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화
프롤로그
"왔어? 오랜만이네."
사람의 형상을 한 빛의 덩어리가 손을 흔들었다. 에휴. 저놈을 또 보게 되다니.
나는 한숨을 쉬며 맞장구를 쳐줬다.
"그래. 오랜만. 다시 안 봤으면 싶었는데."
"피차 마찬가지 아닐까? 그런데 클로드, 아니 원래 이름으로 불러줄까?"
"그냥 클로드라고 해, 원래 이름 기억도 잘 안나."
"성진이 아니었나? 근데 완전 뼈밖에 안 남았네? 이러다 돌려보내기도 전에 죽는 거 아냐? 괜찮냐?"
"괜찮겠냐? 배고파 죽겠구만."
나는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벌써 며칠 굶었어. 이놈의 거지같은 동굴은 어떻게 잡아먹을 벌레 한 마리도 안 사냐?"
"난들 어쩌겠어. 신의 성역이란 게 다 이런데. 그럼 예정대로 평가부터 시작할까?"
"됐어. 이 짓 한두 번 해? 기분도 우울하니 빨리 진행하자."
바로 며칠 전에 내가 아끼던 애들이 다 죽었다. 굳이 그 실패의 기억을 다시 떠올릴 필요는 없겠지.
이곳은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신의 성역.
그리고 눈앞에서 번쩍거리는 저 녀석은, 성역의 주인인 '시간과 운명의 신'이다.
이름은 로아.
전역 후 대학 조교로 썩고 있던 나를, 갑자기 자신의 세계로 소환해 클로드라는 황자의 몸에 억지로 집어넣은 녀석.
이놈은 자신의 세계가 또 다른 이계의 침략에 파멸하게 되었으니, 부디 새로운 몸에 적응해 세계를 구해 달라는 얼토당토 않는 부탁을 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됐냐고?
그걸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있을까?
....
당연히 망했다.
이젠 내가 된 클로드는, 이쪽 세계 최강인 '페이우드 제국'이란 나라의 막내 황자였다.
문제는 이 녀석이 그야말로 회복 불가능한 슈퍼 울트라 개 막장 폐인이었다는 것.
덕분에 처음엔 적응 자체가 고역이었다.
일단 몸 자체가 개판이다.
체격도 너무 작고, 몸도 허약하고, 머릿속은 약이라도 빤 것처럼 항상 몽롱하고.
여기에 그간의 행실이 워낙 막장이라 항상 주위의 눈총을 한 몸에 받았다.
성질도 더러워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욕설을 퍼부었고, 앞뒤 가리지 않고 민폐를 끼치거나 범죄에 가까운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만약 황자라는 신분만 아니었다면, 이미 으쓱한 뒷골목 같은데 끌려가 인생 하직했을 녀석이다.
고작 16살밖에 안 됐는데 말이지.
아오....
첫 회귀, 그러니까 1회차 때가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황자 주제에 가진 거라곤 악명밖에 없어 신분을 활용하는 것조차 난감했던 그 시절.
그나마 로아가 날 소환하며 특별한 능력을 하나 주긴 했는데.... 워낙 독특한 능력이라 활용하기도 쉽지 않았고.
그러다 22살이 되었을 무렵.
갑자기 페이우드 제국의 주변에 있던 모든 세력들이 힘을 합쳐 제국을 향해 전쟁을 걸었다.
일명 반제국 전쟁.
처음엔 이게 로아가 말했던 세계의 멸망인가 싶었다.
그 정도로 치열하고 거대한 전쟁이었다. 그래도 세계관 최강 국가답게, 페이우드 제국은 몇 년간의 접전 끝에 반제국 연합의 군대를 모조리 격파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게 끝이 아니었네?
전쟁이 끝나고 1년 뒤.
내가 26살이 되었을 때 제국의 수도 중심부에 '게이트'가 열렸다.
그리고 처음 로아가 예언했던 대로 정체불명의 이계인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고.
녀석들의 특징은 딱 두 가지였다.
강함, 그리고 많음.
가뜩이나 반제국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한 제국이 감당할 수 없는 강적.
예상대로 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 뒤로는 지옥이었다. 이계의 군대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과 생명들을 철저히 파괴하고 멸종시켰다.
"야, 왜 갑자기 멍해지고 그래? 이보세요! 정신 차리세요!"
로아가 눈앞에 손가락을 튕기며 딱딱거린다. 이 녀석, 실제로는 손가락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는 흉내나 내긴.
"...별거 아냐. 그냥 옛날 생각나서."
"옛날? 너 고향 말이야? 지구?"
"아니. 1회차 때."
"첫 회귀 말이네. 그땐 엉망진창이었지. 그래도 이번엔 좋았잖아?"
로아는 양팔을 벌리며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 이계 놈들 군대를 5차 웨이브까지 끌어낸 게 어디야? 역대 최고 기록이 3차였는데, 한 번에 두 단계나 돌파한 거잖아? 역시 대단해. 내가 사람 하난 잘 뽑았지."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또 여기까지 도망쳤지."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소리잖아? 전에 소환자들은 2차 웨이브조차 돌파하지 못했어. 넌 뭔가 특별해."
"그래봤자 아무나 랜덤으로 소환한 주제에.... 뭐 됐어. 암튼 말 나온 김에 확인 좀 하자."
나는 녀석의 번쩍거리는 얼굴을 정면으로 보며 물었다.
"이번이 9회차였으니, 다음이 마지막이지?"
"그래. 마지막이야. 내가 소환자를 과거로 회귀시킬 수 있는 기회는 총 열 번이니까."
그래. 그렇다고 한다.
나는 이계인의 침략으로부터 이 세계를 구해내기 위해, 지금까지 총 아홉 번의 회귀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항상 16살의 클로드 황자로 돌아갔고, 26살이 되면 어김없이 이계의 침공이 시작됐으며, 결국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이곳 성역으로 도망쳐 다시 16살의 과거로 회귀하는 짓을 반복했다!
-이계인의 침공은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첫 웨이브(wave)를 다 막아내면 잠시 후에 동일한 규모의 두 번째 침공이 시작돼.
