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흑랑 클랜 (1).
1.
'3분.'
김지운, 그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은 머리 위로 유리룡이 지나가고 3분이 지났을 때였다.
짤막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게 만약 전투 중이었다면, 김지운이 평생 은퇴를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었다.
'이 정도로 강렬한 포스를 느낀 것은 오랜만이군.'
이게 바로 어비스의 상위 몬스터들이 내뿜는 포스였다.
이건 어떻게 방어가 되는 게 아니었다.
포스, 표현처럼 그냥 절대적인 힘이었다.
그나마 이 포스를 버틸 방법은 최대한 노출되는 양을 줄이는 것, 그것뿐이었다.
김지운이 이영후와 강현중에게 최대한 막힌 공간으로 숨으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노출도를 낮추는 것.
귀와 눈을 감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 덕분이었다.
"으으으, 으으으!"
지금 김지운의 옆에 있는 강현중이 기절한 채 신음만 흘릴 수 있었던 것은.
'그대로 노출됐으면 끝장났겠군.'
만약 옥상에서, 그 어떤 보호도 없이 정면으로 노출됐다면 신음을 흘리거나 기절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심장이 터졌을 테니까.
이게 어비스의 무서움 중 하나였다.
"강현중, 일어나라."
그렇게 김지운이 강현중을 흔들었고, 그의 뺨을 두드렸다.
"으으, 으으."
"정신 차려라."
신음을 흘린다는 것은 깊게 기절한 건 아니라는 의미.
"강현중."
그런 김지운의 거듭된 자극에 강현중이 차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눈을 떴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사냥감을 발견한 살쾡이처럼 번뜩였다.
그 눈동자로 김지운을 노려보더니 이내 김지운을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풀렸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강현중, 그는 특수부대 중에서도 매우 힘들고 고약한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의 군인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목숨이 경각에 다다르거나 위험한 순간 어느 때보다 살기가 넘치는 반응을 보이도록 훈련을 받은 자였다.
갑작스럽게 기절을 했다 일어났을 때 이렇게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이었다.
물론 그는 상황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에게 김지운은 설명을 해줬다.
포스에 대해서.
사실 예전에 이영후가 강현중에게 어비스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서 포스에 대한 것도 말해주긴 했다.
그러나 그때의 설명은 너무나도 많았으며, 결정적으로 체감이 되지 않았다.
강현중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김지운은 초보 헌터들 몇 명에게 포스에 대해 경고했었으나, 그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한 이들은 열 명 중 한 명 정도였다.
강현중 역시 그 아홉 명 중 하나였을 뿐.
"일단 이영후도 도우러 간다."
그렇게 설명을 마친 김지운과 강현중이 층을 내려왔고, 이내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사무용 책상 아래에서 기절한 채 몸을 떨고 있는 이영후를.
김지운이 그를 깨웠고, 그제야 이영후가 정신을 차렸다.
"으으으으!"
깨어난 후에도 이영후는 거듭 몸을 떨었다.
"먹어라."
그런 그에게 김지운이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건네줬다.
김지운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었으나, 이영후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고, 고, 고맙습니다."
지금은 이 떨림을 멈추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초콜릿을 먹고 진정한 이영후가 말을 꺼냈다.
"저기 대장, 그거."
"유리룡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 놈······ 등급이 뭡니까?"
그 질문에 김지운이 대답했다.
"그린 등급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영후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후우, 후우, 후우."
이영후는 유리룡을 본 적이 없었다.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비스의 몬스터나 아이템에 대한 정보 대부분은 헌터들에게도 제공되지 않는 상황에서 관광객들이 그걸 잘 알 리 없었으니까.
단지 그린 등급의 몬스터가 얼마나 가공할 존재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유리룡.'
물론 김지운은 유리룡을 매우 잘 알았다.
'그린 등급 몬스터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강한 놈이지.'
놈의 몸뚱이는 닿는 모든 것을 잘라버리는 날카로운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으니까.
'아홉 명이 죽었지.'
베테랑 헌터들조차 속절없이 토막이 날 만큼 날카로운.
정말 힘든 녀석이었다.
'놈을 잡으려고 하다가.'
김지운이 사냥한 몬스터들 중에서 어려움만으로는 열손가락 안에도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죽을 뻔했네요."
어쨌거나 이곳에 있는 이들 입장에서는 정말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었다.
포스 때문만이 아니었다.
만약 날아가던 유리룡이 63빌딩에 관심을 가졌다면, 이 63빌딩은 정말 1시간도 되지 않아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될 테니까.
'유리룡까지 나왔다는 것은 어딘가에 그린존이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김지운이 더 걱정하는 것은 유리룡의 존재가 의미하는 바였다.
그 사실에 김지운의 표정이 굳었다.
분명 그린 등급의 몬스터들은 그린 존에서만 살 수 있지만, 잠시 동안 외출을 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리고 몇몇 몬스터들은 매우 긴 시간 동안의 외출이 가능하기도 했다.
유리룡이 그랬다.
놈은 안개 밖은 모르지만, 레드존에서 5일 이상 생존했었다.
김지운, 그가 직접 그걸 봤다. 레드존까지 놈을 유인한 다음에 5일에 걸쳐 잡았으니까.
"이 글 아니었으면 진짜 좆될 뻔했네요."
그쯤에서 이영후가 어비스넷을 보며 감탄을 토했다.
여기 나온 공습 경보가 그들의 목숨을 구했으니까.
그쯤에서 이영후가 공지글을 눌렀고, 그 밑에는 무수히 많은 댓글이 달라붙었다.
- ㅇㅇ : 와, 유리룡이라니!
ㄴ qwe : 유리룡 뭔지 앎?
ㄴ ㅇㅇ : 모름.
ㄴ dd : 그게 뭐야? 무슨 색이야?
ㄴ ㅇㅇ : 모르지만 공지글로 급하게 올라올 정도면 보통 놈은 아니겠지.
사실 대부분은 유리룡이 뭔지 몰랐다.
단 한 명.
- 술은맥캘란 : 이거 최소한 맥캘란 30년급 정보인데, 그냥 꽁으로 알려준다. 유리룡은 그린 등급 몬스터다. 몸이 유리로 되어있는데 장난 아니게 날카롭지.
ㄴ ㅇㅇ : 이 미친놈 또 왔네.
ㄴ 술은맥캘란 : 미친년이라니까. 여하튼 믿든 안 믿든 상관없지만 조심하라고. 퍼스트 킬러도 이거 잡다가 뒤질 뻔했거든 ㅋㅋㅋ
ㄴ ㅇㅇ : 게시판이라고 이제 퍼스트킬러도 파네 ㅋㅋㅋ 네가 퍼스트 킬러를 어떻게 알아? 응?
ㄴ 술은맥캘란 : 잘 알지. 걔랑 몇 번을 싸웠는데.
저번에 봤던 익숙한 닉네임 한 명은 아는 모양이었다.
"퍼스트킬러도 힘들었다니, 꼭 이렇게 온라인에서 허세 부리는 새끼들이 존재하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 사실에 불만을 토로하는 이영후에게 김지운은 별 말하지 않았다.
그럴 틈도 없었다.
"대장, 1층이 위험합니다."
강현중이 다급하게 말했으니까.
"고강수가 정신을 잃었다면, 무기를 탈취당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 질문에 김지운은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라."
2.
"내려오셨습니까?"
김지운 파티가 일을 마치고 내려온 63빌딩 1층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아니, 평화로운 건 아니었다.
총을 든 사나운 외모의 덩치 좋은 사내 앞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의자나, 책상 따위로 건물의 출입구를 막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는 광경은 평화와 거리가 멀었으니까.
"일단 입구를 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식량을 체크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쓸모 있는 게 많았습니다. 특히 이곳에 있는 편의점 창고에서 KF94 마스크를 대량 발견했습니다. 재고로 남겨둔 모양입니다."
분명한 건 이곳 어디에도 유리룡이 내뿜은 포스의 영향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에 김지운은 놀라지 않았다.
'이레귤러에는 포스가 닿지 않는다.'
안개가 도리어 포스를 막아준다는 것은 어비스의 헌터들이라면 다들 아는 상식이었으니까.
김지운이 오아시스의 가치를 매우 높게 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안개가 미치지 않은 고층 빌딩과 이레귤러 현상 지역은 결코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더불어 이런 특징이 아니었다면 어비스의 헌터들의 생존율은 지금보다 반의 반이 됐을 터였다.
잠자고 있는 와중에 위로 강력한 몬스터가 지나가면 그냥 숨 쉬다 죽게 될 테니까.
어쨌거나 63빌딩은 빠르게 거점화가 되고 있었다.
설치된 바리게이트는 조잡한 수준이긴 했지만, 의미는 컸다. 이제부터는 각오가 달라질 테니까.
여기 있는 이들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협조를 할 것이다.
고강수가 있는 동안은.
달리 말하면 김지운 파티는 여기서 나누어져야 했다.
이번에 획득한 물자를 가지고 백화점으로 돌아가는 동안 남은 한 명은 이곳에 남아서 관리를 해야 했으니까.
"고강수, 필요한 건?"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한 명이었다.
"총은 필요 없습니다. 잘 쓸 자신도 없고, 괜히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면 제가 위험해집니다."
고강수 역시 기꺼이 그 역할을 맡았다.
"그러니 이 도끼만 주십시오."
그 대답에 김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믿음직한 대답이었으니까.
"만약 이곳에 헌터 무리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도망쳐라."
그렇게 김지운의 마지막 조언을 끝으로 김지운 파티가 집으로 돌아갔다.
3.
김지운 파티가 돌아왔을 때 그들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잔뜩 챙겨온 무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지금 생존자들에게 총을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으니까.
일단 지금 생존자들 중에 총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자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단순히 사격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어비스의 안개에서는 숙련된 특수부대원조차도 제대로 된 사격이 불가능했다.
탄약만 낭비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우려되는 건 돌발행동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열 명 중 아홉 명은 분명 살아남으려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은 한 명이 사고를 쳤을 때 답이 없다는 것.
특히 총이라는 무기는 그 사고를 칠 가능성을 매우 높여줄 뿐더러, 사고의 크기를 상식 밖으로 만들었다.
당장 63빌딩의 이재돌 병장이 그랬다.
이재돌 병장만 아니었다며 63빌딩은 이 아포칼립스에 나름 꽤 좋은 대응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재돌 병장이란 정신병자 한 명 때문에 그곳은 지옥이 됐다.
김지운 일행이 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파멸을 마주했을 것이다.
백화점 지하 1층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지금이야 다들 협조하는 듯하지만, 그 협조는 공포에 의한 협조였다. 그리고 총이란 무기는 그 공포를 망각하게 해주는 힘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해서 김지운은 가지고 온 무기들을 근처에 있는 차량 안에 숨겨 놓았다.
필요할 때 꺼내 쓰기 위해서.
그렇게 돌아온 김지운 일행이 마주한 백화점 지하 1층의 풍경은 떠날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잘 관리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다름 아닌 고강수의 측근들에 의해서.
"문제는?"
"없었습니다."
대답을 하는 이들의 눈빛은 다른 생존자들과 달랐다.
흔들림과 초조함이 없었다.
믿음 때문이었다.
'제대로 따르는군.'
고강수에 대한 믿음이, 고강수를 따르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을 굳건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게 인간의 특징이기도 했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일수록 더더욱 맹신하게 되는 것.
여하튼 김지운 입장에서 나쁠 건 없었다.
집이 잘 관리되는데 이보다 좋을 건 없었으니까.
'소득은 크다.'
더불어 이번 소득은 김지운 입장에서도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엄청나기 그지없었다.
단, 그 사실에 김지운은 안심하지 않았다.
'상황은 더 최악이지만.'
유리룡의 등장은 김지운의 머릿속에 있던 무수히 많은 시나리오들을 짓뭉갰다.
대신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더더욱 등장했다.
'놈이 어디를 가든, 도착한 곳은 지옥이 될 거다.'
김지운이 생각하기에 지금 이 시점에서 유리룡을 잡을 수 있는 자는 대한민국에 없었다.
군대는 의미가 없었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유리룡의 포스를 버티지도 못할 터.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유리룡이 그린존으로 돌아가는 순간, 자신의 영역에 자리를 잡는 순간 그곳에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하면 된다.
그곳에 민간인이 수십만 명이 살아있건 말 건 개의치 않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럴 군인은 없다.'
그러나 김지운이 아는 군부는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지휘관이 존재치 않았다.
'있어서도 안 되고.'
있어서도 안 됐다. 그런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을 대부분 쓸어버려도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는 자라는 의미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자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는 뻔했으니까.
'그런 인간이 레벨업을 하면 더 큰 재앙이다.'
결정적으로 무기를 이용해서 몬스터를 잡아도 레벨이 오르는 상황,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르는 것도 경험치 획득이 가능한지는 아직 미증유의 영역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극단적인 경우에는 핵미사일 버튼을 누르면 순식간에 레벨을 올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이 강력한 헌터가 된다?
차라리 유리룡을 총이나 미사일 없이 잡는 게 나았다.
여하튼 김지운 입장에서 쉴 틈은 없었다.
앞으로 올 재앙에 대비해서 김지운은 다시금 움직여야 했다.
"파크원 빌딩을 오른다."
"파크원 빌딩이면, GOP로 가시는 겁니까?"
"유리룡이 등장한 이상 그곳에 있는 GOP 병사들도 무사하진 못할 테니까."
일단 빌딩 GOP에서 마저 무기를 회수해야 했다.
사실 그건 서두를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강현중이 보기엔 그랬다.
'이미 확보한 무기도 충분한 것 같은데?'
63빌딩 GOP에서 확보한 무기와 탄약은 꽤 넉넉했다. 김지운의 전투 스타일을 생각하면 더더욱.
