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굳어진 와중에도, 루스의 눈은 그들의 모습을 충실하게 담아냈다.
빈틈없이 몸을 가린, 본래는 순백이었을 빛 바랜 로브. 하지만 그 한복판을 크게 가르며 새겨진 황금색 원은 여전히 선명했다.
둘 다 두건을 깊이 눌러 쓴 덕분에, 하관만이 간신히 드러났다.
그 밑으로 넓고 두툼하게 이어진 어깨선은, 로브 아래에 육중한 갑옷을 걸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케 했다. 루스가 방금 떠올렸던 이름을 되새기게 하기에도, 충분한 모습이었다.
'정말, 정화자인가…?'
물론, 속단할 수는 없었다. 그저 교단의 성전사나 성기사일지도.
절그럭. 절그럭.
장내로 들어서는 둘의 육중한 발소리가, 루스의 정신을 일깨웠다. 애써 침착한 미소를 입가에 걸면서, 루스가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었다.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둘이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두건 아래에서 낮은 목소리가 번졌다. 둘 다 남자였다. 턱수염으로 보아 한 명은 중년이었고, 다른 한쪽은 청년 같았다.
"임시로 사제직을 맡은… 루스입니다. 두 분은…."
조심스럽게 덧붙인 루스가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루스는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정화자들은 교단 내에서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밝히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로브를 걸친 채 사제의 물음에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정체를 밝힌 것과 다름없었다.
잠깐의 적막 끝에, 중년의 정화자가 입을 열었다.
"타락자들이 이곳 교회에서 저주받은 의식을 벌였다 들었소. 사실이오?"
"예. 사실… 입니다."
조금 목이 메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루스는 단상 위의 신상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 그러나 의식은 많은 이들의 용기와 희생 앞에 저지되었으며, 찬란한 여신의 가호가 델라 루의 신상을 굽어살피셨습니다. 도시에 깃든 어둠은, 모두 물러났습니다."
"...."
중년 정화자가 고개를 들어 신상을 바라보았다.
두건 아래로 턱수염과 콧날, 서늘한 눈동자가 설핏 드러났다. 그의 눈동자에 막을 씌운 것 같은 황금빛이 스친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루스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는 사이. 뒤에 선 청년 정화자가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대문으로 걸어간 그가, 곧바로 문에 빗장을 걸었다.
철컹-
둔탁한 소리가 번지는 가운데, 빈 의자에 걸터앉은 중년 정화자가 내뱉었다.
"더 자세히 설명해 보시오."
"...."
닫힌 문을 바라보며 굳어 있던 루스의 눈에, 일순간 갈등이 스쳤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에 대한 갈등이었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자리를 피하는 것도.
그런다면 그저 얼굴을 붉히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터였기 때문이다.
교단의 정화자는, 타락자로 판명된 사제들을 즉결 심판할 권리가 있었다. 심판은 물론 사형이며, 그 정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끔찍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고 들었다.
물론 오판으로 밝혀질 경우에는 자격이 박탈되며, 말단 성전사로 여생을 보내게 된다고는 하지만.
그런 법이 제대로 지켜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타락자로 밝혀진 사제들이 그에게 해 준 이야기였다. 지금 와 돌이켜 보면, 그들은 교단의 눈에 띄는 것을 늘 조심하고 있었다.
그러니 정화자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만큼은 거짓이 아니었으리라.
"루스 사제?"
"예.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루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적 갈등과 달리, 그의 설명은 간소하고 담백했다.
"…그게 끝이오? 백작과 백작의 귀빈, 그의 기사들. 그리고 병사들이 의식을 막아내고 어둠을 몰아냈다?"
어쨌건 이들을 믿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예고 없이 찾아와 도시의 일을 캐묻는 중앙의 정화자들이라니.
과거라면 의심 없이 협조했겠지만, 교단의 이면을 본 지금은 아니었다.
모든 걸 이야기 하는 건, 이들의 진짜 목적을 알아내고 난 이후가 되어도 늦지 않으리라.
중년 정화자의 물음에, 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찬란한 여신과 풍요로운 여신이, 그들을 가호해 주셨지요."
"...."
중년 성기사가 입을 다무는 가운데, 어느새 그의 뒤에 서 있던 청년 정화자가 가만히 루스를 바라보았다.
두건 아래로 설핏 드러난 그의 눈빛이 서늘했다.
"거짓말이 서투르시군요."
그가 내뱉은 찰나, 중년 정화자가 일어섰다. 순간 숨을 멈춘 루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두건 아래로 심연이 펼쳐진 듯했다.
"타락자들은 그렇게 물리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오. 오직 그들과 싸우도록 훈련받은 자들만이 가능하지. 혹은, 신의 선택을 받았거나."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은 중년 정화자가, 한차례 숨을 들이쉬고는 덧붙였다.
"피처럼 붉은 신성을 휘두르는 성기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었소. 왜 그런 부분을 빠뜨렸지?"
"…백작의 귀빈들 중 하나가 바로 그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교회에 있었으니까요. 저를 구한 건 전혀 다른 분이셨죠."
"흑안 흑발에, 검의 달인이었나?"
"그… 랬습니다만. 어떻게 아셨습니까?"
입술 끝을 슬쩍 말아 올린 중년 정화자가 중얼댔다.
"…역시. 제대로 찾아 왔군."
루스의 미간이 꿈틀댔다. 이들의 목표가 이반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대답하시오, 사제. 이안 호프는, 어디로 갔소?"
"...?"
하지만 이어진 중년 정화자의 말은, 다시 한번 루스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안 호프라니요? 그게 누구입니까?"
"헛소리 마시오, 사제. 방금 직접 그자를 만났다지 않았소."
"저를 구한 건 이안 호프가 아니라, 이반 경이셨습니다."
"이반…?"
멈칫한 중년 정화자가, 이윽고 덧붙였다.
"그 백작의 귀빈이라는 자들에 대해, 아는 대로 털어 놓으시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원로 요정인 텐시아 아이나스 공과, 그 분을 모시는 성기사들 이라는 것 밖에는요."
"아이나스…? 아이나스 가의 원로가, 왜?"
이제는 중년 정화자의 목소리에도 의아함이 묻어 나왔다.
그의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진 건 그때였다.
"…글루미르에서 함께 있었다던 정체 모를 요정. 그게 아이나스가의 원로였던 모양이군요. 맞춰지지 않던 한 조각이었는데. 이제야 확실해 졌어요."
중년 정화자의 시선을 받은 그가 말을 이었다.
"대리인을 찾은 겁니다. 자신의 정체를 감춰줄."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원로의 뒤에 숨어, 다른 사람인 척하고 있는 것인가. 과연, 거짓 선지자 다운 짓이군."
이어진 둘의 대화는 루스를 굳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반이 남긴 마지막 말이 떠오른 것이다. 그게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속인 걸 뜻하는 것이었다면.
"짐작가는 게 있으신 모양이군."
어느새 다시 루스를 바라보던 중년 정화자가 내뱉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루스가 입을 열었다.
"대체, 그분의 진짜 정체는 무엇입니까? 무엇이기에, 정화자들께서 그분을 찾으시는 거지요?"
"이안 호프. 출생은 불명이며, 변방의 용병으로 활동하던 자이지. 흑안 흑발에 검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북부 야만인들의 전사신과 엄정한 여신의 총애를 받는다더군."
"카르하와… 티르 엔의…? 서, 설마."
문득 뇌리에 떠오른 생각에, 루스가 눈을 치켜떴다.
"지금 그분이, 북부의 용살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게도 알려져 있지. 대외적으로는."
"루 솔라, 맙소사…!"
루스의 입에서 비로소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눈에는 커다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이반, 아니 이안에 가지고 있던 의문들이 단박에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그 엄청난 전투력도. 홀로 타락자들의 한복판으로 향하던 영웅적인 면모와, 델라 루의 총애를 받던 그 모습까지.
어쨌건 그의 반응이, 중년 정화자의 마음에는 들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가 한층 더 싸늘해진 목소리로 씹어 뱉었다.
"하지만 그 실체는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르지. 그는 백금룡이 만들어낸 거짓 선지자이며, 어둠을 삼키고 혼돈을 낳는 자이니."
"백금…? 교단의 성자께서, 왜 거짓 선지자를 만든단 말씀이십니까?"
"그 괴물이 성자라 불리는 건 신성하거나 명예로워서가 아니오. 놈은 수많은 동족을 상잔한 살육자이자, 인간 위에 군림하던 폭군이니. 그럼에도 찬란한 여신께선 자비롭게도, 놈에게 성자라는 이름의 재갈만을 물리셨지."
"...."
"그러니 놈은, 자신을 속박하는 빛이라는 족쇄를 벗어 던지고 싶을 것이오. 대륙을 어둠으로 뒤덮어서. 피에 굶주린 본모습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도록."
루스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멍하니 정화자를 바라보던 그가 간신히 내뱉었다.
"하지만 그분은… 제가 보는 앞에서 공허의 존재들을 물리치고 도시를 구원하신…."
"그건 구원을 위한 행동이 아니오. 어둠과 혼돈은 그자의 힘이 되지. 그자는 이미 마검을 손에 넣었으며, 암흑 성물의 주인이기도 하니. 그렇기에 빛을 가져오는 사도처럼 보이나, 어둠과 혼란만을 낳는 것이오."
중년 정화자가 고개를 숙였다. 두건 아래로 드러난 건조한 눈이, 더 가까이에서 루스를 응시했다.
"그자가 거쳐 간 모든 곳은 빠짐없이 어둠에 물들었으며, 그가 떠난 뒤에는 더 큰 혼란에 휩싸였소.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조차, 그가 만들어 낸 일의 결과물이오. 과연, 이 모든 것이 우연 같소?"
"...."
"다시 묻겠소. 이안 호프와 그의 일당들은, 어디로 갔지?"
루스는 이안과 필립, 메브를 떠올렸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엉키는 느낌이었다.
이안이 사용하던 검. 그건 루스가 보기에도 분명히 마검이었으니까. 게다가 그가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속인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 이들의 말처럼, 그는 빛을 참칭하는 거짓 구원자이자 혼돈을 낳는 자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순간 루스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오른 건, 어둠 속에서 그를 마주 보던 종자의 눈이었다.
두려움에 흔들리면서도, 끝끝내 그걸 이겨내려 안간힘을 쓰던 갈색 눈. 그 눈빛만큼은 결코 거짓일 수 없었다.
그를 살리려 안간힘을 쓰던 그 등도. 그리고, 잿더미 사이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일어나던 이안의 모습 역시.
'…나는 이미, 혼돈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건지도.'
귀 기울여서는 안 되는 속삭임. 내심 필립의 말을 뇌까린 루스는, 비로소 결정을 내렸다.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정화자님. 하지만, 그들이 어디로 간 건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본 것을 믿기로.
"그들은 자신들의 행선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낸 적이 없으며, 저 역시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목숨과 도시를 구원한 은인으로 대우했을 뿐이죠. 그리고 그분들을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나셨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
두건 아래의 눈이, 루스의 눈을 뚫을 듯 응시했다. 중년 정화자의 눈동자에 황금빛이 아른댈 찰나.
"거짓말이 아닌 것 같군요. 게다가 이분은, 타락하지도 않았고요."
뒤에 선 청년 정화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옆으로 한 걸음을 내디딘 그가,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 있는 루스를 바라보았다.
"사제님의 품에서 찬란한 여신의 은총이 번지는 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선배? 이분은 그저…."
설핏 드러난 그의 눈매가 휘어졌다.
"속았을 뿐인 겁니다. 다른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
중년 정화자가 시선을 돌리는 가운데, 여전히 루스를 응시하며 청년 정화자가 속삭였다.
"사제님. 만에 하나라도 아직 말씀하지 않으신 게 있다면-"
철컥, 철컥.
닫혀 있던 대문이 흔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흔들림은 곧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두 정화자들이 뒤를 돌아보는 가운데, 문 너머에서 우렁찬 외침이 이어졌다.
"당장 교회의 문을 여시오! 드네로브의 정당한 지배자이신 모르간 웨스트우드 백작 각하의 명이오!"
"...."
서로를 돌아본 것도 잠시. 곧 청년 정화자가 걸음을 옮겼다. 그가 빗장을 풀자, 문이 곧바로 벌컥 열렸다.
"...!"
뒤에 선 루스의 눈이 커졌다. 교회의 계단 아래로 무장한 병사들과 쇠스랑을 든 주민들이 잔뜩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끌고 대문 앞에 선 건, 웨스트우드 백작과 가신들이었다.
"호오…."
청년 정화자가 탄성을 흘리는 가운데, 중년 정화자가 문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내뱉었다.
"아무리 이 땅의 정당한 통치자라 하더라도, 교단 내부의 일에 간섭할 권리는 없습니다. 백작."
"평소라면 그렇겠지."
그를 마주 본 백작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타락한 사제들이 내 땅을 더럽힌 지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았소. 그래서 나는 신원이 검증되지 않은 그 어떤 외부의 사제도 믿지 않소. 대교회에서 나온 이들이라 해도 예외가 될 수는 없지."
"불경한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군. 우리가 누구인지는 아시오?"
"모르오. 알고 싶지도 않고."
칼같이 말을 자른 백작이,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신원을 알 수 없는 외부인들이 도시에 하나 남은 신실한 사제와 함께 있으며, 찬란한 여신과 풍요로운 여신을 모신 전당을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지. 내 허락도 없이."
"목표가 아니기에 놓아두었을 뿐, 아직 귀하의 무고함이 밝혀진 것은 아니오, 백작. 타락자들은 늘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세력을 키우는 법이니."
중년 정화자가 서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분을 억누르듯, 두건 아래로 황금빛 광채가 아른거렸다.
백작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나는 이미 모든 일을 기록한 서신을 대교회에 보냈소. 내게 죄가 있다면, 교단의 조사단이 밝혀낼 것이오. 당신들이 아니라."
"...."
중년 정화자와 백작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건, 그의 옆에 선 청년 정화자였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군요. 백작 각하. 우리는 그저, 누군가의 행방을 물으러 왔을 뿐입니다. 이곳에 머물렀던 텐시아 아이나스 공의 행방을요."
"아이나스 공? 그들은 닷새 전에 이 도시를 떠났소. 또한 그들의 목적지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들은 바가 없지.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담담하게 내뱉은 백작이 병사들 쪽으로 턱짓했다. 병사들과 그들의 뒤에 선 주민들이 길을 트는 가운데, 백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이만 떠나시오.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비극을 낳고자 이곳에 온 것으로 간주할 것이오."
"…이런."
이윽고 짧게 혀를 찬 정화자가, 옆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서부 촌구석이라고 얕보면 안 되겠군요. 못 당하겠는데요."
#211화
동의하듯 짧게 혀를 찬 중년 정화자가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작의 앞을 느릿느릿 지나치며, 그가 덧붙였다.
"이 도시에 여죄가 없기를 바라시오. 백작. 그렇지 않다면 다시 나를 만나게 될 테니.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대화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오."
"염려 마시오. 죄가 있다면, 기꺼이 벌을 받을 것이니."
백작의 무덤덤한 대답을 등진 채, 두 정화자가 계단을 내려갔다.
길을 튼 병사와 주민들이, 그들이 지나치자 다시 틈을 메우며 모여들었다. 백작의 시선이 예배당 쪽으로 돌아갔다.
"괜찮으신가?"
"예… 덕분에. 감사합니다."
문으로 다가오며 루스가 고개를 숙였다. 곧 백작의 눈을 마주 본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분들께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반 경이…."
"그만."
백작이 말을 잘랐다. 입을 다문 루스의 눈매가 이내 꿈틀댔다. 백작이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건조하게 웃음 지은 백작이 덧붙였다.
"자세한 얘기는, 내 집에서 단둘이 나누도록 합시다. 서로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군."
"…예. 그런데, 교단에 서신은 언제 보내셨습니까?"
"안 보냈소. 거짓말이었지."
"예…?!"
루스의 눈이 다시 커졌다. 소리 없이 콧방귀를 뀐 백작이, 인파를 뚫고 멀어지는 정화자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더 미룰 수 없겠군."
저들의 귀에 들어갔다면 당장 칼을 뽑아 들고 달려 왔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백작의 목소리는 정화자들의 귀에 닿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익숙하지 않은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말을 묶어둔 성문으로 걸음을 재촉할 따름이었다.
청년 정화자가 내뱉은 건, 주민들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됐을 때였다.
"적어도 서부에선, 교단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겠군요. 앞으로도."
"진작 서부 지부를 뒤엎었어야 했다. 평화에 젖은 돼지 새끼들…."
혀를 찬 중년 정화자가 곧 씹어 뱉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이 땅의 불경한 자들도, 그동안 우리가 어떤 싸움을 이어 왔는지 알게 될 테니."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둠과 싸워온 자였다. 교단의 다른 정화자와 성전사들이 그러했듯이.
그런 이들의 결말은 둘뿐이었다. 어둠에 물들거나, 더더욱 빛에 의지하거나. 그는 후자였다. 그렇기에 찬란한 빛에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 대한 실망과 혐오도,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겠지."
청년 정화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선배의 속내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이윽고 읊조렸다.
"아까 그 사제도 그렇고. 백작도 분명 뭔가 아는 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절대 말하지 않을 게 분명했어요. 아마도 그자가, 저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이겠죠."
"...."
중년 정화자가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넌, 아직도 그자가 정말 신의 선택을 받은 구원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청년의 입가에 옅은 호선이 스쳤다.
"대주교의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자를 죽이러 가는 게 아닙니다. 그를 처단하는 건, 그가 정말 빛의 선택을 받은 참된 용사인지 확인한 후가 되어도 늦지 않습니다. 저를 함께 보내신 건 아마도 그래서겠지요. 그러니 저는, 제 역할을 다할 겁니다."
"…현명한 자는 보지 않아도 믿으나, 어리석은 자는 보아야만 믿는 법이지. 그자의 본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나세르. 그리고 그 순간이 오면, 그자의 목을 베는 건 네가 될 것이야."
"그자가 정말 선지자의 탈을 쓴 혼돈의 첨병이라면, 기꺼이."
대답하며 앞서 걸어간 청년, 나세르가 곧 성문에 묶어 둔 말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먼저 안장에 오른 중년 정화자가 내뱉었다.
"교단에 매를 날려라. 아이나스, 그 역겨운 귀쟁이들에게 연락을 넣으라고 해. 텐시아라는 원로가 왜 관련도 없는 서부로 향하는 전지, 그 이유를 밝히라고."
"예. 용살자와 관련된 일이라 첨언하면, 빠르게 처리될 겁니다."
대답하며 말에 올라탄 나세르가 덧붙였다.
"대주교와 본단에도 연락을 넣겠습니다. 우리가 그를 찾았다고."
"...."
중년 정화자가 앞서 나아갔다.
그 뒤를 따르며, 나세르가 말을 이었다.
"해서, 이제 이제 어쩌실 겁니까? 지원을 기다리실 겁니까?"
