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콰아앙! 콰앙!
실험실 내부에 휘몰아치는 뜨거운 격류, 터져나오는 마력의 잔해에 세레네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었다.
부숴진 기계 병사의 방패 뒤에 어찌어찌 숨어 있지만, 새끼용 오르티마가 옆에 있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죽었을 지도 모른다.
세레네는 용기를 내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콰앙! 콰아앙!
그녀의 눈에는 마족과 이지한의 싸움이 그저 폭발과 소음의 연속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방사되는 마력과 마기에 가려져 둘의 형체를 파악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누가, 누가 이기고 있는 거야?"
세레네가 가지고 있는 전지의 능력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구소 내부의 일이라면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지한이 오고나서부터는 그 능력조차도 불안정해졌다.
'모르겠어. 알아낼 수가 없어.'
전지의 능력이 이지한에게만큼은 적용되지 않는다. 전지의 능력으로 알아내는 모든 정보가 계속해서 뒤바뀐다.
'넌 뭔가 알고 있는거니?'
뀨.
전투를 바라보고 있는 새끼용 오르티마. 녀석은 진지하게 실험실에서 벌어지는 전투을 눈에 담고 있었다.
전투는 과열되어 있었다. 하위 마족과 주인님은 완벽한 호각을 이루며 싸우고 있었다.
다만 소모전이 되었을 때 불리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여기는 마족의 은신처. 이곳에 모인 짙은 마기는 마족에게 지속적인 힘을 부여하고 있었다.
콰아앙! 콰앙!
하위 마족이 장착한 슈트는 어느새 변형을 거쳐 보랏빛 마력을 은은하게 방출하고 있었다.
이지한 또한 밀리지 않았다. 그가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었다.
차츰차츰 발전의 마족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다.
오르티마는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주인이 자신을 부르는 순간을.
* * *
하위 마족.
그 중에서도 발전의 마족이 가지고 있는 힘은 강력했다. 마도 지식을 결합하며 발명한 각종 병기들이 그의 힘을 보조해주고 있었다.
놈은 내 움직임을 분석하고, 읽어내며 차분히 대항하고 있었다.
'정석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힘을 아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단숨에 자세를 잡은 뒤, 대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 스킬 '데몬헌트 Lv.11'을 발휘합니다. 』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
발전의 마족은 불길함을 감지하고서 방어 태세를 취했다. 놈의 양 팔에서 솟아난 검은 오러 블레이드가 크기를 부풀렸다.
놈은 방어가 아니라 회피 했어야 했다.
내 일자베기는 마기조차 씹어 삼키는 궁극의 일격.
콰아아아!
공간 위에 새겨진 검은 선 하나가 발전의 마족의 오러블레이드를 잘라냈다. 그것은 블랙홀처럼 근처의 것들을 빨아 들이기 시작했다.
"무, 무슨······!"
콰득, 콰드득!
발전의 마족의 오른팔이 그대로 찢겨 나갔다. 검붉은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놈은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광화 상태의 좋은 점은 마력이 계속해서 차오른다는 것. 그것이 고유 서클과 결합된다면.
나는 계속해서 일자베기를 내지를 수 있다.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콰드드득!
다시금 놈의 다른 팔이 잘려 나갔다. 그렇다고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마기를 활용한 신체의 재생은 마족의 특기였으니까.
"네, 네 놈!"
발전의 마족의 입고 있는 슈트에서 은은하게 나오고 있던 보랏빛이 일순 강해졌다. 어쩌면 이게 놈의 마지막 발악.
동시에 세 개의 정육면체가 놈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맥동하는 심장이 담긴 상자.
『 부덕의 상자가 불길한 기운을 방출합니다. 』
『 제약 : 전진 금지 』
『 제약 : 회피 금지 』
『 제약 : 도약 금지 』
동시에 세 개의 제약이 생겨났다. 얼굴에 핏대를 가득 세운 발전의 마족이 소리쳤다.
"이것이 마족과 인간의 차이다! 네 놈은 절대로 날 이길 수 없다. 내가 평생에 걸쳐 이룩해 온 모든 것을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 무너질 순 없단 말이다!"
마기가 한가득 방출되며 발전의 마족을 뒤덮었다.
"조심해요!"
뒤쪽에 숨어 있던 세레네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검은 마기를 뚫고 쏟아져 나오는 새하얀 광선.
피하려고 발을 떼었지만 슬쩍 움직이다 몸이 굳어졌다.
『 제약 : 회피 금지 』
피할 수 없다. 제약이란 그런 것이었다.
신속(神速)으로 인해 가속된 사고 속에서 나는 재빨리 대검을 들어 올렸다.
피할 수 없다면, 베어내는 수밖에 없다.
콰아아아아!
일자베기가 만들어낸 선을 중심으로 레이저는 양측으로 갈라졌다. 양분되어 발사된 광선은 실험실의 한쪽 벽면을 완전히 박살냈다.
마기가 걷히자 멀쩡한 모습을 한 발전의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기로 몸을 회복한 모양새였다.
그의 옆에는 거대한 기계 대포 하나가 놓여 있다.
놈은 그 앞에서 광소했다.
"제약 앞에 인간은 무력하다! 그것을 다루고 사용하는 것은 마족 뿐이다. 이게 마족이 모든 생물의 정점이란 뜻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놈의 말대로 수많은 헌터들을 옭아맸던 제약이다.
정점에 오른 SSS급 헌터라고 한들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검술의 달인은 검을 제한하는 제약 앞에 무릎을 꿇는다.
마법의 천재는 마력 제한 앞에서 좌절한다.
활을 아무리 잘 다뤄도, 활을 잡지 못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한 사람이 평생 일궈 온 재능을 부정하며, 살아온 인생마저 부정하는 것이 마족의 제약.
우우웅.
다시금 기계 대포의 앞쪽으로 마력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그 강렬한 진동에 의해 이미 반쯤 폐허가 되었던 실험실이 무너져 내렸다.
쿠구구구······.
설상가상 근처의 바닥까지 차근차근 무너져 내린다.
놈을 잡기 위해서 전진하는 것은 불가능.
레이저를 회피하는 것 또한 불가.
제약은 확실히 성가시다.
만약 내가 다룰 수 있는 무기가 검이 전부였다면.
여기서 좌절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전진하지 못한 채로 레이저를 받아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을테니까.
'해볼만 하다.'
나는 오른쪽으로 팔을 뻗었다.
"오르티마. 회수의 창."
아이템에 붙은 회수 스킬을 사용했다.
처억.
회수의 창으로 변한 오르티마가 내 손으로 쭉 끌려왔다.
나는 창을 들어 올렸다.
『 유니크 스킬 '웨펀 마스터 Lv.2'를 발휘합니다. 』
창 끝에서 미친듯한 불길이 치솟았다.
손에 든 무기를 전부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해주고 위력을 올려주는 스킬 웨펀 마스터.
그러나 이 스킬의 활용법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는 손을 뒤로 뻗어 회수의 창을 날릴 준비를 했다. 활시위처럼 당겨진 팔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핏줄이 가득 올라온다.
한계까지 끌어당긴 회수의 창.
남은 건.
『 스킬 웨펀 마스터의 효과로 모든 무기에서 동일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레이저가 쏘아지는 타이밍에 맞춰 던지는 것 뿐.
콰아아아아!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 스킬 '투창 Lv.11'를 발휘합니다. 』
미사일처럼 쏘아진 창이 별똥별처럼 푸른 꼬리를 그리며 나아갔다. 창날은 다가오는 레이저를 가르며 계속해서 나아간다.
창날의 끝이 향하는 장소는 대포가 아니다.
그 옆에 서 있던 발전의 마족. 그제서야 내 의도를 깨달은 놈이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 제약 : 회피 금지 』
발전의 마족이 몸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윽!"
제약은 모두에게 공평한 법. 이제와서 방어하기엔 너무 늦었다.
푸우욱!
오러로 타오르는 창날은 그대로 마족이 가슴에 꽂혔다. 관통하지는 못했다. 레이저를 뚫고 나가느라 확실히 위력이 약해진 탓이었다.
"커허억!"
놈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에 박힌 창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창은 없었다. 새끼용으로 변한 오르티마가 깊게 새겨진 상처에 입을 쳐박고 있었다.
이걸로 마무리다.
나는 녀석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르티마. 오러 브레스."
창날에서 유지 되던 오러는 오르티마가 용의 모습으로 변하고도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오러를 몸에서 발산하는 새끼용.
『 스킬 '웨펀 마스터 Lv.3'을 획득합니다. 』
소환수인 동시에 무기.
그렇기에 가능한.
오로지 오르티마만이 할 수 있는 공격이다.
콰아아아아!
오르티마의 강렬한 브레스가 발전의 마족을 휘감았다.
78화 발전의 마족(3)
"크아아악!"
닿는 것을 녹이고 태우는 마력의 불길.
오르티마의 오러 브레스가 발전의 마족을 체내에서부터 녹여나가기 시작했다. 놈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주저 앉았다.
『 제약 : 회피 금지 』
『 제약 : 도약 금지 』
『 제약 : 전진 금지 』
발전의 마족이 만들어낸 제약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덫이 되었다.
『 모든 제약을 해제합니다. 』
파스스······! 공중에 떠 있던 부덕의 상자가 내부의 심장과 함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살고자하는 마족의 최후의 발악이었지만.
너무 늦었다.
"내가······. 겨우 여기서······. 인간 따위에게······."
그는 반쯤 녹아내린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있었다. 브레스를 전부 뱉어낸 오르티마가 놈의 머리를 밟아 제압했다.
발전의 마족은 분노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인간, 네가 감당할 수 있겠나?! 나는 네가 잡아 온 최하위 마족 같은 잔챙이들과는 다르다. 나 발전의 마족은 대업을 짊어진 대체 불가능한 존재란 말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잘 됐네."
하위 마족인 발전의 마족.
놈은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의 총 책임자다.
마계와 현실 세계를 잇는 직통 게이트를 열기 위한 기술자. 녀석의 죽음은 마족의 입장에선 치명적인 손실이다.
"잘 돼······? 네 놈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거다. 전 마족의 분노와 증오를 한낱 인간인 네가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흔하디 흔한 협박이었다.
나는 무감하게 발전의 마족을 바라봤다.
"그래?"
그런 말에 겁먹을 거면 시작도 안했다. 나는 발전의 마족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발전의 마족이 눈이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나를 살려라. 그렇다면 용서해주마. 그래, 내 충실한 종이 될 수 있도록 하지."
이룬 것이 많을수록 삶에 대한 집착은 심해질 수밖에 없는 걸까. 녀석은 오만한 태도로 목숨을 구걸했다.
"목숨 구걸은 최하위 마족도 안 하던데."
"······."
