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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 *

첫 목적지는 세뉴 강 건너편 동쪽에 있는 바넨샤 거리였다.

- 다각, 다각.

수도 내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기 때문에 칼리안은 빨리 걷는 정도로 레이븐을 움직였다.

경쾌한 발굽 소리를 들으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 칼리안이 레이븐의 움직임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바넨샤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석양이 지는 시간이었음에도 망치질 소리가 멈추지 않고 울려퍼지는 곳을 찾아가기만 하면 되었던 까닭이다. 거리에 진동하는 쇠 냄새를 맡으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긋지긋했던 냄새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바넨샤는 대장장이들의 거리였다. 작은 도로를 가운데 두고 스무 곳이 넘는 상점이 줄지어 있었다.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어떤 상점의 무기가 좋은지까지 보고를 올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칼리안은 레이븐의 등에서 내려 고삐를 쥔 채 천천히 상점들의 물건을 훑어보며 걸어갔다.

"마땅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네."

한동안 가게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중얼거리게 될 쯤, 비로소 칼리안의 이목을 끄는 상점이 나왔다. 다른 곳과 달리 방패나 방어구 없이 무기만 진열된 곳이었는데 언뜻 보아도 상품들의 품질이 상당했다.

'로튼 대장간' 이라는 이름의 그 상점 앞에서 칼리안이 걸음을 멈춰 서자, 상점에 있던 아이가 쪼르르 달려나와 인사했다.

"어서오십시오! 검을 보러 오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레이븐의 고삐를 넘겨 주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동전 한 개를 쥐어주며 당부를 했다.

"쓰다듬으면 큰일 나. 얌전히 데려가서 고삐만 묶어 둬."

아이가 겁을 먹은 듯 침을 꿀떡 삼켰다. 그게 귀여워서 칼리안이 동전 하나를 더 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얌전하니 걱정 말고."

그렇게 아이를 보낸 뒤 가게로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고 있자니 상점의 주인인 듯한 중년 남자가 나왔다. 물건도 직접 만드는지 두꺼운 근육질의 팔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찾으시는 종류가 있으십니까?"

"열 일곱 전후의 아이가 사용하기에 좋은 검이 있겠나? 길이는 성인의 것과 같아도 되지만 무게는 가벼웠으면 하네. 검을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이라서."

남자가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마치 자신보다 훨씬 어린 아이의 검을 찾는 듯한 말을 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 말을 꺼낸 이의 목소리는 열 일곱 근처도 못 가봤을 만큼 어리게 느껴졌던 탓이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의문을 깊이 가지는 것은 명을 단축하기 딱 좋은 태도임을 알기 때문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보여드리겠습니다."

"알겠네."

남자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뒤, 칼리안이 발을 옮기며 무기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뼘 길이의 얇은 나이프에 눈이 갔다. 옷 속에 숨겨 사용하는 경우를 염두에 두었는지 가드가 없었고 칼집에는 팔뚝에 채울 수 있는 가죽 벨트가 달려 있었다.

칼리안이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고작 나이프일 뿐이었으나 손에 잡히는 느낌만으로도 중심이 잘 잡힌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칼을 뽑아보니 묵철로 된 예리한 날이 빛을 발했다. 칼리안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내 것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고."

방금 주인에게 요청한 것은 칼리안의 것이 아니었다.

기마 공연장에 가는 길에 마주쳤던 키리에가 검을 연습할 때 쓰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칼리안이 직접 검을 쓰게 되더라도 일반적인 철로 만들어진 것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오러를 오랫동안 견디지 못할 테니까.

'뭐. 지금은 내 몸도 오러를 못 견디겠지만.'

문득, 베른이 죽던 날 부서진 검의 울음이 생각났다.

지금이야 당연히 부서지지 않고 멀쩡히 있겠지만 칼리안이 그 검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세크리티아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던 보검이었으니까.

검을 생각하니 검을 부수고 베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마법사도 떠올랐다. 하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를 떠올린 칼리안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되게 아팠다. 언제 만나기만 해봐라. 뭐 이런 식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여기 있습니다."

어느새 물건을 찾아온 상점 주인의 목소리가 칼리안을 현실로 불러냈다.

주인이 꺼내 온 것은 세 자루의 장검이었다.

가벼운 편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칼리안은 그 조차 한 손으로 들어올릴 수 없었다.

'엉망이군.'

때문에 스스로를 비웃은 칼리안이 양 손으로 검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살짝 휘둘러 보기도 하며 검의 이곳 저곳을 세심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키리에가 처음으로 쓰게 될 검이었으니 대충 고를 수가 없었다.

'무게 중심이 잘 잡혔다. 유연성이며, 예리함이며. 평범한 상점 같은데,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그런 모습을 본 주인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아마도 소년일 것 같은 손님이 검을 살피는 모양새가 범상치 않았던 탓이다.

중요한 부분들을 정확히 짚어가며 확인하는 태도는 상급 기사보다도 엄정했다. 헌데, 검을 제대로 들어올리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하겠네. 이 나이프도 함께."

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데 칼리안이 한 자루의 검을 골라냈다. 주인이 골랐다 해도 같은 것을 선택했을 법한 물건이었다.

곧 은화 8개를 꺼내 장검과 나이프 값을 치른 칼리안이 물었다.

"이 곳의 무기는 모두 직접 만드는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세 개의 금화가 카운터에 올려졌다. 방금 지불한 것의 네 배 가까이 되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조금 더 튼튼한 장검, 그리고 가드 없는 단검이 필요하네. 무게는 일반적인 것과 같으면 되고."

"이 검을 쓰실 분께서 검에 더 숙련되었을 때 사용하실 것입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요구사항을 덧붙였다.

"맞네. 키가 매우 크고 검을 묵직하게 다루지만 속도가 느린 것은 아니네. 둘 모두 오랫동안 쓰게 될 것이니 신경 써서 만든 좋은 검이었으면 하는데 만들어 줄 수 있겠나?"

사용자에 대한 설명을 기억한 주인은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혹시 검에 새길 이름이 있습니까?"

"아니. 그런 것은 없네."

"알겠습니다. 그럼 기간은 얼마나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물어보아야 할 말이지. 기간은 상관 없이 제대로 만들어주면 되니."

주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가능한 좋은 재료를 구해 마음에 드실 만한 검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한 달 정도 뒤에 다시 한번 들러 주시겠습니까?"

"그리 하겠네. 혹여 돈이 부족하다면 그 때 더 지불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인사한 주인은, 나이프를 칼리안에게 건넨 뒤 장검을 들고 나가 레이븐의 안장에 실어주려 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레이븐의 눈에서 흰자위를 본 칼리안이 손사래를 치며 검을 받았다.

"아니, 그러지 말게. 내가 하겠네."

주인에게만 친절한 이놈의 말 덕분에, 칼리안은 낑낑거리면서 직접 안장에 검을 매었다.

그리고는 나이프 집과 연결된 가죽 벨트를 소매 안쪽에 채운 뒤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이제 가야 할 곳은 조금 특별한 것을 파는 상점이었다.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2)

하늘이 조금씩 어둑해지고 있었다.

잠시 품을 살피니 잘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어린애가 모아 둔 코 묻은 돈을 함부로 빼 쓰는 기분인데.'

어차피 이게 다 살자고 하는 것이니 옛 칼리안도 크게 노여워 하지는 않으리라.

아무튼 제일 우선했던 검을 구했으므로 다시 강 건너편으로 돌아가야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온 길을 되짚어 다리를 향해 왔다.

세뉴 강의 다리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그런데 다리 입구에서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멀리서 다가오는 칼리안을 보곤 길을 가로막고 섰다.

그들을 본 레이븐이 속도를 줄여 멈추었다.

"레이븐, 왜 그래?"

레이븐이 워낙에 길을 잘 찾아갔던 탓에 칼리안은 다음으로 갈 목적지 생각에 잠겨있었다. 때문에 레이븐이 멈춘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칼리안도 검은 옷의 사람들을 보았다.

칼리안의 얼굴에 경계하는 빛이 어렸다.

