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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서장.

강의 이남(以南)에서 태어나 북망(北邙)에서 끝을 맺으리.

산 아래에 있는 주막.

산세가 수려하여 마치 옥을 깎아지른 듯 아름다운 망산을, 명미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낙양 북쪽에 자리한 망산은 오랜 세월 제왕들의 장지(葬地)였다. 산등성이를 타고 솟은 봉우리마다 역사 속에서 천하를 호령했던 영웅들이 잠들어 있을 터였다.

‘과연 용들의 땅이라 불릴 만하구나.’

“아가씨. 지금 오는 눈은 앞으로 열흘은 더 내릴 거라오. 당장 저 산에 올라가고 싶겠지만, 두 달 후에나 올라가시구려. 그때나 되어야 눈이 녹아 길이 보일 테니, 오르지 말고 기다려요.”

주막 여주인의 말에 명미는 고개를 저었다.

“두 달 뒤면 늦어버려서요.”

다시 한 번 말리려는 주모에게 주인장이 헛기침하며 눈치를 주었다.

남편의 눈치에 주모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명미가 쓰게 웃었다.

천하가 혼란스러워질수록 평범한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겨워진다는 것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그런 힘겨운 삶을 겪는 백성에게, 망산에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왕과 제상들의 무덤은 떨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 무덤 속에는 보물이 어마어마하게 묻혀있을 테니 말이다.

그녀가 묵고 있는 주막은 망산 끝자락에 있어 산을 오르는 많은 이가 거쳐 가는 곳이었다.

주막에 묵는 자들의 십중팔구는 신분이 불분명한 자들로, 실상 주막이 아니라 도둑 소굴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었다.

주인장은 그녀도 그런 목적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망산의 보물을 노리는 게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온 목적을 떠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천하의 혼란을 틈타 온갖 악한 것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십 년 전 시작된 북호의 침략으로 제나라가 멸망하고, 그 후에는 초나라가 쓸려나갔다. 세상이 온통 몰락하며 스러지는 모습은 지옥을 방불케 했다.

그녀의 스승은 어떻게든 이 혼란을 돌이키려 천하 사방을 돌아다녔지만, 장장 십 년을 뛰어다니고도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스승이 그렇게 허망하게 가신 후, 명미는 스승님의 필첩(筆帖,수첩)을 뒤졌다. 그리고 스승이 젊었을 적 망산에 남겨둔 천행대진(天行大陣)을 찾아냈다.

그 후, 명미는 그 술법을 펼치기 위해 각종 정보와 자료를 수집했다.

수소문에 수소문을 거듭하고 온갖 고서들을 뒤진 끝에, 시간을 거스르는 역전의 술법인 천행대진을 펼치는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명미는 간밤에 본 별자리들을 다시 떠올렸다.

‘자미(紫微)가 숨고 정요(正曜)는 빛이 바래있으며, 보요(輔曜) 또한 사방으로 흩어진 것이 십 년을 이어오는 난리의 성상(星象)이다. 그러나 최근 별들이 조금씩 다시 힘을 회복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드디어 때가 왔다.’

별들의 힘과 망산에 잠든 수많은 영웅의 힘을 빌려 스승님께서 남겨둔 천행대진을 움직일 기회가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만약 내가 이 기회를 잡아 천하의 운명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스승님의 운명도 함께 돌이킬 수 있으리라.’

해야 할 일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함께 떠오른 스승님의 기억에 명미는 허리춤에 있는 목패를 쓰다듬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별들이 다시 기운을 차리는 시기는 백 년 후에나 올 것이었다.

스승이 돌아가신 후 명미는 계속해서 다친 채로 쫓기고 있었다. 이대로 백 년을 기다릴 수도 없거니와, 곧 그녀를 쫓는 적들이 그녀를 발견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녀에겐 이번 기회가 유일하게 남은 삶의 기회였다. 그러니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산을 오르리라!’

다음 날.

하늘이 명미를 불쌍히 여긴 것인지 밤사이 내리던 눈발은 약해져 있었다. 솜뭉치처럼 두껍게 내리던 눈이 드문드문 성기게 흩날렸다. 주모가 건네주는 손난로와 식량을 받아든 명미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래도 아직 눈이 내리니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 큰 소리는 절대 금물이니 더더욱 조심해야 해요. 잘못해서 산사태라도 났다간 신선이 와도 못 구하니, 꼭 명심하시구려!”

