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9)
어떻게 된 일일까.
'일단 상황을 정리해 보자.'
눈알은 움직이지 않는다.
의식도 움직이지 않는다.
일류 시절 절정에 들어가기 위해 한껏 감각을 증폭시켰던 방식을 사용해 주변을 탐사한다.
그리고, 저 뒤쪽에서 홍국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서휼 님, 시, 시키신 것은 다 했습니다. 헤헤…."
'아, 그렇군….'
나는 홍국을 이용해 서휼의 혈음계와의 연관성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애당초 홍국은 서휼에게 포섭된 시점인 것이었다.
'다른 곳으로 출타한 줄 알았는데 애당초 현음 아래에 있었고, 사축기 초기인 줄 알았는데 애당초 하계에서 기축제의를 미리 전부 지내고 와서 영력을 쌓기만 하면 되는 수준이었고, 봉명주 최하층을 규련의 눈을 피해 숨어들어 갔다고?'
도대체 이놈이 내뱉는 말과 언행 중 거짓이 아닌 게 몇 개나 될까.
나는 천량과 다른 반서파 요족들의 숨소리와 고동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홍국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서휼의 편은 아니었나….'
상황이 조금씩 파악된다.
홍국을 만난 것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천량이 병신 짓을 해서 이 시각에 규련의 농장을 호족으로 끌고 간 게 아니었군.'
아마 홍국이 천량을 옆에서 있는 대로 부추겼으리라.
그리고 서휼은 아마 규련이 이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를 쓸어버릴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굳이 규련이 와서 그녀를 기습해 짓밟은 이유, 그것은….
"…규, 선배가, 더는 필요 없나 봅, 니다?"
나는 서휼에게 목이 잡힌 상태에서, 숨을 끊어 쉬며 질문했다.
서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묻는 것에만 답하시지요."
"너무, 하시는, 군요… 규 선배는, 정말로 당신을…."
뚜두둑!
내 왼팔이 뒤로 꺾였다.
그러나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히죽 웃을 뿐이었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당신은, 마음을, 너무 쉽게 가지고, 노는 게, 아닙니까?"
"흐음… 고통을 못 느끼는 겁니까? 아니면 내성이 강한 건가…. 내성이 강한 편인 것 같군요. 역시나 당신은 너무 이상합니다."
우득, 우드득….
서휼이 내 왼팔을 아예 영력으로 으스러뜨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씨익 웃어 줄 뿐이었다.
"역시, 몇 번을 봐도 고작 50년도 안 살아온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의지력은 아니군요. 혜서 양은 고통에 내성이 전무한 수준이었는데, 그녀의 동료라는 당신은 도대체 뭐지요?"
"…너, 오혜서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뭘 했길래 고통에 내성 같은 소리가 나온단 말인가.
"별 건 아닙니다. 몇 가지 실험을 조금 했을 뿐이지요."
"…."
나는 서휼의 눈동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서휼은 그냥 내 감정을 고조시키려고 말을 던져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오혜서한테 관심이 많다는 걸 들키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차라리….
그때였다.
"서휼…."
철퍽… 철퍽….
규련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신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서휼의 일격에 멀쩡한 곳이 없더라도, 그녀는 마치 소녀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왜 그러는 거냐? 나는, 나는 너를… 사랑했는데…."
"…."
서휼은 웃음을 지으며 규련을 돌아보았다.
"당신을… 사랑했어! 좋아했어! 예, 예쁘게 보이고 싶었고, 내 좋은 점만 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만 바라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당신 손을 잡고 있으면 너무 기분이 좋았어…. 그런데 왜, 왜 나한테…."
"아, 규 선배님. 그건 말입니다…."
서휼은 나를 휙 내팽개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친절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서 규련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에게 번식 욕구가 생겨서, 저와 교미하고 싶었을 뿐이랍니다. 그것 외에는 별것이 없답니다."
"아, 아니야! 성욕 같은 게 아니야! 나는 정말로, 감정을 담아서…."
"규 선배님."
스륵….
서휼의 손이 규련의 뺨을 매만졌다.
그의 손은 점차 그녀의 턱선을 타고 내려가, 목을 어루만지고, 다시 쇄골을 만지면서 점차 내려갔다.
마치 악기를 다루는 듯이 조심스럽게.
"감정이란 건 말입니다.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서휼의 손이 규련의 가슴에 닿았다.
"이 안쪽에."
그리고 그의 손은 그녀의 가슴에서 조금 더 내려가, 규련의 늑골을 짚었다.
푸확!
서휼의 손이 우악스레 그녀의 늑골을 비집고 들어간다.
"폐 안쪽에서 이뤄지는 작용이 곧 감정입니다."
서휼은 규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외부로부터 자극이 오면, 뇌가 그를 인지하고, 횡경막이 내려가며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폐 안으로 들어간 공기의 진동을 정리해서 바깥으로 몸짓, 발짓, 시선 처리와 함께 표출하면. 그것이 바로 '감정'이라는 것이랍니다. 그게 끝이에요."
"끄헉…!"
나는 듣다 듣다 못 해 피를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개… 소리, 하지 마라…! 네가 말하는 건… 감정이 아니야…!"
"감정이 아니라니요, 이게 감정의 전부입니다."
"네가 말하는 건… 감정 연기이지, 감정 그 자체가 아니야…!"
그렇다.
그가 말하는 건 무대에 올라간 광대나 극단의 배우들이 하는 감정 연기일 뿐, 진짜 감정이 아니다!
그러자 서휼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재밌는 말씀이군요, 서 도우. 이 세상은 운명의 아래에서 이뤄지는 연극이고, 우리는 연극 안에서 연기하는 연기자들일 뿐입니다. 연기자가 연기를 하는 것이, 어째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
순간,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서휼의 모습에 괴군이 비취는 듯했다.
둘의 사상은 극단적으로 달랐다.
감정을 대하는 태도만 하여도 정반대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양극단으로 향한 두 미치광이가 향한 곳은, 어째서인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기자답게, 그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대에서 쫓겨나고 말지요. 그게,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랍니다. 규 선배님."
서휼은 딱하다는 눈빛을 띠며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정말로 그가 연기자라면 훌륭한 연기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심상은 딱딱하고 차가운 어둠이었고, 내 눈에 그는 연기자가 아닌 사람 흉내를 내는 흉내쟁이 괴물일 뿐이었다.
서휼의 손이, 그녀의 폐부터 시작하여 그녀의 몸 곳곳을 헤집기 시작했다.
"분명 당신은 쓸모가 있었습니다. 적당히 혜서 양에게 질투를 해 주고, 적당히 저를 도와주시고, 적당히 구석에서 조연의 역할에 만족하셨으면 계속 무대에 출연할 수 있었겠지만… 과하셨습니다. 혜서 양에 대한 질투였습니까? 저를 향한 소유욕이셨습니까? 어찌 되었든… 정말로 규 선배님께서 합체기 요왕이 되어 저를 차지하겠다고 하면 곤란해집니다."
