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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 *

잠시 후.

영감님을 뒤로한 우리는 거대한 요르의 등 뒤에 탄 채, 안개 가득한 빙산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

새하얀 안개 속을 말없이 지나가던 와중, 문득 영감님과 로제의 대화가 떠오른 나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대는 로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제가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머니에게 듣기론 가장 위대한 전사 중 한 분이셨대요. 그것도, 엘프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을 통틀어서 말이죠!"

그녀의 표정에선 아버지를 향한 존경심이 드러났다.

훌륭한 아버지라,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말이죠, 제가 가진 일몰은 원래 한 세트인데, 센티넬인 아버지와 기사였던 어머니를 위해 두 분의 친구였던..."

로제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던 그때였다.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음과 동시에.

쉬이이익-

산을 오르던 보리스가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부드럽던 털이 빳빳이 세워졌고, 몸에선 기이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재잘대던 로제 또한 입을 다문 채,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도 느꼈어요?"

"대강은."

지난번 샤샤가 갇혀있던 동굴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원념, 분노, 절망, 공포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는, 마치 끈적한 진흙 같은 기운이다.

그것은 저 멀리에 있는 어두컴컴한 빙굴(氷窟)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곳을 향해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리스의 떨림 또한 강해졌다.

더 이상은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무렵, 땅으로 내려온 나는 보리스를 향해 손짓했다.

"너는 이제 돌아가도 돼. 고생했다."

두두두두두-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보리스. 평소의 움직임이 아닌, 네 발을 이용해 마치 구르듯이 산비탈을 도망쳐 내려갔다.

"대체 안에 뭐가 있길래..."

다급한 보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로제가 중얼거렸다.

대답 대신 가방에 있던 익스플로전 포션을 모두 꺼낸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유틸리티 벨트에 그것을 끼워 넣었다.

내 나름의 전투 준비인 셈이다.

발걸음을 옮겨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미적지근한 공기가 느껴졌다.

"대체 여긴...뭘까요."

"그러게. 윽, 너무 지독한데."

우리를 덮친 건, 진한 식초와 비슷한 시큼한 냄새였다.

순간 가스마스크를 꺼낼까 생각하던 나는 가방을 향해 가져갔던 손을 거두었다.

'혼자만 쓰면 미안하니까...'

워낙 비싼 물품이기에, 하나밖에 구비 해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검은 숲의 늪지처럼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기에, 따끔거리는 코를 감싸 쥔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낯익은데. 어디서 맡아봤더라...'

기억을 더듬던 나는 춘식이를 떠올렸다. 매주 수요일마다 발을 씻는다던가. 샤워는 매달 14일이었지, 아마.

'비슷하네. 진짜로.'

어차피 방 청소도 일 년에 한 번 하는 놈인데, 그놈이라면 여기서 편안히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무슨 생각 중이길래 얼굴이 죽상이에요?"

"있어. 고향 친구."

"맞다, 한은 고향이 있었죠. 가끔 잊어버리게 되네요. 고향 친구라...저는 친구가 없어서 그런지, 부럽네요."

"뭐, 친구가 별거야? 너랑 나도 이만하면 친구지. 같이 밥 먹고, 시시콜콜한 얘기도 하고."

"...정말요? 그 얘기 진짜죠? 무르기 없기에요?"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이던 로제에게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크르르륵-

전방에서 쇠를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나 라이트의 밝기를 올리자 눈에 들어온 건.

"저건...?"

구석에 몸을 덜덜 떨며 웅크리고 있는, 반나체의 남성이었다.

특이한 점은 피부가 시커멓게 죽은 보랏빛이라는 것과.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나온 뾰족한 귀. 그리고 커다란 체구.

외형만 보았을 땐 영락없는 엘프인데. 색은 다크 엘프에 가깝다. 그보다 대체 왜 여기에?

경계심을 유지한 채 그를 향해 다가가려는 나를 로제가 만류했다.

"혹시 모르니 거리를 좀 두는 게 어떨까요."

"그게 낫겠지. 거기 당신, 누구십..."

크아아악-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사내가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아무런 경고 신호조차 없이 가해진 빠른 기습이었음에도 이상하게 느린 그림처럼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피해요, 한!"

"이크."

카랑카랑한 로제의 외침이 울렸고, 사내의 손톱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튼 내 앞섶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손에서 놓친 마나 라이트의 불빛이 어지러이 동굴의 벽면을 장식했다.

황급히 내 앞을 가로막은 로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역시, 뭔가 수상했어요. 물러서요, 한."

촤르륵-

로제가 손을 가볍게 털자 쭉 늘어난 일몰이 새하얀 백광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마나 라이트의 불빛보단 약하지만, 봄날 오후의 태양처럼 따스하고 나른한 빛이었다.

나 또한 척추분쇄자를 뽑으려던 찰나.

크르르르륵-

멍하니 일몰을 바라보던 놈이 갑작스레 몸을 돌려 꽁지가 빠져라, 동굴 안으로 도망쳐버렸다.

로제가 황당하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덤벼드는 분들은 수없이 보았는데, 저렇게 도망가는 분은 처음이네요."

"...그러게. 나는 대체 왜 얻어맞은 거야?"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떨어진 마나 라이트를 주워들었다.

다행히도 아슬아슬하게 스친 모양인지 걸치고 있던 요르의 가죽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뭐야, 저 녀석..."

찝찝한 기분을 애써 떨쳐버리며 마나 라이트의 오물을 닦고 집어넣으려는데, 순간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상하게 허전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지퍼를 열고 손을 집어넣자.

'어...?'

흉내쟁이 특유의 서늘하고 진득한 느낌 대신 텅 빈 허공만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갈 뿐이었다.

몇 차례나 휘저어 봐도 똑같았다.

마나 라이트를 비추자,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할 시커먼 어둠 대신 텅텅 비어버린 가방의 내부만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이게 무슨...'

흉내쟁이가 사라졌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53화

"흘흘, 로제 양이라면 별문제 없겠지."

털가죽에 몸을 묻은 제오르그가 중얼거렸다. 도망쳐온 보리스는 아직도 불안한지, 연신 털을 빳빳이 세우며 산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너도 명색이 왕의 핏줄을 이었는데. 덩치에 안 맞게 어찌 그리 겁을 먹은 게냐."

슬쩍 웃은 제오르그가 손을 치켜들자, 곧 그곳에 새하얀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나도 이제 힘들다, 이놈아. 살날도 얼마 안 남았고."

그리고는 가볍게 보리스의 등을 쓰다듬었다. 떨림이 서서히 멎어 들었다. 반면 제오르그의 주름진 얼굴은 눈에 띄게 파리해지기 시작했다.

"흘흘, 역시 한창때만큼은 안 되는구먼..."

메마른 몸에서 기운을 짜냈더니 억지로 붙잡아두었던 수명이 조금 더 줄어든 모양이다.

가쁜 호흡을 가다듬던 제오르그가 로제를 떠올렸다.

"베일의 딸이라..."

여느 부족민들과 달리, 그는 로제에게 별다른 악감정이 없었다.

반대로 평범한 인간인 승현에게 큰 관심을 두진 않았다.

족장을 비롯해 다른 부족원들은 승현에게 큰 호감을 품은 것 같지만, 그에게 있어 승현이란 로제가 움직일 동기를 부여해 줄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만년빙산을 둘러싼 결계를 뚫고 그의 숙원을 이뤄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로제뿐이다.

"에포나의 은혜롭고 영광된 축복이 함께하기를."

지금의 제오르그가 할 수 있는 건, 그가 믿는 신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것뿐.

이 장막이 걷히면, 가장 먼저 산을 올라 에포나 님을 영접하리라.

그리 다짐한 그는, 눈을 감고 기도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 * *

흉내쟁이가 내게 귀속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사실상 녀석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종족도 불명, 신원도 불명. 아는 거라고는 BETA-0702라는 모호한 이름뿐. 그것마저도 상태창 덕분에 알아낸 부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간혹 스치듯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건 모른다는 답변, 혹은 무응답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한 일탈일지 내가 모르는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

"무슨 일이에요? 한?"

텅 빈 가방을 멍하니 보고 있던 게 걱정이 되었는지 로제가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체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이상, 흉내쟁이는 쉽사리 드러낼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안으로 더 들어가 보자."

도망가더라도 바깥쪽으론 향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빛이 있는 곳에선 내가 없으면 흉내쟁이의 활동이 극도로 제한되니까.

가장 큰 문제는 흉내쟁이가 보관하던 물품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비상식량도, 각종 편의 도구들도. 그리고 생존 장비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나에게 있어 흉내쟁이는 없어선 안 될 귀한 인력이다.

게다가 녀석이 없으면 백색의 연금술사, 베타는 누가 연기한단 말인가.

'로제에게 의심을 사지 않는 선에서, 어떻게든 찾아내야 해.'

재차 다짐한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샅샅이 밝히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로제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다음번엔 한의 '친구'인 제가 지켜드릴 테니까. 제가 읽었던 책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지켜줘야 한다고 했지만. 뭐, 그 반대면 어때요."

"..."

로제는 내가 또 다른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보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도 봐서 알겠지만, 저는 보기보다 힘이 세거든요. 특히 다른 분은 몰라도 록타 족장보단 두 배쯤 더 셀걸요? 아니, 한 세 배쯤? 그 이상인가?"

"...왜 하필 비교 대상이 록타야?"

"그야 당연히...아, 아니에요. 그보다 한은 저한테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책에서 봤는데, 친구끼리는 서로의 비밀도 이야기하고 그러더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

"뭔데요?!"

마침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었다.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이 된 로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엘븐 아르테스가 대체 뭐야?"

",,,그건 저에 대한 질문이 아니잖아요."

로제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마나를 이용해 주변 환경. 그러니까...자연에 자신의 몸을 동화시키는 거예요. 자유로운 바람이 될 수도 있고, 굳센 바위가 될 수도 있고. 뭐, 그런 거죠."

"너무 간단한 거 아니야?"

"사실상 그게 전부인 기술이니까요. 윈드워크니 가이아 크래셔니 플레임 스트라이크니 하는 거창한 이름이 붙긴 하지만, 본질을 놓고 보면 내가 자연이 되는 것. 그것뿐이에요."

그리고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렇기에 사실상 엘븐 아르테스는, '내'가 아닌 '남'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해요. 음...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과거 인간들도 비슷한 능력을 사용했다고 책에서 봤는데요."

"비슷한 능력?"

"숭배하는 대상의 형태를 취해, 그 힘을 자신의 몸에 깃들게 하는 것. 뭐라고 하더라...기억이 잘 안 나네요. 아무튼 그것과 비슷해요."

"오호라..."

비슷한 능력을 보유한 헌터들을 알고 있다.

강체술.

스킬의 힘을 빌어 짐승으로 변하거나, 혹은 자신의 신체 일부를 변화시키거나.

'그러고 보니, 춘식이도 비슷한 특성을 부여받았다고 했었지.'

춘식이가 전투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기에 뭐로 변하는 진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 고릴라. 아니면 오랑우탄 아닐까. 다른 짐승은 딱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아무튼, 내가 로제에게 이런 걸 묻는 이유는 하나다.

"그럼, 나도 혹시 나도 엘븐 아르테스를 배울 수 있는 거야?"

[마력 결핍] 때문에 스킬북이나 스킬석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니, 다른 대체재를 찾기 위해서다.

본래는 흉내쟁이가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게 마땅하지만...지금과 같은 상황을 대비해 차선책을 마련해둬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실망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아마...어려울 거예요. 아니, 불가능해요."

룬드그렌 장로에 이어, 로제마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유를 묻자.

"자연이 동화를 허락하는 건, 오로지 신에게 조화의 특성을 부여받은 엘프뿐이에요. 나머지 종족은...저도 본 적은 없지만, 어머니에게 듣기론 모든 도전자가 목숨을 잃었다고..."

로제의 표정이 꽤 단호했는데, 확실히 엘프들만 배울 수 있는 기술인 모양이다.

"아버지와 견줄 만큼 강인한 기사셨던 어머니도 끝까지 엘븐 아르테스는 익히지 못하셨어요. 그러니 혹시라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지금이라도 포기하세요."

"...그런가."

"차라리 힘이 필요하다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이래 봬도 록타 족장에게. 아니, 룬드그렌 장로님께도 지지 않을 만큼 세다구요."

로제가 킥킥 웃으며 팔을 들어 보였다. 분명 로제는 강하긴 하지만, 현대로 데려갈 수 있단 보장이 없으니....

게다가 그녀에겐 맡은 바 임무가 있다. 이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쉽지만 기각이다.

"그보다, 여긴 대체 뭘까. 아까 그 남자는 왜 여기 있는 거고."

이에 대해 더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아, 슬그머니 대화 주제를 돌렸다.

다행히 로제는 그에 순순히 응해주었다.

"그러게요. 이곳의 거주민인 걸까요? 상태도 안 좋아 보이던데..."

"이런 데서 살면 다 저렇게 되지 않을까. 으, 이 점액 좀 봐. 대체 어디서 흘러나오는 거야?"

안으로 들어갈수록 신발 밑창에 달라붙는 점액의 농도가 진해진다. 길게 늘어지는 연녹색 액체가 자꾸만 비위를 자극한다.

"아끼는 부츠인데..."

거의 울상이 된 로제가 연신 발바닥을 땅에 문질렀다. 허름한 가죽 부츠가 순식간에 오물로 더럽혀졌다. 그때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나와 나란히 걸으며 투덜대던 로제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로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 *

"한?"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인 로제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마법? 트랩?

그렇다기엔 어떠한 징후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감각이 예민한 그녀가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만에 하나 간과한 부분이 있더라도, 마법이 시전 되었다면 그 흔적은 남아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조금 전과 똑같다. 덜컥, 불안감이 밀려왔다. 만약 아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홀로 떨어진 승현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입술을 깨문 로제가 실프를 부르려는데.

'응답이...없어?'

물의 정령인 운디네도 불렀지만 마찬가지, 그녀와 가장 유대감이 강한 두 정령이 응답하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령의 출입을 막았다는 거네요."

까득.

어금니를 깨문 로제가 일몰을 들었다. 희미한 빛이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어둠에 적응한 로제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승현을 부르며 찾아다니고 싶지만. 어떠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때였다.

크르르륵-

익숙한 소리다. 조금 전 승현을 습격했던 사내가 내던 것과 같은.

시선을 돌린 로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의 그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이쪽을 바라보며 녹색으로 번쩍이는 안광이 금방이라도 덤벼들 기세였다.

평소 같으면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겠으나...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승현의 소재 파악이 급선무였다.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다.

사내를 쓰러트리기 위해 일몰을 앞세운 로제가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그러자.

"그, 그만. 크륵, 그만두시오...!!"

사내가 시커머죽죽한 두 팔로 눈을 가리며 외쳤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태도에 당황한 로제가 손속을 멈추자 사내가 다급히 말했다.

"빛...빛을 치워주시오. 제기랄, 아까보단 낫지만...그것도 나에겐 충분히 위협적이오."

"...뭐죠, 당신."

여전히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사내가 고개를 돌린 채 다급하게 일몰을 가리켰다.

"거기서 나오는 빛...빛을 가려주시오. 빨리!"

"...?"

다시 막대의 형태로 돌아간 일몰이 로제의 허리춤에 꽂혔다.

사방이 완전한 어둠에 휩싸이자, 사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누구시오?"

"빨리도 물으시네요. 다짜고짜 달려들 땐 언제고."

로제의 목소리엔 가시가 한껏 돋아나 있었다.

"미안하오. 빛을 보면 이성을 잃는지라...그보다, 당신은 누구길래 멜리사 님의 일몰을 가지고 있는 게요?"

"그 이름을...어떻게 아세요?"

"알다마다. 어떤 연유로 당신이 일몰을 손에 쥐고 있는진 몰라도, 멜리사 님은 잘 계시오?"

베일.

멜리사 라셀레스.

그간 잊혀진 줄 알았던 부모님의 이름이 낯선 이의 입에서 나오자 로제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정체가 뭐죠."

어느 정도 신분이 보장된 제오르그와는 다르게, 사내는 너무나도 수상쩍다.

그렇기에 로제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대신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사내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파나마요. 몇 년 전이지...하도 오래 있었더니 시간 감각이 희미하군. 아무튼. 꽤 오래전 베일 님이 이끄시던 센티넬의 단원이었소."

센티넬의 단원이라니.

로제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파나마를 바라보았다. 베일이 이끌던 센티넬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약 300여 년 전에 해체되었다고 들었는데.

엘프보다 상대적으로 수명이 짧은. 그러니까, 오래 살아 봐야 300년 남짓인 다크 엘프가 어떻게 지금까지?

혼란에 빠진 로제가 입을 열지 않자, 파나마가 재차 물었다.

"그런데, 생김새와 향기를 보아하니 당신은 하프 엘프 같군. 베일은 무사하시오?"

"어? 음...돌아가셨어요. 꽤 오래 전에."

"뭣이?!"

사내가 로제를 향해 일갈했다. 아까와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멜리사 님은 어떻게 되셨소? 룬드그렌은?"

"...룬드그렌 장로님만 살아 계세요."

"허어...어쩌다 그런... 멜리사 님은 인간이시니 엘프에 비해 수명이 짧아 그렇다 쳐도...하이 엘프인 베일님이 돌아가시다니. 그래도 룬드그렌이 살아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로군."

"이제 장로님만이 부족에 남은, 유일한 하이 엘프세요."

"그렇습니까...."

어조를 보아하니 그들에게 적대적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이제 당신 차례요. 정체를 밝히시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파나마가 로제를 향해 질문을 던졌고.

"저는 겨울숲 부족에서 온 로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로제의 이야기를 듣던 파나마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54화

"뭐지, 여긴..."

흉내쟁이에 이어 로제마저 갑작스레 사라졌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마나 라이트를 들어 주변을 비춰보았다. 습하던 아까와는 다르게, 묘하게 건조한 공기.

바닥을 가득 메우던 점액질은 어느새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게다가 빙굴의 얼음이 아닌, 어딘가 퍼석하고 메마른듯한 흙벽.

아무래도 이곳은 내가 머물던 장소와 다른 곳인 듯하다.

"함정인가. 아니면, 이것도 로제가 펼쳤던 것과 같은 환각?"

자문을 던져보아도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때였다.

오너라...

누군가의 부름이 들렸다. 아니, 들렸다고 해야 할까. 마치 뇌리에 직접 때려 박는 것처럼 선명하고 생생한 목소리였다.

"누구십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이쪽으로 오거라...

조금 전보다 목소리가 더 커졌다. 성별도, 연령도 짐작할 수 없다.

파악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일직선으로 뻗은 통로의 끝에 상대가 있다는 것.

정체도 모를 상대의 부름에 응할 만큼 나는 아둔하지 않다. 천천히 몸을 돌려 뒤로 돌아가려는 순간.

어서!

"크윽...!!"

깨질 듯한 두통이 밀려들었다. 이대로 두면 머리가 터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게다가.

- 유대 포인트를 [200 사용해 [척추분쇄자]의 숨겨진 퀘스트를 해방합니다.

- 잔여 유대 포인트 : [2068]

- 장비 퀘스트, [융합]이 도착했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대 포인트가 사용되었다는 시스템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열리지 않던 퀘스트가 왜 하필?'

의문을 품을 틈은 없었다, 척추분쇄자가 맹렬히 진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친...이거 왜 이래."

카가각. 카가가각.

허리춤에 꽂은 척추분쇄자에 의해 서서히 내 몸이 통로 안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인력은 저항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곧이어 [이해와 분석]이 발동되며 해방된 척추분쇄자의 퀘스트가 나타났다.

[융합]

- 초월적인 존재가 사용자와의 접견을 요청하고 있다. 부름에 응하도록 하자.

* [???]와 접촉하기.

보상 : [???]

퀘스트가 가리키는 대상은 분명했다. 저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나를 끌어들이는 무언가와의 만남을 종용하고 있다.

물음표로 가려진 상대의 정체. 메인 퀘스트가 가리키는 대상 또한 저 녀석인 게 확실했다.

이를 확인한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저항하길 그만두었다.

"갈 때 가더라도 내 발로 간다."