다행히 멀쩡한 수도의 왕도 위를 점령한 간 큰 강도 따위는 아니었다. 방금 산 무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칼리안이 안심하며 앞을 쳐다봤다.

가장 앞에 서있던 이가 칼리안에게 다가왔다.

"함부로 길을 막아 죄송합니다."

입고 있던 검은 옷은 바로 상복이었다.

많이 울었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쉬어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굉장히 정중한 태도로 사정을 이야기했다.

"지금 망자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여,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세뉴 강을 쳐다보니 작은 촛불이 올라간 붉은 안네루시아 꽃들이 강물을 따라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다. 저 멀리 꽃이 내려오기 시작하는 곳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영결식인가."

"네,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칼리안이 선뜻 레이븐의 등에서 내려서며 대답했다.

"굳이 망자의 걸음을 방해할 이유가 없지. 죄송할 일이 아니네."

칼리안이 말한 것과 같이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카이리스의 장례 의식이었다. 망자를 기리는 이들이 망자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강변에 모여 생의 마지막 길을 비춰줄 촛불을 띄워 보낸다는 뜻이 있었다.

다만 강물에 꽃잎이 떠내려가는 동안 산 사람이 그 위를 지나가면 망자가 산자를 따라 나서려다 길을 잃는다는 속설이 전해졌다. 때문에 이렇게 잠깐 동안 다리를 건너지 말아주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우연히 마주한 이 숙연한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세뉴는 언제나 고요하게 흐르는 강이었다.

그러므로 안네루시아 꽃도 출렁이지 않고 조용히 흘러 내려왔다. 바람도 잠잠하여 촛불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평안히 가시겠군. 명복을 비네."

"감사합니다."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굳이 걸음을 멈춘 것으로 모자라 말에서 내리더니 명복까지 빌어주는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남자가 한번 더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형님께서는 내 무덤에 시나스타를 올려주셨으려나. 아니면 그 전에 시간의 축을 돌리셨으려나.'

달빛에 두 번째 꽃을 피우는 시나스타를 무덤 위에 올리는 세크리티아의 관례를 잠시 생각하던 칼리안에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다시 길에 오르시지요."

어느새 안네루시아가 다리 아래를 모두 지나간 듯 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고마운 마음에 어느 가문의 자제인지를 가늠해보고자 말 위의 칼리안을 올려다보았던 남자가, 어깨를 움찔하더니 서둘러 비켜섰다.

왕도에 설치된 마법 등불이 밝았으므로 깊은 후드로 숨겨둔 것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는 것을 눈치 챈 칼리안이 조용히 말했다.

"기억에 두지 않았으면 하네만."

"······ 알겠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숙여보였고 칼리안은 천천히 다리 위를 건넜다.

잠시 뒤 고개를 들어올린 남자는 그런 칼리안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자에게 다가온 또 다른 검은 옷의 일행들이 물었다.

"아르센. 왜 그러나? 아는 사람인가?"

남자, 아르센 헤르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저, 좋은 사람인 듯 싶어 그러네."

그 사이 많이 멀어진 촛불이 작게 일렁이고 있었다.

* * *

어느새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제부터 갈 곳은 대장간과 달리 시간에 상관 없이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정말 온통 시스파니안이네."

- 수도 카이리시스는 마치 시스파니안의 추종자들이 사는 곳 같습니다. 어느 곳이든 시스파니안이 있습니다.

카이리스로의 파견을 무사히 다녀온, '푸른 솔새'라는 별칭의 세작이 전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제 공연장에서도 하츠아라와 시스파니안을 이야기 했었는데 칼리안의 눈에 보이는 간판에 적힌 이름이 온통 시스파니안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시스파니안의 단잠' 이라는 이름의 호텔이나 '시스파니안의 여유'라는 이름의 카페, 심지어 '시스파니안의 한끼'라는 식당까지.

칼리안이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무 막 갖다붙이는 것 아니야? 용의 한끼가 맛있게 느껴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다 구석진 곳에 있던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라는 술집을 본 뒤에는 대다수의 가게 이름이 참 정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곤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게 얼마를 더 가니 '나에랑샤' 거리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였다. 두 번째 목적지가 있는 곳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급속도로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나에랑샤 거리로 들어섰다.

그 곳에는 카이리시스의 서쪽 시장이 있었다.

밤이 되었으므로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았고 밤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식당과 술집, 카페들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다만 모두 칼리안의 목적한 곳은 아니었기 때문에 칼리안은 주저없이 그 앞을 지나쳤다.

"둘, 셋, 넷······ 여기인가."

서쪽 시장의 골목 세 개를 지나치고 네 번째 골목으로 들어서니 어두운 거리에 홀로 불을 밝힌 상점이 보였다. 문 앞에 늘어선 여러 가지 크기와 모양의 새장이 눈길을 끄는 곳이었는데, 간판에 적힌 것을 본 칼리안이 목적지를 제대로 찾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나에랑샤 새 판매점 (전서구 대여)단순히 애완용 새를 파는 곳이라면 이 시간에 문을 연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그 옆의 전서구 대여라는 내용 때문에 이해가 되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소식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찾아올 테니 말이다.

그런데 가게 건물이 작아서인지 혹은 시간이 늦어서인지는 몰라도 따로이 말을 받아 줄 시동이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말을 매어 둘 수 있는 곳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어찌한다."

레이븐의 등에서 내린 칼리안이 난감한 마음에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차피 레이븐이야 몸 편히 돌봐줄 재력가 주인을 두고 다른 데 갈 리 없는 놈이란 것을 칼리안이 가장 잘 알았으니, 레이븐을 걱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민했던 것은 누가 레이븐을 훔쳐가려 할까봐서였다. 물론 레이븐이 아니라 발광하는 말에 채일 운 나쁜 이에 대한 걱정이었다.

결국 칼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레이븐의 안장 위에 고삐를 올려놓았다.

"기다리고 있어. 사고치지 말고."

레이븐이 칼리안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푸르륵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가게 옆으로 가만히 걸어가 섰다. 검은 말이 어두운 건물의 그늘 속에 들어가니 오른쪽 앞 발목의 하얀 털만 유난히 잘 보였다.

칼리안이 레이븐을 그대로 두고 몸을 돌렸다.

그 후에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후드를 잘 눌러쓴 뒤에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 딸랑.

얀이 울리는 것보다 조금 더 큰 종소리가 울리며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알렸다. 그러자 종소리 때문에 잠을 깬 것인지 가게 안의 새들이 일제히 지저귀기 시작했다. 마치 시장 한 켠이 아닌 숲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겉으로 보기 보다는 넓은 곳이군.'

엄청 많은 종류의 새장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새들이 보였다. 칼리안의 주먹보다 작을 것 같은 애완조부터 당장 사냥에 쓰여도 좋을 매까지.

오히려 없는 새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외눈 안경을 끼고 새 모이를 주던 가게 주인이 칼리안을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전서구를 원하시오?"

어둠이 내린 밤.

검은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 새 가게에 들어온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대신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칼리안은 대답 없이 유독 조용한 새장 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 안의 하얀 애완조 두 마리가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을 한 쌍의 새였으나 칼리안은 그것이 아주 잘 만들어진 가짜 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칼리안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새들은 잠에서 깨질 않는군."

목소리가 어린 것은 상관 없었지만 혹시라도 긴장한 것이 드러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가게 안을 울렸다. 주인이 대답했다.

"잠이 많소."

베른이 기억하는 것과 같은 대답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오가야 할 말이 이미 정해져 있는 대화가 이어졌다.

"먼 곳에서 날아온 모양이지? 매우 고단해 보이는데."

"······ 그러니 저렇게 잠을 자는 것이 아니겠소?"

주인이 잠시 침묵하며 칼리안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어차피 외관으로는 티가 나는 것이 없었으니 칼리안은 오로지 눈 색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기사. 그러고 보니 고단한 새가 잠시 쉬기에는 이만 한 곳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군."

"그렇게 보았다면 다행이오."

