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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도가 죽고 나타난 시체는 총 두 구였다.

하나는 근육이 우락부락한 전사의 형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은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쓴 로브 차림의 시체였다.

둘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제단 위에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팔다리가 죄다 절단당한 상태라는 것.

둘 다 산 채로 제물이 되어, 대사도에게 흡수된 시체였기 때문이다.

댈런은 씁쓸한 기분에 침을 퉤 뱉고는, 두 시체를 회수했다.

[여섯 번째 은가면 사도의 시체]

- 빙결 주문을 사용하는 암살자의 시체다. 냉혹한 살해자라는 이명이 붙었으며, 피살자를 꽁꽁 얼린 채 팔다리부터 깨뜨리는 잔혹한 손속으로 유명해졌다. 그 악명으로 인해 역행의 사도들의 영입 제안을 받아 은가면 사도가 되었다. 대계 끝에 대사도의 제물로 바쳐졌다.

첫 번째는 은가면 사도의 시체.

설명을 읽은 댈런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완전 사이코 새끼였네."

아무리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때라지만, 사람 팔다리를 얼려서 부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라니.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 생각하기에는, 미친 놈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잘 뒈졌다, 새꺄.

댈런은 과거의 자신에게 진심어린 덕담을 건네며 시체 위에 손을 올렸다.

[여섯 번째 은가면 사도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기량 +1, 마력 +1, 급속 빙결(D)]

보상은 괜찮았다.

다른 계열의 주문 하나에, 부족했던 능력치들을 얻었다.

댈런은 다음 시체 위에 손을 올렸다.

[사로잡힌 대전사의 시체]

- 번쩍이는 흑철 갑옷과 파괴적인 양손검술로, 순은 거리에까지 명성을 떨친 금패 용병의 시체다. 악마를 소환한 대사도에게 패배해, 산 제물로 바쳐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부릅뜬 대전사의 시체.

팔다리가 잘린 처참한 몰골의 잿빛 시신이, 빛무리로 화해 그의 손 안으로 빨려들어온다.

[사로잡힌 대전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4]

미친. 근력?

보상을 본 댈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미친."

우드드득!

그리고 전신의 근육이 뒤틀렸다.

침묵의 밤(5)

꾸드드득!

우득! 우드득!

근육이 경련한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마치 독립적인 자아를 가진 것마냥 꿈틀거렸다.

피부를 찢고 나올 듯하다가, 다음 순간에는 내장을 압박하며 쥐어짠다.

댈런은 이를 악물었다.

치이이익!

왈칵 치솟는 핏물에, 코와 입에서 주전자마냥 김이 확 뿜어져나왔다.

눈앞이 새하얘졌다가, 다시 까맣게 암전되기를 몇 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여기서 밀리면 죽는다.'

죽고 싶지 않았다.

살려고 여태껏 발버둥쳐왔다.

살기 위해 돈을 벌고 의뢰를 수행했으며.

살기 위해 바위도 부술 주먹과 세 치 혀를 놀려, 멸망을 향해 다가가는 세계의 흐름을 뒤틀었다.

설령 죽더라도 악마와 피터지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해야지, 이렇게 시체 하나 날름 먹고 몸이 터져 뒈질 순 없었다.

"······!"

우드드드득!

경련하는 근육을 의지로 찍어누른다.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몸을 부여잡는다.

내장을 압박하는 근육을 주변의 다른 근육으로 밀어내고, 피부를 찢고 튀어나오려는 근섬유를 곁에 있던 근섬유로 붙잡는다.

'체력이 초인의 경지에 완전히 접어들기만 했어도······.'

그런 아쉬움이 스쳐지나가지만, 때늦은 후회는 필요없었다.

체력과 용혈은 나름대로 충분히 버텨주고 있었다.

남은 건 어떻게든 이 불균형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은 능력치를 모두 끌어모아 사력을 다하는 일뿐.

초인적인 감각과 지능으로 몸 안을 관조한다.

마력의 바람을 끌어와 근섬유를 붙잡고, 그동안 몸을 써온 기량을 총동원해 근육을 이완시켰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고.

"···허억."

정신을 차려보니, 낯익은 산골 오두막 앞이었다.

***

휘이이이―

칼바람이 찢어진 갑옷 속을 파고든다. 발목까지 쌓인 눈이 가죽신 터진 맨발에 밟혀 뽀드득거렸다.

"······."

댈런은 당혹감을 가라앉히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등 뒤로는 몇 걸음만 가면 깎아지듯한 절벽이 있었다. 정면으로는 오두막과 그 뒷마당이었다.

댈런은 천천히 걸었다.

뽀드득.

뒷마당의 정경을 보니, 어느 사냥꾼의 오두막 같았다.

가죽 건조대. 장작 패는 도끼와 그 곁의 눈 덮인 장작더미.

작은 동물을 해체할 수 있는 낮고 넓은 탁자와 그 위의 사냥칼, 그리고 손도끼까지.

스윽.

댈런은 손도끼를 가만히 집어들었다.

손끝에 착 달라붙는 익숙한 감각.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사용해왔던, 그리고 얼마 전에 하수도에서 기어이 부숴먹었던 낡은 손도끼였다.

'···스타팅 포인트군.'

게임이 시작하는 장소인, 산골의 어느 낡은 오두막.

이곳은 댈런이 이 세상에 떨어져, 처음 눈을 뜬 장소였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그는 분명 방금까지 대사도를 죽이고 시체를 회수하고 있었다. 왜 이곳에 떨어진 거지?

꿈인가? 아니면 시체 먹고 뒈져서 그대로 회귀?

턱을 긁적이던 댈런은 문득 감각을 확장시켰다. 그리고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이건 또 뭔···분신술이냐.'

그의 몸이 두 개였다.

하나는 시체를 회수한 직후의 모습 그대로, 폭증한 근력 수치와 이를 잠재우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는 육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설산 오두막에 떨어진 몸뚱이.

마치 가위에 눌린 듯, 저쪽의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둘 모두 그의 육신이었다.

그의 초인적인 감각도 어느 한 쪽이 환상이다 말해주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다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건, 이곳에서 무언가를 해결해야 그의 원래 육신 또한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

"···후우."

댈런은 한숨을 내쉬었다. 따뜻한 김이 시야를 훑고 지나간다.

자, 그래서 이제 어쩌라는 걸까.

고개를 들어보니 오두막 창문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원래라면 그가 이 땅에 떨어졌을 때, 오두막은 버려진 상태였어야 한다.

불은 전부 꺼져 있고, 사람이 떠난 지 한참 되어 냉기만이 남아있어야 할 오두막.

그게 스타팅 포인트 '버려진 오두막'의 기본 세팅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창문 너머로 넘실거리는 이질적인 빛이, 마치 그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끼이익―

댈런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건조하고 따뜻한 공기가 그의 피부에 부딪혔다.

오두막 안은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손때를 탄 나무 가구들. 구석의 작은 벽난로와 침대.

다만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침대 곁에 놓인 책상과 의자였다.

"······."

현대식으로 마감된 까만 책상. 푹신하게 등허리와 머리를 받쳐주는 게이머용 의자.

그리고 그 아래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최신형 컴퓨터와, 테이블 위의 모니터.

모니터 안에는 덩치 큰 야만전사 캐릭터가 서 있었다.

넓고 어두운 공동 안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야만전사.

한쪽 구석에 띄워둔 상태창에서 30이라는 근력 수치가 깜빡거리며 빛나는 중이었고, 하단의 알림창에 한 줄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단일 능력치가 최초로 30을 달성했습니다. 캐릭터가 작은 영역을 이뤘습니다.]

그 순간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댈런은 뒤를 돌아봤다.

[에이, 썩을. 왜 배달이 한 시간이나 걸려.]

거기에는 추리닝 차림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주말이라 씻지 않아 새집처럼 떡진 머리칼. 마찬가지로 주말이라 까슬하게 턱선을 뒤덮은 수염.

한 손에 캔맥주 네 개들이 묶음을 들고, 방금 배달받은 치킨을 다른 손에 든 남자.

그건 게임이 취미였던 회사원이자, 과거의 자신이었다.

[일시정지도 없는 거지 같은 게임이라니, 쯧쯧.]

남자는 혀를 차며 자연스럽게 댈런을 지나쳤다.

테이블 위에 캔맥주와 치킨을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몸을 묻는다.

남자가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게임을 다시 플레이했다.

한 손으로는 편하게 치킨을 뜯고 맥주를 마시며, 건성건성 몹을 죽이고 경험치를 쌓았다.

[다 식었네. 쩝쩝. 다음 퀘스트가 뭐였지?]

"······."

딸깍거리는 마우스와 다채로이 빛나는 모니터를 보며, 댈런의 머릿속 한켠에 아스라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죽어간 그의 캐릭터들. 그가 죽인 NPC들.

어쩔 수 없이 멸망한 세계와 그가 포기한 세계들.

아니, 애당초 클리어할 생각조차 없던 회차들.

악의 축에 가담한 회차들은, 그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수단이었다.

전여자친구와 헤어졌던 날에는, 악룡의 수하로 들어가 온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기도 했었다.

까득.

저도 모르게 악문 이가 거칠게 부딪힌다.

원인 모를 죄악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수천만, 수억의 생명이 그의 손끝에서 스러진 것만 같은 기분.

그저 데이터 쪼가리인 줄 알았다는 항변은, 살아 숨쉬는 세계를 겪어온 경험 앞에서 한없이 작아져 구석으로 밀려났다.

네가 지금껏 살아온 세계를 부정할 수 있나?

없다면, 네가 지금껏 죽여온 세계는? 그 주민들은?

그저 재미를 위해, 네 손으로 직접 죽인 영웅들은?

댈런은 문득 자신이 입술을 꽉 깨물고 있음을 알아챘다.

주륵.

찢어진 입술 아래로, 턱선을 타고 흐르는 선혈.

치이이······.

그리고 억센 치악력과 용혈의 재생 인자로, 아물고 찢어지길 반복하는 입술.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눈앞에 어른거리자, 댈런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모니터 앞에 앉은 남자의 모습.

그건 그의 과거이자, 그를 집어삼킬 듯 다가오는 죄책감의 실체였다.

그 앞에서.

"후우."

댈런은 마침내 깊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

"어쩌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난 살려고 발버둥친 죄밖에 없는데.

그리고 지금도 뒈질 생각은 없어, 씹새야.

픽!

모니터가 꺼졌다.

그리고 눈앞이 암전됐다.

***

"······시발."

댈런은 눈을 떴다.

약간 어질어질한 게, 에버랜드에서 롤러코스터를 한 세 번쯤 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지금의 육신이라면 세 번이 아니라 삼백 번을 타도 별다른 감흥이 없을 것이다.

애당초 20대 초반 이후로는 가본 적도 없었으니, 기억의 왜곡일지도 몰랐고.

철퍽.

발밑에 악마의 피와 살점이 밟혔다. 댈런은 문득 시야가 좀 더 밝아진 걸 느꼈다.

뭐지? 시체 회수할 때 감각 능력치가 올라가지는 않았는데.

'상태창.'

자연스레 상태창을 띄우고 나니, 그제야 변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

이름 : 댈런

레벨 : 9

[근력 : 30] [기량 : 16] [체력 : 16]

[감각 : 17] [지능 : 19] [마력 : 14]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용혈의 재생 인자(C), 도약(E), 불꽃 화살(D), 급속 빙결(D)

――――――――

시체 회수로 얻은 능력치 이외에도, 모든 능력치가 1씩 더해져 있었다.

근력만 예외였다. 근력은 다행히도 30에 고정된 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킬 숙련도 또한 전반적으로 눈에 띄게 올라 있었다.

못해도 5퍼센트 이상. 도약이나 불꽃 화살 같이 숙련도가 낮은 스킬의 경우 10퍼센트도 넘게 증가한 상태였다.

'이런 건 처음이군.'

레벨업과 시체 회수 이외의 경로로, 이런 급격한 성장을 이룬 건 처음 있는 일.

애당초 시스템과 별개인 성장 자체가 겪어보지 못한 경우였다.

'추측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다.'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오두막의 모니터 안에서 봤던 알림창이 힌트였다.

'작은 영역'을 이뤘다는 알림창의 메시지.

영역 개념은 게임 설정상으로 여러 번 봤었지만, 실제 시스템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내용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게임이 현실이 된 이 세상에서, 그런 자잘한 설정들이 꽤나 중요하다는 건 이미 여러 번 겪어서 알고 있는 바.

'노인장한테 한 번 물어봐야겠군.'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 펠버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댈런의 뛰어난 기억력은, 그가 처음에 자신을 소개했던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작은 영역을 일궈낸 대지술사랬지.'

물론 당장 물어볼 건 아니다. 몇 번의 전투와 폭증한 근력을 잠재우는 일로 인해,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누적된 피로는 언제 그의 의식을 끊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쉬는 게 먼저였다.

덜그럭.

댈런은 부러진 검과 널브러진 방패, 그리고 도끼를 주워들었다.

제물로 바쳐진 시체들을 뒤적이니, 경비단의 배신자 지휘관이 몇 명 더 나왔다.

댈런은 놈의 옷을 벗겨, 부러진 검 조각들과 걸레짝이 된 방패를 싸매 어깨에 걸쳤다.

도끼는 허리띠에 끼우고, 넝마에 가까워진 갑옷 끈도 넉넉하게 풀어주었다.

찰박.

댈런은 피바다 위에 파문을 남기며 공동을 빠져나갔다.

그의 찰박거리는 발소리를 마지막으로, 공동에는 어두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

"댈런! 돌아왔구만."

펠버가 손을 흔들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역시 노인장. 피 튀는 전투가 끝나고서도 누구보다 정정하시군.

"그래. 돌아왔소."

"이쪽 싸움은 조금 전에 정리되었네. 걱정되어 나 혼자라도 내려가볼까 생각했었지만···그럴 필요까진 없었나 보군. 다행일세."

댈런은 대답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펠버의 말대로, 동굴 입구에서 벌어진 전투는 방금 막 끝난 듯했다.

"으, 으으으···."

"포션! 포션 가져와! 빨리!"

"커헉. 컥, 살려줘······."

부상자들의 비명과 그들을 돌보는 이들의 고함이 메아리친다. 피비린내와 약초 냄새가 진동했다.

특별한 광경은 아니었다. 전투 이후에는 으레 펼쳐지곤 하는 모습이었으니까.

오히려 마물과의 전투였음에도, 사망자가 많지 않다는 게 놀랄 점이었다.

'침묵중대원 셋에, 마법사가 둘인가.'

댈런의 뛰어난 감각은 대략 그 정도가 죽었다고 말해주었다.

부상자는 그보다 좀 더 많아보였다. 그 숫자는 펠버가 말해주었다.

"사망자 다섯에, 부상자는 경상자를 제외하면 스물하나일세. 금방 치료가 끝날 테니 걱정은 말게나. 마탑이 함께한 전장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중상은 많지 않으니."

펠버의 말마따나, 중상자들 중에서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상태가 악화되는 낌새가 보이기만 하면, 냅다 마탑제 재생 포션을 들이붓고 있는 덕분이었다.

"끄아아아악!"

"아아악! 죽을 것 같아!"

소리만 들어보면 거의 수십 명씩 죽어가는 것 같기는 했지만. 펠버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포션 치료가 원래 좀 아픈 법이지."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게임에서도 재생 포션을 전투 중에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사용하자마자 어마어마한 고통 디버프가 걸려서, 전투 속행이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

물론 포션 하나로 모든 치료가 가능한 건 아니었기에, 멀쩡한 마법사들과 침묵중대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상자들의 치료를 돕고 있었다.

손의 핏자국과 갈색 머리칼에 맺힌 땀방울을 보아하니, 펠버 역시 댈런이 오기 전까지 그들과 함께였던 듯했다.

원로 마법사쯤 되면 치유 주문에도 능숙할테니, 재생 포션만으로는 처치하기 힘든 부상에 큰 도움이 되겠지.

"이래저래 신세를 많이 지는군. 고맙소."

"신세를 진 건 자네가 아니라 침묵중대와 청동 경비단일세. 그리고 우리도 얻어가는 게 있으니 신경쓸 것 없다네. 가끔은 이런 실전도 겪어줘야 깨달음이 막히지 않거든."

펠버는 로브 소매로 땀을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아, 침묵중대장은 저기 잠들어 있네. 은가면 사도와의 싸움에서 중상을 입어, 포션으로 치료한 뒤 안정을 취하는 중이야. 자네에게는 신세 많이 졌다면서, 꼭 사례하겠다 전해 달라 했네."

사례라. 금화 많이 없다면서. 댈런은 낮게 웃었다.

"사도는?"

"침묵중대장이 직접 죽였다네. 내가 아는 그답지 않게 잔혹한 손속으로 마무리하더군. 솔직히 놀랐네."

"저마다 사연이 있는 법이지."

댈런이 말했다. 펠버는 갈색 수염을 움찔거리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맞네. 사연 없는 이가 어디 있겠나."

"원로 마법사님!"

그때 한 마법사가 펠버를 급히 찾았다. 환자에게 포션이 잘 듣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펠버는 실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달려갔다.

"이런, 마물의 부러진 발톱이 깊이 박혀서 그런 거야. 먼저 제거하고 치료해야 하네. 엘르―즈이툼."

그의 나지막한 주문에 땅에서 여섯 손가락 달린 손이 올라온다.

흙의 손은 펠버의 의지에 따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환자의 환부를 헤집었다.

댈런은 그가 주문을 응용해 외과적 수술을 하고, 포션과 치유 주문으로 처리를 하는 모습까지 한동안 지켜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갈 시간이군.'

그는 동굴을 걸어나가며 잠든 가웨인을 발견했다. 그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음에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아마 가족의 원수를 제 손으로 갚아서겠지.

팔다리가 다 잘려나간 은가면 악어인간의 시체는, 저 구석에 따로 보존되어 있었다.

타다닷.

댈런은 곁을 스쳐지나가는 한 젊은 마법사의 귀에, 지나가듯 속삭여주었다.

"원로 마법사께서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내가 봐도 다 티나니까."

움찔.

마법사가 화들짝 놀란 순간, 로브 아래의 머리가 금색이 되었다가 황급히 다시 갈색으로 물든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가보라는 의미로 그의 등을 툭툭 쳐주었다. 마법사는 잰걸음으로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이름이 토미였나. 이 어린 마법사는 하수도 사건 이후에도 아직 철이 덜 든 것 같았다.

'펠버가 알아서 잘 교육하겠지.'

어디까지나 사제지간의 일. 그가 간섭할 영역이 아니었다.

몰래 따라온 걸 내버려뒀다는 건, 추측하건대 그만큼 이곳에서 많은 걸 배워가게 할 생각이었다는 것이겠지.

철 없는 소년이 철이 들기 위해서라면, 피 튀기는 전장만큼 좋은 장소도 없긴 했다.

마법사건 농부건 간에, 떳떳하게 살아온 노인들은 언제나 지혜로운 법이다.

저벅.

동굴 밖으로 나오니 동이 트고 있었다.

저 멀리 청동 성벽 너머, 울긋불긋 고개를 내미는 태양을 보며 댈런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지부에 들리겠네! 얼굴 한 번 보세나!"

등뒤에서 소리치는 원로 마법사의 목소리에, 그는 손을 들어 휘적휘적 저어주었다.

오두막에서 치맥을 보고 와서 그런지, 자기 전에 시원한 맥주나 한 잔 하고 싶었다.

악마의 성검(1)

댈런은 여관에서 일주일을 푹 쉬었다.

근력을 잘못 써서 고생한 게 벌써 세 번째. 그중에도 이번이 가장 후유증이 심했다.

고블린을 맨손으로 찢어발긴 첫 번째야, 그냥 약한 근육통이 며칠 갔을 뿐이었다.

당시에는 용혈의 재생 인자도 없었음을 생각하면, 그저 약간 삐끗한 수준이었던 것.

상회장을 반토막으로 잘라버린 때는 조금 심각했다. 하루종일 곯아떨어졌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세 번째인 지금은.

뚜두둑!

"···썩을."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만성적인 근육통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중세랜드. 파스 하나가 없어서야."

댈런은 투덜거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거대한 덩치에 침대가 끼익거리며 신음을 토했다.

그래도 지난 일주일간, 댈런의 몸은 많이 호전된 상태였다.

첫 사흘은 꼼짝없이 침대에서 곯아떨어졌다.

몇 차례나 죽을 정도로 망가진 몸을, 용혈의 재생 인자로 끊임없이 재생한 대가였다.

사실 나흘째부터는 근육통이 좀 있긴 해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댈런은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왠지 그러고 싶어서였다.

