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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7)

이대로 체르밀 궁에 들어갈 것인가.

방향을 돌려 헤이시아 궁에 들어갈 것인가.

모두 아니라면 브리센 저택으로 돌아갈 것인가.

에반은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한참을 서 있었다.

앨런의 아랫사람에게 에반의 부하가 졌다거나 앨런 본인에게 말과 기세 모두에서 크게 밀려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두 가지도 자존심이 크게 상하고 화가 나는 일임은 맞았으나 그보다는 앨런의 마지막 말이 그의 심경을 건드리고 있었던 탓이 더 컸다.

-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누구를 믿고 또 무엇을 바라고 여기 오려 했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앨런이 건넸던 말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변경백인 그레이가 대체 왜 수도에 왔는가.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은 하나였다.

'실리케.'

레넌이 브리센을 버리고 란델을 선택한 것처럼 실리케가 에반을 버리고 그레이와 손을 잡으려 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퍼져나온 소문에 정신을 온통 팔려서는 정작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이런 사실을 하필 앨런의 입을 통해 상기하게 되었으니 그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을 또 가르치려 든 마법사의 목소리와 얼굴을 지워내기 위해 에반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곧 에반의 눈이 자연스럽게 헤이시아 궁을 향했다.

'네가 기어이 나를!'

에반이 감아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자식이 아비를 쳐내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에 대한 분노였다.

에반은 지금 당장 헤이시아 궁으로 달려가려는 발을 붙들어맸다.

그렇게 간신히 화를 삼켜낸 에반이 다시 고개를 돌려 체르밀 궁을 쳐다봤다. 플란츠가 있을 곳을 살펴보려던 에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섣불리 만나면 안된다.'

사실은 플란츠와 실리케의 관계가 어떤지를 확인하려 찾아온 길이었다. 만에 하나 자신이 실리케를 궁 밖으로 내보낼 경우 플란츠가 영향을 받을지를 알고자 했다.

제 어미를 내쫓았다며 브리센과 척을 질 듯 하다면 플란츠를 왕으로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레넌을 꺼내주고 브리센 전체가 란델의 손을 들어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실리케가 에반을 배신했다면 플란츠가 누구의 편인지를 완벽하게 파악한 뒤에 만나야 했다. 그러니 일단은 이 준비되지 않은 만남을 미루기로 에반은 그렇게 결정을 했다.

그리하여 결국 에반은 발을 돌렸다.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로 작은 성과도 같은 브리센의 거대한 저택으로 돌아간 것이다.

실리케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 쏴아아아······.

그리고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 *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과 창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 그 너머로 발길을 돌리는 에반의 모습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방향을 보니 왕궁 밖으로 나가려는 듯 하네요."

"그나마 가장 현명한 판단을 하였습니다. 같은 싸움을 또 걸어오기에 영 머리가 나쁜 줄로 알았는데, 그래도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는 모양입니다."

이러한 앨런의 말을 들은 칼리안은, 에반을 함께 비웃는 대신 자신조차 오싹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던 앨런의 피어를 떠올렸다.

"조금 전에는 정말 굉장하셨습니다. 그 정도의 기운은 저도 처음 겪어봤습니다. 아, 물론 시스파니안을 제외하고요."

앨런은 에반의 앞에 서 있던 사람과 같은 이가 맞을까 싶을 만큼의 상냥한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놀라기는 했습니다. 스승님의 앞에 있던 것이 제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키리에는 아예 숨도 못쉬던데요."

칼리안은 그 기싸움에 대한 감상을 여기까지만 전했다.

자신이 에반의 오러를 느낄 수 없었음을 그러니 당장은 에반이 자신보다 강하리라는 말을 앨런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다. 괜한 걱정을 끼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수는 것은 참 잘하는 칼리안이 아니던가.

가로막는 벽이 있으면 부술 힘을 더 키우면 되는 일이니까.

"혹 제가 물러났어야 했을지요?"

재미있는 것을 눈 앞에 둔 듯한 칼리안의 웃음을 어찌 해석했는지 몰라도 앨런이 이렇게 물어왔다.

이 말을 아마 르메인이 들었다면 분명 능구렁이 같은 질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칼리안이 무슨 대답을 할지 알면서 묻는 말이니 말이다.

굳이 제자의 칭찬을 받고자 하는 기대감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앨런에게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스승님. 아주 잘 하셨습니다. 어차피 알리려 했던 정보이기도 했으니까요."

세상에서 무서울 것 하나 없을 이 대마법사가 왕자의 칭찬을 받고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터였다.

"마법은 모르겠지만 입으로 스승님을 이길 자는 이 땅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칼리안이 진심을 담아 덧붙인 말에 앨런은 세상에서 가장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마법은 누가 가르쳐 줄 수나 있지.

입을 놀리는 것은 누구에게 배울 수도 없는 능력이 아닌가.

"제 입이 세상 어디에서도 적수가 없을 입이기는 하지요."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한참을 웃었다.

잠시동안 칼리안의 웃음이 끝나길 기다린 앨런이 화제를 바꾸었다.

"아무튼 이제 저들의 사이가 보기 좋게 틀어지겠군요."

칼리안은 그레이에게 실리케가 레넌의 손을 잡을 것이라 언질을 주었다.

그리고 앨런은 에반에게 실리케와 그레이가 협심하여 후작위를 빼앗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겉으로는 셋이 서로를 의심하고 견제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들춰보면 아니죠."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겉으로는 셋이 힘겨루기를 하는 듯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레이와 에반 모두에게 공통된 적이 생긴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바로 실리케다.

"실리케가 어찌 나올지. 궁금하네요."

같은 것이 궁금하다 여기며 고개를 끄덕이던 앨런이 문득 떠오른 다른 의문을 꺼내들었다.

"그럼 왕자님께서는 이제 무엇을 할 요량이십니까?"

"가보려고요. 궁금증 풀러."

"가보다니······."

앨런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설마 실리케와 독대를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내일 쯤 만나볼까 하고 있습니다. 빠르다면 내일 중에 그레이에게 보낸 이들이 전해온 소식이 도착할테니 그레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좀 떠볼 겸 해서요."

앨런이 손가락을 들어 귀를 후비적거렸다.

"누가 또 오늘만 살 것처럼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칼리안이 씩 웃었다.

지금 앨런은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또 독차를 내어줄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런 수에 당할 칼리안이 아님을 알았으니까.

그저 실리케를 만난 칼리안이 화를 참지 못하고 또 무슨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사고 치러 가는 것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레이와 에반이 실리케를 경계하기 시작하니 실리케는 그 둘이 아니라 저에게 집중하게 만들어 놔야죠. 그래야 자신의 처지를 잊고 무모하게 움직일 테니까요."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앨런이 참 잘 아는 방법이기도 했다.

사람 속 뒤집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왕자의 말에 사람 비꼬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스승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맞이할 사람이나 찾아올 사람이나 서로 미리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오늘 밤에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때문에 이 추운 밤에 창문을 연 채로 방문객을 기다리던 칼리안은, 테라스에서 난 '툭' 하는 작은 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자신이 앉아있는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켜보였을 뿐이었다.

"앉으십시오."

고작 두 번 만에 플란츠의 방문이 익숙해지다니.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마도 플란츠 역시 칼리안의 방에 이런 식으로 또 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터였다. 오전에 느껴진 짙고 짙은 살기에 창문 밖을 내다 보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칼리안의 맞은편에 털썩 앉은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아침에 마법사가 기사를 내쫓는 것이 보이던데."

"스승님과 브리센 후작의 기싸움을 알아보셨습니까. 전하께서 형님의 검술 실력을 칭찬하시기에 반만 믿었는데. 과언은 아니셨나 봅니다."

플란츠는 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이 닿는 곳에서 칼리안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으므로 하루 종일 고민을 했을 것이 뻔했다.

앨런과 에반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왜 둘이 그런 싸움을 벌였는지. 그리고 에반은 왜 다시 돌아갔는지.

"후작과 혹시 자주 만나십니까."

칼리안은 플란츠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궁금한 것을 먼저 물었다. 이 대화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플란츠는 자신의 질문을 무시하고 건네진 칼리안의 물음에 대답을 해줄 수 밖에 없었다.

"따로 대면했던 적 없는데."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플란츠를 따로 만난 적 없었다는 그 말에 에반의 심경 변화를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실리케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까지는 몰랐어도 실리케를 먼저 버릴 생각을 하고는 있었던 것이군.'

상황을 조금 더 파악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형님의 집안이 워낙 화목했던지라 그리 많은 것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곧바로 골이 생기는군요."

플란츠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대체로 그 눈에 빛이 돌지 않는 모습만 보아 왔던 칼리안은 문득 생소한 느낌을 받았다.

칼리안은 그에 대해 별다른 티를 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일 때문에 후작이 형님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형님 의중을 확인하려고. 그러다 제 스승님과 마주쳤고, 사소한 자존심 싸움이 있었고, 그냥 돌아간 겁니다. 그러니 형님의 어머니가 물러나는 것만을 바라신다면 굳이 제 편을 더 들어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두시면 후작이 알아서 형님의 어머니를 끌어내리고 형님을 카밀론에 보낼 준비를 할 테니까요."

플란츠는 지금의 말에 대해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칼리안의 말이 끝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 계속 해보라는 듯 고개만 살짝 움직였다.

"그러니 형님의 어머니만 배척하고 왕이 될 생각이 있다면 에반을 만나십시오. 만약, 형님의 어머니가 있든 없든 상관 없이 카밀론 궁에 가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저는 갈 생각이 있으니 겸사겸사 제가 돕겠습니다."

플란츠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이미 대답을 한 줄 알았는데."

그것은 칼리안의 손을 잡을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는 플란츠 나름의 명확한 대답이었다. 실리케가 있든 없든 왕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칼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카이리스와의 전쟁에서 죽은 뒤 카이리스에서 되살아나서.

아르센을 거느리고 플란츠와 손을 잡을 상황에 놓였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신이 목숨을 바쳤던 형을 대신해 앉아 있는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형을 보면서.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플란츠는 고개를 한번 더 움직여 보였다.

입을 다물고 숨을 고른 칼리안이 한참이 지난 뒤 물었다.

"실리케. 이번에는 정말 최악의 선택을 할 지 모릅니다. 제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 생각이라서."

'형님의 어머니'라는 길고 긴 표현을 집어치운 칼리안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악의 선택.

플란츠의 눈이 깊이 잠겨들어갔다.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저는 실리케를 구제해 줄 생각이 없습니다. 제 손을 잡겠다면 제대로 각오하고 잡으십시오."

실리케를 위한 레니시타 잎이 광장에 깔리더라도 내 손을 계속 잡을 수 있겠느냐고. 칼리안은 그렇게 물었다.

플란츠의 입에 깊은 조소가 어렸다.

그것이 누구를 향한 비웃음인지는 플란츠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열어 둔 창문 사이로 거센 빗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내 어머니가 그리 애써가며 걸어간 길에."

르메인의 검에 죽든.

에반 브리센의 손에 죽든.

혹은 광장에 선 죄인으로 죽든.

"그것 말고 다른 끝이······ 있기는 할까."

플란츠는 담담하려 노력하는 것이 분명한,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정없이 휘청거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플란츠와 완전히 손을 잡았다.

제16장. 내가, 당신에게 (1)

분명한 것은 얀이 어딘가 많이 허술하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바로 옆에서 칼리안을 보필하는 것이 얀의 일이다. 칼리안의 몸에 베른의 영혼이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칼리안이라는 사람의 옆에는 얀이 있었다.

그런데 얀은 칼리안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얀이 칼리안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얀은 칼리안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칼리안의 습관 하나 취향 하나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이런 얀이 의심을 안하니 오히려 불안하게 여길 수 밖에.

때문에 얀이 어째서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항상 안고 살았던 칼리안은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다.

"플란츠가 너한테 칼을 던졌던 게 기억이 안나?"

"칼을 던진 것은 알죠. 그런데 저한테 던진 것이었던가요?"

얀은 그냥 바보였다는 것을.

플란츠와 대화를 나눈 다음 날 오전.

서서히 그쳐가는 비를 보며 실리케를 만나러 갈 준비를 마친 칼리안은 플란츠와의 일을 얀에게도 설명해줘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다보니 오래 전 조찬에서 플란츠가 얀에게 나이프를 던졌던 일이 생각났다.

슬레이만이나 얀은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얀은 공작가의 귀한 자제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의 그 행동에 대해 얀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얘기를 꺼내려 했다. 그런데 얀은 플란츠가 바로 자신을 향해 칼을 던졌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분명 그날 얀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나이프를 피하면 플란츠가 더 화를 낼까봐 그냥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 얀에게 날아가던 나이프를 붙들어 잡은 칼리안이 손을 다쳤다.

아무리 햄이나 자르는 무딘 칼이라지만 그래도 자칫 크게 다칠 뻔했던 일이다. 그러니 그 정도는 당연히 기억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아니, 어떻게 너한테 나이프가 날아온 것을 쏙 빼먹고 그 나이프에 내가 다친 것만 또렷이 기억을 하는 거야."

"아직도 왕자님 손에 흉이 남아있잖아요. 그 일만 생각하면 제가 얼마나 화가 치미는지······!"

"그래. 알았으니까 화내지 마."

결국 칼리안은 전날 플란츠와 나누었던 유쾌하지 않은 대화 때문에 감정이 얽혀있던 것도 잊은 채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도 언제 또 얘기를 나누게 되면 너한테 제대로 사과해달라고 할게."

"얘기를 나누다니요?"

"손잡기로 했어. 플란츠와."

"란델 왕자님이 아니라 플란츠요?"

"그래."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플란츠가 실리케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말씀이세요? 그럴 이유가 없을텐데요."

"아니. 그건."

그렇게 입을 뗀 칼리안이 잠시 플란츠를 떠올렸다.

플란츠는 실리케가 자신을 왕으로 만들겠다며 벌이는 악행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왕이 되지 않기 위해 온갖 기행을 해왔던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 실리케가 포기하리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실리케는 그런 일로 제 욕심을 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 마법사 협회에서 공개했던 자료를 플란츠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실리케가 얼마나 많은 목숨을 빼앗아가며 자신을 키워왔는지를 제대로 알았으리라.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물론 처음부터 실리케를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르메인의 말을 가로채면서까지 실리케를 보호하려 나서던 플란츠가 아닌가.

그러나 결국에는 죽음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실리케를 막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리라.

"마음을 접은 거야."

칼리안은 자신이 예상한 내용을 입에 담는 대신 짧게만 대답했다.

따라서 본래에도 사람 속 읽어내는 재주가 별로 없는 얀은 플란츠의 마음이 바뀐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때문에 얀은 칼리안과 플란츠의 관계가 이전과는 조금 달라지게 되었음을 그리 탐탁지 않아 했다. 다만 칼리안에게 그런 거부감을 드러내어 알리지는 않았다.

"그럼 그 동안 왜 그렇게 왕자님을 괴롭혔다고 합니까."

"안 물어봤어."

얀을 멀뚱히 쳐다보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옛 칼리안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플란츠가 칼리안을 괴롭힌 것은 오로지 다른 이들이 함께 있을 때 뿐이었다. 플란츠가 얀에게 칼을 던졌던 바로 그 날에도 란델이 오기 전에는 조용히 있지 않았던가.

그런 것들에 의거하여 괴롭힘의 이유도 가늠해 볼 만 했으나 칼리안은 그렇게까지 해가며 플란츠를 포용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한들 플란츠를 이해하고 용서할지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옛 칼리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니까.

이미.

늦었으니까.

"서로 쌓인 것을 털어놓고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려고 손을 잡은 것이 아니잖아."

이번에도 칼리안은 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간단하게만 얘기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실리케를 만나러 가려는 것이다.

"실리케를 따로 보셔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마. 별 일 없을 거야."

얀의 얼굴에 다시 걱정이 들어찼다.

칼리안은 그런 얀의 얼굴을 못본 척 말했다.

"다녀올테니 스승님께 가서 오늘 귀가 전에 잠깐 들러주시라고 전해줘."

그 말에 담긴 다른 뜻 때문에 얀은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헤이시아 궁에 혼자 가시려는 것은 아니죠?"

"혼자 갈 거야. 실리케의 그 얼굴을 또 보는 건 나 하나면 족할 것 같아서."

"거길 혼자가신다니요. 저와 같이 가세요.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앨런은 칼리안이 사고를 칠까봐 걱정하고 얀은 칼리안이 사고를 당할까봐 걱정하고.

"걱정 말라니까."

과한 걱정들을 뒤로 하고 칼리안은 제 고집대로 혼자서 실리케가 있는 헤이시아 궁으로 갔다.

* * *

실리케의 손에는 작은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에게 보낸 시녀가 변경백령에서 왕궁으로 다시 출발하기 전에 보낸 전서구였다.

편지를 들고 있는 실리케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편지를 쥔 손은 핏줄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로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 변경백을 멀리서 보았을 때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심신의 안정이 매우 중요한 상태라 하여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성의 하인들을 탐문해 보았으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멀리서 보았다. 대면하지 못했다. 입을 열지 않는다."

-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며 이만 돌아가 주기를 청했습니다.

"돌아가라."

편지의 내용을 읊조리는 실리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른 새벽에 전해진 그 편지를 실리케는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 돌아가라."

왕비가 보낸 사람을 대할 때에는 충분히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심지어 실리케의 오빠라면 이런 내용이 예법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응당 그렇게 접대해 주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전해진 내용을 보면 그레이를 찾아간 시녀를 완전히 무시하며 불청객과 다름 없는 취급을 했다는 말이 아닌가.

"크게 다친 곳은 없는데 돌아가라 하였다."

실리케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지금 시녀장은 몇 시간 째 실리케의 옆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녀장은 힘든 것을 느끼기는 커녕 실리케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금 실리케가 이 온실의 르니에리 화분을 전부 깨뜨렸던 그 날 만큼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온실 밖에서 한 시녀가 들어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시녀장에게 말을 전했다.

"지금······ 칼리안 왕자님께서······."

하필 지금 칼리안이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따로 없었다.

물론 전날 미리 약속을 잡았던 것은 맞았다. 하지만 지금 실리케가 칼리안을 만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가늠이 어려웠다.

때문에 시녀장은 조용한 목소리로 실리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칼리안 왕자와의 약속은 다른 날로 바꾸도록······."

"아니다."

약속을 미루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시녀장의 말을 이렇게 가로막은 실리케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꽉 쥐고 있던 편지를 비로소 손에서 놓았다. 그것을 시녀장에게 건넨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 하거라."

"네, 왕비님."

