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9

167. 덫

차우진이 대답했다.

"작곡가 아닙니다."

형사는 당황했다.

"예? 제가 듣기로는 선생님이 루나페어리의 신곡 작곡가라고…."

루나페어리의 멤버 김세린은 이 마을 쌀집 딸이다.

그래서 그 형사는 이 마을에 차우진이 와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우진이 설명했다.

"제가 하는 일을 마을 분들이 대충 이해하신 겁니다. 프로듀싱과 작곡은 차이가 있으니까요."

"프로듀싱은 많이 들어보기는 했는데 어떤 일인지는 잘…."

"그것 보십시오. 형사님도 헷갈리시잖습니까? 어쨌든 제가 루나페어리의 소속사 LPP 엔터에 있는 건 맞습니다."

차우진이 명함을 한 장 주었다. 명함에는 LPP 엔터 이사 차우진이라고 박혀 있었다.

형사가 의심을 풀었다.

"아. 그 회사 이사님이셨군요."

"예. 루나페어리의 신곡 제작을 담당했습니다."

형사가 차우진의 옆에 있는 고성능 금속탐지기를 힐끗 보았다.

"그런데 엔터 회사 이사님이 왜…."

차우진이 명함을 한 장 더 주었다.

"딥어스테크에서도 일합니다."

"예?"

"그 회사 지분을 좀 가지고 있거든요. 출근은 가끔 합니다만."

"아. 그러시군요."

형사가 금속탐지기와 상자를 가리켰다.

"그럼 이건…."

"회사에서 금속탐지기를 가져와서 어제 테스트한 지역을 조사하다가 발견했습니다."

"그걸 이사님이 직접 하셨다고요?"

"시간이 많은 데다가, 아는 동네니까요."

"그러시군요."

형사는 더 따져 묻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차우진이 아니라 금속 상자다.

그가 상자의 내용물을 힐끗 보았다.

"이건 그냥 절차상 물어보는 겁니다만, 선생님께서는 혹시 처음부터 이 물건을 찾으신 겁니까?"

"몰래요?"

"그렇죠. 몰래 찾으러…. 아."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형사가 말했다.

"여기엔 목격자가 많군요."

"그렇죠. 제가 이 상자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찾던 거라면, 지금 파내서는 안 됐죠."

"지금이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지금은 위치만 확인해두고, 한밤중에 몰래 와서 꺼냈겠지요."

차우진이 딥어스테크의 금속탐지기를 보여주었다.

탐지 소리는 헤드폰으로 듣기 때문에 남들은 들을 수 없다. 디스플레이 화면도 멀리서 보면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다.

"지금은 못 찾았다고 했으면 다들 그런 줄 알았을 겁니다."

"하긴. 그렇군요."

형사는 납득했다.

그는 어제의 탐지기 테스트와 오늘의 금속탐지기 작업이 한노성을 유인하는 덫이라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단서만으로 그것까지 의심하는 건 무리였다.

"선생님을 의심한 건 아니고 절차상 물어본 겁니다. 이렇게 해둬야 선생님한테 혐의가 안 가거든요."

"이해합니다."

논 주인은 흥분했다.

"김 형사. 그놈들이 우리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이려고 했다니까?"

"어르신. 죽이려던 건 아닌 듯합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흥분했다.

"이 골프채 좀 봐. 난 이게 난생처음 잡아본 골프채인데, 이걸로 공이 아니라 사람이랑 싸울 뻔했어."

"예. 저희가 범인들을 잡아서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다 튀었는데 잡기는 무슨. 조금만 더 일찍 오지."

"근처 도로 CCTV를 뒤져서라도 잡겠습니다."

"이 근처는 이리저리 갈라지는 시골길이 많아서 그런 거로는 못 잡을걸?"

"아…."

차우진이 형사에게 말했다.

"한노성입니다."

"예?"

"아까 그놈들 중에 오동케미컬의 실소유주 한노성이 있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SL 제약에서 업계 동향을 파악하면서 조사한 업체 중에 오동케미컬이 있거든요."

형사가 눈을 껌뻑였다.

"SL 제약이요? 거긴 저도 들어본 회사인데…."

차우진이 옆을 가리켰다.

"여기 이 분이 SL 제약 홍보팀 직원입니다."

성혜리가 얼른 명함을 주며 대답했다.

"맞아요. 제가 사진으로 그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한노성이 확실해요."

마을 사람도 편을 들었다.

"맞아. 내가 봤어. 작곡가 선생이 그놈한테 한노성이라고 하니까 자기를 어떻게 아느냐면서 화를 내더라."

"작곡가 아니라니까요."

형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누군지 알았으니까, 잡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

논에서 파낸 금속 상자는 경찰이 가져갔다.

그 상자는 어차피 차우진의 목적이 아니다. 내용물을 따로 챙길 생각도 없다.

마을 사람들은 차우진에게 신세를 졌다면서 읍내 식당에서 한턱내겠다고 했다.

차우진은 거절하지 않았다. 목격자가 많은 곳에서 시간도 좀 보내야 하고 정보를 더 얻어야 한다.

그들은 식당에 모였다. 두부와 파전과 술국, 막걸리와 소주가 나왔다.

쌀집 주인 김기환이 물었다.

"그런데 상자에서 나온 그것들은 뭘까요?"

차우진이 대답했다.

"귀금속은 아마 장물일 겁니다. 알약은 마약이나 각성제일 테고요. 총은 뭐, 아실 테고."

"봉투도 있던데 그건…."

"서류 봉투니까 서류가 있겠죠. 경찰이 확인할 겁니다."

"그게 왜 우리 마을 논에 있는 걸까요"

그 논 주인이 손을 흔들었다.

"난 아니야. 내가 묻었을 리 없잖아."

차우진이 설명했다.

"누군가 빼돌렸다가 상황이 급해지니까 거기 묻어둔 거겠죠."

논 주인이 입맛을 다셨다.

"저렇게 쳐들어와서 빼앗으려던 걸 보면, 비싼 거겠지?"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출처가 문제일 겁니다."

"출처요?"

"그 장물을 누가 훔쳐서 누구를 통해 처분하려 했는지 같은 것 말이죠. 그걸 추적하면 한노성이 곤란해질 겁니다."

성혜리가 옆에서 물었다.

"장물아비 짓을 해서요?"

"그래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걸 훔치라고 청부한 게 한노성일 수도 있고요."

"아. 그렇구나."

"제일 중요한 건 그 서류인데, 그건 경찰이 처리하겠죠."

성혜리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혹시 무슨 서류인지 보셨어요?"

"슬쩍 봤습니다."

"뭔데요?"

"여기서 말할 건 아니라서."

"우리 회사에 가면 알려주실 거예요?"

"궁금하다면."

성혜리가 송미소를 슬쩍 본 후에 방긋 웃었다.

"궁금해요."

차우진이 마을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정보를 좀 더 수집했다.

그런 후에 그들은 서울로 복귀했다.

운전은 송미소가 했다. 차우진과 성혜리는 술을 마셔서 운전대를 잡을 수 없었다. 차우진은 조금 마셨는데 성혜리가 꽤 마셨다.

성혜리가 막걸리 때문에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오늘 진짜 스릴이 넘치지 않았어요? 정말 분석팀 일은 이래서 좋다니까요."

송미소가 운전하면서 물었다.

"우리 조사팀도 만만치 않아요."

"히히. 난 훨씬 더 많은 일이 경험했어요."

성혜리는 차우진을 만난 후로 바다에도 빠져보고 공장이 폭파될 뻔하기도 했다.

그녀도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겨본 적은 있지만, 안전장치를 갖춘 상태로 즐기는 것과 실전은 자극이 완전히 달랐다.

성혜리가 조금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 이사님을 만난 후로 신세계를 사는 거 같아요."

세 사람은 서울에서 헤어졌다.

성혜리의 차는 신당읍에 놔두고 왔기 때문에 서울에서는 택시를 이용했다.

차우진이 송미소에게 말했다.

"이 차는 회사 차니까, 미소 씨가 집에 몰고 갔다가 출근할 때 가져와요."

"차 이사님부터 댁으로 모셔다드릴게요."

"난 택시 타면 되니까 그냥 가요."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근무시간 끝난 지가 언젠데. 가요. 얼른."

차우진이 그렇게 말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러면 송미소가 그를 도로 태울 방법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송미소가 출발했다. 차우진이 멀어지는 회사 차를 보며 말했다.

"미소 씨가 계속 따라다니면 내 일은 언제 끝내라고."

차우진이 장소를 옮긴 후에 스마트폰 공기계를 하나 꺼냈다. 그걸로는 전화는 걸 수 없다. 대신에 와이파이가 연결되면 어플은 쓸 수 있다.

차우진은 한노성의 부하들과 싸울 때 그중 한 놈의 주머니에 위치추적기를 넣어놓았다. 그건 주변의 스마트폰을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분실방지용 추적기로, 2만 원이면 살 수 있었다.

화면에 그 추적기의 현재 위치가 떴다.

"움직이지 않은 걸 보면, 아지트에 도착했나 보다?"

***

한노성은 측근 셋만 데리고 비밀 시설로 사용하는 작은 폐공장에 있었다. 한적한 곳에 있는 이 공장의 외벽은 조립식 건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내부에 있던 기계는 이미 다 팔아먹었다. 대신에 그 자리에 간단히 생활할 수 있는 가전제품이나 침대 등을 가져다 놓았다. 꽤 튼튼한 금고도 있었다.

한노성은 이 공장도 오동케미컬처럼 사채를 이용해 빼앗았다. 그런 후에 기계는 팔아먹고 공장만 은신처로 사용했다.

지금 이곳에는 한노성과 박민수, 그리고 부하 두 명이 있었다.

승합차로 이동한 놈 중에는 급하게 끌어모은 어중이떠중이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다.

한노성이 직계 부하들에게 욕을 했다.

"이 멍청한 새끼들아! 어떻게 골프선수 하나한테 당해!"

그가 데려온 두 놈은 아까 상자를 빼앗으려다가 차우진에게 얻어맞았다.

한 놈이 변명했다.

"다른 놈들도 맞았…."

한노성이 따귀를 때렸다.

"그 새끼들은 골프채 던진 거에 맞은 거고! 너는 이 새끼야! 어떻게 쇠파이프가 골프채한테 져!"

"죄, 죄송합니다."

박민수가 걱정했다.

"회장님. 일이 복잡해졌습니다."

"돈으로 덮으면 돼. 복잡하면 돈이 더 들지만 다 덮을 수 있어."

"제가 지금 수사를 받는 중인데…."

박민수는 불구속 상태로 수사를 받는 중이다. 현장에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바로 체포될 수도 있다.

한노성이 짜증을 냈다.

"그 새끼가 나만 알아봤잖아! 그 새끼가 네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아!"

"아. 그건 그렇습니다.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한노성이 이를 갈았다.

"그 상자가 넘어가면 안 됐는데…. 젠장. 일단 내 돈 먹은 놈들을 통해서 상황을 파악…."

갑자기 밖에서 소리가 났다.

"뭐야?"

부하 하나가 CCTV 화면을 확인했다.

"어? 문 앞에 누가 있습니다."

"경찰이냐?"

"아닙니다. 이놈은…."

박민수가 모니터를 보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독수파? 회장님. 그놈들이 여길 알아냈습니다!"

"몇 놈이냐!"

"다섯입니다! 모두 독수파 직계입니다!"

"그 새끼들이 다섯이나 남아있었어?"

"남은 놈들을 다 데려왔나 봅니다!"

"씨발…."

한노성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안으로 끌어들여."

"예?"

***

독수파 두목이 부하 넷을 데리고 창고 문을 확인했다. 철문은 쉽게 부술 수 없었다.

"그 새끼들이 여기에 있단 말이지."

"형님. 문이 튼튼해 보입니다. 어쩌죠?"

"차로 들이받을까?"

갑자기 공장 철문에서 철컥 소리가 나더니 문이 천천히 열렸다. 사채업자 박민수가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어이. 들어와서 이야기하지."

"흐흐흐. 이야기? 그거 좋지."

독수파 두목이 부하들을 데리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내부를 재빨리 확인했다. 한노성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두목이 실실 웃었다.

"한 사장. 아니지. 이제 회장이지? 여기 있었구나."

"여긴 어떻게 알았지?"

"애들 풀어서 너 찾느라고 돈 많이 썼다. 그러다 하나 얻어걸렸지. 우리 애 하나가 아까 소문을 들었더라고?"

"여기는 소문이 날 수 없을 텐데?"

"네 부하 중에 누가 입이 가벼웠겠지. 지금 여기도 떠들 놈이 셋이나 있잖아?"

"끄응."

독수파 두목이 회칼을 꺼냈다.

"한 회장. 여기서 칼 맞으면 아무도 모르겠지? 참 좋다. 그치?"

독수파 두목은 부하 넷을 데려왔다. 그들도 회칼을 꺼냈다.

한노성의 부하인 박민수와 부하 둘도 칼을 꺼냈다. 그들의 칼은 특수부대가 쓰는 전투용 단검이었다.

조립식 건물 내부의 넓이는 50평쯤 됐다. 아홉 명이 있어도 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독수파 두목이 칼날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흐흐흐. 한노성 회장. 아니, 어이. 한 씨. 지난번에 보낸 선물은 잘 받았다. 많이 아프더라고. 나도 그 빚을 갚으려고 왔지."

"네가 칼을 맞았단 말은 들었다. 그래서 나한테 칼침을 놓겠다고 온 거냐?"

"흐흐. 빚에는 이자가 붙는다며? 그게 한 씨 방식이잖아?"

"이자?"

두목의 눈이 허옇게 번뜩거렸다.

"어차피 이젠 누구 하나는 죽어야 하잖아? 내가 죽을 수 없으니까, 한 씨 목숨을 이자로 받아갈게."

한노성이 혀를 찼다.

"쯧쯧. 이자가 너무 큰데?"

"크크크. 원래 사채가 그런 거지. 한 회장이 더 잘 알면서 왜 그래? 한 회장 사업체 물려받으면 나도 그렇게 독하게 장사하려고."

"넌 이거 못 한다. 등신 새끼야."

"어이. 한 씨. 나도 이깟 사채 정도는 잘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안심하고 죽어라."

"나는 죽지 않아."

한노성이 갑자기 권총을 꺼냈다. 6연발 리볼버였다.

"난 총이 있으니까."

독수파 두목은 화들짝 놀랐다.

"어? 어? 초, 총? 씨, 씨발. 총은 반칙이지!"

"이건 반칙이 아니라 보험이다."

"한 회장. 그거 쏘면 뒷감당이 되겠어?"

"여기는 한적한 시골 창고다. 게다가 이곳은 실내니까, 총소리가 들려도 타이어가 터졌나 하겠지."

두목이 말을 더듬었다.

"시, 신고할 수도 있잖아! 지나가던 사람이 신고할 수도 있다고!"

"나를 친 새끼는 죽여야 뒤탈이 없으니까, 그 정도는 내가 감수해야지."

"씨발! 네가 먼저 쳤잖아."

박민수가 한노성의 옆에서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대가리 새끼야! 네가 나를 친 게 먼저다!"

"그건 나 아니라고 했다! 아니라고 했는데도 나를 쳤잖아!"

"무슨 개소리야! 내가 언제 너를 쳤다고…."

차우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야. 내가 쳤어."

사람들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주류 장식장 옆에서 차우진이 말했다.

"내가 쳤다고."

168. 도시 전설

사채업자 한노성과 독수파가 충돌하려던 폐창고에 차우진이 나타났다.

독수파 두목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 누구냐!"

"너. 어깨는 괜찮냐?"

"어깨? 어? 씨, 씨발!"

독수파 두목이 소리를 질렀다.

"너구나! 내 어깨 찌른 새끼! 역시 저 사채새끼들이 보낸 거였어!"

사채업자 박민수가 차우진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가 나를 쳤다! 독수파가 보낸 저 새끼가 나를 쳤다고!"

독수파 두목도 소리를 질렀다.

"나도 저 새끼한테 칼을 맞았다! 너네가 보낸… 게 아니라고?"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말을 던져봤는데 그걸 속더라? 너네들 혹시 평소에 사기 잘 당하냐?"

"이, 이 새끼가!"

한노성이 6연발 권총의 총구를 차우진 쪽으로 돌렸다.

"너. 누가 보냈는지 말해라."

"야. 너 괜찮겠냐?"

"그런 걱정은 내가 아니라 네가…."

"독수파가 너한테 가는데?"

독수파 두목이 한노성 쪽으로 움직이다가 움찔했다.

한노성이 즉시 총구를 독수파 두목 쪽으로 돌렸다.

"너 이 새끼?"

두목이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니, 나는 도와주려고…."

이미 독수파와 한노성은 원수지간이다.

그들은 차우진이 개입하기 전에도 사이가 나빴다. 독수파는 한노성의 사채업체를 탐냈다.

차우진이 개입한 후에는 두 조직이 크게 충돌했다. 그때 양쪽 다 부하들이 많이 다쳤다.

한노성은 회사도 가지고 있고 돈도 많다. 돈을 뿌리면 부하를 새로 만드는 건 쉽다.

반면에 독수파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제는 다른 조직의 뒤치기까지 걱정해야 했다.

그래서 독수파는 한노성을 죽이고 사채업체를 빼앗으려고 이곳에 왔다.

지금 그들은 둘 중 하나는 죽어야 싸움이 끝나는 원수가 됐다.

게다가 지금 여기에는 차우진까지 있다. 사채업자와 독수파, 차우진 셋 다 서로가 적이다.

한노성이 머리를 굴렸다.

'저 이상한 새끼가 독수파 두목에게 칼을 놨어. 그러니까 칼을 맞은 독수파를 잘 꼬드겨서 저 새끼부터 제끼자. 그 후에 독수파를 총으로 처리….'

차우진이 한노성을 힐끗 본 후에 말했다.

"나도 너희 모두한테 유감이 있는 건 아니다. 난 저 사채업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뿐이야."

독수파 두목이 그 말을 듣자마자 얼른 말했다.

"나, 나랑 손잡자! 내가 칼 맞은 건 이해할 수 있어! 한 회장을 속이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

"말이 통하네."

한노성이 화를 냈다.

"이 멍청한 새끼야! 너한테 칼 꽂은 새끼의 말을 믿는 거냐!"

