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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화. 고뇌하는 편돌이

편의점 POS기에는 계층키라는 게 있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고, 그냥 손님 연령대에 따라서 다르게 누르도록 만들어진 버튼이다. 잼민이들 상대로는 어린이男, 어린이女.

급식들 상대로는 중고생 버튼 누르면 되고, 대충 젊어 보이면 젊은 남여성 버튼, 적당히 늙어 보이면 늙은 남여성 버튼, 많이 늙어 보이면 노인, 아예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것 같으면 외국인 버튼. 마지막 경우엔 나이는 신경 안 써도 된다.

사실 뭘 눌러도 계산은 잘 되지만 이걸 굳이 지켜야 할 때가 있다면 담배나 어린이용 교통카드를 팔 때. 담배 팔 때는 어린이나 중고생 버튼이 안 눌리고, 어린이용 교통카드 팔 때는 그 반대.

이게 전부다. 그 외엔 정말 신경 안 써도 상관없다. 어린이용 음료수 팔면서 노인 버튼 눌러도 되고, 외국인들 상대로 젊은 남여성 버튼 눌러도 된다. 흑형 백형도 어쨌든 젊은 남여성은 맞잖아?

그래도 이번엔 이걸 가급적이면 지킬 생각이었는데, 점장이 설명해 줄 때 맞춰 누르라고 했기 때문이다. 괜히 시키는 대로 안 해서 문제 생기면 내 책임이잖아.

그런데 말이다.

"플러스 한 갑만 주세요."

"…손님,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600살 막 넘었어요."

"...."

"신분증 보여드려요?"

자신을 600살 먹었다 주장하는 120cm도 안 되어 보이는 금발 트윈테일 꼬맹이를 상대로는 대체 뭘 눌러야 한단 말인가?

키는 어린애였으나 말투는 젊은 여성이었으며, 머리 색은 외국인이었고 하는 소리는 노인이다. 넷 중 뭘 눌러야 할지를 도저히 모르겠어서 꼬맹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일단, 아무리 봐도 금발 트윈테일 꼬맹이가 맞다.

이 경험 자체는 한국 땅에서 별 신기한 경험을 다 해보네 하고 말 텐데, 이 꼬맹이는 평범한 금발 트윈테일 꼬맹이는 아닌 듯했다. 눈동자는 붉은색에 동공은 세로줄로 길었으며, 입가에는 덧니 하나가 뾰족이 튀어나와 있었으니까.

게다가 피부는 푸르스름하다 못해 창백할 지경이고. 너 편의점에서 담배 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 병원 가 봐야 되는 거 아니냐? 피부과든, 소아정신과든….

"…신분증 보여주세요."

날아가려던 정신을 붙들고 겨우 말을 꺼내자, 금발 트윈테일 꼬맹이는 익숙한 듯 앙증맞은 핑크색 파우치에서 신분증을 꺼내서는 내게 내밀어 왔다. 하나가 아니라 세 개를.

"지난주에 환생해서 아직 신분증이 안 나와 가지고, 전생 것들 드릴게요."

"예?"

이건 또 뭔 소리야?

싶으면서도 일단 내밀어 온 신분증 세 개를 하나씩 살펴봤는데, 찍힌 사진은 눈앞의 꼬맹이가 맞긴 했으나 연도는 죄다 제각각이었다. 더해서, 지방청장 인장이 찍혀 있어야 할 자리에 별 모양 도장 같은 게 찍혀 있다.

"...뭐냐, 이게…."

"아니면 면허증 보여드려요?"

그 키에 액셀에 발은 닿냐?

아무튼 난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됐기 때문에, 꼬맹이한테 일단 기다려 보라 하고 점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으니까.

[ 어, 찬아. 왜? ]

"점장님. 상황이 대충 이런데요."

저체온증 심하게 걸린 금발 트윈테일 꼬맹이가 담배를 달란다. 꼬맹이에겐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짧게 설명하자, 점장은 세 글자로 대꾸했다.

[ 주면 돼. ]

"예?"

[ 문제없어. 들어보니까 뱀파이어 같은데? ]

점장의 대답은 이 상황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뱀파이어라는 단어가 대체 여기서 왜 튀어나온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요?"

[ 응. 일단 주고, 그래도 신분증은 매번 잘 확인해야 돼.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진짜 미성년자 뱀파이어 와서 담배 달라고 할 경우도 있거든. 잘못 팔면 편의점 영업정지 당해. ]

여기까지 듣고 나니, 쥐꼬리만큼 남아있던 판단력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냥 담배 꺼내서 찍고 줬다.

담배를 받아 든 꼬맹이는 갑자기 떠오른 듯 내게 물었다.

"아, 그리고 혈액팩 300미리짜리 있나요? 도수 17% 정도."

이것도 난 모르겠다. 아직 전화를 끊진 않았기 때문에, 다시 점장에게 물어봤다.

"점장님, 손님이 혈액팩 있냐고 물어보시는데요."

[ 있어. 근데 몇 도짜리? ]

"17도요."

[ 그렇게 쎈 건 없는데. 다른 매장 가시라고 말씀드려. ]

"저희 매장에는 없다네요."

"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가버렸다. 꼬맹인지 뱀파이어인지 모를 뭔가가 열고 나간 정문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전화에 대고 말했다.

"저 일 그만둬도 돼요?"

[ 왜?! ]

왜긴 왜야, 이런 곳인 줄 몰랐으니까 그렇지.

1화. 적응하는 편돌이 (1)

내가 편돌이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빌어 처먹을 코로나가 내가 다니던 회사를 조졌기 때문이다.

19년도에 입사해서 올해로 딱 2년. 이 2년 내내 일감이 워낙 불규칙했던 터라 일이 줄어들기 시작했을 때도 '일시적인 거겠지―' 하며 낙관했는데, 어느 날 회사에 도착해서 보니 사무실 문이 잠겨있었다. 내부는 태풍에 직격당했나 싶을 정도로 엉망이었고 말이다.

처음엔 그냥 어이가 없었다. 뒤집힌 책상들 중에 대체 어느 게 내 거야? 이러고나 있었지.

이게 당최 뭔 일인가 싶어 상사한테 전화를 해 봤는데, 당연히 받을 리가 없었다. 하도 답답해서 맡고 있던 거래처에도 연락해 한번 물어봤다가 이런 대답을 들었다.

[ 대리님 회사 망한 걸 왜 제게…. ]

그렇다. 난 내 회사 망한 이유를 딴 사람에게 묻는 등신이 된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린 후 내 회사가 풍비박산 났단 걸 이해하고 납득하는 데에 꼬박 사흘이 걸렸고, 납득한 뒤에 솟아오른 감정은 중국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었다. 중국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 한 80개 정도?

어쨌든 먹고살 길은 찾아야 했다.

첫 한 달은 다른 취직자리를 알아보려 했다. 근데, 당연히 취직이 될 리가 없었다. 코로나로 박살 난 게 내가 다니던 회사만이 아니었을뿐더러, 회사에서 내가 맡았던 업무가 좀… 두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회사에서 개발한 게임을 계약된 매장에 설치한다.

그러다 도중에 누가 CCTV 까는 것 좀 도와달라 하면 도와주고, 매장 점주가 처음 보는 기계 조작법 좀 알려달라 하면 '아니, 우리 회사 기계도 아닌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면서도 내가 설명서 읽어다가 알려주고, 설치 끝내고 나면 A/S는 내가 다 담당했고….

쉽게 말해, 그냥 시키는 걸 다 했다는 소리다.

한 가지 업무를 전문적으로 파기보다는 여러 업무를 두루 봤던 탓에 취직 포트폴리오엔 하등 도움이 되질 않았고, 외에 달리 적을 것도 없었다. 고등학교 개근상 따위를 적을 수도 없었고, 대학은 아예 못 나왔으니.

한 달 내리 취직에 실패하고 나서 고른 차선책이 알바였다.

물론 알바라고 구하기 쉬웠던 건 아니었다. 공장 알바는 연락하는 족족 죄다 구했다질 않나, 카페나 서점 같은 알바는 29세는 나이가 많다질 않나.

가끔 어플에 등록해 둔 이력서를 통해 전화가 몇 번 오긴 했는데, 받으면서 울화통만 터지더라. 전라도 양말공장 2교대 알바를 경기도 사는 내가 도대체 뭔 수로 하냐고. 최소한 이력서는 읽고 전화를 줘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장난 전화만도 못한 연락을 2주간 수십 개쯤 받다 지쳐 바람이나 쐬러 나갔던 게 오늘 오전.

2주간 집 밖으로 안 나갔던 사이 집 근처 풍경이 조금 바뀌어 있었는데, 근처에 편의점 하나가 생겨난 게 그중 하나였다. 정문에는 '알바 구합니다'라 인쇄된 A4 용지 한 장이 붙어 있었고.

아직 구하나?

의식의 흐름대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카운터엔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밖에 안 되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알바겠거니 하며 물었다.

"저, 문에 공고 보고 들어왔는데요. 혹시 점장님께서 아직도 알바 구하고 계시나요?"

"…어, 네, 네! 아, 구하고 있어요! 제가 점장이구요."

"네?"

여기서 한 번 당황했다. 점장 선언을 해온 이 여자가, 차마 믿기 힘들 정도로 동안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후의 행동을 보니 점장이 맞기는 했다. 기다렸다는 듯 종이를 꺼내 들고는, 창가 자리로 날 불러 앉힌 뒤 맞은편에 앉아서는 펜을 집어 들고 내게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찬, 입니다."

"혹시 전에 편의점 알바 해보신 적 있나요?"

"네."

취업하기 전에 짬짬이 해봤었다. 기간 다 합치면 1년 정도. 내 대답에 점장은 싱글벙글한 얼굴이 되어, 종이 첫 줄에 내 이름을 적어넣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금방 적응하시겠다. 그럼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29살입니다."

"딱 적당하네. 저는 나이가… 음…."

자기 나이를 말하려는 듯했던 점장이 느닷없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기 나이 말하는 데에 고민은 왜 해?

"…아무튼 이찬 씨보단 나이가 어, 조금 많아갖구. 혹시 말 편하게 해도 되나요?"

"네, 괜찮아요."

난 나이는 딱히 신경 안 쓴다. 여전히 싱글벙글한 얼굴을 보건대 채용이 되긴 할 것 같고, 월급 주면 다 어르신이요 형, 누나니까, 뭐.

"응, 알았어. 그러면, 일단 수당은…."

줘봐야 얼마나 주겠어 싶었으나, 이후 점장이 꺼낸 말들은 하나같이 다 내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일단 시급은 깔끔하게 만 원."

"네? 최저 아니고요?"

"최저시급이 얼만데?"

이걸 피고용인인 내가 말하는 게 맞나 싶지만, 상사 될 사람이 물은 거라 대답은 했다. 올해가 2021년도니까….

"8,720원일걸요? 제 기억으로는."

"시급이?"

"네."

"그거 받고 어떻게 살아?"

"그거 받고 못 사니까 그렇게 주는 거죠. 빨리 취직하라고."

난 그걸 못 해서 알바 하러 온 거긴 하지만 말야. 점장은 납득이 된 듯 아닌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난 만 원 줄 거야. 나중에 물론 올려 줄 거고. 근데,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취미라고 해봐야 게임 말곤 없었고, 한번 게임에 빠지면 피시방비로 몇만 원씩 갖다 박고는 했으니까. 돈 벌려면 차라리 일하면서 게임 생각을 안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리고… 근무 시간은 하루 12시간.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10시까지…."

"야간 12시간이요?"

"응. 남은 12시간은 내가 보고."

뭔 근무 시간이 이러냐. 막 오픈한 편의점이라 아직 알바 자리를 덜 구했다든가, 뭐 이런 건가….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일단 괜찮다고 했다.

편의점 일이 몸이 힘든 게 아니잖은가. 재고정리하고, 인수인계 끝내고 나면 스마트폰 들여다보며 노닥거리는 게 전부니까. 여유시간 동안 아예 다른 취직자리를 알아봐도 상관없고.

다 떠나서, 내가 근무 시간이고 뭐고 가릴 처지가 아니다. 당장 다음 달 집세를 못 내게 생겼는데 뭘 어떻게 해?

그래도 보험은 들어놨다.

"그래도 힘들어지면 따로 말씀은 드릴게요."

"그땐 내가 대타 뛰지 뭐."

"대타요? 다른 알바생 구하시는 게 아니고?"

"안 구해지는 걸 어떻게 해."

왜 안 구해지는지 모르겠다. 이 시국에 시급 만 원 준다 하면 공장일 때려치우고 올 취준생들이 수두룩할 것 같은데 말야.

"어쨌든 찬아. 알바, 할 거야?"

"해야죠. 요새 일 구하기 적당히 어려워야지."

"그렇긴 하지. 얼마나 할 생각이야?"

"글쎄요, 아마 1년은 하지 않을까 싶은데."

사실 코로나 끝나기만 하면 1년이든 반년이든 상관없었다. 그때는 그래도 취직할 수 있겠지….

"그럼 그렇게 적어두고, 잠깐 계산대 쪽 좀 보여줄게."

이후에는 간단했다.

계산대에서 인수인계하는 거 잠깐 보고, 물류 정리는 대체로 점장이 다 받지만 아주 특수한 상황에는 새벽에도 물류가 올 수 있다고 한다.

이 부분이 아무래도 의아해서 물었다.

"새벽에도 물류가 와요?"

"응. 근데 진짜 급한 거 아니면 잘 안 와."

편의점에서 급한 물류 받을 일이 대체 뭐가 있나 싶었으나, 일단은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새벽 2시에 쓰레기 버리고, 음… 그리고…."

"네."

"진상 손님들 적당히 받아주고."

"그건 걱정 마셔요. 진상 상대하는 건 익숙해서."

이건 자신 있다. 회사에서 내가 맡았던 업무 중 하나가 진상 받는 일이었으니까.

예를 하나 들자면, 회사 제품을 전국 방방곡곡에 설치한 탓에 정말 오만 곳에서 연락이 왔고 요구 조건이 다들 똑같았다. 당일 A/S 해주시면 안 되냐고.

그리고 내 몸뚱어리는 여분이 없었기 때문에, 거제도와 속초에서 동시에 연락이 오면 둘 중 어느 곳을 그날 다녀와야 할지를 취사선택해야만 했다. 한 곳을 고르고, 다른 곳에 전화해 오늘은 힘들 것 같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익숙해졌다. 편의점 손님이라고 별반 다르진 않겠지.

"다행이다. 일단 알려줄 건 다 알려준 거 같은데, 더 궁금한 거 있어?"

"뭘 궁금해해야 할지 모르겠어 가지고."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어지간한 건 다 알아서 돌아가게 해놨으니까."

뭐가 알아서 돌아간다는 건지.

이 부분도 궁금했으나, 묻지는 않고 일단 집에 돌아왔다. 오늘 야간부터 근무하려면 미리 쉬어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알람을 맞춰 놓고 침대에 눕자, 교육받을 때는 들지 않았던 의문들이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단 점장이 일반적인 사람 같지는 않았다.

아니, 대체 몇 살이야? 아무리 좋게 봐줘야 내 밑으로 띠동갑이지, 나이가 많을 것 같진 않은데.

더해서 말하는 투로 보건대, 편의점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최저시급이 얼만지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금수저가 취미로 운영하고, 그런 건가?

게다가 이런 고소득 알바를 왜 내가 구할 때까지 다른 사람은 안 한 것이며, 점장은 알바생 한 명 온 거 가지고 왜 그리 싱글벙글했던 건지….