"…아니. 그때는 늦다. 우리가 잡아야 해."
중년 정화자의 시선이 성문 너머로 드러난 풍경을 훑었다.
"닷새 전에 떠났댔지. 방향만 제대로 잡는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거다."
"그럼 어디로 가실 겁니까? 테센? 라클리프?"
"…빛이 인도하는 곳으로."
읊조린 그의 백마가 앞서 나아갔다. 그림자가 드리운 듯 어두운, 새카만 들판 너머를 향해서.
***
"테센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산만 넘으면 곧 도시가 나올 거예요."
마부석에서 필립이 말했다.
마차 천장에 누워 밤하늘을 응시하던 이안이 느긋하게 상반신을 일으키는 사이.
마석등으로 지도를 비춰 보던 필립이 덧붙였다.
"이번엔 확실할 겁니다. …아마도요."
"누가 뭐래?"
"하하. 괜히 찔려서요."
필립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이러는 건, 이미 한 차례 길을 잘못 든 전적이 있어서였다.
덕분에 길을 조금 돌아가게 되면서, 일행은 예상보다 하루쯤 늦게 테센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필립을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초행길이기도 한 데다, 이안이 보기에 진짜 잘못은 루스가 줬다는 저 낡아빠진 지도에 있었다.
저건 축척은커녕 애초에 길과 지형의 형태마저 틀려먹은, 현대인인 이안의 관점에선 지도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림 낙서였다.
사실 지금까지 저딴 것들로 길을 잘만 찾은 필립이 오히려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위 환경의 변화도 길을 찾기 더 어렵게 했다.
말라 죽거나 휴지기에 들어간 농작지나 텅 빈 농막 촌을 지날 때는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들판과 숲으로 접어들면서, 풍경이 본격적으로 기괴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드륵, 마부석 뒤의 간이 창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슬쩍 얼굴을 들이민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그래서, 수도원까진 얼마나 남은 건데?"
"테센시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으니까…."
지도를 잠시 가늠한 필립이 이내 덧붙였다.
"아무리 늦어도 이틀 반나절이면 될 겁니다. 저 산만 넘으면 금방이에요. 물론, 아무런 방해도 없거나…."
슬쩍 마차를 끄는 말들을 곁눈질한 그가 덧붙였다.
"저 녀석들이 그때까지 버텨 준다면 말이죠."
말들은 엊그제부터 비실대고 있었다. 뭘 주워 먹는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고, 마차를 끄는 속도도 느려졌다. 어쨌거나 걷는 것보다는 빠른 속도를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산은 내일 넘지. 적당한 야영지를 물색해라."
이안이 내뱉었다. 마부석 창문이 닫히는 가운데, 말에 탄 채 마차와 나란히 걷던 샬롯이 턱을 까딱였다.
"물 냄새가 난다. 멀지 않은 곳에 냇가가 있을 거야."
그녀가 탄 말이 훅훅, 힘겨운 콧김을 내뿜었다. 머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였다. 물론 샬롯은 때때로 녀석을 내려다보며 혀를 날름댈 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차 문이 열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몸 절반을 마차 밖으로 내민 테사이아가, 지붕에 앉은 이안을 올려다봤다.
"그냥 밤새 움직이면 안 돼? 말도 저 모양이고 주위도 이 모양인데. 쉬어서 뭐 해."
"이 모양이니까 쉬어야지."
관도 주위를 돌아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언제 마경이 시작될지 몰라. 그때부턴 쉬고 싶어도 못 쉴 거다."
날씨는 후텁지근하고, 건조하던 공기는 눅눅했다. 낮이 되면 하늘의 먹구름은 음울한 황색이 뒤엉켜 일렁였다.
주위의 나무들은 비틀어 늘린 엿가락처럼 괴상하게 가지를 뻗은 채 시들어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곰팡이와 버섯들이 자랐다. 바위틈과 나무 둥치에도 형형색색의 이끼가 끼고, 점점 더 넓게 뒤덮이고 있었다. 밤중에는 자세히 바라보면 흐릿하게 빛을 뿜는 이끼였다.
어제부턴 꽃가루나 먼지 덩어리 같은 것들이 주위에 둥둥 떠다녔다. 자세히 보면 살아있는 것처럼 작게 꿈틀거리는 포자였다. 밤에는 이것들도 반딧불처럼 반짝였다.
말들이 비틀대는 건 아마도 이것들을 들이마셔서일 터였다.
다행히, 일행에게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오늘 밤은 너도 푹 쉬어 둬라."
내뱉은 이안이, 한쪽 눈두덩이가 퍼렇게 물든 테사이아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대련도 하지 말고."
음산한 전경과 달리, 일행의 여정은 뜻밖에도 꽤 평화로웠다.
마물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변방이나 북부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본격적으로 오염되기 시작한 지역부턴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흉지에 마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것대로 이상한 일이었지만, 어쨌건 사실이 그랬다.
덕분에 남은 시간을, 일행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보냈다.
테사이아가 몰두 중인 두 가지 중 하나는 대련이었다. 상대는 주로 필립이었고 둘의 실력은 어느새 거의 호각이었다.
눈가의 멍은,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샬롯에게 도전했다 생긴 결과물이었다.
이안은 이런 평화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가 공허의 표식을 통해 저 너머를 엿봤듯, 공허의 존재 역시 이안의 존재를 마주했었기 때문이다.
분명 그가 드네로브의 의식을 저지했으며, 곧 자신을 찾아오리란 것도 알고 있으련만.
'또 제 본진에 드글드글 집결시키고 있는 거겠지.'
시발.
그를 멀뚱히 바라보던 테사이아가 덧붙인 건 그때였다.
"그래도 활 정도는 쏴도 되지?"
"...."
그녀를 돌아본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살 보충만 제대로 해 둔다면."
"걱정 마. 그건 야옹이가 도와줄 테니까."
"이젠 아예 맡겨 둔 것처럼 부려먹는군. 귀쟁아."
샬롯이 헛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테사이아가 상체를 쭉 위로 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권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게다가 난 연습용 화살 만들 줄도 모른다고."
"가르쳐 준다고 했을 텐데."
"안 배울 거라고도 했을 텐데?"
"그게 무슨 미친…. 아니다. 대답할 가치도 없군."
한숨 쉬는 샬롯과 눈이 마주친 이안이 어깨만 으쓱였다.
테사이아에게 활을 권한 건 그였다. 그녀의 근접 전투 수행 능력은 아직 다른 일행에 비해 여러모로 손색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요정이니 활 정도는 금방 능숙하게 사용하리라는, 지극히 현대인다운 이유도 더해져 있었다.
물론 테사이아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모습을 본 샬롯은 오히려 냉큼 백작의 병기고에서 튼튼한 장궁을 찾아 돌아왔다.
그리고 테사이아는 예상보다 더 빠르게 활을 다루는 데에 능숙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아예 재미가 붙었는지, 연습용 화살을 거의 매일 밤 쏴 댔다.
'테센의 괴물들한테도 통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일행은 곧 샬롯이 말한 냇가 근처에 도착했다. 숲에서 굽이져 흘러나온 물줄기였다.
"건너지 않고 여기 야영지를 꾸리는 게 좋겠습니다. 풍경이 심상치 않네요."
"그래. 그러는 게 좋겠군."
이안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산기슭으로 이어진 뒤틀린 숲 곳곳에서 푸르스름한 빛들이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단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딧불 무리처럼 허공에 잔뜩 떠다니기까지 했다.
필립이 물가로 마차를 몰고 가는 사이, 메브와 테사이아가 짐가방을 든 채 먼저 내렸다.
말을 물가에 묶어둔 샬롯이 땔감을 구하러 냇가 너머로 달려가고, 메브와 테사이아가 능숙하게 모포와 식량들을 꺼내 늘어놓았다.
"조금 출출한데. 그냥 먹으면 안 돼?"
"안 돼. 기다려라."
테사이아의 손에 든 육포를 낚아챈 이안이, 냄새를 맡고는 북 찢어 입에 넣었다. 뒤이어 나온 말린 빵과 치즈도 마찬가지였다.
음식이 상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기미 상궁이라도 된 기분이었지만, 별 수 없었다.
저항력과 회복력 모두, 그가 압도적으로 뛰어났으니까.
마경을 앞두고 누군가 식중독에 걸려 앓아 눕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난 활이나 쏘고 올게.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거든. 빨강 머리는, 말이 너무 없어."
어깨를 으쓱인 테사이아가 휙 마차 쪽으로 달려갔다.
하여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군.
이안은 마차를 뒤지는 테사이아와 마차에서 말을 분리 중인 필립을 잠시 바라보았다. 비실대는 녀석들에게 물을 먹이려는 모양이었다.
곧 필립을 휙 지나친 테사이아가 냇물을 박차며 멀어졌다.
"평범한 혈통은 아닐 것이다."
옆에서 이어진 목소리에,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기름 주머니와 천을 꺼내 놓은 메브가 팔목 보호대를 분리하고 있었다.
드네로브를 떠난 이후, 그녀는 차분함을 넘어 경건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종일 말을 아꼈고, 밤에는 장비를 점검하고 아침에는 기도를 올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또 다른 복수를 앞두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테사 말이오?"
이안의 물음에, 벗은 팔목 보호대를 옆에 놓은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르친 건 예법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들뿐이었어. 하지만 테사가 드네로브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걸 한참 뛰어넘었지. 그걸 떠나, 아주 자연스러웠다. 타고난 것처럼."
이안을 돌아본 메브가 덧붙였다.
"분명, 테사는 본래도 평범한 요정은 아니었을 거야."
"그냥 타고난 거짓말쟁이일지도 모르지. 다른 귀쟁이들 처럼."
이안의 농담에 메브가 옅게 웃음지었다.
"그럴지도. 어쨌든…."
견갑의 고정을 풀며 냇물 너머의 어둠으로 시선을 돌린 메브가 덧붙였다.
"저들이 무사히 고향에 돌아가게 하고 싶어. 내 복수 때문에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 없이. 필립도, 물론."
별걸 다 신경 쓰는군. 이안은 짧게 웃음 지었다. 보아하니 샬롯이 다쳤을 때부터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일행 모두가 무사히 이번 여정을 끝낼 수 있을지는, 이안도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가 싸워야 할 적들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고, 심지어 이번엔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공허의 존재이기까지 했으니까. 중간에 누군가 죽거나 크게 다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이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다치는 쪽이 속이 편했다. 회복력만큼은 초인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는가.
"다들 알고도 함께하는 것이오. 그 정도 각오는 당연히 했겠지."
그런 속마음과 달리, 이안은 덤덤하게 내뱉었다. 흉갑을 벗으며 메브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고 있다. 하지만 죽거나 다쳐도 되는 건 나뿐이야. 이건 내 복수행이니."
"내 의뢰이기도 하지. 아시다시피, 난 의뢰는 어떻게든 완수하는 편이라서 말이오."
"…그래. 그럼, 너와 나로 하자."
메브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가 반대쪽 팔목 보호대도 벗는 사이, 육포를 더 찢어 입에 문 이안이 덧붙였다.
"경은 어쩔 생각이오?"
"...?"
메브가 고개를 돌렸다. 육포를 질겅대며, 이안이 턱 끝을 까딱였다.
"여기서 경의 복수가 끝날 수도 있잖소. 그 뒤엔?"
"그때는… 네게 밀린 보수를 지불해야 하겠지."
육포를 삼킨 이안이, 고개만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내가 당장은 받을 생각이 없다고 한다면?"
"...!"
메브의 눈이 설핏 커졌다. 그것이 그녀의 복수가 끝나면 더는 동행하지 않겠다는 뜻임을 단번에 알아들은 것이다.
"그럴… 것이냐?"
"글쎄. 아마도."
이안의 속내를 읽으려는 듯, 메브가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불가능할 터였다. 그의 눈빛은 평소처럼 미동도 없이 가라앉아 있었으니까. 이윽고 짧은 한숨을 내쉰 메브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때는…."
"으악?! 아, 아니…?"
물가에서 필립의 경악성이 번진 건 그때였다. 말을 멈춘 메브가 홱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필립 쪽을 바라본 이안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
필립이 허둥지둥 달려가는 가운데, 말 두 마리가 물가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212화
말들 사이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은 필립이, 양팔을 뻗어 녀석들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하… 왜 하필 지금…."
장탄식을 흘린 것도 잠시.
"두 녀석 다 죽었습니다…."
일어서며 내뱉은 그가, 저만치의 냇가에서 물을 마시는 남은 한 마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녀석이라도 어떻게든-"
풀썩-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은 녀석도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킁, 하고 단말마 같은 콧김을 뿜은 녀석이 그대로 물속에 고개를 처박았다.
"...."
필립이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멈춰 섰다.
"마시면 안 되는 물이었나…."
입맛을 다시며 읊조리던 이안의 눈매가 일순간 꿈틀댔다.
그의 시선이 다시 옆으로 돌아갈 찰나.
"그… 이제 말을 다 잃게 됐군요."
필립이 애써 웃음 지으며 그들 쪽을 돌아보았다.
이안이 턱짓했다.
"뒤를 봐라. 필립."
"뭐,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될 걸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요. 내일부턴 제가 가방을 메고… ...?!"
주절대며 뒤를 돌아본 필립이 다시 한번 굳어졌다. 쓰러졌던 말들이 다시 부스스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필립이 중얼댔다.
"분명히… 죽었었는데…?"
자세를 다잡은 말들이 천천히 몸을 돌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어, 어어…?"
녀석들이 냇물로 걸음을 옮기자, 손을 내뻗은 필립이 후다닥 달려갔다. 그가 고삐를 낚아채 끌어당기자, 두 녀석 다 별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끌려왔다.
절그럭-
곧, 쓰러져 있던 다른 한 마리도 비틀대며 일어섰다.
고삐를 쥔 필립이, 녀석들의 상태를 확인할 틈도 없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녀석도 터덜터덜 냇물로 발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메브가 중얼댔다. 냇가 너머에서 달려오는 샬롯을 눈에 담으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 녀석도, 뭔가 본 모양이오."
잘라낸 나뭇가지들을 품에 안은 샬롯은 필립을 본 척도 하지 않고 달려왔다. 그 뒤로 활을 든 테사이아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 숲엔 마물이 있다. 이안."
앞에 멈춰선 샬롯이, 나뭇가지를 우르르 떨어뜨리며 내뱉었다. 흐릿한 푸른 빛무리가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나뭇가지는 하나같이 뒤틀리고 변형된 형태였다.
…곰팡내가 진동을 하는군.
화륵, 그 한복판에 불꽃을 던진 이안이 샬롯을 바라보았다.
"무슨 마물?"
"정확히는 모르겠다. 빛을 내면서 날아다니던데. 벌레 같아 보이더군. 굳이 따라가지는 않았다. 나한테 날아들지도 않았고."
"나도 봤어. 한 마리가 아니던데. 걸어 다니는 것들도 있더라. 걔들은 좀 익숙하게 생겼었어. 반짝거리는 것만 빼면."
모닥불 옆에 장궁과 연습용 화살이 담긴 화살통을 던져 놓은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그래, 별것들이 다 있단 거지.
게임의 서부를 떠올린 이안이 낮게 코웃음 치며 숲을 돌아보았다.
어둠 너머로 푸르스름한 빛이 도깨비불처럼 아른거렸다.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게다가 숲 자체도 묘하게 기분 나빠. 여기랑은 또 달라. 표현하기 어려운데… 뭔가 거슬려."
"내가 느끼기에도 그랬다. 이 냇물이 경계선인지도."
동의하듯 덧붙인 샬롯이 손을 털었다. 손바닥 사이에서 반짝이는 포자가 번졌다. 그녀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건, 타고난 내성에 델라 루의 은총이 더해진 덕분일 터였다.
"싸울 각오를 해야겠군. 내일부턴."
메브와 눈빛을 교환하며 말한 이안이, 냄비를 꺼내 샬롯에게 건넸다.
"오늘은 든든하게 먹어 두자. 물을 그냥 마시지는 마라. 오염된 것 같으니까."
"그러지."
샬롯이 몸을 돌리는 가운데, 이안이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냈다. 그가 그 안에서 보존 식량들을 꺼내는 사이, 테사이아는 다시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말들을 이리저리 살피던 필립이 모닥불 쪽을 돌아본 건 바로 그때였다.
"아무리 봐도 말입니다, 나리. 이 녀석들, 죽은 게 맞는 것 같은데요?"
"...?"
안에서 꺼낸 육포와 햄, 빵을 차례로 찢으면서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마차를 뒤적이던 테사이아가 필립의 곁으로 다가갔다.
곧 우두커니 선 말들을 만져 본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이네. 심장이 안 뛰어. 기분 나쁜 느낌도 들고."
"언데드라도 됐단 말이냐?"
견갑을 기름 먹인 천으로 닦던 메브가 물었다. 아마도, 하고 덧붙인 테사이아가 다시 휑하니 마차로 되돌아갔다.
푹 한숨을 내쉰 필립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불쌍한 녀석들 같으니…. 제가 편하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동작 그만."
이안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멈칫한 필립이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 기다려 봐."
이안이 내뱉는 가운데, 되돌아온 샬롯이 물을 담은 냄비를 모닥불 위에 올려놓았다.
목에 건 가죽 주머니에서 델라 루의 은총을 꺼내 물속에 넣은 이안이, 앞에 늘어놓은 재료들을 전부 던져 넣고는 일어섰다.
"팔팔 끓을 때까지 맛보지 마라. 상자 안에 암염 통도 있으니까, 적당히 갈아 넣고."
샬롯에게 덧붙인 그가 말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녀석들은 정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탁 풀린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한 녀석의 머리에 손을 얹은 이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심장은 뛰지 않는데…."
말의 몸속에서는 여전히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손바닥을 타고 뜨끈한 체온과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 오염된 마력이 전해졌다.
이 마력이 이것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게 그저 피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어쨌건.
"이것들, 마차를 끌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안이 내뱉은 말에, 필립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죽었다가 되살아난 말들에게 마차를 맡기시겠다고요?"
"움직이긴 하잖아. 미쳐서 덤벼드는 것도 아니고. 당장은. …그거 줘 봐."
이안이 필립이 모아든 고삐로 손을 뻗었다. 입맛을 다신 필립이 안장이 달린 녀석의 고삐를 건넸다. 이안은 곧바로 안장에 올라탔다.
말은 반항하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게다가 고삐를 내리치자 앞으로도 나아갔다. 몇 번 더 고삐를 흔들던 이안이 중얼댔다.
"달릴 수는 없나 보네."
냇물을 건너 숲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긴 했지만. 어쨌건 말은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움직였다.
이안이 꺼림칙한 표정의 필립을 돌아보았다.
"그 녀석들, 그냥 마차 옆에 묶어 둬라."
"…예."
입맛을 다신 필립이 몸을 돌렸다. 주위를 작게 한 바퀴 돈 이안이, 말을 묶고 있는 필립의 곁으로 다가갔다.