물론 다다익선, 많아서 나쁠 건 없었지만 파크원이란 고층 빌딩에 그냥 놔두는 게 보안 면에서는 나을 수도 있었다.
반면 김지운의 생각은 달랐다.
'고층 빌딩에 있던 생존자들 대부분이 죽거나 혹은 정신 이상에 걸렸을 거다.'
본래대로라면 김지운도 강현중과 같은 생각을 했다.
'그걸 헌터들은 알 거다.'
그러나 문제는 유리룡이 여의도를 지나쳤다는 것을 헌터들이 알았을 경우였다.
눈치 빠른 헌터라면 답을 내놓을 것이다.
지금 빌딩 GOP는 무주공산이라고.
먼저 가서 무기 챙기는 놈이 임자라고.
사실 그게 김지운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었다.
'헌터들이 이곳으로 올 거다.'
여의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파크원 빌딩은 지금 김지운의 집인 백화점과 바로 붙어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곳까지 온 헌터들이 김지운의 집을 보고 저 집 잘 지었네, 나중에 친해지면 놀러가야지, 라는 생각을 한 다거나 옆에 이사 오려고 하는데 떡 좀 드시죠, 라는 생각을 할 리 만무.
십중팔구는 전쟁이었고, 김지운은 그 전쟁을 피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김지운은 오는 전쟁을 마다한 적이 없었다.
'숙이거나 죽이거나.'
그리고 그 전쟁에서 패배한 적도 없었다.
그때였다.
"대, 대장님!"
보초를 서고 있던 한 명이 다급하게 김지운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누, 누가 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김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움직였다.
빠르게.
이미 전투 준비는 되어있었다.
허리에는 총이 있었고, 목에는 줄로 목걸이로 만든 모루뱀의 눈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마스크를 쓰고 밖으로 나간 김지운, 그런 그의 눈에는 보였다.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 한 사내가 이곳에 오는 것이.
김지운은 망설이지 않고 안개 너머로 들어갔다.
고요하게.
그리고 이내 거리가 좁혀졌을 때 김지운은 볼 수 있었다.
한 사내가 KF94 마스크를 쓴 채 어비스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면서 백화점이 있는 쪽으로 오는 것을.
거기까지는 김지운도 딱히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내가 의료용 산소통을 짊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의료용 산소통에서 이어져서 나온 선이 사내가 품고 있는 검은색 비닐 보자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김지운의 눈빛이 달라졌다.
'생존자다.'
동시에 김지운은 놓치지 않았다.
꿈틀!
그 검은색 비닐 보자기 안이 꿈틀거리는 것을.
'아이를 품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건 총상인가?'
사내는 허리춤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상처의 느낌은 총상으로 보였다.
그쯤에서 김지운의 미간이 찌푸렸다.
가늠이 안 되는 탓이었다.
'이 추위에 저 산소통을 매고, 아이를 품고 안개를 뚫고 오다니. 총에 맞은 채로.'
저 사내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
그때였다.
크르르르!
주변에서 도그블린의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사내는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그때 사내가 움직였다. 산소통을 내려놓고, 품에 있는 것을 바닥에 내려놓고자 했다.
바닥에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본인을 마지막으로 불태울 속셈이었다.
그것을 본 김지운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스윽!
김지운, 그의 피아노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4.
어비스에서의 전투는 언제나 고요함을 철칙으로 했다.
그러나 어비스의 안개가 펼쳐진 지구에서는 달랐다.
삐익삐익!
전투는 언제나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으어어어!
어비스 좀비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팔기 위해서.
으어어어!
그렇게 어비스 좀비가 스마트폰의 알림소리를 쫓아 움직이는 사이, 김지운이 움직였다.
그는 피아노줄을 꺼냈다. 정확히는 꺼낸 게 아니라 김지운이 매고 있던 가방 안의 피아노줄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마치 요술피리 소리를 들은 뱀처럼.
심지어 그렇게 등장한 피아노줄은 제 스스로 올가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커헝, 커헝!
그렇게 올가미가 된 피아노줄이 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향해 달려드는 도그블린을 향해 움직였다.
살아있는 뱀처럼.
그 속도 역시 정말 뱀처럼 빨랐다.
모루뱀의 눈 덕분이었다.
그 아이템에 담긴 마력 +10포인트란 옵션이 지금 김지운의 마력을 풍족케 했다.
자동차로 따지면 기름이 한 칸 밖에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열 칸이 가득 채워진 격.
연비 주행을 위해 몸을 사리던 드라이버가 이제 마음대로 풀악셀을 밟을 수 있는 격이었다.
하물며 그 드라이버는 김지운이었다.
케엥!
등장한 세 마리의 도그블린들의 목에 올가미가 걸리는 데에는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지운은 이번에는 올가미들을 서로 엮지 않았다. 그 올가미들의 끝에는 다름 아닌 김지운의 손이 있었다.
김지운, 그가 올가미를 잡아 당겼다.
예전이라면 힘에서 밀렸을 일.
그러나 지금의 김지운의 근력 스탯은 도그블린 세 마리 정도를 잡아당기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켁켁!
그렇게 낚시를 하듯 잡아 당겨온 도그블린을 향해, 숨이 막혀 몸부림을 치는 놈들을 향해 김지운은 도끼를 들었다.
콰직!
그렇게 도끼를 세 번 내리쳤고, 그것으로 다시금 주변에는 고요함이 짙게 깔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지운은 바로 바닥에 주저앉은 사내를 짊어들었다.
시간이 없었다.
사내의 마스크가 얼마나 버틸지.
그때 사내가 말했다.
"소연아, 소연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목소리에 김지운은 별 다른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이동할 때.
'대장.'
어느새 등장한 이영후가 잽싸게 아이를 감싸고 있는 비닐 포대와 산소통을 짊어졌다.
그렇게 둘이 바로 백화점으로 이동했다.
돌아왔을 때는 이미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다.
"강현중."
"누구도 못 들어오게 하겠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지운이 바로 짊어지고 있는 사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후에 케이블 타이로 사내의 두 팔을 그리고 두 다리를 묶었다.
갑작스러운 조치에 모두가 놀랐다.
살리려고 데려온 거 아니었던가?
사내 역시 놀랐다.
그런 사내에게 김지운이 말했다.
"좀비가 될 거 같으면 그 전에 죽여 주겠다."
그제야 사내가 의미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나는 괜찮습니다. 어, 어차피 얼마 못 버팁니다. 초, 총에 맞았습니다."
무엇보다 절박하게.
"내 딸아이만, 딸아이만 살려주십시오. 이름은 정소연입니다. 소연. 나이는 4세입니다. 생년월일하고 다른 정보는 품에 있는 지갑 안에 있습니다."
소름 끼칠 정도로 간절하게.
그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참담하게 가라앉았다.
전후 사정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사내가 어떤 각오로 이곳에 왔는지는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둘은 달랐다.
김지운은 그 목소리에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영후도 마찬가지였다.
도리어 이영후는 김지운을 보며 말했다.
"대장, 치료할까요?"
"그렇게 하도록."
"좋습니다. 어디 보자, 여기가 총상이니까······ 아! 총알은 관통한 거 같습니다."
그것을 본 이영후가 갑자기 품에서 병 하나를 그리고 주사기 하나를 꺼냈다.
그 후에 주사기로 병 안의 액체를 뽑아낸 이영후가 쓰러진 사내의 상처 부위를 향해 주사기를 꽂았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부글부글!
상처 부위에서 거품이 일어나더니 상처 부위가 치료가 되기 시작했다.
"레드 트롤 포션답게 효과 확실하네요."
레드존에서만 등장하는 희귀 몬스터인 레드 트롤의 피와 어비스의 몇 가지 약재를 섞어 만든 포션의 효과였다.
그렇다고 포션 자체가 엄청나게 귀한 것은 아니었다. 레드 트롤 자체는 희귀 몬스터였으나, 레드 트롤 한 마리를 잡으면 얻을 수 있는 피의 양은 엄청났으니까.
해서 어비스 관광객들에게 가장 많이 나눠주는 기념품이었다.
귀하면서도 실용적이고, 받는 쪽이나 주는 쪽이나 나쁠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더불어 이 포션이 어비스의 헌터들이 어비스에서 사냥을 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했다.
어비스에서의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쏟아지는 상처가 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포션이 그들을 싸우게 했다.
심장이 붙어 있고, 목만 붙어 있다면 싸울 수 있게 해줬다.
물론 마냥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포션에는 부작용이 있었다.
"우욱!"
구토감, 어지럼증 그리고 상처 부위에서 느껴지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뜨거움까지.
해서 보통은 포션을 처음 사용한 이들은 그 자리에서 몸부림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제 상처 부위를 긁거나 쑤셔서 기껏 치료한 상처가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사내는 다행히도 팔다리가 묶인 탓에 그대로 몸부림을 치는 수준에 그쳤다.
상처는 멀쩡했다.
그것을 본 김지운이 고개를 돌렸다.
"아이 상태는?"
"잠들어 있습니다."
"상태는?"
"부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신 아이가 환자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쯤에서 김지운과 이영후는 이 사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 근처에는 여의도 성모병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내가 어떤 모험을 했는지.
얼마나 큰 절망 속에서 걸음을 내디뎠는지.
"대장님 아니었으면 죽었겠네요. 아이랑 같이."
그야말로 김지운이 신보다 더 위대한 은인인 셈.
물론 김지운 입장에서는 결코 적지 않은 희생이었다.
포션은 그 효과만큼 값어치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니까. 사실상 지금 이 사내에게 김지운은 여분의 목숨을 준 격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아쉬움은 없었다.
"포션이 아깝진 않은 거 같습니다."
이토록 간절한 자에게 기회를 준 것, 그보다 더 값진 건 없었으니까.
"이걸 보고 그냥 넘어가면 사람이 아니죠."
"그것도 있지."
"예?"
그러나 김지운이 나선 것은 단순히 그런 측은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게 중요한 이유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 사내는 병원에서 왔다. 마스크를 쓰고. 총에 맞은 채."
이 사내가 말해줬으니까.
"정리하면 지금 이 사내가 온 여의도 성모병원에는 이레귤러 현상이 있으며."
"어?"
"어비스의 안개를 마스크로 막을 수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는 이가 있으며."
"어?"
"그 정보를 알고 있는 자는 총을 가지고 있다."
"어!"
"즉, 그곳에 무장한 헌터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김지운이 사내를 살려준 또 다른 이유였다.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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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흑랑 클랜 (2).
5.
사내의 이름은 정지혁.
"의사입니다. 성모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여의도 성모 병원 응급의학과 소속인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해줬다.
"아이는 성모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예정이었습니다. 선천성 심장 질환인데, 판막 쪽에 이상이 있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그러다가 31일에 일이 일어났습니다. 병원 주변이 안개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이야기를.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당황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내가 말했습니다. 자신은 어비스의 헌터라고. 그러니까 자신의 말을 따르라고. 사람들은 그를 따랐습니다. 식량을 모았고, 병원 주변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했습니다. 구조대를 기다렸습니다."
백화점에서 일어난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그러다 하루가 지났을 때 한 무리가 왔습니다. 10명이 넘었던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오는 순간 악몽이 시작됐습니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은 이들은 그 자리에서 오른손을 잘랐습니다. 어른과 아이 구분 없이. 동시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밖에서 무엇이든 쓸모 있는 것을 가져오라고."
하지만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식량이든 뭐든. 할당량이 있었습니다. 물 30리터 혹은 석유 30리터. 아니면 식량 3킬로그램. 마스크 100장. 가져오지 못한 자는 왼손이 잘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김지운을 제외한 모두의 안색은 검게 변했다.
너무 참혹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꿀꺽!
그 이야기가 자신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김지운은 그럴 수 있었다.
여기 생존자들을 가마우지처럼 이용해 먹을 수 있었다.
'효율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실제로 이 순간 김지운은 성모 병원을 점거한 헌터들의 방식을 높게 평가했다.
잔혹하지만 어비스에서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결과일 뿐.
'어설픈 자가 아니다.'
그리고 결과를 만들 줄 아는 자는 어비스에서 강자가 됐다.
해서 김지운은 확신했다.
성모 병원을 점령한 헌터 무리가 단순한 헌터가 아니라 꽤 실력과 세력이 있는 클랜 소속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래도 그들을 믿었습니다. 최소한 우리를 부려 먹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사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자들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죽는 것보단 개처럼 대접받더라도 일단 살아남는 것이 나을 수도 있으니까.
최소한 선택지가 주어지는 셈이었으니까.
정지혁도 그랬다.
더군다나 그는 홑몸이 아니었다. 아픈 아이가 있었고, 아이 수술을 위해선 병원 설비가 필요했다.
달리 말하면 그런 그가 아이의 운명을 가지고 확률 낮은 도박을 하게 된 이유가 있다는 의미.
"하지만 갑자기 어느 순간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꽤 진지하게. 딱히 대화 내용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느낌이 있었습니다."
"다 죽이려고 했군."
그리고 김지운은 그 느낌을 알 수 있었다.
"타이밍 상으로는 1시간 전쯤이겠고."
"어? 그, 그걸 어떻게?"
더 나아가 전후사정도 알 수 있었다.
'유리룡이 등장한 걸 알았고, 그 순간 계획이 바뀌었을 거다.'
큰 변화가 있었으니까.
'GOP를 노리기로.'
그 대목에서 김지운의 머릿속으로 계산기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데 그걸 눈치 챘다는 건.'
일단 이레귤러 안에서는 유리룡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개미굴 안의 개미 입장에서 하늘 위에 매가 지나가든 말든 그걸 알 도리가 없는 것처럼.
'연락 체계가 있다는 거다.'
사실 그 이전부터 그 헌터들이 외부와 소통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동료를 부를 수 있었을 터.
문제는 현 시점에서 이레귤러 안에서 외부와 통신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위성을 이용한 것도 그랬다. 위성 접시가 이용되지 않는데, 위성 전화기가 작동될 가능성은 지극히 낮은 바.