로아는 처음부터 그렇게 경고했지만, 2회차까지는 그 첫 웨이브조차 막아내지 못했다.
그래도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경험치와 능력이 쌓였고, 3회차 때 처음으로 두 번째 웨이브를 불러내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 뒤로 계속해서 다양한 능력으로 도전하다..., 이번에는 무려 다섯 번째 웨이브를 불러오는 새로운 성과를 이룩했다.
"그런데 5차가 과연 마지막일까? 갑자기 엄청 강한 놈들이 튀어나오던데."
"나야 모르지. 하지만 그랬으면 좋겠네."
"정말 너도 몰라? 신 주제에?"
"응. 나도 몰라. 신이라 해도 뭐 절대적인 건 아니라서."
"쳇, 그럼 만약에 6차가 있으면 어떻게 해? 이번이 마지막이라 대책을 세울 수가 없잖아?"
"그 전에 5차를 깰 자신은 있고?"
"응. 있어."
자랑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도망치는 동안 많은 계획을 새롭게 수정했다.
그러니 예정대로만 진행 된다면, 다음엔 5차 웨이브도 충분히 격파 가능하다는 말씀.
하지만 그 다음은?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야겠지?"
"고민은 무슨, 이번엔 뒤가 없다고."
"최대한 잘 대비해봐. 암튼 너 이번에 정말 잘했어. 전에 소환자들 중에 너만큼 악착같이 해낸 놈은 한 명도 없었다고. 10년동안 흥청망청 살다가 회귀만 반복하던 놈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나야 모르지. 암튼 슬슬 시작하자. 이러다 회귀하기 전에 굶어 죽겠어."
"그래. 시작해야지."
로아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주변에 빛의 덩어리들을 만들어냈다.
우웅!
동시에 내 몸으로부터 여러 가닥의 빛이 뻗어 나와 문제의 덩어리들에 흡수된다.
이것은 내가 키운 능력의 최대치를 로아가 흡수해서 저장하는 과정이다. 로아는 좀 더 커진 덩어리들을 살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 대단해. 더 켜졌어. 그 와중에 능력까지 추가로 성장시킨 거야?"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지. 그게 도움이 되든 말든."
"역시 넌 특별해. 좋았어. 그럼 시작할까?"
지금부터는 선택의 시간.
16살의 나로 회귀하기 전, 지금까지 아홉 번의 회귀에서 쌓아온 능력 중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전부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건 물론 아쉽지만.
그래도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쌓을 필요가 없다는 것 자체는 엄청난 이점이겠지?
"자, 그럼 1번은 항상 그랬듯 '은신의 각인'이야."
로아는 주변에 떠있는 빛의 덩어리 중 가장 작은 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소환자에게 기본으로 제공하는 능력이라 고를 필요 없어. 자동 장착이니까. 능력 설명해 줄까?"
"됐어. 이젠 내가 너보다도 더 잘 알껄?"
은신의 각인. 이름 그대로 주변에서 안 보이도록 몸을 숨기는 능력.
이게 아니었다면 첫 회귀도 못 넘기고 끔살을 당했을 것이다. 이계의 강력한 군대조차 일단 은신으로 숨으면 날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다만 은신한 상태로는 이동을 제외한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특히 은신한 채로 적을 공격할 수 없다는게 아쉽다. 그랬으면 일이 훨씬 쉬워졌을 텐데.
"그래. 그럼 다음으로...."
로아는 붉은 기가 감도는 새로운 빛의 덩어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2번은 '힘의 각인'이야. 지금까지 쌓아온 육체와 관련된 모든 능력을 처음부터 사용할 수 있어."
"그래 봤자 5회차 때 뒤로 더 올라간 건 없지?"
"그렇지 뭐. 여전히 중급 마갑은 착용하지 못할 거야."
이쪽 세계는 '마갑(魔鉀)'이라는 특수한 힘이 담긴 갑옷이 있다.
이것을 착용하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과 속도를 낼 수 있다. 대신 평범한 인간이 입으면 마갑의 힘에 짓눌려 꼼짝도 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마갑을 착용하려면 그에 맞는 육체의 수련이 필요하다. 나도 5회차 때 딱 한번 이쪽에 올인해 보긴 했는데....
"타고난 몸이 엉망이라 한계가 있어. 이번에도 패스."
"좋아. 그럼 다음 걸로 넘어간다."
로아는 붉은 덩어리를 소멸시킨 다음, 다음으로 옆에 있던 검은빛의 덩어리를 내밀었다.
"3번은 '사령술의 각인'이야. 알다시피 넌 이쪽으로 독보적이고."
사령술은 3회차 때 고작 몇 년을 투자했는데도 완벽하게 마스터했던 능력.
하지만 알고 보면 함정카드다. 그러니 이것도 패스.
"사령술 쓰면서 평판 유지하는 게 너무 힘들어. 신관들을 대놓고 적으로 돌리는 것도 골치 아프고. 그래서 패스."
"그래? 그럼 다음으로."
로아는 검은 덩어리를 소멸시킨 다음, 이번에는 녹색 빛이 담긴 덩어리를 내밀었다.
"4번은 '영약의 각인'이야. 이것도 넌 최고 경지에 도달했고."
영약은 복용한 자의 육체에 다양한 효과를 부여하는 특수한 약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도 제작자의 타고난 적성과 무수한 경험을 통해 효과가 극과 극으로 벌어진다.
얼핏 별것 아닌 능력처럼 보이지?
하지만 두 번째 회귀 때 처음으로 첫 웨이브를 돌파할 수 있게 해준 게 바로 이 영약의 힘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것도 패스. 영약에 의존하는 건 한계가 뚜렷해."
"마음대로 해. 그럼 다음으로...."
로아는 다음으로 보라색이 담긴 빛의 덩어리를 내밀었다.
"5번은 '정령의 각인'이야. 이걸 선택하면 넌 회귀 시작부터 총 여섯 개의 정령을 바로 소환할 수 있어. 무슨 정령인지는 말 안 해도 알지?"
당연히 알고말고. 다섯 마리 모두 내가 고생고생해서 얻었으니까.
이것은 소위 말하는 '정령 마법'이다.
