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레벨(2) >
3곳에서 일제히 격전이 펼쳐졌다.
일시에 기습을 받은 YSM의 선수들은 당했다, 견제다, 도와달라, 소리쳤다가 다른 쪽도 공격받은 것을 알고 혼란이 왔다.
-저우린, 1킬.
-슈란, 1킬.
우왕좌왕하는 것을 수습한 사람은 서문엽이었다.
"정신 차려! 본대는 서로 합류하고, 개리, 이나연은 본대 쪽으로 달려가서 도와!"
-엣? 여긴요?
이나연이 놀라서 물었다.
개리와 이나연이 떠나면 이곳은 서문엽과 심영수만 남는다. 조승호는 이 상황에서 쓸모없고 말이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서문엽은 눈앞에 대치 중인 다니엘 만츠 일당을 보며 투지를 불태웠다.
초능력 '스프린트'로 돌입하려던 다니엘 만츠는 같은 타이밍에 서문엽이 창을 던지려 하자 멈칫했다.
눈치 싸움으로 다니엘 만츠를 멈춰 세운 서문엽은 4명이나 되는 베를린 블리츠 선수들과 대치했다.
소수이니 이쪽은 최대한 오래 버티는 게 답이었다.
다니엘 만츠 측도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는데, 서문엽의 기세가 무서웠다.
그 뒤에 있는 심영수라는 선수는 '속박'으로 상대의 발목을 붙잡을 수 있는 원거리 딜러였다.
속박에 이은 서문엽의 일격이라면 1데스가 순식간에 나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대치 상태를 깬 것은 다름 아닌 심영수였다.
"으아아!"
심영수가 고함을 지르며 폭발 구체를 던진 것이었다. 위기감을 느꼈을 때 반사적으로 펼치는 안 좋은 습관이 발동된 것.
그걸 맞아줄 베를린 블리츠 선수들이 아니었다.
콰르릉!
폭발을 피해 흩어진 베를린 블리츠의 선수들.
흩어진 김에 그들은 삽시간에 에워싼 형태로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폭발 구체를 썼으니, 속박을 펼치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라는 계산이었다.
뒤늦게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심영수가 속박을 펼치려 했지만.
슥
갑자기 앞으로 잡아끌리는 듯한 힘의 작용에 심영수는 휘청거렸다. 다니엘 만츠가 '당기기'로 흔든 것이다.
결국.
파직!
-게오르그 하셀, 1킬.
근접 딜러의 도끼에 맞아 속절없이 데스 당했다.
"이런 젠장맞을."
심영수가 맥없이 당하자 서문엽은 욕지거리를 했다. 하지만 지체하지 않고 오른쪽에 있는 탱커에게 돌진했다.
전형적인 클래식 탱커였다.
근력이 97이나 되며 민첩성도 80, 기술은 92.
-충격 감소: 공격받을 시 충격을 절반 이하로 줄인다.
베를린 블리츠의 탱커다운 능력치였다. 근력에 초능력이 더해지니 서문엽이 달려들어도 전혀 겁내지 않았다.
서문엽은 창을 내질렀다.
그러나 페이크.
창을 거두고 바로 방패로 후려친다.
그러나 상대도 예상한 듯 방패를 회수해 옆구리를 막았다.
쿵!
방패끼리 충돌하며 묵직한 소음을 냈다.
하지만.
"······!"
탱커는 깜짝 놀랐다.
뒤 어 서문엽이 발차기를 한 것이다.
높이 뻗어 올라가는 하이 킥.
탱커는 방패를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팟!
서문엽의 왼발은 엄청나게 높이 올라가며 방패 위로 치솟았다.
이윽고,
'증폭, 근력에.'
102로 증폭된 근력!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탱커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뻐어억!!
"커억!"
'충격 감소'로 대미지를 줄였음에도 탱커는 비틀거렸다.
"뒈져, 새꺄!"
서문엽은 창으로 비틀대는 탱커를 찔렀다.
순간, 다니엘 만츠가 '당기기'로 서문엽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서문엽은 흠칫했지만, 반사적으로 창을 손에서 놓으며 '던지기'를 펼쳤다.
창이 '던지기' 판정을 받아서 날아가 탱커에게 꽂혔다.
-서문엽 1킬.
다니엘 만츠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거둔 1킬이었다.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다니엘 만츠도 표정이 굳었다.
"내가 잡을 테니 죽여!"
다니엘 만츠는 서문엽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밀기'와 '당기기'를 동시에 펼쳤다.
순간 서문엽은 두 발이 꽉 붙잡힌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다!"
심영수를 처치한 근접 딜러 게오르그 하셀이 2킬을 올리러 달려들었다.
파아아앗!
들고 있는 도끼에 모든 오러를 집중시킨다.
최혁과 동일한 '오러 집중'이다.
다만 게오르그 하셀은 오러 능력치가 무려 92라 82인 최혁과 파괴력이 전혀 달랐다.
"오케이, 자신 있으면 들어와 봐!"
서문엽도 방패에 오러를 집중시켰다.
'오러 집중' 같은 초능력은 없었지만, 오러 컨트롤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뒤로는 전 오러를 한곳에 집중시키는 게 어렵지가 않았다.
그걸 모르는 것이 게오르그 하셀의 패착이었다.
'증폭, 오러에.'
순간적으로 방패에 집중된 오러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도끼와 방패가 격돌했다.
꽈아아아아앙!!
충격파가 일대를 뒤흔들 정도로 강렬한 충돌이었다.
"크헉!"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게오르그 하셀은 온몸이 붕 뜬 채 뒤로 날아가 버렸다.
"저럴 수가!"
다니엘 만츠는 경악하고 말았다. 게오르그 하셀의 오러 집중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저렇게 일방적으로 밀릴 줄은 몰랐다.
"크하하! 좆밥 새끼, 뒈져!"
서문엽은 나동그라진 게오르그 하셀에게 창을 던졌다.
세차게 날아간 창은.
푸욱!
다니엘 만츠의 '밀기'에 의해 살짝 옆으로 비켜나 땅에 꽂혔다.
킬 찬스를 뺏긴 서문엽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너부터 죽여주마!"
서문엽이 다니엘 만츠에게 달려들었다. 속도가 무려 94라 엄청난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으왁!"
기겁한 다니엘 만츠는 '스프린트'를 펼쳐 쏜살같이 달아났다.
하지만 서문엽은 다니엘 만츠를 쫓으려던 게 아니었다.
그대로 냅다 아군 본대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쫓아!"
속았음을 깨달은 다니엘 만츠가 소리쳤다.
그사이에 비보가 계속 들렸다.
-슈란, 2킬.
-슈란, 3킬.
혼전 속에서 아주 슈란만 신난 꼴이었다.
"피에트로 살아 있어?"
-그렇다.
혼전 속에서도 매우 덤덤한 피에트로의 목소리.
그나마 다행이었다.
"공간 이동으로 조승호한테로 가!"
조승호에게 오러를 충전받으면 피에트로가 초능력을 마음껏 난사할 수 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살아 있는 녀석들 전부 승호가 있는 곳에 집결해! 이나연은 엄호 사격 하다가 마지막에 빠져나가!"
이미 5명이나 죽었으므로 살아 있는 선수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았다.
사니야와 피에트로가 개리와 함께 도주.
그들의 도주를 돕기 위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이나연은 그야말로 '점프'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미친 듯이 활약했다.
땅과 공중에서 계속 화살을 3발씩 난사하니 천하의 베를린 블리츠의 선수들도 성가셔서 추격에 방해받았다.
그 대가로 이나연이 위태로워졌지만, 서문엽이 달려가 구출했다.
-서문엽, 2킬.
시야가 가려지는 숲에서 창에 회전을 먹여 던지니, 상대측 선수가 미처 발견 못 하고 데스당했다.
그 바람에 베를린 블리츠 측이 주춤한 틈을 타서 이나연이 몸을 뺐다.
"이제 됐어! 철수!"
멀리서 다니엘 만츠의 말이 들렸다.
베를린 블리츠의 선수들 9인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YSM의 남은 인원은 고작 6인.
그것도 전투 능력이 없는 조승호를 제외하면 5인이었다.
수적의 차이도 많이 나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 격차가 커질 것이다.
6인이 성장하는 것보다 9인이 성장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추격한다."
서문엽이 결단을 내렸다.
"조승호는 피에트로와 딱 붙어 다녀. 사니야, 개리, 이나연은 내 뒤에 붙고. 똘똘 뭉쳐서 한 타 싸움을 열면 이길 수 있다."
"옛!"
서문엽 일행이 추격을 개시했다. 6인의 결사대는 결판을 짓고야 말겠다는 필사의 각오였다.
하지만,
"안 싸워주면 되지."
베를린 블리츠를 이끄는 다니엘 만츠는 한 타 싸움을 피해 철저하게 도망 다녔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사냥을 하며 사냥 포인트를 쌓아나갔다.
단기결전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양측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결국 경기가 중반에 이르러서야 베를린 블리츠가 일제히 덮쳤다.
슈란이 소멸 광선으로 피에트로를 처치한 것이 가장 컸다.
서문엽은 다수의 적과 싸우느라 소멸 광선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1세트는 YSM의 패배로 끝이 났다.
점수는 4-0.
베를린 블리츠도 경기가 끝났을 때 생존자가 불과 4명이었다.
서문엽이 총 4킬 1어시를 거두며 맹활약했고, 사니야도 1킬, 피에트로가 죽기 전에 영령들을 잔뜩 소환해 2킬을 거둔 것이다.
"와아아아!!"
"멋진 경기다!"
"YSM도 생각보다 잘하는데?"
"서문엽 엄청나게 세!"
경기장에 모인 베를린 블리츠의 팬들은 분전한 YSM에게도 박수를 보냈다.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니 벤치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심영수가 눈에 띄었다.
이미 자신의 실책을 잘 알기 때문에 자괴감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서문엽은 뚜벅뚜벅 그에게 걸어갔다.
"얌마."
"······."
"뭐 할 말 없어?"
"···죄송합니다."
심영수는 저기압인 목소리로 작게 대꾸했다.
서문엽은 빙긋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사고 치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사과 한마디 툭 던지면 끝이네?"
"······."
아직 반응이 없는 심영수.
서문엽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쿨하다? 나도 기분 안 좋으니까 그만 합시다, 이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때까지도 심영수는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못 느꼈다.
뻑!
"억!"
서문엽의 발길질에 뒤로 날아가 벽에 튕겨 발라당 엎어진 뒤에야, 심영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덥석!
서문엽은 심영수의 목을 틀어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커억! 컥!"
한 손에 목이 잡힌 채 매달린 심영수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야 이 좆만 한 새끼야. 내가 우스워? 기분 안 좋으니까 건들지 마세요, 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으면 내가 네 눈치 볼 줄 알았냐? 네 애미 애비는 그랬나 보지?"
소멸 광선이 쏘아질 것 같은 두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컥! 커헉!"
심영수는 숨이 막혀 대답도 못했다. 목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어차피 대답하라고 물은 말도 아니었다.
"뒈지고 싶냐? 이 좆같은 새끼가 감히 내 지시를 어겨? 폭발 구체 사람한테 쓰지 말랬지? 난 던전에서 내 말 안 들은 새끼를 살려둔 적이 없어, 토막 내서 개 먹이로 줄 새끼야!"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
심영수는 공포에 젖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후회와 함께 지난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진심으로 살해당하기 1초 전 같았다.
"너 2세트도 출전한다. 내가 똑똑히 지켜볼 거야. 기분 안 좋아져서 2세트 경기력도 개판이다? 그땐 내 손에 살해당한다. 알아들어?"
심영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서문엽은 심영수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분노가 수그러든 목소리로 물었다.
"자, 어때?"
"···예?"
"베를린 애들이 나보다 더 무서워?"
"아뇨."
지옥의 문을 잠시 열었다가 닫은 심영수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쟤들한테 쫄아서 폭발 구체 난사하는 일이 다시는 없겠네?"
"예!"
군기가 잡힌 심영수는 대답이 우렁찼다.
"위기 상황에서 폭발 구체를 쓰는 버릇은, 거하게 폭발이나 일으키면 자기가 뭐라도 하려 했다고 관중들한테 변명할 수 있어서다. 운 좋게 폭발에 적이 1명이라도 휘말리면 실적도 올릴 수 있겠거니, 하는 요행을 바라는 수다."
서문엽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때 네가 해야 할 일은 속박이야. 속박으로 동료가 킬을 내게 연계 플레이를 해야 해. 침착하기만 했으면 네가 충분히 할 수 있는 플레이였어."
서문엽은 심영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적이 강하고 두려울 땐, 항상 네 뒤에 내가 있다는 걸 기억해."
서문엽답지 않은 따듯한 격려에 심영수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나한테 맞아 뒈지는 거랑 비교하면 별거 아니잖아. 안 그래?"
"···예."
결국 격려가 아닌 협박!
심영수는 2세트에서 영혼이 실린 플레이를 펼치겠노라고 결심했다.
< 세계 레벨(2) > 끝
< 세계 레벨(3) >
"역시 한국 클럽은 아직 3탱커는 무리입니다."
가브리엘 감독이 결론을 내렸다.
서문엽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수 넣어서 4탱커 가자."
"예. 구단주님과 최혁에게 가짜 탱커 롤을 부여하죠."
최혁은 '내구력 강화' 외에도 공격에 좋은 '오러 집중'이 있어서 한때 근접 딜러로 뛰었었다.
그런 최혁에게 보다 공격적인 플레이를 요구하고, 대신 방어는 서브 탱커인 김진수가 더 보충해 주기로 했다.
김진수를 투입하는 대신, 근접 딜러 중에서 남궁지훈을 제외시켰다.
-대상: 남궁지훈(인간)
-근력 65/65
-민첩성 73/75
-속도 79/80
-지구력 63/63
-정신력 85/85
-기술 88/95
-오러 79/79
-초능력: 보호
그동안 나름대로 발전이 있었지만 역시 피지컬의 한계가 너무 뚜렷했다.
한국에서야 기술 88로 커버 가능했으나, 세계 레벨에서는 무리였다. 1세트에서도 그저 '보호'를 동료에게 걸어주는 서포터로 전락했다.
'기술 95를 다 채우면 '보호'와 함께 나름 먹힐 텐데, 그 전에는 무리야.'
결국 남궁지훈은 기술 95를 다 채운 검술의 달인이 되기 전까지는 세계 무대에 세우지 않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니, 남궁지훈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검술만 파라. 넌 그것만이 희망이야."
"예."
남궁지훈도 오늘 넘을 수 없는 피지컬의 벽을 느꼈기에 서문엽의 충고에 동의했다.
가브리엘 감독은 선수 교체 외에도 새로운 대책을 하나 더 내렸다.
"초능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쓰면서 사냥한다. 1세트보다 훨씬 빠르게. 소모된 오러는 조승호가 오러 전달로 보충해 주고. 조승호?"
"예!"
"20%의 오러만 있어도 할 건 다 할 수 있지?"
"예."
"좋아. 그러면 오러량이 20% 밑으로 하락하기 전까지는 동료들에게 오러 전달을 해주도록."
본래 조승호의 오러 전달은 피에트로를 위한 것이었다.
피에트로가 오러를 충전받아서 초능력을 더 펼칠 수 있으면, 이론적으로 그게 최고의 효율이다.
하지만 가브리엘 감독은 생각을 달리했다.
"피에트로는 오러가 고갈될 때까지 초능력을 다 펼치고 또 충전받을 여유 같은 게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조승호의 오러 전달을 아예 시작부터 활용하기로 한다."
1세트도 피에트로는 간신히 한 번 초능력을 펼쳤다.
전투에서 조승호가 끼어들 여지도 없었다.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킬 당할 판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사냥 속도를 올리는 데 미리 써먹자는 발상이었다.
"물론 모두가 초능력을 남발하라는 뜻은 아니다. 초능력을 적극적으로 써서 사냥 포인트를 몰아 가지는 사람은 이 셋이다."
가브리엘 감독은 화이트보드에 세 선수의 이름이 적힌 자석을 배치했다.
서문엽, 사니야, 심영수.
"이 셋은 적극적으로 사냥 포인트를 따서 시작부터 빠르게 성장해 상대 팀보다 더 우월함을 갖도록 한다. 그러면 1세트와 같은 상황이 되어도 보다 강력하게 반격할 수 있는 경쟁력이 생기지."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1세트 때, 서문엽이 사냥 포인트를 더 획득해서 성장한 상태였더라면, 분명 킬을 더 많이 낼 수 있었을 터다. 그랬으면 경기 양상도 달라졌으리라.
"저쪽은 지금 견제보다는 대규모 전투로 승부수를 띄운 움직임을 보였는데, 아예 초반부터 우리가 빠르게 성장하면 저들도 더는 그렇게 과감하게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때는 우리 쪽에서 견제를 펼치면서 압박한다."
화이트보드에 붙여진 던전 지도에 선수들을 계속 배치하면서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가브리엘 감독.
YSM의 선수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 설명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서문엽이 심영수에게 난리를 친 것 때문에 다들 긴장감이 바짝 들었다.
***
"서문엽은 예상보다 강하다."
엠레 카사 감독이 입을 열었다.
베를린 블리츠 BC도 마냥 발랄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1세트 MVP를 받은 다니엘 만츠도 평소와 달리 표정에 여유가 없었다.
"일단 1세트의 경기력은 칭찬해 주마. 판단부터 움직임까지 아주 좋았어. 적이 3무리로 쪼개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덮친 판단도 좋았고, 저우린과 첸진도 빠르게 움직여 작전을 잘 수행해 주었다."
엠레 카사 감독은 칭찬으로 시작했다.
새로운 이적생 저우린, 첸진은 원하는 대로 새로운 공격 옵션이 되어주었다.
적을 일제히 덮치는 대규모 기습 때, 이 두 사람은 빠른 발로 재빨리 이동해서 어려운 작전을 잘 수행해 주었다. 그들의 빠른 기동력이 아니었더라면 움직이는 데 더 시간이 걸렸을 터였다.
하지만.
"다만 평소였다면 압승으로 끝났을 경기가 꽤 길어졌지. 말할 것도 없이 이 녀석 때문이다."
스크린에 나타난 서문엽의 1세트 플레이 영상.
근접 전투든 원거리 투창이든 가리지 않고 킬을 내는 가공할 플레이.
"아돌프 귄터."
호명된 아돌프 귄터가 흠칫했다.
그는 서문엽의 발차기에 쓰러지고 창에 1킬을 당한 탱커였다.
"서문엽을 상대해 보니 어떤 느낌이 들었나?"
그 물음에 아돌프 귄터는 안심했다. 무력하게 데스당한 것을 질책당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발차기가 미처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들어와 당했습니다만, 사실 제 '충격 감소'로 견딜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아돌프 귄터는 대미지를 50% 감소시키는 충격 감소 초능력을 펼칠 수 있어서 웬만해서는 킬을 내주지 않는 튼튼한 클래식 탱커였다.
그런데 서문엽의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발차기를 못 견디고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보통의 상황에서는 견뎠겠지."
"예. 예상 못 했던 탓도 있지만······."
"역시 생각보다 힘이 강했지?"
"예, 발에 실린 힘이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그래, 이게 원인이다."
엠레 카사 감독은 영상 속의 서문엽을 툭툭 치며 말했다.
"예상보다 강하다. 계속 강해지고 있는 것은 이미 확인된 바였지만, 직접 붙어보니 근력이 더 붙은 게 느껴지는군. 예전과는 달리 상대와 근접해서 싸우는 데에 전혀 망설임이 없어."
본래 서문엽은 자신이 들고 있는 창 길이만큼의 거리를 두고 싸우는 것을 선호했다. 힘이 약했기 때문에 가까이 붙어 있으면 불리했기 때문.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아돌프 귄터 같은 탱커를 상대로도 가까이 붙어서 몰아붙였다.
"피에트로는 슈란이 잘 견제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서문엽이 문제군. 다니엘?"
"예, 감독님."
다니엘 만츠가 대답했다.
"서문엽을 상대해 보니 어땠나? 제어할 수 있겠어?"
그 물음에 다니엘 만츠는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꼭 해야 한다면 하겠지만, 솔직히 버거운데요."
"버겁다?"
다니엘 만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는 속도도 엄청 빨라져서 스프린트로도 따돌리기가 쉽지 않아요. 따돌린다 해도 창을 던지고, 페인트를 걸어도 전혀 안 속고······."
다니엘 만츠의 플레이의 핵심은 바로 타이밍이다.
허를 찌르는 타이밍에 적진에 파고들어서 '밀기'와 '당기기'로 적 포메이션을 망가뜨려 놓는다.
'밀기'와 '당기기'는 거리가 가까울수록 위력이 강해지기 때문에 서포터임에도 적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바로 그 타이밍을, 서문엽은 조금도 내주지 않았다.
접근하면 죽이겠다는 눈치만 계속 줘서, 다니엘 만츠는 멀리서 '밀기', '당기기'를 해야 했다. 당연히 위력은 반감됐다.
"솔직히 나단보다 상대하기 어려운데요. 걔는 속일 수라도 있지, 서문엽은 안 속아요. 완전 제 천적 스타일이에요."
덕분에 쉽게 이길 수 있는 1세트 경기가 중반까지 이어지는 접전이 되었다. 그래봤자 한국 챔피언에 불과한 YSM가 이렇게 까다로운 것은 서문엽 탓이었다.
엠레 카사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도 살면서 인격 말고는 서문엽의 약점을 본 적이 없다."
그 말에 선수들이 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서문엽의 플레이가 계속 영상에 보였다.
이를 보여주며 엠레 카사 감독이 말했다.
"봐라. 서문엽이 강할 때는 프리 롤로 마음껏 날뛸 때다. 이를테면 탱커가 아니라 근접 딜러이자 원거리 딜러인 셈이다. 이게 서문엽이 만든 '가짜 탱커'의 핵심이지."
탱커로 출전하긴 했는데, 탱커가 아니라 딜러 역할을 수행하는 것. 이것이 미국과 영국의 빅맨 전술의 천적인 가짜 탱커의 요체였다.
이를 위해서는 다재다능한 탱커가 필요한데, 최근엔 치치 루카스가 있는 파리 뤼미에르도 곧잘 써먹는 패턴이었다.
"서문엽이 활약한 상황은 대개 지켜야 할 것이 없을 때였다. 완전히 프리로 활약할 때는 무섭지. 하지만 지켜야 할 아군이 있다면?"
다시 1세트의 상황이 재생되었다.
