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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174

166화 중국 출장(1)

166. 중국 출장(1)

오늘은 신태길과의 약속이 있는 날.

강현이 싱글벙글 웃으며 도착한 곳은 고급 일식집이었다.

"겨울에는 역시 회지."

신태길과의 만남이 항상 달갑지는 않았지만, 이런 만남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오셨습니까?"

예약된 방의 문을 열자 화려한 상차림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신태길이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이런 데를 다 오자 하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대화하는 김에 저녁도 먹고요. 이제 슬슬 방어 철이지 않습니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요."

어느덧 11월이 되어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방어가 뭐예요?"

"예? 방어를 모르십니까?"

방어를 모른다는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당황했다.

"어릴 때 좀 없이 자랐거든요. 들어는 봤는데 먹어본 적은 없어요."

강현은 원래 해산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돈으로 차라리 돼지나 소를 먹자는 주의.

돈을 벌고 나서도 외식의 90%는 소고기였기에 모를 수밖에 없었다.

"음... 방어는 쉽게 말하면 참치의 사촌 같은 겁니다."

"오호..."

"방어는 크기가 클수록 맛있는데, 지금 보시는 것은 10kg이 넘는 대방어이니 만족하실 겁니다."

신태길이 말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사실 신태길 씨가 먹고 싶어서 이리로 부른 거 아니에요?"

"예. 맞습니다."

"굉장히 당당하네요..."

신태길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이 대답하자 도리어 강현이 당황했다.

"됐고. 왜 불렀는지나 이야기해봐요."

"일단 이것부터 보시죠."

대답 대신 신태길은 대뜸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방어를 한 점 집어먹으며 감탄하던 강현이 종이를 받았다.

종이에는 사진 하나가 인쇄돼 있었는데, 기괴하게 생긴 괴물이었다.

"으음, 이 밥맛 떨어지게 생긴 건 뭐예요? 새로 나온 몬스터인가?"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당연히 몬스터일 것이라 생각했던 강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몬스터가 아니면 뭔데요?"

"동물입니다."

"예?"

"정확히 어떤 종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로서는 개과 동물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게 어딜 봐서 개인데요?"

확실히 머리 쪽에 개과 특유의 긴 두개골과 세모 모양의 귀가 보이기는 했다.

문제는 머리 아래쪽.

거대한 근육에 10cm는 넘어 보이는 긴 손톱은 벵골 호랑이도 찢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놈. 두 발로 걷고 있는데요?"

가장 중요한 것은 놈이 이족 보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 두 발로 서서 걷는 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잠깐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개든 고양이든 호랑이든 네 발로 다니는 동물인 것이다.

"하지만 몬스터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어떻게 확신하는데요?"

"머리 위에 이름이 없습니다. 게다가 던전 안에서 한 번도 보고된 적이 없는 종이고요."

"흐음... 이 사진은 던전 밖에서 찍은 사진이고요?"

"예."

확실히 신태길이 말한 것들을 토대로 보면 몬스터가 아닐 가능성이 크기는 했다.

"그렇다고 동물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현재 그런 괴생명체들이 터키, 브라질, 이집트, 중국, 러시아, 캐나다, 호주 등 전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라 목록이 어쩐지 익숙한데요?"

신태길이 말한 나라들은 최근 한 번씩 들어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전부 A등급 던전이 나타난 곳입니다. 그리고 해당 사진은 던전 인근에서 찍힌 것들이죠."

"그 말은 던전이 지구 생명체를 변화시켰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허어..."

강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약간의 혼란과 당황스러움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람이 영향을 받아서 변한 사례는 없어요?"

"아직은 없습니다."

"아무튼, 큰일이네요. 이놈들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데 점점 늘어난다는 거 아니에요?"

"모든 개체가 그렇게 폭력적으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그건 조금 극단적인 예시 중 하나일 뿐이죠."

"불행 중에 다행이네요."

지구의 동물이 전부 이렇게 살벌하게 변한다면 앞으로 등산과 트레킹 같은 야외 활동은 전부 끝났다고 봐야 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A등급 던전 이후로 세계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처음 전자장비가 고장 난 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죠. 터키 던전의 공략 결과는 알고 계십니까?"

"일반 코어 하나 부수는데 거의 길드가 전멸했다면서요?"

터키의 랭킹 1위 길드에서 300명이 넘는 능력자가 나섰지만, 생존자는 고작 3명.

처참한 수준의 생존율이었다.

"예. 다른 나라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노말 코어를 공략하기는 했지만 엄청난 피해를 본 상황이죠. 심지어는 군대를 파견한 나라들도 있었습니다만, 그 어느 나라도 메인 코어를 공략하지는 못했습니다."

"많이 어렵긴 한가 보네요. 한국은 어때요? 아직 A등급 던전은 없지만 언제 생길지 모르는 상황이잖아요."

"국내는 오래전부터 대비를 해왔기 때문에 큰 혼란 없이 유지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A등급 던전이 생기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죠."

"딱히 대책은 없는 거네요."

"예...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것밖에 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그러네요."

강현이 피식 웃었다.

"오늘 뭐 좋은 거 먹는다더니 계속 우울한 이야기만 하고. 입맛이 다 떨어졌네."

"그런 것치고 본인이 너무 잘 드시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분명 거대한 접시에 가득 쌓여있던 대방어는 어느새 절반 이상이 줄어들어 있었다.

물론, 대부분 강현이 먹어치운 것이다.

"듣는 건 듣는 거고! 먹는 건 먹는 거죠!"

괜히 큰소리를 낸 강현이 자연스럽게 회를 두 점 더 집어서 입에 욱여넣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하려던 건 끝났어요?"

"아직 하나 남았습니다."

"뭔데요?"

신태길이 갑자기 자세를 바꾸더니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강현 씨."

잔뜩 목소리를 내리깐 채 강현을 부르는 신태길.

"뭔데 갑자기 음흉한 분위기 만들어요?"

"중국 한 번만 다녀오시죠."

"싫은데요."

강현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일단 왜 가야 하는지 이유라도 들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뻔하잖아요. A등급 깨러 가달라는 거겠지. 또 입바른 말 하면서. 강현 씨! 세계가 위험합니다! 보수는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말만 하시죠! 이렇게 잔뜩 바람 넣은 뒤에 실제로 뭐 달라고 하면, 하아... 그건 좀... 강현 씨. 그건 안됩니다. 강현 씨. 우리 사이에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강현 씨. 사정 한 번만 봐주시죠. 하면서 온갖 힘든 척은 다…."

"알겠습니다. 그쯤 하시죠."

신태길이 강현의 말을 끊었다.

"뭐야? 벌써 포기하는 게예요?"

"강현 씨가 정 가기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갈게요."

"예?"

"간다고요."

강현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신태길이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싫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시 생각해보니 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생각이 바뀐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처음부터 가려했어요. A등급 던전에 가면 막혔던 성장이 뚫릴 것 같거든요."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얼굴이 해괴망측하게 일그러졌다.

"애초부터 간다고 했으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재미없잖아요."

"..."

"이런 게 밀당이란 거죠. 밀당."

신태길은 치밀어 오르는 살인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

신태길과의 대화 이후.

강현은 날이 밝자마자 정서빈의 연구소를 찾았다.

"오랜만이네요. 어찌한 일이에요?"

"이번에 해외 출장을 좀 길게 가거든요. 포션 좀 받으려고 왔어요."

그동안 정서빈 연구소는 마력 포션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막 대량 생산 설비를 갖추는 중이라 아직 판매되고 있지는 않았지만, 강현은 이전부터 시제품을 받아서 사용하고 있었다.

"얼마나 필요한데요?"

"대충 100병 이상?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강현의 말에 정서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많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가격이 만만치 않아요. 아시다시피 마정석에서 마력을 추출해서 만드는 거니까요."

"지금 몇 병이나 있는데요?"

"연구소에 있는 걸 싹 다 긁어모아도 50병이 조금 안 될 거예요."

"일단 그거라도 줘요."

"맡겨 놓으신 듯 말씀하시네요."

정서빈이 새초롬하게 눈을 뜨며 강현을 흘겨봤다.

"사람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다르다더니..."

"뭐라고요?"

"다 쓰러져가는 연구소 투자해서 일으켜 세우고, 마정석 대주고, 정부에 꽂아주고 다 해줬는데!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기 있습니까?"

"흠흠, 알겠어요. 농담 한번 한 거 가지고 뭐라 하기는..."

괜히 머리를 긁적인 정서빈이 마력 포션을 모아서 건네주었다.

강현은 포션을 모두 인벤토리에 넣고 다음으로 필요한 것을 고민했다.

"맞아. 던전 보존식 있죠? 그것도 좀 많이 필요하거든요."

던전 보존식이란 인벤토리 보관이 가능하고, 던전 내에서 간단하게 조리해서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말했다.

대부분의 던전 보존식에는 소량의 마력 회복 기능이 들어 있었다.

"알겠어요. 잠시만요."

"소고기맛 나는 거 위주로. 스테이크 많이 넣어요!"

"아, 알겠다고요!"

정서빈은 연구소 직원을 부르더니 몇 가지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이 정도면 되겠어요?"

잠시 후. 강현의 앞에 상자 다섯 개가 놓였다.

한 상자에 들어있는 보존식은 90인분으로 총 450인분이었다.

4명에서 아껴 먹는다면 석 달은 먹을 수 있는 양.

"충분하네요. 대금은 길드에 달아둬요."

식량을 인벤토리에 챙긴 강현이 곧장 연구실을 떠나려 했다.

"바로 가려고요? 그래도 오랜만에 왔는데 차나 한잔 하고 가요."

"물어볼 거 있어요?"

"보기보다 팍팍하네요. 꼭 용건이 있어야 대화를 해요? 그냥 수다나 떠는 거지."

정서빈의 말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그것도 그러네요."

그렇게 둘은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해외 출장은 어디로 가요?"

"중국이요."

"오, 설마 A등급 던전?"

"알고 있네요."

"요즘 가장 뜨거운 주제이니까요. 아마 모르는 사람이 더 적을걸요?"

중국에 나타낸 A등급 던전.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

중국은 이전처럼 압도적인 물량으로 던전 공략에 나섰다.

결과는 대실패.

노말 코어를 공략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려 천 명이 넘는 능력자들이 죽어버렸다.

-정부는 이번 사태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중국은 유감을 표하면서도 던전 공략에 관하여 선을 확실하게 그었다.

길드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고 정부의 책임은 없다 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다음 공략을 위해 해외의 유명한 능력자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 이 최악의 던전 메인 코어를 공략하기 위한 공략대를 모집하겠습니다. 전 세계에 계신 능력자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이번에 중국이 취한 태도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항상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한 모습을 보여왔던 과거와 달리 해외에게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아마 중국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능력자는 이제 국가의 귀중한 자산이 된 시대이니까요. 무턱대고 미래의 자산을 불구덩이에 처박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정서빈이 간단하게 자신의 의견을 곁들였다.

"그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메인 코어 공략에 밀어 넣는 거면 사실상 반쯤 죽으러 가는 건데."

"그렇죠. 하지만 어디든 강현 씨 같은 사람은 있기 마련이죠."

정서빈의 말대로였다.

게다가 한국의 경우 직접 강현을 그곳에 밀어 넣으려 하고 있기도 했다.

'이건 내가 죽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한 행동이기는 하겠지만.'

아마 한세연이나 최동우가 아닌 자신이 발탁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저는 슬슬 가볼게요. 이야기 재미있었어요."

"벌써 가시려고요?"

"아직 준비할 게 좀 남아서. 다음에 또 들를게요."

강현이 인사를 하고 떠나려 하자 정서빈이 붙잡았다.

"잠시만요. 이거 가져가요."

"응? 이게 뭐예요?"

"강현 씨를 위해서 만들었어요. 그래도 우리는 파트너잖아요?"

정서빈이 건넨 것은 화려하게 꾸며진 가죽 재킷이었다.

"아이템인가..? 그런데 왜 하필 디자인이 가죽 재킷이에요?"

"맨날 입고 다니시길래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아니에요?"

"아... 좋아하는 거 맞아요. 예. 고마워요."

강현이 입고 다니는 것은 길드 복장으로 신성아가 특별히 디자인한 것이었다.