중얼거림과 동시에 나를 끌어들이던 힘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통로 안쪽에서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언젠가 산에 올랐을 때 맡았던, 상쾌한 향을 가득 품은 공기다.

어서 다가오거라...

그리고.

끝없는 어둠을 향해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마치 꿈처럼 의식이 멀어졌다.

* * *

눈꺼풀 위로 느껴지는 밝은 빛에 반사적으로 이마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짚으려고 했다.

어?

움직이는 건 내 의지뿐이다. 정작 행동을 취해야 할 오른팔이 없다. 그러고 보니 눈꺼풀도 없다.

눈을 감았다는 건 내 착각인가?

팔도. 다리도. 몸통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그저 허공에 떠 있을 뿐이었다. 의식은 있지만, 신체가 없다. 황당함이 정도를 넘어선 모양인지, 이런 상황에서도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가만히 이 감각에 적응하던 와중.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반갑구나, 씨앗을 품은 아이야."

고개를. 아니, 의식을 움직여 보니 사방을 가득 메운 푸르른 빛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익숙하다. 게다가 아까와는 다르게 또렷했다. 그 외에는 여전히 아무런 정체도 유추할 수 없었다.

누구십니까?

상황이 역전되어 내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성대와 입이 없으니 당연한 건가. 아니, 그 전에 목소리란 표현이 맞긴 맞는 걸까.

몸이 사라졌으니 놀라 허둥대는 게 당연할진대, 시답잖은 생각을 할 정도로 침착하다.

상대 또한 내 질문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이 공간의 주인이란다. 조급한 나머지 데려오는 방법이 조금 무례했구나. 사과하마."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온 세상이 나를 적으로 돌리더라도, 오로지 내 편이 되어줄 것만 같은.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나도 모르게 생각이 났다. 내 어머니도 저런 분이셨을까.

상념에 빠져있던 나를 향해 푸른 빛이 다가왔다. 아니, 그건 착각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이 공간은 빛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으니까.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끼며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야. 네게 심어진 씨앗에 대해 알고 있느냐."

- 씨앗?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머리가 멍했다. 그렇기에 순순히 답했다. 포근했다. 이대로 누워서 잠들고 싶을 만큼.

"그런가. 그렇구나. 그런 거야."

- ...?

"씨앗은 찬란하지만, 그것을 품어낼 땅이 너무나도 척박하구나."

뜻은 모르겠지만 뭔가 굉장히 실례되는 이야기 같은데.

육신이 사라져서일까. 아니면 몽롱한 기분이 들어서일까. 생각을 이어가려 해도 머리가 도통 따라주질 않았다.

"아이야. 스러져가는 나에게 네가 찾아온 건,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겠구나."

-그게...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여긴 대체 어디입니까?

"선물을 하나 주마. 네게 물을 주고, 땅을 기름지게 바꾸어 주마. 모든 건 전적으로 네게 달렸단다. 할 수 있겠느냐?"

"아니, 제 질문에 답을..."

어라?

목소리가 돌아왔다. 두 손도 어느새 멀쩡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태초의 상태 그대로의 모습이 된 상반신이 보였다. 별안간 의식이 또렷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잔재만 남은...나에게 몸을 의탁한 불쌍한 아이를 구해 줄 수 있겠느냐."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육신이 다시금 흩어졌고, 또렷했던 정신도 어느새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기를 쓰고 정신을 모은 끝에 본 마지막 광경은.

"언젠가 온전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면, 그때 다시 만나자꾸나. 네가 쥐고 있던 이 아이는, 내 품으로 돌려보내 주렴."

부드러운 한 마디와 함께, 푸른 빛 안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척추분쇄자였다.

* * *

"저, 정말이오? 아가씨가 베일 님과 멜리사 님의..."

"...네, 맞아요."

몇 번이나 되묻는 사내를 향해 로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하는 건 조금 내키지 않았지만, 승현을 찾기 위해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다.

몇 번이나 로제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자.

"아가씨를 뵙습니다!"

철퍽-

파나마가 무릎을 꿇자 바닥 가득한 점액질이 사방으로 튀었다.

"왜, 왜 이러세요. 당황스럽게...말씀도 편히 하세요. 저는 존댓말이 불편..."

"아닙니다. 저는 센티넬의 일원이자 단장님과 멜리사 님께 크나큰 은혜를 입은 몸. 어찌 두 분의 따님이신 아가씨께 그런 무례를 저지르겠습니까. 거두어 주십시오."

파나마가 재차 무릎을 꿇었다. 난처해진 로제가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말을 돌렸다.

"저기...그보다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혹시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파나마와 로제.

둘의 어색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로제 혼자 어색한 동행이다.

"그러니까, 함께 온 친구분이 사라졌다는 겁니까? 갑작스레?"

"맞아요. 제가 살면서 처음 사귄...아무튼, 중요한 치, 친구예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 파나마, 목숨을 걸고 아가씨의 친우를 찾아내겠습니다."

"...다 좋은데, 제발 무릎은 꿇지 말아 주세요."

가뜩이나 아버지와 같은 세대를 살아온 인물이라 대하기 어려운데 저런 존칭까지 사용하다니.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 온몸에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남자예요. 나이는 음...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외형상으론 저랑 비슷해요."

"아아, 인간은 엘프보다 상대적으로 노화가 빠른 법이니. 그렇다면 대략 오십 세 전후겠군요."

"그런가요? 역시!"

로제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교류가 활발하던 아버지 세대의 엘프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인간에 대한 지식이 빠삭했다.

'다음에 대화 주제로 써먹어야겠다.'

승현의 나이는 오십 전후. 로제가 언젠가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인간 남성은 성숙해 보이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육십 정도로 보아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으음...그렇게 쳐도 제가 한참 연상이네요.'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로제가 시선을 돌리자, 가만히 턱을 쓰다듬는 파나마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사라지는 현상은 저도 금시초문입니다만...어떻게든 찾아내겠습니다.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십시오."

호언장담한 파나마가 앞장섰다.

어둠 사이로 잔뜩 누더기가 된 옷과 비쩍 마른 몸, 멍이 든 것처럼 검푸른 피부가 슬쩍슬쩍 드러났다.

물끄러미 이를 바라보던 로제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파나마 씨는 왜 이곳에서 지내는 건가요. 외롭거나 힘들지 않으신가요?"

찌잉-

파나마의 가슴에 전기가 통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그 안에서 보이는 배려와 염려.

베일 단장 다음으로 존경하는 멜리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 파나마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이곳에 있는 인원은 총 셋. 모두 베일 단장님 휘하에 있던 센티넬 단원들입니다.

"그렇다는 말씀은, 이곳에 네 분이나 더 계신다는 건가요?"

"...원래는 스물이었습니다."

"어쩌다 이런 곳에..."

"그야, 저희 모두가 센티넬의 조사단 소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사단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어둠 속에서 울리는 파나마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조사단. 로제 또한 그 존재를 알고 있다. 어머니에게도 들었고, 책에서도 보았다.

생존을 위협하는 혹한을 피해 새로운 땅을 발견하러 떠난 파수꾼들.

상대할 수 없는 몬스터를 만나 전멸했다느니, 새로운 땅을 독차지하기 위해 부족을 버렸다느니 하는.

무성한 소문만 남긴 채 사라졌던 그들이 어떻게 여기에?

"저를 비롯한 나머지 열아홉의 단원은, 혹한의 추위를 뚫고 세계수의 마지막 뿌리라 불리는 이 세 번째 능선에 다다랐습니다. 그때..."

파나마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쿠구구구구-

커다란 소음과 함께, 동굴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소리...흡."

"이런...왜 하필 지금.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가씨."

로제의 입을 파나마의 손이 틀어막았다. 채 씻기지 않은 점액이 로제의 얼굴에 덕지덕지 달라붙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파나마에게 로제는 불만을 표시하지 못했다.

"놈들이 돌아온 걸 보니, 아무래도 해가 저문 모양입니다."

'놈들? 제오르그 영감님이 말씀하시던 파수꾼인가. 분명 한 녀석이라고...'

눈빛으로 의문을 표하는 로제에게 한껏 목소리를 낮춘 파나마가 속삭이듯 말했다.

"녀석들은 총 두 마리. 어지간하면 맞부딪치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제가 시간을 벌 테니, 아가씨께선 안전한 곳으로..."

"그것보다, 아까 빛을 쬐는 게 괴롭다고 하셨죠?"

파나마의 손을 떼어낸 로제가 일몰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저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을 토대로 상대의 기량을 가늠한 뒤 앞으로 나섰다.

"그럼, 일몰은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네요."

스르릉- 로제가 허리춤의 단검을 뽑았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55화

카드드득-

마찰음이 가까워지자 파나마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전투태세에 들어간 로제에게서, 그 어떠한 마나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꺼냈던 일몰까지 집어넣었다. 저건 단순한 치기일 뿐이다. 파나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가씨."

로제는 파나마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시퍼런 예기를 뿌리는 단검을 가슴께로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본 파나마가 로제를 재촉했다.

"저 녀석은 평범한 짐승이나 몬스터가 아닙니다. 그런 단검으론 처치할 수 없으니 일단은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거면 충분하니까."

"아가씨...!"

로제의 대답에 속이 콱 막힌 듯 답답함을 느끼던 파나마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따각. 따각. 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놈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아가씨!"

다급해진 파나마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곳의 금기를 어긴 것이다.

따각. 따각. 따각. 따각.

발굽 소리의 간격이 점점 줄어들었다. 실수다.

놈이 이쪽의 존재를 알아챈 것이다. 파나마가 고민에 빠졌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만큼 제 한 몸 빼내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그럴 수 없다.

지금 앞을 가로막은 채 만용을 부리는 건 존경해 마지않는 센티넬의 단장. 베일의 외동딸 아니던가.

망설이던 파나마가 결정을 내렸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놈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

로제의 답을 듣기도 전에 파나마가 정면을 향해 내달렸다.

살아남을 확률은 절반. 걸어볼 만했다.

파나마가 땅을 두 번째 박찼을 때, 어둠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의 눈에 거대한 실루엣이 들어왔다.

파나마를 비롯한 생존자들이 '감시자'라 이름 붙인 놈은, 커다란 한 개의 눈을 희번덕거리며 제 둥지에 들어온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마치 벌레와 같은 몸통 아래론 발굽이 달린 역관절의 다리 수십이 딸각거리며 일정한 박자로 땅에 부딪히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감시자가 기쁜 듯 입을 쩍 벌리자 오래된 톱날처럼 자란 이빨 사이로 줄줄 흐르는 액체가 보였다.

바닥을 가득 메운 것과 같은 점액이다. 파나마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힘만 쓸 수 있었어도... 저런 놈쯤은 대번에 반으로 찢어버릴 수 있을 텐데.'

앓는 소릴 해 봐야 바뀌는 건 없다. 지금은 베일 단장의 딸, 로제의 생존이 최우선이다.

각오를 다진 파나마가 미끄러지듯 놈을 지나쳐 동굴 밖으로 유인하려는 순간.

쐐애액-

한 줄기 푸른 빛이 그의 귓가를 스치듯 지나갔다.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낀 그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린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런...!!'

파나마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커다란 실책이다. 상대를 눈앞에 두고 눈을 감다니.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으려던 그때.

"...?"

놈의 거구가, 쿠웅-하는 굉음과 함께 옆으로 풀썩 쓰려졌다.

무슨 짓이지? 설마 장난을 치는 건 아닐 테고. 파나마가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거대한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흐읍..."

숨을 집어삼켰다. 커다란 눈의 정중앙에 휑하니 뚫린 구멍.

그리고 그 사이로 줄줄 새어 나오는 회백색의 체액. 숨통이 끊어진 것이다.

당황한 그의 등 뒤로 로제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조금 긴장했는데, 이격까지 갈 필요도 없었군요...보리스 씨가 겁먹을 상대가 아니었는데 말이죠."

체구도, 외형도 정반대이지만, 그녀의 얼굴 위로 단장의 모습이 겹쳐 보인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감시자의 시체와 로제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그때. 눈꼬리를 조금 치켜세운 로제가 그를 재촉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한을 찾으러 가죠."

쿠웅-

로제의 감각에, 저 멀리서부터 울리는 익숙한 마력의 파동이 감지되었다.

* * *

- [조화와 화합-3]을 클리어하셨습니다!

- 보상으로 유대 포인트 [1500]을 획득하셨습니다.

- 차원 상점의 구매 리스트가 오픈되었습니다!

- [상급 이해와 분석]을 획득하였습니다!

[상급 이해와 분석]

- 생소한 지식을 더 빠르게 습득할 수 있습니다. 이해력이 높아집니다.

- [유니크] 등급 이하의 숨겨진 아이템 정보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조건이 맞는 일부 대상의 스탯과 정보를 간략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 차이가 현격히 벌어질 경우 정보를 열람할 수 없습니다.

- 유대 포인트를 사용해, 아이템에 숨겨진 퀘스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일부 아이템에만 퀘스트가 부여됩니다.

눈을 뜨자 머리는 멍했고 귓가에는 연신 띠링- 하는 알림음이 울린다.

미간을 찌푸리며 어지러이 나타난 메시지를 지워버렸다.

"꿈인가...으윽. 뭐야, 이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짚으려는데, 손가락 사이로 진득한 점액질이 빠져나갔다.

등 언저리가 축축하다. 소름 돋는 느낌에 기함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떻게 보는 거지?"

구석에서 나뒹구는 마나 라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은 분명 칠흑 같은 어둠인데, 사물이 이상할 만치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가...이런 곳에서 잠들었다고?"

늘어지듯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다. 몇 가지 단편적인 장면이 떠올랐다.

나를 허공에 띄워둔 채 제 할 말만 하던 푸른 빛.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이질적인 존재의 힘.

환상이나 꿈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현실적이었고, 실제로 겪은 일이라기엔 괴리감이 컸다.

퀘스트가 클리어된 걸 보니 무언가와 조우한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이 희미하다.

"대체 뭐였을까..."

몸을 움직이며 마나 라이트를 주워 주변을 슥슥 비췄다.

휑한 통로엔 오로지 나 혼자다. 당혹스럽다.

이리저리 주변을 비춰보던 그때, 한구석에 짙게 웅크린 그림자가 보였다.

"거기서 뭐 하냐."

어둠 위로 덧칠된 어둠. 흉내쟁이였다.

저기서 뭘 하는 거지. 가까이 다가가도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약간의 당황과 함께 아예 사라진 게 아니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혹시 무언가를 발견한 걸까. 궁금한 마음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자.

"...뭘 보는 거냐."

[식용 가능한 개체 발견. 협조 요망.]

뜬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식용 가능한 개체? 좀 더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얼음과 얼음 사이. 일자로 주욱 이어진 통로의 끝에 팽창과 축소를 반복하는 커다란 무언가가 보였다.

그리고 그 녀석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처음 보는 형식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이름 : [동굴의 감시자]

근력 : [2.5] 민첩 : [1.2]

체력 : [3.3] 마력 : [0.1]

상태창이다.

조금 전 치워버렸던 시스템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자연스레 변화한 능력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저 숫자는, 나를 기준으로 판정된 능력치인가."

나와 상대방의 능력 차이를 표시해준 것이다.

근력은 내 2.5배. 민첩성은 1.2배. 수치를 보던 나는 문득 의구심이 생겨났다.

"저 덩치랑 내가, 그 정도 차이밖에 안 난다고...?"

보리스보단 작지만, 나보다는 훨씬 더 컸다. 말이 안 되는 수치인데. 단순히 체급으로만 계산해도 열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의문을 품던 그때, 나와 시선을 마주친 놈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애벌레를 닮은 외형에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수십 개의 다리. 제오르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놈이 제오르그 영감님이 말했던...그 녀석인가."

아마 맞을 거다. 칙칙한 외눈에 수많은 다리.

백 개는 과장인 것 같지만, 어쨌거나 많다. 꺼림칙한 녀석이다.

일직선으로 뚫린 이 비좁은 통로에서 도주는 불가능하다. 전투를 대비하기 위해 허리춤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없어...?"

척추분쇄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어지러이 찢겨진 기억의 파편 속에서, 척추분쇄자를 가져가던 푸른 빛의 마지막 목소리가 떠올랐다.

- 언젠가 온전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면, 그때 다시 만나자꾸나. 네가 쥐고 있던 이 아이는, 내 품으로 돌려보내 주렴.

졸지에 무기가 사라졌다. 아깝긴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카아악-

감시자가 이쪽을 향해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금방이라도 뛰어들 기세였다. 어쩔 수 없다.

"배 채우고 싶으면 나와."

플랜 B.

좁은 동굴 안이라 사용해도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돌진하는 놈을 흉내쟁이가 막고, 익스플로전 포션으로 처치한다.

[거부 의사 표명. 현재 상태 파악 완료. 위험 요소 다분. 변이 불가.]

흉내쟁이가 거부했다. 그럼 저걸 혼자 상대해야 한다고?

나는 헌터가 아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척추분쇄자가 없으면 평범한 성인 남성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이해와 분석]은 놈과 나의 능력 차이가 크지 않다고 했지만, 특수 능력을 배제하고 체급 차이만 봐도 말이 안 된다.

최소치로 잡아도 열 배.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몸을 전부 일으킨 감시자가 천천히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각. 따각. 생김새완 어울리지 않는 청명한 울림이 동굴의 내부를 맴돌았다.

그 모습에 입술을 깨문 나는 허리춤의 익스플로전 포션을 꺼내들었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다.

따각. 따각. 따각. 템포가 점점 빨라졌다. 일직선으로 뻥 뚫린 통로. 도주는 불가능했다.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으면 맞서는 수밖에 없다.

두두두두두-감시자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이빨이 제멋대로 박힌 입. 굽이치는 몸통과 수많은 다리를 보아하니 마치 거대한 노래기 같다.

'이런 상황에 무슨 생각을...'

스스로의 한심함을 자책하며 양손에 포션병을 꼬나쥐었다.

폭발이 일어나면 동굴이 무너질지도 몰랐지만, 저놈에게 죽는 것보단 나았다. 타이밍을 재던 그때.

"어어...?"

갑작스레 머리가 멍해졌다. 기분 좋게 취한 것처럼 허공에 둥둥 뜨는 느낌이 들었다.

계속 이 느낌을 즐기고 싶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콰드득- 커다란 이빨이 훅, 다가왔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상반신을 노리고 들어온 공격이 가볍게 빗나갔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 약이 바짝 오른 감시자가 씹어뱉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키이이익-

먹잇감을 놓친 놈이 긁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진로를 선회했다.

두두두-코뿔소처럼 달려오는 감시자을 보며, 재차 땅을 박찼다.

"아까 겪었던 일 때문인가..."

한 번 발을 차올릴 때마다 몸이 쭉쭉 뻗어 나갔다.

상대는 빨랐지만, 체구의 이점을 이용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본래는 동굴이 무너질 걸 각오하고 익스플로전 포션을 사용하려 했지만, 조금 여유가 생겼기에 머리를 굴렸다.

'바깥으로 유인한 뒤 폭파할까? 아니면 눈 딱 감고 한번 부딪혀 봐?'

그때였다. 연이어 공격을 피하던 중 [이해와 분석]이 재차 발동되었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익스플로전 포션]

등급 : 레어+

옵션 : [대폭발]

* 복용할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 복용 조건 : 아이템을 제작한 사용자

* 지속 시간 : [15분]

* 재사용 대기 시간 : [12시간]

바뀐 옵션이 나타났다.

'복용 가능이라고?'

분명, 공기에 닿으면 폭발을 일으킨다고 하지 않았던가. 먹으면 당연히 죽는 거 아닌가?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콰앙- 놈의 돌진이 내 어깨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으니까. 슬슬 체력의 한계가 오고 있었다.

길어야 오 분. 망설일 겨를은 없었다.

"그래, 시스템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까."

마개를 연 나는, 행여나 터질세라 재빨리 그것을 들이켰다.

비릿한 향과 후끈한 열기가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곧이어.

- [익스플로전 포션]이 보유한 폭발력이 사용자의 근력으로 치환됩니다!

