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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 *

단 것 좋아하는 앨런은 설탕을 넣지 않은 진한 커피를 좋아했다.

만약 이것을 칼리안이 알았다면 꽤나 의외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앨런은 칼리안의 앞에서 절대로 커피를 마시지 않으니 칼리안이 앨런의 커피 취향을 알 일은 없을 터였다.

"마나실 경이 이렇게 쓴 커피를 마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신 체이스가 이렇게 말했다.

처음 앨런을 보았을 때도 앨런이 커피를 내어주기는 했지만 그 날은 칼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야 하는 말이었다.

"버릇이 되어 그렇습니다."

앨런은 그냥 이렇게만 대답했고 체이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카이리스의 국왕 전하께 미리 전해야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던 체이스는 플란츠가 찾아와 하고 간 이야기를 앨런에게 전했다.

"발칸의 부군단장이 아주 나서서 기밀을 줄줄이 알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야말로 플란츠 왕자님다운 일을 했습니다."

발칸의 군단장인 앨런이 이렇게 말하며 잠시 웃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하였지요. 세크리티아가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하면 그 몫이 전부 칼리안 왕자님에게 갈 테니 그것을 걱정하였을 겁니다."

앨런은 얼마 전 칼리안이 자신을 '마나실 백작'이라 부르며 체이스를 따라 나서도록 말했던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하께서 나서서 칼리안 왕자님을 돕겠다며 홀로 나서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냥 카스트린 경을 데리고 세작을 찾아가셨다면, 저는 예정대로 칼리안 왕자님을 따라나섰을 것이 아닙니까."

"네. 그렇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로지 앨런에게만은 자신이 짐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칼리안이 아니던가. 그러니 앨런과 함께 갔다면 칼리안은 앨런의 실드 안에 선 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렇게 무리를 해서 다시 쓰러지는 일도 없었으리라.

"물론 저하께서 그런 일을 벌인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확실히 이번에는 걱정이 과하셨습니다."

이해는 하고 있었다.

눈 앞에서 자신의 핏줄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비참한 기분은 앨런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플란츠도.

"그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에 플란츠 왕자님께서 더 나섰겠지요. 같은 일이 또 생긴다 해도 칼리안 왕자님이나 저하나 무모한 선택을 다시 하실 분들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플란츠가 체이스를 찾아간 것이다.

"짐은 이미 충분하니 적어도 제 몸은 건사할 상황은 만들어놓고 칼리안 왕자님을 돕든 말든 하라는 뜻으로 이야기를 하셨을 겁니다."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해서 저 역시 그렇게 하겠다 답했습니다. 발칸과 같은 방식은 아니겠으나 약하지 않을 힘을 지니겠다 결정을 했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다만, 세크리티아에서 유사한 군대가 창설되었을 때 카이리스에서 그 목적을 의심할까 우려가 되어 왔습니다."

"전하께서 그에 대해 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실 터이니 마음 놓으시지요."

적어도 앨런이 발칸을 이끄는 한 체이스가 아무리 강한 군대를 만든다 하더라도 발칸을 이기지는 못할 테니까. 게다가 소 같은 르메인은 체이스의 의도를 우려하거나 섣불리 의심을 할 만한 인사가 못되었다.

체이스가 온 목적에 대해서는 해결이 되었으니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앨런이 나지막이 말했다.

"헌데 저하께 제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네. 무엇이 궁금합니까."

"과거의 칼리안 왕자님께서 왕위를 포기한 이유를 알고 싶은데, 혹여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지요."

"이유라······."

"칼리안 왕자님께서는 저하가 더 나은 군주가 될 수 있다 생각해서 왕위를 포기했다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굳이 저하에게 기사 작위까지 받아가며 포기를 했다 하였지요."

"네. 맞습니다. 그런 이유를 말했습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체이스를 응시했다.

"만약 그 뿐이라면 그야말로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왕자님의 의도가 아니라, 그런 왕자님의 뜻대로 움직여 준 저하의 의도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의 저하를 본다면 동생이 칼을 드는 것에 절대 찬성하지 않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알려주기 힘들 일은 아니었다.

힘든 일이 아니라, 아픈 일이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옛 일을 떠올려보듯 기억을 훑어보던 체이스가 조용히 눈을 내려감았다. 똑같이 내려앉은 목소리가 고요하게 흘러나왔다.

귀족들은 베른을 지지했다.

베른은 왕비의 아들이었고, 체이스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그 때의 베른은 지금과 달리 재능을 드러내지 않았다. 검술 외에는 언제나 체이스의 뒤에 서있었고 늘 말을 아꼈다. 사람들 앞에 홀로 나서지 않았다. 체이스가 빛을 볼 수 있도록, 늘 그렇게 했다.

"만약 내가 세자위에 오르지 않았다면. 세크리티아의 귀족들은 불씨를 남겨두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서."

데블란이 베른을 바다에 던져가면서 체이스의 의중을 확인해보려던 것과 같은 생각을 세크리티아의 귀족들도 하고 있었다.

베른이 왕위에 올랐을 때 여러 면에서 베른보다 뛰어난 체이스가 과연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지에 대해서 의심을 하리라고. 그 의심의 싹이 될 체이스의 목숨줄을 자르려 들 것임을 것을 베른이 알고 있었다.

"저하를 살리려 왕위를 포기했다는 겁니까."

"둘 모두 살기 위해 포기했다 하는 것이 맞겠으나, 자신이 죽더라도 그것이 내가 사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다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고민하지 않고."

앨런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같은 것이군요."

칼리안은 앞으로의 일에 대응하기 위한 힘이 필요해서 세자위에 오르겠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앨런은 그런 칼리안의 말에 의구심을 품었다.

세자가 되면 힘은 생길지언정 그 행동에 제약이 생기지 않나.

처음에야 플란츠와의 관계가 극악했다지만 지금은 아니다. 때문에 플란츠와 우호 관계를 유지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란델에 대한 일만 해결한 뒤 플란츠를 세자위에 올리고 수도에서 벗어나 제 힘을 가지는 것이 낫다. 플란츠 성격에 칼리안을 견제하지는 않을 테니까.

"굳이 세자위를 가지겠다 하시기에 이상하다 여겼습니다. 그 자리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 자리를 얻으려 하시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저하의 말씀을 들으니 이제 알겠습니다."

칼리안은 베른과 달리 숨지 않았다.

스스로 나서서 두각을 드러냈고 빛을 보았다. 관심을 받고 호평을 받았다. 체이스처럼.

그런 칼리안이 세자위를 포기한다면, 그래서 플란츠가 그 자리에 오른다면.

여러모로 비범한 칼리안이 왕위에서 멀어진 뒤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지를 생각하는 것은 세크리티아나 카이리스나 다르지 않을 터였다. 다만 다른 것은, 체이스와 달리 칼리안을 암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상황이 역전될 수 있다.

칼리안을 옹호하는 세력이 세자위에 올라있을 플란츠의 목숨을 노리게 될지도 몰랐다. 거기에 더해 플란츠 역시 왕위를 원하지 않고 있으니, 스스로가 그 자리에 서기로 한 것이다.

플란츠를 살리겠다고.

그것을 모를 리 없을 똑똑한 플란츠가 그렇게 나서서 칼리안을 돕는 것일 테고.

"이 얼마나 눈물겨운 형제애인지."

앨런이 이렇게 말하며 커피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결코 칭찬의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 * *

하루를 꼬박 잠으로 보냈다.

어쩐지 눈만 감았다 뜨면 날짜가 휙휙 바뀌어 있는 것에 실소한 칼리안이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전날 하지 못한 것들을 빨리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헤르츠 경을 좀 불러줘."

이렇게 말하는 칼리안을 본 얀이 조용히 키리에를 쳐다봤다.

- 눈 뜨자마자 또 일 하겠다는 말 하시면 그냥 기절시켜요.

칼리안이 일어나기 전 얀은 키리에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키리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고 싶고 말고 할 것 없이 일단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얀의 눈에는 당연히 스치기만해도 픽픽 쓰러질 왕자겠지만 자칫 그렇게 건드렸다가 칼리안이 무의식중에 반격이라도 하는 순간 키리에 팔이 잘려나갈지도 모를 일인 것을.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얀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투기를 본 칼리안이 경계하는 낯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얀이 툴툴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식사 준비 해뒀으니 식사부터 하세요."

안그래도 하루 내내 잠을 잤더니 속이 꽤 허했으므로 칼리안은 얀이 시키는대로 얌전히 자리에 앉아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칼리안은 플란츠와 달랐다.

끼니는 절대 거르지 않았다. 밥이 보약 아니던가?

따라서 아주 야무지게 음식을 먹어치워가는 칼리안을 보던 얀이 말했다.

"그래도 저는 다행이네요. 레릭은 플란츠 왕자님이 밥을 잘 거르신다고 걱정이 크더라고요."

"여전히 식사를 안하신대?"

실리케의 일 이후 끼니를 잘 안챙긴다는 것은 알았지만 여전히 그러고 있는 줄은 몰랐다.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들어 창 밖을 쳐다봤다.

층수 차이에 따른 높이만 달랐을 뿐, 칼리안의 방이나 플란츠의 방이나 테이블이 놓인 위치는 똑같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주 잘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헤이시아 궁.

실리케가 머물던 곳.

유난히 높은 지붕 탓에, 르메인의 집무 공간인 아르피아 궁의 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보이고 있었다.

"저걸 보면서 밥이 넘어가는 게 이상할 일이긴 하지."

놈이 밥을 왜 안 처먹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뒤 손가락을 움직여가며 아주 잠시 고민을 했다.

지금 생각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지, 혹은 없을지.

곧 생각을 마친 칼리안이 얀을 향해 말했다.

"헤르츠 경에게 여기 오는 길에 뭐 하나만 하고 오라고 전해줘."

"네. 어떤 것을 하라고 할까요?"

칼리안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창 밖의 헤이시아 궁을 가리켜 보였다.

"저 지붕 날려버리라고."

어차피 갇혀 사는 김에 그냥 조금 더 갇혀 있으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 형님, 밥은 제 때 드셔야지.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5)

칼리안도 사람이다.

그러므로 칼리안도 상처를 받는다.

예를 들면, 불면 날아갈까 스치면 바스라질까 어화둥둥 우리 왕자님 해가며 자신을 아껴주던 시종의 얼굴에 이런 표정이 떠올랐을 때 그렇다.

- 방금 어디서 멍멍이가 짖었는데.

아무리 플란츠로부터 하루 걸러 한 번씩 짖는다는 말을 들어왔던 칼리안이라지만 얀의 얼굴에 나타난 이 말은 상당히 뼈에 사무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이시아 궁의 지붕을 날려버리라는 칼리안의 말을 한번 되새겨 본 얀이 공작가 장남 시로이안과 시종 얀을 반반 섞은 얼굴이 된 채로 말했다.

"식사 마저 하세요."

닥치고 밥이나 먹으라는 소리다.

부수는 것은 잘 하지만 거짓말과 빈말은 잘 못하는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키리에."

"네, 왕자님."

"네가 가."

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키리에가 뭐라 대답할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네."

이렇게.

칼리안이 '국왕 전하 앞에 가서 칼 한번 뽑아봐라' 라고 말해도 저렇게 담백한 대답을 하고 그대로 할 사람이 바로 키리에다. 그러니 그깟 지붕 하나 없애라는 말을 아르센에게 전하는 것 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닐 터였다.

그리고 또 하나.

보태지도 빼지도 않은 칼리안의 말을 고스란히 전달받게 될 아르센은 이 곳에 오는 길에 있는 헤이시아 궁에 잠시 들러 가벼운 마음으로 불덩이를 날리고 올 위인이었다. 정말로.

그야말로 충직한 따까리와 미친 따까리의 조합이 아닌가?

"잠깐, 잠깐만요."

개중에 그나마 내일이 있는 것처럼 살고는 있는 얀이 황급히 키리에의 앞을 막아서며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왕자님. 이건 그냥 내친김에 부수고 말고 할 일이 아닙니다. 헤르츠 경 죽어요. 왕자님도 무사히 못 넘어가신다고요."

그 말에 칼리안이 잠시 웃다 대답했다.

"괜찮아."

그리고는 키리에를 보며 눈짓을 했다.

얼른 가보라는 뜻이었으니 키리에는 지니고 있던 검을 벽에 기대놓은 뒤 아르센을 부르러 밖으로 나갔다.

"걱정 안해도 돼."

"하지만요, 왕자님."

"괜찮으니까 가서 히나 오라고 해줘."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얀이 무어라 더 얘기하려 하는데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 말을 잘랐다.

"원래 내 나이 때는 사고도 좀 치고 그러면서 커."

책임은 내가 지고 뒷수습은 전하께서 해주실텐데.

뭐 어때.

* * *

드미레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본래 카이리시스에 있는 지그프리드 저택을 관리하던 것은 드미레아의 어머니인 세리에였다.

그리고 세리에는 슬레이만과 함께 지그프리드 영지로 갔다. 덕분에 생각지도 않았던 저택 일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 터였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당연한 것이니까.

"몇 번째지."

보던 책을 잠시 덮은 채 상당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오는 드미레아를 향해 앞에 서 있던 집사장이 차분히 대답했다.

"여덟 번 째입니다."

그런 집사장이 들고 있는 쟁반에는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물론 에반 브리센 후작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칼리안과 플란츠의 일로 명예가 실추된 브리센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소각하라 이를까요."

조심스레 묻는 말에 고개를 가로 저은 드미레아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집사장이 얼른 편지를 건넸다.

- 팔락!

그것은 두 장의 편지였다.

빠르게 훑어내리며 내용을 대충 대충 살핀 드미레아가 편지를 돌려줬다.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플란츠 왕자님이 이 저택에서 훼손이나 파손하신 것이 있던가."

"없습니다, 소가주님. 칼리안 왕자님은 물론이고 플란츠 왕자님도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고 계속 방에만 머무셨습니다."

방에 박혀 나오지도 않는 사람 손에 훼손되거나 파손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드미레아가 집사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보상은 됐으니, 입 안다물면 플란츠 왕자님 앞으로 숙박비와 식비를 청구하겠다고 답장하도록."

"숙박비와 식비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리가 플란츠 왕자님을 강제로 억류한 것이 아니라 플란츠 왕자님이 원해서 있었던 것으로 상황을 바꿔놓겠다 하면, 조용해지겠지."

드미레아가 숙박비와 식비를 청구하게 되면 플란츠는 별 말 없이 대가를 지불할 테고, 그 순간 그 일은 억류가 아니라 자의 방문이 된다. 정말로 억류하고 있던 사람에게 숙박비와 식비를 받을 리도 없거니와 억류 당했던 사람이 그것을 줄 리가 없으니까.

어차피 칼리안이 이 저택에 숨어 있어야 했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그러니 지그프리드에서 플란츠를 '억류'하고 있었다는 오명 역시 계속 떠안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에게 식비와 숙박비를 청구하겠다 으름장을 놓으라 얘기한 드미레아가 느긋한 목소리를 냈다.

"유명해진 김에 이름 한번 제대로 나 볼까."

사람들은 지그프리드 저택에 칼리안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들이 아는 것은 플란츠가 한밤중에 제 발로 소공작이 '혼자'있는 저택에 몰래 찾아와서 일주일을 지냈다는 것 뿐이다. 그런데 공작가 소가주는 칼리안의 정혼자로 소문이 나 있다.

2왕자와 3왕자, 그리고 소공작.

셋 모두 분명한 성인이니 말 많은 귀족들이 이 셋이 얽힌 상황을 보고 또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까.

"하지만 그리 되면 소가주님께 피해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심한 추문이 돌아도 소공작 자리가 없어지지는 않고, 공작 가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나. 누가 더 손해일지는 후작이 잘 판단할 일이지."

무슨 추문이 돌든 누가 봐도 플란츠만 손해를 볼 일이다.

"네 소가주님. 말씀하신대로 바로 회신하겠습니다."

집사장이 저도 모르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한 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드미레아의 서재에서 나갔다.

드미레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덮어놓았던 책을 다시 펼쳐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히나의 품에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칼리안은 이제 꽤 묵직해보이는 녀석을 히나로부터 건네 받아 안았다. 고양이를 안은 채로는 수어를 할 수 없을 테니까.

맞은편 소파에 히나를 앉힌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히나. 물어볼 게 있어."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은 작은 애옹 소리를 내는 고양이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발칸에서 일할 수 있다면 할 생각이 있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칸은 마법사들의 군대가 아니던가.

마법사가 아닌 이는 능력과 특기와 할 줄 아는 것이 왕자인 플란츠 뿐이었다.

그래서 잠시동안 칼리안의 말 뜻을 생각해보던 히나가 뭔가를 알아챘다는 듯 '아!' 하는 입모양을 만들더니 손을 움직였다.

- 그 곳에, 시녀가 모자라요?

칼리안이 짧은 웃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퍽 부드러운 얼굴을 한 채 대답했다.

"설마 내가 널 다른 건물 청소나 하라며 보낼까."

- 그럼, 치료 때문에요?

"응. 정확히 얘기한 건 아니지만, 아마도 형님께서 왕실 기사단 카렌과 라온을 발칸에 합류시킬 것 같아."

플란츠가 자신의 구체적인 계획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플란츠가 두 개 기사단을 손에 쥘 가장 평화적인 방법이 그것임을 칼리안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군단장 앨런 마나실을 주축으로 마법사단을 담당할 아르센과 기사단을 담당할 플란츠. 이렇게 구성된 발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훈련 방법도 달라질 거야. 마법사와 기사가 함께 훈련을 받게 되면 당연히 부상이 늘어날 수 밖에 없을 테니 치유사가 있다면 좋을 거야."

물론 어느 정도는 명분이고 핑계였다.

귀하디 귀한 능력을 지닌 히나를 언제까지고 시녀로 부려먹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히나가 그동안 별 불만 없이 시녀로서 일해왔지만 혹시라도 다른 일을 더 원하지는 않을까 싶어 꺼내 본 말이었다. 물론 그것도 히나가 좋다 했을 때의 일이겠지만.

- 할게요.

히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고, 칼리안이 살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고민 없이 대답하는 것 같은데, 히나. 발칸은 군대야. 지금이야 왕궁 안에서 평화롭게 있다지만 나중에 때에 따라서는 전투에도 따라가야 해."

- 알고 있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히나의 까만 눈을 잠시 응시하던 칼리안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히나. 시키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지를 묻는 거야. 그러니까 나 때문에 하겠다고는 하지 말고."

