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지하 3층.
그곳으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 에스컬레이터가 지하 3층까지 쭉 연결되어 있었다.
마스크를 쓴 김지운과 이영후는 천천히 정지된 에스컬레이터를 계단처럼 밟으며 움직였고, 3층에 도달하는 데에는 1분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
문제는 지하 3층에 들어온 직후였다.
안개라기보다는 연기라고 해야 할 정도로 짙은 안개.
당장 1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그 안개 속에서 김지운과 이영후는 그대로 멈췄다.
그때였다.
으어어어!
멈춰 있는 그들의 코앞으로 어눌한 소리를 내뱉는 여자 한 명이 그대로 지나갔다.
으어어어!
그야말로 영화에 나오는 좀비처럼.
느릿하게.
이성 따위는 조금도 없는 모습으로.
그 앞에서 김지운과 이영후는 가만히 서 있었다.
설명은 필요 없었다.
어비스에서도 안개에 의해 정신이 무너진 좀비들을 볼 수 있었다. 많지는 않았다. 어비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세상의 권력자들이 들이는 노력은 엄청났으니까.
그러나 대단한 권력자라고 해도 세상 전부를 관리할 수는 없는 법.
때문에 어비스를 경험한 이들은 좀비를 모를 수 없었다.
'어비스 좀비는 소리에 반응한다.'
일단 어비스 좀비의 유효한 감각은 청각뿐이었다.
사실상 눈은 기능을 못했으며 하더라도 어비스의 안개에서만 살 수 있는 좀비들에게 시력은 무의미했다.
'민감하진 않다.'
그렇다고 어비스 좀비의 청각이 매우 뛰어나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있을 때의 인간보다도 기능이 떨어졌다.
비유를 하자면 예민한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의 수준이었다.
어지간한 소리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큰소리에는 반응하는 수준.
'하지만 걸리면 좆된다.'
문제는 어비스 좀비의 강함이었다.
어비스 좀비는 정신이 무너진 인간, 그런 어비스 좀비는 리미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제 주먹이 부서지든 손가락이 부러지든 간에 대상을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면서 머리통이 뭉개지거나 머리가 부서지기 전까지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동해야 했다.
툭!
'알아, 안다고 씨발!'
다른 누구도 아닌 이영후의 안내에 따라서.
당연한 말이지만 이영후 입장에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영후는 여기서 불만 따윌 품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해야 해.'
오히려 의지를 불태웠다.
'지금 이 양반이 나한테는 동아줄이다.'
어비스를 경험한 이영후는 지금 상황에서 헌터의 존재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잘 알았다.
즉, 김지운이 필요한 게 있다면 전부 구해줘야 한다는 의미.
그렇게 그 둘이 천천히 지하 3층 주차장으로 나왔다
지하 3층 주차장의 크기는 가늠되지 않았다.
짙게 깔린 새하얀 안개는 도무지 뭐가 뭔지 구분하는 것조차 불가능케 했으니까.
방향감각조차도 사라질 지경이었다.
툭툭!
그러나 이동한지 채 2분도 되지 않았을 때 이영후가 걸음을 멈추고 김지운에게 신호를 줬다.
'다 왔습니다.'
이영후, 그는 완벽하게 목적지에 도달했다.
정말 완벽하게 길을 읽었다는 의미.
사실 이영후는 자신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게 자주는 아니지만, 최소 한 번 이상은 와봤던 곳이었고 이영후는 한 번 간 곳은 무조건 기억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발렛파킹 데스크에 도달한 이영후의 눈에는 걸려 있는 자동차 키들이 보였다.
정말 많은 차키들이 있었다. 당연히 비슷한 키들도 넘쳐났다.
'이건 벤틀리, 이것도 벤틀리, 이것도 벤틀리, 아니 무슨 벤틀리 매장 차렸나? 아!'
그러나 그중에서 이영후의 차키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기 있다.'
이영후가 타고 온 브랜드의 차키는 오로지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벤틀리 대신 이걸 사서 다행이야. 아니면 골치 아플 뻔 했네.'
그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영후.
그러나 이내 이영후의 표정이 굳었다.
'가만.'
알았으니까.
'내 차 위치 어디지?'
그의 차를 주차한 위치는 그가 알 수가 없다는 것.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발렛 카드를 내밀면 알아서 발렛파킹 직원이 차를 가져다줬으니까.
어디에 주차할지는 알 바 없었으니까.
그마저도 몇 번에 불과했다.
대개는 그냥 쇼핑 후에 직원에게 말해두면 내려왔을 때 이미 차가 대기 중인 경우가 많았다.
즉, 이제부터 주차한 위치를 찾아야 했다. 1분은 물론 1초가 어느 때보다 귀중한 상황에서.
거기서 이영후는 혼자만 고뇌하지 않았다.
준비했던 스마트폰의 메모 기능으로 빠르게 문장을 썼다.
[주차 위치는 저도 모릅니다.]
그것을 본 김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손을 내밀었고, 이영후가 바로 의미를 눈치 채고 차키를 건네줬다.
'방법이 있구나!'
그런 김지운을 바라보는 이영후의 눈빛에는 어느 때보다 강력한 믿음이 있었다.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니었어! 이 인간만 따라가면 돼!'
그 순간이었다.
틱!
'응?'
김지운, 그가 차키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이영후의 자동차 대답을 했다.
삐익!
나 여기 있다고, 아주 큰 소리로.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당연히 그들도 들었다.
으어어어어어어!
어비스 좀비, 놈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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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지하주차장 (4).
8.
삐익!
자신의 애마가 소리를 내는 순간 이영후는 전력을 다해 비명을 내질렀다.
'이 미친 새끼!'
입 밖이 아닌 입 안에서만.
그 사실에 김지운의 눈빛이 반짝였다.
'관광 경험이 제법 되는 모양이군.'
어비스의 헌터들에게 다섯 가지 수칙이 제공되는 것처럼, 어비스의 관광객에게도 수칙이 제공됐다.
물론 그 수칙은 꽤 많았다. 거의 책자 수준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비명을 내지르지 않는 것이었다.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어비스의 몬스터들은 안개에서 살아갔고, 자연스레 소리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어비스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것은 여기 생생한 생고기가 있습니다, 지금 잡아드시면 간하고 허파가 공짜! 리고 외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물론 헌터들과 관광객들 중에 그 규칙을 제대로 지키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헌터들은 실수하면 제 목이 날아갔지만, 관광객들이 실수하면 헌터의 목이 날아갔으니까.
더불어 관광객의 목숨 값은 꽤 높았고, 그래서 대개는 관광객이 실수할 것을 염두에 두고 관광 가이드 파티를 갖추고는 했다.
그런데 이영후는 비명을 삼켰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비명을 내지르고, 씨발 미친 새끼라고 욕지거리를 내뱉어도 이해해줄 수 있는 상황에서.
그건 타고난 재능이었다. 헌터들 중에서도 어비스에 처음 온 이들 중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이가 열 중 셋은 됐으니까.
'꽤 깊은 곳까지 관광했겠군.'
더불어 이런 재능을 가진 관광객들, 수칙을 잘 지키는 관광객들은 더 제대로 된 관광이 가능했다.
'저 정도만 되어도 오렌지까지는 문제 없지.'
화이트 존이 아니라 레드 존 혹은 오렌지 존까지.
김지운이 은퇴하기 전까지는 그린 존이 기록이었다. 관광객이 가서 살아돌아온 기록.
그 관광에서 헌터도 헌터이지만, 관광객의 능력이 엄청 중요했다. 그 사실을 김지운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린 존은 다르지만. 그때 정말 위험했지.'
그 기록을 달성한 게 누구도 아닌 김지운의 파티였으니까.
어쨌거나 김지운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영후는 파트너였고, 능력 있는 파트너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결정적으로 김지운은 기대했다.
이영후가 깊은 곳까지 관광을 했다면, 받을 수 있는 기념품 역시 더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으어어어어!
고요함 속에서 들린 소란에 어비스 좀비들이 미친 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우두두두!
'발소리를 보니까 백 단위군.'
아득한 숫자가.
하지만 김지운과 이영후가 대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 어비스 좀비들이 향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영후의 롤스로이스 차량이었으니까.
김지운과 이영후는 티끌도 다칠 게 없었다.
자동차도 문제가 없었다.
자동차가 소리를 낸 건 찰나에 불과했고, 그 소리를 듣고 몰려온 어비스 좀비들은 고요함이 깔리는 순간 그 차량 주변에서 그대로 행동을 멈추고 주변을 경계할 뿐이었으니까.
이제 김지운과 이영후는 한 가지만 해결하면 됐다.
'저걸 어떻게 타!'
저 어비스 좀비를 치우고 차량에 탑승하는 것.
당연히 이영후 기준에서는 미친 짓이었다.
어비스 좀비를 여기서 처리한다?
한다고 치자.
그러나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쯤에서 이영후는 생각했다.
'서, 설마?'
종종 이런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날 미끼로?'
한 명이 소란을 피워서 좀비들을 유인하는 사이 나머지가 목표를 수행하는 장면을.
그 순간 김지운이 이영후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그 사실에 이영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씨발!'
그 질린 얼굴로 김지운을 바라봤다.
둘이 눈빛을 마주했고,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이영후는 질끈 눈을 감은 후에 스마트폰의 문장을 썼다.
[알겠습니다. 내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김지운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뭔 개소리야? 라고.
그 표정과 함께 김지운은 품에서 가져온 것을 꺼냈다.
꺼낸 것은 다름 아니라 스마트폰이었다. 잠금이 풀려 있는.
김지운은 그 스마트폰을 가볍게 두 번 터치했고, 이내 화면에는 시계 앱 기능 중 하나인 타이머 기능에 도달했다.
김지운은 그것을 30초 지정한 후에 멀찌감치 떨어진 곳을 향해 가볍게 미끄러뜨리듯 던졌다.
자동차가 있는 곳과 정반대 방향으로.
그 후에 준비한 스마트폰을 두 개 더 던졌다.
똑같이 타이머 기능을 작동한 채로.
각각 40초, 50초를 설정한 채로.
그리고 시간을 가늠하던 김지운이 이내 이영후의 어깨를 두드렸고, 그 순간 들렸다.
삐빅! 삐빅! 삐빅!
알림 소리가.
으어어어!
그 소리에 어비스 좀비들이 다시 한 번 더 질주를 시작했다.
짙은 안개 탓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대신 느낄 수 있었다.
우두두두두!
김지운과 이영후의 앞으로 수백 명의 인파가 달려가는 것을.
안개가 흔들리는 것을.
그것을 느끼면서 김지운과 이영후가 걸음을 내디뎠다.
이윽고 그들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딸깍!
이영후가 운전석으로, 김지운이 조수석으로 들어갔다.
쿵!
그러나 문을 바로 닫진 않았다.
삐빅! 삐빅! 삐빅!
닫는 타이밍은 세 번째 스마트폰의 알림이 들리는 순간, 그 순간이었다.
으어어어!
어비스 좀비의 격한 반응이 들리는 순간 김지운과 이영후는 문을 닫았다.
쿵!
"후아!"
그리고 타자마자 이영후는 마스크를 벗으면서 깊은 숨을 그대로 내쉬었다.
김지운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마스크를 벗었다.
거기서 여유는 없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잽싸게 새로운 마스크를 썼다.
차 아니라고 안개로부터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었으니까.
단지 여유는 있었다.
"이 차량 방음은 잘 되나?"
질문을 할 수 있는 여유.
그 질문에 이영후는 말했다.
"이 차 롤스로이스에요, 롤스로이스. 여기서 총 쏴도 밖에서는 잘 모를 겁니다."
말을 뱉는 이영후의 표정에는 긴장과 흥분이 가득했다.
죽다 살아났다는 사실에 대한 긴장과 흥분.
"아니, 그보다 그 방법 장난 아니었습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그리고 김지운이 보여준 센스에 대한 긴장과 흥분.
그런 이영후에게 김지운은 말했다.
"조용."
그 말에 이영후는 놀랍게도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관광객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수칙 중 하나가 바로 헌터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아직 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었다.
"물건은?"
나지막한 김지운의 물음에 이영후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 그대로 뒷좌석으로 이동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차량은 집이라고 해도 될 만큼 거대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뒷좌석으로 이동한 이영후는 뒷좌석 가운데 있는 암레스트를 내렸다.
그러자 보였다.
"금고군."
다른 차량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물건을.
"롤스로이스니까요. 주문제작만 하면 냉장고도 넣을 수 있는데 금고는 우습죠."
그에 대해 짤막한 설명을 마친 이영후가 금고문을 열었다.
지문 인식을 통해서.
그것을 본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만약 차키만 가지고 왔다면 김지운 입장에서는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상황.
달리 말하면 이영후가 김지운을 엿 먹이기도 한다면 얼마든지 한 번쯤 엿을 먹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영후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잽싸게 금고문을 연 후에 그 안에 있는 것들 중에서 어비스의 물건들을 꺼냈다.
"이게 가진 전부입니다. 숨기는 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잘 부탁합니다. 앞으로도 잘."
그러면서 진심을 담은 말을 뱉었다.
그 말에 김지운은 이영후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믿을 건 이 사람뿐이야.'
여기서는 김지운을 상대로 괜한 협상을 하는 게 아니라 올인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김지운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이영후가 강현중 중사 같은 도움은 주지 못하겠지만, 그냥 신뢰할 수 있는 성인 남성 한 명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도움이었다.
"관광은 언제부터 했지?"
"3년 전부터입니다. 3년 전에 코인 거래소가 대박나면서 돈이 미친 듯이 들어왔거든요."
"몇 번이나 했지?"
"관광이요? 서른 번쯤 했나?"
꽤 많은 횟수였다.
무엇보다 김지운은 알았다.
'3년 동안 서른 번, 그럼 최근까지 간 거군.'
관광은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아니라 한 번 할 때마다 그 텀이 한 달 이상임을.
무엇보다 관광 자체가 하루아침에 끝나는 게 아니었다.
게이트를 통해 어비스를 넘어간 후에 다시 돌아오는 데에는 기약이란 게 없었다.
돌아오는 출구는 있었다. 들어간 게이트를 통해서 나오면 될 뿐이었으니까.
문제는 어비스의 상황이었다.
어비스는 놀이공원의 사파리 투어처럼 몇 시부터 입장해서 정해진 시간에 따라 여긴 곰이 있고요, 다음은 호랑이를 보러 가겠습니다, 아, 지금 저기 사자들이 짝짓기를 하고 있군요, 같은 게 아니었다.
어떤 상황이 등장할지 몰랐고, 안 좋은 상황에서는 숨 죽이고 이 안 좋은 상황이 해결되기를 기도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만큼 준비도 많이 필요했다.
여하튼 정리하면 이영후는 최근까지 어비스를 관광했다.
즉, 김지운이 은퇴 이후로 업데이트 되지 않은 나름 최신 정보들이 이영후에게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가장 기대가 큰 건 관광 횟수가 많은 만큼 가진 기념품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포션들이군.'
일단 가장 먼저 이영후가 건네준 것들은 어비스에서 특별한 효능을 가진 재료로 만든 물약들, 일명 포션이었다.
어비스의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기념품이었다.
현대 의학으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물건들이었으니까.
'힐링 포션들.'
더불어 이영후가 가진 포션 중 대부분은 힐링 포션, 즉 치료 효과를 가진 것들이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
부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결국 제 목숨이었으니까.
'여벌 목숨들이다.'
그리고 지금 김지운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들이었다.
'쓸모가 없으면 좋겠지만.'
물론 가장 좋은 건 포션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안개가 걷히고, 몬스터들이 사라지고, 군대가 구하러 와주는 경우.
하지만 그 희망적인 그림을 위해서 백화점에 있는 식량만 축내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약 정전이 일어난다면.'
애초에 그런 성격도 아니었을뿐더러 김지운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최소한 서울은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거다.'
최악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때를 위해서는 뭐든 필요했다.
해서 김지운은 그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그전에 파밍을 해야 한다.'
몬스터를 사냥하고, 아이템을 구하기 위해서 안개에 일부러 들어가는 경우를.
이상할 건 없었다.
어비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꾼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세상은 지금 어비스와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스킬.'
개중에서도 김지운에게 시급한 건 스킬이었다.
스킬의 유무는 자동차로 따지면 엔진의 유무와 같았으니까.
그때였다.
"이거."
이영후가 금고 안 쪽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냥 상자가 아니었다.
"잠깐만요. 열어야 해서."
그건 소형 금고였다.
우웅!
그것도 지문 인식이 아니라 홍채 인식을 해야 열리는 소형 금고.
당연히 그 안에는 포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기념품이 담겨져 있었다.
손톱만한 조약돌, 그러나 그 표면에 신비로운 문자가 노란빛으로 빛나는 돌이.
'이건?'
어비스의 기적 중 하나인 룬이었다.
헌터를 헌터로 만들어주는 스킬을 담은 룬!
그것을 보는 순간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본래 스킬 룬은 기념품 대상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관광객에게는 스킬 룬은 딱히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반면 클랜은 언제나 스킬 룬이 부족했고, 그래서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스킬 룬을 판매하거나 혹은 기념품으로 제공하지 않았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그리고 돈으로 안 되는 건 세상에 없는 법.
가끔 관광객들의 수중에 스킬 룬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스킬 룬의 거래 가격은 상식 밖이라고 할 만큼 비쌌다.
"등급에 대한 건 뭐 저보다야 잘 아실 테고."
일단 지금 푸른빛을 띠고 있는 룬의 등급은 레어 등급이었다. 이 자체로도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스킬 룬의 값어치는 담긴 스킬로 결정되는 법.
