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역대급 재능 망캐
세상에는 두 가지 게임이 있다.
바로 갓겜과 똥겜.
만일 이 두 게임의 예시를 찾는다면 난 망설임 없이 '마법기사 아카데미'와 '무림학원'을 들 것이다.
같은 게임사인 스탑시커에서 나온 양극단의 게임.
그중 '마법기사 아카데미'는 내 인생작이기도 했다.
수수한 제목이지만 높은 자유도와 짜임새 있는 구성, 다양한 도전 과제.
반면 그 후속작 '무림학원'은 실망이었다.
급전개와 정신 나간 듯한 캐릭터들 그리고 너무한 밸런스와 난이도까지. 정말 같은 게임사가 만든 것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나도 딱 한 번만 클리어하고 계정째로 삭제했지.'
그런데 이번에 그 게임사가 망한단다.
안 그래도 인디 개발사였는데 이런 걸 기대작이랍시고 내놨으니 그럴 수밖에.
씁쓸한 심정으로 게임에 접속하자 계정으로 개발자 메시지가 날아와 있었다.
[그동안 '마법기사 아카데미'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이 게임을 사랑해 주신 유저분들께 최후의 DLC를 보내드립니다.]
"왠지 뭉클하네."
아쉬운 심정으로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다. 이 게임이 나온 지 벌써 몇 년째인지.
골수 유저인 나조차 은연중에 잊고 있었는데 그 긴 시간 동안에도 개발진은 마지막까지 게임을 살리기 위해 개발을 거듭했다는 뜻 아닌가.
아직 기다리고 있을 유저들을 위해 말이다.
그것이 묘한 감동이었다. 유종의 미라고 할까.
얼른 DLC를 다운받고선 '마법기사 아카데미'에 접속했다.
이윽고 팟 하고 떠오른 캐릭터 선택창에 나는 감탄을 터트렸다.
"오, 마스터 설정인가?"
그곳에는 캐릭터의 능력치와 재능을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목록이 펼쳐져 있었다.
인물의 능력치와 재능을 멋대로 설정할 수 있는 목록.
원래 게임의 모든 캐릭터 루트를 클리어하면 특정 능력치를 올리거나 깎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DLC는 밸런스 때문에 막은 요소를 완전히 해금하고 있었다.
"그래 이거지!"
골수 유저의 심정으로 개발자를 칭찬했다.
이런 자유도가 이 게임의 정체성이었다. 그 덕에 힘 법사, 마법 궁수 등의 컨셉 플레이가 가능했다.
더욱이 새로운 업적과 재능을 발견하면 다음 캐릭터를 만들 때 그 재능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데 그런 식으로 플레이 방식을 넓히는 것도 쏠쏠했다.
근래 게임과 비교해 봤을 때도 꿀리지 않을 만큼 상당히 방대하고 꼼꼼한 세계관이었다.
고인물인 나조차도 90% 정도의 업적 달성률을 이룬 게 전부였으니까.
"보자, 별의별 것들이 다 있네."
[검성], [절대마도], [신의 대리자], [영웅의 운명], [초월성장]….
소위 신화급이라 불리는 재능마저 모조리 해금되어 있었다.
"진짜 뭐든 가능하겠는데?"
수천 가지가 넘는 재능 목록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간 수많은 재능을 조합해 본 내게 있어 호승심을 끓어오르게 하는 선물이었다.
물론 캐릭터당 그 능력치와 재능의 총량은 정해져 있고 그마저도 선택 후 밸런스에 맞게 디버프가 조정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쪽도 골수 유저이자 고인물 플레이어.
당연히 그 정도는 재능 설정과 그에 맞는 플레이로 대처할 수 있었다.
곧 캐릭터 생성창이 떠올랐다.
[캐릭터를 창조하시겠습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확인을 눌렀다. 그렇게 최종 캐릭터가 선택된 순간 로딩과 함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유저의 계정을 확인합니다.]
[유저의 숨겨진 업적 달성률이 90%가 넘습니다!]
[놀라운 업적! 칭호(재능) [극한의 의지]를 부여합니다. 위 칭호(재능)는 재능치를 소모하지 않습니다.]
"뭐?"
순간 난 헛숨을 들이켰다. 재능치를 소모하지 않는 칭호라니. 그냥 아무런 리스크 없이 기본으로 깔고 가는 재능 하나가 생긴 셈이다.
그동안 온갖 업적을 깨고 칭호를 받아 봤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과연 마지막이니 제대로 퍼 준다 싶었다.
게다가 [극한의 의지]는 정신 및 성장 관련 재능에 있어 최소 전설급에 속하는 재능.
특히 정신계 디버프의 경우에 강한 내성을 부여한다.
"이러면 최고의 캐릭터를 만들 수 있겠는데?"
나는 재능치 설정란에 들어가 정신계 디버프를 마구잡이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분노조절장애, 무력감 등등. 그러자 마이너스 수치만큼 캐릭터에 부여할 수 있는 재능치가 크게 늘었다.
이제 이 재능치로 재능을 선택하면 된다. 이왕이면 [극한의 의지]와 시너지를 일으킬 만한 능력으로.
"역시 그것밖에 없지."
한참 재능 목록을 들여다보던 내가 고심 끝에 선택한 재능은 [초월성장]. 말 그대로 모든 부분을 초월해서 성장할 수 있는 재능이었다.
이론상 대부분의 디버프는 이걸로 극복 가능할 정도로 괴랄한 잠재력을 자랑했다.
얼추 사기적으로 보이지만 정작 유저들은 거의 쓰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만큼 클리어 실패율이 급격히 높아지니까.'
[초월성장]은 신화급 재능인 만큼 기본적으로 상당한 재능치를 갉아먹는다.
특기가 없으니 초중반이 엄청나게 어려워지며, 그렇게 성장한다 해도 다른 상위 재능의 특화된 성장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
즉 초중반은 더럽게 어려운데 겨우겨우 성장해 후반까지 간다 해도 다른 특화 캐릭터에 비해 주력 능력이 어정쩡한 상태가 된다는 거다.
'나도 그런 이유로 거의 쓰지 않았지.'
아무리 [초월성장]이 좋은 재능이라 해도 이를 위해 부여한 디버프로 인해 캐릭터의 성장 속도와 정신력을 갉아 먹힌다면 되려 마이너스였다.
하지만 [극한의 의지]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건 오직 [극한의 의지] 칭호를 얻은 이 캐릭터만 가능한 테크트리다.'
이를 염두에 두며 세심하게 디버프와 버프를 조정해 나갔다.
예컨대 [시한부]와 [생명연장]을 붙이면 시한부가 더 큰 디버프이기에 캐릭터에 부여 가능한 재능치가 늘어난다.
이 경우 캐릭터는 단명하겠지만 [초월성장]과 [극한의 의지]의 조합으로 [생명연장]의 재능을 성장시키면 [시한부] 역시 극복할 수 있었다.
물론 조금이라도 [생명연장] 재능의 성장이 느려지면 [시한부]에 의해 줄어든 수명으로 사망할 거다.
그러나 원래 하드코어 모드란 이런 거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죽는 하루살이 플레이.
유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해내거나 망하거나 둘 뿐이었다.
'어차피 게임이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재능을 배치해 나갔다.
"됐다."
마침내 [초월성장]이 잡아먹는 재능치를 메울 정도로 디버프를 부여한 후 이를 읽어 내려갔다.
'시한부', '마력절맥', '쇠약'….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디버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재능치는 늘었네. 상위 전설급 재능 두 개라, 좀 아쉬운데."
'이왕이면 주력으로 신화급 재능은 무조건 가져가고 싶은데.'
고심하던 그때 내 눈에 보이는 상태창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재능치가 아닌 능력치.
"이것도 조정된다고 했지?"
나는 곧장 체력, 민첩, 손재주, 정신력 등의 수치를 모조리 내렸다. 본래 5 이하로 떨어뜨릴 수 없는 수치가 2에서 3까지 내려갔다.
"어이없긴 하네."
이러면 캐릭터가 움직일 수나 있을지 미지수였다.
만약 실제로 이런 인간이 존재한다면 메인 시나리오 진입은커녕 요양부터 해야 할 터였다.
'그래도 이건 게임이니까.'
한 번 도전해 볼 만했다. 어차피 정신력은 [극한의 의지]가 보조하고 나머지 것들도 재능과 극적인 플레이로 보조 가능했으니까.
그렇게 마력을 제외한 모든 수치를 최하로 낮추고선 다시 재능치를 바라봤다.
"오."
꽤 많은 양의 재능치가 모여 있었다. 앞서 예상했던 것을 초과할 정도로.
'이 정도면 조금만 더 욕심내 봐도 되겠는데?'
내친김에 기존의 이상적인 계획을 폐기하고 정말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이상적인 재능 조합을 구상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앞서 생략했던 디버프 두 개를 추가했다.
명성치 때문에 포기한 중2병 특성인 [오만한 귀공자]와 플레이 난도를 극단적으로 높이는 주범인 [간헐적 디버프 강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경고: 계정의 생존 확률이 극히 낮습니다. 정말로 위 재능을 부여하시겠습니까?]
바로 확인 버튼을 눌렀다. 이걸로 부족했던 재능치가 확 채워졌다.
"됐다."
동시에 나는 망설임 없이 머릿속에 담아 두었던 두 재능을 골랐다.
[절대마도]와 [무극지체].
신화급 재능인 [절대마도]는 마법의 재능을 극한으로 늘려 줄 주력 재능으로 쓸 생각이었다.
그리고 전설급 상위 재능인 [무극지체]는 최악으로 떨어진 신체 능력을 보조하고 추후 기사로서의 성장을 염두에 둔 배치였다.
이걸로 마법사와 기사의 모든 재능을 갖춘 셈.
"미쳤네."
신화급과 전설급 재능으로 도배된 캐릭터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완전 사기였다. 수백 회차 넘게 플레이해 본 나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준의 현란한 재능의 향연.
"무슨 괴물이냐…."
이 정도면 후반부 최종 보스도 혼자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빡세게 해야겠구만."
내심 각오를 다졌다.
이 캐릭터의 치명적인 약점은 성장을 멈추면 죽는다는 점이다. 최대의 효율이기에 최선의 수를 향해 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
안 그러면 디버프에 몰려 죽고 말 테니. 결국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셈.
그렇지만 내겐 수백 회가 넘는 캐릭터 육성 공략 방안이 있었다. 각 상황에 맞는 성장 공략이 있는 한 무서울 건 없었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플레이에 앞서 저장 버튼을 누르자 미리 설정해 둔 특성들이 마구 떠올랐다.
[절대마도] [초월성장] [무극지체] [극한의 의지] [생명연장]…
[마력절맥] [분노조절장애] [불면증] [오감저하] [오만한 귀공자]…
"어우, 보기만 해도 어지럽네."
그렇게 메시지창을 끄려다 멈칫했다.
'혹시 무림학원에는 DLC 같은 거 없나?'
아무리 망작이지만 그래도 같은 게임사인데 뭔가 있을 것 같았다. 난 곧장 '무림학원'에 접속해 봤다.
"없네."
그러면 그렇지 싶었다. 개발자도 흑역사 따위에 매달릴 이유는 없지.
그런데 그 순간 게임 판매 리뷰 상단에 한 코멘트가 노출된 것이 눈에 띄었다. '무림학원'이 나온 당일에 쓴 리뷰였다.
[전작에 비해 별로네요. 자유도도 낮고 인게임 밸런스는 왜 이 모양인지. 난이도도 그래요. 주인공이 갑툭튀로 죽는 건 뭡니까? 캐릭터가 성장하기도 전에 갑자기 은둔 고수가 나타나 썰어 버리는데 뭘 어쩌라는 건지. 즉사 이벤트도 좀 성의 있게 만들던지요. 어찌어찌 클리어는 했는데 정말 실망했습니다.]
신랄하다면 신랄한 평가였다. 그 아래로 뼈아픈 공감 버튼이 여럿 달려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이니 이제 이런 리뷰는 지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수정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러다 문득 밑에 스토리 팀이라는 공식 계정이 추가로 단 코멘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럼 네가 직접 해보든지.]
"뭐?"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작성 시간대를 보니 몇 분 전에 단 댓글이었다.
계정 담당자부터가 이 모양이니 서비스가 제대로 될 리가 있나.
"참나."
적당히 혀를 차고선 '마법기사 아카데미' 게임창을 띄웠다. 이런 걸로 마지막 플레이를 방해받을 순 없지.
커서를 움직여 게임 시작 버튼에 올렸다.
"꼭 처음 게임할 때 같네."
언제나 신선한 도전은 즐거운 법이다. 나는 기대감을 가득 품고서 게임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음? 렉 걸렸나?"
그런데 게임이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창이 떠올랐다.
[업적 포인트 랭킹 1위 확인했습니다. 김재준님은 귀사가 선정한 최후의 1인으로 선발되셨습니다. 최종 DLC 특전에 따라….]
문자가 멈춘다. 동시에 지직거리는 화면. 반응하지 않는다.
"뭐야 창이 꺼졌나?"
갑자기 내려간 게임 화면에 무심코 눈앞에 보인 게임 시작 버튼을 더블 클릭했다.
"아."
그리고 알아챘다.
갓겜창이 내려간 뒷배경에 띄워져 있는 망겜 화면을.
'이거 '무림학원'이었지?'
렉 걸릴 때는 괜히 다른 거 건드리면 안 되는데. 괜히 로딩만 더 걸리게 생겼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무림학원' 창을 끄려 했으나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화면은 꺼지지 않았다.
'뭐야?'
[계정을 불러옵니다….]
"계정은 무슨."
'무림학원'의 결말을 본 후에 아예 삭제했다. 기존 정보를 다 삭제했으니 불러올 것도 없을 텐데.
그 순간 눈앞에 창이 떠올랐다.
[찾았다!]
"뭔 놈의 프로그램이 반말을…."
나는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메시지창을 바라봤다.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2화 1서클을 향해 (1)
머리가 울린다. 전신에 힘이 없고 탈력감이 감돌았다.
'뭐야?'
정신을 차리니 낯선 천장이었다.
당황한 것도 잠시 순간 눈앞에 무언가 떠올랐다.
무림학원을 클리어하시오.
"뭐?"
저도 모르게 반문하는 사이 문자열은 깨져 서서히 허공 속에서 사라졌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심상치 않은 반응에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한 귀퉁이에 걸터앉았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난 분명 게임을 하던 중이었는데?'
그런데 난데없이 낯선 방안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
고개를 드니 방 입구 쪽에서 누군가 이쪽을 부르고 있었다.
잘 들리지 않아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린 채 물었다.
"예?"
"이, 일어나셨습니까? 공자님!"
상대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그의 말이 들렸다.
그런데 공자라니?
영문을 몰라 침묵하고 있자 곧 남자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공자님께서 기침하지 않으셔서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무슨 말투가 이상하게 공손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무심코 이쪽에서 손사래를 치려다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혈색을 잃어 창백한 하얀 피부의 길쭉한 손. 낯선 손이다.
"…제가 누구죠?"
그 말에 상대가 움찔거리며 이쪽의 눈치를 살폈다.
긴장한 낯으로 옅게 떠는 걸 보니 내 존댓말을 꼽주는 걸로 여긴 모양.
이쪽은 진짜 몰라서 묻는 건데 말이다.
곧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굴리던 녀석이 원인을 알아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위대한 제갈세가의 셋째 아들이신 제갈천우님이십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제갈세가라니 이게 무슨 무협지도 아니고…?'
그때 불현듯 머릿속에 마지막에 실수로 실행한 '무림학원'에 대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지금 게임 속으로 들어온 건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자신의 대답이 시원찮다고 판단한 건지. 시종으로 추측되는 사내가 목소리를 키웠다.
"위대한 오대세가 중 최고 명문인 제갈세가의…!"
"됐다."
추가로 얼굴에 금칠하려는 녀석을 만류하며 생각에 빠졌다. 무림학원, 그중 제갈천우라면 초반 악역 중 하나였다.
자기 가문만 믿고 나대는 재수 없는 망나니.
능력도 없으면서 비아냥거리다 참교육당하는 빌런 역할을 맡는 녀석이었다.
