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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300

#290화

세라스가 대답 대신 눈썹만 살짝 치켜 들었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억지로 대답하란 얘긴 아니오. 이번 일과는 상관없는 부분이고. 그냥 문득 궁금했던 것뿐이니까."

엘리야가 홱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호기심에 불이 붙은 눈빛이었다. 이안이 씁, 하고 숨을 들이켜며 그녀를 바라보는 사이, 세라스가 비로소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에요. 생명의 은인이시기도 하니, 충분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두 분 모두 비밀만 지켜 주신다면요."

"맹세하겠습니다. 전하."

냉큼 대답한 건 엘리야였다. 조심스럽게 이안을 일별한 그녀가 덧붙였다.

"사실, 여기서 두 분이 나누시는 대화를 필립 경께도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조금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해 줘요."

딱히 놀라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인 세라스가, 뒤이어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여기서 비밀이 가장 많은 건 그였다. 하나가 추가된들 달라질 건 전혀 없었다.

"막상 말하려니 낯뜨겁군요. 사실, 그리 대단한 능력은 아니거든요."

빈말이 아닌 듯, 무릎에 얹은 세라스의 손가락이 슬쩍 꼼질댔다. 다시 한번 낮게 헛기침한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가까운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

엘리야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이안의 눈썹도 절로 말려 올라갔다.

"엄청 대단한 능력 같소만."

"이렇게만 보면 그렇죠. 하지만 맹점이 아주 많은 능력입니다. 제가 통제할 수 없다는 부분이 특히요. 가끔, 아주 짧은 한순간을 꿈에서 볼 뿐이죠. 그것도 오로지 제가 보고 듣는 것만을요. 거기다…."

적어도 타인에게 설명을 많이 해보지 않은 건 분명했다. 말투도 더듬댔고, 설명 순서도 뒤죽박죽이었다.

"…제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순간만을 보게 됩니다."

"잘못된 선택이라면, 어떤?"

"말 그대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선택이죠. 그게 얼마나 나쁠지는 일어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어요. 꿈에서 본 것과 같은 선택을 하고 시간이 흘러야 알게 되죠. 다치거나. 아끼는 것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그보다 나쁘거나."

이안은 술병을 입에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스가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깨닫고 확인해 나갔는지 알 것 같았다.

전에도 이런 상황을 겪어본 듯한 기시감을 느끼고, 그 후에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게 반복되었으리라.

자신이 예지몽을 꾼다는 걸 알게 된 뒤에는 꿈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으리라. 그래서 그 후로는 오히려, 본래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을지는 알 수 없게 되었겠고.

"운명의 갈림길…!"

엘리야가 탄성을 터뜨린 건 그때였다. 이안과 세라스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의 운명은 무수한 갈림길로 이루어져 있다는 문구를 본 적이 있어요. 아무리 하찮은 선택의 순간일지라도 갈림길이 만들어지며, 그때마다 새로운 운명이 생겨난다고요. 그렇기에 영혼을 가진 모든 존재는, 사실상 무한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라고 하더군요."

원래 세상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안이 턱을 긁적이는 가운데.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세라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식하군요. 아는 이가 거의 없는 이론인데. 맞아요. 나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답니다."

"갈림길을 엿보는 자라는 게, 그런 의미였던 거군…."

비로소 이안이 읊조렸다.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까지 오라버니와 아버님뿐이었지만요. 다른 이들은 터무니없는 추론만 하고 있죠."

"물론, 귀하는 오해들을 굳이 바로잡지 않으시겠고."

세라스가 당연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하지만, 갈림길이 반드시 두 갈래인 건 아니지 않나요?"

엘리야가 조심스럽게 끼어든 건 그때였다.

이안은 그녀를 슬쩍 돌아보았다. 여전히 의문점이 많은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마법사나 학자는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미지나 지식을 향한 탐구심과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는 부분이 특히.

둘 다인 엘리야는, 물음표 살인마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몰랐다.

'다행히 이제, 흑마법 부문에선 조절이 되긴 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그녀를 바라보는 세라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더 짙어지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옷이나 보석을 발견한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래요. 그게 내 능력의 수많은 맹점 중 하나죠. 결국은 또 다른 불확실성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 다른 선택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만 이어지지도 않는다는 것."

"그렇겠네요. 과연…."

엘리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로소 그녀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저 동글동글한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오가고 있을지는, 아마 본인만 알고 있으리라.

'어떤 면에선, 나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는 이안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어떤 의미로는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비록 최악의 갈림길만 선택한, 끝까지도 가보지 못한 미래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거기다 공략 글에서 훑어본 크고 작은 정보들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과 정보를 토대로 다르게 한 선택이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낳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달라진 결과와 그로 인한 여파를 예상하지 못해 낭패를 본 적도 여러 번이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세라스가 자신의 능력을 하찮다 표현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는 그보다 더 단편적이며 불친절한 미래만을 본다지 않는가. 결정적인 도움보다는, 혼란이나 불안만 가져왔던 때가 더 많았으리라.

"가장 최근에 꾼 예지몽은 어떤 내용이었소?"

이안이 툭 내뱉었다. 엘리야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세라스가, 다시 그를 마주 보았다.

"가장 최근에는…."

그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쳤다.

"성자 대행께서 중앙에 발을 들이셨다는 소식을 듣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안의 눈매를 순간 가늘어지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본 이안이 덧붙였다.

"그리고?"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죠. 그때 제 관심은 온통 서부에 가 있었거든요."

"그 꿈을 꾼 게, 서부의 소식을 알기 전이오?"

"서부에서 도착한 첫 보고서를 읽은 바로 그날 밤이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천장에 달린 마석 등으로 향했다.

"제가 생각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그리고 며칠 뒤에, 다른 보고서가 도착하더군요."

"서부의 어떤 기사가 쓴 보고서?"

"맞아요. 저는 아버님 다음으로 빠르게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이안은 그를 배웅했던 기사, 스펠로를 떠올렸다. 그와 헤어진 뒤에 곧바로 드네로브로 향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본인이 말했듯, 곧바로 중앙으로 보낼 보고서를 작성했으리라.

"성자 대행께서 서부에서 이룩한 업적을 장황하다 싶을 정도로 묘사해 뒀더군요. 그리고 거기서, 성자 대행의 행방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었고요. 제가 원한 만큼의 단서는 없었지만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다시 이안을 마주 본 세라스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까딱였다.

"저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황제의 명령으로 날 만나러 온 게 아니라, 그 반대가 맞았군.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그럼, 귀하는 확정된 갈림길만을 볼 수 있으신 건가 보군."

"...!"

세라스의 눈이 순간 커졌다.

"어떻게 아셨나요?"

"내가 중앙으로 떠난 뒤에 꿈을 꾸신 것 같아서 말이오."

"…오늘은 제 인생에서 놀랄 일이 가장 많은 날이군요. 저도 제가 가까운 미래만을 보게 되는 게 그래서라고 생각합니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건, 고작 몇 걸음 앞까지밖에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글쎄. 이미 정해져 있지만 바꿀 수 없는 미래가 있을지도 모르지. 말씀하신 대로면, 그런 건 예지할 수 없으시잖소."

세라스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이젠, 저를 숨 쉬듯이 놀라게 하시는군요. 그게,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가정 중 하나입니다. 인간이 결국 죽듯, 제게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피할 수 없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런 부분까지 꿰뚫어 보실 줄은 몰랐어요."

…나도 비슷한 걸 두려워하고 있거든.

내심 생각하며, 이안은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물론 그는 세라스와 달리, 이 세계에는 거대한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북부. 변방. 그리고 서부가 그랬듯이. 결국은 어떻게든 일어나게 되는, 운명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흐름.

하지만 막을 수 없다 해서, 변화를 만드는 것까지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아주 작은 부분들일지라도, 이안의 기억과는 전혀 달라진 부분들이 이미 여럿이지 않던가.

그리고 그런 것들이 모이고 모여, 분명 거대한 흐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게 반드시 좋은 영향만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세라스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이 일렁인 건 그래서였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던데….'

비록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조금씩 바꾸는 것뿐이긴 하지만.

죽지 않고 계속 바꿔 나가다 보면 언젠가, 거대한 흐름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될지도 몰랐다.

"귀하 말고도, 예지력을 가진 이가 또 있소?"

"제가 알기론, 당대에서는 저뿐입니다. 위대한 백금룡께서 별의 흐름을 읽으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은 있지만, 그건 저보다는 성자 대행께서 더 잘 아실 것 같군요."

그 양반이…?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기로, 백금룡에게 예지력 같은 건 없었다. 물론, 신들이 지켜보고 있기에 발휘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긴 했지만.

이안의 표정을 관찰하듯 바라보던 세라스가 빙긋 미소지었다.

"가문의 기록에도 예지력을 타고난 분은 손에 꼽습니다. 저는 아주 드문 능력을 타고난 거예요. 그저, 뛰어나지는 않을 뿐이죠."

"내가 보기엔, 충분히 뛰어난 것 같소."

적어도 마법사가 집중력과 육감을 타고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게임에서 세라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녀를 살려두는 게 그에게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변수를 만들어내는 존재는 많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물론, 이안은 굳이 그런 사실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지금 솔직해야 하는 건 그가 아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빙긋 미소 지은 세라스가, 이내 덧붙였다.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었을까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도 될 만큼 충분히."

이안의 대답에,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아버님의 시선은 황궁 안까지만 닿는다고 여기죠. 그래서 밀담은 황궁 밖에서 나눕니다. 물론, 조심해야하는 건 같아요. 대신 아버님의 다른 눈과 귀가 사방에 있거든요. 하지만 제도 밖은… 그마저도 존재하지 않죠."

그녀의 목소리가 문득 낮아졌다.

"그만큼 자유롭지만, 동시에 더 위험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같은 일을 겪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요."

정말 바로 본론이네.

이안이 낮게 웃음 지었다.

"목숨을 걸고 날 찾아왔다는 말씀을 어렵게도 하시는군."

"생색내고 싶지 않아서요. 저 자신을 위해서 한 선택이니까."

이안은 그저 어깨만 한번 으쓱였다. 실제로도 전혀 인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세계는, 죽음의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많지 않던가.

목숨 건 모험은, 그저 중앙에서만 특별한 일일 뿐이었다.

"제 변명은 여기까지입니다. 성자 대행."

이윽고 세라스가 덧붙였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손가락 끝으로 쥔 술병을 휘휘 돌리며 말을 이었다.

"종합해 보면 이번 습격의 배후는 특정할 수 없고, 앞으로 이런 습격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시군."

"저쪽에서 제가 이미 성자 대행과 동행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 아마도요. 알게 된다면 더는 손을 쓰지 않을 겁니다."

선선히 대답한 세라스가, 이안의 눈을 조심스럽게 마주보며 덧붙였다.

"성자 대행의 목숨을 노리는 건 대역죄를 저지르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날 죽이는 것보다, 제도에서 날 포섭하거나 이용하는 게 더 가치 있어서 그런 것 아니오?"

"…역시, 직설적이시네요."

세라스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그런 부분도, 아예 없지는 않겠죠."

"그럼, 습격이 더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겠군."

"...?"

"암살자들의 우두머리가, 마지막 순간에 매를 날렸소."

이안은 빙하 방벽 너머로 날아가던 검은 매를 떠올렸다.

"다리에 편지 같은 게 묶여 있진 않더군. 아마도 전멸이나 임무의 실패를 알리는 역할이겠지. 알고 있겠지만, 귀하들만으로는 놈들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오."

세라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안이 기습을 먼저 눈치채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암살자들은 그들의 발을 묶은 채 포위망을 완벽하게 구축했을 테니까.

"저쪽도 그걸 알고 있겠지. 그러니 아마도 내가 동행하고 있다고 추측할 것이오. 물론, 모른 척 다시 복수를 준비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성자 대행과 함께하는 것만이 제가 살길이 되겠군요. 조금이라도 마음이 풀리셨길 바랄 뿐입니다."

말을 마친 세라스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 같은 모습이었다.

전략을 바꿨군.

눈도 깜빡이지 않고 생각하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미리 떠들어 댈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부분은, 이해했소."

세라스가 슬며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십니까…?"

"하지만 귀하가 신뢰를 저버렸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지."

세라스가 그대로 숨을 멈췄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황실의 후계 다툼에도, 황실과 교단의 알력 다툼 같은 문제에도 전혀 관심이 없소. 그 사이에 끼고 싶은 생각 역시, 전혀 없고."

"…어느 쪽의 손도, 잡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당신들의 속사정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말이오. 내게 칼을 들이민다면 칼로 갚아줄 것이고, 금화를 내밀며 대화를 청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오. 상대가 누구건 간에."

"맙소사… 그 반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세라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읊조렸다. 어쨌건, 그녀는 이안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그녀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말을 이었다.

"만약 그렇게 찾아온 누군가가 저보다 더 좋은 보상을 제시한다면, 그쪽의 손을 잡으실 거고요."

"아마도. 하지만, 손은 하나가 아니잖소?"

"...!"

세라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손이 부족하면 발도 있고. 내 발이라도 기꺼이 잡을 이도,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은데."

태연하게 덧붙인 이안이, 이제는 놀람을 넘어 경탄마저 머금고 있는 세라스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귀하도 그러실 수 있다면, 보상을 다시 조율하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오."

#291화

"정말이지… 대단하시군요. 제도의 닳고 닳은 귀족들도, 성자 대행 앞에선 코가 베일 겁니다."

이윽고 세라스가 말했다. 비아냥대는 게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감탄한 말투였다.

이안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어깨만 으쓱였다. 잠시 숨을 고른 세라스가 뒤이어 덧붙였다.

"제안은, 받아들이겠습니다."

"현명하시군."

"…글쎄요. 이런 상황을 자초했으니, 앞으로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이젠 자학까지 하네.

이안이 짧게 웃음 짓는 사이, 세라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만, 다른 방문객과 대화를 나누실 때, 제가 동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런 부분들까지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소."

이안은 선선히 대답했다.

사실 그녀가 곁에 있는 게, 흥정에도 더 유리할 터였다. 세라스가 비로소 안도인지 체념인지 모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요…."

"벌써 안심하시기엔 이른 것 같소만."

"…물론이죠. 혹시, 원하시는 추가 보상이 있으십니까?"

"글쎄… 귀하의 지불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말하자면…."

잠시 말꼬리를 흐린 이안이, 이윽고 세라스를 마주 보며 덧붙였다.

"…아스메가 사용하던 보옥은 어떻겠소?"

"...!"

세라스의 눈이 순간 커졌다.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위험수당에 해독약 값까지 더하면, 얼추 셈이 맞을 것 같소만."

"그,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성자 대행께 보옥은 그다지 쓸모가 없으실 텐데요. 아스메는 특수한 시술을 받은 몸이라, 보옥 같은 마도구의 도움 없이는 주문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요."

이안이 마법사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입가에 저도 모르게 옅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이안이 대답했다.

"난 귀중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어서 말이오. 아스메도 그 몸으로는, 어차피 전투가 일어나도 싸울 수 없을 테고. 그래서… 거절로 받아들이면 되겠소?"

"…아닙니다. 아스메가 깨어나면, 이야기 해 두겠습니다."

"훌륭하군. 그리고…."

멈칫한 세라스가 대답했다. 입꼬리를 조금 더 말아 올린 이안이 덧붙였다.

"필립 경과 영애에게도 합당한 보상을 하셔야될 것이오."

이안이 옆자리의 엘리야를 일별하며 말을 이었다.

"이분들은 내 의뢰 때문에 불필요한 위험에 노출된 거잖소."

"…알겠습니다. 다만, 두 분께는 금화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세라스가 덧붙였다.

"성자 대행과 같은 수준의 보상을 드리기에는, 제 능력이 부족해서요."

"정확한 금액은?"

"내일, 생각을 정리한 뒤에 다시 말씀드려도 될까요? 두 분 다 서운하지 않으실 금액이 되리라는 건 미리 보증하겠습니다."

"알겠소. 그러시오."

이미 쥐어짠 상대를 굳이 더 몰아붙일 필요는 없었다.

이안은 다시 한번 엘리야를 돌아보았다. 눈빛을 보아하니 지금도 필립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새끼, 입 찢어지고 있겠네.

내심 웃음 지은 이안이 말을 이었다.

"경에게 전해. 페이든 경이 주변 정리를 다 끝내면, 함께 전하의 마차를 길가로 옮기라고. 그다음엔 우리 마차도. 오늘 밤은, 여기서 묵고 갈 거니까."

