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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30

#220화

흑검이 비명 같은 울음을 마력과 함께 토해내며 출렁였다.

쾅-! 콰광!

화염 해일 위로 불규칙적인 폭발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기둥이 몇 미터씩 치솟았다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허물어졌다.

이미 불바다가 되어 있던 부패의 정원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거목의 나뭇가지들에도 불길이 뒤덮였다.

그것들은 정원처럼 타들어 가지 않았다. 끓는 기름처럼 부글대며 겉표면부터 형태를 잃고 녹아내렸다.

"그- 오- 오- 오-"

파사사사-

불결한 거목이 사념이 뒤섞인 울음을 토해냈다. 동시에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떨리기 시작했다. 표면에서 번져 나온 새카만 점액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치명적인 질병을 머금은 독액이, 지금은 불을 진화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혼돈력을 연료로 타들어 가는 불의 물결은 매캐한 연기만 토해낼 뿐 사그라지지 않았다. 용암이 분출되듯 연달아 치솟아 오르는 폭발도 마찬가지였다.

솨아아아-

바람 칼날과 휘몰아치는 방벽을 연달아 시전하던 이안이 문득 한쪽 미간을 찌푸린 건 그때였다.

'왜 또 지랄인데.'

혼돈의 파편에서 시작된 울림이 어느새 전신으로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식을 집중한 순간, 눈앞으로 선택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융합. 설명을 보니 앞선 퀘스트인 잠식의 연계 퀘스트가 분명했다. 보상은 일정 시간 동안의 능력치 상승. 그리고 경험치가 전부였다.

불길한 이름이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해 봐, 어디.'

이안은 퀘스트를 수락했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혼돈의 파편이 혼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몸속이 혼돈력으로 가득 차는 느낌.

착각이 아니었다. 삽시에 전신의 핏줄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그걸 넘어 피부까지 변색되고 있었으니까.

뿌득, 뿌드득-

몸 곳곳에서 뼈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혼돈력이 그의 육체를 재구성하고 있었다. 어쩌면 변이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상태창을 열었다. 지능과 정신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하고 있었다.

까드득-

흑검의 자루를 으스러질 듯 움켜쥔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반전된 시야가 현실과 겹쳐지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과 치솟는 연기 너머, 자줏빛과 암녹색으로 일렁이는 불결한 거목의 마력이 선명해졌다.

대기에 자욱한 혼돈력의 잔재와 땅속으로 이어진 뿌리의 형체까지도 또렷하게 육안에 겹쳐졌다.

사념도 뇌리를 파고들었다. 단편적인 감정의 편린이었다. 혼란과 분노. 불결한 거목이 뿜어내는 파장이었다.

하나같이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 인지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정보들.

'…분명히 일정 시간이랬지.'

본모습으로 못 돌아가기만 해 봐라. 내심 씹어 뱉은 이안이 비로소 땅을 박찼다.

몸 주위에 일렁이던 바람 칼날이 그의 몸을 포탄처럼 떠밀었다. 이안은 균형을 잃지 않고, 그 속도에 발맞춰 다리를 박찼다. 한 걸음마다 몇 미터씩 나아가는 느낌.

콰르르르-

그가 땅을 박찰 때마다 발자국 아래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화염 걸음. 본래는 지속적인 마력 소모량이 적지 않아서,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활성화하지 않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마력을 대체하는 막대한 양의 혼돈력이 전신에 꿈틀대고 있었으니까. 투쟁의 축복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아주 차갑고 끈적한.

비슷한 건 무한하게 느껴진다는 부분뿐이었다.

솨아아아-

흑검의 십자 막이에서 보라색 아지랑이가 번졌다. 역천의 송곳니. 혼돈력을 머금고 타오르는 잔상이, 혜성의 꼬리 같은 궤적을 그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이글대며 휘몰아치는 불의 물결이 삽시에 가까워졌다.

"...!"

콰앙, 바로 근처에서 불기둥이 치솟은 건 그때였다. 이안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아무런 예고도 없는 폭발이었다.

푸화악-!

이안이 반응하는 것보다, 그의 주위로 거대한 돌개바람이 휘몰아치는 게 더 빨랐다.

휘몰아치는 방벽은 폭발로 치솟은 불길은 물론 이안까지 함께 휩쓸어 날려 버렸다.

이안은 그 찰나의 순간에도 모든 상황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허공에서 힘으로 자세를 다잡은 그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나뭇가지들을 눈에 담았다.

흑검이 살아있는 것처럼 뻗어 나갔다.

콰지지지직-

아지랑이가 만들어 낸 궤적이 어지럽게 휘몰아쳤다. 앞을 가로막는 것들이 모조리 잘려나갔다. 가지들은 잘린 순간 형태를 잃고 끈적하게 쏟아져 내렸다.

솟구치던 속도는 거의 천장 근처에 다다르고서야 줄어들었다.

이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자욱하게 치솟는 연기 사이로 불결한 거목이 선명해졌다. 놈의 무수한 시선도 이안에게로 집중됐다.

"...!"

이안의 뇌리로 공허의 환영이 밀려든 건 거의 동시였다.

조각난 행성의 파편. 온갖 기괴한 형태의 식물들과 벌레들로 뒤덮인 밀림이었다. 서로를 잡아먹으며 끝없이 다시 태어나는 무간지옥.

공포나 혼란, 착란 상태를 불러일으킬 정신파였지만.

'누가 공허 출신 아니랄까 봐….'

지금의 이안에게는 그저 기분 나쁜 환영에 불과했다.

환영은 고개를 터는 것만으로도 흩어졌다. 준비 중이던 주문이 깨진 게 여파의 전부였다.

동시에 주위로 펼쳐진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구부러지며 뾰족하게 돋아났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푸확-!

뒤로 내뻗은 이안의 손아귀에서 돌풍이 토해져 나왔다.

쒸에에엑!

거의 동시에 끝이 뾰족하게 솟은 나뭇가지들이 사방에서 휘몰아쳤다. 하지만 허공만 갈랐을 뿐이었다.

화르르르-

이안은 이미 수십 개의 춤추는 불꽃을 만들어내며 거목의 줄기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아직도 불사인지부터 보자고.'

수십 개의 불덩이가 일제히 줄기를 향해 쏘아졌다. 줄기가 굵어서 공들여 조준할 필요도 없었다.

이안이 양손으로 고쳐 쥔 흑검을 머리 위로 치켜드는 가운데.

콰과과과광-

거목의 줄기가 어지럽게 폭발에 휘말렸다. 그 한복판으로 밀려들며, 이안이 힘껏 흑검을 내리쳤다.

콰드드드득-

보랏빛 아지랑이를 두른, 붉게 달아오른 칼날이 거목의 표면을 가르며 박혀 들었다. 나무가 아니라 단단한 진흙을 가르는 듯한 감촉.

보라색으로 뒤덮인 이안의 눈 한복판이 붉게 끓어올랐다.

꽈아아앙-!

검날 끝에서 터져 나온 일점 폭발이, 거목의 내부를 불사르며 솟구쳤다. 그대로 튕겨 나간 이안이 치솟아 오르는 불기둥을 눈에 담으며 땅에 처박혔다.

불티가 사방으로 튀고, 몇 차례 바닥을 구른 그가 자세를 다잡았다.

어딘가 부러지는 느낌은 물론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뜯어져 나간 팔목 보호대 아래로 보랏빛 섬유질로 뒤덮인 듯한 피부가 드러났다.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 오- 오-"

그저 폭발에 휩쓸려 괴상하게 울부짖는 불결한 거목을 곧바로 다시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이제야 놈에게서 고통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이안의 눈에는 놈의 내부를 타고 솟구치는 자줏빛 혼돈력의 흐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흐름은 물론이고 빛도 전혀 줄어들지 않은 채였다.

'…아직 순환이 완전히 이어진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사실상 불사인 건가.'

혀를 차는 와중에도, 이안의 눈이 또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곧 거목을 향해 왼손을 내뻗은 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콰르르르르-

치솟던 폭발이 다시 뜨겁게 타오르면서 거꾸로 쏟아져 내렸다. 용암을 뒤집어쓴 듯한 몰골이 된 거목이 꿈틀댔다. 불길에 뒤덮인 눈알들이 퍽퍽 터지며 누런 고름을 토해냈다.

이안을 노려보던 남은 눈동자들에 자줏빛이 응집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눈을 치켜뜬 이안이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슈-화아아-

남은 눈알들에서 자줏빛 선이 일제히 뿜어져 나와 사방을 훑었다.

폭발은 한 박자 늦게 일어났다.

콰과과과광-

충격파에 휩쓸려 날아가면서, 이안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마력 광선이라니, 시발.'

제대로 맞았다면 아무리 혼돈력으로 강화된 상태라도 만신창이가 되었으리라.

이안의 뇌리로 게임에서 펼쳐졌을 광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처럼 쏟아지는 독액과 칼날처럼 떨어지는 나뭇가지들. 사방에서 날아드는 사제들. 상태 이상을 유발하는 정신파와 사방팔방으로 일제히 뿜어내는 마력 광선.

거기다 무한에 가까운 체력까지.

'…확실히, 이놈도 정면 대결만으론 못 죽이는 거였어.'

이안은 곧바로 결론을 내렸다.

그가 게임에서 물질계에 현신한 공허의 존재를 맞닥뜨린 건 검은 벽을 넘어간 이후였다.

그리고 그놈 역시 저 거목처럼 무적에 가까웠다. 약점이 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는 몇 번이나 죽고서야 그 사실을 알아냈었지만, 그런데도 약점을 공격하는 게 너무 어려워서 끝내 공략을 포기했었다.

그가 이 캐릭터로는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하다 결론 내리기 불과 몇 시간 전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훨씬 이른 시점인 지금은 다를 수도 있겠다 여겼건만.

'본질적인 부분은 다 똑같은 거네. 하지만 어쨌든… 적어도 그때보다는….'

더 찾기 쉬운 약점이 있겠지.

생각하며, 이안은 난장판이 된 장내를 돌아보았다. 휘몰아치는 불길과 폭발이 아니라, 땅 아래 일렁이는 자주색 뿌리들을 눈에 담은 채였다.

정원에 발을 들이기 전에 보았던 혼돈력이 응축된 마디들이 뇌리를 스쳤으니까.

역시나, 자줏빛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선명한 부분이 있었다. 바닥을 구른 이안이 튕겨 오르듯 일어나 몸을 날렸다.

콰과과과-

그의 등 뒤로, 뾰족한 나뭇가지들이 포격하듯 쏟아졌다. 이안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춤추는 불꽃을 피워 올렸다.

퍼버버버벙-

빠른 속도로 재생 중이던 줄기가 연달아 날아든 불덩이에 뒤덮였다. 그사이 미끄러지듯 멈춰선 이안이, 땅 아래로 일렁이는 자줏빛 덩어리를 눈에 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두 개…?'

심지어 하나가 아니었다. 순환의 단절. 그리고 혼돈의 침식. 두 퀘스트의 내용을 연달아 눈에 담은 이안의 눈빛이 묘해졌다.

하나는 뿌리의 마디를 끊어내라는. 그리고 또 하나는 혼돈력으로 마디를 물들이라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일반 퀘스트와 타락자 퀘스트가 동시에 들어온 것이리라.

'이거 설마, 일종의 튜토리얼 같은 건가?'

공허의 존재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려 주는?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스쳤다.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그가 검은 벽 너머에서 공허의 존재를 마주쳤을 때는 이런 친절한 퀘스트 따윈 없었으니까.

두근, 전신의 혼돈력이 공명했다.

'뭘 기대하는 건지는 알겠다만-'

흑검을 역수로 고쳐 쥔 이안이, 그대로 땅속에 깊숙이 내리찍었다.

'더는 안 돼.'

쩌어엉-!

땅속에서 터져 나온 폭발이 이안을 튕겨내며 솟구쳤다. 자줏빛 혼돈력이 불길에 뒤섞여 타들어 갔다.

끝내 잦아들 불길이었다. 그 후엔 아마도 다시 이어 붙으리라.

튕겨 나가는 와중에도, 이안의 시선은 다음 마디를 찾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고- 오- 오- 오-"

재생 중이던 불결한 거목이 울음을 토해냈다. 이안의 귀에는 방금 공격이 제대로 먹혔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바닥을 뒹구는 그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잠깐 사이에 주문을 완성한 그가 벌떡 일어나 내달렸다.

콰르르르-

화염 장벽이 거목을 가로지르며 치솟았다. 화염 해일보다는 효율이 떨어지겠지만, 시전 속도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춤추는 불꽃까지 연달아 쏘아 보낸 이안이, 또 다른 마디 위에 뒹굴듯 멈춰 섰다.

쩌어엉-!

그리고 또 한 번의 폭발. 불길에 휩쓸려 꿈틀대는 거목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놈의 시선에서 전해지는 의문과 놀람, 분노가 이안의 뇌리를 울렸다.

당연한 일일 터였다.

놈은 물질계에 구축된 자신에게 약점이 존재하리란 사실조차 몰랐을 테니까.

슈-화아아- 콰과광-!

놈이 발작적으로 광선을 쏴 댔지만, 이안을 맞출 수는 없었다. 놀람과 다급함. 다양한 감정이 담긴 사념이 이안의 뇌리를 울렸다.

'놀랍겠지. 나도 가끔 그러니까.'

혼돈력과의 융합으로 높아진 능력치. 거기다 집중력까지 최고조로 발휘 중인 지금, 이안의 육감은 예지력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본래는 오감이 느껴지는 범위 안에서만 작용하는 특성이지만. 지하 공간 거의 전체가 감지 범위인 지금은 제약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콰아아아-

이안이 연달아 뿌리 마디를 끊어내는 와중에도, 불결한 거목은 끝내 자신들의 하수인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그건 일행들이 아직도 잘 싸우고 있으리란 의미이기도 했다.

어쩌면 예상보다 훨씬 더 잘 싸우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까 본 바로, 사제들은 거목의 사념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었으니까.

거목이 혼란과 분노, 고통, 공포 같은 극단적인 감정에 휩싸인 지금, 놈들은 아마 제정신이 아닐 터였다.

콰르르르-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오른 건, 네 번째 뿌리 마디를 끊어낸 그때였다. 거목의 눈알들은 한 시도 멈추지 않고 사방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작은 안도가 전해졌다. 이안은 이유를 곧바로 깨달았다.

그가 처음 끊어낸 뿌리 마디의 불길이 잦아들고 있었다. 놈의 혼돈력이 곧바로 뿌리를 이어붙이기 위해 뻗어 나가는 게 보였다.

물론, 이안이 주문을 펼치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화르르르-

화염 방벽이 푹 파인 땅 위로 치솟았다. 첫 번째뿐만 아니라 두 번째 뿌리 마디가 위치한 구덩이 위까지 가로지른 채였다.

"...!"

거목의 눈알들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처럼 일제히 이안을 돌아보았다.

쒸아악-

그때 이미, 이안은 놈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언제 돋아났는지 알 수 없는 뾰족한 두 번째 치열이 입술 사이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제야 공평하네?"

붉은빛이 휘몰아치는 그의 눈을 빤히 응시하는 거목의 시선에서, 생경한 감정이 전해졌다.

공포였다.

#221화

쿠구구구-

예배당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렸다.

"갸- 아아아악-!"

제단 주위로 솟구친 사제들이 발작하듯 비명을 토해냈다. 휘청대는 놈들의 암녹색 안광에는 이성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콰지지직-!

그 와중에도 넘실대는 넝쿨들은 더 거칠게 사방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 한복판의 메브와 샬롯은, 당황한 기색 없이 검과 전투 도끼를 쉬지 않고 휘둘러댔다.

지진은 이안이 지하로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터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사제들이 발작하기 시작한 건 조금 전부터였다.

"아, 아니…?! 이건, 도대체…?"

급살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떨던 주르도가 내뱉은 탄식을 시작으로, 광란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 이제 그만 뒈져라, 이 빌어먹을 년아! 주께서, 주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니!"

주르도를 비롯한 순환의 자세들은 절규하듯 외치며 밀려들었다.

변화한 건 저들의 상태만이 아니었다.

넝쿨들은 더 길고 굵어졌고, 몇 번을 터뜨려도 다시금 재생하는 제단의 눈은 마력 광선까지 뿜어댔다.

샬롯이 전투에 합류한 것도 그때였다. 필립을 테사이아에게 맡긴 채였다.

메브는 거절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적들을 상대하는 것에 집중했다. 저들의 반응은, 이안이 공허의 존재를 상대로 승기를 잡았으리라 유추하기에 충분한 근거였기 때문이다.

콰지지직-!

그들은 서로의 빈틈을 메꾸며 오히려 사제들을 토막 냈고, 제단의 눈을 계속해서 터뜨렸다.

필립을 등에 업은 테사이아 역시 낑낑대면서도 용케 광선의 여파를 피해 도망 다녔다.

그 와중에도 예배당은 절대 무너져 내리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이 또한 마경의 영향력일 터였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한 지금.

콰과과과-

두 자루 검으로 넝쿨들을 정신없이 썰어 대던 메브는, 마침내 그 끝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밀려드는 넝쿨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잘려 나간 순간 곧바로 재생을 시작하던 이전까지와는 달랐다. 지금은 그저 짧아진 채로 꿈틀대고 있었다.

"갸아- 아악-!"

발광하던 사제들이 달려든 건 그때였다.

이제는 익숙한 반응이었다. 메브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놈들의 공격을 흘려내며 검을 휘둘렀다.

"...!"

안면 가리개 한쪽이 바스러지면서 드러난 그녀의 눈매가 꿈틀댄 건, 그렇게 세 명째의 사제를 토막 낸 순간이었다.

목을 날리고 상반신을 토막 낸 다른 두 놈과 달리, 공격을 피하며 아가리 채로 썰어 버린 놈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놈의 암녹색 안광에 홀연히 이성이 되돌아왔다.

역겹게 변이된 얼굴에 경악이 물감처럼 번졌다.

"왜 아직 의식이…? 설마-"

콰직-!

놈의 면상을 무게추로 내리쳐 박살 낸 메브의 시선이, 놈과 이어져 있던 넝쿨로 돌아갔다.

조각난 아가리가 끝에 달린 넝쿨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저 경련하듯 꿈틀댈 뿐. 그녀가 베어낸 다른 두 사제의 넝쿨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더는 재생되지 않았다.

"갸- 아아악-!"

또 하나의 사제가 복부에서 뻗어 나온 넝쿨을 꿈틀대며 밀려든 건 그 직후였다. 둥치 반대쪽에 돋아난 놈이었다.

"...."

놈을 응시하던 메브가, 왼손에 들고 있던 반 토막 난 장검을 놔버렸다. 이번에는 사제가 내뻗은 촉수도 피하지 않은 채였다.

달려든 사제의 복부 촉수가 갑옷을 후려치며 휘어 감긴 순간.

콰드득-!

그녀는 왼손을 내뻗어 사제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이성을 잃고 휘청이는 암녹색 눈과 역겨운 얼굴. 뒤로 주르륵 밀려나면서, 메브가 오른팔을 힘차게 휘둘렀다.

