 동아줄이 내려왔다고 하면 믿겠나?

[Recola: 안녕하세요. 작가님. 팬이에요.]

어느 날. 마법처럼 내게 전해진 Recola의 연락은.

마치 모든 진리를 꿰뚫은 현자가 내뱉는 도도한 말 같았다. 그런 느낌이 전해져 왔다.

"…어?"

[Recola: 작가님이 쓰신 작품 전부를 정독했어요.]

처음에는 잘못 보낸 쪽지인가 싶었지만.

[Recola: 작품마다, 매화마다, 문장마다 영혼을 녹여낸다는 느낌이 들어서 괜찮았어요. 이번에는 연중으로 끝내버리셨지만, 저는 작가님께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김안현 작가님.]

나는 깜짝 놀라서 계정 보안란을 살폈다. 분명 본명은 비공개로 설정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해킹당한 걸까? 해커가 날 놀리려고 보낸 쪽지인가?

[Recola: 신작, 쓰실 거죠?]

누군가 내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오랫동안 나를 지켜봐 온 사람처럼 'Recola'라는 독자는 망설임이 없었다.

신작을 쓸 거냐는 물음 또한 답을 기다리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러하리라는 걸 알고 한 질문이었다.

대답을, 하긴 해야 하는데….

"어, 어어, 어어어어…."

대답 대신 나는 한동안 어버버 거렸다.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난… 난, 나는 기쁘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처, 처음이다. 누군가, 타인이 내가 쓴 소, 소설을 보고, 패, 패, 팬이라며 보내준 쪽지다. 나는, 나는, 그게, 그게 너무…!

"흐읍!"

손을 들고 입을 틀어막았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울컥거리는 감정이 끝도 없이 토해져 나왔다.

놀이공원에 홀로 고독하게 서 있는 내게, 누군가 함께 놀자며 손을 내밀어준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이 쓰라린 고독의 감정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수막이 끼며 흐릿해지려는 시야를 몇 번이고 바로잡으며 장문의 답글을 작성했다.

[안녕하세요, Recola 님. 팬이시라니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인데도 다 읽어주셨다니 정말이지 두근거리고 설레네요. 쪽지를 보내주신 것도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맞습니다. 정말로 부족하지만 그래도 쓸 때만큼은 어떻게든 제 모든 걸 쏟아부으려고….]

두서없이 횡설수설한 엉망진창이었지만.

[…네. 신작, 쓰고 싶습니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전했다.

[Recola: 그럼 제가 아이디어를 제공할게요. 이대로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고? 설마 대신 써달라는 건가? 하지만 아이디어만이라면….

아니, 아니지. 이건 아니지. 아무리 대중적인 글을 쓰고 싶다곤 하지만 남이 불러주는 대로 글을 쓰는 건 내 자존심이 용납 못 하지.

작가라는 특성상 생각이 겹칠 수는 있어도 대놓고 남의 아이디어를 받아서 글을 쓰는 건 아니지. 그건, 내 소설이 아니잖아. 내 세계가 아니잖아. 그게 표절과 다를 게 뭐야.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고.

왜 내가 10년 동안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나만의 궁극의 소설을 쓰고 싶어서잖아.

모든 걸 바치기로 한 거잖아.

그런데 남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대로 쓰라니.

[Recola: 제목은 '몰락한 코스모스 제국의 황태자'에요. 등장하는 빌런 캐릭터 하나는 작가님의 작품에서 차용해 왔어요. 이 정도는 괜찮죠?]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ID Recola은 내게 장문의 글을 보내왔다. 그건, 사실상, 아이디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시나리오였다.

이미 뼈대는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고, 근육까지 입혀져 있다. 남은 과정은 그저 살만 덧붙이면 되는 정도.

지금 이걸, 나한테 맡기겠다고?

[Recola: 전 작가님을 믿어요. 누구보다 이 작품을 멋지게 완성하실 거라는 걸.]

자존심이 상했다. 작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인기가 없지, 작가의 자존심마저 내버린 건 아니란 말이다!

[Recola: 그러니 작가님도 저를 믿고 한 번 써보세요. 제 아이디어가 작가님을 성공으로 이끌어줄 테니까요.]

그러나 마법과도 같은 한 단어가 내 마음속을 거세게 내리쳤다.

성공이라고…?

자연스레 내 손이 키보드를 향해 움직였다.

확실히… 써본다고 해서 내가 손해를 보는 건 아니지. 내용을 보니 출간된 작품도 아니고, 큰 줄기는 잡혀 있지만, 살을 덧붙여야 하니 일종의 공동집필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닐까?

실패해도 경험치를 쌓는다고 생각하면….

한참을 읽어 내려갔을 때. 내 입에선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와, 스토리는 좋네."

Recola의 '몰락한 코스모스 제국의 황태자'는 그야말로 대서사시를 그리는 듯했다.

먼저 전체적인 스토리를 한 번 쭈욱 살펴보고, 당장 써야 할 프롤로그 부분을 집요하게 분석했다.

"…진짜 뭐지?"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되짚어봐도 볼 때마다 완벽하고 치밀한 전개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이 사람, 대체…."

일순간 Recola에 대한 의구심이 가슴 속에서 피어올랐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얼마 안 있어 추악한 욕망에 사로잡혀 버렸으니까.

***

"어, 어어…?"

자정 무렵, 1화를 올려놓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조회수가 200이나 됐다. 추천 수도 200, 댓글도 수십 개는 달렸다. 전례에 없던 엄청난 화력에 입이 쩌억 벌어졌다.

[karna20: 와…, 저도 웹소설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진짜에 진짜인 대작이네요.]

[Enigma1407: 무슨 프롤로그에 영혼이라도 갈아넣으셨나…]

[koreakimchi: 하, 이걸 이렇게 일찍 본 게 죄입니다. 제발 연참 좀…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하나같이 호평이었다. 이게, 말이나 되나 싶을 정도로.

곧바로 댓글 하나가 더 달렸다.

[악마사냥: 아니, 조회수랑 추천수가 어떻게 똑같지? 친목질인가 싶어서 와봤더니 이유가 있었네;;]

10초 정도 멍하니 댓글창을 보다가, 번개같은 속도로 창을 닫고 쪽지함을 열었다.

[반응이 엄청 좋아요. 보셨어요?]

이 짧은 문장을 작성하는 동안에도 내 손발은 덜덜 떨렸다. 이제와서 제 아이디어라는 둥 딴소리를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답장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확인이 늦나 싶어서 하루를 기다리고, 여행을 갔나 싶어서 사흘을 기다려봤지만, Recola는 마치 할 일을 마쳤다는 듯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Recola가 남겨준 시나리오는 내 컴퓨터 바탕화면 한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제 아이디어가 작가님을 성공으로 이끌어줄 테니까요.

이대로 Recola가 보내준 시나리오처럼 써도 되는 걸까.

처음에는 여러 고민이 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안과 초조함은 희미해져 갔다. 끝내 악마의 속삭임에 굴복하게 된 것이었다.

눈앞에 처음으로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 순간부터 미친 사람처럼 글을 썼다. 하루에도 3, 4, 5편씩 쉬지 않고 글을 쓰고 올리기를 반복했다.

이건 된다는 확신이 섰다. 글이 너무 잘 써졌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그 세계에 살아본 것처럼 문장이 술술 흘러나왔다.

끝없는 심연을 홀로 걷다가, 수십 년 만에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나는 온몸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 이름 드높던 출판사들의 컨택은 나를 영광의 자리로 올려놓았다.

그렇게 나는 기성 작가가 되었다.

***

"Recola, Recola, Recola."

1부 완결을 앞두고, 나는 신을 부르짖듯 Recola의 ID를 속으로 되뇌었다.

"Recola, Recola, Recola."

당신은 누구입니까? 청컨대 어느 귀인이신지 알려주세요. 어째서 내게 구원을 던져주고 사라지셨는지, 이 타오르는 갈증을 해갈시켜주셨는지요.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ID Recola를 떠올렸지만, 단 한 번도 연락이 오질 않았다.

뭐, 이젠 상관없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남녀 독자를 아우르는 인기 연재작 '몰락한 코스모스 제국의 황태자'의 1부 완결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나는 전에 없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믿고 보는 작가라는 평은 물론이고 여러 작가 모임에서도 나를 초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제 뭘 해도 앞길이 탄탄대로일 게 분명했다.

'그래, 이럴 때일수록 더욱 초심으로 돌아가야지.'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집필을 하면서 틈틈이 신작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장르 소설을 처음 써봤던 그때처럼, 다시 한번 작품에 내 모든 걸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몰락한 코스모스 제국의 황태자>의 1부가 완결되는 당일.

과로를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큰 욕심을 부렸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눈앞이 새하얘지면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발은 굳어져 갔고,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서서히 눈이 감겨간다. 심연 그 어두운 지하를 넘어서 혼돈 아래로 내 정신이 빠져들어 간다.

그렇게 나는 컴퓨터 앞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1화>

빛조차 영멸한 어둠 속에서 나는 사람의 형상을 한 어둠을 마주했다. 복수심, 분노, 증오, 원망이 뭉쳐서 응어리진 덩어리. 그러나 한편에는 후회가 자리 잡고 있다.

어둠의 몸 곳곳에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엑스트라, 악역, 폐급, 일진, 폭력 서클, 쓰레기.

이 추상적인 현상에 나는 꿈을 꾸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둠이 내게 경고했다.

"너 따위가 내 운명을 바꿀 수 있겠어?"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눈앞에서 말을 걸어온 상대는.

[월!]

"…?"

개였다. 독일계 피를 양껏 물려받은 늠름한 흑갈색의 저먼 셰퍼드 도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너도 나를 비웃는 거냐."

그럴 리가 없지. 피해망상은 그만두자.

"넌 뭐고, 여긴 어딜까?"

어젯밤, 지쳐 쓰러진 기억은 난다. 침대 위인 걸 보면 어찌어찌 기어 올라간 모양인데…, 내가 기억하는 침대랑은 좀 많이 다르다.

녹색 실크로 꾸며져 심플하면서도 고급진 이 귀티 나는 침대가 내 침대일 리가 없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양손을 구속한 족쇄를 발견했다.

"…."

납치…, 를 당했다고 보는 게 옳은 걸까.

나름 10년차 소설가라고 뇌내에 망상이 폭죽 다발처럼 터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돈 좀 굴리는 중세 귀족의 방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흑갈색 셰퍼드 도그는 좋다면서 내 볼을 핥고 있고. 가문의 문양으로 보이는 녹색 바탕에 개의 두상이 그려진 깃발이 보인다.

"이건 설마…."

어쩐지 익숙한 감각이 내 머릿속을 계속 두드렸다.

아니, 속단하지 말자. 지금 중요한 건 현재 상황이다.

뭐가 됐든 양손이 족쇄에 묶여서 눕혀진 현실은 설명이 안 된다. 볼 때마다 머리가 하얘지면서 높은 확률로 납치됐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큰일이네. 인생 조진 건가?'

아무리 거지같이 비생산적인 인생을 살았다지만 업보로 자는 사이에 납치를 당하다니. 개떡 같은 삶을 살았기에 더더욱 억울하다!

평생 소설 하나에 매진했다. 가족들이 다 등을 돌리고, 친구들이 만류하다 떠날 때까지도! 내 빌어먹을 재능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나는 더더욱 죽어서는 안 된다.

나는…, 나는 이렇게 끝낼 수 없다. 나를 납치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죽여서라도 여길 탈출해주마! 나는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어떻게든 살아남을….

"아우, 잠깐만! 그만 좀 핥아봐!"

축축하다 못해 질척해진 뺨이 느껴졌다. 좋아서 미쳐버린 건가 싶은 셰퍼드 도그를 살며시 밀어내도 금방 다시 달라붙었다.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무슨 개가 이렇게 붙임성이 좋… 아?'

개 목걸이에 달린 이름표 '세바스찬(Sebastian)'을 보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이성은 그렇게 말했지만 예민해진 감각이 충동적으로 정보를 조합해서 직감적인 정답을 도출해냈다.

흑갈색 셰퍼드 도그의 이름은 세바스찬.

녹색 바탕에 검은 개의 두상이 그려진 가문기.

나는 알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

울브하딘 가문은 세계관 최고 강대국인 임페리움 제국에 나오는 4대 공작 가문… 아래에 있는 20개의 후작 가문… 보다 아래인 126개의 백작가 중에서도 하위에 속한 가문이다.

위세 높은 백작 가문이라도 소설은 주인공 중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자주 병풍보다 못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는 병풍 중에서도 특별한 병풍이다.

주인공에게 대들다가 처절하고, 처량하며, 처참하게, 더 표현하기 미안할 만큼 참교육을 당한, 이를테면 '폐급 엑스트라 빌런'이니까. 병풍조차 못 된 쓰레기다.

어떻게 잘 아냐면 내가 만든 캐릭터니까!

Recola가 쓴 시나리오 '몰락한 코스모스 제국의 황태자'에 들어가는 유일한 김안현의 오리지널 설정이니까!

"그게 나라고?"

실성한 듯 헛웃음이 육성으로 튀어나왔다.

어쩐지 이 멍멍이가 꿀 새는 단지 핥듯 혓바닥을 날름거리더라니. 이유가 있었다.

세바스찬은 마틴이 어릴 때부터 함께해온 파트너니까.

멍청하다고 할지, 착하다고 할지. 동물학대범 마틴에게 질리지도 않고 사랑을 갈구하다니….

내가 그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

'…아니지? 아니겠지? 내가 착각한 거겠지?'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케이크를 든 편집자님이 들어와서 깜짝 이벤트라며 폭죽을 터뜨리면 웃으면서 넘어가 줄 용의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러운 노크 후에 문이 열리며, 처음 보는 메이드 한 명이 들어왔다.

갈색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두껍게 땋고 둥근 안경을 낀, 지적이지만 소심해 보이는 인상의 소녀였다.

"마, 마틴 도련님…. 시,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그래."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게 내 드라마 데뷔를 축하해주는 기습 오디션이든 막장 이세계 빙의물이든 맞춰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설정해놓은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에 맞게 냉랭한 대답을 했다.

듣는 사람이 불쾌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무심함.

메이드는 음식이 담긴 나무 쟁반을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오,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네요. 헤헤…."

"…그래."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기분이 좋을 때의 반응이란 말이지.

단순히 메이드 소녀의 아부일지도 모르지만, 나도 마틴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잘 알고 있는 만큼 순전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면서 쟁반 위를 보았다.

'…과연, 그렇단 말이지.'

딱딱한 빵, 묽은 수프, 물. 백작가 도련님의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식단이었다.

이게 맞나 싶어서 눈동자만 살짝 들어서 메이드를 보았다.

메이드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이 아이를 추궁하는 건 내 양심만 아플 것 같았다.

'먹자. 먹고 살아야지.'

손을 뻗자, 절그럭거리며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손목에 차가운 저항감이 느껴졌다.

"아, 저, 그, 쟁반을 올려드리겠습니다!"

"풀어줘."

"네?! 아… 저, 그건…."

당황한 메이드의 움찔거림을 따라서 허리춤 뒤로부터 찰랑거리는 열쇠 소리가 울렸다.

"그, 그럴 수 없습니다, 마틴 도련님. 가주님의 명령은 절대적이고 또, 또 이번에야말로 거역하시면, 저, 정말로 큰일 나실지도 몰라요…!"

메이드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내 뇌리에 꽂아 넣었다.

사실 안 풀어줄 걸 예상하고 한 말이었다. 대신 이 아이는 믿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참 착한 아이다.

"그, 그래도 도련님께서 가만히 식사만 한다고 하시면…, 그 후에 바로 족쇄를 찰 거라고 약속해주신다면…."

'어라?'

메이드는 홀린 듯이 열쇠를 꺼내서 양손의 족쇄를 풀어주었다.

무척이나 뜻밖이었다.

"부, 부디 크게 소리치시면 안 돼요…. 가주님께서 아시면 큰일 나요…."

"그래."

나는 쟁반을 가져와서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 사이 메이드는 꼬리를 흔드는 세바스찬에게 가서 또 다른 쟁반을 내려놓았다. 무려 고기가 한가득 들어간 요리였다.

나도 식사를 시작했다. 맨손으로 빵을 들고 묽은 수프에 적셔서 입에 구겨 넣었다. 솔직한 말로 기가 막히게 맛이 없었다. 내가 빵을 수프에 찍어 먹는 건지 밀가루 덩어리에 물을 묻혀 먹는 건지.

내 표정에서 드러났던 걸까, 메이드가 어쩔 줄 몰라했다.

"죄, 죄송해요, 도련님. 가주님께서 시키셔서… 다음에 몰래 과일이라도 들고…."

거듭 말하자면… 저 메이드를 타박하는 건 나만 피곤해질 게 분명했다. 말없이 딱딱한 빵이나 씹었다.

"…음?"

이상한 식감이다. 뱉어보니, 밀가루 아닌 이물질이 섞여 있었다.

메이드가 기겁해서 다가왔다.

"죄, 죄송합니다! 주, 주방의 사용인들이 실수를 저질렀나 봅니다…!"

메이드가 손을 뻗었다. 내 침과 빵조각에 범벅된 종이 쪼가리를 잡으려는 걸, 내가 제지했다.

"멈춰."

나는 천천히 이물질을 집어서 펴보았다. 그건… 글씨가 쓰인 종이, 편지였다.

[전 세계가 사랑하는 커피도 처음에는 악마의 음료라고 불렸죠. 구제불능의 빌런, 마틴의 운명을 바꿔보세요. 작가님. - Recola]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지.

편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사건은 발생했다.

쾅!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총신이 긴 엽총을 든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날 선 눈매는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뒤에는 사람보다 더 큰 셰퍼드 도그가 있었다.

"가, 가주님!"

메이드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온몸을 덜덜 떨었다.

울브하딘 백작 가문의 가주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벌을 받을 각오는 됐겠지?"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에 메이드가 끼어들었다. 내 앞을 가로막고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께 백번, 천번 혼난들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마틴 도련님께서는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으셨습니다! 마틴 도련님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에 그러했습니다! 부디 절 벌해주십시오!"

통곡에 가까운 부르짖음에 가주의 시선마저 잠깐 메이드에게 머물렀다.

왜… 왜 저 아이는 이렇게까지 나를 위하는 걸까. 마틴을 설정할 때 충심 깊은 메이드는 설정한 적이 없는데.

내 앞에서는 말도 더듬고 손도 떨었으면서, 정작 무시무시한 형벌권을 쥔 가주 앞에서는 자식을 지키는 성난 암사자처럼 헌신적으로 희생하고 있었다.

가주는 마치 맹금류의 것을 닮은 눈매로 메이드를 보다가 혀를 찼다.

"쯧. 메이드를 끌어내라. 마틴의 족쇄도 다시 채우고."

"네!"

문밖에서 경비들, 기다란 엽총을 찬 레인저에 가까운 병사들이 진입해서 메이드를 양쪽에서 구속했다.

"도련님! 도련님! 아아, 가주님, 제발 도련님을 용서해주세요!"

메이드가 끌려나가면서도 날 위해 애원하는 장면을 배경 삼으며 한 경비가 내게로 다가온다. 양손에 다시 족쇄가 채워지겠구나.

"도련님…."

끌려가면서도 애걸복걸하던 메이드는 고개를 돌려서 마지막으로 내게 미소 지었다.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가슴 시리도록 아련한 소녀의 미소에….

"멈춰라, 경비."

메이드를 끌고 가는 경비들을 멈춰 세우고, 내 팔에 족쇄를 채우려는 경비를 떨쳐냈다.

그리고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나 가주 앞에 섰다.

허리 숙여 인사했다.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이 가주님께 문안 인사드립니다."

부디 내 도박이 옳기를 바라면서.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가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 메이드를 놔주십시오."

"주제도 모르는 것 같으니!"

둔중한 충격에 고개가 비틀렸다. 가주가 손에 쥔 엽총을 휘둘러서 뺨을 후려친 것이다. 이번에는 반대편 뺨을 후렸다.

머리가 아찔하고 몸이 휘청이며 한쪽 발이 떼어졌다. 나는 그대로… 허릿심을 굳세게 지탱하고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감정이 들불처럼 뻗쳤다.

<2화>

더! 더 때려보라고! 내가 이 정도로 물러나려고 나선 줄 알아?!

연이어 엽총으로 따귀가 갈겨졌다.

나는 돌아가는 뺨에 맞춰 눈동자를 가주의 시선에 고정했다. 또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

총 다섯 번이나 뺨을 휘갈긴 후에야 가주가 멈췄다. 가만히 응시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없이 허락했다.

그 정도 기개면 발언을 허락하겠노라고.

이제부터가 실전이다. 말투 하나하나 다 신경 써야 한다. 어떻게 할까.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마틴의 오만방자하고 제멋대로인 성격도 잘 반영해야 한다.

"가주, 저와 제 메이드의 잘못을 용서해주십시오."

"네가 왜 족쇄를 찼는지 잊었느냐."

폐급 엑스트라 빌런, 이라는 말에 걸맞는 저질스러운 이야기다.

"우리 가문이 네놈 때문에 사교계에서 우스운 꼴을 당했다."

족쇄를 찬 시점에서 그 사건 이후임을 짐작했다.

'알지… 아주 잘 알지.'

무대의 배경은 소설 '몰락한 코스모스 제국의 황태자'의 주된 배경과 같은 세계 최고의 교육 기관 '임페리움 아카데미'이다.

