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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저야말로 겸손하고 단정한 군자입니다



8화 저야말로 겸손하고 단정한 군자입니다

이내 남궁묵은 소리도 없이 하염없는 눈물만 흘리는 노인을 향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제 지난날은 잊고 이곳 단양을 떠나 잘 살아 보십시오.”

“이제 그 흉적 같은 놈의 뼈를 온 세상에 뿌려, 모든 사람이 밟고 지나다니도록 할 것입니다!”

한이 서린 노인의 눈빛에, 남궁묵은 고요히 고개를 끄덕여주다 은냥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르신, 지금 온 도성에 계엄령이 내려졌으니 부디 주의하십시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곧이어 대청을 나온 남궁묵의 귓가에 노인의 한 맺힌 절규가 울려 퍼졌다.

“여보……, 내 여식, 아들아……. 내가 드디어 복수했다. 이젠 죽어도 너희를 황천에서 만날 면목이 있겠지. 내가 무능해서…….”

남궁묵은 가만히 고개를 들고 하늘에 무심히 걸린 달을 바라보았다. 울부짖는 노인의 처절한 소리가 저 하늘을 다 찢을 듯했다. 남궁묵은 저도 모르게 탄식같은 한숨을 흘렸다. 곧 남궁묵은 노인의 피맺힌 고통을 뒤로한 채, 천천히 걸음을 뗐다.

* * *

동이 틀 무렵, 남궁묵은 평온한 빛으로 객점(客店)의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대당(大堂)에서 조식을 먹고 있는 몇 사람들이 보였다. 이내 주인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남궁묵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가씨, 오늘은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요?”

“아무 일도 없어요. 물건 몇 개만 사고 돌아갈 예정이에요.”

“오늘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머물다 가시지요.”

“왜요?”

“올해는 정말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어느 귀하신 분이 누군가로 인해 다쳤다고 들었는데, 엊저녁엔 또 성내 장가(张家)에서 태자 측비마마의 친동생이신 장주(漳州) 태수왕 전하께서 죽임을 당하셨다 합니다. 머리를 베곤 시신까지 모조리 불태워버렸다고 하던데……. 그래서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이 오늘 아침 일찍부터 금지되었습니다. 빨리 그 살수를 잡아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남궁묵이 긴 속눈썹을 내리곤 살짝 옅게 웃었다.

“그랬군요. 이곳에서 한 이틀 더 묵다 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곳 성내는 안전한 건가요?”

“누가 아니랍니까? 그런 높으신 분들의 일에 저희 같은 평범한 백성들까지 연루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아가씨, 어서 식사하십시오. 기왕 돌아가지 않으시는 김에 성내를 한 번 둘러보십시오. 매년 이맘때면 단양은 정말로 평소보다 번화해 있답니다.”

“주인장 말씀이 옳아요. 마침 좋은 약재가 있으면 좀 사고 싶었으니, 한번 가보도록 할게요.”

남궁묵의 미소에, 주인도 환하게 웃고는 심부름꾼을 불러 남궁묵의 조식을 준비시켰다. 남궁묵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남궁묵이 매우 침착한 빛으로 엊저녁의 일을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분명 그곳엔 불이 붙을 만한 그 무엇도 보이질 않았었다.

‘그럼 그 후에 누군가 나타나 불을 붙인 것일까……? 아니면 설마, 그 조그만 여자아이가? 아니지. 그 아인 해가 뜨기 전엔 당연히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어제 내가 떠난 후에 누군가 와서 불을 질렀다는 말인데……. 날 도와주려는 뜻일까, 아니면 그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속셈이 있는 걸까?’

