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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예언하는 자의 최후(2)

"놓쳤다는 거냐."

까득.

니콜라이의 창백한 얼굴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아이템을 털린 것도 모자라 그대로 놓쳐버렸다. 누가 훔쳐갔는지조차 제대로 파악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너덜너덜해진 이반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장······. 동료들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콰아앙!

산산조각이 난 이반이 그대로 바닥에 쳐박혔다.

러시아의 헌터 니콜라이는 더러운 게 닿은 듯 발을 털어냈다. 그의 군복 바지에서 피가 뚝뚝 흘러 내렸다.

"빌어먹을······. 하, 이 몸이 눈 뜨고 아이템을 도둑 맞아? 제대로 열받게 하는군."

니콜라이.

그의 진짜 정체는 최상위 부패의 마족.

그만한 프라이드가 있음에도 아무런 손도 못쓰고 아이템을 빼앗겼다.

"쯧······."

에픽 아이템 차원 격리의 구.

콰득.

니콜라이는 조각이 난 이반의 시체를 짓밟았다. 늘상 하는 화풀이었다.

"그게 대적자에게 넘어가기라도 하면······. 대참사가 따로 없어."

"예언의 마족과 검의 마족에게 합류할까요? 그러면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 수도······."

금발을 묶은 러시아의 여성 헌터가 어깨를 으쓱였다.

혀를 찬 니콜라이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그는 깊게 들이마신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내뿜었다.

"하, 진짜 개같이 맛없는 담배라니까."

합류.

나쁘진 않지만.

많은 걸 포기해야 했다.

마계왕이 내린 명령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래, 당장은······.

머리를 식힌 니콜라이가 담배로 반대방향을 가리켰다.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가서 대기한다. 이건 예기치 못한 사고인 셈 치자고. 책임을 져도 당장은 아니다. 일어나라 이반."

그의 말에 바닥에 조각난채로 흩어져 있던 이반이 발목부터 천천히 맞춰지기 시작한다. 굴러 온 시체의 조각들이 이반의 몸을 완벽히 구성했다.

재생에 성공한 그는 경례 자세를 취했다. 만들어진 미소가 그의 얼굴에 붙어 있다.

"예스, 알겠습니다. 대장."

밀림의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부패의 마족이 중얼거렸다.

"인형 놀이도 슬슬 질령 나는군."

그의 뒤를 따르는 수천의 언데드들.

부패의 마족은 애써 신경을 돌렸다.

아이템 하나로 크게 전황이 바뀌지는 않을 거다.

예언의 마족은 이러한 상황까지도 예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신뢰가 있었다.

* * *

콰아아앙!

아스카할 부족이 위치한 마을.

피어오른 검은 마기가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었다.

"마족······. 마족이 침입했습니다!"

검은 뿔과 붉은 눈.

이지한이 미리 일뤄둔 마족의 외양이었다.

"팔이 하나 없다! 저 놈부터 노려!"

"무조건 막아!"

부족의 전사들이 곧장 달려 들었지만, 그들은 몇 발자국 못 가서 쓰러졌다.

"?!"

"크, 크으윽······."

"무슨 사악한 요술을······."

"커허억···!"

무기를 겨누는 것도, 심지어는 바라보는 것조차도 불능. 하나둘씩 자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지 않으면 몸이 터질 것만 같았기에.

심하게는 피를 토하는 이까지 있었다.

그들의 사이를 걸어오는 예언의 마족이 가볍게 웃었다.

"너무 애쓰지 마세요. 볼 일이 있는 건 한 사람 뿐이니까요."

그런 예언의 마족의 뒤에 따라 붙은 검의 마족.

두 마족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가진 강대한 격이 전사들을 압도할 뿐이었다.

"뭐냐, 저 놈들은······."

"큭, 조심하세요. 위압감이 무슨······."

마을을 지키고 있던 전사들과 헌터들이 몰려 왔지만, 쉽사리 접근조차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두 마족은 아무런 방해 없이 마을의 중심부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아, 찾았다. 저기에 있네요."

예언의 마족이 가리키는 방향.

거기에 서 있는 건 윤서현이었다.

그녀를 확인한 예언의 마족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 역시 예상했던대로 인과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네요. 흥미로워요."

"뭐야, 마족······? 마족이 왜 여기에······?"

윤서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맹수왕의 성에 있어야 할 놈들이 갑작스레 마을에 나타난 것이다.

사실상 마족들이 적진으로 뛰어 들어 온 상황.

이지한도 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예언의 마족은 미래를 비틀었다.

예정된 결과보다 한발자국 앞서 행동을 개시했다.

따라서 이지한이 확인한 미래에는 없던 일이 생겨난 것이다.

윤서현의 동요에 예언의 마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족 맞아요. 지금부터 대적자를 포함한 모든 것을 죽일 겁니다. 그 계획에서 제일 방해 되는 게 그쪽이라서요. 죽이려고요."

예언의 마족과 시선을 교환한 검의 마족이 검집에 손을 올렸다.

그 다음 순간.

터엉—!

소리 없는 검격이 마을을 갈랐다. 수십 채의 가옥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근처에 자리 잡은 수천 그루의 나무도, 사람들도조차 반으로 갈린 채 떠올랐다.

찰나가 영원 같던 시간이 지나고.

철컥.

검의 마족이 검을 납도했을 때.

그것들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크아아악!"

"으아악!"

"사, 살려줘······!"

외관으로는 멀쩡했으나.

그 여파는 무시무시했다.

베어진 사람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몸은 붙어 있으나 심각한 내상이었다.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고 대비하지 못했다.

단 한 사람 윤서현을 제외하면.

"크으윽······."

윤서현이 순간적으로 생성해 낸 보랏빛의 공간 방어막이 마을 한쪽을 뒤덮었다. 반으로 갈린 흔적이 있지만, 보호막을 뚫어내진 못했다.

윤서현 덕분에 피해를 입은 것은 마을의 일부에서 그칠 수 있었다.

"괴, 괴물이다!"

"도망쳐. 다들 물러나!"

"으아아아!"

그렇다곤해도 사람들의 전의를 꺾기엔 충분했다.

그만한 대규모의 기술을 펼쳤음에도, 검의 마족의 얼굴은 평온하다 못해 고요했다. 반면 윤서현의 이마에선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차원이 달라.'

은발의 마족.

그 정체는 검의 마족이다.

함선 세이비어가 물리쳤던 마족을 이끌던 군단장.

함장 진세아는 어렵지 않게 물리쳤었지만, 직접 마주하니 그 압박감이 차원이 다르다.

유적에서 마주했던 초월자보다도.

더 상위의 존재라는 게 느껴진다.

솨아아아—!

하늘에서 화살이 쏟아져내렸다. 뒤쪽에 있떤 윤지은의 지원이었다. 예언의 마족은 단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은 전부 예언의 마족을 빗나가 땅에 꽂혔다. 예언의 마족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무조건 죽여야겠어요. 대적자 말고도 예측이 안되는 존재가 있다는 것부터가 치명적이니까요."

"서현아! 괜찮아?!"

윤지은이 급하게 달려와 윤서현의 상태를 살폈다.

"나는 괜찮아. 문제는······."

저 놈들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검의 마족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나쁘지 않은 실력이군. 유언을 남길 시간은 주마."

윤서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격을 제한하고 있는 게 틀림 없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기백이다.

뒷편에서 화살과 마법이 이어서 쏟아졌다. 마을에 남아 있던 헌터들의 지원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부질 없었다.

예언의 마족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모든 공격은 빗나간다. 그게 당연한 이치라는 듯이 말이다.

'지한씨가 있어야 해······.'

윤서현의 옆에 서 있떤 윤지은이 떨리는 손으로 활을 들어 올렸다.

파아앙—!

그녀가 쏘아낸 화살이 녹색의 선을 그리며 쇄도했다. 검의 마족은 검을 들어 올렸다.

콰아아앙—!

화살은 그대로 검에 가로막혔다. 눈부시게 빛나던 화살이 빛을 잃은 채 바닥에 떨어졌다.

예언의 마족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반항하지 마세요. 두 사람 다 살 수 있는 미래는 없어요. 아마, 대적자를 기다리는 모양인데······. 대적자는 못 와요."

지금쯤이면 부패의 마족이 차원 격리의 구를 사용해 대적자를 가뒀을 거다.

대적자가 자력으로 탈출할 확률은 0에 가깝다.

이 여자를 처리해둔다면 그 확률은 더욱 낮아지고.

윤서현은 가소롭다는 듯 마족을 바라봤다.

"데려오면 그만이거든?"

이지한을 찾아내서 공간이동으로 데려 온다면 승기를 바꿀 수 있다.

"그러니까, 이미 데려 올 수 없는 공간에 갔다니까요. 아니, 애초에 여기서 벗어날 수도 없을 걸요."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공간이 뒤바뀌기 시작하려는 찰나.

콰아앙—!

땅을 박차고 뛰쳐 나온 검의 마족이 윤서현을 걷어찼다.

"크흑!"

"서현아!"

공간 방어막 덕분에 피해는 줄였지만, 윤서현은 바닥을 굴러 근처의 가옥에 부딪혔다.

"공간이동이 시전 되기 전에 막으면 그만이다."

"용서 못해······!"

윤지은이 활을 휘둘러 검의 마족을 노렸지만, 검의 마족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피한 뒤 윤지은의 복부를 가격했다.

"언니!"

윤서현과 마찬가지로 근처의 가옥에 쳐박혔다. 보호막이 없기에 더욱 치명상이었을 거다.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둘 다 사이좋게 죽여줄테니, 걱정마라."

검의 마족이 검을 뽑아드는 그 순간이었다.

파직!

예언의 마족의 앞에 자그마한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윽, 잠깐만요. 아니, 이럴리가······."

"무슨 일이지?"

"미래가 바뀌었어요. 빨리 끝내고 여기를 떠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다."

검의 마족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상관 없었다. 예언의 마족이 말을 따라서 손해를 봤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검의 마족이 검을 들어 올리는 찰나.

콰아아아앙!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져내렸다. 그 주변으로 밀림의 진흙이 크게 튀어 오르고, 주변의 나무들이 세차게 흔들렸다.

떨어진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한씨!"

윤서현이 소리쳤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다행히 맞춰왔나 봅니다."

이어서 공중의 와이번에서 엘리스와 진세아가 뛰어 내렸다. 엘리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부님, 예언이 빗나갔어요. 계속해서 바뀌고 있어요!"

"바뀌면 바뀌는대로 알려줘."

"넵!"

때에 맞춰 도착한 이지한을 바라보는 예언의 마족의 입가가 뒤틀렸다.

"하, 이건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네. 이런 식으로 미래가 뒤틀릴 수 있단 건······. 정말 이해가 안 가네요."

부패의 마족이 실패했다. 이지한의 발목조차 붙잡아두지 못한 것이다.

그런 미래는 조금도 읽지 못했다.

대적자에 대한 정보는 분명 충분했을 터.

이번에는 그가 가진 변칙적인 요소까지 모두 고려했다.

이렇게까지 비틀린 미래에 원인이 있다면······.

"설마 이걸 찾나?"

이지한이 들어 올리는 차원 격리의 구.

그 뒤로 의기양양하게 단검을 들어 올리는 진세아.

인과의 영역에서 벗어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예언의 마족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그렇게 나와야 대적자죠. 아, 진짜 예언 따위 하나도 쓸모 없게 되잖아요. 내가 살아 온 세월이 한순간에 부정 당하다니, 이게 맞아요?"

그리 소리친 예언의 마족이 붉은 눈을 번뜩였다.

[ 예언이고 나발이고 그냥 전부 쓸어 버리죠. ]

예언의 마족이 숨겨두었던 격을 개방했다. 거센 격의 흐름이 일대를 뒤덮는 폭풍이 되어 나타났다.

콰아아아—!

"으윽!"

"다, 다들 조심해요!"

마을 전체가 검은 폭풍에 휩싸인 상태.

SS급에 다다른 윤서현과 진세아, 엘리스만이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었다.

"이, 이제 어떻게 해요?!"

"너희는 검의 마족을 상대해."

지금의 진세아, 엘리스, 윤서현이 힘을 합친다면 가능할 거다.

그리 판단한 이지한은 별빛의 검을 들어 올렸다.

"나는 예언의 마족을 상대할테니."

[ 하하, 건방지네요. 마족을 얕보고 있는 거 아닌가요? ]

폭풍을 뚫고 불현듯 나타난 예언의 마족. 그의 등 뒤에 뭉친 마기가 송곳처럼 이지한을 노렸다.

카가각—!

마기를 막아내는 별빛의 검에서 붉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엄청난 속도지만, 타재간파의 서를 발휘한 상태에선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광화, 초시공인지, 신속, 리미트 해제의 효과를 모두 받은 이지한의 능력치는 마족과 비등한 수준이었다.

콰앙! 콰앙!

마기를 쳐내고 이지한이 검을 휘두르는 횟수가 늘어가지만.