17세가 된 마틴은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평범한 학교생활을 보내기로 했다. 평소 성격이 오만방자하고 제멋대로였기에, 평범한 생활이란 망나니 노릇을 뜻했다. 입학하자마자 마틴은 저와 같이 패악질을 즐기는 귀족 자제들을 포섭해 사교 모임을 만들었다. 실상은 총만 안 들었지, 거의 마피아나 다름없는 범죄 조직이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쓸데없이 돈만 많은 귀족 자제들이어서 그런지 큰물에서 노는 불법 카르텔과도 접점이 있었을 정도로 스케일도 컸다.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묻는다면 간단한 이야기다. 재미있었으니까. 자신보다 열등한 인종을 괴롭히고 갈취해 배를 불리는 행위 자체가, 나를 보고 겁에 질려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깔아뭉갤 수 있다는 사실이.

같은 시각, 소설의 주인공도 마틴과 같은 시기에 입학했다.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선보였다.

마틴은 평민인 주인공이 재능을 뽐내고 귀족가의 쟁쟁하신 분들에게 관심을 받는 걸 시기, 질투했다.

그래서 마틴의 폭력 서클은 독을 주입하는 뱀처럼 주인공을 타킷으로 삼았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평민이라며 핍박했고, 교과서를 화장실에 버렸으며, 왕따를 시키기까지 했다.

부모가 천하다 욕했고, 기물에 온갖 욕설과 모욕적인 추잡한 것을 써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무도 모르게 따로 불러내어 집단 린치를 가하려고까지 했다.

뭐, 당연하게도 주인공에게 매료된 주조연들에게 탈탈 털리고 주인공에게 최후의 결정타까지 맞아서 몰락했다. 참교육 당한 것이다.

심지어 그간 저지른 일들이 아카데미와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져서 사회적으로 매장되기까지 했다.

아카데미 측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대륙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이런 저질스러운 사건이 발생했고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졌을 뿐 아니라, 제국의 유력 귀족가인 4대 공작가의 눈에도 띄어버린 상황이었으니까.

아카데미 측에서는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마틴에게 공식 사과문과 봉사활동 200시간, 벌금 50금화, 피해보상금 100금화 혹은 제적 처리라는 전례에 없던 중징계를 통보한 것이다.

그러나 마틴이 인정할 수 없다며 항의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었다.

'…조졌다.'

회상하고 보니까 정말 답도 없다.

이런 주제에 가주의 명을 받은 병사들을 제치고 와서는 메이드를 풀어달라고 했으니, 맞아도 싸다.

내가 이런 아들을 뒀으면 그냥 자식이고 뭐고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족쇄를 풀 조건은 단 하나다, 마틴. 임페리움 아카데미에서 제시한 징계를 성실히 수행하고 복학해라. 그리고 죽은 듯이 학교생활을 마쳐라."

이어지는 최후 통보.

"아니면 가문에서 너를 추방하겠다."

가문에서의 추방. 귀족 계급의 박탈.

예삿일이 아니었기에 경비들마저 하던 일을 멈추고 가주와 나를 주시했다.

끌려가던 메이드의 눈동자가 불안함으로 떨렸다.

"…아주, 간단한 일이군."

원하던 바다.

"하시죠, 추방."

"뭐?!"

"나가주시겠습니까, 가주님? 제 개인 물품을 챙길 시간이 필요합니다만."

가주의 안색이 눈에 띄게 분노로 차올랐다.

"그래… 스스로가 얼마나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었는지, 깨닫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되겠지."

파르르 떨리는 콧수염, 악문 이 사이로 새어 나오는 노성.

"오갈 곳 없이 떠돌고, 배를 곯고, 찬 바닥 위에 눕고, 헤진 옷을 입고, 그 누구도 너를 돌보지 않고 대접하지 않는 세상을 깨닫고, 울브하딘의 이름이 얼마나 무거운지와 네가 나면서부터 지니게 된 귀족권이 얼마나 대단한 권세였는지 깨닫도록 해라! 그리고 돌아와서 다시 정문을 두드려봐라!"

그의 손에 들린 소총이 휘리릭 한 바퀴 돌더니.

빵! 총성을 내뿜었다.

총알은 정확하게 왼쪽 볼을 스치듯 지나서 녹색 커튼에 바람구멍을 냈다.

귓가가 멍해지고 이명이 들려온다. 왼쪽 볼이 쓰라리다.

자식을 향해서 총을 쏘는, 울브하딘만의 절교법.

"네 마음대로 해라! 메이드도 데리고 떠나버려라! 애초에 네가 데려온 아이니, 책임을 지는 것도 너다! 이 못 되 쳐먹은 녀석 같으니라고!"

메이드? 이 메이드를 마틴이 데려왔었다고?

가주가 성난 발걸음으로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됐다. 이걸로 된 거다.

굳게 닫힌 방문 소리와 함께 메이드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도련… 도련님… 도련님…."

"넌 어쩔 거냐."

"네…?"

"떠나고 싶으면 날 빌미로 아주 떠나버려."

"도련님을 따라가겠어요. 도련님께서 저를 구해주셨으니, 어디까지라도 영원히…."

"그럼 가서 내 생필품부터 챙겨."

"알겠습니다, 도련… 아니, 주인님."

메이드가 곧장 옷장을 뒤지는 동안 나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

나는 Recola가 남겨준 쪽지를 꽉 쥐었다.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마틴의 운명을 바꿔달라고 했지. 그렇다면 여기에 남아 있는 건 최악의 선택지야.'

원작에서 마틴의 최후는, 끝까지 방에서 농성 시위하던 중에 자살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훗날 가문의 집사에 의한 타살이라고 밝혀지기 때문이다.

동기는 오랫동안 벌여온 패악질에 대한 보복과 존재만으로 가문에 누가 되는 마틴 때문에 속을 썩는 가주를 향한 충심.

가주가 추방을 입에 담았을 때, 이게 웬 떡이냐 싶은 심정이었다.

'아깝지만 버릴 건 버려야지.'

주인공 일행 앞에서야 병풍이지, 백작 가문이면 귀족위 중에서도 중상위권에 자리한 권세 있는 집안이다. 백작가의 일원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라면, 판타지 소설가인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내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며 목숨까지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족쇄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빛 좋은 개살구.

'아직은 모든 게 혼란스럽지만.'

괜히 족쇄가 될지도 모르는 것들은 미리 잘라두는 게 옳았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어.'

여기는 소설, 내가 썼지만 나의 것이 아닌, Recola의 창작물인 '몰락한 코스모스 제국의 황태자'의 세계 속이다.

좋은 소식이냐면, 아니다! 소설 '몰락한 코스모스 제국의 황태자'는 수십 차례가 넘는 멸망 클리셰 속에서 전체 인구의 99.9%가 사망하는 절박한 세계관이니까!

수렁 속에서 삽질하던 내가 전력으로 부딪쳐가며 집필한 작품이니만큼 얼마나 비참하게 세계가 멸망하는지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지.'

다시 말해서, 내가 제일 잘 아는 소설이라는 뜻이다.

예정된 멸망을 아는 만큼 활로를 확보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원래 세계로 돌아가든 미래를 꿈꾸든 할 수 있으니까.

확실하게 살아남는 방법은 역시….

'식상하고 진부하지만, 역시 주인공 곁이겠지.'

문제는 이거다!

마틴은 주인공을 상대로 깡패짓을 하다가 사회적 매장을 당한 상태!

'하, 망할….'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이니까!

물론 그것만 믿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개떡 같은 세상이 막장으로 치닫는 주원인은, 주인공이 다가오는 종말을 상대로 무조건 받아치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니까.

즉, 판을 뒤집어야 한다. 종말을 향해 선공하는 포지션을 잡아야 한다.

이게 바로 울브하딘 백작 가문을 나온 결정적인 이유다. 살해를 피하는 건 둘째치고, 앞으로 있을 종말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다. 이 세계를 덮칠 재앙을 내가 먼저 공략하고, 악인의 손에 들어갈 보물을 가로챈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환경이 필수다.

방금 봤다시피 울브하딘 가주는 자존감으로 똘똘 뭉쳐서 각진 콧수염만큼이나 딱딱하고 칼 같은 귀족이다. 울브하딘 가문에서 생활하게 되면 외박은커녕 외출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울브하딘 백작 가문을 나오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마틴의 가족 관계를 파탄 낸 셈이지만, 솔직한 말로… 미안함은 못 느끼겠다.

착각하지 말자. 여기는 소설 속이다. 아무리 실체 같아도 가상의 세계관, 허구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숫자 코드로 만들어진 게임 NPC 같은 존재들의 비위를 맞추는 게 아니다.

그들 전부를 이용해서라도 내가 살아남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게 진짜 중요한 일이지.

'하….'

아니. 너무 멀리 내다보지 말자. 당장 내일 눈 뜨고 보면 집일지도 모르잖아.

또 Recola가 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의 쪽지를 생각하면 나를 도우려는 듯한 뉘앙스였지. Recola를 믿어보자.

점점 무거워지는 어깨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개인용품이 하나하나 메이드의 배낭으로 들어갔고, 충성스러운 세바스찬은 내 다리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나, 메이드, 개. 이렇게 셋이 정문에서 나가는 동안 누구도 배웅 나오지 않았다.

도리어 피하는 것인 듯 유령 저택마냥 인기척이 없었다.

이제 정말로 끝이다. 어쨌든 울브하딘 가문의 피를 이었으니 성을 못 쓰는 일은 없겠지만, 거의 대다수의 귀족권은 사라진 유명무실한 이름에 불과했다.

"주인님… 마차를 부를까요?"

"돈 아껴야지."

"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그러게. 어디로 가야 할까. 드넓게 펼쳐진 중세 판타지 세계의 모습에 현실감이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경이롭고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막막했다.

Recola가 빨리 나타나 주면 좋겠는데. 빨리 나타나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망할, 1부 완결 전에는 오겠지? 와야 하는데!'

내가 쓴 원작 내용은 1부까지다. 거기까지의 내용은 거의 다 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후부터 본격적인 재앙의 시작과 완결까지의 이야기는 큰 맥락만 외우고 있을 뿐이다.

이 세계의 종말은 약속되어 있다. 내가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나조차 모른다.

…Recola, 대체 무슨 생각이냐.

<3화>

ID Recola. 그를 많이 찾았던 만큼 조사도 해봤다. 스페인어로 '소환'이었다. 노린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지만, 심증상 나를 마틴에게 빙의시킨 범인은 Recola가 분명했다.

그는 폐급 엑스트라 빌런인 마틴이 원작과 다르게 종말까지 살아남는 걸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 나, 김안현이다.

어째서 나인지.

이 소설속 세계는 대체 뭔지.

Recola의 소설에 왜 하필 내 오리지널 빌런 캐릭터 마틴이 추가되었고 하필 거기에 내가 빙의되었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뒤통수를 공성추로 맞은 듯 얼얼했지만, 내가 괜히 소설가겠나. 작금의 상황에 주저앉아 울부짖는 대신 이 세계에 적응하기로 했다.

"음… 은행으로."

당연하지만 대책 없이 나온 건 아니다. 종말에 대한 활로 마련이 힘들지, 이 세계에서의 기초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울 테니까. 힌트까지 받지 않았나. 지금도 당장 생각나는 방안이 있다.

"어서오세요. 임페리움 뱅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떤 도움을 원하시나요?"

"계좌 잔금 확인이요."

수도 정중앙에 커다랗게 세워진 임페리움 뱅크 본점은 사람이 개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대륙 최대의 은행이기도 했고, 또 전화국에 우체국에 부동산까지 겸하는 하이브리드인 만큼 인파는 어쩔 수 없다.

"네,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 고객님의 개인 계좌 잔금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확인 결과, 1백금화 92금화 95은화 41동화가 남아있었다.

1동화는 한화로 백 원이고, 1은화는 만 원, 1금화는 백만 원이다. 1백금화는 고위 귀족들만 쓰는 단위로 한화로 1억에 달한다.

즉, 2억에 가까운 돈이 들어있었다.

'썩어도 귀족이군.'

입꼬리가 씰룩였다. 웃음 참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니.

마틴 이 녀석… 성질만 포악하지 돈은 쓸 줄 모르는 어린애였다. 용돈과 폭력 서클 활동으로 모은 금액을 은행에만 넣어둔 모양이다.

"송금 기능을 쓰고 싶은데요. 임페리움 아카데미 행정부로 1백금화를 이 편지와 함께, 따로 50금화를 이 편지와 함께 부탁드립니다."

미리 써둔 편지 세 장을 보냈다.

임페리움 아카데미 징계위원회에서 결정한 벌금과 피해보상금, 그리고 공식 사과문이었다.

사실 임페리움 아카데미에서는 반기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징계로 벌금만 1억 5천을 때렸다. 거기다가 봉사활동 200시간에 공식 사과문까지. 그냥 오지 말라는 거다.

그래도 어쩌겠나. 종말 때 살아남으려면 가야지.

"남은 건, 대략 43금화…."

아카데미의 2학기 분량 등록금보다 조금 부족하다. 입학하면서 1학기 등록금은 납부했지만, 3년을 다녀야 하니 43금화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세계 종말을 걱정하는 동시에 생계 자금 마련도 해야 한다니.

"주인님, 날이 저물어요. 여관방을 잡을까요?"

"그래."

메이드를 데리고 여관방을 돌아다녔다.

'솔직히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다.'

이 메이드가 왜 이렇게 마틴에게 지극정성인지 모르겠다. 특히 가주 앞에서 머리를 땅에 박고 나를 변호할 때는 내가 더 놀랄 지경이었다.

아까도 분명 떠날 기회를 줬음에도 가지 않았으니… 연기인가, 진심인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이 메이드는 내가 가진 유일한 체스 말이다.

"주인님, 이 여관방이 제일 싸고 방이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제가 방을 잡을게요. 그… 돈을 아껴야 하니까… 1인실… 로, 할까요?"

"마음대로 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마틴에게 충성하는 걸까?

가주와 메이드는 마틴이 데려왔다는 뉘앙스로 말하긴 했다. 아마 사실이겠지.

기묘하다. 이 세계는 성립하는 과정에서 독립해버렸다. 소설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들이 알아서 설정된 것이다.

실제로 난 이런 메이드를 설정한 적도 없고, 마틴의 과거를 설정한 적도 없었다.

"주인님, 제가 이부자리를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메이드가 신속하게 하나뿐인 침대의 보를 바르게 펴고 이불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일도 잘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의심스럽다. 이 메이드, 진짜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확인할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 제일 확실한 건, 역시 '돈'과 '일'을 맡겨보는 거다.

"혹시 커피에 대해서 알고 있나?"

"네?"

메이드는 당황한 듯 두 눈을 깜박이다가.

"네. 그… 남방의 음료라고만 알고 있어요."

"커피 장사를 할 거다."

"네?!"

당황에 당황이 더해지고 눈이 고속으로 깜박였다.

"요, 요식업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네가 일해줘야겠다."

내 폭탄선언에 메이드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다가, 이내 양손을 공손히 배에 두고 허리를 숙였다.

"주인님께서 명령하시면, 저는 뭐든지 따르겠어요."

간단하게 짐만 풀어놓은 뒤, 시장으로 향했다.

커피콩이나 카카오, 설탕, 우유, 프림 등의 공수는 어렵지 않았다. 임페리움 제국은 세계 최강의 국가. 이곳은 그 수도. 모든 물자가 모이는 장소였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커피인가요…?"

왜냐하면 내가 지구에서 따낸 유일한 자격증이 바리스타 자격증이기 때문이다. 카페 창업도 했었고.

빌어먹을 Recola가 편지에 굳이 커피 이야기를 꺼낸 것도 이것 때문이겠지.

"맛있잖아, 커피."

나 김안현은 커피를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부디 마틴의 육체에 카페인 알레르기가 없으면 좋겠는데.

아마도 없을 거다. 내가 마틴을 처음 창조할 때 대놓고 커피 애호가 컨셉을 잡았었으니까.

메이드는 전혀 새로운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수첩에 메모했다.

"주인님께서는 커피를 좋아하셨군요. 처음 알았어요."

"흠, 저택에는 커피가 없었으니까."

흔히 그렇듯 차는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는 훌륭한 기호식품이다.

임페리움 제국은 '홍차'를 주로 마시지 '커피'나 '녹차'는 주류가 아니지만, 원작 초중반부터 녹차가 유행하고 중반부 때부터는 커피가 유행하게 된다. 유행의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 제국민은 온갖 종류의 차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고객의 선호도를 알고 필승 메뉴를 꿰고 있다면, 난이도는 훨씬 수월해진다.

'한국식 커피의 매운맛을 보여주마.'

커피에 물만 부어 만드는 밍밍한 차가 아닌, 설탕과 프림을 때려 박아서 만들 이 세계에는 아직 없는 달달한 커피 말이다.

"잘 봐. 이렇게 하는 거야."

커피콩을 볶고, 갈고, 물을 붓고, 배합해서 여러 가지 커피 제조를 보여주었다.

"이게 에스프레소. 물을 넣으면 아메리카노. 우유를 넣으면 카페라떼. 초코 시럽을 넣으면 카페모카."

메이드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리스타 기술을 보더니.

"주인님께서는 커피에 대해서도 잘 아시네요."

옛날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서 카페를 창업했었다. 소설과 병행하기도 좋았고, 어쨌든 돈을 벌 수 있었으니까. 시작은 좋았다. 결과적으로 대형 자본 프랜차이즈와의 경쟁에서 도태되고 말았지만.

"네가 나가서 커피를 팔아. 할 수 있겠어?"

"네, 주인님. 알겠습니다."

메이드가 고개를 숙여 복종을 표시했다.

목재 공방에 가서 작지만 튼튼한 손수레를 만들었다. 쉽게 부러지지 않는 특수 목재를 써야 해서 따끔한 금액 지출이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감당할만했다.

"그리고."

이것은 시험.

"오는 길에 임페리움 뱅크에 한 번 더 들를 테니까. 알아둬."

이 정체 모를 메이드의 본심을 시험하기 위한 내 덫이다.

"네!"

나는 메이드와 함께 커피 카트를 몰고 시장과 광장을 전전했다. 글줄로만 읽던 세계를 직접 눈으로 본다는 건 신선한 경험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유롭게 준비하고 싶었지만, 당장 돈 나올 구석을 만들어둬야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다.

"커피를 사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메이드가 속상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막 시작한 장사니까 아예 못 팔 것도 예상했다. 커피는 이국적인 음료니까. 마땅한 홍보 수단도 없으니.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다. 내일 무료로 커피를 나눠주는 이벤트라도 열어서 사람을 모아야겠다.

"이봐요, 거기 메이드!"

노점을 물끄러미 보던 한 노인이 벤치에서 일어나 느릿하게 걸어왔다.

"네!"

메이드가 환한 미소로 응대했다.

"이건 파는 거에요?"

"네! 커피라는 거에요. 대륙 남방에서 자주 마시는 차의 일종이에요."

"차? 흐음, 이국의 차는 좋지. 한 잔 줘."

노인의 주문에 메이드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가, 물었다.

"어르신, 오늘은 어떤 차를 마시고픈 기분이세요?"

"봄날이니 달콤한 게 땡겨."

주문을 받은 메이드가 순식간에 준비한 재료들을 배합해서 커피를 제조했다.

노인은 한잔 가볍게 들이키더니.

"으으음!"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오오…, 향이 참 좋아. 달고, 흐음, 이렇게 맛있을 수가. 이 커피 이름이?"

"카페모카에요."

"친구들 좀 나눠주게 석 잔만 챙겨줘."

"네, 어르신!"

운이 좋았다.

하지만 그 후로 커피를 사 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첫날이니 각오한 바다.

"이제 돌아가자."

"네!"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오늘 장사를 접기로 했다.

나는 예고한 대로 메이드를 데리고 임페리움 뱅크를 방문했다. 밤에도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볼일을 보기까지 제법 오래 걸렸다. 내 전재산 43금화 중 40금화나 되는 거금을 출금했다.

그 거금을.

나는 메이드에게 통째로 건네주었다.

40금화. 한화 4천만 원. 아찔한 금액이었다.

"나는 아카데미 복학 관련으로 할 일이 있으니까, 먼저 돌아가 있어."

"네? 아니에요. 저, 주인님께서 일을 마치실 때까지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아니, 먼저 돌아가. 내일부터 일해야 하니까 쉬어둬야지. 명령이야."

"그, 그러시다면, 네…."

메이드가 내게 정중하게 인사한 뒤, 커피 카트를 끌고 먼저 길을 나섰다. 어쩐지 서운해 보이는 그 모습에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더해졌지만 어쩔 수 없다.

나도 은행에 들어가는 척하며, 메이드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세계에 떨어진 내게 신중함이란 미덕이다. 사람을 믿을 때도 그냥 믿어서는 안 된다. 시험을 통과하든, 인질을 잡히든 확신이 필요했다.

자, 어떻게 할 거냐. 세상 끝까지 나를 쫓겠다고 말하며 함께 저택을 나왔겠지만! 40금화라는 유혹을 이길 수 있겠나?! 그럴 리가 없지! 인간이란 거기서 다 거기니까! 돈을 위해서 가족을 속이고 죽이기까지 하는 마당에! 아무런 득도 없이 이제 귀족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내게 충성을 바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라는 생각이 무색하게.

메이드는 커피 카트를 끌고 곧장 여관방으로 들어갔다.

"…."

