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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66화

'일단 두 아이템의 마력 파장 중, 공통된 부분을 찾아야 해.'

눈을 감은 나는 천천히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두 아이템에서 흘러나오는 파장이 어지럽게 감각을 스쳐 갔다.

'이게...맞는 건가.'

복잡한 파장들.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지만 이전의 감각을 떠올리며 천천히 마력을 나누었다. 1의 마나를 0.1로. 그것을 다시 0.01로.

곧 수천 가닥으로 나눠진 마나의 촉수가 제각각의 신경을 품은 채 복잡한 파장을 더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한 신경 다발.

집중력을 끌어올려 그것들 하나하나를 미세하게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컨트롤의 목적은 파장이 맞는 신경 다발들끼리 교접시키는 것. 교접이 성공적일수록 아이템의 융합은 성공적으로 이뤄질 것이고. 이는 곧 등급의 상승을 의미한다.

'하나, 둘...'

훑듯이 파장을 탐색하던 마나가 조금씩 두 아이템의 공통된 부분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양은 극히 미약했다. 두 옵션을 융합하기엔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은 수치.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해 그것을 유지하던 와중.

지잉-

강렬한 위기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무슨 일...우욱."

다급히 방어구에 집어넣었던 마나를 회수하자 강한 구토감이 밀려왔다. 다행히도 지난번 같은 경우는 아닌지 시스템의 경고 메시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날뛰는 마나를 간신히 진정시킨 나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너저분한 공방의 모습이 보였다. 잘라낸 요르의 가죽과 마력 탄소가 널브러진 바닥. 그리고 검은 구두.

'구두?'

천천히 눈을 깜빡여 초점을 맞추었다.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흰색 가면의 사내. 무명이 조용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 여길 어떻...우욱."

몸이 멀쩡할 때도 버거운 상대였는데 지금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방패는 무명의 뒤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상태. 지난번보다 상황이 더 안 좋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으며 상황을 파악하던 그때. 무명의 입에서 거북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중요한 순간에 방해한 모양이군. 미안하게 되었어."

"...무슨 일이지?"

"볼일이 있어 찾아왔다."

"어차피 날 잡아 봐야 백색의 연금술사는 움직이지 않아. 포기하는 게 좋아."

최대한 침착히. 그리고 천천히. 무명이 눈치채지 못하게 책상 서랍에 손을 넣었다. 곧이어 단단한 금속의 질감이 느껴졌다.

'아니야...이건 안 돼.'

막 커넥션 벨의 버튼을 누르려던 나는 손가락을 거두었다. 지난번과 다르게 지금은 좁은 공방 안에서 둘만 대치한 상황.

만약 커넥션 벨을 누른다고 해도, 무명이 이를 눈치챈다면 유신애 팀장이 도착하기 전에 나를 죽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다른 타개책을 필사적으로 물색하던 그때,

"너와 대화를 하고 싶다."

무명의 입에서 의외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대화?"

"그렇다. 대화. 너는 정말로 형질 변환을 습득한 건가. 중요한 문제다. 답해주길 바란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까. 아니, 그 전에 이자와 말을 섞는 게 맞는 걸까?

판단이 서질 않아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무명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뢰하지 못하겠단 건가. 지난번 일이 있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만, 나는 진심이다. 맹세코 너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그럴 어떻게 믿지?"

"어떻게 해야 믿어줄 수 있나?"

"글쎄. 너는 위험하니 손가락이라도 자르...잠깐!"

쐐애액-

무명의 단검이 허공을 갈랐다.

당황한 내가 그를 제지했지만, 반 박자 늦은 탓에 칼날이 그의 검지를 절반 넘게 파고들었다.

투두두둑- 붉은 피가 공방의 낡은 바닥을 수놓았다.

"왜 멈추게 한 거지?"

무명이 무덤덤하게 질문을 던졌다. 황당함에 말문이 막혔다.

"...진짜 자를 생각이었나? 참고로 말해두겠는데. 우리 가게엔 유니크 등급 포션 따윈 없어. 잘리면 그걸로 끝이야."

"그걸 원한 거 아니었나?"

할 말이 없었다. 말 몇 마디 나누자고 손가락을 포기해?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다.

'왜 나한테는 이런 놈만 꼬이는 걸까....'

속으로 탄식을 내뱉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유틸리티 벨트에 보관해두었던 치유 가속 포션을 꺼내 건넸다.

"이거부터 써. 바닥에 피 다 튀잖아. 젠장, 이 포션 비싼 건데...."

"대금은 지불하겠다. 감사히 쓰도록 하지."

치이익- 포션을 흩뿌리자 곧 환부에 새하얀 연기가 피어났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무명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것도 네가 만든 제작품인가. 놀랍군."

"...아니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의 조사는 이미 끝내두었다. 내가 여기 온 건,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확신?"

"백색의 연금술사는 사실 네 녀석이라는 것. 전 세계를 떠돌며 연금술사들을 만나왔던 나다. 어중이떠중이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눈을 속일 생각은 하지 마라. 비밀은 지킨다. 진실을 이야기해 다오."

무명은 자신의 가설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가만히 그를 노려보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정확하네. 맞아. 네가 알고 있는 대로야."

"역시...!!! 그렇다면 지난번 나에게 투척했던 아이템도 형질변환을 이용해 제작했다는 말인가?"

"...그래."

무명의 가면이 나를 향해 움직임과 동시에 양손이 내 어깨를 짚었다.

"역시,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형질변환은 어디까지 익혔지? 네 경지를 알고 싶다."

"트롤의 피가 가진 열기와 포션이 가진 가속성을 증폭해 폭발력으로 바꾸는 것.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다. 대답이 되었나?"

"그렇다면. 아직 그 이상은 아니라는 건가..."

"그래. 네가 뭘 원하는진 몰라도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야."

"그랬군...그랬어. 그 정도였나."

무명의 목소리엔 강한 실망감이 묻어나왔다. 어깨를 늘어트린 그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난 뒤 고개를 숙였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형질변환을 깨달은 건 대단해도,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기엔 오랜 시간이 걸리겠군. 실례했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답변 고마웠다."

말을 끝마친 무명이 몸을 돌렸다. 묘하게 기분이 상해 팔짱을 낀 채로 미간을 찌푸리는데, 멈칫한 무명이 등을 돌린 채 말을 물어왔다.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연금술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지. 5년? 10년? 나이를 생각하면 최소한 7-8년은 되었겠군."

7-8년? 10년?

정상적인 루트를 밟았더라면 그쯤 되었겠지만.

"두 달이다."

"뭣?!"

나는 이제 갓 두 달 차에 접어든 참이다. 무명이 몸을 돌려 나에게 다가왔다. 가히 번개와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두 달...그게 사실인가? 모든 걸 걸고 맹세할 수 있나?"

"그래. 맹세하건대, 본격적으로 연금술을 시작한 건 고작 두 달이다. 뭐야, 왜 이래?"

쿠웅-

무명이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가면의 윗부분이 다 부서지도록 땅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쿵. 쿵. 낡은 나무 바닥이 애처로운 울음을 토했다.

"몰라봐서 미안하다! 네 힘을 빌리고 싶다. 허드렛일을 시켜도 좋고, 네 수족으로 부려도 좋다. 그러니 제발, 제발 부탁하는데. 나에게 네 힘을 빌려다오. 하라는 대로 전부 하겠다. 부탁한다."

갑작스레 바뀐 태도. 영문을 알 수 없었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서 있는 나를 향해 바닥에 납작 엎드린 무명이 쥐어짜듯 말했다.

"청부업자가 아닌 한 아이의 아비로서 부탁하겠다. 네 연구에 필요한 거라면 뭐든 구해다 주마. 나를 실험체로 써도 좋다. 그러니 제발..."

"아비라고?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다. 나에겐 네가 가진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간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 뭐 땜에 그러는지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자. 그 전에 일단 그 가면부터 벗는 게 어때?"

"...알겠다."

스윽-

무명이 새하얀 가면을 벗었다. 그 아래에 드러난 얼굴은.

"의외로 평범하네?"

40대 중반쯤 되었을까. 길 가다 보면 한 번쯤 마주칠 법한 아저씨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난번의 그 흉흉했던 무명이라곤 생각할 수 없다.

"실망했나. 특이한 얼굴이 아니어서."

"...조금은. 그보다 얘기나 들어보자.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러는 건지."

대답 대신 무명이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순간 단검이 튀어나올까 싶어 경계했지만, 의외로 안에서 나온 건 낡은 폴더폰이었다.

"취향이 좀 올드한 편이네. 요즘은 구하기도 힘들 텐데."

무명은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핸드폰의 앨범을 뒤적여 오래전에 찍은듯한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내 딸의 예전 사진이다. 올해로 열일곱 살 되었지."

대략 열 살쯤 되었을까. 사진 속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다. 무뚝뚝한 무명의 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애교 넘치는 표정.

무명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액정을 쓸었다.

"칠 년 전. 울산에 등장했던 역귀(疫鬼)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들어봤지. 그 당시 클랜 연합한테 퇴치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역귀. 십칠 년 전 등장했던 검은 뱀 이후로, 두 번째로 한국에 등장한 규격 외 등급의 몬스터.

검은 뱀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며, 이에 분노한 헌터들의 맹공으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되었던 몬스터.

그 당시의 상황이 너무나도 끔찍했기에, 구를 대로 구른 베테랑 헌터들조차 언급을 꺼린다는 참사의 주범.

주먹을 쥔 무명의 손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내 딸은...그때의 참사에서 살아남았다."

"...이런 이야기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울산에서 살아남은 민간인은 없다고 알고 있는데. 아니었나?"

"...외부엔 그렇게 알려졌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무명이 또다른 핸드폰을 꺼냈다. 이번엔 최신 기종이다.

"이게 지금 딸아이의 모습이다."

"..."

선명한 액정 속에는 온몸을 붕대로 뒤덮은 사람이 있었다. 긴 머리와 가녀린 체형으로 성별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는, 미이라와 같은 몰골의 소녀.

끔찍한 점은,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피부였다. 마치 나무껍질처럼 쩍쩍 갈라진 피부에서 배어 나온 진물이 붕대를 누렇게 물들이고 있었다.

멍하니 사진을 바라보고 있자 무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귀가 나타난 그 날. 당시 C급 헌터였던 나는 소속 되어있던 클랜의 지원요청을 받아 해외로 출국해 있던 상황이었다."

"...자책했겠군."

"그래. 그보다 더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게 뭔지 아나?"

"들어주지."

투두두둑- 무명의 손바닥에서 떨어지는 핏줄기의 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네가 들은 대로, 살아남은 민간인은 없다. '공식적'으론."

"비공식적으론 있다는 얘기...잠깐. 그렇다는 건, 설마."

"그래. 정부와 협회. 그리고 당시 그곳에 있던 헌터들은 생존자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다. 역귀는 각종 디버프와 불치병을 옮기는 몬스터라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면, 네 딸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현재 울산에서 믿을 만한 지인과 함께 지내는 중이다. 그 이상은 말해줄 수 없다."

"...울산이라고?"

역귀가 퇴치된 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울산은 유령도시나 마찬가진 상황일 텐데. 병까지 얻은 몸으로 그런 곳에서 지내야 한다니.

"협회의 적절한 조치만 있었어도, 딸아이는 지금처럼 지내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무명의 한 마디에 담긴 건조함이 가슴을 푹 찔렀다.

"그렇기에, 그날부로 나 또한 이름과 신분을 버렸다. 아비로서 그런 몰골이 된 딸아이를 두고, 밝은 세상에서 떳떳이 살아갈 순 없었기 때문이다."

무명의 눈에 핏기가 내비쳤다. 실핏줄이 터진 것이다. 몇 차례 이를 갈던 무명이 잠시 심호흡한 뒤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당장이라도 그런 결정을 내린 협회 놈들을 다 죽이고 싶지만...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딸아이를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선 네가 체득한 형질변환이 필요하다. 그것도 사람의 신체에 적용할 수 있을 만큼 높은 경지의 형질변환이."

이제야 무명이 나에게 무릎 꿇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은 건 내 대답뿐. 한 딸아이의 아비는 말없이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무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당신도 날 도와줘야겠어."

"도움? 무슨 도움이 필요하지? 뭐든 원하는 걸 말해라."

곧바로 반색하며 고개를 든 무명이 뚫어져라, 나를 바라본다.

"그...좀 부담스러운데. 그렇게 안 쳐다보면 안 되나."

"나는 상관없다."

"아니, 내가 불편해서 그래. 본론에 들어가기 전, 미리 한 가지 말해두겠는데."

"새겨듣겠다."

"일단,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단검은 집어넣지. 일단 이건 잠깐 압수."

필요하다면 손가락이 아니라 손목도 자를 기세인 무명의 단검을 빼앗은 나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일단,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날 끌고 가려 했던 당신을 무턱대고 믿을 수 없어."

"...그렇다면 네 신뢰를 얻기 위해선 내가 어떤 행동을 보여야 하지."

"신뢰까진 필요 없어. 우린 그저 비즈니스적인 관계가 되는 거야."

"...?"

무명이 고개를 들어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막 주름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그의 눈가에선 수없이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계약을 맺도록 하지. 내가 당신의 딸을 고칠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때까지?"

"당신은 전심전력으로 날 도와주는 것. 어때. 수락하겠나?"

"수락하겠다."

무명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손을 맞잡던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래, 무명이라면 충분하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으면 곧바로 실행에 들어가야 하는 법. 결의에 찬 눈빛이 된 그를 향해 슬그머니 제안을 건넸다.

"그럼, 가장 먼저 부탁할 게 있는데 말이야."

"말해라."

"내 수행을 좀 도와줘야겠어."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67화

"...이론서가 필요한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다 주마."

난처한 얼굴이 된 무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거나 그는 헌터 출신의 청부업자. 승현의 의도에 관해 알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무명을 향해 승현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 게 아니야. 방법은 간단해 아저씨. 아, 아저씨라 불러도 되려나?"

"호칭 따윈 뭐가 되었건 상관없다. 좋을 대로 불러라."

"좋아. 아저씨가 해줘야 할 일은 말이지...내 연습에 협조해 주는 거야."

"연습?"

"뭐, 아저씨한텐 어려운 방법은 아닐 거야."

승현의 목적은 간단했다. 외부로 방출된 마력의 제어 능력을 기르는 것.

이번 장비 제조에 꼭 필요한 능력이다.

'운이 좋았어.'

본래라면 장비가 파손될 위험성을 감수해 가며 홀로 연습을 강행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때마침 무명이 나타나 주었다.

정확한 등급은 측정할 수 없어도, C급 헌터 여럿을 손쉽게 제압한 걸 보니 무명은 최소 B등급의 헌터와 맞먹는 실력자.

연습 상대로는 오히려 과한 감이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면 말이지..."

방법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에포나와의 일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각자의 마력을 이용해 컨트롤 능력을 단련하는 방식이다.

승현의 설명이 끝나자, 무명이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단순하지만 제법 쓸만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스킬북과 아이템. 그리고 특성에만 의존해 마나 조작 능력을 키우는 많은 헌터들이 간과하는 부분이지만, 마나를 다루는 감각을 단련하는 덴 이만한 게 없다.

"고전적이지만 확실하군. 사부와 자주 했던 방식이다."

"아저씨, 사부가 있었어?"

"별 볼 일 없는 영감이니 알 필욘 없다. 아무튼, 시작하지."

무명이 눈을 감았다. 곧이어 승현의 마나가 그의 개방된 마나 로드를 타고 천천히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 막아?"

"그럴 필요 없다. 오히려 이렇게 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승현은 무명의 의도를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마력을 침투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마나 로드를 완전히 개방했다는 건, 말 그대로 샌드백이 되어주겠단 뜻이다.

보통 담력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이기에 승현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얕잡아봤다 이거네.'

천천히 마나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곧, 무명의 입이 열렸다.

"이 정도면 되겠군. 시작하지."

여유로운 목소리. 마력 방출로 인해 비 오듯 땀을 흘리는 승현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곧이어 무명의 몸속으로 들어온 마나가 가닥가닥 나뉘기 시작했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넷에서 여덟으로.

서서히 가늘어지는 마력의 실을 관조하던 무명이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제법이군.'

솔직히 말하자면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고작 두 달 된 애송이가 이 정도로 섬세하게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재능의 영역이니까.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기서 더 나눠진다고?'

무명은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경악성을 간신히 삼켰다.

순식간에 셀 수 없을 만큼 분할된 마력 다발이 무명의 심장을 향해 스멀스멀 기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두 달이라고 하지 않았나.'

압도적인 재능.

마나의 총량은 말할 것도 없이 무명의 압승이다.

하지만, 저 정도로 섬세하게 마나를 다루는 건 온 정신을 집중해야 가능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장담하기 어려웠다.