[ 내 계획을······. 내 예언을 돌파했다고 이길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당신과 나 사이에는 압도적인 격차가 있어요. ]

그 힘은 완벽한 평형.

둘 사이에서 오고 가는 무수한 공방.

예언의 마족은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 당신이 경험하지 못한 막대한 시간과 경험이 나에게는 있단 말이에요. 마족을 막아설 영웅이란 자들 모두가 내 손에 죽었죠. 당신도 다르지 않아요. ]

예언의 마족의 공격에 기세가 실렸다.

고속으로 뻗어오는 마기의 칼날이 이지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억지력을 해소하기 위해 바친 반대편의 손이었다.

그 손 위로 검 하나가 나타났다.

이번 싸움을 위해 미리 준비한 에픽급 아이템이었다.

[ 그쯤하고 포기하세요. 아무것도 없이 비등한데, 내가 아이템까지 사용한다면······. 그 격차는 더욱 커지겠죠. ]

그리 말하는 예언의 마족은 자신이 승리했다는 표정이었다.

콰아아아—!

검게 오염된 검날이 이지한을 향해 날아왔다. 강력한 마기가 서린 검날. 그 파괴력도 위력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하리라.

"글쎄."

따라서 이지한은 별빛의 검을 움켜쥐었다.

『 별빛의 검의 해방 효과 '별의 울음'을 발휘합니다. 』

『 다음 일격에 100% 확률로 크리티컬이 적용됩니다. 』

『 크리티컬 데미지는 통상의 3.5배 데미지를 가집니다. 』

콰아아앙!

별빛의 검이 에픽급 무기의 검날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공격을 받은 것은 에픽급 무기.

따라서 무기에 가하는 데미지 또한 크리티컬로 적용된다.

쩌저저적!

마족이 휘두른 에픽급 무기에 급속도로 균열이 새겨졌다. 이지한이 완벽히 검을 휘둘러냈을 때, 에픽급 무기는 산산조각이 난 채로 흩어져버렸다.

[ 뭐? ]

무기를 부숴버리는 압도적인 강함.

상상조차 못한 예외의 상황이 예언의 마족을 뒤흔들었다.

그의 붉은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게 끝인가?"

예언의 마족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하. ]

이런 전투는 여지껏 없었기 때문이다.

예언의 마족이 경험한 전투라함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전술과 전략.

모든 것이 예외적인, 상정되지 않은 전투가 익숙할 리가 없었다.

그런 상대를 놀리듯 이지한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직 놀라기엔 이른데."

스윽.

이지한은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꼈다.

강화의 돌을 사용해 1% 확률로 띄울 수 있는 기적.

와이번을 타고 날아오는 동안, 엘리스의 도움으로 완성해 두었다.

리미트를 해제한 그녀는 몇 번이고 시간 조작을 쓸 수 있었기에.

『 스킬 향상의 반지(기적급)를 장착합니다. 』

그 반지가 지금.

『 모든 스킬의 레벨을 '1' 강화합니다. 』

『 레전더리 스킬 '일자베기 Lv.15'를 획득합니다. 』

이지한의 손에 끼워졌다.

179화 예언하는 자의 최후(3)

에픽 아이템 중 하나가 대적자의 손에 의해 부숴졌다.

이미 예언과는 완전히 비틀어진 전투 양상.

그러나 예언의 마족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대적자가 예언을 뛰어 넘을 수 있어도 최상위 마족이 가진 본연의 힘은 압도적이다.

[ 그깟 반지 하나 꼈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

예언의 마족이 그리 말하는 순간.

그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

타오르던 마기의 기세가 꺾이고 방출하던 격조차 잦아들었다. 예언의 마족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공포심? 두려움?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인간을 상대로 느낄 감정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전신이 움츠러든다. 지금 여기서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는 본능적인 감각이 그의 신체를 잠식했다.

그 찰나의 순간.

무수한 미래가 예언의 마족의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하······.'

예언의 마족은 대적자를 향해 마기의 칼날을 날린다.

대적자는 모든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선 자신을 향해 달려 온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움직임이다.

놀라우리만큼 무방비한 대적자의 심장을 향해,

예언의 마족이 두번째 에픽급 무기 심판의 검을 꽂아 넣는다.

그 다음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한 발 빠르게 이지한의 검이 예언의 마족 자신을 가른다. 마치 자신보다 먼저 공격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별빛의 검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능력인 '선공권'.

그러나 예언의 마족은 이계 규율에 관해서만큼은 알지 못한다.

'그럴리가······.'

몇 백 번을, 몇 천 번을 확인해도 그러한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검으로 공격해도, 마기로 공격해도, 함정을 파도 그 결과는 같다.

무슨 짓을 해도 단 한 번.

대적자에게 기회가 생긴다.

그리고 그 기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낳는다.

'이건 말이 안돼.'

대적자가 휘두르는 검에서 피어난 초월의 불길이 예언의 마족의 존재마저 집어 삼킬 것이다. 회피 불가, 회생 불능의 일격.

'고작 반지 하나가······?'

예언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 앞의 미래는 예언의 마족에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미래를 엿본 예언의 마족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피해야 한다.'

애초에 발을 잘못 들였다. 속속들이 빗나가는 예언에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까득.

이를 악문 예언의 마족의 입가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꼴사나운 결정이었다. 인간을 상대로 꽁무니를 빼다니.

'젠장······.'

그래도 이것밖에는 없었다.

도망친다는 선택지.

대적자에게 맞서지 않고 도망가는 길이 최선이었다.

그 미래에선 자신과 검의 마족 둘 다 살아 있다.

'방법이 없다······.'

당초의 목표는 공간계 능력자의 암살.

그게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굳이 불리한 전투를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다.

[ 아브렐, 후퇴해야 합니다! ]

예언의 마족은 검의 마족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이지한의 눈이 빛났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대적자는 검의 마족도 극복하지 못하는 거대한 힘을 숨기고 있다.

지금은 도망칠 때였다.

[ 그런가······. 그리 하지. ]

검의 마족은 무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격의 개방과 동시에 사방으로 부유하고 있던 은빛의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흩날린다.

그녀라고 쉬운 싸움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도망치게 놔둘 것 같아?!"

콰과과과—!

진세아의 단검이 검의 마족을 향해 사정 없이 몰아쳤다. 진세아가 손에 든 단검 이외에도 또 다른 빛의 단검이 자아를 가진 듯 검의 마족을 압박해왔다.

"오른쪽 위, 중단, 중단이에요!"

뒤쪽에선 엘리스의 지원이 이어지고 있었다. 엘리스가 날리는 총알을 큰 피해는 없었지만, 검의 마족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고개 숙여요!"

검의 마족의 공격을 전부 꿰뚫어 보는 듯한 지시였다. 엘리스의 예언이 검의 마족을 앞질러 쏟아졌다.

진세아는 그 틈을 노리고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 뿐이라면 어거지로 밀어붙일만도 했으나.

우우웅—!

보랏빛의 장막이 검의 마족의 팔 목을 감싼다. 재빨리 마기로 장막을 쳐내지만 곧바로 다른 쪽의 공간이 격리되기 시작한다.

"도망 가게 놔둘 순 없지."

윤서현의 부분 격리.

팔, 다리, 몸통, 손목이 번갈아가며 공간 격리 된다. 신체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통제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큰 기술을 낼 수 없다.

[ ······. ]

결국 검의 마족도 별다른 성과를 못낸 채 진세아와 검을 맞대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나군. 그건 인정하마. ]

그러나 본 실력을 드러낸다면 금방 정리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언의 마족이 허락이 필요했다.

최상위 마족의 힘은 세계의 억지력에 제한 받는다. 그것을 해제하기 위해선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어쩌면 최상위 마족으로서의 이름을 포기해야할 정도로.

검의 마족이 예언의 마족을 살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여지껏 본 적 없는 큰 동요였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게 맞다. 그 판단이 옳은 것이리라.

[ 여기까지다. ]

"어딜 도망가는거야!"

진세아가 달려들었지만, 예언의 마족은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콰과과과—!

마기가 폭발하며 주변의 대지가 솟구쳐 올랐다.

"크윽!"

진세아가 양손으로 마기를 막아냈다. 무형의 대상도 훔쳐낼 정도로 실력이 늘었지만, 상대에게 닿지 못한다면 소용없다.

세 명이서 몰아세웠음에도 손끝조차 닿지 못했다.

콰아아앙!

검의 마족과 동시에 예언의 마족도 마기를 폭사시켰다. 대적자를 향한 것이 아닌 바닥을 향한 공격이었다.

쿠구구구······!

마을의 지반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가옥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일대의 밀림이 통째로 허공으로 부유한다.

"으아아!"

"조, 조심해!"

"다들 꽉 붙잡아!"

헌터들과 부족 전사들이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S급도 견디기 힘든 막대한 격의 홍수 속에서 그들은 살아남는 게 최선이었다.

그 거대한 덩어리들은 도망치는 두 마족의 진로를 가로 막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르르르······!

그어어어!

"뭐, 뭐야?! 왜 여기에 맹수왕의 부하들이······?"

이 주변은 아스카할 부족의 본거지다. 헌터들과 부족 전사들이 전선을 넓혔기에 이곳까지 침공한다는 건 불가능했지만.

맹수왕의 부하들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부유한 땅 덩어리 사이를 뛰어다니며 부족의 전사들을 덮쳤다.

"언데드에요! 죽었던 맹수왕의 병사들이 되살아났어요! 다들 조심해요!"

저 멀리서 무녀인 멜이 나무를 붙잡은 채 가까스로 소리쳤다.

"크아악!"

"이 놈들부터 떼어내!"

"서 있을 자리가 없어!"

마기에 의해 떠오른 땅들과 갑작스레 나타난 맹수 좀비들에 의해 마을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이템을 빼앗긴 부패의 마족이 보여준 최소한의 성의.

도망치려는 상황에선 훌륭한 패였다.

뒤로 멀찍히 물러선 예언의 마족은 이지한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 이번엔 인정하겠습니다. 대적자, 당신의 승리에요. 하지만······. 이 다음은 다를 겁니다. ]

검은 마기와 함께 그들이 멀어져 간다.

* * *

"오빠, 뭐해요! 당장 쫓아가요!"

"지한씨!"

나는 도망치는 예언의 마족과 검의 마족을 보고도 쫓아가지 않았다.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은빛의 날개 채아연을 데려와주세요. 언데드들을 금방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거의 다 이긴 거 아니에요? 이대로 보내도 괜찮아요?"

윤서현 헌터의 말대로다.

『 몰락한 신궁이 당신을 재촉합니다. 』

『 이계의 찬탈자가 당신의 의도에 의문을 품습니다. 』

『 소수의 초월자가 마족을 쫓을 것을 종용합니다. 』

이계 규율이 보내오는 알림 속 초월자들도, 빨리 마족들을 붙잡으라고 난리다.

"이대로 보내면 당연히 안되죠."

나는 인벤토리에서 항마의 활을 들어 올렸다.

예언의 마족은 일단 전면에 나서지 않고 나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겠지만, 나또한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의 예언은 그리 정확하지 못하다.

나와 관련된 것들에 한해서는 거의 다 그렇다.

무재조정의 존재도, 이계 규율의 간섭도 전부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진세아가 아이템을 훔친다는 것조차 몰랐으니까.

오히려 진세아의 활약을 잡아낸 엘리스의 잠재력이 뛰어날 정도다.

파직, 파지직!

활을 잡은 손 위로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마력이 내 몸에 새겨진 마력 회로를 타고 빠르게 흘러 손 끝으로 모였다.

그러니 예언의 마족은 예언은 커녕 생각조차 못했을 거다.

아스카할 부족의 유적에서 만난 초월자 '몰락한 신궁'.

본래 스킬의 주인인 그도 의아해 했으니 말 다했다.

그가 가진 스킬이 얼마나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지.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작용하는지.

나는 특수한 화살을 활에 매겼다. 항마의 화살은 아니고, 내가 아이템을 꽂아 만든 화살이다.

마족의 격압이 사라지자, 뒤늦게 다가온 무녀 멜이 내게 물었다.

"······지금 뭐하려는 거에요?"

"보면 알잖아. 너한테 배운 스킬을 쓰려고."

"그게 지금 무슨······?"

보면 안다.

나는 활의 시위를 놓았다.

파앙!

『 레어 스킬 '요행 : 따라가는 화살 Lv.2'를 발휘합니다. 』

손 끝을 떠나간 화살이 밀림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몰락한 신궁이 말한대로 대단한 스킬은 아니다.

유도 기능이 있는 수많은 스킬 중 하나에 불과하다.

심지어 태생적인 등급은 레어에 불과하기까지 하니까.

우우웅.

그러나 허공을 가르는만큼 화살에 담긴 내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 특성 무재조정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그것은 그대로 50만배의 경험치가 되어 내게로 흘러든다.

항마의 화살을 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화살이 나아가며 경험치가 축적된다.