"…서, 휼…."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배님.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간악한 반서파 요족들이 혈음계와 내통하여 혈음계의 마족을 이 자리에 불러낼 것이고. 당신은 그런 그들을 저지하려다 간악한 혈음계 마족에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슬픈 일이지요. 저는 연인을 잃고 슬픈 마음으로, 혈음계에 대항하고자 전 지족을 규합할 것입니다."
"서휼…."
"모두 당신이 오늘 죽음으로써 벌어질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규 선배님, 잠들어 주십시오. 지족의 광영을 위하여."
"서휼…!!"
뚝, 뚝뚝….
규련이 울음을 터트렸다.
우우웅!
그녀의 몸에서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나, 난… 너를 정말로, 정말로 사랑했어…!"
"말씀드렸잖습니까. 감정이란, 폐에서 나오는 공기의 양에 불과하다고. 아, 폐(肺)는 오행에서 금(金)에 대응되니, 어쩌면 감정은 금(金) 속성일 수도 있겠군요. 후후…."
"광한지약을, 나와 광한지약을 맺었잖아…? 나, 나는, 나는…."
혼란에 빠진 규련은 서휼을 강하게 밀쳤다.
그리고 그녀는 공황에 빠진 눈으로 한 손을 치켜들었다.
파아아앗!
그녀의 손에 찍힌 관주사자의 인장이 빛났다.
그와 동시에, 공간 균열이 열리며 목화 농장 전체가 공간 균열을 통해 시커먼 공간으로 진입하였다.
봉명주 최하층.
관주사자 규련의 관리 구역이었다.
파아앗!
그녀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봉명주 상층으로 날아가려 할 때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압박하면 이쪽으로 전송해 오실 줄 알고 있었지요."
타앗!
서휼은 그녀의 발목을 잡은 후, 다시 아래쪽으로 내동댕이쳤다.
꾸우우웅!
폭음이 울리며, 농장 전체가 우그러진다.
그리고, 나는 이를 악물며 결인을 맺었다.
기이이잉!
그와 동시에 농장 곳곳에서 빛이 번뜩이며, 괴군의 회로가 작동하고 서휼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호오, 괴뢰 회로라…. 이건 또 언제 깔아 놓으신 겁니까? 늘 궁금했습니다만, 괴군에게 제자가 있을 리는 없고, 이 회로는 대체 어디에서 익힌 겁니까? 괴군의 것과 상당히 비슷하군요."
콰드득!
그러나 서휼이 힘을 한번 주자 농장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사실상 합체기나 다름없다…!'
역시나, 천 년 후 괴군의 앞에서 사축기의 수행을 드러낸 건 그냥 내숭이었을 뿐.
실제로는 천 년이면 해룡'왕'의 칭호를 충분히 되찾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도, 도망…."
번쩍!
천량과 반서파들이 도망치려 했으나, 서휼이 허공을 움켜쥐자 모조리 으스러져 한 줌 육편이 되어버렸다.
서휼은 일어서려는 규련에게 다가가, 다시 목을 짓밟았다.
콰득!
"규 선배님께는 감사드립니다. 봉명주 최하층은 어둠의 공간인지라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제대로 신경 쓰는 이들이 없지요. 괜히 바깥에서 흔적이 남으면 그게 더 곤란하니…."
"끄…윽…!"
"그나저나 이건 또 무슨 벌레인지, 재밌는 은신술이군."
따악!
서휼이 손가락을 튕기자, 서휼의 뒤편 허공에서 유화가 튕겨 나갔다.
"호오, 그때 그 악사가 아닌가? 자네도 심족이었나? 하하, 과연 심도공법은 기오막측하군."
유화는 두 눈을 부릅뜨고 연주를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서휼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양팔이 바로 부러져 버렸다.
"…!"
"요선루에서 자네와 서 도우의 열애설이 파다하더니만, 과연 특별한 관계였나 보군. 이런 날에도 서 도우와 함께하다니…."
서휼은 유화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파아앗!
서휼과 규련 사이에, 황금빛 실 같은 것이 반짝였다.
서휼은 흠칫 몸을 떨며 규련을 쳐다보았다.
"이건…."
"광한지약, 광한지약을, 맺었잖아, 서휼…. 우리는, 우리는…."
그녀는 서휼에게 당했다는 사실에, 제정신이 아닌지 같은 말을 반복하며 공황에 빠져 있었다.
"아, 규 선배님. 아직도 뭔가 하실 마음이 있는 겁니까?"
"광한지약… 우리, 광한지약을…."
"후후, 규 선배님. 광한지약을 좋아하시는군요."
"광한지약을 맺어서, 한날한시에 죽기로…."
서휼은 미소를 지으며, 쓰러져서 혼란에 빠져 중얼거리고 있는 규련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상냥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규 선배님, 선배님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광한지약이 백홍주의 제례로 대체된 이유를…. 분명 부부가 연을 맺고, 운명의 인력을 끌어 한날한시에 죽게 하는, 조금은 무서운 비술이지요. 하지만… 광한지약은 먼 고대 적에 이미 효력을 잃은 법술입니다.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발동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진선이 아니라면 광한지약의 발동 조건은 영원히 알 길이 없지 않습니까."
우득, 우드득….
서휼은 규련의 뿔을 꺾었다.
그녀의 뿔을 손에 든 서휼은 빙긋 웃었다.
"이제 와서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술이지요. 처음 제게 광한지약을 거실 때는 무슨 비술인지 몰라 조금 당황했으나, 별로 의미도 없는 법술이란 걸 알고 나니 우스울 뿐입니다. 후후… 마치 당신 같지 않습니까, 규 선배님."
"아, 아니야… 서휼…! 서휼…! 나, 나를 버리지 마…! 나, 난 너를 사랑했어, 정말로 좋아했어… 서휼…! 난, 나는…."
그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고 있는 서휼의 얼굴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듯, 무너져 내렸다.
"자, 그럼… 아까 설명드렸듯이, 당신이 죽으면 저는 연인을 잃은 슬픔을 중심으로, 혈음계의 간악한 책략에 당한 선량한 광한계의 젊은이라는 배역을 바탕으로 지족을 규합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만 퇴장해 주십…."
다음 순간.
규련은 서휼의 말에서 도망치려는 듯이 눈물을 흘리며 아래쪽의 땅을 부숴 버리고, 시커먼 어둠의 공간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여파에 나와 유화 역시 말려들어 그녀에게 딸려 갔다.
"어딜 가십니까. 함부로 최하층에서 힘을 쓰시면…."
푸콱!
서휼이 날카로운 무언가를 날렸다.
그것은 물방울이었다.