그에 대해서 이영후는 꽤 흥분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이거 엄청난 겁니다."
그 말에 김지운은 딱히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이 스킬 룬이 무엇이 담겼는지는 바로 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
김지운, 그가 스킬 룬을 가볍게 맛봤다.
그러자 들렸다.
[사전이 발동합니다.]
이어서 보였다.
[룬(염력)]
- 등급 : 레어
- 사용 시 염력 스킬을 습득할 수 있다.
- 1레벨 이상 습득 가능
- 음험한 사기꾼 직업만 습득 가능
홀로그램으로 된 정보창 하나가.
"예, 염력입니다."
그 반응을 본 이영후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비스에서 전설 중 한 명이었던 헌터가 쓰던 스킬이죠. 일곱 개의 별을 최초로 달성한 전설. 지금은 별이 되었지만."
그 말에 김지운 역시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놀란 이유는 이영후와 조금 달랐다.
'설마 이걸 여기서 구하게 될 줄이야.'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한 친구를 만나게 된 느낌.
그러나 그 감흥은 오래 가지 않았다.
크우, 크우!
"어? 어? 이거 어비스 좀비 아니죠? 이게 뭐죠? 뭐가 등장한 겁니까?"
불청객이 등장했으니까.
크우우우!
"오크다."
도그블린 그리고 어비스 좀비와는 차원이 다른 괴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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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지하주차장 (5).
9.
크우우우!
오크,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 영화에서 너무나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몬스터.
그야말로 몬스터들을 대표할 수 있는 몬스터였다.
어비스에도 마찬가지로 오크가 존재했다.
'빌어먹을 오크라니.'
그런 어비스의 오크는 기본적으로 덩치가 남달랐다. 작은 개체가 2미터였고, 큰 개체는 3미터에 이르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놈들은 매우 영악했다. 그 영악함이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그저 순수하게 구슬치기를 하고 아이스크림 하나에 해맑은 미소를 짓던 70년대 수준의 초등학생 수준이 아니라 옥상에서 벽돌을 던져서 사람을 죽인 후에 저 촉법소년인데요, 라고 말을 지껄이는 초등학생 수준.
또한 영리한 만큼 무기를 아주 잘 다뤘다. 어지간한 헌터들보다 훨씬 잘 다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비스의 헌터들이 등장한 거 5년여 전, 제아무리 경력이 대단한 헌터도 이제 6년차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비스가 언제 탄생했는지는 아직 제대로 가늠조차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어비스에서 수년 혹은 수십 년을 살아온 오크들이라면 무기를 다룬 경험이 헌터들보다 많을 수밖에.
여기에 심지어 무리생활마저 했다.
여러모로 어비스 헌터들에게도 골치 아픈 몬스터였고, 해서 어비스 헌터들은 오크에 별명을 지었다.
'초보자 킬러잖아!'
아주 멋진 별명을.
물론 김지운과 이영후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별명이었다.
지금 그 둘은 초보자였으니까.
더욱이 골치 아픈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비스 좀비는 어비스의 주민들에게 반응하지 않는다.'
지금 김지운과 이영후에게 매우 골치 아픈 어비스 좀비는 몬스터들에게는 딱히 골치 아픈 대상이 아니었다.
몬스터들도 그걸 알았기에 어비스 좀비를 그냥 무슨 안개 보듯이 바라봤다.
즉, 지금 오크의 눈에 보이는 건 하나였다.
김지운과 이영후 일행.
물론 아직은 들킨 게 아니었다.
소리를 듣고, 소란을 듣고 온 것 뿐.
하지만 이대로 차 밖으로 나간다면?
"저기 어떻게 할까요?"
질문을 던지는 이영후는 내심 답을 내놓은 상태였다.
'싸우면 죽는데, 어떻게 도망쳐야 합니까?'
싸운다, 일단 그 선택지는 배제하기로.
반면 김지운의 생각은 달랐다.
김지운의 눈이 안개 주변을 훑었다.
사실 보이는 건 없었다.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는 그저 흐릿한 그림자만 보일 따름.
그래서 김지운은 질문했다.
"여기 들어오는 입구랑 출구가 몇 개지?"
"예? 아, 잠깐만요. 그게······ 나가는 출구 2개, 들어오는 입구 2개, 아마 그럴 겁니다. 아니,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
"최소 3개 이상이라는 거군."
그 사실에 김지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그블린은 개구멍으로도 잘 들어온다.'
도그블린의 경우에는 그 덩치가 작은 만큼 작은 틈도 충분히 유용하게 이용했다.
반면 오크는 달랐다.
거대한 덩치이기에 적당한 크기의 입구도 쉽사리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그런 성격도 아니었다. 억지로 막 몸을 쑤셔 넣으면서까지 탐험을 하는 성격이.
그런데 오크가 지금 이곳, 지하 3층에 들어왔다?
둘 중 하나였다.
지하 3층 어딘가에서 혹은 그 아래 지하에서 오크를 분출하는 게이트가 열렸을 경우.
'게이트는······ 이곳에 열린 게 아니야.'
김지운은 그 가능성은 높게 보지 않았다.
일단 정말 그랬다면 고작 이곳에 이 정도 몬스터만 있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또한 안개도 이미 지하 1층까지 점령했었어야 했다.
'그럼 이미 끝장이니까.'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이미 김지운 입장에서는 죽은 목숨이나 다를 게 없었다.
'밖에서 오는 거다.'
결국 남은 답은 하나, 건물 밖 어느 외부에서 어비스가 등장했다는 것.
그래서 지금 오크가 문제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오크도 올 만큼 큰 구멍이 있다.'
지금 이 백화점 지하 3층 주자창으로 오는 길목을 막는 게 없다는 의미.
당연히 그 구멍을 막아야 했다.
어떤 식으로든.
하지만 지금 그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이 차."
"예? 이 차요?"
"마력이 어느 정도지?"
"마력이요? 550마력? 그쯤 되는데요?"
"무게는?"
"어 그거까지는 잘······ 그래도 2톤은 넘을 겁니다. 아, 아니 잠깐."
그 대목에서 이영후는 바로 눈치 챘다.
"저 오크를 잡으려고요? 지금?"
김지운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차로 박아서?"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설명을 해줬다.
"놈은 하나다. 그럼 둘 중 하나다. 떠돌이이거나 아니면 수색병이거나. 뭐가 됐건 이대로 놔두면 좋을 건 없다."
왜 놈을 잡아야 하는지.
"무엇보다 오크는 도그블린하고 다르다. 안개 밖에서도 최고 1시간까지 버틸 수 있다."
이어진 말에 이영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 정도는 압니다. 당연히 잡아 죽이면 좋죠!"
그가 놀란 부분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차로 박는 거잖습니까?"
차가 아깝다는 건 아니었다.
이영후는 이 정도 차는 당장 1백 대도 주문할 수 있었다. 리스나 할부 없이 일시불로.
문제는 그 위력, 자동차 충돌이 만들어내는 위력은 분명 대단했다. 하물며 지금 이영후의 차가 만들어낼 파괴력은 벽도 부술 수 있을 정도.
오크를 잡는 데에는 충분한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곧 안에 탄 탑승자에게도 엄청난 데미지를 준다는 의미!
살짝 툭, 뒤에서 누가 박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욱신거리는 게 인간의 몸뚱이 아니던가?
안전벨트를 매고, 에어백을 믿고 일부러 차로 가져다 박는 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장면이었다.
하물며 오크도 보통 놈은 아니었다.
덩치가 2미터가 넘어가고 체중이 150킬로그램을 훌쩍 넘어가는 놈이었다.
멧돼지였다.
그걸 전속력으로 박는다?
장담컨대 운전자가 정상일 리 없었다. 실신하거나 어디 골절되면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
특히 자동차 사고는 필연적으로 차의 짓뭉개짐을 가져왔다.
"차에 갇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갇힌다?
어비스의 안개가 가득 찬 곳에서?
그냥 차라리 가서 오크에게 깔끔하게 머리를 들이밀어서 두개골 파열로 살해당하는 게 훨씬 더 현명한 일.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말하지 않았다.
덥석!
"어?"
대신 보여줬다.
꿀꺽!
"어!"
이영후가 준 스킬 룬을 머금고, 삼키는 모습을.
"자, 잠깐만요. 설마 직업이 사기꾼이십니까?"
그 모습에 놀라는 이영후에게 김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염력(F랭크)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대신 명령했다.
"차에서 내리도록."
10.
김지운이 명령을 했을 때 이영후는 생각했다.
'염력으로 운전을 한다고? 미친 거 아니야?'
김지운이 그리는 계획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고.
'그게 쉽게 될 리가 없잖아?'
염력.
어비스의 헌터들, 그중에서 음험한 사기꾼 직업을 습득한 이들만이 쓸 수 있는 스킬이었다.
효용 가치는 매우 높은 스킬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하게 생각해도 생각만으로 물체를 움직인다, 라는 게 가지는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염력을 쓰는 게 얼마나 힘든데!'
하지만 효용 가치와 별개로 염력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염력을 습득한 헌터들은 그것을 인형 뽑기 기계로 비유했다.
인형 뽑기 기계를 조작하는 건 누구든지 할 수 있지만 인형을 뽑는 건 전혀 다른 일인 것처럼.
물론 재능이 없어도 인형 뽑기 기계에 돈 천만 원 정도 쓰면 나름 수준급은 되듯이 훈련을 통해서 염력 사용 능력을 발달시키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아무리 훈련을 해도 재능이 없는 이가 100미터를 9초대에 달릴 수는 없는 법.
염력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유효 거리 그리고 세밀한 컨트롤은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운전은 이중에서 세밀한 컨트롤이 매우 필요한 영역이었다.
언뜻 운전은 쉬어보이지만, 처음 면허증을 따로 갔을 때를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달랐다.
핸들을 얼마나 돌려야 하는지,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얼마나 밟아야 하는 건지, 감조차 잡지 못해서 시속 10킬로미터 운행에도 겁을 먹는 이들이 대부분인 것처럼.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막힌 공간에서는 염력이 작용하지 않아.'
어비스 헌터들의 염력은 상자 안에 있는 공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동차 운전도 마찬가지였다.
운전을 한다?
그럼 최소한 창문을 연 상태에서 그 안으로 염력으로 만든 손을 집어넣어 조작하는 식.
그저 단순하게 핸들 정립해서 목표가 보이면 그냥 풀악셀을 밟으면 되잖아? 라는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 사실을 김지운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염력으로 차를 운전할 수 있는 건 최소 B티어 헌터들밖에 없다고 말했어.'
팬이었으니까.
'퍼스트 킬러가.'
어비스의 헌터들 중에서 전설적인 존재 중 한 명이자, 가장 뛰어난 염력능력자로 알려진 퍼스트 킬러의 팬.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인 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영후가 군말 없이 마스크를 쓰고 차에서 내린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차에 타고 있어서 해결되는 건 없었다.
롤스로이스가 꽤 단단한 차인 건 맞지만, 어비스의 오크라면 주먹으로 창문을 깨서 안에 있는 인간을 끄집어내 물어뜯는 것은 성인 남자가 주먹으로 수박을 깨서 안에 있는 과육을 먹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결국 도망치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의미.
'어차피 죽이진 못하더라도 위협만 해도 돼.'
여기에 또 하나, 이영후가 보기엔 그냥 차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오크가 반응할 가능성이 높았다.
오크 입장에서는 롤스로이스가 더 위협적인 맹수처럼 보일 테니까.
그 정도 위협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을 텐데?'
문제는 어지간한 염력 능력자가 아니고서는 그 정도를 하는 것조차 결코 쉽지 않았다.
'내 차 가뜩이나 커서 운전하기 좆같은데.'
심지어 이영후의 차는 운전 좀 한다는 양반들도 그 크기 때문에 모는 게 쉽지 않은 녀석.
물론 그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순식간이었으니까.
우우웅!
시동이 걸린 롤스로이스가 고요한 소리와 함께 바로 주차칸에서 매우 부드럽게 빠져나오고는 그대로 오크를 향해 날아간 것은.
'어?
그리고 들려왔다.
콰앙!
롤스로이스가 그대로 오크를 박는 소리가.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그 상황에 이영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게 이렇게 쉽게?'
그가 아는 어비스의 상식하고는 달랐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상식에서 어긋나는 게 아니었다.
뛰어난 염력 능력자라면 염력으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물론 서킷에서 타임 어택도 할 수 있었으니까.
김지운이 뛰어난 염력 능력자라면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일이었으니까.
'대체 어떤······.'
그때였다.
크헉, 크헉!
먼 발치에서 무언가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뱉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오크였다.
거대한 자동차에 정면으로 치였음에도 오크는 제 두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어어어!
그리고 분노에 가득 찬 포효를 내질렀다.
놀라운 생명력이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씨발!'
어비스를 경험해본 이라면 지금 오크가 보여주는 것 따위에는 놀랄 수가 없었으니까.
그보다 더 빌어먹을 몬스터들이 차고 넘쳤으니까.
당연히 김지운도 알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오크가 죽지 않으리란 것을.
그래서 이미 준비해둔 상태였다.
우우우우웅!
오크를 치고 갔던 롤스로이스가 어느새 유턴을 하더니 오크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충돌했다.
콰아앙!
앞서 충돌했을 때보다 더 강렬하게.
그와 동시에 김지운의 귓속에 들렸다.
[오크를 처치했습니다.]
[오크가 도감에 등록됩니다.]
[근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오크를 처치했음을 알리는 알림이.
그러나 그 알림에 김지운은 기뻐하지 않았다.
김지운은 빠르게 움직였다.
'확인해야 한다.'
오크를 향해서.
그건 위험한 일이었다.
으어어어!
지금 이 소란을 알게 된 어비스 좀비들이 다시금 이곳으로 모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김지운은 던졌다.
스윽!
준비했던 스마트폰의 타이머 기능을 활성화한 후에 오크가 있는 곳과 정반대된 방향으로.
삐빅! 삐빅! 삐빅!
그 소리에 어비스 좀비들이 정신이 팔린 사이, 김지운이 오크에게 다가갔다.
그쯤에서는 이영후도 다가왔다.
사실 이영후도 알고 있었다.
지금 김지운이 하려는 게 무엇인지.
그래서였다.
'씨발.'
김지운, 그가 오크의 이마에 있는 십자 모양의 흉터를 보는 순간 욕지거리를 내뱉은 것은.
'떠돌이가 아니라 무리 오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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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파밍 (1).
1.
어비스의 관광객들이 관광을 하는 이유 중 90퍼센트 이상은 기념품 때문이었다.
그래서 몇몇 관광객들은 말했다.
위험한 관광 따위는 관심 없으니까 적당히 하고 끝내자고.
어비스의 헌터들 입장에서도 나쁠 거 없는 제안이었기에 적당한 관광을 마치고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관광을 요구하는 관광객들 역시 적지 않았다.
어비스가 주는 신비는 그들을 놀라게 했으며, 무엇보다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어비스의 헌터들이 몬스터들을 잡는 과정을.
그 과정은 다큐멘터리에서 거대한 물소를 하이에나 무리들이 사냥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 번 그 관광에 맛을 들이면 꿈에서도 다시 맛을 보고 싶을 정도.
자연스레 알게 됐다.
몬스터의 습성과 특징에 대해서.
이영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헌터들이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못해서 열광했다. 그래서 알았다.
'무리 오크라니, 빌어먹을.'
오크에는 떠돌이 오크와 무리 오크가 있다는 것을.
그것을 구별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보통 오크는 무리를 이루고 살았고, 그런 무리를 이는 오크들은 이마에 흉터를 남겼다.
십자 무늬나, 동그라미 같은 분명한 문장의 흉터를.
떠돌이 오크의 경우에는 그 흉터가 강제로 뜯겨지거나 훼손된 놈들을 말함이었다. 이마에 살점이 뜯어졌던 흔적이 있거나 혹은 날붙이 따위로 무자비하게 긁은 상처가 있으면 떠돌이 오크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리 오크의 경우가 상대하는 게 훨씬 위험했다.
'수색병이야.'
일단 무리 오크는 이동할 때는 한 무리가 되어 이동했다.
그러다가 어느 곳에 자리를 잡으면 그때부터는 수색병이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영리한 수색병 오크들은 수색하면서 자신이 지나간 자리에 흔적을 남겼다.
즉, 지금 백화점 주변 어딘가에 오크 무리가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
그리고 놈들은 수색병이 오지 않으면, 그 수색병의 흔적을 따라 이곳에 오리란 의미였다.
사실 어비스에서는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장소를 이동하면 될 일.
오히려 역으로 남긴 그 흔적을 이용해서 오크 무리를 소탕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백화점에서 벗어나는 건 지금 시점에서는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외부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특히 김지운은 느끼고 있었다.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다.'
지금 아직까지 구조대는커녕 낌새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어비스가 아니었다.
경찰서만 가더라도 실탄이 잔뜩 있었다.
그뿐인가?
여긴 여의도였다.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지인 여의도.
물론 일하는 날에도 출근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이 연말에 출근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곳에 문제가 생겼다면 매우 빠르게 조치가 들어오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면 어느 곳보다 빠르게 취해질 수 있는 곳이었다.
지하 벙커를 비롯해 전쟁에 대비한 물자와 설비들이 아주 잘 관리되고 있는 지역이었으니까.
결정적으로 김지운은 정부가 어비스의 존재를 아주 잘 인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이렇다 할 낌새조차 없다는 것은 지금 이 일이 여의도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미였다.
'이곳을 나가는 건 더더욱 위험하다.'