콰드드득-!

붉은 신성력이 맺힌 검날이 아가리와 이어진 사제의 허리를 그대로 반으로 갈라 버렸다.

"...?!"

사제의 안광에 이성이 되돌아온 건 그때였다. 어리둥절해 한 것도 잠시, 곧 경악과 공포가 놈의 얼굴을 뒤덮었다.

"어떻게…?! 수, 순환은 영원한…!"

붉게 물든 메브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이것들은 더 이상 불멸이 아니다.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사제의 목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퍼석-!

사제의 목이 으스러지면서, 전신이 재가 되어 터져 나갔다.

콰직-!

멀지 않은 뒤에서 샬롯이 마지막 사제의 몸을 아가리째로 토막 낸 것도 바로 그 직후였다.

숨을 헐떡이던 샬롯의 시선이, 비로소 거목의 제단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달려드는 넝쿨은 없었다.

제단에서 돋아난 모든 넝쿨이 짧아진 채로 그저 꿈틀대고 있었다.

터져 나간 제단의 눈도, 부글대기만 할 뿐 역겨운 본모습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쿠구구구구-

또 한 번의 진동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예배당 바닥 전체가 들썩일 정도였다. 도끼를 늘어뜨린 샬롯이 내뱉었다.

"끝났군…. 이안이 이긴 거야."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검을 늘어뜨린 채 걸음을 옮기며, 메브가 내뱉었다. 진동 속에서도 그녀의 걸음걸이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

샬롯은 그제야 제단에 남은 마지막 사제를 눈에 담았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눈을 까뒤집고 바들대고 있는 주르도.

곧 메브의 검이 붉은 호선을 그려냈다.

푸확-!

뿜어져 나간 궤적이 넝쿨을 잘라냈다. 추락한 주르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타오르듯 일렁이던 그의 안광에 이성이 되돌아왔다.

"헉…?!"

손을 내뻗은 것도 잠시, 치켜뜬 주르도의 눈에 경악이 번졌다. 의식을 짓뭉개던 사념의 절규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어느 순간 다시 육체에 깃들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합일이… 깨지다니…? 어떻게…?"

의문은 잠시였다.

저벅- 저벅-

뒤흔들리는 장내에서도, 발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아… 아아…."

고개를 돌린 주르도의 얼굴에, 비로소 공포가 가득 서렸다.

기사의 형상을 한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피처럼 붉고 끈적한 신성력을 뚝뚝 떨어뜨리며.

드러난 메브의 한쪽 눈이 주르도와 마주쳤다.

붉은 안광이 섬뜩하게 일렁였다.

"네 유언은, 듣지 않겠다."

***

대들보 같던 불결한 거목은, 천장 아래로 이어진 일부만이 간신히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검은 점액을 뚝뚝 떨어뜨리며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콰르르르-

나머지는 지하 공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본래의 형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토막 난 뱀처럼 사방에 너저분하게 널브러져, 샛노란 불길에 휩싸여 부글댈 뿐.

"하아… 하아…."

하지만 그 한복판. 이 광경을 만들어 낸 장본인인 이안은 꿈틀대는 잔해들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자줏빛을 머금고 꿈틀대는 새카만 덩어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순간에도 표면에 거머리 같은 줄기를 꿈틀대며 내뻗으려 애쓰는, 거목의 핵.

이안의 눈에는 그 내부에 떠다니는 파편이 선명하게 보였다.

파편에 새겨진 공허의 표식과, 그 안에 담긴 의식도.

아마 사제들이 의식으로 더럽힌 모종의 성물일 터였다. 지금은 불결한 거목의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 쓰이고 있으리라.

이걸 곧바로 깨뜨리지 않은 건, 혼돈의 파편 때문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빨아들이겠지…?'

최근 들어 부쩍 멋대로 구는 일이 잦아지지 않았던가.

그게 흡혈 여제가 만들어 낸 균열의 영향인지. 그저 덩치가 커져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경각심을 가지게 되기에는 충분한 변화였다.

이러다 언젠간 울어 대는 걸 넘어, 그를 집어삼키려 들지도 모를 노릇이었으니까.

물론, 갈등은 길지 않았다.

'내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냐고….'

적어도 아직은 잡아 먹힐 정도는 아니니까.

생각과 동시에, 이안은 흑검을 내뻗었다.

콰직-

보랏빛 아지랑이를 머금은 검날이 핵을 깊숙이 파고들어, 그 안에 담긴 공허의 표식을 꿰뚫었다.

핵에 맺힌 자줏빛이 명멸했다.

푸확-!

페인트 탄처럼 폭발한 핵이 이안의 전신을 덮쳤다.

이제는 익숙한 암전. 늘 그랬듯, 모든 감각이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의식만큼은 여전히 명료했다.

다음 순간 거대한 자줏빛 소용돌이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거대한 은하의 단면이 눈 앞에 펼쳐진 것 같기도 했다.

고- 오오오-

단말마의 사념이 이안의 의식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안은 아마도 불결한 거목의 영혼일 거대한 의식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놈은 소용돌이의 눈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죽인 건 줄 알았더니. 그냥 공허로 쫓아내기만 한 건가.'

어쩌면, 애초에 죽일 수 없는 놈이었을지도.

소용돌이의 눈 너머에는 아득한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자줏빛이 가장자리를 따라 왜곡되어 번들거렸다. 그 너머로 질감이 다른 검은 그림자가 문득 넘실댔다. 건너편에서 장막을 어루만지는 듯한 굴곡.

그 형체는 정확히 인지할 수 없었다. 그저 기포 터지는 듯한 소리가 이안의 의식을 간지럽힐 뿐이었다.

고오- 오-

거목의 절규가 이어졌다. 비통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비명이었다.

아마도 놈은, 저 장막 너머의 존재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였으리라.

그 순간, 장막 너머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까슬한 혀가 의식 표면을 훑는 듯한 느낌.

뜻밖에도 전혀 적대적인 느낌이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안은 자신의 의식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저항할 수 없는 공포.

그의 정신이 무너지는 것보다, 모든 광경이 점이 되어 멀어지는 게 더 빨랐다.

철퍽-!

어느새 다시 현실이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모든 감각이 뒤엉킨 가운데에도, 이안은 자신이 바닥에 주저 앉았음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퀘스트 완료창만이 홀로 선명하게 시야 한복판을 채웠다.

"하아… 하아…."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숨소리가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이안은 간신히 확인 창을 닫았다. 또 다른 퀘스트 창이 이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봉인과 해방. 선택 퀘스트였다.

심상이 조리개의 초점을 맞춘 것처럼 멋대로 선명해졌다. 이안은 땅속, 자신이 잘라냈던 순환의 뿌리들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기묘한 고양감이 뒤를 이었다. 우주를 손에 넣은 듯한. 신이라도 된 것 같은 감각.

무너져 뒤엉키던 의식이 삽시에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

퀘스트 창이 깜빡이며 그의 결정을 종용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이안은 그제야 퀘스트의 내용을 눈에 담았다.

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뿌리를 봉인해 혼돈력과 영혼들을 가둬 둘지. 아니면 안에 담긴 모든 것들을 해방시킬지.

전자를 선택하면, 이안은 부패의 마경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 땅에서는 뿌리에 담긴 힘을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해방을 선택하면, 뿌리에 담긴 모든 것을 해방하고 이 땅의 침식을 끝낼 수 있었다.

경험치. 그리고 중독을 비롯한 몇 가지 상태 이상에 대한 상당한 추가 저항력이 보상의 전부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선택이었다.

콰- 아아아-

해방을 선택한 순간, 혼돈의 파편이 커다란 울림을 토해냈다.

동시에 이안은 뿌리에 담긴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쿠구구구구-

지진이 뒤를 이었다. 등을 두드리는 돌의 감촉이 느껴지고서야, 이안은 이게 심상이 만들어 낸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무너지냐고….'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신을 두드리는 감촉이 둔탁했다. 그저 심상 너머, 모든 것을 토해내는 뿌리들의 형상만이 선명했다.

묘한 허탈함이 뒤를 이었다. 손에 넣었던 힘을 잃고 있기 때문이리라.

또 다른 퀘스트 완료 창이 그 위를 덮으며 떠올랐다.

융합 퀘스트가 완료된 것이다. 창을 닫은 순간 전신에 가득하던 혼돈력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심상에 그려지는 광경도 뿌옇게 흩어졌다. 억눌려 있던 감각이 수면 위로 떠오르듯 선명해졌다.

두근-

혼돈의 파편이 또 한 번 울음을 토해낸 건 그때였다.

놈이 흩어지는 혼돈력을 다시 끌어당기고 있었다. 뿌리에 담긴 힘은 포기했지만, 이것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는 듯이.

이안은 본능적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혼돈력을 몸 밖으로 밀어내 흩어버리기 위해서였다.

인력과 척력의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악문 건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내 말을… 들어…!'

혼돈의 파편이 대답하듯 울렸다.

확, 정신력을 좀 더 찍어…?

어디선가 타는 듯한 열기가 번진 건 그때였다.

그게 왼쪽 팔에서 시작된 것임을, 이안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신성력이었다.

누가 이걸 내리는 건지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카르하.

유독 또렷하게 느껴지는 열기가, 삽시에 불길처럼 전신으로 번졌다. 신성력이 혼돈력을 태우고 있었다.

'도와주는 거야 죽이려는 거야?'

이러다 쇼크사하겠다, 시발아…!

전신에 불이 붙은 듯한 감각에 내심 울분을 토해내면서도, 이안은 악착같이 견뎌냈다.

적어도 균형이 깨진 건 분명했다. 파편이 속수무책으로 혼돈력을 빼앗겼다. 신성력이 그 사이로 스며들었다. 어느새 전신은 뜨겁다 못해 차가울 지경이었다.

"----!"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이안은 번쩍 몸을 일으켰다.

와르르르-

그의 몸을 뒤덮고 있던 돌 더미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이안은 그제야, 자신이 무너진 천장 더미에 깔려 있었음을 깨달았다.

"하… 하아…."

거친 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 와중에도 모든 감각이 빠르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선명해진 건 시야였다.

이안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전신에 보라색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그 아래로 흐릿한 붉은 신성력이 아른거렸다.

걸치고 있던 장비들은 죄다 박살 난 모양이었다. 지금 그가 걸친 건 넝마가 된 천 쪼가리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드러난 피부는, 더 이상 보라색이 아니었다.

'대체 몇 번이나 깔려 죽을 뻔하는 거야….'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주위가 무너진 예배당의 잔해로 가득했다.

그는 움푹 파인 잔해의 구덩이 한복판에 주저앉은 채였다.

우웅, 옆에서 낮은 울림이 번졌다. 잔해 사이로 자루만 삐죽 튀어나온 흑검이 토해낸 울음이었다.

별 경험을 다 하지?

흑검의 자루를 움켜쥐며, 이안은 위를 올려다 보았다.

사방에 안개 같은 자주색 빛무리가 번지고 있었다. 그가 해방한 혼돈력과 그 안에 뒤엉킨 영혼들이리라.

문득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저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하지만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괜찮은 거야, 이안? 방금 소리는 왜 지른 거야? 설마, 깔렸어? 깔렸으면 한 번 더 소리 질러!"

저 위에서 테사이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222화

"난 괜찮아. 걱정 마라."

대답한 이안이 문득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어금니 안쪽에서 이물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손바닥에 뱉어내 확인한 그의 얼굴에, 이내 옅은 헛웃음이 번졌다.

뾰족한 이빨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치열에 돋아났던 이들이 다 빠지면서, 그중 하나가 입안에 남은 모양이었다.

'어딜 봐도 사람 이는 아니군.'

대체 난 정확히 어떤 몰골이었던 거람.

답을 알 수는 없는 의문이었다.

흑검을 아공간에 휙 던져 넣으며 일어선 이안이, 잔해 위로 걸음을 옮겼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지하실은 딱 예배당만 한 넓이였다.

무너진 천장의 두터운 단면 너머, 그가 들어섰던 예배당의 정문이 설핏 보였다.

예배당은 문과 그 앞의 바닥 조금만을 남긴 채 천부 무너진 상태였다.

샬롯과 테사이아는 그 끝에 주저앉아 지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샬롯과 달리, 테사이아는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이안을 발견한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다행이네. 깔린 건 줄 알고 뛰어 내려갈 뻔했어."

"깔렸었다만."

"아, 그랬어?"

"어쨌든, 다들 떨어지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갔나 보군."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슬아슬했지만, 뭐. 그런데 어떻게 올라올 거야, 이안? 줄이라도 찾아볼까?"

"…아니."

멈춰선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가 들어선 나선 계단은 이미 잔해에 파묻힌 후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의 전신에는 아직도 카르하의 신성력이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붉은 신성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지만, 전부 사라지려면 적어도 몇 분은 더 필요할 터였다.

카르하가 왜 신성력을 내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대전사를 도와주고 싶었거나, 이안이 순수한 인간으로 남길 바란 건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저 단순한 변덕이었을 지도.

무엇이 진실일지는 알 수도, 상관도 없는 부분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덧붙였다.

"둘 다, 뒤로 바짝 물러나."

"응? 응. 어쩌려고?"

테사이아가 샬롯을 이끌고 물러나며 되물었다.

어쩌긴.

속으로 읊조리며 다시 몸을 돌린 이안이 그대로 내달렸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잔해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몇 번의 도움닫기 끝에, 그가 바닥을 힘껏 박찼다.

콰르르르-

발아래 잔해들이 움푹 파이며 허물어졌다. 이안의 몸이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솟구쳤다.

터억-

그는 예배당 문 앞의 바닥에 주저앉듯 착지했다.

뛰어오를 때와 달리 가벼운 소리만 남긴 채였다.

"와우."

문 앞에 바짝 붙어 서 있던 테사이아가, 일어서는 이안을 바라보며 묘한 탄성을 흘렸다.

샬롯도 정신이 번쩍 든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는 가운데, 몸을 일으킨 이안이 미소 지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결국 못 참고 싸운 거냐?"

"딱 봐도 알겠지? 주근깨도 나한테 던져 놓고 뛰어 나갔다니까."

테사이아가 이르듯 말했다. 입맛을 다신 샬롯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것들이 갑자기 발광하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었다. 메브 혼자서는 위험해 보였어. 그래서… 다 끝난 건가?"

"그런 셈이지. 보다시피."

대답한 이안이 둘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테사이아가 코 끝을 찡그리며 덧붙였다.

"그런데 공기는 아직도 왜 이렇게 더러워? 이 기분 나쁜 자주색 안개는 또 뭐고."

"공허에서 온 놈이 사라졌다고, 놈이 남긴 흔적까지 다 사라지는 건 아니지. 신경 쓰지 마라. 이제부터 좋아질 테니까."

장내의 공기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탄내와 곰팡내가 뒤섞여 퀴퀴했다.

하지만 이안은 숨을 쉬는데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여전히 독기가 섞여 있으련만. 냄새를 제외하면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마도 높아진 저항력 덕분이리라.

만독불침, 뭐 그 비슷한 거라도 된 건가?

생각하며 아공간에서 델라 루의 은총이 담긴 목걸이를 꺼내 목에 건 이안이 덧붙였다.

"경과 필립은?"

"정문 근처에 있을 거야. 여기가 죄다 무너지는 줄 알고, 잠깐 다들 엄청 다급했었어. 또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내가 내려간 이후의 얘기는 가면서 듣지. 비켜라. 문을 열 거니까."

이안이 손을 뻗었다. 선선히 비켜선 테사이아가 문득 덧붙였다.

"그런데 이안."

"...?"

"옷 부터 입는 게 어때? 혹시, 지금 나 따라하는 거야?"

"…아."

이안은 그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위아래가 죄다 넝마가 되어 버려서, 다 부서진 강철 장화만 신은 야만 전사 같은 몰골이었다.

"훌륭한 지적이군…."

중얼댄 그가,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냈다.

***

휘고 굽어져 있던 공간이 되돌아 왔음에도, 수도원 내부는 여전히 널찍했다.

곳곳에 가득하던 이끼와 곰팡이들은 여전했지만, 빛을 잃고 시들어 가고 있었다. 죽어가는 게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대부분은 며칠이면 완전히 말라비틀어져 가루가 되리라.

서부는 본래 이런 것들이 살아가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더럽혀진 땅과 물이 되돌아 오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이안이 생각해도 어이없지 않아? 그렇게 시끄럽게 싸울 땐 뻗어 있더니, 다 끝나고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놀라서 깬다는 게?"

재잘대는 테사이아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들어섰던 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닫힌 대문 옆, 벽면에 나란히 주저앉은 메브와 필립이 일행을 반겼다.

퀭한 얼굴로 앉아 있던 필립이 이안을 눈에 담자 허둥지둥 일어섰다.

"나리…!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괜찮으십니까?"

"내가 물어야 할 말 같은데."

피식대며 대답한 이안이, 투구를 벗은 메브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녀 역시 샬롯만큼이나 기진맥진해 보였다. 붉은 머리칼은 떡 져 있고, 녹색 눈에는 피로가 뚝뚝 떨어졌다.

제국제 전신 판금 갑옷은 곳곳에 금이 가고 부서져서, 속에 걸친 누비옷이 비쳐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옆에 벗어 둔 투구 역시, 안면 가리개 절반이 부서져서 덜렁댔다.

"괜찮소? 오는 동안 듣자하니, 격전을 치르셨다던데."

"괜찮다. 지쳤을 뿐이야."

"숨긴 상처도 없으시고?"

창백하게 미소 지은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잘한 상처가 있긴 하지만, 엄정한 여신과 풍요로운 여신께서 가호해 주셨어."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너는?"

"멀쩡합니다. 기운이 좀 없긴 하지만요."

"적어도 몇 시간은 더 쉬어야 하는데, 고집을 부리는구나."

메브가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며 덧붙였다.

그들 앞에 멈춰 선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다 모시는 나리에게 배운 거 아니겠소."

"그런가…? 하긴. 그럴지도."

메브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대답하는 가운데, 다가선 샬롯이 그녀에게 가죽 수통을 내밀었다.

이안이 옷을 걸치는 사이 봉인함에서 꺼낸 물건이었다. 메브가 입을 축이는 동안 필립을 돌아본 샬롯이 덧붙였다.

"마시고 일어서라, 필립 경."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듯 눈을 깜빡인 필립이, 이내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죠."

샬롯과 눈빛을 교환한 이안이 필립을 내려다 보았다.

"그래서, 이제 성기사가 된 거냐?"

"그게… 예. 뭐. 일단은요."

메브에게 수통을 받아든 필립이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안의 뒤에 선 테사이아가 끼어들었다.

"되면 된 거지, 일단은 뭐야?"

"그게… 제가 루 솔라의 사도 중 하나가 된 건 사실입니다. 제 영혼에 새겨진 성흔이 그 증거죠. 아직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만…."

물을 마시고는 대답한 필립이 비틀대며 일어섰다.

이제 보니 그가 걸친 장비들도 상태가 엉망이었다. 전투의 흔적이라기보단 부식된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아직 교단의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니까요."

"신에게 인정받았으면 됐지, 교단의 인정까지 받아야 한다고?"

