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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0

#100화

산과 들을 뒤덮었던 눈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늘진 곳에 얼어붙은 눈만이, 아직 이곳이 장벽 너머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계곡을 지나면 북부 관문이 보일 터였다.

푹신한 의자에 앉은 방주 상단의 상인, 파엘의 얼굴에도 비로소 안도가 감돌았다.

"루 솔라께서 도우셨군. 희생자가 만만치 않게 나올 줄 알았는데. 무사히 관문까지 도착하겠어."

바로 옆, 말에 탄 보르를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아무리 봐도, 여간 대단한 자들이 아니야. 안 그래?"

이안 용병단을 말하는 거였다.

그들이 합류한 후로도 마물의 습격이 없진 않았지만. 방주 상단의 경호병들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게다가 저들의 방식은 과감하기 그지없었다. 마물들에게서 마차를 지키는 방식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물들에게 먼저 돌격해 접근을 차단하는 식으로 싸웠다.

파엘의 입장에선 어리둥절한 호의였다.

어쨌거나 덕분에 상단 경호병들은 그들이 놓친 소수의 마물들만 상대하면 됐고, 파엘은 저 의문의 용병들에게 술과 치즈를 아낌없이 대접했다.

"보기 드문 마족 전문가들이야. 제국의 용병 중에서도 저 정도로 강한 자들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파엘이 덧붙였다.

"왜 고작 셋이서 움직이는지 모르겠군. 용병단을 꾸린다면 거대 세력을 만들 수 있을 테고, 어디 터를 잡으면 작위를 손에 넣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겠지."

묵묵히 듣고 있던 보르가 내뱉었다.

그는 파엘의 고용인이지만, 동시에 친구나 다름없었다. 둘만 있을 땐 편하게 말을 트곤 했다.

"또, 또 이런다. 자넨 너무 비관적이야. 북부인답지 않게."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 수인이 한 말을 들었을 텐데."

"고용주를 지키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르지. 수인이니 누명을 쓰기도 쉽겠고."

보르가 파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들을 고용하고 싶은 건가? 그래서 자꾸 내 눈치를 살피는 거고?"

"눈치는 무슨…. 세상이 갈수록 위험해지고 있잖나. 어디 북부 뿐인가? 이젠 제국 땅에도 강도들이 돌아다니고 마물이 둥지를 트는 판국인데. 너만큼이나 뛰어난 호위병이 많이 필요한 시기가, 머지않아 오게 될 거야."

그에겐 상단을 더 키우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그러려면 언제나,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하는 법이었다.

북부 야인들과의 거래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 도박은 성공했고, 덕분에 상단에 상당한 부를 안겨 줬었다.

적어도 작년까지는.

"새로운 활로를 터야 해. 이대로는 몇 년 안에 망할 거라고. 언제까지 거대 상단 눈치만 보며 살 순 없잖나."

"그렇다고 깜냥에 맞지 않는 걸 탐내다간, 언젠가 목이 달아날 거다."

"고용주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군."

"저자들은 단주가 품을 만한 위인들이 아니까, 맘 접으시오."

"자네로 만족하란 거지? 흐응… 이런 너구리 같으니라고."

"관문을 통과하면 어디로 갈지나 확실히 정해. 난 이대로 돌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니까."

"그럼 마차에 실은 것들은, 죄다 버리고? 안 돼. 트라벨가로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보르가 꾹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빛을 외면하며 마차 앞을 돌아본 파엘이, 이내 미소 지었다.

"관문에 도착하면 저들에게도 물어봐야겠군. 트라벨가까지 동행해 달라고 말이야."

계곡 저 너머, 높다랗게 솟은 관문과 좌우로 이어진 방벽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이안은 저 먼 산기슭까지 이어진 성벽을 돌아보았다.

"인상적이군…."

덤덤한 말투와 달리, 샬롯도 꽤 감명받은 눈치였다.

그럴 만했다. 이안이 보기에도 저 먼 산과 산 사이를 통째로 가로지른 성벽은 대단해 보였으니까.

이런 걸 볼 때, 이안은 이 세계가 한때는 게임이었음을 실감하곤 했다.

관문이 가까워지자, 앞서가던 상단의 속도가 느려졌다.

곧 말에 탄 파엘이 이안 일행의 마차로 다가왔다.

"신원 확인부터 먼저 할까 하는데. 같이 가시겠소?"

그의 손에는 술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뇌물인가…?

"뭐, 그럽시다."

마차에서 내린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파엘이 그의 옆으로 보폭을 맞춰 따라붙으며 물었다.

"여길 통과하면, 바로 트라벨가로 가실 거요?"

"아마도. 일단은."

"아무리 그래도 제법 거리가 있는데, 세 분만 가시기엔 적적하지 않으시겠소?"

이안이 파엘을 돌아보았다.

"결국 거기로 가시려고?"

"이대로 돌아갔다간 손해가 너무 커서 말이오. 팔 수 있는 건 다 팔고 돌아갈 거요."

그가 이안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지금까지 그랬듯, 귀하 일행의 식사는 우리가 책임지겠소. 물론 술도."

동시에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창이 이어졌다. 놀랍게도 또다시 연계 퀘스트가 있었다.

상단의 운명. 퀘스트 내용을 읽던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글쎄. 여기까진 우리랑 다니는 게 더 안전했지만. 저 안에서부턴 아닐 수도 있어서."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파엘이 이안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이안이 뭔가 말하려는 찰나.

"정지! 말에서 내리고 신분을 증명할 것들을 꺼내시오!"

방위군 병사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관문과 성벽 위의 병사들이 그들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변방 왕국들과 달리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었다.

곧 관문 대장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파엘이 내민 상단의 증명서를 읽어 내려가면서, 그가 내뱉었다.

"북쪽으로 나갈 때는 닝글로슬을 거치셨군. 왜 들어올 땐 우리 2관문이오?"

"저 위에선 이제 장사를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트라벨가에 들러 물건을 정리하려 합니다."

태연하게 말한 파엘이, 손에 든 술병을 내밀었다.

"저희가 파는 물건입니다. 한번 맛이라도 보십시오."

"흐음… 방주 상단이라."

관문 대장이 턱짓하자, 뒤따라온 병사가 술병을 받아 들었다.

'저걸 또 받네.'

관문 대장의 시선이, 피식대는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이쪽은? 일행이 아니시오?"

"오는 길에 만난 사이요. 용병, 이안 호프요."

이안이 양피지를 내밀었다.

양피지를 펼친 관문 대장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화로의 사원…? 누구시기에 화로의 사원에서 신분을 증명한단 말이오?"

"용병이오. 거기 닝글로슬의 관문을 통과한 기록이 있을 텐데."

"그건 그렇소만. 증명서에 찍힌 인장이 대사제의 직인이군."

"그분이 발급한 거니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는, 알고 계시오?"

"알고 있소. 보아하니 귀하도 아시는 것 같군."

"...."

관문 대장의 눈빛에, 이안은 이번엔 저번처럼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수는 없으리란 걸 깨달았다.

뇌물까지 받아 놓고 왜 이러지.

설마 더 달란 건가.

이안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 관문 대장이 몸을 돌렸다.

"확인 절차가 필요할 것 같군. 기다리시오."

"...."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멀어졌다. 양피지를 손에 쥔 채였다.

저번에도 아슬아슬하더라니.

생각하며, 이안은 느긋하게 짝다리를 짚었다.

이런 일도 있는 법이었다.

말투로 봐선 저 관문 대장은 체르윈의 존재를 아는 모양이었다.

황족의 직인이 찍힌 증명서를 일개 용병이 가지고 있으니, 의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위조가 아니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화로의 성화가 있는, 그 화로의 사원을 말씀하시는 거요?"

잠깐의 침묵 후, 더듬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삐를 쥔 파엘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시오?"

"알다마다… 오는 길에 그 옆의 마을에서 묵었었소. 사원에서 신분을 보증하다니, 사제를 제외하곤 처음 보는군. 사원에 아주 큰 도움이라도 주셨었나 보오."

이안은 대답 대신 물었다.

"어때 보였소?"

"뭐가 말이오?"

"마을. 그리고 사원."

"마을은 활기가 돌더군. 화로의 불씨가 되살아났다고 들었소. 떠났던 장인들이 돌아오고 있다던데. 곧 다시 예전처럼 번성하게 될 거요."

"그리고?"

"그게 사원에 새로운 불씨가 들어와서 그렇다더군. 소녀인데, 보통 영민한 게 아니라고 들었소. 사원까지 들어갈 순 없으니 뭐 그 이상은 모르겠소만. 망해가던 사원이 되살아나다니. 요즘 같은 시대엔 드문 일…."

파엘이 순간 말을 멈췄다.

이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아는 사이시오?"

"조금은."

미소를 지운 이안이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불씨의 운반자라 불리는 용병들이 있었다던데. 혹시…?"

이안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밀은 아니었지만, 굳이 떠벌리고 싶지도 않았다.

'잘 지내는 거군.'

그저 그거면 충분했다.

기다림은 십 분여 만에 끝이 났다.

관문 대장이 누군가와 동행한 채 돌아왔다.

판금 갑옷과 적당히 짧은 갈색 머리.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완료 창이 이어졌다.

젊은 사령관.

창을 닫으며, 이안이 묘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과거 닝글로슬에서 만났던 젊은 지휘관, 루카스 램필드였다.

"저도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안 경."

루카스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얼굴로 대꾸했다.

"신분은 확인되었습니다.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깍듯하게 말한 관문 대장이 잘 말린 양피지를 양손으로 건넸다.

파엘이 다시 한번 이안을 놀란 듯 바라보는 가운데, 루카스가 관문 안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시간을 좀 내주시겠습니까? 안으로 모셔서 말씀을 좀 나누고 싶습니다만."

***

관문을 지나친 루카스는, 요새 안쪽으로 이안을 안내했다.

"트라벨가에 계실 줄 알았소. 안 그래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말했다.

루카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맞습니다. 지금은 2군단 소속이죠. 여긴 임무가 있어 잠시 파견 온 겁니다."

"임무? 답할 수 없으신 거라면 묻지 않겠소."

이안이 덧붙이자,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제2 관문 요새의 주둔군을 재편하러 온 겁니다. 병력을 옮겨야 하거든요."

"옮긴다면… 카링기온으로?"

"전에 나눈 대화를 기억하시는군요. 맞습니다. 자치령 각 요새의 병력을 전부 차출하고 있죠."

'이래서 장벽들이 그렇게 쉽게 뚫린 거군….'

눈매를 설핏 찌푸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병력이 많이 비겠지만, 여긴 난공불락의 요새니 별일 없을 겁니다. 대단한 장벽이지 않습니까?"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대단하긴 하더군."

"과거의 유산입니다. 옛 북부 왕국들은, 언젠가는 거인 왕국이 다시 부활해서 영토를 되찾으러 올 거라 여겼다더군요. 그래서 수많은 장벽과 요새를 지었고요. 그 덕을 우리가 보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도 장벽을 계속 증축하고 있다고 들었소만."

이안은 파엘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곳곳에서 계속 지어지고 있는 장벽은, 일종의 국책 사업이자 형벌이었다.

죄인들은 위험한 곳에서, 자유민들은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장벽을 증축하고 있었다.

북부를 대표하는 게 달리 광산과 모피, 채석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북부 전체를 요새화할 거라더군요. 대륙을 지키는 거대한 방벽으로. 물론 본국에선 관심도 없는 것 같지만요. 들어가시죠."

이윽고 루카스가 문을 열었다.

그가 머무는 방인 모양이었다.

루카스는 술병부터 탁자에 올렸다.

이안도 사양하지 않고 잔을 받았다.

술을 따르며 루카스가 덧붙였다.

"놀랄 일도 아니죠. 변방에 그 사달이 났다는 데도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술잔을 입에 가져가던 이안이 순간 멈칫했다.

"변방 왕국들을 말씀하시는 거요?"

"예. 전쟁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더군요."

"...."

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가라앉은 눈으로 루카스를 마주 보았다.

#101화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계시오?"

"아주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아시다시피 소식이 빠르지도 않고, 그리 자세하지도 않으니까요. 제가 아는 정보와 지금 일어나는 상황 사이에는 꽤나 간극이 있을 겁니다. …아."

루카스가 문득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 경은 아겔 란 왕국과 인연이 깊으셨죠."

"나에 대해 잘 아시는군."

이안이 툭 내뱉었다.

잠시 멈칫한 루카스가, 이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먼저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이안 경."

"사과보단 설명이 듣고 싶소만."

몸을 일으켜 책상에서 작은 노트를 들고 온 그가 말을 이었다.

"닝글로슬에서 경을 만난 이후로, 화로의 사원에 서신을 보냈습니다.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이안 경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서요."

"뒷조사를 하신 거군."

"아예 부정하진 않겠습니다만. 개인적인 호기심이 더 컸습니다. 화로의 사원을 구원하고, 티르 엔의 성전사이며 닝글로슬에 침투한 마족을 격퇴한 분이시니까요. 이안 경을 불신한 건 아닙니다."

필사적이군. 하긴. 루카스의 눈빛이나 말투만 봐도 거짓말 같진 않았다.

별로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그래서, 답신은 만족스러우셨소?"

"그 이상이었습니다. 여기, 드리겠습니다. 언젠가 이안 경을 뵙게 되면 드리려고 가지고 다녔습니다."

공책을 펼친 루카스가, 그사이에 끼워 뒀던 잘 접힌 편지를 내밀었다.

"사원에 이안 경을 오래 안 분이 계신 모양이더군요.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대단한 분이시리라고는 이미 예상했습니다만…."

편지를 펼쳐 본 이안의 눈매가 묘하게 구겨졌다.

그러면서도 반대로, 입꼬리는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실 만하군."

답신을 쓴 건 루시였다. 하지만 내용을 불러 준 건 미구엘이 분명했다. 루시가 이런 걸 냅다 써 댈 리가 없었으니까.

"늪지대의 용 사냥꾼. 아겔 란의 마물 참수자. 무덤 숲 마경의 정화자. 아겔 란의 구원자이며 불씨의 운반자…."

내용을 다 외운 듯 루카스가 읊조렸다.

이안은 이제야, 오랜만에 만난 루카스가 왜 더 깍듯해진 건지, 그리고 말해 봐야 좋을 것 없는 얘기들을 왜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 댄 건지를 확실히 알게 됐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젊은 지휘관의 호감을 잔뜩 산 것이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용병이며, 맡은 의뢰는 무슨 수를 써서든 해결하는 분이시라더군요."

"다는 아니오. 계약 내용이 달라지거나, 계약자의 상황이 달라지면 계약을 파기하는 경우도 있었소."

우르드 영감의 의뢰처럼.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안이 말했다.

빙긋 미소 지은 루카스가 턱짓했다.

"하단에 경께 남기는 말씀도 있습니다.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경을 만나면 꼭 보여 달라고 쓰여 있더군요. 그래서 항상 가지고 다닌 겁니다."

"…그래. 지금 읽고 있소."

루시의 편지였다.

자신은 화로의 사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며, 이제는 루 엔테르의 신성이 담긴 불꽃도 피울 수 있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언젠가 직접 보여 줄 날이 있길 바란다며.

이안은 미구엘도 루 엔테르를 섬기기로 했다는 부분에선 참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놈이 수행 사제라고…?'

그가 사제복을 뒤집어쓰고 다니는 꼴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엄연히 쓰여 있는 사실이었다.

다시 만나는 날이 있다면,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되리라.

"그래… 덕분에 반가운 소식을 들었군. 고맙소."

편지를 접으며 이안이 말했다.

루카스가 안도하듯 미소 지었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서, 아겔 란은 어떻게 되었소?"

"가장 먼저 수세에 몰린 게, 애석하게도 아겔 란이라더군요."

"…그럴 리가."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겔 란에는 메브 리우렐이 있으니까.

그녀는 신성력 없이도 홀로 백 명은 너끈히 상대할 수 있는 강자였다.

거기다 국경 지대에서 병사들을 지휘한 경험도 풍부하니, 변방 왕국 간의 전쟁에서 쉽사리 수세에 몰릴 리가 없었다.

루카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국왕이 전군을 직접 통솔하는데, 용병술이 형편없었다고 합니다. 몇 번의 패퇴 후에 후퇴했고, 휘하의 영주들에게 신뢰를 잃었다는데. 그 이후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국왕이… 전군을?"

메브가 아니라?

이안은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뻑였다.

이건 게임일 때나 펼쳐졌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메브가 엄연히 살아 있는데.

'설마,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아겔 란을 떠나기라도 한 건가.'

하긴.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 만한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녀는 물론이고 필립조차, 국왕의 행태에 환멸을 느끼고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필립이 바람을 넣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터다.

"혹시 다른 정보가 더 들어온다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요새에서의 일이 끝나면 트라벨가로 복귀하게 될 테니, 소식을 더 자주 전해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해서, 경은 왜 절 찾으시려던 겁니까? 산맥 인근에서,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그렇소."

