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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8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40화

특성 진화의 룬 (2)

폭주형 던전에는 종류가 존재한다.

 첫째.

 게이트가 형성되자마자 주변 일대를 집어삼키며, 시간이 지나면 몬스터를 사방으로 토해내는 폭주.

 북한산에서 발생한 던전이 이에 해당했다.

 두 번째는 지금 이전석이 진입한 던전을 예로 들 수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던전과 같으나, 제한시간 안에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내부의 몬스터가 외부로 쏟아지는 형태.

 [해당 던전은 폭주형입니다.]

 [던전이 폭주하기 전에 공략하십시오.]

 [제한시간 - 1:00:00]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

 "더, 던전 폭주···!"

 변하늘이 화들짝 놀라며 이전석을 쳐다봤다.

 "헌터님! 이거 일단 밖으로 나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그러나.

 이전석은 조용히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들이 들어온 게이트.

 그 위에 떠오른 시스템 하나.

 유성우가 내리는 지옥

 등급 : A

 내용 : 사람은 없이 그저 괴물만이 서성이는 그곳은 틀림없이 지옥이라 부르기에 마땅할 것이다.

 *해당 던전은 폭주형입니다. 보스 몬스터를 토벌할 때까지 게이트가 봉인됩니다.

 ━

 "어···?"

 변하늘이 그걸 보곤 당황을 내비쳤다.

 폭주형 던전의 공통된 특징이다.

 던전을 클리하기 전까지 나갈 수 없다는 것.

 물론 제한시간을 초과하면?

 게이트가 열리기야 하겠지.

 다만 그때가 되면 폭주의 영향으로 이전석이나 변하늘도 멀쩡하진 못할 거다.

 한 번에 파도처럼 밀려들어오는 몬스터.

 그건 아무리 이전석이라도 위험했으니.

 당연히 그 위험성만큼 보상도 두둑한 편이었다.

 이전석이 괜히 짐꾼을 데려온 게 아닌 셈이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시죠. 던전 폭주라고 몬스터의 급이 올라가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이전석은 변하늘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그 직후.

 "그어어!"

 몬스터가 코앞까지 달려왔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동시에 녀석이 단검을 내찔러 온다.

 생긴 것과 다르게 무기술을 사용하는 게 특징.

 움직임이 오크나 고블린과는 달랐다.

 [웨어울프 Lv. 65]

 녀석에게선 지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봤자 일개 몬스터.

 "그어?"

 이전석은 손쉽게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녀석이 투척했던 단검을 팔에 박아 넣었다.

 출혈 효과라도 있던 것일까.

 푸슉-!

 단검이 가죽을 꿰뚫자마자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어억···!"

 웨어울프가 당황하며 비틀거린다.

 그 사이.

 [광폭화를 사용합니다.]

 이전석이 녀석을 밀어내듯 걷어찼다.

 광폭화를 사용한 영향일까.

 레벨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어울프는 생각보다 멀리 날아갔다.

 "스켈."

 이전석은 잠깐의 틈을 타 스켈을 소환했다.

 "기자님을 지켜."

 "존, 명···."

 스켈이 고개를 끄덕인다.

 "기자님은 이놈이 지켜줄 겁니다."

 이전석의 말에 변하늘은 어떨떨한 표정으로 스켈을 올려봤다.

 "어··· 자, 잘 부탁··· 한다······?"

 "······"

 대답 없는 스켈.

 변하늘이 침을 꿀꺽 삼킨다.

 이전석이 소환수를 부린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CCTV에 그런 정황이 찍혀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코앞에서 몬스터를 마주니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안전한 걸까?

 ···안전하겠지?

 '테, 테이밍 된 거니까······.'

 물론 몬스터를 테이밍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경우다.

 그래도 이전석이 직접 소환하지 않았는가.

 신수나 정령이 그러하듯, 테이밍된 존재가 대뜸 주인의 명령을 어기진 않을 터였다.

 변하늘은 애써 심호흡을 했다.

 긴장과 두려움을 가라앉힌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이전석이 웨어울프를 쳐다봤다.

 녀석도 화가 난 듯 으르렁거리며 이전석을 응시했다.

 단검이 박힌 팔뚝에선 여전히 피가 솟구쳐 나오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어어!!"

 웨어울프가 재차 도약해왔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 덕분일까.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헉!"

 변하늘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웨어울프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화륵-!

 "그억···!"

 발화의 불꽃이 녀석을 가로막았다.

 발화는 공격력이 그리 크지 않다.

 상급의 몬스터나 헌터를 상대론 결코 치명타를 줄 수 없는 특성이었다.

 다만 평범한 불과 다른 점은 유독 느껴지는 열이 뜨겁다는 것이었다.

 실질적인 데미지는 없지만 정신적인 데미지는 S급에 필적하는 셈.

 그리고 그건 웨어울프를 잠시나마 주춤거리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생긴 찰나의 틈.

 서걱-.

 이전석이 적단도로 손을 그었다.

 그리고.

 난도.

 웨어울프가 채 자새를 잡기도 전.

 새빨간 날이 녀석을 베어 갈랐다.

 팔, 다리, 어깨, 무릎-.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녀석의 몸에는 샐 수 없이 많은 상처가 새겨졌다.

 "그어!!"

 웨어울프가 괴성을 터트렸다.

 고통은 벌써 잊어버린 걸까.

 아무렴 상관없었다.

 준비는 이미 끝났으니까.

 '공격력은··· 1천 5백. 이 정도면 충분해.'

 이전석이 자세를 잡았다.

 웨어울프가 그를 향해 단검을 내찔렀다.

 지성은 있지만 지혜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레벨의 차이가 있다지만 이런 뻔히 보이는 공격에 그대로 맞아줄 이전석이 아니었다.

 쐐액-.

 화살처럼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검.

 웨어울프의 공격을 피한 이전석은, 그대로 적단도를 큰 폭으로 휘둘렀다.

 그리고.

 콰앙-!

 적단도에 흡수된 피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며 초승달을 그렸다.

 혈격.

 날에 축적된 피를 거대한 참격으로 빚어내 쏘아내는 공격.

 그것이 웨어울프를 향해 쏘아진다.

 위에서 아래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간 실선이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쩌억-.

 웨어울프의 몸이 절반으로 갈라졌다.

 언뜻 난잡하다고 보일 수 있는 난도질은 그대로 혈격의 재료가 되어 웨어울프를 절단 낸 것이다.

 [웨어 울프를 사냥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뒤이어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

 이전석은 적단도를 바로 잡으며 생각했다.

 '괜찮군.'

 방금 사용한 혈격.

 최대치의 절반도 되지 않는 위력이었다.

 그런데도 A급 몬스터를 단숨에 죽였다.

 전생의 혈격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쓸 만 한 수준은 되었다.

 '몸에 부담이 크다는 게 단점이지만······.'

 절개처럼 천매보와 섞어 쓰지 않는 이상은 충분히 감당할 만한 부담이었다.

 그리고.

 "와······."

 한참 스켈의 뒤에 숨어 있던 변하늘.

 그가 감탄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다.

 오히려 그는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혹시 지금 헌터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도 괜찮을까요?"

 "사진? 던전에서 전자기기는 작동 안 할 텐데요."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석으로 만들어진 던전용 초고가 카메라를 챙겨왔거든요."

 변하늘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제 주먹만 한 크기의 카메라였다.

 그걸 본 이전석은 내심 어이가 없어졌다.

 '던전에서 사용 가능한 카메라면 아무리 못해도 수천 만 원은 할 텐데······.'

 혹시 취미로 기자하는 재벌집 아들일까?

 뭐,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진이라면 마음대로 하시죠."

 이전석은 뒤늦게 그리 대꾸했다.

 그가 사진을 통해 명성을 올려준다면 그건 이전석으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으니까.

 명성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그건 협회의 반응이나 대응으로부터 이미 충분히 겪어봤다.

 뇌령옥이 바로 그 증거였다.

 힘, 명성, 명예.

 그러한 것들은 이전석에게 이보다 더한 보물을 안겨다줄 터.

 거기에 약간의 귀찮음은 충분히 감내할 만 했다.

 "감사합니다!"

 찰칵-.

 변하늘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것도 잠시.

 웨어울프의 가슴팍을 갈라 마석을 적출한 이전석.

 그가 마석을 변하늘에게 넘기며 말했다.

 "다 찍으셨으면 가시죠. 1시간 안에 보스를 잡아야 하니까."

 "넵!"

 두 사람은 뒤늦게 자리를 이동했다.

 던전의 심부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밤하늘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유성우가 그들의 머리를 장식했다.

 ※ ※ ※

 [축하드립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털석-.

 시스템이 떠오름과 동시에 웨어울프 한 마리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후우···."

 이전석은 조금 거칠어진 숨을 다듬으며 체력 포션을 마셨다.

 던전에 진입하고 35분.

 지금까지 12마리의 웨어울프를 잡았다.

 개중 한 마리는 엘리트 개체였다.

 방금 이전석이 잡은 놈.

 [블러드 웨어울프 Lv. 75]

 75레벨.

 A급의 한계치에 다다른 수치.

 헌터가 그렇듯 몬스터도 등급에 따라 레벨이 정해지곤 했는데, A급 던전에 출몰하는 몬스터는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80을 넘기지 못했다.

 즉 75레벨이면 A급 던전에선 보스와 비슷한 수준의 강자인 셈이다.

 당연히 그만큼 보상도 좋고 레벨도 잘 오르지만···.

 '그에 비례해 위험성도 높지.'

 때문에 엘리트 개체는 던전에서 마주하면 누군가에겐 큰 불행이 되기도 하는 놈이었다.

 그러나.

 '운이 좋아.'

 이전석에겐 불행이 아닌 행운으로 다가왔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앨리트 개체의 출현률은 3% 미만.

 그걸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고 잡기까지 했다.

 실로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으리라.

 "기자님, 마석 챙겨주시죠."

 "아, 네!"

 이전석의 말.

 변하늘이 급히 달려온다.

 그는 마석을 받아들었다.

 일반 웨어울프의 마석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크기.

 품질도 이 정도면 수백은 받을 거다.

 어쩌면 천만 원을 넘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블러드 웨어울프의 전리품은 비단 마석만이 아니었다.

 한 번에 두 번이나 오른 레벨은 물론.

 [피로 물든 손톱(A)]

 특수한 재료까지 함께 드롭 됐다.

 이런 것들은 마석보다 더 비싸게 팔렸다.

 수백? 우습지도 않지.

 경매에 올리면 천은 가볍게 넘길 터.

 '이 정도면 3천은 하겠군.'

 이전석은 드롭된 재료까지 변하늘에게 넘겼다.

 반면.

 '······대단해.'

 변하늘은 마석과 아이템을 백팩에 눌러 담으며 이전석을 흘겨봤다.

 A급의 웨어울프를 손쉽게 압도하던 모습.

 하물며, 앨리트 개체를 잡을 땐 어떻던가.

 압도.

 A급 헌터들조차 홀로 상대하길 꺼려하는 녀석을 이전석은 너무나도 쉽게 상대했다.

 그 모습은 한 마리의 나비가 춤추듯 아름다웠지만, 한편으론 숨길 수 없는 흉포함도 느껴졌다.

 두 가지의 모습을 전부 가진 이중적인 전투 스타일.

 그것은 사람의 눈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찰칵-.

 덕분일까.

 변하늘은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도 잊어버린 채 연신 사진 찍기에 바빴다.

 '제대로 기록하고 내보내자.'

 아마 지금쯤이면 밖에선 다양한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겠지.

 이곳에 오기 전에 봤던 것들만 해도 꽤 흥미로운 게 많았다.

 [이전석, 그가 바로 검의 권좌를 계승할 유일한 인물?]

 [최초로 F급에서 A급으로 성급한 헌터!]

 [영웅 이전석. 그에 대해 생존자들에게 다시 묻는다.]

 [칠천의 마스터 "왜 나는 안 됐고 그는 됐는가." 몇몇 헌터들로부터 의심이 빗발쳐···.]

 칭송과 칭찬.

 시기와 질투가 뒤섞인 기사들.

 왜 나는 됐고 그는 됐는가.

 그 기사를 봤을 땐 코웃음만 쳤다.

 칠천의 마스터라면 인성이 안 좋기로 유명한 헌터였으니까.

 '그런 놈을 누가 제자로 받아들여?'

 그렇기에 변하늘은 생각했다.

 하루에도 수십 개씩 올라오는 기사들.

 만약 거기에 오늘 찍은 사진을 올리면?

 ······꿀꺽.

 변하늘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군침.

 군침이 돈다.

 기자로서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번 건(기사)은 대박이라고.

 위에서의 포상?

 그야 있겠지.

 어쩌면 승진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전석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야 말 터였다.

 변하늘은 궁금했다.

 영웅이나 천재, 혹은 초신성.

 그런 말들로 불리는 헌터.

 그가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시다."

 "네!"

 이내 그는 이전석을 따라 가방을 등에 맸다.

 슬슬 던전 최심부가 가까웠다.

 하늘에서 쉼없이 떨어져 내리는 유성.

 '특성 진화의 룬···.'

 이전석은 최종공략 보상을 떠올렸다.

 '어디에 쓸진 이미 정해뒀어.'

 남은 건 보스를 공략하는 것뿐이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41화

특성 진화의 룬 (3)

풀 한 포기조차 남기지 않고 메말라버린 들판.

 그 위.

 거대한 석조 문이 새워져 있다.

 족히 5미터는 될 법한 크기다.

 양쪽에는 늑대 형상의 석상이 있었다.

 [보스 에어리어.]

 이곳이 바로 보스방이었다.

 "······이중 구조네요?"

 그걸 보더니 변하늘이 작게 말했다.

 이중 구조.

 흔히 던전 안에 게이트가 또 있을 경우를 의미하는 단어다.

 그의 말 대로였다.

 이전석이 마주하고 있는 문.

 그것은 또 다른 게이트였다.

 슥-.

 손을 얹자 문이 괴음과 함께 열리기 시작한다.

 그 너머에는 소용돌이치는 듯한 게이트가 있었다.

 이곳을 넘어가면 바로 보스와 마주하게 될 터.

 "기자님은 어떡하시겠습니까? 주변 몬스터는 거의 정리해놨으니 밖에서 기다리고 계셔도 됩니다만······."

 "따라가게 해주세요!"

 이전석의 물음.

 변하늘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위험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헌터님의 소환수도 있고··· 최대한 뒤에 숨어 있겠습니다."

 변하늘이 각오를 다진 듯 말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하기도 그랬다.

 본인이 따라오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럼 알겠습니다."

 이전석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변하늘이 긴장한 듯 심호흡을 한다.

 그를 뒤로한 채.

 "상태창."

 이전석이 창 하나를 불러왔다.

 ━

 Lv. 52

 [근력 - 20] [민첩 - 42]

 [체력 - 20] [마나 - 41]

 스탯 포인트 - 14

 선업 - 70750

 악업 - @#%^#TF

 보유특성

 └천살성(EX+), 영원의 낙인, 발화(B). 망자들의 왕(C), 업상점, 은신(A), 광폭화(B), 힘의 권위(D), 자폭(A), 신속한 발(D), 마나조율(S), 천매보, 절개(格). 대기만성(SS)

 ━

 어느새 레벨이 52까지 올랐다.

 다만 40을 넘어서부터였을까.

 그때부턴 경험치도 잘 오르지 않았다.

 웨어울프 2마리 내지 3마리는 잡아야 겨우 1레벨이 올랐고, 50이 되고선 한층 더 속도가 느려졌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대략 5마리.

 그 정도에 레벨 하나가 올랐다.