주인은 무심하게 말한 뒤 쓰고 있던 외눈 안경을 벗어 소매로 슥슥 닦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시 끼며 물었다.

"무엇을 찾으러 왔소?"

이제부터의 대답이 중요했다.

자칫 잘못된 대답을 하거나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였다가는 그대로 목이 날아갈 터였다.

"새 모이가 필요해서."

"그래. 여기서 새 모이도 팔기는 하오."

두 사람의 대화가 두런두런 이어지는 탓에 한참을 지저귀던 새들이 다시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어느새 가게 안은 옷이 스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해져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 칼리안의 뒤로 걸어와 섰다.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 주인의 품 속에 서슬 퍼런 칼이 있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주인은 말 없이 한참동안 칼리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칼리안의 귀에 스스로의 숨소리가 나지막이 들렸고 진득해진 것 같은 공기가 폐를 압박했다. 서늘한 느낌이 온 몸을 엄습했다.

'살기.'

숨막히는 긴장 속에 주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근래에 누군가에게 새를 판 기억이 나질 않소만. 아무래도 못 보던 손님인 듯 하여."

이것은 정해져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알아서 생각하고 대답을 해야 했다.

곧바로 칼리안의 입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나왔다.

"이제 막 둥지를 떠나 먹이 찾으러 왔으니, 이 곳에서 팔았을 리 없지."

칼리안에게 다가오던 주인의 발이 멈추었다.

"어디에서 온 새인지는 아시오?"

정해진 질문이 다시 나왔다. 칼리안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남동풍을 타고 왔다 하던데."

"그렇다면, 그 새는 누구의 새요?"

칼리안이 천천히 몸을 돌려 주인을 향해 마주 섰다.

깊이 내려온 후드 아래로 보이는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 입술 사이로 마지막 대답이 나왔다.

"네빌라드의 새."

세크리티아의 국왕 데블란. 네빌라드는 데블란의 이름 철자를 섞어 만든 호칭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칼리안은.

카이리스에 숨어든 세크리티아 세작들의 근거지에서 카이리스 정보를 얻어내려는 최초의 카이리스 왕자가 된 것이다.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3)

카이리시스는 넓었다.

애초에 왕궁 크기가 그 정도이니 수도라 해서 좁을 수가 없었다. 그 넓은 땅에서 키리에를 찾는 것은 모래 밭에 묻어 둔 바늘을 찾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이 시기의 키리에가 무얼 하고 있었는지는 알았으나 그 위치를 찾는 것이 힘들었다.

게다가 또 하나.

칼리안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팔 만한 곳도 마땅히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이 미친 짓이었다. 세크리티아 세작들에게 카이리스의 정보와 물건을 구하는 것.

이들은 단순한 정보 상인이 아니었다.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를 염탐하기 위해 오랜 준비 끝에 보내온 진짜 칼잡이들이었다. 그만큼 위험한 곳이었다.

게다가 칼리안은 지나가다 만난 사람도 곧바로 알아볼 만큼 눈에 띄는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붉은 눈을 스치듯 보기만 해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질 터였다. 그러니 미친 짓이라 한 것이다.

"모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소."

세작들의 거점을 지키는 자, '하얀 수리'가 그렇게 말했다. 적이 아님을 확인한 뒤로는 더 이상의 적의나 살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아직 죽을 때는 아닌가보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칼리안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가능한 하얀 수리의 검격 범위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며 그의 뒤를 따라 가게 뒷편으로 갔다.

세작들은 서로의 신상을 몰랐다.

본국에서도 언제 몇 명을, 혹은 누구를 세작으로 보낼지 알려주지 않았다. 첩보 활동이 발각될 경우 다른 세작들이 줄줄이 엮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또한 세작들은 서로에게도 얼굴을 노출하지 않았다. 마찬가지 이유였다.

게다가 이 시기의 세크리티아 세작들은 나이와 성별에 대한 구분도 없이 양성되었다. 따라서 칼리안과 같은 나이의 세작이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칼리안은 이런 상황만 믿고 하얀 수리로 하여금 자신을 세크리티아에서 새로 파견된 어린 세작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이었다.

"잠시만 있으시오."

칼리안이 선 곳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빈 새장, 모이통, 여러 모양의 횃대, 청소 도구 등등. 먼지가 풀풀 풍기는 그 안에서 하얀 수리는 이리저리 잘도 피해가며 움직였다. 그러더니 잡동사니인 냥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던 나무 막대기를 잡아 반대쪽으로 밀었다.

- 드르륵!

체인이 감기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둘이 서 있는 방 전체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우르릉 소리와 끼릭거리는 마찰음이 울리더니 곧 칼리안이 서있던 곳이 어느 집의 창고와 이어졌다. 하얀 수리가 창고 문을 열자 좁은 마당이 나왔다. 둘은 곧 마당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칼리안은 하얀 수리를 따라 그 집의 거실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갔고 또 한번의 비밀 공간을 지나 커다란 서재 같은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큰 테이블이 있고 사방으로 책장과 선반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앉으시오."

하얀 수리가 컵에 물을 따라 칼리안에게 건넸다. 최근 마시는 것 때문에 굉장한 피해를 입고 있었던 칼리안은 물을 받아 내려놓은 후 마시지 않았다.

그것을 본 하얀 수리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나도 원래는 차를 내어줬소. 근데 아무도 안마시는 것이 아니오? 비싼 찻잎 버리는 게 아까워서 이제는 그냥 물만 주고 있소. 그런데도 안 먹는 것은 여전하니 이젠 아무것도 내주지 말까 생각중이오."

아마 음료를 거부하는 것이 칼리안만은 아니었는지 성의가 매번 무시되니 불편했던 모양이다.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아무거나 집어먹지 말라고 누가 그래서."

"하기사. 맞는 말이긴 하지. 신참인가본데, 앞으로 종종 마주칠테니 이름이나 알아 두시오. 나는 하얀 수리요."

칼리안은 그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티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 곳에 오기 전부터 미리 생각해 두었던, 세크리티아의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별칭을 알렸다.

"붉은 고니."

르메인을 처음 만났을 때 백조가 된 기분을 느꼈던 칼리안이었다. 칼리안의 겉과 속이 다르니, 그에게 이만큼 어울리는 별명도 없을 터였다.

"그래. 반갑소. 허면 무슨 모이를 찾아 오셨소?"

지금 칼리안이 찾은 이 곳에서 맡고 있는 일은, 첩보 활동에 필요한 기본적인 정보와 장비를 세작들에게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모이'였다.

칼리안이 책장과 선반을 한번씩 쳐다봤다.

"정보 하나, 물건 하나."

하얀 수리의 손바닥이 펼쳐졌다.

"정보 5플로린, 물건 3플로린. 선불이오."

무슨 정보, 무슨 물건인지도 묻지 않고 이렇게 가격을 말해주는 것이 이상했다. 이 곳의 운영은 오로지 하얀 수리의 자율이었으며 따로이 세크리티아에까지 알려져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칼리안도 이것 까지는 알지 못했다. 칼리안의 생각을 눈치챈 하얀 수리가 설명을 덧붙였다.

"정가제라서."

금괴를 구해달라 하면 3플로린에 살 수 있는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어 바보 취급을 받을 일을 만들지는 않았다.

칼리안이 품에서 금화 8개를 꺼내 하얀 수리에게 건넸다. 생각보다 값이 비쌌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값을 받은 하얀 수리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말했다.

"그래. 얘기하시오."

칼리안의 설명이 이어졌고 하얀 수리는 두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곧 그가 지도 하나와 종이에 싸인 작은 물건 하나를 들고 와 칼리안의 앞에 다시 앉았다.

먼저 작은 것을 칼리안의 쪽으로 민 하얀 수리가 말했다.

"일단, 물건 하나."

그 뒤에는 지도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보."

받아 보니 카이리시스의 상세한 지도였는데, 그 가운데 한 곳에 점이 찍혀 있었다. 칼리안이 의문을 가지며 물었다.

"이곳은 카이리시스 외에는 없는 것인가?"