실리케의 말을 들은 시녀장이 서둘러 온실 밖으로 나가 칼리안과 함께 다시 들어왔다.

- 뚜벅, 뚜벅.

칼리안의 구두 소리가 온실 안을 조용히 울렸다.

"따로 보는 것은 오랜만인 것 같군요."

곧 칼리안이 실리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실리케의 눈을 보며 인사를 건넨 뒤, 바로 그 날과 같은 표정을 하며 웃었다.

"실리케."

실리케가 실소했다.

칼리안이 또 자신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이 없구나."

곧 시녀 한 명이 따라 들어와 커피 두 잔을 놓고 나갔다. 그리고 실리케는 시녀장을 향해 나가 있으라는 제스처를 했다.

주변이 비워진 뒤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방문에 그리 반가운 마음이 들지는 않는구나. 무슨 일로 찾아왔니?"

"줄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짧게 대답한 칼리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 탁!

지난 번에는 설탕처럼 생긴 독약을 내려놓더니.

칼리안이 꺼내둔 것에 묻어 있는 얼룩을 본 실리케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지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검게 마른 핏자국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실리케에게 매우 낯이 익은 것이기도 했다.

실리케가 직접 테일에게 건넸던 돈 주머니였기 때문이다.

"테일이라고 했던가. 그 자가 가지고 있었다 하더군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쳐다봤다. 이미 죽은 이의 피가 잔뜩 묻은 것을 손으로 만지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꽤 큰 돈이 들어 있던데."

그렇게 말한 칼리안은 주머니를 다시 닫은 후 그것을 실리케 앞으로 툭 던졌다.

자신의 커피잔 바로 옆에 떨어진 주머니를 본 실리케가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헤르츠 경이 당신 오빠 마차를 땔감으로 만드는 바람에 내가 물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변경백령에 사람을 보내기는 싫고. 혹시 변경백을 만나거든 당신이 대신 좀 전해줬으면 합니다."

실리케가 테일에게 건넨 돈을 칼리안이 주워오더니 그레이의 마차값이라며 실리케에게 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본래 당신 돈이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테일을 보낸 이가 실리케라는 사실을 이미 확신하는 말투였다.

실리케가 한쪽 눈썹을 살짝 움직이더니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죠. 그날 테일을 만난 것도 기억나지 않을테고."

실리케의 말을 자른 칼리안은 담담한 얼굴과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헤르츠 경을 적당히 잡아다가 그레이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오라 한 적도 없을 겁니다."

실리케의 웃음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리고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기억나지 않는구나."

그 말에도 칼리안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실리케는 지금 칼리안이 테일의 일을 두고 자신을 협박을 하러 온 것인지 다른 이유로 온 것인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분명히 아는 것은 단 하나. 앞에 있는 칼리안이 지나치게 거슬린다는 사실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내게서 가져간 것은 고작해야 기사단 하나란다. 하나를 빼앗았다고 꽤 기고만장해진 모양이다만. 나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그리 작은 사람이 아니란다. 그러니 건방진 행동은 그만했으면 좋겠구나."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정말로 우스운 것을 보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실리케를 쳐다봤다.

"그렇게 큰 사람이라는 분이 굉장히 안좋은 일이라도 있는 얼굴을 하고 있군요."

"그리 보이느냐."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와서 그런 것인지."

실리케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순간적으로 그레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칼리안이 똑같이 차가워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 아니면 새가 와서 그런 것인지."

새······!

실리케의 눈빛이 바뀌었다.

칼리안은 그레이로부터의 전서구를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했다. 실리케의 머릿속에 빠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제 집으로 돌아간 변경백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변경백은 카이리시스로 오던 중 연락을 끊었다. 엔디시아 영지에서 새로운 마차를 구입하느라 일정이 지연된다는 연락을 한 것이 마지막. 그런데 마차를 새로 사야 했던 이유는······.'

레딩턴에서 칼리안과 그레이가 대치했고 지금은 실종된 아르센 헤르츠라는 마법사가 그레이의 마차를 부숴놓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졌었다.

하지만 그 뿐.

그레이는 그 길로 레딩턴 성에서 나왔고 칼리안은 그 곳에 사흘을 더 머물렀다 했었다. 그레이가 연락을 두절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그 사이에 둘이 무슨 일이 있었구나.'

이렇게 상황을 따져보던 실리케의 귀에 재밌어하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이 복잡해 보이시니 보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요."

"변경백에게 무슨 수를 쓰기는 한 모양이구나. 너를 도와주면 무슨 대단한 것을 주겠다는 약속이라도 하였느냐?"

그렇게 입을 연 실리케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네가 줄 만한 것이 있을까 모르겠다만."

제대로 잘못 짚었다.

칼리안은 그저 실리케가 에반과 그레이로부터 눈을 돌려 자신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앞뒤 안가리고 칼리안을 없애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기 위해 왔을 뿐이니까.

칼리안이 대답하지 않자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여긴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를 얻었다고 신이 난 모양이지만.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착각하지 말거라."

그 후에는 예전의 그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어미도 그랬단다. 널 낳고 어찌나 신이 나 있던지."

"아, 참."

칼리안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프레이야를 언급했으나 칼리안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자르자 실리케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제 어머니를 얘기하시니 문득 궁금했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방금 전 실리케의 말을 듣고 어떤 의문이 떠오른 것이다. 그레이에 대한 이야기보다 조금 더 실리케를 자극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그런 의문이었다.

때문에 그레이에 대한 말을 잠시 미루고 새로운 질문을 먼저 꺼내기로 한 칼리안이, 여유로운 동작으로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실리케를 응시했다.

그리고 물었다.

"전 왕비 아이샤는 정말 병사한 것이 맞습니까."

그런 실리케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칼리안이 작게 입을 열었다.

낮은 중얼거림 혹은 속삭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아니구나."

실리케의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제16장. 내가, 당신에게 (2)

칼리안과 실리케가 대면하던 시간.

에반 브리센 후작이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꽉 쥔 주먹에서 한 방울의 피가 뚝, 떨어졌다.

하룻밤.

그는 꼬박 하룻밤 동안 자신의 침실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어제 왕궁에서 앨런과의 일전을 치르고 그 와중에 실리케의 배신을 알게 된 에반이었다. 때문에 에반은 매우 예민해진 상태로 저택에 돌아왔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화를 다스리며 하루를 보내던 중 르메인이 보낸 이들이 저택을 찾았다.

바로 국왕 친위대인 카에라였다.

'하필 카에라를 보내다니.'

사실 에반은 왕궁의 기사들이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썩 좋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었다. 다른 이들도 아닌 카에라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르메인을 두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그 누군가가 국왕의 안위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 자일 때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르메인이 아르센을 찾겠다며 카에라를 보냈다는 것은 발칸 부군단장의 실종이 르메인의 안위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아직 정식으로 창단되지도 않은 발칸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분명히 보여주기 식 방문일테지.'

즉 르메인은 이번에 에반의 집을 조사하라며 카에라의 기사를 보내는 행동을 통해 발칸이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어떤 목적의 군대인지를 널리 알리려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계획적인 움직임에 자신이 쓰였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카에라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저택을 수색하라는 왕명을 받고 왔습니다."

에반의 앞에 선 기사.

카에라의 기사단장인 렌 아드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렌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말하지 않았다.

에반을 향해 예를 보이지도 않았다.

에반은 렌이 언제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노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네 놈.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죄인 취급인 것이냐."

범죄자 그것도 카에라가 직접 움직여야 할 만큼 르메인에게 큰 피해를 입힌 범죄자를 대할 때의 표정을 한 렌이 짧은 대답을 전했다.

"왕명, 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내는 것은 비단 렌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기사들도 모두 완전히 무장하고 있었고 표정들이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제야 에반은 자신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카에라의 방문은 '보여주기 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껏해야 자신을 찾아와 몇 마디 묻고 갈 것이라 생각을 했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곧 렌이 기사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에반의 허락은 구하지도 않았다.

렌의 손짓을 따라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 이들은 아르센 헤르츠라는 마법사를 찾으러 왔을 텐데 기사들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작은 동전이라도 찾으러 온 것처럼 온 저택을 뒤져나갔다.

결국 더 참지 못한 에반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내가 그 마법사를 이 곳에 숨겨두기라도 했다는 말이더냐!"

에반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면서도 렌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기다리십시오."

그 한 마디와 함께 렌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 중 두 명이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에반을 침실로 안내했다. 에반은 당장 검을 들어 그들을 베지 않기 위해 인내해야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상황에 에반이 가장 먼저 생각한 이가 르메인이 아닌 실리케였다는 사실이었다.

실리케가 그레이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해괴한 소문에 자신이 얽혔기 때문에.

실리케가 배신을 했기 때문에.

카에라의 기사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고도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실리케."

에반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수색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끝났다.

에반의 저택이 워낙 컸고 카에라의 수색이 상상 이상으로 꼼꼼했던 탓이었다.

그나마 에반에게 있어 한 가지 다행이었던 일은 레넌을 숨긴 곳은 들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수 장치로 잘 숨겨두었던 지하실 입구는 발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상 없는 것 확인했습니다. 쉬십시오."

렌은 이런 짧은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기사들이 떠난 후 에반에게 남겨진 것은 어질러진 저택, 그리고 분노였다.

* * *

에반이 한참 화를 내고 있던 바로 그 시간.

뚱한 얼굴로 창 밖을 보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정말 저를 위한 일이 맞을는지요?"

그리고는 붉게 충혈된 눈을 부비적거리며 긴 하품을 했다. 갈수록 방만해지는 앨런의 태도에 잠시 혀를 찬 르메인이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안경을 찾아 쓰며 대답했다.

"배부른 소리를 하는군."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하나 집어들고 읽어내려가기 시작하는 르메인을 향해 앨런의 대꾸가 이어졌다.

"도무지 올 생각을 않으니 의심을 하는 것이지요."

"아드리안 경이 꼼꼼한 성격이기는 하지."

지금 앨런은 카에라의 기사단장인 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렌이 빨리 와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꼼꼼한 것이 아니라 오다가다 죽은 것이 아닌지를 걱정해야 할 판이 아닙니까?"

전날 오후. 자신의 집무실에서 얌전히 일을 하고 있던 앨런은 르메인의 집무실 주변을 구석구석 호위하던 기사들이 반 이상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깜짝 놀라 르메인의 집무실로 찾아가니 태평한 얼굴의 르메인이 이런 말을 했다.

"카에라를 내보냈으니 올 때까지 내 뒤를 부탁하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찾아온 사람에게 자신의 업무를 계속 넘겨주더니 이제는 시시때때로 호위까지 맡기려는 르메인에게 앨런이 넌지시 물었다.

"이번에는 전하께서 후작의 집을 부술 요량이십니까?"

"수색이라 설명을 하였는데."

"하셨지요. 그런데 그 수가 누군가의 집을 수색하겠다는 인원이라기보다는 부수겠다는 인원이니 하는 소리 아닙니까."

"경고의 의미를 담은 수색이지. 마찰이 있을까 우려되기도 하고. 그러다 좀 부서지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나."

앨런이 웃었다.

"전하께서 누군가에게 화풀이도 할 줄 아시는 분이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제 알았겠군."

물론 렌은 모르고 출발했지만 아르센은 여전히 앨런의 집에서 유유자적 노닐고 있었다. 다만 외부에는 아르센이 실종 상태였으므로 처음 르메인은 아르센을 찾는 척 적당히 장단만 맞춰 줄 생각이었다.

그러다 카에라가 출발하기 조금 전에 마음을 바꾸어 그렇게 많은 인원을 보내 후작의 집을 아예 샅샅이 뒤지도록 한 것이다. 앨런의 말마따나 화풀이였다.

르메인이 화풀이를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낮에 앨런과 에반이 주고 받은 설전 때문이었다.

"아무리 임시직이라고는 해도 그대는 발칸의 군단장이 아닌가. 그런 그대를 무시하고 들었다 하니 이 참에 발칸이 어떤 군대인지를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네. 그래서 '수색'의 수위를 높였고."

물론 평소였다면 수색을 핑계삼아 에반에게 경고를 보내는 일을 절대 할 수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지 않은가. 따라서 앨런은 이참에 르메인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알려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허······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나서서 제 복수를 해주시겠다 하니, 기사들이 돌아올 때까지는 여기에 있지요."

앨런은 더 이상의 다른 말 없이 르메인의 소파에 앉아 렌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고 결국 밤이 지났다.

그 뒤 아침이 오도록 렌은 돌아오지 않았다.

슬슬 렌이 에반의 집 주춧돌까지 들춰보고 오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될 때 쯤.

- 똑똑.

비로소 렌이 돌아왔다.

밤새 무엇을 그리 뒤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렌은 다소 피곤한 얼굴로 들어와 르메인에게 보고를 전했다.

"헤르츠 경은 찾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무언가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저택의 지하에 사람 한 명이 갇혀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레넌 브리센으로 추정됩니다."

이 꼼꼼한 기사단장은 비밀통로의 입구를 열어 레넌이 감금된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원 상태로 돌려두었다. 그리하여 에반 모르게 레넌의 위치를 알아내 온 참이었다.

쓰일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의외의 소득인 것은 맞았다. 때문에 르메인은 수고했다는 말을 전한 뒤 렌을 내보냈다.

"경은 리베른에서는 자작위를 받았다 했던가."

리베른에 있을 때 앨런의 작위를 묻는 것이었다. 다소 뜬금 없는 질문이었으나 앨런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딜 가든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지만 세크리티아에서는 남작이기도 하고 리베른에서는 자작이기도 하지요."

워낙 한 나라에 묶여있질 않았으니 가는 곳마다 작위를 주며 앨런을 붙들어두려 했던 결과였다.

정작 본인은 작위 같은 것에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지냈던 앨런이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래도 카이리스 3왕자의 스승인 앨런 마나실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그 말에 르메인이 피식 웃으며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집어들었다.

"그 입이 내 마음에 드는 말을 할 줄도 아는군."

"능력 좋은 입이니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런 대답을 끝으로 앨런은 이제 슬슬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서류 너머로 그 모습을 흘끗 본 르메인이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카이리스에서는 3왕자의 스승이자 백작인 앨런 마나실로 하지."

에반이 무엇을 빌미로 앨런에게 시비를 걸었을지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앨런의 위치에 맞는 작위를 내리려는 것이다.

"······ 그런 말을 무슨 평일 아침에 날씨 얘기하듯 꺼내시는지."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 * *

전 왕비 아이샤는 병사하지 않았다.

란델은 알고 있을까.

아이샤의 죽음에 실리케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은 이내 란델은 모르고 있으리라는 결론을 냈다.

베른의 기억을 통해 란델이 텐실의 국왕이 된 이후에도 카이리스와 텐실의 사이가 특별히 나쁘지 않았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플란츠보다 란델이 먼저 내 방에 찾아와 손을 잡자 했겠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칼리안이 실리케를 축출해주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이것을 란델에게 알려줘야 할지.

혹은 그냥 두어야 할지.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기게 된 칼리안이 짧게 웃으며 실리케를 쳐다봤다. 그리고 실리케는 이미 칼리안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향한 시선을 그대로 둔 채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시계의 초침이 두 바퀴 쯤 돌았을 때,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네가 또 무언가를 오해한 모양이구나."

그 말에 칼리안의 입에 짙은 조소가 떠올랐다. 실리케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오해라."

중얼거리던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칼리안의 질문을 받고 지어보였던 표정을 실리케 스스로가 본다면 그것을 결코 오해라 할 수 없을 터였다.

칼리안은 아이샤가 죽은 원인을 확신하고 있었고 실리케 역시 칼리안이 자신을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오해를 했다 하니 웃음이 나올 밖에.

꽤 오랫동안 웃음소리를 내던 칼리안이 사납게 치켜 뜬 눈으로 실리케를 쳐다봤다.

"내가 고작 그레이 브리센 따위와 손을 잡았을 것이라는 당신의 불쾌한 착각. 그런 것을 바로 오해라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필요 없거든. 당신같은 족속들."

그 말에 실리케의 얼굴이 조금 전 편지를 쥐고 있던 손보다 더 하얗게 질렸다. 왕자로부터 반말과 폭언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실리케가 충격을 받았든 말든 칼리안은 안쓰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다시 말했다.

"그런데 내가 왔을 때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한테 필요 없는 브리센 변경백에게는 당신이 필요 없었나보네요."

"칼리안.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아주 정신이 나간 게로구나."

"당신만큼 나가진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 입에 내 어머니를 계속 담습니까.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그렇게는 못합니다."

가만히 앉은 채로 실리케의 손에 더 들어갈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텅텅 비워져 있는 온실을 쭉 둘러본 칼리안이 실리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온실 다시 채우지 마요. 당신 이 곳에 오래 못 있을 겁니다."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냉담한 얼굴로 실리케를 내려다보며 실리케의 머릿속에 오로지 칼리안의 이름만 남게 할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내가, 당신에게. 끝을 보여줄테니."

제16장. 내가, 당신에게 (3)

칼리안이 제 자리에 선 채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얀은 칼리안이 생각할 것이 많을 때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 때문에 그리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얀은 칼리안의 생각이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말 없이 서 있는 시간이 하염없이 늘어났다.

그러자 칼리안에게 깊은 상념을 준 무언가가 다시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꾸물럭거리는 느린 춤을 추며 발랄한 노래를 부르는 석상을 본 칼리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웃음을 참고 있었다.

방금 전 칼리안은 실리케와 대면을 했다는 것과 아이샤의 죽음 뒤에 실리케가 있는 것 같으니 확인이 필요하다는 말을 르메인에게 전했다. 플란츠와 손을 잡았다는 것도 자신이 플란츠에게 얼마나 냉정한 말을 했는지도 모두 르메인에게 풀어놓았다.

그런 칼리안의 말을 모두 들은 르메인은 미안한 것이 많다 대답했다.

르메인의 사과 덕에 더더욱 가라앉은 기분을 한 채로 앨런의 저택까지 온 길이었다. '밖'에서 만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앨런의 저택 현관 앞에 세워져 있던 석상이 갑자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미치겠네."

간신히 웃음을 참아낸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자 지금껏 칼리안의 기분에 맞춰주느라 함께 웃음을 참고 있던 얀이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저도 이거 처음 봤을 때 똑같은 말 했었어요."

"네가 언제 스승님 댁에 왔었나?"

그런 칼리안의 질문에 얀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지금 그들은 왕궁 밖에 있었다.

앨런의 마차를 타고 남몰래 밖에 나온 길이었으므로 얀은 시종의 옷차림도 아니었다.