만약 외부로 나가는 게 낫다고 생각됐다면 김지운은 진즉에 움직였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이제까지 김지운은 밖으로 나가기 위한 방법을 거듭 강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가지 않는 건, 이곳을 나가서는 정말 답이 없다는 의미.
그런데 이곳에 오크가 온다?
'시간은 있다.'
물론 당장 오크가 온다는 건 아니었다.
오크 무리 역시 수색병이 당했다면 상황이 좋지 않음을 인지하고 주도면밀하게 움직일 테니까.
그리고 오크들이 안 올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도 오크가 오는 게 낫다.'
그러나 김지운의 기준에서 오크 무리가 오지 않는 것은 더더욱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더 괴물보단.'
그건 곧 오크 무리들조차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위협이 백화점 주변에 존재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에 맞춰 대비한다.'
거기서 김지운은 고민을 멈췄다.
지금 고민하다고 해서 풀릴 문제도 아니었을 뿐더러, 지금 해야 할 건 고민이 아니었다.
툭툭!
김지운, 그가 이영후의 어깨를 두드린 후에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위로 올라간다.'
2.
더 짙어진 안개 탓에 이제는 에스컬레이터의 발판조차 보이지 않는 지하 2층.
처벅!
그런 지하 2층 에스컬레이터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다!"
그 등장에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던 생존자들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반긴 것은 강현중 중사였다.
"오셨습니까?"
가족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그는 김지운을 맞이했다.
그러나 반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말에 김지운은 바로 대답했다.
"소란이 생겼겠지."
"예, 맞습니다."
이미 김지운은 지하 1층의 풍경이 보이는 순간부터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사람이 너무 없다.'
처음으로 생존자 무리가 외부 탐사에 나갔다 왔다.
그런데 그 귀환에 환호하는 이들의 숫자는 기껏해야 채 백 명도 되지 않았다.
이곳에 남은 생존자가 여전히 천 단위에 가까운 것을 생각하면 지극히 적은 숫자였다.
달리 말하면 그보다 더 중요한, 시급한 일이 터졌다는 의미.
그리고 그게 무슨 일인지는 뻔했다.
'이제 슬슬 터질 때가 됐지.'
김지운이 자리를 움직인 후에 고개를 돌렸다.
다름 아닌 식품관 쪽으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가 들렸다.
"저리 안 가, 이 씨발놈들아? 응?"
3.
지하 1층 식품관.
백화점 식품관답게 온갖 먹을 식품들이 가득 찬 그곳은 언제나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식품관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일단 상황부터가 특이했다.
식품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쇼핑 카트나 진열대, 식탁, 의자 따위로 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사내들이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처럼 서 있었다. 손에는 식칼과 테이프 그리고 대걸레 막대기를 조합해 만든 조잡한 창 따위를 뒨 채로.
"저리 안 가, 이 씨발놈들아? 응?"
그렇게 성벽을 갖춘 이들이 들어오려는 이들을 향해서 거침없이 위협을 했다.
2023년 대한민국 여의도에서는 참으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더불어 매우 우스운 광경이기도 했다.
일단 지금 식품관을 막아놓은 그 의자나 진열대 따위들은 매우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더불어 식품관을 지키는 이들의 숫자는 30명 남짓, 머릿수를 샐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반면 그 밖에서 지금 식품관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의 숫자는 대충 가늠해도 삼사백이 훌쩍 넘었다.
지금 지하 1층의 생존자들 중 절반 이상이 몰려와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즉, 상식적으로라면 농성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 식품관을 둘러싼 이들 중에서 그 누구도 감히 식품관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상식적으로는 어찌하는 게 웃긴 일이긴 했다.
"아니!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요? 지금 이거 범죄 행위입니다!"
일단 지금 이 농성 자체가 불법 행위였다.
하물며 사람을 해친다?
그냥 합의금 몇 푼 쥐어준다고 해서 끝나지 않을 일.
만약 사람이라도 죽는다면 그때는 정말 걷잡을 수 없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한편으로 지금 당장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목숨 걸고 식품관에 갈 이유도 없었다.
특히 이곳은 식당가였다.
주변에 빵집만 다섯 곳이 있었고, 음식은 종류별로 넘쳤다. 식품관 말고도 먹을 걸 구할 수 있는 곳은 넘친다는 의미.
결정적으로 식품관에 있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이상으로 많은 게 지금 창고에 보관 중이었다.
"그럼 지랄 말고 꺼져! 여긴 우리 영역이야! 다 꺼져!"
지금 고작 식품관 하나 가지겠다고 저렇게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치는 것은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다는 의미.
그러니 애초에 기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목숨 걸고 바보짓을 하는 이와 그걸 바보짓이라고 치부하는 이가 싸움이 될 리 없었으니까.
그래서 딱히 분위기도 바뀌지 않았다.
이 대치국면은 하염없이 이어졌다.
"저기."
"왜?"
하지만 그가 등장하는 순간 분위기는 달라졌다.
"저 사람."
"누구? 어? 어!"
김지운, 그의 등장에 살벌하던 분위기가 꺼졌다.
당장에라도 싸울 듯이 이빨을 들이대던 강아지들 사이에서 늑대 한 마리가 등장한 것처럼.
달리 말하면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이제 김지운에 대해서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안개가 등장하고, 몬스터가 등장한 이후 김지운이 보여준 행적은 압도적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김지운이 아니었다면 장담컨대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 3할은 시체가 됐을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김지운을 은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인간이란 그렇게 간단한 족속이 아니었다. 제 목숨을 구해줬다고 해서 무작정 은인으로 모시는 경우는 오히려 훨씬 적었다. 은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제 목숨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대부분은 그런 값을 지불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그저 김지운을 더 위험한 괴물로 바라볼 뿐.
단지 그런 생각을 하는 부류는 있었다.
"이봐요! 저 새끼들이 지금 여기서 난동을 부리고 있어요!"
김지운이 그들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는 부류들.
"맞아! 저 빌어먹을 새끼들이 멋대로 식량을 점거하고 있다고!"
그런 부류들은 김지운의 등장을 히어로의 등장으로 여겼다.
"죽여! 저 새끼들도 죽여야 해!"
지금 자신들이 어찌하지 못하지만 눈에는 가시 같은 식품관 점령자들을 처리해줄 히어로.
정의를 집행해주고, 가치를 바로 세워줄 히어로.
자신들을 도와줄 히어로.
그것도 무보수로 피를 대신 흘려줄 히어로.
그러한 기대감은 빠르게 번졌다.
"죽여!"
이제까지 수백 명이 모였음에도 제대로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이들이 섬뜩한 심판을 부르짖었다.
반면 앞서서까지 성악가마냥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던 점령자 무리들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꿀꺽!
나오는 것은 긴장감의 소리 뿐.
그들도 알았으니까.
김지운이 어떤 괴물인지.
'저 새끼 말도 안 되는 새끼인데.'
그중에는 김지운이 어떻게 싸우는지 코앞에서 본 자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 그게 계기였다.
김지운이 몬스터를 잡는 걸 본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상식은 그 순간 깨졌으니까.
이제는 뭔가 해야 한다고,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을 내렸으니까.
그래서 김지운이 안개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 그들이 움직였다.
식품관을 점령했다.
그런데 김지운이 다시 등장했으니, 등골이 오싹해질 수밖에 없는 일.
그때였다.
스윽!
김지운이 가볍게 진열대를 넘어갔다.
"어, 어!"
조잡한 창을 쥐고 있던 점령자들은 그런 김지운을 향해 제대로 창을 내찌르지 못했다.
당연했다.
대한민국 국민들 중에서 사람을 칼로 찔러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일뿐더러 모두는 어릴 때부터 사람을 해해서는 안 되는 교육을 성인이 된 후에도 수없이 받았다.
사실상 세뇌교육이었고, 그 세뇌 교육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북한이 그 증거였다. 그들의 세상이 지옥이란 걸 객관적으로 모두가 아는데 세뇌 교육은 북한 주민들에게 자신들이 천국에 있다고 믿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사람을 찌른다?
심지어 약자도 아니고 찌르는 순간 자신을 죽이고도 남을 무시무시한 맹수한테?
어림도 없는 일.
그 사실을 김지운도 알 잘고 있었기에, 김지운은 그들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유히 음료수가 진열된 코너에서 병에 든 바닐라 카페라테를 골랐다.
그런 김지운의 시선이 한 사내 앞에서 멈췄다.
겉보기부터가 보통이 아닌 사내였다.
일단 덩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외모도 각이 진 것이 사납다, 거칠다, 느낌이 분명했다.
그리고 목덜미에는 문신이 있었다.
직업을 물어보라고 하면 조직폭력배, 그런 대답이 나올 정도.
요즘 흔히 놀림감이 되는 그런 조폭, 그러니까 살만 뒤룩뒤룩 찌고, 혐오스런 외모에 문신으로 겁이나 주며 어울리지도 않는 명품 따위를 걸치고 다니는 건달 같은 부류를 말함이 아니었다.
눈빛이 달랐다.
그렇기에 김지운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쪽이 리더인가?"
이 무리를 만든 게 그 자임을.
그 사실에 그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김지운이 질문했다.
"이곳을 점령할 생각인가?"
"그렇다. 방해할 생각인가?"
"어떤 상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은 그쪽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런 상황에서 골치 거리를 하나 더 만들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 대답에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흔들림은 짧았다.
이내 사내는 이를 꽉 물며 일어났다.
싸움을 준비했다.
그 모습에 주변의 관중들도 상황을 깨달았다.
김지운이 저 점령자 리더를 심판하고 이곳의 평화를 다시 찾아 주리라고.
"죽여 버려!"
그러기를 바라는 이들 중에는 격한 응원을 내지르는 이도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성인 4명분의 식사, 아이 한 명 분의 기저귀와 분유. 그 외에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수준의 물품 보급을 약속해줄 수 있나?"
김지운의 말에 모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운을 당장 죽일 듯이 바라보던 사내 역시도.
결국 그 사내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이지?"
"내가 원할 때 적정한 수준의 물품 보급만 지원해준다면 굳이 골치 아픈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건?"
그제야 비로소 모두는 알았다.
"이곳을 점령하든 말든, 내 알바 아니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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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파밍 (2).
4.
김지운이 커피와 크림치즈와 빵, 탐스러운 딸기를 가지고 나오는 순간 그것을 보는 모든 이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그렇게 식품관에 만들어진 바리게이트를 넘어온 김지운이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현중 중사에게 말했다.
"아이 물건은 그쪽이 챙기도록."
"예?"
"애들한테 뭐가 필요한지는 몰라서."
그 말에 강현중 중사의 표정에는 더더욱 놀람이 가득 찼다.
반면 예외는 한 명 있었다.
이영후, 그는 상황을 이해하고는 말했다.
"저기, 제 것도 가져와도 됩니까?"
대답 대신 김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는 순간 이영후는 망설임 없이 바리게이트를 넘어가더니 수입식품관 코너에서 잼이나 향신료들 그리고 과자를 챙겨왔다.
그제야 비로소 나머지 사람들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저거 뭐야?"
"손잡은 거야?"
김지운과 저 점령자들이 협상을 했음을.
자신들이 예상한 것과 다르게.
"미친! 아니! 지금 저 새끼들을 그냥 놔둔다고?"
그 대목에서 누군가가 김지운을 향해 제 심정을 토해냈고, 그 사실에 김지운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불만 있나?"
그 순간 말을 뱉은 사내와 김지운, 그 사이에 있던 이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홍해가 갈라지듯이 김지운과 말을 뱉은 사내 사이가 갈라지고 길이 생겼다.
둘이 서로를 마주했다.
"에? 아, 어."
딸꾹!
그 시선에 말을 뱉은 사내는 제대로 된 말을 뱉지 못하다가 결국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 순간 그 누구도 김지운에게 무어라 말을 뱉지 않았다.
있는 건 한 명뿐이었다.
"저기······."
"대장이라고 부르도록."
"대장님, 저들을 놔둘 생각이십니까?"
강현중 중사, 그는 김지운의 선택에 의문을 제기했다.
마땅한 의문이었다.
지금 점령자들의 행동은 과격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동시에 법으로 결코 보호받을 수 없는 짓!
저들은 사실상 무법자 무리였다.
그런데 그들을 처리하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그들과 손을 잡는다?
그 대목에서 김지운의 생각을 대신 말해준 건 이영후였다.
"어비스에서 헌터가 되는 조건 중 하나가 뭔지 알아요?"
"예?"
"응? 어비스 모르시나? 헌터 아니에요?"
그 대목에서 이영후가 김지운을 바라봤다.
같은 동료라고 해서 같은 헌터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그럼 여기서 어비스에 대한 걸 말해줘도 됩니까? 라는 눈빛.
그 눈빛에 김지운은 가볍게 턱짓을 했고, 그제야 이영후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자세하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기니까 지금 하려던 말만 하면, 어비스의 헌터에게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행동력입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움직이면 늦어요. 일단 움직이고 생각해야지."
말을 하던 이영후가 고개를 돌려 식품관을 바라봤다.
"저기 있는 사람들은 그런 부류고요."
이어서 이영후가 그 식품관 주변을 둘러싼 생존자들을 바라봤다.
"나머지들은 그렇지 못한 부류죠."
몬스터가 등장하면 가장 먼저 뒈질 부류이기도 하죠, 라는 말을 이영후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지금 우리 헌터님에게 필요한 건 식품관을 지배하는 부류이고요."
이영후의 말대로였다.
당장 이곳을 떠날 수 없는 김지운 입장에서는 머릿수만 많은 양은 필요 없었다.
필요한 건 이빨을 가진 개들이었다.
물론 그저 이빨만 가지고 짖을 줄만 아는 별거 아닌 개들이었다면 김지운도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 부류들의 개들은 몬스터를 보는 순간 도망치기만 하는, 오히려 골치 아픈 부류들이었으니까.
그래서 봤다.
이 점령자들의 리더가 누구인지.
'보통은 아니다.'
사실 보기 전부터 김지운은 그 점령자 리더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황이 그랬다.
김지운, 그가 이영후와 같이 지하 3층으로 갔다 오는데 걸린 시간은 채 30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간 안에 점령자들은 무기를 들고 식품관을 점령하고 있었다.
'사전에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어.'
당연히 그 30분 안에 그 모든 게 됐을 리 없었다.
그전부터 사람을 모으고, 계획을 세우고, 무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즉, 도그블린 무리가 등장할 무렵부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는 의미.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그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쉽지 않은 건 그런 이들을 모아서 하나의 무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런 건 말재주가 뛰어나다거나 그런 것으로는 결코 불가능했다.
카리스마가 필요한 일.
그 점령자 리더에게는 그게 있었다. 눈을 마주치고 몇 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무리를 만들 수 있는 카리스마가.
"대장님, 위험한 부류입니다."
물론 그렇기에 위협적이었다.
"저런 부류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강현중 중사, 그는 어비스의 헌터는 아니었지만 결코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이가 아니었다.
삶과 죽음, 그 경계선에서 줄을 타는 삶을 살아왔었다.
그렇기에 강현중 중사는 지금 점령자들의 리더 같은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경험해봤다.
"자기 위의 다른 우두머리를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부류가 아님을.
당장 지금 행동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누군가 나를 구해줄 것이다, 그런 생각 따위는 없는 부류였다.
내 목숨은 내가 지켜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행동이 최선이다, 라고 생각하는 부류였지.
그래서 강현중 중사는 확신했다.
"저 자에겐 대장이 가장 큰 위협일 겁니다."
틈이 생기면 김지운에게 이빨을 들이댈 것임을.
김지운도 알았다.
저런 부류들이 어떤 부류인지를.
특히 어비스의 헌터들 중에는 그런 부류가 많았다. 아니, 많은 정도가 아니라 어비스의 헌터들 중에서 파티를 이끄는 리더들은 대부분 점령자의 리더 같은 부류였다.
자기가 곧 답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들.
하지만 김지운은 어비스의 헌터가 되고 은퇴하기 전까지 그런 부류들에게 공격을 당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틈을 보이면 이빨을 들이대겠지.'
이유는 간단했다.
'틈을 보이면.'
그런 부류들에게 김지운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였으니까.
지금도 다를 건 없었다.
도리어 김지운은 바랬다.
'차라리 날 죽일 만큼 실력 좋은 헌터가 됐으면 좋겠군.'
지금은 실력 좋은 헌터가 하나라도 더 필요할 때.
"점령자들이 있는 동안 더 이상 이곳에서 소란은 없을 거다."
더불어 김지운 입장에서 점령자의 등장은 기꺼운 일이었다.
"우리가 없어도."
가장 중요한 식량을 지키고, 관리해줄 이가 생겼으니까.
"없어도? 저기?"
그 대목에서 이영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또 어디 갑니까?"
이영후의 물음에 김지운은 대답했다.
"파밍을 한다."
5.
어비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에 대해서 헌터들은 이래라저래라, 여러 가지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생각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였다.
"강해지는 게 가장 확실하지. 레벨 올리고, 아이템을 모으는 거."
파밍을 다니는 것.
물론 이 확실한 방법을 두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게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김지운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였다.
'이게 싫어서 은퇴를 했는데.'
그가 놀라운 결과물을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돌아오는 순간 은퇴를 한 것은.
그의 눈에 비친 어비스는 공략의 대상, 탐험의 대상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사냥의 대상도 아니었다.
곤충 따위가 아무리 강해도, 맹수 따위가 아무리 강해도 공룡 같은 거대한 존재 앞에서는 사냥을 운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니까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치는 게 정답이었고, 김지운은 그 정답에 만족했다. 꼬리 내린 개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더 이상 김지운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결국 어비스가 펼쳐졌고, 이제 도망칠 구석 따윈 없었다.