하얀 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허공에 주먹을 뻗어보이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당신이 설명한 시설이 있을 정도의 규모라면 그 곳 뿐이오."

키리에가 카이리시스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을 확률이 현저히 낮아진다는 말이었다. 공연장 가는 길에 마주쳤던 아이가 키리에가 맞았을 것 같다는 생각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다행이군."

그나저나 점 찍은 지도 한장이 5플로린이라니. 괜스레 바가지를 쓴 기분을 느끼며 두 가지를 챙겨 품에 넣자, 하얀 수리가 종이 쪽지 하나를 더 내밀었다. 빼곡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선뜻 받지 않으니 하얀 수리는 하얀 이가 보이도록 웃으며 말했다.

"사용 설명서."

영 바가지는 아닌가보다.

칼리안이 피식 하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창고를 통해 다시 가게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가정집 대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새 판매점의 뒷건물인 것 같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판매점까지 걷는 대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레이븐."

오래지 않아 다각 다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두운 가운데 하얀 띠만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으로 레이븐이 걸어나왔다. 칼리안은 빠르게 레이븐의 등에 올라 일단 그 곳에서 멀어졌다. 잠시 뒤 적당히 밝고 외진 카페 앞으로 간 칼리안이 지도와 설명서를 열어 보았다.

'몸 조심하시오. 험한 곳이니.'

하얀 수리의 말이 떠올랐다. 칼리안이 실소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렴 당신보다 위험할까."

지도에 나온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 온 길을 다시 되짚어가야 했다. 설명서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읽고 외운 칼리안이 카페 입구에 켜져 있던 촛불에 지도와 설명서를 태워 없앴다.

* * *

칼리안의 눈에 깊은 근심이 들었다.

지도를 태워버려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지도는 정확했고 인근에 문을 연 곳은 한 곳 뿐이었다. 지금 칼리안의 머릿속에 갖가지 상념을 들게 한 것은 바로 2층짜리 건물 입구에 적힌 가게 이름 때문이었다.

-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

왜 하필?

"하······."

새 판매점으로 향하던 길에 보고 질색했던 바로 그 술집이었다. 다시 고개를 내려 술집 입구를 쳐다보던 칼리안의 마음이 참으로 복잡했다.

"아니 대체 누가 가게 이름을 저렇게 짓나? 시스파니안도 엄연히 왕족인데, 왕실에서는 왕족 모독죄도 안 묻는 거야?"

옛 칼리안의 기억이 답을 주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츠아라 사후의 시스파니안은 왕비로서 활동한 것이 아니므로 온전한 왕족으로 보기 어려웠다.'

칼리안은 참으로 할 말이 많은 표정을 지으며 시동에게 레이븐의 고삐를 맡긴 후 술집에 들어갔다.

술집 내부는 세크리티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묵은 오크통의 퀘퀘한 냄새와 쌉쓰름하면서도 시큼한 홉 특유의 냄새가 그득했다.

"일행이 있으십니까?"

곧 점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칼리안의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오밤중에 후드를 쓰고 있는 손님이 들어선 까닭인지 약간 경직된 걸음이었다.

"혼자 왔네."

새 판매점에서는 상관이 없었는데 이 곳에서는 상관이 있었다. 너무 어린 목소리에 점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칼리안은 설명 대신 은화 하나를 꺼내 점원에게 쥐어 주었다. 말 뜻을 잘 알아들은 점원이 곧바로 의심을 풀었다.

"빈 자리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용 설명서에 쓰여 있던 대로 말했다.

"4층으로 가겠네."

그 곳은 누가 보아도 너무 명백한 2층 건물이었다. 그러나 점원은 이 건물에 4층이 없다는 말을 하는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네. 따라오십시오."

칼리안은 다시 긴장하며 점원의 뒤를 따랐다. 시간이 늦어 대부분의 손님들이 거나하게 취해 있었기 때문에 칼리안은 크게 주목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대여섯 개 정도의 테이블을 지나 코너를 돌자 두꺼운 나무 문이 하나 나왔다. 점원은 품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연 뒤 칼리안에게 손짓했다.

"이 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여보인 뒤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점원은 방의 불을 켜고 다른 설명 없이 밖에서 문을 닫았다. 얼마 뒤 점원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칼리안이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댓 명 정도가 조용히 모여 술을 마실 수 있을 만한 공간으로 꾸며진 곳이었는데, 네모난 테이블과 장식장이 놓여 있었다. 그 외에는 카운터의 종을 울려 점원을 부르는 용도의 손잡이 달린 끈과 의미 모를 그림이 그려진 액자 하나, 그리고 옷을 걸 수 있을 붙박이 행거가 전부였다.

그러니 그 곳은 언뜻 보기에는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만들어진 특실같을 뿐, 특별히 이상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물론 칼리안에게는 그렇지 않았지만.

'나비 모양, 세 번째.'

설명서는 이 상황에 대해서도 친절히 알려주었다. 따라서 칼리안은 당황하지 않고 맞은편 벽으로 걸어갔다. 외투를 걸어둘 수 있도록 만들어진 나비 모양의 주석 행거에 시선을 둔 채였다.

칼리안이 여섯 개의 행거 중 세 번째 것을 잡고 비틀었다. 그러자 행거가 서서히 원을 그리듯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거의 90도 가까이 눕혀졌을 즈음.

- 딸깍.

무언가에 걸리는 소리와 함께 행거가 멈췄다. 칼리안은 옷걸이에서 손을 뗀 뒤 방 모서리에 놓여있던 장식장을 붙들고 옆으로 밀었다.

큰 힘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잠금 장치가 풀린 장식장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움직이며 어딘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심호흡을 한 번 한 칼리안이 언제든 나이프를 뽑아들 준비를 한 뒤 계단 아래로 발을 옮겼다.

딱 발 밑을 구별할 정도의 빛이 계단을 비춰주고 있었던 탓에 내려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참을 내려가던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추었다.

"3층."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에 '3'이라고 쓰여 있었다.

"카드 도박장이겠군."

입구는 어두운 천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커튼 틈새로 동그란 테이블을 하나씩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몇몇 남자들의 인영이 보였다. 칼리안은 3층 풍경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3층으로 올 때의 거의 두 배 쯤 되는 계단을 내려감에 따라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4'가 쓰여진 입구가 보이며 계단이 끝났다.

"여기군."

고함소리가 귀를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커져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의 머뭇거림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칼리안이 들어선 곳은 바로 격투기 도박장이었다.

검을 포기한 검사 키리에가 있을 곳이기도 했다.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4)

습한 냄새와 땀 냄새, 그리고 피 냄새.

그런 냄새에 익숙한 세월을 살았던 칼리안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입장료."

어떤 사내가 칼리안에게 다가와 두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에게 금화 2개를 주었고, 사내는 숫자가 새겨진 명패를 하나 건넸다. 칼리안의 이름을 대신할 숫자판이었다. 칼리안은 말 없이 그것을 받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도박장 한 가운데에는 널찍한 철창이 있었고 그 안에서 두 명의 남자가 한참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흑색의, 그리고 또 한 명은 백색의 머리띠를 두른 채였다.

쉰 명 남짓의 도박꾼들이 그 모습을 보는 중이었다. 일부는 철창을 둘러싸고 소리를 지르고, 또 다른 일부는 작은 테이블이 딸린 의자에 앉아 관전 중인 것이 보였다.

그렇게 제 자리에 선 채로 도박장 풍경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한 사람이 칼리안에게 다가왔다.

짧은 원피스를 입은 은색 머리의 소녀였다. 어려보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에 칼리안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스스로 원해서 입은 옷이 아니라는 것이 눈에 훤했던 까닭이다.

소녀는 곧 칼리안의 팔을 감싸잡고 손짓을 해 가며 빈 자리로 안내했다.

'말을 하지 못하나.'

칼리안이 자리에 앉자 소녀가 잠시 어디론가 가더니 손에 들고 있던 쟁반 같은 것을 칼리안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절반으로 나뉘어 반은 흑색, 반은 백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그 용도를 알아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잠시 경기장 안의 싸움꾼들을 쳐다보던 칼리안은 품에서 금화 세 개를 꺼내 백색 편에 놓았다.