성의를 생각해서 자주 입고 다녔는데 그것을 보고 정서빈이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뭐,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니까.'

재킷을 받아 든 강현이 정서빈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진짜 갑니다."

"네. 다음에 또 봐요."

정서빈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강현이 피식 웃고는 재킷을 걸쳐 입으며 연구소를 떠났다.

167화 중국 출장(2)

167. 중국 출장(2)

"올리엔. 잠깐 들어간다."

던전 공략을 떠나기 전날 밤.

강현은 올리엔이 머무는 숙소를 찾았다.

"강현! 늦은 밤에 어쩐 일이에요?"

과자를 먹으며 책을 읽던 올리엔이 강현을 맞이했다.

"전해줄 말이 있어서."

강현은 던전 공략을 위해 한동안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A등급 던전이라면... 엄청 어려운 거 아니에요?"

아쉬움 반, 걱정 반이 담긴 쓸쓸한 표정으로 올리엔이 물었다.

"아마, 그렇겠지."

"꼭 가야 하는 거죠..?"

"반드시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지만, 결국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

강현이 말했다.

"휴우...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다치지 않는 건 힘들 테니까. 대신 꼭 살아서 오셔야 해요!"

올리엔은 아직 강현이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강현은 부활에 관해 설명해 줄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돌아오지. 걱정하지 마."

"네. 기다릴게요. 그나저나, 이번에는 어떤 던전을 공략하는 거예요?"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랬나? 커다란 도마뱀이 잔뜩 나오는 곳이야."

"네!? 크록타요!?"

올리엔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분명 크록타라고 하셨죠!?"

"어... 혹시 아는 곳이야?"

"네!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는 하켄 대륙에서 유명한 곳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곳이었으나, 역사학자인 올리엔은 그곳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불사자들이 일어나 온 대륙에 죽음이 내려앉기 이전.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는 아주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오던 유명한 신전이었다.

"지구에 있으면서 던전이라는 게 하켄 대륙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이렇게 특정 지명까지 나올 줄은 몰랐네요."

강현 또한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거기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없어?"

"많죠! 크록타 자체가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해서 저도 관심이 많았거든요."

올리엔은 한동안 크록타와 그를 모시는 신전, 그리고 리자드맨에 관해 설명했다.

"크록타는 리자드맨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고 해요."

위대한 마법사 '크록타'.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는 그런 크록타를 모시고 받드는 신전이었다.

"성지의 중앙에는 가장 거대한 신전이 있는데, 그곳에 리자드맨 대제사장이 있다고 해요."

"대제사장(大祭司長)?"

"네. 대제사장은 종족 내에서 가장 강한 마력을 지닌 개체가 자리를 이어받기 때문에, 하나같이 엄청난 마법 실력을 지녔다고 전해지죠."

"하아... 그거 골치 아프네."

강현은 리자드맨의 마법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일반적인 주술사도 엄청나던데...'

종족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면 얼마나 강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대제사장은 평생 신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해요. 오직 그곳에서 크록타의 소실된 마법을 되찾기 위해 연구를 반복하죠."

"집착이 심한 놈들이네."

"그만큼 크록타가 대단하다는 뜻이겠죠?"

"어쨌든 걔들이 평생 마법만 연구해서 겁나 세다는 거잖아?"

"네. 그렇게 강한 대제사장도 결국 불사자에게 패배하고 말았지만요."

올리엔의 설명에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여담인데, 대륙 어딘가에는 크록타의 숨겨진 유물이 있대요."

"유물?"

"전설에 따르면 크록타가 살아있을 때 사용하던 지팡이, 장신구 같은 것을 대륙 어딘가에 누구도 찾지 못하게 숨겼어요. 그래서 모든 리자드맨들이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종족이 멸망할 때까지 찾지 못했죠."

올리엔은 마치 유치원 선생님이 동화를 읽어주듯, 생동감 넘치게 이야기를 전달했다.

"사실 유물에 관한 건 그냥 전설 같은 거라 재미로만 들어주세요."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정보를 좀 얻었네."

실제로 이 정보가 전투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아서 나쁠 것은 없었다.

"강현. 조심해야 해요. 문헌에 따르면 대사제들은 평생 동안 의자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뜬금없는 올리엔의 말에 강현이 당황했다.

"응? 왜?"

"생각하기 위해서요! 그들은 움직이지 않아도 모든 것을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즉, 그들에게 마법이란 숨 쉬는 것과 마찬가지인,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뜻이죠!"

"아... 알겠어."

"그리고 또 주의해야 할게…."

자신의 전공 분야가 나오자 신이 난 올리엔.

강현은 그날 해가 뜨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리자드맨... 도마뱀이라..."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

강현은 밤새도록 올리엔에게 들은 정보를 복기하고 있었다.

"하아..."

그러던 도중 내뱉은 한숨.

"강현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강현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신성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너희들... 그냥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때?"

사실 강현의 최대 고민은 이것이었다.

일행과 함께해도 되는가?

중국으로 떠나기 전.

강현은 신성아, 안유성, 윤나래에게 함께 갈 것인지 의사를 물었다.

대답은 만장일치로 함께한다는 것.

-뉴스도 안 보냐? 그냥 쉽게 따라올 만한 곳이 아니라니까.

-형 걱정이나 해요.

-맞아. 혼자 가서 또 사고나 치려고? 우리가 같이 가야지 헛짓거리할 때 말려줄 거 아니에요.

-이게 또 기어올라!

모두가 자신을 따라나선다고 하자 내심 기분은 좋았지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이 첫 A등급 던전이잖아. 적어도 이번에는 나 혼자 다녀와도 될 것 같은데... 내가 겪어보고 괜찮으면 다음에 다 같이 가면 되잖아?"

전 세계의 A등급 던전에서 매일 엄청난 숫자의 능력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들은 그저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고 자신의 국가에서 정예라고 손꼽히는 능력자들이다.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강현은 지금까지 어떻게든 자신이 나서서 막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요즘은 예전 같지 않았다.

점점 더 강한 적들.

이제 강현도 자신의 한 몸 건사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나한테 맡기고 너희들은 그냥 관광이나 해. 오랜만에 푹 쉬라고."

강현의 말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형. 언제부터 그렇게 오지랖이 넓어졌어요?"

"맞아. 언제부터 우리 걱정을 그렇게 했다고. 본인 일이나 잘해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네."

안유성과 윤나래의 말에 강현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이것들이 걱정해줘도 지랄이야."

비록 투덜대며 말했지만, 강현은 저들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현 님. 저희가 비록 길드원이고 강현님이 길드장이긴 하지만, 필요 이상의 걱정은 오히려 저희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희는 강현님과 함께 싸우는 동료지 않습니까?"

신성아까지 나서서 말하자 강현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게 그렇게 되나?"

"예. 강현 님은 저희의 길드장이지 부모가 아닙니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고 거기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는 게 옳은 것 같습니다."

"흐음..."

"애초에 쉽게 당할 것 같으면 따라나서지도 않았을 겁니다."

신성아의 말에 강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래."

"모두가 이번 기회에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리라 다짐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성아의 당당한 말에 안유성이 미소를 지었다.

"누나. 자신 있나 봐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는 안유성 씨야 말로 뭔가를 숨기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저야 항상 오픈마인드죠."

"유성아. 나한테도 오픈마인드로 대해주면 안 될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잡담으로 이어지고, 분위기가 가벼워지자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초심을 잃지 말자.'

주머니에 품고 있는 것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지고 불안이 늘어났다.

강현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던 시절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항상 그때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상황에 끌려다녀서는 안 돼.'

강현이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도착이다!"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어느새 목적지인 중국 항저우 시에 도착했다.

**

"크흐~ 중국 공기도 나쁘지 않네!"

항저우.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도시이다.

샤오산 국제공항을 빠져나와 도로를 달리자 강을 따라 줄지어 선 아파트와 고층 빌딩들이 보였다.

"예상보다 도로가 한산하네요?"

화려한 도시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도로는 텅텅 빈 상태였다.

강현의 물음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A등급 던전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생성됐으니까요. 앞으로 5km 정도를 더 가면 전자기기가 무력화되는 영역에 들어섭니다."

남자는 중국에서 강현을 맞이하기 위해 보낸 사람으로, 정백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타고 있는 이 차는 문제 없는 거죠?"

강현이 시트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탑승하고 계신 리무진은 순수하게 마정석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자동차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러면 다행이고요."

중국은 동부 해안의 대도시들을 위주로 빠르게 마정석 산업을 발전시켰다.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경우에는 전자 장비의 약 70%가 마정석 기반 장치로 교체된 상태.

"아직 국토 전체에 비하면 일부분이지만, 머지않아 모든 국토에 발전된 미래 기술이 자리 잡을 겁니다."

정백연은 현재 중국의 기술이 자랑스러운 듯 당당하게 말했다.

"아, 예."

현재 대한민국은 국토의 절반 이상이 마정석 장비들로 대체된 상태였지만, 강현은 굳이 나서서 흐름을 깨지는 않았다.

"이런 것들 말고 던전에 대해서 좀 알려줘요. 던전 정보도 제대로 안 알려주고, 누가 공략에 참여하는지도 안 알려줬잖아요."

"죄송하지만, 그것들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회의장에 도착하면 알게 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죠.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정백연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리무진이 멈춰 섰다.

도착한 곳은 화려한 외관의 호텔.

주차장에는 이미 온 선객들이 있는지 강현이 타고 온 것과 같은 리무진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게 대륙 스케일인가?"

한국에서 구경하기 힘든 리무진을 한 장소에서 수십 대나 보자 제법 장관이었다.

"약 두 시간 후에 전체 회의가 있을 예정이니 그때까지는 객실에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정백연은 일행을 각자의 객실로 안내했다.

"와, 이거 뭐야?"

로비에 들어선 강현이 작게 감탄했다.

사방에서 강력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마력만 놓고 비교했을 때는 자신보다 수치가 높은 이들도 꽤나 있는 것 같았다.

"여기 호텔에 묵고 있는 사람들. 전부 능력자인가 보죠?"

"예. 각국에서 최고의 능력자와 길드만 모셨습니다. 물론, 강현 씨 일행도 그중 하나죠."

강현과 정백연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수많은 시선이 일행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강현이 어느 정도 인지 가늠하고 품평하는 듯한 모습.

'이놈의 인기는 어딜 가나 끊이질 않네.'

피식 웃은 강현은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받아넘기며 주위를 둘러봤다.

"네가 강현인가?"

그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거구의 남자가 일행 앞을 막아섰다.

2m에 가까워 보이는 신장.

크고 단단한 근육이 몸 전체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어. 내가 강현인데."

자신보다 키가 큰 남자를 올려다보며 강현이 대답했다.

"반갑다. 나는 레일러라고 한다."

인사를 하며 손을 내미는 레일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었다.

강현은 잠깐 고민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당사자를 두고 계속 고민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생각을 접은 강현이 웃으며 레일러의 손을 마주 잡았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반갑다."

강현의 인사에 레일러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소문과는 달리 굉장히 여려 보이는군. 계집아이처럼 말이야."

"방금 뭐라 했냐?"

강현의 인상이 구겨짐과 동시에 레일러가 손아귀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네가 미국에서 벌인 짓은 잘 알고 있다."

"또야? 또? 지긋지긋하다 진짜."

지난번 암시장에서 만난 미국인 이후 또 같은 패턴의 남자가 등장했다.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하는 게 좋을 거야. 던전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내 눈에 띄지 마라. 요새 양놈들이 유독 거슬리더라고."

"하! 자신감 하나는 소문 못지않군. 그래."

코웃음을 친 레일러가 천천히 강현의 손을 놓았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너는 너무 날뛰었거든. 다들 널 주시하고 있다고."

"너나 잘해. 부탁하지도 않은 오지랖을 부리고 지랄이야."

강현의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레일러가 자리를 떴다.

**

강현과의 만남 이후.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레일러가 그제야 자신의 손을 확인했다.

"으음..."

벌겋게 부어오른 손.

강현과 손을 마주 잡은 그 잠깐 사이 레일러의 손은 강현의 손 모양 그대로 살이 파인 상태였다.

"어이가 없군. 내가 힘에서 밀린 건가? 이 레일러가?"

