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쟤 눈 돌아간 거 아니야?
조금 전과 달리 린토넬라는 완전한 적개심을 가진 목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스승에 관한 무언가가 더 숨겨져 있는 듯하다.
'조금 건드려 볼까.'
이 상황에서의 자극은 좋지 않지만, 어떠한 정보라도 필요하다.
그런 생각에 디르엔은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입에 담았다.
"마음대로 못 만나는 건 스승이 너를 버렸다는 거잖아. 그런 사소한 일에 이런 위험을 부르는 것 자체가...."
"네놈 따위가 뭘 알아!"
가벼운 도발에도 적나라한 반응을 보이는 린토넬라.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기에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잘 알지. 스승이 왜 너를 버렸는지, 그리고 네가 무슨 심정인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닥쳐! 루블린의 피를 이은 놈이 뭘 이해한다고!"
"재능이 없어서 버려지는 사람은 세지도 못할 정도로 많았으니까. 나도 몇 번이나 경험해 본 거라고?"
"그게 무슨 헛소리...."
"결국 사고를 쳤군."
그때,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남성의 목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셰링엄."
지팡이를 든 그의 모습은 낮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디르엔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때와 전혀 달라져 있었다.
"린토넬라, 내가 말하지 않았나? 네 계획은 쓸 생각이 없다고. 괜히 일이 틀어지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이 기회를 이용하면 놀라울 정도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이미 루블린의 피를 이곳에 데려온 이상, 돌이킬 수도 없게 되었죠."
"약초와 약물로 충분히 기억을 혼미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할 수 있을 뿐이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게 이 연구는 그만큼 중요하니까요."
"하아… 정말 못 말리겠군."
린토넬라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는 셰링엄.
하지만 말 안 듣는 자식이 사고를 쳤다는 느낌 정도라,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셰링엄, 사실 저 사람은...."
"뭘 바라시는지는 알겠지만, 린토넬라의 속내는 첫 만남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뭐?"
진실을 밝혀 적대시키려 했는데, 돌아온 대답이 너무도 예상 밖이었다.
"알고도 가만히 뒀다는 거야? 어째서?"
"마법의 구현에 성공하게 된다면 저희로서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으니까요. 아마 온 세계의 커블로스가 다시금 움직이게 될 겁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한다고? 너희는 고작 수십 년 전에 토벌됐었잖아."
디르엔의 시선에서 본 저 태도는 불나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에 멸망했던 경험이 있는데도, 어째서 다시 그 길을 걸으려는 걸까.
하지만 그 의문을 들은 셰링엄은 고개를 저으며 덤덤히 대답해 왔다.
"당시 검거된 커블로스는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껍데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의 비원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은 조금 더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지요."
"루블린의 조사대에게 잡히면 바로 제도에 넘어갈 거야. 그렇게 되면 이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조사와 토벌이 시작되겠지."
"괜한 걱정이시군요. 글리바스에서 저를 잡을 수 있는 마법사는 없습니다. 넘기는 건 실험장과 일부 연구 자료 정도라, 제대로 된 해독 또한 쉽지 않을 겁니다."
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그의 표정은 평온함을 유지했다.
하지만 저 당당한 태도의 근거 또한 확실한 탓에 괜한 허세와 경고가 먹힐 리도 없다.
"셰링엄, 슬슬 준비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때, 조용히 말을 꺼내며 무언가를 재촉하는 린토넬라.
"그래야지."
셰링엄 역시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곳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실험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간의 시행착오를 대대적으로 종합해 첫발을 내딛는 날이었지요. 하지만 도련님께서 오신 덕에 단계를 대폭 축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첫발?"
"흑마법의 비원에 대해선 알고 계십니까? 공작 가문에서 교육을 했을 리는 없을 듯합니다만...."
"잘은 몰라도, 마계를 재림시키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어. 책에도 그 정도는 적혀 있으니까."
"정확히 핵심을 알고 계시는군요."
디르엔의 답에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조각난 비석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고는 중앙에 있던 커다란 조각 앞에 멈췄다.
"도련님의 마나는 이곳에 담게 될 겁니다."
"결국, 죽이겠다는 거잖아?"
"흑마법에 대해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으시군요. 저희는 생명을 거름으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마나 코어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육체가 무너지게 될 뿐이지요. 다만, 저항하지 않으신다면 최대한 원형을 유지해 보겠습니다."
둘은 전혀 다르다며 궤변을 늘어놓는 셰링엄.
문제는 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마나 코어를 정제한다고?
그때, 조용히 있던 크로노가 목소리를 냈다.
'뭔지 알아?'
-들어 본 적도 없지만, 흑마법 중 하나겠지. 마나 코어의 근간을 휘젓는 일일 테고.
'그러면 이대로 마나 코어를 빼앗기는 거 아니야?'
-빼앗기긴 뭘 빼앗겨? 백 번을 시도해도 백 번 다 실패할 텐데.
'뭐?'
-하아… 내가 몇 번이나 말해? 마나 코어만 봤을 때 너는 그냥 괴물이라니까? 성장도랑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강한 어조로 쏘아붙이는 그이지만, 나름대로 인식은 하고 있다.
크로노의 표현에 따르면 마나의 응축 정도가 징그러울 수준이라고 한다.
성장에 따라 이것이 점차 풀리면 얼마나 될지 자신도 모른다던가.
"규모가 큰 쪽부터 작업하는 게 좋겠군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곳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셰링엄.
어느새 한쪽 손 위에는 비석 조각이 떠오른 채였다.
"커블로스에는 장로회라 불리는 기구가 있습니다. 저를 원조해 주시는 분 또한 훌륭한 장로이시지요. 그분께서 초석을 주신 덕분에 제 연구는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웅-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손 앞에 붉은 마법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냥 공격해 버릴까?'
-됐어. 가만히 있어도 돼.
'진짜야?'
-내가 틀릴 리 없잖아. 이 마법은 무조건 실패라고. 절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아니, 마법진을 베끼면서 뭘 묻는 거야?
심각한 대화가 오가던 중, 크로노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아까부터 한쪽 손가락으로 몰래 등록하던 마법진이 들킨 모양이다.
하지만 정면에 그려지는 새로운 마법진을 멍하니 놓치는 것이 더 말이 되지 않는다.
팟-!
잠시 후, 눈앞에서 완성된 붉은 마법진.
"고통은 잠시일 겁니다. 마나 드레인."
슈욱-
짧은 그의 말과 함께 영창이 이어지자, 붉은 아지랑이가 생겨났다.
천천히 다가온 그것은 디르엔의 몸을 감싸며 짙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문제는.
'실패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 그럴 리가....
크로노의 말과 달리 마나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순조로운 작업은 틀림이 없었는지, 셰링엄이 입을 열었다.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저항 없이 계셔 주신다면 저 또한 최선을 다해...."
파직-
그때, 갑자기 공간을 울리는 이상한 소리.
-어?
모두가 말을 멈춘 가운데, 크로노의 당황한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뭐야?'
-야, 이거 큰일 났어!
'큰일이라니? 똑바로 말해 봐.'
-너한테서 빠져나간 마나가 주변에 머무르고 있어. 혹시 마법이라도 가해졌다간 터져 버릴 거라고!
그의 설명에 디르엔은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이 공간에서 지켜야 하는 것은 납치당한 사람들과 흑마법의 증거들.
대략 30이 넘는 숫자이지만, 여유로운 수준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 그래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 정도의 마나라면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겁니다!"
눈앞의 두 사람은 점점 커지는 붉은 아지랑이와 그 속의 강렬한 마나 탓에 꽤 당황한 듯하다.
팟-!
둘의 시선이 팔린 사이, 디르엔은 등 뒤쪽으로 보호 마법진을 만들어 빠르게 산개시켰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증거품에도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다.
'이 정도면 됐겠지.'
모든 작업이 끝난 후, 그는 다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붉은 아지랑이는 실험실의 공간을 가득 채운 상태였다.
-뭐야, 왜? 어쩌려고?
'아까 여기가 산 정상이라고 했지?'
-…그랬었지?
'내가 마법으로 저 둘을 이길 확률은?
-린토넬라 쪽은 쉽겠지만, 셰링엄은 힘들 거야. 저쪽은 전투에 너무 능숙한 모험가니까.
'그럼 됐네.'
-뭐?
빠르게 결정을 지은 디르엔은 정면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팟-!
-야, 잠깐. 그거 아니야! 안 돼!
"파이어 버스트."
온 힘을 다해 4성급 마법을 발동시켰다.
***
퍼버버벙-!
"...!"
글리바스 내성 저택의 한 침실.
교대 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얀테는 엄청난 폭발음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문을 열고 나서자 마침 이쪽으로 달려오는 기사가 하나 있었다.
"무슨 일이지?"
"대, 대장! 광산이… 광산이 폭발했습니다!"
"뭐라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보고에 그는 빠르게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시야를 돌려 바라본 광산의 모습에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저게… 가능한 일인가?"
마치 무언가에게 먹힌 듯, 움푹 파인 정상의 봉우리.
심지어 까만 연기가 밤의 어둠을 뚫고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다.
"필수 호위를 제외한 전원을 집합시켜라. 글리바스와 별개로 조사를 진행할 것이다."
"예!"
명령을 내리자 기사는 경례와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증원을 부른 것이 천만다행이군.'
이런 혼잡한 상황에선 보레아트와 같은 베테랑들이 큰 힘을 발휘한다.
혹시 잘만 파고든다면 커블로스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장!"
그때, 뒤쪽에서 다급히 달려오는 한 기사.
그런데 이자는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야 했다.
'설마....'
"죄송합니다! 디르엔 도련님이 사라지셨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충격적인 보고.
죄악으로 남은 켈파에서의 일이 얀테의 머릿속에 겹치며 의식을 뒤덮었다.
'또 이런 실책을 범하다니!'
부서질 듯이 꽉 쥔 손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감각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은 조금도 없었다.
"지금 집합한 조사대와 호위 전원은 바로 디르엔 도련님의 수색에 들어간다! 후발대의 통솔과 분배는 보레아트 님께 전달해 위임하도록!"
"예!"
명령을 전달한 뒤, 얀테는 곧바로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고삐를 강하게 쥔 채 광산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특별한 흔적은 없었나!"
"예! 물증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납치라면 마법사의 소행일 확률이 높습니다!"
빠르게 이동하는 사이, 얀테는 목소리를 높여 호위들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예상대로 정보가 부족하다.
"만코아는 성문으로 이동해 수상한 출입자가 없었는지 확인해라! 트레포아는 셋을 데리고, 도시 내를 조사하도록!"
"예!"
겹친 대답과 함께 다섯 명의 인원이 도심가로 방향을 틀었다.
"서둘러라!"
나머지는 그대로 광산을 향해 오르막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팟-!
갑자기 숲 쪽으로 돌린 시선의 끝에서 붉은 빛줄기가 나타났다.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 빛이 점차 개수를 늘려 가기 시작했다.
"대, 대장! 저것은 도대체...."
부하의 말에도 얀테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생전 처음 보는 저 빛줄기를 뭐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지금은 다른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그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이며 고삐를 재차 강하게 쥐었다.
"우리는 디르엔 도련님을 찾는 데만 집중한다! 전원 속도를 높여라!"
26.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
새카만 연기가 시야를 가린 사이, 크로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의 발동과 동시에 일어난 폭발은 실험장 전체를 전부 날려 버렸다.
심지어 위쪽을 막았던 천장까지 터져 버린 탓에 이제는 까만 밤하늘 아래에 서 있는 상황이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죽으면 어쩌려고 그걸 터뜨려?
'방어 마법도 있었잖아. 애초에 피해도 전혀 없는데.'
-아니, 그건 나도 신기하지만… 하아....
처음엔 그 엄청난 폭발을 보호 마법이 막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소모된 마나는 전혀 없었고, 지금도 마법은 여전히 몸을 지키는 상태다.
'흠.'
주변을 둘러보자 철창 속의 사람들과 연구 증거들 또한 멀쩡한 것이 보였다.
보호 마법까지도 유효함은 역시 무언가 이상하다.
투둑-
'어떻게 막긴 했나 보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셰링엄.
그의 눈빛은 당혹과 놀라움이 뒤섞인 것처럼 보였다.
-쟤는 어떻게 산 거야?
한쪽 구석에서 뒹굴고 있는 린토넬라의 모습에 크로노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상태를 보니 방어를 전혀 하지 못한 모양이다.
"제 식견이 너무도 부족했군요."
그때, 정면에서 들려온 셰링엄의 목소리.
여전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12살짜리 아이가 만든 이 처참한 광경은 둘째 치고, 멀쩡히 서 있는 게 눈을 의심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까의 분출됐던 그 마나의 양을 생각하면 당장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다행히 조건은 충족됐군.'
흩뿌려진 비석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각각의 상태를 살폈다.
어째서인지 손상이 전혀 없지만, 아까 폭발하던 마나를 제대로 흡수한 듯했다.
아니, 흡수가 아니라 너무 높은 밀도에 절여졌다고 표현해야 할까.
중간 과정이 죄다 생략된 채 강제로 주입된 느낌이다.
'곧 몰려들겠군.'
어쨌든 이런 대규모의 폭발이 일어났으니 꽤 많은 사람들이 움직일 것이다.
심지어 루블린 가문의 자제가 사라졌으니 엄청난 소란이 일었겠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목적은 분명하게 달성해야 한다.
"어디서 그런 힘을 얻으신 겁니까?"
"힘? 그냥 열심히 한 거야."
"신의 아이라 말씀하시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겠군요. 이미 이런 상황까지 왔으니, 숨기실 것은 없지 않습니까."
시간을 끌기 위한 대화이지만, 셰링엄의 본심이기도 했다.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저 아이는 평민의 피가 섞인 서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미 재능이라 부를 수도 없는 저 힘은 신의 개입이 아니면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보다 이제 어쩔 거야? 네 계획은 전부 무산된 거 같은데."
정보를 주진 않겠다는 듯 화제를 돌리는 디르엔.
당연히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셰링엄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한 발자국 걸어 나왔다.
"마법에는 얼마나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냥 좋아하는 정도야."
"그렇게 계속 숨기시니 한번 확인해 보고 싶군요. 파이어 랜스."
화악-!
순식간에 나타난 마법진과 함께 생겨난 거대한 불꽃의 창.
일찍이 경계하고 있던 디르엔은 빠르게 마법을 사용했다.
"아쿠아 월."
치이익-!
날아든 불의 창이 부딪치자 엄청난 속도로 증발해 버리는 물의 장벽.
방어가 불가하다는 것을 직감한 디르엔은 곧장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공격의 범위가 너무 넓었던 탓인지, 로브의 한쪽을 태워 버리고 말았다.
-똑바로 좀 피해! 저쪽은 5성급보다 위일 수도 있다고!
아슬아슬한 회피에 크로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 정도의 공격력이면 방어 마법에도 의지하기가 어렵겠지.
슈욱-!
펑-!
그러는 사이에도 마법은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좌측으로 회피하던 디르엔은 곧바로 공격이라는 선택지를 꺼냈다.
팟-!
"프로즌 오브!"
영창과 함께 얼음 조각을 뿜으며 사출된 구체는 빠른 속도로 셰링엄을 향해 날아갔다.
화륵-
그 직후에 둘의 사이로 나타난 커다란 불의 벽.
바로 궤도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얼음 구체는 순식간에 불 속으로 녹아들었다.
셰링엄에게 이런 상성을 이용한 구도는 익숙했지만, 그의 눈은 크게 떠진 상태였다.
'…방금 게 프로즌 오브라고?'
저 마법은 4성급 중에서도 꽤 흔히 사용되는 부류다.
그런데 오브의 중심이 되는 구체와 산개되는 얼음의 크기가 통상보다 3배는 컸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저런 상태가 되는 걸까.
'일단 준비는 끝났군.'
공방을 주고받던 사이, 셰링엄은 바람 마법을 이용해 석판들을 발밑으로 가져왔다.
지금은 불의 장벽으로 시야가 가려진 상황.
본래라면 정교한 조정과 조작이 필요하지만,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없다.
결심을 굳힌 셰링엄은 곧바로 자세를 낮추며 조용히 읊조렸다.
"파루스 레 브레다 이테르."
파직-!
영창을 입에 담자 비석들이 붉은 선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제대로 발동된다면 마계로 연결되는 작은 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확인은 몇 번이나 했으니 문제는 없겠지.'