'사부라면 가능할까.'

보면 볼수록 놀라운 재능. 어쩌면 사부와 필적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연금술사가 된 지 두 달 만에 형질변환을 익혔다는 게 거짓이 아니었어. 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승현을 보며 연신 경악하던 무명이 재빨리 정신을 다잡았다.

어쨌거나 이대로 두었다간 코어에 손상을 입어 영구적인 장애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잡념을 털어내며 천천히 자신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쾅-

그와 동시에, 승현의 몸이 작게 진동했다. 무명이 일으킨 반탄력이 순식간에 그의 마력을 튕겨낸 것이다.

무명의 코어를 향해 움직이던 마나가 대번에 회수되었고, 그 여파로 인해 승현의 입가를 타고 작은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솔직히 감탄했다."

진심을 담아 칭찬을 건넸다. 그럼에도 승현은 불만족스러운 듯, 인상을 찡그릴 뿐이었다.

"한 번 더 해. 이 정도론 부족해."

"아직 네 능력으론 하루에 두 번은 무리다."

"아니야. 다시 해."

고집을 부린 승현이 다시금 무명과 손을 맞잡았다.

콰앙-

물론, 결과는 똑같았다. 이번엔 승현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다시."

승현은 또다시 무명에게 도전했다. 똑같은 상황이 밤새도록 이어졌고.

그렇게, 3주의 시간이 흘렀다.

* * *

"귀찮아. 이런 건 내 체질이 아닌데...."

유신애가 연신 투덜거리며 저 멀리 보이는 잡화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근 한 달 가까이 전투다운 전투를 치르지 못했더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어휴..."

남편이자 클랜마스터인 오신우의 부탁을 못 이기고 수락한 거지만 그녀는 영 이 상황이 못마땅하다.

"이럴 바에야 균열에 들어가 몬스터들과 박 터지게 싸우는 편이 훨씬 좋은데 말이지."

승현이 거주하는 충청도의 시골 마을은 그녀가 지내기엔 너무나도 평화롭다.

유신애가 지금의 생활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은 단 하나.

언제 찾아올지 모를 무명과의 대결을 향한 기대감 덕분이다. 하지만,

"그 자식은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청부업자면 청부업자답게 슬슬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날 이후로 어언 삼 주가 지났다.

그나마 변한 건 승현이 직원을 하나 더 뽑았다는 것 정도로, 그 외의 특이 사항은 없었다.

"빨리 한 번 붙어보고 싶은데. 커넥션 벨도 조용하고...직업정신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오신우가 들었더라면 기함할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린 유신애가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곧 한 사내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맞이했다.

그간 이곳에 들락거리며 몇 번이나 보았던 신입 직원이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아직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상대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특이점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뭐 저렇게 평범하게 생겼어?'

잠깐이라도 고개를 돌리면 금방 얼굴을 잊어버릴 것 같은 사내를 향해 유신애가 빙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어머, 안녕하세요. 한승현 사장님은 외출 중인가요?"

"사장님께선 물품 정리를 위해 공방에 계십니다."

"아아, 오늘은 그냥 안부 겸 들렀어요. 잠시 구경 좀 해도 되죠?"

"편한 대로 하십시오. 고객님."

유신애가 흥미로운 눈으로 가게를 훑었다.

혹시라도 백색의 연금술사가 제작한 물품이 입고되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나온 행동이다.

'역시, 오늘도 별다른 건 없네.'

늘 보았던 것처럼 선반을 가득 메운 건 아무 데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포션, 그리고 잡화류들.

그녀의 눈을 잡아끌 만한 아이템은 눈에 띄지 않았다.

흥미를 잃은 유신애가 이번엔 가게를 지키고 있는 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그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는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은은히 느껴지는 각성자의 기운. 시간도 때울 겸, 무료해진 유신애가 사내를 보며 머릿속으로 작은 분석을 시작했다.

'일반인은 아니고...헌터 출신인가. 연금술사들이 데리고 다니는 가디언인가.

아냐. 가디언이라기엔 약해. C급...이라기엔 좀 부족한 것 같고. D급? 퇴역 헌터인 것 같기도 하고.'

왜소한 체구를 보니 근력을 사용하는 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특수 능력을 보유한 자일까?

한동안 그를 분석하던 유신애가 곧 흥미를 잃어버리곤 고개를 돌려버렸다.

'에이, 재미없어.'

은근히 흘려보낸 그녀의 기세에도 반응하지 않는 걸 보니 감각 또한 매우 둔한 것 같다.

일단, 경호 목적으로 배치된 자는 아니란 뜻이다.

'뭐, 어차피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

나는 2구역을 클리어할 아이템이 제작될 때까지만 쟤의 안전을 보장해주면 되는 거니까. 그 뒤는 진성이가 알아서 할 거고.'

슬슬 백색의 연금술사와 오신우가 약속한 기한이 다가오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3일 정도 남았으려나. 그 이후엔 이 지긋지긋한 시골 마을도 안녕이다.

일류 청부업자인 무명과 만나지 못한 건 조금 섭섭해도, 어차피 클랜에 복귀하면 매일같이 전투의 연장이다.

매일 밤 검을 닦으며 욕구불만에 몸서리치지 않아도 된단 뜻이다.

"그럼, 별일 없는 것 같으니 저는 이만...어라?"

그렇기에 승현에게 별일 없음을 확인한 유신애가 막 돌아서려는 찰나.

"안녕하십니까. 유신애 팀장님. 안 그래도 찾아뵈려 했습니다."

막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승현과 마주친 유신애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매번 방문할 때마다 승현의 분위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뭘까...'

물론 박진성처럼 다른 이의 마력을 탐지할 수 있는 건 아니어도, 오랜 시간 경험을 쌓아온 그녀의 감각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를 확신한 유신애가 밝게 웃으며 허리춤에 찬 쌍검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뭔가 발전이 있었던 거 같은데. 오늘은 누나랑 붙어보는 게 어때?"

"...사양하겠습니다."

"에이, 쪼잔하게 그러지 말고. 가볍게 한 판...음?"

지잉-

장난스레 막 쌍검을 뽑아 들려던 찰나. 유신애는 목덜미에서 서늘한 감촉을 느꼈다.

짧지만 강렬한 적의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까의 그 사내가 보였다.

'착각인가.'

기대와는 무색하게 사내는 여전히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다. 머쓱해진 유신애가 머리를 긁적였다. 하마터면 검을 뽑아 휘두를 뻔했기 때문이다.

'나도 참.'

이게 다 한 달 내내 빈둥대며 몸이 굳었기 때문이다.

클랜으로 돌아가자마자 오신우를 호출해 밤새 검을 휘두르리라 다짐한 그녀가 다시금 승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이 누나한테 할 말이 뭐야. 얘기해 봐."

"으음. 정확히는 오신우 클랜장님께 먼저 말씀드려야 하는 거지만 상관없겠죠."

"...?"

"지난번에 베타 님께 의뢰하셨던 방어구의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마침 오늘 아침에 저한테 맡기고 가셨던 참입니다."

"정말?"

유신애가 눈을 크게 떴다. 매일같이 툴툴거리기는 해도 어쨌거나 그녀는 제피로스를 대표하는 팀장급 헌터.

지금까지 강렬한 냉기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하던 2구역을 해결할 실마리가 나타났다는데,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어디, 보여줘 봐. 빨리!"

조금 흥분한 그녀가 승현을 재촉했다.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승현이 공방에서 커다란 쇼핑백을 하나 들고나왔다.

그것을 열어본 유신애가 조심스레 내용물을 만져보았다. 탄탄한 질감이 느껴졌다.

"샘플입니다. 확인해 보시죠. 아마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광택이 없는 까만 코트. 원단을 만져보니 유틸리티 베스트와 같은, 마력 탄소 섬유가 사용된 것이 분명했다.

한데, 그 위로 느껴지는 묘한 차이점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뭐가 이렇게 단단해?'

물론 원단의 단단함이 아니다. 일반적인 것과 다르게, 청아한 마력이 코트의 겉면을 빼곡히 감싸고 있었다.

오로지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각성자만이 느낄 수 있는 두께감. 이를 확인한 유신애가 이번에는 안감을 펼쳐보았다.

"오..."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명품 모피 못지않게 부드러운 잿빛 털이 보였다.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은은한 온기가 느껴진다. 게다가 이렇게나 가벼운 무게라니.

이런 쪽으론 보는 눈이 없는 그녀라도, 단박에 이 코트가 보통 물건이 아닌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 외형이 어찌 되었건 간에 가장 중요한 건 제작한 아이템의 옵션이다.

품속에서 최신형 디텍터를 꺼낸 유신애가 곧바로 그것을 착용했다. 그리고.

"어...?"

그녀의 날카롭게 빛나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68화

"여보, 나 왔어!"

유신애가 커다란 외침과 함께 집무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오신우가 황급히 모니터를 덮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한승현 사장님은? 설마 혼자만 올라온 건 아니겠지?"

안 그래도 얼마 전 승현이 습격당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물론 그 이후로는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혼자 두고 오는 건 안 될 일이다.

가만히 그의 반응을 살피던 유신애가 눈썹을 찡그렸다.

"...나보다 승현이를 먼저 찾는다 이거지? 뭐, 베타 님이랑 승현이랑 같이 올라왔어.

지금은 둘 다 3층 숙소에 있고. 해야 할 게 있으니 오늘은 찾지 말라던데?"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경호는 붙여놔 둬야겠네."

오신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피로스의 사옥에 머무는 거라면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으리라.

"그럼 내가 부탁드렸던 물건은 어떻게 됐어? 제작은 끝난 거야?"

"그것도 내일 한꺼번에 가져올 거래. 총 열두 벌. 맞지? 오기 전에 수량도 다 체크했고, 옵션도 전부 확인했어."

"그래서, 어때? 옵션은? 등급은? 당신이 보기엔 2구역을 공략하기에 충분한 것 같아?"

"쯧쯧. 미리 말하면 재미없지."

"..."

유신애가 혀를 차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얄미운 모습에 오신우는 순간 그녀를 다그칠 뻔했으나.

'참아야지...'

때마침 허리춤의 쌍검이 눈에 들어왔기에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한 오신우가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내일 몇 시쯤 오신다는데?"

"정오쯤 올 거래. 아 참, 그리고 전해줄 말이 있는데."

"전해줄 말?"

"가능하면 내일 우리 클랜의 팀장급 헌터를 전부 소집해 주고, 오늘은 목 씻고 기다리라던데?"

"...?"

목은 왜?

뜬금없는 이야기에 오신우의 사고가 순간적으로 정지되었다.

그러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유신애가 말없이 그것을 들이밀었다.

"첫 번째는 승현이가 당신에게 전해달란 얘기고, 두 번째는 내가 당신한테 할 말이야."

"이게 뭔...헙."

찬찬히 액정을 뜯어보던 오신우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 [25분 전] 유부 횐님들... 지방으로 출장 갔던 와이프가 조만간 돌아온답니다.....^^

└위로추

└자유 끝이라니..힘내십시오...

└나는 오늘 와이프 친정갔는데ㅋㅋㅋ개꿀! 치킨 시켜 먹어야지

└못된 새끼ㅋㅋㅋㅋ 나는 소주 세 박스 사놨음

"헌터넷에 익명으로 쓰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

"아이디 옆에 제피로스 엠블렘은 좀 떼고 쓰지."

"..."

"오늘 밤, 퇴근하자마자 연무장으로 와. 째면 뒈진다."

"..."

"대답."

"...알겠어."

홍아와 애아. 시퍼렇게 빛나는 두 자루의 쌍검을 본 오신우의 고개가 바닥을 향해 푹 떨궈졌다.

* * *

"알지? 연습한 대로만 해라."

"접수 완료. 다과류 준비 요망."

"...너는 온종일 먹을 생각뿐이냐."

"불응 시 돌발 행동 시행 확률 증가."

지난 한 달간, 무명과의 수련을 통해 나 또한 제법. 아니, 꽤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그와 더불어 감시자의 소화가 끝난 흉내쟁이 또한 상당히 스펙이 상승했지만. 문제는 놈이 한층 더 삐딱해졌다는 거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아쉬운 쪽이었기에, 잔뜩 콧대를 세운 흉내쟁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만 넘어간다...진짜."

매일같이 말 그대로 피를 토하는 수련 끝에, 나는 드디어 마력 탄소 섬유 위로 마나를 코팅하는 데에 성공했다. 무명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룩할 수 없었던 성과다.

"그래도 나름 엠블럼은 잘 뽑힌 것 같단 말이지."

그와 더불어, 예전에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문양을 조금 비틀어 제작한 엠블럼까지 박아넣었다.

뿌듯한 결과물에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제피로스의 본관에 발을 들여놓았다.

"어?"

"어라?"

"저분은...!!!"

우리를. 정확히는 흉내쟁이를 알아본 헌터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무표정한 흉내쟁이의 어깨가 한껏 추켜세워져 있었다.

'좋아하는구만.'

최근에 안 사실인데, 흉내쟁이는 은근히. 아니, 대놓고 관심받길 즐기는 것 같다.

다행히도 외부에선 별다른 짓거리를 하지 않지만, 지금처럼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제피로스 클랜 내에선 자신의 위상을 뽐내고 다니는 것이다.

'저...걸음걸이 봐. 팔자걸음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휘적대며 돌아다니는 흉내쟁이가 조금 창피했기에 슬쩍 거리를 벌린 나는, 어제 유신애 팀장에게 들었던 대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곧, 문이 열리며 오신우 클랜장의 집무실이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로...헉. 베타 님?"

앞을 지키고 있던 헌터가 흉내쟁이를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어깨 대신 콧대가 올라간다. 자신을 알아봐 준 게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아, 안으로 드시지요! 안 그래도 클랜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을 열어준 헌터에게 고개를 숙인 후 집무실로 들어가니, 책상에 앉아 고개를 숙인 오신우 클랜장이 보였다.

어쩐지 몰골이 초췌하다. 혼이 빠진 듯 앉아있던 그가 우리를 보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십니까. 한승현 사장님. 그리고 베타 님. 약속한 시각에 맞추어 오셨군요."

"안녕하십니까."

"..."

인사 대신 흉내쟁이는 곧바로 테이블에 앉아 다과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오신우 또한 예상한 행동인 듯, 그에 관해선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말씀하신 대로 1팀부터 4팀까지. 제피로스의 팀장급 헌터들을 전부 소집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전에, 이것부터 받아주시죠."

막 챙겨온 코트들을 건네려는데, 오신우의 눈가에 새겨진 시퍼런 멍 자국이 보였다.

내 시선을 의식한 듯 오신우가 말꼬리를 흐렸다.

"하하, 어쩌다 보니...눈치채셨습니까?"

유신애 팀장 짓이구나. 어쩐지. 어제 이곳에 오기 전 헌터넷을 보다 이를 갈더라니. 기어코 한바탕 한 모양이다.

'쯧쯧...그러게 좀 조심하지. 누가 봐도 오신우 당신이 쓴 글이더만.'

눈가를 문지르는 오신우를 안쓰럽게 바라보자 반쯤 풀이 죽은 목소리로 오신우가 중얼거렸다.

"한승현 사장님은 아직 미혼이시죠. 부럽습니다. 저는 차에서 잤더니 아직도 목이 아픕니다."

"뭐, 저야 잘 모르지만...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 아닙니까. 힘내십시오."

"...물은 아니고 다른 걸 베더군요.

이런, 손님을 모셔두고 내가 무슨 소리를...그보다 이게 전부 동일한 아이템입니까?"

"그렇습니다. 베타님께서 클랜장님과 약속했던 대로, 총 열 두벌. 제작을 완료해 주셨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달이었다.

서리감옥 부족을 만나 요르에 대한 단서를 받고, 만년빙산에 올라 에포나를 만나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요르의 가죽을 얻어내고.

그뿐이랴. 남은 삼 주간 계속되었던 무명과의 수련은 내 진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힘든 하루하루였지만 성과 하나는 확실했다.

막 삼 주가 되어갈 무렵, 나는 마력 탄소 섬유에 내가 가진 마나를 완벽히 코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뿐이랴. 무명의 도움을 받아 [여왕의 실타래]를 이용한 새로운 전투 기술까지 개발하는 데에 성공했다.

상태창에 등록된 정식 스킬은 아니지만, 그 무명조차 순간적으로 당황할 정도였으니. 성능 하나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소득이 있었던 지난 한 달. 이제는 마지막 행동을 취해야 할 시점이다.

"옵션은 다른 팀장님들께서 전부 도착하셨을 때 공개하도록 하죠. 어떠십니까? 일단 냉기 저항 능력은 확실히 부여되었습니다."

"뭐, 저야 좋습니다. 일단, 이건 작지만 제 성의 표시입니다. 받아주십시오."