"일종의 임명 의식이다."

대답한 건 메브였다. 투구를 집어 든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몇 가지 검증과 적법한 절차, 그리고 자질을 증명하는 과정을 거치지. 그러면 비로소 신의 사도이자 성기사로서 교단의 명부에 이름이 오르게 돼."

부려먹기 편하게 만드는 거군.

이안이 코로 짧은 웃음을 흘리는 사이,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자질을 증명할 게 있어? 뭐, 그 성흔이라는 걸 꺼내 보기라도 하는 거야?"

"기사로서의 역량이 충분한지를 확인하는 거다. 모든 사도가 기사인 건 아니니까. 역량이 부족하면 성전사로 먼저 임명되거나, 고위 사제가 되겠지."

"그럴 일은 없겠군. 실력은 충분하니까."

샬롯이 툭 덧붙였다. 그녀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필립이 새삼스럽게 감동받은 표정이 되었다.

메브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필립은 자격이 충분해. 모든 부분에서."

"그 의식은 어디서 치르는 거요? 교회에서 하나?"

"그게 말입니다…."

이안의 물음에, 필립이 머뭇댔다.

"내가 엄정한 여신의 사도가 되었을 때는, 제국의 교단에서 주교가 직접 방문했었다."

대신 대답한 건 메브였다.

"하지만 그건 티르 엔 교단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데다, 내가 왕을 섬기는 기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그녀가 너덜거리는 투구를 눌러 썼다.

"필립은 사실상 자유 기사이니, 교회를 통해 본교단에 연락을 넣고 기다리거나 직접 대교회를 찾아가 의식을 치러야 할 거야."

"…뭐, 어느 쪽이든 급하진 않습니다. 당장 교단에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해서, 성흔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필립이 슬며시 덧붙였다. 메브가 그를 돌아보았다.

"의식을 미뤄서 좋을 건 없다. 필립."

"그… 렇긴 합니다만."

이안은 내심 웃음 지었다. 필립의 속내를 알 것 같아서였다.

대교회로 떠나게 되면 일행과 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는 것이리라.

"뭐, 나머진 차차 이야기해도 될 것 같군. 그보다 우선은…."

끼어든 이안이 턱짓했다.

"나갑시다. 왜 문도 열지 않고 계셨소? 공기도 탁한데."

"그게… 안 열리더구나."

아, 그랬군.

이안은 그제야 문을 돌아보았다.

대문을 봉인한 표식이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 그의 혼돈력을 각인해 두었기 때문일 터였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이안이 문에 손을 얹었다.

문 표면에 보랏빛이 아른거리더니 그의 손아귀로 스며들었다.

"...?"

이어 문을 연 이안은, 전해지는 무게감에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대문이 느릿느릿 열렸다.

이안이 문이 잘 열리지 않은 이유를 눈에 담는 사이.

"루 솔라여…."

뒤로 다가선 필립이 탄식했다. 다른 일행들의 표정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그러졌다.

코를 찌르는 악취. 문 앞은 뒤엉켜 쓰러진 부패의 권속들로 가득했다. 문 앞만 그런 것이 아니라, 보이는 모든 곳에 그들이 뒤덮여 있었다.

대부분 죽었지만, 일부는 아직도 작게 꿈틀댔다.

독 안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상태였지만, 녀석들이 풍기는 악취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상공은 흩어지는 자주색 안개로 자욱했다.

"테센은… 망했군."

샬롯이 내뱉었다. 아무도 부정하지 못했다. 사실, 이미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안의 뒤를 따라 널브러진 권속들 사이로 발을 들이며, 메브가 읊조렸다.

"중앙에 이 소식이 들어가면, 황실에서 칙령이 내려질 것이다. 테센의 영주가 새로 임명되고 이주민들이 모여들겠지. 어쩌면, 드네로브와 라클리프가 반씩 나눠 관리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라클리프도 비슷한 상태라지 않았어?"

테사이아가 시체들 사이를 깡총깡총 뛰어넘으며 물었다. 필립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돌아보는 가운데, 메브가 내뱉었다.

"아닐지도 몰라. 가장 작은 규모의 의식이라 했으니까. 크랄렌 공작이 거느린 가신들과 방위군의 규모가 적지 않을 거다. 설사 고전하고 있다 해도, 이안이 공허의 존재를 물리치고 마경을 닫았으니 상황이 달라지겠지. 우리가 도착할 때쯤엔 모든 일이 끝난 뒤일 수도 있다."

"흐응… 그래. 그럼 오히려 좋지 뭐."

뒤에서 이어지는 일행의 대화를 귀에 담으며, 이안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미 죽었거나 껍데기만 남아 꿈틀댈 뿐인 권속들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대부분은 이미 썩기 시작한 상태였다. 뼈만 남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아까 떠올렸던 상념이 다시 한번 뇌리를 스쳤다.

이들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걸까.

"확실히, 공허의 존재가 죽은 게 맞군요."

수도원의 담장 밖으로 나서며, 필립이 중얼댔다.

권속들의 시체는 여전히 길을 뒤덮고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거대하게 뒤틀려 있던 포도밭은 전부 시들어 버린 상태였다.

물론, 말라붙은 과육에 뒤덮인 땅은 검게 변한 그대로였다.

"검은 벽의 광기가 스며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군. 가만히 두면 흉지로 거듭나겠어. 그 뒤엔, 또 다른 마경이 열릴지도."

샬롯이 피로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후각과 청각이 특히 예민한 그녀에겐 지금 이 상황이 꽤 괴로울 터였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이니 더 그러리라.

저 녀석도 마경 전문가가 다 됐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 교단에서 정화대를 파견할 겁니다. 설사 검은 벽의 광기가 스민다할지라도, 늦기 전에 막아내겠죠."

"그래.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따지고 보면,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이미 우리가 대신해 준 거잖아."

테사이아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이안은 언덕길 중턱을 눈에 담았다.

곧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가 내뱉었다.

"기적이 필립에게만 일어난 게 아니었군."

그제야 이안과 같은 곳을 바라본 필립이, 짧은 탄성을 흘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요."

시체들 무리의 끝에, 일행이 타고 온 마차가 덩그러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탈 때와 다를 바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223화

메브가 중얼댔다.

"우리가 앞서 달려간 덕분인가…."

그나마 체력에 여유가 있던 테사이아가 껑충껑충 앞서갔다.

곧 마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소리쳤다.

"짐도 전부 무사해!"

마차 문 옆으로 고개를 내민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냄새가 좀 나긴 하는데, 일단 겉보기엔 그래 보여."

"장비들도?"

"응. 네가 기름을 열심히 먹여두지 않았어, 빨강 머리? 보람이 있네."

"다행이군…."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이안은 주저앉은 채로 죽은 말을 눈에 담으며 입맛을 다셨다.

짐이 무사한 건 다행이었지만, 어쨌든 마차를 버리고 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혼돈력을 밀어 넣으면 되살아 날지도…?'

물론, 정말 시도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된다 해도 문제의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신들의 시선이 닿지 않으면 모를까. 지금까지 그랬듯, 타락자처럼 보이는 행동은 자제해야 했다.

'그나마 혼돈과 융합한 걸 카르하에게만 들켜서 다행이지….'

이안은 자신이 변이된 모습은 다른 신들에게 들키지 않았으리라 내심 확신했다.

본래도 지하는 신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데, 심지어 마경까지 완성되지 않았던가.

거목을 죽인 후에도 곧바로 그 내부를 들여다 볼 수는 없었으리라.

심지어 그는 델라 루의 은총조차 아공간에 넣어 둔 상태였다.

카르하가 곧바로 눈치챈 건, 그의 몸에 직접 낙인을 새겨 둔 덕분이었겠지.

'그래서 신성을 내린 건가…? 다른 신들에게 들키기 전에?'

아예 말이 되지 않는 추론은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카르하가 여러가지 의미로 그를 도운 셈이었다.

뭐, 남의 몸에 멋대로 낙서까지 했는데 그 정돈 해 줘야지.

이안이 내심 배은망덕하게 뇌까리는 사이, 마차에서 짐가방 하나를 꺼내 든 필립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묵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야영지는 어디에 꾸릴까요?"

"도시에."

그에게 손짓해 가방을 받아든 이안이 덧붙였다.

"여긴 너무 탁 트였어. 시체 밭 옆에서 자고 싶지도 않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저마다 짐을 나눠 챙긴 일행이 그의 뒤를 따랐다.

테센시로 이어진 길은 시체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모든 권속이 수도원 인근으로 모여든 덕분일 터였다.

성벽 너머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보면 오해하기 딱 좋겠네. 우리가 여길 이렇게 만든 것 같잖아."

열린 성문을 통과하며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적막에 휩싸인 테센시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도시를 뒤덮었던 이끼와 곰팡이는 온통 검게 시들어 버렸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음산했다.

금방이라도 도시의 골목에서 마물이나 망령들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 누구도 이 인근에는 발을 들이지 않을 테니까요."

필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하는 사이. 앞장서 대로 한복판을 걷던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는 여러 건물 사이의 단층집에 발을 들였다. 지붕 한쪽이 무너지고, 벽면에도 벽돌이 우수수 떨어져 나간 폐가였다.

다른 건물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엉망이었지만, 단층이니 무너져도 크게 다치지는 않을 터였다.

내부의 공기는 지하실처럼 퀴퀴했다. 썩어버린 가구들의 잔해가 사방에 굴러다녔다.

"몇 분만 주십시오."

뒤따라 들어선 필립이 집 한복판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기도문을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에 은은한 황금빛이 번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오른손뿐만 아니라 전신에서 거의 동시에 피어오른 신성력이었다.

반짝이는 빛무리가 장내를 부드럽게 뒤덮었다.

푸스스-

곳곳에서 거뭇한 연기가 솟았다가 바스라졌다. 장내의 공기가 빠른 속도로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무슨 일광 소독인가.

짐가방을 내려 놓은 이안이 피식댔다. 일행들도 이때다 싶었는지 저마다 들고 온 것들을 바닥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건 사이사이에 남았을 독과 포자의 잔재를 걷어내려는 것이리라.

이안도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내 열어두고, 예비로 넣어 뒀던 장비들까지 모조리 꺼냈다.

이렇게만 해 둬도 각자 알아서들 챙겨갈 터였다.

잠시 신성력을 쬐듯 팔을 벌리고 있던 샬롯이,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몸을 돌렸다.

"따듯해도 모닥불은 있는 게 좋겠군. 땔감으로 쓸만한 게 있는지 찾아보겠다."

"같이 가, 야옹아."

"넌 왜?"

"그 몰골로 혼자 돌아다니다 기절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가기나 해. 길 막지 말고."

테사이아가 샬롯의 등을 밀며 집을 나섰다. 샬롯을 돕는 것보다 유령 도시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눈치였다.

"후…."

곧 기도를 끝낸 필립이 일어섰다.

장내에 번진 빛무리는 곧바로 사라지지 않고 주위를 은은하게 밝혔다.

퀴퀴하고 눅눅하던 공기는 어느새 제법 산뜻해진 상태였다.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을 새삼 신기하다는 듯 잠시 바라본 필립이, 곧이어 고개를 돌렸다.

"두 분 나리 먼저 주무십시오. 두 분 다 몹시 피곤해 보이십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모두가 마찬가지지. 먼저 자라."

짐가방을 풀어헤치며 이안이 내뱉었다. 투구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은 메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부터 쉬거라, 필립. 이안, 너도. 보초는 내가 첫 번째로 서도록 하지."

거참 더럽게 훈훈하구만.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이안은 더 사양하지 않고 모포를 펼쳤다.

솔직히 말해 너무 피곤했다. 훈훈한 실랑이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체력과 마력에는 뜻밖에도 조금 여유가 있었다. 지금 그가 느끼는 피로는 말 그대로 정신적인 문제였다.

몇 번이나 의식을 납치당한 데다 혼돈력과도 힘겨루기를 하고, 변이되었다 되돌아오는 과정까지 전부 맨정신으로 겪지 않았던가.

"먹을 건 봉인함에 있으니 알아서들 챙기고. 불침번 순번도 알아서들 정해."

모포로 기어 들어간 이안이 덧붙였다.

"내 차례가 되면 깨우고."

"그렇게 전달하겠다, 이안. 필립? 이리 와서 이안의 곁에 눕거라."

"전 정말 괜찮습니다. 나리부터 쉬십시오. 샬롯과 테사에게는 제가-"

저러다 날 새겠군….

이안은 둘의 실랑이가 끝나기도 전에 기절하듯 잠들었다.

끝없는 심연. 꿈이 시작됐다.

그는 혼돈력과 함께 휘날리는, 뒤엉킨 영혼들의 일부였다.

그들은 자줏빛 혼돈력의 안개와 함께 세상의 이면에 새겨진 균열 사이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이안도 함께 휩쓸려 흘러갔다.

세상의 틈을 지나 공허로. 그리고 그 너머, 무언가의 쩍 벌어진 아가리에 펼쳐진 암흑 속으로.

***

"...!"

이안은 번쩍 눈을 떴다. 이마에 식은땀이 축축했다.

묘한 두려움과 불쾌감.

'뭐였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그저 잔재일 뿐이었다.

악몽의 기억은 이미 뿌옇게 흐려져, 편린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이안의 시선이 무너진 지붕 너머의 하늘로 향했다.

불그스름하던 하늘은 어느새 흐릿한 회색빛 먹구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자줏빛 안개의 흔적은, 독 안개가 그랬듯 찾아볼 수도 없었다.

새벽쯤 됐겠네.

먹구름의 색으로 시간을 가늠하며, 이안은 상반신을 일으켰다.

"왜 벌써 일어나느냐?"

옆에서 메브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구석구석에 일행이 누운 가운데, 불길이 잦아드는 모닥불 너머에 그녀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실랑이는 결국 필립이 이긴 모양이었다.

이안의 시선에 메브가 덧붙였다.

"더 쉬거라. 너는 말번이니, 한 시간… 아니, 두 시간 후에 깨워 주겠다."

"이미 잠이 깼소. 경이야말로 더 쉬시오. 남은 시간도 내가 설 테니."

일어선 이안이 말했다. 메브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충분히 잤어."

이안이 모닥불 건너에 앉았다. 메브가 앞에 놓인 술병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불침번들이 돌아가며 마신 듯, 벌써 반이 넘게 사라져 있었다.

'이걸 다 마시면 두 병이 남던가….'

생각하며, 이안은 병을 입에 가져갔다. 술을 입에 머금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메브를 훑고 있었다.

그녀의 장비들은 수명을 다한 게 분명했다. 적어도 수리하거나 정비해서 쓸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라클리프에서는 그녀의 새 장비를 구해줘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전신 판금 갑옷을 사 줄 수는 없으리라.

다른 걸 걸친 건 상상이 안 되는데….

그가 내심 읊조리는 사이.

"그러고 보니, 어제 바로 말하지 못했군. 정신이 없어 지나치고 말았어."

"뭘 말이오?"

이안이 술병을 건네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이제 불가에 내려놓은 육포와 호밀빵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저분한 천을 깔고 그 위에 마구잡이로 쌓아 놓은 상태였다.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맙다, 이안. 덕분에 또 하나의 복수를 이뤘어."

육포를 집어 든 이안이 낮게 웃음 지었다.

"내가 경의 복수를 가로챈 것 같은데. 그 사제들, 거목과 영혼이 이어져 있었잖소."

"마지막에는 어찌 된 일인지, 영혼이 떨어져 나와 육체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해서, 내 손으로 놈들의 목숨을 끊었지."

"그랬소…?"

찢은 육포를 입에 물며, 이안은 뿌리가 떨어져 나간 이후의 불결한 거목을 떠올렸다.

놈은 남은 혼돈력을 오로지 그를 떨쳐내고 뿌리를 재생하는 데에 사용했다. 막판에는 자신을 재생하는 데에도 전력을 다했었다.

어느 순간 혼돈력을 끝없이 빨아먹는 하수인들의 영혼을 분리해 버렸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으니, 아마 그때 놈들의 영혼이 되돌아간 것이리라.

"네 전투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었겠지. 공허의 존재와의 전투는 어땠느냐?"

이어진 물음에 육포를 삼킨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징그러웠소."

"…그게 끝이야?"

"강했고."

덧붙인 말에 풀썩 웃음 지은 메브가 술병을 들었다.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이 모닥불을 반사해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래. 다른 감상은 무의미하겠군. 네가 놈을 없애고 마경을 닫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하지. 네 이번 업적 역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부패와 역병을 밀어낸, 서부의 정화자로."

그런 별명은 그만 좀 붙어도 될 것 같은데.

"아직 서부의 의식을 전부 저지한 건 아니잖소. 무엇보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육포 조각을 입에 넣으며 덧붙였다.

"크랄렌 공작이 남아 있고."

"…그래. 그렇지."

술을 한 모금 마신 메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술병을 이안에게 내밀며, 그녀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뿌리가, 그자일지도 몰라."

"그럴지도. 내가 찾는 놈들의 일원일 가능성도, 차고 넘치고."

"원탁 의회…."

메브의 날카로운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사실, 그녀는 원탁 의회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이안이 그들에 대해 말을 아꼈기 때문이다.

기존의 모든 법칙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자들이라는 정도가 그녀가 아는 전부였다.

몇인지 모를 의원들이 주요 구성원이라는 것도.

이번에도 다를 건 없었다.

"그건 경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니오. 당장은 그보다, 놈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만들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겠지."

돌처럼 딱딱한 빵을 집어 든 이안이 물로 입술을 축이고는 덧붙였다.

"경의 말대로, 놈이 의식을 저지했을 확률도 높아 보이니까. 그럼 놈의 세력은 더 공고해질 거요. 거기서 확실한 물증도 없이 놈을 죽였다간, 서부는 물론이고 제국의 수배까지 받게 되겠지. 아마 그건, 백금룡이라 할지라도 막아주지 못할 거고."

백금룡 아르케아스는 합당한 명분 없이는 세상사에 개입할 수 없었다. 아마 이안의 무고를 증명해 주지도 못할 터였다.

할 수 있더라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 의회를 쫓는 배후가 그라는 것이 확정될 테니까.

술을 한 모금 마신 메브가 서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상관없다. 놈이 정말 변방의 타락자들을 물밑에서 지원한 배후라면, 망설임 없이 처단할 것이다. 오명은 기꺼이 내가 감당하도록 하지. 너희들에게 불씨가 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겐 안 되겠소."

뭘 자꾸 혼자 감당해?

코웃음을 친 이안이, 그녀에게 술병을 받아들며 덧붙였다.

"이건 내 의뢰이기도 하니까."

"...."

"제국의 수배를 받는 일 없이, 놈을 죽일 방법을 찾을 것이오. 그러니 그때까지만 기다리시오. 놈의 목을 치는 건, 경에게 기꺼이 양보할 테니."

"…알았다. 그러지."

이런 건 또 은근히 말을 잘 듣는다니까.

내심 피식한 이안이 덧붙였다.

"사실, 지금 말해 봐야 소용없는 부분이긴 하지. 놈이 원탁의 일원이 아닐 수도, 경의 복수의 종착지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 해도, 타락자 하나를 처단하게 되긴 하겠지."