글리바스의 곳곳에는 수십 개의 반응체가 설치된 상황.
기존의 방법과 전혀 다른 이 실험은 셰링엄에게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을 들여 고안됐다.
반응체 중 한 곳에서라도 붉은 빛줄기가 솟아오른다면 오랜 비원의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플라이."
그는 비석의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 빛기둥의 존재를 확인했다.
팟-!
"아아...!"
잔뜩 긴장했던 셰링엄의 눈에 들어온 하나의 선명한 붉은 빛줄기.
실패할 확률이 높았던 만큼, 감격은 배로 돌아왔다.
"프레첼로시여! 당신의 강림을 위한 첫 불꽃이 드디어 피어올랐습니다! 부디 머지않은 미래에 이곳으로...."
팟-!
그가 마신의 이름을 부르짖던 그때, 갑자기 하나의 빛기둥이 더 생성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눈을 크게 떴지만, 그 충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팟-!
팟-!
"이게 무슨...."
도시의 전역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한 붉은 빛줄기는 벌써 10개를 넘어섰다.
화악-!
충격에 빠진 사이, 아래에서 거대한 불꽃이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피한 셰링엄은 어느새 정면에 도착한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저게 마법을 성공한 증거야?"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자 15개가 넘는 붉은빛이 디르엔의 시선을 끌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은 들지만, 딱히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성공… 성공이라...."
가벼운 물음에 뒤늦게 중얼거리는 셰링엄.
뭔가 싶었는데, 고개를 든 그의 표정이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감사?"
"도련님의 마나 덕분에 수십 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긴 시간을 뛰어넘게 됐습니다. 오늘은 저희 커블로스에게 있어 역사적인 날이 될 것입니다."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 셰링엄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크 선더볼트."
영창과 함께 거대한 검은 번개를 소환했다.
"어스 브레이크!"
두 단어만으로 반응한 디르엔은 고도를 낮춰 바닥의 지면을 뒤집었다.
콰과과-!
하지만 조금도 버티지 못한 채 파괴된 대지의 방어막은 조각이 되어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파직-!
바닥으로 떨어지자 낙석과 함께 틈을 뚫으며 들어오는 검은 번개.
-야, 이거 안 돼!
"윽!"
겨우 직격은 피했지만, 왼쪽 팔의 일부가 공격에 노출되고 말았다.
"역시, 당신이라면 쉽게 죽지 않으시겠지요."
상처를 살피는 사이, 아래를 내려다보던 셰링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이제부터는 팔다리를 전부 날리더라도 전력으로 무력화를 시켜 모셔 가겠습니다. 다크 팔마."
슈욱-!
순간, 영창과 함께 마법진에서 뻗어 나온 엄청난 숫자의 검은색 손.
기괴한 형태의 그것들은 온 땅을 휘저으며 마구잡이로 날아들었다.
-하늘로 가!
탓-!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디르엔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팔의 통증 때문에 제대로 된 판단조차도 쉽지 않았다.
퍼버벙-!
그런 고민조차 두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마법이 날아들었다.
문제는 남아도는 마나를 활용하고 싶어도 저쪽의 움직임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쉬익-!
그때, 갑자기 이곳으로 쇄도하는 셰링엄.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리자 검을 든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모험가 놈들은 저래서 싫다고!
크로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이 상황에선 상당히 유효한 전법임이 분명하다.
디르엔에겐 검사와의 전투에 관한 내성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탓-!
공중전은 불리하다고 판단한 그는 뒤의 숲을 향해 다급히 이동했다.
이 부근은 파괴됐지만, 다른 곳의 나무와 수풀을 이용하면 충분한 엄폐가 가능해질 것이다.
펑-!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도심 쪽에서 들려온 폭발음.
퍼벙-!
슬쩍 시선을 돌리는 사이에도 몇 번의 폭발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시작된 모양이군요."
역시나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던 셰링엄이 불길한 말을 해 왔다.
저 여유로운 모습에서 상황에 대한 자신감이 여실히 보인다.
"시작됐다니?"
"마계의 차원과 연결된 문이 열렸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계의 저급 마수들이 살아가는 최저층이라고 봐야겠지요."
"저 빛줄기가 전부 문이라고?"
"마계의 마수들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일 텐데,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너무도 즐겁다는 듯이 말하는 그이지만, 이 상황은 너무도 최악이다.
"함께 가 주신다면, 마법을 해제할 생각도 있습니다. 도련님의 마나는 저희에게 꼭 필요하니까요."
"어차피 해제할 생각도 없잖아?"
"이럴 땐 아이가 가질 순진함의 부재가 아쉽군요."
슈욱-!
짧은 대답과 함께 쇄도하는 셰링엄.
또 검을 휘두르는가 했는데, 뒤쪽에서 강렬한 빛이 따라서 날아왔다.
아무래도 시야를 제한해 더 명확한 우위를 점하려는 듯하다.
팟-!
눈앞이 하얗게 물듦과 동시에 그와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하지만 디르엔은 되레 앞으로 뛰어 셰링엄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선 플레어!"
미리 준비했던 마법의 영창을 입에 담았다.
"...!"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는지 곧바로 팔을 뿌리치는 셰링엄.
하지만 손이 떨어지는 것보다 노란색 구체에 집어삼켜지는 것이 먼저였다.
화악-!
강렬한 빛이 공간을 지배함과 동시에 디르엔은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일단은 로브로 시야를 가린 채였기에 곧바로 다음 공격을....
"으윽!"
그때, 멀찍이서 셰링엄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조금 더 뒤로 물러선 그는 천천히 로브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빛이 걷히며 드러난 지면 위에는.
꿀럭-
왼팔을 잃은 셰링엄이 피를 쏟아 내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위력은 확실할 거라고.
결과가 나오자 크로노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은 크로노가 직접 만든 4성급 아이덴티티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력한 효과라면 사용처를 확실히 구분해야 할 정도다.
-그리고 네 마나 체질이 조금 특이한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크로노가 이상한 말을 꺼냈다.
'무슨 뜻이야?'
-방금을 보고 확신했어. 아무래도 네 마나로 이루어진 건 서로 간섭하지 않나 봐.
'어?'
지나가듯 듣기엔 여러모로 충격적인 내용.
하지만 그런 대화를 나누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투둑-
"지금은 어쩔 수 없군요."
잃어버린 팔을 얼린 채, 이곳을 응시하는 셰링엄.
상태를 보니 여러모로 소모가 심각한 듯하다.
애초에 폭발로 인한 피해까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도망치려고? 순순히 놓아줄 생각은 없는데."
"죽인다는 선택지를 고른다면 상황은 달랐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도련님의 생명은 당신만의 것이 아니지요. 커블로스의 미래를 위해...."
슈욱-!
그때, 갑자기 사선에서 튀어 올라온 그림자.
털썩-!
차마 반응하지 못한 디르엔은 그대로 무언가에 깔리며 쓰러졌다.
"네놈은 절대로 못 살아남는다!"
광기에 젖은 채 소리치는 것은 계속해서 쓰러져 있던 린토넬라.
그런데 지금은 디르엔의 몸 위에 올라타 단검을 겨누고 있다.
"멈춰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셰링엄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린토넬라의 흥분은 가라앉을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하! 더러운 커블로스 주제에 여기까지 와서 우위에 서려고 하나?"
"…뭐라고?"
"네놈의 역할은 거기서 끝이다. 이제 루블린의 아이가 죽음으로써 사건의 대미를 장식해야 할 때지."
"저 위대한 실험의 결과가 보이지 않는가! 이 정도라면 네 스승도 다시...."
"그 입 닥쳐라! 네 몸은 갈기갈기 찢어서 황실에 가져다줄 것이니까. 그라비티 바인드!"
팟-!
처음 들어 보는 영창과 함께 그에게서 뻗어 나간 빛.
촤악-!
그것이 셰링엄에게 닿자 보라색 선들이 순식간에 몸을 휘감았다.
"으윽!"
서서히 바닥으로 엎어지는 그는 아무래도 저항이 불가한 듯했다.
"너도 마법을 쓸 생각은 하지 마라. 마나를 역류시키는 독이 완전히 퍼졌을 테니까."
다시 고개를 돌린 린토넬라가 얇은 침 같은 것을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아까 다리 쪽이 잠깐 따끔했었는데, 계속해서 틈을 노리고 있었던 듯하다.
게다가 보호 마법까지 전부 뚫었다는 것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런 독을 만들려면 얼마나 복잡한....
"으윽!"
순간, 엄청난 통증이 디르엔의 몸을 지배했다.
셰링엄의 공격에 다쳤던 팔의 부상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야, 왜 그래! 정신 차려!
"윽… 커헉...!"
린토넬라에게 깔린 채 미친 듯이 뒤틀리는 몸.
당장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디르엔은 어떻게든 남은 의식을 끌어모았다.
당장 무슨 마법이라도 써야....
"...?"
그런 노력을 시도하던 디르엔의 사고가 잠시 멈췄다.
-야, 왜 그래?
"젠… 장...."
싫어도 깨달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공격 마법을 쓰려고 해도 반응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못하니 화가 나나? 재능이 넘쳐도 죄다 역류해 뒤틀린 마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그런 디르엔의 반응을 보며 린토넬라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야, 너 진짜 죽어! 뭐라도 해야 한다고!
크로노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렸지만, 이미 디르엔의 의식은 바닥까지 옅어졌다.
이대로라면 결국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진짜, 내 힘이든 뭐든 좀 써 보라니까!
"...!"
그때, 귀를 울린 크로노의 목소리에 떠오른 하나의 생각.
이미 선택지가 없던 디르엔은 손바닥 중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 순간.
팟-!
바닥까지 긁어모은 마나와 함께 황금색 빛줄기가 상공으로 높이 뻗어 갔다.
치이익-!
"아악!"
갑자기 타들어 가는 어깨에 비명을 지르는 린토넬라.
어떻게든 방향을 틀었는데, 빛의 궤도에 제대로 걸린 듯하다.
"끝까지 발악을...! 당장 끝내 주마!"
분노에 찬 듯 린토넬라가 멀쩡한 팔을 이용해 단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디르엔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리찍는 순간!
촤악-!
갑자기 디르엔의 시야에 선혈이 흩뿌려졌다.
"커헉-!"
그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눈앞에 있던 린토넬라가 가슴이 뚫린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 쓰레기들이...."
잠시 당황하고 있었더니, 뒤쪽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본 하늘엔.
"감히 루블린 가문에 이빨을 드러내는가."
마르코의 심복, 멜스가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27.
'저 사람이 왜....'
6성급 마법사이자, 마르코의 교육을 담당하는 인물.
하지만 이곳에 나타나 디르엔을 돕는다는 것은 너무도 이상하다.
그도 그럴 것이 색깔 마법을 얻어 낼 당시에 들었던 비아냥거림이 여러모로 적나라했기 때문이다.
"부상이 심하시군요. 바로 치료하겠습니다."
혼돈에 빠진 사이, 멜스가 바로 옆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붉은 액체가 든 병을 꺼내 디르엔의 입에 가져다 댔다.
꿀꺽- 꿀꺽-
힘이 없는 상태라 흘리는 양이 많았지만, 포션은 어떻게든 목을 타고 넘어갔다.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그의 물음에 디르엔은 천천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완전할 정도는 아니지만, 외상과 독에 대한 통증이 상당 부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를...."
"아, 오해가 조금 있으신 모양이군요."
"네?"
디르엔이 말끝을 흐리며 묻자, 멜스는 의미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평민의 피가 섞였다고 해도 루블린의 성을 이은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당신을 보는 제 시선과는 별개로, 이런 쓰레기들이 선을 넘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지요."
아래로 시선을 내리깐 그의 표정은 마치 혐오스러운 것을 보는 듯했다.
이렇게 직선적인 태도를 보여 주니 오히려 시원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건가요?"
"루블린 각하께서 여러 역할을 맡기셨기에, 서북부에서 바로 넘어왔습니다. 도착과 동시에 상황을 전해 듣고 빠르게 움직였지요."
그의 말을 들은 디르엔은 이 남자가 증원의 마지막 조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마 블루 스틸까지 감정할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아직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여전히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는지 멜스가 물어 왔다.
"그게, 마나가 조금...."
"잠시 몸을 살피겠습니다."
디르엔의 묘한 대답에 멜스는 곧바로 자세를 낮춰 손을 뻗었다.
슈욱-
그러자 천천히 뻗어 나오는 푸른 마나.
마법진이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마법은 아닌 듯하다.
"이 독은… 상당히 본격적으로 노렸던 듯하군요."
"네?"
"항마를 씌워 마나를 공격하는 독은 제작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재료부터 조합 과정까지 상당한 돈과 노력이 들어가게 되지요. 어쨌든 임시 조치이지만, 조금 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파앗-!
그런 말과 함께 멜스는 조금 더 강하게 마나를 흘려 보냈다.
그러자 무언가 뒤틀리고, 꼬인 듯한 느낌이 점차 해소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신 건가요?"
신기한 마음에 디르엔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대답에 돌아오질 않았다.
자세히 보니, 표정이 뭔가 이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
"아, 무언가 말씀하셨습니까?"
"네. 어떤 원리인지 궁금해서요."
아까의 질문을 다시 읊자 그는 손을 떼며, 표정을 원래대로 돌렸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마나를 흘려 몸 전체를 살피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정리했습니다. 이런 일에 특화된 탓에 각하께서도 저를 보내신 것이지요. 아, 천천히 움직이셔야 합니다."
몸을 일으켜 앉으려 하자, 멜스가 조심스레 등을 받쳤다.
처우의 괴리감이 그때와 너무 큰 탓에 여전히 적응은 쉽지 않았다.
'즉사인가.'
어쨌든 앉은 자세로 정면을 보자, 발치에 엎어진 린토넬라가 눈에 들어왔다.
미동은커녕 바닥의 피만 봐도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저기는 안 죽었네.'
그리고 조금 더 떨어진 거리에 엎어져 있는 셰링엄.
양다리와 몸에 집중적으로 공격받은 것 같은데, 가슴이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바인드."
시선을 돌린 멜스는 마법을 사용해 셰링엄의 몸을 묶었다.
린토넬라가 썼던 특이한 마법은 그가 죽음과 동시에 해제된 상태였다.
"전반적인 설명을 듣고 싶지만, 우선은 저쪽을 먼저 처리하겠습니다."
멜스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빛줄기가 보였다.
심지어 이 산 아래와 저택 쪽에도 보이는 탓에 피해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다.
"이곳으로 오던 호위들에겐 아래쪽의 마수를 먼저 정리하라 지시했습니다만.... 아, 이제 도착했군요."
"도련님!"
그때, 아래쪽 멀리서 들려오는 얀테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꽤 많은 인원이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럼 저는 다른 곳을 정리하겠습니다."
"아, 저 붉은색 빛은 전부 마계의 최하층과 연결된 거라고 했어요. 아마 마수들도 보통과는 다를 거예요."
"마계를.... 우선은 알겠습니다. 조금 이따 뵙도록 하지요."
슈욱-!
그렇게 말한 멜스는 곧바로 비행 마법을 사용해 도시 쪽으로 날아갔다.
문제 자체는 해결될 것 같지만, 뭔가 찝찝함 느낌이 남아 있다.
"...?"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이, 발치 아래 린토넬라에게 고정된 시선.
그런데 엎어진 상체 아래로 손바닥 크기의 네모난 물체가 보였다.
'뭐지?'
그것은 하얀 천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위치가 절묘한 탓인지 피에 거의 젖지 않았다.
슥-
호위대가 가까워진 것을 확인한 디르엔은 손수건을 꺼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허리춤의 가방에 쑤셔 넣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도착한 얀테가 다급히 자신의 몸을 살폈다.
"난 괜찮아. 마수가 나타났다고 들었는데, 다친 사람은 없어?"
"지금 그 부분을 신경 쓰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멜스 자작님이 포션을 써 주셔서 정말 괜찮아. 도시 전역까지 나타났으면 피해가 큰 거지?"
"하아...."
디르엔의 말에 얀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납치를 당했던 12살이 어째서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걸까.
익숙해지고 싶어도, 호위에 실패한 입장에선 반쯤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마수가 나타난 것은 전 병력이 도련님의 수색에 나선 직후였습니다. 저희는 이 광산을 오르던 중에 마주했습니다만, 멜스 자작께서 상황을 전파해 주셨지요."