레일러는 미국 내에서 가장 근력이 강한 능력자로 유명했다.

톤 단위의 무게도 들어서 던져버리는 자신이 비록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힘에서 밀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신체의 내구도도 압도적인 수준이야... 인간이 아니라 강철을 붙잡은 것 같군."

레일러는 미국에서 강현에게 당한 길드장들을 수치스럽게 여겼었다.

하지만 직접 강현을 겪고 나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강현... 주시해야 할 놈이야."

168화 중국 출장(3)

168. 중국 출장(3)

A등급 던전의 악명이 날로 높아지는 현재.

중국의 구원 요청에 선뜻 능력자를 보내는 나라는 많지 않았다.

중국에서 많은 보수를 약속했지만, 죽은 능력자를 돈으로 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혹여나 높은 레벨의 능력자를 보냈다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그것은 국가적인 손실로 직결된다.

"브리핑에 앞서, 선뜻 이번 공략에 나선 10개국. 398명의 능력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그럼에도 무려 10개의 국가에서 약 400명의 능력자가 참가했다.

중국과 러시아 북한에서 국가적으로 공략을 지지하며 각각 100명 정도의 능력자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나머지 100명의 능력자는 강현처럼 소규모 단위로 자원을 한 능력자들이었다.

"지금부터 A등급 던전.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를 공략하기 위한 작전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거대한 스크린 옆에 마이크를 든 남자가 말했다.

남자를 향하는 400쌍의 눈동자.

하나하나가 강한 마력을 품었던 탓에, 어지간한 능력자라면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의 마력이 남자를 압박했다.

'제법이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태연하게 행동하는 남자를 보며 강현이 작게 감탄했다.

"제 소개를 잠깐 하자면 저는 용신 길드를 이끄는 장명호라고 합니다. 지난 던전 공략에 참여했으며, 이번 공략에서도 여러분과 함께할 예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호오..."

장명호의 소개에 신성아가 작게 감탄했다.

"아는 사람이야?"

"예. 중국에서 아주 유명한 능력자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10대 길드의 길드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유명한 사람이었구나. 어쩐지."

같은 10대 길드라도 한국과 중국은 느낌이 다르다.

세계적으로 봤을 때, 한국 능력자의 평균수준은 높은 편이다.

반대로 중국 능력자는 평균수준이 조금 낮은 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애초에 한국과 중국은 인구의 차이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중국에 공식적으로 개설된 길드의 숫자만 해도 한국의 10배 이상이다.

그중에서 10위 안에 드는 길드를 이끌고 있다고 하면 굉장한 강한 능력자일 것이 분명했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중국은 이미 A등급 던전의 노말 코어를 제거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분께 정보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장명호가 던전 안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언론에서 말한 것처럼 지난 공략은 무려 5,000명이라는, 역대 최고 규모의 공략대가 참가했습니다."

사상 최대 규모의 던전 공략이었다.

그만큼 중국은 자신에 차 있었고, 전혀 실패를 예상하지 못했다.

"모두가 하나같이 정예였기에 노말 코어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공략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우리는 확신했죠. '세계 최초로 A등급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은 중국이다!' 우리는 성취감에 휩싸여 있었고, 자만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메인 코어.

그곳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괴물이 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거대한 리자드맨은 엄청나게 강력한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마법 한 번에 수십 명의 능력자가 죽을 정도였으니까요. 결국, 우리는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후퇴했습니다."

그때 한 능력자가 손을 들었다.

"네. 말씀하시죠."

"보스가 그렇게 강했나?"

"강했습니다. 나름 강자라고 자부하는 저도 꼼짝없이 얼어붙었으니까요. 놈 앞에서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장명호의 말에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우리는 약 5분의 1의 능력자. 즉, 천여 명의 전사를 잃고 도망쳤습니다. 더 이상 피해가 커지면 던전을 클리어해도 남는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침을 한번 삼킨 장명호가 말을 이었다.

"복귀 후. 우리는 단순히 물량이 아닌 최고의 정예들로 꾸려진 공략대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고, 장명호가 주위를 둘러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비록 그때의 저는 도망쳤지만, 여러분들과 함께라면 그 강력한 보스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장명호가 웅변대회에 나선 연사처럼 말했으나, 청중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크흠... 이미 지나간 공략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제는 과거보다 미래. 앞으로의 이야기 중요하겠지요."

미소를 지은 장명호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보수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보수라는 말에 능력자들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계약금은 충분히 받으신 상태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공략 성공에 대한 보수죠."

말을 한 장명호가 품에서 꺼낸 팔찌를 들어 올렸다.

"이것은 지난 공략에서 던전의 준보스를 잡고 나온 A등급의 팔찌입니다. 성능은 이미 알려드렸으니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영광스러운 주술사의 팔찌.

강현도 이미 사전에 정보를 받은 상태였다.

"기억이 나지 않으시는 분은 나눠드린 종이를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여나 의심되는 분은 차후에 개인적으로 찾아오시면 직접 성능을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이름 : 영광스러운 주술사의 팔찌

등급 : A

내구도 : 478/500

능력 : 마력 10 스텟 증가, 마력 회복속도 25% 증가, 주술사의 가호

*주술사의 가호 : 단기간에 대량의 마력을 회복한다.

"주술사의 가호에 붙어있는 대량의 마력 회복이라는 설명이 모호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마력 스텟 50 기준으로 절반의 마력이 3초 안에 회복됐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장명호의 말에 곳곳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설명대로라면 굉장히 알짜배기 능력만 담겨 있는 팔찌야."

특히나 마력을 많이 쓰는 이들에게는 더욱더 빛을 발할 아이템.

아이템의 설명을 보며 강현이 눈을 빛냈다.

현재 강현의 마력은 아이템과 칭호를 포함하여 총 55.

저 팔찌를 착용하면 강현은 마력이 바닥난 상황에서 3초 안에 절반 정도가 회복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마력으로 신체를 회복하는 강현의 특성상 아마 훨씬 장기전에 유리해질 것이다.

"와, 저거 갖고 싶다..."

윤나래 또한 팔찌를 몽롱한 눈으로 바라봤다.

'전부 눈독을 들일 만해.'

강현뿐만이 아니었다.

마력은 모든 능력자의 공통적인 필수 자원.

누구든 저 팔찌를 가진다면 현재보다 한 단계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중국 정부는 이 팔찌와 앞으로 잡게 될 던전 보스에게서 나오는 아이템 둘의 소유권을 모두 공략대에게 넘길 겁니다."

"팔찌는 이전 공략에서 얻은 것인데 넘긴다는 것인가?"

팔찌를 넘긴다는 장명호의 말에 누군가 손을 들어 물었다.

"예. 중국 정부는 이 팔찌와 앞으로 공략에서 나올 던전의 모든 부산물의 소유권을 포기합니다."

소유권을 포기한다.

언뜻 보면 모든 소유권을 공략대에게 준다니 괜찮은 것 같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함정이 존재했다.

"그러면 배분은 어떻게 하는 거지?"

"중국은 이미 여러분들에게 지급한 보수와 공략 성공 시 약속된 금액 외에 기타 부산물에 대한 배분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습니다."

장명호의 말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말은 우리가 알아서 아이템을 나누라는 건가?"

"예. 맞습니다. 배분은 여기 계신 분들의 자유입니다."

장명호의 말에 능력자들이 술렁였다.

중국의 의도가 뻔했기 때문이다.

던전 공략 도중 내분이 일어나는 것.

어째서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 능력자들을 모아놓고 이런 짓을 벌이는지 알 수 없었으나, 좋은 의도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이 새끼들 대놓고 수작질이네."

마찬가지로 그것을 눈치챈 강현이 사납게 웃었다.

"명분 좋고. 실리 좋고. 돈이랑 아이템으로 생색도 잔뜩 냈고. 여러 가지로 머리를 잘 썼네."

어차피 A등급 아이템은 시간이 지나면 시장에 많이 풀릴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템의 가치가 최고치에 달해 있는 순간에 적절히 이용한 것이리라.

"보스에서 떨어지는 아이템도 많아봤자 서너 개일 테고."

공략에 성공한다 해도 고작 몇 개의 아이템을 15개의 국가에서 나눠 가져야 한다.

다툼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미있겠네."

그 수가 뻔하기는 했지만 강현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제일 센 놈이 독차지하면 된다는 거잖아?"

"그러네요. 형 말대로 재미있겠어요."

안유성 또한 앞으로의 일이 기대된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후에 장명호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던전 공략에 대한 브리핑을 계속했다.

그렇게 약 30분 정도 이어진 설명이 끝나고,

"공략은 내일 정오에 시작될 예정이니 모두 마지막 준비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설명을 마친 장명호가 강단에서 내려왔다.

**

숙소로 돌아온 장명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장명호입니다."

-준비는 끝났나?

"예. 뛰어난 은신 실력을 갖춘 능력자 10명을 대기시켜 놨습니다."

-수고했다. 던전 공략은 예정대로 진행되겠지?

"내일 정오. 모든 인원이 들어가는 것을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제가 신호하면 그때 군대를 움직이십시오."

-아주 좋아. 역시 일 처리가 확실하군. 그래.

목소리는 굉장히 만족한 듯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반응은 어떻던가?

갑작스러운 물음에 장명호가 당황했다.

"반응이라 하시면...?"

-아이템 배분에 관한 것 말일세.

"예상보다 덤덤했습니다."

-그렇군. 아무쪼록 자네만 믿도록 하겠네.

"예."

-그럼 이만.

전화 속의 목소리는 그 말을 끝으로 사려졌다.

"후우..."

통화를 종료한 장명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오늘 모인 외국의 능력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분명히 중국에서 무언가 일을 꾸민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정말, 이 방법뿐이었을까..."

중국이 공략대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전 공략에서 중국은 너무 큰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5,000명의 대규모 공략대.

그리고 5분의 1의 사망.

이것이 언론의 발표이고, 오늘 자신도 그렇게 설명했다.

'사실은 그게 아니지.'

장명호가 쓰게 웃었다.

5,000명의 대규모 공략대가 던전에 들어간 것까지는 맞았다.

문제는 생존자의 수.

'5분의 1이 사망한 게 아니라, 사실은 5분의 1이 생존했으니까.'

실제 던전에서 죽은 능력자는 약 4,000명으로, 공략대는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정말 손 쓸 틈도 없이 죽어 나갔지.'

메인 코어를 지키고 있는 보스는 그만큼 강력했다.

중국은 이러한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입단속했다.

보유한 능력자가 국력으로 직결되는 지금 시대에, 수천 명의 고위 능력자가 죽어 나간 것은 너무 큰 타격이었기 때문이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악랄한 계획이야..."

엄청난 피해를 메우기 위해 중국이 택한 것은 타국의 전력을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끔찍한 계획의 마지막 마침표가 바로 자신, 장명호였다.

'전략 분석팀에서는 아슬하게 보스를 잡지 못할 거라고 했다.'

중국은 이번 공략대가 공략에 실패할 것이라 예상했다.

자신의 역할은 마지막 순간에 던전의 메인 코어를 파괴하는 것.

능력자들과의 전투로 약해진 보스가 던전 밖으로 나오면 중국 군대가 단번에 제압하고, 부산물 또한 모두 차지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던전 공략에 성공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혹여나 능력자들이 던전을 클리어하더라도 중국의 손해는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타국의 능력자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며, 중국은 위협이 되는 A등급 던전을 제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예상보다 쉽게 던전을 클리어해서 생존율이 너무 높아지면, 자신이 분배 문제를 가지고 다툼을 유발하기로 계획을 잡은 상태였다.

'조국을 위한 길이야...'

계획대로라면 공략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중국은 최대의 이득을 보면서 타국의 전력을 깎아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것의 대가는 무고한 능력자들의 목숨이다.

"..."

정말 이것이 최선인가? 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조국을 위하지만, 인류를 배반하는 행위.

솔직히 진정 조국을 위하는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야. 생각하지 말자."

여기서 더 고민하면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후우... 쉬어야겠어."

장명호는 내일부터 시작될 공략을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169화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1)

169.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1)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능력자들은 곧장 던전으로 향했다.

"이게 A등급 던전인가..."