서휼의 손끝에서 쏘아진 물방울은, 정확히 그녀의 요단을 노렸고, 규련의 요단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규련은 허공을 잡고, 공간을 벌렸다.
기기기기긱!
공간 균열이 인다.
봉명주의 최하층에서, [아래]로 향하는 입구가 열렸다.
서휼은 그녀가 공간 균열을 여는 것을 보고 쫓아오려다가, 그녀가 연 것이 어디로 향하는 균열인지를 알아본 후 산뜻하게 웃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스스로 무대를 내려가시겠다니, 훌륭한 선택입니다."
나는 규련의 영력과,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기이한 인력(引力)에 이끌려 그녀와 함께 공간 균열로 빨려 들어갔다.
공간 균열 너머,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웃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며.
동시에 전혀 웃고 있지 않은 눈으로 끝까지 우리를 관찰하며 우리의 최후를 살피는 서휼의 모습이었다.
* * *
"흐음… 서은현을 놓친 건 안타깝군. 천거자들은 뭘 하는 존재들인지 연구해 보고 싶었지만… 오혜서를 더 연구해 보면 될 일이니 아쉬울 건 없겠지. 나름 만족스럽군.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서휼은 싱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홍국이 아부하는 표정으로 서휼에게 굽신거리고 있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부 서휼 님의 작전대로 되었습지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서은현을 놔두고 가시면 그가 반대파를 결집시킬 것을 어찌 아셨는지! 반대파를 일소하고, 사악한 혈음계 마족에게서 연인을 잃으셨다는 명분을 얻으셨으니…."
"그래, 그렇지. 지금까지 자네의 공이 참 컸다네."
"아닙니다. 전부 서휼 님의 책략이 뛰어난 탓이지요. 저는 그저 말씀해 주신 대로…."
"알겠네, 혈음계의 마족으로 진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홍국은 그의 말에 뛸 듯이 기뻐하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하하, 사실 700년 전 혈음계 마족들과 싸우며 느낀 게 있습니다만, 그 혈음계 마족 놈들 참 편리하게 싸우더군요. 저 역시 그런 고명한 천마들로 진화할 수만 있다면…."
서휼이 홍국을 본체만체하며 결인을 맺자, 서휼의 반대파였던 반서파.
그들의 피륙이 서휼의 앞에 모여들며 음산한 기운을 토해 냈다.
서휼은 혈육의 기운을 모아 주문을 외웠고, 얼마 후, 혈육의 기운이 모인 덩어리 안쪽에서 시커먼 뭔가가 튀어나왔다.
"자, 받게나. 이걸 입에 넣으면 자네도 혈음계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걸세."
"아, 감사합니다. 혈음계에 가서도 서휼 님의 은혜는… 꿰에에에엑!"
그리고 다음 순간, 서휼이 건넨 시커먼 것이 홍국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꿰에에엑! 꿰에엑! 서, 서휼 님, 서휼… 님…!"
홍국은 시커먼 것을 떼어 내려 했으나 검은 것은 그의 얼굴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홍국은 비명을 지르며 혈음계에서 온 생물에게 머리가 뜯겨 나가 죽어 버렸다.
얼마 후, 홍국의 머리를 뜯어먹은 검은 것은 홍국의 머리에 안착해, 홍국의 머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그의 몸을 차지했다.
서휼은 홍국의 몸을 차지한 것에게 말하였다.
"인족 영역으로 가서, 진마계와 전쟁을 벌이고 싶어하는 인족들에게 명분을 만들어 주게나. 봉명주에서 나가서 흑룡왕께 말씀드려 흑린어령문 사람을 숙주로 구해 주지."
"알, 겠, 습니, 다."
"그리고 최하층에 힘을 써서 자네가 규 선배를 죽였다는 티를 좀 내 주게. 어차피 진룡맹 늙은이들에게 혈음계의 법술이라면 심족 급으로 기오막측하게 여겨질 테니,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혈음계의 법술만 남아 있다면 다들 그러려니 하겠지."
"명, 받드, 옵니, 다."
홍국의 입으로 어색하게 말한 그 존재는 서휼에게 예를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본 서휼은 다른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약속은 지켰네. 이제 자네가 알던 홍국은, 혈음계 마족에게 혼백마저 잡아먹혀, 죽어서도 명계에 가기 전까지는 고통을 받을 테니 충분히 잔인한 죽음이 아닌가."
그리고, 허공에서 백녕이 나타났다.
백녕은 얼마간 서휼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제 동족들을, 구해 주십시오."
"내가 언제 허언을 하는 것을 보았는가?"
"…."
백녕은 침음성을 흘리며 서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서휼은 기분 좋은 듯이 어둠 속을 바라보며 웃었다.
"실로 기분 좋은 배신자들의 밤이로군."
* * *
여긴… 어디지?
쏴아아아아―
빗소리가 들린다.
나는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하늘이 보였다.
먹장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여기는….'
어쩐지 천지영기가 희박하다.
광한계가 물속이었다면, 이곳은 진공 상태인 것 같다.
"하계(下界)…?"
나는 희박한 천지영기를 들이키며, 서휼에게 부러진 팔을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산맥만 한, 산맥만 한 거체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규련이었다.
"아…."
그녀는, 하계로 떨어지면서, 본체로 변하여 공간의 압력으로부터 나를 지켜 준 것이었다.
"규… 선배님…."
내가 그녀의 머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규련 선배님!"
그리고, 그녀의 머리가 있는 곳으로 갔을 때.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
[서휼… 서휼… 서휼….]
그녀는 혼이 나간 듯, 흐릿해진 눈으로 끝없이 서휼의 이름만을 되뇔 뿐이었다.
그리고 그마저 서휼에게 요단이 깨진 탓인지 점차 눈빛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선배님, 일단 화형을 하십시오! 화형을 하면 제가 어떻게든 상처를 봐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선배님!"
그러나 그녀의 정신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 덕인지 완전히 붕괴한 듯했다.
그녀는 끝없이 서휼을 중얼거리다, 어느 순간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규련은, 죽은 것이었다.
"선배님…."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죽은 규련의 사체를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이었다.
쩌억….
규련의 입속에서, 뭔가가 굴러 나왔다.
왈칵!
그것은 핏덩이었다.
"…!"
시뻘건 용혈 속에서, 나는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저건…."
나는 황급히 달려가 핏덩이 속에서 움직이는 것에 다가갔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것은….
"선… 배님?"
규련이었다.
전라의 형태로, 핏덩이 속에서 기어 나온 규련은 혼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서휼… 서휼… 서휼…."
"규 선배님…!"
사축기 수사부터는, 자신의 수행을 소모하여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영력은 범인과 다를 바 없었지만, 나는 일단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하며 규련을 바라보았다.
"살아 계셔서 다행…."
"서휼…!!!"