 그나마 A급이기에 이 정도.

 B급이나 그 이하 던전이었다면 레벨업 속도가 훨씬 느렸을 거다.

 '음···.'

 이전석은 상태창을 바라보며 어떤 스탯을 올릴지 생각했다.

 그러나 고민은 아주 잠깐 뿐이었다.

 '일단 민첩부터.'

 그는 곧 바로 스탯포인트의 일부를 민첩에 투자했다.

 [스탯포인트 '8'을 사용하셨습니다.]

 [민첩이 '8'만큼 상승합니다.]

 드디어 50을 달성한 민첩.

 직후.

 이전석은 자신의 육체가 크게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신에서 솟구치는 활력.

 심장이 크게 두근거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근육이 비틀리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꽈드득-.

 피부 위로도 보이는 변화.

 "허, 헌터님? 괜찮으세요?"

 갑작스런 상황에 변하늘이 당황 어린 어조로 물었다.

 이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변화하는 육체에 정신을 집중했다.

 찢어져 갈라진 근육.

 그것들이 마치 퍼즐 맞추어지듯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울고불고 난리 쳤을지도 모르는 고통.

 이전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관찰했다.

 '······키가 조금 커졌나?'

 한 5cm정도.

 다리 길이도 길어진 듯하다.

 이 정도면 모델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뿐만이 아니다.

 피부 위로 새겨진 근육도 더 단단해졌다.

 모두 민첩이 50을 달성하며 생긴 결과다.

 스탯은 일정수치를 달성할 때마다 모종의 변화를 겪곤 했으니.

 20, 50, 80.

 그리고 100.

 20 때는 낮은 수치만큼 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스탯의 효율이 조금 높아지는 정도.

 그러나 50부터는 달랐다.

 [민첩이 50을 달성하였습니다.]

 [속도와 관련된 신체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이전석은 자신의 몸이 속도라는 측면에 있어, 한층 격 높은 차원으로 도약했음을 알 수 있었다.

 "후우······."

 짧게 심호흡을 하며 두근거림을 진정시키는 이전석.

 그리고.

 [스탯포인트 '6'을 사용하셨습니다.]

 [체력이 '6'만큼 상승합니다.]

 남은 스탯포인트를 모두 체력에 투자했다.

 절개를 썼을 때 느꼈다.

 마나만큼이나 체력도 한참 부족하다고.

 체력이야 높아서 나쁠 것도 없는 스탯이니, 이전석은 민첩과 체력을 두루 올려두기로 했다.

 마나도 50을 찍어두면 좋지만.

 '···뭐, 이건 마나조율이 있으니까.'

 그리 급한 것도 아닌 셈.

 애당초 아이템이나 특성으로 올린 스탯은 특정수치를 돌파해도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들어가시죠."

 "···아, 네!"

 이윽고 두 사람이 게이트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유성우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보스방은 어두컴컴한 지하공간이었다.

 출구도, 입구도 없는 동굴.

 음습한 기운만이 내리깔려 있다.

 다만 그 크기가 유독 크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일까.

 그 가운데.

 "인간."

 무언가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이전석과 변하늘을 노려봤다.

 사람의 말을 구사하는 괴물.

 겉보기엔 웨어울프와 똑같다.

 다만 한 가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은색 갈기가 녀석을 화려하게 돋보이고 있었다.

 [웨어울프 로드 Lv.80]

 로드.

 어떤 한 몬스터의 보스, 혹은 우두머리에게만 주어지는 칭호.

 레벨도 A급의 최대치인 80이다.

 "맛있어 보이는 근육을 가지고 있구나."

 돌연, 녀석이 침을 흘리며 말했다.

 구울의 왕이나 스켈레톤 워리어도 미숙하게나마 언어를 구사했지만, 눈앞의 로드처럼 유창하게 사람 말을 하진 못했다.

 그만큼 녀석이 발하는 기세도 마치 해일과 같았으니.

 "허윽···!"

 보스방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변하늘이 한껏 겁을 먹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수천 만의 카메라도 놓친 채 달달 몸을 떤다.

 스켈이 그를 지키고자 곡도를 들었다.

 거대화를 사용해도 80레벨의 상대라면 순식간에 당하고 말겠지만··· 상관없다.

 휘릭-.

 적단도를 돌려 잡는 이전석.

 '어차피 길게 끌 생각은 없어.'

 그가 광폭화를 사용했다.

 붉게 물드며 뱀처럼 찢어지는 동공.

 포악한 기세가 솟구쳐 나온다.

 던전이 폭주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남짓.

 '그 전에 끝낸다.'

 탓-!

 이전석이 땅을 박찼다.

 망설임 따윈 없었다.

 그저 왼손에 검붉은 불꽃을 피어 올렸다.

 이건 대련도, 하물며 시험도 아니다.

 모든 수단을 사용해 적을 죽여야만 하는 싸움.

 굳이 특성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인간!"

 로드가 송곳니를 드러낸 채 웃었다.

 맛있는 먹잇감을 보고 흥분한 걸까.

 녀석은 다른 웨어울프와 달리 무기가 없었다.

 유독 날카로운 손톱과 송곳니.

 그저 그것만을 앞세운 채 달려들었다.

 이전석이 왼손을 크게 휘둘렀다.

 불꽃이 한 줄기의 유성과도 같은 궤적을 남기고.

 콰과광-!

 그 궤적이 폭발을 일으켰다.

 시야를 집어삼킨 불꽃과 섬광.

 "크륵?!"

 로드가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그 사이.

 [은신을 사용합니다.]

 이전석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거기에 숨을 참으며 기척마저 죽였다.

 "꾀를 쓰는구나, 인간!"

 로드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고.

 쿠어어-!

 이내 큰 소리로 포효를 터트렸다.

 짐승, 특히 호랑이와 같은 맹수의 울음소리에는 특이한 파장이 존재한다고들 한다.

 이는 당연히 몬스터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크처럼 자체적으로 피어를 지닌 몬스터가 있는가 하는 반면, 그보다 더 상위의 몬스터는 아예 포효라는 별개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때문에 헌터들은 상위 던전에 들어갈 땐 반드시 그에 대한 대처법을 마련하는 편이었다.

 다름 아닌 아이템이란 수단을 통해서 말이다.

 보통은 그걸로 포효를 무마하기 마련이지만.

 촤락-.

 이전석은 대신이라는 듯 마나를 전신에 둘렀다.

 마나 보호막.

 호신강기.

 흡사 갑옷처럼 펼쳐지는 마나의 막.

 이전에 사용했을 때와는 다르다.

 전신을 두른 푸른 마나는 일체의 흔들림도 없었고, 종이 한 장보다 더 얇으면서도 아다만타디움 못지않은 강도를 자아냈다.

 던전에서 발견되는 상급 물질.

 그와 비견되는 보호막이 포효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리고.

 푸욱-.

 "크르륵······?!"

 이전석이 적단도를 내찔렀다.

 로드의 등.

 정확히는 가슴을 파고 들어가는 날.

 분명 80레벨의 몬스터는 강하다.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몬스터일 뿐.

 과거에야 대처법을 몰라 헌터들이 수없이 죽어나갔지만, 현대에 이르러선 몬스터에 대한 재난은 꽤나 안정화가 되었을 만큼 상당부분이 공략되었다.

 하물며 미래를 직접 겪고 돌아온 이전석이라면 어떠할까.

 스탯의 차이.

 레벨의 격차.

 종으로서의 격.

 그런 것 따윈 하등 의미가 없었다.

 콰앙-!

 다시금 손으로부터 발아한 불꽃이 적단도를 타고 로드의 내부로 흘러들어가 폭발을 일으켰다.

 "······!!"

 녀석은 눈을 까뒤집으며 형용할 수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인, 간······!"

 그래도 보스는 보스라는 것일까.

 A급 헌터조차 버티지 못했던 고통을 타액과 함께 집어삼킨 채 이전석을 돌아봤다.

 서로 다른 종류의 붉은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이전석이 그에게 말했다.

 "뭘 봐."

 "크르륵!"

 명백하기 그지없는 도발.

 순간 로드의 기세가 변했다.

 가시처럼 우뚝 치솟는 갈기.

 몸의 근육이 확장되듯 커진다.

 이전석은 이상을 감지하고 재빨리 물러났다.

 50을 넘어 변화한 근육 덕분일까.

 이전보다 몸이 훨씬 민첩했다.

 "감히 인간 따위가!!"

 로드가 괴성을 내지르며 바닥에 양손을 대고 납작 엎드렸다.

 직후.

 녀석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뚜두둑-.

 괴상한 소리와 함께 뼈와 근육이 뒤틀린다.

 어깨와 복부의 근육도 형태가 달라졌다.

 마치 사족보행과도 같은 모습.

 '짐승화로군.'

 이전석은 그 정체를 단번에 꿰뚫었다.

 웨어울프 로드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

 이름 그대로 짐승의 모습을 취하면서 스탯이 대폭 상승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탓-.

 로드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이전보다 월등히 빨라진 속도.

 정확히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지는 손톱을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피한다.

 "얌전히 먹잇감이 되어라!"

 로드가 분노에 찬 채 손톱을 휘둘렀다.

 이전석은 침착하게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손톱.

 피부가 갈라지며 피 한방울이 흘러내린다.

 50이라는 수치의 민첩은 확실히 육체를 더욱 빠르게 만들어줬지만, 80레벨의 몬스터와 비교하면 여전히 느리게만 느껴졌다.

 그렇기에 점점 한계에 달하고 있다고···.

 적어도 로드나 변하늘은 그렇게 생각했다.

 점차 이전석이 밀리고 있노라고 말이다.

 '헌터님······!'

 변하늘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전석을 지켜봤다.

 툭-.

 어느새 이전석이 벽 끝까지 내몰렸다.

 "도망도 이젠 끝이로구나!"

 로드는 이전석을 몰아넣었다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로드.

 녀석을 보며 이전석이 코웃음 쳤다.

 '역시 몬스터는 몬스터로군.'

 지성도 지혜도 일반 몬스터보다 뛰어나지만, 결국 로드는 짐승으로서의 본능을 버리지 못했다.

 그야 사냥감이 도망칠 수 없는 구석에 내몰려 있으면 금방이라도 목을 물어뜯고 싶겠지.

 그게 놈의 패착이었다.

 빠른 스피드와 유연성을 살리지 못했다.

 일직선의 너무나도 정직한 공격.

 이쯤 되면 스피드는 상관없었다.

 어디로 어떻게 올지만 안 다면, 공략은 훨 쉬워진다.

 착-.

 이전석이 적단도를 역수로 잡았다.

 그것을 아래에서 위로 그어올렸다.

 힘을 실은 것도, 특별한 기교를 살린 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날을 휘둘렀을 뿐.

 그런데.

 "······?!"

 일순간.

 로드의 신형이 갈라졌다.

 착각일까?

 아니다.

 적단도로부터 폭발하듯 터져나간 피의 참격.

 그것이 천장과 바닥을 그대로 긁어내며 로드를 베어 가른 것이다.

 '3천쯤 되니 혈격의 위력도 달라지는군.'

 보스방에 도달하기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축척해둔 피.

 그로인해 상승한 공격력만 무려 3천.

 그 결과가 눈앞에 펼쳐졌다.

 절반으로 갈라진 채 쓰러진 로드.

 천장과 바닥이 깊게 파여 있다.

 지진이라도 인 듯한 충격.

 "······세상에."

 변하늘이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찰칵-.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변하늘은 저도 모르는 사이 카메라를 주워든 채 이전석을 찍고 있었다.

 반면.

 [보스 몬스터 '웨어울프 로드'를 토벌하셨습니다.]

 이전석의 눈앞에는 던전 공략의 보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던전을 공략하였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짐승화(A)'를 습득하셨습니다!]

 [A급 던전 '유성우가 내리는 지옥'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보상으로 '특성 진화의 룬(A)'이 지급됩니다.]

 짐승화.

 그리고 특성 진화의 룬.

 [게이트가 열립니다.]

 그 너머로 출구가 나타난다.

 "기자님."

 "네? 아, 네!"

 이전석이 부르자, 한참 셔터를 누르던 변하늘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그런 그에게 이전석이 말을 이었다.

 "먼저 나가 계시죠."

 "헌터님은···?"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금방 나가겠습니다."

 "아, 넵."

 변하늘이 이전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빠르게 게이트를 통해 밖으로 나간다.

 보스를 죽인 방금 그 일격 덕분일까.

 이전석에게 압도당한 변하늘은 차마 더 찍고 싶다는 말도 내뱉지 못한 채 조용히 던전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

 던전 내부에 홀로 남은 이전석.

 그가 왼손을 내려다 봤다.

 어느새 돌덩이 하나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다름 아닌 '룬'이라고 불리는 물건.

 던전을 최초로 공략함으로서 얻은 보상이었다.

 ━

 특성 진화의 룬

 등급 : A

 효과 : A등급 이하의 특성 하나를 상위 등급으로 진화시킨다. 단, 진화시키는 특성의 급이 높을수록 확률이 대폭 낮아진다.

 ━

 실로 간결하기 그지없는 효과.

 '어디에 쓸진 이미 정해뒀어.'

 A라는 한정된 등급.

 천살성이나, 다른 S급 특성에는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망자들의 왕.

 "······."

 그 의도를 깨달은 걸까.

 스켈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변하늘을 따라 나가지 않고, 여전히 이전석의 옆을 지기고 있었다.

 '발화나 은신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것들은 지금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굳이 급하게 등급을 올릴 이유가 없는 셈.

 하물며 급이 높을수록 확률이 내려간다는 걸 생각하면···.

 '차라리 망자들의 왕에 사용하는 게 나아.'

 정확히는, 그게 더 안전했다.

 지금 당장 룬을 또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혹시라도 실패한다면?

 그거야말로 대참사다.

 전생에서도 적지않게 룬이 실패해 사라지는 걸 봤다.

 '실패확률이 생각보다 높았지.'

 A급이 S급으로 성급할 확률.

 아마 그게 3퍼가 채 안 됐을 거다.

 덕분일까.

 인도에선 어떤 한 헌터가 룬을 열 개 가까이 사용했음에도 등급을 올리지 못해, 그 돈값으로만 파산한 전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기야 무작정 사용한다고 성공하면 세상에는 S급 헌터가 샐 수 없이 많아졌겠지.

 '마침 시험해보고 싶은 것도 있고.'

 그래서 이전석은 굳이 망자들의 왕에 룬을 사용하기로 했다.

 C급이라면 성공확률도 사실상 백에 가까울 터.

 [특성 진화의 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

 [특성을 선택해주십시오.]

 "망자들의 왕."

 [망자들의 왕을 선택하셨습니다.]

 [특성 진화의 룬이 발동합니다.]

 시스템이 떠오른 직후.

 돌덩이- 룬이 허공에 녹아 사라졌다.

 변화는 바로 찾아왔다.

 [축하드립니다!]

 [망자들의 왕이 B등급으로 상승하였습니다!]

 [보유 가능한 소환수가 1 > 2로 증가합니다.]

 [스켈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다행이 등급상승에 성공했다.

 그 결과, 테이밍 할 수 있는 언데드의 수가 늘어남과 동시에 스켈의 형태가 바뀌었다.

 신장이 이전에 비해 1.5배 정도 커졌다.

 그리고.

 '검정색?'

 그렇다.

 뼈의 색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희미하게 붉은 빛이 감돌고 있다.

 검붉은 빛깔의 몸체.

 이전석은 즉시 스켈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스켈레톤 워리어

 등급 : D

 [근력 - 30] [민첩 - 18]

 [체력 - 21] [마나 - 18]

 특성 : 돌격(F) / 거대화(C)

 충성도 - 150%

 ━

 '한 번에 두 등급이나 올랐군.'