던전의 입구는 항저우의 대표 관광지 서호(시후호)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호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항저우 여행객의 필수 관광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서호의 아름다운 풍경 옆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거대한 문.

"A등급 던전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딱히 다를 건 없네?"

던전의 입구는 지금까지 지겹도록 봐온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 세계의 것과 다른 이질적인 모습의 거대한 석문은 소름 끼치도록 농밀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확실히 마력 밀도가 높아. 밖인데도 이 정도면 던전 안은 정말 장난 아니겠어."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느끼며 강현이 말했다.

"윤나래. 너는 주변에 흩어져 있는 마력 끌어올 수 있지?"

"기본이죠. 그건 왜요?"

몸 안에 저장된 마력이 아닌, 대기 중의 마력을 대량으로 끌어오는 것은 윤나래의 장기 중 하나였다.

그녀가 지닌 마력의 양을 아득히 초월하는 메테오를 쓸 수 있는 것도 그런 기술적 배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한 번 메테오를 쓰면 마력 회로가 망가져 며칠을 요양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러면 네가 저기 들어가면 엄청나게 세지는 거 아냐?"

"왜요?"

"주위에 마력이 엄청 많으니까. 막 끌어다 쓰면 될 거 아냐."

강현의 말에 윤나래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참나, 생각을 해 봐요. 마당에 소 떼가 뛰어다닌다고 치자고요. 그렇다고 해도 혼자서 도축해서 잡아먹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죠?"

"어... 그런가?"

강현은 소 떼의 씨가 마르도록 잔뜩 잡아먹을 자신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이에요!"

"보통 사람이면 그렇겠지?"

"이것도 똑같아요. 혼자서 컨트롤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력은 한계가 있다고요."

"무슨 비유가 그래?"

"수준에 맞춰서 설명해준 거죠."

"뒤질래?"

강현이 인상을 구기자 윤나래가 호다닥 도망쳤다.

"모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누군가가 외치는 목소리가 들여왔다.

"사전에 말씀드렸듯이 방향 제시 외에 별도의 통제는 없습니다."

이번 공략을 총괄하는 중국의 장명호였다.

"여러분처럼 강력한 능력자들을 통제하는 것은 오히려 비효율적이지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해오셨던 대로 알아서 합을 맞추고 싸워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장명호가 몸을 돌려 던전을 바라봤다.

"입장하겠습니다."

무거운 대사와 함께 가장 먼저 던전에 들에 입장하는 장명호.

그를 보며 강현이 피식 웃었다.

"입장 가지고 똥폼은."

"멋있지 않아요?"

"어떤 부분이?"

"잘생겼잖아요."

윤나래의 대답에 강현이 얼굴을 구겼다.

"기생오라비같이 생겼구만, 잘생기기는. 쯧."

"길드장님처럼 인간인지 오크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것보다는 저렇게 살짝 마른 몸에 중후한 타입이 좀 더 여심을..."

신나서 떠들어 대던 윤나래가 강현과 눈을 마주쳤다.

"자극하기는 무슨! 남자는 듬직함이 최고 아니겠어요!? 하하하. 힘! 근육! 멋지다 강현!"

오늘도 사회에 조금 더 적응하는 윤나래였다.

**

"역시 밀림이네."

"풍경이 멋진 것 같습니다."

"그러게."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일행을 반기는 것은 울창한 숲이었다.

던전 안에서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떠한 숲보다 크고, 화려한 모습.

"숨만 쉬어도 마력이 늘어나는 기분이야."

"마력 농도가 이렇게까지 짙어질 수도 있구나."

어찌나 마력이 진득한지 공기 중의 마력 흐름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쓰으읍. 하아! 공기가 아주 좋아! 이런 게 피톤치트라는 건가?"

수십 미터 높이의 나무 사이를 지나치며 강현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치트가 아니라 치드거든요."

"그게 그거지. 대충 알아들어."

윤나래가 딴지를 걸자 강현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여유로워 보이는군.'

주위의 능력자들이 아옹다옹하는 둘을 쳐다봤지만, 고작 시선 따위에 위축될 강현과 윤나래가 아니었다.

"슬슬 오네."

그렇게 숲 속을 거닐기를 약 30분.

갑자기 모든 능력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 멈춰 섰다.

"시작부터 제법인데?"

"얼마나 많은 거지? 오백? 육백?"

"무슨 소리. 천은 되겠구먼."

능력자들이 사방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수준과 숫자를 가늠했다.

"몸풀기로는 적당하겠어."

천마리의 리자드맨 군단.

그러나 두려움에 떠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 모인 능력자 하나하나가 혼자서 수십은 거뜬하게 감당할 수 있는 강자였기 때문이다.

"왔다."

고요한 와중에 누군가의 말이 울려 퍼지고,

-두두두두...

땅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캬아아아!"

"카록! 쿠아르!"

"콰라아!!!"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괴성.

리자드맨들의 기괴한 외침에 온 숲이 진동했다.

그 압도적인 위용에 겁먹을 만도 했건만, 능력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전부 죽여!"

"와아아!"

능력자들은 한가하게 제자리에서 적들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앞다퉈 달려 나갔다.

"마법이다! 준비해!"

그 순간, 리자드맨들의 뒤쪽에서 강한 마력이 쏘아졌다.

원래도 마법이 강하기로 유명한 리자드맨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뭉쳐 있으면 더 피해를 받기 마련이나,

-콰아아앙!

윤나래와 몇몇 능력자들의 방어 마법에 허무하게 막혀버렸다.

"막었어요!"

피해는 전무(全無).

그 이후는 학살의 시간이었다.

"오늘 저녁은 도마뱀 구이다!"

"크롹! 투르카!"

리자드맨은 하나하나가 인간을 손쉽게 찢어 죽일 수 있는 괴물이다.

능력자들은 그런 리자드맨을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손쉽게 쓰러뜨렸다.

400 대 1,000의 싸움.

조금은 치열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싸움은 예상보다 훨씬 시시하게 끝이 나버렸다.

'피해는 거의 없는 건가?'

주위를 둘러보며 장명호가 생각에 잠겼다.

소수정예로 공략에 참여한 이들이 강하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능력자였기 때문이다.

의외인 것은 러시아와 북한의 능력자들.

'조사한 것보다 이들의 수준이 더 높아.'

러시아와 북한은 참여한 숫자가 많은 만큼 평균적인 전력이 떨어지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별다른 피해 없이 선전하고 있었다.

'어쩌면 보스를 잡는 것도 가능할지도...'

고민하던 장명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섣부른 판단은 하지 말자.'

이제 막 던전의 초입에 들어섰을 뿐이다.

지금의 공격은 탐색전이나 마찬가지.

'나는 내 임무에 충실할 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은 장명호가 손을 들었다.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겠습니다!"

**

던전에 들어온 지 5일이 흘렀다.

공략대는 파죽지세로 코어를 향해 달리며 쉼 없이 전투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모두가 자신감에 차올라 힘차게 움직였지만, 13번째 전투가 끝난 지금은 피로한 모습을 숨길 수 없었다.

"슬슬 체력에 부치기는 하네."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

올리엔의 말만 들었을 때는 그리 넓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던전 내부는 정말 거대했다.

지금껏 강현이 겪은 어떤 던전보다 광활한 영역.

낯선 숲에서 온종일 엄청난 숫자의 리자드맨과 싸우다 보니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거의 코어에 도착했으니까 다행이네. 노말 코어 부수고 나면 한 번 크게 쉬겠지."

장기 공략대는 대부분 코어를 하나 부술 때마다 길게 휴식을 취한다.

한번 코어를 제거하면 그 근처로는 몬스터가 잘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 코어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진짜 코앞이야. 한 시간도 안 걸릴걸?"

강현의 말대로 코어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여기다."

공략대가 도착한 곳은 숲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신전.

신전의 한가운데서 강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강현 님. 여기가 노말 코어가 맞습니까?"

웅장한 건축물에서 뿜어지는 강대한 마력이 능력자들을 압도했다.

그 모습에 신성아는 이곳이 사실 메인 코어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나도 처음이라서 잘 모르겠는데... 아마 맞지 않을까?"

강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던 그때.

"노말 코어에 도착했습니다! 모두 전투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공략대의 가장 앞에 있던 장명호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다고 하네."

너무 강한 마력에 혹여나 이곳에 메인 코어가 아닌가 했지만, 역시나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갑자기 궁금한 건데 말이야. 어차피 메인 코어 공략할 거, 굳이 노말 코어를 지나쳐야 되는 건가?"

"처음 브리핑 때 메인 코어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말 코어를 지나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나...?"

먼저 던전을 공략한 경험이 있는 중국에서 그렇다고 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쿵! 쿵! 쿵!

능력자들이 신전에 접근하자 거대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전부 알아서 몸 챙겨. 이제부터가 본게임이니까."

"예."

강현이 빌게인의 장검을 빼들고, 일행도 각자의 애병기를 꺼냈다.

동시에 나타나는 리자드맨들.

"캬아아아아!"

"무슨 바퀴벌레 군단 같네. 저게 몇 마리야?"

신전 안에서 리자드맨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얼씨구? 애완동물도 데려왔네."

그리고 숲 한쪽에서 나타나는 거대 괴물.

마치 악어를 수십 배는 확대한 듯한 엄청난 괴물 위에 수십 마리의 리자드맨이 올라탄 상태였다.

"제대로 한번 놀아보자!"

**

"크롸아!"

거대한 창을 든 리자드맨이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들었다.

"냄새난다. 새꺄."

강현은 양손으로 놈의 입을 잡아서 그대로 위아래로 찢어버렸다.

-촤아아악!

리자드맨의 머리가 뜯겨 나가며 사방으로 피가 뿜어졌다.

"후우... 끝이 없네."

강현의 수준에서 일반 리자드맨 전사는 딱히 위협적인 적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끝이 없는 물량 공세에 조금씩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져 갔다.

'다른 놈들은 어떻지?'

강현이 빠르게 전황을 파악했다.

'모두 각개전투 중인가.'

능력자들은 국가별로 모여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러시아와 북한, 중국은 많은 머릿수를 바탕으로 방진을 형성해 수비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 외의 국가들은 모두가 소수정예니 만큼 방어보다는 공격 위주로, 리자드맨 무리 속을 휘젓고 있었다.

"그래! 얼른 끝내고 쉬자!"

점차 리자드맨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면 오래 지나지 않아 모든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콰아앙! 쾅!

강현은 필시언의 해머를 꺼내 사방으로 휘둘렀다.

망치에 걸리는 리자드맨들의 몸이 사정없이 터져나가며 흩어지는 피에 붉은 안개가 일었다.

"쉽게쉽게 가자!"

망치로 벌어지는 대량 학살에 강현 인근에 있는 리자드맨들은 순식간에 씨가 말랐다.

강현이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

"캬아아아아!"

거대한 악어를 닮은 몬스터가 강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로아'라는 이름을 가진 놈은 무려 30m가 넘는 몸길이를 가지고 있었다.

'저 덩치에 당하면 위험해.'

저런 놈의 공격에 당하면 아무리 강현이라도 위험했다.

"흐읍!"

강현이 빠르게 몸을 뒤로 빼내고, 크로아가 강현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딱 기다려라."

강현은 크로아의 울퉁불퉁한 외피를 잡고, 등 위로 올라섰다.

"콰륵, 콱!"

크로아의 넓은 등에는 십여 마리의 리자드맨이 올라타 있었다.

리자드맨들은 강현을 보자마자 무기를 휘둘러 왔다.

"잔챙이는 꺼져!"

어느새 장검을 꺼내 든 강현이 순식간에 리자드맨들의 사지를 베어냈다.

리자드맨들의 시체가 수십 조각으로 나뉘며 허공을 떠돌았다.

"캬아아아!"

자신의 등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모르는 건지 크로아는 여전히 사방으로 날뛰며 능력자를 위협하고 있었다.

리자드맨을 정리한 강현은 곧장 크로아의 머리 위로 이동했다.

"쓰으읍..."

숨을 들이켠 강현이 자신의 손에 날카로운 마력을 둘렀다.

"하압!"

기합과 함께 뻗어 나가는 강현의 손.

마력을 두른 날카로운 손이 단숨에 크로아의 두꺼운 외피를 파고들었다.

