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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그네



22화. 그네

방 안에 있던 강서가 비명소리에 놀라 정원으로 뛰어나왔다.

“하하, 아씨 그네가 무척 재미있어요.”

아만이 그네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그녀의 양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반면에 강담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슬금슬금 그네로 다가가서 나무에 걸린 그넷줄을 풀며 말했다.

“원래 빌려 온 그네라…… 이만 돌려줘야겠다.”

강서는 치맛자락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거짓말 마세요. 그네를 빌려 왔다는 얘기는 난생처음 듣습니다.”

“사매는 몸이 약해서 그네를 타다 고뿔에 걸리면 어떡해. 그냥 풀어 버리는 게 좋겠어.”

‘아이고야, 천방지축 아만은 그네를 타다가 하늘로 승천하겠구나. 누이가 이걸 보고 배우면 어쩌지?’

강서가 그네 위에서 뛰어내리는 상상까지 한 강담의 손놀림이 한층 빨라졌다.

강서는 그넷줄에 매인 비단 끈을 보며 웃었다.

“오라버니, 저는 이 그네가 맘에 들어요.”

강담이 분주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웃음기가 담뿍 담긴 소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재빨리 태세를 바꿨다.

“누이가 좋다고 하니, 그럼 내버려두도록 하지. 하지만 아만처럼 타면 결코 아니 된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야!”

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이 좋지 않을 텐데, 그네라도 타면서 기분전환이 되었으면 하는 오라버니의 마음이었다.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그럼 나는 이만 가야겠구나. 나가 봐야 해서.”

“오라버니 나가시려고요? 저도 살 것이 있으니 같이 가요.”

강서는 아직 부족한 약 한 가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강담도 거절하지 않고 강서가 옷을 다 갈아입을 때까지 기다린 뒤 같이 길을 나섰다.

“이 공자님, 아씨!”

나가는 길에 만난 시종 하나가 급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넷째 아씨…… 오, 이 공자님도 계셨군요.”

얼마 가지 않아서 다른 하인이 황급히 예를 올렸다.

강담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낮은 목소리로 강서에게 물었다.

“사매, 오늘 시종들이 더 친절해진 것 같지 않아?”

강담은 강서가 퇴혼해서 시종들이 그녀를 얕잡아 볼까 봐 걱정하였지, 시종들이 오히려 이렇게 공손하게 떠받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강서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인사를 올린 시종이 몰래 눈을 희번덕대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우리가 왜 이렇게 공손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인사를 했으면 한쪽으로 비킬 것이지, 길은 왜 막고 서 있는 것이냐? 상이라도 내려 주랴?”

시종이 길 한가운데를 막고 있자, 강담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강담의 말에 시종이 깜짝 놀라 부들부들 떨며 황급히 길을 비켰다.

감히 넷째 아씨에게 상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분이 바로 둘째 마님을 찍소리도 못하게 만든 장본인인데.

강담은 매끈한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평소에 이 정도까지 나를 무서워하진 않았는데……. 저 시종의 얼굴을 보니 내가 사람이라도 잡아먹는 줄 알겠구나.”

“괜한 생각이세요. 저희도 어서 나가요.”

* * *

수전골목을 나서면 바로 저잣거리였다. 저잣거리는 행상인들과 구경꾼들로 시끌벅적하였다.

“사매는 뭘 사려고?”

강담이 노점상에서 탕후루를 사서 모양이 가장 예쁜 것을 강서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남은 것은 그를 따르던 시종 아길에게 대충 던져 주었다.

아길은 눈치 빠르게 아만에게 한 개를 나눠 준 뒤 강담에게 물었다.

“공자님께서는 안 드십니까?”

“대장부가 무슨 탕후루를 먹어?”

아길을 흘겨보던 강담이 강서가 멀뚱멀뚱 탕후루를 들고만 있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탕후루 안 좋아해?”

강서가 머리 위의 유모(*帷帽: 여인들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쓰던 휘장을 드리운 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먹기 불편해서요.”

“그렇겠구나.”

강담이 안타까움에 한숨을 푹 쉬었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계속 쓰고 있거라.”

‘선녀 같은 누이의 얼굴을 아무에게나 보여줄 수 없지!’