"네. 그럴게요."

곧바로 대답한 엘리야가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로소 의자 등받이에 허물어지듯 기대앉았던 세라스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한 모금 마셔도 될까요?"

"내가 마시던 건데, 상관없소?"

"전혀요."

그러시다면야.

이안이 술병을 내밀었다. 곧바로 자세를 바로 한 세라스가 병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이안 경."

그녀가 그대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만큼 술 한 모금이 간절했던 것이리라.

벌컥벌컥 몇 모금을 들이켠 세라스가, 망토 자락으로 입가를 닦으며 옅은 탄식을 흘렸다.

"…덕분에, 제도에서는 평생 배울 수 없었을 교훈을 하나 얻었어요."

"...?"

"때로는, 약점이나 불리한 부분을 먼저 드러내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요. 내가 유리한 부분이 하나도 없는 상대에게는, 특히."

이안의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아주 중요한 교훈이군."

"잊을 일도 없을 겁니다. 뼈 아프게 배웠으니까."

덧붙인 그녀가 다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저러다 또 취하겠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술병을 내리는 세라스의 눈에 힘이 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장이 풀리고 술까지 몇 모금 마시면서, 잊고 있던 피로감이 한 번에 몰려온 것이리라.

"이만 돌아가서 쉬시오. 내일부터 한 마차를 타고 불편하게 이동해야 할 텐데, 조금이라도 체력을 회복해 두시는 게 좋을 거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아스메의 상태도 걱정이고요. 남은 술은,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다 마셔 버리고 기절하고 싶어서요."

세라스가 술이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을 들며 물었다.

그 기분, 내가 잘 알지. 내심 생각하며, 이안이 풀썩 웃음 지었다.

"그러시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두건을 눌러쓴 세라스가 맥없이 마차 밖으로 나갔다. 기운이 쪽 빠진 그녀의 뒷모습이 닫히는 문틈 사이로 사라졌다.

기다렸다는 듯 반대편으로 건너가면서, 이안이 입을 열었다.

"필립은?"

"전하의 마차를 옮기고 있대요. 기사 두 분이 직접 끌고 있나 봐요. 말들은 쉬게 하려고요."

"사서 고생하는군…."

읊조리며, 이안은 의자에 몸을 뉘었다. 사실 피곤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관자놀이도 조이듯이 지끈거렸다. 막판에 마력을 많이 소모한 여파이리라. 몇 시간 정도는 죽은 듯이 자야 했다.

"대부님. 잠시만요."

엘리야가 화들짝 손을 뻗은 건 그때였다. 이안이 멈칫하자, 그녀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장비 전부 벗어서 구석에 놔 주세요. 지금 그 몰골로 주무시면, 의자가 온통 엉망이 될 거예요."

"…그럼 너는 어디서 자게."

"제가 누울 공간은 충분히 나온답니다. 아시다시피, 전 난쟁이라서요."

"...."

할 말 없게 하네.

입맛을 다신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몸에 걸친 것들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그는 봉인함에서 꺼낸 새 옷으로 갈아입고서야 비로소 다시 의자에 누울 수 있었다.

과정이야 어쨌건, 축축하고 냄새나는 옷을 걸치고 자는 것보다는 훨씬 쾌적했다.

***

비는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완전히 그쳤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잿빛 먹구름이 가득했다. 언제 다시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어쨌든, 비는 어젯밤 있었던 습격의 흔적들을 거의 다 씻어 버렸다.

암살자들의 시체는 전부 숲에 던져 버려서, 적어도 길에서는 전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호오…."

마차 밖으로 나온 이안을 가장 먼저 반긴 건, 곧바로 다가온 아스메였다. 진작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여전히 얼굴에 핏기가 없긴 했지만, 어쨌든 거동에도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의 앞에 선 아스메가 정중하게 무릎을 굽혔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자 대행."

이안은 순간 눈을 깜빡였다. 속삭이는 것처럼 작긴 했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사하시니 됐소. 당분간은 무리하지 마시오."

이안의 대답에 비로소 다시 일어선 아스메가, 공손하게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치렁치렁한 금속 사슬 사이로 정수가 반짝였다.

어제 약속했던 보상이었다. 이안이 받아들자, 한 번 더 무릎을 굽힌 아스메가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안은 어젯밤의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저 시녀가 유독 과하게 언행을 조심하는 건, 아무래도 황제 때문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스메와 페이든은 어제 계약이 파기될 뻔했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자세히 설명할만한 시간도 없었으리라. 세라스도 기절하듯이 잠들었었을 테니까.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이안은 손아귀의 보옥을 내려다보았다. 정보창도 확인할 수 있었다. 회색 마녀의 보옥. 희귀 등급으로, 꽤 독특하게 생겼다. 정교한 문양들이 새겨진 금속 고리에 발톱 같은 마디가 튀어나와 정수를 고정하고, 사방으로 길고 짧은 금속 사슬들이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것이다.

다소 짧은 사슬 세 개의 끝부분에는 금속 고리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고리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들어진 걸 보면, 아마도 손가락에 끼우는 것이리라.

어쨌든 능력치는 꽤 준수했다. 주문 증폭력이 쓸만한 수준이었고, 회색 마법에는 추가적인 증폭 수치까지 붙어 있었다.

정수가 장착되어야 효과가 적용되는 데다, 어제 사용한 탓인지 지금 장착된 정수에는 마력이 반도 남지 않긴 했지만.

'이게 어디야. 얼마만의 마법사 전용 아이템인데.'

마법사 전용 장비는 거의 손에 넣은 적 없던 이안에겐 말 그대로 감지덕지였다.

만족스럽게 미소 지은 이안이 보옥을 아공간에 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아직 해야 할 일들이 여럿 남아 있었다.

"이 가련한 영혼을 따스하고 찬란하게 감싸 드넓은 천상으로 인도해 주시옵고…."

쉘비의 장례가 이어졌다. 시신을 가지고 돌아가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에, 그나마 볕이 잘 드는 숲의 가장자리에 묻어줄 수밖에 없었다.

페이든에게는 성자 대행과 찬란한 여신의 사도가 장례를 주도하고 있다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되었으리라.

차가운 보존 식량으로 요기까지 끝내고서야, 비로소 일행은 다시 여정을 이어갈 채비를 끝마쳤다.

마차는 이안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게 됐다.

황녀의 마차가 더 크고 넓었지만, 이안은 선택을 주저하지 않았다.

황녀의 마차가 너무 눈에 띈다는 건 둘째 치고, 손때가 탈 정도로 익숙한 마차를 이런 식으로 버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석에 앉은 페이든이 말했다. 조금이라도 어제의 빚을 갚고 싶은 듯, 그는 남은 여정의 마부를 자처했다. 필립은 사양했지만, 그의 태도는 완고했다.

덜그럭- 스윽- 스윽-

다섯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지만, 마차 내부는 뜻밖에도 조용했다.

바닥에 망토를 깔고 앉은 엘리야가 이안의 장비를 분해하고 닦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세라스와 아스메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눈치였다.

엘리야가 난쟁이여서인지도, 그녀의 행동이 아주 자연스러워서일지도 몰랐다.

'…그냥 피곤해서거나.'

창백한 안색의 아스메는 물론이고, 창가에 기대앉은 세라스도 다소 퀭한 얼굴이었다. 어제의 피로를 다 떨치지 못한 것이리라.

"...."

심지어 오늘은 필립도 조용했다.

그는 투구의 안면 가리개로 얼굴을 가린 채, 이안의 옆자리에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어젯밤은 피곤해서 잠들기 바빴다고 해도, 오늘까지 그가 조용한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이안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몇 가지 사건을 겪은 후로, 이런 적막이 다시 반가워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남은 안건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적막을 깨뜨린 건 세라스였다.

엘리야가 이안의 장비를 반쯤 닦았을 무렵이었다.

술을 홀짝인 이안이 말했다.

"하시오."

"예. 두 분께 각각 금화 백 개씩을 드리고자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백 개라…."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안이 보기엔, 남은 여정은 평화로울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이미 끝난 한 번의 싸움으로 금화 백 개가 더 굴러들어오게 된 것이다.

"마음에 드냐?"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며 물었다. 창밖만 보고 있던 필립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내뱉었다.

"예. 뭐. 괜찮군요."

이 새끼가 오늘 왜 이러지, 진짜.

시큰둥한 대답에 이안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곧 그가 내뱉었다.

"실내에서 뚜껑은 왜 쓰고 있어? 벗어."

"…예."

필립이 순순히, 그러나 내키지 않는 손길로 투구를 벗었다.

역시나, 투구 아래로 드러난 얼굴도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왜 눈을 그렇게 뜨냐?"

"예…?"

"표정이 왜 그렇냐고. 쉘비 때문이야?"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만."

필립이 난감한 듯 입맛을 다셨다. 이안이 자신에게 이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이내 그의 시선이 건너편의 아스메와 세라스를 슬쩍 훑었다.

세라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우리가 불편해서 그러는 건가요, 경?"

"…아니라고 하진 못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평소처럼 편하게 계세요. 여기, 이안 경처럼."

댁이 제일 편해 보이는데.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이 다시 필립을 돌아보았다.

"기회 줄 때 말해. 뭔데?"

"그게… 하.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속이 터져서 말입니다."

짧게 한숨 쉰 필립이, 이윽고 결심한 듯 내뱉었다.

"세상이 개판이 되고 있는데. 그걸 되돌리는 데에 앞장서야 할 황실과 교단 모두, 각자의 이득을 두고 다투고만 있으니까요."

"...!"

"모든 게 더 크고 강대해졌을 뿐. 이래서야 변방과 다를 게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292화

번쩍 고개를 들어 필립을 바라보았던 아스메가, 이내 입술을 꾹 앙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오히려 변방보다 더 나쁘죠. 변방은 무너져도 제국이 있지만. 제국이 무너진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꿋꿋이 말을 끝낸 필립이, 차라리 후련하다는 듯 콧김을 뿜었다.

이안은 내심 웃음을 삼켰다.

'아겔 란이 겹쳐 보이는 거군….'

필립은 아겔 란이 끝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고 있으니, 더더욱 지금 제도의 상황이 곱게 보이지 않을 터였다.

물론, 이안도 동감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뭐라 핀잔을 주는 대신 술병만 옆으로 내밀었다.

필립이 냉큼 받아들 찰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세라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술을 마시던 필립이 움찔 어깨를 떨며 술병을 내렸다.

물론, 세라스는 전혀 화가 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진지해 보였다.

"하지만 제국은 신들의 선택을 받은, 가장 뛰어난 자가 다스려야 합니다. 그것이 대륙의 안녕은 물론이고 제국의 번영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죠. 황실의 후계 다툼은, 그렇기에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러시겠지요…."

필립이 콧잔등을 씰룩이며 대답했다. 코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안의 한쪽 입꼬리도 더 위로 말려 올라갔다. 이어 그가 툭 내뱉었다.

"하지만 정작 폐하께서도, 가장 뛰어나서 그 자리에 앉으신 건 아니잖소?"

당대의 황제가 즉위할 수 있었던 건, 검은 벽이 전 황태자와 그의 군단을 삼켜버린 덕분이었다.

순교 원정 같은 개짓거리를 벌이는 것도 그래서라지 않던가.

아스메가 불편한 듯 두건을 더 깊이 눌러 썼다. 목숨의 은인인 필립과 이안을 차마 노려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아버님께서 신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결과가 됐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터무니 없는 풍문이 아직도 돌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교단 내부에서도 이견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고요."

정작 세라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선대께서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셨기 때문이겠죠. 한때 빛의 아들이라 불리실 정도였다고 하니까요. 물론, 이제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이는 없습니다만…."

심드렁한 이안의 눈을 마주 본 세라스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버님께서 후계를 정하지 않고 반목과 경쟁을 부추기시는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다음 대에는 잡음이 없기를 바라실 테니까요. 교단에 발목이 잡히는 것 역시, 당대에서 끝내고 싶으시겠죠."

결국, 모든 상황의 원흉은 또 검은 벽이군.

필립에게 술병을 받아 들면서, 이안은 낮게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건 당대에는 교단과 황실이 완전한 합치를 이루는 것도, 후계 다툼을 멈추게 하는 것도 불가능할 터였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는 것보다, 세상이 먼저 어둠과 혼돈에 뒤덮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전하."

필립이 탄식하듯 말한 건 그때였다. 세라스를 마주 보며,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변방이 어떤 상태인지, 서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이 평화로운 중앙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보고서의 그 어떤 글귀로도, 실상을 전부 표현할 수는 없을 겁니다."

세라스의 미소가 부드러워졌다.

"진심으로 대륙의 앞날을 걱정하고 계시군요, 경. 역시. 입으로만 명예와 정의를 부르짖는 이들과는 달라요. 경 같은 기사들이 많아져야 할 텐데요."

필립은 물론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현실을 모른다 여긴 듯, 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됐다.

"지금 대륙은, 보이는 것보다 더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전하. 거기다 검은 벽의 상태도 심상치 않다더군요. 자칫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알고 있어요. 아버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실 겁니다. 검은 벽과 관련된 부분에는 특히 더 촉각을 곤두세우시는 편이거든요. 이 순간에도, 각 전선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군단이 집결하고 병력이 충원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차분하지만 진중하게 대답하던 세라스의 시선이, 마주 앉은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이안 경을 뵙고자 하시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는 않을 겁니다."

"무관하지 않다니요…?"

필립이 미간을 좁히며 되묻는 가운데. 세라스를 마주 보던 이안은 별다른 반응 없이 술병만 입으로 가져갔다.

새삼스럽게 놀랄 이야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게임에서와 달리, 아직 침식과 침공이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이긴 했지만. 그를 전선으로 보낼 명분은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그보단 세라스가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는 부분이 차라리 더 놀라웠다.

"폐하께서 나리를, 전선으로 파견하실 거란 말씀이십니까?"

필립이 덧붙였다.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이안을 관찰하듯 바라보던 세라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에요. 정말 그럴지는 이안 경이 아버님과 만난 후에나 확실해질 겁니다. 하지만 보아하니… 이안 경께서도 나와 비슷한 예상을 하고 계셨던 것 같군요."

필립이 정말이냐는 듯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그보다 나와 황실의 관계를 효과적이고 상징적으로 알릴 방법이 또 뭐가 있겠어?"

"아…!"

필립이 비로소 탄식했다.

백금룡의 대행자이자 북부의 용살자가 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전선으로 향한다면, 말 그대로 제국 전체가 들썩일 소식이 될 터였다.

삽시에 제국 구석구석까지 소문이 퍼지리라. 이안이 용을 죽였을 때처럼.

"변방과 서부의 소식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단번에 바꿀 수 있겠지. 전선의 사기도 오르겠고."

황실을 향한 국민들의 충성심도 더 견고해질 터였다.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지만, 필립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져 있었다.

"장군으로 임명해서, 군단의 지휘권이라도 주시려는 걸까요."

"글쎄. 그렇게까지 날 믿으실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권한을 부여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명목상에 불과하겠지."

이안이 전선으로 향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황제는 목적을 다 달성하는 셈일 터였다.

그리고 그러는 편이 이안에게도 좋았다. 책임질 게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짐이 많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만에 하나 황제가 예상 이상의 권한을 내리려 한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사양할 생각이었다.

내 목숨 건사하기도 바쁠 텐데, 남까지 챙기려다간 가랑이가 찢어질 터였다.

'어차피 내가 간다고, 전선이 뚫리는 걸 막을 수도 없을 테고….'

이안은 내심 혀를 찼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았다.

침식이 시작되면, 전선은 말 그대로 최악의 흉지로 돌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된 지금은, 분명 게임에서보다 더 끔찍한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물론 그건 곧, 수많은 퀘스트와 막대한 경험치가 기다리고 있으리란 뜻이기도 했다.

이제 레벨을 올리려면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암살자들은 적지 않은 경험치를 주었지만, 레벨 업까지 필요한 경험치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머리는 목숨은 하나이니 조심하라고 했지만. 가슴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위험한 곳을 찾아다녀야 한다고 속삭였다.

어쨌건, 둘 다 도망치라고 속삭이지는 않았다. 물론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었다.

"이안 경은 정말, 매번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그저 예상만 하신 게 아니라, 이렇게까지 상황을 꿰뚫어 보고 계셨다니."

탄성을 흘리며 말한 세라스의 눈매가 슬며시 휘어졌다.