하얀 머리띠를 한 남자가 이길 것이라 건 것이다. 소녀는 칼리안에게 지급된 번호와 백색에 3플로린을 걸었다는 것을 적어 돌려주고는 돈을 가지고 돌아갔다.

칼리안이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흰 머리띠의 남자가 검은 머리띠의 남자에게 맞아 휘청이고 있었다.

"더 숙이고 들어가야지!"

"팔꿈치 조심하라고, 머저리야!"

등등의 욕설 섞인 말들이 들려왔다.

칼리안은 싸움의 결과를 볼 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쿠당탕!

거대한 것이 내동댕이쳐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눈을 떠 보니 흑색 머리띠의 남자가 경기장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곤죽이 된 얼굴은 알아보기조차 어려웠다.

조금 전 칼리안으로부터 돈을 받아갔던 소녀가 다가와 종이 하나를 주고 돌아갔다. 칼리안이 3플로린을 걸었던 남자가 승리했으니 두 배의 금액을 지불한다는 증서였다.

"네! 피투성이 제라드가 오늘도 승리했습니다! 그럼 오늘의 세 번째 경기를 시작합니다!"

방금 본 것이 두 번째 경기라 하니 첫 경기는 칼리안이 오기 전에 끝난 것 같았다.

검은 머리띠의 남자가 질질 끌려 나가고 하얀 머리띠의 남자가 기진맥진한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지체없이 다음 경기가 시작됐고 종전의 소녀가 다시 걸어왔다.

칼리안은 이번엔 검은색 쪽에 걸었다. 대신 새로운 돈을 낸 것은 아니었고 조금 전에 받은 6플로린 짜리의 증서를 냈다. 소녀는 똑같이 칼리안이 선택한 정보를 적어 주고는 돌아갔다.

한 경기에는 거의 5분에서 10분 가량이 소요되었고 칼리안은 그 때마다 증서를 내고 결과를 예측했다.

그렇게 열 번째 경기가 종료되었다.

"열 번째 경기가 끝났습니다. 승리자는 강철 무릎 판테론입니다!"

경기 진행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곧 소녀가 다시 걸어와 예측 결과에 대한 증서를 건네주었는데 그것을 주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칼리안에게 있어 싸움의 승리를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3플로린은 어느새 1500플로린이 넘는 엄청난 금액으로 불어나 있었다.

계속하여 경기 결과를 맞추는 의문의 손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지 경기 진행자가 칼리안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칼리안이 고갯짓을 했다. 빨리 다음 순서를 진행하라는 뜻이었다.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다.

'도박 따위를 하러 온 것이 아니야.'

아직까지도 키리에가 나오지 않았다.

잘못 알았던 것일까, 혹은 시기가 맞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칼리안이 놓친 첫 경기에 이미 나왔던 것일까.

일단은 다른 손님들을 위해서라도 다음 경기 진행을 해야 했으므로 진행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이제 마지막 경기입니다. 무려 네 배의 배당금이 걸려있죠! 많은 분들께서 이 특별한 경기를 기다려 주셨을텐데요!"

그러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기대감을 드러냈고 진행자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우렁찬 소개를 시작했다.

"소개합니다! 피망치 숀!"

근육질의 거한이 앞서 나왔다.

하얀 머리띠의 그가 경기장 바닥을 발로 탕탕 구르더니 양 팔을 들어올리며 포효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에게 도전하는, 포기를 모르는 사나이!"

마지막 경기. 이번에도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정말로 숨이 멈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행자의 말과 오래된 언젠가의 기억 속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지금까지 아슬아슬한 패배가 벌써 열 번을 넘었는데요! 비록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쥔 적 없었으나 과연 오늘도 그러할 것인가!"

- 그 때 저는 싸움을 팔아 돈을 버는 곳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도전자가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검은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 머리띠 위로 선명한 물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칼리안의 몸이 움찔 떨렸다.

"승패를 예단하지 마십시오. 어제보다 더 강해져서 왔습니다!"

- 그러다 누이가 죽은 후 카이리스를 떠났습니다.

도전자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칼리안이 있는 곳을 향했고 덕분에 칼리안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소개합니다!"

파란 색과 검은 색의, 오드 아이를.

"괴물 눈알!"

키리에.

"키리에!"

찾았다.

* * *

소녀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건 돈이 너무 컸던 탓이다.

칼리안이 내어놓은 것은 조금 전 받은 증서였다. 1500여 플로린을 건 것이다. 예측한 승리자는 당연히 키리에였다.

옆에 서 있던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어이, 어마어마한 돈인데 그렇게 날리지 마쇼. 저 새끼 저거 한 번도 못이겼소. 경기는 볼 만 하니 그냥 응원이나 하고 돈은 하얀 쪽으로 거쇼."

"아니지! 오늘이야말로 이길 거야! 어제 딱 일 초만 빨랐어도 이길 수 있었다구."

그러고 보니 지금껏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는데도 검은 색에 돈을 거는 이들이 꽤 있는 모양이었다. 쟁반을 든 소녀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종이에 내용을 써준 뒤 돌아갔다.

이제 막 시작된 싸움에 사람들이 소리를 죽이고 경기장을 봤다.

키리에 역시 열 일곱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큰 키였으나 숀이라는 상대방의 앞에 서니 어린 애가 따로 없었다. 키가 족히 2미터는 될 듯한 거구의 숀이 팔을 휘둘렀다. 마치 레이븐의 다리를 보는 것 같은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오르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 쉬익!

팔을 휘둘러 나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소리가 들렸고 키리에가 살짝 몸을 틀어 피해냈다. 그러자 숀의 왼팔이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왔다. 키리에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두 번째의 공격을 모두 피해내자 휘둘렀던 팔을 빠르게 회수한 숀이 다리를 뻗었다. 그 속도가 굉장히 빨랐던 탓에 다시 피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키리에가 양 팔을 들어올려 공격을 받았다.

- 퍽!

막아내기 위한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소리와 함께 키리에의 상체가 휘청였다. 그렇게 키리에가 다시 한 발을 물러나자 숀이 다가오며 다시 한번 발을 올려찼다.

키리에가 숀의 다리를 잡아챘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게 하고자 한 행동이었으나 그러기에는 둘의 체급이 너무 달랐다. 숀은 자신의 다리를 붙든 키리에의 옆구리로 주먹을 뻗었다.

- 타앗!

키리에가 다리를 놓은 뒤 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그리고는 주먹이 지나가기 무섭게 달려들었다.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킨 키리에의 뒷꿈치가 숀의 턱을 강타했다. 턱이 옆으로 획 돌아가며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머리를 부여잡고 혼미해진 정신을 챙긴 숀이 키리에에게 달려들었고 키리에의 허리를 붙든 채 철창 벽을 향해 돌진했다.

- 쾅!

키리에의 몸이 철창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숀의 주먹이 키리에의 배를 가격했다. 키리에 역시 주먹을 뻗어 조금 전 발로 찼던 숀의 턱을 쳐올렸다.

그렇게 이십 여 차례의 공방이 이어졌다.

키리에의 무릎에 얻어 맞은 숀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왼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니 팔을 꺾일 때 다친 모양이었다.

물론 키리에 역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숀에게 한 발 다가서던 키리에의 몸이 잠시 휘청였다. 조금 전 뒷목을 얻어맞은 여파가 남아있는 듯 했다. 스치듯 맞은 눈은 퉁퉁 부은 채였고 입술도 터져 있었다.

"검이 없으니 아주 물러터졌군."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유로운 듯한 말이었으나 마음 속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키리에가 맨손으로 싸움을 하는 것을 보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숀이 허공을 가르며 키리에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오른쪽 주먹이 키리에의 얼굴을 향해 뻗어나왔다. 키리에가 순간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는데 그와 동시에 숀의 왼주먹이 키리에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커헉!"