- 사용자의 신체 능력으로는 아직 온전한 성능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전환률 : 32%]

- 남은 지속 시간 : [14분 58초]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56화

"이게 무슨..."

동굴을 울리는 마력의 파장을 뒤쫓아온 로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건, 치열하게 감시자와 맞서는 승현의 모습이었다.

로제의 기준에서 감시자는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보리스가 쫓겨난 게 의아할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상대다.

하지만 승현은 아니다. 그녀처럼 신력을 보유한 것도 아니고, 보유한 마력을 이용해 신체를 강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엘븐 아르테스를 쓸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고.

객관적으로 보자면, 감시자와의 전투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단 뜻이다. 그렇기에 승현을 발견하자마자 막 뛰쳐나가려 했는데.

"..."

퍼억- 승현의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그것에 얻어맞은 상대가 괴로운 듯 몸을 뒤튼다. 무자비한 난타가 이어진다.

쏟아지는 연타에 감시자의 거구가 조금씩 밀려났다. 손에 단검을 쥔 로제가 둘의 접전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록타 족장이나 다이크 씨 정도는 아니지만, 어떻게 저럴 수가 있죠?'

여차하면 단검을 던질 생각이었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괜한 걱정이었다. 어느새 뒤쫓아온 파나마가 눈을 빛냈다.

"저분이 말씀하시던...아가씨의 친구분은 특이한 기술을 쓰시는군요. "

차고, 때리고, 피하고, 막고.

어설픈 박투술이지만 제법 위력적이다.

'저런 거구를 상대로 쓰기엔 좀 부적합한 것 같긴 해도...아마 비슷한 체급의 상대에겐 꽤 괜찮은 위력을 발휘하겠지.'

게다가 그의 근력이 어설픈 기술을 보조해주고 있었다.

멜리사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그가 보았던 인간 중에선 꽤 괜찮은 수준이었기에 한참 흥미롭게 전투를 관전하던 그때.

"슬슬 끝날 것 같네요."

로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쿠웅- 감시자의 거구가 옆으로 쓰러졌다.

승현이 손을 탁탁 털며 거친 호흡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흐음...잘 가르쳐 보면 쓸 만할지도. 아차, 내가 무슨 생각을.'

제 코가 석 자인데,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 지금의 상태로는 지도는커녕 지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잡념을 떨쳐버린 파나마가 앞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지금은 안 되니, 소화는 돌아가고 나서 시켜라."

스으윽-

승현의 지시와 함께, 바닥에 쓰러진 감시자의 시체가 어둠 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한, 다친 곳 없...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그리고, 재빨리 승현을 향해 다가간 로제가 놀란 듯 소리쳤다.

"빨리 설명해 봐요."

"어? 어어...여긴 어떻게? 그동안 어디에 있던 거야?"

"제가 할 말이거든요! 그리고, 조금 전 그 그림자는 대체 뭐예요?"

"그게..."

난처한 얼굴이 된 승현이 말꼬리를 흐렸다.

감시자를 쓰러트린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흉내쟁이의 존재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필 흉내쟁이가 놈을 집어삼킬 때 마주칠 줄이야.'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그때, 로제의 옆에 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당신, 아까의 그..."

얼굴을 확인한 승현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분명 저자는 나에게 달려들었던...그런데 왜 여기?'

가만 보면 아까와는 달리 목소리도 또렷하고, 정신도 멀쩡해 보인다.

어떻게 된 거지. 순식간에 오만 가지 생각이 승현의 머릿속을 교차했다.

"...파나마입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가씨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결례를 저지른 모양이군요.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파나마가 입을 열어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아까 보인 공격성이 이유가 마나 라이트의 불빛 때문이었단다. 승현은 선뜻 믿기 어려웠지만, 로제가 그의 신원을 보증해 주었다.

그녀의 부모님과 친분이 있는 상대라니. 당황스럽긴 해도, 일단은 믿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강한 빛을 쬐면 주변의 모든 것을 공격하고 싶다는 충동에 빠져들게 됩니다. 최대한 억제해 보았지만...죄송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저한테 사과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주의할 터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파나마가 연신 사과를 건넸다. 저렇게까지 나오니 머쓱해진 건 오히려 승현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괜찮다 말하려는데, 로제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서, 대답 안 해줄 거예요?"

"...뭘?"

"저거요."

로제가 희미한 어둠 위로 덧칠된 승현의 그림자를 가리켰다.

지금까지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확연한 차이점이 느껴졌다.

'어쩐다.'

승현은 고민에 빠졌다. 딱히 숨겨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체를 모르니 뭐라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귀속된 게 분명한 놈을 두고 '모른다'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승현을 구원해준 건 파나마였다.

"음...아가씨. 저의 짧은 식견으로는 원시 정령의 한 종류가 아닐까 싶습니다."

"원시 정령이요?"

로제가 기억을 더듬었다. 얼핏 들어본 것도 같다.

물, 불 땅, 바람으로 대표되는 4대 원소를 제외한, 나무나 바위 같은 정령이라던가.

"잠깐, 원시 정령이라 하면...설마..."

책에서 보았던 계약법을 떠올린 로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를 보지 못한 승현이 재빨리 파나마의 이야기에 동조했다.

"맞습니다. 원시 정령. 정확히 보셨습니다. 우연찮은 기회로 계약을 맺게 된 녀석이죠."

"....정말 원시 정령이에요?"

"진짜로 원시 정령과 계약을 맺으신 겁니까?"

로제와 파나마가 놀란 듯 소리쳤다. 의외의 반응에 당황한 건 승현이었다.

"하기야, 친화력을 이용해 '부탁'의 형식으로 계약을 맺는 4대 정령과는 다르게, 원시 정령을 길들이는 법은 제각각이니...더 이상 묻는 것도 실례겠군요."

"아무리 그래도...어떻게 보면 한은 굉장하네요. 어떻게 그런 수치까지 감수하며 계약을...저는 죽어도 못 해요."

동정심 가득한 시선이 승현을 향해 쏟아졌다.

'대체 계약 방법이 뭐길래...'

어쩐지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계약을 해 버렸다고 말한 이상 돌이킬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이만 이곳을 빠져나가죠."

동굴의 주인을 처치했으니, 더는 이곳에 볼 일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솟아났다.

'분명 감시자가 약한 녀석은 아니지만..."

보리스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일반적인 요르와 비슷한 체구에, 특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가진 거라곤 혐오스런 외형뿐. 이 산의 주인을 자처하기엔 한참은 부족했다. 그때였다.

오오오───

통로의 반대편에서 들려온 기괴한 공명. 그 안에 담긴 감정의 파동이 느껴졌다.

원한, 분노, 그리고 슬픔. 파나마가 흠칫, 몸을 떨었다.

"...피하셔야 합니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파나마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부터 저벅, 저벅. 하고 들려오는 발소리를 뒤로한 채, 파나마가 재빨리 로제와 승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왕이 돌아왔습니다."

* * *

파나마는 겨울숲 부족 출신의 혼혈 엘프다.

어머니가 인간, 아버지가 엘프인.

게다가 자랑스러운 센티넬의 단원 중, 상위권에 드는 강자였다.

그가 펼치는 엘븐 아르테스는 손쉽게 바위를 부수고, 땅을 가를 정도의 경지에 올라있었다.

그렇기에 300년 전. 그는 망설임 없이 센티넬의 단원 중, 일부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조사단에 지원했다.

"파나마, 믿겠다."

무뚝뚝하던 단장은 짧은 격려와 함께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이례적인 일이기에, 젊은 파나마의 눈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엘프. 아니, 전 종족을 통틀어 최강의 반열에 오른 베일 단장이 자신을 격려해 준 것이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한 몸 바쳐 만년빙산을 정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 한 번도 정복된 적 없는 만년빙산이지만, 자신이라면.

그리고 단원들과 함께라면 반드시 그 너머를 보고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오만이었다.

그건, 그 녀석은 갑작스레 그들을 찾아왔다.

- 몬스터다!

- 전부 전투 대열로!

그저 매일같이 벌어졌을 평범한 전투일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백 개의 다리와 한 개의 눈. 검붉은 껍데기. 커다란 애벌레를 닮은 외형. 그게 '여왕'과의 첫 조우였다.

놈의 눈동자가 빛나던 순간, 홀린 듯 단원들 모두가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건...마법도 아니고, 정령술도 아니었습니다. 그래, 굳이 비유하자면...강제력에 가까웠습니다."

로제와 승현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던 파나마가 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스물의 동료 중 다섯이 그 자리에서 잡아먹혔다.

나머지 열다섯은 살아남았지만 낙인이 새겨졌다. 그걸 과연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을까.

파나마가 로제와 승현에게 제 손목을 보여주었다. 마치 무언가에게 깨물린 듯, 기묘하게 뒤틀린 흉터가 드러났다.

"이 낙인 때문인진 몰라도...도망조차 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기묘하게 뒤틀린 감각은 저희가 만년빙산을 벗어나는 걸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보다 더 끔찍한 건."

놈은 아껴두었던 먹이를 섭취하듯, 낙인의 흔적을 따라 반년에 한 번씩 그들을 찾아왔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절망적으로 변해갔다. 동료들의 몸이 점점 시커멓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햇볕을 쬐면 광증(狂症)을 보이는 이가 부지기수였고, 몇몇은 아예 살이 썩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저희는 죽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살았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살아남았다.

부패한 살점 때문에 피부가 썩어들어 가도, 수십 일을 아무것도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해도, 혹한의 날씨에 온몸이 얼어붙어도. 그들은 절대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오로지 여왕의 포식만이, 그들에게 안식을 내려줄 수 있었다.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건, 저를 비롯해 다른 종족과 피가 섞인 일곱 명의 동료들뿐이었습니다."

여왕은 남겨진 그들에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그들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눈에 띄면 잡아먹는다. 띄지 않으면 내버려 둔다.

여왕의 행동은 단순했지만, 이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몇 명의 동료가 또다시 목숨을 잃은 후였다.

그렇게 조사단의 인원은 파나마를 포함해 셋뿐이었다.

"언젠가는 기회가 올 거란 생각으로 지금까지 버텼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빙굴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안에는 선객이 있었다. 잿빛 털로 뒤덮인 뱀. 이야기를 듣던 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잿빛 털의 뱀이라면, 보리스 씨랑 같은...요르군요."

"그런 이름이었습니까? 아무튼, 어찌어찌 피난처를 찾은 저희는 이곳에 몸을 의탁했습니다."

말은 안 통하지만, 요르 무리는 파나마 일행을 퍽 반겨주는 눈치였다.

추위에 떠는 그들을 위해 제 등을 내어주기도 하고, 어디서 구해온 지 모를 고기를 나눠주기도 했다.

빛만 잘 피해 다니면 목숨을 연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겼다.

이미 처음의 목표는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몸에 각인된 건, 오로지 강렬한 생존본능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오오오───

요르의 둥지로 여왕이 찾아왔다. 그날, 절반의 요르가 죽었다. 나머지 절반은 제 살길을 찾아 동굴을 버리고 도망쳤다.

주인이 사라진 동굴.

이제 이곳에 남은 건 여왕. 그리고 파나마를 비롯한 두 명의 동료뿐이다.

죽지도 살지도, 심지어 정신을 놔버리지도 못하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타난 것이....

"저와 한이었다는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부디..."

파나마는 베일을 동경했다. 만년빙산에 갇힌 후, 지옥 같은 매일을 단장을 떠올리며 견뎌냈다.

늘 친절하고 따스했던 멜리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들의 피를 이은 로제가 자신처럼 추한 몰골이 되는 꼴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베일에게 물려받은 로제의 신력도, 멜리사의 신기인 일몰도. 여왕에겐 통하지 않는다. 여왕은 그런 존재였다.

승현은...아까 보여준 전투력으로 미뤄보았을 때, 딱 제 몸 하나 지킬 수준이었다.

그에게 기대를 거는 건 헛된 짓거리였다.

오오오───!!!

분노와 비탄으로 가득 찬 울림이 피부로 전해졌다. 순식간에 제 새끼 둘을 잃은 어미의 외침이다.

"이 구멍을 따라 쭉 내려가시면, 산의 초입과 이어진 통로가 나타납니다.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두 분 다 도망치십시오. 만나 뵈어서 기뻤습니다. 아가씨. 그리고 한 님."

파나마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로제와 승현의 등을 떠밀었다. 우연찮게 발견한 작은 통로다.

어차피 여왕에게 발이 묶인 그에겐 무용지물이겠지만, 승현과 로제는 이곳을 따라가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그런데, 승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가 가야 할 곳은, 그쪽이 아닙니다."

이상하게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57화

승현의 감각에 동굴의 깊은 곳에서 시작된 작은 파문이 걸려들었다.

낯설지 않다. 마나와 비슷한, 하지만 어딘가 다른 기운이다.

'어디서 느껴봤더라...'

기시감? 아니다. 확실히 몸으로 체험해 본 적 있는 힘이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던 승현은 마침내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조상신.'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순 없지만, 비슷했다.

'이런 곳에 조상신이 있을 리는 없고...정체가 뭐지.'

문득, 조금 전 만났던 푸른 빛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그리고, 이제는 잔재만 남은...나에게 몸을 의탁한 불쌍한 아이를 구해 줄 수 있겠느냐.

그동안 나뉘어 있던 것들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천천히 이어지기 시작했다.

- [신규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조화와 화합-4]

- 만년빙산의 심층부로 이동해, 그곳에 봉인된 [???]를 탈취하도록 하자.

보상 : 유대 포인트 [2000]

* 목적지가 네비게이션에 표기됩니다.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를 재차 확인한 승현이 머뭇거리는 파나마를 향해 말했다.

"아니면, 두 분은 탈출하십시오."

"그게 무슨 소..."

흡. 승현에게 소리치려던 파나마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도 여왕은 듣지 못한 것 같다.

오오오오───

다만, 여왕이 내는 공명음이 이쪽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하지만 승현은 요지부동이었다. 다급해진 파나마가 로제를 재촉했다.

"아가씨, 아가씨라도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친구분은 제가 어떻게든 챙길 테니, 먼저 통로 밖으로..."

"안 가요."

"..."

단호한 거절. 머리를 쥐어뜯는 파나마를 뒤로한 로제가 물끄러미 승현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확신에 찬 듯한 표정. 샤샤와 조우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야.'

당시엔 답답했지만, 돌이켜 보니 결국 승현의 결정이 옳았다. 샤샤의 정신은 멀쩡했으니까.

그렇기에 로제는 이번에도 승현에게 무언가 계획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여왕을 만나도 안전할 겁니다. 놈은 지금까지 절 절대로 건들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아가씨께선..."

"괜찮아요. 파나마 씨. 한을 믿어보세요."

어딘지 모르게 신뢰가 담긴 목소리. 그 안에선 부드럽지만 강한 고집이 느껴졌다.

'이런 점에 있어선, 멜리사 님과 판박이로군.'

파나마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저럴 때의 멜리사는 베일 단장도 말리지 못했다.

파나마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한 님을 따라가실 겁니까?"

"그렇게 하죠."

그들의 대화를 듣던 승현이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동굴의 어둠 속을 향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일직선으로 이어진 통로를 지나, 몇 개의 갈림길을 거침없이 통과한 승현이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파나마는 이제 거의 반 포기상태였다. 이곳은 그도 몇 차례 방문한 적 있던 곳이다. 앞으로 더 가면 막다른 길이 나오고, 거기서 통로는 끊어진다.

결말은 뻔했다. 성난 여왕에게 잡혀 생을 마감하거나, 아니면 파나마와 똑같은 꼴이 되거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서 되돌아가 아가씨라도 목숨을 부지하시는 것이..."

한껏 목소리를 낮춘 파나마가 나직이 속삭이자, 로제가 슬며시 눈을 흘겼다.

"안 가요."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대체 뭘 믿고? 로제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렇다고 해서 힘이 통할 상대도 아니고. 베일 단장과 멜리사를 생각하자니 혼자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파나마의 내적 갈등이 깊어지던 그때.

"흐음, 분명 여기였는데..."

어느새 막다른 길에 다다른 승현이 걸음을 멈추었다.

'네비게이션이 틀린 걸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파장이 한층 더 강하게 느껴졌다.

"뭐 찾아요?"

막다른 벽을 살피던 승현을 향해 로제가 다가서는 순간.

- [인증되었습니다.]

반투명한 메시지가 나타나며, 시커먼 어둠이 둘을 집어삼켰다.

* * *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 눈앞의 풍경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빼곡한 밀림이었다. 작은 개울이 흐르고 하늘을 가릴 듯 커다랗게 솟아오른 침엽수가 보였다.

"여긴...?"

"...이게 다 뭐예요? 파나마 씨는?"

로제 또한 어안이 벙벙한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우리 둘만 여기로 떨어진 것 같은데."

승현의 눈에 들어온 건,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을 부유하는 빛무리였다.

조금 전까지 얼음으로 가득한 빙굴 안에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일까.

"여긴...단순한 환영이나 눈속임이 아니에요. 실존하는 장소인데. 대체 어떻게?"

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로 다가간 로제가 중얼거렸다. 물속을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 그리고 주변을 날아다니는 벌레들. 돌 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가재, 그리고 민물새우.

책에서 묘사된 것과 똑같은 생김새, 감각을 비트는 환영술은 기억에 없는 걸 구현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의문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은 실제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들이란 사실을.

지금의 상황도 잊은 채, 쪼그려 앉은 로제가 신기한 듯 물가를 바라보던 그때.

"저건 뭐지?"

승현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개울 너머로 돌을 깎아 만든 작은 구조물이 보였다. 로제의 키보다 훨씬 더 작은, 이끼로 가득한 사당.

그것은 건물이라기 보단, 조금 커다란 모형에 가까워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승현과 로제가 몸을 일으켜 그곳을 향해 다가가자. 띵동- 하는 부저음과 동시에 시스템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 잠시 후, [테스트]가 시작됩니다.

"...테스트?"

메시지를 수신한 승현이 중얼거리던 찰나.

"조심해요!"

철컹- 묵직한 쇳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번개처럼 튀어나온 로제가 승현의 앞을 가로막았고.

콰앙!-

폭음과 함께 사나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승현이 재빨리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이름 : [수호 기사]

근력 : [???] 민첩 : [???]

체력 : [???] 마력 : [???]

거대한 방패와 산양의 머리를 닮은 투구. 오른손엔 메이스를 쥔 은빛 철갑의 기사가 로제를 향해 안광을 빛냈다.

- 응시 인원 : 항목 당 각 [001]명

- [차원 교류자] 와 [수행원]의 적합성 테스트를 시작합니다.

연이어 메시지가 나타났다. 곧이어.

"어어?"

승현의 몸이 휙, 어디론가 끌려갔다. 로제와 기사를 지나쳐 순식간에 사당 앞으로 끌려가듯 움직인 승현의 눈앞에 또 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

- [???]의 요청에 따라, [차원 교류자]의 적합성 테스트를 시작합니다.

- 전면 수정구를 손바닥으로 터치하시면 테스트가 시작됩니다.

우우웅-

땅속에서 이끼로 가득한 기둥이 올라왔다. 그 위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구슬이 하나 놓여있었다.

1. [차원 교류자]의 적합성 테스트 합격 조건

- [의념체]와의 마력 대결에서 승리할 것.

2. [수행원]의 적합성 테스트 합격 조건

- [수호 기사]와의 무력 대결에서 승리할 것.

"테스트라. 잘은 모르겠지만, 차원 교류자를 언급하는 걸 보니 나와 관련된 것이 분명한데."

승현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공간이 그를 위해 마련되었다는 것.

막 수정구에 손을 올리려던 찰나,

"한, 어떻게 할까요?"

쾅- 쾅-

일몰을 움직여 연신 메이스와 방패를 막아내던 로제가 질문을 던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스템의 테스트가 승현과 로제. 둘이 함께 진행되는 상황.

그렇다면, 승현이 시험을 치르는 동안 로제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내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 로제는 저걸 맡아줘. 부탁할게."

"시험이 뭐인지 모르겠지만...넵! 맡겨주세요!"