'쉼이 필요하긴 했지.'

댈런은 뻣뻣한 어깨를 주무르며 생각했다.

이 도시에 도착한 뒤, 말 그대로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첫 시체를 회수하고, 시에나의 의뢰를 받고.

하수도의 마법사를 시작으로 은가면 사도들을 하나씩 처리하다가, 놈들의 대계에 휘말려 한바탕 전쟁을 벌이기까지.

많은 일들을 겪었고, 많은 것을 얻어낸 몇 주였다.

자신을 향한 작은 보상의 의미로라도,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시간은 꼭 필요했다.

'···너무 많이 빈둥거린 것 같긴 한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댈런은 고개를 털었다.

왜, 지구의 정신과 의사들도 쉼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나.

전문가가 괜히 전문가가 아닌 법이다.

꼬르르르륵.

"······."

아침부터 아주 대차게 울어대는구만.

댈런은 배를 슬슬 쓰다듬으며 방을 나섰다.

타다닥. 타닥.

널찍한 거실에, 난롯불이 타닥거리면서 타오르는 소리만 맴돈다.

찻주전자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걸린 채 따뜻한 온도를 유지했고, 탁자 위에는 나름 진수성찬이라 해도 좋을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이곳은 칼과 방패 여관에서 가장 좋은 방이었다. 심지어 숙박비도 공짜.

당연히 원래 공짜는 아니었다.

갈리오스 상단주인 볼크마 갈리오스가, 댈런 대신 납부하는 방식으로 머물고 있는 것.

이번 일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가 그인 만큼, 나름대로 은혜를 열심히 갚아보겠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역행의 사도들을 쓸어버리는 과정에서, 댈런이 텔리아 상회를 무너뜨리며 근방 상권은 한바탕 폭풍을 겪었다.

상회가 독점하던 상권은 조각조각 갈라져 다른 상인들에게 뿌려졌고, 수완 좋은 갈리오스 상단주는 이 기회를 놓칠 인물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상단의 몸집은 못해도 배 이상 불어났다던가.

시에나가 보내준 편지에 의하면, 앞으로 몇 년 안에 갈리오스 상단이 이전 텔리아 상회의 위치를 대신할 가능성도 있었다.

어쨌든 그만큼 큰 떡고물을 얻어먹게 되었으니, 볼크마는 댈런에게 무엇이라도 더 해주지 못해 안달인 상황이었다.

정작 댈런이 일주일동안 문을 걸어잠그고 아무도 만나주지 않아, 문전박대만 몇 차례 당하고 말았지만.

"음. 맛있군."

댈런은 아침을 먹으며 시에나가 남긴 편지를 뜯어보았다.

빵조각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진, 척 보기에는 치즈조각인지 종이인지 구분하기 힘든 편지.

시에나는 댈런이 방에 칩거하는 사이, 급변하는 도시 정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하루에 한 번씩 보내주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도 이번 일을 통해 간접적으로 얻어간 것이 많을 테니, 일종의 서비스 개념인 것.

호텔 조식과 함께 신문을 받아보는 느낌이라, 묘한 향수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당신 이름으로 온 의뢰들 때문에, 지명의뢰함이 터지기 직전이야. 거기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얼굴도 안 비추던 거물들이 술집을 몇 번씩이나 방문하고 있어. 만약 조만간 들를 생각이라면 조심해.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꽤 늘었으니까.」

이거 본의 아니게 연예인이 되어버렸군.

댈런은 편지를 반으로 접으며 낮게 웃었다.

그는 접은 편지를 난롯불에 던져넣고 아침을 마저 먹었다.

이 최상급 방에는 식사까지 룸서비스로 제공됐다.

물론 가격이 꽤 나갔지만, 볼크마가 내는 것이니 상관은 없었다.

콩과 양파, 고기가 듬뿍 들어간 스튜가 작은 솥째 자리했고, 그 곁에는 아침에 막 구워낸 빵이 종류별로 한 덩이씩 놓여 있었다.

큰 그릇에 가득 담긴 샐러드와, 북부 지구에서 직송해온 듯한 생선 구이까지.

마무리는 얼음을 가득 채운 시원한 맥주 한 잔이었다.

"크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후식으로 곁들여진 제철과일까지 입에 털어넣은 댈런은, 물수건으로 손과 입을 슥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푹 쉬었으니, 다시 바쁘게 움직일 시간이었다.

일주일동안 방구석에서 칩거하는 바람에, 밀린 일정이 상당히 많은 상황.

'일단 까마귀 둥지부터 들러볼까.'

댈런은 천옷 위에 허리띠를 걸치고, 손도끼를 대충 꽂아넣었다.

시에나가 저렇게 편지를 남길 정도면, 그의 명성이 도시 전역으로 알음알음 퍼지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숨어다니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댈런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봐야 파리들은 계속 꼬여들 테니까.'

어차피 앞으로 그의 명성은 늘어만 갈 터.

곁에서 뭐라도 얻어먹으려는 이들 역시, 별다른 조치 없이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만 날 것이다.

놈들로 인해 무언가 잘못되는 걸 사전에 방지해두기 위해서라도, 이 기회에 확실하게 선을 그어둘 필요가 있었다.

'파리한테는 충격요법이지.'

어디 파리채 한 번 휘두르러 가 볼까.

댈런은 허리춤의 도끼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방을 나섰다.

***

그날 오후. 청동 구역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남부 지구의 대로변.

느지막한 오후의 붐비는 인파 사이를 뚫고, 댈런은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자박. 자박.

판석이 점점 사라져 흙길이 되어가고, 횃대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한편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건달이나 부랑자들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시간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평소의 모습과 비교하면 꽤나 느슨한 분위기.

얼마 전의 폭풍 같은 일이 지나간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 듯했다.

경비단이 뒷골목을 한바탕 들쑤시고 갔으니, 알아서 한동안은 몸을 사리는 것이겠지.

뒷골목의 실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청동 경비단이 뒷골목을 방임하는 건 인력난 때문이지, 결코 그 자체의 무력이 약해서가 아니라는 걸.

스윽.

댈런은 문득 품속에 손을 넣어 손바닥만 한 패 하나를 꺼내들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금박 입힌 용병패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시에나의 술집으로 향하기 전, 그는 청동 경비단에 들렀었다.

고객이 사례를 하겠다고 했으면, 찾아가서라도 받아내는 게 용병의 도리니까.

'용병 길드와 이야기를 해서, 이번 일을 귀관이 청동 경비단의 공식 의뢰를 맡아준 것으로 처리했소. 귀관의 공로에는 미치지 못하는 약소한 보상이지만, 부디 받아주시길 바라오.'

침묵중대장 가웨인이 그렇게 말하며 건넨 게, 바로 이 금패와 금화 서른 닢.

이로써 시체를 잔뜩 회수해 일신의 능력이 향상된 것 이외에도, 이번 일에 대한 물질적인 보상 역시 주어진 셈이었다.

돈이야 많을수록 좋지.

명성이나 지위도, 잘만 다루면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자원이었고.

댈런은 금패와 함께 받은 돈주머니의 묵직한 감촉을 즐기며, 천천히 시에나의 술집으로 걸어갔다.

[까마귀 둥지]

[영업시간 : 오후 4시 ~ 오전 2시]

그렇게 영업시간이 약간 앞당겨진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상 외의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번에 갈리오스 상단이 포목업 쪽으로 확장을······."

"경비대 몇 곳이 감사 대상으로 올랐다는군. 글쎄, 경비대장이 배신자였다지 않나?"

"필로폰네 과수원 가봤나? 어허, 아직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구먼."

테이블마다 두셋 이상씩 꽉꽉 들어찬 손님들.

왁자지껄한 가운데 풍겨오는 연초와 주향(酒香).

영업시간이 앞당겨졌으니 술집 특유의 시끌시끌함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평소보다 손님의 숫자가 눈에 띄게 많은 것 역시 사실.

그 원인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끼이익.

술집을 가득 채우던 소란함이, 반지하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댈런의 발걸음에 따라 썰물처럼 밀려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동부에서 왔다는···."

"······쉿."

"······."

왁자지껄 오가던 말소리가 줄어든다.

사람들의 이목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뚜벅. 뚜벅.

댈런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테이블에 다가갈 때쯤에는, 술집에 완전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단 한 사람을 바라보는 수십 쌍의 눈동자들.

"멜론드 하이랜더 한 잔."

댈런은 그 시선의 집중이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레 바텐더에게 술을 주문했다.

달그락.

잔을 닦던 버번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술을 따른다.

그동안 댈런은 주점 안을 한 번 슥 둘러봤다.

"큼! 크흠! 그래서 이번 거래가 말일세···."

"북부 지구에 양식장을 확장한다는 소문, 그게 진짜란 말인가?"

그 무던한 시선에, 사람들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저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래. 서로 좀 편하게 마시자고.

댈런은 픽 웃으며 버번이 건네주는 잔을 받았다.

잔을 홀짝이며 좀 더 관찰해보니, 다른 손님들 역시 술병이며 안줏거리를 잔뜩 시켜놓은 채였다.

고급 양주나 포도주,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말린 과일이나 과자 따위의 안주들.

'술집 매상이 못해도 배는 올라갔겠군.'

댈런은 독한 술로 목을 축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 누군가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이, 청동 구역의 유명한 영웅 아니신가! 거 얼굴 한 번 보기 참 힘드네 그려!"

취기에 약간 절여진 듯,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다가온다. 댈런은 무시하고 가만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 사이 남자는 친근한 척 댈런의 어깨에 한쪽 팔을 걸치며, 다른 팔꿈치를 바 테이블에 턱 하고 기댔다.

뭐야 이 새끼는?

"바텐더! 그 뭐냐, 멜랑드로 하이랜더? 나도 이 용병이랑 같은 거 한 잔 부탁하겠어."

댈런은 뚱한 눈으로 남자를 돌아봤다.

고급스런 원단의 제국식 옷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허리띠춤의 장식 화려한 검. 기름을 잔뜩 바른 머리칼과 수염. 남부 특유의 혀 꼬부라진 발음까지.

뭐 하는 놈팽인지는 단박에 결론이 나왔다.

'제국 출신의 젊은 귀족이군. 어설프고 경험 없는 귀족가의 자제.'

갓 스물이나 넘겼을까.

수염을 길게 길러 연륜 있어보이게 노력한 티가 나는 젊은 귀족은, 댈런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

"자네, 은패 용병 주제에 명성이 아주 자자해! 하지만 아무리 이름값이 높다 해도, 그렇게 낯짝을 두껍게 깔면 안 되는 법이야."

넘치는 자신감을 가장한 목소리.

그러나 그 속에 숨겨진 초조함을 읽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댈런은 귀찮아지기 전에 날파리를 쫓아내기로 했다.

"자네, 내가 자네를 찾으러 이 술집에서 헛걸음을 몇 번이나 한 지···."

"곱게 술이나 마시지."

낮고 굵은, 위협적인 목소리.

젊은 귀족이 움찔하며 말을 멈춘다.

"어, 어어···."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다가, 혼자 발이 꼬여 엉덩방아를 찧었다.

콰당탕!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는 젊은 귀족.

그 뒤에서 살기등등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던 호위기사는, 단번에 검을 뽑아들고서 소리쳤다.

"네 이놈! 감히 누구 몸에 손을 댔는지 아느냐! 이분은 대제국의 충성스러운 세브론 남작, 그 남작가의 삼남이시다!"

아주 쌍으로 지랄을 해대는구만.

댈런은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얼음만 남은 잔을 내려놓은 그는, 호위기사를 똑바로 노려보며 사납게 미소지었다.

"글쎄. 철없는 어린애라는 건 알겠는데."

"감히 뚫린 입이라고―"

그래. 이렇게 나오시겠다는 거지.

예상대로 호위기사는 검을 휘둘러왔고, 댈런의 시간은 순간 느려졌다.

시이이이―

검끝이 유려하게 그리는 호선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게 보인다.

댈런의 극도로 예민한 감각과, 그 감각이 받아들이는 자극을 모두 감당하고도 남을 지능 수치로 말미암은 현상.

그 여유로운 간극 속에서, 댈런은 충분히 고민할 수 있었다.

이 놈을 여기서 죽여?

아니면 적당히 패서 내쫓아?

'사실 죽여도 큰 문제는 없는데.'

말이 귀족이지, 제국에는 남작 호칭이 붙은 사람만 백 명이 넘는다.

거기다 이곳은 제국이 아닌, 팔시온을 위시로 한 도시연합의 심부.

남작 본인도 아닌 아들, 그것도 셋째 아들의 호위기사 정도면 죽인다 해서 큰 후환이 뒤따르지는 않을 테였다.

'그렇다고 사람을 막 죽이는 야만인 이미지는, 한 번 쓰면 벗기 참 까다롭단 말이지.'

다만 고민하는 이유는 역시 평판이었다.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 댈런의 소문을 듣지 못한 이는 한 명도 없을 터.

쉽게 말해, 여기서 댈런이 취하는 손속에 따라 그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결정된다 보면 되었다.

쉽게 보이는 건 최악이다.

허나 마냥 손속 잔인한 야만인으로 보이는 것도 차악.

최선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찰나, 댈런의 느려진 시간을 가르고 들어오는 다섯 개의 기척이 있었다.

댈런은 속으로 웃었다.

역시, 집주인이 해결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

퍼버버버벅!

원래대로 되돌아온 시간감각 속.

호위기사의 팔다리에 정확히 다섯 발의 화살이 연달아 꽂혔다.

좌중의 시선이 댈런에게서 화살이 날아온 쪽으로 쏠린다. 댈런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또각.

굽 낮은 구두가 마룻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숙련된 손놀림으로 5연발 석궁에 화살을 끼우는 긴 흑발의 여성.

"어처구니가 없네. 싸구려 술만 쳐마시면서 며칠째 빌붙어앉은 주제에, 내 손님한테 무기까지 휘둘러?"

"끅, 끄윽······."

술집의 주인이자 정보상인 시에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장전을 끝마쳤다.

그녀는 팔다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호위기사의 머리를 지그시 짓밟은 채, 그 가슴팍에 석궁을 겨누며 말했다.

"진상 짓도 정도껏이지. 제국의 기사님 눈에는 미궁도시가 무슨 쥐새끼 소굴로 보이나 봐?"

악마의 성검(2)

장전된 석궁의 시위만큼이나 팽팽하게 당겨진 술집의 분위기.

어느 순간에 방아쇠가 당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공기 속.

"시에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댈런이 입을 열었다.

"······."

그 말에 술집의 주인, 시에나가 댈런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미간에 주름이 팍 들어간 채, 사납게 째려보는 눈빛.

댈런은 그 시선을 무심한 표정으로 받아내며, 잔에 남은 얼음을 오도독 씹었다.

이거 맛있네. 마법으로 얼렸나?

"······이번만 봐주는 건 줄 알아."

시에나는 분한 듯 숨을 씩씩거리며, 바닥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호위기사에게 속삭였다.

또각.

그녀는 기사의 머리를 짓밟던 구둣발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선 아직까지도 자빠져 있는 젊은 귀족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야, 네 호위기사 데리고 내 술집에서 꺼져. 애먼 곳에서 기사 하나 잃고 너네 아버지한테 혼쭐나기 싫으면, 빨리 신전이건 약재상이건 찾아가는 게 좋을 거야."

"으, 으어. 아, 알았다. 쏘지 마."

"당장 꺼져. 셋 센다. 셋, 둘,···."

"으아아아!"

줄어드는 숫자에, 젊은 귀족이 허둥지둥 일어난다.

그는 팔다리가 화살에 꿰인 자신의 기사를 부축하더니, 쏜살같이 술집을 빠져나갔다.

쿵.

두 사람이 떠나는 걸 끝까지 노려보던 시에나는, 술집 문이 닫히자마자 몸을 휙 돌려서 뒷문으로 향했다.

"댈런, 좀 늦었네. 당신 앞으로 온 지명의뢰들에 관해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러지."

와자작.

댈런은 잔 안에 남은 얼음을 입에 털어넣은 뒤,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이 뒷문으로 빠져나간 뒤.

스윽. 스윽.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 술집 안에는 한동안 버번이 잔 닦는 소리만 들렸다.

정적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까 하던 거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말일세."

"동부 지구에서 사교도 조직이 토벌되었다는 소문 들었나?"

하나 둘.

손님들은 다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웬 놈팽이 하나가 봉변을 당한 거야, 그 놈의 팔자일 뿐.

청동 구역의 뒷골목 정보상까지 찾아온 손님들은,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 하나 죽는 거야, 이 동네에서 으레 있는 일.

겁을 집어먹기에는 지나치게 사소한 사건이다.

오히려 대부분은 댈런과 시에나의 반응을 곱씹으며, 어떻게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댈런의 몸값은 좀 더 높게.

접선하는 경로는 되도록 까마귀 둥지의 정보상을 통해서.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은, 그런 계산과는 전혀 무관한 모습이었다.

"동부 지구 7구역은 쇠퇴기로 접어든 게 확실하다더군."

"침묵중대가 신규 인원을 차출하고 있다던데. 아는 바가 있는지···."

여느 때처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떠도는 소문과 정보들을 교환하는 손님들.

철벅. 슥. 슥.

그들 사이에서, 버번은 말없이 바닥의 핏자국을 대걸레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

"연기는 만족하나?"

달칵.

시에나의 사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댈런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시에나는 구두굽을 경쾌하게 또각거리던 발걸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생각 이상이던데? 겉이 곰 같아서 그렇지, 속은 누구보다 늑대라니까."

"욕처럼 들리는군."

"그럼 늑대가 아니라 뱀이라고 해줄까?"

"그건 쌍욕이고."

시에나가 깔깔 웃었다. 방음이 잘 된 정보상의 사무실은 그렇게 웃어도 밖으로 작은 소리조차 새어나가지 않았다.

찻잎 담은 통을 달그락거리는 그녀를 두고, 댈런은 길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가구를 몇 개 새로 들여왔군."

"맞아. 누구 덕에 술집 장사가 아주 잘 됐거든. 경비대 지휘관들이 절반 넘게 모인 곳에서, 대놓고 음지의 정보상을 팔아넘기는 건 무슨 매너야?"

"덕분에 손님이 늘었잖소. 술집에나, 정보상에나."

댈런이 낮게 웃었다. 시에나는 잔 두 개와 다과를 내오며 말했다.

"···덕분이긴 하지. 내가 빚지는 걸 참 싫어하는데, 당신한테는 벌써 두 번이나 졌네."

청동 구역의 고객들이 사교도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해 준게 첫 번째.

그 과정에서 정보상의 입지를 크게 늘려준 게 두 번째.

시에나가 그렇게 덧붙이는 사이, 댈런은 진중한 태도로 잔을 들고는 향을 음미했다.

"음."

커피 향기.

오랜만이었다.

지난 몇 주간 워낙 바빴던 나머지,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가 보내준 원두를 이제서야 맛보게 된 것.

시에나는 그런 그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천천히 운을 띄웠다.

"어떻게 갚을까. 뭘 원해?"

댈런은 대답 없이 찻잔을 기울여 한 모금 머금었다.

뭉근하게 퍼지는 고소함과, 입 안쪽으로 퍼지는 씁쓸한 각성효과.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은은하게 남는, 살짝 시큼한 잔향까지.

이거 진짜 죽여주네.

한동안 그 향과 맛을 즐기며 침묵을 지키던 댈런은, 시에나가 잔을 반쯤 비웠을 무렵에서야 입을 열었다.

"난 고객이오. 그쪽은 정보상이자 의뢰 중개인이고."

"그렇지."

"그럼 그냥 맡은 일을 잘 해주면 되는 거요. 그러다보면 언젠가 내가 빚을 질 날이 오겠지."

시에나는 말없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사무실에는 한동안 두 사람의 홀짝거림만 맴돌았다.

그 정적 속에서, 댈런은 문득 생각했다.

'뱀이라.'

이 게임에 있어서 능숙함과 교활함으로 따지자면, 절대 틀린 비유는 아니겠지.

그는 스스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음의 빚이라는 독을 주입해왔으니까.

'영입 대상인 영웅 후보들에게, 심적인 채무감만큼이나 치명적인 독도 없지.'

단순한 돈이나 물건으로 누군가의 호감을 사는 건 쉽지 않다.

그보다 효과적인 건 거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적당한 수준의 부담과 채무감.

그건 수백 회차가 넘도록 이 게임을 거듭하면서, 댈런이 NPC들을 영입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그 게임이 살아 숨쉬는 세계가 되었다 해서, 그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르베론에게는 채무관계를 해결하고 좋은 입지의 대장간을 열어줌으로 빚을 지웠고.