"어차피 한 회장 당신도 나 잡아먹으려고 하잖아! 여기저기 돈 뿌려서 나 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건 오해다!"

"나도 경찰에 연줄이 있다! 다 들었다고!"

차우진이 말했다.

"그러니까 깔끔하게 하자. 라스트맨 스탠딩. 마지막까지 서 있는 놈이 이기는 거다."

한노성이 권총을 앞으로 쭉 뻗었다.

"난 총이 있다!"

독수파 두목은 화들짝 놀랐다.

"초, 총은 반칙이라고!"

차우진이 말했다.

"그거 6연발이잖아. 명중률도 낮아. 여섯 발로 여섯 명을 다 맞힐 수 있겠어?"

"맞힐 수 있다!"

"그러면 감당은 되고?"

"뭐?"

"여기가 좀 외진 곳이라도, 한두 발도 아니고 여섯 발이나 쏘면 신고하는 사람이 없겠냐?"

한노성이 차우진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이 새끼야! 너는 죽일 수 있어!"

독수파 두목이 환성을 질렀다.

"그래! 그거지! 저 새끼를 쏘라고!"

차우진이 총구에 시선을 둔 채로 독수파 두목에게 말한다.

"어이. 대머리독수리."

"이 새끼가!"

"내가 저 총에 맞아서 죽으면 말이야. 한노성이 총기 살인을 목격한 너희들을 살려둘까? 그런 일이 없을 때도 잡아먹으려던 사이인데 말이야.

독수파 두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본 나를….'

살려둘 리 없다. 두목도 그 정도는 안다.

차우진이 한노성에게 말했다.

"쏴보던가."

한노성이 화를 벌컥 내며 방아쇠를 당겼다.

"죽어라!"

차우진은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총구의 방향이 한참 빗나가 있어서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총소리가 실내에서 요란하게 났지만, 총알은 한참 떨어진 곳에 박혔다.

차우진이 비웃었다.

"한 손으로 쏘면 맞겠냐?"

한노성이 두 손으로 권총을 잡았다. 차우진이 또 말했다.

"이제 다섯 발 남았네? 총소리가 또 나면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겠냐?"

"이, 이 새끼…."

"그런데 말이야. 저놈이 너한테 가는데?"

한노성이 독수파 두목을 휙 돌아보았다. 거리가 조금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그가 급히 총구를 두목 쪽으로 돌리며 외쳤다.

"당장 손…."

갑자기 독수파 두목이 들고 있던 칼을 던졌다.

두목은 지금 여기서 제일 위험한 건 권총을 들고 있는 한노성이라고 판단했다.

'저 새끼를 총으로 죽이는 걸 내가 목격하면 나를 살려둘 리가 없어. 나까지 죽일 거야.'

그래서 두목은 한노성을 치려고 했다. 한노성이 차우진을 쏘는 때가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갑자기 총구가 독수파 두목을 향했다.

두목은 차우진에게 항의할 틈은 없었다. 그는 즉시 들고 있던 회칼을 던졌다.

칼이 날아가 한노성의 몸에 푹 꽂혔다.

"끄아악!"

비명이 터졌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로 한노성이 제압된 건 아니다.

그는 원래는 총을 더 쏠 생각은 없었다. 총소리가 반복되면 누군가 그 소리를 듣고 신고할 수 있다.

그런데 칼을 맞았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한노성이 방아쇠를 당겼다.

급하게 쏜 총탄이 독수파 두목의 어깨를 스쳤다. 지난번에 차우진에게 칼을 맞은 쪽이었다.

두목이 즉시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었다. 총이 무서워서 한노성을 정면으로 덮치진 못하고 옆으로 뛰었다.

"우와악! 쳐!"

두목들이 서로 칼을 던지고 총을 쐈다. 그건 전투 시작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팽팽하게 대치하던 게 무너졌다.

독수파 조직원들이 사채업자들을 덮쳤다.

"이야아악!"

"죽어!"

이 전투는 이미 총까지 사용됐다. 그들은 상대방을 죽일 마음을 먹고 칼을 휘둘렀다.

"컥!"

"으아악!"

차우진이 말했다.

"흥정은 말리고 싸움은 붙여야지?"

한노성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두목을 노린 총탄이 빗나갔다.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두목을 맞히는 건 어려웠다.

빗나간 총탄이 독수파 조직원의 몸에 꽂혔다.

"으아악!"

그나마 독수파가 한 명 더 많았는데, 그 유리함이 총알 한 발에 사라졌다.

전투가 더 치열해졌다. 칼에 맞는 놈이 늘었다.

"아아악!"

한노성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도망치던 독수파 두목이 결국 총에 맞았다.

"커억!"

두목이 배를 손으로 눌렀다.

"씨, 씨발. 피했는데…."

한노성이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총탄이 두목의 가슴을 관통했다.

"컥!"

두목이 결국 고꾸라졌다.

양쪽 조직원들도 서로 찌르고 베다가 치명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서 있는 건 한노성뿐이었다. 다른 놈들은 죽거나 정신을 잃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서 있는 라스트맨은 너냐?"

한노성이 차우진을 권총으로 겨누었다.

"너 누구야! 누가 보냈어!"

"네가 생각하는 거기."

"거기 어디!"

"너무 많아서 짐작이 안 가나? 그럼 스페인이라고 하면 알겠지?"

한노성은 지난번에 박민수가 습격당했을 때도 스페인이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런데 그는 그게 가짜라는 걸 그때도 눈치챘다.

"한국 놈이 스페인이라니! 나는 속지 않아! 어디서 나라 이름만 주워들었겠지!"

"안 믿네."

"나는 민수 저 새끼처럼 등신이 아니니까!"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그럼 쿠에르노 인더스트리는 알겠지?"

"어? 뭐? 뭐?"

한노성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알잖아. 쿠에르노에서 보냈다."

"왜, 왜…."

"네가 회사를 팔 때 속임수를 쓰니까. 회장님은 속는 걸 무척 싫어하신다."

"아, 아니야. 오해다. 난 시키는 대로 했어."

"어디까지?"

"뭐?"

상대의 목소리에 의심하는 기색이 살짝 느껴졌다. 차우진이 재빨리 질문을 바꾸었다.

"신당읍의 논을 산 이유가 따로 있던데?"

"그것도 오해다! 배신자가 거기 뭘 묻어놔서, 그걸 조용히 회수하려던 것뿐이야!"

"그런데 그건 경찰 손에 넘어갔지. 넌 그걸 숨겼다."

"그건 우리 거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어! 배신자도 처리했다고!"

"시체가 발견되면 일을 다 망치겠지."

"아니야! 시체는 확실히 묻었다!"

"어디에?"

"회사 뒷마당에! 거기는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못 파! 그러니까 절대로 안 들켜!"

"그래? 흐음…. 그럼 이걸 어쩐다…."

차우진이 고민하는 척했다.

한노성이 얼른 제안했다.

"본사에 잘 좀 말해 주면 내가 따로 챙겨줄게. 나 일 잘하고 있다. 성수당도 내가 기술자를 매수해놨어."

차우진이 들어본 이름이 나왔다. 신당읍 사람들은 그 마을 출신인 사람이 서울에 있는 바이오 회사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 회사 이름이 성수당바이오였다.

"성수당에서 뭘 빼내려는 거지?"

한노성이 멈칫했다. 차우진은 조금 전에도 상대가 의심하려는 걸 보고 논 이야기로 압박해 넘어갔다.

그런데 한노성이 다시 의심했다.

"잠깐. 킬러가 그걸 왜 궁금해하지?"

일단 의심을 하니 계속 의심이 들었다.

"본사에서 알고 있는 일인데, 왜 나한테 그걸 묻지?"

"개인적인 호기심?"

한노성이 차우진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너 이 새끼! 쿠에르노에서 보낸 게 아니구나!"

차우진이 박수를 천천히 쳤다.

"놀라워. 그걸 이제 알다니."

"너 누구냐!"

"그게 중요한가?"

"대답해! 안 하면 죽여버린다!"

"해 보던가."

한노성이 두 손으로 권총을 쥐고 차우진을 정확히 조준했다.

'이 거리면 빗나가지 않아!'

그는 그렇게 확신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죽어!

차우진은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이 느리게 보였다.

한노성의 이번 조준이 꽤 정확했다. 그대로 서 있으면 총탄에 맞는다.

차우진이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옆으로 몸을 젖혔다.

총탄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그의 뒤쪽 철근 기둥에 명중했다. 총탄이 쇠를 때린 후에 옆으로 튕겨 나갔다.

"어?"

한노성은 당황했다. 제대로 조준하고 정확히 쐈는데 빗나갔다.

"빗나간 게 아니라…. 피했어? 어떻게?"

차우진이 한노성을 향해 걸어갔다.

"보이더라."

"말도 안 돼!"

한노성이 방아쇠를 다시 당겼다. 공이가 빈 탄피를 때리는 소리만 났다.

"헉!"

"몇 발 쐈는지 세지도 않았냐? 적을 눈앞에 두고 재장전하다가 죽을 놈이네."

한노성은 공포에 질렸다.

"사, 살려줘."

"성수당바이오 직원은 왜 매수한 거지?"

"나, 나도 잘 몰라. 쿠에르노 쪽에서 시켜서…."

"알아야 할 텐데?"

한노성이 다급히 말했다.

"저, 정보를 빼내라고 했어! 정보!"

"무슨 정보?"

"어…. 야, 약 만드는 기술?"

"정말 모르는구나."

쿠에르노는 제약회사가 아니다. 성수당바이오도 마찬가지다. 있지도 않은 제약 기술을 빼내려 할 리가 없다.

"사, 살려줘."

"이거 염치가 없는 놈이네."

"뭐?"

"너 나한테 총 쐈잖아. 두 발이나."

"그, 그건…."

"네 부하는 죽여서 회사 뒷마당에 묻었다며?"

"그건 그놈이 배신해서…."

"배신한 놈이라서 죽였다? 그럼 나한테 총을 쏜 놈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한노성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사, 살려…."

바짓단 아래에 숨겨둔 칼이 잡혔다. 한노성이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차우진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죽엇!"

차우진이 그 손을 잡아 거꾸로 비틀며 한노성의 가슴에 박았다.

"컥!"

"오동케미컬의 예전 사장은 죽었더라?"

그 사장이 죽으면서 회사는 사채를 갚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래서 회사가 한노성의 손에 넘어갔다.

"네가 죽였잖아."

한노성은 쿠에르노 인더스트리가 차우진을 보낸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거기서 그 사건까지 관심을 가질 리 없다.

갑자기 최근에 떠돌던 소문 하나가 생각났다.

혼자서 조직 여러 개를 박살 낸 킬러에 관한 소문이었다. 그중에는 서해안 사건으로 무너진 상칠파도 있었다.

그리고 소문 중에는, 그 킬러가 총알을 피한다는 것도 있었다.

"끄윽…. 너, 너, 설마 빌런 킬러…."

169. 도시 전설 II

차우진이 물었다.

"누구냐? 그건."

빌런 킬러에 관한 소문은 경찰에서 시작돼 범죄조직 쪽으로 퍼졌다.

경찰 쪽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사건을 담당한 몇몇 형사 사이에서 도시 전설 수준으로 이야기가 도는 정도였다.

범죄조직은 달랐다. 당한 놈들이 살인마나 범죄조직이기 때문에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소문의 내용에는 과장된 것도 있고 전혀 상관없는 사건까지 같이 묶인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 소문 중에는 빌런 킬러가 총알을 피한다는 것도 있었다.

"끄으윽. 빌런 킬러…."

"난 그런 놈 모른다."

차우진이 칼을 밀었다. 한노성의 가슴에 박힌 칼날이 더 깊게 들어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차우진이 칼 손잡이를 손끝으로 툭 밀었다.

한노성은 가슴에 자신의 칼을 박고 뒤로 넘어갔다.

차우진이 폐공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조폭과 사채업자들이 서로 싸우다 전멸했다. 전부 죽은 건 아니지만, 양쪽 두목은 확실히 죽었다.

차우진이 이 폐창고 내부에서 건질 게 있는지 확인했다.

금고가 하나 보였다. 꽤 튼튼한 금고였다. 하지만 그걸 한가하게 뜯어볼 여유는 없다.

"저기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경찰이 알아내겠지."

방금 한노성이 권총을 여섯 발이나 발사했다.

여기는 조금 외진 곳이고, 발사된 위치는 실내다.

그래도 여섯 발이나 쏘면, 누군가 듣고 신고할 확률이 높다.

차우진이 서로 싸우다 칼을 맞은 놈들을 보며 말했다.

"살 놈은 살겠지."

***

20분 후에 순찰차가 그곳에 도착했다.

김 경사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총소리면 밀렵꾼일 테고, 그게 아니면 공장에 있던 뭐가 터진 거겠지."

이 순경이 옆에서 대답했다.

"진짜 총소리인지는 신고자도 긴가민가하다고 했습니다. 소리가 여러 번 들려서 신고한 거랍니다."

경사가 폐공장 건물을 보았다. 조립식 창고 형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음? 전등이 켜져 있네? 여기 문 닫았다고 안 했어?"

"창고로 쓰는 거겠죠."

폐공장 앞에는 승합차와 승용차가 한 대씩 서 있었다.

"누가 있나 보다."

경사가 폐공장의 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었다.

"경찰입니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차는 있는데 사람은 없나?"

이 순경이 문을 밀어보았다.

"김 경사님. 이거 안 잠겨있는데요?"

"야. 영장도 없는데 함부로 들어가면 안…. 어?"

조금 열린 문으로 폐창고 내부가 보였다.

김 경사가 다급히 외쳤다.

"지, 지원, 지원 요청해!"

"네, 네!"

"빨리!"

***

현장에 형사들이 출동했다. 과학수사대도 도착했다.

폐공장에 쓰러져 있던 놈들은 일단 병원에 보낸 후에 신원을 확인했다. 그런 후에 먼저 깨어난 놈들부터 조사했다.

***

형사가 경찰서에서 화면에 간단한 자료를 띄워놓고 사건을 설명했다.

"사채업자와 폭력조직이 충돌한 사건입니다. 이들은 최근에도 다른 지역에서 충돌해 다수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사건이 꽤 컸다. 그래서 서장이 직접 보고를 받았다.

서장이 질문했다.

"저번에는 다친 놈은 많았어도 죽은 놈은 없다던데, 이번에는 사망자가 있다며?"

"예. 사채업자 박민수의 보스인 한노성과 독수파 두목이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독수파 두목은 한노성이 쏜 총에 맞았습니다. 특히 가슴에 맞은 총탄이 결정적인 사망원인입니다."

"그 총, 한노성이 쏜 거 확실해?"

"정신을 차린 놈들에게 교차 확인했습니다. 한노성이 쏘는 걸 봤다고 합니다."

"그럼 한노성은 누가 죽였어?"

"한노성은 본인의 칼을 가슴에 맞았습니다. 총알이 떨어지니까 적을 향해 칼을 휘두르다가 거꾸로 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른 놈들 상태는?

"사채업자 쪽 셋, 조폭 쪽 넷이 칼에 찔리고 베여 중상을 입었습니다만, 모두 살아는 있습니다."

"그놈들이 다친 건 서로 싸우다 그렇게 된 거고?"

"예. 현장에서 발견된 칼에 묻어있는 지문이나 혈흔, 소지하고 있던 칼집 등으로 볼 때, 서로 싸우다가 전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중 한 명은 한노성의 총에 맞았습니다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사채업자와 조폭이 싸우다가 전멸한 거면, 그것도 큰일이지만 수사 방향은 간단한데…."

서장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현장에 한 놈 더 있었다며?"

"예. 침입자가 한 놈 있었답니다."

"그놈은 거기서 뭘 했어?"

"그게…. 싸움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는데…."

"구경만 했다고?"

"시비를 걸었답니다."

서장은 당황했다.

"어? 뭐?"

"혼자서 양쪽에 시비를 걸었다고…."

"그건 도대체 뭐하는 새끼야?"

"아직 조사 중입니다."

"하긴. 그걸 알면 벌써 잡았겠지."

서장이 화면을 보며 욕을 했다.

"저 새끼들은 자기네 동네에서 치고받고 싸우지, 왜 우리 관할에서 지랄이야? 하여간 빨리 수사해서 마무리 지어. 오래 끌면 우리한테 불똥 튄다."

***

TV에서 사채업자와 조폭이 싸운 사건이 나왔다.

차유리가 소파에 누워 뉴스를 보며 말했다.

"저기가 우리 관할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우리 쪽이었으면 또 야근할 뻔했네."

차우진이 물었다.

"확실히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동네가 완전히 다른데."

차유리의 스마트폰에 톡이 들어왔다. 그녀가 소파에 누운 채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어머, 씨발."

"왜?"

"저기서 싸우다 죽은 놈들이 사채업자랑 조폭이야. 그러니까 우리 지역 사채업자와 양아치들의 동향도 확인하라네?"

그녀가 소파에 똑바로 앉아서 불평했다.

"그럼 원래 하던 수사는 다 어쩌고? 그것도 하고 이것도 하고? 내가 뭐 몸뚱이가 서너 개야?"

"고생해라."

"내가 더러워서 경찰을 확 때려치울… 수는 없고, 확 승진할까?"

"누나가 승진하기엔 이놈 저놈 너무 많이 패고 다녔지 않았나 싶은데."

"그치? 승진은 글렀지?"

"글렀지."

차유리가 스마트폰을 소파 위에 던져놓았다.

"그럼 나 오늘은 일 안 할 거야. 내일 할 거야. 건드리지 마라."

"야식 만들어줄까?"

"어쩐 일로?"

"내일부터 고생해야 하니까?"

"간 딱 맞는 면 요리로 가져와라. 역시 야식은 면이지."

"다국적으로 준비해주지."

차유리가 스마트폰을 다시 집었다.

"수연이도 불러야겠다."

"걔는 왜?"

"조금 전에 톡 왔는데, 야식 만들면 부르라더라."

"무당 스킬이라도 생겼나? 왜 먹을 거로 예지 능력이 생기는데?"

***

이튿날 차우진이 SL 제약에 출근했다.

홍보팀에 있던 성혜리가 분석팀으로 달려왔다.

"차 이사님. 뉴스 보셨어요?"