다른 계통의 마법과 달리 내 마력을 소모하지 않고 정령이 대신 싸워주는 개념이라 엄청나게 유용하다.
정령왕 급이 되면 위력 또한 무시무시하고.
하지만 이번엔 다른 루트로 해 볼 생각이다. 아쉽지만 이것도 패스.
"됐어. 다음으로 넘어가자."
"엥? 정말?"
이번에는 로아가 놀라며 되물었다.
"진짜? 정령의 각인 패스? 일곱 번째부터 이번 아홉 번째 회귀까지 전부 선택했던 각인인데?"
"응. 패스."
"이번에 5차 웨이브까지 도달한 것도 결국 정령 마법 덕분이잖아? 게이트 바로 앞에 미리 불의 여왕을 깔아 놓고...."
"나도 알아. 암튼 정령은 다시 얻을 수 있으니까. 똑같이 고생좀 하겠지만."
"그거 시간 걸리잖아? 차라리 그 시간에 새 정령과 계약하는 게 좋지 않을까?"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이 녀석 단호하긴."
로아는 혀를 차며 보라색 덩어리를 소멸시켰다. 그리고는 파란빛이 담긴 빛의 덩어리를 내밀었다.
"6번은 '마법의 각인'이야. 뭐 남은 게 두 개뿐이니까 이건 선택하겠지?"
"응. 마법의 각인 고를게."
마법이라면 4회차 때 이미 '아크 위저드'의 칭호를 받을 만큼 최강의 경지에 올랐다.
단순 위력만 보면 정령 마법에 비해 떨어진다. 하지만 이번 마지막 계획에서는 시작부터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라 어쩔 수가 없다.
근데 이 녀석.... 어째 전혀 납득을 못하겠다는 분위긴데?
"야 클로드. 나 진짜 모르겠어."
"뭐가?"
"물론 다들 장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정령 마법이 원소 마법보다는 화력 면에서 앞서잖아? 마력도 필요 없어서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고?"
"걱정 마. 다 계획이 있으니까."
"이러다 5차 웨이브는커녕 전처럼 3차도 못 뚫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뭐 어쩌겠냐. 선택은 네 몫인데."
로아는 마지막으로 투명한 빛의 덩어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자, 마지막 7번은 '신성의 각인'이야. 하나 남은 거니 이것도 당연히 가져가겠지?"
"응. 이것도 가져갈게."
최근까지,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인게 바로 이 신성 마법이다.
물론 최고등급인 '아크 프리스트'는 한참 전에 달성했지만, 그거 말고도 중요한 일이 있었단 말이지.
"그래. 이걸로 전부 선택했어."
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투명한 덩어리와 파란 덩어리, 그리고 조그만 덩어리를 성소의 천장 높이 띄웠다.
"선택한 각인은 '마법의 각인'과 '신성의 각인'이야. '은신의 각인'은 기본으로 들어가고."
"그래. 이거면 돼."
"예상이랑은 다르네. 네가 특별한 녀석인 건 알지만.... 정말 이걸로 자신 있냐? 특히 신성 마법은 이계 놈들 상대로는 별로잖아?"
"꼭 그런 건 아니야. 감염군주 잡을 때 반드시 필요하고. 아무튼 다른 곳에도 써먹을 데가 많아. 이번에 중요한건 스노우 볼이라서."
"스노우 볼?"
"시작부터 눈덩이 굴리려면 이게 필요해. 암튼 두고 봐. 그리고 너 말인데."
"나?"
"너야 결국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나는 마지막 작업을 하는 로아를 보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내가 실패해도 넌 지구에서 또 새로운 소환자를 골라올 거 아냐? 나 이전에도 네 명인가 있었다며?"
"아니, 이번이 마지막이야."
"...응?"
이건 또 뭔 소리래?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로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실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진짜?"
"응. 그동안 다섯 명의 소환자를 부르면서 쌓아놓은 힘을 다 써버렸어."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로아는 높이 올린 세 개의 덩어리를 다시 내 쪽으로 서서히 낙하시키며 웃었다.
"그러니 지금 이게 마지막이야. 내가 가진 모든 걸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전부 다 써버렸어."
"야, 아니 그걸 이제 와서 이야기하면...."
위이이잉!
순간 빛의 덩어리들이 빠르게 몸을 휘감으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잠깐! 너 지금 나한테 비장감 심어주려고 거짓말하는 거지! 마지막 열 번째 회귀니까 어떻게든 이 악물고 성공하게 하려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로아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근데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거짓말을 못해."
"웃기시네. 방금까지도 날 속였으면서?"
"속인 게 아니라 말하지 않은 것뿐인데?"
"뭐?"
"물어봤으면 언제라도 대답했을 거야. 근데 너 한번이라도 나한테 '다음 소환자'에 대해 질문한 적 있냐?"
"그런 적은 없지만 난 당연히...."
내 뒤로도 다음 소환자가 계속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난 마지막 절규를 지르지 못한 채, 스스로 선택한 빛에 휩싸이며 빠르게 의식을 잃었다.
이런 망할 신 같으니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필 이 마지막 순간에 털어 놓으면 어떻게 하냐?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2화
1장 테크트리는 정교하게
"으아! 이런 건 계획에 없었다고!"
침대 위에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오. 망할. 빌어먹을.
회귀 직후인 지금은 제국력 514년이고, 나는 올해로 16살이 된 제국의 유명한 막장 클로드 황자이며, 이곳은 황궁에서 쫓겨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루넨브레스 저택이다.
참고로 루넨브레스는 어머니의 가문.
가문 대대로 뛰어난 영약사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데.... 근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내 뒤로 다른 소환자가 없다!
근데 그게 어때서?
뭐가 어쨌든 어차피 내 입장에선 마지막 아니었냐고?
물론 그렇다. 이번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회귀였으니까.
하지만 나만 죽고 끝나는 것과, 내 뒤로 아무것도 없다는 건 전혀 다른 의미의 압박이다.
지난 아홉 번의 회귀를 통해, 이곳에서만 햇수로 90년 이상의 인생을 살았다.
그것은 지구에서 살았던 기간의 3배가 넘는 시간이다. 덕분에 이제 와서는 여기가 더 고향 같은 기분이란 말이지.