그리고, 나는 그녀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죽여 버릴 테다!!!"
뚝, 뚝….
그녀의 눈가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쏴아아아….
사방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고, 빗물은 그녀의 피눈물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녀의 절규는 마치 폭풍 속의 뇌성벽력처럼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반드시, 반드시 네놈을 죽인다, 서휼…! 너를, 너를…!"
그렇게.
이름 모를 하계의 어느 대지 위에서.
그날, 사랑하던 자에게 배신당해 마음이 산산조각 난 존재는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부르짖었다.
조각난 마음 (1)
"일단 이 옷이라도 입고 계시지요."
나는 범인 수준으로 영력이 떨어진 규련에게, 일단 내 상의를 벗어 걸쳐 주었다.
규련은 계속해서 혼이 나간 얼굴로 서휼을 죽이겠다고 중얼거렸고, 나는 일단 주변을 둘러보며 비를 피할 곳이 있는지를 찾았다.
'그리고 유화도 찾아야겠군.'
유화도 분명 같이 떨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주변에는 보이지 않았다.
규련의 본체를 넘어서자, 산악 지형으로 보이는 주변 지형이 드러났다.
나는 적당한 곳에 구멍을 뚫어 동굴이라도 만들려 산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저 멀리서 유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그녀는 하계로 내려오다가 잘못 튕겨져 나왔는지, 땅에 상반신이 처박힌 채로 하반신을 내놓고 있었다.
떨어질 때 거미줄로 어떻게 충격을 줄여 보려 했던 것인지, 그녀의 뒤꽁무니에서는 새하얀 거미줄이 울컥울컥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난 일단 거꾸로 박혀 있는 그녀를 다시 뽑아서 등에 걸쳐 맨 후, 인근 절벽으로 가 암반 동굴을 만들었다.
쿠과과광!
흑룡진혈의 힘을 드러내고 주먹을 내지르니 별 다른 힘을 들이지 않아도, 셋이 들어갈 정도의 동굴은 만들어졌다.
나는 안쪽으로 들어가 나뭇가지를 끌어모았다.
치직, 치지직!
화월입도경의 법술로 화속성 영기를 계속 불어넣자, 나뭇가지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수분이 전부 말라 버린 후에 불이 붙었다.
'다행히 법력은 축기기 수준 정도는 남아 있다.'
서휼이 그때 내 목을 조르면서 수작을 부려 놓았는지 법력이 상당히 유실된 상태였지만, 애당초 창령성광오채대법으로 단련한 내 육신은 물론이고, 내공 자체도 멀쩡했으며 유실되고 남은 법력도 축기기는 된다.
'아마 근시일 내에 경지 회복도 가능하겠어.'
"규 선배님, 이쪽으로 와 앉으시지요."
내가 불을 지피고 규련을 부르자, 그녀는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난, 규련이 아니다. 규 선배라 부르지 마라."
"예…?"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진짜 규련은 죽었다. 애당초 사축기 수준의 존재라면 죽은 이후 부활할 때 수행을 할 수 있는 몸으로 부활한다. 하지만… 보이느냐?"
그녀는 자신의 가냘픈 팔을 들어보였다.
"영기 자체가 쌓이지 않는 팔이다. 딱히 인족도 아니지만 화형체 모습으로만 살아갈 수 있고, 용족의 몸으로는 못 돌아가겠지. 그렇다고 진짜 인족이라서 천족공법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녀가 텅 빈 눈으로 불꽃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진짜 규련은, 죽으며 부활할 생각을 버렸다. 그대로 죽으려고 했고, 실제로 죽었을 테지. 나는 규련이 아니라, 그녀가 남긴 찌꺼기에 불과하다."
히죽, 히죽….
그녀는 입꼬리를 억지로 울리며 음울하게 말했다.
"사축기 수사쯤 되면, 그 생명력이 너무 강해져서 설령 부활을 원하지 않았더라도… 죽어도 나 같은 찌꺼기가 생겨나는 법이지. 진짜 규련이 죽어 가며 남긴 응분과 분노, 절망과 배신감이 나를 만들었다. 나는 분명히 규련이 아니고, 그 찌꺼기에 불과해…."
허탈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물었다.
"그럼, 어찌 불러 드려야겠습니까."
"…규련의 넋이니, 규백이라 불러라."
"예, 규백 님."
규백은, 그 말을 한 후 멍하니 불꽃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심상은, 현재 제대로 읽기가 힘들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나는 일단 그녀를 두고, 유화에게 다가갔다.
유화의 상반신에 난 자잘한 상처들을 법술로 씻기고, 생명력을 활성화해 주는 법술을 걸어 주었다.
직접 치료를 해 주면 좋겠지만, 그녀는 인간의 몸이 아닌 반인지주의 몸이었기에 경락이나 혈맥이 인간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고, 딱히 뭔가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 본연의 생명력에 치유 효과를 기대하기로 하며, 생명력을 활성화시키는 법술을 걸어 줄 뿐이었다.
* * *
비가 그치고, 며칠이 지났다.
나는 유화를 간호하고, 희박한 영기나마 끌어모으며 다시 수행을 되찾았다.
선각후통은 몇 번이고 해 왔던 수행법이기에, 희박한 영기로도 빠르게 수행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진법으로 주변 지형의 용맥을 끌어와 흡수하며, 결단기까지 수행을 되찾았다.
결단기까지 돌아오자, 유화 역시 의식을 차렸다.
"…여기는, 어디죠?"
"하계인 것 같소."
"하계… 어떤 하계인가요?"
어떤 하계냐니?
내가 의아해할 때, 유화가 다시 질문했다.
"성계(星界)와 부해계(腐骸界). 둘 중 어떤 곳인지 여쭤본 것입니다."
"아… 그건 잘 모르겠소만."
"저도 광한계 출신이라 하계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부해계는 위로 올라가면 하늘이 막혀 있고, 성계는 끝없이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번 확인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알겠소."
나는 아직도 늘어져 있는 유화를 뒤로하고 동굴에서 나왔다.
'어디, 한번 올라가 볼까.'
으스러졌던 팔은 결단기에 오른 후 전부 회복되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
'답천!'
파아앗!
무형검이 전신과 융화되며, 나는 무형검과 하나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비둔술을 섞어 날아오르니, 나는 어지간한 원영기 수사들보다도 빠르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점차 공기가 희박해졌다.
하지만 결단기 경지를 되찾은 내게 공기의 유무는 별 상관이 없었다.
구름을 뚫고, 더더욱 먼 하늘로 올라가며,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아…."
공기가 완전히 없어지고, 소리가 삭제된다.
그리고 마냥 파랗던 하늘은 어느새 새까만 밤처럼 검게 덧칠된다.
"후우…."
봉명주 최하층보다는 덜하지만, 상당한 추위가 몸을 엄습했다.