“네, 꼭 명심할게요.”

웃으며 당부하는 주모에게 명미도 따뜻하게 대답한 후, 눈 쌓인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명미가 주막을 나서자 위층에 있던 몇 개의 방들이 동시에 열리며, 도와 검을 치켜든 사내들이 우르르 아래로 내려왔다.

“형님, 그 여자가 산을 오릅니다!”

“쫓아라!”

명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독안(獨眼)이 흉악한 표정으로 뒤를 쫓으라 말하자 보고를 한 아우가 물었다.

“형님, 눈이 이렇게 오는데 너무 위험한 거 아닐까요?”

명미가 사라진 산길을 보는 독안의 얼굴에 악의에 찬 웃음이 걸렸다.

“그 여자 허리에 걸린 목패 못 봤어? 그거 진혼패(鎭魂牌)야, 명사령부(命師令符)라고! 다들 명사령부가 뭔지는 알지?”

“천하의 제일이 현사(*玄士: 법력을 써서 혼을 부르거나 악귀를 제압하고, 술법 등을 행할 줄 아는 술사)고, 그중 제일이 명사(命師) 아닙니까.”

아우는 걱정이 되는 듯 다시 물었다.

“형님, 명사를 건드려도 괜찮을까요?”

독안이 아우의 뺨을 철썩 때렸다.

“이 새끼야, 그 여자가 여기 얼마나 묵었는지 알지? 한참 묵었는데 술 한 방울 안 마시고 차만 마시는 거 나만 봤어? 날이 이렇게 추운데 그러는 거 보면 모르겠냐? 분명 어디서 먼저 당했거나, 지금 아프다는 거지.”

독안이 눈빛을 번들거리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딱 봐도 어려 보이는 게 강호에 이름이 알려진 것도 아니니, 무공이 있어 봐야 실력은 그저 그럴 거야. 전인(傳人)으로 정해진 지 얼마 안 된 새파란 신출내기란 말이지. 그 초짜가 가진 진혼패만 빼앗을 수 있으면, 천하의 현사들도 다 우리 발아래 두고 굴릴 수 있게 되는데, 너 같으면 포기하겠어?!”

독안의 말에 함께 있던 도적 패거리들의 피도 같이 끓어올랐다. 현사들을 발아래 두고 호령할 수 있다니! 무덤을 도굴해 보물을 훔치느니, 진혼패를 빼앗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일이 아닌가?

“야! 빨리 쫓아가자!”

한 무리의 장정들이 후다닥 뛰쳐나가는 것을 보며 옆에 있던 주모가 한숨을 쉬었다.

“아까운 사람 하나 또 잡겠네. 불쌍해서 어쩌누, 쯧쯧.”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주모는, 곧 하던 청소를 이어나갔다. 저 살기도 어려운 세상이었다. 남의 일까지 관여하는 것은 제 명줄만 짧게 할 뿐이었다.

* * *

먼저 산을 오른 명미는 이미 산허리에 도착해 있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곤 비슷비슷하게 생긴 눈 덮인 산뿐이었다.

‘스승님의 필첩에 적힌 대로라면 천행대진의 진안(陣眼)은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곳으로, 오룡(五龍)이 마시는 물이 흐르는 곳이라고 했어. 확실하지 않은 내용만으로 찾기에는 망산은 너무도 큰 산이로구나.’

다행히도 명미의 스승은 살아생전 그녀를 위한 안배를 해 놓았다. 그녀 혼자 아무런 정보도 없이 진안을 찾는다면 적어도 네, 다섯 달은 족히 걸릴 것이다.

명미의 스승은 생전에 천행대진을 만들고 난 뒤, 천행대진을 친우에게 지켜 달라고 부탁했었다.

명미가 스승의 친우만 찾아낸다면, 진안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때, 문득 명미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바스락-.

바로 발길을 멈춘 명미의 뒤로 공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예리한 칼날이 날아들자, 그녀는 재빨리 허리에 달린 기다란 피리로 쌓인 눈을 후려치며 날렸다.

챙 챙 챙-.

“큭!”

“큭…!”