로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콰앙-

등 뒤의 소음을 무시한 나는, 테스트에 응시하기 위해 수정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이어 거미줄처럼 얽힌 마나가 손끝을 타고 내 몸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의 양은 극히 미세하나 그 수가 상당했기에 그 안에 담긴 의도가 또렷이 느껴졌다.

'뭔진 몰라도, 내 마나 컨트롤 능력을 시험하고 있어.'

수많은 마력의 실이 마나 로드를 타고 심장 부근의 코어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이를 막아내기 위해 천천히 마력을 나누었다. 하나의 줄기가 둘로, 그리고 넷, 여덟...

마력을 다루는 능력은, 손재주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섬세하면 섬세할수록, 신체의 말단 부분까지 통제가 가능할수록 그 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제작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아이템에 정확히 마나를 부여하는 능력. 즉 마나 컨트롤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나는 아버지에게 최고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커터칼로 나무젓가락에 유니콘을 조각할 수 있을 정도의 섬세함.

계량 시 1g의 오차도 놓치지 않는 정확함. 게다가 어지간한 일에는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집중력까지.

그렇기에, 지금 내 팔을 타고 들어오는 마나가 가소롭게 느껴졌다.

만약 이 수정구 너머에 있는 것이 채널의 관리자라면, 조상신과는 달리 취향이 고약한 녀석이다.

시스템의 판단인지, 아니면 이 녀석의 바람인지는 몰라도, 나를 시험에 들게 했으니, 뜨거운 맛을 보여주리라.

"한 번 해보자 이거지."

내가 나눈 마력의 실 또한 수천 가닥이 되었다. 마치 물고 물리듯 내 오른팔을 거점으로, 공세와 수세가 반복되었다.

하지만 내가 노리는 건 이따위 시시한 공방이 아니었다. 천천히. 물고기에게 입질하듯 마나를 당겼다.

딱 아슬아슬하게 상대가 우세할 정도로. 심장 언저리까지 후퇴를 반복했다.

그리고 잔뜩 신이 난 상대의 마력이 막 내 심장을 침범하려던 찰나.

우드득-

공수가 역전되었다. 뻗어 나간 마력의 실이 상대의 마나를 하나씩 감싸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 마나의 통제력은 손재주, 그리고 사용자의 섬세함과 비례한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놈은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당황한 마력이 이리저리 날뛰며 마나 로드를 긁어댔다. 수천 가닥으로 나뉘긴 했지만, 놈이 한 번에 통제할 수 있는 마력의 개수는 대략 수백 가닥.

그에 비해, 나는 잘게 나눠진 거의 모든 마나를 통제할 수 있다.

순식간에 몸속을 파고 들어온 침입자가 꽁꽁 묶였다. 다급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 관리자의 요청에 따라, [차원 교류자]의 적합성 테스트를 종료합니다.

- 테스트 결과는 [합격] 입니다.

사실상의 항복 메시지. 하지만 나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 잠깐, 잠깐...!!! 그만! 이대로 당기면...

"시끄러. 네 멋대로 시작했으면, 그 대가는 치러야지."

머릿속으로 다급한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뒤엉킨 마력의 실을 내 쪽으로 쭉 잡아당기자.

- 마나 [120]을 획득하셨습니다.

- [에포나의 사념체]를 획득하셨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것이 딸려 들어왔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58화

녹이 가득한 갑옷과 방패. 그리고 메이스. 푸른 안광을 흩뿌리는 기사와 마주 선 로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투구 안쪽이 텅 빈 걸 보니 살아계신 분은 아닌 것 같고, 정령도 아닌 것 같고. 몬스터인가요?"

부우웅-

대답 대신 메이스가 날아들었다. 일몰로 공격을 받아낸 로제가 뒤로 물러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힘은 확실히 좋네요. 보리스 씨보다는 확실히 강해요. 으음...아마 세 배 정도? 네 배?"

답변 대신 카가각- 기분 나쁜 마찰음이 들렸다.

녹슨 관절을 움직인 기사가 이번엔 방패를 휘둘러왔다.

카앙- 또다시 몇 걸음 물러난 로제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수정구에 손을 올린 채 무언가에 집중하는 승현의 모습이 보였다.

- 내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 로제는 저걸 맡아줘. 부탁할게.

시험이 뭔지는 몰라도, 부탁이란다.

쿡쿡. 로제가 가볍게 웃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아본 건 처음 있는 일이기에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간다.

"'친구'에게 '부탁'을 받았으니, 최선을 다해야겠죠."

카칵. 기사의 텅 빈 투구 너머로 보이는 시퍼런 안광이 로제를 바라본다.

"어머, 웃어서 화나신 건가요."

로제가 마나를 일으켰다. 은백색의 일몰이 손잡이부터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기사의 전신에도 검붉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과묵하신 분이네요."

기사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여자에게 메이스는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자신에게 입력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뿐.

방패를 앞세운 기사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주변 풍경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로제의 모습이 확대되었다.

극에 달한 실드 차지. 기사는 로제가 처참히 나가떨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아무런 타격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뒤를 잡은 로제가 생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방패는...좀 쓸만해 보이니까 부수면 안 되겠죠."

부웅-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기사가 메이스를 휘둘렀지만.

"이건 위험하니 안 돼요."

콰득. 검은빛이 일렁이는 일몰과 맞부딪혀 수명을 달리했다.

곧이어 날아든 주먹이 기사의 안면을 후려치자 콰앙! 투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텅 빈 갑옷 내부가 드러나자 로제가 신기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어머...안이 텅 비었네요? 어떻게 된 거죠?"

수치다. 주인을 지켜야 할 사명을 띤 그가 침입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다니.

다시금 덤벼들기 위해 자세를 잡으려는데.

쿠당탕.

요란한 소음과 함께 세상이 빙글 돌았다. 어느새 그의 텅 빈 갑옷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하반신이 허전했다. 기사가 의식을 아래로 움직였다. 허리 아래가 사라진 자신의 갑옷이 보였다.

그리고 콰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기사의 코어가 들어있는 가슴께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방패는 잘 쓸게요. 고마워요."

자신의 가슴께에 일몰을 꽂아 넣은 채, 방패를 들고 해맑게 웃는 로제의 모습이었다.

* * *

- [수행원] 테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 [차원 교류자] 테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고성이 머릿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 이거 빨리 안 풀어?! 그보다 어떻게 이런 마력 컨트롤을...야! 빨리 내보내 줘!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시끄러운 녀석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에포나의 의념체라고 했었지."

- 그래, 내가 에포나의 정신이 담긴...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에포나.

이곳에 와서 귀가 닳도록 들었던 이름이다. 조화와 숲의 여신이자, 엘프들의 주신이라던가.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숲을 본 적이 없는데. 대체 왜 숲의 여신이지?'

- 멍청아! 몰라서 물어? 그것도 모르고 여기에 발을 들였단 말이야?

날카로운 고함에 머릿속이 왕- 울렸다.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뭐야.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거냐?'

- 네가 끌고 들어왔으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당장 안 내보내? 아아악!

녀석이 쉴 새 없이 소리를 내질렀다. 마음 같아선 입을 틀어막고 싶은데, 어디가 입인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문제다.

- 빨리 이것부터 풀어줘.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아무런 해도 안 끼칠게. 내 이름에 걸고 맹세해. 그러니까 제발 좀 풀어줘!

명색이 신이란 녀석이 굉장히 방정맞다. 수많은 마력의 실에 꾹 묶인 채 발버둥 치던 의념체가 다급히 애원했다.

- 제발.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원래대로 못 돌아간단 말이야. 으으...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좀 과하게 장난친 건 미안해. 사과할게. 제발 돌려보내 줘.

'돌려보내 주면, 내 질문에 대답해 줄 건가?'

- 그럼! 뭐든지 답해줄게. 제발, 아아...머물고 있기 괴롭단 말이야. 빨리...!!!

머릿속을 울리는 호들갑에 정신이 나갈 것 같다.

'그래.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의념체를 감싸고 있던 속박을 풀자, 손에 쥔 수정구가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안으로 도망친 에포나가 목소리를 바꾸어 말을 걸어왔다.

- 흠흠. 그대가 가진 마나 제어력은 상당하군요. 솔직히 말해서 감탄했습니다.

"그냥 하던 대로 해. 왜 갑자기 분위기를 잡고 있어. 그리고 질문은 내가 한다고 했어. 네 정체는 뭐고, 왜 여기 있는 거지?"

- ...아까 말했잖아. 에포나의 의념체라고. 뭐 굳이 말하자면, 내가 곧 에포나야.

"에포나라...그럼 그냥 에포나라 부르면 되는 거지? 생각했던 거랑 다른데. 뭐가 이렇게 경박스러워?"

- 경박스럽다니! 나는 누구에게나 친근한 거야. 신이라고 해서 다 근엄해야 한다는 법 있어?

"틀린 말은 아닌데. 그보다 너, 왜 여기에 있냐는 질문엔 답하지 않았어."

- ...그건 말하기 좀 자존심 상하는데. 그냥 모른 채로 살아주면 안 될까?

수정구가 가볍게 진동했다. 그때, 제 몸집만 한 방패를 든 로제가 나에게 다가왔다.

"한이 부탁한 대로 했어요. 아, 그리고 이건 기사 씨에게 받아온 선물이에요."

- 아아악! 내가 마지막 남은 힘으로 만든 수호기사가! 그중에서도 제일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던 방패만 쏙 빼 왔어?!

처참한 몰골이 된 기사를 발견한 에포나가 소리를 내질렀다.

- 잠깐. 저 계집애, 뭔가 낯익은 기운이 느껴지는데...어디서 봤더라? 아니, 그보다 내 걸작이...!!! 그거 당장 안 내려놔?!

연신 비명을 내지르는 수정구에서 손을 뗀 나는 방패를 받아들었다.

신기하게도 손에 쥐는 순간, 약간의 마나가 빨려 들어감과 동시에 방패의 크기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강철의 결의]

등급 : 유니크

옵션 : 방어력+20, 스킬-[수호의 의지] 사용 가능

[수호의 의지]

마력을 소모해 신체의 내구도를 대폭 강화한다. 스킬이 시전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마나가 소모된다.

* 1분당 소모되는 마나 : [50]

대박이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특색이 없는 방패인데...무려 유니크 등급이란다.

옵션 또한 굉장했다. 손에 드는 순간 온몸이 단단해지는 것이 체감될 정도였다.

게다가 춘식이에게 주었던 에고 아머와는 달리 사용 조건 따위도 없다.

유니크 등급에 걸맞은 아이템의 위용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신없이 방패를 감상하는 나를 향해 로제가 다가왔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한에게 선물로 주려고 기사 씨에게 받아온 거예요."

"...고마워. 나중에 라면 잔뜩 구해다 줄게."

내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로제가 작게 미소 지었다.

"이왕이면 카레도 부탁해요. 아주 많이."

내가 가져온 먹을거리들이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유니크 등급 방패를 공짜로 받았는데, 그 정도쯤이야.

방패를 가방 안에 집어넣은 나는 다시금 에포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연신 진동하는 황금빛의 수정구. 저 안에서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한, 지금까지 손에 쥐고 있던 저건 뭐예요? 아까 보니까 굉장히 심각한 표정이던데."

"에포나래."

툭 던지듯 내뱉은 한 마디에 로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저게 에포나 님이라고요?"

"궁금하면 손 한번 대 봐.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저 놀리는 거죠? 에포나 님이 왜 이런 곳에...?"

반신반의하며 로제가 수정구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 후우. 간신히 연결됐네. 야! 너, 얼굴 봐 놨어! 감히 내 귀염둥이를 곤죽으로 만들어 놔? 너 뭐야?

바닥을 나뒹굴던 기사의 투구에서 날카로운 고성이 울렸다. 에포나의 목소리였다.

"어? 아직 살아계셨네요. 죄송해요. 마무리가 어설펐나요?"

일몰을 뽑아 든 로제가 투구를 향해 다가갔다. 에포나가 다급히 외쳤다.

- 잠깐, 너 내가 누군 줄 알...

"쟤가 에포나야."

"...예?"

"그...네가 아는 에포나라고. 조화와 평화. 그리고 숲의 여신."

내 대답을 들은 로제의 표정이 빠르게 바뀌었다. 표정 중 대다수의 지분을 차지한 건 의심이었다.

"저런 경박한 게 에포나 님일 리가..."

- 뭐? 경박? 몸만 멀쩡했어도 면상에 확 세인트 캐논을...

아까와는 다르게 수호기사의 투구 사이로 황금빛의 기운이 작게 피어올랐다.

잠시 둘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대치하던 로제가 일몰을 치켜들려던 찰나.

- 잠깐...너 하프 엘프구나? 게다가 이 기운은...베일? 너 베일의 딸이니?

"아버지를 아신다는 건...헙! 에포나 님을 뵙습니다!"

황급히 로제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몇 차례 헛기침한 에포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 흠흠. 어머. 숲의 아이였구나. 흥분한 나머지 미처 네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 나를 용서하거라. 그 베일의 피를 이었다면 수호기사가 상대가 안 되는 것도 당연하지. 그보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느냐?

표독스럽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일몰을 집어넣은 로제가 조심스레 답했다.

"제 유일한 친구인 한을 따라왔습니다. 에포나 님께선 왜 이런 누추한 곳에 머무시는 겁니까?"

- 누추...흠흠. 정든 곳이 고향이요, 마음 둔 곳이 집이지. 나는 이 성소에 만족하는 중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그보다 의외로구나. 여기서 베일의 딸을 만나게 될 줄이야.

"부끄럽게도 임무를 다하기 위해 에포나 님의 뜻을 거스르며 생명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로제가 고개를 떨궜다. 왜 저러지? 에포나 또한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 뜻? 그게 무슨 소리니?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로제가 땅을 바라본 채 말을 이어갔다.

"자비로운 대사제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땅에 시련을 내리신 이유는 저처럼 피가 섞인 더러운 존재들을 정화하기 위해서라고..."

로제는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투구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갑작스레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 뭐? 지금 뭐라고 그랬니? 피가 섞인 더러운 존재? 대사제가 그랬다고?

고함이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고개를 푹 숙인 로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에포나가 한층 더 크게 소리쳤다.

- 제오르그 그 개자식이 그랬단 말이야?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59화

"대사제가 제오르그 영감님이라니, 그게 무슨...?"

- 그거야, 그 새끼가 나를 보필하던 놈이었으니까 그렇지! 허, 참. 내가 이곳에 갇혀있는 동안 제멋대로 무슨 짓거리를...

에포나가 연신 혀를 찼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어쨌거나 외부인인 승현이 무턱대고 끼어들 자리는 아니었기에, 가만히 팔짱을 낀 채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때, 부복해 있던 로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럴 리가...제가 아는 대사제는 케이프 님뿐입니다."

- 케이프? 제오르그가 아니라? 너, 지금 한 이야기에 책임질 수 있어?

"케이프 님은 오랜 시간 에포나 님의 말씀을 전해왔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그런 말씀을 하시면..."

- 나는 걔한테 어떤 힘도 넘겨준 적이 없는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대사제를 자칭하는 거야?

"하지만 케이프 님은 늘 기적을 행해오셨습니다. 몇 번은 제 눈으로 똑똑히 본 적이 있던 데다가, 그 신성한 힘이 거짓된 곳에서 나왔으리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 그렇다는 건, 내 말을 못 믿겠단 거네. 아니면 내가 에포나인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거나.

"그건..."

말꼬리를 흐리는 로제를 보며 에포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 후우,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하기야, 네 입장이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니. 잘 봐두거라.

투구에 빙의한 에포나의 눈이 한 차례 빛났다. 움찔. 한쪽 무릎을 꿇은 로제의 몸이 작게 떨렸다.

'움직이지 않아...?'

시시한 마법이나 염력 따위가 아니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돌처럼 굳은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제는 자신의 몸을 둘러싼 이 힘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권능...'

마나도 아니고, 신성력도 아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몸은 움직임을 거부했다.

뻣뻣이 굳은 로제의 귓가로 의기양양한 에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 권능을 사용하는 건 너무 비인도적이라 안 쓰려고 했는데. 어때. 이제 좀 믿겠어?

로제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를 압박하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안 그래도 저 인간한테 절반 넘게 빼앗겨서 힘도 없는데...빨리 얘기해 봐. 케이프가 정말 대사제 자격을 얻었단 말이야? 게다가 뭐가 어째? 내 말씀을 전해?

에포나의 다그침이 이어졌다. 충격에 휩싸인 듯 말문을 잇지 못하는 로제를 대신해 승현이 답했다.

"외부인이라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더군. 얼핏 듣기로는 겨울숲 부족에선 구원자라 불린다던데."

- 구원자아? 걔가 대체 왜? 엘프들이 단순한 속임수에 넘어갈 리는 없고. 그렇다는 건 내 힘을 사용한 게 분명한데. 그러기 위해선 셋으로 나눠 둔 내 본체를...잠깐. 설마...이 인간이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도 그것과 연관이...너, 어머니를 만났구나?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연신 늘어놓던 에포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 그래. 어쩐지 아까부터 네 몸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했어. 게다가 그릇까지...너, 정체가 뭐야? 어머니는 왜 너를 택하신 거지?

"좀 알아듣게 얘기해 봐."

- 아아...일단 대사제가 바뀌었단 걸 보니, 케이프가 연관되었다는 건 확실하네. 이봐, 베일의 아이야.

혼자 횡설수설하던 에포나가 부드럽게 로제를 불렀다. 반쯤 넋을 놓고 있던 로제가 고개를 들었다.

"말씀하십시오. 에포나 님."

- 잠시 내 그릇이 되어야겠다. 저 인간과는 다르게 너라면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다.

"그게 무슨...말씀이십니까?"

- 지금부터 네가 임시 대사제란 뜻이지. 당장 여기서 나가자.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겠구나. 빨리, 내 본체를 잡아. 어서!

에포나는 막무가내였다. 성화를 이기지 못한 로제가 수정구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자, 찬란한 금빛 아우라가 그녀를 한 차례 감쌌다.

곧이어, 로제의 오른쪽 눈동자가 금빛으로 변함과 동시에 말투와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휴우, 이게 얼마 만에 움직여보는 팔다리야. 동조율도 높은 편이고. 신체 능력도 뛰어나. 베일의 피를 이은 게 확실하네. 이 정도면 한동안 편안히 지낼 수 있겠어."

급작스러운 변화. 승현이 놀란 눈으로 로제의 몸에 들어간 에포나를 바라보았다.

"뭘 봐? 빙의하는 거 처음 봐?"

"그렇게 막 빙의해도 괜찮은 거냐? 부작용 같은 건 없어?"

"나를 뭘로 보고! 그런 건 저급한 망령들이 씌였을 때고. 나 정도의 격을 가진 혼은 파장만 맞으면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더 좋아질걸?"

"...무슨 신이 저렇게 막무가내야? 좀 고상하고, 차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신 아니거든. 관리자라고 해 줄래? 저걸 그냥 확! 아까는 몸이 없어서 봐 준 거지만, 지금은...아니지. 그보다 빨리 여기서 나가자. 지체할 겨를이 없어."

로제, 아니 에포나가 나를 향해 눈을 흘기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허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 *

오오오───

공명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파나마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대체 어떻게 되신 거지?'

어차피 여왕은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문제는 갑작스레 사라진 로제다.

그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여왕에겐 이길 수 없다. 행여 패배하여 낙인이 새겨지기라도 한다면....

'아가씨마저 이런 꼴을 당하게 둘 순 없지.'

비참한 몰골로 살아가는 건 그와 그의 동료들이면 충분했다. 빠르게 결정을 내린 파나마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마 이 근처에 하나 있을 텐데."

지하 은신처로 통하는 비밀 통로, 오랜 동굴 생활 동안 뚫어놓은 것이 몇 군데 있다.

파나마는 그곳에 숨어 지내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쿵- 기억을 더듬어 가며 통로를 찾아 달리던 파나마가 무언가와 부딪혔다.

둔탁하고 묵직한, 그리고 털이 부숭부숭한 것.

한 차례 바닥을 나뒹군 파나마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자신과 부딪힌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여, 여왕..."

여왕은 마치 바닥을 납작 엎드린 커다란 나방처럼 보였다.