'망할.'
어째서 '무림학원' 세계관 속에 들어오게 된 건지 몰라도 당장 시급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지금 내 몸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잠시 떨리는 주먹을 쥐었다 펴본 후 이내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몸 상태를 살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말라붙은 기맥과 저하된 감각 그리고 선천적으로 쇠약한 몸으로 인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진짜 설정대로 몸이 만들어졌다.'
이대로 가만히 손 놓고 있다간 얼마 안 가 죽는다.
'눈앞이 흐리거나 귀가 먹은 건 [오감저하]일 거고,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 [마력절맥]인가?'
능력치와 재능을 설정할 때가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양의 디버프로 떡칠된 신체는 분명 산송장에 가까웠다.
'미치겠군.'
무엇보다 문제인 건 지금 내 주력 재능이 [절대마도]라는 거다. 이곳은 엄연히 무협 세계관인데 그 재능이 마법이라니.
그러다 문득 시종을 세워 둔 게 생각나 물었다.
"난 왜 찾아온 거지? 늦게 일어나서 깨우러 온 게 다인가?"
제갈천우의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건지 하대하는 말투가 술술 나왔다.
"그, 그게 오늘 무림학원 시험 시작 날이라 깨우시라고…."
"뭐?"
오늘이 입학시험 날이었다니 전혀 예상치 못했다.
나는 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느껴지는 현기증에 다시 침대 위에 앉으며 물었다.
이 빈약한 몸뚱이는 일어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시험 시작까지 얼마나 남았지?"
"반 시진 후입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 내 몸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단련깨나 했다 하는 후기지수들이 죄다 모일 텐데 이런 검이나 들 수 있을지 모를 몸으로 통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장 준비해."
그렇다고 제갈세가로 돌아갈 순 없었다.
망나니 삼공자인 제갈천우는 가문에서도 내버린 자식이었으니까. 돌아가 봤자 가문의 지원은커녕 시험에 떨어진 수치라며 자택 연금이나 당하겠지.
'지금 이 몸 상태로 유폐라도 당하면 그걸로 끝이다.'
상상만 해도 아찔한 결말에 등 뒤로 식은땀이 배어났다.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죽는다. 가만히 있어도 수명이 깎이는 처지에 유폐까지 더해지는 순간 사형을 선고받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시한부에 더해 수많은 디버프가 중첩된 내가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디버프를 중화할 수 있는 재능들을 성장시켜서 이를 이겨내는 것.
'무엇보다 마지막의 그건 아마….'
눈을 뜨자마자 보이던 을 클리어하라는 메시지. 뭐가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찾고 저 건방진 메시지창에 닿기 위해선 일단 이 세계에서 주어진 과업을 클리어해야 한다는 점.
그렇다면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내 검과 기물은 어딨나? 시험용으로 가져온 게 있을 텐데."
나는 시종을 향해 물었다. 작중에서도 그런 기물을 활용해 다른 이들을 괴롭히곤 했으니 분명 지금도 가지고 있을 거다.
'지금, 내 힘은 미약하다.'
그러니 그 자체로 강한 기운을 품은 병장기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가져오시라는 건지?"
"당연히 시험을 치러야 하는 거 아니겠나."
나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정신계 디버프는 반대 재능인 극한의 의지로 어느 정도 극복 가능했으니 이건 아마도 제갈천우의 본래 성격일 터.
그런데 그때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게… 공자님의 시험은 내일입니다. 전체 시험 시작이 오늘일 뿐입니다. 그, 어제 미리 수준이라도 보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찾아온 것입니다."
시종이 긴장한 낯빛으로 대답했다. 아마 원래 제갈천우라면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분명 옳은 말은 한 것임에도 불호령이 떨어질까 급급해하는 시종의 모습을 보니 제갈천우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더 잘 알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내심 끓어오르는 낯선 분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선택한 디버프 중 하나인 [분노조절장애]가 발동한 것이다. 여기에 [간헐적 디버프 강화]와 중첩되어 발동하자 상당히 참기 어려웠다.
"후우."
일단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렇게 [극한의 의지]로 충동적으로 몰아치는 분노를 억누르며 애써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하루의 유예가 남아 있었다. 고작 하루일지도 몰라도 아예 없는 것보단 나았다.
한숨을 내쉬고 나서 시종에게 명했다.
"이곳에 올 때 가문에서 받아온 전표나 무기 전부 가져와. 혹시 영약도 있으면 가져오고."
"알겠습니다!"
혹여나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시종은 얼른 문을 닫고 나갔다. 그제야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하루.'
그동안 뭔가 수를 써야 한다.
나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절대마도의 재능 덕에 내부의 기운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력절맥 때문인지 체내의 기운은 희박하다 못해 없다시피 했다.
'그러면 마력 능력치는 다 어디로 간 거지?'
아무리 마력절맥이라 해도 능력치 자체의 마력까지 사라지진 않았을 터. 나는 기감을 넓혀 전신을 살폈다.
'여기 있었나.'
찌릿한 감각에 미간을 좁혔다. 마력은 심장부에 뭉쳐 있었다.
'흐르지 못해 고인 건가?'
어쩐지 심장이 뻐근하다 했다. 능력치 설정에는 높았던 마력 수치가 역으로 독이 된 케이스였다.
시한부 디버프와 함께 작용해 더욱 치명적으로 체내를 잠식하고 있었다.
'우선 이것부터 해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두면 마력절맥과 동시에 마력중독에 빠질 수 있었다. 현대 의학에 비유하자면 말기 고혈압과 극단적 저혈압이 동시에 오는 셈.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
'서클을 만든다.'
마력을 안정적으로 순환시킬 수 있는 서클이 있어야만 이 심장부에 몰린 마력을 해소할 수 있었다.
'문제는 서클을 만들기에는 마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지.'
마력절맥 때문에 단숨에 코어를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추가 마력이 필요해.'
아무리 절대적인 재능이라 할지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순 없다.
서클을 만들기 위해선 우선 말라붙은 기맥을 채울 만한 마력이 필요했다.
체내에서 주변으로 기감을 넓히자 주변의 기운이 더더욱 세밀하게 느껴졌다. 다만, 기감을 확대해 나갈수록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마력이 거의 없잖아?'
이 세계의 마력 농도는 상당히 옅었다.
대신 비슷한 느낌을 주는 힘의 흐름이 여럿 느껴졌는데 이것이 바로 다른 무인들이 말하는 '기'인 듯했다.
절대마도의 재능 덕분인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력과 기는 원류가 같다고.
다만 마력이 정제되어 변형하기 쉬운 자연적으로 보기 힘든 무형의 힘이라면, 기는 이미 어떤 성질을 띤 채 세계의 흐름에 작용하고 있어 변형하기 어려운 종류의 힘이었다.
'큰일이군.'
공기 중의 희박한 마력과 체내의 마력만으로는 서클을 형성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기의 형태로 흐르고 있는 힘을 순수한 마력으로 분해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기를 분해해 순수 마력으로 추출하는 것은 오히려 막대한 양의 마력이 드니까. 본말전도인 셈이다.
"망할."
답답한 심경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필이면 '무림학원'이어서 이 꼴이라니. '마법기사 아카데미'였다면 달랐을 텐데.
'잠깐?'
나는 역으로 생각을 전환했다.
오히려 이건 기회가 아닐까?
지금 이 세계에서 마법사는 나뿐이다. 오직 나만이 마법을 쓸 수 있다. 거기서 오는 이점은 아마 상상을 초월할 터.
다른 재능 있는 이들이 무공에 매진할 때, 나는 유일하게 마법사의 길을 걷는 자가 되는 거다. [절대마도]라는 최고의 재능을 지니고서 말이다.
'도전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때마침 저편에서 문이 열렸다.
"공자님! 전부 가져왔습니다!"
시종이 가져온 건 고액의 전표와 시험용 검, 그리고 제갈세가에서 챙겨 온 묘한 기운을 풍기는 단검들이었다.
아쉽게도 지금 가장 필요한 영약이 없었다. 하긴 그 귀한 게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것밖에 없나?"
"예. 이건 저희가 예비로 가지고 있는 것이고 다른 전표는 도련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혹여나 부족하다고 욕먹을까 봐 급하게 덧붙이는 시종. 그 덕에 나는 내 침대맡에 놓여 있는 전표 꾸러미를 찾을 수 있었다.
총 5,500냥. 어렴풋이 기억하기론 평범한 무인의 한 달 봉급이 200냥 언저리였으니 상당한 금액이었다.
제대로 된 사업체도 물려받지 못한 일개 삼공자가 용돈 겸 챙겨온 게 이 정도였으니 과연 오대세가의 위엄이 대단하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것도 다 살아야 누릴 수 있는 법. 나는 급히 시종에게 물었다.
"근처에 흑시(黑市)가 있나?"
"예? 네 있긴 합니다."
"잘됐군."
흑시는 뭐든 팔고 살 수 있는 암시장이다. 가격이 지파별로 정해져 있어 누가 가도 같은 가격이다. 물론 아무나 들여보내 주진 않지만.
나는 제갈세가 신분패를 시종에게 맡기며 말했다.
"가서 내 신분을 대고 영약을 사 와라."
"네?"
그러면서 시종이 가져온 단검들을 담보로 전당포에서 돈을 꾸라고도 덧붙였다.
"네에?!"
놀라는 녀석. 설마 가문의 물건을 날름 팔아 버리려 할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나는 덤덤했다.
"저것들을 담보로 최대한 빌려. 못해도 2,000냥 이상은 나오겠지."
실제 플레이 중에서 제갈천우를 쓰러뜨리고 나서 저 단검들을 팔면 그 정도 가격이 된다.
"그걸로 오십년하수오 정도는 살 수 있을 터."
기억상 이 시기 오십년하수오 한 뿌리의 시세는 7,000냥 정도였으니 부족하진 않을 거다.
"그… 그래도 가문의 물건인데 어찌…."
"내가 언제 팔라고 했나? 담보로 빌리라고 했지."
"아, 알겠습니다!"
내 으름장에 마른침을 삼키던 시종이 이내 도망치듯 밖으로 물러갔다. 확실히 행실이 나쁜 망나니다 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도 군말 없이 따르는 모양.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시험 시작 당일이면 그 이벤트를 빼놓을 수 없었다. 앞으로 있을 입학시험. 거기서 쓸 최소한의 보험을 챙길 몇 안 되는 기회였으니까.
나는 덜덜 떨리는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치겠군."
쇠약해지다 못해 무너지기 직전의 몸뚱이 상태에 난 혀를 찼다.
만약 무극지체의 재능이 육체를 보조해 주지 않았다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을 터.
시간이 없다.
"여봐라!"
나는 급히 호위를 불러 외출을 지시했다.
* * *
잠시 후, 부실한 두 다리로 도착한 곳은 한 객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창백한 안색에 호위까지 대동한 내 모습에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이내 내 의복을 보고는 눈을 깔았다.
두려움과 경계 등이 혼재된 시선 속에서 나는 주점 한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구석진 자리였지만 주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좌석.
이미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지만 어렵지 않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호위 무인이 알아서 쫓아내 줬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가 한층 내려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림학원의 입학시험 난도를 낮춰 줄 인물이 바로 이곳에 있었으니까.
나는 바로 앞 탁상에 앉은 노인의 뒤통수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잠자코 일이 벌어지길 기다렸다.
사건은 금방 터졌다.
"억!"
노인의 옆을 지나가던 한 젊은 남자가 한쪽 편을 힐끔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진 것이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그저 발이 꼬여 넘어진 것처럼 보였으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
남자가 얼굴이 벌겋게 변해 외쳤다.
"이 미친 노인네가! 감히 발을 걸어?"
그러자 순식간에 주변의 시선이 남자에게 꽂혔다. 누가 봐도 혼자 넘어져 놓고 약한 노인을 탓하는 무뢰배의 전형이었다.
그런 싸늘한 기류를 느꼈는지 남자는 자신의 이름 밝히며 위세를 끌어오려 했다.
"나는 금문상가의 둘째 공자 금찬복이다!"
'금문상가의 자제인가.'
비싼 청색 염료를 사용한 걸로 보아 꽤 잘나가는 집안의 자제라고 생각은 했다만 금문상가였을 줄이야.
이곳 하북에서 나름 잘나가는 상단가였기에 주변의 다른 이들도 비난의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자 자신의 권세가 먹혔다고 판단한 금찬복이 노인을 핍박해 나갔다.
남을 깎아 자신의 체면을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전형적인 소인배였다.
물론 그럴수록 주변의 시선은 싸늘해져만 갔지만 말이다. 분명 이 객잔의 모든 손님들은 금찬복이 행패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할 터다.
하지만 나는 봤다. 한순간 튀어나온 발동작에 저자가 걸려 넘어지는걸. 그리고 그걸 행한 건 무력하게 수모를 당하고 있는 바로 저 노인이었다.
"그만하지?"
내가 목소리를 내자 금찬복을 비롯한 객잔의 시선이 돌아왔다.
고작 금문상단의 위세를 업고서 욕설한 정도 가지고 망나니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넌 뭐냐? …어디서 같잖은 게 나서기는.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금찬복은 이쪽의 복식을 보며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낀 듯했으나 이내 솟구치는 혈기와 기세로 몰아붙였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간단했다.
"제갈세가의 삼공자 제갈천우다. 그래서 누가 누굴 죽인다고?"
일순 흔들리는 상대의 눈동자에 그를 응시하던 이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짜 망나니가 뭔지 보여 줄 차례였다.
3화 1서클을 향해 (2)
싸해진 분위기의 객잔에서 내 목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금문상가의 위세가 대단하긴 하군. 제갈세가의 혈족을 없애 버리겠다니."
차갑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나는 천천히 금찬복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지금 명분은 완전히 내게 있었다.
"거, 거짓말! 어디서 농을 하시오?"
그리 반응하지만 이미 존대로 바뀌어 있는 걸 보면 이미 반쯤은 쫀 상태였다.
아무리 금문상가의 영향력이 크다 해도 제갈세가만큼은 아니었으니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안 그래?"
그러면서 나는 녀석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원래 성격 덕분인지 상대의 약 올리기에 극대화된 손짓이었다.
"무슨 짓이오!"
뒤늦게 금문상가의 호위가 나섰으나 이쪽 호위가 더 빨랐다.
"호위 관리 잘해야겠어. 아니 주인이 그 모양이라서 이런가?"
내 말에도 금찬복은 대답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이 옷에 자수되어 있는 제갈세가 문양을 알아챈 모양.
"내… 이 수모를 잊지 않을 거요."
"꺼져."
나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대화를 끝맺었다.
곧 도망치듯 호위와 함께 객잔을 나서는 금찬복의 모습에 수모를 당하던 노인이 나를 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나는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노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눈빛은 더없이 차분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지금 [분노조절장애] 때문에 시비 걸린 것 자체가 불쾌한 상황. 감정을 잘 컨트롤해야만 했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지극히 오해를 살 행동이었으니까.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아, 화나네?'
[분노조절장애]가 발동되는 게 심상치 않았다. [간헐적 디버프 강화]에 의해 증폭된 감정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이런 말이 나온 건.
"뭘 잘했다고 그러지?"
"예?"
순간 달라진 태도에 노인이 떨리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불쌍하다기보단 경멸을 유발하는 시선이었다.
'빌어먹을.'
인내는 끝났다. 나는 그대로 노인을 후려쳤다.
* * *
'무림학원'을 플레이하던 중 이런 공략을 본 적이 있다.
[시험 시작 날 객잔에서 노인을 구하면 비급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때 특이한 점은 구할 때 선택지 외의 행동을 하면 그 보상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마법기사 아카데미'에서도 그렇듯 '무림학원'에서도 오브젝트나 인물과 상호 작용이 가능했다.
주먹을 내지른다든가, 말을 걸었다가 말거나 주변을 빙글빙글 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법기사'에서는 그러면 서브 퀘스트가 열렸는데 '무림학원'에서는 고수에게 칼침 맞거나 암살당하는 루트로 빠져 버리는 지름길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그걸 자유도를 막으려는 개발사의 행동이라 생각했다.
다만 이번 공략은 그 경우가 달랐다.