"어떤 뉴스 말입니까?"

"조폭하고 사채업자하고 싸우다가 서로 죽인 사건이요."

"아. 그 뉴스."

그 사건 현장에 있었다.

성혜리가 흥분해서 말했다.

"그놈이 그놈 맞죠? 저번에 신당읍에 쳐들어왔던 그놈. 그러니까 오동캐피털의 오너인 사채업자 한노성 말이에요."

"맞습니다."

"그럼 같이 있다가 칼에 찔린 놈들도 그때 왔던 놈들이에요?"

"한노성 쪽 네 명은 그때 그놈들이 맞겠죠."

성혜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저번엔 훨씬 더 많았는데요? 왜 그것밖에 없어요?"

"한노성은 아지트에 있다가 당했습니다. 그 아지트가 비밀 거점이라면, 거기에는 측근만 데려갔을 겁니다. 신당읍에는 어중이떠중이 다 모아온 거였고요."

"그렇구나. 그러니까 부하가 조금밖에 없을 때를 노리고 조폭이 습격한 거구나."

"그렇게 된 겁니다."

성혜리가 물었다.

"그런데 차 이사님은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세요? 그렇게 구체적인 이야기는 뉴스에서 못 봤는데요."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럴 때 팔아먹기 좋은 혈육이 있다.

"누나가 형사라서."

"아. 맞다. 그래서 아시는구나."

그녀가 홍보팀에서 들고 온 봉투에서 도넛 두 개를 꺼냈다. 그걸 분석팀 탕비실의 접시에 담아 차우진의 앞에 놓았다. 그러고 나서 커피와 함께 차우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저는요. 그놈들이 그 마을에 또 쳐들어오는 건 아닌지 걱정했어요. 죽어버렸다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복잡한 마음이에요."

"꼴좋다고 해요."

"그래도 돼요?"

"돼요."

분석팀 사무실 문이 열렸다.

법무팀 대리 윤병수가 들어오다가 두 사람이 가까이 앉아 있는 걸 발견하고 얼른 사과했다.

"앗! 좋은 분위기인데 제가 눈치 없게…."

차우진이 말했다.

"그런 거 아니니까 들어와요."

"아. 그런 거 아니시구나."

윤병수가 안으로 들어오자 성혜리가 작게 말했다.

"눈치 없다는 걸 알 눈치는 있나 보네."

"예?"

"아니에요."

차우진이 말했다.

"갑자기 연락했는데 와줘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분석팀에 뽑아주시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은 자리가 없어서…."

"사무실에 자리 남아 보이는…. 아,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일로…."

차우진이 말했다.

"오동케미컬은 사장이 사망하면서 회사가 사채업자에게 넘어갔습니다. 그 사망 사건에 대해 알아볼 수 있습니까?"

"그건 법무팀의 업무 범위를…."

"그렇군요. 그럼 그만 돌아가셔도…."

"하지만 제가 개인적인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부탁드리죠."

성혜리가 질문했다.

"차 이사님. 그건 왜요?"

"혹시 한노성이 오동케미컬 사장을 죽이고 회사를 빼앗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서요."

"예? 갑자기 왜 그런 의심을…."

"신당읍 논에서 캔 상자에 봉투가 하나 있었지요? 그게 뭔지 궁금하다면서요."

"네. 회사에 오면 말씀해 주신다고…. 어머! 혹시 거기에…."

"누군가 예전 사장을 죽였다고 의심할만한 자료들이 있더군요. 한노성은 장물도 문제지만, 그 봉투도 없애고 싶었을 겁니다."

"아. 조폭하고 저렇게 싸우고 총도 쏘던 놈이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경찰이 한노성 주변을 조사하면 과거에는 몰랐던 단서가 더 나올 겁니다. 그러면 진실이 밝혀질 수도 있죠."

"그렇지만 그건 남의 회사 일인데, 진실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죽은 사장의 가족에게 그 자료를 넘기고, 홍보팀에서 기사 나가게 힘 좀 써주면, 그 가족이 회사를 되찾을지도 모릅니다."

성혜리의 두 손을 맞잡고 눈이 반짝였다.

"어머! 차 이사님. 따뜻하시다."

"안 따뜻합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거니까."

"이유가 뭔데요?"

차우진이 법무팀 윤병수 대리를 쓱 보았다. 윤병수가 즉시 말했다.

"저는 마음만은 분석팀 팀원입니다. 공장 테러 사건 때의 일도 비밀 확실히 지키고 있습니다."

차우진이 설명했다.

"쿠에르노 인더스트리가 오동케미컬과 어떤 거래를 하려고 했는지 그 가족을 통해서 알아보고 싶어서요."

성혜리가 말했다.

"아. 그렇구나. 그래도 따뜻하시다. 결국 그 회사를 가족에게 돌려주시게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한노성의 부하가 계속 사장으로 있는 것도 보기 싫으니까."

윤병수 대리는 업무 지시만 받고 돌아갔다.

그 후에 분석팀 팀원들이 모였다.

차우진이 물었다.

"성수당바이오에 대해 예전에 알아보라고 한 거, 어떻게 됐습니까?"

"업계에 도는 소문과 수집 가능한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정리된 게 있으면 봅시다."

팀원이 그 파일을 화면에 띄운 후에 성수당바이오에 대해 설명했다.

"식물 성장 물질 쪽으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는 회사입니다. 여러 가지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차우진이 제품 목록을 보았다. 화분에 쓰는 식물용 영양제 같은 상품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액체비료 첨가제도 있었다.

"저 첨가제의 성분은 뭡니까?"

"성분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시중에 판매되는 다른 업체의 제품들과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효과는요?"

"그것도 비슷합니다."

"신제품 연구 개발은 얼마나 합니까?"

"계속 개발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매년 새로운 제품이 나옵니다."

"회사 상태는 어떻습니까?"

"비슷한 첨가제를 만들거나 수입해서 파는 회사가 여럿 있습니다. 경쟁이 심해서 회사 상황에 여유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성혜리가 물었다.

"차 이사님. 성수당바이오는 왜 보시는 거예요?"

"신당읍에 갔을 때 성혜리 대리도 들었잖습니까? 거기 어르신들이 그 마을 출신이 그 회사에 다닌다고 자랑한 거."

"아. 서울에서 일한다는 대추나무집 아들!"

"쿠에르노 인더스트리, 오동케미컬. 그 마을 출신이 그들과 비슷한 업계에 있는 게 우연인가 싶어서요."

성혜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연 아닐까요? 한노성은 논에서 파낸 그 상자 때문에 그 마을에 관심을 가졌던 거잖아요."

"그렇지요. 우연이겠지요."

차우진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쿠에르노의 액체비료 첨가제가 나오는 건 몇 년 후이지만, 지금부터 뭔가 시작됐을 수 있겠지.'

그걸 확인하려면 직접 움직여야 한다.

170. 유해준

차우진이 신당읍 쌀집 주인 김기환에게 물었다.

"대추나무집 아들이 서울에서 좋은 회사에 다닌다면서요?"

"그렇죠. 걔가 옛날부터 공부를 참 잘했습니다."

차우진은 그것만 캐묻지 않고 두루두루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다 루나페어리 김세린의 이야기도 나왔다.

김기환이 딸 자랑을 했다.

"우리 세린이가 어렸을 때부터 이 일대에서 제일 예뻤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었죠. 무슨 날만 되면 초콜릿을 뭘 그리 받아오는지. 하하하."

***

김세린의 동생 김세나도 치킨을 먹으면서 대추나무집 아들 이야기를 했다.

"그 아저씨는 공부 엄청 잘했다는데, 다른 오빠는 공부 못해요."

"다른 오빠?"

"그 아저씨 동생이요. 그 오빠가 언니 좋아했는데. 하긴, 이 동네에는 언니 안 좋아하는 오빠가 없었죠."

"형제인데 아저씨와 오빠로 나누는 기준은 뭐냐?"

"얼굴?"

"성격은 어때?"

"그 오빠요?"

"아니. 그 아저씨라는 사람."

"전 모르죠. 그 아저씨는 언니가 알 걸요?"

***

차우진이 서울로 돌아와 LPP 엔터를 방문했다.

신인 걸그룹 루나페어리는 신곡 연습 도중에 잠깐 쉬고 있었다.

"앗! 차 이사님!"

"안녕하세요!"

"그거 혹시 먹을 건가요?"

차우진이 물었다.

"너희들 요즘 식단관리 중 아니냐?"

"그, 그렇죠."

차우진이 종이 상자를 내밀었다.

"그럼 이건 몰래 먹어."

"앗! 그래도 돼요?"

"안 들켜야지?"

"네!"

차우진이 약간의 닭가슴살과 다량의 채소로 만든 저칼로리 도시락을 넘겨주었다.

"빵이 아니다. 풀이다."

"근데 맛있어!"

"풀이 왜 맛있지?"

"소스가 특별한가?"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차우진이 대답했다.

"내가 만든 거야."

"네?"

"왜?"

"요리할 줄 아세요?"

"그게 그렇게 놀란 눈으로 물어볼 일이냐?"

멸망한 세계에서는 채소나 나물 등을 많이 먹었다. 풀도 먹었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먹을 걸 가릴 여유가 없었다. 먹어서 탈이 안 나고 소화를 시킬 수 있다면 들판의 잡초라도 뜯어 먹었다.

멸망한 세계의 도인선은 사람이 먹기 어려운 식물을 가공해서 소독용 알코올과 술을 만들었다. 그 작업을 보조하는 스킬도 있었다.

채소나 나물 같은 식물에서 맛을 끌어내는 스킬은 전투나 전투보조가 아니라 생존 스킬로 분류됐다.

차우진도 풀 요리를 잘했다. 물론 아무리 풀에서 맛을 끌어내도 고기보다 맛있진 않았다.

루나페어리 멤버들이 말했다.

"와. 맛있는데 파는 곳이 없어."

"또 만들어달라고 하면 실례겠죠?"

차우진이 대답했다.

"어. 실례야."

"앗! 그냥 해본 소리예요."

차우진은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대추나무집 아들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대추나무집 아들도 서울에 있다며? 무슨 바이오 회사라던데."

김세린이 물었다.

"해준이 아저씨요?"

"어. 친해?"

"아뇨. 소식은 듣고 있어요."

"사람은 어때?"

"공부는 잘해요."

***

차우진이 SL 제약 분석팀과 다시 만났다.

성혜리가 보고했다.

"대추나무집 아들의 이름은 유해준. 한국대 졸업. 현재 성수당바이오의 연구팀장으로 재직 중이에요."

"나이가 서른인데 벌써 팀장이군요."

"차 이사님은 이사…. 아, 아니에요."

성혜리가 계속 보고했다.

"중소기업이라 팀이 작아요. 그리고 굉장히 유능해요. 분야만 비슷했으면 우리 회사로 스카우트하고 싶을 만큼요. 그럼 중소기업에서 서른에 팀장을 달 수도 있죠."

"스카우트하지 않는 이유는요?"

"약학이나 음료가 아니라 식물 성장 전문가를 우리 회사 팀장급으로 데려오는 건 부담스러우니까요."

SL 제약은 비타민 음료 같은 건 만들지만, 비료를 만들지는 않는다.

"식물 성장 전문가라…."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의 액체비료 첨가제는 식량 생산량을 증가시킨다.

'신당읍 출신이 그런 첨가제를 연구한다? 이게 우연일 확률은 낮아.'

그럴 수도 있지만, 일단은 아니라고 보고 접근해야 한다.

차우진이 질문했다.

"다른 특이점은요?"

"SNS에 올라온 사진을 분석해봤는데…."

"그런데?"

성혜리가 유해준의 SNS에서 찾아낸 사진을 한 장 띄웠다.

"이 사진이 촬영된 래스토랑은 음식값이 직장인에게는 부담되는 곳이에요. 이런 사진이 여럿 있었어요."

"밥에 진심인가? 난 그건 이해가 가는데."

"네? 아니, 그게 아니라요. 여기는 혼자 가는 데가 아니에요."

"아. 이런 데 잘 안 가봐서."

"앗! 그래요?"

성혜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내일 같이 가실래요?"

"응?"

"유해준이 이 레스토랑에 내일 다시 방문한다는 걸 알아냈어요. 제가 예약 확인하는 척하고 물었더니 내일이라고 알려주더라고요."

"역시 성혜리 대리는 유능하군요."

성혜리는 차우진이 왜 유해준을 조사하는지 모른다. 최근의 사건과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는 것만 안다.

상관없다.

'이걸 핑계로 차 이사님이랑 둘이서 그 레스토랑에 가야지. 내일 와인도 마시자고 할까?'

***

이튿날 성혜리와 차우진이 그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그들이 자리에 앉았다. 성혜리가 물었다.

"유해준이 어디 있는지 찾아볼까요?"

"이미 찾았습니다. 성 대리 뒤쪽 창가 자리. 여자와 있습니다."

성혜리가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며 그쪽을 슬쩍 확인했다.

"여자가 미인인데요?"

"왜 비싼 레스토랑에 왔는지는 알겠군요. 데이트인가?"

"이상해요."

"뭐가요?"

성혜리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외모 차이가 너무 나잖아요. 남자가 재벌집 아들도 아닌데 여자만 너무 미인이에요."

"서로 좋으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조사해 보니까 유해준은 재미있는 남자는 아니래요. 매일 연구만 해요. 그런데 저런 미녀가 옆에 있다?"

"이상한가요?"

"네. 여자가 남자한테 뭔가 노리는 게 있어 보여요."

"그런가?"

"그게 아니면 저런 예쁜 여자가 왜 배 나온 저런 남자를…."

그들이 있는 곳에 정예지가 성큼 다가왔다.

"어머어. 우진 오빠가 여기 왜 있어?"

"응? 예지 씨가 여기 어쩐 일이지?"

"내가 먼저 물어봤거든? 그리고 이분은 누구셔?"

성혜리는 그녀를 보고 당황했다.

"정예지 씨?"

차우진이 정예지에게 손짓했다.

"쉿. 시선 끌지 마라."

"왜? 뭐? 또 스캔들 이야기냐? 내가 아주 그냥 오늘 확…."

"일하러 온 거야."

"아. 그래?"

"미행 중이다."

정예지가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았다.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지."

성혜리는 당황했다.

"정예지 씨가 왜 여기…."

"우진 오빠랑 친해요."

성혜리는 바다낚시에 차우진이 정예지를 데려오려고 했던 게 생각났다.

"그, 그러신 거 같아요. 그런데 여긴 왜…."

"윤성준 감독님이 우리 영화가 뜬 기념으로 출연한 배우 몇 명한테 밥 사고 있어요. 저쪽 룸에서요. 거기 가다가."

성혜리가 차우진을 째려보았다.

"우진 오빠가 여자분이랑 밥 먹으러 온 걸 발견했네? 그것도 이런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 해명해 보시지?"

차우진이 말했다.

"일하러 온 거라니까."

"누구를 미행하는데?"

"혜리 씨 뒤쪽 창가에 남녀 보이지?"

정혜리가 눈동자만 움직여 그쪽을 확인했다.

"아. 저 두 사람?"

"혜리 씨는 저렇게 예쁜 여자가 배 나온 남자를 만나는 이유가 수상하다고 의심하던 중이야."

"그게 왜? 그럴 수도 있지."

"그런가?"

"당연하지. 배는 운동해서 빼면 되잖아. 내 트레이너가 아주 독한데 우진 오빠도 같이 운동할래?"

"내가 남에게 운동을 배워야 하나?"

"아. 하긴. 오빠가 가르쳐야 하는 쪽이지. 어머. 잠깐. 그럼 그 배는 운동으로는 못…. 에이. 괜찮아. 좀 나올 수도 있지. 그래도 예전보다는 들어갔잖아."

성혜리는 당황했다.

'둘이 친해 보여.'

배가 나와도 괜찮다는 말도 마음에 걸렸다.

'나도 그렇게 말할걸.'

정예지가 성혜리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누구…."

차우진이 대답했다.

"회사 직원."

"아하. 딥어스테크?"

"아니. SL 제약."

"응? 거기도 다녀?"

"어. 가끔."

정예지가 따지듯이 말했다.

"아니, 오빠는 알바를 몇 개나 하는 거야? 그럴 거면 그냥 내 매니저 하라니까? 내가 월급 많이 주라고 할게."

"매니저 안 한다고."

성혜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차 이사님을 임원이 아니라 알바라고 알고 있어? 심지어 임원 겸직인데?'

그녀가 마음을 조금 놓았다.

'둘이 그냥 조금 친한 정도인가 보다. 사귀는 건 아니네.'

성혜리가 밝아진 얼굴로 설명했다.

"우진 씨가 조사하는 일이 있어요. 저희가 그 일 때문에 남들의 시선을 좀 피해야 해서…."

그녀의 말은 방해되니까 가라는 뜻이었다.

정예지가 성혜리를 쭉 훑어보았다.

'얼굴이나 몸매는 내가 확실히 이겼는데….'

그래도 둘만 남겨두는 건 찜찜했다. 그래서 차우진에게 제안했다.

"이미 시선은 다 끌었으니까 룸으로 가는 건 어때? 어차피 우진 오빠가 다 아는 사람들이고, 감독님도 좋아하실걸?"

차우진이 동의했다.

"시선을 더 끌면 곤란하니까 그게 낫겠다. 저기는 나중에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체크해야겠어."

***

윤성준 감독이 활짝 웃었다.

"차우진 씨! 이야아. 오랜만이야!"

"통화는 가끔 하는데요? 시사회 때도 봤고요."

이 자리에는 배우 서준영도 있었다.

그는 원래는 '운명의 풍차'에 출연하는 배우가 아니었다.

그 영화 촬영 도중에 작은 오토바이 사고가 있었다. 그때 차우진이 정예지 앞에서 오토바이를 미끄러뜨려 충돌을 피했다. 그 장면 때문에 새로운 배역이 갑자기 생겼다.

차우진은 그 배역을 거절했다. 그래서 윤성준 감독은 평소에 잘 아는 배우인 서준영에게 급히 땜빵을 부탁했다.

서준영이 웃었다.

"이번에 차우진 씨 덕을 많이 봤습니다. '서준영이 저런 연기도 한다고?' 라는 말을 진짜 많이 들었거든요. 하하하."