띠링-

오신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 회원님의 계좌에 [350,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삼억 오천만 원. 아이템이 가진 가치에 비하면 크다고 할 수 없는 금액이지만, 이건 거래의 대가가 아닌 말 그대로 '성의 표시'다.

즉, 오신우의 개인적인 호의란 뜻이다.

"감사합니다. 클랜장님."

"아닙니다. 속성 저항이 붙은 아이템의 값어치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금액이라 죄송스럽습니다.

그보다 여쭤보고 싶은 게 한 가지 더 있는데...혹시 지난번에 베타님께 감정을 의뢰했던 아이템, 기억나십니까?"

기억난다. 커넥션 벨과 함께 받았던 잿빛의 돌덩이.

[이해와 분석]의 레벨이 올라갔음을 인지함과 동시에 곧바로 확인해 보았지만.

- 현재 사용자의 능력으론 아이템을 분석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아직 분석 중이십니다."

"그렇습니까. 하기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연금술사들에게도 의뢰해 보았지만...전부 고개를 젓더군요.

그냥 쓸모가 없는 아이템이라기엔 제법 마력이 느껴졌는데. 뭐, 부담 갖지 마시고 천천히 분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확실히 안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기에, 언젠가는 꼭 분석해내기로 마음먹은 나는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에 관한 겁니다만."

"아아, 부탁 말씀이십니까?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제 선에서 가능한 거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행여라도 말을 바꾸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내 안목이 정확했는지, 오신우 클랜장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확신을 가진 나는, 그를 향해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생각해 두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려던 찰나.

"나 왔어!"

"안녕하십니까. 한승현 사장님. 베타 님."

"저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때마침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박진성과 유신애. 그리고 내가 모르는 두 명의 남녀다.

내 또래로 보이는 호쾌한 인상의 거한 한 명과 작은 체구의 어려 보이는 여성 한 명. 둘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보아하니 저 사람들이 2팀장과 4팀장인 모양인데.'

나와 눈이 마주친 그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2팀장 강철규입니다. 반갑습니다."

"4팀장 유선아예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한승현입니다."

등에 커다란 방패를 멘 강철규는 마치 하얀 춘식이 같았다. 그리고 유선아는...뭔가 낯이 익은데.

"선아는 내 친동생이야. 참고로 이 누나랑은 열 살 차이가 나지."

유신애 팀장의 동생이었구나. 어쩐지.

생긴 건 비슷한데 체구며 풍기는 분위기 하며. 완전히 딴판이다.

나에게 인사를 건넨 두 팀장이 흉내쟁이에게 다가갔지만.

"역시, 듣던 대로 과묵하시군요."

"..."

가볍게 무시당했다.

'이럴 땐 좀 받아주지...사람 민망하게.'

괜히 머쓱해진 나는 서둘러 제작해 온 [만년빙산의 피풍의]를 꺼내 펼쳐 보였다.

아이템을 찬찬히 뜯어보던 헌터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인 건 강철규였다.

"오...디자인 하나는 딱 제 취향입니다. 역시, 이런 제복 스타일의 방어구는 남자의 로망이죠."

그는 자신의 커다란 몸에 이리저리 코트를 대 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신우 또한 정신없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고, 유선아와 박진성 또한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아이템의 옵션을 확인해 주시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헌터들이 품속에서 디텍터를 꺼내 착용했다.

아마 그들의 눈에는, 아이템의 옵션이 이런 식으로 보일 것이다.

[만년빙산의 피풍의]

등급 : [레어]

옵션 : 방어력+20 체력+10 [냉기 저항]

[냉기 저항]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냉기 속성 디버프의 효과를 [53%] 줄여줍니다.

"이건..."

"저항 등급이라니. 잘 해봐야 방어 등급일 줄 알았는데. 역시 베타 님은 대단하십니다."

"하하, 저는 디자인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저도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미리 언질을 받았던 유신애 팀장을 제외한 모두가 감탄하며 코트를 만지작거렸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니다. 여기엔 디텍터로 확인할 수 없는, 숨겨진 옵션이 있으니까.

[체온 유지]

착용자의 체온을 항상 일정 수준으로 유지합니다. 외부 기후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해와 분석]으로 확인한 아이템의 등급은 [레어++]. 최상위권 레어 등급의 아이템이란 뜻이다.

모두가 숨겨진 옵션, [체온 유지] 덕분이다. 속성 저항으로 냉기 디버프를 막아낸다 해도, 물리적인 추위까지 차단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냉기 저항]과 [체온 유지]는 절대적인 궁합을 자랑한다. 적어도 냉기 디버프에 관해선 만큼은 유니크 부럽지 않은 옵션이란 뜻이다.

이를 모두에게 설명해 주자, 박진성 팀장과 유신애 팀장을 제외하곤 모두가 믿을 수 없단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그런 옵션을 부여하셨습니까?"

그거야 요르의 가죽이 가진 성질을 증폭시켜 준 것뿐. 아예 없는 걸 만들어 낸 건 아니다.

물론 여기에 다다르게 된 건 매일 밤 반복되는 개고생 덕분이었지만.

"뭐, 베타님만이 아시겠죠. 아마 이 정도면 충분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선에선 뭐든 해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좋겠지만...내가 지금부터 꺼낼 제안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사실은, 이를 위해 다른 팀장님들을 이 자리에 모셔달라 부탁드린 겁니다."

"...?"

모두가 행동을 멈춘 채 이쪽을 바라보았다. 대답 대신, 나는 흉내쟁이가 앉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이번엔 제가 아닌, 베타 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실 겁니다."

드르륵-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참 입안에 다과를 집어넣던 흉내쟁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난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흉내쟁이를 바라보았다.

'잘해야 할 텐데.'

어제 숙소에 틀어박힌 채 온종일 연습한 성과를 보일 시간이 다가왔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69화

"말하겠다."

모두의 앞으로 베타가 천천히 다가왔다. 강철규에게 밀리지 않는 위압적인 체구.

그에 관해 모르는 상태였다면, 연금술사가 아닌 순수 근력계 헌터로 착각할 만한 체격이었다.

저도 모르게 경쟁심이 발동한 강철규가 베타를 똑바로 응시했다.

"제안이라는 게 혹시 어떤 건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클랜장인 오신우가 있음에도 먼저 나선 건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지만,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베타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만만치 않다.'

지금까지 덩치만 큰 연금술사라 생각했건만. 상당한 힘이 느껴졌다.

베타의 기세에 반응한 유신애의 손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쌍검을 향해 뻗어있었고, 강철규와 유선아 역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요구 조건은 하나다."

"말씀하십시오."

이 자리의 최고 결정권자, 오신우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을 둘러보며 베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피로스가 6급 균열을 공략 중이라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공공연한 사실이죠."

"공략이 끝나면."

"...?"

"그곳에서 수확한 모든 전리품의 우선 구매권을 원한다."

"뭣?"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모두의 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발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는 완벽히 제피로스를 무시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균열에서 획득한 전리품은 전부 클랜에 귀속된다.

그중 희소성이 있는 물품은 내부의 협의를 통해 기여도에 따라 공략에 참여한 클랜원들에게 배분되며, 외부에 유통되는 건 분배를 거친 후 남은 전리품들이다.

그런데 비용을 지불한다고는 해도 전리품의 구매 우선권을 내놓으라니.

이 순간. 오신우의 집무실에 모인 헌터들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날강도.'

분명 베타가 제작한 만년빙산의 피풍의는 2구역 공략을 해결할 핵심적인 키가 되는 아이템이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우선권을 넘기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저도요. 이것 때문에 팀장들을 불러 모으신 건가요."

"우선권을 넘기면 균열의 공략 의미 자체가 사라지는 거야. 당신. 잘 생각해. 이건 집사람이 아닌 1팀장으로서 하는 충고야."

강철규를 시작으로 모두가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이를 본 오신우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당연히 거절해야 하건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 모두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베타의 태도는 너무나도 태연했기 때문이다.

'아쉬움 하나 없는 표정...제피로스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이건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생각이 길어져 봐야 답은 나오지 않기에 별수 없이 오신우는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쳤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선권을 드리기엔 조금 부족합니다."

"그런가."

건조한 대답. 도무지 저 무표정한 얼굴에 어떤 생각이 숨겨진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마음을 다잡은 오신우가 막 거절의 의사를 표명하려는 순간.

"시제품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것. 재미 삼아 만들어 본 시제품이었다."

베타가 테이블 위에 놓인 코트를 가리켰다. 이곳에 모인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게 시제품이라고? 재미로 만들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속성 저항 옵션이 붙은 아이템을 장난삼아 만들 수 있는 거라면, 애초에 희소성 자체가 매겨지지 않았을 거다.

한데, 베타의 말이라면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는 고작 한 달만에 모두가 만족할 만한 장비를 제작해 오지 않았던가.

분명한 건 베타는 국내 그 어디를 뒤져봐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인재다.

'역시.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하면 손해 보는 셈 치고 받아들여야 하나...'

오신우의 마음이 점점 수락을 향해 기울어가던 그때. 베타의 마지막 한 마디가 쐐기를 박았다.

"세 가지."

"...세 가지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리품의 우선 구매권을 넘겨주면, 나 또한 아이템 세 가지를 제작해 너희에게 우선적으로 판매하겠다."

피잉-

이곳에 모인 모든 헌터들의 머리가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실력 하나는 검증된 연금술사, 베타가 가치를 보장한 물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익과 미래의 이득.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1팀장 유신애도 동의합니다!"

"2팀장 강철규. 좋습니다!"

"3팀장 박진성. 동의합니다."

"4팀장 유선아도..."

오신우와 유신애를 시작으로 이곳에 모인 헌터들이 앞다투어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물론, 만장일치였다.

* * *

"잘 했어. 흉내쟁이."

막 집으로 돌아온 내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흉내쟁이의 무표정과 딱딱한 말투, 그리고 지금까지 보여준 성과가 어우러져 꽤 괜찮은 협상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대사부터 혹시 발생할 돌발 상황까지. 숙소에 틀어박혀 밤새 연습한 보람이 있다.

[성과에 따른 보상 지급 요망.]

물론 대부분에 시간은 드라마와 영화 등을 이용해 저 말투를 교정하는 데에 소모되었지만 말이다.

'원래는 추가적인 제안 없이, 구매 우선권만 따오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거기까진 너무 큰 욕심이었던 모양이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제피로스에게 판매할 물건들은 전부 시제품 위주가 될 테니까.

어차피 아이템의 판매 비용으로 재료를 구매할 때 드는 비용은 충당될 것이니, 따지고 보면 나는 큰돈을 들이지 않고 고등급 재료를 사용해 마음껏 아이템 제작을 연습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중 옵션이 탁월한 아이템이 나오면 내가 사용하거나, 따로 챙겨두면 될 테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게다가 통장에 찍힌 삼억 오천이란 금액.

일 년 내내 일해도 구경조차 하지 못 한 액수를 한 번에 지급 받았다.

"어디 보자...이 돈으로 뭘 해야 하지."

일단 일부는 아직 9억 가까이 남은 빚을 탕감한다 쳐도. 나머지 금액의 사용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때, 맑은 종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선반을 닦던 무명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저희 가게는 잡상인을 받지 않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잡상인이라니, 아저씨는 누구슈? 처음 보는 얼굴인데. 가게 주인 바뀌었수?"

귀에 익은 목소리. 고개를 돌려 보니 문 앞에 선 거지 한 명이 보였다. 커다란 체구, 덥수룩한 수염. 구릿빛 피부....

"장춘식?"

"그래, 형님이다, 인마!"

말 그대로 거지꼴을 한 춘식이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굉장히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어후, 이게 얼마 만에 돌아오는 고향이냐. 한 달 하고도..."

기분 탓이 아니었구나.

그러고 보니 지난번 겨울숲 부족에게 줄 근육성장제를 테스트 해 본 이후로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어딜 갔다 왔길래 꼬라지가 그 모양이냐. 냄새난다. 좀 씻어라."

"놀라지 마라. 이 형님이 인마, 무려 미국에 다녀왔다는 거 아니냐."

"...미국? 거긴 왜? 덕구는?"

"애견 호텔에 맡겨뒀지. 확실히 서양이라 그런가. 미국 몬스터들이 빡세긴 하더라.

그만큼 수입도 짭짤했지만. 흐흐. 네가 준 갑옷 덕도 많이 봤다."

"그 에고 아머? 그거 입으면...너 미국에서도 내놓고 다닌 거냐? 글로벌하게?"

"너 뭘 모르는구나? 서양은 개방적이니까 그래도 돼. 아메리칸 몰라? 아메리칸."

"...집에 가라."

역시, 내 상식으로 춘식이를 이해하는 건 어렵다.

"내가 현지에서 친해진 친구가 하나 있는데, 네 얘기를 하니까 관심을 보이더라."

"내 얘기? 내가 얘기할 만할 게 있는 사람인가. 아니, 그보다 영어가 통해?"

"새끼가, 이래 봬도 초등학교 때까진 신동 소리를 듣던 몸이야. 그깟 영어. 그보다, 그 친구도 연금술사라더라. 너한테 이걸 보여주면 알 거라던데?"

그럴 리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해외의 연금술사를 모른다.

"여기 있을 텐데...아, 찾았다."

한참 뒤적거리던 춘식이가 바지 속에서 시커먼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무언가를 꺼냈다.

"내 정신 좀 봐. 챙겨 갔던 팬티가 다 떨어져서, 대신 걸치고 있었지 뭐냐."

"...치워라."

"에이, 뭘 이런 걸 가지고."

실실 웃던 춘식이가 테이블 위에 시커먼 천 쪼가리를 올려놓자마자, 이쪽을 향해 서늘한 기운이 쏟아졌다.

불과 오 분 전. 광이 나도록 테이블을 닦던 무명에게서 흘러나온 살기였다.

"어우, 오늘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네. 한 달을 안 씻어서 그런가? 집에 가서 머리라도 감아야겠어."

"...그거 때문은 아닐 걸, 너 밤길 조심해라. 그보다 이게 뭔데?"

"봐봐. 거기서 사귄 친구가 나한테 주고 간 건데. 네가 연금술사라면 곧바로 알아볼 거라더라."

춘식이가 아무렇게나 접힌 천 쪼가리를 넓게 펼쳤다. 무명의 짙은 한숨이 들려왔다.

곧이어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천 위에는,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이건..."

"알아보겠어? 엄청 유명한 클랜이라던데."

"...당연하지. 이걸 모른단 말이야?"

"나야 뭐, 외국 물정에는 별 관심이 없으니까. 그래서 이게 뭔데?"

모를 리가 있나.

굳건한 방패 위로 겹쳐진 잿빛의. 아니, 본래는 순백이었어야 할 랜스.

미국 5대 헌터. 펜타그램 나이츠 중 백기사가 운영한다는 연금술 클랜. W.K의 엠블럼이다.

게다가 클랜의 엠블럼이 새겨진 물건을 가지고 다닐 정도면, 꽤 직책이 있는 사람이란 뜻인데.

의아해하는 나를 향해 춘식이가 쓸데없는 설명을 덧붙였다.

"별 건 아니고, 균열에 선발대로 들어갔다가 우리 둘만 트랩에 걸려 고립 당했거든. 그때 친해졌어."

"...그래서. 이 사람이 왜 나한테 관심을 가진 건데?"

"그냥. 한국에 연금술사 친구가 있다니까 이름을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말해줬더니, 성이 같다면서 혹시 한기호 연금술사님이랑 관계가 있냐고 묻던데?"

"뭐?"

아버지를 알아?

실질적인 활동을 그만두신 지 십 년이 넘었는데? 그것도 먼 땅인 미국에서?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사실대로 말했지. 엄청 많이 놀라던데? 침까지 튀겨 가면서 막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버지의 존재를 딱히 숨길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해외이기도 하고. 별 상관은 없겠지.

"그래서 그 친구가 조만간 여기로 찾아오겠다던데. 이름이...뭐였더라. 오...으...모르겠다. 여튼 좀 복잡한 이름이었어."

해외의 연금술사 이름이야 뭐, 들어도 나는 모르니까. 만약 진짜로 찾아오게 되면 누군지 알 수 있겠지.

그보다 춘식이와 대화를 나누던 와중, 그간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라이센스."

연금술사 또한 헌터처럼 자격증이 있다. 그리고, 매년 분기마다 자격시험이 시행되기에 때를 놓치면 3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11월 말이고

그 말인즉슨, 조금 있으면 국가 공인 연금술사의 자격 검정시험이 시작된단 뜻이다.

에포나와의 약속 기한까지 앞으로 한 달.