그 말에 녀석의 표정이 멍해졌다.
고민은 없었다.
나는 헌터로서 녀석을 사냥하러 온 것이므로.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서걱—!
푸른 선 하나가 발전의 마족의 머리를 잘라냈다. 언젠가 마도공학자로서 마도 병기 군단을 거느릴 마족은 이렇게 목숨을 잃었다.
『 하위 발전의 마족을 처치하셨습니다. 』
『 4210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오르티마의 레벨이 7 상승합니다. 』
『 마공학 드래곤(오르티마) Lv.104 → 111 』
대량의 포인트와 경험치가 쏟아져 들어왔다. 물론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 C등급 한계돌파 퀘스트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
『 목표 : '프로젝트 : 메이저 게이트' 저지 ( 1 / 1 ) 』
『 보상 정산에 시간이 소요 됩니다. 』
이로써 C등급 레벨 60에서 멈춰 있던 내 성장이 다시 시작 될 수 있게 되었다. 보상 정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뀨!
발전의 마족이 죽은 것을 확인하자, 오르티마가 나를 향해 뛰어 들었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띵.
뒤늦게 떠오르는 메시지.
『 이계규율 : 전무후무한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
『 해당 업적이 인과의 순리를 뛰어 넘었습니다. 』
『 업적 정산에 시간이 소요됩니다. 』
그래 이것도 잊으면 안 된다.
'이번에는 기대할만 하겠어.'
지난번 최하위 마족을 처리하고 받았던 칭호가 '마계의 재앙'이었다. 따지고보면 그것 덕분에 마족의 은신처에 돌입하고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보상이 정산 되는 동안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저, 정말로 이겼어요."
뒤쪽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세레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쓰러진 발전의 마족을 살피는 세레네의 얼굴은 복잡해보였다.
"드디어······. 돌아갈 수 있겠어요.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요."
그리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덕분에 여기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각자 이해 관계가 일치한 거죠."
"그래도, 그쪽이 아니었으면 저는······. 앗!"
오르티마가 세레네의 머리에 올라탔다.
"그래, 너도 고마워."
세레네는 눈가를 쓱 훔쳤다.
격렬한 전투였던만큼 최상층이 엉망진창이었다.
천장과 벽은 훤하니 뚫려 있어 밖이 내다 보였고, 바닥에 생긴 균열은 당장이라도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발치에 죽어 있는 발전의 마족을 바라봤다.
놈의 목에 걸린 보석을 뜯어냈다.
『 마계의 틈새 고유 제어석 』
이로써 연구소가 위치한 공간 자체의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마족도 올 수 없도록 아예 공간을 폐쇄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놈이 입고 있던 금속제 수트.
이건 순수히 마기로 작동 되는 거라 내가 사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내가 후드려 패놔서 거의 반쯤 망가져 있기도 하고.
'하지만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배신자 김상욱이 마기를 다룰 수 있기도 하고.
"오르티마, 이걸 흡수 할 수 있겠어?"
스르륵.
내 말에 오르티마가 슬라임으로 변해 마족을 뒤덮었다. 녀석이 착용하고 있던 금속 수트를 금세 흡수했다.
'생명체 흡수에는 제한이 있지만, 아이템 흡수에는 제한이 없으니.'
『 해당 아이템의 파손이 심각합니다. 파손률 67% 』
『 오르티마가 마도공학 방어구의 형상을 기억합니다. 』
"이건 수리할 수 없는거야?"
도리도리.
몸을 좌우로 비트는 오르티마.
『 해당 아이템의 복구에 필요한 오르티마의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
'드래곤을 흡수할 때 에너지를 다 쓴 건가.'
메시지를 종합해 보면 드래곤 또한 제대로 된 마수가 아니었다. 결함이 있는 인공 생명체를 오르티마가 복구한 것이었다.
'복구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단 거군.'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어쨌든 당장은 필요 없는 아이템이니 복구할 필욘 없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대포의 형태를 하고 있는 마도병기를 바라봤다.
"저건 안되나?"
"······."
오르티마를 번쩍 들어서 대포 위에 올려봤다.
도리도리.
녀석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턱을 매만졌다. 너무 커서 그런가. 아이템이 아니라 그런 걸 수도 있고.
"잠시만요."
세레네가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안전한 장소를 밟고 나아간 세레네가 벽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것저것 조작하더니 벽면이 열리며 금고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지 않으면 열 수 없는 금고.
발전의 마족이 죽어버린 지금 그 비밀번호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나.
세레네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전지(全知)의 능력자다.
삑, 삐빅. 삑.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금고가 열렸다.
"찾았어요."
그 안에서 찾아낸 붉은색 보안카드.
세레네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제 돌아갈 수 있어요."
* * *
나와 세레네는 승강기에 올라탔다. 붉은 보안 카드를 가져다대자 승강기가 빠른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최하층 : 초월의 유적 』
문이 열리며 최하층의 모습이 드러났다. 새하얀 방 안에 3m 크기의 검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그 주변에 세워져 있는 경비 안드로이드들.
세레네가 순간 흠칫했으나 모두 기능이 정지한 상태였다.
혹시나 싶어서 따라왔는데 문제 없어 다행이다.
"여기까지 안와주셔도 되는데······."
세레네가 힐끗 나를 바라봤다. 그냥 각자 갈 길을 가도 되는 부분이었지만.
"저도 묻고 싶은게 있어서요."
기껏 전지(全知)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만났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검은 비석 앞으로 다가간 세레네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검은 비석 위에 새겨진 황금빛 문자가 천천히 빛을 발했다.
『 동료 세레네가 스킬 '다세계 해석 Lv.2'를 발휘합니다. 』
음각으로 새겨진 문자들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른다. 떠오른 문자들은 그대로 그 주변을 배회하며 공간 전체로 퍼져나갔다.
세레네의 주변에서 반딧불이처럼 퍼져나간 녹빛의 마력과 뒤섞이며 장관을 이뤄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될 거에요."
그녀는 체력을 꽤 소모했는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어떤 게 궁금하신가요? 제가 아는 한 최선을 다해서 알려 드릴게요."
가장 먼저 궁금한 건 이거다.
"마족의 침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겁니까?"
"······그 말은 다른 세계도 마족들에 의해 공격 받았냐는 질문이겠죠?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래요."
세레네는 씁쓸한 표정과 함께 대답했다.
"그들의 진정한 목적까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그들은 끊임 없이 다른 차원을 멸망 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 왔어요. 지금은 이지한씨의 차원이 노려지고 있는 거고요."
마족들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움직였다. 인류가 그들의 존재를 알아채기 전부터 침략을 준비해 왔다.
그러한 일들은 이미 수차례 진행된 전쟁의 경험 아래 벌어진 일이었던 거다.
"혹시 마족의 공격을 막아낸 차원도 있습니까?"
그 말에 세레네는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아, 하지만 침략 과정에서 마족들에게 굉장한 타격을 준 사건은 있었어요. 저도 기록으로 본 것 뿐이지만 마족들은 그 사건을 치욕의 밤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고 있다네요."
치욕의 밤이라.
"최상위 마족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건······. 아마 그 일 때문일 거에요. 무한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테니까요."
좋은 정보였다. 이후로 시스템이나 마족에 대해서 이것저것 질문했지만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죄송해요. 생각보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이 별로 없네요. 이 연구소 내부의 일들은 훤히 알지만······. 그 바깥의 일은 잘······."
"괜찮습니다. 충분합니다."
전지의 능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나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계 규율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그 말을 들은 세레네가 고심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계 규율······. 발전의 마족이 가지고 있던 고대의 문헌. 거기에 딱 한 줄 적혀 있었을 거에요. '그 힘은 결코 부정되지 않는 모든 것의 규칙이자 초월자의 자격이다'. 제가 아는 건 거기까지에요. 죄송해요. 도움이 못 되어서."
"아뇨, 충분합니다."
초월자의 자격이라. 의미심장하다.
본래 이계 규율의 주인이었던 불사의 마족은······. 이 능력에 대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우우웅.
생각이 깊어지려는 찰나, 비석에서 검은색 빛이 방출되었다. 허공으로 발산된 검은 빛에 닿은 금빛 글자들이 부식 되어 사라졌다.
이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잠해졌다.
"어······? 이럴 리가······.
비석을 바라보는 세레네의 눈에 절망이 감돌았다. 그녀는 다시 비석에 가져가 스킬을 발휘했다.
『 스킬 '다세계 해석 Lv.2'를 발휘합니다. 』
『 스킬 '다세계 해석 Lv.2'를 발휘합니다. 』
『 스킬 '다세계 해석 Lv.2'를 발휘합니다. 』
그러나 비석은 묵묵부답이었다.
"왜? 어째서?"
주먹으로 비석을 두드리던 세레네는 그대로 주저 앉았다. 그녀가 허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돌아갈 수가 없어요. 해석이 안돼요. 비석을 해석하지 못하면 타차원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제가 가진 전지의 능력이 적용되지 않아요."
곤란한 상황이었다. 모든 게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돌아갈 길이 요원해졌다.
세레네는 애써 울음을 삼키며 쓴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어차피 멸망한 세계였거든요. 돌아가도 남아 있는 사람은 없을 거에요. 차라리 잘 됐어요······."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나는 세레네에게 다가갔다.
"그 다세계 해석이라는 스킬 전수 가능합니까?"
"네? 아마도요······. 엘프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해석법이니까요. 인간에게 알려준 적은 없지만······. 가능은 할 것 같아요."
"그러면 저한테 알려 주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하면 다른 해석이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세레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농담 같은 위로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제서야 세레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어려운 스킬은 아니에요. 반면에 사용처는 많아요. 모르는 세계의 문자를 읽는다거나, 언어를 이해한다거나. 법칙을 이해하고 이용할 수도 있죠."
지혜로운 하이 엘프들은 마력을 사용해 타차원의 편린을 엿보고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곳으로 자신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높이고, 지식의 산물을 향유하기 위해서.
그것이 다세계 해석.
『 레어 스킬 '다세계 해석 Lv.1'을 전수 받았습니다. 』
열심히 모은 재능 파편과 고유 서클 생성이 이번 스킬을 습득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보답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내게 스킬을 전수해주고도 세레네는 기대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레벨 1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저벅, 저벅.
나는 비석으로 다가가 바로 다세계 해석을 발휘했다. 검은 비석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묵묵부답이었다.
『 스킬 '다세계 해석 Lv.1'을 발휘합니다. 』
하지만 나는 그것에 굴하지 않고 스킬을 발휘했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양의 스킬 경험치가 내게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20만배의 경험이 계속해서 끊없이 축적된다. 실패하더라도 상관 없다. 그 무수한 경험 속에서 사람은 어떻게든 성장하기 마련이니까.
촤르르륵!
