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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이번에는 (6)

아무래도 이번 생애 르메인의 사인은 심장 쇠약이 아닐까.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있다 해도 이쯤 되면 르메인의 심장에 뭐가됐든 문제가 하나 쯤은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앨런은 매우 재밌는 구경거리 하나를 찾았다는 표정으로 딸기 파이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그것을 본 르메인이 불만어린 소리를 냈다.

"지금 먹을 것이 입에 들어가는가."

"들어갑니다."

앨런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단 것 싫어하는 르메인의 집무실에 항상 설탕 가득한 간식이 준비되어 있는 것은 시시 때때로 찾아와서는 달달한 것만 골라 먹는 한 마법사 때문이었다. 그러니 올 때마다 열심히 집어먹어 주는 것이 그 마법사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런 앨런의 태평한 마음과는 달리 르메인의 심기는 오늘도 편치 않았다. 그것을 본 앨런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이래서야 탄신일 기념 축제의 주인공이 맞을까 싶을 지경입니다. 얼굴이 또 왜 그렇게 곯아 있습니까."

"셋 중 둘이 또 밖으로 나갔다는데 마음이 편하겠나."

조금 전 라울이 전해주고 나간 소식 때문이었다.

플란츠와 칼리안이 수행원도 없이 달랑 둘이서 말을 타고 나갔다.

맛있다는 듯 감탄한 눈으로 남은 파이 조각을 쳐다보던 앨런은 마치 이 파이 어디서 샀냐고 묻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이 그렇게 생각이 짧지는 않으니 왕자님들께서 어디 한 군데씩 잃어버리고 올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시지요."

"어디 한 군데를 잃어버린다니. 정말 그 입을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그냥 두시면 됩니다. 두 아드님도 그냥 두십시오."

지금 앨런은 르메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에 대해서 잘못 짚었다. 때문에 르메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 쪽이 아니네."

둘째는 검을 곧잘 다뤘다.

셋째는 아마 대사막에 던져놔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 르메인이 걱정하는 것은 두 아들의 안전이 아니었다.

"걱정하는 건 브리센 후작 쪽이네."

성격 사나운 둘째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셋째가 좀.

특히 브리센을 앞에 둔 셋째는 좀 그랬다.

"브리센만 만났다 하면 뭐든 하나는 부숴놓던 칼리안이 직접 에반을 만나러 갔다 하니 어찌 걱정이 안되겠는가?"

"아직 싸울 때가 아닌 것은 서로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핑계 그만 대시고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앞에 놓인 체스 판을 가리켜 보였다. 란델에 대한 일로 르메인의 시름이 하도 깊어 보였던 탓에 앨런이 한 판 두자 해서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시종장 라울이 왕자들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다.

그리고 르메인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창가로 걸어가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두 수만 더 두면 앨런의 승리인 상태였다.

설마 르메인이 그런 이유로 앨런의 앞에 오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르메인은 그럴 인사가 아니지 않은가. 핑계를 댄다 말하면서도 앨런은 그렇게 믿었다.

"곧 란델 왕자님이 도착하실 터이니······."

- 똑똑.

앨런의 말을 자르는 노크 소리와 함께 때마침 란델이 도착했다는 라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르메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란델을 바로 들이라 말했다. 그리고는 앨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1왕자가 왔으니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둬야 되겠군."

그렇게 말하는 르메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린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앨런의 착각일 것이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르메인이 아닌가.

* * *

- 다각 다각.

고아한 자태를 뽐내는 은백색 말과 세상 천지 나보다 높은 사람이라고는 오직 칼리안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한 검은 말이 에반 브리센 후작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에반과 칼리안이 다시 만났다.

물론 에반 역시 두 왕자가 어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들었다. 둘의 동맹은 사전에 플란츠가 에반에게 알리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당혹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칼리안이 아무런 예고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에반을 찾아 온 것이다.

미리 얘기하고 오지 그랬느냐 만나서 반갑다 뭐 이런 인사는 이미 필요하지 않은 사이였다. 따라서 에반은 가장 먼저 이렇게 물었다.

"3왕자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에반이 플란츠와 손을 잡기 전 왕궁에서 칼리안을 마주쳤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 당시 칼리안이 에반을 상대하며 보여주었던 호의적이지 않은 모습과 에반의 도박장을 칼리안이 없애버렸던 일에 대한 앙금 때문이었다.

아무리 란델의 눈에 띄려 온 길이라고는 해도 목적 자체가 없는 걸음은 아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곧바로 입을 열어 찾아온 이유를 알렸다.

"어제 석찬에도 들지 않고 그냥 돌아오신 듯 하던데, 맞습니까."

"3왕자님께 허락을 받았어야 할 일입니까?"

에반은 내가 돌아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물었다.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봤다.

생각 깊은 플란츠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따라서 지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말 한마디 없이 창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에반에게 시선을 두며 대답했다.

"어제 중앙 귀족 모임이 끝나자마자 왕궁을 나갔다 들었습니다."

어제의 석찬에 슬레이만과 에반이 모두 참석하지 않아 르메인이 잠시 외롭게 앉아있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허나 그 일은 이미 왕궁에도 알렸던 일이니 그에 대해 제가 3왕자님께 더 말씀을 드릴 내용이 없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어제 일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을 텐데 그렇게 서둘러 돌아간 것 말입니다."

에반은 대답 없이 칼리안을 쳐다봤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어제 중앙 귀족과의 자리에서 내가 중간에 나갔습니다. 다른 귀족은 몰라도 후작은 그 이유를 알고자 해야 맞지 않겠습니까. 나와 란델 형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아야 하는 입장이니. 그런데 귀가를 했다 하여 그것을 조금 생소하다 여기고 있습니다. 검의 길에 오른 분께서 섣불리 아플 것도 없을 텐데."

"고작 그것이 궁금하여 이렇게 굳이 왕궁까지 나와 물으시는 겁니까."

"고작 그것이었으면 이렇게 안 나왔습니다."

계속 얘기해보라는 듯 에반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칼리안의 말이 계속됐다.

"어제 석찬에서 내가 플란츠 형님과의 동맹을 알렸음에도 이렇게 집 안에 꼼짝을 않고 있으니. 궁금해 할 수밖에요"

아르센은 에반의 집에 특별히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다고 했다.

에반은 소식의 중요성을 잘 아는 이였다.

도박장의 일이 터졌을 때만 해도 에반에게 곧바로 보고가 가지 않았던가. 그러니 밤새도록 상황을 확인해보려 이리저리 분주해도 모자랄텐데 에반이 지나치리만치 조용했던 것이다.

칼리안의 붉은 눈이 날카로운 빛을 머금었다.

"시기 적절하게 란델 형님께서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을 수도로 불렀다는 이 시기에, 꼭 집을 비우기 힘든 사람처럼 꼼짝없이 집안에 들어와 있는지. 왜 그것이 내 눈에는······. 집을 오래 비워두기 어려울 일이 있어서 일단 돌아왔고 내 속내를 궁금해하기 어려울 만큼 큰 것을 숨겨뒀다는 듯이 보이는지."

"그것은."

"그래서 와봤습니다. 이렇게 굳이."

에반은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은 한 모금 마신 차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레이 브리센, 돌려보내요. 숨겨두지 말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를 말만 하고 계시는군요."

에반은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마치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자신의 생각이 맞음을 확신했다.

"란델 형님이 불러서 온 사람을 설득시켜 옆에 붙여놔 봐야 후작에게 도움 될 것 없습니다."

에반이 다른 말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이 칼리안에게는 긍정으로 보였다.

칼리안은 이 집에 들어오는 내내 그레이의 오러를 느끼지 못했다. 단전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를 에반은 그레이의 무력이 강해졌다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반나절 이상 집을 비우지도 못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그레이가 다른 마음을 먹을까봐. 브리센이란 항상 그래오던 가문이 아니던가.

잠시 에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칼리안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에반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부러진 허리 나았다 해서 예전만한 실력이 나오지도 않을 텐데요. 나올 실력이나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들은 에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칼리안의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 창 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플란츠도 고개를 돌렸다.

칼리안이 어투가 좋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에반이 낮은 음색으로 말했다.

"허리가 부러졌다는 것은 알리지 않았습니다. 변경백의 상태는 '재기가 불가할 만큼의 큰 부상'이라고만 알렸을 뿐 정확히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에 대해서까지는 이야기를 전한 바 없는데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알고 있을 수밖에요."

- 달칵.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했으니까."

태연하게 꺼내놓는 저 말에 에반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리안이 이것을 알린 이유는 단순했다. 칼리안의 무력 수준을 모르고 있는 에반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시 한 번 묶어두기 위함이었다. 란델과 칼리안이 서로 힘겨루기를 할 때 혹시라도 란델 쪽으로 발을 올리면 곤란해질 테니 말이다.

물론 에반이 그 일에 대해 달리 화를 내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에반에게 그레이는 자식이기 이전에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새끼 그리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에반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굳이 기다려서 그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으니 칼리안은 질책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란델 형님이 무엇을 노리고 변경백을 불렀는지도 모르면서 뭘 믿고 옆에 두려 합니까."

그렇게 제 말만 다 꺼내놓은 칼리안은 할 말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여전히 앉아 있는 에반을 내려다보며 마지막 말을 전했다.

"변경백령 비워두지 말고 당장 보내요."

* * *

에반의 집에서 나온 칼리안은 레이븐의 위에 앉아 눈을 내리 뜬 채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왕궁까지는 레이븐이 알아서 찾아갈 수 있었고 플란츠는 굳이 생각에 빠진 칼리안에게 먼저 말을 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칼리안은 그 상태 그대로 왕궁 입구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입구에서 레이븐을 멈춘 칼리안은 그제야 비로소 플란츠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세이렌 경을 좀 만나고 가겠습니다. 형님 먼저 들어가십시오."

마법 학원은 지금 온 길을 어느정도 되돌아가야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에반의 저택에서 각자 헤어졌다면 조금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굳이 왕궁 앞을 왔다 돌아가는 것은 칼리안 나름대로 플란츠의 호위를 보아 준 셈이었다.

그것을 왜 모르겠느냐만 플란츠는 그냥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플란츠의 뒤로 다각 다각 하며 레이븐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플란츠는 말을 멈춘 채 조금 전 칼리안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내가 했으니까.'

"하."

곧 짧은 웃음과도 같은 소리가 플란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그레이의 허리를 누가 부러뜨렸든 플란츠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웃은 이유는 그런 말을 에반의 앞에서 서슴없이 꺼내드는 무모하기까지 한 자신감과 싹퉁머리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참 대단한 아우님을 두게 됐군."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앞으로 걸어가던 플란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말을 멈춰 세웠다. 누군가 그 앞에서 인사를 건네온 까닭이다.

"다시 보는군요, 플란츠 왕자."

이 넓은 왕궁에서 매일 한 번씩은 맞닥뜨리니.

우연에 우연도 이런 악연이 있나.

참으로 대단한 아우님과 꼭 빼닮은 웃음을 짓는 옆 나라 왕세자의 모습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 * *

과거의 형님과 지금의 형님이 또 만났다는 것은 꿈에도 모를 칼리안은 잠시 에우리아를 만나 말을 전한 뒤 왕궁으로 돌아왔다.

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수련장에 갈 생각이었다.

마법이나 검술이나 요 며칠 제대로 훈련을 하지 못했던데다 조용한 방 안에 혼자 있으면 떠올리지 말아야 할 기억에 다시 잠겨들 수 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 계획을 세우며 체르밀 궁 앞에 도착한 칼리안이 레이븐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체르밀의 시종에게 레이븐의 고삐를 넘긴 뒤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얼굴에 긴 미소가 드리워졌다.

인공 호수 쪽에 선 채 칼리안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깊고도 깊은 푸른 색의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란델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란델 쪽에서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던 듯 했다. 덕분에 5층까지 벽을 타고 올라갈 수고가 줄어든 셈이다.

"마음이 급하셨군."

조용히 중얼거린 칼리안은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란델의 앞까지 걸어가 예를 취했다.

란델은 고개만 끄덕여보인 뒤 앞서 걸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나 산책이나 다시 하자는 의미인 것은 분명했으니 칼리안은 사양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

호수 가운데 시스파니안 조각상 인근을 지나고 호숫가의 산책로도 모두 지나친 뒤 장미 정원에 이르렀다. 그제야 란델의 입이 열렸다.

"잠시 같이 걷자꾸나."

칼리안의 걸음이 멈췄다.

이미 칼리안은 란델과 함께 걷고 있었다.

"그런 말은 보통 오가는 것이 있을 때 나옵니다."

"그저 같이 걷자는 말에 오가는 것이 필요하더냐."

"정말로 걸음이나 같이 걷자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손을 잡자는 소리지."

"잘 알아듣는구나."

칼리안이 란델조차 뜻을 가늠하지 못하는 미소를 지은 채 란델을 쳐다보며 말했다.

"손을 잡으려면 주고 받는 것이 있어야 할 텐데요. 제가 가진 발칸이나 플란츠 형님의 브리센처럼 단순히 텐실이라는 배경 말고 눈에 보이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구나."

"제 것을 받는 대가로 주실 것이 있으니 그런 말씀을 하신 듯 한데, 혹시 제 말이 틀립니까."

"그 역시 틀린 말이 아니다."

"신관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그래."

칼리안이 먼저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란델은 방금 제 입으로 신관들의 정체를 알려왔다.

"카이리스를 찾은 서른 명의 신관. 진짜 신관일 리는 없으니 세작 혹은 자객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 정도 세력이 아니었나 봅니다. 발칸과 거래가 가능할 만큼의 힘을 지닌 이들이라는 뜻일 테니까요."

억지를 부려 생각해냈던 것.

고작 서른 명이지만 란델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만한 무리. 카이리스 곳곳으로 흩어져 치유사 노릇도 할 수 있을 뿐더러 한데 모이면 란델의 검이 될 이들.

"······ 이를테면 신성기사 같은."

텐실의 신성 기사.

란델이 발을 멈추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어느새 훌쩍 자라 얼추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동생을 향해 란델이 말했다.

"네가 너무 많이 자란 것 같구나."

"계속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지금껏 돌봐주기라도 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칼리안이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사신들이 묵고 있을 곳, 서른 명의 신관들이 묵고 있을 루비아 관을 가리켜 보였다.

"나를 얻으려고 욕심내지도 말고 저기에 있을 당신의 검도 당장 치우십시오."

왕궁 안에 제 검을 몰래 들여오는 놈이라는 것을 안 이상 꿈에서라도 손 잡을 생각은 없어졌다.

"전부, 죽여버리기 전에."

칼리안의 살기 가득한 눈이 심연 가득한 란델의 눈을 응시했다.

21장. 심연의 이면에 (1)

칼리안이 란델을 만나기 조금 전.

플란츠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을 막아선 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아우님의 잘난 형님께서 또 무슨 일로."

체이스는 쓴 것을 삼킨 듯한 얼굴로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체이스는 혼자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항상 함께 다니던 테일란이라는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이나 수행원들도 곁에 두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는 마치 플란츠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플란츠의 앞에 나선 것이다.

"플란츠 왕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물을 것도 있고, 얘기도 좀 할까 해서요."

"혼자 온 것 같은데."

"네. 몰래 나온 길입니다. 호위는 귀찮아서."

귀찮아서라니.

카이리스를 정말 무르게 보았음이 틀림없다.

저러다 르메인이 마음을 바꿔먹고 볼모로 삼든 아니면 란델이 숨겨둔 것들이 공격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찰나의 순간에 떠오른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걱정한다고.'

방금 전 칼리안이 플란츠를 왕궁 앞까지 데려다 놓고 다시 나갔지 않은가. 모르긴 몰라도 혼자 있을 때 위험하기로는 이 카이리시스에 플란츠만한 이가 없을 터였다.

아무튼 체이스는 더 없이 차분한 얼굴을 한 채로 말 위의 플란츠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플란츠는 몰랐지만 아마 앨런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꽤나 감탄했을 것이다. 처음 앨런이 칼리안을 만났던 날 말 위의 앨런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딱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 일단 내려라. 얘기 좀 하게.

이런 표정 말이다.

물론 저 모습이 칼리안과 그리도 닮았음을 알았든 아니든 플란츠의 기분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을 또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매우 나빴기 때문이다.

"발칸을 두고 참견하더니. 아직 할 말이 남으셨는지."

예의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을 이런 말을 툭 내보낸 플란츠가 가벼운 놀림으로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어차피 플란츠의 언사가 어떤지는 전날에 이미 많이 겪은 터였다. 그러니 이 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체이스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름이 세뉴 관 맞습니까. 걷기 좋은 곳이 있던데."

"맞아."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플란츠가 마뜩치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냥 이 곳에서 말하면 안되는지를 묻고 싶어하는 것이 그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 다각 다각.

그러나 마치 그 생각에 대한 대답을 하는 듯 왕궁으로 들어오는 한 대의 마차가 보였다.

이렇게 마차며 말이며 끊임없이 드나드는 길 한복판에서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카이리스의 2왕자가 말싸움이나 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칼리안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플란츠는 굳이 그런 곳에 왜 하필 당신과 가야 하는지를 묻는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던지."

그리고는 주변에 보이는 기사 한 명에게 말 고삐를 넘기고는 저벅 저벅 앞서 걷기 시작했다.

걷는 내내 체이스는 말이 없었다.

물론 플란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간 중간 플란츠를 만난 이들이 예를 보이고는 서둘러 멀어졌다. 요즘이야 조용하지만 혹시라도 플란츠의 심기가 꼬여 있을까 걱정한 탓이다. 그것을 본 체이스가 조용히 웃었고 플란츠는 못들은 척 했다.

곧 둘은 나란히 세뉴 관의 산책로에 들어섰다.

이제 조금씩 울창해지기 시작하는 나무 사이에 발을 디딘 플란츠와 체이스의 입이 또 동시에 열렸다.

"그래서."

"한 가지."

쯧 하고 혀를 찬 플란츠가 체이스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먼저 말하라는 뜻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고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칼리안 왕자, 이틀 전에는 오러가 보였는데 어제는 보이지 않았다고. 카스트린 경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는데 혹시 알고 있는 바가 있습니까. 문제가 있어 그런 것인지 걱정이 되어서."

"걱정하는 것을 보니."

피식 웃으며 입을 연 플란츠가 말을 멈췄다.

걱정이 되어 카이리스까지 오고 걱정이 되어 언제 올지도 모를 나를 계속 기다리고. 그런 것을 보니 아주 둘도 없는 형제였나보다고.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그냥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법. 내 아우님 검술이 얼마나 모자란지 알면 안 될 사람이 있어서."

"브리센 후작 말입니까."

"그래."

도대체가 세크리티아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맞기는 한 건지. 모르는 것이 없다.

아무래도 체이스가 가고 나면 나서서 새부터 좀 잡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센 후작에게 숨겨야 해서 카스트린 경이 있음에도 오러를 감췄다는 말인데. 오히려 카스트린 경 쪽을 경계해야······."

"당신 쪽은 경계 할 필요 없으니까."

체이스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칼리안이 자신의 앞에서도 오러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 어떤 사고의 결과인지를 알게 됐다.

곧 체이스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차마 말을 꺼내질 못하고 있는 것이 훤했다. 지금 무슨 말이 목구멍을 치받고 있는지 아주 잘 알아들은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소리를 냈다.

"내 아우님도 안다고."

체이스의 발이 멈췄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플란츠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아우님의 형님께서 내 아우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을 내 아우님도 알고 있다고. 아는데 티를 안내는 거라고, 내 동생이."

칼리안이 나한테는 그 말을 한 줄 아냐고.

나도 그냥 눈치 챈 것을 너는 왜 모르냐고.

그보다도 내가 왜 이런 말이나 하고 있냐고.

그냥 둘이 만나면 안되냐고.

도대체 나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고.

라고 화를 내는 대신 플란츠는 그냥 세뉴 관을 다 돌도록 말 없이 체이스 옆에서 저벅 저벅 발을 옮겼다.