"그럼 별수 없이 한동안 더 동행하게 되겠군."

"…글쎄."

이어진 메브의 반응에, 술을 한 모금 마시던 이안이 슬쩍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모닥불로 시선을 돌린 메브가 이윽고 내뱉었다.

"라클리프의 일이 끝나고 나면 부탁… 아니, 의뢰할 게 있다. 이안."

"의뢰…?"

빵을 집어 든 이안이, 이내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필립을 말씀하시는 거군."

"…어떻게 알았느냐?"

"감으로. 뭐, 호위라도 부탁하시려는 거요?"

"비슷하지. 본교단까지 저 아이를 데려가다오. 해 줄 수 있겠느냐?"

"당장은 답을 드릴 수 없겠군. 내 의뢰가 라클리프에서 끝난다는 보장이 없어서 말이오."

"…우리 둘 중 하나라도 먼저 목적을 달성할 경우라는 전제가 붙는다면?"

빵을 우물대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달라질 건 없지. 잊으셨나 본데, 내가 의뢰를 받는 조건 중에는 당사자의 동의도 포함되어 있소.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생각하냐?"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필립."

"…제가 깨어 있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구석에서 필립의 잠긴 목소리가 이어졌다. 메브가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이안이 덧붙였다.

"코를 안 골아서."

"…제가 코를 곱니까?"

"보통은."

사실은 메브가 말한 순간 필립이 숨을 내쉬는 소리를 들은 거지만.

그보다는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을 터였다.

"다음부턴 코 고는 척이라도 해야겠군요."

머쓱하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킨 필립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무튼, 굳이 이안 나리께 의뢰까지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리께서 저와 함께 가시면 될 텐데요."

"…그러지 않을 생각이니 한 말이다."

메브가 머뭇거리며 한 말에, 필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요?"

"나는… 다시 변방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필립."

"변방으로요…?"

이안도 메브를 빤히 바라보았다. 테센에 발을 들이기 전, 끝맺지 못했던 대화가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왜 하필 변방입니까? 거긴 지금쯤 대혼란이 펼쳐지고 있을 텐데요."

"그 이유까지는, 이제 네가 알 필요는 없는 부분이야."

이어진 메브의 덤덤한 대답에, 필립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눈을 치켜떴다.

"알 필요가 없다니요…? 제가 아니면 누가 나리의 계획을-"

"다 자란 새는 둥지를 떠나야 하는 법이지."

말을 자른 메브가 필립을 바라보았다.

"너도 마찬가지다. 필립. 너는 더 이상 종자가 아니야. 어엿한 기사다. 네 하늘을 찾아 멀리, 그리고 높이 날아야 해."

"하지만… 나리… 저는 나리와 함께하는 게 훨씬 더 좋습니다. 정확히는, 여기의 모든 분들과요. 기사 작위 따위는 전혀…."

"너는 신의 뜻을 대행하는 성기사임을 잊지 말거라. 너에게는 이제 너만의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걸 외면해선 안 돼."

거참 눈물겹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둘의 대화를 귀에 담으며, 이안은 식사를 이어 나갔다.

"말 그대로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그가 다시 입을 연 건, 배를 다 채우고 술로 입까지 헹군 후였다.

"저 녀석은 어쩌면, 제도까지 가지 않아도 될 수도 있소."

"…뭐라고?"

"뭔가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메브가 미간을 좁히고, 필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안이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내 의뢰주가 누구인지 잊었나 보군."

"...!"

#224화

메브와 필립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서, 설마… 저 위대한…?"

더듬대는 필립을 바라보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교단의 성자이시니, 어쩌면 손쉽게 끝내주실지도 몰라."

"루 솔라 맙소사…!"

필립이 헐떡대는 가운데, 짧게 침음한 메브가 내뱉었다.

"백금룡을 뵐 수 있다면 일생의 영광이긴 하겠으나… 그렇다 해도…."

"그렇게 해주십시오…!"

냉큼 끼어든 필립이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 떠들어 댔다.

"심장이 터질 것 같군요. 위대한 백금룡을 뵙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분께 성기사로 인정받게 될지도 모른다니."

"말했듯이, 안 될 수도 있어. 합당한 명분 없이는 세상사에 개입할 수 없는 분이니까. 어디까지나 시도만 해 보겠단 얘기다."

그러니까 진정 좀 해라.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필립이 목이 떨어질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십시오. 전혀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뵙기만 해도 영광인걸요. 어렸을 때는, 혹시 제가 용의 아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꿈꾼 적도 있었을 정도거든요."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용의 아이?"

"…용의 아이가 뭔지도 모르시는 겁니까?"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필립이 되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자, 필립이 눈을 끔뻑이며 읊조렸다.

"참, 나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평소엔 그렇게 박학다식하시다가, 가끔씩 이렇게 어린아이도 아는 걸 모르실 때가 있으시니."

그야, 파고들어야 알아낼 수 있는 설정 따위엔 관심도 없었으니까.

내심 읊조린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설명이나 해. 짧게."

"일종의 전설 같은 겁니다. 과거 전쟁의 시대에는 고아가 많았으니까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 중에 착하고 똑똑한 아이는 백금룡이 거둬 가신단 얘기가 있었죠."

필립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었다.

"그 아이는 세상 그 누구도 위치를 알지 못하는 용의 둥지로 가서, 따듯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게 된다고요. 그리고 둥지를 관리하고 백금룡의 시중을 들며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는 겁니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평생 동굴에서 용 수발이나 들며 사는 게 행복할 것 같진 않은데.

생각하며 소리 없이 콧방귀를 뀐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시한 얘기였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저 같은 고아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누군가 지어낸 걸 겁니다. 뭐, 부려먹기 편하게 하려는 걸 수도 있겠고요. 착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려면,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어야 할 테니까."

필립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본인의 과거를 돌아보며 짓는 것이리라.

생각이 많은 표정이 된 메브를 일별한 이안이 덧붙였다.

"어쨌든. 그 양반이 거절하면 그땐 중앙으로 가야 할 거다. 필립."

필립의 미소가 곧바로 사그라들었다. 그가 시무룩하게 웅얼댔다.

"나리까지 왜 그러십니까…."

"경의 말이 옳으니까."

메브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가 자신의 뜻에 힘을 실어 주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피식한 이안이 말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거다. 네가 교단의 성기사로 인정받는 건, 반드시 해야 할 첫 단추지."

"...."

"그 뒤엔 너 하기 나름이야. 혹시 모르지. 몇 개의 단추를 더 끼우다 보면, 변방으로 가게 될 지도."

"...!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필립이 홱 그를 바라보았다.

"알다시피 변방은 혼란스럽고, 유능한 성기사의 도움을 필요로 할 테니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첨언했다.

"물론 노력과 운이 따라야겠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경도 어쩔 수 없으시겠지. 안 그렇소?" 

"…그래. 그렇겠지."

뭔가 생각하듯 허공을 바라보던 메브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찬란한 여신께서 인도하신 길을, 내가 어찌 막겠느냐."

말투를 보아하니, 필립이 다시 변방으로 가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리라 여기는 게 분명했다.

당연한 생각이었다. 자유 기사가 드문 시대였다. 자유 기사 출신 성기사는 더더욱 드물 수밖에 없었다.

분명 많은 이들이 필립을 주목하리라. 교단이든 황실이든, 제국의 유력한 귀족 가문이든.

그들 모두의 손길을 뿌리치는 건,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물론, 필립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땐 종자가 아니라 기사 후배로 동행할 수 있겠군요. 어쩌면, 새로운 종자들과 함께요."

"벌써 종자를 부려먹을 생각부터 하다니."

이안이 코웃음을 흘렸다. 필립이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백금룡께서 임명해 주시면 좋겠군요. 여러모로 편해질 테니 말입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의외로 수다스러운 양반이니까, 하다못해 뭔가 도움 될 말이라도 해 주실 거다."

"그럼 우리는?"

옆에서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그녀가 덧붙였다.

"빨강 머리랑 주근깨는 데리고 가면서, 우린 두고 가려는 거 아니지? 이안?"

쟨 또 언제부터 깨어 있었담.

테사이아를 돌아본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너는 샬롯과 함께 떠나야지. 이미 얘기해 뒀으니까, 자세한 얘기는 그 녀석에게 들어라."

"아니, 그렇게 중요한 얘길 왜 날 빼놓고 해? 나도 백금룡 만나고 싶단 말야. 우리가 본 용이라곤, 북부의 그 너덜너덜한 뼈다귀가 전부라고."

입술을 비죽이며 내뱉은 테사이아가 검지를 치켜들었다.

"게다가 혹시 알아? 백금룡이 내 진짜 이름을 알게 해 줄지?"

"그 양반이 무슨 수로…."

내뱉던 이안이 멈칫했다. 아르케아스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주 오래 사셨고 그동안 많은 요정을 보셨을 테니. 도움을 주실 지도요. 어쩌면, 마법을 부려서 기억을 되살려 줄지도 모르고요. 용의 마법은 신의 기적에 버금간다지 않습니까."

필립이 덧붙였다. 테사이아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했어, 주근깨. 역시 성기사는 다르네. 물론, 내가 알고 싶은 건 이름뿐이지만 말야. 게다가 얘도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을 거라고. 안 그래, 야옹아? …야옹아?"

옆에 누운 샬롯을 돌아본 테사이아가, 이내 한쪽 눈썹을 말아 올렸다.

"얜 이렇게 시끄러운데 어떻게 깨지도 않고 자는 거야? 일어나 봐."

"음…? 뭐지? 적인가?"

테사이아가 팔을 흔들자, 샬롯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이젠 깨우기까지 하다니.

헛웃음을 짓는 이안을 돌아보며,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안이 빨강 머리랑 주근깨만 데리고 백금룡을 만날 거래. 너랑 나는 먼저 보내고. 이게 말이 돼?"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해야지는 무슨 그렇게 해야지야. 넌 궁금하지도 않아? 용과 대화해 볼 수 있는 기회인데?"

"…고작 이런 말이나 하려고 깨우다니."

어이가 없다는 듯 가르릉댄 샬롯이 내뱉었다.

"백금룡과 싸울 기회라면 절대 빠지지 않겠지만, 그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안이 하라는 대로 할 거다."

"정신 나간 야옹이 같으니…. 루 솔라의 신도라며, 교단의 성자가 궁금하지도 않아?"

"굳이 왜 그래야 하지? 물론 위대한 분이시지만, 내가 섬기는 건 찬란한 여신이지 백금룡이 아니야."

"그럼 넌 빠지든가. 난 어떻게 해서든 이안을 설득해서-"

"…안 된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이안이 말을 잘랐다. 약이 오른 표정으로 샬롯을 노려보던 테사이아가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그럼 만나게 해 줄 거야?"

"예의 바르게 군다면. 어쨌건, 내가 데려가는 거니까."

"당연하지. 걱정 마. 텐시아의 얼굴로 만날 테니까. 아니, 그건 너무 오만해 보이나? 어쨌든. 공손하게 굴게."

테사이아가 방긋 미소 지었다. 메브와 필립도 어느새 옅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안이 술병을 들며 중얼댔다.

"안 그래도 물어볼 게 잔뜩이었는데. 날이 새도록 붙잡혀 있게 생겼군…."

이미 백금룡을 다시 만나면, 그를 살뜰하게 써먹을 생각이었던 그였다. 술을 마시며 다시 한번 생각들을 곱씹은 그가, 이윽고 덧붙였다.

"공작이 의원이면 좋겠군. 그게 아니면, 지금 한 얘기는 다 의미 없어질 테니까."

"…동감이다."

그에게 술병을 받아들며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과 테사이아는 그들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표정으로 백금룡에 대해 떠들어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샬롯이 덧붙였다.

"그런데 왜 다들 일어나 있지? 내가 늦잠을 잔 건가?"

"그건 아니야. 더 자라.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이제 막 해가 뜬 것 같으니까."

"그래. 더 자, 야옹아. 네가 세 번째였잖아."

일어난 테사이아가 모닥불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필립도 자연스럽게 이안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모닥불은 이제 불씨만 남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일행을 돌아보며 입맛을 다신 샬롯이 일어섰다.

"나도 충분해. 땔감이나 더 구해와야겠군."

"일어날 거면, 그냥 여기 앉아라."

이안이 빈자리를 턱짓했다.

"식사를 끝내고 떠날 채비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

"…아. 그렇군."

샬롯이 머쓱하게 모닥불 앞으로 다가왔다. 필립이 그녀에게 육포를 건넸다. 곧, 느긋한 식사가 시작됐다.

***

일행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빨리 끝낸 덕분에 채비도 가장 먼저 끝낸 이안이 폐가 밖으로 나섰다.

강철 부츠가 발에 잘 맞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이제부터는 걸어서 이동해야 하니 발에 딱 맞게 조절해 둘 필요가 있었다.

신발만 새 물건인 건 아니었다.

사실 그가 걸친 장비가 전부 그랬다. 혹시 몰라서 사슬 갑옷과 판급 흉갑, 각반 따위도 준비해 온 게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듬성듬성한 장비를 걸치게 되었을 터였다. 필립과 테사이아처럼.

"흠…."

다행히 신발은 발에 잘 맞았다.

폐허 주위를 한 바퀴 돈 이안은, 어느새 나와 있던 메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구겨지고 부서진 갑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다가오는 이안을 돌아본 그녀가 내뱉었다.

"밤새, 또 분위기가 바뀌었군."

도시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녀 옆에 멈춰선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방 도시라 해도 믿겠소."

메브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래. 변방의 도시들도 이런 상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어."

가만 보면, 은근히 사서 걱정하는 스타일이라니까.

메브를 돌아보며 내심 혀를 찬 이안이, 이내 입을 열었다.

"모두가 죽어가는 건 아닐 것이오."

"...?"

"살아남기 위해 싸우거나 힘을 합치는 자들이 있을 테니까. 인간은 더없이 나약하지만, 동시에 그 무엇보다도 강하잖소?"

"…그래. 검은 벽의 광기가 변방 전체를 물들였다 해도, 이겨내고 살아남은 이들이 있겠지.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메브가 읊조렸다. 보아하니 정말, 복수가 끝나면 곧바로 변방으로 달려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어떤 죄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지, 이안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일 뿐. 그는 어떤 정의감이나 사명감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내면 깊숙한 곳 어딘가에는, 아직도 박봉에 시달리던 말단 사회인의 본모습이 남아 있었다.

갈수록 작아지고, 옅어져 가고 있긴 했지만.

"내게 줘야 할 의뢰비가 남아 있다는 것만 잊지 마시오."

이안이 툭 내뱉었다. 메브의 시선을 받은 그가, 다시 눈길을 돌리며 덧붙였다.

"무모한 짓은 하지 마시란 얘기요. 아마 그때는, 필립도 곁에 없을 것 같으니."

눈을 깜빡인 것도 잠시.

메브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래. 그럴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

"걱정은 무슨…."

"그런데 말입니다."

이안이 중얼댈 찰나, 밖으로 성큼성큼 나온 필립이 끼어들었다. 그가 이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백금룡은 어떻게 만나실 겁니까?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정작 여쭤보질 않아서요. 그분은 대부분의 시간을 둥지에서 잠든 채로 보낸다고 들었거든요."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야.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들뜨지 말고 긴장이나 유지해."

"걱정 마십쇼. 위대한 분을 만날 기회를 앞두고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 지키거라. 다시는 먼저 목숨을 던지려 하지 마."

메브가 엄하게 덧붙였다. 필립이 헤실대며 네, 하고 대답할 찰나.

"가자. 이안. 우리 준비 다 됐어."

샬롯과 테사이아도 밖으로 나왔다.

이안은 테사이아가 들고나온 봉인함과 샬롯의 전투 도끼, 필립이 등에 멘 짐가방까지 전부 아공간에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다시 아공간이 꽉 차서 샬롯이 든 가방은 그녀가 짊어져야 했다.

"제가 들어도 되는데요. 샬롯은 아직 몸이 온전하지 않으시잖습니까?"

"충분해. 이게 도끼보다 가볍다."

"그럼 날 업을래, 주근깨? 걷기 싫은데."

이안이 앞장서 반대편 성문으로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필립과 샬롯, 테사이아가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불과 몇 분도 이어지지 못했다.

"...?"

이안이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다.

성문이 그리 멀지 않은 대로 한복판이었다.

필립과 메브가 어리둥절하게 그를 바라보는 사이, 같은 눈빛이 된 테사이아와 샬롯이 성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좁힌 필립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뭔데요?"

"말발굽 소리야. 두 마리 같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어."

"예…? 하지만… 저쪽에서 온다는 건, 그 정신 나간 산을 지나쳤다는 얘기일 텐데요."

그제야 성문 쪽을 돌아보며, 필립이 덧붙였다.

"예사 인물들은 아니겠군요. 마물이야 죄다 여기로 몰려왔다 쳐도, 산의 독기는 그대로였을 텐데. 말까지 살려서 타고 온 걸 보면 말입니다."

"그 비법은 나도 궁금한데."

내뱉으며 검의 무게추에 손바닥을 얹은 이안이,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를 귀에 담으며 덧붙였다.

"곧 알게 되겠지. 도시를 구하러 달려온 자들인지. 타락자의 끄나풀인지."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너덜너덜한 투구를 눌러썼다. 일행이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대열을 갖추는 사이.

다각- 다각-

웅얼대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성문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속도를 줄인 채였다.

곧 열린 성문 너머로 은빛 마갑을 두른 두 마리의 백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에 탄 기수들의 모습을 확인한 필립의 눈이, 이내 커졌다.

"저건… 대교회의…?"

그들은 망토처럼 몸을 완전히 가리는, 끝이 너덜너덜한 로브를 뒤집어 쓴 채였다.

하지만 그 한복판을 가르며 새겨진 황금빛 원 만큼은, 홀로 빛을 받은 것처럼 선명하게 반짝였다.

#225화

그들이 걸친 로브의 소매는 아주 길고 품이 넓어서, 고삐를 쥔 손 위까지 덮고 있었다.

거기다 둘 다 왼손으로만 고삐를 쥔 채였다. 반대쪽 소매는 팔이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축 처진 채였다.

"대교회의 성기사들이로군…."

메브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저들이 로브 안에 갑옷을 걸치고 있음을, 오른손은 언제든 검을 뽑아 들 수 있게 안으로 넣어 둔 것임을 눈치채서였다.

저 로브는 생긴 것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망토에 소매를 붙여 놓은 것에 가까웠다.

두건을 깊이 눌러 쓴 그들을 바라보며, 메브가 덧붙였다.

"서부의 소문을 듣고 달려오기라도 한 것인가?"

그녀를 돌아본 필립이 옅게 미소 지었다.

"잘됐군요. 도움을 받을 수 있겠어요. 우리가 이곳의 의식을 이미 저지했다는 걸 알리면-"

"그렇다기엔, 분위기가 이상한데."

샬롯이 말을 잘랐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필립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 도시 한복판에 있으면 누구라도 우릴 수상하게 여길 겁니다. 오해야 풀면 그만이죠. 안 그렇습니까, 나리? …나리?"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필립이 비로소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이안 역시, 우묵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저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

필립이 고개를 갸웃할 찰나.