답은 하나였다.
'아이템이 있거나.'
어비스에서 통하는 방식을 썼다는 것.
실제로 어비스에서는 먼 거리에서 소통할 수 있는 아이템이 몇 가지 존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게 포폰 나무였다.
옐로우존에서만 자라나는 포폰 나무는 여러 나뭇가지가 있었고, 그런 나뭇가지에서 자라난 나뭇잎들은 공명을 했다.
나뭇잎 하나가 불타오르면 다른 것들도 불타오르는 식.
즉, 나뭇잎에 누군가 글자를 쓰면 똑같은 글자가 다른 나뭇잎에도 그대로 전달됐다.
거리는 상관없었다.
그래서 이 포폰 나뭇잎으로 헌터들은 소통을 했다.
그러나 이건 매우 구하기 힘든 아이템으로 가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실상 거래 자체가 없었다. 클랜 입장에서는 절대 밖으로 내놓지 않는 필수품으로 취급됐으니까.
그런 포폰 나뭇잎을 이용해 소통을 했다면 그 클랜의 세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포폰 나뭇잎이 낫다.'
물론 김지운 입장에서도 그게 나았다.
'텔레파시를 써서 소통한 것보단.'
만약 그게 아닌 다른 방법을 썼다면, 그때는 김지운 입장에서는 바로 지척에 매우 골치 아픈 것을 둔 셈이었으니까.
그래서 중요했다.
"그들에게서 무언가 특이점이 없었나?"
상대방들이 어디 소속인지 파악하는 것이.
"그게······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반인인 정지혁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헌터들이 헌터랍시고 무슨 중세 시대의 강철 갑옷이나 롱소드를 들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평소에는 그냥 평범한 복장을 했다.
그리고 아이템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비스에서 획득한 아이템은 현실에서 다시 재가공을 했다.
당장 김지운이 얻은 도끼 같은 경우에도 가공이 가능했다. 검으로도 만들어도 그 옵션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헌터들보고 현실에서 나대지 말라고, 정체 들키지 말라고 클랜들은 칼 들고 협박했다.
"대신 중국어를 썼습니다."
"중국어?"
"예, 중국어 대화를 한 걸 자주 들었습니다."
그쯤에서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의심 가는 후보는 몇 있었으나, 말 그대로 의심.
"그리고 이건, 그냥 한 명뿐이긴 한데 한 명의 손등에는 검색 늑대 머리 문신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대답은 이영후의 입에서 나왔다.
"그거 흑랑 클랜 아니에요?"
그도 알 만큼 유명한 곳이었으니까.
"중국 5대 클랜 중 한 곳인?"
헌터들의 세계에서도 매우 유명한 곳이었다.
당연히 김지운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한국에 왔죠? 한국에 지부가 있었습니까?"
"없었다."
'약속했었으니까.'
흑랑 클랜하고는 몇 번 마주했으니까.
'한국 땅을 밟으면 어비스에서 죽여 버리겠다고.'
안 좋은 의미로.
그런데 놈들이 한국에 있다는 것, 그건 약속을 어긴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겠지만 한국 땅에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서, 한국이 아니면 먹고 살 방법이 없어서, K-POP을 너무 좋아해서 한국 땅을 밟았을 리는 없었다.
그런 이유였다면 삼족오 클랜이 일자리도 마련해주고, K-POP콘서트 VIP석도 예매해 줬을 것이다.
'한국 땅에서 장사하지 말라고.'
흑랑 클랜의 한국 진출 목적은 오로지 하나, 장사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장사는 마약 밀매나 인신매매 같은 게 아니었다.
그건 흑랑 클랜이 아니더라도 흑사회 내의 범죄 조직이 열심히 하고 있었다.
헌터에게 장사란 하나였다.
바로 관광사업!
그리고 이건 꽤 유효한 사업이었다.
보통 어비스 관광은 매우 특별한 이들만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1억 원짜리 여행이었다. 그런데 수중에 5천만 원밖에 없는 이에게 누군가 다가와 비슷한 퀄리티의 관광 여행을 제공한다면?
하물며 그 관광을 제공받는 게 국회의원이고, 제공하는 헌터가 돈 대신 앞으로 돈독한 관계를 부탁한다면?
그 과정을 몇 번 걸치면 한국 정재계에 강력한 카르텔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흑랑 클랜의 한국 진출을 막았다.
하지만 그것도 김지운이 은퇴하기 전의 이야기,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어떤 상황일지 알 수 없는바.
어쨌거나 이것으로 상황은 정리됐다.
흑랑 클랜의 헌터들이 성모 병원을 점거하고 있고, 그들은 외부와 소통 중이고 있으며, 유리룡이 등장하는 순간 성모 병원의 생존자들을 몰살시키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이영후."
"예."
"마스크를 준비해라."
오기 전에 치는 것.
6.
어비스가 등장한 이후 그것을 가장 탐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석유를 기반으로 세운 권력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그것을 대신할 권력을 찾던 그들 입장에서는 어비스야 말로 미래로 보였다.
그런 사우디아라비아만큼 어비스를 탐낸 것은 다름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었다.
사실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미국에게 이빨을 들이댄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
정리하면 기존의 기술이든 자본이든 자원이든 무엇으로도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두 나라는 어비스에 운명을 걸었다.
그런 중국 공산당의 의지로 태어난 클랜 중 하나가 바로 흑랑 클랜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에서 흑랑 클랜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세력을 키웠다.
어비스의 헌터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모두가 알 수 있을 만큼!
이영후도 잘 알고 있었다.
"흑랑 클랜이면 큰 곳 아닙니까?"
그래서 그는 그런 제안을 했다.
"손을 잡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흑랑 클랜은 다른 무엇보다 엄청난 헌터 숫자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물론 이영후도 알았다.
그들이 아주 빌어먹을 짓을 했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 세상은 더 이상 기존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세상이었다.
분노에 취해 서로 할퀴어서 상처를 입어봤자 웃는 것은 지척에 있는 도그블린뿐이었다.
김지운 역시 이영후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김지운 역시 어지간한 곳하고는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잡을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김지운이 아는 클랜들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올바르고, 정의 넘치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가 속했던 삼족오 클랜도 마찬가지였다.
"흑랑 클랜은 손을 잡을 만한 상대가 아니다."
"예?"
"중국 공산당의 후원을 받는 클랜 중에서 가장 더러운 짓만 골라 하는 곳이니까."
"더러운 짓이요?"
"불법 관광부터 헌터 살해까지. 어비스와 관련된 모든 더러운 짓은 전부 다."
하지만 김지운이 아는 흑랑 클랜은 선을 넘은 집단이었다.
"지, 진짭니까?"
그 설명에 이영후가 기겁했다.
그런 클랜이 있다는 것도 놀랐지만 설마 모두가 인정하는 중국 대표 클랜이 그런 짓을 할 줄이야?
하지만 김지운에게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세상이란 게 그랬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국가 간의 전쟁이라고 해봐야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서 중국인이 한국인을 욕하고, 한국인이 중국인을 욕하는 것 정도,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 이면에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무수히 많은 피를 흘렸다.
김지운이 특수부대원 시절에도 그랬고, 헌터 시절에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처절했다.
어비스는 세상 모두가 숨기기로 약속한 세상이었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없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흑랑 클랜은 과했다. 서로 총칼로 죽이는 전쟁에도 선이란 게 있는데 그 선을 수도 없이 넘었다.
해서 김지운은 말했다.
"이영후, 이제부터 보게 될 광경은 좀 험할 거다."
그 말을 마친 김지운이 마스크를 썼다.
그로부터 잠시 후 이영후와 김지운은 성모 병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볼 수 있었다.
'맙소사.'
어비스 좀비가 있었다.
'이거 환자들이잖아?'
성모 병원의 환자복을 입은 이들이었다.
더불어 그들의 몸에는 이렇다 할 상처가 없었다.
꿀꺽!
그 의미를 이영후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냥 던졌구나, 안개로.'
흑랑 클랜의 헌터들이 성모 병원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물론 어찌 보면 그건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환자들은 솔직히 아무 쓸모가 없었다. 더 나아가 지금 여의도 지역은 전기 공급이 끊긴 상황이었다. 환자들 중 생명유지장치의 도움이 필요하건, 의료 조치가 없으면 죽는 이들은 사실상 죽은 목숨이란 의미.
하지만 사람의 목숨 아닌가?
더욱이 아포칼립스 세상이 된 지 그리 오래 지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냥 그들을 안개 밖으로 던진다?
어비스 좀비로 만든다?
'미친놈들.'
욕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그 광경은 지옥의 시작이었다.
김지운이 손짓을 했고, 그 손짓에 이영후과 김지운이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으어어어!
어비스 좀비 사이로 숨죽인 채 움직이고 있는 이들을.
정지혁이 말했던 이들이었다.
살기 위해서 할당량의 식량을, 연료를, 마스크를 물어 와야 하는 인간 가마우지들.
당연한 말이지만 가마우지가 된 그들의 표정에는 살아있는 자의 느낌은 없었다.
어비스의 좀비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죽지 못해 산다는 느낌.
사실 혼자였다면 이미 진작에 죽음을 택했을지도 모르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기꺼이 가마우지가 되어 밖으로 나온 것은, 이 안개로 넘어온 이유는 하나였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 대목에서 이영후는 더 이상 머릿속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김지운, 그가 왜 흑랑 클랜을 처치하려고 하는지.
그렇게 빌어먹을 광경을 뚫고 나아가던 김지운 파티는 이내 볼 수 있었다.
'와.'
성모병원 건물, 그 건물의 1층부터 4층까지가 안개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을.
그건 꽤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특히 여의도 성모 병원 건물 옆에 위치한 주차타워, 그 주차 타워 벽면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 그림이 경이로움을 더더욱 자아냈다.
정말 신이 이곳을 가호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신이 있는 걸까?'
이 순간 평생 무신론자였던 이영후가 갑자기 종교에 대한 고찰을 다시 하게 될 정도로.
물론 김지운은 감흥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하러 왔고, 그가 하려는 전쟁에는 신의 도움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이 정도면 소수 인원으로 병원 전체를 커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요한 건 하나였다.
'로프를 써서 옥상으로 올라간다.'
침투를 위한 도구들뿐.
그리고 그 작업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됐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우우웅!
고프로를 이용해 이동 루트를 탐색한 후에 건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김지운은 염력을 이용해 로프를 옥상에 묶었다.
이후 김지운과 이영후가 로프를 잡고, 벽면을 밟으며 단숨에 옥상에 올라갔다.
그리고 옥상에 오르는 순간, 김지운이 바로 시계를 확인했고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였다.
'예상대로군.'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곧 밤이 온다.'
7.
흑랑 클랜.
중국 공산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클랜 중 한 곳으로 중국 5대 클랜 중 한 곳이었다.
그러나 흑랑 클랜은 5대 클랜 중에 특이점이 있었다.
클랜 소속 헌터들 출신이 대부분 범죄자들이라는 것.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흑랑 클랜의 가장 큰 후원자가 그 누구도 아닌 흑사회라는 것을 생각하면 도리어 이게 상식이었다.
지금 여의도 성모 병원을 점령하고 있는 흑랑 클랜, 그곳의 리더인 우궈창도 그랬다.
그는 원래 필리핀에서 마약과 인신매매를 주업으로 하던 흑사회 소속 조직원이었다.
그러다가 필리핀 정부에게 잡혔고, 필리핀 정부는 중국으로 범죄자 인도를 해줬다.
당연히 중국의 법으로는 사형 혹은 무기징역이었으나, 그에게 기회가 왔다.
중국 정부는 제안을 했다.
목이 잘린 후에 각막부터 시작해서 콩팥을 기부한 후에 평생 사람들에게 근육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봉사활동을 할 것인지, 아니면 어비스 너머에 들어갈 것인지.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고, 그는 어비스를 넘어갔고, 헌터가 됐다.
아포칼립스가 터지기 전, 그는 무려 17레벨을 달성했었다.
그건 꽤 대단한 결과물이었다.
17레벨을 달성했다는 것은 화이트존을 벗어나서 레드존에서 적잖게 활동한 실력자라는 의미였으니까.
그게 이유였다.
'빵즈 정치인 놈 관광시켜주려고 왔다가.'
그가 한국에 온 이유.
그는 한국의 꽤 이름 있는 정치인의 어비스 관광을 돕기 위해서 파티원을 이끌고 한국에 입국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모든 클랜들에게 관광은 중요한 수입이지만, 동시에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정상적인 클랜일수록 관광 수입에 딱히 의존할 이유가 없었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대기 순번이 너무 길다는 의미.
특히 정치인들 같은 경우에는 클랜 입장에서는 그렇게 달가운 관광객이 아니었다.
돈을 주는 것도 아닐뿐더러, 국회의원이랍시고 내세우는 그 자격은 4년짜리에 불과했으니까.
그마저도 비리나, 뇌물수수, 성범죄로 날아갈지 몰랐다.
그런 부분을 흑랑 클랜은 공략했다.
한국 정치인에게 접근해서 관광을 제안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한국에 등장하는 어비스 게이트를 전부 관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특히 이번에는 새해를 맞이해서 특별 행사를 할 예정이었다.
국회의원 쪽도 새해에는 출근 안 해도 되니까 상관 없다고 말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국회에 출근 안 해도 상관없으니 언제든 괜찮다는 말을 덧붙여주긴 했지만.
어쨌거나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에서 관광을 준비하던 우궈창에게 그 일이 생겼다.
'이런 일이 터질 줄이야.'
세상이 어비스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당황했다.
하지만 곧 상황을 파악했다.
'운이 좋았어. 포폰 나뭇잎을 가져온 게.'
수중에 있던 포폰 나뭇잎 덕분이었다.