불이 거세게 타오르다가 찬물에 꺼진 듯한 허탈한 느낌을 등 뒤에 매달고 한참을 서 있었다. 바로 들어가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밖에서 괜히 찬 밤바람이나 맞으며 시간을 때우다가 돌아온 나는 말을 잊었다.

그 사이에 메이드는 이부자리를 깔끔하게 청소해 놓고 목욕물도 받아놓고 가벼운 찬거리까지 준비해놓았기 때문이었다.

"아, 주인님! 다녀오셨어요! 목욕부터 하시겠어요? 아니면 식사부터? 많이 피곤하셔도 간단한 세안이라도…."

"씻고 나올게."

"네, 주인님."

<4화>

욕실에는 나무 욕조에 뜨끈한 목욕물이 받아져 있었다. 몸을 담그자 딱 알맞은 온도에 몸이 풀리고 노곤해졌다.

조금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서 벽을 바라보았다. 얇은 벽 너머에서는 메이드가 쉬고 있겠지.

'조금은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목욕을 하고 나온 나는 메이드와 함께 오늘 판매량을 결산했다.

판매한 커피 3잔. 매출은 2은화 10동화. 판매량 결산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나는 몇 커피 메뉴의 가격을 새로 책정하고, 커피 카트의 판매 동선을 정했다. 대광장, 공원, 번화가, 시장 등이 주요 장소였다.

"내일부터는 혼자야. 할 수 있지?"

"네!"

재차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똑같았다.

"아, 그리고…."

단순히 커피만 팔아서는, 수지가 안 맞지 않겠나.

"밖에서 듣는 소문이나 정보들을 나한테 전해줘. 뭐라도 좋아. 최대한 많이 듣고 알려줘. 알겠지?"

옛말에도 민심이 흉하면 재앙이 찾아온다 그랬던가. 항간에 떠도는 불길한 소문이야말로 재앙의 전조였다.

"네!"

다음 날, 메이드가 홀로 커피 카트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부디 쓸만한 체스 말이면 좋을 텐데."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에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메이드는 대하기 어려웠다. 쉽게 배신하진 않을 것 같지만, 내 입장에선 만난 지 이제 겨우 하루도 지나지 않은 초면인 사람이었다. 속내도 모르겠고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도 판단이 안 선다.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기에, 나는 그녀에게 조금씩 일을 맡겨보면서 테스트할 생각이었다. 그 결과에 따라서 나중에 쓸지 버릴지를 택하면 되는 거고. 그녀가 밖에서 움직이는 동안 나는… 안에서 산재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

"하, 아카데미에는 복학도 안 했는데 벌써 지치는군."

열정적인 삶은 빠르게 타오른다고 하던가, 해와 달이 뜨고 지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가문에서 나온 지도 두 달이 지났다.

메이드는 생각보다 훨씬 쓸만한 말이었다. 매일 새벽부터 재료를 공수하고 카트를 끌고 나가서 커피를 팔아왔다. 그러면서도 내가 먹을 삼시세끼 식사를 준비하는 성실함까지.

일을 시킨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매출도 괜찮았다.

남방 이국의 맛있는 차를 판다는 소문이 괜찮게 돌았는지 이동식 카페치고는 나쁘지 않게 팔렸다. 메이드가 카트를 끌고 나가서 직접 판다는 것도, 어쩌면 평민들에게 귀족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했을지도 모르지.

그동안 나는 고아원, 요양원, 신전, 마차 대기소, 경비초소 등을 전전했다. 봉사활동 200시간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이것도 난제였다. 왜냐하면… 내 생각보다 마틴의 악명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온갖 더럽고 역겨운 봉사들만 맡아서 해야 했다.

겸사겸사 커피를 가져가서 홍보하기도 했다. 내 악평과는 별개로 커피는 호평일색이었다.

그렇게 고생한 끝에 마침내 그날이 되었다.

울브하딘 가문에서 나온 지 60일째 되는 날 아침.

우편으로 아카데미에서 편지를 전해왔다.

[친애하는 아카데미 생도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에게.]

핵심은 임페리움 아카데미로의 복학을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과오를 생도가 기억하기를 바라며…]

한 번만 더 눈 밖에 나면 얄짤없이 퇴학시키겠다는 경고.

[…부디 다른 생도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추구하길 바라며, 생도 간 신실한 우정에 선생들은 개입하지 않을…]

아카데미에서 왕따 당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은 덤이었다.

편지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네가 오는 걸 막지는 않겠지만 가능하면 오지 마. 제발. 오면 어떻게든 퇴학시켜줄게.

'대놓고 오지 말라고 써놓던가. …그래도 가겠지만.'

어떻게든 주인공 일행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종말 때까지 빌붙어야 한다.

막막한 일인 만큼 당장 복학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하, 이것부터 확인해봐야겠는걸."

-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의 운명이 창조주에 의해 바뀌었습니다.

- 시스템이 제공됩니다.

- 시스템은 당신의 모든 행동을 보조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임페리움 아카데미에서 온 편지를 다 읽자마자 갑자기 시스템이 나타났다.

- 사용자 정보를 수집, 수치화하겠습니다.

[바리스타 Lv 5]

[요리 Lv 4]

[작문 Lv 3]

'이 썩을 놈이.'

소설가한테 작문보다 요리와 바리스타 레벨이 더 높다고 보여주다니.

물론 내가 더 나은 소설을 써보겠다는 핑계로 의식주의 개선을 위한답시고 요리와 바리스타에 열중이긴 했지만!

- 사용자의 각종 요인을 수집, 분석하여서 현재 실력을 레벨로 수치화했습니다.

"…."

화를 낼 수 없었다. 작문 Lv 3이라는 수치가 객관적으로 내 작문 실력을 말해줬으니까. 내 소설은 지독하리만치 인기가 없었다. 그러니까, Lv 3만큼.

스멀스멀 기어오르려는 열등감을 억눌렀다. 익숙한 작업이다.

"그래서 뭔데. 시스템으로 강해질 수 있다, 뭐 그런 거야?"

괜히 장르 소설 작가가 아니다. 시스템이니 하는 건 익숙하다. 어쩌면 나타나 줄지도 모르겠다고 예상하기도 했고.

- 사용자의 질문을 접수했습니다. 대답은 '그렇습니다'입니다.

질문을 받아준다면 먼저 할 말은 정해져 있다.

"내가 왜 이 세계에 왔고, 뭘 해야 하지? 돌아가는 방법은?"

- 사용자의 3가지 질문을 접수했습니다.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대답을 못 해주는 것도 아니고 없단 말이지.'

시스템을 윽박질러도 나올 정보가 아니라는 건 알겠다. 지구로 돌아갈 방법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 시스템 개방 및 활용 업적 달성으로 1,00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스킬을 강화 혹은 생성할 수 있습니다.

대신 이 세계에서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용자의 자체적인 학습으로 스킬이 생성 및 강화되기도 하지만, 업적 달성으로 얻는 포인트로도 가능합니다. 빠른 성장을 위해서 포인트의 적극적인 활용을 권장드립니다.

"…창조술을 배우고 싶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무적이다.

- 창조술 스킬은 시스템의 권한 밖입니다. 시스템은 조물주의 권한에 해당하는 몇 가지를 제외한 모든 능력을 부여해드릴 수 있으므로, 예시를 말씀해주시면 바로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래, 너 잘났다. 1,000포인트로 가능한 건 뭐가 있지? 아니다. 검술은 몇 포인트야?"

- 검술 이해 (Lv 1)은 5포인트입니다.

"…궁술은?"

- 궁술 이해 (Lv 1)은 10포인트입니다.

"마법."

- 마법 이해 (Lv 1)은 80포인트입니다.

이거… 생각보다 1,000포인트가 큰 값인가 싶다.

"레벨은 몇까지 있어? 검술을 마스터 하려면 포인트가 얼마나 들지?"

- 검술 이해 레벨을 끝까지 올릴 시 검술 숙련으로 진화합니다. 검술 숙련 레벨 최대 시 마찬가지로 검술 달인으로 진화합니다. 검술 달인의 레벨을 최대로 올리면 검술 스킬을 마스터하게 됩니다.

"…거 복잡하네. 마스터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검술 이해를 끝까지 올리려면 얼마나 들어?"

내 기억이 맞다면 초반부 주인공 일행의 경지가 이해의 끝자락일 터.

- 검술 이해 (Lv 10)까지 5,110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검술 스킬의 경우 상위 레벨로 올릴 때마다 포인트가 2배씩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

아무래도 너무 비효율적이다. 이런 것 말고… 종합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걸 가져야겠는데.

"이 세계에 대해서 아는 정보가 없어."

작가 김안현으로서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이 17년 간 살아온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억의 부재는 상식의 부재로 이어졌다.

봉사활동 200시간은 물론이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아직 메이드의 이름조차 몰라서 얼버무리고 있단 말이다!

내 고뇌를 읽기라도 했는지 시스템이 먼저 제시해왔다.

- 빙의자를 위한 특전 스킬 2가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 전용의 스킬 '척척박사'와 '야생 감각'입니다.

이상한 이름이군. 야생 감각은 몰라도 척척박사는 진짜로 이상하다.

- 척척박사 (Lv 1)는 1,000포인트입니다.

"1,000포인트씩이나 한다고? 어떤 스킬이지?"

- 사용자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개념에 대한 정보를 열람하고, 뇌를 활용하는 각종 지능적 활동을 보조하는 스킬입니다. 세계 구성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 개념, 상식이 부족할 경우 적극 추천합니다.

"…."

대충 초보자 패키지 같은 느낌인가. 시스템이 내게 호의적이라는 전제하에 나쁠 건 없겠지.

하지만 덥석 물어버리는 것도 영 내키지 않는다. 특히 이름이 미덥잖다.

"정보와 관련된 다른 스킬들도 살펴보겠어."

- 정보의 파악, 분석, 도출과 관련된 스킬로는 통찰, 분석, 제3의 눈, 심안, 대현자 등이 있습니다.

- 시스템 권한으로 임시 체험도 가능합니다.

체험이라, 그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백문불여일견이니까.

"좋아."

선언하자마자 시야가 암전됐다. 몸이 붕 뜨고 공간이 뒤바뀌었다. 놀라기도 전에 아찔한 부유감이 사라지며 바닥에 착지했다.

- 시스템이 제공하는 연습장입니다. 이곳에서 개인적으로 수련하거나 스킬을 체험해볼 수 있습니다. 현실과 똑같이 시간이 흐르며, 현재 육체는 가수면 상태입니다.

- 앞서 나열한 스킬들을 체험하기 좋은 환경으로 구성하겠습니다.

빛무리가 일어나며 책 무더기가 다다닥 쌓이고, 미로가 만들어지고, 복잡한 조형물이 세워졌다.

- 통찰부터 임시 체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감각이 맑아졌다. 시야도, 청각도,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는 뇌도. 세상을 인지하는 범위가 늘어나고, 정교함이 훨씬 좋아졌다.

- 계속해서 다른 스킬들을 체험하겠습니다.

분석은 통찰처럼 감각을 활성화해 주지는 않았지만, 온갖 어려운 공식과 논문을 순식간에 이해하게 해주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제3의 눈은 수많은 서적들 중에서 내가 원하는 걸 찾아주었고, 미로의 길을 알게 해주었으며, 문제의 답과 공식을 알려주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영체도 볼 수 있었다. 다만… 이마에 세 번째 눈이 툭 하고 생기는 건 달갑잖았다.

심안은 눈을 감은 채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걸 인지하게 해주었다. 아니, 그보다 더. 나를 중심으로 360도에 있는 모든 걸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제3의 눈만큼은 아니어도 진실을 찾게 해주는 성능이 있었다.

'하나같이 탐나는 능력들이다.'

나는 벅차오르는 설렘을 안고, 마틴에게 특전으로 주어진다는 능력을 맛보기로 했다.

- 척척박사를 임시 체험하겠습니다.

척척박사라는 이름답게, 이 세상의 개념과 상식에 대한 정보들이 뇌리에 새겨졌다.

"…!"

통찰도, 분석도 뛰어난 스킬이다. 제3의 눈과 심안은 경이로웠고.

척척박사는 놀랍게도, 앞선 스킬들이 가진 능력을 전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인지는 통찰만 못했고, 파악 능력은 분석보다 약했으며, 진실을 파악하는 법은 제3의 눈보다 비효율적이었으며, 보는 건 심안보다 못했다. 매력적이다. 하나의 절대적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다재다능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내게 딱 필요한 스킬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결단을 재촉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5화>

대뇌 위로 영사기를 쏘아대는 것처럼 머릿속으로 영상이 송출됐다. 이 현상이 척척박사로부터 발원되었음은 분명했다.

영상 속에는, 한 어린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소년의 곁에는 수많은 어른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건 대체…?

의문이 꼬리를 물기도 전에 영상이 툭 하고 끊겼다.

- 특전 스킬 척척박사의 경우, 습득 시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에 관한 과거 기억을 전송받을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일시 정지된 대뇌 속 기억을 노려보았다.

"…하."

실소했다. 이 녀석, 협박하는 거야? 아니… 선택지가 이것밖에 없잖아.

통찰과 분석은, 물론 괜찮은 스킬들이지만 묘하게 부족했다.

제3의 눈과 심안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만.

- 제3의 눈(Lv 1)은 7,000포인트가 필요합니다.

- 심안(Lv 1)은 5,000포인트가 필요합니다.

비싸다. 지금 가진 1,000포인트가 적지 않다는 건 알겠다. 3천이니 5천이니 하는 포인트를 언제 모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한다.

반면.

- 척척박사(Lv 1)는 1,000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초기 자금으로 사버리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가격.

마틴에게 중요해 보이는 과거의 정보.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범용적인 능력까지.

"척척박사를 구매하겠어."

선택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 스킬 척척박사(Lv 1)가 추가되었습니다.

- 척척박사의 기본 능력인 절대기억과 정보 열람(1단계, 기초 상식)이 항시 적용됩니다. 사고, 추리, 추상하는 등 지능적 행위를 보조합니다.

- 특전 스킬의 구매로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의 과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체험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 있으므로, 하루에서 이틀 간 안전한 곳에서 시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당장 내일 아카데미에 복학해야 하는데, 지금은 기회가 아닌 건가.

그 순간 연습장은 사라지고 카페의 내부로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서, 메이드를 보았다. 작고 여린 손으로 커피콩을 볶고 그라인더에 갈아서 우려낸 음료에 여러 재료를 첨가하고 있었다.

- 척척박사(Lv 1)가 인물 사전을 열람합니다.

[이름: 라일락]

[나이: 17세]

[성별: 여성]

[성격: 충성스러움, 세심함]

[사용자 인식: 충성, 애정, 연민]

[청소 Lv 5]

[요리 Lv 6]

[임페리움 제국 가정식 요리 Lv 5]

[제과제빵 Lv 8]

[바리스타 Lv 1]

이어서 메이드 라일락이 만들던 커피를 주시했다.

[제품명: 카라멜 마끼아또]

[제작자: 라일락]

[품질: Lv 3]

[품평: 바리스타 지식은 부족하지만, 수준급의 요리와 제과제빵 스킬의 보조로 괜찮게 만들어진 커피. 고소한 맛이 다소 진해서 호불호가 갈린다.]

'제법이잖아, 이 능력!'

쓰면 쓸수록 감탄만 나온다.

그러나 라일락과 커피가 예외였지, 대부분의 물건들은 상세한 설명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제품명: 의자]

[품질: Lv 2~5]

[품평: 딱딱하지만 많이 불편하지는 않고 튼튼해 보인다.]

아예 처음 보는 물건은 설명이 안 보느니만 못하다. 오래 관찰하거나 사전 지식이 있으면 상세하게 표시되는 모양이다.

살짝 아쉬운 성능은 스킬 레벨을 올리는 것으로 보충 할 수 있어 보였다.

나는 카페 마감 시간까지 시스템을 탐구하다가 라일락을 불렀다.

"라일락."

"네, 주인님!"

커피에 집중하던 라일락이 나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이름을 불러주니 평소보다 기뻐 보였다.

사실은 내가 더 기쁘다! 지금까지 난처했다고. 분명 알고 지냈을 사이가 분명한데, 이름을 모르면 안 되잖아?! 그래서 부탁할 때도 '어, 음, 크흠, 저것 좀 해줄래?'라는 식으로 했다고.

…후, 진정하자.

"매출은 괜찮아? 오늘 매출은 얼마야?"

"네! 오늘 하루 매출은 21은 92동화에요!"

21만 9천 2백원. 매출로만 보면 제법 상당한 금액이지만, 애석하게도 커피콩의 가격이 지구에서보다 비쌌기 때문에 원자재 값을 고려하면 조금은 난처하다. 순수익은 10만 원 정도일까? 세금을 제외하면 아카데미 학비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겠고 생활비조차 빠듯하다.

사업을 일찍 시작하기를 잘했다.

자본도 인력도 부족해서 성장에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성공이 보장된 사업인 만큼 미래는 확실하다.

당분간은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겠지만.

아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임페리움 아카데미로 복학할 거야."

"네! 주인님께서 안 계시는 동안 열심히 할게요!"

"저기 라일락."

"네!"

너는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

상태창의 '사용자 인식'에 나온 충성, 애정, 연민은 라일락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일 터.

그러나 턱 끝까지 차오른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

이른 아침, 나는 멍한 눈으로 눈을 떴다.

'지금이면 라일락도 나갔으려나.'

커피에는 각성 효과가 있다. 꼭두새벽부터 일터에 나가는 사람이 마시기에 딱 좋은 '모닝 티'의 역할에 안성맞춤이지 않은가.

아, 오해하지 않으면 좋겠다. 커피에 대한 효능은 내가 알려주었지만.

"그럼 새벽부터 나가서 장사하면, 주인님께 더 많은 돈을 벌어드릴 수 있겠네요!"

라면서 일을 기획한 건 라일락이니까. 방긋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이, 미안하면서도 유쾌했다.

"웃겨. 내가 뭐라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창밖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웃어?"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느낀 '웃음'이라는 감각은 황무지의 들꽃만큼 아름답고 낯설었다.

Recola는 내가 가문에서 나온 후 어떠한 연락도 주지 않았다. 무려 두 달 동안이나. 괘씸하고 화도 났으나, 그 연락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벌어진 일을 더 탓할 수도 없다. 그럴 여유도 없고.

이 세계는 종말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다. 종말도 세계를 추락시키기 위해 강하하고 있다. 세계와 종말이 만나기 전에, 탈출하고픈 것이 내 소망이다.

그러나 Recola는 마틴의 운명을 바꾸라고 했었다. 그게 과연 단기간에 끝날 일일까?

아니, 이쯤되면 잊고 있는 편이 낫다. Recola에 대한 생각은 싹 잊고,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생활해야 한다.

우물은 목마른 자가 파는 법. 죽지 않으려면, 활로를 찾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세계에 떨어지고 2달 동안 쉬는 시간도 거의 없이 일만 했다. 라일락은 매일 카트를 몰고 나는 봉사 시간을 채웠다. 퇴근한 뒤에는 매출을 계산하고 수도의 근황에 대한 정보를 분석했고. 사실 이 모든 게 사전준비에 불과했다.

메인은 바로 오늘.

"아카데미, 인가."

마침내 출발선에 섰다.

제복을 입은 채 착잡한 기분을 느끼며 서 있었다.

[끼잉….]

"그래, 세바스찬. 다시 돌아와버렸어."

임페리움 아카데미 정문 앞에서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다독였다. 세바스찬도 내 마음을 아는지 손을 핥아주고 있었다.

"아이, 침! 축축하잖아!"

[월!]

기운이 났다고 생각한 걸까? 세바스찬은 입꼬리를 올리며 짖었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더니 부럽다, 부러워."

임페리움 아카데미는 이능력 전투사관학교다. 마법, 검술, 초능력 등을 가르치고 또 이를 활용한 전투 전반과 생존법을 가르친다.

학생 대신 쓰이는 생도라는 칭호도 사관학교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소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좋은 점이라면 애완견의 출입이 합법이다. 파트너, 패밀리어, 펫 등과 함께해야 본 실력을 드러내는 이능력도 있기에.

방해만 안 된다면 수업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애완견은 귀여운 수준이고 커다란 악어나 바실리스크를 데리고 다니는 어느 나라 공주님도 계신다.

"덕분에 나도 긴장이 좀 풀리네. 고맙다."

세바스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볼까.'

정문을 지나자마자 시선이 쏟아진다. 이건 양반이고 대뜸 욕부터 때려 박는 생도도 있었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쟤 마틴 아니야?'였다. 다음으로는 '쓰레기 마틴?'이었고.

'각오는 했지만…, 예상보다 심한걸.'

교실에 도착할 때까지 악의 어린 시선은 계속 몰렸다. 교실에 들어왔다고 끝도 아니었다.

1학년 A반 교실 문을 드르륵 열자, 넓은 강의실에서 하하호호 떠들던 생도들의 시선이 모이고 동시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마치 조별 과제 펑크를 내놓고는 발표날 웃으면서 준비 다 됐냐고 묻는 새파란 후배가 된 기분이다. 아니, 비유가 부족했다. 지금의 마틴은 그보다 더한 쓰레기겠지.

지구와 마찬가지로 혹은 그보다 더 제국에서는 학교폭력을 엄중하게 처벌하고 있다. 하물며 대륙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며 타국의 왕족과 귀족들도 다니는 아카데미에서 폭력 서클 운영 및 학교폭력 가해자면… 솔직히 변호해줄 수가 없다.

나는 애써 무시했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가장 뒷자리. 제일 끝자리. 아싸들을 위한 안식처에 자리 잡았다.