『 레어 스킬 '요행 : 따라가는 화살 Lv.3'를 획득합니다. 』

『 레어 스킬 '요행 : 따라가는 화살 Lv.4'을 획득합니다. 』

···

..

『 레어 스킬 '요행 : 따라가는 화살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초(超)명중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

푸른 꼬리를 남기며 밀림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화살.

그럼에도 화살은 멈추지 않는다.

밀림의 수풀을 가로 지르고, 기이한 곡예를 펼치며 나무들을 피해 나아간다. 그 목표는 예언의 마족. 놈에게 닿을 때까지 화살은 멈추지 않는다.

고작 레어 스킬에 불과하지만.

일자베기도 시작은 특수 레어 스킬이었다.

11레벨.

그러나 획득하는 경험치는 끝나지 않는다.

내 스킬 최대 레벨은 12니까.

A등급 한계 돌파 퀘스트를 끝낸 보상이다.

품 안에 잠든 애매한 재능의 결실이 빛을 내뿜는 게 느껴진다.

그에 따라 경험치가 가파르게 치솟아 올랐다.

『 레어 스킬 '요행 : 따라가는 화살 Lv.12'를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절대 명중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

콰아아아—!

도약하는 로켓처럼 화살이 붉은 마력을 내뿜으며 가속한다. 그 사이를 가로막는 부패한 언데드의 뇌리를 꿰뚫고, 나무와 바위를 박살내며 전진한다.

『 찬란한 초월의 성배(에픽)의 효과로 지정 스킬의 레벨이 1 상승합니다. 』

『 스킬향상의 반지(기적급)의 효과로 모든 스킬의 레벨이 1 상승합니다. 』

『 레어 스킬 '요행 : 따라가는 화살 Lv.14'를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공간 도약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

과거 아스카할 부족을 세운 초월자.

몰락한 신궁의 경지마저도 뛰어넘은 한 발의 화살.

이지한은 조용히 활을 내렸다.

"피할 수 없을 거다."

* * *

예언의 마족은 게이트에 심장을 적당히 숨겨 놓고서 마계의 틈으로 급히 들어갔다. 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도망쳤지만, 간발의 차였다.

조금만 판단이 늦었어도 대적자의 검이 자신을 베었을 거다.

"······."

게이트와 분리된 마계의 틈.

검의 마족이 그런 예언의 마족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무슨 일이었지?"

"······완전한 오판이에요. 대적자가 숨기고 있는 힘을 심하게 간과했어요. 제 상상 이상이에요.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했던 건데. 이런 상대는 여지껏 없었으니까요."

"그야, 그렇다만······."

마족의 역사상 압도적인 승리만이 존재해왔다. 치욕의 밤을 제외하면 그렇다할 패배는 없었다.

그것이 방심을 부른 걸까.

"어쨌든 곤란하게 됐네요. 아브렐, 당신은 괜찮나요?"

한숨 돌린 예언의 마족이 검의 마족에게 물었다. 검의 마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지껏 그가 이만큼 당황한 적은 없었다.

"필요하다면 내 힘을 해방해도 괜찮다."

"아뇨, 그래선 안되죠. 지금의 게이트 수준에서 억지력을 무시하고 힘을 썼다간, 하위 마족으로 격하될 위험이 있······."

그 순간이었다.

마계의 틈.

우우웅—!

마족이 지배하는 또 하나의 세계이자, 게이트와는 분리된 공간.

그곳으로 의문의 물체가 날아들었다.

화살 한 발.

그 앞에는 화살 촉이 아닌 검은 구체가 달려 있다.

공간을 꿰뚫고 나왔음에도 그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져 있지 않은 화살이.

"!"

예언의 마족을 향해 쇄도했다.

철컥.

검의 마족이 곧장 검을 빼어드려는 순간, 예언의 마족이 그 앞을 가로 막았다.

"막지 마세요!"

"뭐?"

그의 입가에는 허탈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거야, 완전히······."

그의 예언이 지금 상황에서의 모든 미래를 예지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화살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평범한 화살이었다면 맞아도 상관 없었겠지만, 그 끝에 달린 아이템이 문제였다.

차원 격리의 구.

여기에 닿는 이는 대적자가 소유한 공간으로 빨려들어 갈 것이다.

검의 마족이 사로잡히느니, 자신이 죽는 게 낫다.

예언의 마족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완전히 제가 졌네요."

파아아아앙—!

강렬한 폭발이 마계의 틈의 지축을 울렸다. 검은 반원형의 폭발이 세계를 뒤덮는다. 마족조차 항거할 수 없는 필중(必中)의 화살이 예언의 마족을 집어 삼켰다.

『 차원의 구가 대상을 차원 격리 합니다. 』

폭발이 잦아들고 고요해진 세계.

예언의 마족이 사라진 자리.

검의 마족이 덩그러니 남았다.

"······."

그녀의 뻗어진 손이 허망하게 떨어졌다.

180화 예언하는 자의 최후(4)

이번 게이트의 공략 조건은 하나였다.

『 맹수왕의 굴복 ( 0 / 1 ) 』

번거롭게 최상위 마족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맹수왕을 처치하는 것만으로 해결된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놈들도 그걸 알고 있으니 맹수왕을 보호하려 했겠지.'

이 비장의 한 발 또한 맹수왕을 향해 사용할 작정이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그랬다.

다만, 진세아가 훔쳐 온 에픽 아이템에 의해 계획이 완전히 바뀌었다.

예언의 마족을 사로잡는 것으로.

'요행 : 따라가는 화살'

이 스킬이 발동한 화살은 적에게 닿기 전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레벨이 올라갈 수록 그 힘은 강해지는 것이다.

바람을 가르고 공간을 뛰어 넘어 적을 맞추는 궁극의 기술.

『 대상 '최상위 예언의 마족'을 차원 격리의 구에 가뒀습니다. 』

미래의 나는 아스카할 부족을 구해주고 나서야 얻은 기술이지만, 그 미래를 엿본 나는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사, 사부님! 대박! 성공했어요!"

예지가 가능한 엘리스가 환호하며 달려왔다. 영문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벙찐 상태로 날 바라봤다.

"성공? 뭐가 된 거야······?"

"우리가 이긴거야?"

진세아와 무녀 렘이 물었다. 성녀 채아연을 데려 온 윤서현이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마족도 다른 공간으로 넘어갔고, 화살도 도중에 사라졌어요. 설마 마족을 맞춘 건가요?"

"네, 맞습니다. 예언의 마족을 가뒀습니다."

우우웅······.

내 옆으로 검은 구체가 두둥실 떠올랐다. 역할을 마친 차원 격리의 구였다. 소유주인 내게로 돌아온 거다.

나는 그걸 윤서현에게 건넸다. 보자마자 원리를 이해한 모양.

그녀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예언이 마족이 격리 차원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후속 조치를 부탁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그리 말하며 차원 격리의 구에 마력을 쏟아붓는 윤서현. 그녀의 주변으로 보랏빛 기운이 모여들었다.

최상위 마족들은 이곳에 넘어오기 위해 상당한 대가를 지불했을 거다. 그들이 본래 소유한 힘과는 한참 거리가 먼 힘이다.

예언의 마족이 팔 하나가 없는 것도 그 대가겠고.

한마디로 약화된 상태란 뜻.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를 무너뜨린 게 유효했다.'

본래대로라면 최상위 마족도 메이저 게이트를 통해 힘을 보존하며 넘어왔을 거다. 그걸 막아냈기에 지금의 작전도 가능한 셈.

'놈은 절대로 격리된 차원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윤서현에 의해 강화된 격리 차원.

그곳에선 마기를 끌어 올 곳도 없다.

"그러면 우리가 이긴 거야?"

무녀 멜이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그녀는 이번 전쟁의 책임자다. 상황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채아연이 신성력을 사용해 언데드들을 정리했지만 마을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복구하는데만해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터.

이제 끝···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

"마족은 두 명이었고, 내가 가둔 건 하나다. 아직 검의 마족이 남아 있다는 말이지."

우우웅······!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길한 기운이 마을을 뒤덮는다. 멀리서 솟아나는 마기의 일렁임이 부족 전사들과 헌터들을 옥죈다.

끝나지 않았다.

마을 전체에 다시 한 번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밀림 속에서 걸어 나오는 한 명의 여성에게로 향했다.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검의 마족.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검에서 은빛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대적자. 네가 특별한 존재라는 건 인정하겠다."

나는 그에 맞서 검을 뽑아들었다.

검의 마족.

그녀는 별 다른 능력이 없는 마족이다.

그저 검 하나로 마족의 정점에 올라 선 존재.

수 천 년의 세월을 유랑하며 쌓아 온 검의 정수가 그녀의 힘이다.

나는 함선 세이비어와 대적하던 검의 마족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녀는 있는 힘껏 나를 증오하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는 것만으로 이성을 잃고 달려들 정도로.

'그 이유는······.'

내가 예언의 마족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둘의 사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연인쯤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검의 마족의 차가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 넌 내게 죽는다. 또한 이 게이트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거다."

그녀의 검을 감싸고 있던 은빛의 불길이 점차 부풀어오른다. 강대한 격이 우리쪽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온다는 건가.'

나조차 팔을 들어 올리지 않고선 막아내기 힘든 격이다.

"저희 쪽으로 오려는 건가요?"

"으윽, 어쨌든 검의 마족만 잡으면 끝이라는 거잖아!"

여기서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전력을 다한다면 이길 수 있다.

동료들이 함께하고 있으니, 패배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이후의 일을 생각한다면.

마계왕이란 거대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쓰러뜨리는 것만으론 불충분하다.

"검의 마족. 그걸로 괜찮겠나?"

나는 격을 막아내기 위해 올렸던 팔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휘몰아치는 격 앞에서 허리를 펴고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싸워서 이길 수 있다면 예언의 마족이 진작 그렇게 했을 거다."

검의 마족은 억지력을 무시하고 본래의 힘을 꺼내려 하고 있었다. 본인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이길 수 있냐는 다른 문제다.

내 말에 검의 마족이 조소했다.

"우습군, 대적자. 두려워지기라도 한 건가? 너는 최상위 마족의 진정한 힘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있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다.

별빛의 검의 선공권은 남아 있으며 15레벨 일자베기는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

미래에서 받은 기술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저벅, 저벅.

나는 다가오는 격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억지력을 뚫고 힘을 개방해서 이길 수 있었다면······. 예언의 마족이 그리 했을 거란 말이다."

쏟아지는 격 속에서 스킬의 레벨이 오르기 시작했다.

『 레전더리급 스킬 '영웅의 격 Lv.7'를 획득합니다. 』

『 레전더리급 스킬 '영웅의 격 Lv.8'을 획득합니다. 』

거기에 더해.

나는 찬란한 성배와 스킬향상의 반지의 효과를 발휘했다.

부족한 레벨이 2 단계 상승하며 10에 도달한다.

『 레전더리급 스킬 '영웅의 격 Lv.10을 발휘합니다. 』

『 추가 효과 : 격의 형체화 』

최상위 마족을 압도하는 격.

콰아아아——!

먹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은 마기를 푸른 기운이 잡아먹듯 몰아낸다.

형체화 된 격이 검의 마족을 압박한다.

그녀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새겨졌다.

큰 차이는 아닐 거다.

조금 넘어선 정도.

격은 전투력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수치는 아니다.

그러나 수 천 년을 살아 온 마족이라면 본능적으로 알 것이다.

강대한 격을 가지고 있는 존재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머리로는 부정해도 이해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저 한 걸음 앞으로 걸어서.

검의 마족을 향해 입을 열 뿐이다.

"싸우지 않고 해결 할 방법이 있다."

한결 누그러진 검의 마족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거래를 하자는 건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협박이다."

지금 나는 모든 면에서 검의 마족의 우위에 서 있다.

그런 내가 거래를 할 리가 없잖은가.

"내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예언의 마족은 죽는다. 너 또한 마찬가지다."

이미 한 차례 목숨을 건 전투가 끝났다.

패배한 예언의 마족은 사로잡혔다.

따라서,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다.

"지금 내게 마계왕을 배신하라는 건가? 가당치도 않은······."

검의 마족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다. 명백히 동요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니, 조금 돌아가란 이야기지. 예언의 마족을 살리고 싶다면."

"······."

검의 마족을 감싼 은빛의 불길이 어지럽게 일렁였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싸워야겠지만.

마을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검의 마족을 향한다. 붕괴되고 무너진 마을의 잔해에 숨어서 검의 마족의 결정을 기다린다.

나에 의해 격이 치워진 지금.

모두가 긴장하며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마계왕인가.

예언의 마족인가.

이윽고, 은빛의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

고심 끝에 그녀의 입이 열렸다.

"대적자, 내가 뭘 하길 원하는거지?"

딱 알맞는 일이 있다.

나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밀림 너머를 가리켰다.

"자기 임무에 실패한 마족에게 책임을 물어야겠지."

* * *

아스카할 부족의 마을 근방.

러시아 헌터들이 주둔해 있는 밀림 속.