[노인을 구해줄 때 주먹을 내지르거나 하는 상호 작용을 하면 노인이 쓰러진다. 이를 반복하다 보면 주변에서 이를 막고 노인은 도망치게 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진짜로 때리는 게 아닌 때리는 척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인공 백하신은 유저의 명령에 따라 주먹을 내지르지만 스스로는 거부하며 노인을 강하게 공격하지 않는다.]
[때리는 척하지만, 실제론 때리지 않는 것. 그 점이 공략의 포인트다.]
원래 협행으로 해야 할 일을 역으로 악행으로 변모시키는 사이코 플레이였다.
물론 명성이나 성향을 악 계열로 바꾸는 일이었기에 누구도 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누가 선행 이벤트를 그런 식으로 해결한단 말인가. 하지만 게임을 하다 보면 별의별 인간이 다 있었다.
주목해 볼 건 그 이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후 골목을 거닐다 그 노인을 마주하게 되면 그가 주는 보상이 바뀌어 있다.]
[비급서가 아닌 하나의 은패를 말이다.]
[그리고 그건….]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직시했다. 노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망했다.
'그 공략대로라면 때리는 척만 해야 하는데!'
원래 주인공 캐릭터인 백하신은 공격을 명령해도 하는 척만 한다.
그런데 내가 진짜로 쳐 버린 것이다.
난 발길질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속으로 당혹감을 느꼈다.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미친 척하는 망나니라도 되어야 한다.
안 그러면 이 괴물한테 죽을 테니까!
나는 억울한 심정으로 폭행을 계속해 나갔다.
'살기 위해선 망나니가 돼야 한다.'
쪼들리는 체력에 내지른 다리가 떨리고 당장에 현기증이 핑 돌았다. 그럼에도 나는 발길질을 계속했다.
"저거 말려야 되는 거 아냐?"
"쉿! 그냥 좀 참게 제갈세가잖나!"
주변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이미 가문명까지 밝힌 상태인데 이런 일을 벌이다니.
오늘 이후로 어딜 가든 망나니로 취급되겠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해서 히든 이벤트를 완수해야 했다.
그때 뒤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이게 무슨 행패죠?"
호리호리한 체격의 여인이었다.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 가는 선에 조화로운 눈매와 입술이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그 기세는 맹수 못지않았다.
곧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호위가 나섰지만, 상대는 오히려 맨손으로 호위를 제압했다.
'드디어 말리러 왔군.'
마침 때릴 힘이 바닥났기에 다행이었다.
나는 반쯤 탈진 상태라는 걸 감추기 위해 일부러 화난 척 숨을 거칠게 내쉬며 말했다.
"넌 누구지?"
"그쪽에 댈 이름은 없어요."
물론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남궁비화. 기수로 따지면 바로 내 위 학년의 강자 중 하나였다.
'내 호위도 아마 일류 초입은 될 텐데 이걸 제압할 정도라니.'
새삼 고수가 많은 세계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문세가라는 사람이 약자를 핍박하다니. 어서 사과하고 물러나세요."
나는 최대한 호흡을 고르며 태연히 답했다.
"그렇게 못 하겠다면?"
"그럼 실력 행사를 할 수밖에요."
남궁비화가 날카로운 눈매의 시선이 이쪽을 관통하듯 노려봤다. 이만하면 됐다. 슬슬 물러날 때겠지.
"흥, 보내 주지."
내가 뒤로 물러서며 말하자 노인이 비척비척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남궁비화는 그런 노인을 부축해 주기 위해 걸어가려다 날 노려보더니 으름장을 놓았다.
"제갈세가의 공자가 약자나 건드리는 무뢰배일 줄은 몰랐군요. 실망이에요."
약자라. 만일 그녀가 저 노인의 진짜 정체를 안다면 이런 말을 하진 못했을 거다.
이내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나는 흥이 깨진다는 듯 객잔 밖으로 나섰다. 어느새 노인과 남궁비화는 사라져 있었다.
이를 의식하며 난 으슥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아마 이 근처일 텐데.'
그리 생각하며 발을 떼던 그때. 공기가 변했다. 동시에 내 뒤로 서 있던 호위의 몸이 허물어졌다.
"아까는 잘도 패더군."
문득 정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올렸다. 그곳에는 아까 그 노인이 있었다.
모습만 같았지 그 기도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사실 그는 단순히 노인이라 불리기엔 너무도 유명한 고수였다.
'백병괴(百兵怪) 미태을.'
그는 한때 중원 십대 고수의 자리를 차지했던 강자이자 전 무림학원장이었다.
* * *
"무림인이 멋대로 주먹을 휘두르면 쓰나."
엄청난 살기였다.
속이 울렁거리고 손발이 저절로 덜덜 떨릴 정도로. 단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그대로 사지가 찢겨질 것 같은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는 여전히 돌아갔다. 아마 [극한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이미 눈물 콧물 다 쏟으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았겠지.
'이미 벌어진 일이다.'
어차피 주먹질을 한 이상 공략대로 진행하는 것은 물 건너갔다.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골목으로 들어서기에 앞서 이미 수많은 계산을 거쳤다. 그의 정체. 그의 목적. 그의 성향. 그걸 생각하면….
"제 덕에 무사할 수 있었으면서 괜히 성내지 맙시다."
"뭐라?"
숨 막히는 압박 속에서 입을 연 것도 모자라 뻔뻔하기 그지없는 답변이 나오자 미태을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물건이구먼?"
현재 미태을은 고민 중이었다.
이 녀석의 진짜 정체를 짚고 넘어갈지 그냥 무시할지 말이다. 사실 그가 방금까지 하고 있었던 일은 무림학원 속 숨어 있는 배후 세력을 찾을 겸 진행했던 시험의 일환이었다.
남궁비화를 비롯한 중급생도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저잣거리의 고수 찾기 시험. 그리고 이를 주도한 건 미태을이었다.
중급생도 중 누군가를 추적하고 정보를 얻는 모습이 과하게 자연스럽거나 수상쩍으면 그 녀석이 세작이었으니까.
그런데 남궁비화에게 역으로 의심을 살 줄은 몰랐다. 설마 그녀가 그 정도로 감이 좋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거기서 자신의 정체가 발각됐다면 배후 세력은 더욱 경계하며 꼬리를 숨겼겠지.
그래서 남궁비화의 미모에 시선이 팔린 망나니 한 놈을 잡아 유약한 노인 행세를 하며 넘어가려 했건만 설마 더 한 놈이 나타날 줄이야.
'제갈천우라고 했나.'
창백한 얼굴과 달리 불같은 성질을 지닌 건방진 녀석.
그를 둘러싼 형편없는 소문과 달리 직접 만나 본 제갈천우의 실체는 전혀 달랐다.
먼저 그 존재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정말 기운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산송장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만일 심장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아니었다면 강시로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자신을 감추는 게 익숙하다는 거겠지.'
어쩌면 망나니 소문도 다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그 제갈세가 아닌가.
무림맹 총군사직을 연임했던 전략가의 후손답게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 몰랐다.
미태을의 감은 그가 금문세가 녀석을 쓰러뜨릴 때 적중했다. 객잔 누구도 보지 못한 자신의 발재간을 제갈천우가 정확히 목격한 것이었다.
고수인 그이기에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은 확실히 자신의 동작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제갈천우가 격분하며 자신을 발길질할 때 미태을은 확신했다.
'이 녀석 분명 내가 고수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나약한 발길질은 있을 수 없었으니까.
겉으로 봤을 때는 격렬해 보였으나 그 안에 담긴 힘은 나약하다 못해 미약했다.
미태을이 맞으면서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일부러 자신이 금문세가의 녀석에게 시비를 건 것까지 알아채고는 돕겠다 나선 것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기행이었다.
'자신의 명성을 깎아가면서까지 날 도왔단 말이지.'
그래서 일부러 골목길에서 매복해 있다 압박을 가해 봤는데 그 대답이 가관이었다.
"제 덕에 무사할 수 있었으면서 괜히 성내지 맙시다."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인상 깊은 답변이기도 했다. 상대가 심상치 않은 후기지수라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기에 미태을은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물건이구먼?"
옅은 미소와 함께 그가 품 안에서 꺼내 든 것은 백금색의 추천패였다.
공략집에서 언급한 은패가 아니라 백금패를. 그리고 백금패는 은패와 달리 입학시험에서 어떤 시험이든 한 단계를 바로 통과할 수 있는 만능수표였다.
그 영롱한 반짝임에 일순 내 표정이 굳었다.
'백금패를, 준다고?'
이건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지뢰인 물건이었다.
미태을은 지금까지 은패만 뿌리고, 어지간하면 백금패는 주지 않았다. 그렇게 귀한 백금패를 망나니 제갈천우가 들고 나선다? 시험관들이 어떻게 나설지 모르는 폭탄이나 다를 바 없는 물건.
'하지만 은패보단 높은 건 사실이다.'
잘만 사용한다면, 마냥 나쁜 건 아니다.
이것은 나에 대한 미태을의 평가가 통상적으로 은패를 주는 자들보다 높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런데 왜 이걸 준 거지?'
진짜로 팼는데 이런 걸 주다니.
공략에서는 때리는 척만 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실제로 때리면 이렇게 되는 건가?
'다행이군.'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전 십대 고수와 맞붙을 뻔했으니까. 만일 그렇게 되면 진지하게 1초 만에 다짐육이 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래 놓고서 막상 뒤돌아서면 내 전신에 무수한 빗금이 그어져 있고, 넌 이미 죽어 있다 이러진 않겠지?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안감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걸 왜 주시는 거죠?"
"그냥 내 개인적인 흥미일세."
"이런 망나니에게 말입니까?"
일부러 중의적으로 물었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아무리 자신이 모종의 도움이 되었다 해도 이런 귀한 걸 순순히 줄 리가 없었다.
그러자 미태을이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일부러 살살 때려 주지 않았나. 무인이 그렇게까지 완력을 약하게 조절하는 건 어렵지."
"...예?"
아니다. 힘이 약한 거다.
그러나 미태을은 멋대로 추론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내 눈은 속일 수 없네. 아무리 일반인이라 해도 선천진기를 지니고 있지. 인간이 이렇게 진기가 없을 순 없네."
"...."
아니다. 정말 진기가 말라붙은 거다.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핵심을 찔렀다 생각한 것인지 미태을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 일부러 약한 티를 낼 필요는 없단 말일세. 실제로 그런 몸을 한 사람이 이리 멀쩡히 걸을 수 있을 리도 없고 말이지."
"...흠."
아니다. 진짜 제대로 걸을 수도 없다.
아무래도 내 망한 몸 상태가 그렇게 해석되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에게 백금패를 주는 건 이상하지 않지."
미태을은 사람 좋은 얼굴로 어깨를 툭툭 쳤다.
어깨에 한 번씩 두꺼운 손바닥이 닿을 때마다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그럼 학원에서 보세."
그 말과 함께 한순간 눈앞에서 사라진 미태을.
골목에서 홀로 서 있던 나는 황당함에 고개를 숙였다.
"하…."
전력으로 찼는데 기별조차 오지 않는 다리.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숨까지.
알고는 있었지만 고수에게 공인까지 받으니 더더욱 비참한 느낌이었다.
"제기랄…."
예상한 것보다 좋은 걸 받았는데, 어쩐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 * *
"여기 사 왔습니다! 도련님."
겨우 쓰러진 호위를 깨워 숙소에 도착하자 시종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목함을 내왔다.
나는 그 안에 신묘한 빛깔을 띠고 있는 영초를 바라봤다.
오십년하수오. 올바른 방식으로 복용하면 15년에서 25년 치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영약이었다.
'상당한 양의 마력이 포함되어 있어.'
확실히 영약이라 그런지 풍기는 기운 자체가 달랐다.
"후우."
복용 전에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절대마도] 덕분인지 마력을 어떻게 다루고 서클을 구성해야 할지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했다.
'우선 [마력절맥]을 극복한다.'
[마력절맥]은 선천적으로 기맥, 즉 마력의 통로가 말라붙은 디버프를 뜻한다.
본래라면 불치병에 가까운 저주였으나 [절대마도]의 재능과 [초월성장]의 능력을 합치면 충분히 극복이 가능했다.
'물론 더럽게 힘들겠지만 말이지.'
게임에서야 마구잡이로 굴렸지. 이건 현실이었다. 실제로 혈관이 찢기고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만 했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나는 주변을 물리고선 방 안에 홀로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는 이내 오십년하수오를 집어삼켰다.
안 그래도 좁은 기맥을 따라 마력을 비롯한 오행의 기운이 폭포처럼 흘러넘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약하고 말라비틀어진 혈맥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전신이 도자기처럼 산산조각 나며 타오르는 듯한 격통이었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참아 냈다.
곧 천천히 실타래를 뽑듯 각 혈관 사이사이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말도 안 되게 섬세한 감각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이윽고 심장에 고인 마력을 회전시켜 외부에서 마력이 들어올 통로를 만들었다.
[극한의 의지]와 [절대마도] 없이는 불가능한 기예. 전신이 터질 듯 맥동했다.
'버텨라!'
기맥을 따라 들어온 마력이 심장에 고인 마력의 흐름과 만나기 시작하자 수압이 터진 것처럼 전신의 혈관이 부풀어 올랐다.
'...!'
[극한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진작 기절했을 거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통증 속에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호흡하는 것조차 잊을 만큼의 몰입이 이어졌다.
마침내 전신을 휘감는 마력을 끌어모아 코어를 만들자, 심장에 고인 마력이 고리의 격류에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부족해.'
서클을 구성하기 위해선 더 많은 마력이 필요했다.
기맥을 뚫느라 소모된 마력으로 인해 서클이 만들어지는 최소한의 마력만이 남은 상황.
나는 주변의 희박한 마나까지 모조리 끌어모았다.
'조금만 더!'
소량의 마나가 빠르게 모여들었다. 이들은 마치 처음부터 하나인 것처럼 서로 뭉쳐 회전하기 시작했다.
순간 내부의 에너지가 단숨에 밀집되면서 심장에 원형 고리가 만들어졌다.
"커헉!"
모든 과정이 끝나자마자 입가에 고인 검은 피를 내뱉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기맥을 막고 있던 불순물들과 마력 회로를 뚫는 과정에서 튀어나온 죽은 피들이었다.
"…두 번 했다간 죽겠네."
이제 겨우 1서클을 만들었다.
나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체내에 선명히 도는 정순한 기운. [마력절맥] 현상이 확연히 나아져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 처음 맞은 평온.
이를 느끼며 난 그대로 기절했다.
아니. 기절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잠이 안 와.'
피로해서 당장이라도 의식이 날아갈 것만 같은데 잠들 수가 없었다. 설정해 둔 디버프 중 하나인 [불면증]의 효과 때문이었다.
'망할.'
다음에는 반드시 수면 효과가 있는 향초와 약품을 구비해 두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한참을 괴로워하다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4화 무림학원 입학시험 (1)
다음 날. 나는 전신을 불태우는 듯한 격통에 눈을 떴다.
"빌어먹을!"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온몸에 멀쩡한 구석이 없었던 탓이다. 전신에 근육통이 온 듯 통증이 이어졌고, 몸살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보람은 있네."
여전히 마력 회로는 말라 있었으나 예전의 말라비틀어지다 못해 막힐 정도의 상태는 아니었다.
그때가 마구 찌그러지고 눌린 초소형 튜브였다면 지금은 그래도 지금은 소형 빨대 구멍만큼 늘어난 정도.
'[초월성장]과 [극한의 의지] 덕분이다.'
한계에 다다른 몰아붙임 속에서 성장하는 두 신화급 수준의 재능이 아니었으면 갑자기 열린 마력 회로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죽었을 터다.
"그나저나… 어떻게 한다?"
겨우 1서클을 만들었으나 여전히 답은 없었다.
무림학원의 입학 지원자들은 다들 한가락 하는 후기지수 후보들. 고작 하루 만에 각성한 능력으로 그들을 꺾고 합격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물론 이게 최선이었지만.'
지금 이 몸뚱이론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힐 수 없으니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어차피 평범한 방식으론 절대 통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법이라는 특이성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했다.