무슨 말을 하겠느냔 말이다.

저딴 얼굴을 하고 있는데.

* * *

베른이 이제 막 열 살이 되었을 때.

세크리티아의 국왕 데블란이 두 아들을 데리고 바다에 나갔었다. 그리고는 광막한 그 바다 한가운데에 베른을 집어던졌다.

후궁의 아들인 체이스가 왕비의 아들인 베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확인할 겸 '이제 다 큰' 베른에게 국왕인 자신에 대한 두려움도 심어줄 겸 해서 벌인 일이었다.

체이스와 모래성이나 쌓고 놀았던 것이 겪어 본 바다의 전부였던 베른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깊은 바다에 그대로 잠겨들어갔다. 그것을 본 체이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베른을 붙들러 뛰어든 뒤 같이 빠졌다. 체이스도 수영을 못했으니까.

결국 기사 테일란이 둘을 모두 건져내왔고 그 후로 베른은 데블란을 일생일대의 원수처럼 여기며 살았다.

자신을 물에 빠뜨려서가 아니었다.

데블란 때문에 체이스가 죽을 뻔했던 탓이었다.

아무튼 칼리안이 그 일을 이렇게 갑자기 떠올린 이유는 바로 란델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란델의 저 눈 때문이었다.

칼리안의 불 같은 눈이 란델의 물 같은 눈을 바라봤고, 란델이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란델의 눈은 그 날의 바닷속과도 같았다.

바라보고 있으면 한없이 잠식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간신히 이어 온 실낱같은 숨결조차 놓아버려야 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느끼게 하곤 했다.

그런 란델의 눈에 칼리안이 비춰졌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어린 아이가 깊고 깊은 곳에 숨겨둔 란델의 이면을 찾아 기어코 내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이제는 오히려 란델의 숨통을 옥죄려 하고 있었다.

"항상 궁금하였다."

그렇게 말한 란델이 짧은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시선에 맞닿아 있는 칼리안의 살기 때문이다. 살의가 아닌 그 어떤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붉은 눈이 란델의 심연을 끊임없이 헤집어놓고 있었으니까.

"네가 어떻게 이리 변했을까."

"덕분입니다."

칼리안은 거짓말을 잘 하지 못했다.

지금의 대답 역시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로지 란델 하나만을 향하고 있는 칼리안의 살기 역시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아시는 겁니까. 텐실의 신성 기사를, 타국의 군대를 왕궁 안에 들이셨습니다."

란델은 웃었다.

비웃음이나 악의에 찬 웃음이 아니었다. 살기를 잊기 위해 지어보이는 억지 웃음도 아니었다.

완벽할만큼 무의미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본 칼리안은 순간적으로 란델을 베어버릴 뻔 했다. 칼리안으로 살겠다 다짐하지 않았었다면, 때문에 란델이 제 핏줄임을 끊임없이 되뇌고 있지 않았다면 이성적인 판단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 그대로 검을 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무감정한 얼굴을 한단 말인가.

"알고 있다."

그 날의 바다를 생각했던 칼리안은 이제 풀내음 가득했던 날의 시스파니안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란델은 칼리안의 기억을 되짚어 본 이후의 시스파니안과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칼리안과 베른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했다 말하던 바로 그 모습 말이다.

시스파니안은 그녀의 반려였던 하츠아라에게 '인간적인'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러나 하츠아라의 죽음과 함께 그에게 배운 것들도 잃어버렸다 했다.

칼리안도 잃은 것이 참 많았는데.

- 당신 역시 잃은 것 때문에 그리 되었을까.

그런 잡스러운 생각이 잠시 들었다.

어찌됐건 왕궁에 제 검을 들인 것이 무슨 짓인지 안다 하니 칼리안은 상념을 버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물리십시오. 제가 가기 전에."

"간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더냐."

"말씀 드렸는데요. 전부 죽여버릴 수 있다고."

경고였다.

사실 그것은 경고일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란델은 그에 대해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을 터였다. 신분 상으로 저들은 엄연히 신관이다.

저들 중 한 명의 기사는 '말콤 체티쉬'라는 이름의 신분 증명서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무기를 들고 왕궁에 들지도 않았으리라.

"네가 정말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는구나. 증거도 없으니."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겪어 보시던가요."

"네 마법사들과 목적이 같다. 그러니 너와 전하께 해가 될 이들이 아니니라."

"브리센을 견제하기 위해 들여온 이들이니 그냥 모르는 척 두라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의 입에서 한기가 잔뜩 맺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적이 같다 해서 텐실의 기사들을 발칸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백 번을 양보해서 란델 형님의 말이 진실이라 해도, 브리센을 치기 위해 텐실의 기사를 들인다니. 묵인할 수 있을 일이 아닙니다. 그리 떳떳하시면 숨겨오지 말고 당당히 들이십시오. 제대로 된 명분을 가지고, 제대로 된 방법으로."

발칸은 칼리안이 목숨을 걸고 기회를 얻어 만든 군대였다. 르메인의 허락 아래 정당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브리센 변경백은 이미 돌아가고 있을 겁니다. 만약 그 쪽을 먼저 없애 둘 생각이셨다면 그 역시 늦었습니다."

그레이 브리센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자 란델이 다시 한번 칼리안을 쳐다봤다. 이번에도 칼리안은 란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칼리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숨긴 것이 무엇인지 이제 완전히 알게 되었다.

"브리센 변경백을 카이리시스로 불러내어 변경백령도 비우고 저와 플란츠 형님의 눈도 속일 심산이셨습니까. 그 사이, 텐실의 신성 기사들이 변경백령을 치도록 하기 위해서요."

신성 기사 서른 명이면 주인 없는 변경백령의 기사들은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닐 터였다.

그 후 소식을 들은 그레이가 변경백령으로 돌아오면 그레이도 없앤다. 변경백령의 기사들을 상대한 서른 명 중 스무 명의 신성 기사만 살아남아 있더라도 그레이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테니까.

만약 그레이까지 처치하지 못해도 변경백의 병력을 없앤 것만으로도 브리센에는 꽤 큰 피해를 줄 테니 첫 시도로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으리라. 이후에 텐실로부터 군사를 더 지원받아 그것으로 브리센과 전면전을 벌일 예정이었는지 혹은 발칸의 힘을 빌리려 했는지까지는 칼리안도 알 수 없었다.

뭐가됐건 텐실의 기사들이 카이리스에 들어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니 지금 막아야 했다.

"둘째를 염두에 두었는데. 네가 알아낸 것은 의외로구나."

"플란츠 형님만 눈과 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플란츠 형님만 속여서 해결 될 일도 아니고요."

"네가 막을 줄도 몰랐고."

"모르셨다니 유감입니다."

칼리안이 모를 것이라 여겼거나.

알아도 막지 않을 것이라 여겼거나.

"기사들은 돌려 보내마. 대신."

란델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리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렇게 말한 란델이 조용히 손을 뻗어 장미 덩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유난히 비죽이 자라 있던 장미 가지 하나를 꺾어 들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장미 한 송이가 란델의 손에 들렸다.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너무 그리 자라지도, 벗어나지도 말거라."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고 란델의 손이 잠시 붉게 빛났다. 그리고 장미는, 언젠가 칼리안의 손에서 사라졌던 그 모습처럼.

- 파스스······.

생명을 잃고 검게 말라가다

불에 타고 남은 재와 같은 모습으로 부서지며 흩어졌다.

항상 평온한 란델의 목소리가 칼리안을 향했다.

"보기에 좋지 않으니."

칼리안은 흩어져 사라져가는 마른 장미를 말 없이 지켜봤다. 그것이 모두 사라지도록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에는 다시 란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란델은 지금 그리 말하고 있었다.

왕이 될 자신의 뒤를 받쳐 줄 쓸모 있는 능력 좋은 동생 노릇. 그런 노릇이나 하고 살라고. 그렇게 하면 살려주겠다고.

칼리안의 붉은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카밀론 가서 개 키울 겁니다."

란델의 말은 절대 안 듣기로 했다.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2)

그날 저녁, 텐실의 사신단 대표가 르메인을 찾았다.

석찬에 들기 조금 전이었다. 르메인에게 별다른 일정이 없는 시간이었으니 아무리 갑작스러운 방문이라고는 해도 아예 만나주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시종장 라울은 이렇게 말했다.

르메인은 사신단 대표와의 만남을 거절했다. 용무가 바쁘다는 이유였다.

거절의 의사를 전하는 라울의 얼굴에는 아무나가 아무때나 찾아와서 만나뵐 수 있는 분인 줄 알았느냐는 의미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 순간 라울은 대륙 최강국 카이리스의 국왕 르메인을 보좌하는 대변인이었다. 텐실의 우방국인 카이리스의 국왕을 모시는 시종이 아니었다.

텐실의 사신단 대표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다른 반박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 본국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신관들의 카이리스 체류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르메인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사과의 뜻을 전해달라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왕궁에서 빠져나갔다.

여전히 석찬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그만큼 신속히 물러났다는 뜻이었다.

창가로 걸어간 르메인은 왕궁에서 나가는 텐실의 마차를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이 집무실만 1년 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싶을 만큼 지금 르메인의 분위기는 딱 작년 이맘때의 그를 생각나게 했다. 차갑고 무표정했다. 그런 상태로 딱 세 시간 전에 만나본 란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특별한 이야기를 들은 바 없습니다.'

오후에 르메인의 집무실을 찾았던 란델은 신관들에 대해 묻는 르메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태연한 얼굴로 그리 말했을 뿐이었다.

그 후 칼리안이 란델을 만났고 신관들이 왕궁을 빠져나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른다면 르메인은 당장 왕위에서 물러나야 할 터였다. 저 신관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란델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 되었다.

"란델의 표정이 잊혀지지가 않네."

그 말에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있던 앨런이 르메인을 쳐다봤다.

"어쩌다 란델이 그리 되었을까."

"전하 때문이지요."

언제든 빠지지 않는 앨런의 솔직한 대답에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르메인 역시 그것을 알았다. 때문에 르메인은 지금 스스로에게 굉장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란델을 만난 직후 칼리안은 곧바로 아르피아 궁에 왔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가 신성 기사라는 것을 알렸다. 칼리안이 그 일을 앨런에게 먼저 알린 이유는 단 하나였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르메인을 보호해달라는 뜻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다시 르메인의 집무실에 들어앉아 있던 앨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엘린느의 아들을 만나보신 적 있습니까?"

"리베른의 국왕 말인가."

"네. 맞습니다."

엘린느 리베른을 떠나는 앨런에게 마차를 선물했던 리베른의 국왕이었다.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앨런의 말은 항상 들을 가치가 있는 것이니 르메인은 그냥 얌전히 대답했다.

"리베른의 국왕은 만나본 적 있으나 왕자는 만나본 적이 없네."

"아주 인물도 그런 인물이 없습니다."

비아냥이 잔뜩 들어간 말. 진심으로 칭찬하는 말이 아니었다.

다만 여전히 그 의도를 알 수 없던 르메인은 그저 다음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엘린느의 남편이었던 국서 테이안은 사형됐습니다."

"알고 있네."

테이안이 사형되었던 일은 국왕의 남편이 사형된 일이면서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 깊이 연관된 일이기도 했다. 온 대륙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랬다.

엘린느가 앨런을 총애하는 것을 남녀간의 문제로 오해한 테이안이 앨런을 독살하려 시도했다. 무력으로는 죽일 수가 없으니 독을 고른 것이다. 그러나 우연한 일로 앨런이 아닌 앨런의 아들이 죽었다. 사건의 배후에 테이안이 있는 것을 안 엘린느는 곧바로 테이안을 사형에 처했다.

"그 때부터 엘린느의 아들이 꽤 많이 엇나갔지요."

그 때의 일을 생각하다가 잊고 살던 아들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때문에 앨런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한참 뒤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놈을 엘린느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네."

"제 며느리 레이첼의 집을 한 달 동안 청소하도록 시켰습니다."

"청소라니."

리베른에는 다른 왕자나 공주도 없었다.

하나뿐인 왕자에게 하인들이 하는 일을 한 달이나 시켰다는 것이다.

"테이안 때문에 죽은 이의 집에 직접 가서, 테이안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깨우치게 했습니다. 제 아비가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뒤로는 얌전히 지내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나."

"데블란이 아무리 손이 과했어도 제 자식에게 관심은 가졌습니다. 그러니 란델 왕자가 그렇게 속 시커먼 놈이 된 것은 전하의 잘못이 맞을 겁니다. 그것은 전하께서 반성하실 일이 맞지요."

르메인이 자책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 잘못이라 생각해서 란델을 탓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번 르메인의 속내를 꿰뚫어 본 앨런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잘못은 잘못이니 그에 대한 벌은 주셔야 합니다. 증거가 없어 처벌을 못할 뿐이지 부모로서 자식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여전히 르메인은 앨런에게 배울 것이 많았다.

도무지 왕자의 스승인지 왕의 스승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저 마법사를 보며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곧 르메인은 시종장 라울을 불러와 란델에게 몇 가지 말을 전하도록 시켰다. 함부로 타국의 기사를 들여와 왕실의 안전을 위협한 것에 대해 반성할 시간을 가지라는 내용이었다.

* * *

결핍.

부족한 것. 처음부터 없었던 것.

혹은 어느새 잃어버려 사라진 것.

"레이븐은 발목에 티가 있습니다. 내 고양이는 이름이 없고."

칼리안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수련장 밖 잔디밭에 털썩 앉은 채였다.

붉은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이 계절에 어울리지도 않을 가을 바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키리에는 눈 색이 다르고 히나는 말을 못해요."

참 뜬금없는 말이었기 때문에 플란츠는 내 아우님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됐다. 하지만 칼리안은 계속 말을 이을 뿐이었다.

"얀은······ 얀이고."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다 세어보기 너무 어려운 얀의 이름을 꺼내면서 칼리안은 잠시 웃었다.

플란츠의 얼굴에는 짜증이 섞였다. 체이스의 한탄을 듣고 오자마자 칼리안의 한탄을 듣고 있었으니까.

칼리안은 아직 란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뭘 말하자고 만난 것도 아니었다.

란델을 만난 후 아르피아 궁에 들렀다 온 칼리안.

체이스를 만나서 아주 사이 좋게 세뉴 관을 다섯 바퀴쯤 같이 돌아 주고 온 플란츠.

그렇게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수련장을 찾아왔고 마주쳤을 뿐이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키리에가 있어서.'

수련장은 넓었고 키리에는 어차피 언제나 있었다. 때문에 오늘따라 왜 그러는지를 묻는 눈으로 쳐다보니 칼리안이 다시 설명했다.

'오늘은 간섭하면 안 될 상태 같습니다.'

칼리안은 딱 그렇게만 말했다. 무엇을 간섭하면 안 된다는 것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수련장 앞에 앉아서는 밑도끝도 없이 우울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아무튼 들어가지 말라 하는데 굳이 들어갈 수도 없었고 칼리안의 입은 이미 열렸다. 그러니 또 어쩌겠나. 들어줘야지.

"제 스승님은 아들을, 그리고 전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심지어 그분은 막내 아들을 이미 잃었다는 것도 모르십니다.

흔들 흔들.

말을 삼키고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던 칼리안은 맞은편에 앉아있던 원수같은 형을 잠시 쳐다봤다.

"게다가······ 아무것도 가져본 적 없어서 잃어버린 것도 없을 내 형님은. 아마도 여전히, 불행하시고."

"······ 내 아우님이 미치셨나."

새로 베인 상처보다 엊그제 생긴 멍이 더 아프다.

칼리안의 말이 딱 그랬다.

딱 그만큼 아픈 말로 플란츠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저는 온 생을 잃었으니."

남의 상처 눌러놓더니 제 상처를 헤집는다. 더 이상 다른 말도 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치사하기가 이를 데 없다.

독 처먹던 놈이 이번에는 또 뭘 처먹고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지.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을 했다. 칼리안이 실소하며 다시 말했다.

"그렇잖습니까. 왕궁 어디에도 온전한 놈 하나 없는데."

그러더니 손가락 끝으로 등 뒤의 체르밀 궁을 가리켜 보였다.

"저 분은 무엇이 그토록 억울해서 홀로 그리 되셨을까."

뒤에 있을 것이라고는 체르밀 궁 뿐이었으니 플란츠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지금 칼리안이 누구를 이야기하려 하는지 알아들었다.

"왜 그것이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안쓰럽기도 하고 화도 나고. 그냥 그런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 제가 아직 설명을 안 드렸습니까."

"안했어."

칼리안이 란델을 만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플란츠는 그냥 적당히 안좋은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어 조금 전 있던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표정이 굳어지던 플란츠는 란델이 알 수 없는 힘으로 장미를 말라죽게 했다는 말을 들은 뒤 완전히 날카로운 눈이 되어 있었다.

란델과의 일을 모두 전한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냥 형님께서 카밀론 가시겠습니까. 조금 무서운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린 플란츠가 대답했다.

"싫어."

"왜 싫으십니까. 이제는 달라졌을텐데."

플란츠를 마음대로 휘두를 실리케가 없음에도 굳이 왜 왕이 되기 싫은지.

플란츠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왕궁 안을 둘러봤다.

고요하고 적막했다. 숨이 막혔다.

곧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린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살고싶어서."

잠시 말 없이 그런 플란츠를 응시하던 칼리안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플란츠가 살고 싶단다.

이보다 더 기꺼운 말이 어디 있을까.

* * *

- 란델 왕자가 귀족들과의 석찬에서 멋대로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한 벌로 3개월간 체르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궁 밖에는 적당한 이유를 담은 이런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 체르밀에 갇히게 된 이유는 텐실의 신성 기사 때문이었으나 그것을 외부에 알릴 수는 없었으니까.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는 고작 석찬에서 자리를 비운 것 때문에 내린 벌이라 하기에는 조금 과한 벌이 아닌가 하는 술렁거림이 잠시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주목되지는 않았다.

축제 마지막 날 마지막 일정인 무도회에서 칼리안이 또 일을 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칼리안이 플란츠와 함께 들어올 것인지를 주목했다. 정말로 둘이 손을 잡은 것이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문이 열리며 칼리안의 입장을 알리는 기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귀족들의 시선이 칼리안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모두가 입을 벌렸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듯, 칼리안은 혼자 입장하지 않았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과······."

그런데 그 옆에 있는 것은 플란츠가 아니었다.

당연하겠지만 앨런 마나실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드미레아 지그프리드 소공작님입니다."

브론즈 색 곱슬머리를 곱게 땋아 올린, 그리고 장식 없는 잿빛 드레스를 입은 드미레아가 칼리안의 옆에 있었다.

그것은 정혼의 의미 따위가 아니었다.

드미레아는 그 이상의 힘을 지닌 인물이니까.

칼리안.

3왕자 칼리안이 지그프리드를 등에 업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3)

칼리안의 옆에 드미레아가 섰던 축제 마지막 날의 이른 새벽.

그날따라 유난히 새들의 지저귐이 컸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날따라 유난히 긴 꿈을 꾸었다.

지금껏 베른이었을 때의 꿈을 꾼 적이 없었는데 꿈 속의 칼리안은 베른이었다. 거울 속에 비춰지는 연보라색 눈을 보며 청은색의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었다. 그리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일상처럼 체이스에게 갔다.

꿈 속의 체이스가 베른을 보며 웃었다.

베른이 무언가를 말했지만 꿈 속에서는 체이스의 목소리만 들렸다.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서 그랬나보다.

- 피곤해 보이는구나. 더 쉬고 오거라.

- 내가 네 형이니라. 네가 아니라 내가 너를 걱정해야지.

그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이 너무 좋아서,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못할 만큼 좋아서 한참이 지나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꿈 속의 체이스는 머리가 짧았다.

그랬다. 체이스는 한 번도 머리를 기르지 않았었다.