볼크마에게는 목숨을 구해주고 상권을 장악하게 도와줌으로써 손에 족쇄를 채웠다.

펠버의 제자를 구해주고, 가웨인에게 복수할 기회를 열어준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그리고 시에나 에클라시아는, 최후반부까지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NPC중 하나지.'

가웨인이나 르베론 아하킴이 영입 1순위라면.

시에나는 단언컨대 영입 0순위다.

아직까지 본신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서도, 음지를 거머쥔 정보상이자 준수한 전투원인 그녀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 비밀이 하나씩 드러날수록,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더욱더 큰 전력이 되어갈 테지.

물론 그 전제에는 그녀의 기질적인 성향이 기반되어 있기도 했다.

한 번 자기 사람이라 확정한 순간부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배신하지 않는 고지식한 성향.

'호감도 올리기가 미친듯이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어느 지점만 넘으면 그 다음부터는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니까.'

그리고 이 게임을 오래 플레이한 고인물의 감은, 이미 그녀의 호감도가 그 지점에 근접하게 도달했다고 말해주었다.

근래 들어서 끊임없이 터져나온 사건들과, 그 사이 보여준 댈런의 모습이 큰 영향을 미쳤겠지.

달칵.

댈런은 깨끗하게 비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거진 다 넘어온 상태라면, 여기서 굳이 더한 부담을 줄 필요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슬쩍 느슨하게 풀어주는 게 더 나은 선택지.

조금 천천히 돌아가더라도, 확실하게 사로잡는 게 사람의 마음을 얻는 열쇠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시오."

"···뭐?"

"역행의 사도들과 싸울 때, 놈들의 동향을 알아내는 데 크게 일조하지 않았소. 저런 날파리들을 일주일 씩이나 가게에 붙잡고 있던 것도, 저놈들이 나에게 직접 꼬이지 않도록 편의를 봐준 것일 테고."

시에나가 댈런이 올 때까지 저런 진상 손님을 방치한 건, 그녀 자신의 이득보다는 댈런을 위해서가 컸다.

사실 그녀 정도 되는 사람이면, 제국 저 구석 영지의 남작가 아들 정도야 크게 꺼릴 상대가 아니다.

그 호위기사가 아니라 본인의 머리에 석궁을 박아버렸다 해도, 까마귀 둥지의 이름으로 심심한 유감 한 번 표하면 그만일 테니까.

그럼에도 댈런이 올 때까지 그런 진상 손님을 쫓아내지 않고 있었다는 건 뭘 의미하는가.

'일종의 거름망이자 미끼를 자처한 거지.'

날파리들이 댈런에게 직접 꼬이지 않게, 귀찮음을 감수하고 중간에서 걸러주는 거름망.

어차피 그녀가 나서서 쫓아내봐야, 날파리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그 목표가 댈런 본인으로 바뀔 뿐.

어쩌면 그가 묵고 있는 여관에서 저런 진상 짓거리를 한 번 더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여관까지 찾아왔다면, 그의 손에 한 번 더 두들겨 맞을 뿐이었겠지만.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고맙지."

달칵.

그녀가 빈 잔을 내려놓았다.

"다만 나라고 손해 볼 행동이었던 건 아냐. 내가 얻어가는 것도 분명 있으니까."

시에나는 그렇게 말하며 잔 두 개를 가지고 일어섰다.

항상 한 수를 숨겨두는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오늘따라 유독 솔직한 태도다.

이 역시 그녀의 신뢰도가 임계점에 가까워졌다는 증거.

새로 커피와 차를 내리는 그녀를 보며, 댈런은 말없이 낮게 웃었다.

'얻어가는 게 있었다라.'

오히려 기꺼운 일이다.

아무 것도 얻어가지 못했으면, 그거야말로 오히려 무능한 정보상이라는 소리니까.

능력 없는 동료는 필요하지 않다.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댈런에게 필요한 사람은 가진 바 능력이 출중한 이들뿐.

설령 내 편으로 만드는 게 한없이 어려운 이들이라도, 중요한 건 그 난이도가 아니라 능력이었다.

혼자 힘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종말 앞에서, 유능한 영웅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법이니까.

어쨌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댈런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지명의뢰는 뭐요?"

기다렸다는 듯이 책장 한쪽에 꽂혀있던 종이뭉치를 꺼내오는 시에나.

테이블 위에 올려진 건 두툼한 의뢰서 묶음이었다.

거의 반 뼘 두께쯤 되어보이는 종이더미. 시에나는 찻잎을 마저 달그락거리며 말했다.

"좀 길어질 수 있는데, 차 한 잔 더 하면서 이야기할까?"

"그래야겠군."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서류작업에, 커피 한 잔으로는 부족한 법이다.

***

지난 일주일 남짓한 시간동안, 그에게 들어온 지명의뢰는 총 마흔여섯 건이었다.

의뢰자의 신원이 불명확하거나, 너무 얼토당토않은 의뢰들은 한 번 걸러냈음에도 그 정도.

시에나에게 간략한 브리핑을 듣던 댈런은, 어느새 눈꺼풀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프로그맨과 괴인 수백을 때려죽일 때도 느껴본 적 없는 정신적인 피로감.

'이 정도면 마물보다 서류더미가 더 공포스러울 지경이군.'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그의 앞에서, 시에나는 서른세 번째 의뢰서를 요약하다 말고 슬쩍 내려놓았다.

그녀가 말했다.

"피곤하지?"

"쉽지 않군. 하나씩 요약해달라고 했던 말, 취소하겠소."

역시 정보상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댈런의 너스레에, 시에나가 작게 웃으며 늘어져 있는 의뢰서를 모아 한 묶음으로 만들었다.

"그냥 조건에 맞게 골라주는 게 서로 편할 것 같네. 보수로 원하는 금액대나 물건, 아니면 선호하는 의뢰 내용 같은 거 있어?"

댈런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체력을 증진시키는 비약. 혹은 그런 종류의 비전 주문이나 의식을 내어줄 수 있는 의뢰주라면 좋을 듯하군."

이 세계에서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레벨업밖에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레벨업은 플레이어만이 가능한 특권.

다른 NPC들은 몇 년씩 지독한 수련을 거치거나, 아니면 특별한 방법으로 본신의 능력을 향상시켰다.

'특별한 비약이나 영구적으로 적용되는 주문, 혹은 의식이 대표적이지. 악신과의 계약도 그 중 하나고.'

쉬는 동안 수 차례나 고민해봤지만, 레벨업으로 부족한 체력을 올리기는 요원한 일이다.

거기다 과거에 그가 키웠던 캐릭터들을 떠올려보면, 체력 능력치를 중점적으로 올렸던 경우도 그리 많지 않았다.

무너진 능력치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

물론 그 전후사정을 모르는 시에나는, 댈런이 내건 조건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체력? 당신이 체력이 부족할 일이 있어?"

"이렇게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어보니, 확실히 부족함이 느껴지더군."

낮게 웃으며 둘러대는 말.

시에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네. 마물을 때려잡는 거랑, 엉덩이 지구력이 좋은 거랑은 다르니까."

오히려 그의 장단에 맞춰주면서, 자세한 언급을 두루뭉술 피해간다.

누구에게나 가장 깊이 감춰둬야 할 비밀이 있다는 건,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바였으니까.

"체력 증진이 가능한 비약이나 주문, 혹은 의식이라······. 잠시만 기다려줘."

"그러지."

댈런은 커피를 한 잔 더 홀짝이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시에나는 그 사이 오십 건 가까이 되는 의뢰를 빠르게 분류하고, 한 번 걸러냈던 것들 중에서도 조건에 맞는 게 없는지 다시 찾아봤다.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댈런이 커피 한 잔을 다시금 깔끔하게 비워냈을 무렵 그녀가 말했다.

"여기. 대충 여덟 개 정도로 추려졌어."

시에나는 추려낸 의뢰들을 다시 한 번 요약해서 설명해주었다.

여덟 개 중 다섯은 약초를 주로 다루는 상단이나 서부 구역의 농장주, 그리고 뒷골목의 마약상들의 의뢰서였다.

댈런은 그것들을 테이블 한쪽에 슬쩍 밀어두었다.

"이건 일단 보류하도록 하지."

사실 약초상들의 의뢰를 받아서 나쁠 건 없었다.

영약의 원재료를 다루는 이들이니만큼, 댈런의 목적과 가장 가깝다 봐도 무방했으니까.

그러나 댈런이 원하는 건 단순한 건강증진 목적의 약초가 아니다.

그의 초인적인 육신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못해도 전설의 약초나 영약이 필요할 터.

'그런 급의 물건을 취급하는 사람들은, 이 드넓은 청동 구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지.'

그리고 그 정도 되는 NPC라면, 당연하게도 댈런의 머릿속에 이름부터 이명까지 다 담겨 있었고.

지금 그에게 지명의뢰를 넣은 이들 중에는, 아쉽게도 그런 거물 약초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머지 셋 중 둘은 신전이야. 하나는 빛의 신 파웰의 신전이고, 하나는 물의 수호신 시셀라의 신전."

"둘 다 끌리지 않는군."

시에나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당신 북부인도 아니면서, 하다쉬의 영원궁전이 진짜 있다고 믿는 거야?"

"인종과 신앙은 별개 아니오?"

댈런은 심드렁한 얼굴로 답했다.

물론 그가 정말로 북부의 전사신을 믿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제국이나 동부 기사왕국에서 모시는 저런 신들보다는 단순무식한 투신이 낫지 않나 싶기도 했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는, 신이라고 뒤통수 안 치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럼 남은 건 하나뿐인데. 사실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 이건 내가 한 번 걸렀던 의뢰거든."

시에나는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뢰 내용이 좀 이상하더라고. 성공 보수도···글쎄, 당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지 확실하게 장담을 못하겠어."

"뭐길래 그러시오?"

댈런이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시에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러더니, 한 장짜리 의뢰서를 댈런에게 내밀었다.

"의뢰주는 성기사단의 한 수습기사야. 그리고 의뢰 내용은···미궁의 악마를 무찌르고, 놈에게 빼앗긴 성검을 되찾는 걸 도와달라는 거."

턱을 긁적이던 손길이 순간 멈췄다. 댈런은 건네받은 의뢰서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말했다.

"이걸로 하겠소."

"···진짜?"

시에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댈런은 사납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끄덕였다.

"그래, 덕분에 드디어 미궁이라는 곳에도 가보겠군."

톡톡.

두텁고 긴 손가락이 테이블 위의 의뢰서를 두드린다.

성검을 강탈한 미궁 속 악마라.

댈런은 놈을 알고 있었다.

놈은 역행의 사도들만큼이나 댈런을 골치아프게 만들었던, 게임 중반부에 등장하는 보스몹들 중 하나.

벌써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일찍 상대해서 나쁠 건 없겠지.

"의뢰자에게 연락을 넣어주시오. 곧 만나러 가겠다고."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춤의 도끼가 곧 맛볼 악마의 피를 기대하는 듯, 저 혼자 부르르 떨리는 것만 같았다.

악마의 성검(3)

도끼가 악마의 피를 원한다고 해서, 정말 그 도끼 하나만 가지고 악마를 패죽이러 갈 수는 없었다.

미궁은 금패 용병에게도 위험천만한 마경.

물론 댈런이 평범한 금패 용병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준비가 필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깡― 깡―

의뢰를 수락한 다음날 아침.

댈런은 오랜만에 르베론 아하킴의 대장간에 들렀다.

'베로 씨의 대장간'이라 적혀있던 간판에는, '미스릴 제련소'라는 이름이 새로이 새겨져 있었다.

쉼없이 울려퍼지는 망치 두드리는 소리. 가판대에 한가득 들어찬 물건을 구경하는 상인들과 용병들.

조수 겸 일꾼까지 고용했는지, 직원 두 명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손님을 맞고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다루기 편한 무기를 원하시면, 이쪽에 진열된 메이스나···."

"갑옷을 보러 오셨다고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번에 들어온 이 짱짱한 소가죽 갑옷은 어떠신가요?"

키에 비해 떡대가 좋은 용병에게 철퇴 하나를 쥐어주고서 잘 어울린다며 극찬을 쏟아내는 소년.

그리고 그 옆에서 진열된 무기와 갑옷을 반들반들하게 닦아놓으며, 가죽갑옷 하나를 사냥꾼 차림의 여성에게 추천해주는 소녀.

댈런은 두 소년 소녀가 운영하는 가게의 정경을, 잠시 느긋하게 바라봤다.

열여섯, 열일곱쯤 먹었을까.

취업이 빠른 이쪽 세계에는, 십 대들이 경력직 신입인 경우도 많았다.

"어서 오세요! 원하시는 물건 있으신가요? 저희 미스릴 제련소는 갈리오스 상단에서 공인한 상등품 물건만 제작, 판매한답니다. 원하시는 게 딱히 없으시면, 한 번 둘러보시는 건 어떠세요?"

댈런이 가게 앞에서 서성이고 있자, 어느새 용병에게 메이스를 팔아치운 소년이 후다닥 뛰어나와서 그에게 말을 붙였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물었다.

"가게 주인장은 바쁘신가?"

"사장님이요? 어···바쁘시긴 한데······."

갑자기 사장을 찾을 줄은 몰랐던 걸까. 소년은 방금까지의 당찬 모습과는 다르게 당황한 얼굴로 쭈뼛거렸다.

댈런은 그대로 고개를 들어 가게 안을 바라봤다. 따로 안내를 받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요란하던 망치질 소리가, 방금 막 멈췄기 때문이었다.

"아니, 댈런! 이게 대체 얼마만인가!"

가게 안에서 터져나오는 우렁찬 외침.

거기 묻어나는 놀람과 반가움에, 댈런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두꺼운 앞치마 차림으로 뛰어나온, 땅딸막한 키에 어깨와 팔뚝은 댈런만큼 두꺼운 사내.

미래에 미스릴의 제련자라 불릴 영웅, 르베론 아하킴은 댈런을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자네가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조카딸에게 들었네. 은인께서 다녀갔는데 얼굴도 보지 못했다니! 내가 얼마나 아쉬웠는지 상상이나 가나?"

"인사를 건네기에는 한창 집중하고 계시더군. 장인이 작업에 전념할 때는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소."

"자네라면 다르지. 내가 장인으로서 남게 해준 은인 아니신가! 아니, 그나저나 그 소문이 사실인가? 자네가 지붕 위를 날아다니며 극악무도한 암살단을 때려잡았다던데."

르베론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거 수다쟁이 상인 양반이 또 입을 털기 시작했나 보군.

댈런은 낮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맡겼던 것들이나 좀 보여주시오. 가게를 비웠길래 안쪽에 두고 갔었는데."

"일주일 전에 놓고 간 갑옷이랑 무기 말이지? 다 준비해뒀네. 이리로 오게나!"

르베론은 벌겋게 달궈진 망치를 휘적이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댈런은 그 망치에 맞지 않게 조심하며 뒤를 따랐다.

가게 안의 후끈한 열기는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댈런은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불 냄새. 금속의 비릿함. 매캐한 탄내와 무두질한 가죽의 텁텁한 내음.

그리고 사이에 섞여있는, 가게 저 안쪽에서 희미하게 풍겨오는 구수한 맥주의 향취.

여기저기 한가득 쌓여있는 가죽이며 철판 따위로 인해, 가게 안은 발 디딜 틈이 넉넉하지 않았다.

밖에서도 손님들이 끊이질 않더니, 장사가 잘 되긴 하는 모양이었다.

'입지가 좋으니 입소문이 빨리 퍼졌나 보군. 아니면 갈리오스 상단 측에서 홍보를 많이 해줬다던가.'

어찌됐건 반가운 일이었다. 그만큼 르베론의 실력과 명성이 더 빠르게 늘어갈 테니까.

모니터 너머에서만 보던 그의 미스릴 무구들을, 머지않아 실제로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으랏챠!"

그 사이 르베론은 가게 안쪽 구석을 뒤적이더니, 큼직한 상자를 꺼내왔다.

쿵.

테이블 위에 올려진 묵직한 목재 상자.

열어보니 깔끔하게 수리된 갑옷과 방패, 그리고 새것처럼 보이는 검이 들어있었다.

"여기있네. 갑옷과 방패는 수리하면서 갑각늑대 가죽으로 보강했고, 검은 박살이 났기에 그냥 새로 만들었네."

"새로?"

"수리해 달라는 말은 전달받았네만···불가능하네. 상식적으로 두 동강 나버린 검을 어떻게 이어붙이나."

댈런은 고개를 갸웃했다. 팔찌의 제왕이었나, 영화에서는 잘만 이어붙이던데?

"확인해보니 검신이랑 십자막이도 거의 분리되기 적전이더군. 이번에는 아예 통짜 한몸으로 만들었으니, 훨씬 튼튼하다고 느껴질 걸세."

스르릉―

댈런은 검을 들어보았다. 르베론의 설명대로 검 전체가 하나의 쇳덩어리였다.

몇 번 휘둘러보니 저번보다도 더 품질이 향상된 듯했다.

'명검이군.'

손잡이를 감싼 가죽은 손에 착 달라붙었고, 휘두를 때 느껴지는 질량감과 균형 역시 최적이었다.

보통 이렇게 통짜 금속으로 만들면 무게중심 문제가 있기 마련.

허나 르베론은 전설의 대장장이가 될 인재답게, 뛰어난 손재주로 그 부분을 해결한 듯했다.

"아주 좋군. 얼마요?"

수리된 갑옷을 입고 끈을 조여보며 댈런이 말했다.

갑옷 역시 몸을 편안하게 감싸주는 게 상등품이었다. 박살났다가 수리된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

이 정도면 금화 몇 개를 내어줘도 아깝지 않았다. 가웨인에게 받은 보수 덕분에 주머니 사정도 넉넉한 참이었고.

하지만 돈주머니를 끌르는 댈런을 보며, 르베론은 대차게 고개를 저었다.

"돈은 필요없네. 저번에 받은 금화를 다 쓸 때까지는 돈 들고 올 생각 자체를 말게나."

그러고보니 빚 갚으라고 준 금화 스물여섯 닢이 있었지.

텔리아 상회가 폭삭 망해버리면서 오갈 곳 없게 된 금화들이었다.

애당초 댈런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아니었기에, 머릿속 저편에 던져두었던 기억이었다.

'미스릴의 제련자를 영입하는 비용이라 생각하면, 금화 한 줌 정도야 거저나 다름 없기도 하니까.'

그러나 절박했던 사람의 마음은 다른 걸까.

르베론은 그 때 받은 금화를 잊지 않고 기억해둔 모양이었다.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몇 번을 만류하니, 댈런도 돈주머니를 도로 묶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잘 쓰겠소."

공짜라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지.

댈런은 방패를 등 뒤에 걸치고, 검을 검집에 꽂아 허리띠에 메어두었다.

그대로 가게를 나서려는 그에게 르베론이 말했다.

"벌써 가나?"

"의뢰주가 기다리고 있어서."

댈런은 창문 밖을 슬쩍 내다봤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의뢰주인 성기사는 순은 구역의 한 여관에 묵고 있다고 했다.

지금쯤 시에나의 연락이 닿았을 테니,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지.

이 거대한 도시에서 성문을 지나 순은 구역까지 들어가려면, 마차를 타도 몇 시간은 족히 걸릴 터.

미래에 든든한 우군이 될 수도 있는, 또 하나의 영웅 NPC를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쉽구먼. 오랜만이니 같이 맥주라도 한 잔 하면 어떨까 싶었는데 말이야."

르베론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문밖을 나서던 댈런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요 건너편 식당에서 기가막힌 햄 샌드위치를 판다네. 빵을 갓 구워낸 아침에 사와서 맥주랑 함께 먹으면, 아침 겸 점심으로 딱 좋더라고. 다음에 한 번···."

"생각해보니, 의뢰주도 점심은 먹고 만나는 걸 더 선호할 것 같군."

햄 샌드위치에 맥주라.

이건 못 참지.

***

순은 성문에 도착한 건 늦은 오후가 되어서였다.

성문 앞에는 이미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도시에서 가장 두꺼운 성벽으로 알려진 순은 성벽.

형식상의 검문만 하는 청동 구역과는 달리, 순은 구역으로의 입장은 꽤나 빡빡한 검문을 거쳐야 했다.

성문부터 성벽 이쪽과 저쪽에 두 개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다행히 짐마차나 수레를 싣고 가는 상인들은 따로 짐 검사를 받았다.

덕분에 가방 하나를 제외하면 짐이랄 게 딱히 없는 댈런은, 금방 검문소의 경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출입증 보여주시죠."

"하나 만들어주시오."