"마력폭발, 마력폭발!"

강현은 크로아의 머리 안에 손을 집어넣은 상태에서 마력폭발을 연속으로 사용했다.

몇 번의 폭발음이 울리고,

"쿠륵, 쿠르르..."

크로아가 머리의 모든 구멍에서 피와 체액을 쏟아내며 움직임을 멈췄다.

"휴우..."

머리에 박혀 있던 손을 빼내자 엉망진창으로 변한 것이 보였다.

저릿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익숙한 일이었다.

'어차피 금방 낫겠지.'

아직 여분의 마력 포션은 충분한 상황.

강현이 이런 가벼운 피해를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슬슬 마무리되는 건가?"

어느 정도 전장이 정리됐다고 생각하던 찰나, 강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콰륵! 캬아!"

다른 놈들보다 족히 2배는 거대한 덩치를 지닌 근육 리자드맨.

이름을 확인하자 '리자드맨 대전사'라고 적힌 것이 보였다.

"저놈이 준보스구만."

아무래도 저 근육이 이곳 노말 코어를 지키는 준보스인 것 같았다.

그런 대전사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중국의 능력자들이었다.

"이름이 장명호라 했나?"

용신 길드의 길드장 장명호가 선두에서 놈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역부족으로 보였다.

"도와줘야겠네."

당장에라도 대전사에게 당할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모습의 장명호.

강현은 재빠르게 전장을 뚫고 달려갔다.

"캬아아아!"

리자드맨 대전사의 창이 장명호의 몸을 꿰뚫기 직전,

"으랴아!"

강현의 해머가 그대로 대전사의 머리를 후려쳤다.

170화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2)

170.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2)

"으랴아!"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리자드맨 대전사가 대포알처럼 허공을 날아갔다.

"허억, 허억..."

정명호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자, 대전사에게 달려가고 있는 강현이 보였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건가..."

장명호가 이끄는 중국 공략대는 의도치 않게 던전의 준보스와 맞닥뜨려 고전하던 중이었다.

다른 능력자들은 고작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기에 하는 수 없이 홀로 놈을 막아선 장명호.

놈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했지만, 자신이 무너지면 모두가 죽기에 필사적으로 버티던 중이었다.

"정말 다행이야."

다행히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난 남자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마 강현이라는 이름이었지."

한국에서 온 공략대의 대표.

사실 강현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능력자 중 하나였기에 이전부터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듣던 것보다 더 괴물이군."

장명호도 중국에서 내로라하는 능력자다.

그런 장명호를 일방적으로 압박하던 놈이 지금은 강현과 호각으로 싸우고 있었다.

"초반에 기습으로 우세를 점했다고는 하지만, 그 이후를 이끌어 가는 것은 순전히 본인의 실력이지."

강현의 전투는 상상 이상으로 거칠었다.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적을 죽이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모습.

처음 기습으로 해머에 강타당한 대전사가 몸을 회복하기 전에 단숨에 마무리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제발! 곱게! 좀! 뒤져어!"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던 둘.

전투는 결국 강현이 대전사의 머리통을 산산조각 내며 끝이 났다.

"크아아아!"

강현은 마치 자신이 괴물이 된 것처럼 포효하고는 다음 목표를 향해 뛰어갔다.

'기회다.'

그 모습을 본 장명호가 빠르게 주위를 살피더니 대전사의 시체로 다가갔다.

'아이템이 두 개나 떨어졌군.'

장명호는 대전사가 사용하던 창과 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창은 A등급이었고 반지는 B+등급이었다.

장명호는 재빠르게 그것들을 인벤토리에 넣고는 전투로 복귀했다.

**

치열했던 노말 코어 공방전이 끝나고, 남은 것은 하천을 이루는 피와 산처럼 쌓인 시체였다.

얼굴에 진득하게 눌어붙은 피를 손으로 닦아내며 장명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끝난 건가."

이제 막 노말 코어를 부쉈을 뿐인데, 마치 모든 공략을 끝낸 것처럼 피로가 밀려왔다.

바위에서 휴식을 취하던 장명호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길드장님. 보고 드리겠습니다."

"어. 말해."

장명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길드원이 전투 결과에 대해 보고하기 시작했다.

"…해서 이번 전투로 인한 사망자는 총 67명입니다."

"67명이라."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였다.

"자세히 말해봐."

"러시아 능력자 21명. 북한의 능력자 27명. 그 외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1명의 능력자가 사망했습니다."

길드원의 말대로라면 사망자는 총 50명이 된다.

"인원이 몇 명 비는군. 나머지 17명은 우리 길드원인가?"

"예... 전투 도중에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대부분 대전사라는 놈에게 당한 인원들입니다."

강현이 오기 전까지 장명호가 최선을 다해서 막았건만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알겠다. 이만 쉬도록."

"예."

부하는 고개를 한차례 숙이고는 길드원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갔다.

"지금까지 사망자가 총 81명인가."

노말 코어까지 오는데 죽은 인원이 14명이고, 이번 노말 코어 공략에서 죽은 인원이 67명이다.

모두 합치면 81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처음 출발했을 때 나를 포함해 397명이었으니 대략 5분의 1이 죽었군. "

언뜻 보기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것 같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지금까지 죽은 능력자들 전부가 러시아와 북한, 중국의 능력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소수정예로 참가한 국가에서 나온 사망자는 이번 전투에서 죽은 2명뿐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런 사지에 몸을 들이민 놈들이야. 나름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는 거겠지.'

중국, 러시아, 북한은 모두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한 것이었지만, 그 외의 능력자들은 대부분 국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이 원해서 온 것이었다.

말 그대로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이들.

그 행동에는 실력에 대한 깊은 자신감이 깔려 있으리라.

그리고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그 자신감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렇게 장명호가 생각을 정리할 때였다.

"이 근육 돼지가 뭐라는 거야!?"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이 근육 돼지가 뭐라는 거야!?"

"네놈이 도둑이 확실하다!"

강현과 미국의 대표인 레일러가 목소리를 높이며 다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피곤한 얼굴로 둘에게 다가간 장명호가 물었다.

"여기 강현이라는 놈이 준보스가 가지고 있던 아이템을 독식했어."

"이 새끼가 장난하나. 야. 네가 봤냐? 어?"

레일러의 말에 강현이 잔뜩 흥분해서는 소리쳤다.

"네놈이 리자드맨 대전사와 싸우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

"나는 그거 처리하고 바로 갔다고! 싸우기 바쁜데 아이템 챙길 시간이 어디 있어!?"

"거짓말하지 마라. 눈앞에 아이템을 두고 그냥 떠났을 리가 없지."

사실 아이템을 가져간 것은 장명호 본인이었으나, 그는 나서지 않았다.

'목숨을 구해준 강현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어차피 그가 원했던 상황.

오히려 너무 의도대로 흘러가서 고마울 지경이었다.

'아직 능력자들이 너무 건재해. 여기서 전력을 조금 흩어놓는 것도 좋겠지.'

지금까지 피해를 본 것은 다수의 능력자를 파견한 나라들이었다.

실질적으로 공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능력자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장명호 지금 둘의 다툼이 이들의 전력을 줄일 기회라고 여겼다.

"이번 전투에서 그레이슨이 죽었어. 그런데 너 같은 놈이 아이템을 훔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레일러의 억지에 강현이 코웃음을 쳤다.

"대가리에 총 맞았냐? 네 동료가 죽은 걸 왜 내 탓으로 돌려? 그리고 내가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고?"

강현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저기 있는 존나 큰 악어 새끼들. 10마리 중에서 3마리를 나 혼자 죽였고, 네가 그렇게 부르짖는 대전사도 내가 죽였어. 그런데 내가 놀았다는 식으로 지껄여?"

"웃기는군. 저 거대한 크로아를 너 혼자서 3마리나 처치했다고? 증거는 있나? 그리고 리자드맨 대전사는 중국의 능력자들과 싸워 지쳐있던 것을 네가 마무리한 거겠지."

"하... 진짜 말이 안 통하네."

사실 레일러는 강현의 말이 진실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아이템을 가져가는 것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것은 강현이 확실했다.

그럼에도 레일러가 강현을 몰아붙이는 이유는 하나.

'잘못하다간 놈에게 모든 성과가 넘어갈 거야.'

아이템은 한정적이고, 강현은 그 한정적인 자원을 차지할 가능성이 가장 큰 최대의 경쟁자다.

'이 정도 수준이면 메인 코어에서 제법 피해를 입겠지만... 클리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여기서 여론을 움직여 강현을 한번 몰아붙이는 게 좋았다.

'그나저나 정말 아이템을 가져간 게 누구인지 모르겠군...'

의심이 가는 것은 중국의 능력자였으나 물증이 없었다.

'됐어. 어차피 중요한 건 보스의 아이템. 그것만 가져가면 된다.'

레일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직 공략 도중입니다. 벌써 이렇게 다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중국의 장명호가 나서서 둘을 제지했다.

'이런 능구렁이 같은 새끼.'

그런 장명호를 보며 레일러가 속으로 비웃었다.

중국에서 공략 도중 내분을 일어나기를 원한다는 것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현재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저렇게 나서서 말하니 레일러 조차도 정말 환멸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한 번은 맞춰서 놀아주지.'

하지만 지금 강현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더러운 장명호의 손이라도 빌려야 했다.

"나는 이런 도둑놈과 함께 다닐 수 없어. 너희들도 그렇지 않아?"

레일러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맞아. 신뢰가 무너져서야 함께할 수 없지."

그 물음에 은연중에 강현을 견제하고 있던 능력자들이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강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공략대를 떠나라."

"뭐?"

"너희 길드원을 데리고 떠나라는 말이다. 앞으로의 공략은 따로 하는 것으로 하지."

레일러가 장명호를 바라봤다.

"그렇게 해도 문제없겠지?"

장명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요... 강현 씨에게는 죄송하지만, 모두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한 편의 잘 짜인 연극 같은 모습이었다.

"둘이 짝짜꿍이 잘 맞아서 아주 좋으시겠어."

강현의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라. 더 이상 공략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레일러가 차갑게 강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간다. 가. 가지 말라 해도 더러워서 간다. 새끼들아."

바닥에 침을 뱉은 강현이 당당하게 돌아섰다.

**

강현. 신성아. 안유성. 윤나래.

넷은 한쪽 구석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말없이 던전용 보존식을 입에 욱여넣는 이들.

그렇게 침묵의 식사가 끝나고, 참지 못한 윤나래가 입을 열었다.

"우리 큰일 난 거 아니에요!?"

윤나래의 시선은 그들과 한참 떨어진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공략대에 향해 있었다.

"뭐가?"

"우리만 따로 다니는 거잖아요!"

"그렇지."

강현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태평해요!? 방법을 찾아야 할 거 아니에요! 이게 누구 때문인데!"

"누구 때문이긴 누구 때문이야. 저 코쟁이 근육 돼지 새끼 때문이지."

"하아... 방법은 있는 거죠?"

"무슨 방법?"

"살아남을 방법이요!"

윤나래의 말에 강현이 눈을 감았다.

"딱히? 아직은 없어."

"하아... 다들 괜찮아요? 이렇게 죽을 거예요? 네!?"

윤나래가 안유성과 신성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미 상황은 벌어졌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해 봐야겠죠."

신성아가 뻔한 대답을 내놓았다.

"나쁘지 않은데요? 이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안유성은 미친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내가 다 방법이 생각해 뒀어. 그러니까 그만 좀 찡찡대."

강현의 말에 윤나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역시 우리 길드장님! 다 생각이 있었던 거죠!?"

"그래그래. 그러니까 닥치고 쉬어."

강현이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윤나래는 절박했다.

"혹시 위대한 길드장님의 계획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러자 누워있던 강현이 몸을 일으키며 윤나래에게 다가왔다.

"잘 들어. 중요한 거니까."

"네!"

강현이 몸을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일단 저놈들 몰래 뒤를 따라가."

"네. 그리고요?"

"저놈들이 메인 코어 쪽으로 계속 갈 거 아냐?"

"그렇겠죠!"

"그러니까 몰래 따라가다가 저놈들이 메인 코어에 도착하면, 우리도 합류하는 거야."

"끝?"

"뭐가 더 필요해?"

"시발... 끝났네..."