『 스킬 '다세계 해석 Lv.2'를 획득 합니다. 』
『 스킬 '다세계 해석 Lv.3'을 획득 합니다. 』
『 스킬 '다세계 해석 Lv.4'를 획득 합니다. 』
···
..
.
『 스킬 '다세계 해석 Lv.10'을 획득 합니다. 』
『 해석한 대상이 가지는 효과가 10% 증가합니다. 』
화아악!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 속에서 황금빛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때까지와는 다른 강렬한 섬광. 그것은 내 푸른 마력과 뒤섞였다.
이내 비석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봐봐, 내가 된다고 했잖아.
79화 각성 스킬(1)
『 초월의 비석을 해석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 』
『 해당 기물이 올바른 방식으로 기동합니다. 』
스킬 다세계 해석으로 확인하고 나니 알겠다.
이 비석은 타 차원 간의 연결을 담당하는 매개체. 발전의 마족은 이 비석을 토대로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를 진행하던 게 아닐까.
샤아아—!
비석에서 흘러나온 황금빛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찬란한 기류 속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세레네.
"다, 당신은······."
엘프 소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전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세레네가 하지 못했던 비석의 해석을 나는 단숨에 해냈다. 특성 무재조정과 칭호 초성장의 효과로 20만배의 달하는 경험치를 얻어 만들어낸 기적.
그러나 여기에선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세레네는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고마워요."
세레네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한발자국.
비석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 내게 말했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거에요. 당신의 세계를 구할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오르티마를 쓰다듬어줬다.
"너도 잘 있어."
녀석은 아쉬운 듯 세레네를 바라봤다.
세레네가 손을 뻗자, 근처로 황금빛과 녹빛의 기류가 동시에 형성되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비석의 효과인지 그녀의 감정이 일부 내게로 흘러 들어 왔다.
아득하지만 그립고, 가슴 아픈 고향. 다시는 돌아갈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그 장소로.
세레나는 돌아갔다. 빛이 사그라든 자리에 그녀는 없었다.
'이미 멸망한 세계라.'
그녀가 돌아간 장소는 그런 곳이었다.
회귀 전, 이 세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일말의 희망도 없이 마족들에게 짓밟힌 땅.
무력함과 절망감만이 감도는 멸망한 세계.
그런 미래를 이번에는 반드시 막고 말겠다.
다짐하는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 이계 규율의 업적 정산이 끝났습니다. 』
『 해당 업적을 정산합니다. 』
- 업적명 : 소규모 기적( 하위 발전의 마족 처치, 하이 엘프 세레네의 귀환 )
- 기록 : 데미지 S, 전투 S++, 능력 개화 SSS, 인과 간섭 SS······.
- 종합평가 : SS
변함없이 과대평과 된 업적.
『 전대미문의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
『 이계 규율 상점 : 18200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해당 기록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
『 무성(無星)등급 칭호 : 기적의 발현자 』
- 유적 필드에서 데미지 1,000% 상승
- 제약 무시 4% 추가
'유적 필드라······.'
지금 내가 있는 장소에는 적용이 안 되는 모양. 비석 하나 있는 걸로는 안된다는 건가? 필드의 기준이 뭔지 알 방법이 없다.
그래도 분명 쓸 일이 있을 거다.
마계의 재앙이 유용하게 사용 되었듯.
이계 규율의 터무니 없는 보상을 확인하며 나는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주인을 잃은 연구소는 모든 기능이 정지해 있다.
놈이 자랑하던 병기 모두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있다. 그것들을 지나, 나는 성 밖으로 나왔다.
메마른 식물들로 가득한 정원 한 켠에 있는 철문.
내가 들어왔던 푸른색 철문이다.
나는 발전의 마족이 가지고 있던 제어석을 들어 올렸다.
'김상욱의 말대로라면······. 이렇게 쓰는 거던가.'
제어석을 흔들자 붉은 빛이 퍼져나오며 철문을 감싸기 시작했다.
본래대로라면 마계의 틈새에서 바로 내가 사는 현계로 돌아갈 순 없다. 이곳은 마계와 더 가까운 장소니까.
'그래서 들어올 때도 게이트를 거쳐서 들어 온 거고.'
마찬가지로 나갈 때도 게이트를 거쳐야 한다.
'문제는 무슨 게이트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건데······.'
내가 들어왔던 게이트는 공략이 완료 되었으니 사라졌을 거다. 아마 조건이 맞는 다른 게이트로 연결 될 거다.
찰싹.
새끼용으로 변한 오르티마가 내 어깨에 올라탔다.
최소한 대한민국에만 떨어져라······.
그런 마음과 함께 나는 내부로 들어갔다.
* * *
촤아아악!
수호 길드의 공략이 이뤄지고 있는 A급 게이트.
"태양아, 여기서 휴식할래? 쉬엄쉬엄 해도 돼."
오러 블레이드를 개화한 신태양은 나타나는 맹수들을 가볍게 썰어버렸다. 이제 막 B급에 오른 헌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미친 퍼포먼스였다.
순조로운 공략이었다.
오히려 마수들이 신태양을 피해 도망칠 정도였다. 그 뒤를 따르는 스무 명 가량의 보조 헌터들은 입을 벌린 채 구경할 뿐이었다.
'이게 천재······?'
'며칠 전하고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는데.'
'성장이 말이 안되잖아.'
수퍼 루키? 그 정도 수식어로 신태양을 표현할 순 없었다. 수호 길드의 길드장 사최헌 못지 않은 천재 헌터의 등장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감탄만 하고 있을 때.
신태양의 사수만이 그의 얼굴에 깃든 변화를 알아챘다. 사냥 도중에도 무언가가 줄곧 걸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제 대규모 공략이 있었으니까, 천천히 해도 돼."
그녀는 손에 든 태블릿 기기를 살피며 말했다. 이미 충분하다 못해 기적적인 성장 수치였다.
본래 게이트의 랭크와 헌터 랭크가 올라갈수록 성장이 더뎌지는 게 당연하다. 나타나는 마수는 강해지고, 필요한 경험치 양도 대폭 늘어나니까.
신태양의 성장은 오히려 가속하고 있었다.
남은 건 신태양 본인의 멘탈 관리 뿐이었다. 잘 나가는 상위 플레이어 중에서 심리적 이유를 문제로 고꾸라지는 헌터들은 꽤 많았다.
급하게 간다고 전부는 아니었다.
안경을 올려 쓴 그녀는 신태양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그 스승이라는 사람 때문에 그런 거야?"
어제 긴급 공략에서 사라진 한 사람. 그게 신태양의 스승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사실이기도 했고.
'기사는 안났지만.'
호라이즌 길드와 협회에서 모종의 대화가 오고 간 것은 수호 길드에서도 알고 있었다.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낸 신태양이 고개를 들었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 분은 어디 떨어져도 괜찮을 사람이거든요. 다만······."
자신의 상태창을 살피는 신태양은 미간이 좁혀졌다.
'원래 이런 건가? 아니, 그럴리가 없는데.'
그러나 다시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 차이는 분명했다. 지금까지 마수를 수 천 마리 때려잡았으니까 알 수밖에 없다.
'······경험치가 왜 이렇게 많이 들어 오는 거지?'
경험치가 기존의 3배에서 4배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번 게이트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오늘 공략한 게이트만해도 이걸 포함해 두 개.
'원인은······.'
굳이 꼽자면 딱 하나 밖에 없었다.
스승님.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고 자연스레 오러블레이드를 체득하게 되었다. 그때 한순간이지만 알 수 없는 힘이 몸에서 끓어 오르는 느낌을 받았었다.
'진짜라면 대체 무슨 능력을 가지고 계신겁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려던 신태양.
'······.'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그를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할수록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으니까.
그저 보고 배우고 감사하기로 했다.
'하여튼 감사합니다.'
신태양은 자신의 스승을 향한 무한한 경외심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겠어?"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제 없습니다."
화르륵!
새하얀 검날 위로 타오르는 오러 블레이드. 신태양은 검을 쥐고서 달려나갔다. 그 앞을 가로 막고 있던 마수가 단숨에 꿰뚫렸다.
촤아악, 촤악!
온갖 버프를 몸에 두른 신태양을 막을 마수는 없었다. 일방적인 학살 앞에 그나마 앞에 나서던 마수들도 사라져갔다.
이제는 마수를 직접 찾아서 데려와야 할 정도.
"다음부터는 몰이꾼도 한 명 데려와야겠네."
신태양의 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 내부를 휩쓰는 일이 끝났으면 마지막은 보스 공략이다.
이런 느낌이라면 보스의 처리도 단번에 끝날 것 같았다. 수풀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찰나였다.
휘익!
검은 무언가가 빠르게 신태양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못봤지만 신태양은 분명하게 봤다.
'드, 드래곤······?'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 크기로 보건데 아직은 새끼인 해츨링이였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순 없었다.
수호 길드에서 받은 이론 교육 대부분 흘려 들었지만, 그거 하나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드래곤은 최상위 위험 개체.
무한에 가까운 마력과 고위 마법을 난사하는 이능.
마력을 흡수하는 비늘과 압도적인 육체 능력.
절대로 혼자 처치 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
발견 즉시 해당 게이트에서 벗어나 길드에 보고 해야 했다. 이후 길드 자체적으로 대규모 토벌대를 꾸려 공략을 나서기로 되어 있었다.
"돌아가야 합니다!"
신태양은 심각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눈 앞에 다시금 새끼용이 나타났다.
"드, 드래곤······?"
"여기에 왜 드래곤이······?"
헌터들이 술렁였다.
자리에 있는 헌터들 모두가 드래곤의 위험성에 대해 알고 있었다. 왈가왈부 할 것 없이 당장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허공에서 날개를 펄럭이는 새끼 드래곤과 신태양의 눈이 마주쳤다. 신태양은 검에 두른 오러 블레이드를 진하게 했다.
"제가 막아 볼테니······. 도망치세요."
"아니, 그건 안 돼. 차라리 선배인 내가······."
실랑이가 벌어지는 사이 뒤에 있던 헌터들이 마음을 굳혔다. 그들은 결연한 표정과 함께 뒤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저희는 빨리 물러 납시다! 빨리 지원을 불러와야 해요."
"미안해요! 금방 올게요!"
일촉즉발의 상황.
신태양은 검 끝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스승님께 배운 검술과 오러 블레이드를 조합한다면 승산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새끼용이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는 순간 치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그렇게 먼저 나가면 어떻······."
뒤쪽의 수풀을 헤치고 익숙한 얼굴 하나가 튀어나왔다.
"스승님?!"
왜 여기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드래곤 앞에서 살아남느냐가 더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새끼용이 이지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녀석의 입이 슬쩍 벌려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브레스다!'