경비병은 순간 살짝 찌푸린 인상으로 댈런을 훑었다. 그가 말했다.

"순은 구역에서는 과도한 음주 상태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댈런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술 냄새 좀 난다고 되게 뭐라하네.

경비병은 다시 사무적인 표정이 되어 물었다.

"이름이?"

"댈런."

"신분은 어떻게 되시죠?"

"용병이오."

댈런은 금패를 내밀었다. 경비병은 금패를 받아들고 앞뒤로 살펴본 후 다시 돌려주었다.

"용무가 어떻게 되십니까?"

"미궁에 들어가려 하오."

"출입증 신규 발급은 15플로린입니다. 따로 마차나 말이 없으실 경우 통행세는 10실링이지만, 금패 용병이시면 감세 혜택이 있으니 8실링만 내시면 됩니다."

"여기 있소."

경비병은 댈런이 건넨 금화와 은화를 세어보고, 무게까지 달아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끼창을 들고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한 걸음씩 옆으로 물러나며 지나갈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출입증 발급해드리겠습니다. 성문 안쪽에서 대기해주시죠."

"고맙소."

댈런은 병사들이 터준 길로 바깥쪽 성문을 통과했다.

두 성문 사이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아까와는 다른 경비병이 다가왔다.

"도난당하거나 분실하실 경우 새로 만드셔야 합니다. 비용은 동일하게 15플로린입니다."

얇은 직사각형 금속패를 건네주며 덧붙이는 말.

거참 까탈스럽네. 대충 금속판에 이름이랑 신분 박아넣는 건데 얼마나 품이 든다고.

말없이 출입증을 받아든 그는, 두터운 성벽의 안쪽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이를 내밀었다.

가방을 열어서 안에 든 걸 대충 보여주자 검문은 금새 끝났다.

댈런은 안쪽 성문을 통과했다.

후웅―

겨울바람이 머리칼을 휘날린다.

벽 하나를 사이에 뒀을 뿐인데,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진다.

팔시온의 일곱 성벽. 그중 가장 두껍고 높은 두 번째 성벽의 안쪽.

미궁의 입구가 있는 곳이자, 수많은 탐험가들이 미궁의 보물을 찾으러 들어왔다가 끝내 정착해버린 곳.

'탐험가들과 그 자손들의 땅.'

마침내, 순은 구역이었다.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곧게 뻗은 대로를 중심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는 10층 안팎의 높다란 건물들.

저 멀리 대로의 끝자락을 따라가니, 넓은 광장과 그 중앙에 곧게 솟아있는 첨탑이 보였다.

넓은 광장은 순은 구역의 모든 대로가 모여드는 중앙광장.

그리고 그 가운데 솟은 높은 첨탑은―.

"미궁도시의 결계탑일세. 미궁으로 내려가는 입구지."

한 노인이 허허 웃으며 말을 붙여왔다.

"그렇게 멀뚱히 바라보는 걸 보니 순은 구역은 처음인가 보군, 젊은이."

"그렇소."

모니터 너머에서는 눈에 익도록 들락거린 곳이지만, 여기서는 처음이니까.

"나도 한때 그랬었지. 입장료가 좀 비싸긴 해도, 눌러앉기에 나쁘지 않은 도시야. 내 아들딸과 손주들은 여기에 잘 정착했다네. 한평생을 도시 안에서 산 녀석들이라 그런지, 이곳이 얼마나 치안과 질서가 잘 갖춰져있는 동네인지 잘 모르더군."

배부른 녀석들 같으니라고. 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댈런은 노인의 푸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말과 마차는 길 가운데로 줄지어서 다녔고, 사람들은 길 가장자리의 인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바쁘기는 해도, 대부분 일말의 여유 정도는 찾아볼 수 있었다.

적어도 청동 구역처럼 길 가다가 언제 소매치기를 당할지 모르는 곳은 아니었으니까.

사람들로 붐비지만, 동시에 최소한의 질서와 치안이 갖춰져 있는 정경.

댈런은 그 광경에서, 무심코 그가 떠나온 지구를 또 한 번 떠올렸다.

"그나저나, 그럼 자네도 미궁에서 한 탕 하러 온 겐가?"

그가 계속 말이 없자,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따지자면 그렇소."

"그렇구만. 그럼 행운을 비네, 신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전사여."

신들의 뭐?

노인의 웃음이 귓가를 간질이고, 댈런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이런. 늦었군."

지팡이를 짚던 흰 수염의 노인은 그 짧은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지팡이 또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걸로 봐서, 결코 평범한 노인은 아닌 게 분명했다.

'신들이 주목하는 대전사.'

문득 떠오르는, 대사도가 남겼던 말.

잠시 노인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던 댈런은, 이내 발걸음을 옮겨 인파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

여관은 중앙광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술과 음식 냄새, 그리고 사람과 난롯불의 열기로 가득한 여관 1층의 주점.

"어서오세요.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

댈런은 여급의 안내에 따라 자리로 걸어가며, 넓은 주점에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둘러봤다.

'지명의뢰를 건 게, 고위기사 루시아 본인이었지.'

고위기사 루시아 카스타챌드.

굳은 신념과 의지의 소유자이자, 악마를 상대로는 잔혹해도 사람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운 성품의 성기사.

모니터 너머에서 수십 회차 이상을 같은 편에서 싸워왔기에, 댈런은 그녀의 성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지금 시점이면 아직 수습기사겠군. 악마를 여럿 죽이며 빠르게 고위기사가 된 케이스니까.'

원래 그녀는 게임의 중반쯤 등장하는 NPC다.

악마들이 본격적으로 대륙 곳곳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하고, 전쟁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 혼돈의 시기에 나타나는 영웅.

그 시기에 나타나는 영웅 NPC들이 으레 그렇듯이, 영입 자체는 꽤나 까다로웠다.

다만 굳이 영입하지 않는다 해도, 우호 관계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NPC이기도 했다.

특유의 조용한 분위기 탓에, 이런 시끌벅적한 여관에서 찾기는 쉽지 않을 텐데······.

"이 씨발 버러지 같은 새끼가!"

스릉!

걸쭉한 욕설과 함께 검을 뽑아드는 여인을 보며, 댈런은 순간 뇌가 작동을 멈추는 느낌을 받았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

바다처럼 청명한 푸른 눈동자.

투박한 로브 사이로 번쩍이는, 성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진 판금갑옷.

악마 살해자,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눈앞의 용병 무리를 향해 쌍심지를 치켜세운 채 검을 들이대는 중이었다.

"이 쥐좆만 한 새끼들아, 방금 뱉은 말에 대해 각오해야 할 거다. 오늘 전쟁의 신께서 니들의 터진 머리통이나 으깨진 불알 둘 중 하나는 받아가실 거니까!"

···이건 또 무슨 지랄이야.

악마의 성검(4)

"우리가 뭐 틀린 말 했소?"

테이블에 앉아있던 용병들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번들거리는 민머리의 꽤 연륜 있어 보이는 용병 탐험가였다.

"그 머저리 새끼가 다 뒈져가는 악마한테 성검을 빼앗기는 바람에 토벌이 실패한 거 아니오! 토벌대 삼분의 일이 죽었소! 삼분의 일!"

"뭐? 머저리?"

성기사, 루시아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바렛은 그래도 성검에게 인정받은 기사야. 악마에게 맞서서 쓰러질 때까지 싸운 전사라고! 너 같이 악마한테서 꼬리 말고 도망간 겁쟁이 새끼랑은 차원이 달라!"

민머리 용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허! 언제부터 성검이 용기랑 만용도 구분 못하는 코흘리개를 인정해줬는지 모르겠군. 그 정도면 내 아랫도리로 성검을 들어도 인정받을 수 있겠는데!"

"뭐 이 새끼야?"

제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소리치는 용병. 순간 루시아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녀는 검을 여관 바닥에 콱 꽂아넣고,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저 버러지 같은 용병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공증인 없나?"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팔에서 금빛 문신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성기사단의 상징, 신성 문신이었다.

안 그래도 다들 이 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참이었던지라, 눈을 반짝이며 손을 드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속출했다.

"내가 하겠소! 내가!"

"6년차 탐험가 한스요. 내가 공증인을 맡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거리가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던가.

입이 걸쭉한 성기사와 용병 출신 탐험가의 싸움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관객들의 호응 또한 남달랐다.

끼익! 드르르륵!

테이블과 의자가 밀려나며 금세 원형 결투장이 만들어진다.

손님들 대부분 힘 좋은 용병이나 탐험가들이었기에,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결투! 결투!"

"자자, 돈 걸 사람 없나? 돈?"

자연스럽게 은화를 주고받으며 내깃돈을 걸고, 주먹을 치켜든 채 환호하는 관중들.

"······."

댈런은 속으로 오만 가지 욕을 퍼부어대며, 그 인파 사이를 비집고 헤쳐나갔다.

그 사이에도 결투장은 한창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공증인으로 6년차 탐험가까지 나선 마당이니, 더 이상 걸릴 게 없었다.

"성검을 들 수 있다는 아랫도리를 햄처럼 얇게 저며주면, 더 이상 그 혀로 나불거릴 일은 없겠지. 안 그래?"

"이런 쓰벌. 그래, 한 번 죽여보자 그거지? 좋소!"

철컹.

바닥에 놓아두었던 긴 사슬추와 방패를 집어드는 용병. 사슬 끝에 날카롭게 각진 추가 메달려있는 무기였다.

용병이 평범하지 않은 무기를 꺼내들자, 루시아의 눈이 약간 커졌다.

다만 놀란 건 잠시뿐. 그녀의 분위기는 금세 착 가라앉았다.

"그래. 죽여보자고."

그녀가 말했다. 각진 방패와 검을 들고, 낮게 자세를 잡는 루시아.

밝게 빛나던 그녀의 신성 문신도, 점차 은은하게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잘 됐군. 안 그래도 이번에 그 머저리를 보면서 생각했다고. 성기사라는 작자들이 다 이렇게 허접한 건지 말이야."

용병은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사슬추를 휭휭 돌렸다. 그가 물었다.

"그쪽은 그 머저리보단 강한가?"

"자꾸 머저리 머저리 거리는···!"

타닥!

루시아의 말이 끝나기 전에,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민머리 용병.

블러핑에 익숙하지 못한 성기사의 자세가 순간 움찔하며 흐트러졌다.

"비겁한···!"

루시아가 외쳤다. 용병은 비웃음을 머금은 채 사슬추를 휘둘렀다.

빙빙 돌리던 관성에 몸의 가속까지 더해지자, 휘둘러진 사슬 끝의 추에서 공기를 찢는 소리가 났다.

쐐애액―!

머리통을 단번에 박살낼 위력과 속도.

피하기에는 늦었다.

방패로 막아도 과연 충격을 견딜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관중들이 모두 숨죽인 순간.

턱!

오크의 머리라도 부술 기세였던 강철 추가, 큼직한 손에 가로막혔다.

"뭐, 뭐야?"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을 더듬는 용병.

강력한 손아귀 힘으로 강철 추를 단단히 붙잡은 댈런은, 약간 피곤한 얼굴로 용병에게 말했다.

"결투는 여기서 중단하는 걸로 하지. 이쪽은 내 동료요."

"중단? 그 여자가 나에게 어떤 모욕을 했는지 알기나···!"

댈런은 말없이 추를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끼긱.

불안하게 삐걱거리는 추의 접합부. 맥없이 두어 발자국을 끌려가는 용병의 몸.

그는 남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슬슬 문지르며,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내 동료이니, 여기까지 해주면 참 고맙겠소. 아니면 나랑 먼저 한 판 붙던지."

"···알겠소."

"고맙군."

댈런은 추를 놓았다. 묵직한 강철 추가 쿵 떨어지며 여관의 마룻바닥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았다.

두려움과 분노가 섞인 오묘한 표정의 용병을 뒤로 하고, 댈런은 눈을 동그랗게 뜬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좀 늦었소. 그쪽이 의뢰를 맡긴 사람이오."

"그, 그럼 당신이 이번에 사교도들을···!"

"거기까지."

루시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합 다물었다. 댈런은 허리띠에 손가락을 꽂고선, 주변을 한 번 슥 둘러봤다.

끼익. 드르륵.

관객들은 갑자기 막을 내린 결투에 뭐라 불평하며 테이블을 되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개중 몇몇은 이채 어린 눈빛으로 댈런과 루시아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댈런이 말했다.

"보는 눈이 많군. 따로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할 것 같소."

***

조용한 장소를 부탁하자, 여급은 그들을 3층의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댈런은 테이블 위에 도끼를 올려놓고, 검과 방패를 풀어 벽면에 기대두었다. 그가 말했다.

"이제 검은 넣어도 되지 않겠소?"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좀 진정됐는지, 떨림이 어느정도 잦아든 목소리였다.

루시아는 아직까지도 뽑아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꽂아넣었다. 좁고 곧은 날이 하얗게 빛나는 명검이었다.

"그래서."

끼이익.

의자에 몸을 묻은 댈런은 운을 띄웠다.

"내막을 좀 말해보시오."

"의뢰 내용을 전달받고 온 것 아니었습니까?"

"의뢰서에 안 적힌 이야기도 많더군."

사실 의뢰서에는 별다른 내용이 적혀있지 않았다.

정식 성기사가 된 동료가, 수행차 미궁에 내려갔다가 악마에게 성검을 빼앗겼다는 전말.

그리고 그 성검을 되찾기 위해, 의뢰주인 루시아가 이 도시에 오게 되었다는 것 정도가 끝.

내건 보수마저도 '성기사단이 해줄 수 있는 거라면, 금화 쉰 닢이든 신성 문신이든 뭐든지 다 해주겠다.'였다.

시에나가 초장에 한 번 걸렀던 이유가 있었다.

"일단 좀 앉으시오. 뭐가 그리 급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미궁은 내일 정오가 되어야 내려갈 수 있소."

"···그러죠."

루시아는 천천히 댈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즈음 여급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주문을 받았다.

음식을 이것저것 잔뜩 시키는 댈런과는 달리, 루시아가 주문한 건 하얀 빵 한 덩이와 버섯이 들어간 스프.

여급이 맥주 두 잔을 놓고 나가자, 루시아는 그제야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하아. 이런 바보 같은 년. 그렇게 성질 좀 죽이라고 교육을 받았으면서······."

뭐야. 왜 갑자기 자아비판이야?

댈런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그녀를 멀뚱히 쳐다봤다.

"우선 고맙습니다. 아까 그 용병의 철퇴, 생각 이상으로 매섭더군요."

"별말씀을."

댈런은 반쯤 비운 잔을 내려놓고 거품을 닦아냈다.

낮에 마셨던 르베론네 맥주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품질이 괜찮았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저는 대륙의 균열을 수호하는 성기사단의 수습기사, 루시아 카스타챌드라고 합니다."

"댈런이오."

한 마디로 끝나는 그의 대답에, 루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끝인가요?"

"뭐가 더 필요하오?"

"도시에 암약한 사교도들을 물리친 용병이라던가, 악마와 하나가 된 악신의 사도를 처치한 신의 전사라던가······."

"어떻게 그 이야기를 아는지는 차치하고, 그런 미사여구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군."

끼이익.

댈런은 천천히 몸을 앞으로 숙였다.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

흠칫 뒤로 물러서는 루시아를 향해, 그는 무감정한 눈으로 말했다.

"나는 댈런이오. 우리 둘은 지금 처음 만났고,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지. 과거를 수식하거나 미래를 포장하는 건 확신이 아니라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만을 더할 뿐이오."

그러니 이름 하나면 족하오. 댈런은 그렇게 덧붙이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루시아는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고개를 살짝 털고 말했다.

"제가 생각했던 전사의 모습과는 좀 다르군요."

"보시오. 벌써부터 그러지 않소. 사람은 떠도는 소문이 아니라 경험으로 서로를 알아가야지."

"오히려 마음에 듭니다. 이제야 숨기는 것 없이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댈런은 말없이 잔을 마저 비웠다. 그리고 루시아는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

팔시온은 미궁으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들 중, 유일하게 마물이 올라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 말인즉, 미궁으로 연결된 통로 자체는 미궁도시 외에도 더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성기사단이 자리한 대륙의 균열.

대륙 중앙의 미궁도시에서 남서쪽으로 한참을 가면 나오는, 지하로 내려가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골짜기였다.

"성기사단의 주 임무가 균열에서 올라오는 마물들을 막는 겁니다. 그래서 기사단은 주기적으로 이곳 팔시온에 성기사와 성전사들 수행차 보내곤 하죠."

"안전한 실습장소 같은 느낌이군."

"예. 적어도 한 명의 실수로 인해 방어선이 돌파되고, 마물의 군세가 대륙을 침공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니까요."

바꿔 말하면, 성기사단이 균열에서 수백 년간 벌이고 있는 싸움은 그만큼 팽팽한 줄다리기와 같다는 뜻이었다.

"제 동기, 바렛 스트리먼도 두 달 전 정식 기사가 되어 수행을 떠났습니다."

동기 중에 누구보다 출중했던 아이인지라, 당연히 잘 해낼 줄 알았죠. 그녀는 덧붙였다.

하지만 미궁은 들어가보기 전에는 결코 짐작할 수 없는 마경이다.

정식 기사 하나와 수습 기사 둘, 그리고 성전사 열둘로 구성된 그의 일행은, 약속했던 때에 돌아오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성기사단은 모두 언젠가는 패배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그녀가 동기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 팔시온에 도착했을 무렵, 성기사단 본부에서 새로운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바로 성기사단의 열두 성검 중 하나가 도난당했다는 것.

그리고 그 범인이, 다름아닌 바렛이라는 소식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걸 훔쳤는지, 아니 애당초 성검의 선택을 받았으면 사실대로 보고하면 될 것을, 왜 그걸 몰래 훔쳐가서 이렇게 일을 키운 건지······."

반쯤 흐느끼다시피 하며 테이블에 힘없이 엎드리는 루시아.

댈런은 소갈비 하나를 우물거리며 그걸 쳐다봤다.

"결론은 그 애송이가 모종의 영웅심으로 성검을 훔쳤고, 영웅이 되기는커녕 미궁에서 객사하는 바람에 악마를 퇴치하려던 공격대까지 피해를 봤다는 소리군."

"애송이라니···!"

"제 분수를 모르고 덤벼들었으면 애송이지. 그 성검을 당신네들이 지키는 대륙의 균열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해보시오. 그걸 되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성기사가 죽었을지 상상이 가시나?"

발끈하며 고개를 쳐들었던 루시아는, 댈런의 무미건조한 눈빛과 말에 다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다시피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그저···아직도 믿기지 않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믿기지 않는 일들이 많지. 소설 같은 일들도 많고."

시발, 나라고 내가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질 줄 알았겠어?

댈런은 갈빗대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성검을 되찾는 걸 도와달라는 거군. 나와 동행하는 성기사단 병력은 어떻게 되오? 순은 구역에 지부가 있는 걸로 아는데."

"···이곳 지부에는 가용 가능한 병력이 얼마 없습니다."

댈런은 다음 갈빗대를 향해 뻗던 손길을 멈칫했다.

설마 지금 수습 기사 하나랑 둘이 성검 찾으러 가라는 거야?

"근 몇 개월간 균열의 마물들이 심상치 않은 기세를 보이고 있어서, 최소한의 행정 업무가 가능할 정도로만 남겨두고 전부 본부로 귀환했거든요."

댈런은 뒤늦게 게임 초반의 설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튜토리얼이 끝날 시점은, 대륙 곳곳에서 마물들이 조금씩 준동할 시기였다.

그러다 한 몇 달쯤 있으면 천천히 기세가 줄고, 폭풍전야의 잠잠함을 지나면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된다.

'그리고 진짜 위기가 다가올 무렵에는, 오히려 사람들의 경각심이 둔해져 있게 되지. 바로 얼마 전에 마물의 침공이 일어날 거라고 곳곳에서 외쳐놓고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어쨌든 시기가 참 공교로웠다.

악마를 때려잡고 성검을 되찾으러 가는 의뢰에서, 성기사단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게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지.'

가까운 미래에 영웅이 될 인물을 포섭할 수 있는 의뢰다.

지원이 없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거기다 성검을 빼앗아간 악마 역시, 지금 시점에서는 최하급 악마 수준.

훗날 성검의 힘을 통해 중급 악마로 성장하는 놈이니, 차라리 지금의 무력으로 어떻게든 밟아놓는 게 낫기도 했다.

물론 확실히 해야 할 부분은 있었다.

"보수는 제대로 지급되길 바라지."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인장이 찍힌 공문도 있으니까."