"마수는? 처치할 수 있었어? 마계에서 온 것들이라 힘들 거라고 저 흑마법사가 그랬었는데."
"마계라니.... 그래서 마수들의 모습이 이상했던 것이군요."
"왜? 상대할 수 없었던 거야?"
"당황하긴 했지만, 대처가 불가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도시 내에도 다수의 병력과 모험가가 있으니 피해는 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다행이네."
셰링엄은 이번 마법이 마계의 최하층과 연결하는 것이라고 했다.
얼마나 많은 층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까.
"절반은 주변의 경계와 현장의 증거 수집을 시작해라. 나머지는 납치된 이들의 상태를 살피고, 응급조치부터 시행하도록."
"예!"
상황이 정리된 후, 얀테는 빠르게 인원을 분배하며 지시를 내렸다.
"도련님은 제가 직접 모시고 갈 것이니,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빠르게 현장의 확인만 끝내겠습니다."
"응."
디르엔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아수라장이 된 연구장 쪽으로 이동했다.
호위대를 담당하는 만큼 직접 상황을 보려는 듯하다.
-너 진짜 괜찮아?
주변을 살피고 있자, 크로노가 반쯤 불안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체력이 바닥난 느낌 말고는 괜찮아.'
-그 정도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지, 보통이었으면 바로 저세상에 가는 거라고. 그러니까 제발 다음부터는 좀 조심히… 뭐 해?
잔소리를 잇던 작은 마법진의 반짝임이 멈췄다.
그도 그럴 것이 디르엔이 갑자기 로브를 쥐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하냐니까?
'확인해 볼 게 있어서.'
-확인?
크로노의 물음에 그는 대답 없이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해진 로브로 몸을 가린 채 손을 뻗었다.
팟-!
"익스트랙션."
영창과 동시에 푸른빛이 마법진에 감돌았다.
하지만.
슈욱-
그 빛은 빠른 속도로 흩어지며 사라지고 말았다.
[아이덴티티 인자 획득에 실패했습니다.]
'흐음, 안 되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용해 본 마법이 깔끔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바실리스크에게서 1개를 얻었는데, 4성급 마법사로는 안 된다는 걸까.
-너 뭔가 시체에 익숙한 느낌이다?
옆에 있던 크로노가 의외라는 듯이 물어 왔다.
'남들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평민이 전쟁에 계속 내몰리거나, 귀족에게 즉결 처형을 당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잖아.'
-…도대체 무슨 세계에서 살았던 거야? 그런 망나니 같은 짓을 하는 놈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그래?'
전생의 이야기를 꺼냈더니 크로노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디르엔의 친모가 지하로 쫓겨나 출산했던 것만 봐도 차별은 이 세계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물론, 전생처럼 일상에 섞인 분위기가 아님은 루블린의 영지에서도 충분히 깨닫고 있다.
조금이라도 덜하다면 좋은 거겠지.
'어쨌든 아쉽네.'
5개를 모아야 조합이 가능한 아이덴티티 인자.
크로노에게서 얻은 5개가 태양이 됐으니, 지금은 바실리스크에게서 얻은 하나뿐이다.
하지만 4성급 마법사에게서 얻지 못한 것으로 보아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마나의 질과 양이 충족돼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일정한 성급의 유무가 절대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접근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뭐야? 저것도 하려고?
셰링엄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크로노가 또 반응을 보였다.
'당연하지. 혹시 나올지도 모르잖아.'
-아니, 살아 있는 데다 흑마법사잖아. 저 불길한 놈 거를 얻겠다고?
'아무것도 안 나올까 봐 더 걱정이지. 게다가 기절해 있으니까, 오히려 좋은 거야.'
팟-!
"익스트랙션."
주저 없이 내뱉은 영창과 함께 푸른빛이 마법진에 감돌았다.
슈욱-!
그때, 셰링엄의 몸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흘러오는 마나의 흔적.
그 잔상이 사라지자 정면에 문장이 떠올랐다.
[아이덴티티 인자 1개를 획득했습니다.]
"와!"
순간, 마법의 성공과 함께 입 밖으로 나온 소리.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당연히 근처에 있던 호위들은 즉각 반응을 해 왔다.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바깥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조금 아파서 그랬어. 이제 괜찮아."
"정말 죄송합니다! 우선은 이 회복 포션을...."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러니까 천천히 해도 돼."
"예!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혀 전달이 안 된 듯 호위 기사는 포션을 두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영향인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현장의 정리가 끝났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아래에서 올라온 얀테가 디르엔의 몸을 자신의 말 위에 앉혔다.
그리고 뒤에서 감싸는 모양새로 자리를 잡았다.
"이동한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이동하기 시작한 무리.
산등성이를 따라 아래로 달리자 핏자국이 흥건한 곳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죽은 기괴한 마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많이 나타난 거야?"
"예. B급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이 C급 이하였던 덕에 전부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사체의 상태가 깔끔하진 않았지만, 형태는 명확하게 보였다.
-무섭게도 생겼네.
'그러게.'
크로노의 말에 디르엔은 빠르게 수긍했다.
인간과 소, 늑대, 스켈레톤, 고블린 등이 섞인 모양새가 너무 괴상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C급 이하라고 하지 않았어?"
게다가 코볼트, 홉 고블린 등 익숙한 마수들까지 보여 얀테의 발언에 의문이 생겼다.
저들은 전부 E급과 D급에 해당하는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모습은 그렇지만, 크기와 강함이 너무도 달랐습니다. 아마 마계의 환경이 영향을 끼친 것이겠지요."
그의 물음에 얀테는 아래의 사체들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최하층이 이 정도라면 위쪽은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걸까.
"얀테만 나랑 돌아가고, 나머지는 토벌을 도와주는 게 좋지 않아?"
"죄송하지만, 저희에겐 도련님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게다가 멜스 자작께서 가셨다면 큰 무리 없이 토벌이 진행되겠지요. 보레아트 님의 증원 병력 또한 빠르게 투입되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호한 얀테의 말에 디르엔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무자가 저렇게 말한다면 문제는 없겠지.
"다시 이동하겠습니다."
어쨌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말은 멈추는 일 없이 저택까지 도달했다.
"아이고,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말에서 내리자 시종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역시 이곳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던 듯 주변에는 마수의 사체가 대충 치워진 상태였다.
"도, 도련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다급히 근처로 와 굽실대기 시작한 아메프.
상당히 정신이 없어 보이는 게 충격이 큰 듯하다.
"물러서십시오. 상처가 크셨으니 치료와 휴식이 먼저 필요합니다. 도련님, 안으로 드시지요."
싸늘한 목소리의 얀테는 주변을 물린 뒤, 디르엔을 저택의 방까지 옮겼다.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은 그는 침대에 누워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고마워. 밑에서 시간을 끌리긴 싫었거든. 빨리 상황을 알려 주기도 해야 하니까."
"바로 회복에 전념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저희의 부족함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두 번이나 호위를 실패한 책임은 일이 마무리된 후에 모두 지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거 말인데...."
반역 죄인이 된 듯한 모습에 디르엔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들을 약간의 각색을 통해 전달했다.
"갑자기 이동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듣던 얀테는 사건의 시작에 의문을 품었다.
"응. 잠들지도 않았는데, 바닥의 그림자로 빨려 들어갔어. 아마 셰링엄이 사용한 흑마법인 것 같아."
"불안한 예측이 전부 맞아 들었군요."
이야기를 들은 얀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디르엔의 설명으로 불가항력이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책을 떨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난 얘가 제일 불쌍한 거 같아.
'....'
풀이 죽은 그를 보니 디르엔 또한 조금의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도 흑마법사를 잡아냈으니, 결과는 괜찮은 게 아닐까.
"우선 현장의 증거는 전부 확보했으니, 해 주신 말씀 또한 보고에 더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련님께선 영지로 복귀할 때까지 안정을 취해 주십시오."
"응,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자, 얀테는 경례와 함께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방을 나서지 않은 채 문 옆에 섰다.
"여기에 있으려고?"
"물론입니다. 멜스 자작께서 와 주셨으니 저는 본연의 호위 임무에 집중하는 것이 맞습니다. 세 명은 방 내부에 머무를 것이니, 편안히 휴식을 취해 주십시오."
거절은 거절한다는 듯한 목소리로 자세를 잡는 얀테.
"어.... 그럼 조금만 잘게."
어차피 시종들도 있는 이상, 별 차이는 없었기에 디르엔은 바로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몰래 던져 놨던 가방 속에서 피 묻은 책을 꺼냈다.
"라이트."
팟-!
작은 빛을 고정한 그는 표지를 천천히 넘겼다.
그러자 한 문장이 시선을 강렬하게 이끌었다.
<경애하는 로베르카를 위해.>
28.
'로베르카?'
첫 장에 덩그러니 적힌 글을 본 디르엔은 당황했다.
이 이름이 기억 속에 있는 성자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해?'
-이름만 똑같은 거겠지. 뭐가 아쉽다고 그런 놈을 제자로 받아? 심지어 나이를 생각하면 성자가 되고도 100년은 지난 시점일 텐데.
'보통 탑의 연구실에 머무른다고 했지? 밖으로는 거의 안 나오는 거야?'
-손에 꼽을 정도지. 애초에 그 사람은 제자 같은 걸 받는 성격이 아니야. 진짜 남한테는 조금의 관심도 없으니까.
가능성을 제시하자 크로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무슨 성격인가 싶지만, 직접 만나 봤던 그의 의견이라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겠지.
'일단은 볼까.'
펄럭-
생각을 정리한 디르엔은 반쯤 의심을 가진 채 다음 장을 넘겼다.
<당신이 나를 구한 그날의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합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마주한 마법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릴 때였나?'
훨씬 과거에서부터 시작된 내용에 잠시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더욱 커지는 궁금증을 가지고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당신의 여정에 함께할 수 있도록 허락한 날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이후 여러 마법을 배우며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지요.>
펄럭-
<하지만 5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당신이 지은 체념의 표정은 나를 어두운 수렁으로 빠트렸습니다. 차라리 화를 냈다면, 왜 그렇게밖에 하지 못하느냐 짜증을 냈다면 내 마음은 더 단단해졌을 겁니다.>
여기까지 읽었을 땐 이미 뒤틀린 글씨체가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해는 가도, 공감은 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다.
펄럭-
<며칠의 시간이 지난 후, 당신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겠노라며 나를 떠났습니다. 나의 모자란 재능이 죄악이 되어....>
<…당신에 대한 증오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떨어져 있는 시간만큼 간절함은 더욱 커졌습니다....>
<…조금 다른 방법을 쓰고자 합니다. 역사에서 한 번도 닿지 못한 차원의 흑마법을 당신이 접한다면....>
<…실험장이 자신의 고향이라면, 그 중요한 자료를 손에 넣은 것이 나라면, 당신의 마음은 어떨까....>
<…이 행복한 상상은 나의 모든 죄악을 말끔히 씻어 내려갔습니다.>
펄럭-
펄럭-
이후로 쓰인 글씨체는 말끔히 정돈된 상태였다.
그리고 일기 형태의 마지막 장은 불편한 느낌이 들 정도로 공들여 적혀 있었다.
<…드디어 내일이 결전의 날입니다. 귀족가 자제의 희생과 흑마법의 성공, 그리고 그 흑막을 밝혀낸 나는 상당한 공로를 인정받을 겁니다. 그 대가로 성자를 알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지요.
제 모든 연구가 담긴 이 일지를 빨리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나의 경애하는 로베르카여.>
-진짜 성자였잖아! 아니, 그보다 이 미친놈은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인 거야?
부정했던 것과 다른 결과에 크로노가 목소리를 높였다.
디르엔 또한 이 서사를 전부 마주하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도대체 성자 로베르카는 어떤 사람인 걸까.
'어쨌든 마법진도 기록한 모양이네.'
마지막 문단에서 나왔던 마법진의 존재는 단연 가장 눈에 띄었다.
뒤쪽엔 아직 몇 장의 종이가 남아 있었기에, 디르엔은 곧바로 손을 움직였다.
펄럭-
'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2개의 마법진.
개조의 흔적으로 덧칠된 것을 보니, 성자가 알려 줬던 마법인 듯하다.
이걸 성과로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스윽-
빠르게 조수를 불러낸 디르엔은 모든 마법진을 베껴 등록했다.
그것이 곧장 열띤 개조로 이어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개조 마법:그라비티 바인드(4성급)]
[중력장을 소환해 대상을 강력하게 속박한다.]
[개조 마법:매직 디텍션(4성급)]
[지정한 범위에 남은 마법의 흔적으로 마나의 주인을 추적한다. 대상과 접촉한 경험이 있는 경우에 한해 대상을 특정할 수 있다.]
'이걸로 알아냈었구나.'
마법의 시전자가 디르엔임을 알아낼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투명화 상태였던 그가 발각됐던 원인이 이제야 드러났다.
린토넬라는 탐지 마법이라고 대강 넘어갔었기에, 그 궁금증이 가슴 깊숙이 박힌 채였다.
'좋네.'
어쨌든 새로운 마법을 손에 넣은 디르엔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개조 범위는 20퍼센트 내외지만, 구조가 일반적이지 않은 덕에 보는 맛이 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안 복잡하네.'
-마법을 만드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게 힘든 일이라고. 게다가 저성급인 걸 보니, 심혈을 기울인 수준도 아니야. 적당히 쓸 만한 것 같아서 만든 거겠지.
크로노의 말을 들으니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생각해 보니, 성자가 되기 전에 마법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세계의 정점에 선 마법사이니 말이다.
펄럭-
'이쪽은 흑마법인가.'
한 장을 더 넘기니 다른 느낌의 마법진 3개가 그려져 있었다.
앞선 것과 달리 정보가 상당히 적지만, 나름대로 건드려 보려고 노력한 듯하다.
[개조 마법:다크 선더볼트(5성급)]
[검은 번개를 소환해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공격에 노출된 대상은 모든 받는 피해가 증가한다.]
[개조 마법:다크 팔마(5성급)]
[검은 그림자 손을 소환해 대상을 속박한다. 묶인 손의 개수에 비례해 대상의 체력을 고갈시킨다.]
[개조 마법:섀도우 포켓(5성급)]
[자신의 그림자에 공간을 만들어 물체를 보관할 수 있다. 단, 살아 있는 존재는 경계를 통과할 수 없다.]
'포켓?'
똑같이 개조를 마치던 끝에 마주한 새로운 마법.
앞선 2개는 셰링엄이 직접 썼던 것인데, 마지막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실용성만 보면 가장 좋은 게 아닐까.
-뒤에 더 있는 거 아니야?
'뒤에?'
그 말에 디르엔은 책장을 손으로 문질렀다.
펄럭-
그러자 색이 조금 더 짙은 얇은 종이가 흐물거리며 떨어져 나왔다.
-아까 그 흑마법인가?
'그런 것 같은데.'
마지막 한 페이지에 촘촘하게 기록된 기이한 내용.
상단에는 셰링엄이 내뱉었던 '파루스 레 브레다 이테르'라는 영창문이 적혀 있다.
하지만 마법진이 정확히 그려진 것도 아닌 데다, 언어와 구조 자체가 너무 다른 탓에 감이 잡히질 않았다.
[분석에 실패했습니다.]
[등록된 마법진을 보존합니다.]
억지로 끼워 맞춘 시도에 조수가 냉철한 결과를 가져왔다.
-일반 흑마법이랑은 완전히 궤가 다르네. 이건 진짜 모르겠다.
일말의 지식이라도 있던 크로노조차 포기해 버린 해석.
아무래도 이것을 다루려면 별개의 지식이 필요할 듯하다.
탁-
좀 더 내용을 살피던 그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아까 등록해 뒀던 마법진을 불러왔다.
[개조 마법:마나 드레인(5성급)]
[대상의 마나를 추출해 형상화한다. 추출한 마나는 단수, 혹은 다수의 대상에게 분배할 수 있다.]
자동 개조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 마법진.
몰래 베끼긴 했지만, 다행히도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슥-
수동 개조로 전환한 디르엔은 작업을 진행하며 속으로 말을 꺼냈다.
'아까 그 말은 뭐였어?'
-뭐가?
'마법이 간섭할 수 없다고 했던 그거.'
-아.