그렇게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고, 이제 와서는 어떻게든 이 세계를 멸망의 운명으로부터 구해내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느끼고 있다.
꼭 내가 아니라 해도.
내가 필사적으로 끌어낸 이계의 전력을 로아가 확인하고, 그 정보를 다음 소환자에게 전달하기만 해도 다음 타자는 훨씬 좋은 조건에서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누군가는 이 일을 성공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번 마지막 회귀의 최종 목표는, 지난번에 가까스로 불러놓고 실패한 5차 웨이브를 막아내는 것으로 잡았다.
물론 5차가 마지막이라면 만만세겠지.
하지만 그 뒤로 6차 웨이브가 존재한다면, 나는 그때 쏟아져 나오는 적의 종류와 규모까지만 확인하고(내가 확인했다는 건 로아도 확인했다는 뜻이니) 그곳에서 깨끗하게 끝낼 생각이었다.
그럼 다음 소환자가 6차 웨이브가 존재한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그것마저 막아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마지막이라니!
으악! 이거 사기야! 사기꾼에게 속았어요 여러분!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마지막이라고 알려 주던가!
현실은 내 뒤에 아무것도 없으며, 이번에 내가 실패하면 이 세계는 완전히 끝장이라는 것.
그건 안 돼!
안 돼. 안 되고말고. 절대 그럴 수 없다.
어떻게든 여기서 모든 걸 결판 짓고 세계를 구해야 한다. 이 세계는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단 말이야.
부디 나를 대신해 누구라도 그들을 구원해주길 바랐는데.
이젠 다른 소환자에게 그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서 내가 어떻게든 끝장을 봐야 한다!
반드시, 어떻게든 반드시 내 손으로....
"황자님!"
그때 방문이 열리며 시녀복의 여성이 달려 들어왔다.
"황자님!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자님!"
여자의 얼굴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뭐가 어찌되었든, 회귀의 시작은 미리 짜놓은 계획대로 진행해야 하니까.
"...시녀장."
"네. 황자님. 시녀장입니다. 혹시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여자는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폈다.
라니아.
언제나 회귀의 시작을 함께하는 라니아는, 이곳 루넨브레스 가문의 저택을 책임지고 있는 시녀장이다.
그리고 지금은 숨기고 있지만, 그 진짜 정체는 죽은 어머니의 여동생.
내가 앞으로 3~4년 정도 막장에서 벗어나 멀쩡한 모습을 보여 주면, 그때 가서 진실을 털어 놓으며 정체를 밝힌다.
그러니까 결국... 내 이모인 셈인데, 여기서도 선택이 약간 갈린다.
만약 '영약사'의 테크트리를 빠르게 밟고 싶다면, 이런 라니아의 정체를 내 쪽에서 먼저 밝혀버리면 된다.
라니아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영약사.
저택 지하에는 라니아와 다른 시녀들이 사용하는 대규모 영약 제조실과 실험실이 존재한다. 라니아와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순간, 이것을 활용해 이계와의 전쟁에 필요한 영약을 생산할 수 있다.
여섯 번째 회귀 때 시작부터 이걸 활용해서 시작부터 꽤 짭짤한 성과를 거뒀었지?
하지만 그래봤자 최종적으로 3차 웨이브를 막는데 급급했고, 모든 것은 순서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됐다.
"악몽은 아니고...."
나는 최대한 눈에 힘을 주며 라니아를 응시했다.
라니아는 금발에 미인으로 소문났던 어머니와는(결국 그걸로 황비의 자리까지 올랐다) 전혀 다른, 검은 머리카락에 수수한 외모를 가진 30대의 여성.
여태까지 결혼도 안 하고 정체를 숨긴 채 가문의 가업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도 배신하지 않는 완벽한 내 편이다. 나는 회귀 직전까지 고심해서 짜놓은 계획을 떠올리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후우.... 후우.... 후우...."
"황자님. 오늘도 몸이 불편하십니까? 황공합니다만 부디 제가 드리는 영약을 드셔주시면...."
"가져 와."
"네?"
"가져 오라고. 그 영약. 마실 테니까."
"앗! 네! 알겠습니다!"
라니아는 놀란 얼굴로 밖을 향해 달려 나갔다. 나는 익숙하면서도 끔찍한 몸 컨디션에 진저리를 치며 이를 갈았다.
"이 망할 저질 몸.... 이건 시작할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니까?"
속은 미식거리고, 머릿속은 안개라도 낀 것처럼 뿌옇고.
여기에 뭔가 신경통이나 관절염이라도 앓는 듯, 온몸이 삐걱대며 욱신거린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냐고?
이 자식이 고작 16살 주제에 독한 술을 대접으로 퍼마셨고, 입이 하도 짧아 평소에 영양 상태가 엉망이었으니까?
하지만 더 깊이 파고들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 레일린 황비. 그녀는 황제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황제는 첫 황비로부터 여섯 명의 자식을 보았다.
그리고 황제가 갓 스무 살이었던 어머니의 미모에 혹해 후비를 맞아들인 무렵, 기존의 황비가 출산 중에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자연스레 어머니는 비어있는 황비의 자리에 올랐고, 이후 나까지 출산하며 황제의 더 큰 총애를 받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 위로 형제들이 날 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있을까?
그 중에도 만악의 근원인 둘째 형 제스는, 실로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날 무너뜨리는 중이었다.
"황자님! 여기 영약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라니아가 작은 영약병을 들고 부리나케 돌아왔다.
"어제 저녁에 드렸던 것과 같은 영약입니다. 맛은 안 좋지만 어떻게든 천천히 들이키시면...."
"이리 줘."
빼앗듯이 병을 낚아 챈 다음, 숨도 쉬지 않고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꿀꺽꿀꺽....
"황자님께서 드디어 제가 만든 영약을...."
라니아는 감격한 얼굴로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도 그럴 것이, 라니아는 1년 전 황궁에서 큰 사고를 치고 저택으로 추방당한 클로드에게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이 영약을 진상했으니까.