통신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포폰 나뭇잎으로 우궈창은 파티원과 소통할 수 있었다.
'이곳을 발견한 것도 그렇고.'
그런 와중에 파티원 중 한 명이 성모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것도 행운이었다.
정확히는 외국인 건강보험으로 싸게 치료받을 수 있다고, 별것도 아닌데도 병원을 간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그 행운을 우궈창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모두가 성모 병원으로 왔고, 이후 성모 병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쓸모없는 것들을 어비스의 안개로 쫓아버렸고, 남은 이들을 이용해서 주변 물자들을 확보했다.
모든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쯤에서 연락이 왔다.
'본부가 움직인 것도 그렇고.'
흑랑 클랜의 본부에서 포폰 나뭇잎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여의도를 점령하라니.'
보낸 명령은 그뿐이었지만, 그 명령을 듣는 순간 우궈창은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건 기회다. 단순한 정치인 포섭이 아니라, 한국 땅에 뭔가를 하려는 거야. 역사적인 전쟁이야.'
이번 일을 성공시키면 그 순간 그는 단순한 헌터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핵심 당원이 될 수 있음을.
권력의 중추에 도달할 수 있음을.
그때부터 우궈창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어졌다.
그때였다.
"저기 대장."
파티원 한 명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의사 한 놈이 딸아이와 도망쳤습니다."
"뭐?"
기분 좋았던 우궈창의 입가에 있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의 눈빛이 섬뜩해졌다.
"언제?"
"좀 됐습니다."
"그걸 왜 이제 와서 말해?"
이어진 타박에 파티원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게, 총을 맞췄습니다. 곧 죽을 놈입니다. 그래서 굳이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을 뱉는 파티원의 얼굴에 두려움은 없었다.
말 그대로 파티원이었으니까.
부하가 아니라 같은 동료.
이 무리에서 우궈창이 우두머리가 된 건 그저 레벨이 가장 높다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이들 입장에서 우궈창을 상전으로 모실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다.
우궈창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여기서 파티원을 크게 타박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는 확실하게 죽인 걸 확인해라."
단지 경고할 뿐이었다.
물론 우궈창은 하나마나한 경고임을 알았다.
"빵즈 놈들은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다. 조금이라도 목숨줄이 붙어 있으면 골치 아픈 일을 일으킨다."
해서 그는 그저 분풀이에 가까운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리고 탈출한 놈이 있으니 열 명 잡아다가 죽여라. 머리통을 박살을 내버려."
그 말에 파티원들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의 생존자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니까.
정확히는 중화인민 앞에서는 한국인은 그저 개돼지와 크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다.
"그보다 조만간 무기 가지러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남은 빵즈들은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다 죽여야지."
"다 죽입니까?"
"빵즈 애새끼들 빼고 전부 다."
"애들은 살립니까?"
그 질문에 우궈창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 돌아왔을 때 빵즈 애새끼 놈들을 이용해 먹을 수 있지. 어차피 빵즈 애새끼들 남겨둬봤자 위협도 안 될 테니까."
그 말에 남은 부하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다 죽이기 전에 더 뽑아먹자고. 할당량을 2배로 늘린다. 못 채우는 놈들은 발목을 자르도록."
"으하하하!"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좋습니다."
"역시 대장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하하호호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이었다.
파밧!
"어?"
그들이 있던 곳의 불이 꺼졌다.
8.
비상 발전기가 돌아가는 덕분에 비상등이 켜졌던 성모 병원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그 사실에 모두가 놀랐다.
"뭐, 뭐야?"
그들의 구명줄 중 하나였던 비상 발전기가 꺼졌다는 것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게 아니더라도 칠흑 같은 어둠 자체에 모두가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예외는 두 명뿐이었다.
'껐다.'
한 명은 비상발전기를 멈춘 이영후.
'이제 대장 차례다.'
다른 한 명은 당연히 그였다.
그 명령을 내린 김지운, 그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는 순간 자신의 목에 있는 모루뱀의 눈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가 뱀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 광경은 오랜만이군.'
체온을 가진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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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흑랑 클랜 (3).
9.
전력이 끊긴 후에 비상발전기가 돌아가는 여의도 성모 병원의 내부는 침침했다.
모든 등이 아니라, 비상등만이, 일부 등만이 빛을 내뿜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마저도 우궈창을 비롯해 흑랑 클랜이 성모 병원을 점거한 후에는 등을 상당수 제거했다.
굳이 안개 너머의 몬스터들에게 혹은 헌터들에게 생존을, 이것에 따뜻한 잠자리와 먹을거리가 그리고 의약품이 있음을 광고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특히 어비스의 안개 속의 밤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런 빛이 사라졌을 때 느껴지는 어둠은 생각 이상으로 매우 지독하기 그지없었다.
하물며 흑랑 클랜원들은 밀폐된 곳에서 있었다.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뭐야!"
"무슨 일이야?"
이 상황에 그들도 당혹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
더욱이 그들은 헌터였지, 특수부대나 군인이 아니었다.
이 차이는 컸다.
헌터는 어비스의 세계에 특화된 이들이었다. 건물 안에서의 전투나, 특수한 상황에서의 대처 방식을 배우지도 않았고, 솔직히 딱히 배울 필요도 없었다. 어비스엔 이런 공간이 없으니까.
당혹감은 컸고, 그래서였다.
어느 한 명이 손전등을 켰다.
그러자 모두의 모습이 보였다.
그건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만약 이 상황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상황이라면 제 위치를 아주 확실하게 알려주는 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비상 발전기가 나간 거야? 고장 난 건가?"
"젠장, 하필이면 이럴 때에."
모두는 습격보다는 사고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모두가 걱정하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빵즈 놈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몰라!"
자신들이 이제까지 착취하고 있던 이들이 이 순간을 틈 타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것.
우궈창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전 변경이다."
그는 말했다.
"빵즈 놈들 전부 처리한다."
"전부?"
"애새끼 상관없이 전부."
이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이 자신들의 말을 잘 따르는 가마우지일지, 아니면 자신을 죽이려고 드는 성난 인간일지는 알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어차피 전부 죽이려고 했던 것들이었다.
괜한 문제를 남기는 것보단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여러모로 정신 건강에 좋았다.
그 사실에 파티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두가 무기를 들었고, 이내 손전등을 앞세운 채 그들이 있던 방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투!
총성이 들렸다.
투투!
일단 들린 건 세 발.
털썩!
풀썩!
철퍼덕!
그리고 그 세 발이 들리는 순간 바로 세 명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물론 거기까지 계산한 이는 없었다.
"초, 총이다!"
모두가 기겁을 했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들은 총성이 난 반대 방향으로, 복도로 움직였다.
그때였다.
투투투투투!
그들이 가려는 방향에서도 총성이 들리자, 도망치려던 이들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씨발 포위됐다!"
"으아아악!"
공포에 가득 찬 비명을 내질렀다.
해서 그들은 몰랐다.
투투투투!
앞선 총성이 들렸을 때는 총성 소리마다 한 명이 죽었지만, 지금 총성에는 그 누구도 쓰러지지 않음을.
그리고 총성이 들리면 예의 따라오는 그 탄약의 불빛이 조금도 보이지 않음을.
패닉 상태에 빠진 그들은 그것을 알 도리가 없었고, 그저 자리에서 머뭇거릴 따름이었다.
투투투투!
그사이 들려오는 진짜 총성에 흑랑 클랜원들이 쓰러졌다.
총성 한 발에 한 명씩.
모두가 총성이 울릴 때마다 머리통에 큼지막한 구멍을 낸 채 바닥에 쓰러졌다. 어둠 속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임에도 불구하고.
예외는 한 명이었다.
"으으으!"
우궈창, 그만 유일하게 총성에 쓰러지지 않았다.
그쯤에서 우궈창도 슬슬 정신을 차렸다.
상황 파악이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총성이 오는 방향은 한 곳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수중에도 총이 있다는 것.
"我去!"
그렇게 우궈창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총성이 난 방향을 향해 권총을, 중국에서 한국에 들어올 때 지급 받은 호신용 권총을 겨누었다.
타앙!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타앙!
쉴 새 없이.
그러자 이제까지 들려오던 총성이 보이지 않았고, 그제야 비로소 우궈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총구를 겨눈 채로 소리쳤다.
"이 개새끼! 나와!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당장 나와! 이 빵즈 새끼야 나오라고!"
거칠게 위협을 하면서.
반대로 그 걸음은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 코너에 이르는 순간 우궈창은 볼 수 있었다.
한 사내를.
휘릭!
그리고 그 사내가 손에 든 피아노줄로 제 목을 단숨에 휘감는 것을.
"끄륵!"
그 순간 우궈창의 숨이 목구멍에서 빠져나오기 못했고, 그대로 우궈창의 몸이 바닥에 넘어졌다.
그와 동시였다.
콰직!
도끼 한 자루가 바닥에 쓰러진 우궈창의 오른손목을 그대로 내리쳤다.
"끄르르르륵!"
그 고통에 우궈창이 내지른 비명이 그의 목구멍 안에서 메아리를 쳤다.
더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고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푸홧!
사내는 단검으로 우궈창의 양다리 아킬레스건을 단칼에 베어냈다.
핏물도 거의 나오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사실상 우궈창을 이제 왼손만 남은 병신으로 만들었다.
"크엑!"
그쯤에서 우궈창의 숨통이 트였다.
"쿨럭쿨럭!"
우궈창이 거칠게 숨과 기침을 토해냈고, 그러면서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동시에 우궈창은 볼 수 있었다.
"네, 네놈!"
자신의 앞에 있는 한 사내를.
그 사내를 보는 순간 우궈창의 눈빛에 초점이 제대로 돌아왔다. 눈빛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 눈빛에는 공포 대신 분노가 있었다.
우궈창이 나름 꽤 실력 있는 헌터라는 증거였다.
최악의 순간, 죽음을 코앞에 둔 순간 패닉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불태운다는 것은.
그렇기에 우궈창은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아나?"
어눌한 한국어로.
"흑랑 클랜이다!"
그건 협박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기도 했다.
"네놈이 건드린 것은 지금 흑랑 클랜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흑랑 클랜이다! 이제부터 네놈과 관련되누 모든 것을 흑랑 클랜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쫓아 죽일 것이다!"
겁을 주고, 그 후에 협상을 할 생각이었으니까.
"네놈의 존재가 블랙리스트에 오를 것이다! 이제 살아도 산 게 아닐 것이다!"
넌 죽은 목숨이지만, 자신을 살려주면 이야기가 바뀔 수 있다고.
"상관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상대가 잘못됐다.
"이미 그 블랙리스트에 가장 높은 곳에 내 이름이 있을 테니까."
"뭐, 뭐?"
김지운, 그는 이미 흑랑 클랜과 같은 땅을 밟고는 살 수 없는 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리고 딱히 흑랑 클랜과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 빌어먹을 족속들에게서 마음에 드는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래도 의지를 불태우는 건 마음에 드는군."
마음에 드는 게 생겼다.
"거기서 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의지를 불태우는 걸 보면 협상이 될 것 같군."
자신의 동료를 죽인 헌터를 앞에 두고 제 목숨을 챙기기 위해 발악하는 이들과는 가능했으니까.
"묻는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면, 곱게 죽여주마."
의미 있는 대화가.
10.
"대장!"
김지운이 신호를 주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이영후가 잽싸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됐습니까?"
"전부 처리했다."
말을 뱉는 김지운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짐승을 잡는데 딱히 감흥을 느끼면 그게 이상한 일.
그리고 지금은 감흥에 빠질 때도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제부터 회수를 시작한다."
그중 하나는 죽은 흑랑 클랜에게서 아이템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정황상 이들은 관광을 위해 밀입국한 이들을 가능성이 컸다. 그건 곧 관광을 위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
실제로 그들의 수중에서는 꽤 좋은 아이템들이 많이 나왔다.
일단 무기들이 나왔다.
생긴 건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전투용 나이프 그리고 칼 혹은 도끼였다.
잘 벼려진.
현대 기술로 만들어진.
"어비스 아이템들이네요."
그러나 그 무기들은 사전 스킬을 통해서 옵션이 확인되는 무기들이었다.
어비스의 무기들을 지구에서 다시 가공한 것들이었다.
당연히 그 위력이나, 쓰임새는 훨씬 더 좋았다. 어비스의 무기들 대부분은 몬스터들에 맞춘 것들이었다. 당장 김지운 파티가 오크들을 잡고 얻은 무기들도 그랬다. 손을 잡는 부분이 솔직히 보통 사람이 잡고 휘두르기에는 너무 컸다. 오크가 쓰는 손도끼도 사람이 쓰면 양손으로 잡아야 할 정도.
그러나 이렇게 가공된 것들이라면 사람이 쓰기에 제격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특수한 옵션이 있는 아이템은 없었다. 전부 노멀 등급들뿐이었다.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레어 등급 이상, 옵션이 달린 아이템은 생각 이상으로 귀했으며 특히 레벨이 낮은 경우에는 더더욱 귀했다.
여기 있는 헌터들의 원래 레벨은 잘 쳐줘야 10레벨대였을 터.
옵션이 달린 아이템이 다수 있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김지운 역시 큰 기대는 없었다.
"어, 대장? 그 손모가지는 뭡니까?"
김지운, 그가 자신이 잘라낸 우궈창의 손에서 반지 하나를 빼는 순간에도 그랬다.
그러나 그 반지를 집어드는 순간 달라졌다.
[하얀 리자드맨의 구슬]
- 아이템 등급 : 유니크
- 5레벨 이상 착용 가능
- 공격력 : F-랭크
- 내구도 : F-랭크
- 착용 시 스킬 랭크 D랭크로 상승
- 착용 시 마력+5
- 매우 희귀한 하얀 리자드맨을 죽이면 심장에서 구할 수 있는 구슬이다. 강력한 힘이 담겨 있다.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랭크업 아이템이다.'