숨이 막히는 소리를 낸 키리에가 철창에 몸을 기대고 섰다. 어깨가 흔들리는 것을 보니 급소를 제대로 맞은 모양이었다. 칼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숀이 달려왔다.

키리에가 발을 들어올려 숀을 강하게 걷어찼고 그 힘에 주춤 물러나는 숀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 직후 주먹으로 숀의 명치를 때렸으나 숀은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 퍼억!

숀이 마치 약을 올리듯 똑같이 주먹을 쥐고 키리에의 복부를 가격했다. 조금 전 다쳤던 옆구리 근처였는지 키리에가 다시 한번 몸을 휘청였다.

숀이 씩 웃으며 주먹을 감아 쥐었다. 키리에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섰다. 숀이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열댓 번의 주먹이 키리에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을 막아내던 키리에가 어느 순간부터 속절 없이 공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간신히 중간 중간 주먹질을 했으나 숀에게 큰 피해를 주질 못했다. 기어코 키리에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더는 두고 보지 못한 칼리안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키리에! 너는 공격 직전에 어깨를 물리는 버릇이 있다!"

수많은 소음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에 키리에의 어깨가 움찔했다.

키리에가 숀의 주먹을 막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손 끝부터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팔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손등서부터 팔뚝에 이르는 곳까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키리에가 숀의 배를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뻗어냈다. 단지 한 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이번 공격 때는 어깨가 제대로 움직였다.

- 퍼어억!

숀의 발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꽤나 충격이 컸던지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쥔 상태였다. 키리에의 반격이 제대로 먹히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도박장을 뒤흔들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키리에의 공격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팔을 뻗고 턱을 들이받고 돌려 찼다. 정신을 차릴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쉼 없는 공격이 가해졌다.

그리고 결국,

- 쿠웅!

몇 발자국 물러나던 숀이 눈을 까뒤집으며 대자로 쓰러졌다. 진행자가 재빨리 숫자를 세었으나 정신을 잃은 숀은 일어나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진행자가 말을 더듬더니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외쳤다. 키리에의 첫 승리에 매우 흥분한 목소리였다.

"드디어! 키리에가 승리했습니다!"

좌중이 들썩였다.

키리에의 승리에 돈을 걸었던 이들이 오늘의 큰 행운에 기뻐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오늘의 마지막 경기 승자는! 괴물 눈알 키리에입니다!"

키리에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서였다. 후드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으나 어쩐지 그 속의 눈을 마주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지.'

키리에가 느낀 것 같이 칼리안도 후드 너머로 키리에를 쳐다보고 있었다. 칼리안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피눈깔에 괴물 눈알이라."

그리고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올 때가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칼리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키리에가 승리함에 따라 금액 지불 증서를 가져와야 할 소녀는 아니었고 숀 만큼이나 덩치가 큰 남자였다. 그는 증서를 건네는 대신 말을 전했다.

"찾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따라오시죠."

예상한 대로 일이 흘러가자, 칼리안은 고민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5)

칼리안은 아무 말 없이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후드를 벗지는 않았다.

칼리안의 뒤에는 칼을 찬 장정 넷이 문을 막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철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쳐다보는 중이었다. 칼리안이 지금껏 낸 증서들이었다.

"3플로린으로 6천 플로린을 넘게 벌다니. 대단하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특별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증서들을 내려놓았다.

남자가 칼리안을 이렇게 불러 온 이유는 뻔했다. 금액이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저 돈을 다 꺼내주려면 엄청난 손해를 보아야 하니 아마도 적당한 협상이나 협박을 해올 것이라 생각했던 칼리안도 스스럼 없이 따라 나선 길이었다.

"아무리 도박장을 운영한다지만 우리도 상도의는 있는지라. 돈은 내어 드리겠소."

그렇게 말한 남자는 가볍게 쥔 주먹으로 테이블을 툭툭 쳤다. 그러자 남자의 뒤에 있던 이가 주머니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의외로 순순히 돈을 내어놓자 칼리안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후드에 가려져 그 표정을 볼 수는 없었겠으나 고개가 움직이는 것을 본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런데 왜 불렀느냐면."

남자가 칼리안 쪽으로 돈 주머니를 열어 보여주었다. 금화가 들은 것을 확인하라는 듯한 모양새였는데 칼리안은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어린애한테 이런 큰 돈을 쥐어 주자니 좀 걱정이 되서 말이지."

어느새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아마도 키리에에게 소리지르는 것을 누군가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들이 하는 말은 '돈을 주기는 주겠지만 지금은 못 준다. 다 커서 와라.' 이런 뜻인 것이다. 마치 누가 짜 둔 순서라도 있는 양, 방금 돈 주머니를 내려놓은 이가 키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 그 모습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큰 돈인 것은 아는데."

후드 아래로 간신히 보이는 것은 입술 뿐이었다. 그 입술이 웃고 있었다. 분명한 소년의 목소리였으나 당황하거나 놀란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칼리안이 고개를 약간 움직이며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협상 정도는 걸어올 줄 알았더니."

남자는 대답 대신 칼리안의 머리를 가리켜보였다.

"일단 그 답답한 모자나 좀 벗지, 꼬마야."

칼리안이 손을 들어 모자 끝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는 오히려 조금 더 깊숙이 눌러 쓰며 짧게 대답했다.

"안돼."

"사람이 눈을 보고 얘기해야지. 안 그래?"

꽤 큰 돈을 가지고 있던 것을 보면 평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호위도 없이 온 것을 보면 그리 높은 가문일 리도 없었다. 그런 확신이 있으니 남자도 이렇게 위 아래 없이 굴고 있는 것이다.

"이거 벗으면."

칼리안의 입술 끝이 비틀려 올라갔다. 플란츠에게 배운, 사람 심기를 뒤트는 데 아주 일가견이 있는 웃음이었다.

"곤란한 일이 생겨. 진짜로."

플란츠의 것을 꼭 닮은 웃음은 아주 탁월한 효과를 냈다. 남자가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뒤에 있던 이를 향해 턱짓을 한 것이다. 돈 주머니를 꺼내놓았던 사내가 칼리안에게로 걸어가 손을 뻗어 후드를 잡아챘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도 움직였다.

- 쉬익!

칼리안은 왼손을 들어 벗겨지려는 후드 끝을 붙들고 그 손에 채워진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 뒤로 돌아 후드를 잡고 있던 이의 손등을 내리그었다.

"으아악!"

사내가 제 손을 붙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을 때 칼리안은 어느새 다시 자리에 앉은 뒤였다.

"뭐, 뭐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칼리안의 컨디션은 최상이었으니 말라 비틀어진 몸으로도 이 정도는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아주 잠깐, 그리고 한 두 번 뿐이겠지만 상관 없었다.

동료의 비명에 문을 막고 있던 네 명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칼리안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뻗어나왔다.

명백한 살의를 담은 짙은 살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남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역시 기사들의 살기라는 것을 상대해 봤으나 확연히 달랐다. 칼리안 주변의 남자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칼 끝이 떨려왔다.

이런 곳에서 살아온 놈들은 눈치가 빠르다.

제 몸 사리지 않고 끝까지 칼을 맞대는 기사와는 다르다. 힘의 우위를 깨달으면 웬만해선 더 덤비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이 가지고 얕보는 건 재미 없어. 얼굴은 궁금해하지 말고. 칼 넣고, 시끄러운 애 치우고. 협상 먼저, 협박은 그 뒤에."

지금 뒤에서 손이 반쯤 잘려나간 이가 비명을 질러대고 있음에도 앞에 앉은 칼리안의 목소리는 너무나 태연했다.

"알아들었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

뭉클거리며 피어오르던 살기가 씻은 듯이 가라앉고,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후드 때문에 입만 보이니 더 살벌한 것이다.

'젠장! 칼 쓰는 미친놈을 불러들였어!'

밖의 수하들을 부르면 이길 수 있을까. 남자가 재빨리 머리를 굴려 힘의 차이를 가늠했다.

'움직임이 빠르다. 굼뜬 놈들이 저 속도를 따라갈 리가 없어. 게다가 저런 살기를 뿜어대는데 반은 제대로 칼도 못 뽑고 뒈질 판이다.'