이번에는 서문엽이 없는 곳에서, 기습당한 YSM의 선수들이 무참히 데스당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보다시피 약점도 참 많은 팀이다. 다른 놈들을 공략해 서문엽도 탱커로서 방어에 전념하도록 만들면 돼. 그러면 서문엽도 막기 바빠서 딜러로서의 모습을 꺼낼 수 없다."
엠레 카사 감독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마 저쪽도 이를 알고 탱커를 한 명 더 투입할 거다. 서문엽을 프리로 만들려면 나머지 아군이 튼튼해야 할 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거꾸로 공격력을 더 강화시킨다."
그는 2세트 출전 명단에서 한 명을 빼고 한 명을 추가했다.
"우린 2탱커로 간다. 우리에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을 퍼부어서 서문엽이 방어에 전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야."
그제야 베를린 블리츠 선수들의 눈빛도 빛났다. 서문엽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대안이 생겼으니까.
"저우린, 첸진."
"예."
"네, 감독님."
두 중국 선수가 답했다.
"전투 시에는 너희 둘이 서문엽을 상대해라. 다니엘이나 슈란으로는 서문엽을 상대할 수 없으니, 너희가 해야 한다. 무기의 길이가 더 기니, 철저히 그 이점을 이용해서 발만 묶어라. 할 수 있지?"
저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만 묶어놓는 거라면, 첸진과 둘이서 해보겠습니다."
"좋아, 2세트로 깔끔하게 오늘 평가전을 마친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2세트가 시작되었다.
경기를 치르러 입장하는 선수들을 쭉 보던 엠레 카사 감독은 YSM 측에서 입장하고 있는 선수들 중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 원거리 딜러는 또 출전하는군.'
엠레 카사 감독이 주시하는 선수는 바로 심영수였다.
좋은 초능력이 있고 발도 빨라서 빅 리그에서도 뛸 자질이 있는데, 멘탈과 전술 이해도가 낮아서 영입을 고려하다가 포기한 케이스였다.
어찌 보면 7영웅 시절의 슈란처럼 서문엽이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목숨은 부지했나 보군.'
엠레 카사 감독도 저쪽의 사정을 대강 추측하고 있었다.
저 선수가 저지른 실수는, 원거리 딜러의 초능력을 전략적으로 통제하는 서문엽이 제일 싫어하는 짓이었다.
당연히 심영수가 얻어터져서 반쯤 죽을 줄 알았다. 멀쩡한 모습을 보니, 서문엽이 옛날보다 다소 성격이 착해진 것 같았다.
'이런 평화로운 시대에 적응 못 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잘 순응하는군.'
그가 아는 서문엽은 위험한 인간이었다.
지저 문명이라는, 대적해야 할 강대한 적이 없었더라면 범죄자가 되었을 유형이다.
이제는 지저 문명도 세계를 위협하는 적도 없는 마당에, 서문엽이 잘 지내는 걸 보니 의외이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했다.
밝은 표정과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하는 향상심. 마치 전쟁 시절 강대한 적을 깨뜨리기 위해 노력하던 서문엽을 보는 것 같았다.
< 세계 레벨(3) > 끝
< 세계 레벨(4) >
"2탱커······."
가브리엘 감독은 베를린 블리츠의 출전 선수 명단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2탱커? 그거 강팀이 약팀 상대할 때 빨리 끝내려고 하는 거 맞죠?"
최동준 수석 코치가 흥분해서 씩씩댔다.
그러나 사니야를 위해 프랑스에서 영입된 창술 코치 막심 블랑코가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였다.
"노노, 보통은 그렇지만 저 2탱커는 의미가 다른 것 같은데요. 그렇지요, 감독?"
가브리엘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탱커 대신 딜러가 하나 더 들어가면서 기동성과 공격력을 더 강화했습니다. 우리를 더 강하게 몰아붙일 생각이겠죠."
그 말에 최동준 수석 코치는 의아해졌다.
"탱커가 부족해서 마냥 좋은 게 아니잖습니까?"
"우리의 공격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2탱커로도 충분하다고 봤겠죠."
"아니, 우리 구단주님이 탱커 하나를 단숨에 골로 보냈는데······."
"바로 구단주 때문입니다. 구단주는 어디까지나 탱커입니다. 아군이 위협받으면 보호해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죠. 구단주를 방어에 전념하게 해놓으면 더 위협거리가 없다고 본 겁니다."
가브리엘 감독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 약팀을 상대할 때나 꺼내 드는 기책이었다.
양 팀의 실력 차이야 명백하지만, 실제로 이런 취급을 받아보니 감독으로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YSM은 나름대로 가브리엘 감독이 온 힘을 다해 키운 팀이었으니까.
'기책은 기책. 허점이 분명이 있는데. 구단주가 잘 파악했으면 좋겠군.'
***
2세트의 던전은 '던전 웜 레어'였다.
'던전 웜'은 개미처럼 지하에 굴을 파고 집단 서식하는 거대한 지렁이다. 광물을 먹고 미네랄을 섭취하는 덕분에 땅속에서도 잘 살지만, 진짜 좋아하는 먹이는 고기였다. 영양가가 풍부한 살아 있는 먹잇감이 나타나면 마약처럼 환장하고 떼로 덤벼드는 무서운 괴물이
었다.
던전 웜 레어는 그런 던전 웜들이 집단 서식하는 굴인데, 던전 웜들이 파고 다닌 굴들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나 있어서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래봤자 프로 선수들은 당연히 수없이 경기와 연습을 치러봤기 때문에 지리를 파악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경기가 시작되면 서식하는 던전 웜들이 새롭게 굴을 파기 때문에 사전에 숙지했던 것과 지형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기 중에 길을 잃는 경우가 종종 속출하기도 했다.
던전 웜은 개미와 같이 여왕, 병정, 일반 던전 웜 등 3종류로 계급이 나뉜다.
여왕 던전 웜은 말할 것도 없이 집단을 이끌고 번식을 책임지는 최종 보스 몹.
병정 던전 웜은 중간 보스 몹에 해당하는 괴물이다.
일반 던전 웜 또한 웬만한 던전의 중간 보스 몹 수준으로 맷집이 강하기 때문에 수준이 낮은 팀은 상대 팀과 싸워보기도 전에 이 던전에서 전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아마추어 리그에서는 쓰이지 않는 높은 난이도의 던전이었다.
하지만 서문엽의 머릿속에는 던전 웜 레어가 아닌 다른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새끼들이 2탱커를 갔다 이거지?'
1세트 때보다 더 강하게 때리겠다는 선포였다.
방어력이 줄어든 대신, 공격력과 기동성이 더 살린 조합. 가만 내버려 두면 점점 더 기세를 타게 된다.
'없는 허점을 일부러 만들어줬다면 나야 좋지. 너 실수한 거다, 엠레 카사.'
서문엽이 입을 열었다.
"계획이 살짝 바뀌었다. 이나연과 심영수는 날 따라오고, 나머지는 감독이 말한 대로 초능력을 적극적으로 써가면서 열심히 사냥하고 있어."
서문엽은 팀원 중 가장 속도가 빠른 멤버를 선별했다.
이나연은 100/100.
심영수는 85/85.
사니야도 심영수와 속도가 같았지만, 그녀는 사냥에 참여해서 성장을 더 시키기로 했다.
서문엽은 바로 다른 굴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고, 이나연과 심영수가 뒤따랐다.
"우리 어디 가요?"
이나연이 물었다.
"견제하러."
"엑? 그래도 돼요?"
"나한테 아주 끝내주는 계획이 있거든."
YSM의 장점은 가브리엘 감독이 짠 작전을 서문엽이 현장에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게 장점이 되는 이유는 서문엽의 전술적 기량은 가브리엘 감독도 인정하는 수준이었기 때문. 상황에 따라 알맞게 서문엽이 대응할 수 있으니 유연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견제는 너희 둘이 죽더라도 1명만 잡을 수 있으면 우리가 유리해져."
두 사람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서문엽이 틀린 적이 없었으므로 묵묵히 따랐다.
굴을 따라 가는 길에 던전 웜 1마리가 나타났다.
"끼리리릭!"
이상한 소리를 내며 포효하는 던전 웜.
서문엽이 피식 웃었다.
"너희들 그거 알아? 쟤 온몸을 진동시키잖아. 그거 웃는 거야. 맛있는 먹이가 나타나서 무지 좋아하는 거지."
"진짜요?"
이나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흙만 퍼먹다가 살아 움직이는 먹이 나타나면 환장하거든. 우리 같은 먹이는 여왕한테 바치지도 않고 그냥 자기가 먹으려 들어."
"끼리리리릭!"
그 말에 동의하듯, 던전 웜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굴을 가득 채우는 덩치로 밀고 들어오자 피할 틈이 안 보였다.
하지만 서문엽은 앞장서서 정면으로 맞섰다.
던전 웜이 입을 쩌억 벌리자, 서문엽은 몸을 웅크린 채 그 입속으로 들어갔다.
한 입에 서문엽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이윽고.
푸우욱!
"끼리릭!"
오러를 머금은 창이 던전 웜의 정수리를 뚫고 솟아나왔다.
다시 들어간 창이 또 머리를 뚫고 나온다.
푹! 푹! 푸욱!
요동을 치던 던전 웜은 얼마 못 가 축 늘어졌다.
잠시 후, 죽은 던전 웜의 입에서 서문엽이 기어 나왔다.
"그래도 얘는 혀랑 체액이 없어서 덜 찜찜하네. 점액질로 범벅이었어 봐. 아무리 나라도 입안에 안 들어갔다."
"그래도 냄새 나잖아요!"
여자인 이나연이 악취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도리 있냐? 저 새끼 뇌를 찌르려면 입안이 가장 좋은데."
"그런 식으로 던전 웜을 사냥하는 건 처음 봐요."
"그래도 확실히 빠르긴 빠르다······."
심영수도 감탄했다. 국가 대표 경기를 많이 치러봤지만, 지금까지 본 중 가장 빠른 속도의 던전 웜 사냥이었다.
굴을 가득 차지하는 던전 웜의 사체를 옆으로 밀고, 비좁은 틈새로 낑낑대며 빠져나온 세 사람.
이어서 갈 길을 계속 가면서 그들은 베를린 블리츠 측이 사냥하는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몇 번 던전 웜을 더 만났지만, 같은 방법으로 서문엽이 빠르게 사냥했다.
워낙 강한 만큼 사냥 포인트도 잘 주는 던전 웜.
서문엽은 벌써 사냥 포인트가 누적되어서 2단계, 보랏빛 광채에 둘러싸였다.
"심영수, 여기서는 폭발 구체 쓰면 안 돼. 소리와 진동 때문에 다른 던전 웜이 몰려오니까."
"예."
폭발 구체 잘못 썼다가 맞아 죽을 뻔했던 심영수는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적진이 가까워졌다.
베를린 블리츠 선수들이 던전 웜을 사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자세를 낮춘 채, 소리 없이 기어갔다.
"끼르르르륵!"
보통 던전 웜과는 약간 다른 괴성이 들렸다.
'병정 던전 웜이군.'
병정 던전 웜은 해당 지역에서 던전 웜을 많이 사냥하면 출동한다.
그리고 그 병정 던전 웜을 퇴치하면, 해당 지역이 붕괴되는 방식이었다.
'벌써 병정하고 싸우는 걸 보면, 저쪽도 사냥 속도가 상당히 빠른데.'
탱커 2명, 서포터 1명 외에는 전부 딜러들이니 사냥 속도가 느릴 수 없었다.
선수 개개인이 강력한 베를린 블리츠이니, 이 정도면 YSM이 이 던전에서 연습했던 사냥 속도보다도 더 빠른 페이스였다.
'역시 빠른 사냥을 콘셉트를 그대로 밀고 갔으면 이길 수 없었을 거야.'
서문엽은 이나연과 심영수에게 나직이 말했다.
"일단 저거 스틸한다. 그리고 다음 타깃은 아돌프 귄터다. 아돌프 귄터만 죽이고 빠져나갈 거야."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아돌프 귄터.
1세트에서 서문엽의 1킬 희생양이 됐지만,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베를린 블리츠의 메인 탱커였다.
두터운 갑옷과 큰 방패로 중무장했고, '충격 감소'까지 있어서 죽이기가 극히 힘들었다.
그런 아돌프 귄터가 견제 타깃이라니, 성공 확률이 너무 떨어진다.
베를린 블리츠가 병정 던전 웜을 사냥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6명이서 사냥 중이었는데, 다행히 타깃인 아돌프 귄터가 있었다.
또 다행인 점은 6인 중에 다니엘 만츠가 없는 점.
그러나 불행한 점은 6인 중에 슈란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슈란은 서문엽 일행의 접근을 모르는 눈치였다. 이번 경기도 그녀의 '위치 추적' 타깃은 피에트로라는 뜻이었다.
'그렇겠지. 엠레 카사 녀석은 피에트로처럼 심각한 변수가 되는 적을 통제 안 하면 찜찜해서 못 사는 성격이거든.'
공간 이동으로 불쑥 나타나 초능력을 퍼부어 테러를 가하면 삽시간에 팀이 초토화될 우려가 있었다. 빈틈없이 철저한 성격인 엠레 카사 감독은 그 점을 강력히 경계하고자 슈란의 위치 추적을 썼을 터였다.
그러므로 지금이 서문엽이 견제를 펼칠 절호의 찬스였다.
병정 던전 웜은 6인의 공격에 점점 약해졌다.
슈란이 소멸 광선을 쏘면 언제든 마무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바로 그때.
파앗!
서문엽이 비호처럼 뛰어들었다.
"······!"
놀란 베를린 블리츠 선수들을 지나, 서문엽은 그대로 병정 던전 웜에게 뛰어들었다.
콰지지지직!!
오러를 잔뜩 머금은 창이 병정 던전 웜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던전 웜 레어 6-1구역이 붕괴됩니다. 60초, 59초, 58초······.
스틸은 성공이었다.
병정 던전 웜의 사냥 포인트를 서문엽이 먹었다.
그 증거로, 서문엽의 몸을 둘러싼 보랏빛 광채가 더욱 짙어졌다.
"적이다!"
"견제다!"
베를린 블리츠의 선수들이 소리쳐서 아군에게 알렸다.
서문엽은 소멸 광선을 쏘려는 슈란에게 창을 냅다 던졌다.
슈란은 소멸 광선을 쏘지 못하고 창을 피했다.
그 한 수로 모두의 이목이 슈란의 보호에 쏠렸다.
그것은 진짜 타깃인 아돌프 귄터도 마찬가지. 아돌프 귄터는 메인 탱커답게 서문엽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서 한 번 더 속임수.
서문엽은 아돌프 귄터를 우회해서 슈란에게 달려가려 했다.
아돌프 귄터는 민첩하게 움직여 블로킹을 한다.
그 순간, 새로운 창을 꺼내 든 서문엽의 공격이 아돌프 귄터에게 쏟아졌다.
카카카캉!
연속 찌르기!
"큭!"
아돌프 귄터는 방패를 들어 무사히 막아냈다.
순간, 이나연도 나타났다.
'점프'로 공중에 뛰어오른 이나연은 화살 3대를 시위에 걸고 당겨 슈란을 겨눴다.
그러나 곧 방향을 돌려 아돌프 귄터에게 쏘았다.
뒤이어 나타난 심영수 또한 아돌프 귄터에게 속박을 펼쳐 오른쪽 발목을 묶는 데 성공했다.
'증폭, 민첩성에.'
순간적으로 서문엽의 창이 한 줄기 빛처럼 빠르게 찔러 들어갔다.
쏟아지는 공격에 당황한 아돌프 귄터가 노출한 0.1초도 안 될 짧은 빈틈. 그걸 파고들며, 창은 그의 목을 찔렀다.
슈칵!
-서문엽, 1킬.
목적 달성!
서문엽 일행은 잽싸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베를린 블리츠 선수들도 세 사람의 타깃이 슈란이 아닌 아돌프 귄터였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노림수가 어떤 의미인지도 깨달았다.
2명밖에 없는 탱커를 하나로 줄인 것이다!
2탱커는 탱커를 최소한으로 편성하는 마지노선이었다.
탱커가 1명밖에 없으면 오히려 사냥도 전투도 차질을 빚는다.
분노한 슈란이 서문엽 일행에게 소멸 광선을 쏘았다.
좁은 굴을 통해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피하기 어려웠다. 자칫 잘못하면 3인이 한 방에 데스당할 상황!
하지만 그것까지 염두에 둔 서문엽은 가장 마지막에 뒤따르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
모로 그룹의 로고가 새겨진 서문엽의 새 방패가 소멸 광선을 막았다.
"칫."
슈란은 혀를 차며 소멸 광선을 중지했다.
서문엽이 소멸 광선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이전에 증명됐다. 더 쏴봐야 오러 낭비였다.
서문엽은 씨익 웃고는 다시 뒤돌아 달아났다. 떠나면서 그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세계 레벨(4) > 끝
< 세계 레벨(5) >
돌아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다른 곳에서 사냥하던 베를린 블리츠 5인이 퇴로를 막으러 달려왔다. 앞장선 사람은 '스프린트'를 연속으로 펼치며 무지막지한 스피드로 달려온 다니엘 만츠.
전속력으로 질주한 탓에 동료들도 놔두고 단독으로 온 다니엘 만츠는 서문엽 일행과 맞닥뜨렸다.
탱커 1명, 원거리 딜러 2명으로 구성된 적과 맞닥뜨린 서포터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다니엘 만츠는 놀랍게도 곧장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서문엽이 적의 추격을 막느라 맨 뒤에 있었기 때문에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가장 앞장서 있던 이나연이 화살을 쐈다. 화살 3대가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촤촤촥!
다니엘 만츠는 왼쪽 벽에 바짝 붙어 2대를 피하고, 다른 하나는 손으로 낚아채 버렸다.
그 광경에 이나연은 깜짝 놀랐다.
뒤이어 심영수가 속박을 날리고, 서문엽도 창을 던졌다.
다니엘 만츠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파앗! 팟!
왼쪽 벽에 붙었다가 다시 오른쪽 벽에 붙으며 속박과 창을 연속으로 피했다.
화살 3대를 다시 시위에 걸고 쏘려고 하는 이나연을 '밀기'로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심영수에게 뛰어들어 그의 가슴에 양손을 얹었다.
밀기, 당기기!
양손에서 두 가지 초능력이 동시에 펼쳐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심영수의 아바타가 그 자리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다니엘 만츠, 1킬.
어시스트 전문가인 서포터 다니엘 만츠도 필살기 하나는 있었다.
바로 상대의 심장에 '밀기'와 '당기기'를 직격시키는 것.
상대의 가슴에 양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는 다니엘 만츠도 위협적인 킬러가 된다. 물론 서포터로서 그런 거리까지 접근하기가 상당히 위험했지만 말이다.
심영수가 사라지자 그 뒤에 있던 서문엽과 눈이 마주쳤다.
서문엽은 '오냐, 나도 한 번 그렇게 죽여보지 그래?' 하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다니엘 만츠는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도망갈 태세였다.
슉!
서문엽이 거침없이 창을 찔렀다.
다니엘 만츠는 상체를 뒤로 젖혀 피해냈다.
그러자 서문엽은 창을 그대로 던져 버렸다.
"윽!"
다니엘 만츠는 기겁했다. 하지만 몸은 놀란 표정과 반대로 날렵하게 움직였다.
그대로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왼발로 벽을 박차며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창이 아슬아슬하게 등 아래를 스쳐 지나갔다.
실로 절묘한 회피.
아마도 경기장에서는 이 장면에서 관중의 탄성이 터져 나왔으리라.
하지만 서문엽도 뒤이어 2번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앞서 던졌던 창이 다시 오른손에 되돌아온 것이다. 증폭된 '던지기'로 던졌던 탓이었다.
한 바퀴 돌아 착지한 다니엘 만츠에게 서문엽이 급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다니엘 만츠는 양손을 모아 서문엽에게 힘껏 뻗었다. 많은 오러를 투입한 '밀기'였다.
터엉!
서문엽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자신을 강하게 밀치는 힘에 의해 뒤로 넘어갈 뻔했으나, 서문엽은 초인적인 균형 감각으로 버텨냈다.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서문엽이 버티고 서자 다니엘 만츠도 당황했다. 이 거리에서 '밀기'를 썼는데 밀어내지 못한 상대는 지금껏 없었다. 괴물 탱커 제럴드 워커조차 몇 걸음 물러났다.
상대의 초능력에 저항하는 오러 저항력과 균형감각, 그리고 반사 신경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다행히 이나연이 다니엘 만츠를 구해주었다.
이나연이 그대로 다니엘 만츠에게 3대의 화살을 쏜 것.
다니엘 만츠가 피하자, 화살들은 서문엽에게로 날아들었다.
타타탁!
서문엽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창으로 화살 3대를 모조리 쳐내는 정교한 창술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 틈에 다니엘 만츠는 스프린트를 써서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이나연이 점프로 쫓아가려는 찰나, 서문엽이 제지했다.
"됐어. 우리도 달아나야 해."
"힝, 네."
이나연은 셋이서 다니엘 만츠 하나 못 잡은 걸 분하게 여겼다.
아무튼 두 사람으로 줄자 도주 속도는 더 빨라졌다.
원채 빠른 이나연이 전속력으로 달리고, 서문엽도 속도를 증폭시켜서 104로 만드는 바람에 중무장을 했음에도 이나연에게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베를린 블리츠도 추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양측은 서로 1킬씩 교환한 채로 교전을 마무리했다.
***
배틀필드는 팬들에게 상당히 친절한 스포츠였다.
얼마나 친절하냐면, 다니엘 만츠의 '밀기' '당기기', 슈란의 '위치 추적'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초능력도 특수 효과를 입혀서 볼 수 있게 해줄 정도였다.
그만큼 관중들로서는 게임을 보는 것처럼 눈이 즐거울 수 있었고, 양측 선수들의 싸움을 더 재미있게 즐겼다.
방금 전의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서문엽 1킬! 서문이 병정 던전 웜을 스틸하고 아돌프 귄터 선수까지 해치웁니다!
-완전히 노렸습니다. 아돌프 선수가 운이 없었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견제의 타깃이 아돌프 귄터 선수였어요!
-이러면 베를린 블리츠는 탱커가 1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걸 노렸네요! 2세트가 시작하자마자 견제에 나선 이유가 있었어요!
-2탱커까지는 전략이지만 1탱커는 탱커 부족이에요! 서문엽 선수가 아주 날카롭게 노렸네요.
-사냥 포인트를 엄청나게 적립한 서문엽 선수, 벌써 보랏빛이 붉은빛으로 변하려 하고 있습니다. 아, 베를린 블리츠도 추격을 개시합니다. 다니엘 만츠 선수, 엄청난 속도로 달립니다!