랭크업, 표현처럼 스킬 슬롯의 스킬 랭크를 올려주는 아이템이었다.
전부를 올려주는 건 아니었다.
그럴 경우에는 모든 스킬 랭크 상승이란 표현이 붙었으니까. 이 경우에는 스킬 하나만 올려주는 격이었다.
보통은 지정할 수 있었다. 착용하는 순간 선택창이 떴으니까.
'그런데 D랭크업이라니.'
물론 중요한 건 사용법이 아니라 이 아이템이 고작 이 정도 되는 헌터의 수중에 있다는 점이었다.
'죽은 놈의 이름은 우궈창, 실력은 있지만 그래봐야 10레벨대다.'
김지운이 보기에 우궈창이 가질 만한 아이템이 아니었다.
더불어 클랜에 속한 헌터들은 어지간한 경우에는 개인 아이템을 가지지 못했다.
대부분 지급을 받았다.
아이템의 가치가 너무 높은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아이템을 가지고 다니면 절도의 대상이 된다는 게 문제였다.
어비스에서야 상태창이 유효한 만큼 총 맞아도 웃을 수 있지만 지구는 달랐으니까.
물론 30레벨 이상부터는 개인 아이템을 인정해 주긴 했지만, 지금 우궈창 같은 부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사실 여기서 답은 간단했다.
'이놈들이 데리러 가려는 관광객이 생각보다 대단한 인물이었나 보군.'
이런 물건을 지급할 만큼 안전한 관광이 필요했다는 의미.
'누군지는 본인들도 몰랐지만.'
그 관광객에 대한 정보는 우궈창도 몰랐다.
직접 만난 후에 알게 됐을 모양.
사실 이상할 건 없었다. 우궈창 입장에서는 들어도 모르는 인간일 테니까.
더불어 정말 우궈창은 몰랐다. 김지운, 그가 직접 물어봤으니까 확신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김지운 입장에서는 엄청난 소득이었다.
'그래도 D랭크라니.'
보통 F랭크의 스킬을 D랭크까지 올리는 것은 30레벨 부근에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숙련도가 뛰어나고 자주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보다 더 빨랐지만, 그래도 20레벨까지는 올려야 했다.
그 정도 성과를 고작 아이템 하나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이룩하게 해준다?
김지운이 놀라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물론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김지운이 반지를 바로 손가락에 끼웠다.
[스킬 슬롯에 스킬이 하나입니다.]
[스킬 효과는 염력 스킬에 적용됩니다.]
[염력 랭크가 일시적으로 D랭크로 상승했습니다.]
그러자 들리는 알림과 함께 김지운이 우궈창의 품을 뒤졌고, 그 안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상자를 열자 다섯 장의 나뭇잎들이, 메모장처럼 잘게 잘려진 나뭇잎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폰 나뭇잎이었다.
그중 하나는 이미 글자로 빼곡했다. 그것도 아주 작은 글자로. 돋보기가 아니면 볼 수 없을 만큼.
실제로 나무 상자에는 돋보기가 동봉되어 있었다.
당연했다.
포폰 나뭇잎이 비싼 만큼, 최대한 아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글자를 작게 쓰는 게 정답이었으니까.
김지운은 바로 그 내용을 봤다.
하지만 아쉽게도 읽을 수는 없었다.
중국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것과 별개로 중국어를 읽는 것은 차원이 달랐으니까.
그때였다.
"대장."
이영후가 말했다.
"제가 봐도 됩니까?"
"중국어를 읽을 줄 아나?"
"예, 잘 합니다."
말을 뱉는 이영후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
"원래 해킹 바닥이 영어랑 중국어는 마스터해야 합니다. 특히 중국어 읽고 쓰는 건 더더욱이요. 이게 해킹을 하는 건 영어로 하지만, 하는 새끼들은 태반이 중국놈들이거든요. 그래서 꼬리 잡기 하다보면 중국어가 잔뜩 나오게 됩니다. 덕분에 아주 빌어먹을 정도로 공부했죠."
그 말에 고민은 없었다.
돋보기를 이용해서 이영후가 중국어를 읽은 후에 설명을 해줬다.
"내용은 별거 없습니다. 앞서서는 관광객 대접 잘하라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그다음 내용은 세상이 어비스로 바뀌었다. 여의도를 점령하라, 라고 있습니다."
설명 내용은 간략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김지운이 느끼는 무게감은 달랐다.
'여의도를 점령하라.'
그 명령을 내린 주체가 흑랑 클랜일 리 만무.
'중국 공산당이 움직였다.'
중국이 이 아포칼립스 사태에, 혼란과 절망의 시대에 한국을 공격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도 그냥 가벼운 견제가 아니라 총력전, 한국이란 국가를 무너뜨리고 먹어치우기 위한 침략전쟁이었다.
'여유가 있다는 거다.'
당연한 말이지만 중국 공산당이 당장 자기들 먹고살기 바쁜데 남의 나라 침략할 만큼 얼빠진 자들은 아니었다.
상황이 좋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공산당의 중심들은, 명령을 내릴 만한 자들은 움직일 여유가 있다는 의미.
한국 입장에서는 최악이었다.
중국은 국가가 한국을 침략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그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국가급 전력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김지운 보기에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정부가 지금 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김지운은 알았다.
'정부가 움직여도 그게 누굴 위한 정부일지는 모르겠군.'
흑랑 클랜이 여의도에 관광을 하러 왔다면 필시 정치인일 가능성이 높을 터.
그럼 사실상 지금 한국 정치를 논하는 자들 중 적잖은 이들이 중국인이라고 봐도 옳았다.
물론 김지운은 중국만 나쁘게 보지 않았다.
필시 일본 혹은 러시아나, 미국에 매수된 자들도 적지 않을 터.
결국 정리하면 한국을 위해 싸우는 자들은 적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김지운은 자신이 나서서 이 한 몸, 대한민국을 위해 불태우겠습니다! 라고 연설과 함께 김지운 정부 따위를 세울 생각이 당연히 없었다.
'결국 제 목숨은 내가 챙겨야 한다.'
단지 누가 들어와도 대응할 수 있는 집을 만들고자 할 뿐.
여하튼 고민은 거기까지였다.
'상황은 안 좋지만, 내 처지는 좋아졌다.'
일단 김지운은 소득에 만족했다.
흑랑 클랜을 처치했고, 상황을 보면 당장 여의도에 또 다른 흑랑 클랜의 헌터들은 없는 듯했다.
결정적으로 김지운의 염력 랭크가 D랭크가 됐다.
이 차이는 컸다.
'D랭크면 이제 진짜 사냥이 가능하다.'
F랭크가 티코라면 D랭크는 포르쉐 911과 같았으니까.
그 수준이 차원이 달랐으니까.
"포폰 나뭇잎을 잘 보관하도록."
또한 추가적으로 흑랑 클랜이 움직이게 되면 그 낌새 역시 파악할 수 있었다.
"예."
그 순간이었다.
"으아악!"
병원 1층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괴, 괴물이다!"
그리고 이어서 들렸다.
크우우!
이제는 익숙한 오크의 소리가.
오크 무리가 성모 병원을 습격하는 순간, 그 순간 이영후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대장."
이대로 남은 자들이 죽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
즉, 잡으러 가야 했고 그 사실에 이영후는 긴장했다.
분명 총이 있긴 하지만, 오크는 결코 총으로 쉽게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모두가 김지운처럼 자판기에 동전 넣듯 움직이는 오크의 머리통에 총알을 넣을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걱정할 거 없다."
그렇게 긴장하는 이영후에게 김지운이 말했다.
"이제부터 오크를 상대로는 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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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보스 몬스터 (1)
1.
어비스넷.
이제는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유일하게 돌아가는 커뮤니티 사이트인 그곳의 이용자 숫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 123 : 요즘 뉴비들 엄청 들어오네?
ㄴ ㅁㄴㅇ : 이야기 들어보니까 일반인에게도 알려졌다는데?
ㄴ ㅇㅇ : 일반인? 어비스넷은 관광객들하고 헌터만 위한 곳이었잖아?
ㄴ 123 : 지금은 다 헌터고 관광객인데 그 구분이 무슨 소용이야?
ㄴ ㅇㅇ : 와, 나 때는 관광객 한 번 하려면 수백억 원은 그냥 때려박았어야 했는데.
어비스넷을 관리하는 이들이 더 이상 어비스넷을 폐쇄적으로 운영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게 당연했다.
본래 어비스넷은 관광객들을 감시, 관리하기 위한 목줄이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 의견을 나누는 무대가 됐다.
- 박혜민 : 지금 부산에 갇혔는데 살려주세요!
- 이성빈 : 세종시입니다. 여기 괴물들이 있습니다!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 ㅁㄴㅇ : 지금 제주도인데 여기 한라산 중턱에 새파란 안개가 펼쳐져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물론 어비스를 모르는 이들은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뭔지 이해조차 못 했다.
해서 대부분의 게시판 내용은 기존에 어비스넷을 이용하던 이들 위주로 돌아갔다.
더불어 나누는 이야기 대부분은 생존과는 큰 관계가 없는 잡담이었다.
이 역시 이상할 건 없었다.
지금 살아남는 것조차 힘든 상황에서 어비스넷을 할 정도라면 둘 중 하나였다.
근처 몬스터들 쯤은 우습게 상대할 만한 헌터이거나 혹은 생존에 문제가 없는 곳에 있다거나.
뭐가 됐건 여유가 넘치는 이들이었고, 그들 입장에서는 어비스넷이 유일한 유흥거리였다.
해서 온갖 글이 올라왔다.
지금 글도 그랬다.
[헌터 중에 누가 가장 쎔?]
웃기지도 않는 그 글에는 무려 3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며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 ㅇㅇ : 어비스에서 가장 쎈 거? 어떤 기준이야? 솔플 기준?
ㄴ ㅇㅇ : 솔플 기준이면 불의 마녀 아님? 혼자서 1만 마리 몬스터 불태운 건 역대 최고잖아?
ㄴ 123123 : 솔플하면 칼잡이지, 지금 누굴 논해? 잔챙이 1만 마리 잡는 거랑 보스 몬스터 혼자서 잡는 게 비교가 됨?
그 댓글 대부분은 두 헌터를 논하고 있었다.
- 술은맥캘란 : 불의 마녀랑 칼잡이가 센 건 맞는데, 사실 가장 섬뜩한 건 퍼스트 킬러지.
그러나 그중에는 퍼스트 킬러에 대한 댓글도 있었다.
그 의견에 많은 이들이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퍼스트 킬러는 이제 세상에 존재치 않는 헌터였을뿐더러, 생존 능력이 우수했지, 전투 능력이 우수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음험한 사기꾼이란 직업 자체가 직접 전투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염력, 투시, 텔레포트, 텔레파시 같은 전투 보조의 성향이 매우 강했지.
ㄴ 세컨드킬러 : 퍼스트 킬러 이야기 자주 하는데, 뭐 좀 알아?
ㄴ 술은맥캘란 : 잘 알지. 그 인간 몬스터 잡는 걸 보면 잊을 수가 없으니까. 확 당기잖아.
ㄴ 세컨드킬러 : 오, 진짜 본 모양이네?
ㄴ 술은맥캘란 : 보기만 했나, 당했는데.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끔찍하네.
하지만 그런 퍼스트 킬러를 아는 이라면 알았다.
그가 염력으로 어떤 사냥을 하는지 그리고 그 사냥이 어지간한 헌터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섬뜩하고, 무시무시했는지.
실제로 염력은 전투에서 매우 유용했다.
지금 김지운이 보여주는 것도 그랬다.
크우우우!
등장한 오크, 놈들이 안개를 뚫고 병원 안에 들어왔고 그 사실에 생존자들은 도망쳤다.
김지운은 그 앞에 등장했다.
사실 김지운은 총을 쏴서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 목숨보다 탄약이 값비싼 시대, 탄약을 아낄 수 있다면 아끼는 게 맞았다.
물론 김지운은 탄약을 아끼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위기를 감수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가 총을 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증거였다.
이제 오크를 상대로 총 없이도 목숨을 잃지 않으리란 자신이.
그리고 그 자신감을 오크 상대로 보여줬다.
휘익!
김지운, 그가 마주한 오크의 목을 단숨에 올가미로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그 올가미를 그대로 당겼다.
오크의 등 뒤로.
크엑!
자연스레 오크가 숨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목이 뒤로 젖혔고, 그 순간 김지운이 들고 있는 도끼로 오크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콰직!
도끼는 너무나도 쉽게 오크의 머리통을 갈랐다.
이게 김지운이 탄약을 쓰지 않은 자신감의 이유였다.
'잘 되는군.'
보기에는 단순했다.
그저 염력으로 올가미를 씌운 후에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실제로 매우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김지운 기준으로는.
하지만 그 효과는 엄청났다.
일단 기본적으로 사람도 그렇고, 오크도 그렇고 목을 갑자기 조이고, 숨통이 막히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뒤에서 잡아당기기까지 한다?
그럼 제아무리 강력한 몬스터도 뒤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순간 모든 신경은 오롯하게 자신의 등 뒤를 향하게 됐다.
정면에 어떤 존재가 있건 말건.
틈이 생기는 것이었고, 김지운은 그 틈을 노리면 될 뿐이었다.
물론 이것을 위해선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올가미를 씌운 후에 잡아당길 때 최소한 성인 남자가 당기는 만큼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
지금 김지운이 확신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D랭크다워.'
이제 그게 가능했으니까.
그런 김지운 앞에서 이제 더 이상 오크는 적수가 못됐다.
순식간이었다.
크엑!
김지운이 단 한 발의 총성 없이 등장한 오크 일곱 마리를 도끼만으로 해치웠다.
그렇게 병원에 고요함이 깔렸다.
그 고요함 속에서 김지운이 주변을 둘러보자 시선이 보였다.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득 찬 시선이.