히나의 눈이 다시 동그랗게 변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껏 칼리안은 딱히 누군가의 의사를 묻고 일을 시킨 적 없었다. 키리에와 히나를 대할 때에만 '하겠는지' 혹은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깊이 생각하고 결정해. 키리에와도 얘기해 봐. 왕궁 안에 네가 할 수 있는 다른 일도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하는 말이니까 선택은 네 몫이야. 혹시 다른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걸 얘기해줘도 괜찮고, 그냥 지금 하는 일이 좋다면 그렇게 대답해도 돼."

거기까지 들은 히나가 맑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 네. 그렇게 할게요. 자상한 왕자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화가 끝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고양이가 다시 애옹애옹 소리를 냈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문득 그 목줄에 새겨진 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시선을 내려 그것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거 바꿔줘."

- 혹시 언짢으셨어요? 제가 너무, 장난스럽게, 써놨나봐요.

"아니야.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고."

칼리안이 오해하지 말라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형님 이름만 넣어. 내 이름 지우고."

정말로 플란츠를 더 좋아하는 고양이. 그러니 누가 보아도 고양이의 진짜 주인은 플란츠가 아니겠나.

칼리안의 말에 히나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동안 칼리안의 붉은 눈을 응시하다가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 싫어요.

칼리안은 가만히 웃었다.

* * *

그리고 아르센은.

"고맙네."

신났다.

키리에의 말을 전해듣기가 무섭게 아르센은 매우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전혀 들떠있지 않았지만 아르센은 분명 신나 하고 있었다.

때문에 키리에의 귀에는 이런 아르센의 답이 '칼리안의 말을 전해주러 이 곳까지 온 수고에 대한 고마움'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한바탕 날뛸 기회가 왔음을 전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으로만 느껴졌다.

어찌됐건 할말을 전했으므로 키리에는 곧바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르센이 수행하고 칼리안이 책임을 질 일이니 거기에 키리에가 끼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아무튼 그렇게 키리에가 자리를 벗어난 뒤 아르센은 빠른 걸음으로 훈련장에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발칸의 마법사들을 향해 말했다.

"실전 훈련을 진행할 테니 모두 따라오도록."

그 말을 들은 마법사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무슨 실전 훈련이란 말인가? 플란츠만 오면 그것이 바로 실전이며 지옥인 것을.

다만 이런 말을 입 밖에 내기는 힘들었으므로 그저 시키는대로 아르센을 따라 빌헬름 관의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빌헬름 관은 헤이시아 궁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체르밀에서 헤이시아의 지붕만 보였다면 이 곳은 건물 전체가 다 보였다. 중간을 가로막는 것은 오로지 몇 그루의 가로수 뿐이었다.

바로 그 헤이시아 궁을 향해 선 아르센이 자신과 헤이시아 궁 사이에 얼음 방벽 하나를 세운 뒤 말했다.

"표적이다."

그저 야외라는 것만 제외하고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르센은 항상 이렇게 얼음 방벽을 세운 뒤 화염구 실습을 해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법사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르센이 검지를 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딱, 한 방."

아르센의 손가락이 얼음 방벽을 향했다.

"있는 마력 없는 마력 전부 쥐어 짜서 딱 한 방만 한꺼번에 쏴라. 그래서 저 방벽이 부서지면 오늘 훈련은 여기서 끝내고 술 한잔 사지."

어때?

하고 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그 칼리안이 그리 생각하지 않았던가. 마법사들은 대체 왜 이렇게 호전적이냐고. 그리고 발칸은 일반적인 마법사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호전적이지 않았다.

녀석들의 눈은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다.

"셋 하면 쏜다."

이렇게 말한 아르센의 앞에 시뻘건 불덩이가 생성됐다. 그리고 그 몸집을 거대하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레이의 마차를 날려버리던 그 날의 불덩이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과연 아르센의 주종이 얼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그것을 본 마법사들의 앞에도 일제히 화염구가 떠올랐다.

"하나."

마법사들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지금 아르센이 얼음 방벽을 유지한 채로 화염구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둘."

불과 얼음.

완벽한 상극인 두 힘을 함께 운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간신히 만든 얼음 방벽이 얼마나 약할지도.

"셋."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다.

- 쌔애애액!

얼음의 방벽은 첫 화염구가 닿기도 전에 부서져 사라졌다. 막아 줄 방벽이 사라진 51개의 거대한 화염구가 날아갔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날아간 방향의 끝에, 이제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건물 하나가 있었다.

- 콰아아아앙!

지축이 흔들리고 주변의 나무들이 휘청거렸다.

앨런의 책상이 진동했다.

체르밀 궁의 유리창이 흔들거렸다.

드미레아의 귀에 폭음이 들렸다.

화염폭풍과 자욱한 먼지가 걷히고 난 뒤.

방금 저지른 일의 결과를 확인한 아르센이 중얼거렸다.

"어이쿠."

칼리안은 지붕을 부수라고 했고, 아르센은 지붕도 부쉈다.

"방벽이 못버틸 것을 계산 못했네."

그것은 엄연히 훈련 중 실수에 의한 사고였다.

* * *

시간이 조금 지났다.

앨런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전달받은 르메인이 잠깐 혼자 있고 싶다고 대답했다.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6)

그렇잖습니까.

왕궁 어디에도 온전한 놈 하나 없는데.

저 분은 무엇이 그토록 억울해서 홀로 그리 되셨을까.

* * *

뚝 뚝 뚝 하고.

테이블에 점점이 떨어지던 핏방울.

거기서부터 기억이 난다.

무엇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그 날이 언젠가의 이른 아침이었다는 것.

플란츠가 늘 그래왔듯이, 다만 평소보다 조금 더 심하게 화를 냈고 결국은 참지 못해 나이프를 던졌다는 것. 아마도 칼리안이 그 나이프를 손으로 잡았으리라는 것.

핏방울. 그리고 플란츠에게 건넨 말.

- 괜찮습니다.

그것이 칼리안에 대한 란델의 첫 기억이다.

그 전의 칼리안이 어땠는지 따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이전의 칼리안은 그림자 같이 지냈다. 억눌려 있었고 말하지 않았고 고개 들지 않았다. 그런 칼리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은 란델에게 있어 굉장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란델은 르메인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르메인의 무관심은 그저 지독했다. 채 설명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지독함을 없애주지 못했다.

빈틈 없는 무관심 속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홀로 보내온 란델이, 어린 란델의 눈에는 그저 냉막하기만 했던 르메인에게서 무엇을 보고 배웠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그랬으니.

이렇게 말을 건네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생경하고 어느 정도는 신기했다.

그래서 그리하였다.

지켜보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도움이 되어 줄지. 혹은 그 반대일지. 그것을 가늠할 수 있을 때까지.

- 카밀론 가서 개 키울 겁니다.

그랬더니 이런 말을 했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란델을 향해 숨길 생각조차 없는 살기와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당장이라도 란델의 목을 꺾어버릴 기세로.

- 탁.

다시 한번 떠오른 칼리안에 대한 생각 때문에 창 밖을 잠시 바라보던 란델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거칠 것 없이 날아간 화염에 부서진 과거의 잔재.

그것이 보내오는 매캐한 연기가 방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 * *

술은 못 샀다.

'마나실 군단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대신 불려갔다.

의외로 체포되지는 않았다.

빌헬름 관의 잡무를 보아주는 한 시종이 다가와 이렇게 말했고 아르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앨런의 집무실로 향했다.

앨런은 수많은 마력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였음을 이미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냥 두었던 것은 아르센이 허튼 짓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어느정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르센은 그 믿음을 와장창 깨부순 상태였다.

그러므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 물어볼 것이 뻔했다. 때문에 아르센은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 똑똑

"들어오게."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에서 등을 돌린 채 창 밖을 향해 서 있는 앨런이 보였다. 헤이시아 궁이라기보다는 '옛 헤이시아 궁 터'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게 변해버린 폐허의 모습이 창문을 통해 아주 잘 보이고 있었다.

실리케가 마력탄으로 헤이시아 궁의 한개 층을 망가뜨렸을 당시 대마법 보호진이 함께 파괴됐다. 그래서 '가능'했다.

"······ 설명해보게."

고개를 돌려 누가 들어왔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앨런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르센은 정중한 말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르센의 말에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어준 앨런이 조용히 되물었다.

"훈련 중 방벽이 깨지는 바람에 벌어진 사고인데 너무 놀라서 마력을 흩을 생각도 못했다. 51명이 하나같이 그 생각을 못했다. 맞는가?"

"네. 맞습니다, 군단장님."

믿지도 않겠지만 믿으라고 하는 거짓말도 아니었다.

앨런이라면 지금쯤 눈치 챘을 것이다. 이 일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말이다.

어차피 칼리안도 이 일이 자신이 계획한 일임을 앨런에게까지 숨기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칼리안은 아르센이라면 르메인에게 둘러댈만한 적당한 핑곗거리를 만들어가며 일을 벌이리라는 것을 믿었다.

항상 그래왔듯 아르센은 칼리안이 책임져 줄 수 있는 선 안에서 사고를 쳤으니까.

"······ 그래서 화염구 50개가 헤이시아 궁 중앙 기둥을 가루로 만들었고. 유난히 큰 불덩이 하나가 이유 없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렸고. 그 한 개가 지붕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건물이 폭삭 주저앉게 되었다. 그 말도 맞는가?"

"그렇습니다."

아르센의 대답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때문에 앨런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그래. 그럼 이제 이 일을 어찌할텐가?"

여기에 대해서는 매우 확실하게 생각해 둔 대답이 있었다.

"제 급여에서 제하시면 됩니다."

멋지게 대답한 아르센이 씩 웃었다.

* * *

밥.

그래 밥.

밥 때문이란다.

세상에어떤미친놈이

자기형밥먹이겠다고

궁전을날려버리는지

"제 형님께서 헤이시아 궁이 신경쓰여서 식사를 못하신다는데. 능력이 닿는대로 좀 도와드리는 것이 아우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5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그것도 시스파니안이 직접 짓고 직접 사용했던 그 아름다운 헤이시아 궁을 그 꼬라지로 만들어놨다.

아르센도 예견한 바와 같이 훈련중 실수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은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앨런은 아르센이 어떤 놈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분명 칼리안이 뭔가를 또 꾸민 것이리라.

다만 이 일에 칼리안이 개입했음을 함부로 언급하기는 힘들었으므로 일단 르메인에게만은 아르센이 일러준대로 똑같이 알렸다. 그리고 곧장 체르밀 궁으로 왔다.

그 후에는 칼리안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물었고 너무나 어여뻐서 환장해버릴 듯한 꽃 같은 제자는 거짓말도 안했다. 차라리 아르센처럼 눈에 빤히 보이는 핑계거리라도 대면 좋으련만.

"그러니까 플란츠 왕자의 끼니거름이 걱정되어 저리 만들어두셨다는 말씀이 맞으신지요?"

이 몸이 늙고 늙어 이제 귓구녕에 주름이 졌나.

딱 이런 표정으로 물어오는 앨런을 향해 칼리안이 방긋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승님. 맞습니다."

아······!

시스파니안이시여.

제 앞날 생각 않고 형님들만 챙긴다고 걱정했더니 그야말로 주옥같은 인생을 불태우며 살아가고 계시는 이 제자님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앨런이 관자놀이를 아주 꾹꾹 눌러댔다.

"왕자님. 헤이시아 궁은."

"시스파니안이 지냈던 곳이라는 건 압니다."

그런 것은 몰랐다는 거짓말이라도 제발 좀 해주시면 안되겠느냐 물어볼까 하는 생각을 집어치운 앨런이 애써 침착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이유가 또 있으시겠지요?"

칼리안은 주고 받는 값이 꽤 정확한 사람이다.

물론 플란츠를 걱정하여 저런 일을 벌인 탓도 있겠지만 그것 하나만 가지고 궁을 없애버릴 만큼의 인사는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정말.

참으로 다행하게도.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란의 여지도 좀 필요했고, 과시도 해야 했고. 그래서요."

앨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방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담담한 얼굴로 있던 칼리안이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잘 재워주신 바람에 제가 생각보다 일찍 잠들어서요, 스승님. 스승님께 드리려던 말씀을 다 못드렸습니다."

앨런이 자신을 재워버린 것에 대해 툴툴거리는 것이다. 어찌됐건 칼리안을 위해 한 일이니 앨런은 그에 대해 사과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계획이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말씀 드릴게요."

"듣겠습니다."

칼리안이 웃음을 지운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왕실의 두 기사단과 발칸이 하나로 통합될 겁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초석이랄까요."

"발칸을 통합하기 위해서 분란의 여지를 만들고 과시도 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칼리안의 계획은 이것이었다.

만약 평화롭지 못한 방법으로 브리센을 흡수하면 브리센 후작을 따르던 수많은 귀족들의 세력이 분열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장은 왕궁 안에 있는 플란츠가 그들을 제대로 관리할 상황도 되질 못했다.

더불어, 그레이 브리센과 레넌 브리센에 대한 처분 방향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그러니 왕궁 밖에서는 브리센 후작이 후작가를 잘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지금 상황에서 형님께서 왕궁 내 기사 세력을 '평화롭게' 가져오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에반 브리센 후작이 두 기사단의 통솔권을 제 손으로 직접 형님에게 넘기는 것."

"그것 때문에 헤이시아를 건드리셨습니까."

"형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가져올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만.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시간을 앞당기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비록 지금은 주인이 없다지만 헤이시아는 브리센이 휘두르던 권력의 상징이다. 그것을 발칸의 부군단장인 아르센이 부숴버렸다.

"헤르츠 경이라면 알아서 적당히 면피할 구실을 만들어두고 일을 벌일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헤르츠 경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아무튼 그리 되면 헤르츠 경은 처벌을 받지 않을 텐데, 헤이시아 궁이 부서진 것도 모자라 헤르츠 경에 대한 처벌도 없다면 브리센 후작 기분이 좀 많이 나쁠 겁니다."

안그래도 칼리안의 세력에 대해 이를 갈고 있을 에반은 플란츠를 만날 테고, 플란츠는 적당히 에반을 구슬리면 된다. '무시하지 못할 무력을 지닌 마법사들과 대치할 만한 힘이 필요하니 기사단 통솔권을 달라'고.

"판은 제가 깔아드렸으니, 브리센 후작을 만나서 기사단 통솔권을 달라며 설득하는 것은 밥 많이 드시고 속 든든해진 형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죠."

그래서 그냥 속 시원하게 헤이시아를 치워버린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겸사겸사.

"아무리 기분이 나쁘다 하나, 브리센이 그 말을 덥썩 믿겠습니까."

"통한다면 빠르게 일이 진행되니 좋고 안 통하면 형님께서 생각했을 원래 계획대로 다시 진행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스승님께서는 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 아무리 그래도 다음에는 그리 큰 것을 부수지는 마시지요."

"네. 노력해볼게요."

어차피 부서진 궁이다.

부순 이유까지 확실히 확인을 했으니 더 혼낼 여력도 없다.

"아무튼 브리센 후작이 속는 것을 보는 것도 슬슬 지겨워질 판입니다. 이렇게나 자꾸 이용만 당하니 이제는 좀 딱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한다지만 그리 얘기하는 앨런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정심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행한 일이죠. 브리센 자작이든 변경백이든 후작이든, 셋 중 단 한명만이라도 드미레아 같은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 있어서 그 강력한 칼을 제대로 썼다면 저는 지금 여기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죽었거나, 진작에 탑에 갇혔을 테니까요."

칼리안이 대답을 전하며 살짝 웃었다.

"그럼 왕자님께서는 발칸의 절반을 플란츠 왕자에게 아예 나눠주시려는 생각이신지요."

"네."

절반은 아르센에게, 나머지 절반은 플란츠에게.

칼리안은 고민도 하지 않고 모두 다 나눠주겠다 대답했다.

* * *

플란츠는 가만히 서 있었다.

굉음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소리가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흔들, 흔들, 흔들.

하얀 오팔을 가루내어 채색해두었던 탓에 언제나 신비로운 빛을 내던 헤이시아 궁의 지붕 한 면이 그대로 사라진 채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 쿠구궁······.

그리 오래지 않아 바닥이 우르르 진동하는 것과 함께 불안한 소리가 다시 울렸다. 화염이 치솟고 재 섞인 검은 연기와 뿌연 먼지가 퍼져나오며 이전과는 또 다른 굉음을 토해냈다.

그래도 플란츠는 계속 가만히 서 있었다.

더운 열기가 담긴 바람이 불어왔다.

플란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매캐한 냄새가 열린 창을 통해 방 안까지 들어왔으나 미동도 않은 채 창 밖을 지켜봤다.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느새 먼지 구름이 걷혔다는 것만 알았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고 난 뒤 아르피아 궁 뒤로 보이는 것은 그저 새파란 하늘 뿐이었다.

그 하늘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에 노을이 지고 붉게 물들다가 어둑해지는 것을 보며 계속 서 있었다.

그렇게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 사락······.

플란츠가 걸치고 있던 긴 가디건의 끝자락이 바닥에 닿았다.

우두커니 서 있던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은 플란츠가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실리케를 꼭 닮은 연두색 눈이 느리게 감겼다.

이번에도 알 수 있었다.

어미를 배신한 아들이라는 죄책감.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모정에 대한 갈망 혹은 원망.

짙고 짙어서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르니에리 향.

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도 좋지 않겠느냐고, 칼리안이 묻고 있음을.

"미친 새끼······."

더운 바람이

불었다.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7)

칼리안일 것이다.

르메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헤이시아 궁을 박살낸 주모자는 분명히 칼리안일 것이라고.

아르센이 어떤 인물인지는 여러 번 들어왔으나 그래도 아르센이 혼자서 그런 엄청난 짓을 벌일 리 없다는 것은 알았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반면 눈치는 없는 르메인이라지만 이런 것까지 모르고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어찌한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건물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리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문제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마를 감싸 쥔 르메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라도 얘기를 해보지."

맞은편에 앉아있는 앨런을 향한 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내 알 바 아니라는 표정으로 사과 젤리를 집어먹고 있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말씀을 드리면 될지요."

"사실 그대로. 그 아르센 헤르츠와 그 발칸이 훈련 중 실수를 했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가 아닌 진짜 이유. 그것을 듣고 싶네."

앨런은 손에 들린 포크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사실을 따져본다면 전하께서 직접 부순 것이 되겠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나."

"헤이시아는 전하의 실수와 잘못으로 쌓아올린 탑이 아닙니까. 그것이 너무 높아 그림자가 사라질 생각을 않으니 칼리안 왕자님께서 그냥 시원하게 없애버린 겁니다."

칼리안이 말했다.

그 전에 누가 살았든, 누가 만들었든, 혹은 얼마나 오래됐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이냐고.

전설이 아닌 살아있는 시스파니안을 만나 보았기 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제 몸 속에 카이리스의 역사같은 것은 아무 관심도 없을 세크리티아 왕제가 들어 있어서 하는 소리도 아니었다.