다니엘 만츠가 서문엽 일행을 상대로 홀로 달려든 것은 또 다른 명장면이었다.
-혼자서 덤벼듭니다! 너무 무모하지 않나요?!
-지난해 올해의 선수상에 빛나는 다니엘 만츠! 또 뭔가를 보여주나요!
-오오오!! 다니엘 만츠 1킬!
'밀기' '당기기' 두 초능력을 나타내는 특수 효과가 한 번에 터져 나오면서 심영수가 데스당하는 장면.
"와아아아아!!"
"만츠! 만츠!"
대부분이 베를린 블리츠의 서포터인 관중들이 열광했다.
이어진 서문엽과의 짧은 맞대결도 눈이 호강하는 장면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창을 피한 다니엘 만츠가 '밀기'를 있는 힘껏 쏘며 반격했다. 그런데 서문엽이 그걸 직격당했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버텨냈다.
-맙소사,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한 발짝도 안 밀리나요? 소멸 광선을 막을 때도 그렇고, 서문엽 선수는 정말 진면목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무섭습니다.
이나연의 실수로 인해 다니엘 만츠가 구사일생하는 장면까지, 관중들은 쉴 틈도 없이 열광했다.
-킬을 하나씩 주고받는 양 팀. 다니엘 만츠 선수가 멋지게 만회했습니다.
-간신히 자존심은 지켰습니다. 하지만 킬의 질이 다릅니다. 탱커가 1명밖에 없어진 베를린 블리츠가 앞으로 불리한 운영을 할 수밖에 없어요.
-예, 정석을 고집하던 엠레 카사 감독답지 않은 기책이었습니다. 7영웅 동료였던 서문엽 선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서문엽 선수를 경계한 2탱커 작전이었던 것 같은데, 이러면 허를 찔렸죠.
-하하, 네. 어차피 팀 자체의 역량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문엽 선수 하나가 더 특별히 강하다 해도 이길 수 있었을 텐데, 괜한 수를 둔 듯합니다.
-그런데 방금처럼 다니엘 만츠 선수가 가까운 거리에서 밀고 당겨도 버티면, 이거 서문엽 선수가 다니엘 만츠 선수의 천적으로 불릴 수도 있겠는데요?
-그러네요. 아, 그런데 방금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YSM의 이나연 선수가 도망치는 과정에서 시속 123㎞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초능력을 쓰지 않은 순수한 스피드로는 배틀필드 공식 최고 기록이라는군요.
-세상에, 치타도 가뿐히 능가하는 속도 아닙니까?
단거리에서 초인이 아닌 인간의 최고 시속은 약 38㎞.
남자 초인은 평균적으로 50~60㎞ 사이인데, 이나연은 그 2배 속도로 달려 버린 셈이었다.
초인 중에서도 괴물 급의 스피드!
-굉장히 빠른 선수라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정말 놀랍네요.
-초능력은 최대 20m 높이까지 뛰는 점프라고 합니다. 점프 각도에 따라서 빠른 이동이나 돌격에도 활용 가능하니, 기동력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선수군요.
-예, 1세트에서도 날쌘 움직임이 눈에 띄었고요, 상당히 인상적인 선수입니다. 공격 수단이 약한 게 흠입니다만, 저 정도면 YSM에서 계속 주전으로 출전하는 이유가 있네요.
세계적인 명문 클럽 베를린 블리츠와의 친선 경기.
평가전이지만 많은 이목이 집중된 곳에서, 이나연은 마침내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런데 이나연이 달리는 리플레이 장면을 보다가, 독일 해설자가 새로운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서문엽 선수도 뒤따라 달리는데 크게 뒤처지지 않았거든요? 그럼 서문엽 선수는 대체 얼마나 빠른 걸까요?
-허, 그러네요. 저 정도면 탱커 중에서 달리기 속도가 가장 빠른 축에 속하는 게 아닐까요? 빠르기가 마치 파리의 치치 루카스 선수를 보는 것 같네요.
중계진의 이야기를 듣던 관중들은 술렁였다.
"저렇게 강한데 빠르기까지 하다고?"
"서문엽이 생각보다 훨씬 세잖아?"
"완전 괴물이야. 그동안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였어."
"과연 지구를 구한 영웅인 건가."
그동안 세계 최고의 선수로 꼽혀왔던 것은 3인, 나단 베르나흐, 로이 마이어, 다니엘 만츠였다.
포지션이 서로 달라 비교할 방법은 없었지만, 베를린 사람들은 당연히 다니엘 만츠를 최고로 꼽았다. 그들은 다니엘 만츠보다 더 위대한 선수는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머릿속에도 서문엽이 최고의 선수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문엽은 그 정도로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
경기는 장기전으로 흘렀다.
YSM은 던전 웜 레어의 지하 최심부에 있는 공동(空洞)에 자리 잡았다.
그곳은 던전 웜들이 흙을 파먹어서 생긴 거대한 공간인데, 여왕 던전 웜이 산란한 알들이 수천 개나 널려 있었다.
거기서 부화한 새끼 던전 웜들이 아직 부화 안 한 알을 먹어치우며 생장하기 때문에 실제로 부화하는 숫자는 그 1/100도 안 된다.
하지만 살아 있는 인간은 훨씬 더 맛있어 보이는 먹잇감.
새끼 던전 웜들이 계속 부화해서 덤벼들었고, 알들을 지키기 위해 던전 웜들도 일제히 몰려들었다.
즉, 최고의 사냥터였다.
-YSM이 먼저 공동에 자리 잡고 사냥을 합니다.
-사냥 포인트를 대량 획득할 수 있는 좋은 지점이죠. 당연히 베를린 블리츠도 이곳이 탐나겠습니다만, YSM이 자신 있게 먼저 자리 잡은 이유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불만 있으면 한 판 붙자 이겁니다. 여기서 한 타 싸움을 벌이면 탱커가 1명밖에 없는 베를린 블리츠도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거든요.
-예, 거기다가 피에트로 아넬라 선수도 있죠. 전원 총 집결한 전투가 벌어지면 그의 소환술이 빛을 발할 겁니다. 그래서 YSM이 자신 있어 하는 거고요.
베를린 블리츠는 공동에 다가가지 않았다.
맞붙기보다는 다른 지역을 돌면서 사냥을 계속했다.
최대한 사냥 포인트를 모아서 성장하면, 그때 승부수를 걸어보겠다는 의도.
베를린 블리츠는 각 지역마다 중간 보스 몹인 병정 던전 웜을 사냥했고, 최종 보스인 여왕 던전 웜까지 처치했다.
그러는 동안 YSM도 공동에서 충분히 성장한 상태.
결국 공동에서 한 타 싸움이 벌어졌고, 이번에는 피에트로가 또 한 번 엄청난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 세계 레벨(5) > 끝
< 세계 레벨(6) >
피에트로가 살짝 사고를 쳤다.
아무래도 어지간히도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배틀필드에 별반 흥미도 없지만 달리 할 일도 없어서 그냥 선수 생활을 설렁설렁 하고 있었던 피에트로.
그렇지만 그의 정체는 전직 대사제.
전쟁 일으키기 전까지는 지저 문명의 당대 최고의 천재라 불렸던 몸이었다.
그런 그가 슈란의 위치 추적-소멸 광선 콤보에 뾰족한 대응 수단이 없었던 게 짜증 났던 것이다.
정말 대응 수단이 없었겠는가? 인간에게 불가능한 오러 응용으로 갖가지 수단을 펼칠 수 있지만, 인간의 수준을 넘지 않으려고 자제하는 것뿐이었다.
한 타 싸움이 벌어졌을 때, 슈란은 당연히 피에트로부터 노렸다. '위치 추적'으로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소멸 광선을 쏘았다.
그때.
파파파파파파파파팟!
피에트로는 13개의 마법진을 생성했다.
늘 펼치던, 영령들을 소환하는 마법진.
그런데 13개의 마법진을 일렬로 나열해서 소멸 광선을 막아낸 것이 문제였다.
마법진으로 영령도 소환하고, 방어막처럼 활용도 한 것이다.
슈란이 소멸 광선에 오러를 가했지만, 13겹의 마법진을 다 뚫지는 못했다.
11개까지만 파괴하고, 남은 2개의 마법진은 피에트로를 완벽하게 보호했다.
결국 슈란은 오러를 전부 소진하여서 영령들에게 당해 데스.
피에트로는 남은 2개의 마법진을 계속 방패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썼다.
마법진 2개가 아군의 한쪽 방면을 전부 방어해 냈으므로, YSM은 한결 수월하게 한 타 싸움을 펼칠 수 있었다.
파울 콜린스, 최혁, 김진수 등 3탱커가 열심히 막아내고, 부족한 부분은 피에트로의 마법진이 커버해 주었다.
그 덕에 서문엽은 탱커 역할에서 벗어나 프리롤로 날뛰었다.
-서문엽, 2킬.
-서문엽, 3킬.
-서문엽, 4킬.
아무리 강팀이라지만 탱커가 1명밖에 없는 베를린 블리츠는 추풍낙엽으로 떨어져나갔다.
사기 저하의 문제도 있었다.
피에트로가 슈란을 완벽하게 막은 것도 모자라 계속 마법진으로 아군을 보호하며 탱커 몇 명의 효과를 낸 것이다.
그런 엄청난 활약에 충격받아 당황했던 측면도 있었다.
결국 2세트는 3-0으로 YSM의 승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베를린 블리츠의 공세는 거셌지만, 서문엽과 피에트로, 파울 콜린스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승리를 쟁취했다.
2세트의 충격은 경기장의 수만 관중을 침묵시켰다.
서문엽이 엄청난 기량을 보여주더니, 피에트로까지 말도 안 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더 이상 YSM이 한국에서나 잘나가는 변방 약체 팀으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YSM 더그아웃에서도 가브리엘 감독과 코치진이 멍하니 피에트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얌마, 좀 심했잖아."
서문엽이 나직이 핀잔했다.
피에트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아슬아슬하긴 한데, 뭐 다른 새로운 초능력을 선보인 것은 아니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다만 마법진에 저런 기능도 있었냐는 세간의 충격은 어쩔 수 없을 터였다.
2세트 MVP는 피에트로가 선정되었다.
한 타 싸움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므로 당연했다.
"우와, 우리가 베를린 블리츠한테 한 세트 이긴 거 맞죠?"
"이거 잘하면 월드 챔스도 우승할 수 있는 거 아냐?"
선수들은 그저 좋아서 희희낙락.
가브리엘 감독도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피에트로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해댔다.
"그 마법진은 방어 용도로 쓸 수 있는 거였습니까? 13개를 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있고요?"
피에트로는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를 보며 서문엽은 조용히 생각했다.
'이탈리아가 억울해서 거품 물겠군.'
배틀필드 세계 랭킹 14위에 있는 이탈리아.
파리 뤼미에르의 메인 탱커, 지난 휴가 때 사하라 사막에서 나무를 심고 온 치치 루카스가 있는 이탈리아 대표 팀은 에이스의 부재로 아쉬워하는 팀이었다.
치치 루카스라는 이탈리아의 수호신이 있으니, 킬을 잘 따내는 에이스만 있으면 완벽할 거라고 아쉬워하는 이탈리아 팬들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출신의 한국인 피에트로가 떡하니 대활약을 펼친 것이다.
그동안은 엄청난 초능력이 있지만 단점도 많은 원거리 딜러라는 평가였다. '위치 추적'과 '소멸 광선'을 가진 슈란이 정확히 피에트로의 약점을 공략하는 천적이었고 말이다.
이번 2세트에서 모든 평가가 뒤집어질 것이다.
공격은 물론 방어도 완벽한 원거리 딜러로 말이다.
저런 인재를 왜 한국에 내줬냐고 이탈리아 협회는 팬들의 비난에 휩싸일 터였다.
***
"뭐라 할 말이 없군."
엠레 카사 감독이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아돌프 귄터가 고개를 푹 숙였다. 2세트 패배는 서문엽의 견제에 데스당한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엠레 카사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2탱커를 택한 내 실수다. 물론 네 책임도 있고, 적이 우리의 탱커를 노릴 거라는 걸 예상 못 한 모두의 책임도 조금씩 있지. 그 문제는 모두가 반성하고 어느 누구 하나를 책망하는 건 관두도록 하지."
선수들이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베를린의 독재자라 불리지만 모두의 신뢰를 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 패배의 책임을 한 번도 선수에게 돌린 적이 없었던 책임감 있는 태도였다.
엠레 카사 감독은 그보다 2세트 마지막의 한 타 싸움 영상을 보여줬다.
피에트로의 미친 플레이가 펼쳐지는 광경이었다.
"할 말이 없는 건 이 미친 작자의 플레이다."
마법진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방어막으로 활용할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다.
한 번도 그런 플레이를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게 가능한 선수일 줄 알았다면, 난 얼마를 치르더라도 영입했을 것이다. 물론 서문엽은 팔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지만, 2억 유로라도 불렀다면 흔들렸을 테니까."
선수들은 그 말에 경악했다.
이미 이번 이적 시장에서 1억 1천만 유로를 쓴 베를린 블리츠였다. 저우린과 첸진을 영입하는 데 든 이적료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우리 팀은 완성되었고, 저 가공할 선수는 지금 적이다."
엠레 카사 감독은 새로운 대책을 보여주었다.
"슈란."
"왜."
슈란이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피에트로에게 완전히 당한 탓에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 슈란이었다.
"2세트에서 잡친 기분을 만회하게 해주지."
"어떻게?"
"피에트로를 마크하는 일은 계속 맡는다. 다만 한 방에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견제하는 역할을 할 거야. 적은 자신감이 생겨서 3세트도 한 타 싸움에서 승부를 하려 들 거야. 피에트로의 역할이 중대해지는 순간이지."
"······."
"YSM은 사냥을 할 때, 피에트로에게 사냥 포인트를 몰아주지 않는다. 다들 봤다시피 후반에도 피에트로의 성장은 푸른색에 멈춰 있다. 사냥 효율도 안 좋을뿐더러, 사냥 포인트 없이도 충분히 강력한 초능력을 가졌기 때문이지."
엠레 카사 감독의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는 슈란에게 사냥 포인트를 다소 몰아준다."
그 말에 선수들의 표정이 변했다.
슈란 역시 소멸 광선이 오러 소모가 많아서 사냥에 잘 참여하지 않는 편이었다. 기껏해야 보스 몹 사냥에나 조금 참가할 뿐.
"슈란, 아까는 13개의 마법진 중에 11개까지만 뚫었었지."
"맞아."
"사냥 포인트를 몰아갖고서 충분히 성장하고 나면, 13개를 다 뚫을 수 있겠나?"
슈란은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그러면 15개라도 뚫을 수 있어."
"좋아, 그게 우리의 3세트 작전이다. 한 타 싸움을 원하는 녀석들에게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거다. 다만 놈들이 가장 믿고 있는 것은 부숴줘야지. 우리는 베를린 블리츠다. 자존심을 지켜라."
"옛!"
그리하여서 벌어진 3세트.
YSM의 플레이는 엠레 카사 감독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YSM은 빠른 사냥과 후반 한 타 싸움이라는 기본적인 방침을 지켰다.
베를린 블리츠도 꾸준히 사냥으로 성장하며 슈란에게 사냥 포인트를 많이 몰아주었다.
이번에는 어떠한 허점도 없는 베를린 블리츠.
후반에 벌어진 한 타 싸움에서 슈란은 2세트의 복수를 해냈다.
피에트로의 마법진 13겹을 전부 뚫는 데 성공한 것이다.
피에트로가 공간 이동을 써서 도주하는 바람에 킬을 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말이다.
슈란은 무려 4단계인 검은색이었으니, 여전히 사냥 포인트가 1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피에트로보다 강한 게 당연했다.
한 타 싸움은 결국 YSM의 패배로 끝났다.
서문엽은 홀로 도망쳤다가, 공간 이동으로 먼저 피신했던 피에트로와 합류했다.
그때 베를린 블리츠의 생존한 선수는 5인이었다.
서문엽은 피에트로와 함께 도망 다니면서 계속 사냥을 했다. 다시 사냥 포인트를 모은 뒤,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승부를 걸어볼 생각이었다.
베를린 블리츠의 5인도 서문엽을 쫓으면서 계속 구역을 하나씩 붕괴시켜 도망갈 곳을 줄여 나갔다.
결국은 최후의 지역에서 만나 마지막 싸움이 벌어졌다.
오러를 거의 소진했던 피에트로는 슈란에게 당해 데스.
서문엽은 4인에게 둘러싸여 싸우며 2킬을 추가로 올렸지만, 다니엘 만츠가 끈질기게 당기기로 발을 붙잡은 탓에 수적으로 불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3세트는 베를린 블리츠의 승리.
그래도 점수는 3-0으로, 베를린 블리츠도 생존자가 3인밖에 남지 않은 진땀 승이었다.
관중들도 서문엽과 피에트로 콤비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서 마지막까지 땀을 쥐며 관람해야 했다.
3세트 MVP는 6어시를 기록한 다니엘 만츠. 1, 2, 3세트 도합 1킬 19어시를 기록해서 어째서 작년에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는지를 증명했다.
하지만 화제는 서문엽과 피에트로가 가져갔다.
두 사람이 버티고 있는 YSM이 생각보다 더 강적이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감독과 두 사람은 함께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서문엽 씨, 소유하신 클럽이 상당히 강한 팀이 되었는데요, 구단주로서 올해 목표가 무엇입니까?"
"월드 챔스 우승이죠."
"오오!"
기자들은 호쾌한 서문엽의 포부에 좋아하였다. 자신감이든 허풍이든 기삿거리가 되었으니까.
서문엽은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4강에 가도 만족할 겁니다."
문제는 피에트로에게 질문이 갔을 때였다.
"2세트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하셨는데, 왜 그동안 그런 플레이를 선보이지 않았던 겁니까?"
피에트로는 서문엽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답해야 하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서문엽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마음대로 지껄이라는 제스처.
피에트로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놀이에 불과한 이 일에 실력을 다 발휘해서 밸런스를 붕괴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상대 팀을 보니 자제할 필요가 없겠다 싶었을 뿐입니다."
그 말에 기자들은 피에트로의 심상치 않은 정신세계를 느꼈다.
냉정한 말투로 자신의 오만함을 당연하다는 듯이 내보이는 태도!
거만하기로는 서문엽에게도 밀리지 않는 피에트로의 본색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YSM은 베를린 블리츠 BC와 겨뤄서 팽팽하게 싸운 쾌거를 거둘 수 있었다.
이 경기 내용과 결과는 인터뷰와 함께 전 세계 언론에 알려졌다.
피에트로 아넬라라는 불가사의한 선수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으며, 이탈리아 협회는 한국에 귀화해 버린 이 이상한 50대 신인 선수 때문에 뒷목을 잡았다.
세계 최강 팀과 팽팽히 싸운 YSM은 이 일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더 이상 서문엽 외엔 별 볼 일 없는 아시아의 약체가 아니라, 세계 레벨을 가진 강팀으로 평가된 것이다.
< 세계 레벨(6) > 끝
< 동료(1) >
"아까운 패배였습니다."
가브리엘 감독이 입을 열었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십니까?"
선수들은 조용해졌다. 칭찬하려는 어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코어만 따지면 좋은 결과였죠. 하지만 내용을 보면 결국 질 수밖에 없었던 게임을 끈질기게 끌고 갔을 뿐입니다."
정확히는 피에트로와 서문엽의 하드캐리로 팀을 멱살 잡고 아슬아슬한 승부까지 끌고 갔다.
"우리 팀의 두 선수 외에는 세계적인 강팀을 상대로 플레이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빠른 사냥을 통한 빠른 성장은 좋았지만, 그렇게 성장했음에도 적에게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면 이건 보완해야 할 숙제입니다. 우리는 월드 챔스 4강 이상을 노리는 팀이니까요."
가브리엘 감독은 코치진과 함께 준비한 영상을 재생시켰다.
"일단 양 팀의 킬 장면을 모두 모아놓은 영상입니다. 이걸 보고 양 팀의 차이를 확인해 보십시오."
양 팀의 킬 장면이 계속 펼쳐지는 재미있는 영상이었다.
가장 많이 출연한 사람은 단연 서문엽.
3세트까지 도합 14킬 4어시를 거둔 서문엽은 그 경기에서 가장 많은 킬을 낸 선수였다.
피에트로가 소환술로 킬을 긁어모으는 장면도 있었고, 사니야의 2킬도 보였다.
하지만 역시 패배한 경기였기 때문에 베를린 블리츠의 킬 장면이 더 많았다.
"우리 팀은 소수의 선수만 킬을 기록했군요."
개리가 말했다.
가브리엘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또 없습니까?"
"우리의 방어력이 부족해서 킬을 너무 쉽게 내줬습니다."
파울 콜린스가 답했다. 이는 메인 탱커로서 스스로 반성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킬을 쉽게 내줬다? 그걸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다른 선수들도 열심히 궁리했지만 명쾌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가만히 있던 서문엽이 말했다.
"쟤들은 솔로 킬이 거의 없잖아."
그랬다.
베를린 블리츠는 다니엘 만츠가 홀로 뛰어들어 심영수를 잡았던 것 외에는 솔로 킬이 없었다.
그제야 파울 콜린스도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경기 내내 적의 공격을 막기가 버거웠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베를린 블리츠의 선수들은 단독으로 활약하려 하지 않았다.
그만한 스타 선수들이라면 솔로 킬에 욕심이 있을 법도 한데, 철저하게 동료들과 협력 플레이를 했다.
동료가 빈틈을 만들어주면, 그걸 거들어서 빈틈을 더 크게 만들고, 또 다른 동료가 100% 확실한 킬을 했다.
가브리엘 감독이 영상을 다시 재생시켜주었다.
그제야 선수들은 영상의 진정한 의미가 다시 보였다.
베를린 블리츠의 킬은 최소 2명, 많으면 4명이 킬에 협력했다.
"보다시피 베를린 블리츠는 유난히 어시스트를 많이 기록하는 팀입니다. 하지만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라 월드 챔스에 단골 출장하는 강팀들은 다른 팀보다 킬 대비 어시스트의 비율이 높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굉장히 쉽게 킬을 내지요?"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한 팀입니다. 그들은 성공 확률이 높아질 때까지 킬 기회를 계속 동료들에게 양보합니다. 본래는 이런 플레이메이킹이 다니엘 만츠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는데, 이제는 여러 선수가 함께 협력하는 연계가 더 강화되었습니다. 신입생인 저우린과 첸진의 어시스트가
많은 것을 보니, 영입은 성공적이었던 것 같고요."
긴 육합대창을 자유자재로 쓰는 저우린.