도성에서 가장 큰 약방에 도착하자 강서가 아만을 데리고 약을 사기 위해 들어갔다. 약 냄새가 강해서 강담은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하나 이리 내거라.”

강담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공자님, 조금 전 대장부는 탕후루를 먹지 않는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강담이 아길의 어깨를 쳤다.

“누이의 앞에서나 대장부지, 너 같은 소인의 앞에서는 어르신 아니냐! 어르신이 탕후루 좀 먹겠다는데 불만 있느냐?”

아길은 주인 몰래 혀를 끌끌 차고 탕후루 한 개를 강담에게 건넸다.

강담이 홍과(*紅果: 산사나무 열매)를 한입 베어 물면서 오가는 이들을 구경했다. 오가던 행인들은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소년의 준수한 얼굴에 홀린 듯 시선을 뺏길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오다가 탕후루를 베어 무는 강담을 발견하였다.

“오, 이거 강담 아닌가?”

금포에 옥관까지 쓰고 한 손에 부채를 든 사내가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지난번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지. 이번엔 쉽게 달아나지 못할 거다.”

강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앞에 한 마리의 금계처럼 한껏 멋을 낸 자는 영양 장공주(榮陽長公主)와 대장군 최서(崔緒)의 아들 최일(崔逸)이었다. 강담은 이 금계와 첫 만남부터 사사건건 부딪히는 원수지간이었다.

최일의 도발이 강담의 성질머리를 돋우는 바람에 참다못해 맞붙었다가 오히려 역으로 최일의 성질머리를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강담은 싸움이 두렵진 않았지만, 사매가 아직 약방 안에 있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까 초조해졌다.

그를 둘러싼 이들을 보며 강담이 비웃음을 흘렸다.

“최 공자, 이렇게 사람이 오고 가는 곳에서 한바탕 붙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관차가 달려올 것이오. 그것은 피차 원하는 바가 아닐 테니, 장소를 정하시오. 얼마든지 상대해 주겠소!”

“네놈이 배짱은 있구나. 나를 따라와라!”

강담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를 따라가려는 찰나, 갑자기 뒤에서 소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어디 가세요?”

강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강담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물었다.

“왜 나온 것이냐?”

“다 샀는데요?”

강서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강담의 물음에 착실히 대답해주었다.

“오, 그 여인은 누구냐? 친해 보이는데?”

명백히 희롱하는 어조가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서는 휘장 너머로 목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자들이 바로 오라버니를 죽게 한 공범이 분명했다.

전생에서는 그녀와 강담의 사이가 소원하여 그의 친구, 원한 관계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오라버니가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버지는 강담이 예부상서의 손자인 양성재 무리와 어울려 다니는 것에 크게 화를 내셨는데, 오라버니는 목을 빳빳이 들며 양성재가 그를 도와주었다면서 친우의 마음을 저버릴 수 없다고 반항했었다.

사실 이것이 강서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영양 장공주의 아들 최일과 양성재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데, 지금 보는 대로 둘째 오라버니와 최일은 철천지원수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함께 놀러 다니게 되는 걸까?

둘째 오라버니가 친우의 마음을 저버릴 수 없다 했지만, 설마 그 소중한 친우가 그의 목숨을 앗아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리라.

“함부로 말하지 말아라!”

강담이 강서를 등 뒤로 숨겼다. 그는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 앙칼진 눈초리로, 다가오는 최일을 경계했다.

“결투는 다음번에 하도록 하지. 지금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상대해 주겠네.”

최일이 금박이 번쩍번쩍 빛나는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여인이 놀랄까 걱정되는가? 동평백부 이 공자께서 이리 여인을 끔찍이 위하는지 몰랐네 그려.”

“그 입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다.”

강담의 매끈한 이마에 푸른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하지만 강서가 그의 뒤에 있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자들은 여인을 희롱하고도 남을 놈들이었다.

사매가 동평백부의 여식이어서 강제로 손을 대진 않겠지만, 말로 희롱하거나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어떤 일을 할지 몰랐다. 결국 손해 보는 것은 그의 누이일 것이었다.

강담은 이렇게 괴로운 적이 없었다.

