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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화

Prologue

남자는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수직으로 들어 올린 칼날이 태양광을 반사했다.

[발두르시여. 제게 힘을.]

읊조림에 응답하듯 칼날은 빛을 발했다.

남자는 후욱, 숨을 뱉어낸 뒤,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치고 간 자리가 움푹 파이고, 공기는 순간 떨리며 그를 향해 따라 들었다.

눈앞의 풍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괴수의 무리.

그중 하나, 뿔이 두 개 자란 채 두 발로 서 있는 소의 대가리로 칼날이 뻗었다.

[욱...!]

서걱, 소머리의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든 칼날이 살가죽을 조금 베다 말았다.

그의 혼신을 다한 공격은 거기서 멎었다.

소는 팔을 뻗었다. 남자의 다리를 붙잡았다. 허공에서 남자는 힘 없이 붙잡혔다.

후웅, 바람 소리가 그의 앞을 어지럽히고,

[──!]

퍼억, 소는 물기를 먹은 수건인 양 옆에 있는 나무에 남자를 털었다.

등인지 옆구린지, 남자는 어딘가를 맞고 어딘가가 부러졌고, 어딘가에서 피가 역류해 토했다.

주륵, 나무에 잠깐 붙어버린 몸이 미끄러졌다.

잡혔던 다리도 부러졌다. 아니, 분질러졌다는 것이 옳다.

그는 엎어진 채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햇살이 비친다. 조금 전까지 그의 검을 빛나게 했던 그 빛이다. 나무들이 펼쳐낸 초록의 군집 사이로 햇살이 부서진다.

그리고 소는.

소는, 소의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정의와 빛을 관장하는 발두르시여, 저를....]

퍼걱, 하는 소리가 났다.

* * *

나는 모니터를 잠시 보았다.

'GAME OVER'라는 문구가 담백하고 싸가지 없게 화면 중앙에 자리했다.

흠, 나는 콧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만큼 숨을 들이켰다.

"망겜!"

나는 샷건을 치려다 키보드의 가격이 생각났고, 마우스를 내던지려다 이 또한 가격이 생각났다.

손이 허공을 잠시 맴돌다 팔짱을 꼈다.

"생각할 수 있는 걸 다 해봤는데."

검과 마법, 신과 마물이 존재하는 게임 '에티우스'.

단언컨대 나만큼 이 게임에 깊이 빠진 사람이 없다.

다들 나보다 앞서 망겜이라고 외친 뒤 탈출했다.

그리고 내가 마침내 망겜 선언을 하고 말았으니, 난 게이머 중 가장 멍청한 데다가 최대 피해자인 셈이다.

"갓겜이라고 생각했는데."

생동감 넘치는 AI, 드넓은 오픈월드, 매력적인 캐릭터, 무수한 콘텐츠.

오픈 당시엔 그야말로 다른 어느 세계의 판타지 세상을 게임에 집어넣었다고 표현되었으나.

사실 밸런스 망겜이었다.

주인공의 죽음을 제외하고 이 게임의 엔딩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드넓은 오픈월드라지만 마물 때문에 나아갈 수 없는 경계가 있고, 그 경계를 넘어서면 평범한 잡몹조차 쉽게 죽일 수 없다.

깰 생각으로 만든 게임이 아닌 것 같다. 회사는 고칠 생각도 없고.

근데 오히려 그게 나의 도전 욕구를 자극했다.

'고칠 생각이 없다는 건, 분명 어딘가에 공략할 방법이 있는 거다.'

그렇게 믿었으니까.

왜 그랬을까.

"피곤하다."

팔을 책상 위에 올리고 얼굴을 묻었다.

나도 이 게임에서 작별할 때가 왔다.

방금의 게임 오버가 내가 이 게임을 공략하기 위해 생각한 마지막 수였다.

그것도 실패했으니, 다른 방법이 없다.

"프론디어 학생."

결국 에티우스는 내가 공략하지 못하는 첫 번째 게임이 되었다.

아무도 공략 못했으니까 논외로 칠까.

"프론디어 드 로아흐."

...근데 이게 뭔 소리래.

나밖에 없을 내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고개를 들자.

"...?"

칠판 같은 게 보였다.

그 앞에서 교사 같아 보이는 여성이 교과서 같은 책을 들고 강의 같은 걸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교사가 지금 나를 보고 있었다.

"아, 저요?"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프론디어? 그딴 이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 당신 말고 누가 있나요."

교사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프론디어'인지 뭐시기인지가 당연하다는 듯.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얼굴들이 보였다.

몇몇은 나를 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내 방이 아냐.'

여긴 교실이다. 내 방이 교실이 되어 있다. 책상에 얼굴을 묻다가 일어났을 뿐인데.

'...아.'

이건 꿈인가.

하도 게임 에티우스에 미쳐 살아서, 이 정도로 선명한 꿈을 꾸는가.

"프론디어, 이 무기의 이름이 뭔지 아시겠나요?"

교사는 오른편에 화면을 띄웠다.

허공에 영상을 띄우는 마공제, '위저뷰'다.

게임에서나 보던 마법 기술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저건.'

나는 교사가 위저뷰로 띄운 무기라는 것을 보았다.

그건 나뭇가지였다. 무기 같은 게 아니다.

'...아하.'

대충 알겠다. 교사가 무슨 답을 원하는지.

하지만 꿈이니까.

좀 더 눈치 없이 굴어볼까.

"저건 나뭇가지입니다. 무기 같은 게 아닙니다."

내 말에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교사도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오늘도 수업을 전혀 듣지 않았군요."

전혀 듣지 않긴 했다. 들을 수가 있었어야지.

"...선생님, 오늘 수업이 '발두르'에 관한 얘기였습니까?"

북유럽 신화 오딘의 아들, 빛의 신 '발두르'.

그는 겨우살이 나뭇가지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그 나뭇가지의 이름은 '미스틸테인'.

즉, 방금 나는 저 나뭇가지를 보고 미스틸테인이라고 답해야 맞았다.

교사가 나를 괴상한 것을 쳐다보듯 했다.

"...그렇습니다. 프론디어 학생,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선생님."

나는 위저뷰에 있는 나뭇가지를 다시 보았다.

틀림없다. 저건 그저 '나뭇가지'다.

"미스틸테인은 저렇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에티우스의 세계에서 주인공의 손에 의해 휘둘러질 무기.

그 무기를 난 수없이 보았고, 다뤘다.

'겨우살이 나뭇가지'와 '미스틸테인'을 구분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

"...."

학생과 교사들이 침묵한 채 나를 보았다. 불쾌함, 노여움, 역겨움 같은 것들이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그야 그렇다. 게임 시작 당시의 미스틸테인은 모두가 정말로 저렇게 생긴 줄 알았으니.

"...."

보자, 그래서.

이 꿈 언제 끝나냐?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고.

난 인정하기로 했다. 이건 꿈이 아니다. 내가 인정을 하든 안 하든 여긴 현실이었다.

꿈이라 생각해서 괜히 미스틸테인 갖고 뭐라 했다가 이미지만 안 좋아졌다.

복도를 지나갈 때 나를 향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쟤가 수업 때 헛소릴 하던 걔야?

...에서 쟤와 걔를 맡고 있는 나.

"뭐, 원래 이 몸은 평판이 안 좋았던 거 같지만."

지금 나는 어느 저택 안에 있다. 본래 이 몸의 주인이 지내던 저택.

어떻게 찾아왔냐 하면, 방과 후가 되자마자 정문 앞에서 날 차에 태우러 기다리는 조수가 있었다.

아주 고급스러운 세단에 몸을 싣고 여기로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금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명문의 귀족 자제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울에 비춘 이 몸의 얼굴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그 흑빛이 아주 짙어 제법 고급스러웠고, 외모 또한 그러했다.

정체를 알기 전까진 이 외모에 깜박 속을 정도였다.

나는 내 방 책상 위에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스마트 워치.

원래 세계에서 이쪽으로 넘어올 때 유일하게 가져온 물품이다. 손목에 차고 있어서 그랬던 건지, 그랬다면 옷은 왜 죄다 바뀌었는지.

그건 지금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 스마트워치가 설마 작동할까 했는데, 작동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름 : 프론디어 드 로아흐

•나이 : 17세

•소속 : 로아흐 가문의 차남, 콘스텔 교육생 1학년

•종족 : 인간

•신력 : 없음

스킬 상세 >

마법 상세 >

퀘스트 >

아예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었다.

이제 이건 시계 따위가 아니다.

익숙히 보아왔던 에티우스의 스테이터스. 그게 내 스마트 워치에 들어 있었다.

이걸 보자 실감이 났다. 내가 이세계에 떨어졌다는 실감.

이곳 입장으로는 완벽히 외지인인 나에게 이 스테이터스는 얼마 안 되는 구원이었다.

"...프론디어 드 로아흐."

낯선 이름이었다. 생각해내는 데 한참 걸렸다.

나는 이 게임을 정말 열심히 했다. 구석구석 숨겨진 요소까지 찾아내려고 노력하면서. 그런 나에게도 떠올리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마침내 떠올린 뒤에는, 한숨이 먼저 나왔다.

──인간늘보 프론디어.

나무늘보를 빗댄 멸칭이다. 아무 다른 뜻 없이 그냥 멸칭이다.

나태하지만 강력한,

게으르지만 숨겨진 뭔가가 있는,

그런 게 아니다.

그냥 나태하고 게으른 캐릭터. 단지 그뿐인 캐릭터다.

"스킬 구성이 이래서야, 게을러지는 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에티우스 세계에서 강하고 약한 것, 유능하고 무능한 것을 결정하는 건 오직 스킬과 마법, 그리고 신력뿐이다.

이 중에 신력은 신이 내리는 힘을 뜻한다.

에티우스에서는 온갖 신화의 신들이 등장해 인간에게 힘을 부여한다. 다만 그런 인간은 많지 않다.

신력을 받은 인간은 선택받은 것과 다름없고, 실제로 신력을 가진 사람들은 전부 네임드다.

반면에 스킬과 마법은 모든 사람들이 습득할 수 있지만, 신력에 비해서는 그 힘이 미미하다. 그렇다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말 아주 몇몇은 피나는 노력과 재능으로 신력을 능가하는 스킬과 마법을 일구어내기도 하지만.

프론디어는 신력이 당연하다시피 없고,

마법조차 없으며,

스킬을 보면.

스킬 상세>

[직조(織造)]

•등급 : 고유(固有)

•설명 : 사물의 이미지를 저장하고 복제합니다. 단, 허상입니다. '공방'과 '복제'의 과정을 거칩니다.

- 공방(工房) : 직조한 사물을 가상 공간 안에 저장한다.

- 복제(複製) : 공방에 저장한 사물을 복제한다.

이렇게 되어 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면.

나는 책상에 놓인 만년필 하나를 들어 '직조'를 사용했다.

만년필의 이미지를 저장하고, 저장한 이미지는 눈앞에 실이 짜여지는 듯이 채워진다.

마치 3D 프린터기로 출력되는 것처럼.

아마 이 모습 때문에 '직조'라고 부르는 것이겠지.

[비에트 상회의 고급 만년필] (복제)

•등급 : 일반

•설명 : 만년필을 모방한 직조품. 물리적 실체가 없다.

나는 진짜 만년필을 왼손에 들고, 복제한 만년필을 오른손에 들었다.

내 눈으로 봤을 땐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이것이 직조. 사물을 허상으로 복제한다.

이렇게 한 번 '직조'를 한 사물의 이미지는 '공방'에 저장된다.

위에 쓰여 있듯 공방은 저장해둔 걸 간편하게 볼 수 있는 내 가상 공간 같은 것이다.

증강현실처럼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무기, 도구 등 가릴 것 없이 진열해놓을 수 있다.

때문에 직조는 언제든, 어디서든 가능하다.

다만 내가 눈으로 직접 본 사물만.

내가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무기라고 해도,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공방에도 저장되지 않는다.

내가 빙의하기 전의 프론디어가 이미 몇 번 사용해 봤는지, 몇몇 무구와 물품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렇게 말로만 들으면 되게 그럴듯한데.

공상이니까 죄다 가짜다.

이렇게 복제된 만년필은 글씨를 쓸 수 없고, 하물며 종이 한 장 뚫지 못한다.

게다가 내 눈에만 보여서 다른 사람들은 내가 직조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른다.

현실에 전혀 간섭 못 하는 공상.

...우린 이걸 '망상'이라 부르기로 했는데.

이걸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에티우스를 하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스킬인데."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당연하게도 등급은 고유(固有).

에티우스에서 고유 등급은 다른 등급과 다른 특징이 있다.

등급은 가장 아래인 '일반'부터 최상위인 '신위'까지 존재하는데, '고유' 등급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대신 고유 등급은 다른 특성을 가진다.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

그래서 고유 등급은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아무리 하찮아도 단 하나뿐이라면 '고유' 등급이 붙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쓸모없는 고유 스킬이 있는 건가.

"나무늘보 프론디어."

이 스킬은 마치 그 멸칭을 증명하는 듯하다.

이제부터 나는 주인공으로도 공략하지 못한 게임을, 프론디어의 몸으로 살아나가야 한다.

"그냥 살아가는 게 문제가 아니지."

나는 스마트워치에서 '퀘스트'란을 클릭했다.

퀘스트 >

[메인퀘스트 : 운명 전환]

•설명 : 당신은 인류가 멸망할 최후를 알고 있습니다. 인류를 구하고 운명을 바꾸십시오

이 퀘스트는 내가 스마트 워치를 열자마자 처음부터 자리했다. 아마 내가 프론디어에게 빙의된 순간부터 있었던 퀘스트겠지.

이 퀘스트의 설명대로, 나는 이 게임의 결말을 알고 있다. 아니, 공략하지 못했을 때의 결말을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인류의 최후는 처량하기 그지없다.

일반적인 게임이라면 흔히 있을, 마왕 내지 그만한 정도의 최종 보스, 혹은 거대한 음모, 아니면 흑막. 그런 것에 멸망하는 게 아니다.

그저 마물에 도륙당한다. 인류의 터전은 점차 마물에게 뺏기고, 마침내 밀려오는 마물의 파도를 못 버티고 휩쓸리고 마는 것.

이 게임의 주인공조차도, 최후는 그토록 허망하다.

그걸 막으란다. 나보고.

하하하.

똑똑.

문 건너편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론디어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 그래요."

나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했다. 프론디어는 태생부터 귀족이니, 이런 말투는 어색할 텐데.

들어온 하녀도 나를 조금 기이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물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겠지만.

"프론디어 님,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 누구에게?"

억지로라도 하대로 말해본다. 당분간은 어색하겠지만, 차차 익숙해질 것이다.

"앙페르 님이십니다."

"...아버님이?"

앙페르, 프론디어의 아버지.

나는 프론디어라는 캐릭터는 몰라도, 앙페르는 안다. 아주 잘 안다.

북부의 철벽, 앙페르 드 로아흐.

테르스트 제국 변방의 영지 '예란헤스'에서, 단 한 번도 마물의 침입을 허락한 적이 없는 초인.

내가 프론디어라는 인물이 낯선 이유는 아버지인 앙페르와, 그의 첫째 아들인 앗지에가 로아흐 가문의 거의 모든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앙페르는 장군으로서는 군단장까지 가능한 통솔력과, 개인의 무력으로서는 대륙의 열두 손가락 안에 드는 '조디악'에 필적하며.

앗지에는 그 어마어마한 아버지의 재능을 전부 물려받고, 그 위로 성장하는 에티우스 공식상의 사기 캐릭터다.

앙페르, 이젠 아버지인 그가 나에게 편지라.

나는 긴장한 채 하녀가 건넨 편지를 받아 봉인을 뜯었다. 편지에는 단출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프론디어, 네 나태함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콘스텔에서 학년 내 종합 10위 안에 들어라.

못한다면 파문이다.]

나는 그 내용을 쭉 읽고는 코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만큼 들이켰다.

"...망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 인생도 단출해질 예정인 것 같다.

띠링, 단조로운 알림음이 들려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서브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서브퀘스트 : 아버지의 명령]

•설명 : 지난 과거 동안 보여준 프론디어의 게으름에 아버지인 앙페르의 인내심이 한도에 달했습니다.

•목표 : 이번 학기 내에 콘스텔에서 종합 10위 안에 들 것

•보상 : 앙페르의 인정을 받습니다.

•실패 시 파문당합니다.

나도 알아!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2화

1장 인간늘보 프론디어(1)

다음 날.

수업 시간에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저, 저걸 봐...."

"말도 안 돼...."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과 눈빛으로, 서로를 보며 속삭이고 나를 힐끗거렸다.

"프론디어 드 로아흐가...!"

깨어 있어!

"...."

모든 학생들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정말 단 한 번도 수업 중에 눈 떠 본 적 없니, 프론디어. 그건 그것대로 대단한데.

"그, 그럼 다음 화면을 보면...."

선생님도 내가 깨어 있는 게 어지간히 당황스러운 눈초리다.

하지만 별수 없다. 아버지의 명이 있었으니까.

콘스텔에서 종합 성적 10위 안에 들지 못하면 파문.

콘스텔이란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이 학교... 같은 아카데미... 같은 학교를 말한다.

아무튼 교육 기관 같은 거다.

다른 학교가 일반적으로 지식과 교양을 쌓는다고 하면, 콘스텔은 거기에 더불어 마물과 싸우기 위한 전투 훈련을 병행한다. 때문에 한참 빡세고, 한참 어렵다.

그저 공부만 잘할 게 아니라 전투원으로서의 역할도 뛰어나야 할 것.

그 두 가지를 아주 우수하게 클리어해야만, 종합 성적 10위 안에 오를 수 있다.

프론디어에게는 턱도 없는 과제다.

그러고 보니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프론디어가 어느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데, 그냥 잊혀졌다고 생각한 줄 알았더니 파문당했던 거구나.

파문당할 걸 알면서도 잔 건가. 설마 진짜 파문당할까 싶었냐.

종합 성적은 필기와 실기를 합친 점수다.

신력도 제대로 된 마법도 없는 이 몸으로는 일단 필기에서 최대한의 점수를 따놔야 한다. 그러니 내가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최종 목표는 게임의 클리어지만, 로아흐 가문이라는 위치는 중요하기 때문에 파문은 곤란하다.

프론디어라는 망캐에 명문 귀족이라는 타이틀은 얼마 안 되는 어드밴티지 중 하나다.

이거라도 없으면 프론디어로 이 게임을 깨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해진다.

'그건 그렇다 쳐도.'

졸리네.

프론디어의 습관과 저질 체력이 나에게 깃든 것처럼, 떨쳐내기 어려운 잠이 쏟아진다. 항상 이 시간이 되면 자는 몸이니.

갑자기 수업에 집중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뭣보다 칠판에 적어놓은 것들이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게임으로만 접하다 처음 수업을 듣는 나와, 맨날 잠만 쳐 자는 프론디어는 이 상황에선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어디.'

나는 프론디어의 스킬이 생각났다.

직조.

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선생님이 칠판에 쓴 내용에 직조를 시도했다.

칠판의 쓰인 글 내용 그대로 머릿속에 명확하게 들어왔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내용이 그대로 저장된다.

'이거 하난 쓸 만하네.'

이참에 책 내용도 공방에 저장해두었다.

나는 필기를 멈췄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대신 교사의 설명에 집중했다.

칠판에 적은 내용은 알아서 저장되고, 나중에 언제든지 복습할 수 있다.

내가 필기를 멈추자 주변에서 나를 기이하게 보는 시선이 좀 사그라들었다.

꼭 내가 귀찮아서 필기를 멈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심지어 선생님마저 침착해진 듯이 보였다. 그럼 그렇지,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그러는데.

* * *

필기는 시간과 노력을 쏟아가면서 한다고 쳐도, 문제는 실기다.

신력은커녕 변변한 스킬이나 마법도 없는 프론디어에게 실기의 벽은 너무 높다.

기댈 만한 건 직조 하나뿐인데, 이걸로 뭘 어찌할 수 있을까.

'보이지도 않고, 현실에 간섭할 수도 없는 복제라.'

프론디어의 게으름의 주된 원인은 이 스킬 때문일 공산이 크다. 아마 이 스킬을 써먹을 수 있을 만한 별의별 짓을 이미 한 뒤겠지.

그럼에도 쓸 만한 구석을 발견하지 못하고 포기했다는 뜻이니, 상황은 절망적이라 할 수 있다.