그리고 '무중력'으로 공중을 누비며 여기저기에서 부지런히 동료를 돕는 첸진.
엠레 카사 감독이 무엇을 원했는지 똑똑히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어땠습니까? 오늘 경기에서 우리가 기록한 어시스트는 이 정도입니다."
우습게도 3세트를 종합한 수치에서 어시스트가 가장 많은 사람은 서문엽이었다.
서문엽이 4어시.
피에트로의 3어시가 뒤를 이었고, 개리도 3어시를 기록해 빅 리그를 오래 경험한 베테랑으로서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다.
"봤지요? 개개인의 역량 차이는 패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외로 개개인의 역량에서 경쟁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협력 플레이입니다."
그러면서 가브리엘 감독은 사니야를 호명했다.
"사니야, 본인의 실력이 베를린 블리츠의 선수들과 비교하면 어땠습니까?"
"······."
사니야는 쉬이 대답 못 했다. 자신감이야 늘 넘치지만 오늘 보여준 게 많지 않았으니 할 말이 없었다.
가브리엘 감독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당신이 그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서문엽도 고개를 끄덕인다. 분석안으로 보는 사니야의 수치는 세계 레벨이었다.
"하지만 당신을 원하는 수많은 강팀들은 어디까지나 즉전감이 아니라 가르쳐서 키울 유망주로 볼 겁니다. 파리 뤼미에르에 몸 담았던 제가 장담하죠."
사니야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협력 플레이를 잘해야 월드 챔스에 갈 수 있는 겁니다. 솔로 킬을 낼 수 있는 선수는 극히 드뭅니다."
가브리엘 감독은 서문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솔로 킬을 밥 먹듯이 내는 선수는 없고요. 기본적으로 나단 베르나흐도 솔로 킬보다 동료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재로 주목받았다가 혼자 날뛰는 습관을 못 고쳐서 망한 유망주는 셀 수 없죠. 이제 우리가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하는지 다들 알겠습니
까?"
"옛!"
"좋습니다. 다행히 아직 시간이 많습니다. 앞으로 치러야 할 KB-1 리그의 정규 경기는 여러분들에게 다소 쉬울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안일한 마음 갖지 말고 협력 플레이를 연습할 좋은 기회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단주님?"
"어."
"구단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수들과 MVP로 내기를 하신 건 알고 있지만, 혼자 킬을 하고 다니는 것보다는 어시스트 위주로 플레이해주십시오."
그 말에 서문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선수들은 실실 웃었다.
서문엽의 MVP 내기에 적신호가 켜졌다.
***
귀국하기 전에 독일에서 특별히 이틀간 휴가를 주었다. 선수들은 신난다고 놀러 나갔고, 서문엽은 오랜만에 옛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욥! 서문욥!"
순박한 인상의 덩치 큰 흑인이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7영웅 동료 에릭 튀랑이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낚시를 사랑하는 남자. 그러나 스릴 중독자라 위험한 행동을 일삼는 까닭에 모델 출신 아내로부터 낚시 금지를 당한 불운한 사나이이기도 했다.
"어, 그래그래. 너도 왔구나. 아직도 낚시는 금지야?"
"아냐, 금지 풀렸어. 근데 멀리 못 나가. GPS로 내 위치 항시 체크하고 있어!"
울상이 된 에릭 튀랑.
서문엽은 낄낄거렸다.
"가까운 데서 낚시하면 되지 그럼 태평양에서 고래라도 잡으러 가냐?"
"그것도 해보고 싶은데 이혼하고 가래."
"그래, 참 좋은 아내 만났다."
서문엽은 울상이 되어 토로하는 에릭 튀랑을 토닥여주었다.
"늦었군."
엠레 카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곳은 엠레 카사의 저택이었다.
세계적인 명문 클럽을 이끄는 감독답게 저택도 크고 화려했다. 하지만 역시나 엠레 카사답게 내부는 장식품 하나 없는 삭막한 실용주의를 띠었다.
"시끄러, 너네한테 져서 반성의 시간 좀 가졌다."
"웃겨, 그 정도면 잘한 거 아냐?"
벌써부터 혼자 와인을 음료수처럼 마시고 있던 슈란이 따지고 들었다. 초인에게 와인은 말 그대로 음료수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잘하긴 뭘 잘해. 하긴, 네가 보기엔 우리가 잘한 걸로 보이겠다만, 전문가들이 보기엔 또 아니에요. 그렇지, 카사야?"
"아직 많이 미흡하더군. 그러나 강력한 두 에이스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지."
엠레 카사는 YSM의 단점을 쉽게 알아보았다.
그 정도 되는 명감독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피에트로 아넬라는 대체 정체가 뭐냐? 보다 보니 어쩐지 낯이 익은 재주를 부리던데."
엠레 카사가 물었다.
그 말에 에릭 튀랑도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나도, 나도! 최후의 던전에서 봤던 그 무서운 지저인하고 똑같은 초능력이었어! 그 이탈리아 남자는 정체가 대체 뭐야?"
"나도 깜짝 놀랐어. 그래서 냉큼 선수로 데려왔지. 세상에는 별의별 초능력이 많잖아? 살다 보니 대사제와 비슷한 능력을 쓰는 사람도 있더라고."
서문엽은 대충 그렇게 둘러댔다.
다들 어쩐지 수상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죽은 지 오래인 대사제와 피에트로를 연관 지어 생각할 근거도 없었다.
"조사해보니 연봉 1억에 계약 기간이 7년이더군. 이게 말이 되는 계약 조건인가?"
엠레 카사가 추궁하자 에릭 튀랑은 뛸 듯이 놀랐다.
"뭐! 욥, 실망이야! 터무니없는 노예 계약이잖아!"
"원래 돈에 관심 없는 놈이라 그냥 대충 준 거야. 왜 남의 선수에 대해 조사하고 난리야? 안 팔아! 꿈도 꾸지 마!"
"2억 유로도 생각하고 있다."
"어이구, 그러셔? 미안한데 나 20억 유로 가까이 기부한 사람이야. 돈에 흔들릴 것 같아?"
본의 아니게 사망 처리 되어서 유언대로 전 재산을 기부했으니 맞는 말이었다.
"여름 이적 시장에 계약하고, 이적은 내년에 하는 조건은 어떠냐? 물론 돈은 선불이다. 그럼 너희도 올해 월드 챔스 도전은 피에트로를 데리고 할 수 있잖나."
"아 됐어, 안 팔아. 어차피 본인이 가지도 않아. 한국이 좋다고 귀화까지 했는데 독일로 가겠냐?"
"쯧, 그런 선수는 어디서 발견해 가지고······."
엠레 카사는 결국 혀를 차며 포기해야 했다.
서문엽, 엠레 카사, 슈란, 에릭 튀랑.
오랜만에 7영웅의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그들 4인 외에도 또한 사람이 있었다.
"저, 저기, 나도 있어······."
손을 들며 조심스럽게 말을 하는 남자.
그제야 서문엽은 존재감이 별로 없었던 왜소한 체구의 인도 남자를 발견했다.
체격은 초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작고 왜소하며, 얼굴은 극히 동안이라 아직도 소년으로 보일 정도였다. 아래로 처진 눈썹과 크고 순진해 보이는 눈, 그리고 어쩐지 음울한 안색까지.
자칫 우울증 환자로 오해받기 딱 좋은 이 음울한 인도인의 이름은 칸 아르얀.
바로 7영웅의 멤버였다.
"헐, 너도 왔어?"
서문엽은 깜짝 놀랐다.
7영웅 시절에도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워낙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칸 아르얀이었고, 서문엽도 친절한 성격이 아니라서 던전 공략만 했지 사적으로 친해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인적인 친분이 생길 기회가 없었다.
그랬던 칸 아르얀이 이례적으로 이 술자리에 나타났으니 놀란 것이다.
"그래, 너도 반갑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그동안? 하하하······."
칸 아르얀은 쓸쓸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 탓에 분위기가 확 가라앉아 버려서, 무거운 분위기를 싫어하는 에릭 튀랑이 안절부절 못했다.
"왜? 그동안 어떻게 살았기에?"
칸 아르얀은 쉬이 대답을 못했고, 그 대신 슈란이 툭 쏘아붙이듯 말했다.
"도박으로 전 재산 날렸어."
"그, 그렇게 직설적으로는··· 게다가 도박으로 다 날린 것은······."
"나머지 절반은 이혼 위자료로 날렸대."
슈란은 소멸 광선 못지않은 치명적인 일격을 칸 아르얀에게 가했다.
그제야 서문엽은 옛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렸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너 옛날부터 카지노 중독자였지?"
칸 아르얀은 고개를 숙였다.
인류를 구한 7영웅의 멤버이자 인도의 영웅.
그러나 인도의 수치스러운 영웅이기도 했다.
칸 아르얀은 소년처럼 순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도박 중독자였다.
칸 아르얀은 빨개진 얼굴로 서문엽에게 말했다.
"저기, 미안한데 혹시 네 팀에 내 일자리 없을까?"
< 동료(1) > 끝
< 동료(2) >
칸 아르얀.
인터넷에서 부르는 별명은 망한 7영웅.
도박에 재산을 탕진하는 못 말리는 행각에 아내는 아들 1명, 딸 2명을 데리고 이혼해 버렸고, 인도인들도 그녀의 결정을 지지했다. 애들이라도 잘 키워야 했으니까.
도박을 하건 술을 마시건 사실 개인 사정이다.
하지만 칸 아르얀은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여러 번 공언했다가 얼마 후에 불법 도박장에서 발견되는 일이 여러 차례 생기면서 미움을 샀다.
최후의 던전을 공략한 대가로 받은 보상금은 이미 다 탕진한 뒤였고, 지금은 인도 정부에서 주는 생활 보조금으로 먹고살고 있다고 한다.
그 측은한, 혹은 한심한 이야기를 들은 서문엽은 문득 과거가 생각났다.
말수도 없던 조용하고 음울한 녀석이 유독 자기가 먼저 다가와 적극적으로 주장을 펼칠 때가 있었다.
"우리 던전을 좀 더 많이 공략해야 하지 않을까?"
"적절한 페이스로 하고 있는데 왜?"
리더였던 서문엽이 의아해하자, 칸 아르얀은 우물쭈물하다가 슈란의 핑계를 댔다.
"아, 아니, 아직 미숙한 멤버도 있고 하니까 더 호흡을 맞춰봐야 하지 않나 싶어서."
가뜩이나 서문엽에게 한창 욕먹던 슈란은 칸 아르얀을 더 미워하게 되었다. 지금 칸 아르얀에게 팩트 폭행을 가하는 슈란의 태도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서문엽도 그 의견에 수긍하고는 던전 공략 횟수를 더 늘렸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도박할 돈이 떨어져서였다. 던전 공략 후에 거금을 벌면 냉큼 카지노로 달려갔으니까.
'초인씩이나 되는 놈이 수전증이라니 깜짝 놀랐었지.'
초인이 알코올중독일 리는 없고, 정신적인 문제가 심각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그렇지만 분석안으로 보이는 정신력은 좋았기 때문에 던전에서는 제 몫을 잘 해내겠거니 싶었다. 그땐 서문엽도 막 나가는 인생이라 남 사생활에 트집 잡을 이유가 없었다.
"뜬금없이 웬 취직이야?"
서문엽이 기가 막혀서 물었다.
"인도 정부가 드디어 생활 보조금을 끊었나 보지?"
슈란은 계속 잔인하게 칸 아르얀을 공격했다.
"아, 아니야······."
울상이 된 칸 아르얀은 한숨을 푹 쉬더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우리 애들이 이제 다 컸어. 막내아들도 성인이 됐고."
"걔는 도박 안 하고?"
슈란의 3차 정신 공격!
칸 아르얀이 원망 어린 눈초리로 쏘아봤지만, 옛날에 지은 죄가 있어서 뭐라고 말은 못했다.
"자자, 이제 그만하자. 너도 이제 30대 꺾였는데 성질 죽여야지."
"모가지를 꺾어줄까?"
슈란이 으르렁거리자 서문엽은 낄낄거렸다.
아무튼 칸 아르얀의 이야기는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애들은 다 키웠으니까 아내가 다시 너를 집으로 부르려 한다 이거지?"
칸 아르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아내 천사냐?"
"내 안의 악마를 때려잡는 천사지······."
칸 아르얀은 씁쓸히 웃으며 대꾸했다.
그 말대로 칸 아르얀과 그의 아내는 참 재미있는 부부였다.
아내 역시 전쟁 시절 던전을 공략하던 초인인데, 초능력은 '견고한 정신'과 '거짓 간파'였다.
그야말로 칸 아르얀의 천적!
몰래 도박을 해도 아내에게 비밀로 하기란 불가능했다. 또 도박했냐는 질문 한 방에 진실이 들통나니 말이다.
우습게도 '거짓 간파'는 칸 아르얀의 아내로 살다가 각성한 초능력이라고 했다.
그렇게 아내에게 쥐 잡듯이 잡혀 사는 칸 아르얀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박을 끊기 못한 게 참 끈질겼다.
"와, 나 같으면 때려 죽였을 텐데, 낄낄낄."
서문엽의 험한 말에 칸 아르얀은 움찔했다.
"그럼 잘됐네. 근데 그게 취직이랑 뭔 상관이야?"
"아내가 도박을 끊고 성실하게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받아주겠다고 했어. 못하면 큰딸 결혼식도 못 올 줄 알라고 하면서······."
하소연하면서 다시 울상이 된 칸 아르얀이었다.
"노노, 도박 안 좋아 칸. 차라리 나랑 같이 낚시를 하자."
에릭 튀랑이 순박한 인상으로 권했다.
스릴 중독자인 에릭 튀랑과 도박 중독자 칸 아르얀이 어울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서문엽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다행히 칸 아르얀은 고개를 저었다.
"난 일자리가 필요해."
"어부가 되면 되잖아!"
서문엽이 에릭 튀랑을 제지했다.
"관둬. 너한테 배를 주면 버뮤다 삼각지대로 탐험을 갈까 봐 무섭다."
그 말에 눈을 무섭게 반짝이는 에릭 튀랑이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결국 아내가 준 마지막 기회를 받기 위해 취직을 해야 했는데, 인도에서는 받아주는 클럽이 없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거절했다. 전문성과 경력이 없는 코치를 받아줄 수는 없으니까."
엠레 카사가 덧붙였다.
"유소년이라도 좋은데······."
칸 아르얀이 미련이 남아서 말했지만, 엠레 카사는 칼같이 거절했다.
"유소년에게는 더더욱 너 같은 놈을 붙여줄 수는 없다."
인성도 중시 여기는 엠레 카사라 당연한 결정이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칸 아르얀. 참으로 처량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입고 있는 옷도 19년 전에 자주 입던 복장 그대로였다.
'망한 7영웅, 망한 7영웅 하더니 명불허전이네.'
저게 인류를 구한 7인 중 한 사람의 모습이라니. 그러나 자업자득이라 불쌍하진 않았다. 그냥 궁상맞은 꼴이 보기 눈살 찌푸려질 뿐이었다.
서문엽은 '분석안'을 증폭시켜서 칸 아르얀을 살폈다.
-대상: 칸 아르얀(인간)
-근력 79/88
-민첩성 88/96
-속도 80/87
-지구력 64/90
-정신력 85/85
-기술 79/85
-오러 85/85
-리더십 48/70
-전술 60/82
-초능력: 무음, 맹독
-무음: 소리를 내지 않는다.
-맹독: 소지한 무기에 독을 맺히게 한다.
'어라?'
서문엽은 상당히 놀랐다.
칸 아르얀은 모든 능력치가 고르게 높은 팔방미인이었다.
민첩성 외에는 세계 최고의 초인 7인에 꼽힐 만큼 특출한 능력치가 없지만, 부족한 부분도 없었다. 거기에 초능력도 괜찮았기 때문에 암살자 같은 타입으로 활용하기 위해 7영웅에 뽑았었다.
세월이 한참 흘렀지만 칸 아르얀은 그때와 비교해서 능력치가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지구력이 상당히 낮아졌지만, 다른 부분은 의외로 아직 괜찮다. 지구력이야 다시 훈련시키면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다.
'이 녀석, 리더십도 은근 높은 편이었네.'
생각해 보면 평상시와 던전에서의 모습이 완전히 다른 칸 아르얀이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집착 때문인지 정신력도 여전히 높은 편!
나이가 올해로 48세인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 저 정도라니 의외였다. 얼굴과 마찬가지로 육체도 노화가 더딘 축복받은 체질이었다.
'이거 잘하면······.'
서문엽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우리 팀에 들어오고 싶다 이거지?"
"응, 코치가 아니라 청소라도 할게."
"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각오네?"
"으응, 범죄만 아니면."
"호오,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부, 불안하게 왜 자꾸 그렇게 말하는 거야?"
칸 아르얀도 어떤 위기감을 감지했는지 항변했다.
서문엽은 씨익 웃고는 그와 어깨동무를 했다.
"옛 동료와 같이 일하게 돼서 기뻐서 그렇지."
"그, 그래? 우리가 그렇게 친했던가?"
"섭섭하게 왜 그래? 어려운 처지에 일자리를 주는 좋은 친구지."
"그건 그렇지만."
"난 카사처럼 냉정한 놈이 아니어서 가여운 너를 외면하지 못하겠네. 난 참 착해서 탈이야."
"차, 착해? 아, 아니, 그래, 착하지 물론······."
칸 아르얀은 혼란을 느꼈다.
자신이 알던 서문엽은 정 같은 게 없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이러니 더 불안했다.
다들 무슨 꿍꿍이냐는 눈초리로 서문엽을 바라볼 뿐이었다.
***
오갈 데 없는 칸 아르얀은 YSM 선수단이 숙소로 쓰는 호텔에 함께 왔다.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호텔 로비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가브리엘 감독이 말을 건네 왔다.
"아, 감독. 마침 잘됐다. 계약서 하나 준비해 줘."
"계약서요?"
가브리엘 감독은 서문엽과 함께 온 칸 아르얀을 알아보고는 흠칫 놀란 눈을 했다.
"어떤 계약서입니까?"
그 물음에 서문엽은 입모양만 냈다.
'선수.'
가브리엘 감독의 눈빛에 놀라움이 더욱 깃들었다.
이 세상에 7영웅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칸 아르얀이 누군지도 뻔히 아는데, 선수 계약서라니.
서문엽이 손짓으로 서두르라고 신호를 보냈다.
"아, 알겠습니다."
가브리엘 감독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연락을 보냈다.
잠시 후.
"여기 있습니다."
최동준 수석 코치가 계약서를 들고 서문엽의 호텔방에 나타났다.
"자, 사인해. 인마."
"잠깐만. 읽어보고."
"어허, 얼른 사인이나 해. 다 똑같은 계약서야."
"기, 기다려 줘. 그러다가 실수로 장기 포기 각서에 사인한 적도 있단 말이야."
알면 알수록 밑바닥 인생인 칸 아르얀이었다.
칸 아르얀은 계약서를 읽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거 선수 계약서잖아!"
그랬다.
계약서는 주급 1,500만 원, 연봉으로 치면 7억 8천만 원짜리 선수 계약서였다.
계약 기간은 5년에 바이아웃 조항 같은 건 없었다.
배틀필드 경험이 없는 48세의 신인 선수에게 줄 조건치고는 상당히 후했다.
그러나 칸 아르얀은 반발했다.
"나, 나더러 선수로 뛰라는 거야?"
"어, 코치보다 낫잖아?"
"낫긴 뭐가 나아! 나 꼴이 이래도 칸 아르얀이란 말이야! 내가 어떻게 이제 와서 배틀필드 같은 애들 장난이나 하겠어!"
전쟁 시절에 이름을 떨쳤던 초인들은 대개 배틀필드를 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프라이드 때문이었다.
"그럼 지금 선수 뛰는 나는 꼴이 우습냐?"
"너, 넌 아직 한창 젊잖아!"
"나보다 2살 어린 너도 충분히 할 수 있겠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난 이제 곧 쉰이란 말이야."
"야 인마. 그런 낡은 사고방식 좀 버려. 배틀필드가 애들 장난 같고 부끄러워? 그건 전쟁 시절 날렸던 초인들이 시대가 바뀌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거부감을 느꼈던 거야. 지금은 배틀필드가 얼마나 메이저 스포츠인데?"
"네가 그런 말 하니까 더 이상해! 너는 배틀필드가 광대 짓 같다며!"
최후의 던전에서 생환하고 나서 첫 기자 회견 때 서문엽이 했던 말이었다.
서문엽은 헛기침을 했다.
"인마, 그건 나도 그때 갑자기 변한 세상에 거부감을 느꼈으니까 그랬지."
"아무튼 싫어. 이제 와서 선수로 뛰면 내 꼴이 얼마나 우습겠어?"
"뭐가 우스워? 잘 생각해 봐. 네가 우리 팀 코치로 있어봤자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어? 인생 망한 놈이 친구 덕에 일자리 얻어서 눌러 앉았구나 하겠지 누가 성실해졌다고 칭찬하겠어?"
"······."
"그런데 선수는 다르지. 선수로 활동한다는 것은 보통 노력으로 안 되는 일이니까. 네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거잖아. 노력해서 남부끄럽지 않은 가장이 되겠다고!"
"···하, 할 수 있을까? 이제 나이가 있어서 예전 같지 않을 텐데."
"네가 예전 같았으면 0 하나 더 붙은 고액 연봉을 받았겠지. 근데 내가 보기에 그때만큼은 아니어도 아직 괜찮아. 망신당하지 않고 할 수 있어."
"더 당할 망신도 없지만, 그래도 7영웅이었던 내 커리어는 지켰으면 좋겠어."
"야, 그래서 오히려 더 유리한 거야. 네 나이를 누가 모르겠어?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잘해도 대단하다, 폼은 죽었어도 옛날 클래스는 살아 있구나 하겠지."
"정말?"
"그래, 나만 믿으라니까. 내가 책임지고 네 도박 중독도 다 낫게 해줄게."
망설이던 칸 아르얀은 고민 끝에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계약서를 검토한 서문엽은 표정이 바뀌었다.
"자, 그럼 구단주로서 말할게."
"······?"
"한 번만 더 도박하면 손모가지 아작 내 버린다, 이 새퀴야. 난 알코올중독자도 술병으로 패서 고쳤어."
"······?!"
새로운 동료가 생겼다.
< 동료(2) > 끝
< 동료(3) >
<YSM, 베를린 블리츠와 평가전서 분투. 월드 챔스 청신호?>
<YSM, 베를린 블리츠 상대로 2-1 접전>
<서문엽의 YSM, 몇 년 사이에 강팀으로 변모하다>
한국에 돌아오니 베를린 블리츠 BC와의 시범 경기로 떠들썩했다.