다각, 다각-

잠시 멈췄던 기수 중 하나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성문 앞에 멈춰 선 채였다.

기수는 몇 걸음을 더 앞으로 나오고서야 멈춰 섰다. 여전히 일행과는 꽤나 거리를 둔 상태였다.

깊이 눌러쓴 두건 아래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나스가의 원로이신가?"

"...!"

"...?!"

이안을 제외한 모두가 눈동자를 굴려 테사이아 쪽을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첫마디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행들은 물론 테사이아도 당황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곧바로 텐시아 아이나스의 얼굴이 된 그녀가, 앞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역시, 드네로브를 거쳐 온 모양입니다."

그사이 간신히 놀람을 수습한 듯 눈을 깜빡인 필립이 속삭였다.

"역시, 우리를 조사하기 위해 따라온 것인가…."

메브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지나친 테사이아가, 이안에게도 슬쩍 눈빛을 보냈다.

"...."

이안은 별다른 반응 없이, 두건을 눌러쓴 성기사만을 눈에 담았다.

그의 육감도 샬롯과 마찬가지로 위험을 속삭이고 있었다.

적어도 저들이 좋은 의도로 따라온 것은 아니리라고.

하지만 어쨌든 상대는 교단의 성기사였다. 그 정체와 따라온 이유가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먼저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순서가 잘못된 것 같군요."

멈춰 선 테사이아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대뜸 길을 막고 이름부터 부르는 건, 범죄자들이나 할 행동이죠.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선 분들은 대교회의 망토를 걸치고 계시군요."

차분하고 냉랭한, 텐시아 아이나스의 말투. 성기사를 마주 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그러니 용무가 있다면 먼저 이름과 신분을 밝히고, 대화를 청하도록 하세요."

잠깐의 서늘한 침묵이 이어졌다.

곧 두건 아래에서 짧고 낮은 웃음이 번졌다.

"과연… 원로 요정다운 말씀이시군."

중년 성기사가 말에서 내렸다.

뒤에서 대기하던 또 다른 성기사도 거의 동시에 말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나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온 건, 이번에도 중년 성기사뿐이었다.

그와 일행 사이에는 여전히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가 타고 온 백마는, 홀로 몸을 돌려 온 길을 되돌아갔다. 아주 훈련이 잘 된 말인 모양이었다.

"...."

멈춰 선 중년 성기사가 왼팔을 들었다. 품이 넓고 긴 소매 아래로 육중한 강철 장갑이 드러났다.

두건을 천천히 젖히면서, 중년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찬란한 여신의 사도이자 어둠을 밝히는 빛의 한 가닥. 정화대의 일원인 고티어라고 하오."

고티어의 얼굴이 드러났다.

적당히 짧은 연갈색 머리칼. 마찬가지로 연갈색 수염을 기른 선 굵은 얼굴에는, 날카로운 것에 베이고 찔린 흉터들이 가득했다.

한쪽 눈은 선명한 갈색인 것에 반해, 반대쪽 눈은 검은자위가 하얗게 슬어 있었다.

눈이 먼 것이 분명했지만, 안대로 가리지도 않은 채였다.

"루 솔라 맙소사…."

하지만 필립이 탄식을 흘린 건, 그의 그런 흉측한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정화자…."

가장 신실한 성기사와 성전사, 사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알려진 신의 엄벌.

가장 어두운 곳에 발을 들여 목숨을 불살라 빛을 밝힌다고 알려진 그들은, 동시에 온갖 흉흉한 소문의 주인공들이기도 했다.

타락자와 관련된 자들을 심문하고 처단하는 것도 그들의 역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어둠과 티끌만큼만 연관이 있어도 예외 없이 극형으로 다스린다 했다.

신의 엄벌에는 자비가 없으니까.

물론 필립은 소문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절반, 그 이하만 사실이더라도 그리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

"이 이상의 신분을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하시오. 정화자는 본래, 정확한 소속과 출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철칙이니."

고티어가 외눈으로 테사이아를 마주 보았다. 여상하게 턱 끝을 치켜든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그래요, 고티어 경. 무슨 용무로 나를 찾았죠?"

고티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귀공에게 가진 용무는 여기까지요. 귀공은 이정표일 뿐이니까. 우리는, 이안 호프 경을 찾고 있으니."

일행들이 저마다 일순간 숨을 멈췄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또다시 튀어나온 것이다. 심지어 본명으로.

이안은 눈썹조차 까딱이지 않았다.

물론, 내심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정화자가 나를, 왜?'

저들은 게임에서도 아주 위험한 던전에서나 가끔 마주칠 수 있던 자들이었다.

오로지 어둠을 빛으로 밝히는 것과 어둠의 잔재를 처단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던 자들.

물론 든든한 우군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저들 자체도 위험했다.

한순간에 타락자로 돌변하거나, 맹신자가 되어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덤벼들기도 했었으니까.

게다가 이미 그와 텐시아를 연결 짓기까지 했다니.

"잘못된 이정표를 쫓으셨군요."

테사이아는 이번에도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태연하게 고개를 한번 갸웃했을 뿐이었다.

"나는 이안 호프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함께 하고 있지도 않고."

"그래… 드네로브에서도 그러더군. 이안 호프라는 자는 없다고."

예상했다는 듯, 고티어가 읊조렸다.

이안은 그제야 저들이 웨스트우드 백작에게서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를 쫓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고티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직접 신분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소. 귀공은 물론이고, 귀공의 부하들 모두들."

"무례하군요. 경에게 그런 권리는 없을 텐데요. 교단의 권위를 앞세워 핍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테사이아가 되물었다. 고티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아서, 오히려 삭막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평소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럴 권리가 있소. 귀공이 발을 들인 서부에 어둠이 내려앉았으니."

폐허가 된 도시로 시선을 옮기며, 고티어가 말을 이었다.

"아이나스가의 원로가 서부에 발을 들인 이유는 무엇이며, 드네로브의 타락자들이 왜 때마침 준동한 것인지. 평화롭던 테센이 어쩌다 이런 몰골이 되었으며, 귀공이 또 그 한복판에 있는 것이 정말 우연의 일치인지까지."

고티어의 시선이 다시 테사이아에게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교단의 이름으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심문할 권리가 있소. 귀공은 우리의 조사에 응할 의무가 있으시고. 귀공과 귀공의 가문이 여전히 찬란한 여신을 섬기는 충실한 신도라면 말이오."

"...."

테사이아의 눈매가 꿈틀댔다. 어느새 그녀의 눈가에 핏줄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적어도 이건 연기가 아닌 게 분명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리라.

"…이안."

이안을 돌아본 샬롯이 속삭인 건 그때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야 할 것 같다는 의미였다.

이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저들이 다 알면서도 장단을 맞춰 주고 있다는 걸 안 이상, 계속 정체를 숨기는 건 의미가 없었다.

"물러나십시오."

샬롯이 앞으로 나서며 내뱉었다. 테사이아가 휙 몸을 돌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잔등을 씰룩이며, 그녀가 성큼성큼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속삭였다.

"미안, 이안. 도움이 안 됐네."

"아니. 충분해."

이안이 내뱉는 그때, 고티어를 노려보던 샬롯이 멈춰 섰다.

그녀의 넓은 어깨가 일순간 부풀듯 커졌다.

"당장 합당한 예를 갖추시오! 여기 계신 이분은 북부의 초인이자, 저 위대한 백금룡의 유일하며 공식적인 대행자인 이안 호프 경이시니!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셨으나, 알고도 지금 같은 무례를 계속 저지른다면 신성 모독으로 간주할 것이오!"

그녀가 숨소리조차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또랑또랑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고티어는 물론, 뒤에 선 또 다른 정화자 역시 한쪽 무릎을 꿇지 않았다.

"…역시. 제대로 찾아왔군."

그저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린 게 반응의 전부였다.

샬롯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지금, 백금룡의 대행자께 예를 갖추지 않겠다는 것인가? 교단의 정화자를 칭하면서?"

"교단의 모든 이들이 백금룡을 성자로 추앙하는 것은 아니지. 우리가 섬기는 건 오로지 찬란한 여신뿐이오. 물러나시오. 그와 직접 대화해야겠으니."

고티어가 냉랭하게 내뱉었다. 샬롯의 갈기가 일순간 넘실댔다.

"네 이놈-"

"…됐어. 괜찮아."

이안이 앞으로 나선 건 그때였다. 입을 앙다문 샬롯이 낮게 가르릉대며 몸을 돌렸다.

뒤통수에서 메브와 필립의 시선을 느끼며, 이안이 고티어와 마주 섰다.

"그래… 내게 무슨 용무시지?"

"...."

이안을 바라보는 고티어의 눈매가 꿈틀댔다. 영문 모를 적의.

이 새끼, 싸우러 왔구만.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무기부터 뽑아 들지 않았다.

싸울땐 싸우더라도 이러는 이유 정도는 알아 둬야 했다. 이들의 뜻이 교단 전체의 뜻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어쨌건 상대는 교단의 성기사가 아닌가. 심지어 정화자이기까지 했다.

"귀하가 루 사드에서 타락한 자들의 우상을 입수하였음을 이미 알고 있소."

고티어가 낮게 으르렁대듯 말을 이었다.

"신원 불상의 흑기사로부터 저주받은 마검을 손에 넣었다는 것도."

글루미르에서부터 따라온 건가.

내심 생각하며, 이안이 되물었다.

"그래서?"

"모든 물건을 반납하고 순순히 조사에 응하시오. 왜 백금룡의 뜻을 대행하는 자가 그런 불온한 물건들을 입수한 것인지. 귀경이 정확히 어떤 사명을 대행하고 있는지까지도, 전부 빠짐없이 밝히셔야 할 것이오."

"…재미있군."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내뱉었다. 고티에와 마찬가지로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싸늘한 미소였다.

시선을 고티어에게 고정한 채,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게 암흑 성물이 있음을 안다는 건, 글루미르에 그것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일 테니까. 그게 어떤 자들의 손에 있었는지도, 모를 리 없었겠지."

"...!"

"그건 결국 경이 소속된 정화대가 루 사드에 암약하던 흡혈 일족의 존재를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텐데. 대교회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소, 고티어 경?"

"뭐라…?"

점점 구겨지던 고티어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이안과 마주 선 이후 조금씩 냉정을 잃고 있던 그였다.

뒤에서 필립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이어졌다.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던 모양이었다.

곧 고티어가 내뱉었다.

"난 상부의 뜻은 알지 못하며, 상관도 없소. 그런 불온한 물건들이 지금 당신의 손에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암흑 성물은 백금룡께 운반해 적합한 절차를 거쳐 파괴할 것이고, 마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 위해 손에 넣은 것이지."

이안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족의 존재를 묵인했을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그분께서 내리신 사명을 밝힐 수는 없다. 교황 성하나 황제 폐하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라도 가지고 온 것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보아하니…."

"...."

"그런 건 없는 모양이군."

흉하게 일그러지는 고티어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안이 더 짙게 미소 지었다.

이자가 지금 핵심을 찔렸으며, 교단과 황실의 뜻과도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교단 최상부와 황실은 그가 백금룡의 대행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그들이 사람을 보낸 것이라면, 그에 걸맞은 명령서 하나쯤 동봉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지 않는 건 백금룡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음을 알고 있을 테니까.

"돌아가시오. 고티어 경. 덕분에 백금룡께 보고할 사안이 늘었군. 그 보답으로 경의 무례한 언행은 문제 삼지 않겠소. 돌아가 경이 소속된 정화대를 먼저 조사하시오. 내가 아니라."

순순히 들을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끝까지 말을 맺었다.

상대가 교단의 직속 성기사인 만큼, 어쨌든 명분은 챙겨 둬야 했다.

일그러져 있던 고티어의 얼굴이 무표정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해서, 조사에 불응하겠다는 것인가?"

"요약하자면, 그래."

"그렇다면…."

고티어의 눈동자에 황금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가 걸친 로브가 소리 없이 펄럭였다. 그의 왼팔은 어느새 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노랗게 빛나는 두 눈으로 이안을 응시하며, 고티어가 씹어 뱉었다.

"…절차대로 집행할 수밖에."

#226화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고티어가 적의를 드러낸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놈의 눈에 아른거리는 황금빛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신성력…?'

깊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펄럭이던 고티어의 로브가 좌우로 확 벌어지며 위로 솟구쳤기 때문이다.

그 아래로 놈이 걸친 육중한 전신 판금 갑옷이 드러났다. 흉갑에 새겨진 커다란 황금빛 원이 빛났다. 전신 곳곳에 박힌 크고 작은 마석들이 명멸할 찰나.

"잠깐…! 잠깐만요! 두 분 다 잠시만 멈춰주십시오!"

다급한 외침과 함께, 이안의 앞으로 신성의 장막이 피어올랐다.

"...?"

이안은 물론 고티어도 일순간 미간을 좁혔다.

외침과 동시에 달려 나온 필립이, 오른손을 내뻗은 채 이안의 앞을 막아섰다. 이안을 돌아본 그가 재빨리 속삭였다.

"잠시만 시간을 주십쇼, 나리."

"헛수고일 텐데."

"그, 그래도요."

"...."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반쯤 뽑았던 검을 다시 검집에 밀어 넣었다.

어쨌건 필립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갓 루 솔라의 성기사가 된 참인데, 교단의 정화자와 갈등을 빚는 상황은 막고 싶지 않겠는가.

적어도 최선이라도 다한다면 미련은 남지 않으리라.

게다가 이안에게도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설마 사도 제안을 거절해서 앙금이라도 남은 건 아닐 테고….'

방금 본 것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겼으니까.

장막을 거둬들인 필립이 고티어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다툼보단 대화로 해결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찬란한 여신을 섬기는 신도끼리."

"성물의 소유자라도 되는 건가?"

고티어가 내뱉었다. 기다려 준 이유는 정말 단지 그뿐이라는 듯이.

그의 눈에는 여전히 황금빛이 아른거리고, 로브는 벗겨질 것처럼 넘실댔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이안은 생각을 이어 나갔다.

'어쨌건 내가 혼돈력을 품은 건 알 테니, 타락자 취급이라도 하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티르 엔이나 델라 루가 내게 힘을 빌려줄 리가 없는데.'

교리나 법령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상대가 누구건 신성을 내리고 보는 건가.

차라리 이쪽이 더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이안의 뇌리로 게임의 맹신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이안이 타락자가 아님에도 신성을 마구 휘둘러 댔었다. 그들은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자들이었다.

물론 대부분 그 힘을 영원히 휘둘러 대지는 못했지만, 어쨌건. 현실이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신 중에 인간 출신은 카르하 뿐이었다. 탄생한 순간부터 신이었던 존재들이, 인간의 보편적인 상식대로 움직이지는 않으리라.

게다가 따지고 보면, 이안은 루 솔라의 신도조차 아니었다. 성물의 힘을 몇 번 멋대로 쓴 게 전부.

아르케아스의 의뢰 역시, 신의 시선을 피해 이루어지기까지 했었다.

'교단이 아니라 백금룡의 하수인 취급을 당해도 할 말 없긴 하네.'

사실 공허의 힘도 다루고 있고.

이안이 내심 입맛을 다시는 사이, 자신의 흉갑에 한 손을 얹은 필립이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필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찬란한 여신의 사도입니다. 계시를 받은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요."

"성기사라고…?"

되물은 고티어의 안광이 가라앉았다. 펄럭이던 로브도 비로소 다시 축 늘어졌다.

이안은 로브 자락 사이로 모습을 감추는 전신 판금 갑옷을 마지막까지 눈에 담았다.

'확실히, 더럽게 베테랑이겠고.'

답을 알 수 없는 추론보다, 이쪽이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었다.

곧 저 자와 싸워야 할 게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그가 게임에서 마주친 정화자들은 하나하나가 인간 병기나 다름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들은 극소수의 인원만으로 흉지나 마경을 정화하는, 교단의 최정예니까.

그중에서도 오래 살아남은 자들은 초인의 영역에 발을 들인 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온갖 종류의 마법 무구와 성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군일 때는 든든하지만, 타락하거나 맹신자가 되어 돌아 버릴 경우엔 그만큼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상 필드 보스나 다름없었지….'

그나마 맹신자가 된 경우에는 조금 상황이 나았다. 엄청나게 강했지만, 일정 이하로 체력을 빼고 난 뒤엔 통제력을 잃고 자폭해 버리곤 했으니까.

어둠에 물들어 타락해 버린 경우엔, 망캐인 그로선 사실상 이길 방법이 없었다.

저들과 자주 마주치던 3챕터 후반부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이안은 그냥 도망가는 걸 택하곤 했었다. 어쨌건, 저들은 반드시 죽여야 하는 네임드는 아니었으니까.

그때와는 달리, 피할 수 없는 상대인 고티어가 내뱉었다.

"소속을 밝히시오."

"그게… 아직은 없습니다. 루 솔라께서 제게 계시를 내리신 건 바로 이곳 테센에서의 일이었으니까요."

"여기서 계시를 받았다고…?"

"예.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덧붙이며 비스듬하게 몸을 돌린 필립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곧바로 눈을 감은 그가 기도문을 중얼대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을 멈춘 이안이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대체 이게 뭔 지랄인가 싶었지만, 어쨌건 확인해 볼 기회였다.

솨아아-

루 솔라가 그의 편을 드는 필립에게도 신성을 내리는지.

필립의 전신에도 빛이 서리기 시작하자, 이안은 비로소 내심 코웃음을 흘렸다.

'…빛은 만물을 두루 비춘다더니.'

루 솔라가 자신을 타락자라 여기지는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정신 나간 빛의 여신은, 정말 그저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한 것이다.

솨아아아-

전신에 신성을 머금은 채 일어선 필립이,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눈으로 고티어를 마주 보았다.

"이만하면, 증명이 되었습니까?"

"…그래. 충분하군."

고티어가 떨떠름하게 내뱉었다. 그 역시 루 솔라의 성기사가 갑자기 튀어나온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제 신앙을 걸고 말씀드리건대, 이안 호프 경은 타락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부에 발을 들인 건, 이곳에 암약한 타락자들을 처단하기 위해서입니다."

필립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가는 길에 타락자들이 나타난 게 아니라, 우리가 놈들을 추적해 색출해 낸 겁니다. 공교로운 우연도, 텐시아 아이나스 공께서 그들과 관련이 있어서도 아니죠."

"…그렇다면, 더더욱 조사에 불응할 이유가 없겠군."

이어진 고티어의 대답에 필립이 멈칫했다. 그의 눈을 마주 보며, 고티어가 말을 이었다.

"저주받은 자들의 우상과 마검을 반납하라 이르시오. 필립 경. 그리고 본교단까지 동행토록 하시오. 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안 경은 아무런 문제 없이 풀려나게 될 것이니."

"아니… 이안 경의 말씀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저희는 지금, 백금룡의 사명을 대행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물건들은 때가 되면 백금룡을 통해 파기하게 될 겁니다."

"경은 백금룡을 믿으시오?"

"예…?"