그의 출연 분량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 속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다. 덕분에 서준영에게 액션 영화 대본이 들어오고 있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건 준영 씨가 잘한 겁니다."

"액션은 우진 씨한태 배웠잖아요. 하하."

서준영이 윤성준 감독에게 물었다.

"근데 감독님. 왜 오늘 우진 씨는 안 부르셨어요? 우리 영화 안 엎어진 건 우진 씨 덕분인데."

"우진 씨는 술 먹자고 불러도 안 나와. 그래서 이번에도 안 나올 줄 알고 안 불렀지."

차우진이 말했다.

"요즘 바빠서요."

정예지가 옆자리에서 투덜댔다.

"하나도 안 바쁠 텐데. 노는 거 다 아는데."

윤성준 감독이 말했다.

"오늘 먹는 건 내가 다 살 테니까 다들 실컷 먹자고."

서준영이 제안했다.

"감독님. 우진 씨도 있는데 술 더 좋은 거 가져오라고 하죠?"

"더 좋은 소주 가져오라고 해."

술이 몇 잔 들어간 후에 윤성준이 말했다.

"우진 씨. 그냥 배우 해. 배우. 액션 배우. 내가 팍팍 밀어줄게."

"연기력이 없어서 배우는 안 한다니까요."

"진짜 몇 번을 나랑 영화 하자고 해도 한 번을 안 넘어가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거 누가 퍼트린 헛소문이야?"

성혜리는 옆에 앉아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야?'

오늘 이 자리에는 오윤서는 없지만 다른 배우가 몇 명 있었다. 그들이 차우진과 함께 영화 이야기를 나누었다.

'운명의 풍차 제작에 차 이사님이 깊게 개입했다고?'

절벽 사고 이야기는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때 죽을 뻔한 정예지가 이 자리에 있다. 그래서 다들 알아서 말을 조심했다.

그렇지만 차우진이 아니었으면 영화가 엎어졌다는 말은 몇 번이나 나왔다.

게다가 서준영은 차우진에게 액션을 배웠다고 했다.

성혜리는 '운명의 풍차'를 극장에서 봤다.

서준영의 오토바이 액션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안다. 특히 정예지의 앞에서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하다가 피하는 모습과, 그 직후에 그녀를 챙겨줄 때는 탄성까지 질렀다.

그때 극장에서 그녀처럼 소리를 낸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 액션이랑 그 뒷모습이 다 차 이사님이었어?'

그녀는 차우진이 대중음악 제작에도 전문가 수준의 실력자라고 생각했다.

'근데 영화 쪽도 잘해?'

CF 제작에 영상과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다음 CF 제작 때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차 이사님을 끌어들여서, 둘이서 작업을….'

차우진이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밖으로 나갔다. 어딜 가는지는 알았다.

'유해준의 상황을 확인하러 가는 거겠지.'

차우진이 나간 후에 서준영이 성혜리에게 물었다.

"그런데 같이 온 분은…. 혹시 우진 씨하고 사…."

정예지가 끼어들었다.

"어머어. 준영 오빠. 그런 거 절대로 아니니까 술이나 마시지 그래요?"

171. 유해준 II

배우 서준영은 정예지의 목소리에 싸늘한 기운이 섞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얼른 말했다.

"어. 그래.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배우 정예지가 설명했다.

"저분은 우진 오빠 알바 하는 회사의 직원이래요. 일 때문에 왔대요. 그러니까 조사할 게 있어서 온 것뿐이지, 다른 뜻은 없어요."

"응? 우진 씨는 전기기술자잖아. 이런 레스토랑에서 무슨 조사를…."

"있어요. 그런 게."

SL 제약 성혜리가 그런 정예지를 보며 계산을 마쳤다.

'그러니까 정예지는 차 이사님을 제대로 모른단 말이지?'

성혜리가 밝아진 얼굴로 설명했다.

"이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CF 제작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보러 왔어요. 제가 홍보팀에 있거든요."

"어? 홍보팀이요? 무슨 회사입니까?"

성혜리가 사람들에게 SL 제약 홍보팀 명함을 쭉 돌렸다.

"성혜리 대리예요."

서준영이 명함을 보고 반응했다.

"오! SL! 비타민 음료!"

"약을 팔아요. 물론 영양제나 비타민 음료도 팔지만요."

"저도 SL 제약에서 나온 영양제 먹어봤습니다. CF에 액션 배우가 필요하면 불러주세요. 하하하."

"원래 액션 배우는 아니시지 않나요?"

"이번에 우진 씨 덕분에 액션도 잘한다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하."

성혜리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그 이야기 좀 더 해주시겠어요?"

***

차우진은 화장실에 갈 때 일부러 성수당바이오 유해준 팀장의 자리 근처를 지나갔다.

여기는 도서관이 아니라 레스토랑이다. 사람들은 모두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런 곳에서는 바로 옆을 지나가도 말소리를 엿듣기 어렵다.

지금처럼 조금 떨어진 곳을 지나가면 말소리가 더 안 들린다.

차우진은 예외다. 감각에 전투 센스가 적용되면 벽 너머의 소음을 듣고 적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

같은 방법으로 이 정도 거리의 대화는 대충 엿들을 수 있다.

차우진이 화장실로 가면서 그들의 주변을 지나갔다. 대화가 조금 들렸다.

화장실에서 물만 틀어놓고 잠시 기다렸다가 돌아올 때도 일부러 그 경로를 지나갔다. 소리가 조금 더 잘 들렸다.

갈 때와 올 때 들은 이야기를 모아봐도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그저 흔한 이야기였다.

'대화 내용에는 정보라고 할 게 없지만.'

문제는 내용이 아니다.

'저 여자. 연기하고 있네.'

유해준이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진심처럼 보였다. 시선이 여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고 미소도 자주 지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에 활짝 웃기도 했다.

여자 쪽은 달랐다.

그녀는 유해준을 보고는 있는데, 말을 하는 도중에 시선이 다른 쪽을 향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냥 산만한 성격일 수도 있지만.'

그녀의 말투에서 연기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연기를 꽤 잘했다.

하지만 정예지에 비하면 수준 차이가 났다.

'연기를 배운 적이 있나? 이러면 나인세븐 엔터가 생각나는데?'

나인세븐 엔터는 연예계에서 활동하려고 만들어진 회사가 아니다. 그 회사는 연예 기획사 간판만 걸어놓고 사람을 접대하는 일을 주로 했다.

차우진은 일단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지금 이 방에는 영화감독과 배우들이 있다. 나인세븐 엔터와 달리 이쪽은 진짜 배우들이다.

'여기서 저 여자에 대해 물어볼 수는 없겠네.'

그렇다고 중간에 여길 떠나는 건 자연스럽지 않았다.

차우진은 식사를 겸한 모임에 한 시간쯤 참가했다.

그곳을 나온 후에 성혜리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차 이사님. 유해준을 미행할까요?"

"굳이?"

"네? 이렇게 그냥 밥 먹는 거 보고 끝인가요?"

"어차피 여기서 확인할 건 다 했습니다."

"어머. 그래요? 그럼 우리 2차로…."

정예지가 다가왔다.

"우진 오빠. 더 일해야 해?"

"어. 더 일해야 해."

성혜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싸. 내가 정예지를 이겼다.'

정예지가 따지듯이 물었다.

"누구랑? 이 분이랑?"

"아니."

성혜리는 당황했다.

"네?"

"내가 개인적으로 할 일이 좀 있어서. 혜리 씨는 다음에 회사에서 봅시다."

정예지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믿고 있었다고."

"뭔 소리냐?"

"바위처럼 단단해서 꿈쩍도 안 한다는 걸 믿었다고. 바보야."

"왜 갑자기 욕이냐?"

"야이. 씨."

***

조연 배우 김상훈은 나인세븐 엔터 출신이다.

그는 배우로도 활동하지만, 한때는 나인세븐에서 제일 잘나가는 선수였다. 여자 VIP를 상대하는 데는 김상훈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나인세븐은 망했다.

김성훈이 혼자 길을 걸어가며 말했다.

"약을 사야…."

차우진이 옆에서 나타나 물었다.

"너 요즘도 약을 하냐?"

김상훈은 화들짝 놀랐다.

"으악! 깜짝이야! 누구야!"

"나다."

"헉! 혀, 형님?"

"약이 끊기 어렵지?"

"그, 그거 아닙니다!"

김상훈이 팔을 보여줬다. 상처가 있었다.

백희선이 만든 레드 크리스털은 먹는 약이라 주삿바늘 자국이 남지 않는다. 이건 진짜 상처였다.

"이것 때문에 약국에 가는 겁니다! 흉 지면 안 되니까, 흉터 안 남는 약 사러 갑니다."

"침 바르면 낫겠네."

"네? 이걸 어떻게 침으로…."

"왜 다쳤는데?"

"배역 하나 맡았는데, 몸으로 구르다가 실수로 다쳤습니다."

"그래도 너를 써주는 곳이 있구나?"

김상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희선 사건 때 기사에 제 이름이 나오진 않았으니까요. 어휴. 저는 아직도 백희선한테 죽는 꿈을 꿉니다."

"이번에 받은 건 좋은 배역이냐?"

"아니요. 출연 분량은 얼마 안 되고 몸은 고생하는 배역입니다. 그래도 얼굴을 알리려면 계속 출연해야죠."

"계속 고생해라."

김상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고생을 반드시 하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제 착각이지요?"

차우진이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너 이 여자 아냐?"

"아니, 왜 말을 돌리시…. 어?"

김상훈의 눈이 조금 커졌다. 차우진이 물었다.

"아는구나?"

"나인세븐 엔터에서 가끔 봤습니다. 남녀 혼성으로 접대 들어갈 때가 있었거든요."

"누구냐?"

"나인세븐에서 남자는 제가 원탑이었고요. 여자는 원탑이 따로 있습니다. 이 여자는 그 바로 아랫급 선수입니다."

"하는 일은?"

"같이 들어가면, VIP 앞에서 저는 노래하고, 춤추고, 형님이라고 불러줍니다. 그러면 이 여자는 옆에서 술 따라주고, 그리고 그…."

"이 여자 근황은 아냐?"

"연기판에서는 못 봤습니다만, 하던 일 계속하지 않을까요? 나인세븐 엔터 출신 중에 그런 사람이 여럿 있으니까요."

"미인계 같은 일도 할까?"

"돈만 주면 당연히 할 겁니다. 원래 그런 거 하던…. 어? 형님. 선수가 필요하십니까? 제가 아는 애로 소개해드릴까요? 소개비는 조금만 주셔도 되는데요."

"너 손 씻었다며."

"저는 씻었죠."

"씻은 상태 계속 유지해라. 이 여자에 대해서 말해봐. 아는 거 전부."

***

오동케미털 본사 뒷마당에 묻혀 있던 시체가 발견됐다. 한노성의 부하의 시체였다.

경찰 수사 상황은 법무팀 박민수 대리가 알아왔다.

"한노성의 부하 중에 사채업체의 돈을 빼돌리다가 걸린 놈이 있습니다. 그놈이 죽기 전에 한노성의 약점이 담긴 상자를 신당읍 논에 숨겼답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놈은 그걸로 협상하려 했을 텐데, 한노성이 성급하게 죽였겠군요."

"경찰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박민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경찰이 그 시체를 찾은 건, 회사 뒤뜰을 누가 파헤치던 흔적을 발견해서였답니다. 깊게도 아니고 몇 삽 정도만 판 흔적이라는데…."

"누가 그랬는지 경찰이 알아냈답니까?"

"아니요. 전혀 모른답니다."

"좋군요."

"네?"

"아닙니다."

***

사채업자 한노성이 오동케미컬의 예전 사장을 죽이고 회사를 빼앗았다는 정황이 나왔다. 전임 사장의 유가족들이 증거를 들이밀었다.

현재 사장은 한노성의 측근으로 사채업자 출신이다.

현재 사장은 체포됐다.

예전 사장의 딸인 김효주가 차우진을 만나 말했다.

"회사가 사채업자의 자금 세탁용으로 이용됐다는 걸 직원이 폭로했어요. 그래서 회사 상황이 많이 바뀌었죠."

"그 직원은 아는 사람인가요."

"아빠 때부터 오래 일한 분이에요. 이번에 용기를 내셨어요."

오동케미컬의 사장은 체포되고 관련자들은 도망치거나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증거 인멸도 어려웠다. 예전부터 일한 직원이 전임 사장의 사망 이유를 알게 된 후에 자금 세탁 자료를 경찰에 넘겼다.

김효주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 쪽 사람들이 회사를 장악했어요."

"속전속결이군요."

"아빠가 억울하게 빼앗긴 지분을 되찾는 소송도 걸었어요. 예전부터 일하던 분들이 내부에서 호응하셨고요. 회사 지분을 가진 다른 분들도 설득했어요."

"음…. 지분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알죠. 한노성의 손을 들어줬던 거. 그래서 우리 쪽 손을 더 빨리 잡은 거예요. 자기는 한노성과 같은 편이 아니라고 주장해야 하니까."

"잘 풀렸다니 다행입니다."

김효주가 카페에서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만?"

"SL 제약에서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조사한 자료를 받았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싸울 수 있었어요."

"SL 제약에 고마워하셔야죠."

"그 자료를 만들라고 한 사람도, 저에게 넘겨주라고 한 사람도 차 이사님이라면서요."

"유족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고맙습니다. 차 이사님이 우리 가족을 구해주셨어요."

"별말씀을."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뭐든 말씀만 하세요. 제가 적극적으로 도와드릴게요."

필요한 일이 하나 있다.

"그럼 회사 내부 자료를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차우진이 말했다.

"요즘 조사하는 일이 있는데, 오동케미컬에도 자료가 있을 것 같아서."

***

김효주는 그 문제를 간단한 방식으로 해결했다.

오동케미컬의 임원은 거의 다 한노성 쪽 사람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도망치거나, 체포되거나, 참고인 조사라도 받았다.

빈자리가 많이 생겼다.

김효주가 설명했다.

"비어 있는 자리들은 새로운 이사를 선임해야 해요. 그건 시간이 걸리죠. 그러니까 차 이사님을 임시 이사로 임명하면 어떨까요?"

"임시?"

"정식 발령은 아니지만, 일단 책상부터 갖다놓고 이사 명판을 올려두는 거죠. 정식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만요."

"이사 간판을 걸고 필요한 자료를 찾아본 후에 사표를 쓰면 되겠군요."

"네? 사표요? 아, 그…렇죠?"

오동케미컬에 이사가 새로 와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절차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기존 이사들이 이미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차우진은 하루 만에 오동케미컬의 이사가 되었다. 정식 발령도 아니고, 따로 직책이나 업무가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예전 사장 쪽에서 꽂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세라는 말도 있었다.

차우진이 자료를 요구했다. 그가 무슨 자료를 원하든 일선 부서에서 결과가 프리패스로 넘어왔다.

물론 모든 자료가 넘어온 건 아니다.

***

SL 제약 분석팀 성혜리가 그 자료를 분석한 후에 말했다.

"빠진 게 있어요."

"수작을 부리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성혜리가 화면에 자료를 띄웠다.

"여기 언급된 내용은 뒷부분이에요. 앞부분이 없어요."

차우진이 말했다.

"누군가 일부러 앞부분을 뺐군요. 그걸 벌써 알아내다니, 역시 유능합니다."

"호홋. 그렇죠? 역시 저밖에 없죠?"

"분석팀이 같이 한 거 아닌가?"

"쳇. 차 이사님은 역시 쉽지 않아."

***

차우진이 오동케미컬로 가서 담당 직원을 불렀다.

"내가 달라고 한 자료 중에, 빠진 게 있더군요. 아니, 일부러 뺀 건가?"

담당 직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아닙니다. 이사님. 그 자료는 그게 다입니다."

"내가 직접 조사해서 앞부분을 찾아내면 책임지셔야 합니다."

직원이 큰소리쳤다.

"그땐 제가 사표를…."

"유치장에서 사표를 쓰시게요?"

"예?"

"지금 상황에서 자료를 숨기면 무슨 의심을 받겠습니까? 경찰에서 과장님을 유력 용의자로 보고, 자금 세탁부터 한노성의 사망 사건까지 전부 다 조사할 겁니다."

"더, 더 찾아보겠습니다."

"자료가 있는 곳으로 같이 가시죠. 과장님이 만수무강하시려면 빠진 자료를 채워 넣어야 할 겁니다."

"꼭 찾아내겠습니다."

"빈틈없이. 하나도 빠지지 않게."

"아, 알겠습니다."

차우진은 오동케미컬에서 성수당바이오에 대해 조사한 자료를 받아냈다.

그중에서 과장이 빼돌리려고 한 건 성수당바이오를 조사한 항목과 들어간 비용이었다.

"이걸 뺀 이유가 뭡니까? 대답 잘해야 할 겁니다."

"죄, 죄송합니다! 이 일은 영수증을 남기지 않길래, 제가 술 마신 것도 거기에 끼워 넣어서 처리했습니다!"

그건 상관없다. 어차피 차우진의 돈이 아니다. 필요한 건 정보다.

"이건 내가 가져갈 테니까, 이런 자료 계속 찾아요. 영수증 없이 처리한 지출이 더 있을 겁니다. "

"그것만 하면 저는 괜찮…."

"전부 다 찾아내면 감방에 갈 일은 없을 겁니다. 하나라도 놓친 게 있으면…. 그럼 뭐, 지내기 편한 교도소라도 알아봐야 하나?"

"책임지고 전부 다 찾아내겠습니다!"

***

차우진은 오동케미컬에서 나온 자료 중에 성수당바이오에 관한 것만 따로 모았다. 나머지는 관심도 없었다.

그 자료 분석은 SL 제약 분석팀에서 맡았다.

결과는 금방 나왔다.

***

차우진이 성수당바이오 유해준 팀장을 만났다.

"유해준 씨. 반갑습니다. 차우진입니다."

172. 김은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유해준을 만나는 건 간단했다.

차우진은 루나페어리 김세린에게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했다. 김세린은 유해준의 동생에게 연락했다. 동생은 다시 자기 형인 유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페에서 유해준이 웃으며 말했다.

"세린이네 회사 이사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차우진이 그 회사 명함을 내밀었다.

"LPP 엔터 차우진입니다."

유해준은 차우진이 만나자고 한 이유를 자기 나름대로 짐작했다.