아이덴티티 마법을 사용한 직후에 나왔던 크로노의 말.
그 또한 생각난 듯했기에 디르엔은 다시 물음을 던졌다.
'내 마법은 나한테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는 거야?'
-너도 대충 눈치는 챘잖아. 마나 폭발도 그렇고, 저번에 바실리스크를 잡을 때도 그랬으니까.
'이유는 몰라?'
-전혀. 짚이는 것도 없어.
본래 발동된 마법의 영향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마법을 사용한 본인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언제나 마법의 중심에 있던 디르엔은 조금의 피해조차 겪지 않았다.
어떤 이유인지는 당장 찾을 수 없지만 말이다.
'진짜면 꽤 쓸 만하겠네.'
-넌 자폭으로만 쓸 거 같으니까, 제발 자중 좀 해.
감상을 내뱉자 크로노가 한숨 섞인 충고를 해 왔다.
어쨌거나 쓸 수 있는 상황에선 유용하겠지.
'슬슬… 한계인가.'
마지막 마법진의 개조까지 끝나자 한계에 다다른 피로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졌던 디르엔이 눈을 뜬 것은 루블린의 저택에 옮겨진 이후였다.
***
"큰 공을 세웠군."
이튿날 밤, 루블린 가문 저택의 최상층.
멜스의 보고를 들은 공작은 증원에 관한 짧은 치하를 내렸다.
"제가 한 것은 잔당의 청소 정도였습니다. 비리 정황과 흑마법에 관한 것들을 밝혀낸 것은 디르엔 도련님을 포함한 조사대이지요."
"솔직한 평가군. 그 아이에 대한 좋은 감정은 없지 않았나?"
"객관적인 사실만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공로에 관한 것에 사사로운 감정을 섞어 귀족의 품격을 떨어트릴 수는 없지요."
그 물음에 단호하게 대답하는 멜스.
시원하리만큼 명확한 구분은 그의 가치관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이번 상황만큼은 루블린 또한 별도의 수를 쓸 수 없었다.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오늘 황실에 전달한 보고 또한 진실만을 담아야 했지."
"황제 폐하께서도 필시 디르엔 도련님께 관심을 가지시겠지요. 루블린 가문으로서도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영광이라...."
황제가 거론되자 공작은 잠시 사색에 빠졌다.
아직 디르엔의 잠재력이 눈에 띈 부분은 없지만, 그 황제라면 관심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장남인 카일을 양자로 데려가려고 했던 것이 기껏해야 몇 년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각하."
그 과거와 현재의 미묘한 구도를 잘 아는 멜스는 잠시 침묵을 유지한 뒤, 입을 열었다.
"커블로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상, 폐하께선 제국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실 겁니다. 루블린이 그 역할의 선두에 선다면 여러 방면에서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베르세르 대공의 뜻인가? 이곳에 오기 전에 일찍이 보고를 전달했을 테지."
"각하, 그것은...."
"자네를 글리바스에 보낸 이상,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다. 다만 상황이 예상보다 급격하게 흘러간 것이 문제이지."
황제의 명령은 절대적이지만, 몇몇 선대의 황제들은 여러 제약을 황실의 피에 새겨 두었다.
우매한 폭군이 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카일을 데려간다는 제안을 거절한 것 또한 그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심기를 건드려 버렸지.'
그날 이후, 현 황제는 루블린에 대한 다양한 견제를 시작했다.
대부분은 주변 귀족들을 이용한 방법이었지만, 과거부터 많은 귀족의 시기와 질투를 받은 탓에 티가 나지 않았다.
그중 황제의 검인 베르세르 대공 가문은 루블린을 황실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루블린 공작에겐 쉽게 통할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더 피곤해지겠군.'
어쨌든 커블로스라는 변수가 심연을 끄집어낸 이상, 정세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게 된다.
그들이 선을 넘기 전에 무언가 준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후."
작게 한숨을 내쉰 공작은 화제를 바꿔 말을 이어 갔다.
"범죄자의 이송 부대는 내일 도착한다고 했나?"
"예. 커블로스에 관한 일이니만큼, 황실에서 직접 관리를 하는 것이 좋겠지요."
제도로 보고가 출발했던 것은 오늘 점심.
그런데 그 답신은 전례 없을 정도로 빠르게 도착했다.
일어난 사건의 심각성이 잘 전달된 것 같지만, 속내는 뻔히 보였다.
황실의, 황실에 의한, 황실을 위한 모든 것을 구성하려는 움직임은 언제나 일관됐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디르엔의 마법적인 변화는 없었나? 마르코를 가르치는 자네라면 뭔가 알아차렸을 수도 있을 듯한데."
"마법적인 변화는 모르겠지만, 1성급 마법을 이용해 신호를 쏘아 올린 기지는 훌륭했습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12살 아이가 쉽게 가질 수 있는 판단력은 아니지요."
공작의 물음에 준비했던 대답을 술술 이어 가는 멜스.
그 얼굴은 조금 경직되어 있었지만, 창밖을 보던 공작이 알아차릴 리는 없었다.
"결국, 힘의 성장은 미미했다는 것이군."
"당장은 그렇습니다만, 이번의 사건은 상당히 큰 자극이 되었을 겁니다.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회복 이후를 지켜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공작의 건조한 반응에 멜스는 희망적인 관측을 담은 의견을 전달했다.
자신이 봤던 광경을 숨긴 것에 대한 작은 사죄이기도 했다.
'…분명, 잘못 본 것이 아니었지.'
글리바스에 도착한 그가 광산의 정상으로 직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온갖 마법이 터지는 광경은 멀리서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한 멜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황금빛 마나 줄기를 쏘는 디르엔의 모습이었다.
마법이 아니라, 마나 그 자체가 명확한 형태로 적의 몸을 꿰뚫은 것이다.
게다가.
'그 마나 또한 기이했지.'
디르엔의 몸에 침투한 독을 해소할 때, 엄청난 마나의 격류가 감각을 지배했다.
처음엔 독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의 해일과도 같았다.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아직 아이덴티티도 없는 아이가 마나를 그런 형태로 꺼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몸에서 느꼈던 마나까지 본연의 것이라면 이것은 역사적인 문제다.
만약 엄청난 옥석이 빛을 발한 것이라면 다양한 카드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피로할 테니, 그만 돌아가 쉬어라. 내일 있을 범죄자의 인도에는 나 또한 자리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루블린 공작이 퇴실을 명했다.
"알겠습니다."
마침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했기에 멜스는 인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
홀로 창밖을 보던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였다.
***
한 달 뒤.
완전히 몸을 회복한 디르엔은 평소의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사실 전반적인 회복은 훨씬 빠르게 끝이 났지만, 대외적인 인식을 위해서 조금 시간을 끌었다.
'잘 정리된 건 다행이네.'
저택에서 받은 첫 보고는 글리바스의 뒷정리 목록과도 같았다.
커블로스의 피해자들은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그중엔 노멘의 아이 또한 있었다.
안타깝지만 과거의 피해자들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비리는 바로 사형이네.'
블루 스틸을 횡령한 아메프는 즉결 처분이 내려졌다.
알고 보니 글리바스 자체의 자금마저도 열심히 빼돌렸다는 모양이다.
커블로스와 관련한 건은 제국에 일임했다고 하니, 차차 성과가 나오겠지.
"도련님! 공작 각하께서 찾으세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곳으로 다가오는 앤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이?"
"네. 옷도 갈아입으셔야 하니 얼른 일어나세요."
"응."
몸을 일으킨 디르엔은 시종들과 함께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조금 더 고급스러운 옷으로 갈아입은 뒤, 저택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뭐야, 너도 왔어?"
공작의 방 앞으로 가자 마르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어 왔다.
다른 사람은 없는 것을 보니 둘만 호출한 듯하다.
"각하, 도련님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라."
시종의 보고에 안쪽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들어가십시오."
가벼운 경첩 소리와 함께 열린 문.
마르코는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기에, 디르엔은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부, 부르셨습니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자, 공작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낮은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앉아라."
"예."
"예!"
짧은 지시에 두 아이는 소파 의자에 착석했다.
"...."
"...."
모두가 자리를 잡았음에도 이어지지 않는 대화.
하지만 그 침묵을 깬 공작의 말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너희 둘은 황명에 따라 다음 해, 제노아에 입학하도록 한다."
29.
"네? 벌써 제르노에 갈 수 있는 건가요?"
공작의 말에 마르코는 눈을 반짝였다.
디르엔 역시 반가운 이야기였지만,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하나 있었다.
"아버님, 입학 나이가 줄어든 것인가요?"
"정확히는 1성급 마스터까지 도달한 인원의 입학을 강행하는 것이다. 이유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의 물음에 공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글리바스의 일이 원인임은 알 수가 있다.
'심각하기는 한가 보네.'
셰링엄은 차원의 연결에 성공하는 것이 역사상 처음 이루는 과업이라고 했다.
그것이 황제의 귀에 들어간 이상 상당히 많은 조치와 대비가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입학 나이를 없애는 건 황제 혼자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당연히 마법 학회랑은 논의를 마쳤을 거야. 흑마법의 증거들도 넘어갔을 테니까, 심각성을 잘 알았겠지. 커블로스는 양쪽 다 민감한 사안이니까.
속으로 묻자, 크로노가 마법진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냈다.
혹시 황제가 강제로 밀어붙인 느낌이 아닐까 싶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그 마법 학회는 제국에도 있는 거야?'
-본부는 마법 대륙에 있지만, 각 국가에도 지부가 있어. 그래도 제르노의 학원장이면 지부장보다 높을걸?
'그래?'
설명을 들으니, 학원이 얼마나 중요한 기관인지 새삼 와닿았다.
그 학원장은 어떤 마법사일까.
"입학식은 다음 해의 봄에 열릴 예정이다. 오늘부터 필요한 사전 교육을 잘 받도록 해라. 그리고."
말을 이어 가던 공작의 시선이 다시금 디르엔 쪽으로 고정됐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너는 입학식 전날, 나와 함께 황제 폐하를 직접 알현할 것이다. 황실에 대한 예절 교육을 명해 두었으니, 절대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익혀 두거라."
"아, 아버님! 어째서 디르엔만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건가요?"
그때, 옆에서 멍하게 있던 마르코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디르엔 역시도 궁금했던 부분이었기에 곧바로 질문을 입에 담았다.
"폐하께서 저를 지목하신 게 맞나요?"
"그래. 커블로스의 일과 관련해서 직접 이야기를 들으려 하시는 거겠지. 여쭤보시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면 될 뿐이니, 당장은 교육에 집중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 대화가 끝난 후, 퇴실 명령에 따라 두 아이는 방 밖으로 나왔다.
"너, 우쭐대지 마."
계단으로 가려는데 마르코가 앞을 막아섰다.
알현 이야기가 나왔던 후부터 계속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뭐가?"
"운 좋게 큰 사건에 휘말린 주제에 공을 세웠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거야. 황제 폐하와 아버님은 네가 아니라 흑마법사에 관심이 있으신 거라고!"
"딱히 그런 생각은 안 하는데. 어차피 너도 공은 충분히 세웠잖아?"
마르코가 시험을 위해 보내진 지역은 서북부의 키에스카였다.
분명 교역로의 환경 개선과 치안 부분에서 성과를 올렸다고 했던가.
"당연하지! 키에스카 자작도 큰 도움이 됐다고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했으니까."
"그럼 아버님은 너를 더 인정하시는 거 아니야? 결국 나는 비리를 밝힌 것 말고는 별다른 걸 못했으니까. 폐하께서 부르신 것도 조사의 일환일 뿐일 테고."
"…그래?"
적당히 회유의 말을 던지자 쉽게 넘어오는 마르코.
하지만 공작의 채점 기준을 모르는 이상, 정말로 그런 인식일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학원에 가서도 절대 너한테는 안 질 거야. 어머님 말씀처럼 서자와의 차이를 보여 줄 테니까!"
그런 말을 남긴 채, 마르코는 몸을 휙 돌리며 시종들과 함께 계단으로 내려갔다.
"도련님, 원색적인 비난에는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저희는 도련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르델의 말이 맞습니다. 글리바스에서 이룩한 도련님의 성과는 제국… 아니, 세계를 구할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델과 얀테가 응원의 말을 전해 왔다.
글리바스의 일로 호위에서 해임될 뻔한 그였지만, 디르엔의 호소와 여러 공적 덕분에 현상을 유지하게 됐다.
"응, 고마워. 교육은 바로 시작하는 거야?"
"네. 준비를 마치고, 수업 교실로 가시면 됩니다. 어서 돌아가시죠."
조금의 재촉과 함께 디르엔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간단한 준비를 마친 후, 익숙한 교실로 발길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주한 남성의 정체에 디르엔은 잠시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멜스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멜스 자작께서 수업하시는 건가요?"
"켈리마프 기사단장은 여유가 없는 탓에 제가 수업을 맡게 됐습니다. 바로 자리하시지요."
간단한 이유를 들은 디르엔은 그의 손짓에 따라 정면의 빈자리로 향했다.
조금 뒤, 마르코까지 도착했을 땐 평소처럼 4명의 아이가 일렬로 앉아 있었다.
다른 영지로 훈련을 떠난 페니파는 이미 입학을 포기한 상태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시선이 집중된 것을 확인한 멜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여러분은 1년 뒤, 제르노 마법 학원에 입학하시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마르코 도련님과 디르엔 도련님은 한 해 일찍 들어가시게 되었지요."
그 말이 나오자 슬쩍 옆을 살폈는데, 다른 네 아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필요한 설명은 미리 마친 듯하다.
"제르노 마법 학원은 마법 대륙의 학회 산하의 마법사 육성 기관입니다. 그 때문에 소소한 규칙들이 독립적으로 정해져 있지요. 나눠 드린 자료를 봐 주시길 바랍니다."
펄럭-
그의 목소리와 함께 앞으로 날아드는 얇은 양피지.
허공에 멈춘 그것을 잡아서 펼치자 몇 개의 문장이 펼쳐졌다.
<주요 교칙>
1. 모든 학생은 오로지 실력과 성적, 성과에 따라 대우를 받는다.
2. 제국 법령에 따른 신분 제도는 교내에서 적용되지 않으며, 어떠한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
3. 외부로부터의 모든 지원은 금지한다. 제공되는 의식주를 제외한 생활 비용은 학원에서 발주하는 과제로 벌어들일 수 있다.
'알고 봐도 파격적이네.'
눈을 의심할 만한 내용이지만, 디르엔은 이미 크로노와 주변 사람들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보시다시피 학원 내부는 독자적인 규율로 관리됩니다. 문제를 일으켜 루블린 가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이게 진짜였어? 평민이랑 똑같은 신분이 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맞아! 이건 너무 이상해!"
멜스의 설명에 쌍둥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마르코도 인상을 찌푸린 것을 보니, 알고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하다.
샤를은 언제나처럼 당황한 기색 정도이고.
'너도 제르노의 내부는 잘 모른다고 했지? 마법 대륙엔 신분이 없으니까.'
-알 만큼은 알고, 크게 다를 것도 없어. 마법 학원은 철저하게 마법의 향상을 위한 곳이니까.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동기가 될 만한 재료를 추가하는 거지.
'상상이 안 되네. 평민이랑 귀족이 같은 선상이라니.'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상상하는 정도는 아니야. 신분의 벽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없잖아.
크로노의 단호한 설명에 잠깐 의식이 환기됐다.
완전 평등이라는 기이한 체계가 제대로 돌아간다면 오히려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깥보다는 유하다는 거지?'
-뭐, 그런 셈이지. 대놓고 신분을 들먹이면 퇴학까지 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더 복잡한 느낌이기도 해. 고위 가문 주변에는 알아서 거머리들이 붙거든.
마지막 이야기를 듣자 머릿속에 여러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권력에 잔챙이들이 모여드는 꼴은 전생에서도 지겹게 봤기 때문이다.
"그럼 본격적인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규율에 관한 짧은 설명이 끝난 후, 멜스는 바로 마법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기존 마법진의 복습과 추가적인 마법의 습득에 초점이 맞춰진 일반적인 교육이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 같은 시간에 뵙도록 하지요."
몇 시간의 수업이 마무리된 후, 멜스의 인사와 함께 아이들은 방을 나섰다.
하지만 디르엔은 그 대열을 뒤따를 수 없었다.