'이쪽이 그저 불리한 것만은 아냐.'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건 시험에 대한 정보다.
'이를 최대한 이용할 수밖에.'
그렇게 고심에 빠진 사이 문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슬슬 기침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드디어 대망의 시험 날이다.
여기서 혹시라도 탈락하는 순간 나는 자택 연금행이겠지.
'…절대로 실패해선 안 된다.'
절박했지만 지레 긴장하거나 겁먹진 않으려 했다.
이미 시험 전에 할 수 있는 건 모두 했으니. 이제 남은 건 증명하는 일뿐.
나는 힘겨운 몸을 이끌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 * *
"더럽게 많네."
수백에 달하는 이들이 몰려 있는 광장을 바라보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긴 무림학원의 졸업생이라면 출신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무림맹의 요직에 앉을 수 있었으니 탐낼 수밖에.
'이 어딘가에 유명한 녀석들도 있겠지.'
명문가문 출신이라도 제갈천우의 경우처럼 계승 순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무림학원으로 오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어느 순간 광장 내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삽시간에 잦아들었다.
광장 앞 강단에 날카로운 분위기의 사내가 걸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시험감독관 정묵이다. 그럼 시험을 시작하겠다."
나지막했지만 내공을 담은 목소리는 이미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1차 시험은 간단하다. 검술의 기본인 베기를 행하면 된다."
그와 함께 보조원들이 광장 앞에 일렬로 목표물을 세웠다.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이다. 평범한 짚단 여러 개가 고정대에 꽂혀 축 늘어졌다.
물론 시험 일차마다 조금씩 바뀌지만 대체로 틀은 비슷했다.
얼마나 기초에 충실한가의 유무. 제대로 된 초식 하나 완성하지 못한 어중이떠중이들은 여기서 걸러진다.
"그럼 각자 순서대로 나와서 베어라. 통과한 자는 명패를 받고 다음 시험장으로 가면 된다."
그 말과 함께 차례대로 인원이 지명됐다. 처음 표적은 짚단 다발.
도전자들은 다들 쉬워 보인다는 낯으로 검을 뽑았으나 이내 낭패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무효요! 짚단에 물을 묻혀 놓았다는 말은 없지 않았소!"
'그럴 줄 알았다. 일찍 온 보람이 있군.'
일찍 온 사람부터 단상에서 멀리 배치시켰기에 시험은 일찍 온 사람들이 약간 더 유리했다. 관찰력이 좋은 무인이라면 짚단의 질김 정도마저 어림잡을 수 있겠지.
이럴 줄 알고 일부러 대열의 뒤편에 선 것이다. 만일 지명되었는데 나서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탈락이었으니까.
나는 찬찬히 시험 경과를 지켜봤다. 평균적인 통과자는 2할 정도. 물에 젖은 짚단 다발들은 생각보다 억셌고 단단했다.
깔끔하게 잘리지 않은 경우에도 탈락 처리를 했으니 무작정 힘만 줘서 통과하려는 불합격자들 역시 속출했다.
"탈락!"
다른 감독관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어느새 내 차례까지 오게 되었다.
"응시생, 앞으로 나오도록!"
감독관은 일순 제갈세가의 문양이 그려진 내 검집을 보고는 반응했지만 이내 모른 척 내게 시선을 맞췄다.
"개인이 지참한 병장기는 쓸 수 없다. 준비해 둔 검을 쓰도록."
탈락자가 많은 이유가 바로 저것이었다. 무딘 철검.
물에 젖은 짚단은 진검으로도 베기 어려운데, 그걸 날이 거의 없는 검으로 베어야 하는 셈이었다.
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조건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다.
'완벽하게 베기를 구사하든가, 아니면 그만한 기술을 커버할 수 있는 힘과 속도를 지녔든가.'
물론 나는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 말없이 검을 집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검을 쓰지 않는 자들이 돌덩이를 부수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지금 공략해야 할 건 저 짚단 다발이었다.
"후우."
검을 들어 자세를 잡으려던 그때. 문득 주변의 기류가 달라졌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한줄기 빛살이 사라지고 있었다.
털썩.
마치 낙엽처럼 바닥에 떨어지는 짚단.
사실 앞서 시험 통과를 위한 두 가지 조건 외의 방법이 있었다.
검기.
압축시킨 기운으로 예기를 벼린 절정급 고수의 일검이라면 날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잘 묶은 장발에 하얀 무복. 잘 보이진 않았지만 매화가 그려져 있는 걸로 보아 아마 화산파의 일원일 터였다.
'지금 시점에 이만한 실력자의 입학생이라면… 백청인가?'
추후 화산파의 제일검이 될 사내 말이다.
확실히 대단했다. 그저 검을 내질렀을 뿐인데 주변 이들의 시선이 집중됐으니.
단상 위에서 과묵하게 지켜보던 정묵마저 한마디 던질 정도였다.
"…깔끔하군."
가만히 예를 갖추고는 다음 시험장으로 향하는 백청.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바로 앞의 시험관과 눈이 마주쳤다.
"준비 안 하나?"
속으로 상대를 욕했다.
하필이면 저 녀석 뒤에 이루어진 터라 시선이 따가웠다. 이럴 땐 귀가 밝아지는지 뒤에서 질시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자가 바로 그 어제 사고 친 그 도련님이라더군."
"쯧, 오대세가랍시고 행패나 부리고 말이야."
괜히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별수 없다. 당장 눈앞에 눈을 부릅뜨고 있는 시험관의 재촉이 더 강렬했으니까.
나는 검을 들었다. 꽤 무게가 나가는 바람에 겨우 힘을 줘 날을 세울 수 있었다.
"참나, 어설픈 자세 아닌가?"
"웃기지도 않는군. 저러고도 명문세가라고?"
그 말대로 지금 내 자세는 너무도 불안정했다. 하체는 부실했고 검을 쥔 팔 역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주변의 수군거림이 이어졌다.
"글렀군."
"더 볼 것도 없겠어. 저잣거리의 점소이를 세워 놔도 저것보단 낫겠군."
누군가의 말에 나를 향한 주목은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후우."
그러나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눈앞의 표적에 집중할 뿐.
곧 체내의 서클이 마구 돌아가고 체내의 마력이 천천히 뽑히기 시작했다.
'검기를 흉내 낸다.'
마력을 검에 얇게 둘러 예기를 더한다. [절대마도]의 컨트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기예.
얼마나 적은 양인지 바로 앞의 감독관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걸 휘두를 힘이 없다는 건데.'
1서클의 마력으로는 검날을 세우는 것이 전부였기에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방법은 있지.'
곧 자세를 완전히 낮춘 나는 검날을 수평으로 세워 바닥에 댔다.
"뭐야? 포기인가?"
그 말에 시험감독관이 미간을 좁히고 주변의 비웃음이 커지던 그때.
서걱!
내 검이 바닥을 훑고서 일직선상에 놓인 짚단을 베어 넘겼다.
일순 조롱의 목소리가 멈추고 이내 움직이는 건 허물어진 벽처럼 넘어지는 볏단뿐이었다.
"…무슨?"
단상에서 지켜보던 정묵마저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키게 만드는 일격이었다.
절대 괜찮은 일격이라 할 수 없었다. 자세도 엉망이었으며 제대로 힘이 실린 공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짚단 전체가 기우뚱하더니 너무도 깔끔하게 베여 쓰러진 것이다.
'어떻게 한 거지?'
"깔끔하게 베였습니다."
감독관이 단면을 보며 말했다. 정묵은 당황했다. 이런 식으로 통과한 참가자가 그동안 있었나?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마지막 순간 번뜩인 그건 분명 검기였다는 점이었다.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기운이었지만 그건 분명 검기였다.'
정묵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제갈천우가 다룬 검기는 초짜라기엔 너무도 일정했고, 그렇다고 숙련자라기에는 너무도 미약했다.
'고작 응시자가 그 정도의 정교한 검기를 다룰 수 있다고?'
"다시 시험해 볼까요?"
그의 심중을 읽은 다른 후임 감독관이 물어왔다.
당연히 부정행위를 의심하는 거겠지.
하지만 정묵은 분명 봤다. 검기가 일렁이고 짚단이 베인 것을.
그는 정파인으로서 공정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부정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만큼 근거 없이 무작정 응시생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 역시 그의 성격상 맞지 않았다.
결국 정묵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통과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갈천우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뭐에 진을 다 뺀 것인지 파리한 안색으로 검을 늘어뜨리고는 말했다.
"합격패 주시죠."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그 뻔뻔함에 정묵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다행이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합격패를 챙겼다. 사실 앞서 짚단을 단칼에 벨 수 있었던 건 검에 두른 마력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쓴 수단은 기초 원소 마법 중 하나인 바람 마법.
마력 대신 오행의 기운이 풍부한 이 세계에선 오히려 기초 마법을 자연스레 익힐 수 있었던 터라 가능한 기예였다.
그렇게 다들 백청에 시선이 몰린 틈을 타 1서클 바람 마법을 날카롭게 개량해 몇 번이고 쏴 짚단 밑부분을 벤 것이었다.
'쓰러지지 않게 정확히 같은 장소에 같은 강도로 여러 번 베는 게 어렵긴 했지만 결국 해냈다.'
애초에 마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한 이 시대였기에 마법을 알아챈 자는 없었다.
더욱이 단상 밑에서 일을 벌인 터라 기감이 발달한 정묵조차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 주요했다.
'만약 그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마법이 발동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짚단을 거의 다 바람 마법으로 거의 벤 상태에서 검에 마력을 씌워 베는 척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저게 말이 돼? 저런 어설픈 자세로 짚단이 베였다고??"
"부정행위 아냐?"
그런 내 모습에 웅성거리는 다른 시험참가자들. 그러나 이미 합격패는 이쪽의 손안에 쥐어진 채였다.
"이쪽으로 오게."
곧 안내에 따라 이동한 곳은 단상 뒤쪽에 마련된 2차 시험장이었다.
탁상 너머로 시험감독관들이 저마다 앉아 있었다. 물론 [오감저하] 때문에 그 모습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 시험 내용을 안내하겠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결과를 기다렸다.
공략 중 기억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바로 1차 시험과 달리 2차 시험은 랜덤으로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종목은 모두 어떻게든 대처를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도무지 대처가 되지 않는 단 하나 종목이 있었는데.
'비무만 하지 말아라. 비무만….'
평범한 몸이었다면 얼마든지 승산을 만들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런 디버프가 줄줄이 달린 몸뚱이로는 장기전을 강요받는 비무만큼은 절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신이 있다면 제발….
"2차 시험은 비무로 진행하겠다."
신은 뒤졌다.
그래. 이딴 망겜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만에 하나 이런 최악의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어제 그런 수고를 들였으니 말이다.
비무라는 말에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나만이 천천히 시험감독관들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호오, 당돌한데."
"제일 첫 번째로 비무를 하겠다는 건가? 그래 봐야 쭉정이다."
"옷차림을 제대로 봐 제갈세가잖아? 숨겨둔 비장의 한 수가 있겠지. 이거 기대되는걸."
그런 내 모습에 저마다 반응을 보이는 시험감독관들. 저들이 바로 무림학원의 교수들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내가 익힌 무공 따위는 없다. 펼칠 초식도 마찬가지.
'여기서 이걸 쓴다.'
곧 시험감독관들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나는 품 안에서 백금패를 꺼내 들었다.
5화 무림학원 입학시험 (2)
"뭔데 그게?"
날카로운 눈빛을 한 시험관의 말에 순간 시험장 내에 정적이 흘렀다.
'아오. 그럼 그렇지.'
싸늘하다. 백금패를 쥐고도 마냥 안심할 수 없었던 게 이거였다.
은패라면 몰라도 백금패는 교수들에게도 낯선 물건이었으니까.
나는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침착히 답했다.
"이건 백금패입니다."
그 말에 반대 자리에 앉은 한 부드러운 인상의 여인, 우희령이 입을 열었다.
"아, 그거? 예전의 그거잖아~ 추천패."
역시 예상대로 이 백금패는 일종의 프리패스권이었다. 나는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그 뒤에 들려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그런 게 있다고는 들었지.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처음 내게 지적을 한 건 날 선 인상의 시험관인 남궁도혁의 목소리였다.
예상외의 지적에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연배 있는 시험관이라면 이걸 모를 순 없지. 슬슬 아는 체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건 어디서 난 건가?"
그때 심사위원석 중앙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풍채에 쾌남의 얼굴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자범, 이 시험장의 총시험관으로 있는 사내였다.
"받았습니다. 한 노인분께요."
나는 순순히 사실을 섞어 답했다. 괜히 필요 이상으로 감추거나 꾸밀 필요는 없었다.
그러자 구자범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진위 여부를 판단하려 했다.
"그건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무림학원이 처음 생겼을 때 극히 일부에게만 주어진 물건이지."
구자범이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더니 이내 선언하듯 말했다.
"본래 규정상 그 패를 지닌 이는 단 한 번, 입학시험 중 어떤 단계든 통과할 수 있다."
그래. 본래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굳이 본래라는 말을 꺼냈다는 건, 다른 문제가 있다는 뜻.
"다만 궁금하군. 어떻게 자네가 그분의 인정을 받은 건지."
구자범이 날 응시하며 물었다.
'어째 불길한 예감은 이리 들어맞냐.'
빌어먹을 영감탱이. 그냥 은패만 주면 될 것이지.
은패는 비록 점수는 깎이지만 다른 시험으로 바꿀 수 있는 일종의 시험 변경권이었다.
그것만 해도 충분했는데, 미태을이 굳이 백금패를 내민 것은 호의 겸 시험이었겠지. 어쩌면 진짜 얻어맞은 것에 대한 복수일지도 모르고.
손자뻘 환자가 안마 좀 해드렸다고 삐지긴.
'그래서 어떻게 한다. 백금패의 권위를 빌려 원칙을 들먹이며 설득할까, 아니면….'
그렇게 내가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구자범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궁금해서 말이지. 어째서 정묵 교관이 자네를 유심히 지켜봐야 한다고 적었는지 알고 싶어서 말이네."
그 말에 나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내가 인정한 사람이 무려 둘이나 추천하는 자네가 궁금해졌어."
'백금패만이 문제가 아니었군.'
앞서 내가 이상하게 1차 시험을 통과한 것이 나비 효과가 된 거다.
'벌써 이런 변수가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의도치 않게 주목을 받는 탓에 귀찮게 됐다.
'미치겠군.'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끝까지 가는 게 맞았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이야기했다.
"그럼 규정대로 2차 시험 통과 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게 백금패의 원칙이니까요."
내 대답에 우희령이 슬며시 웃고 남궁도혁은 표정을 굳혔다. 반응은 다르지만 둘 다 내 태도에 놀란 반응이었다.
아마 건방지거나 당돌하다 느낀 거겠지.
구자범 역시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더니 내게 말했다.
"참, 그 규정은 몇 년 전에 바뀌었네. 수용 여부는 시험감독관들이 재량껏 판단하기로 말이지."
그럴 리가 없다. 누가 봐도 거짓말인 티가 났다. 아마 갑자기 만들어 낸 규정일 터.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갑은 바로 저들이었다. 나로서는 부당해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작은 항의 정도는 괜찮겠지.
"그분은 아무래도 모르신 모양입니다. 만약 아시면 섭섭하시겠는데요."
"그건 협박인가?"
곧장 나를 짓누를 듯 살기가 쏘아졌지만, 나는 [극한의 의지]로 그 기세를 이겨내며 덧붙였다.
"그럴 리가요."
내가 압박을 견뎌 내자 구자범은 흥미롭다는 눈빛을 내비쳤다. 아까부터 내가 건방진 자세를 취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여기서 나의 능력을 어필한다.'
나는 이 상황에 대비해 일전에 생각해 두었던 제안을 꺼냈다.
"혹시 방금 내보인 기도가 전부가 아니라면 그걸로 시험을 대신해 주십시오. 제가 버텨 보겠습니다."
순간 공간이 얼어붙은 듯했다.
기껏해야 후기지수도 못 되는 녀석이 무려 중원 백대 고수의 기도를 감당하겠다니.
엄청난 도발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발칙하다 싶을 정도로.