"이야, 대장. 이거 일 났는데요. 최상위 마족 두 명이 도망가고 있어요! 하하."

나무 위에 올라가 상황을 살피던 금발의 소년 이반이 소리쳤다.

박살 났던 상처는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언데드라는 게 믿기지 않는 재생력이었다.

이들의 대장인 최상위 부패의 마족 니콜라이가 혀를 찼다.

혹시나 싶어 야수왕의 병사들을 언데드로 만들어 보냈는데, 큰 도움은 안된 모양이다.

"오, 대장. 좋은 변명이 떠올랐어요. 전부 아이템을 도둑 맞는단 걸 예언해주지 않은 예언의 마족 탓이에요. 이거 천재적인데요."

"나쁘지 않군."

니콜라이는 바닥에 담배재를 툭툭 털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직접 나서지 않는다."

"그게 맞겠네요. 절대 신성을 가진 헌터가 있다네요. 완전한 극상성. 저는 닿기만 해도 녹아버릴 거에요."

텔레파시로 헌터들의 상황을 살핀 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도망가는 걸 보니 죽진 않겠어요. 그러면 이 싸움은 길어지겠네요. 푸핫, 화살을 어디에 쏘는 거야?"

그야말로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이 모든 상황은 부패의 마족이 아이템을 도둑 맞는 바람에 생긴 일.

대적자를 묶어 놓지 못해 계획이 어그러졌음에도 부패의 마족은 태연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장소와 도구만 갖추어진다면 상대할 만하겠군.'

오히려 대적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변명을 해도, 결국 실수는 실수.

최상위 마족 둘이 실패한 시점에서 다음 대적자의 상대는 자신이 될 확률이 컸다.

부패의 마족이 계산한 자신의 승리 확률은 90% 이상.

지금까지 모아 온 시체들을 꺼낼 때가 왔다.

중요한 건 대적자를 그곳으로 어떻게 끌어들이냐는 건데······.

"대장! 대장!"

생각에 잠긴 니콜라이의 귓가에 이반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시덥잖은 일이면 다시 박살을 내놔야겠다는 것도 잠시.

"큰일났어요! 지금! 언데드들이 절반 넘게······!"

이반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콰아아아아!

밀림의 땅과 숲이 해일처럼 밀려 들었다. 지형 자체를 바꿔버리는 공격이었다.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주변의 해골 병사들이 재빠르게 달려들어 벽을 만들지 않았다면 니콜라이도 통째로 땅에 묻혔을 거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지? 대적자인가?"

아직은 대적자 앞에서 직접적으로 정체를 드러낸 적이 없다.

지금 부패의 마족은 마족이 아닌 러시아의 니콜라이다. 자신을 향한 공격은 러시아에 대한 공격이나 다름 없다.

아무리 대적자라고 해도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다니.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 니콜라이의 눈 앞.

콰아아앙!

해골들이 몸을 대어만든 벽이 반으로 갈라졌다. 무수한 해골 병사들의 파편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솟아올랐던 땅이 절반으로 갈라졌다. 강렬한 검기가 니콜라이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크윽."

"뭐, 뭐야?!"

"대장 어떻게 할까요?"

이반과 러시아의 다른 헌터들이 소리쳤다. 니콜라이는 팔을 뻗어 그들을 제지했다.

스으으으······.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은빛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 안에서 은발을 흩날리며 걸어 나오는 여성.

그 정체는 검의 마족이었다.

니콜라이의 얼굴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검의 마족! 미친 건가?"

콰아앙!

그러나 검의 마족은 대꾸도 하지 않고 부패의 마족을 향해 달려들었다.

"대장! 제가 막을게요!"

"여기가 어디라고!"

서걱—! 서걱—!

뛰어든 러시아의 헌터들이 반으로 잘려 나갔다. 수 십 명의 헌터들이 가볍게 압살당했다.

압도적인 실력차이였다. 막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어서 부패의 마족이 소환한 뼈창이 그녀의 앞길을 막았지만 전부 베여나갔다.

"크윽."

돌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푸욱!

검의 마족의 장검이 부패의 마족을 꿰뚫었다.

"커허억!"

니콜라이의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론 검의 마족을 상대할 수 없다.

"검의 마족······. 이게 무슨 짓이지······?"

니콜라이가 고개를 비틀며 물었다. 울컥 울컥 솟아오르는 피를 뱉어내느라 부정확한 발음이었다.

그런 니콜라이를 향해 검의 마족은 차갑게 대답했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자에 대한 처벌이다."

181화 변화하는 흐름(1)

"검의 마족······. 네 놈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는 거냐. 예언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네 놈들에게······."

"뻔뻔하군."

푸욱.

검의 마족은 니콜라이에게 박힌 검을 밀어 넣었다.

"중요한 아이템을 빼앗긴 패배자의 변명 따위 아무래도 좋다."

니콜라이는 에픽 아이템 '차원 격리의 구'를 도둑 맞았다.

대적자의 발을 묶는다는 중대한 계획이 어긋난 것이다.

콰드득!

검날에서 피어 오른 은빛 마기가 니콜라이의 몸을 파고 들었다.

"커허억······."

니콜라이의 입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인간의 모습으로 버티는 건 한계가 있다. 검의 마족 앞에서 니콜라이가 부리는 언데드 병사들은 종잇장이나 다름 없었다.

니콜라이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검의 마족. 후회하게 될 거다. 나는 사도다. 마계왕의 권속이자 선택 받은 존재. 네 놈이 죄를 물을 수 있는······. 크아악!"

검의 마족은 끝까지 듣지 않고 니콜라이를 베어냈다.

절반으로 나뉘어진 니콜라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물론 그는 죽지 않았다.

화르르륵!

니콜라이의 상반신 위로 검은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맹렬히 타오르는 검은 불길에 검의 마족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손에 쥔 검은 움켜쥔 채다.

언제라도 부패의 마족을 베어낼 수 있게.

화르르르······.

이윽고 검은 불길 속에서 붉은 눈을 번뜩이는 마족이 나타났다.

[ 정말······. 짜증 나는군. ]

보랏빛의 피부와 머리에 우뚝 솟은 뿔.

그의 썩어 흘러 내리는 피부와 지독한 악취가 진동한다.

뿜어져나오는 마기가 주변의 모든 것을 오염시키고, 썩게 만든다.

러시아 헌터 니콜라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진 부패의 마족.

그의 흉흉한 눈빛이 검의 마족을 향했다.

[ 대적자에게 패배한 화풀이를 내게 하는 건가? ]

검에 베여 쓰러졌던 러시아의 헌터들이 몸을 일으켰다. 나뉘어져 있던 몸이 수백 가닥의 실로 연결된다.

재생된 금발의 소년 이반이 비웃음과 함께 목을 꺾었다.

"대장, 그게 아니에요. 검의 마족은 졌어요. 예언의 마족은 대적자에게 붙잡혔고요. 지금 검의 마족은······."

서걱—!

검의 마족이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이반이 머리가 통째로 사라졌다. 머리를 잃은 신체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검의 마족은 차가운 눈으로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 책임을 물을 뿐이다."

[ 하, 우습군. ]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부패의 마족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 이제 아무래도 좋다. 네 놈은 나를 화나게 했다. 그 대가를 치뤄야 할 거다. ]

콰아아아—!

흙과 뒤섞인 밀림의 나무와, 수풀, 시체들이 일시에 파리와 구더기로 변해간다. 주변의 모든 것이 파리떼에 뒤덮여 알아 볼 수 없게 변한다.

"할 수 있다면."

그러한 폭풍의 한가운데에서 검의 마족의 은빛 마기가 터져나왔다.

마계에 파란을 일으킬 두 마족의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의 여파가 내가 있는 장소까지 닥쳐온다.

"······막상막하인데요."

그쪽을 바라보던 윤서현이 내게 말했다. 멀리 떨어진 장소지만 대강의 윤곽이 그려질 거다.

"공간 보호막으로 막아뒀으니 피해가 넘어오는 일은 없을 거에요. 정말로 마족끼리 싸우기 시작할 줄이야······."

"딱히 결속력이 강한 종족은 아니니까요."

누가 이기든 우리에게는 이득이다. 무승부가 된다 해도 손해는 없다.

애시당초 내 목적은 부패의 마족을 죽이는 게 아니다.

'니콜라이가 마족이라는 증거만 확보하면 되는 거였으니.'

그게 백묵이 내게 부탁한 일이었다.

검의 마족 덕분에 국가적 분쟁이 되는 일 없이 깔끔하게 처리한 셈이다.

지금도 백묵이 숨겨둔 인물들이 목숨을 걸고 부패의 마족 근처로 향하고 있을 거다.

증거 수집은 그들에게 맡기면 충분하다.

'이제 남은 건 게이트 공략이다.'

나는 윤서현, 진세아 그리고 엘리스와 함께 밀림 속으로 들어왔다. 수색을 개시한지 얼마되지 않아 엘리스가 소리쳤다.

"찾았어요! 여기에 있어요!"

엘리스의 손에 들린 붉은 빛의 심장. 진세아가 분통을 터뜨렸다.

"으, 내가 먼저 찾을 수 있었는데."

검의 마족이 말했던대로였다.

"사부님, 이게 맹수왕의 심장이라는 거죠? 그러면 애초에 마족을 이기지 않으면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없었던 거네요."

엘리스로부터 건네 받은 심장을 품 안에 넣었다. 별 다른 저항 없이 손에 잡힌다.

'이런 편법을 썼을 줄이야······.'

예언의 마족의 팔 하나가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억지력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거다.

우리야 게이트에 적합한 절차를 밟아 들어 온 헌터니, 억지력 걱정은 안해도 되는 거고.

그건 이쪽의 몇 없는 장점이다.

"심장을 손에 넣었으니 상황을 정리하러가죠."

"다른 나라의 헌터들에게도 알려야겠네요. 마을의 복구 작업도 돕고요."

윤서현이 손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콰아아앙! 콰앙!

검의 마족이 있을 장소에서 연이은 폭발이 이어진다.

피어나는 분진과 먼지 때문에 자세한 전투는 보이지 않지만, 최상위 마족 간의 전투니 상당히 치열하겠지.

"근데, 만약 검의 마족이 이기면 예언의 마족을 풀어 줄 건가요?"

윤서현이 설마하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물론 아닙니다."

어떻게 잡은 최상위 마족인데 그냥 놓아주겠는가.

안도하는 윤서현과 달리 진세아는 눈을 깜빡였다.

"헐, 오빠 천재에요? 아니면 엄청난 악당이거나."

"······."

이쪽도 인류의 존망이 달려 있는 일이다.

게다가 검의 마족은 앞으로 해야 하는 일이 더 있다.

그 일의 경과에 따라 예언의 마족의 처우가 결정 될 거다.

어찌되었든 예언의 마족은 유용한 인질이니.

"그러면 마을로 돌아가죠."

아스카할 마을은 복구 작업에 한창이었다.

"이쪽 좀 잡아줘!"

"거기 목재 좀 가져와줘."

"땅부터 제대로 손 봐야겠는데."

예언의 마족에 의해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우고, 마을의 시설들을 정비하고 있었다. 부족 사람들과 헌터들이 힘을 합치고 있었다.

본부 역할을 하던 천막으로 들어서자 좋은 소식이 연이어 들려 왔다.

"맹수왕의 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답니다!"

"주변의 잔당들도 대부분 처리되었습니다."

"무, 무녀님. 저희가 이겼습니다!"

맹수왕의 카리스마 아래에 모여 있던 맹수 병사들은 그의 실종과 동시에 와해 되었다.

"맹수왕의 사천왕도 전부 쓰러졌다네요. 신태양군과 일본 류노스케의 역할의 컸다고 해요."

"언니!"

"쓰러져 있던 사이에 마족들은 잘 처리한 모양이네."

은빛의 날개 윤지은이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예언의 마족에게 당했던 상처는 말끔히 나아 있었다.

"부족 전사들 중에 사상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완전한 우리의 승리에요. 이제 남은 건 맹수왕인데···."

"그것도 해결 됐습니다."

"그건······."

나는 심장을 들어 보였다.

이용만 당하다 버려진 맹수왕의 심장이다.

"원하는 시기에 언제든지 클리어가 가능합니다. 아직 연구도 진행중이고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 공략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겠습니까?"

"그거야 지한씨 마음이죠."

윤지은이 가벼운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국가의 헌터들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SS급 게이트를 조사 중에 있다. 그러니 클리어를 뒤로 밀어두는 게 낫다.

지금의 기술로는 한 번 닫힌 게이트를 다시 열기 어렵다.

"······."

뒤쪽에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모든 부족을 통솔하던 무녀 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잠도 제대로 못자서 초췌한 얼굴이었다.

그런 녀석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맹수왕에게서 이기다니. 꿈 아니지 이거?"

"그래. 말했잖아. 맹수왕은 별 거 아니라고."

결과적으로 잘 해결되서 다행이었다.

"고마워. 진짜로. 무슨 감사를 해야할지. 감도 안잡혀."