커다란 한 개의 눈과 비정상적으로 큰 머리. 털이 가득한 몸통 아래로 수많은 다리가 연신 꼼지락거리며 파나마 근처의 바닥을 훑고 있었다.

"빌어먹을...어떻게 벌써 여기까지."

파나마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우드득-

그를 발견한 여왕의 굵고 커다란 더듬이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곧이어 입 아래에 돌돌 말린 주둥이가 쭉 펴졌다. 그 끝에 삐죽삐죽 돋아난 이빨을 본 파나마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서서히 몸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엘프라면 절대 피해갈 수 없는 여왕의 특기, '강제력'이 발동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길은 두 가지뿐이다.

먼저 간 동료들처럼 여왕에게 잡아먹히거나, 혹은 죽기 직전까지 노리개가 된 후 살아남거나.

평소에는 후자였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전자가 될 것 같았다.

오오──

새끼를 잃고 분노한 여왕의 감정이 공명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편안한 죽음을 맞는 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파나마가 눈을 부릅떴다.

'그래, 어차피 죽을 날만 기다리던 거. 내 한 몸 희생해서 아가씨가 무사히 빠져나가시면 된 거다.'

죽는 건 무섭지 않았다. 다만, 화가 났다. 가장 큰 이유는 승현이었다.

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이곳까지 아가씨를 데려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스윽- 승현을 원망하는 파나마의 목덜미를 여왕의 길쭉한 혀가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소름이 끼쳤다.

지금껏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경우의 수는 둘 중 하나.

저 혓바닥에 뚫려 온몸의 피가 빨려 나가거나, 아니면 산채로 잔혹하게 씹어 먹히거나.

"웬만하면...안 아픈 쪽이었으면 좋겠군."

파나마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배려인가. 더럽게 고맙네.'

도저히 눈을 뜰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얼씨구. 저딴 게 권능까지 쓰네. 세상 말세다."

여왕의 등 뒤에 나타난 누군가가 대뜸 비아냥거렸다.

낯선 말투와 귀에 익은 목소리. 화들짝 놀란 파나마가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스스로 먹이가 되어 여왕의 분노를 가라앉힐 생각이었는데. 하필 이런 타이밍에.

그륵─

가래 끓는 소리를 낸 여왕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당황한 파나마가 저릿한 몸을 억지로 움직여 여왕의 주둥이를 퍽퍽 쳤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시선을 돌릴 심산이었다.

하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파나마의 근력은 여왕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다급해진 파나마가 제 이빨로 여왕을 물어뜯었다. 우지직-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앞니가 깨졌다.

그럼에도 여왕은 여전히 움직임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

"아가씨? 누구? 나? 아가씨라 불리는 건 또 처음이네. 잠깐. 저 비쩍 마른 녀석은 누구야?"

"비쩍 말랐다니...말 좀 가려서 해라."

"어라...너, 숲의 아이구나!"

조금 기쁜 듯한 로제의 목소리와 함께 승현의 목소리도 들렸다.

사라졌던 로제가 돌아온 건 다행이지만, 기뻐하기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안 좋았다. 그렇기에 파나마는 목청이 터져라, 다시금 소리쳤다.

"이놈이 여왕입니다. 아가씨, 엘프는 절대 이놈을 이길 수 없으니, 빨리 도망가십시오!"

그런데, 로제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의 외침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갑자기 목을 가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흠흠, 반갑구나. 숲의 아이야. 아직 새로운 몸에 적응이 되질 않아 너를 알아보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구나. 나를 용서해 주겠느냐?"

캄캄한 동굴을 비추는 한 줄기 빛. 가볍게 메아리치는 울림이었지만, 평범한 하프 엘프인 로제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성스럽고 거룩한 옥음(玉音)이었다.

"...너 그거 하지 마라. 안 어울려."

"예전에 어머니께 배워둔 거니까 트집 잡을 생각 하지 마. 그보다 숲의 아이야. 아, 씨. 의식하고 하려니까 못 해 먹겠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저게 뭐니?"

파나마는 지금의 처지도 잊은 채, 제 눈을 의심했다. 조금 전의 그 성스러운 음성은 자신의 착각이었단 말인가.

마치 삼류 시정잡배와도 같은 말투. 조금 전까지 보았던 로제라고생각할 수 없을 만큼 불량했다.

그 순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여왕의 하나뿐인 눈이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목숨을 빼앗은 '강제력'이 발동된 것이다.

이를 발견한 파나마가 재빨리 눈을 후려치려 했지만, 이미 강제력이 발동된 모양인지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끝났다...'

파나마가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커다란 눈과 마주하는 순간 여왕에게 낙인이 찍힌 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삶을 이어가게 된다.

인간인 승현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엘프의 피가 흐르는 로제의 말로는 확실했다.

저도 모르게 로제를 이곳에 데려온 승현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을 본 로제가 피식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내가 요기에 있는데. 지금 뭐 하는 거니?"

그리고는 고개를 빳빳이 세워, 정면으로 여왕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오른쪽 눈동자가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고작 그 정도 권능으로 나에게 덤벼들려고 해? 누가 그따위로 가르치든?"

그르륵──

당황한 여왕이 작은 신음을 내었다. 권능이 먹혀들지 않는다. 아니, 되려 순식간에 신체의 자유를 빼앗겼다.

제자리에서 뻣뻣이 굳은 여왕이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와 동시에 파나마의 몸이 축 늘어졌다. 여왕의 주둥이에 감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한 것이다.

"흐음...이봐, 여왕이라고 했던가? 너는 내가 왜 조화. 그리고 평화의 여신인 줄 알아?"

뿌드득-

로제. 아니, 에포나가 손가락을 꺾음과 함께 그녀의 주먹에 금빛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거면 다 되거든."

씨익. 여왕을 바라보던 에포나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60화

키이익──

여왕의 구슬픈 울음이 동굴 안에 메아리쳤다.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에포나가 사정없이 발이 묶인 여왕을 후려치기 시작한 것이다.

"망할, 케이프, 이 개자식.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개짓거리를 벌이고 다닌 거야!"

마치 화풀이를 하듯 주먹을 휘두르던 에포나가 손뼉을 탁, 쳤다.

"그러고 보니 이게 있었지?"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춤을 향해 움직였다.

"모양은 다르지만, 예전에 베일이 쓰던 것과 비슷한 거 같은데. 언젠가 한 번쯤 써 보고 싶었단 말이지."

탐욕스런 눈빛으로 일몰을 바라본 에포나가 덥썩 그것을 움켜쥐자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 스파크가 튀었다. 대경실색한 에포나가 일몰을 향해 눈을 흘겼다.

"악! 따가워! 무슨 반항이 이렇게 세. 네 주인이 아니라 이거냐? 좋아. 더럽고 치사해서 나도 안 써!"

토라진 에포나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곧이어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금광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로제의 다급한 외침이 흘러들어왔다.

- 잠시...에포나 님. 그건 제 몸입니다만, 차라리 다른 방법을 사용하시는 게...

'알고 있어. 잠깐만 빌릴게.'

- 아니, 빌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쉿. 조용히 해.'

- ...

로제의 말을 끊은 에포나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래도 생명이니, 반항할 기회 정도는 줘야겠지."

에포나의 오른쪽 눈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자신을 속박하던 기운이 사라짐을 느낀 여왕이 재빨리 전투태세를 갖추려는 찰나.

"이번엔 좀 세게 때릴 거거든? 아마 무지하게 아플 거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에포나가 땅을 박찬 뒤, 공중에서 환히 빛나는 주먹을 휘둘렀다.

끼이익──

다급한 비명과 함께 여왕이 다급히 몸을 틀었다. 그에 맞춰 에포나 또한 허공에서 한 차례 몸을 틀었다.

당황한 여왕이 재빨리 앞발을 휘둘렀지만.

콰지직-

에포나의 주먹에 산산조각남과 동시에 여왕의 시야가 깜깜해졌다.

앞발을 부순 주먹이 기세를 몰아 그대로 머리통을 박살 낸 것이다.

후두둑- 사방으로 살점과 체액이 비산했다.

- 너, 너무하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 몸인데....

오물을 뒤집어쓴 에포나가 머릿속에 울먹이는 로제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체한 뒤, 승현을 향해 다가갔다.

"후우. 간만에 후련하네. 속이 확 풀리는 기분이야."

"그래? 이걸 써 볼 기회였는데. 내 차례가 안 와서 아쉽네."

방패를 들어 올리며 씨익 웃는 승현의 모습을 본 에포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뭐...."

아깝다. 너무 아깝다.

수호 기사의 파츠 중 가장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게 저 방패인데. 이런 식으로 홀랑 빼앗길 줄이야.

먼저 싸움을 건 것은 자신이니 다시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흐뭇하게 방패를 치켜든 승현을 흘겨보던 그때. 잠시 정신을 잃었던 파나마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둘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 여왕의 시체를 발견하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눈이 휘둥그레진 파나마와 시선이 마주친 에포나가 황급히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데. 괜찮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승현이 에포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왜, 아까처럼 다시 말해보지. 포기한 건가?"

"...남이사. 트집 잡지 마. 어머니한테 혼나가며 배웠던 거니까."

파나마는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 멜리사를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말투는 왜 저런 거지.

혼란에 빠진 파나마에게 로제의 몸을 빌린 에포나가 다가왔다.

"쯧쯧...그나저나 꼴이 이게 뭐니? 명색이 하프 엘프인데 몸은 왜 이리도 비쩍 말랐고."

에포나가 작게 혀를 찬 뒤,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오물 가득한 파나마의 얼굴을 짧게 쓰다듬었다.

이런 몰골이 된 후로 처음 느껴보는 따스한 기운이 그의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안타까운 듯 그를 바라보던 에포나가 중얼거렸다.

"너...낙인이 새겨졌구나. 가엾게도. 그 자식, 독하게도 걸어놨네. 지금 내가 가진 힘으론 푸는 게 불가능하겠는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연신 읊어대는 에포나를 향해 파나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차, 그러고 보니 급한 나머지 설명을 안 했구나."

"...?"

"파나마, 맞지? 이제 이름이 생각났어. 예전에 베일 한 번 이겨보겠다고 무작정 덤벼들면서 주먹질하던 코흘리개. 아직 어렸을 적 얼굴이 좀 남아있네. 반가워."

파나마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어떻게? 멍하니 자신을 응시하는 파나마를 향해, 에포나가 빙그레 웃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내가 에포나야,"

"...예?"

파나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앞에 있는 건 로제지, 에포나가 아니다. 혹시 모종의 계기로 순식간에 정신이 이상해진 걸까.

파나마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아가씨. 조금 전 보여주신 능력은 굉장했지만, 에포나 님을 사칭하시는 건 좀...심각한 결례가 아닌가..."

"사칭이 아니라, 내가 에포나라고! 그놈 쫓아낸 거 보면 모르겠어?"

에포나가 눈썹을 추켜세움과 동시에 오른쪽 눈이 다시금 짙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조금 거친 방식으로 몇 차례 권능을 체험하고 난 뒤에야, 파나마는 지금의 상황을 납득할 수 있었다.

"저, 정말 에포나 님이십니까?"

"그래. 아직도 못 믿겠어? 더 해 줄까?"

"아닙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재빨리 부동자세를 취한 파나마, 그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뼛속까지 센티넬인 그에게 있어, 에포나와의 조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온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영광은 무슨. 그보다 파나마.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 설명해줘야겠는데?"

에포나가 조금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 된 파나마를 향해, 로제와 승현에게 들었던 것들을 이야기하자,

"케, 케이프라면. 제가 아는 그 케이프 말씀이십니까?"

파나마가 입을 쩍 벌렸다.

"그래. 숲속에 홀로 살던 난쟁이 케이프. 그 케이프가 지금 대사제라는데 그에 대해 아는 게 있니?"

"...제오르그가 아니라, 케이프가 대사제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보아하니 너도 모르는 눈치로구나. 그럼 질문을 바꿔서, 너는 왜 여기에 있는 거니?"

"그것이..."

파나마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혹한이 찾아든 땅. 순식간에 말라버린 초목. 생존을 위해 새로운 대지를 찾아 떠난 여정. 그리고 여왕을 만나 이곳에 갇히게 된 것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에포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쥐어짜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미안."

"아, 아닙니다! 에포나 님이 왜 사과를...전부 저와 제 동료들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황급히 손사래 치는 파나마를 향해 에포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이유를 이야기해 줄 수 없지만...나로서는 최선이었어.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이야. 미안해. 정말."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에포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승현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어머니가 널 왜 택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머니의 결정을 믿어야겠지. 한승현. 아니, 한. 서리감옥 부족이 여기서 멀지 않다고 했지?"

"아마 걸어서 이틀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부탁할게. 거기까지 안내해 줘. 파나마, 너는 여기서 좀 기다리고 있어. 가닥이 잡히면, 반드시 네 몸을 원래대로 돌려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에포나 님. 아무런 도움이 되어드리질 못해서 송구합니다."

* * *

"흘흘, 확실히 로제 양에게 부탁하길 잘했어. 그렇지, 보리스?"

저 멀리 다가오는 승현과 로제의 모습이 보였다. 제오르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똬리를 튼 보리스의 등을 쓰다듬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법인가. 동굴의 주인을 이리도 빨리 처치할 줄이야."

잠시 그의 옛 친구, 베일을 떠올린 제오르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점점 가까워지는 둘을 보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요르들이 보금자리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안에 봉인된 에포나를 만나는 것.

수백 년 전 갑작스레 사라진 에포나를 찾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던가.

그렇기에 승현에게 보리스가 탈피한 가죽을 보관해 둔 장소를 알려준 뒤, 곧바로 산에 오를 생각이었다.

"끝났습니다. 영감님."

그의 앞으로 다가온 로제와 승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제오르그가 막 고생했다며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주려던 찰나.

"죄송해요...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건 제 의지가 아니에요."

로제가 시선을 회피했다. 영문을 모르는 제오르그가 로제를 바라보자.

"야, 이 새끼야."

빠각- 로제의 손바닥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와당탕 넘어진 제오르그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로제 양. 이게 무슨 짓..."

"무슨 짓? 너 많이 컸다? 나한테 대들기도 하고."

제오르그가 멍하니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어디선가 겪어본 듯한, 그립고 아련한 통증. 그리고 익숙한 말투. 게다가.

"그, 그 눈은...설마."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는 로제의 오른쪽 눈동자.

헛것을 본 것도, 노안이 온 것도 아니다.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황금빛의 눈동자.

제오르그가 떨리는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있어. 오래간만이네. 제오르그. 설명해. 어쩌다 이렇게 개판이 난 건지. 왜 케이프 고 계집이 너 대신 대사제 자리에 앉아있는 건지. 네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어."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당황한 제오르그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봐주기 힘든 광경이네.'

승현이 고개를 돌렸다. 빠악- 에포나의 손바닥이 제오르그의 뒤통수를 한 차례 더 후려쳤다.

"흐흐, 흐흐흐...이 손맛. 정말로 에포나 님이시군요."

제오르그는 묘하게 기뻐 보였다. 에포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나이가 들어도 예나 지금이나 맞으면서 웃는 건 똑같구나."

"안 그래도 찾아뵈려 했습니다만. 성소를 차지한 녀석 때문에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래서, 그걸 없애 달라고 로제를 보낸 거다?"

싸아- 에포나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한 제오르그가 황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베, 베일 단장의 피를 이은 로제 양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판단해..."

"지금 장난해? 저기 살던 놈이 나와 같은 권능을 가지고 있던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예? 그, 그게 무슨...보리스에게 듣기론, 단순히 손쓰기 힘들 정도로 강한 녀석이라고만...들었습니다."

제오르그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그런 줄 알았더라면 다른 방법을 찾았으면 찾았지 절대 로제를 보내지 않았으리라.

엘프들에 한해 그녀가 가진 권능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니까.

"후우, 그래. 네가 아무리 느물거리고, 밥맛 떨어지는 놈이라도 대사제는 대사제인데. 그랬을 리가 없지."

"흘흘, 예전엔 매일 욕만 하시더니.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내심 저를 좋게 봐주시고 계셨던 겝니까?"

"이거 봐. 또 이런다. 징그러우니까 실실 웃지 마. 그보다 너, 내가 묻는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았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포나가 보리스의 털가죽에 몸을 묻으며 제오르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질질 끄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

"흘흘, 모신 세월이 있는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설명해 봐. 왜 케이프가 대사제인지. 그리고 너희들이 왜 다크 엘프란 멸칭까지 들어가며 놈들에게 쫓겨났는지."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61화

끼이익-

삐걱대는 식량 창고의 문을 닫은 록타가 고개를 들었다. 벌써부터 먹구름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한층 더 혹독한 추위가 찾아오기 전에 볼 수 있는 징조다.

"으음...이번 겨울도 별일 없이 넘겨야 할 텐데."

가볍게 탄식한 록타가 등을 돌렸다. 다음 목적지는 마을 공용 창고. 땔감이 충분히 확보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막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저 멀리서부터 요르의 고삐를 틀어쥔 샤샤가 다가왔다. 록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얌전히 쉬고 있으라니까 왜 벌써 나온 거냐."

"그러려고 했는데, 영 몸이 근질거려서 말이오. 그보다 이 녀석 좀 봐주시오. 얼마 전 새끼를 깐 녀석인데 형님이 보기에는 어떻소?"

답답한 동생에게 한소리 하려던 찰나, 샤샤가 요르를 가리켰다. 한숨을 내쉰 록타가 시선을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 말이냐? 흐음..."

씨익- 내뱉는 숨소리가 거칠다. 몸 전체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모피 아래로 붉게 달아오른 가죽이 보인다.

"얼마 가지 못할 것 같다."

지금껏 수도 없이 보았던 광경. 탈피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에너지를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 푹 쉬게 해라. 창고에 건초가 있으니 잠자리도 새것으로 갈아 주고. 먹이도 부족하지 않게 챙겨줘야 한다."

"역시...살릴 수는 없는 모양이군. 그렇게 하겠소."

록타가 고개를 내저었다. 달리 방법이 없다.

안식에 들기 전까지 최대한 편의를 봐 주는 것이 족장으로서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다.

그걸 알고 있는 샤샤이기에 안타까운 눈으로 요르를 바라보다 주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한은 괜찮을지 모르겠소. 날씨가 심상치 않은데."

"질 좋은 요르의 털가죽을 다섯 장이나 가져갔다. 얼어 죽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게다가 신기한 물건들도 많이 지녔으니 별일 없을 거다."

승현을 떠올린 록타가 허리춤의 나이프를 흐뭇하게 쓰다듬었다.

'티...뭐라고 했더라.'

복잡한 이름과 길이가 짧은 게 조금 흠이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 어쩜 이리도 아름다울까.

록타의 상념을 깬 건 샤샤의 입에서 나온 짧은 이름이었다.

"하기야, 걱정은 무의미하겠구려. 게다가 로제까지 함께 있으니..."

"그 망할 계집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제기랄."

인상을 찡그린 록타가 씹어뱉듯 말했다. 목소리엔 분노와 수치심이 섞여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로제....'

소문과는 달리 로제의 첫인상은 나약했다.

한 줌도 안 되는 팔은 그의 도끼를 견뎌내기엔 너무나도 가늘었으며, 새하얀 목덜미는 쥐면 부러질 것 같았다.

그렇기에 록타는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로제의 분위기가 바뀐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 덤벼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그가 할 수 있는 건 투기를 끌어올려 저항하며 겁먹은 짐승처럼 짖어대는 일뿐이었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위대한 전사라 생각해왔던 록타에게 그것은 퍽 충격적인 일이었다.

만약 승현의 중재가 없었더라면 그날 험한 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록타를 너무나도 괴롭게, 그리고 분노하게 했다.

자괴감에 휩싸인 록타가 하늘을 바라보던 그때.

"흘흘, 잘들 있었는감?"

실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간 자취를 감췄던 제오르그란 사실을 알아차린 록타가 괜히 머쓱해져 록타가 버럭 소리쳤다.

"뭐야, 영감. 한창 바쁠 때 어딜 그렇게..."

"너무 화내지 마시게, 족장.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으니."

귀한 손님?