"...?"

직조에 대한 고민을 하며 복도를 걷고 있는 도중.

저쪽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 여자가 보였다.

쏴아아, 창 밖으로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노을빛 머리카락, 커다란 눈에 호수처럼 물든 눈동자.

그녀가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눈동자가 쏟아내는 분위기가 풍경 전체를 적신다.

나에게 시선 하나 두지 않는 모습으로, 그녀는 천천히 이쪽으로 가까워져 왔다.

──누군지 바로 알았다.

저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모르기가 어려울 정도다.

엘로디.

엘로디 드 이니에스 리샤에.

다섯 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지금 내 앞에 있다.

엘로디는 에티우스 게임의 재능 몰빵 캐릭터다.

'다섯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한 문장이면, 그녀의 사기성을 대변해 줄 수 있다.

주인공의 동료가 되지 않는 게 유일하게 아쉬운 점.

플레이를 해보면 주인공이 동료 제안을 아무리 하든 거절하고 만다. 그 이유도 밝혀지지 않는다.

그래도 차후 군대의 최중요 역할로서 자리매김할 여자니, 믿음직한 아군인 건 확실하다.

온갖 다양한 인간군상이 자리한 에티우스에서, 플레이어에게 안심을 주는 몇 안 되는 네임드 캐릭터.

...근데 그건 뭐, 내가 주인공일 때의 이야기고.

나는 프론디어다.

엘로디와는 모르는 사이일 거고, 안다고 좋은 소리를 듣진 못하겠지.

원래 프론디어를 싫어하는 학생은 많다. 성적은 처참하고 행실은 태만하니.

그저 명문가의 이름을 방패 삼아 아무것도 안 하는 나태한 철부지. 그게 프론디어의 평판이고, 사실이 그렇다.

반면에 성실과 모범이 타 학생의 교본 같은 엘로디. 그녀의 입장에서 나란 존재는 혐오 그 자체겠지.

...그런고로 난 주인공이 아니니.

얌전히 지나치도록 하자.

"...프론디어."

얌전히 지나치려고 했는데, 불러 세워졌다.

나는 엘로디를 보았다.

엘로디는 화가 잔뜩 어린 눈동자를 나에게 향했다.

"나에게 할 말 없어?"

할 말이 있다.

저 아세요?

차마 그렇게 말할 순 없어 잠자코 보고 있으니, 뿌득 하고 이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널,"

엘로디가 무언가 읊조리던 순간,

그녀의 우측 창 밖으로 무언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야구공, 정면─

나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그것은 여자가 손을 움직인 것과 거의 동시였다.

챙강-!

날아온 야구공에 유리창이 깨져나갔다. 공과 함께 쏟아지는 유리 파편, 그 앞으로 나는,

프론디어 고유 스킬

직조(織造)

공방 3번제

등급 - 일반

철제 방패

나 이전의 프론디어가 먼저 저장해 두었던 방패를 직조해 앞으로 내밀었다.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멍청아.'

이건 공상이니까 막아내는 데에는 아무 소용도,

화륵-

그런 생각이 지나갈 찰나에 야구공과 유리 조각이 단번에 불길에 휘감겼다.

날아오는 힘까지 전부 불길에 먹힌 듯 힘을 잃고 꽃잎처럼 휘날렸다.

'와....'

이는 내가 한 일이 아니다.

엘로디의 오른손이 유리 조각을 향해 뻗어 있었고, 그녀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일순간 이 모두를 불태운 것이다.

엘로디의 불길에 타오른 유리조각과 야구공은 힘을 잃고 낙하했다.

다소의 유리조각들만이 옷에 달라붙거나 스칠 그 순간,

타다당!

"허?"

"...어?"

나와 여자는 비슷한 의문을 담아 소리 내었다.

야구공과 유리조각이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내 손과 그녀의 몸 전체가, 유리조각 하나 맞지 않고 빗나갔다.

'그냥 허공에서 튕겨 나간 게 아냐. 나의 방패가....'

방패가 유리조각을 막아냈다. 분명 공상일 터인 나의 방패가.

"...음, 고마워. 프론디어.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엘로디는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야 그녀의 눈에는 내 방패가 보이지 않을 테니.

그런데도 내게 감사를 표하는 점은 굉장히 성실하다.

"하지만 뭐! 너도 봤지? 네가 막지 않았어도 나의 불길로-"

이후의 그녀는 무어라 떠들어댔지만 내 신경은 전혀 딴 곳에 가 있었다.

"...그, 듣고 있어? 좀 민망한데."

나는 조금 전의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분명히 내 방패가 유리창과 야구공을 막아냈다.

"저기, 그냥 아무 말이나 해주면 안 돼?"

즉, 직조는 완전히 허상이 아니다. 조건이 맞는다면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것.

그 조건은 아직 모른다. 그러나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이 무엇보다 크다.

"야, 그렇게까지 무시할 건 없잖아!"

나는 아주 자그마한 전율을 느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복도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답도 없어 보이던 이 망겜에 희미한 활로를 찾은 기분이었다.

햇빛이 내 얼굴에 멋들어지게 잠시 스쳤다.

"야!!!"

* * *

"아얏."

나는 또 한 번 머리에 야구공을 얻어맞았다. 내 머리를 툭 치고 저 옆으로 굴러가는 공을 줍고 머리를 어루만졌다.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지금 직조를 이것저것 시험 중이다.

그 파편들을 막아낸 정체는 분명 내가 직조한 방패일 것이다.

그때 난 생각했다.

설마 이 스킬은 시전자가 위험해지면 공상이 아니라 진짜가 되는 어마어마한 물건인가!

그걸 확인해 보려고 방패를 복제한 뒤 야구공을 던져보았다. 그리고 야구공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동안 방패를 위로 향한다.

...하지만 그딴 건 역시 없었다.

보기 좋게 방패를 통과해 내 머리를 때리고 가는 야구공.

하긴, 그런 편의주의적인 게임이었으면 진작 깼겠지.

"어떻게 하면 현실에서 쓸 수 있지?"

분명 유리 파편을 막아낸 사실은 진짜다.

그 모든 상황이 내 직조가 현실에 등장했다는 증거.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다.

"으으, 피곤하다."

나는 의자에 반쯤 누워 탈력감을 느꼈다.

기분 문제도 있지만, 진짜로 몸이 지쳐 있었다.

직조를 너무 사용한 반동인가.

"아니 현실에 나오지도 않으면서 왜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거야."

푸념처럼 중얼거리는 동안.

...그러게?

왜 지치는 거지?

이 묘한 탈력감은 뭐야?

그런 의문들이 차례대로 머리를 스쳤고.

나는 누운 상체를 일으켰다.

"...마나인가?"

게임 에티우스는 스킬과 마법이 있는 것처럼, 당연히 마나가 있다.

물론 프론디어가 된 나도 갖고 있을 터.

다만 나는 여기 세계의 인간이 아니니, 마나의 감각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의 탈력감이 마나 때문이라고 한다면.

'직조'는 마나를 사용하는 스킬이라는 것이다.

즉 마법에 가깝다.

'기억을 떠올려 봐. 에티우스에서 마나란 무엇이었지? 마법이 어떤 개념이었어?'

에티우스의 마법은 물질의 개념이 아니다.

현상의 개념.

불을 쏘든, 얼음창을 날리든, 흙벽을 쌓아 올리든 그 모두는 현실에 계속 존속할 수 없다.

시전자가 주문을 취소하거나, 혹은 마나가 다 닳게 되면 전부 사라진다.

자연히 일어난 산불은 끄거나 태울 게 없어지기 전까진 계속 타오르지만, 마법사가 만들어낸 불꽃은 산불로 번져도 마나를 전부 소진하면 불꽃 또한 사라진다.

그래서 프론디어의 직조가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실망하면서도 납득했다.

마법은 언뜻 만능처럼 보여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

태울 수 있고, 얼릴 수 있고, 무너뜨릴 수 있지만.

없던 것을 있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설령 복제품이라 해도.

'생각을 바꿔야 돼.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뭘 만들려는 생각이 잘못된 거야. 그건 불가능해. 방패를 만들 수는 없어.'

필요한 건 물질이 아니다.

현상.

마법사가 불을 일으킬 때 '불태우는 현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검이라면 '베는 현상'을.

방패라면 '막는 현상'을.

휙-

나는 야구공을 던져 올렸다.

그것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타이밍에 맞춰,

프론디어 고유 스킬

직조(織造)

공방 3번제

등급 - 일반

철제 방패

방패 자체를 만드는 게 아니다.

'방패로 공격을 막는 현상'을 만드는 것.

단 한 순간만.

타앙!

소리는 가벼웠고, 야구공은 방패에 튕겨 궤도를 바꿔 떨어졌다.

"...됐다."

막는 그 순간에만은 현실에 등장한다.

그것이 일순간이라 해도, 현실은 현실.

나는 작은 감동에 몸을 떨었다.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3화

1장 인간늘보 프론디어(2)

수업에 익숙해졌다.

이건 수업 내용을 알아듣기 시작했다는 게 아니다. 여전히 쥐뿔도 모르겠다.

그냥 칠판이든 교과서든 배우는 족족 이미지를 죄다 공방에 저장해놓을 뿐.

내가 익숙해진 건 수업할 때의 분위기였다. 나를 포함해 모두가 익숙해졌다고 하는 게 맞겠지.

수업마다 눈을 뜨고 칠판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슬슬 모두가 익숙해진 것이다.

내가 필기를 하나도 안 한다는 게 학생들을 좀 납득시켜 준 것 같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를 내보죠."

교사가 화면을 띄워놓던 위저뷰를 내렸다.

아마 질문의 답이 그 화면에 있는 거겠지.

"프론디어 군."

나를 지목하는 교사의 눈은 매우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내가 눈을 뜨고 수업을 듣고 있다는 사실.

그건 어떤 교사에게는 마음에 드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사실 프론디어가 수업 내내 잘 수 있던 것은 '로아흐 가문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는 교육기관 '콘스텔'은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없다. 구분은 오로지 실력으로만 나눌 뿐.

허나 내부의 인간이 모두 그렇다는 건 아니다.

콘스텔의 제도가 실력주의라는 것이지, 내부의 인간들은 저마다의 생각이 있기 마련.

누군가는 귀족에게 알랑방귀를 뀌며 평민을 무시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앞뒤 안 가리고 평민의 편을 들고 귀족을 혐오하는 부류도 있다.

프론디어의 포지션이 참 재밌었던 게 그 부분이다.

귀족에게 아부하는 선생은 내가 자는 것에 터치를 안 하고,

귀족을 대놓고 싫어하는 선생은 내가 자든 말든 무시로 일관한다.

즉 어느 쪽이든 프론디어의 나태함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에 나를 깨웠던 교사는 독특한 인물이었네.'

그저 학생이기 때문에, 수업 중이기 때문에 깨웠다.

너무나도 교사다운 반응.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제대로 된 교육기관인 거겠지.

하지만 지금 내 눈앞의 교사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나를 보는 눈에 깃든 혐오감이 그걸 증명한다.

"테르스트 제국력 144년에 무슨 일이 있었죠?"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방금 위저뷰에 띄운 내용에 들어 있다.

하지만 본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성실하게 써서 필기를 했겠다만.

"필기해놓은 걸 보고 대답해도 좋아요."

허허. 이 아줌마가.

내가 받아적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게 그리고 고까웠나.

나는 '공방'에서 저장해놓은 이미지를 꺼냈다. 이게 나의 '필기'다.

내가 이미지를 꺼내 내용을 확인하는 동안에, 교사는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할 수 없나요? 그럴 거면 다음부터는 필기를 똑바로,"

"에데지온 테르스트 폐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에데지온.

간단히 말해 지금 테르스트 황제의 할아버지다.

솔직히 제국 시민들에게 자랑스러운 황제는 아니다. 당시에는 마물들에게 인간의 영역이 계속해서 줄어들던 한중간이니까.

그저 패배의 기록만 남기고 떠난 무능한 황제.

하지만 그 누구라 해도, 당시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면 똑같은 치욕을 뒤집어쓰고 죽었을 것이다.

그만큼 힘들고 절망적인 시기였다. 운이 없었다고 봐야지.

교사가 나를 보는 눈이 험악해졌다.

왜 그렇게 보시죠.

학생이 정답을 맞혔는데요.

"...그것만 있지 않을 텐데요."

"황제의 서거 직후 제국은 수도를 실레스터로 이동, 이것이 테르스트 제국의 세 번째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천도입니다."

나는 그저 내가 꺼낸 이미지를 보고 읽을 뿐이다.

치사해 보이지만 하라는데 어쩌겠는가.

"당시에도 한 번, 현재 저희가 있는 콘스텔과 같은 전투 양성 기관의 필요성이 부각돼 입법 단계에까지 올랐으나 각하됐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맞았습니다. 당시에는 인간과 마물의 경계를 확실히 다지는 게 우선이었죠."

"...그리고요?"

교사는 어디까지 해보나 하는 심산인 듯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난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다음부터는 145년입니다."

다 읽었으니까.

"...."

"...."

잠깐의 눈싸움.

솔직히 왜 눈싸움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를 노려보는 아줌, 교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잠시 후 그녀는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페이지를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위저뷰가 다시 열리고 수업이 속행되었다.

다만 학생들이 숨죽이며 키득거릴 동안, 이따금 교사의 손가락이 조금 떨렸을 뿐이다.

* * *

신력측정실.

이 시설은 콘스텔 내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자랑한다.

신력을 가진 학생은 소수이나, 그들의 신력은 천차만별이며, 그 힘과 규모 또한 천차만별.

보다 정확한 측정을 위해 신력을 가진 학생은 개개인마다 기록표가 있고, 교사들은 그 기록을 종합 검토하여 적절한 평가를 내린다.

"...굉장하군."

그리고 이곳에 한 소녀가 서 있다.

그녀의 주변에 나뒹구는 섬찟한 현장.

갈라진 바위, 불에 탄 그을음, 얼어붙은 지면, 선명히 새겨진 벼락무늬, 등.

한 명이 만들어낸 결과라고는 믿기 힘든 광경.

그녀의 측정을 지켜보던 교사, 알레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아이가 그 '이니에스'인가.'

이니에스는 그녀의 정확한 이름이 아니다. 다섯 신의 사랑을 받아 '이니에스'라는 미들 네임을 갖게 됐을 뿐.

엘로디 드 이니에스 리샤에.

리샤에 가문의 장녀, 엘로디.

한 사람이 하나를 갖기도 힘든 신력을, 무려 다섯을 독차지하는 소녀.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녀의 미래는 거의 정해졌다고 봐도 좋다. 모든 사람의 선망과 존경, 질투와 시기를 한 몸에 받는 미래다.

"어때요? 기록."

"음, 이전과 거의 흡사하다. 기록 떨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알레스는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에이. 오르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엘로디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말했다.

알레스도 마주 웃어줬지만 식은땀을 흘렸다.

거기서 더 오르면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농담을 건넨 엘로디의 표정에는 어딘가 그늘이 져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복도에서 마주친 프론디어의 기억이 남아 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널,

기다렸는데.

그 말은 끝맺지 못했다. 갑자기 날아온 야구공에 흐지부지되었으니.

그러나 지금 와서는 그걸 다행이라고 여긴다.

프론디어와 엘로디는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콘스텔 내의 사람들 그 누구도 모르고 있지만.

프론디어의 가문인 로아흐와 엘로디의 가문인 리샤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동료이자 라이벌 격인 가문이다.

로아흐 가주인 앙페르의 '철벽의 업적'은 유명하나, 그 업적에는 리샤에 가문에도 적지 않은 공이 있었다.

각 가주의 아들과 딸, 같은 나이인 둘이 서로를 알게 된 것은 필연이다.

...엘로디가 프론디어에게 어떤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앙페르의 아들, 그 앗지에의 동생.

모두가 프론디어에게 그들 정도의 재능이 있을 거라 기대했으나.

엘로디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오랜 친구로서 프론디어가 제대로 한 사람 몫을 하길 바랐을 뿐.

그러나 프론디어는 그렇지 않았다.

신력도 재능도 없는 그는 그 품성조차 볼품없었다.

부족한 실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맡은 바 일을 해내는 책임감도, 하물며 자기 일상에 대한 관리조차도 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옛정은 오랜 시간 속에 희미해졌다.

프론디어는 마침내 엘로디와 했던 마지막 약속까지도 저버린 것이다.

-프론디어, 방과 후 콘스텔 동문에서 만나. 너에게 꼭 줄 게 있어.

분명 어렵지 않은 약속이었을 터.

그 말에 알겠다고 대답을 한 건 너였을 터.

...그러나 프론디어는 끝끝내 나오지 않고, 엘로디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복도에서 지나치려 했다.

'...복도.'

엘로디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더니 알레스에게 물었다.

"...선생님, 만약에 선생님이라면 날아오는 화살들을 어떻게 막아내시겠어요?"

그녀는 프론디어와 있을 때 복도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을 떠올렸다.

야구공이 날아와 유리창이 깨지고, 그녀는 한순간에 그 모두를 불태웠으나.

추락하는 동안 그것들은 허공에서 튕겨졌다.

분명 프론디어가 한 일인데. 그 방법에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 전부를 일일이 설명하긴 뭣하니, 유리조각 대신 화살로 예시를 바꾸었다.

"마법적으로라면 방법이야 무수하지, 불태우든 얼리든 바람으로 날려버리든. 힘을 잃게 하기만 하면 되니까. 파마(破魔)의 화살이 아니라면 말이다."

"...만약 누군가 화살을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거로 막아낸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세요?"

"바람으로 밀어냈다는 말이냐?"

"아뇨,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벽으로, 튕겨냈다고 하면요."

"그런 사람을 본 거야?"

"아, 아뇨! 그냥 가정의 이야기에요. 만약에 그렇다면 어떨까, 하는 얘기죠."

엘로디의 질문은 다른 학생이라면 유치하고 바보 같이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알레스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질문한 학생이 엘로디니까.

알레스가 하는 생각을 엘로디 또한 먼저 했겠지. 그런데도 물어보았다는 건, 이 질문에 그만한 고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봐도 알레스의 결론은 같았다.

"이상한 짓이지."

"...그렇죠?"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투명 마법이다. 벽이 됐든 방패가 됐든 뭐든 간에, 사람이 들 수 있을 만한 물품에 투명화를 건 뒤 화살을 막아낸다. 그렇다면 남들이 보았을 땐 '보이지 않는 벽'이 될 수 있지. 말 그대로야. 하지만 투명 마법은 상당히 까다로워. 정말로 투명해지는 게 아니라, 빛의 난반사를 응용해야 하니까. 약간의 계산 실수로도 투명은 실패하지. 그렇다고 이걸 성공했다고 해도, 의문점이 남아."

"...뭣하러 그렇게 하냐는 거죠?"

"그렇지. 막기 위해서라면 투명할 필요가 없고, 그렇다면 그냥 단순히 방패 하나면 된다. 마법조차도 필요 없어. 굳이 마법을 쓰고 싶다면 더 쉬운 방법이 있고, 방패로 막을 거면 투명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앞뒤가 안 맞지."

엘로디도 같은 생각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알레스에게는 자세한 내용은 생략했지만.

사실 화살을 쏘는 건 전시 상황의 얘기고, 엘로디의 경우는 화살도 아닌 유리조각, 그냥 일상의 사고 같은 거였다.

어느 누가 평소 걸어 다니는 복도에서 투명한 방패 같은 것을 들고 다니겠나. 언젠가 날아올지도, 안 날아올지도 모를 공격을 대비하면서 말이다.

알레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슬며시 입을 열었다.

"또 한 가지 있긴 하지만, 이건 가능성이 굉장히 낮으니."

"뭔가요?"

"음,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래도요."

알레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자신이 지금부터 할 말이 황당한 이야기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오러를 쓰는 거야."

"...오러? 전사들의 무기에 담기는 그 오러요?"

"그렇지. 마나와 오러는 본래 '기(氣)'라고 칭하는 같은 물질이니. 마법사가 수식을 통해 마나를 다루어 마법으로 이루어낸다면, 전사는 수만 번의 훈련과 단련을 통해 오러 자체를 깃들게 한다."

"하지만 그게, 보이지 않는 벽과 어떤 연관이 있죠?"

"마법사들에겐 낯선 이야기지만, 경지에 도달한 전사들은 무기가 없이도 오러를 만들어낸다."