그럼 살기 위해 사냥을 하는 수밖에.
물론 김지운은 무모하게,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사냥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계획이 있었다.
"진짜 사냥하시려고요? 혼자서요? 파티 안 만드시고요?"
"그게 정답이지."
본래 계획은 지하 1층의 생존자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자질이 있는 이들을 모아서 적당한 교육과 훈련을 마친 후에 지하 1층을 시작으로 그 주변을 착실하게 정리해나가는 것이었다.
그게 클랜이 만들어진 이유였다.
그저 단순히 몬스터만 잡는 게 아니라, 휴식과 보급, 지원, 수색 등 다양한 역할이 필요했다.
개미와 같았다.
작은 개미들이 무리를 만들어서 새도 사냥해서 잡아먹듯이, 어비스에서 인간들 역시 개미처럼 모여야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염력이 생기기 전이었다면."
그 말에 이영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이영후도 김지운이 보여준 능력을 봤다.
'염력으로 차를 운전하는 것도 모자라서 유턴해서 다시 움직이다니.'
분명 김지운이 보여준 염력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런데 전투에서는 그렇게 위력적이지 않을 텐데? 무기 없이는?'
그러나 염력은 전투용이라기보다는 전투 보조용으로 쓰이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F랭크의 염력이 보여줄 수 있는 물리력은 10살 남짓한 어린 아이의 근력과 비슷했다.
물건을 들고 움직이거나, 그런 건 가능했지만 그 자체로 실질적인 무언가를 하긴 힘들었다.
무기를 움직여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아이의 손에 칼을 쥐여 줘봤자 죽은 닭 한 마리 제대로 해체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 몬스터의 몸에 생체기는 낼지언정 치명상은 주기 힘들다는 의미.
물론 조건이 갖춰지면 달라졌다.
예를 들면 총 같은 것.
하지만 여긴 대한민국이었다. 이런 곳에서 총 같은 아주 효과적인 무기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
여하튼 이영후의 기준에서 김지운의 단독 사냥은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었다.
'이 양반 죽으면 나도 뒤진다.'
그리고 이영후의 입장에서 지금 믿을 수 있는 카드는 오로지 김지운 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솔직히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실력을 떠나서 어비스에 대해 아는 이가 지금 보기에는 김지운 밖에 없었다.
어비스에서 살아남는 건 능력이 아니라 지식이었으니까.
물론 예외가 있긴 했다.
초창기, 어비스의 헌터들에게는 참고할 지식 따윈 없었다. 직접 미지를 지식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자들은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전설이 됐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나 하지 못하기에 전설이었다. 그런 전설이 여기서 갑자기 시작될 리 만무.
그래서였다.
"저기요."
눈알을 굴리던 이영후가 말했다.
"같이 가겠습니다."
그건 제안이었다.
"제가 미끼라도 되겠습니다."
김지운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제안.
그리고 그건 매우 유효한 제안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어비스에서 미끼가 있다는 것은 게임으로 따지면 목숨이 하나 더 있는 것과 같은 일.
"이래 뵈도 어비스에서 관광하면서 먹은 짬밥이 꽤 됩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영후는 어비스의 경험이 있었다.
헌터가 아니긴 관광객이긴 했지만, 어비스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보다는 관광객이 훨씬 도움이 됐다.
물론 이건 이영후가 희생 정신이 투철해서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김지운이 죽으면 어차피 죽은 목숨, 그렇게 생각했기에 할 수 있는 베팅이었을 뿐.
그 베팅에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런 반응은 예상 외였다.
이영후가 자신을 보고 반해서, 감동해서, 존경심이 치솟아서 이런 제안을 한 게 아니란 건 알았다.
김지운이 죽으면 본인도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이렇게 나온 것뿐.
사실 이건 모두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중요한 건 그 상황에서 고르는 답이었다.
제 목숨이 귀한 걸 알기에 제 목숨을 베팅한다는 것.
'관광객보다는 헌터군.'
그게 헌터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었다.
물론 여기서 김지운은 감동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저 잠깐 놀랐을 뿐이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내게는 미끼가 필요 없다."
무엇보다 김지운은 필요 없었다.
"이게 있으니까."
말과 함께 김지운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영후의 눈빛이 빛났다.
'설마 아이템인가?'
아이템.
어비스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으로 매우 특별한 능력을 가진 물건들을 말함이었다.
그 아이템을 통해서 헌터들은 더 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스킬 슬롯의 제약을 벗어나서 스킬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룬으로 얻을 수 있는 스킬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더 강력한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강력한 아이템 하나가 있다면, 이 지옥을 천국으로도 만들 수 있다는 의미!
'그래, 믿는 구석이 있었겠지!'
그제야 비로소 이영후는 김지운이 보여준 자신감을 알 수 있었고, 그 사실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단한 게 있으셨군요! 이런 게 있으면 진작에 보여주셨어야죠! 그래서 뭔가요? 전설 등급 아이템인가요?"
그 기대 가득찬 이영후에게 김지운은 주머니에서 꺼낸 걸 보여줬고, 그것을 보는 순간 이영후는 그대로 굳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랄비?"
김지운이 꺼낸 건 치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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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파밍 (3).
6.
어비스의 헌터들이 어비스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아니었다.
적응이었다.
어비스의 안개 속에서는 더 이상 눈에 의존하는 삶의 방식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대부분은 일단 소리에 민감해졌다.
소리를 듣는 능력이 개발된다는 건 아니었다. 그건 당장 하고 싶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니었다. 고막에 스트레칭 몇 번 한다고 해서 청력이 늘어나거나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보청기나 이어폰 같은 고도화된 전자기기를 어비스에 가져갈 수도 없는 일.
대신 자신의 소리를 죽이는 능력을 개발했다. 자신이 조용해지면 자연스레 주변 소리가 선명해지는 법이었으니까.
물론 쉬운 길도 있었다.
아이템들이 있었다.
사용하면 눈이 갑자기 적외선 카메라처럼 바뀌는 아이템이.
혹은 열화상 카메라처럼 바뀌는 아이템이.
하지만 이런 아이템들의 값어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비쌌고, 동시에 위험했다.
아이템이란 건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는 것.
그런 것에 의존한 이들 대부분은 빠르든 늦든 어비스에서 방랑자가 되어버렸으니까.
어쨌거나 처음은 소리에 예민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 후에 적응이 되면 그때부터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특히 가진 직업 그리고 스킬슬롯에 넣은 룬에 따라서 그 방법은 다양해졌다.
김지운도 그랬다.
그는 원래 정석적인 방법으로 어비스에서 사냥을 하던 헌터였다.
하지만 염력 스킬을 얻은 후에 김지운의 방식이 바뀌었다.
지금 보여주는 것이 그 방식이었다.
스으으!
김지운, 그가 풀어놓은 치실을 염력으로 이용해 하나의 거대한 원으로 만들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약 지름 10미터짜리 원을.
'오랜만이군, 거미줄을 펼치는 건.'
김지운의 염력 기술 중 하나인 거미줄이었다.
원리도 거미줄과 같았다. 치실에 무언가가 닿는 순간 김지운이 그것을 인지하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어비스에는 치실 따위가 없었기에,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진짜 거미줄이나 혹은 비슷한 것들로 펼치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건 매우 유용한 방법이었다.
일단 이 거미줄의 최고 장점은 대상에 닿아도 그 사실을 대상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대신 단점도 있었다.
염력을 쓰는 입장에서도 인지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
비유를 하면 손에 들고 있는 젓가락 끝에 작은 무언가가 묻었는데 그것을 느끼는 격이었다.
보통은 못 느꼈다.
더불어 거미줄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더더욱 느끼기 힘들어졌다.
그래서였다.
김지운, 그가 살아서 은퇴할 수 있었던 건.
'지금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지만.'
전성기 때 김지운이 펼칠 수 있는 거미줄은 무려 반경 100미터에 이를 정도였으니까.
어쨌거나 이 거미줄이 김지운이 단독 사냥에 나서는 이유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나서는 것뿐, 자신감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김지운은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거슬러서 천천히 1층에 올라갔다.
보이는 것은 없었다.
으어어어!
그저 어비스 좀비들의 소리만 들릴 뿐.
그곳에서 김지운은 조심스럽게, 펼친 거미줄을 통해 어비스 좀비의 위치를 파악하면서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그러면서 가늠했다.
'어비스 좀비가 꽤 많다.'
1층에 있는 어비스 좀비의 숫자를.
그 숫자에 김지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평생 본 숫자보다 여기 1층에 있는 어비스 좀비가 더 많군.'
사실 어비스 좀비는 헌터들에게 그렇게 익숙한 존재가 아니었다.
어비스는 매우 철저하게 관리되는 곳이었고, 최대한 비밀리에 관리되는 곳이었다.
당연히 어비스에 들어간 인간의 숫자 역시 극히 적을 수밖에 없었고, 좀비의 숫자는 더더욱 적었다.
그리고 헌터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그것만큼 위험하기 그지없는 건 없었다.
더불어 헌터들은 익숙하지 않은 것은 되도록 피하고는 했다.
어비스 좀비가 많으면 그냥 그 장소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김지운은 달랐다.
그는 2층으로 바로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층을 거닐었다.
그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지금 김지운이 착용하고 있는 KF94 마스크가 줄 수 있는 시간은 짤막하기 그지없는바.
또한 지하 주차장 3층에서처럼 차 안에서 숨을 돌릴 수 있는 공간이 지금 지상 1층에는 없었다.
이곳은 지금 안개로 점령당한 상태, 의도적으로 밀폐된 공간은 존재치 않았으니까.
굳이 찾는다면 계단 정도, 화재에 대비해 철문이 하나도 아니고 이중으로 배치된 계단이라면 어비스의 안개도 쉽사리 차오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김지운은 계단은 무시했다.
애초에 머릿속에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헌터에게 밀폐된 공간은 가장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공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운이 1층을 거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쯤인데.'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을 찾기 위해서.
'저기 있군.'
그렇게 발걸음을 멈춘 김지운의 발치에는 다름 아니라 화재용 장비들이 있었다.
소화기 그리고 화재용 마스크가.
물론 김지운이 필요로 한 건 화재용 마스크였다.
KF94마스크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시간 어비스의 안개에서 김지운의 이성을 지켜줄 물건이었다.
얼마나 지켜줄지, 그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제대로 실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대신에 헌터 정도 되면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안개에 노출됐을 때 보이는 반응은 과대망상, 흥분, 분노와 같은 매우 격한 것들.
자연스레 심박수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심박수가 안정적일 때는 아직 안개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김지운이 서두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심박수가 오르면 그게 무리해서인지 아니면 안개 때문인지 가늠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김지운이 천천히 층을 거닐면서 화재용 마스크를 챙겼다.
또한 화재용 조명등도 챙겼다. 이 역시 매우 유용했다.
특히 밤이 됐을 때 이 조명등의 값어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지운은 확신했다.
'곧 전기가 끊길 거다.'
지금은 전기 덕분에 이곳이 빛이 가득하지만, 전기가 끊기는 순간 어둠이 깔리리란 것을.
그리고 그 어둠은 모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독했다.
그저 전기가 끊긴 밤의 도시 따위가 아니었다.
그곳을 가득 채운 안개가 티끌의 빛마저, 하늘에서 내려오는 별빛과 달빛마저 지워버릴 테니까.
지독한 어둠이 내리쬘 테니까.
'좋아.'
그렇게 화재용 장비들을 챙기는 김지운, 물론 그의 진짜 목적은 이것들이 아니었다.
오크와의 전투를 비롯해 어비스의 몬스터를 사냥할 때 이런 것들은 그리 인상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김지운이 찾는 진짜 무기는 따로 있다는 의미.
'이제 바로 4층으로 간다.'
그렇게 그 무기를 찾기 위해 4층으로 올라가는 김지운.
으어어어!
'에스컬레이터 주변에는 어비스 좀비들이 없다.'
다행히도 어비스 좀비들은 에스컬레이터 쪽에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화장실 쪽이나 계단 쪽에 몰려 있었다.
'예상대로.'
이상할 건 없었다.
안개는 빠르지만, 순차적으로 차오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존자들은 그 안개와 어비스 좀비를 피해 도망쳤을 것이다. 더 높은 층으로 혹은 화장실 같은 밀폐된 공간으로.
자연스레 어비스 좀비도 그들을 쫓아갔을 터.
달리 말하면 김지운은 직감했다.
'5층이 지옥이겠군.'
이곳의 생존자들, 이제는 생존자가 아니라 좀비가 된 이들의 대부분이 5층에 있으리라고.
그쯤에서 김지운이 고개를 돌렸다.
가운데가 뻥 뚫린 백화점의 특징 때문에 김지운은 3층임에도 바로 천장을 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천장까지 차오른 안개를 볼 수 있었다.
'아득하군.'
탄식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그쯤에서 김지운은 확신했다.
'지하 1층은 이레귤러다.'
지금 이 백화점에서 지하 1층만이 안전지대가 된 건, 어비스의 이레귤러 현상이라고.
어비스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안개로 가득 찬 어비스에 이상하게 무인도처럼 안개가 차지 않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헌터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경우였고, 해서 그곳을 보통은 오아시스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헌터들은 휴식을 취하고, 정비를 했다.
동시에 사냥도 했다.
안개가 없는 곳에서는 어비스의 몬스터들 역시 시한부 인생이 시작됐으니까.
어쨌거나 김지운 입장에서는 희소식이었다.
이레귤러 현상은 한 번 발생하면 꽤 오래 유지됐다.
정확히 말하면 이레귤러 현상이 자연적으로 사라지는 경우는 이제까지 발견된 적이 없었다. 김지운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때는 분명 그랬다.
대신에 강력한 몬스터의 등장 혹은 자연 재해로 인해서 이레귤러가 현상이 사라지는 경우는 있었다.
여하튼 지하 1층은 생각보다 훨씬 더 안전했다.
더불어 이런 오아시스는 헌터에게 있어 목숨줄과 같았다.
제아무리 대단한 모험가도 물 없이는 모험을 계속할 듯 없듯이, 제아무리 강한 헌터도 숨을 쉴 수 있는 오아시스 없이는 결코 사냥을 계속할 수 없었으니까.
'오크들에게 밀리면 끝장이다.'
그렇기에 김지운은 더더욱 지하 1층을 지켜야 했다.
'다른 몬스터도 마찬가지이고.'
다양한 선택지를 준비하긴 했었다.
특히 여기까지 올라왔을 때 안개의 끝이 보인다면, 그럼 김지운은 망설임 없이 지하 1층을 버릴 생각이었다.
그냥 옥상에서 농성을 하면 될 뿐.
그게 여러모로 유리했다.
제아무리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백화점 옥상으로, 그 높은 곳으로, 미로와도 같은 계단을 뚫고 올 수는 없을 테니까.
안전함의 수준이 차원이 다를 테니까.
결정적으로 구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헬기든 드론이든 무언가가 지나갔을 때 생존을 알릴 수 있을 테고, 구출하는 쪽도 부담이 훨씬 더 적을 테니까.
그러나 그 모든 시나리오는 무의미한 것이 됐다.
이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결국 이곳을 당장 떠나는 건 불가능하다.'
이제 김지운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해서 이 백화점의 지하 1층에 아성을 만들어야 했다.
그쯤이었다.
김지운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런 김지운의 앞에는 정말 멋진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있었다.
물론 피아노가 목적이 아니었다. 이런 세상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 짓.
김지운이 찾고자 하는 것은 이 피아노를 파는 악기점에 가지고 있을 만한 도구였다.
'다행이군.'
그리고 다행히도 김지운은 찾을 수 있었다.
'피아노줄이 있었어.'
피아노 조율을 할 때 사용하는 피아노줄을.
이런 상황에서는 도무지 무기라고 할 수 없는 물건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김지운의 눈빛은 달랐다.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거면 가능하다.'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오크 놈들을 잡는 건.'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김지운의 눈빛에는 작은 흔들림이 있었다.
'남은 건 선택뿐이다.'
그는 이제 결정해야 했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은퇴한 헌터가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그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비명 소리가 들렸다.
7.
인간의 장점은 중 하나는 적응력이었다.
한때 패닉 상태에 빠졌던 지하 1층의 생존자들 역시 시간이 흐르자 상황에 적응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죽을 일은 없는 거 같네.'
도그블린이 등장한 후에 지하 1층에는 이렇다 할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오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미 터졌던 풍선을 대충 테이프로 막은 상태, 작은 자극만으로도 언제든 크게 터질 수 있는 상태일 뿐.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위험한 상태였다.
패닉 상태에 빠진 이들은 오히려 그 행동 패턴 자체는 매우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겁에 질려 덜덜 떨거나, 실신하거나, 헛소리를 지껄이거나, 그냥 정신 나간 모습을 보일뿐이었다.
그러나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시작됐다.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이들은 상관없었다. 문제는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폭발 직전의 상황에서 인간은 굉장히 이성이 매우 비이성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야."
"뭔데?"
"하나 챙기자."
지금 이 사내들이 그랬다.
"챙겨?"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20대 중반의 사내들, 딱 봐도 양아치 냄새가 풀풀 풍기는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한몫 안 챙기면 그게 병신이잖아? 응?"
"무슨 이야기야?"
"돈 되는 거 챙기자고."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하면 병신아 잠이나 쳐 자, 라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 제안이었다.
"야, 미친놈아! 이미 위에 다 털어갔을 텐데 뭘 털어?"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모두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명품관 말고 지하 2층에 그거 있잖아? 신발 리셀 매장."
"리셀? 아, 거기?"