그 답을 첫 손님 받자마자 바로 알게 될 줄은 몰랐다. 이 편의점엔 뱀파이어가 오기 때문이었다. 미치겠네.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 점장님. 아까 진상 손님 온다 했던 게 이런―"

전화에 대고 물어보려 했으나, 막 들어온 손님을 본 직후엔 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어서 들어온 건 1m도 안 될 키에 허리가 구부정하고, 수두라도 앓았던 듯 곰보 같은 얼굴을 한 녹색 괴물.

그 외에 특이점은 코가 굉장히 대단해서, 보는 순간 '저거 이름이 뭔지 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팍 떠올랐다. 그러니까, 저거 고블린 아닌가?

고블린의 목소리는 째지는 고음이었다.

"맥주 어딨어?"

이놈은 왜 다짜고짜 반말이야?

불만을 속으로 삼키며 손가락으로 주류 방향을 가리켰으나, 고블린은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니 나 키 작다고 무시하냐?"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니가 어딜 가리키는지 내가 보이겠냐고. 키 큰 게 자랑이야?"

이런 진상을 만날 때의 해결법. 기분 나쁘다고 일일이 대꾸해 봐야 속은 절대 안 풀리니, 그냥 원하는 거 쥐여 줘서 보내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카운터 밖으로 나와서 아예 술 파는 곳까지 같이 가 준 뒤에 돌아왔다. 잠시 후 맥주 네 개를 꺼내 가져와서는 카운터로 가져와 계산대에 내려놓으며 내게 물었다.

"네 캔 만 원 맞지?"

"네."

대답하자, 이번에는 묵직한 검은 봉투 하나를 들어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다. 뭔가 싶어 열어보니 100원짜리가 잔뜩 들어 있었다.

"100개 좀 넘을 건데, 한번 세 봐."

이야, 이 안에 든 게 다 100원짜리라고…?

속으로 구시렁대면서도 100원짜리를 10개씩 세기 시작했다. 어쨌든 일은 일이었으니까. 전화는 머릴 기울여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워둔 상태였고. 점장과의 전화가 아직 안 끊겨서였다.

[ 찬아? 정말 일 그만둘 거야? ]

"잠깐만요, 이것 좀 세고…."

100원짜리 100개를 다 세고 고블린한테 맞다고 하니, 이어서 고블린은 다른 봉투 하나를 더 꺼냈다.

"이건 만 원짜리로 바꿔줘."

"...."

"두 장."

아, 이놈 참 진상이네, 진짜….

잔돈을 마저 바꿔주고 고블린을 보낸 뒤, 전화에 대고 물었다.

"점장님. 방금 녹색 땅꼬마 손님 한 명이 왔다 갔는데요."

[ 어. 왜, 상품 상태 보고 막 트집 잡고 그랬어? ]

"왜 편의점 손님으로 고블린이나 뱀파이어가 오는 겁니까?"

[ 이번 좌표를 그쪽으로 잡아서 그래. 찾아가서 장사하는 게 손님 더 많이 오거든. ]

"황금마차도 아니고 편의점이 손님을 찾아가요? 발이라도 달렸나?"

[ 발은 무슨, 당연히 마법이지. 발 달아서 움직이려면 발을 몇 개를 달아야 되는데. ]

대화의 핀트가 점점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것보다 방금 점장이 뭐라고 했냐. 마법?

"아니, 잠깐만요. 마법이요?"

[ 응. ]

"왜 편의점에 마법이 걸려있는 건데요?"

묻자, 점장은 시원스레 답했다.

[ 내가 걸었으니까. ]

"허어…."

허어, 허어어어....

2화. 적응하는 편돌이 (2)

마법 어쩌고 하는 소릴 듣고 떠오른 깨달은 건, 점장이 나이에 비해 동안이었던 이유가 매지컬 파워 덕분이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깨달음에 대한 감탄은 2초 만에 사라졌고, 울화통만 터졌다. 편의점인 줄 알고 일하러 왔더니, 편의점이 아니라 프레디의 피자가게였네. 이걸 어쩌면 좋냐?

우선 대화의 핀트부터 맞춰보기로 했다.

"점장님, 마법 얘기하셨잖아요."

[ 응. ]

"죄송하지만, 전 마법을 본 적이 없거든요?"

[ …뭐? ]

"뱀파이어나 고블린을 본 적도 없구요. 점장님께서는 제가 그런 그… 이종족에 익숙하다 생각하셨던 듯한데, 전 그냥 민간인이라고요."

트럭에 치였던 적도 없고, 똥겜을 파고들어 엔딩 직전까지 간 적도 없거니와, 소설 내용이 마음에 안 든다고 장문의 쪽지를 보내본 적도 없다. 점장이 한참 동안 말이 없는 걸 보니, 핵심을 제대로 짚은 듯했다.

[ 그…럼 여긴 어떻게 온 거야? ]

"뭘 어떻게 와요, 보이길래 들어왔지."

[ 그게 말이 돼? ]

편의점 알바 구인 공고 보고 들어오는 게 말이 되냐고 묻는다면,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 편의점이 쌩판 처음 보는 것들만 찾아오는 할로윈 파티장만 아니었다면 말야. 이게 대체 뭐냐?

점장은 이 상황이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듯 끙끙대며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 손님 몇 명이 더 들어왔다.

사고 과정을 생략하고 설명하자면, 배달 어플 조끼를 입은 켄타우로스였다.

이런 세상에, 사람 얼굴 달린 고라니들이 라이더 조끼를 걸친 채로 웃으면서 걸어 들어오고 있다. 걸을 때마다 다그닥거리는 울림은 덤이다.

"사장님, 세븐 하나 주세요."

그래도 달라면 주긴 줘야지.

"팩으로 드릴까요, 갑으로 드릴까요."

"갑이요. 아, 라이터도 하나 주세요."

"라이터는 이쪽에 있슴다."

말하며 카운터 왼쪽 밑의 매대를 가리켰다. 그사이에도 뒤에서는 다른 켄타우로스들끼리 떠들어 댔다.

"막내야, 바나나 우유 가져와라. 사줄게."

"넵. 사장님, 바나나 우유 어디 있어요?"

"유제품 코너 위에서 두 번째 줄이요."

그나저나 이놈들 히히힝거릴 줄 알았는데, 목소리는 정상적인 사람 목소리였… 아니, 내가 퍼킹 레이시스트인 게 아니라 진짜 말사람인지 사람말일지 모를 것들이 떠들고 있다니까?

"야, 편의점에서도 편자 파냐?"

"여기선 팔더라. 일회용 말고 제대로 된 거."

"그래? 저기 사장님, 편자 어디 있어요?"

여기가 마구간이냐고. 근데 하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여기서 팔고 있는 물건이 맞는 것 같아서, 아직까지도 고민하고 있는 듯한 점장에게 물었다.

"점장님, 편자 어디 있어요?"

[ …어, 세 번째 코너 맨 밑에 좌측에. ]

"저쪽 코너 맨 밑에 한번 살펴보시겠어요?"

가리키면서도 반신반의했으나, 가버린 켄타우로스는 잠시 뒤 정말로 편자를 세 개를 들고 와서 카운터에 짤그랑 내려놓았다. 편의점에서 말 편자를 도대체 왜 파는 건데?

게다가 바코드도 제대로 달려 있고. 찍어보니 개당 10,950원이란다. 그리고 투 플러스 원.

"21,900원입니다."

"세 개에?"

"두 개요. 하나는 투 플러스 원이라서."

"어, 개꿀. 잠만요. 여기 22,000원… 100원짜리 안 주셔도 돼요. 안 그래도 지금 잔돈 잔뜩 있어갖고."

"네."

그러고는 바나나 우유도 팔고, 담배도 마저 팔아서 보냈다. 끙끙대던 점장은 이제야 할 말을 찾은 듯했다.

[ 일단 여긴… 다른 세상 사람은 못 와. ]

"그건 제 세상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 그래? 음… 혹시 찬이 넌 아는 거 없어? ]

"제가 아는 건 천장 시멘에 구멍 뚫을 때 드릴 잡는 요령, 뭐 이런 것밖에 없는데요."

[ 어떻게 잡는데? ]

"개머리판 부분을 어깨에 받치고, 밀어 올리듯이 뚫으면 돼요. 드릴 모터가 마모되긴 하는데, 그 짓거릴 해야 겨우 뚫리는 걸 어떻게 해."

근데 이 소릴 내가 왜 하고 있냐?

점장은 '오오….' 하며 작게 감탄하는 듯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편의점은 이 세계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면서 영업을 하고 있단다.

그에 따라 편의점 위치도 이동하는데, 때로는 학원가 앞, 때로는 도심지 사거리, 드물게는 마왕성 앞에서도 장사를 한다나 뭐라나.

마왕성에서 장사를 하면 세계평화 유지에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냐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용사 놈이 우리 편의점에서 판 소주병에 맞아 머리가 깨지든 말든 내가 알 게 뭐야.

당장 궁금한 건 하나뿐이었다. 다른 세상 사람인 내가 대체 왜, 어떻게 여기 올 수 있게 된 것인가.

[ 당장은… 나도 잘 모르겠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갖구…. ]

그렇다고 하니, 방향을 살짝 틀어서 다시 물어봤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냐?

[ …굳이 찬이가 아닐 이유도 없지. ]

"이유가 없긴 왜 없습니까, 전 말 대가리 가면 쓴 사람은 봤어도, 사람 대가리 가면 쓴 말은 진짜 쌩판 처음 본다니까요? 게다가 그게 가면조차 아니고, 사람 말을 하고…."

[ 찬이 네 세상에는 켄타우로스가 없었나 보네…. ]

"점장님 세상에는 29세 개백수가 없었나 봅니다, 저 같은 놈이 평범한 게 아니라는 걸 보면요."

대화하며 점점 목소리가 까칠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편의점 알바를 하러 온 거지, 환상특급을 타러 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점장이 일부러 날 이 편의점에 처박았단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날 후려친 주먹이 모르고 휘두른 주먹이라 해서 아프지 않을 수도,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도 없는 거다.

점장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답했다.

[ 알겠어. 그럼… 계약서는 파기할게. ]

"네?"

[ 이건 사고 같은 거니까. 어쩔 수 없지 뭐…. ]

계약서, 파기. 맥아리 없이 허공을 맴돌던 내 정신머리가 이 두 단어를 듣는 순간 퍼뜩 되돌아왔다.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일단 여긴 돈만큼은 확실히 쳐준다.

하루 12시간 일하고 12만 원, 주말도 근무하니까 단순 계산으로는 30일 360만 원. 그걸 내가 버틸 수 있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금액적인 부분은 일단 합격이다.

그리고 교통편. 이것도 알바 구할 때 중요한 부분이다. 버스 타고 다니기 시작하면 일일 교통비만 3천 원 가까이 빠지는데, 한 달이면 9만 원이 날아가잖아. 최저시급으로 따지면 하루치 알바비가 증발해 버리는 것이다.

허나 여긴 걸어서 3분 거리라 그 점은 문제가 없다. 편의점이 날 처박은 채로 이세계로 날아가 버린다는 게 문제지만, 일단 오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니 이것도 합격.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저 이종족들한테 내가 죽을까, 안 죽을까? 이게 제일 중요한데.

"점장님. 제가 뱀파이어한테 3,000mL 정도 채혈당하거나, 고블린 무리한테 몽둥이로 두들겨 맞거나, 사람 대가리 말들한테 발굽으로 짓밟힐 일은 없을까요?"

[ 그럴 일은 없지! 옛날이라면 모를까. ]

"옛날에는 어땠길래."

[ 채혈하다 만 피나 몽둥이, 발굽 편자들이 온 사방에 날아다녔지. 지금은 법이 잘 되어 있어서 그럴 일 없어. ]

여하튼 지금은 괜찮다고 하니 일단 넘기고.

여길 때려치우면 난 어떻게 되는가?

직장 구하느라 한 달, 알바 구하느라 2주를 공쳤다. 도합 한 달 반을 쉰 셈인데, 여기 알바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실제로는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거다. 최소한 두 달 안엔 절대 안 끝났겠지.

그 짓을 계속할 바엔 그냥 시급 많이 주고, 교통편 좋은 이 알바가 낫지 않을까?

미친 생각인 건 나도 알지만, 현실적으로 이만한 알바를 또 구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돈과는 별개로 상사 성격이 쌍놈이었다면 때려쳤겠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성격이 그리 나쁜 것 같지도 않고….

한참 고민하다 겨우 결론을 내렸다.

"…점장님, 계약서 파기하지 마시구요."

[ 어… 하게? ]

"해보게요."

이젠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사람이 쉬운 일만 하고 살아.

[ 정말 괜찮겠어? ]

"안 해봐서 모르겠으니까 해보겠다 말씀드린 거죠. 아니면 제가 지금 겁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서 당장 그만둬야 되는 게 맞아요? 보호 마법 걸려있어도?"

[ …아니. 보호 마법은 확실히 걸려있으니까, 위험하진 않을 거야. ]

솔직히 말하면, 나도 당장 일하면서 위험까진 못 느꼈다.

금발 트윈테일 뱀파이어는 액면가가 어렸을 뿐이고, 고블린은 싸가지가 없었을 뿐이고, 켄타우로스들은 다그닥 소리가 시끄러웠을 뿐 꼬장을 부리거나 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29년 인생 살면서 깨달은 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남의 돈 벌어먹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점이고, 둘째는 목숨보다 돈이 더 중요하단 것이다. 그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수십 년이라는 귀한 시간을 돈 버는 데에 쏟아부으며 살 리가 없잖아?

내 목숨이 시급 얼마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를 저울질해봐도, 이만큼 알바비 주는 곳은 절대 못 찾을 것 같다. 이게 아니면, 사자 이빨 닦으러 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래도 전화는 끊지 말아주세요. 피곤하시단 건 알지만…."

[ 괜찮아, 나 안 피곤해. 오랜만에 쉬니까 엄청 좋은데, 뭐. ]

"얼마 만에 쉬시는 거길래."

[ 음… 몇 달 됐나…? ]

몇 달간 24시간 풀근무를 뛰었다고? 이것도 매지컬 파워인가?

아직 손님이 없었기 때문에 이 부분도 물어보려 했는데, 그러진 못했다. 때마침 손님 하나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번 손님도 결코 양반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사람인데, 머리는 삽살개였다.

털로 덥수룩해서 아예 얼굴이 보이질 않았고, 카드를 내미는 손엔 육구가 또렷이 보였다. 왜 다짜고짜 카드부터 내미는가 싶었는데, 말을 듣고는 바로 이해가 됐다.

"티―마니 잔액 확인 좀 해주어."

"…아."

암, 그럼요. 물론 해드려얍죠.

삽살개 목소리가 아주 노인 목소리라 조금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포스기를 조작해 잔액조회를 해줬더니, 1,880원이 남아있더라. 딱 버스 한 번 탈 돈이네.

"1,880원 남아있네요, 손님."

"그랴."

그러고선 뒤돌아서 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날 돌아보면서는 물었다.

"그러니까, 1,880원 남아있다는 거쟈?"

"네."

"이 교통카드에?"

"네, 그 교통카드에요."

"그럼 이 교통카드에 1,880원이 남아있다는 거고?"

"어… 기계엔 그렇게 나오는데요."

"왜?"

왜 1,880원이 남아있는지를 도대체 왜 나한테 묻는데?

적당한 대답이 도저히 떠오르질 않아서 아예 아무 말도 안 했다. 결론이 나오든 말든 제발 가줬으면 해서였다. 허나 삽살개가 아무리 기다려도 떠나려 하질 않았기 때문에, 내가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그… 80원 남은 건, 봉툿값 때문 아닐까요. 봉툿값이 20원이니까."

"난 지금 봉투 안 샀잖여."

"예전에요, 예전에."