드래곤의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인 브레스. 이 근거리에서 정통으로 맞았다간 무사할 수 없었다.
신태양은 반사적으로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위험합니다!"
자신의 스승을 살리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고작 여기서 드래곤 때문에 목숨을 잃게 할 순 없었다.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다.
신태양이 앞으로 한발자국 내딛는 순간.
딱콩!
이지한이 새끼용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새끼용은 머리를 붙잡은 채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뀨우······.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 신태양의 사고가 가속했다.
스승님의 힘이 해츨링을 꿀밤으로 제압할 정도라고?
아니, 상식적으로 그건 말이 안된다. 그게 아니라면······.
"커흑!"
전력으로 검을 휘두르려던 신태양이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넘어진 장소에 기다란 자국이 남았다.
그런 신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지한이 입을 열었다.
"여긴 한국인가보군."
* * *
"페, 펫이요?"
"뭐 그런 거지. 진짜 드래곤은 아니고 그런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오르티마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스르륵.
녀석은 본래 모습인 슬라임으로 변했다.
"신기하네요······."
드래곤을 길들인 헌터는 전 세계에 하나다. 신문 1면에 실리고 싶지 않으면 쓸데 없는 소문은 막아야 했다.
"네가 이상한 소문 안나게 잘 설명해줘."
그렇게 해츨링의 등장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신태양의 사수가 급하게 연락을 보내 지원 요청이 가는 일은 없었다.
나는 뒤쪽에서 건네 준 율무차를 받아 마셨다. 간이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꼼짝도 못 하겠네.'
연달아 세 개의 게이트를 공략했다. 하루가 꼬박지나 있었다. 잠도 한숨도 못잤다.
'자연 회복에도 한계가 있네.'
그만한 전투가 계속해서 벌어졌으니 지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긴 하다. 나는 신태양이 게이트를 공략하는 동안 잠시 눈을 붙였다.
잠시 후.
"스승님, 끝났습니다."
"고생했네."
보스를 잡고 레벨업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애초에 무단침입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괜히 수호 길드에게 고소 먹고 싶진 않았다.
우우웅.
게이트 바깥으로 나오니 통신이 재개 되며 밀려 있던 알림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 부재중 전화(23)
- 문자 메시지(11)
보낸 사람들은 윤서현, 진세아, 신아람, 김상욱, 신태양······. 많이도 있다. 회귀하고 나서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대부분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돌아왔다라고 문자라도 남기자.
열심히 문자를 보내는 사이, 공략을 마무리한 신태양이 내게로 다가왔다. 무리 지어 있던 공략대 모두가 해산했다.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하고 가시겠습니까? 저도 오늘 일정은 끝이거든요. 드릴 말씀도 있고요."
"그럴까."
그러고보니 공략하는 동안 제대로 된 밥도 못 먹었다. 헌터가 초인이라지만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옷 꼴을 보니 말이 아니다. 피와 기름이 뒤섞여 엉망이었다. 그런 내 고민을 알아챈 걸까.
"엇."
오르티마가 슬라임으로 변해 내게 착 달라 붙었다.
『 형상기억마수 오르티마가 오염을 정화합니다. 』
입고 있던 옷이 금세 멀쩡해졌다. 이런 기능이 있는 줄은 몰랐다.
"저도 한 마리 키우고 싶네요."
"100억에 팔까."
내 말에 오르티마가 흠칫 몸을 떨었다. 농담이다.
"그러면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신태양이 자신의 차를 가지러 간 사이 나는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보상 정산이 끝나 있었다.
'드디어······.'
『 < C등급 > 한계 돌파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
- 목표 : '프로젝트 : 메이저 게이트' 저지( 1 / 1 )
『 클리어 보상을 획득합니다. 』
『 축하합니다. B등급 헌터가 되셨습니다. 』
『 레벨 제한이 해제 됩니다. Lv.60 / 80 』
『 이제 레벨당 능력치 증가량이 1.5배가 됩니다. 』
희미한 빛이 내 몸을 가볍게 감쌌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다.
『 지정 스킬 한계 레벨 1증가 및 각성 』
'각성 스킬······.'
최후의 5인 중에서도 독보적인 1인.
인류의 리더 '천성호'만이 가지고 있었던 기적 같은 힘.
그게 바로 각성 스킬이었다.
선택할 스킬은 이미 결정 되어 있었다.
80화 각성 스킬(2)
『 한계 레벨을 1 증가시킬 스킬을 선택해 주십시오. 』
『 선택한 스킬은 '각성' 합니다. 』
각성.
인류의 리더이자, 최후의 5인 중 하나였던 천성호만이 각성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살아 남아 있었던 피난민들이라면 그가 각성 스킬을 사용하는 순간을 모두 볼 수밖에 없었다.
'헌터의 경지를 뛰어 넘은 이른바 진짜 기적.'
마족의 군대에 둘러 쌓여 모두가 최후를 떠올렸을 때.
천성호는 고고히 앞으로 나아갔다. 절망이 만연한 군중 앞에 서서 묵묵히 자신의 붉은 검을 들어 올렸다.
'잊을 수가 없는 광경이지.'
그 순간, 대낮이었던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붉은 혜성.
동시에 지상으로 쏟아져 내리는 무수한 별의 조각들.
아름답다 못해 가슴이 벅차 오르는 광경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영웅과 피난민들의 마음에 희망의 불을 지폈음은 당연했다.
'분명히 영웅들도 각성 스킬이라고 말했었지.'
스킬의 최대 레벨은 10에서 끝난다. 그건 시스템이 정해 놓은 성장의 한계. 더욱 강해지고 싶다면 더 높은 등급의 스킬을 연마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성호는 타고난 천재성으로 하나의 스킬을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그 결과 탄생한 게 각성 스킬이다······. 라는 게 다른 영웅들의 말이었지.'
그런 각성을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이 되었다. 현시점 인류의 누구도 가지지 못한 특수한 기능이다.
나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일자베기를 선택한다.'
유니크 스킬 웨펀 마스터를 선택할 수도 있었으나, 현재 일자베기의 레벨은 12. 이번에 한계 레벨을 높이면 최대 14까지 레벨 업을 할 수 있게 된다.
진작에 레어 스킬이라는 한계는 넘어선지 오래.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게 분명하다.
'웨펀 마스터 덕분에 어떤 무기를 들어도 일자베기를 사용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야.'
나는 스킬 목록에서 일자베기를 선택했다.
『 스킬 '일자베기 Lv.12'의 한계 레벨이 1 증가합니다. 』
『 일자베기의 최대 레벨은 14입니다. 』
이로써 일자베기는 두 번 더 레벨 업 할 수 있게 되었다.
'검성은 이 위쪽의 경지에 대해선 모른다는 눈치였는데 말이야.'
검성의 가르침은 12레벨에서 스킬 조합에 따라 다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까지였다. 자세한 건 레벨을 올려 봐야 알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 스킬 '일자베기 Lv.12'가 각성 스킬이 되었습니다. 』
허공에서 생겨난 새하얀 빛이 내 몸으로 스며든다.
『 이제 각성 일자베기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 해당 각성 기술은 현재 체력과 마력을 90% 소모합니다. 』
메시지를 읽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그냥 일자베기는 예전처럼 사용할 수 있는거고, 필살기의 개념으로 각성 일자베기를 사용할 수 있단거구만.'
체력과 마력의 90% 소모. 어찌보면 큰 패널티처럼 느껴지지만. 따지고보면 그렇지도 않다.
'포션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현재 내 랭크는 B. 내가 소유한 체력과 마력의 크기는 아직 가성비 포션으로 채울 수 있는 수준이다.
나중에 S급을 넘어서게 된다면 고등급의 포션이 필요해지겠지만. 그때쯤이 되면 벌이가 달라질테니까.
'어쨌든 페널티가 붙은만큼 강력하다는 건데.'
이걸 시험해 볼 곳이 없나 생각하던 찰나.
끼이익.
신태양의 스포츠카가 내 앞에 멈춰섰다.
"스승님, 타시죠. 맛집으로 안내하겠습니다."
* * *
"와, 저기 신태양 아니야?"
"미쳤다. 사진, 빨리 사진 찍어······!"
시내 도로를 지나다 신호에 걸렸다. 오픈카라서 그런지 시민들이 신태양을 보고 환호했다.
헌터의 인기는 유명 연예인 못지 않다. 신태양 같이 수호 길드에서 밀어주는 스타 헌터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고.
신태양은 미소와 함께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주 즐기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야, 뚜껑 닫아."
"네?"
순간 신태양의 눈이 흔들렸다.
"이거 지붕 없는 모델인데요."
"······."
그러면 이거 비오면 어떻게 되는 건데.
어쨌든 없는 차 지붕을 만들라곤 할 수 없었다.
"아, 그러고보니까 스승님. 기사 나온 거 보셨나요?"
"응? 무슨 기사?"
"지금 스승님에 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녀석의 말에 나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만 확인했지 기사 볼 생각은 안했는데.
- 긴급 게이트 성공적인 공략, 호라이즌 길드 의문의 헌터 활약
- 호라이즌이 숨겨두고 있었던 천재 헌터는 누구? 호라이즌 묵묵부답
- 수호길드 신태양 '그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공략하지 못했을 것.'
포털 사이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 있었다.
호라이즌 길드 의문의 헌터.
이건 아무래도 날 말하는 것 같다.
"이 인터뷰는 뭐냐."
나는 신태양을 바라봤다. 내 시선을 느낀 녀석이 볼을 긁적였다.
"아니, 하도 묻길래 저도 한마디 해줬죠. 근데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말한 거 아닙니다. 다른 길드 헌터들이 먼저 이야기 했다니까요."
다급히 변명하는 신태양.
"스승님의 개인 정보는 아무것도 안 밝혔습니다. 진짜로요."
"그래, 그래."
어차피 아예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게이트 내에서 한 일이 있으니까.
가능하면 조용히 활동하고 싶단 게 내 희망이었지만.
상황이 안 따라주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호라이즌 길드에서 굉장히 훌륭하게 정보를 막아주나본데.'
헌터는 공인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어, 내 이름이나 얼굴이 밝혀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 점은 정보길드 답달까.
헌터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지는 정도라면 괜찮다. 인지도가 높을수록 공략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자, 도착했습니다. 여기 진짜 맛집이에요."
30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 곳은 고급스런 레스토랑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부로 들어서니, 직원 하나가 우리를 맞이했다.
"예약자분 성함 말씀해주시면, 자리로 안내 해드리겠습니다."
"예약 안 했는데요, 수호길드 신태양입니다."
"네, 그러면 이쪽으로 안내 해드리겠습니다."
예약을 안했는데도 전용 지정석이 있나보다. 대한민국 1위 길드는 이름값을 하는구나 싶다.