"거기 루이뷔통 나이키랑 디올 나이키 있어. 내가 봤어. 사진도 아까 찍었잖아?"
그쯤에서 제안을 한 사내가 스마트폰에 찍힌 사진을 보여줬고, 그러면서 말했다.
"이게 한 켤레에 천만 원이야."
눈이 돌아갈 만한 말을.
물론 모두가 그 제안에 바로 혹한 건 아니었다.
"위험하잖아? 좀비 있다면서?"
의문을 제기했다.
"좀비는 무슨,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에 여기에 쳐들어왔겠지. 안 그래? 설마 좀비들이 에스컬레이터 타는 게 무서워서 못 올라오겠어?"
"안개는? 저거 위험한 거 같은데?"
재차.
"아까 내려간 인간들, 내가 유심히 봤거든? 그러니까 오고 갈 때 마스크 쓰고 있더라고."
"마스크? 화생방?"
"아니, 그냥 일반 마스크 말이야."
그리고 이어진 대답에 모두의 눈빛이 바뀌었다.
물론 그건 그 어떤 근거도 없는 소리였다.
그저 그럴싸하게 포장을 했을 뿐인 소리.
결코 목숨을 베팅할 만한 가치는 없는 소리.
그러나 지금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 소리에 믿음이 갔다.
'얘 말이 맞는 거 같아.'
정확히는 그 소리를 믿었다.
확증편향,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알아, 위험한 거. 근데 어려운 거 없다니까? 저쪽 에스컬레이터에서 그 리셀 매장까지 거리가 얼만지 알아? 10미터도 채 안 돼. 갔다 오는데 30초도 안 걸린다고. 30초 만에 천만 원 벌 수 있다니까?"
그 무렵에서는 더 이상 질문은 없었다.
이야기도 없었다.
다섯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행동에 나섰다.
물론 그들의 수작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지하 2층, 그 안개로 자욱한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그들은 조우했다.
으어어어!
"조, 좀비다!"
그들의 조잡한 발소리에 어비스 좀비들이 달려들었고, 그 순간 모든 건 끝이었다.
한 번에 네 명이 어비스 좀비의 먹잇감이 됐다.
남은 한 명의 운명도 다를 건 없었다.
이미 패닉 상태에 접어든 그에게 근처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발견하는 건 불가능했다.
"으아아악!"
그저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칠 뿐.
으어어어!
그리고 어비스 좀비가 그 한 명을 쫓아 움직였다.
그 추격전 역시 길진 않았다.
"으아아악!"
그 찢어질 듯한 단말마를 끝으로 지하 2층에 다시금 고요함이 짙게 내려앉았다.
"뭐야?"
"아까 몇 명 내려가던데?"
"죽은 거야?"
그쯤에서 적잖은 이들이 그 단말마를 닫고 지하 2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모였다.
"여기 진짜 뭔가 있는 모양이네."
"씨발, 미치겠네. 대체 뭐가 있는 거야?"
모인 이들이 저마다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모두는 생각했다.
'여긴 절대 들어가지 말아야지.'
안개는 지옥이다.
'이제 아무 일 없겠지?'
그래도 굳이 저기 들어가지만 않으면 당장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크우, 크우!
그 비명 소리를 들은 것이 그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크우!
오크, 놈이 소리를 따라 지하 2층에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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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스위트홈 (1).
1.
'잘못하면 최악의 시나리오 확정인데, 괜찮으려나?'
김지운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떠나는 것을 보는 순간 이영후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반면 강현중 중사는 달랐다.
그는 머릿속이 복잡해질 틈이 없었다.
으아아앙!
'하은이!'
그에게는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둘이나 있었으니까.
그렇게 강현중 중사가 잽싸게 아내와 아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이내 볼 수 있었다.
으아앙!
"하은이가 왜 울지?"
"배고픈가 봐."
"분유는?"
"가방에 액상분유 있어."
"잠깐만."
그 모습에 강현중 중사가 가방에서 분유를 꺼낸 후에 일회용 젖꼭지를 채우고는 아내에게 건네줬고, 아내는 능숙한 솜씨로 자세를 잡은 후에 아이의 입에 젖병을 물렸다.
꼴깍꼴깍······.
그제야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분유를 먹기 시작했다.
그 가족 사이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지금 상황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고요함이.
그 고요함 속에서 강현중 중사가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자신을 보고 있는 이영후를 향해서.
"아, 아닙니다."
그 물음에 이영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해됐으면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경우를 잘 몰라서······."
"아닙니다, 방해될 건 없습니다. 곁에 와서 보셔도 됩니다."
"그래도 됩니까?"
그제야 슬그머니 더 가까이 다가온 이영후가 강현중 중사의 딸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이영후 역시 이런 상황이 올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던 바.
그럼에도 웃음이 나올 만큼 강현중 중사 딸아이의 모습은 귀여웠다.
그러나 눈은 달랐다. 이영후의 눈은 웃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도 아기 얼굴 보니까 웃음이 나오네요. 진짜 최악의 상황인데도."
"지금 일어난 이 일들이 뭔지 아십니까?"
그 질문에 이영후는 몇 번 눈을 굴리고는 피식 웃었다.
"원래는 여기서 비밀 유지 조항 어기고 말하면 바로 클랜에서 응징자가 오는데, 지금은 제발 와달라고 빌어야 할 판이니까. 그러니까 아무래도 좋겠네요."
이윽고 이영후는 말해줬다.
"어비스란 게 있습니다."
최대한 간략하게.
"그리고 헌터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이영후는 무려 수십 분 동안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해야만 했다.
"그중 최고는 누가 뭐라고 해도 퍼스트 킬러죠, 최고의 헌터! 최초의 업적들을 누구보다 많이 달성한 헌터! 아쉽게도 죽었지만······ 아, 죄송합니다. 퍼스트 킬러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 말이 길어지네요. 제가 진짜 팬이거든요."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끝이 있는 법.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각성하셨다고요? 그럼 상태창 여실 수 있으시겠네요. 방법이요? 아, 모르시는구나. 박수 한 번 치면 상태창, 두 번 치면 스킬 슬롯, 세 번 치면 도감이 열립니다. 그리고 오른손 악수는 파티 맺기, 왼손 악수는 파티 해제.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손 없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손모가지 간수를 잘 해야 해요."
이야기에 끝이 왔다.
으아아악!
"뭐, 뭐야?"
지하 2층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에 모든 이들이 하던 대화를 멈추었다.
바로 행동에 나섰고, 그 둘은 알 수 있었다.
"다섯 놈이 지하 2층으로 갔다고요?"
이번에 일어난 소란을.
"설마 이 미친 새끼들 신발 훔치러 간 건가? 또라이 새끼들인가?"
그 소란에 모두는 혀를 찼다.
거기까지였다.
어비스 좀비는 안개가 없는 곳에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 만큼, 더 큰 소란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영후는 달랐다.
'설마, 아니겠지?'
어비스에서 소리를 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 순간이었다.
크우우우우!
평화롭던 지하 1층에 오크가 등장했다.
2.
오크.
게임이나 소설에서는 고블린과 함께 가장 흔하게 등장하고, 흔하게 처치되는 몬스터였다.
무서울 것은 하나도 없는 몬스터.
그러나 그렇듯 현실은 달랐다.
크우우우!
등장한 오크의 존재감은 경험치 파밍용 몬스터가 아니라 마왕이라고 해도 될 만큼 압도적이었다.
일단 덩치가 엄청났다.
사람 두 명이 동시에 타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에스컬레이터를 비좁게 느껴지게 만드는 그 덩치는 보는 사람들에게 비명소리조차 내뱉지 못하게 했다.
과장이 아니었다.
"어, 어, 어."
콰직!
처음 오크를 본 생존자는 그 존재감에 압도된 나머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오크가 휘두른 큼지막한 도끼에 머리가 박살이 났다.
비명을 내지른 건 좀 더 뒤에 있던 생존자였다.
"괴, 괴물이다!"
그 소리에 생존자들은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학습을 했으니까.
"튀어!"
여기서는 입 다물고 일단 숨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반면 예외도 있었다.
"잡아!"
스무 명이 넘는 이들은 도리어 등장한 오크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식품관 점령자들이었다.
"저거 죽여야 해!"
오크를 죽이기 위해서.
물론 그들 중에 몬스터를 죽여 본 경험이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존재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망설임 없이 오크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이 임전무퇴를 신념으로 삼는 타고난 전사이거나 용사라서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여기 모인 모두를 구하는 영웅이 되겠다, 라는 일념을 가져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한 건 두 가지였다.
"고작 한 마리야! 우린 스무 명이 넘고!"
압도적인 머릿수.
"한 번씩만 창으로 찔러도 끝이야!"
그리고 조잡하지만 어쨌거나 피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무기가 손에 쥐어졌다는 것.
달리 말하면 그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근거는 그게 전부였다.
크우크우!
"어, 어? 뭐, 뭐야?"
그렇기에 오크를 직접 마주하는 순간 그들의 용기는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괴, 괴물이다!"
힘차게 달려왔던 점령자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크우!
그 사실에 오크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확신의 비웃음이었다.
이곳에 있는 것들이 자신을 조금도 위협하지 않으리란 확신.
이것들은 식량이라는 확신.
"네놈!"
크우?
그런 확신을 한 사내가 가로막았다.
"이곳은 못 지나갔다!"
강현중 중사, 그가 조잡한 창을 든 채 오크를 마주 봤다.
솔직히 그건 막아섰다, 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광경이었다.
일단 체격 차이가 너무 컸다. 강현중 중사의 체격도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오크는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무장의 수준 차이도 너무 컸다. 오크는 지금 투박하지만 가죽으로 된 갑옷을 두르고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투박하지만 어쨌거나 무시무시한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반면 강현중 중사의 손에는 칼과 걸레 마대로 만든 조잡한 창이 무기의 전부였다.
비유를 하면 사냥개와 호랑이 싸움이었다.
그마저도 좋은 비유는 아니었다. 현명한 사냥개라면 싸움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을 택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현중 중사는 도망치지 않았다.
'내가 물러나면 다 죽는다.'
지켜야 했으니까.
'주혜도 하은이도.'
가장 소중한 것을.
어느 때보다 각오를 다졌다는 의미.
동시에 방법도 나름 준비했다.
'어비스의 몬스터는 안개 밖에서 오래 못 버틴다. 설명대로라면.'
강현중 중사는 최대한 시간을 벌어서 오크를 죽일 속셈이었다.
그래서 나섰다.
시간을 벌려면 자신이 타깃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러니까 강현중 중사는 망설이지 않았다.
먼저 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우!
오크 역시 기꺼이 강현중 중사를 맞이했다.
그 둘이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후웅!
정확히는 오크가 공격을 하면 강현중 중사가 전력을 다해 피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강현중 중사는 의외로 오크의 공격을 잘 피해냈다.
물론 오크의 공격 동작이 크고, 그래서 공격이 어느 정도 예측되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오크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보면서 피한다?
그야말로 현실과 지옥 사이를 널뛰기하는 기분.
후웅!
그리고 오크 입장에서는 짜증이 치솟는 일이었다.
그쯤에서 오크의 표정이 달라졌다. 짜증 그리고 귀찮음이란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으아앙!
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 순간 오크의 행동이 멈췄다.
크우?
놈이 아기 울음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장 먼저 깨달은 건 다름 아니라 강현중 중사였다.
'하은이!'
이대로 두면 오크가 울음 소리를 향해 간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그 순간 강현중 중사는 도망치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한눈을 파는 오크, 놈의 눈을 향해 가진 창을 내찔렀다.
푹!
그리고 그 창은 그대로 오크의 왼쪽 눈을 찔렀다.
크우우우우우!
그 순간 오크가 거대한 괴성을, 고통에 찬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강현중 중사를 바라봤다.
앞서서 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한 채.
강현중 중사를 산 채로 씹어먹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채.
"와! 들어와!"
그 눈빛에 강현중 중사도 기꺼이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표현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괴물이 딸아이를 향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나한테 들어와, 이 씹새끼야!"
크우우우!
그렇게 강현중 중사와 오크가 전력을 다해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 그 순간이었다.
퍼걱!
갑자기 오크의 목덜미에 도끼가 꽂혔다.
화재 대비용 도끼였고, 그 도끼를 휘두른 건 점령자들의 리더, 고강수였다.
'이때를 노렸다.'
오크에게 치명상을 줄 틈을 노리고 있던 고강수는 그 틈이 나오는 순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 고강수의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화재용 도끼는 벽이나 문을 부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바, 제아무리 오크라고 하더라도 그 전력을 다한 도끼질 앞에서는 무사할 수 없었다.
특히 상처 부위가 목덜미였다.
푸홧!
고강수가 도끼를 뽑아내는 순간 뿜어진 피가 천장을 적셨다.
그와 동시에 오크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노린 건 아니지만, 고강수의 도끼가 오크의 척수 신경마저 잘라버린 덕분이었다.
그렇게 쓰러진 오크를 가운데 두고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의 눈빛이 마주쳤다.
"강현중입니다."
"고강수다."
서로가 이름을 주고받았다.
"물어볼 게 있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했다.
"지금 내 귀에 무언가가 들렸는데······."
그러나 그 대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크우!
지하 2층, 그곳에서 또 한 번 더 오크의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크우!
크우!
크우!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그 사실에 기겁하는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 그런 그들 앞에 이윽고 등장했다.
크우우우!
오크 네 마리가.
그것을 본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빠득!
그러나 이내 그 둘이 동시에 이를 꽉 물었다.
흔들리는 눈빛을 바로잡았다.
'도망칠 곳은 없다.'
'결국 여기서 잡아야 해.'
전투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건 오크들도 마찬가지였다.
크우?
크우!
크어엉!
동료의 죽음을 본 오크들의 표정과 기세가 달라졌다. 놈들이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를 노려봤다.
거기서 눈싸움을 하거나 그러는 것은 없었다.
동료를 죽인 적이 있는데 가만히 있는다, 오크들에게는 그런 선택지 따위는 없었으니까.
크우우우!
오크들이 동시에 둘을 향해 전력을 다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는 도망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맹수와의 싸움에서 꼬리를 내린다는 것은 결국 사냥감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은 일.
무엇보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저 무시무시한 오크들과 술래잡기를 해봤 자 얼마 안 있어서 뒤를 잡힐 것 같았다.
그 후에는?
참담한 결과만 있을 뿐.
해서 눈앞의 광경을 직시했다.
크우우우!
그 덕분에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는 볼 수 있었다.
우우, 컥, 컥!
갑자기 제 목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쓰러진 채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뱉는 오크들을.
그리고 쓰러진 오크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사내를.
김지운, 그가 돌아왔다.
3.
어비스가 발견된 초창기에 헌터들은 맨몸으로 어비스를 경험하고, 넘어서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제 막 헌터가 되는 이들에게 매뉴얼을 줄 수 있을 만큼 체계화가 됐다.
몬스터 공략법과 어비스 생존법 등 헌터들은 이미 앞선 헌터들이 구해준 지식을 공부했다.
또한 훈련도 했다.
실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몸을 단련하고, 체력을 키우고, 검과 같은 무기를 쓰는 훈련을 통해 스스로를 연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력이 1개월 미만인 헌터들 중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오크에 살해당했다.
오크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보는 무수히 많았다. 오크는 어비스에서 도그블린만큼 보기 쉬운 몬스터였으니까.
더불어 오크가 무자비할 정도로 강인해서 그런 것 역시 아니었다.
처음은 모르지만 어느 정도 레벨이 오르고 근력 스탯이 30포인트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오크의 힘은 그렇게까지 인상적이거나, 초월적인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오크가 무서운 건 생명력이다."
문제는 오크가 가진 밑도 끝도 없는 생명력이었다.
어지간한 치명상이 아니고서는 오크들은 죽지 않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바닥에 피가 흥건하다 못해 웅덩이를 만들어도 오크는 날뛰었다.
심지어 배가 갈라지고 내장이 쏟아져도 오크는 칼을, 도끼를, 해머를 휘둘렀다.
실제로 내장이 나온 채로 1시간 넘게 버티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오크도 버틸 수 없는 게 있었다.
컥, 컥!
바로 숨이 막혔을 때.
내장이 쏟아져도 1시간은 거뜬히 버티는 오크도 숨이 막혔을 때는 채 1분도 버티지 못했다.
김지운, 그가 피아노줄을 확보하는 순간 오크 사냥을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피아노줄을 이용해 올가미 같은 것을 만든 후에 오크의 목에 씌우기만 하면 될 뿐.
더군다나 김지운은 그렇게 만든 올가미들을 올가미끼리 연결시켰다.
켁!
오크 두 마리를 짝지어서 서로가 아등바등 거릴 때마다 서로의 목을 더 조이게 만드는 식으로.
오크들이 서로 목줄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하게 만드는 식으로.
케엑, 케엑!
그렇게 김지운 앞에서 오크 네 마리가 목에 피아노줄로 만든 올가미를 매단 채 몸부림을 쳤다.
털썩!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채 1분도 되기 전에 오크들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 사실에 김지운은 놀라지 않았다.
'안개 밖에서는 더 치명적이지.'
안개가 없는 곳은 헌터들의 세상, 그 세상에서 오크들은 제법 버틸 수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버티는 것뿐.
상처를 입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는 급속도로 빠르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죽는 건 아니었다.
오크의 힘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바.
또한 김지운은 오크들을 서로 묶어놓았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발버둥 치는 오크의 힘을 지금 김지운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으니까. 결국 오크들이 서로 줄다리기를 하게 만드는 게 최선이었다.