그동안, 처리해 두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생겼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70화

약 스물의 인원을 데리고 만년빙산을 올라가던 록타가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의 오른쪽 눈이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어휴, 죽겠네. 너, 비만 아니야? 왜 이렇게 배가 출렁거려?"

- 힘은 뱃심에서 나오는 거다. 에포나 님은 뭘 모르신다. 불만이면 제오르그 영감에게 들어가면 되신다.

"...갈수록 말투가 이상해진다? 좀 건방져진 것 같기도 하고. 존대를 하든지 말을 놓든지 하나만 해. 그리고 제오르그는 안 돼. 걔는 늙어서 잘못 굴리면 죽을지도 몰라."

"흘흘, 저는 아직 멀쩡합니다만."

뒤따라오는 제오르그의 중얼거림을 무시한 에포나가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승현과 로제가 떠나간 뒤로 한 달. 그간 에포나 또한 놀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 세 번째 뿌리라 불리는 만년빙산의 추위를 약화시킨 후, 그곳을 내내 이 잡듯 뒤진 것이다.

그간의 강행군 끝에, 에포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확실히...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

세계수의 뿌리에 남은 마나가 확연히 줄어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 오기 전 방문했던 두 번째 뿌리는 거의 말라비틀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저것들 때문이란 거지."

어느새 주위를 둘러싼 기괴한 생명체들. 어떤 것은 짐승의 형태를, 어떤 것은 곤충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한 가지 공통점은 전부가 눈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은은한 금빛 광채를 내뿜고 있다는 것.

지난 한 달간, 지겹도록 마주쳤던 놈들이다.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말아쥐던 에포나의 머릿속에 록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에포나 님. 족장은 도끼를 써야 한다. 그게 써는 맛이 좋다.

"시끄러. 야, 다들 눈 감아."

요르의 동굴 안에서 마주쳤던 '여왕'과 마찬가지로 주위를 둘러싼 저놈들 또한 권능을 이식받은 존재다.

즉 평범한 하프 엘프가 거스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란 뜻이다.

그렇기에 모두를 물러나게 한 에포나의 주먹에서 금빛 광채가 타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얼마나 남은 거지. 인원을 좀 분산시키고 싶은데, 권능을 가진 놈이 태반이니...그럴 수도 없고. 참."

툴툴거린 에포나가 눈을 뭉쳐 주먹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벌써 한 달이나 이 몸을 써 왔지만 영 적응이 되질 않는다.

로제와 비교하자면 록타의 몸은 물먹은 솜이불같이 무거웠다.

보유한 마나는 둘째치더라도 타고난 신체 능력 자체가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데다가,

체형 또한 본래 여성체인 에포나가 다루기 훨씬 더 수월했기 때문이다.

가만히 머릿속에 머물던 록타가 그녀의 심경을 알아챈 듯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 에포나 님은 뭘 모르신다. 언젠가 록타가 로제보다 더 강해질 거다. 록타는 파수꾼인 로제 따위보다 훨씬 더 쓸모 있는 족장이다.

"그래. 네 맘대로 생각해라. 그보다 저거 좀 그만 따라오게 할 수 없니?"

에포나가 머리 위를 떠다니는 희끄무레한 중년 남성을 보았다. 록타와 계약한 원시 정령이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정령은 수줍은 듯 후다닥 몸을 감추었다. 그러자 에포나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꼭 계약을 해도...신경 쓰여 죽겠는데 내가 계약자가 아니니 쫓아낼 수도 없고. 쯧. 원시 정령은 다 저렇게 생긴 거니? 좀 다른 데로 가라고 하면 안 될까?"

- 안 된다. 록타가 어렵게 계약한 바위의 정령이다. 어차피 나를 따라오는 것이니, 에포나 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

그리고 저 정도면 제법 멋지게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래... 네 맘대로 하세요. 그보다 한승현 이 자식은 내 부탁을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러기만 했어 봐. 면상에 확 세인트 캐논을 처먹여 줄 테니까."

록타는 세인트 캐논이 궁금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 그래서. 에포나 님. 이제는 이야기해 주실 수 있는 거 아닌가. 한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지, 그리고 왜 만년빙산을 돌아다니는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궁금해한다. 록타는 서리감옥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다. 부족민의 궁금증을 해결해 줘야 할 의...의무가 있다.

간신히 단어를 떠올린 록타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잠시 턱을 쓰다듬던 에포나가 입을 열었다.

"뭐, 말해주지 못할 건 없지. 일단 한승현에게 부탁한 건 한 가지야. 한 달 후 돌아올 겨울숲 부족의 대사제, 케이프와 이야기를 나누어 볼 것."

- 이유를 알고 싶다. 어차피 에포나 님의 말대로 대사제가 모두를 속인 거라면 당연히 한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는가. 록타는 현명하지 않지만, 그 정도는 안다.

"내용 같은 건 상관없어. 케이프가 거짓말을 해도 돼. 그냥 한승현이 케이프를 직접 만난다는 게 중요한 거야."

- ...?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거야."

에포나에겐 확신이 있었다. 승현의 몸 안에서 느껴지던 기운. 그리고 은은하게 코끝을 간질이던 어머니의 향기.

이 좁은 세계에서 오로지 케이프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는 건 단둘, 에포나와 승현뿐이리라.

그리고, 록타가 던진 두 번째 질문의 답 또한 코앞에 놓여있었다.

점점 가까워져 가는 만년빙산의 정상을 가리킨 에포나가 모두를 향해 이야기했다.

"너희들, 세 번째 능선 너머엔 가본 적 없지?"

"오래전부터 혹독한 추위 탓에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구역이었으니...저 너머를 본 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가까이 다가온 제오르그가 조용히 답하자 록타의 몸에 들어간 에포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럼, 지금 보여줄게. 그 전에."

부부부붕-

어느새 그들의 주변을 커다란 말벌 떼가 감싸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그들의 상반신 크기와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곤충들.

그들의 황금색으로 물든 눈을 확인한 에포나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저놈들부터 처리하자."

* * *

"어디 보자...필기시험은 문제없을 것 같고."

전년도 기출 문제집을 훑어본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던 것보다 수준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작자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1차 필기시험과 2차 실기 시험을 통과하면 끝이다.

이 시험들을 통과하면 라이센스가 발급되는데, 제대로 된 제작자로 활동하기 위해선 이 자격증을 빨리 획득하는 편이 좋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협회 등지에서 무면허 연금술사를 빡빡하게 단속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선 자격증이 필요하다.

"이번 기회를 내다 버리면 3개월을 또 기다려야 하니까..."

그렇기에 카운터에 앉아 열심히 시험문제를 풀던 그때. 가게를 청소하던 무명이 다가왔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건가. 네 실력이라면 무조건 아레스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있다. 여차하면 내가 막아줄 순 있지만...아레스는 포기하지 않을 거다."

"걱정하지 마. 고등급을 받지 않게 탈락을 면할 정도의 점수로 합격할 거니까.

아무리 아레스라고 해도 E급 제작자한테 관심을 가지진 않을걸? 게다가 나를 조사했다면 더더욱."

"흐음...그런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짐꾼 이력이 전부인 나는 각성자 데이터베이스에 철저한 무능력자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각성자가 된 이후의 행적은 전산에 기록되지만, 개인이 가진 특성과 스킬에 관한 정보는 측정 즉시 그 자리에서 폐기된다.

그 말인즉슨, 아레스는 내가 짐꾼 출신이라는 것과 각성자란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사실은 알아낼 방법이 없단 뜻이다.

"기껏 해봐야 부업으로 먹고살 길을 알아본다고 생각하겠지.

실제로 가게에 파리만 날리는 것도 사실이잖아?

E급 제작자가 그리 드문 것도 아니고. 딱히 눈에 들 일은 없을 거야."

"뭐, 듣고 보니 자격증 취득 정도는 상관없을 것 같군. 아니면 이참에 아예 사실을 밝히고 제피로스에 소속되는 건 어떠냐. 자격증도 있고,

팀장급 헌터들과 안면도 있으니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게다가 사실상 백색의 연금술사란 칭호는 네가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

"그럴 순 없어."

칼같이 답하자 무명이 의아하단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왜지? 클랜에 소속되면 지금처럼 빈곤하게 지내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중견급 클랜이니 아레스도 함부로 널 건드리지 못할 거고."

사실 무명의 의견을 따르면 생활은 한결 편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느 한 곳에 소속되어선 안 돼."

"...무슨 뜻이지."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집단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게 되니까."

"그게 나쁜 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옳지 않은 결정도 따라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거지. 나는 물건을 파는 장사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작자이기도 해."

이건 일종의 신념이다. 아마 윤기 아저씨의 일을 알지 못했더라도 나는 결코 아레스에 들어가지 않았을 거다.

"헌터가 시민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몬스터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의무가 있다면, 제작자는 편견 없이 그들을 뒷받침...그러니까 지원해 줘야 할 의무가 있어.

지원이라니까 말이 조금 이상하네. 어쨌거나 정당한 돈을 받고 아이템을 파는 건데 말이지."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을 풀어놓자, 어느새 진지한 표정이 된 무명이 의자를 꺼내왔다.

"그렇다는 말은 아레스가. 유천호가 찾아와 거래를 제안해도 응하겠단 거냐."

"에이, 그건 아니지. 어떻게 그래?"

"...방금 네가 했던 이야기에 위배 되는 대답이군.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어도 되는 건가."

"그야 나도 사람이니까. 신념은 신념이고, 싫은 건 싫은 거거든. 구태여 내 자존심까지 버려 가며 신념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아, 이것도 서로 모순되는 대답인가?"

피식. 무명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보는 밝은 표정이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낡은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나쁘진 않다. 그러고 보니 영감도 옛날엔 비슷한 말을 했지."

"영감이라면, 아저씨의 사부라던?"

"그래. 영감이 늘 강조하던 이야기지. 성인(聖人)의 가면 뒤를 조심해라.

살면서 겪어보니 틀린 말은 아니더군. 대놓고 고결한 척하는 놈들보단 좀 어설픈 네가 백 배 낫다."

이 말을 끝으로 무명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였지만 굳이 캐묻진 않았다.

그 대신,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리모컨을 집었다. 때마침 기다리던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슬슬 시작하겠네."

채널을 돌리자 때마침 방송이 시작되었다.

- 아, 안녕하세요! 어웨이커TV의 리포터, 김수민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제피로스의 클랜마스터, 오신우입니다.

오신우 클랜장의 뒤로 도열한 열한 명의 인원이 보였다. 대부분 낯익은 얼굴이다.

내 신변 경호를 위해 빠진 박진성 팀장을 제외한 세 명의 팀장급 헌터들과 부팀장급 헌터들.

검은 코트를 걸친 그들의 가슴 위로 육망성의 엠블럼이, 그리고 오른쪽 어깨엔 서풍을 형상화한 로고. 제피로스의 엠블럼이 붙어있었다.

그 기세에 눌린 듯, 리포터가 조금 떨리는 손짓으로 오신우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 바, 반갑습니다. 오신우 클랜장님.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기에 앞서, 시청자분들이 가장 궁금해 하실 부분에 대해 답해주실 수 있을까요?

-

질문의 내용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오늘이 바로. 제피로스가 지난번 공략에 실패했던 2구역에 재도전하는 날이니까.

그리고. 가만히 카메라를 응시하던 오신우 클랜장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지켜봐 주십시오. 오늘은 지난번과 다를 겁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71화

오신우가 게이트에 들어간 지 한 시간. 보문산 6급 균열의 입구는 메이저급 언론사의 기자들로 인해 연신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운 좋게 오신우를 인터뷰했던 어웨이커 TV의 리포터, 김수민 또한 그들 사이에 섞여 긴장된 얼굴로 균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스태프가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수민이 누나. 누나는 이번 공략 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저기 모인 멤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힘들지 않을까요?"

예의상 긍정적으로 답하긴 했지만, 김수민 또한 확실히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는 쪽으로 생각이 점점 기울어졌다.

제피로스 측에서 엠바고를 요청했기에 아직 세간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김수민을 비롯해 이곳에 모인 언론사의 관계자들은 이미 균열에 관한 정보를 파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평범한 균열도 아니고...속성 디버프가 적용된 구역을 준비 없이 클리어하긴 무리겠지. W.K 정도 규모의 길드에게 지원이라도 받지 않은 이상 단기간에 속성 저항 장비를 맞출 수도 없었을 테고.'

별다른 방어구 없이 달랑 코트 한 벌 걸친 채 균열 안으로 들어간 그들의 결과는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 바글바글 모인 이유는 뻔하지.'

오로지 제피로스의 실패 현장을 카메라에 생생히 담아내기 위해.

6급 균열의 공략이 대단한 업적이긴 해도, 완전한 클리어가 아닌 고작 한 구역의 공략이 이렇게까지 이목을 끌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다른 때보다 배는 많은 언론사가 이곳에 집결한 이유는 단 하나.

'누군가의 성공보단 실패가 자극적이고, 이는 곧 높은 시청률로 이어지니까.'

모두가 초조히 기다리던 그때. 수백 대의 카메라가 일시에 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균열이 열린다!"

동시에 터진 누군가의 외침. 김수민이 황급히 스태프들을 향해 손짓했다.

"뛰어, 뛰어! 빨리!"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제피로스의 모습을 담아야 한다.

물론 패배한 헌터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겠지만, 실적이 중요한 그녀에겐 그런 사소한 일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나왔다!"

오신우를 필두로 점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열두 명의 헌터들.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한데. 모두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이 사실을 알아챈 기자들이 막 질문을 건네려던 그때. 오신우의 짤막한 한마디에 모두가 전율했다.

"성공했습니다."

* * *

그날 저녁, 헌터넷이 뜨겁게 달아올았다. 오늘의 주제는 제피로스.

- [속보] 제피로스. 보문산 6급 균열 2구역 돌파.

- 보문산 균열 2구역. 냉기 속성 디버프가 적용된 것으로 밝혀져....

- 협회 측. 보문산 균열의 등급 재조정을 검토해 보겠다. 7등급으로의 격상 가능성도 충분.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뉴스 기사와 함께 오신우 클랜장이 공개한 바디캠 영상이 공중파를 타며 게시판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 지금부터 대전 보문산에 출몰한 6급 균열의 2구역 공략을 시작하겠습니다.

눈보라가 쌩쌩 몰아치는 균열의 내부. 하지만 제피로스 클랜원 중 그 누구도 움직임이 둔해지거나 힘든 내색을 보이는 이가 없다.

오오오오-!!!

곧이어 괴성과 함께 나타난 구역의 주인. 거대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인이 순식간에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거인을 제피로스 팀은 지난번 원정의 설욕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저곳에 모인 멤버는 전원이 B급 이상. 특히 오신우와 유신애는 대한민국의 0.01%에 속하는 A급 헌터였으니까.

그렇기에 보스를 쓰러트린 것 자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 저거, 가만 보니까 구역 전체에 냉기 디버프가 적용된 거 아니야? 단순한 눈보라가 아닌 것 같은데? 뉴스가 사실인가?

┗지랄ㅋㅋ 디버프는 개뿔. 그냥 언플이지. 균열 한두 번 가보냐? 저게 진짜 디버프였으면 쟤들 지금 움직이지도 못했다

┗저거 백 퍼센트 냉기 속성 디버프임. 자세히 보면 눈보라에 마력이 섞여 있어서 반발력 때문에 옷에 부딪힐 때마다 작게 스파크가 튀잖아.

┗?

┗?

┗잠깐만. 스파크가 튄다는 건 제피로스가 걸친 게 전부 속성 저항 아이템이라는 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물론 제피로스 정도 되는 클랜이라면 어찌어찌 인맥이나 수소문을 통해 서너 벌 정도의 속성 저항 아이템을 구할 순 있겠지만.

┗전부 다 해서 열두 벌인데?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균열 공략을 선포한 지 석 달도 안 지났는데 열두 벌을 마련했다고?

┗평소에 구비 해뒀던 거 아닐까?

┗ㄴㄴ;말이 안 됨. 애초에 가격도 비싼 데다 쓰임새 자체가 워낙 드물어서 저걸 상비해 두는 클랜은 거의 없음. 근데 속성 저항이 붙은 아이템인 건 인정ㅋㅋ그렇지 않고서야 저걸 멀쩡히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음.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다들 지금 이상한 데에 정신이 팔린 것 같은데 제피로스 복장을 잘 보세요

┗어?

┗미친?

┗?

한참 그들이 걸친 코트에 대해 떠들던 사람들은 서서히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 님들, 왜 제피로스가 걸친 코트의 디자인이 전부 똑같음?

