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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촌극



20화. 촌극

한편 소란이 나기는 아형원도 마찬가지였다.

초 씨는 자심당에서 한껏 모욕을 당하고 돌아온 뒤, 방 안의 탁자를 뒤집어 엎었다. 탁자 위에 있던 찻주전자와 찻잔이 쏟아져 찻물과 도자기 파편으로 바닥이 엉망이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마침 방으로 들어온 이 노야가 엉망이 된 광경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초 씨는 치욕스럽기도 하고 껄끄럽기도 하여 하인을 모두 물린 후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어리석은!”

이 노야가 초 씨를 꾸짖었다.

“숙모가 되어서 이런 일로 어린 조카를 괴롭혔단 말이오? 그래서 이제 만족하시오?”

초 씨는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반박했다.

“강서가 얼굴이 그렇게 두꺼울지 어찌 알았겠습니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저에게 바락바락 대들더군요.”

다른 가문은 적모가 서녀를 괴롭히거나, 계모가 적녀를 괴롭히는 것이 일상다반사인 마당에 조카의 버릇을 고쳐 주려던 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여자아이들도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강서는 그와 정반대인 것인지!

“당신도 이제 그만하시오. 당신이 서아라면 지금 심정이 어떻겠소? 원래 서아도 좋은 혼사가 있었을 때는 체면을 중시하던 아이였소. 하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소?”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자포자기 상태란 말이오.”

강서의 얘기를 꺼내자 이 노야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때 창고 앞에서 조카에게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한 일을 잊을 수 없었다.

초 씨는 입술을 달달 떨며 이 노야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어쨌든 그 아이는 지금 무서울 것이 없으니, 당신이 피해 가도록 하시오.”

이 노야의 말이 끝나자 초 씨의 얼굴은 아직도 머리 위에 걸려 있는 찻잎보다 더 노랗게 질려 있었다.

더 이상 그 꼴을 보고 싶지 않던 이 노야는 서둘러 서고원(西跨院)으로 몸을 돌렸다.

이 노야에게 위로는 고사하고 질책만 받은 데다, 그녀 앞에서 뻔뻔하게 첩실의 처소로 걸음을 돌리는 그를 보고, 초 씨는 너무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결국 심복 하녀를 불러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달했다.

하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강서와 아만, 아교는 해당거로 돌아왔다.

처소에 돌아오자마자 아만이 참지 못하고 얼른 궁금한 점을 쏟아내었다.

“아씨, 노부인과 둘째 마님이 아씨 말을 들어 주실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강서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니야. 나는 그저 욕심이 없었던 것뿐이지.”

그녀는 정말 바라는 것이 없었기에 어머니의 혼수품을 두고 풍 씨와 터무니없는 흥정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풍 씨는 어머니의 혼수품으로 벌어들이는 이익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숙모를 몰아붙일 때도 함부로 나설 수 없었던 것이었다.

둘째 숙모도 강서가 고작 어머니도 없는 어린 계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강경한 방법으로 따져 물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강서가 주방에 항의를 하면 그때 바로 괴롭힘을 그만둬서, 강서가 이 일을 누구에게 말도 못하게 하는 그림을 기대했을 터였다.

하지만 둘째 숙모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강서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체면과 존엄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체면이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지 않고, 행복한 생활이 되려면 존엄을 버려선 안 되었다.

“이제 자자꾸나. 내일도 한바탕 시끄러울 테니.”

강서의 말에 아만과 아교가 강서의 잠자리를 봐주면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일까?’

* * *

아만과 아교는 내일 있을 일이 너무 궁금하여 잠을 설치고 말았다. 두 시종의 눈가가 너나없이 거무죽죽하게 움푹 패었다.

반면 오랜만에 푹 잠을 잔 강서는 이보다 상쾌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단장을 하고 문안 인사를 드리기 위해 자심당으로 향했다.

딱하게도 풍 씨 역시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그녀는 가뜩이나 나이가 들어서 깊게 자지 못하는데, 마음에 걸리는 일까지 생기니 도통 잠을 잘 수 없었다. 게다가 저번에 악몽을 꾼 이후로 왠지 모르게 왼쪽 눈의 통증이 심해지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풍 씨는 강서의 장미꽃보다 붉고 귀여운 두 뺨을 보자 속이 더 시끄러워졌다.

만약 어젯밤에 저 아이가 난리를 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진 않았을 터였다.

고작 조그마한 계집아이가 감히 그녀에게 혼수품을 거들먹거리다니? 기함할 일이었다.

풍 씨는 강서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적어도 얼굴만큼은 온화한 할머니의 가면을 쓰고 대했다.

초 씨는 두 서녀를 데리고 강서보다 먼저 문안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침부터 꽃보다 화사한 강서의 모습을 보자 속이 뒤집히는 심경이었다. 하지만 이내 어젯밤 심복에게 일러 류 씨 어멈에게 전한 말을 생각하고는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조금 있으면 사달이 날 텐데, 그때도 강서가 저리 여유로울지 두고 볼 생각이었다.

“되었다. 모두 물러가 보거라.”

풍 씨가 찻잔을 집어 들었다.

초 씨는 다섯째 강려와 여섯째 강패와 함께 인사를 올리며 물러갔다. 셋째 숙모 곽 씨도 셋째 강소(姜俏)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의 사람들이 차례로 나가자 손아랫사람인 강서도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갑자기 셋째 숙모 곽 씨 뒤를 따르던 소녀가 홱 뒤를 돌아 강서를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금방이라도 강서를 잡고 한바탕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보고 강서가 낮게 탄식했다.