얼어붙은 공기가 조금이나마 녹으며 다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은, 마틴을 두고 수근거리는 소리였다.

"쟤,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거래? 4대 공작 가문에 찍혀놓고는."

"몰라. 자존심이 없겠지. 신경 끄자."

아무래도 생도들은 마틴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결정한 모양이다.

'다행이다.'

정면에서 맞부딪치는 악의 어린 시선은… 상상 이상으로 거북하고 울렁거렸다.

"아니, 생각해보라고. 애초에 저런 놈이 어떻게 임페리움 아카데미에 들어온 건데?"

"너는 진짜 별게 다 궁금하다. …나도 잘 몰라. 어릴 때는 나름 신동이라 불렸었다는데, 그것 덕분이겠지."

까내리기 좋아하는 애들 덕분이랄까, 마틴이 어떻게 여기 입학했는지 추론할만한 거리도 들을 수 있었다. …참 고맙다, 그래.

떨리는 손으로 세바스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공간 내에서 유일한 내 편이다. 이 아이마저 없었으면, 힘들었을지도.

'고작 두 달 사이에….'

메이드 라일락, 그리고 세바스찬과 정이 들었나 보다. 세바스찬이 날 위로해주려는 듯 내 손에 머리를 부비적거리더니 혀로 핥기 시작했다.

숨죽이고 기다리자. 수업이 시작하면 시선도 분산될 테니까.

그때 드르륵, 하며 열린 문 사이로 또 다른 생도가 등교했다. 그를 보자마자 심장이 철렁였다. 직감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렸고, 시스템이 증거를 들이밀었다.

- 척척박사(Lv 1)가 인물 사전을 열람, 해당 인물의 정보를 파악합니다.

[이름: 길버트 오퍼 코스모스]

[나이: 17세]

[성별: 남성]

[성격: 정의, 선, 질서, 강직]

[사용자 인식: 혐오, 경계, 무시, 일말의 동정]

[주인공 보정 Lv Max]

[코스모스 제국 황족 검술 Lv 5]

[검술 이해 Lv 8]

[마나연공술 Lv 8]

[체술 Lv 7]

[독도법 Lv 5]

[제왕학 Lv 5]

소설 '몰락한 코스모스 제국의 황태자'의 주인공 길버트 오퍼 코스모스. 하늘이 내린 재능으로 '검성'이라 불리울 남자.

지금은 망국의 황태자라는 신분을 숨기며 평민으로 위장 중이다. …그것도 모르고 깝쳤다가 매장당한 게, 마틴이고.

'으음.'

미움받고 있다. 혐오, 경계, 무시. 이건 좋지 않아. 매우 나빠.

'억?!'

심장이 쿵쾅거린다. 피가 끓는다. 눈에 핏발이 서고 목의 핏줄도 도드라진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이 비루한 몸뚱어리에 나도 모르던 지병이 있거나, 알레르기 같은 게 도진 걸까.

…그래, 알레르기다. 길버트 알레르기. 그를 미천하게 여기고 질투했으며 왕따로 몰았다가 참교육을 당한 마틴만이 가질 수 있는 알레르기다.

설마하니, 마틴의 감정 찌꺼기 같은 것까지 남아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급한 대로 눈을 지긋이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감정이 조금은 가라앉자, 눈을 떴다.

길버트는 웃는 낯으로 생도들의 인사를 받으며 교실을 쭈욱 둘러보다가, 나를 보더니 눈썹을 꿈틀거렸다.

"…."

무슨 일이 터지는 걸까.

그러나 길버트는 잠시 끊긴 인사를 이어가며 자리로 가서 앉았다.

뒤이어서 길버트의 동료들이 들어온다.

<6화>

[리나 폰 툴린 아이브린]

[검술 이해 Lv 8]

황태자 길버트의 호위기사다. 제국의 멸망 이후, 길버트와 함께 아카데미에 입학한 상태다. 이후 검후라 불리우며 길버트와 함께 동시대 최강의 검사로 불린다.

[엘리샤 폰 트레샤 하르마듄]

[궁술 이해 Lv 8]

4대 공작가 중 활의 하르마듄 가문의 장녀. 궁술의 천재임은 물론이고, 엘프같은 외모와 사교성 있으면서도 고귀한 이미지로 유명했다.

[보르드 폰 루딘 타우포로스]

[방패 이해 Lv 7]

4대 공작가 방패의 타우포로스 가문의 막내. 키가 2m가 넘는 육중한 근육질의 전사. 호탕하며 친화력 높은 캐릭터로 주인공과 조연의 연결고리를 담당한다.

[메리 폰 아이리 데미니얀]

[마법 이해 Lv 7]

4대 공작가 비구름의 데미니얀 가문의 막내. 소심한 성격으로 말도 더듬고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쓰지만, 실상은 엄청난 두뇌력을 가진 천재다.

파워 밸런스가 편중되어 있다.

주인공 일행의 전투 스킬이 7, 8인데 비해, 반의 다른 생도들의 평균은 3이었다. 그래도 내로라는 엘리트들이 모인 장소일텐데 이렇게나 편차가 심하다니.

그래도 나보다는 낫다. 내 스킬은 고작 척척박사 하나뿐. 전투 스킬은 따지자면 Lv 0이다.

일명 '주인공 일행'은 교실에 들어오면서 나한테 눈길 한 번씩은 주고 갔다. 리나는 무표정했고, 엘리샤는 벌레 보듯 경멸했고. 보르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며 메리는 아예 무시했다.

종말에서 살아남으려면, 저들과 친해져야 한다.

'하하. 마틴, 이 개떡 같은 자식.'

왜 이놈이 싸질러놓은 잘못을 내가 감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곧 조례가 시작됐다. 문이 열리며 담임선생이 들어왔다.

"전원 착석. 반장 인사."

"네!"

우렁찬 대답 소리.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은 주인공 일행 중 보르드였다.

"생도 차렷! 선생님께 인사!"

"안녕하십니까!"

1학년 A반 총원 45명이 허리 숙여서 인사했다. 평민도 있지만 귀족가의 자제와 심지어 왕족까지 섞여 있음에도 깍듯한 인사가 가능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아카데미 내에서 모든 생도는 평등하며….

"안녕하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내길 바란다."

무엇보다 담임선생 핵티아가 임페리움 제국의 황실 근위기사단장이었던 최고봉의 기사이기 때문이다.

원작 후반부에까지 파워 인플레이션에서 밀리지 않는 강력한 조연으로, 주인공 일행의 큰 조력자이나 결국은 종말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기사 중의 기사, 기사의 표본, 정의의 대명사였다.

즉…, 악에 한해서는 가차 없다.

아니나 다를까 반을 한 번 쭈욱 훑어보더니 내게서 딱 멈췄다.

'아, 진짜….'

오늘 저 눈빛만 몇 번을 받는 건지 모르겠다.

"이미 다들 봤겠지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징계위원회에 회부 됐던 마틴 생도가 돌아왔다. 거의 80일 만이다. 어떻게 환영할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핵티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전혀 재미없는 농담을 내뱉었다.

"모두 마틴 생도를 본받아 학업을 충실히 이행해 주길 바란다."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을 꾹 참았다. 언젠가, 어떻게든, 반드시 이 분위기를 바꾸리라. 진심은 통하는 법. 세계관과 별개로 주인공 일행의 인성은 제법 괜찮으니까.

"자, 사흘 뒤면 중간고사다. 1교시 전까지 자습 시간이니까 놀지 말고 공부해라."

자습 시간이 되자 이제야 숨이 좀 쉬어졌다. 소리 없는 한숨을 푹 쉬자, 책상 옆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세바스찬과 눈이 마주쳤다. 웃고 있었다.

'넌 쓸데없이 해맑아서 좋겠다. 머리가 꽃밭이라서 그런가….'

손을 들어 가볍게 세바스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내 연약한 멘탈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나 다름없었다.

헌신적인 메이드 라일락이 보고 싶어졌다.

툭, 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책상 위에 쪽지가 놓여져 있었다. 누가 어떻게 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펼쳐보니 '왜 왔냐?'라고 적혀 있었다. 동봉된 신랄한 욕설은 눈에 담지 않았다.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곧 수업 종이 울렸다.

1교시 수업은 마법학이다.

"상대가 쓸 마법을 미리 예측하는 간파는 단순 암기에 불과하다. 단지 분량이 아주 많아서 문제지. 너희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즐기는 건 아니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기존의 3배나 더 되는 암기 과정을 나갈 예정이다."

핵티아 선생의 지시에 따라서 '마법분류학' 교과서 72p에서 92p까지를 살폈다.

곳곳에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페이지 한가득 채워진 각종 마법 문양의 종류에 압도당한 것이다.

"하아…."

"이게 다 몇 개야?"

핵티아가 말했다.

"페이지 당 10개씩 300개다. 참고로 사흘 후의 중간고사에 들어가는 범위다."

"네?!"

"와!"

"300!"

주인공 일행중 가장 육체파에 가까운 보르드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1교시 끝나기까지 3시간 남았다. 달달 외워라. …마지막에 불러서 시킬 거다."

그러면서 핵티아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조졌다.'

생도들이 눈에 불을 켜고 교과서를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나도 급하다. 아니, 내가 제일 급해. 마틴이 기존에 알던 지식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그조차 없어서 맨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자신은 없지만, 결의를 다졌다.

'남은 시간은 3시간! 대한민국 주입식 교육의 매운맛을 보여주마!'

임페리움 아카데미의 수업 방식은 대한민국과 비슷한 듯하면서 달랐다.

1교시당 배정 시간이 무려 3시간이나 된다. 실전에 입각한 장기 교육 과정이라나 뭐라나.

매일 커리큘럼에 따라서 교시가 늘거나 줄어서 일찍 마치는 날은 정오, 늦게 마치는 날은 자정에 마치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은 1교시가 전부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라일락한테 커피 태워달라고 해야겠다!'

마법 문양 암기로 하얗게 불태울 오전 일과다. 피폐해질 심신을 달래려는 자기방어 본능이 욕망을 부풀렸다.

그 순간.

- 척척박사(Lv 1)가 인지하는 지식을 저장합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가, 교과서를 한 번 쭉 훑은 다음에서야 깨달았다.

마법진에 들어가는 부속 문양 300개를 다 외워버린 것이다!

'…실환가?'

한 번 인지한 지식을 저장해서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게 해주는 절대 기억 능력.

척척박사의 능력에 전율이 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학생들은 여전히 교과서에 코를 박고 있었고, 핵티아 선생은 잠시 나간 상황.

서랍 안의 교과서를 펼쳐서 모조리 훑어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모르는 게 많아. 채워야 해.'

교과서가 우유에 젖어 있다던가, 욕설로 범벅이라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역시 주인공이랄까, 마틴 같은 좀스러운 녀석이랑은 차원이 달랐다.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외워지다니.'

교과서를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본 적이 없었다. 잠시 후, 순식간에 교과서 몇 권 분량의 내용을 다 외워버렸다. 진도를 따라잡는 걸 넘어서, 1학년 교재 전체를.

뇌 활동 보조라고 표기되었던 척척박사의 능력은 상상 이상으로 괴랄했다.

'…이거 흥미진진한걸.'

아슬아슬하게 핵티아 선생이 돌아왔다.

다른 교과 서적을 빠르게 서랍 안으로 정리했다.

"다 외웠나? 내가 질문시킨다고 했지. 마틴 생도, 일어나도록."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 있었다! 당연하지!

"이게 뭐지?"

기형학적으로 꺾인 한 개의 선.

- 척척박사(Lv 1)가 마법학 지식을 열람합니다. 임페리움 마탑 학파의 '미약한 불'.

"임페리움 마탑 학파의 '미약한 불'을 상징하는 문양입니다."

"이건?"

"헤카이스 대수림 토착 마법 학파의 '집어삼키는 불'을 상징하는 문양입니다."

"호오."

생도들이 나를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았고 핵티아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속으로 방방 환호성을 질렀다.

재미있다. 마치 대놓고 하는 컨닝 아닌가. 머릿속에서 불러주는 답을, 그냥 말하기만 하면 되는… 마치 장난을 치는 기분이다.

"불과 관련해서는 제법 공부를 했군. 이건 뭐지?"

작정했는지 상당히 기괴하고 어려워 보이는 문양을 지목했다. 그러나 척척박사님에게는 아주 쉬운 문제였다.

"임페리움 마법 학파의 '제국의 바람'을 상징하는 문양입니다."

"이건 뭐지?"

"그건…."

당당하게 입을 열려던 나는.

'이거 맞아?'

뇌에 걸려오는 제동을 느꼈다.

문제의 답은 '대해양 마탑 학파의 솟구치는 물보라'다.

답은 아는데…, 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척척박사 스킬이 내 두뇌의 회전률을 올려줬기 때문일까. 주위 상황이 보인다.

의심과 질투가 사방에서 쏘아오고 있었다.

10일 출석하고 80일 정학당한 마틴의 실력에 대한 의심.

학교 폭력 가해자가 저럴 리 없다는 불신.

못난 놈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질투까지.

'아, 그렇구나.'

사실… 조금은 기대했다. 무려 80일 만에 복학한 애가 완전히 똑똑해지고 멋있어져서, 반전 매력으로 교실에 확 녹아든다는.

어림도 없었다.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 하는 감정이 올라온다. 이를 악물고 억눌렀다. 아직, 아직은 괜찮다.

모든 건 사전 단계가 필요했거늘. 내가 너무 서두른 걸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무리구나.'

눈치가 없으면 죽어야지. 즉, 눈치만 있으면 최악은 면한다.

속으로 피식 웃었다.

"…모르겠습니다."

"이건?"

"모르겠습니다."

"이건."

"모르겠습니다."

"나와. 엎드려."

강의실 앞으로 가서 엎드렸다.

"다음은 누구로 할까. 지원자 있나? 흠, 엘리샤 생도. 자신 있는 모양이군."

내가 엎드려 뻗치자, 강의실 분위기가 한결 밝고 따뜻해졌다. 이 더러운 세상 같으니라고.

다행인 점은 마틴의 육체가 썩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대로 시간만 죽이면….

"…?!"

위로 철근을 얹은 듯 묵직한 무게감이 올라탔다. 깜짝 놀람과 동시에 덜덜 떨리는 팔다리에 힘을 꽉 줬다.

'뭐, 뭐야…?!'

- 척척박사(Lv 1)가 상황을 분석합니다. 담임선생 핵티아의 마나가 당신을 짓누르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끅."

작게 신음성이 튀어나왔다.

'히, 힘들다…!'

수업이 마칠 5분 동안 나는 이 악물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위로되는 건 나 말고도 네 명이 함께 엎드려 뻗쳤다는 점이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

벌떡 일어서서 자리로 돌아가는 내내 통쾌하다는 시선이 몰리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수치스럽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아까 말했듯이 사흘 뒤에 중간고사다. 어디 새지 말고 가서 공부해라. 공지 사항은 없고, 종례는 따로 안 할 거니까 어서 가라."

"네!"

"감사합니다!"

핵티아 선생이 나가고, 생도들이 짐을 싼다.

각자 아는 사람들끼리 모이고, 주인공 길버트도 일행들끼리 모였다.

'친해져야 하는데….'

접근할 용기가 안 난다.

"야, 마틴 저놈 내가 옆에서 봤는데 덜덜 떨더라."

"뭐? 아무리 폐급이어도 그렇지. 엎드려뻗쳐가 뭐가 힘들다고."

"그렇지? 쟤 완전 약골이라니까. 주제에 무슨 폭력 서클을 이끌겠다고."

내 옆에서 엎드렸던 생도가 입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나보다 더 부들거리던 녀석이 저런 말을 하니 억울해서 욱했지만.

"학교폭력 가해자 놈. 나오지나 말지. 괜히 거슬리게."

숨이 턱 막혔다. 수치심이 밀려왔다. 주위에서 모두 나만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7화>

결국, 도망쳐 나오고 말았다. 이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세바스찬이 후다닥 쫓아온다.

열심히 해보려고 했는데…, 어째 되는 일이 없다.

어서 라일락이 만들어준 맛있는 케이크가 먹고 싶다….

힘없이 하굣길을 걸었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나무로 엉성하게 만든 원룸이 보였다. 언제까지 여관에서 지낼 수는 없었기에, 적은 돈으로나마 급구한 집이었다.

집에 들어오자, 보기만 해도 맛있는 점심이 차려져 있었다.

예쁜 꽃으로 장식한 쪽지와 함께.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주인님!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카데미 생활은 어떠셨나요? 오랜만이라 색다르셨을까요? 저는 그저 주인님께서 편안한 아카데미 생활을 보내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부디 맛있게 드시고 푹 쉬세요. - 라일락]

그녀의 육체는 여기에 없었지만, 정신은 남아서 나와 함께 있는 듯했다. 그러한 안도와 위로를 느꼈다. 라일락은… 기묘할 정도로 빠르게 내 신뢰를 얻어갔다.

세바스찬이 좋아하는 개껌도 있었다. 대충 던져주자 뛰어올라서 물었다.

"라일락…."

라일락은 두 달 동안이나 군말 없이 커피 카트를 몰았다. 그러면서 모든 집안일도 확실하게 해냈고. 돈을 빼돌리고 있나 싶어서 손익 계산을 해봐도 오차 하나 없이 일치했다.

…놀랍도록 헌신적이다. 혹시나 설정에 없던 마틴의 생모인가 싶을 정도로.

물론 진짜일 리는 없다. 나와 나이가 똑같은데 생모는 무슨.

"덕분에 돈이 제법 모였지."

각성 효과가 있는 달콤한 이국의 차는, 이미 경제성이 보장된 시장 아이템이었다.

라일락의 매출 보고를 들어보면 요즘은 전부 전량 매진이다. 카트에 싣는 재료량에 한계가 있음을 감안해도 출중한 성과다.

"카페… 를 차리는 걸 고려해볼 때가 됐어."

너무 빠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라일락 혼자서 카트를 밀고 다니게 둘 수도 없다. 여긴 한국이 아니니까. 애초에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만큼 치안 높은 곳을 찾기 힘든 게 현실이긴 하다.

하지만 검과 마법이 존재하는 중세 판타지다. 경각심을 가지는 건 좋은 일이다.

"정식 사업자 등록을 하고 카페를 차려야겠어."

라일락이 돌아본 동선 중에서도 판매량이 지속적으로 가장 높고, 미래의 전망도 좋을 곳으로 잘 골라보자.

쇠뿔도 단김에 빼는 법이다. 식어버린 식사를 순식간에 먹어 치운 다음 임페리움 뱅크로 향했다. 다목적행정기구 임페리움 뱅크에는 은행 업무를 보러 온 사람이 제일 많았고, 다음은 전화국, 그다음으로 부동산 업무를 보러 온 사람이 많았다. 나처럼.

한참 동안 중개사와 입씨름을 하다가, 결국은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하루만에 끝낼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밖을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가끔 임페리움 아카데미 생도들이 보였다. 한 손에는 맛있는 걸 들고 서로 웃고 떠들며, 청춘을 누리고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주인님."

집에 돌아오자 라일락이 환히 웃는 얼굴로 반겨주었다.

"아직 밤공기가 서늘하네요. 식사부터 하시겠어요? 아니면 목욕물부터 받을까요? 아니면…."

"그보다 매출 보고부터."

"아, 네!"

전량 매진. 오늘은 평소보다도 일찍 매진되는 바람에 돌아와서 다시 재료를 챙기고 나가기까지 했다는 모양이다.

커피의 수요량이 한없이 고공행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카페인 중독은 판타지 세계 사람들도 못 참지. 암.

"홍보가 덜된 것 같아요. 매일 오는 손님들만 오시거든요. 다 호평해주시긴 하는데…."

라일락이 내일 장사 준비에 관한 보고를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귀에 잘 들어오지가 않았다.

오늘 아카데미에서… 나는 라일락을 많이 떠올렸다.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라일락. 마틴의 추악한 모습을 알고 있음에도 변함없는 아이.

"저기, 라일락."

"네?"

어쩌면, 돌아오자마자 인사 대신 매출 보고부터 받는 게 매정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진짜로 신뢰할만한 인물인가를 판별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무심하게 대하긴 했었지만, 그럼에도 라일락은 항상 웃는 낯으로 내게 지극정성이었지만, 어쩌면, 혹시.

상처를 받고 있지는 않았을까.

"혹시."

나는 내심 낯부끄러워지는 걸 느꼈다. 줄곧 매정하게 대한 상대에게 따뜻한 말을 건넨다는 건 영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페를 차리는 건 어떻게 생각해?"

"카페요?"

라일락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을 꾹 닫은 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또 사업 이야기나 꺼내고 말았다.

"그러니까, 음, 언제까지 너한테 카트를 밀게 할 수도 없으니까."

"아뇨. 전 괜찮아요. 튼튼한걸요. 운동도 되고."

라일락은 웃는 낯으로 철벽을 쳤다.

"치안도 안 좋고. 재료 소진도 빠르고."

"임페리움 제국의 수도는 치안이 좋기로 유명한걸요. 재료 소진이야, 제가 여러 번 왕복하면 괜찮아요."

라일락은 웃는 낯으로 철벽을 쳤다.

"아니, 그러니까…."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네가, 걱정돼서 그렇다."

"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고개를 돌려서 아무것도 없는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나답지 않은 말이었다. 부끄럽다.

"저는 좋아요!"

맑은 대답이 돌아왔다.

"카페가 생기면, 주인님께 갓 만든 음식을 대접해드릴 수 있겠죠?"