- 망자의 이름이 산 자의 길을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헤이시아 궁 따위 없어진 것이 대수냐고.

또 다른 망자의 이름을 제 속에 묻은 칼리안이 그리 말했다.

"전하께서 벌인 잘못이 너무 커서 아무것도 잃지 않고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이 아주 싹 없어진 판국이니 어찌하겠습니까. 길을 내려면 막은 것부터 부수는 것이 맞지요."

르메인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고개만 끄덕였고 앨런은 칼리안이 설명했던 내용을 가감 없이 전했다.

발칸과 기사단의 힘을 합칠 것이라는 내용도 전했다. 그 중 반을 아르센이 나머지 반을 플란츠가 가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거기까지 들은 르메인이 잠시 눈을 떴다.

"왜 헤르츠 경인가. 절반을 플란츠에게 준다면 절반은 칼리안의 것이어야 할 텐데."

아무리 발칸의 총 군단장이 앨런이고 그 앨런이 칼리안의 사람이라지만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는 듯한 눈초리였다.

"상관 없지 않겠습니까."

앨런의 대답이 곧바로 이어졌다.

그것은 앨런의 말이라기보단 칼리안의 답이었다. 앨런도 같은 것을 물었던 탓이다.

칼리안은 부리는 이였다.

그 어디에도 제 이름 하나 올려놓지 않았으나, 발칸도, 마법 학원도, 폴룬 상단도, 휘트린 영지도, 곧 만들어질 아이즌의 기사단까지도, 전부 칼리안이 부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부리는 이들이 모두 칼리안의 사람 아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저를 따르지 않는 고양이 목줄에만 제 이름을 올려둔 칼리안을 생각하며 앨런이 그렇게 대답했다.

"일단······ 알겠네."

아무튼 저 궁이 부서진 것에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크다 하니 르메인으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처벌은 내리셔야지요."

르메인이 아무 말 없이 알겠다고만 대답하자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앨런은 상벌에 꽤 민감하게 구는 편이었다. 이번 일도 혹여 유야무야 넘어갈까 저렇게 나서서 처벌을 내리라 말하는 것이다. 르메인을 볼 때마다 '네가 잘한게 뭐가 있냐'며 타박을 하는 것도 그랬다.

어찌됐건 조용히 넘어갈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르메인도 알고 있었으므로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 해야지."

"헤르츠 경이 궁 재건 값을 자신의 급여에서 제하라 하였으니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한 앨런이 젤리 하나를 더 집어먹었다.

부하 직원의 급여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이전에 아르센이 그레이의 마차를 부쉈을 때에도 같은 말을 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마차 값은 칼리안이 지불했지 않았던가.

뭐, 정확히 말하자면 실리케가 아르센을 처치하라며 기사 테일에게 전달했던 돈을 주운 칼리안이 그레이의 마차값이라며 실리케에게 되돌려줬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실리케가 마차 값을 낸 셈이었지만 본래 칼리안이 지불하기로 했던 것은 맞았다.

그리고 이 일은 르메인 역시 아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르메인은 살짝 웃는 얼굴을 한 채 시종장 라울을 불러 말했다.

"헤이시아 궁 재건이 끝날 때까지 헤르츠 부군단장의 급여를 1플로린으로 감하도록. 더불어 재건 완료 전까지는 칼리안 왕자에게 어떤 지원금도 지급하지 않겠다."

앨런이 웃었다.

그야말로 보여주기 식 처벌이었으니까.

착실한 상단주 멜피르는 폴룬 상단뿐 아니라 마법 학원에서도 좋은 수익을 내고 있었다. 휘트린 영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지원금이 사라진데다 본래 아르센이 받던 급여의 두 배에 해당되는 금액이 매달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칼리안의 금고는 건재할 터였다.

과일 향이 진한 홍차를 들어올린 앨런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지원금이 없어진 것을 알기나 하실는지."

그리고는 호로록 소리를 내며 따듯한 홍차를 한 입 마셨다.

하여튼 얄미운 입이다. 칼리안의 금고가 자신의 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넉넉하다는 것을 르메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온천 갔던 슬레이만이 왕궁에 들르지 않고 지그프리드 영지로 간 것이 떠올랐다.

"아."

슬레이만이 빌려간 돈이 생각나 버렸다.

* * *

베른.

다른 이들의 앞에서는 국왕과 호위기사였고 왕가가 모인 자리에서는 국왕과 왕제였다. 그리고 둘이 있을 땐 형과 동생이었다.

'그래도 제가 형님보다 잘 하는 것이 하나는 있어 다행입니다.'

사석에서는 늘 이렇게 편한 호칭을 올리며 말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항상 이렇게 자신을 낮췄다. 검을 쥐는 것 말고는 체이스보다 나은 것이 없다면서.

'네가 나보다 못한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구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체이스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것이 체이스와 같은데 검까지 다루니 오히려 베른이 나은 것이 아니냐고.

거짓이 아니었다.

물론 베른은 이 사실을 단 한번도 인정한 적 없었다. 그리 생각하며 체이스를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음을 체이스도 알았다.

- 어찌 보면 나보다 더 나았지.

베른은 구분을 잘 했다.

말이 필요한 곳 칼이 필요한 곳 포용이 필요한 곳을 정확히 알았다. 그렇게 사람을 회유하고 내치고 제 것으로 만들었다.

사람을 상대하고 부리는 것이 뛰어났다.

때문에 데블란은 베른에게 왕위를 주고자 했었다. 왕에게 있어 사람을 잘 모으고 제대로 쓰는 것 만큼 중요한 능력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베른은 그 능력으로 자신이 왕이 되는 대신 왕이 된 체이스를 도왔다.

"여전하구나."

잠시 기억을 짚어보던 체이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앨런으로부터 대략적인 내용을 듣자마자 칼리안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를 알 수 있었다. 세크리티아에서도 비슷한 일을 한 번 저질렀던 베른이었다. 칼리안은 여전히 구분을 잘 했고 머뭇거리지 않았고 제 사람을 잘 부렸다.

이번 일에 가장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한 마법사의 이름을 떠올리던 체이스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르센 헤르츠.

얼음창을 쓰는 칼을 부서뜨리는 기사의 바로 앞에서 싸움을 하는 발칸의 마법사. 그리고 이제는 칼리안 왕자의 사람이 된 천재 마법사.

"너는······ 버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에도 경계가 없는 것인지."

베른의 마지막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당연히 기억한다. 직접 겪지 않은 일이라 해도, 만에 하나 그것이 단순한 악몽이었다 해도, 그 참담함만은 결코 잊지 못하리라.

그것을 떠올리자 스스로도 겪었던 시리디 시린 마지막 기억이 함께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 일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린 체이스가 짧게 웃었다.

확실히 베른은, 그리고 칼리안은, 체이스보다 나았다.

* * *

누구나 우습게 여겼던 마법사들의 군대.

그들이 얼마나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는지 보라.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발칸!

르메인은 헤이시아 궁에 설치되어 있던 시스파니안의 대마법 방어진이 파괴된 상태임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었다. 복구할 예정이었고 보안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보아야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문은 더더욱 부풀려졌다.

딱 한 번.

고 서클의 마법도 아니었다. 마법 학원의 학생들 중에 화염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극소수였다.

그런 화염구를 모았을 뿐이고 모아서 딱 한 번 쏘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격에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헤이시아 궁이 무너졌다. 50여개의 화염구가 궁전 하나를 돌무더기로 만드는 데까지 단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느긋한 얼굴로 소파에 앉은 칼리안이 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유명해져서야."

물론 유명해진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발칸이었고 르메인이었다. 르메인의 목이 조금쯤 단단하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소문이 난 시기가 참으로 묘했는데, 드미레아와의 정혼설로 시끄러운 상태에서 발칸의 이름이 난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발칸의 군단장 앨런 마나실과 그 제자인 칼리안의 관계가 연상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칼리안과 발칸을 함께 입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얀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꽃 같은 우리 왕자님과 내 동생이 정혼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면서 볼멘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것이 아마 드미레아가 아깝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았으므로 칼리안은 그냥 난처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왕자님 지원금 끊겼대요."

하루 사이에 왕궁 밖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꼼꼼하게 알려준 얀이 전날 밤 르메인의 시종장 라울로부터 전달된 내용을 전했다.

"지원금이 있었지, 참."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적당히 끄덕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번 달부터 헤르츠 경 급여는 내가 직접 챙기는 걸로 할게. 본래 급여에서 두 배 쳐서."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헤이시아 궁 재건 비용도 보태실 겁니까?"

"그럴까 했는데, 안하려고. 에이프린 백작과 기사단을 꾸려야 할 때가 되었으니 일단은 좀 아껴 쓸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네, 왕자님."

"그럼 밥 먹자. 배고프다."

보고도 다 받고 지시도 모두 내린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라스를 향해 걸어간 뒤, 테라스 난간을 밟고 가볍게 뛰어올라 사라졌다.

'밥은 오늘부터 4층에서 먹을거야. 내가 알아서 왔다갔다 할 테니까 4층으로 가져다 줘. 호위기사들 눈에 안 띄게 적당히 잘 숨겨오는 것 잊지 말고.'

이미 얀에게 말해두었던 것이었으니, 얀은 놀라는 대신 짧은 한숨만 내쉬었다.

문을 막으면 뭐하냐고.

창문이 열려 있는데!

* * *

- 뭐야.

- 빵이요.

- 무슨 짓이냐고 묻는거잖아.

- 밥 먹자는 것 아닙니까.

- 왜 이러냐고. 계속.

- 살고 싶다면서요.

그러니까 사시라고요.

계속.

살게 해드릴테니까.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8)

칼리안은 밥을 먹었다.

헤이시아 궁을 왜 저 꼴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 이번엔 또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 밥만 먹었다. 빵을 뜯어 입에 넣고 베이컨을 씹어 삼키고 샐러드도 집어 먹고 물도 마셨다.

같이 밥이나 먹자며 올라온 주제에 '같이'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마치 세상에서 제일 가는 진수성찬을 앞에 뒀다는 것처럼.

조용하고 우아하게 참 잘도 처먹고 있었다.

그 어처구니 없는 꼴을 한참 쳐다보다가, 문득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경박하기는.'

언젠가 그런 말을 했었지, 하는 기억이 난 탓이다.

"안 드십니까."

물컵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를 보다 물었다.

엄밀히 말하면 안 먹었다기 보다는 다 먹었다고 해야 할 일이다. 칼리안처럼 오늘만 먹고 죽을 것 같이 먹지 않을 뿐이지 플란츠도 분명 식사를 했다.

"됐어."

"네."

그래서 '다 먹었다' 하는 의미로 이렇게 대꾸하자 기다렸다는 듯한 답이 나왔다.

팍팍한 답을 꺼내 둔 칼리안이 곱게 접힌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았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를 향해 걸어갔다. 딱 봐도 이제 식사 끝났으니 다시 내려가겠다는 모양새인 것이다.

하, 하고 짧은 한숨과 웃음이 섞인 소리를 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칼리안."

"네."

"앉아."

"네."

곧바로 대답한 칼리안이 다시 걸어와 본래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입에서 한번 더 헛웃음 소리가 났다.

대체, 말을 잘 듣는 것인지 안 듣는 것인지.

창 밖은 조용했고 안은 고요했다.

시녀들이 다가와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테이블의 식기를 치우는 동안 칼리안은 물끄러미 플란츠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마워. 나가보도록 해."

곧 테이블에 차와 디저트를 올려둔 시녀들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자 칼리안이 이런 말로 그들을 내보냈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플란츠의 말이 튀어나왔다.

"왜 이러는데."

식사를 하기 전에 건넸던 질문과 같았으나 그 의미는 달랐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가며 살려주겠다 하는 그 이유를 묻고 있었다.

이해 할 수 없게도 플란츠의 말을 참 잘 알아듣는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말씀드려야 합니까."

순간 순간, 칼리안은 계속 플란츠를 살려 왔다.

첫 조찬에서의 칼리안이 자신을 죽이지 않기 위해 얼마나 죽을 힘을 다했을지 알고 있다. 실리케의 비수를 막기 위해 숨겨뒀던 오러를 꺼내놓은 것부터 제 힘을 빌려준 것, 그리고 어제의 일까지.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물었다.

"이해가 안 되는데."

동정심 따위로 저런 일을 벌일 놈이 아님을 안다.

애초에 자신을 동정할 놈도 아닐 뿐더러 그런 어울리지 않는 감정으로 대하는 것을 몰라볼 플란츠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는 말을 좀 해줘도 되지 않나.

궁전까지 부서뜨려가며 살려놓겠다 하는 이유 정도는.

칼리안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옅은 녹색의 민트 차에서 시원하면서도 단 향이 났다. 차에 띄워진 민트 잎이 천천히 맴돌았다.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냥. 겁이 나서요."

앞으로의 일에 대한 계획도,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도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플란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 *

블루베리는 보라색인지, 파란색인지.

그것을 두고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은 말싸움이 된 적이 있었다. 물론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히나가 이제 막 수어를 배웠을 무렵이었다.

서툰 손짓으로 그것이 '파란색'이라고 설명을 하던 히나는 키리에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말보다는 손이 느렸고 아는 단어도 많지 않았으니까. 그 억울함에, 어린 히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히나가 이겼다.

그 뒤 키리에에게 있어 블루베리는 무조건 파란색이었으니, 블루베리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은 당연히 하늘색이었다.

"히나."

체르밀 궁의 주방장이 만들어 준 하늘색 아이스크림 두 개를 가져온 키리에가 고고한 자태로 운동 중인 레이븐의 앞에서 당근을 흔들어보이고 있던 히나를 불렀다.

키리에의 목소리를 들은 히나가 반가운 얼굴로 웃으며 달려와 키리에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고는 손을 움직였다.

- 맛있어.

왕궁의 세 왕자 모두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이들이 없었지만 주방장은 시시 때때로 갖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두었다. 히나가 아이스크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게 된 칼리안이 부탁한 까닭이었다.

물론 그런 부탁이 없다 하더라도 히나가 좋아했다면 선뜻 수고해 주었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 이거 주려고, 온 거야?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히나의 앞에서나 보여주는 꽤 시원스러운 미소였다.

- 잘 됐다. 오빠한테, 할 말이 있어.

이렇게 말한 히나가 예전에 키리에와 얀이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체르밀 궁 후원의 산책로 쪽으로 걸어갔다. 벤치에 앉아 두 개의 아이스크림을 모두 히나의 옆에 내려놓은 키리에가 검을 풀어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

히나는 잠깐 대답하지 않다가 키리에의 손을 끌어와 그 위에 '발칸' 이라는 글자를 써 보였다.

- 자상한 왕자님이, 여기에서 일하고 싶으면, 말하랬어.

생각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키리에가 물었다.

"발칸? 치유사로 일하라고 하신 건가?"

그 말에 히나가 깜짝 놀라는 얼굴을 했다. 곰 같은 키리에가 히나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던 칼리안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음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 어떻게, 알았어?

키리에가 웃었다.

조금 전 보여줬던 시원한 미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웃음을 지으며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묵빛의 검을 잠시 쳐다보았다.

'운철이야.'

칼리안은 그 검을 건네주며 그렇게만 말했고 키리에는 그것을 준 뜻을 이해했다.

운철이 무엇인지는 키리에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오러를 담아낼 수 있는 몇 안되는 귀한 재료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러니 운철 검을 주었다는 것은 키리에가 빨리 '일곱 번째 검'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연습했고 벽 하나를 넘었다. 그리고 칼리안을 이겼다.

칼리안이 말했던대로 칼리안의 몸이 정상은 아니었고 또 오러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순수한 검술로 칼리안을 이긴 것은 분명했다.

칼리안이 히나에게 다른 길을 보여줄 생각을 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키리에가 칼리안을 이겼다는 것은 칼리안의 '검'이 되는 것에 한 발 다가섰다는 의미였으니까.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를.

"너만 괜찮으면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칼리안은 키리에를 잘 알았다.

자신을 믿고 기회를 줬다는 이유만으로 제 목숨을 바칠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왜, 좋을 것 같아?

칼리안은 과거의 키리에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지만 키리에는 분명히 자신이 베른보다 먼저 죽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어떤 이유든 할 것 없이 베른을 지켜내고 죽었으리라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키리에는 생각했다. 물론 칼리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왕자님께서 언제까지고 도와주실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계속 왕궁 시녀로 있는 것보단 낫잖아. 도움 없이 살 방법도 생각해야지."

혹여 칼리안이 없더라도, 그리고 키리에가 없더라도 히나는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제 앞가림은 하고 살 수 있도록 히나에게 길을 내어 준 것임을 이해했다.

그런 키리에를 잠시 쳐다보던 히나가 말했다.

- 둘 다, 왜 그래?

두 개의 아이스크림이 하나는 고스란히, 그리고 또 하나는 몇 입 대지도 않은 채로 녹아가고 있었다. 하늘색 물이 되어가는 아이스크림에는 눈도 두지 않은 채 히나가 이야기했다.

- 오빠도, 자상한 왕자님도, 이상해.

"왕자님과 내가 이상해?"

이렇게 물으니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칼리안 앞에서 애써 숨겼던 화를 키리에에게 냈다.

- 죽을, 생각을, 하면서 살아, 왜?

히나의 손짓이 빨라졌다.

- 자상한 왕자님은, 아무것도 안 가지려고 해. 고양이 목걸이에서도, 이름을 지우래. 아무것도, 안 남겨놓으려고 해. 그런데, 오빠도 그래. 왜?

"히나. 그런 게 아니야."

카이리스에서 가장 안전한 왕궁에 살면서 언제나 목숨을 내어놓고 살고 있는 왕자. 그리고 그 왕자의 호위가 아닌가.

그러니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대비해두는 것 뿐이라고. 죽을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칼리안의 생각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말하려 했다. 그런데 히나가 키리에의 말을 막았다.

- 저기, 갈 거야. 가서, 치유사 할 거야. 늙어 죽을 때까지, 오빠랑 왕자님 도우면서, 살 거야.

키리에는 대답 없이 히나의 손만 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히나를 달래주려 생각했던 말을 다 잊어버렸다.

키리에가 대꾸하지 않자 히나가 다시 말했다.

- 미련 없이 죽는게, 엄청, 멋있는 줄 알지, 멍청이들아.

그리고는 일어나서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버렸다.

하늘색 물이 되어버린 아이스크림이 잠시 흔들렸다.

* * *

항상 꽁꽁 얼어붙어 있다는 북쪽의 대사막.

그 곳에 꽃이 피고 나비가 팔랑거린다 하면 차라리 그 말을 믿을 것이다.

그런데 칼리안이 겁이 난단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그렇게만 말했다. 티 스푼을 들어 찻잔에 띄워진 민트 잎을 툭툭 건드리면서 다른 말은 하지도 않은 채로.