둘의 머리 색이 완전히 똑같아서였다. 둘 모두 데블란의 얼굴을 닮은 탓에 둘 다 머리까지 길면 재미가 없다며 웃었었다. 그래서 체이스는 항상 머리가 짧았다. 머리를 기른 적 없었다.

그것을, 왜.

몰랐을까.

카이리스를 찾아온 체이스의 모습은, 그래.

베른을 많이 닮아 있었다.

한 눈에 알아봤어야 했던 것을 이제야 눈치챘다는 생각에 그만 정신이 들고 말았다.

"······ 하."

잊고 지내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될 수 있겠지만, 또 누군가는 그 기억 때문에 숨을 참고 버틴다.

날개 접은 새들이 고이고이 울던 그 날 아침.

칼리안은 몸을 일으켜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신 차려야지······."

속삭임같은 목소리가 촛불처럼 흔들거렸다.

* * *

고양이 찾으러 왔다는 강아지 같은 시종의 얼굴은 어딜 봐도 고양이를 찾으러 온 이의 표정이 아니었다. 이제와서 나이프 던진 일을 사과 받고 싶은 것인지 혹은 다른 일이 있는지 몰라도 아무튼 그랬다.

한 마디로 놈은 마치 백 번 째의 전투에 나서려는 노련한 장수의 그것과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플란츠 왕자님."

"왜."

얀의 방문을 알린 시종 레릭만 밖으로 내보낸 플란츠는 귀찮음과 짜증이 반씩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더니 얀은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 되서 입을 열었다.

"왕자님 눈이 빨개요."

"원래 빨간데."

주인 닮아서 아침부터 너도 짖냐고.

그런 눈으로 얀을 쳐다보니 얀이 다시 말했다.

"아뇨. 왕자님께서 요즘 계속 기운이 없으셨습니다."

······ 기운이 없기는.

어제 이야기가 끝났을 때 쯤 키리에가 수련장에서 나왔다. 그것을 본 미친 아우님이 대련이나 하자고 했고 수락했다. 죽을 뻔했다.

밤새 잘 아문 목의 상처가 아직도 욱신거리는 것 같다.

살짝 눈을 감은 듯한 플란츠가 무슨 말을 삼키고 있는지 알 리 없을 얀이 오죽했으면 내가 여기 왔겠느냐는 얼굴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지금,"

"너. 지그프리드."

플란츠가 얀의 말을 잘랐다.

얀이 다소 굳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짧게 입을 열었다.

"왜요."

지그프리드를 불렀으니 공작 아들이 되어 대답하는 것이다.

호칭 한 번에 눈에 띄게 변하는 얀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소파로 가 등을 기대고 앉은 뒤 맞은편을 가리켜보였다. 시종 얀 말고 공작 아들 시로이안과 마주 앉아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으니 얀은 사양하지 않고 가 앉았다.

그와 동시에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불러. 소공작."

얀이 플란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드미레아가 이 곳에 오는 것이 어떤 의미인 줄은 아십니까."

"알아."

"혹시 우리가 개입해야 할 만큼의 상황이 생긴 겁니까?"

얀의 말을 들은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 르메인이 왕위에 오를 때 슬레이만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플란츠가 모를 리 없다.

"개입해달라 하면 할 것처럼 말하는군."

지그프리드는 옹립하는 자가 아니다.

칼리안도 이것을 알았다. 때문에 기사의 힘이 필요하다 여겼을 때에도 슬레이만이 아닌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을 찾지 않았던가.

"검은 필요 없으니 방패만 들고 오라고."

개입을 원했다면 드미레아가 아닌 슬레이만을 불러오라 했을 것이다. 물론 거절하겠지만.

플란츠가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내 아우님은 그조차도 부탁 못할 성격이시니."

란델이 가진 패가 심상치 않았다.

눈에 보이는 기사단이나 마법사단 같은 힘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힘으로 칼리안을 협박해왔다는 것은 본격적인 싸움까지도 염두에 두었다는 소리였다.

그러므로 지그프리드, 그들의 '이름'이 필요했다.

앨런 마나실과 발칸만으로는 텐실과 브리센 양쪽을 모두 견제할 수 없으니 눈에 띄는 세력이 하나 더 있어야 했다.

둘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할 상황이 오지 않도록 그들이 당장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 이름만으로도 양쪽 모두에게 충분한 위협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대한 집단 말이다.

창 밖을 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해보던 얀이 대답했다.

"올해에는 소공작도 카이리시스에 왔으니 얘기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잠시 멈춘 얀이 플란츠의 눈을 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서서 도우시려는 건지 궁금하네요. 저는 그냥 이유만 좀 알았으면 해서 온 것인데."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자조 섞인 웃음소리를 냈다.

- 형님 때문에 다 망했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주십시오.

상황이 이렇게 된 원인이 플란츠에게 있었다.

칼리안이 강자인 것을 몰랐다면 란델은 우선 브리센과 플란츠만을 목표로 잡았을 것이다. 칼리안은 일단 란델의 눈 밖에 있었어야 했다. 칼리안이 레넌을 물렸든 발칸을 창설했든 제 손 안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안심하고 내버려 뒀을 테니까.

그런 란델에게 칼리안이 숨겼던 힘을 들켰다.

거기에 더불어 계속 플란츠와 손을 잡았고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란델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기사단도 발칸도 미완성인 상태에서 란델에게 칼을 겨누게 된 셈이다.

그러니 이제 란델의 다음 대상은 칼리안이 될 것이다.

쓸 수 없다면 없애버려야 더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결국 칼리안이 플란츠를 살려내는 바람에 일이 이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칼리안의 예정에 이런 상황이 있었을 리 없다.

다만 그것을 구구절절 설명해 줄 만큼 친절한 플란츠는 아니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간단히 대답했다.

"빚졌으니까."

"플란츠 왕자님께서 빚을 졌는데 왜 드미레아를 부르라 하십니까."

란델과 브리센 쪽으로 잔뜩 날을 세우느라 체이스에게 시선을 안 두려 무리하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잠시라도 쉴 틈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칼리안이 준 빚을 이렇게나마 갚으려 하는 중이었다. 가진 것도 없는데 빚까지 있어서야 되겠나 싶은 마음에.

"코끼리 그늘이라도 있어야 숨을 좀 쉴 것 같아서."

그것이 플란츠의 생각이었다.

* * *

칼리안은 당황했다.

고양이 찾아오겠다던 새끼 코끼리가 한참을 안 돌아오더니 다른 코끼리를 데려왔다.

"고양이는 어디가고?"

"자던데요. 윗방 침대에서. 쿨쿨. 배까지 뒤집고요. 아무래도 왕자님 방보다 윗방이 더 편한가봐요."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정말 고양이 이름표를 바꿔야 하려나."

아무튼 이렇게 고양이 안부 묻기가 끝난 뒤, 칼리안은 멀뚱히 옆에 서 있던 작은 코끼리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드미레아."

"네. 왕자님."

얀과 얼굴만 비슷하지 성격은 완전히 딴판이다. 얀의 말로는 어머니를 닮았다던데 칼리안은 얀의 모친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간단한 인사를 주고 받은 칼리안이 잠시 제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오래지 않아 그 손가락으로 윗층을 가리키며 물었다.

"형님 생각인가?"

"네. 자기 빚을 왜 지그프리드로 갚겠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것 참······."

플란츠의 도움을 받게 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브리센과 란델의 눈을 돌리게 해 줄테니 잠시 마음을 놓으라는 뜻임을 칼리안도 알았다.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질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됐으니 혹시라도 더 흔들릴까 체이스를 계속 모르는 척 미뤄왔던 칼리안이었다. 그런 칼리안에게 체이스를 제대로 한번 만나고 올 여유를 준 것이다.

"살고 싶다 하더니, 살려주려 하시네."

참으로 애증하게 된 원수같은 놈 덕에 숨 돌릴 틈을 얻은 칼리안이 웃었다. 그리고 드미레아를 향해 말했다.

"오래 귀찮게 하지는 않을게."

"상관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다르니까요."

그 말이 매우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지그프리드가 처음으로 왕을 옹립하게 될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든 칼리안의 입에 마음에 든다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 * *

화려했다.

마치 미리부터 준비했다는 듯 칼리안의 재킷 역시 짙은 잿빛이었다. 은으로 된 단추가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짙푸른 색의 망토의 끝에는 은사로 테를 두르고 망토 여밈 장식에는 다이아몬드 펜던트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변치 않는 다이아몬드.

이번에 처음으로 바꿔 단 저 장식은 신념을 지켜온 지그프리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완전한 동맹 선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귀족들은 그렇게 웅성거렸고 그것을 들은 키리에가 드러나지 않게 웃었다.

'매번 같은 것만 하시면 없어 보입니다.'

칼리안의 옷을 완전히 담당하게 된 메를린이 이렇게 말했다.

금고 사정 좋은 칼리안은 그 말을 잘 새겨 들었고, 없어 보이지 않을 것을 새로 구매했을 뿐이었다. 사실 몇 시간 전에 성사된 동맹이었으니 그런것을 따져가며 옷과 장신구를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이렇게 칼리안을 잘 꾸며 놓은 메를린은 드레스를 갖춰 입고 다시 찾아온 드미레아에게도 무언가를 더 얹어주려 했었다. 물론 드미레아는 사양했다.

드미레아는 사람의 품위가 '그런 것'에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말로 매우 화려하게 차려입은 칼리안을 웃게 만들었다. 칼리안도 처음 이 곳의 예복을 봤을때 똑같이 질색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쳐 둘이 함께 입장을 했고 무도회가 진행되는 내내 함께 앉아 있었다.

슬레이만의 저택에 있는 내내 대련도 여러 번 하고 말도 많이 나눠 본 사이였으니 칼리안은 퍽 편안한 얼굴이 되어 이야기를 하고 웃기도 했다.

"두 분께서 꽤 잘 어울리십니다. 안그렇습니까?"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 이 곳까지 나설 줄은 몰랐군."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웃으며 묻는 앨런의 말에,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앨런이 다시 웃었다.

앞에 앉은 에반 브리센 후작을 쳐다보면서.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놀란 것은 에반일 것이다. 그런 에반이 영 마뜩찮은 얼굴을 하며 슬레이만에게 물었다.

"식성을 바꾸셨습니까."

코끼리가 왜 왕세자위 다툼에 끼어드냐는 말이었다.

상당히 공격적인 목소리였으나 슬레이만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칼 쓰는 사람 마음이 칼 잘 다루는 왕자에게 가는 것이 이상할 일인가?"

그리고는 르메인을 향해 자신의 목 근처를 보여줬다.

아주 희미하지만 상당히 긴 흉터가 남아 있었다. 칼리안의 검에 입은 상처의 흔적이었다.

"이것 보십시오. 전하의 아드님께서 이렇게 손이 험하지 뭡니까. 내가 아주 큰일을 당할 뻔 했습니다!"

모두가 웃는 가운데 오직 에반만 웃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에반은 일단 칼리안으로부터 시선을 떼기로 했다. 우선 란델부터 끌어내리고 칼리안과 지그프리드를 떨어뜨려 놓아야 되겠다고 그렇게 계획을 바꾸었다.

지금의 이 상황이 동생 좀 쉬라며 플란츠가 만들어 준 판이라는 것과, 이 일이 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4)

적당히 시간을 채운 에반 브리센 후작이 자리를 떠났다.

곧 누군가 플란츠에게 걸어가 어떤 말을 전했고, 이야기를 들은 플란츠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래서야 아예 대놓고 왕세자위 쟁탈전을 준비하러 가겠다는 소리와 다를 것이 뭐란 말인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앨런이 툭 던지듯 말했다.

"아무래도 전하 목숨줄이 오늘 내일 하셨던 것을 저만 몰랐나 봅니다."

"또 무슨 소리인가."

"란델 왕자나 브리센 후작이 하고 있는 꼬락서니가 아주 나라를 뒤집어 엎을 모양새 아닙니까. 이래서야 왕세자위가 아니라 정말 왕좌를 둔 전쟁에라도 나서는 길이라 해도 믿겠습니다."

앞길 창창한 젊은 국왕이 이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신경을 안 쓰니 하는 소리였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하루 이틀 간당간당했던 게 아니라서 감흥도 없으십니까?"

"간당간당, 딱 맞는 말이다. 푸큽큭큭!"

앨런 마나실의 입이 열린 것을 오랜만에 본 탓에 옆에 있던 슬레이만의 웃음보가 터졌다.

"란델 왕자와 에반이 저렇게 천지 분간도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양을 계속 두고 볼 생각이신지요."

"간당간당한 와중에 그것까지 신경 쓰실 여력이 있겠나. 적당히 넘어가 주게."

르메인이 무조건 칼리안의 손을 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런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어찌 편하겠냐만은, 어여쁜 제자가 중간에서 혼자 고생을 다 떠안고 있으니 앨런도 얌전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아는 슬레이만은 열심히 한 손을 보태고 있었다.

"제발 그 입들 좀."

당연히 그런 말에 닫아질 입들이었으면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열리지도 않았다.

"덩치만 큰 순한 놈들까지 불러들인 김에 그냥 제가 나서지요. 오래 걸리지도 않을 터이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아주 싹 치워버리고 내 영지로 오게. 지키는 것 하나는 참 잘하니 내 잘 숨겨 주지!"

이 곳이 무도회장인 것이 정말 다행이다.

악사들의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 소리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이 곳에는 침 삼키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나지 않고 있을 터였다.

르메인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알았으니까, 좀."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가 양쪽에서 이러고 있으니 가운데 앉아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 한 명만 속이 썩는다. 카이리스를 받치고 선 큰 기둥 세 명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방금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터였다.

르메인이 정말 난처해하고 있음을 알았는지 고맙게도 슬레이만이 나서서 화제를 바꿔줬다.

"1왕자가 거하게 한 탕 하려다 걸렸다면서?"

아.

그냥 아까 하던 얘기가 나은 것 같다.

앨런을 향한 이 철딱서니 없는 질문에 르메인은 다시 한번 이마를 감싸쥐었다. 앨런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 어여쁜 제자 손에 딱 잡혔지. 그럼, 그럼."

"그러고 보면 제자 한번 진짜 잘 두었네. 그 김에 여기 한 번 다시 보게! 자네 제자 손이 어찌나 빠르던지, 아주 그냥 냅다 칼을 휘두르는데······!"

거기까지 말하던 슬레이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참 1왕자는 살아 계신가? 자네 제자에게 잡혔으면 몸 성하기 힘들었을 것인데."

"마음씨 여린 내 제자가 어디 그리 함부로 손을 쓰던가? 걱정 말게. 잘 살아 계시네."

칼리안은 란델이 장미를 말려 죽였던 것을 앨런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다. 칼리안 스스로도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던 탓이다. 그것을 알았다면 앨런은 결코 '란델이 잘 살아 있으니 걱정 말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를 둘의 이런 농담같은 말에 결국 더 버티지 못한 르메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르메인, 벌써 가시려고?"

"푹 쉬시지요."

그랬더니 슬레이만의 속 보이는 말에 앨런은 잘가라는 듯 웃어보였다. 결국 르메인은 깊디 깊은 한숨을 남기고 아르피아 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해서 처음 넷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이제 슬레이만과 앨런, 둘만 남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거칠 것 없다는 듯 웃고 떠들던 슬레이만은 어느새 매우 조용한 모습으로 와인을 한 잔 마셨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딱 셋이 있지."

"대륙 두 번째 검 씩이나 되는 놈이 무서운 것 참 많기도 하군."

뭐가 그렇게 무섭냐는 눈으로 쳐다보니 슬레이만이 다시 말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리 세리에, 그리고 멍멍이 얀."

세리에는 슬레이만의 아내였다.

그리고 멍멍이 얀은 공작령에 있는 진짜 강아지 얀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제 아들을 닮았어도 어떻게 아들의 애칭을 개한테 붙여주는지. 참으로 슬레이만 답다.

"놈 때문에 남아나는 신발이 없거든."

어쨌거나 지그프리드 영지에 있는 그 갈색 푸들이 두 번째로 무섭다 말한 소드마스터가 앨런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세번째는 자네의 그 주둥이."

앨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내 주둥이가 우리 어여쁜 왕자님께도 인정 받은 주둥이기는 하지."

둘은 거의 열 살 가까운 나이 차이가 있었어도 정신연령이 꽤 비슷했다. 앨런이 7서클을 달성하여 세월을 거슬러 살기 이전부터 이것저것 다 집어치우고 그냥 친구나 하기로 한 지가 어언 20년이 넘었다.

무서운 것 세 개를 모두 말한 슬레이만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나 더 늘었지."

그렇게 말한 슬레이만의 눈이 멀찍이 앉아있는 칼리안의 등을 향했다.

"무서울 만 하네. 우리 왕자님이 보통은 아니시지."

"농담이 아니야. 그런 살기 나도 처음 겪었네. 지금도 오싹오싹해."

목에 남은 흉터를 쓸어내린 슬레이만이 말을 이었다.

"그 날 정말로 죽을 뻔했거든."

"내가 제자 하나는 참 잘 두었다는 말인 건 알아들었네."

슬레이만이야 죽든지 말든지.

앨런은 그저 이렇게 답하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 * *

에반에 이어 플란츠까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방패 역할은 확실히 한 것 같습니다."

"더할 나위 없었지."

칼리안이 다시 한번 고마움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드미레아가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첫째 왕자님 쪽도 조용해야 할 텐데요."

칼리안이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드미레아 역시 지그프리드였으니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숨길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어제 란델을 만나 겪은 일을 이미 전했었다.

"오래 가지는 않겠지만 당장은 외부의 누구도 만나지 못할 거야. 만약 곧바로 나를 죽일 생각이 있었다면 어제 이미 손을 댔을테지만 그렇지 않았으니 그것도 일단은 괜찮고."

"조만간 다시 부딪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심연의 이면에 또 뭐가 있든, 나는 안 져."

칼리안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대답했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빛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라서."

아주 자신만만하고 호기로운 대답이었다.

그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울었다던데."

아, 이놈의 새끼 코끼리!

순간 할 말을 잃고 멈칫했던 칼리안이 굉장히 어색한 얼굴로 거짓말을 시도했다.

"안 울었어."

"눈이 빨갛게 됐다던데."

"원래 빨개."

드미레아의 얼굴에는 등 뒤로 사탕을 숨긴 어린 동생을 보는 듯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지그프리드 집안 사람들은 죄다 할 말을 얼굴로 내뱉는 모양이다.

아무튼 란델이 무서워 울었다는 오해는 벗어야 했으므로 칼리안이 포기한 듯 대답했다.

"그냥. 꿈을 꿨어."

그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잠시 칼리안의 얼굴을 쳐다봤다. 얀이면 모를까 칼리안이 고작 악몽이나 꾼다고 울 만한 놈은 아니었으니까.

드미레아는 가끔 얀이 지어보이는 것과 꼭 닮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얼마나 좋은 꿈이었기에 그러셨습니까."

얼마나 좋은 꿈이었으면 꿈을 꿔서 운 것이 아니라 깨어나서 울었냐고. 그렇게 물었다.

한동안 웃기만 하던 칼리안이 혼잣말같은 대답을 내려놓았다.

"다시는 안 꿀 꿈이라서."

* * *

여전히 한참 시끌벅적한 지그프리드 관에서 나온 뒤 칼리안은 얀도 키리에도 모두 보내고 혼자 발을 옮겼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을 플란츠가 줬으니, 이제 답답하게 구는 것은 그만 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체이스를 만나보려는 것이다.

루비아 관의 입구까지 그렇게 거침 없이 움직이던 칼리안의 발이 잠시 멈췄다.

'내일 다시 올까.'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나.

아무리 그래도 예전처럼 밤새 술 마시고 떠들 수 있을 사이도 아닌데. 그냥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가도 괜찮을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체르밀 궁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올까 하다가. 그리하면 두 번 다시는 걸음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억지로 발을 옮겼다. 짙푸른 망토가 칼리안의 걸음을 따라 같이 흔들렸다.

- 에일라.