고개를 돌려보니 라일락은 활짝 웃고 있었다.

"매일 아침 주인님을 깨워드릴 수 있어요. 배웅 인사를 드릴 수도 있고, 마중을 나갈 수도 있겠네요! 주인님께서 피로하실 때는 달콤한 케이크를 만들어드릴 수도 있어요. 주인님께서 라일락을 찾을 때 언제든 달려갈 수 있어요. 주인님과 더 오랜 시간 있을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은 순수한 기쁨. 앓던 이를 뺀 듯 기뻐 보이는 얼굴.

"그것으로 좋아요."

너는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나.

나는 라일락과 함께 한참 카페를 설립할 장소에 대해 논의했다. 나 혼자 생각할 때는 나오지 않았던 괜찮은 지점들이 후보로 떠올랐다.

물론 가게를 차리는 건 쉽게 볼 일이 아니다. 시간이 제법 걸리지 않을까.

논의를 마친 내게 잠시 자리를 비운 라일락이 다가왔다.

"디저트로 커피와 케이크를 준비했어요!"

"아… 고마워."

세심한 배려에 감사한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편지가 왔어요."

"어?"

라일락의 부드러운 손에 들린 편지를 받아서 살펴보았다. 고풍스러운 문양, 봉인에 찍힌 인장. 인봉을 뜯고 편지지의 맨 아래를 보니 학장의 서명까지 있다. 진짜다.

'편지 같은 게 올 일이 없을 텐데…? 무슨 일이지?'

복학한 지 이제 첫날이다. 내가 그동안 놓친 학교 공지 같은 걸까? 오자마자 사흘 후에 중간고사라길래 조금 놀라기도 했고. 분명 그러하리라.

[친애하는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 생도에게 알립니다. 본 아카데미는 전 세계의 재능 있는 이들이 모이는 곳으로, 입학한 것만으로도 명예가 되는 최고의 교육기관입니다.]

마시던 커피를 토할 뻔했다.

"주인님…?"

"아, 아니. 괜찮아."

이거 불안하다. 잠깐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생도는 이례적으로 입학식 이후 10일 만에 문제를 일으켜 중징계 처분을 받았습니다. 징계위원회는 마틴 생도가 이행한 징계와 별개로, 생도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입니다. 이에 아카데미에서는 특별히 마틴 생도에 대한 취급을 강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라일락이 내 안색을 살폈다.

"얼굴색이 안 좋으신데…."

"괘, 괘, 괜찮아. 진짜로."

[사흘 후에 있을 중간고사의 결과에 따라서 교내 봉사, 정학, 그리고 생도의 퇴학 처분까지 고려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튀어나오려는 육두문자를 자제했다.

내용은 이걸로 끝이었다.

'중간고사까지 사흘밖에 안 남았는데, 이제와서 결과에 따라 퇴학까지 시키겠다고?'

정확한 점수 기준도 없다. 즉, 어지간하면 날 퇴학시켜버리겠다는 뜻이다.

세상에 1억 5천만 원을 꿀꺽 삼키고, 사과문에 봉사시간 200시간을 채워왔더니, 뭐?!

…생각하자. 주인공 일행과 결별하는 순간 끝이다. 종말에서 살아남을 가장 확실한 방법의 상실을 의미한다. 다른 무슨 짓을 해도 비할 바가 못 된다. 생존률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어디가 한계지?'

오늘만 해도 발표 시간에서 조금 우수한 모습을 보여주자마자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갑자기 잘난 모습을 보이는 건 역효과가 크다. 하지만 퇴학만큼은 안 된다. 잘 조절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희망을 갖자.'

결말이야 어쨌든, 꿈과 희망이 넘치는 소설이다. 현실과 다르다. 내가 얼마나 노력한들 결과가 나쁘면 나락으로 치닫는 현실이 아닌, 소설 속.

'해보자.'

사람들에게 반전미가 뭔지 알려주자. 내 달라진 모습을 보고 인식이 바뀌리라. 난 그렇게 믿는다.

왜냐하면 여기는, 한때 나락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내게 희망을 비춰준 소설 속이기 때문이다. 설정도, 전개도, 연출도, 대사도 전부 내가 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의 살을 붙이고 연재를 진행한 건 나다. 그 덕을 본 건 분명 나란 말이다.

분명, 다시 한번 빛을 비춰주리라.

***

둘째 날은 수업이 3교시나 됐다. 저녁 6시까지 숨이 턱턱 막히는 교실에 앉아 있어야 했다. 세바스찬이 없었으면 질식했을지도 모르겠다. 밥 먹을 때는 교내 식당에 갔는데 맛은 있었지만, 다시는 안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3일째는 4교시까지 있었다. 피가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다시는 안 가겠다고 다짐한 교내 식당에 또 갔다. 가격이 쌌으니까. 밤 9시에 수업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서 라일락이 만들어준 케이크를 먹었다. 눈물이 핑, 돌만큼 맛있었다.

진짜로 눈물이 찔끔 났다.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그동안 주인공 일행과는 어떠한 접점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주인공은커녕 그 누구와도.

나는 '공식 왕따'다.

좋게 말하면 '암묵적으로 성립된 공공의 투명인간'이랄까.

그래… 그렇겠지. 나야말로 온갖 소설에 수두룩하게 나온 '주인공에게 말도 안 되는 무개념 무논리로 덤비다가 참교육 당한 폐급 엑스트라 빌런'이니까.

심지어는 제국의 제일가는 4대 공작가의 자제들에게 찍혔다.

솔직한 말로 다가올 종말을 대비한다는 이유만 없었어도 자퇴했다. 실제로도 마틴과 행동을 같이했던 폭력 서클의 생도 중 절반은 이미 자퇴했다는 모양이다.

'망할…. 그래도 덕분에 공부는 열심히 했다.'

친구가 없으면 공부를 하게 된다는 격언을 인터넷에서 봤었던가.

도서관에 방문해서 온갖 전문 지식을 독파했다. 부족함을 느끼던 생활 상식도 보충해두었다.

지구에서도 선행학습이 기본이었는데, 대륙 최고 교육 기관에 없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아카데미 교과서라면 학년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외웠다.

- 척척박사(Lv 1)의 암기력은 세계 제일입니다.

즉, 공부는 자신 있었다.

"자, 중간고사다. 1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반영 비율이 낮다고 해도 명백하게 생도기록부에 기입되는 스펙이다. 너희가 졸업하고 나서 기사단, 용병대에 들어갈 때 분명 도움이 된다. 부디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8화>

임페리움 아카데미의 시험은 극한이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12시간 동안 20개 과목의 1,000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식사 및 수분 섭취 금지, 화장실 금지. 당연하지만 쉬는 시간도 없다.

공부만큼 컨디션 관리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대신 제한 시간보다 일찍 시험지를 제출할 경우 곧바로 퇴실이 가능했다.

하지만 1,000개의 문제가 과목과 진도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섞여 있기 때문에 악랄하기로 유명했다.

즉, 생도들의 포기를 유도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어떤 사유에서든 부정행위는 퇴학 사유다."

마틴 한정으로 고득점을 맞지 못해도 퇴학이다.

'잘하자. 아니, 난 못해도 괜찮아. 제발 잘 부탁드려요, 척척박사님.'

눈앞에 놓인 시험지를 보자 척척박사가 날뛰기 직전의 말처럼 투레질을 하는 듯했다.

시계를 빤히 바라보던 핵티아 선생이 초침과 분침이 정렬되는 순간 교실에 다 들리게 선언했다.

"시작."

펜 사각거리는 소리가 교실을 채운다. 묵직한 긴장감이 공기를 짓누른다.

[1번 문제. 해당 마법진의 부속 문자 종류 6개의 학파와 명칭을 기입하시오.]

- 1번 문제 확인. 제시된 마법진 확인. 임페리움 마탑 학파의 중등 마법 플레임 버스터 확인. 마법진 분석중… 확인.

이어서 떠오르는 6가지 부속 문자를 기입했다.

척척박사님이 알아서 쭉쭉 풀어주실 것 같겠지만, 레벨이 낮아서 그런지 풀이 속도에 시간이 걸렸다.

[149번 문제. 타임카오스 던전에 들어갈 때 국제던전법으로 지정된 단계별 최저 필요 공략 인원과 등급을 기입하시오.]

- 149번 문제 확인. 국제던전법 확인. 타임카오스 던전의 단계는 시간 왜곡력 관측 계수에 따라서 1등급부터 5등급까지. 1등급은 철기사 3명, 2등급은 동기사 5명, 3등급은 은기사 8명, 4등급은 황금기사 13명, 5등급은 백금기사 20명입니다.

이쪽 세계관 이야기다. 임페리움 아카데미의 설립 목적이기도 하다. 타임카오스 던전은 세계를 좀먹고 있었고, 일정주기로 공략하여 시공 왜곡력을 낮춰줘야 했다.

안 해도 된다. 종말이 빨리 찾아올 뿐이다.

보석 기사. 이 세계는 검사든 마법사든 모두가 기사다. 실력에 따라서 보석 등급이 매겨진다.

내게는 이런 문제들이 소설 설정을 정리해 놓은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 오류 발생. 수식 계산에 필요한 공식이 없습니다. 계산이 중단됩니다.

그러나 간혹, 심장이 철렁이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척척박사가 모르는 문제가 나올 때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지만 모든 지식을 욱여넣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교과서는 거의 다 외우다시피 했지만, 외부 참고 서적과 전문 서적까지 다 독파할 시간은 못 됐으니까.

'아, 마지막 문제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 풀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3시간밖에 안 지났다!'

시계의 시침이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척척박사님이 풀어주는 시간보다 내가 필사하는 속도가 느린 탓이 컸다. 풀이뿐이라면 10시가 되기 전에 귀가했을지도.

억누르고 있지만 하교가 마려웠다. 귀가가 고팠다. 시험 날은 패밀리어, 파트너, 펫이 출입금지라서 세바스찬을 데려올 수도 없었기에, 지금 난 지극히 외로운 상태다.

'라일락한테 시험 잘 쳤으니까 치즈 케이크 달라고 해야겠다. 세바스찬이 볼을 침범벅으로 만들어도 오늘은 용서해주도록 할까나.'

시험지를 잘 정리하고 답안지와 함께 준비되어 있던 커버에 씌워서 들고 교탁 앞으로 갔다.

뚜벅거리는 발소리. 핵티아 선생의 '뭐야'라는 표정. 머리카락과 옷깃이 스치며 생도들이 고개를 드는 소리.

"생도 번호 15번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 시험지 제출했습니다. 귀가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해라."

핵티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시험을 포기했다는 오해를 받은 모양인데…, 굳이 정정해줄 필요는 없겠지.

곧바로 짐을 싸 들고 밖으로 나왔다.

임페리움 아카데미의 아름다운 정원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치즈 케이크. 맛있고 몸에 좋은 치즈 케이크.'

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가던 찰나, 모퉁이 너머에서 나온 여자.

"어?"

"아!"

[이름: 헤일리 폰 루아 에뜨랑데]

[나이: 24세]

[성별: 여성]

쿵! 하고 부딪치면서 둘 다 뒤로 몸을 빼려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방금 누구였지?'

눈앞으로 새하얀 종이가 천사의 깃털처럼 나풀나풀 허공을 장식하며 바닥을 수놓았다.

"아, 아아! 안 돼…!"

맞은편에서 분홍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사방으로 흩어지는 종이들로 손을 뻗었다.

어쩐지 분홍색 병아리 같은 사람이다.

입은 옷은 임페리움 아카데미 교생 선생에게 지급되는 복장이다.

곤란해 보여서 도와줘야겠다 싶어서 종이를 집었다. 그녀의 손과 나의 손이 겹쳐졌다.

"아!"

헤일리가 고개를 들어서, 부딪친 생도를 보았다.

나는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이름: 헤일리 폰 루아 에뜨랑데]

[나이: 24세]

[성별: 여성]

[성격: 순수, 선, 질서, 온화]

[사용자 인식: 놀람, 부끄러움]

[자연 마법 Lv 7]

[마나연공술 Lv 7]

[마법 숙련 Lv 5]

[피아노 Lv 6]

[요리 Lv 5]

[체술 Lv 3]

기억에 없는 사람이다. 엑스트라겠지. 적어도 악역인 나보다는 낫다.

자연 마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법 이해를 넘어서 숙련에 들어선 걸 보면 상당한 실력자다.

"생도는 괜찮아요?"

"도와드릴게요."

"네? 아, 괜찮아요."

"어서 주웁시다."

우리는 묵묵히 눈처럼 내린 종이를 주웠다. 거의 수백 장에 달하는 종이를 아무렇게나 줍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본홍색 병아리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서류 뭉치를 든 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요, 생도! 덕분에 살았어요!"

"부딪친 건 제 잘못도 있으니까요."

[사용자 인식: 감사, 대견]

이 학교에서 처음 받아보는 인식이었다.

헤일리 폰 루아 에뜨랑데. 이름을 기억해둬야겠다.

"그런데 생도는 시험 안 쳤어요?"

만난지 수십 분만에 헤일리는 이 시각에 마주친 생도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다 치고 나오는 길인데요."

"다 치고…, 아! 생도! 시험은 찍으면 안 돼요! 잘 모르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풀어야지요!"

"어… 최선을 다했는데요."

"대충 듣지 말고요! 생도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요!"

수북하게 쌓인 서류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상상이 갔다.

"괜찮아요. 정말 잘 쳤는걸요."

"생도! 계속 그러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줄 거에요!"

세상에 내가 어린아이인 줄 아는 모양이다. 아무리 교직원이어도 학생을 아이처럼 대하는 건 좀 결격 사유가 아닐까.

"겨울은 멀었어요. 산타 할아버지도 안 계시고요."

"멋대로 산 사람 죽이지 마세요! 산타 할아버지께서는 멀쩡히 살아계시거든요! 작년 크리스마스 때에도 황제 폐하와 담화를 나누셨고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산타클로스가 실존하는 세계관이었다니. Recola는 어떤 동심의 세계를 만들어버린 걸까.

"106대 산타클로스께서 들으시면 크게 혼 날 거예요. 굴뚝 위로 선물 대신 석탄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요?"

헤일리 교생이 무시무시한 괴담 이야기를 들려주듯 말투를 꾸몄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화사한 봄날처럼 따뜻했다.

"음…. 석탄들 덕분에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중입니다."

"생도는 한 마디도 안 지네요! 계속 그러면 그 누구냐… 그 사람처럼 될지도 몰라요! 인성도 최악! 실력도 최악! 사회 평판도 최악!"

나 말고도 그런 사람이 있을 줄이야. 이거 반갑네.

"그 사람이 누군데요?"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

아…, 내 얘기였구나.

***

정오의 태양빛이 내리쬐는 아카데미의 정원에서 갱생이 필요해 보이는 생도에게 도움을 받았던, 헤일리 교생은 그 후로도 한참을 돌아다녔다.

시험이 끝나고 생도들이 하교한 가운데, 아카데미 선생들은 늦은 새벽까지 조금도 쉬지 못했다. 보조 격인 교생도 마찬가지.

"아아, 나도 빨리 정식 선생이 되고 싶어라아."

분홍색 병아리가, 아니. 헤일리 교생이 서류를 한가득 들고 교무실 책상 위에 두었다.

임페리움 아카데미는 명성만큼이나 일도 빡빡하다고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바쁠 줄이야.

60cm나 되는 서류 뭉치라니.

"헤일리 교생 선생님."

"네! 교생 헤일리, 여기 있습니다! 주임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수고했어요. 쉬라고 하고 싶은데, 미안하지만 채점장에 가서 작업 좀 도와주세요. 일손이 많이 모자르다네요."

"네! 지금 가겠습니다!"

임페리움 아카데미의 채점장은 무려 최후의 벙커를 임시로 개조해서 사용 중이었다.

운석이 떨어지고 마왕이 부활해도 뚫리지 않을 절대 방어를 노리고 만들어진 벙커는, 외부로부터의 모든 부정행위를 차단한다.

'헤헤, 인정받았어!'

일개 교생에게 최후의 벙커로의 출입 허가를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신뢰받고 있다는 증거임은 분명했다.

채점장에 들어서자 무수하게 쌓인 시험지와 채점하는 선생들의 손놀림이 분주한 소리로 들렸다.

헤일리는 1학년 주임 선생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응? 헤일리 교생이네. 3학년 주임 선생님이 허락하셨어요?"

"네! 채점장 작업을 도우라고 명령 받았습니다!"

"응, 그러면 저기… 아, 3학년 시험지를 맡길 수는 없는데. 헤일리 교생, 3학년 시험지 자신 있어요?"

임페리움 아카데미의 시험은 풀이와 과정에 이르는 모든 부분에 세세하게 점수를 매긴다. 문제당 1점, 2점이 아니라, 아무리 쉬운 문제라도 풀이와 답안의 완성도에 따라서 최소 0점에서 최대 10점까지 받을 수 있다.

이 제도가 유지되는 원동력은, 채점자 전원이 공식적으로는 기사단장급 실력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괴수들 중에서도 베테랑이 맡는 학년이 3학년이다. 교생은 언감생심 꿈도 꾸면 안 됐다.

"어…, 아니요…."

"아, 좋아요. 저기에 1학년 답안지 있으니까 채점해줘요. 이번에 쟁쟁한 생도가 많으니까 매길 기분이 날 거예요. A반의 엘리샤나 B반의 카쟉스 황자님이 대표적이겠네요."

"네! 맡겨주세요!"

…라고 말했지만, 시험지의 산을 보는 순간 막막해졌다.

고학년 시험지부터 채점하는 게 관례라, 1학년 시험지는 아직 손도 안 댄 상태였다.

'에…. 그래도 해야겠지.'

어서 정식 선생이 되어서 병아리 같은 아이들을 양육하자는 꿈이 있기에, 헤일리는 오늘도 힘을 낼 수 있다.

'이게 첫 번째 시험지네.'

시험지를 제출하는 순서도 중요하다. 문제의 풀이와 답안 외에도 제출 순서에 따라서 가산점이 붙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략적인 생도는 아는 것만 풀고 일찍 제출해버리기도 한다.

필연적으로 분홍 병아리는 정오의 태양이 비추는 아카데미의 정원에서 만난 생도를 떠올렸다.

'오늘 만난 생도도 그런 부류겠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른데….'

총 12시간이 주어지는 시험에서 3시간 만에 나왔으면, 그건 시험 포기자라 봐도 좋다.

채점자가 수험자의 행위에 '기만'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고하면 감점 처리까지 가능했다.

'우선 볼까…? 제출 시각, 12시 05분. 무려 3시간 5분 만에 나온 거였어.'

<9화>

정원에서 만난 생도의 시험지가 분명했다.

'잘은 몰라도 시간 가산점은 잘 붙겠는걸. 매겨볼까?'

우수수 내리는 핏빛 빗줄기를 예상하며 빨간펜을 들었다.

"아?"

그리고.

"어?"

분홍 병아리는.

"어어어?"

난관에 봉착한다.

'모르겠어.'

손에 굳게 쥐었던 빨간펜이, 복잡해진 실타래처럼 엉켜서 책상 위를 굴렀다.

총 1,000개의 문제 중, 채점한 문제는 총 7개. 앞선 1번에서 6번까지는 완벽한 10점짜리 풀이와 정답이었다.

문제는 7번. 그 한 문제를 가지고 헤일리는 노트 한 장을 빽빽하게 채울 만큼 풀이해봤지만.

'이게, 가능한 거야?'

문제의 풀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누군가 도와주길 바라며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도 만점자는 안 나오겠죠?"

"나오면 그게 사람이겠어요? 역대에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뭐, 전현직 기사단장 전원이 모여서 치면 한두 명 나올지도 모르죠."

"다들 사람 수준이 아닌 사람이니까요."

만점자는 나올 수 없다. 시스템상 나올 리가 없다. 채점자는 기사단장급 선생이고, 수험생은 그저 수험생일 뿐이니까. 생도 수준에서 아무리 잘 풀고 잘 써놓아도 기사단장급 인재가 보면 햇병아리의 날갯짓에 불과했다.

괜히 세계 최고이자 최악인 시험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생도 수준을 넘는 문제가 수두룩했다. 전문 교육기관에서만 가르치는 공식, 현직 종사자가 풀 법한 레벨, 그중에서도 베테랑만 가능한 문제, 심지어는 아직 연구 중인 미해결 문제라 답이 나오지도 않은 문항도 있다.

왜 시험을 이렇게 내냐면, 꼭 있기 때문이었다. 못해도 10년에 한 번은 나타나는 천재가. 풀어보라고 내놓은 문제가 아닌데도 정답을 맞춰버리는 천고의 재능을 지닌 자가.

"저기… 주임 선생님."

"응? 헤일리 교생, 무슨 일 있어요?"

"저… 이거 모르겠어서요…."

잔득 풀 죽은 분홍 병아리를 선생이 위로했다.

"아하하, 괜찮아요. 임페리움 아카데미가 괜히 세계 최고겠어요? 저도 교생 때 막혀서 자괴감에 울기도 했어요. 자, 한 번 볼까요?"

하면서 시험지에 눈을 들인 선생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

옆에서 만점자가 나오겠냐고 물었던 다른 선생이 피식 웃었다.

"아이고, 교생 때 자괴감 느끼셨다면서 학년 주임이 되고서도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한 번 봅시다."

하고 온 선생의 입꼬리도 일자로 굳어졌다. 한참 후에야 떨어진 입.