그리고 동시에.
파아앗!
나는, 우주(宇宙)에 진입하였다.
"이곳이… 성계…!!!"
나는, 지금까지 봐 왔던 평평한 땅이 아닌, 드디어 나에게 '익숙한' 세계에 왔음을 깨닫고 희열에 차 소리쳤다.
저 아래로, '둥근 땅'이 내려다 보였다.
무형검을 몸에 쓰고 더더욱 저 땅에서 멀어지니, 어느덧 둥근 땅은 별이 되어 내려다보였다.
"과연, 성계라는 곳은 정말로 제대로 된 우주였어…!"
익숙하다.
아니, 사실 익숙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어쩐지 기대감이 차 우주를 둘러보았다.
'성계가 정말로 우주라면….'
방금 올라온 땅의 지형은, 대강 보았을 때 절대 지구는 아니었다.
애당초 저 별 주변에는 위성도 두 개나 있었으니.
하지만, 어쨌든 내가 지구인 시절 가지고 있던 상식에 부합하는 세계에 떨어졌다.
그 말인즉슨.
'이 우주 어딘가, 지구가 존재할 수도 있겠어…!'
그건 상당한 희소식이었다.
우주는 무한히 넓겠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의미였으니.
나는 얼마간 우주에 둥둥 떠다니며, 무수한 별하늘을 가슴에 담았다.
그런 후, 나는 다시 그 별로 내려갔다.
휘이이이이―
무형검을 전신에 씌우고 대기권에 진입하자, 강력한 마찰열이 무형검에 생겨나며 부하가 걸려 왔다.
물론 그리 큰 부하는 아니었기에 견딜 만했고, 나는 마치 운석처럼 원래 있던 곳 근처로 떨어져 내렸다.
쿠우웅!
규련의 본체 옆 구릉이 내가 떨어지자 완전히 짓이겨졌다.
나는 다시 동굴 쪽으로 돌아가, 유화에게 이곳이 성계라는 것을 알려 주려 했다.
그때였다.
"너도 심족이었나."
어느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규백이 동굴 앞에 나와 나를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다만…."
"됐다. 네가 속인 건 규련이지, 내가 아니니까."
"…죄송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인 후 굴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규백이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전부 규련을 속여 오기만 했군."
"…."
별 말은 없었지만, 규백은 내가 심족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무언가 더 기분이 나빠진 듯했다.
'…그녀에게 속여 왔던 것들이, 너무 많군.'
나는 속으로 침음성을 흘리며, 일단 유화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생명력을 스스로 활성화시키며 자신의 몸을 치료하는 중이었다.
"이곳은 성계요. 하늘이 끝없이 뻗어 있고, 땅이 둥글더군."
나는 그녀가 이해하기 쉽게 우주를 설명해 주며 이곳이 성계라고 일러 주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유화의 눈이 빛났다.
"성계…! 그렇다면, 그렇다면…!"
번쩍!
어찌나 흥분했는지, 늘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뜨일 정도.
"성계에, 뭔가 있는 거요?"
"예, 물론이지요. 성계로 내려와 하계에 갇힌 상황이 됐습니다만… 오히려 잘 됐습니다."
"흠, 뭐가 잘 됐다는 건지…."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성계(星界)에서라면, 심족 최고회와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합니다."
"음…!"
'과연, 희색을 보이는 이유가 있었군.'
그렇다면, 하계에 조난당한 상황이지만 어쩌면 다시 방법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심족 최고회와 소통이 된다니, 뭔가 도울 건 없소?"
"아, 도와주실 건 없습니다."
"그나저나 신기하군. 하계에서 상계와 바로 연락이 되다니."
"어머, 정확히는 하계와 상계를 연결하는 건 아니랍니다. 천, 지족이라면 몰라도 저희 심족에게 그런 기술력은 없으니까요."
"…? 그럼 어떻게 연결한다는 거요?"
내가 의아해하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답을 말해 주었다.
"최고회에 연락을 취한다는 건, 최고회의 최고지도자님께 직접 연락을 드려, 그분이 광한계에 연락을 전달하는 방식이랍니다."
"…!"
나는 그 말에 흠칫하며 물었다.
"잠깐… 최고지도자라는 건…."
"예, 맞습니다."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물론이고 동굴 입구에서 음침하게 앉아있던 규백 역시 화들짝 놀랐다.
"함천존자(陷天尊者)께서는, 현재 성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존자의 일격을 하사받은 첩보 공작원이니,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그분과 연락이 가능합니다."
"…!!!"
엄청난 사실이다.
'그래서, 지난번 김영훈이 하계에 있다 했을 때 존자에게 연락을 넣겠다고 한 건가.'
함천존자가 애당초 하계에 있으니 말이었다.
그때, 동굴 입구에서 규백이 이쪽을 보며 코웃음을 내뱉었다.
"그것 참 놀랍군. 존자와 소통도 할 줄 아는 대단하신 악사였을 줄이야. 하여튼 기기묘묘한 심도공법이니 그걸로 어떻게 어떻게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존자와 소통이 가능한가 보지?"
"…."
"이렇게 가까이에 심족 첩자들이 둘이나 있었는데도 알아채지 못한 규련이 딱할 뿐이군."
그녀는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혀를 차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잠시 유화와 규백 사이에 엄청난 침묵이 오갔고, 나는 침묵을 깨뜨리며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심족 존자께서는 무슨 일로 성계에 계시는 거지?"
그러나 유화는 그것은 잘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듣기로는 뭘 찾고 있다고 했던가…."
그리고 그때, 규련이 다시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혈음계를 제외한 모든 중경계의 쇄성기 존자들께서는 현재 전부 성계로 출타 중이시다. 듣기로는 다들 성계의 끝자락에 있는 뭔가를 찾고 계신다 하더군. 성계 안에 있는 특별한 부해계라는데, 나도 잘은 모른다."
"아, 감사합니다. 규백 님."
나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한 후,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질문했다.
"그런데, 혈음계 쇄성기 존자들은 왜 본계에 남아 있는 겁니까? 다른 계면의 존자들은 전부 뭔가를 찾으러 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혈음계 천마 놈들은 안 따라간 게 아니라, '못' 따라간 거지. 그놈들은 혈음계에 유폐되어 있으니까."
"유폐?"
"그래. 놈들은 진마계와 광한계, 두 세계를 제외한 다른 어떤 세계로도 나갈 수 없다. 하계인 성계 역시 마찬가지이지."
본인이 아는 얘기가 나오자, 침울한 척하면서도 은근슬쩍 끼어드는 것이 말하는 것 자체는 즐거운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의념을 읽으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정상적인 시절의 규련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침울한 심상이었지만, 대화를 하며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보였다.
"짧은 제 식견으로는 어째서 혈음계 천마들이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혹 규백 님께서 가르침을 주실 수 있으실지요?"