필립이 중얼댔다.
"괜찮을까요. 아무리 봐도, 마물이 된 것 같습니다만."
"무슨 상관이야. 타고 끌 수만 있으면 되지."
말에서 내린 이안이 고삐를 던져주며 말했다. 필립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뭐, 그렇겠습니다만."
"단단히만 묶어 둬라. 혹시 자는 사이에 괴상하게 변이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덧붙인 이안이, 성물 스튜에서 번지는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몸을 돌렸다.
"변이…."
말들을 바라보며 중얼댄 필립이, 고정끈의 매듭을 더 힘껏 고쳐 조였다.
***
다음날에도 말들의 상태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눈동자가 탁하게 물들고 털의 윤기가 사라진 게 변화의 전부였다. 아니, 전부는 아니었다. 녀석들은 더 이상 먹지도 자지도 않았으니까.
"…언제 돌변해서 달려들지 모르니, 잘 지켜보겠습니다."
녀석들을 마차에 고정한 필립이 마부석에 오르며 내뱉었다.
"그러던가."
마차 지붕에 앉은 이안이, 그에게 가죽 수통을 던졌다. 안에는 델라 루의 은총으로 정화하고 한차례 팔팔 끓인 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성물을 불경하게 사용한다고 지적하는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었다.
마차가 출발하는 가운데, 이안이 안장에 오른 메브를 돌아보았다.
"탈 만하시오?"
고개를 숙인 채 터덜터덜 걷는 말을 내려다본 메브가 견갑을 으쓱였다.
"그래. 어쨌든, 말을 듣긴 하는구나."
마물을 탄 성기사라. 진귀한 광경인데.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냇물을 가로지른 마차가 어느새 숲길로 들어섰다.
한순간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통 이끼와 곰팡이, 버섯들로 뒤덮인 숲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비틀린 가지를 위아래 할 것 없이 제멋대로 뻗었고, 그 사이로 형광 물질 같은 청록색 빛이 번졌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풍경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조금씩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안이 현실의 경계를 넘었다 느끼는 건, 비단 그런 몽환적인 풍경 때문만이 아니었다.
포자만큼이나 자욱한 오염된 마력. 그리고 거슬린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불쾌감이 온몸을 감쌌기 때문이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질감이었다.
그저 기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이안은 감각이 어그러지고 왜곡되는 걸 느끼고 있었다. 감지 능력이 형편없어졌다는 의미였다. 마경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섰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상식과 비현실의 영역에 완전히 발을 들인 것이다.
'어쨌든, 제대로 찾아오긴 한 거네.'
문득, 내면에서 작은 울림이 일었다.
뭐. 먹잇감이 가까워졌단 거냐?
이안이 혼돈의 파편을 관조하며 내심 중얼댄 그때,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완벽하게 무장한 샬롯이 지붕 위로 날렵하게 기어 올랐다.
"왜?"
"마물이 언제 나올지 모르니까."
전투 도끼를 옆에 내려놓으면서, 샬롯이 덧붙였다.
"뭐가 나오건, 내가 상대하겠다. 몸 상태가 완벽하게 돌아왔는지 확인하고 싶거든."
"그러던가. 잡몹을 대신 잡아 준다는데, 나야 좋지."
"잡몹…? 그게 뭐지?"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또 안 죽는 놈들일 수도 있다. 용쓰지 마."
"알고 있다. 그냥 토막만 낼 거야."
샬롯이 도낏자루에 손을 가져간 건, 그렇게 삼십 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다 잠든 건가 했는데. 아니었군."
샬롯이 몸을 웅크리며 내뱉었다. 그제야 그녀와 같은 방향을 돌아 본 이안은, 숲의 그림자 너머로 드리운 푸르스름한 실루엣들을 눈에 담았다.
"어제 네가 본 놈들은 아니겠네."
"딱 봐도 벌레는 아니네요. 그보단… 아주 예전에 본 것들이랑 비슷하게 생겼군요. 물론 저것들이 조금 더 역겹긴 합니다만."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필립이 내뱉었다. 메브가 곧바로 첨언했다.
"그 고대수가 있던, 오염된 숲의 마물들과 닮았군."
아, 그 동충하초들? 이안은 짧게 코웃음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것들은 고블린이나 코볼트가 아니라 트롤들이었지만.
세 마리의 트롤은 온몸이 푸르스름한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머리에는 각자 갓이 넓은 주황색 버섯을 달고 있었는데, 눈구멍에서 자라난 것들이었다.
어쨌건, 마차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에도 녀석들은 고함을 지르거나 달려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시시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내뱉은 샬롯이 지붕을 박차며 달려나갔다. 마차가 한차례 덜컹대고, 전투 도끼를 몸에 바싹 움켜쥔 그녀의 뒷모습이 화살처럼 멀어졌다. 멋대로 뒤틀린 나뭇가지들을 날렵하게 박찬 그녀가, 삽시에 곰팡이 트롤들에게로 쇄도했다.
놈들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콰직-!
샬롯이 내리찍은 도끼가 가장 앞에 선 놈을 정수리부터 가슴팍까지 갈랐다. 우뚝 멈춰선 트롤의 머리가 좌우로 쩍 갈라졌다. 피가 튀지는 않았다. 대신 점액질처럼 푸르스름한 체액이 흘러내렸다.
놈을 밀쳐내며 멈춰선 샬롯이 도끼날을 뽑아 다시 한번 힘차게 내리쳤다. 우지직, 이윽고 완전히 반으로 갈라진 트롤이 좌우로 쓰러졌다. 풀썩, 반짝이는 포자들이 먼지 더미처럼 번졌다.
도끼날에 묻은 체액을 휙 털어내며, 샬롯이 곧바로 다른 트롤에게로 달려들었다.
"...."
이안은 허물어진 트롤의 시체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놈은 세로로 반 토막 난 채로도 아직 꿈틀대고 있었다. 단면에서 흘러내린 체액이 뚝뚝 떨어졌다. 체액은 불그스름한 땅에 넓게 번지며 스며들더니, 곧 부글대며 자리를 잡았다.
이안이 중얼댔다.
"저건 곰팡이 트롤이 아니라, 트롤 모양 곰팡이 같은데."
"뭐가 됐건, 식욕이 뚝 떨어지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고 샬롯의 싸움을 구경하던 테사이아가 중얼댔다.
샬롯은 벌써 두 번째 트롤의 머리를 날리고, 놈의 팔다리를 토막 치는 중이었다.
동족이 둘이나 죽었는데도, 마지막 남은 한 놈은 아무런 전의도 없어 보였다.
전의는커녕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쩍, 놈의 정수리로 샬롯의 도끼가 여지없이 틀어박혔다.
이안의 고개가 뒤로 휙 돌아간 건 그때였다.
"저게 어제 샬롯이 본 녀석들 같은데."
나뭇가지 사이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벌레들이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자리 같은 기다란 날개를 가진 거대 지네였다. 좌우로 벌어진 아가리가 냄새를 맡듯 움직였다. 몸통에 뒤덮인 작은 버섯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놈들이 지나친 궤적을 따라 푸르스름한 가루들이 흩날렸다.
"야옹아! 뒤!"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마지막 트롤을 조각내던 샬롯이 홱 고개를 돌렸다. 날아드는 두 벌레를 눈에 담은 그녀가 볼에 튄 체액을 손등으로 닦고는 뛰어 올랐다.
꽈지직-!
곰팡이 벌레 한 마리가 도끼에 찍혀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이리저리 꿈틀대는 놈 위로 올라탄 샬롯이 도끼를 마구 내리치며 이어질 공격에 대비했다.
불필요한 대비였다.
"...?!"
그대로 그녀를 지나친 다른 한 마리가, 토막 난 트롤의 단면 위에 내려앉은 것이다. 아가리를 쩍 벌린 놈이 머리를 그 안에 처박았다.
샬롯의 얼굴에 드물게도 당황이 번졌다. 아마도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생각 때문일 터였다.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댔다.
"보통, 온순한 마물이란 건 없지 않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어두운 본능을 가진 것들이니. 하지만…."
메브가 자신이 탄 말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여기선 예외를 여러 번 보는군."
그녀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때, 샬롯이 트롤을 빨아 먹고 있는 벌레의 머리를 내리쳐 몸에서 분리해 버렸다.
머리를 잃은 몸통이 그대로 날아올라 체액을 뚝뚝 떨어뜨리며 멀어졌다.
샬롯은 굳이 뒤쫓지 않고, 남은 머리를 발로 뻥 차버리고는 마차로 몸을 돌렸다.
달려오는 그녀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전투 같지도 않은 전투였던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펄쩍 뛰어 마차 지붕에 착지한 샬롯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중얼댔다.
"어이가 없군. 어쩌면 어제도 날 발견하지 못했던 게 아닐지도 모르겠어."
내뱉던 그녀가 곧 켁켁대는 기침을 토해냈다. 이안의 시선에, 그녀가 덧붙였다.
"그 가루를 삼켜서 그렇다. 목이 간지럽군."
"…당장 마부석으로 내려 가라."
"...?"
이어진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샬롯이 순순히 필립의 옆으로 내려갔다. 이안이 턱짓했다.
"필립. 그 녀석에게 신성력을 좀 쏴 줘. 골고루."
"예."
필립이 오른손을 펼쳤다. 그의 손아귀에서 번진 흐릿한 빛이 샬롯의 전신을 감쌌다. 일광욕을 하듯 눈을 감으면서, 그녀가 내뱉었다.
"델라 루의 은총이 있어서 괜찮다만."
"예방 차원이야. 재수 없으면, 이곳의 괴물들과 똑같아질지도 모르니까."
"똑같아… 진다고요?"
필립이 인상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메브는 물론 테사이아도 마차 옆으로 몸을 쭉 빼고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말했다.
"저놈들이 우릴 공격하지 않는 건, 우리가 곧 이 생태계의 일부가 될 거라 여겨서인 것 같거든."
"그러니까, 기다려주고 있단 말입니까? 저들과 똑같아질 때까지요?"
"추측이야. 여기선 숨만 쉬어도 아까 그 트롤이나 이 말들처럼 감염되는 것 같으니까."
"…갑자기 숨을 그만 쉬고 싶어지는군요."
필립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샬롯이 고개를 주억댔다.
"확실히. 여기 놈들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였다. 날아다니는 지네들은 아예 처음 보는 놈들이지만…."
"여기서 새로 태어났거나 변이된 거겠지."
첨언한 메브가 주위를 돌아보며 읊조렸다.
"이곳의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어쨌든 그럼, 이 숲의 마물들은 계속 우릴 공격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필립이 덧붙인 말에, 이안이 마차 천장에 드러누우며 대답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우리를 감염시키려고 달려드는 것들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방심은 하지 마라."
"마물이 마차를 끌고 있는데, 방심을 할 수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성력을 거둬들인 필립이 입맛을 다시며 고삐를 고쳐 쥐었다.
이미 곰팡이의 숙주가 된 말들이 터덜터덜 나아갔다. 구불구불하게 휘어진 산길을 따라서.
#213화
황토색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은 낮과 밤을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산은 자신의 이질적인 본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때때로 자줏빛으로 일렁이는 거대한 꽃이나 파르스름한 포자를 안개처럼 머금은 버섯 무더기 따위가 마차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어디서 번진 건지 모를 암녹색 안개가 길에 낮게 깔리기도 했다.
게임에선 부식의 연무나 부패의 안개, 독 포자, 질병 덩어리 따위의 이름으로 불리던 필드 랜덤 디버프들. 닿아서 좋을 게 없다는 설명은, 물론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말들이 마물로 변한 게 전화위복이 됐다고도 할 수 있었다.
녀석들은 암녹색 안개나 포자 따위에 노출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겼다.
"마차에 열심히 기름을 먹여 두길 잘했군요. 아니었다면 진작 삭아버렸을 거예요. 지금도 안심할 수는 없긴 합니다만."
일행은 목에 건 델라 루의 은총을 붙잡고 신성을 쬐거나 필립의 도움을 받으며, 별 탈 없이 전진을 이어나갔다.
마차에서 내리거나 숲에 발을 들일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필립의 예상이 현실이 된 덕분이었다.
곰팡이의 숙주가 된 코볼트나 트롤. 때때로 거대 잠자리나 나방, 지네 따위가 날아다니긴 했지만 마차로 덤벼들지는 않았다.
그저 푸르스름한 포자를 흩뿌리며 날아다니거나 어슬렁댈 따름이었다.
"…여기서 야영지를 꾸리는 건 무리 같습니다. 다행히 말들이 쉴 필요도 없으니, 둘씩 나눠서 불침번을 서도록 하죠."
필립이 제안한 건, 그렇게 한나절이 훌쩍 지나고 나서였다.
메브와 이안을 차례로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비어 있는 한 자리는 제가 연달아서 서겠습니다."
"아니. 내가 두 번 서겠다."
샬롯이 마차 문을 열고 몸을 내밀며 말했다.
"난 잠깐만 눈을 붙여도 사흘은 자지 않을 수 있지. 약해 빠진 인간인 너와 달리."
"하지만…."
"샬롯이 서게 둬."
이안이 덧붙였다. 필립의 시선을 받은 그가 턱을 까딱였다.
"성물의 신성을 섬세하게 다루려면 집중력이 필요하니까. 루 솔라의 신성을 다루는 건 너뿐이야. 체력을 아껴 둬라."
"여차하면 나리께서 쓰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 반지를 빼고도 이 안에서 버틸 수 있을 것 같냐?"
"…아하."
필립이 그제야 낮게 탄식했다.
괴물 같은 저항력과 회복력을 가진 이안은 물론, 그 분야에선 타고난 종족인 샬롯. 영혼에 신성의 근원을 품은 메브와 생명수와 하나가 된 원로 요정인 테사이아는 델라 루의 은총이 부여하는 저항력만으로도 버틸 수 있겠지만.
평범한 인간인 그는 아닐 터였다. 그가 지금까지 멀쩡한 건 성물을 두 개나 가진 덕분이리라.
"알겠습니다. 그러죠."
"안으로 들어가라. 네가 말번을 서."
샬롯이 밖으로 나오며 덧붙였다. 필립이 순순히 자리를 바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메브도 옆으로 말을 붙였다.
"내가 중간을 서겠다. 이안."
기어코 가장 피곤한 순서를 고르시는군.
내심 피식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몸을 일으켰다. 메브가 이 부분에선 양보하지 않을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왜 나한텐 아무도 안 물어봐? 나는 선택권이 없어?"
테사이아가 툭 끼어든 건 그때였다. 저마다 움직이던 일행이 움찔 멈추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테사이아가 히죽 웃음 지었다.
"농담이야. 다들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어."
뭘 기대한 건진 몰라도, 일행의 반응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듯 작게 한숨 쉰 메브가 마차 지붕에 누웠다.
"이따 뵙겠습니다."
인사한 필립이 마차 문을 닫았다.
테사이아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둘 다 곧바로 눈을 붙이려는 것이리라.
전투가 없더라도, 정신적인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말에 탄 이안과 마부석의 샬롯은 말없이 전진을 이어갔다.
샬롯이 입을 연 건, 이윽고 일행 모두의 숨결이 잦아들었을 때였다.
"어딘가에서 반드시 일어날 침식이었다면, 차라리 서부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동공이 넓어진 눈으로 숲을 훑으며, 샬롯이 말을 이었다.
"여긴 남부 밀림을 떠올리게 해. 아마 이끼와 곰팡이가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든 거겠지. 본래의 건조한 날씨에선 살아남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남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순식간에 전역으로 번졌을 거다."
"…꽤 그럴듯한 소릴 하는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날씨가 후텁지근해지고 공기가 눅눅해진 이유 따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침묵이 이어진 것도 잠시. 샬롯이 낮게 가르릉대는 숨소리를 냈다.
그녀를 돌아본 이안은, 놀랍게도 이 수인 전사가 향수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이 주황색 눈동자에 묻어났다.
'이 괴상한 경치를 보면서 고향을 떠올리다니.'
도대체 남부는 어떤 곳인 거야?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하겠는데."
"...?"
"여기서 볼일이 끝나면 라클리프로 갈 거다."
"알고 있다. 그곳에도 타락자들이 숨어 있으니. 어쩌면 이곳과 비슷한 상태일지도 모르고."
"그래. 네가 함께하는 건 거기까지야. 물론, 테사도."
"...!"
샬롯이 눈을 치켜떴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경의 복수가 끝나지 않아도 거기까지다. 이번엔 거절은 받지 않겠어."
"하지만-"
"라클리프는 흑해와 내해를 이어주는 중요한 거점이라지. 아무리 도시가 난장판이 되었어도, 내해를 건너 남부로 향하는 배가 하나쯤은 있을 거다."
"...."
미간을 찌푸린 샬롯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이걸 어떻게 거절하고 있을지 고민하는 게 분명했다.
처음엔 그렇게 떠나고 싶어 하더니….
코로 웃은 이안이 내뱉었다.
"이미 핀드렐, 그 귀쟁이에게 이야기를 들은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네 일족에게 남은 시간은 착실히 줄어들고 있지. 그깟 마음의 짐은 나중으로 미뤄 둬."
샬롯을 마주 보며, 이안이 건조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귀향을 앞두고 죽고 싶진 않겠지.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지 말고, 살아남을 생각만 해. 광전사처럼 날뛰지도 마라.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알았다. 그러지."
머쓱하게 입맛을 다신 샬롯이 시선을 돌렸다.
"네가 말을 길게 할 땐,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지는군."
그러라고 길게 하는 거니까.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돌린 이안은, 이윽고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혼돈의 파편이 만들어내는 울림이 잦아들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더 강하고 선명해졌다.
'의식의 징표에서 혼돈력을 흡수해서 그런 건가.'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가능성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애초에 드네로브의 의식은 이곳과 이어져 있지 않았던가.
그 일부를 흡수한 혼돈의 파편이, 침식의 중심부와 공명하고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알겠으니까, 적당히 하면 안되겠냐.'
슬슬 거슬리거든?
내심 덧붙인 말에도, 파편의 울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밤새도록.
***
"저, 죄송합니다만, 나리. 일어나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부석 쪽의 간이 창을 연 필립이 속삭였다.
의자에 구겨져 있던 이안이 번쩍 눈을 떴다.
그는 잠든 게 아니었다. 파편의 울림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자유로워지는 건 명상을 활성화할 때뿐이었다. 덕분에 그는 내내 명상에 잠겨 있었다.
마차의 각도를 가늠한 그가 곧바로 내뱉었다.
"산을 다 내려왔나?"
"예. 저 멀리 도시가 보입니다. 그리고…."
건너편, 마찬가지로 눈을 뜨는 메브와 눈빛을 교환한 이안이 더 들을 것도 없이 마차 문을 열었다.
상반신을 밖으로 내밀자, 불그스름한 하늘과 사방에 가득한 넝쿨들이 펼쳐졌다.