걸음마다 눈에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 망토 때문인지는 몰라도 문득 푸른 솔새가 떠올랐다.

에일라와의 일을 겪으면서 베른의 모습을 버리고 온전하게 칼리안으로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었지 않나. 그러니 이번에도 다를 것이 없다고.

같은 형이 아니라 그저 베른에 대한 기억만 가진 다른 사람이니 그것을 잊지 말자고. 그러니 그냥 웃으면서 이야기나 적당히 나누다 오면 되는 일이라고.

그런 생각만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눈치채지 못했다.

체이스는 이미 한참 전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칼리안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칼리안."

주저함 가득한 걸음을 지켜보던 체이스가 먼저 칼리안을 불러세웠다.

체이스는 루비아 관 앞에 심겨진 커다란 가문비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그 큰 나무의 그림자 속에 서 있어서 칼리안에게는 체이스의 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칼리안의 발이 다시 멈췄다.

목소리를 들었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보았는데, 발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래 전, 베른이 처음 기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베른의 고집을 꺾으려던 테일란이 밤새도록 훈련장을 달려보라 시킨 적이 있었다. 지금 칼리안의 다리는 그것을 버텨서 결국 테일란을 설득시켰던 그 날만큼이나 무거웠다.

- 자박

칼리안은 그렇게 발을 떼어냈다가 다시 땅에 붙이기를 몇 번이나 계속했다. 그러다 이대로는 밤새 제 자리에 서 있겠다 싶은 마음에 양 주먹에 힘을 꽉 쥐고는 다시 체이스가 있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 자박

베른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졌으니 미련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고. 이대로 다 내려놓고 세크리티아에 갈 수도 없지 않느냐고. 그런 말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 내 이름은 칼리안인 것을.

아는데.

알고 있는데.

"······ 왜."

체이스에게 가까이 간 칼리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칼리안이 고개를 떨궜다.

아 이건.

반칙이다.

정말 이건 반칙이다.

체이스는 웃었다.

"머리카락, 왜······."

그 긴 머리를 어느새 싹뚝 잘라낸 채로 웃고 있었다.

심장 깊숙이 묻어 둔 기억이 기어코 열렸다.

데블란의 노호성으로부터 베른을 지켜줬을 때가 생각났다. 베른에게 어려운 문제들을 내고는 맞히기를 기다리며 짓고 있던 웃음이 생각났다. 처음 말에 올랐다 떨어졌을 때 베른을 업고 달래주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베른에게 기사 서임을 하면서 지어보였던 아픈 표정이 생각났다.

모두가 죽었던 날.

성문을 막으려 밖으로 나서는 베른을 붙들고 울던 얼굴이 생각났다.

그런 체이스에게.

다녀오겠다고 대답하던 베른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생각이 쌓인 무게가 너무 커서, 칼리안은 결국 버티질 못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하루만 무너져 내렸다.

"······ 형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번.

조금만 쉬라고 말하는 체이스의 품에 안겨 울었다.

다녀올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 너무 미안해서.

정말 열 다섯 살 어린애가 된 것처럼, 그렇게나 서럽게 엉엉 울었다.

형님.

형님.

형님······.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5)

에반 브리센 후작의 눈이 홉떠졌다.

플란츠의 말은 칼리안이 드미레아와 함께 입장했을 때보다도 더 놀라운 것이었다.

"신성 기사라니. 1왕자가 정말 놈들을 왕궁에 불러들였다는 말씀이십니까."

플란츠 역시 칼리안 만큼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싫어했다. 아니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는 성격이라 하는 것이 맞을 터였다.

때문에 플란츠는 정말이라는 말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브리센은 강한가."

강하냐니.

에반은 왜 당연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브리센의 힘을 모르시는 것도 아니면서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궁금해서. 강한지."

"강합니다. 무력도 강하지만 카이리스의 귀족들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곳이 바로 브리센이 아닙니까."

이렇게 말한 에반이 자부심 가득한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보자,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여지없이 올라갔다.

"하는 꼴은 승냥이라서."

실리케, 레넌과 그레이, 앨런의 피어, 칼리안의 오러, 칼리안과 지그프리드의 동맹 등등. 지금껏 에반은 참 많은 것들 때문에 계속 몸을 사려 왔다.

"눈치를 보고, 발을 빼고, 계획을 수정하고, 다시 발을 물리고. 이것만을 반복해왔지 제대로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지 않나. 그리핀은 커녕 사자도 못 되는 승냥이. 그렇게만 보이는데."

플란츠나 에반이나 서로가 혈육이라는 것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필요에 의한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왕자로서 말했고 에반은 후작의 입장에서 그 말을 들었다.

따라서 왕자로부터 생각 외로 박한 평가를 받은 에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불쾌한 감정을 담아 뭐라 말을 꺼내려는데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내며 에반의 말을 막았다.

"내 아우님은 숨 쉬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해."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에반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사람을 내려다보는 기색이 분명한 눈빛을 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래야 사니까."

"그것은······."

"란델 형님은 내 아우님과 다를 것 같나. 내 말이 정말인지 묻는 것을 보니 매일 꽃이나 쳐다보고 있다며 우습게 여겼나본데."

에반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플란츠의 말이 맞았다.

매일 같이 정원에 나가 꽃을 돌보고 책이나 들여다보는 텐실 따위의 핏줄. 그것이 에반이 보는 란델이다.

장자라는 것은 카이리스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란델이든 텐실이든 란델을 지지하는 일부 귀족 세력이든. 그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둘을 상대하겠다면서 그저 잔머리만 굴리지."

"왕자님. 말씀이 너무······."

"장담하는데 계속 이딴 식이면 브리센은 내 아우님은 고사하고 란델 형님도 못 이겨. 도박장 만들어 굴리고 아무 소득 없는 변경백을 데려다 일을 꾸밀 그 시간에, 어떻게 하면 나를 세자위에 올릴지 제대로 궁리해야 하지 않나."

나른하게 내리 떠져 있던 플란츠의 눈에 칼날이 담겼다. 당장이라도 에반에게 검을 뽑아들 것 같은 그런 눈으로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는데."

물론 란델을 끌어내리기 전까지만.

숨은 뜻을 가진 말로 플란츠는 이렇게 에반의 정신머리부터 고쳐놓으려 하고 있었다. 칼리안의 말마따나 언제까지고 칼리안 그늘 밑에 있을 수는 없었으니 에반과 브리센이라는 칼을 란델에게 제대로 써먹기 위해서였다.

플란츠의 말에 에반이 조금 더 매서워진 눈을 했다.

어차피 이제와서는 플란츠 외의 다른 왕자들에게 손을 댈 수도 없게 되었다.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던 플란츠에게 이런 말까지 듣고 있으니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넋 놓고 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제대로 한 번 힘을 써보기로 마음을 먹을 수밖에.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왕자님."

그런 에반의 대답을 들은 플란츠는 그나마라도 이해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과연 에반이 얼마나 머리를 써줄 지는 몰라도 예전보다는 나으리라.

그렇게 에반과 몇몇 대화를 더 나누고 헤어졌을 땐 이미 무도회가 완전히 끝난 뒤였다. 따라서 플란츠도 체르밀로 돌아갔다.

그리고 체르밀 궁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시종을 보게 됐다. 도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는 칼리안도 모른다 했던 바로 그 대단한 시종, 얀이었다.

플란츠를 마주한 얀은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는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그런 얀의 앞을 지나치던 플란츠가 문득 발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너."

지그프리드 라는 말이 안붙었으니 이번에는 시종 얀을 부른 것이다. 때문에 얀은 오전보다는 조금 더 공손해진 태도로 대답했다.

"네."

"그 시녀 불러. 너 말고."

플란츠는 대체로 말이 짧고 얀은 대체로 눈치가 짧다.

그러므로 2왕자를 쳐다보던 시종의 얼굴에 '좀 알아 들어 처먹게 말해라'와 같은 표정이 떠오른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표정이 역력한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눈으로 얀을 보며 다시 말했다.

"히나라는 그 시녀 나와 있게 하라고. 너 가라고."

"우리 왕자님 다치셨어요?"

어떤 새끼가 꽃 같은 우리 왕자님 건드렸냐고.

딱 그 말이 나오기 직전에 플란츠가 그 입을 대신해 말했다.

"내 아우님이 잘 짖으시니 아우님의 시종도 짖으려 드는군."

그러더니 알아들었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라는 듯 저벅 저벅 걸어서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 * *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체이스가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칼리안이 찾아간 것으로 이미 충분했으니 굳이 입 밖으로 말을 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칼리안은 체이스에게 많은 것을 털어냈다.

체이스에 대한 죄책감, 마지막 날에 대한 기억, 그 동안 겪어 온 많은 일들.

그리고 베른까지.

전부 다 체이스의 앞에 내려놓았다.

체이스는 말 없이 전부 받아주었다.

칼리안이 무엇 때문에 베른일 수 없는지 온전히 이해 할 수 있을 유일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로지 체이스 뿐이었다.

체이스가 칼리안을 안은 팔에서 힘을 풀었다. 베른은 체이스의 품에서 빠져나온 그 순간부터 다시 칼리안이 되었다.

얼굴을 보고 지낼 수는 있겠지만 형제일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칼리안이 잦아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중에."

모든 일이 다 끝나면.

그때.

칼리안에게 돌아갈 곳이 생겨도 괜찮게 될 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믿고 마음을 놓아도 괜찮을 때.

그 때가 되면.

"나중에······."

그 뒤의 말이 차마 이어지지 않았다.

칼리안은 거짓말을 잘 하지 못했으니까.

그것조차 이해한 체이스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만 돌아가세요. 칼리안 왕자."

이미 너무 늦었으니 돌아가라면서.

그렇게 칼리안의 걸음을 되돌려 보냈다.

* * *

영문도 모른 채 나와 있던 히나는 품 안의 고양이가 체르밀 궁 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을 그냥 두었다. 어차피 4층으로 갈 것이 분명했으니 굳이 붙들 이유가 없었다.

'혼자서 어디를 가셨기에 이렇게 안오시지.'

그리고는 조금 심심해하며 얀을 대신해 칼리안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저도 모르게 나오는 하품을 참을 때 쯤. 자박 자박 하고 멀리서 걸어오는 칼리안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눈치를 챘다.

'아······.'

축복의 힘이 부은 눈은 치료를 안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소용이 없을 만큼 많이 부었던 것인지. 칼리안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그런 모습에 히나가 얼른 칼리안에게 달려갔다. 칼리안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들었다.

"히나."

그리고는 곧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보이고 싶지 않은 얼굴 탓이다.

"왜 나왔어. 감기 걸릴라. 어서 들어가."

칼리안은 유난히 히나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그것이 이성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는 것을 히나 역시 잘 알았던 탓에, 나이도 더 어린 칼리안이 이렇게 오빠처럼 구는 것이 재밌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아무튼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한 얼굴을 한 채로도 히나부터 걱정해준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 칼리안의 앞을 잠시 막아선 히나가 얼른 말했다.

- 들어가면 큰일 나요. 왕자님 눈, 두꺼비.

얀이 또 걱정할걸.

'두꺼비' 빼고는 히나의 수어를 다 알아들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멈췄다. 그리고 히나는 칼리안의 팔을 붙들고 체르밀 궁의 호숫가로 데려가 바위 위에 앉혔다.

그 큰 눈으로 잠시동안 칼리안을 쳐다보던 히나가 물었다.

- 다, 울었어요?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응' 이라고 대답했다. 말보다는 행동이 더 솔직한 법이라 히나는 웃었다.

-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요.

히나는 작은 손으로 칼리안의 두 눈을 덮었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칼리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이제야 비로소 누나 노릇을 해보는 것이다.

히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빛이었다.

안온한 빛을 머금은 히나의 손바닥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어떤 말을 해 줄 손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히나는 그냥 가만히 칼리안의 등만 토닥토닥 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토닥이기만 했다.

조금 떨어진 체르밀 궁의 창가에서 야옹 야옹 소리가 잠시 들리다 곧 멀어졌다.

* * *

항상 큰 일이 벌어지지만 정작 축제의 주인공은 그 일들에 그리 크게 개입하지 않는 르메인의 탄신일 기념 축제가 끝났다.

그런 개입이야 어찌됐건 아무튼 생일을 보낸 것은 분명 르메인이었다.

그런데 칼리안의 얼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르메인을 대신해 나이를 퍼먹은 듯한 모양새였다. 때문에 앨런이 혀를 쯧 차며 말했다.

"효도하시는 겁니까?"

스승의 말을 한참동안 이해하지 못하던 칼리안을 보며 옆에 있던 슬레이만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왕자님 고생한 것이 얼굴에 다 나온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는 앨런의 말을 해석해 낸 것이 스스로 참 대견하다는 듯 웃다가 얼굴을 확 찡그리며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분명히 전 날에는 멀쩡하던 슬레이만의 저 널찍한 가슴팍에 팔뚝만한 길이의 자상이 나 있었던 탓이다.

앨런이 그런 슬레이만을 향해 혀를 쯧 찼다.

"둘 때문에 내가 그냥 다시 늙게 생겼습니다."

칼리안이 더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날 아침.

그럭저럭 마음을 잘 추스른 칼리안이 얀과 마주 앉아 아침 밥을 먹고 있을 때 아르센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히나를 잠시 데려가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이 이지경인 줄은 몰랐던 칼리안은 앨런도 좀 볼 겸 하는 마음으로 히나와 함께 빌헬름 관에 왔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처참하게 조각조각 난 채 나뒹구는 바닥의 대리석과 그 위에 널브러져 있는 슬레이만, 그리고 멀쩡한 모습으로 그 옆에 앉아 있던 테일란을.

회의가 있던 얀이 함께 오지 못한 것이 참 다행한 일이었다.

'이 정도는 간지럽지도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며 웃던 슬레이만은 곧 졸도했다.

결국은 앨런이 나서서 슬레이만의 커다란 몸을 옮겨다 놨다.

아주 오래 전 슬레이만이 테일란에게 검을 들이댔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때문에 슬레이만이 테일란과 한 번 더 붙어볼 날을 그렇게나 기다렸다고 했다. 질 것을 알면서도!

아무튼 그랬던 슬레이만이 어제 무도회 자리에서 술이 부족함을 느꼈고 결국 앨런의 집무실에서 한바탕 더 술판을 벌이며 밤을 샜다. 그렇게 아침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테일란과 마주쳤고, 딱 좋은 숙취 해소 거리로 테일란과의 한 판을 요청했다.

그리고 저렇게 됐다.

반파된 훈련장을 본 칼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깨어나 앉아있던 슬레이만에게 말했다.

"복구 비용 받을겁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까. 치료해주신 값까지 제가 잘 쳐서 갚아드리겠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슬레이만이 대답과 함께 또 웃었다. 원 없이 싸우고 져서 더는 미련이 없다더니 그 때문에 웃는 모양이었다.

그런 슬레이만을 가만히 지켜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돈 말고 다른 것으로."

그 말을 들은 슬레이만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지그프리드의 방패 말고 검을 요구할 생각은 없으니 그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드미레아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무엇으로 갚아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눈을 내리뜬 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뒤 슬레이만을 향해 대답을 전했다.

"전하께는 내가 허락을 받겠으니, 공의 저택을 좀 빌려주세요."

"카이리시스에 있는 지그프리드의 저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저택은 무슨 일로 쓰시려는지 먼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슬레이만의 얼굴에 의문이 들어섰고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내 기사들을 공의 저택에 숨겨 두고 싶다는 소리입니다. 지그프리드 공작저에도 기사들이 머무는 훈련소가 있지 않습니까."

아이즌이 만든 기사단은 당연하겠지만 아이즌의 영지에 있었다. 그 기사들이 카이리시스로 몰래 들어와 있을 곳으로 지그프리드의 드넓은 저택보다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나.

"왕자님의 기사들이라면 혹시, 왕실 친위대 카렌과 라온을 대신할 이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대리석 바닥 값이라 하기에는 상당히 비싼 것을 찾으십니다."

"내 생각에는 적당한 값 같습니다만."

훈련장 바닥 부순 값으로 왕자의 사병을 맡아 숨겨주게 생긴 슬레이만이 씩 웃었다.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6)

당돌하기가 짝이 없다.

자의가 아니었다지만 어찌됐건 지금 칼리안은 지그프리드를 방패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림막으로도 쓰겠단다.

"어떻습니까, 지그프리드 공. 어렵지 않은 일일 것 같은데요."

지그프리드의 도움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는가.

그들이 정해 둔 신념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르메인의 형 아스난은 그것을 가늠하지 못했었다. 둘도 없는 친우였으니 슬레이만이 자신의 부탁을 모두 들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지그프리드의 소가주였던 슬레이만은 자신을 도와 검을 들어달라 했던 친우의 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칼리안."

때문에 슬레이만은 웃었다.

지금 칼리안은 슬레이만이 허락할 수 있을 경계선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슬레이만이 지그프리드의 신념을 망치지 않으면서 칼리안을 도울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정확히 거기까지였다.

"칼리안. 칼리안······. 으어아하하하!"

왕자를 목전에 두고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른 슬레이만이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박장대소를 했다. 상처가 또 벌어지는 바람에 히나가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신경쓰지 않고 웃었다. 그러더니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앨런을 보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새끼가 하도 나만 닮아서 영 비루먹기만 한 줄 알았는데, 사람 하나는 잘 골랐다!"

둘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앨런이 조용히 말했다.

"자네 새끼는 자기가 뭘 골랐는지도 모른다네."

정확한 지적에, 얀의 눈에는 그저 꽃같기만 한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슬레이만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허락의 뜻으로 보면 되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 대리석 값으로 치기에는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하나 더 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슬레이만이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장난스러운 기색이 다분한 얼굴로 흥정을 해왔다.

어쩐 일로 똑똑하게 구는 슬레이만을 본 앨런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리고 칼리안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야기 하라는 뜻이었으나 슬레이만은 잠시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상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검에 시선을 두다가, 히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만, 자리 좀 비켜 줄 수 있겠나?"

고개를 끄덕여보인 히나가 밖으로 나갔고, 슬레이만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테일란이 사용하는 검술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전에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왕자님과 테일란의 검술이 같습니다."

"어떻게 지금의 카스트린 경과 제가 같은 검술을 사용하는지가 궁금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왕세자를 호위하는 기사, 그것도 대륙의 첫번째 검인 자가 세크리티아의 다른 기사들을 가르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기사를 가르칠 리 없을 테일란의 검술을 어떻게 칼리안이 알고 있는지를 설명하려면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의 속알맹이가 세크리티아의 왕자였음을, 왕세자 체이스의 동생이었음을 말해주어야 한다.

대답해야 할 내용을 상기한 칼리안이 파리한 얼굴로 웃었다.

어차피 다 알던 사람이 자세한 내용 좀 더 안다고 문제 될 것이 있겠냐만 지금 칼리안은 그런 말을 꺼내들 기분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칼리안의 얼굴을 슬쩍 본 앨런이 입을 열었다.

"설명을 하여도 괜찮은 부분이라면 제가 이야기를 할 터이니 왕자님께서는 들어가시지요. 왕자님의 기사들을 지그프리드 공작령에 숨겨두시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도 제가 전하와 얘기를 나누고 따로 왕자님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없을 텐데도 앨런이 이렇게 칼리안을 챙기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둘 모두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승의 배려에 감사를 전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슬레이만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밖으로 나왔다.

앨런은 쉬라 했지만 가야 할 곳이 또 있었다.

마법사 협회장 에우리아와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 폴룬도 만나야 했고, 먼저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칼리안의 도움을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을 사람도 만나 볼 때가 되었다.

생각할 것도 가야할 곳도 만나야 할 이들도 이렇게나 많으니, 쉴 틈이 없는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그런 생각에 소리 없이 웃던 칼리안이 발을 옮겼다.

* * *

"애옹!"

안아달라고 졸라대는 소리에 손을 뻗어 놈을 안아올렸다.

"도대체, 넌."