"근데, 왜 이 교통카드에 1,880원이 남아있는 걸까?"

"저야 모르죠. 전에 얼마를 충전하셨는지, 사용 내역이 어떤지는 손님 기록인데."

"젊은 청년은 뭐, 아는 거 읎어?"

방금 저야 모르겠다고 말했잖아요?

삽살개 노견이 이렇게 나한테 되물어본 게 꼬박 5분이다. 딴 손님 오면 일해야 한다고 보내기라도 할 텐데 이럴 때만은 꼭 손님이 더럽게 안 와.

"이상하네, 왜 1,880원이 남아 있을까…."

이후 몇 분을 더 고민하던 삽살개가 마침내 밖으로 나가고, 곧바로 점장에게 말했다.

"방금은 삽살개 머리를 한 개사람 한 분이 오셨는데요."

[ 코볼트네. ]

"좀… 기억력이 안 좋으세요? 코볼트분들?"

[ 종마다 달라. 리트리버 머리 하신 분들은 좀 낫고, 치와와 머리 하신 분들은 좀… 예민하지. ]

마침 치와와 대가리 손님 한 분이 왔다.

"어서 오세요, 손ㄴ"

"씨발, 칫솔 어딨어?!"

3화. 적응하는 편돌이 (3)

치와와의 성격이 개판인 데에 대해 이런 오해가 하나 있다. 치와와의 두개골에 '천문'이라는 명칭의 구멍이 하나 나 있고, 이 구멍이 끊임없이 두통을 유발하기 때문에 성격이 꼬였다는 것.

이 천문이 존재하는 이유는, 출산 과정에서 두개골이 멀쩡한 채로 나왔다간 산모가 죽어나기 때문에 그걸 좀 완화하기 위해 생물이 진화한 결과라고 한다. 원래는 성장하면서 이 구멍이 아물어야 하는데, 치와와 견종은 그러질 못해서 두개골에 여전히 구멍이 뚫려있다― 이거지.

결론만 말하면, 오해가 맞다.

치와와의 성격이 개차반인 이유는, 두통 때문이 아니라 원래 성격이 개차반인 견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난 치와와를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귀엽고 자시고 눈 마주치기만 해도 꼬리 밟힌 것처럼 짖어대는 놈들을 뭔 수로 좋아한단 말인가?

심지어 지금 들어온 놈은 귀엽지도 않았다.

이놈이 머리통은 치와와인데, 키는 아무리 못해도 190cm가 족히 넘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눈이 심각하게 충혈되어 있었다.

"칫솔 어딨냐고!"

소형견 전용 칫솔이라면 손가락에 끼워서 견주가 직접 닦아주는 종류를 말하는 걸 텐데, 이놈이 그걸 바라는 것 같진 않고. 오전에 봐둔 게 떠올라 말했다.

"네 번째 코너 뒤편 한번 찾아보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코너가 한두 개야?"

네 번째 코너라니까?

표정을 보건대 말로 설명하고 있다간 내 손가락을 물어뜯을 기세였던 지라, 직접 칫솔 있는 곳까지 같이 가줬다. 입은 양복에선 술 냄새가 진동을 했고 말이다. 취했으면 곱게 집 가서 잠을 자야지, 칫솔은 왜 찾는지 모르겠네.

"더 좋은 건 없어?"

"칫솔은 이게 다라서요."

"창고에 있을 거 아냐."

"창고에는 주류랑 라면류가 다예요. 칫솔 같은 기성품은 팔린 다음 날이나 다다음 날 들어오는 편이고요. 잘 안 팔리니까."

덧붙여서 삼각김밥이나 샌드위치, 도시락 같은 것들도 창고에 따로 안 쟁여두니까, 도시락 이거 말고 딴 건 없냐고 물어봤을 때 없다고 대답하면 진짜 없는 줄로 좀 알아줘라. 유통기한 3, 4일도 안 되는 걸 창고에 짱박을 이유가 대체 어디 있겠냐?

칫솔을 가져온 치와와는 만 원짜리 하나를 내밀고는, 나가려 했다.

"간다."

"손님, 잔돈 가져가셔야죠."

"내가 알 바야, 씹새야? 자꾸 귀찮게 할래?"

그래, 그냥 가라….

치와와는 정말로 나가버렸고, 칫솔값이 2,100원이라 잔돈 7,900원이 붕 떠버렸다. 꽁돈이 생긴 건 좋은데, 감정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해 보니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잔돈을 뒷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정문을 바라보다 궁금한 게 생겨 물어봤다.

"점장님, 아직 전화 안 끊으셨나요?"

[ 응. 블루투스 이어폰 끼고 있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 말 하면 돼. ]

"이 편의점이 여기저기 막 이동하면서 장사한다 하셨잖아요. 그럼 지금 위치가 어디예요?"

[ 도심지 사거리야. 한 달 대부분은 여기서 장사하거든. ]

왜 배달라이더 켄타우로스나 회식 막 끝난 치와와가 오나 했다. 겨우 여유가 좀 생겼기에, 멍하니 편의점 바깥 광경을 바라보았다.

생긴 건 그럭저럭 도심지가 맞았다.

네온사인이나 조명으로 휘황찬란한 거리, 걸어 다니는 것들이 입고 있는 복장이나 다른 건물들 생긴 것도 나 살던 곳이랑 그리 다르진 않았다.

물론 아주 같은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자전거 도로 비슷하게 난 길에 켄타우로스가 걸어 다니거나, 하늘에 팔 대신 날개 달린 여편네들이 반나체 상태로 날아다니고 있다는 것 정도? 저게 이름이 뭐더라. 하피?

하여튼 이세계이긴 이세계여도 내가 기존에 살던 곳이랑 시대적으로 크게 다르진 않은 듯했다. 당장 플러스니 세븐이니 달라고 할 때부터 짐작했어야 할 부분이긴 했지만….

"점장님, 저 집은 어떻게 갑니까…?"

[ 퇴근하기 전에 미리 나가서 좌표 설정해 줄게. 찬이 네가 좀 도와줘야겠지만. ]

"제가요?"

[ 응. 난 네가 있던 세계에 대해선 잘 모르니까. ]

"점장님은 종족이 어떻게 되시길래."

[ 사람이지, 아님 뭐겠니. ]

이 동네도 사람이 있긴 한가 보다.

[ 많지는 않아. 몇십 년 전에 전쟁 나서 엄청 죽고 그랬거든. ]

"전쟁이요?"

[ 응. 그러다가 '우리 더 싸웠다간 진짜 다 죽겠다' 싶어서 화해하긴 했는데, 그땐 좀 늦은 후였고. 찬이 네 세상은 어땠는데? ]

"비슷한 일이 있긴 했죠. 세계 대전이라고."

[ 세계 대전? 이름이 좀… 멋진데? ]

정작 결말은 일본 명치랑 사타구니에 빅 퍼킹 봄버가 하나씩 처박히면서 끝이 났지만 말이다. 내 세상은 그 난리를 두 번을 겪고도 지성체가 사람밖에 없어서 사람이 바글바글해졌지만, 여긴 이세계라 그렇게 흐르지가 않은 것 같고.

그리고 이 동네 지성체들도 사람이랑 크게 달라 보이진 않았다. 18등신 이족보행 치와와든 코가 대단한 고블린이든, 진상을 부릴 놈들은 진상을 부린다는 점이 특히나 그랬다.

"제가 받은 손님 네 팀 중에 두 팀이 진상을 부렸는데, 원래 빈도가 이쯤 됩니까?"

[ 그 정도까진 아닌데… 비슷하긴 해. ]

"아니, 이걸 어떻게 버티셨대요."

[ 나야 오래 살았으니까, 그냥 귀엽네― 하고 마는데? ]

"대체 몇 살이시길래 그러세요?"

[ 여자 나이는 함부로 묻는 거 아니야. ]

그렇다고 하니 나도 그런갑다 할란다. 말할 생각 없다는데 뭐.

쨌든 점장이 진상을 잘 상대하는 듯하니, 왠지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포스기에 적힌 시간을 보니 오후 10시 40분. 이제 40분밖에 안 지났단다. 시계 고장 난 거 아니냐?

생각하고 있자니 다음 손님이 왔다.

수염이 양 갈래로 땋여 있고 머리는 겁나게 덥수룩한 땅딸보, 그러니까 드워프였는데, 바로 계산대로 와서는 무뚝뚝하게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담배 줘."

"…어떤 담배 드릴까요. 담배가 많아서."

"얇은 거."

"얇은 것도 종류가 워낙 많아서요."

"노란 거."

지금 스무고개 하냐?

"얇고 노란 것도 종류가 여러 개라서요… 슈퍼슬림 드리면 되나요?"

"아니."

"그럼… 스페셜 골드?"

"글쎄."

"직접 피우시는 건 아닌가 보네요."

"내 껀데?"

니가 피우는 담배 이름을 니가 왜 모르는데 도대체….

하도 답답해서 담배 진열대에 있는 얇고 노란 담배란 담배는 다 꺼내서 보여줬다. 여섯 개쯤 쌓인 담배 더미를 가만히 바라보던 드워프가 집어 든 건, 스페셜 골드가 맞았다. 아이고 참.

"근데 그림이 좀 그런데, 다른 거 없어?"

담배를 내밀며 내게 물어온다. 담뱃갑에 새겨진 건 목이 괴사한 채로 구멍이 뻥 뚫린 고어한 그림이었는데, 내가 보기에도 좀 그렇긴 했다.

근데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이 그림 대체 왜 있는 거야?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이딴 그림 신경 전혀 신경 안 쓰거나, 지금처럼 다른 그림 달라 하고 말던데 말이다.

게다가 편의점이 혐짤 면역인 사람들만 오는 것도 아니고 애들도 오는 곳인데 말야. 계산대에 커피 우유 들고 온 꼬맹이들이 그림 보고 얼굴 찌푸린다니까?

흡연자의 금연을 목적으로 한 정책 중 이만한 탁상공론, 거지 같은 정책도 또 없을 거다. 이런 생각이었던지라, 나도 별 무리 없이 요구를 받아줬다.

"한번 찾아볼게요."

헌데 아무리 찾아봐도 목구멍이 뚫렸거나, 입술이 갈라졌거나, 심장이 보라돌이가 된 그림밖에 없었다. 서랍에서 한 보루 뜯어다 찾아봐도 마찬가지였고.

"지금… 어, 마땅한 게 없네요. 이 중에 그나마 멀쩡한 게 장례식장 사진 정도."

"딴 건 없어?"

"이거 말곤 죄다 장기자랑 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럼 안 사. 딴 데 갈래."

돌겠네, 진짜.

차라리 이렇게 떠났으면 몰라. 드워프가 나가기 직전에 다른 손님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이 손님도 드워프였다.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뭐 해."

"담배 사러."

"어떤 거?"

"파란 거."

마지막 세 글자를 듣는 순간 불길함이 등을 스쳐 지나갔고, 현실이 되었다. 막 들어온 드워프가 다가와서는 말했다.

"담배 줘."

"…어떤 거 드릴까요."

"파란 거."

이 드워프들은 말 길게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나 보다.

게다가 이 드워프도 자기 담배 이름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여서, 파란 담배를 죄다 꺼내 보여줬다. 참고로 노란색 얇은 담배보다 파란색 담배가 압도적으로 많다. 네 배 정도.

그중에서도 기어코 자기 담배를 찾아낸 드워프는, 마찬가지로 그림이 징그럽다며 바꿔 달라고 요구해 왔다. 그래도 이번에 찾아보니 그나마 멀쩡한 그림이 있긴 했다. 애가 담배 냄새 맡으면서 오만상을 찌푸린 그림.

담배를 받아 든 드워프가 물었다.

"왁스 있어?"

"있죠. 그것도 종류가 여러 개긴 한데."

"수염용."

"…점장님. 드워프 손님이 수염에 바르는 왁스를 찾으시는데요."

[ 세 번째 코너 가운뎃줄. ]

"세 번째 코너 가운뎃줄이요."

"어디?"

"직접 알려드릴게요."

이거 꼭 대형마트 가이드가 된 기분이다.

드워프를 데리고 세 번째 코너로 와서 가운뎃줄을 가리키자, 드워프는 몇 종류는 되는 왁스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나도 따라서 쳐다봤는데, 왁스마다 효과가 괴랄하기 짝이 없었다.

고농축 슬라임 용액이 첨가된 왁스는 모발에 촉촉이 스며드는 효과가 있다 하고, 세계수 껍질을 벗겨 나온 진액이 첨가된 왁스는 상쾌함이 네 배라고 한다. 대체 이것들은 누가, 어떤 과정으로 만드는 것인가?

더해서 내가 오전에 왔을 때만 해도 여기에 이런 게 진열된 건 못 봤었는데 말이다. 이 자리에 이게 아니라 감자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카운터 쪽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니이임…."

늘어지는 게 딱 만취한 여자 목소리였다. 카운터로 가보니, 핑크빛 머리 색에 슈트 차림을 한 여자 손님 하나가 계산대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어… 부르셨나요?"

물어봤으나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숙인 고개를 살짝 비틀어 날 쳐다보는데, 동공이 세로로 찢어져 있었다. 이건 아까 뱀파이어와 똑같다지만, 피부색이 새하얀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

"…구에에에엑."

비틀거리던 여자는 참지 못하고 계산대에 토악질을 해버렸고, 동시에 슈트의 어깻죽지 부근을 날개 한 쌍이 찢고 나와서는 파들거렸다.

날개를 보고 든 생각이, 아무래도 서큐버스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보다. 왜 하필이면 계산대에 토악질을 하고 있는지는 쥐뿔 모르겠지만….

4화. 적응하는 편돌이 (4)

날 계산대로 불러놓고는 보란 듯이 부침개를 부쳐대기 시작한 이 서큐버스의 의도가 대체 뭔지, 도저히 짐작이 되질 않았다. 저녁밥 뭐 먹었는지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적어도 서큐버스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정확히는, 대답이고 나발이고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새 부침개 한 판을 더 부쳤기 때문이다.

"구어어어얽거걹…."

"손님. 계산대에서 좀 나와주시겠어요?"

계산대 밑으로 뚝뚝 흘러내리는 토사물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 목소리는 나 스스로 느끼기에도 놀라울 만큼 침착했는데, 너무 얼탱이가 없어서 그랬다. 화가 난다기보단 그냥 헛웃음만 나오더라.

겨우 진정한 서큐버스는 헥헥대며 날개를 파들거리며, 날 돌아보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스윽 닦아냈다.

베실베실 웃고 있는 얼굴과 파들대는 날갯짓이 어우러진 게 어찌 보면 요염하게 보일 광경이긴 했다. 이 서큐버스가 토악질만 안 했어도 정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헤헤… 사장님…."

나 그만 부르고 비켜, 제발. 니가 토한 거 치워야 된단 말이야.

어느새 왁스를 골라 온 드워프가 내 옆에 서서는, 서큐버스와 계산대를 번갈아 보다가 내게 물었다.

"계산 돼?"

"지금 계산대에선 안 될 것 같고, 카드세요 현금이세요?"

"카드."

카드를 받아 들어 계산대로 와 계산을 마쳤다. 이렇게 드워프는 일단 보냈고, 이젠 이 망할 부침개를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우선 부침개보단 서큐버스부터 치우기로 했다.

"손님, 일단… 저기 가서 앉아계십쇼."

창가의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으나, 서큐버스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답해왔다.

"시른대여?"

나도 싫다. 저따가 또 토하면 그것도 내가 치워야 되잖아.