여하튼 한 쪽이 힘이 빠져 쓰러지면 다른 한쪽이 오히려 조금 여유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김지운, 그가 가지고 온 화재용 도끼로 숨통이 이제 막 트이기 시작한 오크, 놈의 목덜미를 내리찍었다.
콰직!
앞서 고강수가 오크를 내리찍었던 그곳을.
목덜미의 혈관은 물론 신경이 지나가는 그 부위를.
물론 고강수처럼 운 좋게 찌른 게 아니었다. 김지운은 정확하게 그 부위를 노리고 찍었다.
푸홧!
그렇게 김지운이 도끼를 뽑는 순간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고, 그 속에서 김지운은 도끼를 마저 움직였다.
쓰러진 놈들까지, 네 마리 모두의 목덜미를 장작을 패듯 도끼질을 했다.
한 번도 아니었다.
네 마리의 목덜미를 내리찍은 후에는 김지운은 다시 순서대로 도끼질을 재차 했다.
이미 죽었으리라 생각됐음에도 김지운은 멈추지 않고 도끼질을 거듭했다.
어비스의 헌터가 명심해야 할 규칙 때문이었다.
5. 몬스터 처치 알림이 들리기 전까지는 공격을 멈추지 마라.
그 규칙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오크를 처치했습니다.]
그렇기에 김지운은 그 알림이 들린 후에야 비로소 도끼질을 멈췄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어서 알림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근처에 레어 아이템이 있습니다.]
이어진 알림에도 신경을 주지 않았다.
김지운은 자신을 바라보는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 모습에 그 둘은 그대로 굳었다.
특히 고강수, 그는 굳은 수준을 넘어서 눈동자가 흔들렸다.
김지운을 얕본 적은 없었다.
그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싸움, 그것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으니까.
'괴물이다.'
그러나 지금 고강수는 인정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괴물.'
김지운은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이름."
때문에 김지운의 질문을 던졌을 때 고강수는 대답했다.
"고강수입니다."
고개를 숙이면서.
그 모습에 김지운은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이 당연하게 느껴져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제부터 지하 1층을 폐쇄한다.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고, 출입 역시 제한한다."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끝나면 브리핑을 시작한다."
김지운, 그가 결단을 내렸다.
"이곳을 지키기 위한."
'이곳이 이제 내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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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스위트홈 (2).
4.
지하 1층 폐쇄, 출입구 봉쇄, 출입 제한 그리고 브리핑.
김지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는 멍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 익숙한 말은 어느 것 하나도 없었으니까.
반면 이영후는 달랐다.
"봉쇄라면?"
어비스 관광객 출신이었던 이영후는 김지운이 지금 내뱉은 말의 의미를 바로 파악했다.
"여기를 거점으로 삼으시려는 겁니까? 오아시스로?"
김지운, 그가 이곳을 지키기로 했다는 것.
그리고 그건 이영후 입장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도망치지 않는구나!'
이영후, 그는 김지운이 도망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가능성을 매우 높게 봤다.
'나 같으면 진즉에 튀었을 텐데!'
그도 그럴 것이 이영후가 아는 김지운은 헌터였고,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클랜에 소속되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건 클랜 아지트로 가는 것이었다.
헌터들의 레벨과 스킬 슬롯은 초기화된 상태이지만 헌터들이 어비스에서 쌓은 경험과 능력은 사라지지 않는 법.
무엇보다 클랜에 가면 그게 있었다.
'아이템은 유효하니까.'
어비스의 헌터들이 어비스에서 목숨 걸고 구해온 것들이.
이 어비스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
물론 어비스 안개로 가득 차서 몬스터가 넘치는 지금 상황에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지만, 이영후가 보기에 김지운은 이 안개를 헤쳐갈 역량이 충분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헌터들을 중심으로 세력이 개편될 거야.'
더 나아가 지금 이 아포칼립스 세상을 이끌어갈 건 누가 보더라도 헌터들이 될 게 뻔했다.
당장 헌터들은 전 세계 최고의 권력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이 손을 합친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을 터.
물론 그 질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충돌과 잔혹한 무대가 펼쳐질 것은 분명했다.
세계가 전운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더더욱 클랜에 합류해야 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전쟁을 하는 거지.'
전쟁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었으니까.
여하튼 김지운 입장에서는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정말 눈곱만큼도 존재치 않았고, 그래서 이영후는 그것을 걱정했다.
김지운이 떠나는 순간 이영후가 강현중 중사 주변을 얼쩡거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강현중 중사의 딸아이를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딸아이가 생각 이상으로 귀여웠지만, 어슬렁거린 목적은 김지운이 사라지고 난 다음을 기약하기 위함이었다.
그 상황에서 이영후가 잡을 수 있는 동아줄은 강현중 중사밖에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그 고민은 모두 무색한 게 됐다.
"그래, 이곳을 집으로 삼을 거다."
이제 김지운이 이곳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테니까.
"안타깝게도."
물론 이영후가 기뻐하는 것과 별개로 김지운이 그런 결단을 내린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안개가 천장까지 가득 찼다. 안개 높이가 최소 1백 미터 이상으로 판단된다. 이 정도 크기라면 여의도 전체가 뒤덮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지운 정도 되는 실력자도 이곳 이상으로 안전한 곳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였으니까.
"30층 이상의 고층 빌딩 말고는 생존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의 상황이 여기보다 낫다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힘들었다.
"이 정도 안개면 구조도 불가능하다. 헬기가 떠도 생존자들이 헬기에 닿을 방법이 없다."
또한 외부의 도움 역시 당장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
결국 이곳을 중심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그렇기에 이야기를 들은 강현중 중사와 이영후의 표정은 굳어졌다.
반면 고강수는 달랐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비스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그의 입장에서는 김지운의 말 중에 이해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고강수는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지하 1층을 봉쇄만 하면 되는 건가?"
이미 김지운에게 고개를 숙인 고강수 입장에서는 여기서 해야 할 건 하나였으니까.
"바로 하지."
명령을 따르는 것.
그리고 그건 고강수가 바라던 입장이기도 했다.
본래 그는 식품관만이 아니라 이곳 지하 1층 전체를 봉쇄한 후에 모든 이들을 자신의 관리 하에 두려고 했다.
이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왕 놀이를 하려고, 대장 놀이를 하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
고강수는 지금 상황을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판단했고, 그래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식품관만 봉쇄한 것은 바로 김지운의 존재 때문이었다.
김지운이란 존재를 적으로 뒀을 때 그나마 지킬 수 있는 영역은 식품관 정도가 한계라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지만, 여하튼 고강수 입장에서는 하고 싶었던 일을 이제 마음껏 하면 됐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지운의 이름을 팔아서.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고강수의 행동에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거기, 너."
"예?"
"저 일식당 의자랑 식탁 전부 에스컬레이터 근처로 이동시키도록."
"예? 저 많은 걸요?"
"최대한 빨리."
"제, 제가요?"
"죽기 싫으면."
짤막한 경고 하나에 모두가 부리나케 움직였다.
여자 남자 구분도 없었다.
고강수는 보이는 모든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식당의 식탁, 의자, 마트의 진열대, 카트 또는 화분이나 입간판 등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움직여서 에스컬레이터의 주변을 그리고 지상과 연결된 하나밖에 없는 정문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부 보초를 선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소리를 질러서 알린다."
무기를 쥔 이들을 경비로 세웠다.
인원이 부족했지만 이 역시 문제는 없었다.
"군대에서 특전사 또는 그에 준하는 부대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자 혹은 소방관이나 경찰관 출신, 체대 출신 있나?"
고강수는 남자들을 모았고 그들 중에 받았다.
"지원하는 자,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주겠다."
의지를 가진 자를.
그러자 의외로 적지 않은 이들이 지원을 했다.
분위기가 달라진 탓이었다.
이제는 그들이 생각하던 것처럼 낙관적이지 않음을,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상황임을.
물론 어디나 그렇듯 이런 상황에서 꼭 제 지랄 맞은 성격을 자랑하는 이가 있는 법.
"아니, 대체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지랄이야? 어? 내가 누군지 알아?"
다행히도 그런 부류들의 난동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강수, 그는 바로 결과물을 보여줬다.
퍼억!
주먹질 한 번으로 단숨에 사내를 뒤로 자빠뜨린 후에 그대로 사내의 손목을 제 발로 잡은 후에 도끼를 들며 말했다.
"이제부터 규칙 하나를 세운다. 이곳에서 지랄할 때마다 손가락 하나다."
콰직!
확실한 핏빛 경고를.
"열 번까진 지랄해도 좋다. 단, 열한 번째는 없다."
그 이후로 당장 대놓고 지랄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저기 대장님."
그러나 그 광경을 보던 이영후는 조심스레 김지운에게 말했다.
"이게 의미가 있나요? 오크 한 놈이 그냥 발로 뻥 차면 다 뚫릴 텐데."
몬스터를 상대로 이런 봉쇄가 그렇게까지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것 같진 않았으니까.
김지운도 알았다.
"몬스터를 상대로는 소용없지."
그럼에도 봉쇄를 요청한 이유는 간단했다.
"하지만 사람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인간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것, 그게 목적이었으니까.
"더 이상의 소란은 없다."
그래야 변수가 없을 테니까.
이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아까는 다섯 명이 소란을 피워서 오크가 등장했지만, 그건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여기서 생존자들이 밖으로 나가서 잘못했다가는 오크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몬스터를 데리고 올 수도 있었다.
그 말에 이영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보통이 아니야.'
그 순간 이영후는 확신했다.
"대장님이면 나머지 오크들도 문제는 없겠네요."
김지운이라면 이제 이곳에 오는 오크들 전부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말했다.
"여기서 잡으면 파멸이다."
"예?"
오크가 이곳에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음을.
"오아시스에서 전투를 치르는 건 최후의 수단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안전해야 할 곳에 몬스터들이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게 놔두는 것은 최악의 행위였다.
그 전투의 흔적을 따라서 다음 몬스터들이 등장할 테니까.
"그, 그럼?"
"오기 전에 잡는다."
즉, 김지운은 밖에서 오크들을 사냥할 생각이었다.
그 사실에 이영후를 비롯해 강현중 중사는 물론 이영후로부터 어비스에 대한 정보를 들은 고강수의 표정이 굳었다.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죽어버리는 저 안개 세상에서 오크를 사냥하다니?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말했다.
"동행이 필요하다."
그 대목에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 명. 최악의 상황에서 이곳까지 와서 상황을 전달해 줄 한 명이."
"그럼 제가 같이 하겠습니다."
"내가 가겠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둘이 동시에 동행을 자처했다.
그러나 김지운은 고개를 저었다.
"고강수, 너는 이곳을 관리해야 한다."
일단 고강수는 결코 데려갈 수 없었다. 이곳을 관리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가진 건 그뿐이었으니까.
"강현중, 너는 고강수를 도와야 한다."
그리고 고강수와 같이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김지운을 빼면 강현중 중사뿐이었다.
이 둘은 따로 놔두면 너무나도 약해졌다.
둘이 하나가 되어야 그나마 초보자 헌터 한 명의 몫을 한다는 의미.
"그리고 둘은 어비스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결정적으로 김지운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를 자신의 옆에 두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즉, 김지운이 데려갈 동행은 한 명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씨발.'
이영후, 그가 파트너가 됐다.
5.
크우!
그건 오크 무리였다.
크우!
무려 스물다섯 마리로 이루어진 오크 무리.
오크 무리들 치고는 숫자가 적은 편이긴 했다. 물론 그럼에도 매우 위협적인 무리였다.
크우!
그런 오크 무리들은 지금 어느 때보다 긴장된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눈을 떴을 때 마주하게 된 세상이 그들이 살던 세상과 전혀 달랐다.
일단 발에 밟히는 바닥부터가 달랐다.
흙과 다르게 바닥이 매우 단단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것들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가는 길목마다 강철로 된 단단한 돌멩이들이 가득 차 있었다.
크우!
그게 오크 무리들이 무리를 해서 움직이는 이유였다.
그들은 찾고 있었다.
크우!
자신들이 안전하게 몸을 눕힐 수 있는 공간을.
그것을 찾기 위해서 오크 무리는 수색병을 보냈다.
처음은 한 마리씩 다섯 마리를 보냈다.
그러나 그중 네 마리만 돌아왔고, 거기서 네 마리에게 돌아오지 않은 한 마리의 흔적을 쫓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 네 마리마저 소식이 사라졌다.
그쯤에서 오크 무리는 직감했다.
무언가가 자신들을 동료들을 죽였음을.
그때 모든 오크들은 생각했다.
이제 복수를 해야 할 때가 왔음을.
그게 오크의 무서운 점 중 하나였다. 놈들은 복수를 행하는 부류였다.
그렇게 오크 무리들은 앞서 간 수색병이 남긴 흔적을 되짚어갔고, 이내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크우!
어떤 동굴을.
그 동굴 앞에서 오크들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크우!
동료가 남긴 흔적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오크 무리가 동굴을 타고 내려갔다.
동굴은 길었다.
그러나 복잡할 건 없었다. 도중에 갈림길이 나오긴 했지만, 어려울 건 없었다.
그리고 동료의 흔적이 분명하게 있었다.
그렇게 흔적을 따라 이동하던 오크 무리는 이내 드넓은 공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부아아앙!
거칠기 그지없는 소리 하나가 오크 무리의 등장을 반겼다.
매우 거친 소리였다.
일부러 큰 소리를 내려고 안간힘을 낸 듯한 소리.
부아앙!
그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은색 물체가 오크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당연히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오크 무리 중 일부는 그대로 검은색 물체에 치였다.
물론 오크들은 자신들을 친 게 벤츠 G63 AMG, 일명 벤츠 지바겐이란 차량인 걸 몰랐다.
그리고 그게 중요치도 않았다.
크우우우우!
가장 덩치가 좋은 오크 한 마리가 포효를 내지르는 순간 오크들이 그 검은색 지바겐을 향해 몸을 달렸다.
콰앙!
모두가 손에 든 무기로 지바겐 차량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바겐 역시 순순히 당하진 않았다.
부우웅!
오크를 매단 채 후진을 했고, 그러다가 때로는 벽을 향해 돌진하는 식으로, 성난 말처럼 날뛰었다.
크우!
그 사실에 오크들은 더더욱 흥분했다.
콰앙!
더더욱 공격적으로 지바겐 차량을 공격했다.
때문에 오크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스윽!
자신들의 머리 위로 올가미가 등장하는 것을.
꽈악!
케에엑!
그것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올가미가 목을 조인 후였다.
삽시간이었다.
지바겐과 오크가 서로 치고받으며 강렬한 소음이 퍼지던 지하 주차장에 고요함이 깔렸다.
오크들 모두가 바닥에 제 목을 부여잡은 채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예외 없이.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올가미는 사냥에 매우 유효한 무기였다. 대단한 도구 없이, 몇 번의 적당한 조작을 통해서 만들 수 있었고, 동시에 제대로만 걸리면 사냥감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위력적인 무기를 실시간으로 사용하는 사냥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 올가미로 움직이는 생명체를 그대로 잡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물며 지금 오크들은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쉴 새 없이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그것도 아주 격한 전투를.
그런데 그런 놈들에게 피아노줄로 만든 올가미를 씌운다는 것.
심지어 맨손도 아니고 염력으로 씌운다는 것.
말도 안 되는 일.
'2년 만이지만.'
그러나 김지운에게는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 작업을 거짓말하지 않고 정말 수백만 번 넘게 반복했으니까.
무수히 많은 연습을 했고, 동시에 무수히 많은 실전을 치렀으니까.
'감은 제대로 살아 있다.'
더군다나 은퇴 기간이 무색할 만큼 김지운의 염력 컨트롤은 전성기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죽기 직전, 그때처럼.'
더불어 그 전성기 수준은 김지운을 기억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때를 말함이 아니었다.
김지운, 그가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미끼를 자처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어비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때.
감히 사냥을 운운할 수 없는 아득한 괴물들 속에서 6개월 동안을 보내야 했을 때.
헌터 김지운의 전성기는 그때였다.
그야말로 자신의 밑바닥을 봤다.
'······다시 떠올려도 끔찍하군.'
반면 그때 김지운은 어비스의 바닥을 못 봤다.
그게 은퇴의 이유였다.
자신의 수준을 봤는데, 자신이 마주해야 하는 상대의 밑바닥은커녕 무릎도 보지 못했다는 것.
어쨌거나 그런 김지운 입장에서 주어진 물건들로 오크들을 사냥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론 김지운은 알았다.
크헉!
오크들은 괴물이고, 그 괴물들을 완벽하게 묶기에는 피아노줄은 한계가 있음을.
무엇보다 김지운은 지금 피아노줄로 오크와 오크를 묶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오크의 힘을 이길 수 없는 탓.
결국 모두를 잡아도, 그중 절반은 어떤 식으로든 숨통이 트일 기회가 온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넘쳐났으니까.
'2억 넘는 차가 열 대나 있다니, 부자나라답군.'
500마력이 넘어가는 2톤짜리, 제로백 3초대의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부아아앙!
그렇게 김지운이 배치된 고마력의 SUV들을 오크들을 향해 돌진시켰다.
평소 때라면 피했을 수도 있는 돌진이었으나, 숨이 막힌 오크들의 상황은 달랐다.
콰아앙!
크어어!
충돌소리가 나고, 비명 소리가 났다.
오크 무리와 파손된 차량들이 그리고 소란을 듣고 몰려온 어비스 좀비들이 뒤엉키며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완벽한 사냥.
그러나 김지운은 알았다.
이게 끝이 아님을.
오히려 진짜 사냥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김지운, 그가 손에 든 휴대용 손전등을 깜빡깜빡, 두 번 움직였다.
그러자 들렸다.