 F였던 것이 D로 상승했다.

 그러면서 모든 스탯이 10씩 증가했으며, 충성도 또한 100퍼에서 150퍼로 뛰어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충성도가 올라서 뭐가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리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었다.

 F나 D나.

 이전석이 보기엔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다만.

 [자폭의 정수.]

 가슴팍에서 흘러나온 화색 빛의 구체.

 "양도."

 이전석이 아주 작게 시동어를 읊었다.

 직후.

 구체가 스켈에게 스며들었다.

 뒤이어 떠오른 시스템.

 [스켈이 자폭을 양도받습니다.]

 [스켈이 자폭을 획득하였습니다.]

 '······됐군.'

 무사히 자폭의 양도가 성공했다.

 이전에도 한 번 시도해본 적 있었지만, [스켈의 격이 낮습니다]라며 거부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예상대로.

 망자들의 왕의 등급을 올리니, 두 가지 특성을 양도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렇게 되면 쓰임새도 달라지지.'

 어차피 스켈은 죽어도 되살아난다.

 하루의 쿨타임.

 대가는 고작해야 그것뿐.

 김영소- 자폭의 원주인은 아주 희미한 확률에 목숨을 걸고 자포자기가 된 채 자폭을 사용했다.

 하지만 스켈이라면.

 '필요한 상황에, 필요할 때마다 자폭을 사용할 수 있어.'

 어이가 없을 정도로 효율이 좋다.

 어디까지나 스켈이 부활 가능한 언데드이기에 사용 가능한 방법.

 만약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특성을 줄 수 있다면?

 심지어 테이밍 가능한 건 스켈만이 아니다.

 망자들와 왕이 B급이 되면서 테이밍 가능한 언데드의 수가 하나 더 늘어났다.

 비록 이전석에겐 계륵에 불과한 특성일지라도, 그들에게 양도하여 활용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천군만마와 같은 병력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결코 배신하지 않는, 충성도 높은 부하들이.

 '망자들의 왕을 높이는 게 정답이었군.'

 이전석은 아주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왕이시여···. 무한한, 감사를."

 돌연 스켈이 그런 말을 해왔다.

 무한한 감사라.

 D급이 되면서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폭도 늘어난 걸까?

 "스켈."

 "하명···하소서."

 "자폭 사용할 수 있겠어?"

 "왕께서 명하신다면······."

 "그럼 한 번 써봐."

 "존명."

 [스켈이 자폭을 발동합니다.]

 순간.

 검붉은 뼈로부터 새빨간 빛이 터져 나왔다.

 김영소가 자폭을 발동했을 때와 똑같은 광경.

 이전석은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100미터···.

 '아니, 만약을 위해 더 멀어지는 게 좋겠어.'

 대략 150미터 가량을 이동한다.

 그러고서도 가진 마나의 태반을 활용해, 전신에 마나 보호막을 둘렀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특성일지 한 번 보자고.'

 이전석이 붉은 섬광을 터트리는 스켈을 응시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삐-.

 옅게 들려오는 이명과 함께.

 ━━━!

 천지가 뒤흔들렸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42화

경호원

"이, 이렇게··· 꿀꺽··· 이렇게 많이 주셔도 되는 건가요?"

 변하늘이 떨리는 손으로 봉투 두 개를 받아들었다.

 그곳에는 오백에 해당하는 현금이 들어 있었다.

 총합 천만에 해당하는 거액.

 "오히려 평균보다 조금 낮게 쳐드린 겁니다."

 이번 던전을 공략하면서 대략 5천에 해당하는 돈을 벌었다.

 엘리트 몬스터로 인한 수확이 생각보다 컸던 탓이다.

 엘리트 몬스터가 드랍하는 특수 재료는 정말 다양한 곳에 사용되는 까닭인지 보스 몬스터의 마석보다 훨씬 높은 값에 거래되곤 했다.

 '그나저나······.'

 이전석이 변하늘을 쳐다봤다.

 돈을 받고 좋아하는 모습.

 재벌집 아들이라고 생각했더니.

 그건 또 아닌 걸까?

 그럼 저 고가형 카메라는 또 어디서 얻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해답은 금세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카메라 사느라 빚까지 졌는데······ 흐윽, 이걸로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헌터님은 제 은인이십니다!"

 아니···.

 '빚으로 산 거였어?'

 이전석은 황당하다는 양 그를 쳐다봤다.

 이걸 멍청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만큼 기자에 진심인 걸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물론 이전석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럼 인터뷰도 끝났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넵!"

 이전석은 정산을 마치고 협회를 나왔다.

 마석이나 몬스터의 부산물 등. 갖가지 정산은 보통 협회에서 이루어지는 편이었고, 때문에 던전공략을 끝낸 두 사람은 근처 협회 지부에서 막 정산을 끝낸 차였다.

 그때.

 "어? 저기 혹시···."

 협회를 나오던 이전석을 누군가 붙잡았다.

 교복을 입을 여학생이었다.

 "···그, 이, 이전석님······?"

 "님?"

 "아, 님이 아니라! 헌터님!"

 여학생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와아··· 실물이 더 멋있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이전석은 얼떨떨한 어조로 대답했다.

 멋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한 마디였다.

 외모가 준수하다는 거야 이전석 본인도 알고 있지만, 천살성으로 인해 변해버린 눈빛은 멋있다라는 감상을 떠올리기엔 한참 이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왜 사람을 그렇게 쳐다봐?

 이지혜나 그외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

 오히려 무서워하는 게 정상 아닌가?

 적어도 이전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 기괴한 눈이 몇몇 사람들에겐 도리어 매력 포인트로 손꼽혀 인기를 끌어 모으고 있다는 건, 이전석으로선 도무지 알래야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혹시 싸인 한 장만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 정도야, 뭐."

 "아싸! 감사합니다!"

 여학생이 활짝 웃으며 등에 맨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이전석은 거기에 싸인을 해줬다.

 그러고있자니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연예인이라도 된 기분이군.'

 그야말로 어색함의 극치.

 "헤헤, 애들한테 자랑해야지!"

 싸인을 받은 여학생은 한 번 더 감사인사를 하곤 싱글벙글 웃으며 멀어졌다.

 대체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은신을 사용합니다.]

 이전석은 바로 은신을 사용했다.

 또 누군가에게 붙잡힐까 싶어서였다.

 굳이 기척까지 숨기진 않았다.

 일반인들이야 은신만 사용해도 못 알아볼 테니까.

 그렇게 가도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전석은 던전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던전을 공략하고, 스켈의 자폭을 시험했던 때.

 ━━━!!

 굉음과 괴음.

 폭발과 충격.

 솔직히 말하면, 이전석도 적잖이 놀랐다.

 자폭.

 그 위력이 생각보다 커다랬던 것.

 이 정도면 S급 헌터도 정통으로 맞았다간 멀쩡하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 그들이 제대로 방어하지 않았을 경우의 이야기다.)

 '리스크가 극단적으로 큰 특성일수록 위력도 커진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유독 폭발력이 더 커다랬다.

 자폭이라는 특이성 덕분일까.

 '단순히 위력만 따지면 고독과 비슷한 수준이군.'

 윤진을 기폭제로 일어났던 고독의 폭발.

 그와 엇비슷한 정도의 규모와 위력이다.

 '만약 여기에 텔레포트 특성까지 사용하면······.'

 적의 본거지에 스켈을 핵폭탄처럼 투하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활용성이 무수하게 떠올랐다.

 특성과 특성의 결합.

 거대화를 사용한 채 자폭을 터트리면 어떻게 될까?

 '시험해볼 게 많겠어.'

 그 외에도 언데드를 한 마리 더 테이밍할 수 있었지만.

 '당장은 떠오르는 게 없군.'

 B급 중에서 그나마 가장 강한 놈이라고 해봤자 미라 정도가 끝이다.

 반면 A급으로 올라가면 데스 나이트라는 강력한 언데드가 있었다.

 미라에 쓸데없는 소환수 칸을 소모할 바에야, 특성 등급을 한단계 더 올려서 데스 나이트를 테이밍하는 게 훨씬 효율이 좋았다.

 물론 망자들의 왕이 B급이 된 이상 그만큼 룬의 성공확률도 내려갈 테지만···.

 'B급이면 아직 괜찮아.'

 정말 확률이 거지같아 지는 건 A급부터다.

 이전석이 괜히 A급 룬을 가지고 C급 특성에 사용한 게 아닌 셈.

 3%라는 지랄 맞은 확률.

 덕분일까.

 A급 특성을 올리려면 사실상 S급 등급의 상위 룬이 필요했다.

 다만 지금 이 시기엔 아직 그런 게 나타나기 한참 전이었으니.

 '일단은 보류.'

 이전석은 룬을 한 개 더 얻을 때까지 추가 테이밍을 보류하기로 했다.

 어차피 룬이 나타나는 장소와 시기는 전부 기억하고 있다.

 이전석이 할 일은 그저 그 시기를 기다리다,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일이었다.

 뚜벅-.

 이윽고.

 이전석이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오래되기도 더럽게 오래됐어.'

 입구와 계단.

 곳곳이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했다.

 참 오래된 아파트였다.

 '할아버지 때부터 여기서 살았다고 했으니까.'

 물론 돈이 없어서 이사를 안 간 건 아니다.

 이한석은 죽은 아버지(이전석의 입장에선 할아버지다)를 추억하며 이곳에서 결혼하여 신혼을 보냈고, 또한 20년 간 두 명의 자식을 길렀다.

 버릴래야 버릴 수가 없는 집인 셈이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사는 가야 해.'

 생각보다 많이 오래된 집이다.

 작은 지진만으로도 쉽게 부서질 거다.

 빌런의 침입에도 안전하지 않았다.

 그뿐이랴.

 던전 폭주의 빈도도 옛날에 비해 많이 줄었다곤 하나, 언제 그런 재앙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벌써부터 머리 아프군.'

 그 고집 쌘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 것인가.

 분명 죽어도 이곳에서 죽겠다고 말할 게 분명한데······.

 이전석은 한숨을 푹 내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띵-.

 엘리베이터가 10층에 멈췄다.

 이전석은 복도를 가로질러 집으로 들어갔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던 때였다.

 "이전석 헌터님 되십니까?"

 집.

 현관문 앞.

 웬 남자 한 명이 서있었다.

 꽤나 중성적인 외모다.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

 흑색머리를 길게 묶어내리고 있으며, 이마엔 도깨비처럼 두 개의 뿔이 솟아나 있다.

 "저는 아야미네라고 합니다. 협회의 명령으로 헌터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야미네.

 일본인일까?

 아냐가 그러하듯 헌터가 타국으로 귀화하는 거야 그리 드문 일은 아니지만······.

 "오늘부로 헌터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그가 일전 병원에서 김백동에게 부탁했던 경호원인 것 같았다.

 ※ ※ ※

 이전석은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는 때마침 가족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니 시발! 야 이 새끼야! 패스를 그따위로 하면··· 아오!"

 "여보, 애가 보고 있는데 말버릇 좀······."

 "응? 나 불렀어, 엄마?"

 "아니다···. 하던 거 마저 하렴."

 아무래도 다 같이 축구경기를 보는 모양.

 이지혜는 관심도 없는지 소파에 드러누워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다.

 반면.

 "교체 해! 저 새끼 빼라고!!"

 이한석은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저러다 화병으로 쓰러지는 건 아닐까.

 그 정도로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하긴 그는 동네 축구 동호회에도 매주 빠짐없이 참석할 만큼 축구를 좋아했으니···.

 한국 국대의 실정을 보고 쌍욕을 퍼붓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물론 월드컵을 할 때면 늘상 있는 일이다.

 "아들 왔니?"

 뒤늦게 이전석을 발견한 한유리가 말했다.

 이지혜는 여전히 휴대폰이나 만지고 있고, 이한석은 축구에 푹 빠져 욕설만 내뱉을 뿐이다.

 "못 살아."

 그 모습을 본 한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거실에서 냉수를 마시던 이전석에게, 한유리가 호호 웃으며 다가왔다.

 "어제 사준 보약 방금 먹어봤는데 괜찮더라."

 보약.

 그녀의 말 대로였다.

 한유리가 빈혈로 병원을 드나들자, 이전석은 그날로 바로 보약을 주문한 것이다.

 그리고 방금 택배로 도착했는지 거실 식탁에 큼지막한 상자가 보였다.

 "빈혈은 좀 나아지셨어요?"

 "한 달은 먹어봐야 알지."

 "그럼 한 달 뒤에 알려주세요. 몸에 잘 맞으시면 또 사드릴 테니까."

 "우리 아들, 평소에는 속만 썩이더니 갑자기 효자가 다 됐어?"

 효자.

 그 말에 이전석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전생에 미처 하지 못했던 효다.

 지금이라도 다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보다.

 "아직 낯빛이 조금 안 좋으신 것 같아요. 무리해서 운동한다고 돌아다니시지 마시고, 당분간은 집에서 푹 쉬세요."

 "병원에서도 그러라고 하더라."

 한유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검진을 받아보라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유리는 유난이라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그녀는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알겠다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이전석이 뒤늦게 방으로 들어갔다.

 밖에서는 여전히 성대를 불태우는 이한석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런 이전석을 따라 같이 방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아야미네.

 방금 현관문 앞에서 마주친 그 헌터.

 '기척 하나는 꽤 잘 감추는군.'

 이전석이 그를 흘겨보며 평가했다.

 가족 중 누구도 아야미네를 알아채지 못했다.

 마치 투명인간 취급이라도 하는 듯한 광경.

 한유리와 대화를 나눌 때조차 그녀는 아야미네에 대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빤히 얼굴을 쳐다봤기 때문일까.

 아야미네가 나지막이 물어왔다.

 이전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별 거 아닙니다. 그보다, 잠시 협회에 그쪽에 대해 확인 좀 해도 되겠습니까?"

 아야미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에 이전석이 곧장 김백동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자···.

 ━아야미네? 아, 벌써 갔나 보군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믿을 수 있는 헌터입니다. 은신과 암살에 뛰어난 특성을 가지고 있고, 비교적 최근 S급으로 성급했죠.

 "S급?"

 ━놀라셨습니까?

 "그거야, 뭐···."

 당연히 놀랄 수밖에.

 S급부턴 헌터들의 수도 꽤 적은데다, 특유의 강함 덕분에 세간에선 귀족과도 같은 취급을 받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런 S급이 단지 경호를 위해 파견되다니.

 ━협회에서 그만큼 헌터님을 신경 쓰고 있다고 알아주시면 좋겠군요.

 김백동은 "게다가"라며 말을 이었다.

 ━아야미네 만큼 누군가를 '다수'로 경호하는데 뛰어난 헌터는 달리 없을 겁니다.

 다수.

 그 단어에 이전석이 기억을 되새겼다.

 분명 전생에 들어본 적이 있긴 했다.

 분신을 소환하는 종류의 특성.

 그런 걸 가진 S급 헌터가 협회에 있다고.

 만약 그런 류의 특성을 아야미네가 가지고 있다면······.

 '다수라는 말도 납득이 가는군.'

 하물며 그는 기척을 숨기는데도 능했으니.

 이만큼 경호에 특화된 헌터도 달리 없으리라.

 ━협회에서 각별히 신경 써서 선별한 헌터입니다. 또한 협회장님께서도 그에 대해선 괜찮을 거라 보증하셨으니 가족분들은 안심하고 맡기시면 될 것 같습니다. 

 "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이전석이 나지막한 어조로 수긍했다.

 윤진이라는 스파이가 드러난 상황.