근데 이 서큐버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걷기도 힘들어 뵈는데, 편의점 밖으로 내보냈다가 정문 앞에 나자빠져 잠들기라도 하면 손님이 들어올 리가 없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손잡고, 등 옷깃 붙잡아 테이블로 인도해 앉혀놨다. 앉혀놓자마자 테이블에 옆머리를 처박고는, 동공 풀린 눈으로 날 지긋이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라고 냅두고 계산대로 왔다.

계속 번지고 있던 토사물은 이제 단말기 언저리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세면대의 손걸레를 집어 슬쩍 밀어낸 뒤, 잠깐 생각을 해봤다.

손걸레로 이걸 일일이 다 닦아낼 바에, 차라리 바닥으로 다 떨군 다음에 대걸레로 치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치운다면 치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 짓거리를 하면서도 손님을 받아야 했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도 반도 못 치웠는데 손님이 왔다.

"사장님, 아이스크림 어디 있… 억, 뭐야 이거."

"저기 정면에 있거든요. 죄송하지만, 좀 골라보고 계시겠어요?"

이번 손님은 머리가 비늘로 덮인 도마뱀 인간. 그러니까 샐러맨더 비슷한 것이었는데, 공장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야간 공장일 하다 잠깐 아이스크림 사러 나온 듯했다. 하긴, 파충류는 체온 조절이 힘드니 아이스크림이 효과적이긴 하겠네.

그리고 말귀가 통했다. 혀를 축 늘어뜨린 채로 테이블의 서큐버스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해한 듯 아이스크림을 찾아 고르기 시작했다. 눈물 나게 고마웠다.

그사이에 토사물을 계산대 밑으로 다 내려보내고, 손걸레 빨아서 계산대 위도 깔끔하게 닦았다. 이제 대걸레 어디 있냐.

"점장님, 매장에 대걸레 어디 있어요?"

[ 왜? 청소 교대 전에 내가 다 해놨는데…. ]

"계산대에 손님이 토해놨어요."

[ 아…. ]

점장은 짧게 탄식하고는 답했다.

[ 참… 근데 대걸레가 있을지 모르겠네…. ]

"대걸레 없으면 청소는 뭘로 하십니까?"

[ 마법으로 하지. 아, 아예 찬이 너도 약식으로 쓸 수 있는 마법 하나 알려줄게. 마력은 있지? ]

"없는데요?"

[ …으음, 옛날에 사역 마법 훈련할 때 쓰던 게 있긴 할 텐데, 사무실 안쪽 한번 뒤져볼래? ]

사무실 안쪽으로 달려가 보니, 대걸레는커녕 태어나 처음 보는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했다. 굴러다니는 책들은 아무리 봐도 장부는 아닌 듯했고, 구석에 놓인 저건 뭔지도 모르겠다. 해시계인가?

다 필요 없고 대걸레 대체 어디 있냐.

수정구슬이나 정체불명의 약병 같은 것들을 죄다 헤집고 나서야 구석에 놓인 푸석한 대걸레를 찾을 수 있었다. 집어 들고 뛰쳐나와 보니, 샐러맨더가 아이스크림을 다 고른 뒤였다.

계산대에 놓인 아이스크림의 개수는, 아니 대체 몇 개를 갖고 온 거야.

"좀 많죠. 직장 동료들 것도 사 가야 돼서."

좀 많은 게 아니라 몹시 많았다. 다 찍어봤더니 40개가 넘어갔으니까.

계산을 해보려 했는데, 2+1 아이스크림 하나를 안 갖고 왔는데 정말 결제할 거냐는 문구가 떴다.

"손님, 투 플러스 원 아이스크림 하나 안 가져오셨는데."

"아, 진짜요? 어떤 거요?"

글쎄. 이 사십몇 개 중에 대체 어떤 게 2+1에 해당되는 아이스크림일까?

포스기 문구에 그게 뭔지까지 떠오르지는 않았고, 똑같은 아이스크림 두 개짜리를 찾아 하나를 더 가져오라 할 수도 없었다. 아이스크림은 묶음 상품이라, 같은 가격의 다른 아이스크림도 2+1에 포함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처음 하나를 찍어보면 묶음 상품 중 이런 것들이 2+1입니다― 라며 작은 글씨로 목록이 주륵 뜨긴 하는데, 현미경으로 들여다봐도 잘 보일까 싶을 만큼 글씨가 작을뿐더러 종류가 정말 더럽게 많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면, 처음부터 아예 말을 안 해주면 된다.

낱개로 사는 거면 모를까, 수십 개씩 사는 손님은 아이스크림 한두 개 더해지는 건 신경도 안 쓰니까. 신경을 쓰는 손님은 보통 자기가 직접 개수 맞춰서 가져온다.

근데 난 하나를 안 가져왔다고 말을 해버렸네? 그렇다고 꺼낸 말을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이러했다.

"처음부터 다시 한번 찍어봐도 될까요?"

다 찍은 상태에서 종류별로 하나씩 더 찍다 보면 +1 상품은 일반 가격이 아니라 할인된 가격이 올라가기 때문에, 그걸로 구별이 가능하다. 근데 그걸 언제 하고 있냐고.

포스기는 터치스크린 민감도며 자판 조작성이며 죄다 엉망진창이기 때문에, 작은 항목은 누르는 게 무척 번거롭다. 그리고 상품 항목은 항목 중에서도 겁나게 작은 편이었고.

게다가 낱개로 된 걸 일일이 등록하고 취소하려면 버튼을 몇십 번은 더 눌러야 하는데, 그럴 바에 아예 처음부터 하고 말겠단 생각이었다.

사실 다른 의도도 있었고.

"에이, 오래 걸릴 거 같은데 그냥 갈게요."

"아, 괜찮으시겠어요?"

"네. 동료들 더위 먹어서, 빨리 안 가면 아예 일이 안 돌아가요."

"어우, 고생하시네."

"어쩔 수 없죠. 샐러맨더니까. 아, 영수증 끊어주시구요."

말하며 샐러맨더가 내민 건 법인카드였다. 공장 복지 참 대단하다 싶었다. 법인카드로 아이스크림도 사 먹게 해주네.

계산 끝내고 봉투 다섯 개에 담아서 보냈다. 봉툿값이 개당 20원이라 100원이긴 한데, 2+1 안 가져간다는 손님한테 봉툿값 받기는 좀 그렇지.

그 뒤엔 토사물을 치웠다. 얼음컵 쏟아진 거면 밖으로 쓸려 보내고 말 텐데, 이건 그럴 수도 없어서 쓰레받기를 발로 고정해 담았다. 그 후에 대걸레 빨고, 다시 담고, 또 가서 빨아오고….

천만 다행히도 다 치울 때까지 더 손님이 오진 않았다. 하긴, 토사물 뚝뚝 흐르는 계산대에서 어느 누가 물건을 사고 싶어 하겠는가.

서큐버스도 더 토악질을 하진 않았고 말이다. 입가 언저리에서 흐른 침 때문에 테이블이 흥건해지긴 했는데, 저 정도야 뭐.

"점장님, 토한 거 다 치우긴 했는데, 쓰레받기에 있는 거 걸레 빠는 곳 하수구에 흘려보내도 됩니까?"

옛날에 알바할 때 비슷한 짓 했다가 하수구가 막혔던 경험이 있어서 물어봤다.

[ 괜찮아. 버릴 데도 없을 거 아냐. ]

"그리고… 토악질한 서큐버스 손님 아직 안 갔는데요."

[ 그럼 아직 매장에 있는 거야? ]

"네. 나갈 생각이 없어 뵙니다."

[ 어… 그러면… 그 서큐버스 연락처랑 주소 명부에 적어야 하는데…. ]

"왜요? 이 세상도 코로나가 퍼졌나?"

이건 또 예상 못 한 내용이었다.

나 사는 세상 편의점에도 손님들 거주지나 연락처를 적는 명부, QR코드가 따로 있긴 하다. 그놈의 코로나 때문이다. 근데 여긴 대체 뭐가 문제야?

물론 점장은 코로나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

[ 코로나가 뭐야? ]

"바이러스 같은 건데요. 설명하긴 좀 그렇고, 그거 때문에 대충 1억 4천만 명쯤 감염됐고, 300만 명쯤 죽어 나가고 있고 그래요."

[ 세상에. 대륙 규모로 마법실험이라도 했나? ]

"그건 아니고, 뭘 잘못 먹어서…."

점장은 잘못된 식습관 하나가 세상을 박살 내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렇잖은가. 때론 현실이 판타지보다 더한다는 거.

근데 들어보니, 점장이 명부를 적으라는 것도 비슷한 이유인 듯했다.

[ 가끔이지만… 저주나, 반마법 같은 게 걸린 채로 오는 손님들이 있어. ]

"그것들도 옮아요?"

[ 응. 그리고 문제가, 본인도 자기가 저주나 반마법이 걸린 걸 모르거든. 그래서 마법청에서 부탁한 거야. 이런 걸 적어두면 발원지를 찾기가 수월해지니까. ]

마법청은 또 뭔가 싶다. 이 세상 구청 같은 건가.

어쨌든 적으라니 적긴 적겠는데, 서큐버스는 멀리서 봐도 인사불성을 넘어 의식불명 단계로 접어든 상태였다. 팔이 흐느적거리는 게 꼭 시체 같다. 날 보고 저걸 상대로 전화번호를 따내라는 거야?

명부는 옆 계산대 근처에 놓여있었다. 집어 들고 서큐버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봤다.

"손님. 실례지만, 매장에 계시려면 이걸 적어주셔야 하는데요."

"...."

"손님?"

"헤헤…."

난 도저히 못 하겠고, 점장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나 싶어서 물어봤다.

"점장님, 이 손님 웃는데요."

[ …에이, 냅둬. 좋은 꿈이라도 꾸나 보… 아니지. 혹시, 아까부터 계속 웃어? ]

그렇다고 답했더니, 점장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 카운터 밑에 저주 검진기 있을 텐데, 한번 꺼내 볼래? ]

5화. 적응하는 편돌이 (5)

점장이 말한 곳을 뒤져보니, 초록색 체온측정기처럼 생긴 게 보였다.

[ 찾았어? ]

"초록색 작은 기계, 맞나요?"

[ 응. 그거 맞아. 위쪽에 버튼 누르고 손님 맨살 부위에 겨눈 다음에, 액정 화면에 뭐라고 뜨는지 좀 알려줄래? ]

작동 방식도 비접촉 체온측정기랑 비슷한 모양이다.

들고 서큐버스에게 다가간 뒤, 이걸 어디에 겨눠야 하나를 잠깐 고민했다. 가장 편한 곳은 얼굴이었는데, 얼굴에 대고 레이저를 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을 것 같아서였다.

"손님, 잠깐 손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

말은 당연히 안 들어 먹었고, 손은 팔짱 껴서 꼭꼭 싸맨 채다. 잠깐 몸을 훑다가, 어깨 언저리에서 살랑대는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하면 될 것 같다.

검은 날개를 겨누고 버튼을 누르자, 액정 화면이 옅은 보랏빛으로 작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점장님, 화면이 연보라색이 됐는데요."

[ 점멸 주기는 어때? ]

"어… 2초 주기로 한 번씩, 규칙적으로 깜박이네요."

대답하자 안도감 섞인 한숨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후 점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 다행이네. ]

"이 손님 멀쩡한 거예요?"

[ 그건 아니고, 저주 걸린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편의점에서 파는 걸로 해결 가능할 것 같아. ]

저주가 존재한단 것도 놀라운데, 그게 편의점에서 파는 걸로 해결된다는 게 더 놀랍다.

"저주가 반창고 붙이면 낫는 그런 거예요?"

[ 반창고 말고, 포스기 맞은편에 상비약 들어있는 케이스 있잖아. 거기 두 번째 줄에서 중간 사이즈 약 꺼내서 손님 드려. ]

"얼마인데요?"

[ 4,000원. 아, 두 알 드리면 돼. ]

그래도 별로 위험한 건 아니었나 보다. 4,000원짜리 약 두 알 먹이는 걸로 해결된다는 걸 보면 말야.

점장이 말한 대로 의약품 케이스의 가운뎃줄을 찾아보니, 분홍색 포장지의 의약품이 딱 눈에 보였다. 이어서 눈에 보인 건 케이스 윗줄에 큼직하게 적힌 효능.

"어… '상사병이 단방에 치료됩니다?' 점장님, 편의점에서 항우울제도 팝니까?"

[ 항우울제는 아니구, 그 손님한테 걸린 저주가 상사병도 아니긴 하지만… 효과는 있을 거야. ]

"그게 대체 뭔… 아, 잠깐만요."

다른 손님이 왔다. 창백한 피부에 회색빛 머리, 붉은 눈에 창백한 피부.

돌고 돌아 다시 뱀파이어인 듯했는데, 처음에 받았던 뱀파이어보다는 키가 좀 더 컸다. 그래도 좋게 봐줘야 중학생쯤. 외에 왼쪽 눈가에 눈물점이 찍혀 있는 게 눈에 딱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혈액팩… 어디쯤 있나요?"

목소리도 좀 어리게 느껴졌고. 뭔가, 뭔가 느낌이 오긴 오고 있는데, 일단은 절차대로 했다.

"혹시 도수 있는 거 찾으시나요?"

"네. 음, 13도짜리."

"저쪽 끝에 주류 코너 밑에 줄 한번 봐보시겠어요?"

위치는 몰랐지만 굳이 점장한테 물어보진 않았다. 도수가 있으면 주류로 분류될 거고, 혈액팩도 냉장 보관해야 신선할 테니 냉장고에 있겠지, 뭐.

잠시 후 뱀파이어가 혈액팩 네 개를 가져와 내려놓았다. 혈액팩을 보고 있자니, 여기가 응급실인지 편의점인지 분간이 안 간다. 심지어 여기에 알코올이 섞여 있단 거잖아?

"저, 그리고 담배 한 갑… 주세요."

"어떤 담배 말씀이십니까."

"저거요."

담배도 달라고 한다. 바로 꺼내주진 않았고, 아까 왔던 느낌이 영 마음에 걸려 혹시나 하고 물어봤다.

"이 6mg짜리 드리면 되나요?"

"어… 네. 6mg."

내가 든 건 5mg짜리다. 이놈 민짜 아니야?

미성년자의 속칭을 민짜라고 부른다. 속칭이라 거부감이 들 수도 있긴 하겠다만, 편의점에서 담배 사려는 놈들은 민짜나 철없는 애들이 아니라 씹새끼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왜냐면, 판 사람이 형사 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엔 내가. 청소년 보호법 위반했다고 벌금 내야 되고, 주민등록증에 빨간 줄 그인단 말야. 전과자가 된다니까?

담배 하나 판 것 갖고 그렇게까지 하냐 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된다. 편의점은 영업정지 처분받게 되고. 인생 여럿 조지는 짓거리를 지들 폐 작살내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데 좋게 불러주려야 불러줄 수가 없다.

"신분증 보여주시겠어요."

"네."

이것도 정상적인 신분증은 아닐 게 분명하다.

받아 들어서 눈 가까이에 대고 들여다보는 척하며, 뱀파이어를 슬쩍 곁눈질했다. 원체 창백한 낯빛이라 얼굴색으론 알아볼 수 없었다만, 경직된 게 눈에 확 보였다.

이어서 신분증도 한번 살펴봤다. 지금이 2021년이니까 2002년생부터 성인이고, 민증은 딱 02년생이라 적혀 있긴 하다. 근데 숫자 주변 홀로그램은 왜 벗겨졌을까? 응?

손톱으로 한번 긁어봤더니, 02라 적힌 부분 언저리가 슬슬 벗겨지려 했다.

신분증을 돌려주며 말을 걸었다.

"이거 스티커 벗겨지는데요."

"…네, 네?"