창 밖만 쳐다보고 있으면 꼭 이렇게 안아달라고 채근을 하는 것이다. 우울한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듯이.

그러니 정말 뭘 알고서 이러는지 아니면 항상 우연인지 궁금해질 수 밖에.

물론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일은 아니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손을 움직여 고양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그 목에 채워 놓은 목걸이 색이 조금 바뀐 것을 눈치챘다.

처음에는 몸집이 커져서 새 목걸이를 달았겠거니 했는데 조금 이상했다. 때문에 목걸이에 시선을 둔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분명 히나일 것이다.

칼리안은 지금 머리도 시끄럽고 속도 시끄러운 상태인데다 애초에 이런 것을 할 성격도 되지 못했으니까.

훨씬 더 길어진 이름이 적힌 목걸이로 바꿔 맨 고양이를 잠시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 똑똑.

누군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플란츠는 대답 없이 잠시 방문 쪽을 쳐다봤다.

매년 그래왔듯 국왕 탄신일 기념 축제가 끝나면 왕자들의 일정은 더 많아진다. 축제 준비로 인해 미뤄뒀던 행사들이 일제히 진행되는 까닭이다.

그랬으니 가장 바쁜 것은 시종들이었고 플란츠의 시종 레릭은 얀과 마찬가지로 회의중에 있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시녀들과 한 명의 시종 외에는 아직 다른 시종을 더 뽑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레릭이 회의에 들어갈 시간에 누가 찾아오면 직접 대답을 해줘야 했다.

"뭐야."

물론 친절한 대꾸는 아니었지만.

플란츠의 말에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고양이를 찾으러 히나가 왔나 하는 생각에 방문을 연 플란츠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잠시 뒤, 플란츠의 입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아우님 방은 아랫층인데."

체이스의 기사, 테일란을 향해서였다.

* * *

텐실의 신성 기사를 데리고 그레이가 있는 변경백령을 공격하려 했다. 그리고 계획이 실패했다.

과연 란델이 여기서 멈추겠는가.

"란델 형님은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다."

란델의 입장에서 란델보다 먼저 생각을 해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가 절실했다. 때문에 에우리아와 멜피르를 찾아온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시간이 촉박하다 생각하는 만큼 분명 다른 일을 벌일 계획을 또 짜고 있을 텐데, 워낙 상식적이지 않은 일을 벌이셨던 분이라서 또 무슨 일을 시도하실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네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실소했다.

지나칠만큼 이성적인 란델이 지나칠만큼 비이성적인 행동을 했으니 그것이 웃겨서였다.

곧 칼리안이 에우리아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신성 기사들은 제대로 빠져나가고 있습니까."

"그 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에우리아의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유가?"

그러자 에우리아가 재밌는 일이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젯밤에 란슬럿 영지에 있던 기사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란슬럿이라면 브리센 쪽에 서 있는 남작이던가요."

"맞습니다. 무력 충돌을 일으킬 분위기는 아니었고 텐실 국경까지 잘 안내하고 올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섣불리 빠져나가거나 말 머리를 돌려 다른 공격을 꾀하지 못하도록 아예 근처에서 바짝 쫓아가고 있다 전해 들었습니다."

"텐실 치유사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브리센 후작이 알고 있었을리는 없는데. 플란츠 형님께서 브리센 후작을 만났다 하더니 그런 이야기를 했나 보군요."

그 에반이 거기까지 생각을 확장시킬 인물은 되지 못했으니, 텐실의 치유사들이 허튼 짓을 하지 못하도록 국경까지 잘 인도하도록 한 일은 분명 플란츠의 생각일 터였다.

"내 형님께서 이렇게 또 도움을 주시나."

혼잣말과 함께 짧게 소리내어 웃은 칼리안이 에우리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손 놓지 말고 우리 쪽에서도 계속 지켜봐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걱정 마세요."

에우리아가 이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웃음을 보였다.

그 후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있던 멜피르를 쳐다봤다. 직접 대면하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영지들이 있으면 모두 확인해주세요."

멜피르 역시 에우리아만큼이나 많은 정보를 접하는 인물이었다. 카이리스 곳곳의 영지와 거래를 하고 있는 곳이니까.

"지금까지는 특이한 점이 없었고,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폴룬 상단에 타격이 있을 겁니다. 이번 일로 텐실과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다면 텐실에서 다이아몬드 거래를 중단하겠노라 할 수도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답한 멜피르가 칼리안의 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주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였다.

"무엇입니까."

"지금 카이리스에서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것이 있습니까."

"열어보십시오."

곧 상자를 열어 본 칼리안이 순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다. 그 안에 든 것은, 칼리안의 눈동자를 꼭 닮은 선연한 붉은 빛의 보석이었다.

"루비 아닙니까."

"네, 왕자님. 루비입니다."

멜피르가 둥글둥글한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의 아니게 카이리스의 루비 수요가 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것이 다이아몬드를 대체할 만큼일 줄은 몰랐습니다."

"대체하는 정도가 아니라 없어서 팔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세크리티아의 사신단에 루비를 취급하는 이가 있기에 어제 만나보았습니다. 생각외로 굉장히 호의적으로 나오더군요. 그러니 텐실과의 다이아몬드 거래에 대해서는 신경 써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 하고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체이스의 도움이었다.

체이스는 죽었어야 할 멜피르가 살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멜피르가 누구와 손을 잡았을지는 굳이 오래 고민할 거리도 못 되었을 터였다.

"다행이군요."

플란츠, 그리고 체이스 덕분에 여러 걱정 거리가 덜어진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한 명을 만나볼 일만 남게 된 칼리안은 조금쯤 가벼워진 마음을 한 채로 마법사 협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레이븐은 칼리안을 태운 채 참으로 편안한 걸음걸이로 발을 옮겼다.

언제나 그랬듯 레이븐이 알아서 왕궁까지 잘 데려다 줄 테니, 칼리안은 입고 온 로브의 후드를 깊이 눌러쓴 채 눈을 감았다. 그런다고 사람들이 칼리안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기에는 조금 피곤한 마음이 들었던 탓이었다.

- 다각, 다각.

어떻게 알았는지 레이븐은 발굽 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기특한 녀석이라는 생각에 다시 혼자 웃을 즈음 레이븐이 발을 멈췄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눈을 뜨고 앞을 쳐다봤다.

칼리안과 마찬가지로 로브를 입고 후드를 쓴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후드 아래 비춰진 모습을 본 칼리안은 레이븐처럼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너······."

무슨 일로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고.

그런 질문 대신 칼리안은 웃으며 그 이름을 불렀다.

"시아."

"대장! 오랜만이야!"

앳된 얼굴의 엘프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시아의 대답은 질문보다 앞서 있지 않았다.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1)

엘프들은 선하지 않다.

정확히 말한다면, 모든 엘프가 선한 것은 아니라 해야 할 일이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폭력을 꺼려하며 숲 속에 모여 산다 하여 그들을 '선하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몸소 겪으며 깨달은 칼리안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엘프라는 종족에 대한 분별 없는 믿음을 일찌감치 내다버렸다. 물론 칼리안이 알고 있는 유일하게 착한 엘프인 시아를 제외하고서.

"대장이 맞았어! 너무 좋아!"

이렇게 칼리안과 마주 앉아 해처럼 웃는 시아를 어떻게 믿지 않겠는가.

시아는 로브를 쓰고 있던 칼리안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특징 있는 외형의 레이븐을 알아봤다. 그래서 얼른 레이븐의 앞을 막아서게 되었다고 했다.

"다시 만나니까 정말 기쁘다."

"그래. 나도 정말로 반가워. 깜짝 놀라기도 했고. 장로 제르가 있는 마을에 다시 돌아간다 했던 것을 걱정했는데 여전한 모습을 보니 좋네."

칼리안은 이렇게 말하며, 기뻐해주는 시아를 향해 진심어린 미소를 보냈다.

"여긴 어떻게 왔어. 혼자 온 거야?"

"아니야. 혼자 안 왔어."

시아를 데리고 마법사 협회 건물로 되돌아온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어느새 칼리안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주변을 가득 채운 책들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던 시아가 대답했다.

"우리 마을 장로님이 이번에 여기 오는 장로님으로 뽑혔어. 그래서 내가 부탁했어. 대장이랑 히나랑 만나고 싶어서 나도 오고 싶다고 졸랐어."

"왕궁에서 엘프들을 못 봤는데. 전하의 탄신 기념일 축제에 참석한다던 엘프 사절단을 말하는 게 맞아?"

"응, 맞아."

"설마 그럼 장로 제르도 이곳에 와 있다는 소리인가."

"아니야, 대장. 우리 마을 장로님은 이제 제르가 아니야."

"장로가 바뀌었다고?"

"응. 제르는 이제 장로 아니야. 대장로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 제르랑 루카는 오랫동안 벌을 받을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둘에 대해 어떤 처벌이 내려졌는지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떠올려 보아야 칼리안만 불쾌해지는 이들이었다.

더불어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시아. 말 순서가 안 바뀌는데 어떻게 한 거야."

"이거, 나도 생겼어."

곧 시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눈빛이 아주 잠시 가라앉았다. 칼리안 역시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 또 있었군."

검은 조약돌.

칼리안이 지닌 것과 완전히 똑같은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바로 그 신물이었다.

"루카 가방에 하나가 더 있었어. 루카는 어디서 났는지 정말 모른다고 해서 주인을 못 찾았어. 그래서 새 장로님이 나더러 가지고 있으라고 하셨어."

시아가 조약돌을 칼리안 앞에 내려놓더니 생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 가져가."

"나 주려고?"

그렇게 질문한 뒤 시아가 이미 대답을 했음을 깨달았다. 돌이 없으면 대답이 빠른 것은 여전한 모양이다.

칼리안이 시아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시아에게 돌려줬다.

"그래도 돼?"

"그냥······ 응. 빨리 가져가."

어차피 같은 것은 칼리안에게도 있었으므로 굳이 시아와의 대화를 힘들게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라도 필요해지면 시아를 찾아가 돌려받으면 될 일이니까.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여전히 항상 지니고 다니는 같은 돌을 손으로 쥐어 본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나가 아니었단 말이지."

분명 시스파니안도 이 돌의 정체를 알아봤다.

주신 세렌티의 개입으로 그 말이 칼리안에게는 전해지지 않았으나 '모르겠다'는 분위기는 아니었었다.

일단 시아는 그에 대해 더 아는 것이 없다 하였으니 칼리안은 돌에 대한 의문을 잠시 접어두었다.

"그래서, 카이리시스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야?"

"대장로님이 대장의 대장한테 할 말이 있댔어. 그래서 아직 조금 더 있다가 갈 거야."

시아의 대장의 대장이라면 르메인이다.

"이번에 우리가 찾아왔는데 왕궁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왕궁 출입은 허락을 받았는데 그 안에서 자면 안 된다고 대장의 대장이 그랬대."

엘프들의 왕궁 출입은 허가가 되었으나 체류는 허가되지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음을 아는 칼리안이 그 말을 듣고 실소했다.

"어쩐지 엘프들이 안 보이더라니."

"대장의 대장이, 대장이 겪은 일 때문에 화가 나서 못 들어오게 했다고 들었어."

돌이 있음에도 대화가 수월하지는 않다.

한동안 시아의 말을 곱씹은 칼리안이 시아의 말을 해석했다.

"전하께서, 내가 겪은 일로 인해 엘프의 왕궁 체류를 불허했다는 말인가."

"응. 맞아. 그렇게 얘기하더라. 그래서 대장의 대장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한다고 그랬어."

칼리안이 엘프들과 얽혀 겪게 되었던 일에 대해 르메인이 항의 표시를 한 것이리라. 대장로는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일 테고.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인 칼리안은 그 후 잠시동안 시아와 함께 소소한 대화를 조금 나누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다른 일은 없었는지 뭐 그런 것들에 대해서. 그 뒤에는 내일 히나와 시아를 만나게 해주기로 약속하며 시아를 돌려 보냈다.

그리고 에우리아를 다시 불렀다.

시스파니안은 기다리라 했지만 무작정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약돌이 하나가 아니었다면 어딘가에 또 있을 것이라는 소리였으니까.

때문에 란델의 장미와 같은 색을 발하던 이 돌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 * *

세크리티아 새들의 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플란츠는 이제 그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체르밀 궁은 왕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르메인의 집무 공간인 아르피아 궁처럼 외부인 방문이 자주 있는 곳과는 완전히 달랐다.

물론 플란츠는 몰랐지만 그 앨런조차도 체르밀 궁의 입궁을 바로 허락받지 못했었다. 그 덕에 굳이 수고스럽게 '워프'를 하여 칼리안의 방으로 들어와야 했지 않았던가.

그러니 르메인이 아무리 체이스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타국의 왕세자가 체르밀 궁에 들어오는 것까지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 겁이 없으신데. 아니면 생각이 없으신가."

그런데 지금 세크리티아의 기사, 그것도 대륙 첫번째 소드마스터인 기사가 카이리스의 왕자들이 머무는 체르밀 궁에 보무도 당당히 들어와 있는 것이다.

"위조된 것을 들고 올 만큼."

때문에 플란츠는 테일란의 손에 들려 있는 입궁 허가서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것을 위조할만한 이들은 당연히 왕궁의 허가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고 있을 세작들 뿐이다. 그러니 그들이 지닌 능력의 한계치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플란츠의 말에 한쪽 눈을 살짝 찌푸렸던 테일란이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 플란츠 왕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

"만나보시면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체르밀 궁의 밖이라 하면 당연히 인공호수나 장미 정원이 있는 곳일 터였다. 수련장으로 이어지는 후원에 체이스가 가 있지는 않을 테니까.

테일란의 말에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대꾸했다.

"불러. 여기로."

카이리스 왕궁 안을 혼자 돌아다니질 않나, 위조된 허가서를 들고 이렇게 밝은 시간에 찾아와서는 당당히 밖에 있질 않나. 그 왕세자 대체 뭘 믿고 그리 제멋대로 군다는 말인가.

란델이라도 마주치면 어쩌려고.

"당장."

때문에 플란츠는 이렇게 덧붙인 뒤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감은 채 동생의 형이었던 이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히나가 첨언을 해 두는 바람에 길고 긴 이름이 더 길어진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얼른 달려와 플란츠의 무릎에 자리를 잡고 몸을 뉘였다.

- 똑똑.

그리고 조금 뒤 체이스가 플란츠의 방에 들어섰다.

플란츠의 눈이 잠시 체이스의 목 언저리에 가 닿았다. 꽤 길었던 체이스의 머리가 확 짧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를 제외한다면 체이스 쪽은 칼리안보다 얼굴이 좀 나았다. 물론 정말 나아서 그런 것인지 나은 척을 하는 것인지까지 플란츠가 걱정해 줄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말없이 맞은편 자리만 가리켜 보였다.

자리에 앉은 체이스가 오전의 햇살 아래 플란츠의 무릎 위에서 몸을 말고 누워있는 고양이를 봤다. 그리고는 의외라는 듯 말을 건넸다.

"생각도 못했습니다. 플란츠 왕자와 고양이라니."

"······ 자꾸 들어와서."

누군들 생각했을까.

간단히 대답한 플란츠는 고양이의 목줄을 손으로 가렸다. 딱히 체이스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체이스의 짙은 보랏빛 눈을 보며 다소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준비성이 대단하시던데."

"혹시 쓸 일이 있을까 해서 마련해 뒀습니다."

출입 허가증을 떠올린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여전히 당당한 대답이다.

"내 아우님을 만나기 위한 쓸모인지. 아니면 내 숨을 끊어놓기 위한 쓸모인지."

"글쎄요. 어떤 이유였는지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후자겠지."

체이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플란츠는 실소했다.

"그래서. 세크리티아의 세자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로."

그 말을 들은 체이스가 대답에 앞서 작게 웃었다.

'내 아우님의 형님'이라던 거추장스러운 호칭 대신 처음 체이스를 봤을 때와 같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느낀 까닭이다.

눈치가 빠른 걸까.

아니면 칼리안이 얘기를 했을까.

아무리 체이스라 해도 그것까지 가늠해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체이스는 그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대답했다.

"전해 줄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새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물어왔기에."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카이리스에 와서는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알아낸 정보를 카이리스 왕자에게 알려주겠단다.

대충 둘러대도 될 것을 솔직하게도 알려주는 모습이 누군가와 참 많이도 닮았다.

"말해."

"텐실의 신관들 뒤를 쫓아 달리던 브리센 측의 기사들은 플란츠 왕자의 생각입니까."

다만 체이스가 꺼낸 것은 세작들의 소식에 대한 말이 아닌 다른 이야기였다.

"······ 세크리티아의 세자께서 이 곳을 떠났을 때 내가 뭘 해야 할지 확실히 알겠군."

"세작부터 정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라면 접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 동생도 모를 곳으로 다시 숨었으니 쉽지 않을 겁니다. 카이리스에 해가 될 일도 없을 테고."

내 동생.

별 문제 없다는 듯 건네진 대답 속에 예상치 못한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플란츠의 표정이 바뀐 것을 눈치챈 체이스가 아주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형제가 아닌 것을 받아들인 것과는 별개로, 그래도 한 명쯤은 계속 기억을 해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칼리안 왕자가 나에게 그것들을 다 내려놓고 갔으니 적어도 나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베른'이라는 그 이름이 가진 의미가 상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

플란츠가 그런 체이스를 한동안 쳐다보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말했다.

"그럼, 내 아우님의 옛 형님께서 하실 말씀이 뭔지."

호칭이 또 바뀌었다. 체이스가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카이리스 국왕 전하께서도 곧 아시게 되겠지만. 내 새들이 조금 더 빠르니까."

"텐실과 대사막의 전사가 만났습니다. 내 동생에게 전해주면 알아들을 겁니다. 내 생각엔 플란츠 왕자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 같지만."

나라가 없는 대사막. 그곳의 전사들.

그들의 무력은 상상 이상이다.

"수해를 잔뜩 입은 텐실이 이제와서 대사막의 전사들과 다시 전쟁을 일으킬 리 없는데."

"네. 신을 모시는 텐실과 신을 부정하는 대사막의 전사들이 서로 손을 잡았다는 소리입니다."

"······ 란델 형님의 힘이 늘어나겠군."

플란츠의 눈이 예리한 빛을 발했다.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2)

- 대사막의 전사와 텐실이 만났다.

고작 그 한 마디에 플란츠의 눈빛이 바뀌자 체이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한 층 짙어졌다. 그리고 그 미소를 흩어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내 동생이 많이 무뎌졌기에,"

"하."

체이스가 딱 거기까지 말했을 때 플란츠의 입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새나왔다. 헛웃음과 비웃음의 중간 쯤 되는 그런 소리였다.

많이 무뎌졌단다.

누가 들으면 칼리안이 그냥 예쁘장한 왕자님이기만 한 줄로 착각할 소리를 한다.

칼리안과 대련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목을 베인다.

그레이가 카이리시스에 들어오는 것을 막겠다며 허리를 부러뜨려 둔 놈이다. 에반 브리센 후작의 의심을 덜고자 일을 좀 벌이겠다 했을 때에는 쉰에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 그 일을 벌이고 돌아온 키리에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은 동생 놈은 놀란 기색도 없이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레이븐이 칼리안만 따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앨런에게도 대서는 그 미친 아르센이 칼리안에게만 꼬리를 내리는 것에도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는 말이다.

"무뎌졌다니."

"정말 많이 무뎌졌습니다."

지금의 칼리안이 어떤지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체이스라면 칼리안의 행적에 대해 플란츠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웃은 것이다.

대체 '과거'에는 어땠길래 라는 뜻의 웃음이었다.

"그래서일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플란츠의 복잡한 마음에는 관심 없을 체이스가 이렇게 의미심장한 소리를 했다. 평소 플란츠가 그리하는 것처럼 머리와 꼬리는 찾아볼 수 없을 말이었다.

"이 체르밀 궁에 여전히 세 명의 왕자가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던 터라."