맹수왕의 폭정 아래 죽은 듯 살아가던 인간들이 이제 초맹림계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걸 유지하는 건 이들의 몫이겠지만.

"승리했다는 게 정말이냐!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아스카할의 부족장이 허겁지겁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정신 없이 뛰어 온 건지 새하얀 수염이 엉망이었다.

그는 곧장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오오, 위대하신 분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맨 처음에 나를 마주했던 태도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는 고개 숙여 내게 감사를 표했다.

아직 검의 마족이 부패의 마족과 전투를 하고 있으니, 정확히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하지만 당장의 승리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나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감사하면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요."

그 의미심장한 미소에 족장이 흠칫 몸을 떨었다.

"저, 저희는 가진 게 별로 없습니다."

그건 나도 안다.

* * *

다음날.

아스카할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소식을 들은 각국의 헌터들도 모여들면서 마을이 엄청난 활기를 띄고 있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야, 최초의 SS급 게이트 성공이라니. 역사에 남는다고요."

"일단 먹고 마십시다!"

"이 술은 엄청 부드러운데요?"

"크하하, 독일 맥주 맛이 어때요?"

헌터들이 가져 온 식량과 음료, 술이 풀려나왔다. 아스카할에서도 각종 잔치 음식과 술을 준비했다.

"우왓, 뭐냐. 이 열매. 능력치가 오르는데?"

"잠깐만, 이 음식도 맛이 끝내줘."

"허허······. 많이들 드시게."

진세아, 엘리스를 포함한 은빛의 날개 일원들도 이 분위기를 즐기는 중이다.

"딱 처음 떨어졌는데, 보물 창고가 있지 뭐에요? 이건 운명이다 싶었죠."

그러고보니 잊고 있었다.

진세아가 맹수왕의 보물창고를 털었다고 했었다.

내용물이 뭐였는지는 나중에 물어볼까.

"스승님!"

류노스케와 어깨 동무를 한 신태양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게이트 공략을 하면서 둘이 많이 친해진 모양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쪽에는 마족이 있었다면서요?"

"지한씨! 큰 활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잠깐······. 지한씨가 스승님이라고요?"

"맞습니다. 저보다 백배는 강하실 겁니다."

왜인지 굉장히 놀란 표정의 류노스케가 날 바라본다.

어쨌든 한바탕 축제가 치뤄지고 있었다.

"자, 자. 다들 비키시오! 급조하긴 했지만 부족을 구한 영웅을 기리기 위해 조각상을 만들어 봤습니다!"

인파를 헤치고, 부족 사람들이 커다란 조각상을 들고 오고 있었다.

"영차, 영차. 다들 조심히!"

그렇게 세워진 건 검을 쥔 사내의 조각상이었다. 그 주변으로 각종 장비와 무기가 잔뜩 놓여져 있다.

설마, 저게 나는 아니겠지.

"푸핫, 오빠랑 똑같다!"

"사, 사진기가 없어······. 가져가고 싶을 정도에요."

"스승님. 저희 집에도 하나 세우죠."

"······."

모든 부족의 전사들과 헌터들이 한데 모여 축제가 이어졌다.

헌터들의 다양한 스킬 덕분에 마을 복구가 일찍 끝나기도 했으니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적당히 인사를 나누다가 마을 어귀로 향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딱 맞춰왔네요."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윤서현 헌터와 무녀 렘.

"서현씨는 축제 안 즐겨도 괜찮습니까?"

"상관 없어요. 뭐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별 건 아닙니다."

우리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앞서가던 렘이 손짓했다.

"빨리 와. 나는 빨리 축제에 돌아가고 싶단 말이야."

"그렇다네요."

렘을 따라 향한 곳은 이전에 갔었던 유적이다.

본래 아스카할 부족이 신을 섬기던 장소.

이제 이곳을 지키는 병사는 없다.

하지만 맹수왕의 병사에 의해 훼손된 흔적이 여기저기 가득했다.

"복구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네요. 그래도 뭔가 달라진 것 같아요."

윤서현은 유적의 벽면에 손을 올린 채 미간을 찌푸렸다.

무녀 렘은 내가 이전에 쇠락한 신궁을 불러냈던 대야 앞에 섰다.

"잘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해볼게."

렘이 두 손을 꼭 모은 채 무릎을 꿇었다.

내가 부탁했던 일은 이거다.

다시 한 번 쇠락한 신궁을 불러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

샤아아아—!

렘의 주변으로 새하얀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부숴진 신상이 빛으로 채워지고, 유적의 훼손된 부분이 조금씩 복구된다.

그를 따르던 부족이 위세를 되찾았으니, 초월자의 힘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내가 사용한 스킬 '요행:따라가는 화살'을 다른 초월자들도 분명 보았다.

쇠락한 신궁의 존재를 타차원에 전파 시키는 일.

따라서 그의 힘은 상당수 회복 되었다.

『 쇠락한 신궁(神弓)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

고요하게 머문 빛이 렘의 머리에 후광처럼 빛난다.

렘에게 깃든 쇠락한 신궁이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쪽 생각대로 쓸모 없는 스킬은 아니었지?"

몰락한 신궁은 내게 스킬을 알려줘도 소용 없다고 고집을 부렸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 인정하마. 그대의 존재는 내 판단을 뛰어넘어 있다. 경의를 표한다. ]

가볍게 떠오른 몰락한 신궁은 나를 바라보았다.

[ 또한 그대의 이름은 영원토록 기억 될 것이다. 부족을 구한 아스카할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후대에 내리 기록 되리라. ]

좋은 말이긴 한데.

"그런 말로 어물쩡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부족 전체를 구원하고 위세를 회복하게 도왔다.

부족에게서 받아낼 만한 건 없지만, 초월자인 쇠락한 신궁이라면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

"초월의 힘을 사용해서 이계 규율을 움직여라. 내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 쇠락한 신궁이 당신의 요구를 부담스러워합니다. 』

[ ······. ]

『 잊혀진 영웅이 얼굴을 찌푸립니다. 』

『 이계의 찬탈자가 쇠락한 신궁의 인성에 의문을 품습니다. 』

『 소수의 초월자가 보상을 촉구합니다. 』

그래, 다른 초월자들도 그리 말하잖냐.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게 가능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전에 초월자 '잊혀진 영웅'이 3★ 강화의 두루마리의 확률을 조정했듯.

쇠락한 신궁도 같은 것이 가능할 거다.

[ ······그대는 그만한 일을 해주었다. 합당한 보답을 해주어야겠지. ]

쏟아지는 초월자들의 원성.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직접 마주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잠적했을지도 모른다.

샤아아······.

들어 올린 쇠락한 신궁의 손에서 빛이 샘솟는다.

이번 공략은 결과적으로 마족을 처치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계 규율의 보상도 없는 게 당연했다.

『 이계규율 네번째 : 초월 간섭 』

그러나.

『 초월자 '잊혀진 영웅'이 해당 차원의 인과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

『 적지 않은 수의 초월자들이 해당 결정에 찬성합니다. 』

이계 규율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파직, 파지직!

붉은 스파크와 함께 홀로그램 창이 솟아났다.

본래는 없었을, 보상창이 내 앞에 나타났다.

『 최상위 예언의 마족을 사로잡았습니다! 』

『 인과의 근간을 뒤흔드는 초월적인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 다수의 초월자들이 당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

『 아카식 레코드에 새겨질 전무후무한 업적! 』

『 이계 규율이 해당 업적을 정산합니다! 』

강렬한 검은 빛이 내 앞으로 쏟아져내렸다.

182화 변화하는 흐름(2)

이번에는 정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검은 빛과 함께 곧바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 업적 정산이 완료 되었습니다. 』

『 이계규율이 해당 업적을 정산합니다. 』

- 업적명 : 최상위 예언의 마족 포획

- 기록 : 성장 SSS, 스킬 SSS, 아이템 SSS, 압도 SS+, ······.

- 종합평가 : SSS

촤르르륵!

끝없이 펼쳐지는 텍스트 세례.

이번 전투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내 힘을 전부 발휘하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 평가다.

'이 다음이 더 기대되는군.'

SSS급을 뛰어 넘은 평가가 존재할지 모르겠다만.

『 업적을 획득합니다! 』

『 칭호 : 초맹림계의 영웅 』

- 맹림계에서 모든 능력치 250% 상승

『 칭호 : 아스카할의 전설 』

- 필드 '밀림'에서 모든 데미지 300% 상승

- 활과 관련된 스킬의 위력 100% 증가

먼저 두 가지의 칭호가 주어졌다.

이계 규율의 호화스런 능력치 증가 보상이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칭호들은 복합적으로 사용 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마계와 밀림이 겹친다면.

'마계의 재앙'과 '아스카할의 전설' 두 칭호가 동시에 발휘된다.

만약, 내가 그러한 밀림 속의 유적에 있다면······.

데미지 1,000% 증가인 '기적의 발현자'도 동시에 적용된다.

'모든 게 겹쳐질 확률은 지극히 적지만······.'

장소를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내 능력치가 극대화 될 수 있단 거다.

보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샤아아아—.

검은 빛무리의 일부는 내 손목에 있는 초월의 팔찌에 깃들기 시작했다. 음각으로 새겨진 문자가 허공으로 떠오른다.

『 첫번째 초월의 길이 밝혀집니다! 』

『 해당 초월의 길이 사용자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로 제시됩니다. 』

'적합한 형태······?'

시스템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 초월급 퀘스트 : 첫번째 길 』

달성 조건 : 초월에 다가선 존재 처치 0 / 1

보상 : 초월의 권리, 아카식 레코드 접근 권한

'······!'

보상을 들여다보는 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초월의 권리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아카식 레코드에는 흥미가 동한다.

내가 사는 세계인 문명계에서 전해지는 아카식 레코드란, 전우주의 기록이 담긴 일종의 도서관이다.

'마계왕을 쓰러뜨릴 방법은 물론이고, 무수한 차원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킬들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그게 가능하다면 무재조정의 효과로 압도적인 효과를 내는 건 당연하고, 차원이 다른 힘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윤서현이 한마디 했다.

"뭔데 그렇게 웃는 거에요······. 그렇게 좋은거에요?"

"아뇨, 당장 좋은 건 아닙니다. 그래도 나쁘지 않네요."

달성 조건이 어렵기는 하다.

초월에 다가선 존재 처치.

아마도 초월자가 되기 직전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 같다.

미래에서 보았던 세계 속에서 그러한 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런 자들을 초월의 순례자라고 부른다.

초월의 길에 오르기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을 갈고 닦는 존재.

그들의 힘은 차원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마계왕의 사도들이다.'

모든 사도가 그만큼 강한 건 아니지만 그런 가능성을 소유한 자들이 있다.

곧 만나게 될 거다.

샤아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앞에 진짜 보상이 떨어졌다.

나타난 것은 흑색의 보석함.

독특한 문양이 중심에 새겨져있다는 걸 제외하면 특이할 건 없었으나.

'뭐야······.'

그 정보를 확인한 나는 그 자리에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게 왜······?'

『 명계의 랜덤 박스(재앙급) 』

- 등급 : 흑(黑)

- 랜덤한 무언가가 들어 있습니다.

그저 자그마한 상자였지만.

나를 바라보는 초월자들 또한 술렁이기 시작했다.

『 다수의 초월자들이 경악합니다. 』

『 이계의 찬탈자가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봅니다. 』

『 잊혀진 영웅이 당신을 만류합니다. 』

쇠락한 신궁조차도 입을 벌리고 나를 가리켰다.

[ 그대······. 지금 네 손에 들려 있는 거······. ]

문명계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등급 '재앙'.

그럼에도 아득히 발전한 타차원에는 분명히 있는 등급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계 규율이 어째서 이것을 건네주는가.

이 랜덤 박스는 하나의 행성을 집어 삼킨 적이 있는······.

이른바 멸망의 상자였으니까.

* * *

게이트와 던전의 보상으로 나타나는 수많은 아이템들.

그것들은 모두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 대부분은 세계의 기원과 설화를 담고 있다.

해당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전설들과 신화.

그것들을 모티브로 생성된 아이템은 그 격에 맞는 등급을 소유한다.

그러니 이 랜덤 상자도 어느 차원의 전설이나, 신화를 담고 있을 거다.

우리의 세계로 치자면 그리스 로마 신화의 판도라의 상자 같은 이야기일까.

제우스에게 받은 상자를 열었더니, 그 안에 있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세상으로 흩어졌다. 판도라는 황급히 상자를 닫았을 때 남아 있던 것은 단 하나 희망이였다.

뭐, 그런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으로 만들어진 상자일 거다.

'이 상자를 열었던 어느 세계는 행성째로 멸망했다.'

그러나, 그것 뿐이라면 초월자들이 이 상자에 대해서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이들 모두가 과한 반응을 보이는 건 그만큼 이 상자가 유명해서다.

'운이 좋다면 그에 상응하는 좋은 물건이 나온다.'