 그런 마당에 김백동이 이렇게까지 단언하는 건 꽤 흔치않은 경우다.

 하물며 협회장- 연선화의 보증까지 있다지 않은까.

 이전석 본인이 보기에도 달리 악의나 살의 같은 것들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믿고 맡겨도 좋을듯 싶었다.

 ━그보다 협회 내부에서 새로운 방침이 내려왔습니다.

 문득, 김백동이 그런 말을 해왔다.

 "방침이요?"

 ━예. 작전 실행일까지 개개인의 성장에 주목하라는 방침입니다. 

 작전 실행일.

 그거라면 아마 개벽연합과 관련된 걸 말하는 것일 터.

 하긴 이제 보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다.

 작전을 위해 스스로를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저희가 다른 움직임을 보이면 연합측에서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그거라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안심?

 ━협회를 포함한 서울 전역에 광범위한 인식저해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S급 헌터 10명, SS급 헌터 두 명, 그리고 협회장님의 도움까지 빌려 사용한 마법입니다. 제아무리 연합측에 정보취득에 뛰어난 인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번만은 무엇 하나 알아낼 수 없을 겁니다.

 확실히······.

 '그쯤 되면 연합도 쉽게 이상을 눈치 채진 못하겠군.'

 그저 단순한 인식저해가 아니다.

 저만한 헌터들이 힘을 합쳤다면, 그건 이미 하나의 거대한 환술이나 마찬가지였다.

 협회의 네트워크를 해킹해 정보를 빼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놈'이 가진 특성의 특이성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협회에서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나서면 해킹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정보 하나조차 쉬이 얻을 수 없겠지.

 ━또 다른 변경점이나 특이사항이 있다면 그때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김백동은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정막이 내려앉은 방.

 이전석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러곤 정면을 바라본다.

 아야미네.

 "···경호는 안하십니까?"

 "이미 가족 분들은 제 분신들이 경호하고 있습니다."

 "그럼 당신은요?"

 "헌터님을 경호하고 섬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단순 지키는 게 아니라 수발까지 들겠다?

 그것도 상부의 명령으로?

 '협회가 그렇게까지 진심일 줄은 몰랐는데.'

 하다하다 S급 헌터를 수발들라며 보내는 경우는 이전석으로서도 처음 보는 경우였다.

 "그쪽···."

 "아야미네 특무관이라 불러주십시오."

 "······아야미네 특무관께선 일단 시야에 안 보이도록 경호해주시죠."

 "알겠습니다."

 아야미네가 즉시 모습을 감췄다.

 고개를 숙이며 사라지는 신형.

 무슨 특성일까.

 분신에 은신.

 듀얼 각성자인지, 아니면 두 가지 효과를 가진 특성인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전석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작전 실행일까지 개개인의 성장에 주목하라는 방침입니다.

 김백동의 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천매보, 절개, 마나조율.

 익히고 다뤄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육체적인 성장과 수련까지.

 이전석은 김백동의 말대로 당분간은 그런 것들에 신경 쓰며 보낼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토요토가 출장을 끝냈습니다.]

 [토요토가 당신의 업상점 이용기록을 확인합니다.]

 [토요토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제가 불가피한 상황이 생겨 자리를 비우고 말았군요. 대신, 고객님을 위해 특별 세일을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시간 괜찮으시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길. ^0^]

 [토요토가 '바겐세일!'을 시작합니다.]

 뜬금없이, 그런 시스템이 눈앞에 나타났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43화

살의 (1)

'······바겐세일?'

 이건 또 뭐야.

 이전석이 황당한 눈빛으로 시스템을 쳐다봤다.

 참 별게 다 있구나 싶었다.

 동시에 호기심이 들었다.

 세일이면 얼마나 할인하는 거지?

 이전석은 바로 토요토를 불러보기로 했다.

 아먀미네가 보고 있긴 했지만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주변에 펼친 기막 덕분이었다.

 이걸로 내부의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진 않을 터.

 경호원이라는 양반이 억지로 기막을 뚫고 소리를 엿들을려 하진 않을 것이다.

 하물며 토요토의 모습만으론 무슨 특성인지 추측하기도 어렵겠지.

 티켓처럼 토요토가 다른 사람 눈에 보이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토요토."

 그래서 이전석은 바로 토요토를 불러냈다.

 쩌적-.

 마치 금이 가듯 갈라지는 허공.

 그곳에서 토끼 한 마리가 뛰쳐나온다.

 "후후-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요, 고객님."

 "며칠 지나지도 않았을 텐데."

 "저한테는 꽤 긴 시간이었답니다. 천계와 하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른지라···. 음, 한 27년은 됐을까요."

 천계에 갔었다고?

 27년이라는 어이없는 시간의 흐름은 그렇다 치고.

 '천계라.'

 명계에서 지옥에 떨어졌을 때.

 저승사자들이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다.

 ━에휴, 나는 언제 천군(天軍)으로 올라갈 수 있으려나.

 ━네가? 꿈도 꾸지마라. 천군이 아무나 될 수 있는지 알아? 천계에 올라가는 것만 해도 상당한 공이 필요한데 거기서 천군까지 되려면··· 어휴 상상하기도 싫구만.

 천계, 천군.

 아마 명계와 반대되는 개념.

 천군은 그곳의 군사일 터.

 천국···은 아닐 거다.

 다만 이전석 자신을 심판했던 신적 존재들이 거주하는 세계임은 얼핏 알 수 있었다.

 "헌데 오랜만에 확인해보니 고객님께서 특별 이용권을 사용하셨더군요."

 특별 이용권?

 아냐와 관련된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얻은 보상을 말하는 걸까.

 "그걸 사용하신 분은 오랜만이라 무심코 흥분하고 말았지 뭡니까."

 "흥분까지 할 정도인가?"

 "흥분할 정도이지요. 왜냐하면 그건······."

 "그건?"

 애매하게 말을 흐리는 토요토.

 그가 땅딸막한 손을 내민다.

 "이 이상의 정보는 선업이 취급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됐다."

 이전석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선업까지 지불해가며 듣고 싶은 정보는 아니었다.

 그보다.

 "상점창이나 보여줘."

 토요토가 왜 그렇게까지 난리부르스를 쳤는지, 그 이유나 확인해보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토요토.

 그러나.

 "그 전에 잠시······."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아야미네가 있는 방향.

 그런데.

 '······기척이 사라졌어?'

 토요토가 아야미네가 있는 방향을 응시한 직후, 아야미네의 기척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표정을 찌푸린 이전석.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죽였나?"

 "설마요. 그저 불필요한 눈이 있는 것 같아 잠시 시간을 멈춰뒀을 뿐입니다. 덤으로 잠시 전까지의 기억도 지워뒀으니 안심하시길."

 시간을 멈췄다.

 토요토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내뱉고 있었다.

 시간조작은 SSS급 특성으로도 쉬운 일이 아닐진대.

 게다가 기억까지 지웠다고?

 "······."

 이전석은 토요토를 내려다봤다.

 처음에는 단순 작은 토끼라 생각했다.

 업을 취급하는 상인이라고.

 헌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적어도 토요토는 S급 헌터를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전석으로선 꽤나 충격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대체 무슨 술수를 사용한 거지?'

 마나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았다.

 특성을 사용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도 아야미네의 기척이 순식간에 TV 채널 돌리듯 사라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을 지경.

 띠링-.

 한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눈앞에 상점창이 나타났다.

 [전품목 90% 파격 할인!!]

 창 하단에 적힌 문구.

 "허."

 이전석이 무심코 헛웃음을 흘렸다.

 놀랍기는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뜬금없이 90퍼 가격을 할인하다니.

 "장사 접냐?"

 이전석이 황당함이 깃든 어조로 물었다.

 그에 대해, 토요토가 설명하듯 말했다.

 "특별 이용권을 획득하신 분껜 특별히 1회에 한 해 할인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답니다. 일종의 기념 이벤트이지요."

 "왜 그런 이벤트를 하는 거지?"

 "그 또한 정보료를 받습니다만···."

 "지랄하는군."

 "하하."

 참 별 걸로 다 정보료를 받는구나 싶었다.

 "뭐든 골라보시죠, 고객님. 90퍼 할인은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니 천천히 즐겨주시면 감사할 것 같군요."

 그 말에 이전석이 상점창을 살폈다.

 확실히.

 가격들이 하나 같이 저렴했다.

 전에는 기본이 만이었던 것이 지금은 천 단위의 물건도 쉽사리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막 주워담으면 충동구매가 될 거야.'

 이전석은 침착하게 올라오는 욕망을 억눌렀다.

 무엇이든 과한 건 좋지 않다.

 저렴하다고 무작정 구매하면 빈털털이가 되기 일쑤다.

 이럴 때 참아야 비로소 저금이라는 개념이 형성된다.

 하물며 업상점의 화폐는 선업.

 신중하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소비해야만 했다.

 '이왕이면 차후 진행될 작전에서 도움이 될만한 아이템이나 특성이면 좋겠는데···.'

 그런 거라면 몇 개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영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아이템도, 특성도.

 전부 어딘가 한 조각이 부족한 느낌이다.

 '음.'

 이전석은 어딘가 뚱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스크롤만 내려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걸로 할까.'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나마 가장 나은 아이템 하나를 골랐다.

 정확히는, 그러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잠깐.'

 번개처럼 어떤 한 생각이 내리쳤다.

 "이봐."

 "왜 그러시죠?"

 "처음 너를 불러냈을 때, 너는 '존재하는 모든 걸 취급한다'고 했지."

 "그렇지요."

 존재하는 모든 것.

 그렇다면, '그것'도 있지 않을까.

 미래.

 정확히는 전생.

 어떤 한 헌터가 가지게 되는 특성.

 "그럼······."

 이전석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 ※ ※

 아야미네.

 대한민국 헌터협회 특무부 소속 S급 헌터.

 오직 협회장과 최상위 간부진의 명령에만 움직이며, 협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는 특수부대.

 빌런을 중점으로 상대하는 감독관과 달리, 그들은 협회의 어두운 부분에 암약하면서 다양한 일을 처리하곤 한다.

 암살이나 요인경호가 그 대표적인 예였는데···.

 최근 아야미네는 협회장의 직할명령으로 한 헌터와 그 가족의 경호를 맡게 되었다.

 솔직히 임무에 불만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아야미네로선 흥미롭기까지 했다.

 경호를 맡게 된 인물.

 그 사람이 바로 이전석이었기 때문이다.

 영웅.

 검선의 제자.

 궁금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선뜻 임무를 받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처음 그를 봤을 때.

 ━어떻게?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이전석이 사는 아파트.

 정확히는 그의 집 앞.

 그곳에서 아야미네는 기척을 죽이고 있었다.

 이전석이 도착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면서.

 헌데.

 이전석은 그런 아야미네를 바로 알아차렸다.

 1초 내지 2초의 딜레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석의 눈은 틀림없이 아야미네를 인지했다.

 그 사실이 놀라웠고, 무엇보다 궁금했다.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거지?'

 아야미네는 S급 헌터다.

 특무부에 소속된 엘리트.

 그것도 경호나 암살을 위해 기척을 숨기는데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를 한순간에 알아차리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리고 그건 처음 이전석과 만나고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아야미네는 기척을 죽이고 이전석을 경호했으나.

 이전석은 단 한 번도 아야미네의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이런 미친.'

 그때쯤 되자 놀람은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이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아무리 재능이 있고 검선의 제자라고 한다지만···.

 의문.

 경악.

 두 가지 생각이 뇌리를 뒤덮었다.

 그러나···.

 아야미네.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이전석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타인의 기척을 감지하는데 뛰어난 것인지.

 천살성.

 살의와 살기의 집합체.

 그것은 이전석의 감각기관을 보다 더 날카롭게 벼려냈다.

 회귀하면서 특성이 모두 사라졌다지만, 재능과 실력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감지능력.

 그것은 육체와 달리, 회귀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현재로 전승되었다.

 연선화조차 잠시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지 곧 그 기척을 눈치 챘으니···.

 이전석이 가진 기척감지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는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아야미네로선 그저 한없이 경악스러울 따름이었다.

 '음······.'

 아야미네가 눈을 깜빡였다.

 '뭐지?'

 방금 뭔가··· 이질감이 들었다.

 다만 그 이질감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끊어진 듯한 감각.

 이전석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랬다.

 종종 무언가가 일그러진 느낌이 들어 기분이 거북해지곤 했다.

 그게 토요토에 의한 것이라곤 차마 알 리 없는 아야미네는, 나중에 헌터 전문병원이라도 찾아가 봐야겠다 생각하며 그저 이전석의 경호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어딜 가는 거지?'

 이전석이 집을 나섰다.

 '던전?'

 그렇다.

 이전석이 향한 곳은 던전이었다.

 놀과 코볼트를 포함한 고블린의 상위종이 주로 등장하는 B급 던전.

 그는 그곳을 순식간에 공략했다.

 뭐라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다.

 단도를 몇 번 휘두르자 몬스터가 낙엽처럼 죽어나갔다.

 그건 보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맹독으로 수많은 헌터를 궁지에 내몬 '놀 로드'는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목이 썰려 죽었다.

 그리고 텅 빈 보스방.

 '수련인가?'

 이전석은 바로 밖으로 나가지 않고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

 아야미네는 입을 다물었다.

 눈도 깜빡이는 것을 잊고 그저 이전석을 지켜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전석은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겉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기술을 수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야미네는 생각했다.

 아름답다고.

 그러나 한편으론 그 이상의 흉포함이 느껴졌다.

 모든 걸 찢어발길 듯한 예기.

 왜 그가 검선의 제자가 됐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위압적인 모습이다.

 아야미네.

 S급인 그가 압도당하고 있다.

 대치하는 것도 아니고.

 싸우는 것도 아니며.

 그저 수련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그렇게 한참 넋을 놓은 채 이전석을 지켜보고 있을 무렵.

 ━본체, 대답 바란다.

 돌연 분신으로부터 전음이 들려왔다.

 머릿속에 울리는 아야미네 본인의 음성.

 그는 귀에 손을 댄 채 속으로 되뇌었다.

 ━무슨 일이지?

 ━이전석의 가족을 노리는 괴집단 발견. 죽일까? 아니면 포박할까.

 ━일단······.

 아야미네는 생각을 거듭했다.

 그것도 잠시.

 곧 대답을 하려던 찰나.

 "무슨 일이시죠?"

 갑자기 이전석이 다가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기척을 숨기고 있는데, 그는 마치 아야미네가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다가왔다.

 '······들킨 이상 어쩔 수 없군.'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는 게 그의 방침이건만.

 낌새를 알아채고 다가왔다면 이 이상 숨기는 건 의미가 없었다.

 아야미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가족 분들께서 괴집단에게 노려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 순간.

 '······음?'

 아야미네가 머리를 붙잡았다.

 '뭐지?'

 한순간.

 '어지러움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빈혈이라도 생긴 듯 머리가 핑 돌았다.

 이전의 이질감과는 종류가 다르다.

 '살기?'

 그렇다.

 그것과 비슷하다.

 전에 SS급 헌터의 기세를 한 번 정면으로 맞아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감각이 엇비슷했다.

 하지만···.

 그걸 A급 헌터에게서도 똑같이 느꼈다고?

 여전히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의문도 잠시뿐.

 곧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몇 명이죠?"

 그 사이, 이전석이 재차 물어왔다.

 이질적일 정도로 무감각한 어조.

 아야미네는 잡생각을 털어놓으며 전음을 보냈다.

 ━몇 명이 노리고 있지?

 ━열 둘.

 간결하게 돌아온 대답.

 "열 둘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그대로 이전석에게 전한다.