"겉모습만으로는 결코 판단할 수 없는 분이셔요."

생각 없게 생겼다는 얘기를 칭찬처럼 하네.

낮은 코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이안이, 술병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위험합니다. 거기선, 나리의 진면목을 드러내실 수도 없겠고요."

필립이 걱정스럽게 덧붙인 건 그때였다. 세라스의 눈동자가 의문을 머금고 그에게로 돌아갔다.

"진면목이라니요? 제가 모르는 이안 경의 모습이 더 있나요?"

"...!"

그제야 실언을 깨달은 듯 순간 눈을 치켜 떴던 필립이, 이내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폐, 폐하께서 누구를 붙여 주시건 나리에겐 오히려 짐이 될 거란 얘기였습니다. 나리께서는 기본적으로 혼자 싸우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데다가, 전술이나 전투 방식은 여간해서는 따라가기-"

당황한 티를 너무 내는 거 아니냐.

필립을 슬쩍 일별한 이안이 실소를 삼켰다.

물론, 그는 필립이 한 말의 진짜 의미를 알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은 전선에서는, 혼돈력은 물론이고 마법도 다루기 어려울 테니까.

필립의 눈에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팔다리에 족쇄를 찬 채로 싸우는 것과 다름없어 보일 터였다.

"염려 마라.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 볼 테니까."

이안이 비로소 덧붙였다. 중언부언 이어가던 변명을 멈춘 필립이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예. 물론… 그러시긴 하겠습니다만. 제가 잔걱정이 워낙 많지 않습니까. 하하."

…그래도 내 걱정해 주는 건 이놈밖에 없네.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필립이 걱정하는 부분은 사실 이안에게도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마법 무구나 마도구라 여겨질 수준의 주문만을 사용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중위 이하의 스킬 레벨을 더 올릴 생각은 없었다.

스킬 포인트는 아껴 둬야 했다. 최고 레벨이 그리 멀지 않은 상황이 아니던가. 초월 주문을 적어도 하나는 익히려면, 지금 가진 것만으로도 아슬아슬했다.

그보다는 어떻게든 가장 좋은 종류의 장비를 구해 무장하는 쪽이 합리적이었다. 마침 주머니도 사상 최고로 두둑하지 않던가.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놓이네요. 이안 경께서 이미 많은 부분을 예상하고 계셨다니."

세라스가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아버님께서 걸맞은 보상만 내리신다면,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으실 것 같아서요."

"이제야 내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셨군."

이안이 한쪽 입꼬리만 말아 올리며 말했다.

어쨌건, 그는 황제의 명령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거절할 수야 있겠지만, 그런다고 일어날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보상을 두둑하게 뜯어낼 생각을 하는 쪽이 건설적이었다.

이왕이면, 살아남는 데에 도움이 될만한 보물로.

"뼈아프게 배운 덕분이죠."

빙긋 미소 지은 세라스가 시선을 돌렸다.

"황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륙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륙이 무사해야 제국도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니까. 다만, 힘에 부쳐 모든 곳에 손을 쓰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필립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황실과 교단의 뜻도 완벽하게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고요. 그러니 필립 경이, 장차 큰 도움이 되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무례하고 경솔한 발언들이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전하."

필립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제야 머리가 좀 차가워진 모양이었다.

세라스가 미소 지었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니까요. 오히려 더 욕심이 나는군요. 내 곁에서, 필립 경의 정의를 실현해 보지 않겠어요? 나라면 제법 큰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텐데."

멈칫한 필립이, 고개를 조금 더 깊이 숙였다.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전하. 너무 감사한 제안이지만.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여간, 이놈도 은근히 고집이 세다니까.

이안이 내심 콧방귀를 뀌는 사이, 세라스가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네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도록 해요, 경. 내가 아니라도 수많은 이들이 경에게 손을 뻗게 될 테니까."

"그렇게까지 많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제도잖습니까."

"경은 보기보다 순수하군요. 자유 성기사는 아주 드물죠. 심지어 백금룡의 대행자와 오랜 기간 함께 싸운 분이기까지 하고요. 제도에는 경의 이름도 알려져 있답니다. 그러니, 모두가 탐을 낼 거예요. 아무리 다루기 어렵다 해도, 어떻게든 손에 넣고자 하겠죠. 그리고 분명…."

세라스의 목소리가 눈빛만큼이나 의미심장하게 가라앉았다.

"나처럼 정직한 방식으로 손을 내미는 이들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경을 옭아맬 방법을 찾고, 거절할 수 없는 명분을 들이밀겠죠."

"…그렇다면, 그렇게 되기 전에 제도를 떠나야겠군요."

낯이 굳어진 필립이 읊조렸다. 반대로 세라스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더 짙어졌다.

"제도는 발을 들이는 것만큼이나 벗어나기도 어려운 곳이랍니다. 뛰어난 인재일수록 특히."

"...."

"장담컨대, 대교회부터가 경을 놓아주지 않으려 할 겁니다. 뛰어난 성기사를 필요로 하는 건 그들도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그들에겐 경이 거부할 수 없는 무기가 있어요. 교리와 율법."

"루 솔라여…."

필립이 낮게 침음했다. 세라스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것이 와닿기 시작한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달라요. 경을 옭아매려 하지도, 규율을 빌미로 휘두르려 하지도 않을 겁니다. 경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할 거예요."

부드럽게 속삭이며, 세라스가 슬며시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필립의 눈매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갈등을 머금고 가늘어졌다.

"경. 장화를 벗어 주세요."

엘리야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의 장비 청소를 끝낸 것이다.

의도한 건 아닌 게 분명했지만. 어쨌건 필립의 정신을 일깨우기에는 충분했다.

"...! 아, 예. 그러죠."

화들짝 눈을 깜빡인 필립이, 허리를 숙이고 주섬주섬 장화를 벗기 시작했다.

세라스가 아쉽다는 듯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그냥, 황녀에게 서임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필립이 홀로서기를 바라던 메브가 떠올라서였다. 사실, 이안도 같은 마음이었다.

조언이나 도움은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적어도 성기사로서의 삶에 대한 고민과 결론은 필립 스스로 내리기를 바랐다.

이미 능력도 자격도 충분하니,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는 않으리라.

물론, 어리석은 선택을 하더라도 존중해줄 생각이었다. 필립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엘리야에게 부츠를 벗어 준 필립이, 이윽고 세라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전하의 고견은 마음 깊이 새겨 듣고,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경은 끝내 내게 오지 않겠군요. 괜찮아요. 그런 올곧은 모습조차 마음에 드니까."

세라스가 빙긋 미소지었다. 고개를 숙인 필립이, 더 덧붙이는 말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상념에 잠기려는 찰나.

"하지만 그렇다면… 너무 먼 곳에서 답을 찾을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요."

세라스가 문득 덧붙였다. 필립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 지었다.

"돌파구는 언제나, 뜻밖에도 가까이에 있는 법이거든요."

"...? 예.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한 필립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라스가 불현듯 이안을 돌아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그녀의 입가에 번지는 의미심장한 미소에, 이안의 미간이 꿈틀댔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곧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깜빡인 세라스가 손을 내밀었다.

"저도 한 모금만 마셔도 될까요?"

#293화

비가 내리지 않는데도 어두운 밤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은 한 점의 달빛도 허용하지 않았다.

길 밖에 마차를 정차한 일행은, 마차를 가림막 삼아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지를 꾸렸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전하."

"푹 쉬어요. 그렇게 마음 불편한 표정 짓지 말고요."

야영지의 정비가 끝나자, 페이든 경이 가장 먼저 마차로 들어갔다.

불침번은 이안과 필립만 교대로 서기로 했다. 제국 인근의 위성 도시인 가라드까지는 아직도 이틀이나 남아 있어서, 체력 안배가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페이든은 자신이 밖에 남겠다고 했지만, 세라스의 명령을 이길 수는 없었다. 마차에서 자는 건 페이든과 아스메, 엘리야뿐이었다.

밖에서 자기엔 꽤 서늘한 날씨였지만, 세라스는 이때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일이라며 노숙을 선택했다. 그보다는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는 걸 더 하고 싶은 것 같긴 했지만.

'밤새 안 잘 것처럼 그러더니. 머리를 대자마자 기절했네.'

마차 지붕 위에 일행을 등지고 걸터앉은 이안은, 안에서 요란하게 번지는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코웃음을 흘렸다.

하긴. 암살자 습격의 뒤처리도 혼자 다 한 데다 종일 마부석에 앉아 있기까지 했으니, 피로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심지어 페이든은 신의 사도도 아니지 않던가.

"...."

구운 육포를 질겅대며, 이안은 슬며시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멍하니 불을 바라보고 있는 엘리야와 아스메. 필립과 세라스는 주석 잔에 담긴 포도주를 홀짝이며 서로 딱 붙어 뭔가를 쑥덕대고 있었다.

'싸우면서 친해진다더니….'

이안의 입가에 다시 한번 옅은 미소가 스쳤다.

페이든의 코골이 때문에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저러다 그냥 필립이 세라스에게 서임을 받게 되는 것도, 그가 보기엔 썩 괜찮은 결말이었다.

그런다면 다른 황족이나 교단에 힘을 실어줄 것도 없이, 그냥 황녀를 지지해줄 생각이었다. 그게 필립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

뭐, 알아서 잘 하겠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그가 여기에 올라온 건, 황녀 일행에게는 아공간을 훑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투투툭-

아공간에서 꺼낸 물건들을 옆에 내려놓은 그가, 마지막으로 사슬이 치렁치렁한 보옥을 꺼내 들었다.

이안은 비로소 회색 마녀의 보옥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정수를 고정하고 있는 건 하단의 고리에서 발톱처럼 튀어나온 금속 마디들이었다. 크기와 각도를 조정할 수 있었고, 고리로 이어진 표면에 정교한 주문 회로들이 새겨진 채였다.

고리에는 다섯 가닥의 얇은 금속 사슬들이 이어져 있었다. 길이가 제각각이고, 끝에 달린 고리의 크기도 저마다 달랐다.

'누가 마법사 전용 템 아니랄까 봐….'

거추장스럽게도 생겨 먹었네.

강철 장갑의 손아귀 한복판에 정수를 올린 이안은, 가장 긴 사슬 두 가닥을 차례로 손등에 한 바퀴 돌려 고리 반대쪽에 고정했다.

세 가닥 사슬 끝에 달린 고리는 차례로 엄지와 중지, 약지에 끼워졌다. 고리를 손가락에 딱 맞게 조절한 그가, 몇 차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강철 장갑을 끼고도 착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고.'

이안의 눈동자에 흐릿한 마력이 일렁였다. 보옥의 정수 표면에 마력이 아른거리며, 소리 없이 손바닥 위로 떠 올랐다. 정수만 사용할 때처럼 회전하지는 않았다.

뒤이어 강철 장갑 사이로 옅은 황금빛이 스쳤다.

'역시, 중복 사용도 문제 없고.'

방벽이 구현되기 전에 진언 회로의 마력을 다시 흩어버린 이안이, 만족스럽게 육포를 질겅댔다.

현실이 되면서 오히려 좋아진 몇 되지 않는 부분 중 하나였다.

게임에선 이런 식으로 장비를 중복해서 착용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마력까지 거둬들이자, 보옥이 다시 손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다시 한번 주먹을 쥐락펴락한 이안이, 옆에 놓아둔 투척용 단검을 들어 허공에 가볍게 던졌다가 받아들었다.

이질감은 크지 않았다. 장착을 해제하지 않더라도 단검 정도는 얼마든지 던질 수 있으리라.

'손이 조금 치렁치렁해 보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단점이라 할 수도 없었다. 이안은 가죽 띠의 빈 단검 집에 투척용 단검들을 차례로 욱여넣었다. 마지막은 연발 쇠뇌였다.

꾸구국- 철컥-

이안은 화살 함 아래의 가죽 고정끈을 오른팔의 팔목 보호대 위에 차례로 단단히 고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쇠뇌도 왼손에 장착하고 싶었지만, 오른손으로는 검을 들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철컥-

쇠뇌 고정이 완전히 끝나자, 이안은 왼손으로 쇠뇌의 옆에 달린 작은 도르래를 돌렸다.

시위가 뒤로 끝까지 당겨지면서 활 몸 끝의 고정쇠에 걸렸다. 동시에 아래의 화살 함에서 올라온 볼트가 사이에 놓였다. 이대로 고정쇠를 누르면 바로 발사될 터였다.

이안은 볼트를 그대로 다시 꺼내 화살통 안으로 되돌리고 나서야 고정쇠를 눌렀다. 퉁, 시위가 공기만 가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훌륭하네.'

입가의 미소가, 문득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이런 것들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자신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씁쓸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잠깐의 감흥에 불과했다.

짧은 콧방귀로 상념을 떨쳐버린 이안이, 몸을 돌려 마차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

그가 모닥불 근처에 가볍게 착지하자, 주위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말을 멈추고 눈을 깜빡이는 필립을 잠시 내려다본 이안이, 피식 웃으며 빈자리에 걸터앉았다.

"뭐, 내 욕이라도 하고 있었냐?"

"그, 그럴리가요. 위에서 볼 일은, 다 끝내셨습니까?"

허둥지둥 장작을 뒤집을 나뭇가지를 집어 든 필립이 말했다. 이안이 오른 팔목의 쇠뇌를 슬쩍 내보였다.

"그래."

세라스와 아스메의 시선이 새카만 쇠뇌에 집중됐다.

"…암살자들의 무기를, 챙겨 오신 거군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소만."

이안이 엘리야가 몸에 칭칭 두른 그림자 망토를 일별하며 말했다. 그녀는 그 위에 모포를 덮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입가에 침까지 고인 채였다.

세라스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 저는 그 당연한 일도 하지 않아서요. 사실,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요."

그건, 이게 길바닥 방식이라 그런 거고.

필립이 건넨 술잔을 받으며, 이안은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흘렸다.

시체를 뒤지는 건 전장의 병사나 용병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지체 높은 황녀나 황실의 기사에겐 고려할 가치조차 없으리라.

"뭐든, 당연한데도 생각지 못하는 부분은 있는 법이지요."

필립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세라스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이안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필립이 또 그의 눈치를 살피듯 힐끔댔기 때문이다.

"왜 자꾸 한동안 안 하던 짓을 하지?"

"예…?"

"할 말 있으면 해. 새삼스럽게 자꾸, 거슬리게 굴지 말고."

이안의 눈빛에, 필립이 낮게 침음 하며 애꿎은 장작만 뒤적였다. 불길을 응시하는 눈빛에 갈등이 오간 건 잠깐이었다.

"…그동안 서임을 받을 생각만 했지, 정작 그보다 중요한 부분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거든요. 충성을 바칠 주군 말입니다."

타들어 가는 모닥불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필립이 입을 열었다. 술잔 들면서, 이안은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리. 저는 황실에도 교단에도 충성을 맹세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도의 대귀족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의식을 마치고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건, 전하의 말씀대로 쉽지 않은 일이겠죠. 저는 이제 교리와 율법에 얽매인 몸이니 말입니다."

뭐 이렇게 서론이 길어.

슬쩍 미간을 좁힌 이안이 술잔을 입에 댄 채로 내뱉었다.

"그래서."

"…그래서 종일 고민해 봤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모시고 싶은 주군은 한 분뿐이더군요."

말을 멈춘 필립이, 부지깽이 대신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그제야 이안의 미간도 굳어졌다.

술잔을 땅에 내려놓은 이안이 내뱉었다.

"설마, 그게 나라는 얘긴 아니겠지."

"왜 아니겠습니까?"

정말이었네, 미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나 했더니…."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이안이, 다시 잔을 들며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나는 왕도 아니고, 공식적인 작위를 가진 것도 아니야. 내 칭호들이 그저 명예에 불과하다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나리를 먼저 떠올리지 못했던 걸지도요. 하지만,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말을 멈춘 필립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안의 눈썹이 슬며시 내려앉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세라스가 빙긋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뭔가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랍니다. 경."

"…나한테도 자격이 있다고?"

"당연하죠. 경은 엄연히 저 위대한 분을 대행하고 계시니까요. 물론 그게 모든 권한을 대행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만. 경의 이름으로 기사 직위를 내리는 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거기다 경은, 북부의 대전사이시기도 하잖아요?"

이안은 그제야 필립과 세라스가 뭘 그렇게 쑥덕댔는지를 알게 됐다.

태연하게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세라스가 덧붙였다.