그래서 얀은 잠시 시로이안 지그프리드가 되어 대답했다.

"어떤 분이 독 차가 싫다고 독약을 처드셨던 날에요."

그 날의 일에 대해 쌓인 것이 누구보다 많은 얀이었으니까.

옆에 있던 앨런은 그런 얀의 심정에 깊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뒤에 서 있던 키리에가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앨런과 아르센에 이어 이제는 얀에게까지 욕을 얻어먹은 칼리안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으니.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결국은 칼리안의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이렇게나 마음에 들어하시니 왕자님 방 앞에도 하나 놓아드리겠습니다."

"아뇨.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스승님."

칼리안이 급히 손사래를 치며 발을 옮겼다.

그렇게 간신히 들어간 앨런의 집 안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베로니카는 점심 식사를 준비중이었고 폴룬 마법 학원의 이사장이기도 한 멜피르와 그 마법 학원의 교장이기도 한 에우리아가 학원의 운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바로 옆에서 아르센이 베로니카의 마법 학원 과제를 해주고 있었다.

"무료한 마음에 제가 먼저 도와주겠다 했습니다, 왕자님."

마법학원 이사장과 교장 옆에서 학생의 과제를 마음대로 해주고 있던 아르센이 마법학원의 실질적인 주인인 칼리안을 보며 그렇게 변명같은 설명을 했다. 칼리안은 그 말을 반쯤만 믿기로 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함께 점심식사를 마친 뒤 칼리안과 아르센 그리고 멜피르와 에우리아가 응접실 테이블에 빙 둘러 앉았다.

"내가 없는 동안 다들 고생이 많으셨다 들었습니다."

카이리시스 밖에 나섰던 칼리안도 이런저런 일들을 꽤 많이 겪기는 했으나 안에 있던 이들 역시 한가하지 못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칼리안이 벌여놓고 간 일들 때문이었다.

칼리안은 더 이상 동글동글하지 않은 멜피르의 얼굴을 보며 정말 미안해했다. 제대로 쉬지 못해 그새 많이 홀쭉해진 것이다.

"레딩턴 자작이 도착했습니다, 왕자님. 좋은 분을 보내주시어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제 좀 여유가 생겼습니다."

애초에 바빠진 것이 칼리안 탓이었으나 멜피르는 이렇게 칼리안을 배려하는 말을 했다.

고개를 끄덕여 멜피르의 감사 인사에 화답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번 사냥 대회에서 기사 세력을 가진 귀족들을 만나 볼 생각입니다. 브리센의 기사들을 대신할 세력이 있는지 찾아봐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요."

그 말과 함께 얀이 멜피르와 에우리아의 앞에 종이 한 장씩을 건넸다. 그것은 바로 칼리안에게 선물을 보낸 기사 가문 귀족들의 명단이었다.

칼리안은 종이 안에 적힌 이들을 쭉 훑어 내려가는 둘을 보며 말을 이었다.

"폴룬 남작."

"네, 왕자님."

칼리안의 손이 종이를 가리켜보였다.

"그들 중 남작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신용하기 어려운 이들을 골라내 주시면 됩니다."

상단을 운영하면서 각 귀족 가문들과도 수많은 거래를 해왔던 멜피르가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네. 확인해보겠습니다."

그 후 칼리안이 에우리아를 쳐다봤다.

마법사 협회장이나 마법학원의 교장이 아닌 정보조직 보스인 에우리아의 거름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에우리아는 칼리안이 따로 말을 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브리센에 대해 조사했던 내용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브리센과 연관이 있는 이들을 명단에서 제외시켜 놓겠습니다."

칼리안이 믿음직스럽다는 눈으로 둘을 보며 고마움을 전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칼리안이 직접 한명 한명 만나가며 판단해나가는 것이었으나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칼리안은 그렇게 많은 이들을 일일이 대면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멜피르와 에우리아의 눈과 귀를 빌리려는 참이었다.

첫 번째로 얀이 걸러낸 이들 중 멜피르와 에우리아의 손까지 거친다면 꽤 믿을만한 이들만 남을 것은 분명했다. 완벽하게 걸러지지는 못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내가 마음 놓고 신용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이니.'

칼리안의 최측근인 앨런 얀 키리에. 그리고 아르센.

칼리안이 완전히 등을 맡길 수 있을 사람들이다.

그보다 조금 넓은 범위에는 지금 눈 앞에 있는 멜피르와 에우리아 그리고 르메인과 슬레이만이 있었다. 이들까지는 칼리안이 속내를 드러내고 대해도 괜찮을 터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만나게 될 귀족들은 앞서 언급한 이들보다 조금 더 먼 범위 안에 속하게 된다. 누구든 언제든지 칼리안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손을 잡아야 할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히 걸러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녁까지는 여기에 있을테니 그때까지 알려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아르센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눈이 긴 호선을 그렸다.

"헤르츠 경. 닷새 정도면 푹 쉬는 것이라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베로니카의 과제를 해준 아르센이 이제 다시 바빠지리라는 것을 예감하고는 씩 웃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마법학원의 과제보다는 재미가 있으리라.

"네 왕자님. 충분합니다."

칼리안이 아르센과 비슷한 얼굴로 마주 웃었다.

* * *

아침부터 멜피르 폴룬이 선물을 보내왔다.

그가 보낸 선물은 이번에도 칼리안의 허를 찔렀다.

아주 특별한 선물이 도착했다는 말에 조찬을 마치자마자 밖으로 나온 칼리안은 체르밀 궁 앞에 있는 커다란 두 마리와 작은 한 마리를 보며 또 웃고 말았다.

"하여튼 폴룬 남작."

칼리안의 귀환도 축하하고 마음에 쏙 드는 테시드 레딩턴이라는 인재를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보내온 선물이었다.

멜피르가 처음 칼리안에게 보냈던 선물은 레이븐의 목걸이였다. 아직도 채워 줄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칼리안이 가진 그 어떤 장신구보다 비싼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선물 역시 칼리안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얀의 입이 귀에 걸렸다. 키리에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건지."

'커다란 두 마리'는 무려 레이븐의 형제 말이었다.

브리센 상단을 인수하면서 처음 플란츠에게 레이븐을 보냈던 마주와도 계약을 한 듯 했다.

한 마리는 옅은 갈색 또 한 마리는 짙은 갈색이었는데 각각 얀과 키리에를 위한 선물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두 마리 모두 순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 대체 레이븐은 왜 혼자 그모양인지.

"저 짙은 색 말이 원래 플란츠 왕자에게 보내려던 녀석이었대요. 플란츠 왕자가 하도 레이븐을 마음에 들어해서 어쩔 수 없이 레이븐을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얀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볼을 긁적였다. 플란츠는 그런 말을 고스란히 칼리안에게 빼앗겼다는 소리니까.

공교롭게도 그 날 플란츠가 던진 칼 때문에 손을 다쳤었으니 칼리안은 미안해하는 대신 그냥 그에 대한 보상이었던 셈 치기로 했다.

아무튼 얀이나 키리에나 이제 왕궁 밖에 나갈 일이 많아 슬슬 말을 한 마리씩 마련해줄까 했으니 아주 잘 된 일이었다.

"오늘 사냥에 바로 타고 나가면 되겠네."

때문에 이렇게 말하며 얀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말을 받는 것을 허락한 칼리안이 이번에는 '작은 한 마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새를 사줄까, 개를 사줄까 했더니."

멜피르를 만난 칼리안은 키리에의 동생이 왕궁에서 키울 만한 동물을 상단에서 판매하고 있는지를 물어봤었다. 어쨌거나 히나에게 약속을 했었으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선물로 보내온 모양이었다.

푸른 색과 갈색의 오드아이를 가진 은백색의 새끼 고양이였다. 언뜻 보면 히나의 머리색과 비슷하고 키리에의 눈을 꽤 닮았다.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찾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폴룬 남작은 여러모로 비범하네요."

칼리안이 얀의 감상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옹거리는 새끼 고양이를 보며 가장 좋아한 것은 당연히 선물의 주인인 히나였다.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고양이를 안아올려 히나에게 건넸다.

"고양이는 체르밀에 있어도 되니까. 잘 키우도록 해."

히나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언제나 느끼지만 보는 이들의 복잡했던 마음을 전부 잊게 만들어주는 웃음이다.

"폴룬 남작에게 잘 받겠다고 전해줘."

"네 왕자님."

그나저나 멜피르.

처음에는 칼리안이 아끼는 말을 위한 선물을 주더니 이번에는 칼리안이 아끼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보냈다.

"남작이 내 선물을 보내 줄 날이 오긴 오려나."

정작 멜피르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한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멜피르는 재밌는 사람이다.

* * *

비는 이미 그쳤다.

늦가을 날씨는 아주 좋았고 사냥대회는 취소되지 않았다.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왕자님. 아이즌 에이프린입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만났다.

사냥대회는 몇몇 귀족들이 한 조를 이루어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는 이들에게 우승 상품을 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앞서 얀은 멜피르와 에우리아가 말한 이들을 제외한 최종 명단을 칼리안에게 정리해줬었다. 서른 명 가까이 되던 귀족들은 세 명의 거름을 거쳐 어느새 열 한 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각자의 기사들과 마법사단이 모이면 브리센 그리고 브리센과 우호 관계에 있는 귀족들의 병력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힘을 낼 터였다.

칼리안은 바로 그 명단을 르메인에게 전달했다. 그리하여 명단에 적혀있던 인물들은 모두 칼리안과 한 조로 묶이게 되었다.

시큼 텁텁한 호밀 쿠키를 한가득 보낸 에이프린 백작을 보며 칼리안이 호감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쿠키가 아주 맛있더군요.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모인 다른 열 명의 눈을 하나하나 들여다 본 칼리안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칼리안을 마주 쳐다보는 귀족들의 눈빛은 단순히 사냥대회에 참석하러 온 이들의 것과는 달랐다.

"반갑습니다."

지금의 자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한 조에 참여하게 된 다른 이들의 면면을 보며 알았으리라.

칼리안이 이제 브리센과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리라는 것을.

"내가, 칼리안입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이렇게 두 번째로 자신의 이름을 먼저 알렸다.

제16장. 내가, 당신에게 (4)

왕족은 자신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는다.

빈민보다도 못한 삶을 살았던 키리에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도 '내가 칼리안' 이라니.

분명 의도한 말이겠지만 자세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모두들 일단 고개를 숙이며 입부터 열었다.

"저는 헤밀란 토르카입니다."

"카인 세르트입니다 왕자님."

운좋게 칼리안에게 먼저 인사를 했던 아이즌을 제외한 남은 열 명의 사람들이 이렇듯 매우 서둘러가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웃지 못할 광경이 잠시 펼쳐졌다.

그 모습을 보는 칼리안의 얼굴에는 어떻게 보면 장난기가 짙은 듯 하면서 또 어떻게 보면 자신감이 가득해보이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단박에 눈치 챈 얀은 눈에 띄지 않게 웃었다.

오래 전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에서 사람들의 앞에 나서기 전 칼리안이 농담처럼 했던 말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들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 같던데. 아 '그' 칼리안!'

그 때는 '그'에 포함된 의미가 결코 좋지 않았었다. 나약한, 겁 많은, 힘 없는 등등의 수식어가 칼리안의 이름 앞에 항상 붙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도 칼리안을 '그' 칼리안이라고 불렀다. '그'에 들어가는 말들은 이제 완전히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만큼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과장된 평가도 많았다.

- 내가, 칼리안입니다.

그러니 이 인사는 당신들 머릿속의 '그' 칼리안이 아니라 당신들 앞에 서 있는 내가 진짜 칼리안이라는 뜻을 담아 건넨 말인 것이다.

칼리안이 어떤 사람인지는 직접 보여줄테니 칼리안에게 선물을 보낼 결심을 하게 했던 기대감과 선입견은 일단 다 버리라는 소리다.

그러니 이보다 자신만만한 인사가 또 어디 있을까.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든 이들이 칼리안의 얼굴에 나타나 있던 미소를 보았다. 그리하여 칼리안의 인사에 담긴 뜻을 이해한 몇몇은 마주 웃었고 또 몇몇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웃고 있는 이들을 쳐다봤다.

자신을 따르겠다고 먼저 알려온 이들에게 칼리안은 이렇게 평생 잊지 못할 첫인상을 심어주었다.

* * *

르메인이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바로 옆에 있는 앨런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이것이 정말 왕자들을 위한 일이 맞을지 모르겠군."

바로 며칠 전 앨런이 했던 것과 아주 비슷한 말이었다.

앨런은 그때 르메인이 대꾸한 것을 따라하며 '배부른 소리를 하시는군요.' 등으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다른 귀족들이 함께 있었던 탓이다.

"충분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답한 앨런이 적당히 활을 들어올려 멀리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를 향해 쏘았다. 마법사의 손에 들린 활이라니 참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팅!' 하는 힘 빠진 소리를 내고 날아간 화살은 새가 앉은 나무의 근처에도 못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를 잡기에는 지나치게 부족한 활 솜씨에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르메인이 웃는 것을 본 귀족들은 놀랐고 앨런은 툴툴거렸다.

"그리 웃지 마시지요. 마법사는 마법이나 잘 쓰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이 끝났을 바로 그 때였다.

방금 전까지 나무 위에 있던 새가 갑자기 작은 울음소리를 길게 내더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죽은 것이다.

그것을 본 귀족들의 눈이 르메인의 웃음을 보았을 때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의 크기로 벌어졌다.

다만 르메인만은 그리 놀라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마법으로 사냥을 해도 된다는 규칙이 없으니 저것은 무효로 보아야겠는데."

"마법으로 사냥을 하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으니 유효한 것으로 보아 주시면 안되겠는지요."

둘은 지금 가벼운 말싸움이나 나누고 있었으나 함께 있던 귀족들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새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르메인이 '마법'임을 말한 뒤에야 앨런이 무엇인가 수를 썼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 소리도 아무 기척도 없었다.

심지어 앨런은 아까부터 계속 르메인을 보던 채였다.

이 자리에 선 이들은 모두 브리센과 동맹 관계에 있는 기사 가문의 귀족들이었다. 즉 칼리안이 지금 만나고 있는 귀족들과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곧 이들 역시 검을 꽤 잘 다루는 사람들이라는 뜻도 되었다. 에반 브리센 후작만큼은 아닐지라도 모두들 무력에 대한 제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런의 화살이 날아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것이 나에게 날아왔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한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물론 이 곳에 모인 이들의 놀라움에는 관심이 없던 르메인은 앨런을 보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유효로 본다니 안 될 일이지."

그러더니 숲을 둘러보는 듯 혹은 브리센 편의 귀족들을 노려보는 듯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경은 이 곳에 있는 전부를 사냥할 셈인가."

그 말을 들은 귀족들의 입에서는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고 앨런의 입에서는 짧은 웃음 소리가 났다.

곧 앨런의 날카로운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냈다. 그런 그의 가느다란 입술 사이로 차디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 큰 나무에 보란듯이 앉아 있으니."

또 한 마리의 새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새의 마지막 울음을 뒤로 하고 들려오는 앨런의 말이 모두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

"······ 못 잡을 것이 있겠습니까."

명백한 협박이었다.

* * *

르메인과 앨런이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브리센 측의 귀족들을 압박하는 사이, 칼리안과 함께 있는 이들은 소풍같은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 피잉!

칼리안의 손을 떠난 화살이 가벼운 파공음을 냈다.

화살은 방금 날아오른 새의 목을 거침 없이 꿰뚫었다.

활을 한 번 쏠 때마다 어김없이 한 마리가 죽었다.

어차피 사냥은 목적이 아니었으나 적당히 구색은 맞추어야 했으므로 칼리안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새들을 몇 마리 잡고 있었다.

칼리안의 활솜씨가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던 탓에 날개를 펼친 새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리는 모습을 본 이들의 입에서 이번에도 작은 탄성이 터졌다. 물론 그들 중에는 얀도 있었다.

"키리에. 왕자님께 활도 가르쳐드린 겁니까?"

그 말을 들은 키리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칼리안이 활을 다룰 줄 안다는 사실을 얀에게 말하지 않았었다는 것에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하지 않는 얀의 둔함에 놀랐다.

아무튼 키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 안에서 칼리안에게 활을 가르칠 수 있을 만한 이는 키리에밖에 없었으니까.

"네······ 제가 알려드렸습니다."

이렇게 말한 키리에는 말 안장에 매인 활을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 오늘은 절대로 활을 들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검은 다뤄봤지만 아직 활은 한 번도 손에 들어보지 못했던 까닭이다.

키리에의 대답을 들은 얀이 뿌듯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우리 왕자님은 무기를 다루는 것에 소질이 조금 있으신가봐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이다.

덕분에 주변에 있던 이들은 다소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소질 조금만 더 있었으면 아주 큰일이 났겠다 싶어서였다.

"네. 배움이 매우 빠르십니다."

그리고 하프엘프 키리에는 이제 완벽할만큼 능숙해진 거짓말을 입 밖에 내며 얀의 둔함을 응원했다.

이들의 조금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웃던 칼리안이 옆을 쳐다봤다. 그 방향에 있던 아이즌이 칼리안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에이프린 백작."

"네 왕자님."

"보내주신 쿠키, 왜 호밀이었습니까."

조금 맥락 없는 질문이기는 했으나 칼리안은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중이었다.

카이리스의 귀족들은 호밀을 먹지 않았다.

물론 칼리안이나 앨런은 그렇지 않았으나 얀은 쿠키가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먹지 않았었다.

얀이 그럴 정도면 다른 귀족들은 볼 것도 없지 않은가.

다만 호밀은 밀보다 영양이 더 좋고 값이 훨씬 저렴했다. 때문에 평민들에게 있어서는 없어선 안 될 식재료였다. 그러니 나라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정작 귀족들은 입에 대지도 않는 독특한 작물이 바로 호밀인 것이다.

"그것이 내내 궁금했습니다. 왜 하필 호밀일까. 백작 씩이나 되서 왕자에게 평민의 생활을 보여주겠다는 감성적인 이유는 아닐텐데."

칼리안의 질문을 받은 아이즌이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것을 보낸 뒤에 혹시라도 다른 이유가 있다고 오해를 하실까 후회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혹시, 내 어머니에 대한 조롱의 의미로 받아들일까봐 걱정했다는 말입니까. 내 어머니께서는 호밀을 먹는 평민이었으니."

숨김 없이 물어오는 칼리안의 말에 아이즌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고개를 숙였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왕자님.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해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런 의미가 맞았다 하더라도 내 환심을 사긴 했을 겁니다."

그렇게 정성스러운 조롱이라니.