삐빅, 삐빅, 삐빅!
지금 오크와 자동차들이 뒤엉켜 있는 곳에서 정반대에 있는 곳에서 스마트폰의 알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어어어어!
그 소리에 어비스 좀비들이 몰려갔다.
그리고 김지운은 걸어갔다.
오크들을 향해서.
[오크의 피 묻은 도끼]
- 아이템 등급 : 레어
- 1레벨 이상 착용 가능
- 공격력 : E-랭크
- 내구도 : F+랭크
- 착용 시 근력+4
- 오크의 피가 여러 번 묻으면서 특별한 힘이 담긴 도끼다. 착용자의 힘을 강하게 해준다.
놈들에게서 얻은 도끼를 손에 든 채.
사냥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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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어비스넷 (1).
1.
김지운은 파트너인 이영후에게 두 가지만 요구했다.
"내가 위험하면 거기서 주저 없이 비명을 내지를 거다. 내 비명을 듣는 순간 바로 지하 1층으로 가서 상황을 알려라."
"전투가 시작된 후에 내가 손전등으로 신호를 주면 내가 말한 위치에서 스마트폰을 놓고 알림을 20초 맞춰두고 도망쳐라."
그뿐이었다.
자세한 사냥 계획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어떻게 오크를 잡을 것인지, 어떤 방법으로 잡을 것인지, 어디서 잡을 것인지 그리고 언제 어느 순간에 잡을 것인지.
그건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전투 상황을 자세히 모른다는 것은 자신에게 무엇이 위협이 될 수 있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러나 그 사실에 이영후는 별 다른 불만을 품지 않았다.
관광객일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이제부터 우리는 오크를 잡을 겁니다, 오크는 어비스에서 좋은 단백질 공급원이죠, 라는 식의 농담 섞인 가이드를 받았지만 지금 이영후는 그저 부품일 따름이었다.
하라는 대로 하면 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오히려 머릿속에 여러 정보를 넣을 필요가 없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판단에 착오가 생길 가능성도 많아지는 법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이영후의 머릿속에는 여유가 없었다.
'이거 정말 잡을 수 있을까?'
근심과 걱정으로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김지운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오크 네 마리를 잡는 것과 오크 무리를 잡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이곳은 어비스와 같은 공간이었다.
자욱한 안개에 어비스 좀비마저 있는 곳!
그러나 그 걱정은 곧 무색한 게 됐다.
순식간이었다.
콰앙!
지하 3층 주차장이 소란으로 가득 찼고, 이어서 이영후에게 김지운이 신호를 보내줬을 때 이영후는 스마트폰 알림을 맞추고 도망쳤다.
그 후 몇 번의 소란이 더 피어오른 후에야 다시 신호가 왔다.
깜빡깜빡깜빡!
김지운, 그가 살아있음을 알렸다.
그 광경에 이영후는 넋을 잃었다.
'대체 어떻게?'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김지운이 어떻게 이토록 쉽게 그리고 빠르게 오크 무리를 처치했는지 떠올릴 수가 없었으니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건 보통이 아니야.'
이제까지 이영후가 본 헌터들 중에서 김지운보다 뛰어난 헌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별을 가진 헌터들도 이 정도는 못해.'
그중에는 헌터들의 최고 훈장이라고 할 수 있는 별을 가진 헌터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엄청난 일이었다.
어비스의 헌터들에게 별이란 남다른 업적을 이룩한 실력자를 의미했으니까.
실제로 별을 가진 헌터와 그렇지 못한 헌터는 같은 레벨에서도 차이가 매우 심했다.
'눈알사냥꾼보다 더.'
그중에는 별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헌터, 눈알사냥꾼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그녀는 이영후의 수준으로는 만날 수 없는 가이드였다.
애초에 가이드를 하는 짬밥도 아니었다.
별 하나만 있어도 그 대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기업 회장들이 역시 자네였군! 하고 먼저 인사를 할 정도.
실제로 그 만남도 제대로 된 가이드가 아니었다.
단지 기회가 닿아서, 그러니까 관광 도중에 정말 운 좋게도 눈알사냥꾼과 그녀의 파티와 합류하는 덕분에, 그 덕분에 옆에서 관광할 기회가 왔었다.
그리고 그때 이영후는 느꼈다. 별을 가진 헌터를 왜 헌터들이 그토록 칭송하는지.
그럼에도 이영후는 자신할 수 있었다.
김지운이 더 대단하다고.
'대체 누구지?'
김지운의 정체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일.
그때였다.
반짝반짝반짝반짝!
김지운이 다시 신호를 보냈고, 그 신호를 보내는 순간 이영후가 생각을 멈췄다.
호출 신호였으니까.
'전투가 끝났구나.'
이영후가 조심스럽게 손전등이 반짝이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달하는 순간 이영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크우우우!
'어? 어!'
오크 한 마리가, 하체가 뭉개진 오크 한 마리가 이영후의 앞에 있었으니까.
크우우우!
이제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함에도, 거의 다 죽어감에도 눈빛과 입에서 흉포함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무시무시한 오크가.
'다, 다 잡은 거 아니었어?'
그건 규칙 위반이었다.
절대 살아있는 몬스터를 관광객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 라는 규칙 위반.
몬스터란 그만큼 위험한 존재였으니까.
관광객이 아니더라도 헌터들은 결코 몬스터가 죽기 전까지는 허튼 짓을 하지 않았다.
특히 거의 다 죽어가는 놈들을 일부러 살려두거나 그런 식으로 장난을 치는 경우는 없었다.
만약 그런 장난을 친다면 같은 동료가 혹은 지나가던 다른 헌터가 장난친 놈의 머리통을 깨부숴도 무죄였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헌터들의 세계에서 몬스터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 놈들은 헌터로 대우해 주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어비스의 방랑자들만도 못한 취급을 했다.
김지운이 그 사실을 모를 리 만무.
즉, 저건 일부러 살려둔 놈이었다.
그리고 살려둔 이유는 하나였다.
[헌터가 될 생각이 있나?]
이 제안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김지운이 내민 스마트폰의 문장을 본 이영후의 눈빛이 흔들렸다.
'되고 싶었다.'
이영후, 그는 헌터를 동경했었다.
그들이 누리는 세상을, 그들이 보여주는 초인적인 능력들을,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지구와는 차원이 다른 어비스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활약을.
그게 아니었다면 그토록 열심히 관광을 했을 리 만무.
하지만 그 동경을 실현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헌터가 되는 것, 그 자체는 아주 어려울 건 없었다. 어비스에서 몬스터를 잡으면 될 뿐. 지금처럼 누군가 다 잡아준 몬스터를 직접 죽이기만 해도 헌터는 될 수 있었다.
문제는 헌터가 된 다음이었다.
어비스를 관리하는 클랜과 권력자들은 헌터들의 숫자를 철저하게 관리했다.
관광객 따위가 헌터가 되는 경우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용납하지 않았다. 그 규칙만큼은 철저하게 지켰다. 제아무리 돈이 많고, 대단한 자라고 해도 예외로 두지 않았다.
세상에 편법이 얼마든지 존재하는 만큼 정말 몰래 하라면 할 수 있겠지만, 이 역시 그리 메리트 있는 건 아니었다.
헌터로 얻은 능력은 어비스에서만 유효했으니까. 지구로 돌아오는 순간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되어버릴 따름이었으니까.
물론 가진 자질이 뛰어나면 상관없었다. 그럼 헌터가 되어 활약을 하면 될 뿐. 실제로 관광객 중에는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헌터로 직업을 바꾸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었다.
하지만 이영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헌터가 될 자질이 없음을.
그래서 동경으로만 두었는데, 그랬는데 지금 김지운이 그에게 동경을 현실로 만들 기회를 줬다.
도끼를 건네줬다.
방법은 이제 간단했다.
지금 하반신이 박살이 나서 죽어가는 오크의 머리통에 도끼를 꽂아 넣으면 될 뿐.
더불어 지금 세상에서는 헌터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메리트였다.
어비스와는 달랐다.
이제 헌터가 되는 순간 그것을 관리할 이들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빌어먹을.'
그러나 그 사실 앞에서 이영후는 기뻐할 수 없었다.
'왜 꿈이 이루어지고 지랄이야.'
이런 식으로 헌터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차라리 그냥 평생 관광객이어도 좋으니까 어비스 관광이 끝나면 백화점에 방문해서 사고 싶은 명품이나 쇼핑하고, 그러다가 밤에 몰려오는 우울함에 위스키나 진탕 마시다가 취하는 삶을 살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이미 세상은 바뀌었다.
과거의 무료했던 나날은 이제 오지 않았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평범하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헌터가 되어 발버둥 치다가 죽을 것인가.
그 선택지 앞에서 이영후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영후, 그가 도끼를 들었다.
하늘 높이.
그리고 그 도끼를 내리찍었을 때 이영후는 들을 수 있었다.
[오크를 처치했습니다.]
헌터의 증거를.
그와 동시에 이영후의 눈앞에는 떠올랐다.
다양한 것들이.
'헌터가 됐구나.'
그 사실에 여러 감정 섞인 반응을 보이는 이영후.
그때였다.
김지운이 그런 이영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직업은?]
그 질문에 이영후 바로 반응을 했다.
'뭐였지? 아까 들렸는데?'
분명 직업을 알려주는 알림이 같이 들렸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래서 이영후는 정말 조심스럽게 두 손을 맞닿았다.
그러자 상태창이 떴다.
이쯤에서는 약간의 설렘이 있었다.
직업은 헌터의 운명을 결정했으니까.
'예전에는 음험한 사기꾼이길 바랬지만, 지금은 차라리 파수꾼이나 사냥꾼이 낫다. 목숨을 조금이라도 부지할 수 있으니까. 제발. 그런 쪽으로 나와라. 쓸모 있는 걸로.'
그렇게 설렘과 간절함 속에서 이영후는 볼 수 있었다.
'응?'
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놀란 이영후가 김지운에게도 자신의 직업을 알려줬고, 그것을 본 김지운의 표정도 이영후와 비슷해졌다.
[느긋한 구경꾼이라는데요?]
'이건 무슨 직업이지?'
처음 보는 직업이 등장했으니까.
하지만 거기서 놀랄 여유는 없었다.
김지운, 그가 느꼈다.
두근!
자신의 심박수가 조금 빨라지기 시작했음을.
'당장 올라간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왔음을.
2.
김지운, 그가 이영후와 돌아왔을 때의 풍경은 이전과는 달랐다.
"누구냐!"
그들이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오려고 하자, 경비를 서고 있던 이들이 손에 든 창을 앞세우며 정체를 물었다.
그건 큰 변화였다.
이제 지하 1층이 관리가 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렇기에 김지운은 기꺼이 협조했다.
"김지운이다."
"아!"
그 이름을 들은 경비병이 놀란 소리를 내뱉으며 곧바로 들고 있던 창을 치웠다.
"어, 어서 오십시오."
그때였다.
"대장이 왔습니다!"
경비를 서던 이의 그 말에 곧바로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고강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 사실에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에스컬레이터 근처를 비롯해 출입구는 지금 가장 위험한 장소였다.
그리고 위험한 장소에는 최대한 중요한 것을 배치하지 않는 게 상식이었다.
고강수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내였다. 집단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의미였다.
꽤 큰 이유가.
그 예상대로였다.
"생존자들에게 정보를 수집하던 중에 중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고강수, 그는 말했다.
"스페이스 링크라고 아십니까? 위성으로 통신하는 그 스페이스 링크에 접속할 수 있는 안테나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말에 반응을 보인 건 이영후였다.
"접시를 가진 양반이 있다고요? 진짜? 그걸?"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모든 통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통신사는 물론 지하 1층에 있는 백화점 직원들의 사무용 PC 역시 인터넷 연결이 안 된 상태였다.
사실상 이 백화점의 모든 통신망이 두절된 상태, 더 나아가 여의도 전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세상과 통신을 하고자 한다면, 방법은 오로지 하나였다.
지상의 통신망과 상관없이 작동하는 위성 통신!
그렇기에 그것을 시도해볼 기회가 왔다는 것 엄청난 기회였다.
그러나 김지운은 그 사실에 반색하지 않았다.
'물건이 아니라 정보라.'
그 위성 통신이 지금 당장 가능했다면 고강수가 기다리고 있었을 리 없었다.
이미 위성 통신을 통해 얻은 정보를, 어비스 아포칼립스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퍼뜨려주는 정보를 정리해서 알려줬을 터.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김지운은 질문을 했다.
"누가 가지고 있지?"
"생존자들 중에 외국인 생존자들입니다."
"외국인?"
"예,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 관광을 하러 오면서 그 위성 접시도 같이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김지운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백화점 도로 건너편이 호텔이었나?"
"콘래드 호텔에 입니다."
"그곳에 있겠군."
"······맞습니다."
지금 마주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일단 설명해보록."
3.
"건빵을 걸고 정보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인이 정보를 주더군요. 한국 관광을 왔다고 합니다."
"관광? 그런데 위성 장비인 접시를 가지고 있다고요?"
고강수의 설명을 듣던 이영후, 처음에는 접시 등장에 놀랐던 그는 이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위성 장비는 그도 관심이 제법 있는 물건이었다.
기존 통신장비와 다르게 스페이스디쉬, 관계자들은 그냥 접시라고 표현하는 그 장비와 몇 가지 부속 부품만 있으면 오지에서도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으로 SNS를 비롯해 뭐든 할 수 있는 장비였으니까.
더불어 그 장비 전부를 가방 하나에 넣고 가지고 다닐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관심의 영역이었다.
그건 전쟁터나 오지를 탐험하는 탐험가들이나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어지간한 나라보다 통신망이 잘 확보된 대한민국, 거기서도 서울, 버스 정류장에도 공짜 와이파이가 가능한 이곳에 접시를 가지고 다닌다? 그 무거운 것을 가지고?
관광객이?
그쯤에서 이영후는 말했다.
"간첩 아닙니까?"
그 인간이 관광객이 아닐 것 같다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강현중 중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성 통신은 추적이 쉽지 않으니까요."
대테러 작전에도 투입되는 광호부대 소속인 강현중 중사는 지금 대한민국에 관광객인척 하는 간첩이, 테러리스트가 얼마나 많은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간첩이든 아니든 상관없지."
물론 김지운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오히려 간첩인 게 낫지. 그러면 약을 파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 접시란 게 있다는 거니까."
"아!"
일단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정보의 진위 유무였다.
갔는데 접시가 우주 모양이 그려진 접시라면, 그렇다면 돌아와서 거짓말을 한 외국인 놈의 뚝배기를 깨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진짜라고 한다면, 그걸 가지러 가야 하는지 아닌지, 그걸 고민해야 하고."
결정적으로 효용 가치도 문제였다.
"어비스 안개 내에서 통신이 가능한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지금 현재 모두의 통신은 불가능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이유가 어비스 안개 때문인지 아니면 통신 장비들에 문제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비스에서 통신 장비를 가지고 들어가서 실험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니까.
어쨌거나 만약 지금 통신이 불가능한 게 그냥 장비 문제라면, 그건 매우 좋은 일이었다.
인프라만 다시 정상화시키면 통신이 가능하다는 의미.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비스 안개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거라면?
그러면 접시를 이용한 위성 통신 역시 불가능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고민의 이유는 하나였다.
"제일 문제는 콘래드 호텔로 가는 거다."
콘래드 호텔, 백화점에서 큰 도로 하나만 건너면 바로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뛰어가면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곳이었다.
또한 둘 사이는 지하도로 이어져 있었다.
백화점 지하 2층에서 전철역으로 갈 수 있는 길목, 거기에서 아예 콘래드 호텔과 그 호텔과 붙어 있는 쇼핑몰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예전에는 정말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뭐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곳을 가는 것은 엄청난 각오를 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지하 3층이나, 지상을 돌아다니는 것과는 달랐다.
"오아시스가 없을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쉴 수 있는 공간의 부재였다.
어비스 안개에서 이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당장 김지운이 적극적인 활동을 한 것도 백화점 지하 1층이라는 확실한 쉼터가 있는 덕분이었다.
그리고 김지운이 지금 지하 1층을 지키려고 결단을 내린 것도 다른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호텔까지 이동했는데, 만약 쉼터가 없다면?
돌아올 때 문제가 생긴다면?
제아무리 김지운이라고 해도 그런 상황 속에서 버틸 수 있는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콘래드 호텔, 그 건물의 고층으로 가면 모르겠지만.'
단 하나, 지금 나온 안개의 높이가 100미터쯤에서 멈췄을 경우에는 상황이 나았다.
여의도에는 마천루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건물들이 있었고, 여의도 콘래드 호텔은 이제는 아니지만 과거 한국에서 가장 높은 호텔이었을 정도로 높았다.
그 높이가 200미터에 이르렀다.
그곳이라면 안개가 닿지 못하는 안전지대가 있을 터.
'리스크는 분명하다.'
결국 중요한 건 그거였다.
'메리트에 비해서.'
그럴 만한 리스크를 감수하기에는 위성 통신 장치를 확보할 만한 메리트가 높지 않다는 것.
위성 통신이 가능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상황에서 제대로 된 통신이 가능한 이들의 숫자가 많을 리 만무하다.'
과연 얼마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구조 요청은 도리어 위험하고.'
특히 김지운이 가장 위험하다고 여기는 것은 이곳의 사정이 외부에 들키는 경우였다.
'어차피 정부의 구조대는 오지 않는다.'
만약 정부가 제 역할을 했다면 최소한 여의도만큼은 상황 전달이 왔었어야 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어비스의 안개 위로 헬리콥터든 비행기든 아니면 드론이든 띄어서 소식을 알려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둘 중 하나다.