"물론, 그러면 필립 경은 다른 추가적인 작위를 받을 수도, 더 높은 직위에 오를 수도 없게 될 겁니다. 물론, 휘하에 병사를 거느릴 수도 없겠고요.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리라 믿겠습니다."

"...."

"대교회의 임명 의식을 치를 때도 두 분의 관계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사실관계를 입증할 신뢰도 있는 증인이 있다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입니다. 이번 경우에는, 참관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를테면…."

"귀하 같은?"

이안이 툭 내뱉었다. 세라스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 짙어졌다.

"네. 저 같은."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말려 올라갔다.

세라스를 잠시 바라본 그가 덧붙였다.

"아까 마차에서 하신 말씀이, 이런 의미셨군."

"전 작은 단서만 제공한 것뿐이에요. 고민과 결론은 모두 필립 경이 직접 내렸답니다. 저는 질문에 답을 해줬을 뿐이고요."

"…귀하는 이 녀석을 탐내셨잖소. 그런데, 왜?"

세라스의 눈매가 슬며시 휘어졌다.

"적어도 이렇게 되면, 다른 이에게 필립 경을 빼앗길 일은 없어질 테니까요."

남을 주느니 그냥 아무도 가지지 못하게 하겠단 건가.

이안은 저도 모르게 풀썩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황족이 할 법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뒤통수가 얼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필립이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존중하리라 생각한 게 불과 한나절 전이건만. 그 결론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줄이야.

"제가 눈에 차지 않으시리라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다른 누군가를 섬기는 게 더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필립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를 돌아본 이안이, 잠시 코로 긴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후회할 거다. 네 앞에 놓일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거니까. 귀찮은 일도 생길거야. 물론, 위험한 일도."

"…나리께 서임을 받는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저도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교단에서도 나리와 저의 관계를 다들 알고 있다지 않습니까."

필립에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나리께서 제게 직위를 내리신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어쨌건, 용의 기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적어도 저 위대한 분께 직접 서임을 받는 것보다는 덜 주목받을 겁니다. 물론, 견제도요."

"명목상으로만 직위를 내릴 생각은 없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내 권리도 휘두를 거다."

"당연하지요. 사실,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그리 달라질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또 그렇지만.

이안이 잠시 입맛을 다시는 사이, 필립이 덧붙였다.

"교리와 율법에 위배 되지 않는 한, 죽으라는 명령이라도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나리."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이윽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의식을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 아시오?"

"물론이죠. 생각보다 아주 간단하답니다."

싱긋 미소 지은 세라스가, 손에 든 술잔을 빙빙 돌리며 말을 이었다.

"필립 경의 칼이나 경의 주먹으로 서임 의례를 치르고, 그 사실을 입으로 말해 세상에 공표하시면 됩니다. 참관자인 제가 들을 수 있게."

"…그게 끝이오?"

"하사할 봉토가 없다면, 네. 그게 전부입니다. 간단한 문서 작업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건 제도에 도착하면 제가 대신해 드리죠. 참관인의 자격으로요."

쓸데없이 간결하고 난리야.

이젠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하긴. 이 세계의 법은 세밀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빈틈이 아주 많았다. 신분이 높은 자들에겐 지나치게 너그럽기도 했다.

그 역시 백금룡의 대행자라는 이름을 앞세워 절차를 여러 번 생략하지 않았던가.

잔에 남은 술을 천천히, 그러나 남김없이 들이켠 이안이 마침내 술잔을 턱 내려놓으며 내뱉었다.

"그럼, 준비해라. 빨리 끝내버리게."

"나리…!"

화색이 되어 번쩍 고개를 들었던 필립이, 뒤이어 언제 웃었냐는 듯 엄숙한 얼굴이 되어 옆에 놓인 투구를 집어 들었다.

벌떡 일어난 그가 투구를 눌러 썼다. 세라스와 아스메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다 양손을 경건하게 앞으로 모은 채였다.

"...."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킨 이안이, 마지막으로 입가를 닦으며 일어섰다.

스릉-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검을 뽑아 들었다.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검날을 양손으로 받쳐 들며 투구 위로 나란히 들어 올렸다.

"…찬란한 여신의 율법 아래, 충성스러운 검이 되겠나이다."

#294화

한순간 주위의 공기가 엄숙하게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양손 위에 놓인 칼날에 모닥불의 불빛이 일렁였다. 그 아래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필립.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지켜보는 두 참관인.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내는 모닥불. 한구석에서 어느새 누워 잠든 난쟁이와 저 멀리서 낮게 번지는 코 고는 소리까지.

비현실적이지만 동시에 놀랍도록 현실적인 광경을 잠시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손을 뻗었다.

자루의 서늘한 감촉이 손아귀를 타고 번졌다. 이안은 내심, 몇 번째인지 모를 헛웃음을 삼켰다.

'하다 하다, 이젠 기사 직위를 수여하는 순간이 다 오다니.'

심지어 그 대상이 필립이 되리란 건,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현실이기도 했다. 하긴. 삶이란 언제나,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마련 아니던가.

이안이 검을 들자, 필립이 팔을 내려 양손을 땅에 댔다. 이안이 검면을 필립의 목덜미에 드리웠다.

툭, 툭, 태앵-

양쪽 어깨를 두드린 것에 이어, 이안은 필립의 투구를 귀가 조금 울릴 정도로 내리쳤다. 물론, 필립은 움찔대지조차 않았다.

…오글거리는 건 딱 질색인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필립의 목덜미에 다시 검날을 드리웠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말 내가 내리는 검을 받겠는가?"

필립이 대답 대신, 다시 양손을 활짝 펼쳐 머리 위로 들었다. 이안은 그 위에 다시 검을 얹었다.

이윽고 낮은 한숨을 내쉰 그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필립. 너는 이제 나의 기사다."

"충심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주군."

그 순간,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충성의 맹세. 받은 적도 없는 퀘스트였다.

보상은 약간의 경험치와 체력 수치 하나. 그리고 물음표였다.

물음표 포상이 무엇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그의 앞에서 일어서고 있었으니까.

'게임에서는 비용 없이 무한으로 고용되는 용병 같은 식이었나…?'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기사의 전용 퀘스트였는지도 몰랐다.

마법사가 마탑에 소속될 수 있듯, 기사는 레벨에 따라 직위를 높일 수 있는 서브 퀘스트가 있다지 않았던가. 야만 전사가 그렇듯, 휘하에 소수의 기사단이라도 꾸릴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생각하는 사이, 필립이 자신의 검을 허리춤의 검집으로 되돌렸다. 세라스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이어졌다.

"서임 의례는 적법한 절차에 의해 치러졌으며, 이는 참관인인 세라스 아스트레이아의 이름으로 보증합니다."

말투와 목소리만 진중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겉모습 역시, 어느새 온전히 본래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윤기 흐르는 백금발과 붉은 눈. 참관인으로서의 예의를 갖춘 모양이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제도에서 본 것들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군요. 뭐랄까… 훨씬 더 인상적이에요."

빈말이 아닌 듯,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묘하게 감상적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던 필립이 낮게 헛기침했다.

"그렇습니까? 저는 생각보다 낯부끄럽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만."

저도 모르게 기가 막힌 웃음을 흘린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나만 하겠냐?"

"하긴. 나리, 아니, 주군은 낯간지러운 걸 가장 싫어하시죠."

필립이 투구를 벗으며 미소 지었다. 다시 불 앞에 걸터앉으며,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알면, 그 호칭부터 바꿔. 하던대로 해라."

주군이라니. 고막이 다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필립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예. 나리."

아스메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마차로 향하는 가운데, 다시 자리에 앉은 세라스가 둘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이제야 아쉬움이 조금은 덜어지네요. 필립 경을 다른 황족이나 교단에 빼앗기면 잠을 못 이룰 뻔했는데. 이제야 속이 편해졌어요."

그러시겠지.

이안이 코웃음을 흘리는 사이, 필립이 덧붙였다.

"그럼 이제, 저를 귀찮게 할 이들은 전부 사라지게 되는 겁니까?"

"아마 처음 한동안은 접근해 올 거예요. 하지만 경이 백금룡의 대행자를 모시며, 내가 보증했다는 걸 알게 되면 다들 물러나겠죠. 그 사실이 알려지고 나면, 다들 미련도 버릴 거고요."

어깨를 으쓱인 세라스가 이안을 일별하며 말을 이었다.

"염려 마세요. 이번 임무가 끝남과 동시에 증명서를 작성해서, 교단과 황실에 제출할 겁니다. 물론, 제 직인을 찍어서요."

"감사합니다. 전하."

필립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 아스메가 다시 모닥불 옆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양손에는 치즈와 포도주 병이 들려 있었다. 모두 파엘의 작별 선물이었다. 그녀가 마개를 열며 자리에 앉는 가운데, 세라스가 미소 지었다.

"경사스러운 일인데, 축배는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본인이 더 신난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자신의 빈 잔을 들었다.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다가온 세라스가 술잔을 채워 줬다. 이안의 무릎 위에 치즈도 한 조각 얹어 놓은 채였다. 마찬가지로 필립의 잔도 채워 준 그녀가 비로소 세라스의 곁으로 되돌아갔다. 아주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유령처럼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세라스가 술잔을 들었다.

"한밤중의 이름 모를 숲에서 이루어진, 변치 않을 맹세를 위하여."

더럽게 오글거리네, 진짜.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안뿐이었다.

"변치 않을 맹세를 위하여."

뭔가 울컥한 눈빛으로 읊조린 필립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아스메 역시 양손으로 고이 받쳐 든 술잔을 기울였다.

짧게 입맛을 다시면서도, 이안 역시 잔에 담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보다 먼저 잔을 말끔하게 비운 필립이, 비로소 후련해 보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실감이 나는군요. 걱정을 덜었습니다. 방해 없이 제도를 떠나, 바로 변방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요."

"바로 돌아가긴 뭘 돌아가."

"엥…?"

이안이 술잔을 입에서 떼며 내뱉은 말에, 필립이 얼빠진 소리를 내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빈 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무릎에 놓인 치즈 조각을 집어 들며 말했다.

"경이 화로의 사원에 남아 있는지, 인편으로 확인부터 해라. 변방으로 떠난 게 확실해지면,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아. 그동안은, 대교회에 머물고."

"아. 전 또, 나리께서 뭔가 명이라도 내리시려는 건 줄 알았습니다."

"그사이에 해 줘야 할 일도, 당연히 있지."

"…있으셨다고요? 갑자기요?"

"항명할 거면 없던 일로 하든지."

"그럴… 생각은 물론 없습니다만. 이렇게 바로 뭔가 명을 내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안은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이왕 공식적인 부하가 생겼는데, 필요한 곳에 한 번은 써먹어 봐야지. 끝낸 뒤엔 변방으로 가든 어쩌든 알아서 해라."

"예. 하명하십시오."

그때, 옆에서 다시 망토를 걸친 기다란 손이 튀어나왔다. 어느새 아스메가 다시 곁에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술잔을 채워 주는 사이, 이안이 자신의 모포를 엘리야의 머리까지 덮어 주며 말을 이었다.

"교단 내부의 상황을 좀 알아봐. 어떻게 나뉘어서 파벌 싸움을 하고 있는지. 어느 쪽이 그놈들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지."

"…역시,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아는 거군요."

필립의 눈빛이 삽시에 진중해졌다.

원탁 의회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 자들을 알아보라는 말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들은 것이다.

이안이 덧붙였다.

"쉽지는 않을 거다. 용의 기사는 아니라도, 어쨌든 너는 공식적인 내 부하니까. 노골적으로 배척하거나, 오히려 속내를 숨기고 친구인 척 다가올 수도 있어."

"염려 마십시오. 아무도 믿지 않겠습니다. 그 정도는, 사실 두렵지도 않고요."

"목숨도 잘 챙기고."

"희생의 계시를 받은 사도에게, 어려운 명령을 내리시는군요."

필립이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안이 낮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네가 죽으면, 내가 메브를 볼 낯이 없어. 그러니까 항상 명심해라. 죽지 마. 이건 언제까지나 유효한 명령이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내리신 임무도, 물론 최선을 다할 겁니다. 반드시 실체를 파해쳐 보겠습니다… 만. 보고는 어떻게 드립니까?"

멈칫하며 물은 필립이 덧붙였다.

"제가 조사를 끝냈을 때는, 이미 제도에 계시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안은 세라스를 돌아보았다.

둘의 대화를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던 세라스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는 가운데,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귀하라면 내가 어느 전선으로 가게 되더라도 위치를 알아낼 수 있으시겠지. 아니오?"

"…아마도요?"

"이 녀석이 서신을 가져다주면, 내게로 보내 주시오. 대교회의 긴밀한 속사정이 쓰여 있을 테니, 믿을 수 있는 전령을 쓰셔야 할 거요."

"지금, 새로운 거래를 제안하시는 건가요?"

세라스가 미소 지었다. 슬쩍 눈썹을 들썩이는 걸 보니, 이안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는 걸 티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잘 배웠네. 생각하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덧붙였다.

"맡아 주신다면, 교단에서 찾아오더라도 그쪽의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하겠소."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만, 필립 경의 서신을 저도 읽어 봐도 될까요? 저 역시, 교단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아주 궁금하던 참이거든요."

"귀하도 교단 내부에 정보통이 있으실 텐데."

"있지만,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만한 인물은 없답니다. 교단의 주교나 소속 성기사들은, 저들끼리 반목하는 와중에도 결코 내부의 사정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거든요. 필립 경 같은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할 수 있죠. 아니."

잠시 말을 멈췄던 세라스가 덧붙였다.

"유일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처음 봤거든요. 신의 계시까지 받은 사도가, 교단과 반목하는 건."

"흠…."

이안이 침음하는 사이, 아스메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필립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전하.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인 일도 있는 법입니다."

"어머…. 경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궁금해지는걸요."

세라스의 눈이 은근하게 빛났다.

역시, 이 황녀는 가지지 못하면 더 가지고 싶어 하고, 하지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부류의 인간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봐도, 두 분은 지금 교단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란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시는 것 같거든요."

잠시 말을 멈춘 세라스가, 뭔가 꿍꿍이가 있을 때의 눈빛이 되어 이안과 필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에 대해서도 알려주신다면, 제가 필립 경의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조력하겠습니다. 물론, 은밀하게. 말씀드렸다시피 대교회에도 제 사람이 몇 있거든요. 필립 경에게도, 손발이 되어줄 조력자는 필요하잖아요?"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전하. 전하께서 위험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필립이 타이르듯 덧붙였다. 물론, 역효과였다. 세라스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저는 이미 목숨을 걸었는걸요. 두 번 거는 게 어렵겠어요?"

"루 솔라여…. 나리.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제 능력으로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필립이 고개를 돌렸다. 턱을 어루만지며 세라스를 바라보고 있던 이안이, 이윽고 툭 내뱉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 어디에서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실 수 있으시겠소?"

"…나리?!"

필립이 눈을 치켜떴다. 물론, 이안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필립이 만류하는 동안, 그는 세라스를 관찰하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의회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황실 내부에도 손을 뻗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다른 곳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크지 않을 터였다. 황제가 황궁의 모든 것을 손바닥처럼 지켜보고 있다지 않던가.

그게 아니라도, 눈앞의 이 황녀가 놈들의 일원일 것 같지는 않았다.

대교회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건 물론이고, 모든 관심이 제국과 후계 다툼에만 쏠려 있었으니까.

잘하면 의회의 또 다른 걸림돌이자 정보원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예지몽도 꾸곤 한다니,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 역시 보통 사람들보다는 훨씬 뛰어날 터였다.

이안의 눈을 마주 본 세라스가,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찬란한 여신과 타오르는 여신께 맹세코, 두 분께 들은 모든 이야기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아스메는 저와 한 몸이나 다름없으니, 믿으셔도 되고요."

술병을 든 아스메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와중에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그사이 놀람을 추스른 듯, 필립이 입맛을 다셨다.

"나리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야…."

"이야기는 네가 해라. 나는 중간중간에 첨언만 할 테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필립이 그건 좀 솔깃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이는 사이, 둘을 바라보던 세라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맙소사, 또 가슴이 뛰는군요. 정말이지, 이안 경과 만난 이후로 심장이 평온한 날이 없는 것 같아요."

"귀하도 내게 가장 깊은 비밀 하나를 털어놓으셨다는 사실이 기억났을 뿐이오. 물론, 내뱉은 약속은 지키시리라 믿겠소."