별실로 안내 받아 자리에 앉았다. 음식은 코스 요리였는데 무지하게 맛있었다. 전채 요리인 샐러드조차도 입에서 녹아내리는 맛이었다.
"맛있네."
스테이크를 써는 내 만족스런 미소를 확인한 신태양이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 주방장이 헌터인데 요리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레벨이 8이랍니다."
"이렇게 맛있는데?"
"이렇게 맛있으니까. 8레벨이나 되는 거죠."
"······."
내가 가진 요리 스킬의 레벨은 10이었다. 어쩐지 내가 뭘 만들때마다 다 맛있다고 하더라.
다만, 요리 스킬이 지식과는 별개인지라 이만한 요리는 레시피가 없으면 만들긴 힘들 것 같다.
"그래서 아까 할 말이 있었단 건 뭐야?"
"아, 그거요. 감사 인사 드리고 싶어서요.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고 난 뒤로 제가 획득하는 경험치가 늘어났습니다. 3배에서 4배 정도로요. 덕분에 말도 안되는 성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건 스승님께서 해주신 버프 같은 건가요?"
"······."
스테이크를 썰던 내 포크가 잠시 멈췄다. 하지만 정말 잠시 뿐이었다.
슥삭슥삭.
"그래."
"역시 그랬던 거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스승님! 제 것도 드세요!"
기쁜 표정으로 고기를 건네주는 신태양.태연한 척 고기를 입에 넣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아무래도 타재간파에 숨겨진 기능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단순히 재능을 개화 시키는 게 끝이 아니라, 경험치를 올려준다라.'
심각한 표정으로 상태창을 확인하던 진세아가 떠오른다.
'그때 진세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나보구만.'
사냥을 지속적으로 하던 신태양은 확실히 알아챌 수 있는 수준이었을 거다. 버서커인 신아람은 대형 길드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몰이 사냥의 경험치와 상승한 경험치를 분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고.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경험치 증가.
신태양과 같은 천재에게는 압도적인 성장을 부여할 무기가 된다. 향후 마족들과의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할 수 있을 거다.
'좋네.'
나는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다.
* * *
"그러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신태양이 떠나고, 나는 단칸방 집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방바닥에 주저 앉아 정보창을 열었다.
"다음 목표를 확인해야지."
발전의 마족을 처치하며, 메이저 게이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이제부터는 마족들의 견제가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이 정도로 방해를 하면 놈들이 아무리 둔하더라도 눈치 챌 수 밖에 없겠지.'
지금의 내 등급은 B급.
이것을 돌파하고 A급에 올라가기 위한 퀘스트를 해야했다.
『 <B등급> 한계돌파 퀘스트 』
- 목표 : 전투의 마족 처치( 0 / 1 )
- 클리어 보상 : 레벨업 능력치 증가량 2배, 재능 획득의 물약(레전더리), 스킬 향상의 반지(레전더리)
클리어 보상을 살피는 내 눈이 커졌다.
'이건······.'
이전까지만해도 1.5배였던 레벨업 능력치가 2배로 뛰었다. 거기에 더해 레전더리급 재능 획득의 물약이라니.
'장난 아닌데.'
유니크급 재능 획득의 물약은, 나를 미래로 보내 검성에게 가르침을 받도록했다. 그 효과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고.
'레전더리는······. 어떻게 되는거지?'
상상도 안간다. 지금 내 일자베기의 레벨은 12. 아직 올릴 수 있는 단계가 두 단계나 남았다.
13까지는 어찌어찌 올리더라도, 14는 감이 안 잡히는데 레전더리급을 먹으면 어떻게든 될 거란 생각이 든다.
'좋아, 의욕이 샘솟는구만.'
물론 퀘스트인 전투의 마족은 처치는 결코 쉽지않다.
'중위 전투의 마족 류크엘.'
당장은 평범한 중위 마족에 지나지 않지만, 미래에 그는 12명의 군단장 중 하나로 성장한다.
인류의 어떤 헌터도 단독으로 군단장에게 맞설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다. 아직 그만큼 강하진 않아.'
오히려 내가 놈의 성장 가능성을 억제할 수도 있단 말이었다. 놈이 얻어야 할 아이템들을 도중에 가로챈다면······.
'승산은 내게 있다.'
어디까지나 내 성장이 뒷받침 될 때의 이야기지만. 하위 발전의 마족을 수월하게 이길 수 있었던 건 그곳이 마계 필드이기 때문이었다.
'전투의 마족은 싸움 자체를 즐기는 놈.'
발전의 마족처럼 은신처에 숨어드는 짓은 하지 않을 거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할 터였다.
다음날.
나는 백묵에게 연락했다. 지난 던전과 게이트를 공략하며 얻었던 마정석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 죄송합니다. 아직 백묵님께서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백묵은 아직도 해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내 용건을 전하자 비서가 답을 대신했다.
- 물건을 거래할 때에 대해선 미리 전해두신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번 빌런 사건의 사과를 겸해 앞으로 이지한씨에게선 수수료를 받으시지 않으시겠답니다.
"아, 그런가요."
내 물건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처리해주는 대신, 백묵은 30% 가량의 수수료를 붙였을 거다.
그걸 없애준다니, 나야 땡큐다.
그 백묵이 무작정 해주는 건 아닐 거고 이걸로 나를 자기 가까이에 두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그 건에 대해서는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제 정보를 숨겨 주셨던데요. 감사합니다. 너무 알려지는 건 피하고 싶었거든요."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명색이 정보 길드니까요. 임시 길드원의 정보라도 소중히 해야죠."
그리 말하는 수화기 너머 비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해야 할 일을 했다는 프로 의식이 담긴 느낌이다.
"그리고 이전에 말씀하셨던 사람에 대해서 보고 드릴게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살짝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영훈이를 찾아냈나 싶어서였다. 미래에서 내 아들이자 친구나 다름 없던 그 녀석.
아쉽게도 이번에는 다른 쪽이었다.
"천성호. 찾았습니다."
"······."
그 말을 듣는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드디어 찾았다.'
인류의 리더이자, 최후의 1인.
정의의 사도이자 모든 영웅이 우러러 보는 영웅.
대한민국의 구원자.
그를 수식하는 말을 찾아내는 것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정도다.
나는 그의 팬이었고,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 중 하나였다.
과거, 그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시간은 너무 늦었다. 그가 더 빨리 빛을 발할 수 있었더라면 멸망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그를 찾아냈다.
'기다려라 천성호.'
네가 가진 재능과 능력.
하나도 남김 없이 발휘하게 해주마.
81화 최후의 리더(1)
'여기에 천성호가 있단 건데······.'
나는 백묵의 비서가 알려 준 주소를 따라 가파른 경사길을 올라갔다. 언덕 위에는 학교 건물이 늘어서 있다.
'천성호의 과거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는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있는 일 없는 일 전부 말하고 다니던 검성과는 딴판이었다.
'이야기가 통할지 모르겠어.'
내가 아는 천성호는 정의의 사도라고 부를만한 인물. 멸망한 세계에서도 선이나 도덕, 정의를 추구하며 그대로 실천했으니까.
그럴만한 힘이 있기도 했고.
나와는 반대의 성격이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다. 일반인이나 다름 없던 나는 살기 위해 발버둥 쳤고 발악했다. 선이나 정의?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이 어딨었겠는가.
세계가 멸망했는데.
하여튼 천성호는 굉장히 고지식하면서도, 자기 확신이 깊은 사람이다.
"이번에 기사 난 거 봤어? 긴급 게이트 공략."
"와, 신태양 대박이지······."
"은날 길드 신아람한테 반했다."
마침 수업이 끝난 건지 고등학생들이 언덕을 따라 하교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 긴급 게이트 공략 사건이 있어서, 그런지 그런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다.
나는 그 물결을 반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 그 사람이 파앙! 하고 나타나서 골렘을 한 방에 파바방!"
근데 뭔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태양은?"
"그딴 인간 내가 알 게 뭐야. 신태양은 그저 숟가락을 얹었을 뿐. 진짜는 나랑 그 오빠가······."
"그런 헌터가 있다는 건 못 들어봤는데, 진짜 맞아?"
"내가 거기에 있었다니까!"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입에 문 채 일장연설을 늘어 놓는 진세아.
하교하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어, 오빠?"
누가 내 정보를 그렇게 흘리고 다니나 했는데 너도 그 중 하나였냐. 나를 발견한 진세아의 친구가 눈을 크게 떴다.
"이 사람이 네가 그렇게 말하던 그 분? 오오."
"맞아, 맞아."
진세아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나를 부추기기까지 했다.
"빨리 와서 말해줘요. 오빠에 비하면 신태양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후후."
"······."
왜 네가 자랑스러워 하고 있는 거냐.
"근데 여기엔 왜 왔어요?"
"찾을 사람이 있어서."
"그거 내가 도와줄게요. 선혜야 먼저 가. 담에 봐."
진세아의 말에도 선혜는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면서 입을 우물거리던 선혜가 용기를 내 말했다.
"신태양 헌터랑 아시면 싸인 받아주시면 안될까요?!"
"······."
신태양의 인기가 얼마나 좋은지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수호 길드에서 대대적인 광고를 밀어주기도 하고, 비주얼도 연예인 저리가라 할 정도긴 하다.
터억.
나는 진세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물론이지, 네 친구 진세아가 최선을 다해서 신태양의 사인을 받아 올 거야."
"엑, 제가요?"
"너도 신태양이랑 잘 알잖아. 공략도 같이 했는데."
"그······."
"저, 정말요? 그럼 약속한 거다, 세아야!"
선혜는 진세아의 두 손을 잡고 흔들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순식간에 날치기 약속을 잡힌 진세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 싸가지한테 싸인 부탁을······? 절대로 불가능······."
싸인지는 신태양네 검도장에 널려 있던데. 그거라도 훔쳐오지 그러냐.
"너도 학교를 다니고는 있었구나. 가출했다길래."
"당연하죠. 당분간 서현 언니네 집에서 머물면서 다니기로 했어요. 아빠가 제 헌터 활동을 인정할 때까지요."
나는 언덕 위의 학교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부터 불길한 의심이 들었기에.
'여긴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던 곳이잖아.'
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면, 진세아는 해당 브레이크의 피해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찾는 사람이 누군데요?"
"천성호."
나는 스마트폰에 찍힌 주소와 지도를 다시 살폈다. 그의 집은 여기서 10분 거리에 있다.
"천성호······? 되게 익숙한데."
진세아가 무언가 생각날 것 같은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냐.
"좋은 느낌은 아니었어요. 저도 학교에 자주 나오는 편은 아니라서 잘 몰라요.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인데······."
"결국 모른단 거구만."
나는 스마트폰 앱의 지도를 따라 거리를 이동했다. 단독 주택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동네다.