연세가 몇이신지도 모를 동생의 한 마디를 조용히 곱씹던 열 여섯의 플란츠가 툭 내뱉듯 말했다.

"그리 겁 많으신 내 아우님께서 어제 내 어머니의 궁을 없애주셨군."

"내 어머니께서 머무르시던 곳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작은 웃음 소리를 냈다.

"다른 이유도 있었고, 겸사겸사요."

굳이 플란츠 하나 때문에 없앤 것은 아니었으니까.

대충 무슨 생각으로 일을 저질렀을지는 밤새 가늠해봤던 탓에, 플란츠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대신 다시 원래의 주제를 꺼내들었다.

"몇 번을 묻게 할 셈이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질문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그냥 적당히 넘어가려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을 때.

"애옹!"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플란츠의 방에 들어왔다. 그러더니 웬일로 플란츠가 아닌 칼리안의 무릎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고양이를 안아들곤 목줄을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내용이 바뀌지 않은 것을 본 탓이다.

"싫다더니. 진짜 안 지워놨네."

"······ 짜증나게 하네."

칼리안은 플란츠의 짧은 말을 참 잘 알아들었고 플란츠는 칼리안의 속내를 참 잘 읽었다. 칼리안의 속에 든 말을 또 눈치채버렸다.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플란츠를 쳐다보다,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똑똑하셔서 형님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 꺼내겠습니다."

"짖지 말고."

기껏 체이스에게까지 찾아가서 준비해라 마라 오지랖을 부리고 왔는데 앞에 있는 동생 놈이 생에 대한 미련이 없음을 알아채버렸다.

그래서 플란츠를 살리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칼리안이 없을 때 칼리안을 대신해서 왕위에 앉으라고.

플란츠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앉아 붉은 눈을 응시하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싫다고 했을 텐데."

"자리에 관심 없으신 것은 압니다. 그냥.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무슨 생각."

"세렌티의 장난일지 배려일지 모를 저주스러운 행동 때문에 망자가 될 육신을 빌려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데······."

칼리안이 웃었다.

"제 쓰임새가 다하는 그런 날이 온다면. 아니, 그런 날이 왔을 때. 그 이후에도 제 생이 이어질까. 알 수가 없어서요."

그것에 겁이 났다고.

죽는 것은 겁나지 않았는데 그 빈 자리가 드러날까 겁이 났다고.

푸른 솔새를 만나고, 시스파니안을 만나고, 체이스를 만나고, 하얀 수리의 일을 겪으면서.

베른이 사라진 그 빈 자리를 느끼게 된 이후 계속 키워 온 그 생각을 칼리안이 지금 저보다 한참 어린 원수 같은 형의 앞에 풀어놓고 있었다.

"저는 이미 누구보다 절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쉽게 사라질 생각도 죽을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만약에."

그래도 만에 하나 그런 날이 온다면. 어쩔 수 없는 그런 날이 온다면.

"지그프리드의 저택에 찾아오셨던 그 때처럼 똑똑하신 내 형님께서 어떻게든 해주셨으면 해서."

칼리안이 웃었다.

플란츠는 웃지 않았다.

말 없이 차를 들어올렸다. 재수없는 칼리안의 시종은 칼리안의 입맛에 딱 맞을 차를 가져다 놨다. 영 익숙하지 않은 민트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만 짖어."

민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플란츠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 내 아우님이 원하시는대로 살아 드릴테니."

원하는대로 밥 먹을 테니까 아르피아 궁에서 평생 고생하는 건 너 혼자 하라고. 그런 뜻이었다.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9)

툭,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자신의 방에 내려온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검은색 일색인 칼리안의 방과 달리 플란츠의 방은 꽤 환했었다. 커튼이며 카펫이며 멀리 침실 안 쪽으로 보이는 침구며 대부분 밝은 색이었다.

당연히 고양이 때문일 터였다.

무시무시할 만큼 털이 빠지는 고양이가 온 방을 휘젓고 다닐테니 별 수 있겠는가. 밝은 옷만 입는 것처럼 방도 밝아진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이제 막 방에 들어온 얀을 보며 말했다.

"앞으로 4층에 있을 땐 민트 차 올리지 마."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굳이 민트 차 한 잔을 싹 비워낸 플란츠의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고양이한테도 맞춰 사는 플란츠 성격에 차가 입에 안맞는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 하는 말이었다.

"끼니 때마다 계속 올라가시게요?"

"당분간은."

칼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의외로 얀은 그리 거부감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헤르츠 경을 부르라 하셨는데 아무래도 오늘 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왜, 무슨 일 있어?"

혹시라도 이번 일로 불이익을 받았을까 걱정되어 묻는 말에 얀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헤이시아 궁 잔해 처리하는 것을 돕는다고 합니다."

다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르센이 자리를 비우고 칼리안을 찾아올 수 없는 상황인 것은 맞았다.

귀한 능력 가진 마법사 뒀다 어디 쓰냐는 앨런의 의견에 따라 헤이시아 궁의 잔해 처리에 발칸이 투입된 까닭이다. 그것은 르메인이 아니라 발칸의 군단장인 앨런이 내린 벌이었다.

툴툴거리면서 일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아르센의 모습이 떠오른 탓에 결국은 참았던 웃음이 터졌다.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알겠어. 이따 회식이라도 하게 돈이라도 보내줘."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얀이 가지 않았다. 또 할 말이 있다는 것 같았기 때문에 칼리안이 얀을 쳐다봤고 얀이 입을 열었다.

"밖에 지그프리드 소공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든 왕자가 시킨 일에 대한 보고와 알아야 할 내용의 전달이 먼저였으니 다른 내용을 모두 전한 뒤에야 그 말을 꺼낸 것이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들어오라고 해."

"네, 왕자님."

간단히 대답한 얀이 밖으로 나간 뒤 오래지 않아 드미레아가 들어왔다. 그런 드미레아를 본 칼리안이 씩 웃었다.

내가 이래서 드미레아를 좋아하지.

드미레아는 짙은 감청색의 바지 정장을 입은 채였다. 무도회에 참석하기 전에 왕궁에 왔을 때에는 가벼운 원피스를 입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향해 가볍게 예를 보인 뒤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곧 얀이 들어와 아무 말 없이 차 두 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자신의 동생이며 집안의 일이 연관된 이야기가 오갈 것임을 모르지 않을텐데도 끼어들거나 간섭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얀. 너도 앉아."

얀이 듣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을 뿐더러 어찌됐건 얀도 같은 가문 사람이니까.

가볍게 고개 숙여 보인 얀이 드미레아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둘의 대화를 듣기는 하겠으나 끼어들지는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속으로 잠시 웃었다. 무엇때문에 저렇게 선을 긋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체이스가 함께 있으면 항상 한 발 물러나 있는 것으로 체이스를 존중했던 베른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그런 얀을 존중하기로 한 칼리안은 얀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드미레아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정혼자님."

농담 섞인 인사에도 얀은 별다른 반응 없이 앉아있었고 드미레아는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정혼자'라는 소문에 대해 짧은 말을 전했다.

"그 소문은 바나나 값으로 치고 저도 잘 쓰겠습니다."

밖에서 칼리안을 제 정혼자라 소개하고 다니는 것으로 저택에서 칼리안이 먹어 치운 바나나 값을 대신하겠다는 말이다. 물론 칼리안도 필요에 의해 받아들인 소문이었으나 드미레아 역시 덕을 보고 있었으니까.

"바나나 두 송이에 내 이름을 판 셈이 됐네."

"워낙 많이 드셨으니, 적당한 값인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꽤 오랫동안 웃는 소리를 내다 물었다.

"그래. 브리센 후작은 다른 반응 없어?"

"네. 특별한 반응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을 얌전히 만들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까지는 굳이 전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조용해진 것은 사실이니까.

"저는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때문에 이렇게 본론을 꺼내드는 드미레아를 향해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곧 기사단을 하나 만들거야. 그것 때문에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들을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잠시 숨겨두려고 하는데."

"네. 그 얘기는 아버지에게 전해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왕궁의 기사단을 대체할 예정이라 들었는데, 맞습니까."

"원래는 그랬는데 생각이 좀 바뀌었어. 계속 왕궁 밖에 있을 새로운 기사단으로 키울거야."

드미레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왕궁 밖에 있을 기사단이라면 칼리안의 사병을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왕궁을 공격할 기사단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만약 왕궁을 공격할 용도의 기사단이라면 저는 돕지 않겠습니다."

"설마 내가 그런 일로 쓸 기사들을 코끼리 집에 숨기겠다 말할까."

"그럼 왕자님의 사병입니까."

"비슷해. 내 힘이 되어 줄 이들이니까."

말이 좋아 숨긴다는 것이지 실상은 그 안에서 기사단을 키우겠다는 의미나 다름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의 이름은 못 드립니다."

칼 같이 선을 긋는 그 말에, 칼리안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아. 숨겨주기만 하면 관리는 내가 할 거야. 그리고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인 것으로 해 둘 테니까 이름 달라고 할 일 없어. 그것도 걱정하지 마."

"그럼 왕자님이 아니라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의 사병인지를 물었을 때 왜 비슷하다 대답했는지 이제야 제대로 이해를 했다.

"만일을 대비해 왕자님의 성함을 넣어두지 않겠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에이프린 백작을 브리센과 같은 힘을 지닌 무가로 키워내겠다는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말했지만 내 기사단으로 키울 사람들이야. 굳이 내 이름일 필요는 없으니 백작의 이름을 빌리는 거고."

"왕자님. 기사단은 상단이나 학원과는 다릅니다. 기사단의 주인을 정해두지 않는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발칸과도 다릅니다. 마법사들의 신의와 기사들의 충의는 다릅니다. 검을 쥔 모든 이들이 키리에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곧바로 드미레아가 이렇게 말했다.

기사들이 어떤 이들인지를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기도 했다.

"에이프린 백작을 믿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보실 문제가 아닙니다."

"알아."

기사들이 어떤 이들인지 칼리안보다 잘 알지는 않을 터였다. 칼리안이 슬쩍 웃으며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가 나 대신 기사들을 지켜보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드미레아가 입을 다물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칼리안의 의중을 따져보는 드미레아를 향해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네 말대로 왕궁 안에서 언제나 내 눈 아래 둘 수 있을 때와는 또 다를 테니까.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는 나도 아직 확신하지 못하겠고. 그래서 이번 기회에 백작을 어디까지 믿어도 좋을지를 지켜볼까 해. 그 후에 그들을 독립된 하나의 기사단으로 만들지, 혹은 다른 방법을 강구할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좀 해 보고."

"그러니까 지금 왕자님 말씀은, 그들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하기 위한 '감시자' 역할을 저에게 맡기고자 하신다는 겁니까."

"맞아. 정확해."

"저를 여러모로 부리려고 하시네요."

"부리는 게 내 일이니까."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고, 그 웃음에 조금도 넘어갈 일 없을 드미레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뻔뻔하시기도 하고."

"아니면, 정혼자 특혜로 쳐 주면 안되나?"

드미레아의 얼굴이 볼만하게 구겨졌다.

당장이라도 둘의 정혼설이 헛소문이라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므로, 칼리안이 재빨리 손사래를 치며 말린 뒤 다시 말했다.

"부탁할게. 드미레아."

한동안 그런 칼리안을 쳐다보던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와드리죠."

"고마워."

"지난 번 숙박비도 못 받았습니다. 이번 것도 전부 받을 생각이니 넘어가려 하지 마십시오."

"바나나 값도 잘 갚았잖아. 안 떼먹고 다 갚을게."

그 많은 빚 중에 이제 고작 바나나 값 갚은 왕자의 말에, 결국 드미레아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조금 많이 유명해진 것은 알고 계십니까. 사고를 치려면 나처럼 치라고 외치듯이 대형 사고를 일으키셨다고 말이 많던데요."

"아, 헤이시아 궁."

칼리안이 짐짓 모르는 일이라는 듯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 아니야. 발칸이 실수한 일이지."

"발칸이 왕자님의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에 대해 칼리안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잠시 보던 드미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기사단 들어오는 날짜 정해지면 말씀해주세요."

"아, 드미레아."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드미레아를 불러세운 칼리안이 얼마 전에 히나가 보여줬던 바로 그 수어를 보여줬다.

"이거. 혹시 무슨 뜻이야?"

서툰 손짓이긴 해도 알아보기 어려운 단어는 아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의 얼굴이 묘하게 바뀌었다.

'맴매'라니.

"왕자님 시녀에게 그런 말을 듣고 다니십니까."

"역시 욕이구나."

그리고 드미레아 옆에 앉은 얀을 흘깃 보며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아무도 안 알려줘. 얀도 말을 안해."

"무엇을 잘못하셨기에 그런 말을 들으십니까."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잘못하는 게 한 둘이 아니라서."

드미레아가 마지막 한 모금의 차를 넘긴 후 찻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신차리고 사시면 됩니다. 같은 말 듣지 않도록."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결국 히나의 말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였다.

"대체 무슨 말이기에 드미레아도 안알려주나."

칼리안의 의문만 커졌다.

* * *

드미레아가 나간 뒤.

칼리안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그냥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신차리고 살라는 그 말이 오전에 플란츠가 했던 이야기와 얽혀든 탓도 있었고 딱히 할 일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수련장도 가질 못하고 발칸이 있을 빌헬름 관에도 가질 못하고 하다못해 산책도 못 가는 처지가 아니던가.

그나저나, 정신차리고 살라니.

"······ 뭘 알고 하는 소리인지."

축 늘어져 앉아 이런저런 생각이나 하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얀이 다가와 맞은편에 앉으며 차게 식힌 민트 차를 내려놨다.

오늘만 두 잔 째다.

굳이 얘기하지 않는 이상은 같은 차를 두 번 내오지 않았던 얀이었으나 칼리안은 별 말 없이 그것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생각 깊을 땐 항상 민트 차를 달라고 하셔서요."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했고 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4층에 계속 가셔서 식사 하실 것 같다고 마나실 백작에게 말했습니다."

"그걸 얘기했어?"

칼리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네. 어차피 그렇게 움직이실거면 그냥 편히 다니게 해달라고 얘기했어요. 전하께 허락 받는 것은 마나실 백작이 알아서 할 테니까 내일쯤 부터는 체르밀 궁 안에서라면 자유롭게 움직이셔도 될 것 같아요. 위험한 방법으로 4층에 가거나 이렇게 심심하다고 우울해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그래."

얀의 마음 씀씀이에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려는데, 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러지 마세요."

수어는 멀리서도 보인다.

운동을 마친 레이븐을 다시 데려다 놓기 위해 밖으로 나갔던 얀은 히나가 하는 말을 보았다.

하늘색 아이스크림을 옆에 내려놓은 히나의 수어는 빨랐고 얀이 모두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알아듣고 나니 숨이 멎기 딱 일주일 전에 제 물건을 전부 가져다 불태우던 형이 생각났다.

"살았으니까 빈 자리가 나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없애요. 그러니 빈 자리 걱정할 시간에 그냥 사세요."

잠시 말을 멈춘 얀이 창 밖을 쳐다보다 다시 칼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곧 그 시선이 민트차로 향했다가 다시 칼리안에게로 갔다.

청량한 민트 향과는 정 반대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일을, 또 겪지는 않게 해주세요."

나는 그냥 만일에 대비한 것뿐이라는 말.

당장 죽겠다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는 말.

나도, 살고 싶다는 말.

"그래. 알았어."

그런 말 대신 칼리안은 그냥 웃었다.

이렇게 붙드는 손이 있으니 죽어도 못죽겠다 싶어서였다.

제24장. 이해의 초석 (1)

- 팔락

오늘의 에우리아는 마법사 협회장이기도 했고 칼리안 전용 정보조직의 보스이기도 했다. 그런 에우리아가 건넨 서류를 넘겨보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이건."

그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 앨런은 칼리안이 에우리아에게 부탁했던 '검은 돌'에 대한 조사 결과를 확인하러 찾아온 길이었다.

'가지고 있으라고, 때가 되면 알게 된다 했습니다.'

시스파니안의 말을 전해주던 칼리안의 목소리가 잠시 떠올랐다. 그 말대로인지는 몰라도 검은 돌에 대한 내용은 고서적 어느 곳에서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다만 에우리아는 그것과 별개로 조금 흥미로운 내용을 앨런에게 전한 상태였다.

소파에 기대 앉아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앨런이 말했다.

"자네 혼자 조사한 건가?"

"네."

앨런이 에우리아의 눈을 지긋이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보던 에우리아가 다소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너무 큰 비밀을 알았으니까 이제 죽어라, 그런 말 하실 얼굴인데."

애들 가르치는 사람이 무슨 그런 재미 없는 농담을 하는건지. 하는 생각을 하며 에우리아를 쳐다보고 있던 앨런의 얼굴이 굳었다. 농담이 아닌 얼굴이다.

"나를 대체 어떻게 보는데 그런 말을 하나?"

눈 하나 깜빡 안하고 사람 태워죽이는 분이요, 하고 대답하려던 에우리아가 곱게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의 주변에 있으면서 무력을 쓸 줄 아는 이들 중에 살생한 수가 가장 적은 사람이 바로 앨런임을 깨달은 탓이다.

"매우 이성적이고 인정 많으신 대마법사님이시죠. 제가 실언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바꾼 에우리아를 보고 있던 앨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에 놓인 사과를 집어들려다 멈칫했다. 사과 껍질이 녹색인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실 것이 분명한 사과 대신 차를 들어 한 모금 삼킨 앨런이 에우리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튼 이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게."

"왕자님께는요."

"왕자님께도."

에우리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칼리안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을 그대로 따르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마나실 백작님. 제가 딱히 왕자님과 주종 관계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이게 왕자님께서 알아봐달라고 말씀하신 거라서요."

이런 키리에같은.

앨런이 혀를 쯧 찼다.

아무리 칼리안이 시킨 일이라 해도 다 이유가 있으니 입을 다물라 하는 것을 키리에나 에우리아나 곱게 말을 듣질 않는다.

앨런을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처럼 여기며 떠받들던 에우리아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이제 싫다는 소리를 곧잘 하는 것이다.

"지금 아시면 안되네. 내가 알아서 말씀드릴테니 아무튼 자네는 입 닫게."

"······ 네."

"이 일에 더 이상 손 대지 말고. 정말 죽을지도 모르니까."

마법사 협회장이라는 이름이 헛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무력에 있어서는 아르센보다 확실한 우위에 있는 에우리아였다. 다만 '그들'이 그 칼리안을 어떤 상태로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었던 탓에 이번에는 다른 말 없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키리에보다는 에우리아쪽이 말을 좀 잘 듣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것이 기가 막혀서 앨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서류를 가장 앞으로 넘겨 첫 장부터 다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만든 신물이라······."