"물론이죠. 저는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답니다."

"그럼 술은 거기까지만 드시는 게 좋을 거요. 꽤 긴 얘기일 테니."

세라스가 냉큼 술잔을 내려놓았다. 물론 이안과 필립도 그러지는 않았다. 필립은 오히려 생각을 정리하듯 천천히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먼저, 이 질문부터 드려야겠군요."

이윽고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세라스가 숨을 멈춘 채 그의 입술만 바라보는 가운데, 필립이 속삭이듯 물었다.

"원탁 의회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정말 늦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세라스와 아스메의 얼굴에서 피로는 물론, 미소까지 전부 앗아가 버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295화

마차 안의 공기는 서늘하고 습했다. 몇 시간 전부터,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솨아아….

얼핏 보면 물안개가 낀 것처럼 느껴지는 부슬비였다. 하늘에 자욱하게 넘실대는 짙은 먹구름과 달리, 다소 소박한 느낌마저 들었다.

창가에 느긋하게 턱을 괴고 기대앉은 이안의 눈길 역시, 다소 나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은 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몇 시간쯤 뒤면 도시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니까.

"이번 책은, 무슨 내용인가요?"

세라스의 은근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며칠 사이, 마차 안의 분위기도 여러모로 달라져 있었다.

필립은 건너편에 황녀가 앉아 있는데도,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입까지 벌리고 자고 있었다.

기운을 완전히 차린 아스메는 세라스의 떡진 머리를 빗으로 쓸어내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루에 한두 번씩은 일행들의 앞에서 말도 했다. 여전히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에, 또 취하시겠어요, 전하. 같은 식의 짧은 잔소리뿐이긴 했지만.

"...."

그리고 마차 바닥에 망토를 깔고 앉은 엘리야는 책을 읽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새로 읽기 시작한, 저주 술사의 마법서였다.

할 게 없어지자 초조하게 자꾸 마차를 청소하려던 통에, 보다 못한 이안이 마법서를 꺼내 던져 준 것이다.

물론 그는 황녀 일행에게, 엘리야는 검은 벽을 연구하는 학자이며 금서는 직접 검열한 것이란 짧은 설명도 잊지 않고 곁들였다.

페이든과 아스메의 표정은 당연하게도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둘 다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마법서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안의 말이었기에 그냥 넘어갔을 뿐,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엘리야의 손발이 족쇄가 채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표정과 눈빛이 달라진 건 세라스뿐이었다.

"지금도, 내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 건가요, 영애?"

엘리야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필립을 바라볼 때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본래도 내심 마음에 들어 했었지만. 아예 노골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안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영애?"

"…부르셨어요, 전하?"

"드디어 대답을 주는군요."

"죄송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집중할 때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편이죠. 알아요. 그래서, 이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읽는 책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해줘요. 새로운 금서를 읽기 시작했잖아요."

"그게… 모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 죄송합니다."

둘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친절하고 정중했지만, 어쨌건 세라스의 권위가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용의 아이이니 당연한 부분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안의 교육이 만들어낸 부과적인 효과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세라스가 돌려 이야기하는 것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물론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걸 수도 있었지만. 평소의 성격을 미뤄볼 때, 관심이 없어서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일 확률이 훨씬 더 높았다.

"어차피 위험한 부분은 이안 경이 다 지워 버렸다면서요. 조금만 이야기해 줘요."

"자세한 내용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현재까지는, 이 책의 저자가 고유한 저주를 만들어 낸 과정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과정은, 물론 끔찍하겠죠?"

"아마도요."

세라스는 흑마법과 검은 벽에 대해 이것저것 화두를 던져 댔지만, 엘리야는 매번 태연하게 두루뭉술한 답변만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오히려 세라스의 흥미를 더 잡아끌고 있었다.

'…어쨌건, 이제 충격에선 벗어났나 보네.'

지난 며칠을 떠올린 이안이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필립의 이야기를 들은 후, 세라스는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차분한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다음 날까지 식사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조개처럼 입만 다물고 있었다.

그만큼 큰 충격을 받은 것이리라.

놀라운 반응은 아니었다. 제국에 암약한 비밀 결사가 대륙을 혼돈으로 물들이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셈이었으니까.

심지어 절반 정도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변방은 어둠에 물들었으며, 서부는 반쯤 황폐해지지 않았던가.

만약 이안이 의원 하나를 죽여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지역이 그들에 의해 혼란에 휩싸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눈치를 챘어도 대응할 여력이 없었겠고.'

게임에서 그랬듯이.

물론, 세라스는 그런 사실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를 충격에 빠뜨린 건, 그토록 거대한 그림자를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일 터였다.

'적어도 황실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오만은 깨졌겠지.'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건, 세라스가 의회에 대해 발설하지 않으리란 건 확실했다. 황제는 물론, 자신의 오라버니에게까지도.

그저 맹세 때문만이 아니라, 사안의 심각성과 위험성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동시에, 황좌로 이어지는 길을 이어 줄만 한 비밀이라는 것도 깨달았으리라. 의회의 실체를 밝혀내고 무너뜨릴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면, 단숨에 후계 구도의 가장 높은 자리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가닥을 잡기 위해서라도 필립을 잘 조력하겠지.'

이참에 겸사겸사, 엘리의 뒤도 봐주면 더 좋고.

다소 무책임한 결론을 내리며, 이안은 세라스에 대한 상념을 깨끗이 지워 버렸다.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겠지만. 그녀가 알아서 해야 할 부분이었다. 애초에 맹세까지 하며 듣기를 원했던 건 그녀이지 않았던가.

이안은 하늘에 넘실대는 먹구름과, 나무가 듬성듬성 이어진 잿빛 평야를 바라보며 조용히 포도주만 홀짝였다.

슬슬 이보다 독하고 쓴 술이 먹고 싶다는, 배부른 푸념이나 내심 읊조리면서.

"...?"

나른하게 풀려 있던 이안의 눈매에 힘이 들어간 건,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저 먼 먹구름 너머가 번쩍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시선을 잡아끈 건, 그저 단순히 번쩍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쿠르릉-

한참 만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이어졌다.

아주 멀리서 시작된 듯 웅웅 울리는 소리였지만, 마차 안을 고요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습격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화들짝 잠에서 깬 필립이 이윽고 안심한 듯 읊조렸다. 순간 굳어졌던 세라스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러게요. 놀랐어요."

"이 정도면,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한동안 귀가 먹먹할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 정도면 자칫하면 말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질 수도 있거든요."

필립의 너스레에도, 이안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먹구름이 넘실대는 저 먼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늘 너머가 또 한 번 번쩍인 건 그때였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네.'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먹구름 너머가 불길한 선홍색으로 번쩍였기 때문이다. 광원의 시작점을 알 수는 없었지만, 주위의 먹구름들을 물감처럼 물들였다.

그 사이로 혈관처럼 번지는 가느다란 번개 줄기들이 설핏 보였다가 사라졌다.

게임에서도 종종 본 기억이 있는 현상이었다. 아마도 화로의 사원으로 향할 때쯤부터였던가.

어쨌든, 이번에는 한 번의 번쩍임으로 끝나지 않았다.

"...?"

뒤늦게 이안과 같은 방향을 돌아본 세라스의 시선이, 붉게 번쩍이는 하늘 너머에 고정되었다.

그녀의 입이 설핏 벌어질 찰나.

쿠르릉- 콰릉-

천둥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안의 곁으로 다가앉은 채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던 필립이, 이윽고 입술을 달싹였다.

"나리. 제 착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에도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가 이안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변방에서 서부로 넘어가던 때요. 그, 동굴 앞에서. 저렇게 기분 나쁜 붉은 빛은 아니었습니다만…."

"…글쎄. 어쩌면."

나지막이 읊조리면서, 이안도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꽤 닮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균열 사이로 무언가 넘어왔던, 천둥 치던 그 날 밤과.

하지만 지금 붉게 빛나는 저 동쪽 하늘은, 사실상 변방과 정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게임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이었지만, 이안이 알기로 저쪽에는….

"검은 벽."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모두의 고개가 거의 동시에,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돌아갔다.

어느새 책을 내려놓고 일어선 엘리야였다.

그녀는 주위의 시선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서로 다른 색의 두 눈에는 그저 붉게 번쩍이는 구름만이 각인된 것처럼 새겨지고 있었다.

"…검은 벽이, 발작하고 있는 거예요."

콰르릉, 콰릉,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하늘을 울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필립이 눈을 깜빡이며 내뱉었다.

"검은 벽이 때때로 발작한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여긴, 전선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검은 벽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상 현상을 발작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용례이다…."

엘리야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목소리와 말투 역시, 고저 없이 균일했다. 책을 읽는 것처럼.

"이상 현상 대부분은 검은 벽이 혼돈이라는 이름의 광기를 분출하며 일어난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검은 벽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 본래 검은 벽의 발작은-"

아마 실제로도 그럴 터였다. 그녀는 지금, 머릿속에 기억된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침식의 명확한 전조 증상을 지칭하는 말이며, 침식의 과정 중에도 관찰된다. 첫 침식 이전의 발작은, 제도에서도 그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으며,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비로소 엘리야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잠시 숨을 멈췄던 그녀가, 속삭이듯 말을 맺었다.

"…구름이 피처럼 붉게 물들고, 온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처럼 절규했다고 한다."

"...."

"...."

상대적으로 더 무겁게 느껴지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다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엘리야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럼, 바로 침식이 시작된다는 거냐?"

이안의 덤덤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그건 아닐 거예요. 이런 발작이 앞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겠죠. 다만, 점점 더 주기가 짧아질 거예요. 침식은 그때 시작되겠죠. 첫 침식 때의 기록에 따르면…."

잠시 말을 멈췄던 엘리야가, 이윽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두 달이 조금 안 되게 남았을 거예요. 오늘이 첫 발작이라면요."

"...!"

세라스의 눈이 커지고, 필립도 숨을 들이켜며 얼어붙었다.

이안의 눈매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가늘어졌다.

'역시… 침식 시기가 앞당겨진 거네.'

이미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지 않았던가. 악순환의 고리. 자신이 만들어낸 변화가 끝끝내 침식을 가속화한 것이다. 게임일 때보다 최소한 몇 달은 빠르게.

물론, 예상이 적중했다는 사실은 전혀 기쁘지는 않았다.

그건 결국 미지의 영역이, 그리고 그가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였던 최후의 순간도 더 빨리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두 달이라니…."

이윽고 필립이 장탄식을 흘리며 읊조렸다.

이안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는 핏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두 달 뒤면 검은 벽이 또 한 번 영역을 넓힐 것이며, 그 과정에서 광기에 휩싸인 수많은 괴물들을 토해내리라는 의미였으니까.

동시에 세상 곳곳에 광기가 스며들어, 새로운 마경들이 열리리라는 뜻이기도 했다.

"말했듯이, 두 달이 채 되지 않을 거예요.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가 읽은 책 어디에도 그것까지 쓰여있지는 않았어요."

엘리야가 비교적 차분하게 정정했다. 물론, 그녀의 목소리 역시 계속해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십여 년 만의 침식이 되겠군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한동안 온 제국이 혼란에 휩싸였었죠."

이제야 간신히 정신을 추스른 듯, 세라스가 읊조렸다. 가면처럼 굳어진 얼굴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겠습니다. 아버님을 뵈어야겠어요. 가라드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제도로-"

"아니. 도시는 들러야겠소."

이안이 말을 자른 건 그때였다.

세라스가 홱 그를 돌아보았다.

"저 광경을 보시고서도요? 왜 굳이-"

"난 오늘 밤, 반드시 따듯한 물로 목욕을 해야겠소. 먹을 만한 음식도 배부르게 먹고. 술도 몇 병 더 살 거요. 이제, 남은 게 두 병도 되지 않거든."

이안이 손에 든 술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걸 포함해서."

"아니… 대체 그게…."

세라스가 말문이 막힌 듯 더듬댔다. 이안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하루 정도 늦는다고 달라질 건 없을 것이오. 제도에서도 저걸 봤을 테니, 황궁도 분주해질 테니까. 물론,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시겠지. 차라리 한차례 소란이 지나간 후에 입궁하는 게 나을 것이오."

"...."

"어차피 가라드를 지나면, 바로 제도 지역이라고 하셨잖소."

물론,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제도에 발을 들이기 전, 그리고 엘리야와 헤어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검은 벽이 발작하기 시작했으니, 더더욱.

"게다가 곧바로 제도로 향한다 해도, 바로 입궁할 수는 없을 것이오. 폐하를 뵙는데 이런 몰골로 갈 수는 없잖소."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세라스의 푸른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내가 입궁 전에 제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귀하에게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 일어날 확률도 높아질 텐데."

"...."

벌어져 있던 세라스의 입이 비로소 다시 닫혔다. 아스메도 동의하듯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이윽고 대답한 세라스가, 이제는 경탄을 전혀 감추지 않은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놀랍도록 이성적이시군요. 경. 이런 순간에조차."

이 정도 일로 요란 떨기엔,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거든.

대답 대신 낮은 콧방귀만 흘린 이안이, 다시 창밖을 돌아보았다.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전선이 충분히 대비되어 있길 바라는 게 좋으실 거요."

내뱉으며 어느덧 고요해진 하늘을 잠시 응시하고 있던 그가, 이윽고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두 달은, 생각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니까."

#296화

"신분 증명은 끝났습니다, 나리. 머무실 저택이 필요하십니까?"

멈춰 선 마차 밖, 경비병의 목소리가 이안의 귀로 파고들었다. 페이든의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오가는 이들이 많지 않은 곳으로 한 채 내어주시게. 하루만 묵고 떠날 걸세."

"예.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머무시는 동안 시중을 들 일손도 필요하십니까?"

"넷 정도면 충분하겠군. 바로 따듯한 목욕물과 식사도 준비해 달라 전하게. 아가씨뿐만 아니라 귀빈이 셋 더 계시고 머무는 인원이 총 여섯이니, 목욕물과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해야 할 걸세. 물론, 술도. 금액은 신경 쓰지 말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페이든은 물론 경비병도 이런 식의 대화에 아주 익숙해 보였다.

물론 그 사실이 이안에게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아마도 귀족이나 부유한 여행객이 많은 덕분에 만들어졌을, 중앙 특유의 문화에 익숙해진 덕분이었다.

아마도 이런 게 중앙 대도시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이기도 하리라.

"...."

술병에 남아 있던 반 모금의 술을 전부 들이켠 이안은, 빈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연스럽게 마차 내부를 다시 눈에 담은 그의 입가에 건조한 실소가 스쳤다.

마차 내부의 무거운 분위기가 도무지 풀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세라스는 물론이고, 필립도 뭔가 고민하듯 눈을 감고 입도 앙다문 채 등받이에 뒤통수를 대고 있었다.

엘리야는 아직도 자신의 공책에 뭔가를 적어 내려가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한 장문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리라. 한 글자 한 글자 고심하며 꾹꾹 눌러쓰는 손길이 진중했다.

'뭐, 각자의 짐은 각자가 짊어지는 거지….'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등을 깊숙이 기대앉았다.

그 역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게임에서의 기억들을 다시 한번 되짚으며 곱씹는 시간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이안의 눈빛이 문득 가라앉았다.

'확실히… 까먹는 부분도 늘고 있단 말이지.'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졌다 해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겪었던 상황이 일어나면 다시 불현듯 떠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물론, 걱정보다는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씁쓸함이 더 클 뿐이었다.

그의 기억이 휘발되는 것보다, 미지의 영역에 도달하는 게 더 빠를 테니까.

예상대로면 앞으로 길어야 일 년 반. 그보다 빠르다면 일 년이면 도달하게 될 터였다.

'그 전에, 레벨이라도 최소한 두어 개는 더 올려야 하는데….'

사실 진짜 걱정스러운 건 이쪽이었다.

게임일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고, 만약을 대비한 자원도 어느 정도 남겨 두고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 헤쳐나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전혀 확신할 수 없었다.

"아, 저기 오는군요."

그때, 밖에서 다시 병사의 목소리가 번졌다.

"하루 동안 시종장으로 부리시면 될 겁니다. 저택으로 안내할 테니, 따라가십시오."

"수고하시게."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수많은 인기척들이 가까워지자, 이안은 창문을 밖을 볼 수 있을 정도로만 열었다.

부슬비 내리는 우중충한 거리의 전경이 드러났다.