이안은 간결하게 설명했다.

지하 궁전을 발견했으며, 거인 여왕과 그녀가 봉인한 악마를 죽였고, 이후로 거인 대장군이 봉인된 유적지를 거쳐 산맥을 빠져나왔노라고.

물론 담담한 건, 이안의 말투뿐이었다.

"...."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점점 턱이 벌어지던 루카스는, 이안이 말을 끝낼 때쯤엔 거의 넋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듣고 있소?"

이안이 내뱉자, 그는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빡였다.

"…너무 놀라운 이야기로군요. 그 말씀이 전부 사실이라면, 입증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증거물이 있소. 그것들을 제값을 받고 처분하고 싶은데, 마침 루카스 경이 떠오르더군."

"처… 분이요."

"그렇소. 엄연히 전리품이니까.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경에게 하겠소?"

"그야… 그러시겠지만. 으음."

잠시 침음한 루카스가 생각을 정리하듯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이안 경, 여기서 하루만 더 묵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서, 밤에 다시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가슴팍에 손을 얹은 그가 덧붙였다.

"일행분들 모두 머무실 수 있는, 안락한 숙소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뭐, 안 될 것 없지. 그럼 그 얘기는 다시 나누는 걸로 하고…."

잠시 말끝을 흐린 이안이, 이윽고 넌지시 덧붙였다.

"이 요새에서 경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나 되시오? 그저 잠깐 거쳐 가는 관리이신가?"

"명목상이긴 하지만, 일단은 요새 사령관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경이 병력을 다 빼 가니 병사들 사기가 많이 떨어졌을 텐데."

"아무래도, 영향이 없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잠시 턱을 긁적인 이안이, 이윽고 툭 내뱉었다.

"나랏돈으로 생색 한번 내 보시지 않겠소?"

"...?"

***

"감사하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이안의 손을 붙잡으려다 실패한 파엘이, 대신 꾸벅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요새에서 그가 싣고 있는 식료품들을 죄다 사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파엘이 야인들을 등쳐먹던 가격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어쨌건 트라벨가에 거래하려던 정도의 수익은 올릴 수 있었다.

심지어 트라벨가까지 가지 않고도 생긴 수익이니, 파엘이 이토록 감사해하는 건 당연했다.

트라벨가를 오가는 시간만큼 늘어날 품삯도 아끼게 된 셈이었으니까.

'역시, 생색은 남의 돈으로 내는 거군.'

이안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국 술을 마음껏 얻어 마신 보답이오."

"안 그래도 귀하께 드릴 술을 몇 병 따로 빼 뒀소. 보르가 귀하의 부하에게 가져다줬을 거요."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

이안이 피식 웃음 지었다.

그를 바라보던 파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귀하의 진짜 정체가 무엇이오? 아까 관문 대장과 지휘병이 귀하를 대하는 태도를 보았소. 보통 용병에게 그리 깍듯할 리가 없는데. 정말 불씨의 운반자시오?"

"난 그냥 용병이오."

덤덤하게 대답한 이안이, 잠시 턱을 긁적이고는 덧붙였다.

"불씨의 운반자도 맞고. 그런 거창한 호칭은 좋아하지 않지만."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걸 보니 칭호가 여럿 있으시군. 더는 묻지 않겠소. 보르의 말이 맞았군. 귀하는 내가 품기엔 너무 대단한 위인이오."

"…품다니?"

"사실은, 귀하의 용병단을 상단에 고용할까 고민하고 있던 참이라서 말이오."

큰 꿈을 꾸셨군. 헛웃음을 짓던 이안의 눈매가 문득 가늘어졌다.

그래서 이런 퀘스트가 생겼던 건가…?

파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몸값은 아주 제대로 쳐 드렸을 거요. 하지만 이제보니, 귀하는 그냥 반가운 손님으로만 남기는 게 내 분수에 맞을 것 같군."

동시에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상단의 운명.

그가 창을 닫는 사이, 파엘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직속 경호병인 보르가 다가오고 있었다. 물건을 다 내린 그는, 곧바로 다시 떠날 수 있게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보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의 인사일 터였다. 그는 트라벨가에 가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

"경호병을 잘 구하셨소."

"...?"

"감이 좋은 친구요. 위험을 감지할 줄 아는 사람의 말은, 귀담아듣는 것이 좋소."

눈을 끔뻑인 파엘이 이내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저 친구는 종신이오. 창을 들 힘이 없을 때까지 끌고 다닐 생각이오."

"훌륭하시군."

"혹 제국의 보르타 인근을 지날 일이 있다면, 꼭 들르시오. 내 언제라도 귀하게 모시겠소."

"손님으로만 모신다면야."

"물론이오. 꼭 들러 주시오."

"기억하겠소. 보르타의 파엘."

한 번 더 강조한 파엘이 걸음을 옮겼다.

"저 친구가 널 평생 곁에 두라더군. 감이 좋은 친구라고 말이야."

"역시, 강자다운 안목이군."

둘의 대화를 뒤로한 채, 이안은 일행의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을 안내하려 대기하는 병사를 지나친 이안이, 안에서 기다리는 샬롯과 테사이아에게 턱짓했다.

"가자. 얘기 끝났으니까."

양손에 술병을 든 테사이아와 샬롯이 벌떡 일어났다.

보아하니 치즈도 한 덩이 주고 간 모양이었다.

은혜를 아는 양반이군.

피식하며 병사의 뒤를 따르는 이안의 귓가로, 샬롯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짜 이유가 뭐지?"

"뭐가."

"그 상인의 물건을 다 사게 한 이유. 정말 단순히 보답은 아닌 것 같은데."

"...."

은근히 눈치 빠른 녀석이라니까.

"이제부턴 저런 자들이 따라다니는 게 더 귀찮으니까. 그뿐이다."

내뱉으며, 이안은 멀어지는 파엘 무리를 돌아보았다.

마지막 연계 퀘스트인 상단의 운명은, 완료 조건이 두 가지였다.

트라벨가까지 동행하거나, 상단주가 제국으로 돌아가게 설득하거나.

보통 이런 퀘스트의 경우엔, 어려운 쪽이 좋은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엔 후자였다.

파엘은 트라벨가에 가기를 원했으니까.

말로 설득하고 싶진 않았으니, 마침 찾아온 편법을 사용할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게임에선, 이런 식으로 헤어진 캐릭터들을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마주치곤 했다.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거나, 선물을 받거나, 그도 아니라면 또 다른 퀘스트를 선사하는 식으로.

'보르타의 파엘이라….'

현실이 된 지금도 그럴까?

속으로 읊조린 이안은,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돌렸다.

어차피 모든 건,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부분이었다.

***

루카스가 제공한 숙소는, 요새 외곽의 집 한 채였다.

귀빈용 숙소가 틀림없었다. 나름대로 푹신한 침대에 책상, 벽난로까지 있었으니까. 한쪽에는 목제 욕조까지 놓여 있었다.

테사이아는 침대에 누워 다리만 까딱댔다. 이 와중에도 안대는 벗지 않은 채였다.

이안과 마주 앉은 샬롯은 술을 홀짝대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이안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숨 소리도 내지 않는 채였다.

이안은 여러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변방 왕국들의 전쟁. 메브. 테사이아. 루 사드. 그리고 북부에 일어나게 될 일들.

없을지도 모른다 여겼던 거인 왕국 망령들의 침공이, 아무래도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방주 상단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미리 알지 못했을 단서였다.

어쩌면 변방의 전쟁처럼, 이 역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포함되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심지어 게임에서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거인 여왕을 죽인 것이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가속 시키는 트리거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게임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몰랐다.

아직 북부 장벽 요새들의 병력이 전부 빠진 게 아니었으니까.

좀 전의 파엘이 그랬듯, 북부 장벽 역시 그의 선택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여지는 충분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런다면… 퀘스트가 여럿 날아가겠지.'

본의 아니게 산맥 인근의 퀘스트를 너무 많이 해결해 버렸다.

그건 루카스와 관련된 트라벨가의 퀘스트가 이미 여럿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장벽 요새까지 무너지지 않는다면, 남은 퀘스트들도 대부분 사라지게 되리라.

하지만 그건 동시에, 수많은 목숨을 구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안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아졌다.

'어이없네. 내가 언제부터 타인의 목숨을 신경 썼다고.'

아무래도 몇 번 영웅이니 구원자니 하는 취급을 당하다 보니, 정말 자신이 그런 대단한 존재라도 된 양 착각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나는….'

"온다."

상념의 결론을 내리기 전에,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102화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루카스를 맞이했다.

방으로 들어선 루카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이안 경의 일행을 뵙는 건 처음이군요."

"인사는 생략합시다. 앉으시오."

이안이 턱짓했다. 루카스가 이안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래서, 거인 군단장과 거인 왕국의 여왕이라고요…?"

루카스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군.

피식한 이안이 샬롯을 바라보았다.

샬롯이 미리 준비해 둔 봉인함을 들고 다가왔다.

쿵, 봉인함이 탁자 위에 놓였다.

"이게 그 증거물이자 전리품이요."

내뱉은 이안이 봉인함을 열었다.

"허…."

억지로 구겨 넣은 잘린 머리와 머리에 씌워진 왕관을 응시하며, 루카스가 탄식을 흘렸다.

한참 만에 놀람을 추스른 그는, 이안이 지하 궁전으로 가게 된 경위부터 물었다.

"이 정도의 유물을 처분하시려면, 획득 경위에 불경하거나 불법적인 과정이 없었는지를 조사하는 절차를 거치셔야 합니다. 하지만 믿을만한 보증인의 설명이 첨부된 확인서가 있다면, 여러 반복적인 절차를 간소화하실 수 있을 겁니다."

차분한 설명에, 이안이 넌지시 되물었다.

"궁금해서 듣고 싶으신 게 아니란 말씀이시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만. 전에 보니, 이안 경은 유독 반복적인 절차를 좋아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서요."

"그런 걸 누가 좋아하겠소. 하지만 어쨌든…."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이 귀찮으리란 건 확실히 알겠군. 여차하면 중간에 날치기당할 수도 있겠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 보증이 있다면, 그럴 가능성이 조금은 줄어들겠죠."

"도와주시는 건 고맙소만. 이유를 모르겠군. 사실 경에게는 귀찮은 일만 추가되시는 걸 텐데."

"유물을 최초로 보증한 사람으로 제 이름이 기록에 남으리란 이유가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경과 친분을 쌓고 싶어서죠."

"솔직하시군."

피식한 이안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약간의 각색은 필요했다.

그의 손아귀에 낙인이 찍혔던 부분은 특히. 악마와 맹약을 맺었었다는 게 알려지면, 당장 타락자 취급을 받게 될 터였다.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신 것도 대단한데, 거기서 오히려 단서를 찾아내신 거군요."

"거창하게 말씀하실 것 없소. 바보가 아니라면, 정체도 모르는 고대 망령의 유혹에 넘어가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제가 알기론, 세상엔 그런 바보가 정말 많습니다. 이안 경."

'…결론적으론, 나도 그렇지만.'

이안은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때때로 탄식하면서, 끝까지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된 거군요."

루카스의 시선이 커다랗고 끔찍한 머리통을 훑었다. 아공간에 들어있던 군단장의 머리는 썩지도 않은 채였다.

"산맥 한복판에 유적 입구가 있다는 건,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사단을 파견해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곳인데…."

루카스의 시선이 머리통에 얹어진 황금 왕관으로 향했다.

"중요한 건, 정말 산맥 지하에 거인 왕국의 부활을 꿈꾸는 존재가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옛 북부인들이 그저 망상에 사로잡힌 겁쟁이들이 아니었다는 의미죠. 이 사실이 알려지면, 많은 북부인이 경께 감사를 표하게 될 겁니다."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은 아니오."

"저 역시 북부인으로서 경께 감사를 표합니다. 이젠 경을 도울 수 있어서 오히려 기쁘군요."

"북부인이셨소?"

이안이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가 섞여 있죠. 지금 중요한 건 제 혈통이 아닌 것 같군요. 흠, 일단 경께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확인서를 써야겠습니다. 또한, 이 유물의 정당한 소유권이 경에게 있음을 확실히 해야겠군요. 가치를 감정하는 건… 저와 친분이 있는 사제님을 소개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런 정도의 유물이라면, 본국의 대교회를 통해 정리하시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렇게 하겠소."

"작성해야 할 서류가 아주 많겠군요."

읊조린 루카스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툭 내뱉었다.

"뜻밖이군."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이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걸 캐물으실 줄 알았소."

루카스가 속내를 들킨 듯 볼을 긁적였다.

"사실 여쭙고 싶은 건 잔뜩 있습니다. 이건 설원을 배회하는 얼빠진 망령들 말고도, 정말 자치령의 위협이 될만한 존재가 실존하고 있었다는 증거니까요. 하지만…."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 경과 일행분들은, 이미 개인이 할 수 없는 수준의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야 할 어떤 책임이나 의무도 없으신데도요."

"...."

"이보다 더 큰 협조와 봉사를 요구할 순 없습니다. 산맥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위험과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조사하는 건 저를 비롯한 자치령에 몸담은 이들의 몫이죠."

게임에서의 루카스가 떠올랐다. 공와 사의 구분이 확실한, 사명감과 책임감 넘치는 젊은 사령관.

어설프고 부족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핵심적인 부분은 현실이 된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안은 조금 전, 자신이 하던 고민을 떠올렸다. 그리고 끝내 퀘스트로 기울던 자신의 마음을.

"…훌륭하시군."

"조사 병단을 파견하자는 건의를 넣을 겁니다. 당장 받아 드려지리란 기대는 크지 않습니다만."

루카스가 사담을 털어놓듯, 한결 편해진 말투로 내뱉었다.

"검은 벽이 안정되고 나면, 아마도 조사가 시작될 겁니다. 조사가 끝나면 이안 경의 이름도 역사에 남게 되겠죠. 잠들어 있던 거인 여왕을 참수한 영웅으로요."

"영웅은 무슨. 나는 오히려…."

잠시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반대편의 인간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카스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동행하던 상인 무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소. 설원을 배회하던 망자들이, 산맥 쪽으로 걸어가고 있더군. 그것도 매일 밤."

"거인 왕국의 망령들이, 산맥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루카스의 낯이 설핏 굳어졌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어쨌건 내가 죽인 건 거인 왕국을 다스리던 존재요. 왕국의 망령들이 죽어서도 섬기던 존재이기도 하지. 그런 존재가 죽었으니…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잖소?"

"...."

"나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유물을 제값을 받고 처분할 생각부터 하는 인간이오. 영웅이 아니라."

샬롯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안은 그저 태연하게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말없이 생각에 잠겼던 루카스가, 이윽고 그를 마주 보았다.

"경은 해야 할 일을 하셨을 뿐입니다. 그로 인해 일어난 변화는, 경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아닙니다. 굳이 꼽자면 자신의 백성들과 병사들을 타락시킨, 그 고대의 여왕에게 책임을 물어야겠죠."

"...."

"경이 아니었더라도, 그들은 언젠가는 북부를 침공했을 겁니다. 구심점을 잃은 지금은 본능만 남은 오합지졸들일 테고요."

이안의 눈을 빤히 바라본 그가, 슬며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게다가 비난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아시면서도, 지금 이렇게 미리 경고해 주고 계시잖습니까?"

"…내 의도를 너무 좋게 보시는군."

이안이 나지막이 실소했다.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니군요. 요새 주둔군의 재편을 멈춰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산맥에 망령 잔당들이 집결하고 있는 거라면, 반대로 출격하는 날도 있을 테니까요."

"독단으로 가능하시겠소? 이런 민감한 시기에."

"쉽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도 않을 겁니다. 경이 거인 여왕을 참살한 증거가 있으니까요."

생각을 정리하듯 손가락을 까딱인 루카스가 말을 이었다.

"본국의 교단으로 서신을 넣고, 저는 직접 카링기온으로 가서 상황을 알리고 처리할 겁니다. 나쁘지 않은 일이죠. 이참에 곧바로 소속을 옮기는 것도. 그만한 명분이 생겼으니까."

이윽고 다시 이안을 바라본 루카스가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합니다, 경. 덕분에 다가올 위협에 미리 대비할 수 있겠습니다."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은 없으시고?"

"당장은 없을 것 같군요. 한동안 정신없을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께 필요한 서류는 내일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미소 지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트라벨가에서 뵙고 싶었는데, 아쉽군요. 전 여기서 하던 일을 다 원래대로 되돌리고, 바로 카링기온으로 갈 겁니다. 제가 돌아올 때쯤엔 경께선 떠나셨을지도 모르겠군요. 유물을 본국에서 매각하셔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

이안의 눈빛이 묘해졌다.

루카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산맥에서 어떤 것들이 밀려온 들, 장벽이 뚫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루카스가, 샬롯과 테사이아에게도 마찬가지로 눈인사를 건네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샬롯이, 문이 닫히자 이윽고 내뱉었다.