모두가 간과하던 사실. 게다가 그들이 걸친 코트의 오른쪽 어깨엔 제피로스의 엠블럼이. 그리고 가슴엔 생전 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말은 곧, 그들이 걸친 아이템은 전부 같은 사람이 제작했다는 뜻이고. 어깨에 박힌 클랜의 엠블럼이 의미하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제조 특성상 분업을 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저 정도 아이템을 만들 만한 제작자 열두 명을 고용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 그럼, 열두 벌이나 되는 속성 저항 방어구가 전부 제피로스를 위해 제작됐다는 거임? 아니, 그 전에 한 사람이 저걸 다 만들었다고?

헌터넷이 한층 더 폭주했다.

그리고,

그날 밤 올라온 오신우 클랜장의 게시글이 그들의 열기에 기름을 부어버렸다.

- 오신우입니다.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아 클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 모두가 궁금해하시는 질문에 답을 드리려 합니다.

* * *

"흐흐...그러니까. 지금 난리도 아니라니까. 백색의 연금술사님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전국에서 우리 클랜으로 몰려들었다는 거 아니야."

자격증 응시까지 앞으로 이틀. 나와 흉내쟁이는 유신애 팀장의 손에 이끌려 제피로스의 본부로 향하게 되었다.

흉내쟁이에게 관심이 쏠리는 건 나로서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귀찮았기에 적당한 핑계를 대며 따라가지 않으려 했건만.

"베타 님. 오늘 저희와 동행해 주시면 프랑스제 최고급 다과를 원 없이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가겠다."

흉내쟁이가 박진성 팀장의 교묘한 유혹에 넘어가는 바람에, 나까지 따라가야만 했다.

'어쩔 수 없지. 명목상 나는 사회성이 부족한 베타의 대변인이니까.'

차에서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피로스의 익숙한 본관이 나타났고, 동시다발적으로 수없이 많은 눈동자가 우리를 향해 움직였다.

"베타 님이시다!"

"어디, 어디!"

"안녕하십니까 베타 님! 삼포 클랜의..."

"저는 마크 클랜의 팀장..."

정확히는 흉내쟁이를 반기는 수많은 인파. 유신애 팀장이 부연 설명을 곁들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모두가 베타 님을 보려고 모인 제작자들이야.

이들 중 삼 분의 일은 제피로스에 가입하길 희망하는 중이고. 그중엔 B급 이상 제작자도 있다더라."

"안 그래도 유능한 인력이 필요하던 때였는데. 잘 된 것 같습니다. 모두가 베타님 덕입니다."

유신애와 박진성. 두 팀장급 헌터는 이 상황이 마냥 좋은 듯 웃음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행 중 그 둘과 비견되는 자가 있었으니.

"저리 비켜라."

쏟아지는 관심에 잔뜩 흥분하신 흉내쟁이 되시겠다.

귀찮은 듯 내뱉는 말투와 다르게 한껏 여유로운 걸음걸이. 그리고 높아진 콧대와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 어지간히 들뜬 모양이다.

어찌어찌 인파를 뚫고 집무실에 도착하자, 오신우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두 분 덕분에 지난번 공략 실패 때 목숨을 잃은 클랜원들의 원한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누가 보아도 흉내쟁이의 공이건만.

일개 상점 주인이자 대변인인 나에게까지 허리 숙여 감사를 표하는 걸 보니...역시, 오신우는 괜찮은 사람이다.

약간의 공치사가 오갔고, 테이블에 앉아 게걸스럽게 무언가를 입에 집어넣는 흉내쟁이를 뒤로한 나는 오신우 클랜장을 향해 물었다.

"그럼, 이제 저희를 부르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설마 단순히 감사를 표하기 위함은 아닐 테고.

무언가 의도가 있으니 유신애 팀장까지 보냈을 터인데.

"하하.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말씀드렸던 조건 때문에 두 분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조건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지?"

"균열 전리품의 우선 구매권. 설마 벌써 잊으셨습니까?"

그럴 리가. 내가 이들에게 협조하는 목적 중 하나인데.

기쁘게 받아들이려던 찰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다.

"그...우선 구매권을 사용하고 싶어도, 지금 당장은 베타 님께서 보유하신 현찰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수중에 돈이 없다는 것.

물론 지난번 오신우 클랜장에게 받은 3억 5천이란 금액이 고스란히 통장에 남아있다곤 해도, 제피로스가 공략한 균열의 등급은 6등급이다.

고작 억 단위의 돈으로 재료를 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란 뜻이다. 난처한 속내를 감추려고 애쓰는 나를 향해 오신우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돈이라면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예? 그게 무슨...?"

"어차피 베타 님께선 나중에 저희에게 세 가지 아이템의 우선 구매권을 보장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죠."

"베타님께서 제작해 주신 아이템의 값어치가 결코 전리품보다 낮지 않을 테니,

나중에 판매해 주실 때 저희 쪽에서 가져가신 전리품의 액수만큼을 차감해 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어떠십니까?"

한 번쯤 제안해 볼까.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던 내용이 오신우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물론 나로서는 대환영이다. 정 안 되면 무명 아저씨에게 빌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흉내쟁이와 잠시 상의 아닌 상의를 마친 후, 그의 제안을 수락하자 박진성 팀장이 상자에 담긴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번 공략대가 2구역의 주인, 골렘을 처치한 후 얻은 전리품입니다. 그 외에도 각종 등급의 마석이 있으니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셔도 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진성 팀장이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 곱게 놓인 한 쌍의 푸른 보석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레 그것을 향해 손을 뻗자 기분 좋은 냉기가 손가락을 타고 전해졌다.

[골렘의 핵]

등급 : [유니크]

* 골렘을 구동하는 가장 중요한 부품이다. 자체적으로 가진 능력은 없으나 조합에 따라 천차만별의 성능을 자랑한다.

* 흡수한 마력에 따라 속성이 변화한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은은히 느껴지는 냉기는 아마 균열 속에서 쌓였던 마력의 잔재겠지.

그보다 무려 유니크 등급이란다. 마음 같아서는 덥석 집어 들고 싶다.

다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아는 한 코어만 가지고는 쓸만한 골렘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

이를 위해선 등급에 걸맞은 육신을 구성할 만한 재료와 제작 기술이 필요했다.

한데, 아쉽게도 내 주변에 골렘 제작법을 아는 사람은 없다. 아니, 애초에 골렘을 손수 제작하는 제작자 자체가 드물다.

즉, 지금의 나에겐 등급은 높지만 처치가 곤란한 아이템이란 뜻이다.

그렇기에 골렘의 핵을 받아들이길 망설이려던 찰나.

'맞아, 에포나가 있었지.'

에포나의 성소를 지키던 방패의 주인. 수호 기사를 떠올린 나는 속으로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외형은 다르지만 어쨌거나 스스로 움직이는 갑옷인 수호 기사 또한 골렘의 일종. 에포나를 잘 구슬리면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얼마 전, 케이프를 만나달란 부탁을 들어주면 충분한 대가를 지급하겠단 약속까지 했으니.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럼, 베타님과 상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나는, 테이블에 앉아 다과 섭취에 열을 올리는 흉내쟁이를 힐끔 바라보았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72화

제피로스에 방문한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오늘은 라이센스 취득 시험 당일이었기에 오전 내내 시행된 필기시험을 끝마치고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난 유신애 팀장이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왔다.

"오호라...그러니까. 연금술사 자격증을 따겠다 이거지? 헌터 자격증은 왜 안 따고?

내가 봤을 땐 너는 C급 상위권이나 B급까지 가능할 거 같은데. 아니면 제작자와 헌터. 둘 다 노리는 거야? 보기보다 야망이 있네."

"아직 헌터 라이센스를 취득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아쉽네. 헌터가 되면 꼭 나한테 연락해. 내 팀에 넣어줄 테니까. 음...이를테면 낙하산?"

"사양하겠습니다."

"아, 왜!!!"

왜긴 왜야. 다른 부분은 다 차치하더라도 당신이랑 같이 일하면 인생이 피곤해질 것 같으니까 그렇지.

호전적이고, 말 많고. 제멋대로고.

물론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기에 재빨리 대화의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보다 박진성 팀장님께선 어디 가시고 팀장님께서 여기에...?"

"클랜에서 빈둥대는 거보단 여기가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진성이 대신 왔지."

아무래도 나를 본인의 심심풀이 대상 정도로 보는 모양이다.

"...팀장급 헌터가 그렇게 마음대로 자리를 비워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내 일은 부팀장이랑 진성이가 다 하는걸? 그보다 자격시험이라니. 재밌겠다. 예전에 거래하던 연금술사가 해줬던 얘긴데 말이야..."

끝도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유신애 팀장. 지난 한 달간 지켜보며 느낀 점인데, 인상과는 다르게 말이 많은 타입이다.

'으...피곤해.'

그렇다고 해서 안 받아주면 자연스레 대화의 흐름이 한 판 붙자는 쪽으로 넘어가니, 어쩔 수 없이 적당히 맞장구쳐줘야 한다.

"쯧. 유선아 팀장 반만 닮으면 어디가 덧나나. 지난번에 보니까 엄청 차분해 보이던데."

아차, 너무 시달린 나머지 본의 아니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뭐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푹 찔렀다.

"흠흠. 말이 헛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아가 맘에 들어? 소개해 줄까?"

"...?"

대체 어떤 식으로 생각하면 저런 결론이 나오는 거지.

어안이 벙벙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유신애가 가까이 다가왔다.

"흐흐. 그래. 승현이 정도면 제부로 삼기에 나쁘지 않지.

어차피 돈은 선아가 벌어올 테니까 그냥 셔터맨으로 사는 게 어때? 너는 잘 모르겠지만, 선아 걔 B급 상위권 헌터야.

진성이나 철규랑 붙어도 안 밀릴걸? 뭐, 나한텐 역부족이지만."

"말씀은 감사하지만...사양하겠습니다."

"왜! 선아가 너보다 연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얼마 차이 안 나! 그만하면 얼굴도 예쁘고.

나완 다르게 남자 앞에서 좀 숙맥인 게 좀 단점이지만. 아, 네 나이 때는 그게 장점인가?"

"시간이 다 된 것 같아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 왜! 이리 와 봐. 누나랑 진지하게 얘기 좀 하자! 야, 야! 어디가!"

말을 더 섞었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아 재빨리 자리를 떴다.

연신 무언가를 외치는 유신애 팀장을 등지고 실기 시험장에 들어서자, 넓은 강당 아래 모인 수십 명의 응시생이 보였다.

누군가는 이론서를 탐독하고, 누군가는 명상에 잠기고, 누군가는 배합식을 재점검하고.

인생의 갈림길에 선 그들의 열기가 뜨거울 정도로 생생히 전해졌다.

'다들 열심이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곧 있으면 실기 시험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통과 의례로 취급받는 전반부 필기 부문과는 달리 직접 아이템을 제작하는 후반부 실기 부문은 최초 등급 책정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

이론성보단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마이스터 협회의 방침이 반영된 결과다.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단순히 자격증이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각자의 일에 열중하는 응시생들을 뒤로하고 배정된 좌석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뒤.

강당의 앞문이 벌컥 열리며 세 명의 감독관이 들어왔다. 후반부 실기 시험이 시작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응시생 여러분. 오늘 시험의 감독을 담당하게 된..."

간단한 소개와 끝난 후. 곧이어 그들을 뒤따라온 협회 소속의 인력이 부지런히 커다란 상자들을 강당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며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안에 든 게 이번 시험 문제인가 보네.'

실기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협회 측에서 제공한 레시피와 재료를 이용해 아이템을 만들어 낼 것.

일단 이것만 정확히 해내도 E급 라이센스는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곳에 있는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해 만든 아이템을 제출하는 것.

이 부분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최대 B등급의 라이센스를 취득할 수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B등급 판정이 떨어지는 순간 창창한 앞길이 열리게 된다.

'뭐...두 번째는 지금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어차피 내가 원하는 등급은 E급이기에. 쓰게 웃으며 앞으로 나가 레시피를 받아왔다. 오늘의 시험 주제는 [활력 포션].

지친 몸에 활기를 불어넣는 이 아이템은 결코 제작이 어려운 건 아니다.

'일반 등급쯤 되려나.'

시중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제품이니, 아마 그럴 것이다.

"어디 보자. 넥타의 꽃잎이랑 어스 슬러그의 점액. 그리고 최하급 마석이랑..."

재료들을 찾아 가져온 나는, 자리마다 비치된 계랑 도구에 그것들을 옮겨 담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지닌 감각 덕에 별다른 계량 도구 없이 플라스크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였지만.

괜히 눈에 띄어 좋을 게 없으니 일부러 번거로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융해된 마석을 집어넣으면..."

이것 또한 불필요한 과정이다. 어차피 마석이란 매개체를 사용하지 않아도 내가 가진 마나는 아이템에 자연스레 스며들기 때문이다.

레시피에 적힌 방식에 따라 재료를 배합하니, 플라스크에 담긴 연녹색의 액체가 약간의 거품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이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활력 포션]

등급 : [일반+]

옵션 : [활력 증강]

딱 예상했던 대로의 옵션.

뒤에 추가 등급이 붙은 이유는 계량이 완벽해서일까.

옵션을 체크해 보니 일반적인 아이템보다 5%정도 성능이 향상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정도쯤이야 문제없겠지. 그나저나.'

완성된 아이템을 구비 한 포션 병에 옮겨 담은 후 생각에 빠져들었다.

"너무 넉넉하게 가져왔나..."

예상했던 것보다 재료가 많이 남은 것이다.

원칙적으로 한 번 가져온 재료 아이템들은 반납이 금지되기에 전부 폐기해야 하는 상황.

버려질 것들이 조금 아깝게 느껴졌기에 고민하던 나는, 결국 남는 재료로 활력 포션을 한 병 더 제작했다.

그런데, 별안간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해와 분석이 발동되며 시스템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 [형질 변환]을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형질 변환?

평소 워낙 발에 치일 정도로 굴러다니는 포션 이었으므로, 애초에 이게 가능하리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물건이다.

그간 꾸준한 반복 퀘스트를 수행함으로 인해 내 마나는 300대 후반까지 상승한 상황.

익스플로전 포션을 제작할 때와 같은 낭패는 겪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기에, 제출할 포션을 제외한 나머지 하나를 집어 든 나는 천천히, 천천히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시간도 많이 남았고.'

주변의 응시생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각자의 아이템 제작에 몰두하는 상황.

어차피 내 자리는 가장 구석진 곳이었기에, 구태여 이쪽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거란 판단 하에 내린 결정이다.

"어디 보자, 그러면 여기에다 고블린의 마력이 가진 효과를 가미하면..."

요령을 복기하며 머릿속에 이미지를 떠올렸다. 동시에 손에 든 포션을 향해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활력 포션이 보유한 효과는 간단하다. 지친 몸에 약간의 활기를 불어넣고, 복용자의 기분을 조금 들뜨게 만들어 주는 것.

어찌 보면 피로 회복제와 비슷한 포지션을 지닌 아이템이란 거다.

곧 내가 주입한 마력이 일정한 형태를 품고 포션에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고,

포션은 머릿속에 떠올린 이미지에 따라 옵션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간혹 마력을 머금은 포션이 짧게 점멸하긴 했지만, 주변의 조명이 워낙 밝았던 탓에 다행히도 눈치 챈 사람은 없는 듯했다.

형질 변환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익스플로전 포션의 제작으로 인해 숙련도가 올라갔기 때문이다.

곧 시스템의 메시지가 나타났고.

- [피어리스]를 제작하셨습니다.

"이게 뭐야..."

옵션을 확인한 나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그것을 품속에 숨겨야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쯤이면 괜찮겠지."

실기 시험의 주제였던 활력 포션을 제출한 뒤 도망치듯 밖으로 나와 다시금 아이템을 꺼냈다.

"혹시 잘못 본 게 아닐까."

[피어리스]

등급 : [레어++]

옵션 : [광폭화]

[광폭화]

- 복용자의 신체 능력을 대폭 증가시키며 강한 투쟁심을 느끼게 만듭니다.

또한, 그 어떤 상황에서도 공포심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 지속 시간 : 30분

* 효과가 종료되면, 복용자의 모든 능력이 하루 동안 대폭 감소합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

신체의 피로가 회복된다는 옵션은 신체 능력의 대폭 증가로,

그리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부분은 투쟁심 증가와 공포심 제거로 변해버렸다.

사실 옵션 자체만 놓고 보자면 꽤. 아니, 익스플로전 포션과도 비견될 만큼 좋은 물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만에 하나라도 감독관에게 걸리면 안 되니까."

가장 큰 문제는 '투쟁심을 강화하고, 공포심을 제거한다.'라는 부분이다.

바꿔 말하면, 전투에 미친놈으로 만드는 도핑 포션이란 의미다.

세간에 나도는 아이템 중,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끼치는 아이템은 유통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물론 활력 포션처럼 단순히 기분을 조금 들뜨게 하는 정도는 눈감아주는 편이지만, 이 정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게다가 이와 시너지를 일으키는 신체 능력 강화. 그리고 페널티.