* * *

남궁묵이 차를 한 모금 음미하며, 찬찬히 생각을 정리했다. 어떤 상황이든 그때그때 적절한 대처를 하면 될 것이니, 크게 걱정이 되는 건 없었다. 그렇게 잠시 한눈을 팔며 사소한 잡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소생이 여기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남궁묵이 고개를 들자, 그녀의 앞에 인장풍이 서 있었다. 인장풍은 푸른 무명옷을 입고 있어서, 준수한 외모를 갖췄음에도 그냥 평범한 인물로만 보였다. 그러나 남궁묵은 곧바로 인장풍으로부터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인장풍에게선 분명, 자신과 같은 살수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남궁묵은 몇 년간 스승과 사숙을 따라 심신 수양을 하며 평소에 사람을 치료하기도 해서인지, 간혹 임무에 따라 살인을 해도 계속 심적으론 평온을 유지했다. 그래서 인장풍과 같은 정상급 살수도 그녀에게서 풍기는 살기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이내 남궁묵은 옆자리 빈 탁상만 무심히 바라보았다. 빈자리가 이리 많음에도 굳이 자신의 앞자리를 청하는 인장풍을 향한 무언의 대답이었다. 의도를 들켜버린 인장풍은 남궁묵이 분명 거절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은 채 마음대로 그녀의 앞자리에 앉아버렸다.

“소생이 단양현에 처음 와서, 사람도 환경도 익숙지 않습니다. 혹시 아가씨께서 시간이 되신다면 소생에게 안내를 좀 해주지 않겠습니까?”

‘이자는 내가 어제 곁에 함께 있던 그 사내를 모를 줄 아는 것인가?’

남궁묵이 뜻을 굽히지 않는 인장풍을 말없이 바라보자, 인장풍이 이야기했다.

“아가씨, 이렇게까지 방비할 필요가 있습니까? 소생은 호인(好人)인데 말입니다.”

‘하! 살수가 스스로를 호인(好人)이라 칭하다니. 나보다 더 뻔뻔한 사람이군.’

이내 남궁묵이 몹시 황당한 눈망울을 하고 물었다.

“공자님……. 댁에 부인이 계십니까?”

“예? 아가씨, 어찌 그걸 물으십니까?”

그러자 아직 정실(正室)부인이 없던 인장풍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앞의 여인은 보통의 여인이 아니었다. 이 여인은 초국공부의 적녀로서, 위군맥의 정혼자로 추정되는 인물이었다. 아직 위군맥의 손에 죽고 싶지 않았던 인장풍은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고, 남궁묵이 방긋 웃으며 답했다.

“공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찌 오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공자님께서 이미 혼인을 하셨다면, 그렇다면…….”

순간 인장풍은 머리끝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남궁묵의 앞에서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었지만,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가씨,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소생……, 그저 진심으로 아가씨와 벗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소……, 소생은 이미 정혼자가 있습니다.”

인장풍은 이대로 계속 귀찮게 굴면 왠지 남궁묵이 돌연 자신과 혼인을 하겠다고 나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남궁묵이 이렇게 온화하게 웃고 있더라도, 그녀는 위군맥의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물론입니다.”

남궁묵은 온화한 미소로도 사람을 단번에 압도하는 놀라운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인장풍은 점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으나, 커다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선뜻 질문을 건넸다. 같은 질문이 실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한눈에 보아도 대범해 보이는 그녀의 성정은 왠지 이 물음도 개의치 않아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기……, 인품과 용모를 다 갖춘 아가씨께서는 혹시 정혼자가…….”

“없습니다.”

“예?”

인장풍이 의아한 빛으로 되물었다. 옅은 미소를 짓는 남궁묵은 아직 자신이 사혼을 받았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남궁회 일가가 먼저 도착한 것으로 알고 있건만, 아직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것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남궁묵의 얼굴을 보던 인장풍이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와 같은 인품을 지닌 분은, 장래에 반드시 뛰어난 인재를 배우자로 맞이할 것입니다.”

남궁묵은 인장풍의 순간적인 눈빛 변화를 감지하고, 다시 연하게 미소 지었다.

“공자님 말씀대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유쾌한 분이시군요. 아가씨와 벗이 된 것만으로도 정말 큰 행운입니다. 소생은 인장풍이라 하는데, 아가씨의 이름은 어찌 되시는지요?”

하지만 더는 도저히 유쾌하게 이야기를 이을 수 없었던 인장풍이 돌연 화두를 돌렸다.

인장풍의 말에, 홀연 남궁묵의 눈에 반짝 빛이 어렸다.

‘인장풍? 금릉(金陵)의 인씨 가문을 말하는 것인가?’