우려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낮은 중얼거림이 앨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 *

언젠가 칼리안이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엘프들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르메인은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엘프라는 족속들은 왜 다 저따위인가.'

애석하게도 시아와 같은 착한 엘프가 있음을 겪어보지 못한 르메인의 얼굴은 차갑게 굳은 채였다.

로젤리타 중인 카이리스 3왕자를 이용해먹으려 든 것도 모자라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은 엘프들이 아닌가.

그런 엘프의 사절단이 르메인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방문했다. 때문에 르메인은 그들의 왕궁 내 체류를 허락하지 않았다. '굳이 왕궁에 머무르고 싶다면 이번에 사과하고 다음에 다시 와라' 정도로만 내용을 전달했다. 물론 르메인이 엘프들의 카이리시스 방문을 허락했을 당시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사후 통보였다.

그러니 한 마디로 그것은, '내 아들이 맞은 뒤통수 너희들도 맞아봐라' 라는 이름의 큰 몽둥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엘프들은 곧바로 항의하지도 못했다. 르메인이 칼리안의 잠적과 왕궁 내 폭발사고를 이유로 만남을 계속 미루다 이제야 그들을 대면하고 있었던 탓이다.

"대장로께 내용을 미리 전했다면 좋게 끝났을 일을 이렇게 키우다니요. 문제를 일으켰던 이들은 지금 우리의 규율에 따라 처벌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 일으킨 엘프가 벌을 받았든 말았든."

중요한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으므로 르메인은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것까지 내가 염두에 두어야 하나."

사실 이 정도 참았으면 많이 참았다 할 일이다.

칼리안이 굳이 전하지 않았던 일을 앨런을 통해 들었을 때 당장 군대를 보내 그 숲을 싹 태워버리라 명하고 싶던 마음을 간신히 되돌렸다.

"불편한 점이 있었으면 그대들의 대장로가 직접 말하라 전하게. 물론 그 전에 사과와 감사가 있어야 할 터."

"사과와 감사라니. 무엇을 사과하고 무엇을 감사하라는 겁니까."

"일국의 왕자를 우롱한 것에 대한 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살려둔 왕자의 자비에 대한 감사."

이렇게 말하는 르메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 * *

시종을 미리 보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

뒤늦은 후회를 해보아야 이미 늦었음을 안다. 알면서도 굳이 이런 생각을 하며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숨겨야 할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버릴 것 같아서였다.

"카이리스 마법사단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 인사드립니다."

앨런을 만나기 위해 르메인의 집무 궁인 아르피아에 잠시 들른 길이었다. 그런데 앨런이 외부 일정으로 부재중이라는 말을 듣고 아르피아 궁에서 나오던 중 마주치고 말았다.

- 왕제는 전사했다.

조금 어려진 얼굴과 조금 더 긴 머리.

여전히 당당하고 여전히 정중하며 여전히 냉철한 태도.

체이스가 잠시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고요한 미소를 애써 지어보이며 앞에 선 아르센을 향해 대답했다.

- 그 왕제를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안타깝게 됐군.

"이렇게 만나는군요."

체이스의 화답에 아르센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늘 '반갑다' 하던 평소의 인사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으나 기사 테일란은 다른 말 없이 체이스의 뒤에 서 있었다.

- 너무 원망하지는 말았으면 하네.

어떻게 원망하는 마음이 안 들까.

어떻게 다 접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겪지 않은 일의 기억만 떠올린 채로도 이렇게 흔들리는데, 너는.

상념이 지워지지 않은 탓에 체이스가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아르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 헤르츠 부군단장. 이름을 많이 들었습니다. 칼리안 왕자를 따르고 있다고요."

왕세자님 저 놈이 왜 남의 나라 사정에 신경을 쓰고 계시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아르센과 우리 주군께서 또 세작들이 알아온 비밀을 입에 올리시는구나 하는 표정의 테일란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그렇게 테일란과 무언의 감정을 담은 눈인사를 주고 받은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발칸은 전하를 따릅니다."

이렇게, 발칸의 부단장인 아르센 헤르츠는 르메인을 따른다고만 답했다.

마법 잘 쓰고 싸움에 물러서지 않고 폭발을 즐기는 아르센 헤르츠는 칼리안의 말만 듣는다는 소리는 타국의 왕세자에게 알릴 만한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이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비 없이 아르센을 딱 마주친 탓에 잠시 평정심을 잃을 뻔 했던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왕비궁과 관련된 일은 유감입니다."

아르센이 잠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까지 저 말을 수백 번은 들은 것 같았다. 각오하긴 했지만 타국의 왕세자까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오래된 건물이던데 주저함이 보이지 않더군요."

이런 체이스의 말은 아르센에게 있어 꽤 의외의 것이었다.

아르센이 체이스의 보라색 눈을 쳐다봤다.

내막을 모르는 이의 말투라기에는 지나치게 느긋한 감이 있었다.

"지나간 시간에만 얽매여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겠습니까."

때문에 아르센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정도의 건물은 카이리스 어디에나 있다는 말도 붙일까 하다 그만두었다. 아무리 아르센이라지만 타국의 왕세자에게 싸움을 걸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군요."

체이스가 작게 웃었다.

아르센은 칼리안이 의도한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일을 벌였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웃은 것이다.

체이스가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아르센이 마법사이기 때문이었다. 마법사에게 있어 시스파니안이 머물렀던 장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체이스도 잘 알았다. 때문에 아르센이 그러한 궁을 칼리안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너뜨렸는지 확인을 좀 했다. 아르센에게 그 정도의 신의가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아르센이 칼리안이라면 저 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일을 시켰으리라 믿고 일을 저질렀음을 알게 됐다.

체이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 미안하네.

그 날.

아르센이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문득 떠올랐다.

* * *

"브리센 후작은 만나셨습니까?"

갑작스레 건네진 질문이었으나 플란츠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직."

"네."

칼리안과 플란츠의 대화는 여전히 이런식이었다. 대화의 길이도 짧고 오가는 말도 적었다.

실리케가 비수를 들었던 날 이후 왕자들의 조찬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도 그 전까지는 꼬박꼬박 침묵 속에서 식사를 함께 했던 형제였으니 대화가 적다는 것은 플란츠에게 있어 그리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불편한 것은 딱 하나.

"왜 자꾸 오는데."

동생 놈이 식사 때마다 앞에 앉아있다는 것 뿐.

처음 이틀은 그러려니 했다. 플란츠를 생각한다며 4층까지 올라와 식사를 할 만한 놈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냥 조용히 넘어갔다.

그래서 이틀 동안 별 말 없이 꾸역꾸역 식사도 했다.

그런데도 계속 오는 것이다. 마치 그 날 이후 플란츠의 방에서 나가지 않았던 그 때처럼.

"말 상대 해드리고 좋지 않습니까."

"또 짖지."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저 뻔뻔한 대답에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그 많은 빵과 고기와 샐러드를 먹은 뒤에도 배가 차지 않았는지 바나나를 까먹던 칼리안이 손에 들린 것을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벌써 다 드셨습니까. 과일은 손도 안 대시고."

"참견 말고, 대답."

"검 가르쳐드릴게요."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이 과연 왜 자꾸 오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지는 신경쓰지 않은 채, 별 것 아니라는 듯한 투로 계속 말했다.

"키만 크지 생각보다 약하시던데. 검술 배울 수 있을 만큼 잘 드시고 쑥쑥 크셔야죠. 그래서 계속 옵니다."

······ 아니. 계속 짖었다.

애초부터 선택지 따위를 준 적이 없던 듯한 저 태도는 마음에 안 들지만 검을 배우는 일이 싫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겨하리라는 것을 아니 저렇게 당당하게 굴고 있는 거다.

"나가."

"네."

이럴 때만 말을 잘 들으니 결국 짜증이 치민다.

제24장. 이해의 초석 (2)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붉은 색과 푸른 색이 맞닿았는데 어찌 저리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다가 창밖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완벽히 다른 두 색으로 나뉜 하늘이 전혀 이상하지 않아서, 석양이 내리는 그 하늘을 잠시 바라보던 생각 많은 대마법사가 꽤 감성적인 말을 꺼냈다.

"저 불가해한 뒤섞임도 세렌티의 가호일지."

사실 그것은 굉장히 마법사답지 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앨런이 고민하는 주제 역시 마법사가 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니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 200여년 전 시온 제라드라는 이름의 학자가 '인간의 힘으로도 신물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 출신지와 신상과 관련된 내용은 확인되지 않으며 본인의 학설을 증명할 방법을 찾던 중 실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에우리아가 건넨 조사 결과를 함축하면 이러했다.

마법사 협회의 자료실에 있던 신학 관련 서적을 모조리 뒤져 찾아낸 결과라 했으니 텐실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다른 정보를 알아내기는 어려울 터였다. 사실 저 얼토당토 않은 내용에 대해 다른 정확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기는 할까 하는 의문도 든다.

생각이 이어지는 바람에 내려두었던 커피가 어느새 완전히 식어 있었다. 때문에 귀한 능력을 잠시 낭비하여 마력으로 커피를 데운 앨런이 쓰디 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신물을 만든다······."

전날 에우리아를 만났을 때 꺼냈던 것과 비슷한 혼잣말이 다시 흘러나왔다.

커피의 쓴 맛 때문인지 혹은 침범하지 말아야 할 선을 건너려 한 이가 있었음을 알게 된 까닭인지 몰라도 입이 아주 깔깔했다.

언젠가 르메인의 시종 라울이 챙겨줬던 코코넛 쿠키 하나를 집어먹은 앨런이 다시 한번 생각에 빠져들었다.

"우리 왕자님 안 그래도 고민하실 거리가 넘쳐날 것인데. 과연 언제 알리는 것이 좋으려나."

이번 일과 연관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하지만 찜찜하기 그지없는 기록을 칼리안에게도 알려줘야 할 텐데.

'그러고보니 란델 왕자를 만나시겠다 하셨었지.'

그러다 이렇게 칼리안이 란델을 다시 한번 만나보겠다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때문에 지금의 정보와 텐실이 연관되지 않았을까 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란델을 대하지 않도록 우선 칼리안이 란델을 만나보고 온 뒤에 알리는 것이 낫겠다 마음을 정했다.

생각을 갈무리하며 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던 앨런이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님이 오시나."

그리고는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런 시간에 커피를 내어놓아도 괜찮을까 고민을 하다가, 조금 덜 진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새로 내려지는 커피 향을 음미하고 있으려니 손님이 도착했다. 물론 체이스였다.

"이 시간이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왔습니다."

자리에 앉아 이렇게 건네오는 말에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늙은이를 워낙에 잘 써먹으시니 궁에서 나가지를 못합니다."

사실은 칼리안과 관련된 일로 고민이 깊어 가지 못했으나 그냥 일이 많아 귀가하지 못했다는 핑계만 댔다. 그리고는 조용히 앉아 커피만 쳐다보고 있는 체이스를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심기가 많이 어지러우신가 봅니다."

"마나실 경 앞에서 속내를 감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이스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낮에 마나실 경을 만나러 이 곳에 잠시 왔었습니다. 그러다 발칸의 부군단장을 만나는 바람에."

아, 하고 앨런이 잠시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아르센을 떠올릴 때 제 가슴을 쓸어내리던 칼리안과 지금의 체이스가 지어보인 표정이 같아서였다.

하기사 플란츠의 검이었을 발칸의 군단장이 아니던가. 그러니 왕과 왕제 모두 아르센이 직접 마지막을 내렸으리라.

"아. 나는 괜찮습니다."

앨런의 표정을 본 체이스가 이렇게 말했고 앨런이 작게 혀를 찼다.

플란츠를 살리고 란델에게도 손을 내밀어보려는 그 칼리안조차 제 심장을 꿰뚫었던 냉기를 잊지 못했다.

체이스라 해서 다를 리 없다.

그런데도 고스란히 그 감각을 기억해내고 있는 얼굴로 괜찮다 하고 있으니.

심지어 체이스는 한 번을 보고 한 번을 겪었을텐데.

"직접 겪은 일이 아님을 알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보통은 그리 하지 못합니다. 사람이니까요."

칼리안은 아르센을 받아들였다. 플란츠를 살려냈다. 체이스는 그런 칼리안을 믿으니 괜찮다 한다.

그런데 베른은 체이스를 죽음에 이르게 할 뻔 했던 데블란을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했다. 체이스는 칼리안을 공격하게 만든 하얀 수리를 용서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플란츠가 옛 칼리안을 괴롭힌 이유조차 알려 하지 않는다. 옛 칼리안을 대신하고 있음을 미안해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르메인이 왜 그리 무관심했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고 생각을 하면 이해하게 되고, 그러다 결국 용서를 하게 될까봐.

"두 분 모두 이해의 범위가 어찌 그모양이신지."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 해도 감정이 섞이게 마련인데 어쩜 이렇게 철저하게 과거의 일과 아닌 것을 자로 재듯 나누어 대처하고 있는지. 체이스까지도.

"결국 범위를 정한 것은 그 아이입니다. 나는 따르고 있을 뿐이니."

"참 대단들 하십니다."

결국 앨런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고 체이스는 조용히 웃었다.

"그 일로 온 것이 아니라 그 아이에게 전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왜 직접 만나지 않고 말만 전해달라 하십니까."

"텐실의 마차 축이 부러진 것은 사고가 아닐 겁니다."

앨런의 질문을 듣지 못했다는 듯한 부탁의 말. 그 말을 들은 앨런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 눈초리를 읽었음에도 체이스는 앨런의 생각에 대한 다른 반응 없이 말을 이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라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텐실의 마차 축.

텐실의 현 국왕과 왕세자가 한꺼번에 사망했던 사고를 말함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앨런이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지금 체이스가 하는 말도 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텐실과 관련이 있는 내용인 듯 했으므로 일단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 전해드리지요."

"고맙습니다."

"해서, 언제쯤 출발하실 요량이십니까?"

체류하기로 예정했던 날이 채워져 가고 있으니 하는 소리였다.

"고민 중입니다. 어찌 해야 할지."

"왕자님을 생각하면 영영 가지 못하게 해두고 싶다가도, 또 다시 생각을 해보면 지금 당장 세크리티아로 돌아가라 등을 떠밀고 싶어지니······."

복잡한 마음을 가득 담은 앨런의 말에 체이스의 입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나왔다.

스스로도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리라.

* * *

칼리안이 만들어내는 검은 그 어떤 것보다 예리했다.

때문에 그것을 온전히 받아내며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슬레이만과 아르센, 그리고 드미레아와 키리에 정도였다.

칼리안의 손에 들린 그 독특한 검을 쳐다보는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그것이군."

플란츠 때문에 들켰다고, 그래서 망했다고 했던 힘.

그것을 이제야 보게 되었다.

지금껏 계속해서 수련용 철검만 들어 플란츠와 대련을 해왔던 칼리안이었다. 그런 칼리안이 제 힘을 꺼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플란츠도 잘 알았다.

칼리안이 정말로 자신의 검을 가르쳐 줄 셈인 것이다.

"브리센 후작의 검을 본 적은 없습니다만. 형님의 것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칼리안이 검 끝으로 바닥을 톡톡 치다 이렇게 입을 열었다.

"에반 브리센이 기사들에게 전수하고 기사들이 형님에게 알려줬던 것은 브리센 가문의 진짜 검술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니라서."

"그렇겠지."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브리센 후작가를 누군가 잇는다면 그레이 혹은 그레이의 아들이 물려받게 될 테니 플란츠에게 브리센의 검을 알려 줄 이유가 없었다. 왕위에 오르게 될 지도 모를 이에게 브리센의 검을 알려줘봐야 에반에게 득이 될 것이 없지 않겠나.

늘어뜨린 검을 쥐고 있던 칼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저 역시 같습니다. 저 역시 형님께 제대로 된 제 검을 보여드린 적 없습니다."

에반과 비슷한 이유였다.

브리센의 인물에게 베른의 검술을 알려줘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칼리안의 검 끝이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본 플란츠의 눈빛이 바뀌었다. 포식자를 마주한 늑대와 같은 날카로우면서도 긴장감 가득한 눈을 한 채 칼리안의 검 끝을 내려다봤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그리 보고만 계시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칼리안의 모습이 플란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실전에서 그 누구도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검을 보내지 않는다. 때문에 칼리안은 스스로가 약자가 아님에도 항상 기습적으로 대련을 시작했다.

"······ 죽습니다."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방향을 가늠하지 못할 곳에서 흘러나왔다. 플란츠가 검을 휘둘렀다.

- 카아앙!

키리에의 것보다 조금 더 묵직한 검이 칼리안의 공격을 막아냈다. 뒤이어 플란츠의 검이 대기를 갈랐다.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무게감 있는 타격음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플란츠의 검 역시 약하지 않다.

결코 약하지 않다.

드미레아에게 쉽게 질 만큼은 아닐 터였다. 열 번을 싸우면 두 세 번은 플란츠가 이길 것이라 여겼다. 수련하는 시간의 차이를 생각한다면 플란츠 역시 재능이 있다는 소리였다. 지닌 핏줄이 있으니.

- 쌔애액!

- 카강! 캉!

한기를 내뿜는 듯한 칼리안의 검과 묵빛의 검이 얽혀들며 강렬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예리한 날을 세우며 쇄도해오는 검격이 둔중한 기운의 검에 막혔다. 그리고 다시 공격을 이어간다.

심장을 향해 달려드는 검을 쳐낸 칼리안이 힘이 뻗어나간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키듯 검을 내질렀다. 재빨리 허리를 틀며 공격을 흘려보낸 플란츠가 대각선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 카앙!

언제 회수했는지 모를 검으로 공격을 막은 칼리안을 본 플란츠가 칼리안의 검을 밀어냈다. 그 후로 몇 수가 오갔는지는 아무도 세어보지 않았다. 날카로운 공격과 틈 없는 방어가 계속 이어졌을 뿐이다.

칼리안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다.

이전에 보여주던 움직임과 격이 다를 만큼 빠른 속도.

분명 실제로는 저보다 더 빠를 터였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속도를 낸단 말인가.

- 쌔애액!

어느새 뒤에서 달려드는 예기를 느낀 플란츠가 몸을 틀며 검날을 앞으로 했다. 여지 없이 강렬한 타격음이 터져나오며 보이지도 않던 검이 플란츠의 미간 바로 앞에서 막혔다.

"생각이 많으셔도, 죽습니다."

짜증나는 놈!

"그만 좀 짖으라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꾸한 플란츠의 눈에 다시 한번 날이 섰다. 화려한 궤적이 허공을 가르며 뻗어나갔다.

칼리안이 서 있던 곳도 아닌 나아가고 있던 곳도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해서였다.

- 카아앙!