동평백부는 총 삼 형제인데 셋째인 삼 노야는 서자였다. 조용한 성격의 그처럼 부인 곽 씨도 바깥활동을 잘 하지 않았는데, 유달리 그의 여식 강소는 활달한 성격에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었다.

사실 삼 노야가 서자이긴 해도 슬하에 일남일녀밖에 없으니, 강소는 어렸을 때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백부의 여섯 아가씨 중 강서와 강소는 유일한 동갑내기였는데,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강소는 시종일관 강서와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본격적으로 틀어지게 된 것은 안국공과의 혼인이 성사된 후 부터였다.

산사태에서 안국공을 구한 것은 강안성과 삼 노야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안국공부가 동평백부에 혼사를 제안했을 때 혼사 자리가 홀랑 강서에게 넘어간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비록 몇 개월이라 하더라도 강소가 강서보다 언니였다. 한데 강소를 제치고 강서에게 혼사가 넘어가다니, 강소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하지만 이전의 강서는 끝도 모르고 오만한 데다 사람을 깔보는 데 도가 터서, 강소에게 비수보다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그러게 누가 너희 아버지보고 동평백이 아니랬니?”

결국 이 한마디 때문에 둘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고, 강소는 이제 강서를 볼 때 하다못해 잘 지내려는 척도 하지 않았다.

강서가 전생에서 안국공부로 시집을 간 지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아 생과부 신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온갖 비난과 헛소문에 지친 상태였고, 강소에게 비웃음을 당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강소는 강서를 보자마자 아무 말 없이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전생의 일이 떠오르자, 강서는 강소를 향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모습을 본 강소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평소 사람을 고고하게 깔보던 강서가 나를 향해 웃었다고? 그것도 비웃음이나 빈정거리는 게 아닌 평범한 미소를?’

‘반드시 꿍꿍이가 있을 거야!’

강소가 흔들리는 눈빛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셋째 숙모 곽 씨의 뒤로 돌아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자심당을 나오던 때, 갑자기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모두 미처 반응하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못을 박은 듯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튀어나온 인영은 곧장 강서에게 향했다. 하나 강서 뒤를 따르고 있던 아만이 벼락같이 발을 박차고 뛰어올라 정체불명의 괴한을 걷어찬 뒤 가벼운 몸놀림으로 착지했다.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괴한은 강서의 발밑에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넷째 아씨,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발 저희 일가족을 사지로 내몰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 빌겠습니다.”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려 있는 이를 금방 알아보았다. 바로 류 씨 어멈이었다.

강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흔히 바람구멍 없는 벽은 없다 했던가. 어젯밤 강서가 벌인 소동은 이미 온 백부 사람들에게 퍼져 있었다.

강서는 발치에서 애처롭게 꿇어앉아 있는 류 씨를 보고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넷째 아씨, 소인이 아둔하여 그랬사옵니다. 잘못된 생각으로 아가씨에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제발 아량을 베푸셔서 한번만 봐주십시오. 소인이 잘못하였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류 씨 어멈은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마구 내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곤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심당에서 나온 이들 말고도 길을 지나가던 하인들까지 모두 걸음을 멈추고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디선가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류 씨 어멈 참 불쌍하지 않니?”

“그러게. 류 씨 어멈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일가족을 농가로 보내버린다니……. 정말 끔찍하네.”

백부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모두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었다. 류 씨 어멈이 평소에 어떤 사람이었든,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쫓겨나는 것을 보고 동병상련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다시 한번 그 입을 놀린다면 네 입을 찢어 놓고야 말겠다.”

아만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초 씨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기가 번졌다가 사라졌다. 어젯밤 끙끙 앓던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류 씨 어멈이 이 소란을 피웠으니 아랫것들 뇌리에 강서가 각박하다는 인상이 깊이 박혔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 좋은 혼사 자리는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집 못 간 계집아이의 혼삿길을 막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반격이 아니겠는가?’

류 씨 어멈의 흐느낌이 통곡으로 바뀌자, 자심당의 하인들까지 고개를 빼고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이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던 풍 씨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데?”

아복이 황급히 나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돌아왔다.

“류 씨 어멈이 대문 앞에서 넷째 아씨를 붙잡고 사정하고 있다 합니다.”

풍 씨가 끄응, 하고 침음을 흘리더니 아복에게 손을 뻗었다.

“가 봐야겠으니 부축하거라.”

“마님, 노부인께서 나오셨습니다.”

초 씨의 옆에 있던 시종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초 씨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딱 좋은 순간에 어머님이 나오시는구나. 이제 어머님도 이런 소동을 벌이는 강서에게 질리셨겠지?’

류 씨 어멈은 풍 씨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초 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초 씨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류 씨 어멈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넷째 아씨께서 소인을 용서해 주지 않으신다면, 소인이 죽음으로써 죗값을 받겠습니다. 부디 제 가족만은 살려 주십시오.”

류 씨 어멈은 말을 마치자마자 머리를 숙여 담벼락으로 곧장 달려갔다.

“아앗!”

구경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야 할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고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살며시 눈을 뜨자 아만이 류 씨 어멈의 치맛자락을 밟아 류 씨 어멈이 꼴사납게 바닥에 엎어져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구멍 난 내의까지 적나라하게 보였다.

껄끄러운 적막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여기저기서 우레와 같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류 씨 어멈이 정말 제대로 된 자린고비였구먼.”

누군가가 던진 말에 사람들이 다시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만은 치맛자락을 밟고 있는 발을 떼지 않고 류 씨 어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죽으려면 혼자 조용히 죽을 것이지. 우리 아씨가 놀라면 어쩌려고, 이것이?”

‘아씨께서 수상한 낌새가 있는지 주시하라는 당부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이 망할 것이 기어이 사고를 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