세계 최고의 클럽을 상대로 그 정도의 치열한 경기를 펼친 팀이 지금껏 아시아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서문엽의 엄청난 활약을 담은 영상은 인터넷에서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거기에 피에트로도 여러 가지로 화제를 만들어주었고 말이다.
<특급 원딜 피에트로 '배틀필드 놀이에 불과'>
<귀화 선수 피에트로 아넬라 '밸런스 고려해 전력 다하지 않았다'>
<슈란의 소멸 광선 막아내는 피에트로(사진)>
소멸 광선을 막는 13겹의 마법진은 그 자체로도 무척 화려한 그림이었다.
전력을 다하면 밸런스가 붕괴될까 봐 쉬엄쉬엄했다는 명언까지 날려줬으니, 인터넷 커뮤니티에 수많은 떡밥이 쏟아졌다. 주로 '피에트로 대 로이 마이어'를 주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봤냐? 피에트로 형님께서는 지금껏 전력을 다하지 않고 계셨다. 밸런스 붕괴되면 재미없으니까! 이게 다 너희를 위해서였다.
-너무 세서 밸런스 깨질까 봐 걱정해주신 아량이라니. 형님 너무 멋지십니다!
-피에트로 허언증 오지네;;
-피에트로는 초능력은 센데 로이 마이어 같은 두뇌 플레이가 없음. 아직 멀었다.
└밸런스 고려해서 대충 하셨던 거다.
로이 마이어는 잘생긴 외모와 신사적인 성품, 화려한 초능력들로 팬들이 많았지만, 피에트로 역시 귀화하여 한국인이 된 탓에 팬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 큰 화제가 하나 추가되었다.
그것은 바로.
<'망한 7영웅' 48세의 칸 아르얀, 선수 데뷔?>
<7영웅 동료 칸 아르얀, 서문엽의 YSM에 영입>
<서문엽, 7영웅 동료 칸 아르얀 선수로 영입>
<서문엽 '칸 아르얀 선수로 뛸 역량 충분'>
칸 아르얀이 서문엽에게 영입되어 YSM에 입단한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서문엽이야 17년을 건너뛴 터라 실질적인 나이는 30대였지만, 칸 아르얀은 달랐다.
한때 7영웅의 멤버로서 뛰어난 활약을 했던 초인이나, 그 뒤 무려 20년을 술과 도박에 빠져 지낸 48세의 중년이었다. 얼굴은 엄청난 동안이지만 선수로 뛰기에는 지나치게 늦었다.
어쨌든 인류를 구한 7인의 초인 중 하나였다.
그 7인 중 가장 불행해진 케이스였는데, 배틀필드를 통해 재기할 수 있을지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YSM은 기자회견을 열었고, 서문엽과 칸 아르얀이 회견에 참가했다.
칸 아르얀은 힌디어와 영어만 알 뿐,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서문엽이 통역을 할 겸 거의 모든 질문에 대답했다.
"칸 아르얀 씨는 선수로서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인데 선수로 기용한 것이 확실합니까?"
"네, 선수입니다. 경기도 뛸 거고요."
"선수로서 칸 아르얀 씨의 경기력이 어느 정도일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재활 훈련을 해야 하지만, 지금도 한국은 씹어 먹습니다."
서문엽의 말에 기자들은 놀라 웅성거렸다.
한국 수준이 낮아도 설마 48세의 초인을 못 당할까? 아무리 7영웅 출신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서문엽의 영입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정말 칸 아르얀이 맹활약을 한다면 엄청난 뉴스였다.
"어떻게 해서 칸 아르얀 씨를 영입하게 되셨습니까?"
"도박 끊고 일을 하면 가족과 다시 합칠 수 있답디다. 다시 잘살아보려는 애니까 응원합시다."
"···끊을 수가 있을까요?"
한 기자가 회의적인 시각으로 질문했다.
서문엽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관리하는 동안은 괜찮을 겁니다. 어느 날부터 얘가 실종되면 또 도박하다가 나한테 살해당한 걸로 아십쇼."
그렇게 칸 아르얀의 YSM 입단 기자 회견은 몇 차례의 질문이 더 오간 뒤에 마무리되었다.
칸 아르얀은 곧 협회에 선수 등록을 하고 아바타를 만들었다. 물론 아바타는 별 이상 없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슈란, 서문엽, 피에트로처럼 페널티를 받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으니까.
정식으로 선수가 되자, YSM의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소식을 들었는지, 인도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칸 아르얀의 아내였다.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네요."
갈색 피부의 미녀가 서문엽에게 영어로 인사했다. 한때 던전 공략으로 이름 날린 초인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러고 보니 뵐 일이 없었네. 반갑습니다, 제수씨."
서문엽도 인사에 화답했다.
칸 아르얀은 아내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하도 지은 죄가 많다 보니 이제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조건반사로 고개가 숙여지는 모양이었다.
"제 못난 남편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제가 어찌 보답해야 할까요."
"선수로 써먹으려고 영입했는데 저야 좋죠."
그 대답에 칸의 아내는 눈을 빛냈다.
서문엽은 미소를 지었다. 분석안으로 칸의 아내의 초능력이 보였다.
-견고한 정신: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거짓 간파: 어떠한 종류의 거짓에도 속지 않는다.
정말 기막힌 초능력이었다. 둘 다 서문엽이 높이 사는 종류의 초능력이었다. 특히 거짓 간파는 싸우는 상대의 속임수도 알아차릴 수 있으니 전투에도 유용하다.
'아깝네. 젊었으면 영입할 텐데.'
어쨌든 칸의 아내는 거짓 간파로 서문엽의 말이 사실임을 느꼈을 터였다.
칸의 아내는 이채를 띠며 물었다.
"정말 남편이 아직 선수로 뛸 수 있는 건가요?"
"월드 챔스까지 데려갈 겁니다. 이 녀석이 생긴 것처럼 몸도 잘 안 늙어요."
"아직도 그 정도라니······."
서문엽의 말에 과장됨이 없다는 것을 느낀 칸의 아내는 기가 차서 칸 아르얀을 노려보았다.
"이 못난 화상아, 그 축복받은 몸으로 도박이나 했냐!"
"미, 미안······."
"50 바라보는 나이에도 월드 챔스에 갈 수 있었는데, 젊었을 때 성실했으면 더 잘했을 거 아냐!"
"며, 면목이 없어."
사실 젊었을 때 세상 구했으니 아예 헛산 건 아니었다.
"네 아들이 어릴 때 학교에서 '네 아빠는 도박하느라 장기도 하나 없다며?'하고 놀림받아서 울며 돌아온 적이 있었는데, 넌 정말로 장기를 담보로 잡은 계약서를 쓴 적 있었지!"
"그, 그 얘기가 왜 또 나와. 내 장기는 멀쩡해! 그 녀석들은 다 손봐줬다고!"
"자랑이다!"
빼액 소리 지르는 아내 앞에서 칸 아르얀은 고개를 땅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코미디 같은 부부 싸움을 듣다 보니, 서문엽은 문득 칸 아르얀이 그동안 범죄 조직들과 얽히는 바람에 아직도 기량 저하가 안 됐나 의심됐다.
칸의 아내는 다시 서문엽에게 말했다.
"모쪼록 저희 남편이 다시는 도박에 손 안 대게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세요. 걸릴 때마다 죽기 직전까지 팰 거니까. 죽음에 대한 공포가 도박에 대한 욕망보다 강한 법이잖아요."
"······."
칸의 아내는 서문엽을 빤히 보다가 칸 아르얀에게 말했다.
"진심인데. 한 톨의 과장도 없어."
"허억!"
서문엽은 안색이 창백해진 친구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칸의 아내는 며칠간 칸 아르얀과 함께 있으면서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했는데, 그 모습이 의외로 잘 어울렸다.
아내가 돌아가고 난 뒤, 칸 아르얀은 정식으로 팀 훈련에 참가했다.
피지컬 테스트는 이미 아바타 등록을 할 때 측정했다.
아바타를 테스트할 때 측정하는 것은 근력, 민첩성, 오러량인데, 이중 민첩성과 오러량이 아직도 정정해서 코치진이 기함을 했다.
"민첩성이 아직도 상위권입니다!"
"오러량도 준수하고. 정말 선수로 쓸 만한데요?"
"대체 구단주께서는 이걸 어찌 알아보셨는지."
"지구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데, 피지컬은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강하면 되겠군요."
가브리엘 감독은 칸 아르얀의 현 상태와 나이를 감안하며 신중하게 훈련 계획을 짰다.
실전 테스트도 거쳤다.
칸 아르얀은 던전에 금방 적응했다.
처음에는 조금 헤맸는데, 괴물과 맞닥뜨리자 금방 적응했다.
촤촤촤촥!
세르펜을 상대로 칸 아르얀은 매섭게 쌍단검을 휘둘렀다.
손잡이에 동그란 고리가 달려서 손가락에 끼고 돌릴 수 있는 두 자루의 단검은 치명상보다는 조금이라도 생채기를 입히는 데 특화되었다.
왜냐하면.
"크어어어어!"
세르펜이 고통에 날뛰었다.
두 자루의 단검에 맹독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분노한 세르펜이 미쳐 날뛰었지만, 칸 아르얀은 순간적으로 세르펜의 시야에서 벗어나더니 '무음'으로 소리 없이 움직여 세르펜의 감각을 교란시켰다.
금방 세르펜이 잡혔다.
"후우, 어땠어? 오랜만이라 시간이 좀 걸렸네."
"허풍 떨지 마. 현역 때도 세르펜 잡는 건 그 정도 속도였으니까."
"그런가?"
죽은 세르펜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선수들은 혀를 내둘러야 했다.
"7영웅이라더니."
"사냥 속도는 정말 빠르다."
"저게 어딜 봐서 48세야?"
외모도 그렇고 실력도 그렇고, 나이답지 않은 칸 아르얀이었다.
뜬금없이 새로 영입되어 나타난 칸 아르얀은 뜻밖에도 날랜 몸놀림과 능숙한 사냥 솜씨로 같은 포지션의 근접 딜러들을 긴장시켰다.
지난번 베를린 블리츠와의 평가전에서 출전한 근접 딜러의 숫자는 3명인데, 사니야야 붙박이 주전이지만 나머지 두 자리는 경쟁이 더 치열해진 셈이었다.
칸 아르얀의 합류로 YSM은 더욱 힘을 받았다.
이는 비단 칸 아르얀 본인의 역량 때문만이 아니었다.
"자, 경기가 시작되면 바로 무기를 칸에게 건넨다. 최대한 빨리 하는 거야! 특히 활쟁이들 두 명! 너희 화살은 꼭 칸에게 부탁해서 독을 발라야 해!"
"옛!"
바로 칸의 초능력 '맹독' 덕분이다.
소지하고 있는 무기에 맹독을 깃들게 할 수 있는 칸의 초능력을 활용, 모두가 독이 발라진 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특히나 이나연과 개리 같은 활잡이들에게는 더없이 유용했다.
위력이 다소 약한 화살에 독이 첨가되어서 사냥이 더 빨라졌을 뿐더러, 잘하면 킬도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 바쁘다. 서문, 이거 노점 장사 하는 것 같은 기분이야."
계속 동료들의 무기에 독을 첨가한 뒤 돌려주는 일을 반복한 칸은 진땀 흘리며 토로했다.
서문엽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축복받은 줄 알아. 넌 이 초능력 하나만 갖고도 배틀필드로 먹고살 수 있어. 애들이 네가 독을 발라준 무기로 킬을 거두면, 넌 자동으로 어시스트를 추가하게 되는 거라고."
"어라? 진짜야?"
"그래. 가만히 앉아서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건데, 잘하면 한 경기 최다 어시스트 기록도 갈아치우겠다. 그럼 어시스트 수당도 많이 받을 수 있고, 이런 꿀 빠는 포지션이 어디 있어?"
"그러네."
칸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의 맹독은 최대 30분간 지속되는데, 30분마다 독을 발라주는 일을 하면 되는 거여서 어려울 게 없었다.
나이 탓에 지구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칸이지만, 그 지구력이 재활 훈련으로도 올라오지 않는다 해도 서문엽은 칸에게 주는 주급이 아깝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런 활용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
독으로 무장한 YSM의 사냥 속도는 전보다 더 빨라졌다.
무려 1.3배 빨라진 사냥 속도!
거기에 가브리엘 감독의 주문에 따라, 동료를 활용하는 연계 플레이를 보강하여 속도는 더 빨라졌다.
2024년, 전반기 시즌을 앞둔 YSM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 동료(3) > 끝
< 과시(1) >
<7영웅의 시대가 돌아오나>
칼 아르얀의 등장으로 7영웅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다. 그래서 이를 자세히 다루는 언론 매체도 늘어났다.
17년의 세월을 건너뛰고서 젊음을 유지한 채 나타난 서문엽.
원채 어렸기 때문에 적절한 나이에 선수로 나타난 슈란.
세계적인 감독으로 활약한 엠레 카사.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 감독으로 나타난 백제호.
그리고 이제는 폐인이 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나 싶었던 칸 아르얀까지 선수로 나타났다. 칸 아르얀의 선수 데뷔는 누구도 예상 못 한 깜짝 뉴스였다.
칸 아르얀이 이제 와서 선수로서 가치가 있을까?
그것은 모두가 주목하는 일이었다.
'선수라니······.'
가장 머릿속이 복잡해진 사람은 엠레 카사 감독이었다.
그는 한국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TV 앞에 앉았다. 이제 곧 칸 아르얀이 출전하는 데뷔전 경기가 시작된다. 아마 전 세계가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코치로 영입할 줄 알았더니, 선수라니. 서문엽이 칸에게서 무엇을 본 거지?'
겉보기엔 아닌 것 같아도, 엠레 카사 감독은 세상에서 서문엽을 가장 고평가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서문엽이 선수로 영입했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젊은 적 칸 아르얀은 대단했지. 결점이 없고 소리 없는 전투는 위협적이었어.'
7영웅 멤버는 전부 7인에 뽑힐 만한 역량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 시절의 칸 아르얀을 저평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혹시 한국 리그에서만 써먹으려고 영입했나?'
많이 쇠락했어도 칸 아르얀이라면 아직 한국 리그 정도에서는 통할 수도 있었다.
스피드 빼면 시체였던 백제호도 일전에 올스타 이벤트 경기에서 활약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엠레 카사 감독은 서문엽이 고작 그 정도 목적으로 선수 영입을 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한창 키우고 있는 어린 선수들이 많아. 출전 기회는 그 어린 선수들에게 몰아줘도 모자란데 늙은 옛 동료를 쓸 이유가 없지. 그럴 거였으면 차라리 코치나 시켰을 거야.'
즉, 선수로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YSM 같은 작은 클럽에서 그만한 연봉을 주고 영입한 것이리라.
코치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칸 아르얀을 매몰차게 거절했던 엠레 카사 감독으로서는 못내 신경 쓰였다.
혹시나 그렇게 걷어차 버린 칸 아르얀이 실은 훌륭한 선수감이었다면 속이 쓰릴 터였다.
그리고 YSM의 전력이 강화된다는 게 더 문제였다.
'아직 미숙하지만 만만치 않은 팀이었다. 서문엽과 피에트로가 있고, 사니야 같은 재능 있는 선수도 있었어. 개리 윌리엄스도 원거리 딜러로서 예상보다 훨씬 움직임이 좋았지. 파울 콜린스도 어설프지만 단단했고.'
YSM이 거기서 옵션을 하나 더 추가한다면. 그리고 미숙한 팀플레이를 보완한다면. 그때는 월드 챔피언스리그에 또 다른 강적이 탄생하는 거였다.
칸 아르얀은 젊을 적에는 엄청난 초인이었기 때문에 분명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선수들이 입장합니다. YSM, 그리고 상대 팀은 쌍성 스피리츠라는 한국 팀입니다. YSM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매 시즌 우승 후보 클럽이었다고 하는군요.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전통의 강호였지만, 지난 시즌에 YSM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연한 일이죠. 한국 리그 수준에 베를린 블리츠와 일전을 겨루는 클럽이 나타났는데 적수가 있겠습니까?
경기를 중계해 주는 독일 해설진이 설명을 늘어놓는다.
한국 리그 경기를 독일에서 중계한다.
서문엽이 귀환하기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독일에서 중계하는 목적은 오직 서문엽이었기 때문에, 중계진의 해설도 서문엽 위주였다.
이제는 서문엽뿐만이 아니라 YSM 자체에 관심을 갖고 분석하는 추세. 그만큼 YSM에 주목할 만한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칸 아르얀 선수의 얼굴이 보입니다.
-지난번 기자 회견 때는 낯을 많이 가리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당당하네요. 표정에 자신감이 보여요. 짧은 시간인데 오늘 경기를 위해 준비를 잘한 걸까요?
-원래 평소의 모습과 던전에서의 모습이 전혀 다르기로 유명한 선수였죠. 오늘은 던전으로 향하고 있는데 겁먹을 리 없습니다. 옛날 모습을 다시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더 재밌으니까요.
-하하하하.
-오늘은 피에트로 선수가 빠졌는데, 대신 서문엽 선수가 출전합니다. 쌍성 스피리츠로서는 안됐군요.
-그래도 칸 아르얀 선수의 중요한 데뷔전이니만큼 서문엽 선수도 직접 활약하기보다는 양보를 많이 하겠죠.
경기가 시작되었다.
던전에 접속하자마자 YSM의 선수들이 칸 아르얀에게 자기 무기를 건네기 시작했다. 칸 아르얀은 무기에 맹독을 걸어서 되돌려주었다.
'맹독을 걸어주는군. 지속시간은 30분이었던가? 저것만으로도 좋은 옵션인데.'
엠레 카사 감독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다.
모든 선수 무기에 독 속성을 걸어준다는 건 상당히 유용한 서포트였다.
저 초능력에 피지컬도 어느 정도 된다면, 베를린 블리츠 BC의 서브 선수로 기용해도 좋았을 터였다.
'당연히 선수로 쓰는 건 생각도 못 했는데.'
만약 선수로 영입했다면, 이적료 한 푼 안 들었을 것이다. 그게 아까운 엠레 카사 감독이었다.
-무기에 독이 걸려 있어서인가요? 사냥 속도가 상당히 빠릅니다. YSM!
-놀라운 효과입니다. 요즘 잘 쓰지 않는 활잡이를 2명이나 출전시킨 YSM인데요, 화살에 독이 걸려 있으니 위력이 전혀 딴판이 됐습니다!
-화살에 맞고 비틀거리는 괴물들! 독에 대한 내성이 기본적으로 있는 괴물들인데도, 칸 아르얀의 맹독은 정말 강합니다!
-괴물도 저 정도면, 사람에게는 더 잘 통하겠죠. 활잡이 2명이 있는 YSM으로서는 칸 아르얀의 영입이 신의 한 수가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칸 아르얀 자신도 어느 정도 경기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때의 이야기죠.
-예, 동료들 무기에 독만 걸어주는 건 서포터입니다. 칸 아르얀은 근접 딜러로서의 역량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나연과 개리 윌리엄스가 빠른 사냥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나연이 괴물들을 유인해 오고, 개리가 저격한다.
개리의 합금 장궁은 놀라운 위력의 화살을 날렸다.
괴물들의 단단한 외피를 뚫고 깊게 틀어박히는 화살. 화살촉의 맹독이 괴물들의 신체 깊숙이에서 퍼져 나간다.
칸 아르얀도 쌍단검을 들고 사냥에 참가했다.
시야 밖에 있다가, '무음'을 펼치고 뛰어든다. 소리가 없어서 괴물은 단검에 찔릴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난도질. 외피를 뚫고 푹푹 찌르는데 소리가 없다.
칸 아르얀의 무음은 이 점에서 적에게 강한 괴리감을 준다.
눈에 보이는데도, 서로 충돌하는데도 소리가 안 나니 차라리 투명화되어 모습을 감췄을 때보다 더 심한 착시를 주는 것이다.
칸 아르얀은 숨었다가 기습하는 암살자가 아니라, 상대의 감각에 괴리감을 주어서 손발이 꼬이게 만드는 전투 수법을 구사한다.
그 옛날, 엄청난 스피드와 순간 이동을 쓰는 백제호와 함께 얼마나 많은 괴물을 쓰러뜨렸던가.
-칸 아르얀! 사냥은 합격점입니다! 대단히 날렵하고 능숙합니다! 20년 가까이 쉰 사람 맞나요?
-선수 복귀하고 준비 기간 없이 바로 투입됐는데도 상당한 솜씨입니다. 역시 옛날의 기억을 떠올린 덕분일까요!
순식간에 1구역을 정리하고, 1구역의 보스 몹인 '살리오릭토'와 맞닥뜨렸다.
살리오릭토는 그리스어로 달팽이와 광물이 합쳐진 합성어였다.
수십 개의 긴 더듬이를 가진 거대한 달팽이인데, 금속과 오러로 이루어진 거대한 껍데기를 짊어지고 있다. 실제로 광물과 오러를 흡수하여서 저 껍데기 안에 저장하는 습성을 지녔다.
광물만 있어도 생존하지만, 지저 문명이 개조한 괴물들이 흔히 그렇듯 살아 있는 먹이를 환장하게 좋아한다.
서문엽이 방패를 가로로 눕혔다.
칸 아르얀은 싫은 기색이었지만 서문엽이 노려보자 순순히 방패 위에 올라탔다.
서문엽이 칸 아르얀을 힘껏 던졌다.
살리오릭토의 몸 위로 날아드는 칸 아르얀.
수십 개의 더듬이가 쏘아졌지만 정확도가 낮아 피하기 쉬웠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모두 피해낸 칸 아르얀이 머리 위에 착지.
쌍단검을 흐물흐물한 몸 위에 박아 넣으며 공격을 개시했다.
살리오릭토가 격렬히 몸을 비틀며 더듬이로 마구 공격했다.
칸 아르얀은 갈대숲을 헤치고 지나가듯, 유연하게 더듬이를 피하거나 단검으로 베며 그 사이를 누볐다. 쌍단검을 교차하며 베니 단단한 더듬이도 쉽게 잘려 나갔다.
-정말 날렵합니다, 칸 아르얀!
-저 사이를 마음대로 누비네요! 더듬이들을 다 피하고 있습니다! 아직 죽지 않은 7영웅의 클래스를 보여줍니다!
서문엽이 창을 던져서 마무리 지었다.
-1구역이 붕괴됩니다. 60초, 59초, 58초······.