"그럼, 이제부터 궁중 예절에 관한 것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황제 폐하께 실례하는 일이 없도록 잘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흠, 우선 제게 말을 높이시는 것부터 해결해야겠군요. 본래 공작령에 소속된 모든 귀족에겐 하대가 기본입니다. 루블린의 힘을 조금 더 의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았어."
왜 이제야 말을 꺼내는지 모르겠지만, 심경의 변화라도 있던 모양이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하시지요."
바로 돌입한 교육은 디르엔의 생각보다 훨씬 어렵게 흘러갔다.
자세 하나하나와 세세한 움직임까지 전부 뜯어고쳐지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육이 제도로 출발하기 전날까지 이어질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어두운 지하의 감옥 안.
그곳엔 상처가 가득한 셰링엄이 고통 섞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으윽...."
글리바스에서 붙잡힌 그가 제도에 도착한 것은 한 달 전.
곧바로 이어진 신문과 고문은 심신을 빠르게 갉아먹었다.
하지만 갖가지 시도에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 주는 일은 없었다.
정신력과 분노 따위의 것이 아니라, 눈에 담았던 희망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것만… 그것만 손에 넣는다면....'
글리바스에서 진행한 실험은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에 다다랐다.
단순한 마법진의 구현을 넘어서 마계를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마나 공급체까지 발견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커블로스의 손에 들어온다면 비원의 달성 시기를 엄청나게 앞당길 수 있다.
문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군.'
가장 깊숙한 곳에 박힌 이 철창에서 탈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7성급 결계와 수많은 경비를 어떻게 뚫을 수 있을까.
탁-
그때, 갑자기 멀찍이서 들려온 이상한 소리.
'뭐지?'
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을 보니 졸음과 싸우려 머리를 휘적거리고 있다.
아무래도 지금 시간은 새벽의 어딘가인 듯하다.
탁-
다시 한번 들려온 소리에 셰링엄은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철창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아이 씨, 귀찮아!"
콰과광-!
엄청난 고성과 함께 입구 쪽의 벽이 무너졌다.
"뭣...!"
"치, 침입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두 경비가 당황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촤악-!
"커헉!"
무언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오랜만이군, 셰링엄!"
"하인테? 어떻게 여기에...."
자홍색의 검을 든 채 정면에 선 덩치 큰 남성.
아무리 다시 봐도 장로 고레이츠의 심복인 하인테가 분명하다.
"네 머리는 장식이냐? 결계 무력화가 끝나면 돌입하라고 했잖아!"
그리고 입구 쪽에서 검은 머리칼의 여성이 표정을 찌푸린 채 다가왔다.
"비네, 당신까지 오신 겁니까?"
"오랜만이네. 솔직히 혼자 오는 게 더 나을 뻔했어. 저런 멍청한 새끼는 방해만 된다고."
하인테를 째려보는 그녀 역시 고레이츠의 심복 중 하나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지하 감옥에 나타난 것일까.
"설마, 장로께서 명하신 것입니까? 어째서 이런 위험을...."
"당연히 그분의 명령이긴 하지만, 이번엔 조금 복잡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몰라. 그냥 직접 가서 들어. 제국군 놈들이 몰려올 거 같으니까."
귀찮다는 듯이 대답한 그녀는 손을 뻗어 셰링엄과 하인테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팟-!
"하이퍼 보이드."
영창과 함께 세 사람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30.
1년 후, 봄.
루블린의 영지를 떠난 마차는 거대한 제도의 성벽 앞에 도달했다.
"와!"
"엄청 크다!"
마차가 성문을 통과하자 아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루블린 영지의 도시 또한 규모가 큰 곳이지만, 이곳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너는 와 본 적 있다고 했지?'
-재료 수급 때문에 제국에는 꽤 많이 들렀지. 제도까지 온 적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크로노가 살았던 마법 대륙과 인대륙에 위치한 제국은 거리가 상당하다.
그의 성격이면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 같은데, 실험 재료가 몸을 움직인 모양이다.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춘 곳은 거대한 저택 부지 내부였다.
루블린 가문이 제국에 머무를 때 사용하는 별장이라고 했는데, 이 정도면 그런 수준은 넘어섰다.
"휴식을 취한 뒤, 저녁까지는 자유롭게 행동해라. 간단히 제도를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 말을 남긴 공작은 곧장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글리바스의 일 때문에 가둬 놓진 않을까 싶었는데, 당장은 풀어 주는 모양이다.
"도련님, 우선 방으로 가실까요?"
"응."
어쨌든 잠시 정리는 필요했기에 디르엔은 지정된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은 뒤, 호위들과 1층으로 내려갔다.
"뭐야, 전부 나가는 거야?"
밖으로 나오자 쌍둥이 동생 메이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시선을 돌리니 마르코와 샤를도 준비를 마친 채로 서 있었다.
"방은 심심하니까, 당연하잖아. 나는 먼저 간다!"
"아, 같이 가!"
오빠인 레이어가 마차로 뛰어들자, 메이어가 다급히 뒤를 따랐다.
언제 봐도 활발한 건 좋은데, 같이 입학한다고 생각하니 뭔가 미묘한 느낌이다.
"도련님, 오르시지요."
"응."
어쨌든 다른 두 아이도 순서대로 출발했기에, 디르엔은 마지막으로 마차에 올랐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 없이 전체적으로 둘러보는 모양새가 됐다.
"저곳이 대신전입니다. 신 아체시오를 모시는 곳이지요."
중심지로 들어가기 전에 마주한 백색의 건축물.
전생에서는 성자가 있는 곳을 신전이라 불렀기에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신성 마법은 신전에서 배우는 거지?'
-신전에 소속돼서 축복을 받으면 쓸 수 있어. 너도 전생에서 못 배웠던 거 아니야?
'거기선 신성 마법 자체를 황족, 왕족들이 관리했어. 그들이 선별한 마법사만 배울 수 있어서 구경하기도 어려웠거든.'
-진짜 이상한 세계란 말이야....
짧게 설명해 주자 크로노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전생에선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항상 마법과 관련해선 초대 성자가 신처럼 받들어졌으니까.
"와, 엄청 많네."
마차가 중심부로 이동하자 엄청난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내려서 구경해도 괜찮아?"
"으음… 목걸이는 잘 착용하고 계십니까?"
"응. 착용한 이후로는 한 번도 안 뺐어."
2주 전, 공작은 몇 개의 마도구를 구매해 가문의 아이들에게 분배했다.
6성급 이상, 7성급 이하의 마법을 딱 한 번 방어할 수 있는 일회용 보호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한다.
당연히 엄청난 돈이 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잘하셨습니다. 착용감이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항상 지니고 계셔 주시길 바랍니다."
"알았어. 꼭 가지고 있을게."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내리시지요."
얀테의 안내에 따라 디르엔은 마차 밖의 땅으로 발을 내디뎠다.
시선이 낮아지니 주변의 광경들이 더욱 거대하게 느껴졌다.
"근처에 모험가 길드가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응, 볼래."
"알겠습니다. 너희는 사각이 없도록 각자 위치를 전담해라."
얀테의 지시에 기사와 병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괜히 내렸나 싶기도 했지만, 멍하니 앉아서 구경하기엔 너무 아쉬웠다.
"이동하겠습니다."
정리가 끝난 후, 디르엔은 중앙에 보호되는 모양새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시선이 쏠리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제국민들에겐 생소한 광경이 아닌 것 같다.
"이곳입니다."
"…이게 다 길드야?"
좌측으로 꺾어 도착한 곳엔 똑같이 생긴 커다란 두 건축물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하지만 쓸데없이 큰 규모라고 생각하기엔 출입 인원이 상당히 많아 보였다.
"이곳에선 제국과 타국을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의뢰들이 모여듭니다. 그 덕분에 찾는 모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요."
"다른 나라에도 길드가 있지 않아?"
"당연히 존재는 하지만, 강한 모험가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고난도의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지요."
얀테의 설명을 들으니 상황이 이해가 갔다.
최상위 모험가가 굳이 타국에 자리를 잡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종족들도 꽤 있네.'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는데, 수인과 드워프, 호빗, 엘프 등 다양한 종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실제로는 처음 보는 탓에 눈을 떼기가 어렵다.
물론, 제국은 인족 중심 국가라 들었기에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럼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근처에서 볼만한 곳은 광장의 분수대가...."
쿵-!
"엇!"
길을 나아가려던 그때, 골목에서 튀어나온 누군가와 호위의 몸이 부딪쳤다.
"물러서라!"
반사적으로 검을 빼 든 얀테는 디르엔의 앞을 막아섰다.
방향을 살짝 틀어서 정면을 보니,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입에 빵을 물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백발의 머리가 시선을 끄는 느낌이다.
"아이고, 앞을 제대로 못 보고 걸었네. 미안해, 미안해."
떨어트린 빵 봉투를 주운 그는 가볍게 사과를 건넸다.
그런데 망토 안의 옷차림이 다른 이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혹시, 제르노 학원의 관계자이십니까?"
얀테 역시 그것을 알아차린 듯 물음을 던졌다.
제르노의 것이라면 교수쯤 되는 사람인 걸까.
"뭐, 그런 셈이지. 이쪽 도련님은 처음 보는데, 신입생인가?"
"멈추십시오."
디르엔을 발견한 그가 다가오려고 하자 얀테가 빠르게 제지했다.
"에이, 닳는 것도 아니잖아. 보기만 할게."
"그것은 입학 이후에...."
"얀테, 괜찮아."
이러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기에 디르엔은 얀테의 옷깃을 건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디르엔 루블린이라 합니다."
"오, 공작 가문의 자제였군. 보아하니, 조기 입학을 하게 된 건가?"
"예. 부족하지만 황명에 따라 제르노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흠, 12살? 아니, 13살인가? 내가 본 아이 중에서 제일 예의가 바르군. 게다가...."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상을 이어 가는 남성.
그런데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뭔가 이상한 감각이 전신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재밌네."
표정을 숨기며 경계하고 있자, 그가 씩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빵을 하나 더 입에 물며 몸을 돌렸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어. 보면 아는 척이라도 하자고."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모습은 한량 그 자체였다.
저런 사람이 학원의 교수를 맡아도 되는 걸까.
-방금 뭔가 이상했는데?
의심스럽게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크로노가 묘한 말을 꺼냈다.
'나도 소름 같은 게 느껴지긴 했어. 마법이었나?'
-마법이랑은 달랐어. 아이덴티티를 썼다기에도 뭔가 이상한데....
그는 말을 흐리며 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를 파고들어 봤자, 시간만 아까운 일이다.
'교수면 학원에서 다시 마주칠 수 있겠지. 어차피 해를 끼치는 느낌도 아니었으니까.'
-그놈이 흑마법사면 어떡할래? 세상엔 상상도 못할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커블로스가 제도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자살행위 아니야?'
-필요하면 뭔들 못하겠어? 그나마 셰링엄이 잡힌 걸 다행으로 생각해. 네 마나의 가치를 다른 놈들은 모를 테니까.
정신 좀 차리라며 말을 덧붙이는 크로노.
아무래도 본인의 목숨까지 달린 탓에 상당히 예민하다.
"도련님, 별장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응, 알았어."
얀테의 물음에 디르엔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도 뉘엿뉘엿 지고 있었기에 시간이 딱 맞을 듯했다.
"이동하겠습니다."
그렇게 구경을 마친 후, 곧바로 마차에 올라 별장으로 향했다.
부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아이가 돌아온 상태였다.
"도련님, 저녁을 드신 후에 황궁으로 가실 거예요."
마중을 나와 있던 앤느가 잔뜩 상기된 채 말을 건넸다.
그러고는 빠르게 디르엔을 이동시켜 따로 식사를 마치게 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 인물이 훤해지시네."
멍하게 뒤를 따르다 보니 어느새 모든 준비가 끝났다.
심지어 갈아입은 옷은 생전 처음 보는 화려함이 잔뜩 묻어 있다.
"가지."
1층으로 내려가자, 공작이 짧은 말을 남기며 앞서 걸어갔다.
시종들의 손길로 마차 위에 오른 디르엔은 공작과 마주 보는 모양새가 됐다.
"출발해라."
낮은 목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마차.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 사이, 공작이 입을 열었다.
"예절 교육은 잘 익혔나?"
"예. 최선을 다했습니다."
"멜스는 황제 폐하께 실례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고 보고했다. 충분히 긴장하되,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13살 막내아들에게 터무니없는 것을 주문하는 공작.
만약 이 나이 그대로의 정신이었다면 격하게 흔들리고도 남을 조언이다.
"폐하께서는 글리바스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알고 계신다. 하지만 네 입으로 직접 들으신 뒤, 몇 가지 질문을 하실 것이다."
"예. 숨김없이 진실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게 한 보고와 같은 정도면 족하다. 단, 질문에 대한 답은 충분히 숙고한 후에 입 밖으로 꺼내도록 해라. 서두른다고 능사가 아니니."
"명심하겠습니다."
그런 딱딱한 질의응답을 끝으로 대화는 멈췄다.
침묵이 불편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어서 신기했지만, 황궁에 도착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여기가 진짜 성이네.'
입구를 지나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건물들이 눈을 자극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주변을 구경하는 자신이 신기할 정도였다.
"어서 오십시오. 루블린 공작 각하, 디르엔 도련님."
마차에서 내리자 노년의 남성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모습을 보니 집사 같은 위치인 듯하다.
"오랜만이군, 노르켈."
"정말 그렇습니다. 각하께선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이시군요."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은 꽤 가까운 관계처럼 보였다.
저게 귀족들의 겉치레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그럼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노르켈의 뒤를 따라 들어선 건물의 내부는 휘황찬란함의 극치였다.
곳곳에 황금과 보석 장식이 보이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마정석까지 다양한 곳에 박혀 있다.
"이쪽입니다."
멍하게 2층으로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커다란 방 앞에 멈췄다.
"폐하, 루블린 공작이 도착했습니다."
"들라 하라."
노르켈이 방문을 향해 보고하자, 안쪽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신기하게도 그것에 담긴 무게가 기이한 압박감처럼 느껴져 피부로 와닿는 듯했다.
"들어가시지요."
어쨌든 허가가 떨어졌기에 디르엔은 공작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저 사람이 황제인가.'
커다란 탁자 너머에는 강한 인상을 풍기는 중년의 남성이 앉아 있었다.
겨우 머리카락일 뿐인데도, 그의 찬란한 금발은 신기할 정도로 강렬한 분위기를 풍겼다.
"제국의 빛을 뵙습니다. 신, 페르체 루블린, 폐하의 부름을 받아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제국의 빛을 뵙습니다. 신, 디르엔 루블린, 폐하의 부름을 받아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공작이 무릎을 꿇으며 인사하자, 디르엔도 그 뒤를 따랐다.
틀이 정해진 문구를 교육받았던 터라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고개를 들라."
짧은 의례가 끝나자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고개를 드니,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정확히 닿아 있었다.
"기개가 있구나."
'아.'
얼떨결에 눈을 계속 마주하고 있었더니 황제가 반응을 보였다.
그나마 바로 시선을 떨어트렸음에도 너무 늦은 듯하다.
"전부 나가라. 이 아이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니."
"폐하, 그것은...."
"듣지 못했나? 전부 나가라."
조금 당황한 공작이 말을 꺼냈지만, 황제는 다시 한번 퇴실을 명했다.
아무래도 막아설 수는 없었기에 공작을 포함한 모든 인원은 응접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자리에 앉거라."
"명 받들겠습니다."
조용히 울린 명령에 디르엔은 재빨리 건너편의 의자에 착석했다.
"글리바스에서는 힘든 일을 겪었다고 들었다. 회복에는 문제가 없었느냐?"
"예. 폐하의 은혜 덕분에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 가문에서 아주 엄하게 교육한 모양이구나.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니 과하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저 네 이야기를 들으려는 것이니."
말의 속뜻을 파악하고 있자, 황제가 자세를 조금 편하게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늦지 않았나."
덜컥-!
그의 목소리와 함께 열린 창문.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그 너머에서 로브를 덮어쓴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매진 직전에 빵을 사느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딱 맞게 온 것 아닙니까?"
너스레를 떨며 답한 남성은 천천히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로브를 벗으며 모습을 드러낸 그의 정체는.
"안녕?"
낮에 마주했던 제르노의 교수였다.
31.
"...?"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디르엔의 사고가 굳었다.