"꽤 완고한 자군. 나쁘지 않아."

이안은 대답 대신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의 입가에 흐릿한 쓴웃음이 스쳤다.

'…이렇게 싹 다 스킵인 거군.'

게임에선 존재했던, 루카스와 관련된 자잘한 서브 퀘스트들이 전부 사라졌으리란 게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곧바로 카링기온으로 떠난다면, 어쩌면 꽤 오랜 시간 다시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검은 벽이 요동치는 건, 최소한 1년은 지나야 벌어지는 일이니까.

그의 건너편에 앉은 샬롯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했는데. 확실하게 경고해 주고 싶었던 거군. 네가 산맥에 모이고 있다는 망령들을 계속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안."

"북부인들이 걱정된 거겠지."

테사이아가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말했다.

낮게 코웃음 친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만약에라도, 나한테 책임의 화살이 돌아오는 게 싫었을 뿐이야."

***

다음 날 아침.

떠날 채비를 하는 이안 일행의 마차 앞으로 루카스가 다가왔다.

"필요하신 서류들입니다. 트라벨가의 교회로 가셔서, 페르마 사제님을 찾아가시면 될 겁니다. 가문의 인장을 사용했습니다. 제 이름으로 보증하는 것보단 훨씬 효과적일 겁니다."

그가 퀭한 얼굴로 서류를 내밀었다. 품에 잘 갈무리한 이안이 미소 지었다.

"정말 밤을 샌거군."

"작성할 문서들이 많아서요. 제대로 회포를 풀고 싶었는데, 아쉽군요. 일을 끝내시면 북부를 떠나실 겁니까?"

"글쎄…. 아직은 고민 중이오."

대답한 이안이 이내 그를 돌아보았다.

"어제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소."

"말씀하십시오."

루카스가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야인들이 이주해 올 거요. 그중에서 검은 숲 언덕 마을에서 온 자들은, 내가 아는 자들이오. 트라벨가 인근의 정착지로 보내면, 문제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살 거요."

"자치령에 정착하려는 거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혹시, 전사도 많습니까?"

"수십 명 정도."

"그렇다면 대환영이군요. 요즘은 야인 출신 북부인으로만 꾸린 부대도 만들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활짝 미소 지으며 말한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들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 십니까?"

"어쩌다 보니, 내가 그들의 대전사가 됐소."

"예…?"

루카스가 멍하니 되물었다.

이안이 대꾸 대신 턱짓했다.

샬롯이 병사에게 미리 받아 뒀던 나무 상자를 루카스에게 내밀었다.

"이건 또 무슨…. …!"

상자 내부를 확인한 루카스의 눈이 커졌다.

거인 군단장의 머리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별로 비쌀 것 같지도 않은데 쓸데없이 크기만 한 놈이오. 난 왕관만 있으면 되니까, 그건 경이 쓰시오. 쓸 데가 있지 않겠소?"

"그야 당연히… 하지만 이걸 정말 제게 주셔도 되겠습니까?"

"썩지 않게 잘 보관하시오."

내뱉은 이안이 마차에 올랐다.

의자에 걸터앉은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또 봅시다."

"...."

마차가 출발했다.

푸드득-

머지 않은 지붕 위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마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루카스가, 그 날갯짓 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몸을 돌렸다.

"이봐, 병사! 요새의 창고 중에 가장 추운 곳이 어디지?"

외치는 그의 발걸음이 다급했다.

이 상자에 든 머리는, 절대 썩으면 안 되는 귀중한 증거품이었다.

#103화

다각, 다각.

"이젠 여기가 따듯하게 느껴질 정도네. 심지어 평화롭고."

마차가 관도를 나아갔다. 그야말로 일상적인 분위기였다.

일행 모두, 이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발굽 소리가 들린다는 걸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의자에 걸터앉은 이안은, 테사이아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손에 든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북부의 술처럼 독하진 않지만, 어쨌거나 향이 아주 좋은 술이었다.

여정의 지루함을 달래기에도 딱이었다.

장벽 요새를 떠난 이래 이틀간 이안이 한 것은, 지금처럼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앉은 채 술을 홀짝인 게 전부였다.

"뭔가 허무해 보이네, 이안. 말도 없고. 날씨가 흐려서 그런가."

마차 바닥에 누워있던 테사이아가 말했다.

이안이 슬쩍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도 표정까지 보이냐?"

"느껴져. 내가 왜 계속 이러고 있는지 알아? 그만큼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져서야."

테사이아가 잠시 말을 멈췄다.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아 잿빛인 머리카락이 희미한 바람에 휩싸인 것처럼 일렁였다.

"오히려 새로운 눈을 뜬 기분이야. 지금 야옹이가 하품하는 것까지 보인다니까."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 감각에 뭔가 이상한 게 걸리면, 바로 알려라."

"그럴게. 그런데 왜 그렇게 기운이 없는 거야?"

왜긴. 서브 퀘스트가 대여섯 개는 날아가서 그러지.

이안은 묘한 후련함을 느끼며, 대꾸 대신 술만 한 모금 더 마셨다.

북부 장벽 요새가 떠올랐다.

그야말로 난공불락. 아마 다른 장벽 요새들도 비슷할 터였다.

병력과 보급만 충분하다면, 망령 거인들이 섞여 있다 해도 막아낼 수 있으리라.

'교단에도 연락하겠다고 했으니, 어쩌면 성기사와 전투 사제들까지 파견할지도.'

그럼 당분간은 북부의 메인 퀘스트는 없으리라는 뜻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최근 클리어 한 굵직한 퀘스트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제 변방 전쟁이 발발한 시점이었으니, 공백이 생기기에도 충분했다.

예전이었다면 마을을 거치며 시답잖은 의뢰들을 해결하며 시간을 보냈겠지만….

계속 대답만 기다리는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트라벨가에 도착하면, 곧바로 유물의 감정을 맡길 거다."

"응, 그리고?"

"검은 숲 언덕 마을 주민들이 정착지에 도착하는 걸 확인할 때까진, 거기서 머물 거다. 그러면서 정보를 수집할 거야."

테사이아가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귀를 쫑긋대던 샬롯이 내뱉었다.

"무슨 정보를 수집한단 거지?"

"변방에 전쟁이 일어났다."

샬롯이 홱 뒤를 돌아보았다.

"전쟁이라고…?"

"그래.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는 걸 보면, 하루 이틀 만에 끝나진 않을 거다."

"…정말 일어난 거군. 하비에르가 말한 적 있다. 변방의 왕국들은 죄다 전쟁 물자를 모으고 있다고."

혀를 날름댄 샬롯이 덧붙였다.

"전쟁에 쓰일 병장기도 여럿 팔았지. 아겔 란뿐 아니라, 주변 왕국에도. 전력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그래야 전쟁 중에도 이득을 극대화할 수 있으리라 여겼겠지."

이안의 말에 샬롯이 입맛을 다셨다.

"그럴 거다. 오히려 어서 전쟁이 시작되길 기대하는 눈치였으니까. 이제 와선 의미 없는 얘기지만. 그래서, 아겔 란의 소식을 듣고 싶은 거냐?"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루 사드의 소식을 알아보려는 거다."

"...!"

테사이아의 입이 벌어졌다.

걸치고 있던 안대를 휙 벗어 던진 그녀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이안을 올려다봤다.

해가 지고 있는지, 눈동자가 노을 지듯 물들고 있었다.

어쨌건, 저번처럼 겁부터 집어먹은 눈치는 아니었다.

"바로 루 사드로 갈 거야?"

"거기 상황이 어떤지 알아본 후에. 전쟁이 거기까지 번졌는지는 알아 둬야 하니까."

"그럼 뭐가 달라져?"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쟁 중이라면 말이나 마차 없이, 은밀하게 움직일 거다. 우릴 수상하게 여기는 자들이 많을 테고, 십중팔구는 칼부림이 날 테니까."

"그래 봐야 별거 아닌… 아, 그래."

내뱉던 테사이아가 뒤늦게 깨달은 듯 그를 올려다봤다.

"반대로 우리가 죄다 죽이게 될까 봐 그러는 거구나."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샬롯도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변방의 병사는 땅을 파먹다 끌려 나온 자들이 태반이지. 그런 자들을 죽이는 건, 일방적인 살육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그나저나…."

샬롯의 시선이 테사이아에게로 향했다.

"네 동족들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거냐, 귀쟁아?"

"동족이라고 하지 마. 나한텐 동족 같은 거 없어."

인상을 찌푸린 테사이아가 이내 입술을 비죽였다.

"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어. 도망쳐 나올 때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며칠을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으니까."

"기억나는 대로 말해 봐라."

이안이 내뱉었다.

사실 그는 흡혈 일족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이 말했다간, 또 요상한 오해를 사게 될 터였다.

늘 그렇듯, 단서를 통해 유추해 낸 척이라도 해야 했다.

"잘 모르겠어. 엄청 큰 집. 넓은 정원. 큰 도시였어. 성벽도 있는. 그래서 돈이 많으리라 생각한 거야. 그런 집은 보기 드물더라고."

"루 사드에서 그만한 도시를 가진 영지라면…."

"사드린과 글루미르 정도겠군."

이안의 말을 샬롯이 받았다.

이안의 시선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에 가 본 적이 있다. 제국에서 가깝고, 변방 왕국 중에선 가장 부유하니까. 제국의 상인들이 좋아하는 나라지."

"그럼 그 두 영지를 다 돌아보면 되겠군. 크고 정원 딸린 집이라면, 생각보다 찾는 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어."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 마족들이 그렇게 부유하게 살고 있다니. 이 귀쟁이가 전에 말했을 땐, 사실 거짓말인 줄 알았었다. 귀쟁이 들이야 늘 그러니까."

"뱀파이어들은 하수인과 추종자를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이니까."

이안의 시선이 테사이아의 은발과 검붉은 눈동자를 훑었다.

"어쩌면 우리 예상보다 훨씬 큰 세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만큼, 하수인을 찾아내기도 쉬울 거야."

이안이 슬며시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즐거운 대화를 몇 번 나누다 보면, 본거지가 어딘지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다."

"기대되는군. 때때로 나도 그 대화에 끼워 주길 바라겠다."

샬롯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런 둘을 번갈아 물끄러미 바라보던 테사이아가, 문득 내뱉었다.

"그리고 나선?"

"...?"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테사이아가 이안을 빤히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나선 어떻게 할 거야, 이안? 지금까지 그랬듯이, 의뢰가 끝나면 날 떠날 거야? 아니면...."

"…글쎄."

시선을 돌린 이안이, 이윽고 단검을 검집에 되돌리며 내뱉었다.

"그 대답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군."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멍하니 되묻던 테사이아의 고개가, 불현듯 마차 앞쪽으로 돌아갔다.

"...!"

저 먼 앞에서 심상치 않게 이어지는 마력의 응집을, 뒤늦게 느낀 것이다.

어느새 눈동자에 푸르스름한 마력을 머금은 이안이 마부석으로 나섰다.

"마차를 멈춰라 샬롯."

그의 말이 아니라도, 샬롯은 이미 고삐를 당기고 있었다.

쩌저저저적-

저만치 앞의 관도를 가로지르며, 고드름이 잔뜩 돋은 거대한 얼음 결정이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손을 앞으로 내뻗은 건 거의 동시였다.

쩌저적-

빙하 방벽이 멈춰선 앞을 부채꼴로 가로막으며 피어올랐다.

쾅, 하는 짧은 굉음과 함께 얼음 결정이 폭발한 건 바로 직후였다.

퍼버버벅-

방벽 위로 거대한 얼음 가시가 무수히 틀어박혔다. 반투명하던 빙하 방벽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하나가 아니야…!"

테사이아의 탄식이 이어졌다.

바람 칼날을 시전한 이안이, 비로소 몸을 똑바로 세워 방벽 너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둘… 아니…."

그가 중얼대는 사이.

사그라드는 얼음 결정 너머로, 어둠에 휩싸인 두 형체가 드러났다.

"이상하군. 내가 듣기론 적색이었는데. 나와 동문이었나. 저 주문은 빙하 방벽 같은데…. 흠."

내뱉는 남자는 두툼한 로브를 걸치고 기다란 지팡이를 쥔 마법사였다. 창백한 안색과 핼쑥한 얼굴 탓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동문이면 살려 줄 생각이냐?"

생기 없이 스산한 목소리로 내뱉은 건, 옆에 선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였다. 안면 가리개 탓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법사와 비슷한 상태이리란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법사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적색 나부랭이들의 코를 짓눌러 줄 수 없는 게 아쉬울 뿐일세. 후배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도, 나쁘진 않지."

이안은 도끼의 끈을 풀고 있는 샬롯과 테사이아를 차례로 일별하고는 다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곧바로 달려들었겠지만, 지금은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루 사드에서 왔나?"

"바로 맞췄네. 역시 청색 마법사다운 총명함이군."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이안의 눈에 맺힌 푸른 마력을 응시한 그가 이내 덧붙였다.

"선배라 부르시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너한테 물은 게 아니다. 하수인."

"으음…?"

"루 사드에서 왔나?"

마법사의 핼쑥한 미간이 좁아지는 가운데, 이안이 재차 내뱉었다.

푸스스, 마법사와 기사의 그림자가 꿈틀대더니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곧 마법사의 로브 뒤에서 하얗고 기다란 손이 튀어나왔다.

마법사의 어깨너머로 붉은 눈을 가진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감이 좋네. 내 기척은 느끼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마법사와 기사의 고개가 홀린 듯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

이안이 덧붙였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당당하네. 멋진걸. 프레야라고 불러 줘."

"묻는 말에 대답해 준다면, 고민해 보지."

또각, 프레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림자처럼 새카만 드레스가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이안이 볼 때, 저건 진짜 그림자였다.

그녀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리며 내뱉었다.

"뭐가 궁금한데?"

"우리 위치를 어떻게 알았지? 전의 그놈은 냄새로 따라왔다던데. 우린 냄새를 맡기 어려운 곳에 오래 있었거든."

프레야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여제께선 자신이 심은 진혈이 힘을 발휘할 때마다 느끼실 수 있지. 저 귀여운 잡종이 아무리 숨어다녀도, 결국에는 들킬 수밖에 없단 얘기야. 그 외에도 추적할 수 있는 여러 수단이 있지만."

그녀가 가볍게 손을 펼쳤다.

새카만 까마귀 한 마리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이번 경우엔, 너희가 장벽을 넘은 순간부터 지켜보고 있었어. 그리고 가장 인적이 드문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지."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에서 마력의 파장이 스멀스멀 번져 나갔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이안의 얼굴에서 조금씩 표정이 사라졌다.

"…그렇군. 하지만 나에 대해선 제대로 아는 게 없나 보지? 내가 어떤 마법을 사용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던데."

"애석하게도. 많지는 않아. 네가 적색 마법사라고 생각했거든. 그 넘실거리는 불길은 마법이 아니었나 보네. 유물이라도 가진 거야?"

프레야의 목소리가 점점 나긋나긋해졌다. 은밀하게 사방으로 번진 파장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이안의 무표정한 얼굴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어. 사실, 우린 너를 죽이러 온 게 아니거든. 그보다 훨씬 더 서로에게 이득이 될 제안을 하러 왔지."

"제안…?"

이안이 멍하니 되물었다.

마력의 파장이 그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프레야가 속삭였다.

"그 잡종을 우리에게 넘겨. 대신 네겐 합당한 보상을 할게. 여제께선 원한다면 일족의 일원으로 받아주시겠다고도 하셨어. 저런 잡종이 아니라, 진정한 일족의 일원으로. 아스콜드를 죽일 정도라면, 자격은 충분하니까."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역시 그렇지?"

"하지만 거절한다."

"그래 잘 생각, 뭐라고…?"

프레야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푸스스, 빙하 방벽이 증발하듯 녹아내린 건 그 직후였다.

한 손에는 투척용 단검을, 한 손에는 단죄의 검을 움켜쥔 이안의 상반신과, 한 자루 장검을 쥔 채 웅크린 샬롯의 모습이 드러났다.

"너, 마법에 걸린 게-?"

슈확-!

프레야가 질문을 끝맺기도 전에, 이안과 샬롯이 몸을 날렸다.

퍽!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들던 마법사의 고개가 튕겨 나가듯 젖혀졌다.

얼굴 한복판에 단검 자루가 삐죽 돋아난 채였다.

#104화

이안은 통나무처럼 뒤로 넘어가는 마법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내달렸다.

'설마 이 정도로 죽진 않겠지.'

청색 마법이 사거리가 짧기 때문이라고 해도, 마법사 주제에 아무런 대책 없이 이렇게 앞에 서 있었을 리 없었다.

철컹, 철컹-

기다란 장검을 뽑아 든 기사가 앞을 가로막으며 달려오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저놈은 내가 맡겠다."

내뱉은 샬롯이 앞질러 달려갔다. 몇 걸음 만에 도약한 그녀가 치켜든 전투 도끼를 내리쳤다.

쩌엉-!