루시아가 돌돌 말린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성기사단 지부의 인장이 찍힌 두루마리에는, 악마를 퇴치하고 성검을 회수해올 시 금화 쉰 개나 그에 준하는 수준의 다른 보상을 주겠다고 적혀 있었다.

이러면 걱정할 것 없지.

댈런은 소갈비를 마저 뜯으며 말했다.

"미궁은 매일 정오에 문이 열리오.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니, 일단 밥이나 먹지. 든든하게 먹어야 키도 크는 법이니까."

"지금 키가 작다고 놀리시는 겁니까? 동기 여기사들 중에는 제가 가장···."

"나보다는 작지 않소. 더 드시오."

갈빗대 두 개와 스튜 한 접시를 밀어주자, 루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스튜가 담긴 솥을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

고기와 곡물을 듬뿍 넣은 스튜의 향이, 감미롭게 코끝을 간질였다.

***

겨울 밤공기가 찼다.

댈런도 그게 차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핏줄 속에 흐르는 용혈의 인자 때문인지, 춥다는 감각은 느끼지 못한 지 오래였다.

그는 엘가이아 마탑의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미궁에 내려가기 전, 꼭 확인해봐야겠다 싶은 의문들이 있었기 때문.

공교롭게도 오늘은 펠버 발렌티노의 야간 수업이 있는 날이어서, 댈런은 야심한 밤에 옥상을 거닐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일이면 드디어 내려가는군.'

댈런은 저 멀리, 중앙광장의 결계탑을 보며 생각했다.

저 결계탑의 1층에는, 매일 정오에 미궁으로 내려갈 수 있는 포탈이 열린다.

'이로써 조금 더 가까워진 건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미궁 밑바닥에 잠든 희망을 향해서.

물론 이번에 갈 곳은 소원의 돌과는 전혀 무관한, 미궁 1층 저 구석의 동굴이었다.

그러나 댈런은 마음만큼은 벌써 소원의 돌에 한 발짝 더 다가간 것만 같았다.

아니, 다가간 게 맞긴 했다.

그는 이미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수많은 갈림길들 중 하나를 깔끔하게 없애버렸고.

이번에도 갈림길 하나를 지워버리려 가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마음 한켠에 잔잔하게 내려앉은 불안감은, 그의 비범한 육체와 이뤄낸 업적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종류였다.

앞으로 이 땅에 닥쳐올 멸망의 가능성들은, 그가 극복해온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갈 테니까.

그리고 그것들 중 몇몇은, 댈런이 단 한 번도 이겨내본 적 없는 시련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자.'

댈런은 고개를 털었다.

이겨내지 못한 과거는, 지나간 그림자일 뿐.

다가올 미래는 동시에 다가오지 않은 환상이다.

그가 해야할 일은 그림자를 딛고 일어나,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것.

곧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허허, 뭘 그렇게 세상 다 산 노인같은 얼굴을 하고 있나?"

그때 누군가 옥상 정원의 문을 열고 나왔다.

"기다리느라 고생했네. 아이고, 밤늦게까지 강의를 하기에는 체력이 부칠 나이야 이제."

등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걸어오는 갈색 수염의 노인.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 펠버 발렌티노였다.

"안녕하십니까. 너무 늦게 인사 올리게 되었습니다. 토미 발렌티노라고 합니다."

그의 곁에는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금발의 젊은 마법사, 토미 발렌티노도 함께였다.

댈런은 청년의 기세가 이전보다 한층 단단해졌음을 느꼈다.

"사교도들이랑 싸우며 얻은 게 있긴 한가 보군. 스승님을 잘 뒀어."

"가, 감사합니다."

"늙은이가 한 게 뭐가 있겠나. 저 혼자 전쟁터로 따라왔고, 유혈 낭자한 싸움에서 살아남아 성장했는데. 알아서 잘해낸 거지."

펠버는 고개를 슬슬 저었다. 그 능숙한 능청에 댈런은 마주 낮게 웃었다.

"그럴 기회를 만들어준 게 노인장 아니오."

"난 마탑에 돌아오기 전까지, 이 녀석이 따라온 것도 몰랐네."

펠버는 끌끌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묻고자 하는 게 있다 들었네. 밤이 너무 늦었으니, 괜찮다면 짧게 이야기하고 들어가서 쉬세나."

그는 난간 앞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깊이 하품을 했다.

댈런은 난간에 등을 슬쩍 기대고는 입을 열었다.

"용혈과 영역에 대해서 말해주시오."

쩍 벌렸던 입이 곧장 닫힌다. 펠버는 곧바로 댈런을 돌아봤다.

피로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흥미와 기대감이 한가득 담겨있는 얼굴.

그가 물었다.

"자네, 벌써 작은 영역을 이뤘나보군?"

작은 영역을 일궈낸,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

댈런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마법사 특유의 마력광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악마의 성검(5)

"그런 것 같소."

댈런이 말했다. 그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펠버는 오히려 두 눈을 반짝였다.

"이럴 수가! 진짜였다니! 물론 자네라면 금방 도달할 거라 생각하긴 했네. 하지만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군!"

이 양반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렇게 대단한 거요?"

"그럼 당연하지! 영역을 이뤘다는 건, 자네의 그릇이 더 큰 힘에 걸맞음을 증명했다는 걸세. 토미, 우리 마탑에 영역을 이뤄낸 사람이 몇이나 있지?"

"스승님과 탑주님, 이렇게 두 분 계십니다."

금발의 청년은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아쥔 채 대답했다. 펠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게나. 순은 구역에서 내로라하는 마탑인 우리 엘가이아에도, 영역을 이뤄낸 이는 단 두 명 뿐일세. 그릇을 증명했다는 건, 단순히 명석함이나 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야."

후우.

너무 많은 말을 한 번에 쏟아냈는지, 펠버는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자신만의 심상을 담아낸 영역을 이뤄내는 건, 과거를 직시하고 극복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네."

"흠."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과거를 극복한다라.'

짐작가는 게 없는 건 아니다.

그때 봤던 설산 위의 오두막에는, 그의 오래 전 모습이 그림자처럼 남아있었으니까.

열흘 가까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 세계를 살아낸 경험이, 예전 세계에서의 자신을 책망하던 그 순간을.

그때.

댈런은 파도처럼 몰려오는 그 죄책감의 그림자 앞에서, 단 한 문장을 소리쳤다.

'살아남기 위해서였다고.'

그저 회사원에 불과하던 시절.

삶에 들이닥친 폭풍들 속에서 발버둥치며, 그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게임을 비롯한 탈출구들을 찾아다녔다.

그건 거인마저 이길 전사가 된 지금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괴물과 사교도들을 때려잡고, 시체를 회수하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비록 그가 택하는 방법과 수단이, 언제나 옳고 정당하다 말하지는 못하지만.

지나간 결과에 묶여 자책하며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살아내는 게 훨씬 나은 길이었다.

그건 그가 지금껏 살아온 흔적이자, 앞으로도 살아갈 방식이었고.

"허허, 내가 괜히 지나간 화두를 또 던졌나 보구만."

노년의 마법사는, 생각에 잠긴 댈런을 바라보며 끌끌 웃었다. 댈런은 그 웃음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끼익.

펠버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옥상 안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거나 이제 자네의 질문에 답해줄 차례가 됐구만. 그 전에, 영역을 다루는 법은 좀 알겠나?"

"하나도 모르겠소만."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스킬을 사용하는 법은 안다. 스킬은 획득하는 순간, 필요한 모든 지식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니까.

고도의 지능 수치로 이를 분석해내고, 오랜 시간 실전과 훈련을 통해 체화해내는 것만이 그의 몫이었다.

반면 영역을 다룬다는 건 굉장히 모호한 이야기였다.

게임 설정상 그런 개념이 있다 정도만 알고 있었지, 실제로 모니터 너머에서 그걸 겪어본 적은 없었기 때문.

펠버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어가며, 댈런에게 재차 물었다.

"좋네. 그러면 영역이라는 게 어디에 만들어지는 건지는 아는가?"

"환상세계 아니오."

이 역시 설정에서 본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알지 못했다.

펠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걸었다. 댈런도 천천히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네. 영역이라는 건 환상세계에 구축되는 걸세. 우리가 숨쉬는 이 대륙과는 달리, 환상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 이 땅의 법칙에 구속받지 않고, 따라서 불가능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

자박.

발밑에서 흙이 바스라졌다.

엘가이아 마탑의 옥상은, 대부분의 공간이 정원처럼 흙으로 덮여있었다.

인위적으로 관리하는 게 아닌, 자연 그대로 자생하도록 두는 정원.

겨울철 추위에 풀들은 누렇게 죽어있었고, 말라 비틀어진 낙엽은 그 아래에 잔뜩 쌓여 썩어가는 중이었다.

판석을 깐 좁은 도보만 제외하면, 마탑의 옥상은 작은 숲이라 해도 될 모습이었다.

"마법과 비의를 위시한 모든 신비들은, 원래라면 이 땅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들이네. 환상세계에 이미 구축된 영역을 이 현실에 내비침으로 만들어내는 기적인 게지."

듬성듬성 자라난 나무들 사이를 지나가며, 펠버가 말했다.

"영역을 이뤘다는 건, 그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에 자네만의 가능성을 실체화시켰다는 이야기일세."

"···어렵군."

댈런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예전부터 가능성이 어쩌고, 운명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잘 와닿지 않는 부분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에도, 그는 대학에서 철학이나 사상 같이 추상적인 수업을 가장 싫어했었으니까.

물론 펠버는 그런 대학 교수들보다도 훨씬 연륜과 경험이 풍부한 스승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금 더 쉬운 예시를 들었다.

"쉽게 말해서 어떤 다른 세상가 있고, 자네가 그 세상의 작은 일부분을 점령했다고 생각하게나."

"그 세상이 환상세계라는 거요?"

"그렇지."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럼 내가 그 어딘가를 점령했다고 치고, 내 영토를 어떻게 사용하면 된다는 거요? 비의나 마법의 근원이라면서. 그것들과는 너무 다른데."

"그건 한 번 보는 게 백 마디 설명보다 나을 걸세. 토미. 이만 내려가서 쉬거라."

펠버는 뒤따라오던 토미에게 손짓했다.

젊은 청년 마법사는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옥상에서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댈런이 고개를 기울이자, 펠버는 눈치 빠르게 이유를 설명했다.

"영역이 전개되는 장면을 보는 건, 아직 저 아이에게는 과분한 일일세. 오히려 낯선 마력의 흐름에 혼란만 생길 테야."

원로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며, 누렇게 죽은 수풀을 발로 꾹꾹 다져 원을 만들었다.

"잘 보게나."

앞으로 뻗어내는 두 손.

손목과 손가락을 돌려가며, 둥근 모양으로 맺어나가는 수인.

댈런은 허리띠에 손가락을 끼우곤, 잎이 다 떨어진 나무에 기대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덥수룩한 댈런의 머리칼이 그 바람에 천천히 흩날렸다.

어떤 강력한 폭풍이 아닌, 그저 산들바람 수준의 미풍.

"······."

하지만 마법사를 멀뚱히 바라보던 댈런은 느낄 수 있었다.

일대의 공기의 흐름이, 조금씩 펠버를 중심으로 회오리를 그리듯 휘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 회오리의 한가운데.

펠버의 수인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시선은 손끝에. 움직임은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댈런의 높은 지능수치로도 그 그리는 모양을 이해하기 힘들어져갈 때쯤, 펠버가 입을 열었다.

"엘르―메멘토 엘레구스."

우웅―

짤막한 영창.

공기가 떨리기 시작한다.

댈런은 본능적으로 감각을 한껏 확장했다.

오감이 곤두서고, 육감이 고개를 든다.

마력 감응력이 민감하게 깨어나며, 공기중에 흐르는 마력의 바람을 느껴낸다.

"말했다시피 영역을 이뤘다는 건, 작게나마 환상세계에 나만의 공간을 구축했다는 걸세."

그리고 그는 느낄 수 있었다.

펠버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마력이.

공간을, 아니 세계 그 자체를 일그러뜨리고 있다는 것을.

그 일그러짐에서, 댈런은 문득 얼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대사도와의 결전.

천둥을 빚어내는 일격을 위해, 온 몸의 근육을 올올이 깨어냈을 때.

'그때도, 주변의 마력 흐름이 바뀌었다.'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니었다. 그저 단 한 번의 공격을 심상 속에 새기며, 그 일격을 온몸으로 준비했을 뿐.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가 서 있던 공간은 마치 어떤 압이 내리누르는 듯 일그러졌다.

"깨달았나 보군."

펠버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맞네. 환상세계에 이뤄낸 영역을 이 현실에 불러와, 이 땅의 불가능함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덧씌워버리는 것."

일렁―

파문이 일었다.

복잡한 수인 가운데에서 퍼져나간 마력이, 땅 아래로 스며들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지면이 순간 울렁이는 듯한 감각에, 댈런은 손도끼를 움켜쥐며 반 걸음쯤 뒤로 물러났다.

두 눈을 금빛으로 빛내며, 펠버가 말했다.

"그게 영역을 사용한다는 것이라네."

쉬이이익―!

일렁임이 파고든다.

단순한 마력이 아닌, 어떤 개념의 파동.

지면에서부터 올라오는 그 파문은, 댈런의 발끝부터 정수리까지를 순식간에 훑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대사도와의 결전에서 뻗어냈던 그의 주먹과는 달리, 펠버의 영역은 파괴적인 결과를 내놓지는 않았다.

허나 댈런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단 한 번의 주먹질로 강력한 힘의 폭풍을 일으키고, 수십 가닥에 달하는 악마의 촉수를 고깃조각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펠버의 영역 역시,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어떤 현상을 이뤄내고 있다는 것을.

"후우. 나이가 드니 뭘 하든 힘에 부치는군."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흙바닥에 앉아버리는 원로 마법사.

그는 가만히 생각에 빠진 댈런을 바라보며, 괜스레 더 골골대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가. 이제 영역을 사용할 수 있겠나?"

"그렇소. 하지만 아직 자주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군."

"원래 그런 걸세. 강력한 비의나 주문에는 강력한 제약이 따르는 법이지. 무사들의 수행과 마법사들의 연구가 다 그걸 극복해나가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영역의 능력은 하나만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자네만의 능력들을 더 개발해보게. 덧붙이는 펠버의 말에,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가닥을 잡았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능력치의 균형을 맞추던, 다른 능력을 개발하던 간에.

이로써 마탑을 방문한 목적은 해결한 셈이었다. 나무에 다시 등을 기댄 댈런은 문득 물었다.

"노인장의 영역은 능력이 무엇이오?"

"나 말인가?"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을 울리던 파문은 사그라들었지만, 펠버를 중심으로 흐르는 기묘한 마력의 흐름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펠버는 게임 상에서 그렇게 비중있는 인물로 등장하지 않았기에, 댈런도 그 능력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기왕 맺어진 인연이니, 이참에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펠버는 길게 기른 갈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러 능력이 있겠네만···기본적으로는 대지의 기억을 읽어내는 걸세. 대지에는 이 땅을 밟고 선 모든 이들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지. 과거를 반추할 뿐만 아니라, 수없는 대지의 기억을 기반으로 흐릿하게나마 가까운 미래마저 내다볼 수도 있다네."

펠버의 두 눈동자가 금빛으로 번뜩였다. 댈런은 허리띠에 꽂힌 도끼머리를 슬슬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판타지 버전 빅데이터인가."

"···뭐라 했나?"

"아무 것도 아니오."

댈런은 씩 웃었다. 펠버의 능력을 들으니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이 세상에 떨어진 뒤, 가장 많이 되뇌었던 질문이자.

지난 2년의 시간동안 어느새 흐릿해지고 있던 기억.

잊지 않기 위해 종이에 적어두었던, 그의 가방 깊은 곳에 묻혀있는 혼란함의 잔재.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보겠소."

댈런은 천천히 펠버의 앞에 마주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누구요?"

***

다음날.

마탑에서 하루를 묵은 댈런은, 아침을 넉넉히 먹어두고 정오에 가까워져서야 느긋하게 길을 나섰다.

중앙광장에 접어드니 높이 솟은 결계탑 앞에 와글거리는 인파가 보였다.

루시아는 그 인파의 한켠에 서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광장에 나와있었는지, 그녀의 코와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많이 기다렸소?"

"아, 아니···에취! 아닙니다. 성기사에게 인내와 기다림은 일상의 미덕이지요."

댈런은 픽 웃었다.

"들어가서 기다리지 그랬소."

"에, 에취! 혹시라도 안 오시면 데리러 가려고······."

"내가 어디서 묵었는지는 알고?"

"······."

훌쩍. 투명한 콧물이 주륵 흐르는 게 안쓰러워보일 지경이다.

댈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들어갑시다."

"네, 네―에취!"

두 사람은 결계탑의 1층으로 들어갔다. 뭐만 해도 세금을 떼는 순은 구역답게, 입장료는 무려 은화 열 개나 되었다.

'돈이 꾸준히도 빠져나가는군.'

댈런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순은 구역에 들어오자마자 돈주머니의 무게가 순식간에 반 이상 가벼워졌다.

'이번에 미궁에 들어가면, 뭐라도 크게 한 탕 해야겠어.'

돈벌이가 될 만한 건 생각보다 많았다.

댈런은 머릿속의 목록을 훑어가며, 탐험가들로 바글거리는 넓은 홀 안에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잠시 그렇게 서 있자, 뒤늦게 입장료를 내고 들어온 루시아가 조심스레 곁에 다가와 나란히 섰다.

그녀가 물었다.

"이대로 기다리면 됩니까?"

"그렇소."

"언제까지···?"

"저기 시계 보이지 않소. 정오가 되면 문이 열릴 거요."

루시아는 댈런이 고갯짓한 쪽으로 눈을 돌리더니, 시계를 발견하고는 아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댈런은 그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낮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이런 애송이가 어떻게 그 전설적인 성기사가 된 걸까.

수많은 마물과 악마의 피로 목욕을 했으나, 지나가는 아이가 건네는 꽃 한송이마저 거절하지 못하는 심성의 소유자.

단단함에도 한없이 부드럽고, 날카롭게 벼려졌음에도 따뜻함을 품고 있는 영웅.

악마 살해자라 불리는 루시아 카스타챌드의 과거가, 이렇게 덤벙거리고 미숙한 다혈질의 수습기사였을 줄이야.

"···긴장 안 되십니까?"

웃고 있는 댈런을 보고 루시아가 물었다.

"긴장되시오?"

"···조금요."

조금이라. 뻣뻣하게 굳은 어깨와 목을 보아하니, 전혀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댈런은 그렇게 정곡을 찌르는 대신, 다르게 접근하기로 했다.

"어려울 것 없지 않소. 미궁에 들어간다. 그쪽 친구가 실종된 곳으로 간다. 흔적을 추적해 악마를 처치한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말하는 그를 보고, 루시아는 황당한 눈으로 반문했다.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일입니까?"

"그렇게 간단한 일이오. 적어도 날 고용한 이상에는."

그러니까 긴장 좀 풀라고, 수습기사 양반. 댈런은 그렇게 덧붙이며 루시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미래를 바꿔나가야 하는 댈런의 입장에서도, 지금은 전혀 나쁠 것 없는 상황이었다.

밑바닥에서 플레이어와 함께 성장하는 르베론 아하킴과 달리,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원래부터 완성형으로 등장하는 NPC.

그녀가 완성되기 이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이 또한 긍정적인 변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토록 영입하기 힘들던 악마 살해자를, 등을 맞댈 동료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회차의 악마 살해자는, 모니터 너머에서 보던 것보다도 더 강력한 모습으로 빚어질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댈런은, 멀리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왜 믿지를 못하시오. 성검을 가진 악마, 그놈은 지금 다 죽어가는 상태라니까."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삼사백 명이 들어찬 결계탑의 1층 홀.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선 인파 사이로, 댈런은 눈에 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관에서 봤던 그 놈이군.'

썩 괜찮은 갑옷을 걸친, 민머리의 용병 출신 탐험가.

처음 보는 탐험가와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는, 루시아에게 철퇴를 휘둘렀던 바로 그 용병이었다.

악마의 성검(6)

"확실한 정보 맞나?"

민머리의 이야기를 들은 탐험가가 되물었다.

그는 꽤 실력있는 탐험가로 보였는는데, 민머리의 설득에도 의심이 가시지 않는지 께름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이라니까. 괜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토벌대를 꾸렸겠소?"

이에 질세라 속삭이는 민머리의 목소리.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는 인파의 북적거림에 쉽게 묻힐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댈런의 초인적인 감각과 이를 해석해내는 지능수치는, 그 희미한 음성마저도 명확하게 선별해서 잡아낼 수 있었다.