날씨가 이렇지 않았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번화하고 생기 넘쳐 보였을 도시였다. 물론, 분위기가 뒤숭숭한 건 그저 날씨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아까 그게 대체 뭐였는지, 들은 게 있나? 설마, 정말 검은 벽이…."

"다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여기서 전선까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가 보지 않아서 알지 못하는 거지."

길을 오가는 이들 대부분이, 몇 시간 전 일어났던 괴현상에 대해 쑥덕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 벌써 십 년도 넘게 지났군. 검은 벽이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거야. 분명해."

"듣자 하니 변방 전 지역이 끔찍한 꼴이 되었다던데. 그 영향일 수도 있잖나."

진실에 근접한 결론을 내린 이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다들 추측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긴. 아무리 제국이라도, 정확한 정보는 황족과 소수의 지식인만이 알고 있으리라.

'앞으로도 그렇겠지.'

이 세계의 인간들도 지식과 정보가 곧 힘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이런 세계이기에 더더욱 잘 아는 걸지도 몰랐다.

"…제도가 바로 지척인데도, 생각보다 훨씬 번화한 도시로군요."

필립의 목소리가 번졌다.

그 역시 이안처럼 창문을 살짝 열고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숙소에 도착할 테니, 그 전에 분위기를 좀 풀어 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세라스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도로 가기 위해 먼 길을 온 여행객이 들르거나, 사정상 제국에 자리 잡지 못한 이들이 대신 머무는 도시니까요."

"자리 잡지 못한 이들이요?"

세라스가 살짝 벌어진 창문 틈으로 시선을 돌렸다.

"듣기론, 제도에서 진행하기 어려운 사업이나 거래를 이곳에서 대신하기도 한다더군요. 제도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중개인들도 여럿이라고 하고요. 그들은, 제도에 터를 잡은 자들이죠."

"…제도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인 셈이군요."

"괜히 제도에 사는 이들이 자신들을 제도 사람이라 칭하는 게 아니랍니다."

세라스의 입가에 자부심 같기도, 비웃는 것 같기도 한 묘한 미소가 스쳤다.

"설사 자유민이라 할지라도, 다른 지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회와 권리를 가지고 있죠. 그게 제도가 끝없이 번성하고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럼… 모든 이들이 제도로만 모여들게 되지 않겠습니까?"

"제도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엮인 곳입니다. 타지에서 온 이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정착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물론, 물리적으로도 쉽지 않고요. 제도라고 빈 땅과 건물이 남아도는 건 아니거든요."

"그보단, 의도적으로 제도의 인구를 통제하고 있는 것 아니오?"

이안이 툭 끼어들었다. 세라스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모두가 살 수 있다면 오히려 가치가 떨어질 테니까."

"…이젠 놀랍다는 말이 오히려 무색하군요. 맞습니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어야, 상징성과 가치가 유지되는 법이죠. 제도는 처음이신 것으로 아는데. 제대로 이해하고 계시네요."

내가 원래 살던 세상에서도 많이들 쓰던 방식이거든.

속으로만 덧붙인 이안이 한쪽 어깨를 으쓱이는 사이, 세라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도에 완전히 자리를 잡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능력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녀의 시선이 엘리야와 필립을 차례로 훑었다.

"앞에 계신 두분 처럼요. 물론…."

묘하게 떨떠름한 필립의 얼굴을 잠시 응시한 그녀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 뿌리는 황실과 교단에 있습니다. 제도가 대륙의 중심이라면, 황실과 교단은 제국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죠."

"많이 아픈 심장이군…."

이안이 농담처럼 읊조렸다. 하지만 폐부를 찔린 듯 멈칫한 세라스가, 이윽고 입술만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그렇다 해도, 예견된 재앙 앞에서는 불협화음 없이 함께 뛰게 될 겁니다."

"부디 그러길 바라겠소."

"…그, 그래서, 정말 황궁과 대교회가 제도를 양분하고 있습니까?"

일말의 기대도 느껴지지 않는 이안의 대답에, 조금 어색한 헛기침을 흘린 필립이 재빨리 덧붙였다.

세라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양분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군요. 교황령은 제도에서 가장 핵심적인 지역 중 하나이지만, 결국 제도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반면에 황궁은 실질적으로-"

이어지는 세라스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제도 타령보다 차라리,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밖의 목소리들이 더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어떻게든 제도에 집을 구해야겠군.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그러느니 이곳에 확실히 눌러앉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지 않겠나?"

"여긴 아무리 제도와 가깝다 해도, 제도는 아니지.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자네도 알잖나."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지 못하는 이들조차, 어쨌건 머지 않아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외곽 지역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로 피신하려 하고 있었다. 제도가 무너지는 일은 없으리라 확신하는 것이다.

하긴, 아르케아스조차 제도가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되리라 확언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에선, 대륙에서 안전한 곳은 제도 밖에는 남지 않게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대체 검은 벽을 넘은 뒤에,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그걸 확인하기 위해 검은 벽을 넘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안은 황제의 명령을 수행한 뒤에 다시 중앙으로 돌아오리라 결론 지었다.

그때는 게임에서 그랬듯,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그들이 줄 퀘스트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만큼 위험하겠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밖에. 계속 살아남으려면.'

내키지 않더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역천룡을 상대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검은 벽을 넘어야 하는 순간도, 끝내는 오게 될 테니까.

그 시기가 생각만큼 멀지는 않았으리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거슬리게 마음 한구석을 긁어댔다.

***

숙소는 페이든이 요청한 대로 도시 외곽의 2층짜리 저택이었다.

건물에 비해 낮은 담장과 좁은 마당을 가진, 이제 꽤 전형적인 느낌이 드는 제국식 저택이었다.

좌우로도, 그리고 인근에도 비슷하게 생긴 저택이 여러 채 있었다.

이 도시는 다른 곳보다 더, 여행객을 상대로 한 숙박업이 발달해 있었다.

"식당에서 다시 만나요. 경."

"각자 알아서들 합시다. 굳이 억지로 시간을 맞출 필요는 없잖소."

이안 일행과 황녀 일행은 2층을 반으로 나눠 사용하기로 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무장부터 해제한 이안은,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이 저택은 욕실만 무려 세 개였다. 중앙의 제국인들이 이 세계에서 그나마 가장 목욕을 즐기는 자들인 덕분이었다.

돌을 깎아 만든 욕조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은은한 꽃향기도 번졌다. 물에 향유를 조금 섞은 것이리라.

중앙 지역에 접어들고서야 종종 접하게 된 호사였다.

"따듯한 물이 더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냉큼 옷을 벗어 던진 이안이 욕조에 몸을 담그자,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이 공손하게 말했다. 아마도 그가 이안 일행을 담당하는 모양이었다.

눈을 감은 채 간만의 열기를 만끽한 이안이, 입가에 다소 나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다른 분들은 어쩌고들 계시오?"

"영애께서는 방금, 시녀 분과 함께 욕탕으로 향하셨습니다. 다른 분들은 각자의 방에 계신 것 같습니다만. 확인해 보고 올까요?"

"됐소. 뜨거운 물은 더 준비해 주시오."

색이 변하고 있는 물을 슬쩍 내려다본 이안이 덧붙였다. 물론, 이래도 악취는 번지지 않았다.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미리 준비를 시작해 두고는 있었습니다만…."

"난 목욕부터 끝내겠소. 다른 이들에게는, 기다리지 말고 먼저들 먹으라고 전해 주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필립 경에게 이야기하면, 필요한 물품들을 적은 종이를 줄 것이오. 목욕물을 준비하고 나면, 심부름할 사람을 찾아 전해 주시오."

"예. 그럼, 뜨거운 물부터 준비해 오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시종이 몸을 돌렸다. 이안이 다시 입을 달싹인 건 거의 동시였다.

"하나만 더 묻겠소."

"예. 말씀하십시오."

멈칫한 시종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혹시, 이 저택에 지하 공간이 있소?"

"창고로 사용하는 작은 창고가 있긴 합니다만…."

"어디로 가야 들어갈 수 있소?"

"주방 뒤편 바닥에, 문으로 막아 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시종이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선선히 대답했다.

이안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알겠소. 가 보시오."

꾸벅 몸을 돌린 시종이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욕조 가장자리에 얹어져 있던 이안의 오른손 손가락 사이로 꾸물대는 움직임이 번졌다. 늪지의 원한이었다.

뱀의 형태로 돌아온 녀석은, 욕조 안으로 퐁당 뛰어들어 물속을 유영하듯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다.

느긋하게 몸 곳곳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던 이안이, 이윽고 슬며시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지하실이 있단 말이지….'

혹시나 싶어 묻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 그는, 검은 벽의 파편을 꺼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신들의 눈을 피해서.

#297화

물론, 오늘은 굳이 지하가 아니라도 상관없을지도 몰랐다.

이미 밤인 데다가, 하늘에 먹구름까지 자욱하지 않던가.

밤은 루 솔라가 잠드는 시간이었고, 경험상 먹구름은 신들의 영향력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가장 안전한 방식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이 정도면 나도 명예 타락자 아닌가.'

이안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스쳤다.

어쨌건, 이게 굳이 이 도시를 들른 가장 큰 이유였다.

제도에서 검은 벽의 파편을 꺼내는 건 너무 위험성이 높았다. 제도는 말 그대로 신들의 축복을 받은 도시가 아니던가.

'돌발 상황이라도 생기면 혼돈력을 흡수해야 하는데. 거기서 그랬다간 신들에게 바로 들키겠지.'

그러니 사실상, 오늘 밤이 제도에 도착하기 전의 마지막 기회였다.

"정복이 어서 도착하면 좋겠어요. 입으신 걸 보고 싶거든요."

문틈으로 엘리야의 목소리가 스친 건 그때였다. 저녁 식사를 위해 방을 나서는 모양이었다.

"내일 오전이면 볼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요.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는데…."

"염려 마십쇼. 그러실 겁니다. 무뚝뚝해 보이셔도, 표현이 아예 인색한 분은 아니시잖습니까."

목소리가 멀어졌다.

이안의 입꼬리는 어느새 다시 말려 올라가 있었다. 좀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미소였다.

'짐을 풀자마자 왜 시종부터 찾나 했더니… 내 정복을 주문한 거였나.'

엘리야도 작별 선물을 준비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안이 준비한 건 물론, 검은 벽의 파편이었다.

확인해 보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그는 파편을 엘리야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굳이 제도에 들어서기 전에 파편을 살펴보려는 것도 그래서였다.

물론, 엘리야 개인에게 주려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위험성을 교육하고 파편 역시 하급품이라고 해도, 그건 너무 위험했다.

대신 추천서와 함께 동봉해서, 대학의 공식적인 연구 자료로 등록하게 할 계획이었다.

검은 벽의 연구뿐만 아니라, 엘리야의 입지를 공고하게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만약 운이 좋다면….'

이안이 검은 벽을 넘는 것보다 먼저, 벽을 안전하게 무너뜨릴 수도 있을지도 모르고.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

나른하게 풀려 있던 이안의 미간에, 문득 다시 힘이 들어갔다.

영문 모를 불쾌감이 뇌리를 스치면서, 신경이 멋대로 바짝 곤두섰기 때문이다.

오감. 특히 청각이 예민해지면서, 욕실 밖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멋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 세라스의 나른한 목소리와 아스메의 속삭임. 종자를 위한 기도문을 읊는 중년 기사의 피로한 목소리. 벌컥 열린 문의 경첩에서 번지는 쇳소리와 저벅대는 발소리들. 여럿의 숨소리.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시종들의 다급한 발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고장 난 라디오처럼 멋대로 커졌다가 작아지며, 한순간에 이안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곧 초점이 맞듯, 가장 거슬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대문으로 들어오는 발소리와 숨소리들.

"공간을 확보해. 소란 피우지 말고, 시종들은 안에 가둬 둬라."

정체 모를 남자의 목소리까지 귀에 담은 이안은, 비로소 낮은 한숨과 함께 욕조에서 일어섰다.

'이제야 좀 쉬는 것처럼 쉬어 보나 싶었는데….'

불청객들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발소리로 봐서는 스물 안팎. 제대로 무장한 듯 쇳소리도 들렸고, 전신 판금 갑옷 특유의 묵직한 소리를 내는 자도 있었다.

몸의 물기를 닦아내는 사이, 이안의 신경이 곤두설 때만큼이나 빠르게 가라앉았다.

"당신들 뭡니까? 거기 멈추십시오. 더 다가온다면-"

필립의 싸늘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더는 소음이 귀를 파고들지 않았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방금 그건 육감이 만들어낸 반사적인 반응이었으니까. 위기감과 집중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선 길게 유지할 수 없었다.

어쨌건, 무력 충돌이 이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랬다면 육감이 바로 다시 경고를 보냈을 터였다. 하긴. 뒤에 엘리야가 있을 테니, 필립도 무작정 싸울 수는 없을 터였다.

스륵-

이안이 재빨리 셔츠와 바지를 걸치는 사이, 늪지의 원한이 다시 손가락에 감겼다.

바지의 허리춤을 대충 묶은 이안은, 문 옆에 기대 두었던 진은 강철 장검을 검집째 집어 들며 방을 나섰다.

복도는 조용했다.

아직 황녀 일행은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안은 그저 왼손의 검집만 콱 움켜쥔 채 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그들이 이상함을 느끼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안은 복도 끝, 계단이 아래로 이어지는 난간 앞에 도착하고서야 멈춰 섰다.

"...."

계단 아래. 전신의 벽면을 따라 병사들이 나란히 도열 해 있었다. 이안이 들은 발소리들의 정체이기도 할 터였다.

다들 사슬 갑옷 위에 제국 국기가 새겨진 검은 서코트를 걸쳤고, 손에는 적당한 크기의 쇠뇌를 든 채였다. 그들은 이안이 등장한 순간, 놀란 기색도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라도 쇠뇌를 겨눌 태세였지만, 이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정규군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장내를 훑었을 뿐이었다.

이들을 이끌고 온 게 누구인지 알아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대문 옆.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마련된 탁상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를 몸으로 막듯이 등지고 선 전신 판금 갑옷 차림의 기사였다.

갑옷 표면에 황금을 덧씌워 만든 듯한 문양이 빼곡했다.

실전적이기보단 장식품처럼 느껴지는 화려한 갑옷이었다. 늑대 머리를 형상화한 듯한 안면 가리개 역시 멋스러웠다.

기사의 곁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회색 정복을 걸친 중년인이 서 있었다.

마법사처럼 다소 마른 얼굴에, 잘 다듬어진 콧수염을 기른 자였다.

그리고 둘 다, 묘한 경계심이 묻어나는 눈길로 이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내가 무단 침입한 줄 알겠네.'

헛웃음을 삼키며, 이안은 걸음을 옮겨 계단으로 발을 들였다.

저 둘의 뒤편, 의자에 앉은 작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기사에 가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검은 두건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기까지 했다.

처저적-

동시에 병사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쇠뇌를 겨눴다.

물론, 이안은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지 않았다.

지잉-

그저 백금 방벽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오른손으로 진은 강철 장검을 뽑아 들었을 뿐이었다.

"...!"

"...!"

병사들의 눈이 커졌다.

그건 기사의 곁에 선 콧수염 중년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을 받은 기사가 재빨리 팔을 들었다.

병사들이 이안에게 겨눈 쇠뇌를 내리는 가운데,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혹, 저 위대한 분의 대행자이신 이안 호프 경이십니까?"

"나리, 오셨습니까? 다들 당장 무릎을 꿇고 합당한 예를 갖추시오!"

대답은 이안이 아니라 계단 옆에서 터져 나왔다.

이안은 몇 걸음을 더 내려가서, 계단 옆으로 이어진 복도를 돌아보았다.

병사들과 마주 선 필립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그는 병사들이 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투구는 물론이고 검과 방패도 위에 두고 온 모양이었지만, 어?건 나머지 갑옷은 걸친 상태였다.

저 상태로도 마음만 먹는다면, 병사들을 전부 때려눕힐 수 있으리라.

"그리고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히시오. 이런 무례한 방식을 선택한 합당한 해명도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오!"

덧붙인 필립이 이안 쪽을 바라보았다. 표정과 눈빛을 보아하니, 이안이 허락만 하면 당장 죄다 때려눕혀 버릴 기세였다.

슬쩍 고개를 저은 이안이, 뒤이어 옆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식당의 엘리야를 지키라는 의미였다.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순순히 뒤로 물러나는 사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성자 대행."