"나도 잘은 모른다. 다만 운명의 인력에 의해 쇄성기 천마들은 혈음계에 묶여서 바깥으로 못 나간다고 하지. 진마계야 원래 같은 차원이었으니 왕래할 수 있겠지만… 광한계에 올 수 있는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군."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됐다. 말 걸지 마라, 이 심족 놈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등을 돌려 동굴 입구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심상을 보며, 대화를 나누자 그녀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보며 계속 그녀에게 대화를 걸었다.
규백은 짜증 나는 척하면서도 내가 계속 말을 걸자 답을 해 주었고, 그녀와 얘기를 주고받으며 나는 그녀의 상태가 나아지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심상에 드리운 안개가 걷혔을 때.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규백 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뭐냐, 또."
"…규백 님께서는 현재 요수공법도, 천족공법도 익히기 힘들다고 하셨잖습니까."
"…."
그 말에 다시금 규백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심도공법을 익힐 생각은 없으십니까?"
"…!"
내 말에 규백은 화들짝 놀라 나를 노려보았고, 나무를 깎고 거미줄을 붙여 새 금을 만들던 유화 역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나보고 심도공법을 익히라는 거냐…?"
"안 될 건 또 무엇입니까."
"그건…."
잠시 생각해보던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심족들을 핍박해 오고, 경멸시해 왔던 내가, 이제 와서 심도공법을 익히라고? 염치가 없지 않나."
상당히 재밌는 이유였다.
'심족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심족을 괴롭혀 왔던 자기 자신이 심족의 힘을 익히는 게 마음에 안 든다라….'
역시, 본성이 착하다.
나는 규백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걸 왜 규백 님이 걱정하십니까?"
"뭐?"
"규백 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규련' 님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십니까?"
"…! 너…."
그녀는 순간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런 것보다도 규백 님은 현재 하고 싶은 게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녀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심상을 읽으며 질문했다.
내 질문에 규백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서휼을, 죽여 버리고 싶다."
"예, 그렇게 이루고 싶은 것이, 갈망하는 것이 있는데… 그 비원을 아무 공법도 익힐 수 없는 지금의 몸으로 어찌 이루시렵니까?"
"…."
"제가 심도공법을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심도공법을 익혀, 서휼에게 복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녀가 정말로 입천까지 이르리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그녀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잔뜩 심상이 어둡게 뒤틀린 그녀가, 무언가 몰입할 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상태가 나아지는 것 같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녀는 언제라도 자살할 것처럼 어두운 심상을 지닌 상태였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각성시켜 훈련시킨다면, 수련하는 데에 집중하여 그녀의 어두운 심상에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내 말은 들은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이를 악물었다.
"…모르겠다. 여태껏 심족들에 대해서는, 늘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공포스러워했던 기억밖에 없다. 거기에, 내가, 아니, 규련의 기억에서 규련은, 심족들을 보면 언제나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해 왔어…."
"…."
"내가, 심도공법이란 걸… 익혀도 될지 모르겠다."
"…한번…."
"생각을, 해 보겠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일단 그녀에게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렇게 동굴 인근에서, 유화는 생명력을, 나는 경지를, 규백은 마음을 회복해 가며 며칠을 더 보냈다.
그리고 하계에 떨어진 지 약 보름, 유화의 부상이 전부 회복된 날.
나는 그녀로부터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들었다.
"함천존자께서 이쪽으로 분체를 보낸다 하십니다."
"…!?"
그녀의 말에 나는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규백 역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쯤… 존자께서 도착하신다는 거지?"
나는 당황하며 그녀에게 질문했고, 그녀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요."
조각난 마음 (2)
파아아앗!
뭔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의 미간에서 환한 빛이 뿜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미간에서 뿜어진 빛은 녹색의 빛무리로 변하더니 허공에 녹색의 박도를 응결시켰다.
유화의 심상에 박혀 있던 존자의 일격!
그리고 그 존자의 일격은 허공에서 번뜩이는 듯하더니 점차 형태를 바꾸었다.
나는 그 과정을 눈여겨보며 거듭 탄성을 내질렀다.
'저 변화 하나하나에 도대체 무슨 엄청난 묘리들이 섞인 거지…?'
의해은산과 맞닿은 깨달음이 심상을 통해 느껴진다.
그리고 답천경과 맞닿은 깨달음이 박도가 몸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리고 또 채 알아보지도 못할 수많은 묘리들이 허공에서 얽히고설키며, 박도가 익숙한 모습으로 변하였다.
"존자(尊者)께 예를 취합니다."
유화는 그에게 다리를 굽히며 예를 취했다.
규백 역시 심족은 껄끄러워했음에도 장익에게 허리를 숙였다.
"존자께 예를 취합니다."
나 역시 그녀들을 따라 장익에게 예를 취했다.
"존자께 예를 취합니다."
우우웅!
빛무리가 뭉치며, 완전히 초록빛 소인의 형상을 취한다.
'저것이… 함천존자.'
지난 생까지 더하면 두 번째 본다.
이전에는 자세히 보지 못했으나, 다시 보니 그제야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화의 일격에서 구현된 함천존자는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초록빛 피부를 가진 소인이었다.
그의 귀는 부채처럼 컸고, 코 역시 주먹만큼 컸다.
이빨도 역시 삐죽삐죽했으며, 손발톱도 날카로웠다.
아마 한 가지만 아니라면, 조금 얍삽하다고 생각되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 한 가지란 다름 아닌 근육!
자그마한 몸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전신에 오밀조밀한 근육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순수 근력만으로도 어지간한 결단경 요족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장익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
꿰뚫리는 것 같다.
어쩐지 그의 시야 앞에 서 있는 한, 언제라도 그가 출수하면 목이 댕겅 잘릴 듯한 느낌!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시선을 잠시 받았다.
얼마간 나를 쳐다보던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었다.
[놀랍군, 인족 같은데 어떻게 구현 2보를 밟은 거지? 거기다 느껴지는 기운을 보면 결단기, 아니, 원영기인가? 게다가 천족인데도 지족 공법이 느껴지는군. 허….]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천, 지, 심 셋을 통합한 거냐? 그나마 올곧은 마음을 지닌 것 같으니… 죽일 필요는 없겠구나.]
그가 대수롭지 않게 한 말에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장익은 내 잠재력을 알아보았고, 내 심상에 조금이라도 그릇된 마음이 보였다면 즉시 베어 버리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리라.
[그래, 일단 네가 나를 불렀나?]
"심족 1798번 첩보 공작원 유화가, 심족의 존자를 뵙습니다."
[도대체 뭘 하면 광한계 본토에서 활동해야 할 첩보 공작원이 성계에 떨어지는 거지?]
장익은 약간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우리를 보았다.