할 수가 없거나 할 생각이 없거나.
그런 상황에서 이곳의 위치가 알려진다면 도리어 다른 이들이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헌터들이 올 거다.'
어비스의 헌터들이.
김지운은 은퇴한 후에 어비스의 헌터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헌터라면 오아시스의 가치를 모를 리 없다는 것.
하물며 그곳에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든지 리스크를 가지고 이동할 수 있었다.
반면 김지운이 알고 싶어 하는 정보들은 위성 통신을 통해 얻기가 쉽지 않았다.
'헌터들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무리해서 인터넷을 할 필요는 없다.'
그가 궁금한 건 일반인들의 처지가 아니라, 헌터 혹은 클랜의 상황이었으니까.
그쯤이었다.
"위험합니다."
이영후가 말했다.
"일단 그 접시가 제대로 작동할지도 의문이고요, 한다고 하더라도 할 만한 게 없습니다."
김지운이 생각한 대로.
"어비스넷을 이용하는 거면 모를까."
그러나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비스넷이 뭐지?"
들어본 적 없는 게 등장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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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어비스넷 (2).
4.
"어비스넷이 뭐지?"
그 질문에 이영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비스넷 모르세요?"
그 대목에서 김지운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의 은퇴 이야기를 해야 할지.
은퇴 사실 자체를 말하는 건 어려울 게 없었다.
문제는 어비스의 헌터들 세계에서 은퇴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헌터들은 죽어야 은퇴를 할 수 있을 뿐, 부상으로 은퇴는 사실상 없었다. 어비스에서는 두 다리가 잘린 인간도 달릴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들이 존재했으니까.
"아!"
그러나 이영후는 김지운의 고민을 없애줬다.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어차피 관광객들 목줄이니까요. 헌터들은 굳이 깔 필요가 없긴 하죠. 제가 만난 헌터분들 중에서도 어비스넷 앱 까신 분들보다 안 까신 분들이 더 많았으니까요. 관광객 상대 안 하시는 실력 좋으신 헌터 분들은 더더욱 모를 수밖에 없고요."
알아서 상황을 이해하고서는 바로 설명을 해줬다.
"올해 여름부터 등장한 앱인데, 어비스를 관광하는 모든 관광객들은 소유한 스마트폰에 무조건 깔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스마트폰은 무조건 휴대하고 있어야 하고요. 만약 스마트폰이 꺼진 상태인데 연락이 안 된다, 그러면 무조건 이겁니다."
말을 하던 이영후가 제 손으로 제 목을 툭툭 쳤다.
"뭐, 그래도 있으면 좋습니다. 어비스에 대한 정보들이 종종 올라오거든요. 아이템도 올라오고, 경매도 있고, 헌터들이 가끔은 귀한 정보를 주거나, 이벤트도 있고요."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했다.
'목줄을 만들었군.'
예전부터 클랜들에게 관광객 관리는 큰 문제였다.
헌터는 솔직히 필요하면 제거하면 됐다. 대부분 헌터들은 클랜에 목줄이 잡힌 채 헌터가 됐으니까.
그러나 관광객들은 달랐다. 그들은 지구의 권력자들이었다.
물론 분명하게 경고를 했다. 규칙을 어기는 이에게는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고.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적인 존재가 있는 법.
세계에서 10위 안에 드는 대부호나 혹은 미국 부통령 정도 되는 권력자를 규칙을 어겼다고 당장 제거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다행히도 김지운이 은퇴하기 전까지는 큰 소란이 일어난 적은 없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소란이 일어나기 전에 대비하는 게 최선인 법.
그래서 클랜들은 목줄을 만들었다.
실시간으로 관광객들을 감시할 수 있는 목줄을.
그러면서 동시에 당근도 줬다.
"거기라면 뭔가 좋은 정보들이 올라올 겁니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최고의 구명줄이 됐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노하우와 정보들, 그것도 신뢰성이 보장된 것들이 올라오고 있을 테니까.
결정적으로 어비스넷에는 그 메리트가 있었다.
"어차피 눈팅만 해도 되니까요."
굳이 그곳에 투신할 필요가 없다는 것.
"하지만 위치가 들킬 텐데?"
그 대목에서 김지운이 가장 중요한 리스크를 언급했다.
그 어비스넷이란 것의 핵심 기능은 다른 무엇도 아닌 위치 추적인 만큼, 접속하는 순간 위치가 드러날 터.
물론 그게 어비스넷 이용자에게 알려지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 어비스넷을 관리하는 누군가는 그 위치를 안다는 의미였다.
김지운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여러모로 리스크에 비해서 메리트는 확실치 않다는 의미.
그런 김지운의 고민에 이영후가 대답했다.
"아, 그 정도는 제가 우회할 수 있습니다."
"우회?"
"코인 거래소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해커 놈들한테 덜 털리는 겁니다. 애초에 코인은 제대로 된 재산이 아니라서 전부 해킹 당해서 털려도 답이 없거든요. 하물며 초창기에는 더더욱 심했죠."
이영후,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제가 거래소로 대박 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걸 좀 잘했거든요. 당연히 제 거래소를 많이들 이용했죠."
짤막하게.
"그래서 컴퓨터로 사람 속이는 것쯤은 일도 아닙니다."
그 후에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솔직히 이 어비스넷에 사용된 보안 기술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아, 물론 대단한 양반이 만든 건 맞는데, 그래도 애초에 이 어비스넷에는 고도의 보안 기술을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걸 가지고 장난질을 치면 클랜이 와서 목을 자르는데, 굳이 뭐 하러 장난질을 치겠습니까? 하물며 위치 추적을 이걸로만 하는 것도 아니고요. 이건 그냥 말 그대로 목줄이죠. 족쇄랑 수갑 차고 있는 인간 목에 건 목줄."
정리하면 어비스넷에 접속하더라도 위치가 들킬 위험은 적다는 이야기였다.
"아, 물론 절대 쉬운 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게 그냥 통신도 아니고 위성 통신으로 하는 거면······ 솔직히 걸리면 언제든 걸립니다. 그냥 클럽에 모자에 선글라스에 마스크 정도 쓰고 들어가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관심 없으면 누군지 모르는데, 와서 얼굴 좀 보자고 하면 바로 들킵니다."
그쯤에서 김지운이 머릿속으로 저울질을 다시 했다.
리스크와 메리트를.
그런 김지운의 표정이 무겁게 굳었다.
'뭐가 나은지 쉽게 결정이 안 나는군.'
저울을 수평을 이루고 있었으니까.
위치 추적에 대한 리스크는 이미 많이 줄어들었지만, 문제는 결국 호텔에 가야 한다는 리스크였다.
'지금 당장은 더더욱.'
더군다나 지금 호텔에 있는 물건들이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질 가능성은 없었다.
즉,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김지운이 좀 더 강해진 다음이라고 해도 늦을 건 없었다.
물론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식량은 제한적이었고, 어비스의 안개를 거니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더더욱 늘어날 테니까.
무엇보다 생존자들이 버틸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희망이 없으면 정신이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안개 너머에 있는 어비스 좀비들과 다를 바 없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김지운이 보기에 사나흘 정도까지는 문제없었다.
그동안 파밍을 하면 최소 레벨은 2레벨 이상 올릴 수 있을 터.
그 과정에서 좋은 아이템을 얻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은 나쁠 건 없었다.
파직!
"어?"
"뭐, 뭐야?"
그런 김지운의 눈앞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정전? 정전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아는 순간 모두의 얼굴과 눈빛이 어둠이, 절망이란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기가 끊겼다는 것, 그건 곧 지금 사회의 인프라 중 가장 핵심인 발전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나마 있던 실낱같은 희망이, 사회가, 정부가 유지되어 자신들을 구해주리란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
물론 김지운은 달랐다.
그는 정전이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발전설비라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관리가 필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평소에는 많은 부분에서 관리가 들어갔다. 설비 관리는 물론 테러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 해둔 상태였다. 혹시 모를 사태의, 사태를 대비해 뒀다.
'어비스의 안개는 별개다.'
그러나 그 대비책 어디에도 어비스가 등장할 때에 대한 대비책은 존재할 리 없었다.
더군다나 어비스의 안개는 그저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안개가 아니었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안개였지.
만약 발전소를 운영하던 직원이, 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직원이 어비스 안개 때문에 미쳐서 안 좋은 버튼들을 누른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어비스의 몬스터들이 발전소에 들어가는 순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즉, 시간의 문제였다.
'그래도 이건 생각보다 빠르다.'
그리고 지금 정전은 김지운의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일렀다.
어비스가 등장하고 하루는커녕 아직 반나절조차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데 전기가 벌써 끊겼다?
생각보다 외부 상황이 더더욱 심각하다는 의미.
'언제나 최악이 현실이 되는군.'
물론 김지운은 예상했지만 현실이 되지 않기를, 자신이 헛된 예상을 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신이 틀린 게 가장 베스트였으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예상은 현실이 됐다.
다행히도 당장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결국 비상발전기 도움을 받아야겠군.'
이런 때를 대비해 대부분의 건물에는 비상발전기 설비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백화점 정도라면 더더욱!
물론 그 비상발전기가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표현처럼 비상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일 뿐.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분명 나았다.
"왜 불이 안 켜지지?"
그러나 상황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보통 상황이면 바로 비상발전기가 작동할 텐데?"
"비상발전기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비상발전기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나?"
"괴물들이 비상발전기 근처에 등장했을 수도 있잖아? 응?"
그쯤에서 김지운은 더 이상 저울질을 하지 않았다.
"고강수."
"예, 대장."
"그 정보를 준 외국인이 어디 있지?"
5.
고강수가 생존자들의 무리를 장악하기 시작한 후로 생존자 무리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눴다.
조용히 입 다물고 하라는 것만 하는 부류와 도리어 적극적으로 고강수를 따르는 부류.
그런데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부류가 있었다.
"역시 요즘 핫플답게 외국인이 꽤 많네요."
바로 외국인 관광객들이었다.
일단 그들과는 제대로 된 소통이 불가능했다. 영어라면 모르겠지만, 백화점에 방문한 관광객들의 국적과 인종, 언어는 너무나도 다양했다.
해서 고강수는 결론을 내렸다.
외국인들 모두를 그냥 한 곳에 모은 후에 아무것도 시키지 않기로.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이들은 고강수 입장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았으니까.
당연히 외국인들은 그 대우에 만족하지 않았다.
불만을 토로하는 자들도 있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 줄 아느냐고, 외교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협박하는 자들도 있었다.
특히 중국어를 쓰는 이들 중에 그런 자들이 많았다.
"중국 애들이 조용하네요. 신기하네, 쟤들은 진짜 시끄러운 애들인데."
그러나 고강수는 그런 부류들을 너무나도 쉽게 정리했다.
"지랄하는 놈들은 손가락 두 개를 잘랐다."
특별대우를 해줬고, 그때부터 외국인들 중에 소란을 피우는 자들은 존재치 않았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은 협조적이었다. 자기 나라도 아니고 남의 나라 아닌가? 목에 핏대를 높이고 중국어를 지껄이는 것보단 고개를 숙이고, 납작 엎드리는 게 정답이었다.
동시에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보어입니다."
지금 김지운 앞에 등장한 사내가 그랬다.
"데이비드 보어."
그는 40대 중반의 금발 머리칼의 수염이 덥수룩한 그리고 배가 제법 나온 중년 백인이었다.
딱 봐도 관광객이었다.
물론 김지운의 생각은 달랐다.
평범한 관광객이, 커피숍만 가도 와이파이가 넘치고, 그런 커피숍이 횡단보도 하나 건널 때마다 세 개씩 보이는 서울에서 위성 통신 장비를 가지고 다닌다?
말이 안 되는 일.
즉, 김지운은 의심하고 있었다.
'테러리스트나 아니면 정보원이거나.'
진짜 신분이 따로 있을 거라고.
'여의도니까.'
더불어 지금 김지운이 있는 곳은 대한민국 정치와 금융의 핵심 요소들이 모인 곳이었다.
다른 나라 정보기관 요원이나, 테러리스트 같은 이들이 뭔가 수작을 부려도 이상할 건 없었다.
오히려 납득이 가는 곳이었지.
더불어 김지운은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정말 위성 통신 장비인 그 접시란 놈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
물론 상대방이 쉽사리 제 정체를 말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해서 몇 가지 작업을 할 생각이었다.
"데이비드 보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를 보는 순간 김지운은 준비해왔던 멘트들을 머릿속에서 삭제했다.
'이 목소리.'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네만이다. 데이비드 진네만.'
지금 눈앞의 상대는 김지운이 알고 있는 목소리였으니까.
그것도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CIA 비밀작전팀 팀장.'
김지운이 헌터가 되기 전에 몇 번 대화를 나눠본 적 있는 자였으니까.
달리 말하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김지운이다."
"킴지운? 응?"
김지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앞의 백인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경악으로 물들었다.
"고스트?"
이윽고 나온 그 단어에 김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죽었잖아? 어?"
"그러는 그쪽은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리고 시작된 대화.
"그야 그건······ 빌어먹을."
그 대목에서 데이비드 진네만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준비했던 시나리오, 그러니까 접시를 이용해 하려던 협상 시나리오를 버렸다.
눈앞에 있는 김지운의 능력을 아는 이상, 그 시나리오는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란 걸 알았으니까.
더 나아가 눈앞의 김지운을 상대로 장난질을 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수없이 그 경우를 봤고, 그럴 때마다 대한민국이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렇기에 여기서 데이비드 진네만은 뱉었다.
"관광지로 한국에 올 이유가 없지. 이 좁고, 물가 비싼 곳에 내가 미쳤다고."
진실을.
"자세히 말해주진 못하지만 지금 우리 팀이 여기 왔어. 소수 정예이긴 하지만. 여하튼 신께 맹세하건대 한국 정부에 위협을 주기 위해 온 건 아닐세. 한국 정부의 허가도 받았네."
이어진 말에 김지운은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여기서 정치인을 암살하든 경제인을 암살하든 그건 관심도 없었다. 이미 은퇴한지 꽤 됐으니까.
대신 그건 관심이 있었다.
"작전으로 온 거라면 가지고 온 건 접시만이 아니겠군."
그 질문에 데이비드 진네만은 눈매를 가늘게 떴다.
"긴말 안 하겠네."
그러면서 품에서 카드키를 꺼냈다.
"하나는 내 목숨값. 다른 하나는."
두 장을.
"혹시 나중에 잘못됐을 때를 대비해 미리 주는 보상금일세."
그 말에 김지운은 고민 없이 두 장을 받았다.
이제 의심은 없었다.
또한 고민도 없었다.
'메리트가 달라졌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CIA 특수팀이 직접 와서 작전을 펼친다는 것은 다양한 것들을 가지고 와다는 의미.
위성 통신 접시를 떠나서, 강력한 무기들 역시 함께 가지고 왔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그중에는 총도 있을 터였다.
이 빌어먹을 지옥 같은 곳에서 생존 가능성을 지극히 크게 높여줄 수 있는 아이템들이 가득 하다는 의미!
해서 김지운은 바로 결단을 내렸다.
"호텔로 간다."
김지운의 말에 고강수와 강현중 중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그 둘은 김지운과 데이비드 진네만이 나눈 대화를 알 수 없었으니까.
단지 둘이 아는 사이였구나, 그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이영후, 그는 그 둘의 영어 대화를 전부 이해했고, 그래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하시는 분인지 모르지만.'
김지운의 배경에 대한 놀람은 아니었다.
이미 이영후의 머릿속에 김지운은 매우 뛰어난 헌터, 관광객들은 얼굴도 보기 힘든 클래스의 헌터인 바.
그런 그가 특별한 어떤 조직들, FBI나 뭐 그런 곳의 인물과 아는 것은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고스트가 별명이신가?'
그 와중에서 나온 고스트란 별명 역시 김지운이 특별함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놀란 것은 그 부분이었다.
'뭐가 됐든 이거 대박 같다. 뭔가 엄청난 것도 가져올 수 있는 거 같아.'
이번 호텔 원정의 성과가 기대 이상일 수도 있다는 것.
"그렇군요."
여하튼 김지운의 선택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원정대 멤버를 소집하셔야겠네요. 위험한 곳이니까."
"위험한 곳이니, 파티는 소수로 한다."
"소수면 몇 명입니까?"
"둘이다."
"둘?"
그러나 그 대목에서는 달라졌다.
"둘이면······."
이영후가 고개를 들어 주변의 둘을 바라봤다.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를.
아이를 지켜야 하는 자와 이곳의 룰을 지켜야 하는 자를.
그렇기에 그 둘을 보는 순간 이영후는 확신했다.
'또 나네.'
그런 이영후에게 김지운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다."
'어?'
그 순간 이영후가 기겁했다.
헌터가 오른손을 내민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보통 것이 아니었으니까.
'악수? 파티?'
진짜 동료가 된다는 것.
더불어 파티가 된다는 것은 몬스터를 잡았을 경우 경험치를 나눠 먹는다는 의미였다.
정확히 머릿수대로 나눠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헌터에게 있어 경험치를 나눠준다는 것은 피를 나눠주겠다는 의미.
"가,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이영후는 어느 때보다 감격하며 오른손을 내밀어 김지운의 손을 잡았다.
[김지운과 파티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알림에 이영후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이영후에게 김지운은 말했다.
"그럼 준비해라."
"예!"
"밤에 움직일 테니까, 따뜻하게 입도록."
"예?"
그리고 이어진 말에 이영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밤이요? 아무것도 안 보일 텐데요?"
그 질문에 김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밤에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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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어비스넷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