"당신 동생이 형제들을 죽여 없애기라도 할 줄 알았나보지."

그리고 플란츠는 그 말의 의미와 말에 든 가시까지도 아주 잘 알아들었다.

"내 아우님이 나를 살려 둔 것이 아주 놀라운 일인가보군."

"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아우님 마음이 약해져서 나를 살려둔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소리인가."

"맞습니다. 눈치가 빠르군요, 플란츠 왕자는. 아무래도 그 덕분인가 싶고."

칼리안이 화를 참고 살려두었을 만큼은 똑똑하다는 소리임을 이해한 플란츠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칭찬으로 들어야 하나."

"칭찬입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칭찬이었는지는 플란츠가 알아서 걸러들으면 될 일이니까.

"아무튼 그 내용만 전해주면 될 것 같습니다. 텐실과 대사막이 손을 잡았다고."

"궁금해지는데."

서로간에 더는 할 말이 없던 체이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것을 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의 옛 형님께서는 왜 가만히 있는지. 내 아우님은 움직이고 있는데."

"가만히 있지 않아야 합니까."

칼리안은 제 목숨값으로 발칸부터 만들었다.

그 뒤에는 마법사와 기사를 모으고 스스로는 검술과 마법을 수련해가며 아주 열심히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 아우님이 준비하고 있는 것, 왕세자위에 오르기 위해서만은 아닌 듯한데. 내 아우님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칼리안은 뭔가를 대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때문에 카이리스를 최대한 망치지 않으면서 제 힘을 키우려 하는 것이 눈에 훤했다.

자리만을 바랐다면 그렇게 얌전히 앉아서 눈치 싸움이나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플란츠와 란델의 목을 꺾는 것만큼 쉬운 일이 칼리안에게 또 있을까.

그러니 궁금한 것이다. 체이스가 칼리안과 같은 것을 안다면 최소한 발칸과 유사한 집단이라도 만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세크리티아의 행보는 매우 평범했다. 그저 세작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달았을 뿐, 그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글쎄요. 무엇이라 설명을 해야 할까."

체이스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

깊은 보랏빛의 눈. 하지만 란델의 것처럼 사람의 숨을 죄이는 것이 아닌 통찰이 담긴 눈빛을 한 채였다.

"그것은 내가 건드려야 할 부분이 아닙니다."

체이스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과거와 똑같은 결정을 하고 똑같은 나라를 만들 생각입니다. 그래야 내 동생이 그 힘을 손에 쥔 유일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플란츠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화가 끝났다 여긴 체이스가 밖으로 발을 옮기려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는지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나실 경도 내 동생의 비밀을 아는 것 같던데. 혹시 내용을 아는 이가 또 있습니까?"

"······ 모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 것이 빠를 것 같은데."

체이스가 처음으로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 * *

앨런이 앞에 놓인 귤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서류를 보던 눈을 잠시 돌려 그 모습을 본 르메인이, 쓰고 있던 안경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듯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실 텐데."

앨런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굳이 입에 넣고 씹을 때를 기다려서 시다고 말했다. 노린 것이 분명하다.

뱉을 수도 없고 삼키기도 힘들만큼 신 귤을 간신히 씹어 넘긴 앨런이 툴툴거렸다.

"웃지 마시지요."

서류로 얼굴을 가린 르메인이 괜한 헛기침을 했다.

분명하다. 웃었다.

곧 얼굴을 가리고 있던 서류를 손에 든 르메인이 안경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앨런의 맞은편으로 와 앉더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기사들을 모을 예정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었네. 때문에 사냥대회도 열어주었던 것이고. 그런데 그들을 수도에 두겠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그래서 이렇게 제가 전해드리고 있는 중인 것 아닙니까."

칼리안이 슬레이만에게 요청했던 일과 관련해서 칼리안을 대신해 르메인에게 허락을 받으러 온 길이었다.

"열 한 곳이나 되는 가문에서 모은 기사단이라 하니 우려가 되는군. 기사는 마법사들과는 다를 수 있네. 그들처럼 맹목적으로 칼리안을 따르지는 않을 테고. 나아가서는 칼리안으로부터 마음을 돌릴 수 있으니까."

"왕자님께서도 그 점은 알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왕세자위 싸움이 정말로 내전으로 번질지 모른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감안하고 말한다는 이야기인가."

그 말을 들은 앨런이 귤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한 조각을 먹어도 시고 여러 조각을 먹어도 십니다."

어차피 칼리안이 직접 키워낸 기사단이 아니었다. 한 가문이 모였든 여러 가문이 모였든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니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똑같다는 말로 알아들은 르메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앨런이 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브리센만 있든 브리센 외의 다른 기사들이 있든 전하 목숨 간당간당한 것은 똑같다는 말입니다."

아.

"내 목 얘기였나."

르메인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앨런은 그런 르메인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앨런이 신 귤을 하나 더 떼어내어 입에 넣었다. 그러더니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한번 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만약 그들이 왕궁을 향해 검을 드는 날이 온다면 그 맞은편에는 전하의 셋째 아드님이 있을 터이니 그것은 걱정 마시지요. 제 사람 하나는 확실히 지키는 분이 아닙니까."

그리고 칼리안이라 하여 그들의 배신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다. 이미 모두 고민을 끝낸 일일 터였다.

"어차피 귀족들은 제 잇속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왕자님을 따르는 것이 계속 그들에게 이익이 되면 될 일이니 어려울 것이 없지요."

"그렇다 하나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보고 내일까지는 답을 주겠네."

"알겠습니다. 그리 하십시오."

르메인이라 하여 무조건 앨런의 말을 다 들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꺼낸 대답이었다. 어차피 예상했던 대답이었던 탓에 앨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신 귤은 처음 봤습니다."

무언가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귤 얘기였다. 아직 푸른 빛이 감도는 그 귤은 단 맛을 찾기 어려울 만큼 셨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가져왔다더군."

"그럼 이것은 세크리티아의 귤입니까?"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타국의 것을 들고 올 리는 없지 않겠나."

세크리티아의 귤이란다.

심지어 체이스가 챙겨 온 귤이다.

르메인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이블 위에 있던 귤이 바구니째로 사라졌다.

먹지도 못하는 걸 왜 가져가냐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르메인에게 앨런이 날카로운 눈매를 둥글둥글하게 만들어보이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다른 것 드십시오."

체이스가 르메인 먹으라고 보존 마법까지 걸어가며 귤을 가져왔겠는가? 당연히 아닐 터였다. 그런 대단한 귤을 전부 다 어여쁜 제자에게 가져다 줄 생각을 한 앨런이 흐뭇하게 웃었다.

* * *

에우리아는 참으로 마법사다웠다.

칼리안이 내보인 돌에 대해 엄청난 호기심을 보인 것이다.

"시간을 바로잡는 힘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하지 않습니다. 내 예상일 뿐."

시아가 대답하는 순서를 바로잡고 시들지 않는 장미에 묶여 있던 시간을 흐르게 했었으니까.

시간을 거슬러 온 칼리안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었지만 시아와 장미만 놓고 본다면 '시간'과 관계가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았다.

그런 내용에 대해, 칼리안은 앨런에게만 자세한 내용을 알렸었다.

세렌티가 개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왕궁의 자리 싸움과는 완전히 다른 어찌 본다면 칼리안 개인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었으니 그에 대해서까지 마법사들과 에우리아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시간이라니. 흥미로운 힘을 가졌군요. 이 문자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물론 에우리아 역시 아는 것이 없으리라는 생각도 한 몫을 했다. 칼리안의 예상대로 돌에 새겨진 문자를 본 에우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해듣기로는 세크리티아에도 잊힌 문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혹시 그것은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 쪽은 이미 알아보았습니다."

칼리안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언어가 아닌가. 특별할 것 없이 전승되어 내려온 그것을 떠올리며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에우리아는 서재에서 온갖 신학 서적을 가져왔다. 그 중 한 권을 들어올린 칼리안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의외네요. 마법사 서재에 양신전쟁 연대기라니. 마법사들은 세렌티를 믿지 않는 줄 알았는데."

"믿지 않는 것과 부정하는 것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법사들은 텐실의 신관과는 다릅니다. 세렌티의 생존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시스파니안께서 그 자리에 있으셨으니까요. 그러니 모든 마법사들은 세렌티에 대해서도 상세히 배웁니다, 왕자님."

옛 칼리안의 기억에는 양신전쟁 뿐 아니라 주신 세렌티에 대한 자세한 지식이 들어있지 않았다. 왕자의 수업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다. 독학으로 마법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종이와 펜을 들어 칼리안이 가진 돌에 새겨진 문자와 돌의 모양을 베껴낸 에우리아가 물었다.

"로젤리타 기간, 그리고 스팅과 네리카 영지 맞으십니까? 루카라는 엘프 소년이 가지고 있었고요."

"네.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 몫입니다, 왕자님. 그러니 이만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확인되는 것이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에우리아가 왜 그러는지를 묻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재밌어서요. 요즘 왠지 내가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서. 다들 나는 그냥 가라고 하니."

"왕자님께서 직접 움직이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에우리아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왕자님은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부리는 분이니까요."

"그래서인가.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에우리아에게 도움이 될 것이 없어진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주의를 덧붙였다.

"그 돌을 처음 얻었을 때 피 냄새가 아주 짙었습니다. 누군가 생명을 잃었던 물건이니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기사들이 맡는 피 냄새가 어떤 의미인지는 에우리아 역시 잘 알았다. 따라서 에우리아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침에 슬레이만을 만나고 마법사 협회로 왔다.

에우리아와 멜피르를 만나고 돌아가던 길에 시아를 만났고 다시 협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에우리아와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아."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시간이 흘렀음을 알게 된 칼리안이 난처한 소리를 냈다.

"얀이 걱정하겠네."

금방 다녀올 생각이었으므로 행선지도 알리지 않고 키리에도 없이 혼자 나왔다. 분명 안달을 내고 있거나 아니면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수소문을 하고 있을 터였다.

칼리안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오르자 여유롭게 걷고 있던 레이븐이 알아서 걸음을 빨리 했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레이븐의 갈기를 흩뜨리듯 쓰다듬었다. 그렇게 레이븐이 알아서 왕도를 향해 걷고 칼리안은 후드를 깊이 눌러 쓴 채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잠시만, 레이븐."

이번에는 칼리안이 레이븐을 멈춰세웠다.

그리고 고개를 들며 재밌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레이븐이 멈추지 않았을 만큼 잘 감춰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카이리시스는 넓었다.

어디에서든 한적한 곳은 있었다.

그런 한적한 곳에서 시아도 알아보는 왕자의 검은 말을 향해 몇몇 인영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리시스의 축제 기간이었으니 손님들이 참 많이도 찾아온 모양이었다. 때문에 낮에는 시아가, 그리고 밤에는.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을까."

붉은 눈에 아주 반가운 것을 보았다는 빛이 떠올랐다.

"······ 대사막의 전사들."

정확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그들 특유의 투기를 느끼며 칼리안의 웃음이 짙게 변했다.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3)

대사막의 전사.

대사막의 늑대라고도 불리는, 뛰어난 칼잡이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상급 기사 이상의 힘을 지닌다. 저들이 '전사'의 이름을 받았다면 왕실 기사단원 정도의 솜씨는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칼리안은 아직 베른의 검술을 완전히 사용하지 못했다. 몸도 더 자라야 했고 오러도 더 쌓여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작 다섯이라니.'

칼리안이 소드마스터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 다섯 명 뿐이다.

'숨긴 패가 있다고밖에는 보기 어려운 숫자인데.'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리고는 그 예쁜 웃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서늘한 눈빛을 한 채로 놈들이 숨긴 패보다 더 궁금한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란델 형님은······ 아닐테고."

칼리안은 텐실과 대사막의 전사들이 손을 잡았다던 체이스의 말을 아직 전해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델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칼리안에게 해를 입히고 싶어 할 가장 유력한 인사가 바로 란델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떠올렸을 뿐.

칼리안은 란델에 대한 의심을 곧바로 지웠다.

'시기가 맞지 않는다.'

란델은 이미 신성 기사를 보냈고 실패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텐실에 도착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란델은 칼리안을 손에 넣으려 했다.

그런 란델의 뜻을 거부한 지 불과 사흘도 되지 않았다. 그 전까지 란델은 칼리안에게 해코지를 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테니 만에 하나 란델이 저들을 보낸다 하더라도 보름 쯤은 뒤에나 도착해야 앞뒤가 맞는 것이다. 따라서 란델은 아니다.

"브리센 후작도 아닐텐데."

에반은 칼리안의 뒤에 지그프리드가 있음을 안다.

몸 사리기 좋아하는 에반이 카이리시스에 슬레이만과 그의 기사들이 있는 이 시기에 칼리안을 습격하려 할 리 없다. 때문에 에반도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한 웅큼의 바람이 칼리안의 손 끝을 스치듯 지나갔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바람이 한 번 불어오는 그 사이에 란델과 에반에 대한 사고를 이미 마쳤다고 해야 할 터였다.

그 바람을 타고 시린 기운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보낸 선물일까."

그런 칼리안의 혼잣말에 대답하듯 전사들 중 한 명이 칼리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허리에 검이 매여 있기는 했지만 뽑아들지는 않은 채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아무리 살기가 아니라지만 저런 투기를 뿜어대면서 반갑게 인사라도 나누자는 것은 아닐텐데.

배후도 의도도 파악되지 않는다.

- 탁!

그때 레이븐이 제 자리에서 앞 발을 한 번 굴렀다.

칼리안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하기사.

칼리안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누군가를 앞에 두고 긴장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랬으니 레이븐의 이런 모습 역시 처음일 수밖에.

때문에 레이븐의 발구름이 칼리안에게는 '긴장하지 말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믿기지 않겠지만 말이 사람을 걱정해주는 것처럼 들렸다는 뜻이 맞다.

얀은 물론이고 앨런부터 히나까지 주변의 모든 이들이 칼리안을 걱정해주고 있는데 레이븐의 걱정까지 받아서야 되겠는가.

"괜찮아."

따라서 칼리안은 레이븐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등에서 훌쩍 뛰어내린 뒤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검은 머리, 붉은 눈.

칼리안의 얼굴을 확인한 전사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것은 이들이 정확히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세 보 남짓 거리를 두고 칼리안과 대면한 그가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하르난."

이름을 말한 것이리라.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칼리안은 왕자였고 저들은 이미 칼리안의 이름을 알고 있을 테니까.

"싸움, 대화. 어느 쪽이야."

대신 칼리안은 언젠가의 플란츠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질문을 건넸다. 하르난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싸움."

그리고 칼리안이 매우 마음에 들어할 대답을 했다.

- 카앙!

숨막히던 정적이 찢겼다.

* * *

"애오옹!"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긴 울음소리를 냈다.

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고양이의 입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나갔다 오더니 뭔가를 얻어먹고 온 모양이다.

플란츠가 피식 웃으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곧 못들어오겠군."

아닌 게 아니라 살이 많이 쪘다.

정작 손으로 잡아보면 아직 작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꽤 묵직해졌다. 이러다가는 저 문틈을 넓혀 놓지 않는 이상은 들어오다 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안아달라는 고양이를 들어올린 플란츠의 눈에 목걸이가 다시 보였다. 목줄에 적힌 동생의 이름에 시선이 닿았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달빛에 비춰진 그 이름을 한동안 응시하고 있으려니 불가피한 사념이 떠오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고양이를 쓰다듬던 손은 멈추고 고양이가 게으른 하품을 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이어져 나간 생각의 끝에 선 채로 플란츠가 낮게 읊조렸다.

"눈치 채기 싫었는데."

칼리안은 하루 아침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식당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칼리안의 그 눈빛을 플란츠는 잊지 않았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그 동생, 그리고 지금의 칼리안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왕위에 올랐을 카이리스의 2왕자. 그런 이들이 서로 얽힐 만한 일.

그 일을 겪은 칼리안이 '죽이지 않도록' 사력을 다하는 눈빛으로 플란츠를 직시하게 만들 만한 일.

"미오옹!"

고양이가 다시 울었다.

플란츠가 고양이의 목덜미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다시 꺼내들었다.

"확실히 나는······."

플란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왕이 된 자신이 무슨 짓을 하게 됐을지를.

이유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예상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왕이 될 재목은 아니었나보군."

그 나라의 형제는 플란츠가 벌인 전쟁으로 인해 죽었으리라.

* * *

- 두근!

가히 오랜만에 듣는 소리다.

축복의 힘이 이 정도로 크게 느껴진다는 것은 허리에 생긴 상처가 꽤 깊다는 뜻이었다.

조금 전 하르난의 검에 허리를 베였을 때 칼리안 역시 하르난의 어깨를 벴다. 그러나 하르난의 상처는 오래지 않아 흔적 없이 사라졌다.

- 툭 투둑. 투두둑.

굵은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씩 웃었다.

상처에 개의치 않고 검을 뻗었다.

- 카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을 다시 한 번 뒤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누군가 이 곳에 직접 발을 들이지 않는 이상 이 한적한 곳에서 카이리스 왕국의 3왕자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르난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이 칼리안과 하르난을 감싼 채 대규모 사일런트 막을 생성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다섯 명이 칼리안을 찾아 온 이유였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저것을 사일런트라 칭해도 된다면 말이다.

- 카앙! 카강! 캉!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칼리안의 빠른 검격을 막아낸 하르난의 검에 붉은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앨런이 발현했던 그레이트 실드에 감도는 붉은 빛과 다르다. 그것은 앨런의 주종인 불꽃의 힘이었으나 저것은 아니었다.

- 타다다당!

란델이 보여줬던 바로 그 빛이었다.

칼리안의 손에 들린 투명한 방패가 쏟아지듯 이어진 하르난의 검격을 되받아쳤다. 그 힘에 밀린 하르난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하아.

잠시간의 틈을 타 칼리안이 소리 없이 숨을 내뱉었다. 곧 방패를 장검으로 다시 바꿔 든 칼리안이 조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재밌는 힘을 쓰네."

"누가 할 말을."

무기를 바꿔가며 싸우고 있는 칼리안의 공격을 언급하듯 대답한 하르난이 다시 발을 박찼다.

- 카아앙!

날아오는 검격을 막은 칼리안이 하르난의 검을 밀어낸 뒤 아래로 내리그었다. 하르난이 훌쩍 뛰어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듯 공격을 피했다.

- 우웅!

하르난의 검에 검붉은 빛이 다시 얽혀들었다.

지금 당장 저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중요치 않다. 때문에 일단 그것을 그들의 '오러' 정도로 이해하기로 한 칼리안의 손에도 한층 짙어진 한기가 어렸다.

- 우우웅!

그리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칼리안의 신형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동안 하르난 역시 검을 뻗고 들어올리며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느리다.

- 푸욱!

쇄도하듯 뻗어나간 칼리안의 검이 하르난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짧은 신음과 함께 뒤로 주춤 물러선 하르난의 입에 조소가 어렸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번에도 역시 붉은 기운이 모여들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젠장."

시스파니안.

역시 조금 덜 사려깊었어야 했어.

하르난이 큭큭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힘들 것이다, 3왕자."

비웃음이 잔뜩 어린 목소리와 함께 붉은 빛의 잔상이 다시 칼리안을 덮쳐왔다. 그것들은 어김 없이 칼리안의 푸른 검 앞에 막혔다.

- 카앙! 캉!

들어올린 팔에 힘을 주자 붉은 피가 쏟아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통증이 찾아들었다.

칼리안은 이번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상처 하나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심장을 향해 달려드는 하르난의 검을 검신으로 막은 칼리안이 단검을 생성한 뒤 지체없이 놈을 향해 날렸다.

- 쌔액!

무기가 끊임없이 바뀌는 칼리안의 공격에도 하르난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칼리안의 '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하르난은 밀려난 검을 재빨리 틀어 날아오는 단검을 쳐낸 뒤 다시 공격을 가해왔다. 막았고 상처가 벌어졌고 눈 앞이 아찔해졌다.