엘로디의 입이 벌어졌다. 그제야 알레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짐작이 갔다.

왜 허무맹랑한 얘기라는지 잘 알겠다.

"그러니까... 그만한 경지에 도달한 전사가 방패만 한 오러를 맨손으로 만들어냈다는 건가요?"

"가정의 이야기였잖아?"

"아, 그, 그렇죠! 가정의 이야기로서! 그런 게 가능한가 하는, 뭐 그런 질문이었어요."

엘로디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생각했다.

프론디어가 오러를 만들었다는 가능성, 따윈 당연히 없다.

무기도 없는 맨손으로 오러를 만든다는 것부터가 극소수일 터.

그런데 그 무수한 유리조각들을 전부 튕겨낼 정도의 크기로 오러를 만들었다고?

'...말도 안 돼.'

그렇다면 프론디어는 정말로 방패에 투명 마법을 거는 바보 같은 짓을 했든가, 아니면.

...아니면, 뭘까.

알레스는 고민하는 표정의 엘로디를 보고 미소 지었다.

엘로디가 분명 뭔가를 보긴 봤나 보다.

하지만 알레스는 확신했다. 뭘 잘못 본 거지.

"하지만 이론일 뿐이지. 그런 짓은 그 누구도 불가능해."

"...아, 역시 그렇죠?"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인류의 땅은 지금보다 넓었을 거야."

"그 정도예요?"

"방패만 한 크기의 오러를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만든다면, 그의 몸 자체가 전설 무기에 준하지. 그것도 마구잡이로 쏴대는 전설 무기 말이야. 보이지도 않는 무기가 수십 발이 날아오는데, 그걸 맞으면 딱 그만한 구멍이 뚫린다고 생각해 봐."

알레스의 말에 엘로디의 얼굴이 싸해졌다.

"그건 확실히, 무섭네요."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4화

1장 인간늘보 프론디어(3)

콰직!

"맞췄다!"

나는 부서진 표적을 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곳은 단련실.

누군가는 근육 트레이닝을 하고, 누군가는 마법 테스트를 하고, 누군가는 기술 검증을 하고.

아무튼, 빈방이 있고 허락만 맡으면 누구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밖에서는 내부의 상황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직조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개인실에 설정된 프로그램 중 하나인 표적 맞히기다.

보통은 원거리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이용하는 시설인데, 멀리 보이는 표적을 맞히면 된다.

가장 아래 난이도에서는 표적이 그냥 선 채로 가만히 있지만,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표적은 멀어지고, 숨었다가 나타났다가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급기야는 투사체에 반응해서 피하기까지 한다.

물론 나는 겸허히 최하 난이도를 하는 중.

참고로 표적은 마공학 홀로그램이라, 부쉈다고 해서 진짜 부서진 건 아니다.

효과음과 그래픽이 굉장히 그럴듯할 뿐.

맞추는 데에 성공하면 맞은 부위와 데미지까지 표시되니 참 편리하다.

지금 연습하고 있는 건 직조한 단검의 투척술.

타겟에 적중하는 순간에 맞추는 현상을 이끌어내기만 하면, 직조한 단검을 날려도 적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원거리 공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직조가 현실에 개입하는 건 아주 찰나에 불과하다. 베는 순간, 막는 순간, 찌르는 순간에만 잠깐 등장하고 마는 것.

그래서 근접전에서는 직조의 능력이 반감된다. 왜냐하면 상대의 공격을 막는 것조차도 일순간이기 때문이다.

막아내는 순간에 궤도를 흘리거나 튕겨내지 못하면, 적의 검이 내 무기나 방패를 뚫고 그대로 몸을 베어 버린다.

이건 방패든 칼이든 마찬가지. 방패를 들었으면 마치 게임처럼 상대의 공격 매순간에 패링을 해야 하고, 검을 들었다면 어설프게 막아선 안 되고 전부 흘리거나 쳐내야 한다.

그런 정신 나간 난이도의 근접전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활이 됐든 단검이 됐든 뭐가 됐든 멀리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만으로 쓰러뜨릴 수 있다면 베스트.

하지만 이 전술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드럽게 안 맞네."

바로 나 자신.

게임 폐인일 뿐인 나와, 잠만 쳐 잘 뿐이었던 프론디어.

아주 쌍으로 지랄맞은 센스가 몸서리치도록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이 악물고 열 번에 한 번, 스무 번에 한 번이라도 맞히다 보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생성 스킬 : 투척술]

[투척술]

•등급 : 일반

•설명 : 사물을 던져 맞춘다. 숙련도가 높을수록 명중 보정을 받는다.

•현재 숙련도 : 최하급

스킬을 얻는다.

보잘것없지만, 나와 프론디어에게는 전투 자체의 재능을 기대할 수 없으니, 스킬에 의존해야 한다.

참고로 투척술 최하급은 열심히만 하면 10살 전후의 꼬맹이라도 얻을 수 있다.

...힘내자!

* * *

달을 초승으로 베어 문 저녁.

연습을 끝마치고 단련실을 나온 나는 입구 앞에 가만히 섰다. 그리고 시간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게임에 들어온 직후 너무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니, 들어온 것부터가 이미 정신없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아니 나란 인간이 애초에 정신없는 인간이기,

...아무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잠깐 잊고 있던 게 있었다.

처음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의 생각이 떠오른 뒤로, 그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오늘은 그걸 확인해야만 한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단련실에서 기다리는 이유는, 그가 반드시 여기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스마트워치로 날짜도 확인했고, 오늘이 틀림없다. 시간도 슬슬 올 때가 됐다.

지잉-

단련실의 자동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찾았다.

달빛을 깨끗이 반사하는 금발, 선연히 빛나는 푸른 눈동자, 이목구비는 당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듯 정갈하다.

그 누구라 해도 이 남자를 보면 주변의 공기가 바뀌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아스터 에반스.

콘스텔 1학년생, 앞으로 찬란히 빛날 인류의 희망.

이 게임 '에티우스'의 주인공이다.

"...음? 안녕하세요?"

아스터는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프론디어인 나와는 지금까진 초면일 것이다.

...설령 초면이 아니더라도, 아마 기억조차 못 할 터.

나는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괜히 쓸데없이 의심을 사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나는 그와 말하려고 기다린 것이 아니다. 그를 '보기 위해' 기다린 것이다.

아스터는 나를 잠깐 보고는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갔다.

조금만 걸으면 나오는 갈림길.

왼쪽은 도서관으로 향하고, 오른쪽은 기숙사로 향한다.

나는 그의 등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갈림길에 접어든 그의 걸음은,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는 절망에 시선을 떨구었다.

확실하게 알았다. 이 게임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순탄치 않을 것임을.

──게임 에티우스.

아스터 에반스는 좀 전에 말했듯 에티우스의 주인공이다.

게임의 주인공이란 말은, 당연히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캐릭터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바꿔 말해서,

플레이어가 플레이하지 않는 아스터 에반스는, 그 누구도 모른다.

오늘 이 날짜에는 이벤트가 있다.

아스터가 도서관으로 향하면 사서와의 만남을 갖고 사서에게 몇 가지의 정보를 전해 듣는다.

그 정보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만남 자체가 독특하기 때문에 사서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흔히 말하는 호감도를 올리는 것이다.

사서는 이후 계속해서 다양한 도움을 주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모두가 당연히 도서관을 향한다.

...도서관에서 사서를 만나는 이벤트를 알고 있으니까.

아스터 에반스의 입장에선 절대로 모르는 정보를,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안다.

에티우스는 누구도 깨본 적이 없는 게임이다.

에티우스에 도전했던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아스터를 가장 이득을 많이 얻는 최적의 루트로 움직이게 했다.

...지금의 아스터 에반스가 그런 루트를 갈 리 없다.

많은 사람의 정보 공유, 셀 수도 없는 재시도를 통해 쌓이고 쌓인 최적화 루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스터가 기적이 다섯 번이 일어난대도 그렇게 갈 리 없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그렇게 많이 아스터가 되어 플레이했는데.

나는 아스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플레이어가 플레이하지 않는 아스터 에반스. 그가 대체 어디로 향할지, 나에겐 알 방도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처음의 계획은 단순히 나 자신을 성장시켜 아스터의 동료가 되는 거였다.

아스터가 스스로 알아서 잘 성장할 동안, 나는 내 나름의 방식을 익혀 아스터의 전력에 보탬이 되는 것.

프론디어는 원래 아스터의 동료에 속해 있지 않았으니까, 강해진 내가 합류한다면 단순 계산으로도 무조건 플러스 이득이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예정이 바뀌었다.

여기의 아스터는 내가 생각하는 만큼 '알아서 잘' 성장해 주지 않는다.

고인물들의 루트를 타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사서의 정보를 놓치게 되는 사소한 것에 불과하지만, 나아가서는 그의 능력에 보탬이 될 경험과 각종 무구, 아티팩트를 죄다 놓치게 되겠지.

이 게임은 누구도 공략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아스터가 없는 공략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것은 은근슬쩍 아스터를 유도하는 것이다. 그가 고인물의 루트를 타도록.

모든 것을 다 얻게 할 수는 없다.

도서관 사서처럼 정보 취득에만 도움을 주는 캐릭터들도 조금은 넘겨도 좋다. 어차피 웬만한 정보는 내가 아니까.

하지만 필수 불가결한 이벤트는 반드시 거쳐야 한다.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게 아니니 훨씬 손이 많이 가겠지.

그래도 어떻게든 해내서, 아스터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나 스스로도 강해지고.

...참, 올해 안에 학년 10위 안에 들어야 했지.

그것도 하고.

...참, 도서관 사서 이벤트를 방금 아스터가 넘겨버렸지.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망겜.

"...그것도 하고."

앞으로 아스터가 놓치는 모든 것들.

내가 주워 담을 수밖에.

* * *

나는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사람은 많지 않았고, 장소답게 조용하고 이완된 공기가 감돌았다.

다만 몇몇 내 얼굴을 본 학생들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피하곤 했다.

프론디어와 도서관은 상당히 안 어울리는 매치겠지.

사실 콘스텔 어디에도 프론디어와 어울리는 곳은 없다.

실력 향상과 교양을 쌓기 위해 있는 교육 기관이니, 아무것도 하기 싫은 프론디어에게 어울릴 리가.

나는 빠르게 주위를 살펴 사서를 찾았다.

사서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갈색 머리에 동그란 안경, 수수한 얼굴. 그와 대비되는 글래머러스한 몸매와 왼쪽 눈 아래에 자리한 눈물점.

처음 얼굴을 보고 그야말로 사서답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몸매와 이따금 나타나는 요염한 표정을 보면 그 생각이 걷힌다.

사서, 아이넨 교사.

이 교사와 친분이 쌓이면 학교 내에 들어오는 최신 소식과 잡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애초에 게임이 불친절과 부조리로 꽉 차 있기 때문에 이 게임의 초보자에겐 정보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뭐, 그러니까 초보자에겐 그렇다는 거고.

사실 나보단 아스터에게 더 중요한 인물이다.

하지만 아스터가 이 이벤트를 놓쳤으니,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노릇.

'내가 온다고 이벤트가 시작되지는 않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스터가 흘린 정보는 내가 전부 줍기로 하자.

기회가 된다면 아스터에게 적절히 정보를 나눠줄 수도 있겠지.

자, 그럼 어쩌지.

내 평판은 교사 내에서는 유명할 것이다.

아마 아이넨도 프론디어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즉 처음부터 호감도가 마이너스인 채로 친해져야 한다는 말인데.

"너, 프론디어지?"

그런데 아이넨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내 얼굴을 보고는 오라는 듯이 손짓까지 한다.

...뭐지.

영문을 모르고 다가간다.

"네가 이런 곳에 올 줄 몰랐네. 웬일이니?"

"...찾고 싶은 책이 있어서요."

그런 건 없다.

그렇다고 '제 용건은 바로 당신입니다.' 따위로 말할 순 없으니.

"흐응. 마침 잘 됐다. 이거 봐볼래?"

아이넨이 책상 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신문이었다.

신문 하나 달랑 꺼내놓고 어딜 보라는 거냐고 되묻고 싶지만,

어딜 보라는 건지, 보자마자 알았다.

신문 1면에 실린 내용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신물(神物)을 발견한 파티. 장소는 솔기토프 영지 근처의 던전?]

사진에는 그러한 제목과 함께, 사진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 사진에는 투명한 관 안에 하나의 나뭇가지가 들어 있었다.

나뭇가지. 그 모양이 눈에 익다.

"사람들 모두가 이걸 '미스틸테인'이라고 했어."

그렇다.

내가 에티우스의 세계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한 교사가 나에게 위저뷰로 보여주었던 나뭇가지.

그것과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너, 제인에게 이게 미스틸테인이 아니라고 했었다면서?"

그 교사의 이름이 제인이었구나.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넨이 나를 시험해 보는 듯 은근히 물어왔다.

"어때? 신문에도 나오고, 조금 있으면 위저뷰를 통해 뉴스도 나올 텐데. 이걸 본 모두가 미스틸테인이라고 해. 일생에 한 번 제대로 마주하기도 어려운 신물을 찾았다면서 제국이 들썩일 거야."

그럴 것이다.

신의 손에 사용되었던 물건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거기다 미스틸테인은 그런 사소한 것이 전혀 아니다.

북유럽 신화의 '완전한 신'이라 불렸던 발두르.

그를 죽인 겨우살이 나뭇가지. 그것이 미스틸테인이다.

가치는 돈 따위로는 감히 매길 수 없고, 다른 신물을 들이민다 해도 맞설 만한 것이 손에 꼽힌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미지대로의 미스틸테인을 누군가 발견했고,

나는 '미스틸테인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즉 아이넨은 지금 내게 묻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여전히 네 의견을 관철할 수 있어?

네가 했던 말이 그저 허세나 헛소리가 아니라고, 또다시 말할 수 있어?

아이넨의 웃는 얼굴 사이에서, 희미한 장난기가 보인다.

그녀는 아마 내가 의견을 꺾을 것이라 여기겠지. 혹은 회피하거나, 자신의 말을 부정하거나, 말을 더듬는다거나. 어느 쪽이든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

나의 단정된 말에 아이넨의 미소가 사라진다.

"미스틸테인은 저렇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 미스틸테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물론이고,

저 신문에 등장한, 투명한 관 안에 들어 있는 '가짜 미스틸테인'의 정체까지도.

'...하지만 저거, 이용할 수 있겠어.'

어떻게 하면 아스터에게 자연스레 접근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잘만하면 저걸로 해결할 수 있겠다.

저 내용에 관한 뉴스가 나오면 아스터가 가장 관심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아스터의 신력. 그 대상이 바로 발두르니까.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5화

2장 관 속의 나뭇가지, 미스틸테인(1)

어둠이 깊게 물든 밤.

한 여자가 조용한 걸음으로 향했다.

금발의 긴 생머리가 달빛에 비춰 주변에 그녀 홀로 빛났다.

살짝 가라앉은 눈매, 차분한 걸음걸이.

우수에 찬 듯, 부드럽게 풍경을 밀어내는 눈빛은, 남자라면 다시 돌아볼 만한 고혹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여자는 완만한 걸음을 계속하다가,

"...헛."

눈을 떴다. 아니, 눈은 원래부터 뜨고 있었고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입술에 붙어 있었다.

"...아, 도착했네."

엘린은 자신의 집 앞을 바라보았다.

옷매무새를 확인한다.

"어디 부딪힌 거 같진 않고, 좋아."

저번엔 나뭇잎이 머리에 올려진 채 그대로 집까지 걸어왔었다.

후암, 여전히 졸린 듯 하품이 나왔다. 하기야 졸리지 않은 적이 언제 있었냐만.

현관문을 열었다.

"어, 누나 왔어?"

동생이 소파에 앉은 채 그녀를 맞아주었다. 아니, 위저뷰에서 시선도 안 떼고 있는데 맞아주는 게 맞는지.

"아스터."

엘린은 동생인 아스터 에반스에게 미심쩍은 시선을 던졌다.

"왜?"

"너 로아흐 가의 1학년과 아는 사이야?

"그게 누군데?"

"프론디어 말이야. 인간늘보 프론디어."

아스터가 엘린의 말을 듣고 고개를 좀 더 기울였다.

"...그게 누군데?"

엘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이 바깥 정세에 너무 무심하다. 설마 프론디어라는 사람 자체를 모른다니.

"너와 프론디어가 같이 있는 걸 봤다던데. 단련실에서."

"...아 그 사람인가?"

아스터는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근데 같이 있었던 게 아냐. 그냥 지나가는 길에 인사했을 뿐.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던데."

"흐음."

엘린은 짧게 콧소리를 내곤 아스터를 지나갔다.

냉장고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을 아스터가 어이없는 듯 보았다.

"아니, 그걸로 끝이야?"

"난 또 네가 이상한 거에 물들까 봐 걱정했지."

엘린은 물통을 꺼내 컵에 물을 따랐다.

등 뒤에서 아스터의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린다.

"웃기고 있네. 하루 온종일 잠만 퍼질러 자면서-"

휙, 엘린의 손이 휘둘러졌다.

그 손끝에서 뻗어 나온 컵, 그리고 담긴 물. 그 전체가 마치 탁자 위에 놓고 민 것처럼 깨끗한 수평을 그리며 아스터를 향해 날아간다.

아스터는 손으로 받아내고 관성을 따라 몸을 뒤로 기울였다. 힘의 방향을 살짝 틀어 한 바퀴 몸을 회전시켰다.

찰랑, 물컵 속의 물이 흔들렸다.

엘린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그것을 보고 말했다.

"흘렸네."

"그딴 식으로 던지니까 그렇지!"

"그딴 식? 너도 그딴 식으로 던져질래?"

빌어먹을, 아스터는 속으로 울분을 삼키고 물을 마셨다.

신력을 쓰면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주제에.

아스터는 괜한 생각을 잊으려 위저뷰로 시선을 옮겼다.

"어?"

위저뷰에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내용이, 아스터의 움직임을 멎게 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솔기토프 근처의 던전을 공략한 파티 일행이 신물(神物)을 발견했다는 소식입니다. 신물은 2m 가까이 되는 나뭇가지로, 그 생김새가 미스틸테인과 흡사하여 화제가 되고-]

"미스틸테인?"

아스터의 중얼거림에 엘린도 반응했다. 그녀는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고 아스터의 옆으로 다가갔다.

화면에는 파티의 일원이 어떤 투명한 관을 들고 있었다. 관 안에는 긴 나뭇가지가 안치되어 있었다.

마침 인터뷰 중이었다.

[왜 관 안에 넣어놨나요?]

[저희가 넣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던전에서 발견했을 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관을 깨볼 생각은 하지 않으셨나요?]

[설마요. 이 관을 포함해서 신물이라면, 자칫하단 신의 분노를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겠군요. 세간에서는 미스틸테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희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기쁠 것 같아요!]

쾌활하게 웃는 파티의 리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아스터는 관 안에 든 나뭇가지를 가만히 살폈다.

엘린이 아스터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어떤 것 같아?"

"모르겠어. 실물을 본 적이 없으니."

"혹시, 그분께서 반응은?"

아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엘린이 말한 '그분'이란 발두르를 뜻한다. 그를 죽인 무기이니, 아스터에게 무언가 알려주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참고로 신 대부분은 '죽음'을 겪었다. 오랜 역사와 신화 속에서 신들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소멸했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 세계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구원의 세계'에 존재하며, 이는 각 신화에 등장하는 그리스의 '황천'이나 북유럽의 '헬헤임'보다 좀 더 상위의 개념이다.

때문에 발두르 또한 그곳에 있을 것이며, 마음만 먹는다면 아스터에게 무언가 언질을 주거나 힌트를 주는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

아쉽지만 아스터는 발두르에게 아무런 힌트도 받지 못했다.

다만 그 눈은 여전히 나뭇가지에 못 박히듯 있었다.

"그래도 넌 확인해 보고 싶은 거지?"

"응. 저게 정말로 미스틸테인이라면, 내가 가져야만 해."

발두르를 죽인 나뭇가지.

발두르의 사랑을 받는 아스터에겐 그대로 약점이 된다.

반대로 저것만 갖게 된다면, 가장 거대한 약점이 사라지는 셈.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저것을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저 신물을 사용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사용하는 것을 신에게 허락받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신물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대로는 사용할 수 없을 텐데요.]

[저희가 갖기엔 주제넘은 무기라고 생각하네요. 올바른 가격을 받을 수 있다면 판매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아스터."