"…포도밭이군."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좌우 곳곳에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포도송이들이 매달려 있어서였다.
씨알이 거봉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만큼 크고, 안에서 번지는 푸르스름한 빛이 낡은 전구 불빛처럼 일렁였다.
철퍽-
멀지 않은 곳의 포도알 하나가 쩍 벌어지며 속살을 토해낸 건 그 직후였다.
신비한 푸른 빛과 달리, 과육은 전혀 신비롭게 생기지 않았다.
가래처럼 누르스름한 덩어리.
땅에는 이미 다른 과육들이 잔뜩 눌어붙어, 누런 안개를 자아내고 있었다. 게임에선 질병 덩어리가 내뿜던 색이었다.
"이것들 때문에 부른 게 아냐. 이안."
안장에 탄 테사이아가 그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사람이 있어."
"사람?"
"사람 같은 형태인 것들."
한쪽 눈썹을 말아 올린 이안은, 곧 테사이아가 말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넝마 같은 로브를 뒤집어쓴, 등이 굽어진 누군가였다.
그는 진물과 고름이 흐르는 팔을 뻗어, 다 익은 포도알을 하나씩 쥐어짜 터뜨리고 있었다.
다각- 다각-
마차가 근처의 길을 지나치자, 하던 일을 멈춘 그가 마차 쪽을 돌아보았다. 깊이 눌러 쓴 두건 아래로 누런 안광이 빛났다. 놀랍게도 평온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는 적의를 드러내거나 괴상한 행동을 하는 대신, 마차를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사실 저게 더 괴상했지만.
"…저러는 게 처음이 아닙니다. 몇몇을 더 지나쳤는데, 죄다 저렇게 인사하더군요. 반갑게요."
필립이 인상을 찌푸린 채 뇌까렸다. 지붕 위에서 샬롯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서 몸을 반으로 갈라 볼까? 그래도 저렇게 예의 바른지."
"…아니. 됐다."
심드렁하게 내뱉은 이안이 마차 지붕으로 올라서며 덧붙였다.
"도발에 넘어가서 저 안에 발을 들일 필요는 없지. 급하면 저놈들이 찾아올 테니까, 그냥 둬."
그가 오만상을 찌푸린 필립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신의 손길이 닿고 있나?"
"확인해 보겠습니다."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쥔 필립이 눈을 감았다. 이안은 비로소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완만하게 이어진 내리막 저 너머, 테센시의 전경이 보였다.
드네로브보다는 훨씬 작은 성이었다. 변방의 도시와 비슷한 규모였다. 본래는 포도주나 빚으며 수도사들과 어울려 살던 작은 도시였던 게 분명했다.
어쨌건, 지금의 모습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성벽은 몇십 년은 버려진 것처럼 낡아 있었고, 이끼와 곰팡이가 곳곳에 덮여 있었다.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왜 보이지 않는지는, 물론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두근-
그보다 당장 이안의 신경을 거스르는 건, 혼돈의 파편이었다.
성을 눈에 담은 순간 더 강하게 고동을 토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히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멋대로 굴거면 이유라도 알려 주던가. 시발아.'
반항기냐?
명치 어름에 손을 얹은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어떠면 혼돈의 파편이 성장하며 일어나는 단순한 부작용일지도 몰랐다.
본래는 계란 보다도 작던 게, 지금은 작은 자두 정도의 크기가 되었으니까. 실제로 형태가 존재하는 건 아니겠지만, 심상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이 그랬다.
품은 혼돈력의 양만큼, 그에게 끼치는 영향력도 함께 늘어나고 있었다.
'확실히, 정보를 줄 타락자가 필요하긴 해.'
여기 있는 놈들은 아니겠지만.
숨을 고르며, 이안은 몸에 걸친 장비들을 딱 맞게 조율하기 시작했다. 마차 내부에서도 철컥대는 소리가 번지고 있었다. 메브도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리라.
그때 눈을 뜬 필립이 말했다.
"다행히 여신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역시, 아무리 공허의 존재라도 한계는 존재하는 모양이군요."
"물질계로 현신했으니까. 본래의 힘을 전부 가지진 못했겠지."
"…마법사다운 말씀을 해주시네요. 간만에."
오랜만에 아는 설정이 나왔거든.
이안이 내심 중얼대는 사이, 필립이 말을 이었다.
"두 분 나리는 적어도 수도원에 들어갈 때까지는 힘을 아끼십시오. 이안 나리는 특히 마력을요. 그 전에 싸울 일이 생긴다면, 저희 셋이 나서겠습니다."
"우린 계속 한 묶음이네."
손에 든 장궁을 까딱댄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의형제라도 맺어야 하나 봐."
"수인과 귀쟁이, 인간 삼 남매라. 아주 볼만하겠군. 난쟁이와 오크까지 껴 있으면, 모든 종족을 아우르겠어."
샬롯이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댔다.
테사이아가 눈을 빛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난쟁이야 북부에 잔뜩 있고. 오크들은, 사막에 산댔나? 들를 일이 있으면 하나 주워 봐야겠어."
"포자를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군. 귀쟁아.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왜, 못 할 건 없잖아. 우리만 봐도 충분히-"
테사이아와 샬롯의 말다툼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포도밭에 둘러싸인 성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회해서 가겠습니다. 굳이 저 안을 가로지르고 싶진 않네요."
필립이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마차가 성벽 옆을 따라 이어진 관도로 들어섰다. 몇백 년 된 유적이라 해도 믿을 법한 성벽이 마차 측면으로 이어졌다.
성벽 너머는 그저 고요했다. 반대편 포도밭에 낀 누런 안개도 소리 없이 조금씩 더 짙어졌다.
"아예 우리 존재를 무시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긴장 늦추지 마라."
툭 내뱉은 이안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는 주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발작하듯 울어대는 혼돈의 파편을 다스려야 했기 때문이다.
'설마 보스전까지 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냥 허공에 다 뿌려 버릴까.
혀를 찬 이안이 눈을 반개하며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성벽을 지나친 마차가 이어진 관도로 접어들었다. 테센 수도원은 성 뒤편, 다시 시작된 완만한 오르막길 너머에 솟아 있었다.
관도 좌우로 이어진 뒤틀린 포도밭이 괴물의 손아귀처럼 보였다.
필립의 지도상으론 반나절 거리였건만, 실제로는 도보로도 십여 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원래 저런 건지, 일대가 뒤틀리며 일어난 변화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쨌건, 수도원은 작은 마을이라 해도 될만한 규모였다.
높고 긴 담벼락과 대문이 음산했다.
"저 역겨운 안개가 관도까지 밀려들겠는데요. 서둘러야겠습니다."
길 좌우의 포도밭을 돌아보며 필립이 내뱉었다. 안면 가리개를 올린 채 마차 문을 연 메브가, 뒤편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래야 할 것 같구나. 필립."
"...?"
고개를 갸웃하며 일어선 필립이, 마차 지붕 너머로 테센 시를 돌아보았다. 그의 미간이 이내 구겨졌다.
"루 솔라 맙소사…."
포도밭에서 번진 누런 안개가 어느새 성을 뒤덮고, 그걸 넘어 관도로도 밀려들고 있었다.
퇴로가 완전히 차단 당한 형국이었다. 메브의 손길에 테사이아가 마차 옆으로 말을 붙이고, 휙 지붕으로 뛰어 올랐다.
메브가 능숙하게 안장 위에 올라탔다. 명상에 잠긴 듯한 이안을 잠시 돌아본 그녀가, 뒤를 응시하는 샬롯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나?"
"감각이 교란되고 있다. 여기선 나도 평범한 인간과 다름 없어."
샬롯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필립이 입맛을 다셨다.
"평범한 인간은 그보다 더합니다. 귀는 먹먹하고 악취에 코는 마비됐고, 목도 깔깔하고요."
"그럼 지금 가장 유능한 건, 아무래도 나인 것 같네."
"…엥?"
이어진 테사이아의 의기양양한 목소리에, 필립이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똑바로 선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꾸득 꾸득, 그녀의 눈 주위로 지렁이 같은 핏줄들이 돋아났다.
"이걸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원로 요정인 이 몸의 능력 밖에…?"
테사이아의 시선이 옆에서 뒤로, 그리고 반대편 옆을 지나 다시 저 앞에 솟은 수도원까지 한 바퀴를 돌았다.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뭐가 아닙니까?"
"기척이 온 사방에서 느껴지거든. 우린 지금 포위당했어. 게다가…."
"...."
필립의 낯이 굳어지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눈을 끔뻑이며 덧붙였다.
"죄다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내 시선을 느낀 것처럼."
#214화
"준비해야겠군."
내뱉은 이안이 눈을 떴다. 테사이아가 홱 그를 돌아보았다.
"준비? 그럼 정말 우리가 포위 당했단 거야?"
"아마도."
"그럼, 난 유능한 게 맞았네."
물론, 그 사실에 미소 지은 건 테사이아 뿐이었다.
이안이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파편의 공명을 가라앉히는 건 포기한 채였다. 어쩌면 테사이아가 느낀 게 이 울림의 원인일지도 몰랐다.
놈들을 다 죽여야 편해질지도.
"...."
곧, 누런 독 안개 사이로 온갖 실루엣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차 뒤를 응시하던 필립이 나지막이 탄식했다.
"루 솔라여… 부디 저 몰골이 되느니 죽게 해 주소서…."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들만 해도 족히 수백은 되어 보였다. 곰팡이에 뒤덮여 누런 안개 속에서도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부패와 질병의 권속들. 생긴 것도 가지각색이었다. 뒤틀린 몸에 넝쿨이 칭칭 감긴 놈이 있는가 하면 머리에서 버섯이 자라거나 네 발로 기는 놈도 있었다.
독 안개가 앞길을 인도하듯 번지는 가운데, 그들이 뿜어내는 푸른 빛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확실히, 이번엔 그냥 구경만 할 것 같진 않군."
샬롯이 도끼를 고쳐 쥐며 뇌까렸다. 그녀의 시선은 좌우의 포도밭 너머를 훑고 있었다.
넝쿨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고블린과 트롤. 변이된 개나 염소, 곰 같은 동물들의 모습까지도 보였다. 넝쿨 위로는 온갖 종류의 곰팡이 벌레들이 안개 속을 헤엄치듯 유영했다.
끼이이이-
수도원의 대문이 열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 뒤에도 백 단위는 족히 될 법한, 가지각색의 권속들이 서 있었다.
다만, 놈들은 문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일렁이는 누르스름한 안광을 마차에 고정한 채, 그저 자리를 지켰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포위망을 좁혀 오는 건 후방과 좌우의 마물들이었다.
"하나가… 되자…."
"합일을… 위대한 순환의 일부가…."
"혼돈이여… 순환의… 합일을…."
고막을 간지럽히는 듯한, 주문 같은 속삭임이 사방에서 번졌다.
알아듣기 힘들 만큼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안의 귀에는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파고들었다.
파편의 울림이 그 음성들을 증폭시켜 주는 것 같았다.
"이, 일단 마차를 멈출까요? 내려서 돌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차는 후방으로 돌려서 시간 벌이용으로 쓰고… 어어…?"
고삐를 당기던 필립이 눈을 치켜떴다. 말들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녀석들은 고삐를 아무리 당겨도 그저 터덜터덜, 수도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 말도, 이제 멈추지 않는군."
무덤덤하게 내뱉은 메브가, 좌우의 포도밭을 돌아보며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마차 지붕에 우두커니 선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것들이 왜 저러는 걸까. 분명히 자유 의지가 있어 보였는데, 지금은 그냥 꼭두각시 같아. 내 시선을 어떻게 느낀 건지도 모르겠고."
"그딴 게 지금 무슨 상관이냐, 귀쟁아. 활이나 들어라."
핀잔을 준 샬롯이, 마차 아래로 휙 뛰어내리고는 덧붙였다.
"저놈들, 그리 빠르지 않아. 그냥 다 같이 달려서 정면으로 돌파할 시간은 충분할 거다."
"예. 수도원의 저 괴물들을 뚫고 들어가서, 좁은 곳에서 막도록 하죠. 여긴 너무 열려 있습니다."
왼팔에 원형 방패를 단단하게 고정한 필립이 마부석에서 뛰어내리며 대답했다.
마차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테사이아가 뒤로 손을 뻗었다.
"날아다니는 것들은 내가 맡을게. 이안. 화살 좀 꺼내 줘. …이안?"
그녀가 지붕 한복판의 이안을 돌아보았다. 숨을 고르던 이안이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곧 그가 화살이 잔뜩 담긴 가죽 화살통을 꺼내 내밀었다. 화살촉이 제대로 박힌 것들이었다.
받아든 테사이아가 묵직한 무게감에 미소 짓는 사이.
"말씀드렸다시피, 두 분은 최소한으로만 싸우십시오.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마차와 나란히 걸으며 필립이 말했다. 그 옆으로 훌쩍 뛰어내린 메브가 양손검을 뽑아 들었다.
"돌파의 선봉은 내가 서는 게 맞다. 필립. 이안을 중심으로 쐐기 진형을 구축하자."
"그럼 내가 좌익을 맡겠다."
내뱉은 샬롯이, 홀로 멍하니 걸음을 옮기는 말의 앞다리를 도끼로 후려쳤다. 그대로 허물어진 말이 꿈틀댔다.
"그럼 내가 오른쪽에 설게. 주근깨, 뒤를 맡아 줘."
"그러죠. 사실, 여기가 제일 저에게 걸맞은 자리이긴 합니다."
화살통을 허리에 꽉 묶은 테사이아가 오른쪽에 서고, 필립이 검을 쥔 손목을 휘휘 돌리며 뒤에 자리를 잡았다.
테사이아가 지붕 위에 선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 여기 중심으로 내려와."
"이번엔 내가 선택권이 없군."
내뱉은 이안이 진영 중앙의 빈 공간으로 뛰어내렸다.
"...!?"
그의 눈이 커진 건, 발과 무릎이 땅에 닿은 순간이었다.
파편이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고동치더니, 혼돈력을 일제히 토해낸 것이다. 전신의 혈관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뒤이어 눈앞도 그렇게 됐다. 검을 떨어뜨린 이안의 손바닥이 절로 땅에 닿았다.
"이안-?!"
이어진 테사이아의 외침이 늘어졌다.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감각.
그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혼돈력이 동심원을 그리며 번졌다.
그 한복판, 이안의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흑백으로 반전된 세상. 보랏빛 혼돈력의 파장이 주위를 흑백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새하얀 대지 아래, 혈관 다발처럼 뻗어 나가는 자줏빛 그림자가 선명해졌다. 모든 게 색을 잃은 가운데 보라색과 자주색만이 선명했다.
타락자만이 인식할 수 있을,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이면.
'이게 파편이 공명한 이유였나…?'
이안은 파편이 날뛰기 시작한 이래 땅에 발을 디딘 적이 한 번도 없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대부분은 마차 지붕에서. 그게 아니라도 말 안장이나 내부에서만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게임에서 이건, 탈 것에서 내린 순간 시작되는 이벤트였던 게 분명했다. 어쩌면 본래는 그 산길에 접어든 순간 겪었어야 했던 걸지도 몰랐다.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잠식.
거절할 수도 있는 선택 퀘스트였다.
'타락자 전용 퀘…?'
설명은 한 줄에 보상도 하나였다.
능력치에 따른, 혼돈의 주도권.
게임에선 수락을 누르기만 해도 알아서 진행되던 퀘스트이리라 유추하는 건, 이제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잠깐의 갈등이 뒤를 이었다. 선택 퀘스트인 이유가 있을 테니까. 물론, 그저 잠깐의 망설임일 뿐이었다. 거절한다면 아무런 소득도 없이 혼돈력만 소모한 셈이 될 터였다.
"혼돈이여… 순환의… 합일을…."
늘어진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속삭임을 귀에 담으며, 이안은 퀘스트를 수락했다.
슈확-
동시에 세상을 물들이며 번지던 혼돈력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안의 의식도 함께 빨려 들어갔다. 시야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이럴 것 같더라니.'
물론, 그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그저 온몸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며 끝없이 추락하는 듯한 감각에 휩싸인 채, 염려하던 상황이 펼쳐졌음에 잠시 탄식할 따름이었다.
그의 육체는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안은 일행들을 믿었다.
그들이라면 적어도, 그가 퀘스트를 완료하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물론, 그가 지금 느끼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찰나의 순간에 불과한 이벤트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러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이미 낙장불입이야.'
이 선택 퀘스트의 완료 보상이, 위험을 감수한 가치가 있길 바랄 수밖에.
그때 모든 감각이 씻은 듯 사라졌다. 찰나의 고요. 다음 순간 이안의 시야가 밝아졌다.
새카만 어둠 한복판. 거대하게, 그리고 수없이 많은 갈래로 뻗어 나간 자주색 덩어리가 선명해졌다.
얽히고설킨 뿌리나 인간의 신경계를 형상화한듯한 광경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의식이 그 덩어리의 한 점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 갔다. 동시에 이안의 뇌리로 파노라마 같은 광경들이 펼쳐졌다.
여자. 남자. 아이. 개. 트롤. 고블린. 심지어 벌레의 기억과 의식이, 난잡하게 편집한 뮤직비디오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통합 의식…?'
이안은 비로소 이게 수많은 의식 세계가 이어 붙은 군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혼이 서로 이어져 뒤엉켜 있는 것이다. 개별적인 경계가 모호해진 채로.
어지럽게 이어지는 기억들 사이로, 흐릿한 자줏빛이 아른거렸다. 그 너머에서 선명하고 또렷한 하나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때 그 놈이구나?'
수백 수천의 의식은 결국 저 존재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나로 뒤엉켜 종속된 게 분명했다. 그가 늪지의 원한을 부리듯이.
그 순간, 이안의 의식이 파노라마를 뚫고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자줏빛은 거대한 구멍이 되었고, 필름을 빨리 감은 것처럼 스쳐 지나가던 기억들은 곧 자줏빛 통로로 화해 주위로 펼쳐졌다.
저 너머의 존재가 그를 마주 본 건 바로 그때였다. 그것만으로도 이안의 의식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시야 주위로 보랏빛이 아른거렸다. 이안은 비로소, 자신의 의식이 혼돈의 파편이 토해낸 혼돈력에 담겨있음을 깨달았다.
잠식이라더니, 이런 의미였나?
-기다렸노라… 혼돈이여….
이안의 뇌리로 속삭임이 울려퍼졌다. 언어라 부를 수도 없는 사념이었지만, 더없이 또렷했다.
-우리는… 하나가 되리라…
누구 마음대로 하나가 돼?
이안이 씹어 뱉었다. 물론 그저 생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수많은 기억이 담긴 의식들이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안은 반항할 수도 없이 휩쓸렸다. 온갖 것들의 기억과 속삭임, 생각, 소망과 염원이 그의 의식을 뒤덮었다.
'이런… 시발…?'
이안은 이 물결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의 영혼의 경계가 허물어져, 모든 것과 뒤섞이게 될 순간까지.