"계속 벗길까요, 아니면 라이터로 지져서 녹여볼까요?"

뱀파이어는 어느 쪽도 고르지 않았다. 신분증을 받아 들고는, 꺼내 온 혈액팩도 내팽개친 채로 후다닥 정문 밖으로 도망쳤다.

그냥 내버려 뒀다.

내가 민짜가 담배나 술 사는 걸 조질 권한도 없고, 경찰서에야 같이 갈 수 있겠다만 민짜가 폭행당했다고 역고소해 버리면 일이 더 복잡해진다.

게다가 스티커까지 붙여놓은 걸 보면 하루 이틀 이런 게 아닐 텐데, 저 민짜 뱀파이어를 역추적해서 담배 판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하면 난장판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여, 민짜가 떠난 자리엔 혈액팩 네 개가 남았다.

한번 집어봤는데, 물컹물컹했다. 뱀파이어들은 이걸 대체 어떻게 먹는 걸까. 기성품 코너에서 수혈 도구 같은 건 못 봤는데, 빨대 꽂는 구멍이라도 있나?

[ 찬아, 서큐버스 손님 이제 좀 어때? ]

"아직 못 먹였어요, 방금 민짜가 술담배 사러 왔다가 가가지고."

[ 진짜? 와, 큰일 날 뻔했네. 누구였어? ]

"뱀파이어요. 아까 이런 놈 가끔 온다고 하지 않으셨나?"

[ 가끔 오는 게 맞는데, 찬이 네가 오늘 고생 좀 하네…. ]

"그러게 말입니다…."

일을 해도 해도 시간이 안 가, 시간이 안 간다고. 이놈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경보 울리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

"경보요? 이것도 마법 같은 게 걸려있는 건가?"

원래 편의점은 경보고 뭐고 없다.

[ 응. 위조신분증 들고 들어오면 경보 울리게 해놨어. 대부분은 다 그걸로 잡았고. ]

"그냥 아날로그로 해놨던데요. 커터로 긁어서 숫자 부분 지운 다음에, 거기다가 위조 스티커 붙여가지고. 말하는 거나 행동거지도 어려 보이긴 했고요."

난 순전히 눈썰미로 잡았다 생각했는데 말이다.

회사생활 3년 내내 거래처 상대하고 공사 다니면서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은 한 번도 못 만나봤고, 자연스레 눈치가 늘 수밖에 없었다. 그 눈치를 편돌이 하면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허나 점장은 이 부분에선 단호했다.

[ 그게 더 어려워. 청에서 발급하는 신분증은 위조 방지용 장치가 엄청 많이 걸려 있어서,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훼손하기도 힘들거든. 그 마법을 해제하는 데에도 엄청 마법을 썼을 거고, 그렇게 푼 신분증에 추가로 마법을 안 걸었을 리도 없고…. ]

"경보 마법도 안 울릴 정도로요?"

[ 위력이 센 걸 걸어둔 건 아니거든. 지금까지는 문제없었고. ]

"그럼 저 민짜가 마법적 능력이 탁월한가 봅니다. 하긴, 뱀파이어니 그럴 수도…."

[ 그건 아니고… 원래 뱀파이어들 집안이 대체로 돈이 많아. ]

20세도 안 된 뱀파이어가 수입이 많을 리는 없고, 부모님 고혈 빨아서 만든 위조신분증이었던 모양이다. 집에 돈이 많으면 골프를 치러 가라. 혹시 모르잖아, 프로 골퍼가 될지.

하여튼 이건 그렇구나― 하고 대충 넘길 부분은 아닌 듯해서, 한번 정리를 해봤다.

그 민짜 뱀파이어가 내민 신분증이 실은 온갖 마법이 걸린 위조신분증이었다, 점장이 말한 걸 난 이렇게 이해했다. 근데, 난 마법이고 뭐고 못 느꼈는데?

"음…."

점장도 쉽사리 대답하긴 힘든 문제인 듯했다. 생각하시라 하고, 서큐버스한테 약부터 먹이기로 했다. 포장을 까서 알약 두 개를 집은 뒤, 서큐버스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걸 어떻게 먹이냐….

아, 몰라. 빨리 끝내고 계산대나 볼란다.

그냥 입술에 손가락으로 한 알씩 밀어 넣었다. 여자 입술을 상대로 한 생애 첫 스킨십이 이런 식으로 이뤄질 줄이야.

넋이 나가 있던 서큐버스는 입 안에 들어간 알약 두 개를 우물대다 삼키고, 작게 신음하기 시작했다. 바로 점장에게 보고했다.

"손님한테 약 먹이긴 했는데, 이걸로 정말 저주가 낫나요?"

[ 낫긴 나을 거고, 음… 엄밀히 말하면… 저주라기보다는, 직업병? ]

이건 또 뭔 소리야. 직업병을 약으로 치료해?

[ 그 서큐버스, 대충 사회초년생으로 보이지 않아? ]

말을 듣고 바라보니 그렇게 보이긴 했다. 입고 있는 슈트도 비싸 보이진 않았고, 갖고 있는 서류 가방도 산 지 얼마 안 된 새삥으로 보였으니까.

이후 점장의 설명이 이어졌는데,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일단 내가 갖고 있는 서큐버스의 이미지는 대충 이렇다. 매료, 매혹으로 사람에게 거짓된 사랑을 심어 홀린 뒤 사랑을 나누고, 그걸 자신의 힘으로 삼는 음마.

이 세계 서큐버스도 크게 다르진 않았으나, 그 방식이 엄청나게 건전했다. 그러니까, 이 서큐버스라는 종족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개입하는 업종 전반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제약 회사에 들어가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키우거나 줄이는 약물을 개발하고, 정신과 의사가 되어서 사랑에 대해 상담하거나 콘돔 제작 회사에서 일하는 등.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말이다. 짐작이 되긴 했지만 물어봤다.

"왜요?"

점장은 짐작한 대로 대답했다.

[ 서큐버스들은 원래 그래. ]

종족 특성이라 그런 거였다.

그리고 이 사회초년생 서큐버스의 경우에는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자기가 취직한 곳에서 일하는 과정에서 마력이 과주입된 듯하다는 게 점장의 추측이었다.

[ 마침 근처에 제약 회사가 하나 있거든. 거기 직원분 아닐까? ]

"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나 보네요."

[ 응. 지난달 일인데, 서큐버스 한 분이 발가벗고 들어오셔서는 널빤지 두 개랑 밧줄, 매직을 달라고 하셨거든. 빨리 보내야겠다 싶어서 팔았더니, 그 자리에서 널빤지 양쪽에 '안아줘요'라 적어서는 몸에 걸치고 나가셨어. ]

"...."

[ 경찰이 잡아갔고. ]

나도 조만간 그런 손님 받을 수도 있단 소리로 들린다. 조심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이걸 어떻게 조심해야 되냐? 오는 손님 막을 수도 없고.

[ …아. 혹시 모르니까, 찬이두 검진기 한번 몸에 써봐. ]

"저도요?"

[ 응. 지금 그 서큐버스분이 위험한 게, 그때도 전염이 됐었단 말이야? 좀 여러 명한테. ]

당장 몸에 검진기를 사용해 봤다. 액정은 연보라색으로 점멸하진 않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알람이라도 된 마냥 삑삑거리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나서 물었다.

"점장님, 소리 들리세요?"

[ 응, 잘 들려. ]

"이 경우엔 어떤 겁니까?"

[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째는 마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거. 이 경우엔 엄청 위험한 거라 바로 병원 가야 돼. 근데 찬이는 다른 세계 사람이라 그 문제는 없을 것 같구…. ]

내 입장에선 점장이 다른 세계 사람인데 말이다. 이어서 점장이 말했다.

[ 둘째는, 저항 마법 때문에 측정기가 작동 안 하는 거. ]

나로선 영문을 모를 일이라 점장이 말하는 걸 가만 기다려봤다. 좀 더 고민하는 듯하던 점장이 대뜸 말했다.

[ 찬이는… 아무래도 마법이 안 통하는 몸 같은데. ]

"아니, 그건 또 뭔 소리래요?"

6화. 적응하는 편돌이 (6)

점장이 조금 전에 뭐라 그랬냐. 날 보고 크립토나이트가 됐다고? 마법 면역이 됐다, 그 말인가?

[ 됐다기보다는, 원래 네가 그런 체질이었을 거야. 타고나는 거니까. ]

"제가 그런 체질이었다뇨, 전 살면서 그런 거 전혀 몰랐…."

[ 알 수가 없었겠지. 찬이 세상엔 마법 같은 거 없었다며? ]

그렇긴 하네. 내가 절대반지를 주워본 것도 아니고, 9와 3/4 승강장에 가본 것도 아니었으니까. 근데, 내가 그런 체질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한데 말이다.

"제가 마법이 안 통하는 몸이면, 여기에 올 수도 없었던 거 아닌가요?"

[ 글쎄… 자세한 건 나중에 봐야 알겠지만, 분명 연관이 없지는 않을 거야. ]

점장도 어지간히 골이 지끈거리겠다 싶었다. 한 달 넘게 구해서 겨우 받은 알바가 이세계 사람인 것도 모자라 무지개반사 체질이라니.

점장이 할 말을 고르는 동안 서큐버스를 내려다만 보았다. 먹인 약이 효과가 있긴 있었는지, 슬며시 눈을 뜬 채였다. 가늘게 뜬 눈꺼풀 속의 눈동자가 날 주시하고 있는 게 영 부담스러웠다.

"어쨌든 잘 모르신다는 거죠."

[ 당장은. 알게 되는 대로 말해줄게. ]

"사장님…."

통화 도중에 서큐버스가 날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낸 목소리 중 그나마 멀쩡한 목소리였다. 이제야 집에 좀 보내겠다 싶어 바로 대답했다.

"네, 손님."

"…사랑이란 게 뭘까요…?"

그걸 묻기 전에 사랑을 해보긴 해봤는지부터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니냐?

"모르겠습니다, 아직 해본 적이 없어서."

"헉… 왜요…?"

얼굴에 개연성이 없어서 그런다. 이 서큐버스 그냥 다시 재울까.

"점장님, 혹시 콜택시 전화번호 아세요?"

[ 카운터 밑에 있을 거야. 부르게? ]

"네. 잠깐 전화 끊을게요."

정신을 아주 차린 건 아닌 듯했지만, 어쨌든 대화가 통하긴 했으니 콜택시 불러주면 얌전히 집에 가겠다 싶었다.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자 정상적인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종족이 뭔지는 안 봐서 모르겠고….

[ 전화 받았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

"여기 주소가… 아, 잠깐만요."

이 와중에도 또 손님이 왔기 때문이… 아니, 저건 또 뭐냐.

얼굴에 뼈만 남은 해골 둘이 막 정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해골바가지 말이다.

몸에는 어떻게 걸쳤는지는 몰라도 군복을 입고 있었고. 이 세계 군대는 병사를 엄청 험하게 굴리나 보다. 얼마나 삽질을 시켰길래 몸에 뼈밖에 안 남았냐.

"어서 오세요, 손님."

"...."

해골바가지들이 대답하지는 않았다만, 나도 별로 기분 나쁘게 여기진 않았다. 성대가 없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대신 내민 건 기다란 메모지였으며, 메모지 안에는 담배 이름 십수 종이 보루 단위로 적혀 있었다.

담배 부탁받은 거구나― 생각했다.

군부대 인근이나 도심지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 편의점에 유독 군인 손님들이 자주 오긴 한다. 군대 안에서 싸제 담배를 안 파니 외박이나 휴가 나가는 양반들한테 부탁해서 그때그때 잔뜩 사 가는 거다.

왜냐면, 담배 몇 보루씩 들고 다니려면 불편하잖아. 전자의 경우엔 좀만 들어가면 되고, 후자의 경우엔 버스 타고 복귀하다 까먹을 것 같아서 그렇고.

난 후자의 경우였다. 나도 육군 복무하면서 수십 번 부탁 받아봤고, 세상에 별의별 담배가 다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메모지에 적힌 담배 이름도 다 아는 것들이고.

"이대로 드리면 될까요?"

말하니 삐걱삐걱 고개를 끄덕여온다. 어디 한번 보자. 이것저것 다해서 총 아홉 보루. 전자담배도 하나 섞여 있고….

[ 저기, 편의점에서 일하시나요? ]

콜택시에 전화 건 걸 까먹고 있었다. 얼른 대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편의점 맞아요."

[ 그럼 위치는 대충 알겠고, 금방 가겠습니다. 그런데 태울 손님 만취 상태인가요? ]

"대화는 통해요."

[ 어… 일단, 알겠습니다. ]

대답하고 전화 끊은 뒤에, 점장한테 다시 전화를 거는 사이 담배를 다 골라 봉투에 담았다. 근데 목록 맨 밑에 담배 외에도 두 글자가 더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어. 시체? 별걸 다 파네, 진짜.

"점장님. 콜택시는 불렀고, 지금 막 들어온 손님께서 시체를 찾으시는데요."

[ 이번 달엔 그거 취급 안 하는데. 혹시 손님 스켈레톤이야? ]

"네."

[ 아, 그럼 급한 손님일 텐데… 근처에 의체 취급하는 곳 있으니까, 급하면 거기 가보시라고 말씀드려. 정문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3분쯤 쭉 걸어간 뒤에, 길 건너편. ]

그러라고 하니 그러기로 했다.

"다 합쳐서 40만 5,000원이고, 시체는 저희 매장에선 취급을 안 해서요."

"...."

"정문 나가셔서 3분 정도 우측으로 쭉 가보시면, 길 건너편에서 찾으실 수 있을 검다."

스켈레톤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담배 받아 들고는 덜그럭대며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점장에게 물었다.

"이건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지난달엔 편의점에서 시체를 취급한 거예요?"

[ 팔긴 했어. 보관이 힘들어서 재고 보충은 안 했지만. ]

"그… 왜 팔고, 왜 사 가는 겁니까?"

[ 스켈레톤한테는 필수품이어서 그래. ]

이후 점장이 말하기를, 복무 중인 스켈레톤들은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한다. 딱 2주 정도. 매미 성체가 딱 그만큼 사는 걸로 아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영혼을 담은 해골의 내구성이 최악이기 때문이다.

군부대에서 스켈레톤을 부리기 위해 쓰는 해골들 대부분은 옛날에 일어났다는 전쟁에서 생겨난 시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거라고 한다. 근데, 수십 년 전의 시체에 뼈가 제대로 남아있을 리가 없잖은가? 만년필 금칠도 벗겨질 시간인데.

스켈레톤이 시체를 찾는 이유가 그래서란다. 군대에서 보급하는 시체로는 육신이 몇 주밖에 유지되지 않지만, 밖에서 신선한 싸제 시체를 찾아 빙의하면 최소 몇 달, 최대 몇 년은 육신이 유지된다나 뭐라나.

이야기를 들으며 곧장 떠올린 건, 군복무하던 시절 입었던 국방색 빤스였다. 이놈들은 국방색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왜 보이지도 않는 빤스까지 국방색으로 만드나 모르겠다. 가뜩이나 착용감도 거지 같은데.

"어째 저 군복무하던 시절이랑 비슷하네요."

[ 찬이도 군대에 있었어? ]

"저 살던 곳은 남자면 거의 다 군대 갔거든요. 2년 정도. 여긴 어떤데요?"

[ 모병제인데, 요새는 군대 잘 안 가. 받지도 않고. 전쟁 끝난 뒤에는 나라마다 군비 절감하는 추세라고 하더라고. ]

"그럼 저 군인들이 스켈레톤인 건…."

[ 중대장들이 다 네크로맨서거든. 철밥통이래. ]

부대 중대장이 한 번 실망했다 하면 그 부대는 정말 개판이 나겠다 싶었다. 이 부분은 나 사는 동네 군대도 다를 게 없긴 하다만.