재앙급 무기를 손에 쥐고서 초월자가 된 영웅.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고, 영원불멸의 삶을 누린 황제.

고통 받는 존재들을 구원하고 우주를 횡단하는 대주교.

미래의 내가 듣고 보았던 전설의 상당수가 이 상자에서 시작되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윤서현이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상자를 가리켰다.

[ 그래, 차라리 내게 넘겨라. 나라면 그 물건을······. ]

쇠락한 신궁이 렘의 몸을 빌려 말했다.

『 잊혀진 영웅이 쇠락한 신궁의 뻔뻔함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

『 소수의 영웅들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일축합니다. 』

『 시공의 감시자가 자신에게 팔아달라고 애원합니다. 』

그새 새로운 한 명이 꼽사리 꼈다.

어쨌든 초월자도 원하는 그런 물건이란 말씀.

"······그럴 순 없지."

나는 상자를 인벤토리에 집어 넣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엘리스에게 시간 조작이 가능한지 묻는 게 먼저다.

그게 아니여도 교섭 재료로 사용하면 그만이니까.

"그럼 볼 일은 다봤으니, 돌아가죠. 그리고 쇠락한 신궁."

나는 렘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녀의 몸에 빙의한 쇠락한 신궁을.

"이번에는 제대로 된 신 노릇 좀 부탁합니다."

한 번은 운이 좋아 살아났지만,

두 번은 없다.

그는 씁쓸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명심하도록 하겠다. 그런데 그 상자는······. ]

안 판다니까.

* * *

조사는 2주간 더 이어졌다.

오랜 기간 맹수왕에게 억압 받았던 부족민들은 완전히 해방 되었다.

그들이 걷어가는 공납이 사라지고, 각종 연구와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축제 분위기가 지속 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천막 안에서 검은 상자를 유심히 들여다 보던 엘리스.

"딱 10년만 수련하면 가능할 것 같아요!"

그녀는 해맑게 대답했다.

명계의 랜덤박스.

확률적으로 아이템이 튀어나오는 물건인만큼 확률 조작은 가능했다. 엘리스는 결론을 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번 정도라면 더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에요."

사실상 지금은 불가능이란 소리였다.

"궁금한데 그냥 열죠!"

진세아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상당히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었다.

슥!

나는 잽싸게 상자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괜히 훔쳐가서 사고나기 전에 넣어둬야지.

"쳇, 쩨쩨하게."

쩨쩨하다니.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는 정신 나간 상자다.

마족 이외의 문제를 늘리는 건 사양한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엘리스를 바라봤다.

"그러면 열심히 훈련하는 수밖에는 없겠네. 10년의 수준을 앞당길 수 있는 훈련이······."

"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평생해도 안될 것 같기도 하고······."

그간의 훈련이 힘들었는지 엘리스가 시선을 회피했다.

그렇게 힘들었나.

'그래도 가능성은 확인했다.'

상자를 당장 열진 않을 거다. 무슨 재앙이 터져나올지 모르니. 결국 엘리스의 성장에 기대는 방향이 될 것 같다.

그리고 10년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아마, 조만간 상자를 여는 게 가능해 질 거다.

엘리스의 능력이라면 분명히······.

"아 참, 맹수왕의 창고를 털고 얻은 아이템 있잖아요. 왕창 훔쳤거든요. 특별히 여기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보여줄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진세아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녀석은 천막 안에 아이템들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SS급 게이트인 초맹림계답게 높은 등급의 아이템들이다.

맹수왕이 아끼는 보물들이었으니 당연하지만.

레전더리급 무기와 장비들이 30개 이상 바닥에 쭉 깔렸다. 그것을 바라보는 엘리스와 윤서현의 눈이 커졌다.

"저, 전부 레전더리······."

레전더리의 가치는 여전히 높다.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그래도 지금의 내겐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에픽 아이템은 없나.

찬찬히 아이템들을 훑어보던 와중, 돌멩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 정체모를 돌멩이(레전더리) 』

울퉁불퉁한 표면에 감싸져 있어 내용물을 알 수 없다. 진세아가 의외라는 듯 날 바라봤다.

"그게 마음에 들어요? 일단 레전더리급이라 가져오기는 했는데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어요. 아이템 설명도 없······."

말을 하다말고 진세아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잠깐, 오빠가 눈독 들이는 걸 보면 설마 엄청난 아이템?"

녀석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선 돌멩이를 가져갔다.

"이건 안될 듯."

"······."

그냥 특이하게 생겨서 살펴 본 건데.

나는 다른 아이템으로 눈을 돌렸다.

"세아양, 고마워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엘리스는 스킬의 대기 시간을 줄여주는 팔찌를 선택했다. 윤서현은 마력 효과가 붙은 신발을 골랐다.

"고마워 세아야. 근데 성능은 좋은데, 외관이 좀······. 수선을 맡기던가 해야겠어요."

외관을 감추는 마법을 부여하면 좀 나을 거다.

"그래서 오빠는 안 골라요?"

"준다니 감사히 받아야지."

나는 뼈로 만들어진 팔찌를 골라들었다.

『 뼈 이빨 부적(레전더리) 』

- 과거의 누군가가 염원을 담아 만든 부적.

- 행운의 레벨이 1 증가한다.

행운의 레벨을 1이나 올려주는 훌륭한 아이템이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내 행운의 레벨은 아직도 3이다. 스킬 향상의 반지를 더해봤자 4다.

행운은 경험이 아닌 오로지 운에 의해서 결정되는 스킬이다.

그런 스킬의 레벨을 거저 먹을 수 있다니 땡큐다.

행운은 높을수록 레벨이 오르기 용이하기도 하고.

『 스킬 '행운'의 레벨이 5가 됩니다. 』

"다 골랐으면 판 접을게요.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내가 다 뿌듯하네. 이런 게 착한 일을 한 보람인가. 그래서 엘리스. 이 돌멩이 미래에 어떻게 될 것 같아?"

"음······. 굉장히 돌멩이······."

"굉장한 돌멩이······?"

"아뇨, 그냥 굉장히 돌멩이······."

그렇게 아이템 분배가 끝났다. 이번에는 진세아가 많은 일을 했다.

부패의 마족으로부터 아이템을 훔쳐내기도 했고.

야수왕의 창고도 털었다.

이번 게이트 공략의 MVP가 있다면 진세아가 아닐까.

우리는 천막 밖으로 나왔다.

"우와, 사람들 진짜 많네!"

부족 사람들과 헌터들이 부산스럽게 마을을 정리하고 있다.

오늘이 게이트 공략을 끝마치는 날이다.

사람들을 도와 정리를 마친 뒤, 우리는 한 곳에 모였다.

"러시아와 영국의 헌터들은 연락이 안됩니다."

"영국은 아까 통신했어요. 문제는 러시아인데······."

"아, 방금 통신 성공했답니다. 러시아는 후발대로 빠져나오겠다네요."

미리 연락을 받은 각국의 헌터들이 마을로 모여있었다.

부패의 마족과 검의 마족의 싸움.

그 승자는 누가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한동안 격렬하게 싸우던 두 마족은 자취를 감췄다.

아마 마계의 틈으로 넘어간 모양.

러시아의 후발대 이야기는 백묵의 수하들이 날조한 이야기일 거다. 그가 마족이라는 게 밝혀지면 어떻게든 뒤처리를 하겠지.

'정보는 충분히 모을 수 있게 해줬으니 상관 없을 거고.'

스윽.

나는 인벤토리에서 맹수왕의 심장을 꺼내들었다.

무녀 멜과 부족의 장로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각국의 헌터들의 시선도 마찬가지로 쏟아졌다.

"저 사람이 이지한 헌터야?"

"게이트 공략을 주도했다던데."

"마족하고 직접 싸웠다고 하더라. 한국에 협력할 걸 그랬네."

대부분 아쉬워하는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한쪽을 바라봤다.

대한민국의 오성 길드가 있는 장소.

그곳에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는 대마법사 김민수가 있다.

이번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됐을텐데.'

그에 대한건 김상욱이 잘 감시하고 있을테니, 일단은 기다리는 수밖에.

나는 심장을 들어 올렸다.

"우와아아!"

"이지한! 이지한!"

"우아아!"

부족 전사들의 함성이 마을 전체에 울려 퍼진다.

"······."

부담스러울 정도다.

이렇게 주목을 받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아니, 내 인생에 이런 적이 있었나?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부족 사람들의 성화에 못이겨 내가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었다.

나는 검을 꺼내들었다.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서걱—!

심장을 가볍게 던진 뒤, 깔끔하게 베어냈다.

『 SS급 게이트 공략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

- 맹수왕의 굴복 ( 1 / 1 )

『 바깥으로 향하는 게이트 열립니다. 』

고오오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게이트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저릿한 느낌과 함께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은빛의 날개의 일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지은, 윤서현, 진세아 그리고 엘리스까지.

모두 든든한 동료다.

마계왕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첫 단추를 성공적으로 꿰었다.

"이제 돌아가죠.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상황이 달라질 거다.

마족들이 이 세계를 침범하기 이전에.

내가 그들을 끝장 낼테니.

183화 변화하는 흐름(3)

"그래서······. 결과는 나왔나?"

세계 최초의 SS급 게이트 공략.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 되어 있는 상황에서 가장 초조한 것은 대한민국이었다.

다름아닌 대한민국의 제주도에 발생한 게이트다.

결과에 따라서는 제주도의 영토 자체를 포기해야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 마수들의 소굴이 된 장소가 존재하는만큼, 이번 공략은 중요한 문제였다.

"공략은 아직입니다. 만일을 위한 군병력도 배치되어 있고, 공략을 마친 헌터들도 제주도로 호출한 상태입니다. 예정했던 시각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통령님."

보고를 마치는 보좌관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세계 각국의 헌터들이 참가했다.

최초의 A급, S급 게이트가 그러했듯 SS급도 어렵지 않게 공략되어야만 했다.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 되어 있는만큼 실패는 국가적인 망신이 된다.

대통령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고개를 돌려 옆의 사람에게 물었다.

"자네는 이번 게이트 공략 어떻게 보나."

질문을 받은 건 국내의 헌터 전문가라고 알려진 이현명 박사.

"공략 성공률은 55% 이상인 것 같습니다. 다만, 한국 헌터들의 활약을 기대하긴 힘들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아쉽게도······."

지금 이 자리에는 헌터계와 관련된 유명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다. 대통령은 게이트 발발 이후 그들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답들은 애매모호했다. 공략이 될 것 같다. 아마, 성공하지 않을까.

그 정도의 이야기.

대통령의 미간은 연신 찌푸려진 채였다.

확답을 내기 어려운 사안이란 건 알지만, 그럼에도 모호한 답만 이어지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내 대통령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협회장, 자네는 이번 게이트 공략을 어떻게 보나."

대통령의 물음에 헌터 협회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솔직히 모르겠다. 라곤 답할 수 없겠지.'

헌터 협회의 협회장 진태산.

이제 30대 후반에 들어선 그는 국회의원이나, 장관들보다 훨씬 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협회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그건 헌터계의 역사가 짧았기 때문이다.

실력 반, 운 반.

10년 남짓한 역사 속에서 그는 나름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헌터 협회를 이끌어왔다.

'뭐라고 답을 드려야 하나.'

그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부협회장이 마족이었다는 충격적인 소식.

협회 전체가 불신을 겪는 상황에서 협회장이 가지는 위치는 위태하기 그지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 쏟아지는 다른 전문가들의 시선은 따가웠다.

'으음······.'

그럼에도 대통령이 이 자리에 자신을 부른 건 협회장으로서의 의견을 신용하기 때문일 거다.

'백묵군의 정보에 따르면 게이트 내부에 새로운 마족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 기존의 SS급보다 훨씬 더 높은 난이도가 예상된다. 경우에 따라선 모든 헌터들의 전멸까지도······. 더럽게 절망적이군.'

그게 솔직한 심경이었지만.

입을 여니 다른 말이 쏟아졌다.

"우리나라의 헌터들이 해낼 겁니다.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진태산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협회장이 그리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대통령의 눈썹과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가 뭐지?"

"특정 헌터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지는 추세고, 한국 헌터들의 기량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이 올라갔습니다."

"그래, 그런 답을 기대하고 있었다네."

협회장의 단호한 어조에 대통령은 흡족한 모습이었다.

'쯧, 듣기 좋은 말을 한다고 다가 아닌데.'

'어휴, 저 양반······.'

'협회도 갈 때까지 갔구만······.'

주변의 따가운 눈총.

협회장은 애써 눈을 대형 화면 앞으로 돌렸다.

긴장하면 으레 과장해서 말하는 습관이 여기서 또 도졌다.

우습게도 그런 허풍이 그를 협회장이란 자리에 올렸으니, 나쁘다고만 볼 순 없는 것이다.

뭐, 그냥 듣기에 좋은 말을 한 것 뿐일 수도 있지만······.

'백묵군의 정보에 의하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마족을 화살 한 발로 사지로 몰아 넣은 헌터.