시원한 목소리가 번졌다. 탁상 앞에 앉아 있던 검은 망토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말투와 목소리만으로도 꽤 시건방진 젊은 귀족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콧수염 중년인과 황금 갑옷 기사가 좌우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동시에 남자가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벗었다. 그 아래로 드러난 잘 다듬어진 금발을 본 순간,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역시, 이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건 교단 아니면 황실이지.'

또 다른 황자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세라스와는 달리 신분을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긴. 그러니 병사들을 이렇게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 거겠지만.

"이들은 그저, 저를 경호할 의무가 있을 뿐입니다. 성자 대행이나 일행분들을 위협할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태연하게 내뱉으며, 황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진 건, 황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 때문이 아니었다.

'이 새끼… 혹시?'

그의 다소 날카롭고 건방져 보이는 얼굴이, 어딘지 묘하게 낯이 익어서였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황자가, 이윽고 짧은 탄성을 흘렸다.

"이런. 제 소개가 늦었군요."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우측 뒤편에 있던 콧수염 중년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마도 그가 황자의 개인 시종인 모양이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이안을 올려다보며 허리를 꼿꼿이 편 그가 말을 이었다.

"루 솔라의 신도이자, 황궁의 고귀한 네 번째 별. 펠릭스 아스트레이아 전하이십니다."

가슴 앞에 한 손을 얹은 펠릭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슬쩍 고개를 숙였다. 벌어진 망토 사이로, 황금 실로 자수를 화려하게 수놓은 보라색 정복이 드러났다.

그를 내려다보는 이안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번졌다.

'역시, 맞았네. 그 새끼.'

게임에서 그를 찾아왔던 황자였기 때문이다. 별 볼 일 없는 보상을 선심 쓰듯 던져 주며 그를 별궁으로 보냈던, 바로 그놈.

그때와 달리 지금은 신분을 감추지 않은 데다, 대놓고 아랫사람 부리듯 오만하게 굴지는 않고 있긴 했지만.

특유의 시건방진 표정과 말투는 여전했다.

물론 지금은 그저, 이안의 미소를 더 진해지게 할 뿐이었다.

그의 표정을 오해한 듯, 펠릭스의 입가에 맺힌 미소도 짙어졌다.

"내일이면 바로 떠나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너그러이 양해해 주십시오."

이안은 대답 대신 백금 방벽을 거둬들이고, 왼손에 쥐고 있던 검집에 검날을 되돌렸다.

"감사합니다, 성자 대행."

고개를 까딱인 펠릭스가 더 활짝 미소 지었다.

"황금처럼 빛나는 신성한 방패를 사용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비유적인 표현인 줄 알았습니다만. 덕분에 아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군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안은 주절주절 이어지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뒤편의 복도에서 연달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소리가 이어지자,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래서."

펠릭스가 공치사를 멈췄다. 이안이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덧붙였다.

"날 왜 찾아오셨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펠릭스가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일 황자 전하의 뜻을 대신해, 성자 대행을 황궁으로 모시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

세라스는 머리의 물기조차 제대로 닦아내지 못한 채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그건 뒤따르는 아스메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갑옷조차 벗지 않았던 페이든만이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사과할 필요 없어요, 경."

페이든의 말을 자르며, 세라스는 걸음만 재촉했다.

그를 책망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우려하던 상황이 현실이 된 것뿐이니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너무 늦지는 않았을지가 걱정될 뿐이었다.

"나는 이미 황녀와 동행하고 있소만."

복도를 타고 번지는 이안의 목소리에, 세라스의 굳은 얼굴에 비로소 옅은 안도가 번졌다.

물론, 잠깐의 안도에 불과했다. 그저 최악만 면했을 뿐이었으니까.

지금까지 지켜본바, 이안은 빈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조건만 충족된다면 얼마든지 다른 이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그와의 계약을 독점하려면 그만한 추가적인 조건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리라.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어진 목소리에, 세라스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그녀의 이복형제인 펠릭스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일 황자 파벌의 삼인자쯤 되는, 오만하고 덜떨어진 녀석.

하지만 동시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이기도 했다.

일 황자는 장자로 타고났다는 것 외엔 장점이 없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자였지만, 어쨌건 덕분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제시할 수 있는 보상 역시 막대하리라.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세라스는 걸음을 늦췄다. 아스메가 페이든이 영문도 모른 채 속도를 줄이는 가운데.

"아마도 황녀는 폐하의 칙령을 받들어 성자 대행을 찾아왔다고 전했을 겁니다."

펠릭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입니다. 성자 대행께서는 속고 계신 겁니다. 폐하께서는 그런 칙령을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황녀가 제안한 것이죠."

"그래서?"

"일 황자께서는 성자 대행께선 그런 농간에 놀아나서는 안 되는 분이시라고 하셨습니다. 황실이 아직도 성자 대행의 노고에 아직 제대로 된 감사조차 표하지 않은 것 역시, 큰 잘못이라 덧붙이셨고요."

세라스의 한쪽 입꼬리가 싸늘하게 말려 올라갔다.

어느새 계단으로 이어진 난간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그녀가 몸에 걸친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사이, 펠릭스가 덧붙였다.

"물론, 말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금 더 일찍 찾아뵙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와 감사의 인사가 모두 담긴. 합당하며 명예로운 보상을-"

"약속드렸지. 물론."

자연스럽게 말을 자르며, 세라스가 난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 한복판에 선 이안과 전실을 둘러싼 무장한 병사들. 그리고 이안을 올려다보고 있던 펠릭스 일당의 모습이 한눈에 펼쳐졌다.

"나는 정당한 계약을 통해 성자 대행을 모시고 있는 거거든."

눈동자만 굴려 세라스를 올려다본 펠릭스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정당한, 계약이라고?"

#298화

"물론이지."

대답한 세라스가, 이안을 돌아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안 경."

이안은 가볍게 어깨만 으쓱였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세라스는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본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결론을 내린 걸까? 지금까지 본 이안이라면 그렇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으로 있으니 전혀 다른 사람 같구나. 세라스."

펠릭스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세라스의 시선을 받은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안 어울린다는 뜻은 아니야. 오히려 아주 잘 어울리는군. 그 모습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유치하긴. 내심 생각하면서도, 세라스는 고개를 까딱였다.

"칭찬 고마워. 난 안 어울리는 색이 없는 편이지. 너와 달리."

펠릭스의 눈을 내려다 본 그녀가 덧붙였다.

"붉은 눈과 금발은, 너한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거든."

펠릭스의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세라스는 그저 고개만 슬쩍 옆으로 기울였다.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는 물음은 무의미했다. 그저, 돌아가면 새로운 가명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갈 뿐이었다.

"간만의 안부 인사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네. 잠시 빠져있도록 해. 지금 네게는 볼 일 없으니까."

이윽고 느릿느릿 내뱉은 펠릭스가 다시 이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추태를 보였군요. 안으로 들어가서 마저 대화 나누시겠습니까, 성자 대행? 방해 없이 말입니다."

"글쎄…."

이안은 곧바로 그러리라 대답하지 않았다. 세라스는 그가 이 순간에도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물론 지금이 흥정에 더 유리하기 때문일 뿐일 수도 있지만, 약속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어쨌건, 지금까지 이안은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은 없었으니까.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은데."

그러니 대신 거절의 말을 내뱉어 주는 것 정도는, 전혀 어렵지 않은 배려였다.

미간을 슬쩍 좁힌 펠릭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벽면을 따라 선 병사들이, 일제히 쇠뇌를 양손으로 쥐며 가슴 앞까지 들어 올렸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겨눌 수 있는 자세였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씹어 뱉으며 앞으로 나서던 페이든이 멈칫했다. 세라스가 손을 들어 저지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이안을 슬쩍 일별한 세라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성자 대행과 계약을 맺었고, 추가적인 약속도 했지. 누군가 또 성자 대행을 찾아오면, 그 자리에 반드시 내가 함께하겠다고 말이야."

보란 듯 미소 지은 세라스가, 펠릭스의 붉은 눈을 빤히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그러니 할 말이 있다면 그냥 여기서 하도록 해. 난 너와 마주 앉는 것보다, 이렇게 내려다보는 게 더 편하거든."

"…황녀의 말이 사실입니까, 성자 대행?"

이안에게로 시선을 돌린 펠릭스가 물었다. 세라스는 내심 긴장하며 시선을 돌릴 찰나.

"사실이오."

이안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세라스가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안으로 들어가도 상관없소만. 두 분만 따라 들어오셔야 할 것이오. 좁은 곳에서 답답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딱 질색이니까. 그게 싫다면 이대로 이야기합시다. 이왕이면…."

이안이 슬쩍 고개를 까딱였다.

"단도직입적이고, 간결하게."

"…좋습니다. 그러죠."

짧게 혀를 차며 말한 것도 잠시.

"황녀와 정당한 계약을 맺으셨다니,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이내 다시 입술 끝을 말아 올린 펠릭스가, 슬쩍 세라스를 일별하고는 말을 이었다.

"저와 함께 가신다면, 황녀가 약속한 것보다 더 큰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말입니다."

"...."

세라스는 미소가 굳어지는 것을 간신히 숨겼다. 금력으로 승부를 걸어온다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군."

펠릭스의 눈매가 휘어졌다. 세라스를 놀리듯 돌아본 그가 말을 이었다.

"현명한 결정을 내리신 겁니다. 성자 대행."

"하지만, 황녀 전하와도 계속 함께 갈 것이오."

"...?"

펠릭스의 미소가 그대로 굳어졌다. 다시 이안을 돌아본 그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 분 전하와 함께 입궁하겠다는 뜻이오."

펠릭스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설마, 양쪽의 손을 다 잡으시겠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맞소."

"뭐라고요…?"

"나는 황실의 후계 다툼에 끼고 싶지 않소. 그래서 내린 결론이오."

"...."

펠릭스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세라스가 보기엔 아주 멍청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황녀도, 동의한 사안입니까?"

"그렇소."

펠릭스가 세라스를 돌아보았다. 세라스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의 눈을 빤히 마주 보던 펠릭스의 미간이 더 구겨졌다.

"…황녀가 약속한 보상까지, 저희가 전부 대신 드리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어진 말은 세라스의 숨을 다시 멈추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보란 듯 억지 미소를 지은 펠릭스가 이안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거기에 추가적인 보상까지 더해 드리겠습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말입니다."

세라스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방식은 아주 투박했지만, 어쨌든 파격적인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제안을 받아들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럴 순 없소."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대답에, 세라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그녀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계약은 계약이오. 전하의 선택지는 둘 뿐이오. 이대로 모두 함께 돌아가거나, 혼자 돌아가시거나."

"...."

펠릭스가 입을 앙다물었다. 더는 표정을 감추지도 못한 채였다.

하긴. 황족들은 대부분 거절에 익숙하지 않았다. 슬쩍 병사들을 일별한 펠릭스가, 이윽고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둘 다 택할 생각이 없다고 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세 번째 선택지를 만들어야지."

덤덤하게 내뱉은 이안이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전하."

그와 눈이 마주친 세라스가 냉큼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경."

"황자의 신변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겠소?"

"...!"

펠릭스의 눈이 순간 커졌다. 마찬가지로 눈을 동그랗게 떴던 세라스의 입가에, 곧이어 옅은 미소가 번졌다.

"…글쎄요. 애석하게도, 그렇게까지 가치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일 황자 본인이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이 자리에 나온 것이겠지만요."

부드럽게 대답한 세라스가, 이윽고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한 펠릭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일을 맡길 정도는 되지만, 만에 하나 잃더라도 치명적이지는 않은 정도일 겁니다."

"솔직하시군."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말했다. 세라스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뼈 아프게 배운 교훈을 벌써 잊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답니다. 어쨌든, 굳이 금화로 가치를 매기자면-"

"하…!"

펠릭스가 짧은 웃음을 터뜨린 건 그때였다. 노골적으로 신경질적인 웃음이었다.

"지금 황족을 겁박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가 씹어 뱉듯 말을 이었다.

"아무리 교단의 성자 대행이시라 할지라도, 제국법에서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황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는, 반역과 다름없습니다."

"그게 다른 황족을 지키기 위해서인 경우엔, 상황이 좀 다르지. 펠릭스 황자."

곧바로 대답한 세라스가, 펠릭스 주위의 병사들을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내 눈엔, 네가 나를 해치러 온 것처럼 보이거든."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었을 터였다. 그저 경고만을 위해 대동했다기엔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으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그건 이안을 확보한 이후에나 고민해 봤을 선택지일 터였다.

여기서 잘못 소란을 일으켰다간, 황궁까지 그 소문이 전해질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모함을…."

"정말 그렇다면, 순순히 물러나는 게 좋을 거야. 펠릭스."

세라스가 타이르듯 말했다. 펠릭스가 눈썹을 꿈틀대며 그녀를 빤히 노려보았다.

이마에 핏줄이 돋아난 걸 보니,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세라스를 더 즐겁게 했다.

어차피 펠릭스는 물러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싸움이 일어난다면 방금 그녀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꼴이 될 테니까.

물론, 이안의 협박이 부담스러운 것도 있을 터였다. 그 유명한 북부의 용살자가 아니던가.

아마 이안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내뱉은 말일 터였다.

"가라드에는 언제 도착하셨소?"

이안이 툭 내뱉은 건 그때였다.

맥락 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펠릭스가 입을 열었다.

"이틀 전에 도착했습니다만."

"그럼 암살자들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 부랴부랴 새로운 계획을 세우신 거겠군."

펠릭스는 물론 세라스도 멈칫했다.

이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 황자께서 직접 암살자를 고용하셨소? 아니면, 그분의 눈에 들기 위한 다른 누군가의 짓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암살자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간을 찌푸린 펠릭스가 물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경로를 알고 있다는 건 둘째 쳐도, 이렇게 딱 맞춰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이상해서 말이오. 너무 공교롭잖소?"

세라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릴뻔했다. 이 와중에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그녀는 그제야, 아까 이안이 자신에게 한 제안이 진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펠릭스를 물러나게 하려 한 말이 아니라, 정말 사로잡아 넘겨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누명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군요."

내뱉는 펠릭스의 얼굴이, 언제 구겨졌었냐는 듯 무표정해졌다.

달라진 건 표정만이 아니었다. 그의 눈빛 역시 기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신경을 긁는 듯한 불쾌감이 세라스의 뇌리를 스치는 가운데, 펠릭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귀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성자 대행. 날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으신 거군요.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요."

"...."

이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계단 아래를 응시하며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설마?!"

뒤늦게 화들짝 눈을 깜빡인 세라스가 시선을 돌렸다. 멈춰 선 건 이안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녀의 곁에 선 아스메와 페이든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선 채로 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재빨리 아스메에게 팔을 뻗은 세라스가 그녀의 목덜미에 손가락을 얹었다. 심장은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 이상 숨조차 쉬지 않았다. 의식이 남아있는지조차 알 방법이 없었다.

세라스의 시선이 난간 아래로 돌아갔다.

"…이게 네 능력이구나, 펠릭스."

"혈족끼리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지."

펠릭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세라스를 응시하는 눈빛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가능했다면, 다들 내 앞에 서는 걸 두려워했을 텐데."

세라스는 자신이 느낀 불쾌감의 정체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의 시선이 장내를 훑었다. 병사들 역시 미동도 없었다. 펠릭스의 시선에 닿은 모두가 굳어버린 것이다. 그녀만 빼고.

입술을 파르르 떤 세라스가 말했다.

"무슨 짓을 벌이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거야? 제도 바로 앞에서, 심지어 성자 대행께 이런 짓을 벌이다니?"

"그렇다고 네 손에 붙잡힐 수는 없잖아."

태연하게 대답한 펠릭스가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뒷수습은 형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거야. 그보다 네 걱정부터 하는 게 어때? 아. 걱정은 마. 죽이지 않을 거니까. 아직은."

"아니, 이게 무슨…?!"

복도에서 탄식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식당에서 대기하던 필립이, 이상함을 느끼고 복도로 나온 것이다.

"나, 나리? 나리! 괜찮으십니까, 나리!"

그가 소리쳤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로소 눈을 부릅뜬 그가, 앞에 선 채로 굳어진 병사들을 밀치며 달려 나왔다.

세라스가 홱 고개를 돌린 건 거의 동시였다.

"나오지 말아요!"

"그게 무슨-"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달려 나오던 필립의 움직임이 삽시에 둔해지더니, 그대로 굳어진 것이다.