[그리고 저건… '조각'인 건가?]
그의 시선이 규백에게 향했다.
['조각'은 최소 사축기 이상의 수사에게서만 태어나는 것인데… 그래, 이 별에 의식을 보내는 와중 잠시 황룡의 사체를 본 것 같은데, 네가 그 황룡의 조각이냐?]
규백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족 진룡맹 관주사자 규련의 찌꺼기… 규백이 심족의 최고지도자께 인사 올립니다."
[진룡맹 관주사자면… 그 배 청소부, 맞나?]
관주사자를 청소부 따위로 격하하는 장익이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장익의 말에 딴지를 걸지 못했다.
규백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설명을 좀 들어 보지. 이 천지심족 완전체 놈은 또 뭐고, 심족 공작원은 왜 또 여기 떨어졌고, 관주사자의 조각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그 말에,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내가 장익에게 우리의 사정을 천천히 설명했다.
아침 해가 저녁놀이 될 때까지, 내 얘기는 계속되었다.
나는 서휼의 악독함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서휼을 제어하기 위해 온갖 일을 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규련 역시 서휼에게 어떻게 이용당했고, 유화는 어쩌다 휘말렸는지를 설명했다.
어차피 규백 역시 서휼의 본성을 알게 되었으니, 그녀 앞에서 더 숨길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내 얘기를 끝까지 들은 장익은 유화 입장에서의 이야기도 전부 들은 후, 마지막으로 규백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가, 규련의 조각. 규백이라고 했나? 네 입장에서도 뭔가 말할 게 있는가?]
"…조각 같은 과분한 칭호로 불러 주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저 규련이 남긴 찌꺼기이니, 존자께오서는 찌꺼기라고 불러 주시지요."
[원한다면 그리 해 주지.]
장익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얼마간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던 규백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대부분 두서가 없었다.
대다수가 규련이 서휼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배신당할 때 무슨 고통을 느꼈는지.
그리고 그 울분과 고통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그녀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장익은 두서가 없는 규백의 이야기도 끝까지 들어 주었다.
규백의 이야기는 길어져, 한밤중 두 개의 달이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해서, 서휼이 날 버렸고, 마침내 난 여기에 도착하게 됐습니다."
얘기하다가 감정이 북받쳤는지, 규백은 눈물을 닦으며 이야기를 마쳤다.
우리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장익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휼이란 미치광이가 현재 광한계 본토에서 수작질을 부린다는 거로군.]
"…뭐, 요약하면 그렇게 되겠지요."
장익은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내가 너희 이야기를 다 들어 준 이유가 무엇인지 아나?]
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심상의 깊은 곳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 너희에게 도움을 줄까 말까 고민하기 위해 너희의 이야기를 들어 준 것이지.]
장익은 유화를 쳐다보았다.
[유화, 너는 합격이다. 백녕이란 신입을 받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니, 조금만 도와주면 충분히 의지를 관철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장익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괴물, 너도 합격이다.]
"저는 왜 괴물입니까?"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네 심상 깊은 곳에서는 끝없는 불굴의 의지가 느껴졌다. 심상 자체가 상당히 경이롭다고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녀석이기도 하고, 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도와준 보람이 있을 것 같은 녀석이니.]
장익은 그리 말하며 마지막으로 규백을 쳐다보았다.
[너, 조각은 불합격이다.]
"…!"
그는 규백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자기가 뭘 바라는 건지도 모르고 있군. 하긴, 그게 조각들의 정체성일 테지만.]
"…."
규백은 장익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조용히, 음울한 눈으로 장익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흘려듣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네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전까진, 나는 네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겠다.]
"…마음대로 하시지요. 심족 존자의 도움은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맹랑하군. 본체가 아니라 분체라고 얕보인 건가?]
"어차피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데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뭐, 됐다. 죽지 못한 망자(亡者)를 상대해 봤자 나만 손해지.]
장익은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세 가지다. 첫째, 이 자리에서 내 일격을 사용해서 광한계와 이어지는 공간 균열을 만들어 준다. 둘째, 여기서 지내며 너희를 수련시키고, 너희의 가능성을 끌어올려 너희가 스스로 비승해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내가 심족 최고회와 연락하며 그들이 너희를 구하러 올 수 있게 구조 신호를 보내 준다.]
그는 우리에게 선택을 맡긴다는 듯 물었다.
[세 가지 중 택해라. 뭘 원하든 들어주마. 단!]
장익은 규백을 쳐다보며 말했다.
[첫 번째를 택하면 둘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 균열을 만들어 줄 것이고, 두 번째를 택하면 너희 둘만 가르칠 것이고, 세 번째를 택해도 너희 둘만 구조해 가라고 이를 것이다. 자기 정체성도 못 찾는 저런 것은 나도 도움을 주기 싫으니 그리 알도록.]
그 사실을 들은 나는 망설임 없이 두 번째를 택했다.
'두 번째를 택하면, 어쨌든 그녀를 천천히 설득시킬 시간은 존재한다. 거기에 그녀의 마음을 돌리면 함천존자 역시 규백을 조금 가르쳐 줄 수도….'
내 선택에 장익은 피식 웃었다.
[상냥한 녀석이군.]
"…."
아무래도 내 심상을 바로 읽어 내, 내가 두 번째를 택한 이유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너는 어쩔 거지?]
유화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도 두 번째를 택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제자를 구하러 가고 싶지만… 합체기에 달하는 그 괴물의 손에 잡혀 있을 테니, 지금 가 봤자 아무것도 할 게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존자께 가르침을 받아, 제자를 구할 수 있을 실력을 기른 후 올라가겠습니다!"
그 말에 장익은 흡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보아하니 구현 3보를 밟기 직전이니만큼, 가르치는 맛도 있겠군.]
그렇게, 우리는 함천존자 장익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 * *
우우웅!
나는 내 경지 회복용으로 만들어 낸, 용맥을 모으는 진법을 장익의 분체에게 연결해 주었다.
조금 희미한가 싶던 그의 분체는 진법에 연결되자 완전히 실체처럼 변화했다.
[그런데, 너희가 지내는 곳은 여기인 게냐?]
"예, 그렇습니다."
[그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수련을 시작하지. 너희 거처가 다 박살이 나면 곤란하니.]
"알겠습니다."
[그럼 따라와라.]
타앗!
장익의 분체는 허공을 밟으며 어딘가로 날아갔고, 유화 역시 그를 따라 주홍빛 강물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나는 규백을 쳐다보며 물었다.
"규백 님께서는, 구경하지 않으시렵니까?"
"…됐다. 심족이 수련하는 걸 봐서 뭐에 쓴다는 거냐."
그녀는 텅 빈 눈으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심상을 읽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존자의 힘을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흥! 용족에도 존자께선 한 분 계신다. 비록 출타 중이시지만, 그래도 아주 어렸을 적 용족 존자의 분체가 지닌 힘을 본 적 있으니 상관없다."
