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상처에 상처를 더하다
화서가 밖으로 달려나가 월량문(月亮門)에 다다랐을 때, 그는 하마터면 어떤 사람과 부딪힐 뻔했다.
“둘째 사촌 누님?”
그는 급히 발걸음을 멈췄다. 너무 급히 달린 탓에 뺨에는 아직 홍조가 남아 있었지만, 목소리는 한결 차분했다.
“여기서 뭐 해?”
화서에게 둘째 사촌 누님이라 불린 소녀는 그와 또래로 보였고, 연약한 몸매에 가냘픈 얼굴을 하고, 반쯤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서는 문득 깨달았다.
“정미를 보러 온 거지?”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주 작게 말했다.
“응.”
화서는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그럼 들어가지 그래,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이 소녀는 국공부의 둘째 아가씨 한추로였고, 그녀는 정미와 동갑이었다. 그녀의 생모는 한씨네 넷째 나리가 젊을 때 바깥에서 만난 소실(*小室: 정식 아내 외에 데리고 사는 여자)이었으며, 기생 출신이라 들었다. 노부인이 절대 그 첩을 들이지 못하게 막았기에, 한추로는 한결같이 무기력하고 과묵했으며, 국공부에서 마치 투명인간 같이 생활하곤 했다.
그녀는 화서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듣고도 고개를 들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정미 언니가 잠들었을지도 모르잖아?”
“아니, 내가 방금 거기서 나왔다니까.”
화서가 짜증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말하자면, 이 사촌 남매 둘은 신세가 동병상련인 부분이 있어, 친한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사실 화서는 한추로의 이런 성정을 아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한추로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도 그녀처럼 이렇게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이며 고분고분하게 살아야 맞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때문에 화서는 조금도 그녀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럼 먼저 가 볼게. 여기서 망설이지 말고, 들어가서 정미를 보고 싶으면 어서 들어가.”
말을 마치고 그는 성큼성큼 걸어갔고, 한추로는 문 입구에서 오랫동안 주저하다가 결국 몸을 돌려 조용히 떠났다.
* * *
정미는 한추로가 왔었는지도 모른 채, 앞서 문안을 온 사람들 때문에 조금 피곤해져 화서가 떠난 후 깜빡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나 눈을 떴을 때는 눈앞이 밝아진 채였다. 그녀가 놀라서 급히 눈을 가리며 소리쳤다.
“환안, 내 천은? 왜 풀었어?”
그러자 한 씨의 억센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은 무슨 천이니? 곧 백부에 도착할 텐데, 돌아가면 국공부에 있을 때처럼 소란을 피우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멀쩡한 눈을 천으로 가리고, 그게 무슨 꼴이란 말이야?”
눈을 보호하던 천이 없어졌다는 건, 연지와 분을 사러 거리로 나갔던 아가씨가, 외출하고 나서야 내복만 입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무섭고 펄쩍 뛸 만한 일이었다. 눈을 가렸을 때의 안도감이 사라지자, 정미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천, 천을 주세요!”
한 씨는 질겁하는 정미를 보고는 울컥해 화를 냈다.
“계속 일부러 미친 척한다면, 나도 네 마음대로 하게 두지만은 않을 거다!”
눈을 뜨면 생지옥이 보이는 정미로선, 한 씨의 위협을 헤아릴 여지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는 듯했고, 숨이 막혀와 본능에 따라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차를 타고 있었고, 정미는 눈을 꼭 감은 채 뒤로 물러가다가 저도 모르게 마차의 문에 다다랐다. 마침 바퀴가 길의 웅덩이에 빠져 마차가 흔들렸고, 정미는 곧바로 마차에서 나가떨어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맞은편의 화려한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 앞부분에는 정교하면서도 일곱 빛깔로 빛나는 유리등이 달려있어, 마차 주인의 신분이 높음을 나타냈다.
“죽고 싶은 거요!?”
마부가 크게 꾸짖었다.
한 씨 일행도 놀라 멍해져서는 혼란스러워했다.
“정미!”
“셋째 아가씨!”
이때, 그 마차의 문발이 갑자기 걷히더니 흰 피부의 사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마부가 급히 공손한 태도를 갖춰 대답했다.
“주인님, 맞은편 마차에서 아가씨 한 명이 내던져지더니, 저희 마차 앞으로 떨어졌습니다. 만약 소인이 재빨리 멈추지 않았다면 밟을 뻔했습니다.”
“사람은 어찌 되었는가?”