***
"나, 나리! 나리…?!"
필립이 다급하게 이안의 어깨를 흔들었다. 일행은 곧 전투가 시작되리란 것조차 잊고 이안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차에서 뛰어내린 이안이 보랏빛에 휩싸인 채 무너져 내렸으니까.
안개처럼 자욱하게 쏟아져 내린 보랏빛 덩어리는 땅속으로 꺼지듯 사라졌고, 남은 건 쓰러진 이안 뿐이었다.
그는 보라색으로 물든 눈을 반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를 뒤덮고 눈가까지 이어진 보랏빛 균열이 불길하게 아른거릴 뿐.
"비켜 봐…!"
샬롯과 눈빛을 교환하던 테사이아가 필립을 옆으로 밀쳐내며 다가 앉았다.
그녀가 이안의 눈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덮었다.
눈 주위로 핏줄이 꿈틀대듯 돋아나고, 마력이 맺힌 녹색 눈동자가 허공을 훑었다.
"…헉!"
곧 소스라치게 놀란 테사이아가 손을 뗐다. 일행의 시선을 받으며, 그녀가 내뱉었다.
"심연…. 심연이 이안의 의식을 삼킨 것 같아…."
자세히 설명하라 다그치는 이는 없었다. 테사이아 조차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싸우고 있는 것이다."
뒤이어 내뱉은 건, 안면 가리개를 올린 메브였다. 이안의 얼굴을 내려다 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미 이안은 공허의 존재와 이어진 적이 있으니까. 놈이 다시 이안을 불러들인 거야. 이안은 아마도 지금, 심연 속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품은…."
잠시 멈칫한 메브가, 이윽고 내뱉었다.
"…혼돈으로."
"루 솔라여…."
필립이 중얼댔다. 일행 중에 이안이 때때로 공허의 힘마저 부리곤 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어둠이 이렇게 이안을 집어 삼킨 건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들이 알던 이안은 사라진 후일지도 몰랐으니까.
"이안은 돌아올 거다."
샬롯이 그르렁대듯 씹어 뱉었다. 메브와 필립을 돌아본 그녀가, 주황색 눈을 번뜩였다.
"그러니 허튼 생각들 하지 마."
"저흰 그저 걱정을-"
"그르륵… 그으으…."
"그워어어어-"
사방에서 번진 고막을 긁는 듯한 소리가 필립의 목소리를 삼켰다.
번쩍 고개를 치켜든 일행이 저마다 주위를 살폈다.
다가오던 권속들이 멈춰선 채 발작하고 있었다. 고요하게 밀려들던 안개도 격류가 휘몰아치듯 출렁이고, 누런 안광들이 타올랐다. 몇몇은 서로 뒤엉켜 달라붙으며 변이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는 확실해."
내뱉은 테사이아가 다시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놈은 이안의 육체까지는 필요하지 않은 거야."
"오히려 육체를 죽여야 일이 쉬워지겠지. 그러면 이안의 영혼이 돌아올 곳을 잃을 테니까."
"…혹은, 원하는 걸 이미 얻었으니 필요 없는 것들은 정리할 생각이거나요."
메브에 이어 필립이 첨언했다.
그사이 말없이 전투 도끼를 등에 묶어 멘 샬롯이, 이안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는 갑옷까지 걸친 채였지만, 샬롯은 무게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 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유 따윈 알 바 아니야. 이안을 지켜야 돼. 돌아올 때까지."
"그 정도로 끝내길 바라진 않을 거다."
가라앉은 눈으로 내뱉은 메브가, 양손검을 늘어뜨리며 일어섰다.
샬롯을 마주 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내가 아는 이안이라면, 우리가 목표를 잊지 않길 바랄 거야."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을 번갈아 바라본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그럼 뭣들 하고 있어? 당장 출발해, 빨강 머리. 선봉에서 길을 뚫어."
"기꺼이. 그러니까…."
철컥, 안면 가리개를 내리며, 메브가 몸을 돌렸다.
"뒤쳐지지 마라."
다음 순간 그녀가 길을 따라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일행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뒤를 따라 내달렸다.
곧이어 포위망도 다시 좁아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215화
"그… 으으으…!"
"하나… 위대한… 순환을…."
사방에서 권속들의 숨소리와 마력이 담긴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포도송이들이 누런 속살을 뚝뚝 떨어뜨리고, 그럴 때마다 출렁대는 독 안개도 점점 더 자욱해졌다.
파드드드-
안개 속을 헤엄치듯 날아든 날벌레들이 뒤이어 날아든 화살을 맞고 떨어졌다. 화살은 놈들의 두꺼운 갑피나 날개도 꿰뚫었다. 화살촉에 마력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달려! 야옹아! 뒤처지지 마!"
하지만 정작 그 화살을 쏜 테사이아는, 자신이 지금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였다.
품에 안은 이안을 머리가 흔들리지 않게 추스르던 샬롯이, 으르렁대며 속도를 높였다.
솨아아아-
권속들보다 안개의 물결이 밀려드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일행의 눈에는 좌우에서 황색 해일이 밀려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쨌건, 일행의 질주는 충분히 빨랐다.
저 독의 물결에 휩쓸리기 전에 충분히 수도원의 대문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
문 너머에 모여 울부짖는, 저 권속들의 장벽을 뚫을 수만 있다면.
"...."
적어도 메브는 그럴 수 있다 확신 하는 게 분명했다.
신성을 두른 것도 아니건만. 선두를 내달리는 그녀의 질주는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순환의… 합일을…!"
"워… 어어어억-"
메브를 마주보던 권속들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저마다 손을 앞으로 내뻗으며 잇몸도 남지 않은 아가리를 딱딱대기 시작한 것이다.
놈들이 움직일 때마다 주위로 흐릿한 독 포자가 피어 올랐다.
"필립!"
"예! 나리-!"
몸을 비스듬히 튼 메브가 양손으로 쥔 검을 흉갑 앞까지 바짝 치켜들며 외쳤다. 그 뒤를 따르던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슈화아아아-
검날을 타고 솟구친 빛무리가, 그대로 메브의 앞까지 감싸는 빛의 장막을 그려냈다.
곧 장막이 가장 먼저 수도원의 울타리를 넘었다.
치이이이이-
권속들의 몸과 그들이 뿜어낸 독 포자들이 타들어갔다. 놈들은 그런 와중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내뻗은 손을 허우적댔다.
그리고.
콰장창-!
전신 판금 갑옷의 기사가 포탄처럼 놈들을 들이 받았다. 권속 네 다섯을 으스러뜨리며 튕겨낸 메브가 멈추지 않고 양손 검을 힘껏 휘둘렀다.
콰지지지직-!
커다란 호선이 앞에 걸린 모든 것들을 휩쓸었다. 베는 것이 아니라 찢어발기고 터뜨리는 것에 가까웠다. 신성의 장막에 타들어 가던 권속들이 썩은 고깃덩어리처럼 썰려 나갔다.
돌진하는 속도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메브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양손 검이 만들어내는 호선이 무한을 그리며 휘몰아쳤다.
때때로 어깨와 팔꿈치, 강철 주먹이 사정 없이 뻗어 나가 궤적의 빈틈을 매꿨다.
콰직-! 빠가각!
주위에 일렁이던 빛의 장막이 사그라들었음에도 그녀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필립의 눈에는 인간 분쇄기가 따로 없어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성기사의 육체는 기본적으로도 평범한 인간과는 궤를 달리했다. 근육은 훨씬 더 촘촘하고 유연하며, 뼈는 쇠에 버금갈 만큼 단단했다.
"뒤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인 필립도 뒤처지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메브와 이안에게 배운, 그리고 수많은 반복 훈련과 대련으로 체화된 전투 기술이 있었다. 성물에 담긴 신성의 근원도 그의 육체에 힘을 보?다.
신성이 맺힌 검이 빈틈을 매꾸려 다가오는 권속들을 찌르고 후려쳤다. 왼손의 원형 방패도 그저 권속들의 손길을 밀어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콰직! 콰직!
제국 강철을 두른 방패 날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둔기나 다름 없었다.
휘두르고 찌르고 후려치는 와중에도, 필립은 때때로 신성의 장막을 넓게 펼쳐 독 포자를 불태우고 일행의 공간을 확보했다.
물론,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공간은 한쪽 측면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캬오오오-!"
이안을 품에 안은 샬롯 역시, 어떻게든 제 몫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팔과 어깨를 온전히 이안을 안전하게 감싸 쥐는 데에만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는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흉포하게 번쩍였다.
갈기가 거세게 나부끼고, 온몸의 털이 뻣뻣하게 곤두선 채였다.
퍼석-!
일순간 솟구친 그녀의 무릎 보호대가, 다가오는 권속의 머리통을 수박처럼 터뜨렸다.
그대로 몸을 휘돌린 그녀가 반대편 발을 휘둘렀다.
끝부분이 발톱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진 강철 장화가, 다가오는 권속들을 칼날처럼 할퀴며 지나갔다.
물론 모든 공간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곰팡이에 뒤섞인 권속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저 마구잡이로 샬롯에게 다가들며 손을 내뻗고 아가리를 벌려댔다.
"...!"
몸을 웅크리며 착지한 샬롯의 미간이 구겨졌다. 운 좋게 발길질을 피한 몇몇 권속들이 코앞에서 손을 내뻗고 있었다. 그녀가 품에 안은 이안을 보호하듯 휙 등을 돌릴 찰나.
퍽- 퍼벅-
가장 가까이 다가온 권속들의 머리에 연달아 화살이 틀어박혔다. 머리가 움푹 들어간 놈들이 허우적대며 쓰러지는 사이.
"뭘 봐? 뛰어!"
샬롯의 시선을 받은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씩 웃은 샬롯이 곧바로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화살통에서 두 발의 화살을 뽑아든 테사이아가 득달같이 시선을 돌렸다.
"이안만 멀쩡했어도…!"
그녀가 연달아 활시위를 당겼다. 울타리 위로 솟구친 벌레 두 마리가 균형을 잃고 떨어져 내렸다.
일행이 땅에 선 적들만 신경쓸 수 있는 건, 그녀가 있어서였다.
일행의 가장 후미를 달리는 그녀는 전방위적인 지원은 물론, 단 한 마리의 벌레도 일행에게 도달하지 못하게 했다.
쉬악-!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화살은 전혀 빗나가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에는 매번 두 개에서 세 개씩의 화살이 연달아 끼워져 있었다. 차례로 발사하는 데에는 눈 깜짝할 사이면 충분했다.
연습할 때에는 제대로 되지 않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테사이아의 얼굴에는 그런 자신의 능력에 대한 감탄이나 뿌듯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더 빨리! 빨강 머리! 빨리 가!"
어느새 자욱한 독 안개의 물결이 수도원의 담벼락 위로 넘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돌파한 공간이 다시 채워지는 건 물론이고, 밖에서 따라오던 것들도 우글우글 들어서고 있었다.
고블린이나 트롤 따위의 마물들부터 가지각색의 짐승. 찰흙을 대충 주무른 것처럼 이어 붙은 커다란 놈들까지도 서로 먼저 대문을 통과하기 위해 뒤엉켰다.
오히려 그게 놈들의 전진을 느리게 만들고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부분이었지만.
어쨌건, 고작 넷이서 상대하기엔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다.
게다가 반대편 저 너머.
"그… 으으…."
"위대한… 합일을…."
언덕 꼭대기, 돌계단 위에 솟은 수도원에서도 여전히 권속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활짝 열린 대문 너머의 부자연스러운 어둠은, 벌써 수십의 권속들을 더 토해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난 안 죽어. 절대로…!"
주문처럼 씹어 뱉으면서도, 테사이아는 멈추지 않고 화살을 쏘아댔다.
눈가의 핏줄이 터질 듯 꿈틀대고 어느새 코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인지하지도 못한 채였다.
콰직-! 빠각!
어쨌건 일행은, 충실하게 포위망을 돌파하고 있었다. 메브는 오로지 저 앞의 수도원만을 바라보며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어느 순간 호흡을 가다듬는 것조차 잊었다. 그저 기계처럼 앞을 가로막는, 한때는 나병 환자와 수도사였을 권속들을 베고 또 벨뿐.
그런 그녀의 노력은 착실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느새 앞을 가로막는 권속들의 끝이 보였다.
건물 사이나 수도원의 대문 너머에서 빠르게 걸어 나오는 것들의 숫자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쿠… 구구구구…
활짝 열려 있던 본원의 대문이 닫히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문을 닫는 이는 없었지만, 육중한 나무 문이 스스로 움직여 그 너머의 어둠을 가렸다.
-큭큭큭큭….
메브의 뇌리로, 아주 낮고 부드러운 웃음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안면 가리개 사이의 녹색 눈동자에 차가운 분노가 타올랐다.
"----!"
조금씩 느려지던 메브의 움직임이 다시 빨라졌다. 그녀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고 찌르고 후려치며, 말 그대로 온몸을 흉기처럼 휘둘렀다.
콰지직-!
그렇게 마침내, 그녀는 앞을 가로막는 권속의 장벽을 뚫어냈다.
하지만 그리고도 곧바로 달려가지 않고, 주위의 권속들을 베어 넘기며 공간을 확보했다.
빠각-
불그스름하게 변색 되던 양손 검이 기어코 부서졌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반 토막난 검을 계속 휘둘렀다.
"나리! 달리십시오! 다들 달려요!"
필립의 외침이 터져 나온 순간, 메브는 비로소 굳게 닫힌 대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안을 품에 안은 샬롯이 뒤따라 포위망을 돌파했다.
포자와 핏물을 머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필립이 고개를 돌렸다.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온 힘을 다해 외치며, 그가 빛을 머금은 검을 내뻗었다.
눈부시게 피어오른 빛의 장벽이 넘실대는 독 안개와 그 너머의 권속들을 불태웠다.
상반신만 뒤로 돌려 연달아 화살을 쏘아대던 테사이아가 장벽을 뚫고 지나쳤다.
그녀가 코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필립을 돌아보았다.
"고마워 주근깨-!"
"인사는 나중에. 뛰십쇼!"
테사이아는 이미 필립을 두고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길을 막던 빛의 장벽이 일순간 휘청대듯 깜빡였다. 최대한 버티던 필립도 이윽고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일행과 권속들의 거리는 충분히 여유가 생겼다.
넘실대며 밀려드는 독 안개의 물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필립의 시선이 아치를 그리며 솟은 수도원 건물로 향했다.
평범한 교회 정도의 크기였지만, 내부도 그렇지는 않은 게 분명했다.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건물을 중심으로 시야가 왜곡되는 게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닫기만 한다면, 권속과 독 안개로부터 도망칠 시간을 더 벌 수 있으리라.
"문! 문 여십시오!"
아직도 대문이 닫혀있다는 걸 깨달은 필립이 계단에 발을 들이며 소리쳤다.
하지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메브가 힘껏 당기고 있음에도 그랬다.
이안을 대문 옆의 움푹 들어간 벽면에 조심스럽게 기대 놓은 샬롯도 합류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뭐해? 안 열어?"
날아드는 벌레들을 연신 쏴 맞추던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샬롯과 함께 안간힘을 쓰던 메브가, 이윽고 폐가 터질 듯 숨을 몰아쉬며 내뱉었다.
"안 열린다…."
"뭐라고…?!"
테사이아가 홱 뒤를 돌아보는 가운데, 계단을 다 오른 필립이 육중하게 솟은 문 앞으로 다가갔다.
검을 내팽개친 그가 문을 힘껏 밀고 당겨보고는, 이내 문에 기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제기랄, 정말 안 열리는군요."
"그럼 어떻게 해! 이제 도망칠 곳도 없다고!"
소리치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 테사이아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화살도 없고!"
그녀가 손에 든 활을 짜증스럽게 계단 너머로 던져버리고는 문 앞으로 달려왔다.
"익…! 이익-!"
그녀가 거의 문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안간힘을 썼다. 물론 코피가 더 심하게 터졌을 뿐 달라진 건 없었다.
"헛 힘 쓰지 마라… 귀쟁아…."
그녀를 문에서 떼어낸 샬롯이, 계단 너머를 돌아보며 내뱉었다.
"진짜 힘은 저쪽에 써야 할 것 같으니까."
"어떻게 써, 멍청아! 이안. 이안? 눈 좀 떠봐! 이안?"
소리친 테사이아가 바닥을 기듯이 이안에게 다가갔다.
미동도 없는 그의 뺨을 찰싹찰싹 친 것도 잠시. 곧 욱, 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그녀가 한 모금의 피를 왈칵 토해냈다.
"어…? 이게…?"
멍하니 중얼대던 그녀가, 이내 비틀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력 탈진 증상이었다. 단시간에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한 것이다.
"쉬고… 있어라. 이안 곁에서."
그녀의 어깨를 샬롯의 손아귀가 내리눌렀다. 테사이아가 홱 고개를 들었다. 비틀대는 와중에도, 샬롯이 등에 멘 전투 도끼의 고정 끈을 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야. 안 돼. 야옹아."
테사이아가 손을 뻗어 그녀의 종아리를 움켜쥐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샬롯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온몸에 포자를 뒤집어쓴 건 물론이고, 팔과 목덜미 따위에 긁히고 물린 흔적이 잔뜩이었다.
이안을 보호하며 온몸을 부딪쳐 가며 싸우다 생긴 상처들이었다.
델라 루의 은총으로도 정화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터였다.
이미 그녀의 몸속에는 독이 퍼지고 있었다.
"달리 방법이 없군…."
주저앉아 숨만 몰아쉬던 메브가, 힘겹게 다시 일어섰다.
필립은 비로소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면 가리개 탓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할 게 분명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신의 축복을 받았다 해도, 그녀는 결국 인간이었다. 홀로 선두에서 그토록 많은 적을 상대로 쉬지 않고 싸운 여파가 적을 리 없었다.
게다가 이 더러운 공기. 온갖 포자와 독이 가득한 공기도 그들의 체력을 빠른 속도로 앗아가고 있었다.
"...."
필립은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누런 안개의 물결. 그 사이로 권속들의 실루엣이 그림자처럼 끝도 없이 이어졌다.
다시 고개를 돌린 필립이 이안과 테사이아, 샬롯, 그리고 검조차 쥐지 않은 메브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그의 뇌리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 건 그때였다.
결국, 이 순간이 왔다는.
아겔 란에서 정체 모를 해결사와 함께 흑마법사를 찾아가던 때부터, 언젠가 찾아오리라 직감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필립의 눈에 번지던 떨림은 오히려 잦아들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무의미하게 끝나지는 않아야 했다.
문득 오른손에 온기가 번졌다.
검 자루를 힘껏 움켜쥔 그가, 메브를 바라보았다.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뭐라고? 너 혼자 말이냐?"
숨을 헐떡대던 메브가 필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필립은 이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을 받은 샬롯이 미간을 좁히는 가운데, 필립이 내뱉었다.
"샬롯. 테사. 나리를 제압해 주십시오. 당장."