칼리안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보낸 이의 얼굴을 한 번 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내 어머니의 출신에 대해서는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해서 나에게는 오히려 반가운 선물이었습니다."

그렇게 솔직한 감상을 전한 칼리안이 다시 아이즌을 쳐다봤다.

"그러니 이제 호밀의 이유를 좀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궁금했던 터라."

아이즌이 다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밀도 좋지만 호밀도 필요하다는 의미로 보내드린 것입니다."

"밀도 좋지만 호밀도 필요하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은 마치 어려운 문제를 풀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더 강력한 마법사들도 좋지만 덜 강력해도 그 수가 월등한 기사들도 없으면 안된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간 칼리안이 마법사 위주로 세력을 불려나가니 이제 기사들도 좀 봐달라는 뜻에서 보낸 선물이라는 소리였다.

"내가 만약 먹지 않고 돌려보냈다면 백작은 지금 이 자리에도 나오지 않았겠군요."

"죄송합니다, 왕자님."

아이즌이 민망해하는 얼굴을 했다.

호밀 쿠키 하나로 시험을 해 봤다.

오히려 아이즌이, 칼리안을.

아이즌을 보던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멜피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 탓이다. 말 목걸이를 보내서 칼리안의 의중을 떠보려 했던 그 모습과 참으로 닮았다.

"선물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같은 것을 생각했으니, 내가 백작의 문제를 비슷하게나마 맞혔다고 쳐 주면 안되겠습니까?"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고 아이즌은 더 대답하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그런 아이즌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이 레이븐을 살짝 움직여 조금 더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돌아서 섰다. 그러자 칼리안이 홀로 귀족들을 마주보고 선 모양새가 되었다.

"맑은 날 '밖'에 나온 김에 전할 말이 있습니다."

모두를 앞에 둔 칼리안이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내가 곧 사냥을 할 겁니다. 물론 여기 있는 분들과 함께."

이미 사냥대회가 시작된 지 한참이었다.

이제와서 이 자리에서의 사냥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가 있든 없든 잘 알아들은 듯 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독수리도 아니고 사자도 아닌 그런 사냥감은 나도 처음 잡아보는 것이라. 다들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번에는 모두가 웃었다.

모두의 머리에 브리센의 문장 속 그리핀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하나같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칼리안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칼리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원금을 보내겠습니다."

당장 이들에게 칼리안이 줄 수 있는 도움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시 불어나고 있는 자금 뿐이다. 그리고 자금은 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할 터였다.

"눈에 띄지 않게 본래 하던 일을 조금만 더 열심히 해주면 됩니다. 나는 에이프린 백작을 통해 연락을 취할테니 주기적으로 서로 교류하기를 바랍니다."

그 말에 모두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그들을 다시 한번 살펴본 칼리안이 낮지만 위엄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다음에는 '안'에서 만나게 되겠군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카이리스 왕궁, 그 안에서.

제17장. 그 걸음 (1)

실리케.

그리고, 에반 브리센.

과연 누가 더 먼저인가.

르메인이 사냥을 하겠다며 기사단 카에라 앨런까지 모두 대동하여 궁 밖으로 나가자, 실리케가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단 라온과 카렌의 단장들을 불렀다.

당연히 둘은 최근 파벨의 기사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되도록 실리케의 눈에 띄지 않으려 나름대로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실리케가 직접 이들을 찾은 것이다.

결국 명을 거절하지 못한 두 기사단장이 실리케의 온실을 찾았다. 그리고 예상했던대로의 말을 듣게 되었다.

- 돌아오는 월요일 마법사단 발칸의 창단식.

그 자리에서 실리케가 시키는대로 일을 해 준다면 충분한 보상을 하겠다는 소리였다. 무엇을 시킬 것인지 무엇을 보상할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두 기사단장은 우선 생각할 시간을 달라 답한 뒤 헤이시아 궁에서 나왔다. 깊은 수심이 그들의 얼굴에 가득했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군."

"나도 그렇네."

아직 무슨 일을 해주길 원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실리케는 그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말했을 뿐이었다.

깊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카렌 단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일 아침까지 답을 달라 하셨는데. 자네는 어찌 할 생각인가."

라온의 단장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더니 말했다.

"본래는 후작님의 명만 듣는 것이 맞겠네만."

"하지만 이 곳은 왕궁이 아닌가. 왕비님의 명을 어찌 거역하는가."

그들은 왕실의 기사단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르메인의 명을 들어야 하는 이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대화 어디에서도 르메인의 이름은 없었다.

실리케의 말을 들을 것인가 혹은 에반을 따를 것인가.

오로지 그것 뿐이었다.

결국 둘은 답을 내지 못하고 헤어져 각자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둘 모두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발신인 역시 같았다.

바로 에반 브리센 후작으로부터 전달된 편지였다.

같은 사람으로부터 두 기사단장에게 전해진 편지.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눈을 움직여가며 편지의 내용을 읽어내려가는 두 단장의 얼굴이 똑같이 심각하게 굳어져갔다.

* * *

절대 잊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니 그것은 분명한 칼리안의 실수였다.

"애옹!"

장미 정원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려주었어야 했다.

사냥 대회에 참석하느라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그 정도는 꼭 일러주고 출발을 했어야 했다.

"애옹, 애오옹!"

무슨 이유에서든 고양이가 그 곳에 가면 안 된다고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러니.

칼리안이 아직 베른의 모습을 다 버리지 못했을 때 만난 탓에 누나라기 보다는 제 동생처럼 여기면서 보호하게 된 히나가 칼리안의 눈에는 불한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플란츠와 엮이게 된 것은.

모조리 칼리안의 잘못이었다.

* * *

그 일은 사냥대회가 있던 그 날의 조찬에서 주고 받은 대화로부터 시작됐다.

식당에 가장 먼저 도착해 혼자 앉아있던 칼리안은 이제 막 들어서는 플란츠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어왔다.

"심한 몸살에 걸리셨다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플란츠는 사실 그 어떤 날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몸살은 커녕 재채기 한 번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플란츠는 칼리안을 향해 왜 아침부터 짖는 소리를 하는지를 묻는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냥이나 할 상태는 아니군."

아주 대놓고 사냥에 오지 말라 하고 있는데 이 외에 어떤 말을 더 하겠나.

플란츠는 칼리안이 사냥대회를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그 이유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왜 그 자리에 가면 안되는지 역시 어느정도 이해를 했다.

귀족들을 반 브리센과 친 브리센 세력으로 나누어, 칼리안은 회유를 하고 르메인은 겁박을 주고자 만든 사냥대회.

그런데 플란츠는 브리센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런 분위기를 알아챈다면 실리케에게 전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브리센 쪽에 칼리안의 정보를 전달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달할 수도 없다. 그러니 중간에 껴서 치이지 말고 속 편하게 방에나 있으라는 말인 것이다.

"전하께는 저도 잘 말씀을 드릴테니 푹 쉬십시오."

시종들의 이목이 있으니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플란츠는 그 길로 제 방에 돌아왔다.

덕분에 르메인이 플란츠를 위해 마련한 사냥대회는 당일에 갑작스럽게 불참을 알려온 플란츠를 제외하고 치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아침 내내 꼼짝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던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간단한 옷으로 환복한 뒤 체르밀 궁 밖으로 나왔다. 후원에 마련된 수련장에 갈 생각이었다. 남들의 눈에 몸살을 좀 떨쳐냈다 여겨질만 할 때 쯤이 되었다 싶었던 것이다.

"애옹!"

그러다 아침에 창 밖으로 언뜻 보았던 은백색 털뭉치가 어디론가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까지만 봤으면 신경을 안 썼을텐데 잠시 뒤에는 같은색 머리를 한 시녀 한 명이 그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하필이면 정원에 란델이 있을 시간이었다.

"······하."

플란츠가 발을 움직였다.

칼리안의 고양이가 벌일 사고의 뒷치다꺼리를 위해서였다.

그것이 무슨 이유에서건 상관 없이 지금의 이런 시점에 칼리안과 란델이 대치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했으니까.

* * *

왕자들의 산책을 위한 길이었으니 그 곳은 시종이나 시녀들이 홀로 드나들 수 없었다. 때문에 히나는 정원에 가 본 적도 없었고 그 정원이 어떤 곳인지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새끼 고양이가 히나의 품을 빠져나가 도망쳤을 때, 히나는 곧장 정원에 가지 않고 메를린을 찾아가려 했다. 그러다 메를린이 얀을 대신해 회의에 참석 중임을 떠올렸다.

왕자가 선물한 고양이를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잃어버릴 수는 없었으므로 히나는 어쩔 수 없이 정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왕자들이 모두 사냥에 간 줄로만 알았으니 빨리 들어가서 고양이만 찾아 나올 생각이었다.

"애옹!"

인공호수를 지나니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따라가는 바람에 마주치게 되었다.

'아······.'

정원 한 구석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장미를 손질하는 중이던 첫째 왕자와 그 옆으로 가 흙장난을 친 듯한 고양이. 그리고 그런 고양이를 우악스럽게 잡아 든 채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히나를 노려보는 첫째 왕자의 호위 시종을.

"누구냐."

히나가 깜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큰일났다.'

란델의 상급 시종 역시 회의에 참석했을 터.

그런 그를 대신해 란델과 함께 나와있던 호위 시종이 물었다. 몇 번 마주쳤을 법도 했으나 히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느냐."

란델의 호위 시종은 키리에와 많이 달랐다.

덩치가 컸고 무섭게 생겼고 말은 위협적이었다. 수어를 해보여야 할지 품 속의 수첩을 꺼내 글을 써야 할지, 결정할 시간을 주지 않고 히나를 다그쳤다.

"이것도 네 짓이겠구나. 감히 이 곳이 어디라고 이딴 것을 들이느냐."

고양이를 들어보이며 그렇게 물은 시종이 히나에게 한 걸음을 다가왔다. 결국 히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수첩을 꺼내려 했다.

그런데 이 곳에 새로 도착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히나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 저벅.

시종과 히나 사이에 플란츠가 걸어와 섰다.

시야가 캄캄하게 막힌 것에 깜짝 놀란 히나가 고개를 들었다가 옅은 에메랄드 색 머리카락을 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진짜 큰일······!'

란델의 앞에 보란듯이 달려간 것도 모자라 플란츠까지 이 곳에 나타났다. 메를린이 회의에서 나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또 뵙습니다."

왕실 예법을 다시 만들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시종도 없이 혼자 정원에 온 플란츠가 고개를 까딱 숙이며 멋대로 축약시킨 인사를 란델에게 건넸다. 그러더니 란델의 시종을 잠시 쳐다보곤 입을 열었다.

"왕자의 전속 시녀도 못알아보는데. 눈이 나쁜건지 머리가 나쁜건지 모를 호위는 왜 데리고 다니시는지."

란델의 시종을 입에 담는 것임에도 거침이 없었다.

체르밀에서 일하는 시녀도 아닌 왕자의 전속 시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책을 한 것이다. 저러면서 어떻게 호위를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 못하겠다는 눈빛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시종이 플란츠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플란츠는 그에 대해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등 뒤에 선 히나를 흘끗 돌아보며 말했다.

"치워."

당연히 고양이를 말함이다.

허리 숙여 인사를 전한 히나가 시종의 손에 들린 고양이를 빼앗듯이 돌려받은 뒤 빠른 걸음으로 정원에서 벗어났다. 철모르는 고양이가 히나의 품에서 애옹애옹 소리를 냈다.

고양이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란델이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사냥에 오라 하더니. 가지 않은 것이냐."

플란츠의 무례함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므로 자신의 앞에서 시종에게 한 소리를 한 것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래서 나아질 성격이었으면 진작 고쳤을 것이다.

"그렇게 됐습니다."

플란츠는 간단한 대답만 했다. 란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지도 않았다.

"형님이 계실 시간인 줄 모르고 왔습니다. 가보겠습니다."

곧 플란츠는 이렇게 말하며 뒤로 돌아섰다. 란델과 오랫동안 말을 섞어봐야 속내만 들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플란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란델이 말했다.

"둘의 사이가 많이 좋아진 모양이구나."

플란츠의 발이 제 자리에 멈춰섰다.

호위 시종은 몰랐더라도 란델은 히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플란츠가 굳이 이 시간에 정원에 들른 이유를 눈치 챈 것이다. 왜 플란츠가 칼리안의 시녀를 도왔는지를 말이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손을 잡은 것은 아닐까, 라고.

플란츠가 힘주어 눈을 감았다 떴다. 어차피 한 번 의심을 하기 시작한 란델은 더 이상 속일 수 없다. 그리고 란델이라면 이 일을 브리센에 알리지는 않을 터였다.

때문에 플란츠는 무슨 사이를 말하는 것인지를 묻는 대신 비웃음이 잔뜩 매달린 대답만 했다.

"이것도 아쉬우십니까."

그 말에 란델이 다시 돌아앉았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 말이 플란츠에게는 경쟁자 한 명이 줄어 오히려 기쁘다는 뜻으로 들렸다. 플란츠는 더 이상의 말 없이 정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체르밀 궁의 앞에 서 있는 히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굳이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었던 것 같은 모양새였으므로 플란츠가 잠깐 히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자 히나가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건네왔다. 얼결에 내용을 보니 짧은 문장이 써 있었다.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플란츠는 히나가 칼리안의 시녀라는 것은 알았으나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제야 눈치를 챘다. 다만 그에 대해 뭐라 다른 말을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저 고개만 끄덕여보인 뒤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이 되어 사냥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칼리안 역시 그 일을 전해들었다. 다만 그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용한 듯 그렇지 않은 듯한 날이 지나갔다.

그리고 월요일.

발칸의 창단식이 치뤄질 날.

많은 이들이 각자의 이유로 기다려온 그 날이 다가왔다.

제17장. 그 걸음 (2)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

무엇이라 해도 좋을 그 어두운 시간.

실낱같은 바람이 방 안을 한 번 맴돌자 침대에 누워 있던 플란츠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바람결에 눈을 뜰 줄 아는 이가 비단 칼리안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플란츠는 베개 밑에 두었던 검을 꺼내드는 대신 입을 다문 채 어둠 속을 살폈다. 예상한대로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에 동생의 붉은 눈이 비춰지는 것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마법사. 한가하군."

플란츠는 창문을 열어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안이 플란츠의 침실에 들어설 수 있던 이유는 단 하나. 시스파니안의 경보 마법이 누군가에 의해 작동을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이 카이리스에 그런 짓이 가능할만한 사람은 물론 앨런 마나실 외에는 없었다.

"스승님께서도 두 번은 못하겠다 하셨으니, 또 올 일은 없을 겁니다."

이 비범하기 짝이 없는 형제간의 만남을 위해 잠시 동원되었던 쓰임새 많은 스승을 생각하며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플란츠가 짧게 물었다.

"왜 왔는데."

칼리안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침실 안에 놓인 작은 소파로 가 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말 없이 플란츠의 얼굴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것 하나, 권해줄 것 하나, 그리고. 고마운 것 하나."

아마 절대로 입에 담고 싶지 않았을 '고마운 것' 때문에 잠시 뜸을 들인 모양이었다. 칼리안의 얼굴에 딱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저런 놈한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날이 오다니, 라고.

물론 칼리안이 고마워 할 일이라고는 딱 하나였다. 칼리안의 시녀를 도와준 혹은 살려준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란델의 앞에 선 시녀가 아무 말 없이 품 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그것이 수첩일지 아니면 암기일지 호위가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 플란츠가 그 앞에 서지 않았다면 무슨 결과가 생겼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플란츠 역시 칼리안같은 놈한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 시녀 히나에게 이미 듣기도 했고.

그래서 플란츠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마지막 것은 관심 없는데."

그 말에 칼리안이 실소하며 '물어볼 것'을 먼저 입에 담았다.

"혹시 저와 손잡은 것을 란델 형님께서 눈치채셨습니까."

"그래."

플란츠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고 칼리안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플란츠와 손을 잡은 것을 가능한 오래 숨기려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로 틀어진 까닭이었다.

"왜들 그렇게 눈치가 빠른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하루하루 목숨을 내놓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인 왕자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이미 잘 알았다. 당장 칼리안만 보아도 카이리스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단 하루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반응은요."

"그다지, 별로."

왕위를 포기한 것이 둘 중 누구였든 란델에게 손해가 될 일은 없었다. 그러니 둘의 동맹을 공개하여 두 세력을 하나로 합치려 하지 않는 이상은 경계하지 않을 터였다.

"네. 어쨌거나 저는 행동에 더 조심을 해야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두 번째 말을 꺼냈다.

"오늘 하루만 더 아프실 생각은 없습니까. 발칸의 창단식에도 나오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이것은 칼리안에게 득이 될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세번째 목적이었던 '고마움'과 연관된 소리였다. 즉 히나를 도와줬으니 플란츠를 한번 배려해주기 위해 건넨 말이었다.

실리케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 마음을 먹었다면 발칸이 창단되기 직전에 일을 벌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칼리안에 대한 복수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테니 칼리안이 그렇게 추진해오던 일과 칼리안을 한꺼번에 망쳐놓기로 결심을 했을 터였다.

그러니 플란츠가 발칸의 창단식에 나온다면 실리케가 일을 벌이는 것을 목격하게 될 터였다. 그러느니 그냥 보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란츠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한참이 지난 뒤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제 넘는 짓은 거기까지."

"굳이 참석을 하시려는 겁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칼리안은 그런 플란츠를 더 설득하려 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칼리안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경고의 의미를 담은 말을 덧붙였다.

"대신 이번에는 무슨 일이 생겨도 끼어들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고맙다는 말은 진짜 생략한 채로.

* * *

- 사락······.

청포도 빛의 아름다운 드레스 위로 실리케의 에메랄드 색 머리가 흘러내렸다.

결 고운 머리를 빗겨 내려가는 시녀의 얼굴이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며칠 전 칼리안이 다녀간 이후로 망가진 실리케의 기분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심기가 틀어져도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다.

아니 소리만 지른다면 다행이었다. 그동안 벌써 몇 명의 시녀가 실리케의 손찌검에 당하고 또 실리케가 던진 물건에 맞아 다쳤는지 모른다.

"머리를 올리겠습니다."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스치듯 쳐다본 시녀는 곧 실리케의 머리를 굵게 땋아 틀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날을 계속 견디느니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하던 젊은 남작과 결혼이나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남작 부인도 나쁘지는 않아.

결혼해서 살다보면 그런 생활도 익숙해지겠지.

그런 상념이 너무 깊어서였을까.

순간적으로 시녀의 손이 방향을 잘못 찾아가고 말았다.