"뭐? 뭔발? 너 지금 뭐라 했냐?"

강현이 벌떡 일어났다.

"어휴... 내 인생. 꽃다운 스물둘에 이렇게 가는구나. 멍청한 길드장 만나서 이게 무슨 꼴이래..."

강현의 인상이 흉악하게 일그러졌으나 윤나래는 전처럼 두려워하지 않았다.

"뭐 어쩔 거야. 때리게? 때려! 어차피 죽을 건데 좀 맞으면 어때."

"그래. 어차피 죽을 건데. 그냥 지금 죽어라."

"아아악! 미안! 아니 잘못했어요! 아악! 아파! 아프다고!"

"아프지 말고 그냥 죽어!"

윤나래에게 헤드록을 걸며 강현이 생각에 잠겼다.

'어떡하지.'

농담처럼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모두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

'어떻게든 버텨봐야지.'

자신은 죽더라도 부활하지만, 여기 있는 길드원들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들을 살리라 다짐하며 강현이 더욱 팔에 힘을 주었다.

"아아아악! 머리 깨진다고!"

171화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3)

171.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3)

며칠이 흘렀다.

공략대는 메인 코어를 향해 나아가며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다.

가장 선봉에서 많은 적의 시선을 끌던 배데스 길드가 없었던 탓일까.

이전보다 더욱 많은 능력자가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대부분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의 능력자들.

'잘 됐어. 놈들의 머릿수가 더 줄어야 편해.'

소규모로 공략에 참여한 능력자들은 이 상황을 오히려 반겼다.

위의 세 국가는 대규모로 온 만큼 아이템을 가져갈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전력에는 그다지 도움도 되지 않는 녀석들이 아이템을 차지해서는 곤란하지.'

그렇게 메인 코어에 도착했을 때 남은 능력자는 약 260명.

처음 출발했던 400명보다 숫자가 줄어 불안할 법도 했건만, 그런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의 머릿속에는 그저 얼른 공략을 끝내고 아이템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각자가 다른 마음을 품으며 메인 코어 공략 회의가 시작됐다.

**

"메인 코어가 코앞입니다."

높은 바위에 올라선 장명호가 공략대를 바라봤다.

"던전의 보스는 지금까지 만난 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놈의 마법을 조심하십시오. 그 누구든 그것에 당한다면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장명호의 말은 진심이었다.

비록 장명호가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지고 이곳에 왔다고는 하나, 그도 던전을 공략하는 능력자다.

아직도 놈에게 당하던 수많은 동료의 얼굴이 생생했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원거리에서 사용하는 광역 마법입니다. 정확한 거리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3km가 넘는 거리에서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정도 거리에서 사용하는 마법이 위협적이란 말인가?"

장명호의 설명에 한 능력자가 의문을 표했다.

애초에 마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멀리 날아갈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일반적으로 마법 공격은 빠른 편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화살도 눈으로 보고 피하는 능력자들에게 먼 거리에서 날아오는 마법은 일부러 맞으려고 해도 당하기 힘든 공격인 것이다.

"놈의 마법은 기존의 것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게."

"가장 위험한 것은 하늘에서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대규모 마법입니다. 한 번에 대략 반경 500m 이상이 초토화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뭐?"

장명호의 설명에 능력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과장이 지나치군."

국제경기 기준 축구장의 넓이는 대략 7,000m²전후이다.

반경 500m의 면적은 785,000m²으로 어지간한 축구장 백 개 정도의 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껏 그만한 범위를 공격하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에라도 그런 범위를 공격할 수 있더라도, 범위가 넓어지면 그만큼 위력이 약해지는 것이 순리다.

"농담이 아닙니다. 만약 놈이 마법을 전개하면 모두 흩어져야 합니다. 중심부에서 최대한 벗어나는 것. 그것이 유일한 살길입니다."

장명호가 심각하게 말하자 몇몇 능력자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왜 그걸 이제야 말하는 거야!? 그런 정보는 공략 전에 전해줬어야지!"

"맞아.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

능력자들이 반발하자 장명호가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다들 진정하시죠. 사실 놈의 마법에 당하지 않을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도 이 공략에 참여하지 않았을 겁니다."

장명호의 말에 그제야 능력자들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 방법이란 게 뭐요?"

"메인 코어에는 보스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숫자의 리자드맨 전사들도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빠르게 놈들에게 접근해서 난전을 유도해야 합니다. 아군과 적군이 섞이면 놈은 절대로 광범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뻔한 이야기군. 그렇다면 놈들에게 접근하는 동안은 마법에 노출되지 않소?"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부터 흩어져야 합니다. 사방에서 신전을 향해 달리면 놈의 광역 마법에 당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일 테니까요."

"결국, 운에 맡기자는 거군..."

"다른 수가 없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흩어진다는 것이 위험하기는 했지만 뭉쳐 있다가 한 번에 마법에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장명호가 능력자들에게 상세한 계획에 관해 설명했다.

"이제 여기서부터 각자 이동해서…."

그렇게 모든 계획을 전달하고 움직이려는 찰나, 머리 위에서 소름이 끼치는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젠장! 흩어지십시오!"

장명호가 외치며 먼저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냐고!"

"신전은 보이지도 않는데!?"

당황한 능력자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당장 흩어져서 마법에 대비하십시오! 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마법이 시작됐다.

고개를 들자 하늘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쿠르르릉!

벼락이 치는 것과 같은 굉음이 일고, 빛이 떨어졌다.

-콰아아앙!

능력자들이 있던 장소에 떨어진 빛은 사방으로 폭사되며 모든 것을 파괴했다.

무려 반경 500m를 넘어서는 거대한 범위에 내려앉은 마력 폭풍.

단 한 번에 중국의 능력자 수백을 죽인 끔찍한 마법이 다시 한번 위력을 과시했다.

**

숲 한가운데에 있는 드넓은 평야.

그곳에는 높이가 100m는 넘을 듯한 거대한 신전이 지어져 있었다.

언뜻 보면 지구의 피라미드와 비슷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크르르..."

신전의 중심부에 위치한 홀.

한 리자드맨이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력에 인상을 찌푸렸다.

놈의 정체는 바로 리자드맨 대제사장인 '코시크'.

다른 동족보다 몇 배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리자드맨이었다.

놈이 앉아 있는 화려한 의자는 탄탄한 근육 대신 비대한 살집에 짓눌려 당장에라도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전쟁을 준비해야겠군."

이전에도 인간들의 군대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숫자가 훨씬 적었으나, 강한 적들이 제법 포함된 것 같았다.

"전사들을 내보내라."

"예."

코시크의 말에 리자드맨들이 고개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코시크가 육중한 몸을 의자에 기대며 옆에 놓인 지팡이를 쥐었다.

그러자 의자가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곳인가."

하늘을 날아 신전 꼭대기에 오른 코시크가 숲의 한 지점을 응시했다.

"멍청한 놈들."

저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코시크의 몸에서 대량의 마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죽어라."

**

먼지가 내려앉고 살아남은 능력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켈록, 켈록..!"

"으으... 다들 괜찮아?"

레일러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젠장! 리지가 당했어."

"제이미! 정신 차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수많은 능력자들이 죽거나 행동불능에 빠졌다.

평균적인 실력이 낮은 중국과 러시아, 북한의 능력자들은 더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하아... 미리 알고 대비했는데도 이 정도 피해인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비록 갑작스럽게 벌어지기는 했지만, 이들은 모두 엘리트들이다.

세계 최고의 능력자들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 마법을 막아냈음에도 그저 피해를 줄이는 것에 그쳤다.

"시간이 없습니다! 놈이 다음 마법을 사용하기 전에 접근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린 장명호가 외쳤다.

"젠장! 전부 달려!"

"이게 무슨 꼴인지!"

엉망진창이 된 갑옷을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능력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신전이 보인다!"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간 능력자들은 금세 거대한 신전을 발견했다.

"이번에도 물량전인가?"

신전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리자드맨들이 보였다.

지금까지 나온 숫자만 해도 족히 이천은 넘어 보였다.

"어차피 숫자가 얼마가 되든 상관없어!"

여기 모인 능력자들에게 리자드맨의 숫자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그저 조금 피곤할 뿐.

비록 처음 기습으로 피해를 보았다고 해도 놈들에게 당하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던전의 보스.

"저놈이 보스군."

엄청난 체구를 지닌 리자드맨이 의자에 앉은 채로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접근해서 보스부터 처치해야 돼!"

아무래도 후방에서 지원하는 형태의 보스일 확률이 높았기에, 공략대는 빠르게 접근해서 보스를 처치하기로 했다.

"캬아아아!"

"콰륵! 콱!"

공략대를 발견한 리자드맨 군단도 마주 달려오기 시작했다.

육중한 무게의 리자드맨 수천이 한꺼번에 달려오자 땅이 흔들렸다.

"지금이야! 모두 마법을 날려!"

범위 마법을 지닌 능력자들에게는 지금이 최고의 기회였다.

복수의 시간.

능력자들이 이를 꽉 깨물며 자신의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마법들을 사용했다.

-콰아앙! 콰앙!

리자드맨 진영에 폭발이 일어나고, 불꽃이 휘몰아쳤으며, 뇌전이 놈들의 몸을 새까맣게 태웠다.

순식간에 수백의 리자드맨들이 쓰러지고, 놈들이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을 아끼지 마! 어차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난전이 벌어지면 마법 사용이 까다로워지는 것은 보스뿐만이 아니라, 공략대도 마찬가지다.

능력자들은 지금 모든 것을 쏟아부을 작정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땅이 갈라지고, 눈보라가 일며 리자드맨 군단의 진군이 더 늦춰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학살에 놈들의 눈에 공포가 일기 시작했다.

"별거 없잖아!?"

"이대로 보스까지 밀어버리자!"

능력자들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쿠룩, 콰리아!

신전의 꼭대기에 있던 보스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동시에 모든 리자드맨의 눈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침을 흘리며 광기에 젖어가는 눈동자.

이성과 두려움을 동시에 날려버린 놈들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젠장! 부딪힌다. 전부 대비해!"

리자드맨 부대와 능력자들이 격돌했다.

**

"음흠~ 맛있겠다. 아! 소금을 가져오는 건데."

같은 시각.

강현 일행은 숲 한가운데서 바비큐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햐아! 고기 빛깔 죽인다."

던전 보존식에 질려있던 강현은 숲에서 사냥한 동물을 손질해서 불에 익히고 있었다.

"강현 님. 괜찮겠습니까? 아무래도 이건 좀..."

"뭐 어때? 너도 봤잖아. 쟤들은 우리한테 관심 없어."

"그건 그렇지만..."

지난 며칠 동안, 일행은 속된 말로 꿀을 빨았다.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4명의 인간.

리자드맨은 그런 일행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대규모 군대들은 모조리 수백 명의 능력자가 있는 본대를 향해 달려갔다.

간혹 리자드맨을 마주치는 경우가 있었지만 거의 소규모 무리.

그 정도는 강현 혼자서 식후 운동으로도 처리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야야! 얼른 먹자. 다 익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푹 쉬며 잘 먹은 일행은 그사이 살이 조금 찐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놈들이랑 떨어져 나온 게 이렇게 개꿀일 줄 누가 알았겠냐."

"그러게요. 아, 이거 뭐야? 완전 연하고 부드러워!"

강현이 구운 고기를 먹은 윤나래가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보통 야생의 동물을 잡아먹으면 질기고 누린내가 나기 마련인데, 전혀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고기 굽기 경력이 얼마인데? 이쪽 분야에서는 어지간한 전문가보다 낫다 이거야."

그렇게 포식을 한 일행이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

지저귀는 새소리.

가끔 불어오는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

"이게 신선 놀음인가."

모닥불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드러누워 있던 일행은 점차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일단 한숨 자고 이따가..."

그렇게 모두가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땅이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시발! 뭐야!?"

깜짝 놀란 강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이네요. 거리랑 마력을 계산했을 때, 아마 메테오 수준의 마법이 떨어진 것 같아요."

윤나래가 소리와 마력을 가늠하며 말했다.

"하아, 휴식은 끝났나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현이 몸을 풀었다.

"전부 준비됐냐?"

강현의 말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너무 기다려서 지루하던 참이었어요."