"알아."

저 무기엔 필시 어마어마한 가격이 붙겠지.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다. 설령 가짜라고 한들, 진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저것이 진짜다.

아마 전투에 관련 없는 가문이라면 저 무기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진품임을 증명하지 않고, 가문에다가 안치할 뿐.

그것만 해도 명성이 오를 터. 그 용도만으로도 가격이 뛰어오를 터.

평민인 아스터 에반스는 꿈도 못 꿀 가격이.

* * *

"들었어? 미스틸테인 그거."

"아, 경매 취소됐다며?"

며칠 뒤.

콘스텔에서는 미스틸테인의 얘기가 한창이었다.

학생, 교수 할 것 없이 모두의 관심사가 그쪽으로 쏠렸다.

미스틸테인을 발견한 파티는 그 신물을 경매에 올렸다. 그러나 곧 취소되었다.

이건 예정된 사항이었다. 명문가들이 제시한 것은 단순히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었으니.

결국 명문가의 가주들이 한자리에 모여 합의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어설픈 귀족은 이 자리에 참석조차 못 할 것이다.

바로 오늘이 그 귀족 회의의 당일.

드물게 오늘은 교실 내에서 프론디어에게 시선이 몰렸다.

그의 됨됨이와는 별개로, 프론디어는 엄연한 명문가의 아들.

그의 아버지인 앙페르 드 로아흐는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고 한다.

여기서 아들은 프론디어가 아니라, 그의 형인 앗지에를 말한다.

게다가 얼마 전 프론디어의 발언까지.

'미스틸테인은 저렇게 생기지 않았습니다'라던 그의 이해 못 할 허세는 학년 전체에 소문이 쫙 퍼졌다. 이제 곧 그 허세가 들통날 순간이 온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져서,

오늘의 콘스텔에서는 프론디어에 대한 관심이 폭등했다.

물론 당사자인 프론디어는 오늘도, 조용하고도 나른하게 졸린 얼굴일 뿐이다.

"프론디어."

방과 후, 엘로디가 프론디어의 교실로 찾아왔다.

콘스텔에는 각 학년마다 6개의 반이 있다.

엘로디와 프론디어는 같은 학년이라 해도 반이 다르다.

프론디어는 5반, 엘로디는 아스터와 같은 2반이다.

게임 에티우스는 어디까지나 아스터가 주인공이기에, 많은 네임드들이 2반에 몰려 있다.

엘로디가 프론디어에게 다가오자 학생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모였다.

하지만 엘로디의 행동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녀 또한 명문가의 딸. 로아흐 가문과 라이벌 관계인 리샤에 가문의 딸이다. 당연히 오늘 회의에 참석한다.

"너, 회의 장소에서까지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엘로디가 경고하듯 말했다.

"이상한 소리?"

"미스틸테인이 저렇게 생기지 않았다든가 어쨌다든가."

"그런 말은 안 해. 걱정하지 마."

"걱정은 무슨. 부끄러움이 내 몫이 될까 봐 그러지. 뭐, 허튼소리 안 할 거라면 다행이야."

엘로디는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프론디어는 웃었다.

나른한 얼굴에 아주 잠깐, 빛이 감돌았다.

"그런 거 안 해도, 저건 내 거야."

"...응?"

방금 뭐라고 했지?

내 거라고?

"아, 로아흐 가문의 것이라고?"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

"그러면 그렇게 말해. 이상하게 말하지 말고."

* * *

프론디어와 엘로디는 함께 교문으로 향했다.

많은 학생들이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결혼식장에서 나오는 신랑 신부를 바라보듯이.

물론 둘의 사이는 그 반대에 가깝다.

"엘로디."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아스터였다.

같은 반에 유망주인 둘은 당연히 친분이 있다.

플레이 기준으로도 이때쯤 아스터는 엘로디와 말을 트게 된다.

"잘 다녀와."

"응. 내가 할 건 아무것도 없지만."

엘로디가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아스터도 마주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약간의 경직이 보였다.

"엘로디,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응?"

"무리라는 거 알지만, 가능하면, 미스틸테인을 가져. 너라면 안심할 수 있겠어."

엘로디는 아스터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 또한 아스터의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리샤에 가문의 입장에서는 미스틸테인이 그 정도로 탐낼 만한 물건은 아니다.

가질 수 있다면 가지겠다만, 재산상의 피를 흘릴 정도의 물건이 아니니까.

아마 가장 확률이 높은 게 로아흐 가문.

가주인 앙페르는 앗지에를 위해서라면 못하는 게 없다고 들었다.

프론디어가 미스틸테인이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뭐, 노력해 볼게."

엘로디는 말했다.

회의의 진행 상황에 따라서, 자신이 목소리 한 번 정도는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걱정 마, 아스터 에반스."

그때 갑자기 프론디어가 말했다.

아스터가 프론디어를 보았다.

둘은 단련실에서 마주친 것을 제외하면 초면에 가까운 사이.

그런 아스터에게, 프론디어는 담담히 고했다.

"너의 걱정을 없애줄게."

그 말을 끝으로 프론디어는 걸었다.

엘로디도 조금 뒤이어 따라왔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걱정을 없애주겠다는 게."

"말 그대로야."

말 그대로가 뭔데 대체.

엘로디는 찜찜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지금 프론디어에게는 회의 자체보다 더 중요하고 긴장되는 문제가 있었다.

교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는 인물이, 그 문제다.

"프론디어."

차가운 목소리가 정지된 마차 앞에서 프론디어를 불렀다.

프론디어가 그를 처음 본 인상은, 비유하건대 벼려진 도검과 같았다.

날카로우면서도 강직한 눈매. 꾹 다문 입술 전부가 그 상징과도 같다.

그저 미의 기준만으로 따지면 대륙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수려한 외모지만, 손대면 베일 것 같은 저 날 선 모습에 다가갈 수 있는 이는 몇 없겠지.

"...형님."

이 남자가 바로 프론디어의 형, 앗지에 드 로아흐다.

철벽의 가주 앙페르의 재능을 모두 물려받고, 그 위로 성장하는 에티우스 공식상의 사기 캐릭터.

"지체한 시간이 많다. 마차에 올라라. 아버지가 기다리신다."

앗지에는 프론디어가 유무를 말하게 할 틈도 없이 움직였다.

응당 그리해야 한다는 당연한 몸짓이었다.

같이 온 엘로디는 어느새 리샤에 가문에서 대동한 마차에 올랐다.

"...예."

프론디어는 마차에 올랐다.

오늘 처음으로 본 이 남자가, 그의 형이며,

프론디어의 정체가 들킬 확률이 가장 높은 인물이다.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6화

2장 관 속의 나뭇가지, 미스틸테인(2)

회의 장소는 밀러 가문의 저택이었다.

밀러 가문은 대륙 중앙의 하올드 지역에 위치한다.

밀러가 선택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가문의 급이 낮아 미스틸테인 구매 의사가 없고, 참석하는 가문들 중 특별한 친분이 있지 않으며, 참석 가문들의 중앙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형님."

나는 마차로 향하는 중에 앗지에를 보았다.

"형님께서도 미스틸테인을 원하십니까?"

기본적으로 앗지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미스틸테인을 가질 최고 유력자가 앗지에인 만큼, 그의 심정이 궁금하다.

"글쎄...."

앗지에는 그제야 좀 생각해 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있으면 좋긴 하겠군."

──그 대답이야말로 앗지에다.

나는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시간 뒤 마차가 멈추고, 우리는 밀러 가문의 저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저택 앞에 있는 어느 인물을 보고, 나는 숨을 삼켰다.

철벽의 가주, 앙페르 드 로아흐.

앗지에가 도검이라면, 앙페르는 그 자체가 완성된 무구의 형상이었다.

강직한 눈매와, 입가를 멋들어지게 덮는 콧수염.

나이를 증명하듯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셌는데, 전혀 약해 보이는 느낌이 없다.

이렇게 놓고 보면 프론디어가 앙페르의 아들이며 앗지에의 동생이라는 게, 굉장히 어울리지 않았다.

"...가자."

단 두 글자.

앗지에도 참 말이 단호한 느낌이라 생각했는데, 앙페르는 더 짧다.

그리고 말하는 와중에 나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저택의 집사가 우리를 안내했다.

콘스텔부터 여기까지는 가장 거리가 머니까, 우리 가문이 가장 늦은 것은 일견 당연했다.

...사실 그리 당연하진 않다. 며칠 전에 출발했으면 그만이니.

이는 그저 앙페르의 과시이자, 자존심일 따름이다.

여기에 있는 명문들을 기다리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앙페르뿐인, 그 증명 같은 것.

끼익, 집사가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아.'

나는 입 밖으로 소리를 뱉을 뻔했다.

벌써부터 느껴진다. 테르스트 제국의 내로라하는 가문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들이 받는 신의 사랑이 곧 중압감이 되어 회의실 밖으로 넘쳐흐를 것 같다.

"왔구먼."

짧은 인사를 건네는 초로의 백발 남자.

'조디악' 헬드레.

"늦었는디, 시방 아무도 할 말이 없는감?"

로아흐 가문의 정 반대편의 변방을 지키는 가주.

리드위 폰 우르파.

"잘 왔네."

여기 있는 이들 중 그나마 호의적인 시선을 가진 앙페르의 라이벌.

오르텔 드 리샤에.

그 뒤에 엘로디가 서 있다.

그 밖에도 유명한 가주들과 네임드인 자제들이 죄다 한자리에....

'어라.'

그러다 한 여자에게 시선이 갔다.

...네임드 캐릭터 중에 저만큼 알아보기 쉬운 이는 달리 없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입은 드레스도 검은색에, 들고 있는 부채까지 검정인 새까만 여자.

퀴니에.

퀴니에 드 비에트.

비에트 가문의 외동딸이자, 콘스텔의 3학년. 몰락 직전의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운 '소악마'.

놀랍게도 그만한 업적을 가지고서 나보다 고작 두 살 많은 나이다.

어째서인지 부채 뒤에 숨은 은근한 미소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영 미심쩍다.

날 아나?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신경 쓸 필요는 있어 보인다....

"그럼 후딱 시작하지. 밀러 씨, '그거' 어딨는감?"

"예."

리드위는 특유의 자기 멋대로인 사투리와 가벼운 어조로 밀러를 보았다.

일견 무례해 보일지 모르나, 리드위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 이런 화법이다.

무례하다는 얘기다.

가주는 집사에게 손짓을 하고, 곧이어 하인들이 조심스레 '관'을 옮겼다.

관은 회의실 중앙 탁자 위에 올라왔다.

"호오, 이것이."

헬드레가 눈을 빛냈다. 그 눈빛은 전성기 때와 비교해도 전혀 누그러진 기색이 없다.

날카롭고 강렬하며, 그만큼 어둡고 음습한 기운.

그러나 눈을 빛내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다.

"보기에는 제법 그럴듯하지 않은가."

어떤 이의 말대로, 관 안에 든 나뭇가지는 그 모양이 제법 품격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전해 내려오는 '미스틸테인'의 묘사와 완전히 똑같다.

"그래서 이걸 누가 가지느냐가 문제잖아? 먼저 말하지. 나는 이두스 광산의 채굴권을 내놓겠어. 5년이다."

누군가 느닷없는 딜을 걸었다.

"인내심이 없구먼, 그리하면 나는-"

거기서부터는 각 가문의 가보와 권리 경쟁이 시작되었다.

온갖 재물들을 모아 미리 환전 뒤의 가치를 매긴 이도 있었고, 소유 재산이 없다면 재산을 쥐어주면 된다며 땅과 건물을 내건 이들도 있었다.

당연히 자제들은 그 모습을 지켜볼 뿐, 입을 꾹 다물고 주위를 살핀다. 애초에 그들은 발언권이 없다. 견학일 뿐.

움직이지 않는 가문은 셋. 로아흐와 리샤에, 그리고 퀴니에다.

리샤에 가주인 오르텔은 애초에 구매 의사가 없었고, 퀴니에는 무슨 생각인지 주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만 앙페르는 그저 때를 살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는 머지않은 모양이었다.

"로아흐 가문은 검을 걸지."

"이 양반아, 검이라는 게 어디 한두 개,"

리드위가 평소의 템포대로 딴지를 걸다가 멈췄다.

"시방 네 검을 걸겠다고 했냐?"

"굳이 다시 말할 필요가 있는가?"

철컥, 앙페르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을 분리했다. 때 묻은 가죽, 쇠의 무게가 탁자 위에 올랐다.

"...신물을 신물과 교환하겠다?"

오르텔이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인 표정을 지은 것은 앗지에였다.

"...아버지."

"여기 올 때부터 결정한 일이다."

앗지에는 무어라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걸고 있는 기대, 그것은 무겁지만 부담스럽지는 않다.

미스틸테인에 목매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것이 된다면 기쁠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저 물건이 진정 '그람'을 내놓을 가치가 있는가?

영웅 '시구르드'의 명검, 그람.

시구르드는 북유럽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자체는 신이 아니지만, '신물'이란 영웅의 무기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람'이라면 어지간한 신의 무기를 능가한다.

"자, 잠시, 잠시 진정하시지요."

밀러는 당황하며 상황을 제지했다.

"거래가 급작스럽게 진행되어 잠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만, 먼저 선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맞아요."

퀴니에가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이것은 진짜 미스틸테인일까요?"

퀴니에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지금껏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가 종용을 위해 나섰다.

"만약 이것이 미스틸테인이 아니라면, 이 거래는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 아직 진품임을 전제해 거래를 하기엔 이르다. 본래는 이것이 진품인지 아닌지를 '모르기에' 가치가 있는 것일 터.

"그럼, 그걸 누가 확인할 건디?"

리드위가 미스틸테인을 둘러싼 투명한 관을 가리켰다.

알아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단 하나. 저 관을 부수는 것.

지금의 미스틸테인은 그 어떠한 신적인 기감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만약 저 관으로 인해 기감이 '지워진' 것이라면. 미스틸테인은 저 투명한 관을 포함해 '신물'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관을 부수는 것은 위험천만한 짓이다. 누구도 신벌을 받고 싶진 않다.

"확인하지 않습니다."

"뭐시여?"

"이 나뭇가지가 미스틸테인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물건의 가치는 본디 그것입니다. 이것을 상기하고 거래를 진행해야지요."

즉 이 물건이 이 자체로 생기는 가치. 그 가치에 해당되는 지출을 한다면, 거래는 성립한다.

이것이 퀴니에의 생각이었다.

이것이 진짜 미스틸테인이라는 가정으로 거래한다면 퀴니에는 도저히 그만한 조건을 들이밀 수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러나 이것이 그냥 미스틸테인이라는 상징성만 있지, 실지 사용할 순 없다고 가정했을 때. 가격은 하락하고, 이걸 원하는 가문은 변한다.

미스틸테인을 '무기'로 다루려 하는 가문이 아니라, '간판'으로 다루려는 가문.

바로 퀴니에, 그녀와 같은 가문들.

'좋아. 이런 흐름이라면 제법 저렴하게 가져올 수 있을지도....'

"상관없다."

그때 그녀의 생각을 끊는 한마디.

마치 판결과 같은 음성으로 앙페르는 말했다.

"저것이 진품인지는 차후에 증명하면 그뿐."

"...그래도 네 검을 내놓겠다고? 만약 저게 진짜가 아니면?"

이번만큼은 오르텔도 놀라 되묻는다.

"진짜가 아니면 그걸로 끝이다. 그것뿐이지."

"멍청한 소리. '그람'을 내놓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오르텔."

그 목소리는 가벼운 숨이 섞였고, 공기를 그만큼 가라앉았다.

"나의 시대는 옛적에 지났다."

그 말은 감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모두가 당혹함을 먹고 앙페르를 보았다.

"앗지에가 나를 뛰어넘을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너, 정말 그람을 버릴 셈이냐?"

"몇 번이고 반복하게 하지 마라."

앙페르의 눈은 고고하다. 단 한 번도 그렇지 않은 적 없었다.

"미스틸테인은 앗지에의 것이다."

사위를 적막하게 만드는 말. 그것은 결론지어진 듯 명확하고 단정적이다.

퀴니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로아흐의 가주가 저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군, 여긴 물러나야 할 때다. 그람을 내놓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가치가 있는 물건들은 그밖에도 있다.

모두가 앙페르의 뜻을 따르는 눈치였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풀잎 같은 목소리.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

앙페르와는 전혀 다른, 마치 일상의 대화처럼 느껴지는 편안함.

그러나 그 말의 뜻은 절대 가볍지 않다.

그 음색과 내용의 갭이 너무 커서, 모두가 한 박자씩 반응이 늦었다.

"프론디어, 말을 삼가라."

그의 형인 앗지에가 주의를 주었다. 앙페르 또한 눈가를 좁혔다.

낮은 곳에서 끓는 목소리가 앙페르의 입에서 흘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프론디어의 목소리는 여전히 분위기를 모르는 듯 태평하다.

리드위가 언짢은 낯짝을 프론디어에게 가까이했다.

"이 얼라가 갸지? 앙페르가 꼭꼭 숨겨놓은 차남."

리드위는 지금껏 관심도 없던 프론디어의 얼굴을 처음으로 직시했다.

나른하고 태평한 얼굴이다.

좋게 말하면 그런 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그저 게으르고 나태한 색이 묻어난다.

저 평화롭기 짝이 없는 얼굴로 훗날 전투에 나선단 말인가.

"얼라야. 니가 주제 파악을 못하고 끼어드는구나. 응?"

프론디어는 으르렁거리는 리드위를 잠깐 보았다.

아주 잠깐.

곧 시선을 옮겨 미스틸테인을 가리켰다.

"아버지, 진품도 아닌 것에 그람을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리드위는 프론디어의 말에 잠깐 멍해졌다.

시방 이것이 나를 무시했나?

"니가 으찌 알고 그런 소릴 함부로 지껄이냐?"

"어떻게 아는지는,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만."

프론디어는 한 걸음 나섰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산책이라도 나가는 듯한 느긋함으로.

그 누구도 저 평화로운 걸음의 끝엔 평화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느끼게 하는 그 걸음 끝에서.

관 앞에 서서 그 위에 손을 올렸다.

"확인하는 것은 간단하죠."

그 말까지 했을 때 모두가 뜻을 알았다.

나설 때부터 설마설마했다.

앙페르, 앗지에, 오르텔, 엘로디가 동시에 움직였다가 멈췄다.

프론디어를 말리려 했으나 너무 늦었다. 뭘 어찌해도 프론디어가 앞설 터.

손을 베어내거나, 죽인다면 모를까.

"너 그거이 진짜루 신물이면, 으짤라고, 신이 두렵지 않으냐?"

당황한 리드위는 그 사투리마저 더욱 괴상해졌다.

"허."

프론디어는 웃었다. 그 웃음은 진짜 분위기를 못 읽고 그의 주변을 나른하게 했다.

"그따위 것, 두려워한 적이 없습니다."

콰창───!!

관이 부서졌다.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7화

2장 관 속의 나뭇가지, 미스틸테인(3)

날카로운 파쇄음. 그 소리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다.

신벌이 온다....

모두가 그 긴장에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엇?"

"이, 이게 뭐시여?"

그때, 관 안에 들어 있던 나뭇가지가 '흘러내렸다'.

말 그대로 조금 전까지 나뭇가지이던 그것은 검은 물이 되어 중력에 이끌려 쏟아지고 있었다.

"말했잖아요. 가짜라고."

프론디어가 흘러내리는 검은 물에 손을 내밀었다.

주변의 귀족들이 소스라쳤다.

"그, 그거 만져도 되는,"

프론디어가 검은 물을 손으로 받쳤다. 물은 손을 타고 그대로 흘러내렸다.

그런데 프론디어가 주먹을 쥔 순간,

"잉?"

물은 그의 주먹 안에서 다시 금속이 되었고, 피면 다시 액체가 되어 흘러내렸다.

"요, 요상한 녀석이구만."

"...아."

그때 무언가 떠오른 듯 엘로디가 입을 열었다.

"점탄성."

"응? 뭐?"

프론디어는 엘로디의 말에 긍정의 뜻으로 미소 지었다.

"맞습니다. 이 물질은 점탄성을 가진 금속입니다."

"그게 무어냐?"

"쉽게 말해, 힘을 주면 단단해지지만, 내버려 두면 곧 액체가 되는 성질입니다."