- 툭.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작은 소리가 났고 그 후에야 상황을 파악한 시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머리를 고정할 핀을 집어들다 실리케의 머리를 손 끝으로 툭 건드리고 만 것이다.

거울 속에 보이는 실리케의 눈이 시녀를 향해 치켜 떠졌다.

실리케는 사과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고 세차게 손을 휘둘렀다.

- 짜악!

실리케가 시녀의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침실을 날카롭게 훑고 지나갔다. 몸을 휘청이던 시녀는 맞은 곳의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방금 전 자신을 노려보던 그 연두색 눈이 너무 무서워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 짜악!

실리케의 손바닥이 다시 한번 시녀의 뺨을 내리쳤다. 지금껏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였다.

곧 실리케는 옆에 서 있던 시녀장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 의미를 아는 시녀장은 실리케가 시녀에게 다시 손을 대기 전에 얼른 밖으로 보냈다. 그리고 실리케의 앞에 허리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곧바로 왕궁에서 내보내겠습니다."

실리케는 냉랭한 눈으로 그런 시녀장을 노려보다 자리에 앉았다. 그 뒤 다른 시녀가 다가와 실리케의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빗기기 시작했다.

숨도 쉬기 어려울 시간이 잠시 지나고 머리 손질이 끝났을 때, 실리케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라온의 단장은 도착했느냐."

토요일에 제1기사단 카렌의 단장과 함께 나간 뒤 일요일에 홀로 실리케를 찾아왔던 이였다.

카렌의 단장과 함께 있을 때는 그렇게나 주저하는 얼굴을 하더니 따로 찾아온 뒤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시키는 일을 할테니 자신을 카렌의 기사단장으로 발령해달라는 요구까지 해온 것이다. 실리케는 당연히 수락했다.

실리케의 질문에 시녀장이 재빨리 대답했다.

"네.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실리케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사라졌다던 마법사는 아직인가."

"네. 발칸이라는 집단 내에서도 보이지 않고, 아직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합니다."

"그래."

그 대답을 끝으로 실리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 밖으로 나가려 걸음을 옮기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한 얼굴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아이 내보내지 말거라. 쓸 곳이 있으니."

시녀장이 조금 놀란 눈을 한 채 실리케를 쳐다봤다. 한번 실수한 이를 두 번 보지 않는 실리케가 이런 말을 했으니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리케는 같은 말을 다시 설명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

라온의 단장이 명을 잘 수행했기를, 그래서 준비해오라 한 물건을 가지고 왔기를 바라면서.

* * *

헤이시아 궁에 숨이 멎을 듯한 긴장감이 가득찼던 그 시간.

마찬가지로 옷을 입고 머리 손질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칼리안이 침실 커튼 너머로 보이는 앨런을 향해 물었다.

"오늘 전하께서 스승님께 백작위를 내리실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언급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소문이라는 것이 본디 비공식적이고 출처를 알기 어려울수록 빨리 퍼져나가는 법이 아닌가. 때문에 그 소식이 칼리안의 귀에 들어오는 것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단치 않은 일입니다. 발칸의 출정식이 더 중요하지요."

어차피 앨런은 작위가 있든 없든 그 이름 하나만으로 이미 가치를 입증해 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오늘 백작이 되든 말든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축하드립니다, 스승님."

"축하를 해주시니 좋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거저 주시는 자리는 아닌 듯 하여 걱정이 됩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작위까지 받았으니 더 많은 일을 주실 것 같으니 말입니다."

"설마요."

조심스레 대답한 칼리안이 입을 닫았다. 어쩐지 앨런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닐 듯한 예감이 무럭무럭 들었다.

잠시 뒤 칼리안이 준비를 마치자 얀이 걸어가 침실을 막고 있던 커튼을 올렸다. 그리고는 시간을 확인한 뒤 말을 건넸다.

"바로 식사를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그날 칼리안은 조찬에 가지 않았다.

앨런이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그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 고마워."

고개를 숙여보인 얀이 밖으로 나간 뒤, 칼리안과 앨런만 방에 남게 되었다. 칼리안은 그제야 앨런을 제대로 보게 되었는데 덕분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못 보던 옷을 입으셨는데요. 대단치 않은 일이라 하신 분은 어디 계십니까?"

백작이 되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던 사람이 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옷을 쫙 빼입고 앉아 있었다. 작위 수여 이후에는 발칸의 군단장임을 뜻하는 로브를 걸쳐야 했으니 저 멋들어진 옷은 분명 작위 수여를 위한 것일 터였다.

심지어 앨런은 지난 새벽에 칼리안이 플란츠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도왔다.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렇게 멋을 부리고 왔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의 웃음에 앨런이 조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레이첼이 마련해 준 것이니 그리 보지 마시지요."

"멋집니다. 잘 어울리시네요."

앨런의 며느리인 레이첼이 새 옷을 맞춰 준 모양이었다. 아침에 새 옷을 입니 마니 꽤나 신경전을 벌였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것을 상상한 칼리안이 다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웃음은 칼리안이 앨런의 맞은편에 앉기 전까지만 이어졌다.

"그래서."

자리에 앉은 후 이렇게 입을 열며 앨런을 마주 보는 칼리안의 얼굴에서는 장난스런 웃음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앨런과 농담을 주고 받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눈빛을 한 칼리안이 하려던 질문을 이어나갔다.

"브리센 후작이 전하께 다녀갔습니까."

평소에도 불쑥불쑥 오던 앨런이기는 했지만 이런 바쁜 날 아침에 찾아왔다면 필시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여겼다.

이를테면 실리케가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서 애가 잔뜩 탄 에반 브리센이 갑작스럽게 르메인을 찾아왔다거나 하는 그런 일 같은.

아니나 다를까, 앨런이 살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조금 전에 브리센 후작이 전하와 독대를 마치고 갔습니다."

"실리케를 잡는 것에 협조할테니 이번에 실리케가 벌이는 일에서 브리센 가문까지 피해를 입지 않게 해달라. 그런 말을 했을 테고요."

"네. 왕자님의 생각과 똑같은 말을 하고 갔지요."

곧 앨런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헤르츠 경이,"

하지만 거기까지.

- 콰아앙!

결코 무시할 수 없을 폭발음이 울려퍼졌고, 앨런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테라스의 창문이 우르르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함께 느껴졌다. 칼리안과 앨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테라스로 나갔다.

그리고 보여지는 광경에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 소리를 냈다.

"내가 아무리 오래 못 있을 것이라 했다지만······."

들은 대로, 그리고 느낀 대로였다.

폭발이었다.

그것도 카이리스 왕궁 안에서 일어난 폭발이었다.

헤이시아 궁에서 검은 연기가 풀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칼리안의 입가에 의미를 읽어내기 어려울 미소가 드리워졌다. 옆에 서 있던 앨런 역시 그리 당황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번에 실리케가 저에게 줄 누명은 꽤 화려하네요. 이걸 고맙다 해야 할지."

과거의 실리케는 옛 칼리안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웠었다. 그것을 빌미로 옛 칼리안을 암살했었다.

이번에도 실리케의 사고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저 폭발의 범인이 왕자님이라 몰아세우려는 수작을 부린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헤이시아에서 폭발이 생길 일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여유로운 얼굴을 한 채 속삭이듯 말했다.

"처음에는 독을 주시더니, 이제 누명까지 주시려 하니."

받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제는 갚아도 드려야지요.

제17장. 그 걸음 (3)

거대한 폭음이 카이리스 왕궁에서 터져나왔다.

인근의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저택으로 들어서던 에반 브리센의 마차가 잠시 멈췄다.

에우리아가 마법사 협회 건물 옥상으로 뛰쳐 올라갔다.

멜피르와 테시드가 동시에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르센은.

발칸 부군단장의 로브를 어깨에 둘렀다.

* * *

"끝을 보여주겠다 하였으니. 이제 어찌 하겠느냐."

실리케가 읊조리는 소리를 들은 시녀장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시녀장은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짙고 검은 연기를 지켜보는 실리케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어려 있는 것은 볼 수 있었다.

시녀장은 오늘 줄곧 실리케와 함께 있었고 그래서 실리케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모조리 지켜 보아야 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셨습니까.'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떠올려 본 시녀장이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키려 제 두 손을 마주잡았다.

조금 전 라온의 기사단장이 실리케를 찾아온 뒤.

준비를 모두 마친 실리케가 응접실에 홀로 들어갔다. 시녀장이 알려주었던대로 라온의 기사단장이 그 곳에서 실리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실리케에게 예를 보인 뒤 준비해 온 검은 색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리고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위험한 물건입니다. 어떤 이유로 찾으셨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그렇게 기사단장의 말을 끊은 실리케가 검은 상자를 잠시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뒤 하나를 꺼내들고는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기사단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경에게 무엇을 받았던가요."

어깨를 움찔한 라온의 기사단장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 아닙니다. 아무것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실리케를 대면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과연 좋은 선택을 한 것인지를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 실리케 왕비의 전횡이 심각하여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바 기사단 카렌과 라온은 더 이상 실리케 왕비의 명을 따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에반의 편지에 적혀있던 내용이 계속 생각났다.

카렌의 단장은 분명 에반의 말을 따르리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순간적인 욕심에 실리케를 찾아왔던 라온의 단장이었다.

일요일에 실리케를 만나고 돌아오던 그 순간부터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심상치않은 물건을 가져다 달라 하던 실리케가 꼬리를 자르려는 의도가 분명한 말까지 하니 아무래도 영 불안해진 것이다.

"좋아요."

가벼운 어투로 말한 실리케가 검은 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응접실 문 옆에 놓인 협탁에 상자를 올려둔 뒤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요. 곧 돌아올테니."

그리고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응접실에서 나갔다.

그렇게 라온의 기사단장을 두고 밖으로 나온 실리케는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시녀장과 시녀들을 보았다. 실리케의 눈이 유난히 눈에 띄는 얼굴이 된 시녀에게로 향했다. 머리 손질 중 손을 잘못 놀렸던 바로 그 시녀였다.

"이리 오거라."

그 시녀는 잔뜩 겁에 질린 채였다.

움츠러든 어깨가 펴지질 않았다. 입술은 터져 마른 피가 엉겨붙어 있었고 볼에는 시퍼런 멍이 든 탓에 퉁퉁 부어 있었다. 두 번의 따귀가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두었다.

그것을 본 실리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내 손이 과했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듯한 말이 아닌가.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실리케를 쳐다봤다.

실리케는 손 안에 든 작은 짐승을 어루만지는 듯한 보드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때문에 시녀장마저도 그 미소 안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짚어내지 못했다.

······ 그렇게 오랫동안 실리케를 지켜봤으면서도.

"하나만 부탁하마."

이렇게 말한 실리케가 조금 전부터 손에 들고 있던 구슬을 시녀의 손에 들려주었다.

"응접실 입구에 놓인 상자에 그것을 가져다 두고 나와 주려무나."

최근 실리케는 시녀들은 물론 시녀장에게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간혹 그 입이 열리면 듣는 이들의 심장을 갈래갈래 찢을 것 같은 독기어린 목소리가 나왔었다.

그리하여 너무나 오랜만에 이런 자상한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를 대한 시녀는 실리케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네, 왕비님. 알겠습니다."

흡족해한 실리케가 구슬을 든 시녀의 손을 감싸잡았다.

그리고 살짝 힘을 주었다.

- 딸깍.

불안한 소리가 시녀의 손 안에서 들렸다.

그것을 느낀 시녀가 실리케를 쳐다보자 실리케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어 보였다.

"어서. 들어가보렴."

그리고는 곧바로 뒤로 돌아서 걸어나갔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언제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 * *

헤이시아 궁의 폭발음을 들은 르메인이 고개를 들었다.

바쁜 걸음 소리가 아르피아 궁 이곳 저곳에서 들렸고 카에라의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와 르메인의 주변을 에워쌌다.

아르피아 궁의 집무실 창문은 왕궁 정문을 향해 나 있었다.

때문에 실리케가 머무는 헤이시아 궁은 르메인의 집무실에서 보이지 않았다.

"시작했군."

조용히 중얼거린 르메인이 정말 피곤하다는 얼굴로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폭음에 놀라거나, 그 원인을 확인하려 하거나, 혹은 밖을 살피려는 등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던 시종장 라울이 놀란 얼굴을 한 채 밖으로 나간 뒤, 르메인의 뒤를 지키던 카에라 기사단장 렌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 마나실 경을 불러오라 하겠습니다."

"마나실 경은 무슨 일로. 내 호위는 이 곳에 다 모여 있는 줄 알았는데 나에게 다른 호위가 또 있던가."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한 렌이 입을 다물었다. 르메인은 여전한 얼굴로 말했다.

"마나실 경의 도움을 받는 것은 상관없으나, 의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네, 전하. 주의하겠습니다."

오래지 않아 집무실 문이 다시 열리며 라울이 들어왔다.

"헤이시아 궁입니다. 응접실 쪽에서 폭발이 있었다 하는데 다른 이들의 피해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왕비께서는 무사하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말한 라울이 잠시 말을 얼버무렸다. 차마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전해들은 탓이었다. 르메인이 라울을 지긋이 쳐다봤고, 라울은 난처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말을 맺었다.

"아르센 헤르츠가 왕비님을 공격했다 합니다."

아르센 헤르츠.

발칸의 부군단장 이름이 엉뚱한 곳에서 나오자 렌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르메인은 실소했다.

곧 르메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지랄하네."

* * *

테라스에 서 있던 칼리안이 몸을 돌렸다.

폭음이 들림과 동시에 칼리안의 방으로 뛰쳐 들어온 키리에가 잔뜩 굳은 얼굴로 곁에 섰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얀이 들어왔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겠다던 얀은 식사 대신 재밌는 이야기를 칼리안의 앞에 내려놓았다.

"오늘 아침에 헤르츠 경이 실리케 왕비를 찾아갔다 합니다. 그리고 지난 번 습격의 주동자가 실리케라는 말을 왕자님께 들었다 주장하더니 일방적으로 공격을 했다 합니다."

말을 하고 있는 얀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었고 말을 듣는 앨런과 키리에는 웃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내가 헤르츠 경을 사주해서 실리케를 공격하게 했다는 소리네."

"네. 그렇다는데요."

죽일거면 내가 했지.

"그래."

아르센의 폭음.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또 접하게 된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레이의 마차가 폭발했다 하니 아르센이 화염구 쓰는 것을 퍽 좋아하는 줄로 안 듯 했다. 파벨의 기사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신경쓰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어찌됐건 사람들이 듣기에는 그레이의 마차가 폭발한 것과 실리케의 응접실이 폭발한 모양새가 퍽 비슷해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행방불명된 헤르츠 경을 꺼내 올 생각을 했다니. 기대한대로 제법 머리를 썼군요. 마력탄도 구한 듯 하고."

칼리안이 아르센을 사주했다는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면 칼리안은 물론 발칸까지, 그리고 발칸의 군단장인 앨런도 무사히 넘어가지는 못할테니까.

"헤르츠 경이 붙들렸을 때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우리가 해명할 수 없으리라는 것까지는 생각을 했나 봅니다. 브리센 후작의 집에서도 헤르츠 경을 찾지 못했으니 내가 숨겨두고 있다는 것까지는 결론을 냈던 것 같네요."

만약 칼리안 측에서 아르센을 보호하고 있었다면 실리케가 공격을 받은 그 시간에 아르센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칼리안이 변호해 보아야 소용이 없지 않겠는가. 실리케를 공격하라 사주한 것이 칼리안이니, 칼리안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들 중 누구의 얼굴에서도 난처함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칼리안은 여전히 걱정 없다는 듯한 얼굴로 얀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발칸 창단식에 늦지 말라십니다."

창단식을 미루지 않았다.

르메인 역시 실리케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 * *

- 차르륵!

실리케의 부채가 센 소리를 내며 접혀들었다.

헤이시아 궁의 폭발이 있은 지 벌써 한참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 누구도 조사를 하러 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르메인의 말이 전해져왔다.

- 왕비가 무사하다 하니 마법사단 발칸의 창단식이 마무리 된 이후 사고 조사를 하겠다.

실리케는 분명 사고가 아니라 하였다.

습격이 있었다 했고 범인의 이름까지 알렸다.

"사고라니."

그럼에도 르메인은 '사고'라는 말로 일의 본질을 바꾸었다. 이런 일까지 벌였음에도 실리케의 말을 듣지 않는다.

"만에 하나 이것이 정녕 사고였다 하더라도 행사는 미루어야 함이 아니더냐. 전하의 의중이 이제 명확히 보이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실리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실리케는 평정심을 찾기 위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시녀장을 향해 말했다.

"기사단 라온의 부단장을 불러 라온 전원을 빌헬름 관으로 집결시키도록 하거라. 라온의 단장이 나와 함께 있다 하면 말을 들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기회에 칼리안을 잡아야 했다.

르메인이 나서지 않겠다 하니 직접 움직일 수 밖에.

곧 실리케는 몇몇의 호위기사들과 다른 시녀들을 대동한 채 발칸 창단식이 치뤄질 빌헬름 관으로 이동했다. 기사단 파벨이 사용하던 곳이었으니 빌헬름 관은 헤이시아 궁과 가까이 있었다.

때문에 그리 오래지 않아 행사장에 도착한 실리케는 부채를 쥔 손에 다시 한번 힘을 꾹 주어야 했다.

왕궁에 폭발사고가 생긴 이후였다.

그런데 그 누구의 얼굴에도 불안함은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아침을 보내고 온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선 지극히 평범한 인사들을 주고 받고 있었다.

그 곳에 모인 누구도 폭발에 대해 입에 담지 않았다.

친 브리센 성향의 귀족들이 계속 눈에 띄었으나 그들은 아주 조용했다. 실리케에게 인사만 건넨 뒤 고개를 돌렸다.

앨런과 밀접한 발칸의 창단식이 있는 날이 아닌가.

그러니 앨런이 말했던 '눈에 띄는 큰 나무'에서 살짝 발을 뗀 것이다.

'감히 나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 겪는 실리케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다가와 걱정어린 말을 했다.

"폭발이 있었다던데 괜찮으신 듯 보이니 다행입니다."

말을 한 이를 쳐다 본 실리케의 눈에 독기가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실리케에게 사고 소식을 물어온 이는 칼리안이었다.

"네가 주도한 일을 가지고 참 뻔뻔하게도 묻는구나."

실리케의 목소리가 상당히 컸고 주변은 조용했다.