둘 다 '대폭'이란 수식어가 붙은 걸 보니 못 해도 50%는 넘어선단 뜻인데.

이런 아이템을 내 손으로 만들어냈단 걸 걸렸다간...협회 관리국에 끌려가 탈탈 털릴 게 분명했다.

"...이건 나 혼자만 써야겠어."

이것만큼은 차마 제피로스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

위급 상황에서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는 데다, 적용된 디버프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숨을 내쉰 후 막 건물을 빠져나가려는데.

"자네.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나?"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러세웠다. 화들짝 놀라 재빨리 피어리스를 집어넣은 후, 몸을 돌리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당신은..."

얄팍한 수염을 코끝에 매단 초로의 중년인이다.

"감독관님?"

분명, 시험장에 있던 세 명의 감독관 중 한 명이었다.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다가온 감독관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품속에 숨긴 거. 이리 가져와 보게."

모든 걸 다 알고 왔다는 표정.

아무래도 좆 된 것 같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순순히 넘길 순 없는 법.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태연히 대답했다. 감독관이 의심스런 표정으로 수염을 매만졌다.

"정말인가?"

"정 못 믿으시겠다면 뒤져보시죠. 혹시 제가 안에 있는 재료들을 몰래 빼돌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물론 그렇게 생각할 확률은 거의 없다. 시간을 벌기 위해 아무 이유나 갖다 붙인 것뿐이다.

내 말에 황당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감독관이 한 걸음 다가왔다.

"자네, 내가 누군지 모르나?"

"...성함까진 모르겠습니다만. 감독관님 아닙니까?"

"이런. 너무 오래간만이라 그만 잊고 있었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감독관이 주머니에서 분홍빛이 도는 약병을 꺼내 단숨에 들이키자.

"...!!!"

얄팍한 인상의 중년인은 순식간에 내가 익히 아는 얼굴로 변하기 시작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73화

대한민국의 각성자들을 관리하는 단체.

일명 협회는 크게 두 개의 조직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는 헌터 강국인 대한민국답게 전 세계적으로도 상위권의 규모를 자랑하는 헌터 협회.

두 번째는 제작자들이 다수 포진해있는 마이스터 협회.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번에 내가 참가한 제작자 라이센스 또한 마이스터 협회에서 검증을 거친 후 발급받을 수 있는 자격증이다.

이 두 곳이 아니더라도 헌터 및 제작자 자격증을 발급해 주는 단체가 몇 군데 있긴 하지만,

협회에서 발급받은 자격증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사용할 수 있는 장소가 국내로 한정된다.

그 말인즉슨. 전 세계적으로 통용될 만큼 공신력 있는 집단이란 뜻이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근엄한 인상의 중년인은.

"이화수 협회장님...?"

두 개의 거대 단체 중 마이스터 협회를 이끄는 S급 연금술사. 이화수 협회장이었다.

맨몸으로 최정상의 자리에 오른 동경의 대상이었기에 평소 같았으면 사인이라도 요청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진짜 좆됐다.'

감독관에게 걸려도 위험할 판에, 무려 협회장급에게 암시장에서나 거래될 법한 아이템인 피어리스를 적발당한다면...뒷일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화수 협회장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반응을 보니 내가 누군지 알아챈 것 같은데. 정말 보여주지 않을 생각인가."

"무슨 말씀이신지...제 품속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보다 왜 협회장님께서 이런 곳에?"

"쓸 만한 인재가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왔네. 그보다, 따르지 않을 거라면 다 방법이 있네."

주제를 돌려 시간을 끌어보려 했건만...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협회장의 주변을 둘러싼 마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능력을 발휘해 내 품속을 수색할 생각인 것 같은데. 지금의 나로서는 막아낼 방법이 없다.

마나를 일으켜 조금이나마 저항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더 의심을 살 게 뻔했기 때문이다.

등골이 서늘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며 속으로 필사의 기도를 올리자.

"...내가 오해한 모양이로군."

협회장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다행히도 흉내쟁이가 눈치껏 움직여준 모양이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럼,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신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흉내쟁이에게 나중에 상을 주리라 다짐한 나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아직 내 얘기 안 끝났네."

그런데. 이화수 협회장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 부모님은 뭐 하시나?"

"...?"

뜬금없고, 황당한 질문이다. 협회장이 그걸 왜 궁금해하지?

"오래전에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가. 어쩌다?"

"...꼭 대답해 드려야 합니까?"

조금 삐딱한 대답이 나왔다. 무례하다 싶은 질문에 기분이 상하기도 했거니와, 그게 아니더라도 이 자리가 너무나도 불편했다.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몸을 돌리자, 내 앞을 또다시 협회장이 가로막았다.

"어딜 가는 건가. 아직 내 말 안 끝났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난처한 상황에 이도 저도 못 하던 그때. 때마침 구세주가 나타났다.

"야! 한승현이. 끝났으면 끝났다고 말을 해야지! 괜히 밖에서 기다렸네. 여기서 뭐 해?"

유신애 팀장이었다. 저 사람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눈꼬리를 한껏 치켜세운 유신애 팀장이 씩씩대며 이쪽으로 다가오다가 협회장을 발견하곤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이쪽을 가리켰다.

"어라? 아저씨는 여기 왜 있어?"

"신애로군. 여긴 어쩐 일이지."

"그냥 뭐. 아는 동생이 자격증에 도전한다길래 겸사겸사 왔지."

저 사람은 어딜 가나 똑같구나.

"그런데 아저씨 지금 뭐 해? 얘한테 눈독 들이는 거면 포기해. 제피로스 1팀장 유신애가 점찍어 놓은 인재니까."

"헌터로 보이지는 않는다만."

"조만간 내가 헌터로 만들 거야. 그러니까 아저씨는 포기해."

다행히도 둘은 평소에 안면이 있던 사이인지, 이화수 협회장은 유신애 팀장의 태도를 크게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다. 다음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

곧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협회장이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내심 안도하는 나를 향해 유신애 팀장이 다가왔다.

"그나저나 저 아저씨가 웬일이지. 네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인데?"

"...마음에 든 거 맞습니까?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냥 취조당한 기분이었는데. 내 표정을 본 유신애 팀장이 배를 잡고 낄낄 웃었다.

"그래 보일 수도 있는데, 그건 다 저 아저씨가 사람 대하는 방법이 서툴러서 그러니까 네가 이해해.

그보다 별일이네. 저 아저씨가 어지간하면 다른 사람한테 관심을 보이는 일이 드문데."

"팀장님은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예전에 마이스터 협회 전속 가디언으로 날 데려가려 했었거든. 처음엔 나도 시비 거는 건 줄 알고 좀 욱했는데, 알고 보니 나름 괜찮은 사람이더라. 저 아저씨."

그럼 설마, 아까의 그 질문이 친근감의 표현이었나.

"그보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제안인데, 너 진짜 헌터 해 볼 생각 없어? 내가 최고의 대우를 보장할..."

"생각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누나랑 한판 붙을까?"

"그것도 생각 없습니다."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유신애 팀장은 자신의 쌍검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그런 그녀를 피해, 나는 최대한 사람들이 많은 곳을 향해 바삐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런..."

한적한 장소에 다다른 이화수가 아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분명 지난번 모임에서 듣기론, 후배들과 이야기할 땐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먼저 꺼내라고 했는데."

승현이 직접 만든 제작품을 보고 온 힘을 다해 칭찬하려 했건만.

아무래도 방법이 잘못된 모양이다.

"쯧...그러니까. 늙은이들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그보다 그 한승현이란 녀석. 대체 어디서 나타난 녀석이지."

출생지나 가족 관계라도 알게 되면 승현에 관해 파악할 수 있을까 싶어 물었건만, 딱히 소득은 없었다.

사실 비싼 폴리모프 포션까지 사용해 가며 협회원을 대동하고 시험장에 들어갔을 때도, 이화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개인차는 있으나 모두가 도토리 키 재기였고, 가장 구석에 앉은 승현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 첫 번째 과제인 활력 포션을 만든 승현이 또다시 무언가에 열중하는 순간.

이화수가 보유한 특성이 발동되었다.

'저, 저건...'

승현의 뒤를 환하게 밝히는 새하얀 광채. 그를 한 단체의 우두머리로 이끌어준 특성. '재능을 보는 눈'이 개안 된 것이다.

자세한 것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자리에 모인. 아니,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며 만났던 각성자 중 손에 꼽을 정도의 밝기다.'

하마터면 체면도 잊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갈 뻔했다.

'저놈이라면...점점 퇴보하는 제작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을 거다.'

이건 일종의 확신이었다.

분야에 상관없이 지금 세대에서 천재라 불리는 유신애나 박진성. 유천수 등의 각성자와 만났을 때도 이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전 세대의 인재들. 지금은 먼 전설로만 남은 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었던 찬란한 휘광.

그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이다.

그렇기에 도저히 놓칠 수 없었다.

반드시 온 힘을 다해 가르쳐, 마이스터 협회의 주축이 될 연금술사로 키워내리라.

"아직 풋내기이긴 하지만...이놈.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있는 힘껏 다짐한 이화수가 시험장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무려 S급 제작자인 자신의 눈을 속였다. 분명 시험장을 빠져나가기 전 품속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걸 확인했건만.

마치 증발한 것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 다만. 그래도 조금 아쉽군. 두 눈으로 직접 뭘 만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거늘."

중요한 건, 승현을 어떻게 꼬드기느냐였다.

승현이 감독관에게 제출한 건 흔히 볼 수 있는 활력 포션 달랑 한 병.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작 재능을 발휘해 만든 아이템을 제출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지.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괜히 젊은 나이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간 잘못된 길로 빠져들 수도 있다.

굳이 협회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다만, 저런 인재를 방임하는 건 협회장으로서 죄악이나 마찬가지인 행동이다.

"한승현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한민국 연금술계의 주축으로 만들어 주마."

강하게 다짐한 이화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의지를 머금은 그의 두 눈이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이화수 협회장을 만난 뒤로 어언 한 달 가까이 되는 시간이 지났다.

처음에 의도했던 대로 라이센스 취득 시험에서 내가 책정받은 등급은 E급.

즉, 최하위 등급이다.

그래도 어엿한 라이센스가 생겼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흐뭇하게 협회로부터 발급받은 푸른색 카드를 바라보는데.

"그게 그렇게 좋니?"

가게 소파에 드러누워 텔레비전 시청에 열중하던 유신애 팀장이 찬물을 끼얹었다.

분명 다른 팀장급 헌터들과 교대할 기한이 지난 것 같은데. 도무지 나갈 기색이 보이질 않는다.

"아예 여기에 눌러앉으실 생각입니까?"

"예전에는 좀 지루했는데, 지내다 보니 괜찮은 것 같더라고. 아예 근처에 월셋집도 하나 얻어놨어."

"오신우 클랜장님은 어떻게 하고..."

"그 인간. 또 헌터넷에 글 쓰다가 걸린 거 알아? 아주 머리털을 다 뽑아놓으려다 마음 넓은 내가 한 번 참은 거야. 마누라 소중한 줄 알아야지."

저건 핑계다. 아무리 봐도 그냥 자연스레 놀고먹는 일상에 적응되어,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거다.

게다가 더 당혹스러운 건.

"아저씨. 점심 뭐 드실래? 내가 사 줄게."

"저는 아무거나 좋습니다."

"일식? 중식? 양식? 아저씨 먹고 싶은 걸로 아무거나 골라. 승현이 너도,"

내 가게를 제집 드나들듯 드나들던 유신애 팀장이 무명 아저씨와 제법 친해졌다는 거다.

물론 정체를 아는 건 아니다. 언젠가 통성명을 요구하자. 무명은 이렇게 답했다.

"이름 따위는 버린 지 오래이니 ...묻지 마십시오."

"어쩜...드라마에서 자주 봤어. 아저씨 뭔가 사연이 있구나?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황당한 건, 예상외로 납득해 버렸다는 거다.

단순한 건지. 아니면 감수성이 풍부한 건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타입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가게를 닫을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

아예 눌러앉아 버렸더라면 매일 밤 트레이닝에 상당한 악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기에,

그 사실 하나만으로 위안을 삼아야만 했다.

"그나저나 어쩐다."

최근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운 고민은 세 가지.

첫 번째는 AR-001채널이다.

그때와 비교할 수 없는 성장을 일구어냈건만. 조상신의 의지인지, 아니면 시스템의 판정인진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채널의 입구가 굳게 닫혀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리고 두 번째는 공방 깊숙한 곳에 보관해 둔 피어리스.

아무리 세상에 내놓기 껄끄러운 아이템이라곤 해도, 기껏 형질 변환을 이용해 제조한 신제품이 세상의 빛을 못 보는 건 제작자로서 썩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슬슬 출발해야겠네."

에포나와 약속한 기한이 되었다는 것. 카운터에서 몸을 일으키자 눈을 동그랗게 뜬 유신애가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어디 가?"

"방에 갑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계십쇼."

"까칠하기는. 사춘기니?"

아저씨처럼 낄낄거리는 유신애 팀장을 뒤로하고, 쪽방으로 들어와 미리 챙겨두었던 가방을 둘러메었다.

그와 동시에 흉내쟁이가 스며들듯 가방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준비는 충분하다.

"그럼, 출발해 볼까."

뒷문 앞에 서자, 곧 시스템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 현재 거주 중인 [???] 채널의 시간을 정지하시겠습니까? [Y/N]

[???]라니.

지구도 채널에 포함되는 건가.

작은 의문이 들었지만 당장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집중해야 할 사실은, 지금부터 케이프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것.

[Y] 버튼에 손을 올린 나는, 서서히 잿빛으로 변해가는 세상을 등지고 빛나는 통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74화

"한 님이 돌아오셨다!"

초소를 지키던 에크만의 외침이 마을을 쩌렁쩌렁 울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광장에 모여 신체를 단련하던 엘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 님이 왔다고?"

"드디어...!!!"

광장 여기저기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곧이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쩍쩍 갈라진 육체의 장벽이 마을의 입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어서 근육성장제를..."

"내가 먼저야! 제길, 지난번에 세계수의 껍질을 더 많이 준비했어야 했는데."

"이럴 줄 알고 지난 한 달간 뿌리 능선을 이 잡듯 뒤졌지. 흐흐."

"나도 마찬가지일세. 길 막지 말 고 비키게! 자네들은 위아래도 없는 겐가!"

"어허, 밀지 마십시오. 이런 일에 위아래가 어디 있습니까!"

일제히 정문을 향해 달려가는 엘프들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도 그럴 만했다.

이들이 복용한 것은 고작해야 며칠 분. 얼마 안 되는 양에도 불구하고 두 달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육체가 거대해졌기 때문이다.

이 기적과도 같은 효능의 이유는 하나.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백질 및 영양소 섭취의 효율이 뛰어난 엘프였기에, 근육성장제 안에 담긴 승현의 마나와 시너지를 일으켜 예상했던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특히, 무려 한 달 분을 받은 에크만의 성장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불과 두 달 만에 중간을 조금 웃돌던 에크만이, 겨울숲 부족 최고의 육체미를 지닌 이안과 견줄 수 있을 정도의 성과를 이루어낸 것이다.

이를 직접 목격한 겨울숲 부족의 엘프들이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곧 그들의 눈에 활짝 개방된 정문 너머로 그간 오매불망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승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헐레벌떡 뛰어가던 엘프들의 걸음이 일거에 멈추었다.

"뭐야. 왜 그래?"

"빨리 지나가게, 왜 길을 막는 겐가. 저리 비키...저 계집은?"

모두가 승현의 옆에 담담히 서 있는 흑발의 하프 엘프. 로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주변이 순식간에 적막으로 뒤덮였다. 곧이어, 따가운 시선이 로제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케이프 님의 은혜도 모르는 망할 계집 같으니라고."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온 거지."

"썩 안 꺼져! 한 님, 물러나십시오. 그 계집을 가까이하시면 안 됩니다!"

외침은 야유로. 그리고 금세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원색적인 비난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담담했다. 잠시 흥분한 엘프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승현이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안에 들어있던 근육성장제를 바닥에 쌓아놓기 시작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엘프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저, 저건 아티팩트인가."

"그렇겠지. 아티팩트가 아니고서야 저리도 많은 물건이 들어갈 리 없지."

바닥에 쌓인 근육성장제의 탑은 어느새 승현의 키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물리적으론 불가능한 일. 저건 분명,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아이템이다.

"공간과 관련된 아티팩트는 상당히 귀중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내가 알기론 일정 경지에 이른 마법사만이 제작할 수 있는, 가치가 뛰어난 물건일 게야."

"역시...한 님은 인간 세상에서 높은 신분을 지닌 분이셨군요."