"…이거, 7번 문제. 맞추라고 내놓은 문제 아니지 않아? 학년별로 하나씩 들어간, 만점 방지 문제잖아."

"현직 베테랑들도 '못 풀어서 연구가 필요한 문제'를 가져온 걸로 기억하는데."

"이 방식. 이 대입. 숙련공이나 낼법한 해법이야. 헤일리 교생이 모르는 게 이해된다를 넘어서, 일개 학생이 쓸 공식이 아니야. 아니…, 솔직한 말로 나도 잘 모르겠는걸."

"실제로 맞는지는 현직자들에게 보내서 검증을 받아봐야 알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이 점수를 줄 수밖에 없겠군."

선생이 7번 문제에 점수를 매겼다. 십점만점.

이후로도 하나씩 답안을 체크해 나갔다.

선생이 무려 셋이나 정색하고 붙어있으니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다른 선생들도 몰려들었다.

그러자 즉석에서 토론회가 시작됐다.

"이 공식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지 않은 현장에서만 배우는 응용 공식입니다. 틀리긴 했네요. 중간에 들어가야 할 필수 공식이 있는데, 그건 전문 기관에서만 따로 가르치는 거니까요. 만점, 까지는 아니지만 8점…?"

의견이 더해지고.

"물론, 이 해답도 맞는데…, 그, 도저히 고등부 생도가 낼 답이 아닌데요. 공식 꼬아서 과정을 절반이나 생략하는 건, 현직자들의 방식이에요."

감탄이 더해진다.

시험지를 쥐고 있던 주임 선생이 총평했다.

"이거… 마치, 마법진 문제 같군."

"마법진 문제요?"

헤일리 교생이 묻자 주임 선생이 흐음 하고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떴다.

"그래. 마법진 문제를 낼 때면 엄청나게 복잡한 마법진을 그려놓고는 답으로 낼 몇 가지 수식만 빼고 내놓거든? 그거랑 비슷하다고."

학년 주임이 예시로 문제 몇 개를 가리켰다.

"7번 문제는 선생들도 힘들어할 문제를 현직 베테랑이 쓸법한 공식까지 쓰면서 완벽하게 풀이했어. 반면 62번 문제는 간단한 문제에 낯선 공식을 덧씌웠을 뿐인데 못 풀었단 말이지? 마치 정교하고 복잡한 마법진을 그려놓고는, 의도적으로 몇 개만 빼놓은 느낌이야."

거기까지 말한 학년 주임의 뇌리로 뭔가 번뜩였다.

"마치… 점수를 조작한 것처럼."

그때였다.

"실례하지."

"아, 교감 선생님!"

마틴의 시험지 앞에 몰려 있던 선생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아카데미의 실권을 쥐락펴락하는 2인자, 게다가 교장의 잦은 부재로 사실상 아카데미의 최고 실세나 다름없는 교감의 등장이었다.

"핵티아 선생은?"

교감은… 누군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자리에 없습니다. 잠시 황실 업무로 불려갔다나 봅니다."

"그래? 잘 됐군. 혹시, 여기 마틴 생도의 시험지 있나?"

"마틴 생도요? 그 문제아 시험지라면…."

주임 선생은 안구 위로 마나를 한 점에 모아서 해독 마법을 펼쳤다. 시험지 위로 가려진 보안 마법이 꿰뚫리며 생도들의 이름이 드러났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린 주임 선생은 그만 힘이 탁 풀릴 뻔했다.

"…마침 채점 중이었습니다."

교감이 시험지를 낚아챘다. 점수를 보고는 흠칫했다.

"…."

잠시 동안 침묵하더니.

"…컨닝이로군."

"네? 아니, 컨닝이 존재할 수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선생? 머리가 안 돌아가?"

교감이 날 선 눈으로 선생들을 내려다보았다.

"컨닝이라고."

교감은 말없이 학년 주임에게만 편지를 전달했다. 받아든 학년 주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마틴 생도를 퇴학시켜라.]

편지의 날인에는 4대 공작가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컨닝이 아니어도 좋아. 지금 이 순간부터 마틴 생도는, 부정행위를 저지른 거야."

***

"흐아아암."

밤새워 공부하기를 사흘. 중간고사를 치고 나니 피로가 급격하게 몰려왔다.

아카데미로 가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무겁다.

도착해서 보니 다른 생도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교생과 선생들의 몰골도 정상은 아니었다.

"다들 좋은 아침이다."

핵티아 선생이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온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학생들 사이에서 말이 나왔다.

"좋은 아침… 이 아니신 듯한데…."

"선생님 못 주무셨나 봐."

"시험 채점 때마다 밤을 새신다더니."

임페리움 아카데미의 시험은 전통에 따라서 선생과 학생 모두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대신, 마냥 나쁘지 않은 전통인 이유도 있다.

"정숙해라. 오늘은 조례를 생략하고, 성적표부터 나눠주겠다. 이후에는 종례도 생략하고 바로 귀가하겠다."

"오!"

"와!"

전통의 끝마무리는 '어제 고생했으니까 오늘은 쉬어라'다. 생도는 생도대로, 선생은 선생대로 고단했으니까.

오늘의 수업 커리큘럼은 성적표 배부가 끝이다.

생도도 선생도 바로 퇴근이다.

"1번 길버트."

"네."

피로한 가운데서도 자동으로 눈이 갔다.

소설의 주인공, 길버트 오퍼 코스모스.

"기대보다 훌륭했다."

"감사합니다."

시작부터 이어진 호평에 학생들은 기대했겠지만, 길버트가 양반이었다.

2번은 '눈은 똑바로 뜨고 다니냐'라는 일침이, 3번은 '이게 네놈의 한계냐'라는 비수가 쏘아졌기 때문이다.

핵티아의 독설은 전교 서열에서 상위권을 다투는 학생에게조차 '제대로 할 생각이 있냐'라든가 '형편없었다'가 기본이었으니까.

순서대로 쭉쭉 번호가 불렸다.

"14번 보르드."

"네!"

"넌 반장에 4대 공작 가문이라는 놈이 이렇게밖에 못하나?"

"죄송합니다!"

"마법학 관련 문제에서 치명적인 문제들이 엿보인다. 반드시 고치도록. 들어가라."

다음이 내 차례다.

폭풍전야 같은 침묵이 교실을 꽉 잡았다.

핵티아 선생은 말없이 성적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15번 마틴."

A반의 공기가 싸늘해지는 게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이어지는 기대 어린 비웃음. 내게 독설이 꽂히는 걸 보고 싶어서 몸을 배배 꼬는 생도들이 있었다.

사실 나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마틴이 걸어 나오자, 핵티아는 성적표를 건네며 속삭였다.

"…잘했다."

"감사합니다…?"

성적표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가는 길이 생소하다.

보이는 생도들의 표정도 어안이 벙벙함 그 자체.

자리에 앉아서 슬쩍 성적표를 살폈다.

'몇 등이지?'

[석차: 1위 총점: 8,874점]

'오! 척척박사님! 해내셨군요!'

속으로 정수리 근방이 텅 빈, 백발에 안경을 쓴 노인을 얼싸안았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케이크를 물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잠깐.'

퇴학을 안 하게 됐다는 건 좋지만, 생각해보니 이건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8,874점. 백점만점으로 치면 90점도 안 되는 성적이지만, 내가 기억하기로 이 시험의 최고 점수는….

"32번 엘리샤. 4대 공작가의 장녀다운 실력이었다. 잘했다."

"네. 감사합…."

성적표를 받아든 엘리샤의 표정이 희게 질렸다. 그리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멍한 목소리.

"3등…?"

A반에서, 감히 멈출 수 없는 술렁임이 생겼다.

"엘리샤가 3등? 입학 때 차석이었잖아!"

"아니, 수석인 카쟉스 황자 전하랑 차이도 얼마 안 났는데…, 아니, 잠깐만! 차석뿐 아니라 수석도 바뀐 건가?!"

"1등은 누군데, 그럼?! 카쟉스 황자 전하가 수석이 아니라고?!"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성적표를 보았다.

'저질렀다. 저질러버렸어. 우선은 숨기자.'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다. 심지어 나는 아카데미 비호감 월드컵 No.1이다. 그런 내가 수석이라니….

하지만 동시에 나는 벅차오르는 심장이 펄쩍펄쩍 뛰는 걸 내리눌러야 했다. 나는 달라졌다. 너희가 알던 마틴이 아니야. 그렇게 알려준 것이었기에. 부디 많은 이들이 나에 대한 인식을 바꿔줬으면 좋겠다.

"정숙해라. 1등이 궁금하면 나가는 길에 성적 순위표를 붙여놓았으니까 따로 확인해라."

'저런!'

흔들리는 두 눈동자를 부여잡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응해야 한다.

과연 폭력 서클 형성, 학교 폭력 가해, 80일 만에 복학한 쓰레기 마틴이 전교 1등을 차지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어떨까.

솔직한 말로 1등은 개뿔 50위권 정도나 예상했는데….

속으로 척척박사님을 부여잡고 울었다.

'척척박사님! 너무 성실하셨다고요!'

"자, 이제 집에 가라!"

"야! 등수 확인하러 가자!"

"뭔데, 뭔데!"

"앗, 아아!"

평소와 다르게 생도들이 벌떼처럼 우르르 몰려나갔다.

전교 2등에서 3등으로 전락한 엘리샤가 제일 먼저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빠져나갔다. 주인공 일행도 위로의 말을 장착한 채 따라나섰고.

나도 뛰어가려고 했지만.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 잠깐 남아라."

"…."

큰일이다. 그래, 생도는 몰라도 선생이 모를 리가 없지.

핵티아의 표정은 무표정이었으나, 나는 그 뒤에 일렁이는 악귀나찰을 보았다.

"내가… 부정행위는 퇴학이라고 했을 텐데…!"

<10화>

헉하고 숨이 턱 막혔다. 호랑이 앞에 서본 적이 있는가. 대륙이 인정하는 보석기사 등급 중에서도 벡금기사라는 계급이 있다. 최강이라는 임페리움 제국에도 단 5명뿐인. 핵티아가 바로 그중 한 명이었다. 현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기사단장이기도 했다.

그의 살기가, 나를 정통으로 꿰뚫었다.

울렁거린다. 어지럽다.

그러다가 거짓말처럼 살기가 사라졌다. 나는 어느새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잠시 후, 10시 30분에 징계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다. 참석해라. 불참은 곧 퇴학이다."

"…알겠습니다."

절제된 분노를 담아서 통보한 핵티아가 교실 앞문을 거칠게 열고 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

냉정하지 못했다.

척척박사(Lv 1)에게 오답률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다 맞춰버렸는데, 88%의 정답률을 보여줄 줄이야. 척척박사가 사전에 못 푼다고 포기한 문제들을 제외하면 100%의 정답률이었다.

퇴학을 당할 수는 없다는 조급함에 외통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럴 수가.'

나는 성적표에 기재된 지난 입학시험 결과를 확인했다.

마틴의 입학시험 석차는 반에서 45등 중 42등, 전교 250명 중에 242등이다. 맞다. 꼴통이다.

고득점이 아니면 퇴학이지만, 해내면 그것대로 부정행위가 의심되는 외통수였다.

'젠장. 척척박사가 이 간단한 문제를….'

뇌 활동을 보조해주는 척척박사가 외통수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못했다.

아무래도 척척박사는 단순 암기에 고효율이며, 상황 판단에 비교적 저효율임이 분명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진 후에야 원인을 깨닫는달까…, 물론, 지금 알아차린들 늦었다.

사실 척척박사를 탓할 문제도 아니었다. 마틴의 입학시험 등수가 이렇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으니까.

아무리 척척박사라도 가지지 못한 정보를 떠올리지는 못한다.

'하….'

라일락의 치즈 케이크가 먹고 싶다.

'젠장. 애초부터… 이럴 속셈이었어.'

일개 생도에게 1억 5천만이라는 벌금을, 꼴등에 가까운 사람에게 기준도 없는 고득점을 맞으라는 협박을, 고득점을 맞았으니 부정행위를 의심해서 징계위원회를.

아카데미는 좀 더럽고 치사한 방법을 쓰더라도 어떻게든 나를 퇴학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세계 최고의 교육기관에서 나 같은 망나니를 받아줄 생각은 절대로 없었겠지. 오지 말라고 사과문에 봉사 시간에 벌금까지 때렸는데 눈치도 없이 다시 복학한 내 잘못이지, 그래.

고분고분 돈 바치란 대로 바치고 봉사 시간 채운 순간부터 외통수에 걸린 것이었다. 나는 사방이 막힌 구덩이 안에서 헛짓거리 중이었단 말이다.

'어째서 이 세계는 나를 이렇게나 미워하는 걸까.'

마틴을 미워하는 거겠지만, 지금은 내가 마틴이다. 그리고 나는 그 악의를 태연하게 받아넘길 멘탈이 못 됐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내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강하지 않다. 내게 있는 거라고는 평범함뿐.

나는, 이런 일을 겪어가며 이들을 사랑할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젠장.'

사실, 조금은 기대했다. 그래도 수석이 됐으니, 주위의 환영을 받으면서 꿈에 그리던 즐거운 학창 생활을 보내며 종말에 대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아니었다. 꿈은 꿈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10시 30분까지 40분가량 남았다.

아…, 라일락의 치즈 케이크는, 먹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랬구나.'

알록달록 다양하던 세상의 색채가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수십 편의 소설을 써 내렸음에도 단 하나조차 성공하지 못했던 그때처럼. 오직 남의 아이디어를 받아썼을 때 유일하게 성공을 거뒀던 그때처럼. 내 절망적인 재능을 자각한 그때처럼.

'나는, 여기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구나.'

눈을 가늘게 떴다. 희미하게 Recola가 보이는 듯했다. 분노와 증오가, 나를 갉아먹는다.

세계가, 나를 구성하던 긍정적인 에너지가 반전하고 있었다.

***

"…."

차가운 분노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핵티아는 어제오늘 일어난 부정행위 사태에 대해서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이상하군."

하필이면 어제 채점장에 없던 순간 일이 터지다니.

교감을 위시한 아카데미 실세 선생진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A반의 마틴 생도가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면서, 징계위원회를 개회할 테니 생도에게 알리라는 통보를 들었다.

"전혀… 그런 기류가 없었는데."

핵티아 폰 빌레몬 하르트만. 내가 누구인가.

임페리움 제국의 황실 기사단장이었던 최강의 기사이자, 전 세계에 100명도 채 존재하지 않는다는 백금기사 중 한 명이었다.

경지에 올라 예지의 수준에 오른 직감이, 고작 생도의 부정행위를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

도리어 직감은 교감 라인의 선생진에게서 수상함을 느꼈다.

"잘한 건지 모르겠군요."

"하하,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나! 우리 같이 스테이크나 먹으러 가지! 내가 잘 아는 곳이 있는데! 저기 페트낙 왕국에서 직수입한 특상급 페트낙 황소 고기거든!"

"스테이크요."

핵티아는 옆에 딱 달라붙은 교감 라인의 선생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말도 안 붙여본 자가, 갑자기 이렇게 나가자고 하다니.

무엇보다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담당 생도가 부정행위를 저질렀는데, 담임은 스테이크를 썰러 가라니.

"징계위원회는요?"

"에이, 그런 건 다 교감 선생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선생님은 안 가셔도 됩니까?"

"나? 에이, 나야 뭐 땡땡이치는 거지!"

딱 봐도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속셈이지 않나.

아까 마틴에게 화를 냈던 것도 이 자를 속이기 위해서였다.

핵티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이런 데서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곧이어 핵티아의 옆에 달라붙던 선생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에는 칠흑색 로브를 둘러쓴 몇 명이 가만히 서 있었다. 정면에서 마주 보고 있음에도 인식이 자꾸 흐트러지려 했다. 마치 그림자 같았다.

백금기사인 핵티아이니 이 정도지, 일반적인 생도나 교생이면 누가 있는지도 모를 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4대 공작가 중 하르마듄과 데미니얀에서 마틴 생도를 퇴학시키라는 청탁을 교감에게 넣었습니다."

"마틴 생도가 정말로 부정행위를 저질렀나?"

"그건 저희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실 겁니다."

"…."

뭔가 더 질문하려는 찰나 그림자 기사들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며 사라졌다.

"저기, 핵티아 선생님…."

뒤돌아보자, 분홍색 머리칼의 교생이 다가오고 있었다.

"헤일리 교생. 무슨 일입니까."

"혹시 마틴 생도의 징계위원회가 어디서 열리는지 아시나요?"

"그건 왜…?"

"제가 그때 마틴 생도가 하교하던 걸 봐서…, 혹시 참고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

징계위원회의 구성 기본은 학년별 주임 선생을 맡은 3명이다.

일의 경중에 따라서 문제 생도의 담당 선생과 소속 학년 선생 전체가 소집되기도 한다.

보통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될 때 교감이 등판하고.

최악의 경우, 임페리움 제국의 전쟁영웅이자 최강의 마도사인 아카데미 교장이 등판한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좌우 검사단 자리를 가득 채운 고등부 학년별 선생들이 보였다.

정면을 응시한 채 고개를 위로 올렸다.

위원단 자리의 주임 선생 셋.

더 높게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마침내 판사석에 앉은 교감이 보였다.

고개를 까마득히 올려다봐야 하는 판사석과 위원단 자리에서부터 악의가 휘몰아쳤다.

'없군. 절반 정도가.'

미리 아카데미 소개글을 읽으면서 선생들의 면면을 다 익혀뒀다. 징계위원회에 참석한 선생들은 전체의 절반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교감 라인을 탄 선생들만 모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담임인 핵티아조차 보이지 않았다. 명백한 사기 재판이다. 의도는 뻔하다. 징계위원회 날치기를 위해서. 여기에 내 편은 아무도 없다고 봐도 좋았다.

"하암, 언제 끝나? 가족 회식 있는데."

"금방 끝나겠죠. 뭐, 다 준비된 거잖아요."

선생들끼리 익숙하다는 듯 수군거리는 소리가 귀를 박박 긁었다.

그때 문을 살짝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았으나, 잘 인식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서 똑바로 보려고 해도 인지가 흐려진다.

이 기묘한 현상은 대체…?

- 척척박사(Lv 1)가 원작에 나온 인식 저해 마법임을 떠올립니다. 보는 이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인식률을 낮추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임페리움 아카데미 선생들의 인식을 저해시킬 정도의 마법이라고?

하지만… 왜? 교감 라인의 선생이라면 굳이 저런 마법을 쓸 이유는 없을 터. 저 둘은 대체 누구지?

"전원, 주목."

때마침 회의가 시작된다. 교감이 선언했다.

"지금부터 징계위원회를 개회하겠습니다. 의제는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 생도의 부정행위입니다. 징계위원인 주임 셋은 사건의 경위를 설명해주십시오."

1학년 주임 선생이 대표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틴 생도의 입학 순위는 전교생 250명 중 242등입니다. 반면 이번 중간고사에서의 순위는 수석. 시험 시간 12시간 중, 3시간밖에 쓰지 않은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부정행위가 떠오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심증은 명명백백했다.

"그동안 학업에 열중이었냐면 아닙니다. 입학 후 10일 만에 중대한 불량행위로 정학 및 형벌 조치했으나 징계위원회에서 결정한 징계에 불복, 80일이 지나서야 징계를 이행하고 복학했습니다."

퇴학시키려는 것도 이해는 간다.

세계 최고인 임페리움 아카데미가 아니라 다른 학교였어도 마틴같은 학생은 존재만으로 수치일 테니까.

"이번 시험 성적에 의구심을 품은 선도부가 조사, 부정행위를 발각했습니다."

"…."

"마틴 생도의 자리에서 다수의 교과서와 참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

"이상, 마틴 생도에 대하여 징계위원회는 두 번이나 아카데미의 위상을, 나아가 황제 폐하와 제국을 기만한 행위를 감안하여 무조건적인 즉시 퇴학을 고려하는 바입니다."

'임페리움 아카데미… 썩었구나.'

원작에서도 징계위원회는 비굴한 역할로 나왔었다.

이들은 4대 공작가에 줄을 대고 막대한 돈을 받아먹고 있었다. 공작들이 평민인 길버트가 잘 나가는 걸 견제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지금과 비슷한 일이 발생했지만….

주인공 곁의 주조연들이 누군가? 4대 공작가의 자제들 아니던가.

징계위원회는 참교육을 당하고, 가주들은 모른 척하는 웃긴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아니야.'

고작해야 백작가 출신. 그것도 집 나온 망나니가 아닌가.

4대 공작가의 핍박을 걷어내 줄 든든한 동료들도 없다. 나는 오로지 혼자다. 눈앞의 승냥이들이 내 몸과 마음을 한없이 물어뜯을 때까지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흠흠! 각설하고, 모두 바쁜 만큼 빠르게 선고하겠습니다.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의 퇴학을 이 자리에서 선고…!"

교감이 선고하려는 찰나.

"저기…."

갸날픈 목소리. 묵직한 재판장의 공기에 따뜻한 풀내음이 흘러들어왔다.

<11화>

교감은 미간을 찌푸렸다.

반쯤 체념했던 마틴이 고개를 돌리자, 검사단 사이에서 분홍색 병아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있었다.

"증거조사와 검사측, 변호측의 신문과 진술 과정이 생략되었는데요…. 그, 최후 진술도…."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이상하다 싶어서 제기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에 압도당한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할 말은 다 했다.

교감과 주임 선생들, 몇몇 선생들의 안색에 분노가 서렸다.

"자넨 뭐지?"