원래라면 새털처럼 가벼웠을 눈들이 마치 암기처럼 공격한 이들에게 가서 박히자, 신음과 함께 그녀를 쫓아온 도적 떼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여러분들이셨네요!”

도적들은 명미가 같은 주막에 묵으며, 오다가다 본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담담하게 말한 그녀와는 다르게 쫓아온 자들은 그럴 수 없었다.

현사 중의 제일이 명사라더니, 그녀가 조금 전 보인 한 수가 예사롭지 않았다. 도적 떼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안개처럼 차올랐다.

기습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한 명미의 모습에, 독안도 다른 도적 떼들처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긴장과 불안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던 그때, 독안의 눈에 다시금 진혼패가 들어왔다.

‘진혼패!’

바로 저 진혼패만 손에 넣으면 천하를 호령하는 현사들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긴장도 불안도 사라졌다. 오직 탐욕이 주는 용기만이 독안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낭자! 목패만 넘겨주면, 몸은 성히 보내드리겠소!”

명미는 예상 밖의 상황에 한숨이 나왔다. 이런 시골에 진혼패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더욱 당황하게 한 것은 상대가 진혼패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면서도 빼앗을 생각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 패를 아무나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모두 그만 내려가세요, 저는 천하가 걸린 일로 할 일이 있습니다.”

이미 욕심에 눈이 먼 독안은 담담한 명미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하가 걸린 일? 하하하, 낭자가 허세 좀 부리시는구려! 애들아, 진혼패 안 가져오고 뭐 하냐? 얼른 끝내고 오늘은 고기 좀 뜯자!”

“쫓아라!”

호탕한 독안의 말에 함께 있던 도적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산에 오르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자 명미는 안일했던 자신을 탓했다. 상처 입은 허리를 꽉 누른 후, 그녀는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이대로 산에서 내려가면 시기를 놓치고 만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기회를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명미는 이를 악물었다. 궂은 날씨에 여기서 더 다친다면 자신은 절대 진안을 찾을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명미는 자신의 목숨과 스승님의 목숨, 그리고 천하의 명운을 건 도박을 하려 하고 있었다.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제가 늦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 * *

휘오오오-.

몰아치는 바람에 눈발이 더욱 거세졌다. 산을 오르다 미끄러진 명미는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얼어붙어 뻣뻣해진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눈앞이 점점 흐려지며 그녀가 정신을 잃어가던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두 팔이 그녀를 차가운 눈 속에서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데리고 눈 위를 비상하듯 달려 어딘가로 향했다.

명미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하늘에 가득한 어렴풋한 별들이었다.

콸콸콸-.

자신의 몸 아래로 들려오는 물소리에 그녀는 이곳이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물이 흐르는 오룡의 음수처, 즉 천행대진을 이룰 진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진안에 누워 있었다.

망산의 혹독한 추위로 인해 설맹(雪盲, 눈의 염증, 결막염)이 온 듯, 그녀는 모든 것이 흐리게만 보였다. 그런 명미의 눈에 장옷을 입은 백발의 사내가 흐릿하게 들어왔다.

사내는 명미가 가지고 있던 피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너는 천산(天算)의 제자이냐?”

침중한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

명미는 자신의 스승이자 전대의 명사인 천산자(天算子)를 떠올리며, 얼어붙은 입술을 움직여 어렵사리 대답했다. 그에 남자가 말했다.

“천행대진은 곧 시작될 것이니 안심하거라.”

“정말 감사합니다.”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던 명미는 사내의 허리에 걸린 장검을 보았다. 그것은 붉은 검신을 가진, 적소(赤霄)였다. 북제(北齊)의 황족이 보관하고 있다는 황제의 검이었다.

‘스승님께서는 친우가 강(姜)씨 성을 가진 북제의 황족이라 하셨어. 이민족의 공격으로 천하 곳곳에 참상이 계속되고 있을 때, 단신으로 적에게 쳐들어가 적장의 머리를 베어냈다고…. 저분이 검신인가?’

검신. 강호는 그를 검신으로 불렀다.

천행대진이 시작될 시간이 오자, 하늘의 별들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동시에 망산에 잠든 용들의 기세도 거세게 피어오르며 별빛과 용들의 숨결이 일시에 명미의 목패로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