날붙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급히 발을 멈추고 플란츠의 공격을 쳐낸 칼리안의 입가에 웃음이 그려졌다. 플란츠가 그 짧은 사이 칼리안의 동선을 읽고 다음 위치를 '눈치' 챘다.

역시 똑똑한 플란츠.

칼리안이 땅을 박찼다.

제 키보다 높이 솟은 몸이 한 순간 형체를 일그러뜨리며 사라졌다. 이번에도 칼리안이 향할 곳을 빠르게 판단한 플란츠가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뻗었다.

그리고,

- 사아악!

목 언저리의 기분 나쁜 느낌과 함께 뼛속까지 치미는 한기가 플란츠에게 전해졌다.

예상한 방향과 완전히 반대되는 곳에서 뻗어나온 유리조각 같은 검이 플란츠의 목을 가볍게 스치듯 베어냈다.

또 목을 베였다.

칼리안의 승리였다.

* * *

히나의 손에 온기가 어렸다.

한 차례 칼리안 혼내기를 끝낸 히나가 플란츠의 목에 난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득 떠오른 기억 때문이었다.

과거의 플란츠가 굳이 운철을 얻어다 검을 만들어 사용했던 이유. 어쩌면 단순히 귀한 재료라는 이유만으로 운철을 가져간 것만은 아닐 지도 몰랐다.

'나머지 한 자루의 주인은 지그프리드 공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한 자루는 플란츠가 사용하고 그리고 또 한 자루는 지그프리드 공작저로 보냈던, 오러를 담을 수 있는 검. 어쩌면 슬레이만을 위해 보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어쩌면.

"제 기대가 큽니다, 형님."

"또."

분명 '또 짖지' 라는 말일 테니 칼리안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이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히나가 가만히 웃으며 손짓했다.

- 다, 됐어요.

그리 큰 상처가 아니었으니 아무는 것도 금방이다.

상처 치료가 끝난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별 다른 말 없이 수련장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플란츠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히나가 칼리안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 다행이에요.

"뭐가?"

그리고 히나는 늘 그래왔듯 햇살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을 건넸다.

- 자상한 왕자님이랑, 좋은 왕자님이랑, 많이 친해진 것, 같아서요.

······ 음. 잠깐만.

섞이지 말아야 할 말이 하나 들어있는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히나'의 손짓을 보던 칼리안의 발이 조용히 멈췄다. 언젠가 한 번은 보겠지 했지만 벌써부터 보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던 한 단어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좋아하는'과 '좋은'의 차이는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성적인 사고는 그냥 깔끔하게 집어치운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형님."

애증해 마지 않는 우리 형님 너 이 새끼 잠깐 저랑 대련 한 번만 더 하고 가시라고.

그런 의미를 담은 예쁘디 예쁜 웃음이었다.

제24장. 이해의 초석 (3)

아침 햇살이 깃든 호수의 윤슬이 참 아름답다.

오늘따라 창 밖의 저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금 칼리안과 플란츠가 있는 곳이 2층에 위치한 식당이었던 탓이다.

그리고 이들이 굳이 식당까지 와서 식사를 하는 이유는 딱 하나.

"셋째에게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 들었다."

굳이 체르밀 궁까지 와서 조찬을 가지겠다며 갑작스레 통보해 온 르메인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침 잠 많은 칼리안은 새벽부터 울리는 종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떠야 했다. 플란츠라 해서 그리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란델은 심한 감기를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조찬 후에 잠시 들르겠다 전하게.'

르메인은 그런 란델의 태도를 책망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 후 지금까지 다른 말 없이 식사를 이어나가다가 검술 수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참이었다.

마시던 물을 조용히 내려놓은 플란츠가 간단히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기에는 이제 고작 하루 지났다. 정확히는 하룻밤이 지났다. 전날 밤에 대련 두 번 해본 것이 다였다. 그나마 두 번째 대련은 칼 한번 부딪혀보지 못하고 끝났다.

빛이 번쩍하는 느낌과 동시에 첫 번째보다 조금 더 깊은 상처가 생기고 끝났으니까.

"그래. 둘이라도 사이 좋게 지낸다니 기쁘구나."

사이 좋단다.

칼리안과 플란츠의 손이 동시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는데 플란츠는 접시에 둔 시선을 바꾸지 않은 채였다. 칼리안에게 대답을 넘기는 것이다.

정신 나간 동생놈과의 사이를 표현해 낼 만한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혹은 세상에 저런 미친놈과 사이 좋을 사람은 세크리티아 왕세자밖에 없을 것이란 말이 튀어나올까 걱정된 탓도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짖는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몰라도 동생놈이 좀 무는 것 같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플란츠를 슬쩍 쳐다본 칼리안이 르메인에게 대답했다.

"네. 사이가 아주, 좋습니다."

못한다던 거짓말이 술술 잘도 나온다.

"스스로의 단련도 해야 할 텐데 네 형의 검술까지 보아주겠다 하니 좋은 일이다. 다만 서로 다치지는 않도록 조심하거라."

칼리안이 속으로 웃었다.

'어쩐지 갑자기 찾아오셨다 했더니.'

어젯 밤 두 형제의 대련이 끝나고 히나가 수련장을 찾았더라는 말을 전해듣고 플란츠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와 본 모양이다.

부수는 것 좋아하는, 아니. 잘 하는 칼리안의 손이 행여라도 과했던 것은 아닌지 살펴보려고.

"네, 전하.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굳이 말하지 않는 진짜 이유도 알 것 같았지만 칼리안은 짐짓 모르는 척 대답하며 생긋 웃었다.

창 밖의 호수처럼 반짝이는 그 웃음을 본 르메인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플란츠는 그냥 물만 한 모금 더 마셨다.

남들은 못알아볼지 몰라도 칼리안은 지금 플란츠가 얼마나 많은 말을 물처럼 꾸역꾸역 넘겨내고 있는지 아주 잘 알았다. 다리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칼리안의 손 끝이 허벅지 위에 곡선 하나를 그려냈다. 진지해야 할 입을 대신해 웃어주는 것이다.

"네 몸은 좀 괜찮은 것이냐? 무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구나."

칼리안이 너무 멀쩡한 얼굴로 야무지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탓에 셋째 아들이 죽을 고비를 넘긴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상기한 르메인이 물었다.

질문 순서가 조금 바뀐 것이 아니냐는 말 대신 칼리안은 다시 한번 걱정 말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 나았습니다."

······ 그래 보이는구나.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다행히 속마음과 조금 다른 제대로 된 대답을 꺼낸 르메인이 칼리안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근신이 풀리더라도 혼자 밖에 나서는 일은 절대 없도록 주의하거라."

주의라는 강경한 표현까지 쓰는 것을 보니 근신이 풀리더라도 호위기사는 절대로 물리지 않을 분위기다. 칼리안이 조금 풀 죽은 얼굴이 되자 르메인이 살짝 웃는 얼굴이 되어 말을 덧붙였다.

"왕실 숲까지는 가도 좋으니 정 답답하거든 그리 걸음하고."

"네, 전하. 감사합니다."

"그래."

엄마 찾는 강아지마냥 한 시를 가만히 있지 못하는 칼리안을 생각해서 해준 말. 왕궁의 북쪽에 있다는 그리 크지 않은 숲. 칼리안은 물론 옛 칼리안도 가보지 못한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플란츠. 지난 번 보았을 때보다 마른 것 같구나. 혹여 아픈 곳이 있느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잘 챙겨 먹어야지. 한참 자랄 때이니."

"네, 전하."

소소한 대화를 들으며 웃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창 밖에 보이는 아름다운 전경 앞으로 붉은 두 눈이 언뜻 비쳐보였다.

'아······.'

칼리안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기가 지워지듯 사라졌다.

평범한 아침.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 숨긴 의미 하나 없이 오가는 대화. 아무것도 아닌 이 시간이 너무 평화로워서, 칼리안은 하마터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치고 그저 좋아할 뻔 했다.

- 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해했을까.

좋아할 뻔 했던 만큼의 미안한 마음이 차오른 칼리안이 오래도록 창문을 쳐다봤다. 밝은 창에 비치는 보석같은 눈동자를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칼리안.

* * *

"애오옹!"

배가 또 똥똥해진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입니다.' 고양이가 앞 발을 들어 플란츠의 손을 끌어당겼다. 졸린데 잠은 안오니 빨리 쓰다듬어 보라는 것이다.

다리도 꼬지 못하도록 무릎 위에 제멋대로 올라와 앉은 것으로 모자라 원하는 것이 또 남은 고양이를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른하게 감겨들어가는 서로 다른 두 색의 눈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또 다른 소리가 맞은편에서 들렸다. 애교섞인 고양이 울음과는 전혀 다른, 버석버석하기 짝이 없는 동생의 목소리였다.

"전하께서 오신 것을 너무 서운하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플란츠의 말은 앞 뒤가 없었고 칼리안은 항상 좀 뜬금없었다. 잠시 그 말의 의도를 헤아려보던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다지. 별 생각 없는데."

그래도 대화가 곧잘 이어지는 것은 말을 나누고 있는 이들이 칼리안과 플란츠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다른 이들이었다면 이런 식의 대화가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는 못할 것이다.

"네."

아무튼 칼리안이 서운해하지 말라 하는 것은 르메인의 방문 사유에 대한 것이었다.

칼리안이나 플란츠가 다쳐서 앓고 있을 때에는 찾아오지 못하다가 이제 와서 '플란츠가 혹시 다친 것은 아닌지'가 걱정됐다는 듯 발걸음을 한 진짜 이유 말이다.

란델.

르메인은 지금 둘째와 셋째 아들을 핑계로 란델을 만나보러 왔으리라.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는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두들겨지지 않고 무사히 잘 있음을 확인한 뒤 아프다는 란델을 굳이 만나러 가겠다 할 리 없으니까.

그래서 서운해하지 말라 한 것이다.

르메인이 이 곳에 방문한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애오옹······."

어느새 플란츠의 손이 멈췄는지 고양이가 나른한 소리를 내며 다시 졸랐다. 차 한 모금 마실 새도 주지 않겠다는 고양이의 채근에 플란츠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래도 형님 걱정을 하신 것은 맞을 겁니다."

르메인이 변한 것을 모를 리 없었다.

플란츠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내 아우님이 워낙 사나우시니."

그리고는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한 곳을 두 번이나 베인 탓에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아서였다. 한동안 말 없이 있던 플란츠가 칼리안을 노려봤다.

조찬이 끝난 뒤 꾸역꾸역 플란츠의 방에 찾아온 칼리안이 어울리지도 않게 신경을 써주는 듯한 말을 왜 꺼내놓고 있는지도 알기 때문이었다.

플란츠가 짧게 입을 열었다.

"해. 사과."

"미안합니다."

준비된 듯 빠른 사과가 이어졌고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도 묻지 않았다.

칼리안이 잘못했고 사과 받겠다는 말에 사과를 했고 플란츠는 그 사과를 받았으니 더 필요한 것이 없었다. 물론 히나가 지금 이 광경을 봤다면 참 어처구니 없다 했을 일이지만.

"브리센 후작은 언제 만나십니까."

"오늘."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만나는지는 아시는 것 맞습니까."

아직 칼리안은 헤이시아 궁을 폭발시킨 또 다른 이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플란츠가 이미 가늠을 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알아."

플란츠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알고 있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물어보고 확인하는 대신 칼리안은 슬쩍 웃기만 했다. 플란츠라면 알아서 잘 할 테니까.

"다녀오시면 오늘은 키리에에게 배우십시오.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그리고 지금은 저보단 키리에가 나을 겁니다."

칼리안의 검은 빠르고 날카롭다. 슬레이만의 검술은 묵직하고 강렬하다.

플란츠는 그 중간이었다.

칼리안의 것보다는 무겁고 슬레이만의 것보다는 날렵했다.

때문에 처음 배우기에는 키리에가 적격이었다. 플란츠보다는 가볍고 날렵한 검술을 쓰지만 칼리안보다는 무거웠으니까. 게다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키리에에게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플란츠는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 *

에반 브리센 후작의 얼굴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근 1년 사이 이런 저런 고생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지금만큼 마음 고생 심한 시기는 없었으리라.

실리케가 축출되고 난 뒤 브리센을 지지하던 귀족들은 열에 한 명 꼴로 등을 돌렸다. 그나마 그 정도 선에서 멈춘 것에는 플란츠를 붙들어 둔 덕이 한 몫을 했다. 그런데 그레이가 사고를 치고 칼리안이 지그프리드와 손을 잡으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게다가 이번 사건은 브리센에 있어 악재중의 악재였다.

다섯에 한 명.

다섯에 한 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슬금슬금 연락을 끊고 에반을 피하는 것이 눈에 확 보였다.

- 발칸!

바로 칼리안 때문이었다.

그 헤이시아 궁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으로 모자라 르메인의 처벌이 지나치게 경미했다. 그것이 귀족들의 눈에는 칼리안에 대한 르메인의 총애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상황이 좋을 것 같지는 않은데."

때문에 에반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어오는 플란츠를 보며 에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다 자라지도 않은 지그프리드의 코끼리에게까지 이용당하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할 말이 없군."

아니 지금 이게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그러니까 대체 그 시간에 거기는 왜 기어들어가서 일을 이렇게 꼬아놓느냐는 눈을 한 에반을 향해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내가 검을 쥐면 뒤집힐 것 같은데. 어때."

"무엇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었다면 이 정도 말로도 충분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에반은 그렇지 못했다. 불필요한 말을 덧붙여야 함에 답답함을 느낀 플란츠가 짜증 섞인 말투로 입을 열어 계획을 말했다.

"기사단 카렌과 라온의 통솔권을 나한테 넘겨. 발칸을 반으로 나눠놓을 테니까."

자신만만한 말에 에반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안 믿네."

"아닙니다 왕자님. 믿지 않는다기 보다는······."

그렇게 말을 얼버무린 에반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생각을 이어나가던 에반의 입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 의뭉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고스란히 매단 채로 에반이 입을 열었다.

"기사단 통솔권 드리겠습니다. 대신."

그렇게 말한 에반이 자신의 심장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맺었다.

"맹세의 인을 걸고 약속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브리센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맹세의 인.

약속을 어긴 이의 심장을 옥죄는 계약.

"내 심장을 걸라는 말이군."

에반은 지금 플란츠에게 칼자루를 주는 대신 목숨을 걸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에반을 쳐다보는 플란츠의 입에 아주 오랜만에 그려보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 언젠가의 실리케를 꼭 닮은 해맑은 미소였다.

"해."

그까짓것.

아깝지도 않아.

제24장. 이해의 초석 (4)

적막한 방.

한편으로는 놀라고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정원에는 그렇게나 화려한 꽃을 피워내면서 방 안에는 그 흔한 화병 하나 두지 않았다. 시계조차 없는 이곳에 늘 홀로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손에 칼리안의 피가 묻고 자신의 눈으로 플란츠의 결핍을 보고 아무것도 없는 이 방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그것을 깨닫는다. 이미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는 것을 함께 느낀다.

국왕이기 이전에 아버지여야 했고 아버지이기 이전에 국왕이어야 했던 르메인은 입 밖에 내지 못할 후회를 담아 란델을 바라봤다.

"심한 감기에 걸렸다 하던데. 괜찮은 것이냐."

자신을 피하기 위해 핑계를 댄 것임을 당연히 안다. 알면서도 찾아왔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탄신일 축제 중 마지막으로 보았고 체르밀 궁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벌을 주었다. 그 뒤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란델은 변함 없는 모습을 한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변함 없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

내가 서툴렀다.

서툴러서 그렇게 눈을 돌렸다.

눈을 돌리니 보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으니 잊고 지냈다. 잊고 지내니 시간이 흘렀고 시간이 흐르니 알게 되었다.

잘못했다는 것을.

"······ 그래."

르메인은 속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같은 말만 다시 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사과의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저 변명이었고 나를 이해하라 종용하는 폭력임을 알았다.

그리 잘 알았으면서.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비집고 수만마디 말이 담긴 한 줄기 한숨이 기어코 새어 나왔다.

"아프면 혼자 참지 말고······ 혹여 내가 또 모르거든 말해주거라."

고작 이런 말이나 건넨 르메인이 앞에 놓인 차를 꾸역꾸역 마셨다. 마주 앉아 있던 란델은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한참만에 꺼내진 이야기에도 란델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만큼의 간극이었다.

그 곳에 더 있는 것조차 무언의 강제가 될까 걱정되어 르메인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일어난 란델의 눈을 들여다보던 르메인이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또 오마."

란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 * *

세상에서 이보다 기꺼운 초대는 없을 것이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잠시 와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어여쁜 제자가 찾는다는 말에 앨런은 보고 있던 서류를 곧바로 뒤집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칼리안의 청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얀의 뒤를 따라 체르밀 궁에 들어서니 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수련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 말을 들은 앨런이 생각 많은 얼굴로 웃었다.

"명색이 왕자님의 스승인 앨런 마나실인데, 왕자님 방이 아닌 수련장에서 만나자는 말이 이렇게나 생소해서야."

"왕자님께서는 혼자서도 워낙 잘하시니까요."

칼리안이 워낙 알아서 잘 수련해왔던 탓에 정작 스승 노릇은 몇 번 해보지 못했다. 이것이 민망했던 앨런은 얼른 수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술 수련장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마법 수련장에 들어서니 널찍한 공간 한 가운데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칼리안이 보였다. 르메인과의 조찬 때문에 매일 아침 해오던 마나 축적을 이제야 하는 중이었다. 방해 되지 않도록 조용히 서서 그 모습을 보던 앨런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실로 방대하구나.'

그것이 시스파니안의 축복 때문인지 옛 칼리안이 유난히 뛰어난 재능을 가졌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확한 것은 정제되어 쌓이고 있는 마나의 양이 다른 마법사들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랬으니 오러를 숨기는 마법을 상시 유지하면서 때에 따라 검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테지.

'4서클의 끝도 가장 빨리 보게 될 것이다.'

이미 앨런보다 앞선 나이에 3서클을 마스터했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때문에 앨런은 자신이 4서클 마스터가 되었던 나이가 언제였는지를 기억해보고 있었다.

"스승님!"

그러던 중 변함 없는 반가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앨런을 불러냈다. 곧바로 기억에서 빠져나온 앨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칼리안이 자신을 왜 불렀는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수련장으로 불러내셨으니 막힌 것이 있을 터인데, 제가 무엇을 가르쳐드리면 될는지요."

칼리안이 웃는 낯을 바꾸지 않은 채 수련장 한쪽에 놓인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로 가 앉았고 마주 앉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헤르츠 부군단장은 좀 어떻습니까?"

"마법 쓰는 족속들은 어찌 다들 그모양인지 모르겠습니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앨런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섞인 답이 나왔다.