아니, 애초에 이 자리에 저런 형태로 들어왔다는 것부터가 정상적인 흐름이 아니다.
"당황한 거 보니까 재밌네. 폐하, 아직 말씀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대 덕분에 틀어지지 않았나. 빵에 미쳐 사는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오늘을 놓치면 이틀이나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 드시겠습니까?"
"됐다. 그만 자리에 앉아라."
"예, 예."
작게 한숨을 내쉰 황제의 말에 남성은 흐느적거리며 빈 의자에 착석했다.
"이자는 제르노의 학원장인 페네트로다. 몇 가지 자문을 위해 부른 것인데, 벌써 마주친 적이 있나 보군."
"낮에 우연히 인사를 나눴습니다. 설마 했는데, 이 친구를 부르신 거였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디르엔을 관찰하는 페네트로.
하지만 그런 대화는 이미 의식 밖으로 넘어갔다.
'학원장?'
-저게 학원장이라고?
크로노와 동시에 의문이 튀어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 학회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는 학원장이 저런 한량이라니.
여러모로 인식이 뒤틀리는 느낌이다.
"그럼 슬슬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하지. 글리바스에 도착한 직후부터 자세히 들려줄 수 있겠느냐?"
"명 받들겠습니다."
어쨌든 본론으로 들어갔기에, 디르엔은 사건의 개요를 빠르게 풀어 갔다.
공작에게 보고했던 내용과 다를 바가 없는 덕분에 한 번도 막히지 않고 끝맺을 수 있었다.
"흠, 보고받은 내용과 같군."
"다른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괜한 질문보다 필요한 것을 묻는 것이 낫겠죠."
"…그럼 그대에게 맡기지."
피곤한 듯한 황제의 말에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페네트로가 이어 간 말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사실, 1년 전에 감옥에 가둬 놨던 셰링엄이 사라졌어."
"…네?"
"7성급 결계까지 파괴된 것을 보니, 아마 커블로스가 데려갔을 거야. 조사 때문에 아직 공개하진 않았으니, 너희 아버지 말고는 남들에게 알리면 안 된다?"
손가락을 세우며 주의를 주는 그이지만, 너무 어이가 없는 탓에 탄식이 나올 뻔했다.
가장 중요한 범죄자이자 증인을 납치당하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심지어 1년 전이면 글리바스에서 복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다.
-하, 이거 진짜 최악이네.
절망적인 소식에 한숨을 푹 내쉬는 크로노.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잡고 늘어져 봤자 소용이 없다.
'7성급 결계면 어느 정도야?'
-아마 마법 저해와 관련한 결계일 텐데, 적어도 7성급 상위나 마스터는 와야 할 거야.
'그 정도 마법사라면… 셰링엄이 말했던 장로인가?'
-장로든 뭐든 최상위급 마법사는 있겠지. 고작 5성급, 6성급 마법사를 모은다고 뭐가 되진 않아.
한숨 섞인 그의 대답을 들으니 대충 정리가 됐다.
일단은 이 대화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지.
"그 흑마법사를 찾기 위해서 저를 부르신 건가요?"
"이유 중 하나이긴 하지. 신문에서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었거든."
진의를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신문에는 고문도 포함이 됐을 텐데, 꿋꿋하게 입을 닫고 있던 모양이다.
"그래서, 뭔가 스쳐 가듯이 들은 건 없어? 같은 편끼리 싸우기도 했다면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지만,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둘 다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뭐, 떠벌리고 다니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딱히 거짓을 섞지 않은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페네트로.
뭔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내어 줄 정보가 없는 게 사실이다.
장로에 관한 건을 포함해 아는 내용은 거의 다 전달했기 때문이다.
"폐하,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방침을 바꾸는 것이 좋겠군. 이 문제는 따로 논의하도록 하지."
진중한 얼굴로 대답한 황제는 가만히 디르엔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학원장에게 시선을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이제 이 아이를 돌려보내도 괜찮겠는가?"
"…필요한 이야기는 전부 들었습니다. 내일은 입학식이기도 하니, 일찍 돌려보내는 게 좋겠죠."
"그럼 그렇게 하지. 늦은 시간까지 어울려 줘서 고맙구나. 공작에겐 바로 돌아가라 명했다고 전하거라."
"알겠습니다. 저는 그럼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국의 빛에 평안함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궁중 예절법으로 인사를 마친 디르엔은 바로 응접실을 나섰다.
"이야기는 끝났나?"
문을 닫음과 동시에 이곳으로 다가오는 루블린 공작.
당장 입실을 허가받을 기세였기에 디르엔은 재빨리 황제의 말을 전했다.
"그대로 돌아가라 하셨다고?"
"네. 안쪽에서 있던 이야기는 마차에서 설명해 드려도 될까요?"
"…일단은 이동하지."
거절하지 못할 권유를 들이밀자, 그는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기가 이어진 것은 마차가 황궁을 빠져나온 뒤부터였다.
***
"흠."
디르엔의 뒷모습을 보던 황제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어떻지?"
페네트로는 이 질문이 커블로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찍이 준비했던 대답을 내놓았다.
"기대가 크셨다는 것은 잘 알지만, 당장 마법적인 재능이 우수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정신적인 수준을 본다면 엄청난...."
"됐다. 양자로 들일 것도 없겠군."
다른 부분은 관심이 없다며 말을 끊는 황제.
사실 그가 페네트로를 부른 것은 디르엔의 자질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장남인 카일은 재능이 일찍 드러나 데려오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싹을 미리 파악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역시 신랄한 취미군.'
사실 황제가 귀족의 아이를 빼앗는 것은 페네트로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이야기다.
이런저런 도움을 주는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의 가치가 훨씬 크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안 되지.'
이번에 황제가 관심을 가진 루블린 가문의 막내아들은 특별했다.
지금까지 대기의 마나를 다루는 그의 특수한 통찰이 실패한 사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나 코어의 질 때문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학원장을 맡은 상태지만, 그의 본질은 마법 학회에 있다.
훌륭한 재목을 찾은 것과 동시에 연구자의 마음이 들끓는 느낌이다.
"커블로스 놈들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황제의 질문에 페네트로는 즐거움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당장 대대적인 수사로 전환해 봤자 성과를 얻어 내기는 힘들 겁니다. 기존의 비밀 조사는 진행하되 방어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이 좋겠죠."
"방어적인 면모라면?"
"마계의 연결에 성공한 이상, 좀 더 활발한 실험 활동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 여지를 주면서 머리를 드러내길 기다려 보시죠."
"흠."
필요한 답을 건네자 턱수염을 만지며 생각에 잠긴 황제.
마법 학회가 제국과 공조하는 상황은 존재하겠지만, 각자 움직이는 부분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서로의 능력대로 처리할 문제겠지.
"그럼 저는 슬슬 가 보겠습니다. 내일은 입학식도 있으니까요."
"그래,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방침이 정해지면 다시 보도록 하지."
"저희 쪽에서도 괜찮은 이야기가 나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페네트로는 창문을 열어 바깥으로 날았다.
그 뒷모습을 보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
"학원장이 찾아왔다고?"
마차에 마주 앉아 시작된 이야기는 공작의 의문으로 멈춰 섰다.
"예. 황제 폐하께서 일찍이 부르셨던 듯합니다."
"그쪽과 연락을 했던 것이군."
알겠다는 듯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공작.
딱히 기다릴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디르엔은 이야기를 이어서 전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건이 튀어나왔을 때, 공작의 반응 또한 강해졌다.
"잠깐, 지금 흑마법사가 사라졌다고 했나?"
"커블로스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 아마 보고드렸던 장로가 관련됐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제국군이 적 세력을 얕잡아 본 것인가. 괜한 성과를 내려다 일을 그르치고 말았군."
그는 한심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번 동감하는 말이지만,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이면 차라리 제르노에 입학하게 된 것이 다행인가."
"학원이 제일 안전한 곳인가요?"
"제르노를 지키는 것은 유구한 역사의 8성급 결계다. 그걸 깰 수 있다면 전쟁이 시작되는 수준이겠지. 납치 또한 학원장이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공작의 답을 들은 디르엔은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8성급 이상의 마법사라면 평범한 싸움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학원 내에도 커블로스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거야말로 진짜 자멸 행위가 아닐까.
"도착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마차가 멈춰 섰다.
"입학식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충분한 휴식을 취해라."
막내아들이 채 내리기도 전에 말을 남기며 안으로 사라지는 공작.
참 일관성이 있는 모습이지만, 틀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도련님, 저희도 얼른 올라가요."
시종의 재촉에 디르엔 역시 곧장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목욕을 마친 후, 내일을 위해 빠르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디르엔은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복도도 시끄러운 것을 보니, 입학 준비를 서두르는 모양이다.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응. 바로 씻으면 되지?"
"네, 잠시만요. 르비아!"
그는 바쁜 앤느를 뒤로한 채, 다른 시종의 도움으로 목욕을 마쳤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가 함께 아침을 먹은 뒤 준비된 제르노의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실까!"
"훌륭하십니다, 도련님."
주변에서 칭찬이 쏟아지는 사이에도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그것이 모두 마무리됐을 땐 이미 시종들과 함께 저택의 입구 밖에 서 있었다.
"저조한 성과와 더딘 향상을 보이는 자는 퇴교를 시킬 것이다. 항상 루블린의 긍지를 가슴에 품고, 성실히 교육에 임해라."
전혀 힘이 나지 않는 선언을 뱉은 공작은 곧장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마차에 오른 디르엔은 남은 시종들과 마주했다.
"도련님, 다른 것보다 밥은 꼭 잘 챙겨 드셔야 해요. 옷은 더러워지기 전에 세탁을 맡기시고, 방의 정리는...."
"앤느, 잘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옆에서 계속 보면서 배웠으니까."
"도련님...!"
잔소리를 이어 가다 어느새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한 앤느.
시종들과는 여기서 이별이기에 아르델과 르비아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출발하겠습니다."
"잘 다녀올게."
디르엔은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의 창 너머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여전히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시종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학원이라....'
시기가 조금 빠르다고 해도 마법 학원에 입학하는 것은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전생에선 아무리 원해도 닿지 못했던 곳을 직접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규모도 꽤 크겠지.'
전 세계에 5개, 이 대륙에는 2개밖에 없는 마법 학원.
그중 제국에 속한 제르노라면 작은 규모일 리가 없다.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크로노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 분위기는 디르엔을 놀릴 때 나오는 습관 같은 것이다.
'왜? 또 뭔데 그래?'
-이건 말보다 직접 보는 게 좋겠지. 가는 길이나 잘 봐.
애매한 대답과 함께 오른쪽 길로 틀어지는 방향.
그런데 어째서인지 점점 거대한 성벽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뭐지?'
어느새 외곽의 큰길로 나온 마차는 성벽을 따라 앞으로 달려 나갔다.
주변을 보니, 엄청나게 많은 마차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곧 입구에 도착합니다."
얀테의 목소리에 몸을 당겨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길게 이어지던 성벽의 중앙 부분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가 입구라고?'
덜컹-
물을 것도 없다는 듯 그쪽으로 방향을 꺾는 마차.
그 커다란 통로를 빠져나오자 엄청난 광경이 눈을 자극했다.
-어때? 엄청나지?
표정을 숨기지 못했는지, 크로노가 재밌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 풍경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적인 수준이다.
'이게 다 학원이야?'
-직접 보는 게 좋을 거라고 했잖아.
멍하게 바라본 정면으로 넓게 펼쳐진 부지.
그곳에 세워진 엄청난 숫자의 건물들은 마치 도시를 연상하게 했다.
심지어 외곽마저 제도와 같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그 인식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도련님, 이곳에서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귀를 울리는 얀테의 목소리에 의식이 환기됐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마법 학원 내로는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다는 듯하다.
"언제나 몸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그의 짧은 조언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켈파와 글리바스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는 어려운 거겠지.
"응. 걱정하지 마."
"신입생들은 이쪽에서 줄을 서세요."
대답과 동시에 정문 쪽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다녀올게."
"예. 정진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디르엔은 둘러멘 가방을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미 형제들이 앞서갔기에 끝자락에 맞춰 자리를....
쿵-!
그때, 뒤쪽에서 들려온 둔탁한 소리.
바로 고개를 돌리니 한 여자아이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
상당히 아프게 넘어진 것 같아 일으켜 주기 위해 손을 건넸다.
하지만.
탁-!
그 친절은 너무도 가볍게 내쳐지고 말았다.
"됐… 어. 건드리지 마."
32.
"아, 미안."
홀로 몸을 일으키는 소녀의 얼굴은 연하늘색 머리카락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신기한 점은 저 날카로운 반응에서 악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즘 애들은 다 이렇게 까칠해?
'뭐, 싫을 수도 있지.'
치마를 터는 소녀를 뒤로한 채, 디르엔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줄은 여전히 길었지만, 차례가 오는 것은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천천히 오르세요."
안내인의 말에 따라 아이들은 특이하게 생긴 구조물에 오르기 시작했다.
앞쪽에 말도 보이지 않는 탓에 머릿속에 의문이 강해졌다.
"이 운송 수단은 레비오 교수님께서 발명하신 말 없는 마차 4호기입니다. 1학년 수업을 담당하진 않으시지만, 내년에는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이어진 안내인의 설명에 디르엔의 호기심이 빠르게 치솟았다.
이 상태로 20명가량을 태울 수 있다는 것은 마법적으로 엄청난 일이다.
-작명 센스가 왜 저래? 너무 대충 지은 거 아니야?
'이름이 뭐가 중요해? 직관적이고 좋잖아.'
크로노의 불만을 일축한 디르엔은 당장 주변을 뒤져 마법진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입학식도 전에 사고를 칠 수는 없는 일.
잠시 마음을 가다듬던 그는 의식을 환기하기 위해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이대는 대강 비슷한가.'
외모로 정확한 나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꽤 작은 아이들이 몇 보이는 것이, 자신 말고도 조기 입학자가 꽤 되는 듯했다.
말없이 조용한 것은 아마 긴장한 탓이겠지.
끼긱-
안으로 계속 달려가던 말 없는 마차 4호기는 하얀색 건물 앞에 멈췄다.
열린 문 안을 보니 강당 같은 구조인 모양이다.
"차례대로 들어가서 의자에 앉으세요."
안내에 따라 아이들은 건물 내부로 줄줄이 걸음을 옮겼다.
문제는 사람이 예상보다 너무 많았던 탓에 조금 당황할 정도였다.
'원래 이렇게 많아?'
-엄청 많은 것도 아니야. 보통 한 학년에 500명 정도는 되니까.
별것 아니라는 듯이 돌아온 대답에 디르엔은 빠르게 상식을 조정했다.
확실히 제국과 다른 왕국들의 귀족 수를 생각하면 이 숫자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모두 주목하세요."
어쨌든 자리가 모두 채워진 후, 정면의 단상에 한 여성이 올라섰다.
목소리가 증폭되어 들리는 것은 단연 마법의 힘이다.
"제르노 마법 학원에 오신 신입생 여러분, 환영합니다. 저는 1학년 부장을 맡은 마르넨 트라우체입니다."
붉은 머리칼과 날카로운 인상은 상당히 사무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잠시 아이들을 둘러본 그녀는 같은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본래 입학식은 행사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외부적인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간소화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특별한 미사여구 없이 상황만을 전달하는 마르넨.
아이들이 조금 웅성거렸지만, 그 이유가 성대한 입학식에 대한 기대 때문은 아니었다.
커블로스의 재출현과 역사적인 흑마법의 성공은 이미 대대적인 공문으로 알려졌다.
그렇다 보니 커블로스를 무서운 악당 정도로 듣고 자란 아이들도 경계심이 높아진 것이다.
"이제 페네트로 학원장님께서 입학 축하 말씀을 전하실 겁니다. 모두 정숙을 유지한 채로 경청해 주시길 바랍니다."
필요한 이야기를 마친 듯, 마르넨은 단상의 계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아아, 잘 들리나?"
낯익은 얼굴의 그 사람이 등장했다.
"괜찮나 보네. 다들 반갑습니다. 저는 학원장 페네트로 컴브레아입니다. 이름은 대충 알고 있죠?"
형식상 존대를 하고 있지만, 느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미 만나 봤던 디르엔에겐 별 감흥이 없었지만 말이다.