기사가 지지 않고 양손으로 쥔 검을 후려치며 맞부딪혔다.

타타탓-

이안은 미끄러지듯 놈을 지나쳤다.

이안이 기습을 선택한 건, 이놈들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놈들은 게임에선 상대해 본 적 없는 놈들이었으니까.

몸으로 비집고 들어가 전력을 탐색하는 건 물론 위험한 선택이지만, 동시에 저들의 역량을 그만큼 빠르게 가늠할 수 있었다.

현혹 마법을 소리 없이 펼칠 때부터, 저 프레야라는 뱀파이어의 전투력이 그다지 높지 않으리란 계산도 어느 정도는 깔린 채였다.

물론 그녀의 마법은 충분히 강력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부탁을 전부 들어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잠깐의 충동. 그의 정신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엔, 한참 부족한 마법이었다.

'…꼭 이렇게 자신만만하다 한 번씩 큰코다치던데.'

생각하며, 이안은 가까워지는 프레야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쓰러지는 마법사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제야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너…!"

인상을 찌푸린 채 뭐라 내뱉으려던 그녀의 목으로, 단죄의 검이 날아들었다.

콰직-

잘려 나간 프레야의 머리가 허공을 돌았다.

"저 녀석과 함께하는 건 의뢰 때문이 아니야. 그게 너흴 다 죽이는 데 도움이 되어서지."

이안이 떨어진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에 푸른 마력이 맺히는 사이.

"…일족에 원한이라도 있나 보네. 아쉬운걸. 조사가 부족했어."

프레야의 잘린 머리가 미소를 지으며 내뱉었다.

푸스스-

그녀의 몸이 그림자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의 시선이 꿈틀대는 그림자의 한복판으로 향했다.

쩌적-

그의 왼팔 주위로 서리 칼날이 피어올랐다. 칼날 같은 얼음 결정이, 스멀스멀 번지는 그림자를 쫓아 뿜어져 나갔다.

쩌저적-!

땅을 타고 번진 얼음 막이 그림자를 가린 건 그 직후였다.

퍼버벅, 형성되던 서리 방패가 이안이 쏘아 보낸 칼날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이안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지는 가운데.

"불사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지 아나?"

쓰러진 채로 서리 방패를 펼친 마법사가, 그림자에 떠밀리듯 푸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가 촉수처럼 뻗어 나와, 그의 얼굴에 박힌 단검을 뽑았다.

마법사가 마력이 가득 맺힌 퀭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마력을 축적하고 주문을 연구할 시간이 무한하단 것일세."

쩡-!

마력 맺힌 지팡이가 땅을 찍었다.

쩌저저저적-!

얼음 가시가 수없이 솟구치며 이안을 향해 밀려들었다. 혀를 차며 물러난 이안이 곧바로 서리 방패를 펼쳤다.

쾅-!

폭발과 함께,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쩌저저저적-

방패 위를 두드리는 얼음 파편들을 응시하는 이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일렁였다.

'이런 식인 거군.'

비로소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현혹의 심판자.

이안의 머릿속에 떠다니던 정보의 파편들이 빠른 속도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를 현혹하거나 변절하게 만드는 게 1순위 목표였다 해도, 프레야는 무력으로 진압할 상황까지 착실하게 대비한 게 분명했다.

적색 마법사를 대비한 청색 마법사 하수인과, 그를 지킬 기사 하수인까지. 거기다 프레야까지 그림자에 숨어 보조한다면, 어떤 의미에선 아스콜드보다도 까다로운 상대일 터였다.

'두 놈과 동시에 싸웠다면 말이지.'

이안의 시선이 샬롯과 전투 중인 기사의 뒷모습을 훑었다.

"훌륭하구나, 짐승아…!"

둘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으며 완전히 싸움에 몰입하고 있었다.

프레야의 그림자가 스며든 이후로는, 기사의 갑옷과 검이 검게 물들어 흐릿한 잔상을 흘렸다.

흡혈 일족만이 다루는 모종의 흑마법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샬롯이 그와 호각을 이루는 건,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테사이아 덕분이었다. 기사의 그림자에서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그림자 가시를, 테사이아는 손톱을 휘둘러 베어낼 수 있었다.

'주문쟁이부터 조지기엔 최적의 환경이네.'

이안의 시선이 서리 방패 너머로 돌아갔다. 가라앉는 폭발 너머, 청색 주문쟁이가 우두커니 다음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타탓-!

이안은 더 지켜보지 않고 질주했다.

청색 마법은 대부분 사정거리가 짧은 편이고, 그렇기에 근접전은 보통 현명한 선택이 아니지만.

지금 저놈은 그를 청색 마법사로 오해하고 있으니, 그 오해에 최대한 부응해 주어야 했다.

'내가 적색도 쓸 줄 아는 걸 알면 태세를 바로 바꿀 테니까.'

본래 적색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 온 자였다.

이안이 적색도 사용한다는 걸 알면, 지금처럼 득의양양하게 공격 마법만 펼쳐 대진 않을 터였다. 거리를 유지한 채 그의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데에만 전념하면서, 기사나 프레야의 지원을 받으려 들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럼 개 피곤해지겠지.'

그렇기에 접근전으로 승부하면서, 단숨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생각이었다.

불사신처럼 굴고 있어도, 하수인에 불과한 이상 그럴 리는 없었으니까.

쉬쉭-!

이안이 왼손을 털었다.

번쩍이는 날붙이가 마법사의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슈확, 마법사의 발아래에서 먹물 같은 막이 치솟으면서 단검을 막아냈다.

마법사의 시야가 차단된 사이, 이안이 훌쩍 솟구쳤다.

슈학-!

머리 위로 검을 치켜든 이안이 장막을 뛰어넘으며 솟구쳤다.

마력이 아른거리는 마법사의 느긋한 시선이 그를 맞이했다.

"예상했다네. 후배님."

쩌저적-

내뱉은 지팡이 앞으로 서리 칼날이 뭉텅이로 피어올랐다.

이안이 볼 때, 이만하면 상위 마법사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오래 살았단 말이 빈말은 아닌가 보네.'

몸을 비틀며, 이안이 내뱉었다.

"나도."

"...!"

푸확, 허공에서 터져 나온 돌풍이 이안의 몸을 옆으로 힘껏 떠밀었다.

퍼버벙-!

폭발과 함께 방사된 얼음 파편이 텅 빈 허공을 갈랐다.

놈을 지나친 이안이 묘기를 부리듯 착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쒸엑-!

다급하게 솟구친 그림자 가시가 뻗어 나왔다.

프레야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던 듯, 어설픈 궤적이었다.

이안은 옆으로 두 바퀴 몸을 돌리는 것으로 간단히 피하고는, 그대로 일어서며 검을 사선으로 올려 쳤다.

쩌엉-!

간신히 피어오른 서리 방패에 검날이 비스듬하게 박혔다.

놀람과 안도가 뒤섞인 표정의 마법사가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자넨 아마 내 후배 중에 가장 검을 잘 다루는-"

내뱉던 마법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든 이안의 눈동자가, 불길을 머금은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같은 선배, 둔 적 없는데."

"이게 무슨…?"

바람 빠지듯 내뱉는 마법사의 눈에 마력이 휘몰아쳤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슨 마법을 펼치려 할지는, 마찬가지로 청색 마법사이기도 한 이안에겐 뻔한 부분이었다. 냉기 파동.

하지만 이미 이안은 주문을 완성한 상태였다.

콰아아아아-!

서리 방패에 박힌 검을 중심으로, 샛노란 화염의 폭발이 치솟았다.

일점 폭발.

"갸- 아아아아악-!"

폭발 한복판에 놓인 마법사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끼아아아악-!

그림자에서도 비명이 이어졌다.

불이 붙은 그림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도망치듯 허둥지둥 기사 쪽으로 뻗어나갔다.

'이거, 원래는 저 그림자 속의 본체를 먼저 노리는 게 공략법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곧바로 춤추는 불꽃을 시전해 그대로 마법사에게 내뿜었다.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퍼버버버벙-!

폭발에 휩쓸린 마법사가 너덜너덜해진 채 튕겨 나갔다. 전신이 화상으로 일그러지고 타들어 간 끔찍한 상태였지만, 아직 죽지 않았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타타탓-! 콰직-!

"...!"

질주해 놈을 따라잡은 이안이, 마법사의 가슴 한복판에 역수로 쥔 단죄의 검을 내리쳤다. 검에 꿰여 땅에 박힌 마법사의 입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그대로 자루를 놓으며 물러난 이안이, 단죄의 검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콰아아아-!

다시 한번 일점 폭발. 숯덩이처럼 변한 마법사가 비로소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불길이 가라앉기도 전에 놈의 앞으로 걸어간 이안이, 달궈진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이 정도면 되살아 나는 게 오히려 고통일 거다."

콰직-!

이안이 그대로 마법사의 머리를 잘라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떨어진 마법사의 머리통을 발로 차서 날려 버리기까지 했다.

이만하면 아무리 뱀파이어의 흑마법이라도 더는 살려 내지 못하리라.

'주문쟁이랑 싸운 건 오랜만인데.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콰앙-!

이어진 상념은, 뒤에서 터져 나온 굉음에 깨끗이 밀려 사라졌다.

"...!"

뒤를 돌아본 이안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목덜미에 전투 도끼가 박힌 채로도 검을 내리친 흑기사의 뒷모습. 검 끝에서부터 마구잡이로 솟구친 수많은 그림자 가시들. 거기 휩쓸려 산산 조각난 마차와 고기 토막이 된 말들. 그리고 그 옆, 갑주가 다 찢겨 나간 채 피를 흩뿌리며 튕겨 나간 샬롯과, 그녀를 구하려다 함께 휩쓸린 게 분명한 테사이아까지 한눈에 들어온 것이다.

푸스스….

말과 마차를 토막 낸 그림자 가시가 사그라들었다.

-알드리치…! 내 불쌍한 여덟 번째 사랑….

다행히도, 흑기사는 더 이상 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목덜미에 박힌 도끼를 뽑아 던져 버린 흑기사가 몸을 돌렸다.

-복수해 줘, 스텔란…!

프레야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그림자에 완전히 뒤덮인 흑기사, 스텔란이 검을 늘어뜨렸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는 의지만이 남은 듯, 안면 가리개 너머의 불그스름한 안광이 타올랐다.

'하나를 처치하면 2페이즈인 패턴이군….'

이안은 단죄의 검을 고쳐 쥐었다.

동시에 스텔란이 그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안의 눈동자에 붉은 마력이 넘실대기 시작한 찰나.

쉬학-! 쉬학-!

질주를 멈추지 않은 채, 스텔란이 검을 연달아 휘둘렀다. 검날에서 토해져 나온 새카만 궤적이 초승달처럼 이안을 향해 날아들었다.

'원거리 공격까지 한다고…?'

인상을 찌푸린 이안이 몸을 날려 궤적을 피했다. 바닥을 구른 그가 곧바로 기사를 향해 마주 달렸다.

저런 식이라면 시전 시간이 긴 마법은 어차피 사용할 수 없었다.

쉬학-!

그림자 칼날이 다시 한번 날아들었다.

화르륵-!

몸을 비틀어 피한 이안의 주위로 불덩이들이 피어올랐다.

"훗…!"

기사, 스텔란이 싸늘하게 비웃으며 그 한복판으로 달려들었다.

이어진 폭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파한 그는, 이안이 내리치는 검을 향해 마주 검을 올려 쳤다.

둘의 체구와 힘의 차이는 명확했고, 흑마법의 도움까지 받고 있으니 아주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파스스슷-

이안의 검에 새파란 신성력이 치솟기 전까지는.

"...!"

콰아아아- 콰지직-!

폭발하듯 터져 나온 푸른 궤적이 그대로 스텔란의 검을 부러뜨리고, 그 너머의 두꺼운 갑주마저 가르며 훑고 지나갔다.

검의 달인이었던 흡혈 일족의 심판자조차 막지 못했던 일격을, 뱀파이어의 하수인에 불과한 기사가 막아낼 수는 없었다.

"아아…."

낮은 탄식과 함께, 목덜미부터 반대쪽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잘려 나간 스텔란의 몸이 비스듬하게 허물어졌다. 피와 내장이 치솟지는 않았다. 그저 푸른 불꽃 같은 티르 엔의 신성력이 살을 불태울 뿐.

-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건, 그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프레야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신성력 때문인지, 또 다른 하수인의 죽음이 비통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콰직-!

발작하듯 꿈틀대는 그림자 위로, 아직 신성력의 잔재가 남은 검날이 자비 없이 박혀 들었다.

찢어지는 비명. 푸스스, 복부를 꿰뚫린 프레야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너나 네 하수인들이나 왜 이렇게 안일한 건지 모르겠군. 난 이미 너희 일족의 심판자를 하나 죽였는데."

짐승처럼 울부짖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 숨겨진 한 수도 없을 만큼?"

"무슨… 방심 따윈 하지도…!"

콰아아아아-!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 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찢어지는 비명. 자루를 놓아 버린 이안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그냥, 너희가 좀 내 기대 이하인 거군."

"...!"

프레야는 입을 억지로 벌려서라도 말하려고 했다. 검을 쓰는 적색 마법사도 괴상한데, 거기다 청색 마법까지 다루리란 걸 누가 예상할 수 있겠냐고. 마법사의 검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리란 걸 세상 그 누가 알 수 있겠냐고.

애초에, 그녀의 현혹을 아무렇지도 않게 떨쳐내는 건 신실한 사제나 성기사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게 가능한 건 자신과 같거나 더 높은 수준의 마족뿐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런 사실을 이안에게 알려 줄 수 없었다.

콰직!

물결 같은 무늬가 맺힌 단검 날이, 심장을 꿰뚫어 버렸으니까.

#105화

단검 날을 타고 불꽃이 번졌다.

퍼억-!

심장 한복판에서 만들어진 화염구가 생성과 동시에 폭발했다.

눈코입으로 불빛이 번쩍인 프레야가, 그대로 재가 되어 폭발과 함께 흩어졌다.

남은 건 붉게 달아오른 단검 날과, 땅에 박힌 단죄의 검 뿐.

푸스스….

단죄의 검에 맺힌 신성력이 모두 흩어졌다.

이안은 검 자루를 쥔 채, 물끄러미 잿더미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그랬듯, 또 뭔가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눈앞으로 퀘스트의 완료를 알리는 확인창만이 흐릿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전부 그런 주문을 걸고 다니는 건 아닌 건가…?

생각하며, 비로소 검을 회수한 이안이 상태창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경험치가 들어와 있었다.

심지어 저번의 아스콜드와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냥 상성이 좋았던 건가…. 하긴. 정말 강한 놈 하나 보단, 적당히 강한 놈 여럿을 상대하는 게 더 편하긴 하지.'

몸을 돌린 이안은, 이내 걸음을 옮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박살난 마차와 토막난 고깃덩어리로 변한 말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었었는데….'

이제 남은 길은 꼼짝없이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탄식을 삼키며, 이안은 길 가장자리에 기대 앉은 샬롯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테사이아는 아직 의식이 없어 보였다.

샬롯은 사슬 갑옷이 다 찢겨져 나가고 피범벅이 된 상태에서도, 그런 테사이아의 입술에 자신의 피를 찍어 바르는 중이었다.

"괜찮나?"

이안의 물음에, 샬롯이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면목이 없군. 갑자기 그런 괴상한 짓거리를 할 줄은 몰랐다. 거기다 마차까지 잃다니…."

"내가 마법사를 먼저 죽여서 그렇게 된 거다. 애초에 처음부터 뱀파이어만 노렸어야 했는데."

마차의 잔재를 뒤지며, 이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미간이 조금 더 구겨졌다. 마지막 남은 술병이 완전히 깨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껴 먹던 건데, 시발.

그의 말이 위로라 여긴 듯, 샬롯이 씁쓸하게 내뱉었다.

"세상은 넓고, 강한 것들은 정말 많군. 난 마법 무구 없이는, 별 것 아닌 전사였을지도 몰라."

"안 어울리는 짓을 하는군."

그나마 멀쩡한 짐가방 하나를 들고 돌아온 이안이, 그녀의 앞에 가방을 내려 놓으며 코웃음 쳤다.

"증명은 이미 충분히 하고 있으니까, 헛소리 마라."

"...."

샬롯은 그럴 리 없다는 듯 미간만 꿈틀댔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이안은 게임에서도 용병을 종종 고용해 데리고 다녔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던전 두 개를 넘기지 못했다. 별 것 아닌 마물에게 맞아 죽거나, 보스에게 피떡이 되거나, 괴상한 상태 이상에 걸려 자멸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지 않는 건 이름 있는 조연 캐릭터들 정도였다. 그나마도 뻑하면 죽거나, 미치거나, 타락하기 일쑤였으니, 지금 샬롯이면 충분히 제 몫을 다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솔직히 그가 이 정도로 맘 편하게 보스 전의 일부를 맡기는 건, 메브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천을 꺼내 아직 뜨거운 운철 단검의 날을 닦은 이안이, 갑옷이 통째로 찢겨나간 샬롯의 옆구리를 살폈다.