"저번이랑은 달리 공식적인 토벌대가 아니잖아. 괜한 소문에 어중이떠중이들이 끌려온 거 아냐?"

"어허.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그 애송이 성기사놈의 성검에, 악마가 배때지를 찔려서 내장을 줄줄 흘리는 걸 말이오."

토벌대라. 그것도 비공식적인 토벌대.

'그래서 이렇게 많은 탐험가들이 몰린 거였군.'

댈런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미궁에 내려가는 탐험가의 숫자는 이백 명이 좀 안 된다.

하지마 지금 홀에 모인 인원은 거의 사백에 가까웠다.

무슨 일이 있나 싶었는데, 방금의 대화로 추측할 수 있었다.

'부상당한 최하급 악마 정도면, 탐험가 입장에서 탐스러운 먹잇감이긴 하지.'

미궁의 악마는 위험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무엇보다 탐스러운 사냥감이기도 했다.

미궁에서 악마를 죽인 이에게, 금강궁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보수금을 지급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미궁도시의 결계는 악마나 마물의 힘이 강력할수록, 더 강한 반발력으로 그들이 올라오는 걸 억누르고 있는 바.

그 결계의 영향을 뚫고 미궁의 1층까지 올라온 악마라면, 최하급 중에서도 약한 악마일 수밖에 없었다.

'부상까지 당했다고 하니, 자기들 힘으로도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원래부터도 탐스러운 먹잇감. 거기에 잡기 쉽게 다친 상태이기까지 하다.

심지어 그 와중에 놈은 성검이라는 어마어마한 보물까지 덤으로 들고 있었다.

이 정도면 탐험가들의 눈이 안 돌아가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신경쓸 필요는 없겠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댈런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름 모를 탐험가의 말대로, 이 정도 소문에 휩쓸리는 놈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대부분이다.

은퇴하기 전에 미궁에서 한 탕 해보려는 생각으로, 전재산을 쏟아 순은 구역에 들어온 은패 용병 출신이나.

처음부터 순은 구역에서 태어나, 돈을 많이 번다는 소문만 듣고 탐험가의 꿈에 젖어있는 애송이들.

이 정도면 경쟁자라 하기에도 뭣할 지경이다.

'그리고 그 악마놈이 여기서 죽었으면, 중반부에 보스몹으로 나타났을 리가 없지.'

게임에서 성검을 든 악마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건, 지금으로부터 몇 년이 지난 이후.

즉 이 시점의 악마는 무사히 어딘가로 숨어들어, 성검을 가지고 몇 년동안 힘을 키워낸다는 이야기다.

달리 말하면, 여기 모인 탐험가들 가지고는 그 악마를 어찌하지 못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쿠르르르.

그때 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댈런은 갑옷 끈을 다시 조이고, 무장을 재차 점검하며 말했다.

"문이 열리는군. 준비하시오."

"주, 준비요?"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포탈이 열리면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무슨 준비를···."

"그 포탈이라는 게 말이오. 그게 그냥 저 앞에서 열리는 게 아니거든."

쿠르르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결계탑의 진동이 더 심해진다. 댈런은 휘청거리는 루시아의 어깨를 붙잡아주었다.

익숙하게 균형을 잡으며, 그는 홀의 바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웅웅웅―

희미한 공명음과 함께, 서서히 빛이 새어나오는 바닥.

처음에는 희뿌연 수준으로 새어나오던 빛이, 점차 홀을 가득 메울 정도로 밝아지기 시작한다.

빛나는 바닥을 본 루시아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든다.

그런 그녀를 향해, 댈런은 웃으며 말했다.

"미궁은 아래에 있지 않소. 문도 당연히 아래에서 열리지."

그 말이 끝나마자자.

구우우웅―

결계탑 전체가 떨리는 듯한 진동과 함께, 바닥에서 새어나오던 빛이 팟 하고 꺼지고.

후욱―

"꺄아아아아!"

댈런과 루시아의 몸이, 어두컴컴한 지하로 추락했다.

***

추락은 길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진짜 떨어지는 게 아니라, 포탈을 통한 일종의 공간전이 마법이기 때문.

우우우웅―

공기가 떨렸다. 공간전이의 여파가 서서히 잦아든다.

댈런은 추스렸던 감각을 빠르게 확장시키며, 주변에 위험요소가 없는지 살폈다.

까맣게 암전되었던 시야가 서서히 복구되고, 발밑으로 단단한 지면이 느껴질 무렵.

'일단 별다른 위협은 없는 것 같군.'

댈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서있는 곳은 숲으로 둘러싸인 낮은 언덕.

대낮임에도 온 지면에 내려앉은 어둠과, 이질적인 풀과 나무의 모습은 이곳이 땅 위가 아님을 말해주었다.

'미궁.'

온갖 마물과 악마가 도사리는 땅 밑의 마경.

동시에 미궁은 저만의 생태계를 이룬 하나의 세계이기도 했다.

발밑의 흙의 바스락거림이 땅 위의 세계와는 다르고, 숲속의 풀벌레 소리마저 대륙에서 들어볼 수 없는······.

"꺄아아아아아!"

···그렇다고 풀벌레가 귀청 떨어지게 비명을 지르는 곳까지는 아닌데.

"···좀 조용히 해주겠소?"

댈런은 여태까지 비명을 지르고 있는 루시아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녀는 눈을 번쩍 뜨더니, 놀란 표정으로 비명을 멈췄다.

딸꾹.

우악스런 손길에 헛숨을 들이킨 후, 발 아래를 내려다보는 루시아.

"어, 어라?"

당연하게도 그녀의 두 발은 단단한 흙바닥을 딛고 있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 루시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니. 이게 왜···."

"결계탑의 포탈은 사실 공간전이 마법이오. 문자 그대로의 포탈은 매일같이 여닫기에는 가성비가 좋지 않으니까."

미궁이 땅 밑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땅을 파고 내려가서 도달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게임 설정상으로도, 미궁은 다른 차원에 한 발짝 걸친 공간이라 묘사됐으니까.

포탈 주문 자체가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하는 걸 생각하면, 아무리 팔시온이라 해도 미궁으로 향하는 포탈을 매일같이 여닫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고안해 낸 방법이 공간전이 마법이라지.'

심지어 그마저도 일반적인 공간전이 마법과는 달랐다.

보통의 공간전이가 어디에 떨어질 지 정확한 좌표를 지정해서 발동된다면.

결계탑의 공간전이는, 대상자를 미궁의 1층 어딘가에 무작위로 떨어뜨려버렸으니까.

"미궁 안 마력풍의 흐름이 지상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그렇다더군. 좌표 특정이 난해해진다던가."

게임 설정으로 알고 있는 내용을 설명해주며, 댈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부끄러워할 것 없소. 처음에는 다 그렇게 비명을 지르곤 한다니까."

"댈런도 미궁에 오신 건 처음 아닙니까?"

"나는 경력직 신입이라 그렇소."

"경력···?"

못 알아들을 한국어에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하늘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층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미궁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세계였다.

드넓은 대지. 자생하는 동식물들.

하늘에는 별들이 수놓아져 있고, 지평선 저 끝에는 높게 솟은 산맥들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

어둑한 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은, 지상의 별자리처럼 탐험가들의 이정표가 되기도 했다.

댈런은 별자리를 관찰하며 지금의 위치를 대략 추정해보았다. 다행히도 별자리는 모니터 너머에서 보던 것과 거의 동일했다.

'귀환비를 기준으로 북서쪽이군.'

미궁의 1층에서 방위의 기준이 되는 건, 하루에 한 번 공간전이 마법이 발동되는 거대한 비석이었다.

강력한 결계로 보호받는 귀환비 주변은,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출구인 동시에 유일한 안전지대라 할 수 있는 곳.

댈런과 루시아가 서 있는 곳은 그 귀환비를 기준으로 북서쪽의 작은 숲 한가운데였다.

한편 성기사 바렛과 토벌대가 악마에게 패배한 곳은 정 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바로 귀환비를 중심으로 기준으로 남동쪽에 있는 커다란 동굴.

'걸어서 가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리겠는데.'

시간을 너무 오래 끌어서는 안 됐다.

최하급이라도 악마는 악마.

놈이 숨어든 동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받는 마굴로 변할 것이다.

악마라는 족속은 자신의 거처에서 갑절 이상의 힘을 내기 마련이니, 가능하다면 마굴을 온전히 구축하기 전에 처치하는 게 옳았다.

'놈의 거처까지 일주일 내로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이···그거면 되겠군.'

댈런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그 방법이라면, 걸어가는 것보다 몇 배는 빠르게 놈의 본거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중간에 시체를 회수하고 돈까지 챙기는 건 덤이었고.

그가 대충 머릿속 경로를 설정했을 무렵, 루시아가 부시럭거리며 가방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제가 지도를 가져왔습니다. 여기 보면···."

"저쪽으로 가면 될 것 같군."

댈런은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루시아는 그 손끝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하늘의 별자리와 손 안의 지도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희가 있는 곳이, 이쯤 아닙니까?"

그녀는 지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지도 중앙의 귀환비를 기점으로, 북서쪽의 숲 한가운데였다.

'별과 지도를 볼 줄 안다니, 성기사단이 사전교육 하나는 확실하게 해두는 모양이군.'

왜 포탈이 아래에서 열리는 걸 빼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댈런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는 루시아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맞소. 잘 짚었군."

"그러면 저쪽은 정서향 아닙니까? 지도에 따르면,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위험을 뜻하는 붉은 선이 그어져 있는데······."

아, 지도가 생각보다 상세한 고급품이었군. 이건 예상 못했는데.

댈런은 잠시 침묵하다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지도가 잘못된 거요."

"예? 하지만 여기 분명 해골 표시도···."

"잉크가 번진 거겠지."

수습기사는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댈런은 씩 웃으며 지도를 낚아채 둘둘 말아버렸다.

"믿고 고용한 것 아니오? 이번 한 번만 믿어보시오."

그는 말아서 잘 묶은 지도를 루시아의 손에 올려놓으며 말했자.

"저기는 위험한 곳이 아니라, 미궁 1층에서 두 번째로 빠른 이동수단이 있는 곳이니까."

***

숲을 빠져나가기까지는 두세 시간쯤 걸렸다.

미궁의 숲은 방향을 혼란케 하는 지형으로 가득했지만, 댈런의 경이로운 방향감각은 그 정도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물론 루시아의 입장은 달랐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바위와 나무들은 방향감각을 혼란시켜 어지럽게 만들었고.

일부 괴이하게 뒤틀린 나무는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멀미를 유발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두어 시간 뒤.

"푸하."

탁 트인 평원으로 나오자, 루시아는 막혔던 숨을 토해내듯 내쉬었다.

"후우. 후. 만만치 않은 숲이군요. 어지러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멀미에 약하시오?"

"마차까지는 괜찮은데, 승마는 버겁습니다. 신성문신의 힘을 끌어내면 버틸 수 있습니다만···."

"그건 힘을 낭비하는 꼴이지."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댈런은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며 생각했다.

악마 살해자가 말 한 필 없이 걸어다니던 이유가, 다른 게 아닌 멀미 때문이었다니.

무심코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는 찬찬히 주변의 땅을 훑어보았다.

숲에서 벗어나자 지면의 흙은 비쩍 마른 모래와 같았다. 약한 바람에도 잘 휘날려, 흔적이 쉽게 남지 않는 모래바닥.

하지만 그런 모래바닥이라도, 미궁에 익숙한 길잡이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는 법이다.

스윽.

댈런은 지면에 가깝게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감각을 한층 끌어올렸다.

지면의 미세한 발자국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흐릿하게 남은 온갖 마물과 짐승의 향취가 코를 간질였다.

극한까지 확장된 그의 감각이 온갖 자극들을 머릿속에 때려넣고.

초인적인 지능 수치가 이를 낱낱이 해체해 필요한 정보들을 선별해내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있었을까.

"흠."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그즈음 좀 진정이 됐는지, 루시아가 그에게 다가왔다.

"댈런? 뭐하십니까?"

"흔적을 찾고 있었소."

그렇게 말하며, 댈런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성기사랑 함께하니 행운이 따르는 모양이오."

행운?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댈런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시선의 끝은, 그리 멀지 않은 언덕.

루시아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뭘 보시는 겁니까? 저긴 아무 것도 없는 언덕입니다만?"

"잠시 기다려보시오."

댈런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초인적인 지각력은, 아무 것도 없는 언덕 너머의 광경을 생생히 내다보고 있었다.

발밑을 울리는 연속적인 진동.

어렴풋이 들리는 네 발 짐승의 울음소리.

그가 미궁 1층에서 자주 써먹던 이동수단이, 지척까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잠깐. 설마···!"

그리고 머지않아, 루시아 역시 같은 걸 느낄 즈음.

아우우우―

언덕 위.

하이에나 머리의 기수를 태운 늑대 무리가, 긴 울음을 토해내며 나타났다.

"놀의 갑각늑대 정찰대!"

루시아가 소리쳤다.

스릉―

그녀는 검을 뽑아들고 방패를 끌러내렸다. 그 즉시 두 팔의 문신이 빛을 뿜기 시작한다.

댈런은 허리띠에서 도끼를 뽑아들고는, 느긋한 걸음으로 언덕을 향해 걸어갔다.

아우우우―!

이내 두 사람을 발견한 놀 정찰대가 전속력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루시아가 자세를 낮추며 소리쳤다.

"댈런! 위험합니다!"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걸어가던 그대로 속도를 조금씩 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희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놀 정찰대.

도끼 하나를 움켜쥐고 내달리는 거구의 전사.

둘 사이의 거리는 애당초 그렇게 멀지 않았기에, 오래 지나지 않아 그 거리는 서로의 눈동자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좁혀졌다.

으르릉! 으르르르!

갑각류 비슷한 질감의 가죽에 덮인 늑대와, 그 위에 올라타 투박한 무기를 든 놀 기수가 대략 열 남짓.

선두의 놀 기수가 툭 튀어나온 입으로 히죽거리며, 2미터쯤 되어보이는 장창을 들어올렸다.

누가 봐도 단박에 사냥감을 꿰어버리려는 동작.

댈런은 그 동작을 보며 사납게 웃었다.

오랜만에 벌어질 싸움에, 전신의 근육이 기대감으로 달아올랐다.

발끝이 걸음마다 지면의 모래흙을 파고든다.

도끼 든 손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놀 기수와 댈런의 거리가 지척까지 좁혀진 순간.

"댈런!"

루시아가 팔과 다리에서 빛을 뿜어대며 외치고, 동시에 댈런의 손이 흐릿해졌다.

패래래랙―

손도끼가 희끗한 음영이 되어 날아간다.

어둑한 미궁의 공기 속.

흐릿한 별빛만으로는 빛의 원반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으르르―깨액!

그렇기에 놀 기수는 도끼가 미간에 꽂힐 때까지도, 무언가 날아온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르르······.

머리에 도끼 꽂은 놀 기수가, 그대로 눈을 뒤집으며 안장에서 미끄러진다.

꽈앙!

동시에 댈런이 서 있던 자리에서 흙더미가 폭발하더니, 그의 신형이 선두의 갑각늑대 위에서 나타나고.

콰직!

미끄러지는 놀 기수의 가슴팍을 짓밟은 반동으로, 안장 위에 안착하는 곡예에 가까운 동작이 이어졌다.

으르르? 으르르르!

뒤따르던 놀 기수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댈런을 쳐다본다.

그들 입장에서는 뭔가 희끗하더니 선두의 정찰대장이 넘어가고, 그 자리에 사냥감이 떡하니 앉아있는 꼴.

두두두두두―!

고개를 돌려 당혹감에 물든 놈들의 얼굴을 보며, 댈런은 사나운 미소를 머금었다.

제 주인이 바뀌었는지도 모르는 갑각늑대의 안장 위.

댈런의 손에는 어느새 허리춤에서 뽑아든 검이, 번뜩이며 자신의 첫 싸움을 기다리고 있었다.

악마의 성검(7)

서걱!

강철검이 번쩍였다. 잘려나간 하이에나 머리 하나가 허공을 빙글 돌았다.

쿠당탕!

머리 잃은 몸뚱이가 미끄러져 땅바닥을 구르는 동안, 댈런의 검은 두 번 더 번쩍였다.

스각!

놀 기수가 찔러오는 긴 창대를 잘라내는 첫 번째 검격과.

콰직!

먼젓번 기수를 잃고 덮쳐드는 갑각늑대의 머리를 내려치는 두 번째 검격.

콰직!

깨갱!

머리의 갑각과 두개골이 반쯤 부서진 갑각늑대가, 그대로 방향을 틀어 달아나기 시작한다.

뇌가 일부 파괴되고도 즉사하지 않는, 마물의 질기디 질긴 생명력.

"이그넬 로트."

댈런은 자연스레 왼손에서 타오르는 화염 화살을 만들어내, 달아나는 갑각늑대를 향해 쏘아냈다.

뻐어엉!

두개골 사이를 파고든 불꽃이, 늑대머리를 안에서부터 풍선처럼 터뜨려버린다.

머리가 사라져버린 갑각늑대가 그대로 땅바닥을 굴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놀 두 마리와 갑각늑대 하나를 쓰러뜨린 댈런.

그의 무력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자, 놀 정찰대 역시 움직임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으르릉!

한 놈이 짧게 울부짖는다. 일종의 신호였다.

그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곧장 정찰대의 진형이 변형되었다.

조금 전까지가 최대한 붙어서 한 지점으로 돌격하는 밀집형이었다면.

새롭게 변한 진형은 댈런을 중심으로, 최대한 거리를 두고 넓게 퍼진 모양새.

창이나 칼 같은 주무기를 집어넣은 놈들이, 안장 곁의 주머니에서 단궁이며 투창 따위를 꺼내들었다.

'개과 마물들이 머리가 좋긴 해.'

근접전에서 승부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즉각적으로 전략을 수정하는 모습.

예상 밖의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최하급 마물 중에서도 가장 이지가 뚜렷한 놀 종족다웠다.

끼이익―

투박한 단궁 시위에 화살이 걸린다. 투창을 꺼내든 놈들은 어깨 너머로 들어올린 창끝을 댈런에게 조준했다.

열 쌍의 노란 눈동자가 살기를 품은 채 사냥감을 향해 고정되었으나, 정작 그 시선을 받아내는 댈런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그리고 잠시 후.

으릉!

조금 전 울부짖었던 놀이, 다시 한 번 그르렁거림을 토해냈다.

피피핑!

쐐애액―

여섯 발의 화살과 네 자루의 투창이 허공을 날아든다.

사방에서 동시에 날아드는 투사류 무기는, 평범한 전사라면 그대로 고슴도치가 될 수밖에 없는 공격.

물론 평범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난 댈런은, 맞받아치려면 그 모든 걸 충분히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댈런은 그걸 선택하지 않았다.

쐐애애애―

파공성이 화살보다 한 발 앞서 귓가를 간질일 무렵.

그는 갑각늑대의 안장 위를 딛고 일어서, 발끝에 힘을 모아냈다.

그리고.

'도약.'

으지지직!

갑피가 으깨지며 피보라가 왈칵 치솟고, 댈런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콰아앙!

날아든 투척물들이 애꿎은 갑각늑대에 후두둑 꽂히는 동안, 포탄처럼 쏘아진 댈런의 몸은 가장 멀리 있던 놀 기수에게 도달했다.

으르···?

노란 맹수의 눈이 당혹감에 휘둥그레 커진다.

댈런은 날아간 속도 그대로 놈의 가슴팍과 얼굴을 짓밟았다.

와드득!

무슨 대포에 적중한 것마냥 으스러지는 머리와 가슴.

놀 기수가 그대로 저 멀리 튕겨나가고, 댈런은 자연스레 놈의 갑각늑대 안장에 올라탔다.

다만 이번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다리가 다시 한 번 힘을 받고, 용수철처럼 몸을 밀어냈다.

으지직!

깨갱―

초월적인 근력과 도약 스킬의 힘으로 인해, 갑각늑대의 갑피와 내장이 곤죽이 된다.

댈런은 그 도약으로 다른 놀 기수에게 포탄처럼 날아가고, 진짜 인간 포탄이라도 된 듯 놀 기수를 걷어차 날려버렸다.

공격의 반동으로 속도를 줄여 올라탄 갑각늑대의 등 위에서, 숨 한 번 고른 뒤 다시금 도약.

마치 범퍼에 끊임없이 부딪혀 튕겨나가는 핀볼처럼, 댈런의 신형은 놀 정찰대의 진형을 종횡무진하며 날아다녔다.

콰직! 퍼벅! 으지직!