모두가 힘차게 대답하자 강현이 만족한 듯 씨익 웃었다.

"그럼, 가자."

172화 거짓의 대가(大家)(1)

172. 거짓의 대가(大家)(1)

판타지 세계의 전쟁.

거대 괴수.

화려한 마법.

강철로 무장한 사람들.

이것들은 모두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가상의 세계에서나 그렇다.

실제로 눈앞에서 바라보는 폭력과 죽음은 너무나도 무겁고, 지켜보는 이를 압도한다.

"장관이네."

그것을 바라보며 강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구경할 때에요?"

"아니, 얼른 가야지."

강현이 멀리 있는 신전의 꼭대기를 바라봤다.

"저놈이 보스 같지?"

강현의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런 건 보스 목만 따면 끝나는 게임이거든. 잔챙이들 상대해 봤자 영양가가 없어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강현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날아서 간다!"

"날아서요?"

"그래! 한 번에 보스한테 붙어서 접근전으로 처리하는 거지. 보스가 마법사라면서? 그러면 거리를 주면 안 돼! 단숨에 붙어서 순식간에 처리해야 한다고."

"훌륭한 계획입니다."

신성아는 무조건 강현이 옳다는 듯 흐뭇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뭐, 나쁘지 않네요."

윤나래도 이번에는 강현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동의했다.

"저기 봐! 공략대에도 똑똑한 사람이 하나 있었네."

그때 강현과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허공을 날아가고 있는 능력자가 보였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 돼."

그 순간.

-위이이이잉... 콰아앙!

"응..?"

보스에게서 쏘아진 거대한 마력빔이 능력자를 강타했다.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재로 흩어져 사라지는 능력자를 보며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어... 그냥 뛰어가자."

"그게 좋겠네요."

"저는 원래 고소공포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날아가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

전장 속으로 들어온 일행을 리자드맨들이 거친 공격으로 화답했다.

"이것들 왜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있어!?"

눈이 붉게 빛나는 리자드맨들은 지금까지 봐왔던 것보다 훨씬 포악하고 강력했다.

"보스한테서 주기적으로 마력이 발산돼서 놈들에게 스며들고 있어요. 아마 일종의 버프 같아요!"

윤나래의 대답에 강현이 인상을 구겼다.

"무슨 버프를 수백, 수천 마리한테 걸어? 사기 아니야!?"

심지어 보스는 버프를 걸면서 간간이 공격 마법을 날리기까지 했다.

"이대로는 답이 없어. 무조건 이것들을 제치고 보스한테 가야 돼!"

당연한 말이었다.

"어떻게 갈 건데요!?"

하지만 지금까지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고전하던 공략대는 바보가 아니다.

공략대도 진작부터 보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강현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는 상황이었다.

"강현님. 계획이 있습니까?"

"힘으로 밀어붙이는 거지!"

계획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어떻게 힘으로 밀어붙일 건데요!?"

윤나래가 앙칼지게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전부 내 뒤로 바짝 달라붙어!"

강현이 필시언의 해머를 최대 크기로 키웠다.

"윤나래! 버프!"

'웨인의 비기'와 '거인의 힘'을 활성화하고, 추가 버프까지 받은 강현.

그러자 단숨에 강현의 근력이 110까지 치솟았다.

"크으으으!"

이번에 '전사의 마지막 불꽃'을 착용해서 근력이 늘어난 이후, 신체의 부담이 훨씬 커져 버렸다.

"좋았어!"

대신, 그만큼 강한 힘을 손에 넣기도 했다.

"달린다! 알아서 따라와!"

"예?!"

뜬금없는 강현의 말.

그러나 일행은 금세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케에엑!"

"카륵! 크루악!"

강현은 엄청난 무게의 해머를 앞세워 앞을 막아서는 리자드맨들을 박살 내며 달려갔다.

해머에 부딪히는 리자드맨이 전치 12주 이상의 골절상을 입으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크하하하! 이대로 보스까지 직진이다! 다 죽여!"

"아아악! 천천히 좀 가요!"

강현이야 달리면 그만이었지만, 뒤따르는 일행은 죽을 맛이었다.

양옆에서 날아드는 리자드맨들을 쳐내며 일행이 빠르게 강현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빠르게 보스에게 가까워지던 그때.

"멈춰요!"

윤나래가 갑자기 소리쳤다.

"뭐야? 왜!?"

흐름을 방해하는 윤나래에게 강현은 짜증이 났으나, 금세 그 이유를 깨닫고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보스가 이쪽을 보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달리느라 몰랐는데, 앞쪽에서 엄청난 마력이 모이고 있었다.

"온다! 전부 준비해!"

아무래도 목표는 자신인 것 같았다.

"전부 내 뒤로 바짝 붙어. 윤나래 실드 전개해!"

강현의 말에 윤나래가 당황했다.

"막을 수 있지?"

"저걸요!?"

조금 전 능력자 한 명을 흔적도 없이 날렸던 마법을 떠올린 윤나래가 질겁했다.

"몰라! 나도 같이 막을 테니까 해봐! 못하면 죽는다!"

강현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거대한 마력빔이 일행에게 쏘아졌다.

-콰가가가가가!

총알처럼 빠르게 날아온 마력빔이 일행을 덮쳤다.

필시언의 해머를 앞세운 강현의 몸이 쉴 새 없이 뒤로 밀렸다.

"끄으으읍!"

윤나래 또한 입에 마력 포션을 문 채로, 자신의 펼칠 수 있는 가장 강한 마력 실드를 전개했다.

"크흐으..."

영겁과도 같았던 몇 초가 흐르고, 마침내 마법이 그들을 지나쳤다.

"아이고, 삭신이야!"

온몸의 근육과 뼈가 비명을 내지르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려 일행을 확인하자 허겁지겁 마력 포션을 마시고 있는 윤나래가 보였다.

"나도, 나도!"

강현이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크흐... 전부 할만하지?"

"할만하기는 무슨, 죽겠어요..."

윤나래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똑같은 짓을 한 번만 더했다가는 마력 회로가 망가져 한동안 마법을 쓰지 못할 수도 있었다.

"괜찮으면 다시 가야지!"

강현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강현이 몸을 추스르자마자 다시 보스를 향해 달리려 할 때였다.

"강현 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뭐야? 왜 그래?"

"1분. 아니, 30초만 주십시오."

갑작스러운 신성아의 요청.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지만 강현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신성아 지켜!"

신성아의 주위로 모여든 일행이 달려드는 리자드맨을 막아냈다.

"후우..."

신성아는 활을 든 채로 무언가를 노려보며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며 몸에서 마력이 조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연습한 건가...'

그것을 본 강현이 작게 감탄했다.

신성아는 일행에서 유일하게 마력에 대한 재능이 없었다.

그 때문에 무기에 마력을 실지 못해 위력적인 측면에서 너무 뒤처져 있었는데,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마력의 양이 너무 부족해.'

노력은 좋았지만, 이제 와서 고작 마력을 실은 화살로 전황을 바꿀 수 있을 수는 없으리라.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줄게요."

그때 윤나래가 신상아의 옆으로 다가가더니 자신의 마력을 흘려 넣었다.

"야! 그거 함부로 하면 안 돼!"

두 마력이 섞이는 순간 몸속이 엉망진창이 될 수 있다.

강현이 비슷한 방법으로 수많은 적을 처치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집중해야 하니까! 조용히 해요!"

하지만 윤나래는 자신의 마력을 전혀 위화감 없이 신성아가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데에 성공했다.

"됐습니다!"

신성아의 오케이 사인과 동시에,

-피슉!

푸른 화살이 쏘아졌다.

마력을 응집된 화살은 그대로 보스의 몸에 박혔다.

"하아, 하아..."

신성아는 단기간에 한계를 넘어서는 집중력을 발휘한 탓인지 상당히 지쳐 보였다.

하지만 강현은 고작 화살 하나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 순간,

"크어어어어어!"

보스가 비명을 토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

대제사장 코시크.

다른 리자드맨 보다 비대한 몸집을 가진 탓에 굼떴지만, 두 개의 눈동자만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전황을 파악했다.

"실력이 제법이군. 하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리자드맨 군단에게 주기적으로 광포화를 걸어주고, 여유가 생길 때마다 능력자들을 저격했다.

"날파리 같은 놈."

한 인간이 겁 없이 공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위이이잉!

코시크는 강력한 저격 마법을 사용해 단숨에 목표물을 제거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군."

처음에는 조금 선전하는 것 같았으나 결국은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놈들은 감히 성지에 들어온 대가를 목숨으로 치르리라.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새로운 인간인가."

어디선가 나타난 4명의 인간들.

놈들은 순식간에 진형을 붕괴시키며 무서운 속도로 접근했다.

"인간. 비장의 한 수를 숨겨놓았군."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지만 가장 선두에 있는 인간이 상식을 초월하는 괴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놈들이 접근한다고 해서 자신이 당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변수는 미리 싹을 잘라내는 것이 좋았다.

-위이이이잉...

코시크가 조금 전 하늘을 나는 능력자를 저격했던 마법을 준비했다.

단, 이번에는 훨씬 더 많은 마력을 모은 상태였다.

"죽어라."

-콰아아아앙!

보랏빛의 마력빔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놈들에게 직격 했다.

코시크는 굳이 놈들의 죽음을 확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다시 시선을 돌리고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광포화 시간이 끝나가는군."

반복적으로 광포화를 걸면 마법이 끝난 후에 강한 부작용이 생긴다.

자칫하면 백치로 변해버리거나, 불구가 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대체할 전사들은 얼마든지 있었기에 코시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전사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은 영광이지."

그렇게 마력을 모아 다시 광포화를 발현하기 직전,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날아들었다.

코시크는 항상 주변에 마력 실드를 두르고 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음?'

하지만 예상과 달리 화살은 부드럽게 마력 실드를 지나쳐 코시크의 허리에 꽂혔다.

바늘로 살짝 찔린 듯한 따끔함.

'지금은 화살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어차피 대수롭지 않은 피해였기에 무시하고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그때 코시크의 입에서 울컥 피가 토해졌다.

'이런...!'

화살이 정확히 마법이 쏘아지기 전 마력이 뭉쳐 있던 장소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마법을 사용하기 직전에 마력이 심하게 뒤엉킨 탓에 마력을 순환시키는 회로 몇 군데가 터져버렸다.

"크아아아아아!"

몸속에서 느껴지는 강한 고통에 코시크가 괴성을 내질렀다.

"대제사장! 괜찮으십니까!?"

코시크의 주변에 있던 주술사들이 다가와 코시크의 몸을 살폈다.

"놔라!"

코시크는 거칠게 몸을 흔들어 주술사들을 뿌리쳤다.

"어떤 놈이 감히!"

빠르게 주변을 확인하자, 조금 전 자신에게 다가오던 4명의 인간이 보였다.

"아직 살아 있어!?"

어떤 방법을 쓴 것인지 자신의 마법을 맞고도 서 있는 인간들.

심지어 그다지 피해를 입은 것 같지도 않았다.

"크르르..."

코시크의 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잔재주 하나는 인정해주마."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코시크가 주술사들을 불렀다.

"저기 있는 인간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처리해라. 동족의 피해는 신경 쓰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코시크의 명령에 5명의 주술사가 강현 일행을 향해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코시크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콰륵! 하필이면 그 타이밍이 공격을 당하다니."

평상시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한심한 수준의 공격.

그러나 노린 것인지 화살은 정확히 대규모 마법이 발현되기 직전에 공격이 날아왔다.

때문에 자신의 마력이 날뛰게 되며 결과적으로 코시크의 내부는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상태였다.

"크르르르..."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최소 하루.

길면 며칠은 집중 치료를 하며 요양해야 할 상처.

하지만 자신은 위대한 크록타를 모시는 대제사장이다.

마력을 정밀하게 움직이며 치료를 반복하자 금세 내부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불과 3분도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상처를 회복한 코시크가 인간들을 바라봤다.

"아직도 살아 있는가."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강한 놈들입니다."

주술사들에게 처리를 맡겨 놨건만 되레 당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비켜라. 내가 직접 끝내지."

거의 500m 앞까지 접근한 인간들.

코시크는 놈들에게 쉴 새 없이 마법을 날렸다.