만약 여칠 형님이라도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아니다, 그의 개라도 있었다면…….

“싸우려던 것이 아닙니까?”

소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대치하고 있던 사내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저 여인이 뭐라고 한 거지?’

“사매, 조용히 하거라.”

강담이 보기 드물게 강서에게 큰 소리를 냈다.

강담은 누이가 이렇게 자신을 곤경에 빠뜨릴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하하, 강담 들었느냐? 네 누이가 싸움 구경을 하고 싶은가 보구나!”

최일이 가녀린 여인의 몸매에 시선을 둔 채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같이 있던 장한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강담, 그래서 싸우겠다는 것이냐 말겠다는 것이냐? 꼭 계집애처럼 우물쭈물하는구나.”

“아이고, 그런 말 마십시오. 공자는 아가씨를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맞습니다! 강담은 이제 여인네보다 못한 놈이 되었네요. 하하하.”

강담은 주먹을 꼭 쥔 채 저놈들의 더러운 주둥이를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을 꾹꾹 억누르고 있었다. 길게 심호흡을 한 그가 말했다.

“당신들이 어떻게 말하든 오늘은 싸우지 않겠소. 저리 비키시오!”

“강담, 너는 가고 싶다 하더라도 네 누이의 생각도 물어봐야 하지 않느냐?”

최일이 부채를 밉살스럽게 흔들면서 스스로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미소를 지으며 강서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소, 아가씨?”

“당연히 아니지요.”

강서가 차갑게 대답했다.

강서의 대답에 최일이 깜짝 놀라 부채를 부치던 것도 잊어버렸다.

‘뭐라고? 방금 한 얘기랑 다르잖아?’

아만이 최일을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입술을 비틀었다.

‘저 사람 바보 아니야? 아씨는 당연히 이 공자님 편이지.’

아만이 맞은편 장한들을 노려보며 머릿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음, 저쪽은 다섯이구나. 내가 혼자 세 명은 능히 상대할 수 있으니 한 명은 공자님에게 양보하고, 아길은…… 음, 걸리적거리지만 않으면 되지.’

“저희는 급히 집에 돌아가 봐야 합니다. 만약 오라버니와 싸우실 게 아니라면 저희는 이만 가겠습니다.”

강서가 가볍게 강담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강담은 꿈에서 깬 사람처럼 허둥지둥했다.

“맞아, 우리 먼저 가겠어.”

최일이 아래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 이상한데?

“거기 서!”

그가 부채를 접어 앞으로 뻗으며 강서와 강담을 막아섰다.

“두 오누이의 수작에 넘어갈 뻔했구나. 내가 언제 가도 좋다고 했지?”

애초부터 누가 저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느냔 말이다!

“하, 그럼 빨리 싸우실 순 없나요? 저희도 급해서요.”

강서가 강담의 소매를 놓으며 재촉했다.

“하, 오늘 견문을 넓히는구먼!”

최일이 강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뭐 하고 서 있는 거야! 어서 강담에게 본때를 보여 줘! 강담을 해치우면 저 여인은 우리 것이다.”

“아길, 아만! 아씨를 모셔라!”

강담이 강서를 뒤로 물린 뒤 주먹을 들어 응수했다.

“아씨, 빨리 가셔요.”

아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장한들에게 둘러싸인 강담을 보다가 거의 흐느끼면서 강서를 재촉했다.

아만이 침착하게 물었다.

“아씨, 어찌할까요?”

강서는 아만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아길에게 반문했다.

“이 공자의 실력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

아길은 혼이 빠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일각도 안 될 겁니다.”

만약 아길까지 합세한다면 조금 더 버틸 수 있겠지만, 그는 넷째 아씨를 모시고 빨리 도망가야 했다.

이 공자님께서 맞는 것은 고작 피육의 상처뿐이지만, 넷째 아씨가 저런 몹쓸 놈에게 걸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큰일이었다.

“열까지 버티면 충분하다.”

강서가 중얼거렸다.

“예?”

아길이 강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되물었다.

강서는 난전 속에서 익숙한 인영에게 시선을 고정한 뒤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꼭 열을 다 세었을 때, 갑자기 사면팔방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