대화 도중 벨이 울려 정문을 바라봤고, 살짝 움찔했다.

"사장님, 택시 탄다는 손님 어디 계세요?"

콜택시가 온 듯했는데, 기사라고 들어온 이종족이 눈이 하나밖에 없는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저건 사이클롭스, 뭐 그런 거겠지.

살짝 숨을 고른 후, 서큐버스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쪽 저분이세요."

"어디… 어우, 이분 술 잡수신 거 아닌 거 같은데요?"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하나. 잠깐 생각하다 답했다.

"뭔 저주가 걸려 있긴 하셨는데, 약 드셔서 괜찮을 거예요."

"그렇다면야, 뭐. 손님, 일어나십쇼."

"우음…."

사이클롭스가 어깨를 들치며 일으켜 세웠음에도 서큐버스는 몸을 가누질 못했다. 질질 끌려가듯 이끌려 택시 뒷좌석에 태워지는 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잊은 게 떠올라 뒷좌석에 몸을 디밀고 말을 걸었다.

"저기, 손님."

"네…?"

"약값이 4천 원인데요. 계산 카드로 하시겠어요, 현금으로 하시겠어요?"

일은 해야지. 난 빵꾸 내기 싫다.

서큐버스는 내가 카드 주고 산 것도 아닌데 왜 돈을 줘요? 라며 꼬장을 부리진 않았다. 그랬으면 영업방해로 고소할 생각이었고. 서큐버스는 그저 헤, 웃으며 카드를 내밀어올 뿐이었다.

받아서 다시 편의점에 들어온 뒤에, 아까 서큐버스가 먹었던 의약품을 꺼내서 바코드만 찍고 집어넣었다.

이것도 나름 팁이라면 팁인데, 꽐라 된 손님한테 바코드 찍어야 되니 물건 잠깐 받아가도 되냐며 실랑이를 할 필요가 없다. 유도리 있게 하면 되는 거다, 유도리 있게.

결제한 뒤에 나와서 카드를 돌려주자, 서큐버스가 다시금 물었다.

"진짜… 사랑이란 게 뭘까요…."

난 네가 그걸 나한테 왜 물어보는지를 모르겠다. 이거 진짜 대답해야 하나? 난 상품 바코드나 찍으면 되겠다 싶어 출근한 건데, 왜 서큐버스 손님 상대로 상담을 해줘야 돼?

"대체 뭐지…."

하도 궁금해하는 것 같길래,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해줬다.

"취미로 할 땐 즐거운데, 직업이 되면 짜증 나는 거죠."

내 주변에 결혼한 친구 놈들 의견이 대체로 이러했다. 연애할 때에는 마냥 즐거웠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엔딩 본 게임 억지로 진행하는 기분이라나 뭐라나.

그걸 들으며 든 생각이 이거였다. 사랑은 취미고, 결혼은 직업이다.

뭔 취미든 간에 직업이 되면 당연히 재미없어지기 마련인데, 사랑의 종착역은 일단은 결혼이란 말이다. 이후에 이혼을 하든 말든 그건 알아서들 할 일이고.

이걸 진짜로 말해줬다. 내가 뭔 생각으로 이리 대답을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만, 서큐버스가 원했던 대답은 아니었던 듯하다.

"에이… 뭐예요, 그게…."

이 물음엔 대답 안 했다. 운전석 백미러에 비치는 사이클롭스 눈동자가 희번득했기 때문이다. 빨리 끝내라는 것 같은데, 나도 그러고 싶어 진짜.

"…죄송해요."

죄송하면 다신 보지 말자고. 직장생활 잘하고.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몰라도 서큐버스가 사과를 해왔다. 술 먹고 토한 거에 대한 사과이겠거니 납득하며 몸을 빼자, 마침내 택시가 출발했다.

이후 손님이 뜨문뜨문해졌다. 오전 0시 지난 직후라 그런 듯했다.

편의점 야간 근무 때에는 0시 즈음에 매출 전표가 나온다. 용도는 그날 매출이 얼마다― 기록해두는 용도. 받아든 뒤에 점장이 알려줬던 대로 금고에 10만 원만 남기고 죄다 꺼내서 금고에 집어넣고, 자리에 앉았다.

2시간을 일한 현재 소감. 뭐라도 좋으니 푸념을 하고 싶었다.

"근무 두 시간 만에 온갖 진상은 다 만나네요. 손님 사랑 상담까지 해줘야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 사랑 상담? 혹시 서큐버스 손님 얘기야? ]

"네. 점장님도 해보신 적 있어요?"

[ 어…. ]

점장의 목소리에 고민이 깊어졌다.

[ 앞으로는 그런 손님 있으면 진지하게 받아주면 안 돼. 알았지. ]

"그러고 싶었는데, 하도 물어봐서… 일단 몇 마디만 하고 말았는데요."

[ 그 몇 마디도 하면 안 돼. 서큐버스 손님들이, 음… 집착이 좀 강하단 말이야. ]

그래서 사랑에 대해서 나한테 몇 번이고 물어봤나 보다.

[ 특히 사랑에 대한 주제에 대해선 엄청 민감해. 혹시 결론은 냈어? ]

"아뇨. 택시 태워야 해서 빨리 보냈어요."

[ 그럼 그 손님 나중에 또 오겠다. ]

아까 보내면서 다신 보지 말자고 기도했는데 말이다.

"진작 좀 말해주시지."

[ 미안. 아까부터 정신이 없어 가지고…. ]

"뭐 하고 계신 거라도 있어요?"

묻자, 점장이 미안하다는 듯이 답했다.

[ 잘 안 들어오는 물류가 하나 있는데, 그걸 지금 가져오겠다고 문자가 왔거든. ]

"어… 물류요?"

[ 응. 아직 답장은 안 했는데, 혹시 받아줄 수 있어? ]

원래 편의점 물류는 정해진 시간에, 미리 약속된 만큼만 딱딱 오고 간다.

오전에 설명 들을 때에도 의아하게 생각한 부분이긴 했지만, 이젠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여기가 보통 평범한 편의점이어야지.

"양이 많아요?"

[ 아니, 하나야. 좀 크긴 한데, 운반은 그 애가 해줄 거고. 찬이 너는 기록만 해주면 돼. ]

"화물 기사분이랑 친하신가 봐요."

[ 응, 옛 직장 동료. 그럼 받는다고 문자 보낸다? ]

"그러셔요."

기록만 하면 된다잖아. 종이에 펜으로 동그라미 치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근데, 아니었다.

5분 뒤에 밖에 웬 운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허겁지겁 뛰쳐나와 보니, 웬 날개 달린 말이 날갯짓하며 낮게 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도 당근 먹니?

"화물 왔습니다!"

그 위에는 고글을 쓴 한 여자가 타고 있었고. 바닥에 놓여있는 건 에어컨도 담을 수 있을 만한 상자였으며,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짐작도 되질 않았다.

여자가 물었다.

"어라? 언니 어디 갔어요?"

"언니라면 점장님 찾으시는 건가요?"

"네. 근데… 누구세요?"

"알바생입니다. 오늘 시작했구요."

잠시 후, 여자는 고글을 벗으며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오?"

감탄했다.

7화. 납품받는 편돌이 (1)

고글을 벗은 여자의 눈은 갈색이었다. 사람처럼 보였단 뜻이다. 오늘 오전만 해도 썩어지게 본 게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사람이 반가운지 모르겠다.

"그럼 언니 지금 쉬는 거예요?"

"퇴근하긴 하셨어요. 뭐 하시는진 모르겠고."

"와… 언니 쉬는 건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데."

중얼거리며 페가수스에서 내리는 여자를 보며, 아까 잠깐 궁금해하고 말았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 편의점은 초코우유를 팔고, 담배도 판다.

이건 누가 나르든 그러려니 하겠는데, 혈액팩이나 말편자, 시체 같은 비정상적인 물류는 대체 누가, 어디서 구하는 거며 어떤 방법으로 옮겨다 놓는 것인가?

이 여자가 그 해답의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는 되겠다 싶었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도 도검 소지 허가증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쓰는 걸 굳이 차고 다닐 이유도 없겠지.

그 외에 여자를 보며 느낀 점은, 아무리 봐도 물류 운반하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는 것.

페가수스에서 내리고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늘씬하기 그지없었다. 입고 있는 가죽 재킷과 청바지가 어우러지는 게 특히나. 모델 일이 더 적성에 어울릴 매무새였다. 맞을 듯했다.

더해서 넉살도 좋아 보였고. 씨익 웃으며 내게 넌지시 물어왔다.

"편의점 일 어때요. 할 만해요?"

"그럭저럭요. 좀 더 해봐야 알 것 같긴 한데."

대답하는 지금도 하늘엔 하피가 날아다니고 거리엔 켄타우로스가 내달리고 있었으나, 이젠 별 감흥도 없다. 이게 적응이 돼서 이런 건지, 넋이 나가서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어휴,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편의점 일은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언니 도와줄 때 잠깐 해보긴 했는데."

"여기서 일하셨었나 봅니다."

"며칠요. 진상들 때문에 그만뒀고.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진다니까."

편의점 일이 접하기도 쉽고 업무도 편하긴 하지만, 적성에 안 맞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한 자리에 오래 있질 못하는 성격이어서, 얕보이는 게 싫어서, 페이가 약해서 등등.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놈의 진상들이 짜증 나서고. 길에 널린 똥은 피해 걸을 수 있다지만, 이 똥 덩어리들은 걸어서 날 찾아오는 것이다. 더럽고 밟기도 싫은데 피할 수도 없으니, 사람이 미쳐버릴 수밖에.

"그리고 지금 하는 일이 더 좋기도 하구요."

"물류 일이요?"

"아뇨. 헌터."

헌터는 또 뭔데?

슬금슬금 궁금증이 일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더 끌 상황이 아니었다. 여자가 가져온 물류를 행인들이 피해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중에도 페가수스는 손바닥만 한 깃털을 휘날려대고 있으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일단 그것부터 안에 좀 들여놔야 할 것 같은데. 카트 가져올까요?"

"네? 아뇨, 괜찮아요. 이거 갖고 뭐."

사실 카트로도 되겠냐 싶었다. 물류가 내려진 도보에 금이 가 있었으니까. 저거 대체 몇kg짜리냐.

"읏차."

근데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합 한 번 주고는 물류를 들어 올렸다. 물리법칙이 고장 난 듯한 광경이었다. 난 나대로 폐문 잠금쇠를 풀어 연 뒤에 물었다.

"진짜 안 도와드려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둘이서 들면 더 번거로워. 사무실 문만 좀 열어주셔요."

문은 아까 열어놨다.

사무실 문을 열어둔 건, 편의점 창고가 사무실 안쪽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편의점이 대체로 다 이런 구조다. 그 창고 안엔 냉장 보관이 필요한 음료수들을 채워 넣는 편이고.

왜, 그런 경우 있잖은가. 편의점 들어갔는데 카운터에 점원은 없고, 콜라 사러 냉장고 가보니 뒤편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들릴 때. 그 소리가 창고 뒤편에서 점원이 쌔빠지게 창고 음료수들 매대에 채워 넣으면서 나는 소리다.

그걸 하려면 당연히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는데, 편의점에서 물류 채우라고 따로 시간을 주는 게 아니라서 어쩔 수가 없다. 24시간 영업하는 곳에서 따로 시간을 어떻게 줘?

그러니까 점원 없을 때 사장님 어딨냐고 소리 안 질러도 된다. 점원들도 일부러 손님 안 받는 게 아니라, 손님 좀 덜 온다 싶을 때 그때그때 하는 거란 말야. 이건 부탁이다. 살살 불러도 알아서 나오고, 보통은 CCTV 힐끔힐끔 보면서 손님 있나 없나 알아서 확인한다.

근데 이 편의점은 그건 못 할 것 같다.

음료 창고 문을 열어보니, 창고 끝에 지하로 통하는 듯한 계단이 떡하니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지하창고 있는 편의점은 살다 살다 처음 본다.

여자는 사무실 앞에서 잠깐 짐을 내려놓고는 내게 물었다.

"아, 그리고. 음… 어, 사장님?"

"이찬입니다."

그냥 이름 말해줬다. 물류 하는 분이니 앞으로 어머니보다 더 자주 뵈겠다 싶어서였다.

"미안해요. 언니 말고 다른 분한테 사장님이라 하려니 어색해서."

"미안하실 것까지야."

"네. 그럼 이찬 씨, 이거 지하창고 안쪽 네 번째 칸에 놔두면 될까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제가 아직 창고 안쪽을 못 가봐서."

솔직히 아직은 엄두가 안 난다. 점장이 시체 보관했다고 한 곳이 저 안쪽일 것 아닌가. 언제 한번 저 안에 대체 뭐뭐가 들었나 확인을 하긴 해야 되는데….

"맞다, 일 두 시간 됐다 하셨지. 그럼 같이 들어가 보실래요?"

"얼마나 걸리나요?"

"음, 내부 구조 생각하면… 한 5분?"

"그 시간 동안 카운터 비우기는 좀 그런데."

5분이면 진상이 개진상이 되고도 남을 시간이다. 낮에 점장이랑 교대할 때에나 들어가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인 여자는 종이를 하나 꺼내 내게 내밀고는, 상자를 들어 올리려다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날 돌아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몇 살이세요?"

"29살입니다."

"제가 한 살 많네. 서윤하예요.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누나라고 하셔도 되고."

"어… 노력해 볼게요."

아까도 느꼈지만 참 넉살 좋은 여자다. 누나라는 단어 써본 게 한 20년은 된 것 같은데….

서윤하, 그러니까 윤하 누나가 창고로 물류를 집어넣는 사이, 받아 든 종이를 한번 살펴봤다. 원래라면 들어온 물류가 주룩 적힌 목록이어야 하는데, 물건이 하나밖에 안 들어왔기에 적힌 것도 한 줄이 끝이었다.

적혀 있는 건, 어… 드래곤 비늘?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확인해 봤다. 개수는 하나, 몇 그램인지 적혀 있어야 할 규격 부분은 공백란이었으며, 가격도 안 적혀 있다.

그래도 일단 받긴 했으니 펜으로 동그라미 쳐놓고, 카운터로 와서 점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점장님. 물건 받았는데, 이제 어떻게 하면 돼요?"

[ 받은 전표에 바코드 찍고, 점도착 증명 출력된 거 포스기 밑 금고에 넣어두면 돼. ]

"그건 그렇게 할게요. 근데, 이거… 신품인 거 같은데, 어따 진열해야 됩니까?"

알바생에게 여러모로 골치 아픈 순간 중 하나다. 신품 들어올 때.

그냥 채워 넣으면 되는 거 아니냐 하면 또 할 말이 있는 게, 보통 편의점 진열대는 항상 꽉꽉 채워져 있단 말이다. 쉽게 진열할 자리를 만들 수가 없다.

억지로 자리 만들어서 진열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대신 균형이 깨지고 점장 마음에 안 들면 욕을 먹게 된다. 대부분은 그렇더라.

이걸 갖고 점장이 내게 욕을 할 리는 없을 테지만 이건 그, 드래곤 비늘이다. 대분류로 나누면 파충류 허물. 이걸 어떤 코너에 진열해야 좋을지도, 할 수 있을지도 떠오르는 게 없다.

[ 진열 굳이 안 해두 돼. 이번 주엔 안 팔 거라서. ]

"아, 그런가요."

[ 아, 내친김에 지금 말해줘야겠다. 계산대 밑에 닫힌 사물함 보여? ]

듣고 나서 밑을 내려다보니, 세로로 긴 사물함 하나가 보였다.