'하지만 구자범은 오히려 그런 도전 정신을 지닌 녀석을 좋게 본다.'
살얼음판에 선 기분이었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구자범의 두 눈을 응시했다.
"후, 재밌는 지원자로군."
찰나의 시간이 지난 후 대답이 돌아왔다. 구자범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그 눈빛은 더없이 서늘했다.
나는 직감했다. 저건 태풍 전 고요와 같은 징후라고.
숨 막히는 와중, 이쪽이 마른침을 삼킴과 동시에 구자범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으윽!"
순간 엄청난 압박감이 쇄도했다. 마치 짙은 심해에 갇힌 느낌이었다. 폐에 물이 찬 것처럼 숨이 안 쉬어지고 극한의 공포와 무력함이 전신을 지배했다.
'제길!'
보통 무인이었다면 이미 혼절했을 테지만 나에겐 [극한의 의지]가 있었다. 멀어지는 의식이 천천히 부상하더니 좁아졌던 시야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영겁 같은 시간이 끝나고 나는 압박이 풀리는 감각을 느끼며 숨을 들이켰다.
"확실히 근성은 있군. 괜히 귀띔이 온 게 아니었어. 직접 온 보람이 있었나."
'뭐?'
그제야 나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원래 이 자리는 구자범이 있으면 안 됐다. 그런데 내가 미태을을 만나는 바람에 미래가 틀어진 거였다.
그 가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구자범의 선언이 이어졌다.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이 자리는 초식과 실력을 보는 자리. 기백만으로는 부족하지."
'망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따져 봤자 의미 없다. 중요한 건 내가 이 자리에서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는 점이었다.
'무난하게 통과할 방법 따윈 없다.'
당장에 1서클 마법 좀 보여 준다고 통과될 상황은 아닌 듯했다.
물론 신기해하긴 하겠지만 오히려 실용성을 따지며 날 떨구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야 한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선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시험감독관분 중 한 분의 일격을 받아 보겠습니다."
"허."
"뭐?"
곧장 이어지는 반응들. 그 당돌한 태도에 우희령도 할 말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어지간한 유명 문파의 간부급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비무보다는 오히려 나은 편이다.'
상대방을 제압해야 하는 비무는 장기전을 강요받는다. 이런 쓰레기 체력이라면 몇 합을 나누기도 전에 쓰러질 터.
반면 고수와의 지도대련에선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단 한 번. 일격뿐이라면 어떻게든 버틸 확률이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상대가 신입생 수준에 맞춰 봐준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이를 생각하면 지금 나는 조금이라도 그들의 호의를 사야 했다.
"다만."
무작정 끌려다닐 생각은 없었다. 저쪽이 먼저 규칙을 어겼으니 이쪽도 백금패를 구실 삼아 뭐라도 하나 뜯어낼 생각이었다.
건방져 보여도 제갈세가 출신에 백금패까지 가져온 생도이니 저쪽에서도 섣불리 내치진 못할 터.
"이렇게까지 하셨으니, 저도 한 가지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뭐라?"
생각지도 못한 역제안에 구자범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당돌한 걸 좋아하는 그의 특성인지, 입꼬리가 움직인 것이 보였다.
"뭘 원하지?"
"제가 사고 쳐도 한 번만은 눈감아 주십시오."
잠자코 지켜보던 시험관들 사이에서 정적이 흘렀다.
흥미롭게 웃고만 있던 우희령조차 표정을 굳혔다. 교칙 위반 선언, 이는 학원의 권위를 흙발로 짓밟는 행위나 다를 바 없으니까.
"이 자식이!"
"…대놓고 사고 치겠다는 거네. 우리를 대체 뭐로 보길래 그런 걸까?"
"...."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두 고수. 엄습해 오는 살기에 [극한의 의지]로도 버티는 것이 버거워질 즈음.
구자범이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구자범 주임 교수님!"
"대신."
구자범이 손을 들어 올리며 남궁도혁을 제지시켰다.
그리고 하얗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과정에서 팔 하나가 날아가도 불만은 없겠지?"
살벌하기 그지없는 선언에 교수들의 기세 역시 가라앉았다.
"…예."
팔이 대수겠는가. 어차피 시험에서 떨어지면 내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그래서 누굴 선택할 거냐?"
구자범이 무언가 기대된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변태 같은 인간. 당연히 저자는 안 된다. 그의 거패도에 반으로 갈라져 죽임당할 테니까.
그렇다면 우희령? 그것도 아니면….
짧은 고민 끝에 남궁도혁을 지목했다. 동시에 표정을 구기는 남궁도혁. 아무래도 얕보였다고 생각한 모양.
"내가 우스워 보이나 보지?"
신경질적인 표정 위로 남궁도혁이 살벌한 기세를 일으켰다.
구자범만큼은 아니지만 섬뜩함을 품은 기도다. 당장에 선택이 후회될 정도로.
하지만 내 판단은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남궁도혁은 얼핏 까칠해 보이지만 생도들에게 있어서는 좋은 교육자였으니까. 게임 내에서도 가혹하긴 해도 과도한 손속은 하지 않는 인물이었으니 믿을 만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교육과 시험이라는 틀에 충실히 지도대련 해줄 수 있는 어른이었다.
'단지 그 방식이 지나치게 거칠어서 그렇지.'
그 증거로 지금도 남궁도혁은 기세만으로 나를 죽이려 들고 있었다.
"좋다. 한 번 어울려 주지."
심사위원석에서 걸어 나온 남궁도혁이 품 안에서 비수를 뽑았다. 그의 주력 무공은 비도류였다.
"뭘 원하지? 검? 비수?"
이렇게 일부러 비수를 뽑으며 물어보는 것도 선택지를 주는 거였다. 네가 원한다면 그나마 약한 검으로 상대해 주겠다고.
평범하게 생각하면 그나마 주무기인 비수가 아닌 검을 택해야겠지만. 난 아니었다.
심호흡을 마친 내가 정반대의 선택을 내렸다.
"비수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남궁도혁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후회하지 마라."
30미터는 넘게 떨어진 거리에서 그가 손목을 돌렸다. 그러자 마치 마술 카드처럼 겹겹이 쌓인 비수가 그의 손에서 촤르륵 펼쳐졌다.
무슨 마술사처럼 손가락을 펼친 채 이쪽을 노려보는 남궁도혁.
나는 숨 쉬는 것도 잊고 전방의 비수에 몰입했다. 그러자 비수 사이로 흐르는 기의 흐름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보인다.'
마력 흐름이 보였다. 기 역시 결국은 마력과 근원적으로 같은 힘. [절대마도]의 감각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곧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남궁도혁이 나지막이 내공을 담아 말했다.
"막아 보도록."
촤르르륵-
그를 중심으로 허공에 휘황찬란하게 솟구치는 비수들. 적색의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이 마치 꽃잎이 휘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이 중에서 단 한 기만 쏠 것이다."
나는 종단 자세를 취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비수들의 검무 속 흐름이 옅게 느껴졌다.
[오감저하]로 낮아진 시력도, 청력도 쓸모가 없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더욱 뚜렷하게 비수들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외줄에 올라탄 듯이 긴장된 정적이 갈라지는 바람 소리 속에서 이어졌다. 섬뜩한 파공음.
일순 전방에서 솟구치는 기류가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오른쪽 어깨 방향으로 눕혔다.
카앙!
순간 손아귀가 찢겨 나가는 충격과 함께 비수가 튀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놓칠 뻔했으나 [무극지체]의 움직임 덕분인지 아슬아슬하게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후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올렸다.
남궁도혁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세히 얼굴까지 보이진 않지만 아마 그랬을 거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구자범과 우희령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설마 이렇게 막힐 줄은 몰랐겠지.'
비도류의 핵심은 그 화려함 이면의 은밀함에 있다.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원거리의 공격이기에 무서운 거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그 공격 타이밍과 방향만 파악하면 의외로 쉽게 파훼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심지어 내기도 담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방금의 일격은 손속을 둬 본래 위력을 극단적으로 줄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쉽게 간파해 튕겨낼 줄은 몰랐을 거다.
처음 보는 이들은 종잡을 수 없는 비수의 움직임에 혼란스러워하다 베이는 게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침묵이 내려앉은 시험장 속에서 내가 물었다.
"이 정도면 됐나요?"
내 말에 남궁도혁의 표정은 악귀처럼 변했고, 우희령은 웃음을 참았으며 구자범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충분하네."
결과는 합격이었다.
* * *
"여기가 하급 생도관인가."
나는 생도관 문 앞에 서서 중얼거렸다. 슬슬 무림학원에 입성했다는 것이 체감됐다.
'한시름 놓았군.'
아직 최종 시험을 치른 건 아니었으나 이걸로 당장 자택 연금 당해 죽는 미래로부터는 조금 멀어질 수 있었다.
물론 남은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통과하자마자 바로 기숙 생활이라니.'
이전의 시종이 봐주는 생활과는 딴판일 터.
'그러니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한다.'
생도관 안으로 들어왔다 해서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다. 예정대로라면 예비생도를 위한 최종시험은 다음 주에 치러진다.
당장 인원이 많아 1일 차에서 5일 차로 나누어 시험을 보기 때문.
'무엇보다 내겐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
특히 수석을 노려야 했다.
수석을 하면 얻을 수 있는 외출권을 비롯한 중급서고 열람 권한 등 각종 혜택이 내겐 필요했다.
문제는 그걸 위해선 각종 괴물들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건데….
'골치 아프군.'
생도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이지만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규정상 최종 시험 날까지는 일단 이곳에서 지내야 했다.
문제는 이곳에서 지내게 되면 그 '이벤트'도 겪게 될 거라는 점이었다.
'하는 수 없지.'
고심 끝에 문을 열자 그곳에는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칠게 손날을 내지르는 중단발의 남자와 이를 막는 빡빡머리. 격렬한 전투 탓에 실내는 싸움의 열기로 후끈했다.
동시에 자리에 서 있던 예비생도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내부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네가 마지막인가 보지?"
구경꾼 중 한 녀석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물어 왔다.
그 모습에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할 수 없는 예비생도 이벤트. 서열 정리의 시작이었다.
6화 서열 정리
열띤 분위기 속 나는 말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벙어리냐?"
그러자 이죽거리는 구경꾼 중 한 녀석. 어디서 본 기억도 없는 걸 보니 흔한 조연 중 한 명인 모양이다.
순간 올라오는 [분노조절장애]를 억눌렀다. 근시일 동안 자주 발동해서 그런지 슬슬 통제가 되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초월성장]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도 없었다. 중2병 디버프라고 불리는 [오만한 귀공자]의 특성이 이를 용서하지 않았으니까.
"상대조차 파악하지 못하나. 역시 피라미답군."
"뭐?"
순간 발끈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노골적으로 언짢은 티를 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제갈세가의 혈족에게 모욕을 주진 않았을 테니 말이지. 아니면 이건 제갈세가에 대한 도전으로 봐도 상관없나?"
"뭣? 혈족? 그렇다면 네가 그…."
내 배경에 주눅 들었는지 한 걸음 물러서는 사내. 다른 구경꾼들도 그제야 내 의복 한쪽에 새겨진 제갈세가 문양을 보고선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기선제압은 됐고.'
어느새 구경꾼들의 중심을 차지한 나는 싸움 양상을 지켜봤다. 그곳엔 여전히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초식이 화려하기만 하군."
빡빡머리가 달려들어 손바닥을 내지르자 이에 튕겨 나간 단발 녀석의 이마에 혈관이 튀었다.
"이 자식이!"
이내 서로 투닥거리며 싸워 나가는 두 녀석. 무가 숭상되는 시대에 혈기 넘치는 생도들을 집어넣어 놨으니 이렇게 싸움이 날 수밖에.
나는 그 둘의 전투를 보며 그들의 출신을 유추해 나갔다.
빡빡머리는 장법으로 대응하는 걸 보니 소림사에서 온 듯했고, 단발은 손날을 세워 찌르는 모습이 재빠르긴 했지만 특정 문파가 떠오르진 않았다.
'소림은 단단하지만 단발은 날래군.'
[무극지체] 덕분인지 시력이 그리 좋지 않음에도 녀석들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저 정도면 내 호위보다 약간 아래거나 비슷한 정도.
'이류에서 일류 사이라는 건가. 장난 아니군.'
나이대를 생각해 보면 상당한 성취였다. 게다가 둘 다 아직 문파의 비기는 보여 주지도 않았으니 실제론 더 강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겨루던 두 사람이 이내 허공에서 손날과 손바닥을 부딪쳤다.
파앙!
내공이 담긴 반탄력으로 인해 그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허억!"
"후우."
단발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빡빡머리 역시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안정감 있게 보였다.
이를 느낀 것인지 단발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바꿨다.
두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살짝 숙인 채 손날을 자신의 허리춤에 가져다 댄 모습.
'아!'
그 광경에 나는 단박에 상대의 무공을 알아챘다.
마치 몸을 웅크린 짐승이 뛰쳐나오는 듯한 저 자세는 발검술. 점창파의 무공 중 하나였다.
게임 내에서도 강렬함 하나로 먹고사는 점창파의 트레이드마크.
기동성을 버리고 자리를 잡았다는 건 최후의 한 방을 준비했다는 뜻이겠지.
'이걸로 승부가 난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직감했다.
빡빡머리 역시 각오를 다진 것인지 자세를 바꿨다. 함정인 걸 알아도 돌파할 생각일 거다.
단발이 저런 자세를 잡은 건 직접 오라는 도발이자, 여차하면 체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겠다는 속셈이 내재된 행동이었으니까.
그렇게 긴장된 대치가 이어지고 빡빡머리의 신영이 쏘아진 순간 단발의 모습 역시 사라졌다.
곧 정적과 함께 두 사람이 서로 교차한 자세로 멈춰 섰다.
"단단하군."
단발의 중얼거림에 빡빡머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쪽이 더 빨랐소."
동시에 기울어지듯 쓰러지는 빡빡머리. 승자는 단발머리였다.
힘겨운 기색을 감추며 고개를 든 단발머리가 선언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부로 이 방의 방장은 나 이희문이…!"
그런데 외치려던 녀석의 시선이 문득 내게 와서 멈췄다.
"넌 뭐지? 그 옷, 네가 이번에 사고를 쳤다던 제갈세가 삼공자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내게 한 걸음 다가오는 이희문.
하지만 그의 말에 반응한 건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었다.
"역시 제갈세가 삼공자가 맞았나…."
"교관 상대로 한 수를 받아 냈다던 그 응시생도 아냐?"
"근 10년 만에 백금패인지 뭔지 하는 걸 가져왔다던데?"
웅성거림이 퍼진다.
정말 소문이 빠르기도 했다. 백금패 이야기는 대체 어떻게 들은 건지. 뭐 응시생도 중에선 교관이나 교수와 인맥으로 엮인 경우도 있을 테니.
이희문도 그 소문을 들었는지 이쪽을 바라보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였다. 하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가 내게 다가와 사방에 기세를 흩뿌리며 선언했다.
"오늘부터 이 방의 방장은 나다. 괜히 가문 믿고 나대지 마라."
이희문이 자신을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불만 있으면 붙어 보자는 말과 다를 바 없는 도발이었다.
반면에 이쪽은 딱 봐도 허약해 보이는 외견에 무공 하나 배우지 못한 듯한 몸뚱이를 지닌 상태. 아마 소문이 과장되었거나, 내가 가문의 위세로 합격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확실히 지금의 내 상태로는 이길 수 없다.'
나는 냉정한 시각으로 이희문을 바라봤다.
분명 지쳐 있을 게 분명함에도 강자 특유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사실 당장에 이곳에 내가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대 따윈 없었다. 1서클을 만든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가만히 놔두면 귀찮게 굴지도 모르겠어.'
무림은 강자존의 세상이다.
강한 놈은 우대받고, 약한 놈은 멸시받는다. 이는 밑바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답 대신 녀석이 그랬듯 손날을 세웠다. 그러자 손끝에 선명히 일렁이는 푸른빛 기운. 일순 주변에 소동이 일었다.
"허억!"
"검기?"
아니다. 그냥 1서클짜리 라이트 마법을 얇게 둘렀을 뿐이다. 하지만 하수들에겐 다르게 비치겠지.