가죽이 푹 파여 분홍빛 속살이 보이고, 깨진 사슬 파편이 주위에 잔뜩 박혀있었다.

"내장까지 상하진 않았군. 참아라."

이안은 단검 끝으로 사슬 고리를 하나씩 꼼꼼하게 파냈다. 섬세한 손길. 움찔댈 뿐 신음조차 흘리지 않던 샬롯은, 이윽고 그가 허리에 붕대를 감겨주기 시작하자 머쓱하게 내뱉었다.

"그, 나도 할 줄 안다만…."

"그걸 몰라서 해 주는 게 아냐."

나한텐 응급 처치 스킬이 있거든.

지금까지의 경험상, 스킬 효과는 분명히 적용되고 있었다. 상처가 곪거나 덧나지 않는다는 부분에선 특히.

단단하게 붕대질을 끝낸 이안이, 이번에는 그녀의 팔뚝을 살폈다.

"당분간 왼팔은 조심히…."

내뱉던 그의 목소리가 순간 잦아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

"테사를 지키고 있어라."

내뱉은 그가 일어섰다.

샬롯이 영문도 모른 채 상체를 뻣뻣하게 세우는 가운데, 이안의 시선이 마차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진, 말들의 잔해로.

철퍽, 찌걱-

살덩이와 내장들이 꿈틀대며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단죄의 검을 뽑아 찍어버리지 않은 건, 저 역겨운 짓을 벌이는 오염된 마력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아서였다. 꿈틀대며 모여든 내장과 살덩이가, 곧 하나로 뭉쳤다. 부풀어 오르거나 변이되지는 않았다.

그저 농구공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타원형으로 단단하게 뭉칠 뿐이었다. 내장과 살점의 형태가, 굉장히 징그럽게 빚어낸 얼굴처럼 보였다.

내장들이 달싹대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아아…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중간에 으깨 버리셨으면, 같은 주문을 다시 반복해야 했거든요. 이건, 보기보다 어려운 주문이랍니다."

눅진한 기포가 터지는 것 같기도, 질척한 내장을 비비는 것 같기도 한 아주 기분 나쁜 목소리가 그 사이로 흘러나왔다.

뭐야, 시발. 진짜 머리였어?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궁금했거든. 이런 짓거릴 하는 게 누구인지. 이제 알겠군. 흡혈 여제."

"어머. 바로 알아봐 주시고, 그렇게까지 불러주시니 영광이군요. 저도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요, 이안 호프. 출신 불명의 용병이자, 아겔 란의 구원자. 그리고 벨 론데의 학살자."

…학살자? 나도 모르는 악명도 있었군. 이안이 콧방귀를 뀌는 사이, 여제가 덧붙였다.

"일족의 심판자를 둘이나 죽일 정도의 실력자라는 건,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됐지만요. 사실 아스콜드 경이 당한 건 방심해서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분은… 자신만의 미학 같은 걸 추구하는 분이었으니까."

"이번에 보낸 녀석들이 더 얼뜨기 같던데."

"글쎄요. 프레야와 그녀의 애인들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처음 듣는군요. 어쨌든… 프레야가 죽었다는 건, 당신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겠고요."

"그래서, 복수라도 하러 오셨나?"

"그럴리가요. 그럼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겠죠. 저는 그저…."

내장과 살점으로 이루어진 얼굴이 미소짓는 걸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당신과 직접 대화를 나눠 보고 싶을 뿐이에요."

"…흠."

이안은 검 자루에 한 손을 얹은 채,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가 보기에도, 이 머리는 그저 통신 수단 정도밖엔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면, 그냥 반으로 썰어버리기만 해도 본래의 살덩이로 돌아가리라.

"난 당신에게 어떤 악감정도 없어요, 이안 호프. 오히려 그 반대죠. 과거가 베일에 싸인 마검사 용병. 멋지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엮였다는 걸 알았을 때 많이 애석했답니다."

"애석함을 담아서 심판자를 하나 더 보내셨나?"

"들으셨을 텐데요. 당신을 설득하라고 보낸 거예요. 무력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쓰라고 했죠."

"만나자마자 냅다 마법부터 갈기던데."

"어머. 그랬다니 대신 사과하죠. 일족의 심판자들은, 쉬운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어쨌든, 저는 지금도 당신이 싫지 않아요, 이안. 서로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이유도 없고요."

은근히 이름으로 부르네. 하긴, 상대는 최소 수백 년은 살았을 뱀파이어였다. 어떤 의미론 그에게 존대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이리라. 콧방귀를 뀐 이안이 내뱉었다.

"나도 너한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 이유는, 이미 충분히 있는 것 같군."

"저 아이 때문인가요? 그 아이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아요, 이안. 오히려 그 반대죠. 그저 일개 실험체에 불과해요. 대가로 무엇을 약속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나도 해 줄 수 있어요."

얼굴이 질척한 미소를 지었다.

"저 아이가 약속한 보상보다 더 많은 걸 줄 수도 있고요. 당신의 울타리가 되어줄 수도 있죠. 우리의 일원이 되지 않더라도요.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후원하는 분들도, 적지는 않으니까."

그래, 프레야가 한 것 보단 확실히 더 좋은 제안이군.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제가 속삭였다.

"잘 생각해 봐요, 이안. 당신 혼자서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거예요. 설사 정말 우리 모두를 죽인다 해도, 당신에게 좋은 일은 없을 거고요."

"너희 뒤를 봐 주는 존재가 나를 노릴 테니까?"

이안이 툭 내뱉은 말에, 머리통이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정체 모를 내장이 겹쳐져 만들어진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뭔가, 알고 있는 건가요?"

"추측한 거지. 너희가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런 뒷배 없이 제국 바로 옆의 나라에 붙어살 수는 없을 것 같았으니까. 네 반응을 보니, 제대로 맞췄나 보군."

자존심이 상한 듯 잠시 꿈틀댄 얼굴이 이내 내뱉었다.

"그래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에요. 당신은 이미 눈에 띄었어요. 여기서 우리까지 건드려서 좋을 건 없을 겁니다."

"글쎄… 그건 네가 걱정해 줄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내뱉은 이안이 피식댔다.

사실 그 뒷배가 뭔지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원탁 의회.

타락한 귀족과 성직자, 마법사, 그리고 마족들에게서 때때로 언급되던 이름. 하지만 놈들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어떤 새끼들이 모여 있는지 까진 그도 알지 못했다.

놈들과 마주치려면 특정한 조건이 필요한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그저 스토리를 다 진행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었다. 4챕터 에서야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었을지도.

"말씀하시는 걸 보니, 끝내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겠단 거군요."

이윽고 여제가 내뱉었다. 그 선홍색 머리통을 향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이안이 말했다.

"어차피 넌 내가 원하는 걸 줄 수도 없어."

"당신이 원하는 게 뭔데요?"

이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너희들을 죽일 때마다 얻게 될 경험치와 퀘스트 보상."

"…그게 어느 나라의 언어죠? 전혀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너희 전부의 죽음을 원한다는 거다. 테사는 거기 도움이 되지만, 너희는 아니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차라리 우리가 마족이라 죽인다는 거면 모를까. 하지만 알았어요, 이안."

머리통이 자신의 앞에 멈춰 선 이안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당신이 우릴 찾아올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게요."

이안이 발을 들었다.

"그래. 나도 기대하겠다."

콰직!

이안이 그대로 얼굴 한복판을 짓밟았다. 머리를 구성하던 내장과 살점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구린내와 피비린내가 번졌다.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은 방금 나눈 대화를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마족들도 나를 알고, 그 뒷배도 이미 나를 알고 있다니.

말하는 걸 봐선, 심판자를 죽이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뒷세계의 명성이라도 생긴 건가….'

어쨌든,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직접 얼굴을 들이밀고 구구절절 설득하려 들지 않았을 테니까.

이안은 눈만 끔뻑이고 있는 샬롯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샬롯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건 대체…."

"뱀파이어 여제 같아. 진혈의 주인."

대답한 건 테사이아였다. 이안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깨어나 있었냐?"

"응, 조금 전에."

테사이아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다시 샬롯의 앞에 주저앉는 이안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윽고 덧붙였다.

"감동이네."

"...?"

가방에서 새 붕대를 꺼내던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테사이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가 날 팔아넘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거든. 안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난 또 뭐라고.

"널 위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다. 나를 위해서 한 거지. 쓸데없는 착각 하지 마라."

"하지만 내가 볼 때, 뱀파이어 전체를 적으로 돌려서 이안이 얻을 게 없는 걸."

없긴 왜 없어. 오를 경험치가 몇이고 클리어할 퀘스트가 몇 개인데.

콧방귀를 뀐 이안이, 붕대를 들며 내뱉었다.

"헛소리 말고 땔감이나 모아 와라. 오늘은 여기서 잘 거니까."

"그래!"

튕겨 오르듯 일어선 테사이아가, 문득 샬롯과 이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마워. 둘 다."

"...?!"

샬롯이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사이아는 이미, 부서진 마차의 잔해를 주우러 달려가는 중이었다.

#106화

글루미르, 미로 저택.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니그리안테 백작 부인이 화들짝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 맺혀 있던 자주색 광망이 사그라들었다.

"대체…."

놀란 얼굴로 읊조린 그녀가 앞의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양손을 얹고 있던 건, 어린아이의 두개골에 몇 가지 짐승의 뼈를 이어 붙인 듯한 끔찍한 형태의 작은 두개골이었다.

법구였다. 아는 자들은 암흑 성물이나 심연의 우상이라 부르는.

그녀가 북부까지 의식의 파편을 보내 주문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이 법구의 도움이 있어서였다.

"...."

작은 눈구멍 속의 심연을 응시하는 검붉은 눈동자에, 비로소 잠시 밀려났던 피로와 상념이 몰아쳤다.

"…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셨나 보군요."

어둠 너머에서 나지막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륵, 창가의 커튼이 조금 벌어지고, 그 사이로 창백한 달빛이 내리쬈다.

핏기없는 노인의 얼굴이 설핏 드러났다. 대외적으론 그녀의 남편이나, 실상은 그녀의 가장 오래되고 충실한 시종인 백작이었다.

"벌써 심판자를 둘이나 잃으셨습니다, 이 이상의 피해는…."

백작의 입이 닫혔다. 백작 부인이 피로한 얼굴로 검지를 입술 위에 얹은 까닭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 그녀가 속삭였다.

"…차가운 분노와 그 아래 억눌린 광기가 느껴졌어요. 아주 찰나였지만. 날 압도할 정도로 엄청났죠."

"그게 무슨…."

"주문이 깨지면서 의식의 파편이 잠시 흩어졌어요. 다시 심연의 틈으로 빨려들어 돌아오기 전에. 그때 느껴지더군요. 아마 공허의 마력이 어떤 상호 작용을 일으킨 거겠죠."

"...."

그제야 그녀가 놀란 것이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음을 깨달은 노인이 미간을 좁혔다.

"…어떤 존재였습니까?"

"글쎄요. 알고 싶지 않네요. 다만."

백작 부인의 입가에 흐릿한 호선이 스쳤다.

"머잖아 북부에 큰 혼란이 찾아오리란 건 확실히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녀의 시선이 노인에게로 향했다.

"자매를 보내겠어요. 그 아이들이 가장 신중하고 교활하니까. 은밀하게 지켜보면서, 실험체를 회수할 기회를 노리라고 하세요."

기다리겠다는 백작 부인의 말은, 반만 진실이었다.

이안이 자신들을 찾아올 때까지 실험체를 마냥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사제의 다음 방문까지 남은 시간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다.

그래서 본래는 이안이 제안을 거절하면 가장 강한 심판자들을 여럿 보낼 계획이었는데, 생각이 조금 바뀐 것이다.

"혼란의 폭풍이 휘몰아칠 땐, 누구라도 빈틈이 생기는 법이니까요."

"그리 전하겠나이다."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직 백작 부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루 사드에도 혼란이 필요할 것 같군요."

"...!"

"이 땅을 피와 죽음으로 충분히 적셔 둬야겠어요. 필요해질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까."

내 도시가 비탄에 잠기는 건, 마음이 아프지만.

백작 부인은 뒷말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이안 호프에게는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그저 검을 잘 다루는 마법사라는 특이한 이력 외에도, 드러나지 않은 특별한 무언가가.

그렇지 않다면 일족의 심판자를 둘이나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한들, 개인에 불과한 용병이 일족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겠지만.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한 백작이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장내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빛나는 건 오직 검붉은 눈동자뿐.

이윽고, 씁쓸함과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가 나지막이 번져 나왔다.

"…그 역겨운 작자의 일을 돕게 될 줄은 몰랐는데."

***

일행은 관도를 따라 나아갔다.

황량한 평야와 잿빛 숲, 계곡. 그 끝에 또 하나의 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 금이 간 낡은 성벽. 그 너머의 산 능선에 솟은 요새 역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드문 일이군. 여긴 보통 방위군이나 이주민들이 오가는 관문인데. 거기다 증명서부터 면면까지 특이하지 않은 게 없으시군. 용병단이시오?"

중년의 관문 대장이 이안이 내민 증명서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말했다. 눈빛에 호기심과 흥미를 감추지 못한 채였다.

근무가 어지간히 지루했나.

"그렇소."

"장벽을 넘어갔다 돌아온 용병단이라… 보통 분들이 아니시군. 하긴, 딱 봐도 그래 보이지만. 그래서, 트라벨가로 가시오?"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오?"

"남동쪽 관도를 타고 사흘 정도만 더 내려가면 도착할 거요. 당신들을 따라 복귀하고 싶군…."

관문 대장이 고개를 주억대며 읊조렸다.

확인이나 빨리해 줄 것이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트라벨가 소속이신가 보군."

"그렇소. 한 달씩 돌아가며 근무하지. 보다시피 상주할 이유가 없는 곳이라서 말이오. 말이 벨리움 요새지, 여긴 그냥 관문이나 초소라고 부르는 게 맞소."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이 관문 이름이 벨리움이오?"

"그렇소. 이 동네 이름이기도 하고. 왜, 사연이라도 있으시오?"

"…아니오, 아무것도."

심드렁하게 대꾸한 것과는 달리, 이안은 차근히 좌우로 이어진 성벽을 눈에 담았다.

'어쩐지 뭔가 낯이 익더라니.'

이 낡은 관문은, 게임에선 주요 퀘스트의 배경이 되는 장소였다.

검은 벽을 기준으로 하면 아무 의미도 없지만, 설원 지대를 중심으로 하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장벽을 돌파한 언데드 군단이 남하하던 시점.

루카스를 포함한 소수의 방위군은, 트라벨가로 들어서는 길목인 이곳에서 결사의 항전을 펼쳤었다.

루카스가 가장 신뢰하는 용병이었던 이안도 물론 이곳에 있었다.

카링기온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관문을 지키는 게 목표였다.

'진짜 빡셌는데….'

보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일반 마물과 정예 마물이 섞여 밀려오는 것뿐인데도 몇 번이나 게임 오버 화면을 봤었다.

물론 지금의 그는 그때보다 훨씬 강하고, 이번엔 장벽이 뚫릴 일도 없을 것 같긴 했지만….

"여길 통과하면 이제 자치령 중심부라 할 수 있소. 트라벨가에서 괜찮은 의뢰를 건지시길 바라겠소."

관문 대장이 양피지를 건넸다.

어쩌면 이자도 그땐 관문을 지키려 싸웠을지도.

내심 피식댄 이안이 덧붙였다.

"트라벨가 인근에 야인 정착지가 있다고 들었소만."

"가는 길목에 있소. 하루쯤 더 가면 숲으로 꺾이는 갈림길이 나올 것이오. 그 안에 있지."

관문 대장이 냉큼 대답했다. 턱을 긁적인 그가 덧붙였다.

"고마운 자들이지. 그들이 이주하고 나서 인근의 마물이 거의 사라졌으니까. 모피 가격도 싸졌고. 어쨌건 외지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니, 특별한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접근하지 마시오."

"알아 두겠소."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친절한 사람이네. 보통 우릴 보면 경계부터 하는데, 그러지도 않고."

멀어지는 관문을 돌아보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내뱉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만큼 지루했던 거겠지."

게다가 여기까지 온 이들은 사실, 굳이 신분을 확인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어쨌든 잘됐네. 이제 사흘만 더 걸으면 된다니. 안 그래?"

이안은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게임에선 불과 몇 분 거리였지만.

이런 변화는 이제 일상적인 부분이었다.

기대된다, 하고 중얼대며 헤실대던 테사이아의 시선이, 문득 옆의 샬롯 쪽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야옹이는 왜 이렇게 기운이 없을까. 며칠째."

"…신경 쓰지 마라."