도착하기 3분전, 근처 공원에서 소란이 느껴졌다.
"야, 죽여 이 개같은 새끼!"
"커헉! 이 새끼가 진짜!"
"밟아!"
스무 명도 넘는 고등학생들이 몰려 있었다. 단체로 패싸움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무슨 일이 났나?."
그 보기 드문 광경에 잠시 멈칫했다. 반대로 진세아는 바로 달려나갈 준비를 했다.
"기다려라, 미래의 민중의 지팡이 영웅 진세아가 나가신닷!"
나는 진세아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크헉!"
"나중에 영웅할 거라며."
진세아는 영웅 협회에 들어가고 싶다 했었다. 그러려면 일반인 폭력 사건에 휘말리면 안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함성과 기합 소리가 들려오고는 있는데 도저히 패싸움을 하는 걸로는 안 보였다.
퍼억, 뻐억! 퍼버벅!
스무 명의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난전을 펼치는 건 단 한 명이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1 vs 20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크악! 이 새끼가 진짜!"
코피를 질질 흘리는 고딩 하나가 야구 배트를 들어 올렸다. 그런 고딩에게로 쏜살 같이 달려 들어 주먹을 먹이는 남자 아이 하나.
"못 움직이게 붙잡아!"
"거기로 간다!"
요란하게 소리치곤 있지만.
뻐억. 뻐억, 뻐억.
얻어 맞고 있는 건 20명 쪽이었다. 상황은 5분도 안되어서 정리 됐다.
퉷.
침을 뱉고선 손을 털어내는 남학생. 녀석은 얼굴에 붙였던 반창고를 떼어 바닥에 버렸다.
진세아가 놀란 듯이 말했다.
"······저거 중학교 교복인데. 아, 생각났다."
나는 천성호의 나이를 모르고 있었다.
S급을 뛰어 넘어 SSS급의 경지에 이른 초인이라면, 신체는 자연스레 자신의 전성기 시절에 머물기 때문이다.
타고난 카리스마와 리더쉽 앞에서 그의 나이가 문제였던 적은 없으니까.
그래, 중학생이란 건 그럴 수 있다.
"미친개새끼 천성호! 깡패 중학생이라고 유명해요."
유일무이한 대한민국의 각성 헌터.
기적의 그 자체이자 마지막 희망.
인류 최후의 리더 천성호.
그의 별명이 미친 개새끼였을 줄이야.
* * *
20명을 이긴 것보다, 20명이 천성호를 향해 죽자고 달려들었다는 게 놀랍다.
'뭔 짓을 하면 20명이 달려드냐.'
싸움을 끝낸 천성호는 바닥에 쓰러진 고등학생의 자켓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주머니도.
'······?'
찾아낸 지갑을 펼치더니 만원짜리를 꺼내 주머니에 넣는다. 그 짓을 반복.
"으악, 빨리 이거 놔요! 저건 오바잖아요."
발버둥 치는 진세아.
나는 충격 받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기사, 신태양도 내가 아는 검성의 모습과는 달랐다. 진세아도 그랬고. 그건 천성호도 마찬가지다.'
그래 조금 다를 수 있지.
······조금이라기엔 많이 다른 모습이긴 하다.
'과거 얘기를 안한 이유가 있었네.'
그는 과거의 이야기를 안 꺼낸 게 아니었다.
흑역사라 못 꺼냈던 거였다.
다만, 그것이 천성호의 심성이 악하다는 증거가 될 순 없다. 그는 목숨을 던져 사람들을 지켜낸 영웅이다.
'마족이 접촉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지.'
아직 중학생인데다가 각성도 한 것 같지 않다.
나는 천성호를 향해 다가갔다. 앳된 그의 얼굴에 내가 아는 모습이 보인다. 나를 발견한 천성호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은데. 시답잖은 설교 할 거면 꺼져."
"······."
내 머릿속 천성호의 이미지가 박살이 나는 순간이었다.
고등학생들의 파밍(?)을 끝낸 천성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원 밖으로 향하려 했다.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천성호를 붙잡아야 했다.
여기서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는 말은······.
"천성호, 헌터가 되고 싶지 않나."
이 세계에서 헌터라는 직업은 꿈이자 로망. 모든 이들이 되고 싶어하는 인생 역전의 로또와도 같다. 누구라도 혹할만한 말이다.
멈칫.
예상대로 천성호가 멈춰섰다. 그는 슥 뒤를 돌아보더니, 내 얼굴을 살폈다. 그러더니 피식 웃는다.
"내가 병신인 줄 아나."
"······."
"아저씨 그거지. 사기꾼. 각성을 빌미로 애들 꼬드겨서 한탕 해먹는 버러지 같은 인간."
그 말에 뒤에 있던 진세아가 손을 두두둑 풀었다.
"야, 상꼬맹이. 일단은 예의 주입부터 간다. 이 꽉 물어!"
"아니, 기다려. 상황만 복잡해지잖아."
"매가 약이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성호가 재밌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 번 해보시던가. 진짜 헌터라도 되나?"
이대로 두들겨 패도 되겠지만.
나는 조용히 타재간파를 발휘했다.
말도 안되는 싸움 실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녀석은 아직 비각성자다. 헌터가 아니란 의미.
'하지만 그 안에 잠든 재능을 간파하는 게 타재간파라면······.'
필시 무언가가 보일 터.
『 특성 타재간파(他才看破)를 발휘합니다. 』
『 대상의 재능을 파악합니다. 』
그러한 내 예상은 딱 들어 맞았다.
『 대상 천성호에 대한 정보가 충분합니다. 』
- SSS급 영웅, 대한민국의 리더, 붉은 기적, 최후의 5인, 각성 헌터······.
『 대상 천성호는 비각성자입니다. 』
『 개화 가능 재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최초 각성 : A
"만약 내가 사기꾼이 아니라, 정말로 널 각성 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어쩔거냐."
내 진지한 목소리에 천성호가 조소했다.
"말했잖아. 안 믿는다고. 이 사기꾼아. 나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 재능 '최초 각성'을 선택하셨습니다. 』
『 해당 재능의 개화 난이도는 A입니다. 』
천성호는 목을 스트레칭했다.
"사기꾼. 너는 내가 무조건 정리한다."
일그러진 정의.
도무지 말을 들어 먹을 것 같지 않은 야생마.
미친 개라는 말이 딱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녀석의 재능이 꼭 필요하다.
타악.
땅을 차고 뛰어 오른 천성호가 발차기를 날렸다.
뒤이어 떠오르는 재능 개화의 조건.
『 대상 천성호를 굴복시킬 것 』
『 대상의 현재 의지 : 100% 』
나는 한 팔을 들어 가볍게 공격을 막았다.
"너는 내가 무조건 각성 시킨다."
* * *
또 다른 마계의 틈.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는 연회장.
세 명의 하위 마족이 모였다. 그들은 각자 와인이 담긴 잔을 나누었다. 마기가 듬뿍 담긴 최고급 와인이었으나.
그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기록의 마족은 프로젝트 마기에 실패했다."
"발전의 마족은 메이저 게이트를 실행하지도 못하고 살해 당했단다. 그의 권속들이 하는 이야기니 틀림 없어."
"마족의 계획을 저지하려는 자가 있다는 건가."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
하위 마족 하나가 손가락이 동방의 작은 나라를 가리켰다.
"대한민국. 여기만 문제란 말이야. 진짜 성가시기 그지 없어."
"근데, 녀석들의 무능을 왜 우리가 뒤치닥거리나 해야 하는 거야?"
두 마족의 불평을, 다른 한 명의 마족이 일축했다.
"전투의 마족께서 직접 내리신 명이다. 높으신 분들께서는 그 불씨가 번져나가기 전에 제거하라고 하셨다."
무력의 마족.
전투의 마족의 오른팔인 그에게 있어 명령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의 몸을 조각처럼 메운 근육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놈에 대한 조사는 네게 맡기도록 하지. 지시의 마족이여."
"아아, 그래. 물론이고 말고."
지시의 마족.
그녀는 고혹적인 미소를 흘렸다.
"이번에 아주 괜찮은 녀석을 하나 주웠단 말이야. 너희들에게도 보여주지. 들어오라고 해."
마족의 말에 권속들이 연회장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긴장한 표정의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지시의 마족이시여."
"편하게 있어라. 네 놈은 앞으로 해야할 일이 많으니까 말이야."
"인간? 우리 계획에 인간을 끼워 넣자는 거야?"
왜소한 체형의 마족이 못미덥단 듯 눈살을 찌푸렸다. 지시의 마족은 코웃음을 쳤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이 녀석은 기록의 마족의 밑에 있었던 인간이다. 마족의 편에 선 자라는 거지. 이 자를 이용하면 모든 일을 더없이 조용하게 처리할 수 있다."
지시의 마족은 들고 있던 부채를 펼쳤다.
"그렇지 않은가, 김상욱?"
그 말을 들은 김상욱이 고개를 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마족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놈을 꼭 찾아 없애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쇼."
그리 말하는 김상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깃들었다.
"현재 파악하고 계신 것들을 말씀해주신다면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족의 정보가 역으로 새어나가는 순간이었다.
82화 최후의 리더(2)
천성호는 망설임 없이 나를 향해 달려 들었다. 녀석의 주먹은 빠르고 간결했다. 중요한 순간에 치고 들어오는 발차기는 날카롭고 묵직했다.
타고난 전투 센스.
헌터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고 공격을 퍼붓는단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각성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미친 재능이 따로 없군.'
나는 녀석의 공격을 전부 막으며 바닥에 쓰러진 고등학생들을 살폈다. 전부 천성호가 쓰러뜨려 놓은 놈들이었다.
자신보다 덩치가 큰 고등학생 스무 명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걸 해낸 거다.'
그러나 일반인은 상위 각성자를 이길 수 없다. 세계 챔피언이 와도 마찬가지다. 가지고 있는 신체 능력차이가 지대하기 때문이다.
겉모습은 같은 인간이더라도, 내부에 품은 힘은 비교할 것이 못 된다. 세계 최강의 토끼가 평범한 코끼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크윽!"
내가 모든 공격을 막아내자 천성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발자국 뒤로 물러난 천성호가 물었다.
"당신 헌터야?"
"그래."
"헌터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런 사기를 치고 다닌다 이거지."
오히려 오기를 불태우며 어깨를 돌린다. 녀석은 제자리에서 콩콩 뛰더니, 기습적으로 내게 돌려차기를 날렸다.
뻐억!
팔로 막았지만 그 묵직함이 전해졌다. 공격을 받아낸 내 눈이 커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력을 다루고 있어······?'
팔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마력을 받아냈을 때와 동일했다. 심지어 표정을 보니 의도한 공격 같았다.
