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말 못할 고충
지장은 전보다 더욱 친근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부모님께서 백모님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 소리에 장씨 부인은 얼른 일어나 정씨 부인에게 인사를 했다.
지익 역시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큰형수님을 뵙습니다.”
그에 지형도 마지못해 일어났다.
“큰형수님을 뵙습니다.”
그러나 위씨 부인은 무성의한 태도로 그저 무릎만 슬쩍 굽혔다 폈을 뿐 입을 열지조차 않았다.
정씨 역시 그 모습을 보았지만, 조금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그저 웃으며 마주 예를 갖춰주었다.
지온까지 인사를 모두 마치자 정씨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아이들도 그만 쉬어야지요. 무슨 일인지 서둘러 이야기하고 아이들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형수님.”
지익이 침착하게 대답을 하였다.
“큰형수님과 지온이를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허나, 이 일에 두 분 모두 깊은 관련이 있어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씨 부인이 몸을 돌려 시종에게 무더기로 쌓인 장부를 가져오라 하여 다탁(*茶卓: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지익이 말을 이었다.
“부친께서 돌아가시며 형제들에게 가산들을 나눠주지 않으셨고 큰형님에게만 가업을 남기셨지요. 그러나 큰형님께서 예상치 못하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고 저와 둘째 형님만 남았습니다. 전에는 둘째 형님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형님께서 지씨 집안의 가주이니 형님께서 가업을 이끄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가 지형을 바라보곤 흥, 하는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기분이 상한 지형이었지만, 조금 전 약점을 잡힌 터라 마주 비웃음을 날릴 수가 없었다.
지형은 그저 불편한 듯 수염을 쓸었다.
“상황이 이리되어 저희 형제에게 문제가 생겼으니 차라리 재산을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당하게 각자의 것을 가지고, 앞으로 다신 다른 이의 이득을 취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그 말이 귀에 거슬렸는지, 지형이 강하게 변론하고 나섰다.
“셋째야, 어찌 말을 그리한단 말이냐? 너 역시 내가 이 집안의 가주라 하지 않았어? 그런 내게 집안의 재산을 처리한 권리조차 없단 말이냐? 더구나 큰형님께서 그리 떠나시고 집안의 제사를 물려받은 것이 나였으니 가산의 대부분은 본래 내 것이지!”
지익이 차갑게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정당하게 각자의 것을 가지자 말하지 않았소? 형님이 이제 맏이니 형님의 것을 가지고 가시오! 난 형님 것을 탐내지 않으니까!”
“뭐가 내 것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이냐?”
지형이 곧바로 대답했다.
“지금 넌 내가 네 것을 탐했다 의심하여 갈라서자 하는 것이 아니냐! 그 듣기 안 좋은 소문이 밖으로 퍼지기라도 해보거라. 내가 어찌 얼굴을 들고 사람들을 만나겠느냐!”
“형님이 창피가 무언지 알기는 알았소?”
지익이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이미 다 늦어버렸으니 이를 어쩌면 좋소? 취태평에서 형님이 집안의 물건을 훔쳐다 기녀에게 가져다 바친 것을 본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창피를 아는 사람이 그랬소?”
“어찌 말을 그리 듣기 안 좋게 해, 뭐가 훔친 것이냐…….”
지익은 그와 더 말을 이어가지 않고 다탁 위 가장 위쪽에 놓인 장부를 들었다.
“아버지께선 우리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지 않으셨지만, 큰형님께선 떠나시기 전에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했소. 아버지께서 남기신 유산의 반은 집안 종친 본가로 보내어 그곳의 가주가 관리하게 하라 하셨고, 남은 것들은 우리 삼형제가 똑같이 나누라 했다 하셨소. 그러나 큰형님 본인은 아들이 없으니 죽고 난 후에 그 몫도 우리 두 형제가 나눠 가지라 하였고, 형님께서 번 것들은 일단 집안에서 관리하고 있다가 지온이 돌아오면 시집갈 때 혼수와 지참금으로 챙겨주라고 했었소.”
지익이 제 형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형님, 내 말에 틀린 곳이 있소?”
지형이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대노야가 임종하기 전에 남긴 말이 맞았다. 더구나 증인까지 있으니 함부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럼 됐소.”
지익이 장부를 펼쳤다.