"한때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종족들을 공포로 지배했으며, 끝내 찬란한 여신의 자비에 기대 동족마저 배신하고 살아남은 그 괴물을, 진정 믿느냔 말이오."

"그게 무슨… 대체… 정화자께선 교단의 성자를 왜 그런 식으로 매도하십니까?"

"그게 진실이니까.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아주 불편한 진실이지."

"..."

필립이 입만 뻐끔댔다.

반면, 이안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이 새끼. 순수 교도인가 그거군.'

기적은 신의 은총만으로도 충분하며, 신의 뜻을 받드는 건 인간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는 자들.

그리고 게임에서 이안이 검은 벽을 넘기 직전엔, 교단과 제국의 주류로 떠오른 자들이기도 했다.

그때는 이런 극단적인 자들이 득세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러려니 했었지만.

보아하니, 그 이전부터 이미 교단 내부에 충분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만. 그럼, 그 사제님이라는 자도…?'

문득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흡혈 여제의 유언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을 이용하는 루 솔라의 광신도가 있다던.

비로소 모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따라와서 시비인 건가 싶었는데.

'…이것들, 암흑 성물을 교단으로 회수하려는 게 아니군. 나도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던 거고. 백금룡의 대행자니까.'

순수 교도들은 의회의 하수인인 것이다. 어쩌면 본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들에게 명령을 내린 결정권자는 의회의 일원이 틀림없었다.

필립이 간신히 말을 이어간 건 그때였다.

"그, 그럼… 저희와 동행… 하시겠습니까? 모든 과업을 완수한 후엔, 백금룡을 직접 만나 뵐 수 있을 테니까요. 두, 아니,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면 되겠군요. 이안 경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거, 거짓말인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태연하게 고티어를 바라보았다. 저자가 받아들일 리 없었기 때문이다.

백금룡을 마주 보는 상황 자체를 역겹다 여길 게 분명했으니까.

역시나, 그가 코웃음을 흘렸다.

"내가 받은 명령은 회수와 조사, 둘 뿐이오. 임의로 명령을 바꿀 수는 없으니, 비키시오. 아직 진실에 눈 뜨지 못한 사도여. 어리석음이 죄는 아니나. 무지에서 비롯된 죄업까지 면죄 받을 수는 없음이니."

"도대체…."

숨이 턱 막힌 듯 탄식한 필립이 덧붙였다.

"진정 피를 보시려는 겁니까…?"

고티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가피하다면. 기꺼이."

"하…."

필립이 한숨을 내쉴 찰나, 이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필립이 망연자실하게 이안을 돌아보았다.

"말이 안 통합니다, 나리. 이게 대체…."

"정 마음에 걸리면, 그냥 물러나 있어라."

말을 자르며 내뱉은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경도 마찬가지요."

"...."

어느새 싸늘한 얼굴이 되어 있던 메브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의 시선이 그 뒤, 샬롯과 테사이아를 훑었다.

"이번엔 우리 셋이 싸울 테니까."

"내 전투 도끼를 다오. 이안."

샬롯이 손을 내밀었다. 테사이아는 이미 허리춤에 화살통을 고쳐 매고 있었다. 예비용 활도 손에 든 채였다. 이안이 아공간에서 샬롯의 전투 도끼를 꺼내는 사이.

"뭐, 저쪽의 제안도 아예 터무니없진 않은 것 같습니다. 선배."

반대편에서도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고티어의 뒤편, 말 두 마리의 고삐를 쥔 채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던 또 다른 정화자였다.

고티어와 달리 꽤 젊은 목소리.

"우리가 직접 조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요. 어쩌면 이번엔, 백금룡 본인도 함께 심문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고티어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어리석은 소리 마라, 나세르! 그 용이 진실을 알고 있는 우리를 살려 보낼 것 같으냐? 아직도 그 어리석은 갈등을 이어 가고 있다면, 그대로 빠져 있어라. 집행은 나 혼자로도 충분하니."

솨아아-

동시에 고티어의 눈동자에 다시 황금빛 광채가 번지기 시작했다. 걸어 나온 메브가 이안의 앞에 선 건 거의 동시였다.

"빠져 계시라니까."

이안의 말에, 그녀가 너덜너덜한 안면 가리개를 내리며 내뱉었다.

"내가 보기에 저 자는 눈 먼 사도다. 타락자만큼이나 위험한 부류지."

이안이 한쪽 눈썹을 슬며시 말아 올릴 찰나, 필립도 등 뒤의 원형 방패를 왼팔에 차며 중얼댔다.

"성기사가 된 후의 첫 상대가 성기사 선배라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습니다."

"교단 내부의 적을 상대할 운명인 모양이지."

이안이 피식대며 덧붙였다. 필립이 그런 끔찍한 말씀 하지 마시라고 중얼대는 사이.

"정말 돕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또 다른 정화자, 나세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쪽은 다 나오려는 모양인데요. 혼자서는 쉽지 않으실 겁니다."

"명예를 모르는 자들이라는 반증이지. 지켜보아라. 진실을 보게 될 테니."

고티어의 로브가 크게 펄럭이며 어깨 위로 솟아올랐다. 전신 판금 갑옷이 다시금 본모습을 드러냈다.

철컹-!

뒤로 젖혀져 있던 투구가 스스로 올라와 고티어의 머리를 감싸며 재조립된 건 거의 동시였다.

그사이 로브는 완전히 펼쳐져 그의 머리 위로 둥실 날아올랐다. 연이 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감에 새겨진 황금빛 주문 회로가 번쩍였다.

'용은 그렇게 증오하면서, 진언 마법은 또 좋아하나 보군.'

이안이 실소를 흘렸다. 저 로브에 새겨진 주문 회로가 진언이라 불리는 용의 마법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색으로 미뤄 볼 때, 심지어 아르케아스가 직접 주문을 새긴 물건 같았다.

"우리는 명예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명예를 알기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울 뿐이지."

메브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원형 방패를 치켜든 필립도 뒤따라 소리쳤다.

"무장을 해제하고 물러나십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백금룡의 과업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할 겁니다."

고티어의 표정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매끈한 안면 가리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뚫린 눈구멍에서 황금빛 광채만이 아른거릴 뿐이었다.

"신의 엄벌에는 자비가 없으니. 우매한 자들일지라도 예외는 아니리라…."

읊조린 고티어가 등 뒤에서 기다란 양손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주 느긋한 걸음걸이.

하지만 전신 곳곳에 박힌 마석은 점점 더 밝게 번쩍이고, 검날에도 눈부신 신성이 맺히고 있었다.

마법 양탄자처럼 떠오른 로브도 소리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혼돈력은 쓰면 안 되겠군. 어차피 거의 있지도 않지만… 뒤에 놈도 곧바로 합류할 테니까.'

어지간한 마법은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데….

검을 뽑아 들며, 이안은 차분히 생각을 이어갔다.

신중하게 싸워야 할 상대였다.

"잘 됐군."

"...!?"

타타탓-

새카만 궤적이 그의 곁을 스치며 뿜어져 나간 건 그때였다.

"한 번쯤 꼭 싸워보고 싶었는데."

샬롯이 남기고 간 말이 뒤늦게 이안의 귀를 파고들었다.

"빛이여…! 부디 이 무의미한 싸움을 멈추게 해 주소서!"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소리친 필립과 메브도 달려나갔다.

"저 머리통에 한 발 먹여 줘야 속이 풀릴 것 같아!"

테사이아도 그들의 뒤를 따라 내달렸다.

…신중하긴 글렀네.

순식간에 이어진 일행의 돌격에 헛웃음을 흘린 것도 잠시.

"...?"

뒤따라 달려가려던 이안이 문득 고개를 숙였다.

뱃속 깊은 곳에서 열기가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옷 사이로 흐릿한 붉은 신성이 아른거렸다.

아니, 또…?

삽시에 몸속이 용암이라도 머금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이를 악문 이안의 무릎이 절로 땅에 닿았다.

북부도 아닌데 왜, 하는 의문은 끝까지 이어지지도 못했다.

열기가 사지로 퍼져 나갔다. 눈앞이 붉게 물들고 모든 감각이 흘러내렸다.

쩌어엉-! 콰지직-!

저 앞에서 온갖 굉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굉음은, 곧 이안의 뇌리를 울리는 천둥소리와 시끄럽게 뒤엉켰다.

그게 웃음소리임을 깨달을 때쯤, 싸워라! 하는 일갈이 쩌렁쩌렁하게 그의 의식을 뒤흔들었다.

뭐, 대전사들끼리의 싸움이라도 된다 이거냐?

이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 고통은 엿 같았지만, 이번에는 카르하를 욕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역시 내심은, 저 광신도의 면상에 주먹을 처박아 주고 싶었으니까.

전신을 뜨겁게 달군 열기가 조금씩 위로 치밀어 올랐다.

이안은 예전처럼 그것을 억누르려 애쓰지 않았다.

가라앉았던 의식이 함께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저 고개를 뒤로 활짝 젖혔을 뿐이었다.

열기가 마음껏 분출될 수 있도록.

"------!"

#227화

걸음을 옮기던 고티어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검을 올려 쳤다.

콰과과과-!

신성력을 머금은 날카로운 바람이 비스듬한 궤적을 그리며 뿜어져 나갔다.

그를 향해 달려오던 샬롯이 날렵하게 몸을 휘돌렸다. 궤적을 스치듯 피한 그녀는 그대로 용수철처럼 솟구치며 전투 도끼를 치켜들었다.

"----!"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포효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녀의 도끼는 고티어에게 닿을 수도 없었다.

쩌저적-

놈의 머리 위에 너울대던 로브가 번쩍이고, 육각형을 그리는 금색 역장이 그녀의 앞에 삽시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샬롯이 역장을 깨뜨리려는 듯 도끼를 내리쳤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도끼날에 찍힌 역장은 금빛으로 명멸하며 작은 균열이 일었을 뿐이었다.

쒸아악-!

고티어가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궤적이 역장 너머의 샬롯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녀의 앞으로 신성의 장막이 피어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쩌저정-!

궤적이 장막과 맞부딪혀 샛노란 폭발을 만들어냈다. 샬롯이 튕겨 나가는 가운데, 고티어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오른손의 검을 내뻗으며 달려오는 필립. 그리고 그의 모습은 곧, 앞질러 달려 나온 메브에 의해 가려졌다.

그녀의 갑옷은 곳곳이 너덜거렸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고티어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고티어는 역장을 만들거나 무구에 내장된 주문을 사용하지 않았다.

"흡…!"

그저 짧은 기합성을 토해내며, 그녀를 향해 마주 검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쩌어엉-!

검과 검이 맞부딪친 순간 메브의 돌진이 멈췄다. 고티어는 뒤로 밀려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를 마주 보는 녹색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교착은 찰나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날을 밀쳐낸 둘이 곧바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채채채챙-!

검격이 날카롭게 오갔다.

한 호흡에 불과한 교환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고티어는 상대가 신의 사도임을 깨달았다.

신의 축복을 받은 육체가 아니라면 그의 힘을 이렇게 흘리거나 받아 낼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검술 역시 달인의 경지였다. 젊은 나이인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성취였다.

"그대가 변방의 붉은 기사로군…! 복수의 대행자!"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고티어가 내뱉었다. 메브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고티어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고티어의 검날에서 한순간 신성력이 솟구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쩌엉-!

검이 맞부딪친 순간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살상력이 있지는 않았지만, 메브의 검을 뒤로 튕겨내기에는 충분했다. 그대로 그녀의 품으로 파고든 고티어가 왼 주먹을 내뻗었다. 장갑과 팔목 보호대의 마석이 번쩍이며 그의 주먹에 삽시에 돌풍을 휘어 감았다.

"...!"

오른팔이 활짝 열린 상태였던 메브가 왼팔을 들어 자신의 투구 앞을 가렸다. 주먹이 그 위로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콰지직-!

메브가 마차에 치인 것처럼 튕겨 나갔다. 후두둑, 그녀의 왼팔을 감싼 갑주가 산산 조각나며 흩날렸다.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던 부분들이 완전히 수명을 다한 것이다.

검을 쥔 고티어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갈 찰나.

솨아아-!

그의 앞으로 신성의 장막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원형 방패를 앞세운 필립이 고티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쩌엉!

내뻗었던 왼팔을 구부린 고티어가 몸으로 그의 돌진을 받아냈다. 그의 몸이 옆으로 조금 밀려나고, 서로 맞닿은 두 성기사의 신성력이 빛무리로 뒤엉켜 흩어졌다.

"이건 무의미한 싸움입니다…! 지금이라도 검을 거두십시오!"

필립이 신음하듯 내뱉었다. 온 힘을 다해 방패를 밀어내는 채였다. 그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번쩍였다. 고티어의 안면 가리개 너머에서 낮은 웃음이 번졌다.

"사랑과 자비는 여신께서 내리시는 축복만으로 충분하지. 그분의 종인 우리는, 그로 인해 생겨나는 썩은 부분들을 도려내야 할 의무가 있다. 설사 그것이 나의 살점일지라도…!"

"그러니까 우리는-"

퍼엉-!

필립이 내뱉을 찰나, 폭음과 함께 고티어의 투구가 옆으로 흔들렸다. 일순간 날아든 화살이 투구와 충돌하며 만들어 낸 폭발이었다.

"…그래. 너희 둘은 아닐지도 모르지."

내뱉는 고티어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저 멀리 멈춰선 테사이아를 노려보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저것들은 아니야."

필립도 그를 밀어내려 애쓰며 시선을 돌렸다. 눈가에 핏줄이 돋아난 테사이아는, 코피를 줄줄 흘리는 와중에도 새로운 화살을 꺼내 들고 있었다.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 건, 아직 마력 탈진의 여파를 온전히 다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종족… 아닌 척 늘 인간의 자리를 노리는 가증스러운 것들…."

나지막한 읊조림과 함께, 고티어의 흉갑 양 측면에 박힌 마석들이 번쩍였다.

화르르르-

그의 주위로 연달아 피어오른 불덩이가 테사이아를 향해 마구잡이로 날아갔다. 미간을 찌푸린 테사이아가 폭발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고티어는 이미 그녀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아직도 자신을 밀어내려 애쓰는 필립을 내려다본 것도 잠시.

쩌엉-!

고티어가 왼팔을 힘껏 떨쳐냈다.

필립이 속절없이 밀려나는 가운데, 고티어의 오른쪽 견갑과 팔뚝의 마석들이 눈부시게 빛났다.

파치치치-

검신을 타고 뇌전 자락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신성력과 뒤섞인 황금빛 뇌전.

"죽음은 거짓 선지자와 이종족들만으로 충분하니… 저항하지 마라."

고티어가 밀쳐낸 필립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샛노란 뇌전이 맺힌 검날이 필립의 방패 위로 새하얀 직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

방패를 머리 위로 바짝 붙인 필립이 신성력을 뿜어낸 건 거의 동시였다.

꽈아앙-!

신성의 방패 위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눈부신 빛줄기와 함께, 방패 너머로 흘러들지 못한 뇌전 줄기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하지만 전부 막아낸 건 아니었다.

필립의 무릎이 휘청 꺾였다. 발아래, 대로에 깔린 판석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졌다.

"루, 루 솔라여…."

방패 너머에서 낮은 탄식이 번졌다. 고티어의 양팔에 다시금 힘이 들어갈 찰나.

쩌어엉-!

어느새 달려든 메브가 온몸을 던지듯 고티어와 충돌했다.

그나마 멀쩡하던 오른쪽 견갑과 팔뚝, 너덜대던 투구까지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상관없다는 듯 온 힘을 다해 고티어를 떨쳐낸 메브가 필립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필립! 괜찮으냐? 대답해!"

"예…."

대답과 함께 방패가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피를 토한 듯 입술이 붉게 물든 필립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왼팔에서도 연기가 수증기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나리."

필립이 덧붙였다. 하지만 메브의 눈빛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턱선에 힘줄이 돋아난 것도 잠시.

쩌어엉-!

득달같이 몸을 돌린 그녀가 떨어져 내리는 검날을 막아냈다. 옆으로 밀려났던 고티어가 자세를 다잡고는 검을 내리친 것이다.

그가 내리친 검은 메브의 검날에 반 가까이 박혀 있었다. 그녀를 내리누르며, 고티어가 내뱉었다.

"물러나라. 기회를 줄 때."

"...!"

눈을 부릅 뜬 메브가 고티어의 검을 밀쳐냈다.

"그럴 일은 없다. …내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

그녀가 벌떡 일어서며 씹어 뱉었다. 너덜거리는 안면 가리개 덕에 드러난 그녀의 한쪽 눈동자에는 어느새 붉은 빛이 물감처럼 번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끈적하게 흘러내릴 것 같은 검붉은 신성력이 그녀의 전신에 번졌다.

"복수의 맹세…? 그래… 끝내 목숨을 걸겠다면야…!"

일갈한 고티어가 달려들었다. 전신의 마석들이 눈부시게 명멸했다. 메브도 물러나지 않고 검을 마주 휘둘렀다.

쩌엉-! 쩌저정-!

붉은 궤적과 노란 궤적이 끝없이 맞부딪쳤다. 때때로 돌풍이 치솟아 메브를 휩쓸고 불길이 치솟기도 했지만, 메브는 피하지 않고 전부 견뎌내며 검을 휘둘렀다.

"오- 오오오오-!"

저 멀리에서 문득,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메브는 물론 고티어도 시선조차 돌리지 못했다.

팔과 얼굴 곳곳에 피가 터질수록, 메브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마주 선 고티어의 움직임 역시 조금씩 여유가 사라졌다.

"...!"

고티어의 어깨가 문득 굳어진 건.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쒸하악-!

등 뒤에서 샬롯이 도끼를 치켜들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티어는 직전까지 그녀의 기척을 느낄 수 조차 없었다.

하지만 고티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쩌적-

그가 기척을 느낌과 동시에 형성된 육각형의 역장이, 샬롯의 앞을 또다시 막아서고 있었으니까.

밀려드는 메브의 검을 간신히 튕겨낸 고티어가 소리쳤다.

"방해하지 마라! 이 명예도 모르는 더러운-?"

그의 목소리가 일순간 올라갔다.

콰장창! 역장이 유리처럼 박살 나더니, 도끼를 앞세운 샬롯이 그 한복판을 뚫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콰지직-!

황급히 몸을 돌리는 고티어의 어깻죽지로 도끼날이 틀어박혔다. 휘청 몸이 꺾인 고티어가 그대로 밀려났다.

"...!"

안면 가리개 너머, 샬롯을 바라보는 고티어의 황금빛 안광이 일순간 놀란 듯 출렁였다. 그녀의 전신에도 어느새 불그스름한 신성력이 맺혀 있었다.

메브의 그것과는 달리 불길처럼 타오르듯 일렁이는 신성력.

"수인 주제에, 어떻게?"

"글쎄."

옆에서 검붉은 궤적이 번쩍인 건, 샬롯이 이를 악문 채 내뱉은 찰나였다.

쒸에엑- 카드드득-!