천성호는 비각성자인 상태에서 마력을 다루고 있다.
'진짜 미친 천재구나······.'
시스템이 이 세계를 점령하고 게이트가 등장하며 대기의 조성도 바뀌었다. 마력과 같은 미지의 기운들이 들어차고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하지만 비각성자가 마력을 다루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인간이 엘프도 아니고······.'
날 때부터 재능을 타고 났다는 건가.
"어때, 이제야 정신이 좀 들어?"
내 반응을 공격이 먹힌다고 착각했는지, 천성호는 의기양양 해져서는 다시 도움닫기를 했다.
어김없이 마력이 담긴 발차기가 나를 향해 쇄도했다.
덥썩.
"?!"
나는 녀석의 발을 붙잡아서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떨어지는 와중에도 천성호는 몸을 틀어 안전하게 낙법을 발휘했다.
"젠장, 이게······!"
지치지도 않고 달려든다. 나는 손을 들어 가볍게 주먹을 막아냈다. 이어지는 연격을 전부 막아낸다.
"오빠, 빨리 공격해요! 왜 방어만 하는 거에요! 그 상꼬맹이는 맞아야 정신 차린다니까요, 전력으로 가요!"
내가 계속 막고만 있자 진세아가 답답해 하며 소리쳤다.
전력은 무슨 얼어죽을. 천성호 죽일 일 있냐.
'천성호의 각성 조건은 굴복.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거다.'
나는 천성호를 향해 한걸음 나아갔다. 이번에는 막지도 않았다. 그저 가볍게 녀석의 가슴팍을 툭 쳤다.
"크헉!"
그러자 천성호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압도적인 체급 차이 앞에서 무술이나 기술은 무의미해지는 법이다.
"난 사기꾼이 아니야."
"지랄. 각성? 웃기고 있네. 그런 걸로 날 꼬드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본데, 사람 잘못 봤어."
"······."
사실 각성을 시켜준다며 사기를 치는 일은 상당히 흔했다. 각성을 시켜주겠다며 사람들의 등골을 빼먹고 다니는 사기꾼들이 한 둘이 아닌지라.
정상적인 사고를 가졌다면, 못 믿는 게 당연하다.
'말로 될 것 같지는 않군.'
천성호는 내가 헌터인 것은 관계 없다는 듯이 계속 달려 들었다. 생각해보면 마족들에게 둘러쌓여 극도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포기 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성격은 좀 달라보여도 그 근간이 어디로 갔을 리가 없다.
약 세 시간 뒤.
"허억, 허억······."
너덜너덜해진 천성호가 입가를 쓱 닦았다. 바닥을 수 백 번도 더 굴러서 온 몸이 흙투성이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야, 사기꾼. 오늘은 내가 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하지만, 내일 이 자리로 다시 나와라."
끝까지 자기가 졌단 말은 하지 않는다. 대단한 고집이다.
녀석은 뒤를 돌아 터덜터덜 걸어갔다.
"드디어 끝났네."
진세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느라 완전히 지쳤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진세아의 어깨를 잡았다.
"미행하자."
"네?"
이제부터가 진짜다.
* * *
천성호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미래를 위해 과거까지 버린 영웅이라고 칭송했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고.
지금보니 그냥 흑역사를 잊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유일하게 과거에 대해 이야기했던 게 있다면.'
그건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서였다. 가족들이 던전 브레이크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 그 비통함을 알고 있는 천성호였기에,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도 더 잘 헤아려 주었던 게 아닐까.
"저기, 오빠. 그렇게 가면 다 들키겠어요."
뒤쪽에서 나를 따라오던 진세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척을 숨겨야죠. 몸 위로 마력을 둘러서 소음을 최소한 하고, 몸도 낮추고 해야죠."
"설마, 천성호가 헌터도 아니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성호가 휙하고 뒤를 돌아봤다. 나와 진세아는 건물 뒤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봐요! 저 상꼬맹이 정상은 아니라니까요. 특별히 제가 미행 하는 법을 알려 줄게요. 지난번에 오빠 덕분에 고유서클도 배웠으니까요. 제가 앞서 갈게요. 요령은 간단해요. 마력의 분배가 중요하달까."
진지해진 표정의 진세아가 앞으로 나아갔다.
『 동료 '진세아'가 스킬 '은밀한 움직임 Lv.6'을 발휘합니다. 』
일순 진세아의 기척이 사라졌다. 바로 앞에 있지만 그게 진세아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단순한 배경처럼 느껴질 정도다.
미행에 최적화 된 스킬이었다.
'괜찮은데.'
나는 진세아의 말대로 마력의 흐름을 조정했다. 마력을 옅게 둘러 기척을 죽이고 자세를 낮춘다.
현재 내가 가진 미약한 재능의 파편은 두 개.
그마저도 일반인에 재능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지만, 내 경험치는 20만배다.
부족한 재능을 경험으로 커버할 수 있다.
『 일반 스킬 '은밀한 움직임 Lv.1'을 전수 받습니다. 』
어렵지않게 스킬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오, 좋아요. 바로 그거에요."
진세아에게 스킬을 전수 받아 활용하자 경험치는 순식간에 올라갔다.
『 스킬 '은밀한 움직임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은밀한 움직임 Lv.3'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은밀한 움직임 Lv.4'를 획득합니다. 』
···
..
.
『 스킬 '은밀한 움직임 Lv.10'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모든 은신 계열 스킬의 효과가 20% 상승합니다. 』
그 레벨이 10에 달하자 효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진세아가 눈을 부릅뜨더니 날 확인했다.
"잠깐, 왜 이렇게 능숙해요? 이 정도면 나도 미행 당해도 모르겠는데······."
"그러게. 재능 있나."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스킬은 아니지만, 기척만 지울 수 있어도 활용도는 높다. 덕분에 나와 진세아는 천성호에게 더 가까이 붙을 수 있었다.
심지어 이야기도 편하게 나눌 수 있었다.
"근데, 이렇게까지 쟤한테 집착하는 이유가 뭐에요?"
"천재잖아. 일반인이 저 정도인데 쟤가 각성까지 해봐. 얼마나 세겠어."
"각성할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안 할 거라는 보장도 없지."
"······."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타재간파의 서가 각성을 보장하고 있다.
천성호는 허름한 빌라의 반지하로 들어갔다.
"여기서 기다리자."
나와 진세아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방음도 제대로 안되는 반지하의 창문 너머로 집 안의 소리가 들려 온다.
"형아! 왔어?!"
"오빠! 글쎄, 말 좀 들어봐. 지훈이가······."
"그래, 그래. 잘들 있었지? 엄마는 괜찮아?"
쿨럭. 쿨럭.
기침 소리가 집 안에서 바깥으로 퍼져나왔다. 일반적인 기침이 아니라, 깊은 병이 있어 보이는 소리다.
이내 어머니의 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싸우고 다닌 거 아니지?"
"아냐, 그냥 오다가 넘어졌어. 그리고 이거 돈. 학교에서 받았어. 아직 모자르지만 더 모으면 엄마 병원도 갈 수 있을 거야."
그 출처는 스무 명의 고등학생들에게서 갈취한 돈이었지만, 어느새 장학금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미안하다. 엄마가 미안해······."
그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옆에서 누군가가 훌쩍인다.
슥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진세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녀석이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이거 눈물 아니에요, 땀이거든요?"
감수성 풍부하네.
집안 사정이 딱한 건 맞기는 한데.
'나름 슬픈 장면인데, 고등학생들 패고 다니던 걸 생각하니까 이입이 안되네.'
나는 빌라가 있는 거리 근처를 눈으로 살핀 뒤,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확인했다. 여기까지 보고나니 확실해진다.
'중요한 건 미래에 던전 브레이크 발생하는 피해지역 근처란 거다.'
그 사고에 가족 전체가 휩쓸렸을 확률이 크다. 천성호의 각성 시기랑도 얼추 맞아 떨어진다.
'그렇게 둘 순 없지.'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이지한씨? 안 그래도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무사하셔서 다행이네요, 지난번 게이트 공략 때 사라지셨다고 해서 걱정했는데요.
은빛의 날개 부길드장 윤지은이었다.
- 지한씨 추천 진짜 고마워요. 신아람 같은 인재를 도대체 어떻게 찾아낸 거에요.
적혈의 버서커 신아람. 그녀를 영입한 은빛의 날개도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었다.
"지은 언니! 오늘 저녁은 뭐에요?"
옆에 있던 진세아가 끼어들었다. 가출해서 윤지은, 윤서현 자매네 있다고 그랬지.
- 어머, 세아도 같이 있었네? 글쎄, 떡볶이?
"오예."
그런 이야기 나누라고 한 전화가 아니다. 나는 스마트폰에 대고 용건을 말했다.
"은빛의 날개에서 후원을 해줬으면 하는 가정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여기 있는 친구가 굉장히 재능이 있어 보이거든요."
내 말에 윤지은이 관심을 보였다.
- 지한씨 추천이라면 망설일 것도 없죠. 길드 입장에서 후원은 언제나 옳죠. 주소를 알려주시면 사람을 보낼게요.
잠시 후.
은빛의 날개에서 보낸 사람들이 왔다.
양복을 걸친 사람들과 평상복 차림의 윤지은도 있었다.
"언니!"
진세아가 반갑다는 듯 달려 들었다. 선글라스를 올려 쓴 그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윤지은은 얼굴이 많이 알려진 유명인이다. 과장 조금 보태서 매체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람.
"그래서, 지한씨가 점 찍어둔 분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성호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손에는 후라이팬을 들고 있었다.
"당신들 뭐야, 남의 집 앞에서 시끄럽게하지 말고 꺼져. 모임을 할 거면······."
"이 친구입니다. 이름은 천성호."
나는 천성호에게 어깨 동무를 했다. 내 얼굴을 확인한 천성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이게 무슨 수작······."
"어머, 생각보다 나이가 어리네요."
천성호를 확인하고서 선글라스를 내리는 윤지은. 그녀를 바라보는 천성호의 눈이 커졌다.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으, 은빛의 날개······?"
바로 알아 본 모양. 유명인의 힘이 대단하기는 하다.
"맞아요. 저희 은빛의 날개에서 친구를 후원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후원이요? 대형 길드에서 저를요······?"
갑자기 존댓말까지 쓰는 천성호.
"옆에 있는 이지한 헌터가 학생을 추천해줬어요."
"예?"
천성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녀석은 고개를 이내 말을 한마디 뱉었다.
"이거 사기 아니죠······?
아니라니까.
* * *
은빛의 날개가 오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다.
천성호의 어머니는 병원으로 급히 이송 되었다. 입원하셔야 할 정도의 심각한 상태셨다고 한다.