-벌써 1구역 클리어! YSM, 베를린 블리츠와의 시범 경기 때도 그랬지만 사냥 속도가 무척 빨라요.
-사냥은 배틀필드의 기본입니다. 배틀필드의 취지가 또다시 전쟁 때처럼 괴물들이 나타났을 때 대항할 능력을 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냥이 느린 팀은 강팀이 될 수 없어요. YSM은 그 점을 생각해 기본기를 다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보니 성공적인 것 같네요.
경기가 지속되면서, 쌍성 스피리츠 선수들과 마침내 충돌했다.
쌍성 스피리츠는 상대가 YSM이다 보니 무려 5탱커를 동원했다.
방어에 전념하고 무리하게 공격 들어온 적을 커트해서 역습을 꾀한다는, 강팀을 상대하는 약팀의 기본 전술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5탱커는 YSM을 상대로 독이 되었다.
이나연이 '점프'로 사방팔방 날뛰며 독화살을 뿌린 것이다.
본래 화살 자체는 별 위협이 안 되던 이나연이었지만, 칸 아르얀의 맹독과 합쳐지자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다.
동서남북과 공중에서 마구 날뛰는 이나연에 의해 쌍성 스피리츠의 진형이 붕괴되었다.
서문엽은 직접 나서지 않고 칸 아르얀에게 턱짓했다.
칸 아르얀이 진형 붕괴된 적 틈으로 파고들었다.
개리가 합금 장궁으로 저격을 하여 지원 사격을 해주었다.
쌍단검의 동그란 고리를 손가락에 걸고 빙글빙글 돌리며 침투한 칸 아르얀. 적들 사이를 누비며 주위의 적들에게 닥치는 대로 생치기를 입혔다. 독이 상처를 통해 스며들어 적들을 죽였다.
단검이 살갗을 베고, 무기끼리 충돌해도, 빠르게 뛰어다니는데도, 소리가 없다.
눈앞에 보이는데도 소리가 안 나니 감각이 왜곡되는 착시를 느꼈다.
숨 가쁜 싸움에서 선수들은 오로지 감각과 본능에 집중한다. 그런데 그 감각 중 청각이 왜곡되니 손발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칸 아르얀, 1킬.
-칸 아르얀, 2킬.
2킬을 거두고 빠져나온 칸 아르얀.
하지만 그 후에 중독된 쌍성 스피리츠 선수들이 더 죽어나갔다.
-칸 아르얀, 3킬.
-칸 아르얀, 4킬.
칸 아르얀이 활약하니, 같은 포지션인 사니야도 자극받았다. 근력 강화로 힘을 40% 상승시킨 뒤 장창을 휘두르며 지리멸렬한 적들을 분쇄한다.
-사니야 아흐메토바, 1킬.
-사니야 아흐메토바, 2킬.
지원 사격만 하던 이나연과 개리도 1킬씩 거두었다. 화살에 독이 맺혀 있는 덕분이었다.
심영수도 '속박'을 걸며 동료들을 보조.
서문엽이 가만히 있어도 쌍성 스피리츠는 그야말로 믹서에 갈려 나가듯 박살 났다. 무려 5탱커였음에도.
'강팀이다.'
엠레 카사 감독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월드 챔스 우승을 방해하는 또 다른 강적이 생겼다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그의 심정을 독일 중계진이 대변해 주었다.
-칸 아르얀 선수 대단합니다! 1세트에서 4킬 11어시! 본인의 킬 능력도 증명했고, 동료들의 무기에 맹독을 걸어준 덕에 어시가 자동으로 쌓였습니다. 구단주 서문엽, 저런 근접 딜러를 이적료 한 푼 없이 얻었네요.
-YSM을 상대해야 하는 팀들은 배가 아프겠어요.
< 과시(1) > 끝
< 과시(2) >
한국은 외국인 선수 제한이 5인인데, 본래 3인이었다가 선수층이 너무 얇아서 확대했다.
배틀필드 초창기에 해외로 떠났던 한국 출신 초인들을 다시 불러들일 목적도 있었다. 일단 외국인 용병으로 오게 한 뒤에 국적을 다시 회복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초인은 국력이었으니까.
그러나 한 번 떠난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거짓말처럼 시작된 초인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 각종 사회적 제약 등에 실망한 탓이었다.
외국인 용병도 한국에 오려는 선수는 제한적이었다. 커리어의 무덤인 이곳에 오는 외국인 선수는 한국 선수들과 그리 큰 실력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외국인 용병을 엄청난 실력자로 채운 팀이 있었다.
단연 YSM.
베를린 블리츠 BC의 유망주 출신 파울 콜린스.
빅 클럽들도 탐내는 카자흐스탄의 천재 소녀, 사니야.
빅 리그를 두루 경험한 베테랑 개리 윌리엄스.
거기에 7영웅 출신 칸 아르얀까지.
피에트로는 한국에 귀화했으니, 아직 외국인 선수를 하나 더 영입할 수 있었다.
도저히 한국의 다른 팀들이 보유할 수 없는 퀼리티 높은 용병 군단!
YSM에게 학살당하는 다른 팀들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
그러나 서문엽 덕에 KB-1 리그의 중계권이 엄청나게 팔려 나갔고, 배틀필드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늘어나 클럽들의 수입도 덩달아 늘었다.
클럽들은 그런 돈으로 좋은 지도자를 영입하는 데 투자했다. 이제 한국 선수도 해외 진출이 활발해졌다. 유망주를 잘 키우면 비싸게 팔 수 있다. 그러니 선수를 잘 키워줄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해외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는 리그가 된 덕에 이곳에서 뛰겠다는 외국인 선수도 전보다 늘었다. 그런 용병들과 경쟁하기 위해 한국 선수들도 훨씬 더 노력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서문엽에 의해 한국 배틀필드가 급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쌍성 스피리츠 애들도 작년보다는 많이 늘었네."
칸 아르얀의 충격적인 데뷔전이 끝났다.
1세트 때 무참히 깨진 쌍성 스피리츠는 의외로 2세트는 완강히 저항했다.
1세트는 칸 아르얀의 효과를 몰랐기에 5탱커로 거북이 작전을 펼쳤지만, 2세트는 4탱커로 줄이고 한 타 싸움의 포메이션을 바꿔서 치열하게 맞섰다.
효과가 있었는지 칸 아르얀은 1세트와 달리 2킬 11어시 정도로 그쳤다. 물론 이것도 엄청난 기록이었지만 말이다.
대신 사니야가 필살기인 '근력 강화' 후 '양손 내리 찌르기'를 펼쳐 탱커 라인을 강제로 부수며 3킬 4어시를 올렸다.
"쌍성 스피리츠도 지난 시즌 말에 코치진을 새로 구성했습니다. 유럽에서 데려온 인사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은퇴하고 지도자 인생을 시작한 선수도 포함되어 있는데, 과연 한 타 싸움을 벌이는 포지션이 좀 더 세련된 모습입니다."
가브리엘 감독이 말했다.
서문엽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발전해야지. 그래야 상대할 맛이 나지."
오늘 서문엽은 잠잠했다. 되도록 나서지 않고, 팀플레이가 매끄럽게 연결되도록 돕는 역할만 했다. 피에트로는 아예 출전도 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 덕에 칸 아르얀의 확실한 데뷔전이 되었으며, 다른 선수들도 파워풀한 플레이를 해서 에이스 한둘에 의지하지 않는 진정한 강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승리 후에 인터뷰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통역 역할로 서문엽이 칸 아르얀, 가브리엘 감독과 함께 기자회견에 나왔다.
"감독님, 칸 아르얀 선수의 활약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구단주가 장담하던 대로 대미지 딜링이 훌륭한 근접 딜러였고, 그의 맹독은 전술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었습니다. 나이에 비해 몸 상태가 아주 좋아서 놀랍기도 했습니다."
가브리엘 감독은 칸 아르얀의 실력을 칭찬했다.
칸 아르얀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지만, 얼마 전에도 기자 회견을 했기 때문에 이제 궁금한 점이 별로 없었다.
마지막으로 서문엽에게 질문이 갔다.
"올해 목표가 월드 챔스라고 여러 번 언급하셨는데, 현재 전력으로 목표를 어디까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는 4강도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남아 있고, 계속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월드 챔스 무대에 나왔을 때 우리가 완전히 준비된 상태라면, 우승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서문엽이 준비 중인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신수경.
이제 막 프로가 된 풋내기였지만, 재능은 거의 백하연에 필적하는 수준으로 한국 선수 중 역대급이었다. 쌍둥이 동생 신태경이 역대급 재능으로 유명세를 떨치고는 있지만 말이다.
경기도 나가지 않은 채 훈련만 하며, 실전도 오직 서문엽이 일대일로 봐주고 있다. 처음부터 눈높이를 세계 레벨로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렇듯 비밀 병기로 키우는 신수경이 서문엽이 갈고 닦고 있는 회심의 카드였다.
준비 중인 다른 하나.
그것은 바로 서문엽 자신이었다.
-영혼 연성: 육신이 한계를 넘어도 깨지지 않는다. 극한에 도달한 능력치가 1씩 한계가 늘어난다.
재능에 한계가 없어진 서문엽.
언젠가 예언의 괴물과 대적할 날에 대비하여서 끊임없이 수련 중이다.
계속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배틀필드를 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였다.
-대상: 서문엽(인간)
-근력 94/95
-민첩성 98/99
-속도 95/96
-지구력 97/98
-정신력 110/111
-기술 105/106
-오러 105/106
-리더십 100/101
-전술 100/101
-초능력: 분석안, 던지기, 불사, 증폭, 영혼 연성.
근력은 92에서 94로 2 올랐다.
속도도 94에서 95로 1 증가.
지구력은 95에서 97로 2 높아졌다.
약점이었던 근력과 속도가 이제는 세계에서도 수위에 올랐다.
묵직하게 힘으로 버티고 서는 클래식 탱커들과 비교해도 수위에 이른 힘과 지구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스피디하고 테크니컬한 스타일을 구사하는 말도 안 되는 사기 캐릭터였다.
이렇듯 모든 면에서 완벽하니, 세계에서 가장 실력 좋은 선수들만 모여 있는 베를린 블리츠 BC를 상대로도 혼자 서너 명씩 상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당초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가 남들과 차원이 다른 서문엽은 이에 만족할 리 없었다.
'이제 능력치가 높아져서 쉽게 안 오른단 말이야.'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만인릉 황제의 수준.
언데드가 되어 힘이 약해졌음에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던 만인릉 황제. 살아생전에는 대체 얼마나 강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예언의 괴물과 싸우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때 이후로 세월이 더 흘렀으니, 그동안 괴물은 더 강해졌을 게 아닌가?
''불사'나 '무기 영체화' 없이도 베를린 블리츠 같은 녀석들을 혼자 쓸어버릴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실로 어마어마한 목표치를 잡고 있는 서문엽.
사실 배틀필드의 아바타 서문엽과 실제의 서문엽은 강함의 차이가 너무 컸다.
서문엽이 만약 영체로 변신하거나 '무기 영체화'를 펼치면 몇 명이 덤비든 스포츠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 될 터였다.
그것은 모든 재주를 다 펼칠 수 없는 피에트로와 같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배틀필드에 전념하는 것은, '불사'나 '무기 영체화' 이외의 부분을 단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근력, 민첩성, 속도, 지구력 등 피지컬 말이다.
'그런데 역시 혼자서 수련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어. 죄다 100이 넘거나 100에 가까워지니까 더럽게 안 오르네.'
독자적인 수련법으로는 한계가 보였다.
본래 그 정도 능력치면 이미 최상의 수준이라 거기서 1이라도 더 올리기가 쉬울 리 없었다.
그럴수록 더욱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다행히 YSM은 가브리엘 감독부터 시작해서 선수 육성에 특화된 코치진이 많았다.
경기가 끝난 후, 서문엽은 가브리엘 감독과 면담을 했다.
"무슨 일로 면담을 요청하신 겁니까?"
평소에 자주 둘이 얘기를 나눴지만, 서문엽이 따로 면담을 갖고 싶다고 요청하는 경우는 없었던 탓에 가브리엘 감독은 의아함을 느꼈다.
"감독은 전에 파리 뤼미에르에서 수많은 선수를 키웠었잖아."
"예."
"내가 요즘 성장이 좀 더뎌서 고민이야."
"···네?"
가브리엘 감독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본 구단주는 최근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다. 그런데 저런 소리를 하다니?
"구단주님, 아시겠지만 구단주님은 유소년도 유망주도 아닙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클 나이는 지나셨지요. 나이를 감안하면 지금의 피지컬 성장 속도도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만."
"그렇긴 한데, 꾸준히 오르다가 요즘 들어서는 진전이 안 보인단 말이지."
"일단, 저는 파리에서 유소년을 지도한 감독이었습니다. 훈련을 시키면 시키는 대로 쭉쭉 성장하는 아이들만 가르쳤죠."
"그렇긴 하지."
"그런데 제가 알기로 구단주님은 이제 단기간에 쉽게 피지컬을 끌어 올릴 수 있는 구간은 지났습니다."
서문엽도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고민이라 면담을 신청한 게 아니겠나.
"이 이상 조급하게 피지컬을 끌어 올리면 신체를 컨트롤하는 균형 감각이 무너져 오히려 역효과일 수도 있습니다. 구단주님도 그 점이 걱정이었습니다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게 없었죠."
"나도 신경 많이 썼으니까."
"예, 자기 자신의 육체이고 구단주님이 스스로의 몸을 잘 컨트롤하니까 그런 피지컬 성장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에 지장이 없었던 것이죠. 제가 보기에는 지금으로도 이미 충분해 보이는데, 더 욕심낼 필요가 있을까요? 솔직한 평가로는 나단 베르나흐도 무난히 이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아직 부족해. 난 더 강해져야 해."
"흐음······."
가브리엘 감독은 끊임없이 강해지려 하는 서문엽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 나이가 30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즌 피지컬이 더 성장한 것이 경이로웠다.
이전에는 톱3와 최고의 지위를 경쟁할 만했다면, 지금은 이미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는 기량이었다.
그런데도 더 강해져야 한다는 사명감이 보인다.
"피지컬이야 무작정 올리려고 한다면 못 올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균형을 생각지 않은 성장은 역효과인 것을 아실 테지요?"
"알지."
"구단주님은 파울 콜린스처럼 다 덮어놓고 근력만 올리면 되는 것도 아니고, 이나연처럼 달리기만 죽어라 연마해서도 안 됩니다. 구단주님은 현재 최적의 상태로 보여 집니다. 그 정도 근력을 가졌으면서 그 정도로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건 놀라울 정도죠."
이나연은 몸이 가벼워도 된다. 달리기도 해야 하고 점프도 해야 하니 속도만 올인했다.
하지만 서문엽은 가벼워서는 안 된다. 모든 능력치를 고루 최고로 올린다는 것은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부터는 전문가가 아닌 스스로 개척하셔야 하는 영역입니다. 어떤 전문가도 육체의 주인보다 더 그 육체를 잘 알지 못하니까요. 균형을 유지한 채 피지컬을 계속 키우시려면 이제는 구단주님이 스스로 몸 상태를 느끼면서 과하지 않는 선에서
연마하셔야 합니다."
"누군가가 지도해 줄 수 있는 수준은 지났다는 뜻이네. 그런데 좀 더 구체적인 조언은 없을까?"
그 물음에 가브리엘 감독은 고민 끝에 말했다.
"구단주님, 더 강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렇지."
"그런데 정말 더 강해져야 한다는 걸 몸으로 절감한 적이 있습니까?"
"···음?"
"없으셨지요?"
서문엽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만인릉 황제와의 싸움을 마지막으로, 힘든 싸움을 한 적이 없었다.
"베를린 블리츠와 평가전 때는 고전하셨지만 부족함을 느끼실 상황은 없었죠. 그때도 주로 근접 전투보다는 적의 초능력에 의해 당하신 것이니까요. 피지컬이 부족해서 진 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그랬다.
그때 3세트 마지막 상황에서 혼자 4명에게 둘러싸여 싸웠다.
그때도 그 와중에 2킬을 거둔 서문엽.
그러나 베를린 블리츠 선수들은 근접 전투보다 초능력을 활용하며 싸웠다.
가까이서 피지컬과 무기술만으로 싸웠다면 이길 수 있었을 터. 그러나 초능력으로 집중 공격하니, 오러가 거의 소진된 상태로는 견딜 수 없었다.
힘이 더 세야겠다.
더 빨리 움직였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필요성을 몸으로 체감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 정도로 서문엽의 육체는 완벽했으니까.
"그런 필요를 몸으로 느낄 만큼 강한 상대와 많이 싸워봐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인간 중에는 그런 상대가 없을 것 같군요."
괴물 중에도 없었다.
현재 배틀필드로 출시된 던전 중 서문엽이 혼자서 사냥 못 하는 괴물은 없었다. 구역 보스 몹이든 최종 보스 몹이든 다 잡을 수 있었다.
서문엽은 좋은 생각이 들었다.
'여왕에게 부탁해서 내 연습용 던전을 만들어달라고 할까? 페널티 없이도 접속해서 싸울 수 있고, 그럼에도 이기기 쉽지 않은 엄청난 괴물이 있는 던전으로.'
< 과시(2) > 끝
< 선생(1) >
'감독 말이 맞아. 실전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보완하는 수련이어야 돼.'
그것은 실제로 전쟁 시절 서문엽이 해왔던 방식이었다.
던전을 공략하고, 그 뒤는 경험을 토대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수련을 했다.
그런 식으로 능력치를 모두 한계까지 올렸으며, 그 때문에 서문엽은 스스로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서문엽은 완전히 달랐다.
부족했던 근력과 속도가 이제 한계가 없어졌다. 또한 '불사', '증폭', '무기 영체화' 등의 초능력도 생겼다.
이 차이가 얼마나 크냐면, 옛날 동료 초인들과 함께 팀을 짜서 사활을 걸고 공략해야 했던 공략 불가 던전들을 이제는 혼자서 공략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실로 엄청난 힘의 격차였다.
과거부터 쭉 고수했던 전투 스타일의 변화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과거의 나를 토대로 수련을 했으니 능력치가 늘지를 않지. 다시 실전을 통해서 내 전투 스타일부터 다시 정립해야 해.'
그러려면 서문엽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강력한 상대가 필요했다.
'불사', '증폭', '무기 영체화'를 총동원해도 이길 수 없는 막강한 적 말이다.
'강력한 괴물. 즉, 예언의 괴물을 모티브로 삼은 괴물이 있는 던전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결전의 날에 대비한 전투 시뮬레이션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일단 가능한지 물어봐야겠다.'
서문엽은 피에트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피에트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파앗!
"뭐냐?"
YSM 클럽하우스의 서문엽 사무실에 피에트로가 불쑥 나타났다. 전화보다 공간 이동이 더 편한 전 지저인 피에트로였다.
"너 예언의 괴물 만나봤지?"
"영령계에서는 여러 번 만났지."
"영령계에서는 어떻게 생겼고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다면서?"
"놈이 숨기고 있는 한은. 영혼을 다루는 능력은 나보다도 뛰어났다. 놈이 숨기면 나는 파악하기 어렵다. 당연히 놈도 내가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고."
"영령계 말고 전에 한 번 녀석이 사는 세계에 가서 본 적 있었잖아."
"날 속여서 내 영혼을 붙잡아두려 했었지."
"그때 녀석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힘을 가졌는지 파악은 좀 했어?"
"조금의 빈틈도 없이 날 에워싸서 가둬놓고 있었지. 그래서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볼 수 없었다."
피에트로의 대답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곧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놈의 속박에서 벗어나 탈출하는 과정에서 살짝 존재감을 느끼긴 했지."
"최대한 구체적으로 말해봐."
"수천 년 된 거목처럼 굵은 몸통의 연체동물이었다. 똬리를 틀어서 나를 안에 가뒀었지. 예상컨대 거대한 뱀이었다."
"거대한 뱀이라. 다른 건?"
"똬리를 튼 몸통을 따라서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오러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지."
"몸통 자체도 단단하겠지?"
"생체 조작해서 만들어진 괴물이 그 정도까지 성장했으면, 오러를 주입한 무기로 찔러도 상처가 안 날 거다."
"···거 존나 세겠네."
"지금의 짐조차 못 이기거든, 어차피 미래가 없으니 그냥 뒈져라."
만인릉의 황제의 독설이 생각났다.
만인릉 황제는 언데드 상태에서도 무기 영체화를 썼다.
서문엽이 무기 영체화를 터득하지 못했더라면 피에트로와 아무리 합공해도 못 이겼을 터였다.
무기 영체화는 예언의 괴물을 상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는 뜻이었다. 이걸 못하면 생채기도 못 입히니까 말이다.
도무지 희망이 안 보이는 까마득한 대적의 묘사를 들었지만, 서문엽은 기죽지 않았다.
"여왕이랑 얘기해서 그런 괴물을 배틀필드로 구현할 수 없을까?"
"실전 연습용인가."
"그래."
"여왕 측이 가진 기술로는 없는 것을 창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확히는 '관측'이라는 여왕의 수하 지저인의 기술이다. '관측'은 기억 속에 저장된 대상을 똑같이 구현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기억 속에도 없는 새로운 것은 구현하지 못한다.
피에트로가 말을 이었다.
"내가 돕는다면 가능하겠지."
그 말에 서문엽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진즉 그렇게 얘기해야지. 꼭 말하다가 마지막에 자기 능력을 생색내네."
"생색 안 냈다."
"네 말투는 잘난 체에 특화되어 있거든?"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이만 여왕에게 가서 그 문제를 상의해 보지."
팟!
피에트로는 사라져 버렸다.
***
그러고서 곧 여왕의 연락을 받았다.
-잘 계셨나요? 배틀필드에서의 활약상은 잘 봤어요.
"애들 놀이지 뭐. 그쪽은 어때? 흔적이라도 찾았어?"
-못 찾았어요. 첫 번째 상급 사제는 흔적을 지우는 데도 능한 데다, 아예 이동 흔적이 남아 있던 공간 자체를 폐기해 버렸어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는 뜻이리라.
첫 번째 상급 사제, 즉 타락한 대사제는 이미 서문엽, 피에트로와 싸워서 크게 당했다. 괴물 제작의 대가였던 다섯째 상급 사제가 죽임당하는 치명타도 입었고.
생각이 있다면 다시는 싸울 엄두를 못 낼 터. 아마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럼 이제 어딘가에 처박혀서 문을 열 궁리만 하고 있다는 뜻인데, 더 고약하게 됐군."
-그래도 다섯째를 비롯해 수많은 동료를 잃었으니 큰 차질을 빚었을 거예요.