그의 참전이 확실시 된 것을 협회장의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예정 했던 시각보다 몇 시간 이른 시간.

"공략 성공했습니다!"

뉴스보다 한 발 빠르게 성공 소식이 알려졌다.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과 기쁨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공략에 성공했단 사실만으론 부족했다.

누가 어떤 활약을 했느냐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했으므로.

안경을 쓴 비서 한 명이 급히 들어와 보고를 시작했다.

"헌터들로부터 정보를 수집 중에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은······."

그의 입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 되었다.

"대한민국의 이지한이라는 헌터가 압도적인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은빛의 날개를 중심으로 미국, 일본이 협력하여······."

보고의 내용에 따르면 한국의 맹활약.

특히 이지한이란 헌터의 리더쉽이 판도를 갈랐단다.

"오오······."

기뻐하는 대통령. 그는 기뻐하며 협회장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제서야 협회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를 질책하듯 바라보던 전문가들이 하나둘씩 눈을 피했다. 언제그랬냐는 듯 공략 성공을 축하하고 있었다.

'후우.'

그가 협회장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직감에 따랐기 때문이다.

'이지한 헌터······. 정말로 해낼 줄이야. 백묵군의 정보가 진짜였군.'

불과 몇 달전만해도 F급이었던 그가 지금은 헌터들을 이끌고 있었다.

'심지어 아직 길드를 정하지도 않았다던데······.'

그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지기 전에 먼저 만나볼 필요가 있다.

'점점 더 궁금해지는군. 원하는 게 뭔지, 확실히 들어 볼 필요가 있겠어.'

아직 소속을 정하지 않은 용병 헌터.

잘만하면 협회로의 영입도 가능하단 말 아니겠는가?

위기에 빠진 협회를 구하기 위한 게임 체인저.

그 역할에 이보다 잘 어울리는 인물은 없을 거다.

그걸 위해서라면 간도 쓸개도 내줄 요량이 있었다.

* * *

세계 최초 SS급 클리어.

그 여파는 대단했다.

전세계의 언론이 앞다투어 해당 내용을 보도 했으며, 한국의 언론은 관련 기사로 도배가 될 정도였다.

각자의 나라로 귀환한 헌터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막대한 정보와 소재를 가지고 돌아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중에서도 2군을 보낸 미국의 길드 넥스트.

"이지한, 이 남자가 요주의 인물이었다. 마족을 직접 상대했을 뿐 아니라, 부족 전체를 설득하고 움직였으니까."

한 명의 헌터에 대한 이야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푸른 눈의 남자가 짧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세계 랭킹 5위, 무한의 마법사 아이작.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길드장에게 물었다.

"그러면 정확히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거야? 길드장은 마족을 직접 상대한 경험이 있으니까, 알 거 아니야?"

세계 랭킹 1위, 자유의 포환 그렉스.

"글쎄······."

그 또한 새로운 인재의 발굴에 만족스런 얼굴이었다.

"그건 지금부터 확인하러 가봐야 알겠지."

마족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입수한 건 미국과 일본 뿐.

두 국가만 한국의 맹수왕 토벌 작전에 참여했고,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따라서 마족과의 전투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있는 것도 그들 뿐이다.

"그게 정말이란 말이지? 류노스케, 훌륭하다."

일본 길드 '류구'에서도 이지한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더군요. 은빛의 날개와 주로 움직이고 있지만, 정작 거기에 들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습니다.

류노스케는 이지한의 활약을 떠올렸다. 솔직히 신태양에게도 밀리는 감이 있었는데, 그의 스승이었다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수호 길드의 초신성 신태양과도 친분이 있었고요. 뭔가 더 큰 걸 계획하고 있다고 해야할까요."

"더 큰 물에서 놀겠다 이거군! 당장 접근 해 봐. 친분을 활용하면 더 좋고."

길드장 켄타로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길드원 중 하나가 슬그머니 목소리를 냈다.

"한국 헌터인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갑자기 일본으로 귀화할 리도 없고."

그 말을 들은 켄타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물론이다! 영입까지는 어려워도, 우호적인 관계를 취해두는 거다. 그는 마족의 침입이 가시화 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퇴치법을 알고 있는 자다. 그런 자와의 친분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는 법."

용병 이지한.

그가 아직 소속을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흥미를 당기는 부분이었다. 그것이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단 느낌을 주었으므로.

한편 이전부터 이지한을 주시하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백묵이었다.

그는 그의 수하들을 통해 SS급 게이트에 있었던 일과 부패의 마족에 대한 정보를 모두 챙겼다. 그것들을 확인한 그는 폭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지한씨, 정말 상상 이상이네요. 진짜 미친 것 같아요."

러시아 1위의 길드 전체가 언데드였다니.

국가 전체가 부패의 마족의 손에 놀아나고 있던 꼴이었다.

이 정보는 도대체 얼마에 팔 수 있을지.

그저 그가 마족이라는 정보만 얻어도 족했건만, 이지한이 큰일을 해냈다. 다른 마족을 움직여 그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게 했으니까.

백묵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좋아요, 지한씨, 당신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데려갑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이지한이 자신의 편에 설 것이라고.

이지한이 F급 헌터였을 때부터 좋은 관계를 구축해 놓은 사람이 바로 백묵 자신이니까.

물론 다 잡은 물고기라고 해도 방심할 순 없었다.

이번 공략에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니, 다른 길드와 국가들이 이지한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려 할 것이다.

백묵이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

"저희도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 보죠. 아주 적극적으로요."

물밑의 이지한 쟁탈전이 시작된 가운데.

국내에서도 연일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 대한민국의 새로운 빛 '이지한'

- SS급 게이트 공략의 주연은 한국의 헌터

- 무명 헌터 세계에 이름을 알리다.

- 수호 길드 사최헌 "전적으로 이지한 헌터의 공"

- 수호 길드 신태양의 스승은······.

···

..

.

- 대한민국, 이제는 세계로!

* * *

대한민국 은빛의 날개 라운지.

엘리스가 눈을 반짝이며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사부님에 대한 글이 잔뜩이에요! 드디어 사부님의 시대가 왔나봐요!"

나는 소파에 걸터 앉아 엘리스의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다소 낯간지러운 제목의 기사들이 즐비하다.

이번 게이트는 SS급인만큼, 그 파급력이 상당한 모양.

언론에 내 이름이 알려지는 건 지금에 와서는 환영이다.

'어차피 숨기는 건 어렵고, 마족들도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차라리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게 낫다. 유명해지면 영향력도 올라가기 마련이니까.'

지친 얼굴의 진세아가 라운지로 들어왔다.

"으으, 건물 아래에도 기자들이 잔뜩 몰려 있어요. 괜히 지나갔다가 혼났네. 몰래 지나갈 걸. 서현 언니는 계속 여기에 있었던 거에요?"

"나는 안 나갔어. 잠잠해질 때까지 조용히 있으려고."

테이블에 책을 놓은 윤서현은 안경까지 쓰고서 독서 중이었다. 그런 윤서현을 나무라듯 복도에서 윤지은이 걸어나왔다.

커피를 손에 든 윤지은이 윤서현을 째려봤다.

"조용히 있자는 사람이 인스타에 사진을 몇 개나 올리는 거니? 팔로워 수가 아주 하늘을 뚫겠다?"

"그거야······. 기자들 때문에 못 나가서 답답하니까······. 하여튼. 근데,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윤서현이 급하게 말을 돌렸다.

"저 여자.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있는거에요? 다들 왜 당연하게 생각하는 건데?"

윤서현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은발의 여성.

숨길 것도 없이 그 정체는 검의 마족이었다. 마족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명백히 이질적인 존재다.

검의 마족은 오만한 표정으로 윤서현을 내려다봤다.

"당연한 거 아닌가? 너희들이 예언의 마족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 내게는 방법이 없다."

녀석은 그런 이유로 자연스레 합류했다.

게이트를 넘어 온 검의 마족은 억지력에 의해 더욱 약화되었다.

처음부터 이쪽에 넘어 와 차근차근 힘을 모아 온 부패의 마족과 달리, 검의 마족은 손해를 감수하고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따라서 순수한 힘은 A급 헌터 정도다.

나는 설명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마족의 맹세를 거쳤으니, 우리에게 위해는 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일이 생겼다간 바로 최하위 마족으로 격하 당할 거다.

"그거 참 편리하네요."

윤서현은 여전히 신용할 수 없단 표정이었다.

"부패의 마족인가 뭔가는 제대로 처리한 거 맞아요?"

"내가 이겼다. 놈은 죽었다. 당분간은 말이지."

"당분간? 무슨 말이 그래요?"

『 < S등급 > 한계돌파 퀘스트 』

- 목표 : 사도 처치 ( 1 / 4 )

실제로 내 한계돌파 퀘스트의 수치가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검의 마족이 당분간이라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부패의 마족은 신체를 옮겨다닐 수 있다. 손상을 입혔다만, 자기 은신처에서 충분히 회복하면 다시 돌아올 거다."

결국 제대로 죽인 건 아니란 말이다.

숫자는 카운팅 되어 있지만, 다시 줄어들지도 모르는 거고.

"결국 애매하단 소리네요."

"어쨌든 난 시킨 일을 끝냈다."

설명을 끝낸 은빛의 마족이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예언의 마족은 언제 풀어줄 거지? 허튼 짓했다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라."

"저기요, 그쪽이 우리를 협박할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

윤서현의 말에 검의 마족이 입을 다물었다.

때가 되면 풀어줄 거다.

지금이 때가 아닐 뿐.

스윽.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휴식은 누릴만큼 누렸다.

마계왕의 계획을 저지하려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잠시 어디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딜요?"

나는 품 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보였다.

황금빛 열쇠가 반짝였다.

엘리스가 유일하게 반응했다.

"고블린들을 만나러 가시는 건가요······?"

이 열쇠의 주인은.

전 고블린의 수장이자, 황금왕이라 불렸던 자볼.

그 녀석의 창고 열쇠다.

꿈틀.

어깨에 보호구로 붙어 있던 오르티마가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녀석이 열쇠를 든 손으로 기어 올라왔다.

미래에서 한 번 이 열쇠를 사용했었다.

그때는 환세의 도둑 진세아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오르티마를 하나 건졌을 뿐이지만.

현재 이 세계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모든 아이템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차원 넘나들며 긁어 모은 황금왕의 재보.

"같이 갈 사람은······. 최대한 큰 가방을 준비해야 할 겁니다."

이제 찾으러 갈 때가 되었다.

184화 고블린의 재보(1)

『 A급 게이트 : 그레이 포레스트 』

나는 바로 A급 게이트 하나를 잡아 공략에 나섰다.

"여기 게이트에 보물 창고가 있는 거에요? 또 창고하면 진세아죠."

잔뜩 기대를 품은 진세아가 의기 양양하게 앞으로 나섰다.

"오! 마수다! 거기 서라!"

공략에 참여한 건 자리에 있던 진세아, 엘리스, 윤서현. 거기에 더해 검의 마족까지.

키에엑!

캬아악!

잿빛의 숲에 숨죽이고 있던 마수들은 부리나케 달아나느라 바빴다.

"어딜 도망가는 거야! 돌아와 경험치들아!"

A급 게이트에 S급을 상회하는 헌터들이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부님, 저도 세아양이랑 길을 뚫을게요! 겸사겸사 사냥도 하고요!"

엘리스도 의욕적으로 마수들을 사냥하러 나섰다.

두 명 다 타재간파의 영향으로 수십 배의 경험치를 획득하게 되었을 거다.

'원래부터 재능 있던 녀석들이 경험치 버프까지 받았으니······.'

A급 게이트여도 획득하는 경험치량은 차원이 다를 거다.

엘리스가 타재간파로 개화한 재능은 두 가지다.

'시공인지'와 '리미트 해제'.

진세아가 개화한 재능은 '신속', '리미트 해제', '절대 은밀 기동'으로 무려 세 가지다. 녀석은 독보적으로 많은 재능을 깨우쳤다.

나는 단검을 들고 숲을 헤짚고 다니는 진세아를 멈춰세웠다.

"진세아, 지금 획득하는 경험치가 얼마나 돼?"

"음······. 무진장 많이? 오빠 능력 덕분인거죠? 완전 대박이랄까. 근데 정확한 수치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제가 따라다니면서 체크 해볼게요!"

엘리스가 진세아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경험치 배율 계측은 엘리스에게 맡기면 되겠고.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검의 마족이 입을 열었다.

"생각났다. 그 열쇠는 자볼의 것이군. 얼핏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설마 네 짓이었을 줄이야."

"······이봐요, 대체 어디까지 따라오려는 거에요?"

"뭘 당연한 걸 묻는건지 모르겠군. 예언의 마족을 풀어줄 때까지다."

그런 검의 마족을 윤서현은 여전히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름 감시의 효과도 있으니 나쁠 건 없다.

"맹약까지 했거늘, 귀찮은 계집이군. 그래서, 왜 여기에 온 거지? 눈 씻고 봐도 황금왕의 창고가 있을 장소는 아닌데."