그러나 금속이 본래 이런 성질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점탄성을 가진 물질은 고체가 될 때도 본래 탄력과 점성이 있어 부드럽다. 금속 정도로 단단해질 수는 없다.

미스틸테인은 아니지만 이 새까만 물이 마법적 가치가 있는 금속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럼 방금 미스틸테인처럼 생겼던 건?"

"누군가가 술식으로 마력을 주입해 겉모습을 흉내 낸 거겠죠. 마력 또한 힘이니. 아마 이 관이 그 용도를 대신했을 겁니다."

"허어...."

그제야 주위에 안도의 공기가 피었다. 신물이 아니었으니, 신벌 또한 없을 것이다.

오르텔이 물었다.

"그런데 어찌 알았느냐? 이 물건이 가짜라는 걸."

"어르신들이 생각한 것과 같습니다. 미스틸테인은 발두르 신을 죽인 무기입니다. 정말로 이게 그 나뭇가지라면 발두르 신께서 두고 보실 리가 없을 테니까요."

프론디어는 자신이 본래의 미스틸테인의 모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너무 지나친 사실은 설득력을 죽이는 법이다.

"그리고 미스틸테인이 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고요."

"그거야 그렇다만, 그것만으로?"

지금 프론디어가 말한 건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다.

여기 있는 이 나뭇가지가 진짜 미스틸테인일 확률은 분명 높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 한들, 목숨이 걸려 있다면 도박하지 않는 법.

신벌에 잘못 걸리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린다.

"아까도 말했듯 저는 신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프론디어는 탁자 위에 놓인 유리병에 검은 물을 담았다.

힘을 주면 금속이 되는 그 물은 생각보다 유리병 안에 쉽게 담겼다.

그리고 프론디어는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이따위 것이 아버지의 검과 바뀐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군요."

그 말에 모두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곧, 한 명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크하핫! 이거 완전히 당했구만. 한참 어린 친구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어."

'조디악' 헬드레였다.

그는 나이답지 않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곤 프론디어에게 다가와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프론디어입니다."

"프론디어, 그래 프론디어. 내 그 이름을 잊는 일이 없을 것이야."

그리 말한 뒤 헬드레는 앙페르를 보았다.

"앙페르, 효심이 지극한 아들을 두었어."

"─무어라 첨언할 말이 없군요."

"이렇게 아들 덕에 그람을 내놓을 일도 없었는데, 무언가 선물을 주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헬드레는 그 주름진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장난기가 담긴 눈빛이었다.

앙페르는 영 기껍지 않은 눈치였다.

"저는 원래 엄히 꾸짖으려 했습니다만."

"무얼. 자네도 들었지 않나. 신벌 따위 두렵지 않다고.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감히 못 할 말이지. 어쩌면 신도 이런 당돌한 젊은이를 원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앙페르는 눈을 잠시 내리깔았다.

결과적으로, 프론디어의 행동은 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람을 팔아치울 일도 없어졌고, 가문들 간의 또 다른 알력이 생길 것을 막았으니.

미스틸테인을 가져오는 건 거기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문에 습격이 빈번해지는 요즘 괜한 질투의 눈을 늘릴 필요는 없으니.

허나,

"널 칭찬하기에는 너무나 결과론적이다, 프론디어."

"...예, 죄송합니다. 아버지."

"너의 행동은 아주 위험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말이야. 본래라면 네 책임을 엄중히 묻고 이런 과오를 다신 하지 않도록 교육시킬 것이다. 그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라."

"명심하겠습니다."

프론디어는 가만히 목례했다.

한 줌의 미련조차 없는 그 동작을 보며 앙페르는 한숨을 쉬었다.

"허나, 그람의 가치를 따진다면 이렇게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

"호오?"

리드위가 쓸데없는 추임새를 붙였다.

앙페르는 말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도록 해라."

그 말에 프론디어의 눈빛에 당혹감이 어렸다. 저 무감한 눈에 드물지 않게 생기는 감정이다.

"어, 그럼...."

프론디어는 잠시 손을 입가에 대고 생각하는 듯하더니, 얼굴을 들었다.

"저는 그람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그 검집의 안을."

"허어."

"오호라!"

주변 사람들의 짧은 감탄사가 터진다.

앙페르의 애장, 신물 '그람'.

그 본신을 목격하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다.

프론디어의 제안에 이 안의 모두가 눈을 빛냈다.

"그거면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앙페르는 잠시 생각했다.

스스로 말하기도 뭣하지만, 프론디어의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앙페르는 올려놓은 그람에 손을 올렸다.

검집에 그 자태를 감춰놓은 검.

모두가 앙페르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어떻게?'

그러나 그 짧은 순간, 오직 퀴니에만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부순 거야?'

프론디어는 맨손이었다.

관 위에 손을 올려놓았을 뿐, 주먹으로 내리친 것도 아닌데 한순간에 관이 부서졌다.

설마 마법? 주문도 없이?

그게 아니면....

'오러, 인가.'

퀴니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맨손으로 오러를 뿜어낼 수 있는 사람이면 학생의 레벨이 아니다.

다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오러라면 기를 방출했다는 뜻인데, 어떤 기의 흐름도 느끼지 못했으니.

그러나 만약 정말로 방금 오러를 사용한 거라면, 그것도 타인이 느끼지 못할 정도의 순간적인 방출이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무슨 짓을 해서든, 말이다.

쓰윽, 검집은 무겁게 벗겨졌다. 그 안의 오롯한 칼날이 빛을 반사했다.

"호오, 이것이...!"

귀족들의 눈이 빛났다.

영웅 시구르드의 명검, 그람.

그 유명세에 비해 그람은 생각보다 외견이 투박했다.

검면에는 제법 아름다운 무늬가 물결 흐르듯 자리 잡았지만, 신의 조업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그러나.

"...."

좌중에는 침묵이 가라앉았다.

이 무기는 그저 외견의 아름다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거기 놓여 있는 것에 불과한데 공기를 무겁게 눌러앉는다.

예기는 서늘하고, 칼날은 위부터 아래까지 본래 그 모양대로 태어난 듯 응집된 힘을 느낀다.

'검을 쓰지 않는 나도 알겠어. 과연 신물은 다르구나.'

퀴니에는 속으로 감탄했다.

저도 모르게 이 무기에 가격을 매기려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성이라, 우선 넘어가고.

처음에 말을 꺼낸 프론디어는 어떤 표정일까.

그게 궁금해 시선을 돌리니,

"...!"

퀴니에는 숨을 감췄다.

혹시나 자신의 시선을 눈치챘을까 얼른 다시 시선을 거뒀다.

'뭐야, 저 눈?'

프론디어 또한 그람을 보고 있었다.

순수한 얼굴로. 순수한 눈빛으로.

그러나 그 '순수'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프론디어는 순수하게, 마치 그람을 집어삼킬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로 그럴 수 있다는 듯이.

그 눈이 그람을 탐하는 모습은, 뭐랄까,

금기를 침범하는 눈동자였다.

* * *

"아스터, 소식 들었어?"

"응? 뭘?"

아스터는 친구인 테인의 호들갑스러움에 대꾸했다.

테인은 아스터와 같은 평민으로, 둘은 금방 친해졌다.

아스터는 워낙 유명인이라 테인은 거의 팬심과도 같은 마음으로 아스터에게 말을 걸었는데, 넉살이 좋은 아스터와 죽이 잘 맞았다.

"뉴스 못 봤어? 미스틸테인 말이야!"

"아... 어제는 좀 일찍 잠들었지."

아스터는 어색한 목소리로 말하며 머리를 긁었다.

거짓말이었다.

엘린이 어제저녁부터 봐야 하는 로맨스 영화가 있다며 위저뷰 시청권을 뺏어버렸다.

그래놓고는 하는 말이,

-어차피 우리 것도 아닌데, 나중에 확인해. 기회는 많잖아.

빌어먹을. 남의 일에 있어선 강철처럼 이성적인 누님이시다.

로맨스에 죽고 못 살지만.

"프론디어가 관을 부쉈대!"

"...뭐?"

아스터의 눈가가 흔들렸다.

그건 불쾌함, 분노 그런 것이 아니라, 프론디어 살아 있나? 하는 불길함의 발로였다.

"미스틸테인을 보관했던 그 관 말하는 거야?"

"그래! 아니 좀 다르긴 한데!"

"뭐가 달라?"

"그게 들어보니까 미스틸테인이 아니라더라. 가짜래 가짜!"

테인은 여전히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과연, 이 정도 일이면 호들갑을 떨 만하다.

가짜라. 그럼 신벌도 없을 테니 프론디어 걱정은 안 해도,

"가만. 그러면 프론디어가 그걸 알고 있었다는 거야?"

"글쎄,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게 아닐까? 뭐 나 같으면 무슨 근거가 있든 절대 안 할 짓이지만은!"

그렇다. 심증이 얼마나 크든 그런 미친 짓을 누가 하는가.

...그러면 심증이 아니라, 확증이 있었나.

프론디어만이 알 수 있는?

"...가짜라."

아스터의 눈동자가 구른다.

전날 프론디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걱정 마, 아스터 에반스.

-너의 걱정을 없애줄게.

그건 사소한 위로라 믿었다. 불가능한 얘기라 생각했다.

미스틸테인이 어떤 가문에게 가든 아스터 에반스에게는 심장 앞에 칼이 놓인 기분이 들었을 거다.

그러나, 그렇군. 그 칼을 부숴주었나.

...그렇군.

* * *

나는 기숙사의 방 안에서 유리병에 찰랑거리는 새까만 물을 가만히 보았다.

점탄성을 지닌 금속.

회의실 안에서는 이것에 무관심한 표정을 짓는 것에 온 집중을 다 했다.

본래 게임 진행상 이 가짜 미스틸테인은 높은 확률로 앙페르의 그람과 교환된다.

그 뒤 로아흐 저택의 잘 보이는 곳에 잠시 안치되지만, 가짜라는 것은 금방 들통난다.

술사가 없는 술식은 마나 입력에 한계가 있으니, 관이 제멋대로 깨지고 마는 것이다.

그 후의 그람은, 사실 어디로 갈지 모른다. 게임을 할 때마다 달랐으니까.

하지만 누구의 손에 들어가든 서브 이벤트를 발생시켜버리는 무서운 녀석이다.

지금은 그래도 여전히 아버지의 손안에 있으니 안심이라 할 수 있겠다.

"자, 그럼."

나는 네모난 틀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유리병에 있던 금속을 쏟아, 틀을 채웠다.

게임을 하던 당시의 나도 '거 참 미묘한 물건이구만', 생각한 이 금속.

이렇게 말하긴 뭣하지만 본래 이 금속은 미스틸테인을 흉내 낸 것처럼 무언가를 '위작'하는 것이 그나마 쓸 수 있는 용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프론디어라면, 어쩌면.

이 금속의 성질을 100% 이상으로 끌어올릴지 모른다.

나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미소 지었다.

"앞으로 너를 '흑천'이라 칭한다."

틀 안의 흑천 위로 손을 올렸다. 온도가 없는 액체의 느낌은, 아직 많이 낯설다.

지금부터, 이 흑천에 '직조'를 더한다.

직조(織造), 흑천(黑川)

공방 1번제

등급 - 일반

철제 단검

공방에 거치된 단검의 이미지가 흑천에 새겨진다.

마력이 흑천에 주입되어, 흑천은 그 모양을 바꾸어갔다.

그리고,

"됐다."

주먹 쥔 나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드디어.

허상도 아니고, 이미지도 아닌.

분명한 현실로서 존재하는 흑색 단검이.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8화

2장 관 속의 나뭇가지, 미스틸테인(4)

나는 단검을 몇 번 가지고 놀아보았다. 무게와 균형, 모든 것이 본래의 직조와 같다.

칼날의 날카로움까지 똑같은지는 시험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 거의 흡사하겠지.

'하지만 지속적으로 마나를 소모하네.'

흑천은 힘을 가하는 동안 고체가 되는 물질.

그 형태를 유지하려면 계속된 마력이 필요하다.

프론디어의 마나량은 평범한 일반인 수준이다.

콘스텔의 학생 기준으로는 턱도 없지만, 전투 한 번 하는 동안은 무리 없이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흑천으로 만드는 직조는 일반 직조와 장단점이 완전히 역전된다.

직조로 만든 무기는 닿는 찰나에만 현실에 등장하기 때문에 상대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을 수 없다.

그랬다간 상대의 공격이 직조를 뚫고 나를 죽일 테니까.

게다가 한 번에 베지 못하면 또 사라지니까 제대로 된 데미지를 입히기 어렵다.

반면에 흑천은 실재하는 무기니까 일반 무기술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평범하게 막을 수도 있고, 맞부딪힐 수도 있고, 잠깐 막히더라도 밀어붙이는 선택지가 있다.

하지만 흑천은 직조로 유지하는 동안 계속해서 마나를 소모하고, 실체가 있기에 적들의 눈에 보인다.

상황에 따라서 일반 직조와 흑천을 구분해 가며 써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나는 긴장으로 침을 삼켰다. 지금부터가 본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내 공방에는 명검 '그람'이 있다.

그람의 실물을 목격한 건 생각지도 못한 이득이었다.

나는 앙페르의 그람을 보자마자 이미지를 공방에 집어넣었다.

흑천 단검을 틀 위에 두고 직조를 풀자, 자연히 액체로 돌아가 틀 안에 담겼다. 그리고 다시 손을 그 위에 올린다.

이번엔 평범한 단검이 아니라, 영웅의 검을 복제한다.

─이게 가능하다면, 이 세계의 공략에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직조(織造), 흑천(黑川)

등급 - 전설

그람

마나의 실이 흑천을 향해 뻗었다.

이미지와 구조가 새겨지는 것은 간단했다.

[그람]

•등급 : 전설

•설명 : 시구르드가 사용했던 명검. 영웅과 무기가 지닌 업적이 뛰어나 몇 신위를 능가한다.

능력 상세 >

- 용살검 : 용을 죽여 그 피를 머금었다. 용에 대한 공격력이 매우 강화되며, '유니크' 등급 이하의 용종에게 공포를 부여한다.

그리고 완성.

여기까지는 프론디어의 순수한 재능이므로, 다른 방해될 것이 없다.

문제는,

"...윽!"

나는 직조된 그람을 손에 쥔 순간, 어마어마한 현기증과 구토감이 몰려왔다.

마나 소진. 고작 3초를 못 버티고 직조를 취소했다.

"흡, 콜록! 콜록콜록...!"

마른기침이 반복된다. 몸 안의 모든 수분이 타들어 가는 기분.

그러나 나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 떠올랐다.

"쿨럭, 되, 쿨럭, 되긴 하네...! 쿨럭!"

그렇다. 직조 자체는 성공했다. 다만 터무니없는 양의 마나를 요구할 뿐.

"후우.... 마나를 늘릴 방법을 생각해야 돼."

가장 빠른 건 아티팩트를 착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나를 늘려주는 아티팩트는 지나치게 비싸다.

아무리 로아흐 가문이라 해도, 아니 그러하기에 더욱 고가의 아이템에는 민감한 것이다.

내가 만약 앗지에였다면 그 정도의 지출은 용인해 주겠으나.

나는 프론디어니까, 안 된다.

"그러면 일단은, 단순무식한 방법으로 가볼까."

마나통을 늘리는 방법은 한 가지 더 있다. 좀 전과 같이 마나를 전부 소진시키는 것이다.

마나가 없어지면 몸은 다음의 소진을 막으려 마나통을 성장시킨다. 마치 근육처럼 말이다.

이 방법은 사실 에티우스의 대부분 캐릭터들은 모른다.

일단 늘어나는 마나량이 아이템이나 신력에 비해서는 매우 미미하다. 운동한다고 근육의 성장이 단번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마나를 전부 소진하는 건 여기 상식으로는 해선 안 될 금기다.

언제 어디서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일이므로, 생명줄과 같은 마나가 텅텅 비는 것은 매우 위험하니까.

하지만 뭐.

마나가 는다는 걸 알고 있는데 안 할 이유는 없지.

마나가 회복되면 그람을 몇 번 더 직조해 마나소진을 반복해, 마나를 키울 생각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도 한계는 있다.

결국엔 아이템이 필요한데.

"...퀴니에."

결국, 도출되는 결론은 그거다. 퀴니에 드 비에트와 거래를 하는 것.

내가 가질 수 있는 거래 루트는 그녀뿐이다.

그러나 가진 돈이 없으니, 팔 수 있는 건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물론 그 전에 친분을 만드는 게 먼저다.

그녀를 회유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나저나, 이거 어떻게 갖고 다니-"

나는 말하다 말고 멈췄다. 손끝이 떨렸다.

그것이 의아해서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 떨림은 곧 팔을 기어올라 전신을 훑었다.

"이, 뭐가, 윽!"

이는 다른 무엇도 아닌 공포.

너무나도 느닷없이 몸을 뒤덮은 그 감정이, 처음엔 공포인 줄도 몰랐다.

주위엔 아무것도 없다. 공포를 촉발할 어떤 매개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냐.'

좀 전까진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던 허공.

마치 커튼을 천천히 여는 것처럼, 허공의 한가운데가 갈라졌다.

그 틈 사이로 누군가 천천히 비집고 나온다.

"너, 는."

검은 날개를 펼친 작은 소년.

황금빛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혐오와 모멸을 담은 눈빛이 내 목구멍 속으로 들어와 헤집는 듯한 착각.

공포는 부풀어 오른다.

나는 아주 약간 남은 이성으로 빠르게 소년의 모습을 훑었다.

'인간이 아냐. 신이다. 이 게임 '에티우스'에 엄연히 현존하는 신들 중 하나. 한데 누구지? 생김새만 봐서는 그리스나 북유럽 신화 중 하나다. 기억해 봐, 금색의 눈, 검은 날개, 소년의 모습을 한 신...!'

에티우스의 세계에서 신이 강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신의 입장에서도 상당한 준비가 필요한 일. 그럼에도 그런 장애를 뚫고 내 앞에 나타났다.

'설마, 내가 흑천을 이용해 직조했기 때문에?'

직조가 현실에 실재하게 되는 것을 미리부터 강림의 '조건'으로 설정해놨다면.

강림할 준비는 애초부터 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신은 직조가 현실에 영향을 가할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아직 모르지만, 이 신에게는 직조가 그만큼 위험한 것.

소년의 모습을 한 신이 입을 달싹였다.

들리지도 않고, 들렸다 해도 신의 언어를 알아들을 순 없지만, 나는 어쩐지 그 신이,

[기어코, 저질렀구나.]

그리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딱, 신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나의 오른손이 멋대로 들렸다.

프론디어 고유 스킬

직조(織造)

공방 1번제

등급 - 일반

철제 단검

나의 손이 멋대로 직조를 행했다.

만든 칼날의 끝이 나를 향해 있었다.

'이 자식, 나를 죽이려고...!'

내 몸을 멋대로 조종해, 내 손으로 나를 죽이려 한다.

아무런 증거도 남지 않는 완벽한 자살 위장.

내 오른손은 부들부들 떨릴 뿐 전혀 내 의지를 따라주지 않는다.

칼날이 점차 가까워졌다.

나는 힘을 주려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

어금니를 깨물 수는 있네.

나는 생각을 바꿨다. 힘으로 저항할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인간, 그것도 네임드조차 아닌 평범한 일반인이다. 신에게 대적하는 것 자체가 무모하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것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멈추게 하는 것.

아직 이를 깨물 수 있는 틈에.

입을 놀릴 수 있을 틈에.

나를 차갑게 쳐다보는 금색의 눈을 마주한다.

새어 나오는 숨을 짓이기듯, 나는 입술을 움직였다.

"──타나토스."

내 말은 거의 소리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개 같은 신은 알아 처먹을 것이다.

신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

금빛 눈동자가 커진다.

동시에 소년의 몸이 내게서 멀어진다.

내게 다가오던 칼날이 멎었다.

"헉! 허억, 헉!!"

나는 몸의 자유를 되찾고 거친 숨을 뱉었다.

주, 죽을 뻔했다...!

[──!]

소년의 모습을 한 신이 당황과 분노를 한데 섞인 얼굴로 나에게 무어라 외쳤다.

뭔 소린지 못 알아먹겠다 멍청아.

그러고는 금방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나를 한 번 흘겨본 뒤 비집어진 틈으로 걸어간다.

곧 틈이 닫히고, 내 방은 평소의 내 방이 되었다.

"...갔냐?"

나는 긴장이 풀려 축 늘어졌다.

