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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혼인 대사



6화. 혼인 대사

강안성이 아복을 따라 방으로 들어서자, 노부인 풍 씨(馮氏)와 마주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립(*而立: 30세)쯤 되어 보이는 여인은 단아하고 수려한 용모에 총기 넘치는 눈을 하고 있었다. 강안성의 얼굴에 의아함이 한층 더 짙어졌다.

‘어머니께서 접대하시던 손님이 여인이었구나. 한데 어찌하여 나를 부르신 걸까?’

“동평백 대감이시군요.”

여인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풍 씨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이쪽이 바로 넷째 손녀의 부친 동평백이요. 아범아, 이분은 안국공 세자 부인이시다. 오늘 혼사를 논의코자 오셨다.”

“혼삿날은 이미 정하지 않았습니까?”

풍 씨가 곽 씨에게 눈길을 주자, 곽 씨가 조금 계면쩍은 얼굴로 말했다.

“어젯밤 국공부에 변고가 조금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과 어머님 모두 혼사를 서두르고 싶어 하십니다…….”

“어떤 변고 말이오?”

강안성의 얼굴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정해진 혼삿날을 앞당기면 괜한 구설수에 오르내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신랑 측이야 큰 타격이 없다 하더라도, 신부에게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곽 씨가 다소 민망함을 느끼면서 쓴 입을 다셨다. 하지만 어젯밤 일은 차마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무거운 입을 힘겹게 뗐다.

“도련님께서 아직 철이 없어 어젯밤 막우호에 갔다가 물에 빠져서…….”

세간에서 어떻게 떠들던 국공부는 삼 공자와 외간 여인의 순정을 죽어도 인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문의 체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흙빛이 된 강안성이 곽 씨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삼 공자가 물에 빠진 것과 혼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혹시 내 딸에게 숨이 다 넘어가게 생긴 병자의 액막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대감, 오해십니다. 삼 공자께선 놀라긴 했지만 큰 탈은 없습니다.”

곽 씨는 착실히 대답하였지만 추궁당하는 입장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삼 공자가 눈이 멀어 그런 사달을 내지만 않았다면, 그녀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가문에 머리를 조아릴 일이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혼사를 서두르려는 것이오?”

강안성은 끈질기게 연유를 캐물었다.

세 아이가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적어도 혼인 대사(婚姻大事)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넘어갈 수 없었다.

강안성의 몰아세우는 듯한 말투가 곽 씨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녀는 평소 남에게 떠받들어지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곽 씨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삼 공자에게 큰일은 없지만, 어젯밤 삼 공자와 함께 물에 빠진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허튼 소문이 돌기 전에 넷째 아가씨를 빨리 맞이하자는 얘기가 나온 것입니다.”

“여인이라니?”

강안성의 얼굴이 얼음을 한 겹 두른 듯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 여인이 누구란 말이오?”

강안성의 끝을 모르는 작태에 곽 씨는 더욱 심기가 불편해졌지만, 조금 전 노부인의 묵인하던 모양새를 떠올리며 에두르지 않고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찍이 삼 공자와 교제하던 여인입니다. 하지만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삼 공자도 그저 어린 치기에 저지른 일이고, 안국공 내외께서도 단단히 단속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퇴혼!”

강안성이 더 듣지도 않고 단호하게 두 글자를 내뱉었다.

벼락같은 소리에 놀란 곽 씨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동평백이 방금 뭐라고 한 거지?’

‘퇴혼?’

그녀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동평백부와 안국공부의 혼사는 다시 오지 않을 최고의 혼사 자리인데, 동평백이 미치지 않고서야 저리 쉬이 퇴혼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대감, 고정하시고 제 말을 마저 들어…….”

“퇴혼하겠네.”

강안성은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단호히 말했다.

‘듣기는 뭘 들으란 말인가. 저 고약한 입에서 고약한 소리밖에 더 나오겠어?’

“노부인…….”

곽 씨가 풍 씨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동평백이 이렇게까지 막무가내일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역시 그가 우연한 기회에 안국공의 목숨을 구한 일만 없었다면, 두 집안의 혼사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다행히 동평백 노부인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니, 결국 동평백도 노부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아범아, 세자 부인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두 집안의 혼인 대사가 걸린 문제인데, 그리 쉽게 퇴혼을 논하면 되겠느냐?”

풍 씨가 나직하게 타이르며 말했다.

“혼인 대사이기 때문에 더더욱 딸을 사지로 내몰 수 없습니다.”

“대감, 그 말씀은 조금 지나치셨습니다. 그 여인은 기껏해야 첩실일 뿐, 넷째 아가씨의 안국공부 셋째 며느리 자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을 것입니다…….”

“퇴혼!”

강안성이 막무가내로 내지른 두 글자에 곽 씨의 뒷말이 전부 먹혀 버렸다.

곽 씨는 화를 꾹 참고 말했다.

“대감, 이 일은 노부인의 뜻도 여쭤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안성이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세자 부인은 가문도 좋고, 교양도 풍부하신 것 같으니 내 한 가지만 묻겠소. 부인은 혼인 대사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당연히 부모님의 뜻이요, 중매쟁이의 말 아니겠습니까?”

곽 씨가 즉각 대답했다.

“바로 그렇소! 내가 넷째의 아비인데, 내 뜻대로 퇴혼하는 것이 문제가 된단 말이오?”

곽 씨는 동평백 강안성이 고상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소귀에 경 읽기가 따로 없었다.

그녀는 답답한 심정을 억누르고 가까스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노부인, 본디 혼사란 두 집안이 하나가 되는 일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지요. 먼저 부인께서 대감마님과 말씀을 나누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곽 씨가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니, 풍 씨의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녀도 퇴혼을 원하진 않았지만, 안국공부의 사람 앞에서 얕보일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안국공부의 과실이 분명한 이 기회를 놓칠 수도 없었다.