계산의 결과는 간단했다. 괜히 싸워서 피도 보고 돈도 뺏기느니 돈만 뺏기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직접 검을 겨뤄보지도 않고 질 것을 걱정하여 발을 빼는 것이다. 칼리안이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돈을 다 줘버리면 나도 죽은 목숨인데. 어쩐다?'

남자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센 척 한답시고 저 돈을 다 꺼내오긴 했어도 정말로 저 큰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곤란했다. 당장의 사업에도 차질이 생길테고 상납금도 모자랐다.

그래도 칼리안이 협상을 얘기했으니 남자는 그것을 믿고 사정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꺼번에 돈을 주는 것은 어렵소. 지내는 곳을 알려주면 매주 돈을 나누어 보내겠소."

- 까드득!

칼리안의 나이프 끝이 철 책상을 긁어냈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칼리안이 말했다.

"칼, 시끄러운 애."

조금 전에 칼리안이 말했던 것을 상기한 남자가 손짓을 했다. 네 명의 손에 들린 검이 다시 검집으로 들어갔고 그 중 두 명이 비명 지르는 이를 데리고 도망치듯 나갔다.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됐소? 이제, 지내는 곳을 알려주면······."

- 까드득!

그것은 정답이 아니라는 소리다.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사실 저 돈을 한꺼번에 주는 것은 어렵소. 우리도 매주 상납금을 올려야······!"

조용히 하라는 듯, 칼리안이 나이프를 들어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알아봐야 귀찮을 얘기는 하지 말고."

"아니, 줄 돈이 없는데 어쩌라는 거요?"

남자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뜨끔한 듯 죽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아니. 내,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원하는 것을 그냥 얘기해달라는 뜻이오."

칼리안이 나이프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돈은 안 받을게."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칼리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남자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이어졌다.

"대신 사람 하나 줘. 괴물 눈알."

"아니, 그것은······!"

- 까드득!

"아 씨, 진짜!"

남자가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무리한 요구에 악다구니가 생긴 것이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안도 남자의 심경 변화를 눈치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주면 싸움이 벌어질 테고 그럼 별볼 일 없는 그냥 어린애라는 것을 들키게 된다. 그러니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된다.

칼리안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제 막 돈이 되기 시작한 놈인데다, 마스터께서······!"

그렇게 말하던 남자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의 나이프가, 검도 아닌 그것이 작은 울림 소리를 내는 것을 들은 탓이다.

- 우우웅!

곧 푸른 기운이 나이프를 감싸며 넘실거리더니 예리한 날이 되어 쭉 뻗어나갔다.

무엇이든 잘라버릴 것 같은 푸른 오러가 나이프에 맺혔다. 남자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말로만 듣던 것을 눈 앞에서 본 이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설마'하는 눈으로 칼리안의 손 끝을 쳐다봤다. 그 설마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난 칼리안이 검의 길이 만큼의 오러가 맺힌 나이프를 들어 그대로 남자의 코앞에다 내리찍었다.

남자가 움찔 놀라며 어깨를 확 움츠렸다.

"······!"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두꺼운 철제 테이블이 무슨 푸딩이라도 된다는 듯 소리 없이 내리꽂힌 나이프가 테이블을 뚫고 쑥 들어갔다. 푸른 빛의 잔상만 악몽처럼 길게 남았다.

테이블 밑, 양 무릎 사이를 스치듯 지나간 후 사라진 오러의 날에서 시린 한기가 느껴졌다. 남자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바지가 길게 잘려 맨 다리가 훤히 보였다.

"당신 뭐야!"

칼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울컥, 몸 속에서 핏물이 치고 올라왔다.

칼리안은 양 손으로 테이블 귀퉁이를 잡아 몸을 지탱하고는 치미는 핏덩이를 가까스로 되삼켰다.

'두 번은 못한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칼리안이 간신히 입을 열어 여유로운 척 말했다.

"6천 플로린에 네 목숨이면······ 괴물 눈알 바꿔주나."

목소리가 떨렸다. 아픔을 참기 위한 것이었으나, 남자의 귀에는 영락없이 화를 참는 것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미친! 소드마스터다! 나 같은 놈 백 명. 아니, 천 명이 모여도 상대가 안 된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남자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칼리안의 뒤에서 댕그랗게 치켜 뜬 눈으로 오들거리는 두 수하에게 눈짓을 했다. 데려오라는 뜻이었고, 두 명이 앞다퉈 달려나갔다.

칼리안이 손을 뻗어 나이프를 챙겼다.

오러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나이프는 의외로 멀쩡했다. 만든 이의 솜씨도 좋았고, 오러가 워낙 짧은 순간 발현되고 사라졌던 이유도 있으리라. 칼리안이 실소했다.

'칼보다 내가 약했군.'

칼리안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픈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내리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5년 같은 5분이 흘렀다. 그럭저럭 견딜만 해 질 정도로 통증이 줄어들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답답해진 칼리안이 나이프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수명이 줄어들 것 같아서 남자가 허둥지둥거렸다.

"금방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그 직후 사무실 문이 열리며 조금 전 나갔던 남자들이 뛰어 들어왔다. 헌데 둘 뿐이었다. 키리에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다. 남자가 다급하게 물었다.

"애는 어디 두고 너희들만 와?"

"놈이 하는 말이······ 히나, 그것을 두고 못가겠다고······."

칼리안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간신히 지킨 후드가 벗겨질 뻔했다.

히나.

들어 본 이름이다.

'설마, 아까 그······?'

칼리안의 고개가 들리자 남자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같이 가겠다 했다는 거지?"

"네. 히나라고, 똑같은 반쪽짜리······."

"상관 없으니까 데려와! 둘이든 셋이든 다 데려와, 그냥!"

"네, 네!"

다시 달음박질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달칵.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네 사람이 들어왔다. 남자의 수하들을 뺀 한 명은 키리에, 그리고 또 한 명은 칼리안도 조금 전 보았던 사람이었다. 증서를 전해주던 은색 머리의 소녀였다.

이들을 본 남자가 반색하면서 말했다.

"자. 다 데려가시오. 얼른 가시오."

드르륵,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남자와 수하들이 몸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따라와. 둘 다."

더 이상 다른 이들에게는 볼 일 없다는 듯 말한 칼리안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

남자가 안심한 듯 심장을 쓸어내리는데 짧은 소리를 낸 칼리안이 돌연 뒤로 돌아서서는 다시 다가왔다.

"왜, 왜 그러시오?"

남자의 앞에 선 칼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남자가 까무러칠 듯 놀랐다.

'마음이 바뀌었나? 돈까지 달라고?'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입장료랑 원금 돌려줘."

금화 5개.

아껴 써야 해.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6)

술집을 벗어나 조금 더 걸어가니 한적한 곳이 나왔다. 달이 밝았으나 날이 흐렸다. 게다가 마법 등불도 꺼진 늦은 시간이었다. 때문에 어두웠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칼리안의 걸음이 멈추었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이들도 멈춰 섰다.

칼리안이 뒤로 돌아서서 한동안 둘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지금껏 모습을 감춰주던 로브 끈을 풀었다. 검은 머리가 흘러내리듯 밖으로 드러났다.

- 펄럭!

칼리안의 로브가 히나라는 소녀의 어깨에 둘러졌다.

아무 말 없이 담담한 손길로 로브 끈을 매어 준 칼리안이 이번에는 키리에를 쳐다봤다. 키리에라고 썩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낡은 셔츠 차림이었으니.

칼리안이 쯧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재킷을 벗어 키리에에게 건넸다.

그 뒤에는 히나의 긴 은발 사이로 드러난 귀를 보며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자른 거야, 잘린 거야."

히나의 귀 끝에는 날카로운 것에 잘린 듯한 흉터가 있었다. 뾰족하게 드러난 것을 감추려는 것처럼.

키리에에게는 없던 것이었다.