실상은 그저 마력을 무작정 뭉치면 생기는 발광 현상을 이용한 기초 마법이다.
절삭력을 극대화한 검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잡기.
그러나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 이를 간파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누가 누굴 지적하는지 모르겠군. 점창파 이희문."
내 말에 더욱 놀란 표정을 짓는 녀석. 대충 있어 보이려고 끼워 맞췄는데 아무래도 잘 먹힌 모양이다.
"…설마 이곳에 절정 수준의 고수가 있을 줄이야."
이희문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그 모습에 내심 안도하며 대화를 끝맺었다.
"난 방장 따윈 필요 없다. 알아서 해."
그리고는 흥미 없다는 듯이 뒤돌아섰다.
내가 다가가자 저마다 움찔하며 몸을 비키는 구경꾼들. 그제야 아직도 빛나고 있는 손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아, 아직 라이트 마법을 안 껐구나.'
제대로 휘두를 수도 없는데, 알아서 물러나는 모습이었다.
'나야 좋지.'
제멋대로 겁먹고 떨어져 나가 주면 나야 편했다.
이내 가장 안쪽 자리를 차지한 나는 가부좌를 틀었다. 주변의 웅성거림 따위는 무시했다.
'우선 서클의 총량부터 늘린다.'
이제 갓 만들어진 서클의 마력량은 형편없이 적었다. [절대마도]의 재능이 아니었다면 서클 형성도 불가능했을 정도로.
사실상 아직까진 불안정한 1서클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더구나 [마력절맥]도 완전히 치유된 게 아냐.'
영약으로 겨우 [마력절맥] 증상을 해소했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마력 회로를 확장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선 더 많은 마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명상에 임하며 서클 내에 마력을 쌓아 나가기 시작했다.
* * *
"기상!"
아침이 되자 생도관 내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빌어먹을."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앞까지 다가온 운명을 직감한 거다.
곧 문이 벌컥 열리고 교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구보 시간이다!"
끔찍한 선언이었다. 지원자를 선별하는 과정이 남았기에 최종 시험은 5일 후. 그때까지 매일 아침 이 망할 합숙 훈련을 해야만 했다.
'빠져야 한다.'
지금의 나는 달리기조차 제대로 못 하는 상태였다. 먼저 열외자를 묻는 교관의 말에 곧장 손을 들었다.
"뭔가?"
"빠지고 싶습니다. 부상이 있어서."
"아프다고 뺄 거면 여길 왜 왔나! 그딴 정신머리로는 강해질 수 없다!"
'그럴 거면 왜 묻는 거야.'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자리로 향했다. 아무래도 훈련을 피할 순 없는 듯했다.
'빌어먹을, 첫날부터 거품 소리를 들을 순 없는데.'
물론 이 사태에 대한 방안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도박을 좀 해야 할 뿐이었다.
"목표는 생도관 뒷산, 그곳의 정상을 찍고 이곳으로 오는 것! 돌아오는 순으로 아침 식사 순번과 태도 점수를 매기도록 하겠다!"
교관이 한쪽 뒷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최종 시험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생도관에 온 이상 훈련은 빼놓을 수 없었다.
"길을 모르면 어떻게 합니까?"
어제 대련을 벌였던 소림사의 빡빡머리, 구동이 물었다.
"1일 차에 들어온 예비생도들을 따라가라. 뒷산 길에 접어들면 너희도 정상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거다."
그 말대로 널찍한 연무장의 한쪽에는 1일 차에 들어온 다른 방 생도들이 보였다. 설명을 마친 교관이 팔을 들어 올리더니 이내 빠르게 아래로 내렸다.
"그럼, 아침 구보 시작이다!"
동시에 뒷산을 향해 예비생도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홀로 뒤처진 채 빠른 걸음으로 그들의 뒤를 쫓았다.
"뭐 하나?! 어서 달리지 않고!"
뒤에서 불호령이 떨어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정확히는 그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이게 최대 속도였으니까.
저 앞에서 몇몇 생도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소곤대는 것이 느껴졌다.
"검기를 쓰지 않았나? 그런데 저렇게 체력이 없다고?"
"기만일지도 모르지. 듣자 하니 제갈세가의 셋째가 그렇게 망나니라고 하던데."
"우리 따위는 언제든 제칠 수 있다는 건가? 빌어먹을!"
멋대로 퍼지는 소문.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런 것 따윈 신경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내 체력은 최악에 가까웠으니까.
"망할."
어느새 멀어진 대열을 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에서 최악의 결말은 이대로 꼴찌를 하는 거다.
하지만 너무 늦게 들어오면 아침 식사를 굶겠지. 이 부실한 몸에는 그 역시 치명적이다.
'어떻게든 속도를 높여야 한다.'
예전 게임 속에서 보았던 생도관 지도를 최대한 떠올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날 욕하던 교관도 이제는 포기한 듯 말이 없었다.
'벌써 고비인가.'
한참을 걸어 도착한 끝에 있는 건 뒷산의 초입. 경사가 그리 가파르지 않은 코스였지만 지금 내게 있어선 그 어떤 험지보다 막막했다.
"미치겠군."
요 며칠간 놀고만 있지 않았다. 마력량을 늘리는 와중에 재활 훈련하듯 신체 능력도 키웠다.
그 증거로 첫날에는 가벼운 외출에도 힘겨워하던 내가 이렇게 빠른 걸음으로 뒷산까지 다다를 수 있었지 않나.
중증 환자가 경증 환자가 된 셈이다. 남들은 웃겠지만, 내겐 유의미한 성장이었다. 아마 [무극지체]와 [초월성장]의 시너지 덕분이겠지.
문제는 이 정도로는 지금 상황을 타파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거지만.
'결국 도박을 할 수밖에 없나.'
나는 숨을 헐떡이며 산길을 올랐다.
단련을 위해서인 듯 여러 보폭으로 오를 수 있도록 적절하게 쌓아 둔 돌계단들. 그 사이를 걸으며 주변을 탐색하던 도중 문득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뭔가 가려져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풀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간의 헤맴 끝에 마침내 찾던 것을 발견했다.
"여기 있었군."
허공을 향해 손바닥을 뻗자, 마치 투명한 벽이 쳐진 것처럼 공간이 일렁였다. 진법이었다.
이를 확인하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역시나.'
처음 영약 속 마력을 감지하고 1서클을 만들 때도 느꼈지만, 이 세계 역시 마법적인 현상이 존재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지금 눈앞에 펼쳐진 진법이었다.
'설마 마법이 진법과 호환되는 개념이었다니.'
진법은 환상 마법과 닮아 있었다. 그 안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시야가 변하더니 다른 길이 나타났다.
수련용 길과는 달리 교관들이 다니거나 유사시에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일종의 지름길이다.
'이걸로 정상 부근까지 직선거리로 주파한다.'
체력적으로 한계였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걸어 나갔다. 폐가 마르다 못해 불타는 것 같았고, 전신이 후들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무극지체]의 재능을 믿었다. 몸을 쓰는 일에 있어선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그렇게 경보로 한참을 걸어 나가던 그때,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수련용 길 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 밑에서 굽이친 수련용 길을 따라 달려오는 하위권 생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지름길을 쓰지 않았다면 저들보다 더 뒤떨어진 곳에서 빌빌거리고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달리는 속도로 미루어 봤을 때 상위권은 이미 이곳을 지나쳤을 터.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앞서 나가긴 했다.
정상까지는 아직 꽤 남은 상태.
조금 가라앉은 호흡을 내쉬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다시금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군.'
소란이 있는 것 같았는데 [오감저하]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쯧."
하는 수없이 일정량의 마력을 운용해 시력을 보조했다.
마력으로 수정체의 곡률을 조절하고 눈 주변의 근육을 강화해 초점을 맞췄다.
그러자 안경을 쓴 듯 시야가 훨씬 선명해졌다.
"이게 되네."
본래는 세심한 컨트롤이 필요하기에 이런 식으로 마력을 운용하는 건 3서클 이후부터나 가능한 일이지만 [절대마도]의 재능은 이 모든 걸 가능케 했다.
새삼 신화급 재능의 사기성을 체감하며 나는 두 기척이 엉킨 지점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총 세 녀석이 대치하고 있었다. 한 명을 두 명이 막아선 모양새.
'어?'
그런데 그중 열세인 한 남자가 눈에 익었다. 바로 단발의 사내 이희문이었다.
즉시 마력을 귀에 집중해 보청기를 쓰듯 청력을 높였다.
"이런 짓을 하다니, 생도 자격 박탈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
이희문의 말이었다.
"글쎄. 우리가 뭘 했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두고 가면 돼. 그거 말이야."
두 사내가 나뭇가지를 든 채 가리키는 건 이희문이 쥐고 있는 대나무패.
반환점을 돌고 왔다는 증거로 교관이 한 사람당 하나씩밖에 나눠 주지 않는 증표이기도 했다.
'어딜 가도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이 있지.'
수련이라는 걸 잊고서 그저 꼼수로 남의 것을 가로채려는 인간들 말이다.
일명 대나무패 쟁탈전. 게임 내에서도 극초반에 나타나곤 하는 이벤트였다.
'저대로라면 꽤 위험해 보이는데.'
아무리 이희문이 이류에서 일류 사이의 강자라 해도 지금처럼 지친 상태에서 맨손으로 두툼한 나뭇가지를 든 두 예비생도를 제압하는 건 어려웠다.
'도와줘야 하나?'
그랬다간 도착이 한참 늦어질 게 뻔했다. 내심 갈등하고 있던 그때 이희문의 물음이 들려왔다.
"너희가 내 걸 빼앗아도 하나가 부족할 텐데?"
"걱정 마. 네가 마지막이니 말이야."
두 사내 중 한 명이 대나무패를 흔들며 말했다.
그 모습에 내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여전히 멀리 떨어진 정상이 보였다.
굳이 저기까지 가야만 할까?
'운이 좋군.'
망설일 이유가 사라졌다. 나는 자세를 낮춘 채 대치 현장을 향해 조용히 다가갔다.
7화 어디서 수작질이야 (1)
"버러지와는 더 할 말이 없겠어."
이희문이 손날을 펼치며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 속마음은 달랐다.
'낭패다.'
후발 주자들과 부딪치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올라올 때 봐둔 다른 샛길로 빠지려 했는데 이런 상황에 처하다니.
안 그래도 넓지 않은 길이라 단단히 경로를 막고 선 녀석들을 피하기도 어려웠다.
"들어와라. 먼저 온 놈부터 끝장내 줄 테니."
그러나 이희문은 싸우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의 성향상 이런 비열한 녀석들을 쳐부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말이다.
"미쳤나 보군."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냐?"
두 사내가 목검처럼 나뭇가지를 든 채 비웃더니 천천히 그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 왔다.
확실히 지금의 그는 열세였다. 수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불리했는데 심지어 이쪽은 무기조차 없었다.
'스승님, 전 굴하지 않겠습니다.'
그럼에도 이희문은 싸우기로 했다. 점창파의 일원으로서. 나아가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도 이런 무뢰배들의 악행 따위에 져서는 안 된다.
앞으로 자신이 해치워야 할 악인은 이런 녀석들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강하고 악랄한 괴물들이었으니까.
적들이 다가온다. 나뭇가지들을 휘두르며 좌우 양쪽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와라!'
곧 그의 간격이었다. 그렇게 일순 적들이 범위 안에 들어온 순간 이희문이 손날에 모든 내기를 불어넣어 출수했다.
'한 방 정도는 맞아 주마.'
뼈를 주고 살을 친다. 적의 공격을 허용하면 자신도 다치겠지만, 그럼에도 지금 노리는 한 놈만은 확실히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이희문의 손날이 우측 사내에게로 쏘아진 순간 무언가 이질적인 파공음이 왼쪽에서 들려왔다.
'와라!'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에 이희문이 각오를 다지며 왼쪽 어깨에 힘을 줬다.
그러나 그가 우측에 달려오는 사내 녀석의 나뭇가지를 부수고 그 복부에 손날을 박아 넣을 때까지도 이희문이 예상했던 충격은 없었다.
대신 의외의 비명이 들려올 뿐이었다.
"아아아악!"
얼른 자세를 바꿔 옆을 보자 그곳에 있는 건 허공에 나풀거리는 수십 개의 나뭇잎과 안면 여기저기가 베인 채 피가 철철 나고 있는 적의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당황스러웠지만 그럴 틈도 없었다.
곧장 정신을 차린 이희문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물러나는 사내에게 쇄도해 그대로 손날을 내질렀다.
예비생도들의 평균치는 이류 정도. 애초에 그들은 일류에 근접한 이희문과 일대일로 싸워서 이길 실력이 아니었다.
그것도 이상 현상에 의해 혼란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퍽!
이희문이 남은 한 명까지 제압하고는 풀숲을 노려봤다.
아직 그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방금 있었던 나뭇잎의 부유와 적의 얼굴에 남은 여러 자상은 분명 심상치 않았다.
"나오시죠."
이희문이 풀숲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미지의 상대이지만 자신을 도와줬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파삭!
곧 수풀이 흔들리며 누군가 천천히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이희문이 긴장한 기색으로 풀숲을 바라보던 순간 그가 눈동자를 크게 떴다.
수풀을 헤치고 등장한 자는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제갈천우?"
이희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 * *
애초에 나는 전투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육체적으로는 도움도 안 되고 말이지.'
태생적으로 마법사는 후방 지원이 특기인 직업. 당연히 내가 할 일 역시 이희문의 보조였다.
'역시나 합공하는군.'
둘이서 동시에 이희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희문이 공격할 방향의 기 흐름이 예상됐다.
'우측!'
그러면 자연스레 내가 타깃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좌측에서 덤벼드는 쪽.
망설임은 짧았다. 나는 곧장 기본 바람 마법을 응용해 만든 칼날 바람을 상대의 안면에 쏘아 냈다.
그와 동시에 뜯어 온 나뭇잎들을 녀석의 진행 방향으로 날려 보냈다.
과도한 마력 운용 때문에 서클의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갔지만 덕분에 상대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었다.
특히 첫 칼날 바람이 녀석의 눈두덩이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 컸다.
아무리 이류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어도 상대는 아직 경험이 적은 십 대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 명을 처리한 이희문이 마지막 남은 상대마저 쓰러뜨리고 나자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나오라고 했다.
'들켰군.'
어차피 나가야 했으니 상관없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대나무패였으니까.
곧 수풀을 나오자 놀란 이희문의 얼굴이 보였다.
대체 무슨 말로 녀석에게서 대나무패의 권리를 주장할지 고민하는 사이.
"고맙다."
이희문이 의외로 순순히 고마움을 표했다. 어제 싸울 때만 해도 꽤 건방져 보이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같은 동기끼리 도와야지."
나는 적당히 친분을 드러내며 쓰러진 이들에게 다가갔다.
"이런 자식들은 탈락시켜야 해. 안 그래?"
그러면서 한 녀석의 품 안에 있는 대나무패를 꺼냈다. 마치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렇지."
이희문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은근슬쩍 대나무패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내가 도와준 것 때문인지 녀석도 이를 따로 지적하진 않았다.
"나 때문에 괜히 늦게 된 것 같군. 이 은혜는 갚지."
이희문의 말에 내심 실소를 지었다. 이 녀석, 내가 아직 반환점도 통과하지 못했다는 걸 모르고 있다.
애초에 녀석이 보기엔 지금의 나는 검기를 다루고, 자신을 도와준 강자로 비춰질 터.
내가 고작 대나무패 때문에 그를 도와준 것이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있을 거다.
그렇다면 좀 더 이용할 구석이 있지.
"잠시만. 가기 전에 물어볼 게 있다."
"뭐지?"
"너 말고."
이희문의 말에 나는 바닥에 누워있는 둘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들한테 말이야."
짝!
뺨을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희문이 자신을 급습했던 한 사내를 깨우는 소리였다.
짝!
"으으윽!"
한 번 더 따귀를 올려붙이자 이윽고 신음하며 눈을 뜨는 녀석.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용. 지금부터 내가 묻는 것에만 대답한다."