물론 병원비는 은빛의 날개 전액 지불. 동생들의 학비 또한 걱정 할 필요가 없어졌다. 내 의견에 따라 새로운 집을 알아보는 중이고.
대한민국의 대형 길드답게 통이 크다.
역시 세상은 돈과 인맥.
과거의 나였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에 어쩐지 뿌듯하다.
"대체 왜······."
천성호도 믿기지가 않는지 멍한 표정이었다. 자신에게 쏟아진 행운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에요?"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겠지."
"그딴 개소리 말고요. 목적이 있을 거 아니에요."
저녁이 되어 윤지은과 진세아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천성호를 데리고 근처의 D등급 게이트로 향했다.
"말했잖아. 각성 시켜 준다고."
터무니 없는 이야기긴 하다.
"아직도 내가 사기꾼처럼 보이나?"
"아뇨, 그건 아닌데······."
미심쩍어하면서도 천성호는 나를 따라 게이트로 들어왔다. 푸른 하늘, 넓게 펼쳐진 평원 위로 슬라임이나 고블린 같은 약한 마수들이 뛰어다닌다.
천성호가 그것들을 바라본다.
"여기가······. 게이트······."
누구나 꿈꿔 본 적은 있을 거다. 헌터가 되어 마수들과 싸우고, 승리하고 부와 명예를 누리고. 과거의 나도 그랬으니까 잘 알고 있다.
"내가 정말로 헌터가 될 수 있다고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성호 너는 단순한 각성자가 아니다.
언젠가 헌터가 되어, 인류를 이끌 영웅이 된다.
물불 가리지 않고 전선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해내는 진짜 영웅.
나는 대검을 꺼내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블린 한 마리를 향해 달려 나갔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 옅은 바람이 일렁인다.
『 재능 '최초 각성'의 발현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 대상 천성호를 굴복시킬 것 』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은, 한 명의 인간을 굴복 시키는 방법은 폭력이 아니다.
차갑고 시린 바람은 겉옷을 걸어 잠구게 하지만 따뜻한 빛은 사람의 마음마저도 녹이는 법이니까.
『 각성 스킬을 시전합니다. 』
푸르렀던 하늘이 어둡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보여줄 뿐이다.
천성호가 나아갈 수 있는 길.
그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를.
『 스킬 '각성 일자 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어두워진 하늘과 땅을 잇는 선 하나.
가슴 시리도록 푸르른 선은 그 끝을 알 수 없이 무한하게 뻗어 나간다.
세계를 좌우로 양분하는 기준선이 범위에 들어 온 모든 것을 갈라냈다.
콰아아아아!
터져나오는 섬광과 거센 돌풍이 어두운 밤하늘을 다시금 밝혀낸다. 어둠에 가려졌던 하늘이 빛으로 점철된다.
먼 발치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천성호.
거센 바람에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녀석.
그런 녀석의 눈에 검붉은 이채가 감돌기 시작했다.
『 타재간파의 발동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
『 천성호의 재능 '최초 각성'이 개화합니다. 』
『 동료 천성호가 S급 헌터로 각성하셨습니다. 』
마족을 쳐부술 영웅이 출현하는 순간이다.
83화 최후의 리더(3)
천성호의 각성.
헌터의 등급은 각성부터 정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F,D와 같은 하위 등급에서 시작하지만, 소수의 강운을 가진 자나 극히 뛰어나는 자는 고등급에서 시작할 수 있다.
운과 재능.
그 두 가지를 모두 타고난 천성호는 시작부터 S급이다.
"정말로 각성했잖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녀석은 못 믿겠다는 듯 자신의 손을 들여다 보았다. 일반인에서 S급이 되었다면 그 차이를 단번에 느낄 수 있는 게 당연하다.
다만 본인의 등급을 아직 확인하진 못했을 거다.
"상태창을 살펴봐. 더 놀랄 거다."
"네? 네. 사, 상태창."
몇 번이고 상태창을 들여다보는 천성호의 눈이 커졌다.
"와, 시발······."
"야, 말 좀 이쁘게 해라."
"아, 죄송. 근데······. 이거 제가 S급 헌터라는 게 맞아요?"
"시스템은 거짓말하지 않는단 건 상식이잖냐."
"내가 S급······?"
눈을 꿈뻑이는 천성호.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각성 스킬의 후유증이 뒤늦게 밀려왔다. 폼 잡고 있었지만,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후우······.'
『 체력과 마력의 90%가 소모 되었습니다. 』
『 스킬 '맷집 Lv.11'을 발휘합니다. 』
『 스킬 '불굴의 정신 Lv.11'을 발휘합니다. 』
아무래도 패널티를 너무 우습게 봤던 것 같다. 체력과 마력이 단번에 90%가 증발하는 감각은 꽤 고통스럽다.
스킬이 없었으면 바로 바닥에 쓰러졌을지도.
속이 울렁거리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힘이 빠진다. 마력 고갈 증상과 빈사 증상이 같이 나타나는 것 같다.
'그래도 위력 하나만큼은 끝내주네.'
내가 노렸던 고블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은 물론이고 주변부가 완전히 초토화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각성 스킬은 일자베기의 레벨이 오를 때마다 같이 그 위력이 증가할 거다.
'실전에선 필살기 개념으로 확실할 때만 사용하는 게 맞겠어. 빗나가기라도 한다면 아찔해진다.'
꿀꺽, 꿀꺽.
나는 내가 만들어뒀던 포션을 들이켰다. 스킬 '포션 체질' 덕분에 포션의 효과가 빠르게 몸 전체로 퍼졌다.
한결 낫다.
『 타재간파 : 개화 시킨 재능 '최초 각성'은 이미 소유하신 재능입니다. 』
『 해당 재능을 대신하여 '미약한 재능의 파편'을 지급합니다. 』
'오.'
이걸로 미약한 재능의 파편은 총 세 개다. 영구적으로 내 재능을 올려주는 아이템이기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 미약한 재능의 파편을 세 개 모았습니다. 』
『 파편을 조각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습니다. 』
'좋다.'
이건 앞으로 더 많은 스킬들을 익히기 위한 발판으로 작용할 거다. 여기에 더해 고블린을 잡고 떠오른 레벨업 알림까지.
"어때. 헌터가 된 기분은."
나는 일단 시야 한켠으로 치워놓고서 천성호를 바라봤다.
"최고에요. 아직 얼떨떨하지만요."
"헌터가 됐으면 사냥부터 해봐야겠지. 어디보자 무기는······."
본래 천성호가 사용하던 무기는 츠바이헨더라는 양손검이다.
나는 이계 규율의 상점을 확인했다. 무기 카테고리가 추가 되어 있다. 소모품과 마찬가지로 여러 잡다한 무기들을 팔고 있었다.
'가성비 미쳤네.'
일단은 이거다.
『 2500 point를 사용하여 츠바이헨더(유니크)를 구매하셨습니다. 』
『 아이템을 건네는 대상이 타재간파의 영향을 받은 인물입니다. 』
『 무기의 양도가 성립합니다. 』
하마터면 못 줄 뻔했네. 무기도 마찬가지로 가져다 파는 건 안되는 모양이다. 이번에 한해서는 문제 없다.
"너 가져라."
검을 받아든 천성호가 멀뚱멀뚱 서 있었다.
"저 돈 없어요.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니에요? 아무리 저라도 그 정도는······."
"그냥 써."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빨리 찾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돈은 앞으로 갈퀴로 쓸어담을텐데 뭔 걱정을 하는 건지.
나는 대검을 꺼내 앞을 가리켰다.
"자, 준비 됐으면 사냥 시작이다."
* * *
천성호는 과연 천성호였다.
촤아악! 촤악!
평원의 고블린들이 우습게 잘려나갔다. 10마리의 고블린들이 떼로 덤벼들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천성호의 검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건 고블린 시체 뿐이었다.
D급 게이트니 튜토리얼만도 못한 장소긴 하다.
'역시 첫 전투부터 말도 안되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검을 써 본적이 없다던데, 녀석은 검을 손에 쥔 순간부터 자유자재로 다뤘다.
'천재······.'
신태양이 검의 경지를 개척해 나가는 구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천성호는 검을 이용하고 다루는데에 있어서 천부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촤악—! 서걱—!
별 생각 없이 휘두르는 천성호의 검은 마수들을 사냥하는데 최적화 되어 있었다. 한 점 군더더기 없고 효율적이다.
더욱 무서운 점은 따로 있었다.
콰아아앙!
천성호의 검 끝에서 방출되는 붉은 마력. 그것은 앞을 가로 막고 있던 고블린들을 일제히 집어 삼켰다.
각성하고부터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다. 비각성 상태에서부터 마력을 다루던 재능이니까 두말하면 입 아프지.
나는 천성호를 보조하면서 게이트를 돌았다.
콰아앙—!
게이트의 보스는 일반 몬스터나 다름 없는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다. 게이트를 전부 공략하는데까지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
게이트를 빠져나온 천성호는 말이 없었다. 도중부터 말수가 적어지더니, 이젠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밤 하늘 위로 떠오른 달.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던 천성호가 입을 열었다.
"개쩌네요."
분위기 확 깨네.
그런 생각을 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곳의 천성호는 아직 중학생이다. 그것도 사고를 일으키고 다니는 문제아. 인류의 리더 천성호가 아니다.
멸망한 세계가 무엇이길래 사람들을 그렇게 바꿔 놓은 걸까.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나는 잠시 멈칫했다.
영훈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녀석. 근데 나이가 아무리 많이쳐줘도 초등학생일 거다.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있겠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가."
"그······. 낮에는 미안했어요. 형. 깝쳐서 미안요. 진짜, 진짜 고마워요."
그리 말하는 천성호의 눈가가 촉촉했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알면 앞으로 잘해. 내일은 은빛의 날개랑 계약하러 가야지."
"네? 제가요?"
"그래, S급이잖아."
"와우."
각성의 대상은 어리다고 해서 예외가 없다. 실제로 나이가 어려도 활동하는 헌터도 많다.
그리고 천성호는 대한민국을 뒤흔들 신인이 될 거다.
'타재간파의 버프까지 받았으니, 경험치도 오를테고······.'
성장이 기대 되는 부분이다.
이제 돌아가려고 하는데, 천성호가 날 붙잡았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형. 형은 등급이 뭐에요? 아, 너무 뻔한 질문을 했나······. 당연히 S겠죠?"
"······."
이 눈빛은 맥이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현재 내 등급은 B.
레벨은 방금 전 게이트 공략 덕분에 76이 되었다. A랭크의 시작 레벨이 80이니 사실상 A랭크나 마찬가지인 수준.
스킬 레벨까지 합치면······.
나도 S급의 발끝에는 닿을 수 있나?
워낙 괴물들이 많아야 말이지.
나는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뭐에요, 알려줘요. 형! 어디가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