"제가 우리 회사 홍보팀을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성수당바이오는 방송 CF를 하는 회사는 아니다.

대신에 농촌에 뿌리는 광고지나 원예 홍보용 책자는 종종 만든다. 그런 것도 모델은 필요하다.

게다가 루나페어리는 신인 걸그룹이라 모델료가 싸다.

유해준이 자랑했다.

"제가 CF를 정하진 못해도, 홍보팀장님을 잘 아니까 소개 정도야 뭐. 세린이랑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요. 하하하."

"뭔가를 부탁하려고 보자고 한 게 아닙니다."

"예? 그럼 저는 왜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엔터 회사에서 저를 스카우트할 리는 없는데…."

차우진이 스마트폰에 들어있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분 아시죠?"

유해준은 당황했다.

"어? 은솔이 사진을 왜…."

"이름을 그렇게 알고 있습니까?"

"예?"

"이 여자의 본명은 김수정. 아니지. 이것도 가명일 수 있겠군요."

유해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시죠?"

차우진이 사진을 몇 장 더 보여주었다.

"이름은 김수정. 또는 김은솔. 나인세븐 엔터 출신입니다."

유해준의 눈이 커졌다.

"은솔이가 배우였습니까?"

"배우입니다."

유해준의 표정이 풀어졌다.

"아. 그래서 수정이란 예명이 있는 거군요. 혹시 은솔이를 LPP 엔터에서 계약하려는 겁니까? 그래서 남자친구인 저까지 관리하려고요?"

"김수정, 아니, 김은솔은 요즘은 미인계 전문 배우로 활동합니다."

"네? 미인계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런 건 삼국지 시절에나 있던 거 아닙니까?"

"미인계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법인데, 산업스파이 활동에도 곧잘 쓰입니다."

유해준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김은솔의 예전 활동 기록은…. 그건 넘어가죠."

차우진이 종이로 된 문서 두 장 중에 한 장만 내밀었다.

"이건 현재 김은솔이 밑밥을 까는 곳들입니다. 다음 타깃을 고르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 이건…."

그 한 페이지짜리 서류에는 김은솔이 요즘 어느 회사의 누구와 접촉한다는 정도만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그 서류는 나인세븐 엔터 출신 배우 김상훈이 전화를 돌려 알아낸 소문을 토대로 작성됐다. 정보의 신뢰도는 낮았지만, 보기엔 그럴듯했다.

유해준이 화를 벌컥 냈다.

"이, 이런 종이 한 장에 몇 줄 적힌 것만 보고 내가 속을 줄 압니까? 난 우리 은솔이를 믿습니다!"

"물론 이런 걸 갑자기 들이밀면 믿기 어렵겠지요. 설사 이 문서가 사실이라 해도,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오해는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겠지요. 이해합니다."

유해준이 벌떡 일어났다.

"더 듣고 싶지 않군요. 꺼져요!"

"유해준 팀장님. 이대로 가면 이미 생긴 의심을 지울 수는 없을 텐데요.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으니까."

"당신 때문이잖아!"

"직접 보여드리죠."

"뭐?"

차우진이 제안했다.

"갑시다. 김은솔의 실체를 눈으로 보고 확인해요."

"그…."

"가서 직접 봤는데 아니면 날 한 대 치던가."

***

차우진이 데려간 곳은 담장이 높은 단독주택이었다.

"저 집 아십니까?"

"은솔이가 자기네 집이라고…."

"저 집은 오동케미컬 사장의 비밀 주택입니다."

유해준이 긴장했다.

"예? 오동케미컬은…."

"아시는구나."

"은솔이가 지나가는 말로 몇 번 이야기했는데…."

"김은솔이 사장 딸은 아닌데, 저 집에서 지냈군요."

"그,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방금 비밀 주택이라고 했지요?"

차우진이 서류를 보여주었다.

"오동케미컬 내부 자료입니다. 저 집은 사장 개인이 아니라, 사장의 지시로 회사에서 비밀리에 임대한 곳입니다."

"예?"

"사장이 체포됐으니까 이제 회사 돈으로 나가던 월세가 끊기겠군요. 그럼 뭘 해야 할까요? 누가 찾아오기 전에 증거 인멸을 해야겠지요?"

"그…."

"들어갑시다."

차우진이 담장을 훌쩍 뛰어넘은 후에 문을 안에서 열었다.

유해준이 걱정했다.

"남의 집인데 이래도 됩니까?"

"여기는 오동케미컬의 돈으로 임대한 곳입니다. 이래도 됩니다. 내가 외부인이 아니거든요."

차우진은 오동캐미컬의 이사다. 정식 발령은 아니지만 자리도 있고 명함도 있으며, 직원들도 임원으로 알고 있다.

차우진이 현관문을 벌컥 열고 혼자서 안으로 들어갔다.

김은솔은 온몸을 완전히 감싸는 옷을 입고 머리에는 염색용 비닐 헤어캡을, 얼굴에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손에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눈에는 고글을 착용했다.

그러면 바닥에는 머리카락 하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그렇게 몸을 완전히 가리고 집안을 닦는 중이었다. 바닥에는 락스 같은 청소용품이 보였다.

그녀가 갑자기 집안으로 들어온 차우진을 보고 당황해서 소리쳤다.

"누, 누구야!"

"아. 증거 인멸 중이시구나."

"아, 아니, 이건…."

"인멸 중인 분이 소리를 지르면 곤란할 텐데."

"누, 누구세요?"

"오동케미컬 사장님이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러라고 이 집을 내준 게 아닐 텐데?"

그녀가 변명했다.

"아, 그, 그게 아니에요. 미리 잘 치워놔야 혹시 여기를 조사받아도 문제가 없으니까…."

"잘 치워놓고 튀시려고? 돈을 그렇게 받았는데 그러면 곤란하지."

"튀다니! 난 아직도 일하고 있어요!"

차우진이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유해준에게서 필요한 건 얻어냈습니까?"

유해준은 지금 현관 밖에 있다. 김은솔의 위치에서는 그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신발을 신고 들어온 차우진이 좀 무섭게 느껴졌다. 게다가 차우진은 유해준의 이름을 정확히 말했다.

김은솔은 차우진을 사장이 보낸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그런 사람에게 이곳에 그녀가 있었다는 증거를 없애고 튀려는 모습을 들켰다.

그녀가 강해 보이는 단어를 쓰면서 적극적으로 변명했다.

"그 돼지 새끼는 거의 다 넘어왔어요. 내가 서두르고 있으니까, 곧 그 회사 기술은 싹 다 빼낼 수 있어요."

"유해준이 기술을 빼내서 넘기는 거, 확실합니까?"

"확실하다니까요? 그 새끼가 나한테 푹 빠졌다니까요?"

"회사를 배신할 정도로?"

"물론이죠! 작업 거의 다 쳤으니까, 이제 몇 밤만 자주면 게임 끝이에요."

"흐음…. 조금 더 기다려야겠군요. 시간이 없는데…."

김은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머리를 굴렸다.

그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일이 늦어지면 곤란하시죠? 원래 스케줄대로 진행하려면 예산이 더 필요해요."

"더?"

"오동케미컬이 그렇게 된 후로 지원금이 끊겼잖아요. 활동비가 더 있어야 해요."

"얼마면 되겠습니까?"

"급한 대로 한 장?"

"정확한 액수를 말해보시지."

"한 장이라니까요? 평소에 주던 한 장…."

김은솔의 표정이 굳었다. 의심이 들었다.

"저기요. 박 사장님이 보낸 거 맞아요?"

"박 사장은 지금 유치장에 있는데 나를 보낼 수 있을 리가."

"뭐?"

"난 유해준 씨가 보냈는데."

"그, 그게 무슨…."

유해준이 창백해진 얼굴로 현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지금 다리가 후들거렸다.

"으, 은솔아…."

김은솔은 경악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차우진과 유해준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차우진에게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급히 변명했다.

"아, 아니야. 오빠. 오해야!"

"네가 산업스파이…."

"저 사람을 속이려고 그렇게 말한 거야! 저 사람이 너무 위험해 보여서 그런 거야!"

"그, 그렇지? 다 오해였던 거지?"

차우진이 유해준을 보며 혀를 찼다.

"쯧. 눈이 너무 멀어서 보여줘도 보지 못하는 건가?"

"아, 아니, 그게…."

차우진이 김은솔에게 말했다.

"오동케미컬에서 이번 일의 조사를 맡은 차 이사입니다."

"네? 그 회사에 차 이사가 있다는 말은…."

"당연히 새로 왔습니다. 기존 이사들은 대부분 날아갔으니까."

"아…."

"회사 내부에 자료가 많더군요. 나인세븐 엔터 출신 김은솔 씨. 아니. 김수정 씨인가?"

김은솔은 나인세븐 엔터라는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그, 그것까지 알고 있…."

"김은솔 씨가 누구인지,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은 압니다. 제안을 하나 하지요. 내가 모르는 것까지 모두 다 사실대로 말하면 못 본 척하겠습니다."

"저, 정말요?"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감방에 보낼 놈이 많은데, 김은솔 씨 하나 더 보낸다고 해서 오동케미컬에 이익될 건 없으니까. 우리는 상황 수습을 위해 진실을 알아야겠습니다."

김은솔이 얼른 변명했다.

"사실 전 박 사장이 시켜서…."

"다만, 지금부터 하는 말에 단 하나라도 거짓이 있으면, 다른 놈들과 묶어서 같이 감방에 보낼 겁니다. 박 사장은 이미 체포된 건 아시죠?"

차우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경고했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하거나, 거짓말을 할 거면 절대로 들키지 말아요."

김은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결국 자백했다.

"당신네 회사에서 돈 준다고 해서 한 거예요. 그냥 비즈니스였어요!"

"구체적으로."

김은솔은 술술 털어놓았다.

"해준 오빠가 개발하는 비료 첨가제 기술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걸 빼내라고 했어요. 그래서 접근했어요."

유해준이 거기까지 듣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건 아니야. 이건…."

"미, 미안해."

유해준이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기는 하냐! 너 지금 그 말도 다 연기잖아!"

"아니야. 미안한 건 진심이야."

"왜, 왜, 나 좋아해 줄 수 있었잖아! 우리 그동안 좋았잖아!"

"좋을 때도 있었지. 그런데…."

"그런데 왜!"

김은솔이 차우진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차우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사하면 다 밝혀집니다. 단 하나의 거짓말만 해도 감방에 보낼 겁니다."

그녀가 포기하고 유해준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 돈 좋아해. 직장인 월급으론 안돼."

"씨바알!"

***

차우진이 유해준을 술집으로 데려갔다.

유해준이 술을 마시며 울먹였다.

"사랑했었다. 나쁜 년아."

차우진이 유해준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마셔요."

유해준이 술을 마신 후에 인상을 쓰며 말했다.

"크으. 직장인 월급으로 안 되면…. 저기요. 로또라도 살까요?"

"로또의 당첨확률은 800만 분의 1쯤 됩니다. 다섯 개 사면 160만 분의 1. 대도시 하나가 멸망급 재난에 휘말려 몰살당할 때, 그 도시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가 될 확률과 비슷하군요."

"예? 아니, 무슨 로또를 그렇게 계산…. 로또는 희망을 사는 거잖습니까?"

"맞습니다. 희망을 사는 거죠. 그러니까 포기해요. 김은솔은 희망이 아니란 거, 이미 망한 거 알잖아요."

"우리 좋았던 때도 있었는데, 아니, 저는 항상 좋았는데…."

"유해준 씨는 설계 당한 겁니다."

"압니다. 알아요. 나도 안다고요!"

유해준이 술을 한 잔 더 마시더니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차 이사님. 은솔이가 어떤 여자인지 나한테 왜 보여준 겁니까? 내가 불쌍해서는 아닐 거 아닙니까?"

"오동케미컬은 사채업자 한노성이 가로챈 회사입니다. 그걸 조사하다가 한노성이 김은솔을 산업스파이로 썼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한노성 개새끼.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죽었습니다."

"천벌을 받았구나!"

"그런 거로 칩시다. 어쨌든 한노성이 원하던 기술이 뭔지 궁금하더군요."

"특별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건 기술유출 문제가…."

유해준은 이미 산업스파이 김은솔에게 당하다가 빠져나온 상태다. 그래서 조심스러워졌다.

차우진이 말했다.

"알려줘도 되는 것까지만 알려주시죠."

유해준이 성수당바이오에서 개발 중인 액체비료 첨가제에 대해 설명했다.

"식물이, 그러니까 쌀 같은 식물의 수확량을 늘리려면 뭐가 필요한지 연구했습니다. 질소나 인 같은 기본 비료 말고, 소량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을요."

차우진은 멸망 초기에 관련 기술에 관한 기사나 영상을 많이 보았다.

"비타민처럼?"

"정확히 말하면 비타민은 아니지만, 그 비유가 제일 그럴듯하군요. 맞습니다. 제가 개발하는 건 농작물용 비타민과 비슷한 겁니다. 그걸 액체비료에 섞어서 쓰는 거죠."

"그 첨가제는 특정 농작물에만 효과가 있게 세팅할 수 있을 테고요."

"예. 그게 목표…. 어? 그걸 어떻게…."

"안 그러면 잡초도 그 비타민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잖습니까?"

"아. 그렇죠. 이해가 빠르시군요."

유해준이 계속 설명했다. 김은솔에 대해 잊으려는 듯이, 술을 퍼마시면서 열심히 설명했다.

그렇다고 제조 기술을 공개한 건 아니다. 지금 말하는 기본 원리와 효과 정도는 홍보용 책자에도 쓸 수 있다.

유해준은 하는 김에 홍보용 책자 수준보다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지금은 벼를 타깃으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게 성공하면 다음 단계로는 밀과 옥수수에만 적용되는 첨가제를 개발할 겁니다."

차우진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상을 썼다.

"그렇군요."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그 첨가제 개발에 성공할 거 같아서 걱정이거든요."

"예?"

173. 개입

차우진이 질문했다.

"개발은 어디까지 됐습니까?"

성수당바이오 개발팀장 유해준이 대답했다.

"실험실 환경에서라면 식량 생산량이 대폭 증가하는 첨가제는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벼에만 작용하도록 세팅하는 단계입니다."

"양산은요?"

"하, 하하. 필드에서, 그러니까 실제 논에서 쉽게 쓰려면 갈 길이 멉니다."

"안정성은 어떻습니까?"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건 아니니까 그게 딱히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앞으로 한 10년쯤은."

"네?"

차우진이 인상을 쓰며 생각했다.

'쿠에르노의 멸망급 식량 재난을 일으킨 첨가제와 구현 방식과 목표가 비슷해. 위험하지 않다고 착각하는 것도 비슷하고.'

그 액체비료 첨가제는 멸망 초기에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면서 가뜩이나 부족하던 멸망 초기 식량 생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성수당바이오의 제품은 아직은 쌀 하나만 목표로 하고 있다. 멸망 초기에는 쌀과 밀, 옥수수 등에 두루 사용됐다.

'쿠에르노가 필드 테스트를 하는 건 몇 년 후인데.'

성수당바이오의 기술은 멸망 초기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현재는 쿠에르노도 거기까지 가진 못했다.

'쿠에르노도 이 기술을 한창 개발 중이겠지. 거기에 성수당바이오의 기술을 훔쳐서 통합하면, 개발 속도가 빨라지겠지.'

그림이 대충 그려졌다.

'성수당바이오를 인수하지 않고 기술만 빼내는 이유?'

쿠에르노는 돈에 미친 기업이다.

'직접 인수하려 하면 그 기술의 가치를 눈치채고 비싸게 부를 테니까.'

돈을 아끼기 위해서 이 일을 저질렀다는 결론이 나왔다.

'오동케미컬을 시켜서 대신 기술을 훔치면 탈이 안 난다고 판단했겠지. 그 대가가 오동케미컬 인수였을 테고.'

조기택 패거리가 신당읍 일대에 매매 각서를 받으러 다닐 때 유럽계 외국인이 목격된 일이 있다.

'그 외국인은 유해준이 고향에서 따로 테스트하는 건 아닌지 확인하러 간 거였어.'

왜 그 금속 상자가 하필 거기 묻혀 있었는지도 짐작이 갔다.

'한노성에게 살해당한 부하가 유해준의 고향을 조사하는 일을 맡았겠지. 그러다 급해지니까 그 근처 논에 묻은 거야.'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성수당바이오가 그 기술을 빼앗기지 않으면, 쿠에르노의 액체비료 첨가제도 나오지 못할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쿠에르노 인더스트리가 이 첨가제를 만들긴 했지만, 이걸 연구하던 회사나 연구소는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성수당바이오는 아직 쌀 하나만 타깃으로 한다. 쿠에르노는 다양한 작물용 첨가제를 만들어 팔아먹었다.

'쿠에르노는 결국 그 기술들을 개발할 거야.'

의문이 들었다.

'한국 중소기업의 기술을 유럽 기업이 어떻게 알았지?'

차우진이 물었다.

"지금까지 개발한 거, 특허는 냈습니까?"

유해준이 대답했다.

"아직 완성 단계까지는 가지 못 해서…. 하나 출원해놓은 게 있긴 한데, 특허가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아. 그거구나."

"그거라니요?"

"출원된 특허를 보고 성수당바이오가 어디까지 개발했는지 눈치챈 겁니다. 같은 걸 연구하니까 쉽게 이해했겠지요."

'그놈들보다 앞선 부분이 있으니까 탐내겠지.'

유해준이 물었다.

"누가 말입니까? 한노성이란 사채업자가요?"

"음…."

한노성은 이미 죽었지만, 그 뒤에 있는 쿠에르노 인더스트리는 멀쩡하다.

성수당바이오가 이 연구를 접어도 멸망급 식량난을 일으키는 첨가제는 결국 나온다.

'첨가제 기술을 쿠에르노보다 더 빨리 개발해서 시장 주도권을 쥐어야 하나? 그 방법밖에 없겠는데?'

일단 유해준이 김은솔에게 속아서 기술을 빼앗기는 건 막았다. 시간은 벌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유 팀장님. 성수당바이오 사장님 좀 만납시다."

"우리 사장님을요? 왜…. 헉!"

유해준이 펄쩍 뛰었다.

"저, 저를 신고하려고…."