그러면서 나뭇가지를 목에다 가져다 대자 급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굳이 이런 수고를 들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상해.'
사실 이희문을 몰아넣는 그들을 보며 내가 느낀 의문은 이거였다.
'생도관에 들어온 지 하루 만에 이런 전략을 생각해 냈다고?'
물론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이 녀석들의 대응이나 생각 수준이 의심스러웠다.
유독 이 두 명만이 비상한 머리를 지녔다고 보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엑스트라 중의 엑스트라잖아.'
이런 녀석들이 그런 전략을 짜냈을 리가 없다는 확신에 가까운 의심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첫날은 방장을 정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둘째 날은 아침부터 뒷산 구보를 비롯한 훈련 및 낯선 지리를 익혀야 했다.
더구나 둘째 날부터는 하루 동안 풀어진 경계심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같은 예비동기끼리 안면을 익히는 데도 바쁠 시간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잔머리를 굴릴 수 있으려면 보통 약은 녀석이 아니어야 한다. 분명 뒷배가 있다.
"누가 이렇게 하라고 말해 줬지?"
내 말에 녀석이 표정을 살짝 굳히며 목울대를 꿀렁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 컥!"
나는 곧장 온몸의 무게를 실어 나뭇가지를 녀석의 명치에 내리꽂았다. 이 때문에 양 손목이 시큰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기세를 잡아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 네 독단이라면 오늘 여기서 다리 한 짝 정도는 부서질 수도 있겠군. 네가 이용당한 게 아니라면 책임도 네가 져야 하니 말이지. 안 그래?"
내가 나뭇가지를 높이 들어 올리며 으름장을 놓자 녀석이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아냐! 선배님이 말씀해 주셨어!"
"그게 무슨 말이지?"
"그, 우리 1년 선배 있잖아. 그런데 아직 중급생도로 올라가지 못한 선배들… 전 하급생도 말이야!"
예상외의 답변에 순간 되물었다.
"전 하급생도가 알려 줬다고?"
내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그간 대나무패 쟁탈전 이벤트는 그저 수행 과정에서 처리해야 할 악역을 위해 배치한 건 줄 알았는데, 설마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줄은 몰랐다.
"정확히 누가 알려 줬지?"
"몰라, 그냥 이름도 알려 주지 않고 우리 생도관에 몰래 와서 이야기해 줬어. 편하게 점수도 받고 경쟁자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서."
"하."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말하는 하급생도는 작년에 승급하지 못해 잔류한 유급생들이었다. 그리고 올해까지 중급생도 자격을 따지 못하면 방출될 이들이기도 했다.
"유급생 따위가 이런 수작질을 벌였다 이거지?"
그들 딴에는 고만고만한 예비생도들을 부추겨 나중에 들어온 유망한 경쟁자들을 견제할 수 있는 묘수였을 거다.
훈련에서부터 빠르게 두각을 드러내는 인물이라면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게 뻔했으니까.
"쓰레기 같군."
옆에서 듣고 있던 이희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동감이었다. 이어 그들에게 배후 세력의 인상착의를 추궁한 후, 이희문에게 나뭇가지를 던지며 말했다.
"이 녀석들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뭐?"
"처음부터 습격을 받은 건 너였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나는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이렇게 이희문에게 적들의 처리를 맡김으로 인해 지름길로 가는 걸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진짜 이유는 나뭇가지를 휘두를 힘이 없어서지만 말이다.
'이 빌어먹을 손목 같으니.'
아직도 욱신거렸다. 어제는 남들이 보지 않는 사이에 무릎 붙여 팔굽혀펴기도 해냈는데 이 모양이라니.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나저나 유급생들이라."
설마 이런 식으로 사다리 걷어차기를 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나름 선배라는 것들이 후배 사이를 이렇게 이간질해?
'얕은 수작질을 부리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제대로 보여 줘야겠군.'
확실하게 각오를 다지며 빠른 걸음을 이어 나갔다.
우선 이 망할 아침 단련부터 끝내야 했다.
* * *
"여기까지! 이 이상 늦게 온 이들은 오후에 추가 훈련을 하도록 하겠다."
아슬아슬하게 마지막 차례에 들어온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 냈다.
'겨우 살았군.'
어떻게든 훈련 지옥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지름길이 본 수련길의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걸 고려했을 때 참혹하기 그지없는 결과였으니까.
심지어 이희문은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상위 그룹이었다.
가장 힘든 정상 코스는 밟지도 않았건만 이런 격차라니. 상상 이상으로 다른 생도와의 체력 차이가 너무 났다.
'최대한 빨리 성장해야 한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식사를 해나갔다. 그런데 문득 뒤에서 무시할 수 없는 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오셨구만."
익숙한 목소리. 일전에 볏짚 베기 시험에서 들어 본 음성이었다. 주로 내 자세가 어설프다고 지적하는 쪽에서 말이다.
나는 정수리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의식하며 말했다.
"할 말 있으면 정면에 앉아서 하지?"
"어이쿠, 실례."
곧 커다란 덩치에 굳건한 인상의 남자가 맞은편에 앉았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법한 체구의 사내를 보며 나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팽근우.'
하북팽가의 직계 혈족이자 차남이었다. 팽가 특유의 사기적인 육체 능력답게 아까 수련에서도 이 녀석은 최선두 그룹이었다. 화산파의 백청과 함께 말이다.
'그런 녀석이 왜 날?'
일단 그는 나와 같은 2일 차 예비생도기는 했다. 그래도 방이 달라서 안면을 틀 기회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오."
팽근우가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책 한 권을 꺼냈다. 제갈천우의 기억 덕분인지 자동으로 읽히는 한자어. 그건 바로 진법서였다.
"내가 오전 수련 중에 특이한 길을 발견했지 뭐요. 거기가 진법으로 된 곳 같은데 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부탁을 좀 하러 왔소."
팽근우가 날 바라보며 눈빛을 빛냈다. 왠지 귀찮아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8화 어디서 수작질이야 (2)
"진법은 직접 보지 않으면 의미 없다.
난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내며 팽근우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래도 제갈세가이지 않소? 뭔가 다른 방법 같은 건 없는 거요?"
사실 나도 진법 같은 건 하나도 모른다. 그냥 [절대마도] 재능으로 기운의 흐름을 읽고선 움직일 뿐.
"진법을 쉽게 보지 않는 편이 좋아. 그나저나 이 책은 어떻게 가져온 거지?"
팽근우가 들고 있는 진법서를 가리키며 물었다.
"예비생도 딱지를 뗄 때까지는 외부 반입이 불가능할 텐데."
"미리 챙겨 왔소. 듣자 하니 이곳에 진법이 많다 해서 말이오."
"준비성이 철저하군."
'미리 내부 정보를 알고서 들어온 건가.'
하북팽가 정도면 무림학원 내 지리를 어느 정도 파악해 두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진법서를 훑어보며 물었다.
"너라면 그런 길 따윈 몰라도 쉬울 텐데?"
"아하하. 백청이라는 자가 쉽지 않아서 그렇소."
호탕한 대답에 나는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화산파는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하니 이런 종류의 훈련이 유리하겠지.
'무엇보다 녀석은 절정급에 다다른 고수. 애초에 비교할 대상도 아니다.'
"의외인데. 하북팽가라면 더 당당히 도전할 줄 알았는데."
"좋은 길을 찾는 것도 실력이지. 안 그렇소?"
팽근우가 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나 역시 진법을 발견했으리라 믿고 있는 모양새.
의외로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팽근우는 꽤 섬뜩한 구석이 있었지.'
가만히 머릿속에서 그의 본성을 떠올리고 있을 때 팽근우가 말을 이었다.
"사실 이건 빌미일 뿐이오. 내심 천우 공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 어제 기억하시오? 나는 설마 공자가 그런 자세로 베어 낼 줄은 몰랐소."
역시나 그때 뒤에서 흥미롭다느니 중얼거린 자는 바로 이 녀석이었다.
"운이 좋았지."
"운이라니! 세상에 그런 우연은 없소. 모든 건 필연이지."
팽근우가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목소리를 깔았다.
"볏단이 그렇게 베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않았겠소?"
나는 서늘한 느낌을 받으며 그를 마주 봤다. 이쪽을 바라보는 형형한 안광. 더 이상 좋은 사람의 얼굴을 한 팽근우는 없었다.
'역시나 예감이 좋지 않더라니.'
지금 그는 나의 합격을 의심하고 있었다.
팽근우는 철저한 실력 지상주의자다. 그런 만큼 비겁한 이를 극도로 싫어했으며 악인 앞에선 누구보다 차가운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가 보기엔, 아니 누가 봐도 형편없는 검술에 볏단이 쓰러졌다. 당연히 부정행위를 의심할 수밖에.
"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소. 천우 공자도 그러길 바라오."
그 말과 함께 팽근우가 멀어졌다. 내 손에 진법서만을 남기고서.
애초에 그는 내게 배우러 올 생각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경고의 의미겠지.
어쩌면 모욕일지도 몰랐다. 부정행위로 입학할 바에는 하던 대로 진법서나 읽으라고 말이다.
다만 그가 모르는 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내가 정말로 내 능력만으로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었고, 둘은 이 진법서가 내게 매우 유용하리라는 사실이었다.
'공짜 진법서라. 운이 좋군.'
안 그래도 필요했던 진법서를 얻게 된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남은 식사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 * *
오후에는 자율 단련 시간이 주어졌다.
다들 보통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지만 때론 교관에게 자세를 봐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쪽에선 무당파의 태극검법이 시연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선 종남파의 천하삼십육검법을 단련하는 생도가 있었다.
'기이하구만.'
이렇게 다양한 문파의 무공이 한곳에서 마주치고 교육되는 건 본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독문무공을 바탕으로 지역 패권을 장악해 문파를 형성하는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이해관계와 정체성이 얽힌 문제였으니까.
원래 무림학원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교육 기관이었다.
'그 어떤 세력도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으니까.'
무공은 물론이고 후기지수 역시 꽁꽁 싸매는 게 본래 무림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중원에도 무림학원이 세워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절대적 천재이자 괴짜. 파천마의 등장이었다.
그 미친 작자는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였다.
무공을 분석하는 눈이 압도적으로 발달한 그는 자신과 대련한 상대의 무공을 간파할 수 있었고, 나아가 심법 같은 무공 비급마저 훔쳐 익히는 미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거기서 비롯됐다.
대무공 시대라 불리게 되는 대격변의 날. 파천마는 구파일방 및 명문세가들의 심법과 무공을 중원 곳곳에 모조리 뿌려 버렸다.
당연히 무림맹을 비롯한 중원의 모든 문파에서 척살령이 떨어졌고 천라지망을 펼쳐 파천마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동안 자신이 키운 제자들을 불러 모아 천라지망을 파훼해 버렸다.
파천마와 그 제자 각자가 남궁세가의 제왕검형, 하북팽가의 혼원벽력도, 화산파의 자하검법 등 오대세가 및 구파일방의 상승 무공들로 무장한 괴물들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마교가 암약하던 시대에 무공 해방을 선포하며 전 중원민의 지지를 받았다.
아무리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탄압을 시도해도 소용없었다.
그럴수록 민중들은 상승 무공을 익혀 나갔고 점점 파천마의 뜻에 동조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권력가들의 무공 독점이라는 세태에 반항하며 모두가 무공을 익힐 수 있는 무공 자유화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었다.
그렇게 오대세가와 구파일방과의 2년 만의 대치 끝에 파천마가 내세운 조건은 이랬다.
1. 각 문파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을 민간에 개방할 것.
2. 누구나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무림학원을 만들 것.
누가 봐도 이상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무림맹주는 이를 받아들였고 각 문파들의 반대 속에서도 무림학원의 건립을 강행했다.
파천마가 앞선 두 제안이 틀어질 경우 자신이 정리해 둔 비급들을 마교, 사파, 민간인 할 것 없이 모조리 풀어 버리겠다고 협박했기에 결국 구파일방 역시도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교에 의해 다른 문파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이루어 낸 성과였다.
추후 파천마 세력과 모용문파의 지원으로 인해 무림학원을 운영하는 무림맹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이를 바탕으로 무림학원은 전 중원 교육 기관으로서 민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인재를 영입하게 되면서 그 지위를 확고히 했다.
파천마가 사라지고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이다.
'괜히 이런 잡탕이 벌어진 게 아니지.'
그렇게 각 문파의 무공을 구경하다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과연 또래끼리 경쟁하다 보니 다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한적한 방 안에 홀로 앉았다.
"진법서라."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번역되는 진법서를 읽어 내려갔다. 뭔가 뜬구름 잡듯이 알 듯 말 듯한 내용이었다.
'무슨 철학서도 아니고.'
음양, 오행, 팔괘, 별자리 이십팔수, 풍수지리 등등. 복잡한 내용이 난해하게 얽혀 있었다.
그러면서도 물리학과는 달리 모호하고 때론 주관적이면서도 언어적인 난잡함이 섞인 괴서였다.
"팽근우가 버린 것도 이해가 가는군."
그나마 [절대마도]에 지능값 보정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더욱이 오전에 막 진법을 경험한 터라 더욱 이해가 쉬웠다.
'정말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군.'
진법은 일종의 감각 영역에 닿아 있었다. 마치 마법처럼.
"이렇게 하면 되나?"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선 진법에 나온 대로 돌멩이를 침대 근처에 배치했다.
기의 흐름이 뭔가 달라졌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약한데?'
나는 돌멩이 각각에 마력을 조금씩 담았다.
이 세계의 마력은 희미한 데다 오행의 기운이 마구 뒤섞인 형태였기에 다루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절대마도]의 재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곧 오행에 맞게 한쪽은 수 속성을, 다른 쪽에는 바람 속성의 마력을 담아 놓자 곧 침대 주변에 투명한 막이 쳐진 듯 주변과 격리됐다.
"이게 은신진인가?"
순간적으로 모습이나 기척을 사라지게 하는 진법이다. 마법과의 유사성 때문인지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아마 다른 진법가들이 이 광경을 보면 얼이 빠졌을 거다.
책에선 소양이 있는 이가 못해도 반년 이상을 익혀야 성공할 수 있는 기초 진법이라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군."
나는 주먹을 강하지 않게 쥐었다. 이걸로 내가 쓸 수 있는 무기가 하나 늘어난 셈이었다.
'설마했지만 진법도 [절대마도]의 재능으로 익힐 수 있을 줄이야.'
마력량이 부족한 나에게는 세계에 흐르고 있는 기를 이용해 소량의 마력으로도 발동하는 진법이 더 어울렸다.
제갈천우라는 이름값을 하게 된 거다.
'좀 더 연습해 볼까.'
진법서를 더 뒤적거리려던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나?"
"그렇다니까."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지금 내가 은신진 속에 있는 터라 보이지 않는 모양.
내심 진법의 완성도에 만족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저들의 얼굴을 본 나는 눈썹을 모았다.
'저 녀석들 우리 방이 아닌데?'
모르는 면면들. 저들은 분명 다른 방 생도였다. 그런데 그들이 왜 여길 온 걸까.
"여기 어디쯤이라고 했는데… 다른 곳도 놓을까?"
"됐어. 얼른 놓고 가자고."
녀석들이 무언가를 침대 안에다 숨기고선 그대로 문밖으로 나서려 했다.
"응?"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어서 가자고."
둘 중 한 명이 순간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움직였다.
곧 녀석들이 사라지자 나는 방 한구석에서 일어서서 그들이 무언가를 숨겼던 장소로 갔다. 그곳은 바로 소림사의 빡빡머리, 구동의 자리였다.
'뭐지?'
나는 구동의 침대 안쪽에 손을 넣어 그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이것들 봐라?"
손에 잡힌 떡 몇 조각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생도실 내에서 음식은 식중독 등의 이유로 반입 금지였다. 만약 들킨다면 벌점이었고 임시생도 신분이라면 누적 시 자칫 퇴실 조치까지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가관이네."
혀를 찼다.
누군가 이걸 구동의 침대에 놔 누명을 씌우려 한 모양이었다.
사실 여기서 그냥 넘어가도 상관없었다.
괜히 간섭했다간 귀찮은 일만 엮일 수도 있으니까. 따지고 보면 내가 당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냥 넘기기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슬슬 이쪽이 망나니라는 평판이 퍼지기 시작했지.'