 그러자 이전석이 나지막이 물었다.

 "분신으로 처리 가능하시겠습니까?"

 "문제 없습니다."

 보고 받은 상대의 전력은 C급 내지 B급.

 가장 높은 놈도 A에 불과하다.

 그 정도면 분신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럼 한 명만 죽이지 않고 남겨주시죠."

 그에 이전석이 말했다.

 어째서일까.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감정도 없었거늘.

 이전석은 어딘가 무척 일그러져 보였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44화

살의 (2)

"분신으로부터 도착한 보고에 의하면, 괴집단이 가족분들께 접근하기 전에 이미 그들을 격퇴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인적이 드문 곳에 한 명을 포박해둔 상태라고 하니 그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아야미네가 사람들 사이를 내달리며 말했다.

 아야미네, 이전석.

 둘 다 기척을 죽이고 있기 때문일까.

 누구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가.'

 이전석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메스컴에 얼굴이 팔리면서, 가족에게도 위험의 손길이 뻗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처음 인터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비록 당시에는 익명성이 지켜졌고 특정될 만한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파탄 나 사라져버릴 익명성이었다.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의미 없다.

 과연 이전석이 거절한다고 마냥 그의 신변이 감춰질까?

 파파라치라는 놈들이 괜히 악질로 불리는 게 아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정신 나간 놈들이 많이 있었고, 더불어 앞으로 이전석 자신이 해결할 빌런이나 던전 폭주까지 고려하면 그 화제성은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없을 터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예상도 하고 대비도 했다.

 가족의 하루일과.

 몇 시에 어딜 가고 무엇을 하는지.

 또 누굴 만나며, 어떤 물건을 사는지.

 철저하게.

 혹은 광적일 정도로.

 가족의 안전을 지키고자 애썼다.

 아니, 발악했다.

 두 번 다시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오빠··· 우리 이제 어떡해······?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눈물 흘리는 여동생.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부모님.

 그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그래서 회귀 후 철저하게 발버둥 쳤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알아채고 달려갈 수 있도록, 가족들에겐 얼마 없는 마나마저 붙여 놨다.

 그뿐이랴.

 지금은 아야미네라는 경호원까지 있었다.

 우려하거나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가족이 무사하단 말을 듣고도.

 두근- 두근-.

 심장박동이 줄어들지 않았다.

 머리는 북해의 얼음만큼이나 차갑거늘, 심장은 마치 용암에 집어넣은 것처럼 뜨거웠다.

 "이쪽입니다."

 아야미네가 방향을 틀었다.

 이전석이 그를 따라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윽고 어느 폐건물에 다다랐다.

 사람은커녕 CCTV조차 없는 곳.

 한때 던전의 폭주가 발생했던 지역은 마나의 침식으로 일반인이 쉬이 접근하지 못해 이런 식으로 방치되기도 했는데···.

 "이곳에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장소는 각성자들의 주 무대로 사용되곤 했다.

 누군가를 납치하거나, 죽이거나.

 혹은 심문하거나.

 그래.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장소였다.

 '노이즈존'은.

 뚜벅, 뚜벅-.

 이전석이 폐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야미네와 똑같은 얼굴의 사람이 두 명 서있었다.

 말끔한 정장 차림,

 기다란 포니테일,

 이마에 돋아난 한 쌍의 뿔.

 아야미네와 완전히 똑같은 외관.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그들은 아야미네와 달리 제 키보다 훨씬 큰 대검을 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왔나?"

 "왔네."

 그들이 동시에 이전석을 바라봤다.

 "······."

 "······."

 그러곤 똑같이 표정을 찌푸렸다.

 아야미네- 본체가 느끼던 것과 똑같은 감각을 그들도 경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아야미네가 허공에 손짓했다.

 그러자 분신들이 희뿌연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놈입니다."

 아야미네는 폐건물 중앙에 온몸이 결박된 채 패대기쳐져 있는 사내 한 명을 가리켰다.

 꼼짝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의식을 잃은 듯하다.

 화륵-.

 "끄아악-!"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의식을 잃었다면 깨우면 되는 일.

 왼쪽 상반신을 집어삼킨 불꽃.

 사내가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 친다.

 이전석은 뒤늦게 불을 꺼트리며 물었다.

 "이름."

 "헉, 허억······!"

 사내는 고통에 깜짝 놀랐는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숨만을 헐떡였다.

 물론, 이전석이 알 바는 아니었다.

 화륵-.

 재차 타오르는 불꽃.

 "끄아아악-! 그, 그만! 제발 그만!!"

 이전석이 발화를 꺼트리며 다시 물었다.

 "이름."

 "김, 김윤성!"

 "왜 내 가족을 노렸지?"

 "가족? ······그럼 네가 이전석이냐?"

 퍽-!

 이전석이 사내의 턱을 걷어찼다.

 "컥···?!"

 그러자 피를 토하며 넘어가는 사내.

 이전석은 그를 차디찬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어둠이 소용돌이 쳐 굳어버린 듯한 동공.

 "미안하지만 나는 너한테 질문을 허락한 적이 없어. 묻는 말에만 대답해."

 "쿨럭!"

 사내는 피를 한 움큼 토하더니, 이내 겁에 질린 듯한 눈치로 대답했다.

 "우리는, 화산을 위해······."

 "화산?"

 이전석의 의문.

 대답한 건 아야미네였다.

 "놈이 속해있던 사무소 자체가 화산의 신봉자였던 모양입니다."

 화산의 신봉자.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놈들이다.

 화산은 쿠데타를 일으킬 때를 대비해 자신들을 응호하고, 뿐만 아니라 앞서 고기방패가 되어줄 이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내곤 했으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들 또한 그런 화산에 감화된 단체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간다.

 그들이 이전석의 가족을 노린 이유.

 "화산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나를 미리 제거해두려는 생각이었나?"

 화산과 가장 사이가 안 좋은 협회.

 그곳에서 밀어주는 영웅.

 화산의 신봉자가, 그런 이전석을 가만 두고 볼 리 없었다.

 "······."

 표정을 보니 정답인 것 같다.

 "가족을 인질로 잡고, 헌터님을 꾀어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옆에서 아야미네가 말했다.

 이전석도 예상하긴 했다.

 애당초 그의 가족을 노릴 만한 이유라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일까.

 "······."

 이전석은 자기 자신조차 신기할 정도로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음을 느꼈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면 경호원을 미리 준비시켜 대비해서?

 모르겠다.

 그저 머리가 차가웠다.

 과열되고 과열되어.

 기계가 열을 이기지 못하고 다운되듯이.

 이전석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박동이 유난히도 빠르게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간 폭발하는 게 아닐까.

 그런 착각마저 들 정도로 혈액이 빠른 속도로 체내를 순환했다.

 "······화산에 영광을!"

 문득.

 사내가 품에 숨기고 있던 단검을 꺼내들며 달려들었다.

 잘 보니 포박- 밧줄이 풀려 있다.

 아야미네가 대충 묶어뒀을 리도 없는데.

 그런 종류의 특성이 있는 걸까?

 "헌터님!"

 아야미네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손에 어느새 대검이 쥐어졌다.

 허공에 불쑥 나타난 큼지막한 검.

 그것으로 사내를 베어버려던 순간.

 뚝-.

 아야미네가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왜일까.

 손과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감각.

 "미친······."

 그저 나지막이, 욕지거리가 새어나왔다.

 그 사이.

 코앞까지 가까워진 사내와의 거리.

 "뒤져라!"

 그가 이전석을 향해 단검을 내찔렀다.

 이전석은 그때까지도 가만히 서있었다.

 딱히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는다.

 대신이라는 듯.

 "······?!"

 사내의 전신을 푸른 실이 휘감았다.

 허공에서 형성된 마나의 실타레.

 그것이 풀린 밧줄을 대신해 사내를 포박한 것이다.

 "크으윽······!"

 사내는 이를 악 물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실은 어느새 밧줄 크기로 두꺼워져 있었다.

 B급만 되도 이렇게 쉽게 포박되진 않을 텐데···.

 사내의 등급이 그보다 훨씬 낮았던 걸까.

 그는 이전과 달리 포박을 풀지도 못했다.

 꽈득-.

 "크아악!"

 마나가 사내의 몸을 쥐어짜듯 압박했다.

 이전석이 그 앞으로 다가가 사내를 쳐다봤다.

 여전히 분노는 없었다.

 이전석은 한없이 냉정했다.

 다만.

 "······!"

 사내가 눈을 떨었다.

 어째서일까.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느낀 건 비단 사내만이 아니었다.

 이전석을 쳐다보고 있던 아야미네.

 그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대체······.'

 잘 보니 손이 떨리고 있었다.

 격하게 두근거리는 심장박동.

 두려움.

 그렇다.

 S급일 터인 그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대체, 협회는 무슨 괴물을······.'

 괴물.

 아야미네는 이전석을 괴물로 빗대어 표현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전석.

 지금 그의 모습은 마치 악귀와도 같았으니.

 폐건물 전체를 뒤덮은 무형의 기운.

 살기.

 혹은 살의라고도 불리는 것.

 대검을 들고 움직이지 못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손에 잡히지 않고 인식조차 되지 않아야 할 기운이 전신을 옭아맨 것이다.

 "허억······."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괴롭다.

 눈을 뜨기가 어렵다.

 사람이···.

 아니.

 생명의 감정이.

 이토록 흉측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마치 절망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다.

 지옥, 죽음, 불꽃.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

 억눌린다.

 옥죄이고, 짓눌린다.

 이대로 바스라져 허물어진 모래성처럼 갈가리 찢겨져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살의는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은 곧 위태로움이 되어 아야미네를 집어삼켰다.

 그는 더 이상 위풍당당한 S급 헌터가 아니었다.

 그저 죽어 심판을 기다릴 뿐인 한 명의 망자일 뿐.

 이윽고.

 툭-.

 이전석이 사내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화륵-.

 불꽃이 타올랐다.

 다만 색이 조금 달랐다.

 검붉은 색을 띄우던 이전과 달리, 그것은 어둠을 그대로 가져다놓은 듯 더없이 새까맸다.

 "······!!"

 전신이 타들어가는 사내.

 고통에 몸부림치지만 소용없다.

 마나의 실은 풀릴 기미가 없고, 이전석에게도 용서라는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으니.

 이대로 불태워 죽여버리려는 생각이었다.

 그때.

 "커, 헉······!"

 사내가 피를 토했다.

 눈, 귀, 코.

 사방에서 쏟아지는 핏물.

 고독.

 '화산의 신봉자라고 할 때부터 예상은 했다만······.'

 마지막까지 발악하는 그 추태가 한심했다.

 제주도에서 나올 수 없으니 이런 방식으로 어떻게든 피해를 입히려고 하는 거겠지.

 그 가당치도 않은 수단.

 '우습다.'

 이전석이 코웃음을 치며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사내를 옭아매던 마나의 실을 거둬들였다.

 대신, 다량의 마나를 방출했다.

 거기서 뒤이어진 현상화.

 마나가 사내의 주변으로 소용돌이치듯 모여들며 둥근 막을 형성한다.

 여러차례 겹겹이 쌓여가는 막.

 [마나조율이 당신을 보조합니다.]

 눈앞에 창이 떠오르고.

 촤락-!

 마나는 거대한 방벽이 되어 사내를 둘러쌌다.

 감옥.

 그렇다.

 그것은 마나로 이루어진 감옥이었다.

 조금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아마 놈의 등급은 C.'

 어쩌면 그보다 더 낮을지도 모른다.

 D 내지 C로 보는 게 옳을 터.

 당연히 고독의 규모도 기존에 비해 한참 뒤떨어질 거다.

 그렇다면 그건 더 이상 이전석에겐 유의미한 공격수단이 되지 못했다.

 예상대로.

 콰과광-!

 방벽 내부에서 고독이 폭발했다.

 새빨간 화염이 방벽을 물들인다.

 손이 떨릴 정도의 진동이 전해지지만 고작해야 그뿐이다.

 저급헌터를 매개로한 고독의 폭발은 별 대단치도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화염이 줄어들며 새까맣게 그을린 시체가 드러났다.

 이전석은 뒤늦게 마나를 거둬들였다.

 털석-.

 숨을 멎은 듯 축 늘어지는 사내.

 직접 죽인 게 아닌 만큼 선업이나 특성을 갈취하진 못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고작 이 정도 수준이라면 얻을 수 있는 특성이나 선업도 별 볼일 없었을 테니까.

 밧줄은 풀되, 마나의 포박은 풀지 못하던 모습.

 그 정도 수준의 특성이라면 이전석에겐 쓸모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최승철을 죽여야 할 이유가 늘었다.

 '절대 편히는 못 죽을 거다.'

 이전석은 각오를 굳히듯 손을 몇 차례나 쥐었다 폈다.

 그것도 잠시.

 "가시죠."

 이내 등을 돌려 폐건물을 나갔다.

"······."

 아야미네는 조용히 뒤를 돌아봤다.

 새까맣게 타 죽은 사내의 시신.

 노이즈존에서 죽은 만큼 그 시체는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마나에 의해 분해될 것이다.

 폐건물을 가득 채웠던 살의도 사라진지 오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일까.

 차마 말 못할 꺼림칙함에 아야미네는 도무지 그 자리에서 발을 때기가 어려웠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45화

전야(前夜)

이전석은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잠자듯이 명상에 잠겼다.

 방금 전 있던 일.

 어째서 화가 나지 않았던가.

 계속 생각해봤지만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영원의 낙인.

 정신의 마모를 막아주는 특성.

 그게 이전석의 분노를 억누른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왜 영원의 낙인이 발동했는가.

 이 또한 생각할 만한 추론은 하나뿐이었다.

 영원의 낙인은 영혼의 마모를 막는다.

 영혼은 달리 말하면 정신이기도 하다.

 즉 이전석은 정신이 마모되어 망가져버릴 만큼 분노를 느꼈고, 그것이 영원의 낙인에 의해 억눌러져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단지 살의만이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대신하듯 사방으로 뻗어나갔을 뿐.

 분노는 없으되, 살기는 존재했다.

 아야미네의 반응만 봐도 쉬이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누가 뭐래도 괴물을 눈앞에 둔 어린아이와 같았으니까.

 전생에 수도 없이 받아본 시선.

 "아야미네."

 문득.

 이전석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르셨습니까?"

 직후 아야미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딱딱한 어조에 단정한 정장차림.

 누가보면 집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야미네의 몸짓은 그만큼이나 우아했다.

 정확하게는 격식이 있다고 해야 될까.

 이전석이 그에게 물었다.

 "부모님이랑 제 여동생은 괜찮습니까?"

 "괴집단이 접근하기 전에 미리 차단했으니, 가족분들께선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하셨을 겁니다."

 아야미네는 말했다.

 그의 가족에겐 기본적으로 4~5명의 분신이 배치되어 있다고.

 대체 무슨 특성이길래 분신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걸까.

 "그럼 다행이네요."

 다행이다.

 정말.

 "그럼······."

 이내 아야미네가 작게 고개를 숙인 채 사라졌다.

 그의 눈빛에선 여전히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이전석을 꽤나 껄끄러워 하는 눈치였다.

 다만 그걸 겉으로 티내지 않는 게 실로 프로답다고 해야 할까.

 끼익-.

 이전석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집에는 적막이 가득했다.

 이지혜는 물론, 이한석과 한유리도 자리를 비운 채다.

 이전석은 차디찬 냉수를 들이켰다.

 그러고선 슬쩍 달력을 바라봤다.

 '일주일인가.'

 작전 결행일까지 일주일.

 벌써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전석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개벽연합 소탕작전.

 왜 거기에 참여하려 했던가.