장내에 있던 귀족들 창단식을 위해 모여있던 새하얀 로브의 마법사들 그리고 다른 두 왕자들의 눈이 모두 실리케와 칼리안을 향해 움직였다.

그들을 한번 둘러본 칼리안이 다소 굳은 얼굴을 했다.

"섣부른 말은 삼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행사가 끝나면 원인을 찾을 것이라 하셨지 않습니까."

비아냥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진심으로 실리케를 걱정하는 그런 말투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칼리안은 평소 실리케를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지금 저 모습은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한 연기라는 것을 실리케는 알았다.

실리케만 알았다.

손에 들린 부채가 까드득 하는 소리를 냈다.

"그 마법사를 찾아오거라. 그 마법사의 소행임을 내가 똑똑히 보았으니 반드시 찾아와야 할 것이다."

그 말에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실리케가 웃음을 지었을 때.

"그 마법사라 함은."

실리케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자를 말하는 것입니까, 왕비."

익숙한 목소리.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실리케가 고개를 돌렸다.

에반 브리센이 그 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던 한 명의 마법사가 고개를 숙였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정중한 목소리로 마법사가 실리케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아르센 헤르츠······ '그 마법사' 입니다."

실리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체 왜 아르센 헤르츠가 칼리안이 아닌 에반과 함께 들어오고 있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으므로.

그렇게 한 걸음 물러서 에반과 아르센을 쳐다본 실리케의 고개가 칼리안 쪽으로 돌아갔다.

칼리안은 웃고 있었다.

당신의 끝이 보이느냐는 질문이 그 웃음에 담겨 있었다.

제17장. 그 걸음 (4)

아주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이틀 전 토요일.

칼리안이 반 브리센 세력에게 제 이름을 소개하고, 새 잡던 앨런 옆에서 르메인이 친 브리센 세력을 잡고, 플란츠가 히나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던 그 날.

에반 브리센 후작의 저택으로 폴룬 상단의 마차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멜피르도 앨런도 아닌 아르센이 들어 있었다.

"처음 뵙습니다.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아르센의 자기 소개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정중하되 왜인지 모르게 사람 심기를 쿡쿡 건드리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물론 에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르센이 사라진 일 때문에 에반이 발칸을 견제해서 젊은 인재를 죽이려 했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저 놈의 마법사 한 명 찾겠다고 카에라의 기사들은 마굿간의 건초더미까지 헤집어두고 갔다.

뿐만인가?

- 그 스승에 그 제자라 말씀하셨으니. 후작의 칼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저도 좀 알 것 같습니다.

아르센이 에반의 기사 열을 죽여놓는 바람에 앨런에게 평생 잊을 수 없을 치욕적인 말까지 들었다.

"아르센······ 헤르츠. 네 놈이 그 놈이구나."

바로 그 아르센 헤르츠가 제 발로 찾아 들어왔으니 에반은 당연히 너 이놈 잘 만났다 하며 검부터 집어들었다. 앞뒤 사정 구분 없이 저 놈 하나 죽여버리면 속은 시원하겠다 싶어서였다.

에반의 손에 들린 검이 웅웅 소리를 내는 것을 본 아르센이 손을 내밀었다. 마법을 쓰기 위함이 아니라 제 손에 끼워진 반지 하나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마나실 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전에 칼리안이 끼고 다녔던 통신용 마법이 걸린 반지였다.

"혹시라도 제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곧바로 찾아오시겠다 전해달라 하십니다."

아르센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르센은 지금 자신의 앞에 선 것이 누구인지 알고는 있는걸까 싶은 평온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후작께서도 마나실 경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제가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통신용 반지가 무엇인지는 에반도 잘 알았다. 그것이 에반의 검을 붙들었다. 결국 에반은 검에 불어넣었던 오러를 회수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능구렁이 같은 마법사 놈이······."

그러자 반지의 빛이 조금 더 진해지는가 싶더니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에 들은 바 있던 말이라 식상하다 하십니다. 그래도 언제 한번 꼭 오시겠다고 전해달라십니다."

에반이 노기 가득한 얼굴로 아르센을 쳐다봤다.

지금 장난이나 칠 때인가 싶어서였는데 아르센의 얼굴 그 어디에서도 장난스러운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마법사는 소드마스터 앞에서 아주 진중하게 대화에 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정말로 자신의 욕설을 앨런에게 전한 것이다.

결국 에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치다시피 말했다.

"왜 왔느냐! 그 용건이나 말하고 꺼지거라."

그러자 아르센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월요일 발칸 창단식이 있을 때까지 이 곳에 머무르라는 칼리안 왕자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 뭐라?"

닷새의 휴가가 끝나자마자 제 편 하나 없을 사지에 찾아오게 된 아르센은 할 말을 잃은 에반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왕자님께서는 왕비께서 분명 제 거취를 빌미로 일을 꾸미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후작께 제가 몸을 의탁하고 있으면 거취에 대한 증명이 가장 확실할 것이므로 이 곳에서 이틀만 지내라 하셨습니다."

에반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일을 꾸민다니. 실리케가 무슨 일을 꾸민단 말이냐?"

그러자 아르센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말을 들었다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무슨 일인지를 아셨으면 왕자님께서 저를 이런 곳에 보내셨겠습니까."

"이런 곳이라니, 이런 건방진 놈을 보았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실리케가 무슨 일을 꾸민다면 분명 발칸의 창단식 날이 맞기는 할 터였다. 거기까지는 에반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을 꾸민다는 그 자체가 심히 마음에 걸렸다.

아르센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왔다.

"후작께서 이번에 칼리안 왕자님을 돕는다면 저를 해치려 했다는 소문에서는 벗어나실 수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물론 플란츠 왕자님께 해가 될 일도 없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칼리안이 괜히 아르센을 에반의 저택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에반이 아르센을 해치려 했다는 누명이 사라져야 실리케가 기사들을 사주했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에반만큼 아르센의 거취를 정확히 보증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브리센이 아닌가.

브리센이 보증을 한다면 아무리 실리케라도 아르센을 더 몰아세우지 못하리라는 것이 칼리안의 생각이었다.

다만 그것은 칼리안에게만 이득이 큰 일이었다.

에반은 그깟 소문 하나 이기자고 아르센을 이틀이나 집에 묵게 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따라서 에반은 거절의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아르센의 말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 도박장에 대한 비밀을 지키겠다 하셨습니다. 그 이상한 이름의 술집 3, 4층 말입니다."

물론 브리센과 관련하여 칼리안이 알고 있는 비밀은 더 많았다.

이를테면 레넌 브리센이 어디에 있는지 라거나 그레이가 무슨 일로 이 곳에 와서 무슨 일을 겪고 다시 돌아갔는지 라거나 혹은 플란츠가 이미 왕위에서 마음을 뗐다는 사실이라거나 더불어 아이샤 왕비의 사망 원인에 대한 의구심 같은 것들.

하지만 아르센의 이틀치 숙박비에 맞을 교환품은 이 정도였다. 좋지 않은 소문 그리고 도박장.

나머지는 칼리안이 사실을 알고 있음을 에반에게 들키기에는 너무 값이 비싼 것들이었다.

칼리안의 계산은 정확했다.

양대 기사가문 중 하나인 브리센 후작가의 가주가 도박장 운영이라니. 그 일은 절대로 공개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결국 에반은 칼리안의 거래에 응하고 말았다.

도박장에 대한 정보를 칼리안이 함구하는 대신 자신의 기사들을 도륙낸 이 마법사를 이틀 동안 맡아주기로.

"······ 네 놈이 다른 기사들에게 공격당하는 것까지 참견하지는 않겠다. 그러니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없는 것처럼 있다 가도록."

"알겠습니다."

아르센은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당연히 없는 것처럼 지내지 않았다.

아르센이 에반의 집에 있었다는 사실을 에반만 알고 말 것이라면 뭐하러 목숨을 걸고 왔겠는가.

때문에 아르센은 기사들, 그것도 아르센이 자신의 동료를 죽였다며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기사들이 득시글한 그 곳에서 당당하게 마법사 로브를 걸쳐 입고 온 저택 안을 헤집고 다녔다.

그 와중에 몇 번 싸움이 있었으나 아르센은 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폭음이 들려올 그 즈음에는 온 저택의 사람들이 적어도 한 번은 아르센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에반은 실리케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불안해진 마음에 카렌과 라온 기사단장에게 실리케의 말을 듣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것만으로는 불안이 가시지 않았으므로 월요일 오전에는 르메인을 찾아가 실리케를 축출하는것을 묵과할테니 실리케와 브리센 가문을 연관짓지 않도록 해달라는 말도 했다.

그 후 저택까지 잘 간 뒤에 카이리스 왕궁에서 터져나온 폭음을 들었다. 때문에 다시 왕궁으로 온 상태였다.

자신의 딸에게 가장 큰 독이 될, 아르센 헤르츠라는 그 마법사와 함께.

* * *

사실 칼리안은 정말 많은 생각을 했었다.

실리케가 어떻게 일을 벌일지를 예측하기 위해서였다.

칼리안이 실리케를 만나러 갔던 날.

밖에서 칼리안을 기다리던 시종이 무슨 짓을 꾸몄다는 말을 할까봐 얀도 데려가지 않고 실리케를 혼자 만났다.

그만큼 가능한 많은 경우의 수를 두고 생각을 했다.

그 중 하나가 아르센이었을 뿐이다.

마력탄까지 써 가며 헤이시아 궁에 폭발 사고를 일으킬 정도로 막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아르센을 빌미로 암살을 시도했다는 누명을 씌우지 않을까 하는 예상까지는 했다. 그래서 대비를 했다.

그리고 실리케는 아르센이라는 미끼를 덥썩 물었다.

이제 그 낚싯줄을 힘껏 당길 차례였다.

칼리안이 한번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제 막 들어와 왕자들의 곁에 앉아 있던 르메인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뚜벅, 뚜벅.

고요한 가운데 칼리안의 구두 소리가 울려퍼졌다.

르메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이목이 칼리안에게 집중됐다. 때문에 칼리안의 목소리도 모두에게 들렸다.

"전하."

칼리안은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가며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수많은 이들이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헤이시아 궁의 사고를 조사해 주십시오."

제 손으로 마력탄을 터뜨리고 그것으로 칼리안을 내치려 했던 것을 밝혀달라고.

그리하여 실리케가 절대로 견디지 못할 시간을 만들어달라고.

그렇게 말했다.

르메인의 눈이 잠시 플란츠에게 가 닿았다.

플란츠는 아무 말 없이 르메인의 시선을 받기만 했다.

곧 르메인의 입이 열렸다.

"그리하겠다."

* * *

가장 먼저 확인된 것은 아르센에 대한 사실이었다.

실리케의 부친이기도 한 에반이 아르센의 거취를 보증했다. 사고가 있던 당시 아르센이 에반의 집에 있던 것을 본 눈이 너무 많아서 의혹의 여지조차 없었다.

실리케가 그렇게 애써 만든 덫이 너무 쉽게 벗겨졌다.

"섣부른 말을 삼가시라고, 그리 말씀을 드렸는데."

실리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칼리안의 말에 실리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실리케는 분명 아르센을 보았다 했다. 칼리안에게 그 마법사를 당장 데려오라 소리쳤다. 그 마법사가 모든 일의 범인이라 했다.

헌데 아니었다.

심지어 아르센은 오히려 실리케가 파벨의 기사들을 사주하여 자신을 공격하게 했다는 말을 했다.

애초에 아르센을 죽이려 한 것이 에반이 아닌 실리케라는 말에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그러던 중 시종장 라울이 르메인의 곁으로 와 무언가를 알렸다. 이야기를 들은 르메인이 저도 모르게 침통한 소리를 냈다.

"실리케."

르메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장내의 소란을 가라앉혔다.

"폭발에서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크게 다쳤다."

시녀가 죽었다.

기사단장은 크게 다쳤다.

실리케가 고개를 들었고 플란츠는 고개를 숙였다.

실리케는 누군가 살았다는 말 때문에, 그리고 플란츠는 누군가 또 죽었다는 말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뉘우치지 않을 생각인가."

르메인이 다시 물었고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실리케의 뒤에 있던 시녀장을 봤다. 그 시선을 느낀 시녀장이 눈을 꼭 감았다.

그녀는 이 곳에 오기 전부터도 얼굴이 창백했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주시해왔던 칼리안이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무조건 따르기만 해서는 바로잡을 수 없다. 감싸는 것만이 네 길인 것은 아니니라."

생각해보라.

얀은 칼리안에게 욕도 했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시종의 모습이란 말인가?

그 때를 생각한 칼리안의 얼굴에 아주 잠깐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 실리케가 그 미소를 보았다.

"그래. 참으로 많이 닮았구나."

실리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같았다.

아무 위협도 되지 않는 옛 칼리안에게 어떻게든 끈질기게 손을 뻗어 죽여버렸던 칼리안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던 여자였다.

"네 어미도······ 마지막까지 그리 웃었다."

칼리안이 프레이야를 닮았으니까.

너무 많이 닮았으니까.

기사가 깨어나든, 시녀장의 입이 열리든.

에반까지 완전히 돌아섰으니 어차피 실리케는 이제 더 이상 왕비일 수 없었다. 실리케가 그것을 가장 잘 알았다.

그리하여 실리케는 칼리안에게 달려들었다.

어느새 그 손에는 숨겨두었던 비수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칼리안과,

앨런과 키리에와.

······ 플란츠가 보았다.

* * *

끼어들지 말라고.

무슨 일이 생겨도 끼어들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 * *

빌헬름 관의 하얀 대리석 바닥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소리내지 못했다.

르메인이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란델의 눈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실리케는 칼리안에게 비수를 휘둘렀다.

그녀의 비수가 누군가의 가슴을 길게 베며 깊이 파고들었다.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한 발을 떼었을 그 때 칼리안에게는 이미 앨런의 실드가 씌워져 있었다.

사실 그렇게 튼튼한 6서클짜리 실드가 없어도 평생 칼 한번 휘둘러보지 않은 그 움직임은 지나치게 느렸다. 굳이 칼리안이 손을 쓸 필요조차 없을 만큼 느렸다.

그러므로 칼리안은 완벽하게 안전했다.

그 똑똑한 플란츠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니 플란츠는, 일부러 달려든 것이다.

실리케의 비명소리가 정적을 깼다.

청포도 빛의 아름다운 드레스에 핏물이 스몄다.

아무도 그 소리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비수와 함께 잘려나간 실리케의 아름다운 손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길게 베이다 간신히 심장 앞에서 멈춘 플란츠의 깊은 상처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죽겠다고 달려든 원수같은 놈 살리겠다고.

제 스승이 씌워준 실드를 깨기 위해 만들어 낸.

투명한 검에 어린 푸른 오러 때문이었다.

제17장. 그 걸음 (5)

내가 널 어떤 마음으로 살려뒀는데.

저딴 칼에 네가 죽으면 내 생은 뭐가 되냐고.

진짜 미친 새끼 같으니.

* * *

칼리안의 손에서 검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플란츠가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뒤에야 행사장은 비로소 혼란에 휩싸였다. 지금 놀라야 할 일이 칼리안이 푸른 빛무리를 발현했다는 것만은 아니었음을 깨달은 까닭이다.

왕비가 왕자에게 칼을 휘둘렀으니까!

제 아들이 흘리는 피를 또 보게 된 르메인이 플란츠에게로 다가가던 걸음을 휘청였다.

"플란츠."

그런 르메인을 붙든 앨런은 칼리안을 보며 혀를 쯧 찼다. 모두의 앞에서 힘을 들켜버렸으니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다만 지금 당장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잘 알았으므로 앨런은 다시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우선 이 곳을 벗어나 계시지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더 지체하지 않고 르메인을 보호하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와 함께 카에라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부는 앨런과 함께 르메인을 호위했고 또 일부는 실리케를 포박해 끌고 나갔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귀족들도 모두 내보내며 주변을 통제했다.

발칸의 마법사들은 빌헬름 관에 누군가 더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분위기에 휩쓸려 발생될지 모를 또 다른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혼란의 한 가운데 있던 칼리안은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하는 것이 맞을 터였다.

칼리안은 조금 전 그 많은 이들 앞에서 오러를 썼음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르메인과 얀 란델과 에반까지 모두 다 칼리안이 숨긴 것을 보았다는 걱정도 모조리 미뤄뒀다.

칼리안이 입술을 깨물며 플란츠의 상처를 내리눌렀다.

머릿속을 맴돌던 욕지거리가 기어이 입 밖으로 나왔다.

"미친 새끼."

플란츠는 이미 정신을 놓았다.

실리케의 비수는 사정 없는 상처를 남겼다. 상처가 길고 또 깊었다. 심장이 뛸 때마다 피가 솟구쳤다.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축복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손이 정말로 특별하기를 바랐다면 축복의 힘도 더 강했어야 했다. 하지만 시스파니안은 그 정도의 힘을 남겨주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빌어먹게도 사려깊었으니까.

이대로는 진짜 죽는다.

멈추지 않는 피를 보던 칼리안이 채근하듯 입을 열었다.

"치유사를, 빨리."

"이미 부르러 갔습니다. 히나가 오는 것이 빠를 것 같아서 공자님은 체르밀 궁으로 갔습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칼리안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은 키리에가 다가오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칼리안과 함께 플란츠의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무언가를 떠올린 칼리안의 고개가 휙 들렸다.

바로 이 곳에 치유사가 있지 않은가.

란델이 있지 않은가?

"란······."

때문에 란델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던 칼리안의 입이 하려던 말을 멈추고 서서히 닫혔다.

란델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로 계속하여 칼리안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든 칼리안과 앉아있던 란델의 시선이 곧바로 맞닿았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칼리안이 보게 되었다.

지독하리만치 이성적인, 란델의 밑바닥을.

란델은 칼리안과 달랐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갔다.

숨긴 모습을 풀어놓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길게 웃었다.

칼리안은 그런 란델을 원망하는 대신 상처를 누른 손에 힘을 주었다. 악다문 이 사이로 다시 한번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오래지 않아 히나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 * *

가만히 앉아 있던 실리케가 고개를 들었다.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발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울렸다. 그 걸음 소리만으로도 누가 온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곧 소리가 멈추고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말 없이 선 채로 쇠창살 너머의 실리케를 지켜보던 이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아주 깊이 잠긴 목소리였다.

"나를 찾았다고요."

피 묻은 옷, 오른손이 있어야 할 곳에 감긴 붕대, 창백해진 얼굴까지. 실리케의 모습은 아침과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독기어린 모습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불렀단다."

그렇게 말하던 실리케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눈이 오른 손에 가 있는 것을 보니 잘린 곳이 아픈 듯 했다. 칼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잠시동안 말을 멈추고 있던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너."