내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그지없지만, 아예 없는 사실은 아니기에 따로 항변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내 착각인진 모르겠지만 동기들과 교관들의 눈길이 슬슬 싸늘해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 혼자 살아남기란 쉽지 않아.'
이미 구보에서도 미친놈들이 나왔고 거기에 유급생들에 의한 변수들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한 번밖에 클리어해 본 적이 없는 인 만큼 위기 시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료는 많을수록 좋았다.
그리고 평판을 관리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위기에 빠진 누군가를 구하는 거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무엇보다 귀찮은 일에 휘말린 탓인지 [분노조절장애]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거든.
"이 멍청한 것들을 어떻게 한다."
보자기에 감싸진 떡을 본 내 눈빛이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저 녀석들에게 제대로 한번 보여 줘야 할 듯했다.
내 영역에서 이런 수작질을 벌이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9화 어디서 수작질이야 (3)
나는 빠르게 연무장으로 사라지는 녀석들의 뒤를 밟았다.
'수련하고 있나.'
이런 일을 벌이고선 태연히 훈련이라…. 확실히 낯짝이 두꺼운 녀석들다웠다.
'예상대로군.'
그들도 바로 보고하진 않을 거다. 구동은 아까부터 교관 몇몇이 보는 앞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으니까.
무턱대고 신고하기엔 알리바이가 있는 셈이었다.
'그러면 이를 역이용하면 되겠지.'
상황 파악은 끝났으니 남은 건 움직이는 일뿐이었다.
* * *
"여기라는 거냐?"
노을 질 무렵, 교관의 목소리에 두 빡빡머리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목격했어요."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모습들에 교관은 구동의 침대가 있는 숙소 문을 열었다.
"어디에 있는데?"
"그게…."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한 녀석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교관이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쪽을 보며 물었다.
"저쪽이냐?"
"어, 예."
녀석들이 멍청하게 대답했다. 멀리서 마력으로 시력과 청력을 강화하고 있던 나는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교관이 구동의 침대로 가 물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
"없는데?"
"네?"
두 번째 실수였다. 그들은 지금 이상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멍청한 녀석들. 이미 자신들이 모종의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는 걸 드러낸 거다.
"와서 봐라."
교관의 재촉에 각자 다가와 침대를 더듬는 빡빡머리들. 놀랍게 그곳에 음식물은 없었다.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녀석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 저희가 잘못 알았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착각을 했습니다."
그때 다시 침대를 뒤지던 교관의 손에서 무언가 들렸다. 수상쩍은 무언가를 담은 듯 묵직한 윤곽의 하얀색 보자기였다.
"설마 이건가?"
"그겁니다!"
"맞습니다!"
그러자 살았다는 듯 바짝 깎은 두 머리를 끄덕이는 녀석들.
"나라도 생도의 물건을 함부로 뒤질 순 없다. 그러니 확실히 대답해. 너희는 분명 이걸 본 게 맞나?"
"그거 맞습니다!"
동시에 외치는 두 빡빡머리들.
'멍청하긴.'
나는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풀리는 흰색 보자기.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작은 크기의 돌멩이들이었다.
"어?"
순간 벙찐 표정을 짓는 두 빡빡이들. 그런 그들을 보던 교관의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아니잖아. 너희는 어째서 여기에 반입 금지 식품이 있다는 걸 확신한 거지?"
졸지에 부정을 고발하는 입장에서 추궁당하는 처지가 된 그들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두 눈알만 굴리고 있자 교관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아까 다른 첩보를 들었는데 말이지. 어떤 두 생도 녀석이 다른 생도실로 들어가 수상한 물건을 놓고 나왔다는 이야기란 말이지."
"네?"
두 사람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러는 동안 노을 진 배경 속 그들의 앞에 긴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졌다.
"이 녀석이 봤다더군. 너희가 들어간 걸 말이지."
교관이 가리킨 건 바로 나였다.
"이게… 무슨?!"
"너! 증거 있어?"
다짜고짜 증거부터 되묻다니. 전형적인 궁지에 몰려 발악하는 범인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나는 녀석들을 비웃으며 문 한쪽에 떨어져 있는 소매 조각을 가리켰다.
"나설 때 문틈에 끼어서 잘렸더군. 그게 내 증거다. 대조해 보면 되겠지?"
녀석들이 나서기 전에 바람 마법을 쏴서 소매 끝부분을 잘라 둔 게 유효했다.
"웃기지 마라!"
당황으로 빚어진 분노를 내게 표출하는 녀석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잊어선 안 되지.
"입 닥치고 소매 들어."
내게 이미 사건의 경과를 모두 들은 교관은 이제 흉악한 표정으로 녀석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껏해야 이류 수준의 무인 따위가 절정급의 교관에게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내 기세에 눌린 녀석들이 떨리는 팔을 들어 소매를 내보였다.
바닥에 잘려 나간 옷 조각은 정확히 녀석들의 소매와 일치했다. 두 용의자가 그걸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거, 거짓마… 컥!!"
"대답해라. 너희는 어떻게 문밖에서 목격한 게 전부이면서 구동의 침대를 알았고, 이 보자기의 정체를 확신했지?"
교관의 멱살잡이에 그대로 허공에 두 다리가 떠오른 상대가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무엇보다 너희는 증인이 증언하고 의심한 대로 뒤늦게 나를 찾아와 이 모든 걸 고발했다. 더욱이 너희 소매가 찢긴 흔적마저 현장에 남아 있었으니 증거 역시 뚜렷하다."
공포에 질려 이를 달달 떨며 교관을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기 전의 가축처럼 굳어 있는 그들에게 냉담한 선언이 떨어졌다.
"본 교관은 너희 둘의 행위를 반입 금지 물품 위반 및 고의적인 조작으로 판단하는바. 지금부터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것이다."
징계위원회. 무림학원 내에서 처벌을 정하는 회의였다.
본 생도조차 징계위원회에 불려가면 폐관 훈련은 기본인데 예비생도라면 더 볼 것도 없었다.
"따라와라."
교관이 차갑게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제갈천우, 너도 증인으로 오도록."
'아휴.'
나는 내심 귀찮음을 느끼며 교관의 뒤를 따랐다. 평판을 관리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
* * *
"힘들구만."
징계위원회는 신속했다. 각자 다른 방에 격리한 뒤 진맥을 짚으며 증거와 정황을 몰아붙이자 결국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순순히 죄를 실토한 것이었다.
애초에 정황이 뚜렷했으니 어차피 결과는 같았겠지만.
그들은 결국 예비생도 자격 박탈, 즉 퇴실이 정해졌다.
"허접한 것들."
나는 생도실로 향하며 징계위원회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어째서 그랬느냐는 말에 그들의 답은 단순했다.
"소림사적의 자식 놈이 저희와 같은 학원에 다닌다는 게 수치스러웠습니다."
듣자 하니 구동은 일전에 소림사를 배신한 네 명의 적을 뜻하는 소림사적 중 한 명의 친자식이라는 모양.
'가정사가 꽤 복잡한 모양이네.'
하지만 여전히 찜찜한 구석은 있었다. 하필 1일 차 예비생도 간에 유독 이런 일이 많이 벌어졌다는 점.
아무래도 누군가 예비생도끼리의 분열을 유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번 일 역시 그자의 부추김으로 빚어진 사건일지도 모를 일이고.
'경계를 늦춰선 안 되겠어.'
나는 그리 생각하며 생도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내게 쏟아지는 시선.
그중 가장 강렬한 시선으로 날 보고 있는 건 빡빡머리를 한 구동이었다.
그가 단숨에 다가오더니 곧장 포권을 취했다.
"고맙소! 천우 공자 덕에 오해를 사지 않을 수 있었소."
덤덤해 보였지만 목소리가 약간은 떨리는 듯했다.
설마 같은 사문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줄 몰라서 충격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내 행동에 감동받아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감사한 마음만큼은 충분히 전해졌다.
"고마우면 앞으로 잘 부탁한다. 구동."
내 말에 감명받은 듯 구동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러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바라보는 구동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들려온 소문에 비해 사려가 깊군."
그러자 들려온 건 이희문의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새 내 조사를 한 건가?"
"제갈세가의 혈육에 대한 소문은 넘쳐나니 말이지."
그럼 날 아주 망나니로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괜히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머쓱해지기는 싫었기에 덧붙였다.
"그건 잊어. 사실 난 소문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거든."
"그래 보인다."
"나도 끼워 주게!"
구동이 불현듯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뭔가 친분 있는 동기 사이에 있는 것이 어색한지 약간은 들뜬 모습.
어쩌면 구동은 자신의 태생 때문에 같은 사문에서도 줄곧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너, 설마 다른 사문도 널 건드리는 일은 없겠지? 상급생도에게 시비가 걸리면 곤란하다."
이희문의 지적에 구동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걱정 말게. 그 둘이 걸렸으니 앞으론 이렇게 요란한 방식으로 건드리진 않을 걸세."
결국 괴롭힘당하기는 한다는 거잖아. 나는 숙연한 감각을 느끼며 서클 내에 마력을 쌓기 위해 명상을 이어 나갔다.
그사이 녀석들은 멋대로 이야기를 해나갔다.
"넌 소림사적의 자식이라며. 어떻게 소림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냐?"
"아이는 죄가 없으니까 말이지."
"그래서 기껏 거둬 놓고 괴롭히나? 불교식 자비는 참 지독하군."
"이 역시 내 업인 거다."
"멍청이 자식."
그런 대화들이 일상처럼 스쳐 지나가는 저녁이었다.
* * *
그 후로 며칠간은 역시 똑같은 하루의 연속이었다.
나는 매번 토할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아침 구보를 해나갔고 매번 아슬아슬하게 끝 열에 도착했다.
[마력절맥]을 어느 정도 치유한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무극지체]로 인한 신체 회복이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안 그랬으면 2일 차부터는 다른 낙오 생도들처럼 매일 오후 단련에 나가서 약한 몸뚱이를 혹사당했을 거다.
지금 내 몸 상태에선 무조건 많은 운동을 한다고 좋은 게 아니었기에 이 정도 자극이 가장 적당했다.
그렇게 [극한의 의지]로 육체가 말을 듣는 마지노선까지 쥐어짜고선 회복하는 과정을 반복해 나갔다.
정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기분이었다. 육체가 회복되는 틈틈이 서클을 키우고 진법 공부 역시 이어 나갔다.
구동 사건 이후로 1일 차 녀석들이 단체로 야밤에 기합을 받는 일이 벌어지자 더 이상 괜한 짓을 하는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구동을 구해서 그런가, 나에 대한 소문이 좀 변했다.
의외로 망나니치고는 성실하다거나,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등.
물론 이는 같은 방을 쓰는 인원 사이에서 도는 말들이고 여전히 외부에서 보기엔 경계할 명문가의 망나니로 취급됐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이 더 퍼지지 않는 것만 해도 크다.'
악평 때문에 괜한 시비에 걸릴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줄인 셈.
'유급생 쪽에서도 더는 나설 생각이 없는 모양이고.'
이쪽에서 벌써 네 명을 쓰러뜨렸으니 뒤에서 부추기던 이들도 조용해질 수밖에.
최종적으로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 망할 흑막에게 확실히 보여 줬다. 우리 쪽, 아니 정확히는 내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말이다.
그렇게 무사히 5일 차가 되고, 다시 며칠이 흘러 최종생도 시험 날이 다가왔다.
'드디어 시작이군.'
오늘은 아침 구보도 훈련도 없었다. 다만 최종 시험만이 남아 있을 뿐. 전방에 돌무덤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돌산의 입구에 우리가 대열을 맞춰 섰다.
"주목!"
그러자 단호한 인상의 교관 정묵이 대표로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최종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이번 시험의 내용은 진법 및 기관 통과다. 총 1, 2차로 이루어져 있으며 먼저 도착하는 자가 높은 점수를 얻는다."
제한 시간 내에 진법을 통과해 목표 지점에 도달하면 통과. 그렇지 못하면 탈락이었다.
지금까지의 시험이 단순히 기본적인 실력을 보는 거였다면, 진법 통과는 생도의 기본적인 자질 유무를 파악하는 시험이었다.
각 생도들의 정신력은 어떤지, 혼란한 진법 속에서 자신의 기를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는지, 주변의 기를 어떻게 간파하는지 등.
육체 능력 외의 정신력과 기의 활용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선발 방식이었다.
"올해는 전체적인 수준이 높기에 진법을 더욱 강화시켜 놓은 상태다. 쉽지 않을 수도 있으니 괜히 객기부리지 말고 위험해지면 나눠 준 피리를 불도록."
'위험해지면이라.'
저 앞으로 소형 대나무 피리를 쥐고선 결계 너머로 사라지는 1일 차 예비생도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음 순번은 2일 차 생도들이로군. 먼저 도전할 사람은 앞으로 나와라."
정묵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름 끼치는 비명이 들려왔다.
"끄아아아악!!"
그 심상치 않은 징후에 다른 생도들이 긴장해 굳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번 평가는 무림학원에 들어온 이래로 유일하게 자신 있는 시험이었으니까.
10화 최종 시험 (1)
"얼마나 통과하려나?"
우희령의 말에 결계 너머를 바라보던 정묵의 눈빛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글쎄요."
적어도 예비생도 수준에선 쉽지 않을 터였다. 관련 교관들이 며칠 밤을 새워 이번 진법에 공을 들였으니까.
"이번 기수는 하나같이 우수하죠. 그렇다 해도 합격자가 많진 않을 겁니다."
"그런가. 그럼 넌 누가 가장 쓸 만하다고 생각해?"
우희령의 말에 정묵이 침묵했다.
사실 예상가는 후보는 꽤 있었다. 화산파의 백청이나 하북팽가의 팽근우, 어느 문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두각을 드러낸 녀석까지.
다만 그런 객관적인 평가를 제외하고서 자신에게 유독 시선이 가는 녀석을 꼽으라면 이상하게 엉뚱한 얼굴이 떠올랐다.
'제갈천우.'
앞선 시험에서 그 미약한 검기로 말도 안 되는 베기를 보여 준 사내.
제갈천우가 백금패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파악하고 난 뒤 그는 꽤 놀랐었다. 그 까다로운 영감이 누군가를 인정한 경우는 드물었으니까.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의 행보는 특이했다.
예비생도 주제에 징계위원회를 열게 만들지 않나 그러면서도 아침 구보에서는 언제나 꼴찌로 들어오는 기행을 선보이곤 했다.
'실력을 숨기는 건지….'
"아 그래서 누구냐고."
생각 도중 옆에서 재촉하는 우희령의 모습에 그가 슬며시 한숨을 내쉬고는 시험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냥 지켜보죠. 시험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요."
정묵의 시선이 지긋하게 결계 너머의 풍경을 응시했다.
"주임 교관님!"
그런데 그때 다른 교관이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일인가?"
"첫 번째 시험인 대형진법을 통과한 자가 나타났습니다!"
"뭐?"
예상외의 사태에 멍해진 정묵의 옆에서 서 있던 우희령이 싱글거리며 정묵을 놀려 댔다.
"이제 막 시작이라며?"
"...."
괜히 멋쩍은 민망함을 느낀 정묵이 애꿎은 보고자를 노려봤다.
"누구냐? 백청? 팽근우?"
하지만 상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게… 제갈천우입니다!"
"...!"
제갈천우.
그 단어에 정묵은 마치 정곡에 찔린 것 같았다.
곁에서 듣고 있던 우희령이 더더욱 짙어진 미소로 정묵을 쿡쿡 찔러 대었다.
"후후, 이거~ 시험 내용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진법 시험을 주관한 것은 정묵이었다. 시험이란 모름지기 변별력을 가져야 하는 법.
그런데 그런 시험이 이렇게 쉽게 돌파되다니.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말이다.
'그래. 꼴에 그래도 제갈세가라는 것이지.'
마치 진법을 가지고 노는 듯했다는 보고에 정묵은 이를 갈았다.
"…아니, 두 번째는 좀 다를 거다."
"그거 지금 나한테 한 걸까~?"
"…아닙니다."
꼭 그래야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