그리스 신화의 죽음의 신, '타나토스'.

하지만 에티우스에서는 본래 신화에서 묘사하듯 '죽음 그 자체' 어쩌구는 아니다.

강력하고, 또한 고위의 신이지만, 그가 없다고 죽음이 사라진다든가 그런 건 아니다. 죽음을 관장하고 있음에도, 그 또한 죽을 수 있다.

아무튼 정체를 맞춘 것은 운이 좋았다.

금색의 눈동자와 검은 날개, 소년의 모습.

세 가지 특징을 전부 가진 신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목숨을 걸고 찍어야 했으니.

가장 중요한 근거는 살해 방식이다.

방금처럼 신이 인간의 몸을 조종해서 스스로를 죽이게끔 만들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자살이 된다.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답다.

타나토스의 얼굴을 알고 있는 건 신 중에서도 극소수다. 그 몇몇은 타나토스보다 고위의 신들.

나는 단순히 찍은 거지만, 타나토스 입장에선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타나토스의 얼굴을 알고 있다는 것. 이는 타나토스의 입장에서는 내가 다른 고위 신과 긴밀한 연결을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일 터.

때문에 지금 나를 함부로 죽이는 건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하길 바라서 그의 이름을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말할 수 있는 건.

정말 운이 좋았다.

"...엄청난 위기 같기도 하고, 엄청난 기회 같기도 하고."

날 죽이려든 것은 분명 '직조' 때문이겠지.

왜 직조가 신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는지, 그 이유는 몰라도.

지금껏 인간이 신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에티우스의 역사 내에 단연코 없었다.

"설마 프론디어, 신력이 없는 이유가 신에게 미움받아서인가?"

...너무 나갔나?

애초에 신력이 있는 인간이 적고, 설마 프론디어가 모든 신에게 미움받지는 않겠지.

어쨌든 이 직조라는 능력은 내 생각 이상으로 위험하고, 그만큼 강력할지 모른다.

"다만."

나는 양손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떨림이 가라앉질 않는다.

나는 자조했다.

"공포에는 익숙해질 필요가 있겠네."

나의 허세가 얼마나 통할지 모른다.

타나토스가 다른 고위 신들에게 그저 다짜고짜 물을 순 없을 테니, 시간은 제법 벌 테지만.

그 전까지 준비할 수 있는 건 해둬야겠지.

* * *

'프론디어.'

퀴니에는 강의실에서 그에 대해 생각했다.

프론디어 드 로아흐. 로아흐 가문의 차남.

이제 콘스텔의 3학년이 된 자신이 로아흐 가문에 대해 신경 쓸 건 앗지에 뿐이라 생각했다.

프론디어라는 이름은 그가 입학한 뒤에야 알았다.

앗지에가 동생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대단치 않으리라 여겼다.

혹시나 해서 정보를 캐봤지만 건질 것도 없었다. 아주 게으르고 나태하다는 정보가 유일했고 신빙성이 높았다.

"퀴니에, 뭘 그리 생각해?"

옆에 있던 친구가 말을 건다.

퀴니에는 넌지시 그녀를 보았다.

"안느, 프론디어를 어떻게 생각해?"

"뭐? 설마, 퀴니에, 프론디어의 그 얼굴을 보고! 드디어 풋풋한 그 감정을 느낀 거야? 느끼고 만 것이야? 새콤달콤하고 알콩달콩한 그...!"

"정보, 를 위해 묻는 거야."

"역시?"

안느는 히, 하고 웃었다.

"프론디어, 음, 글쎄. 수업 때 잠만 잔다던데. 요즘은 또 아닌 것도 같지만."

"콘스텔 모두가 다 아는 얘기 말고."

"나도 다 아는 얘기만 아는걸."

흠, 그건 그렇네.

안느가 프론디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리 없지.

대신 퀴니에는 다른 질문을 했다.

"얼마 전 사건은 너도 알지? 프론디어가 미스틸테인을 보관하는 투명관을 깨부쉈다는 거."

"아, 알지! 며칠 전까지 엄청 시끄러웠잖아."

"그거, 어떻게 생각해?"

"그 행동에 대해?"

"응."

안느는 으음, 하고 고개를 기울이다가, 활짝 핀 웃음을 보였다.

그녀는 해맑게 답했다.

"무모했지! 멍청했고!"

"...음."

그래. 이것이 당시 사건의 프론디어를 향한 세간의 평가다.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라고 한들, 그게 정말로 신물이었으면?

아들 죽는 꼴 보고 싶은 아버지가 누가 있으랴.

'하지만 내 눈에는 확신에 가득 찬 듯 보였어.'

실제로 그랬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겁도 없이 그런 짓을.

-그따위 것, 두려워한 적이 없습니다.

"풋."

퀴니에는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하물며 온갖 유명한 신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그곳에서.

그야말로 겁도 없이.

"좋아, 결정했어."

"뭐를?"

"가지고 싶은 건, 역시 가져야겠어."

팔짱을 끼고, 머릿속으로 생각을 진행시키며, 빛나는 눈동자로 말하는 퀴니에.

그 모습을 보고 안느는 '설마 진짜로 퀴니에가 프론디어를?'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9화

2장 관 속의 나뭇가지, 미스틸테인(5)

중앙 대륙 최대 규모의 박물관, '레뮤즈'.

미술, 조각과 같은 예술품부터 시작해서, 고대의 병기와 문화를 한눈에 체험할 수 있는 그야말로 과거의 집대성 같은 공간이다.

퀴니에는 취미와 공부를 겸해 이곳 레뮤즈 박물관을 들렀다.

수준 높은 예술품들을 보면 물품들의 가치를 잴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다.

다만 오늘은 옆이 약간 신경 쓰여, 퀴니에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안 와도 된다니깐."

"아냐 아냐, 재밌어 재밌어, 진짜로 진짜로."

옆에 있던 안느가 자동응답기처럼 대답했다. 모든 말을 한마디씩 덧붙이는 걸 보니 대답에 영혼이 빠져나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이런 거 관심도 없는 애가 왜 따라왔담."

"아빠가 얼마 전에 그림을 하나 샀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모조품이었대. 그래서 친구들한테 쪽 좀 팔렸나 봐. 그 뒤에 갑자기 나한테 와서는 '딸아, 너는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 하면서 예술품에 대해 공부 좀 하라지 뭐야. 요즘 그런 사건이 많아졌다나 뭐라나."

"좋은 분이시네."

"...뭐어, 나도 그런 게 필요하던 참이어서, 아빠 부탁이니 들어주지 않을 이유도 없을 겸? 좀 알아볼 겸?"

안느가 머리카락을 베베 꼬며 말했다. 퀴니에가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하지만 예술을 좋아하지 않으면 안목을 기를 수 없을 텐데. 예술에서의 안목이란 건 '아름답다'를 느끼는 감각이니까.

퀴니에는 그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결국 침묵으로 삼켜두었다. 이렇게 보다 보면 또 눈이 뜨일지도 모르니까.

"...어머."

퀴니에는 걷던 도중, 어떤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

기도하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교회나 성당은 아니었다. 그녀는 황금으로 펼쳐진 이삭의 가운데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여자는 웃고 있었고, 그 얼굴은 엄숙하거나 진중하지 않고 밝고 화창했다.

그 모든 요소들이 서로 닮지 않으면서도 어우러졌고, 이질적인 동시에 웅장했다.

굉장해. 퀴니에는 무심코 그 말을 소리 냈을까 봐 당황했다.

"퀴, 퀴니에, 저기, 저기 봐."

"그래, 보고 있어. 너도 이 정도 수준이 되면 알아보는,"

"아니아니, 그림 말고, 너 옆에!"

안느의 잘 들리지도 않는 속삭임에 퀴니에는 미간을 살짝 모으다가, 옆을 보았다.

옆을 보니 과연, 퀴니에는 좀 전보다 더 당황했다.

옆에는 프론디어가 있었다.

콘스텔이 아닌 곳에 프론디어가, 박물관 안에 프론디어가, 미술 작품 앞에 프론디어가.

뭐 하나 말이 되는 구석이 없어서 퀴니에는 그대로 얼었다.

좀 전의 퀴니에처럼 프론디어는 옆에 퀴니에가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 눈은 오로지 그림에만 향해 있었다.

프론디어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감상은 없었다. 늘 보던 그 나른한 얼굴이었다. 시각을 좀 달리하면 그림을 관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프론디어가 미술을 보는 안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작품에 이토록 오래 머무른다는 건 분명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에 퀴니에의 흥미가 동했다.

그래, 미스틸테인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던 프론디어다. 예술에도 어떤 조예가 있을지 모르지.

이 그림에 대한 너의 감상은 뭐니?

"...굉장한,"

프론디어의 입이 나직이 열렸다. 함께 섞여나온 한숨은 그림에 대한 감탄을 반증하는 것도 같았다.

"짝퉁이군."

짤막한 감상이었다.

프론디어는 그렇게만 말하고 걸어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담백한 걸음이었다.

"...?"

퀴니에는 자신을 지나친 프론디어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보고, 또 보다가,

"자, 잠깐! 잠깐만요! 야! 기다려요! 거기 서! 이봐요!"

프론디어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존대와 평대가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어, 퀴니에 선배. 여기서 뵙는군요."

프론디어가 인사했다. 그 평소와 같은 모습에 퀴니에가 잠깐 움찔했다. 일단은 인사를 받아주기로 했다.

"아, 네, 네. 프론디어는 무슨 일로? 이런 곳에 올 것 같이 보이진 않았는데."

"음, 저는 예술품보다는 유물 쪽을 보려고 왔는데, 그쪽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유물이요?"

"네, 무기라든가, 갑옷 같은 거."

프론디어의 말에 퀴니에는 비로소 납득했다.

미스틸테인을 가짜라고 알아봤던 프론디어. 그는 옛날 물건에 관심이 많은 오타쿠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프, 프론디어, 그나저나 방금 한 말 무슨 뜻이에요?"

"네? 제가 무어라 말했나요?"

"저 그림 보고 '짝퉁'이라고 했잖아요! 분명히! 제가 똑똑히 들었거든요!"

퀴니에가 팟 하고 그림을 가리켰다. 가리킨 김에 자기도 한 번 더 보았다.

다시 봐도 굉장히 뛰어난 그림이었다. 짝퉁은커녕 전당의 반열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 네. 그랬죠."

프론디어는 답했다.

또 담백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얘는 미스틸테인도 그렇고 뭐든지 짝퉁이라고 말하는 것에 버릇이 든 거야 뭐야?

"여기가 어딘지 알아요? 레뮤즈 박물관이에요! 중앙 대륙 최고의 박물관! 이런 데에서 짝퉁 같은 게 있으면 보통 일이 아니라구요!"

그 말을 듣고 프론디어는 입가를 매만졌다. 뭔가 고민하는 듯이 보였다.

"...즉, 퀴니에 선배는 제가 박물관에 짝퉁을 들여놓은 것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를 했어야 한다는, 그런 뜻인...."

"그게 아니고오!"

뭐니 얘?

자기가 틀렸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니?

"레뮤즈 박물관에 짝퉁이 있다는 소리를 함부로 하면 그냥 끝나지 않는다구요!"

"여기가 레뮤즈 박물관이든 루브르 박물관이든, 짝퉁은 짝퉁일 뿐입니다."

프론디어가 말했다.

본인은 굉장히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듯한 어조였다.

그야 말 자체는 당연하긴 한데.

근데 루브르 박물관이 어디야.

"저게 짝퉁이라고요?"

"네. 짝퉁."

"정말? 그 말 후회 안 해요? 진짜로?"

"정말로. 진짜로. 완전 백 퍼센트 짝퉁입니다."

퀴니에는 다시 한번, 그림을 보았다.

...역시, 어딜 어떻게 봐도 훌륭한 그림이다.

미스틸테인 사건으로 그녀 안에서 프론디어의 기준이 좀 높아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자신의 눈에 더 신뢰가 간다.

"...그럼 내기할래요?"

"내기요?"

"네. 저 그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고르는 내기. 프론디어가 이기면 저 그림에 제시된 가격만큼 비에트 상회에서 로아흐 가에 보내드리죠. 제가 이기면 그 반대가 되구요. 어때요?"

"진짜인지를 어떻게 확인하시려고요?"

"제가 살 거예요. 저 그림."

옆에 가만히 있던 안느가 '히에엑!' 하고 대신 놀라주었다.

퀴니에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프론디어를 보았다.

사실 그녀는 레뮤즈 박물관에 올 때부터 무언가를 구매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그림이면 그녀의 눈에 충분히 만족한다.

...그런 그림에 짝퉁 소리를 들으니까 화가 난 거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취소하면 없던 일로,"

"좋습니다."

프론디어가 말했다.

퀴니에는 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린 채 눈을 깜박였다.

근데 프론디어는 더 어이없는 소리를 했다.

"그런데 로아흐 가문에 주는 거 말고 저한테 개인적으로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현찰이라든가."

"아주 가지가지 하시네요?"

* * *

현재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비에트 상회.

하지만 그건 최근에 바뀐 평가이고, 퀴니에의 손을 거치기 전 과거의 비에트 상회는 찬란한 전성기의 빛을 잃은 뒤였다.

당시에는 모두가 비에트 상회는 회복 불능이라 여겼다.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비에트 상회의 흐름을 보았을 때 전성기 시절로 되돌려놓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퀴니에는 아예 부수고 다시 시작했다.

이득이 되지 않은 거래 관계를 전부 없애고, 사람을 해고하고, 오랫동안 친분을 맺은 귀족들과의 연줄을 전부 끊었다.

상회에 덕지덕지 붙은 거품을 전부 걷어내고 나니 적자는 해결되었다. 문제는 그만큼 적도 늘었다.

비에트는 그간 다른 상회나 가문에 많은 거래를 해왔다. 그들 중에는 비에트 가문이 망하면 같이 망하게 될 이들도 다수 존재했다.

하지만 퀴니에는 망설임 없이 잘랐다. 오랫동안 거래를 해온 '시간'이나 '정' 따위의 것들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당연히 적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별명이 '소악마 퀴니에'.

이후의 비에트는 보란 듯이 성장했다. 그리고 비에트 상회가 성장하는 만큼, 퀴니에가 잘라낸 모든 가문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로 인해 퀴니에를 보고 무모하다 말하던 세간의 평가가 일변했다.

'무정하되, 소름 끼칠 정도의 안목. 사람을 보는 눈과 능력에 대한 평가는 예지에 견줄 만하다.'

퀴니에가 끊지 않았거나, 그녀가 먼저 손을 내민 가문은 성장한다. 퀴니에가 잘라내면 그 가문이 몰락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나니 퀴니에를 무너뜨리려던 가문들이 오히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퀴니에가 끊었다는 건, 그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는 반증이 되어버렸으니. 자연히 인기가 떨어지고, 능력 없는 가문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사람을 감별하는 데에는 귀신과도 같은 안목을 가진 퀴니에.

그 능력이 예지에 견줄 만하다지만, 당연히 예지가 아니다.

그러니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 모두를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한 당연한 사실이, 오늘만큼은 퀴니에는 참으로 거슬렸다.

"그래서, 죄다 섞였다?"

"그, 그것이, 도착한 뒤에는 이미 이 지경이라."

"그래서 섞였다?"

퀴니에의 추궁에 집사는 입을 다물고 쩔쩔맸다.

퀴니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가보죠.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봐야 하니."

그렇게 퀴니에는 집사를 앞세워 저택 앞으로 나왔다.

저택 앞에는 이미 짐을 전부 꺼내고 하인들이 물건 분류에 한창이었다.

"...세상에."

저택 앞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분명 상회에서 구매한 기록이 없는 물품들이 퀴니에의 눈에도 보였다.

"최근에 모조품 사기가 유행입니다. 특히 저희 상회와 같이 물품을 대량 구매하는 곳이 주요 타깃이라더군요. 비슷한 차량을 가져와 운전수를 억지로 쫓아내고, 양쪽 차량의 짐에서 비슷한 것들을 바꿔 치는 겁니다. 값비싼 것들은 아예 분간이 어려운 모조품을 따로 준비해놨다더군요."

"모조품이 미리 준비되어 있다는 건 우리 상회에서 뭘 구매했는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예. 갤러리나 박물관의 기록을 빼돌리는 자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아, 퀴니에는 한숨이 나왔다.

그제야 자기 아버지가 모조품 사기를 당했다던 안느의 말이 생각났다.

그 한마디를 듣고 이 사태를 예상하라는 건 너무한 처사긴 하지만.

그래도 비에트 상회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범행 현장을 발각했으니까.

문제는 사기꾼 녀석들이 한참 뒤바꾸던 도중이라, 양쪽 차량에서 짐이 섞여버렸다는 것.

그 두 차량을 전부 가져와 여기서 분류 작업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근데 저쪽에선 뭘 하고 있는 거야?"

열심히 물건을 분류하는 직원들과 하인들이 있는 와중에, 다른 한쪽에는 사람들이 어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아, 감정사를 몇 고용했습니다. 저희가 구매한 것들과 상당수 비슷한 모조품이 발견되어서."

"흐음."

퀴니에는 호기심에 그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모조품이 비슷하면 얼마나 비슷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아, 잠깐, 설마. 설마 이거."

퀴니에의 눈앞에 있는 것은 두 개의 그림이었다. 그녀가 레뮤즈에서 구매한 그림. 기도하는 소녀의 그림이었다.

'말도 안 돼....'

두 개의 그림은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단지, 소녀의 표정이 달랐다. 한쪽은 웃고 있었고, 한쪽은 무표정했다. 퀴니에가 산 것은 분명 웃고 있는 소녀의 그림이었다.

"그, 감정은 끝났나요?"

"아, 퀴니에 님. 죄송합니다. 굉장히 어려웠습니다만, 감정은 끝났습니다. 그림이 너무 좋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정신이 팔렸군요. 하핫."

감정사가 멋쩍은 듯 웃었다.

감정이 끝났다라. 퀴니에는 침을 삼켰다. 과연 어느 쪽이 진짜일까.

퀴니에는 양쪽 그림을 다시 한번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웃고 있는 쪽이 더 진짜 같았다. 기도라는 행위와 소녀의 미소. 그 부조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그래서, 진짜가 어느 쪽이죠? 어느 쪽이 더 예술적 가치가 높은가요?"

"음, 그 두 가지는 답이 다릅니다."

"네?"

감정사가 웃고 있는 소녀의 그림을 가리켰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은 이쪽입니다. 저희 모두가 보자마자 감탄을 했었죠. 소녀의 표정뿐만 아니라 색채를 사용한 방식, 밑색에 들어간 정성, 이 모두가 낯선 조합의 아름다움을 정확하게 그려내었죠. 무엇보다 진품에서 사용한 채색 방식을 차용하면서도, 그 수준을 세련되게 끌어올렸어요. 웬만한 사람들은 진품과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 말한 감정사는 이번엔 무표정한 소녀의 그림을 가리켰다.

"진품은 이쪽입니다. 이쪽도 훌륭한 수준의 그림입니다. 다만 방식이 조금 고루하고, 무엇보다 소녀의 표정이 아쉽죠. 저희도 처음엔 이쪽이 모조품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진품이라는 걸...?"

"운 좋게도 저희 중에 이 작품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감정사가 나왔다.

"알렝 뷔숑의 작품 '소녀의 기도'. 작가와 작품 모두 무척 마이너한 데다가, 작가가 죽은 지 한참 되었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겠죠. 모조품으로 바꿔치기 하려던 사기꾼들이 진품을 들고 왔을 정도니 말입니다. 아마 어느 갤러리에서 저렴하게 팔고 있었을 겁니다."

진품보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가짜.

그래서 프론디어는 '훌륭한 짝퉁'이라고 표현한 건가.

...아니, 그럼.

"그럼 보통 사람이 이걸 진품이라고 알아챌 방법이 있나요?"

"힘들겠죠. 박물관에서도 가짜를 진품인 줄 알고 전시해놓았을 정도니. 이런 작품에 가짜 진짜를 구별하려면 정말로 운 좋게 이 모조품이 없던 시절의 진짜를 보았든가, 아니면 대륙의 거의 모든 그림을 전부 섭렵할 정도는 되어야 할 겁니다."

그 말에 퀴니에는 몇 번 눈을 깜박였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내뱉었다.

"운이 좋았던 거겠죠?"

"네?"