“그럼 이제 무엇이 누구의 것인지 살피기만 하면 되겠지!”
* * *
장부계산과 같은 일들이 어디 금방 끝나겠는가?
야탁(*夜柝: 야경을 돌 때 서로 마주쳐서 딱딱 소리를 내게 만든 두 짝의 나무토막)이 삼경(三更)을 알렸지만 두 부부의 논쟁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헛소리요?”
지익이 씩씩거리며 장부를 패대기쳤다.
“큰형의 장례에 만 냥을 썼다니? 형님, 내가 장님으로 보이시오? 겨우 물건 몇 개 가져다 놓고선, 천 냥이면 충분하지! 거기다 다른 이들이 부조까지 보냈는데…….”
어차피 몰릴 대로 몰린 상황인 지형은 더는 체면을 챙기지도 않았다.
“말 참 쉽게 하는구나! 물건이야 많지 않았지,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을 모셨는지 아느냐? 큰형님은 우리와 달라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누가 향을 올리러 오지 않겠어? 그들이 내는 부조를 우리가 받을 수가 있었겠느냐? 결국 인정상 다 돌려보냈다. 더구나 식사까지 대접해야 하는데 그 지출이 이렇게 많았던 것이다.”
“그게 아무리 많아도 만 냥은 안 될 것이오!”
“네가 집안을 건사하질 않으니 뭐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몰라 그런 것이지!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것들이 합쳐지면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는 것이다.”
그리곤 지형이 거칠게 말하기 시작했다.
“장부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면 지적해 보거라. 그게 아니라면 모두 근거 없는 헛소리가 아니냐? 늘 본인을 군자라 칭하던 셋째 네가 돈 때문에 형제와 싸움이나 하는 것도 이미 부끄러운 일인데, 이젠 근거도 없이 트집까지 잡는다 하면 다른 이들이 뭐라 하겠느냐?”
“아니……!”
지익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평소 탁상에 앉아 글이나 쓰던 지익은 이런 재무에 관해 잘 알지 못했다. 더구나 지형은 홍려시(*鴻臚寺: 황실관련 의례를 관장하고, 사신 접대를 담당한 예부의 속사)에 있으니 제기들을 관리하거나 연회비용을 처리하며 매일 같이 위조를 해대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도 하다 보면 기술이 느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지익이라 하더라도 외부인을 들여 장부를 계산하게 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리하면 집안의 명성은 완전히 끝난 것으로 봐도 무방했기 때문이었다.
장씨 부인은 제 부군의 말문이 막히자 곧장 소리쳤다.
“둘째 형님, 따로 개인장부를 쓰고 계시지 않으셨어요? 그게 진짜겠죠! 어서 가지고 나오세요, 제가 이미 다 보았습니다!”
위씨 부인이 허연 흰자를 들어내며 눈을 굴렸다.
“자네가 봤다 하면 진짜 본 겐가? 꿈에서 봤겠지? 개인장부 같은 것은 없네! 여기 있는 것이 전부이니 믿을 테면 믿든가 말든가!”
“어찌…….”
부부 두 사람 모두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그들 모두 형님 부부에게 개인장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나, 저리 인정을 하지 않으니 어쩐단 말인가? 그렇다고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재산을 나누는 일로 형제 집안끼리 치고박고 싸웠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찌 되겠는가? 저들의 체면은 이미 깎였지만, 자신들은 아니지 않은가!
상황을 지켜보던 지온이 한숨을 쉬었다.
“제가 할게요.”
두 부부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쏠렸다.
지익의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장, 장부를 볼 줄 아느냐?”
그는 제 질녀가 밖에서 이상한 성질머리만 배워온 줄 알았던 것이다.
지온이 그를 향해 방긋 미소를 지었다.
“해보면 아시겠지요?”
종이와 붓을 가져다 달라 말한 그녀가 장씨 부인을 불렀다.
“작은 숙모님께선 제게 장부를 읽어주시겠어요?”
“어? 오, 오냐.”
장씨 부인이 어리둥절해하며 대답했다.
지온은 종이 위에 선을 몇 개 그어 내리며 말했다.
“읽어주세요.”
그 말에 마치 아이가 선생의 말에 따르듯 허둥지둥 장부를 펼친 그녀가 장부를 읽기 시작했다.