-콰앙, 쾅! 콰르릉!

감히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 놈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마법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불과 번개, 칼날과도 같은 바람.

수많은 종류의 마법들이 정신없이 인간들을 덮쳤다.

"아직도 살아 있나?"

그러나 인간들은 끈질기게 버텼다.

분명 상처 입고 지친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땅 위에 오롯이 서 있었다.

"재미있군. 이것도 버틸 수 있나 보겠다."

코시크가 마무리를 할 생각으로 마력을 모았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마력량.

인간들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마법이 실현되기 직전.

"잠깐-!"

인간이 엄청난 목청으로 소리쳤다.

코시크는 신경 쓰지 않고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크록타의 유산이 숨겨진 곳을 알고 있다!"

자신의 염원. 아니, 모든 리자드맨들의 오랜 숙원.

그것이 인간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173화 거짓의 대가(大家)(2)

173. 거짓의 대가(大家)(2)

"하아, 하아..."

숨을 헐떡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주위를 가득 메우던 리자드맨들은 사지가 터지고 찢겨나간 채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미친놈. 동족까지 싸그리 날려버리네."

그들은 대부분 같은 동족인 보스 코시크에게 당한 것이었다.

신성아의 공격에 맞고 잔뜩 화가 난 코시크가 강현의 인근을 미친 듯이 마법으로 폭격했기 때문이다.

"괜찮냐?"

강현의 물음에 윤나래가 풀썩 쓰러졌다.

"으으으..."

대부분의 마법을 혼자 막아낸 윤나래는 정상이 아니었다.

잠깐 사이에 주변에 굴러다니는 마력 포션만 10병 이상.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해.'

강현이 고민하던 때였다.

"우라아아아아-!"

코시크가 엄청난 굉음을 토해냈다.

거대한 함성에 마치 숲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러자 단숨에 모든 리자드맨이 행동을 멈추고, 일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영문을 모르고 이곳을 바라봤다.

"유물이라니... 무슨 소리냐?"

그러한 상황에, 코시크가 말했다.

'다행이야. 먹혀들었어.'

정신을 차린 강현이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귀머거리냐! 크록타의 유산이 어디 묻혀있는지 내가 안다고 인마!"

물론 모른다.

그저 상황이 급박해지자 올리엔이 했던 말이 떠올랐을 뿐이다.

-대륙 어딘가에는 크록타의 숨겨진 유물이 있대요.

-모든 리자드맨들이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들을 떠올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외쳤는데, 다행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인 탓에 앞으로의 계획이 없었다.

'일단 입을 털자.'

강현이 코시크를 바라보며 웃었다.

"네가 모시는 위대한 신. 크록타의 유산! 어디 있는지 알고 싶잖아?"

강현의 말에 코시크가 빤히 강현을 쳐다봤다.

마치 강현이 정말 진실을 알고 있는지 확인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강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주먹이 절로 쥐어지는 긴박한 상황.

강현이 재빠르게 주변을 살펴봤다.

'이길 수 있나?'

놈은 강하다.

외관은 리자드맨인지 살찐 오크인지 분간이 안 갔지만, 마법 실력 하니만큼은 진짜였다.

강현이 지금껏 만난 적 중에 가장 강했던 바노 쿨사.

대제사장 코시크는 그 바노 쿨사 보다도 더 윗급인 것이 분명했다.

'성아가 한 방 먹이긴 했지만 벌써 치료는 끝난 것 같고, 반면 이쪽은... 전멸이네.'

신성아의 공격에 잠깐 타격을 입은 것 같았으나, 그게 끝이었다.

놈은 여전히 건재했고 강현과 일행은 모두 지친 상태.

이쪽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하고 있는 공략대의 상황도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았다.

'시간을 벌어줬으면 제발 뭐라도 해라 새끼들아!'

속으로 수백 번은 외쳤으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네놈. 거짓이라면 곱게 죽지 못할 거다."

마침내 코시크가 내뱉은 말.

'걸렸어.'

강현이 씨익 웃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네가 확인해 보면 알겠지."

"인간. 당장 유산이 어디 있는지 말해라."

"말하면 죽을 거 아냐?"

"말하지 않아도 죽는다."

"죽여봐. 그럼 유산은 평생 못 찾을 테니까."

강현이 말을 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뭔 줄 아냐?"

코시크가 자세히 보려 하자 강현이 재빨리 그것을 품에 숨겼다.

"지도야 인마. 지도."

"그게 유산의 위치가 숨겨진 지도라는 것인가."

"그래. 이게 그 소중한 보물 지도라고. 어때? 갖고 싶지? 응?"

그때 안유성이 다가와 강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형. 그거 던전 보존식 포장지잖아요."

"제발! 닥쳐!"

"크큭, 알겠어요. 표정 풀어요."

강현을 놀리는 것이 제일 재미있는 안유성이었다.

'이 미친놈은 목숨을 걸고 장난을 치네.'

어쨌든 안유성의 말은 사실이었다.

강현이 꺼내 든 것은 던전 보존식을 포장하는 포장지였다.

그 사실을 모르는 코시크는 진지하게 포장지를 보며 고민했다.

'인간 놈의 말이 사실인가...'

저것이 정말로 유산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 게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을뿐더러 인간이 그것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더욱 작았으니까.

하지만 정말이라면?

만약에라도 저 인간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렇다면 자신의 손으로 종족의 위대한 숙원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코시크는 신중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놈들은 독 안에 든 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인간을 구슬려 지도를 빼앗냐는 것이다.

"네 손에 든 게 지도라는 것을 어떻게 믿지?"

코시크의 말에 강현이 웃었다.

"믿기 싫으면 말던가. 그런데 장담하지만, 너희 종족은 이 지도가 없으면 크록타의 유산은 영원히 찾지 못할 거다. 영원히."

"흥! 허튼수작이군."

코시크가 코웃음을 쳤다.

"믿든지 말든지. 시발."

그러자 강현이 다시 종이를 꺼내 꾸깃꾸깃 구기기 시작했다.

강현의 손안에서 뭉쳐져 동그란 공처럼 변해가는 종이.

코시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뭐하는 짓이냐! 네놈, 설마...!?"

지도를 동그랗게 뭉친 강현이 하늘을 바라보며 전력으로 그것을 집어 던졌다.

"윤나래! 날려!"

단번에 의미를 파악한 윤나래가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켜 종이를 더욱 멀리 날려 보냈다.

"안돼-!!! 모두 움직이지 마라!"

천둥처럼 터져 나오는 코시크의 고함.

동시에 강현이 분노의 사자후를 사용했다.

"지금이야! 전부 조져!"

**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보스가 포효함과 동시에 모든 리자드맨이 갑작스럽게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한 보스.

"저거 강현 아니야?"

누군가 한 말에 능력자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정말이잖아? 저놈이 어떻게 저기 있는 거지?"

"아직 살아 있었어!?"

"모두 조용히 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능력자들이 소란스러워지자 레일러가 큰소리로 외쳤다.

"저놈이 뭘 했든지 간에 리자드맨들이 행동을 멈췄어.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야 해."

레일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끊임없는 물량과 보스의 강력한 마법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이대로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체력과 마력이 바닥나 죽을 운명이었는데, 강현 덕분에 여유가 생겼다.

그때였다.

"신호를 보내라."

장명호가 시선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중국 길드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길드원들에게 몰래 신호를 전달했다.

'어차피 보스를 잡는 건 무리야.'

솔직히 말하면 잠깐이지만 보스를 이기지 않을까 생각했다.

타국의 능력자들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메인 코어를 부숴야 한다.'

이대로 공략대가 전멸하면 그것만으로도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상의 목표를 위해서는 코어를 부숴야 한다.

'타국의 공략대는 전멸하고, 중국의 A등급 던전은 클리어되는 거지.'

던전 밖에는 중국의 군대가 대기하고 있다.

아무리 보스라고 해도 현대 무기의 집중포화를 견디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 몬스터의 숫자가 조금 많다는 것이군.'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면 이 몬스터들도 밖으로 쏟아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어떡하지...'

고민하던 장명호는 결국 명령을 수행하기로 했다.

'내가 판단할 게 아니야.'

이미 정부의 연구팀들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해둔 상황이었다.

전문가인 그들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한 이상, 자신은 그저 따를 뿐이었다.

"안돼-!!! 모두 움직이지 마라!"

"지금이야! 전부 조져!"

그때 강현과 코시크의 고함이 터져 나오고, 모든 리자드맨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시작하지."

장명호와 용신 길드원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지도를 사수해라! 위대한 유산! 종족의 유산이 담긴 것이다!"

코시크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든 리자드맨들이 필사적으로 지도를 향해 달렸다.

혹여나 실수가 있으면 안 됐기에 광포화도 사용하지 않은 상황.

지속적으로 신체를 활성화시키던 버프를 받던 리자드맨들은 버프가 사라지자 그 반사작용으로 눈에 띄게 둔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죽여!"

공략대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지금 강현이 만들어준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모두가 죽는다.

"가자!"

"와아아아!"

수확의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공략대가 보스를 향해 달리며 리자드맨의 머리를 쓸어 담았다.

지금 리자드맨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가져가려는 종이가 중요하다는 것은 능력자들도 눈치로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능력자들은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대규모 마법까지 자제하며 돌진했다.

"크르르..."

어차피 같은 상황에 놓인 보스도 마찬가지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기에 불리한 조건은 아니었다.

"어서! 어서 가져와라!"

코시크가 흥분하며 의자의 팔걸이를 후려쳤다.

"대제사장님! 지도를 찾아왔습니다!"

잠시 후. 리자드맨들은 결국 지도를 가져올 수 있었다.

지도를 받아 든 코시크가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인간들이 근처까지 접근한 것이 보였다.

"지금이다! 모두 마법을 쏴라!"

이제 지도가 손안에 있었기에 더 이상 마법을 자제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마법이 사방에서 터지고, 폭음이 울렸다.

전투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코시크의 정신은 온전히 손에 들린 종이에 쏠려 있었다.

'이것이 유산이 담겨있는 지도...'

전투가 끝나고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모든 리자드맨의 숙원... 마침내 내가 이루는군.'

슬쩍 확인했는데 자신조차 모르는 생소한 문자가 적혀 있었다.

아마 위대한 크록타가 만들어낸 암호 같았다.

[정서빈 연구소장의 강력 추천 HOT! 아이템!]

-던전 스테이크 소불고기 맛-

그것의 정체를 알 리 없는 코시크가 흐뭇하게 그것을 바라봤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지도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착각이 일을 정도였다.

그런 포장지. 아니, 지도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전투를 벌이던 도중이었다.

[던전의 중심 핵(Main Core)이 제거되었습니다]

[외부로 향하는 포탈이 열립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음성과 함께 나타난 메시지 창.

"이게 무슨 소리냐...?"

코시크와 인간들 한가운데 푸른 포탈이 생성됐다.

**

중국 인민해방군 제37 집단군.

제8 장갑사단 소장 조문성.

"오늘이 며칠째지?"

"13일째입니다."

조문성의 물음에 옆에 있던 장교가 대답했다.

"예정대로라면 슬슬 밖으로 나올 때가 되었군."

"아니면 모두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장교의 말에 조문성이 고개를 저었다.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지."

"예."

중국은 이번에 최초로 A등급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중국 내 유일하게 마정석으로 장비 교체를 끝낸 제8 장갑사단의 전차들을 던전 인근에 배치했고, 외곽으로 3개의 사단을 더 배치해 밖으로 새는 적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그 외에도 탄두에 전기기기가 들어가지 않는 구식 야전포를 외곽에 배치해서 언제든지 던전 인근을 초토화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서 다른 능력자들이 휘말리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중국은 이곳에서 모든 능력자를 없앨 생각이었다.

외교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어차피 던전 안에서 생긴 일이다.

추궁하려 해도 남은 증거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 오만한 놈들도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하고 왔을 테지. 하하하!"

은연중에 중국을 무시하던 외국의 능력자들을 떠올리며 조문성이 크게 웃었다.

"소장님!"

그때 옆에 있던 장교가 벌떡 일어났다.

"던전이 열립니다!"

174화 거짓의 대가(代價)(1)

174. 거짓의 대가(代價)(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