"…그게 무슨 말이냐, 필립? 왜 갑자기-"
"당장이요! 이게 최선입니다! 이안 나리까지 죽게 두실 겁니까?"
필립이 버럭 윽박질렀다.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눈을 치켜떴던 샬롯이, 그대로 몸을 날려 메브를 덮쳤다.
와장창-
기습에 널브러진 메브가 바닥을 나뒹굴고, 샬롯은 삽시에 그녀의 등에 무릎을 내리찍고는 양팔을 등 뒤로 결박했다.
"귀쟁아!"
"응…? 으응!"
눈만 끔뻑이고 있던 테사이아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메브의 다리를 내리눌렀다.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숨만 헐떡이던 메브가 비로소 내뱉었다.
"필립, 너, 설마-"
"반드시 제 복수를 해주십시오, 나리. 이 두 분은 제 부탁을 들어주셨을 뿐이니, 너무 미워하지 마시고요."
여유 부릴 틈이 없다는 듯 빠르게 내뱉은 필립이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널 진정한 전사로 기억하겠다."
"주근깨, 너, 설마. 정말…"
샬롯의 말을 듣고서야 테사이아가 눈을 치켜떴다. 손을 떼려는 그녀에게, 필립이 검을 내밀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
"안 돼. 필립? 그러지 말거라. 이거 놔! 당장 놓지 못해? 샬롯!"
헐떡이며 내뱉던 메브가 몸을 들썩이며 소리쳤다.
하지만 샬롯은 팔을 쥔 손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 주었을 뿐, 오히려 등을 더 무겁게 짓눌렀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독 안개를 힐끔 돌아본 필립이, 메브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제대로 인사 올릴 여유가 없어 아쉽군요.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나리."
"안 돼! 필립! 멈추거라! 제발…!"
메브의 갈라진 절규를 등진 채, 필립은 계단을 내려갔다.
자욱한 독 안개의 파도. 그리고 계단으로 발을 들이는 권속들의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느리고 선명하게 눈에 담겼다.
'이게 이안 나리께서 보시는 세상인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며, 필립은 거꾸로 고쳐 쥔 검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검 끝을 계단에 찍으며 눈을 감았다.
반지에 담긴 얼마 남지 않은 신성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게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빛이여…."
눈을 감고 기도문을 읊조리며, 필립은 성물에 담긴 신성력을 모조리 뿜어냈다.
솨아아아-
그의 전신을 중심으로 흐릿한 빛의 장벽이 피어올랐다. 그 위를 독 안개가 뒤덮었다.
필립의 바람과 달리, 그가 펼쳐낸 장벽은 불과 몇 초도 버티지 못했다. 장벽을 깨뜨린 독 안개가 그의 전신을 뒤덮으며 밀려들었다.
하지만 필립은 도망치지도, 기도를 멈추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으로 말미암아 메브가 엄정한 여신의 은총을 받길. 그래서 그녀의 복수가 성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이안이 살아남길. 그래서 언젠가 대륙의 어둠을 모두 몰아내고, 자신과 같은 고아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게 해주길 기원했다.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진심을 다해서.
다음 순간 고통이 사라졌다.
찬란한 빛이 그를 비췄다.
#216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불과 몇 초가 지난 것 같기도, 몇 년이 지난 것 같기도 했다.
이안은 굶주림에 떠도는 늑대였고, 동시에 가려움과 고통에 신음하는 나병 환자였다. 뙤약볕 아래 밭일하는 농부였다가 행인에게 달려드는 코볼트이기도 했다. 동시에 자신의 등을 채찍질하는 수도사이며 구정물 속을 기어 다니는 구더기였다.
생의 파편들은 저마다 온갖 종류의 괴로움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고통 끝에 기다리는 건, 언제나 공평한 죽음뿐이었다.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속삭임들은, 그렇기에 위대한 순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부패와 질병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이어 주는 순환의 매개체였다. 그 일부가 되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나와 타인의 구별조차 무의미 했다.
진정한 의미의 해방. 그리고 끝없는 순환으로 말미암은 영생.
위대한 순환과 합일을 이루면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고, 죽음도 두려운 것이 아니리라.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던 환영과 설파는, 한 순간 예고도 없이 멈췄다.
이안이 포도밭에서 일하는 소년이 되어 있을 찰나였다.
모든 게 정지한 세상 속.
'뭐야, 설마….'
소년이 된 이안의 눈동자가 꿈틀댔다.
기억과 의식의 해일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그였다. 완전히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유혹에 넘어가 순환의 일부가 되지도 않았다.
이안은 그저, 수많은 기억의 파편과 의식의 조각들을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였다.
어떤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이벤트는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혼돈력도 두근대는 옅은 울림을 토해내기만 할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쨌건, 이안은 이 기억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넘어왔음을 깨달았다.
내내 그를 관조하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잠시 그에게서 눈을 돌린 모양이었다.
"벌써 보여 줄 게 다 떨어졌냐?"
자주색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아이의 목소리였다.
-...!
일순간 하늘 파장이 번졌다. 깜짝 놀란 것처럼 보였다.
이미 이안이 의식을 잃었으리라 여긴 모양이었다. 터무니없는 예상은 아니었다. 아무리 강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도, 수천 개로 조각난 기억의 파편에 휩쓸리고 나면 자아를 잃었을 테니까.
어쩌면 계속 울려 대는 혼돈력이 이안의 의식이 쓸려나가지 않게 붙잡아 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이안은 자신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비단 높은 정신력 수치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런 환영과 설파는, 현대인인 그에겐 별다른 깨달음이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심지어 그리 공포스럽지도 않았다. 이보다 더한 환영을 몇 번이나 경험하지 않았던가.
뇌리로 흐릿한 사념이 이어졌다.
-합일을… 거부하지 말라… 혼돈이여….
뭐라는 거야, 자꾸.
당장 이죽거려 줄 말이 서너 개쯤 뇌리를 스쳤지만, 이안은 입을 열지 못했다.
두근-
혼돈력의 울림이 불현듯 또렷해졌기 때문이다. 시야가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혼돈력이 당장이라도 뿜어져 나갈 것처럼 꿈틀댔다.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 이제 와서 말 잘 듣는 척이라도 하려고?
내심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이안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을 풀어헤쳤다.
솨아아아아-
혼돈력이 봇물이 터지듯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물감처럼 뒤섞여 흘러내린 이안의 시야가, 곧 신경계 다발 같이 복잡하게 뻗어나가 이어진 순환의 뿌리를 다시금 그려냈다.
온통 자주색이던 뿌리의 일부가, 엄청난 속도로 보라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거, 많이도 이어 졌었네.'
이안은 그게 자신과 이어진 의식과 기억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뿌리의 내부에 응축된 혼돈력과, 뒤엉킨 권속들의 의식이 자신에게 종속되는 게 느껴졌다.
공허의 존재가 그를 삼키려 했듯, 이제는 반대로 그가 놈이 가진 힘의 원찬을 빼앗고 있었다.
뇌리로 퀘스트의 이름이 다시금 스쳐지나갔다. 잠식.
'암세포가 된 기분인데.'
이안은 감각이 끝없이 확장되고 의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
자연스럽게 저 너머의 시선도 선명해졌다.
이제 보니 하나가 아니었다.
가장 크고 강대한, 아마도 공허의 존재로 보이는 의식을 중심으로, 놈과 바로 이어진 작지만 선명한 의식들이 몇 개 더 있었다.
'저게 의식의 주동자들이겠군.'
의식이 멀쩡하다니. 메브가 좋아하겠는데.
어쨌건, 놈들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란 게 분명했다.
언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사념이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심상에 일렁이던 자줏빛 뿌리가 증발하듯 사라졌다.
이안은 이유를 곧바로 깨달았다.
놈이 완성된 순환을 포기하고, 이안과 이어진 부분을 통째로 잘라내 버린 것이다.
확신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혼돈력으로 물든 보랏빛 뿌리는 여전히 심상에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꼬리 자르기라니… 공허에서 온 놈이 뭐 이리 소심해?'
…어쩌면 공허에서 온 놈이라 더 결단이 빠른 걸지도.
어쨌건, 그 와중에도 이안의 혼돈력은 주위를 착실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직 모든 뿌리가 그의 혼돈력에 물든 건 아니었다. 잘려나가고 남은, 빛을 잃어가는 부분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전부 물들이는 것보다, 혼돈력이 기세를 잃는 게 더 빨랐다.
이 전부를 물들이기엔, 그가 가진 혼돈력의 양이 아슬아슬하게 부족했다.
'능력치에 따른 혼돈의 주도권이라더니….'
보상 문구를 떠올린 이안이 옅게 실소했다.
그 능력치란 건, 아마도 정신력과 혼돈력이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정신이 버틸 수 있는, 혹은 혼돈력이 허락하는 만큼만 뿌리를 잠식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번엔, 그의 정신보다 혼돈력의 한계가 더 빨리 찾아온 것인 셈이었다.
'재수 없었으면, 이 지루한 걸 더 오래 봐야 할 뻔했네.'
게임에선 고작해야 몇 초짜리 컷 씬에 불과했을 텐데.
물론, 아무래도 상관 없는 부분이었다. 당장은 퀘스트를 완료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려면….'
이안은 이제 혼돈의 뿌리라 불러야 할, 자신의 권속이 된 순환의 뿌리를 관조했다.
이 안에 담긴 힘. 그리고 동화된 의식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애석하게도 영원하지는 못할 터였다. 순환이 끊어졌으니 불사도 아니며,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고 말리라.
적어도 당장은 아니었다. 단단하게 뒤엉킨 의식들을 관조하던 이안은, 곧 그것들이 외부로도 이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어지럽게 재생되는 수백 개의 모니터를 눈앞에 둔 느낌이었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수도원의 전경을 비추고 있었으니까.
'...?'
그 전경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이안이, 그중 하나에 정신을 집중했다. 상공에서 수도원을 내려다보는, 넓은 시야를 가진 권속이었다.
의식이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 들더니, 삽시에 시야가 탁 트였다.
그가 의식을 공유한 건 날벌레였다. 여러 개의 홑눈이 넓은 범위를 동시에 인식했다.
하지만 이안은 그 사실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저 자식이…?'
펼쳐지고 있는 광경이 그보다 훨씬 더 놀라웠기 때문이다.
계단 한복판, 필립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검 끝을 땅으로 향하게 쥐고, 이마를 자루를 쥔 양손에 댄 채였다. 기사들이 맹세나 기도를 올릴 때 흔히 취하는 자세.
이번 경우에는 후자일 터였다.
그리고 그 기도가 루 솔라에게 닿은 게 틀림없었다.
먹구름 사이로 내리쬔 빛의 기둥이 필립을 비추고 있었으니까.
빛의 기둥은 필립의 전신에서 반짝이는 신성력으로 화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분명한 거대한 빛의 장벽은, 계단 주위를 완전히 감싼 채 밀려드는 독 안개와 권속들을 전부 막아내고 있었다.
빛의 기둥은 이 순간에도 빠른 속도로 옅어지고 있었지만, 신성의 장벽은 조금도 그 빛이 바래지 않았다.
필립은 자신이 그런 기적을 행하고 있음을 깨닫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저 미동도 없이 눈을 감은 채, 입술만 달싹였다.
'일시 정지된 게, 저 녀석 덕분인가…?'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이안은 자신의 추측이 옳으리라 확신했다.
마경이 된 본거지 앞에 루 솔라의 기적이 현신한 셈이었으니까.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대체 어쩌다 저 녀석이….'
이안의 시선이 반투명한 장막에 가려진 계단 위로 향했다.
바닥에 엎드린 채 투구를 위로 치켜든 메브. 그녀의 등에 무릎을 얹은 채 반쯤 넋 나간 표정을 짓는 샬롯. 마찬가지로 메브의 다리 위에 걸터앉아, 코피로 범벅인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테사이아가 동시에 선명해졌다.
우묵하게 들어간 대문 옆의 벽면에 축 널브러져 있는 이안, 자신도.
'그래… 다들 열심히 한 거군.'
어쩌다 이런 상황이 펼쳐진 건지 알 만한 광경이었다.
게다가 그들 뒤편, 지붕이 아치를 그리며 솟은 건물은 그들의 목적지인 수도원이 분명했다.
이안의 시야에는 굳게 닫힌 대문 한복판에 새겨진 공허의 표식이 또렷하게 보였다. 힘으로는 저 대문을 열 수 없었으리라.
'그러니까….'
좀 도와줘 볼까.
이안의 이식이 다시 지하로 되돌아왔다. 혼돈의 뿌리를 자시 관조한 그는, 모든 권속들에게 같은 명령을 내렸다.
순환의 권속들을 공격하라는.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퀘스트 완료 창이 이어졌다.
이게 대체 어떤 타락자의 전용 퀘스트였던 걸까 하는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아마도 흑마법사. 혹은 고대 신관의 퀘스트가 아니었을까.
'…하긴. 알게 뭐람.'
나한테 도움만 되면 그만이지.
이안의 의식이 다시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솟구쳤다.
***
"루 솔라여…."
메브가 나지막이 탄식했다.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그녀는, 반짝이는 신성에 휩싸인 필립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샬롯이 어느새 결박하고 있던 팔을 풀었음에도,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채였다.
솨아아아-
먹구름을 뚫고 쏟아지던 빛의 기둥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거대한 방벽처럼 솟아올라 계단 주위를 감싼 빛의 장막은 여전히 찬란했다.
독 안개는 물론이고, 장벽에 닿은 권속들은 예외 없이 타들어 가 재가 되었다.
두려움을 모르던 괴물들이 지금은 멈춰 선 채 주춤대고 있었다.
물론, 계단 아래에는 여전히 수많은 부패의 권속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일렁이는 독 안개도 그 밀도가 조금 옅어졌을 뿐이었다.
"그… 르륵…!"
"혼돈을… 경배… 하라…!"
놈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소란이 번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가래가 끓는 듯한 고함과 주문 같은 목소리들이 메아리치고, 찢고 후려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뭐야 이게…?"
눈을 끔뻑이던 테사이아가 중얼댔다. 샬롯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공중에서 서로 뒤엉켜 추락하는 벌레들을 눈에 담으며 읊조렸다.
"지들끼리 싸우고 있어… 게다가 저것들 안광이…."
"안광…?"
그제야 미간을 찌푸린 샬롯이 신성의 장벽 너머를 눈에 담았다. 누런 안광 사이사이 보랏빛이 일렁였다. 서로 다른 색의 안광들이 뒤엉키고 있었다.
"…이안."
"이안이야."
샬롯과 테사이아가 거의 동시에 내뱉었다. 비틀대며 일어선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분명해. 이안이 뭔가 한 거야."
"…그래. 내가 뭔가 했지."
"...!"
옆에서 이어진 목소리에, 테사이아와 샬롯이 홱 고개를 돌렸다.
벽에 기대 널브러져 있던 이안이,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눈을 치켜떴던 테사이아가 그에게 뛰어들듯 달려들었다.
"늦었잖아, 멍청아…!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게다가 막판에는-"
덕분에 뒤로 밀려나 벽에 등을 부딪쳤지만, 이안은 그저 미간만 살짝 찌푸렸다.
"…그래. 엄청난 전투였겠군."
테사이아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밀어내면서,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조금 어지러운 걸 빼면,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샬롯과 메브를 바라본 그가 덧붙였다.
"다들 고생했다. 그리고…."
이안이 샬롯의 무릎 아래를 턱짓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이제 그건 풀어줘도 될 것 같은데."
"…아. 그래. 그렇겠군."
그제야 메브의 등에서 무릎을 뗀 샬롯이 뒤로 물러나며 일어섰다.
메브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휘돌려, 주먹으로 샬롯의 안면을 후려쳤다.
#217화
고개가 홱 돌아간 샬롯이 비틀대며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무슨 짓이야, 빨강 머리! 미쳤어?"
이안이 눈썹을 치켜드는 가운데, 튕겨 오르듯 일어선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그녀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올리며 씹어 뱉었다.
"이 정도로 용서하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라. 필립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것이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우린 주근깨가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대던 테사이아가 말을 멈췄다. 샬롯이 그녀 쪽으로 손바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화낼 필요 없다, 귀쟁아. 오히려 쳐 줘서 후련해졌으니까."
내뱉으며 비틀, 일어선 샬롯이 바닥에 피 섞인 침을 뱉었다. 그녀가 입가의 피도 닦지 않은 채 메브를 마주 보았다.
"정말 충분한가? 부족하다면 더 쳐라."
"…아니. 그럴 필요는 없겠군."
"그렇다면야. 주먹이 맵군. 정신이 번쩍 들어."
비로소 턱을 어루만지며 샬롯이 몸을 돌렸다. 메브는 그저 한 차례 긴 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거참, 시원시원들 하군.
지켜보던 이안은 비로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휘청대며 달려간 테사이아가 메브 옆에 서서 얼굴을 들이 밀었다.
"나도 쳐. 빨강 머리. 그런 거면."
"…됐다. 얼굴을 보니, 너한텐 그러면 안 될 것 같군."
잠시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본 메브가, 이윽고 옅은 헛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난 기회 줬다? 하고 덧붙인 테사이아가 홱 몸을 돌렸다.
"멍청한 야옹아. 거기서 허세를 또 왜 부려? 가뜩이나 못생겼는데 더 못생겨졌네."
"네 얼굴이나 보고 말해라. 네 몰골이 제일 엉망이니까."
"다친 것 같은데. 괜찮나?"
비로소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물었다. 샬롯과 동시에 고개를 돌렸던 테사이아가, 그게 샬롯에게 한 물음이란 걸 깨닫고는 입술을 비죽였다.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진 않다. 아까 신성에 휩쓸리면서, 몸속이 끓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 찬란한 여신의 은총이 몸속의 독을 태워 버린 거야."
"잘됐네. 네가 쓰러지면 옮기기 어려웠을 텐데."
"네 상태는? 괜찮은 거냐?"
"멀쩡해. 상처도 하나 없고."
"그건 야옹이 덕분이야. 멍청하게 온몸으로 막아서더라니까."
"그래…? 역시 내 종자로군."
테사이아의 말에 농담으로 화답하는 이안을, 메브가 돌아보았다.
"그래서, 저 소란은 정말 네가 한 거냐, 이안? 공허의 존재가 네 의식을 빼앗은 건 알고 있었다만. 반격에도 성공한 거야?"
"그런 셈이오. 영원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그놈의 힘을 일부 빼앗았으니까. 이제 놈들은 불사도 아니고, 마경도 완전하지 않을 거요. 아마도."
"힘을… 빼앗았다라…."
메브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가운데, 이안이 대문 앞으로 다가섰다.
황급히 고개를 턴 메브가 덧붙였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이안. 뭔가 마법적인-"
"알고 있소."
어느새 동공 한복판이 보랏빛으로 물든 이안이, 말을 자르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이 대문에 닿자 보랏빛 균열이 핏줄처럼 번졌다.