-황자님, 이건 황자님의 건강을 위해 제가 준비한 특별한 영약입니다. 마시면 건강도 좋아지고 어쩌면 키도 다시 클지 모릅니다. 비록 향은 역하지만.... 황자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니 부디 드셔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성격이 지랄 맞았던 클로드는, 영약의 냄새만 맡고도 병을 라니아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켁! 뭐야 이거! 감히 제국의 황자인 나보고 이딴 끔찍한 걸 마시라는 거냐! 저리 치워! 꼴도 보기 싫으니 꺼져! 죽고 싶지 않으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아 클로드 이 새끼.
정말 너 대체 왜 그러고 살았냐?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니아는 어떻게든 이 약을 하루도 쉬지 않고 클로드의 앞에 갖다 바쳤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니아만큼은 회귀 때마다 항상 좋은 관계를 구축했다. 피가 이어진 이모이기도 하고.
"...마시니까 좀 편해지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라니아는 내 눈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데(지난 여러 번의 회귀동안 항상 그랬다), 나중에 물어보니 썩은 시체 같던 내 눈이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와서 놀랐다고 한다.
"황자님의 눈이...."
"응? 내 눈이 왜?"
"아, 아닙니다. 죄송한데 지금 말고 예전에.... 혹시 어제 저녁에 제가 드린 영약을 드셨습니까?"
그럴 리 있나?
회귀 직후라 그런지 기억이 생생하다. 바로 어젯밤, 클로드는 테이블 위에 라니아가 몰래 두고 간 영약을 창밖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지금 라니아가 느끼는 위화감을 제대로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지난 회귀 동안 여러 번 써먹은 그대로 가장 무난한 루트를 밟았다.
"아니. 반쯤 마시다 너무 맛이 없어서 창밖으로 던졌어."
"반쯤? 그래도 절반은 드셨다는 말씀이죠?"
"그게 어때서? 사실 지금까지 네가 준 약들도 가끔 한입씩은 먹었다고."
"네? 정말입니까? 그래서 오늘 아침에 황자님의 모습이 이렇게나...."
"아침부터 왜 그래? 내가 그렇게 이상해 보여?"
"...아닙니다. 황자님? 혹시 지금 기분이 어떠신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라니아가 글썽이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나는 약간의 연기를 더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기분이야 항상 끔찍하지. 음.... 아닌가. 오늘은 뭔가 달라졌는데?"
"역시 그렇습니까?"
"응. 항상 속에 열이 받아 끓는 기분이었는데.... 그게 없어졌어. 이상하게 차분하네."
"화가 수그러들었다는 말씀이죠? 가슴 속의 열기가?"
"그리고 머리도 맑아졌어. 여태까지 항상 뿌옇고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개운하고 주변이 또렷하게 보이네?"
"...오늘이라면 저도 말씀 드릴 수 있겠군요."
라니아는 갑자기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황자님, 제가 드린 이 영약의 주요 성분은 해독제입니다. 황자님께서는 그동안 계속해서 독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3화
1장 테크트리는 정교하게
"독?"
익히 알고 있지만 일부러 엄청 놀란 반응을 보였다. 라니아는 입술을 깨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네. 독입니다. 다만 독의 제공자가 워낙 높으신 분이고, 황자님께서 신뢰하는 분이기도 하여 섣불리 말씀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니...."
"황자님, 부디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믿어 주시길 바랍니다."
라니아는 내 손을 살며시 움켜쥐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신 지금이 기회입니다. 지금부터 밖에서 함께 어울리는 분들이 황자님께 뭔가 수상한 걸, 특히 그 달달한 약을 마시라며 내밀면...."
쾅!
그때 아래쪽에서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시녀 주제에 감히 내가 들어가겠다는데 막겠다는 거냐! 뭐 하고 있냐 동생아! 해가 중천이다! 오늘도 나가서 신나게 놀아야지!"
"...알베르트."
이건 페이우드 제국의 4황자인 알베르트의 목소리.
배다른 형제들과 나는 당연히 관계가 서먹했는데, 그 와중에도 4황자인 알베르트는 자주 시간을 내어 나와 '놀아'주었다.
물론 두 번째 회귀 때 그 실체를 알고 나서는 기겁을 했지만.... 이제 와서는 그냥 지나가는 이벤트의 하나일 뿐이다.
"형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응접실로 내려오자 진흙 묻은 발로 버티고 선 알베르트가 보였다.
나이는 나보다 네 살 위인 20살. 체격이 크고 얼굴도 큰 쾌남형의 남자다.
"오랜만은 무슨? 우리 사흘 전에도 같이 놀았잖아?"
"그랬죠. 사흘 전에."
현 시점에서 사흘 전. 알베르트는 날 제도의 고급 클럽에 데려가 독한 술을 진탕 퍼먹여 주변에 난장판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거기서 또 사흘 전에는 귀족 전용 도박장에 데려가 은화 수백 개를 날리게 만들었고.
거기서 또 사흘 전에는 백여 명의 몰이꾼을 데리고 인근 야산에 사냥을 나섰다.
이렇게 황궁에서 반 강제로 쫓겨난 나를 유일하게 챙겨준 게 바로 알베르트다. 덕분에 첫 회귀 땐 이 녀석을 나름 고마운 존재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 실체는?
여태껏 클로드를 서서히 파멸로 몰아넣고 있던 2황자, 바로 제스의 충실한 끄나풀이다.
"빨리 옷 갈아입고 준비해라. 오늘은 '골든 룸'에 가서 복수전을 해야지. 너도 전에 잃은 거 다시 따겠다고 벼렸잖아?"
알베르트는 허리춤에 두둑한 돈주머니를 흔들었다. 여기서 일단 도박장으로 따라 나서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지만(꽤 많은 자금을 시작하자마자 확보할 수 있다), 이번에는 전혀 다른 계획이 있기 때문에 거절해야 했다.
"형님. 오늘은 제가 몸이 안 좋아서 힘들 것 같습니다."
"뭐?"
그 순간, 사람 좋던 알베르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왜 그래? 일단 가서 한잔 하고 카드 돌리다 보면 컨디션도 금방 좋아질 거다. 너 주려고 형님께서 하사한 보약도 가져왔고. 근데 너 코에서 피가...."
오, 타이밍 좋구만. 예정대로야.