메브의 검이 고티어의 반대쪽 목덜미를 내리찍었다. 서로 다른 색의 신성력이 서로 뒤엉켜 증발하듯 번쩍였다. 메브의 검은 고티어의 갑옷을 가르지는 못했지만, 놈의 무릎이 땅에 닿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검과 도끼가 만들어내는 압력이 대로의 판석을 으스러뜨렸다. 이가 나간 메브의 검에 균열이 번졌다.

안면 가리개 너머, 고티어의 안광이 타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이 우매한… 것들이…!"

놈의 흉갑에 새겨진 황금빛 원이 새하얗게 물들더니, 빛이 삽시에 그의 전신으로 번졌다.

쩌어엉-!

짧은 충격파와 함께 눈 부신 빛의 폭발이 일었다. 메브와 샬롯이 대포알처럼 튕겨 나갔다.

바닥을 나뒹군 메브는 폐가의 벽면에 처박히고서야 간신히 멈춰 섰다. 어느새 반 토막이 나 버린 검을 끝내 놓지 않은 채였다.

카가가가각-

반대편으로 튕겨 나간 샬롯은 바닥에 도끼날을 내리찍으며 미끄러지듯 착지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녀는 질끈 감은 눈을 뜨지 못한 채 땅에 손을 짚었다.

메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 다 비틀댈 뿐 곧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빛의 폭발이 시력은 물론 평형감각까지 마비시킨 것이다.

"야옹아-!"

소리친 테사이아가 다급하게 내달렸다. 폭발의 가장자리에 휩쓸렸던 필립도 다급하게 메브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반사적으로 방패를 든 덕분에 눈이 멀지는 않은 덕분이었다.

"...!"

이내 필립의 움직임이 멎었다.

파칫, 파치칫-

흩어지는 빛무리 사이로, 고티어가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신 판금 갑옷에 박힌 마석들이 위태롭게 점멸했다.

"...."

하지만 어쨌건, 그의 전신 판금 갑옷은 아직도 건재했다. 안면 가리개 사이로 번지는 안광과 오른손에 움켜쥔 양손 검 역시.

파라락-

그의 머리 위로, 폭발에 휩쓸려 날아갔던 로브가 되돌아왔다.

이를 악문 필립이 비틀대며 일어섰다. 떨리는 왼팔에 힘을 준 그가 방패를 얼굴 앞으로 치켜들며 내뱉었다.

"나를 먼저 죽이고 가야 할 거다."

"원한다면…."

내뱉던 고티어가 일순간 휘청댔다.

찰나일 뿐이었다. 곧 가볍게 고개를 턴 그가 다시 필립 쪽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야만신 같으니…."

쒸에엑-!

불현듯 화살이 쏘아진 것 같은 날카로운 파공음이 날아든 건 그때였다. 고개를 돌린 고티어의 눈에 들어온 건 화살처럼 밀려들고 있는 이안과, 그가 머리 위로 치켜든 거대한 대검이었다.

"그 말엔 동감이야."

"...!"

내뱉은 이안이 대검을 내리쳤다.

고티어가 발작적으로 손을 내뻗었다. 그의 앞으로 흐릿한 신성의 장벽이 치솟고, 그 위로 황금빛 육각 역장이 피어올랐다.

콰지지지직-!

붉은 신성력이 맺힌 대검은 역장은 물론 신성의 장벽까지 차례로 찢어발겼다. 다행히 고티어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날 정도의 시간은 벌어 준 채였다.

콰아앙-!

대검이 고티어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판석 파편이 흙먼지와 함께 엉망진창으로 치솟는 가운데,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양반이 제일 신났거든."

"그게 무슨-?"

되묻던 고티어의 안광이 일순간 흔들렸다. 착지한 이안이 양손으로 자루를 고쳐 쥐며 힘껏 앞발을 내디디고 있었기 때문이다.

쒸아악-! 쩌어엉!

그대로 뿜어져 나온 대검의 넓적한 검면이 고티어의 전신을 후려쳤다.

고티어가 대포알처럼 튕겨 나갔다.

콰장창창- 콰르르르-

바닥에 한차례 튕긴 그가 뒤편의 건물 벽을 무너뜨리며 그 너머까지 뻗어 나갔다. 벽이 무너진 2층 높이의 건물이 통째로 허물어지는 와중에도, 고티어가 만들어내는 충돌음은 여전히 멀어지고 있었다.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듯 대검을 치켜든 이안이 그대로 검신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성문 앞에 선 나세르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만 놀란 듯 석상처럼 굳어진 채였다.

이안의 시선이 주저앉은 메브에 이어, 테사이아의 부축을 받고 있는 샬롯에게로 돌아갔다.

비로소 그의 입가에 옅은 쓴웃음이 스쳤다.

"전투 함성이 왜 나오나 했더니…."

중얼댄 그가 방패를 든 채 멍하니 선 필립의 눈을 마주 보았다.

"고생했다. 경을 챙겨라. 상태가 호전되면 따라오고."

"…예, 나리."

필립이 대답할 때쯤, 이안은 이미 저만치 앞까지 달려나가고 있었다.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당장 계속 싸우라는 듯이.

타타탓-!

무너져 내린 건물의 잔해를 박차며 솟구친 이안이, 그 너머를 눈에 담았다. 그 뒤편의 건물도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잔해 사이에 처박힌 고티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치켜든 군단장의 대검 표면에 푸른 빛이 서렸다.

콰과과과-

냉기의 궤적이 더해진 거대한 칼날이. 잔해를 박차며 일어서는 고티어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놈의 일그러진 안면 가리개가 위로 치켜 올라왔다.

"네 이놈-!"

일갈한 그가 오른손의 양손 검을 치켜들었다. 그의 머리 위로 날아들던 로브가 진언이 새겨진 안감을 드러내며 활짝 펼쳐졌다.

쩌저저적-

육각형을 그리며 이어 붙은 여러 개의 역장이 일제히 피어올랐다.

콰지지지직-!

대검이 그 한복판에 틀어박혔다. 눈부시게 명멸하는 역장에 균열이 일었다.

콰과과과과과-

그 위로 수많은 냉기의 칼날들이 쏟아져 내렸다. 균열이 번지던 역장이 삽시에 빛을 잃고 흩어졌다. 동시에 힘을 잃은 로브도 돌풍에 휩쓸려 날아갔다.

역장을 깨뜨린 이안이 그대로 고티어에게 떨어져 내렸다.

쩌어엉-!

머리 위에 교차한 양손검의 검날이 대검을 막아섰다. 일순간 동심원을 그리며 터져 나온 충격파가 일대의 잔해를 휩쓸었다. 고티어의 한쪽 무릎이 꺾였다.

하지만 대검을 막아선 검날은 부러지지도 금이 가지도 않았다. 단순히 검에 맺힌 신성력 덕분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안은 대검을 누른 팔에 더 힘을 주며 착지했다. 일그러진 안면 가리개 사이로, 황금빛으로 물든 눈이 선명해졌다.

놈을 마주 보며, 이안이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영광으로 생각해라. 네 죽음은, 백금룡도 아시게 될 테니까."

#228화

"웃기지… 마라…!"

고티어의 안광이 한순간 눈부시게 빛났다. 동시에 놈의 전신에서 신성의 장막이 확 피어오르며 그대로 명멸했다.

쩌어엉-!

충격파가 대검을 밀어내며 이안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럴 줄 알았다.

생각하며 튕겨 나가는 대검의 자루를 놔 버린 이안이 자세를 바짝 낮췄다. 빛의 폭발에 휩쓸려 사그라들던 전신의 붉은 신성력이 한순간 뜨겁게 타올랐다.

붕 떠오르던 그의 두 발이 다시 묵직하게 땅을 디뎠다.

콰과과-!

이안이 충격파를 거슬러 고티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안면 가리개 사이 새하얀 빛으로 뒤덮인 고티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 위로, 이안의 오른 주먹이 틀어박혔다.

빠각-!

놈의 고개가 뒤로 튕겨 나가듯 젖혀졌다. 머리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몸 전체가 뒤로 밀려났다.

내디뎠던 발을 박차 놈에게 달려든 이안이 득달같이 왼팔을 뻗었다.

터억-

손아귀가 고티어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뒤로 젖혔던 이안의 오른팔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쒸아아아악- 쩌어엉-!

흩어지는 신성의 잔재를 가르며 뻗어 나간 주먹이, 다시 고티어의 안면 가리개를 후려쳤다. 이번에는 비스듬하게 땅에 메다꽂듯 휘두른 채였다.

고티어의 머리와 어깨가 잔해 사이에 박히듯 처박혔다. 놈의 하반신이 위로 치솟는 가운데.

쩌저적-

투구를 땅에 깊숙이 찍어누른 이안이 비로소 다시 주먹을 들었다.

고티어의 안면 가리개는 주먹에 얻어맞은 부분이 움푹 함몰된 채였다. 그 사이로 흐릿하게 흔들리는 안광이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파치칫-

판금 갑옷 곳곳에 박힌 마석들이 일제히 명멸한 건 그 순간이었다.

이안의 불그스름한 눈동자에 파장이 번진 건 거의 동시였다.

쿠확-!

이안의 왼손 손아귀에서 마력의 파장이 터져 나왔다. 그의 왼손은 여전히 고티어의 팔을 움켜쥔 채였다.

치치칫-

무구에 흐르던 마력이 제멋대로 뒤엉켰다. 마석들이 발작적으로 점멸했다.

"...?!"

고티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력 역류라는 거다.

속으로 내뱉은 이안의 눈동자에는, 이미 잿빛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슈화아아악-!

이안의 전신으로 바람이 밀려들었다. 그리고는 치켜든 이안의 주먹 주위로 삽시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노랗고 붉은 신성의 잔재가 주먹 주위로 빨려들어 뒤엉켰다.

이안이 주먹을 내리쳤다.

카드드드득-!

바람 칼날을 휘감은 주먹이 고티어의 안면에 틀어박혔다. 놈의 전신에서 신성력이 번뜩이고, 이안의 주먹에서 터져 나온 돌풍이 주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안의 주먹 아래에서 더듬대는 목소리가 번졌다.

"마법… 사? 이것이… 네 본모습이었나…?"

거의 잔해 사이에 박혀버린 몰골이 되어서도, 고티어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이안은 대답 대신 놈의 안면에 박힌 주먹을 들었다.

"북부의 초인이자 백금룡의 대행자가… 마법사라니…!"

주먹에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안면 가리개가 딸려 올라왔다.

앞니가 부서지고 코가 부러진 고티어의 얼굴이 드러났다.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놈의 얼굴에는 오히려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샛노란 안광이 이상할 정도로 번뜩였다.

"내가… 옳았다…! 너는 지금까지 모두를 기만한-"

콰직-!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티어의 얼굴로 주먹이 틀어박혔다. 안면 가리개를 툭 날려버린 이안이 그대로 다시 주먹을 내리친 것이다.

미친놈이, 계속 뭐라는 거야.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주먹을 끝까지 내리찍었다.

고티어의 두개골에 금이 가는 감촉이 전해질 찰나.

솨- 아아아-!

주먹 사이로 눈 부신 빛이 새어 나왔다. 엄청난 양의 신성력이 고티어의 전신을 뒤덮었다. 놈의 흉갑 한복판에 새겨진 원이 찬란한 빛을 머금은 건, 말 그대로 찰나만에 일어난 변화였다.

이안의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시발…?'

눈을 치켜뜬 이안이 다급하게 양팔을 교차해 얼굴 앞을 가렸다.

쩌어어엉-!

고티어의 전신에서 신성의 기둥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

"...!"

눈부시게 치솟는 신성의 폭발에, 메브를 부축하던 필립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뒤이어 필립의 전신을 울렸다.

방패를 코앞까지 치켜든 필립이 천천히 눈을 떴다.

건물들이 무너지며 먼지가 치솟는 가운데, 거대한 빛의 기둥이 선명했다.

콰장창창-!

기둥이 솟은 반대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이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필립의 눈에, 치솟는 먼지와 건물의 잔해들이 들어왔다.

건물들이 박살 나 무너지면서 만들어진 먼지구름이 분명했다.

본 건 아니었지만, 필립은 저 건물들을 박살 낸 게 이안 임을 직감했다.

콰직-!

그때 옆의 대로에서 또다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깨를 들썩인 필립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로 구석에 커다랗고 긴 무언가가 비스듬하게 박혀 있었다.

이안이 사용하던 군단장의 대검.

폭발에 휩쓸려 날아온 모양이었다.

"설마… 나리가…?"

필립이 그제야 숨을 헐떡였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던 메브가 내뱉었다.

"이안이, 왜?"

"시, 신성의 기둥이 솟구쳤습니다. 나리와 샬롯을 덮친 것보다 훨씬 큰 폭발이요. 이안 나리가, 거기 휩쓸리신 것 같습니다…!"

"뭐라고…?"

되묻는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진 쩌렁쩌렁한 포효에 묻혔다.

이안이 아니었다.

번뜩 고개를 돌린 필립의 눈이, 이내 서서히 커졌다.

빛무리로 화해 반짝이며 흩어지는 신성 한복판. 비틀대며 일어서는 실루엣을 발견한 것이다.

"루 솔라여…."

고티어였다. 잦아드는 먼지구름 사이로 놈의 모습을 확인한 필립이 탄식했다.

놈의 전신 판금 갑옷에 박힌 마석들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번쩍였다. 흉갑 한복판의 원은 여전히 새하얗게 물들어 번쩍였다.

하지만 필립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고티어의 얼굴이었다.

투구가 부서진 듯 맨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피가 줄줄 흐르는 입과 으깨진 코. 하지만 가장 심상치 않은 건 눈이었다. 안구가 터진 듯 피칠갑을 한 눈꺼풀 사이에는, 대신 샛노란 빛만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거짓 선지자의 본모습을 밝혀냈도다. 기적을 흉내 내는 자는 결코 신의 사자가 될 수 없음이니…! 신조차 기만한 자를 벌할 수 있다면, 이 하찮은 목숨 따위는 얼마든지 불사를 수 있으리라…! 찬란한 빛 앞에 경배하라!"

그는 양손 검을 치켜든 채 쩌렁쩌렁 영문 모를 말을 소리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은 찬란하게 빛났다.

"여신이여… 대체 왜 저런 자에게 저토록 큰 은총을…?"

필립이 멍하니 중얼댔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깜빡이며, 메브가 읊조렸다.

"저자는 자신의 사명을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인 거다. 그 의지가 여신의 은총을 이끌어 낸 것이겠지. 그것이 광신에서 비롯된 것 일지라도…. 아마 저자는 이미 품을 수 있는 한계를 넘은…."

콰과과과-

그때, 도시 반대편에서 흙먼지가 치솟았다. 타오르는 불길 같은 붉은 궤적이 순식간에 골목을 가로질러 뻗어 나오고 있었다.

고티어의 고개가 다가오는 궤적 쪽으로 돌아갔다.

"아아… 이제야 명확하게 보이는구나…. 혼돈이여…."

그가 머리 위로 치켜든 검을 고쳐 쥐었다. 솟구친 신성이 검날을 뒤덮었다. 이안 쪽으로 몸을 돌리는 고티어의 모습은, 빛의 검을 움켜쥔 신의 화신처럼 보였다.

"어둠을 멸하는 것은 오로지 찬란한 빛뿐일지니…."

입꼬리를 괴상할 정도로 말아 올리고 있지만 않았다면.

"…빛이 있으라."

종소리처럼 울리는 한마디와 함께, 그가 검을 내리쳤다.

슈화아아악-

검에 맺혀 있던 빛이 일직선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소리 없는 충격파와 함께 뿜어져 나간 빛이 장벽처럼 일직선을 그리며 솟구쳤다.

"...!"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는데도, 필립의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눈부신 명멸이었다.

쿠르르르- 콰과과과과-

건물이 무너져 내리며 만들어내는 굉음 사이로, 심상치 않은 파공음이 뒤섞였다.

방패로 눈 앞을 가리고 있던 필립이, 눈물을 흘리며 간신히 눈꺼풀을 열었다.

"...!"

곧 필립의 눈이 커졌다.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빛의 장벽 너머, 푸른 섬광이 톱날처럼 삐죽삐죽한 호선을 그리며 뻗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립의 뇌리로 방금 일어났을 일련의 과정이 절로 그려졌다. 기척을 느낌과 동시에 본능적인 회피 도약. 그리고 추진력을 얻기 위해 내뿜은 엄정한 여신의 신성력.

콰과과과-

이안의 머리 위로 꼬리처럼 따라붙는 푸른 궤적이 고티어를 향해 뻗어 나갔다.

고티어가 왼손을 내뻗은 건 거의 동시였다.

슈화악-

놈의 앞으로 새하얀 빛의 장벽이 피어올랐다. 푸른 궤적이 그 위로 쏟아졌다.

카가가가가가-

눈부신 점멸이 이어졌다.

티르 엔의 신성력이 빛의 장막을 끝에서부터 가르고 있었다. 허공에서 몸을 휘돌린 이안이, 그 갈라진 틈을 타 넘으며 재차 도약했다.

투쟁의 축복을 받은 것만으로 가능한 움직임은 아닐 터였다. 전신을 감싸고 있던 바람이 그의 몸을 떠밀어 준 것이리라.

콰과과과-

어느새 잦아들기 시작한 푸른 궤적이 한순간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대로 고티어의 목덜미로 밀려들며 틀어박혔다.

카드드득-!

하지만 신성을 가득 품은 고티어의 판금 갑옷은, 엄정한 여신의 칼날로도 자를 수 없었다.

푸른 신성력은 그저 놈의 갑옷 표면만을 할퀴며 미끄러졌을 뿐이었다.

미련 없이 자루를 놔 버린 듯 반대쪽 땅에 처박힌 푸른 궤적이. 그대로 빙글빙글 돌며 튕겨 나갔다.

콰장창창-!

그리고 이안과 고티어가 충돌했다. 한데 뒤엉킨 둘의 모습이 잔해더미 너머로 사라졌다.

쩌어엉-!

곧 주위가 들썩일 정도의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또 한 번.

눈 부신 빛이 뒤이어 솟구쳤다. 쩌엉! 그리고 다시 한번.

"허…."

필립의 입이 비로소 멍하니 벌어졌다.

이미 신의 사도가 된 그의 눈에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투는 전혀 현실성이 없었다.

초인. 아니, 반신들 간의 전투라 해도 믿을 수 있으리라.

타타탓-

귓가로 발소리가 파고든 건 그때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넋을 놓고 서 있던 또 하나의 정화자, 나세르가 말들도 내팽개친 채 잔해더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던 필립이, 이윽고 내뱉었다.

"…아무래도, 저도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나도 곧 따라가마. 부디 조심하거라. 잘못 휘말렸다간 크게 다칠 테니."

내뱉은 메브가 필립의 어깨에 두른 팔을 풀었다. 그녀는 순간 비틀댔을 뿐 쓰러지지는 않았다.

"나리를 부탁합니다, 테사! 천천히들 따라오십쇼! 혹시 모를 불상사는 제가 어떻게든 막아 보겠습니다…!"

테사이아와 샬롯 쪽으로도 소리친 필립이 달려나갔다.

후들대는 두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면서.

***

콰직-!