밖을 내다본 사내는, 맞은편의 마차에서 몇 명의 사람이 급히 뛰어내리고 길에 쓰러진 사람을 둘러싸고 울부짖으며 허둥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시야에서는 나가떨어진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 틈으로 삐져나온 옅은 남색의 치맛자락으로 보아, 그 사람이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오가는 행인들이 모두 멈춰 섰고, 함께 모여서는 수군거리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부인, 아가씨께서 피를 흘리십니다!”
설란은 손에 묻은 미끄럽고 끈적한 핏자국을 보고는 놀라 창백히 외쳤다.
한 씨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그녀는 얼굴을 뒤덮을 정도로 피가 흘러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두 눈을 꼭 가린 정미와 뒤따라온 하인들을 번갈아 보았다.
명절이 아니었기에, 한 씨는 몸종인 설란 한 명과 믿을만한 노파 시종 한 명과 정미의 시종 환안만을 데리고 갔다. 지금 회인백부로 돌아가는 마차와 마부 또한 위국공부의 소유였다.
‘이렇게 보니, 쓸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한 씨는 이를 악물고 수레를 끌고 가던 말을 가리켰다.
“말을 풀어라.”
그 마부 역시 놀라 멍해졌고, 머리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손으로 이미 밧줄을 풀어냈다.
한 씨가 말에 훌쩍 올라타 외쳤다.
“정미를 내게 안겨라! 내가 정미를 데리고 가까운 의관(醫館)에 갈 테니, 너희는 얼른 백부로 돌아가 보고해라.”
“예!”
설란과 다른 사람들이 함께 정미를 들어 올렸다.
마차 안의 사내는 눈길을 거두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광(趙光), 다친 아가씨를 의관에 데려다주거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호위무사 차림을 한 젊은이가 정미에게로 다가갔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다가온 사람을 본 한 씨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어느새 그 마차 안의 사내가 내려와 살짝 웃었다.
“한(韓) 부인, 본왕이오. 내 마차는 다른 마차와 구조가 조금 달라 좀 더 빠르고 안정적이오. 여식이 머리를 다쳐 말을 타서는 좋지 않으니, 본왕의 마차를 타고 의관에 가는 게 좋겠소.”
한 씨는 다가온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급히 말에서 내려와 예를 갖췄다.
“남안왕(南安王)을 뵙습니다.”
이 서른 남짓의 사내는 현 황제의 어린 동생, 남안왕이었다.
황실에는 대를 이을 아들이 많지 않았다. 선황 때의 황위 다툼은 아주 처참했고, 지금의 창경제(昌庆帝) 때가 되자 눈에 거슬리거나 방해가 되는 형제들은 거의 죽고 없었다. 가장 친했던 어린 동생 남안왕만 남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오랜 세월 동안 약으로 삶을 버텨왔고, 창경제는 이 어린동생을 몹시 아꼈다.
남안왕이 손을 내저었다.
“이런 상황에선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되네.”
누가 감히 왕의 마차를 타려 하겠는가. 한 씨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하필 정미의 부상이 심상치 않아 보였기에, 그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한 씨는 그 주륜마차에 올라탔고, 마차는 곧장 가장 가까운 의관으로 달렸다.
남안왕은 말을 바꿔 탄 뒤 호위를 받으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그들은 한 씨 일행이 멀리 떠난 뒤에도 흩어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치 빠른 사람이 신분을 알아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수도에는 회인백부의 셋째 아가씨가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때 급히 의관으로 가던 한 씨 일행은, 이 풍파를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 * *
공교롭게도 가장 가까운 의관은, 회인백부가 백 년 동안 운영 중인 의관, 제생당(濟生堂)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정미의 고조부의 인생이 맨발의 의사(*농촌 마을에서 기초 의료 훈련을 받고 근무한 의료 제공자) 출신에서 역전되었기에, 지금의 회인백부가 있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개천에서 용이 난 회인백부는 그 출신이 천박하고 밑천이 짧아, 다른 양갓집 가문들처럼 비옥한 땅과 상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이 4대째 이어져 오고 있는 제생당이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제생당은 수도의 의관 중 유명한 곳이었는데, 그랬기에 의관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약을 사고 진료를 보러 온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며 떠들썩했다.
화려한 마차가 완전히 멈추자 한 씨가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그녀는 정미를 안고 의관의 후문으로 달려들어가 이를 맞이하는 머슴에게 말했다.
“얼른 셋째 나리를 모셔 오거라.”