교감이 재판석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헤, 헤일리 폰 루아 에뜨랑데 교생입니다."

"교생? 교생이 왜 여기 있지?"

"저, 저… 시험 당일에 하교하던 마틴 생도와 마주쳤어서…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다른 선생님들이…."

교감의 위압적인 신문에 헤일리 교생이 몸을 떨었다. 목소리에도 울먹임이 더해졌다.

"다른 선생? 누가? …아니, 아니야. 그건 중요하지 않지."

분명 4대 공작가와 줄을 댄 교감 라인 외의 선생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었다.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한 교감은 서둘러서 일을 거행하려고 했다.

"필요 없네. 마틴에 대한 정황 증거는 충분하니까. 이미 위에서는 다 판결이 끝났네. 흠! 다시 판결을 내리겠다.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은 이 시간부로…!"

"잠깐만요, 교감 선생님."

이번 발언자는 헤일리 교생의 동행자.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는데, 헤일리 교생의 말마따나 아무런 과정 없이 곧바로 판결을 내리시는 겁니까?"

"하…, 오늘따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군. 자네는 또 뭔가? 교생이야? 자네들이 아카데미의 법도를 개처럼 무시하니 나도 할 말이 없군. 무엇보다 인식 저해 마법을 걸고 이 자리에 온 건 징계를 피할 수 없네. 당장 해제하도록!"

교감의 엄포에 동행자는 말없이 마법을 해제했다.

인식 저해 마법이 풀리면서 로브 아래로 드러난 맨얼굴은, 강직하고 정의로운 기사.

어쩌면 세계에서 제일 강할지도 모를 기사.

임페리움 제국 현 황제의 가장 큰 신임을 받았던 기사단장이었던 자.

핵티아 폰 빌레몬 하르트만이었다.

"…핵티아 선생?"

교감이 멍하니 그를 보았다.

하필이면 핵티아 선생인가. 저자는… 4대 공작가의 비호를 받는 자신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다.

번거롭게 다른 선생들 눈치 보며 은밀하게 교감 라인의 인원만 모여서 징계위원회를 연 이유가 뭔가. 이 사람, 핵티아를 경계한 것 아니었나.

그래서 선생 중 한 명한테 지시해서 신경을 돌려달라고까지 했거늘. 그 간단한 임무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다니…!

교감은 화가 치밀었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몇 번이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증거는 분명하네."

분명하지 않다. 심증만이 있을 뿐.

그러나 다수의 선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해주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같은 임무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 마틴이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온다면, 퇴학시켜라.

4대 공작가의 가주들로부터 내려온 임무였다.

마틴이 짧은 시간 동안 보여준 행동들은 그야말로 최악. 4대 공작가의 명령을 모르는 선생들도 당연히 찬성해주리라 생각했건만.

"저는 용납 못 합니다. 직접적인 증거는 어디 하나 없습니다. 심증뿐입니다."

거듭된 방해에 교감의 화가 제법 많이 끓어올랐다.

"…생도의 교과서가 발견됐다지 않나!"

"당연히 교과서가 책상 서랍 아래에 있을 수도 있죠."

"시험 중에 자리에 교과서가 있으면 안 된다는 원칙도 모르나, 선생은?!"

"물론 당연한 상식이지만, 그러한 원칙은 제가 알기로 없습니다. 마틴 학생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 서랍에도 교과서나 참고 서적이 있었을 겁니다. 시험을 친다고 서랍 검사를 하거나 주의를 주거나 한 일은 없었으니까요."

"핵티아 선생!"

교감이 이를 악물었다.

"위에서… 다 판결이 났다고… 했지 않나…!"

"저는 모릅니다. 그저 맡겨진 선생으로의 일을 다 할 뿐. 담임이 확실하지 않은 일로부터 생도를 보호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핵티아 선생!"

핵티아가 굽히지 않자 교감이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강렬한 위압감을 뿜어내면서 반대로 핵티아가 교감의 말을 끊었다.

"…임페리움 아카데미의 교감이라 하나… 이 나를 기세로 압박하다니, 겁대가리를 상실했는가."

마치 붉은 호랑이가 어금니를 드러낸 듯한 환각에 교감은 실신하려던 걸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아니면! 담임으로 감독한 제 실력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1학년 생도의 부정행위조차 감지하지 못했다고요. 그것도 아니라면, 제가 생도의 부정행위를 방조했다는 겁니까? 제 명예를 그렇게 더럽히시려는 겁니까?"

황제의 신임을 받는 핵티아를 전면으로 부정했다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교감의 입이 언제 권위적이었냐는 듯 뻣뻣하게 굳었다.

"…아니, 그건 아닐세."

"굳이 서랍을 검사하지 않는 건 애초에 미끼잖습니까. 일찌감치 부적절한 인성의 생도들을 걸러내기 위한 미끼요. 우리 선생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허가되는 일인 줄 압니다. 교과서가 책상 속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정황 증거가 성립되지는 않습니다. 왜 그게 부정행위의 증거가 되는지, 그거 하나만으로 모든 걸 일단락시키려는지, 교감 선생님과 징계위원단의 의중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

끝났다. 하필이면 핵티아 선생이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훼방을 놓을 줄이야. 하지만 괜찮다. 실패했어도, 저 남자가 끼어들었다는 사실을 알면 4대 공작가에서도 크게 문책하지는 않을 테니까.

"위에서 판결이 내려왔다, 말고는 다른 증거는 없습니까?"

"…없네."

"그렇다면…."

핵티아가 뭐라 더 말하려는 찰나, 교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선점했다.

"흠! 징계위원회를 해산하겠네! 마틴 생도를 퇴학시키기 위한 재판은, 흠, 나중으로 미루지!"

그러고는 입을 싹 닫고는 아무 말 없이 큰 보폭으로 재판장을 빠져나갔다.

"크흠!"

"흠!"

3명의 주임 선생도 핵티아 선생을 흘기면서 밖으로 나갔다.

징계위원회가 갑자기 흐지부지되자 선생들도 눈치를 보면서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핵티아 선생도 말없이 마틴을 주시하다가 빠져나갔고.

재판 폐회에 불씨를 놓은 헤일리는 미련이 남은 듯, 말없이 피고인석에 앉은 마틴을 보다가 물길에 휩쓸리듯 빠져나갔다.

엉망진창으로 끝나버린 징계위원회의 무대 위에 앉아서, 나는 말없이 독백에 잠겼다.

'그렇구나.'

소설 속 세계로 들어온 나는 나름 주인공처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현실에서도 저질 같은 재능으로 좌절하고 괴로워하며 남들을 질투하는 것밖에 못 하는 엑스트라였던 나는, 이곳에서도 주인공은커녕 조연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지쳤다.'

운이 따랐는지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 퇴학은 면했다.

조금 아쉽다. 징계위원회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었는데. 차라리 종말에게 붙어서 세계를 멸망시키는 선두에 선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달콤한 생각이.

그 순간 거짓말처럼 라일락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종말에 빌붙어서 목숨을 연명한들, 그녀까지 지켜줄 방도는 없다. 그러므로 위의 방법은 무기한 보류다.

하지만 만약의 만약에, 정말로 이 세계가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나의 모든 걸 앗아가려고 한다면, 나는 종말의 편에 서리라.

'애초부터 잘못됐지.'

이곳은 내가 쓴 소설 속이지만, 어느 하나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Recola를 질투하는 내가, Recola의 세계에 들어와서 그가 만든 등장인물들을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런 일까지 당해야 깨닫는 거냐, 나는.'

피고인석에 앉은 채 홀로 남은 나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나는, 마음의 문을 닫기로 했다.

***

- 당신은 임페리움 아카데미 고등부 1학년 중간고사에서 수석을 차지하였습니다.

- 당신은 기존에 없던 대규모 징계위원회의 주역이 되었음에도 퇴학을 면했습니다.

- 2명의 인물이 당신에게 동정을 가지게 됩니다.

- 대다수의 아카데미 구성원이 당신에게 보내는 멸시와 경계가 더욱 강화됩니다.

- 아카데미의 여론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으므로 1,25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하…."

조소 섞인 한숨이 비틀린 입가를 비집고 나왔다.

아무도 없는 방에 누워서 눈조차 가린 채 나는 시스템의 비아냥을 들었다.

- 척척박사(Lv 1)가 문밖에 나는 소리는 라일락과 세바스찬의 것이라고 감지했습니다.

혼탁한 악의에 상처받은 주인의 몰골을 본 라일락과 세바스찬은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마음 착한 메이드는 분명 내가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를 들고 밖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쟤들이 있었네.'

라일락. 나 같은 변변찮은 놈이라도 사랑해주는 엑스트라.

마틴처럼 내가 창작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Recola의 창작물도 아닌 캐릭터.

애초부터 주인공이 받는 스포트라이트는 내게 어울리지 않았어.

이 세계를 사랑한다는 선택지 자체가 글러 먹었다고. Recola가 만든 세계관이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그러니까 오로지 나만을 사랑하자. 내가 창작한 마틴과 세바스찬, Recola가 설정한 적 없는 라일락.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겠어.'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도 이 세계에서는 사양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Recola가 만든 세계에서만큼은 사양이다. 죽더라도 지구의 개똥밭에서 죽지 여기서만큼은 안 된다.

비뚤어지고 뒤틀리고 왜곡된 감정이 나를 감싸 안았다. 내가 자아내는 나만의 악의 속에서 나는 안식을 느낀다.

그래, 중2병이라 욕해도 좋다. 열등감의 지옥 속에서 발버둥 쳐보지 못한 녀석의 훈수 따위, 개가 짖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난 바보였어.'

마틴이 주인공 일행과 친해진다? 내가 Recola의 창작물을 사랑한다? 그런 주인공 같은 발상이, 행동이 내게 어울릴 리가 없었다.

루저에게는 루저의, 패배자의 방식이 있는 법이었다.

'무기가 필요해.'

휘몰아치는 타인의 악의에서 살아남을 무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바닥의 카펫을 치우고 바닥을 뜯었다. 숨겨두었던 상자의 봉인을 뜯고 열어젖혔다.

울브하딘 가문을 뛰쳐나올 때 챙겨두었던 마틴의 무기, 길고 매끈한 엽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원작에 나왔던 무수한 스킬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스킬을 획득하겠어."

- 포인트를 소모하여 스킬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무브먼트."

- 400포인트를 소모하여서 무브먼트 (Lv 1)을 획득했습니다. 850포인트가 남았습니다.

"총기 이해."

- 5포인트를 소모하여서 총기 이해 Lv 1을 획득했습니다. 845포인트가 남았습니다.

- 마틴 폰 타르곤 울브하딘은 총기술에 관련된 모든 스킬에 더욱 큰 상향 보정을 받습니다.

"근력, 민첩, 내구, 마나."

- 50포인트를 소모하여서 근력 Lv 1을 획득했습니다.

- 50포인트를 소모하여서 민첩 Lv 1을 획득했습니다.

- 50포인트를 소모하여서 내구 Lv 1을 획득했습니다.

- 50포인트를 소모하여서 마나 Lv 1을 획득했습니다.

시야가 격변하고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낡고 헤진 근육을 뜯어버리고 최신소재의 인공 근육으로 갈아 끼운 듯 근력이 솟구쳤다.

"마지막으로… 특전 스킬 야생 감각을 체험해보겠어."

시야가 반전되며 연습장으로 변했다.

<12화>

- 야생 감각을 체험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겠습니다.

주위는… 학교가 되었다. 오늘 봤던 임페리움 아카데미가 재현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보인다. 들린다. 느껴진다. 100m 안이라면 뭐든지 인지할 수 있다. 바람도, 땅도, 사람도.

엽총을 들고, 탄환을 장전했다.

- 적을 소환합니다.

갑옷을 입고 창칼을 든 경비병들이 소환되었다. 나에게 달려들자, 나는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을 마지막으로 잡아본 게 몇 년도 더 된 일이었지만, 사격 연습을 몇 번이고 해본 사람처럼 능숙하게 조준선을 정렬하고 쏜 정조준이었다.

- 총기 이해(Lv 1)가 사격을 보조합니다.

탄환은 일직선으로 똑바로 날아가서 경비의 이마를 부숴뜨렸다. 엽총을 꺾자 열린 약실 사이로 뜨거운 연기와 함께 탄피가 튀어나왔다. 시선은 정면의 적을 응시하며 손만 허리춤의 탄알집에서 탄환을 집어서 약실에 장전했다.

- 척척박사(Lv 1)가 현 위치는 10초 이내로 포위된다고 분석했습니다.

- 야생 감각(Lv 1)이 활로를 지정합니다.

어떻게 해야 더욱 빠르게, 날렵하게, 쉽게, 사냥감이 모르게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는가. 맹견을 닮은 눈 위로 동선이 그려졌다. 나는 달려가며 도약했다. 구조물을 밟고, 창틀을 밟고 몸을 활처럼 튕겨 위로 도약했다.

- 무브먼트(Lv 1)가 움직임을 보조합니다.

원래의 김안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움직임이 스킬의 도움을 받자 파쿠르 선수처럼 능숙해졌다. 저 아래에서 허우적거리며 벽을 짚고 올라서는 경비병의 머리로 엽총을 겨눴다. 탕! 탕! 묵직한 총성 한 발에 한 명씩 순서대로 무너져내린다.

- 야생 감각(Lv 1)이 보이지 않는 위협을 감지했습니다. 당장 회피하세요!

위협이 느껴졌다. 몸을 굴려서 피하자, 있던 자리에 화살이 꽂혔다. 살기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활을 든 병사가 보였다. 곧바로 마주 저격하여서 적을 사살했다.

- 야생 감각(Lv 1)이 추가 저격수에게 저격받고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 척척박사(Lv 1)가 전장을 분석하여서 저격 포인트를 분석합니다.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수십 곳이 넘는 저격 포인트가 그려졌다. 야생 감각을 익힌 육체는 독수리 같은 시야를 갖게 되면서 저 먼 곳의 저격수도 선명하게 보였다.

탕! 탕! 순식간에 쏴 죽였다.

그 틈을 타고 위로 올라온 경비병 하나를 엽총으로 후려쳐서 옥상 아래로 떨어뜨렸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던 병사는 둔중한 소리를 내며 망가졌다.

모든 적을 사살하자 가상의 아카데미가 사라지며 다시 낡은 방안으로 돌아왔다.

- 훈련이 끝났습니다.

"야생 감각을 익히겠어."

- 600포인트를 소모하여서 야생 감각 Lv 1을 획득했습니다. 45포인트가 남았습니다.

- 야생 감각의 기본 능력인 위험 감지, 기척 감지가 활성화됩니다. 신체의 감각들이 대폭 상향됩니다.

원래라면 친화력이나, 주인공 일행이 좋아하는 취미 등을 스킬로 획득할 예정이었다.

이제는 생존과 전투, 고독함을 즐기는 것만이 살길이다. 분기점은 이미 지났다.

***

성적이 발표된 바로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카데미는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1학년 A반의 조례 시간에 핵티아 선생은 선언했다.

"반 학기 동안 수고했다. 남은 학기 동안은 실전 위주의 수업이 진행된다."

"와!"

"끝났다!"

"후아!"

지루하고 숨 막히는 이론 수업은 끝.

생도들이 기쁜 한숨을 지었다.

임페리움 아카데미는 '이능력 학교'이기 때문에 기존 의무 교육(국어, 수학, 역사, 외국어 등)과 함께 기사 교육(마법, 괴물, 생존 등)까지 총 20개 과목의 공부를 단번에 진행한다.

일반 의무 교육 학교와 비교했을 때 4배 가까이 더 많은 공부량을 자랑한다.

방대한 학습량에 죽어나가던 생도들이 기뻐하는 건 당연했다.

"실습은 무조건 조별 평가이기 때문에, 남은 학기 동안 함께할 조원을 결정해야 한다. 조는 3명으로 구성되며, 한번 결정된 조원은 변경이 불가하다."

이미 반 학기 동안 이론 수업을 들으면서 친해진 생도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시간을 오래 주지는 못한다. 10분 주겠다."

폭풍전야처럼 교실이 고요해졌다.

"시작."

생도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저마다의 무리를 찾아 나선다.

3명이 딱 맞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서로 조율하고 남는 인원은 다른 무리와 조율하기도 했다.

주인공 길버트는 하렘에 둘러싸여 있었다. 길버트를 포함해 총 다섯이었으니 둘은 따로 떨어지겠지. 누가 떨어질지는 원작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교실을 관조하던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떠보았다. 역시 내 주위에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

맨 구석 자리에 앉아서 조원 결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핵티아는 고개를 돌려서 마틴을 주시했다.

늘 함께하던 애견 세바스찬이 보이지 않았다. 세바스찬에게 주던 육포도.

대신 등에 한 자루 엽총을 지고 있었다. 육포 주머니를 달아둔 허리에는 탄알집이 있었다.

"그만, 모두 자리에 앉아라. 조별로 앞에서부터 자리를 채워라. 3인 1조를 못 채운 생도는 뒤로 나가라."

낙동강 오리알은 나를 포함해서 총 4명이었다. 2명씩이라도 짝지은 조에 한 명씩 배치되기 시작했다.

'역시 저 두 사람인가.'

길버트 주위에는 금발 여검사 리나와 도도한 여궁수 엘리샤가 있었다.

방패를 든 산 같은 덩치의 남성 보르드와 연신 수줍어하는 여마법사 메리는 2인조를 구성한 채였다.

"선생님."

"보르드. 무슨 일이지?"

"저희 조가 마틴 생도를 맡겠습니다."

위험물을 곁에 두고 감시하겠다는 의도처럼 들렸다.

"…그래라."

나로서는 어디에 소속되든 상관없다. 주인공 일행과 친해져서 종말을 피해 보겠다…. 같은 생각은 때려치웠으니까.

조 편성이 이루어지자마자 실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임페리움 아카데미의 설립 목적이 바로 '타임카오스 던전'의 공략을 위한 '인재 양성'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타임카오스 던전은 과거의 전쟁, 재앙, 과오를 재구현했고… 극복하지 못하면 현재의 땅을 침식시켰다.

그러나 극복해낸다면, 타임카오스 던전의 매개가 된 강력한 아티펙트가 주어진다. 아티펙트는 미발견 된 과거의 기술이 될 수도 있고, 분실했던 왕실의 보물일 수도 있다.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한 각 제국, 왕국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시간 왜곡력에 따라서 던전의 등급을 나누고, 공략을 위한 연구진을 뽑고, 기사단을 창설했지만.

수천 년 동안 대륙을 지배하던 초거대 제국 코스모스가 순식간에 침식당해 멸망하면서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세계는 단합하여서 대륙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타임카오스 던전을 견제하기로 했고, 최고의 인재양성교육기관 임페리움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지금부터 들어갈 인공 던전은 전쟁영웅이시자 대마법사이신 교장 선생님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가상현실이다."

핵티아의 설명을 들으면서 생도들은 제복의 방어력을 체크했다.

"방심하지 마라. 환상이 실제보다 더 악랄할 때도 있으니까. 가상현실에서 죽는다고 실제로 죽지는 않지만, 죽음의 감각만큼은 진짜다. 선례로 5년 전에 한 생도는 트라우마가 생겨서 자퇴하고 말았지."

각자의 무기를 점검하고 보조 물품을 재확인한다.

"안에서 있을 모든 행동과 의도가 점수로 반영된다. 점수에 불만이 있다면 내가 아니라, 제작자인 교장 선생님께 따지면 된다. …그럴 간 큰 놈이 있다면 말이지."

준비를 마친 생도들은 마지막으로 실전에 대비한 각오를 다졌다.

핵티아의 호령이 떨어졌다.

"자, 조별로 진입해라!"

14조도 동굴 형태의 인공 던전으로 진입했다.

주인공 일행 중 보르드와 메리가 속했고… 나 마틴이 있는 조가 14조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동굴 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어색했다. 당연히 나 때문이다.

보르드와 메리는 서로 내 눈치를 보았다.

메리는 아담한 체구와 수줍은 성격답게 이 공기를 바꿀 능력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보르드는 용기를 내어서 횃불처럼 뜨거운 친화력으로 말을 꺼냈다.

"하하하! 실전은 오랜만이군! 어찌저찌 같은 조가 됐는데…, 하하하! 너무 긴장하지 말고! 이래 뵈도 실력에는 자신 있으니까! 나만 믿으라구!"

호탕한 성격으로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 반장다웠다. 이윽고 악수를 위한 손을 내밀었지만.

"잘 부탁해, 마틴 생도!"

"…."

나는 고개를 돌리고 손에 든 엽총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척했다. 명백한 거절.

뜨거운 친화력이, 차가운 바람에 꺼졌다.

"끙…."

소극적인 메리는 눈동자를 어디에 둬야 할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보르드도 뻘쭘하게 손을 거두면서 전보다 더 진한 어색함이 감돌았다.

"도, 동굴 안으로 진입해야겠군. 어쨌든 공략이 우선이니까, 말이야…?"

지나치게 내 눈치를 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없다. 날 어떻게 대하든, 난 무시로 일관할 테니까.

보르드가 한 걸음 앞으로 옮기자, 나도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렇게 시작된 전진.

저벅거리는 발소리만 동굴을 울렸다. 숨 막히도록 어색한 던전 공략이다.

진형도 엉망이었다. 당연히 마법사인 메리는 나와 함께 후열에 서야 했지만, 전위인 보르드 옆에 딱 붙어있었으니까.

'점수에 연연하지 않는 건가?'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보르드와 메리는 둘 다 임페리움 제국 4대 공작가에 속해 있었으니까.