"어쨌거나 그럼 이제 녀석들을 추적할 실마리는 아무것도 없는 거야?"
-희망을 걸고 있는 단서는 아직 있어요.
여왕이 설명했다.
-버려진 세계와의 시공을 연결하려면, 결국 버려진 세계의 위치를 알아야 해요. 버려진 세계는 이미 봉인까지 걸려 있어서 탐색으로는 찾을 수 없으니까요.
"너희들의 개념을 내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탐색으로 못 찾으면 위치를 알 방법이 없는 거 아니냐?"
-맞아요. 하지만 만인릉 황제 시대 때 문이 한 번 열렸었죠.
"그때는······."
서문엽은 말을 하다 말고 여왕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긴 세월이 흘러서 역사를 연구하던 누군가가 버려진 세계를 찾아냈지. 그리고는 함부로 그곳으로 이어지는 시공의 터널을 열고야 말았다."
만인릉 황제가 했던 말 속에 힌트가 있었다.
"역사를 연구하다가 문을 열었다고 했지."
-네, 그것과 관련된 역사는 이미 오래 전에 말소됐지만, 아직 처분되지 않은 사료(史料)가 남아 있을 수도 있어요. 아마 첫 번째 상급 사제는 그것을 찾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사료가 남아 있기나 하겠어?"
-얼마 전에 서문엽 씨가 선물을 받았죠?
"선물이라니?"
-고대 시대의 어느 대사제님께서 남기신 유산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한계를 끊임없이 늘려주는 '영혼 연성'을 뜻했다.
"아하, 그렇지. 덕분에 쑥쑥 강해지고 있어."
-그분처럼 개인 공간에 유산을 비밀리 남기신 선조님들이 여럿 계실 거예요. 그중 폐기되어야 할 역사 사료를 보존하고자 했던 선조님 또한 계실 수 있을 테고요.
그런 개인 공간은 또 어떻게 찾을 생각인지,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졌다.
"아 몰라, 그건 알아서 하고. 그보다 내가 요구한 훈련 설비는 만들 수 있겠어?"
-대사제, 아니, 피에트로 씨가 도와주시면 어떻게든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미 있는 괴물을 개조해서 대형화하고 긴 세월 걸쳐 성장하는 과정을 가상공간에서 빠르게 시뮬레이션 돌려야 할 것 같지만요.
"뭐래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되는 줄 알고 끊는다."
-잠시만요.
"응? 왜?"
-그동안 서문엽 씨도 따로 준비를 하시는 게 어떨까요?
"무슨 준비? 내 수련 말고도 더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하지."
-피에트로 씨에게 들으니 오러 컨트롤의 기초를 뗐다고 들었어요.
"아, 그렇지."
오러로 공중에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슈란의 소멸 광선을 맨손으로 막다가 뜬금없이 깨달아 버린 요령.
하지만 그 뒤로 아직 그 요령을 실전에 녹이지는 못했다.
-그럼 이제 서문엽 씨도 우리 지저인처럼 오러를 다룰 수 있다는 뜻 아닐까요?
"공간 이동 같은 거?"
-호호, 그건 어려울 거예요. 공간 이동은 언어 학습 능력과 마찬가지로 지저인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능력이에요. 이론으로 풀어내면 고난이도의 기술이 되겠죠. 서문엽 씨도 자신의 초능력을 이론으로 설명하라면 쉽지 않잖아요?
"못하지."
-공간 이동은 아직 아니어도 지저인이 흔히 쓰는 유용한 오러 응용법을 습득하시면 도움이 되실 거예요. 저희가 그것을 가르쳐 드릴 선생을 파견해 드릴게요.
"음, 뭐 좋아."
서문엽은 여왕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익힐 수 있는 능력은 최대한 습득해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서문엽 씨가 수련용으로 쓰시는 공간을 약속 장소로 삼으면 되겠군요. 거기로 아랫사람을 보내도록 할게요.
"알았어."
***
블랙홀처럼 생긴 결계로 둘러싸인 몇 평 남짓한 작은 공간.
이 작은 던전은 수련을 위하여 엄청난 중력장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서문엽은 줄곧 이곳에서 수련해 온 탓에 새삼 중력의 압력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지만, 새로운 손님은 달랐다.
팟!
철푸덕!
깡마른 체격의 남성 지저인이 공간 이동으로 나타나자마자 중력에 짓눌려 땅에 납작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했다.
뒤집힌 바퀴벌레처럼 버둥거리지만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지저인.
"너 뭐 하냐?"
서문엽이 한심하다는 듯이 묻자, 깡마른 지저인은 뭐라고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했다.
"한국말로 해, 자식아. 그리고 중력은 오러로 저항해서 떨쳐내면 될 걸 뭐 하고 있는 거야?"
서문엽은 계속 말을 건네면서 지저인이 한국어를 익히는 것을 도왔다.
금방 지저인은 더듬거리는 한국어로 답했다.
-저 1등급······.
그제야 서문엽은 분석안으로 지저인을 살폈다.
-대상: 하인(지저인)
-근력 60/60
-민첩성 82/82
-속도 80/80
-지구력 71/71
-정신력 30/34
-기술 55/55
-오러 63/63
-초능력: 위기 감지, 강자 감지
-위기 감지: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을 감지한다.
-강자 감지: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알아볼 수 있다.
영락없는 1등급 최하 계급의 지저인이었다.
육체노동에 익숙한 탓에 오러 수치보다 육체 능력이 더 높으며, 초능력도 위기가 찾아오면 숨고 자신보다 강자를 알아보고 냉큼 복종할 수 있도록 특화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이름도 '하인' 아닌가.
'1등급 하인이면 중력에 저항할 오러도 못 내겠지.'
서문엽은 자신의 오러를 '하인'에게 나눠주었다.
그러자 일시적으로 중력에 저항할 오러를 얻은 '하인'은 냉큼 일어났다.
-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팟!
그렇게 떠나 버린 하인은 이윽고 이 수련장을 개조해 준 책임자를 데려왔다.
-귀찮게 하는군.
피에트로였다.
피에트로는 이 공간을 유지시켜 주는 던전 코어를 개조해서 과도한 중력을 해제시켜 주었다.
피에트로는 바쁜지 그 일만 처리하고는 휙 사라져 버렸다.
작은 공간에 '하인'과 서문엽만 남았다.
서문엽이 꼬나보자 움찔한 '하인'은 냉큼 조아렸다.
-아이고, 인간 서문엽 님! 악명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동족을 잔학하게 학살하셨다죠?
"그래서 불만이냐?"
-서, 설마요.
'하인'은 이름다운 비굴함으로 동족 문명을 끝장낸 악당에게 굴복했다. 서문엽 앞에 있어서 '강자 감지'를 계속 느끼고 있으니 더욱 비굴할 수밖에 없었다.
"오러 응용법을 가르칠 선생을 보내준다더니, 웬 1등급짜리 하인을 보내? 야, 너희 여왕 나한테 불만 있대?"
-그, 그럴 리가요. 여왕께서는 저로도 충분하실 거라면서 절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뭘 가르칠 건데?"
-일단 오러로 대화하는 법부터 시작할까요? 아까부터 공기와 성대로 발성을 하시는 게 저희들 지저인의 관점에서는 되게 안쓰러워 보여서······.
그렇게 서문엽은 본격적으로 지저인의 오러 응용 세계에 입문했다.
< 선생(1) > 끝
< 선생(2) >
지저인은 빛이 내리는 지상에서는 오러가 억제되기 때문에, '하인'처럼 등급이 낮은 지저인은 1초도 못 견디고 무력해진다. 때문에 이곳을 만남의 장소로 삼은 것이다.
"근데 넌 언제까지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을 거야?"
'하인'은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짚은, 절하기 직전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이 자세였다.
-헤헤, 제가 강한 분일수록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데, 서문엽 님 앞에서는 무릎도 잘 안 펴집니다. 여왕님 앞에서도 허리만 90도였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본분부터가 '하인'인 이 밑바닥 지저인을 보니 서문엽은 절로 가여움을 느꼈다.
"됐고, 편히 앉아."
-헤헤헤,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이게 본능이라······.
'강자 감지'라는 '하인'의 초능력이 이상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너희들 중에 너보다 약한 지저인도 드물 텐데 그래갖고 평소에 생활은 가능하냐?"
-평소에는 고개만 숙이고 사는데, 서문엽 님은 너무 무서워서 무릎도 잘 안 펴집니다요.
"참 딱한 본능이다. 자, 그래서 나한테 오러로 대화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예예. 솔직히 이렇게 강한 느낌이 풀풀 드시는 분이 저희가 만들고 키운 괴물들처럼 육성으로 소리 내는 걸 보면 참······.
"······."
지저인이 인간을 하등하게 본 이유 중 하나가 말을 하는 방식의 차이였다. 소리와 몸짓만으로 의사 표현하는 원시인을 미개하게 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오러로 대화를 주고받는데, 이게 숙달되시면 육성으로 소리 내시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의사 전달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확실히 실전에서 도움이 되겠군."
-아무래도 그렇겠죠? 저야 싸움과는 거리가 멀지만요. 헤헤.
단지 의사소통의 편리성만 생각해서 배우려는 것은 아니다.
지저인의 오러 응용법.
인간은 초능력 사용이나 육체, 무기를 일시적으로 강화하는 것 외에는 오러를 활용할 용도가 없었다.
그에 비해 오러를 활용하여 수없이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지저인의 오러 응용법은 꼭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이 서문엽이 한계를 깨고 더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전에도 오러 컨트롤을 터득하고 나서 오러가 105로 상승했지. 지저인처럼 오러를 사용하는 법을 익힐수록 오러 수치가 늘어날 거다.'
오러량을 늘리는 법은 아직 인간이 발견하지 못했다. 편안한 장소에서 명상을 하는 것이 그나마 알려진 수련법일 뿐이다.
오러는 모든 것의 기본인 만큼 오르면 오를수록 전투력이 상승한다.
배움에 앞서, 서문엽은 일단 몹시 비굴한 포즈로 있는 하인의 자세를 지적했다.
"야, 꿇고 있는 무릎부터 좀 펴고 바로 앉아. 이게 죄인 대질 심문도 아니고 뭐야? 난 그딴 자세로 있는 놈한테 배우고 싶지 않아."
-헤헤, 이게 제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닌, 헉!
서문엽이 창을 꺼내 들고 무릎을 찔렀다.
찔리기 전에 '하인'은 벌떡 일어나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되잖아, 이 새끼야. 그대로 앉아 있어."
-네, 네. 역시 악명대로 사악하신···
"닥쳐."
-네, 헤헤.
상대가 비굴할수록 반대급부로 서문엽의 말투는 절로 거칠어졌다.
어쨌든 하인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언어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잉? 셋씩이나?"
수업은 첫마디부터 인간과 지저인의 큰 차이점을 드러냈다.
-예, 하나는 표음 언어, 둘은 표의 언어, 셋은 상형 언어입니다.
그 말에 서문엽은 비로소 납득할 수 있었다.
"아하, 문자의 분류와 똑같군."
-예, 표음 언어는 지금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오러로 소리를 내어 전달하는 겁니다.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언어지요.
"너희도 보통은 이렇게 대화하지?"
-예, 표음 언어가 가장 보편적이죠. 저처럼 최하 등급의 신분도 쉽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죠. 어쨌건 소리를 내서 상대에게 전달만 하면 되니까요.
"그럼 표의나 상형은?"
-표의 언어가 가장 어려운 언어입니다. 머릿속에 가진 뜻을 오러에 함축시켜서 상대에게 전달하는 거니까요. 저는 안간 힘을 쓰고 시도해도 단순한 뜻만 간신히 전달할 뿐이에요. 적어도 3등급 이상은 되어야 표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습니다.
"뜻을 오러에 함축시킨다고? 한 번 해봐."
굉장히 궁금해진 서문엽이 손짓하며 채근했다.
그러나 '하인'은 고개를 저었다.
-대사제, 그러니까 피에트로 님께서 함께 지내면서 서문엽 님에게 표의 언어로 말을 건넨 적이 한 번도 없었죠?
"응. 그러고 보니 그러네."
-표의 언어는 받는 쪽도 그걸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처럼 등급 낮은 백성은 높은 분들이 쓰는 고등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죠. 고차원적인 언어일수록 뜻이 더 복잡하게 함축되어 있으니까요.
"와, 하다하다 언어까지 신분 격차가 나 버리네."
지저 문명은 정말 냉엄한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오러와 능력부터 언어까지 신분 격차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구조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표의 언어는 들어볼 수가 없으니 흉내도 못 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말 최고의 등급에 계신 분들은 특별한 표의 언어를 구사하기도 합니다. 언어로서 상대의 정신을 제압하고 조종하기도 하죠. 피에트로 님도 대사제이셨던 시절에는 많은 대중을 압도하고 따르게 만드는 언어를 펼치곤 하셨죠.
"인간으로 치면 히틀러 같은 새끼였네. 하는 꼬라지하고는."
독재자의 통치 수단으로 빠지지 않는 세뇌는 아니나 다를까, 피에트로 역시도 왕년에 자주 쓴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사회의 말로가 좋지 않았던 점은 인간이나 지저인이나 마찬가지였던 듯하지만.
-위대한 분들은 더욱 특별한 표의 언어를 쓰시죠. 자신의 위대한 가르침을 언어에 담아서 후대에게 전달해 주려는 목적으로요. 저희 지저 문명의 역사적 유적 중에는 이런 가르침을 담은 언어도 많습니다.
"아! 그게 바로 표의 언어구나!"
그 말에 서문엽도 무릎을 치며 동조했다.
그것이라면 서문엽도 경험이 있었다.
바로 블랙홀 같은 결계로 둘러싸인 몇 평 남짓한 이곳!
여기서 고대의 대사제가 남긴 유산을 서문엽이 습득했었다.
그렇게 해서 영혼 연성이라는 엄청난 초능력을 얻었는데, 이를 얻은 방식이 바로 언어였다.
지저인이 남긴 언어라고 해서 세뇌라도 당할까봐 얼마나 거부감을 느꼈던가.
서문엽은 '하인'에게 고대의 대사제가 남긴 유산을 습득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하인'은 놀라움을 표했다.
-정말 부럽습니다! 아직까지도 영령으로서 존재를 유지하실 정도로 위대한 분의 깨달음을 얻으시다니!
"그건 지저인이 아닌 나도 쉽게 습득되어지더라."
-그건 정말 최고 수준의 고등 언어입니다. 간단한 개념도 아니고 고도의 지식을 억지로 머릿속에 주입시키는 언어는 문명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능한 분이 많지 않을 거예요.
"혹시 피에트로도 그런 거 할 수 있을까?"
혹시나 할 줄 안다면 오러 컨트롤 요령을 표의 언어로서 강제로 습득되도록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분은 워낙에 천재이시니 가능할 수 있겠네요.
"오, 그럼 그 자식이 갖고 있는 오러 응용법을 죄다 언어로 담아서 나한테 바치게 할 수도 있잖아?"
서문엽이 탐욕을 드러냈다.
-음, 아주 긴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언젠가는 완성하실 수 있겠죠.
"···아주 긴 세월?"
-간단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역대 대사제들이나 왕들께서는 말년이 되면 자신의 뜻을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두문불출하고 유산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곤 하셨어요.
"쳇, 좋다 말았네."
아주 긴 세월을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듣자하니 왠지 상형 언어도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상형 언어는 머릿속에 떠올린 시각적 이미지를 오러에 담아 상대에게 보내는 방식이죠. 표의 언어보다야 훨씬 쉽지만, 역시나 소리만 내면 되는 표음 언어보다는 어렵죠. 그래도 표의 언어보다는 쉬우니 서문엽 님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가능성은 일단 표음 언어부터 좀 해보고 판단하자."
-예.
가장 먼저 서문엽은 오러로 소리를 내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가장 쉬운 건 성대를 빌려서 소리를 내는 겁니다. 성대에 공기 대신 오러를 넣는다고 생각하고 해보세요.
"끄응, 이거 쉽지 않은데."
서문엽은 낑낑대며 성대에 오러를 보내 소리 내는 연습을 했다.
성공할 때까지 계속 시도했으므로, '하인'으로서는 지루한 시간이 3시간가량 지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끄아아!
-헉! 깜짝이야!
쩌렁쩌렁한 괴성에 꾸벅꾸벅 졸던 '하인'이 기겁하며 벌떡 일어났다.
다시 오러로 소리를 내려던 서문엽은 이윽고 혀를 차며 육성으로 말했다.
"일단 단어 한마디는 낼 수 있게 됐다."
-단어가 아니라 그냥 괴성 같은데······.
"단어 맞잖아! 끄아아! 세 글자!"
-서문엽 님이 태어나셨을 때 냈을 법한 소리로군요.
"개새꺄, 지금 비꽜냐?"
-헉, 아, 아니요! 설마요! 제가 감히!
'하인'은 황급히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던 서문엽은 이윽고 다시 연습에 돌입했다. 그러나 아무 의미 없는 괴성은 지를 수 있었지만, 좀 더 섬세한 발음이 필요한 말은 한 단어도 제대로 낼 수 없었다.
낼 수 있는 소리라고는······.
-끄아!
-으아!
-카아아!
괴성을 듣다 못한 하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너무 힘주어서 오러를 세게 발출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받침자 발음은 못하고 괴성만 지르시지요.
-으아아아아!
서문엽은 짜증 난다는 듯 저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러다가 문득 서문엽은 수련을 중단했다.
"가만?"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나 영체로 변했을 때는 오러로 소리 내서 말했었잖아?"
그랬다.
영체로 변신했을 때는 온몸이 오러로 화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해도 저절로 오러가 작용해서 발성을 냈다.
"오케이, 수련법을 바꾼다."
서문엽은 즉각 영체로 변신했다.
파아아앗!
-불사(증폭): 140초간 오러로 이루어진 영체가 되어 모든 공격을 무효화하고 모든 사물을 통과한다.
서문엽의 영체화 제한 시간은 기존의 120초에서 140초로 늘어난 상태였다. 오러 능력치가 100에서 105로 늘면서 오러량도 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방식이 표음 언어인 거지?
영체화한 서문엽의 물음에 '하인'은 경외를 느끼면서도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예! 그게 표음 언어입니다. 아, 영체라니! 정말 위대하십니다! 성격은 더없이 사악하시면서도 어찌 그런 위대한 모습으로!
-닥쳐라. 나 알고 보면 착한 사람인데 왜 자꾸 사악하대.
그렇게 대꾸하고서는 면밀하게 자신의 말이 오러로 인해 소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폈다.
본래 걷는 행위도 이론적으로 분석하려면 몹시 복잡한 법.
말도 그러했다.
서문엽은 140초간 열심히 말하고, 말이 오러로 나오는 과정을 집중해서 살폈다.
영체화가 풀리자 서문엽은 눈을 감고 오러에 집중했다.
이윽고.
-이제 그만 되라, 씨발!
마침내 제대로 된 말을 오러로 하는 데 성공했다. 욕설이 섞인 게 서문엽답긴 했지만, 어쨌든 인간이 최초로 지저인처럼 오러로 말한 순간이었다.
-우와, 성공하셨군요!
하인도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래, 성공이다. 난 역시 천재야.
-말하는 데 오러를 너무 많이 쓰시긴 하시지만요. 이제 오러 소모를 최소화하며 말하는 연습을 하기로 할까요.
-오냐.
서문엽은 기쁨을 만끽하면서도 품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분석안으로 스스로를 살피기 위하여 수련 시 챙기는 물건이었다.
-대상: 서문엽(인간)
-근력 94/95
-민첩성 98/99
-속도 95/96
-지구력 97/98
-정신력 110/111
-기술 105/106
-오러 106/107
-초능력: 분석안, 던지기, 불사, 증폭, 영혼 연성.
오러 능력치가 1 올라 있었다.
이 수련이 도움이 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 선생(2) > 끝
< 선생(3) >
'하인'과 계속 수다를 떨었다. 서문엽은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지껄였다. 수련을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오러 조절이 실패해서 쓸데없이 큰 소리를 내다가 서서히 익숙해졌다.
-그래서 내가 던전에서 나왔을 때 그 새끼 멱살을 쥐고서 계속 후려치고 또 후려치고 하는데······.
-죄다 누굴 때리거나 죽인 이야기뿐이군요. 귀가 썩을 것 같습니다······.
듣고 있는 '하인'도 괴로운 눈치였다.
일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공포로 몸이 움찔움찔하게 된다. 저런 인간이니 언젠간 자신도 쥐어 팰 것 같았다.
-이제 오러로 말하는 게 자연스럽다. 나 꽤 재능 있지?
-말할 줄 아는 게 재능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인간이시니 뭐······.
-그래, 인마. 이거 인간은 못하는 거야.
-좋습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신 분이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까요?
-오케이.
-지금 성공하신 말하기는 사실 가장 쉬운 거였습니다. 그냥 소리만 내면 그만이니까요. 그런데 전투 중에는 온갖 소음 탓에 서문엽 님이 하시는 말이 안 들릴 수 있죠.
-그렇지.
-근데 저희들은 다른 소음 때문에 대화가 방해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 말에 서문엽은 피에트로와 같이 살면서 많이 겪어본 일이라 쉽게 이해했다.
-아 그거! 한 사람만 들리게 할 수 있잖아.
-네. 지금까지 서문엽 님이 말한 방식은 소리를 만들어서 주위에 퍼뜨린 거죠. 그런데 보편적으로는 소리를 만들고 상대에게 전달해 주는 방식으로 대화를 나눕니다. 소리를 만들고, 직접 전달까지 해주는 거죠.
-아하, 뭔지 알겠네.
배틀필드에서 던전에 접속했을 때, 같은 팀 동료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목소리가 전달되는 바로 그 방식이었다.
-쉬울 것 같은데.
서문엽은 또 설레발을 쳤다.
-쉽지 않을걸요?
-한 번 해볼게.
서문엽은 심호흡을 하고서는 '하인'을 향해 소리쳤다.
-끄아아!
-헉!
'하인'을 기겁해서 귀를 틀어막았다.
서문엽은 의기양양해졌다.
-어때? 됐지?
-되긴 뭐가 됩니까!
-됐잖아, 인마. 너한테만 소리 보냈어.
-소리를 전달한 게 아니라, 화살처럼 쏴버렸잖아요! 누구 고막 터뜨릴 일 있습니까? 쏘는 게 아니라 전달이라고요!
-달라?
-완전히 다릅니다. 엄마가 물건 갖다 달랬는데 집어 던질 겁니까?
-씨발아! 엄마 없는 새끼라 그런 거 모른다, 왜!
-헉, 죄송······.
'하인'은 헛기침을 했다.