"반응이 묘하네? 뭐, 어쨌든. 이번 신입생은 평소보다 인원이 많아졌습니다. 나쁜 커블로스 놈들이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죠."
단상 위를 걷던 페네트로는 가볍게 앞으로 한 발자국 나왔다.
그리고 그가 양손을 위쪽으로 들어 올리는 순간.
꿀렁-!
강당 내부가 이상한 모양새로 변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누, 눈이 이상해!"
당황한 듯한 아이들이 놀라는 사이, 크로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환영 마법이라니....
'환영?'
전혀 맥락을 찾을 수 없는 단어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해답은 곧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어?"
"저기!"
팟-
일렁이던 공간이 고정되자, 정면에 광경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형상이 나타나자 페네트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들 알겠지만, 과거에 빛의 신 아체시오와 어둠의 신 프레첼로가 있었습니다.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두 신은 별의 기원이라는 태초의 힘을 공평히 나누게 됐죠."
갑작스러운 옛이야기에 따라 눈앞의 장면들이 천천히 교체되어 갔다.
현실과 상상 사이라 기묘함이 느껴졌지만, 이것이 오히려 몰입감을 더 높였다.
"두 신은 각자의 차원에서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아체시오는 지혜의 폰스를, 프레첼로는 힘의 위스를 근간으로 두었죠."
그의 말과 함께 허공에 생겨난 두 개의 원은 흑과 백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런데 흑색의 원에서 뻗어 나온 선 하나가 점차 흰색 쪽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양쪽 세계는 수백 년에 걸쳐 성장을 이어 갔습니다. 아체시오는 태초의 성자를 지정해 마법을 알리도록 했죠. 여기서 사용된 것이 바로 폰스입니다."
팟-
동떨어진 공간에 생겨난 하얀색 마정석.
일단은 폰스라고 표현한 것 같은데, 실체를 봤던 디르엔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에 대한 정보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프레첼로는 평화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힘을 원했던 그는 폰스의 탈취를 목표로 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스륵-
검은 선이 흰색 원에 닿자, 그것이 점차 회색빛으로 변해 갔다.
"헉!"
"먹히고 있어!"
장면이 펼쳐지자 어느새 몰입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이런 시각적 자극에는 당연히 빠져들 수밖에 없다.
"힘의 위스를 근간으로 뒀던 어둠의 차원 주민들은 너무도 강했습니다. 그 때문에 빛의 차원은 빠른 속도로 잠식되기 시작했죠. 그래서 아체시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팟-!
그때, 뒤섞인 회색 원에서 하나의 작은 흰색 원이 떨어져 나왔다.
먼 곳으로 날아가던 그것은 한참을 더 가서야 멈춰 섰다.
"아체시오는 살아남은 소수의 주민을 다른 차원의 세계로 보냈습니다. 그 직후, 자신과 폰스의 힘을 이용해 빛의 차원과 어둠의 차원을 모두 봉인시켰죠."
스륵-
두 개의 원은 하얀색 막으로 둘러싸이더니, 일렁이던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배경에 머무르던 두 사람의 형상이 말끔하게 지워졌다.
"아체시오는 모든 힘을 끌어내 자신의 신체까지 소멸시켰습니다. 극단적인 그 선택에, 어둠의 신 프레첼로조차 온전히 대응하지 못했죠."
하얀 막에 둘러싸인 흑색 원은 그 크기를 점차 키웠다.
하지만 차마 막을 벗겨 내지 못한 채 제자리에 박혔다.
"그 결과, 어둠의 차원은 완전히 고립된 공간으로서 살아남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마계의 기원이죠."
팟-!
마지막 목소리와 함께 다시금 되돌아온 강당의 모습.
'역시 다를 게 없네.'
이 내용은 디르엔이 조금 더 많은 책을 접하며 자연스레 알게 됐다.
물론 폰스의 존재가 신의 세계에서 뚝 끊어진 결과를 그가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했던 작은 기대에 맥이 풀리는 느낌이다.
"이 마계의 재림을 바라고 있는 것이 커블로스라는 흑마법 단체입니다. 1년 전, 처음으로 마계와의 연결에 성공한 탓에 위험도가 더욱 높아졌죠."
단상 위를 가볍게 걸으면서 하기엔 너무도 무거운 말.
당연히 멍하게 듣고 있던 아이들은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 우리 어떡해?"
"아버님은 제국군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셨어!"
"그게 아니라, 성자님이 계시니까 괜찮은 거야!"
점차 커지는 목소리와 함께 고조되는 분위기.
그것을 지켜보던 페네트로는 오른손을 천천히 위로 들었다.
그 순간.
팟-!
하얀빛의 거대한 마법진이 천장 가득히 박혔다.
그 외곽엔 8개의 별이 각자의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 세계로 이주한 주민 중 하나였던, 라스제노는 태초의 성자의 제자였습니다. 그가 초대 성자가 되어 전파한 것이 여러분이 배우는 마법의 시초가 된 것이죠. 그리고 이제는 마계의 위협을 막기 위한 우리의 강대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천장의 거대한 마법진은 텅 빈 껍데기와도 같았다.
하지만 8개의 별만은 명확했기에, 신입생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제르노의 정점에 있는 학원장의 마법이라는 인식 덕분이기도 했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제르노에서 정진해 강한 마법사가 되세요. 이것은 전투 능력만이 아니라, 갖가지 연구와 발명 능력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정진이 미래의 위협에서 세계를 지키는 길이 될 테니까요."
아이들의 눈을 보면서 말한 페네트로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웃었다.
스륵-
그리고 가벼운 손짓과 함께 천장에 있던 마법진을 거둬 냈다.
"이것을 끝으로 입학식을 정리하겠습니다. 부디 제르노에서 훌륭한 결실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볍게 말을 마치며 단상을 내려오는 페네트로.
강당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이어진 반응은 당연한 결과였다.
"와아아!"
"방금 봤어? 별이 여덟 개나 됐다고!"
"나 8성급 마법사는 처음 봐!"
강당은 아까와 전혀 다른 분위기로 소란스러워졌다.
뭐든 적당히 할 것 같은 학회장의 다른 모습에 디르엔 또한 내심 놀라기도 했다.
'너도 아까 같은 건 처음 보지?'
그런 생각에 가볍게 던진 물음.
그런데 어째서인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크로노?'
-…아, 뭐라고?
'아까 같은 환영 마법은 처음 본 거 아니냐고 물었어. 그런데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저런 규모의 환영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는 하지. 물론 가짜일 뿐이지만.
'...?'
묘한 분위기로 끝맺은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사정과 엮인 것 같았기에 디르엔 또한 질문을 거뒀다.
"자, 정숙하세요."
그때, 떠들썩한 신입생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마르넨이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갔다.
"이제부터 배정된 반으로 이동하게 될 겁니다. 나눠 드리는 표를 보고, 바깥의 줄로 이동해 주세요."
펄럭-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내려앉는 종이 한 장.
그것을 집어 드니 빽빽하게 적힌 반의 배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3반이네.'
1학년은 학급당 50명 내외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반이 12개나 됐다.
이름을 쭉 살펴보니, 가문에서 교육받았던 고위 가문 자제들의 이름도 꽤 눈에 들어왔다.
루블린 사람들이 없는 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넘어지지 않게 순서대로 움직이세요. 왼쪽부터 1반입니다."
어쨌든 뒷줄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한 인파는 차근차근 줄어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 줄의 중앙쯤에 자리를 잡았다.
"이동하겠습니다."
전원이 자리를 잡은 후, 1반부터 정면의 건물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대충 10층은 넘는 것 같은데, 한 층의 크기가 보통 건물의 2배는 되는 수준이다.
'안쪽도 좋네.'
내부로 들어오자 주변의 깔끔한 구조가 시선을 끌었다.
어쩐지 공부와 연구에 몰두하기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앞쪽부터 순서대로 자리를 채우세요."
1층의 네 번째 강의실로 들어간 3반은 안내에 따라 빠르게 착석했다.
디르엔은 줄의 위치와 비슷한 중앙에 자리하게 됐다.
그렇게 모든 인원이 의자에 앉자, 이곳으로 안내했던 푸른 머리의 남성이 단상 위에 섰다.
"반갑습니다. 저는 3반을 담당하게 된 루첼리오 파르파사나 교수입니다. 여러분이 즐거운 학원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
학원장과 달리 편안하게 건네진 인사에 학생들은 자연스레 박수로 화답했다.
그 반응에 교수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말을 이어 갔다.
"1학년은 모두 12반으로, 학급마다 50명 정도의 학생들이 배정된 상태입니다. 이런 밀도 때문에 제르노에서는 특별한 운영 방식을 사용하고 있죠."
루첼리오는 뒤로 돌아 칠판 앞에 섰다.
그리고 신기하게 생긴 분필을 잡아 판서를 시작했다.
<첫 번째 과제>
<3인 1조의 팀을 구성하세요.>
"우리 3반은 총 51명으로, 정확히 17팀을 편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달성해야 할 첫 번째 과제가 됩니다."
이어진 설명은 디르엔이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가문의 교육에서도 우선순위가 꽤 높았던 덕에 상당히 중요하다는 인식은 가진 상태다.
"첫 팀의 구성 기간은 일주일입니다. 이후에 팀을 바꿀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처음이니만큼 신중하게 마음을 모아 친구를 모으도록 하세요. 1년간 함께하게 될 테니까요."
루첼리오는 기쁜 듯한 목소리였지만, 아이들의 시선은 바쁘게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팀을 이루는 과제는 대부분이 알고 있을 터이기에, 아마 고위 가문을 잡으려고 하겠지.
"자, 그럼 첫 줄의 왼쪽부터 앞으로 나오세요."
"네?"
그때, 갑자기 눈앞의 여자아이를 부르는 루첼리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그가 더 깊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자기소개를 시작하겠습니다."
33.
"자, 자기소개요?"
갑작스러운 말에 소녀가 놀란 듯이 되물었다.
"어서 나오세요. 51명이 모두 소개를 마치려면 시간이 꽤 소모될 테니까요."
"아, 네...."
루첼리오의 재촉에 아이는 허둥지둥 단상 앞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소개를 시작했다.
"그… 저는 샤르펜 클리시모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짧게 말을 마친 그녀는 다급히 단상 아래로 내려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인가요?"
"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것을 막아서는 루첼리오.
그 저의를 샤르펜이 알아듣지 못하자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어느 지역과 가문의 사람인지 정확히 알려 주셔야 학우들도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나이와 마법 성취도에 관한 것도 부탁할게요."
"아… 알겠습니다."
당황한 샤르펜은 다시 단상을 올라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저는 제국 서부 끝의 에르턴에서 왔습니다. 아버지는 클리시모 남작이시고, 나이는 14살이에요. 마법은 2주 전에… 1성급 마스터까지 도달했습니다."
"에르턴? 거긴 어디야?"
"그 엄청 못사는 곳 있잖아.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거기 귀족은 평민이랑 크게 다를 것도 없대."
"진짜? 그게 무슨 귀족이야?"
"게다가 14살이면서 2주 전에 1성급 마스터에 도달했대. 재능도 없나 봐."
가문과 지역이 노출되자 주변에서 적나라한 조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단상 앞의 샤르펜이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제…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가도 좋습니다."
루첼리오는 반쯤 울먹거리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선생 일부러 저런 거지? 미친놈 아니야?
어느새 돌아온 분위기로 신랄하게 말하는 크로노.
'그러게.'
자기소개라는 방식으로 포장했지만, 이 흐름은 저 교수가 유도한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학생 개개인을 차별할 수 있는 정보를 강제로 공유한다고 보는 게 맞겠지.
신분을 배제한다는 제르노의 교칙이 있지만, 자기소개라면 그 무엇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자, 차례대로 나오세요."
어쨌든 루첼리오는 계속해서 학생들을 단상으로 올렸다.
"14살인 쿠렌버 레나테니즈입니다. 레나테니즈 백작 가문이고, 2성급 마스터입니다."
"14살인 바레잔 클리시크입니다. 클리시크 자작 가문이고, 2성급은 저번 달에 도달했습니다."
가문이 영지를 정통적으로 이어 온 경우엔 지명의 설명을 굳이 하지 않았다.
애초에 널리 알려진 귀족 가문이라 사전 정보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 정반대에 있는 경우 또한 존재했다.
"안녕하세요. 13살인 제니트입니다. 레나테니즈 영지의 고아원에서 자란 평민이라 소개해 드릴 만한 것이 마땅치 않네요. 그리고 아직 1성급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뭐야, 평민이야?"
"레나테니즈면, 쿠렌버네 가문 덕분에 살았던 거네."
"그런데 1성급도 아니면서 입학했다고? 어떻게?"
첫 평민의 등장에 시끄러워진 강의실.
그 많은 의문에 대답한 것은 루첼리오였다.
"제니트 군은 레비오 교수님의 추천으로 입학한 학생입니다. 마법진과 마도구의 연구 및 개발에 재능을 보였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것과 학원 생활을 헤쳐 나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명심하세요."
"알겠습니다."
주변의 모든 반응에도 제니트는 조금의 흔들림 없이 단상을 내려왔다.
13살의 같은 나이이지만, 저쪽도 전생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의 침착함이다.
게다가 재능의 분야를 생각하면 꼭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
'어? 쟤는....'
제니트와 자리를 교체하듯이 올라온 연하늘색 머리의 소녀.
분명 입구에서 마주했던 그 아이다.
"13살 레티아 조르제 프레지엔입니다. 프레지엔 왕국의 3왕녀이고, 3성급 마법사입니다."
"벌써 3성급이라고? 13살인데?"
"쟤랑은 무조건 같은 팀 해야겠다."
"근데 얼굴은 왜 계속 가리고 있는 거야?"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레티아.
하지만 루첼리오를 봐도 딱히 시정을 요구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뭔가 사정이 있는 걸까.
-이제 네 차례야.
잡생각과 함께 소개를 듣다 보니 어느새 차례가 다가왔다.
천천히 단상으로 걸어간 디르엔은 중앙에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13살 디르엔 루블린입니다. 루블린 공작 가문이고, 작년에 2성급에 도달했습니다."
준비할 것도 없이 간단하게 끝난 자기소개.
하지만 그 여풍은 곧바로 불어오기 시작했다.
"쟤가 그 서자야?"
"맞아. 엄마 쪽이 평민이라던데?"
"진짜? 그럼 그냥 버리는 자식 아니야?"
사람들의 이야기 중 자신에 대한 악담은 유독 잘 들린다는 말이 있다.
물론 익숙한 비아냥거림이라 기분 나쁠 수준도 아니지만, 한번 눌러 줄 필요는 있을 듯하다.
이곳이라면 적절한 방법을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겠지.
어쨌든 디르엔의 차례가 끝난 이후에도 소개는 계속됐다.
그리고 한 명만을 남겨 두었을 때, 루첼리오의 표정이 바뀌었다.
"마지막은...."
"나다."
그의 말을 끊으며, 가장 뒤쪽에서 금발의 소년이 일어섰다.
당당히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에서부터 평범한 귀족이 아님을 드러내는 느낌이다.
"제국 8황자, 프로켄 마우르 카이사르다. 나이는 14살이고, 마법 능력은 3성급 마스터다. 부디 원만한 학원 생활이 되길 바라지."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아이가 존대로 소개를 마쳤던 이유.
제국의 심장인 황실 가문이 이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한 압박감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감격스러운 인사에 감사드립니다."
"제국 출신임은 알고 있지만, 네놈도 적당히 하는 것이 좋을 거다. 아부 따위로 얻을 것은 이곳에 없으니."
"…명심하겠습니다."
루첼리오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힐난하는 프로켄.
그 대화에 모두가 숨을 죽였지만, 당사자는 콧방귀를 뀌며 자리로 돌아갔다.
"소개가 모두 끝났군요."
역시 평온한 얼굴로 단상에 오른 루첼리오는 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이 시간을 기점으로 학우들과 충분한 교류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주 이 시간까지 팀을 만들어 보고하세요. 오늘 수업은 없으니, 중식을 마치시고 자유롭게 학원을 구경하시면 되겠습니다."
자기소개만 진행했을 뿐인데 어느덧 점심시간이 됐다.
안내에 따라 강의실 밖으로 나가자 이번에도 인파가 가득했다.
하지만 사람이 빠지는 속도가 상당했던 탓에 곧장 식당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쩐다....'