"당연한 거 아니겠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귀물들을 툭툭 꺼내놓을 수 있을 리 없지."

모두가 감탄하던 그때. 탑을 다 쌓은 승현이 가방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느새 앞으로 나선 이안이 한껏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맞아주었다.

"반갑습니다. 한 님.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부동자세로 크게 외친 이안이 슬그머니 승현의 눈치를 살폈다.

지난번 에크만이 한 달 분 근육성장제를 받아냈을 때, 며칠을 부러움에 몸서리쳤던가.

'어떻게든 잘 보여야 한다.'

이번만큼은 그 행운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어야 했기에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장로님은 어디 계십니까?"

"당장 모셔오겠습니다!"

보람이 있었는지, 기회가 찾아왔다. 룬드그렌 장로를 납치해서라도 끌고 오리라 다짐한 이안이 몸을 날리려는데, 안타깝게도 군중의 맨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군. 나를 찾았는가. 여기 있네!"

"이런..."

기회를 잃어버린 이안이 축 늘어진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반대로, 날아오를 듯한 걸음으로 다가온 룬드그렌 장로가 승현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있었나. 그간 자네 생각에 내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네."

"그간 안녕하셨어요, 장로님."

로제가 인사를 건넸지만, 룬드그렌은 답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없는 사람을 대하듯 시선조차 건네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보고도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던 승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여러분께 여기 있는 근육성장제를 전부 드릴 테니,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뭣?! 저, 저걸 전부?"

얼핏 보아도 상당한 양이다. 마을 주민 모두와 공평히 나눈다고 해도 2주는 족히 먹을 수 있는 분량.

잔뜩 흥분한 룬드그렌 장로가 승현을 다그쳤다.

"그래. 부탁이 뭔가. 내 뭐가 되었건 들어주겠네. 세계수의 껍질이 필요한가? 그거라면 자네가 없는 동안 마을 공용 창고에 산더미처럼..."

"대사제님께서 얼마 전, 마을로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원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룬드그렌의 시선이 승현의 뒤를 향해 움직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로제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룬드그렌이 가볍게 이를 갈았다.

'역시, 저 계집이었군.'

사실 비밀이라고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승현이라면 더더욱.

룬드그렌의 심사가 뒤틀린 건 그저 로제의 입에서 대사제의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룬드그렌이 다시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승현에게 말했다.

"허허, 자네는 소식이 참 밝군그래. 맞네. 대사제님께서 얼마 전에 돌아오셨지."

"만나 뵙게 해주십시오."

아무런 미사여구도 없는 담백한 제안. 모두에게 개방된 에포나의 신전이었기에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문제는.

"로제도 함께 가야 합니다."

이어진 뒷부분의 내용이었다. 마을의 원칙상 순혈 엘프가 아닌 로제는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케이프의 배려로 인해 다크 엘프란 멸칭을 얻는 건 간신히 면했지만, 로제 또한 그들이 보기엔 저주스러운 다크 엘프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엘프들의 시선이 룬드그렌을 향해 집중되었다. 모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절대 안 됩니다.'

아무리 근육성장제가 중요하다지만, 원칙을 깨면서까지 얻어낼 수는 없는 법.

아쉬운 마음으로 거절하려던 그때. 룬드그렌의 귓가에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얼마 전 마을로 돌아온, 케이프 대사제였다.

- 단, 로제는 신전의 입구까지만 출입을 허가합니다.

마을의 최고 결정권자의 승인이 떨어졌다. 한 차례 근육성장제를 바라본 룬드그렌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승현에게 손짓했다.

"들어오시게."

* * *

앞길이 좌르륵 갈라졌다.

'세상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이게 그동안 로제가 보던 세상이었던 건가.

차라리 서리감옥 부족에서 보이던 적대감이 훨씬 나았다.

마치 더러운 오물이 지나가는 양. 철저한 무시와 경멸의 시선이 쏟아졌다.

간혹 로제의 등 뒤에 대고 침을 뱉는 자도 있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마저도.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거절했어야 했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오로지 내가 로제의 고집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함께 가요. 저도 파수꾼이기 이전에 에포나 님을 모시는 신자. 한에게 모든 걸 맡길 순 없어요."

채널의 통로를 넘어온 후 마주한 로제의 눈동자에선 강한 결의가 엿보였다.

그렇기에 어렴풋이 로제의 사정을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동행했던 건데.

'이건 너무 심하잖아.'

기껏해야 서리감옥 부족이 보였던 적대감 정도를 생각했건만.

이쪽을 향해 쏟아지는 경멸의 시선은 옆에 선 나조차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도저히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 옆에 선 로제는 입술을 앙다문 채 묵묵히 신전을 향해 걷고 있었다.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어깨가 작게 떨리는 게 보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너무 신경 쓰지 마. 나는 네 편이니까."

가볍게 로제의 어깨를 두들겨 주는 것뿐이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이쪽을 바라보던 로제는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지금까지 계속 이런 대접을 받은 건가...'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라면 견딜 수 있었을까,'

답은 '아니오' 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로제가 어찌 보면 미련하기도, 그리고 어떻게 보면 존경스럽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걸음을 옮기자, 곧 마을 외곽에 지어진 신전이 나타났다. 처음 와보는 장소다.

'이런 곳에 있었구나.'

정갈해 보이는 신전.

그 앞을 지키던 거구의 엘프 둘이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로제의 앞에 섰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종족의 피가 섞인 자는 에포나 님을 모시는 신전에 출입할 수 없습니다."

"...저는 밖에서 기다릴게요."

목소리를 늘어트린 로제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곧이어, 그들이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 님께는 죄송하지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자, 여기 제가 가져온 장비 전부입니다."

로제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사항이기에, 그들에게 내가 메고 있던 가방을 풀어 건넸다.

신전에 들어가기 위해선 행여라도 위험이 될 만한 물건을 소지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익스플로전 포션을 비롯해 유틸리티 베스트와 벨트마저 가방 안에 전부 넣어둔 상황. 완벽한 비무장이 된 나를 향해 다가온 엘프가 진심으로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아, 한 님을 의심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잠시만 협조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곧이어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내 몸 구석구석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일종의 몸수색이로군. 아차.'

순간 흉내쟁이의 존재를 들킬까 걱정했으나. 괜한 기우였다.

그들이 뿜어낸 마나가 가방 내부를 샅샅이 뒤진 후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수색을 마친 엘프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케이프 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안으로 드시지요."

"다녀와요. 한."

"금방 갔다 올게."

'너는 바깥에서 기다려.'

행여 케이프에게 들킬 수 있기에, 신전 입구 그림자에 흉내쟁이를 숨겨둔 후 안으로 들어섰다.

지난번 감시자를 섭취한 이후. 흉내쟁이의 가동 범위가 300m까지 증가하였기에. 거리에 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뭐, 정 안 되면 최대 거리를 유지하면 되는 거니까.'

흉내쟁이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엘프들을 따라 조용히 걸음을 옮기자 신전의 내부가 나타났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취향 한 번, 대단하군.'

마치 룬드그렌 장로를 그대로 붙여넣은 듯, 터질 듯한 근육을 자랑하는 석상들이었다.

일렬로 주르륵 늘어선 동상들을 지나쳐 예배당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른한 오후 햇살. 혹은 갓 말린 이불에서 나는 향기 같은 나른하고도 아늑한 기운이 어느샌가 내 주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동행하던 엘프를 바라보자, 황홀한 표정이 된 그가 자랑스레 말했다.

"느껴지십니까. 이것이 바로 역대 대사제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니셨다는 케이프 님께서 발하시는 신성력입니다."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주위를 둘러싼 기운에선 한 점의 악의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에포나가 틀렸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은 없지만. 어머니의 품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절로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신성력.

홀린 듯 이를 따라 앞으로 걸어가자, 곧 예배당 옆에 딸린 작은 문이 나타났다.

나를 안내하던 엘프가 조심스레 문을 두들기고는, 귀를 가져다 댄 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케이프 님께서 입장을 허가하셨습니다. 행여라도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그럼, 언제나 에포나 님의 은혜와 평화가 깃들기를."

성호를 그은 엘프가 뒤로 물러났다. 케이프의 신성력에 홀려 행여라도 중립을 지키지 못할까. 마음을 다잡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대사제 케이프입니다."

괜한 걱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시취.

나를 맞아준 케이프에게서, 검은 숲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강렬한 악취가 느껴졌으니까.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75화

케이프의 첫인상은 예상과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150cm가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체구와 아름답지만, 병색이 완연한 얼굴.

투명한 연녹색 눈동자에선 단 한 줌의 사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부끄럽지만 배움이 짧은 터라 인간의 예절을 습득하지 못했으니, 행여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맑고 차분한 목소리.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엷은 미소를 띤 케이프가 가까이 다가왔다.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놀라셨습니까?"

"그게 무슨...?"

"사악하고, 음흉하며, 무언가 꿍꿍이가 있으리라 생각하셨던 거 아닙니까?"

연녹색의 눈동자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페이스에 휘말릴 것 같았기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견문을 쌓는 여행자로서 겨울숲 부족의 대사제이신 케이프님을 만나 뵈러 온 겁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케이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미소는 누가 보아도 정신을 빼앗길 만큼 자애롭고 성스러웠다.

"전부 사실입니다."

"...?"

"한 님. 아니, 한승현 님께서 알고 계신. 그리고 의심하고 계신 모든 것."

당연하다는 듯 이어지는 이야기. 케이프의 태도가 너무나도 담담했기에, 나는 순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전혀 알아챌 수 없었다.

"전부, 제 소행이란 뜻입니다."

무슨 의도지?

순간 넋을 잃었던 나는, 이윽고 나타난 시스템의 메시지에 정신을 차렸다.

- 디버프가 감지되었습니다.

- 시스템이 사용자에게 적용된 디버프를 분석합니다.

은연중에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던 건가.

황급히 초점을 바로잡자 케이프의 눈동자에 어렸던 빛이 사라졌다.

"역시. 안 통하는군요. 실례를 범했습니다."

"...무슨 짓이지."

경계해야 한다.

뭔진 몰라도 평범한 스킬은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간단한 테스트였을 뿐.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는 됐어. 그보다,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저의가 궁금한데."

"당신은 제게 꼭 필요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먼저 진실한 모습을 보이는 게 우선이라 판단했습니다."

내 말투가 하대로 변했음에도 케이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기뻐 보였다.

연노랑 빛의 눈동자를 반짝인 케이프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상하게도 묘한 우월감이 느껴졌다.

"협조가 필요하다는 건가. 어느 정도 나에 관해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말씀하십시오. 기쁜 마음으로 경청하겠습니다."

"나는 특별하지 않아."

"자신을 과소평가하시는군요."

"난 여느 엘프처럼 신체 능력이 뛰어난 것도, 엘븐 아르테스처럼 특수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날 필요로 하는 거지?"

"권능."

"...?"

"제겐 차원을 넘나드는 권능이 필요합니다."

그랬군. 별거 아니었어.

무의식적으로 케이프의 이야기에 수긍하고 넘어가려던 찰나. 마치 나를 가로막듯 또다시 메시지가 나타났다.

- 디버프의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심리 장악]

- 대상의 생각을 시전자가 의도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듭니다.

이 스킬은 적용된 대상이 자신의 상황을 완벽히 인지하는 순간 파훼 됩니다.

홀린 듯 몽롱하던 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왔고, 어느샌가 코를 찌르는 듯한 시취가 다시금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시선을 더 흐트러트렸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지?"

"제 눈과 귀는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잠에 빠졌던 에포나가 부활한 것도. 당신과 로제. 그리고 서리감옥 부족이 에포나와 접촉한 것도."

어떻게 그 모든 걸 알고 있는 걸까.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정신 조작에 걸렸다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렇습니다. 그보다 의외로군요. 비록 한 번뿐이라곤 해도 그간 룬드그렌 장로를 제외하곤 심리 장악을 견뎌낸 자가 없었는데. 확실히 한승현 님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룬드그렌 장로도 같은 일을 겪었던 건가?

아니, 그보다 심리 장악을 견뎌냈음에도 불구하고 케이프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건...장로도 케이프와 연관되어있던 건가.

가슴 한 켠에 의심을 묻어둔 나는 반쯤 풀린 눈을 들었다.

"칭찬은 필요 없다. 그럼,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지."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케이프의 눈에 어린 광채가 한층 더 깊어졌다.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는 게 확실했다.

행여라도 아까와 같은 상황이 벌어져선 절대 안 되었기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네가 그간 벌인 행동의 이유를 알고 싶다."

"흐음..."

초점을 흐트러트린 내 눈을 가만히 응시하던 케이프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자신의 턱을 두들겼다.

"생각보다 피곤한 타입이시군요. 암시에 걸려든 후에도 이 정도면 본성이라고 해야 하나. 뭐, 상관없을 것 같긴 합니다."

"그렇다."

눈이 빠질 듯 아팠지만, 결코 티를 낼 순 없었다. 내 반응을 살피며 잠시 침묵하던 케이프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병사가 필요합니다."

"병사?"

"그렇습니다. 그 누구와 맞붙어도 지지 않을, 오직 저만을 위해 움직이는 병사 말입니다."

병사와 그간 벌인 일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마음속으로 의문점이 쌓여가던 와중.

"엘프가 조화의 종족인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들어본 적 있다."

"그렇다면 설명이 빠르겠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케이프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전에, 먼저 이걸 봐주십시오."

흐릿한 초점 사이로 부유하는 형체들이 나타났다. 정확히 볼 순 없었지만, 케이프와 마찬가지로 하나같이 자욱한 시취를 내뿜고 있었다.

"제가 부리는 권속들입니다. 몇몇 엘프들은 반(反) 정령이라 부르더군요."

반 정령이라면 들어본 적 있다.

- 반(反) 정령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네. 전설에 따르자면, 그들은 오로지 악의로 가득한 영체들. 만나면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모른다네.

분명, 세계수의 껍질을 채취하러 능선에 올랐을 때, 장로가 이런 이야기를 했었지.

"그런가."

"권속들과 완전히 융합된 자는 저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병사가 됩니다. 아, 한승현 님이 만년빙산에서 만났던 윈딩고. 바이슨 또한 제 작품이죠."

"제법 강하더군."

"미완성품이었습니다. 그보다 당시에 사용되었던 폭약이 더 굉장했습니다. 아, 폭약이 맞나요? 매직 아이템이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다."

"아무튼. 솔직히 바이슨의 눈을 빌려 지켜보던 와중, 감탄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답니다."

"내가 사는 세계의 제작품이다."

제작자가 나임을 밝히지 않은 건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케이프와 아레스 클랜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역시...굉장합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케이프가 손뼉을 마주쳤다. 점점 붉어지기 시작하는 눈동자엔 탐욕이 가득했다.

"그 정도 수준의 제작 기술을 보유한 차원이라니. 점점 더 당신의 능력이 탐나는군요. 저에게 협조하십시오. 대가는 충분히 지급하겠습..."

판단이 적절했음을 확신한 후, 재빨리 케이프의 말을 끊었다.

"아직 질문이 남았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런 수고를 들여 엘프 부족을 분열시킨 거지? 병사가 필요하다면 그냥 네 권속을 덮어씌우면 될 일 아닌가."

"그야, 본 계획에 들어가기 전, 실험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실험체?"

"그렇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다크 엘프를 시작으로, 모든 엘프를 제 휘하의 권속으로 만드는 것. 아직 연구가 부족하기에 표본을 쌓기 위한 실험체가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로제의 손에 죽은 사절단들은 어떻게 된 거지."

"부작용입니다. 간혹 융합이 완전하지 않은 개체는 무작정 생전의 마지막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움직이더군요.

융합 과정의 실수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탓에, 하마터면 크게 당할 뻔했습니다."

케이프가 자신의 사제복을 젖혔다. 어렴풋이 드러난 새하얀 피부 위로 아로새겨진 깊은 흉터가 보였다.

'저게 그...'

지금까지도 로제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원인이자, 서리감옥 부족과 겨울숲 부족의 골을 더 깊게 만든 원흉이다.

가만히 흉터를 매만지던 케이프가 자랑스레 말했다.

"뭐, 어쨌거나 이걸로 인해 상황이 더 좋아졌으니, 저로서는 훈장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훈장이라.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다.

"그렇군. 마지막으로 묻겠다. 두 부족을 갈라놓기 위해 무슨 방법을 사용한 거지?"

"간단합니다. 이곳에 닥친 시련의 원흉을 지목했을 뿐입니다.

"원흉?"

"갑작스럽게 일이 발생하면 그 이유를 찾는 게 이치 아니겠습니까?"

얼핏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창밖을 응시하던 케이프가 작게 웃었다.

"순수성을 깨어버린 하프 엘프. 아니, 다크 엘프들을 그 원흉으로 지목하니 간단하더군요."

