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1화 대신하다



11화 대신하다

그날 밤, 진강은 경성으로 돌아오라는 칙서를 받고, 어전시위(御前侍衛)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막북으로 길을 안내하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이틀 뒤 경성으로 돌아가겠다고 전해드리게.”

어전시위는 그의 말을 듣고 다시 경성으로 돌아갔다. 진강은 의자에 한 쪽 다리를 걸쳐놓고 흔들면서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래복루(来福樓)에 도착한 평양현수(平陽縣守)는 진강의 이런 모습을 보고 사색이 되어 허겁지겁 인사를 올렸다.

“진강 공자님, 이곳에 오신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리 누추한 곳에 머무시도록 하였다니,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진강이 고개를 들어 그를 한 번 보더니,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당신이 내가 온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내게 간자를 심었다고 의심했을 것이오.”

이윽고 평양현수가 진강에게 아부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렵게 이곳까지 오셨는데,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제가 좋은 음식과 술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쏘가리 조림도 있소?”

진강이 인상을 쓰고 물었다.

“네. 있습니다!”

평양현수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겠소.”

진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강의 시원한 대답에 평양현수는 매우 즐거워하며 길을 안내했다.

* * *

평양현수의 집은 갑작스러운 일로 인해 시끌벅적해졌다.

평양현수는 오늘 지역의 여러 유명 인사들을 초대했을 뿐 아니라, 극단도 부르고 좋은 술과 음식도 준비하여 진강을 극진히 대접했다.

진강은 가끔 다른 사람들이 이해 못할 행동을 하지만, 사람들에게 부러 어렵게 구는 이는 아니었다. 조정의 대신 뿐 아니라, 시장의 시정잡배라 할지라도 자신과 뜻이 맞거나 말이 통하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무던한 성격이었다. 진강은 지위가 높았지만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깔보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평판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진강의 인간관계는 매우 괜찮은 편이었다.

연회에는 온갖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술이 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연회를 즐기던 진강이 평양현수에게 물었다.

“이건 어느 극단이오? 노래 솜씨가 뛰어나군.”

평양현수가 곧바로 대답했다.

“남양에서 온 극단입니다. 원래는 경성으로 간다고 하였는데, 저희 어머니께서 좋아하셔서 이틀간 저희가 불렀습니다.”

진강이 인상을 쓰면서 물었다.

“그럼 남양의 전가(錢家) 극단인가?”

“네. 바로 남양의 유명한 전가 극단입니다.”

평양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자 진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날, 진강은 평양현수에게 이틀 간 묵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는 진강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틀 간 그를 자신의 집에 묵게 해줬다. 귀한 손님이 머문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평양현수의 집이 매우 분주해졌다. 진강은 이틀간 평양현수와 함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놀다가, 셋째 날 경성으로 향했다.

* * *

진강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사방화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신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제가 미리 알아보니, 요 며칠간 경성으로 가는 극단이 없었습니다. 5일 전에 온 남양의 전가 극단이 유일한데, 지금 평양현수의 집에 묵고 있다고 합니다. 평양현수의 모친이 그들의 노래를 좋아해서 잠시 머물고 있으나 내일 경성으로 떠난다고 합니다.”

언신의 말에 사방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남양 전가 극단은 매우 유명한 극단이라 잠입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금 혼자 경성으로 가셔도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 지금은 왕은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 만약 진강 공자를 만난다 하더라도 들키지 않을 것입니다.”

사방화는 책상을 두드리며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여인 홀로 길을 떠나면 사람들의 주의를 끌 테니, 여전히 주의해야 한다.”

“제가 변장을 하고 아가씨와 함께 경성에 가겠습니다.”

“됐다. 이미 나 혼자도 번거로운데 너까지 끌어들이라는 것이냐? 진강이 경성으로 돌아갔다고는 하나, 평양현의 상황을 감시하는 사람들은 철수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

사방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이 오히려 더 안전할 수 있겠구나. 전가의 극단에 들어가는 게 좋겠다.”

언신이 인상을 썼다.

“조부님께선 남양의 전가(錢家) 극단에 있는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자를 싫어하시지만, 방계 친족들은 그자를 매우 좋아하지. 내가 미리 오라버니께 극단에 섞여 가겠다는 소식을 전하면, 분명 오라버니께서 나서주실 것이다. 그리 되면 나는 순조롭게 충용후부로 돌아갈 수 있을 테지.”

그녀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너는 전가에 가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그들 사이에 섞여 들어갈 수 있는지 한 번 알아 보거라.”

언신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언신이 다시 돌아와 말했다.

“전 가의 극단에서 쓰는 사람들은 모두 오래 일한 노인들입니다. 내부의 사정들을 전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사람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전가의 극단에서 소생(小生) 역할을 하는 자를 모시던 시녀가 며칠 전 병으로 죽어, 벙어리 여자아이 한 명을 새 시녀로 두었다 합니다.”

“그 아이로 하자! 잘되었구나.”

사방화가 미소를 보이자 언신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밖으로 나갔다.

* * *

깊은 밤, 언신은 사방화의 앞에 그 벙어리 소녀를 데리고 왔다. 소녀와 사방화는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벙어리 소녀는 약에 취해 정신이 없었다. 사방화는 소녀를 잘 관찰하여, 그녀와 똑같은 모습으로 분장하기 시작했다.

일이 끝나자 언신이 소녀를 데리고 나갔다. 사방화는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온 후, 평양현수의 집에 숨어 들어갔다.