샬롯이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몸 상태가 안 좋나? 열이 난다거나. 옆구리가 욱신거린다든가."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벌써 거의 다 아물었다. 솔직히 당장 싸워도 괜찮을 정도야."

"그럼 뭔데? 뭘 해도 뚱하고, 많이 먹지도 않고."

테사이아가 덧붙이자, 샬롯이 슬쩍 인상을 구기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럼 넌 왜 실실대는 거냐? 정신 나간 것처럼."

"내가 그랬나…? 하긴, 뭐. 안 그럴 이유가 없잖아."

테사이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망할 놈의 심판자도 또 하나 죽었고. 앞으로도 너희들이 날 버릴 것 같지도 않으니까. 이보다 좋을 수 없지."

"…그래. 거참 잘됐군."

샬롯이 심드렁하게 입맛을 다셨다.

테사이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뭐야, 재미없게. 우리 야옹이 고민이 뭘까. 응?"

"친한 척하지 마라. 귀쟁아."

"운명 공동체끼리 이런 얘기도 못 해? 어차피 할 것도 없잖아."

탄식을 삼키듯 잠시 눈을 감았던 샬롯이, 이윽고 내뱉었다.

"전사로서의 고민이 있을 뿐이다."

"드디어 날 죽일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거야?"

"...."

"어머. 정말인가 보네."

"…날붙이만으로 죽일 수 없는 적들을 상대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너도 예외는 아니지."

멍하니 눈을 끔뻑인 테사이아의 입가에,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하긴 넌 별거 아닌 마법에도 픽픽 쓰러지고, 혼자선 망령 한 마리도 제대로 못 때려잡긴 하지."

"...."

샬롯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어쨌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대신 넌 다른 걸 잘 때려잡잖아. 네가 잘하는 걸 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그렇게 타협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거다, 귀쟁아."

"그래서, 답은 찾았어?"

샬롯이 멈칫했다.

"…아직은."

"그러면서 말은.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 더 못생기게 하고 있지 말고, 네가 못 하는 건 나한테 맡겨. 어차피 우린 한 몸이잖아?"

"...."

그게 싫은 거라는 듯, 샬롯이 입맛을 다셨다. 테사이아가 놀리듯 싱글댔다.

…저것들도 많이 친해졌네.

이안은 둘을 슬쩍 돌아보며 생각했다.

이만하면 그의 조치는 성공적이었다 할 수 있었다. 강제적이라도 서로의 목숨을 몇 차례 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료 의식이 싹튼 것이다.

이제는 그가 곁에 없다 해도 서로의 목숨을 노릴 일은 없으리라. 그걸 넘어, 당연하게 서로를 지킬 터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트라벨가에 도착하면."

이안이 입을 열었다. 투덕대던 둘이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마법 무구를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지. 네 갑옷의 주문 회로를 되살릴 방법은 없는지도."

샬롯의 눈이 설핏 커졌다. 사실 그녀가 고민하는 부분의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해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해법을 택할 수 없는 이유도 명확했다.

"구할 수 있다 해도, 그걸 살 돈이 없다, 이안."

"나한테 있어."

"...!"

"교회에서 왕관 대금을 곧바로 치른다면 더 넉넉해질 테고."

"난 이미 도끼도 받았는데, 네가 또 돈을 쓰게 할 수는…."

눈을 치켜뜬 샬롯이 더듬대는 사이, 테사이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안, 그럼 나는? 난 뭐 없어?"

"너한테는…."

그녀를 돌아본 이안이 대답했다.

"신발을 사 줘야겠군. 새 옷이랑."

"아니… 왜 난 자꾸 그런 것만 사 주는 거냐고…."

왜겠냐?

망토 아래론 넝마를 걸친 거나 다름없는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은 이안은, 이윽고 말없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흐릿한 먹구름이 일행을 뒤따르듯 번지고 있었다.

***

관문 대장의 설명은 정확했다.

이안은 숲 한복판, 듬성듬성한 목책을 두른 마을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단 큰 것 같은데….'

이안은 인근에 트라벨가 같은 대도시를 두고도, 굳이 따로 마을을 만들어 생활하는 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통은 문명 한복판에서도 얼마든지 지켜 낼 수 있건만.

물론 이것 역시, 그가 현대인이기에 가지는 생각일 터였다.

저들에겐 이게 생존을 위해 최대한 타협한 결과이리라.

"거기서 멈추는 게 좋을 거다, 외지인. 여기서부턴 너희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땅이다."

마을 입구. 일행을 빤히 응시하던 두 전사 중 하나가 내뱉었다. 둘 다 창을 언제든 내뻗을 수 있게 콱 움켜쥔 채였다.

멈춰선 이안이 경고한 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전하러 온 거다. 머잖아 다른 야인들이 이주해 올 테니까."

"…어느 마을에서?"

"검은 숲 언덕 마을."

"검은 숲 언덕…? 기다려라. 말을 전하겠다."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은 전사가, 이내 휙 몸을 돌렸다.

이안이 남은 하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내가 전할 말은 다 했다만."

"네가 정말 검은 숲 언덕 마을에서 온 거라면,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게 좋을 것이다."

뭔 책임.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말을 전하겠다 한 건 그였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곧 전사들 여럿이 다가왔다. 한복판에 우르드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늙은이를 앞세운 채였다.

"검은 숲 언덕 마을의 전사들이 이주해 온다는 게 사실이오?"

멈춰선 노인이 물었다. 그 역시 얼굴 곳곳에 깊은 흉터가 있었다.

"그렇소."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상하군. 그들이 성상을 버리고 이주할 리가 없는데. 외지인에게 소식을 전달하게 할 리도 없고."

더럽게 따지는 것도 많네.

이안이 할 말을 고르는 찰나, 뒤에서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이안은 외지인이 아니거든. 대전사니까."

"대전사…?"

이안을 돌아본 노인의 얼굴이 천천히 구겨졌다.

"우리뿐 아니라 검은 숲 언덕 마을까지 모욕하는군. 북부인 같지도 않은 외지인이 대전사라니…."

"거짓말이 아니다, 늙은이."

이번엔 샬롯이었다.

낮게 으르렁댄 그녀가, 이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덧붙였다.

"너희들의 신이 이안을 선택했지."

이안이 테사이아와 샬롯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사실인데 뭐가 문제냐는 표정들.

"...."

내심 한숨을 삼킨 이안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노인은 물론, 전사들의 표정도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었다.

#107화

"카르하께서 인정한 대전사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들이군. 마족 주제에 북부의 전사들을 모욕하다니…."

전사들이 씹어뱉는 크고 작은 목소리가 번졌다.

'…그냥 지나치긴 글렀군.'

말만 전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카르하가 멋대로 날 선택한 건 사실이오. 당신들에게 대전사로 인정받을 생각은 없지만."

"저 미친 놈이 끝까지…?"

"혀부터 잘라 내야겠군. 그건 내가 하겠다."

전사들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분위기가 흉흉해진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저것들이 지금 이안한테 뭐라고 한 거야?"

"죽여 달라고 한 거다, 귀쟁아."

"그런 거 맞지?"

샬롯과 테사이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노골적인 살의가 감도는 가운데, 이안이 팔을 살짝 들어 둘을 저지했다.

여기서 싸우게 된다면 전사들은 물론이고 정착민들을 전부 다 죽여야 할지도 몰랐다. 드센 북부 야인들이 전사들의 죽음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그런 꼴은 최후의 최후에 봐도 충분했다.

다행히 노인 역시 이안과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전사들을 돌아보며 잠시 진정시킨 그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분노를 꾹 억누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피를 보고 싶지 않다면 그 말을 증명하는 게 좋을 것이오. 카르하께서 직접 축복을 내린 대전사라면, 그 증거가 새겨졌을 텐데."

"…하."

졸라 귀찮게 하네, 진짜.

짧게 한숨 쉰 이안은, 이내 왼쪽 견갑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정착지를 피바다로 만드는 것보단, 어쨌건 이게 더 나은 선택지였다.

팔목 보호대와 사슬 갑옷의 한쪽 고리까지 풀어헤친 그는, 안에 받쳐 입은 두툼한 누비옷의 소매에서 왼팔을 빼냈다.

이어 옷 밑단을 비스듬하게 어깨 위로 걷어 올리자, 왼쪽 팔과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안의 시선이 자신의 왼쪽 어깨를 훑었다.

어깨 뒷부분에서 시작돼 팔꿈치 위 절반쯤까지 이어진 문신. 타오르는 불길이나 몰아치는 폭풍을 간결하게 형상화한 듯한 형태의 문양이었다.

'남의 몸에 멋대로 낙서하고 지랄이야. 개 같은 백정 새끼….'

처음 봤을 때와 같은 생각이 뒤를 이었다.

북부의 대전사 퀘스트가 완료된 순간 팔뚝을 타고 열기가 느껴진 건, 이 문양이 새겨지고 있어서였다.

이런 게 생긴 이유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축복을 내리려면 신성을 받아들일 매개가 필요하니, 영혼 대신 육체에 남긴 것이리라.

"됐소?"

이안이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노인을 바라보며 내뱉었다. 노인은 충격과 불신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의 팔에 새겨진 문신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이건 분명 전투 문신인데…? 혹시 검은 숲 언덕의 전사들이… 그럴 리가… 그럼 이건…."

주문을 외우듯 중얼대는 노인을 잠시 바라본 이안은, 이내 벗었던 옷과 갑옷을 다시 착용하기 시작했다. 충분히 알아본 것 같으니, 오래 기다려줄 생각은 없었다.

순간 손을 내밀었던 노인이, 이안의 싸늘한 시선에 다시 팔을 내렸다. 이안의 팔뚝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혼란과 갈등이 묻어나는 사이.

"이보쇼. 크바사르 영감, 왜 말이 없어?"

"설마 저 개소릴 믿으려는 건 아니겠지? 마족을 데리고 다니는 자가 북부의 대전사일 리가."

인내심이 바닥난 듯 전사들이 으르렁댔다. 묵묵히 다시 장비를 착용하는 이안을 노려보던 그들 사이로, 누군가 앞서 나왔다.

"비키시오, 영감. 저 이방인의 말을 판별할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으니까."

기다란 창을 들고 적당히 곱슬대는 장발을 풀어헤친 거한이었다. 견갑을 다시 어깨에 맞게 고정하던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가장 간단한 방법?"

전사가 서늘한 눈으로 내뱉었다.

"결투다. 이방인. 네 놈이 정말 카르하께서 인정한 대전사라면, 결투를 거절할 리도 패배할 리도 없겠지."

노인, 크바사르가 인상을 찌푸리는 가운데, 이안의 눈매도 순간 가늘어졌다. 저 멍청한 전사의 말에 놀라서가 아니라, 눈앞에 퀘스트 창이 이어져서였다.

대전사의 권위. 또 다른 야만 전사 전용 퀘스트였다.

보상이 또 힘 능력치 하나라는 것까지 확인한 이안의 입가에, 비로소 헛웃음이 스쳤다.

그래, 이젠 놀랍지도 않군.

크바사르가 전사들 쪽을 돌아본 건 그때였다.

"다들 기다리게. 어쩌면 이 자는 정말-"

"입 닫아, 영감."

"...!"

말을 자른 건 이안이었다.

전사들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이윽고 덧붙였다.

"받아주지. 번호표 뽑아서 덤벼라."

"번호표…?"

"순서 정해서 덤비라고. 아니면 전부 한꺼번에 덤비던가."

장발 전사의 미소가 짙어졌다.

"대답만큼은 전사답군, 외지인. 하지만 신성한 결투를 그런 식으로 더럽힐 순 없지. 기다려라."

신성하긴, 지랄.

이안이 코웃음을 치는 사이, 전사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내가 처음이라 주장하기 시작했다.

단번에 끝나리라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잊지 말고 혀를 자르길 바란다, 이안. 아니면 내게 맡겨다오. 전부 벙어리로 만들어 주겠다."

"그리고 그건 전부 나 줘. 씹어 먹어 버리게."

샬롯과 테사이아가 속삭였다. 이안이 싸늘한 눈으로 둘을 돌아보았다.

"지금부터 둘 다 입 닫아. 내가 말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마라."

이 녀석들의 입방정 덕분에 퀘스트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일을 더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이곳은 우르드와 아스켈이 살게 될 장소였다. 괜히 전사를 여럿 죽여 원한을 남기고 가면, 뒷맛이 구려질 터였다.

"후...."

이안은 몸을 이리저리 풀며, 떠들썩하게 순서를 정하는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검을 뽑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무기를 사용한다면 죽이지 않고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빡셀 것 같으면, 몰래 바람 칼날 같은 걸 쓰지 뭐.'

생각하며 양손을 깍지 껴 장갑을 손에 꽉 맞게 조이던 이안이, 문득 크바사르를 바라보았다.

이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부의 초인이시여…."

그가 탄식하듯 읊조렸다. 이안은 그제야 자신의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신성력이 아른대며 번지고 있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발휘된 적 없던 투쟁의 축복이, 하필 지금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후손들 앞에서 체면 구기지 말란 건가."

어쩌면 게임에선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이벤트인지도.

진위 여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법 없이도 전부 두들겨 팰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입을 달싹이던 크바사르가 전사들 쪽을 돌아보았다.

"다들 멈추게, 이 분은- 읍?!"

"입 닫으라고 했을 텐데?"

크바사르의 입을 손으로 움켜 쥔 이안이 서늘하게 내뱉었다.

누구 마음대로 멈춰?

퀘스트를 받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받은 이상, 결투를 멈추는 건 퀘스트가 완료된 다음이었다.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 영감 옆으로 치워. 그리고 아무도 결투에 끼어들지 못하게 해라. 저지만 해. 죽이진 말고."

고개를 끄덕인 샬롯이 그대로 크바사르의 멱살을 쥐었다.

그녀가 혀를 날름대고는 속삭였다.

"닥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늙은이. 전사들의 결투에 끼어들지 마라."

"쉿. 쉿."

검지를 입술 앞에 가져다 댄 테사이아가, 샬롯에게 질질 끌려가는 크바사르의 뒤를 따라갔다.

꾹 주먹을 움켜쥔 이안이 조용해진 전사들을 마주 보았다.

노인과 마찬가지로 놀란 얼굴들.

물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 줄 생각 따윈 없었다.

맨 앞의 전사를 향해 턱을 까딱인 이안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순서대로 와라. 시간 끌지 말고."

"...."

굳은 낯이 된 전사 하나가 손에 쥔 창을 휙 던져 버리고는 성큼,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회색 계곡 출신의 볼베르다."

"이안."

고개를 끄덕인 볼베르가 주먹을 치켜든 찰나, 이안이 굽혔던 무릎을 박찼다.

쒸에엑-!

"...?!"

볼베르가 눈을 치켜 떴다.

이안이 한순간에 커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그게 단숨에 코앞까지 쇄도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쯤엔, 이미 턱에 이안의 주먹이 닿고 있었다.

쩌억-!

***

콰당탕탕-

"끄… 억…."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른 전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던 그가,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샬롯이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와 쓰러진 전사를 질질 끌고 갔다.

"후…."

숨을 내쉰 이안이 장갑에 묻은 피를 털며 팔을 내렸다.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창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북부 야만인들과 엮인 후로, 벌써 힘 수치가 두 개나 더 올랐다.

물론 좋은 일이었지만,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이제 정말 힘은 그만 올라도 괜찮을 것 같았으니까.

"끄으...."

그 증거들이 목책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안은 기절하거나 숨만 헐떡이는 전사들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에게 퀘스트를 안겨줬던 장발의 전사는 앞니가 몇 개 사라진 채 팅팅 부은 얼굴로 널브러져 있었다.

'확실히, 발동 되기만 하면 엄청 좋은 축복이긴 한데.'

이안은 심드렁하게 입맛을 다셨다.

지금 그의 전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파괴적인 위력을 가진 무기나 다름없었다.

투쟁의 축복을 받은 그의 힘과 민첩성은, 가장 용맹한 야만 전사보다도 한참은 뛰어났다.

저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데는 굳이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대부분 이안의 주먹을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했고, 전투 기술이 뛰어나거나 맷집이 강한 자들조차 고작 몇 번을 버티는 게 전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야만 전사를 했어야 됐는데. 시발….'

새삼스러운 탄식을 삼키며, 이안은 마을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몰려나온 주민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처음에는 적개심과 분노를 불태우던 그들은, 이제 더는 그를 향해 고함이나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

대신 경외의 눈빛과 크고 작은 탄식, 감탄이 그 자리를 채웠다.

장벽 너머의 여러 마을에서 모인 자들이었다.

이안과 싸운 전사 중에는 각 마을의 대전사도 섞여 있었을 터. 붉은 신성력을 흩뿌리며 그들을 죄다 두들겨 패는 이안의 모습에서 신적인 전사를 떠올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리라.

"더 덤빌 사람?"

이안이 내뱉었다. 물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뒤늦게 나온 몇몇 전사들이 그의 시선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야. 피식한 이안이 테사이아와 나란히 선 크바사르를 돌아보았다.