샤샤와 록타가 제오르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부터 이쪽을 향해 천천히 기어오는 잿빛 짐승이 보였다.

압도적인 크기. 윤기 나는 털과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

"저게...뭐냐, 영감."

"보리스. 왕의 피를 이어받은 요르일세. 내가 부족 밖에서 기르던..."

카앙-

제오르그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록타가 빗겨 매고 있던 도끼를 뽑아 들었다.

팔짱을 낀 채 보리스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로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영감. 요르가 귀한 손님일 리는 없고...설마 저 계집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흘흘. 왜 아니겠나. 저분은 내가 모시는 분이자, 가장 존경하는 분일세."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에 록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까지 부족의 최연장자로서 충분히 편의를 봐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조금 전의 발언을 참아내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모시는 분? 누가 누굴? 영감이 저 계집을? 지금 제정신인가? 아니면 나이를 너무 먹어 미친 건가?"

"그게 아닐세. 일단 내 이야기를..."

"이건 아니다. 저 계집에게 뭘 받아 처먹었는진 몰라도, 영감은 방금 서리감옥 부족민으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분노한 록타가 제오르그에게 도끼를 겨누었다. 그때였다.

"계집? 계에지입?"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록타와 샤샤. 그리고 서리감옥 부족민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보리스의 머리에서 훌쩍 뛰어내린 로제가 팔짱을 낀 채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는.

"뭘 봐? 눈 깔아."

로제의 오른쪽 눈이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 * *

'그러니까 저 계집...아니, 저분이 로제의 몸에 들어간 에포나 님이란 말인가.'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봐도 믿을 수 없었다.

"이런 거보다 더 맛있는 게 있다고? 카레? 라면? 그게 뭔데?"

한쪽 다리를 탁자 위에 올린 채 의자에 기대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대는 저게 에포나라니.

"뭐 어때. 오래간만에 몸을 얻었는데, 이 정도는 좀 봐 줘. 에이, 창피할 게 뭐 있어."

게다가 허공을 보며 혼잣말까지 툭툭 내뱉기까지, 아무리 봐도 위엄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그렇다고 부정하기엔 조금 전 느꼈던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리고, 몇몇 부족민들은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이상하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그게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고, 록타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같이 갔던 한은 어디에 있는 거냐. 아니, 것입니까?"

어색한 존대. 에포나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잠시 부족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어. 비밀로 할 생각은 없지만, 우리끼리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입니까? 혹시 어딘가 다친 것은 아니십니까?"

"너 말투가 좀 이상하다? 뭐, 네 친구는 멀쩡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배도 좀 채웠으니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소매로 입가를 쓱쓱 닦은 에포나가 다리를 꼬며 몸을 돌렸다.

"너희들의 선대가 겨울숲 부족에서 쫓겨났다며? 제오르그 세대의 하프 엘프들 말이야."

갑작스레 나온 예민한 주제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미간을 찡그린 에포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왜 그래? 꿀 먹었어? 그냥 편하게 얘기해 봐."

순간 적막이 흘렀다. 어색한 침묵을 깬 건, 록타의 옆에 서 있던 샤샤였다.

"그렇습니다."

"왜?"

"모릅니다."

너무나도 간단한 대답. 에포나가 턱을 매만졌다.

"흐음...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그 전에, 먼저 당신이 에포나 님이라는 걸 확실히 증명해 주십시오. 아까 보여준 능력만으로 당신을 신뢰하기엔 부족합니다."

이번에 앞으로 나선 건 다이크였다. 커다란 창을 둘러멘 그의 눈엔 아직까지 의심의 잔불이 남아있었다.

"흐음...로제도 그렇고. 파나마도 그렇고, 얘들도 그렇고. 왜 이렇게 내 말을 못 믿을까."

중얼거린 에포나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황당해진 다이크가 막 따지려는데.

오오오오오-

천막 밖에 모여든 이들의 감탄사가 들려왔다.

"지금은 남은 힘이 얼마 없어 이 정도가 한계지만. 증명하기엔 충분하겠지."

".....?"

다이크가 말없이 몸을 돌렸다.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서자 따스한 온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따스해...?'

반사적으로 하늘을 바라본 다이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어때. 이제 좀 믿겠어?"

에포나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을 뚫고 내려온 한 줄기 빛.

일 년 중 하루도 보기 힘든 햇살이 그의 머리 위를 부드럽게 감쌌기 때문이다.

로제 개인이 지닌 힘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날씨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정확히 천막 위로만 내리쬐는 햇살이라니.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털썩-

이곳에 모인 모두가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에포나 님을 뵙습니다!"

겨울숲 부족에서 쫓겨난 이들의 후손이지만 에포나를 향한 신앙심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기에 모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예의는 안 차려도 돼, 너희가 이렇게 될 때까지 잠들어 있던 나는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어."

"그런가. 그럼, 신에게 말을 놓을 기회는 지금뿐인 것 같으니 편히 하겠다. 서리감옥 부족의 족장, 록...커윽."

눈치 없이 나서는 록타의 양 옆구리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하나는 다이크, 하나는 샤샤였다.

"형님!"

"족장, 눈치 좀 챙기시오!"

"크흠..."

머쓱해진 록타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그를 보며 풉 웃던 에포나가 손뼉을 탁, 쳤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묻고 싶은 게 많긴 한데 이거부터 좀 듣자. 왜 그놈들은 다짜고짜 너희들을 쫓아낸 거지?"

"그걸 저희가 어찌 알겠습니까. 당연히 에포나 님의 뜻인 줄로만..."

"제오르그. 넌 좀 닥쳐. 대사제란 놈이...쯧.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그런 짓거리를 시키지 않을 거란 건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잠깐. 제, 제오르그 영감이 대사제란 말이냐...아니, 말입니까?"

놀란 록타가 소리쳤다. 제오르그 영감이 대사제라고? 저 능글맞고 매사 가벼운 영감이?

"내가 마지막으로 뽑은 놈이 이 녀석이야. 아, 이제는 로제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지. 임시직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겨울숲 부족에 있는 케이프 대사제는 어찌 된 겁니까?"

"그 꼬마가 대사제라고? 푸하하!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네!"

에포나가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제오르그가 입을 열었다.

"흘흘, 하지만 들리는 얘기로는 날씨를 바꾸거나,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는 등의 기적을 선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겨울숲 부족에서 차기 대사제로 인정받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너, 똑같은 기적 써봐. 못 쓰면 오늘 나한테 죽는다."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제오르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된 에포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직접 임명한 대사제인 네가 불가능한 일을 케이프 그 계집이 해냈다고? 웃기는 소리."

자리에서 일어난 에포나가 밖으로 나갔다.

쌕쌕 뜨거운 숨을 몰아쉬는 요르 앞에 멈춰선 그녀가 가볍게 그를 쓰다듬었다.

"녀석들은 무언가에 속고 있는 거야."

스르륵-

편안한 표정이 된 요르가 똬리를 틀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곧이어.

쩌억-

작은 파열음과 함께, 가죽이 갈라지며 새하얀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추측하건대, 아마 제오르그 너는 어느 순간부터 신성력이 보충되지 않았을 테지."

"...맞습니다."

"그 시기가 너희가 겨울숲 부족에서 쫓겨났을 때. 맞지? 그쯤 해서 케이프가 대사제 자리를 꿰찼을 테고."

늘 웃는 상이던 제오르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고 에포나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제오르그 네가 순순히 그들의 지시에 따른 건. 그리고 초창기에 이곳으로 넘어온 하프 엘프들이 반발하지 않은 건. 이 모든 게 내 결정이라고 생각해서였을 테고."

모두가 숨을 죽였다. 에포나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기 시작했다.

"나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으니까, 그래서 다음 세대 하프 엘프들에겐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며 진실을 숨긴 거고. 맞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제오르그가 고개를 떨구었다. 다른 이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멀뚱멀뚱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에포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등신들아!"

에포나가 소리를 빽 질렀다. 고요한 설원 위로 그녀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내가 너희들을 왜 버려! 엘프들도, 너희들도. 내가 관리하는 소중한 자식들이나 마찬가지인데! 게다가 다크 엘프? 케이프 그 계집이 그딴 멸칭을 붙이던? 면상을 확 후려갈기지 왜 이런 곳에 짱박혀서 궁상을 떨고 있어!"

"하지만 룬드그렌이 말하길, 에포나 님의 계시가 내려졌다고..."

계시? 족장인 록타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에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대화에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다.

에포나의 고함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계시? 계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제오르그 너는 잘 알 텐데. 나는 계시 같은 거 내리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렸던 신탁이 뭐였는지 기억하고 있어?"

"...몇백 년 전쯤, 취향이 바뀌어 커다란 근육이 보기 좋으니 다들 단련에 정진하라던..."

"...내가 그랬니? 흠흠. 그런 건 좀 잊어버리지 그랬니. 그땐 좀 철이 없었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에포나가 몇 차례 헛기침했다. 그리고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모두를 향해 말했다.

"여기서 확실히 얘기하겠는데, 나는 너희들을 버린 적 없어."

"..."

"많이 늦긴 했지만, 오해를 풀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어떻게 말입니까?"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내 추측으론 케이프 그 계집이 뭔가 일을 꾸민 것 같아. 대강 로제에게 사정을 들어보니...짐작 가는 게 좀 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단 그 부분은 확실한 증거가 잡힐 때까지 기다려. 내가 한에게 부탁해둔 게 있으니까."

에포나가 주먹을 꾹 쥐었다.

"그동안, 우린 우리의 일을 해야지."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62화

- [BR-372] 채널과의 교류가 종료되었습니다.

- 상대방의 만족도는 [★★★★]입니다.

- 채널 등급과 만족도를 바탕으로 보상을 책정 중입니다.

[보상 목록]

1. 신규 스텟, 마나 포인트 [75] 획득.

2. 유대 포인트 [2500] 획득.

집으로 돌아온 나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짧은 기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기에 정신적으로 피로해진 탓이다.

막 알림창을 치우려던 그때, 황당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 지금까지 획득한 유대 포인트가 기준치에 도달해, [차원 교류자]의 새로운 특성이 개방됩니다!

[타임 스톱]

- 특성을 활성화하면, 교류 중인 차원에 방문했을 시 이전에 머물렀던 차원의 시간을 정지할 수 있습니다.

얼토당토않은 능력에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시간을 멈추는 특성이라고?"

시간과 관련된 능력을 보유한 각성자의 이야기는 금시초문인데.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뤄봤을 때 이 허무맹랑한 특성이 사실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대체 아버지는 뭘 만드신 거지?'

알면 알수록 당황스러웠다. 차원을 넘나드는 능력에 이어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라니.

"어떻게 써야 할지는 차차 생각해 봐야겠지만...우선 중요한 건 이거지."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흉내쟁이가 보관 중이던 가죽을 꺼냈다.

에포나의 도움을 받아 탈피한 보리스의 가죽이다.

그것을 집어 들자 눈앞에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보리스의 털가죽]

등급 : [레어++]

옵션 : [냉기 면역] , 방어력+5

[냉기 면역]

- 착용자에게 가해진 냉기 계열의 디버프 효과를 [75]% 줄여줍니다.

옵션을 확인하고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범상치 않은 물건이리라 짐작했지만, 무려 '면역' 등급일 줄이야.

방어-저항-면역-무효

일반적으로 내성 계통 옵션의 등급은 이런 순으로 분류된다.

지금까지 공개된 아이템 중 '무효'등급의 장비는 채 다섯 개가 안 되니, 실질적으론 '면역' 등급이 세간에서 구할 수 있는 것 중 최고의 옵션인 셈이다.

물론, 나는 당장 보리스의 가죽을 사용할 생각은 없다.

이건 내 개인적인 연구 재료이자, 성장의 발판이 되어줄 테니까.

그러므로 제피로스에게 넘겨줄 제작품의 재료는 평범한 요르의 가죽.

'저항' 등급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니, 이 정도면 오신우 클랜장도 충분히 만족하리라.

"3주일...시간은 충분하고."

아직 시간적인 여유는 있다. 제작할 아이템에 관한 대체적인 구상도 끝났다.

대략적인 계획을 수립한 나는 조금 전부터 눈앞에 아른거리는 메시지를 치워버렸다.

- [BR-372] 채널의 시간을 정지하시겠습니까?

특성을 활성화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 에포나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선 두 달이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 에포나에게 갓 탈피한 요르의 가죽을 건네받으며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로제에게 듣기론 두 달 후에 케이프가 겨울숲 부족으로 돌아올 거래. 그때 네가 한 번 만나봐 줘."

"케이프를 직접? 내가?"

"내가 가기엔 걸릴 확률이 높아. 그냥 대화를 나눈 뒤 들었던 내용을 나에게 말해주면 돼. 부탁할게."

에포나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진지했고, 또한 간절했기에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떻게든 한 번 해볼게. 대신 너, 나한테 빚진 거다."

"...걱정하지 마. 맨입으로 부탁할 생각은 없으니까."

"뭐, 그렇다면 좋아. 그럼 너는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로제는?"

"제오르그와 록타의 몸을 빌려 서리감옥 부족을 지휘해 만년빙산을 수색할 거야. 그동안 로제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만년빙산 수색. 그간의 이야기를 들은 에포나는 무언가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 듯 보였지만 끝까지 그게 무엇인지 말해주진 않았다.

작은 쪽방에 앉아 열심히 에포나의 의도를 추측해보던 그때. 누군가가 내 발치를 툭툭 건드렸다.

흉내쟁이였다.

[소화 허가 요청. 현재 공복도 극악.]

"그래...일단 뱃속에 든 아이템들부터 다 꺼낸 뒤에. 그나저나 그 커다란 게 대체 어디로 들어간 거야?"

저장 용량이 150kg인 [이면의 공간]에 넣어 두기엔 감시자의 몸집은 너무 거대했다.

[소화 기관 별도 존재. 숙지 요청.]

밥 들어갈 배는 따로 있었군.

하나둘 바닥에 잡동사니들을 뱉어내는 흉내쟁이를 구경하던 나는 그동안 잊고 있던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차원 상점이 갱신되었다고 했지."

척추분쇄자가 사라진 상태였기에, 대체품이 필요했다.

물론 검은 바위에게 받은 경추파쇄자가 있긴 하지만...척추분쇄자에 비해 성능이 한참 떨어졌다.

"제발 쓸만한 거 하나만...이런."

두근대는 심정으로 리스트를 살펴보던 나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높은 산 부족에서 열렸던 상점과 마찬가지로, 아령, 바벨, 그 외 쓸모없는 것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그것들을 뒤적이던 그때. 두 가지의 물건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왕의 실타래]

등급 : [레어++]

옵션 : 근력+5, 마력+5

- 여왕이 둥지를 지을 때 사용하던 실. 강철을 넘어서는 인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력을 불어넣으면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조종할 수 있으며, 종종 아이템 제작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가격 : [1m]당 유대 포인트 [300]

[원시 정령 계약서]

등급 : [유니크]

옵션 : [종속 계약]

[종속 계약]

-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사용자와 파장이 일치하는 원시 정령과 계약할 수 있습니다.

가격 : 유대 포인트 [12000]

둘 다 상당한 가격이다.

일단 내 시선을 잡아끄는 건, 지금 당장 구매가 가능한 [여왕의 실타래].

마침 인장력 강한 실이 필요하던 참이었으니 나에겐 안성맞춤인 물건이다.

모든 유대 포인트를 털어 여왕의 실타래를 구매한 후 나머지 아이템들을 멍하니 구경하던 와중, 계약서에 적힌 원시 정령이란 단어를 보니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로제와 파나마 씨가 흉내쟁이를 원시 정령이라고 불렀었던가."

일반 정령과는 다른 존재라고 했었지. 그때는 별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상점에 뜬 계약서를 보니 흥미가 생겼다.

"일단은 저걸 구매할 포인트가 없으니...다음에 알아보는 수밖에."

아쉬움을 달래며 궁금증을 한구석으로 치워버린 나는, 적당히 주변을 정리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으, 역시 집이 최고네."

오래간만에 만끽하는 이불과 보일러. 오늘은 따뜻하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프리 마켓으로 향한 나는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여긴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쓸데없이 복잡해."

아무런 규칙도, 일관성도 없는 좌판들.

지난번 [만드레이크의 열매]를 구할 때도 느꼈던 거지만 이곳은 나 같은 외지인에게 지나치게 불친절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은 시끄러운 장춘식이 없다는 것 정도.

지난번과 다르게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지금. 사소한 시비 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기에 춘식이를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한참을 헤매던 나는 주위를 보며 작게 투덜거렸다.

"하다못해 지도라도 좀 만들어 주면 좋을 텐데..."

물론 그런 것 따위가 있을 리 없다. 하는 수 없이 지난번처럼 무작정 내부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내가 찾을 재료는 마력 탄소 섬유의 원단.

보통 유틸리티 베스트에 많이 쓰이는 이 재료는 일반적인 루트로는 입수하기가 어렵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제품이 아닌 원단을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다.

"쯧, 그러니까 헌터의 장구류 가격이 그렇게 미쳐 날뛰지."

내가 가진 하급품 유틸리티 벨트와 베스트 한 세트만 하더라도 수백만 원은 우습다.

이런 가격이 붙은 이유는 하나. 원단이 가진 특수성 때문인데, 가볍고 탄탄하며 다른 아이템과 궁합이 좋다는 것.

최고급품까지 올라가면 유니크 등급 방어구와 맞먹을 정도의 견고함을 자랑한다는 것 등이 주된 이유이다.

얇은 두께 덕에 이중으로 방어구를 걸친 효과를 낼 수도 있으니, 헌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원단 정도는 팔 수 있는 거 아니야?"

구하기 어려운 이유는 간단했다. 마력 탄소 섬유의 자체적인 제작이 가능한 클랜, 혹은 기업에서 제작법을 엄중히 관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종의 독점 벽이다. 행여라도 자신들의 기술이 유출되어 시장의 파이가 나뉘는 것을 철저히 막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뭐, 굳이 그러지 않아도 제작 자체가 어려워 기술력을 빼가긴 어렵겠지만.

만약 원단을 구하게 되면 한 번 자체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지. 제피로스에 납품할 아이템 제작은 덤이고.

"그나저나 죽겠네. 대체 여긴 어떻게 돼먹은 곳이...어라? 저 녀석은?"

시장통을 돌아다닌 지 어언 반나절. 허탕만 치던 내 눈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전창수라고 했던가?"

예전에 방문했을 때 춘식이와 나를 삥 뜯으려던 녀석이 저 멀리 지나가고 있었다.

구세주를 찾은 나는 황급히 그를 향해 달려가 어깨를 짚었다.

"전창수. 맞지? 반갑다!"

"뉘슈...히익! 하, 한승현 형님? 여긴 어쩐 일로?"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던 전창수가 나를 보곤 화들짝 놀라 주춤주춤 물러났다.

"구할 물건이 좀 있어서. 지난번처럼 날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춘식이 형님은 함께 안 오신 겁니까?"

"걔는 왜? 오늘은 나 혼자 왔는데."

연신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던 전창수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우득우득 목을 꺾으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흐흐, 그렇단 말은 당신 혼자란 뜻이...억!"

코를 감싸 쥔 전창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혀, 형님도 헌터셨습니까...?"

"..."

순식간에 비굴한 표정이 된 전창수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가와 내 어깨의 먼지를 툭툭 털어주었다.

"헤헤, 장난이었습니다. 설마 마음에 담아두신 건 아니겠죠? 어떤 걸 찾으십니까. 이 전창수가 성심성의껏 형님을 돕겠습니다!"

"...원단 상태의 마력 탄소 섬유를 구하고 싶은데."

"으, 아파라. 마력 탄소 섬유라...짐작 가는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 W.K 한국지사에서 얼마 전 퇴직한 아저씨 한 분이 이리로 들어왔거든요."

"W.K사라면 화이트 나이츠(White Knights)?"

일명 순백의 기사들이라 불리는, 미국에 본거지를 둔 대형 클랜.

미국 5대 헌터 중 하나인 백기사가 그들의 수장을 맡고 있었지.

그런 곳에 소속되어 있던 양반이 여긴 왜?