벙어리 소녀가 모시는 소생의 이름은 소봉상으로 올해 스무 살이었다. 그는 정말 자신의 역할처럼 젊은 소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얀 얼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기름 바른 머리와 분칠한 얼굴, 그리고 붉은 입술. 훤칠한 키의 그는 고관대작들의 부인에게 인기를 끌어 유명해졌다. 그는 남양 전가에서 제일가는 배우였다.

소봉상은 작은 별채를 혼자 쓰고 있었고, 시녀는 그의 옆방에 묵고 있었다.

그날 밤, 사방화는 시녀를 대신해 평양현수의 집에서 잠을 잤다.

* * *

이튿날, 사방화는 일어나 소봉상의 몸치장을 도왔다.

사방화가 세숫물을 들고 소봉상의 방에 들어갔다. 그는 며칠 동안의 공연으로 지친 것인지, 아니면 잠을 못 잔 것인지 여전히 비몽사몽한 얼굴이었다. 소봉상은 침상 위에서 눈도 뜨지 않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을 이리 가지고 오너라.”

사방화가 세숫물을 들고 가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소봉상은 세수를 하지 않고, 한참을 그냥 앉아 있었다. 갑자기 눈을 뜬 그가 버럭 화를 냈다.

“내 시중을 든 지 며칠이나 됐는데 아직도 미숙한 게냐? 이런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네가 귀한 집 아가씨라도 되는 줄 아느냐?”

그러자 사방화는 세숫물을 내려놓고 손수건에 물을 묻혀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젠장! 차가워 죽겠다.”

소봉상이 사방화의 손을 밀어내고 큰 소리로 화를 냈다.

“단장, 이 멍청한 계집애를 쫓아내시오.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소봉상이 발로 세숫대야를 차 버리자, 사방화는 차가운 물을 온몸에 뒤집어썼다. 사방화는 지난 세월동안 찬물로만 세수를 해왔기에 자연스럽게 차가운 물을 준비했다. 그러나 소봉상은 여느 귀족 아가씨들보다 더욱 공들여 외모를 가꿔야 하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사방화는 오랜 습관 탓에 그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봉상의 고함 소리에 백발노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노인은 전가 극단의 단장이었다. 단장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고, 한숨을 쉬면서 소봉상을 달랬다.

“여기는 남양(南陽)이 아니라서, 제대로 된 시녀를 구하는 것이 힘들다. 민첩하고 똑똑한 아이들은 이미 다 팔리고 없단다. 이 아이는 벙어리이고, 머리도 그리 똑똑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경성에 갈 때까지 조금만 참도록 해라.”

그 말에 소봉상이 화를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속 쓰겠습니다.”

사방화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성에 들어갈 때까지만 버티면, 더 이상 극단에서도 자신을 잡을 것 같진 않았다.

단장은 소봉상이 좀 누그러진 듯하자 다시 그에게 몇 마디를 건넨 후, 방을 나가 경성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 * *

한 시진 후, 전가 극단은 평양현을 나갔다.

남양의 전가 극단은 역시나 천하 제일가는 극단이라, 악단부터 배우들까지 족히 백여 명은 되어 보였다.

벙어리 소녀는 소봉상을 옆에서 모시는 시녀라, 오직 소봉상 옆에만 있으면 됐다. 경성으로 가는 동안 소봉상은 마차에서 거의 잠만 잤다. 가는 길은 평탄했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밥을 먹을 시간이 되면 일어나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잤다.

이 극단이 경성에서 고관대작 부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그들에게 시비를 거는 일이 없었다.

소봉상은 단장의 충고대로 가는 동안 사방화가 잘못하는 것이 있어도, 몇 마디 말만 할 뿐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사방화도 더 이상 소봉상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3일이 지나자 드디어 경성에 도착했다.

* * *

멀리 경성이 보이자 사방화는 감개무량한 마음이었다. 예전에는 집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되레 돌아가는 게 쉽지가 않았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극단을 수색한 후, 별다른 점이 없자 그들을 성 안으로 들여 보내주었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자, 충용후부의 마차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서가 앞으로 나와 물었다.

“어느 분이 단장이십니까?”

“제가 바로 단장입니다. 어느 분이 저를 찾으시는 건가요?”

시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찾는 것이 아니라, 충용후부 세자저하께서 찾고 계십니다.”

단장은 충용후부의 마차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성 안에 들어오자마자 돈을 벌 기회를 잡았으니 좋아하는 것도 당연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시서가 단장을 마차 옆으로 데리고 갔다. 곧 마차의 휘장이 걷히며 사묵함의 얼굴이 드러났다. 사묵함이 단장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단장, 우리 집에 와서 며칠간 공연을 해주시게. 사씨 친족들이 전가 극단의 공연을 매우 좋아한다네. 극단은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 만약 없다면 충용후부에 가는 것이 어떤가?”

단장은 충용후부의 세자가 직접 나와 자신들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세자저하, 저희들은 아직 특별한 계획…….”

“전가의 극단은 제가 4일 전에 이미, 데려가기로 약조를 해두었습니다. 자귀 세자, 설마 저에게서 극단 사람들을 가로채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갑자기 뒤에서 진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방화가 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말에 타고 있는 진강이 보였다. 진강은 뒤에 몇 명의 호위병들을 데리고 있었다. 사방화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진강이 4일 전, 전가의 극단을 예약했다는 소리를 아무에게도 듣지 못했다.

한편, 극단의 단장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장은 며칠 전 평양현수 댁에서 진강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진강에게서 4일 전에 극단을 예약하겠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다. 갑자기 이런 말이 왜 나온 것인지 단장은 도통 알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