"말했듯, 난 그저 소식을 전하러 왔을 뿐이야. 이제 내 말을 믿나?"

"...."

크바사르가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샬롯과 테사이아를 향해 턱짓한 이안이 정착지의 주민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오늘 있었던 일로 검은 숲 언덕 마을의 주민들에게 불이익이 생기는 일은 없으리라 믿겠다."

이만하면 깔끔한 끝맺음이지.

생각하며,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아직 신성력이 아른대는 주먹을 쥐락펴락 했다.

왜 축복이 안 사라지지.

"아니, 이안. 그냥 이대로 간다고?"

엉겁결에 뒤따라온 테사이아가 이내 속삭였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 찰나.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급한 목소리가 따라 붙었다.

크바사르가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귀찮게 굴 것 같아서 그냥 가려던 건데.

혀를 찬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내 볼일은 끝났는데."

"무례를…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대전사여."

멈춰 서며 내뱉은 크바사르가 숨을 고르고는 덧붙였다.

"저희는 그저, 북부인이 아닌 대전사가 탄생했음을 믿기 어려웠을 뿐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노여움을 푸시지요."

단단히 오해하고 있군.

피식한 이안이 내뱉었다.

"내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았군. 난 대전사 같은 거엔 관심도 없어. 말을 전하러 온 거고, 용무가 끝났으니 가는 거다. 너희랑 뭘 어쩔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

"그야말로 대전사다운 말씀이십니다."

크바사르가 웃음을 흘렸다. 이안의 태도가 명예나 권력 따위에 초연한 것으로 비춰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안은 북부 야인 전사들을 이끄는 우두머리 따위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에 뒤따를 귀찮은 책임과 의무를 짊어질 생각은 더더욱.

"이 노구가 드리려던 말씀은, 그저 하루만 마을에 묵어주십사 하는 것뿐입니다."

이내 크바사르가 덧붙였다.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정말 그거면 되나?"

"저흰 모두 고향을 떠난 자들입니다. 새로이 탄생한 북부의 대전사께서 정착지를 들르지도 않고 떠나신다면, 카르하께 버림받았다 여기겠지요."

"...."

이래서 신성력이 안 사라진 건가.

생각할 찰나, 눈앞에 새로운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대전사의 발자취.

이안은 정착지를 둘러보라는, 현실이 된 지금은 아주 귀찮을 게 분명한 내용을 눈에 담으며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건너 뛸 수는 없었다.

보상이 무려 스킬 포인트였으니까.

'이게 마지막 연계 퀘스트인 건가.'

아직도 마을 입구에 모여 있는 정착지의 주민들을 눈에 담은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하룻밤이다. 대신, 그놈의 대전사 소리는 내 귀에 안 들리게 해."

#108화

다음 날 아침. 일행은 말 두 마리에 나눠 탄 채 정착지를 떠났다.

정착민들은 이안이 내미는 말 대금을 끝내 받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 전사들은 그들을 따라가려 하기까지 했다. 전부 이안에게 두들겨 맞은 자들이었다. 이안은 그들을 말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주먹을 들어야 했다.

"진짜 용병단이 될 뻔했네."

깔깔대는 테사이아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멀어지는 정착지를 돌아보았다.

겉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마을이었다.

이주민들이 건설 중인 통나무집.

벌목만 끝낸 채로 방치된 공터와 목책도 없이 숲으로 곧장 이어지는 외곽 지역들까지.

검은 숲 언덕 마을의 주민들이 이주할 여력은 충분하단 뜻이었다.

'그거면 됐지, 뭐.'

이안은 미련 없이 시선을 돌렸다.

더는 연계 퀘스트가 있지도 않을 테니, 이제 다시 저 북부 야만인들과 엮일 일은 없으리라.

"그런데, 왜 난 항상 야옹이랑 말을 같이 타야 하는 거야?"

테사이아가 불쑥 내뱉었다.

상념에서 벗어난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 냄새를 계속 맡으면서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겠냐?"

"자신 있어. 시험해 볼래? …아, 안 된단 얘기였구나. 알았어."

테사이아가 재빨리 시선을 돌리는 가운데, 이번엔 샬롯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 이 녀석을 그냥 걷게 하면 안 되겠느냐? 자꾸 갈기를 잡아당기는데."

"잡기 좋게 생긴 걸 어쩌라고. 이게 자세가 편하단 말야."

정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군.

심드렁하게 코웃음을 친 이안이, 말 고삐를 고쳐 쥐었다.

***

꼬박 하루 반나절을 더 이동한 끝에, 마침내 트라벨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에 요새처럼 솟은 성과, 몇 겹으로 이어진 건조한 성벽.

장식이나 색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남회색 도시의 전경은 구름 낀 하늘과 어우러져 칙칙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규모만큼은 자치령의 중심지답게 거대했다.

심지어 성벽 밖의 관도 주위로도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수많은 행인이 대로를 오갔다.

지금까지 본 북부의 도시들 중에서 가장 번화하고 번잡한 광경.

하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트라벨가가 황량하다면 자치령이 위기에 직면했다는 뜻일 테니까.

게임에서 그랬듯이.

"...?"

성의 북쪽 관문으로 들어서던 이안의 미간이, 문득 좁아졌다.

관문을 지키고 선 자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관문 대장 역시 이안을 알아본 듯 잠시 놀란 표정을 짓고는, 이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었다.

이윽고 멈춰 선 이안이 내뱉었다.

"자치령의 대도시는, 전부 댁이 관리하나?"

닝글로슬의 관문을 지키던 경비 대장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너털웃음을 터뜨린 그가 내뱉었다.

"여기선 북문만 관리하오. 언젠가 다시 볼 줄은 알았지만, 막상 만나게 되니 반갑군."

그가 샬롯과 테사이아에게도 눈인사를 건네는 사이, 말에서 내린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여기에 있는 거요? 댁은 처자식도 없나?"

"없소. 잘된 일이지. 있었어도 달라질 건 없었을 테니까. 어쨌든 내가 여기 있는 건… 굳이 말하자면…."

관문 대장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이안의 눈을 응시했다.

"당신 덕분이라 할 수 있소."

"...?"

이안의 눈썹이 올라갔다. 어깨를 으쓱인 관문 대장이 말을 이었다.

"난 루카스 경을 따라 여기로 왔소.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 아니면 카링기온으로 끌려갔을 테니까. 댁이랑 안면이 있는 사이라 함께 묻어온 거거든."

"그러니까, 날 아는 게 왜?"

"루카스 경이 댁한테 관심이 아주 많던데. 댁이 트라벨가로 오면 바로 알아보고 보고해 줄 사람을 필요로 했소. 마침 그게 나였지."

"하…."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이것도 나비 효과라고 봐야 하나.

이유야 어쨌건, 아는 얼굴을 마주친 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게 짬이 좀 되는 방위군 소속의 병사라면 더더욱.

"덕분에 오자마자 북쪽 관문을 맡게 됐소. 그리고 이렇게 만나게 됐군. 난 사실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살아서 돌아오셨군. 그래서, 의뢰는 완수하셨소?"

관문 대장이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셈이지."

"넌 상상도 못 할걸. 우리가 산맥에서 뭘 봤- 읍."

제 업적인 양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던 테사이아의 입을 샬롯이 틀어막았다. 붉은 눈과 주황색 눈이 서로를 번쩍 노려보는 사이, 관문 대장이 다시 한번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군. 뭐,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답은 충분히 됐소. 그보다… 애석하게 됐군. 하필 지휘관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오시다니."

"루카스 경이라면 이미 만났소."

양피지를 건네며 이안이 말했다.

증명서를 펴보지도 않은 채, 관문 대장이 눈을 끔뻑였다.

"이미 만나셨다고…?"

"장벽 관문에서. 나눌 얘기도 다 나눴지. 흐음… 이제 보니."

턱을 긁적인 이안이 덧붙였다.

"지금은 내가 아니라 댁한테 애석한 상황인 것 같은데."

"내가 애석할 일이 뭐가 있겠소?"

"루카스 경은 지금쯤 카링기온으로 가고 있을 테니까."

"엥…?"

"거기 눌러앉을 것 같던데. 아마 당신을 불러들일지도."

"하, 이런."

눈을 질끈 감은 관문 대장이 한숨을 내쉬며 내뱉었다.

"그 저주받은 동네로는 가고 싶지 않은데… 거긴 마법사들도 한둘이 아니란 말이오."

이안의 미소가 묘해졌다.

"마법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보군."

"누가 좋아하겠소? 그 작자들이 카링기온에 있는 건, 그저 검은 벽이 가깝기 때문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남몰래 검은 벽을 연구하는 자들이 제정신일 리 없잖소."

혀를 찬 경비 대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애초에 저들의 소굴 위치조차 밝히지 않는 자들이오. 난 사실 마탑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도 의심스럽소. 탑이 그렇게 여러 개 있다면, 하나쯤은 위치가 알려져야 하지 않겠소?"

그건 땅속이나 호수 아래로 지하실을 엄청나게 지어 놓고, 거꾸로 지은 탑이라고 우겨서 그런 거고.

"하긴. 그 작자들이 제정신이 아닌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속내와 달리 태연하게 내뱉으며, 이안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를 빤히 응시하던 샬롯과 테사이아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실소를 삼킨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여기 빛의 신의 교회가 있다던데. 어디로 가야 하오?"

그제야 증명서를 대충 펼쳐 보던 관문 대장이 말했다.

"성벽을 하나 더 넘어가야 있소. 교단에도 용무가 있으시오? 이건 좀 궁금한데…."

"모르는 게 좋을 거요. 그럼, 용병이나 상인들이 많이 묵는 여관은?"

"두어 개 있소만. 남서쪽 골목을 돌아가다 보면 나오는 설산 두꺼비라는 여관만 가지 마시오. 거긴 주로 이 동네에 오래 산 용병들이 머무는 곳이라, 외부인이 오면 종종 문제를 일으키니까."

"그럼 거기로 가야겠군."

"...?!"

관문 대장이 눈썹을 치켜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양피지를 받은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정보에 발 빠른 자들과 안면을 틀 생각이라서 말이오. 서로 주먹이 오가다 보면 금방 친해지겠지."

잠시 입을 뻐끔거린 관문 대장이, 이윽고 심각한 표정이 됐다.

주위를 살핀 그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주먹다짐 정도로 끝나면 상관없겠지만, 누굴 죽이진 마시오. 만약 그런다면, 들키지 마시고."

"걱정 마시오. 그럴 일 없으니까."

피식 웃으며 말한 이안이, 또 보자는 인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말을 이끌고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죽일 일이 없다는 거야, 아니면 들킬 일이 없다는 거야?"

여전히 특이하기 이를 데 없는 무리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중얼댄 관문 대장이, 이윽고 다시 앞을 바라보며 한숨 쉬었다.

"카링기온이라…."

지금은 사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

말을 맡긴 이안은 곧바로 테사이아가 입을 새 옷부터 샀다.

"그래서, 또 싸우는 거야?"

신발이 어색한 듯 어기적대며 테사이아가 물었다. 이안이 골목으로 들어서며 어깨를 으쓱였다.

"필요하면. 일단은 그럴 필요 없는 방식부터 써 볼 거다."

"그럴 필요가 없는 방식…?"

샬롯이 그런 게 있냐는 듯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묻는 건가,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보통은 그걸 대화라고 부르지."

"…아. 그렇군."

"그 전에 식사부터 하고."

"나도 배고파."

테사이아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흐릿하게 번들대고 있었다. 이안의 시선에 눈을 깜빡인 그녀가, 이내 주섬주섬 가죽 안대를 꺼내 뒤집어썼다.

슬쩍 그 앞으로 나서면서 샬롯이 내뱉었다.

"헛짓 말고 기다려라. 자기 전에 쥐라도 몇 마리 잡아다 줄 테니까."

"적어도 두 마리. 통통한 놈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안을 돌아본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지 말란 거지?

피식한 이안이 두툼한 여관의 문을 밀었다. 위에 두꺼비 그림이 그려진 작은 나무 간판이 흔들렸다.

지린내와 구린내가 뒤섞인 퀴퀴한 공기와 뜨끈한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이안이 장내로 들어섰다.

"...."

장내의 소음이 순간 잦아들었다.

제법 넓은 1층의 주점은, 이른 저녁임에도 꽤 붐비고 있었다. 곳곳에 자리한 이들의 시선이 샬롯과 테사이아에게로 모였다.

'이젠 이런 게 반가울 지경이군.'

생각하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긴 이안이, 한쪽 구석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곧 일행이 들어 온 순간부터 지켜보고 있던 여급이 다가왔다.

키가 크고 한 성격 할 것 같은, 전형적인 북부인 느낌의 여급이었다.

"여긴 뭐가 맛있지?"

이안의 질문에 잠시 눈을 끔뻑인 그녀가, 이내 목소리를 낮췄다.

"초행이신 것 같은데, 웬만하면 나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왜. 여기 모인 게 죄다 골목대장들이라?"

이안의 물음에 여급이 묘한 미소를 지은 여급이 덧붙였다.

"아직은 한가하지만, 한두 시간만 지나도 더 시끄러워질 거거든요. 그럼 아마도…."

그녀의 시선이 테사이아와 샬롯을 훑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좋네. 이런저런 얘길 많이 들을 수 있겠어. 그래서, 여긴 뭐가 맛있지?"

뭘 믿고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본 여급이, 이윽고 어깨를 으쓱이고는 내뱉었다.

"…무난한 건 콩과 고기가 들어간 스튜에 호밀빵, 계란이고요. 비싼 건 구운 고기죠, 뭐."

"그럼 둘 다 각각 2인분씩. 술도 한 잔씩 가져오고. 제일 독한 거로."

"네. 혹시, 묵고 가실 건 아니시죠?"

"맞는데?"

"...."

여급이 진심이냐는 눈빛으로 다시 한번 이안을 바라보았다.

아, 그래, 여기 놈들이 어지간히 사고를 치긴 하나 보군.

"제일 큰 방으로 하나 줘. 목욕도 할 수 있나?"

"…네. 끓는 물 한 냄비마다 돈을 받긴 하지만요."

"그럼 그것도 부탁하지."

이안이 은화를 몇 개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여급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무 많은데요."

"남는 건 너 가져."

"혹시, 가게 기물값을 미리 치르시려는 건 아니죠?"

"...."

눈치가 보통이 아닌 녀석인데.

이안의 시선에, 여급이 가볍게 관자놀이를 주무르고는 속삭였다.

"무기를 뽑으시는 건 안 돼요. 살인도 안 되고요. 바로 방위군을 부를 거예요."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너도 여기서 바깥소식을 자주 듣는 편이냐?"

"뭐,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얘긴진 모르지만요."

"여기서 며칠 묵을 거니까, 차근히 듣도록 하지."

이안이 은화를 하나 더 테이블에 얹어 여급 쪽으로 밀었다.

심사 복잡한 표정으로 은화를 쥔 여급이 한숨 쉬었다.

"받아도 될지 모르겠네요. 당장 오늘 밤 여기서 정말 묵으실 수 있으실지도 모르는데."

"있으니까, 받아. 가서 식사나 가져와라. 출출하니까."

"...."

잠시 이안을 바라본 여급이, 나도 모르겠다는 듯 홱 몸을 돌렸다.

샬롯이 놀랍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또 벌써 여급과 친해졌군."

"친해지긴. 매수한 거지."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전부터 느꼈는데, 이안은 종업원들한테 유독 친절해."

"고생이 많으니까."

피식댄 이안이 무심한 눈길로 장내를 돌아보았다. 주정뱅이. 무뢰배. 용병. 뭐라 불러도 비슷하게 통용되는 인간 말종들.

저딴 것들과 매일 부대끼며 산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종업원들에게 친절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여러 아르바이트로 점철된 과거를 가진 입장에선 더더욱.

이쪽을 힐끔대는 시선들을 차분히 가늠하던 이안의 앞으로, 곧 음식이 잔뜩 놓였다.

"이건 제가 드리는 거예요."

술잔을 하나 더 놓으며 속삭인 여급이 몸을 돌렸다.

테사이아를 돌아본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이렇게 가끔, 돌아오는 게 있기도 하고."

그는 산뜻하게 술로 입을 축이고는 포크를 들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눈앞의 이 따듯한 음식들과 식도를 후려치는 술 한 잔뿐이었다.

'정말 현지인 다 된 느낌인데. 이게 맛있게 느껴지다니.'

때때로 헛웃음을 지으며 음식에 몰두하는 이안과 달리, 샬롯의 안색은 조금씩 굳어지고 있었다.

저 건너편의 테이블에 모여 앉은 대 여섯이, 그들을 상대로 한 상스러운 음담패설을 떠들어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대상은 테사이아였다. 장님 요정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는 하나뿐이지 않겠냐는 식이었다.

굳이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아서, 일행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어올 정도였다.

'저 녀석들부터 시작해야겠군.'

일단 이건 다 먹고.