나는 일부러 멍한 표정을 지으며 코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닦았다.
이것은 시녀장이 준 영약이 몸에 쌓인 독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런 반응. 물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커먼 코피를 줄줄 흘리는 중환자처럼 보일 것이다.
"황자님!"
함께 내려온 시녀장이 화들짝 놀라며 손수건으로 코피를 닦아 주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비틀거리다 바닥에 쿵 소리가 나도록 주저앉았다.
"켁.... 진짜 안 좋나 보네?"
"으...."
"어쩔 수 없지. 그럼 나 혼자 갈 테니 이거라도 마시고 회복해라."
알베르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품속에서 고급스런 물통을 꺼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바로 독이다!
2황자인 제스가 직접 제조한 맹독을 대량의 설탕물과 고급 증류주에 섞어 희석한 것으로, 클로드는 약 4년 전부터 이 독약을 마시며 서서히 몸과 마음을 망치고 있었다.
클로드가, 그러니까 내가 구제불능의 막장이 된 것도 결과적으로 보면 이 독약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약 중독자처럼 손을 부들거리는 연기를 하며 물통을 향해 힘겹게 손을 뻗었다.
"이건...."
"응? 항상 마시던 그거잖아? 둘째 형님이 널 위해 내려주신 보약이야."
"둘째 형님이.... 아, 그, 그랬죠."
그 순간 알베르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 자식 꼴좋네, 이젠 기억까지 가물거릴 만큼 맛이 간 건가?'
대충 그런 느낌의 비웃음이다. 나는 바보처럼 헤헤거리며 알베르트가 준 물통을 목구멍 안에 부어 넣었다.
꿀꺽꿀꺽....
으, 달고 향긋하며 중독적인 이 맛.
방금 해독약을 먹었는데도 순식간에 온몸으로 독기가 퍼지는 기분이다. 알베르트는 그런 내 모습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다 곧장 몸을 돌렸다.
"그럼 몸조리 잘 해라! 사흘 뒤에 다시 올 테니까!"
"사, 살펴 가십시오 전하!"
저택의 시녀들이 부리나케 몰려나가 알베르트를 배웅했다. 그중에 라니아는 먼저 저택으로 돌아와 내 쪽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황자님! 황자님 안 됩니다! 방금 드신 그 약은...."
"통."
"네?"
"통 아무거나. 빨리."
눈을 질끈 감은 채 손을 마구 흔들었다. 눈치를 챈 라니아는 급하게 몸을 돌리며 다른 시녀들에게 소리쳤다.
"빨리 빈 통을 가져오세요! 어서!"
시녀들은 놀랄 만큼 신속하게 빈 통을 들고 달려왔다. 나는 그제야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은 다음, 마신 것을 모조리 통 안에 게워냈다.
"우웁! 우웩!"
"황자님! 거기! 뭐 하고 있습니까! 빨리 황자님이 쓰실 물을 떠오세요! 그리고 아침에 새로 만든 그 영약도 가져오고!"
"으.... 대충.... 대충 알겠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라니아를 보며, 나는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내가 멍청했지. 저 망할 놈을 좋다고 따르고 있었으니."
"황자님...."
"아까 말한 독약이 이거지? 내가 신뢰한다는 높은 분이란게 둘째 형님과 넷째 형님이고?"
"...그렇습니다."
라니아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머릿속이 또다시 뿌옇게 흐려지는 걸 느끼며 라니아의 손을 붙잡았다.
"고마워 시녀장. 아니 라니아."
"황자님...."
"너 아니었으면 저거 계속 마시다 곪아 죽었을 거야. 근데 방금 토하느라 네가 준 영약까지 같이 토해버린 거 같은데...."
"시녀장님. 여기 가져 왔습니다."
그때 젊은 시녀가 마침 새로운 영약 병을 들고 돌아왔다. 나는 새 영약을 단숨에 들이켠 다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냄새 진짜 끔찍하네. 아무리 마셔도 적응이 안 돼."
"지금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몸에 쌓인 독이 워낙 많아서.... 일단 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 해독제를 드시며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만 침대로 돌아가시죠."
라니아는 등에 업히라는 듯, 내 앞에 쪼그려 앉으며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음, 이건 어떻게 한다?
방금 알베르트 앞에서 쓰러진 건 연기였기 때문에 원한다면 내 발로 서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딱히 중요한 갈림길은 아니고,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별 상관은 없을 테니.... 나는 순순히 라니아의 등에 몸을 기댄 채 2층에 있는 침실까지 업혀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라니아에게 업힌 적은 이번이 처음인가?
아무튼 이것으로 마지막 열 번째 회귀의 첫 이벤트는 계획대로 무사히 진행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첫 날에 해야 할 일이 다 끝난 건 아니다. 진짜 중요한 변화는 오늘밤부터 시작이니까.
* * *
클로드 황자를 업고 2층으로 올라가는 도중, 라니아는 소리 없이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어쩜 이렇게 작고 가벼울까?'
물론 루넨브레스 가문의 정통한 주인이자, 사랑하던 언니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자체는 만세를 부를 일이다.
하지만 배다른 황자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클로드의 몸은 16살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왜소하고 연약한 상태였다.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언니가 남기고 간 하나뿐인 소중한 조카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신이 가진 영약사의 한계를 뛰어넘어서라도 클로드를 다시 건강한 몸으로 돌려 놓으리라.
그것은 영약의 역사상 존재한 적 없던 새로운 길이었다. 하지만 각오를 다진 라니아에게 그 정도 고난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 * *
녹사슴궁.
제국의 황궁을 구성하고 있는 아홉 개의 별궁 중 하나로, 이름은 궁전이지만 구조는 일직선으로 뻗은 높은 탑이다.
맨 꼭대기인 8층에는 오래된 고서로 꽉 찬 서재가 있는데, 오늘밤은 본래 용도 대신 한창 술판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좋아! 위하여!"
"위하여!"
채앵!
제국의 4황자인 알베르트와, 황자의 외사촌인 페넬 백작이 술로 꽉 찬 두꺼운 유리잔을 부딪쳤다.