“시월 초열흘, 삼베 네 필, 금전…….”
지온이 어찌나 빨리 쓰는지 장씨 부인이 이제 막 읽기를 마쳤을 때 그녀 역시 필기를 끝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례에 들어간 비용이 모두 적혔다.
지온은 붓을 붉은색 먹을 먹인 주필(朱筆)로 바꿔 들고는 문제가 있는 곳마다 원을 그렸다.
“큰숙모님, 집안의 회계를 보는 이들을 내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매매 가격이 합리적이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장부 자체가 너무 어수선하여 출납이 맞지 않는 것이 반이 넘습니다.”
그녀가 숫자를 써 넘겼다.
“숙부님들께서는 문제가 있는지 맞춰보시지요.”
그리고 그녀가 다음 장부를 들었다.
“작은 숙모님, 저희는 계속하지요.”
점점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한 장씨 부인이 웃음을 지었다.
“오냐, 네 말대로 해야지.”
위씨 부인은 그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나가 읽고, 하나가 받아 적으며 장부의 내용이 빠르게 적혀 내려갔다.
대노야가 세상을 떠나고 꼬박 삼 년을 기록한 장부는 날이 밝기도 전에 정리가 끝났다.
지온은 마지막 한 줄을 쓰곤 고개를 들었다.
“안에 사소한 것들은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주방과 수선방에서 올린 것들은 그대로 놔두지요. 어차피 다 한 가족인데 그리 세세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숙부님들, 그렇지요?”
위씨 부인이 이를 갈았다.
‘저 계집이 우릴 협박하는 게지!’
또 군소리하는 날에는 그마저도 모두 확인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나저나 대체 어디서 장부를 계산하는 것을 배운 것이야?’
이 장부들은 자신이 보아선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아니었던가?
장씨 부인은 지온이 써 내린 것들을 보며 혀를 찼다.
“둘째 형님, 전에 그리 불쌍하게 이야기를 하셔서 얼마나 살림을 절약하고 사시는가 했는데, 아주 큰손이셨네요!”
위씨 부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이 없었다.
지익이 말했다.
“형님, 나도 더는 형님과 쓴 돈을 두고 제대로 썼네, 안 썼네,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러니 그냥 이 장부에 적힌 대로 나누고 끝내는 게 어떻겠소? 아니면 다른 어르신이라도 모셔 와도 되오. 그래도 아버님의 면을 생각해 유 노태사께서도 한 번은 와주실 거요.”
상황을 믿을 수 없었던 지형은 지온이 정리한 내용을 여러 번 다시 보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찾아내지 못했다.
거기에 유 노태사까지 들먹이다니, 협박이 분명함을 느낀 지형이 손에 들었던 종이를 집어 던지고는 소리쳤다.
“나누면 나누는 것이지! 세상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두 사람이 재산을 가져가고 얼마나 잘 사는지 내가 볼 것이야!”
“그건 형님이 걱정할 바가 아니오!”
지익이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우선 집안의 재산과 큰형의 사유재산을 분리하도록 하겠소.”
어쩐지 계속 불안했던 위씨 부인이 지익의 그 말에 무언가를 깨닫고는 헉하는 소리를 냈다.
‘큰일이다!’
그녀는 지온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큰돈이 나가는 일들은 모두 집안 재산으로 계산을 해두어 가산은 이제 남은 것이 많지 않았다. 그동안 돈을 벌어들였던 것은 대부분 큰아주버님의 개인 재산으로 비롯된 것이었던 것이다.
‘그 둘을 분리하면 큰돈은 모두 저 계집이 가져간다는 게 아니야?’
“둘째 형수님, 왜 그러십니까?”
위씨 부인은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으로만 고충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이 일이 위씨 부인이 갑자기 바람을 잡겠다며 난리를 치다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고 있던 지형도 원망스러운 마음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뭘 멀뚱히 보고 있소? 셋째가 하는 소리 못 들었소? 어서 나누고 끝내시오!”
지형은 자신의 집안이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재산의 반은 제 것이라 생각했다. 거기에 남은 반도 형제 둘이 반씩 공평하게 가져가니 자신은 넷 중에 셋을 가져가고 셋째는 하나만 가져가게 되는 것이었다.
‘나누면 또 어떤가? 어찌하든 내가 이득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