내 의문점을 눈치 챘는지, 전창수가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한국지사가 한 차례 휘청거렸다고 하더군요. 뭐, 자세한 건 내부사정이라 알 수는 없지만...거의 풍비박산이 나다시피 해서 계속 있다간 안 좋은 꼴을 당할 것 같아 나왔다던데요."

"그런 일이 있었나. 나는 까맣게 몰랐는데."

"헤헤, 그야 불문에 부쳐졌기 때문이죠. 백기사쯤 되는 양반이 운영하는 클랜이 위기를 겪는 게 세간에 알려지는 건, 수치스러운 일일 테니까요."

"극비라면서 너는 되게 잘 안다? 영 못 미더운데...."

"제가 누굽니까. 프리 마켓의 정보통, 전창수 아닙니까! 형님은 저만 믿고 따라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슴을 탕탕 두들긴 전창수가 자신만만하게 앞장섰다.

그렇게 몇 차례 구불구불한 골목을 빠져나가자, 곧이어 구석진 곳에 위치한 낡은 좌판이 나타났다. 그곳에 앉아있는 중년인을 향해 전창수가 소리쳤다.

"신참 아저씨. 손님 데려왔수다! 여기 계신 형님께서 마력 탄소 섬유 원단이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이놈이! 조용히 안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신참이라 불린 배불뚝이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뛰어나오더니 전창수의 입을 틀어막고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하여간, 자식이 조심성이 없어...인마. 이거 빼돌린 거 걸리면 나는 끝장인 거 몰라?"

"에헤이. 어쨌거나 있다는 얘기네? 좀 꺼내와 보슈."

"그래. 있다. 이 자식아. 같이 오신 분이 손님이시냐?"

"안녕하십니까."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자, 말없이 좌판 아래를 뒤적이던 아저씨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나를 향해 물었다.

"그래, 얼마나 필요하시우? 미국에서 제작된 제품이니 품질은 확실할 거요."

"으음...얼마나 보유하고 계십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만."

"알음알음 다 팔리고 남은 건 서른 마 정도인데, 어떻게. 전부 드릴까? 아니면 끊어드려?"

한 마가 가로 90cm, 세로 110cm인 걸 감안하면 넉넉한 양이다.

전부 달라고 요청하자, 그의 얼굴에 순식간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어차피 대놓고 팔지도 못하는 물건이었으니까, 내 특별히 싸게 해 드릴게. 천이백만 원. 어떠신가? 서비스로 특수제작 된 재단용 가위도 끼워드리고."

"뭐, 그 정도 가격이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주십시오."

천이백만 원.

적은 돈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투자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저씨가 펜과 메모지를 내밀었다.

"젊은 친구가 화끈하구먼! 들고 가긴 힘들 테니까 여기에 주소를 써 주면 내 배달해 드리지. 내일 오전 중으로 꼭 가져다줄 테니, 대금은 그때 지불해 주면 될 거고."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콧노래까지 부르던 아저씨가 말을 덧붙였다.

"이제는 한국에서 요거 찾아보기 힘들 거외다. 구매하신 기념으로 알려드리는 건데, W.K클랜 한국지사가 곧 사라질 예정이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한국지사의 규모가 약소하다고는 해도 아예 발을 뺄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역시.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건가. 아마 조만간 발표가 나겠지만...쯧쯧."

무슨 뜻이지. 혀를 차는 아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대전의 아레스가 W.K사의 한국지사를 인수한다고 하더군."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63화

"한국지사 인수라. 무슨 꿍꿍이지."

아레스가 제작자들을 끌어들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글로벌 클랜의 한국지사까지 집어삼킬 줄이야.

잠시 머리를 굴려보던 나는 아저씨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얼마든지. 오늘 최고 매상을 올려 준 고객님이신데, 내 답해 드려야지."

"아레스가 대체 무슨 수를 쓴 겁니까? 규모가 크긴 하지만, W.K클랜의 한 지사를 집어삼킬 정도는 아닐 텐데요."

"뭐야, 자네 제작자였어? 제작자가 아니고서야 W.K 클랜에 관심을 둘 리가 없는데."

"맞습니다. 아직 변변한 자격증 하나 없는 연금술사 지망생이긴 하지만요."

적당히 겸손한 자세를 취하자, 허허 웃던 아저씨가 마력 탄소 섬유를 들어 보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일반적인 상인이나 헌터가 이런 걸 찾을 리 없지. 뭐, 자세한 건 모르고, 내가 발을 뺐을 땐 클랜이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어. 간부급 인원들이 대거 탈퇴한 뒤 아레스로 넘어갔거든. 사실상의 공중분해였지."

"그 정도 대형 클랜의 간부라면 대우가 부족하다는 이유는 아니었을 텐데. 대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나 같은 말단이 뭘 알겠나. 아무튼, 결과적으로 보자면 껍데기만 남은 클랜을 아레스가 홀랑 집어삼킨 거지. 근데, 그자들이 대거 이탈한 이후 내부에서 한 가지 소문이 돌더구만."

"무슨...소문 말씀이십니까?"

잠시 주변을 살피던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한껏 목소리를 낮춘 후,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레스로 넘어간 인원들이 사실상 반미치광이가 되었다던데. 몇몇은 거의 폐인이 되었다더군."

"...아레스로 넘어간 이후에 말입니까?"

"뭐, 그것과 관계가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 말했다시피 사실인지도 불분명하고. 그냥 뜬소문일 뿐이니 알아서 걸러 들으면 될 걸세."

어쩌면 아저씨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반 폐인이 된 윤기 아저씨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W.K의 간부들은 자발적으로 아레스에게 협조한 거로 보이는데. 대체 왜?

"하여간, 단순한 호기심인 것 같으니 너무 깊게 알려고 들지 말고. 내 막냇동생 같아 같아서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야. 아는 놈들은 다 알지만, 우리처럼 힘없는 각성자들이 그런 대형 클랜과 엮이면 좋은 꼴을 못 보거든. 그냥 재미로만 듣게나."

"...알겠습니다. 말씀 감사했습니다."

"또 오시게. 오늘 구매한 물건은 내일 오전까지 배송해 주겠네!"

손을 흔드는 아저씨를 뒤로하고 좌판을 빠져나왔다.

머리가 복잡했다. 아레스의 목적은 단순한 인재 영입이 아니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들어가도 인생을 망치고, 거부해도 망가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자문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반쯤 넋을 놓고 걷던 그때. 전창수가 내 눈치를 보며 말을 걸어왔다.

"승현 형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됩니까? 정말 궁금해서 그럽니다."

"뭔데? 말해 봐."

"그...형님은 정말 연금술사십니까?"

"그런데. 왜?"

"그럼 저는 헌터가 아니라, 연금술사 나부랭이한테 처맞은...억!"

하여간 매를 벌어요.

코를 감싸 쥔 채 제자리에 주저앉은 전창수를 내버려 둔 나는, 프리 마켓의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팀장, 조금 전에 도착했다는데? 곧 이리로 올 거라는군."

커다란 손에 쥔 조막만 한 핸드폰을 확인한 박덕기가 표정을 굳혔다.

모니터 앞에서 몇 번이나 같은 영상을 돌려보던 유천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놈 말이냐? 흐음...생각보다 빨리 왔네. 알겠다. 손님이 오셨으니 준비를 좀 해야지."

"뭐, 준비할 게 있수? 어차피 돈만 주면 되는 놈인데. 그런데 팀장, 한 가지 물어봐도 되우?"

"큭큭. 너같이 무식한 놈이 질문을 할 때도 있고. 별일이 다 있네. 뭔데 그러냐?"

"...무식한 건 맞지만 나도 궁금한 것 정도는 있수. 왜 하필 그놈을 부른 거유? 가격도 가격이지만...그 뭐시냐, 이런 걸 보고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쓴다고 하나? 싸게 써먹을 놈도 많은데, 왜 굳이 그 놈이유?"

박덕기가 꼬질꼬질한 손으로 자신의 턱에 돋아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박덕기의 얼빠진 얼굴을 본 유천호가 피식 웃었다.

"그거야 간단해. 돈만 주면 뭐든 해내니까 그렇지. 일 처리도 확실하고."

"그런 놈들이야 널리고 널린 게 이 바닥 아니우? 굳이 그렇게 신경을 쓸 것까지야."

"말 그대로 '뭐든' 하는 놈은 없으니까 그런 거다. 너, 솔직히 그놈이랑 마주치는 게 껄끄러워서 이러는 거 아니냐?"

"딱히 그런 건 아니...제기랄.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수. '무명' 그 새끼, 보면 볼수록 찝찝하단 말이우. 옛날 생각도 나고."

박덕기가 무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늘 쓰고 다니는 새하얀 가면을 떠올렸다.

아무런 굴곡 없이 매끈한 가면. 그곳에서 느껴지는 이유 모를 음습함. 벌써 몇 번이나 그와 대면했던 박덕기였지만 여전히 무명이 껄끄러웠다.

게다가 신분도 국적도 불명확하다. 그가 무명에 대해 아는 거라곤 실력이 뛰어난 청부업자라는 것뿐.

심지어 이름마저 없다. 그들이 아는 건 무명(無名)이라는 가명. 단 하나다. 박덕기는 그 점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미럴. 최소한 얼굴이라도 까고 다니던가. 이래 봬도 우리가 고객인데, 예의가 없어. 쯧."

"그렇게 궁금하면 맨날 말로만 그러지 말고, 네가 직접 까보지 그러냐."

"...괜히 쌈박질하기는 싫수. 절대 겁먹은 건 아니고. 진짜 싸움을 싫어해서 그러는 거유. 그 뭐냐...난 평화주의자거든."

"아무렴. 그렇겠지."

횡설수설하는 박덕기를 보며 유천호가 큭큭 웃고있던 그때.

달칵-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검은 정장에 새하얀 가면. 그리고 조금은 왜소한 체구. 그들에게 익숙한 외형이었다

그를 확인한 유천호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래간만이야. 무명. 살이 좀 빠졌나?"

"..."

"무뚝뚝한 건 여전하네. 우리 사이에 인사 정도는 받아줄 수 있잖아?"

"오래간만입니다. 유천호 씨."

가면 너머로 듣기 거북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변조된 음성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박덕기가 툴툴거렸다.

"쯧, 이제는 목소리 정도는 드러낼 때가 되지 않았수? 원 참. 사람이 뭐 그리 비밀이 많아?"

"당신이 나와 의뢰인의 대화에 낄 정도였나. 처음 알았군. 당신 따위는 여기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할 텐데."

"뭐여? 너 지금 날 무시하는 거여?"

"그렇다면?"

무명이 벌떡 일어난 박덕기를 가만히 응시했다. 가면 너머로 엿보이는 냉랭한 눈빛. 순간 움츠러든 박덕기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끄응..."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박덕기였지만 도무지 저 무명이란 놈에겐 덤벼들 용기가 나질 않았다.

가만히 자리에 앉은 박덕기를 바라보던 유천호가 무명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오는 길은 불편하지 않았고? 오래간만에 불렀는데 용케 잘 찾아왔네."

"불편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보다 일 얘기부터 하시죠, 유천호 씨. 시시콜콜한 잡담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습니다."

팔짱을 낀 무명이 무뚝뚝하게 이야기했다. 박덕기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찡그렸고, 유천호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뼉을 쳤다.

"푸하핫! 그래, 그래야 무명답지. 하자고, 일 얘기. 가장 중요한 보수는 총 5억. 선금 1억에 잔금 4억이야. 내용은 간단해."

"5억이라. 애매한 금액이군요. 일단 들어보겠습니다. 말씀해 주시죠."

"몰래 일반인 하나 데려와 주면 돼. 나는 야만적인 방법을 싫어하는 거. 잘 알고 있지?"

"그랬군요."

"일단 돈부터 들이밀어 봐. 방법은 딱히 말 안 해도 될 거고. 우리 측에선 타겟한테 십억까지 제시할 의향이 있어."

"십억이라. 알겠습니다. 그 외의 특이 사항은?"

"주변을 지키는 놈들이 몇 있을 거야, 제피로스 소속인데, 아마 C급이나 D급 정도 될 거고. 웬만하면 죽이지 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진 않거든."

"C급과 D급.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습니다."

유천호는 무명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돈을 받고 의뢰인이 부탁한 대로 일을 처리한다. 그 외의 사적인 의문 따위는 품지 않는다.

오히려 의뢰인인 유천호가 몸이 달아 타겟에 대한 설명을 더 늘어놓을 정도였다.

"목표물은 각성자이긴 한데, 내가 알아본 바로는 별다른 전투력은 없어 어렵진 않을 거야. 사실 내가 직접 하고 싶지만, 이쪽도 사정이란 게 있는 몸이라."

"이해했습니다. 비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질 것이니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특이 사항은 그게 끝입니까?"

"뭐, 재수 없으면 박진성이라고 B급 헌터 하나가 붙을 수도 있는데. 만약 맞붙게 된다면 그놈은 그냥 죽여도 돼. 아니, 무조건 죽여버려. 추가금은 넉넉히 지급해 줄 테니까. 그런 부분에 있어선 신경 쓰지 말고."

"알겠습니다."

고저 없는 음색으로 답한 무명이 자리에 앉았다.

유천호가 눈짓하자, 주변을 지키고 있던 클랜원 중 하나가 재빨리 서류봉투를 들고 다가왔다.

"이번 목표물에 관한 정보야. 선수금은 이 방을 나가는 순간 자동으로 입금될 거고, 나머지 금액은 의뢰 완료 후 바로 지급해 줄게. 원한다면 늘 그랬듯 빳빳한 현금으로 줄 수도 있어."

"차명계좌로 받도록 하죠. 다른 요청사항은 없습니까?"

"뭐, 타겟을 죽이지만 않으면 돼. 다른 조건은 없어. 토르소를 만들어놓든 장님을 만들어놓던 목숨만 붙여서 내 앞으로 데려와 줘."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무명이 서류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간단한 인적사항이 적인 문서 한 장과 CCTV를 확대한 듯, 조금 흐릿한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어때. 픽셀이 좀 무너지긴 했어도 그 정도면 알아볼 수 있겠지?"

"문제없습니다. 그럼, 일주일 내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달칵. 서류를 챙긴 무명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보던 박덕기가 인상을 한껏 구겼다.

"쯧. 저놈 저거, 박진성한테 칼 맞고 칵 뒈져버렸으면 좋겠네. 팀장은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큭큭. 덕기야. 그럴 일이 없다는 건 무명이랑 붙어 본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냐."

"아, 왜 또 옛날 일을 꺼내고 그러슈! 뭐, 살면서 한두 번 쪽팔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으억! 그만 때리쇼. 안 그래도 나쁜 머리를 왜 자꾸...게다가 애들도 보는데..."

머리를 감싸 쥔 박덕기가 사나운 눈초리로 주변을 훑었다.

그러자 주변의 클랜원들이 하나둘 도망치듯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황당하다는 듯 그 광경을 바라보던 유천호가 박덕기의 뒤통수를 재차 후려쳤다.

"너는 새끼야. 부팀장으로서의 자질이 없어. 팀장한테 바락바락 소리나 지르고. 대들고. 애들한테 겁이나 주고. 쯧. 그나저나 이번에 인수한 인원들은 어떻게 됐냐. 뭐 들은 거 없어?"

"팀장이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수. 뭐, 평소처럼 폐기되거나, 마스터한테 끌려갔겠지."

뒤통수를 쓱쓱 문지르던 박덕기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토라진 것이 분명했다. 유천호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덩치는 산만 한 놈이...아무튼, 이렇게 보면 천윤기 그 아저씨가 참 현명해.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먹어서 그런지 눈치 하나는 빠르단 말이야."

"오래전에 팀장이 직접 섭외하러 갔다는 사람 말이우?"

"그래. 본인은 바짝 쫄아서 한 짓일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론 목숨을 건졌으니 말이야."

"그 양반은 어찌 되었수?"

"뭐, 들리는 얘기로는 인간 이하의 쓰레기가 되었다더군. 더 이상 관심 가질 필요도 없는 폐기물이."

유천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그의 머릿속에선 당시의 천윤기와 백색의 연금술사. 베타의 얼굴이 천천히 겹쳐지기 시작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64화

"자, 여기. 주문했던 물건. 자네 상점도 운영하나? 열심히 사는구만."

트럭에서 내린 아저씨가 조수석에 실린 박스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어제 오전에 주문해 두었던 마력 탄소 섬유의 원단이다.

이를 받아들자, 흐뭇한 표정이 된 아저씨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열심히 해 보슈, 젊은 고객 친구. 열정이 넘치는 게 마치 내 청춘 시절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

"감사합니다. 대금은 계좌로 입금해 드렸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뭐, 맞게 넣었겠지. 그럼 난 가보겠네. 힘내시게!"

부르릉-

고물 트럭을 몰고 순식간에 사라진 아저씨.

공방으로 들어온 나는 곧바로 머릿속으로 생각해 두었던 작업을 시작했다.

제피로스와 약속한 기한까지 앞으로 3주.

날것 그대로의 가죽을 넘겨줘도 제값은 하겠지만. 제작자로서의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다.

좋은 재료가 있으니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 법.

프리 마켓에서 구해온 방어구 도면을 펼친 나는 생각해 두었던 제작 방식을 손끝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일단 냉기 저항이 주가 되어야 하니 털가죽이 안감이 되어야 할 거고."

일단 구상해 둔대로 요르의 가죽과 마력 탄소 섬유의 재단은 완료해 두었다.

처음 해보는 나에겐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그래도 몇 번의 자잘한 실패를 겪고 나니 파츠별로 그것들을 잘라낼 수 있었다.

여기까진 어찌어찌해냈으나.

나를 황당하게 한 건 마력 탄소 섬유 원단의 제작 방식이다.

그간 완제품만 사용해온 터라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원단을 찬찬히 뜯어보니 제작법을 어렴풋이 알아낼 수 있었다.

"마석을 정제해 만든 섬유 위로 날실과 씨실 하나하나에 마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니. 이걸 해낸 놈들은 괴물인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설마설마했지만 이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날 줄이야.

W.K클랜의 제품이라 애써 나를 위안해 봐도, 비참한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내가 가능한 범위는 고작 한 뼘을 넘어설 정도의 폭에 마력을 부여하는 것.

그 이상으로 넘어가자마자 집중력이 흐트러져서인지 순식간에 마나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마력 컨트롤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조금은 희망을 품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벽을 만나버렸다.

"어쩔 수 없지. 납품할 아이템은 일단 지금 사들인 완제품을 이용해 제작한 뒤, 자체적인 원단 생산은 차근차근 시간을 들이는 수밖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 꽤 오랜 시간 동안 제작에 매달려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세상엔 굉장한 놈들이 많아."

더욱더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마당에 앉아 별을 보던 그때.

"뭐지?"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제피로스 클랜원들의 인기척이라도 느껴졌을 텐데. 사방이 이상하게 고요했다.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막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누구십니까?"

어느새 집안으로 들어온 새하얀 가면의 사내가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이 한승현?"

그의 입에서 거북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 * *

"그, 그만...끄르륵."

무명의 손에 잡힌 사내가 피 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걸로 다섯 명째. 주변의 인기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보다 더 쉬운데."

굳이 일주일이란 유예기간을 잡을 필요가 없었다.

인적 없는 시골이란 점과 허술한 경비. 두 가지가 어우러져 무명이 활동하기 최적화된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빠각. 바닥에 쓰러진 헌터를 걷어찬 무명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곧 [대성 잡화점]이라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딱히 가져갈 건 없겠어. 부수입이 없는 건 조금 아쉽군."

상점으로 개조된 낡은 주택. 안으로 들어서자, 계단에 걸터앉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십니까?"

서글서글한 이목구비의 사내. 사진으로 보았던 타겟, 한승현이다.

무명이 그를 향해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한승현?"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이름은 없다. 정 호칭을 원한다면 무명이라 부르도록."

무명의 덤덤한 대답, 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무명이라...무슨 용건이지?"

"간단하다. 넌 지금부터 날 따라간다. 선택지는 둘."

무명이 새하얀 장갑으로 감싸진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그리고는 승현이 뭐라 할 새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하나. 너는 지금부터 십억을 받고, 순순히 나와 동행한다."