"유 팀장님은 아직 유출한 기술이 없을 텐데요?"

"아. 그렇죠. 휴우."

"그 회사 사장님하고 사업 이야기 좀 해야겠습니다."

"예?"

***

성수당바이오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중소기업이다. 그래서 개발팀장이 사장에게 직접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사장 정석현이 물었다.

"사업 이야기?"

"예. 들어보시면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라고 하던데요."

"그 사람은 유 팀장하고 어떻게 아는 사이인데?"

사실대로 말하려면 김은솔이 산업스파이라는 것도 밝혀야 한다. 그럴 수는 없다.

"제 고향 후배와 아는 사이인데, 사장님을 뵙고 싶다고…."

그러면서 명함을 한 장 내놓았다.

"오동케미컬 이사랍니다."

정석현이 인상을 구겼다.

"오동은 경쟁업체잖아. 거긴 느낌이 쎄했는데…."

"원래부터 거기 이사는 아니었고, 이번에 임원이 됐답니다."

"아. 이번에 오동이 다 뒤집히고 나서?"

"예."

정석현이 흥미를 보였다.

"그래? 그 회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했는데, 만나서 이야기나 들어볼까?"

***

차우진이 정석현 사장과 만났다.

서로 간단히 인사한 후에 차우진이 설명했다.

"오동케미컬은 사채업자가 회사를 집어삼켰다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그 일을 지원하려고 이사 자리를 받았습니다."

정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을 하시는군요. 그러면 오동케미컬 정상화 작업으로 바쁘실 텐데, 저는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투자하고 싶어서요."

정석현의 표정이 굳었다.

"오동이 정상화하는 방법으로 우리 회사를 노리는 겁니까?"

"오동케미컬이 아니라, 개인적인 투자를 원합니다."

"차 이사님은 어차피 오동의 임원인데, 그 돈이 정말 개인 자금인지 어떻게 압니까?"

차우진이 다른 명함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사덕리소스 이사 명함이었다.

"오동은 정상화를 도와주려고 자리를 맡은 것뿐입니다. 본업은 다른 쪽이죠."

정성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사덕리소스? 여기는 금광으로 유명한…."

"예. 그래서 제가 돈이 좀 있습니다."

"아…."

"금광 회사가 비료 회사를 탐낼 이유도 없고요."

정석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금광 회사 임원이 왜 우리 회사에 투자합니까?"

"그럴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정석현은 고민했다.

'단순 투자인가?'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 자리인데,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어….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자리를 마련해도 될까요?"

"내일 뵙죠. 너무 오래 끌면 제 마음이 변할 수 있으니까요."

"그, 그러시죠."

***

정석현은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에게 연락해 차우진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가 사업 관계로 아는 사람들은 차우진을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이리저리 인맥을 통해 알아보다가, 차우진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을 한 다리 건너서 찾을 수 있었다.

"사덕리소스 차우진 이사? 그 회사의 넘버 투일 텐데요?"

"예? 부사장이나 전무가 아니라 이사인데 넘버투입니까?"

"직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 회사 2대주주일 겁니다."

"아…. 돈은 많겠군요."

"많겠죠. 금광에서 금이 계속 나오니까요."

사업 관계자가 아니라 정석현의 친구 중에도 차우진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

"사덕리소스 차 이사? 그 사람 딥어스테크에서도 실세잖아."

"어? 다른 회사에서도 이사를 한다고?"

"딥어스테크에 개인 지분이 꽤 많다고 들었어. 거기다 사덕리소스가 가진 지분까지 더하면, 사장도 눈치 봐야 할걸?"

정석현도 사장이다. 그가 긴장하며 물었다.

"그럼 그 사람은 회사 경영에 얼마나 참여한대?"

"경영은 관심 없다던데?"

"응? 그럼 그 많은 지분을 가지고 뭘 하는데?"

"탐지기 같은 장비를 개발하는 연구소를 맡았대."

정석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허…. 아니, 금광 하는 사람이 연구소 일을 뭘 안다고?"

"너야말로 뭘 모르네. 그 사람 실력 쩐다더라."

"어?"

"차 이사가 맡고 나서 그 회사 연구소가 엄청 잘나간대."

***

차우진과 정석현은 이튿날 다시 만났다.

정석현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투자는 얼마나 하실 생각입니까?"

"지분을 얼마나 넘기실지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역시 우리 회사 지분을…."

"이자만 받는 거면 투자가 아니라 대출이겠지요. 투자의 대가로 지분을 원합니다."

"혹시 우리 회사를 원하는 겁니까?"

"경영권에는 관심 없습니다."

정석현도 그렇게 들었다.

"그러면 왜…."

"개발에 관여하고 싶습니다."

정석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 이사님에 대해 좀 알아봤습니다. 유명한 분이시더군요."

"어느 쪽으로요?"

"사덕리소스의 이사님이라는 것만 알았는데, 알아보니까 딥어스테크에서도 개발이사님이시던데요."

"그렇죠."

"제가 평판을 알아본 게 혹시 실례…."

"괜찮습니다. 그게 뭐 비밀도 아니고."

"차 이사님이 맡으신 후로 딥어스테크 연구소가 무척 잘나간다고 들었습니다."

"미국 쪽과 이야기가 잘 풀려서요."

이미 미국 정부까지 끌어들였다. 다만 미국 정부는 뒤에 있고, 전면에 나선 건 스톤파인더와 마그마에너지 두 회사다.

"실력자이신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석현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쪽은 분야가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왜 굳이 우리 회사에…."

"잘 될 거 같으니까 투자하는 겁니다."

"이 분야를 모르는 분이 개발에 개입하면 효율이…."

차우진이 명함을 한 장 더 내놓았다. 이번에는 SL 제약 이사 명함이었다.

정석현은 당황했다.

"어? SL 제약에서도 이사님이셨습니까?"

"제약과 비료 첨가제는 분야는 다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를 못 할 정도로 생소한 분야는 아닙니다."

정석현은 혼란스러웠다. 하루 동안 차우진에 대해 알아보긴 했는데, 그의 인맥으로는 이것까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어떻게 네 회사에서 임원을…."

다른 사람이 이렇게 명함을 뿌렸으면 사기꾼인가 하겠는데, 차우진이 사덕리소스와 딥어스테크의 이사라는 건 이미 인맥을 통해 확인했다.

그러면 SL 제약 이사 명함도 진짜라고 봐야 한다.

정석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 이런 명함이 더 있는 건 아니시죠? 하, 하하."

차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석현의 표정이 굳었다.

"더 있으시군요."

"그러니까 저는 성수당바이오의 경영권에 깊숙이 개입할 이유도, 시간도 없습니다."

정석현도 차우진이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다는 소문을 들었다.

정석현이 고민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차우진이 말했다.

"회사 사정에 여유가 없으실 겁니다."

"요즘 여유 없는 회사가 어디 한둘입니까? 다들 어렵지요."

"그러니까 투자를 받으시죠."

성수당바이오는 증시에 상장된 회사가 아니다. 투자를 받고 지분을 내주거나 증자를 하는 건 정석현이 결정하면 처리된다.

정석현이 궁리했다.

'이런 중견기업들의 임원을 우리 회사에 끌어들이면, 그 인맥이 도움될 것 같은데?'

어차피 대출을 새로 받아야 할 상황인데, 투자금으로 그걸 채울 수 있으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차우진이 딥어스테크 연구소를 화려하게 키웠다는 소문도 들었다.

'우리 회사에 투자금을 넣으면, 그 돈을 불리기 위해서라도 뭔가 도움을 주겠지.'

정석현이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지분은 얼마나 원하십니까?"

성수당바이오에서 목소리를 내려면 1, 2퍼센트로는 안 된다.

이 회사는 중견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인 데다가 회사 사정도 좋지 않았다. 지분은 정석현이 팔아줘야만 살 수 있지만, 가격은 비싸지 않았다.

차우진이 제안했다.

"10퍼센트로 하시죠."

***

차우진은 성수당바이오의 지분 10퍼센트를 인수했다.

이사 명함도 하나 만들었다. 정식으로 이사가 되려면 절차가 필요하지만, 일단 책상을 미리 준비하고 명판도 새겼다.

취임 첫날에 유해준 팀장이 말했다.

"차 이사님. 이렇게 이사님으로 모시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가끔 출근하는 정도니까, 딱히 신경 안 써도 됩니다."

"그래도…."

유해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기, 저와 은솔이 사이의 일은…."

"김은솔이 누구입니까? 저는 그런 사람 모릅니다. 김수정도 모릅니다."

유해준은 식은땀이 났다.

"고, 고맙습니다."

"아예 사내 게시판에 모른다고 공지를…."

"차 이사님! 무슨 개발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174. 공개홀

차우진이 질문했다.

"개발 중인 액체비료 첨가제에 대해 이제 좀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유해준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개발이사로 오셨는데 당연히 보고를 받으셔야죠."

유해준의 팀은 몇 가지 상품을 개발 중이다. 그는 그걸 다 보고할 기세였다.

차우진이 말했다.

"다른 건 간단하게 해도 됩니다. 액체비료 첨가제에 관해 자세히 듣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지난번에는 액체비료 첨가제를 식물용 비타민에 비유해 설명했다.

유해준은 이번에는 실제 원리와 개발 과정, 그 효과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새로 온 이사에게 처음부터 정확한 수치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찔리는 게 많은 유해준은 그것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연구 성과를 자랑했다.

"지금도 환경만 맞춰주면 병충해에 더 강하고 쌀알도 더 많이 열립니다. 앞으로는 다양한 환경에서 평소와 같은 노력으로 농사를 지어도 생산량을 50퍼센트 증가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평소와 같은 노력이라…. 농사짓는 분들이 좋아하겠군요."

"물론입니다. 우리가 이 제품을 출시하면 전 세계 곡창지대에서 사용할 겁니다."

차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음…."

"좋은 이야기인데 왜 그러시는지…."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와 겹치는 부분이 꽤 있군요. 만드는 방법도 그렇고, 목표도 그렇고."

"예? 쿠에르노는…."

"농업 분야에서는 대형 기업이죠. 우리 회사보다 더 다양한 분야의 제품을 만듭니다."

"그거야 우리는 중소기업이고 거기는 국제적으로 노는 회사니까…."

"쿠에르노에서 우리 첨가제와 비슷한 걸 개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쌀 하나를 타깃으로 하지만, 쿠에르노는 밀이나 옥수수 등등 다양한 작물을 타깃으로 합니다."

유해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리도 다음 단계는 밀과 옥수수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연구 개발에 투입되는 예산의 규모가 다릅니다."

당연히 쿠에르노 쪽이 훨씬 더 많은 연구개발비를 쓴다.

유해준이 걱정했다.

"그럼 우린 망한 건가요?"

차우진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니요. 적어도 쌀은 우리가 앞섰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있다.

'그러니까 쿠에르노가 여기 기술을 빼내려 했겠지.'

유해준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하나라도 이기고 있으니까 다행입니다."

"그러니까, 더 빨리 개발해서 특허를 내야 합니다."

"네? 지금보다 더요?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먼저 개발해서 특허를 내야 쿠에르노가 못 쫓아옵니다. 우리가 저쪽보다 늦으면…. 망합니다."

쿠에르노가 농업용 첨가제를 대량으로 보급하면 10년 후에 전 세계 식량 생산이 망한다.

"가능할까요?"

"가능하게 해야지요."

차우진은 멸망 초기에 이 첨가제에 관한 기사와 영상을 여럿 보았다. 방송에 나오는 건 시청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화시킨 개념이지만 상관없다.

'난 방향만 알려주고, 실제 구현은 연구팀이 하면 되겠지.'

문제는 그게 아니다.

'멸망 초기에 사용된 것과 같은 방향으로 개발하면, 결국 똑같은 문제가 생겨.'

그렇게 만들어진 첨가제는 처음에는 생산량을 크게 늘리다가, 결국 전 세계에 멸망급 식량 재난을 일으킨다.

오메가 바이러스나 마그마 폭탄은 멸망 초기에 해결법은 찾았다. 그건 너무 늦게 찾은 게 문제였지 해결법은 있었다.

그런데 이 첨가제는 사용을 금지하는 것 외에는 대처 방법이 없었다.

근본 문제를 해결한 새로운 첨가제도 개발되지 않았다. 그걸 연구한 곳은 있지만, 그 기술이 나오기 전에 현대 문명이 멸망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일단 만듭니다. 우리가 안 만들면 쿠에르노가 만드니까."

"하지만 상대는 외국계 거대 기업인데…."

"개발에 제가 참여하겠습니다. 개발비도 더 끌어오겠습니다. 도움이 될 겁니다."

차우진은 가야 할 길은 알려줄 수 있다. 실제로 그 길에서 제품을 만드는 건 개발팀이 알아서 해야 한다.

차우진이 선언했다.

"반드시 우리가 쿠에르노보다 먼저 완성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진짜 다 굶는 수가 있습니다."

***

차우진이 집으로 가다가 민수연과 마주쳤다.

"퇴근이냐?"

터벅터벅 걷던 민수연이 손을 들었다.

"야. 잘 만났다."

차우진이 그 손을 툭 쳤다.

"왜?"

"감자탕?"

"좋지."

두 사람은 동네 감자탕 집에 들어갔다. 소주도 한 병 시켰다.

민수연이 감자탕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크으. 이거지."

"뭔 일 있냐?"

민수연이 한숨을 푹 쉬었다.

"세상이 망할 거 같아."

차우진은 멈칫했다.

"너한테도 미래를 보는 능력이…."

"블루퍼핏 콘서트 티켓팅에 실패했다.

"블루 뭐?"

민수연이 발끈했다.

"넌 어떻게 블루퍼핏을 모르냐?"

"내가 알아야 하는 놈이냐?"

민수연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얘들이 블루퍼핏이야."

"아이돌이네?"

"어. 내가 진짜 아끼는 아이돌이다."

"네가 티켓팅에 실패한 게 얘네 콘서트라고?"

"단독 콘서트는 아니야. 블루퍼핏은 중소 아이돌이라서 단독이었으면 표가 많이 남았겠지."

"그런데?"

"이번엔 합동 공연이거든. 가수와 팀이 몇 군데 나오는데, 블루퍼핏도 한 코너 받았어."

"결론은 안 들어도 알 거 같지만, 계속해봐라."

민수연이 흥분했다.

"우리 애들이 다른 팀한테 너무 밀리면 불쌍하잖아. 이 공연은 내가 직접 가서 머릿수라도 늘려야지!"

그래서 티켓을 사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일반용으로 나온 건 다른 인기 가수의 팬들이 이미 싹 쓸어갔다.

차우진이 소주를 마신 후에 말했다.

"와. 수연아. 넌 정말…. 속 편해서 좋겠다."

"안 편하다고."

"네가 망할까 봐 걱정하는 게 세상이 아니라 아이돌 콘서트라니. 부럽다"

"내가 응원해줘야 한다고. 걔들이 내가 힘들 때 응원해줬다고."

"너 힘들 때 내가 사준 술이 몇 병이냐? 걔들은 너한테 물이라도 한 병 사줬냐? 응원할 거면 나를 응원해야지!"

"질투하냐?"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가야겠다."

"야. 감자탕 많이 남았어."

"그러네. 너한테 그동안 뜯어먹혔던 거, 조금이라도 회수하려면 이거라도 열심히 먹어야지. 이건 네가 사라."

술이 몇 잔 더 돈 후에 민수연이 갑자기 움찔하다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우진아아아."

"뭐냐? 집에 뭐 또 고장 났냐? 설마 아줌마 또 여행 가셔서 밥 필요하냐?"

"너 전기 공사 일하는 거 말이야. 요즘은 방송국에서 한다며?"

"가끔 땜빵 작업 하는 거다."

"여기서도 할 수 있어?"

"여기?"

민수연이 스마트폰으로 블루퍼핏이 참여하는 공개방송 합동 공연 포스터를 보여주었다.

"이번 공연이 KMTV 방송국에서 주관하는 건데, 너 여기서 일 좀 해라."

"하면?"

"일하면서 표 한 장만 구해주라. 두 장 구해주면 더 좋고."

차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표가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 구할 수 있는 그런 거냐?"

"방송국에서 하는 거라서 관계자용 표가 많대!"

"그런 표가 전기공사하는 나한테까지 오겠냐고."

"아니면 내가 너 보조로 일할게! 공연장에 같이 들어가자!"

"너 겸직금지 아냐?"

"안 들키면 되잖아."

"너 경찰이야. 뭘 안 들키면 돼."

"들어가서 너만 일하고 나는 안 하면 되지!"

"되겠냐?"

민수연이 툴툴댔다.

"쳇. 뭔가 방법 없냐?"

"그런데 이 포스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인터넷에서 봤겠지."

"잠깐만."

차우진이 스마트폰에 들어온 문자를 확인했다.

"아. 이거구나."

KMTV 방송국에서 기획사에 뿌린 표가 LPP 엔터에도 들어갔다. LPP 엔터는 그중 한 장을 차우진에게 보냈다.

그 표는 관계자용이긴 하지만 타인에게 이전이 가능했다.

차우진은 이 공연에 원래 관심이 없었다.

'여기에 루나페어리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가 민수연을 쳐다보았다. 민수연은 툴툴대면서 감자탕 뼈를 고르고 있었다.

차우진이 멸망을 막기 위해 싸우면 차유리가 야근한다. 가끔은 민수연도 야근한다. 그래서 좀 미안한 마음이 있다.

차우진이 스마트폰 톡으로 민수연에게 티켓을 보냈다.

"야. 오다가 주웠다. 이거 너 해라."

민수연이 감자탕 뼈를 물어뜯다가 스마트폰을 힐끗 보았다.

"대출광고 보낸 거면 죽는…. 켁!"

"아. 씨. 더럽게."

"대박! 방금 표 이야기했는데, 표가 막 나왔어! 너 뭐냐! 너한테 왜 이런 능력이 있어? 너 이런 놈 아니잖아!"

"나 이런 놈 맞다."

"이거 어디서 났냐? 훔쳤냐?"

"아는 회사에서 받은 건데, 네가 가라."

민수연이 활짝 웃으며 차우진의 팔을 때렸다.

"야! 차우진! 네가 도움이 될 때가 다 있구나!"

"역시 민수연. 예의상 거절 같은 건 안 하지."