뻗어나간 혼돈력이 대문 한복판, 공허의 표식으로 스며들었다.
자주색이던 표식이 곧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아마도 이안에게만 보일 변화였다.
"어떻게 한 거야? 신기하네."
"...?"
뒤에서 이어진 목소리에, 이안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이게 보이냐?"
"응. 희미하게."
"그런데도 그냥 두고만 봤다고?"
"그게 뭔 줄 알고 어떻게 해? 뭐야, 이거 나만 보이던 거였어?"
테사이아가 그제야 샬롯과 메브를 돌아보았다. 둘 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 문고리를 쥐며, 이안이 짧게 웃음 지었다.
"다음부터 이런 게 보이면, 마력으로 부숴 보려고라도 해 봐."
대문이 그의 손을 따라 천천히 열렸다. 그 너머로 푸르스름한 빛이 번졌다. 일행 모두의 시선이 그 너머로 집중되는 가운데, 문을 반만 열어 둔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럼 이제, 저 녀석만 데리고 들어가면 되겠군."
그의 시선이 비로소 계단 아래, 기도 중인 필립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루 솔라가 상당한 양의 신성을 내려준 게 분명했다. 그는 아직도 반짝이는 빛무리에 휩싸인 채였고, 계단 주위를 감싸며 피어오른 신성의 장벽도 굳건하게 일렁였다.
"그래서 이제 주근깨는 뭐, 성기사라도 된 거야?"
옆에서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방울져 떨어지는 코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이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색이 파리하다 못해 창백했다. 그녀의 코 아래를 엄지로 눌러 닦으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어지럽냐?"
"응…?"
"어지럽냐고."
"아, 응."
"머리는 깨질 것 같고, 속은 메스껍고?"
"어떻게 알았어? 거기다 코피도 안 멈춰."
"마력 탈진이군. 넌 이제 빠져 있어라."
코피가 이렇게 나는 건 그에겐 없는 증상이지만. 본래 마력 탈진의 여파는 조금씩의 개인차가 있었다.
헤실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그래서, 쟤 이제 성기사냐고."
"그건 나한테 물을 게 아닌 것 같은데."
테사이아의 시선이 이안을 따라 옆으로 돌아갔다.
이제야 가슴 벅찬 눈빛으로 필립을 바라보고 있던 메브가 읊조렸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찬란한 여신께서 계시를 내리셨는지는, 필립만 알고 있을 테니."
"저게 계시를 받고 있는 게 아니면 뭔데?"
테사이아의 물음에, 메브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나 역시 처음 엄정한 여신의 눈에 들었을 때, 기적이 내렸었다. 하지만 그게 계시를 받은 순간인 건 아니었지. 그저 성전사로 거듭났었을 뿐. 물론, 필립은 다를 수도 있어."
"뭐, 결국 저 녀석에게 직접 들어야 한단 말씀이시군."
"그래. 중요치 않은 부분이다. 이미 찬란한 여신께 인정받았으니. 결국은 시간 문제에 불과할…."
메브가 말을 멈췄다. 필립의 전신에 맺힌 빛무리가 한차례 눈부시게 명멸하더니, 장벽을 향해 일제히 뻗어나갔기 때문이다.
흩어지는 신성 사이로 필립이 일어서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필립이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눈으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조금은 어리둥절한 시선도 잠시.
곧 녀석이 평소 같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여기가 천상은 아니군요."
필립의 눈에 맺힌 광채가 부스러지듯 흩어졌다. 그의 몸이 옆으로 휘청, 허물어졌다.
"필립-!"
거의 동시에 튀어 나간 메브가, 그의 머리가 땅에 닿기 전에 간신히 붙잡아 품에 안았다.
"다시는 그러지 말거라, 필립. 다시는…"
기절한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메브를 잠시 바라본 이안이, 이내 샬롯을 돌아보았다.
"저 녀석도 나처럼 업을 수 있겠냐?"
"…넌 업은 게 아니라 안고 다녔다만."
"뭐든. 경은 저 안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어쨌든, 너도 전면에서 싸울 상태는 아니고. 그러니까 저 녀석은 네가 챙겨라. 그리고…."
테사이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이안이 덧붙였다.
"이 녀석도, 네가 챙기고."
"알았다. 그러지. 저 녀석에겐 빚을 졌으니까."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인 샬롯이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빛의 장벽을 잠시 눈에 담았다. 흩어진 신성력을 머금고 찬란하게 빛나던 장벽은, 이 순간에도 독 안개를 불태우며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그래. 오래 버티진 못하겠군.
"그… 르륵…!"
"위대한… 순환을…."
"혼돈을… 경배… 하라…!"
장벽 너머, 서로 죽고 죽이는 권속들의 모습도 선명해졌다.
당장은 호각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이안의 권속들이 패배하게 될 싸움이었다. 어쨌건 절대적인 숫자의 차이는 명확했으니까.
문득,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그는 저들 대부분이 원해서 부패와 질병의 권속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들은 그저 피해자였다. 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해도, 뒤엉키고 오염된 영혼들이 본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내가 혼돈력을 전부 다 뽑아 쓰면 되려나.'
그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결국 그저 복수뿐이었다. 저들에겐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겠지만.
필립을 대충 등에 업은 샬롯과 메브가 계단을 올라온 건 그때였다.
축 늘어진 필립을 턱짓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괜찮은 거요?"
"그래. 탈진해서 정신을 잃었을 뿐이다. 반나절, 길어야 한나절이면 충분히 깨어날 거야."
"그럼…."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 녀석이 깨어나기 전에, 끝내 놓읍시다."
이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메브의 눈빛이, 언제 감격과 기쁨을 머금었었냐는 듯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훌륭한 판단이군."
***
구우웅-
대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순간,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적막이 내려앉았다.
"...."
이안은 곧바로 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손아귀에서 뻗어나와 문을 타고 번진 혼돈력이, 반대편 공허의 표식에 스며들었다.
암흑 성물을 각인할 때와 비슷한 감각. 이제 그 무엇도, 이안이 허락하지 않는 한 이 문을 열 수 없을 터였다.
'다른 출입구가 있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지겠지만….'
생각하며 손을 뗀 이안이 몸을 돌렸다. 필립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메브를 눈에 담으며, 그가 걸음을 옮기는 사이.
"반짝반짝하네. 조용하고."
코와 입에 천 조각을 덮은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그녀의 말 그대로였다. 복도처럼 이어진 전실에는 온통 이끼와 곰팡이가 뒤덮여 있었다. 그것들이 내뿜는 빛만으로도 시야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도 이 내부 전체가 이런 상태일 터였다. 수도원이라기 보다는 잘 가꾼 실내 정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싸우면서 갈 일은 없겠군.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덧붙이는 샬롯의 곁을, 이안이 스쳐 지나갔다.
메브는 그와 나란히 걸었고, 필립을 등에 업은 샬롯은 조금 거리를 둔 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앞서 나가려는 테사이아의 팔뚝을 한 손으로 콱 움켜쥔 채였다.
"…역시. 네 말대로 마경에 균열이 생긴 모양이군. 신의 손길이 닿고 있다. 처음 보았을 때 같은 짙은 어둠도 사라졌고."
잠시 기도문을 읊조리던 메브가 내뱉었다. 이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고 가는 거야, 이안? 여기, 길이 여러 갈래 같은데."
"뭐. 어느 정도는."
무책임한 말과 달리, 이안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저 깊은 중심부, 꿈틀대는 공허의 힘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 안으로 들어서면서 감각이 한층 더 예민하게 확장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돈의 뿌리 덕분일 터였다. 뿌리는 여전히 혼돈의 파편을 통해 그의 심상에 선명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안에서는 그 힘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는 게 분명했다.
'타락자나 마법사들이 이래서 그렇게 자신만의 소굴을 만들려고 하는 거군.'
타락자 이안 호프라. 사실, 이젠 아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은데.
내심 실소하며, 이안은 눅눅하고 퀴퀴한 공기로 가득 찬 전실과 그 너머의 복도를 성큼성큼 나아갔다.
공기에 섞인 독과 포자는 더이상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성물이 없더라도 그럴 터였다. 아니, 이어질 싸움을 생각하면 성물이 없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오히려 방해되겠지….'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목덜미로 손을 뻗는 사이.
"주르도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일지 모르겠군."
문득 메브가 입을 열었다.
"만약 놈도 저 밖의 괴물들과 같은 상태라면-"
"그 걱정은 마시오."
델라 루의 은총을 담은 목걸이를 아공간에 넣으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놈들은 자아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 던전의 중간 보스이기도 할 테고.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을 만도 하건만. 곧바로 수긍하는 메브의 모습에, 이안은 내심 실소를 삼켰다. 메브는 그의 마법이나 공허와 관련된 부분에는 절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곧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얼마든지."
"놈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그러니… 놈을 내게 양보해 주지 않겠느냐?"
"뭐, 그러시오."
"...!"
이렇게 선선히 받아줄 줄은 몰랐다는 듯, 메브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피식한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이건 경의 복수이기도 하잖소."
물론, 동료가 대신 처리해도 퀘스트가 완료된다는 걸 이미 겪어 봤기에 가능한 대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선선히 양보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대신, 공허에서 넘어온 놈은 내게 양보하시오."
내뱉은 그가, 메브와 시선을 교환하며 덧붙였다.
"그놈은 내가 죽일거니까."
"기꺼이 그러겠다. 그때는 내가 널 보좌하지."
"됐소. 아마 그놈은 지하에 있을 거요. 경이 사제들을 혼자 상대할 수 있다는 게 확실해 지면, 나는 곧바로 놈을 치러 가겠소."
"혼자서…? 정말 그래도 괜찮겠느냐? 상대는 공허의-"
"걱정마시오. 충분하니까. 오히려 이번엔 혼자 싸우는 게 더 편할 거요. 아무도 없이."
"…그래. 그렇다면."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에 잠시 멈칫한 메브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단 원하는 대답을 제대로 들을 고민이나 하는 게 좋을 걸?"
뒤에서 테사이아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메브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잖아, 빨강 머리. 넌 누가 봐도 자기들을 죽이러 온 기사인데, 네가 뭘 묻는다고 순순히 털어놓겠어?"
"알고 있다. 그래서 샬롯의 심문 방식을 참고할 생각이야."
메브의 대답에,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하군. 타락자들은 쉽게 죽지 않으니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지. 차라리 내게 맡겨 준다면, 원하는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게 만들어 주겠다."
"어쩌면 이번엔 그보다도 더 쉬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이안이 툭 덧붙인 말에, 일행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내가 있으니까."
말하며 보랏빛이 아른거리는 눈으로 메브를 돌아본 이안이, 슬쩍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놈들, 내가 타락자인 줄 알거든."
"...!"
#218화
메브는 이안에게 자신이 묻고자 하는 것들을 간단하게 털어 놓았다.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이안도 그녀가 어떤 것들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지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수도 있소. 그때는…."
"…본래 하려던 방식을 선택하겠다.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이안.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단서를 수색하는 방법도 있으니. 썩지 않고 남은 게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그 와중에도 이안은 이끼와 곰팡이, 온갖 색의 버섯으로 뒤덮인 내부를 거침없이 나아갔다.
독 포자는 일행에게 그리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하지만 장비들은 어느새 눈에 띄게 부식되고 있었다.
특히 메브의 갑옷이 변색이 심했다. 앞선 전투를 생각하면, 사실 아직도 멀쩡한 게 오히려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진작부터 철저하게 관리해 둔 덕분이리라. 그게 아니었다면 이미 진작 삭아서 부서지거나 이음매가 분리되었을 터였다.
'어쨌든, 이번 일이 끝나면 또 장비를 싹 다 바꾸긴 해야겠네.'
남은 돈을 다 털어도 부족할지도.
벌어도 벌어도 끝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안은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굳게 닫힌 대문 앞이었다.
이 너머가 예배당이었다. 공허의 힘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올 수 있었떤 건, 아마도 그가 만들어낸 혼란 덕분일 터였다.
저들은 깨진 순환을 다시 이어 붙이고, 날뛰는 이안의 권속들을 제압하려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리라.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끝내고 싶겠지.'
이안의 권속들은 이 순간에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남은 숫자가 적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가 지하에 도착할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문에 손을 얹으며, 이안이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해야하는 지는 알고 있겠지?"
"걱정마. 하수인인 척하고, 뒤에서 손 놓고 구경만 할게."
이럴땐 참 믿음직스럽다니까.
테사이아의 대답에 코웃음으로 화답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잊지 마시오. 내가 검을 건낼 때가…."
"…내가 나설 때."
메브의 안면 가리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비로소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
원형을 그리며 펼쳐진 널찍한 예배당의 전경이 드러났다.
이안은 느긋하게 장내로 걸음을 옮겼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문 좌우에 멈춰선 채 고개를 숙이고, 메브가 그의 기사인 것처럼 뒤를 따랐다.
예배당은 밖과 다름없이 이끼와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정 중앙에, 바닥을 뚫고 솟아오른 듯한 새카만 나무 둥치가 나선을 그리며 튀어나와 있었다. 끝부분은 누가 뚝 부러뜨린 것처럼 삐죽삐죽하게 잘린 채였다.
새카만 넝쿨들이 둥치 곳곳에서 뻗어 나와 주위를 칭칭 휘감았다.
넝쿨의 끝은, 둥치 위 삐죽삐죽한 가장자리에 둘러앉은 사제들의 로브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로브와 두건을 깊이 눌러쓴 채 웅크리고 있던 그들은, 이안이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불결한 거목의 제단.
'불결한 거목이라….'
이안은 곧바로 놈들에게 달려들지 않고, 계획대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그리고는 아공간에서 날이 곧게 뻗은 양손 검을 꺼냈다. 그는 검의 날 끝을 땅에 찍고, 무게추에 왼팔을 걸쳤다.
당장은 싸울 생각이 없다는 의사 표현임과 동시에, 언제든 오른손으로 자루를 움켜 쥘 수 있는 자세였다.
푸스스….
그사이 둥치를 박찬 사제들은 허공을 유영하듯 날아올라, 허공에 넓게 산개하고 있었다. 총 여섯.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거목의 둥치를 감싼 넝쿨들이 표면을 비볐다.
나무껍질이 썩은 것처럼 바스러지며 거뭇한 분진을 흩날렸다.
분명 중독이나 감염 같은 상태 이상을 유발하는 분진일 터였다.
사제들은 정말 날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뱀처럼 길게 이어진 넝쿨들이 몸을 지탱하고 있어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넝쿨 정도는, 이제 전혀 놀라운 광경이 아니었다.
이안 쪽을 돌아보는 그들의 로브는, 어깨 뒷부분 양쪽이 부자연스럽게 솟아 있었다. 그 아래로 날개라도 감춰둔 것처럼.
'뭐, 당연히 변이 됐겠지.'
곤충 다음은 뭐, 식물이냐?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이안은 오른손을 뻗어 아공간에서 목함을 꺼냈다. 궐련을 한 대 꺼내 무는 손길이 한결 느긋해졌다.
어쨌든 사제들도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허공에 길게 늘어선 그들의 두건 아래로, 이안을 바라보는 암녹색 안광이 일렁였다.
화륵-
아공간에 목함을 휙 던져 넣은 그가 손가락 사이에 불꽃을 피워냈다.
궐련 끝에 불이 붙었다. 주먹을 쥐어 불꽃을 흩어 버리면서, 이안이 천천히 궐련의 연기를 들이마셨다.
사제들을 훑는 그의 눈은, 어느새 선명한 보랏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사제들의 안광에 묘한 두려움과 경외가 일렁였다.
'…이게 정말 통하네.'
이안은 내심 실소를 삼켰다.
하긴. 저것들도 그가 순환의 뿌리를 혼돈력으로 물들이는 것을 이미 보았을 터였다. 그를 고위 타락자, 혹은 그 이상의 존재로 여기는 건 오히려 당연했다.
심지어 순환이 깨지면서, 이제는 완벽한 불사도 아닌 상태가 되지 않았던가.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궐련을 끼운 이안이 연기를 토해내는 그때.
"위대한 혼돈의 화신이여…."
사제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잠긴 것처럼 낮고,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심지어 이제는 사도를 넘어 화신 취급이었다.
"주께서, 혼돈과 순환은 공존하는 관계이니 서로를 파괴할 이유가 없다 전하셨습니다. 합일을 거부하셨으니 더는 권하지 않을 것이며… 화신께서 깨뜨린 순환의 굴레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불필요한 희생은, 이만 멈추는 게 어떠신지요."
얼씨구. 휴전 제안까지.
이안은 코웃음 대신 궐련의 연기를 한 모금 더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게임에서도 캐릭터를 타락시키면, 특정 타락자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게 가능했을지도 몰랐다.
그들에게 서브 퀘스트 따위나 자잘한 도움들을 받는 것이다. 교단이나 황실과는 적대할 수밖에 없을 테니, 당연히 필요한 컨텐츠인지도 몰랐다.
어쨌건, 적어도 지금 상황은 게임에서는 없었던 게 분명했다. 추가적인 퀘스트가 발생하지는 않았으니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툭 내뱉은 이안이 사제들을 눈에 담았다. 두건 아래로 드러난 사제들의 나무 껌찔 같은 입가에 옅은 안도가 번지고 있었다.
"말씀하시지요."
"누가 주르도 주교지?"
"...?"
사제들의 안광이 어리둥절하게 흔들렸다.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대열의 중앙. 거목의 제단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제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한때 그리 불렸습니다."
이제 보니, 내내 말하던 놈이 바로 주르도였다.
거참 뻔한 놈들이군.
"플린트 자작을 알고 있나?"
"…플린트? 지클 플린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르도가 의아한 말투로 되물었다.
이안이 궐련을 입에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라 드린 왕국, 델러햄의. 너와 아는 사이일 텐데."
"그… 렇습니다. 한때 제가 그에게 길을 제시해 주곤 하였지요. 연락이 끊긴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만. 저를 만나러 오셨던 겁니까? 플린트의 소개로요?"
"어느 정도는 그런 셈이지."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죽었다."
"…결국, 그리되었군요."
잠시 입술을 달싹인 주르도가 이윽고 탄식했다.
"그는 본래 병약하게 태어나, 어떤 병마라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손에 넣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길을 잘못 든 모양입니다. 병마와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그 하찮은 놈을 끌어들인 건, 네 의지였나?"
이안이 말을 잘랐다. 얼굴도 모르는 놈의 사연 따윈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주르도의 암녹색 안광으 마주 보며, 그가 덧붙였다.
"아니면 크랄렌 공작의 지시인가?"
등 뒤에서 메브가 순간 놀란 듯 짧은 숨결을 토해냈다.
본래는 그저 배후에 대해 물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안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했다.
어쨌든 크랄렌 공작은 게임에서도 존재하던 보스가 아니던가.
주르도가 다시 한번 탄식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혹, 그자를 죽이기 위해 서부에 오셨던 겁니까? 그 냉혈한이, 화신께도 죄를 지었던지요?"