그렇게 칼리안을 부른 실리케의 눈이 칼리안의 면면을 훑어내려갔다. 칼리안은 묵묵히 실리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숨기는 것이 있지?"

칼리안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예상했던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작 그것을 물으려 이 곳까지 불러낸 것인가.

칼리안이 숨긴 것에 대해 뭐가 그리 궁금해서. 이제와서 이런 질문이나 한단 말인가.

곧 칼리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실리케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느끼며 칼리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숨기는 것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와서 그의 비밀을 실리케에게 알려 줄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칼리안은 그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때문에 실리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온 김에 나도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칼리안은 긍정으로 들었다.

"아이샤 전 왕비. 당신이 죽인 것이 맞습니까."

란델의 친모이기도 한 전 왕비의 죽음에 실리케가 정말 연관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아이샤······."

그렇게 말한 후 한동안 기억을 더듬는 척을 하던 실리케가 떠오른 것이 있다는 표정을 만들어보였다.

어린아이가 보여줄 듯한 순수하면서도 잔인한 웃음을 지은 실리케가 칼리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 일을 어떻게 잊겠니. 내 손으로 처음 건넨 독이었는데."

아이샤도 죽였다.

지금 그것을 저렇게 추억거리 꺼내놓듯 말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르메인을 이제까지 살려둬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실리케의 부드러운 음성이 복도를 울렸다.

"나는 이렇게 솔직하게 말했는데. 넌 아니구나."

그렇게 말한 실리케는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이 있는 쪽을 보고 있었다. 뭐라 대답을 해주기를 바라는 듯 했으나 칼리안은 더 이상 실리케와 나누고 싶은 말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만 발을 돌릴까 하던 칼리안은 곧 걸음을 멈추고 잠시동안 실리케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조용히 큰 숨을 들이킨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실리케의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닌 새로운 질문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물어볼 줄 알았는데. 안 물어보네요. 당신의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제 손으로 아들에게 칼을 휘둘러놓고도 실리케는 이제껏 단 하나도 묻지를 않는 것이다.

칼리안의 말에 실리케가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 끝까지 나를 방해했잖니."

지독하리만치 잔혹한 오해. 그리고, 외면.

살짝 내리 뜬 눈으로 바닥을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더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나도 화가 좀 나 있어서."

칼리안이 손을 들어 심장이 있는 곳을 가리켜보였다.

"당신의 그 서툴고 작은 칼에 어떻게 그런 심각한 상처가 났을지. 그걸 좀 생각해봤으면 하는데."

다시 반말이 나왔으나 실리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하나 남은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쥐었을 뿐이었다. 실리케의 눈이 드레스에 묻은 붉은 핏자국을 향했다. 누구의 피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천천히 허리를 숙여 실리케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느린 속도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지키려는 쪽으로 뛰어듭니다."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표정을 한 채 드레스 자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칼리안이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러니 당신이 걷던 그 걸음. 한 번만 돌려보지 그랬습니까."

말을 마친 칼리안이 뒤돌아 걸어나갔다.

마지막을 알리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그 곳에 또 한번의 정적이 찾아왔다.

곧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가 복도에 퍼져나갔다.

그것이 뒤늦은 후회일지, 더 나은 길을 만들 방법을 놓쳤음에 대한 아쉬움일지.

혹은 또 다른 말을 담은 소리였을지.

이제 와 그것을 신경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실리케 스스로도.

* * *

실리케에 대한 형 집행은 빠르게 진행됐다.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말했던 것처럼 광장에 레니시타 잎을 깔지는 않았다. 다만 아주 길고 고통스럽게 숨을 멎게 한다는 독이 전달됐다. 르메인의 결정이었다.

도무지 깨어날 생각을 않는 플란츠를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그토록 많은 이들을 독살했던 것에 대한 똑같은 죗값이라 여긴 것이었는지는 르메인만 알 수 있을 일이었다.

그리고 그 날의 세뉴 강에는.

그 어떤 꽃잎도 떠내려가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실리케를 위한 안네루시아를 준비하지 않았다.

* * *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고요한 세뉴 강처럼 지나갔다.

좋지 않은 기억을 빠르게 지워내고자 했으므로 실리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곧 사라져갔다. 그 대신 칼리안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그 날 실리케에게 가려졌던 또 다른 사건이 있었으니까.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귀족들과 기사들이 보았다.

칼리안이 손에 들었던 그것은 분명히 오러였다.

'왕자님께서는 이제 고작 열 다섯이십니다. 지금껏 그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된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뿐만입니까? 마법도 사용하신다 하지 않습니까.'

흉한 일을 겪었으니 이제 좋은 일을 공표해야 할 때가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들이 르메인에게 계속 전달됐다.

하지만 르메인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고 있었다. 아니 할 만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칼리안을 일단 만나봐야 무슨 말이라도 할 것이 아닌가?

그 날 칼리안은 실리케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온 뒤 곧바로 플란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주일 째 그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깨어나지 못하는 플란츠 옆을 계속 지키고 있는 것이었으니 아무리 르메인이라 해도 차마 강제로 불러내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입을 연 르메인이 이마를 감싸쥐었다.

속은 시끄러운데 앞에 앉은 새끼 코끼리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자네 말은, 칼리안이 호위에게 호신술을 배우다가 검의 길에 올랐다는 것인가."

일 평생을 오롯이 검술 수련에 바치며 살아온 슬레이만이 거품 물고 쓰러질 소리를 한 얀은 정말로 진지했다. 심지어 얀은 칼리안의 성취를 매우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깊이 잠든 듯 일어나지 않는다는 플란츠만으로도 걱정이 태산인데 칼리안의 일까지 더해져 르메인을 괴롭히고 있었다.

하필 이런 때 앨런도 없었다.

얀을 불러 물어보겠다 했을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나간 뒤로 돌아오질 않는 것이다.

"그래. 알겠으니 가보도록."

결국 르메인은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얀을 돌려보냈다.

그저 하루 빨리 플란츠가 깨어나서 칼리안이 밖으로 나오기만을 바라는 르메인의 한숨이 깊고도 깊었다.

* * *

한편 그 시간.

르메인의 한숨을 만들어낸 두 왕자가 있을 체르밀 궁은 르메인의 시끄러운 속과는 정 반대로 지나칠 정도의 고요함에 묻혀 있었다.

밖에서는 이미 실리케에 대한 일을 잊어가고 있었으나 체르밀만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으므로 과연 왕자들이 사는 곳이 맞기는 할까 싶을 정적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특히 플란츠가 머무는 4층의 분위기는 카이리스 왕궁 그 어느곳보다도 침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누구든 4층에 발을 디디기를 꺼려했다.

때문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 그래서 넌 왜 안 가는데."

카이리스의 2왕자가 이미 깨어났으며 아주 멀쩡해진 몸으로 짜증 섞인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을.

"변명 거리를 아직 못찾았습니다."

그리고 칼리안이 자신이 어떻게 검의 길에 올랐는지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서 일주일 째 이 곳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것도.

덕분에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얀을 부른 르메인이 지금 어떤 고초를 겪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를 칼리안은 아주 뻔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신경쓰지 말고 쉬십시오. 아직 많이 어지러우실 겁니다."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라는 말이 적힌 목줄을 한 고양이가 침대로 올라와 애옹거리고, 그 옆에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는 시녀가 있고, 그 뒤는 오드아이 검사가 말 한마디 안한 채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데, 또 그 옆에는 7서클 마법사가 검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이틀 전 눈을 떠서 이 광경을 처음 봤을 땐, 설마 실리케로 인해 우울해할까 걱정해서 저러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우애좋은 형제 사이가 아니지 않나.

"······ 가라고."

애초에 내 동생이 맞기는 하느냔 말이다.

그런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이 씩 웃었다.

싫다는 뜻이리라.

제17장. 그 걸음 (6)

사실 칼리안은 거짓말을 잘 못했다.

정말이다.

덕분에 칼리안의 몸을 가지게 된 지 1년도 안 된 지금 칼리안의 과거를 완전히 알고 있는 이가 벌써 두 명이었다. 물론 앨런과 키리에다.

게다가 슬레이만은 칼리안이 말하지 않았음에도 비밀을 꿰뚫어봤고 플란츠는 진실에 거의 접근해가고 있으며 아르센 역시 정확히는 아니지만 칼리안에게 남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것까지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이들이 칼리안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이제 그리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칼리안도 극구 부인하는 것을 그냥 포기해버렸다.

하지만 르메인의 경우는 달랐다.

이 세상에 칼리안의 비밀을 알면 안 되는 단 한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르메인이니까.

때문에 검의 길에 어떻게 올랐는지에 대한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는데 일주일이 넘게 걸린 칼리안이었다.

"그러니까 시스파니안의 둥지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그 뒤에 슬레이만과 대련을 하며 검의 길을 깨우쳤다. 그렇게 얘기를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앨런의 질문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자 앨런이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얼굴이 되더니 툭 내뱉었다.

"한번 가서 말씀해보시지요. 그 입에서 욕이 나오는 것을 저도 좀 보고 싶으니."

호신술 배우다 깨우침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놈이나.

드래곤에게 검의 이치를 배웠다고 말하겠다는 놈이나.

칼리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무엇이라 설명을 해야 합니까."

아무튼 플란츠가 깨어난지도 벌써 사흘이다.

더는 플란츠의 방에 머물기도 힘들었다. 눈만 뜨면 나가라고 성화를 부렸으니.

결국 칼리안은 아무 대비도 하지 못한 채 앨런과 함께 아르피아 궁으로 갔다.

칼리안이 찾아왔다는 것을 들은 르메인은 조찬을 서둘러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 얼굴이 상당히 수척해져 있었기 때문에 칼리안은 굉장히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변명거리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플란츠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사흘이나 숨기게 된 것이 아닌가.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칼리안의 인사에 르메인이 어서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칼리안이 르메인의 맞은편에 앉은 뒤 시종장 라울이 들어와 차와 과일을 내려놨다. 그 후 라울이 나가며 집무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르메인의 입이 열렸다.

"네가 요즘 고생이 많다 들었다."

플란츠를 간호하느라 그 방에 있는 줄로 알고 있으니 하는 소리였다. 그야말로 칼리안의 양심을 쿡쿡 찌르는 말이라서, 칼리안이 서둘러 대답했다.

"플란츠 형님은 잘 깨어났습니다. 무탈합니다."

그 말에 르메인이 아주 기뻐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다시 걱정하는 눈빛을 보였다.

"괜찮은 것이냐?"

방금 전에 몸이 다 나았다 했으니 이번에는 다른 것에 대한 질문일 터였다. 실리케의 비수가 길고도 깊은 상처를 낸 것이 비단 몸만은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다른 생각은 없는 듯 합니다. 그래도 완전히 괜찮아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당장 실리케 뒤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으니 그것 하나는 다행이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상처가 좀 아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터였다.

"그래. 네가 신경을 써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아닙니다, 전하."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칼리안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플란츠를 돕게 되리라고는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플란츠에 대한 시름을 내려놓은 르메인은 이제 다음 시름거리를 꺼내놓기 위해 잠시 말을 골랐다. 칼리안은 그런 르메인의 말이 이어지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그 일이 있던 날 네가 보여준 것에 대해 왕궁 안팎으로 오가는 말이 많구나.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나도 그렇고."

칼리안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지그프리드의 그 아이에게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만."

"죄송합니다."

칼리안이 얼른 사과의 말을 꺼냈다. 얀이 르메인에게 얹어준 시름에 대한 것이었다.

세상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둘째 치고 그런 생각을 고스란히 르메인에게까지 전할 줄은 칼리안도 몰랐다.

"제가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르메인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뒤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마력의 덩어리를 만들어 보였다.

언제나와 같이 투명한 유리조각이 뭉친 모양의 구체가 손바닥 위에 놓였다.

"허."

그날 잠시 보았던 것이 이렇게 눈 앞에 나타나자 르메인이 다시 한번 놀란 눈을 하며 짧은 감탄을 냈다.

칼리안은 그것을 무딘 날의 작은 칼로 만들어보인 뒤 오러를 불어넣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흩어냈다. 아무래도 국왕의 앞이었으니 무기를 오랫동안 보이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마력과 오러를 함께 사용할 수 있다보니 이런 재주가 생겼습니다."

고작 재주라니.

칼리안의 말에 르메인이 웃었다.

칼리안이 그런 르메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죽어 사라진 검사의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명을 했다.

그것은 사실이라 하기에도 그렇다고 거짓이라 하기에도 어려운 말이었다.

"지그프리드 공작과 검을 맞대 본 적이 있습니다. 공작의 말로는 제가 사용하는 검술이 세크리티아 기사의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너무 허황된 소리임을 칼리안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빙성을 주기 위해 슬레이만의 이름도 적당히 섞어 덧붙였다.

칼리안이 대체 언제 세크리티아 기사를 만나보았겠는가. 그러니 그들의 검술을 칼리안이 쓸 줄 안다 하면 믿지 않기도 어려울 터였다.

"언제부터 그런 힘을 지니게 되었느냐?"

"기억을 가지게 된 것은 전하의 탄신 기념일 조금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방금 보여드린 그것은 지그프리드 공작령에 도착한 뒤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르메인이 갑자기 짧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목이 간당간당한 것이 네가 아니라 나일 것이라 하더니. 마나실 경은 이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구나."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르메인이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창 밖에 보여지는 왕궁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네가 있는 곳이 왕궁이 아니었다면 숨길 이유가 없었으리라는 것을 안다. 숨긴 것에 대해서 질책할 생각은 없으니 미안해하지 말거라."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호신술이나 배우다 깨우친 것은 아니라 하니 다행이다."

"······ 죄송합니다."

칼리안의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얀은 정말이지 얀이다.

"아니다. 다만 힘을 얻게 된 과정에 대해서까지 모두에게 알리기는 어렵겠구나."

과정을 빼고 칼리안의 검의 길에 올랐다는 것만 알리겠다는 소리였다. 아직 그레이가 어떤 상태인지는 모를테니 칼리안이 여섯 번째 검이 되었다는 소식이 퍼져나갈 터였다.

"발칸의 창단식 자리에서 내가 알리도록 하마."

실리케의 일로 발칸의 창단식이 조금 미뤄졌다. 얀을 통해 일주일 쯤 뒤에 진행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칼리안은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많은 이들 앞에서 힘을 보였으니 이미 세작들을 통해 대륙의 모든 나라로 칼리안의 이야기가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니 막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훈련할 길이 생겼음을 반겨할 수 밖에.

"그리고 일전에 네가 말했던 이동 마법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다."

공간이동 마법진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칼리안이 눈을 빛내며 르메인을 쳐다봤다. 대답을 꽤 기다리고 있던 듯한 모습이었으므로 르메인이 살짝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수락하마. 그 역시 원하는대로 해보려무나."

본래 르메인은 아무래도 어렵겠다며 거절을 하고자 했다.

그런데 칼리안이 검의 길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에반 브리센 후작이 경계를 하기 시작할 것은 분명했다. 따라서 지그프리드와 카이리시스를 연결시킨다면 브리센에서 허튼 생각을 할 일이 적어지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 르메인이었다.

더불어 란델에 대해서도.

당연히 르메인은 란델이 신관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플란츠가 쓰러졌을 그 당시 칼리안과 란델이 보인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칼리안은 플란츠에게로 달려갔고 란델은 밖으로 나갔다.

- 칼리안 왕자님이 저 궁을 비워내기 전까지 란델은 얌전할 겁니다. 란델의 속은 그때 가면 들여다 보실 수 있겠지요.

앨런의 말을 잠시 떠올린 르메인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졌다.

그날 란델은 제 속내를 드러낸 것이나 다름 없었다. 칼리안과 플란츠를 제 형제이기 이전에 경쟁자로 보겠다는 소리였다. 그런 란델이 왕위에 오른다면 칼리안이나 플란츠를 어떻게 처분할지는 보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

칼리안에게 주어진 저 힘이 과연 득이 될지.

혹은 또 다른 독이 될지.

르메인의 눈에 채 씻어내지 못한 걱정의 빛이 어렸다.

* * *

카이리스 왕궁에서는 실리케와 연관된 모든 것을 지워냈다.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이라는 위대한 이름으로 시작되는 카이리스 역대 왕비의 목록에서 실리케 브리센이라는 글자 위에 두 줄의 선이 그어졌다. 실리케가 만들었던 온실은 완전히 해체하여 치워냈으며 사고가 있었던 곳에 대해서도 보수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실리케와 연관된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처분이 있었다. 죄의 유무와 경중을 따져 죄가 있는 이들은 감옥에 가게 되었다. 죄가 없다 하더라도 왕궁에 둘 수는 없었으므로 모두 왕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로 인해 플란츠의 시종과 시녀들이 모두 왕궁 밖으로 내쳐지게 되었다. 단 한 명도 빠짐 없이 모두가 실리케의 수족이었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왕궁의 내정 담당관은 새로운 시종과 시녀를 직접 뽑을 생각인지 혹은 왕궁에서 배정해야 할지를 묻는 서신을 플란츠에게 보냈다.

본래대로라면 플란츠가 그것을 결정하기 전까지 임시로 보필할 이들을 먼저 보내야 했으나 칼리안이 플란츠를 대신해 거절했다. 자신의 시종과 시녀들이 돌아가며 플란츠를 살피기로 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덕분에 플란츠는 새로운 시종도 배정받지 못한 채 칼리안의 시종과 시녀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멀쩡히 일어난 뒤에도 '여전히 혼수상태'인 척을 하며 아직 내정 담당의 서신에 대해 답을 하지 못한 채였다.

칼리안이 안나갔으니까.

도무지 나갈 생각을 하질 않았으니까!

'형님 때문에 다 망했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주십시오.'

정작 플란츠는 제대로 보지도 못한 그 힘을 사람들에게 들킨 이유가 바로 플란츠 때문이라 하니 플란츠는 창문으로 3층과 4층을 오가며 눌러앉아 있는 칼리안을 더 내치지도 못하고 그저 꾹꾹 참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내 동생이 맞기는 하느냐는 그 질문도 꺼내지 못한 채로 꾹꾹 참았다.

아무튼 그런 일들의 결과로.

"애옹!"

고양이가 계속 찾아왔다.

칼리안이 르메인을 만나겠다며 드디어 밖으로 나간 뒤였다.

혼자 남아 창 밖으로 언뜻 보이는 헤이시아 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저 고양이가 침대 위로 폴짝 올라왔다. 청소를 하는 히나를 몇 번 따라다니더니 플란츠의 방을 그것도 침대를 제 영역으로 삼은 것이다.