-자자, 아무튼 방금은 소리를 화살처럼 쏘아 날리신 거예요. 소리가 새지 않고 제게만 전달되도록 더욱 세게 쏘셨죠.
-그렇지.
-그 결과 제게는 음파로 공격한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냐? 미안.
-괜찮습니다. 요지는 소리를 담은 오러를 제게 전달하는 겁니다.
-오러를 전달한다? 그럼 결국 소리를 담은 오러가 네게 전달될 때까지 컨트롤해야 한다는 의미네.
-네. 컨트롤 안 된다고 힘껏 던지면 아까와 같은 상황이 되는 거고요.
정말로 난이도가 확 올라갔다.
몸 밖으로 배출된 오러를 컨트롤하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문엽도 얼마 전에 터득한 그 오러 컨트롤인 것이다.
지저인의 오러 컨트롤 기초를 터득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인 것.
'이거 피에트로가 의도한 모양이군. 피에트로 이 자식, 은근히 체계적인 교육 커리큘럼을 짰잖아?'
서문엽으로서는 순서대로 딱딱 맞게 오러 컨트롤 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피에트로 님께 들었습니다. 인간은 본래 오러를 몸 밖으로 꺼내면 조종하지 못한다죠?
'하인'은 그렇게 물으면서 오러 덩어리 하나를 만들어 허공에 띄웠다.
손 위에 둥실 뜬 오러 덩어리가 요리조리 활발하게 움직였다.
서문엽도 따라해 보았다.
팟!
오러 덩어리가 손에 만들어졌다. 좀 더 집중하니 둥실 공중에 떴다.
하지만 띄운 게 고작이었다. 움직여 보려도 조종하니, 오러 덩어리가 통제에서 벗어나 실 끊긴 연처럼 멋대로 날아다니다가 흩어져 버렸다.
-다행히 인간의 한계는 간신히 벗어나셨네요.
-아직 마음대로 조종하지는 못하겠다.
-저희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지만, 인간은 사정이 다르겠죠. 아무튼 순서대로 차근차근 익혀보죠. 마음대로 조종할 필요는 없으니까, 단지 오러 덩어리를 제게 전달해 주세요. 한 방향으로 날아가게 하는 것은 가능하겠죠?
-해볼게.
-말씀도 편하신 대로 육성으로 하시죠. 지금은 오러 컨트롤에만 집중해야 하니까요.
"그래."
서문엽은 오러 덩어리를 만들어 '하인'에게 날려 보냈다.
쐐액!
야구공처럼 빠르게 날아간 오러 덩어리가 하인의 손앞에 멈췄다.
-이건 아까 소리를 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러 덩어리로 절 공격하신 거라고요.
아주 작은 오러 덩어리라 맞더라도 별 피해는 없지만.
"끄응, 컨트롤이 어려우니까 그냥 확 날려 버리게 되네."
-확 미는 게 아니에요. 제 손 위에 살짝 올려놓는 겁니다.
"알았다."
서문엽은 계속해서 시도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시도했을까?
조금씩이지만 점점 컨트롤이 나아졌다.
하인은 내심 감탄했다.
'정말 습득 속도가 빠르구나. 엄청난 집중력이야.'
110이나 되는 정신력으로 발휘하는 집중력이 서문엽의 수련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사실 정신력 110은 '증폭'이라는 초능력을 각성케 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가진 능력치였다.
그것이 온전히 수련에 쏟고 있으니, 서문엽의 성장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으챠!"
서문엽이 기합을 내지르며 다시 오러 덩어리를 날렸다.
기합과 달리 오러 덩어리는 아주 천천히 둥실둥실 날아서 '하인'의 손 위에 도착했다.
"됐다!"
-오, 해내셨네요!
하인이 박수를 쳤다.
-그럼 이제 이 오러 덩어리에 소리를 담아서 제게 전달하기만 하면 되겠네요.
"소리까지 담아서? 끄응, 그건 훨씬 어렵겠는데."
지금도 이미 엄청난 집중력을 소모하여서 간신히 해낸 성과였다.
-기운 내십쇼. 첫날부터 진도가 팍팍 나가고 계시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이제 막 시작한 수련 첫날임에도 오러 능력치가 1 올랐다. 잘하면 이번 수련을 통해 오러 능력치를 팍팍 올릴 수 있었다.
정신력 110인 서문엽은 포기하지 않고 금방 기운 냈다.
"좋아, 계속하자."
-예, 일단은 매개체를 통해 전달하는 훈련부터 하죠.
'하인'은 땅에 놓인 서문엽의 창을 가리켰다.
이윽고 두 사람은 창의 끝을 잡았다.
-자, 이 창을 통해 소리를 담은 오러를 제게 전달해 주시면 됩니다. 이건 허공에서 오러를 컨트롤하는 것보다 훨씬 쉽죠?
"그러네. 한번 해보자."
여왕이 이보다 더 하찮을 수가 없을 정도로 밑바닥 지저인인 '하인'을 선생으로 보내준 이유가 있었다.
하인은 남을 가르치는 데 상당한 재주가 있었다. 왜냐하면 '하인'이 주로 했던 일이 어린 지저인을 돌보는 일이었기 때문.
오러 컨트롤이 어린 지저인만도 못한 서문엽을 가르치기에 제격이었던 것.
창을 매개체로 삼으니 전달이 더 쉬웠다. 창이야 평생 사용해 온 무기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매개체 없이 소리를 담은 오러를 제게 전달하는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서문엽은 입을 열었다.
첫 시도.
-들려?
-예, 들려요. 중간에 소리가 새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도 다 들을 수 있게 됐지만요. 제게만 들리게 하시는 거예요.
-끄응, 지금도?
-예, 일단은 욕심 부리지 말고 그냥 편하신 대로 끄아아 하는 괴성으로 전달해 보세요.
-끄아아아!
-헉, 깜짝이야. 예고 좀 하고 들어오시죠! 그리고 여전히 소리가 중간에 샜습니다.
시간이 훌쩍 흘러 자정이 넘었지만, 서문엽은 성공할 때까지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인'도 피곤했지만 서문엽의 강한 몰입에 압도되어서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끄아아!
-아직입니다.
-끄아아아!!
-소리를 더 크게 내는 게 아니라 컨트롤을 더 섬세하게 하셔야죠!
-까아아아아!
-헉, 소리가 점점 이상해지네요.
-끼으으으!
-헐······.
될 듯 말 듯 안 되는 오러 컨트롤에 안간힘을 쓰느라 서문엽이 내는 소리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점점 괴상해져 갔다.
이윽고.
-끼오오오!
-헉! 됐어요!
그 말에 서문엽이 번쩍 눈을 떴다.
-돼, 됐다고?
-예, 지금도 되고 있어요! 지금 이 느낌 잊지 마시고, 계속 말해봐요.
-휴, 너무 말을 많이 했더니 이제 뭐라 더 할 말도 없고······.
-네네, 잘하고 계십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요령을 잊지 않으려면 계속 반복해야죠.
-아무 말이나 막 한다?
-네네.
-이 새끼야, 20년 전에 날 안 만난 걸 운 좋게 알아라. 전쟁 시절에 나 만났으면 한 창에 저세상 갔을 텐데, 이렇게 선생과 제자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자, 잘하고 계세요. 근데 절 위협하진 마시고요!
-패고 싶다, 패고 싶다, 널 패고 싶다······.
-그런 소릴 제게만 들리게 말씀하시니 더 무섭습니다!
그렇게 요령을 완전히 터득하고 난 서문엽은 그만 뻗어버렸다.
영체로 변신하는 바람에 오러도 거의 고갈 상태였고, 과도하게 집중력을 썼더니 정신은 더 피로했다.
"아··· 더는 오러로 말할 기운이 없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죠.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빨리 배우시네요.
"오냐, 너도 수고했어."
-푹 쉬시고 다음에는 상형 언어를 익혀보도록 하죠.
"오케이, 내일 계속 하자."
-헉, 내일 바로요? 더 쉬셔야 하지 않습니까?
"뭘 쉬어. 내일 봐."
-네.
하인은 공간 이동으로 떠났다.
서문엽도 귀환석을 써서 YSM 클럽하우스 사무실에 도착했다.
클럽하우스 내에는 예전에 선수 숙소로 쓰던 방이 많이 있었다. 지금은 선수들이 옆에 있는 고급 빌라로 다 옮겨갔으므로, 아무 방이나 사용할 수 있었다.
씻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창을 매개체 삼아 소리를 전달했을 때였다.
창에 오러를 주입하는 거야 평생 해왔던 일이었다.
다만 그 오러에 소리를 담은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단지 오러만 불어넣는 게 아니라, 그 오러에 더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다.
'지금까지는 단지 오러를 불어넣는 것만 했지. 창에 불어넣은 오러를 컨트롤할 생각은 못 했어. 뭐,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당연하지만.'
기술과 오러가 인류 최고치인 서문엽도 못했는데 그 누가 해냈겠는가?
심지어 '전사의 기억'으로 만인릉 황제의 검술을 흉내 내던 타락한 대사제도 대검에 엄청난 양의 오러를 불어넣었을 뿐,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오러 컨트롤을 응용해 보면 뭔가가 나올 것도 같은데 말이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응용해 볼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어떤 영감이 서문엽의 뇌리를 스쳤다.
잘 연구해 보면 분명 무언가 좋은 공격 수단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서문엽은 낮에는 선수로서 팀 훈련을 했고, 밤에는 전용 수련장에서 하인과 함께 수련에 매진했다.
상형 언어는 과연 표음 언어보다 훨씬 어려웠다.
"머릿속에 떠올린 그림을 어떻게 오러에 담으라는 거야?"
-끄응, 뭐라고 설명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싸울 때 무기에 오러를 담으시잖습니까?
"응."
-근데 얼마나 강하게 마음먹기에 따라 같은 오러량이라도 위력이 달라지지 않던가요?
"으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
-오러는 분명 마음에 따라 성질이 달라집니다. 어제 제게 오러 덩어리를 전달하는 훈련을 했을 때도 위험성은 없었잖습니까? 만약 공격하려고 마음먹었다면 같은 크기의 오러 덩어리라도 보다 파괴성을 띠었겠죠.
"마음먹기에 달린 건가? 그건 너무 애매한데."
인간으로서는 전인미답의 경지로 나아가고 있는 서문엽.
오늘도 큰 난관에 부딪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했다.
< 선생(3) > 끝
< 선생(4) >
-이제 상형 언어를 배울 차례군요.
-야, 그거 정말 애매하단 말이야.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감이 안 와.
'하인'과 서문엽은 오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표음 언어를 마스터한 서문엽은 이제 하인에게만 들리도록 말하는 법에 통달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계속 쓰니 익숙해졌고, 오러도 107로 1 더 올랐다.
분석안에 보이는 오러 수치는 오러량과 오러 컨트롤 능력을 모두 감안한 값이었다.
서문엽은 오러량만 따지면 지저인의 3등급 지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러 컨트롤은 아직 지저인 어린아이 수준.
언어를 배우면서 오러 컨트롤을 연마하니 오러 능력치가 쑥쑥 오를 수밖에 없었다. 오러 컨트롤 면에서 서문엽은 아직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으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저로서는 왜 이걸 못하지, 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인간과 우리의 차이점이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하인'은 인간인 서문엽의 관점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선생이었다.
평생 남의 눈치를 보고 살다 보니 저절로 생긴 이해력! 괜히 '하인'을 선생으로 붙여준 게 아니었다.
-머릿속에 있는 시각적 이미지를 어떻게 오러로 바꾸는 거지? 너희는 뇌도 오러로 되어 있냐?
서문엽이 투덜거렸다.
그런데 그 말에 '하인'은 눈을 크게 떴다.
-그거다!
-반말이냐?
-헉, 아뇨.
'하인'이 설명했다.
-제 생각엔 사고방식의 차이 같습니다.
-사고방식?
-네, 인간은 보통 주로 쓰는 언어가 하나뿐이라고 들었어요.
-그렇지. 여러 언어를 익힐 수야 있지만 가장 편한 언어를 원래 쓰던 모국어지.
-네, 근데 저희는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서문엽 님을 통해 습득한 지 얼마 안 된 이 언어가 제게는 매우 편해요. 혼자 있을 때도 이 언어로 혼잣말을 할 거예요.
-너희는 언어에 구애받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거기서 인간과 우리의 차이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은 아마도 자기가 주로 쓰는 언어를 기반으로 사고를 하는 것 같아요. 제 생각이 틀린가요?
서문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말이 맞아. 꿈을 꿔도 모국어로 꾸지.
-그 사고방식의 기반이 우리는 오러라고 보시면 됩니다. 언어는 도구일 뿐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저희는 모든 삶의 기반이 오러이기 때문에 사고방식도 오러를 통해 이루어져요.
-그래서 머릿속에 있는 시각적 이미지를 오러에 실어 전달하는 것도 너희에게는 자연스럽다 이거지?
-네, 물론 표음 언어보다 개념을 전달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상형 언어는 대화를 나누다가 시각적 이미지가 필요할 때 함께 병행하죠.
-종족 간의 차이는 알겠는데,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그럼 난 못 익히는 거잖아?
-오러로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도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죠. 이걸 해내셨으니 상형 언어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못하면 네가 책임 지냐?
-헉, 왜 또 말씀을 그렇게······.
어쨌거나 서문엽은 전혀 다른 수련에 들어갔다.
서문엽은 편히 누워서 눈을 감았다.
'하인'이 말했다.
-이제부터 말은 하지 마시고, 머릿속으로도 언어를 지우세요. 모든 생각은 시각적인 이미지로만 합니다. 어떤 물건을 떠올렸을 때, 그 물건의 이름이 서문엽 님의 언어로 떠오르겠죠? 그런 생각을 지워야 합니다.
서문엽은 그 말에 뭔가 한마디 대꾸를 해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수련에 집중해야 하므로, 하인에게 대꾸해 주고 싶은 '말'까지 전부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무거나 하나 떠올려 보세요.
그 말에 서문엽은 백하연을 떠올렸다. 파리에서 열심히 선수 생활 하고 있을 다 큰 처녀가 아닌, 귀여운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다.
백하연.
하연이.
조카.
제호 딸.
백하연을 가리키는 수많은 단어가 떠올랐다.
-그것을 뜻하는 단어들을 전부 지우셔야 합니다.
백하연을 뜻하는 단어들을 전부 떨쳐 버렸다.
머릿속은 백하연의 어린 시절만 남았다.
참 귀여웠다.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달콤한 간식을 몰래 주곤 했다. 군것질을 못 하게 하는 엄한 부부가 기르는 아이라, 하연이는 서문엽이 몰래 주는 단것에 눈이 돌아갔다.
그러면서 입가에 묻은 초콜릿 자국을 지우고 안 먹은 척했지만, 손에 묻은 게 옷에도 다 묻어서 금방 들통났다. 한승희가 초콜릿 먹었냐고 추궁하면 거짓말을 못하고 술술 실토했다.
-기분 좋아 보이시군요. 누구 때리는 상상이라도 하시나요? 다 좋지만 단어를 지우세요.
'아차.'
서문엽은 급히 머릿속에서 초콜릿, 사탕, 간식, 한승희, 나눴던 대화들 등을 모두 지웠다.
갑갑했지만 그만큼 시각적 이미지가 강해졌다.
-오러를 끌어 올립니다.
시키는 대로 오러를 일으켰다.
-오러를 머리로 보내세요. 이렇게 생각하면 편하겠네요. 생각을 하는 데 필요한 뇌의 활동이 오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요.
-소리를 오러에 싣는 법은 아시죠? 같은 요령이라고 생각하세요. 머릿속에 있는 그 이미지를 오러에 담아보세요.
서문엽은 이윽고 반딧불처럼 작은 오러 덩어리 하나를 만들었다.
-제게 주세요.
오러 덩어리가 '하인'에게 전달됐다.
눈을 뜬 서문엽이 물었다.
-됐냐?
-으음······.
'하인'의 반응은 애매했다.
-뭔가 사람 형태가 보이긴 했어요. 크기를 보니 어린아이인가요?
-어, 일단 시각적인 뭔가가 전달되긴 한 거네?
-네, 시작이 좋네요. 하지만 머릿속에서 시각적 이미지를 좀 더 강화하실 필요가 있어요.
-알았어. 일단 첫 발을 내디뎠으니까 다음은 문제없어.
방법을 알았으니 다음은 노력하기 나름이었다.
서문엽은 인내심을 갖고 계속 상형 언어를 시도했다.
역시나 강력한 집중력이 발휘되었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하루가 꼬박 흐른 것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
다음 날은 경기가 있었다.
피에트로는 여전히 여왕 측과 함께 훈련 시스템을 제작하느라 여념이 없어서 출전하지 않았다.
칸 아르얀은 이제 붙박이 근접 딜러로 출전했다. 팀원들 무기에 독을 깃들게 해주니 전술적으로 꼭 필요한 멤버였다.
다만 이번에는 서포터인 조승호를 제외하고 근접 딜러를 추가했다. 전투 능력이 없는 조승호를 제외하고 근접 딜러를 추가해 실질적인 전투력을 높여보려는 실험적인 시도였다.
그러자 확실히 사냥 속도나 한 타 싸움 시의 전투력에서 효과가 있었다.
다만 경기가 초반에 결판나지 않고 중반 이후로 길어질수록 조승호가 있을 때가 더 전력에 도움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나연과 개리 윌리엄스에게 화살을 전달해 주거나, 오러 전달로 소모된 오러도 보충해 줄 수도 있는 조승호의 존재는 역시 강팀을 상대로 필요합니다."
가브리엘 감독의 말에 서문엽도 동의했다.
"지금처럼 약팀을 상대할 때는 없는 편이 더 빨리 끝낼 수 있어서 좋긴 한데, 강팀을 상대로는 얘기가 다르지. 초반에 기습적으로 단기 결전을 치른다면 모를까. 근데 조승호를 빼면 초반 기습 작전인 게 뻔히 드러나잖아?"
"예. 결국 조승호는 웬만하면 포함되어 야 하는 걸로 결론이 나겠군요."
조승호의 존재는 참 골칫거리였다.
전투 능력이 없는 조승호는 한 타 싸움 때 한 명이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강팀을 상대로 10 대 11로 싸우면 더 불리하다.
그런데 조승호의 다양한 초능력은 경기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된다.
있어도 골치, 없어도 골치였다.
"그런데 오늘 경기를 보니 구단주님의 기량이 더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응? 내가?"
서문엽이 의아함을 표했다.
오늘 경기에서 서문엽은 활약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다른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서문엽은 그냥 잠자코 탱커 역할만 했을 뿐이었다.
상대 팀도 그걸 아는지 싸울 때는 알아서 서문엽을 피해 다니는 눈치였다.
"상대 팀 선수가 초능력을 발휘할 때마다 구단주님이 가장 빨리 알아차리고 반응했습니다. 자세히 분석을 해봐야 알겠지만, 제 눈에는 초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미리 알아차린 느낌이었습니다."
"그래? 내가 그랬나?"
서문엽은 사실 오늘 경기 중에도 상형 언어를 몰래 연습 중이었다. 누군가에게 전달은 안 했지만, 시각적 이미지를 오러에 싣는 요령을 계속 연습했다.
그래서 경기 중에 자신이 뭘 했는지 별생각이 없었다. 그냥 경기 내내 머릿속은 딴생각이 가득했고, 몸만 본능적으로 움직이며 플레이했다.
"제 생각에는 상대 선수가 초능력을 쓰기 위해 오러를 움직일 때, 그 오러 반응을 미리 알아차리는 감각이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요즘 오러 컨트롤을 연마하고 있긴 한데, 그 영향인가?"
"전에 슈란의 소멸 광선을 막은 그 오러 응용 말씀이시죠? 흥미롭습니다. 그 오러 컨트롤 수련법을 제게도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음, 아마 소용없을 거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나 말고는 아무도 안 되더라."
서문엽은 대충 둘러댔다.
하지만 내심 뿌듯했다. 가브리엘 감독의 말이 사실이라면, 매일 상형 언어를 수련한 결과물이 나온 셈이니까.
실제로 상형 언어를 수련하면서 서문엽의 오러 능력치는 108로 1 더 올랐다.
오러 능력치가 이렇게 빨리 오르는 것은 서문엽도 처음 경험해 본 일이었다.
보람을 느낀 서문엽은 더욱 집요하게 상형 언어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럼에도 상형 언어는 어려웠다.
시각적 이미지는 언제나 훼손된 채로 '하인'에게 전달되었다.
-오러 전달 과정에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건 시각적 이미지를 오러에 담는 과정에서 잘못된 것 같은데요.
-끄응, 역시 쉽지 않네.
상당히 독하게 매달렸는데도 큰 진전이 없자 서문엽도 조금은 지쳤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서문엽은 무슨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
"아!"
-뭔가요?
-보기나 해.
서문엽은 '불사'를 증폭시켜서 영체로 변신했다.
그랬다.
바로 영체가 된 상태에서 수련하는 것이었다.
-표음 언어 할 때도 영체 상태에서는 자연스럽게 됐었잖아.
-그랬죠. 그래서 이번에도 영체 상태로 시도해 보시겠다는 거군요? 좋은 생각입니다. 영체는 육신의 얽매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지이기 때문에 상형 언어도 문제없을 겁니다! 아니, 그런 모습으로 상형 언어 하나 못하는 게 웃긴 거죠!
-자, 간다.
서문엽은 다시 어린 시절의 백하연을 떠올린 뒤에 오러에 담아 '하인'에게 보냈다.
-오오오!
하인은 놀라워했다.
-됐어?
-됐습니다!
-아자!
서문엽이 기쁨에 차 포효했다. 영체 상태에서 포효하는 바람에 오러의 파장이 주변을 흔들었고, 그 여파로 '하인'이 나뒹굴었다. 상당히 격한 세리머니였다.
-인간이지만 귀엽게 생긴 아이로군요. 누구인가요?
-내 조카야.
-아하, 상당히 귀여워하셨나 보네요.
-그렇지. 한때 내 삶의 낙이었어. 지금은 훌쩍 커버렸지만.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서문엽 님이 보내주신 상형 언어에는 시각적 이미지뿐만이 아니라, 서문엽 님이 그 아이를 아끼는 마음도 담겨 있었어요.
-내 감정까지 전달됐다고?
의아해진 서문엽의 물음에 '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상형 언어는 말씀드렸듯이 시각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의사소통법입니다. 어디까지나 시각적 이미지뿐이지, 감정까지 전달할 수는 없죠.
-근데 방금 내 감정이 실려 있었다면서?
-예.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인이 이어 말했다.
-서문엽 님은 방금 표의 언어를 하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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