"크! 둘째 형님이 명을 거뒀으니 이제 난 자유야! 더는 그 재수 없는 잡종 녀석이랑 어울리며 약 배달 안 해도 된다고!"
"그래도 나랏돈으로 편하게 펑펑 놀던 건 아쉽군요. 클로드가 도박에 돈을 잃고 괴로워하는 꼴을 보는 것도 나름 재밌었는데 말입니다."
페넬은 마음이 맞는 4황자의 옆에 찰싹 붙어'클로드 타락시키기'프로젝트에 한몫 단단히 챙기고 있었다. 그러자 알베르트가 살짝 취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게 좋아. 그 더러운 잡종 새끼의 비위를 맞춰 주던 것도 신물이 나니까. 어디 약이나 만지던 천한 여자가 황실에 들어와서는.... 암튼 됐어. 내일 형님이 그놈을 다시 황궁으로 불러 온다고 했으니. 뭐 이젠 알아서 하시겠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4화
1장 테크트리는 정교하게
"듣자 하니 머리가 완전 돌아버렸다면서요?"
"소문도 빠르구만. 아침에 보니까 자기한테 약을 내린 사람이 누군지도 기억 못 하더라."
"그 정도입니까?"
"저 상태로 밖에 놓으면 무슨 부끄러운 짓을 할지 모르니, 어디 지하 감옥 같은데 평생 가둬놓지 않을까?"
"감옥보다는 비어 있는 별궁이 좋지 않을까요? 그래도 명색이 황자이니 말입니다."
"그게 그거지 뭐. 암튼 잘됐어."
알베르트가 빈 잔을 들자 페넬이 얼른 투명한 술을 잔에 가득 따랐다.
"크! 술 맛 좋고! 암튼 둘째 형님 명령에 따르는 것도 앞으로는 줄여야겠어. 그 형님이 황궁에서 대신들을 꽉 잡고 있긴 하지만, 그래봤자 같은 황자잖아? 안 그래?"
"물론이죠. 아직 황태자님도 건재하시고 말입니다."
"황태자? 에이, 큰 형님은 이미 끝났어."
알베르트는 혀를 쭉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전에 문병 가니 집안에 썩은 내가 진동하더라. 신관들도 다 손 놨고. 아마 올해를 넘기기 힘들 거야."
"그렇다면 다음 황태자 자리가 문제군요. 물론 이대로면 둘째 황자님이 물려받을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만."
"그것도 아버지, 아니 폐하께서 일어나셔야 가능한 일이겠지?"
황제는 지금 몇 년째 인사불성으로 병석에 누워 있다. 알베르트는 거구의 몸을 위아래로 들썩이며 술김에 숨겨왔던 속내를 털어 놓았다.
"중요한 건 황자들이 나 빼고 다 약골이라는 거야. 둘째 형님도 허우대만 멀쩡하지 몸 허약한 건 마찬가지고. 황자들 중에 나 혼자 이렇게 튼튼하니 언젠가 기회가 오지 않겠어?"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제국의 본질은 결국 힘과 전쟁이니까요."
"그래. 힘과 전쟁이지."
알베르트는 씩 웃으며 자신의 두툼한 알통 위에 술잔을 얹어보였다.
"그러니 몸이 가장 큰 재산이야. 클로드 그 자식 좀 보라고. 벌써 16살이나 됐는데 아직도 그 모양 그 꼴이잖아?"
"그것도 다 제스 황자님이 내린 약의 영향 아닙니까? 정신만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육체도 같이 무너뜨린다니 말이죠."
"맞아. 형님이 그거 계속 먹이면 성장도 멈출 거라고 했지? 큭큭.... 꼴좋다! 어딜 감히 작위도 없는 하급 귀족이 황궁에 들어와서 황비 행세에 황족 행세야! 그딴 벌레 놈들은 다 짓밟아 뭉개 버려야 해!"
그리고는 남은 술을 또다시 목구멍 속으로 털어 놓으며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지켜본 나는, 방구석에서 은신을 풀며 탄식했다.
"나 참, 진짜 몇 번을 들어도 매번 속 터진다니까?"
"뭐? 뒤에서 무슨 소리가.... 으아아아아아악!"
뒤를 돌아본 알베르트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두 놈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키가 콩알만 하던 게 다 네놈들 때문이지. 한 3년만 더 앞으로 돌아왔어도 개선의 여지가 있었을 텐데."
"클로드! 네가 어떻게 여길!"
"어떻게 올라왔냐고?"
나는 손가락으로 멀리 있는 서재의 문을 가리켰다.
"걸어서. 아까 외사촌 형님이 여기 들어올 때 같이 따라 들어왔어. 물론 저놈 새끼는 날 사촌이라고 여기는 것 같지도 않지만."
"너, 너는.... 너 따위는 내 사촌이 아니야."
페넬이 자꾸만 입구 쪽을 힐끔거리며 소리쳤다. 나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그렇긴 해. 당신이랑 나는 직접 피가 이어져 있지 않으니까. 형님들 사촌이지 내 사촌은 아니지."
"처지를 아는 놈이 이런 짓을 하나? 넌 이제 끝장이야. 감히 황자의 거처에 무단으로 침입하다니.... 바로 아래층에 경호기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알베르트 전하나 내가 소리만 질러도 몽땅 몰려올 거야!"
"허풍 떨긴. 첫날밤에 여기 오는 것도 벌써 세 번째야. 확인 끝났어."
나는 코웃음을 치며 뒷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쳇, 근데 내가 너무 가볍고 힘이 없어서 소리가 별로 안 울리네?
"어차피 마갑 입은 기사는 물론이고, 시종들도 전부 1층에 있잖아? 너희들이 하는 헛소리를 괜히 누가 엿들을까봐 그렇게 명령을 내렸고?"
"큭...."
알베르트는 그제야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일으켰다.
"네놈, 감히 도둑처럼 몰래 숨어들어 우리 이야기를 엿들은 거냐? 대체 무슨 재주를 부린 거지?"
"이건 은신의 각인이야."
나는 로아가 내린 첫 번째 능력을 발동시켜 녀석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 뭐야! 어디 갔어!"
"사라졌다!"
"여기야."
그리고는 서재의 입구를 몸으로 막으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때, 신기하지? 로아가 날 소환하면서 기본으로 제공해준 능력이야."