하아.

다시 한번 숨을 몰아쉰 칼리안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한 번만.'

- 우우웅!

얼마 남지 않은 오러의 힘을 증폭시킨 칼리안의 신형이 놈을 향해 날듯이 움직였다. 푸른 빛의 잔상이 칼리안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허공에 길게 이어졌다.

검에 어린 오러가 뻗어나갔고 놈의 붉은 빛이 그것을 막았다.

- 카아앙!

칼리안과 검을 맞대고 선 하르난이 피식 웃는 것이 보인다. 검을 든 채 버티고 선 칼리안의 힘이 빠져나감을 느낀 것이리라.

"여기까지 하지."

끝을 내겠다는 하르난의 말에 칼리안이 마주 웃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작은 목소리를 냈다.

[윈드 스피어]

오러 말고, 마력.

옛칼리안이 만들어 둔 서클에 잘 쌓아가고 있던 마력. 그것을 움직였다.

바람의 힘을 그득히 담은 마력의 창. 아르센의 것보다 날카롭고 거대한 창이 빛과 같은 속도로 내리꽂혔다.

칼리안의 검을 막고 서 있던 하르난은 피하지 못했다.

- 쌔애액!

- 콰직!

바람의 힘은 상처를 헤집는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바람의 힘에 꿰뚫린 하르난의 몸이 형체를 잃은채 천천히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것을 끝으로 하르난은 더 이상 다른 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본 칼리안이 뒤로 돌아섰다.

축복의 힘과 오러에 더불어 무리하게 운용한 마력까지.

울컥 치밀어 오르는 피를 되삼킨 칼리안이 나머지 네 명의 전사들을 향해 예쁜 웃음을 만들어보였다.

* * *

"소가주님!"

수련장에 있던 드미레아에게 하인 한 명이 다급히 달려왔다.

흘러내린 땀을 대충 닦아낸 드미레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고 하인은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지금, 지금 바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인의 얼굴에서 다급함을 읽은 드미레아가 재빨리 달려나갔다.

수련장 바로 앞에 검은 말이 더운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말이 밟고 선 땅에 붉은 피가 흥건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칼리안 왕자님."

차마 왕족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한 하인들을 지나쳐 다가간 드미레아가 서둘러 칼리안의 몸을 끌어내려 눕혔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칼리안의 손이 드미레아의 어깨를 붙들어 잡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드미레아의 귀에 가 닿았다.

"내 형님을······ 불러줘."

어깨를 붙들고 있던 하얀 손이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4)

- 나는, 대사막의 위대한 전사다!

남자는 달렸다.

끝없이 같은 말을 되뇌며 달렸다.

국왕 탄신일 기념 축제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밝은 빛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다. 때문에 골목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쉼 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얼마나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진작에 포기했다. 다리를 움직이고 숨을 쉬는 것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두 가지를 하기에도 벅찬 상태였다.

"헉, 헉! 허억!"

오른팔은 진작에 잘려나가고 없었다. 부여잡고 싶었지만 팔을 감싸 쥘 왼쪽 손이 없었다.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그것만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라 해야 할까.

잠시 스스로를 향해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 남자가 다리에 다시 힘을 주었다. 멈추지 않고 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점점 감각이 사라져가는 두 다리를 계속해서 채근했다.

- 쿠당탕!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남자는 쓰러지듯 바닥을 뒹굴었다.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움직여 다리를 살펴보려 했으나 그조차도 힘겨워지고 있었다.

지금 남자의 온 몸이 점점 마비되어 가는 것은 등에 입은 깊은 상처 때문일 터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치유의 힘은 스스로에게만 작용한다. 그리고 남자는 치유의 힘을 하르난만큼 다루지 못했다.

남자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아니 악물어보려 했다.

"쿨럭!"

둥글게 뭉쳐진 핏덩이가 목을 타고 올라왔다. 채 뱉어내지 못한 그것이 남자의 숨을 막았다. 고개를 돌려 토해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말해야 한다······ 알려줘야······ 한다.'

달빛 아래 진득하게 묻어나오던 살기가 떨쳐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숨통을 비틀어버릴 것 같은 그 붉은 눈빛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피를 흘려가면서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던 소름끼치는 얼굴을, 웃음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니 더 달려야 했다.

달려가서 그들을 보낸 이에게 알려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전사들을 더 보내야 한다고.

전사를 전부 보내서라도 당장 죽여 없애야 한다고.

살려두면 계획이 틀어질 것이라고.

그것을······.

말해······ 줘야······.

* * *

칼리안의 손이 떨구어졌다.

푸른 빛이 감도는 회색 눈이 고요히 잠겨들었다.

모여 있던 이들이 그 모습을 모두 보았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눈 깜빡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적이 찾아들었다.

슬레이만과 아내 세리에는 자리를 비웠다. 내일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3왕자가 죽기 직전의 모습을 한 채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지그프리드의 영역 안에 패닉에 빠진 이가 없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유란.'

그들의 앞에 선 소녀를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이다.

"네, 소공작님."

드미레아의 침착한 목소리에 칼리안의 로젤리타에 함께 했던 기사 유란이 대답했다.

칼리안의 가는 숨을 확인해 본 드미레아가 집사로부터 건네 받은 수건으로 피를 막으며 입을 열었다.

"히나, 그 시녀가 와야 한다. 그리고."

드미레아가 하던 말을 멈추고 칼리안이 전한 단 한마디를 잠시 떠올렸다.

- 내 형님을 불러줘.

이런 상황에 찾는 것이, 왜.

"······ 2왕자님을 모셔오도록."

르메인이 아닌 플란츠란 말인가.

칼리안의 뜻이 너무나 명확했으므로 짧은 한숨을 내쉰 드미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유란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오라버니 외의 다른 누구에게도 내용을 전해서는 안 된다."

르메인은 물론이고 앨런에게조차도.

내용을 전달받은 유란은 다른 의문 없이 간단한 목례만 보인 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플란츠를 호위해 올 몇몇 기사들을 골라 서둘러 움직였다.

그런 유란쪽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드미레아는 칼리안을 안으로 옮겨 눕히도록 했다. 상처에서 떨어진 핏자국이 수련장과 저택의 복도를 지나 침실까지 쭉 이어졌다.

- 울컥!

침대에 뉘인 칼리안의 입에서 한웅큼의 피가 토해져 나왔다. 칼리안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 토해내는 피를 흘려내는 드미레아를 향해, 집사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검의 길에 오른 분이니 독은 아닐 겁니다."

"그래. 마력과 오러 때문이다."

칼리안은 더 이상 독에 해를 입지 않는다.

분명 오러와 마력을 무리하여 운용한 것이리라.

드미레아가 하인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거추장스러운 왕자의 재킷을 벗겨내고 셔츠를 들어올려 상처를 살폈다.

깊다.

칼에 베인 채로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상처가 크게 벌어진 것이 바로 보였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드미레아는 상처 부위를 다시 압박했다.

'소드마스터의 짓이다.'

똑같은 오러 사용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상처.

상대방이 죽었을지 살아서 다시 칼리안을 노려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당장 칼리안을 살려두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로난시테."

지그프리드가의 수석 기사단장 로난시테를 부른 드미레아가 빠른 말로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공격에 대비한다."

"알겠습니다."

로난시테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며 짧게 답했다. 하지만 드미레아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대문은 닫지 않는다."

이토록 모순적인 행동이라니.

대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언제 들어올지 모를 적에 대비하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사 로난시테는 유란과 마찬가지로 의문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있을테니 따르는 것이다. 드미레아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제인. 핏자국을 따라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을 전부 다 찾아오도록. 데카르는 제인이 찾아낸 흔적을 모두 지워라. 시신이 있다면 저택으로 보내고 작은 핏방울 하나 남기지 않아야 한다."

"네, 소공작님."

짧게 답한 두 기사가 다시 방에서 나간 뒤 드미레아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집사장을 향해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렸다.

"입단속을."

"알겠습니다, 소가주님."

당장의 조치를 모두 마친 드미레아가 다시 칼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몸이 차갑다. 상처를 덮은 수건이 어느새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약품과 붕대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필요없다. 섣불리 건드리면 축복의 힘과 치유사에게 오히려 방해만 되니까."

집사장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한 드미레아가 새로운 수건을 들어 상처를 다시 눌렀다. 그리고 칼리안을 내려다보며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말을 건넸다.

"죽지 않을 자신으로 이 곳에 오셨으면 버티십시오."

지그프리드의 저택은 수도 중심에서 꽤 먼 곳에 있었다.

칼리안이 어디에 있었든 이곳까지 오는 것보다는 왕궁으로 가는 것이 빨랐을 것이다. 왕궁으로 갔다면 곧바로 안전해졌을 것이고 히나의 치유도 받을 수 있었을 터였다.

그것을 전부 포기하고 이 곳으로 왔다. 그리고 플란츠를 불렀다.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따라서 드미레아는 대문을 닫지 않도록 했다. 흔적을 지우고 입을 다물도록 했다.

그것이 '방패'가 되기로 했던 드미레아의 몫이었다.

* * *

고양이는 잠들고 플란츠는 깨어 있었다.

고양이가 잔다 해서 사람까지 잠자리에 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던 탓에 플란츠는 여전히 불 꺼진 방의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그렇기 때문에 방문 밖 복도 먼 곳에서 들리는 작은 대화 소리를 곧바로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지금은 어려울 것 같구나."

"혼자 계시고 싶다 하셨으니 돌아가거라."

시종 레릭의 목소리만 들렸으나 레릭은 분명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렇다는 것은 찾아온 이가 히나라는 뜻이다.

고양이를 찾으러 온 것 같아서 플란츠는 슬쩍 고개를 내려 무릎 위를 쳐다봤다.

무엇이 그렇게 편한지 몰라도 놈은 또 무릎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들어올리면 깰 테니 플란츠는 밖의 대화를 못 들은 척 고양이를 건네주지 않고 그냥 두기로 했다.

그런데 레릭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나도 들어가기가 어려우니 어찌하겠느냐?"

"내가 내일······."

- 달칵.

결국 플란츠의 방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레릭의 말이 멈췄다. 복도의 소란스러움이 불편했던 플란츠가 밖으로 나온 것이라 생각한 레릭이 얼른 허리를 숙여 보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그리고 히나를 향해 어서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특유의 낮은 음색이 복도를 작게 울렸다.

"와서 데려가."

그 말에 히나가 레릭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뒤 플란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플란츠의 목소리가 히나를 향했다.

"뭔데."

히나가 아주 잠시 플란츠를 쳐다봤고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고. 고양이 때문에 온 것 아니잖아."

고양이 찾아가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릴 리가 없지 않은가.

고개를 끄덕인 히나가 저도 모르게 수어를 해보이려다 수첩을 꺼냈다. 플란츠가 알아보기 힘든 말이 너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칼리안 왕자님이 플란츠 왕자님을 찾아요.

달빛이 밝았다. 덕분에 히나가 글자를 적어감과 동시에 플란츠도 내용을 봤다.

- 지금 밖에 있어요.

거기까지 읽은 플란츠가 방 안으로 들어갔고 히나는 몇 마디 말을 더 적기 위해 수첩을 다시 들었다. '칼리안 왕자님이 다쳤고 주변에 알리지 않고 몰래 나가야 한다' 라는 말을 다시 전하려 한 것이다.

"애옹!"

그런 히나의 팔에 고양이가 얹어졌다.

밖에서 칼리안이 기다린다는데 왜 고양이를 돌려주나 했더니 플란츠의 설명이 따랐다.

"고양이 찾으러 왔잖아."

고양이 찾으러 왔다는 핑계를 댔으니 데리고 나가라는 뜻임을 이해했을 때, 플란츠가 짧은 말을 하나 더 했다.

"나와. 나갈 테니까."

히나를 내보낸 플란츠가 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체르밀 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 탁.

칼리안의 방 안에 귤 바구니를 내려둔 앨런이, 옆에 선 얀을 향해 물었다.

"이 시간까지 수련을 하신다는 말이냐?"

"요즘 게을리 하셨다며 수련장에 드신 뒤로 나오질 않으시네요. 과일은 왕자님 오시면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얀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대답했다.

얀의 얼굴을 한동안 쳐다보던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 그리하거라."

그리고는 다른 말 없이 걸어 밖으로 나갔다.

앨런의 발 소리가 멀어짐과 함께 얀의 얼굴에 띄워져 있던 미소가 조금씩 사라졌다.

주먹 쥔 손은 이미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얀의 입에서 자책과 자괴감 가득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 * *

칼리안을 앞에 둔 플란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미레아는 란델과 칼리안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고 체이스와 칼리안의 관계는 알지 못했다. 때문에 칼리안이 드미레아에게 불러달라 한 것이 플란츠 자신인 것은 맞다.

그 이유 역시 안다.

칼리안의 옆에 선 채로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 아우님께서······."

타국의 왕세자 신분인 체이스는 제대로 나서기 어렵다. 그리고 체이스는 '세자위를 원하는' 지금의 칼리안이 어떤 사고를 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상황에 칼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할지 그것을 가장 잘 알만한 이는 오로지 플란츠 뿐이었다. 그것을 알고 플란츠를 부른 것이다.

"나를 너무 믿으시는군."

누군가에게 건넨 말이 아니었으므로 그 자리에 있던 히나와 드미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히나는 그저 칼리안의 상처에 치유술을 쏟아내고 있을 뿐이었고 드미레아는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드미레아의 방패는 이미 세워졌으니 그 안에서 행동해야 할 것은 플란츠였으므로.

조용히 눈을 뜬 플란츠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등받이에는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창백하게 질린 칼리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참 뒤 생각을 마친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소공작."

"네, 왕자님."

즉각 대답해오는 드미레아를 향해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브리센 정도는 막을 수 있겠지."

"공격 없는 방어입니까."

드미레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칼리안은 놈들의 배후를 모른다.

왕궁에 돌아간 칼리안을 르메인이 밖으로 내놓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앨런의 경호가 시작될 것이고 놈들은 다음을 노릴 터였다.

언제 올지 모를 적을 얌전히 기다리는 것은 칼리안의 성격에 절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칼리안은 놈들의 배후를 알아낼 때까지 왕궁에도 가지 않고 모습을 내놓지 않을 생각이리라.

축제의 여흥에 취해있던 이들에게 어둠속에 숨어 달리는 검은 말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칼리안이 이 곳에 없음을 주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이후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그프리드는 내 아우님이 사라진 것을 브리센의 짓으로 착각하고 나를 불러들여 인질 삼았다. 내 아우님을 내놓기 전까지는 나도 브리센에 못 보내준다 하면 되겠는데. 어려운 일인가."

칼리안은 왕자다. 아르센과 다르다.

그냥 '없다'고 해서 없어질 수 있을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칼리안을 습격한 배후의 인물이 그것을 믿게 할 만큼 큰 판이 벌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3왕자의 행방불명을 이유로 한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의 대립 같은.

때문에 플란츠를 불렀다.

뒷수습도 맡길 겸 인질 노릇도 해줄 겸. 겸사겸사.

플란츠의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 닫겠습니다. 편하게 지내십시오."

그리고는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지키는 것은 우리가 잘 합니다."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5)

- 사아아아······.

바람결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고요히 머물다 지나갔다.

체르밀 궁을 돌아 건물 뒤 후원으로 들어서면 자작나무가 몇 그루 쯤, 그리고 이름 모르는 나무들이 또 몇 그루 쯤 심겨진 작은 산책로가 있었다. 본래에는 없었던 것이나 칼리안과 플란츠가 수련장을 자주 이용하게 되니 수련장으로 향하는 길 왼쪽의 넓은 잔디밭을 산책로로 꾸며두게 된 것이었다.

플란츠는 종종 그 곳을 찾았고 칼리안은 호수 옆 산책길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후원의 나무 사이를 거닌 적이 별로 없었다. 란델은 언제나 장미 정원으로 갔으므로 당연히 후원을 찾지 않았다.

따라서 칼리안과 플란츠가 왕궁 안에 없는 어두운 밤에 그 곳을 걷고자 들어올 왕자는 없었다.

"후우······."

대신 어울리지 않을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는 새끼코끼리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을 놓지 말 걸."

많이 다치신걸까.

지금 쯤은 깨어나셨을까.

아직도 못 일어나셨으면 어쩌지.

혹시라도 영영······ 아니야.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자꾸 헤집어 두어서 얀은 결국 잠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밖에 나와 청승을 부리고 있었다.

- 자박, 자박.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는데 자갈을 밟고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본 얀이 의외라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키리에."

이 시간까지 검을 수련했는지 키리에는 땀에 푹 절은 채였다. 돌아가던 길에 산책로 한 가운데 놓인 벤치에 앉아 청승을 떠는 얀을 본 모양이었다.

"왜 나와 계십니까."

칼리안이 잠에 들 시간이었으니 이 때 얀이 밖에 나오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때문에 이렇게 물어오는 키리에를 보며 얀은 아주 잠시 고민을 했다.

칼리안이 지금 이 곳에 없는 것을 이야기해줘야 할지를.

그러다 왕궁에서 나간 것이 비단 칼리안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히나도 함께 자리를 비운 것이다.

"잠깐 할 말이 있어요."

"네."

곧 얀은 키리에를 옆에 앉혀둔 뒤 키리에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놀라는 것도 아니고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알겠단다.

"걱정 안되십니까?"

"무엇에 대한 걱정 말씀이십니까."

"왕자님께서 다치셨고 히나가 그 쪽으로 갔으니까요."

"히나가 갔고 아직 아무 소식이 없는 것 아닙니까. 괜찮다는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지만 괜찮지 않다는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히나가 치료 중이라는 말일 테니 괜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태평한 것이 아닌가.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왕자님께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놈들도 나도 살아있지 않을 테니 그 역시 괜찮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파란 쪽의 눈이 유난히 도드라져보이는 얼굴로 키리에가 말을 맺었다.

"쫓아가서 다 죽여버리고 같이 죽겠다는 겁니까."

"네."

칼리안에게 해를 입힌 놈들이라면 키리에가 상대하기는 버거운 이들일텐데도 저렇게 말을 한다. 대책 없지만 너 좀 멋있다는 눈으로 키리에를 쳐다보자 키리에가 작게 웃다가 물어왔다.

"무력한 것이 싫어서 이러고 계셨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모두가 제 할 일이 있었다. 그 작은 히나 역시 칼리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이가 아니던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걱정하는 일 뿐이라서요. 한심하네요."

"왕자님은 쓸모없는 사람 끌어안고 가실 분 아닙니다. 걱정해주는 사람도 필요하니 곁에 두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칼리안이 하필이면 자신의 '검'이 되어달라 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무력하지 않은 적 없던 키리에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계속 걱정하다 왕자님 돌아오시면 걱정했다고 하면 됩니다. 그 말에 기대어 쉬시는 분이니까요."

검술이나 마법으로 도움이 되든, 가문과 기사단으로 도움이 되든, 똑똑한 머리로 도움이 되든, 혹은.

칼리안의 어떤 면을 보든 꽃 같기만 하다며 애지중지 해주는 것으로 도움이 되든.

칼리안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이들 중 하나인 눈치 없는 새끼 코끼리는 키리에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마음 놓고 칼리안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 * *

칼리안이 오전에 궁에서 나간 뒤 입궁하지 않았다.

한 밤에 플란츠가 시녀 한 명을 데리고 궁에서 나간 뒤 마찬가지로 입궁하지 않았다. 그런데 플란츠는 지그프리드의 보증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지그프리드는 대문을 닫은 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집무실에서 꼬박 밤을 새운 르메인이 차갑게 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겠나."

이제껏 앨런의 말이라면 대체로 고분고분 들어왔던 르메인은 별 일이 아닐 테니 조금만 기다려 보라는 말을 들어 딱 하룻밤을 참았다. 이유가 있으리라는 말에 긍정한 것이다. 칼리안이었고, 지그프리드였으니 별 탈은 없으리라고 믿은 것이다.