그녀의 말대로다.

황금왕 자볼의 보물창고는 마계 변경에 위치한다.

나중에 대한민국에 영토를 얻은 자볼이 창고를 옮겨 놓을 예정이었다. 그 덕에 미래에서 보물 창고를 털 수 있었던 거였고.

"윤서현 헌터는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안 궁금합니까?"

"······평소에 워낙 설명을 안 해줘야 말이죠. 지한씨가 하는 일인데 다 생각이 있겠죠?"

그러려니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게이트의 중심 깊숙히 들어와서야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쯤일 겁니다."

우우웅······.

멀지 않은 동굴의 안쪽이 부자연스럽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게이트를 이동하며 발생하는 공간 왜곡.

이 세계에선 네임드 마수만이 게이트를 넘나들 수 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네임드 고블린.

"키륵······."

외팔 외눈의 쿠훌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살기와 적개심이 느껴지는 눈빛이다.

"고, 고블린······?"

"그때 그 고블린이잖아요."

"엄청 노려보는데······."

여기에 온 이유는 쿠훌렌을 만나기 위해서 였다. 자볼이 죽고, 고블린의 수장으로 군림하는 게 바로 쿠훌렌이니까.

이미 쿠훌렌을 본 적 있는 두 사람은 차분했다.

놀란 것은 엘리스 뿐.

아니, 검의 마족도 놀라는 눈치였다.

입은 다물고 있지만.

쿠훌렌의 시선이 잠시 검의 마족에게 머물렀다. 가뜩이나 험상 궃은 녀석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네 놈 제정신인가? 마계왕을 타도하자는 거 아니었나? 이런 혹을 데리고 오다니······. 키륵······."

쿠훌렌과는 마계왕을 처치하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

그는 고블린 일족의 해방을 위해 나에게 협조하고 있는 중이었다.

검의 마족은 최상위 마족.

마계왕의 최측근 중에서도 최측근.

그런 의문이 따라 붙는 건 당연했다.

"······열등한 고블린이 입을 함부로 놀리는군."

검의 마족의 검날이 번뜩였다.

나는 재빨리 둘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오해하지마라, 검의 마족은 이쪽 편이다."

"이봐, 누가 네 편이라는 거냐."

"어쨌든 계획에 차질은 없으니 걱정 말고. 그래서 황금왕의 보물창고는 어떻게 됐지?"

나는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지난 쿠훌렌과의 만남 때, 나는 녀석에게 황금왕의 보물창고를 다른 공간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마계에 위치한 창고를 직접 털러가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들이 날뛰는 곳이 바로 마계다. 그곳에선 이쪽 세계와 달리 억지력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함부로 발을 디뎠다간 객사하기 딱 좋은 장소란 의미였다.

하지만 고블린들이 내 쪽으로 창고를 가져올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게 풀린다.

"키륵······."

잠시 침묵하던 쿠훌렌은 당당히 말했다.

"습격을 당해서 잃어버렸다."

"······."

너무 당당하니 역으로 할 말이 없어진다.

그 범인은 대충 짐작이 간다.

예언의 마족이 인질로 붙잡힌 지금 내 행동을 앞서 예견할 수 있는 인물은 없다. 범인은 원래부터 창고를 노리던 마족이겠지.

따라서 범인 하나로 좁혀진다.

"침체의 마족의 짓인가?"

자볼은 권속이었다. 제약도 사용하고 있었고.

그 주인이 되는게 바로 상위 침체의 마족.

애시당초 자볼의 창고는 마족 사이에서도 소문이 퍼져있었다. 주인에게도 숨긴 엄청난 보물 창고가 있다고.

쿠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군. 키륵, 놈의 군대로부터 창고를 빼내는 건 성공했지만 이동 도중에 습격을 받았다. 창고는 아공간에 빠져버렸다."

뭐,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침체의 마족이 거느린 군사들도 창고를 노리고 있단 거겠네."

"······정리하자면 그게 맞다. 키륵. 상위 마족인만큼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마계에 직접 가는 거에 비하면 훨씬 낫다.

상대는 억지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상위 마족과 그 병사들.

전력은 SS급이나 마찬가지인 헌터 넷.

그래도 잘만하면 더 쉽게 일처리가 가능할 것 같은데.

"······."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뒤쪽에 서 있는 검의 마족에게로 향했다.

"뭐지? 왜 다 날 보는 거냐?"

"저 마족은 최상위 마족이라고 했었죠?"

"맞아요!"

"쉽게 해결되겠네!"

힘의 논리에 따라 위계 질서가 결정되는 마족의 특성상 검의 마족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검의 마족이 눈을 가늘게 떴다.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웃기는 소리 말아라. 나는 마계왕을 배신한 게 아니다. 예언의 마족을 풀어준다면 몰라도 당장 협력할 마음은 없다."

"그러면 여기는 왜 왔대?!"

"꼬맹이, 말했잖냐······. 너희들을 감시하러······."

그런 입장이라 이건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놔둬. 협력하기 싫으면 안해도 돼. 여차하면 정면 돌파해도 상관 없다. 물론 예언의 마족이 풀려나는 시기는 매우 늦춰지겠지만."

아니면 진세아의 절대 은밀 기동으로 돌파해도 되고. 검의 마족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조금 돌아가는 정도다.

"큭······."

내가 단호하게 나오자 검의 마족이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런 짓까지 할 성 싶으냐······."

같은 편인 부패의 마족은 잘도 공격했으면서 말이다.

* * *

아공간을 뚫고 떨어진, 황금왕의 창고는 어느 차원에 떨어졌다.

상위마법계.

이곳에 떨어진 존재는 필연적으로 지상과 하늘을 잇는 하나의 기둥을 보게 된다.

그 정체는 마탑이다.

끝없는 하늘위로 뻗어나가는 마탑은 상위 마법계의 지성들이 쌓아 올린 지식의 보고이자, 지성의 총체.

이 세계를 대표하는 하나뿐인 건물이었다.

그걸 뚫어져라 바라보던 마족 하나가 중얼거렸다.

"마계에도 없는 건축물이라. 이 세계의 인간 놈들은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게 분명하군."

"어이, 구경할 시간 없어. 침체의 마족께서 빨리 움직이라고 하셨다."

"상위 마법계의 인간들에게 걸리면 성가신 일로 번진다. 거기 큐브 주변의 흙을 메꿔라."

바닥에 박힌 거대한 황금빛의 큐브.

그 크기는 문명계에 존재하는 컨테이너 박스와 흡사한 수준이었다.

그 주변으로 보랏빛 갑옷을 걸친 마족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큐브를 지켜보던 안경을 낀 마족이 혀를 찼다.

"몰래 숨겨왔다더니, 그럴만하군. 보통 물건이 아니다. 어지간한 공간계 마법으로는 꿈쩍도 안하겠어."

"고블린들은 갑자기 뭔 생각으로 이걸 옮기려고 한 거야?"

"더러운 마수들이 하는 생각을 저희가 알 수 있을 리가요."

금빛 큐브를 다시 한바퀴 둘러 본 마족은 안경을 올려썼다.

"침체의 마족을 모셔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대기입니다. 상위 마법계의 존재가 다가오면 즉시 사살하시고요."

"알겠습니다."

안경 마족이 사라진 자리, 스무 명 가량의 병사들이 큐브를 둘러싸고 경계를 서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 아래 흘러가는 구름.

이 차원은 마족들의 지배 바깥에 있는 차원이었다.

겉으로는 평화롭기 그지 없어보인다.

경계를 서던 마족 병사 중 하나가 창대로 큐브를 퉁퉁 쳤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고블린 놈의 창고라는 거지. 대체 뭐가 들었을까."

"어마어마한 재보가 들었다던데, 운이 좋으면 우리한테 떨어지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

"잠깐, 저 앞에 뭔가 나타났다."

잡담을 나누는 병사들의 눈 앞으로 사람 하나가 보였다.

저벅, 저벅.

의문의 인물은 병사들을 향해 유유히 걸어 오고 있었다.

"멈춰서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짜증과 함께 호통을 치려던 병사가 말끝을 흐렸다.

처음에는 인간인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헉!"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흉흉한 마기.

같은 마족으로서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눈 앞의 마족은 자신보다 월등한 존재라는 것을.

아니, 못 알아보는 것부터가 멍청한 일이었다.

마계에서 은빛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마족의 존재를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

모든 마족 병사들이 일제히 굳어졌다.

검의 마족의 차가운 눈이 그들을 내려다봤다.

"제 주인을 닮아 멍청한 놈들이군. 꿇어라."

쿠웅!

그 즉시, 모든 병사들이 무릎이 부숴져라 바닥에 대었다.

최상위 마족의 행차.

그녀가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물러나라. 지금부터 이 물건은 내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홍해처럼 갈라져 길을 터주었다. 혹시나 검의 마족의 심기를 거스르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검의 마족이 황금빛 큐브를 향해 다가서려는 그 순간이었다.

"잠깐, 잠깐."

그런 그들의 뒤로 한 남자의 음성이 울렸다.

구부러진 뿔과 야비한 눈을 가진 마족.

창고를 노리고 있던 상위 침체의 마족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검의 마족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최상위 마족께서 어인 일로 이런 누추한 곳에······."

물론 태연한 겉모습과 달리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최상위 마족이 여기에 나타났다.

그 이유는 보나마나였으니까.

'젠장, 내가 어떻게 찾아낸 창고인데. 대체 어디서 정보를 얻어서 온 거야?'

고블린 놈들 말고는 아는 놈들이 없을텐데.

그렇다고 고블린들이 감히 이야기를 나눌 급이 아닌데.

어떻게든 검의 마족을 창고에서 떨어뜨려놔야 했다.

물론 검의 마족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한 번만 말하지. 꺼져라."

"서, 성격 한 번 화끈하셔. 근데, 곤란합니다."

침체의 마족이 바싹 타들어가는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검의 마족이 여기에 있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대적자를 상대하는 중요 임무를 맡으셨던 거 아닙니까? 부패의 마족님과 동시에 실종되셨다고 들었는데······."

그는 검의 마족을 향해 얼굴 들이댔다.

대놓고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이 시점에 어째서 여, 커허어억!"

검의 마족이 검손잡이로 침체의 마족의 얼굴을 후려쳤다. 마기가 담긴 강한 공격에 침체의 마족의 코에서 피가 쏟아져나왔다.

"끄으윽. 무, 무슨 짓입니까······!"

철철 흘러내리는 얼굴을 붙잡은 침체의 마족이 고통에 신음하며 물었다.

검의 마족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대적자를 상대하기 위한 아이템 보급이 필요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퍼져나온 최상위 마족의 격이 일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지대한 살기가 침체의 마족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힘이 곧 법칙.

그것이 마족의 룰이었으니까.

"크윽······. 일단은 알겠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열쇠가 없으면 열 수 없는 장소인데······."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안면을 붙잡은 채 침체의 마족이 중얼거렸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 나름대로 반항한 것이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뭐냐고?'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한 침체의 마족이 손을 흔들었다.

"얘들아, 철수해라."

"예, 알겠습니다."

"모두 마계로 귀환한다."

그들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침체의 마족은 일렁이는 게이트 속으로 마족 병사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모든 마족 병사들이 사라지자, 뒤쪽에 격리된 공간에 숨어 있던 이지한의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최상위 마족의 힘이 대단한가봐요. 그 건방진 마족이 그냥 가버렸어요."

"이게 권력의 힘이라는 건가. 그런 최상위 마족에게 명령하는 오빠는 대체······."

"뭐, 쓸모 있네요."

검의 마족은 쯧하고 혀를 찼다.

"네 놈들에게 인정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다. 빨리 끝내라. 봤겠지만 놈이 의심하고 있는 게 보였으니."

"좋네. 예언의 마족을 좀 더 빨리 놓아줄 수 있겠어."

"네 놈······. 두고 보겠다."

그래, 이 정도면 5분 정도는 빨리 풀어줘도 상관 없겠다.

나는 자볼의 창고 앞으로 다가섰다.

미래에서 봤던 것과는 다른 디자인이다. 금으로 치장된 큐브는 좀 더 세련된 느낌이었다.

『 황금왕의 창고 열쇠 』

비스듬하게 꽂혀 있는 큐브를 타고 올라, 가운데에 있는 틈에 열쇠를 끼워넣었다.

철컥!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창고의 문이 열렸다.

동시에 햇살처럼 따스한 금빛이 쏟아져나왔다.

"오오!"

모두의 시선이 큐브로 향했다.

검의 마족도 관심이 있는지 시선이 힐끔힐끔 이쪽으로 향한다.

황금왕 자볼이 다양한 차원을 떠돌며 수집해 온 재보.

보석이나, 황금은 당연하고······.

기대가 되는 부분은 아이템이다.

환세의 도둑 진세아가 몽땅 가져가느라 맛만 봤던 아이템들······.

그게 이젠 전부 내 거다.

"그러면 들어가죠."

어디 뭐가 있는지 살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