"네."

[ 한번 열어볼래? 안에 버튼들은 누르지 말고. 절대. ]

열어보니 점장이 말한 대로 버튼 수십 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버튼들 지금 보고 있는데, 이게 다 뭐예요? 전등 스위치는 아닐 테고."

[ 그 버튼 하나하나마다 좌표를 지정해 뒀거든. 누르면 그 좌표에 해당되는 지점으로 편의점이 이동하게 돼. 진열된 상품 목록도 거기에 맞춰서 바뀌고. ]

"누르면 바로?"

[ 누르면 바로. 그러니까 절대 누르지 마, 알았지? ]

누르지 말라니까 왠지 눌러보고 싶어진다. 한 번만 눌러보면 안 되나? 아무 데나 갔다가,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버튼 누르면 되는 거 아니야?

물론 누르진 않았다. 그러면 안 되니까 하지 말라는 거겠지. 대신 아까 하던 생각을 이어서 질문했다.

"오늘 들어온 드래곤 비늘은 그… 어느 좌표 손님들이 사 간답니까. 아니, 사 가긴 사 가요?"

[ 그거 없어서 못 파는 거야, 찬아. 공방 수백 곳 뭉친 지역이 있는데, 보통 그쪽에서 일하는 드워프 대장장이들이 많이 사 가. 외에는 학원 지구 쪽에서 견본으로 사 가고…. ]

학원 지구는 또 어디야.

"용도가 뭐길래…."

[ 보통 헌터들 장비나, 장신구 보석 대용으로 쓰여. 아카데미에서 견본으로 사 가는 건 그쪽 학과 지망생들 견학할 때 쓰려는 용도. ]

"보니까 가격도 안 적혀 있는데, 비싼 건가 봐요."

[ 응. 한 번에 팔면 몇천만 원 정도? ]

세상에. 난 시바스 리갈 17년산 양주 정도 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외에 편의점에서 파는 비싼 거라면, 전자담배 기기 정도?

[ 물론 한 번에 팔지는 않고. 그때그때 잘게 나눠서 낱개로 팔고 있어. ]

"듣고 있자니 여기가 편의점이라기보단 만물상처럼 느껴지는데 말입니다…."

[ 나도 고민했던 부분이긴 해. 근데… 아무래도 만물상보단 편의점이 장사는 더 잘될 것 같아서. ]

나도 굳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편의점을 고를 것 같다. 만물상은 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만 오실 것 같잖아… 잠깐만.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점장이 편의점이랑 만물상 둘 중 어떤 걸 선택할까 고민까지 했다는 건, 어느 쪽이든 장사를 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뜻 아닌가?

"점장님. 오해는 마시고, 이건 순수하게 궁금해서 여쭙는 건데요. 편의점 오픈하신 이유가 따로 있나요?"

[ …어, 왜? ]

대답이 좀 느렸다. 정말 이유가 있긴 한가 보다.

"아뇨, 그냥 궁금해서."

[ 돈 벌려고 시작했지. 왜? ]

점장은 최저임금이 얼마인지도 몰랐던 사람이다. 어째 눈치를 잘 봐야 할 타이밍 같아 얼버무렸다.

"중요하죠. 돈."

[ 응. 중요하지. 돈. ]

점장 목소리가 아직 부드럽긴 했지만, 살짝 가라앉은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그런 질문을 하냐기보다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들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굳이 깊게 캐묻진 않았다. 사회생활 하려면 직장 상사 눈치를 잘 봐야 한다. 그 사람이 직통으로 월급 주는 사람이면 특히 더 그렇고.

얼굴 본 지 하루도 안 된 관계에서 이런 것까지 묻기엔 시기상조이기도 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겠다 싶어 먼저 말을 꺼냈다.

"점장님. 전표 뽑아서 뒀고, 이제 따로 할 건 없나요?"

[ 응. 손님은 이제 좀 덜 와? ]

"아직은요. 이제 적응이 좀 되는 것 같기도…."

대답하는 도중 사무실 문이 열렸다. 여자, 윤하 누나가 막 나온 참이었다.

근데 표정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날 보고는 미안한 듯 말해온다.

"아… 이찬 씨. 미안한데, 언니랑 통화 중인가요?"

"네. 바꿔 드릴까요?"

"아뇨, 바꿔주실 필요는 없고… 언니한테 이번 물류 다시 가져간다고 좀 말해줄래요?"

이유를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불량품이라서 그래요. 정제가 덜된 것 같아."

8화. 납품받는 편돌이 (2)

알바 도중 불량품을 발견한다면, 알바생은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팝콘을 사서, 뜯으면 된다.

아니, 이거 진짜다. 이게 공정 과정에서 물품에 구멍이 뚫리든 운반 과정에서 상자째로 찌그러지든, 우리 선량한 알바생들은 아―무런 죄가 없어요. 그냥 불량 생겼다고 점장한테 보고하고, 손님 눈길, 손 안 닿는 곳에 보관해 두면 나중에 환불이 되든, 버려지든 한다.

다만 매장 내에서 불량이 발생할 경우엔 좀 문제가 되는데, 예를 들자면, 애가 콜라 가져오다 떨궜는데 콜라병이 터졌다? 그땐 그 애한테 물건값을 물리는 게 맞다. 만취한 아재가 소주병 들고 오다 깨 먹어도 마찬가지고.

대신 자기 콜라 못 먹는 거 아니냐며 애가 울먹인다거나, 어차피 깨진 거 하나 더 깨져도 상관없지 않냐며 소주병 거꾸로 집어 온다든가 하는 걸 상대해야 하긴 한다.

이 경우에 가장 원만한 해결 방법은… 떡대를 키우는 것. 오래 걸리긴 해도 이게 제일 확실하다.

근데 지금은 그러진 못할 것 같다. 불량이라고 말해오는 표정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점장한테 보고했다.

"점장님. 이번 물류 반품해야 할 것 같다는데요."

[ 어? 왜? ]

"정제가 덜 됐다고 하는데."

[ 음… 정확히 어떤 식으로? ]

"그냥 스피커폰 해놓겠습니다."

스피커폰으로 바꿔놓고 계산대에 내려놓자, 윤하 누나는 계산대에 몸을 기댄 채로 설명을 시작했다.

옆에서 듣자 하니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드래곤 비늘을 공수해 온 위치가 북부의 높은 산. 드래곤과 다이다이를 까서 벗겨온 건 아니고, 그쪽 지방에 귀농한 드래곤들의 벗겨진 비늘이 방치되다 뭉친 걸 통째로 구해온 거라고 한다.

이 부분을 들은 직후엔 송이버섯 따는 일이랑 크게 다를 거 없지 않나 싶었으나….

[ 요새 몬스터들은 별로 없구? ]

"아휴. 말도 마, 언니. 비늘 주변에 기웃거리던 것만 수십 마리였어. 어째 요샌 더 심해지는 것 같다니까."

일반인은 못 하는 일이란다. 드래곤 비늘이 몬스터들이 먹기 딱 좋은 먹이라, 주변에 필연적으로 몬스터가 들끓고 있기 때문이라나.

그 몬스터들한테 비늘이 뜯어 먹힐 경우에도 비늘이 불량품이 되어버린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기 전에 몬스터들을 다 구제하긴 했으나… 문제는 다른 부분이었다.

"비늘 내부에 고름이 생기고 있더라고. 소리 들려?"

말하며 윤하 누나가 꺼낸 건 기름 범벅이 된 진흙 덩어리 같은 것이었는데, 표면에 기분 나쁜 무지갯빛이 감도는 것에 더해서 이 진흙 덩어리가 글쎄… 꾸물거리고 있다.

[ 응, 잘 들려. ]

"미안, 언니. 허가가 오늘 낮에 떨어져서 급하게 구해온 거라, 정제를 좀 적당한 곳에 맡기긴 했는데… 일 처리를 이런 식으로 할 줄은 몰랐어."

[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이지, 뭐. 아니면 아주 못 쓸 정도야? ]

"그 정도는 아니고. 바로 가져가서 정화하고 고름 긁어내면 남은 부분은 쓸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지금 시각이 오전 1시라 작업장 돌아가는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두 사람 입장에선 어지간히도 골치 아픈 상황이겠다 싶었다. 수천만 원이 날아가게 생긴 거잖아.

그나저나 저 진흙 덩어리 이리저리 막 꾸물대는데 말이다. 손님이 들어와서 보면 좋은 소린 절대 못 듣는다.

"얘기 중에 죄송한데, 이거 좀 치워도 됩니까? 계산대 더러워질 거 같아서."

"네? …아, 참. 정신없어서 그냥 올려놨네. 제가 치울게요, 찬이 씨."

"아뇨, 치우는 건 제가 치울게요."

별생각 없었다. 서큐버스 오바이트도 치운 마당에 이거라고 못 치울까.

그래도 맨손으로 만지고 싶지는 않아서, 일단 빗자루 집어다가 계산대 밑에 쓸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 진흙 덩어리가 내 반대 방향으로 슬금슬금 도망가는 게 아닌가.

방향 없이 움직이던 놈이 딱 나만 피해서 도망쳐 대는 탓에 쓸어내리기가 영 애매했다. 내가 뻘짓 하는 걸 바라보고 있던 윤하 누나가 진흙 덩어리를 슥 집고는 말을 꺼냈다.

"이게 찬이 씨만 피해서 도망치는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근데 그거 맨손으로 만져도 돼요?"

"마력 내성 있으시면요. 전 나중에 손 씻으면 되고."

[ 찬아. ]

조용히 있던 점장이 내 이름을 불렀다.

"예, 점장님."

[ 음… 혹시 그거 한번 집어볼 수 있니? 맨손으로. ]

"어… 저걸요?"

사정 다 아시는 분이 왜 이래? 내성 있어야 된다잖어.

[ 싫으면 안 해도 되는데… 혹시나 싶어서. ]

뭐가 혹시나 싶다는, 아. 아까 그건가? 내 몸이 마력이 안 통하는 체질이라는 거?

"제가 만져도 괜찮다 생각하세요?"

[ 내 생각엔 그래. ]

"그렇다면 뭐."

모르겠다. 월급 주는 사람이 까라면 까야지, 뭘 어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하 누나가 내 쪽으로 고름을 슬쩍 들어 보였다. 내가 손을 들이밀자, 진흙 덩어리는 나한테 만져지는 게 그토록 싫은지 몸을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나도 싫어, 인마.

그래도 집었다. 내 손이 닿은 진흙 덩어리는 몸을 부르르 떨며 회색빛으로 바래지다가, 이내 딱딱한 돌멩이로 변해버렸다.

바라보던 윤하 누나가 짧게 감탄했다.

"오?"

"점장님. 이거 만지니까 그냥 돌멩이가 돼버렸는데요?"

[ 검진기도 한번 대볼래? ]

시키는 대로 검진기를 꺼내 대봤으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짐작하던 게 맞는 것 같다.

"그, 아무 반응 안 나오게 되긴 했는데요. 이거 아까 얘기하신 그거의 연장선인 건가?"

[ 응. 그런데, 아예 아무런 반응이 없어? 하나도? ]

"네."

[ …찬이 네 체질이 좀 많이 특이하네. 상상 이상으로…. ]

이후 분위기가 어째, 좀 이상하게 흘러갔다.

스피커폰 너머의 점장 목소리는 또 나한테 뭔가를 시키려는 눈치였고, 윤하 누나는 이젠 날 보며 눈을 반짝여대기 시작했다. 말이 나오는 건 못 막겠다 싶어 아예 선수를 쳤다.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지금 막 생겼죠. 찬이 씨, 잠깐 내려가서 물건 한번 같이 보시죠?"

"글쎄요. 점장님이 허락하시면 모르겠는데."

점장도 똑같은 뉘앙스로 말을 했다.

[ 그 고름이 쉽게 말하면 오염된 마력 덩어리 같은 거라서, 정화 작업을 거치면 딱 그런 모습이 되거든? ]

"전 만지기만 했을 뿐인데요."

[ 그러니까 더 신기한 거지. 잠깐 문 잠가놔도 되니까, 내려가서 같이 한번 봐줄 수 있어? ]

영 내키질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편돌이 업무는 아닌 것 같아서 그렇다. 편돌이가 할 줄 아는 게 많으면 좋긴 한데, 바코드 잘 찍고 근무 빵꾸 안 내고 라면 박스로 테트리스만 잘해도 충분하단 말야.

"점장님. 죄송한데,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정화 작업이 편돌이 업무는 아닌 것 같거든요…."

[ 잘되면 금일봉 줄게. ]

"옙."

그럼 해야지. 나 돈 벌어야 된다.

카운터 구석에 놓인 A4 용지 하나를 집어다 '화장실 다녀옵니다'라고 적어놓고 문짝에 붙여놓고 문을 잠갔다. 여기서 팁을 하나 더 주자면, 행여라도 편의점 문짝에 이런 게 붙어있거든 그냥 다른 편의점을 가라.

이게 대부분은 화장실 가는 게 맞는데, 이거 붙여놓고 지 친구 불러다 밖에서 빈둥대는 불량 편돌이들도 가끔 있어서 그렇다. 이런 놈들은 전화번호 적어놓고는 받지도 않어,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라.

사무실 창고로 향해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 윤하 누나는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는데, 적잖이 관심이 생긴 것 같았다. 내 체질 말고, 나란 인간 자체에 대해서.

"찬이 씨, 알바 전엔 무슨 일 했어요?"

"회사 다녔어요. 망했지만."

"어머. 뭐 하는 회사였길래."

"시키는 일은 다 했죠. 사람 만나라면 만나고, 공사판 가서 구멍 뚫으라면 뚫고, 기계 다루는 법 물어보면 알려주고…."

"그런데 망했다고 하니, 견실한 회사는 아니었나 보네요."

견실하긴 했다. COVID―19라 명명된 핵폭탄이 회사 머리통을 박살 내기 전까지는 말야.

물론 이 부분까진 말 안 했다. 이 얘길 꺼냈다간 내가 이세계 출신 편돌이라는 것까지 밝혀야 하는데, 그걸 아는 건 점장 한 명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뭐… 그랬던 것 같아요."

"아. 이런 것까지 물어보면 좀 실례인가?"

"딱히요. 지금은 거기 일 안 하니까. 대신 저도 여쭙고 싶은 게, 알바 전에 무슨 일 했는지는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별거 아녜요. 그냥, 회사 일 하기엔 아까운 사람 같아서."

아까 정화 작업을 보고 하는 말이겠거니 했다.

물어보려 했는데, 창고 밑에 도착해서는 입이 열리질 않았다. 창고 내부가 꼭 지하 던전의 일자 통로처럼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조명이 있어서 그럭저럭 밝긴 했지만, 여길 돌아다니려면 철검과 방패, 포션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돌아다니다 보면 슬라임 나올 것 같어.

"이건 또 뭔…."

"나중엔 익숙해질 거예요. 나도 처음엔 언니가 대체 뭔 짓을 해놓은 건가 싶었거든."

익숙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은 혼자 들어왔으면 오줌 지렸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윤하 누나는 말한 대로 이곳에 익숙한 듯, 앞장서서 나아가며 통로 벽면에 뚫린 방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숫자를 헤아렸다. 따라가며 방 내부 하나하나를 힐끗 쳐다봤는데, 알아볼 수 있는 건 뭔 무기가 가득한 방 한 곳뿐이었다.

네 번째 방 안으로 들어간 누나를 따라 들어가자, 온갖 상자가 가득 쌓인 구석에 포장이 벗겨진 물류가 바로 보였다. 보면서 느낀 건, 드래곤 비늘보다는 잘라낸 거목 몸통처럼 생겼다는 것.