 처음에는 단순한 이유였다.

 악인을 죽여 선업을 올리고, 특성을 빼앗기 위해.

 그래서 굳이 김백동에게 제안을 건넸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악인을 죽여 선업을 올린다.

 그건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변할 리도 없는 목표다.

 단지 특성을 얻는 것에 명확한 이유가 생겼다.

 '강해져야 해.'

 그 누구보다.

 가족을 지켜줄 경호원?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분명 아야미네는 강하다.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이가 가족을 노린다면?

 여전히 세상은 불안하고 위험천만 했다.

 위험한 놈들이 천지다.

 비단 그뿐이랴.

 던전 폭주는 또 어떻고?

 결국 그 해결책은 이전석 본인이 강해지는 것이었다.

 그래, 강해지면 된다.

 강함에는 명성이 뒤따르고, 명성에는 자연스레 돈이 달라붙으니까.

 돈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집 전체를 최상급 마석으로 도배할 수도 있겠지.

 S급의 마석은 웬만한 폭발에도 멀쩡하니, 그걸 집의 뼈대로 사용하면?

 던전 폭주에도 견디는 천혜의 요새가 될 거다.

 결국 강함만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방법은 명확했으니.

 '최대한 많은 악인을 죽인다.'

 죽이면 죽일수록 특성이 늘어날 거다.

 다만.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들은 의미가 없어.'

 가령 방금 전 만났던 사내.

 포박을 풀 수 있는 특성을 가진 듯 했지만, 정작 이전석의 마나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지 않은가.

 그 정도면 없는 것만 못한 특성이었다.

 그보다 유용하면서 급이 높은 특성.

 이를 테면 마나조율과도 같은 능력.

 그런 것들을 가진 악인을 죽일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 또한 심하면 과유불급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택권이 있을 때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눈앞에 특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잡지 않으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환상.

 그걸 과유불급이라는 이유만으로 버린다?

 아무리 이전석이라도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았다.

 레벨을 올리거나 자체적으로 수련을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래선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터.

 가장 직관적이고 빠른 방법.

 그 방법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개벽연합의 암살 작전 말이다.

 이전석은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그 작전에 있어 가장 많은 악인을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아마 김백동은 팀을 나눠 분할할 거야.'

 개벽연합의 본거지는 여러 장소에 흩어져 있었으니.

 그 과정에서 포탈 게이트를 활용할 터.

 좌표가 문제긴 하지만···.

 '그 정도는 이미 파악해 뒀겠지.'

 좌표도 모르는 마당에 작전을 진행할 만큼 협회의 체계가 부실하지는 않을 거다.

 작전을 진행하는 이상 좌표도 확인해볼 수 있겠지.

 그 좌표와 포탈 게이트를 자유자제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그럼, 괜찮은 계획이 하나 떠오른다.

 보통- 아니, 평소였다면 생각하지 않았을 계획이다.

 이유?

 특별할 건 없다.

 포탈 게이트의 특이성 덕분이었다.

 현 시점에서 포탈 게이트는 아직 그렇게까지 발전한 기술이 아니었으니까.

 한 번 가동하는데 극심한 마나가 소모된다.

 그뿐이랴.

 최상급 마석을 무더기처럼 재료로 사용했다.

 증기 기관차가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듯, 포탈 게이트는 마석을 연료로 사용해 가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탈 게이트는 한 번 가동하는데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가곤 했다.

 단지 그 금액이 협회이기에 감당이 가능할 뿐.

 일반적인 민간기업이었다면 한 번 가동하는 것만으로 재정이 바닥을 기게 될 터였다.

 하지만.

 '포탈 게이트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단은 이미 확보했어.'

 토요토의 상점.

 그것을 통해 충당했다.

 꽤 뼈아픈 지출이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굳은 마음을 먹고 구매했다.

 이게 바로 세일의 유혹이라는 걸까.

 아무렴 상관없었다.

 포탈 게이트의 자유로운 사용수단.

 그건 이미 확보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계획의 실행뿐이었다.

 작전이 실행일까지 기다리는 것 말이다.

 물론.

 마냥 기다리기엔 해야 할 일이 하나 있기는 했다.

 "양인하 장인님 되십니까?"

 이전석은 김백동을 통해 전해받은 번호로 곧장 전화를 걸었다.

※ ※ ※

 다음 날.

 이전석은 양인하를 찾았다.

 ━일주일에 한 번, 내 대장간에 찾아와라.

 다름 아닌 그 말 때문이었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적단도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하고자 한 것이다.

 다행이 양인하는 바로 다음 날에 시간을 내줬다.

 그만큼 적단도에 관심이 있다는 걸까.

 끼익-.

 허름한 문을 열고 대장간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왔냐? 앉거라."

 어딘가 양인하의 태도가 이상했다.

 미묘하게··· 정말 묘하게.

 '친절한데?'

 그렇다.

 친절했다.

 늘 망치로 머리를 후려칠 것만 같이 인상만 쓰던 양반이 오늘 따라 묘하게 서근했다.

 "자, 마셔라." 

 그가 이전석에게 냉수를 줬다.

 그러고서도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오렌지 주스도 줄까? 아니지, 콜라. 그래, 콜라도 있다. 이건 어떠냐?"라면서 제 말을 번복하기도 했다.

 정말 이상한 모습이었다.

 저런 양인하는 전생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걸까.

 물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전석이 적단도를 건네자, 양인하는 절제된 손놀림으로 망치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깡-!

 그의 망치질에는 상위 헌터와 같은 카리스마가 깃들어 있었다.

 망치질은 무려 반나절 넘게 이어졌다.

 대장간은 열기로 가득했고, 종을 울리는 듯한 청묘한 소리만이 한참이나 귓가를 맴돌았다.

 이윽고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이전석은 적단도를 돌려받았다.

 그런데.

 '······바뀐 게 없잖아?'

 예상외로 적단도는 이전 그대로였다.

 외형도, 효과도.

 변한 게 전혀 없엇다.

 그에 양인하는 또 다시 의미심장한 말을 해왔다.

 "아직이다."

 "예?"

 "이놈, 아직도 거부하고 있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쯧- 혀를 차는 양인하.

 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거부하고 있다니.

 '대체 뭘 원하는 거냐.'

 이전석이 적단도를 내려다 보았다.

 그런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웅-.

 적단도는 그저 즐거움 넘치는 감정만을 보내올 뿐이었다.

 "그보다, 너 혹시······."

 문득.

 양인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차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혹시?

 "크흠, 아니다. 바쁘니까 이제 그만 가라."

 "······아, 예."

 알면 알수록 이상한 양반이다.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장간을 나왔다.

 적단도도 그렇고 양인하도 그렇고.

 둘 다 대체 뭘 원하길래 저러는 건지 통 알 겨를이 없었다.

 '···갱년기라도 왔나?'

 생각해보면 그럴 나이긴 했다.

 아무렴 이전석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후.

 이전석은 남은 시간을 오직 천매보와 절개, 그리고 마나조율의 숙련도를 올리는데 집중했다.

 하루는 수련조차 마다할 만큼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함께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

 다행이 별 이상은 없다고 하여 이전석은 바로 다시 수행에 매진했다.

 던전도 몇 번 공략하며 레벨을 올렸고,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그렇게 다시 며칠.

 시간은 눈 깜짝할 새 흘렀고, 어느새 작전 당일이 되었다.

※ ※ ※

 새벽 3시.

 작전 시작까지 2시간을 앞둔 시각.

 ━협회 지하로 오시면 됩니다.

 김백동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집을 나서기에 앞서.

 "상태창."

 이전석은 잠시 제 정보를 확인했다.

 ━

 Lv. 62

 [근력 - 20] [민첩 - 50]

 [체력 - 26] [마나 - 41]

 스탯 포인트 - 10

 선업 - 70050

 악업 - @#%^#TF

 보유특성

 └천살성(EX+), 영원의 낙인, 발화(B). 망자들의 왕(B), 업상점, 은신(A), 광폭화(B), 힘의 권위(D), 신속한 발(D), 마나조율(S), 천매보, 절개(格), 대기만성(SS), 짐승화(A), 활력(A), 튼튼한 육체(C), 견골(B), 물리내성(D)

 ━

 수련으로 던전을 들락거린 영향일까.

 어느새 레벨이 62까지 올랐다.

 그 외에도 4개의 특성이 생겼다.

 활력, 튼튼한 육체, 견골, 물리내성.

 모두 마나를 소모하지 않는 패시브 특성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육체를 보다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마나조율로 호신강기의 수준이 대폭 증가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물론 그외에도 공격용 특성을 하나 얻기는 했다.

 ━

 짐승화

 등급 : A

 효과 : 사용 시 짐승과 같은 힘을 얻게 된다.

 ━

 얼마 전.

 폭주형 던전에서 얻은 특성.

 [짐승화를 사용합니다.]

 이전석은 시험 삼아 특성을 사용했다.

 그러자.

 콰득-.

 어금니가 뾰족해졌다.

 날카롭게 늘어나는 손톱.

 피부가 붉게 달아오른다.

 웨어울프 로드가 사용한 것에 비하면 그리 큰 변화는 아니었다.

 다만.

 [민첩 - 100]

 민첩이 무려 50이나 증가했다.

 다른 스탯의 증가폭은 30.

 거대화와 엇비슷한 수치다.

 민첩 외의 스탯이 30씩 증가한다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거대화보다 증가폭은 낮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만큼 거대화에는 치명적이 단점이 있지 않았던가.

 특성은 본디 얻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리스크도 큰 편이었다.

 짐승화는?

 이렇다 할 리스크가 없었다.

 기껏해야 생김새가 좀 이상해지는 정도.

 때문에 비교적 상승폭이 낮았지만.

 [광폭화를 사용합니다.]

 거기에 광폭화까지 함께 사용하자, 민첩이 정확히 130을 달성했다.

 S급(100)을 약간 웃도는 수준.

 100 이상의 스탯에선 고작 10의 차이로 싸움이 결정 나기도 했으니, 현재 이전석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물론.

 아쉽게도 탈각과 같은 변화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스탯의 상승.

 아이템이나 특성의 도핑으로 인한 스탯상승은 근본적으로 헌터를 더 높은 영역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해.'

 이전석은 아파트 복도의 창문을 열고 그 너머로 뛰어내렸다.

 발이 바닥과 닿자마자.

 쿠웅-!

 하늘 높이 도약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건물.

 하늘이 물감을 뿌린 것처럼 일그러진다.

 바람이 폭풍처럼 이전석을 집어 삼켰다.

 스탯이 100을 넘어가니 단순 뜀박질만으로도 사람이 만든 철덩이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속도를 자아냈다.

 툭-.

 어느새 협회 옥상에 도착한 이전석.

 [짐승화가 해제됩니다.]

 [광폭화가 해제됩니다.]

 동시에 특성의 효과가 사라졌다.

 짐승화와 광폭화.

 두 특성을 사용하면 스탯 큰 폭으로 증가하지만, 그만큼 지속시간도 극단적으로 짧아졌다.

 마나소모와는 다른 개념.

 억지로 유지하려면 할 순 있지만, 대신 체력이 어마무시할 정도로 내리 깎였다.

 장점만큼 단점도 커다란 셈. 

 아마 영원의 낙인이 없었더라면 광폭화의 단점까지 더해지며 도저히 써먹지 못할 조합이 되었겠지.

 [스탯포인트 '10'을 사용합니다.]

 [체력이 '10'만큼 상승합니다.]

 이전석은 10의 스탯포인트를 모조리 체력에 투자했다.

 이걸로 준비는 대충 끝났다.

 탓-.

 그때.

 이전석을 뒤따라 누군가 협회 옥상에 내려섰다.

 다름 아닌 아야미네다.

 "특무관님도 작전에 참여하십니까?"

 이전석은 혹여나 싶은 마음에 물었다.

 예상대로.

 "네."

 아야미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야미네는 협회에서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헌터다.

 그런 그를 단순히 경호에만 할애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작전에 참여시킬 테고, 그러기엔 이전석과 같은 팀으로 합류시키는 게 가장 적절했으니.

 "그럼 가시죠."

 이전석은 뒤늦게 옥상을 내려 지하로 향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연합의 모든 걸 집어 삼킬 때.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46화

독식 (1)

헌터협회 지하 6층.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일직선의 복도가 나타났다.

 그 끝.

 철문과 양옆을 지키는 두 장정이 있었다.

 최소 A급의 헌터들.

 천장에는 CCTV와 유사시 빌런에게 대응하기 위한 자동 포격장치 같은 것들이 보인다.

 실로 철두철미하기 그지없는 보안이다.

 "이전석 임시 감독님, 아야미네 특무관님. 확인 되셨습니다."

 철문을 지키던 남자 중 하나가 헌터증을 확인하더니 이내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제 스스로 열리기 시작하는 철문.

 그 너머.

 작은 회의장이 두 사람을 반겼다.

 원탁과도 같은 형태의 책상.

 총 열 셋의 의자가 놓여 있으며, 정면에는 거대한 스크린이 달려 있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 다섯.

 한 명은 김백동이었다.

 "오셨군요, 헌터님."

 그가 가장 먼저 일어나 이전석을 맞이했다.

 짧게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눈다.

 그러면서 회의장에 들어가니······.

 "······."

 시선이 쏟아졌다.

 하나같이 바늘, 혹은 날붙이와 같은 눈빛.

 물론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었다.

 아냐 이바노프.

 그녀만은 유독 살가운 표정이었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이전석이 그녀의 인사에 답했다.

 그리고.

 "머리, 안 자르셨네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급시험 때 들었던 음성.

 옆을 돌아보자 보라색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여인이 서있었다.

 에밀리 마르티네즈.

 왜 그녀가 여기에 있는 걸까.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두 분께선 면식이 있으신 모양이로군요."

 다름 아닌 그녀를 소개하는 김백동 덕분이었다.

 "헌터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분은 파밀리아 길드의 에밀리아 헌터님이십니다. 이번에 저희 협회의 요청으로 작전을 도와주기로 하셨죠."

 과연.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작전을 수행하는 건 협회 직원만이 아닌 모양.

 "괜찮으면 제가 지금 잘라드릴까요? 이래 뵈도 미용에도 손재주가 조금 있거든요."

 에밀리가 익살맞게 웃으며 말했다.

 허공에 가위모양 마나가 형성된다.

 마법사라는 이명답게 마나를 다루는 실력 또한 무척이나 뛰어난 듯했다.

 "괜찮습니다."

 이전석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여유가 없어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굳이 이런 곳에서 그녀에게 머리정리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

 "아쉽네요."

 그러자 마나를 거둬들이며 옅게 웃는 에밀리.

 그녀가 "참"이라며 말을 이었다.

 "다음에 시간 되시면 개인적으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말입니까?"

 "데이트 신청은 아니고··· 아, 어떻게 보면 데이트 신청인가? 아무튼. 이저··· 저······ 음, 이름이 어렵네요. 그냥 Lee(리)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무래도 외국인인 탓일까.

 받침이 많은 이전석의 이름을 부르기 어려워 했다.

 "그러시죠."

 이전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에밀리가 게스츠름 웃었다.

 "고마워요."

 인상이 꽤 여우 같은 여인이었다.

 마냥 날카롭지만은 않고,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한 상이 마치 새하얀 북극 여우를 연상케 했다.

 에밀리는 "아무튼"이라며 본론을 이었다.

 "저희 스승님이 리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스승.

 그 말에 이전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에밀리가 그리 부를 사람이라면 한 명밖에 없었으니.

 스텔라 스텔레인.

 만마의 권좌.

 마법의 종자라고도 불리며, 어떤 이들에게는 '마신'이라고 추앙받기도 하는 헌터였다.