"그런 셈이지. 그러니, 묻는 말에나 똑바로 대답해."
"…플린트를 택한 것은 제 의지가 맞습니다. 하지만 공작께서 씨앗을 뿌리라 명하셨던 것도 사실이지요."
"너를 이 길로 끌어들인 것도, 그자로군."
"예. 나병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을 찾던 제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어리석게도 전, 그에게 감사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그저 영생과 불멸뿐임을 알지도 못한 채."
"그래서 그에게 버림받았나?"
이안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는 이미 주르도의 말을 반쯤은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다.
이 늙은이는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 건 메브 한 사람으로 충분할 터였다.
대신 그는 지하로 내려갈 길을 찾고 있었다.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각선 반대편의 벽면에, 지하로 이어지는 게 분명한 나선 계단의 입구가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벽의 기관 장치 뒤에 숨어 있었을 비밀 계단이었다. 본래는 유사시에 사제들과 주민들을 숨기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대피 공간이었을 터였다.
수도원은 옛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으니까.
"보시다시피 저희는 눈을 떴고, 위대한 순환의 진리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공작은 아니었지요. 이건 본인이 원하던 불멸이 아니라더군요. 오히려 실패작이라 매도했습니다."
"실패작…? 아, 그래."
조건 반사적으로 되묻던 이안이 이내 궐련의 연기를 뿜으며 피식댔다.
"자아가 무너질 수도 있고 온전히 통제할 수도 없으니 그런 거군."
"역시… 이해하시는군요. 저는 진정한 의미의 해방은 본래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 말했습니다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의식이 실패할 것이라 여기기까지 했지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어리석게도, 그는 우리를 버렸으니."
그놈의 해방은.
내심 콧방귀를 뀌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크랄렌 공작이 의회의 의원이란 추론이 다시금 유력해지는 순간이었다.
영생과 불멸은 놈들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으니까. 흡혈 일족을 하수인으로 부린 것도, 불사의 비밀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쯤, 생각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라클리프의 의식도 무사히 성공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혼돈의 화신이여…. 가장 작은 규모의 의식이었으나, 위대한 순환의 진리를 설파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공작이 저항한다 하더라도… 우리와 하나가 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주르도가 낮게 웃었다. 사제들도 가래가 낀 듯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안은 연기를 들이켜며, 게임 속 크랄렌 공작을 떠올렸다.
그가 이들을 살려둔 건, 혹시 모를 가능성을 남겨두기 위해서일 뿐이었을 터였다.
이들이 자신의 감시를 피해 의식을 준비하고, 끝내 성공시킬 줄은 몰랐으리라.
'그런 주제에, 막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나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던 건가.'
아니면, 내가 겪었던 합일의 환영을 겪고 맛이 가버렸거나.
후자 쪽이 조금 더 유력해 보였다.
의회의 의원이라면 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테니, 공허의 존재의 눈에도 들었을 테니까.
그럼 이것들이 없다면, 공작의 정신 상태가 그가 기억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상태일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뜻이었다.
이안이 서늘하게 미소 짓자, 웃음을 멈춘 주르도가 덧붙였다.
"하지만 만약 혼돈의 화신께서 원하시는 게 그자의 목숨이라면… 기꺼이 양보하겠습니다. 주께서도, 귀하의 앞길을 막지 않을 것이라 전하셨습니다."
"막아도 돼."
툭 덧붙인 이안이, 보랏빛 눈동자로 주르도를 마주 보았다.
"난 너희가 섬기는 그 고목에게도 볼일이 있으니까. 내 영혼을 삼키려 한 대가는 받아야지."
주르도와 사제들이 일순간 굳어졌다. 이안이 검의 무게추에 얹고 있던 팔을 뗐다.
턱.
뒤로 기울어지는 검을, 두꺼운 강철 장갑이 받아들었다.
메브가 말없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사이, 주르도가 내뱉었다.
"하지만 혼돈의 화신이여…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원하는 답을 드리면-"
"그건 너희가 김칫국을 마신 거고."
"김칫국…?"
"처음부터 그럴 생각 같은 건 없었단 얘기야. 게다가…."
궐련을 툭 땅에 떨어뜨려 짓밟으며, 이안이 사납게 미소 지었다.
"그건 사실, 너희도 마찬가지잖아?"
"...!"
주르도의 안광이 일렁였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이안의 권속들은 여전히 줄어들고 있었다.
거기다 발아래 꿈틀대는 혼돈력의 파장도 잦아들지 않았다. 심지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시 묵직한 울림을 토해내기까지 했다.
이들이 그의 대화에 어울린 건, 그저 시간 벌이에 불과 했던 것이다.
주르도의 입술이 느릿느릿 말려 올라갔다.
"네놈…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구나… 하지만 이미-"
내뱉던 주르도의 목소리가 순간 잦아들었다.
솨아아….
이안의 옆에서 붉은빛이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맙다, 이안."
피처럼 끈적한 붉은 신성력을 두른 채, 양손 검을 늘어뜨린 메브가 걸음을 옮겼다.
"이제 여긴, 내게 맡겨라."
#219화
그녀가 곧바로 달려가지 않는 건 적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일 터였다. 그리고 그 의도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성기사가 또…? 그래… 이제야 알겠군…."
메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주르도가 내뱉었다.
"변방을 떠도는 복수의 대행자가 있다더니… 혼돈의 하수인이었던가…."
메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기며,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흉갑 옆까지 치켜들었을 뿐.
거목의 제단이 꿈틀대고, 넓게 포진한 사제들의 로브가 펄럭이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혼돈의 화신이여…! 이미 이 땅의 모든 것은 합일을 이뤘고, 위대한 순환의 굴레는 곧 다시 돌아가기 시작할지니…!"
그와 사제들이 걸치고 있던 로브가 일제히 벌어지며 찢어졌다.
놈들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접힌 날개처럼 보이던 건, 파리지옥 처럼 좌우로 벌어진 거대한 아가리였다. 끈적한 점액이 뒤덮여 번들거렸다. 사제들의 하반신은 그 아가리 사이에 박혀 있었는데, 가슴부터 복부까지 세로로 찢어진 거대한 구멍이 뚫린 채였다. 그 사이로 여러 가닥의 가늘고 긴 촉수가 뻗어나와 꿈틀댔다.
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름답지도 향기로울 것 같지도 않았지만.
복부에서 튀어나온 촉수들이 서로를 비빌 때마다 꽃가루 같은 암녹색 분진이 흩날렸다.
꾸득, 꾸드드득-
동시에 놈들과 이어진 거목의 제단도 변하고 있었다. 나무가 뒤엉킨듯한 줄기 사이가 벌어지더니, 거대하고 누런 눈알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자줏빛 핏줄을 머금은, 가로로 길게 누운 암녹색 동공이 느릿느릿 메브의 움직임을 좇았다.
차르륵… 철퍽…
제단 주위를 감싸던 넝쿨들이 풀어지면서 사제들의 주위로 일제히 치솟았다. 딱딱해 보이던 표면은 어느새 검은 점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말미잘이냐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이안이 내심 읊조렸다. 중요한 건 저 끔찍한 외형이 아니었다. 제단이 본모습을 드러내면서, 계단으로 이어진 길이 완전히 가려진 것이다. 게다가 메브가 저것들을 홀로 상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물론, 메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놈들이 삽시간에 본모습을 드러내는 와중에도 그녀의 걸음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신에 맺힌 신성력은 더 붉고 진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우리는 신과 하나가 되었으니…! 엄정한 여신의 검이라 할지라도 두렵지 않으리라!"
홀로 제단 위까지 솟구친 주르도가 암녹색 안광을 흩뿌리며 소리쳤다. 동시에 사방으로 꿈틀대던 넝쿨들과 사제들이 일제히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후…."
메브의 전신에 신성력이 맹렬하게 끓어올랐다. 그녀가 사방에 검격을 토해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콰과과과과-
수십의 붉은 궤적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곧바로 사라지지 않고 뿜어져 나가면서 흩어지는 궤적이었다. 그것보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더 빨라서, 붉은 막이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피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콰지지지직-
밀려들던 것들이 거꾸로 그 붉은 궤적의 폭풍에 휩쓸렸다. 앞에 걸리는 모든 것을 찢어 발기는 폭풍이었다. 제멋대로 토막 난 넝쿨과 사제들의 조각이 사방에 흩날렸다. 놈들은 신성력에 타들어 가는 것보다 빠르게 재가 되어 흩날렸다.
콰과과과과과-
메브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며 밀려드는 모든 것들을 썰어버렸다. 때때로 잘려나가고 남은 단면이 빈틈을 비집고 그녀의 갑옷을 후려치고 지나갔지만, 그녀의 전진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 전력을 다하면 저랬었지.'
이안은 내심 감탄했다. 과거 기사 클래스를 선택해야 했다고 몇 번이나 탄식하게 만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그때보다도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복수의 사도가 아니라 복수의 화신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하긴. 게임이었다면 레벨 업을 몇 번이나 했을 전투들을 치러 왔는데. 격이 높아졌다 해도 이상하지 않지.'
게다가 그녀는 이성을 잃은 것 같지도 않았다. 목표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거목의 제단에서 조금 어긋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벽면의 계단 입구와 제단 사이를 가로막는 방향이었다.
이안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녀 역시 계단의 위치를 눈에 담아 뒀던 게 분명했다.
콰지직-
휘몰아치는 넝쿨과 사제들의 숫자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아직 반대편의 넝쿨과 사제들이 남아 있었지만, 놈들은 그녀에게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조금 놀란 듯 그녀를 지켜보던 주르도가 양팔을 치켜들었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위대한 순환의 기적은… 이제부터 시작이니…."
솨아아아-
제단의 눈알에 돋은 자주색 실핏줄들이 일렁였다. 동시에 잘려나갔던 넝쿨들이 다시 꾸득대는 소리를 내며 돋아났다. 몇몇 넝쿨 끝에서는 시든 꽃봉오리 같은 검은 덩어리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저 안에는 아마도 순환의 사제들이 들어 있을 터였다.
"후우… 후우…."
걸음을 멈춘 메브가 제단 쪽을 돌아본 건 그때였다.
검을 고쳐 쥔 그녀가 자루를 머리 위로 비스듬하게 치켜들며 자세를 다잡았다. 전신의 신성력은 더없이 짙어져서,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였다. 뚝뚝 흘러내리는 신성력이 주위에 자욱한 독을 중화하며 붉은 수증기를 토해냈다.
하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주르도의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가 맺혀 있었다.
정말 엄정한 여신의 화신이라 해도 믿을 만한 전투력이었지만, 결국은 인간에 불과했다. 숨결은 벌써 거칠어졌고, 그녀의 갑옷 역시 곳곳이 깨지고 구겨졌다.
무한한 재생으로 말미암은 공세를 영원히 버텨낼 수는 없으리라.
"...!"
주르도의 눈매가 꿈틀댄 건 바로 그때였다. 어느새 달리기 시작한 이안이 그녀의 뒤를 지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르도의 시선이 비로소 그의 경로 끝, 벽면에 뚫린 계단의 입구로 향했다.
꾸드드드득-
제단 옆면에 돋아난 눈동자가 엄청난 속도로 옆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넝쿨들의 재생이 빨라졌다. 눈동자 한복판에 공허의 마력이 빠른 속도로 응집됐다.
"쉽게 주 앞에 발을 들일 수는-"
푸화악-!
내뱉던 주르도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거대한 붉은 섬광이 터져 나오더니, 메브가 토해낸 거대한 붉은 궤적이 제단의 눈알을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잘려나간 눈알이 고름을 토해내며 터져나갔다.
"----!"
뇌리를 헤집는 강대한 사념에, 주르도를 비롯한 사제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넝쿨들이 발작하듯 뒤흔들렸다.
"어딜 보는 거지…?"
검을 내리친 자세 그대로, 메브가 내뱉었다. 차분한 음성. 일순간 막대한 양의 신성력을 토해낸 듯,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력만이 흐릿하게 옅어진 채였다.
"네… 이년…!"
주르도가 절규를 멈추고 씹어뱉은 건, 터져나간 눈알이 부글대며 재생하기 시작한 때였다.
불과 몇 초였지만, 이안이 계단 입구에 도착하게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계단 앞에서 멈칫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가 휙,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던졌다. 평범한 길이의 장검이었다.
메브는 왼손만 내뻗어 날아드는 검을 낚아챘다.
이안이 다시 몸을 돌리는 사이, 그녀가 자세를 다잡았다.
기다란 양손 검을 오른손에, 그보다 짧은 장검을 왼손에 쥔 채 서로 날을 교차한 형태였다.
"그렇게 불안한가?"
메브가 덤덤하게 내뱉었다. 이안에게 배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도발이었다.
"그럴리가… 그저 신의 정원이 더럽혀지길 원치 않았을 뿐…."
주르도의 표정이 미소로 일그러졌다.
"네년을 정원의 거름으로 삼아 신께 용서를 빌어야겠군…."
그가 양팔을 치켜들었다. 전보다 더 길고 거대하게 돋아난 넝쿨과 사제들이, 일제히 뿜어져 나갔다.
메브의 두 자루 검이 무수한 궤적의 폭풍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
이안은 지하로 이어진 나선 계단을 멈추지 않고 내려갔다.
'저것들, 게임에서도 못 죽이는 놈들이었을 것 같은데.'
물론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멋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게임에서도, 저 순환의 사제들은 죽이는 게 아니라 무력화한 후에 지나쳐야 하는 놈들이었을 터였다. 죽여야 되는 줄 알고 반복적으로 도전하게 만드는 게 제작자의 목적이었겠지.
'그렇게 내려가면, 불결한 거목과 저것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겠고.'
정말이지 개 같이 어렵고 까다로운 전투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메브가 있는 이상, 사제들이 지하로 따라 내려오지는 못할 테니까.
놈의 본체이기도 할 제단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할 수는 없을 터였다.
물론 시간이 넉넉할 것 같지는 않았다.
메브의 체력이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물론 그녀는 피를 흘릴수록 강해지는 데다, 샬롯과 테사이아도 합류하게 되겠지만. 유예 기간이 조금 늘어나는 정도에 불과할 터였다.
거기다 순환의 굴레도 곧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지 않던가.
'…그러니까, 수단과 방법을 따질 때가 아니야.'
어느새 그의 손에는 세번째 사도의 흑검이 들려 있었다.
이안의 몸속에 꿈틀대는 강대한 혼돈력을 느낀 듯, 녀석이 낮은 울음을 토해냈다.
어쩌면 점점 더 짙어지는 어둠 때문일지도 몰랐다. 계단은 보기보다 훨씬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지고 있었다. 공간이 뒤틀리고 왜곡된 게 분명했다. 적어도 이 아래는 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완전한 마경이리란 의미였다.
하지만 그 사실이 평소 같은 페널티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
심상 저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공허의 힘을, 신들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이안의 눈동자는 어느새 흰자위까지 전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허물을 벗은 것처럼 선명해지는 감각이 계단의 끝이 멀지 않았음을 알렸다.
곧 이안의 눈동자 한복판에 불그스름한 빛이 감돌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손아귀의 흑검이 또 한 번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지금까지와 달리 두려움이 담긴 떨림이었다.
이안의 입가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그의 심상은 어느새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이면까지 그려내고 있었다. 저 아래에 핏줄처럼 번진 자주색 순환의 뿌리들이 선명해졌다. 그 한복판에 높다랗게 솟은 불결한 거목도. 이름에 걸맞은 거대한 크기였다.
한쪽에는 보랏빛의 뿌리도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의 것이 된 잘려나간 혼돈의 뿌리였다.
자주색 뿌리들은 이 순간에도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놈에게 이어진 몇몇 굵은 마디에 심상치 않게 응축된 혼돈력이 이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건…?'
계단이 끝난 건 그때였다.
상념을 떨친 이안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문 너머로 이어진 지하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는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흑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콰- 아아아아-
검날에서 샛노란 화염이 끝도 없이 토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안의 몸이 일순간 뒤로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기세였다. 불길이 만들어내는 눈부신 섬광이 그의 시야마저 순간 하얗게 물들였다.
콰르르르르-
감상이나 탐색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내부는 전부 놈의 소굴이었다. 가진 화력을 전부 퍼부어 시작부터 최대한 큰 피해를 입힐 생각이었다.
'컷 씬 따위가 끼어들 틈도 없게.'
하얗게 물들었던 시야가 빠르게 되돌아왔다. 내뻗은 그의 검 끝에서는 아직도 화염 해일이 끝도 없이 토해져 나와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이안은 해일이 멋대로 날뛰게 풀어 버렸다.
지옥불을 준비하지 않은 건, 이런 지하에서 사용했다간 그 여파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마력보다 혼돈력을 더 많이 퍼부어 시전한 마법이지 않던가.
힘이 다하기 전까진 절대 꺼지지 않는 불을 혼돈력으로 증폭해 사용했다간, 그도 함께 숯덩이가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지금 사방을 불태우고 있는 화염 해일도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쿠르르르르-
불바다에 뒤덮이고 있는 지하 공간의 전경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타락자들이 의식을 준비했을 지하실은, 용의 둥지처럼 거대한 지하 공동이 되어 있었다.
본래는 형형색색으로 빛났을 이끼와 곰팡이, 나무처럼 거대한 버섯들은 불길에 휩쓸려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타들어 갔다.
'질식해서 죽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그 너머에 거대하게 솟은 거목의 둥치를 눈에 담았다.
여러 개의 나무가 뒤엉킨 듯한 놈의 줄기는 천장 너머까지 솟아 있었다. 저 끝부분이 예배당에서 본 제단이리라.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은 허공을 층층이 뒤덮으며 수없이 뻗어 나갔다. 가장 높은 곳의 가지는 천장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면서, 타르처럼 끈적한 점액을 곳곳에 뚝뚝 떨어뜨렸다.
'저게 공격 수단 중 하나겠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놈의 중심 줄기였다. 수많은 검은 뱀이 뒤엉킨 듯한 끈적한 줄기 사이사이로,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눈알들이 제멋대로 박혀 있었다.
염소의 그것처럼 가로로 길게 누운 암녹색 눈알들은, 장내를 엄청난 속도로 불태우는 화염 해일을 조금 놀란 듯 응시하는 중이었다.
이안이 들어오자마자 이런 공격을 퍼부으리란 건, 놈조차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 오- 오- 오-"
쉴새 없이 꿈틀대는 줄기 사이로, 뱃고동 소리 같은 괴성이 메아리쳤다.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불결한 거목.
부패와 질병의 뿌리를 내린 거목이 다 자라기 전에 처치하라는 내용을 눈에 담은 이안이,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덜 자란 거라고…?'
끝없이 뿜어져 나올 것 같던 불길이 잦아든 건 그때였다.
푸스스….
새빨갛게 달아오른 검날에서 잿빛 연기가 치솟았다.
…이러다 조만간 휘겠는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내뻗은 검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음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2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