그런데 플란츠와 함께 사라진 시녀가 바로 히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르메인의 이성은 일단 그 사실이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까지만 유지되었다.

"반역의 의미로 보아야 하나."

"아닙니다, 전하."

그리고 얀을 불러온 후 이렇게 물었고, 그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얀이 즉각 부정했다.

르메인이 더 참지 못하고 얀을 몰아세웠다.

"멀쩡한 2왕자가 아무 이유 없이 치유사를 데리고 나가지는 않았을 터. 3왕자에게 일이 생겼다는 말이고 그 일에 지그프리드가 개입했는데."

얀이 잠시 눈을 감았다. 르메인의 오해를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드미레아로부터 다른 연락이 일체 없었으므로 얀 역시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다.

"······ 그것이 반역이 아니라는 말인가."

"절대로 반역이 아닙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차디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 르메인이 얀을 응시했다. 얀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더 기다려야 할 이유를 말하게. 지금 당장 발칸과 카에라를 지그프리드의 저택으로 보내기 전에."

칼리안에게 분명 계획이 있다.

왕궁에 들어오지 않고 플란츠를 부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발칸과 카에라가 지그프리드를 치면 안 된다. 그것만은 미뤄야 했다.

얀이 주먹 쥔 손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어젯밤 칼리안 왕자님께서······."

습격을 당했다고. 부상을 입었고 치유를 위해 히나가 나갔다고. 그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유가 있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꺼내려 했다.

- 벌컥!

"죄송합니다, 전하. 용서하시지요."

그리고 마법사가 개입했다.

무례한 행동에 대해 일단 사과부터 한 앨런이 집무실 안으로 성큼 성큼 걸어 들어왔다.

앨런 역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지금껏 칼리안이 행방불명 된 적이 없었던데다 칼리안이 부상을 입으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에 대한 앨런의 걱정이 르메인의 것보다 많으면 많았지 모자라지는 않을 터였다.

멋대로 들어와 멋대로 얀의 옆에 앉은 앨런이 멋대로 입을 열었다.

"어젯밤 칼리안 왕자님을 습격한 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답니다."

언젠가 앨런은 이번 생에 르메인의 사인이 심장병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적 있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 될 것 같은 얼굴이 된 르메인을 향해 앨런이 계속 말했다.

"아무래도 왕자님이 직접 지그프리드로 피신을 한 것 같습니다. 더 안좋은 일이 있다면 지그프리드의 대문이 닫히지 않았을 겁니다. 소식을 전했겠지요."

지금 앨런이 하는 말은 체이스로부터 전해 들은 것이었다.

칼리안의 뒤를 따르던 것은 아니었으나 드미레아가 싸움의 흔적을 지우기 전에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그것을 먼저 보았다. 핏자국이 지그프리드 저택으로 이어진 것을 확인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칼리안과 플란츠가 사라졌다는 내용도 들었다.

체이스가 칼리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집중시켜 둔 세작들이 여전히 같은 활동을 했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직접 갔다는 말인가. 왕궁을 두고?"

믿을 수 없다는 소리였다.

체이스는 소문의 출처가 세크리티아의 세작임을 밝혀도 좋다 했다. 양국의 관계에 큰 문제가 생기겠지만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칼리안의 계획이 망쳐지지 않게 돕기로 한 것이었다.

다행히 르메인은 이야기의 근원지를 묻지 않았다. 더 확실한 확인처가 있었으니까.

르메인의 눈이 다시 얀을 향했다.

조금 전 할 말이 이것인지를 묻는 얼굴이었고 얀은 무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데려오겠네."

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르메인이 이렇게 말했다.

"지그프리드 영지도 아닌 저택에 부상당한 왕자를 그냥 둘 수는 없네."

때문에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싸움의 흔적이 사라진 뒤 플란츠가 찾아갔고 그 후 대문이 닫힌 것까지 알게 된 체이스가 두 왕자가 무슨 계획을 짰을지를 어느정도 가늠하여 앨런에게 전했다.

"전하의 검이 향해야 할 곳은 지그프리드가 아닙니다. 수일 내로 지그프리드가 브리센과 대치하게 될 테니 그 쪽을 주시하셔야 합니다."

내용을 모두 전한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지그프리드 공작이 함께 있을 테니 왕자님의 안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우선은 상황을 주시하시고 방향이 정해지면 그 곳으로 발칸을 보내십시오."

그 말이 끝난 후 르메인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앨런의 말에 따라 일단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르메인을 진정시키는 것에 간신히 성공한 앨런은, 몇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르메인을 끌어내리는 것에 한번 더 애를 써야 했다.

'내 새끼가 내 집 문을 안 열어주는데 혹시 이게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

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왕궁을 찾아온 슬레이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 * *

- 틱, 톡, 틱, 톡.

밤이 새도록 저 소리만 듣고 있었다.

칼리안의 상처는 많이 아물었다.

완전히 아물지 않은 것은, 더 두었다가는 히나에게도 문제가 생길 것 같다 판단한 플란츠가 히나를 내보내 재웠기 때문이었다.

"브리센 후작저에 서신 보냈습니다."

꼬박 밤을 새고 난 뒤에도 미동 없는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플란츠를 찾아온 드미레아가 이렇게 말했다. 중간에 슬레이만이 찾아왔으나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슬레이만을 들이지 않은 것은 만에 하나 왕궁에서 이 일을 '반역'으로 여겼을 때 그 책임을 슬레이만에게까지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드미레아는 별 일 아니니 며칠만 더 나갔다 오시라는 말만 대문 너머로 전했다.

"그래."

억지 주장이 가득한 편지를 받고 불같이 화를 낼 에반의 얼굴이 눈에 훤했다. 혼자 찾아오든 기사들을 이끌고 찾아오든 오래지 않아 두 가문의 대치가 시작될 것이다.

드미레아는 몰랐으나 플란츠는 왕실의 개입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히나가 온 것으로 칼리안이 이 곳에 있음을 눈치 챌 것이고 그렇다면 누구든 르메인을 말려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앨런이든, 아니라면 체이스든.

- 틱, 톡, 틱, 톡.

시간이 다시 흐른다.

'누가.'

밤이 새도록 생각했다.

대사막의 전사. 그리고 텐실. 그들과 란델. 오러 사용자에게 입은 듯한 칼리안의 상처.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을 떠올리며 습격자의 배후가 누구일지에 대해 고민하고 다시 고민했다.

'무슨 이유로.'

플란츠의 날카로운 연두색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더 이상의 출혈은 없었으나 칼리안은 여전히 잠든 채였다.

레이븐의 털이 온통 피에 젖어 있었다 했다.

"······ 감히."

플란츠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틱, 톡, 틱, 톡.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따져보지 않았다. 그저 앉아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리고.

"형님."

비로소 깨어났다.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아올려졌다.

하.

실로 애증하는 아우님 같으니.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6)

최소한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칼리안 아니라 칼리안 그림자라도 봤다면 말이다.

"이게 무슨 어처구니 없는 소리란 말인가."

칼리안이 사라진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라진 것도 이제 알았다. 그런데 칼리안을 내어 놓지 않으면 플란츠를 못 보내겠단다.

아니, 플란츠는 또 뭘 믿고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을 따라 나섰느냔 말이다. 그 밤중에 불러냈으면 의심을 했어야지 왜 제 발로 지그프리드 저택에 가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그레이를 부상 입혔다는 오해도 억울하기 짝이 없었는데 아르센을 감금했다며 집을 들쑤셔 놓질 않나, 이제는 칼리안을 붙들고 있다고 하고 있으니.

"정작 르메인은 조용한데 왜 코끼리들이 자꾸 자리 싸움에 엉덩이를 들이미느냔 말이다."

레넌 브리센을 감금해둔 것과 도박장을 운영했던 것 외에는 아주 결백한 에반 브리센 후작이 분통을 터뜨렸다.

"전하께서도 상황을 살피는 중이지 않겠습니까. 3왕자님이 사라지고 2왕자님이 억류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그프리드에 마음대로 공격을 가할 수는 없을테니 말입니다."

"······ 그래.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겠지. 자칫 플란츠마저 잘못되거나 지그프리드가 최초로 왕을 끌어내리는 사태를 맞이하기는 싫을 테니까."

집사장의 말에 동의하며 생각을 정리한 에반이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르메인도 개입하지 않는 이 일을 직접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였으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옆에서 물어오는 집사장의 말에 당장 기사단을 준비시키라 말하려던 에반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뒤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 잠시 혼자 있겠다."

생각을 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기사들을 이끌고 가고 싶었다.

- 하는 꼴은 승냥이인데.

하지만 손자 뻘 되는 놈 아니 손자인 놈에게 이런 말을 들었지 않나. 두 번 다시 그런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았다.

"3왕자가 사라지고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이 대립하게 될 때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이 과연 누구인가."

볼 것도 없이 란델이다.

정신 나간 코끼리들이 거기까지 생각도 못하고 브리센을 몰아세우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3왕자는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칼리안과 당장 맞붙었을 때 자신 역시 이기는 것을 장담하기가 어렵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몰라도 오러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슬레이만 정도의 무력을 지니지 않은 이상은······.

"슬레이만의 자작극인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에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지. 슬레이만은 어제 오후부터 조금 전까지 수도에서 벗어나 있었다 했으니 슬레이만은 아닐텐데."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함께 왔던 기사 테일란을 염두에 두었던 에반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그런 짓을 벌일 이유도 없고 체이스가 왕궁 안에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테일란이 그런 일을 벌이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단 하나.

"그레이······ 그렇지. 안그래도 란델의 편에 한 발을 슬쩍 올리고 있던 그레이가 이번 일에 개입했을 수도 있겠군. 놈이 3왕자와 무력이 비슷하거나 더 위일 테니 3왕자를 잡아 죽이거나 가둬버리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에반은 여전히 그레이가 오러를 쓰지 못하는 것을 모르는 상태였다.

"란델과 그레이가 합작하여 일을 벌인 것인가."

이렇게 엉뚱한 결론을 지어버리고 만 에반은 책상에 앉아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지그프리드에 직접 찾아가지 않고 일단 서신부터 보내 볼 생각을 했다.

란델이 그레이와 손을 잡은 것이 정말 맞다면 당장 지그프리드와 척을 지어서는 안 됐으니까.

* * *

통찰과 심연이 맞닿았던 순간.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

분명히 알아보았다.

전날, 플란츠를 찾아 체르밀 궁에 갔던 체이스가 잠시 장미 정원을 거닐었을 때의 일이었다.

"더는 잘라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장미를 살피는 란델의 손길을 보며 체이스가 그렇게 말했다.

낯선 목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렸던 란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시종을 뒤로 물린 채 이 깊은 곳까지 찾아 들어온 이방인에게 조용히 대답했다.

"조금만 두어도 자라있어서."

그렇게 마주하게 되었다.

둘은 첫 만남에 대한 인사를 나누지도 않은 채 가만히 서서 서로를 살폈다.

심연은 통찰을 삼키려 했고, 통찰은 심연을 꿰뚫어보았다.

"자라도록 그냥 두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체이스의 짙은 보랏빛 눈을 잠시 바라보던 란델이 대답했다.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손을 다칠까."

바람이 불었다.

바람 끝에 머문 장미 향이 사라질 때 쯤 체이스가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 걱정이 되어 하는 말입니다. 가시가 있으니."

부드럽게 맴도는 향기같은 목소리가 웃음의 뒤에 이어졌다.

다시 한번, 바람이 불었다.

* * *

루비아의 별관.

카이리스를 찾은 사신들 중에서도 귀빈을 위해 지어진 곳이었다.

카이리스에서 별관을 내어 줄 정도의 귀빈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사실 극소수였다. 때문에 이 별관 역시 자주 개방되지 않았으므로 별관에 사람이 드나드는 일 역시 많이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물론 요 근래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체이스가 별관에 든 뒤로는 루비아 관의 별관이 꽤 분주했다. 그리고 어제부터는 궁 밖과 루비아 관을 분주하게 드나드는 몇몇 사람이 유난히 눈에 띌 정도가 되었다.

그 중 한 명은 바로 기사 테일란이었다.

- 똑똑.

상당히 큰 보폭으로 빠르게 발을 옮겨 별관 안으로 들어간 테일란이 별관의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체이스의 방 문을 노크하며 말했다.

"카스트린입니다, 저하."

그리고는 들어오라는 허락이 없었음에도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테일란이 체이스의 호위기사이기 때문에 허락된 행동이었다.

체이스는 문에서 등을 돌린 채 창 밖을 보며 서 있었다. 창문에 비춰지는 테일란을 보며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 쪽은 아직인가?"

"네. 아직 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그래."

작은 한숨이 체이스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왜 그렇게 카이리스 3왕자의 일에 신경을 쓰는지 알지 못하는 테일란이었으나 그에 대해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것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테일란은 질문 대신 체이스에게 전해야 할 내용을 입에 올렸다.

"협회의 마법사들이 조사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새들을 들여보내야 할까요."

"그대로 움직여. 충돌하지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

"다른 소식은?"

"수도 내 움직임은 없고, 국왕 르메인의 지시로 수도 출입에 대한 검문이 강화됐습니다만 수도를 빠져나가거나 들어오는 이들 중에 이상점이 있는 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합니다."

카이리시스에서 활동하는 새들이 물어오는 정보 속에서도 놈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다.

"아직 몸을 사리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거나,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났거나, 아니면 이미 모두 죽었거나."

"네. 다만 모두 죽었을 가능성은 배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새들이 싸움의 흔적을 발견했을 땐 이미 시신이 없다 했으니, 누군가 치웠다고 봐야 할 테니."

"네, 저하."

고개르 끄덕이던 체이스가 창에 비춰진 테일란으로부터 시선을 옮겼다. 창밖의 분수를 바라보던 체이스의 입이 다시 열렸다.

"브리센 후작가는."

"네. 아직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생각보다 느리네."

다시 잠시 생각에 잠겼던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

"네."

테일란은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는 체이스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체이스가 전날 만났던 란델을 떠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란델 왕자는 아직 아닌 것 같고······."

체이스는 란델이 칼리안에게 무엇을 이야기했는지까지 알지는 못했다. 다만 텐실의 왕이 된 그의 성향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베른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란델이 다른 두 형제를 어떻게 여기고 있을지 짐작하는 것은 체이스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란델은 칼리안에게 당장 검을 보낼 만큼 구석으로 몰리지 않았다.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할 인물은 아니었다. 이번 일에 대해 란델이 아는 것이 없으리라는 것도.

"그렇다면 누굴까."

창문에 비춰지는 체이스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 * *

"소문을 좀 냈으면 좋겠는데."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침대에 기대 앉아 있던 칼리안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대한 소문 말씀이십니까."

"응. 나 사라졌다고."

소문이라는 것에는 완전히 관심을 끄고 살아왔던 드미레아의 질문에, 칼리안은 당장 다시 정신을 놓아도 이상할 것 없을 안색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짖궂은 얼굴로 대답했다.

귀족들이 소문을 얼마나 신경쓰는지 가장 잘 아는 것은 칼리안이었다. 그들의 명예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니까. 때문에 칼리안 역시 지금까지 몇 번이고 거짓 소문의 힘을 이용해먹지 않았던가.

"브리센 후작이 더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침대 옆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플란츠를 잠시 쳐다봤다.

조금 전 플란츠는 마지막으로 칼리안과 만난 뒤부터 지금까지 있던 일을 모조리 칼리안에게 주입시켰다. 무도회 자리에서 에반을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때문에 에반이 이번 일을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할 것이라 판단한 칼리안은 다시 한번 소문의 힘을 빌기로 했다.

"후작이 가만히 앉아서 서신만 보내면 너무 조용하잖아."

"브리센 쪽에 불리한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리라는 말씀이십니까."

"응. 그래야 이번 일까지 같이 퍼질 테니까."

칼리안이 들고 있던 바나나 껍질을 까며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협회의 마법사가 인근에 있을테니 전달해 두겠습니다."

"협회에서 나섰을 거라고 얘기를 했던가, 내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잘 알고 있네."

"칼리안 왕자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알아서 나설 이들 아닙니까."

얼마 전에 평생 똑똑한 것을 다 써버린 얀과 너무 다른 드미레아의 모습을 보며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나저나 새끼 코끼리가 또 징징대고 있겠네. 나 일어난 것도 전해달라고 얘기해줘."

드미레아가 잠시 웃는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고마워, 드미레아."

정말 여러모로 신세를 지고 있었다.

방패에 대한 내용은 명분일 뿐이었으니 이렇게 대문까지 걸어 잠그며 나서주는 것은 동맹에 따른 결정이라기보단 드미레아가 일방적으로 칼리안을 도와주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대가는 나중에 다 받을 겁니다. 비싸게요."

그리고는 쌓여 있는 바나나 껍질을 가리켜보이며 덧붙였다.

"바나나값까지."

"아, 바나나 좀만 아껴먹을걸."

"공짜 아니니 마음껏 드십시오."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드미레아는 간단한 인사 후 밖으로 나갔다. 저택 주변 어딘가에 숨어있을 에우리아의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드미레아가 나간 뒤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다만 그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기 전에 플란츠가 먼저 말했다.

"필요없다."

"네."

이번에도 고맙다는 말은 그냥 때려치운 칼리안이 마지막 남은 바나나 하나를 플란츠에게 들어보였다.

"형님 드시겠습니까."

"아니."

"네."

같은 말 두 번 안하는 칼리안은 같은 권유도 두 번 하지 않았으므로 고개를 끄덕이며 바나나를 까먹었다. 그리고는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 대사막의 전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아직 드미레아에게 알리지 못할 내용이었다. 란델이 사용한 것과 비슷한 느낌의 그 힘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란델 형님께서 사용하셨던 힘을 대할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러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이가 하나 마법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이가 넷이었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 검사였고 다섯 모두 치유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사막의 전사들이 신력을 썼다는 소리인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플란츠가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뜨며 물었다.

"신력이라고 불러도 된다면요. 사실 이번 일의 배후에 텐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란델 형님과 별개로 그들이 따로 나선 것은 아닐까 하고요."

지금껏 알려진 정보는 명백하게 텐실을 지목하고 있었다. 적당한 명분도 있었다. 란델의 앞길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바로 칼리안이었으니까.

만약 란델이 카이리스의 국왕이 되면 텐실에 그보다 더 큰 이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란델과 별개로 칼리안의 목숨을 노려볼 법 했다.

"내 아우님이 워낙 특출나시니."

플란츠의 말에 잠깐 웃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능한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의심은 접어뒀습니다. 아무리 대사막과 손을 잡았다지만, 일이 틀어질 경우 즉각 전쟁으로 번질 일을 과연 텐실이 저질렀을까 싶어서요."

"그래."

"그렇다면 누구일까······ 생각나는 이들이 따로 없네요. 저는 형님과 달라서 수도에서 공격 당할 만큼 나쁜짓하면서 살지는 않은 것 같으니 말입니다."

"짖지 말고."

농담처럼 덧붙인 말에 따라온 플란츠의 반응을 본 칼리안이 씩 웃었다.

그렇게 이런 저런 가능성을 따져보며 고민에 빠져 있는 칼리안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생각 그만 하지."

배터지게 바나나를 먹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고는 있다지만 곧 죽을 얼굴을 한 채였던 탓이다.

"네."

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 후 칼리안은 하루를 꼬박 더 보낸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 그 사이 에우리아가 충실히 퍼뜨린 소문에 결국 브리센 후작이 찾아와 한 차례 으름장을 놓은 뒤 돌아갔다.

그렇게 닷새가 더 지나자 카이리시스는 온통 칼리안의 실종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찼다. 칼리안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매일같이 왕궁을 찾았고 르메인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놈들이 움직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 불러줘."

다섯 놈 상대하고 죽을 뻔했다.

미쳤다고 혼자 가겠나.

제자 사랑 가득한 앨런 마나실의 실력을 볼 때가 온 것이다.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