생각하며, 이안이 열심히 입을 놀리던 그때였다.

"…이안, 잠시 다녀와도 되겠느냐?"

포크를 내려놓은 샬롯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은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다녀올 생각인데."

"부디 내게 맡겨 줬으면 좋겠군."

"흠…."

잠시 침음한 이안이 빵을 스튜에 찍어 입에 넣으며 내뱉었다.

"기억하지? 무기는 뽑지 말고, 죽이지도 마라."

"부러뜨리는 건?"

"그건 뭐. 말만 할 수 있는 상태면 돼."

"명심하겠다. 네 식사가 방해 받지 않도록 신경 써 보지."

싱긋 미소 지은 샬롯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입 벌리고 있어라. 눈먼 피가 튀어들어 올 수도 있으니까."

"너한테 들은 말 중에 가장 멋진 말인걸."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몸을 돌린 샬롯이 태연한 걸음걸이로 장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한 놈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테이블에 내리찍었다.

#109화

꽈직!

테이블이 그대로 박살났다.

기절한 놈을 놔버린 샬롯이 그대로 옆의 또 다른 놈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벌떡 일어서던 같은 테이블의 대머리는 옆얼굴로 날아든 수인의 발뒤꿈치에 피와 부러진 이빨을 흩뿌리며 날아갔다.

그대로 몸을 돌린 샬롯은, 마지막 놈이 발작적으로 내뻗는 단검을 회전력이 실린 팔뚝으로 후려쳐 날려버렸다.

튕겨 나간 단검이 벽에 박혀 팅, 하는 짧은 떨림을 흘렸다.

고통보단 놀란 표정으로 덜렁대는 팔목을 바라보던 놈의 얼굴에, 새카만 주먹이 틀어박혔다.

콰당탕탕-!

요란하게 바닥을 구른 놈이 벽에 처박혀 축 늘어졌다. 모든 게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쉴 정도의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지켜보던 주점 내부의 건달들이 비로소 화들짝 어깨를 들썩였다.

"저런 미친 마족 년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을 토해내며 일어섰다.

아까 전 여급의 말이 무색하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고 작은 날붙이를 손에 든 채였다.

"…하."

샬롯은 무기를 꺼내 들지 않았다.

가르릉 대며 목을 풀듯 슬쩍 옆으로 꺾은 그녀가, 그대로 가장 가까운 테이블로 몸을 날렸다.

"죽여 버려!"

"뭣들 보고 있어? 담가!"

빠각! 콰장창-!

고함과 욕설,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순식간에 장내를 뒤덮었다.

"흠…."

왜 죄다 잔챙이 같지.

고기를 우물대며 그 광경을 눈에 담던 이안이, 이내 구석의 여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용병 하나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칼을 든 건 아니었고, 여급도 올 게 왔다는 듯한 표정일 뿐 그다지 겁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슬쩍 보니 주방 쪽에 무덤덤한 인상의 거한이 식칼을 든 채 우두커니 여급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래. 저자가 주인장이군.

어쨌든 여급에게 불똥이 튄다거나 방위군이 몰려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고개를 미미하게 주억거리며, 이안은 다시 소란이 한창인 쪽으로 눈을 돌렸다.

흔들리는 등잔 불빛 아래, 원초적인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콰직-!

샬롯은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날붙이에도 전혀 겁먹지 않고, 그저 전사의 본능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주먹, 발, 무릎을 포함해, 때로는 머리까지 무기처럼 사용했다.

그러면서도 테이블을 뒤집거나 예고 없이 물러나는 식으로 아예 포위당하지 않게 상황을 주도했다.

'도와줄 필요는… 없겠네.'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한 그녀의 표정과 눈빛을 안주 삼아, 이안이 술을 한 모금 들이킨 그때였다.

"이 새낀 뭔데 계속 처먹고 있어?"

"저 마족 년이랑 한패인 거 보고도 모르냐? 이 새끼들도 조져!"

후미에 있던 몇몇 놈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다가왔다.

번들대는 눈빛과 불빛을 흐릿하게 반사하는 날붙이들.

입맛을 다신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은 찰나였다.

쉬학- 뻐억-!

은발을 펄럭이며 튀어 나간 테사이아가 맨 앞 놈의 복부를 그대로 걷어찼다.

발을 박차 놈을 날려버리며 그 반발력으로 제동한 그녀는, 그대로 옆 놈의 목덜미를 낚아채 그대로 땅에 내리찍으며 착지했다.

"억…."

출렁이며 튀어 오른 머리칼이 뒤엣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낮은 자세 그대로 몸을 돌린 테사이아가 그대로 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빠각-!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건달이 앞으로 넘어졌다. 테사이아는 쓰러진 놈의 머리채를 붙잡고는 그대로 바닥에 한 번 더 내리찍었다.

순식간에 셋을 제압한 그녀가 손을 탁탁 털며 자리로 돌아왔다.

안대 아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먹어, 이안. 오는 애들은 내가 막아 줄 테니까."

…거참 든든하네.

실소를 흘리며 포크를 집어 든 이안이 덧붙였다.

"흥분하지 마라. 먹지도 말고."

"걱정 마. 그럴 만큼 힘을 써야될 놈들도 아니니까."

대답한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는 다른 용병들에게 와 보란 듯 턱을 까딱댔다.

이안과 샬롯에 비해 다소 전투력이 떨어질 뿐, 그녀도 엄연한 뱀파이어였다. 동시에 요정이기까지 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자리의 용병 전부를 상대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샬롯이 엄청난 속도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으니까.

뒤집히고 박살 난 테이블과 의자.

산산 조각난 접시와 술병들 사이, 어느새 열 명을 훌쩍 넘는 용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후우…."

난장판 한복판에 우두커니 선 샬롯이 숨을 골랐다.

검은 털과 갈기 곳곳이 피에 젖어 반짝였다. 눈가의 피를 눌러 닦는 손길에 묘한 후련함이 묻어났다.

"이런 시발…."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어느새 네다섯밖에 남지 않은 용병들이 주춤대며 탄식을 흘렸다.

처음의 흉흉한 전의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저 초조한 눈길로 샬롯과 옆쪽을 번갈아 힐끔댈 뿐.

스튜에 찍은 빵을 우물대던 이안의 시선이 그들이 힐끔대던 방향으로 돌아간 건 그때였다.

곧 그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그래… 이놈들이 전부일 리가 없지.'

이제는 놀란 표정으로 변한 여급 너머.

2층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발소리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일련의 용병 무리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게 뭔… 시벌…."

"저것들은 또 뭐야…?"

개판이 된 장내를 눈에 담은 그들이 하나둘씩 탄식을 흘렸다.

용병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한복판의 샬롯에게로 모였다.

그녀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어서 합류하라는 듯.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지려는 찰나, 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들 움직이지 마."

용병들 사이를 비집고 덩치 큰 사내가 걸어 나왔다. 중 무장을 하고 얼굴 곳곳에 흉터가 선명한,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북부인이었다.

"멍청한 놈들이, 시비 걸 상대를 잘못 골랐군…."

한숨 쉬듯 읊조린 그가 걸음을 옮겼다. 샬롯 쪽이 아니라 이안이 앉은 테이블 쪽으로.

누가 우두머리인지 단박에 알아 본 모양이었다.

이윽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선 그가, 자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빵을 우물대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통성명이나 합시다. 이놈들을 데리고 있는 트루드요."

"이안."

이안의 대답은 무성의했다.

트루드의 눈매가 꿈틀댔다.

하지만 허리춤의 손도끼를 뽑아 들지는 않았다. 부하들을 죄다 때려눕힌 예비 마족을 거느리고 있는 자가 평범할 리 없었으니까.

이 난장판을 앞에 두고도 식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를 신중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보아하니 내 부하 놈들 때문에 시작된 싸움 같은데, 무의미한 칼부림은 여기서 그만합시다."

"칼부림은 너희 부하들이 했지. 우리가 아니라."

"...."

트루드는 이안의 건너편에 앉은 은발의 장님과 심드렁하게 서 있는 수인을 다시 한번 번갈아 눈에 담았다.

비로소 그들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음을 깨달은 그가 다시 한번 탄식을 삼켰다.

이들이 무기를 든다면 자신들 모두 죽은 목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 것이다.

이윽고 그가 말을 이었다.

"보통 분들이 아니시란 건 충분히 알겠소. 하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요. 괜히 높으신 분들 귀에까지 얘기가 들어가면 피차 피곤해질 텐데, 일 크게 만들지 맙시다. 같이 칼 밥 먹고 사는 처지에, 대화로 해결하는 게 좋지 않겠소?"

"좋지. 대화. 나도 그러려고 온 거니까."

남은 빵 조각을 툭 내려놓으며, 이안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트루드의 눈을 빤히 마주 보며 그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 전에 사과부터 제대로 해."

"…그러지. 부하들의 무례는-"

"나 말고."

말을 자른 이안이 테사이아와 샬롯 쪽을 턱짓했다.

"네 부하들이 모욕한 당사자들에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

순간 트루드가 이를 악물었다.

양 볼에 턱 근육이 선명하게 꿈틀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섣불리 움직이지도, 뭐라 말을 내뱉지도 못했다.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이안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우묵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 그가 흥분하거나 분노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트루드는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자들은 정말 자신들의 숫자나 뒷배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다. 하긴. 애초에 이런 괴물 같은 자들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부터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노린 건가…? 설마, 우릴 접수하기라도 하려고?'

하필 이런 시기에.

아니, 오히려 이런 시기이기에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집혔지만, 이런 곳에서 목숨을 건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지금은 숙이고 들어간 뒤에, 나중을 기약하는 게 현실적이리라.

거기까지 생각하며 마른 침을 삼킨 트루드가, 이윽고 시선을 돌렸다.

샬롯과 테사이아를 번갈아 바라본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부하들의 무례를… 사과하겠소."

잠깐의 적막. 이윽고 짧게 가르릉 댄 샬롯이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움찔대는 용병들을 그대로 지나쳐 테사이아의 등 뒤에 멈춰 섰다.

훅 풍기는 피 냄새와 체취에 트루드가 한쪽 눈썹을 움찔댈 찰나.

"그래. 이제야 대화라는 걸 나눠 볼 수 있겠군."

건조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내뱉은 이안이, 남은 의자를 턱짓했다.

"앉아."

"...."

이제 용병단을 넘길 차례인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트루드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

샬롯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병들이 널브러진 동료를 위층으로 옮기고 엉망이 된 장내를 정리했다.

"…내가 듣기론, 가장 위기인 건 아겔 란이오. 영주들이 더 이상 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더군. 지금쯤이면 독립을 선언했어도 이상하지 않소."

트루드가 술술 말을 이었다.

이안이 원하는 게 변방 전쟁에 대한 정보뿐임을 알고 나선, 아는 이야기들을 죄다 늘어놓고 있었다.

"지금 다들 주목하는 건 메네르와 벨 론데요. 처음엔 연합하던 두 나라의 관계가 아예 틀어졌다고 들었소.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셈이지."

"흠. 확실히…."

이안은 술을 홀짝이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역시. 여기로 오길 잘했네.'

용병은 상인과 함께 외부의 소식에 가장 발 빠른 자들이었다.

돈 냄새는 빨리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전쟁은 용병들에게 단연 최고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상황에 따라 돈뿐만 아니라 작위까지 얻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변방의 전쟁은 트라벨가의 용병들에겐 군침이 도는 소식일 터였다.

여기선 방위군의 뒤나 닦아 주는 처지지만, 그쪽에선 아닐 테니까.

이안이 이들에게 변방의 소식을 듣기로 한 건 그래서였다.

물론, 이 인간 말종들을 상대하는 게 가장 쉽고 편하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여기도 그렇지만, 트라벨가 곳곳에서 용병단이 결성됐소. 아마 다들 머잖아 여길 떠날 거요."

"대공께서 서운해 하시겠군."

"그렇다고 우리가 언제까지 장군들이 던져주는 푼돈만 받아 먹으며 살 순 없잖소.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지. 사실… 난 댁들도 그래서 여길 찾아 온 건줄 알았소만."

"...?"

이안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트루드를 바라보았다. 트루드가 그의 내심을 살피듯 덧붙였다.

"용병들을 접수하러 오신 건 줄 알았단 얘기요."

이안의 입가에 조소가 스쳤다.

"저런 놈들은 너나 가져.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으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다."

트루드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그가 덧붙였다.

"내 뒤통수를 칠 궁리만 했을 거잖아?"

"…그럴리가. 나도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오."

잠시 숨을 멈췄던 트루드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이안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가 본 북부인 전사들은 크게 두 부류였다. 머릿속까지 근육인 전사와 그런 척만 하는 곰 같은 여우.

트루드는 어딜 봐도 후자였다.

이안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슬쩍 눈을 피한 트루드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무튼, 북부의 용병단이 변방에 합류하면 전쟁의 판도가 또 완전히 달라질 것이오. 검은 이리단이니 붉은 형제들이니 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이나 계곡의 여우나 복수의 대행자 같은 자들이 소문을 몰고 다니지만. 그땐 북부 출신들의 명성만 돌게 되겠지."

"복수의 대행자…?"

술잔을 입에 가져가던 이안이, 다시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약탈당하거나 폐허가 된 지역을 떠돌아다닌다는 자요. 도적이 된 용병들을 소탕하거나, 전쟁을 틈타 헛짓을 일삼는 귀족들 목을 따고 다닌다던데. 전부 사실인진 모르겠소. 영 믿기 어려운 얘기잖소."

어깨를 으쓱인 트루드가 용병 특유의 음험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돈도 안 받고 그런 위험한 일을 벌이고 다닐 이유가 없잖소?"

"글쎄…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닌 모양이지."

묘한 눈빛이 된 이안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읊조렸다.

트루드가 미간을 좁혔다.

"뭐, 아는 거라도 있으시오?"

"네 알 바 아니야. 그보다, 루 사드에 대해선 언급이 없군. 그쪽에 대해선 아는 게 없나?"

"거긴 워낙 조용한 동네니까. 국경 근처의 요새에 병사들이 모여있다고만…."

잠시 말을 멈춘 트루드가 묘한 눈으로 이안을 마주보았다.

"혹시, 루 사드의 소식이 제일 중요하셨던 거요?"

돈이 될 얘기인가 하는 눈빛.

하여간, 용병이란 것들은.

내심 피식한 이안이 넌지시 말했다.

"입 조심하고 다녀라."

그거면 충분했다. 호오, 하고 짧게 탄식하며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트루드가 이안을 다시 바라보았다.

"조용히 한 번 알아보겠소. 댁한테도 소식 알려 드리지."

"자세할 필요 없어. 난 전반적인 상황만 알면 되니까.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냐?"

"뭐가… 말이오?"

"우리가 네 부하들을 죄다 두들겨 패서 전력에 손실이 생겼을 텐데. 복수도…."

이안의 눈매가 옅은 호선을 그렸다.

"하고 싶을 테고."

"…그럴 리가."

침을 삼킨 것도 잠시, 트루드가 보란 듯 고개를 저었다.

"댁들 목숨을 노리다가 아예 다 망할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내 진짜 측근들은 거의 손실이 없소. 우린 2층에서 계획을 짜고 있었거든. 저 녀석들은 우리 뒤를 따르면서 빵가루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놈들이오."

이안을 설득하듯 구구절절 내뱉은 그가, 잠시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애초에 먼저 시비 걸고 칼까지 뽑았으면,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지."

"그래… 뭐, 그렇다니 다행이군."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트루드가 내심 안도하듯 어깨를 늘어뜨리는 사이,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말을 계속 믿을 수 있게, 아랫놈들 관리 잘 해. 누가 우릴 습격하면, 네 명령이겠거니 생각할 테니까."

"...!"

트루드의 어깨가 굳어졌다. 이윽고 그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걱정 마시오."

"말이 참 잘 통하는 친구로군. 좋아. 그럼 다음 얘기로 넘어가지."

이안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트루드는 교회의 정확한 위치는 물론, 트라벨가에서 가장 실력 좋은 공방의 위치 같은 이안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전부 알려줬다.

아쉽게도 주문 회로를 다루는 장인은 없었다. 주문 회로를 다룰 줄 아는 장인이나 마법사는 제국 직할령에만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교단에서의 일만 잘 마무리 지으면 되겠네.'

비로소 만족스럽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 앉은 이안이,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주점 주인과 여급이 그의 손짓에 테이블로 다가왔다.

"음…?"

고개를 갸웃하는 트루드를 돌아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돈 좀 꺼내 봐."

"돈은… 갑자기 왜…?"

"너희 부하들이 부순 기물값은 물어 내야지."

"아니… 기물은… 솔직히…."

"솔직히, 뭐?"

"…아니오."

체념한 듯 한숨 쉬며 품에서 돈 주머니를 꺼내던 트루드가, 문득 다시 이안을 곁눈질했다.

"혹시… 기사 출신이시오?"

이거, 그만큼 악독하단 얘기지?

피식한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그럴 리가."

#1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