 그런 사람이 만나보고 싶다고 하니.

 "그럼 나중에 따로 연락주시죠."

 이전석으로서도 흥미가 동할 수밖에.

 "기대되네요."

 에밀리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기곤 한 발자국 뒤로 멀어졌다.

 아무래도 김백동의 눈치를 살핀 모양.

 에밀리가 뒤로 물러나자, 김백동이 뒤늦게 회의실 한 편을 가리켰다.

 "이쪽은 차은수 특무관, 그리고 헌터님과 같은 부서에 소속된 유안빈 부장입니다."

 차은수 특무관.

 유안빈 감독관.

 두 사람에 대해선 이전석도 알고 있었다.

 TV에서도 적잖이 언급되는 헌터들이기도 했고, 전생에서 몇 번 마주쳤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

 차은수가 악수를 청해오고, 유안빈은 적당히 고개만 까딱였다.

 서로 다른 모습에 두 사람의 성격을 얼핏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전석은 그들과 인사를 주고받은 뒤 김백동에게 물었다.

 "작전 실행인원은 여기 있는 헌터들이 전부입니까?"

 "아직 두 분이 더 계십니다. 아, 마침 오셨군요."

 김백동의 말.

 이전석이 뒤를 돌아본다.

 방금 그가 들어온 철문.

 그곳으로 남녀 두 명이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협회장님 직할 경호부 헌터 분들이십니다."

 협회장 직할 경호부.

 협회장을 경호하는 헌터.

 당연히 그만큼 무력도 높고 믿을 수 있는 이들임을 의미했다.

 협회장을 경호하려면 그만큼 신뢰가 필요했으니.

 '확실히 전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군.'

 회의실에 있는 헌터들.

 그리고 방금 들어온 두 사람.

 적어도 빌런은 아닌 이들.

 이전석이 기억하기론 그랬다.

 개개인의 인성을 둘째 치더라도, 작전을 진행하기에 이만한 헌터들은 달리 없을 것이다.

 "그쪽이 이전석 헌터?"

 문득.

 경호부 헌터 중 여자 쪽이 물음을 던져왔다.

 유하나.

 S급 헌터.

 이전석이 직접 죽이진 않았지만, 뉴스를 통해 그녀가 어떤 작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당연히 전생에서 있던 일.

 "나보다 한참 약해보이잖아. 등급도 겨우 A고."

 헛웃음일까, 아니면 비웃음일까.

 유하나가 아주 작게 코웃음을 쳤다.

 명백히 깔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작전수행이 가능할지 의심스러운데···."

 그녀는 "애초에"라며 김백동을 돌아봤다.

 "믿을 수 있기는 한 건가요? 협회에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됐고, 심지어 임시 감독관이라면서요."

 합리스러운 의심이었으나 김백동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전혀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유하나는 그 대답이 불만족스러운 듯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대체 영웅이라는 건 누가 붙인 말이인지···. 딱 봐도 빌런이라고 얼굴에 써져 있잖아. 협회장께선 왜 이런 놈을 제자로 받아들이신 건지 모르겠단 말야."

 뻔히 들린다.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한 건가?

 오히려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보통이라면 그 말에 발끈할 법도 하건만.

 "······."

 이전석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 서있었다.

 두 눈이 그저 차갑게 가라앉을 뿐. 

 앞서 말했듯.

 유하나는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이다.

 협회장 직할 경호부의 헌터였으니까.

 하지만 인성까지 믿을 만 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방금 발언만 해도 그렇다.

 유하나는 인성적인 부분에서 꽤나 글러먹은 헌터였다.

 "유하나 헌터님. 그런 발언은 예의에 어긋나는 언행입니다."

 같은 팀이 모욕 받은 것에 화가 난 걸까.

 아냐가 눈썰미를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이전석 헌터님께 사죄를···."

 그러나.

 그녀의 그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

 "질투 나십니까?"

 대뜸, 이전석이 유하나에게 물었다.

 인성이 안 좋다?

 그거야 마찬가지다.

 천살성 같은 부분은 제외하고서라도-.

 이전석은 성격이 지랄 맞기론 누구에게도 쉬이 꿇리지 않는 편이었다.

 "······뭐?"

 갑자작스런 이전석의 도발.

 유하나가 당혹스런 눈빛을 띠었다.

 이전석은 구태여 그녀에게 물었다.

 "질투가 나냐고 물었습니다."

 "누가 질투 따윌······."

 "하긴, 질투가 나니 초면인 제게 시비나 걸었겠지요."

 "······."

 말도 끊고서 이어지는 이전석의 비아냥.

 유하나는 마치 역린이 찔리기라도 한것처럼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런 우스운 모습 덕분일까.

 이전석은 비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의 가학적인 성격 중 하나였다.

 천살성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이전석은 최승철이나 유하나처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을 깔보고 짓뭉개는 걸 좋아했다.

 잘 만든 레고를 무너트리듯, 혹은 공든 탑을 망가트리는 것처럼······.

 하늘 높이 솟아오른 바벨탑이 무너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짜릿했다.

 과거의 신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애초에 질투가 나면 제게 지랄하실 게 아니라 스승님께 가셨어야죠."

 이전석은 일부러 스승이란 단어를 강조했다.

 "아니면 저는 만만하고 스승님은 그렇지 않으시답니까?"

 "당신,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유하나가 입을 열었으나 이전석은 그조차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뭐, 마음이 그리 쥐똥 같으시니 스승님께서 제자로 받지 않으신 것도 이해가 갑니다. 안 그러고서야 재능도 실력도 있는 마당에 제자가 아니라 단순 경호원으로 활동하고 있을까요."

 꿈틀거리는 유하나의 표정.

 이전석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멈춰?

 왜?

 이게 얼마나 즐거운데.

 저 일그러진 표정을 보라.

 실로 웃기지 않은가.

 이전석은 대놓고 유하나를 내리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남의 얼굴을 보고 비웃는 건 대체 누구에게 배워먹은 매너인지도 궁금하군요. 혹시 부모님이 유하나 헌터님께 그렇게 가르치기라도 하셨습니까? 아, 어쩌면 부모가 없어서 그런 걸 수도 있겠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배려가 부족했습니다. 부모님이 없는 사람에게 부모가 없다고 말하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네요."

 "다, 당신······!"

 "저도 이렇게 제 잘못을 사과했으니 유하나 헌터님도 이제라도 잘못을 회개하고 그르친 마음을 바로잡는 게 어떠십니까? 그럼 혹시 모르는 일이죠. 스승님께서 당신을 제자로 받아주실지. 그렇게 되면 제가 사형(師兄)으로서 잘 모셔드리겠습니다."

 무서우리만치 매섭게 쏟아지는 말.

 이전석은 유하나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도리어 희미하게 튀어나온 말조차 짓밟은 채 그녀를 비웃었다.

 덕분일까.

 일순간 주변이 정적으로 물들었다.

 누군가는 경악하고, 또 누군가는 놀라고.

 "아하하하-!!"

 누군가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에밀리였다.

 "와, 미쳤나봐."

 뭐가 그리도 웃긴지 찔끔 흐른 눈물을 닦아내는 그녀.

 "의외로 화끈하신 구석도 있으시네요."

 그녀가 이전석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이전석으로선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제가 참는 건 잘 못하는 성격인지라."

 "딱 봐도 그래 보여요. 저는 마음에 드는데··· Kim(킴) 감독관은 어떠신가요?"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는 김백동.

 "곧 중요한 작전이 진행될 마당에 팀원 간의 분쟁은 있어선 안 될 일이죠."

 맞는 말이다.

 그 맞는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착각한 걸까.

 "그, 그래요. 팀원 간에 분쟁을 일으키면 안 되죠!"

 유하나가 이전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나.

 "무슨 헛소리이십니까."

 "······예?"

 "먼저 시비를 거신 건 유하나 헌터님이지 않으십니까."

 "그건······."

 김백동의 말에 유하나가 눈을 떨었다.

 "비록 이전석 헌터님의 말이 과하다곤 하나 초면에 상대방을 깔보고 비웃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지요. 하물며 협회의 미래가 달려 있는 작전을 눈앞에 두고서."

 "······."

 유하나가 말을 못 잇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저거다.

 저 모습.

 탑이 무너져 잔해만을 남겨 흙먼지가 흩날리듯, 저 부들대는 모습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반면.

 그런 이전석과 달리 김백동은 꽤 화가 난 눈치다.

 "무엇보다."

 그가 살기를 터트렸다.

 회의실 전체를 물들이는 거대한 기백.

 "허윽···?!"

 유하나가 화들짝 놀라 주저앉았다.

 S급 헌터라기엔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

 당연하다면야 당연하다.

 S급은 탈각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A급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초인의 영역에 들어섰지만, 그건 SS급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A급에서 S급으로 올라갈 때보다, SS급이 되었을 때의 간격이 더 커다란 편이었다.

 국가의 존망마저 결정지을 수 있는 초월자.

 초인보다 더 멀리 앞서간 자.

 그게 바로 SS급 각성자였다.

 그런 SS급 중 최정상에 오른 김백동이 말했다.

 "유하나 헌터님도 모르진 않으실 텐데요. 이전석 헌터님을 영입하기 위해 협회에서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설마··· 그 노력을 전부 물거품으로 만드실 셈이십니까?"

 분노가 살기에 뒤섞여 흩어져 나온다.

 그렇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만약 유하나의 일로 이전석이 협회에 반감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단순히 옷을 벗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문제입니다."

 이전석은 그만한 인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직 외부에 밝히지 않았지만, 협회 상부는 이전석을 최소 SS급의 각성자로 보고 있었으니.

 거기에 검선의 제자, 영웅이라는 이름값.

 그 가치가 고작해야 유하나에게 무시받을 정도는 아닐 터였다.

 "죄, 죄송··· 죄송 합니다······."

 유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김백동의 살기에 겁 먹은 눈치였다.

 사실 누구라도 그럴 터였다.

 그의 살기는 빌런을 사냥하면서 정제되고 정제되어 검보다 더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고 있었으니.

 웬만한 S급이라도 두려워 떨 수밖에 없으리라.

 "제게 할 말은 아니군요."

 김백동은 뒤늦게 살기를 걷으며 대꾸했다.

 그러나.

 "죄송합니다, 헌터님."

 정작 사과를 해온 건 유하나가 아닌, 그녀와 같이 회의실에 들어온 남자였다.

 그 모습- 아니, 목소리륻 들은 이전석이 나지막이 물었다.

 "협회장님 비서이십니까?"

 "비서 겸 경호원이죠."

 남자- 유한설이 멋쩍게 웃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기에 그가 누구인지는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중학생 때 S급으로 각성해 남들에게 떠받들어지다 보니 성격이 조금 거만해진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본질은 착한 아이입니다."

 유한설은 유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

 같은 성씨.

 그리고 유한설의 말투까지.

 "혹시 가족이신가요?"

 "할애비지요."

 "아하."

 이전석은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즉.

 그는 유하나의 조부가 지켜보는 앞에서 패드립을 날렸다는 의미가 된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상황.

 평소였다면 이전석조차 멋쩍어 했으리라.

 물론 지금은 딱히 그러진 않았다.

 미안?

 개뼈다귀나 쳐 먹으라지.

 시비야 유하나가 먼저 걸었지 않은가.

 "제 얼굴을 봐서라도 하나를 용서해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하, 할아버지······."

 유하나가 유한설을 올려다봤다.

 이 어쩜 아름다운 가족애.

 이전석도 가족에 대해서는 한없이 약해지곤 했기에 유한설의 부탁을 마냥 거절하긴 어려웠다.

 작전을 진행하는데 서로 꿍한 감정을 안고 갈 생각도 없고.

 그러나.

 '이렇게 끝나면 섭하지.'

 앞서 말했듯, 이전석은 지랄 맞게 성격이 나쁜 편이다.

 그 지랄 맞은 성격이 전혀 다른 형태로 재차 드러났다.

 "계약서만 하나 작성하면 용서해드리겠습니다."

 "계, 계약서······?"

 "별 건 아닙니다."

 어깨를 으쓱인 이전석이 이내 싱긋 웃었다.

 "제가 부르면 어디에 있든 바로 튀어와서 무슨 말이든 듣고 이행할 것."

 황당하기 그지없는 조건 덕분일까.

 유하나는 잠시 동안 벙 찐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무슨······ 그런 계약이 말이 된다고······!"

 "안 될 건 또 있습니까?"

 이전석은 도리어 되물었다.

 분명 얼굴은 웃고 있고, 말투 또한 부드럽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눈빛만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악마가 웃고 있는 듯하다.

 유하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말이든 듣고 이행할 것.

 사실상 노예계약이나 다름없는 내용.

 명백히 정상이 아니건만, 선뜻 거절하기도 어렵다.

 잘잘못을 따지면 먼저 이전석을 깔보고 도발한 건 다름 아닌 유하나 본인이었으니까.

 하물며 주변에서 쏟아지는 눈초리는 또 어떠한가.

 김백동으로 인해 형성된 분위기.

 마치 이전석이 올바른듯 비추어진다.

 '설마··· 이 상황을 유도했다고······?'

 유하나가 이전석을 바라봤다.

 새까만 동공과 마주치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과연 그녀가 생각한 대로였다.

 이전석은 자신의 가치를 잘 알았고, 그것을 십분 활용할 줄 알았다.

 협회의 영웅.

 검선의 제자. 

 그리고 초신성이라는 인재로서의 이름값까지.

 그것들로 하여금 이전석의 제안은 당위성을 얻고야 말았다.

 아주 오랜 옛적날부터 그랬다.

 이 바닥에선 재능이 전부였다.

 실력이 있으면 우대받고,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는다.

 무엇보다-.

 "물론 정 아니다 싶으면 계약에 제한을 조금 추가해드리겠습니다. 그러고도 싫으시다면··· 뭐, 저도 어쩔 수 없죠."

 시장 물건 흥정하듯 이어진, 한편으로는 협박이 뒤섞인 말 덕분일까.

 유하나는 결국 그의 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악마에게 놀아나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시스템도 그 사실을 인정한 걸까.

 [당신의 악랄함에 시스템이 혀를 내두릅니다.]

 [악업이 '100'만큼 증가합니다.]

 이전석으로선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악업이 올랐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47화

독식 (2)

뜬금없이 오른 악업 덕분일까.

 '이건 예상 못했는데.'

 이전석도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100.

 그리 큰 악업은 아니다.

 적어도 이전석이 가진 것과 비교하면 한줌에 불과한 수치였다.

 이전석은 잠시 생각했다.

 악업이 오른 이유.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갔다.

 이전석이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유도하고, 의도했다는 것. 

 그리고 계약의 내용이 사실상 노예계약과 다름없고, 자비를 배풀어 주었다지만 그것이 거진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

 그 세 가지가 영향을 미친 것이리라.

 계약을 이용해 유하나에게 악행을 명하면?

 아마 이보다 더 많은 악업이 오를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게 있었다.

 아직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음에도 악업이 오른 것.

 그 사실이 이전석으로선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만약 계약내용을 바꾸면, 악업도 줄어들까?

 설마.

 업이란 그리 간단한 개념이 아니었다.

 실존하는 물건처럼 쉽게 주고 뺏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데도 시스템은 쉬이 악업을 부여했다.

 명백히 형평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명계의 기준이 대체로 그러했다.

 그들의 판단은 이따금 어딘가 '맞지 않다'라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그냥 '지들 마음대로'라는 소리다.

 속된 말로는 '좆대로.'

 '과거로 돌아와도 여전하군.'

 전생이나 현생이나.

 명계의 스탠스는 늘 한결 같았다.