"그러니까, 운이 좋았던 거겠죠? 그거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감정사들이 이해 못 할 이야기를 열심히 어필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0화

3장 운명 조작(1)

"오늘의 수업은 '오러'에 관해서다."

기본 전투술 강의.

담당교사 알레스는 모두를 둘러보고 말했다.

학생들은 야외 수련장에 정렬해 알레스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전투술 관련 수업은 보통 이곳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강당이나 필드를 빌리기도 한다.

"인간의 근육은 한계가 있다. 충분히 성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과도한 근육은 움직임의 방해를 낳고, 알고 있다시피 근육은 본래 무겁다. 결국 싸우는 이의 입장에서는 유연성과 힘, 순발력이 적절한 밸런스를 갖춘 몸이 필요하다. 즉 힘을 위해 근육을 무작정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렇게 말한 뒤 알레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시선이 아스터를 향했다.

"흠, 아스터. 앞으로 나와라."

"예."

아스터는 알레스의 옆에 섰다.

알레스가 아스터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정도의 몸이 좋은 밸런스라 할 수 있다. 근육은 적절하면 순발력을 높이고, 부족하거나 과도하면 양쪽 다 순발력을 떨어뜨린다. 아스터의 경우에는 그 적절한 균형을 잘 잡고 있다. 모두 근육 훈련은 이 정도를 표본으로 생각하길 바란다."

아스터는 어딘가 민망한 표정이 되었다.

뭐 아스터의 몸 밸런스에 관해서는 나도 알레스에게 적극 동의하는 바다.

다만 알레스 교사는 원래부터 평민의 편이었으니까. 그 대표인 아스터를 대할 때는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지.

"그러니 힘을 키우는 데에는 근육을 무작정 키우는 게 능사가 아니다. 인간이 가진 다른 힘을 이용해야 하지. 몸의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효과적으로 공격력을 늘려야 한다. 그 '힘'이 바로 오러다."

알레스는 학생들 앞에 미리 배치된 거대한 돌 앞에 섰다.

그리고 검을 들었다.

"근육만 써서는 이러한 바위를 검으로 베는 것은 불가능하다. 힘의 문제도 있지만, 그 전에 검이 망가지지. 허나, 반복된 훈련을 통한 준비된 자세에서의 공격은 오러를 실을 수 있다."

알레스는 자세를 잡았다.

검을 양손으로 쥐어, 자신의 앞에 수직으로, 시선은 정면, 검 끝은 시선과 일치한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자세다.

알레스는 검을 위로 들어 올리고 바위를 향해 아래로 베었다. 그 칼날의 끝에는 푸른빛이 일렁였다.

서걱, 소리와 함께 칼날은 바위를 깔끔하게 베어냈다.

오오, 학생들의 감탄.

알레스는 이렇다 할 감흥도 없는 표정이었다.

그야 강의 때마다 보여줬을 테니.

"전사는 수만 번의 훈련을 통해 오러를 검에 실을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일순간, 그것도 하나의 동작에서만 가능하지만, 나중에는 다양한 동작에서도 오러를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저, 선생님."

그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뒷모습을 봐서는 누군지 모르겠다.

내가 잘 모르는 걸 봐서는 엑스트라인가?

"그렇다면 계속 훈련하면 무기에 항상 오러를 깃들게 할 수 있는 건가요?"

음.

저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 엑스트라가 맞는 것 같다.

알레스는 아주 좋은 질문이라는 듯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지."

"더한 것?"

"오러의 극에 달하면, 무기가 없는 맨손에서 오러를 무기화할 수 있다."

오오오, 학생들의 눈이 반짝인다.

"물론 나는 못 한다. 아직은 말이야."

알레스의 농담에 가벼운 웃음이 일었다.

"오늘 수업은 이 바위를 자신이 가진 무기로 공격하는 것이다."

알레스는 본인이 벤 바위의 나머지 반을 가리켰다.

"이 중에는 콘스텔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연습과 숙련을 통해 무기에 오러를 담을 수 있게 된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바위를 베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평범한 돌이 아니다. 교수들의 마법을 통해 특수제작 되었지."

오러를 담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오러의 차이 또한 천차만별인 법.

바위에 흠집을 낼 순 있어도, 베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그냥 바위도 그럴진대, 특수제작된 돌이라니.

학생들의 눈빛에 허탈함이 실렸다.

그것을 처음부터 알았는지, 알레스는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신력을 사용하지 않고 무기를 이용해 이 바위를 베거나 파괴할 수 있다면, 5인 파티의 하급 던전 입장을 1회 허가한다. 하지만 파티의 다섯 명 중에는 반드시 3학년과 교사가 최소 한 명씩 포함되어야 한다."

그 말에 학생들이 눈을 빛냈다.

던전은 각종 마물의 소재와 재화를 얻을 수 있는 귀한 장소다. 그 생성원리는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 마나가 고이는 장소에서 생성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던전 공략은 단순히 출구를 찾아서 나가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던전 보스를 처치하는 것, 암호를 해제하는 것, 숨어 있는 장치를 작동시키는 것 또한 공략의 방법일 수 있다.

그래서 던전은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마물들이 강력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함정과 장치들 또한 더 악랄해진다.

그래도 던전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고, 경험과 아이템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의 장소.

게다가 생각지 못한 귀한 보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얼마 전 뉴스까지 나왔던 '미스틸테인'처럼.

물론 그것은 가짜였지만, 내가 증명하기 전까지 100퍼센트 가짜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짜일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었으니까.

어떤 던전에서든, 어떤 아이템이 나올지는 모를 일이다.

"그럼 시작할까."

알레스의 말에 앞에 있던 학생들부터 차례대로 나섰다. 모두 던전 이용권이 탐나는지 열의에 가득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저 바위를 베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람을 직조하면 벨 수 있으려나.'

하지만 그람을 보여줄 정도로 던전 이용권이 내게 중요한 건 아니다.

직조는 내 유일한 무기나 다름없다.

가진 손패를 다 보여주면서 싸울 정도로 나는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다.

사실 지금 관심 있는 건 내가 바위를 베고 말고 하는 게 아니다.

바위를 베는 학생을 찾는 것.

내가 알기로, 여기에 딱 한 명 있다.

"흐읍!"

순번은 돌아가 아스터의 차례가 되었다.

그가 휘두른 칼날은 바위에 제법 큰 흠집을 내었다. 그러나 베지는 못했다.

"이익."

아스터의 옷이 바람을 먹은 것처럼 부풀었다. 곧이어 그의 눈동자가 하얗게 빛을 발하고, 그 백색의 빛은 머리카락까지 물들였다.

아, 저건.

"그만. 아스터. 신력은 금지다."

"앗, 아. 죄송합니다."

아스터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야, 발두르의 힘을 빌린다면 저깟 바위쯤은.

하지만 거기서 학생들의 열정이 다소 꺾였다.

아스터도 베지 못하는 바위. 그 사실이 학생들에겐 꽤나 충격이었다.

그리고 몇 번의 차례가 돌아.

서걱-

"어머?"

바위가 베어졌다.

본인의 팔보다도 가는 검을 들고 선 여자는 본인도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깔끔하게 갈라진 바위를 보며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알레스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의 눈이 동그래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찾았다.

분홍빛 머리, 초록색의 눈.

"꺅! 교수님! 봐요! 저 성공했어요!"

머리카락이 춤추고 들뜬 어깨가 유려한 선을 그린다.

그 몸짓 하나하나는 발랄하면서 요염하고, 표정은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영악함의 끝.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신이 빚어놓은 것 같이 절묘한 외모다.

"...사이벨, 합격이다."

알레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이벨 포르테.

운명에게 사랑받는 여자이자,

에티우스의 '메인 빌런' 중 하나다.

'사이벨 포르테....'

이 세상이 정말로 세계의 움직임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개인에게 깃든 '운'이라는 요소가 존재한다면.

그 운만으로 태어난 듯한 녀석이 바로 사이벨 포르테다.

사이벨은 본래 그 성정이 악해서 빌런인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낙천적이고 편리주의자일 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다. 하다가도 도중에 질리면 관둔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은 언제나 그녀의 의지가 향하는 대로, 알맞게 맞추어진다.

"사이벨, 이전부터 오러를 사용할 수 있었나?"

"아뇨! 처음이에요!"

발랄하게 말하는 사이벨. 저 말은 거짓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숭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이벨은 방금까지 오러를 터득한 적이 없다.

그런 그녀가 지금 저 바위를 벨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알레스 교수가 말한 '던전 이용권'을 갖고 싶었으니까.

바라는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가능한 일이라면 그녀는 해낸다. 그녀가 바라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면 그 일은 일어난다.

누군가는 몇 번이고 훈련을 반복해서 지식과 요령을 쌓아가는 동안, 사이벨은 그 과정을 전부 생략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빌런인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도, 자신의 운으로도 대적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났을 때, 곧바로 무너지니까.

그런 난관을 딛고 일어선 경험이 전무하니까.

'타락' 혹은 '퇴장'이 예정된 인물.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첫 플레이 때 사이벨의 좋은 능력치와 간편함 때문에 그녀를 믿고 있다가, 마지막에 와서야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는다.

무작정 사이벨을 밀어주다 보면 사이벨은 그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재능과 운으로 아주아주 높은 위치로 올라간 뒤에.

그 위치에서 다루는 병사, 지역, 크게는 국가를 말아먹는다.

그러고는 유유히 혼자 살아남아 행방불명.

그렇다고 사이벨에게 처음부터 난관을 주어 정신적인 성장을 시키려고 했다간, 그녀의 운명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이벨의 '운'을 이길 수 있는 캐릭터는 없다.

아스터조차도 대적하지 못한다.

그러니 결국 플레이어는 사이벨을 도와주지도, 방해하지도 않으면서, 본인의 성장에 집중해 그 힘 자체로 사이벨을 능가해야만 한다.

이 정도로 귀찮은 빌런은 몇 없다.

"선생님, 던전 이용권 말이에요. 동반이 있어야 하죠?"

"음. 다섯 명을 채워야 한다. 그중에 3학년 한 명과 교사 한 명을 포함시켜야 하니, 동급생을 원한다면 너 말고 두 명을 더 넣을 수 있겠지."

상급생과 교수가 대동한 던전 탐험은 굉장히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여기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던전을 체험한 적이 없다. 제대로 된 체험을 위해서라도 경험자는 필수다.

나는 처음부터 사이벨이 누구와 함께 가고 싶은지 알고 있다.

천천히 입을 연 사이벨은 내 예상대로,

"아스터."

아스터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만족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는 던전에서 얻을 것이 없다.

오히려 아스터 에반스가 이번 던전에서 얻는 게 중요하다. 이 게임을 깨기 위해서 내 성장만큼 중요한 게 아스터니까.

'어려운 던전도 아니고, 아스터와 사이벨이면 쉽게 깨겠지. 선생님도 같이 갈 거고.'

걱정될 일이 없는 파티다.

그동안 나는 내 훈련에나 힘을 쏟으면 될 거고.

"나랑 같이 가자, 응?"

사이벨의 말투는 마치 유혹하는 것 같다.

상큼한 미소와, 살짝 고개를 기울인 몸짓.

분홍빛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응, 좋아."

아스터는 흔쾌히 대답했다.

사이벨은 알기 쉽게 손뼉까지 치면서 기뻐했다.

와, 주변 남학생들 눈동자가 식어가는 게 보인다.

사이벨의 인기를 이렇게 쉽게 체감할 수 있다니.

"근데 동급생 한 자리 남잖아. 그 한 명은 내가 골라도 돼?"

그런데 아스터가 묘한 얘기를 했다.

내가 알기로 아스터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텐데.

나중에 게임 정식 히로인이나 다름없는 '루니아 프리셀'이 사이벨을 질투해 합류하기는 해도.

아스터가 먼저 누군가에게 제안을 하진 않을 것이다.

"응? 그래."

사이벨의 대답에 아스터에게 시선이 몰렸다.

과연 아스터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주목되는 가운데.

"프론디어."

그가 나를 불렀다.

"...엉?"

나는 듣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갑자기 나를 부르는 저의가 무엇인가.

같이 던전 갈 사람을 찾고 있던 거 아니었나?

"던전 갈래?"

그게 나였다.

나는 아스터의 갑작스러운 지목에도 침착한 마음을 유지했다.

한국의 자랑스러운 게이머이자 이 게임에 고일 대로 고인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관조적인 마음으로, 아스터의 말에 진의를 파악, 이해를 완료한 뒤 나는 대답했다.

"...엉?"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1화

3장 운명 조작(2)

수업이 끝난 후.

교내 카페에서 프론디어와 사이벨, 아스터가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이벨은 원형 탁자에 앉아 눈동자를 굴려 양쪽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녀 앞에는 1학년에서 가장 평판이 좋은 남자와 나쁜 남자가 같이 앉아 있다.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인망이 두터운, 강한 신력과 재능을 갖춘 아스터 에반스.

수업 시간 내내 잠만 자며 게으름을 피우고, 신력도 재능도 없는 프론디어 드 로아흐.

둘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카페 내의 시선이 몰려, 사이벨은 괜히 눈치를 본다.

시선이 몰리는 건 여기에 사이벨까지 끼어 있는 탓도 있지만, 그녀는 거기까지의 추찰은 하지 못했다.

"아스터, 왜 날 지목한 거야?"

프론디어의 나른한 입술이 열렸다.

그 질문은 사이벨도 궁금하던 차였으니, 자연스레 그녀의 시선이 아스터에게로 옮겨간다.

하지만 아스터는 오히려 그 질문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긴, 날 도와줬잖아."

"내가?"

"미스틸테인. 나의 걱정거리를 덜어주었으니까."

"...언젠간 사라질 걱정거리였는데 뭘."

프론디어가 한숨을 내쉰다.

"아, 그거 나도 들었어."

사이벨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귀족 회의에서 프론디어의 행동은 굉장히 유명한 사건이었다.

이른바, 인간늘보 프론디어의 막말 사건.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명문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행한 어처구니없는 행동.

신벌이 두렵지 않다는 허세 가득한 말부터, 거래 상품을 부숴버린 무모한 언행 전부.

결과적으로 프론디어의 행동은 가문에 이득이었다고 하나, 행동 자체는 그저 무모함으로 비칠 뿐이었다.

"프론디어, 정말로 신벌이 무섭지 않아?"

사이벨이 물었다.

조롱이나 멸시의 뜻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프론디어는 사이벨을 보며 답했다.

"응."

"...끝?"

"응?"

너무 짤막한 대답에 사이벨이 입을 오물거렸다.

"폼 잡고 싶어서 하는 말치곤 너무 위험한데."

"그런 자리에서 무슨 폼을 잡아?"

알긴 아네.

정말로 폼 잡고 싶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자, 일단 그 얘기는 넘어가고, 오늘 얘기할 건 따로 있잖아."

아스터가 주변을 환기하듯 말했다.

사이벨이 말했다.

"동행해 줄 3학년과 선생님. 누구로 할지 정하는 거였지?"

그렇다. 이 셋이 모인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던전 탐색 인원은 5명. 그중에 최소 두 명은 3학년과 선생님이 포함되어야 한다.

"누구로 할까? 선생님들은 대체로 협력해 주시지만, 3학년은 거절하는 사람들도 많대. 자기 일이 바쁘기도 하고 귀찮으니까. 거절할 것을 상정해 처음부터 명단을 좀 적어둬야 하지 않을까?"

곧이어 사이벨과 아스터가 몇 명의 3학년 선배들을 언급했다.

사이벨은 언급된 사람들을 열심히 명단에 적고 있었다.

그동안 프론디어는 그저 침묵했다.

이 둘이 프론디어에게 무어라 묻지 않은 것은, 그가 원래 게으르다는 평판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의외로 꽤 깊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고 그 고심 끝에 프론디어의 입이 열렸다.

"퀴니에 선배."

"...응?"

아스터가 되물었다.

"퀴니에 선배라면, 퀴니에 드 비에트?"

"응."

프론디어가 끄덕였고, 아스터와 사이벨의 눈이 마주쳤다.

퀴니에 드 비에트.

20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몰락 직전의 가문을 되살린 천재.

냉정한 일처리와 무정한 결단력, 거기에 천재적인 상업 능력이 갖춰진 그녀를 사람들은 '소악마 퀴니에'라고 부른다.

프론디어의 말했다.

"어때? 지금부터 퀴니에 선배와 인연을 쌓으면 앞으로도 큰 도움이 될 텐데."

"그야 그렇겠지만...."

둘은 긍정하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사이벨이 솔직히 말했다.

"...안 도와줄 것 같은데."

그렇다. 이 중에 퀴니에랑 친분이 있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퀴니에는 손익 계산에 굉장히 철저한 타입이다. 그냥 던전 파티에 동행해 달라고 해서 해줄 사람이 아니다.

그만한 뭔가를 내놓아야 하는데.

"내가 알기로 퀴니에 선배는 '외상'이나 '빚'을 싫어해. 던전에 동행해 준 보답을 나중에 갚겠다는 방식으로는 씨알도 안 먹힐걸."

사이벨의 말에 아스터가 동조의 의미로 끄덕였다.

그때 프론디어의 나른한 눈동자가 잠깐 기울었다.

"만약 내가 퀴니에 선배를 데려온다면, 둘 다 불만 없는 거지?"

"...프론디어, 또 뭔가 무모한 짓을 하려고?"

아스터가 표정을 굳혔다.

그 걱정스러운 얼굴에 프론디어가 미소를 지었다.

'오.'

사이벨은 그 미소에 조금 놀랐다.

프론디어의 외모 자체는 고급스러운 귀족의 표본이니까, 그 나른한 얼굴에 미소가 깃들면 제법 보는 맛이 있다.

"걱정 마. 제대로 거래를 하고 올 테니."

* * *

나는 아스터, 사이벨과 헤어진 뒤 학교로 향했다.

그 둘이 폰으로 서로 번호 교환을 하는 걸 보고, 나한테 폰이 없다는 게 생각났다.

에티우스에는 '위저뷰'처럼 TV를 모방한 물건이 있듯, 스마트폰을 모방한 '세이지폰'이라는 게 있다.

누구나 그냥 '폰'이라고 부른다. 폰이 있으면 전화나 문자, 메신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한데 프론디어에게는 세이지폰이 없다. 형인 앗지에도, 아버지인 앙페르도 없다.

앙페르는 옛날 사람인데 더해 그 사고방식은 더 옛날이라 그런 거에 관심이 없고, 앗지에는 아버지가 안 쓰니 본인도 안 쓴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아스터를 도와줘야 하는 내 입장에선 세이지폰이 절실하다.

긴급연락을 하거나 받을 수 있고, 용이하게 위치를 확인할 수도 있으니.

"흠."

나는 어떤 교실 앞에서 멈췄다. 그것만으로도 주위에 둘러싼 시선과 소란이 배가 된 기분이다.

무시하자.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자 안에 있던 학생들 몇몇이 이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것은 처음엔 분명 몇몇이었는데, 자기들끼리 놀라서 옆에 있는 친구를 흔들고 이쪽을 가리키고, 대놓고 '저거 봐'라는 식의 목소릴 내서 주변 사람들까지 이쪽을 보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이 다 쳐다봤다.

...얼른 해치우고 가자.

나는 한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 여자 또한 당연히 나를 보고 있었다. 아주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찾았습니다, 퀴니에 선배."

"...정신이 나갔나요?"

'소악마' 퀴니에.

언제나 여유 있는 미소를 띤 그녀가 당황하는 얼굴은 제법 재밌었다.

"저번 밀러 가문의 저택에서 뵈었죠? 그때는 인사를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아서."

"필요 없네요. 저와 연줄이라도 만들고 싶으면 우리 가문 계좌로 상응하는 돈을 보내세요. 저 주목받게 하지 말고."

퀴니에는 훠이훠이, 하면서 부채를 팔랑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주변에서 '꺄악!'이라든가 '어머어머' 따위의 말들과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퀴니에 또한 굳어버렸다.

그녀의 귀에 대고 나는 속삭였다.

"퀴니에 드 비에트에게 정보를 팔고 싶습니다."

그 말에 퀴니에의 팔랑거리던 손이 멎었다. 그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녀는 이미 학생이 아닌, 비에트 가문의 가주가 되어 있었다.

"헛소리는 좋아하지 않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겠죠?"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등을 돌려 걸어갔다. 굳이 뒤를 돌아 확인하지 않아도, 퀴니에의 뒤따라오는 발걸음이 들렸다.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한참 더 컸지만.