둘은 남매였음에도 생김이 달랐다. 키리에가 술에 취해 주절거렸던 말이 떠올랐다. 기억은 없지만 키리에는 아버지를, 누이는 어머니를 닮았다 들었다고.

둘은 하프엘프였다.

칼리안의 말에 히나가 어깨를 흠칫했고 키리에가 히나와 칼리안의 사이를 막아서듯 다가와 섰다. 보호하려는 것이다.

경계심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와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칼리안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귓가에 아른거리는 그 날의 키리에가, 꺼져가던 목소리가 다시 떠올라서였다.

- 보은을······ 고작 이것 뿐이지만······.

반갑고, 안타까웠고, 고맙고, 미안했다. 그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더 많은 것들이 눈물이 되어 뚝 떨어졌다.

"후우······."

긴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킨 칼리안이 눈을 슥슥 닦아낸 뒤 고개를 들었다.

"남매, 하프엘프. 아까 거기 있던 사람한테 들었어."

정확히 들은 것은 아니지만, 알고는 있는 것 같았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적당히 둘러댄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경계하지 마. 나쁜 뜻은 없으니."

그 말과 함께 거짓말처럼 바람이 불었다.

바람결에 구름이 흘러가고 달빛이 비췄다. 붉은 눈이 드러났다.

그제야 칼리안을 제대로 본 키리에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옆에 선 히나는 영문도 모른 채 키리에를 따라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알아뵙지 못하고 감히 의심을 했습니다."

그 말에 히나가 깜짝 놀라 이미 숙인 허리를 더 깊이 숙였다.

"저는 키리에, 제 누이는 히나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은 고아입니다. 그래서 성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키리에는 칼리안에게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 칼리안은 그래, 하고 작게 말하며 둘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주었다.

"그래서. 귀는 자른 거야, 아니면 잘린 거야? 잘린 거라면 그 정도는 내가 갚아줄테니까."

지금 칼리안에게 중요한 건 첫인사가 아니었다.

히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 손으로 귀를 만지작거렸다. 직접 잘랐다는 뜻이리라.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카이리시스에서는 찾기 어렵지만 지방 도시에서는 여전히 엘프 노예 밀매가 이루어지고 있을 시기였으니까.

"말은 원래 못했어? 아니면 그것도 갚아줄게."

히나가 풋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왕자님이라기에 하늘처럼 높은 사람으로만 생각했는데 마음을 써주는 것이 느껴졌다.

"날 때부터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왕자님."

"다른 건. 갚아줄 것 없어?"

히나의 옷을 떠올린 칼리안의 질문이었다. 다행히 히나의 고개는 이번에도 좌우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키리에를 가리켜 보였다. 키리에 덕에 아직 별 탈은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래."

- 제 누이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습니다.

가진 것 없는 하프엘프 소녀. 그것도 예쁘게 생긴.

자살의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았었다. 자책하는 키리에의 표정에서 전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히나가 자살한 뒤 키리에는 도박장의 사람들을 전부 죽였다. 그 길로 도망쳐 나와 세크리티아로 왔었다.

"다행이다."

그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어제 아스트리샤에서 너를 봤어."

키리에가 놀란 얼굴을 했다. 사람들은 칼리안을 기억할지 몰라도 칼리안이 사람들을 기억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기사들을 보고 있던데."

키리에가 다시 한번 놀랐다. 칼리안의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네, 맞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마스터라는 사람이 키리에를 만나고 싶다 하여 잠시 밖에 나오게 된 차였다. 아주 잠깐 동안만 서 있다 다시 돌아갔었는데, 그 사이에 칼리안이 키리에를 알아봤던 것이다.

"혹시 기사가 되고 싶은 건가?"

칼리안은 언젠가의 키리에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었다.

- 키리에. 기사가 되고 싶은가?

검을 배울 수 없는 현실에 날개가 꺾이고 하나 남은 혈육까지 잃은 채 카이리스를 떠나왔던 키리에는 베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었다.

- 검입니다. 저는 검이 될 것입니다.

낯부끄러운 말을 당당하게도 꺼내놓던 눈이 생각났다.

그 눈을 똑같이 가진 열 일곱의 키리에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닙니다, 왕자님. 저는 기사가 아니라 검이 되고 싶습니다."

여전한 대답이었다.

칼리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너희. 내 이름은 알아?"

"네. 3왕자이신 칼리안 왕자님. 알고 있습니다."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전에 되받은 금화 다섯 개를 히나에게 건넸다. 큰 돈을 엉겁결에 받은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리안이 히나에게 물었다.

"청소 할 줄 알아?"

끄덕끄덕, 히나가 말을 대신해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좋아. 이제 닷새 동안 좋은 데서 자고, 제대로 된 옷도 사 입고, 잘 먹고, 신나게 놀면서 지내. 키리에는 치료도 좀 받도록 해. 혹시 돈이 모자라면 마법사 협회의 앨런 마나실이라는 사람 앞으로 달아 놔. 알아서 셈을 치를 테니."

히나가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도박장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사람이 왕자였고 그 왕자가 돈까지 주는 상황을 맞이한 키리에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칼리안은 이들에게 돈이나 쥐여주러 온 것은 아니었다.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닷새 뒤에 왕궁으로 와. 와서, 나를 찾아. 다른 왕자랑 헷갈리지 마. 왕자들 중에 술 처먹는 나쁜 놈이 있어서 잘못하면 큰일 나."

술 처먹는 나쁜 놈의 악명이 왕궁 밖에까지 났는지 히나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다가 놀란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왕궁으로 찾아오라는 말을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일단은 왕궁에서 지내. 편하게 있도록 배려해주기는 어려워. 일은 해야 해. 그래도 여기보다는 나을 거야. 아무튼 왕궁으로 오면 좀 강아지처럼 귀엽게 생긴 얀이라는 애가 있을 거야. 걔가 하라는 대로만 하고 있어. 나는······ 그땐 조금 바빠서 곧바로 너희들을 만나지 못할 지 모르니까."

말 못하는 히나가 키리에도 없이 혼자서 살 수 있도록 당장의 도움을 주기가 어려웠다. 앨런의 집으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키리에가 불안해 할 것 같았다. 어쨌든 앨런도 겉보기로는 매우 팔팔한 남자 사람이 아닌가? 그러느니 차라리 시녀로 두는 것이 나았다. 왕궁 생활을 싫어하면 그 때 가서 내보내도 늦지 않을 테니까.

"다 이해 했어?"

끄덕끄덕.

"좋아. 내가 몇째 왕자라고?"

손가락 세 개가 펼쳐졌다.

"혹시 왕궁에서 일하는 게 싫다거나?"

도리도리.

"며칠 뒤에 오라고?"

손가락 다섯 개가 활짝.

"그래, 좋아."

끄덕끄덕.

목이 아프지는 않을까 싶을 만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에,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히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을 뻔 했다. 키는 칼리안보다 더 작았지만 그래도 히나의 나이가 두 살 더 많은 것을 기억해내서 다행이었다.

히나에게 할 말을 마친 칼리안이 몸을 돌렸다.

레이븐의 안장에 있던, 키리에를 위해 마련한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키리에에게 건넸다.

"받아."

키리에가 얼결에 검을 받아들었다. 휘두르기 딱 좋을 정도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 모습을 본 칼리안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렇지. 검을 들어야 키리에지.

"당장 기사가 되지는 못해. 내 방패 노릇 먼저 해야 해. 그렇게 해서라도 검을 배우고 싶다면 나를 찾아와."

키리에가 손에 들린 검을, 그리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내가 널, 최고의 검으로 만들어 줄 테니."

왕자를 따르는 검.

지금의 키리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자리였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왜······ 저희에게 이렇게 큰 것을 주십니까."

"좋은 검이 필요해서."

칼리안은 그저 짧게 답했다.

키리에가 마음을 먹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무엇을 고민하겠는가.

키리에가 칼리안의 앞에 엎드렸다. 간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겠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왕자님의 검이 되겠습니다."

"그래. 그 검을 구하러 내가 이렇게 왔지."

칼리안이 웃으며 키리에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보은이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