다만 진짜 핀볼과의 차이점이라면, 한 번 도약할 때마다 갑각늑대 한 마리와 놀 하나가 목숨을 잃는 잔혹한 게임이라는 점이겠지.

아무리 사냥에 있어서 영민한 놀 종족이라도,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으르르르! 깨갱!

결국 마지막 남은 놀 한 마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놈은 곧장 갑각늑대의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기수의 다급함을 감지한 늑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내달린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순식간에 댈런이 올라탄 갑각늑대와 수십 미터가 넘게 거리가 벌어질 정도.

달리는 늑대 위에서 도약 스킬로 날아가기에는 쉽지 않은 거리였다.

댈런은 무심코 허리춤을 더듬고는, 짧게 혀를 찼다.

"쯧."

손도끼는 이미 초장에 던지고 없었다.

이미 잔뜩 경계하고 있는만큼, 불꽃 화살을 날려봤자 피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놈이 달아나 본거지까지 가버린다면, 댈런이 짜놓은 판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는 일.

'검이라도 던져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댈런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타닷―

빛살같이 내달리는 신형이, 땅을 박차고 갑각늑대를 향해 쏘아진다.

스가가각!

쏘아진 신형이 놀 기수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하얀 빛을 내뿜는 검이 눈 깜짝할 사이에 열 번 가까이 휘둘러지고.

후두둑―

조각나 비산하는 놈의 머리와 팔다리 사이로, 피분수가 왈칵 치솟는다.

콰직!

몸뚱이만 남은 놀 기수가 늑대 위에서 떨어지고, 빈 안장에 깊숙히 박히는 새하얀 검신.

늑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은 루시아는, 곧바로 검을 휘둘러 늑대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우당탕!

머리 잃은 늑대가 땅바닥을 뒹굴고, 성기사단의 수습기사는 그 위에서 멋들어지게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한다.

그리고.

"씨바! 존나게 어지럽네."

그 모습에 무심코 탄성을 토해낼 뻔하던 댈런은, 뒤따라오는 그녀의 쌍욕에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

순간이지만 먼 미래의 그 악마 살해자가 돌아왔나 싶었는데.

아직은 아닌 모양이었다.

***

댈런은 타고 있던 갑각늑대의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켰다.

생각 같아서는 곱게 멈춰세운 뒤 내리고 싶었지만, 애당초 이놈은 사람이 아닌 놀의 손에 길들여진 마물.

안장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 정도야 뛰어난 기량과 근력 수치로 가능해도, 특별한 기술 없이는 기마 자체를 의도대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 손에 훈련된 말이 아닌 이상, E등급 승마 스킬 정도는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 갑각늑대 같은 마물이 대상이라면 마물 교감 스킬도 있어야 하고.'

승마 스킬 정도야 시간을 좀 많이 투자하면 얻을 수 있긴 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시체를 줍다 보면 하나쯤 나올 법도 했고.

댈런은 이런저런 상념을 흘려보내면서 도끼를 주워 돌아왔다.

전투는 처음 격돌한 장소에서 꽤 멀리까지 이어졌기에, 돌아올 즈음에는 루시아도 어지럼증을 완전히 가라앉히고 있었다.

"좀 괜찮으시오?"

"예. 감각을 강화하는 문신은 되도록 아껴두는 편인데, 그러지 말 걸 그랬습니다."

루시아는 관자놀이를 슬슬 문지르며 대답했다.

"소문으로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갑각늑대를 탄 놀 정찰대를 그렇게나 빠른 속도로 처리하시다니······."

"그쪽도 대단하오. 젊은 나이에 신성문신을 수준급으로 잘 다루더군."

댈런은 그렇게 말하며 기절한 갑각늑대 곁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도끼를 들어 늑대의 가죽껍질을 톡톡 건드려보았다.

갑각늑대의 가죽은 손바닥만 한 단단한 갑각이 빼곡하게 들어선, 일종의 허술하게 만든 비늘갑옷 같은 구조였다.

갑각 사이의 이음매도 질긴 편이긴 하지만, 갑각 부분은 그야말로 판금갑옷 수준의 강도.

평범한 탐험가라면 꽤나 고전할 만한 상대다. 하물며 댈런이 상대했던 것처럼 훈련받은 놀 기수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그러했고.

"동기들에 비해 신성문신을 잘 다루는 건 맞지만···오히려 문신에 너무 의존하게 되어 고민입니다. 제 일신의 능력이 아닌, 다른 것에 기대는 모양새니까요."

···뭐야. 아직도 그 이야기 중이었어?

댈런은 뚱한 눈길을 그대로 돌려 루시아를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꽤나 진지해보였다.

그 진심 어린 얼굴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당신은 성기사 아니오?"

"그렇습니다."

"성기사의 힘은 신성문신에서 나온다고 알고 있소만."

루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사단이 아무리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다고 해도, 그 훈련만으로 균열에서 기어나오는 마물들을 다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들이 수백 년동안 균열을 틀어막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성기사단의 고위기사만이 새길 수 있다는 신성문신.

결국 기사단의 철저한 훈련 역시, 신성문신을 온전히 다루기 위해서는 본인의 역량도 충분히 갖춰져야 하기 때문 아닌가.

지금도 기사단에서 손꼽는 강자들은, 모두 그 문신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더 강력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악마 살해자, 루시아 카스타챌드도 마찬가지지.'

온몸에 새겨진 신성문신이 어찌나 강력한 빛을 뿜어대던지.

세간에서 빛의 기사라는 이명으로까지 불리던 이가 미래의 루시아 본인이다.

의외로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대규모 전장에서 가까이해서는 안 될 1순위 아군이기도 했고.

그녀가 뿜어대는 빛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모니터가 무슨 섬광탄 맞은 듯 하얗게 물들어버렸으니까.

옛 기억을 떠올리니 웃음이 슬슬 나온다. 댈런은 그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그럼 의존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소? 성기사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이 그쪽에게 내린 힘 아니오?"

그는 도끼를 들어 갑각늑대의 가죽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옆구리에서 갑각 하나, 배 밑에서 갑각 하나, 이런 식으로.

자르다보니 날이 좀 상한 게 보였다. 미궁에 오기 전에 한 번 갈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이 꼴이었다.

댈런이 원체 강력한 힘으로 던져대니, 평범한 날붙이로는 견디질 못하는 것.

문득 생각해보니 그의 초인적인 전투력 역시 능력치며 스킬 따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본신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게 아닌, 거의 거저에 가깝게 얻어낸 힘.

어찌 보면 그 역시 루시아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힘을 대하는 태도가, 루시아와는 판이하게 달랐을 뿐.

"내 고향에는 그런 말이 있소.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쓴다고."

"무슨 뜻입니까?"

"돈을 어떻게 버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단 소리요.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지."

콰직.

거친 도끼질에 엉덩이골 부근의 갑각이 떨어져 나간다. 질긴 가죽이 무딘 도끼로도 슬근슬근 잘만 벗겨졌다.

"힘도 마찬가지요. 어떻게 얻느냐도 분명 중요하긴 하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얻게 된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요."

"······."

"물론 어디까지나 이건 그냥 내 생각이고."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각늑대는 어느새 가죽에 듬성듬성 구멍이 뚫려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무슨 스펀지 같은 모양새였다.

댈런은 루시아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부드럽게 안장 위에 앉혔다. 그가 말했다.

"이번에도 그대들 식으로 말하자면, 신이 내린 축복이니 그냥 잔말 말고 누리라는 거요."

"···잘 알아들었습니다."

루시아는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었다. 그래도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는 좀 가신 듯했다.

댈런은 도끼를 허리띠에 걸치고는, 가방을 둘러메고 손바닥을 폈다. 그가 주문을 외었다.

"이그넬 로트."

화륵.

손 위에서 주먹만 한 불꽃이 타오른다. 루시아는 화들짝 놀란 눈으로 물었다.

"불은 왜 피우십니까?"

"이놈들이 어디서 온 줄 아시오?"

댈런은 나자빠진 놀 정찰대를 고갯짓했다. 루시아가 대답했다.

"1층의 동편에 거대한 놀 거주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못해도 이천 마리 가까운 놀이 살고 있다고···."

"맞소. 그리고 지도에 표시되었던 해골 그려진 붉은 선은, 바로 놈들의 순찰대가 지나가는 경로를 의미하는 위험 표시지."

루시아는 황당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 그게 무슨. 분명 댈런은 지도가 잘못되었다고 했잖습니까!"

"사람 말을 그렇게 쉽게 믿으면 안 되는 법이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믿으라고···!"

"그 말도 믿었소?"

루시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놀은 갑각늑대를 새끼 때무터 저들의 거주지 안에서 키우지. 그리고 갑각늑대들에게는 귀소 본능이 있소. 기수를 잃어버리고 갈 곳이 없어지거나, 부상이 심각해 빠른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자신이 자라났던 곳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려가지."

붉게 달아올랐던 루시아의 얼굴이, 설명을 들을수록 하얗게 질려간다. 댈런은 배낭끈을 꽉 조인 후 그녀의 뒤에 올라탔다.

루시아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댈런에게 물었다.

"지, 지금 그러면 설마······."

"맞소."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 그녀의 시선에, 댈런은 씩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 갑각늑대가, 우리를 놈들의 본거지까지 데려가는 고속 마차가 되어줄 거요."

사색이 된 루시아가 손이 부서져라 고삐를 쥐었다.

댈런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채 덧붙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 신께 받은 축복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게 좋을 거요."

화르르륵!

말을 마친 그가 불덩이를 그러쥔 손을 들어, 갑각늑대의 가죽 벗겨진 부위에 지져버린다.

깨갱! 깨개갱!

그 즉시, 갑각늑대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하고.

"꺄아아아아악!"

피가 후두부로 쏠리는 아찔한 감각과 함께, 수습기사의 비명이 숲 어귀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악마의 성검(8)

두두두두―!

루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고개가 저절로 흔들리고, 골반은 당장에라도 튕겨날 듯 오르내렸다.

갑각늑대의 승차감은 빈말으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부상을 입고 눈이 돌아간 이 마물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자신의 집으로 내달리는 중이었으니까.

'우욱···토할 것 같아.'

그리고 루시아는 훈련된 군마를 타고도 쉽게 멀미를 하는 몸.

신성문신의 힘을 빌렸음에도 불구하고, 갑각늑대의 안장 위에서 보낸 네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거의 다 왔소. 저길 보시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낮고 굵은 목소리. 루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댈런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어, 멀지 않은 언덕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언덕 위에 세워진 울타리와, 그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놀 경계병들.

무려 이천 마리에 달하는 놀 무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미궁 1층에서 가장 거대한 놀 거주지였다.

아우우우!

집에 다 왔다는 사실 때문일까.

갑각늑대가 길게 울부짖고는 속력을 높이기 시작한다.

두두두두두!

놈은 피를 철철 흘려대서 기운 다 빠진 몸으로, 마지막 힘을 쥐어짜 성문을 향해 질주했다.

"으윽!"

루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의 목 뒤쪽, 감각을 강화하는 신성문신이 다시 한 번 빛을 뿜었다.

얼굴을 아리게 스치는 바람 사이, 문신으로 강화된 시력이 목책 위 놀 경계병들의 표정을 읽어냈다.

으릉···?

슬쩍 벌어진 입. 휘둥그레 뜬 노란 눈.

하나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들.

놀들의 입장에서는 당황하는 게 당연하긴 했다.

부상당한 사냥개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그 위에 난데없이 사냥감 둘이 올라타 있는 꼴이니까.

두두두두!

그리고 경계병들이 당황한 사이, 눈이 돌아간 갑각늑대는 이미 목책의 문을 들이받고 있었다.

우지직! 와지끈!

달리는 군마와 같은 속도에, 강철 갑주를 걸친 듯 단단한 머리뼈.

놀의 조악한 손재주로 세운 목책 성문은, 그 무식한 돌격에 받히자마자 산산조각나서 날아갔다.

깨갱! 깽!

박살난 성문 잔해들과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 한가운데. 갑각늑대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주르륵 미끄러진다.

"우욱, 씨발 개좆같은······."

루시아는 비틀거리며 안장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방패와 검을 손에 들었다.

신성문신의 힘으로 균형감각이 빠르게 회복된다.

루시아는 희뿌연 먼지구름 속에서 천천히 주변을 경계했다.

그녀는 훈련받은 대로 천천히 심호흡하며, 거칠어진 숨과 심박을 진정시켰다.

"후우······."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여긴 적진의 한가운데다.

그것도 영민하기 그지없는 사냥꾼인, 놀 종족의 거주지.

놀 종족은 균열의 성기사단이 주로 싸우는 마물 중 하나다.

그런 만큼, 루시아는 놈들이 어떤 종족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개체 하나하나는 최하급 마물 중에서도 덜떨어지는 편으로, 잘 싸우는 은패 용병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무리로 모이는 순간 고도의 전략과 협동력을 발휘해, 숫자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놈들.

심지어 무리가 되는 순간 공포심마저 결여되다시피 해서, 부대의 반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개떼처럼 달려든다.

'놀 종족을 퇴각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뿐이랬지.'

그녀는 교습과 훈련에서 배운 내용을 천천히 복기해봤다.

첫 번째는 무리 전체에 말 그대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는 것.

그게 불가능하다면, 놈들의 머리 역할을 맡은 전사장의 멱을 끊어버리는 게 두 번째 선택지였다.

저벅.

그때 루시아의 곁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왔다. 댈런이었다.

"좀 괜찮으시오?"

"예. 하지만 이제부터가 걱정이군요. 놈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야 합니다."

아직 먼지구름이 채 가라앉지 않았고, 놀 경비대는 상황 파악이 완전히 안 된 듯했다.

갑각늑대를 이용해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게 목표였으니, 그 목표는 이미 달성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하게 거주지 한복판까지 들어오게 되었으나, 지금부터 무사히 탈출하기만 하면 되는 일.

그렇기에 그녀는, 댈런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딜 빠져나간다는 말이오?"

댈런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루시아의 어깨를 툭툭 쳐주더니, 먼지구름을 먼저 빠져나가며 말했다.

"조심히 따라오시오, 성기사 양반."

"자, 잠깐!"

당황한 손길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루시아는 황급히 그를 따라 먼지구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퍽! 서걱!

방패가 투구를 쓴 놀의 머리통을 깨뜨리고, 검이 번쩍이며 그 커다란 몸을 세로로 쪼개버리는 광경을.

"덤벼라! 개새끼들아!"

댈런은 거주지 한복판을 내달리며, 말 그대로 놀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

전후좌우에서 피가 흩뿌려진다. 댈런은 무심한 얼굴로 끊임없이 손을 놀렸다.

방패로 이빨을 들이미는 놈을 후려치고, 큰 칼을 휘둘러오는 놈을 칼과 함께 반토막으로 갈라버린다.

잘려나간 팔다리와 흘러내린 내장이 땅에 나뒹굴었다.

그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서, 놀 거주지의 한복판에 검붉은 융단이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놀 역시 마냥 당해주고만 있지는 않았다.

댈런이 막 놀 하나의 허리를 갈라버린 직후, 곳곳에 자리잡은 놀 궁수들이 화살이 쏘아댔다.

피피핑―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비. 그리고 약간의 엇박자를 두고 덮쳐오는 놀 여섯 마리.

화살을 피하거나 막자니, 직후 덮쳐오는 놀들에게 무방비 상태가 된다.

그렇다고 화살을 무시하고 놀들을 신경쓰면, 놀의 이빨에 찢기는 대신 화살비에 고슴도치가 되는 그림이었다.

이도저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 댈런의 대처는 간단했다.

스읍.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한 것이다.

콰자자작!

왼손의 방패가 화살을 죄다 튕겨낸다. 동시에 오른손의 칼이 번쩍이며, 커다란 빛의 원을 그려냈다.

엇박자로 달려든 놀 여섯 마리의 허리는, 그 원에 닿아 그대로 토막나며 내장을 흩뿌렸다.

으릉······!

순간 주춤하는 놀들. 그러나 잠깐이었을 뿐.

곳곳에서 다시금 화살이 날아들고, 무기를 꼬나쥔 놀들이 덮쳐오기 시작한다.

댈런은 개의치 않았다. 화살 몇 개 쳐내는 건 그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손이 조금 더 바빠지긴 했지만, 놀들이 죽어나가는 속도는 오히려 갈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전쟁의 신이시여!"

흘끔 뒤쪽을 내다보니 루시아 역시 꽤 많이 따라온 상태였다.

그녀의 전신에서 빛을 뿜는 신성문신은, 그저 초인적인 근력과 민첩만을 제공하는 게 아니다.

줄지 않는 체력, 끝없는 재생력, 예민한 감각과 빠른 판단능력까지.

다룰 능력이 된다는 전제 하에, 신성문신은 끝없는 힘을 약속하는 도구였다.

그리고 악마 살해자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역대 성기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신성문신을 완벽하게 다루는 성기사.

아직 그 재능이 완전히 꽃피우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신성문신의 힘을 웬만한 정식 성기사 이상으로 다뤄내고 있었다.

스르르릉―!

새하얀 빛을 머금은 검이, 짧은 순간 열 번도 넘게 긴 호선을 그린다.

십수 번의 검격은, 간격 안에 다가오는 놀들을 죄다 베어버렸다.

물론 그 하나하나에 담긴 힘은, 댈런처럼 한 방에 몸을 반으로 갈라버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뱃가죽이 갈라지기만 해도, 놀의 숨통이 끊어지는 건 매한가지.

심지어 그녀의 검격은 싸움이 지속될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원래부터 타고난 재능에 오랜 시간 훈련과 수행으로 쌓여온 잠재력이, 제대로 된 실전을 경험하며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내는 것.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댈런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싸움에 집중했다. 이미 그의 손에 죽어나간 놀의 숫자만 삼백 이상.

그렇게 백 마리쯤 더 죽였을 무렵이었다.

으르르릉!

그가 막 놀 두 마리의 목을 동시에 잘라버린 순간, 흉포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으르르······.

놀들이 물러난다. 댈런은 천천히 검을 내렸다.

방금까지 눈에 핏대를 세우고 달려들던 놈들이,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공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루시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천천히 댈런 곁으로 걸어왔다.

댈런은 그녀를 슬쩍 쳐다봤다. 그녀의 흰 갑옷은 놀의 피로 뒤덮여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갑옷 사이로 드러난 신성 문신이, 거의 빛을 다해 흐릿하게 깜빡거렸다.

"아무래도 놈들의 대장이, 자기 수하들이 죽어나가는 게 화가 난 모양이오."

"놀의 대장이라면···전사장 아닙니까?"

"맞지. 나랑 한 판 붙고 싶은 모양이니, 그쪽은 그만 좀 쉬시오."

댈런은 그녀의 등을 툭툭 쳐주고 앞으로 걸어갔다.

루시아는 무심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바닥까지 체력을 다 써버린 그녀의 손은 허공을 휘적거릴 뿐이었다.

열 걸음쯤 앞으로 걸어간 자리.

댈런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와라, 겁쟁아! 한 판 붙자는 거 아니었냐!"

그의 목소리가 놀 거주지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댈런은 언덕 위쪽의 커다란 천막을 가만히 응시했다.

잠시 기다리자, 천막 입구를 들추고 거대한 놀 한 마리가 나타났다.

다른 놀들보다 머리 두 개쯤 더 큰 키.

양손으로 단단히 그러쥔 거대한 도끼창.

[미궁 초행자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완숙한 투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댈런은 놈의 머리 위에 주르르 떠오르는 알림창을 보며, 눈앞의 놀이 그가 노리는 대상이 맞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놀 전사장. 악신의 수하 바르구프.'

몇 년 후.

성검을 든 악마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두어 달쯤 전 시점에, 미궁 1층의 놀 군단은 탐험가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자신의 세력권 안에 잠잠히 머물던 놀 부족들이, 갑자기 군단으로 연합해 인간을 공격하는 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

수많은 탐험가들을 잡아먹으며 토벌 대상이 된 그 군단의 지배자는, 악신에게 힘을 하사받은 놀 전사장이었다.

그르르르.

미래에 악신의 수하로 악명을 떨칠 놀 전사장이,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댈런과 루시아를 내려다봤다.

놈은 살기로 번뜩이는 눈으로 댈런을 노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했다.

"넌 누구냐."

얼씨구. 이놈이 말도 할 줄 아네?

***

댈런은 눈썹을 기울였다.

먼 미래에 악신의 힘을 얻어 악마의 말과 사람의 말을 하게 되는 건 알았지만, 이 시점부터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댈런이 대답하지 않자, 뒤에서 숨을 가다듬던 루시아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대륙의 균열을 수호하는 성기사단의 수습기사, 루시아 카스타챌드다!"