배식을 마친 디르엔은 음식을 들고 와 자리에 앉았다.
애초에 형제들을 제외하곤 또래와 만난 적이 거의 없던 탓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적당히 괜찮은 놈들로 골라 봐. 솔직히 성급은 별 상관도 없잖아.
'그게 어려우니까 문제지.'
솔직히 호의적이지 않은 아이는 하루, 이틀만 살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과제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적당한 사람만을 찾는 건 리스크가 크다.
'일단 기숙사부터 가 볼까.'
조용히 식사를 마친 디르엔은 빠르게 식당을 빠져나왔다.
기숙사에 관한 정보는 반 배정표의 뒷면에 적혀 있었기에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꺼져! 평민 주제에!"
안내된 위치의 건물로 이동하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제도 모르고, 어딜 마법 학원까지 들어와!"
"맞아! 어머니가 너희 때문에 마법의 격이 떨어진다고 그랬어!"
넘어진 한 소년을 둘러싼 채, 주변에서 윽박지르고 있는 세 아이.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보니 모두 3반의 학생들이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디서 말대꾸야!"
"평민 주제에!"
바닥에 있는 소년은 제니트였는데, 여전히 타격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저런 상태로 두는 것은 아무래도....
"그만해. 부끄럽지도 않아?"
그때,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이번에도 3반의 아이 하나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테오… 켄틴 하르벤이었나?'
그는 자신을 제국 동남쪽에 있는 하르벤 왕국의 왕세자라고 소개했다.
13살이면서 작년에 2성급에 도달했다고 하니, 우수한 편에 속한다.
"뭐야? 다른 나라는 빠져!"
"맞아! 이건 귀족의 긍지에 관한 거라고!"
보통이라면 왕족의 등장에 놀라겠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하르벤 왕국의 국력이 상당히 약한 축에 속했기 때문이다.
"죄도 없는 평민을 힐난하는 게 카이사르 제국 귀족의 긍지라고?"
"윽...."
저쪽은 적당히 주워들은 말을 조합한 듯했지만, 테오는 문제점을 정확히 짚었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설 생각은 없다는 듯 토르엘 백작 가문의 여식, 엘렘의 반격이 들어왔다.
"너희 왕국은 평민을 감싸고돌아서 그렇게 약한 거야? 마수 처리도 제대로 못해서 제국의 길드에 의뢰한다며?"
"그렇게 수준 낮은 도발에는 넘어가지 않아. 어차피 우리 왕국은 내가 일으킬 거니까."
"꼭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애들이 무너진다고 하더라? 아버님은 주제에 맞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어."
"가르침을 보니, 가문의 성격을 대충 알 것도 같네. 자랑스럽겠어."
"뭐? 무슨 뜻이야!"
갑자기 엄청나게 격앙되기 시작한 논쟁.
-곧 머리채 뜯겠는데?
아무래도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디르엔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거기까지만 해."
"너는...."
가까이 다가가자 자신을 향해 쏠리는 시선.
다른 쪽은 조금 경계하는 눈치지만, 엘렘은 달랐다.
"서자 주제에 공작 가문인 척하지 마. 아무도 인정 안 하니까."
"루블린 공작의 결정을 네가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아니면, 토르엘 백작님의 뜻이 그렇다고 아버님께 직접 말씀드릴까?"
"무슨!"
갑작스러운 가주들의 소환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아이들의 싸움에 귀족 정치를 끌어들이니 당연한 반응이겠지.
"그러니까 거기까지만 해. 누가 보고 신고하면 너희만 곤란해질 테니까. 경고를 받으면 본가에도 알려지는 건 알지?"
"진짜… 짜증 나!"
마지막 주의까지 마치자 엘렘과 아이들은 붉어진 얼굴로 떠나갔다.
"괜찮아?"
그러는 사이, 테오는 제니트의 손을 잡고 일으키고 있었다.
"두 분 모두 감사합니다. 왕자님과 공작가의 자제분께서 도움을 주시다니, 상상도 못했어요."
"제국의 귀족을 대표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사과할게."
"아뇨, 아닙니다. 디르엔 님이 사과하실 게 아니에요. 제 신분의 한계는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
머쓱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 제니트.
13살 아이가 이렇게 체념해야 하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정도다.
"...."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테오의 시선은 디르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둘 다 기숙사 방을 보려고 온 거지?"
"응. 한번 보고 싶어서."
"저도 짐을 먼저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들렀습니다."
두 소년의 대답에 테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자."
앞장서 걷는 그의 뒤를 따라 두 아이도 걸음을 옮겼다.
'신기하네.'
내부로 들어서니, 아까의 강의실 건물보다 더 깔끔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특이한 점은 건물이 내부에서 완전히 양쪽으로 갈라져 구분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왼쪽이 남자 기숙사인가 보네. 너희는 어디야? 난 307호인데."
"어? 나는 306호야."
"저는 305호입니다."
테오의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셋의 시선을 교차하게 했다.
이걸 무슨 우연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재밌네. 일단 갈까?"
가볍게 웃은 그는 다시금 앞장서 계단을 올라갔다.
뒤를 따라 3층에 오르니, 길게 뻗은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학원도 둘러볼 거지? 같이 다닐까?"
"난 좋아. 짐만 두고 나올게."
"저는...."
각자의 방 앞에 서자 테오가 가볍게 권유를 해 왔다.
하지만 즉답을 내놓은 디르엔과 달리 제니트는 머뭇거렸다.
"좋아. 너한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힌 거 같아. 그냥 같이 가자."
"맞아. 너한텐 물어볼 것도 있거든. 같이 가."
두 귀족의 적극적인 말에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짐만 두고 바로 나와."
덜컥-
테오가 곧장 안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둘도 자신의 방 문을 열었다.
'저택보다는 작네.'
내부의 구조는 깔끔하고 좋았다.
하지만 13년간 살아왔던 저택과 별장의 방과 비교하면 크기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물론, 전생을 생각하면 배가 부른 소리겠지.
"이렇게 큰 방을 쓰는 건 처음이에요."
문을 나서자 제니트가 감동한 듯한 얼굴로 그런 말을 내뱉었다.
"그렇… 지?"
묘하게 죄를 지은 느낌이라, 디르엔은 겨우 동의하듯이 대답했다.
"내가 제일 늦었네."
어느새 밖으로 나와 옷깃을 정리하는 테오.
"그럼 갈까?"
그렇게 다시 모인 셋은 곧장 기숙사 밖으로 향했다.
34.
"와, 진짜 넓구나."
"그러게요...."
무작정 걸음을 옮긴 세 소년은 닿는 곳마다 구경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학생 숫자가 상당한 탓에 강의실과 훈련장, 기숙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저기는 뭐야?"
계속 걸음을 옮기다 닿은 특이하게 생긴 건물.
어째서 팔면체로 지은 건지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유리 자체도 다른 건물들과 달랐다.
뭔가 마법적 장치를 해 놓은 걸까.
"연구실처럼 보이는데요?"
밖을 가만히 살피던 제니트가 의견을 내놓았다.
"연구실?"
"네. 방어 마법과 연계할 수 있는 유리창이 저런 구조거든요. 레비오 교수님께서 알려 주셨던 적이 있어요."
말이 없는 마차를 만들었던 레비오 교수는 제니트를 학원에 입학시킨 사람이기도 하다.
학원을 배제하고도, 스승과 제자 정도의 느낌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들어가긴 어려울까?"
"연구실에 학생들도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관계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지 않을까요?"
"역시, 그렇겠지."
단호한 대답에 반사적으로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그 반응이 제니트에겐 가볍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 그… 제가 가서 여쭤볼까요?"
"어?"
"학원에 입학하면 교수님의 연구실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잠깐...."
손을 들어 말리기도 전에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제니트.
멍하게 보고 있으니, 테오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편해지면 좋을 텐데."
"응?"
"우리는 귀족이고, 제니트는 계속해서 억눌려 살았을 거잖아.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지."
안타깝다는 듯한 그의 말에 디르엔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 평민의 시선이 되어 이 상황을 본다면, 아까 먹었던 점심이 올라올 만큼의 부담감일 것이다.
조금은 거리를 둬 주는 게 편한 걸까.
"저기 오는데?"
그때, 건물 안쪽에서 달려오는 제니트.
표정이 뭔가 밝아진 것을 보니 이야기가 꽤 잘된 듯하다.
"두 분 모두 안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괜찮은 거야?"
"네, 교수님께서 특별히 허락해 주셨어요. 얼른 가시죠!"
기쁜 듯이 손짓하는 그의 모습에 두 사람은 곧장 건물로 발을 내디뎠다.
'저게 뭐야?'
내부로 들어서자 처음 보인 것은 흐물거리고 있는 칠판이었다.
너무 두서가 없었던 탓에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제니트가 말을 해 왔다.
"실험 중인 물건인데, 실패한 탓에 잠깐 밖에 내놓으신 것 같아요. 이쪽으로 오세요."
뭘 실험하는지 예상이 가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그리고 1층의 안쪽 구석 방 앞에 섰다.
"교수님, 들어가겠습니다."
"아, 그래!"
"가시죠."
호쾌하게 들려온 대답과 함께 세 아이는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정면에서 마주한 광경에 디르엔은 발을 멈추고 말았다.
-이건 또 뭐 하는 거야?
'나도 묻고 싶어.'
커다란 연구실의 중앙에는 중년의 남성, 레비오 교수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문제는 멀쩡히 서 있는 게 아니라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에 파묻혀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 괜찮으십니까?"
똑같이 당황한 테오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는 허우적거리며 케이크에서 빠져나왔다.
"이거 참, 재밌는 장면을 보이고 말았군. 워터 클렌징."
꼬륵-
이상한 말과 함께 마법을 사용한 레비오는 순식간에 물 회오리 속에 갇혔다.
크림 덩어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마법진은 베낄 수 있었다.
"이제 좀 괜찮군."
물에서 빠져나온 그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자네들이 우리 제니트의 첫 친구들인가?"
"안녕하십니까. 저는 하르벤 왕국의 왕세자 테오 켄틴 하르벤이라고 합니다."
"루블린 공작 가문의 디르엔 루블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의 물음에 두 사람은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이어 갔다.
강의실에서보다 간략했던 덕에 마음도 편하다.
"오오… 왕자와 공작 가문의 자제인가. 상당히 깨어 있는 친구들이구먼."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레비오는 각자의 손을 잡으며 악수를 했다.
본인의 추천으로 학원에 데려왔지만, 평민인 제니트가 꽤 걱정됐던 모양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마법을 좋아하나?"
"좋아합니다!"
"좋고 싫음보다는 필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물음에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다.
감정을 가득 담아 대답한 것이 디르엔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디르엔 군은 눈빛부터가 진심이군. 테오 군은… 조국을 위한 힘의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것인가?"
"예. 제게 마법은 왕국의 부흥을 위해 필요한 힘입니다. 거짓을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아아, 내 말투가 이상했군. 그대의 시선 또한 마법을 다루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지. 그것에 옳고 그름은 없다네. 다만, 작은 즐거움을 찾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야."
진중한 테오의 대답에 레비오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진심이 담겨 있는 것이 느껴져 내심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진중함 덕에 오히려 빛이 나는 느낌이군. 시간은 많으니, 친우들 곁에서 천천히 고민해 보게."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교수는 디르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좀 전의 인자한 눈이 아닌 뭔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이다.
"자네는 마법에 아주 관심이 많아 보이는군."
"마법을 더 많이, 더 깊이 배우고 싶어서 학원에 왔습니다."
"아주 명확해서 좋구먼."
의지를 보이자 고개를 끄덕이며 응하는 레비오.
그 반응을 보던 디르엔은 조심스레 질문을 꺼냈다.
"제니트는 교수님 아래에서 연구를 돕게 된다고 들었는데, 저도 지원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아주 반가운 소식이네만… 아쉽게도 지금은 무리일세. 자네뿐만 아니라, 제니트 역시도 말이지."
"네?"
"교수님?"
예상치 못한 대답에 두 아이는 반사적으로 되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레비오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교수진의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3학년부터일세. 기본 교육과 성장을 저해하지 않기 위한 규율이지."
"교수님께서 학원장님께 건의해 주실 수는 없나요? 제가 고아원을 나와 이곳에 온 것은 교수님의 연구를 위해서였는데...."
"아쉽지만, 이것은 학원장님도 어쩔 수 없으신 일이야. 세계의 모든 마법 학원이 공통으로 적용하는 부분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2년 동안은 개인의 능력을 기르는 것에 집중해 주면 좋겠네. 그 또한 연구에 큰 도움이 될 테니."
그는 차근차근 말을 이어 가며 당황한 제니트를 진정시켰다.
저 설명에 따르면 규율을 바꾸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이 마법 학회장이라는 말이다.
마법적으로 성자 바로 아래에 있는 그 인물을 이런 문제로 건드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흠, 대신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잠시 분위기를 보던 교수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꺼냈다.
뭔가 싶었는데, 생각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동아리를 만드는 것은 어떤가?"
"동아리 말씀이십니까?"
"내 연구실과는 상관없이, 자네들끼리 연구를 하는 것이지. 어차피 셋이서 팀을 이룰 것이지 않나?"
그 질문을 들은 디르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상태로 팀을 결성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준 것부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연한 사건으로 엮인 이들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교, 교수님,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마법도 못 쓰는 평민을 이분들이 왜...."
"난 좋아."
"나도."
다급한 제니트의 목소리를 끊으며 두 아이의 대답이 이어졌다.
테오 역시도 비슷한 마음이었던 듯하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지만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제니트가 되물어 왔다.
"너는 마법을 못 쓰는 게 문제라고 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 오히려 네 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잖아?"
"맞아. 부족한 부분을 서로 채워 주는 게 도움이 될 테니까. 그리고 이상한 놈들이랑 함께하는 것도 걱정이 되거든."
"...."
둘의 이야기를 들은 소년은 학원 구경을 권유했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조금 전에 적극성을 자제하자고 했지만, 지금은 밀어붙일 시기다.
"같이할 거지?"
"같이하자."
계속되는 권유에 제니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그리고 대답이 돌아온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민폐를 끼치게 된다면 제가 직접 팀을 나갈 거예요. 하지만 그때까지는… 잘 부탁드립니다. 두 분 다 같이하자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응, 잘 부탁해."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런 대화와 함께 결성된 팀.
결과가 나오자, 흐뭇하게 지켜보던 레비오 교수가 입을 열었다.
"잘됐군, 잘됐어. 장담하는데, 자네들은 훌륭한 팀이 될 걸세. 내 안목은 틀린 적이 거의 없거든."
그는 확신을 담은 듯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금 말을 이어 갔다.
"이제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지금은 예정일 뿐이지만, 아마 다음 학기부터 동아리에 들어갈 수 있을 걸세. 교수들의 간섭이 없는 자유로운 연구.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는가?"
"연구 동아리가 이미 있는 건가요?"
"비슷한 것들은 몇 개나 있지. 하지만 기존의 것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드는 방법 또한 존재하네. 인원 조건은 최소 2팀이니, 그때까지 포섭을 조금 해 놓게나."
흐름이 조금 이상해졌지만, 디르엔의 입장에선 상당히 괜찮은 활동이다.
동아리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 학기에라도 알 수 있겠지.
"그럼 필요한 이야기도 끝났으니, 슬슬 다른 곳도 구경하러 가 보게나. 자네들이 여기에 있던 걸 들키면 내가 잔소리를 듣게 되니까."
"네? 여기에 있으면 안 됐던 건가요?"
"규율상으로는 저학년 학생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지. 2년 뒤에 정식으로 초대할 테니, 그때 마음껏 구경해 주게."
그런 마무리를 끝으로, 세 아이는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죄송합니다. 교수님이 원래 조금… 특이하셔서요."
멍하니 서 있자 대신 사과를 하는 제니트.
하지만 저런 성격이라 더 신뢰가 가는 부분도 있다.
애초에 실력이 충분하면서 열정까지 있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더 돌아보다 갈까?"
"좋아."
"저도 좋습니다."
멈췄던 학원 투어를 재개한 세 소년은 부지를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녔다.
그리고 해가 거의 다 졌을 즈음에야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럼 내일 보자."
"잘 자."
"안녕히 주무세요."
저녁을 먹고,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취침 시간이 됐다.
하지만 마법진을 연구하는 매일의 일과는 새벽이 돼서야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