그 족속들의 우두머리가 그 족속들을 모아서 써먹어보자 했던 왕자에게 이렇게 말한 뒤 말을 이었다.

"지금 아주 영웅이 되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리안의 한 마디 말을 곧바로 실행했던 대쪽같은 신의. 적절한 위치에 표적을 세워 헤이시아 궁을 한방에 날려버리도록 유도한 칼 같은 계산. 건물 값 정도는 자신의 급여에서 제하라 외치던 멋짐까지.

아르센은 지금 발칸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이러다 빌헬름 관에 동상 세우게 생겼습니다."

실로 마법사다운 반응이 아닌가.

칼리안이 재밌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일 처리가 그렇게 확실하니 제가 헤르츠 부군단장을 신용할 수밖에요."

"그리 부리지 마시지요. 다음에는 무엇이 없어질지 가늠도 되지 않습니다."

"아. 사실 저도 다음에 제가 뭘 부술지 모르겠네요."

헤실거리며 웃어보인 칼리안이, 앨런의 핀잔이 나오기 전에 얼른 본론을 꺼냈다.

"발칸에 자리 하나만 더 만들어주세요, 스승님."

"왕자님의 것입니까? 드디어 무얼 하나 손에 쥘 생각을 하셨나봅니다."

반가워하며 물었으나 애석하게도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아니라 히나요. 이제 발칸에 둘까 하는데, 앞서서 준비를 좀 해주셨으면 해서."

전날 밤 플란츠가 수련장에서 나간 뒤 마음을 굳혔다며 다부진 얼굴로 이야기하던 히나를 떠올린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본래 헤르츠 경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잔해 처리에 열의를 쏟는 중인 것 같네요."

"그리하지요.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스승님."

언제 무슨 말을 하든 흔쾌히 따라주는 앨런만큼 든든한 조력자가 또 있을까.

"그리고 헤르츠 경은 제가 시켜서 일을 벌였을 뿐이니 너무 타박하지 말아주세요."

타박이라니.

앨런이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 꾹 누르면 노래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을 한 채로 건물 잔해를 치우고 있습니다. 제가 얼굴을 맞대 본 이래 그렇게 신나있는 꼬락서니를 처음 보니 걱정 마시지요."

거짓이 아니었다.

그런 아르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치유술을 위해 부르시는 것일 테니, 오후에는 베로니카를 불러 돕게 하면 좋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앨런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표정을 했다.

"베로니카라면 스승님의 손녀 아닙니까. 지금 마법학원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맞습니다. 헌데 마법 재능은 고만고만한 것이 약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니 히나 그 아이의 심부름이나 하게 하면 어떠신지요."

"그렇게 두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대마법사이자 왕자의 스승인 백작이다.

유일하게 아르피아 궁에 집무실을 둔 앨런이 자신의 손녀로 하여금 시녀였던 히나의 일을 돕도록 하겠다는 말이었다.

"저 좋다는 일 시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습니다."

신분 차이 때문에 건넨 질문임을 떠올리지도 못한 듯한 대답. 얀이나 앨런이나 이런 구분이 잘 없었던 탓이다.

칼리안 역시 우려하는 것이지 스스로 신분에 구분을 두어 물은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베로니카만 괜찮다면 저는 좋습니다. 일을 돕는 것을 떠나서 히나의 말 상대라도 되어 준다면 반가운 일이고요."

"그럼 당분간 왕자님의 새끼 코끼리도 좀 빌려주시지요. 발칸 놈들은 배우는 것을 참 좋아하니 수어를 배우는 데에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같은 생각을 했던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히나에 대한 일을 얼추 전달한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제 자신이 배울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차례였다.

곧 칼리안이 손바닥을 내밀어 무언가를 만들어보였다.

붉은 빛의 마력 덩어리.

칼리안이 평소 잘 사용하지 않아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이는 그것을 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담지 않거나 바람의 힘을 주로 사용하다보니 불을 다루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네요. 혹시 도와주실 수 있을까 해서 와주십사 부탁을 드렸습니다."

손 위에 올려진 것의 생김을 보고 칼리안이 배우려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앨런의 표정에 잠시 그늘이 졌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제가 그만 잊고 있었습니다."

"저도 사실 뒤늦게 알게 되어서. 이제야 급히 연습을 해보네요."

"알겠습니다. 제가 가르쳐드리지요. 어려운 것이 아니니 금방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검은 돌과 텐실의 마차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는 것이 낫겠다 판단한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 *

- 퐁당.

아침의 호수는 그리 예쁘게 반짝이더니 석양에 함께 물드는 호수는 왜 이렇게 처연하게 붉은지.

붉어서, 처연해 보이나.

돌아가는 앨런의 편에 얀을 함께 보냈다. 곧바로 수어 알려주기를 시작했는지 얀은 한나절이 지나고 저녁이 되어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궁의 잔해를 치우는 인원과 수어를 배울 인원을 나누고 돌아가면서 알려주려면 시간이 꽤 걸리기는 할 터였다.

에반 브리센 후작을 만난 플란츠가 체르밀에 도착했다 하기에 키리에를 보냈다. 둘은 아직 수련장에 있을 것이다.

메를린이 함께 나오겠다는 것을 말려놓고 혼자 나왔다. 멀찍이 서 있는 두 명의 호위기사는 어차피 있으나 마나. 그냥 없는 취급 하기로 했다.

- 퐁당······!

그렇게 하여 혼자 남게 된 칼리안은 지금 손가락만한 마력 덩어리를 뭉쳐 물에 던지는 중이었다. 마치 작은 돌을 던져 넣는 것 같은 소리가 듣기 좋아서였다.

그렇게 아무 말없이 호숫가에 앉은 채로 밤이 되기를 홀로 기다렸다.

밤이 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차 다가온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붉었던 호수는 그저 검게 일렁였다.

곧 칼리안의 손에 붉은 빛이 어렸다.

아침에 앨런에게 급히 배운 것을 운용하느라 두 번을 꺼트린 뒤에야 제대로 된 모양을 만들어냈다.

"그 날은 어떻게 하는 건지 내가 잘 몰랐어. 말로만 전해들어서."

칼리안의 입이 이렇게 홀로 열렸다.

- 찰박.

불어오는 바람에 인 잔물결이 칼리안의 발 끝에 닿았다. 칼리안은 잠시 몸을 일으켜 손에 들린 붉은 빛을 물가에 내려놓았다.

"오늘도 꽃은 없어."

고요한 말과 함께 또 하나의 붉은 빛이 물 위에 올려졌다.

망자에게 건네는 한 마디 말에 띄우는 한 송이의 꽃과 촛불. 그렇게 건네는 수많은 불빛, 그만큼의 말이 망자의 마지막 걸음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강에도 못 가지만 비슷하니까 봐 줘."

세 번째의 붉은 빛, 아니. 안네루시아를 따라한 불꽃이 호수에 띄워졌다.

오늘은.

칼리안의 기일이었다.

카이리스에서는 망자의 기일을 챙기지 않는다. 그래도 굳이 이렇게 한번 더 옛 칼리안을 떠올리고 있는 것은, 보내주기 위해서였다.

"미안."

이제는 옛 칼리안에 대한 부채감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이기적이라 할지 모르지만.

"나도 살고 싶어서."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은.

"미안해."

그렇게 미안하다 건네지는 말의 수 만큼 물 위에 올려진 불꽃들이 붉게 빛났다.

- 자박.

수십 개의 불꽃을 물 위에 올려두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조용히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이 시간에 굳이 칼리안이 앉은 곳까지 찾아 올 사람은 한 명 뿐이다.

풀썩, 하고 곁에 앉은 플란츠가 호수를 쳐다봤다. 붉게 빛나는 크고 작은 불꽃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살피던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찬까지만 해도 없었던 이질적인 마력의 기운이 느껴진 까닭이다.

"······ 살고 싶다더니."

살겠다는 놈이 제 심장에 속박을 걸어놓고 왔다. 분명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을 것이다.

살기 위한 길을 열기 위해선 목숨을 거는 것도 아깝지 않다는 모순은 칼리안도 안다.

"내 아우님께서 어련히 살려두실까."

나른한 목소리의 대답이 들려왔다.

다시 호수로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너무 잘 아시네요."

어차피 칼리안은 플란츠가 죽게 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칼리안도 플란츠도 걱정할 것이 없는 일이다.

곧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의 속박에 대한 고민은 나중에. 옛 칼리안에게 해야 할 말은 다 했고 플란츠가 에반에게 얻을 것을 얻었다. 이 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부는 바람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던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나만."

발을 옮기려던 칼리안이 가만히 멈춰섰다. 그리고 다른 말 없이 불꽃 하나를 더 만들어 플란츠에게 건넸다. 플란츠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 들었고 칼리안은 체르밀 궁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플란츠의 손에 올려진 불꽃이 호수 위에 올려졌다. 방 안에 들어와 열린 창 밖으로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손을 움직였다.

할 말을 모두 전했으면, 보내줘야 하니까.

향할 곳 없는 호수 위에 올려져있던 수많은 미안함이 하나 둘 떠올랐다. 거꾸로 오르는 별처럼 밤하늘을 밝히듯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광경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속죄임을 칼리안이 안다.

유난히 많은 말을 담아서 유난히 느리게 올라간 마지막 불꽃 하나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제24장. 이해의 초석 (5)

하늘의 한 조각이 반짝이는 듯 했다.

수십 개의 붉은 빛이 천천히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광경이 많은 이들의 눈에 띄었다. 르메인 역시 그런 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창가로 가보려는지 안경을 벗어 내려놓는 르메인을 향해 맞은편에 앉아있던 앨런이 말했다.

"시선 두지 마시지요."

저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를 위한 불꽃인지 알아서는 안 되는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르메인이 아니던가. 때문에 앨런은 진작부터 르메인의 집무실에 찾아와 앉아 있던 참이었다.

"체르밀 궁 쪽인 것 같은데."

그 말에 앨런이 입을 다물었고 르메인이 그런 앨런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무슨 일이지."

칼리안과 관련된 일들 중 앨런이 르메인에게 굳이 전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알아야 할 내용까지 숨기거나 속이는 일은 없었으므로 르메인은 그에 대해 굳이 캐묻지 않았었다.

평소 같았으면 칼리안이 장난이라도 치는 모양이니 그냥 두라는 정도로라도 얼버무릴 앨런인데 아예 보는 것조차 하지 말라 한다. 그러니 저 빛이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평소 알아서 적당히 넘어가던 르메인이 오늘따라 이렇게 구는 것이 단순한 호기심인지, 제 핏줄에 대한 막연한 예감인지. 짧게 혀를 한 번 찬 앨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셋째 왕자님께서 길을 찾아 가시는 것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르메인이 한동안 창 밖을 쳐다보다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술이나 한 잔 하시겠습니까?"

르메인의 대답이 없었음에도, 앨런이 테이블 위에 술병과 술잔을 척척 꺼내놓았다. 마시자는 허락을 구할 생각도 없이 이미 준비를 해 온 것이다.

오전에 란델을 만났던 일로 마음이 복잡했던 르메인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지."

앨런은 조용히 웃으며 두 잔에 술을 채웠다. 옅은 보랏빛을 띄는 술이 잔에 채워지는 것을 보고 있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오늘 다시 한번 통감했네."

"무엇을 통감하셨습니까."

그 말에 르메인은 앨런이 채 건네지도 않은 술잔을 집어들어 먼저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현명하지 못했음을. 왕으로서도 아비로서도 자격이 없구나, 하고."

선왕의 선택으로 왕세자위를 받고 형이 반기를 들었을 때 그냥 내어주었다면 어땠을까.

"무슨 그런······."

르메인이 오전에 란델을 만났음을 알고 있었던 앨런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말하고 있는 눈이 굵게 휘어져 있었다.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하시는지."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곧죽어도 르메인 편은 안 들어준다.

저런 성격이니 앨런이 가져온 술에 뭐가 들었을지 확인도 않고 먼저 마시고 있는 것이다.

앨런이 잠시 창 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붉은 기운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칼리안의 불꽃이 하늘에 거의 닿은 것이리라.

"혹여라도 이미 늦어버린 일을 되돌리려 하지는 마시지요. 그것은 오만이니."

"하지 않네."

르메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반쯤 남은 술을 마저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길을 잘 찾아야 할 것인데."

"보이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불을 밝히는 이도, 말을 건네는 이도 있으니."

이번에는 제대로 된 길을 찾으리라고.

앨런이 그리 말하며 가만히 웃었다.

* * *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마법사단 발칸의 통솔권은 앨런에게 있고 기사단 카렌과 라온은 이제 플란츠의 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앨런은 일단 르메인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리고 플란츠는 르메인의 생명연장과 무병장수를 원하는 칼리안과 손을 잡은 상태다. 그래서 르메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습다 하는 것이다.

본래에는 모두가 국왕의 소유여야 할 것들이 아니던가.

"나라 꼴이 참······."

뒷말을 흐린 이유는 아무리 혼잣말이라지만 '나라 꼴이 개똥이다'라는 말이 왕자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짙은 검은색의 욕조에 몸을 담근 채로 고개만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 우웅.

따뜻하게 맞춰둔 물이 식을 만큼 오랫동안 있었던지 수온 조절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이런저런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괜스레 마음이 복잡해져서 물 속에 들어왔고 생각의 꼬리를 이어나가다가 르메인의 간당간당한 목숨에까지 가 닿은 참이었다. 곧 칼리안은 너무 멀리 가버린 생각을 붙들어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물에 불어 쪼글쪼글하게 주름이 생긴 손 끝을 쳐다보면서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맹세의 인을 그렇게 덥썩 받다니."

안 그래도 고민거리가 산더미다.

조약돌, '그들'의 정체, 시간의 축과 세렌티, 란델의 꿍꿍이와 감춰둔 힘, 아이즌의 기사단, 히나가 말한 '좋은'의 참뜻, 만약 카밀론에 가게 되면 무슨 개를 키울 지, 등등.

그런데 형님 놈께서 하나를 더 얹어주고 갔다. 내 아우님께서 어련히 살려두리라는 태평한 소리나 하면서 말이다.

"알아서 해결하게 그냥 둬버릴까보다."

그러니까 시스파니안.

조금만 덜 사려깊었어야 했다니까요.

심장을 옥죄는 것이면 당연히 축복으로 해결이 되어야죠. 당신이 내린 축복의 힘이 당신이 만든 맹세의 인에 속박되어 버린다니.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 정말이지."

옛 칼리안에게 작별을 고한 일로 감상에 젖을 새도 없었다.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태고의 고룡에게 답답함을 토로하며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일단 계약 조항을 들어보고."

시스파니안에게 푸념을 해봐야 답이 나올 리 없다. 휴대하기 좋도록 가볍게 개선한 것이 분명한 에반의 머리에서 나온 계약 조항이니 빠져나갈 구멍은 있을 터였다. 그런 것도 없이 맹세의 인을 받아 올 플란츠가 아니리라 믿었다. 그러므로 그 문제는 일단 조건을 들어본 뒤 다시 고민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떠올린 것은 란델이었다.

르메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지는 모르겠지만 란델에게 르메인이 큰 영향을 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란델은 절대로 르메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테니까.

"세렌티께서는 내가 이 집안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기를 원하신 건가."

이를테면 르메인이 저지른 잘못의 뒷수습 같은.

얼토당토 않은 상상에 피식 웃은 칼리안이 욕조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쳐다봤다. 그렇게 가만히 물 속에 몸을 누이고 있다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또 왔다는 것을 느낀 까닭이다.

사생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저 단호한 목소리에 잠시 인상을 찌푸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네."

나오라시는데, 나가야지.

* * *

고양이와는 사이가 좋다.

란델과는 사이가 나쁘다.

민트는 싫어한다. 신 것은 못 먹는다. 익히지 않은 양파는 그리 내켜하지 않는다. 고기는 잘 안 먹는 것 같다. 견과류가 들어간 빵은 안 먹는다. 쨈이나 버터에는 손도 안 댄다.

풀을 잘 먹는다.

하얀 빵은 곧잘 먹는다. 계란도 먹는다. 우유는 그럭저럭, 주스는 대체로 다 마신다. 커피는 모르겠고 홍차는 잘 마신다.

입이 험한데 욕은 안한다. 아, 짖는다고는 한다.

눈치가 빠르다.

말 하는 것을 정말 귀찮아한다. 잘 움직이지 않지만 굼뜬 것은 아니다. 생각이 깊다. 한 번 생각에 빠지면 결론을 낼 때까지 가만히 있는다.

그리고 의외로 성격이 급하다.

배려심은 고양이한테 다 퍼준 것 같다.

"애옹!"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플란츠의 품에서 울음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창문 말고 문으로 들어왔는지 몰라도 아무튼 고양이까지 데리고 당당히 들어왔다는 소리다.

"무슨 일이십니까."

"계약 내용."

"맹세의 인을 맺은 내용을 못 전하셔서 이 시간에 오신 겁니까. 내일 식사 때 말 해도 될 것을요."

"안그래도 고민하실 테니."

"굳이 이 밤중에 그걸 궁금해할 만큼 고민하지는 않았는데요."

칼리안이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그대로 둔 채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티를 고스란히 내고 있었다.

물론 플란츠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소리 없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얘기해주세요."

"브리센을 배반하지 않는다."

"네. 세부조항은요."

"없어."

"겨우 그것 하나를 말했습니까."

"그래."

에반 브리센이 진짜 그것만 말했느냐는 눈으로 쳐다보니 플란츠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들은 오만하니까."

내가 생각한 '배반'의 범위가 여기서부터 여기라면 다른 이들도 그렇게 여기겠지 라고 믿는 것이다. 자신의 판단이 곧 보편적인 기준이니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판단을 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라고.

"이런 말씀 죄송합니다만."

너무 멍청합니다.

라는 말을 뒤에 이으려 했는데 플란츠가 먼저 대답했다.

"알아."

"네."

어쩐지 아무리 그래도 맹세의 인을 쉽게 받아들이고 왔더라니.

아마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지 않았다면 에반의 생각은 더 깊었을 터였다. 그랬다면 최소한 세부 조항 하나쯤은 더 만들어 냈을 것이다. 때문에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겠다 말했으리라. 다른 꿍꿍이를 집어넣을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구체적이고 자세하여 틈이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조건이 낫다. 애매한 만큼 조심해야 할 범위는 넓어지겠지만 실제로 맹세의 인이 발동하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적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귀찮더라도 차라리 더 안전한 쪽이 나으니. 다행이네요."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더 할 말이 없으면 가 달라는 노골적인 눈빛을 또 한 번 무시한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기사단. 전하께 말씀을 드려야 할텐데."