* * *

"그래서, 뭐죠?"

빈 교실로 자리를 옮겼다.

퀴니에는 철두철미하게 마법 '바람 속삭임'을 걸어 우리의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다. 나로서도 반길 일이었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퀴니에와는 되도록 빨리 친해지는 게 좋다. 나에게도, 아스터에게도 그렇다.

그건 퀴니에가 가진 상회의 이득도 있으나,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에티우스에서는 내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누구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퀴니에라면 반드시 혹할 만한 정보를 나는 가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지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바깥'의 마물이 옵니다."

"...!"

퀴니에의 표정이 굳었다.

바깥의 마물.

이전에 말했듯 에티우스의 세계에서 인간의 영역은 보잘것없다. 현재의 인류는 그 영역 안에 있는 마물을 잡아내는 것도 벅차다.

'바깥'이란, 말 그대로 인류의 영역 밖. 그곳에 도사리는 마물은 안에 있는 마물과 궤를 달리한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나에게 향했다.

"그런 소리 함부로 하면, 그냥은 끝나지 않아요?"

"하지만 내버려 두면, 정말로 그냥은 끝나지 않습니다."

퀴니에는 내 눈빛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하면 내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처럼.

나는 그 눈빛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3학년들은 곧 파견 임무가 있죠? 프로 임시 체험을 위해서."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죠?"

"거기서 '바깥'의 괴물을 마주할 겁니다."

"...몇?"

퀴니에는 진위를 확인하기에 앞서 정보의 디테일을 요구했다.

그것이 옳다.

나는 검지손가락을 폈다.

"하나입니다."

"...하나? 한 마리라는 건가요?"

"예. 바깥 세계의 무리에서 유난히 약한 개체. 무리의 삶을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낙오자. 그놈과 마주할 겁니다."

퀴니에는 내 말에 눈을 깜박였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렇게 위험한 얘기 같지는 않죠?"

"...솔직히 말하면 그렇네요. 제가 바깥의 괴물을 만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작 한 마리에, 낙오자라니.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곧 프로를 무시하는 게 아닌가요?"

"그 생각이 틀린 건 아닙니다. 그 정도로 열등한 개체는 프로 한 명만 있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죠."

"그럼 왜-"

"왜냐하면 퀴니에 선배가 할 파견임무가 애초에 그놈을 상정한 게 아니니까요."

퀴니에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역시 퀴니에, 추찰이 빠르다.

그럼에도 직접 말하는 것이 효과가 있기에, 나는 말을 계속했다.

"많은 사람이 죽을 겁니다. '바깥'의 마물은 안쪽의 마물과 동종일지라도 훨씬 강하고, 무엇보다 교활합니다. 몸을 숨긴 채, 프로의 시선이 닿지 않을 먼 곳에서부터 사람들을 헤칠 겁니다. 프로가 발견하는 그 순간까지요."

"...어머."

가만히 듣고 있던 퀴니에가 한쪽 입가를 들어 올렸다.

"3학년은 많아요. 체험 장소에는 일반인들도 있죠. 그중에서 제가 그놈에게 당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 전에 프로가 놈을 발견할 겁니다. 전 다른 사람이 당하는 동안 적당히 몸을 피하기만 하면 되죠. 게다가 당신이 이미 정보를 다 불었는데, 제가 당신에게 뭘 줄 필요가 있나요?"

남의 죽음은 신경 쓰지 않는다, 내 안전만 보장되면 상관없다.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오로지 돈과 권력을 생각하는 냉정한 인간.

'소악마' 퀴니에.

...그런 연기를 참 잘하기에,

그녀가 비에트의 가주인 것이다.

"놈의 약점을 압니다. 제가 팔 정보는 그겁니다."

"...!"

퀴니에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가 정말로 사람들 사이로 몸을 숨겨 도망칠 심산이라면, 이 정보는 아무 의미도 없다.

약점을 알아서 뭣하겠는가. 계속 도망 다니면 그만인 것을.

하지만 퀴니에는 흔들렸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는 건, 그저 거짓이었으니.

나는 눈을 낮게 내렸다. 이 이상 퀴니에의 허세를 보는 것도 괴롭다.

"사람 죽는 거, 싫어하잖아요."

"...! 다, 당신이 뭔데...!"

"저는 저 나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개가 있습니다. 이번 정보도 그렇게 알게 된 거고요."

현실 세계에서 수도 없이 반복한 에티우스 게임의 기억. 내게 이보다 정확한 매개는 없다.

내 말에 퀴니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퀴니에는 나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죠? 돈인가요?"

쿨하고도 빠르다.

내가 거짓을 말할 확률보다, 나와 거래 관계를 맺는 게 훨씬 이득이라고 판단했겠지.

"아뇨. 저희가 이번에 하급던전에 입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그거면 되나요?"

퀴니에는 의심스러운 듯 되물었다.

나는 미소 지었다.

퀴니에는 자신에게 지나치게 이득인 거래를 싫어한다. 그만한 하자가 숨겨져 있을 거라는 의심 때문이다.

"그리고 몇 가지 물건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나는 말했다. 그녀와 공정한 거래를 하기 위해.

사실 내 입장에서 본론은 이쪽이다.

그람의 직조를 미완성이나마 성공했으니, 내겐 필요한 물건이 많다.

"물건?"

"예. 우선 마나 총량을 늘릴 수 있는 물건이 필요합니다. 영약이든 아티팩트든 뭐든 좋습니다."

"...갑자기 큰 걸 원하네요. 또 있나요?"

"또 하나는 물을 담을 수 있는 장신구입니다. 신체에 착용할 수 있고, 물을 꺼내거나 담는 게 용이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부가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묘한 주문이네요. 차라리 물통이라도 들고 다니면 되잖아요."

"꺼내고 담는 게 아주아주 용이했으면 좋겠습니다."

퀴니에는 더욱 고개가 기울어져 이상한 사람 보듯이 나를 보았다. 하지만 나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물을 담을 수 있는 장신구는 사실 '흑천'을 담기 위해서다.

정확하게 말할수록 퀴니에에게 들킬 것 같으니, 물이라고 바꿔 말했을 뿐이다.

"좋아요. 그거 두 개면 됐죠? 비에트 가의 이름을 걸고 제공을 약속하죠."

"감사합니다."

"그래서? 약점이 뭔데요?"

"약점은, 아."

나는 무언가 떠올라 멈췄다.

퀴니에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예요?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겠다는 건 아니죠?"

"아뇨. 생각해 보니 필요한 게 하나 더 있었습니다."

"뭐죠?"

"세이지폰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네요."

퀴니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당신 폰 없어요?"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2화

3장 운명 조작(3)

"우움. 생각처럼 안 되네."

사이벨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간 채 생각에 잠겼다.

'아스터 에반스....'

그의 신력은 너무도 유명하다.

보통 사람들은 신력을 받았으면 가문 내에서 숨기기 바쁘지만, 신력의 주인이 발두르 정도나 되면 그럴 필요도 없어진다.

오히려 대대적으로 알려 타 가문이나 기관에 이득을 보는 게 낫다. 그래서 아스터의 신력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모두가 알고 있다.

거기에 두터운 인망, 성실함, 재능, 눈길을 사로잡는 외모까지.

'꼭 내 걸로 만들고 싶단 말이지.'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프론디어가 퀴니에를 포섭하기 위해 떠난 뒤, 제법 열심히 대시했다고 생각하는데.

부드러운 미소로 부드럽게 거절당했다.

'모처럼 표정과 몸짓, 말투까지 전부 신경 쓴 제안이었는데.'

걸어가던 사이벨의 움직임에 리듬이 생긴다. 곧 그녀는 마치 작은 춤을 추는 듯이 걸었다.

사이벨은 살면서 거절을 별로 당해본 적이 없다. 세상은 언제나 그녀의 입맛에 맞게 상황을 대접한다.

그러니, 그녀는 불운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한다.

노력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모르는 것.

모두가 다 그녀만큼의 운이 있고, 재능이 있고, 자기만큼만 노력한다고 믿으니까.

그런 그녀에게,

'거절'은 별로 익숙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끼릭.

끼릭, 끼릭.

아, 들린다. 운명이 맞춰지는 소리. 그 톱니바퀴가 그녀 편할 대로 조금씩 움직이는 소리가.

물론 사이벨은 이 소리가 단순히 환청이라는 것을 안다.

──운명은 소리 따위 내지 않는다.

그러한 전조도 없이 이미 운명은 그녀를 위해 대령해 있다.

* * *

이번에 내가 참여할 던전에는 '성소'가 있다.

신력이 있는 사람은 신력의 주인, 즉 신과 잠깐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간단한 소원이라면 들어주기도 하고, 그저 몇 번 말만 섞기만 해도 신력이 강해진다.

그야말로 아스터에게 제격인 곳. 그래서 본래의 게임대로라면 아스터가 그곳에 도달하고 발두르를 목도한다.

덕분에 발두르의 힘을 한층 더 끌어올릴 수가 있는데.

"내가 갈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신력이 없는 나에겐 당연히 무용지물이다.

적당히 탐험하다가 아스터가 성소 이벤트 하는 거나 제대로 봐두자.

"오."

나는 콘스텔의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퀴니에를 보았다.

약간 안도했다. 퀴니에에 한해 그럴 리는 없겠지만, 거래를 해놓고 오지 않을 가능성 또한 분명 있었으니까.

"빨리 왔네요."

퀴니에가 나를 보고 손을 팔랑거렸다. 그 표정은 미묘했다.

"프론디어, 이번 던전 공략에는 왜 참여한 거죠?"

"아, 원래 참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만. 아스터한테 지목당하는 바람에."

"아스터 에반스가요? 흠...."

퀴니에가 나를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네가 아스터랑 친분도 있어? 라는 듯한 얼굴이다.

"헐? 어라? 저 설마 지각?!"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허둥지둥 뛰어오는 사이벨이 보였다.

"지각 아니라니까."

그 뒤에서 침착한 목소리를 건네며 따라오는 아스터.

사이벨은 내 앞까지 뛰어와 헉헉거리고 있었다.

"지, 지각 아냐?"

"선생님도 아직 안 오셨는데 뭘."

"그렇구나. 다행이야."

안도하는 사이벨. 곧 그녀는 퀴니에를 발견하고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사이벨 포르테입니다. 오늘은 잘 부탁드립니다."

"반가워요. 퀴니에 드 비에트에요."

퀴니에도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처음 만나는 것 같았지만 술술 대화를 이어갔다.

애초에 처세술과 사교성이 좋은 둘이다. 그리고 서로 조금 닮은 측면이 있으니.

자 그럼, 이제 나에게 약간 거북한 사람이 온다.

내가 퀴니에를 데려올 동안, 사이벨과 아스터가 선생님을 모셔오기로 했다.

"다들 오래 기다렸죠?"

단정된,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제인 교사.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오자마자 만난 여자 선생님이다.

그러니까, 내가 위저뷰의 나뭇가지를 보고 미스틸테인이 아니라고 못 박았던 상대.

나에게 좋은 감정이 없을 텐데.

"오늘의 인솔과 안내를 담당하게 된 제인입니다. 곧장 갈까요?"

제인은 미소 지었다. 나를 향하는 그 얼굴은 티끌 하나 없이 맑았다.

...일단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 * *

프론디어와 일행들은 차로 이동했다.

던전까지는 차로 1시간 정도 걸린다. 상당히 가까운 거리라 모두 안심했다.

던전에 진입하는 콘스텔 학생에게는 던전의 규모와 위험도에 따라 휴가를 준다.

이번에 배정된 기간은 사흘. 그 안에는 던전 공략을 완료해야 한다.

"도착했어요."

차에서 내린 뒤, 제인은 던전 앞을 쭉 둘러보았다.

"으음! 좋아요 좋아요. 아주 오소독스한 던전이군요."

던전 입구는 석재로 된 직사각형의 통로였다. 그 앞에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있다.

던전을 알아보기 가장 쉬운 게 바로 이 입구의 겉모습이다.

지형이 던전으로 바뀌게 되면 던전은 그 모양을 변화시키고, 굉장히 눈에 띄는 모습이 된다.

마치 사람을 초대하듯이.

"헤에, 이게 던전...."

사이벨은 반짝이는 눈동자로 던전 입구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던전을 처음 보는 거겠지.

프론디어도 마찬가지일 텐데 감흥 없는 표정이었다.

"자, 이제부터 아스터 학생과 프론디어 학생, 그리고 사이벨 학생은 되도록 견학하는 쪽으로! 저와 퀴니에 학생이 던전 공략을 진행할 테니까요."

1학년에게 던전은 위험하다.

사실 마물보다 던전 안에 도사리는 함정들이 문제다.

콘스텔은 전투원을 양성하는 곳이니 마물에는 대응할 수 있지만, 함정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이다.

"제가 앞장서고, 퀴니에 학생에게 맨 뒤를 부탁할게요."

"예."

맨 앞에서부터 제인, 아스터, 프론디어, 사이벨, 퀴니에.

누가 봐도 프론디어가 가장 안전한 배치였다. 평판과 실력을 판단한 결과다.

"출발하죠."

계단을 내려가자 넓은 동굴이 나왔다.

자연동굴처럼 보였다. 이끼와 바위 사이에 듬성듬성 꽃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무수한 돌들.

입구만 아니었더라도 던전이라고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주의를 기울이며 가죠."

제인이 목소리를 다소 낮추어 말했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완드를 꺼내 빛을 밝혔다.

사실 제인은 별로 긴장하고 있지 않다.

하급던전에 그녀와 함께 있으면 딱히 위험할 것은 없다.

하지만 학생들까지 긴장을 풀면 안 되니까, 긴장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 사이,

퀴니에는 맨 뒤에서 전체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정말로 긴장감이 없네요, 프론디어.'

맨 뒤에 있는 그녀에게는 보인다.

아스터와 사이벨과는 달리, 산책이라도 온 듯한 프론디어의 걸음걸이.

저건 그저 천성인가?

정말로, 게으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렇게까지 여유로울 수 있을까?

선두에 선 제인이 걷던 도중 숨겨진 함정 발판을 발견했다. 구식의 함정이지만, 자연동굴처럼 생긴 이곳에서는 의외로 발견하기 어렵다.

제인은 걸음을 멈췄다.

"아스터, 프론디어, 잠깐 멈추... 어?"

제인이 발을 멈추고 뒤를 보았다.

프론디어는 이미 걸음을 멈췄다.

아스터의 팔을 붙잡고 있는 걸 보니, 아스터의 걸음까지 세운 것이다. 제인이 주의를 주기도 전에.

"...혹시, 이 앞에 뭐가 있는지 알아요?"

"아는 게 아니라 보였습니다."

프론디어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돌. 제인이 발견한 함정 발판.

"눈이 좋네요? 프론디어 군."

"대단한데?"

"운이 좋았죠."

제인과 아스터의 칭찬에 겸손을 떠는 프론디어.

근데 그냥 귀찮아서 말을 짧게 한 것 같기도 하다.

그 일련의 과정을 퀴니에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프론디어가 발견한 발판을 보면, 확실히 잘만 보면 발견 못 할 것도 아니다.

'흠, 진짜로 운이 좋았던 건가.'

그러나 그때.

퀴니에는 프론디어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

프론디어의 시선은 함정이 설치된 돌바닥에서, 오른쪽을 훑더니, 그대로 오른쪽 벽을 향했다.

지금 가야 할 통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단순한 벽.

프론디어가 그 벽을 본 것은 일순간이었으나, 분명한 위화감이 있었다.

"자, 다들 프론디어 군이 말했듯 저 돌바닥을 피해서 갑시다."

제인의 안내에 따라 퀴니에 앞의 네 명은 천천히 피해갔다.

하지만 퀴니에는 돌바닥 앞에서 멈췄다.

...함정 해제 스킬을 가진 그녀의 눈으로서도, 이 돌바닥을 밟았을 때 정확히 어떤 함정이 어떻게 발동될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아까 전 프론디어의 시선.

오른쪽 벽을 보았던 그 시선.

"...."

퀴니에는 부채를 펼치고, 그 돌을 꾸욱, 밟았다.

슈욱!

오른쪽 벽의 돌 틈 사이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카앙, 퀴니에는 가볍게 부채로 화살을 튕겨냈다.

제인이 놀라 소리쳤다.

"뭐, 뭐하는 거예요, 퀴니에!"

"죄송해요. 미리 제거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다시 이 길을 돌아올 수도 있으니."

"...하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다음부터는 그런 건 미리 말하도록 해요."

"예,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퀴니에는 대답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보았다.

'...정말로 오른쪽에서 날아왔어.'

프론디어가 따라간 시선 끝, 오른쪽 벽, 바로 거기서 정확하게 화살이 날아왔다.

설마 프론디어는 그녀보다 뛰어난 상급의 함정 해제 스킬이 있는 건가? 혹은 그러한 지식에 통달했거나?

퀴니에는 프론디어를 보았다. 프론디어 또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프론디어만이 퀴니에가 행동한 본의를 알겠지. 그는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아주 작게 미소를 짓고, 다시 앞을 향했다.

퀴니에는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웃을 때 무심코 하게 되는 그녀의 버릇이다.

....

….

이후 퀴니에는 프론디어의 일거수일투족을 더욱 세심하게 관찰했으나.

프론디어는 아무것도 안했다.

하급던전에 3학년과 교수가 대동한 파티. 위기는커녕 프론디어가 활약할 기회조차 없다.

퀴니에가 일부러 함정을 발동시킨 뒤, 프론디어는 더더욱 나서는 것을 꺼렸다.

"하암."

사이벨은 두 손을 깍지 끼고 머리 뒤에 가져갔다.

옆에 있던 아스터가 주의를 주었다.

"사이벨, 제대로 경계해."

"하지만 너무 심심하잖아. 함정은 교수님이 바로바로 발견해 주시고, 이따금 나오는 마물은 보잘것없고."

사이벨은 이번이 첫 던전이다. 그만큼 제법 많은 기대를 했다.

모험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지만, 아스터의 활약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함정은 미리 해제되고, 마물이 앞에서 오면 제인이, 뒤에서 오면 퀴니에가 순식간에 섬멸한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닌데.'

사이벨은 앞서가는 아스터를 보았다. 아스터는 딱히 지루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따금 지형을 확인하듯 벽 근처를 둘러보지만, 그것뿐이다.

──재미없어.

사이벨의 눈이 가라앉았다.

아스터에 대해 알고 싶어서 권유했다. 그와 함께 던전 탐험을 하며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참가시켰으면, 내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게 이치에 맞잖아? 여기에 뭐가 있어야 할 거 아냐.

뭔가, 뭔가.

끼릭, 끼리릭.

날 즐겁게 해줘.

그때, 프론디어가 벽을 짚었다. 사이벨과 프론디어가 아주 가까이 있는 순간에.

벽에 짚은 손이 움푹 들어갔다.

"어?"

프론디어의 몸이 기울었다. 문제는, 사이벨의 몸도 같이 기울었다.

"꺄, 꺄악!"

함정은 간단했다.

프론디어가 벽을 만지자 프론디어 주위 2m 정도의 벽이 앞으로 넘어졌다. 당연히 같이 있던 사이벨도 그에 휩쓸렸다.

동시에 둘이 서 있던 바닥이 일어섰다. 벽이 바닥이 되고, 바닥은 벽이 되었다. 마치 회전문이 바닥에 설치된 것처럼.

"아야야...."

사이벨은 바닥에 부딪힌 머리를 어루만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프론디어 밖에 없었다.

이곳은 벽 너머. 함정이 프론디어와 사이벨을 남은 셋과 떼어놓았다.

"어, 어떡하지...."

사이벨은 바닥이었던 벽을 두들겼다.

"선생님! 여기에요! 안 들리세요?!"

한 번 작동된 함정은 다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이벨은 겁이 났다. 이런 곳에서 프론디어가 단둘이라니.

속을 도통 알 수 없는 프론디어는 그녀에게는 그저 경계 대상이다.

정면 싸움에서 질 리는 없겠지만, 만약 방심한 틈에 덮쳐지면 완력 싸움에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다.

"사이벨."

"으, 응?"

"저쪽 목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는 것 같아. 우리끼리 나아가자."

"...어, 응."

프론디어는 그녀가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정상적인(?) 행동을 했다.

사이벨은 그녀보다 앞선 프론디어의 등을 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물론,

프론디어가 함정을 작동시킨 것은, 의도된 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