"십억이라. 짐작 가는 곳이 한 군데 있는데. 맞나?"

"질문은 나만 한다. 둘. 십억을 거절하고, 내 손에 강제로 끌려간다. 그 외에 선택지는 없다."

단호한 어조. 가만히 듣고 있던 승현이 무명을 향해 입꼬리를 비틀었다.

"둘 다 싫다면?"

"죽이진 않겠다."

무명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승현이 자세를 바꾸었다.

"아레스에게 순순히 끌려갈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파앙- 승현의 다리가 지면을 박찼다. 그의 주먹이 번개처럼 무명의 새하얀 가면을 향해 날아들었다. 무명이 가면 속의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별 볼 일 없다더니. 정보 부족이었군.'

최소한 C급 상위권. 밖에 널브러진 쭉정이들보단 한 수 위다.

날아드는 손목을 잡아챈 무명이 그대로 승현을 땅에 내리꽂았다.

콰앙.

요란한 소리가 밤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커윽."

울컥. 얕은 비명과 함께 승현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무명의 손이 바닥에 드러누운 승현의 목을 틀어쥐려던 찰나.

"발악을..."

재빨리 몸을 굴린 승현의 다리가 바닥을 쓸며 무명의 하체를 향해 쇄도했다.

이번에는 전력을 다한 듯 상당한 위력이 담겨있었다.

자세가 불안정했기에 무명이 뒤로 한발 물러서자, 재빨리 몸을 일으킨 승현이 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았다.

"만만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아레스가 이렇게까지 나한테 신경을 써줄 줄이야.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

"반항이 거칠군.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도록 하겠다."

카드득. 불길한 소음과 함께 무명의 품속에서 한 쌍의 단검이 튀어나왔다.

이를 본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그 흉측한 건."

단검이라기보단 톱날에 더 가까웠다. 베거나 찌르기보단 상대를 찢는 것에 특화된 무기.

이를 십자로 교차한 무명의 신형이 유령처럼 승현에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최소한 말은 하고 덤벼...이크."

다짜고짜 그의 허벅지를 향해 날아드는 단검. 저기에 걸리면 단순한 검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위기감을 느낀 승현이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하려던 찰나. 그의 본능이 맹렬한 경고를 보냈다.

"어?"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옆구리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느새 무명의 단검이 그의 허리께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마치 짐승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그의 옆구리가 움푹. 뜯겨나갔다.

"빗나갔군. 감이 좋아. 하지만."

쐐액. 무명이 승현의 얼굴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속도.

반사적으로 양팔을 들어올린 승현이 얼굴을 가린 순간.

뻐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승현의 몸이 ㄱ자로 접혔다. 무명의 주먹이 승현의 복부를 강타한 것이다.

와장창- 현관을 부수고 날아간 승현의 몸이 불 꺼진 가게 안에 처박혔다.

"몸은 튼튼해 보이는 놈이니, 죽진 않았겠지."

중얼거린 무명이 난장판이 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부서진 테이블과 가구들이 보였다. 그리고.

"...아직 기운이 남은 건가."

어둠 속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무명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 자루 넘은 단검을 들어 그것을 쳐내려는데.

반짝이는 무언가가 무명의 손을 휘감았다. 콰드득. 순간적으로 멈칫한 무명의 손목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우드득. 어긋난 손목을 기계처럼 맞춘 무명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방패? 실?"

한 손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방패. 다른 쪽 손에는 빛나는 은사(銀絲)를 쥔 승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명을 노려보고 있었다.

'실과 방패를 쓰는 각성자라. B급 하위권 정도로군. 무기의 의외성까지 더하면 B급 중위권 정도까진 쳐 줄 수 있겠어. 아무래도 추가금을 받아야겠군.'

평가를 마친 무명이 팔에 힘을 주었다. 투두둑. 손에 감긴 [여왕의 실타래]가 순식간에 끊어졌다.

승현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새끼. 그게 얼마짜린데..."

방패를 든 승현의 몸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분노에 찬 목소리가 무명을 향해 내리꽂혔다.

"게다가 너...감히 내 가게를 부쉈어."

"흠, 그게 중요한가? 반항이 예상했던 것보다 심하니 팔 하나는 받아가도록 하지."

"할 수 있으면 해 봐."

대답 대신 무명이 몸을 날렸다. 아까보다 한층 더 상승한 속도.

그의 단검이 승현의 어깻죽지를 향해 유성처럼 내리꽂혔다. 곧이어.

카앙-

사람의 살과 금속이 부딪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어깨로 단검을 받아낸 승현이 무명을 향해 웃어 보였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성능이 끝내주네. 이 스킬."

"숨겨둔 한 수가 있었던 모양이로군. 칭찬해 주지."

"네깟 놈 칭찬은 필요 없어. 밖으로 나와. 제대로 한 판 붙어주지."

까딱. 승현이 그를 도발했다. 굳이 응할 필요가 없었다. 대답 대신 무명의 신형이 승현을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카카가가각-

몇 차례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의 공격을 받아내던 승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호기를 부리긴 했지만...이대로는 안 돼.'

승현은 확신했다. [여왕의 실타래]는 무명에게 통하지 않는다. 지금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로제에게 받은 [강철의 결의]뿐.

하지만 스킬의 사용과 함께 마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면 패배는 기정사실이다. 가만히 기회를 엿보던 승현이 온 힘을 다해 달려드는 무명을 밀어냈다. 그리고는.

"...도망?"

무명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강단이 있는 상대인 줄 알았는데, 설마 꼴사납게 도망을 택할 줄이야.

이에 개의치 않고 승현은 전력을 다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최대한 가게에서 멀리.

대략 이십여 미터 정도 달렸을까. 천천히 걸어오는 무명의 모습이 보였다. 여유를 부리는 게 분명했다.

'개자식. 이래도 느긋할 수 있나 한번 보자.'

흉내쟁이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만. 승현의 직감이 이를 강하게 만류했다.

'지금 흉내쟁이를 꺼내면, 백 퍼센트 무명에게 살해당한다.'

물론 죽을지 안 죽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불확실성에 도박을 걸어 흉내쟁이를 희생시킬 순 없다.

그렇기에 아쉬운 대로 허리춤의 유틸리티 벨트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전력을 다해 팔을 휘둘렀다.

"포션? 무슨 꿍꿍이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플라스크를 본 무명이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색이 좀 다른 것 같긴 해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싸구려 치유 포션이다. 무명이 그것을 향해 단검을 날리는 순간.

꽈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시뻘건 불기둥이 무명을 덮쳤다. 이를 확인한 승현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우. 끝났겠지?"

피륙으로 이뤄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저 안에서 살아나올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겼단 안도감이 들자 그제야 통증이 몰려왔다.

방패가 가진 스킬, [수호의 의지]를 뚫고 들어온 타격. 확실히 평범한 놈은 아니었다.

"분명 아레스에서 보낸 놈일..."

하지만 불기둥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로 인해, 승현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네놈..."

옷이 좀 그슬리긴 했지만,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나온 무명이 불길을 헤치고 그를 향해 벼락처럼 질주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콰드득-

순식간에 코앞까지 당도한 무명이 불씨가 남은 손으로 승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방금 던진 그것. 네가 만든 아이템이냐? 아니면, 백색의 연금술사란 놈의 작품이냐?"

아까와는 다르게 잔뜩 격앙된 목소리.

왜소한 체구임에도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너무도 강렬했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승현이 쥐어짜듯 대답했다.

"커윽…내가 만들었다면 어쩔 건데?"

"정말 네가 만든 거라고? 설마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니겠지. 말해라. 형질변환을 사용할 수 있는 거냐? 너는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지? 단순히 물체의 형질을 바꿀 수 있는 정도냐? 아니면, 사람의 신체에도 적용할 수 있는 거냐! 말해! 당장 말하란 말이..."

무명의 처절한 외침은 이어지지 못했다. 피슝- 푸른 섬광이 어둠을 가르고 그를 향해 쇄도했기 때문이다.

"...누구냐."

"그걸 피해? 너, 거기서 딱 기다려. 재미있어 보이네."

한 여자가 무명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판단을 마친 무명이 점점 의식이 멀어지는 승현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조만간 다시 찾아오지."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65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눈꺼풀을 억지로 들자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어머, 일어났네? 한승현 씨 맞죠?"

처음 보는 얼굴이다. 삼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키가 크고 눈매가 사나운, 호전적인 인상의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제피로스의 1팀장. 유신애. 일단 응급조치는 해 두었는데 불편하진 않아? 그 치유 가속 포션이란 거, 나는 처음 써보는 건데 효과가 장난이 아니던데. 참. 내가 한참 누나니까 말 놔도 되지?"

인상과는 다르게 조금 수다스런 타입이다. 허리춤에 찬 쌍검이 눈에 들어왔다. 검사인 모양이다.

"...편한 대로 하시죠. 그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도망갔어. 무명 맞지? 이런 흉측한 걸 쓰는 청부업자는 무명뿐이거든."

유신애가 손에 든 무명의 단검을 빙빙 돌렸다. 그리고는 안타깝다는 듯 발을 굴렀다.

"젠장, 한 번쯤은 붙어보고 싶었는데 그대로 도망가 버릴 줄이야. 아까 보니까 한 가닥 하는 것 같던데. 재미 삼아 누나랑 한 판 붙어볼래?"

"...?"

"농담이야, 농담. 우리 그이가 특별 관리를 부탁한 VVIP인데 그럴 수 있나. 다치면 큰일 나지."

그이? 그러고 보니 왼손 약지에 낀 반지가 보였다.

"그이의 부탁이라면...박진성 팀장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푸하하! 아니야. 오신우 클랜장의 부탁으로 왔어. 내 직장 상사이자 남편이거든."

오신우 클랜장이 유부남이었구나. 몰랐던 사실이다.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보다 너, 괜찮아? 듣기로는 평범한 잡화점 사장이라더니. 그건 아닌가 보네?"

"누구나 비밀 한 가지쯤은 있는 법입니다."

사실 비밀이랄 것도 없다. 얼마 전까진 정말 일반인에 가까웠으니까.

만년빙산에서 푸른빛과 조우한 뒤 신체 능력이 향상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로제에게 방패를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무명에게 신나게 얻어터지고 아레스 클랜에서 눈을 떴겠지.

내 무덤덤한 답변을 들은 유신애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치. 누구나 비밀은 있는 법이지. 아무튼, 무사하다니 다행이네. 아레스 짓이지? 이거?"

"뭐, 본인은 별말 안 했지만. 짐작 가는 곳은 거기뿐입니다."

"...그 새끼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 이런 식으로 나와서야 우리가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어차피 쟤들은 시치미 떼면 그만일 텐데."

진심으로 짜증이 묻어나오는 얼굴이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던 유신애가 조금 전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익스플로전 포션 이랬던가? 영상으로 보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쓸 만하네. 확실히 우리 그이가 눈독 들일만 해. 그러고 보니, 한 달 안으로 냉기 저항 아이템을 제작해 주기로 했다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남편이 기대가 크더라구. 집에서도 맨날 백색의 연금술사 이야기뿐이라...쯧. 일상적인 대화를 나눠본 게 언제인지. 하여간 그 인간, 클랜에 관련된 일이라고 하면 아주..."

뿌드득-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죄를 지은 기분이 되어, 나도 모르게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눈을 사납게 치켜뜬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유신애가 몸을 돌렸다.

"아무튼,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 아 참. 만약 무명이 다시 찾아오면 커넥션 벨로 날 호출해. 무조건. 놈이랑은 꼭 붙어보고 싶거든."

유신애의 눈이 반짝였다. 어지간히 무명이랑 겨뤄보고 싶은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할 말이 끝난 모양인지, 짧은 인사와 함께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굉장히 쿨한 사람이네."

박진성 팀장이었다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호위했을 테니, 차라리 저러는 편이 낫다.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자 난장판이 된 가게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걸 언제 다 치우냐."

오늘은 긴 밤이 될 것 같다.

* * *

"다시 한번 말해 봐."

유천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마주 선 클랜원이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것이...오 분 전. 무명의 차명계좌에 입금했던 일억의 선수금이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왜?"

짧고도 간단한 한마디. 그에 담긴 위압감은 일개 클랜원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선 답해야만 한다. 고개를 푹 숙인 그가 억지로 입을 뗐다.

"이유는...모르겠습니다. 팀장님께 직접 연락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란 메시지밖엔..."

"그래? 흐음...알겠어. 돌아가 봐. 수고했다."

"예, 옙! 감사합니다!"

살았다.

얼마 전 박덕기의 손에 고인이 된 클랜원. 송영진을 떠올린 사내의 눈에 안도의 빛이 돌았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사내를 보던 유천호가 혀를 내둘렀다.

"야, 인마. 네가 얼마나 애들을 쥐 잡듯이 잡으면 저렇게 벌벌 떠냐."

"그게 나 때문이우? 맨날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팀장 때문이지. 그나저나 무명 그놈, 갑자기 웬 변덕이래? 평소엔 돈만 주면 뭐든 다 한다던 놈이."

"내가 알..."

유천호의 이야기는 이어지지 못했다. 띠리리릭- 책상 위에 올려둔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발신자 표시 제한]이라 적힌 문구가 그의 동공에 반사되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 이 속담이 맞는 건가? 흐흐."

혼자 실실거리는 박덕기를 무시한 유천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스피커를 타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명입니다.

"그래. 무명. 설명해라."

유천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딱딱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사내도 그에 못지않았다.

- 의뢰를 파기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뭐? 죄송?"

유천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의뢰를 번복한 것도 모자라, 죄송하다는 한마디로 이 상황을 넘기려 들다니.

빠드득. 유천호의 어금니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유가 뭐냐."

- 딱히 이유는 없습니다. 내키지 않아서일 뿐. 그럼, 수고하십시오.

"이 새끼가...!!!"

유천호의 노성은 전해지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의 손에 잡힌 핸드폰이 와자작-하는 소리와 함께 수명을 다했다.

가만히 눈치를 보던 박덕기가 몸을 일으켰다.

"뭔데 그러슈?"

"...무명이 의뢰를 거절했다."

"대체 왜?"

놀란 박덕기가 입을 쩍 벌렸다. 천하의 무명이 받아들인 의뢰를 번복하다니.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 보던 와중,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더 떠올랐다.

"그럼, 한승현 그놈은 우리가 제안한 십억을 거절한 거유?"

"둘 중 하나겠지. 무명이 이야기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거절했거나."

후자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그들이 제시한 액수가 무려 십억이다. 동네 구멍가게 주인인 승현은 평생 구경하기 어려운 거액일진대.

단순히 '백색의 연금술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거절했다'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금액이다.

"뭐지, 그놈...사진으로 봤을 땐 제법 똘똘해 보였는데. 나보다 더한 머저리네."

안 돌아가는 머리를 억지로 굴리는 박덕기를 보며, 유천호가 턱을 매만졌다.

'역시, 무명은 그놈에게 붙은 건가.'

허무맹랑한 추측일 확률이 높았다. 일개 구멍가게 주인인 승현이 특급 청부업자인 무명을 영입할 만한 능력이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그렇게 가정하지 않고서야 지금의 상황이 설명이 안 돼. 설마 동정심이라거나, 단순한 변심일 리는 없고.'

무명에게 동정심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충분한 대가만 주어진다면 윤리에 거스르는 짓마저 서슴없이 저지르는 놈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만약 들러붙은 게 사실이라면, 무언가 모종의 이유가 있다는 뜻인데.'

검증이 필요했다.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일단 무명이 승현에게 붙은 게 확실하다면 다른 청부업자를 고용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다. 괜한 자금 낭비일 뿐.

'물론 야왕(夜王)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야왕은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직접 나설 수도 없는 노릇.

행여라도 요즘 한참 주가를 올리는 제피로스와 엮이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때. 자리에 앉아 그의 눈치를 살피는 박덕기의 모습이 보였다.

유천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매달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슈?"

적임자가 있었다. 적당한 무력에 생각이라는 게 거의 없는 단순함.

게다가 박덕기는 무명이 승현에게 붙었을 거란 가정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뭐, 일단 직책은 부팀장이라지만 어차피 소모품일 뿐이니...박덕기를 대체할 놈은 널렸어.'

그간 받아먹은 돈값은 해야지.

조금 아깝긴 해도 이런 곳에 쓰기 위해 뽑아두었던 놈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으리라.

결정을 내린 유천호가 은근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덕기야."

"...?"

"너, 간만에 일 하나 해라."

"무슨 일 말이우?"

"무명이 의뢰를 거절했으니, 그 새끼 대신 네가 한승현을 데려와."

"내가? 뭐, 상관없긴 하지만...그냥 다른 놈들 시키면 안 되는 거유? 백색 뭐시기라면 몰라도 꼴랑 구멍가게 주인 하나 잡자고 내가 직접 나서는 건 좀 면이 안 사는데."

"일을 맡아주면 내 개인 창고에 있는 아이템 중...그래. 파쇄갑을 주지. 어때?"

"파, 파쇄갑을?"

박덕기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파쇄갑. 박덕기로서도 쉽사리 구경할 수 없는 최상위권의 레어 등급 장비가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파쇄갑만 내어주는 건 조금 쪼잔해 보이니까. 제대로 일처리를 끝마쳐 주면 파쇄추까지 함께. 어때. 어차피 둘은 한 세트잖아?"

"뭣? 파, 파쇄추까지? 지금 그짓말하는 거 아니지? 팀장! 진짜지?"

"싫으면 말고."

파쇄갑과 파쇄추. 박덕기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휘둥그레졌다.

"하, 하겠수. 팀장. 무슨 일이 있어도 하겠수."

"큭큭. 그래. 너만 믿겠다. 어디 보자. 일단 조만간 마스터의 소집이 있을 예정이니, 착수는 그날 이후로 하자고."

"알겠수다! 충성을 다하겠수, 팀장!"

탐욕스럽게 웃는 박덕기를 보며, 유천호 또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단순한 놈 같으니라고.'

* * *

무명을 만난 이후 이틀의 시간이 지났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지.'

놈의 목소리가 머리를 윙윙 울렸다. 전투에 집중하던 당시엔 몰랐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무모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B급 최상위권..."

물론 이건 최소치다. 내가 보았던 박진성 팀장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란 뜻이다.

내 최고의 공격 수단인 익스플로전 포션까지 통하지 않는 걸 알게 된 이상, 다시금 놈이 나를 습격해 온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분명 처음 무명이 날 방문했을 땐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이해와 분석]으로 본 무명의 스탯은 내 두 배를 조금 넘길 정도였다.

버겁긴 하지만 아이템의 힘을 빌리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그게 만용이었다는 걸 깨닫기까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마...순식간에 스탯이 상승할 줄이야."

전투가 이어질수록 마치 힘을 개방하듯, 무명의 스탯은 점점 상향곡선을 그려갔다.

마침내 내 5배를 넘어선 순간, 그의 상태창에 표기된 숫자는 [???]로 바뀌어 버렸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길 수 없는 상대. 지금 내가 취할 방법은 하나였다.

"커넥션 벨을 지니고 다니는 수밖에...없겠네."

나 자신의 무력함에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마음이 심란했지만 해야 할 일은 미루지 말아야 하는 법.

"후우. 이게 마지막인가."

작업대에 놓인 아이템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왕의 실타래]를 사용해 물리적인 봉합은 이미 완료된 상태라 외관도 제법 그럴싸했다.

마력 탄소 섬유를 외피로, 요르의 가죽을 내피로 사용해 제작된 한 벌의 검은 코트.

그리고 오른쪽 가슴 부위엔, 육망성 형태의 자수가 새겨졌다.

아버지가 현역인 시절 사용했던 문양을 비틀어 만든 엠블럼이다.

"뭐, 설마 엠블럼을 넣었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진 않겠지."

외견상으론 완성된 듯하지만, 이건 각기 다른 두 아이템을 물리적으로 붙여놓은 것뿐. 제대로 된 융합을 위한 작업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아이템 융합의 기초와 심화

저자 : 한기호』

아버지의 저서를 덮은 나는, 머릿속으로 이론을 정리하며 천천히 마나를 끌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