그리고 그들은 떨고 있었다.
그 누구도 김지운의 등장을 희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아포칼립스가 된 이후로 그들이 경험한 것은 절망 그리고 더 깊은 절망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김지운은 굳이 그들에게 희망을 줄 생각이 없었다.
"이곳 성모 병원을 점령하고 있던 무리는 전부 처리됐다."
단지 제안할 뿐이었다.
"그 뒤를 이어 이곳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 지원자를 받겠다."
이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물론 겁에 질린 그들 중에 손을 드는 이는 없었다.
공포에 물든 눈으로 김지운을 바라볼 뿐이었고, 그 시선에 이영후가 말했다.
"안 되겠는데요?"
"그럼 다른 곳에서 데려와야지."
"다른 데요?"
"63빌딩이 이곳에서 가까우니까."
2.
"고강수다. 긴말하지 않겠다. 이제부터 이곳을 관리하겠다. 일단 의사들은 전부 이곳에 모이도록."
고강수, 그는 오자마자 빠르게 병원을 정리했다.
"이곳을 1층과 2층으로 나눈다. 1층은 성인 구역이고 2층은 13세 미만 구역이다."
일단 나이별로 구역을 나눴다.
그것은 어린 아이가 다른 곳보다 많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같이 보호한다. 예외는 없다. 또한 필요한 모든 의료 처치는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수술 실패는 있어도 포기는 없다."
그리고 고강수는 바로 아이들을 중심으로 시스템을 갖추었다.
고강수가 그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씨가 넘쳐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의도를 물어본 이영후에게 고강수는 설명해 줬다.
"이곳의 성인들은 크게 세 부류다. 하나는 의사와 간호사들. 다른 하나는 환자들, 다른 하나는 환자 보호자들. 특히 환자 보호자들 중에는 아이들이 아파서 이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이곳의 아이들은 높은 확률로 환자들이다. 여기 있는 성인들에게 그 아이들에 대한 감정이 다들 남다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보호 받는다는 사실에 가장 큰 안정감을 느낀다. 정리하면 그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매우 협조적으로 나온다는 의미지."
왜 아이들을 지키는 것을 중점으로 했는지.
그 이유를 들어보면 정말 섬뜩한 일이었다.
그 짧은 순간 아이들의 목숨을 완벽하게 계산했다는 의미였으니까.
'믿음직하네.'
그러나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그 어떤 능력보다 중요한 능력이었다.
김지운, 그가 고강수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건 김지운에게는 없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매우 귀한 능력이기도 했다.
저런 능력이 있어야 무리를 이끄는 리더가,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으니까.
'다행이다.'
김지운 입장에서는 고강수를 만난 게 큰 도움이 된 셈.
그렇게 고강수가 성모 병원을 정리하는 데에는 하루면 충분했다.
날이 밝았다.
김지운과 이영후 그리고 고강수는 다시 백화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브리핑을 했다.
"일단 지금 상황은 꽤 좋다."
거기서 김지운은 처음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저 모두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김지운이 보기에 상황은 처음에 비해 꽤 좋았다.
"백화점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IFC몰을 비롯해 다양한 상가 그리고 음식점이 있다."
1차 오아시스인 백화점은 물자 보급에 가장 유리한 지역이었다.
식량도 식량이지만 의류를 비롯해 자동차에 있는 석유까지!
또한 백화점 주변에는 다른 큰 쇼핑몰은 물론 매우 많은 맛집들, 그러니까 식당가가 있었다.
이 역시 매우 유효한 부분이었다.
식당가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많은 이들을 위한 음식 재료들이 보관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혹한의 추위는 천연냉장고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제2 오아시스인 63빌딩의 경우에는 건물 가치가 매우 높다."
63빌딩 역시 가치는 매우 높았다.
일단 오아시스에서 좀 더 올라가면 안개에서 자유로운 지역이 있다는 건 엄청난 강점이었다.
주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건 물론, 접시를 통한 위성 통신도 가능했으니까.
또한 한강과의 접근성도 매우 좋았다.
"제3 오아시스가 병원인 건 그야말로 신의 배려라고 봐도 되겠지."
마지막 오아시스인 병원의 가치는 다른 두 곳과 비교할 바가 안 됐다.
제아무리 포션이라고 해도 치료할 수 있는 영역은 한계에 있는 바.
또한 포션은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만 써야 하는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병원이 있다면 달랐다.
당장 충수염 같은 경우만 해도 그랬다. 병원 설비가 있으면 금방 수술로 처리할 수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보다 더 치명적인 병은 없었다.
하물며 성모 병원은 작은 병원이 아니라 과거에는 상급종합병원이었을 만큼 큰 병원이었다.
어지간한 수술은 전부 가능하다는 의미.
"이곳은 서로 거리가 짧을뿐더러, 삼각형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런 주요 장소들이 전부 이레귤러라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준 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바.
그런 김지운의 설명에 모두는 동감했다.
오아시스가 한 곳만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인데 이렇게 적재적소에 있을 줄이야?
"즉, 이 안만 정리하면 안전하고 빠른 이동이 가능하다."
"예?"
물론 김지운은 단순히 그 사실만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정리한다고요?"
"그렇다."
그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어비스 좀비를 정리할 거다."
이제 이곳을 정리할 자신이 있다는 것.
그 말에 모두는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최고의 시나리오는 없었다.
어비스의 안개는 마스크로 해결이 가능했으니까.
"그, 그게 가능합니까?"
하지만 어비스 좀비는 몬스터 이상으로 골치 아픈 존재였다.
머리를 박살내야만 죽일 수 있는 존재.
무엇보다 그 숫자가 아득했다.
연말에 여의도에 모인 인구 수 그리고 여의도에 상주하고, 유입되는 인구 수는 만 단위가 아니라 십만 단위였으니까.
"어려울 건 없다."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말했다.
"내일 당장 처리한다."
3.
한낮.
위에에엥!
어비스 안개로 가득 찬 여의도의 거리 위로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리가 들렸다.
위에에엥!
소리의 정체는 확성기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소리에 잠자코 있던 어비스의 방랑자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으어어어!
아주 격한 반응을.
모두가 미친 듯이 확성기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확성기에 닿을 순 없었다.
위에에엥!
확성기는 다른 어디도 아닌 지상에서 15미터 상공 위에 떠있었으니까.
으어어어!
그렇게 몰려든 어비스 좀비들이 하늘 위의 확성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부는 서로를 밟고 올라서며 탑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탑이 쌓일 무렵에 확성기는 움직였다.
마치 드론처럼.
그렇게 확성기가 몰려든 어비스 좀비들을 이끌고 하염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멜의 피리 부는 사내처럼, 수만이 넘어가는 어비스 좀비가 확성기를 따라 움직였다.
이윽고 어비스 좀비들은 닿을 수 있었다.
첨벙!
한강, 그 드넓은 강 안으로 어비스 좀비들이 몸을 던졌다.
망설임은 없었다. 애초에 어비스 좀비들은 살아있는 존재 자체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수만 마리가 넘는 어비스 좀비들이 한강에 들어갔고, 그대로 한강에 쓸려 내려갔다.
죽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강의 흐름에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갈 터.
그 광경을 먼발치에서 보던 강현중은 감탄을 토해냈다.
'이렇게 쉽게 처리할 줄이야.'
그러나 강현중의 생각과 달리 이건 쉽게 처리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위험한 짓이었다.
일단 확성기를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어지간한 염력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더 골치 아픈 것은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몬스터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몬스터들을 매우 자극하는 짓이었다.
그냥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했을 터.
'화이트 클래스라면 어지간한 놈들 빼면 다 잡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김지운이 이 방법을 꺼내든 것은 몬스터들을 자극해도 별 다른 위협을 느끼지 않는 덕분이었다.
어쨌거나 김지운은 그렇게 오아시스 주변에 있는 어비스 좀비들을 한강물에 빠뜨렸다.
같은 작업을 거듭 반복하면서.
물론 어비스 좀비 전부를 처리한 건 아니었다.
곳곳에 어비스 좀비가 남아있을 테고, 다른 곳에 있는 어비스 좀비가 다시 모여들 터.
하지만 구름떼처럼 몰려올 걱정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됐다.
마스크만 쓰면 오아시스 사이를 이동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작업을 마친 김지운이 63빌딩으로 향했다.
그 순간 들렸다.
"오케이, 됐다!"
이영후의 목소리가.
"무슨 일이지?"
"어? 대장님 오셨군요!"
그런 김지운의 등장을 확인한 이영후가 어느 때보다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작업 좀 했습니다."
"작업?"
"63빌딩이 사무용 건물 아닙니까? 당연히 위에서 아래까지 인터넷 선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거든요? 더군다나 여기 입주한 회사들 중에는 증권사도 있고, 그런 증권사 애들이 목숨 거는 게 인터넷 회선이거든요. 겁나 빨라야 합니다."
"짧게 간추리도록."
"간단하게 말해서 위에 접시 세팅한 노트북하고, 여기 1층 노트북하고 선으로 연결했습니다. 그럼 짜잔!"
그 말과 함께 이영후가 긴 선이 연결된 노트북을 보여줬다.
"이제 1층에서도 어비스넷 이용이 가능해졌습니다!"
그 설명에 김지운이 짧게 감탄을 토해냈다.
뭔가 한다고 했지만 설마 이런 것을 할 줄이야?
김지운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한 작업.
실제로도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말이 인터넷 선이지, 그걸 따서 세팅한다는 것이 쉬운 일 일 리 만무.
하물며 이영후는 이런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저 겉핥기 지식이 있을 뿐.
이영후 입장에서도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진짜 예전에 군대에 아는 사람이 와우하고 싶다고 근처 빈집에 인터넷 연결해서 밤마다 나와서 와우 레이드 뛰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무슨 미친 짓인가 했는데 사람이 궁하면 다 하게 되네요."
그럼에도 이런 것을 하게 된 건 절박함 때문이었다.
63빌딩에서 유리룡을 경험한 이영후는 하늘 위에서 어비스넷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의 절박함은 결실을 맺었다.
"자, 보시죠!"
이영후가 엔터를 누르는 순간 노트북의 화면 위로 어비스넷이 활성화되었다.
"자, 바로 올라오죠? 어? 잠깐만요."
그 광경에 있는 힘껏 미소를 짓는 이영후.
"응?"
그때 이영후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김지운을 향해 말했다.
"대, 대장. 걔, 걔가 글 올렸습니다."
그 말에 김지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누가 글을 올렸기에 이영후가 이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걔요!"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지운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루뱀의 눈을 뿌리겠다고 한 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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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보스 몬스터 (2).
4.
[아이템 또 뿌립니다.]
[작성자 : 최강레이븐스]
[내용 : 여의도에 아이템 하나 더 뿌린다. 이건 진짜 안 뿌리려고 했는데, 유리룡 떴다는 소식에 그냥 뿌린다.
어떤 아이템인지는 말해주기 힘든데 엄청난 거다. 일단 등급이 전설 등급 아이템이다. 정확히 뭔지는 말해줄 수 없다. 그럼 너무 내 존재가 특정되어 버리니까.
물건은 여의도 트럼프 아파트 펜트하우스에 있다. 주상복합인데, 문은 지문인식이니까 알아서 부수고 들어가도록. 그런데 특수 제작한 문이라서 차라리 옥상에서 로프 타고 창문 부수고 들어가는 게 나을 거야.
솔직히 이건 끝까지 안고 싶었는데 그래도 누가 가져가서 몬스터 하나라도 더 죽이는 게 나을 테니까.
참고로 퍼스트 킬러가 썼던 거다.]
그것은 놀라운 내용의 글이었다.
전설 등급 아이템부터 퍼스트 킬러라는 헌터 언급까지!
하지만 막상 그 글에 대한 반응은 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조회수 : 4]
이제 막 올라온 글이라는 것.
물론 앞으로도 이 글이 큰 관심을 끌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허황한 개소리일 뿐이었으니까.
내가 어디에 보물을 숨겼는데, 그게 파라오의 보물이다! 라고 지껄이는 수준의 개소리.
하지만 김지운 파티는 달랐다.
그것을 보는 순간 모두의 표정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작성자가 가짜일 가능성은?"
"어비스넷에서는 닉네임을 중복으로 못 씁니다. 물론 원래 닉네임 주인이 닉네임을 바꾸거나 혹은 해킹을 한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이걸 가지고 그런 짓을 할 만한 인간은 없을 거 같습니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 어비스넷에서 강퇴당하는 건 어느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강퇴 당하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니까요. 교도소에 무기징역으로 수감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죠."
이 글을 올린 이가 허언을 지껄이는 이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쯤에서 이영후가 제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도 이거 구라 같습니다."
글쓴이를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말이 안 됩니다. 전설 등급도 전설 등급이지만 퍼스트 킬러의 유산이라니?"
내용이 너무 터무니없다는 것.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여기에 이런 게 있을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그야 여기 제 집이거든요."
"집?"
"여기 트럼프 아파트 주상복합에 진짜 꼭대기에 있는 펜트하우스가 4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제 집입니다."
그 말에 모두는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이영후가 본래대로라면 모두가 감히 얼굴 보기도 힘든 엄청난 부자였다는 것을.
물론 김지운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요즘 시대가 이웃집 사람들과 교류 따윈 하지 않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영후가 이 정도로 말할 정도라면 헌터의 낌새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는 의미.
"더군다나 이거 글 올린 분이 진화 그룹 회장이거나 관계자일 텐데, 그쪽 집안 양반들은 평창동하고 한남동에 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의도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여러모로 타당한 근거였다.
"아마 다들 이거 개구라라고 말할 걸요? 댓글이 다 그럴 겁니다."
그쯤에서 이영후가 새로고침을 누르는 순간, 그 순간 모두는 볼 수 있었다.
"어? 삭제됐네?"