그는 전실로 나옴과 동시에, 달리던 자세 그대로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다들 고통스럽지는 않을 거야. 그저, 잠드는 것처럼 의식이 흐려진다더군. 몇 분만 지나도 말야."

태연하게 내뱉으며, 펠릭스가 손을 까딱였다.

뒤이어 그의 좌측 뒤에 서있던 황금 갑옷의 기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세라스의 눈매가 순간 꿈틀댔다. 그는 펠릭스의 시선에 들어왔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저 화려한 갑옷이 기사를 지켜주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설마, 충직한 신하들을 남겨두고 도망치는 추태를 부리지는 않겠지. 세라스. 만약 그런다면 가문의 수치일 거다. 살아남을 자격도 없어."

내뱉으며, 펠릭스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어느새 그의 한쪽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계단으로 다가오는 기사를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던 세라스가, 이윽고 코피를 닦고 있는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이래서 널 보낸 거구나, 펠릭스. 일이 잘 안 풀리면, 전부 제거할 생각이었던 거야."

"정말 최악의 상황에만 선택하는 방식이지."

붉게 물들어가는 손수건을 코에 댄 채, 펠릭스가 미소 지었다.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어. 이렇게 오래 힘을 쓰면, 며칠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거든."

"…마법사들이 신기한 걸 보면 왜 머리를 열어 보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코피를 닦던 펠릭스의 손길이 멈췄다. 계단을 반쯤 오른 기사 역시 멈칫할 찰나.

지잉-

그의 몇 칸 위에 서 있던 이안의 왼팔에서. 황금빛 육각형이 피어올랐다.

#299화

"거의 뭐, 인간 코카트리스잖아."

내뱉음과 동시에, 이안이 힘껏 허리를 비틀었다.

그의 왼손을 따라 뻗어 나간 샛노란 궤적이, 뒤늦게 검을 뽑아들던 기사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콰직-!

얇은 방패 날이 늑대 머리를 닮은 안면 가리개의 사이로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뭔가 으깨지는 느낌이 손등을 타고 번졌지만, 이안은 검집을 쥔 왼손 손아귀에 더 힘을 주며 끝까지 팔을 내뻗었다.

우지직- 콰장창-!

계단 옆 목조 난간을 부수며 날아간 기사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쓰러진 필립의 바로 발아래였다. 얕게 경련하던 팔다리가 이내 축 늘어졌다.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눈을 치켜뜬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펠릭스가, 뒤늦게 멍하니 읊조렸다. 다리를 구부린 이안이 그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잘."

동시에 그가 계단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옷만 걸치고 있어서인지 몸이 아주 가벼웠다. 펠릭스의 경악한 얼굴이 삽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집중력이 발휘된 덕분에, 이안은 이 와중에도 엄청난 속도로 번쩍이는 펠릭스의 눈동자를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눈깔로 파장을 뿌리는 건가…?'

이안은 펠릭스가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었다.

곧바로 대응하지 않은 건, 그에게는 그다지 대단한 영향을 끼치지 못해서였다. 한순간 몸의 감각이 조금 둔해졌고, 그마저도 곧 완전히 멀쩡해졌다.

놈이 뿌리는 파장은 그의 몸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대부분 고스란히 튕겨 나갔다.

이안에게 제대로 된 상태 이상을 유발하려면, 이제 적어도 공허의 마수 정도는 되어야 할 터였다.

그리고 그 뒤론 그저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승리를 확신한 펠릭스가 뭔가 쓸만한 정보를 토해낼지도 몰랐으니까.

'뭐, 별로 대단한 건 없었지만.'

어쨌건, 말로만 듣던 황족의 능력 중 하나를 처음으로 직접 경험한 셈이었다.

펠릭스가 만들어낸 파장은 주문보다는 정신파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신경을 마비시키는 정신파라니. 그 이외의 활용법이 더 있을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초능력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마법과 초능력을 굳이 구분 짓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이안의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간 건 그때였다.

중년 시종이 펠릭스의 어깨를 옆으로 밀치며 앞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하- 피하십-"

늘어진 테이프처럼 소리치는 그의 모습을, 이안은 단숨에 눈에 담았다.

손아귀 한복판, 아스메의 그것과는 또 다르게 생긴 각진 보옥.

목덜미와 옷깃 사이로는, 피부에 감춰져 있던 주문 회로가 마력을 머금으며 드러나고 있었다.

'이건 아스메랑 똑같네.'

생각과 동시에 이안이 몸을 비틀었다. 펠릭스에게로 쇄도하던 그의 궤적이 탄력적으로 꺾였다.

회전력을 고스란히 실은 채 뻗어 나간 오른손 손바닥이, 그대로 시종의 안면에 틀어박혔다.

콰지직-!

안면을 움켜쥔 순간, 이안은 그대로 놈을 바닥에 내리찍으며 자세를 낮췄다. 마룻바닥을 부수며 박힌 시종의 뒤통수가, 그의 손아귀 아래 갈리듯 끌려왔다.

쿠드드드득-

네발짐승처럼 착지한 이안이 완전히 멈췄다. 그의 오른손 앞으로는 부서진 바닥과 붉은 선이 흥건하게 이어졌다.

안면을 움켜쥔 손등에 힘줄이 돋아난 건 거의 동시였다. 으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바들대던 시종의 몸이 축 늘어졌다. 피부 위로 일렁이던 주문 회로가 삽시에 빛을 잃었다.

이안이 비로소 손을 놓을 찰나.

"...!"

일어서려던 그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강렬한 파장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일순간 몸이 살짝 밀려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정신파.

"당장…! 당장 거기 멈춰라…!"

펠릭스가 쥐어짜듯 일갈한 건 거의 동시였다. 치켜뜬 놈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가득 돋고,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읏…?"

인상을 찌푸린 세라스가 머리를 움켜쥔 채 비틀대는 가운데, 미간을 살짝 좁힌 채 펠릭스를 바라보던 이안이 마저 몸을 일으켰다.

장내에 어지럽게 반사되며 밀려드는 파장의 폭풍은, 그저 그의 움직임을 조금 둔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안이 다시 걸음을 내딛자, 펠릭스가 조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읊조렸다.

"대체 어떻게… 견디는 거지? 대체 어떻…. …설마!"

그가 일순간 숨을 멈췄다. 툭툭, 눈의 실핏줄이 터져 나가면서 본래도 붉던 눈이 더 붉게 물들고 있었다.

"설마, 네놈, 황실의 피가 섞여 있는 것이냐? 네가 이룩했다던 그 모든 위업들이, 타고난 혈통 덕분-"

"그런 개소리나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황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덤덤하게 내뱉은 이안이 백금 방벽을 거둬들였다.

"...!"

그제야 펠릭스의 새빨간 눈동자에 놀람 대신 공포가 밀려들었다. 이안과의 거리가 손만 닿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 졌다는 걸 뒤늦게 자각한 것이리라.

그런데도 주춤대며 물러날 뿐인 그를 잠시 바라본 이안이, 슬며시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걱정 마라. 죽이진 않을 테니까. 그건 너무 자비롭잖아."

"자, 잠깐-"

손을 뻗으려던 펠릭스의 안면으로, 이안의 주먹이 그대로 틀어박혔다.

꽈직-!

그다지 힘을 주지도 않았건만. 펠릭스의 고개가 뒤로 홱 튕겨 나갔다. 감각이 조금 둔해져서, 힘 조절이 잘 되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펠릭스가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갈 찰나.

터억-

뻗었던 손을 그대로 내린 이안이 놈의 멱살을 쥐어 끌어당겼다.

혹여라도 바닥이나 벽면에 뒤통수를 찧어 죽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건 너무 호상이었다.

펠릭스가 덜렁대며 힘없이 끌려 올 찰나, 장내를 채우던 정신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와르르르-

거의 동시에, 선 채로 굳어 있던 모든 이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숨조차 쉬지 못한 시간이 생각보다 길기도 했지만, 그보단 막판에 밀려든 파장의 폭풍이 의식을 날려버린 것이리라.

이안은 자신의 손아귀 아래,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진 펠릭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후두두둑….

놈의 벌어진 입에서는 부러진 이와 피가 주르륵 쏟아지고, 눈꺼풀 사이와 코에서도 핏물이 줄줄 흘렀다.

…재수 없으면 질식하거나 과다 출혈로 먼저 골로 가겠는데.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이안은 놈의 몸을 앞뒤로 탈탈 흔들었다.

이놈의 뇌를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물론 진작 사라졌다.

연다고 능력을 얻어낼 방법도 없겠지만, 약점이 너무 명확해 보였기 때문이다.

몸에 직접적인 무리가 가는 능력이라는 건 둘째치고, 사용하는 동안엔 빠르게 움직일 수도 없는 것 같았으니까.

"아스메…! 경…!"

세라스의 헐떡대는 숨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안은 비로소 위를 바라보았다. 주저 앉았던 세라스가, 어느새 허둥지둥 아스메와 페이든을 살피고 있었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죽었소?"

"아, 아니에요…! 살아 있습니다. 숨은 쉬어요. 정신만. 정신만 잃은 것 같아요. 다행히도…."

횡설수설 대답한 세라스가, 비로소 다시 바닥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만 가득 담긴 안도의 한숨이었다.

"저도… 무사합니다…."

절그럭대는 소리와 더듬대는 목소리가 이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리…."

어눌한 발음으로 내뱉으며, 필립이 간신히 일어서고 있었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듯 만취한 사람처럼 휘청댄 그가, 뒤쪽의 벽면에 간신히 등을 기댔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딱 봐도 멀쩡해 보이네."

"숨도 안 쉬어지고… 막판엔 눈앞이 다 아찔해… 졌었지만요…."

필립이 다소 해탈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피식한 이안이 피를 거의 다 토한 펠릭스를 툭 놔버렸다. 그는 허물어진 놈의 몸을 발로 툭툭 차서 돌아 눕히며 덧붙였다.

"엘리는?"

"무사합니다…. 식당에 있습니다. 그대로요."

벽에 기댄 필립이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이어져 있거든요…. 정신은 멀쩡해서, 대충 상황을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상황만?"

이안의 물음에, 필립이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절대 나오지 말라고 계속 강조도 했고… 그, 사실…. 혹시 몰라서 유언도 남기긴 했습니다."

그냥 징징거린 줄만 알았더니.

짧게 웃음 지은 이안이 말을 이었다.

"어딘가에 시종들이 갇혀 있을 거다. 데리고 나오라고 해. 줄이나 끈으로 쓸 만한 것들도 전부 가져오고."

그의 시선이 장내에 널브러진 병사들을 훑었다.

"일단, 이것들 전부 묶어야 할 것 같으니까."

***

양팔이 결박된 채 벽면을 따라 널브러져 있던 병사들은, 삼십 분쯤 지나자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우리까지 죽이려고 하다니… 빌어먹을…."

"전하, 살려… 살려만 주십시오…! 기회를 주신다면… 충성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거나 바닥에 엎어진 채로 읍소했다. 그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몇몇은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뒀으니까.

"저희도… 배신당했습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다들 입 닥치거라."

계단을 내려오며 내뱉은 건 페이든이었다.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으로 병사들을 돌아본 그가, 서늘하게 씹어 뱉었다.

"네놈들의 처분은 전하께서 결정하실 것이니, 조용히 기다리고 겸허히 받아들여라. 이 순간부터 헛소리를 내뱉는 놈이 있다면, 그놈의 목부터 날릴 것이다. 내가 직접."

"...."

"...."

…이제야 좀 조용하네.

식당에서 고기를 우물대던 이안이 비로소 낮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펠릭스와 사병들을 결박하느라, 좀 전부터 겨우 식사를 시작한 참이었다.

대각선 옆, 맥주를 홀짝이는 엘리야를 돌아본 그가 그녀의 앞에 놓인 그릇들을 턱짓했다.

"안 먹냐? 많이 남았는데."

"입맛이 뚝 떨어져서요."

술잔을 내려놓은 엘리야가 짧은 팔로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바깥세상은 너무 위험해요.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어요."

내 주위가 유독 그런 거긴 한데.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엘리아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아마 앞으로는 더 심해지겠죠. 침식이 시작될 테니까요. 검은 벽이 존재하는 한, 안전한 곳이란 존재할 수 없을 거예요."

다시 손을 뻗어 술잔을 집어든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이안을 돌아보았다.

"설사 제도라고 할지라도요."

입을 우물대면서, 이안은 엘리야의 눈을 바라보았다.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에 사명감이 또렷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본래도 없진 않았겠지만. 이안과 함께하며 더 커진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평화로운 여정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엘리야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녀는 평생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백금룡의 둥지에서 보내지 않았던가.

난쟁이의 강인한 특성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이안이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도록 해. 제도에서."

이안이 다시 돼지고기를 썰기 시작하며 덧붙인 말에, 엘리야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밖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진 건 그때였다. 뒤이어 필립과 세라스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필립은 그대로였지만, 세라스는 아까보다 훨씬 더 단정해진 상태였다. 옷도 고급스러운 원단의 드레스로 갈아입었고, 얼굴에 옅게 분칠까지 했다.

"어디 가시오?"

이안이 고기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필립이 엘리야와 마주 보고 앉는 가운데, 식탁 앞에 멈춰 선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와 긴밀한 관계인 도시 귀족이 있어서요. 지금 바로 찾아가, 오라버니께 서신을 보낼 겁니다. 펠릭스를 어디에 가둬 줄지 결정해야 하거든요. 나머지들의 처우도."

"그놈은 잘 격리해 두셨고?"

"물론이죠. 그냥 둬도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할 것 같지만. 확실히 한번 더 결박해서 가둬 뒀습니다. 2층 제일 끝방에 넣어 뒀으니, 알아 두세요."

대답한 세라스가, 뒤이어 정중하게 무릎을 굽혔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경. 저희들의 목숨을 구해 주셨어요. 또다시."

고기를 씹으며, 이안은 덤덤한 눈으로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세라스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이었다.

"황자를 양도해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물론, 감사 인사 역시 말로만 끝나지는 않을 거고요."

정적의 수족 하나를 손에 넣었으니, 앞으로 아주 살뜰하게 써먹을 터였다. 그녀의 성격상, 펠릭스가 어떤 몰골이 되더라도 눈도 깜빡하지 않으리라.

다시 일어선 세라스가 미소 지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국-"

"금화는 됐소."

이안이 말을 잘랐다. 그는 맥주를 홀짝대는 엘리야와 맨 빵을 씹고 있는 필립을 번갈아 일별하고는 말을 이었다.

"대신 이 둘의 뒤를 잘 봐주시오. 적어도 이들이 제도에 머무는 동안에는. 확실한 조력자이자 뒷배가 되어 주시란 말이오."

"...!"

엘리야와 필립이 조금 놀란듯 바라보는 가운데, 세라스가 묘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런 거라면, 몇 년이라도 하겠습니다. 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챙길게요. 그런데…."

세라스가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정말, 어떻게 하신 거예요? 혹시, 아까 황자가 말했듯이, 황실의 혈통이 섞여 있으신 겁니까? 숨겨진 사생아시라거나…."

"사생아는 무슨…."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괴물들과 싸우다 보면, 육체도 정신도 남들보다 강해질 수밖에 없소. 그뿐이오. 불필요한 오해는 사양하겠소."

"…정말, 그저 초인이실 뿐이시라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세라스는, 오히려 그게 더 대단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빵을 우물대던 필립이 그녀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병사들은 어쩌실 겁니까? 페이든 경은 단호하시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달라서요."

"고민 중입니다. 배신당한 건 사실이지만, 또 완전히 믿고 휘두를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기회를 주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오라버니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실지는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렇군요…."

필립이 씁쓸하게 읊조리는 가운데, 세라스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내일, 출발 일정에는 지정이 없게 노력해 보겠습니다. 만약 뒷처리가 조금 늦어진다면, 몇 시간 정도 출발이 지연될지도 몰라요. 그것만은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알아서 하시오. 내가 귀찮아질 일만 없으면, 뭐."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세 분은 아무런 염려도 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남은 뒷정리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호언장담한 세라스가 곧이어 눈을 깜빡였다.

"아, 그리고 이안 경께서 처단한 기사와 시종의 물건은, 전부 분리해서 방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경의 전리품이니까요. 혹 돈으로 처분하고 싶으시다면,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한번 보고, 내일 말씀드리겠소."

이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에 집중했다. 그 무덤덤한 모습을 바라보던 세라스가, 새삼스럽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

"...?"

"경께선 정말, 일 황자가 암살자들의 배후라고 보시는 겁니까?"

#30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