굳이 아카데미에서 노력하지 않아도 성공은 보장되어 있었다.

'더러운 혈족 사회.'

그러나 나는 두 사람에게 내 점수를 위해서라도 협력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메리 생도."

앞서가던 두 사람의 어깨가 움찔한다.

"네, 네, 네…?"

울먹거리기 직전의 메리가 나를 돌아보았다.

"대형이 고블린도 뚫고 들어올 만큼 엉망진창입니다. 나와 보르드 생도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세요."

메리가 '나 어떡해?!'라는 얼굴로 보르드를 보았다.

당황한 건 보르드도 마찬가지였지만 가만히 듣고 보니 마틴이 맞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마, 마틴 생도의 말이 맞아. 우선 대형을 갖추자."

"으, 응…!"

1자로 나란히 서서 동굴에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 들어가다가 또 어색해진 공기를 느꼈는지 보르드가 말을 꺼냈다.

"그래도 다행이야. 시간 왜곡력 등급이 낮은 던전이 분명해. 그렇잖으면 이렇게까지 한가할 리가 없지! 하하하!"

당연히 몬스터가 없음을 확인하고 내지르는 소리였겠지만, 어설펐다.

- 척척박사(Lv 1)가 흡혈박쥐가 서식하는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동굴 벽에 은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야생 감각(Lv 1)이 전방의 동굴 벽에 위장한 흡혈박쥐를 발견했습니다.

어색함을 푸는 데만 온 신경이 쏠린 보르드가 알아차릴 것 같지는 않다.

조원이 흡혈박쥐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기면 나까지 감점이다.

엽총을 들었다.

분명 내 총기 이해는 Lv 1에 불과하지만, 마틴은 총기술에 큰 상향 보정을 받는다. 부족한 점은 척척박사의 지성, 야생 감각의 직감, 그리고 무브먼트가 보조해주고 있기에 빗나갈 일은 없다.

빵! 하고 거대한 총성이 동굴을 울렸다.

바로 앞에서 걷던 메리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딱딱하게 굳었다.

마찬가지로 놀란 보르드의 눈앞으로 거무스름한 형체가 힘없이 지나쳐 바닥에 떨어졌다.

<13화>

"흐, 흡혈박쥐…?"

보르드가 기계처럼 고개를 돌려서 땅에 떨어진 잔해를 살폈다. 큼지막한 바람구멍 사이로 피가 폭포처럼 새고 있었다.

철컥! 뒤돌아본 보르드가 재장전하는 내 모습을 보았다.

"고, 고마…."

"사주경계 하세요, 보르드 생도. 흡혈박쥐한테 물어뜯기고 싶지 않으면."

"그, 그래."

전진하는 중에 몇 번이고 총성이 울렸다. 그때마다 메리는 몸을 떨고 보르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내 눈치를 과하게 봤다.

'이유가 있겠지.'

당장 알 방법은 없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위장한 흡혈박쥐들을 쏴 죽이고 지나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대한 보스룸이 나타났다.

체구가 3m는 될법한 초대형 흡혈박쥐가 신출내기 생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날개를 펼치자 좌우가 10m는 되어 보였다.

[────!]

초음파 샤우팅을 내지르면서 14조를 향해 덮쳐왔다.

"방호 전개!"

뛰쳐나간 보르도가 제 몸만 한 강철 방패를 땅에 박았다.

"프론트키퍼!"

보르도의 몸에서 뿜어진 마나가 거대한 거인 '프론트키퍼'의 형상을 이루어서 달려들던 초대형 흡혈박쥐를 막아냈다.

'저게 바로…!'

타우포로스 공작 가문의 비전 기술. 혼자서 성벽을 대신할 수 있다는 방어형 기술의 최고 존엄이었다.

[───!]

초음파가 울려퍼졌다.

- 척척박사(Lv 1)가 초음파를 분석했습니다. 흡혈박쥐 무리를 부르는 음파입니다.

"박쥐 떼가 옵니다! 광역 마법을 준비하세요!"

"네!"

내 지시에 메리가 손에 든 지팡이로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동시에 보스룸 벽 곳곳에 뚫린 수십 개의 구멍을 통해서 박쥐 무리가 날아들어왔다.

[헤비 레인(Heavy rain)!]

지팡이를 통해서 퍼져나간 먹구름이 동굴 천장을 가득 메우면서 거센 소낙비가 쏟아져 내린다.

[찌익!]

[찍!]

빗줄기에 맞은 흡혈박쥐의 몸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기세 좋게 등장한 흡혈박쥐 무리는 그렇게 비바람 속에 스러져갔다.

보르드도 메리도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나도 1인분 몫은 해야겠지.'

- 척척박사(Lv 1)가 적성 개체의 약점을 분석합니다.

- 야생 감각(Lv 1)이 육신의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 무브먼트(Lv 1)가 당신의 움직임을 보조합니다.

- 총기 이해(Lv 1)가 당신에게 승리를 약속합니다.

탄집을 열고 탄약을 교환했다. 일반적인 탄약에서, 산탄으로.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높게 도약했다. 초대형 흡혈박쥐와 고군분투 중인 보르드의 어깨를 밟고 재차 도약.

"마, 마틴 생도?!"

아래에서 들리는 당황한 음색을 무시한 채, 거인병 프론트키퍼와 정면에서 대치 중인 초대형 흡혈박쥐의 면상으로 나아가며 총을 겨눴다.

[?!]

초대형 흡혈박쥐가 날 인지했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펑! 하고 폭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뒤로 밀려나고, 무수한 산탄이 초대형 흡혈박쥐의 면상에 틀어박혔다.

한눈에 봐도 눈, 코, 입 멀쩡한 부분이 없었다.

초대형 흡혈박쥐가 뒤로 넘어졌다.

총을 구부리자 탄피가 뽑혀 나왔다. 나는 허리춤의 탄집에서 관통탄을 꺼내서 약실에 집어넣었다.

왼발을 한 발 앞으로 내딛으며 총을 들고 조준선을 정렬했다.

'지금.'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려 퍼졌다.

헤비 레인에 고통받던 박쥐 떼가 소음에 더욱 괴로워했다.

그러나 초대형 흡혈박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관통탄이 산탄으로 갈라진 안면을 뚫고 뇌를 정확하게 관통했으니까.

단말마조차 없이 초대형 흡혈박쥐의 숨이 끊겼다. 커다란 피막 날개가 바닥에 떨어지며 흙먼지가 날렸다.

이윽고 던전 전체에 안내 방송이 울렸다.

[14조가 인공 던전 공략을 완수했습니다. 14조는 인공 던전 출구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끝났다. 제법 가벼운 예열이었다.

[14조의 점수를 발표하겠습니다. 보르드 80점, 메리 73점, 마틴 84점입니다. 총점 237점에 조별 평가 등급은 A-입니다.]

A-면 훌륭하지만, 고작해야 이 정도 난이도다. 자화자찬할 정도는 아니다.

던전 밖으로 나오자 먼저 나온 조들이 여유만만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핵티아 선생의 말마따나 기껏해야 '실력 보기' 정도의 던전이었으니까.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 조가 있었다. 다 같이 보도록 하지."

홀로그램 영상이 나타나며 한 파티를 비췄다. 무려 S등급의 공략 평가를 받은 1조였다.

활을 든 엘리샤가 선두에 서서 함정의 유무를 살피고 위장한 흡혈박쥐를 신속 정확하게 쏘아 죽인다.

초대형 흡혈박쥐는 등장과 함께 끝났다. 검을 든 두 기사, 길버트와 리나가 스쳐 지나가며 목을 그어버렸기 때문이다.

14조처럼 흡혈박쥐 떼를 부른다거나 하는 일조차 없었다. 순식간이었으니까.

검에 묻은 잡것의 피를 털고 고개를 돌리는 길버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끝났다.

"속도, 안전, 화력, 역할 배분, 협동심까지 모든 분야에서 완벽했다."

1조의 개인 점수는 3명 다 100점. 총점 300점으로 조별 평가 S등급이었다.

과연 저만한 유대와 협동이 단기간에 이뤄진 걸까? 그럴 리가 없다.

'…시간이 많이 흘렀군.'

내게는 없는 시간이다. 마틴이 학교에 나가지 않은 80일.

그동안 길버트는 두터운 유대를 쌓았겠지. 영상을 보며 환호하는 보르드와 처음으로 웃음 짓는 메리를 보아라.

나 같은 폐급 엑스트라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다들 훌륭히 공략을 완수해주어서 뿌듯하다. 부디 이대로만 성장해서 타임카오스 던전 공략에도 이바지하는 어엿한 기사가 되어주기 바란다."

핵티아 선생은 웃었다. 설정집을 보았을 때 그는 더할 나위 없는 '기사'였다. 바르고 정직하며 약자를 지켜준다.

나 같은 쓰레기조차.

주인공 일행에 대한 미련은 떨쳐버렸지만, 재판장에서 나를 변호해준 두 사람에 대한 은혜까지 잊지는 않았다.

'언젠가 보답해줘야겠지.'

"잠시 휴식 시간을 주겠다. 점심시간 후에 다시 이곳으로 집합하도록. 더 높은 난이도의 던전을 공략할 테니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장비를 점검하고 조원들과 유대를 쌓아 두기 바란다. 이상."

핵티아 선생이 자리를 뜨자 생도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보르드는 긴장을 삼키고 이번에야말로 해내겠다는 용기를 내었다.

"아, 좋았어, 마틴 생도! 하하하! A-면 훌륭한 점수지! 아까 위장한 흡혈박쥐도 그렇고! 초대형 흡혈박쥐도 그렇고! 마틴 생도가 정말 대단했다니까! 나 빈말은 안 하는 성격이거든! 내가 인정하는 거니까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옆에서 염세적으로 정면을 주시할 뿐인 표정의 마틴을 겨냥한 말이었다. 친화력 대장 보르드조차 마틴을 계속 쳐다보려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어때, 우리도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대화라도… 어이!"

보르드가 황망히 손을 뻗었으나 허공만 붙잡을 뿐이었다. 마틴이 무정하게 뒤돌아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이, 이봐! 밥이나 한 끼 먹자고!"

"…."

"어이, 마틴 생도! 안 들리는 거야?! 울브하딘!"

"…."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지친 보르드가 먼저 포기했다.

"내버려 둬, 엽견 따위."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든든하기 짝이 없는 세 사람이 오고 있었다. 말을 꺼낸 사람은 도도한 하르마듄 가문의 장녀 엘리샤였다.

"왜 그렇게 엽견의 이름을 부르고 있어? 공략 중에 뒤통수에 총이라도 맞은 거야?"

"아니, 뭐…, 밥이나 한 끼 할까 해서."

"밥? 저 사냥개가 무슨 짓을 저질렀었는지 벌써 잊은 건 아니지?"

"아니, 그건 아는데…, 음…."

"보르드, 메리. 괜찮아?"

"아…, 길버트."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 때 위를 올려다보면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을 볼 수 있다.

보르드는 길버트의 머리카락이 그 색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엘리샤 말처럼 뒤통수에 총을 맞지도 않았고. 그보다 영상 봤어. 정말 대단하던데?"

"고마워. 메리도 괜찮아?"

"무, 무서웠어요, 길버트…."

긴장이 풀린 메리가 또 울먹이자 일행들이 고개를 돌려서 보르드를 보았다.

길버트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르드…? 정말 아무 일도 없던 거 맞아?"

"아냐! 진짜라고! 믿어줘! 마틴 생도가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야. 그저… 음…, 우리를 끝도 없이 경계하는… 아니, 그조차 아닌가. 마치, 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어."

"아무런, 신경도요?"

금발의 여검사 리나가 보르드의 말을 콕 찝었다. 자세한 설명을 해달라는 압박이었다.

"위장한 흡혈박쥐를 잡을 때 경고 없이 총을 쏜다든가…, 초대형 박쥐를 잡을 때 말도 없이 달려들어서 얼굴에 산탄을 쏜다든가…."

"뭐야, 그게?"

미간을 찌푸린 엘리샤의 말에 보르드는 알맞은 단어를 골랐다.

"그냥… 친해질 생각이 1도 없는 모르는 생도와 조가 된 사람처럼 굴었다는 거지."

"그래…?"

길버트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마틴이 사라진 길을 보았다. 80일 만에 돌아온 그는 달라도 한참 달라져 있었다.

처음 보았던 마틴은 4대 공작가의 자제들과 어떻게든 친해지려고 아부와 사탕발림을 아끼지 않았었으니까.

"흐음."

"그렇다고?"

"…."

대화가 오가며 주인공 일행은 의아함을 품었다.

그중 도도한 공녀, 엘리샤 폰 트레샤 하르마듄은 직접 보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주의였다.

그녀가 행동에 나선 건, 던전의 시간 왜곡력을 측정하는 수업 중이었다.

***

"타임카오스 던전은 시간 왜곡력에 따른 등급표가 존재한다. 등급에 따라 공략을 준비하는 만큼 시간 왜곡력 측정 기술은 필수지."

한 인공 던전 앞에 선 1학년 A반 학생들은 핵티아 선생의 말을 경청했다.

"자그마치 10년 전에 이미 모든 기사는 시간 왜곡력 측정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법안이 제정됐을 정도다. …상당히 까다로워서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는 않지만, 너희는 임페리움 아카데미 생도다."

밖의 어중이떠중이와는 다른, 세계를 선도해나갈 엘리트들이다. 임페리움 아카데미에서의 꼴등이 평범한 학교의 1등보다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조별로 각기 다른 타임카오스 던전에서 시간 왜곡력을 측정할 예정이다. 그 전에, 앞선 이론 수업에서 배웠던 공식을 기억하지 못하는 생도도 있을 터. 복습 차원에서 먼저 풀어볼 지원자를 모집하겠다."

생도들이 우르르 손을 들만한 제안이었다. 생도기록부에는 수업 중의 모범 발표도 기록되기 때문에.

그러나 45명 중에 거수한 사람은 고작 셋.

시간 왜곡력 측정이 전문 종사자도 힘들어하는 고난이도의 공식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샤 생도, 자신 있나?"

"네, 물론입니다."

"기개는 칭찬할만하군. 함께할 2명을 고르도록."

엘리샤가 A반 생도들을 둘러보았다. 여러 생도가 기대의 눈빛을 해보였다. 엘리샤가 주도하는 발표라면, 아무리 못해도 묻혀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부류다.

반면 눈도 안 마주치는 생도들은 조금의 자신감도 없는 부류였다.

엘리샤는 그런 생도를 골랐다.

<14화>

"메튜 폰 율하 애니마스 생도."

"네, 네?!"

메튜가 뜨악하는 표정으로 제 이름을 발언한 엘리샤 생도를 보았다. 도도한 공녀님의 선택 능력에 장애가 있는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 엘리샤 생도님. 저는 자신 없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시, 시간 왜곡력 측정이라니, 저는 하나도 몰라요."

"괜찮다고요."

고압적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에 메튜는 울상이 되어서는 자포자기한 채 단상 앞으로 나갔다.

그러한 엘리샤의 번복 없는 선택은 핵티아 선생도 의외였는지.

"메튜 생도를 모욕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석차는 45등이다. 엘리샤 생도."

45명 중에 45등이면 더 말할 것도 없는 지뢰다.

- 야생 감각(Lv 1)이 불안한 기운이 엄습함을 느꼈습니다.

나는 고개를 내려 바닥만 보았다. 자신감은 둘째치고, 눈에 띄기가 싫었다. 엮이기도 싫었고. 보르드와 메리, 이 둘과 같은 조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가시다.

"나머지 한 명을 마틴 생도로 하겠어요."

"흠."

망할.

A반 전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머물렀다.

입학 10일 만에 쓰레기로 낙인찍혀서 소문이 파다하게 나버린 채 정학당한, 아카데미 측의 징계도 거부하다가 80일 만에 복학한… 공식 왕따 마틴.

그러나 거짓말같이 중간고사에서 기존 수석과 차석을 누르고 수석을 차지하고 첫 공략 평가에서 A-라는 준수한 성적을 받은… 반전의 마틴.

"…."

나는 말없이 앞으로 나갔다. 발표자의 지목은 거부할 수 없다. 아카데미의 룰이다.

가면서 보니 핵티아 선생의 복잡한 심정이 그의 눈빛에 잘 나타나 있었다.

"구성은 맞췄군. 그래, 그럼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앞에 보이는 인공 던전은 15년 전에 바리안 공국에 나타났던 타임카오스 던전을 재현한 복사본이다. 너희는 앞에 마련해놓은 '혼돈측정기'와 '시간측정기' 그리고 '마나측정기' 외 갖가지 장비를 이용해서 시간 왜곡력을 구해라. 지금부터 시작하면 된다."

엘리샤, 메튜, 마틴은 서로 마주 보았다.

대표인 엘리샤가 자신만만하게 이끌어가기 시작했으나.

"이제부터 누가 뭘 담당할지 정하겠어요. 우선 가장 어려운… 이봐요!"

가장 어려운 혼돈측정기 앞으로 마틴이 상의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엘리샤는 말없이 측정기 앞에 앉은 마틴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그래, 그거 너 하세요. 그다음 어려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혼돈 측정을 완료한 마틴이 시간측정기 앞에 앉았다.

엘리샤의 얼굴에서 차가운 분노가 묻어나왔다.

"너… 뭐 하는 거야."

서릿발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마지막으로 마나측정기 앞으로 향하는 마틴을 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나 측정까지 끝낸 마틴이 준비된 작성지 위에 공식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마틴 생도…!"

0을 뚫고 아래까지 내려간 냉랭해진 분위기에 메튜는 엘리샤의 눈치를 보았다.

"호, 혹시 측정값을 다 구한 건…."

"모르면 말이나 마세요, 메튜 생도! 왜 3명을 한 조로 하는 건데요! 하나의 측정값을 구하는 것도 어려워서 3명이 하는 거라고요! 현직 베테랑 3인조가 가장 쉬운 던전의 혼돈, 시간, 마나 값을 구해서 시간 왜곡력을 측정해도 5분이 넘게 걸리는…!"

"종료."

핵티아 선생의 선언에, 엘리샤가 홀로그램을 보았다. 마틴이 풀어놓은 시간 왜곡력 측정값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이, 엽견이…!'

엘리샤가 이를 악물었다. 혼자서 고작 1분 만에 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분명히 빨리 끝내고 들어가려고 대충 써놓은 거겠지!

곧바로 이의 신청을 하고 다시…!

"…어?"

아무리 보아도 틀린 구석이 없다.

궁술로 단련된 시야로 빼곡한 공식을 살펴보아도.

3개의 측정기 앞으로 가서 다시 측정해보아도.

어느 하나 틀린 점이 없었다.

엘리샤는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는 쪽의 신빙성이 더 높겠다고 생각했다.

"…거짓말."

"훌륭하다, 마틴 생도. 나보다 더 잘하는군. 발표자와의 협력은 없었지만…, 이걸로 좋다. 셋 다 원위치로."

엘리샤는 마틴의 뒷모습을 보았다.

'뭐야….'

원위치로 돌아가서 염세적인 무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볼 뿐인 엽견.

'뭐냐고.'

엘리샤가 아는 마틴이 아니었다.

분명 '내 덕을 봤으니 뭐 좀 내놓으셔야겠는데?'라거나 '쓸모없는 공녀 같으니'라는 말이라도 하는 게 마틴이었다.

'보르드의 말대로야.'

접점도 없고 친해질 생각도 없는 조원을 만난 사람 같았다. 엘리샤도 그렇게 행동한 적이 많았었기에.

'…짜증나.'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다 잊어버린 걸까?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마치 한 번 패배한 악역이 칼을 가는 모습처럼 보여서 도저히 가만둘 수가 없었다.

'…사람을 붙여야겠어.'

***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주인님!"

집에 돌아오자 라일락이 반겨주었다. 메이드복의 치마 양끝단을 잡고 살짝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절도 있고 부드러워서 마치 고개를 숙인 한 떨기 꽃 같았다.

"오늘은 어땠어? 별일 없었지?"

"네. 평소랑 똑같았어요. 매출 보고부터 드릴까요?"

"부탁해."

나는 라일락에게 조금 더 부드럽게 대해 주기로 했다. 그녀는 믿을 수 있다. 믿어보기로 했다.

"오늘은 두 번이나 전량을 매진했어요. 커피가 소문이 났는지, 단체 주문이 많아졌더라고요."

"으음? 그래?"

아무리 커피가 대박이 약속된 장사 아이템이라지만 성장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르다.

"네! 마탑인가, 하는 곳에서 마법사님들이 주문하셨더라고요."

라일락이 웃으며 희소식을 전했다.

이런 걸 들으면 카페를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말이야 좋지, 커피를 파는 사람의 수고가 얼마나 많을지는 안 봐도 뻔하니까.

"수고했어. 고생했네."

"괜찮아요. 주인님."

맑게 웃는 얼굴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마주하면 복잡한 생각은 다 가라앉고 꽃밭 위에 누워 봄 내음을 맡는 기분이 된다.

"아, 오늘은 제가 임페리움 뱅크에 가봤어요. 빈민가와 가깝긴 하지만, 번화가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괜찮은 점포가 있더라고요."

적극적으로 내 사업을 돕는 모습도, 저렇게 대견할 수가 없다.

라일락이 물어온 정보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괜찮네. 여기가 좋을 것 같아?"

"네. 주인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여기가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럼 내일 가서 알아봐야겠네."

마침 내일은 주말이다. 밀린 일들을 처리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