그 머슴은 집노비였기에 한 씨를 알아봤고, 그녀의 품에 안긴 어린 아가씨의 가슴에 핏자국이 물든 것을 보고는, 더는 지체 않고 급히 안으로 달려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셋째 나리, 얼른 뒤쪽으로 가 보세요. 둘째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젊은 부인에게 진맥을 하고 있던 사내가 멈칫하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는 다른 의원을 불러 환자를 인계하고는 머슴을 따라 급히 뒤쪽으로 갔다.
“둘째 형수님.”
사내의 눈길이 한 씨의 품 안에 정미를 살펴보고는 저도 모르게 안색이 변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정미가 왜 이럽니까?”
한 씨는 일찍이 정미를 꾸짖을 때의 매서움을 잃었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할 뿐이었다.
“마차에서 떨어졌습니다.”
“형수님, 정미를 제게 넘겨주세요. 부상 정도를 한번 봅시다.”
정씨네 셋째 나리가 손을 뻗어 정미를 넘겨받았고, 의동(醫童)을 불러 부상 당한 환자를 눕히는 내실로 데리고 갔다.
* * *
한 씨는 큰방에 앉아 내실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둘째 부인, 차를 좀 드세요.”
한 머슴이 차를 올렸다.
한 씨는 정신이 딴 데 팔린 채 찻잔을 건네받았고, 옆에 있던 노파 시종 계 할멈이 말리기도 전에 벌써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셔버렸다. 그러나 차가 매우 뜨거워 곧장 뿜어냈고, 입술은 빠르게 부어올랐다.
“부인, 괜찮으세요?”
계 할멈이 급히 물었다.
한 씨는 뜨거워서 어쩔 줄 몰라 눈물이 나려 했다. 게다가 정미의 부상을 걱정하는 마음에 마음속에 쌓였던 감정이 폭발해, 그 일꾼을 꾸짖었다.
“빌어먹을 놈, 이렇게 뜨거운 차를 내오면 어떡하느냐!”
“용서하세요, 부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머슴이 연이어 용서를 빌었다.
한 씨가 말을 더 얹으려고 하자, 계 할멈이 급히 그녀를 끌어당겼다.
“부인, 아직 셋째 나리께서 안에서 아가씨를 진료해주고 계신걸요.”
한 씨는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머슴에게 말했다.
“어서 물러나지 않고 뭐하느냐.”
머슴이 떠나자, 그녀는 지친 얼굴로 의자에 기대며 한숨 쉬었다.
“계 할멈, 요즘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산 넘어 산에 아무것도 뜻대로 되는 게 없구나.”
계 할멈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봄이 되면 현청관에 가 소원을 빌거나, 아니면 보제사(普濟寺)에 가 향을 피우는 게 어떨까요?”
“그것도 괜찮겠군.”
한 씨는 내실을 통하는 대나무 무늬의 면포 문발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윽고 문발이 걷히고, 정씨네 셋째 나리가 걸어 나왔다.
한 씨가 급히 마중 나갔다.
“셋째 도련님, 정미는 어찌 되었습니까?”
“다행히 그저 찰과상입니다. 조금 전에 깨어났어요.”
정씨네 셋째 나리의 눈길이 한 씨의 부어오른 입술을 훑다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한 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셋째 도련님께 수고를 끼쳤습니다. 제가 들어가 보겠습니다.”
“……형수님.”
정씨네 셋째 나리가 한 씨를 막아서며 말을 망설였다.
“왜 그러십니까?”
셋째 나리가 잠깐 망설이다 말했다.
“정미의 외상은 그렇게 중하지 않지만, 아마도 머리를 부딪쳐서 안에 어혈(*瘀血: 몸에 피가 제대로 돌지 못하여 한 곳에 맺혀 있는 증세)이 있는지, 말하는 것이 조금 이상합니다.”
“정말 머리를 다쳤다는 말입니까?”
한 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정미가 이번에 마차에서 떨어져서 다친 게 아니라, 국공부에서 넘어져서 보름 동안 정신을 잃었을 때 머리를 다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어찌 깨어난 이후로 계속 그렇게 이상한 말을 하겠어?’
“형수님, 우선 당황하지 마세요. 제가 이 분야에는 서툴러, 지금은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백부로 돌아가면 황(黃) 태의를 모셔 와 봅시다.”
셋째 나리는 한 씨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위로했다.
“아니면 너무 충격받은 탓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나 머리 안에 어혈이 있다고 해도, 며칠 몸조리를 하여 맺힌 피가 풀리면 평소처럼 나아질지도 모릅니다. 형수님이 이따 만약 정미와 이야기를 하시거든, 그 아이를 많이 따라주세요. 지금 정미는 자극을 가장 견디지 못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