"애오옹!"

처음 봤을 때는 손바닥만하던 것이 벌써 한 배 반은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방문 아래 난 틈으로 참 자유롭게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고양이를 보고서야 알았다.

닫힌 문의 틈이 그렇게나 컸다는 것을.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목걸이에 써둔 글자를 쳐다보던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방문을 잠시 쳐다봤다. 곧 노크소리가 들리겠거니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 똑똑.

아니나 다를까, 오래지 않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혼수상태'인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고 곧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히나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플란츠를 향해 수어를 했다.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청소를 하겠습니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등등.

플란츠는 몇가지 수어를 배우게 되었다. 매번 수첩에 적어 보여주는 것이 신경쓰여서 그냥 배웠다.

아무튼 히나의 말은 고양이가 또 들어왔으니 하는 사과였고 플란츠는 짧게 대답했다.

"둬."

발치에 고양이 한 마리 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 감사합니다, 좋은, 왕자님.

플란츠는 감사하다는 말만 알아들었고 히나는 웃었다.

언제나처럼 마음에 가득 찬 그림자는 전부 지워내주는 그런 웃음이었다.

어느새 플란츠는 헤이시아 궁을 보던 것도 잊고 발치의 고양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 * *

시간은 다시 흘렀다.

빌헬름 관에서 벌어진 일을 지우려는 것처럼 발칸은 같은 자리에서 더 성대한 창단식을 치뤄냈다.

플란츠는 잘 회복해나가고 있었다.

사고가 있던 빌헬름 관에 칼리안과 함께 입장함으로서 자신이 건재함과 함께 두 왕자가 완전히 손을 잡았음을 알렸다. 그리하여 란델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새로 맞췄던 화려한 옷을 대신해 평소 입던 차림을 한 앨런 마나실은 최근에 주인을 잃은 라트란 영지를 하사받으며 백작위에 봉해졌다.

때문에 그 곳은 이제 마나실 영지가 되어야 했으나 그런 것은 딱 질색인 앨런은 영지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아르센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그것이 발칸의 부군단장에 정식으로 위임된 감격 때문일지 다시 시작된 야근으로 인한 피로 때문일지는 아르센과 앨런만 알았다.

반 브리센 세력의 기사들을 이끌게 된 아이즌 에이프린은 기사 양성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와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열 개의 기사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브리센 후작가는 잠시 대문을 닫았다.

에반은 사고가 있던 그 날 칼리안의 오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음을 생각하며 수련에 임했다. 물론 그것은 칼리안이 마법으로 지워냈기 때문이었으나 에반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발칸의 창단식을 마친 이후 르메인은 카이리스에 여섯 번째 검이 탄생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사람들은 시스파니안을 닮은 3왕자가 검의 길에 올랐음에 환호했다.

- 카이리스에 세렌티의 영광 있으라!

겨울이 왔고, 지나갔다.

고요한 세뉴 강을 꽁꽁 얼려두었던 얼음이 녹자 봄의 시작을 알리는 프레디아 꽃의 향기가 온 사방에 퍼져나갔다.

그렇게 르니에리 향기는 지워지고 새로운 봄이 왔다.

브리센 후작가의 대문이 다시 열렸다.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1)

- 쌔애액!

삽시간에 만들어진 얼음창이 쏘아져 나갔다.

아르센과 상대의 거리는 불과 세 걸음 남짓.

때문에 아르센의 얼음창은 생성과 동시에 상대방의 가슴팍에 도달했다.

- 카앙!

하지만 상대는 그것을 막아냈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내리쳐진 얼음이 산산히 부서졌다.

눈으로 보고 움직이면, 죽는다.

소리를 듣고 움직이면, 반드시 죽는다.

그것이 아르센의 얼음이었다. 그만큼 빨랐다.

그럼에도 상대는 그 얼음의 첨예한 끝이 몸에 닿기 전에 쳐내거나 혹은 회피하고 있었다.

아르센은 이제 몇 번째 공격이 막힌 것인지 세는 것도 포기했다.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얼음창을 날려도 죄다 막혀버리고 있었던 탓이다.

그들의 주변을 멀찍이 둘러싼 이들의 시선이 땅에 떨어진 얼음 조각에 가 닿았을 무렵, 아르센의 손을 따라 연달아 세 번의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 쌔액! 쌔애액! 쌕!

심장과 뒷목 그리고 정수리를 노린 세 개의 얼음창이 동시에 공기를 갈랐다. 달라진 공격 패턴에 상대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검을 쥔 그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빠르게 움직였다.

- 카아앙! 타당!

심장으로 날아오던 얼음을 손쉽게 날려버린 그가 곧바로 몸을 비틀듯 돌아서며 검을 뻗고 회수했다. 뻗어나간 검에 머리 위로 떨어지던 얼음이, 회수되어 돌아오는 검에는 뒤에서 날아오던 얼음이 가로막혔다.

- 투둑, 투두둑!

바닥에 떨어진 얼음들은 어김없이 조각조각 흩어졌다. 단순히 쳐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얼음에 그만큼의 충격을 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르센은 멈추지 않고 공격했다.

- 쌔액!

- 카아앙!

사납게 달려든 얼음창이 또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르센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가 강했다.

이 얼음창 한 번에 브리센의 기사들이 한 명씩 죽어나갔던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아르센을 상대하고 있는 이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얼추 가늠이 되리라.

- 쉬이이익!

아르센의 손 끝에서 얼음 줄기가 쏟아져 나갔다.

바늘같이 가늘고 날카롭게 응집된 얼음이 언뜻 보기에도 십수 개는 넘는다.

그 수를 확인한 상대의 손에서 검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 보다는 순식간에 형태를 바꾸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날카로운 예기를 발하던 검은 어느새 둥글고 넓적한 방패가 되어 있었으니까.

- 타다다다당!

새롭게 만들어 낸 방패로 공격을 막은 상대가 땅을 박찼다.

공격을 막기만 하던 그가 당장 코 앞까지 달려드는 것을 본 아르센이 지체없이 마력을 운용했다. 시동어 없이 사라진 그의 모습이 상대의 뒤에서 나타났다.

목표가 사라졌으나 상대는 당황하지 않았다.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등 뒤를 향해 방패를 휘둘렀다.

- 부웅!

순간 낭패한 얼굴이 된 아르센의 몸이 다시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의 허공을 가르게 된 방패가 금세 검의 형상을 취했다.

다만 이번에는 장검이 아닌 단검이다.

동시에 아르센이 상대방으로부터 조금 먼 곳에서 나타났다.

- 쉬이익!

그 생각과 움직임을 이미 읽었다는 듯, 아르센이 나타난 곳으로 상대방의 단검이 날아왔다.

"이크!"

깜짝 놀란 아르센이 재빨리 실드를 발현했다. 그렇게 몸을 보호하며 다시 텔레포트를 하려던 그 때.

- 카가각!

불길한 소리와 함께 날아온 단검이 실드를 관통했다.

브리센의 기사들이 몇 차례나 공격하고도 멀쩡했던 실드가 단검 하나에 뚫려버린 것이다. 잠시 희게 빛나던 실드가 허무하게 사라졌다.

곧 유리 조각 같은 칼날이 그대로 아르센의 목으로 짓쳐들었다. 아르센이 자신의 실드가 파괴된 것을 인지하고 아주 잠시 멈칫한 사이의 일이었다.

지켜보던 모두가 위험을 느낀 그때.

당장이라도 목을 뚫어낼 기세를 보이던 단검이 마치 누가 붙들기라도 한 것처럼 우뚝 멈췄다. 그리고 공기중에 흩어지는 듯한 모양새로 형태를 잃고 사라졌다.

아르센의 목에 작은 상처를 낸 뒤였다.

- 꿀꺽.

피부가 살짝 따끔거리는 것을 느낀 아르센이 마른 침을 삼켰다. 만약 단검이 멈추고 사라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르센의 목에는 딱 단검만한 구멍이 났을 것이다.

그러니 아르센의 패배였다.

아르센은 양 손을 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졌습니다, 왕자님."

오랜만에 불쑥 찾아와 아르센과 대련을 했던 상대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습니다, 헤르츠 경."

그 말에 숨도 쉬지 못하고 둘의 대련을 지켜보던 하얀 로브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모두의 입에서 환호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우와아아!"

"멋집니다!"

아무리 오러를 쓰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그런 칼리안과 아르센이 공방을 주고 받는 것을 눈 앞에서 보았으니 꽤 괜찮은 눈요기가 되었을 터였다.

훈련장을 뒤흔드는 함성 소리에 잠깐 웃은 칼리안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르센에게 건넸다.

한 방울씩 흘러내리는 피 때문이었다.

"놀랐습니다. 이제 시동어 없이 텔레포트도 하는 겁니까."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레이스 경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동 마법의 대가인 레이첼 그레이스에게 공을 돌리는 겸손한 대답이었다.

곧 둘은 나란히 서서 훈련장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칼리안이 아르센을 보며 물었다.

"헌데 굳이 검을 든 이에게 근접하여 공격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도 그랬지만 베른의 마지막을 기억해보아도 그랬다. 아르센은 코앞까지 다가와 베른의 검을 막고 파괴했다.

아르센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상대방과 떨어져 있으면 싸우는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칼리안이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무리 텔레포트가 있다지만 마법사들은 검을 든 이들보다 몸이 느릴 수 밖에 없다. 방금 전 아르센 역시 실드가 깨진 뒤 이렇다 할 행동을 못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인 공격 전문 마법사는 검사와 코앞에서 공방을 주고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방금 죽을 뻔 했으면서."

때문에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자 아르센이 씩 웃었다.

그저 재밌다는 이유로 위험을 무릅쓰고 사는 아르센을 보며 칼리안은 더 참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베른도 잡아낸 아르센이었다.

물론 팔도 하나 없었고 사흘을 넘게 잠을 자지 못해 집중력도 개똥이었던데다 몸에는 화살이 열댓개 쯤 박혀있었고 출혈도 많아서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아무튼 소드마스터를 이겼던 마법사니까.

뭐 알아서 잘 하겠지.

"다른 대원들에게 그리 하라 가르치지는 마세요."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정중하게 대답한 아르센이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데 왕자님께서 검을 집어던지실 때에는 많이 놀라긴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거리를 두고 싸울 의미도 없겠습니다. 마력의 검을 손에서 떼낸 뒤에도 유지하시게 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진심어린 감탄의 말이었다.

칼리안은 아직 멀었다는 듯 대답했다.

"잠깐 던질 정도로는 유지할 수 있는데,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그리고는 굉장히 무심한 말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한 번 던지면 컨트롤도 못하고 회수도 안 돼서."

"······ 네?"

잠깐만요.

컨트롤도 안되고 회수도 안된다뇨.

우뚝 발을 멈춘 아르센이 묘한 얼굴이 되어 다시 물었다.

"그것을 알면서 던지신 것은 뭡니까."

칼리안이 웃었다.

"경의 실력에 대한 믿음."

믿음 같은 소리 한다!

그냥 운이 좋아서 목 앞에서 사라졌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르센이 굉장히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했다.

이런 아르센의 마음을 알 리 없을 마법사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제 50여 명으로 늘어난 발칸의 대원들이었다.

자칫했으면 방금 전에 꽃잎 타고 세뉴 강을 건너갈 뻔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르센이 혼잣말을 하듯 칼리안을 욕했다.

오랜만에 눈호강을 하게 된 마법사들이 신나게 떠드는 통에 아르센이 내뱉은 욕은 아마 칼리안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터였다.

키리에가 다 들었다.

* * *

곧 아르센은 훈련장 안으로 마법사들을 불러들인 뒤 방금 전 오간 공방에서 배울 점들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훈련장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혼잣말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플란츠를 향한 질문이었다. 세상사에 관심 없다는 눈으로 앉아 있던 플란츠가 물었다.

"뭐가."

칼리안이 굳이 이 좋은 봄날에 밖에 나와 아르센과 한 판을 벌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플란츠 때문이다.

물론 플란츠와 사이좋게 소풍이나 온 것도 아니었다.

마법사단 발칸.

단순히 마법사들을 바글바글 모아놓고 불덩이만 내쏘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악마라는 악명까지 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거 발칸은 르메인이 창단했지만 플란츠가 썼다.

그러니 누가 저들을 '악마'로 만들었겠는가.

"저 마법사들, 훈련시켜 볼 생각 없습니까."

바로 플란츠였다.

나라 운영은 전부 다 실리케에게 맡겨두고 발칸의 육성에만 몰두했었다는 것을 칼리안은 안다.

물론 플란츠는 아직 어리다. 과거와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플란츠가 그 나이의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도 칼리안은 안다.

"또 짖네."

검이나 좀 휘두르던 플란츠에게 갑자기 마법사들을 훈련시키라 하니 플란츠의 입에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말이 나왔다. 어차피 하루 한 번은 듣는 말이니 칼리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검을 가르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군사훈련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칼리안은 욕심이 생겼다. 어차피 놀고 있는 원 주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 뭐하러 다른 이에게 일을 맡기겠느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실소하며 말했다.

"아우님도 잘 하실 수 있는 일에 굳이 왜 나를 불러내는지 모르겠는데."

그 말에 칼리안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는 건 이 나라 것이 아니라서요. 들킵니다."

그렇다. 이제는 플란츠도 칼리안의 비밀을 적당히 알고 있었다. 칼리안은 르메인에게 했던 이야기를 플란츠에게도 똑같이 했다.

물론 왕제이자 기사였던 베른이 카이리스의 전략전술을 어찌 모르겠냐만은. 발칸의 일에 직접 관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저는 안 그래도 가진 것이 많아서 발칸까지 제가 관리하게 되면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 겁니다."

발칸의 힘이 우습지 않다는 것을 이제 브리센과 란델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때문에 발칸은 아직 칼리안의 것이 되어서는 안됐다. 브리센 혹은 란델이 혼자 남을 때까지는 힘의 균형을 유지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플란츠가 발칸과 관여되어야 할 큰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제 그늘에 있으면 형님 죽습니다."

칼리안이 진지한 얼굴로 플란츠를 향해 말했다.

브리센 후작가의 대문이 열렸다. 에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리였다.

"형님과 제가 손을 잡았고, 그런데 형님은 제대로 된 세력이 없지 않습니까. 브리센 후작은 분명 제일 먼저 형님부터 없애려 들 겁니다."

플란츠가 말 없이 훈련장을 바라봤다. 고민하는 중인 듯 했으므로 칼리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 그들의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 왕자님."

고개를 돌리니 얀이 서 있었다. 정말 전하기 싫지만 전해야 할 말이 있다는 그런 표정을 한 채였다.

"무슨 일이야?"

"에반 브리센 후작이 지금 만나뵙기를 청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 꿍꿍이를 알 만 했으므로 칼리안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내 오러가 보이는지 그걸 확인하러 오셨나."

재밌는 일이다.

에반은 지금 칼리안보다 자신이 약하다 여기고 있을 테니까.

그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던 칼리안이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라고 해. 갈 테니까."

"네, 왕자님."

다시 발칸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말했다.

"보십시오. 바로 티를 내지 않습니까. 얀은 분명 제가 형님과 함께 이 곳에 있다 했을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저를 지목해 만나기를 청했다는 것은, 브리센 후작 시선에 더 이상 형님이 없다는 뜻입니다."

플란츠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같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발칸, 한번 맡아보시죠."

"······ 그래."

원하던 대답을 들은 칼리안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늙은 사자 이빨이 얼마나 더 날카로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2)

칼리안이 조금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키리에는 세뉴 관을 둘러싼 산책로를 지날 때가 되어서야 아르센이 욕을 하더라는 말을 전해줬다. 때문에 이렇게 묻는 칼리안에게 키리에가 조용하지만 명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헤르츠 경은 능력있는 자입니다, 왕자님."

"내가 아까운 인재 한 명을 정말 세뉴 강 건너편으로 보내버릴까봐 그 자리에서 일러바치지 못했다는 소리야?"

"네. 맞습니다."

"좀 억울하네. 집어 던진 검을 회수하지 못할 뿐이지 언제 사라지는지를 모르는 것이 아닌데."

칼리안으로서는 억울할 일이었다.

"내가 어련히 알아서 던졌을까."

실드를 맹신하는 듯한 아르센에게 적절한 경각심을 줄 만큼의 거리를 정확히 확인하고 공격했던 칼리안이 이렇게 툴툴거렸다.

그런데 그때,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걷고 있던 얀이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참. 오늘 란델 왕자님의 일정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시간이 좀 애매해서 오고 가는 길에 두 분이 마주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의 발이 잠시 멈추었다.

칼리안이 볼을 긁적이며 얀을 향해 말했다.

"넌 또 왜 그걸 지금 말해."

그러자 얀은 미안하기는 하지만 나도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뭐냐는 눈으로 쳐다보니 얀은 참으로 얀 같은 대답을 당당하게 내어 놓았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있었어야죠. 헤르츠 경과 그렇게 험하게 훈련을 하시는 것을 보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그러다 진짜 다치시면 어떡하시려고요."

"키리에 말대로면 내가 진짜로 다치는 것은 둘째치고 내가 진짜로 헤르츠 경을 죽여버리는 게 아닌지를 걱정해야 하는 것 아냐?"

정말. 이 놈이나 저 놈이나.

한 놈은 나를 너무 험하게 보고, 한 놈은 나를 너무 무르게 보니 이를 어찌하나.

아무튼 놀라서 잊었다 하는데 다른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일단 알겠어. 마주치지만 않으면 되지."

결국 칼리안은 키리에에게도 얀에게도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만 대답했다.

'란델 형님이라.'

실리케가 그렇게 된 이후 란델은 조찬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플란츠가 다쳤던 그 자리에서 제 속내가 드러났다는 것과 칼리안이 플란츠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때문에 체르밀 궁에서는 우연히도 마주치지 않았다.

평소 란델이 밖에 나올 일이라 해봐야 장미 정원에 가는 것 뿐이었으니 그냥 칼리안이 피했다. 다른 행사에 함께 나간 자리에서는 한 마디 말도 섞지 않았었다. 본인이 불편하다는데 굳이 가까이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 날 그냥 그렇게 가버리신 것에 대해서 정작 플란츠 왕자님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란델 왕자님이 왜 그러시는지."

그리하여 칼리안의 앞에서는 특별히 다른 왕자들의 험담을 하지 않는 얀이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세상만사 귀찮으신 플란츠 형님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거야."

칼리안이 그렇게 대답하며 에반이 기다리고 있을 세뉴 관으로 들어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