'어렸을 때라….'
그녀는 규백인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죽었다고 착각하는 규련인 것일까.
확실한 것은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한 번만 보러 오시지요. 어쩌면 차후에 심족의 약점을 연구하는 데에 쓰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규백은 한숨을 쉬며 귀찮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빙긋 웃었다.
'은근히 계속 권해서라도 데려가 줬으면 하고 있었는데, 모를 것 같습니까.'
그녀도 내심 심족의 존자인 함천존자의 힘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 역시 그녀가 서휼에 대한 살의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면, 그만큼 심상이 조금 환기되니 찬성하는 편이었다.
나는 저물도에서 비행 법기를 꺼내 그녀를 태우고 장익과 유화를 쫓아갔다.
* * *
"옷은 잘 맞으십니까?"
나는 저물도에서 꺼낸 두꺼운 옷을 입은 규련에게 물었다.
높은 상공을 날아가는 중인지라, 범인 수준으로 영력이 떨어진 그녀는 상당히 추워하고 있었다.
"그, 그래… 괜찮다. 비늘이 있었을 때는 굉장히 따뜻했는데…."
"비늘 문제가 아니라 규백 님께서는 현재 정순지력이 더 흐르지 않으니까요."
"용의 몸은 정말 편했는데…."
"지금 현실적으로 용의 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니, 규백 님께서는 차라리 심도공법을 익히시면 어떠십니까?"
"…생각해 본다고 하지 않았느냐."
"알겠습니다."
그녀와 잡담을 나누며 얼마간 하늘을 날았을까.
나는 규련의 사체를 넘어, 장익이 도달한 커다란 황무지에 도착했다.
사방이 돌덩이인 황무지는 상당히 대련장으로 적합해 보였다.
위이잉―
나는 종이배 형태의 비행법기에서 내려 장익의 앞에 섰다.
그리고 혹시 규백이 휘말릴까 싶어 종이배는 따로 저 멀리 날려 보냈다.
장익은 나와 유화를 보며 팔짱을 꼈다.
[그럼 일단, 너희의 역량부터 제대로 파악해 보도록 하지.]
스릉―
푹, 푹, 푹, 푹!
장익의 사방(四方)으로 네 자루의 녹빛 박도가 구현되어 땅에 꽂혔다.
그는 박도들의 중앙에 들어간 후 팔짱을 끼고 말했다.
[일단 교육 전에 앞서… 뭔가 궁금한 게 있으면 말해라. 교육이 시작되면, 너희 둘 다 피떡이 돼서 바닥을 기어다닐 테니까.]
"…."
굉장한 자신감!
차라리 광오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유화는 뭔가 질문을 정리하고 있는 듯했고, 나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함천존자께서도 아시겠지만, 저는 정식으로 심족 소속이 아닌, 공식적으로는 지족 소속인 몸입니다. 한데 어째서 이리 도와주시는 겁니까?"
[심족이기도 하니까.]
정말로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나는 뒤를 흘끗 보며 규백을 살폈다.
"하면, 심족이 아닌 규백 님은, 정체성을 찾기만 하면 가르쳐 주실 요량이 있으신 겁니까?"
[물론이다.]
"어째서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저 조각 녀석은, 구현에 도달할 자질이 있으니까.]
"…!"
규백이 입천에 도달할 재능이 있다고?
나는 황급히 놀라서 되물었다.
"규백 님에게 그런 자질이 있단 말입니까?"
[그래. 뭐… 네 심상으로 봐서 뭔가 오해하는 거 같긴 하군. 한 가지 말해 주자면 네가 생각하는 '자질'과 내가 생각하는 '자질'은 많이 다를 거다.]
"존자께서 생각하는 자질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이어진 장익의 말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없다.]
"…?"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구현에 도달할 자질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생각하는 '자질'은 너희에겐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
그는 눈을 빛냈다.
[너는 구현… 너희 천, 지족의 말로는 심도공법이라 칭하는 이것. 이것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
어려운 말이다.
나는 여태껏 무를 궁구해 왔으나, 나 스스로 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일단… 심도공법 같은 단어는 마음에 안 드니, 내가 쓰는 용어를 알려 주자면 나는 이것을 투혼(鬪魂)이라 부른다.]
"투혼…."
[너는 투혼을 뭐라고 부르지?]
어쩐지 장익의 물음에는 떨림이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을 느끼며, 단순히 저 질문에 '월도입천, 월도답천' 등으로 대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투혼… 내 투혼은 뭐지? 나는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내가 익혀온 기술, 전투 경험, 깨달음의 총집합.
이것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답을 깨달았다.
'아… 그렇군. 간단한 것이었나.'
"무(武)."
나는 내가 익혀 온 이것의 이름을 장익에게 답하였다.
"제가 익혀 온 것은, 무(武)입니다."
[무라… 좋은 이름이군.]
어쩐지, 장익도 내 대답을 듣고 흡족한 듯했다.
[그럼 다시 묻겠다. 너에게 있어 무(武)란 무엇이지?]
"제 삶의 일부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네가 생각하기에 그 무를 익힌 이들에게 특별한 것이 있느냐? 특정한 자질을 타고났다거나, 특정한 혈통이라거나, 특정한 영근을 타고났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없습니다. 재능의 차이는 있겠지만, 무는 누구라도 익힐 수 있습니다."
[그래, 그거다.]
장익은 즐거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내 투혼도, 유화의 연주도 마찬가지지. 누구나 익힐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투혼을 통해 구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것이 내가 너희를 도우려는 이유 중 하나지.]
"이유 중 하나라면, 다른 이유도 있다는 것입니까?"
[물론 있지.]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말에 장익은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게 있어, 무는 네 삶의 일부이기만 한 것이냐?]
"…? 그렇습니다만…."
[내 투혼은 그렇지 않다.]
"…?"
[네가, 스스로가 익힌 무라는 것의 의미를 더 깨닫게 된다면 내가 너희를 돕는 이유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자, 궁금한 건 이게 끝이냐?]
나와 유화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장익이 자세를 잡았다.
오싹!
'베인다!'
순간, 나는 내 전신이 장익의 박도에 난자당하는 환상을 본 듯했다.
예리하다.
전신의 털이 곤두선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런 경험은, 마치 나보다 경지가 높았던 김영훈과 싸울 때에나 느꼈던 느낌이었다.
그리고, 장익이 자신의 박도들에 손을 가져가며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덤벼 봐라, 꼬맹이들아. 실력 좀 보자꾸나.]
그와 동시에, 유화가 금을 뜯었고 내가 무형검을 바르쥐었다.
다음 순간.
내 무(武)와 장익의 투혼(鬪魂)이 이를 드러내며 부딪쳤다.
조각난 마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