고티어의 얼굴 앞에 피어났던 빛의 장막이 떨어진 주먹에 바스라 졌다.

이안의 양손은 이미 맨주먹이었다. 장갑이나 팔목 보호대 따위는, 그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죄다 부서진 후였다.

'슬슬 한계냐…?'

드러난 고티어의 얼굴을 노려보며, 이안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리찍었다.

콰앙-!

살과 살이 맞부딪친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굉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고티어의 얼굴은 으깨지지 않았다. 신성력이 그의 육체를 단단하게 유지 시켜 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영원하지는 않을 터였다.

"위대한… 빛을…."

고티어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지금 그가 중얼대는 말은 그저 무의식의 발현에 불과했다.

게임에서 보았던 맹신자들이 절로 떠올랐다. 설마 했는데 정말 중간에 돌아 버릴 줄이야.

일행들이 놈의 힘을 좀 빼놓지 않았다면, 그리고 카르하가 축복을 내리지 않았다면 훨씬 더 힘든 싸움이 되었을 터였다.

'어쨌든….'

이안이 다시 주먹을 들었다.

'…이젠 이놈들까지 때려잡을 수준이 됐단 거지.'

숨을 들이켠 이안의 주먹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어쨌건, 한시라도 빨리 끝장을 내야 했다.

'안 그러면-'

쩌저적-

육각형을 그리며 피어오른 역장이 고티어의 얼굴 앞을 뒤덮은 건 바로 그때였다.

심지어 여러 겹이었다.

"…경이 이기셨습니다."

잔해더미 위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세르.

뭐라는 거야, 시발.

이를 악 문 이안이 그대로 주먹을 내리쳤다.

쩌엉-!

하지만 그의 주먹은 역장을 두 겹 깨뜨렸을 뿐이었다. 그 아래 여전히 한 겹의 역장이 남아 있었다. 그마저도 이안이 주먹을 치켜들자 곧바로 다시 생성됐다.

"부디 멈춰 주십시오. 이안 경. 경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어진 목소리에, 이안이 비로소 홱 고개를 들었다.

"당장 이거나 치워."

"죄송합니다. 어쨌건, 제 동료이자 선배라서요."

내뱉으며 나세르가 다가왔다. 로브 안감이 황금빛으로 번쩍이고, 두건 아래로는 신성력을 머금은 안광이 아른거렸다.

"경이 타락자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러니 부디 멈춰 주십시오. 믿을 수 없으시다면, 무장을 전부 해제 하겠습니다."

빈말이 아닌 듯, 그의 로브 아래로 검집에 담긴 장검과 방패가 후두둑 떨어졌다. 이안의 인상이 더 구겨졌다.

"그건 알 바 아니니까, 당장 이거 치우라고. 지금 이자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나?"

"눈이 멀어버릴 만큼의 은총을 받으셨죠. 하지만 선배는 꽉 막힌 성격만큼이나 오래도록…?"

내뱉던 나세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여러 겹의 역장 너머, 심상치 않은 빛이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티어의 눈코입 모두가 새하얀 빛을 토하며 명멸하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의 엄청난 신성력.

"시발…! 역장 최대한 펼쳐!"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친 이안이 그대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전신에 푸른 마력 역장이 번졌다.

반사적으로 그의 말을 따르며 나세르도 따라 몸을 숙이는 가운데.

번- 쩍-!

고티어의 전신에서 섬광이 터졌다. 바닥에 엎드린 이안의 시야가 삽시에 새하얗게 물들었다.

역장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뜬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죽는다고…?'

생각하던 이안은, 곧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은커녕 아예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그저 의식만이 명료했고, 사방이 눈부시게 밝았다.

"...!?"

그리고 그 너머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229화

'루 솔라…?'

이안의 의식이 사방을 훑었다.

하지만 그저 일렁이는 빛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의 인지 능력으로는 그 이상을 꿰뚫어 보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어쨌건, 루 솔라가 그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분명했다.

그녀의 시선은 공허의 존재나 심지어 카르하와도 달랐다.

아주 따듯하고 부드러운 느낌. 심지어 어딘가 애처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떻게 느낄 수 있는 건지는, 이안 본인도 알 수 없었지만.

'뭐, 당신 뜻과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라 이거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사방이 더 밝아지더니, 시야 한복판에 사도 퀘스트가 떠올랐을 뿐이었다. 답을 대신하듯이.

물론 이안은 퀘스트를 거절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시선은 느껴질 때처럼 한 순간에 사라졌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빛이 찾아들었다.

"...!"

현실로 내팽개쳐진 것처럼 모든 감각이 되돌아왔다. 이안은 땅에 손을 짚은 채로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그의 전신에 불그스름한 수증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루 솔라의 신성에 중화되었던 카르하의 신성이 다시 전신으로 번졌다. 묘하게 화가 난 것 같은 열기였다.

숨을 거칠게 내쉬던 이안이 비틀대며 일어섰다.

이미 사방은 반짝이는 빛무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빛의 기둥도 역장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쓴웃음을 흘린 이안이 고티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놈의 시신은 검게 탄 숯덩이처럼 변해 있었다. 그 와중에도 걸치고 있던 장비들은 전부 멀쩡했다. 오히려 신성의 잔재를 머금고 빛나고 있어서, 검게 탄 시신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다소 멍한 눈으로 놈을 응시하던 이안은, 곧 자신의 레벨이 올랐음을 깨달았다.

자멸로 끝이 나긴 했어도, 고티어를 죽인 경험치가 들어온 것이다.

생각보다도 많이.

'…그거면 됐지, 뭐.'

그가 짧게 입맛을 다실 찰나.

"이럴 수가… 빛이여…."

납작 엎드려 있던 나세르가 탄식하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것이 당신의 진심이셨습니까…? 이 어리석은 종을 부디 용서하소서…."

중얼대며 무릎을 꿇은 그가, 그대로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며 눈을 감았다. 나지막한 기도문이 중언부언 이어졌다.

나랑 비슷한 걸 본 건가.

이안은 잠시 나세르를 내려다 보았다.

두건이 벗겨지면서 그는 얼굴을 고스란이 드러낸 채였다.

옅은 갈색 피부. 검은색에 가까운 반곱슬 머릿결. 피부색과 달리 얇은 입술을 보니, 반투르 인과 제국인의 혼혈인 모양이었다.

"나리…! 나리! 무사하십니까? 대답해 주십쇼!"

잔해의 언덕 너머에서 필립의 외침이 이어졌다. 다급한 발소리.

일대는 고티어를 중심으로 작은 구덩이가 파인 것 같은 형태였다. 무너지고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광경이었다.

이안이 걸음을 옮기며 내뱉었다.

"무사해. 일단은."

그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나세르는 알아채지도 못한 것 같았다. 그저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것처럼 기도를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새끼도 돌아버리는 거 아닌가.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손을 슬쩍 들었다. 불그스름한 신성력이 아직도 맺혀 있었다.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정말이지 심상치 않은…. 음…?"

언덕 위로 올라서며 내뱉던 필립이 말을 멈췄다. 이안과 옆에 주저앉아 기도 중인 나세르를 눈에 담은 그가 이내 덧붙였다.

"이건 또 무슨 상황입니까?"

"무슨 상황이긴."

심드렁하게 내뱉은 이안이, 그대로 손날을 나세르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쳤다.

"...!"

으직, 충격에 고개를 치켜든 나세르가 그대로 널브러졌다. 열린 눈꺼풀 사이, 옅은 갈색 눈동자가 탁 풀린 채 위로 돌아갔다.

"아, 아니, 나리…!"

필립이 눈을 치켜떴다.

"아무리 그래도 기도 중인 자를 죽이시다니요…! 그건 이교도나 야만인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그럼 난 상관없겠네. 어떤 의미론, 둘 다 해당되니까. 게다가…."

불경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이안이, 다가오는 필립을 돌아보며 턱을 까딱였다.

"안 죽였어."

아마도.

몸을 숙여 나세르의 목덜미에 손을 얹어본 필립이,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네요. 다행히도."

과연 그게 다행일까?

속으로만 덧붙이며, 이안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와 얼굴에 묻은 재를 터는 손짓에 불길 같은 신성력이 일렁였다. 투쟁의 축복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아마 카르하가 보기엔 전투의 마무리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리라.

'마음은 알겠는데. 뭐, 이미 죽은 놈을 다시 살릴 순 없잖소. 어쨌든 이겼고.'

이안이 입맛을 다시는 사이, 나세르를 내려다보던 필립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어려 보이는군요. 저랑 나이가 그렇게 차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의외입니다. 교단의 정화자는 대부분 나이가 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이런 녀석이 끝까지 살아남으면, 저런 놈이 되나 보지."

재를 터는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이안이 대답했다. 숯덩이처럼 변한 고티어를 눈에 담은 필립이 이윽고 탄식했다.

"도무지 여신의 뜻을 모르겠군요. 아무리 교리를 따르며 어둠과 맞서는 삶을 산다 해도, 저런 편협한 자에게 그토록 큰 은총을 내려 주시다니요."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

"예…?"

필립이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손바닥을 탁탁 털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교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신성을 내려 줄 수밖에 없으신 걸지도."

"그런… 그건 본말이 전도된 격이잖습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안은 방금 본 환영을 떠올리며 어깨를 까딱였다.

"아님 말고. 그런 생각이 들었을 분이야. 궁금하면 직접 답을 구해라. 여신의 사도는 내가 아니라 너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공간에 손을 넣어 봉인함을 꺼낸 이안이,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어깨랑 팔에 붕대나 감아라.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아, 이거요?"

필립이 머쓱하게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 보았다.

강철 장갑과 팔목 보호대 사이로 드러난 누비옷이 검게 타들어 눌어붙은 상태였다. 아까 고티어의 뇌전 일격을 막아낸 흔적이었다.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습니다. 거기다 이래 봬도 신의 사도잖아요? 흉은 지겠지만, 거뜬하게 회복될 겁니다."

"알았으니까, 당장 벗어서 붕대나 감아."

"예. 나리."

비로소 마음이 놓인 듯 미소 지은 필립이 봉인함을 열었다.

그가 건넨 가죽 수통을 받아든 이안이 곧바로 입에 가져갔다.

고개를 젖힌 덕분에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어쨌건 고티어가 뿌려댄 신성이 이 일대에도 도움이 된 게 분명했다.

잿빛이던 먹구름은 도시를 중심으로 탈색이라도 한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 사이로 얼핏 푸른 하늘과 햇빛까지 비췄다.

'이런데 퀘스트 하나 안 주다니.'

수통을 툭 옆에 내려놓은 이안이 다시 일어섰다. 또 다른 발소리들이 요란하게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일 터였다.

"끝난 거 맞지? 또 막 뭐 터지고 그러는 거 아니지? 눈 아프단 말야."

잔해더미 위로 고개를 내민 테사이아가 물었다. 대답 대신 실소를 흘린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올라서는 메브가 눈에 들어왔다.

"눈은 괜찮소?"

"다행히. 온전히 돌아오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긴 하다만. 어쨌건 보이긴 하는구나."

메브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은 뒤따르는 샬롯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양손 검을 질질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군단장의 대검이었다.

어디로 날아갔나 했더니.

이안과 눈이 마주친 샬롯이 말했다.

"심상치 않은 섬광이었는데. 너야말로 괜찮은 거냐?"

"뭐, 보다시피."

너도 썩 멀쩡해 보이고.

샬롯의 전신에는 아직도 흐릿한 붉은 신성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그녀가 대검을 든 것도 그래서일 터였다.

미로 저택에서의 기억이 설핏 뇌리를 스쳤다. 아마도 그때, 카르하는 샬롯을 전사로 인정한 것이리라.

인간의 신은 이종족에게는 축복을 내리지 않는다더니.

'은근히 편견 없는 양반이라니까. 야만인이라 그런가.'

그때, 손과 팔목에 대강 붕대질을 끝낸 필립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양손에 새 붕대를 움켜쥔 채 메브에게 달려갔다.

이안도 다가오는 그녀를 다시 눈에 담았다.

메브의 얼굴에는 새로 긁힌 흔적들이 생겨나 있었다. 한쪽 턱에 난 상처를 가로지르고 있어서, 묘하게 잘 어울렸다. 훤히 드러난 양 팔뚝 곳곳에도 마찬가지로 칼날에 스친 흔적과 불에 탄 흔적들이 여럿이었다.

그녀의 제국제 전신 판금 갑옷은, 이제 몇몇 부위만 겨우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이안의 입꼬리가 문득 말려 올라갔다.

"그래… 덕분에 돈은 굳었군."

"돈이 굳다니?"

필립이 요란을 떨며 붕대를 감아주기 시작한 가운데, 다가선 메브가 눈을 깜빡였다.

"경의 장비 말이오."

이안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바꿀 게 생겼잖소. 지금보다 훨씬 더 그럴듯하게."

"...!

그제야 눈을 치켜뜬 메브가 고개를 돌렸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테사이아 너머, 고티어의 시신이 그녀의 눈에 담겼다.

빛을 잃은 마석들이 곳곳에 박힌 육중한 전신 판금 갑옷.

"…아무리 그래도, 교단 정화자의 유품을 노략하는 건-"

"경이 안 쓰셔도 어차피 챙길 거요. 남김없이. 게다가 저건 내 전리품이니, 어떻게 나눠 줄지도 내 마음이지."

"...."

"제가 보기에도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메브의 반대쪽 팔을 천으로 닦으며, 필립이 끼어들었다. 메브의 시선을 받은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변방으로 가시게 될 테니까요. 거길 허름한 장비만 걸치고 누비신다면, 전 아마 매일 나리를 걱정하게 될 겁니다. 대교회에 있더라도요."

말 잘하네, 새끼.

피식 웃은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인 메브가, 이내 웅얼댔다.

"그래도… 전리품을 내가 다 받는 건… 마음이 편치 않다만."

"다 준다고 하진 않았소만."

"…아, 그렇군."

"일단 갑옷은 경에게 드리겠단 얘기지. 나머지는 나눠 가질 거요. 물론, 내가 필요한 걸 먼저 챙긴 후에."

"정말? 그럼 나도 가지고 싶은 거 봐 놔도 돼?"

고티어의 시체를 관찰하던 테사이아가 번쩍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이안이 코로 웃으며 대답했다.

"네 순서는 제일 마지막이다, 테사. 이유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제일 한 게 없단 얘기지? 상관없어. 뭐든 나눠 준다는데."

"코피도 닦고."

"응."

팔로 코 아래를 대충 문지른 테사이아가, 곧이어 고티어의 머리통을 발로 차 버렸다.

놈의 머리가 재가 되어 흩날렸다.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녀가 갑옷 곳곳을 발로 차 대기 시작했다. 장비만 남겨 두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놈은 왜 살려 뒀지?"

옆에서 찢어진 손아귀에 붕대를 감던 샬롯이 물었다. 널브러진 나세르를 빤히 내려다보는 채였다.

손을 뻗어 그녀가 묶은 붕대를 더 꽉 조여 주며 이안이 대답했다.

"배후가 누군지는 캐내야지. 보아하니 처음부터 날 노리고 보내진 놈들 같은데."

"그렇군…. 그렇다면, 내 심문 기술이 필요한 시점 같은데."

"나야 상관없다만…."

붕대의 매듭까지 깔끔하게 지어 준 이안이 샬롯의 눈을 마주 보았다.

"괜찮겠냐? 어쨌건, 이 녀석도 신의 사도일 텐데."

"네 목숨을 노린 이상 타락자나 다를 바 없지. 염려 마라."

"그래, 뭐. 그렇다면야."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나세르를 발로 툭 차서 바로 눕혔다.

로브 사이로 녀석이 걸친 판금 갑옷이 드러났다.

고티어의 것과는 또 다르게 생긴 미끈한 갑옷이었다. 곳곳에 박힌 마석의 위치도 달랐다. 아마 내장된 주문 회로도 다르리라.

하긴. 통일성은 걸친 로브만으로도 충분할 터였다.

퀘스트가 없다고 투덜댈 게 아니었군. 이거, 간만의 월척인데.

진언이 새겨진 로브의 안감까지 눈에 담은 이안이 미소 지었다.

"일단은 싹 다 벗겨. 이놈이 걸친 것도 전부 우리 거니까."

"기꺼이. 그리고? 그 후엔?"

샬롯이 묘한 기대가 묻어나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턱을 까딱였다.

"네 주특기를 발휘해야지. 이놈도 신의 은총을 받았을 텐데, 허술하게 결박할 순 없잖아?"

"물론이지."

나세르를 내려다보는 샬롯의 입가에 송곳니가 설핏 드러났다.

잡은 쥐를 눈앞에 둔 고양이 같은 미소.

"신의 화신이 오더라도 내 결박을 풀진 못할 거다."

"하는 김에 감시도 네가 해. 깨어나면 바로 심문할 거니까."

"그러지."

샬롯이 나세르 옆에 주저앉았다. 그사이 메브의 모든 처치를 끝낸 필립이 입맛을 다셨다.

"무장을 해제시키고 결박하는 건 저도 동의합니다만…. 샬롯의 심문 방식을 허락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 있을까요?"

그의 시선이 눈을 까뒤집고 혼절한 나세르를 훑었다.

"어쨌든 이 자는 항복했고, 저희에게 칼을 들이밀지도 않았는데요."

"성기사라고 감싸는 거냐?"

그의 로브를 풀어헤치던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화들짝 고개를 저은 필립이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

"뭐, 대화로 풀어갈 기회를 한 번은 주도록 하지. 동정심 가지지 마라. 어차피 죽일 놈인데."

"그… 건 대화를 나눠본 후에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요? 안 그렇습니까, 나리?"

이안을 돌아본 필립이 이내 멈칫하고는 내뱉었다.

"…죽이실 생각이시군요."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필립과 메브를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마음이 바뀔 수도 있어. 하지만 어지간하면 죽일 거다. 이유는 말 할 필요도 없겠지. 어떻게 결정하든 내 마음이니까, 반박은 받지 않을 거야. 다만, 둘의 눈에 보이지는 않게 처리하도록 하지."

"자비롭기 그지 없군…."

샬롯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어조로 중얼댔다.

입맛을 다신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메브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알았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녀도 내키지 않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이안의 입장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을 터였다.

이안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경은 그렇다 치고, 너도 장비 상태를 점검해라. 남는 갑옷 하나는 해체해서 나눠 가질 거니까."

이어진 말에 필립이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나리가 쓰시는 게 아니라요?"

"난 전신에 판금을 두르는 건 갑갑해. 보아하니 이 녀석은 방패도 있던데. 그건 일단 네가 가져라."

"나리…! 아, 아니지. 루 솔라여, 용서하소서. 더 의미 있게 쓰겠나이다."

화색을 넘어 감격한 표정이 되었떤 필립이 황급히 기도를 올렸다.

물론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한 채였다.

용병이 더 어울리는 놈이라니까.

코웃음을 친 이안이 덧붙였다.

"기도 끝내면 성문 쪽으로 가라. 이놈들, 말을 타고 왔잖아."

"...!"

번쩍 눈을 뜬 필립이 소리쳤다.

"마차를 타고 갈 수 있겠군요!"

#2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