"어때요? 이거 구하려고 고생 엄청 했는데."

"글쎄요. 비늘처럼 보이진 않는데."

"수십 개가 뭉친 거라 그래요. 겉 부분 살짝만 긁어내도 바로 멀쩡한 부분 나오고."

긁어내는 일은 사가는 놈들이 알아서 할 일 같고, 이제 내가 뭘 해줘야 되냐.

묻자, 비늘에 가까이 다가간 누나는 비늘 한가운데에 난 구멍을 가리켰다. 내 주먹만 한 직경에, 구멍 언저리에 기름기 같은 게 남아 반들거려 보기 좋지는 않았다.

"아까 퍼낸 고름이 이 안쪽에서 나왔던 거거든요?"

"음… 예…."

"그러니까, 아예 이 안에 팔 집어넣으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뭘 어떻게 생각해, 하기 싫어 죽겠다는 생각이지.

그래도 내 금일봉이 걸린 문제다. 어차피 할 거, 우선 이부터 악물고….

주먹을 쥐어 구멍 안에 냅다 쑤셔 넣자, 아까 덩어리를 집었던 느낌이 팔 전체에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옆에서 보면 연필깎이에 연필 깎는 것처럼 보일 것 같다.

다행히도 내 팔이 깎이진 않았고. 그랬으면 산재 신청했지.

대신 박힌 팔이 안쪽에 그대로 박혀버렸다. 도저히 빠지질 않아, 아예 거목을 양발로 디뎌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한참 동안 끙끙대어 겨우 팔을 빼낸 뒤 한 번 바라보니, 시멘트 포대에 담갔다 뺀 듯한 꼴이었다.

"어… 이거 잘 된 겁니까?"

"찬이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잘 된 것 같아?"

쥐뿔 모르겠어서 고개를 젓자, 잠깐 고민하던 누나는 창고 위로 쏜살같이 올라가서는 검진기를 가져와 내 팔과 구멍 안쪽에 대고 삑삑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내게 엄지를 척 들어 보였고. 난 스마트폰을 꺼내 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하인데 전파가 통하긴 하네.

"잘 됐는진 모르겠고, 일단 검진기에 반응은 없어요, 점장님."

[ 와, 그거면 됐어. 고마워, 찬아. 진짜로. ]

"근데 지금 팔에 뭐가 묻어서 씻어야 할 거 같은데, 제가 세면대에서 비누는 못 봤거든요?"

[ 진열대 바디워시 하나 집어서 계산하고 그걸로 씻어. 영수증만 보관해 두면 돼. ]

"네."

[ 그리고… 아, 문자로 계좌 찍어줘. 돈 바로 보내줄게. ]

해냈닭! 오늘 저녁은 치킨이닭!

9화. 납품받는 편돌이 (3)

팔에 굳은 덩어리를 닦아내는 데에 30분이 걸렸다. 죽는 줄 알았다.

닦는 도중에도 손님들이 찾아와서 한 팔로 일을 해야 했는데, 봉투에 물건을 도저히 못 담겠어서 끙끙대는 걸 윤하 누나가 옆에서 거들어 줬다. 영 부담스러워서 물어봤다.

"퇴근 안 하세요?"

"그 팔에 묻은 거 다 닦아내면요."

"졸리실 텐데 그냥 가시지."

"글쎄, 괜찮다니깐요. 찬이 씨가 안 도와줬으면 작업장 찾는다고 지금도 온갖 곳 날아다니고 있었을걸?"

말하며 콘 아이스크림 끝을 밑으로 향하게 집어넣는다. 저거 저렇게 담으면 봉투 터지는데….

"야근 안 하게 된 보답으로 도와주는 거니까, 아무 말 마요."

그러라니 그러기로 했다.

"개인적으로는 수고비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데…."

"안 주셔도 돼요. 이미 점장님한테 돈 받았고."

바로 거절했다. 이미 점장이 챙겨준 금일봉만 해도 알바 하루치를 한참 넘어갔으니까. 난 일당만 받으면 충분하단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뭘 더 받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이 쉽게 돈 벌면 쉽게 망가진다. 윤하 누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줄 돈이 없어. 이번 달 잔고 바닥났거든요."

"저 물류 때문인가 봅니다."

"저것도 있고, 담당하던 게 몇 개 더 있거든요. 원래 헌터가 정산 직전엔 쪼들리니까, 이해 좀 해줘요."

"이해하죠. 월급날 직전에 거지 아닌 직장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찬이 씨도 지금 돈 없나 봐요?"

집세 모자라서 어쩌나 하던 참이었는데 점장이 내 통장에 링거 꽂아준 참이다. 사람이 굶어 죽으란 법은 없구만.

"대신 카드 살아있으니까 마실 거라도 사드릴게요. 찬이 씨 초코우유 좋아해요?"

"좋아하는데, 지금은 못 먹어요."

"에이, 사양하지 말고."

"제가 사양하는 게 아니라…."

진짜 먹으면 안 돼서 못 먹는 거다. 이것도 팁이라면 팁인데, 편돌이 하는 도중에 절대, 절대 유제품 먹지 마라.

왜냐면 편돌이 일할 때의 특징 중 하나가 없던 유당불내증도 생겨난다는 것이고, 배탈이 나게 되면 해결할 방법이 딱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 걸어 잠그고 화장실로 뛰쳐나가는 거.

이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데, 눈치가 엄청 보이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화장실 다녀오라고 대타를 세워주는 것도 아니라 그동안에는 편의점 영업이 중단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장실도 함부로 가기 힘들다. 초소 경계근무 서는 것도 아니고….

생리 현상 갖고 왜 그러냐며 얼굴에 철판 깔 수 있는 성격이어도 가능하면 먹지 마라. 우유 마시고 싶은 거 잠깐 참으면 몸도 마음도 훨씬 편해진단 말야. 전 유당불내증 없는데요? 하는 사람들도 그냥 먹지 말라면 먹지 마. 나도 없던 게 생겼다니까?

비슷한 이유로 폐기 잔뜩 쌓였다고 배 터지도록 주워 먹지도 말고. 경험자가 하지 말라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그럼 커피?"

"아메리카노 부탁드리겠습니다. 투 플러스 원 있던 걸 봐둬서…."

도중에 말을 끊었다. 손님이 와서였다.

시뻘건 얼굴은 표정이 풀려있고, 머리는 반쯤 벗겨졌는데 귀는 양옆으로 뾰족했다. 다섯 글자로 요약하면, 술 취한 엘프였다. 다가와서는 내게 물었다.

"사장… 그… 그, 소주 어딨어?"

"저쪽 냉장 코너 맨 밑에 있습니다."

설명해 주자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휘청이는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았다. 저거 딱 봐도 진상 부릴 것 같은데….

가져온 건 참이슬 후레쉬 한 병. 1,800원이다.

"1,800원입니다."

"잠만 있어봐…."

한참 주머니를 짤그랑거리더니, 50원짜리 100원짜리가 뒤섞인 동전 뭉치를 내게 내밀어 온다. 세어봤더니, 100원이 모자랐다.

"손님. 100원이 모자라는데요."

"으응? 맞는데? 1,700원."

"소줏값이 1,800원이라서요."

"이 병이 100원이잖어."

말하며 병을 쥐고는 계산대 위에 탁탁 두드리며 말한다.

"지금 여서 원샷하고, 병 주께. 그럼 딱 맞잖어. 그치?"

맞겠냐?

아니, 계산은 맞다. 편의점에서는 공병도 받고 있고, 소주병이 100원이니까. 손님이 땅을 파서 100원을 마저 주워 오든 단기알바를 하든 금액만 채워오면 난 신경 안 쓴다. 근데 문제는 말이다.

"손님, 편의점에서 술 드시면 안 됩니다."

"뭐? 왜?"

왜긴 왜야? 불법이니까 그렇지.

편의점은 분류상 일반음식점이 아닌 휴게음식점이라, 매장 내부에서 술을 마시는 게 불법이다. 덧붙여서 편의점 밖 테이블 위에 술판 까는 것도 불법이고.

법적으로는 그렇고, 도의적으로는 편의점이 어른들만 오는 곳이 아니잖은가. 손님, 특히 꼬맹이들이 과일젤리 사러 왔다가 술 냄새 맡으면 어떤 기분이겠냐고.

"그, 이해하는데. 사장님 입장을 이해는 하는데!"

설명을 듣고 난 후엔 이렇게 말하더라. 허나 말을 마저 들어보니 이해는 개뿔, 내 말을 듣긴 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집이 멀어. 멀다구. 그러니까 여기서 5초 만에, 아니 3초 만에. 먹고 갈게. 나 술 잘 먹어, 걱정 마."

"손님이 술을 잘 드시고 못 드시고는 상관이 없고, 아예 여기서 드시면 안 된다니까요?"

"얼마 안 걸린다니까? 후딱 마시고 나간다니까?"

대화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 와중에도 손님 두셋이 더 들어와서는 물건 고르면서도 계산대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고.

답답한 마음에 옆을 슬쩍 바라보니,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윤하 누나가 날 보며 슬그머니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자기가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보였다.

"괜찮아요."

괜찮다고 했다. 일단 찾아오면 손님이든 손놈이든 받는 게 내 일이었으니까. 엘프를 노려보며 딱 잘라 말했다.

"여기서 술 드시는 건 불법이고 전 큰일 나기 싫으니, 나가서 술 드신다고 약속하십쇼. 아니면 술 안 팝니다."

"뭐… 뭐 인마?"

그 뒤엔 그냥 무시했다. 막 물건을 골라 온 손님이 난감해하고 있길래,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네, 손님. 계산해 드릴까요?"

"아… 아, 네."

엘프 놈이 어안 벙벙히 서 있든 말든, 계산대 앞에 쌓인 라이터 너머로 물건 받아서 계산하고, 보내고, 다음 손님도 받아 보내고. 이 양반들도 종족은 인간이 아니긴 했으나, 최소한 진상은 안 부렸다.

그렇게 손님 셋을 받을 무렵, 화가 잔뜩 오른 엘프 놈이 소리치듯 말했다.

"에이 시팔, 그래. 더러워서 안 먹어, 더러워서!"

"매장 안에서 소리 지르시면 안 됩니다."

"갈 거야, 새끼야! 나가서 먹을 테니까, 종이컵이나 내놔."

이 새끼가, 여기가 동네 다방도 아니고 종이컵을 왜….

아니, 아니. 아니다. 종이컵도 파는 거라고 했다간 그거 갖고 또 꼬장 부릴 게 뻔해. 그 전에 빨리 내보내고 싶다.

계산대 밖으로 나와, 커피머신 옆에 진열된 컵 하나를 꺼내 줬다. 종이컵을 받아 든 엘프는 그 자리에서 병을 까고는, 컵에 절반을 채운 뒤에 중얼거렸다.

"시이팔, 빌어먹을 세상이 술도 못 먹게 하네."

그러곤 나가버렸다. 그 결과로, 반쯤 남은 소주병 하나가 계산대 위에 덩그러니 남았다. 소주병 주둥아리에서는 술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고.

"저 이거 좀 버리고 올게요."

어쨌든 비우고 뚜껑 닫으면 이것도 100원이니까. 윤하 누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같이 나가요. 나도 슬슬 집에 가야 할 거 같아."

그렇게 나란히 밖으로 나왔다. 근처 하수구를 찾아 소주를 흘려보내고 뚜껑을 닫고. 윤하 누나를 바라보니, 입에 전자담배를 물고 있었다. 의외다 싶어 물어봤다.

"담배 피우세요?"

"폈었죠. 이거 금연초예요. 담배 아니고."

"아. 전담인 줄 알았어요. 요즘은 금연초가 전담으로도 나오네."

"정작 이걸 못 끊고 있어서 문제지만요. 찬이 씨는 담배 피우나?"

"피웠었는데, 끊었어요. 몇 년 전에."

"아, 정말?"

나도 담배를 몇 년 피우긴 피웠었다. 군 입대할 즈음부터 회사 다니기 직전까지 피워댔으니 한 5년 됐나.

"어떻게 끊었어요?"

"끊고 싶어서 끊은 건 아니고, 살 돈이 없으니까 알아서 끊게 되더라고요."

정확히는, 스스로가 한심해져서 끊었다.

회사 취업 1년 차에는 월급이 하도 쥐꼬리여서, 여기서 돈 빠지고 저기서 돈 빠지고 하다 보니 생활비도 빠듯했다.

그렇게 두 달 살다 보니 '어디 굴러다니는 돈 없나―' 하며 방 구석구석을 뒤지는 게 일상이 되었는데, 정작 4,500원 모으고 나면 그걸로 담배 사러 편의점에 가게 되더란다.

그러다 4,500원도 못 찾게 됐을 즈음, 허탈감에 거울을 보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담배를 태우는 게 아니라, 담배가 날 태우고 있다고.

그 이후로 끊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쓴 방법은 그냥 껌을 씹고, 씹고, 또 씹으면서 버티는 것이었는데, 잇몸이 헐도록 껌을 씹어대고 나니 어질어질한 금단 증세도 사라지고, 담배 냄새도 역해지더라.

그러다 보니 끊게 됐다. 이 얘길 하고 나니, 윤하 누나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감탄해 왔다.

"그건 찬이 씨가 근성이 있어서 성공한 방법 같은데요…?"

"저도 추천하겠다고 한 말은 아니에요. 그냥, 전 그랬다고."

그러고선 잠시 대화가 끊기고, 이후에 누나가 슬쩍 말을 꺼냈다.

"찬이 씨, 알바 계속 할 거죠?"

"그럴 것 같아요. 근데 왜요?"

"방금 진상 보니까 PTSD가 도져서 그래요. 혹시나 싶어서."

말하며 윤하 누나는 허리춤에 찬 칼을 슬쩍 만지작거렸다. 도움받았다간 왠지 큰일 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계속 해야죠. 오늘 일은 오늘 일이고… 금일봉도 받았는데, 내빼면 좀 그렇지."

"그럼 다행이구요. 근무 시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예요?"

"밤 10시부터 아침 10시까지요."

"매일?"

"네."

"버틸 수 있겠어요?"

"못 하면 못 하는 거죠, 뭐."

"음… 그럼 며칠 뒤에도 계속 있을 거고…."

그야 계속 있겠지. 그런데 느낌이 꼭, 말을 걸어줬으면 좋겠다 싶은 혼잣말이었다.

그래서 물어보려 했는데, 윤하 누나는 씨익 웃고는 휙 휘파람을 불기만 했다. 그러자 반대편 건물의 주차장에서 페가수스가 날아와 착지하고는 콧김을 뿜어댔다. 이놈은 종이 서러브레드일까, 홀스타인일까?

그 위에 올라타서는 페가수스의 갈기에 머릴 슥 기댄 채로 말해온다.

"당분간은 못 오고, 며칠 뒤에 또 한 번 봐요."

"매일 오시는 게 아니었어요?"

"마물 관련 물류 담당하는 게 좀 힘들어서요. 시간도 좀 걸리고."

거 바쁘게 산다. 이어서 고삐를 잡은 뒤,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왔다.

"나 갈게요. 수고해요. 찬이 씨."

나도 인사나 건네보기로 했다.

"야간운전 조심하고, 윤하 누나."

누나는 한 방 먹었다는 듯 멍하니 날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리고는 답했다.

"걱정 마. 내가 경력이 몇 년인데?"

이렇게 서로 말을 놨다.

* * *

이후에도 몇 시간 동안 손님 수십 명을 더 받았고, 그사이에 진상도 몇 있긴 했지만 그건 당장은 넘어가고.

마침내 아침 해가 떴다. 힘세고 좋은 아침!

10화. 공작하는 편돌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