"거절했는데 다시 안 권하면 나만 손해잖아!"

"이 감자탕은 네가 사라."

"당연하지. 표 받은 값은 해야지!"

***

차우진이 이튿날 딥어스테크에 들렀다가 곽민지를 만났다.

"아저씨!"

"너 학교 안 가냐?"

"지금 저녁때인데요?"

"아. 그렇지."

"앗! 아저씨한테 줄 게 있는데!"

"네가?"

곽민지가 스마트폰으로 티켓을 보여주었다. KMTV 방송국에서 하는 합동 공연 공개방송 티켓이었다.

"이거 드릴까요?"

차우진이 물었다.

"혹시 너도 여기서 노래하냐?"

"히히. 네."

차우진은 왜 LPP 엔터에 관계자용 표가 있는지 깨달았다.

곽민지의 드라마 OST는 LPP 엔터를 통해 유통했다. 그 드라마는 KMTV에서 만들었다. 이 합동 공연을 주최한 곳도 KMTV다.

"넌 정식으로 데뷔한 게 아닌데 왜 초대하지?"

곽민지는 드라마에서 고등학생 가수 역할로 잠깐 나오고 노래도 불렀지만, 정식으로 활동하지는 않는다. 평소에는 그럴 시간에 학교에 다닌다.

"근데도 불러주네요? 출연할 사람이 없나?"

"하려는 사람 많을걸?"

"여기 가서 연예인 많이 봐야지."

"너도 연예인이야."

곽민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제가요? 에이. 전 아니죠. 어쩌다 방송에 잠깐 나간 건데요."

"나한테 이미 그 공연 표가 왔더라."

"앗. 방송국이 센스가 있네요!"

"방송국이 아니라 LPP 엔터에서 보내주더라. 근데 난 그거 친구 줬다. 이런 건 별로 관심이 없어서. 너도 친구 줘라."

"엥? 왜 이런 데 관심이 없어요? 아저씨는 노래 잘 만드시잖아요."

"몇 번을 말하냐. 그 노래는 민지가 만들었다니까."

"제가 민지인데요?"

"그러니까 네가 만들었지."

***

도인선 기자가 차우진을 찾아왔다.

"KMTV 방송국에서 하는 공개방송이 있는데요."

"합동 공연?"

"어머. 아시는구나. 아이돌 공연 좋아하시나 봐요?"

"친구가 그거 보러 간다고 설쳐서요."

"그렇구나. 그럼 차우진 씨도 보러 오실래요? 표가 한 장 남는데."

차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표 구하기 어렵다던데?"

"오빠가 방송국에 복직했어요."

"기억상실증은?"

"이제 다 회복됐어요. 그래서 다시 KMTV 방송국에서 기자로 일해요."

"표 남으면 줘요. 친구가 하나 더 필요하다고 해서."

***

정예지가 차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뭐해?

"혹시 예지 씨도?"

- 뭐가?

"KMTV 방송국 주관 합동 공연?"

- 앗! 우진 오빠. 그런 거 좋아해? 말을 하지! 내가 표 구해줄까? 주변에 찾아보면 표는 받았는데 안 가는 사람 있을걸?

"이미 준다는 사람이 많다."

- 어떤 년이야!

"민지?"

- 민지는 그래도 되지.

"도인선 기자?"

- 그런 스타일 좋아해?

"그 표는 친구 줬다."

정예지가 콧소리를 냈다.

- 흐응. 오빠는 안 가는구나. 나도 목동 공개홀이라서 안 가려고 했어. 세종문화회관이면 내가 갔다.

"어? 목동 공개홀? 거기 무너졌잖아."

- 무슨 소리야? 거기가 왜 무너져?

"어? 잠깐. 창수 형이 분명히…."

차우진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 그거 여기서는 아직 아니지."

- 응?

"꿈에서 봤어. 거기 무너진 거."

175. 공개홀 II

박창수가 무너진 콘크리트 엄폐물 뒤에서 자동소총의 탄창을 교환하며 말했다.

"우진아. 여기가 옛날에는 목동 공개홀이었다는 거 아냐? 여기서 방송국이 공연 많이 했는데."

그의 옆으로 총탄이 날아갔다. 총탄 중에는 엄폐물을 때리는 것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콘크리트 파편이 튀었다.

차우진이 옆쪽 엄폐물에서 물었다.

"저 새끼들은 총알이 남아도나. 가본 적은 없어. 그런 공연에는 별로 취미가 없어서."

"난 여기 가끔 갔다."

차우진이 엄폐물 너머로 몇 발 갈긴 후에 다시 몸을 숨기며 말했다.

"형은…. 아이돌을 참 좋아하더라."

"너 방금 빼먹은 말이 있는 거 같다?"

"표 나?"

"너 지금 내 얼굴 이야기하려고 했잖아."

"표 나네."

"야 이. 그땐 나도 젊었다고. 그리고 나 정도면 괜찮았지."

"우리 서로 사기는 치지 말자."

적이 수류탄을 뽑아서 던지려 하는 기척이 감지됐다.

차우진이 즉시 몸을 일으켜 적을 향해 한 발 쏘고 다시 엄폐물 뒤로 숨었다. 총탄이 소나기처럼 날아왔다.

저격당한 적은 수류탄을 쥔 채로 자빠졌다. 적진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차우진이 물었다.

"형의 최애 가수인 민지 공연도 보러 갔어?"

"아니. 민지가 활동할 때는 이미 여기가 무너진 후였어. 한참 후였지."

적진 한복판에서 수류탄이 폭발했다. 땅이 진동하는 느낌이 그들이 있는 곳까지 전해졌다.

박창수가 말했다.

"난 여기 공개홀이 무너져서 참 아쉬웠다. 여기서 볼만한 공연을 가끔 했거든."

"여기는 멸망 초기에 무너졌어? 아니지. 민지 데뷔보다 먼저면 훨씬 더 이전이겠구나."

"어. 멸망 10년 전이다."

수류탄이 적진 한복판에서 터진 것 때문에 적의 사격이 줄어들었다.

차우진이 자동소총의 탄창을 교체했다.

"공개홀은 왜 무너졌는데?"

"연예인 스토커의 일그러진 팬심이거나."

"스토커가 공개홀을 무너뜨린다고?"

"아니면 테러."

"이유를 몰라?"

"사건이 두 개야. 멸망 10년 전에 방송국에서 주관한 아이돌 합동 공연이 있었어. 그런데 아이돌 그룹이 공연하는 도중에 무대가 날아갔다. 그것도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멸망 10년 전에 그랬으면 난리가 났겠네."

"난리가 났지. 목동 공개홀도 한동안 폐쇄됐어."

"폐쇄만 한 거 보면 그때는 무너지진 않았나 보네?"

"그때는 무대만 망가졌지."

"형은 그때도 갔었고?"

"아니. 난 그때는 안 갔다."

"그럼 언제 무너진 거야?"

"반년 후에 다시 문을 열었어. 그리고 재개장 기념 공연을 하는데, 그때 건물이 날아갔다."

"테러 맞나 본데?"

"그렇게 의심되는데, 다 무너져서 단서가 사라졌어. 누가 그랬는지, 목적이 뭔지가 밝혀지지 않았다."

적 진영에서 다시 총알이 날아왔다.

"테러라면 이가 갈리는데."

"그치. 멸망 초기에 안 그래도 힘든데 그놈들 때문에 얼마나 많이 갈려 나갔냐."

"혹시 그 멸망급 빌런 새끼 짓인가?"

"그건 아니지. 목동 공개홀이 무너진 건 멸망 초기에서 10년 전이니까. 그 새끼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훨씬 더 후잖아."

"하긴. 아니겠네."

적의 사격이 더 거세졌다. 적의 움직임도 적극적으로 변했다.

박창수가 말했다.

"수류탄이 옆에서 터지니까 독기가 올랐나 보다."

차우진이 자동소총을 박창수에게 던졌다. 박창수가 그 소총을 턱 받았다.

차우진은 쌍권총을 꺼냈다.

"스킬 에너지 충분히 모았다. 거리 충분해. 내가 저놈들 뒤로 점프할 테니까."

박창수가 자동소총 두 정 중 하나를 언제든지 집을 수 있게 옆에 놓았다. 그러면 탄창을 교환하는 것보다 빠르게 총기를 교체할 수 있다.

"그럼 어그로는 내가 끌어야지."

"셋. 둘. 하나."

박창수가 조그마한 방탄 방패와 함께 몸을 일으키며 적을 향해 자동소총을 난사했다.

"우와아아!"

적의 총탄이 즉시 몸이 노출된 박창수를 향해 쏟아졌다. 방탄 방패에서 불꽃이 요란하게 튀었다.

차우진이 그 장소에서 사라졌다.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의 목표가 평소보다 멀었다.

그래도 여전히 단거리 이동이지만,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차우진이 적의 뒤쪽에 나타났다.

앞쪽에서 분대 병력이 박창수를 향해 사격했다. 바닥에는 이미 여덟 놈이 쓰러져 있었다.

이놈들은 한강 근처에 자리 잡은 생존 커뮤니티를 습격한 약탈자들이다.

그 약탈자 중에도 스킬 각성자가 있었다. 그는 차우진이 공간을 이동하자마자 그 기척을 느끼고 뒤로 돌아섰다.

차우진과 적 각성자의 눈이 마주쳤다. 적이 소리를 질렀다.

"뒤…."

차우진이 쌍권총의 방아쇠를 동시에 당겼다.

"늦어."

총탄이 적 각성자의 상체를 노리고 날아갔다. 적 각성자가 옆으로 점프해 피하려 했다.

차우진은 쌍권총을 쓰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두 발을 발사했다.

적이 몸을 날린 방향으로도 총탄이 한 발 날아가 몸통에 꽂혔다.

"컥!"

"늦다고."

다른 놈들이 뒤늦게 문제를 인식하고 몸을 돌리려 했다.

차우진이 옆으로 뛰며 쌍권총을 난사했다.

맞은 편에서 박창수도 연발로 총탄을 쏟아냈다.

약탈자 부대는 양쪽에서 날아온 총알에 갈려 나갔다.

***

차우진이 그때 일을 생각했다.

'창수 형은 그 멸망급 빌런의 테러는 아닐 거라고 했지만….'

그 테러 빌런의 본격적인 활동기는 몇 년 후다. 멸망 초기에는 멸망급 테러까지 저지른다.

'이젠 그놈이 아니라고 생각 못 하겠는데? 레드 크리스털도 알려진 것보다 빨리 퍼졌으니까.'

블러드 크리스털의 재료인 레드 크리스털이 본격적으로 퍼지는 것도 몇 년 후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차우진은 얼마 전에 그걸 만드는 놈들을 발견했다. 블러드 크리스털을 없애기 위해 국내 협력자 백희선도 처리하고 체코에 가서 스컬스와 박사도 제거했다.

'쿠에르노도 이미 움직이고 있으니까.'

멸망급 사건들의 초기 활동은 멸망 초기에 알려진 것보다 일찍 시작됐다.

'그러니까 이번 일도 그 빌런의 테러와 관계가 있을 수 있어.'

물론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인할 필요는 있다.

휴대폰에서 정예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우진 오빠. 무너진다는 게 무슨 소리냐니까?

"목동 공개홀이 무너지는 꿈을 꿨어. 그래서 잠깐 착각했다."

- 꿈을 꿔? 낮잠이냐? 팔자 좋다?

"예지 씨도 놀지 않나?"

- 난 스케줄 꽤 있거든? 자기 관리도 해야 하고. 그러고 보니까 우진 오빠는 스포츠센터 어디 다녀?

"동네 약수터?"

- 어? 왜?

"공짜라서?"

- 아니, 그게 왜 이유…. 아니지. 그러면 말이야.

정예지가 밝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 나랑 같은 데 다닐래? 여기가 배우나 방송 관계자만 받는 곳이라서 남의 눈 신경 안 쓰고 다니기 좋아.

"원래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 난 일반인이잖아. 그리고 관계자만 받는 곳에 내가 왜 가?"

- 오빠 정도면 관계자 맞는데?

"난 아니라고 본다."

정예지가 포기하지 않고 꼬셨다.

- 여기 시설 진짜 좋아. 첫 달은 내가 쏠게!

"그 좋은 곳에서 운동 열심히 해라."

- 와. 이 바위처럼 굳센 놈.

"왜 또 욕이야?"

- 욕인 건 알아?

"나 바쁘다. 끊어."

차우진이 전화를 끊은 후에 생각했다.

"창수 형이 말한 게 이 공연 같은데."

그 공연이 오늘 이 공연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박창수는 올해 방송국 주최 연합 아이돌 공연에서 사건이 터진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공연은 일 년에 한 번만 하는 게 아니다. 다음 달에 그런 공연이 또 있을 수도 있다. 이번이 아니라 다음 공연에서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래도 대응은 해야지."

차우진이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이번 공연을 보러 간다. 그 사람들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다.

"전부 연락해서 다른 데서 놀자고 꼬시는 방법도 있지만."

곽민지는 가수로 초대받았지만, 사건이나 사고를 만들면 곽민지 하나쯤은 빼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다른 관객이나 가수들은 여전히 위험에 노출된다. 몰랐다면 모를까, 그 사건이 기억났는데 모른 체할 수는 없다.

"공개홀 쪽에 전화로 경고하는 건…."

뭐라고 경고해야 하는지 모른다. 이번에는 헛다리일 수도 있다.

더 문제는, 범인이 들켰다는 걸 깨닫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경우다.

지금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만, 범인이 다음 기회를 노리고 방법까지 바꾸면 대비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목동 공개홀에 가서 현장을 확인하는 게 최선이다.

"가야겠네. 목동 공개홀에."

***

차우진은 일하러 가기 전에 이선정 박사를 만났다. 그녀는 멸망급 재난인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약을 다른 병에 쓰려고 개발하는 중이다. 그 약이 멸망급 바이러스의 치료제로도 쓰이는 건 지금은 예상할 수 없다.

그녀가 자랑했다.

"연구가 막혔던 부분이 있었는데, 해결했어요. 조만간 좋은 결과가 나올 거예요."

"잘됐네요."

"하은 씨가 많이 도와줬어요."

손하은이 옆에서 손을 흔들었다.

"저는 실장님이 시키신 대로만 한 거예요. 아직도 원리를 다 이해 못 했는데요."

차우진이 물었다.

"임상 준비는요?"

이선정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SL 제약이랑 이야기하고 있어요. 연구가 다음 단계도 성공하면 SL과 진행할 거예요."

"거기서 이선정 박사님을 속이진 않겠지만, 혹시 연구 방향에 간섭하려 하거든 절대로 양보하지 말아요."

"네?"

"이건 이선정 박사님이 생각한 그대로 개발해야 합니다."

"아. 그건 당연하죠."

차우진이 본론을 꺼냈다.

"액체비료에 쓰는 첨가제가 있습니다. 아직 개발 중인 물건입니다. 식물용 비타민 같은 거지요."

"어머. 그런 것도 있구나."

"그런데 이게 보급되면 전 세계 농업 생산량을 박살 낼 것 같다는 걱정이 듭니다."

"네?"

"그래서 이선정 박사님이 좀 봐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농사는 아는 게 없는데…."

차우진도 안다. 그런데도 이선정 박사에게 물어보는 건, 멸망 초기의 전문가들이 그녀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한 분야의 천재는 다른 분야에서도 특별할 수 있으니까….'

"그냥 의심 가는 거나 참고할 만한 거라도 좋습니다. 뭐라도 찾아주시면 나머지는 연구팀에 맡기겠습니다."

"일단 보기는 할게요. 하지만 기대는 마세요. 저는 비료는 잘 몰라서요."

***

SL 제약 성혜리 대리는 평소에는 홍보팀에서 근무한다. 분석팀은 추가근무 개념이라서 평소에는 홍보팀 일도 해야 한다.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다. 다들 일이 늘었다.

홍보팀 동료가 물었다.

"성 대리는 분석팀 일까지 하려면 힘들지 않아? 그쪽은 이제 빠져도 되잖아."

"어머. 뭐지? 내 자리를 노리나?"

"응? 아니. 왜 사서 고생하나 해서."

"스릴이 있거든."

분석팀 팀원들은 아무도 분석팀에서 빠지려 하지 않았다. 회사에는 법무팀 윤병수 대리처럼 분석팀에 자리가 나기만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홍보팀에서는 SL 제약의 새 CF를 준비하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됐다.

성혜리가 제안했다.

"우리 이번 CF요. 차 이사님한테 자문을 부탁드릴까요?"

과장이 물었다.

"차우진 이사님?"

"네."

"유니콘 이사님을 왜 우리 CF에…."

"유니콘이요?"

"그런 분이 회사에 계신다는 건 아는데, 힘이 있다는 것도 아는데."

"근데요?"

"얼굴 아는 사람도 몇 명 없고 뭘 하시는지도 모르는 환상 속의 이사님이잖아. 그래서 별명이 유니콘 이사님이야."

"이번 기회에 한 번 만나보세요."

"그런데 그분이 CF에 대해 아시는 게 있을까?"

성혜리는 차우진이 연예계 관계자들과 일하거나 만나는 걸 몇 번 봤다.

"잘하실 걸요? 음악이나 영상 쪽으로 조예가 깊거든요."

"클래식?"

"대중음악이요."

과장이 관심을 보였다.

"그래? 그럼 이번에 실세 이사님을 빽으로 두고 일해볼까? 그런데 시간이 되시려나? 되게 바쁜 분이라 회사에도 자주 안 오신다던데."

"도와주실 수 있는지 지금 전화해볼게요. 제가 친하거든요."

성혜리가 차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 이사님. 우리 회사 CF 제작 회의 중인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주시면 안 돼요?"

- 난 지금 일하느라 바쁜데요.

"무슨 일인데요? 중요한 일이에요?"

- 전기 공사요.

성혜리는 당황했다.

"네? 그걸 왜…. 지금 어디신데요?"

- 공연장 무대 세트에서 전선 깔고 있습니다.

"아니, 왜요? 그걸 왜 직접 하세요?"

- 알바?

"네?"

차우진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게 들렸다.

- 아니, 저 사람이! 거기 선 밟지 말라고! 내가 지금 바빠서. 나중에 전화해요.

"자, 잠깐만요. 차 이사님. 차 이사님?"