 어딘가 썩어 빠졌다고 해야 될까.

 적어도 이전석이 본 바로는 그랬다.

 명계의 염라(閻羅).

 그리고 그 휘하 사자들.

 놈들은 하나 같이 불쾌하면서도 꺼림칙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외형이 그렇다는 게 아니다.

 외형도 이상하긴 하지만······. 그 만큼이나 성격이나 사상, 가치관 같은 것들이 겉으로도 보일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물론 100이 그리 큰 악업인 것도 아니고, 선업도 제대로 올려주니 이전석이 알 바는 아니었다.

 아무리 꺼림칙하다고 해도 사람을 구하고서 악업을 주는 미친놈들은 아니었으니까.

 이전석은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될 뿐이다.

 "아, 알겠어요···.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문득 들려온 떨림 섞인 목소리.

 이전석 정면을 쳐다봤다.

 유하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녀가 잘못한 상황.

 하물며 김백동의 압박 때문일까.

 유하나로선 결국 이전석의 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단, 그녀나 그녀의 가족에게 해가 되는 명령에 한 해서는 거절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었다.

 거기에 한 달이라는 유예기간까지.

 모두 유한설이 제안한 조건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평생 노예로 살라는 건 가혹하지 않냐는 그의 말에 이전석은 한 발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부로서 손녀를 바라보는 유한설의 마음도 이해가 갔고, 그의 제안 또한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예 계약 자체를 물려달라고 하지 않는 건 달리 이유가 있는 걸까.

 무엇보다 가혹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정 아니다 싶으면 계약에 제한을 조금 추가해드리겠습니다.

 애초부터 이전석은 유하나를 평생 노예처럼 부릴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정말 노예로 부려먹으려 했다면?

 유한설부터가 가만 있지 않았겠지.

 뭐, 그래도 계약 자체를 무르려 하지 않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이 정도면 충분해.'

 한 달.

 겨우 그뿐이지만, S급 헌터를 도구처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였기에, 이전석은 유한설이 제안한 대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S급이면 유용하게 써을 수 있겠어.'

 씨익-.

 이전석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유하나가 겁먹은 듯 움츠러들었다.

 헌터 간의 계약은 '마나'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 내용은 결코 파기할 수 없으며, 만일 어기는 일이 있다간 '불이행자'라는 낙인이 새겨지곤 했다.

 마나가 모두 사라지거나 목숨을 잃는다거나···.

 그런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는 건 아니지만, 불이행자라는 낙인은 헌터에게 가장 중요한 명예와 신뢰를 빼앗아 갔다.

 명예와 신뢰가 없다면?

 어떤 작전에 있어 발언을 하기도 어렵고, 개인 의뢰가 들어오는 일도 현저히 줄어든다.

 마나의 계약을 파탄 낸 불이행자.

 그 이름을 누가 쉬이 믿을 수 있으랴.

 급이 낮거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그런 경우라면 불이행자라는 낙인 따위 아무렇지도 않아 하겠지만, 유하나처럼 S급이면서 협회장 직할 경호부에 속해 있다면 그 낙인은 생각보다 더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어길 수 없는 계약, 그리고 명령.

 유하나는 이전석이 무얼 시킬지 몰라 몸을 떤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계약을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으······."

 그녀로선 꽤나 큰 치욕이자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계약이 막 끝났을 무렵.

 "그럼 슬슬 작전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최고 감독관이자 작전의 총책임자이던 김백동이 스크린 앞으로 나섰다.

 이전석도 유하나도 그를 쳐다봤다.

 앙금이 있다곤 하나 그들도 프로.

 작전에서까지 서로를 비웃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곧 김백동이 스크린의 화면을 켜며 말했다.

 "일단 여길 보시죠."

 띡-.

 김백동.

 그가 리모콘을 조작하자 스크린이 켜졌다.

 스크린 화면에는 한반도의 지도와 몇몇 사진들이 띄워져 있었다.

 특정 인물들이 찍혀 있는 사진.

 '전부 개벽연합의 간부로군.'

 이전석은 그 정체를 금세 간파했다.

 하나 같이 S급의 뛰어난 강자.

 세간에 떨친 악명과 더불어, 그들이 가진 무력 또한 여느 S급과는 비할 바가 못 됐다.

 당연하다면야 당연한 일이다.

 수십, 수백의 빌런을 통솔하기 위해선 그만한 강함도 동반 되어야만 했으니.

 하지만.

 김백동이 가리킨 건 그들이 아니었다.

 리모콘을 조작하자 크게 확대되는 사진 한 장.

 그곳에 사람 한 명이 찍혀 있다.

 아니···.

 과연 저것이 사람이 맞을까?

 3미터는 될법한 거대한 신장.

 푸른 피가 흐르는 듯한 옥색 피부.

 도깨비처럼 돋아난 외뿔.

 언뜻 몬스터처럼 보이는 외형이지만, 그는 틀림없이 사람이었다.

 그것도.

 "이 남자가 다수의 빌런단체를 합쳐 개벽연합으로 엮어낸 장본인, S급 빌런 '브랜던'입니다."

 브랜던.

 개벽연합의 수장.

 "흠··· 등급이 생각보다 낮네요?"

 에밀리가 그에 대해 의견을 냈다.

 S급.

 결코 낮은 등급은 아니다.

 그러나 SS급에 비하면 결코 높은 등급인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이곳에는 SS급이 둘이나 있었으니.

 S급조차 초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에밀리는 굳이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있냐고 묻는 셈이다.

 협회에서 지원요청을 했으니 파견을 왔지만···.

 "헛걸음을 시킨 거라면 아무리 저라도 웃으면서 못 넘어가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흐음···."

 에밀리가 조용히 콧소리를 냈다.

 어디 한 번 설명해보라는 듯이.

 "S급 빌런 브랜던. 협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의 특성은 요괴, 악귀라 불리는 영적 존재와 접신해 힘을 얻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체내에 받아들이는 영적 존재에 따라 그 힘이 다양하게 변화하며, 따라서 동급의 S급보다 더 상대하기가 까다로울 것이라는 분석가들의 견해가 있습니다."

 "확실히··· 그 정보가 정말이라면 꽤 까다로운 특성이긴 하네요. 영적 존재와 접신하는데 제약이 없다면 더 까다로울 테고요. 하지만 그것만으론 제 의문에 해답이 되지 못해요."

 그녀의 말 대로다.

 까다롭다고 해도 결국은 S급.

 에밀리나 김백동.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진심을 발휘하는 순간 찰나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S급과 SS급.

 두 등급의 사이에는 그만한 격차가 존재했다.

 "문제는 그가 SS급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김백동이 또 다시 리모콘을 조작했다.

 직후.

 스크린에 영상이 하나 재생되었다.

 브랜던이 협회 소속의 헌터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모습.

 "저건······."

 영상을 보던 이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김백동이 나지막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이미 S급의 영역을 훨씬 웃돌고 있습니다."

 SS급은 아니다.

 그러나.

 "SS급이 되어 두 번째 탈각을 겪는 순간, 녀석의 공격은 SS급인 저희에게도 꽤나 성가시게 다가올 겁니다. 어쩌면 이미 SS급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물론"이라며 김백동이 말을 이었다.

 "SS급이라고 한들 저희에게 비할 바는 아닙니다만, 브랜던이 가진 특성을 고려하면 최소 SS급 두 명이 협동작전을 펼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즉.

 협회에서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두 명의 SS급을 준비했다는 의미다.

 "또한 에밀리님의 마법이라면 어떤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가능하니···."

 "그래서 굳이 저를 콕 집어 지원요청을 한 것이로군요."

 "맞습니다."

 김백동의 수긍.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해했어요."

 이내 그녀가 스크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어떻게 저 많은 쥐새끼들을 잡아들일 계획이죠?"

 쥐새끼.

 개벽연합의 빌런들.

 "우선."

 김백동은 작전을 말하기에 앞서, 개벽연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개벽연합의 간부들은 브랜던을 포함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띡-.

 김백동이 다시 리모콘을 눌렀다.

 직후.

 스크린 속 지도 위.

 특정 지역 네 곳에 동그라미가 쳐졌다.

 "협회에서 파악한 위치는 인천 송도, 대전 서구, 충청남도 세종, 그리고 부산으로 총 네 곳입니다."

 우선, 김백동이 부산을 가리켰다.

 "그중 브랜던이 있는 곳은 부산입니다."

 정확히는 부산에 형성된 노이즈존에 숨어 있다고 말을 덧붙였다.

 뒤이어 자세한 작전 내용을 설명하는 김백동.

 "당연히 브랜던은 저와 에밀리님이 맡을 예정입니다. 다른 헌터분들······

 유하나 헌터님과 유한설 헌터님은 세종,

 차은수 특무관과 유안빈 부장은 대전 서구,

 그리고 아냐 과장과 아야미네 특무관, 이전석 헌터님은 송도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전석이 스크린을 바라봤다.

 인천의 송도.

 그곳에 있는 간부는 이종근.

 흔히 '결계술사'라 불리는 빌런이었다.

 "저기··· 감독관님."

 문득.

 조용히 브리핑을 듣고 있던 유하나가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 송도 쪽은 왜 세 분··· 이신거죠?"

 힐끗-.

 이전석을 흘겨보는 유하나.

 "아, 절대 무시하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고······! 그, 그냥 궁금해서······."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그에 에밀리가 피식- 하고 옅게 웃음을 흘린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 때문.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유하나의 의문에 동조했다.

 "한쪽에만 전력이 치우쳐진 게 이상하긴 하네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에밀리의 물음에 김백동이 답했다.

 "최근 협회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정보취득에 뛰어난 빌런이 개벽연합측에 있다고 합니다."

 일전 이전석이 김백동에게 알려줬던 사실.

 "그리고 그 위치가 송도죠."

 그가 스크린 속 지도- 인천광역시를 가리킨다.

 역시 협회라고 해야 될까.

 이전석이 알려준 건 극히 단편적인 정보였다.

 그저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뿐.

 헌데 협회는 고작 그런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그자가 빌런이라는 것과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까지 알아냈다.

 본래는 작전 브리핑 도중 은근슬쩍 정보를 흘릴 생각이었지만···.

 '괜한 걱정이었군.'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저는 그 빌런··· 임시로 'A'라고 칭하겠습니다만, 그를 제압하는 임무를 아야미네 특무관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뒤이어진 김백동의 말.

 에밀리는 재차 물었다.

 "제압? 사살이 아니라요?"

 "A가 어떤 방식으로 협회의 정보를 빼냈는지 확실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선 아야미네 특무관의 판단에 따라 사살도 허용됩니다."

 확실히.

 A는 미국 국방부와 엇비슷하다고 하는 협회의 보안을 손쉽게 뚫어버렸다.

 그뿐이랴.

 협회의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해킹을 진행하기까지 했다.

 그건 단순히 실력이 좋다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덕분일까.

 추후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협회는 A가 어떻게 협회의 정보를 빼냈는지 알아내려는 것이다.

 "······."

 이전석은 아야미네를 쳐다봤다.

 무표정.

 감정의 흔들림이 없는 눈빛.

 아무래도 작전에 대해선 이미 사전에 들은 모양이다.

 하긴 아야미네 만큼 누군가를 암살하는데 특화된 헌터는 달리 없을 거다.

 기척을 숨기는데 능하고 분신 사용마저 가능했으니.

 이른 바 현대의 닌자.

 때마침 일본인라는 특징 덕분일까.

 세간에선 그를 '오니 시노비'라는 이명으로 부르곤 했다.

 얼마 전 인터넷을 검색해 알아낸 사실이다.

 정작 본인은 그 이명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지만···.

 "이건 각 간부 및 특정 빌런들의 정보가 기록된 서류입니다."

 이내 이전석을 포함한 헌터들에게 서류를 건네는 김백동.

 그 말 대로.

 김백동이 준 서류에는 결계술사 이종근에 대한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멸치처럼 깡마른 몸.

 짙은 다크서클.

 주름 진 민머리.

 '어렸을 적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다 우연히 각성···. 결계를 형성하는데 뛰어난 특성과 재능으로 강도짓을 반복하다 모종의 계기로 친척을 살해. 그리고 결계술사로 악명을 떨치다 개벽연합에 들어갔군.' 

 이전석이 기억하는 이종근과 정확히 일치하는 행적.

 A에 관한 정보도 있었다.

 ━

 키가 작고 어린 소년.

 청안을 가지고 있음.

 단 인상을 보아 서양인은 아니며, 아무래도 특성의 영향으로 변질된 것으로 추측된다.

 ━

 잘도 이런 정보를 입수했구나 싶었다.

 A에 관해선 화산에서도 철저히 비밀로 붙이고 있는 정보일 텐데.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브리핑하죠."

 서류를 살펴보는 사이.

 김백동이 재차 말을 이었다.

 "저희는 네 개의 포탈 게이트를 통해 네 지역에 침입, 이후 개벽연합의 간부진을 모조리 암살할 계획입니다. 연합 전체가 소식을 듣고 지원을 보내기 전에 빠르게 처리하고 다시 이곳으로 귀환하는 게 관건이지요. 모두 이해하셨습니까?"

 그 말에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전석도 마찬가지다.

 작전의 개요는 전부 이해했다.

 다만.

 슥-.

 이전석이 슬쩍 손을 들었다.

 무언가 말할 게 있다는 듯.

 "말씀하시죠, 이전석 헌터님."

 김백동이 작게 손짓했다.

 그에 이전석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만약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 어떡합니까?"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고 하시면?"

 김백동의 물음.

 헌터들의 시선이 이전석에게로 쏠린다.

 흥미와 의문이 뒤섞인 눈빛들.

 이전석은 침착하게 경우의 수를 나열했다.

 "빌런이 서류에 적힌 것과 다른 특성일 경우, 협회측에서 모르는 강자가 더 있을 경우."

 혹은.

 "개벽연합 외의 다른 위험단체의 개입이 있을 경우."

 이전석의 말에 김백동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흘렀으나 그것도 잠시뿐.

 곧 김백동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우선, 전자 2개의 경우는 최대한 현장에서 헌터님들께서 기지를 발휘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런 예외성만으로 작전을 포기하기엔 개벽연합의 잠재적 위험성이 너무 높습니다."

 잠재적 위험성.

 그 말대로, 개벽연합은 아직까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브랜던의 지휘 아래 수없이 많은 빌런들이 모여들었을 뿐.

 정작 그 목적 또한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하지만 협회에서는 빌런들이 연합을 맺었다는 것 자체가 큰 위협이라 판단했고, 더욱이 화산이라는 존재로 인해 한시라도 빨리 연합을 와해시키고자 했다.

 마냥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고 작전을 포기할 순 없는 셈.

 "다만."

 김백동이 사뭇 진지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전선 헌터님께서 얘기해주신 대로 개벽연합과 동등하거나 그보다 더 큰 위험단체의 개입이 있을 경우, 급히 협회로 귀환 후 다른 팀에게 소식을 전달- 빠르게 작전을 재편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개벽연합과 동등하거나 더 큰 위험단체.

 그쯤 되면 일단은 후퇴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한 뒤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하거나 작전을 재편성하는 게 올바르리라.

 "물론 현장에서의 상황에 따라 후퇴가 아니라 요격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김백동이 이전석을 쳐다봤다.

 "이걸로 괜찮으신지요."

 "괜찮습니다."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걸로 괜찮다.

 아니, 충분하다.

 '떡밥은 던졌어.'

 예상치 못한 긴급 상황.

 이전석이 갑자기 돌발행동을 하더라도, 충분히 그 이유를 포장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었다.

 이제 그 떡밥을 거둬드리면 되는 일이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48화

독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