"로, 로아? 시간과 운명의 신 로아?"
"그래. 일단 발동시키면 그 끔찍한 이계의 군대조차 날 못찾아내. 완벽한 투명인간이 되는 거야. 대신 은신 상태로는 다른 짓을 못해서 이렇게 일단 풀어야 하지만."
"이 자식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이계는 또 뭔데!"
"그런 게 있어. 너희는 몰라도 돼."
나는 손바닥 위에 불꽃을 만들며 웃었다. 알베르트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며 뒷걸음 쳤다.
"마법! 말도 안 돼! 네깟 잡종 놈이 언제 그런 걸!"
"내가 이번에 왜 굳이 시작부터 마법을 골랐냐 하면, 바로 너희 같은 놈들 때문이야."
"뭐?"
멍청한 알베르트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물론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내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그동안 아홉 번이나 반복하면서 확인했는데, 일단 알베르트 너는 도저히 재활용을 할 수 없는 완전 쓰레기더라고."
"뭐? 이 벌레 놈이 감히!"
"잠자코 들어봐."
손바닥에 불꽃을 키우자 알베르트와 페넬이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나는 이번 10회 차의 핵심 테크트리의 일부를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전에는 그런 생각도 했어. 이 개자식들은 돌로 처 죽여도 속이 안 시원할 놈들이지만, 그래도 살려두면 이계와의 전쟁에서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크... 클로드 전하? 아까부터 자꾸 이계니 뭐니 하는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계가 대체 뭡니까?"
페넬이 위기를 느꼈는지 갑자기 경어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건 몰라도 돼. 암튼 그래서 꽤 오래 살려 둔 적도 있는데, 결국 뭐 하나 제대로 못하고 다 망쳐버리더라. 특히 알베르트."
"나?"
"그래 너. 물론 너라고 재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몸이 튼튼하고 힘이 강하지. 나중에 상급 마갑 착용자, 그러니까 나이트 커맨더(knight commander)까지는 올라오더라고."
"닥쳐! 나는 나이트 마스터(knight master)가 될 몸이다!"
하, 이 자식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발끈하는구만.
"내가 커맨더에서 멈출 리가 없어! 이미 최상급 마갑도 맞춰 놨다고! 애초에 네깟 놈이 날 무슨 재주로 평가하는데? 어디 미래라도 보고 왔냐?"
"응. 미래를 보고 왔지."
"그래. 미래를.... 뭐? 이 자식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이런 기회 흔치 않으니까 잠자코 들어. 가끔은 이렇게 비밀을 털어 놔야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거든. 혹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 알아?"
"동화? 이놈이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모르면 됐고. 암튼 너 말이야, 조용히 힘만 세면 상관없는데 꼭 황자 지휘를 남용해서 군대를 지휘하더라고. 그리고 항상 폭삭 말아먹고. 그래서 이번엔 아예 다른 루트를 타기로 했지."
"...루트?"
"그래. 해충박멸 루트. 그래서 기껏 최고를 찍은 정령 마법을 포기한 거야. 정령 마법은 화력은 엄청난데 세밀한 컨트롤이 안 되고, 특히 날아다닐 수단이 없거든."
저택에서 비행 마법으로 황궁까지 날아오는데 30분이면 충분했다. 그러자 머리가 약간 더 잘 돌아가는 페넬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설마 플라이(fly)! 비행 마법은 아크 위저드나 되어야 쓸 수 있을 텐데!"
"잘 아네. 내가 바로 아크 위저드야."
"어, 어떻게...."
"기본은 4회차 때 도달했지. 암튼 페넬 씨? 그쪽도 괜히 옆에 있다가 억울하게 휩쓸리는 건 아니야. 당신도 알베르트 못지않게 만만치 않은 산업폐기물이니까."
"산업폐기물?"
"내버려 두면 주변 환경을 오염시키는 쓰레기. 당신네 가문이 제도의 상인들에게 뇌물을 대체 얼마나 처먹었는지, 그것만 개선해도 제도의 경제력이 순식간에 확 오르더라."
"...."
페넬은 허를 찔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알베르트가 이를 갈며 내 손의 불꽃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진 모르지만, 그따위 마법으로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냐? 내가 아무리 마갑을 안 입었어도 그딴 작은 불길로는...."
"으악! 템페스트!"
순간 페넬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알베르트 전하! 저건 템페스트입니다! 저 압축된 마법의 회오리치는 흐름은...."
"페넬 씨가 잘 아네? 이건 템페스트(tempest)야. 파이어 오브 템페스트."
모든 마법의 최종단계엔 템페스트가 존재한다. 나는 손바닥 위에 회오리치는 불꽃의 기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쓰긴 좀 아까운 감이 있는데, 남은 흔적을 싹 없애려면 어쩔 수 없어."
"말도 안 돼! 템페스트가 가능한 건 진짜 아크 위저드뿐일 텐데!"
"웃기지 마라! 네깟 벌레 놈이 그런 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어!"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손바닥을 떠난 불꽃이 내리꽂힌 순간, 거대한 화염의 날개가 폭발하듯 퍼지며 모든 것을 휘감는다.
주변의 모든 것이 새빨갛게 물들고, 동시에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면 템페스트가 아니지.
작열하는 불꽃은 거대한 폭발의 기류를 만들며 서재 자체를 단숨에 날려 버렸다.
폭발.
그것도 제국의 수도 어느 곳에서도 목격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폭발.
문제는 너무 가까운 데서 날린 덕분에 시전자인 나까지 휘말려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가 선택한 또 다른 힘, 바로 신성마법에는 모든 마법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절대 방호마법이 있거든.
'프로텍션 매직.(protection magic)'
선명한 빛이 몸을 감싸며 폭발의 직격을 받아낸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고, 미세한 열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화려한 불꽃놀이는 그 뒤로도 5초 정도 이어졌다. 녹사슴궁의 최상층은 물론, 그 아래층까지 통째로 날아가 사방이 탁 트인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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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탑 아래서 사람들이 뛰쳐나오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비행 마법으로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높은 곳까지 오른 다음, 그대로 몸을 돌려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