게시글이 사라진 것을.
"역시 구라네요. 본인이 쓰고도 씨알도 안 먹힐 글이라는 거 알고 삭제했네요!"
여러모로 신빙성이 사라지는 대목.
반면 김지운은 달랐다.
주어진 정보 자체를 놓고 보면 이영후의 말이 맞았다.
'진화 그룹의 회장과는 만나봤다. 몇 번.'
하지만 김지운의 생각을 다르게 하는 건 만남이었다.
'이런 장난을 칠 만한 분은 아니다.'
깊은 만남은 아니었지만, 서로가 어떤 인간인지는 알 수 있을 만큼은 됐다.
여기서 김지운은 저울질을 했다.
이게 만약 장난질일 경우 김지운이 얻게 되는 리스크.
반면 이게 진짜일 경우 김지운이 얻게 되는 메리트.
사실 이건 저울질이 필요가 없었다.
"이영후."
"예, 대장."
"집으로 가는 길은 알고 있나?"
"예?"
5.
김지운, 그가 오아시스를 정리하면서 가장 먼저 확보한 것은 여의도의 지도였다.
확보는 어렵지 않았다.
여의도 재건축 소식에 아파트 단지 상가마다 부동산이 서너 개가 넘게 있었고, 그 부동산 안에는 아주 좋은 지도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지도를 확보한 후에 김지운은 바로 이동 동선을 짰다.
그 이동 동선이 무슨 대단한 안전 루트이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무슨 벽을 만들지 않는 이상, 새로운 터널을 만들지 않는 이상 어비스 좀비와 오크의 위협으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한 루트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벽을 만들더라도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오크는 몰라도 트롤 정도만 오더라도 벽을 부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동선을 만든 건 간단했다.
"이 동선 곳곳에는 지정된 차량들이 있고, 그 차량 안에는 식량 그리고 마스크가 있다."
그곳에 최소한의 숨구멍을 만들어두기 위해서.
그 차이는 매우 컸다.
"차량 위치 그리고 차량 모델을 제대로 기억해라. 최악의 경우에는 차에 기름이 있으니, 시동을 걸고 움직여라."
그런 동선을 확보함으로써 이제는 헌터가 아닌 이들 역시도 생존율이 올라갔으니까.
그리고 생존율이 오른다는 것은 활동의 자신감이 생긴다는 의미였고, 그건 안정적인 물자 수급과 수색 그리고 노동이 가능해진다는 의미였다.
하물며 김지운이 몇 차례에 걸쳐서 어비스 좀비들을 정리해 준 상태였다.
남아있는 몬스터들이 적은 건 아니었지만, 소리만 들리면 무작정 달려드는 어비스 좀비가 없다는 것은 엄청난 메리트였다.
김지운의 준비는 거기서 끝이었다.
"상황이 마련되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로프로 연결할 거다. 그럼 더더욱 안전한 탈출이 가능할 거다."
김지운은 건물들 사이를 줄로 잇는 구상까지 하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그 줄을 타고 이동할 순 없을 테니, 정말 빠르고 안전한 이동이 가능해진다는 의미.
그런 김지운의 구상에 모두는 감탄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다들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그 이상을 생각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살아남으려면 해야지."
반면 김지운에게는 특별할 게 없었다.
"이런 짓까지."
도리어 김지운은 이런 구상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어비스넷에는 여전히 쉼터 이야기가 없다.'
솔직히 김지운은 대한민국 어딘가에 제대로 된 영역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작은 도시 한 개 정도의 이레귤러 지역이 나오기를.
그러면 그곳에서 도시를 만들면 생존 가능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비단 한국만 그런 건 아니었다.
이영후가 쉴 새 없이 어비스넷을 헤집으며 정보를 수집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쉼터 지역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지옥이 되니까."
어쨌거나 김지운이 지정한 영역은 이제는 일반인도 방법만 알면 돌아다닐 만큼 안전했다.
"저기처럼."
달리 말하면 그 외의 구역은 여전히 지옥과도 같았다.
김지운과 이영후, 둘이 그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으어어어!
일단 곧바로 들리지 않던 어비스 좀비의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김지운과 이영후는 괜한 자극 없이,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소리를 내서 어비스 좀비를 유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김지운이 걱정하는 건 다른 거였다.
그 소리가 몬스터를 자극한다는 것.
여기 얼마만큼의 몬스터가,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정신 나간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주변 몬스터 상황만 파악해도 상황이 매우 좋아질 텐데.'
여러모로 탐색 능력의 부재가 아쉬운 대목.
그러나 아쉬움을 오래 머금지는 않았다.
끄르르!
김지운과 이영후의 앞에 등장했으니까.
끄으으!
도그블린과 비슷한 생김새이나 그보다 덩치가 더 크고, 잿빛 털로 뒤덮인 몬스터가.
'코볼트다.'
어비스의 화이트존에서 오크만큼 자주 볼 수 있는 몬스터인 코볼트였다.
오크보다는 그리 강하지 않은 몬스터였다.
개체의 강함을 놓고 보면 도그블린과 오크 사이.
'골치 아픈 놈이 나왔어.'
그러나 어비스의 개체의 약함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약한 것은 무리의 숫자로 부족함을 채웠으니까.
특히 코볼트는 두 가지 부분에서 까다로웠다.
하나는 도그블린처럼 코가 좋다는 점이었다. 안개에서 코가 좋다는 것은 매우 강력한 메리트였다.
두 번째로 까다로운 건 무기를 다루는 솜씨가 오크 이상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놈들은 활을 다룰 줄 알았다.
이건 매우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활을 다룬다는 것은 그냥 일반적인 무기를 다루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리고 활을 다룰 줄 아는 정도의 지능이면 총을 다루는 것도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총이 적응만 조금 더 되면 더 쉬웠다.
일반인을 데려다가 총을 쏘는 연습을 해서 표적을 맞히는 것과 활 쏘는 연습을 시켜서 표적을 맞히는 것, 무엇을 더 빨리 할지는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물론 한국에서는 걱정할 일이 아니긴 했다.
한국에서 총기를 구하기란 쉬운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놔두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지는 몬스터였다.
크르르, 킁킁!
무엇보다 이대로 지나치고 갔다가는 오히려 김지운 파티의 냄새를 맡고 꼬리에 붙을 수도 있었다.
그쯤에서 김지운이 움직였다.
휘익!
피아노 줄이 뱀처럼 하늘을 기어가더니, 이내 그대로 보이는 코볼트 두 마리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김지운이 그대로 피아노줄을 잡아당겼다.
케엥!
코볼트 두 마리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뱉었다.
여기서 김지운은 도끼를 휘두르지 않았다.
도끼로 머리통을 박살내면 당장 상황은 쉽게 풀리겠지만 피 냄새가 문제가 됐다.
물론 김지운은 피 냄새와 목숨의 위기를 같은 저울에 올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도끼로 머리통을 쪼갰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지금 이 방법으로도 충분하다고, 문제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곧 현실로 드러냈다.
께껙!
두 마리의 코볼트를 옭아맨 올가미가 코볼트의 목을 더 깊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김지운의 힘이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
또한 그럴 만했다.
지금 김지운은 오아시스 주변을 정리하면서 몬스터 역시 적잖게 사냥했고, 덕분에 7레벨을 달성한 상태였고, 아이템 옵션으로 근력 스탯은 50포인트를 넘긴 상태였다.
이 정도면 이미 인간의 영역은 벗어난 수준이었다.
[코볼트를 처치했습니다.]
[코볼트가 도감에 등록됩니다.]
[마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그렇게 단숨에 코볼트 두 마리가 처리됐다.
피 한 방울 없이.
놀라운 결과물이지만 김지운은 만족하지 않았다.
'피아노줄로는 오크 정도가 한계다.'
오크보다 강한 몬스터들은 넘쳐났으며, 그보다 강한 몬스터를 상대로는 피아노줄 정도로는 통하지 않았다.
물론 그 고민을 길게 끌진 않았다.
온 목적은 고민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대장, 이쪽입니다.'
이영후의 안내를 따라 둘이 다시 움직였다.
이동 속도는 매우 빨랐다.
길은 확실하게 파악해둔 상태였고, 김지운에게는 그 무엇도 아닌 거미줄이 있었으니까.
이윽고 둘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드높은 주상복합 앞에.
값비싸기 그지없던 주상복합 아파트의 분위기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으어어어!
들려오는 것은 어비스 좀비의 소리뿐.
여기서 김지운과 이영후는 63빌딩 때와 같은 방법을 이용했다. 엘리베이터 통로를 통해 올라갔다.
이윽고 꼭대기 층에 도달하는 순간 이영후는 마스크를 벗으면서 말을 뱉었다.
"여기 다시 올 줄 몰랐습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서 자신의 집으로 오게 될 줄이야?
물론 정확히 말하면 이영후의 집이 아니었다. 트럼프 아파트는 2개 동이었고, 이영후의 집은 다른 동에 있었다.
그래도 감흥이 남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
"이영후."
"예?"
그러나 그 감흥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이 집의 구조가 네 집과 같나?"
"네, 같죠. 일단은요. 내부를 개조한 게 아닌 이상."
"구조를 그려줄 수 있나?"
그 물음에 이영후가 자신의 집 구조를 그렸고, 그것을 본 김지운이 복도 밖 창문을 바라봤다.
"현관과 거실이 바로 연결되어 있군."
"예, 문 열자마자 느껴지는 개방감이 장난 아니죠. 바로 여의도 풍경이 보이니까요."
그 순간이었다.
김지운이 바로 유리창을 향해 자신의 도끼를 휘둘렀다.
쨍그랑!
유리는 너무나도 쉽게 깨졌고, 그것을 본 이영후가 놀라며 말했다.
"유리창 통해서 들어가시려고요?"
이곳의 벽이 특수 제작됐다는 것은 게시글에도 나온 바.
결국 들어갈 만한 방법은 유리창 밖에 없긴 했다.
하지만 여기는 최상층이었다. 밖을 통해 이동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 이영후의 물음에 김지운은 대답 대신 다음 행동으로 넘어갔다.
'응?'
권총을 꺼낸 후에 권총 끝에 줄을 묶었다.
'뭐하시려고?'
그리고는 그 권총을 깨진 유리창 밖으로 던졌고, 염력으로 권총을 움직였다.
타앙!
이윽고 총성과 함깨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면서 권총은 그대로 반동에 의해 날아갔다.
권총의 반동은 아직 김지운의 염력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날아간 권총은 연결된 줄로 회수하면 될 일.
해서 김지운은 권총을 무시한 채 집중했다.
자신의 염력을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후.
삐빅!
그 굳건했던 문이 열렸다.
"어!"
그 사실에 놀라는 이영후에게 김지운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좋은 문일수록 안에 있는 인간이 나올 때 편리 하게 설계되어 있지."
염력을 이용해서 안쪽에 있는 잠금 버튼을 누르는 것은 어린 아이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그 둘이 안으로 들어갔다.
둘 모두 경계심을 풀진 않았다.
63빌딩에서 호의를 맛봤다고 해서 이곳에도 호의가 있으리라 보장은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누군가의 흔적은 없었고, 그 후에 비로소 그 둘은 주변을 탐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찾았다.
정확히는 바로 거실로 가는 순간 보였다.
"대장! 이거 같은데요?"
마치 박물관에서나 볼법한 유리 케이스 안에 투명한 실들이 돌돌 말려 있는 실타래 하나를.
"뭐야, 이게 전설이라고?"
그걸 본 이영후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김지운은 달랐다.
그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헥타르 거미의 거미줄이다.'
헥타르 거미.
옐로우 등급의 몬스터로 거미줄을 한 번 펼치면 그 넓이가 1헥타르에 이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더불어 헥타르 거미의 거미줄은 보이는 것처럼 거의 투명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그 부분이었다.
마력이 주입되는 순간, 엄청난 점성을 가진다는 것.
피부에 붙으면 거미줄을 떼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냥 피부를 잘라내는 게 현명했다.
물론 다행인 점은 헥타르 거미가 어비스에서 매우 보기 힘든 희귀종이란 점이었다.
또한 그 특이점 때문에 이 헥타르 거미의 거미줄은 전설 등급 아이템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가치 넘치는 아이템이었다.
효용성만 놓고 보면 삼족오 클랜이 외부 유출을 할 리가 없는.
그럼에도 이 아이템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결국 나 말고 아무도 못 쓴 모양이군.'
이 헥타르의 거미줄은 퍼스트 킬러만이 제대로 썼던 아이템이라는 것.
결국 아무도 쓰지 못하는 무기는 기념품이 될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헥타르 거미의 거미줄 앞에서 짧게 회상에 잠기던 김지운, 그러나 그 회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우우우!
지상, 그곳에서 하울링이 솟아올랐고 그 하울링을 듣는 순간 김지운의 눈빛이 바뀌었다.
"웨어 울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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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보스 몬스터 (3).
6.
아우우우우!
드높은 주상복합 아파트의 꼭대기 층까지 도달할 만큼 우렁차기 그지없는 그 하울링을 듣는 순간 김지운은 그 하울링의 정체를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웨어 울프다."
모를 수가 없었다.
어비스의 헌터들 중에서 웨어 울프를 한 번이라도 경험한 이라면 저 소리만큼은 구분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좋은 의미로 구분이 가능하다는 건 아니었다.
이영후의 표정이 말해줬다.
"웨어 울프면 화이트 클래스 중에 가장 골치 아픈 놈 중 하나 아닙니까? 그때 그거 보고 싶다고 했다가 욕 한 사발 처먹었었는데."
김지운의 표정도 비슷했다. 굳어있었다.
'가장 골치 아픈 놈은 아니지만.'
물론 김지운의 기준에서 웨어 울프보다 골치 아픈 화이트 클래스 몬스터가 수십 마리가 넘었지만, 그래도 웨어 울프가 지금까지 마주한 몬스터 중 가장 까다로운 건 분명했다.