전화가 끊어졌다.

과장이 물었다.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는데 그렇게 당황해?"

성혜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그, 우리나라 문화 산업을 위한 주, 중요한 일이요. 나중에 다시 전화하기로 했어요. 나중에."

***

차우진이 공개홀 무대에 설치된 전기 시설을 점검했다.

이 일자리를 얻는 건 쉬웠다. KMTV 방송국에는 차우진의 실력을 아는 사람이 많았다.

차우진은 현장에서 작업하면서 전기 쪽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했다.

"문제는 많은데…."

그가 직접 처리할 수 있는 건 미리 고쳤다. 일이 커지는 건 책임자에게 말해 고치게 했다.

"테러로 이용될 만한 장비 조작이나 부비트랩은 안 보인단 말이야. 그럼 이번 공연이 아닌가?"

176. 공개홀 III

차우진이 목동 공개홀 건물을 조사했다. 그중에서도 공연이 있는 공개홀 내부 무대 쪽은 철저히 확인했다.

차우진이 담당한 전기 쪽 외에도 문제가 곳곳에서 발견됐다.

멸망한 세계는 자원이 부족했다. 철광석을 녹이는 제철소는 이미 파괴됐다.

생존 커뮤니티들은 금속 부품이 필요할 때는 대장간에서 예전에 만들어진 쇠를 녹여서 만들었다.

그런데 그 대장간 화덕의 연료로는 보통 석탄이나 기름이 사용됐다. 그건 귀했다. 당연히 금속 부품은 많이 만들 수 없었다.

그런 세계에서도 상대적으로 흔한 자원이 있었다. 나무였다.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에서 나무를 많이 다뤄보았다. 필요한 물건은 어지간하면 나무로 만들곤 했다.

그 경험 덕분에 공개홀 무대의 목공에서 사고 위험이 있는 결함을 여럿 발견했다. 그런 건 재작업을 요구했다.

목공만 개입한 게 아니다. 다른 문제점들도 사고 위험이 있으면 지적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공사 관계자 두 명이 차우진을 찾아왔다.

"어이. 너. 뭐 하자는 짓이야?"

"뭐가?"

남자가 주먹을 흔들며 화를 냈다.

"뭐가? 이 새끼가 건방지게!"

차우진이 주변을 확인했다. 보는 사람이 없었다.

"일부러 아무도 없을 때 나를 찾아온 건가? 그래. 그건 됐고, 용건이 뭐야?"

상대가 욕을 내뱉었다.

"야 이 새끼야. 왜 남의 일에 신경 써? 네 일이나 해!"

"남의 일이라…."

차우진은 전기 공사를 위해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다. 이 공개홀 세트장 공사에는 그런 식으로 외부 업체들이 꽤 들어와서 작업했다.

차우진이 욕하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디 보자. 목공 담당 업체 중 하나네? 무대 위쪽 지지대를 대충 만들어놨던데, 그러다 거기 달아놓은 조명이 떨어지면 사람이 죽어."

"지금까지 그렇게 해도 아무도 안 죽었어. 바쁜 데 그렇게라도 해야지! 다들 그렇게 해!"

"사람을 조금 써서 인건비 아낀 건 아니고?"

"이 새끼가 건방지게!"

업체 사장이 차우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차우진이 그 손을 툭 잡아 꺾었다. 사장이 곧바로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악! 소, 손!"

"버티지 마라. 손목 부러진다."

"으아…."

같이 온 놈은 당황했다. 그가 뒤늦게 달려들려고 했다.

차우진이 손목을 조금 더 꺾으며 업체 사장에게 경고했다.

"저놈이 나 붙잡으면 네 손목 부러진다?"

"뒤, 뒤로 가! 오지 마!"

차우진이 물었다.

"너희 업체가 맡은 일은 네 명이 해야 할 분량인데, 두 명이 하더라? 다른 두 명은 어디 있냐?"

"처, 처음부터 두 명 인건비만 받았어!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러냐. 그러면 나머지 인건비는 누군가가 드셨겠네?"

차우진은 예전에 전기 공사를 할 때도 그런 일을 수두룩하게 보았다.

"방송국에서 처음부터 후려친 거냐? 아니면 원래는 예산이 제대로 나왔냐?"

"고, 고 팀장이…."

"고 팀장?"

"KMTV의 이번 행사 담당 팀장인데 예산이 그만큼만 나왔다고…."

"고 팀장이 말만 그렇게 하고 중간에서 먹었을 수도 있겠네?"

차우진이 손을 놓았다.

업체 사장이 손목을 잡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는 일단 거리를 띄운 후에 경고했다.

"너 이 새…. 고 팀장한테 찍히면 너 쫓겨나. 그러니까 간섭하지 말고…."

"가라. 보내줄 때."

두 놈이 허겁지겁 사라졌다.

***

고 팀장이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그의 차에는 삼각뿔이 달려 있었다.

그가 그 차를 타고 퇴근했다. 그런데 그가 가는 곳은 집이 아니었다. 룸살롱이었다.

차우진이 그걸 보며 말했다.

"돈도 받고, 접대도 받고. 챙기는 게 많겠어."

***

차우진은 이번에는 딥어스테크 조사팀을 움직였다.

비서실 소속인 조사팀원 송미소가 보고했다.

"그날 공개홀 행사 담당 보안업체도 인맥으로 섭외됐어요."

"업체 등급은?"

"C급이에요. 그런 행사를 관리하기엔 부족한 등급이죠."

"실력 좋은 놈이 공개홀에 침투하는 건 못 잡겠군요."

"아마도요."

"보안업체를 선택한 담당자가 고 팀장입니까?"

"아니요. KMTV의 김윤식 과장입니다."

차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KMTV는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엉망이구나. 하긴. 그러니까 용구 같은 놈이 설쳤겠지."

송미소가 그 말을 듣고 물었다.

"용구라면, 최용구 말씀이세요?"

"압니까?"

"뉴스에서 봤으니까요. 백희선에게 매수돼서 기사도 써주고 정보도 물어주다가, 서로 총으로 쏘고 칼로 찔러 죽였잖아요."

"맞습니다. 그랬지요."

차우진이 판을 깔긴 했지만, 백희선과 최용구가 서로를 죽인 건 사실이다.

송미소는 그 외에도 공개홀과 관련된 몇 개의 비리를 더 찾아내 알려주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조사팀 능력이 좋군요."

딥어스테크 비서실의 송미소가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회사도 예전에 그런 비리가 워낙 많았잖아요. 그래서 비서실에 노하우가 많아요."

"그거 주도한 사람들은 잘렸을 텐데."

"대신에 밑에서 일한 사람들은 구제됐잖아요."

차우진은 위에서 시켜서 한 경우는 간단한 징계만 하고 넘어가자고 했다. 그래서 비서실에는 차우진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송미소가 설명했다.

"도둑질도 해 본 사람이 잘한다잖아요. 우리 회사에 이런 식으로 받아먹은 사람이 많아서, 목동 공개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알더라고요."

***

공개방송 당일에 차우진이 공개홀로 출근했다.

KMTV에서 주최하는 이 특집 공개방송에는 아이돌 여러 팀이 초대됐다.

곽민지도 오늘 노래를 부른다. 그녀가 대기실 쪽으로 걸어가다가 차우진을 발견했다.

"앗! 아저씨가 왜 여기 있어요?"

차우진은 임시 직원 표시를 옷에 붙이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알바 하는 중이다."

"전기 공사 알바요?"

"그건 어제까지. 오늘은 현장 안내 알바야."

곽민지가 입맛을 다셨다.

"아저씨는 월급도 받고 이것도 하니까 돈 많이 받으시겠다. 그럼 끝나고 소고기 막 사주셔도 돈 남겠다."

"네가 소고기 맛을 보더니 이제 떡튀순은 뒤로 밀렸구나."

"히히."

"오늘은 어려울 거 같고, 주말에 세나랑 와라."

"넹!"

"근데 너 말이야."

"네?"

차우진은 이미 무대 밑까지 샅샅이 수색했지만 수상한 건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무슨 돌발상황이 생길지 모른다.

"오늘 공연에서 빠지고 지금 집에 가는 건 어렵겠지?"

"안 되지 않을까요? 공연 순서 다 잡혀 있는데."

"그래. 그렇겠지."

"앗! 저 가야 해요!"

차우진이 뛰어가는 곽민지를 보며 생각했다.

"창수 형은 솔로 가수가 아니라 아이돌 그룹이 공연할 때 무대가 날아갔다고 했는데…."

곽민지는 그룹이 아니라 솔로 가수다. 게다가 멸망한 세계에서는 이 공개홀에서 노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아이돌이 여러 팀인데, 범인은 그중 누구를 노리는 거지?"

오늘 공연은 출연하는 팀이 많아서 현장이 혼란스러웠다. 차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C등급 보안업체라 그런지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네. 이러면 몇 놈 침입해도 모르겠는데?"

차우진이 내부를 계속 조사하러 다녔다. 그가 연예인 대기실 앞을 지나갈 때 로드 매니저 장태호가 차우진에게 손짓했다.

"어이. 거기. 안내."

장태호가 만 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가서 커피 좀 사와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여섯 잔. 내가 지금 우리 가수들 관리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거면 커피를 참으셔야지."

"뭐요?"

"내 일도 아닌 데다가, 내가 바빠서."

장태호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 내가 누구 매니저인지 모르나 본데!"

차우진이 고갤 갸웃했다.

"누구 매니저인지 모르냐니? 본인은 이름이 없나?"

장태호가 차우진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뭐? 야. 너 지금 감히. 이 상황 감당할 수 있겠어?"

차우진이 그 손가락을 덥석 잡았다.

"손가락 확 부러뜨려버린다?"

"어? 어? 으아아…."

차우진은 며칠 전부터 이곳에서 수상한 시설이나 사람, 단서를 찾느라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성과가 없었다.

그래서 짜증이 좀 났는데, 시비를 거는 사람이 나왔다.

의심도 들었다.

"너 진짜 매니저 맞아?"

"마, 맞…."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다른 매니저가 나왔다.

"야. 커피 사 오라니까 이게 무슨 소란이야?"

"실장님. 그게 아니라…."

"응? 손가락은 왜 잡고 있어? 아는 사람이야?"

차우진이 손가락을 놓았다.

"나한테 커피 사 오라고 시키던데, 그걸 시킨 사람이…."

차우진이 대기실 문에 붙어 있는 종이를 확인했다.

"블루퍼핏인가?"

실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차우진의 옷에 붙어 있는 안내 직원 표시를 보더니 로드 매니저 장태호에게 욕을 했다.

"너 이 새끼. 방송국 관계자한테…."

"아니, 관계자가 아니라 안내…."

"안으로 들어가!"

"예!"

장태호가 들어가자 실장이 방문을 닫은 후에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저 새끼, 아니, 저 친구가 연예 기획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어깨에 뽕만 찼지 개념이 부족합니다."

"그래 보이네요."

"네?"

"원래 그런 사람인 걸 회사에서 채용할 때 걸러내지 못했나 봅니다. 인사팀이 일을 안 하나 보네요."

"하, 하하."

실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기실로 들어갔다. 곧바로 화를 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 이 새끼! 너 때문에 내가 체면이…. 방송국에는 이미지 관리를 해도 모자랄 판에 욕먹을 짓을 하고 다녀? 그러다 안 좋은 소문이 방송국에 퍼지면…. 야! 박아!"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걸어갔다.

"어휴. 하마터면 오늘 블루퍼핏은 나랑 싸우다가 무대에 못 올라갈 뻔했네. 그럼 수연이가 실망했겠다."

차우진이 공연장을 확인했다. 다시 점검해도 마찬가지였다.

"무대 시설에는 조작한 흔적이 없단 말이야."

차우진이 모든 걸 확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무대 주변에는 치명적인 문제는 없었다. 그나마 있던 문제들은 차우진이 이미 찾아내서 고치게 했다.

"디데이가 오늘 이 공연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으니까, 실시간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겠다."

민수연은 차우진이 준 표를 가지고 공연장에 들어왔다.

민수연이 활짝 웃었다.

"우진이가 밥 먹을 때랑 집에 전기 공사 할 때 말고도 도움이 될 때가 다 있다니."

오늘은 차유리가 그녀와 같이 공연을 보러 왔다.

두 사람의 자리는 무대 앞쪽이다. 그래서 민수연은 무대 근처에서 돌아다니는 차우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유리 언니. 저기 우진이다."

차유리도 그쪽을 보았다.

"오늘 알바 간다더니 여기 왔나?"

"여기에 알바 자리 있으면 나도 데려가 달랬더니 혼자 왔네? 그러면 오늘 일당은 혼자 받을 테니까…."

"그걸로 저녁 사라고 하자."

"역시 언니는 척하면 척이라니까."

차우진도 두 사람을 발견했다.

"아니. 수연이가 오는 건 알았는데, 누나는 왜 같이 오는데."

왜 같이 왔는지는 곧바로 깨달았다.

"아. 내가 표를 두 장 줬지."

공연이 시작됐다.

가수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이 소리를 질렀다.

두 팀이 먼저 공연한 후에 곽민지가 무대에 올라왔다.

관객석 뒤쪽에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민지야아악!"

차유리가 뒤를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뭐야. 저 고릴라는."

곽민지는 오늘은 게스트로 참석했다.

"안녕하세요. 민지입니다. 제가 왜 여기 있고 저는 누구인지 막 헷갈…."

곽민지가 이어폰에 손가락을 댔다.

"앗! 빨리 노래하라고 하시네요. 시작할게요!"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인 후에 노래했다.

드라마 '친구와 연인 사이'의 마지막 화에 나왔던 노래였다.

차유리가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나 쟤 드라마에서 봤다? 쟤 노래 엄청 잘해."

민수연도 동의했다.

"진짜 잘하네."

곽민지는 게스트라서 노래를 한 곡만 부르고 내려갔다.

그 뒤에 남자 아이돌 팀인 블루퍼핏 무대에 올라왔다.

민수연은 오늘 블루퍼핏 때문에 이 공연을 보러 왔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오빠!"

블루퍼핏 멤버들보다 민소연의 나이가 더 많았다.

상관없었다.

"오빠! 꺄악!"

차유리도 바로 옆에서 악을 썼다.

"오빠악!"

차우진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와.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친구랑 누나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어디서 창수 형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아니겠지. 창수 형은 지금 시기에는 여기 안 왔다고 했으니까."

차유리가 관객석 앞쪽에서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오빠악!"

차우진이 무대 앞을 빠른 속도로 벗어났다.

"저건 모르는 사람인 척하자."

177. 발견

4인조 남자 아이돌 블루퍼핏은 인지도도 좀 있고 팬도 어느 정도는 있다. 그렇지만 잘나가는 그룹과 비교하면 격차가 컸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무대를 뛰어다녔다. 피땀을 흘리며 연습한 고난도 춤을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보여주었다.

차우진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무대는 저렇게 뛰어다녀도 안 무너지는 건 확인했는데…."

일부러 며칠간 여기서 일하면서 누군가 무대에 수작을 부린 건 없는지 확인했다. 조명도 점검했다.

심지어 무대 주변 쓰레기통도 다 뒤졌다.

"그럼 오늘은 디데이가 아닌가?"

박창수는 올해 합동 공연 공개방송에서 누군가 아이돌 팀을 노리고 무대를 날려버린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이번 공연인지는 모른다.

차우진이 뒤로 돌아섰다.

"괜히 며칠 고생했네. 나도 무대 주변이나 확인하면서 공연이나 즐기다 가야겠다."

차우진이 무대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가는 쪽에 블루퍼핏의 매니저가 보였다.

그는 오늘 블루퍼핏의 매니저를 두 명 봤다. 로드 메니저는 차우진에게 시비를 걸었다.

지금 보는 매니저 실장은 시비가 붙은 건 아니다. 그래서 차우진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매니저도 무대에 집중한 상태라서 차우진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가 무대 주변을 점검하며 움직이다가 로드 매니저 장태호를 발견했다. 그는 아까 차우진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켰었다.

"음?"

장태호는 한쪽 구석에서 무대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웃어?"

웃는 게 문제가 아니다. 어떤 웃음인지가 문제였다.

차우진이 장태호의 시선을 확인했다.

'무대만 보는 게 아니라, 매니저 실장까지 보면서?'

로드 매니저 장태호가 양쪽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

'아까 욕을 그렇게 처먹고 바닥에 머리까지 박았는데 웃음이 나와?'

그런 걸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성격이면 웃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아까 그런 식으로 커피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다.

차우진이 장태호의 눈빛을 확인했다. 웃고는 있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장태호가 실실 웃으며 무대 뒤로 사라졌다.

차우진이 무대 뒤로 따라가며 대충 불렀다.

"어이."

로드 매니저 장태호가 뒤를 휙 돌아보다가 차우진의 얼굴을 확인하고 인상을 썼다.

"아. 커피."

"아직도 사람을 커피 취급하네?"

"용건 없으면 가. 바쁘다."

"왜 바쁠까? 어디 가게?"

"회사에 일이 많다."

"이상하네. 아까랑 다르게 묘하게 대답도 잘 해주고…. 뭘 숨기고 있냐?"

장태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가 펴졌다. 그가 어색한 얼굴로 사과했다.

"이봐. 아까 일 때문에 그러는 거지? 미안하다. 됐지?"

차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과가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런데 사과를 했다는 것 자체가 거슬렸다.

"더 이상해. 사과할 성격이 아닌 듯한데, 너무 쉽게 사과한단 말이야."

사람들이 그들의 주변을 지나갔다.

장태호가 그 사람들을 쓱 본 후에 말했다.

"미안하다니까 그러네. 나 바빠서 가야 하니까 그만합시다."

"음…."

차우진은 의심은 들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다. 공개홀 무대를 버려두고 장태호만 따라다닐 수도 없다.

장태호가 다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차우진이 따라오지 않는 걸 보고 피식 웃으며 계속 걸어갔다.

차우진이 장태호가 모퉁이를 돌아가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차유리가 전화를 받았다.

- 아, 왜!

"누나. 일 하나 해라."

- 닥쳐! 나는 놀 거다!

"무대 뒤로 들어오게 해줄게. 운 좋으면 지금 노래하는 걔들을 만날 수도 있어."

- 내가 뭐 하면 되냐? 말만 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