거대한 놀은 노란 눈으로 루시아를 흘깃 쳐다봤다. 잠시뿐이었다.

놈은 곧 눈길을 돌려 댈런에게 고정시킨 채 다시 물었다.

"넌 누구냐고 물었다. 내 영토를 침범하고, 나의 동족들을 학살하는 전사야. 우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성기사도 아닌데, 어째서 여기까지 발을 들인 거지?"

"사람 잡아먹는 개새끼 잡으러 오는 데 이유라도 필요하냐."

댈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놀 전사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놈이 입을 열었다.

"늑대가 사냥감을 잡는 데 역시 이유가 필요한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침범한 인간들만 사냥했을 뿐이다. 우리의 정찰대가 정해진 길 이외의 장소를 다니는 것도 아니니, 그대들 역시 충분히 피할 방법은 있었을 터."

"어쨌든 잡아 먹었다는 거잖아, 개새끼야."

놀 전사장의 이빨 사이로 그릉거림이 새어나왔다. 루시아는 저게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댈런은 검을 땅에 콱 꽂고는, 허리띠를 추스르며 말했다.

"그리고 사람 말 하는 거 보니 이미 악신이랑 계약한 모양인데, 거기에 사람 심장 열 개쯤 바쳐야 하지 않던?"

"···어떻게 그걸, 아니, 나는 잘 모르겠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당황한 거 다 보인다, 새꺄."

허리띠를 추스르던 손이, 자연스레 도끼를 뽑아든다. 댈런은 망설임 없이 놈을 향해 도끼를 내던졌다.

패래래랙―

해가 뜨지 않는 지하세계. 희뿌연 별빛에 번쩍이며 날아가는 도끼날.

신성문신으로 감각이 강화된 루시아마저 그저 희끗한 그림자로밖에 인식하지 못한 손도끼는.

쩌어어엉!

놀랍게도 놀 전사장이 휘두른 도끼창에 튕겨나가, 천막 곁의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무슨. 인간의 힘이 어떻게."

전사장이 중얼거렸다. 놈의 노란 눈은 거의 달걀 수준으로 커져 있었다.

댈런은 혀를 쯧 차고 검을 뽑아들었다. 확실히 미궁의 마물들은 땅 위의 적들보다 수준이 더 높았다.

콰아아앙!

그의 발끝이 지면을 터뜨리듯 밀어차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내며 순간.

"에낙사―!"

악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놀 전사장의 눈에, 짙은 녹색 기운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쩌저저정!

놀 전사장과 댈런의 팔이 동시에 흐릿해지며, 천막 앞에서 무수한 폭발음이 울려퍼졌다.

악마의 성검(9) - 무료 마지막 회차입니다.

도끼창이 단두대처럼 떨어진다. 댈런의 검이 도끼날의 옆면을 후려쳤다.

쨍!

타점을 잃은 도끼날이 허공을 가르고, 댈런은 방패의 모서리로 놀 전사장의 머리통을 찍어갔다.

으릉!

놀 전사장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럼에도 놈은 능숙하게 대처해갔다.

빗나간 도끼날을 몸 쪽으로 끌어당기며, 금속 추가 달린 자루 끝부분을 내지르는 동작.

그 자루 끝부분과 댈런의 방패가 충돌해, 꽝 하고 소음이 터져나왔다.

으르르!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휘청거리는 3미터짜리 거체.

놀 전사장은 빠르게 중심을 회복하고, 다시 도끼창을 들어올렸다.

한편 댈런은 반 걸음쯤 물러났을 뿐이었다.

전사장이 도끼창을 다시 한 번 내려칠 무렵, 그는 가볍게 옆으로 몸을 틀어 이를 피해냈다.

애꿎은 흙더미가 퍽 하고 솟아오른다. 그 순간 댈런의 검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빛살이 번쩍이고, 놀 전사장의 가슴팍이 쩍 갈라지며 피를 뿜었다.

으워어어!

놀 전사장이 길게 울부짖었다. 놈은 녹색 빛이 완연한 눈을 치켜뜨고, 쉴새없이 댈런을 몰아붙였다.

댈런은 단순하게 대처했다. 검과 방패로 도끼창을 흘리거나, 걷어내거나, 아니면 그냥 두어 걸음 움직여 피해버렸다.

그 중간중간 찔러넣는 검격에, 놀 전사장의 몸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크고 작은 상처가 더해져갔다.

거의 스무 개가 넘는 상처에서 피를 흘릴 무렵, 놀 전사장이 갑자기 뒤로 크게 물러났다. 놈이 입을 쩍 벌렸다.

"에낙사―!"

길쭉한 입에서 터져나오는 악신의 이름.

그 외침에, 전사장의 눈에 깃들었던 녹색 기운이 몸뚱이에도 깃들기 시작했다.

그르릉!

전사장의 눈이 이제는 무슨 안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회색 털가죽은 짙은 암녹색 기운으로 덮여갔다.

무슨 녹색 연기로 된 얇은 껍질이, 가죽 위에 한 겹 더 덧씌워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우드득.

놈의 팔 근육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이런.'

수상한 낌새를 느낀 댈런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전사장의 두 팔이 흐릿해지더니, 방금까지 댈런이 있던 자리에 도끼창이 내리찍혔다.

뻐어어엉―!

연못에 무거운 바위를 던진 듯, 와르르 튀어오르는 돌과 흙더미.

그 흙더미가 채 내려앉기도 전에, 녹색 안광을 줄기줄기 흘리는 놀 전사장이 모래흙과 자갈의 폭포를 가르고 도끼창을 찔러온다.

쨍!

검을 휘둘러 그 창끝을 걷어내며, 댈런은 표정을 살짝 굳혔다.

'악신의 힘이 생각보다 더 강하게 깃들었군.'

사람의 말을 할때부터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했다.

놀의 지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복잡한 언어체계를 능숙하게 구사할 정도는 아니니까.

그리고 악신의 이름을 외치며 그 힘을 온몸에 덧입은 지금의 모습은, 제국의 기사였던 텔리아 상회주마저 손쉽게 압도할 위상.

도끼창을 내지를 때마다 공기가 떨리고, 내리치는 위력은 땅이 폭발하듯 흙더미를 토해낼 정도다.

이 정도면 하급 마물 중에서도 극히 드문 전투력이다. 아니, 어쩌면 중급 마물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원래대로라면 몇 년 뒤쯤 고위 마물에 가까운 힘을 얻게 되기는 하지만,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르군.'

뭔가 변수가 생겼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세상의 가장 큰 변수는 댈런 자신. 하지만 이번 회차에서 그가 미궁에 발을 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놀 전사장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방도는 없었다.

그러나.

'만약 간접적인 영향이 놈에게 미친 거라면, 앞으로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되겠군.'

일단 그 고민은 나중에 해도 될 문제였다. 당장 급한 건 눈앞의 싸움.

후웅―!

허리를 젖혀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도끼날을 피해내고서, 댈런은 그대로 땅을 밀어찼다.

퍼벅!

발밑에서 터져나가는 흙더미.

뒤로 젖혀진 무게중심에, 도약 스킬의 반동을 더해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돌아낸다.

뻐억!

그 과정에서 댈런의 발끝은 놀 전사장의 턱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그워어!

덜컥하고 뼈마디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놀 전사장.

놈은 아래턱 왼쪽이 푹 들어간 채, 입에서 핏덩이와 날카로운 이빨을 쏟아냈다.

"그르르. 신께서는 제물의 가치에 따라 힘을 내려주시지."

잠깐 만들어진 싸움의 공백 속.

놀 전사장이 거칠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간 열을 바치자 내게 명정한 이지를 내려주셨고, 스물을 더 바치자 바위도 부술 힘을 내려주셨다. 서른을 바쳤을 때는, 부러진 뼈도 순식간에 재생할 수 있는 회복력을 하사하시더군."

우드득.

그 말과 동시에 전사장의 어그러진 턱이 도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박살나서 피가 줄줄 흐르던 잇몸이 재생되고, 동시에 날카로운 새 이빨이 쑥쑥 자라나며 부러진 이빨들을 밀어내었다.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린 채 이를 지켜봤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방패를 툭 떨어뜨렸다.

전사장이 완전히 회복된 턱으로 히죽 웃었다.

"그르륵. 항복하는 건가?"

"지랄."

댈런은 침을 퉤 뱉었다. 놀들을 학살하며 입 안에 피가 잔뜩 들어와 찝찝했다.

싸움이 끝나면 입을 수통의 물로 입을 한 번 헹구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놀 전사장이 이빨을 드러냈다.

"오만방자하구나. 전사."

놈이 달려들었다. 내리치는 도끼창에 쐐애― 소리가 나며 공기가 갈라진다.

댈런은 이를 정면으로 받아내지 않았다. 검을 대각선으로 눕혀셔, 힘을 적당히 빼고 흘려낸다.

퍼벅!

땅에 쟁기로 갈아낸 듯 깊은 고랑이 파인다. 놀 전사장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몸에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놈은 길게 울부짖으며 계속해서 도끼창을 휘둘러왔다.

그리고 댈런은 그걸 다 흘려내거나 방향을 틀어 걷어냈다. 정면으로 받아내지는 않았다.

놈의 힘은 이미 보통의 놀 수준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것이었기 떄문이다.

물론 받아내려면 받아낼 수 있었다. 아니, 아예 힘 하나로 밀어붙여서 싸움을 끝낼 수도 있을 테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직까지 체력 수치는 근력에 비해 한참이나 부족했고, 그 역시 몸을 상하지 않는 선 안에서 효율적으로 힘을 쓰는 법에 슬슬 익숙해지는 참이었다.

그리고 악마의 힘을 입은 놀 전사장의 근력은, 그 선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는 수준.

댈런이 그걸 압도하기 위해서는 내상을 감수해야 했다.

'용혈의 재생 인자로 금방 회복하긴 하겠지만, 좋은 선택이 아니지.'

미궁은 위험한 곳이다.

댈런의 무력이 동급의 탐험가들에 비해 원체 뛰어난지라, 그 위험함이 별 것 아닌 듯 보였을 뿐.

함부러 용혈에 의지했다가 의식을 잃게 되기라도 하면, 그땐 진짜로 언제 위험에 빠질 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근력을 아낀다고 해서, 선택지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거냐!"

콰광!

놀 전사장의 도끼창이 바위를 쪼갰다. 무슨 재질로 만든 건지 도끼창은 바위를 부수면서도 날만 조금 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댈런은 볼 수 있었다.

싸움이 길어지며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전사장의 자세.

악신의 힘에 아직 다 적응하지 못해, 힘을 휘두르기보다 오히려 휘둘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후웅―

도끼창이 다시 한 번 내리그어진다. 댈런은 검을 들어 그 육중한 공격을 빗겨냈다.

콰앙!

그리고 도끼머리가 땅에 처박히는 찰나의 순간.

턱.

그의 곰발바닥 같은 손아귀가, 놀 전사장의 팔목을 붙잡았다.

"어딜 감히―!"

전사장이 고함을 지르며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댈런의 영창이 조금 더 빨랐다.

"피리엔트 라구스."

영창을 읊는 것과 동시에, 머릿속에 그려낸 심상을 현실에 투영하며 마력의 바람을 옭아멘다.

투영할 심상의 형태는, 차가운 냉기 속에서 얼어붙는 공간 그 자체.

예전보다 강해진 마력 수치에 의해, 좀 더 많은 마력풍이 댈런의 의지에 이끌려오고.

쩌저적―

댈런에게 붙잡힌 놀 전사장의 팔뚝이 얼음덩이가 되는 건,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급속 빙결.'

대사도에게 배신당했던, 여섯 번째 은가면 사도의 시체를 회수하며 얻은 마법.

접촉한 대상에게만 쓸 수 있다는 제한 때문에, 마법사 캐릭터에게는 은근히 쓸모없는 취급을 받는 주문이었지만.

근접전을 위주로 하는 댈런에게 있어서, 빈틈을 만들 수 있는 변수는 무엇이 됬건 간에 유용한 도구였다.

"그어어억! 인···간, 어떻게 주문을!"

혈관으로 침투하는 냉기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놀 전사장이 비명을 질렀다.

댈런은 말없이 손아귀에 힘을 꽉 쥐었다.

얼어붙은 털가죽에 쩌적 금이 가기 시작하고, 전사장이 다급한 손길로 댈런을 밀쳐내려는 순간.

콰장창!

산산이 부서져 뜯겨나간 팔뚝이, 검붉은 피를 흩뿌리며 땅에 떨어졌다.

그어어어어!

잘린 팔의 단면을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는 전사장.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놈을 향해, 댈런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콰직!

전사장은 남은 팔을 들어올려 내려찍는 검을 가로막았다.

두껍고 질긴 털가죽과 악마의 힘으로 강화된 근육에 막혀, 검날은 더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섰다.

"오."

댈런은 짧게 감탄했으나, 그게 끝이었다.

그는 곧장 전사장의 남은 팔에 급속 빙결을 걸고 뜯어내버렸다.

"크억, 으어억! 자, 잠시만 기다려라. 거래를 하자."

"뭔 놈의 거래?"

댈런은 뜯어낸 얼음덩이 팔뚝을 툭 던져놓았다. 전사장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내, 내 막사 안 금고에 제물로 바친 인간 사냥감들의 유품이 있다. 나를 살려준다면 그 금고를 열어주겠다!"

"흠."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탐험가들의 유품이라.

어지간한 탐험가 정도면 비싼 장비를 하나씩은 가지고 다니기 마련이다. 어디까지나 본인의 목숨을 위한 투자니까.

"알려줘서 고맙군."

"조, 좋아. 그르륵, 나를 살려주겠다는 거지? 잘 생각한 거다! 신께서도 너를 기뻐하실···."

"아니."

콰직!

댈런의 검이 놀 전사장의 목에 박혔다. 놈이 반쯤 잘린 기도로 바람소리 섞인 비명을 질렀다.

한 번에 잘라낼 생각이었는데, 힘 조절에 워낙 신경을 쓰다보니 반만 잘렸다.

댈런은 그냥 힘을 좀 더 줬다. 평범한 여성의 허리 둘레만큼 두꺼운 목이, 툭 썰려나가며 피분수를 뿜었다.

쿵.

목이 사라진 거체가 무릎을 꿇는다. 댈런은 풀썩 쓰러진 놀의 시체를 발로 툭툭 차봤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악신의 힘을 받았다더니, 대사도처럼 머리가 두쪽나도 재생하는 수준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전사장의 천막 앞. 댈런은 넓은 포위망을 구축한 놀 무리를 슥 둘러봤다.

으르르.

으릉······.

무리를 이룬 놀은 후퇴할 줄 모르는 용맹한 병사가 되지만, 지도자가 죽는 순간 그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지곤 한다.

무리 내에서 가장 강한 개체를 대장으로 추앙하는 놈들의 습성 탓이겠지.

지금도 놀들은 주춤거리며 천천히 물러나고 있었다.

댈런은 피식 웃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왁 소리를 질렀다.

깨갱! 깨개갱!

단박에 등을 돌린 채 우르르 달아나는 놀 무리. 댈런은 뻐근해진 어깨를 휘휘 풀고는 루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피곤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댈런,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런 몰골로 소리를 지르시면 당신이 마물이 되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몰골?"

"온몸에 검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갑옷 틈새마다 내장조각을 덕지덕지 붙인 몰골 말입니다."

댈런은 피웅덩이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과연 험악한 몰골이기는 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루시아를 쳐다봤다. 사실 그녀라고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진이 빠지도록 싸우느라 감각이 둔해져버렸는지, 본인은 아직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지.

댈런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씩 머금고는 말했다.

"피가 굳기 전에 씻긴 해야겠군. 그런데 혹시 그쪽 머리 위에 붙은 건 뭐요?"

"머리 말입니까?"

루시아는 머리를 더듬거렸다. 그녀는 뭔가 물컹한 감각을 느끼고는 어꺠를 흠칫 떨었다.

루시아는 천천히 댈런 곁으로 다가와, 피웅덩이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핏물에 젖어 붉게 염색된 하얀 피부.

길게 기른 머리칼 사이에 엉켜버린 창자.

갑옷의 어깨부분 틈새에서 대롱거리는 눈알과 시신경.

"어, 어어······."

파들거리는 손으로 어깨에 붙은 눈알을 떼어낸 그녀의 안색이,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

악마가 눈을 떴다. 흰자위 없이 검게 물든 눈이었다.

그는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공동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뻥 뚫린 천장의 구멍 너머로 미궁 하늘의 별자리가 보였다. 악마는 그 별들을 천천히 뜯어살피더니, 굵고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낙사구스의 장기말 하나가 또 목숨을 잃었군."

그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요 근래 들어 놈의 장기말이 둘이나 사라졌다.

하나는 미궁 밖 인간들의 거대도시에 숨어든 인간 수하였고, 다른 하나는 방금 명을 다한 놀 종족의 전사장이었다.

"그 애벌레 새끼는 생긴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어."

히죽거리기를 멈추지 않은 채, 악마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에낙사구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길 게 뻔했지만, 그 대단한 전시안으로도 지옥에서 한참 떨어진 미궁 1층의 중얼거림을 듣지는 못할 테였다.

"내 반드시 언젠가는 그 새끼를 신좌에서 끌어내려, 내 발밑에 무릎을 꿇리고 말 테다."

히죽대는 입술로 뿌드득 이를 갈고는, 악마는 천천히 공동 중앙의 마법진을 걸어나갔다.

우지직.

발밑에서 인간 탐험가들의 시체가 밟혀 으깨졌다.

공동에 수두룩하게 널브러진 시체들은, 건방지게도 자신을 토벌하겠답시고 이 마굴까지 쳐들어온 토벌대들이었다.

몇 주 전부터 열댓 명씩 몰려와 극성으로 귀찮게 구는 놈들. 한 번은 오십 단위로 쳐들어온 적도 있었다.

'그 때는 좀 위험했지.'

악마는 검고 긴 손가락으로 배에 큼직하게 남은 흉터를 쓰다듬었다.

미궁 1층을 싸돌아다니는 허접한 탐험가 무리에, 성기사가 버젓이 끼어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심지어 놈은 성검의 선택까지 받은 성기사였던지라, 정말로 죽을 뻔했던 싸움이었다.

'다행히 같이 온 놈들이 제때 뒤통수를 쳐줬지.'

성검에 찔려 큰 부상을 입은 악마. 그리고 악마의 회심의 반격에 맞아 비틀거리며 주저앉은 성기사.

보통이라면 여기서 성기사를 도와 악마를 마무리하는 게 당연한 수순일 테다.

하지만 인간은 유혹에 약하고, 그중에도 특히 탐험가라는 족속의 탐욕은 끝이 없는 법.

간지럽지도 않은 화살 공격에 비틀거리며 다 죽어가는 척 연기를 해주니, 놈들은 알아서 성기사의 등에 검을 찔러버렸다.

악마의 수급과 성기사의 성검, 둘 모두를 취할 기회라고 여긴 것이겠지.

"크흐흐. 멍청한 놈들."

덕분에 악마는 꿩 먹고 알 먹은 셈이었다.

쓰러진 성기사의 성검을 빼앗고, 실력 없는 속 빈 강정인 나머지 탐험가들을 절반 가까이 쳐죽였다.

지옥의 세력싸움에서 밀려나 미궁 저층부까지 쫓겨난 이레, 악마의 인생에서 가장 운이 좋은 순간이었다.

우르릉.

그때 동굴이 작게 진동했다. 악마는 공동에 연결된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경계마법이 발동된 걸 보아하니, 토벌대가 또 쳐들어온 모양이었다.

"흠···열, 열하나, 열둘. 열두 명이군. 이 정도면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어. 나의 충실한 타락기사야, 일어나라."

그의 명령에 공동 구석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기사가 일어났다.

목에 감긴 얇은 쇠사슬이 불길한 보랏빛을 뿜어대고, 기사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악마를 올려다봤다.

"어서 가서 침입자들을 격퇴하거라."

악마가 말했다. 기사는 맥없이 고개를 까딱 숙이고는, 큼직한 양손검을 뽑아들고서 공동 밖으로 걸어나갔다.

악마는 기사의 뒷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봤다. 그의 갑옷 등 부분에는 여러 날붙이에 찔린 듯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타락한 성기사가 침입자를 처리하러 나가자, 악마는 마법진 한가운데로 돌아가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성검을 향해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검을 온전히 타락시키고 얻게 될 힘을, 그리고 그 힘으로 행할 폭력과 갈취의 향연을 상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성검에 맺힌 신성한 빛은, 공동 안을 가득 채운 불길한 마력에 의해 천천히 좀먹히고 있었다.

악마의 성검(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