"네. 기사단이 형님에게 넘어가기 전에 전하께 미리 말씀드리기는 해야겠죠. 어쨌거나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브리센 후작이 그 권한을 전하께 넘길 일은 없을테니, 차라리 형님이 가져온다면 전하께서도 꺼려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렇겠지."

"내일 형님께서 말씀하세요. 저는 내일까지 체르밀 궁에서 못 나가니까."

그렇다고 스승님처럼 전하를 오라가라 할 수는 없잖아요, 하고 말한 칼리안이 생글거렸다.

"게다가 이번 일의 주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형님이었으니 전하를 대면하는 것도 형님이어야 맞겠고요."

플란츠의 얼굴에 민트차를 마실 때와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다.

당연한 일이다. 란델 만큼은 아닐테지만 플란츠 역시 르메인에 대한 골이 남아 있을 테니 단 둘이 만나는 것이 기꺼울 리 없었다.

"······ 알았어."

곧 플란츠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내일 저와 같이 헤르츠 경을 좀 만났으면 하는데. 이번 일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도 해야 하니까요. 어떠십니까."

플란츠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 떠올랐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웃었다.

처음으로 플란츠가 제 나이로 보여서였다.

"너무 그렇게 싫어하지 마십시오. 알고 보면 재밌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을 보며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곧 소파에 등을 기댄 플란츠가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미친 마법사를 참 잘도 받아들여선 재밌다는 말이나 하고 계시는군."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고 플란츠를 쳐다봤다.

"······ 넘겨짚는 것만 하라 말씀을 드렸는데요."

"뻔한 일 아닌가. 마나실 백작 대신 누가 발칸을 지휘했을지."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앨런을 대신해 발칸을 이끌었을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을 또 누가 막았을지.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을지.

누가 누구에게 죽음을 내리고 받았을지.

베른을 넘어선 아르센의 창이 가장 마지막에 누구를 향했을지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는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내 아우님은······ 마음이 넓으신 건지. 기억이 짧으신 건지."

"그런 것을 기억해두려니 억울한 것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요."

이미 억울한 것이 참 많은 얼굴이었으나 플란츠는 다른 말을 더 꺼내진 않았다. 그리고 칼리안은 화제를 돌리려는 듯 이제 막 생각해낸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아무래도 내일은 저만큼 억울한 분 만나러 가봐야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이 손을 들어 위를 가리켜보였다. 홀로 억울한 마음에 텅텅 비어버린 한 사람을 만나보겠다고.

플란츠가 말없이 칼리안을 쳐다보다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제24장. 이해의 초석 (6)

커튼 밖에서 작은 발소리가 났다.

시녀들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침실의 두터운 커튼을 걷어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침실로 들어온 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설마 또 밤을 새셨습니까, 왕자님?"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 손인사를 건네는 칼리안을 본 탓이다.

어지간해선 칼리안이 먼저 일어나 있는 경우가 없었다. 만약 깨어 있다면 대부분 밤을 샜을 때였다. 사실 베른일 때에도 아침 잠이 많았는데, 스승이었던 테일란보다 먼저 나와 준비한 날이 드물 정도였다. 그런데 몸이 바뀌어도 그 버릇만은 고쳐지질 않는다.

어김없이 잔소리를 준비하는 얀을 향해 칼리안이 얼른 입을 열었다.

"좋은 꿈 꿨어?"

저도 모르게 '네' 라고 대답할 뻔한 얀이 입을 꾹 다물자 칼리안의 눈꼬리가 둥글게 말렸다.

"미안."

에반 브리센 후작이 생각하는 '배반'의 범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일지. 그 수많은 가정에 대한 각각의 해결 방법들을 가늠해보다 그대로 밤을 새웠다.

"잠이 안 왔어."

"그래도요. 아직은 잘 쉬셔야 할 때가 아닙니까."

르메인이 칼리안 안부 묻기를 깜빡 할 만큼 좋아진 혈색은 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눈 앞에서 테라스를 넘어 4층으로 간 것은 진작에 홀랑홀랑 잊어버렸으리라.

그런 얀을 본 칼리안의 입에 소리 없는 웃음이 걸렸다.

결코 싫지 않은 얀의 잔소리와 함께 여유롭게 준비를 끝내고 나온 칼리안이 복도로 나왔다. 당연하겠지만 고양이 울음소리가 머무는 조용한 방에서 아침을 먹기 위해서였다.

계단으로 향해 가던 중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식사에 헤르츠 경을 불렀으면 좋겠어."

"네 헤르츠 부군단장에게 전달해둘게요. 두 분께서 드시는 겁니까?"

"아니. 내 형님도."

그 말을 들은 얀이 저도 모르게 웃는 소리를 냈다. 그것이 어쩐지 기분이 좋아 웃는 느낌이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이 잠시 뒤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왕자에게 '내가 네 말 듣고 좀 웃기는 했지만 신경은 쓰지 말아주세요'와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을 꺼낼 수 있는 시종은 얀 뿐일 것이다. 물론 시종에게 이런 말을 듣고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 왕자도 칼리안 외에는 없을 테지만.

아무튼 얀이 웃은 것은 칼리안의 호칭 때문이었다.

작년 초 즈음까지만 해도 칼리안은 플란츠와 란델을 굳이 구분해 부르지 않았었다. 굳이 말해야 할 때에는 '형님들' 혹은 '두 형님' 정도로만 언급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플란츠' 라고만 부르던 호칭이 잠시 '플란츠 형님'이 되었다가 지금처럼 바뀌었다.

분명 플란츠의 '내 아우님' 소리 때문에 저도 모르게 저렇게 말하게 되었을텐데 그 변화를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여전히 알 수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아무튼 서둘러 웃음을 집어 넣은 얀이 칼리안의 말에 대한 대답을 꺼냈다.

"그런 자리면 식당에서 드시는 것이 낫겠네요. 플란츠 왕자님께서도 그 편이 편하실 테고요. 시간 확인되는대로 준비해놓도록 일러두겠습니다."

얀이 이렇게 말하자 칼리안이 의외라는 눈으로 다시 한 번 얀을 쳐다보며 말했다.

"형님이 불편해하든 말든 신경 안 쓸것 같더니."

"왕자님께서 신경을 쓰시니까요. 플란츠 왕자님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왕자님께서 그렇게 신경을 써주고 계시는데 계속 마뜩찮게 여길 수는 없잖아요."

얀이 플란츠를 완전히 이해해주는 날은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칼리안도 알았다. 얀은 플란츠의 옛 모습을 절대로 잊지 않을 테니까.

"그래."

때문에 칼리안은 이렇게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계단에 발을 디디며 통보하듯 말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수련장에 좀 더 오래 있을 거야."

"네? 왕자님 지금······."

또 한 번 우려 섞인 말을 꺼내려던 얀이 입을 다물었다.

- 타박, 타박.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들은 탓이었다.

이미 진작부터 그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굳이 말을 멈추지 않았던 칼리안이 그런 얀의 얼굴을 일별한 뒤 계속 계단을 올랐다.

마치 시계바늘처럼 정확한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발소리. 란델이었다.

- 탁.

칼리안을 마주한 란델의 발이 멈췄다.

그리고 칼리안의 입에는 숨길 생각 없어 보이는 냉소가 자리를 잡았다.

'어찌나 한결같으신지.'

딱 두 계단.

칼리안이 밟고 선 곳보다 두 계단 위에서 발이 멈췄다.

지난 번에는 세 칸이었는데 이번에는 두 칸이다.

이렇게 두어 번을 더 마주치면 그때는 같은 높이에서 보아 주려나.

"얀."

"네. 왕자님."

"내 형님께 전해."

칼리안의 발이 계단을 밟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두 계단을 더 올라가 란델과 나란히 섰다. 그리고 그 짙푸른 눈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오늘 식사, 같이 못하겠다고."

란델을 향한 인사보다 플란츠에 대한 전언 먼저.

'계단 두 칸'에 대한 칼리안의 화답이었다.

란델에 대해 이해를 해보겠다 했지, 져주겠다고는 안 했으니까.

* * *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크림 스프,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 빵, 넘칠 듯한 샐러드, 삶은 계란과 구운 콩, 향신료 없이 소금으로만 간을 한 훈제 햄, 몽글몽글하게 잘 구운 양파, 그리고 토마토 주스.

그야말로 '싫어하는 것은 다 뺐으니 팍팍 먹고 운동해라' 식단인 것이다. 사용하는 검술이 다른 만큼 칼리안보다 근력을 더 많이 써야 하는데 음식만 앞에 두면 깨작거리고 있으니 그것이 꼴 보기 싫다는 뜻이리라.

"······ 검을 괜히 받았군."

지나치게 좋은 검을 선뜻 주면서 사람 좋게 굴 때 알아봤어야 했다. 놈이라면 분명히 이런 상황을 계획하고 있었으리라. 좋은 검을 받았으면 좋은 검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일 테지.

"니아아, 애옹!"

느지막이 일어난 친구를 반기듯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플란츠의 발목 언저리에 제 몸을 부대끼며 맴돌길 반복했다.

그런 고양이를 안아 든 플란츠가 시종 레릭이 내려놓은 말린 닭고기를 들어 고양이에게 건넸다. 그 사이 레릭은 얀으로부터 전달된 내용을 플란츠에게 알렸다.

"칼리안 왕자님께서는 오늘 불참하신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테이블을 다시 쳐다봤다. 스프도 두 개, 주스도 두 개, 접시도 두 개. 미리 알리지 못하고 식사를 준비시킬 만큼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란델 형님이라도 만났나."

그 정도 일이 아니고서는 식사를 거를 칼리안이 아니지 않나.

독차 사건 이후 몸을 빨리 키우겠다며 이것저것 잘 먹던 칼리안이기는 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조금 달랐다.

근육이 타들어갈 정도로 빠른 속도를 내는 검술, 그리고 오러를 숨기기 위해 언제나 유지하고 있는 4서클의 마법. 이 두 가지로 인해 칼리안이 소비하는 에너지는 상상 이상이다. 그러니 그렇게 먹어대면서도 근육이 붙기는 커녕 살도 안 찌는 것일 터였다.

플란츠도 그것을 알았다.

덕분에 반드시 식사를 해야만 하는 칼리안이 식사 자리에 불참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가늠해냈다. 란델을 만난 정도의 일이 아니라면 식사를 미루지 않을 것이라고.

플란츠가 다시 침실로 발을 옮기는 것을 본 레릭이 얼른 물었다.

"식사를 거르시려는 겁니까?"

"이따가."

거를 생각이라기 보다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조금 더 자려는 심산이었다. 칼리안만 밤새 고민했던 것은 아니니까.

레릭이 플란츠의 걸음을 잠시 붙들었다.

"밖에 칼리안 왕자님의 그 호위 시종이 기다리는 중입니다. 조금 더 쉬시겠다면 잠시 후에 찾아오도록 전하면 될까요?"

플란츠가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오후에 르메인을 만나러 아르피아 궁에 갈 생각이었으니 오전에 검술 수련을 하겠다 했었다. 때문에 벌써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생각보다 약하시다더니.

어제 저녁 플란츠와 검을 맞대 본 키리에는 저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키리에는 말수가 적었다. 플란츠만큼 적었다. 뒷말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애석하게도 플란츠 역시 말을 귀찮아하는 타입이었다. 때문에 물어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것이 '그래도 생각보다는 강하시군요' 따위는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도 했고.

"둬."

그래서 플란츠는 키리에를 보내지 말고 그냥 두라고 했다.

큰 키의 키리에를 떠올려보던 플란츠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입에 거슬리는 것 하나 없는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동생 놈의 시종에게까지 계속 지고 싶지는 않았다.

* * *

- 텐실의 마차 축이 부러진 것은 사고가 아닐 것이다.

만약 체이스가 전해달라 했던 이 말을 칼리안이 이미 알고 있었다면 란델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쯤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몰랐고 그래서 란델을 대하는 칼리안의 모습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굳이 두 계단을 더 올라온 뒤 플란츠를 먼저 입에 담았다. 그 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태도로 예를 보였다. 제 밑으로 안 들어오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에 카밀론에서 개 키우겠다 했던 그때와 똑같았다.

그런 칼리안을 잠시 쳐다보던 란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따라오거라."

어차피 이야기를 나눌 참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그 길로 란델의 뒤를 따라 장미 정원으로 갔다.

흔들림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란델의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잠시 기억을 떠올렸다.

'텐실의 왕이 된 뒤 어땠더라.'

열심히 머리를 써봐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텐실이었기 때문이다.

세크리티아와 텐실은 완벽한 적대 관계였다.

서로 이를 드러내고 지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항상 그랬다. 당장 둘 사이에 언제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 없다고 늘 그렇게 여겨왔다.

하나의 기원, 두 개의 국가.

그것이 바로 세크리티아와 텐실이었으니까.

과거 양신 전쟁을 승리로 이끈 8명의 영웅 중 초대왕 하츠아라와 고룡 시스파니안 그리고 시스파니안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기사 퀴트로스 혼 지그프리드. 이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카이리스다.

그런데 이들보다 앞서 나라를 세운 이가 한 명 있었다.

세렌티를 모셨던 마지막 신관.

바로 세크리티아 대왕이다.

- 이름 없는 왕.

카이리스보다 3년 먼저 세크리티아라는 나라를 세운 그녀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죽었다. 무슨 이유였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오로지 '세크리티아 대왕'이라고만 알려진 이름 없는 왕이 세운 세크리티아는 처음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카이리스에서 시스파니안이 종적을 감췄을 그 무렵, 세크리티아의 신관들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었다. 세크리티아 왕실에서 신물을 이용한 치유술의 이용을 허락하지 않아서였다.

세크리티아는 군사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나라였다.

때문에 반란은 곧 독립이 되었다.

그것이 텐실이다.

이런 이유로 세크리티아와 텐실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작을 관리하던' 베른이 텐실에 대한 정보에 어두운 것은 베른이 왕제였기 때문이었다. 텐실에 대한 정보는 국왕인 데블란과 체이스가 직접 관리했으니까.

"다쳤던 것은 이제 괜찮은지 정도는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요."

때문에 란델이 앞으로 어찌 되는지 알지 못하는 칼리안이 이제 벌어지기 시작한 붉은 꽃봉오리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기껏 따라오라 말한 란델이 아무 말 없이 장미 손질을 시작한 까닭이다.

란델은 뒤에서 들려온 칼리안의 목소리에 잠시 손을 멈추고 있다가 대답했다.

"네가 그 정도에 당할 아이더냐."

······ 역시 내 걱정 해 주는 건 얀 뿐이야.

죽을 뻔 했다는데 르메인은 밥 잘먹는다고 안심하고 란델은 아예 걱정도 안했다는 투다. 칼리안이 짐짓 농담인 것처럼 대꾸했다.

"전사들의 칼이 생각보다 날카로워서요."

"전사라니."

잠시 칼리안이 꺼낸 말의 의미를 새겨보던 란델이 몸을 돌려 칼리안을 마주 보고 섰다.

텐실과 대사막이 손을 잡은 것은 란델도 안다.

칼리안을 공격한 것이 대사막의 전사들이었음을 란델은 모른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그 난리를 피우는 사이 벌을 받는다는 이유로 체르밀 궁 안에 들어앉은 채 태평하게 책이나 보고 지냈을 란델에 대한 억울한 마음.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다른 이의 손을 빌어 제 동생을 해치려 할 놈은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음에 대한 안도의 마음. 딱 그렇게 반반 나뉜 마음이 들었다.

그 묘한 마음을 그대로 담은 칼리안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란델 형님께서도 모르시는군요. 그들이 누군지."

란델은 대답 없이 칼리안을 들여다봤다.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시선을 거부했다.

칼리안이 팔을 뻗어 방금 전까지 란델이 살피던 장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긴 손가락 끝에 오러의 힘을 담은 채였다.

"저 좀 보시죠."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스친 장미가 툭 하고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본 란델의 눈에 아주 잠시 감정이 스쳤다.

그런 란델을 향해 칼리안이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이거. 말고."

다시 말하지만.

이해를 해보겠다 했지 져주겠다고는 안했다.

[외전] 키리에

- 내가 아직 말을 안했던가?

-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 네 이름의 뜻. 여기서는 꽤 그럴듯한 의미가 있거든.

* * *

툭 툭.

한낮의 볕에 적당히 마른 흙 위로 짙은 점이 하나 둘 생겨났다.

코 끝과 이마에 툭 하고 떨어져 닿은 물방울들은 이내 비가 되었다. 적당히 마른 흙에서 적당히 기분 좋은 비 비린내가 풍겨나오다 곧 흩어졌다.

비가 오기 시작했음을 진작부터 알았지만 굳이 손을 뒤집으며 하늘을 쳐다본다. 여지없이 툭 하고 떨어진 물방울이 손바닥 위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아침에는 그렇게 맑더니. 이상하구나."

"제가 그랬잖습니까. 비가 올 것 같았다니까요."

핀잔과 놀림이 조금씩 섞인 말을 꺼내든 베른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체이스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기에서 졌으니 걸었던 돈을 달라는 뜻이다.

그 의기양양한 웃음을 본 체이스가 마주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없으니 들어가서 주마."

"또 잊어버렸다 하시려고요."

"내가 언제 그런 것을 잊은 적이 있었느냐?"

"네. 많이요."

또 티격태격.

이 형제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키리에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일은 뜬금없이 건네진 베른의 한마디 말에서부터 시작됐다.

'형님. 오늘 비가 올까요?'

아침에 체이스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물어오는 베른을 향해 체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비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대답을 했다. 그러자 베른은 곧바로 내기를 하자 말했다.

베른이 걸어오는 내기는 한 번도 사양한 적 없었으므로 체이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베른이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키리에, 잘 봐둬. 형님께서 분명히 비가 안 온다 하셨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기사 베른이 아닌 왕제 베른에게 충성 서약을 한 유일한 기사 키리에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베른이 먼저 내기를 제안하고 체이스가 받아들이면 키리에가 증인이 됐다. 그렇게 내기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이렇게 투닥거리며 끝났다.

"나는 네게 줄 돈을 잊어버린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그런 말씀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시죠."

아마 귀족들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터였다.

그 왕제 베른이 고작 은화 한 개를 가지고 국왕 체이스에게 툴툴거리는 소리를 하고 있으리라고는.

그런 형제의 모습을 보는 키리에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한 명은 국왕이었고 한 명은 왕제였으나 그들은 그저 형제였다. 그것이 그저 좋았다.

그들이 왕과 왕제가 아니었을 때.

그래. 키리에가 그들을 처음 만났던 그 날에도 둘의 모습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었다.

특히 베른은 지금과 완전히 똑같았다. 지금에 비해 입이 조금 더 거칠고 눈빛이 조금 더 사나웠지만 아무튼 똑같았다.

적어도 키리에가 보기에는 그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