마침 창아(滄兒)를 위해 대유(*大儒: 학식과 덕이 높은 선비) 청애(青涯) 선생을 모시려고 해도 연줄이 없어 골머리를 썩던 차였다.

그녀가 볼 때 혼사를 물리는 것은 어불성설이거니와, 이번 기회에 원하는 바까지 얻어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물론, 자신의 아들을 설득하는 것이 먼저이긴 했지만.

풍 씨는 아들의 서릿발 같은 얼굴을 바라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강안성은 어디 한 군데 특출한 곳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아들이었다. 심지어 작년에 산사태에서 안국공을 구하다가 한쪽 팔까지 잃는 바람에, 백부를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겨우겨우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쯧, 저 나이 먹도록 아직까지 세상 물정도 모르니 원…….’

“어머니, 이 일은 더 이상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반드시 퇴혼해야 합니다. 정말이지 사람을 깔봐도 유분수지!”

“퇴혼이 여인에게 얼마나 해가 되는지 생각이나 해 보았느냐? 남자 측의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퇴혼을 한 여인에게 다시 좋은 혼사 자리가 들어올 성싶으냔 말이다.”

강안성은 건조하게 웃으며 답했다.

“ 서아가 평민에게 시집가는 한이 있더라도, 혼사도 치르기 전에 다른 여인과 내통하는 남자보단 낫겠지요.”

“평민이라고?”

풍 씨는 아연실색하여 되물었다.

“너는 넷째 아이의 사치비가 한 달에 얼마나 드는지 아느냐? 무려 평민 다섯 가구가 일 년은 쓸 수 있는 생활비란 말이다.”

풍 씨의 적나라한 지적에 강안성이 잠시 멈칫했다.

풍 씨는 때를 놓치지 않고 청산유수로 말을 이어 갔다.

“사랑만 있으면 물만 마셔도 배가 부르다 하더냐? 안국공 세자 부인이 이르기를, 그 여인은 평민 출신에 글도 모르는 자라고 하더구나. 삼 공자는 그저 한순간의 신선함에 혹한 것이야. 여인이 첩지를 받으면 자연히 흥미가 떨어질 테지.”

강안성이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뿜었다.

“어머니께서 틀리셨습니다. 이건 그 썩을 놈의 공자가 다른 여인에게 마음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자가 서아에게 최소한의 존중심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런 놈에게 서아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럼 서아의 의견은 물어 보았느냐?”

순간 강안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풍 씨가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서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어찌 그 아이도 퇴혼을 원하는지 알겠느냐? 아무리 혼인 대사가 부모의 뜻을 따른다고 한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 서아의 미움을 받고 싶진 않겠지?”

그 말에 강안성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갔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은 그에게 1남 2녀를 남겨 주었다. 세 아이 중 그가 가장 아끼는 자식은 역시 서아였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서아가 유달리 부인을 쏙 빼닮은 탓도 있었다.

그 작은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그는 애간장이 사르르 녹아 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생전 살가운 적이 없던 딸이 어쩐 일인지 오늘은 그에게 한없이 부드럽지 않았던가. 강안성은 서아와 다시 소원해지고 싶지 않았다.

풍 씨가 생각에 잠긴 아들을 보며 속으로 조소했다.

그녀는 넷째 손녀가 아버지를 설득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설령 서아가 저를 탓하게 되더라도…… 저는…….”

“넷째를 들라 하거라.”

풍 씨가 강안성의 말을 끊으며 아복에게 분부했다.

아복이 이방에 있는 강서를 부르러 잽싸게 달려갔다.

* * *

그 시각, 강서는 시간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쯤 되었으면 아버지가 그간의 사정을 모두 알게 되었을 터였다.

전생에서 아버지는 혼사를 앞당기는 것에 반대하셨다. 심지어 이번에는 교랑이 죽지 않았고, 아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안국공 부인도 교랑을 쉬이 내치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제 아버지도 퇴혼의 필요성을 아셨겠지.

물론 곽 씨가 집안의 추문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기에는 충분했을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오라버니가 밖에서 들은 소문을 아버지에게 고하기만 한다면 아버지께서도 마음을 굳히실 거라 생각했다.

‘둘째 오라버니는 왜 여태 안 오는 거지?’

“아씨, 큰 마님께서 찾으십니다.”

강서는 생각을 갈무리한 뒤 차분한 얼굴로 아복의 뒤를 따라갔다.

“서아야, 오래 기다렸니?”

강서가 풍 씨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할머님께서 손님을 맞이하시니, 소녀가 잠시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지요.”

“역시 넷째가 총명하구나.”

풍 씨의 눈가 주름이 한층 짙어졌다. 그녀가 강서를 곁으로 부르며 말했다.

“오늘 오신 객이 누군지 아느냐?”

“소녀는 모르겠사옵니다.”

“안국공 세자 부인이시다.”

강서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풍 씨가 급히 덧붙여 말했다.

“국공부에서 너를 하루빨리 들이고 싶어 하는구나. 네 생각은 어떠하냐?”

“어머니!”

강안성이 굳은 낯빛으로 노부인의 말을 막았다.

‘어머니께서 어찌 이러실 수 있단 말인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곧장 결론만 얘기하는 것은 서아를 속이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풍 씨는 강안성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강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손녀를 잘 안다고 자신했다.

이상은 하늘보다 높지만, 팔자는 종잇장보다 얇은 이가 바로 자신의 손녀딸이었다. 그녀는 강서가 이렇게 좋은 혼사를 놓칠 리 없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