"그걸 순순히 믿어주던가."

"암시의 힘과 에포나의 성체가 가진 권능이면 충분했습니다."

"다크 엘프란 멸칭도 그때 붙은 거로군."

"그렇습니다. 얼마나 우습던지. 눈이 뒤집혀 바로 전날까지 죽고 못 살던 이웃들을 쫓아내는 꼴이란...."

케이프가 재미있다는 듯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아까의 성스럽고, 차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손으로 눈가를 훔친 케이프가 별안간 내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지만, 필사적으로 멍한 표정을 유지하며 물었다.

"무슨 짓이지?"

"조화의 여신께서 재미있는 일을 꾸미셨군요."

와드득.

앞섶이 우그러지며 주머니에 든 구슬이 부서졌다. 이전에 챙겨왔던, 에포나의 사념을 담고 있던 구슬이다.

허공으로 비산하는 빛의 편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이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잡한 그릇...여기에 담아낸 기억을 읽으려던 것 같은데. 유치한 잔꾀입니다."

생긋. 비틀린 미소가 느껴졌다.

조금 전 심리 장악을 시전할 때와 같은 표정이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케이프가 손뼉을 딱, 쳤다.

"자...그럼, 이야기도 끝난 것 같으니!"

케이프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동시에, 머릿속을 파고드는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 디버프가 감지되었습니다.

[기억 왜곡]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그 자리에 시전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채워 넣습니다.

시전 시간으로부터 최대 하루까지의 기억에 간섭할 수 있습니다. 이 스킬은, 적용된 대상이 자신의 상황을 완벽히 인지하는 순간 파훼 됩니다.

- 무효화가 가능한 디버프입니다. 방어하시겠습니까?

'기억을 조작하는 디버프라...'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케이프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내게 정말 자신의 능력이 통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겠지.'

내가 조작된 기억의 내용을 모르는 이상 거짓말을 할 순 없을 테니까.

어쩔 수 없다. 위험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순순히 걸려들어 주는 수밖에 없다.

굳이 이런 방법을 택한 이유는.

'우리 외에 수많은 무언가가 있어.'

조금 전부터 내 감각이 맹렬히 경고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은근히 가해지는 압박감으로 보아 절대 아군은 아니다.

'대비책은 있으니까. 시스템의 메시지가 사실이라면 기억을 잃더라도 괜찮을 거야.'

결단을 내린 후 디버프를 받아들이자, 곧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 *

"감사합니다, 대사제님. 불안했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단지 대변인일 뿐. 모두가 자애로우신 에포나 님의 덕입니다."

승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에포나를 따라 어설프게 성호를 그었다. 잔뜩 굳어있던 아까와는 달리 표정엔 여유가 가득하다.

케이프와 가벼운 대화를 몇 차례 나눈 승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행자 한승현 님의 앞길에 늘 축복이 함께하길..."

예배당을 나서는 승현의 등을 향해 재차 성호를 그은 케이프가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케이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배당 구석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허허...대사제님께서 보시기에 한 군은 어땠습니까?"

겨울숲 부족의 장로. 룬드그렌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를 향해 케이프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심리 장악을 걸어보았지만, 성향을 보아하니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냥 보내셨습니까? 혹여 문제가 될 것 같으면 조금 아깝긴 하지만, 제가 나서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냥 모른 척 내버려 두세요. 통로에 간섭할 수 있는 자를 괜히 건드렸다간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장로가 우려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간단한 몇 마디 대화로 승현을 테스트해보니, 기억이 확실하게 조작되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쯤 여기서 나누었던 이야기는 승현의 뇌가 멋대로 재구성한 복음(福音)이 되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

'자력으로 풀어내는 건 말도 안 되는 거고.'

스스로 기억을 조작당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만에 하나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소지한 아티팩트까지 전부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걸로도 부족해, 마법을 사용할 경우를 상정해 차원의 틈새에 수천 마리의 권속을 대기시켜 놓기까지 했다. 아까 소환했던 건. 그 중 극히 일부일 뿐이고.

승현이 가진 건 의복과 마력이 담기지 않은 조잡한 장신구 몇 개. 마나가 움직이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변수는 없습니다."

케이프의 목소리에 담긴 강한 확신을 느낀 듯, 룬드그렌 또한 안심하는 눈치였다.

"허허...케이프 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아,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 늙은이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만간 또 뵙도록 하죠."

짧은 대화가 끝났고. 고개를 숙인 장로가 녹아들 듯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예배당에 홀로 남은 케이프가 자신의 가느다란 팔을 보며 중얼거렸다.

"서둘러야 해. 시간이 얼마 없어..."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76화

"어땠어요?"

로제가 에포나의 신전에서 나온 승현에게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런데,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좋은 시간이었지."

신전에 들어가기 전까지 잔뜩 굳어있던 얼굴에는 편안함과 자비로움이 가득했다.

"왜, 왜 그래요...?"

당황한 로제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평소의 승현은 결코 저런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냥. 세상이 아름다워 보여서."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든 로제가 조용히 다가가 속삭였다.

"에포나님께서 부탁하신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아, 그런 게 있었지. 참. 괜한 걱정이었어."

"..."

"케이프님처럼 올곧으신 분이 그럴 리가 없지. 에포나가 잘못 생각한 거야."

"...정말 괜찮은 거예요?"

승현이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로제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도 마을을 한 바퀴 돌아봤지만...별다른 소득은 없었어요."

눈총만 잔뜩 받았을 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지만, 그래도 마음이 좋을 수는 없었다.

찝찝한 결과였지만 더 마을에 머무를 수도 없는 일.

"그, 그럼 볼일도 끝났으니, 이제 가요. 어서요."

반쯤 넋이 나간 승현의 손목을 잡아끈 로제가 막 마을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로제 양. 볼일은 전부 끝난 겐가."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네. 장로님."

어느새 나타난 장로를 향해 로제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본체만체한 룬드그렌 장로가 승현을 향해 다가갔다.

"그래. 자네가 원하던 대로 케이프님을 직접 뵙고 나니 어떻던가."

로제를 볼 때와는 달리 한없이 따뜻하고 인자한 표정. 승현 또한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이 풍족해지는 기분입니다. 장담컨대, 대사제님을 만나 뵌 것이 이번 여행 중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소득이라...허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먼. 그래, 자네는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인가. 일정이 없다면 우리 집에 가서 지난번처럼 근육에 대한 밀도 있는 토론을..."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갑작스레 딱딱히 굳은 표정을 보니 룬드그렌 또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전과 같은 반응. 정확히 조금 전의 기억만 지워졌군. 역시, 굉장한 솜씨다.'

이를 확인한 장로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케이프의 일과는 별개로 승현이 가진 지식은 진짜배기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포기해야겠구먼.'

가르침을 받고 싶었지만, 아직 기억이 조작된 지 얼마 안 된 승현을 자극해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니 오늘은 이쯤 물러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에포나의 신탁과는 별개로, 육체가 낼 수 있는 극한의 미(美)에 푹 빠져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장로는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아쉽지만...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굳이 이후의 거취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둘 중 하나다. 원래 살던 차원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에포나를 만나러 가거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럼, 조심해서 가게. 다음에 또 보세나."

케이프는 특별하다.

다른 엘프들에 비해 허약한 육체를 타고난 대신, 그녀에겐 생명체를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있는 정신 조작 능력이 있다.

즉, 타고난 지배자란 뜻이다.

게다가 예전이라면 모를까.

세계수가 사라진 이상, 케이프의 능력은 절대 자연적으로 파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승현의 발길이 어딜 향하든 상관없다.

어차피 모든 일은 케이프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테니까.

"이 모든 건 엘프의 번영을 위해서이다."

제자리에서 한참 승현과 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로가 오래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 * *

"뉘신가."

머릿속을 가득 메운 걱정으로 인해, 침대에 누운 채 뒤척이던 룬드그렌이 몸을 일으켰다.

문 앞에서 느껴지는 자그마한 인기척. 한밤중에 찾아온 걸 보니 결코 좋은 목적은 아닌 듯했다.

"답하지 않겠다, 이건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경계심을 유지하며 천천히 문을 열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너는?"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어요."

로브를 뒤집어쓴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

왜소한 체구.

케이프였다.

그간 이어진 맹추위로 인해 지금은 어렴풋한 흔적만이 남은 마을 외곽의 숲. 케이프는 그곳에서 홀로 지내는 소녀였다.

"...이 한밤중에 말인가."

여기까지 보자면 그저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마을에 알음알음 떠도는 소문이 케이프를 집 안으로 들이길 주저하게 했다.

웬만해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케이프였지만, 룬드그렌은 그녀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다.

'숲의 마녀라고 불린다지.'

간혹 목격될 때면 늘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린다거나, 한밤중에 알몸으로 숲을 돌아다닌다거나 하는.

물론 그런 뜬소문을 전적으로 믿진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세계수의 명이 다했다고 들었습니다."

다짜고짜 황당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당황한 룬드그렌이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세계수가 뭐 어쨌다고?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밤이 늦었으니 돌아가거라. 나는 네 장난에 어울려 줄 만큼 한가하지 않다."

덤덤히 말을 내뱉는 룬드그렌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걸 어떻게?'

케이프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지난 오십여 년간 마을의 엘프들에게 꼭꼭 숨겨두었던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겨울숲 부족이 머무는 이곳은 일 년 내내 포근한 눈이 내리는 침엽수림이었다.

자원은 풍족했고, 날씨는 시원했다.

한데, 한순간에 모든 게 바뀌었다.

포근한 눈송이를 실어다 주던 바람은 살을 에는 삭풍으로. 그들을 비춰주던 태양은 짙은 먹구름으로.

원인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세계수의 소멸.

이런 현상이 일어남과 동시에 대지의 중심을 굳건히 지키던 세계수의 수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내심 경악하는 장로를 향해 케이프가 빙긋 웃었다.

"오십여 년쯤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시기까지 정확하다.

지금까지 이 사실을 숨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

룬드그렌을 비롯한 일부 하이 엘프만이 세계수의 본체를 정확히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하이 엘프의 피가 흐르는 자는 센티넬 로드인 베일과 장로인 룬드그렌. 그리고 얼마 전 태어난 베일의 딸, 로제뿐이다.

예외가 있다면 제오르그 정도일진대.

'평범한 엘프인 케이프가 어떻게?'

그녀에게선 하이 엘프 특유의 정제된 마력은 느껴지지 않는다.

혼란스러워진 장로가 온 힘을 다해 머리를 굴리던 그때, 이질적인 기운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 하이 엘프가 공통적으로 타고난 능력, 정신 공격 내성이 발동되었다.

"무슨 짓이냐!"

뒤로 물러난 장로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뿜어졌다.

"자, 잠깐만요...크흑..."

연약한 케이프는 그의 기세를 감당할 수 없다. 점점 죄여오는 압박감에 컥컥거리던 케이프가 간신히 쥐어짜듯 입을 열었다.

"저는...장로님을...도와드리기 위해 온...겁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숨이 끊어질 것 같았기에, 기세를 거둬들인 장로가 차갑게 물었다.

"말해라. 무슨 속셈인 게지?"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케이프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한참 호흡을 고른 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장로님의 근심...저는 그 해결 법을 알고 있습니다."

"네가 뭘 안단 말이냐. 방금 일은 없던 셈 칠 테니, 돌아가거라. 더 이상의 용서는 없다."

"정말 엘프의 명맥이 이대로 끊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

룬드그렌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게냐."

"제오르그 대사제님께선 더 이상 에포나 님을 영접할 수 없게 되었다 들었습니다."

"..."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케이프를 바라보았다. 이건 오로지 제오르그와 그만이 알고 있는 사실. 여기까지 알고 있다는 건, 부정이 무의미하단 뜻이다.

"...그래. 사실이다."

룬드그렌이 수긍하자, 케이프가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걸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우습나?"

"아뇨,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급히 손사래를 친 케이프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곤 순식간에 아까와 같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조소하듯 물었다.

"그래서, 에포나 님께 버림받으신 심정이 어떠십니까."

"우린 버림받지 않았다. 에포나 님께도 무언가 사정이..."

있을 리 없었다.

있어서는 안 되었다.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많은 의미가 담긴 한 마디.

세계수의 존재 자체가 사라짐으로써 다른 차원과의 교류도 불가능해졌다.

센티넬의 정예 멤버를 추려 구성했던 조사단도 소식이 뚝 끊겼다.

이대로 있다간 향후 수십 년 안에 이 대륙에서 엘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사실 머리론 알고 있었다.

이 대지의 영혼에 깊게 뿌리 내린 세계수를 거두어간 건, 에포나의 의지였다는 걸.

"현실이라..."

다만, 지금껏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저는 룬드그렌 장로님이 최선을 다하셨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케이프가 위로하듯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달콤했기에,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조금 감정이 격해진 룬드그렌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서...네겐 해결책이 있다는 거냐."

질문을 던지면서도 딱히 기대하진 않았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케이프는 자신만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춘기에 접어든 엘프의 치기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당당했다.

호기심이 동한 룬드그렌이 케이프를 채근했다.

"말해 보거라."

"제가 여러분들의 에포나가 되겠습니다."

푸학.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그만큼 허무맹랑했기 때문이다.

"막 성장기에 접어든 어린 엘프들도 그런 상상은 하지 않는단다.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는진 몰라도, 오늘 일은 비밀리에 부쳐줄 테니 돌아가거라."

"제 이야기가 헛소리로 들리십니까?"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다.

막 케이프를 내보내려는데.

"이러면 믿으시겠습니까."

케이프의 몸이 밝은 금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건...?"

신성력.

오로지 대사제만 사용할 수 있다는 성스러운 힘이 케이프의 전신을 물들였다.

이 황당한 상황에 룬드그렌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제오르그가 있는데...대체 어떻게 된 게냐. 대체 어떻게. 언제부터 에포나 님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지?"

"장로님께서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신가요?"

"그건..."

선뜻 답하지 못했다.

전신이 완전히 금빛으로 물든 케이프가 손뼉을 탁, 쳤다.

"어차피 세계수가 시들어버린 이상. 이곳을 되살릴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계수가 있던 만년빙산 너머로 조사단을...크흠, 그들이 행여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거나, 혹은 새로운 대지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정답은 그게 아닙니다."

정답?

룬드그렌이 홀린 듯 고개를 들자, 케이프가 속삭이듯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룬드그렌이 기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그 이야기. 진심으로 하는 겐가?"

"예. 그렇습니다. 제가 가진 능력과 권능. 그리고 권속의 힘이면 충분합니다."

케이프는 당당했다.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닐세! 그들을 이용해 다른 차원의 땅을 빼앗겠다고? 자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고 있는 겐가?"

"빼앗지 않으면. 이대로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제 그만 인정하십시오. 에포나는 저희를 버렸습니다."

"..."

무언가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따악. 케이프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는 문을 활짝 열어, 하늘을 가리켰다.

"제가 가진 권능에 장로님의 힘을 더하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이게...무슨?"

달이다.

무려 오십 년 만에 보는 만월.

다리에 힘이 풀린 장로가 털썩, 주저앉았다.

"저라면 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에포나에게만 허락된 '권능'이 룬드그렌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만월을 배경으로 선 케이프가 손을 내미는 순간. 룬드그렌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희망을 보았다.

오로지 에포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이상. 의심의 여지는 없다.

"저희가 모두의 구원자가 되는 겁니다."

"..."

쿵. 굽은 무릎이 땅에 닿았다. 결코, 억지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행동이다.

"...이제부터 자네. 아니, 케이프 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케이프가 어깨에 손을 짚었다. 작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권능에, 룬드그렌이 몸을 움찔, 떨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케이프는 에포나에게 버림받은 엘프들의 구원자가 될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 '아주 약간'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베일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무력집단인 센티넬의 수장이자 최강의 하이 엘프. 베일의 존재였다.

'종족'의 명맥을 중요시하는 룬드그렌과는 달리, 베일은 '엘프' 그 자체를 사랑했으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베일이 비록 일부라곤 해도 엘프를 희생하는 계획에 찬동할 리가 없었다.

장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케이프가 빙긋 웃었다.

"베일 단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법이 있으신 겝니까?"

의아했다.

겨울숲 부족의 모든 엘프들이 덤빈다고 하더라도 베일을 감당할 순 없다. 심지어 같은 하이 엘프인 룬드그렌마저도.

무력으론 승산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케이프는 자신만만했다.

"그 부분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그리고 장로님께선 지금 당장, 부족의 모든 '엘프'를 소집해 주십시오."

두 눈으로 똑똑히 권능을 목격한 이상, 룬드그렌에게 불복이란 있을 수 없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마을에 남아있던 모든 이종족과 하프 엘프가 사라졌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마을 외곽에서 베일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7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