'쉽지 않다.'
일단 웨어 울프는 기본적으로 강했다.
그 개체의 강함이 오크보다 훨씬 셌다. 그것도 무기를 쓰지 않는 주제에, 맨몸으로 싸우는 주제에 무장한 오크를 압도했다.
또한 웨어 울프는 늑대답게 후각 능력이 발달되어 있었다. 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경 1백 미터 내에서 피 냄새 정도는 추격이 얼마든지 가능한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무리를 지어 움직였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점이 다 합쳐진 격!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골치 아픈 건 그 부분이었다.
'놈은 사냥을 할 줄 아니까.'
웨어 울프는 결코 무리해서 사냥감에 달려들지 않았다.
사냥감이 피를 흘리고 지친 상태면 기꺼이 먼 거리에서 사냥감이 쓰러지기를 기다릴 줄 알았다.
사냥감이 된 입장에서는 지옥 같은 일이었다.
특히 어비스의 안개에서 시간이란 가장 큰 제약을 목에 차야 하는 헌터들에게 웨어 울프의 이런 사냥 방식은 골치 아픈 수준을 넘어서 악몽과도 같았다.
실제로 헌터들 중에는 웨어 울프 무리와 일주일 내내 쫓고 쫓기는 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하튼 지금 김지운과 이영후 입장에서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볼 때가 아니었다.
일단 그 둘은 바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물건은 챙겼다.'
이곳에 온 목적은 완수했으니까.
그렇게 둘은 왔던 방법대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 내려놓은 로프를 타고 올라왔을 때보다 더 빠르게 1층에 도달했고, 건물 밖으로 이동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김지운과 이영후의 걸음이 멈췄다.
이 주변에 웨어 울프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
또한 웨어 울프는 영리한 몬스터였다. 사냥감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숨죽이고 있을 줄도 알았다.
섣불리 움직이는 건 위험하다는 의미.
물론 그렇다고 아주 상황이 최악인 건 아니었다.
'상황은 내게 유리하다.'
어비스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여의도였다.
도처에 자동차가 즐비했고, 건물들이 즐비한 곳!
당장 웨어울프는 자동차 클랙슨이 내는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구분할 줄은 몰랐다.
그냥 소음일 따름.
그게 아니더라도 김지운은 염력을 이용해 스마트폰이든 확성기든 하다 못해 가로등을 때리는 소리든, 뭐든 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김지운의 수중에는 총이 있었다.
글록17과 K2라는 아주 확실한 무기가.
제아무리 웨어울프가 오크보다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붙어서 죽을 일은 없었다.
단지 조심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크르르!
소리 하나가 들렸고, 그 소리에 김지운이 이영후에게 신호를 줬다.
물론 그 신호가 아니더라도 이영후는 이미 자신의 숨 소리를 최대한 죽인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둘이 바닥에 엎드렸다.
최대한 자세를 낮추었다.
그 상태에서 김지운이 움직였다.
우우웅!
그가 고프로를 염력으로 날렸다.
그렇게 고프로가 주변의 상황을 찍었다.
안개 때문에 제대로 된 무언가를 찍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애초에 기대하는 건 디테일한 게 아니었다.
대략적인 형태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크기와 움직이는 동선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으니까.
'이건?'
그리고 김지운은 볼 수 있었다.
'블랙 웨어 울프?'
일반적인 웨어 울프와 달리 덩치가 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검은 털의 웨어 울프를.
그 사실을 아는 순간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보스 몬스터가 나오다니.'
7.
보스 몬스터.
그 표현은 그저 어비스의 헌터들이 붙여준 표현이 아니었다.
어비스의 시스템 알림이 분명하게 명시해 준 표현으로, 어비스 시스템은 몬스터를 네 종류로 나뉘었다.
가장 평범한 몬스터를 노멀, 그보다 강한 몬스터를 엘리트, 그보다 더 강한 몬스터를 보스 몬스터, 그 위에 존재하는 마스터 몬스터.
마스터 몬스터 같은 경우는 간단하게 정리하면 그 존, 화이트존이나 레드존에서 가장 강한 존재를 말함이었다. 그 영역의 주인이라는 의미.
보스 몬스터 같은 경우에는 한 무리를 이끄는 아주 강력한 개체를 말함이었다.
김지운이 최근에 잡은 붉은 눈의 오크와는 달랐다. 그건 엘리트 몬스터에 불과했다.
분명 일반 오크보다 강했지만, 딱 그 정도.
사람으로 따지면 일반인과 타고난 재능을 가진 격투기 선수 정도의 차이였다.
큰 차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궤가 다른 수준의 차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반면 보스 몬스터는 달랐다.
'블랙 웨어 울프 정도라면······ 소형차 정도는 손으로 뒤집을 수 있겠지. 아니면 그냥 맨손으로 찢어버리거나.'
근력과 체력 그리고 방어력, 모든 부분에서 차원이 달랐다.
김지운이 가진 자동소총으로도 데미지를 줄 수 있을지언정 치명상을 준다고는 자신할 수 없었다.
'대신 놈을 잡으면.'
물론 그 강함만큼 특별함도 있었다.
일단 도감에 등록될 경우 얻을 수 있는 능력치 포인트가 다른 몬스터와 비교를 거부했다.
블랙 웨어 울프면 마력이 10포인트 증가였다.
엄청난 수치였다.
'룬이 확정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달콤한 건 스킬룬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건 엄청난 메리트였다.
스킬룬의 값어치는 어비스에서도 그랬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값어치를 가늠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이것은 메리트일 뿐이었다.
'블랙 웨어 울프? 보스 몬스터? 씨발!'
이영후의 경우에는 지금 패닉 상태에 빠졌다.
어비스의 관광객에게 보스 몬스터 이상의 몬스터는 관광 대상에서 제외였다.
흔적이 발견되는 순간, 그 순간 관광은 중단되고 무조건적으로 지구로 귀환이었다.
조우하는 경우에는 딱히 규칙이 없었다. 열심히 잘 살아남으세요, 그게 규칙이 될 순 없었으니까.
그만큼 보스 몬스터의 존재는 압도적이었다.
재앙과 같았다.
'어떻게 하지? 여의도 괜찮은 거야?'
때문에 이영후는 당장의 생존을 떠나서 이제 여의도를 벗어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그런 이영후에게 김지운이 신호를 보냈다.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영후]
그 메시지를 본 이영후가 정신을 차렸다.
'그래, 내 곁에는 대장이 있어.'
이제까지 언제나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최고의 결과물을 보여준 리더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라면 여기서도 최고의 결과물을 보여줄 터!
'대장만 믿으면 도망칠 수 있어.'
무엇보다 김지운의 능력을 생각하면 블랙 웨어 울프를 피해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어쨌거나 당장 블랙 웨어 울프 눈에 걸린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 이영후에게 김지운이 새로운 메시지를 보여줬다.
[블랙 웨어 울프는 보스 몬스터다.]
'아무렴요, 알죠. 당장 튀어야 하는 놈이죠.]
[그러니까.]
'그러니까 도망쳐야죠! 무슨 방법이든 믿고 따르겠습니다! 알몸으로 도망치라고 해도 하겠습니다!'
[여기서 잡는다.]
'네, 그래야죠! 네? 네? 네?'
그때 마음 속으로 대답을 하던 이영후의 사고가 정지됐다.
고장 난 컴퓨터처럼.
정말 그대로 멈췄다.
반면 김지운은 그런 이영후와 상관없이 거듭 자신의 의견을 스마트폰으로 보여줬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겠지만 김지운은 그저 보스 몬스터가 주는 메리트에 눈이 멀어 함 해 보입시더! 그런 생각을 지껄이는 게 아니었다.
[본래 보스 몬스터는 무리를 이끌고 다닌다. 웨어 울프라면 더더욱 무리를 짓는 몬스터다. 하지만 지금 놈은 혼자다.]
일단 김지운의 기준에서 블랙 웨어 울프가 단독으로 활동하는 건 지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사실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스 몬스터의 주변에는 노멀 몬스터는 물론 엘리트 몬스터가 호위를 서는 게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런 이례적인 일이 생긴 것은 이곳이 어비스가 아니라 지구인 탓이었다.
[상황을 보면 놈은 지하철역을 혼자 나온 것 같다.]
블랙 웨어 울프는 지금 샛강역 4번 출구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건 곧 지하철역을 통해 나왔다는 의미.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블랙 웨어 울프 무리는 지구에 등장하는 순간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늑대답게 토굴 또는 동굴 같은 곳으로 피신을 하고자 했을 테고, 지하철역이 제격으로 보였을 터.
그 후에 끝이 없는 지하철역을 지나면서 블랙 웨어 울프 무리는 고민했을 것이다.
이곳이 자신들이 아는 자그마한 동굴이 아님을.
그쯤에서 보스 몬스터인 블랙 웨어 울프가 보스답게 길을 개척하고자 먼저 위험을 감수하고 앞장섰을 것이다.
그렇게 기나긴 지하철 노선을 지나 미로 같은 지하철역의 계단들을 밟고 이내 밖으로 나온 후에 하울링을 질렀을 것이다.
이곳에 땅이 있음을 알리는 하울링을.
[이대로 놔두면 무리가 온다.]
달리 말하면 이제 곧 블랙 웨어 울프를 따르는 웨어 울프 무리가 이곳에 올 예정이란 것.
그렇게 되면 김지운 입장에서는 매우 골치 아팠다.
여의도는 섬이었다.
외딴 섬은 아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섬은 섬이었고, 섬으로 들어온 것들은 섬 안에서 부대낄 수밖에 없었다.
블랙 웨어 울프 무리가 여의도에 자리를 잡는다면 김지운이 만든 집이 위협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
솔직히 김지운은 그 무리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하려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는 이제까지 이룩한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해야 했다.
[절호의 기회다.]
정리하면 김지운 입장에서는 블랙 웨어 울프를 가장 쉽게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다음은 오지 않을 기회
물론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조건을 필요로 했다.
그쯤에서 정신을 차린 이영후가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띄었다.
[저걸 어떻게 잡습니까? 미사일도 없는데!]
그래도 신궁이나 M61발칸포라도 있으면 승산이 있겠지만, 그 무거운 것을 이곳에 들어왔을 리 없었다.
가지러 간다? 그 역시 일단은 후퇴해야 한다는 의미.
여러모로 이영후의 의견이 타당했고, 김지운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자세한 설명을 할 생각도 없었다.
만약 블랙 웨어 울프가 주변 탐색을 마치고 다시 샛강역 역사 안으로 들어가면 그다음에는 블랙 웨어 울프가 아닌 놈이 이끄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웨어 울프를 상대해야 했으니까.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그렇기에 김지운은 말했다.
[놈의 시선을 3초만 끌어라. 그럼 내가 무조건 잡을 수 있다.]
그 순간 이영후도 상황을 이해했다.
여기서 시나리오는 두 가지라는 것을.
자신이 없으면 김지운은 혼자서라도 블랙 웨어 울프를 잡을 것이고, 그러다 죽으면 이영후도 죽은 목숨이라는 것.
혹은 잡으려다가 같이 죽거나 운 좋게 살아남거나.
뭐가 됐던 좋지 않은 엔딩 앞에서 이영후는 더 이상 셈법을 하지 않았다.
'씨발, 집 한 번 왔으면 됐다.'
어차피 김지운 덕분에 부지한 목숨, 아까울 게 뭐가 있는가?
이영후, 그가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만들었다.
그 후에 스마트폰으로 말했다.
[언제 움직일까요?]
그 물음에 김지운이 가볍게 턱짓을 했다.
'예? 당장이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그래, 당장.'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이영후의 표정이 이제는 울먹거리는 표정이 됐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몸은 움직였다.
이영후, 그가 조심스럽게 다른 곳으로 기어가듯 움직이더니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갑자기 차량 위로 올라가더니 소리쳤다.
"개새끼야, 드루와!"
크어어엉!
그 순간 바로 거대한 검은 물체가 이영후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이영후가 등장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총알처럼.
'어어? 어어?'
그렇게 자동차 위를 징검다리 건너듯 뛰어오는 블랙 웨어 울프의 존재 앞에서 이영후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공포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대로 있었다.
이윽고 이영후의 눈 앞에 블랙 웨어 울프의 모습이,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린 그 무시무시한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거기서 이영후의 사고는 정지했다.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
크르르르!
해서 이영후는 볼 수 없었다.
깨에에엥!
갑자기 블랙 웨어 울프의 몸뚱이가 뒤로 넘어가더니 그대로 블랙 웨어 울프가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케에엑, 케에에엑!
그리고 그 블랙 웨어 울프가 제 목을 부여잡고 절망적일 정도로 짙은 숨소리를 내는 것을.
그러면서 블랙 웨어 울프가 자신의 목덜미를 긁었다.
그 날카로운 손톱으로, 강철도 긁을 수 있는 손톱으로. 제 피부가 찢어질 정도로.
그러나 그렇게 긁었음에도 제 목에 지금 달라붙은 그 투명한 실들을 끊어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투명한 실들에 손톱이 달라붙었다.
끄에에에엑!
그 처절한 몸부림, 물론 그 몸부림 속에서 숨통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트이기 시작했다.
그쯤에서 김지운이 등장했다.
철컥!
K2로 블랙 웨어 울프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
투투투투!
그렇게 총성이 울려 퍼졌다.
탄창 하나가 전부 비어버릴 때까지.
거기서 김지운은 멈추지 않았다.
잽싸게 새로운 탄창을 끼웠고, 다시금 총성을 피웠다.
쉴 새 없이.
이윽고 세 번째 탄창을 갈아 끼우고 총알을 난사하는 순간, 그 순간이었다.
[블랙 웨어 울프를 처치했습니다.]
김지운, 그의 총성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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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보스 몬스터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