남궁묵이 세상의 많은 일들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명망 높은 가문들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었다. 인씨 가문은 초국공부의 권력에 미치진 못했으나, 그래도 금릉의 10대 명문가 중 하나에 속하는 가문이었다.

‘인씨 가문의 부인과 황제의 셋째 아들인 연왕(燕王), 소유(蕭攸)의 왕비가 친자매라고 들었는데, 그럼 이 인장풍은 인씨 가문의 어느 공자란 말일까? 인씨 가문의 공자가 살수라……. 이 금릉도 참 재미있는 곳이군. 이리 훌륭한 가문의 공자도 살수인데, 그럼 초국공 적녀가 살수인 것도 그리 기괴한 일은 아닐 것 같은데?’

“남궁묵입니다.”

이내 남궁묵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인장풍이 물었다.

“남궁? 당대 초국공 또한 단양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남궁묵이 담담히 그를 바라보다, 옅은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과연 인 공자님의 식견이 넓으십니다.”

정말 이 여인이 바로 남궁회의 여식이었던가. 어제 위군맥은 확신에 차 이야기했지만, 인장풍은 다소 회의적인 마음이었다. 위군맥은 초국공의 여식을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을뿐더러, 남궁회의 여식은 남궁묵이 아닌, 남궁경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남궁묵 역시 의아한 빛의 인장풍을 한쪽에 홀로 내버려 둔 채, 심부름꾼이 가지고 온 죽을 마시며 잠시간 생각에 젖어들었다.

‘이 사람, 꽤 재미있는 자야. 그런데 이 사람과 함께 있던 그 사람은 어떤 인물일까? 뒷모습만 본 것뿐인데도, 분명히 그 사람이 더 위험하게 느껴졌어.’

남궁묵과 인장풍이 서로에 관한 의혹에 잠겨 꽤 긴 침묵을 이어가던 즈음, 돌연 곁에서 전혀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아야, 네가 어떻게 이곳에 있느냐?”

남궁묵, 인장풍이 동시에 고개를 든 순간, 눈앞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남궁서, 남궁휘 형제의 얼굴이 보였다. 한순간 모든 고민이 풀린 인장풍은 한쪽 입꼬리만 씩 올린 채 미소를 지었고, 남궁 형제는 동생의 곁에 있는 인장풍의 출연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형제는 남궁묵보다 인장풍의 신상을 더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인장풍은 금릉 인씨 가문의 적자이자 차남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명문가 공자로서가 아닌 괴상한 인물로 더 명성이 자자했다. 연유는 바로 그가 온 황성 사람들이 경멸과 멸시의 대상으로 여기는 위군맥과 유일한 벗이라는 것, 그 하나 때문이었다.

인장풍은 금릉 황성 사람 모두가 피하는 위군맥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벗이 되어 지금껏 그의 곁에 머물렀다. 괴이함, 수상함, 세상 모든 의혹의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위군맥과 그의 유일한 벗, 인장풍. 그 인장풍이 지금 형제의 누이동생 남궁묵의 곁에 앉아 있었다.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

곧 남궁서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인장풍을 향해 먼저 입술을 뗐다.

“인 공자님?”

인장풍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느긋하게 답을 이었다.

“네, 남궁가의 두 공자님 아니십니까? 아가씨, 이분들을 아십니까?”

인장풍 역시 남궁서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 마음을 크게 개의치도 않아했다. 자신 역시 남궁서가 그리 달가웠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남궁서는 남궁가의 적장자임에도 친동생 남궁경은 등한시하고 이복동생 남궁주와 더 가까이 지내는 오라버니인지라,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오히려 남궁경을 그의 이복동생이라 착각하기도 했다. 인장풍 또한 10년간 하루가 멀다 하고 계모와 대립했기 때문에, 그런 남궁서의 행동이 더욱 못마땅했다. 곧 남궁묵이 침착한 빛으로 세 사내를 향해 입술을 뗐다.

“어제 알게 되었습니다.”

하하, 인장풍의 시원한 웃음이 터져 나왔고, 마치 두 형제에게 들으란 듯이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

“흠, 겨우 나보다 하루 먼저 알아놓고 매우 잘 아는 행세를 하셨군요. 묵 아가씨, 이제 아시겠습니까? 소생이야말로 겸손하고 단정한 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